2023/05/28

[Sejin님의 서재] 임건순

[Sejin님의 서재] "책과 통하는 블로그, 알라딘 서재!"

[eBook] 제자백가, 인간을 말하다- 성악설 vs 성선설, 위대한 사상가 10인이 말하는 인간 본성 이야기
임건순 지음 / 서해문집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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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세, 동아시아 사상의 거의 모든 것- 상황을 읽고 변화를 만드는 힘과 지혜
임건순 지음 / 시대의창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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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도덕경
노자 지음, 임건순 옮김 / 더퀘스트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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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묵자, 공자를 딛고 일어선 천민 사상가 (2판)
임건순 지음 / 시대의창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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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관중에서 한비자까지 위대한 사상가 13인이 꿈꾸었던 최상의 국가
임건순 지음 / 서해문집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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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건순 (지은이) | 오블리제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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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chang Kim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安藤昌益の[直耕正人]的農民像

(10) Facebook


Taecha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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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chang Kim

明日早朝共に哲学する旅路に立つ. 
長年の経営コンサルタントの職を終えて、最近農場に住み込み、
日本と世界の食と農の問題に取り組んでいる長年の哲友のところを訪ね、
食と農の崩壊危機に関する対話を交わす. その後、
元東京大学出版会理事兼編集局長とも会って
わたくし自身の引退以後の京都フォーラムの哲学活動に関する意見を聞いておき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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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者天下之大本
農学即科学(+哲学+宗教)であると言う意見に対して
農学即美学(生命開新美学)であり、種美学+開 美学+実美学ではないか、と問い返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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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民の位置付けと意味付けという観点と立場から改めて考え直すと、
安藤昌益の<直耕正人>的農民像が良いのではないか、という気が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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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 농農은 천하天下에서 가장 으뜸이 된다는 뜻으로 농업의 중요성을 일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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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농업과 농민의 사회적 위치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과 사업四業에서 선비를 제외한 일반 백성의 일 가운데 으뜸에 있다는 농본주의農本主義 사상에서 알 수 있다. 따라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은 농본주의를 나타내는 깃발과도 같다. 농본주의란 농업이 산업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백성의 생업生業이며 농민과 농촌을 사회·경제의 바탕으로 삼아 국가를 경영해야 한다는 생각으로서 농업의 발전을 통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상이다. 원천적으로 농본사상의 기원은 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유학과 농본사상은 조선왕조의 건국과 더불어 채택된 왕조의 통치이념이었다.

역사적 원류를 찾아보면 농본사상과 그 기치 표현인 ‘농자천하지대본’은 중국 한漢나라의 3대 황제인 문제文帝(재위 기원전 180~157) 때부터 시작되었고, 이는 맹자孟子의 유가적 농본주의와 그 가치관을 현실 정치에 도입하려는 의지에서 발원하였다.
『사기史記』 효문본기孝文本記에 따르면 한 문제는 유학자인 가의賈誼의 진언에 따라 백성들에게 몸소 농사의 모범을 보이는 데 앞장섰다. 기원전 178년(문제 2)에 처음으로 적전籍田을 설치하고 몸소 쟁기로 밭을 갊으로써 농사의 중요성을 가르쳤다(前元 二年 正月 上曰 農天下之大本 基開籍田 朕親率耕 以給宗室廟粢盛). 문제는 이 권농행사勸農行事에서 ‘농천하지대본農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을 처음 썼는데, 이 말은 오늘날까지도 농촌·농민·농업과 관련된 수많은 행사장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한나라의 문제는 유가의 선비들이 제언하는 국정 의견을 크게 수용하여 백성들에게 농업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또한 중농정책을 시행하였다. 재위 22년 동안 여러 차례 농업 장려 조치를 반포하고 적전을 설치하여 몸소 권농행사를 이끌었으며 군·현의 농촌사회를 여유롭고 비옥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재위 후반기에는 창고에 쌓인 곡식들로 넘쳐나서 세금을 받을 필요조차 없었다. 문제와 그 뒤를 이은 경제景帝 시대까지를 한데 묶어서 ‘문경지치文景之治’라고 일컫는 태평성대의 시대로 본받게 되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안정되고 평화로운 시대의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한편 조선 건국의 설계자이자 총수였던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1342~1398)은 개국 일등 공신이 되어 ‘농자천하지대본’의 기치를 세웠다. ‘부자들은 땅이 천맥을 잇댈 만큼 넓게 가졌어도 빈자들은 송곳을 꽂을 땅도 없어서 소작 신세가 뻔하며, 지주들은 소출의 절반 이상을 가져가니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해지는 것이 고려의 사정’이었던 것이다. 농본주의로 혁신하는 길밖에 없었으며, 이 같은 생각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 동안 변함없이 추구되었다. 다만 농본 개혁사상은 조선 전기에는 왕권 강화에 연루된 반면 후기에는 실학적 개혁사상이 나라와 백성의 근대화에 바탕이 되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내용
유학에서 발원한 농본주의는 다면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농업이 의식주의 근본이며 부富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토지국유화, 경자유전, 병농일치, 중농억상, 10분의 1세, 부역균등, 상호부조, 사회보장 등의 정책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사상구조를 갖고 있다. 조선 농본주의 사상은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세종·중종·영조의 권농교문勸農敎文, 정조와 고종의 권농유시를 비롯한 역대 왕들의 교문과 유시, 국가운영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 그리고 세종 때 간행된 농서 『농사직설農事直說』의 서문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경국전』에 적힌 “農者衣食之本 王政之所先也”라는 말은 ‘농업은 의식의 기본이 되고 왕정의 맨 앞에 있다.’라는 뜻이다. 세종의 『권농교서勸農敎書』에는 “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 즉 ‘국가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을거리를 하늘로 삼는다’라고 적혀 있다. 정도전은 적전籍田으로 권농의 뜻을 피력하며 “農者萬事之本也 籍者勸農之本也”라고 하여 ‘농사는 만사의 근본이고 임금이 적전을 몸소 경작하는 일은 권농의 근본’임을 강조하였다.
농업을 위하여 우선적으로 베푼 왕정의 사례를 보면 첫째로 일선 군·현과 수령의 임무인 농잠업 장려, 호구 증가, 교육 진흥, 공정한 군정, 부역 균형, 소송 신속처리, 미풍양속 장려 등을 우선하였다. 둘째는 권농상勸農桑을 위한 친경親耕과 친잠親蠶 의례로 동적전과 서적전을 두고 선농단에서 농사의 신神인 신농神農과 후직后稷에 풍년제를 지내며, 고대 중국의 시조인 황제의 정비正妃 서릉씨西陵氏를 잠신蠶神으로 모셔 선잠단先蠶壇에 제사하는 의례를 행하였다. 셋째는 각종 재해를 막기 위하여 원구단圓丘壇에서 제천제祭天祭를 거행하고 때마다 각급의 기우제와 기풍제를 거행하였다. 넷째는 『농사직설』과 『농가집성農家集成』 등의 종합서를 비롯한 양잠·구휼 등의 전문 농서를 편찬하여 백성들의 농업과학기술 수준을 향상시켰다. 다섯째는 흉년이나 춘궁기에 빈민과 무의탁 백성을 구휼하기 위한 의창義倉과 진휼청賑恤廳을 운영하고, 물가 안정을 위한 상평창常平倉이나 향촌의 미풍양속을 위한 사창과 향약을 장려하였다.

특징 및 의의
농본사상은 중농사상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중농사상은 단순히 산업으로서의 농업 위치를 강화하자는 뜻이지만 농본사상은 농업의 산업적 위상을 높일 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정치·군사·경제·사회 문제를 연계하는 강력한 정치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의 농본사상 정치에는 ‘숭농억상공주의崇農抑商工主義’의 폐단이 싹틀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조선 후기에 실학사상이 싹트면서 이 같은 폐단은 사라지게 되었다. 정조가 이른바 “옛 제도가 본받을 만하더라도 오늘날의 상황이 옛날과 다르다면 성인聖人이 다시 돌아와도 시속에 따른 다스림을 펼칠 것이고 통달한 인재는 옛 제도에 집착하지 않는 법이다.”라며 “온갖 업무를 뒤로 미루고 백성들을 뒤흔들어 가며 행할 수 없는 옛 제도를 재현한다는 것은 허황된 짓이다.”라고 피력한 바와 같다.
‘농자천하지대본’이란 기치는 흔히 향촌의 농사일이나 마을 민속행사에 앞장서는 각종 두레 공동체의 품앗이 문화와 풍물에 내세우는 깃발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보기 드문 민속행사장에서나 볼 수 있는 어색한 정경이 되었다.

참고문헌
농사, 고전으로 읽다(구자옥, 농촌진흥청, 2016), 생명과학 농자천하지대본(최병한, 한림저널사, 1993), 조선시대 농본주의 사상과 경제개혁론(오호성, 경인문화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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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藤昌益 直耕正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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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藤昌益 안도 창익 (읽기) 안도 쇼에키

일본 대백과 전서(닛포니카) 「안도 창익」의 의미・알기 쉬운 해설
안도 창익
안도쇼에키
(1703-1762)
江戸中期の思想家。通称は孫左衛門。著作時の堂号は確龍堂良中(かくりゅうどうりょうちゅう)、別号は柳枝軒(りゅうしけん)。正信、草高とも名のる
에도 중기 사상가 . 통칭은 손좌위문. 저작시의 당호는 확룡당 료나카(카쿠류도류추), 별호는 류에겐(류시켄). 마사노부, 쿠사다카라고도 한다.

[미야케 마사히코 2016년 4월 18일]

평생과 행동

경력의 대부분은 불명하고, 1703년(겐로쿠 16)에 태어나, 1744년(연향 1)부터 1746년 사이, 육안(무츠)국 미토(산노헤)군 하 치노 헤 마을 ( 아오모리현 하치노헤시)에서 마을 의사를 개업, 1762년(호력 12) 10월 14일에 데와(데와)국 아키타군 후이다무라(아키타현 오다테)시에서 사망 해 , 동촌의 조동 (그러자) 소엔마쓰야마 온 천사 에 묘소가 있는 것만이 확실하다. 선조의 손자에몬이 1674년(연보 2)에 니이타무라의 간소(키모이리)(명주)를 맡고 창익도 1761년(호력 11) 10월 14일에 동촌에서 손자에몬이라고 칭하여 과 역을 부담해, 후손도 손좌위문이라고 하는 옥호로 동지에 현주하고 있는 것 등으로부터, 창익의 출생지는 니이다무라에서, 마을 관리인 클래스의 상층 농민 출신으로 추정 된다 .

 창익은 하치노헤 시대, 의사, 학자 로서 높은 평가를 얻고 하치노헤번으로부터 빈객의 치료를 명령받고, 대관, 측의, 유필, 유관상, 어용상인 등 10 여명 을 문인 했다. 1756년(호력 6) 니이다무라의 안도 본가의 당주가 사망하고, 1758년경 창익은 귀촌하여 본가를 이어준다. 후이이다는 미요(川代) 강지류의 재(川) 강변 마을로 에에노사쿠(고에사쿠)의 고지로 전해진다. 벼농사 하나의 논지대에서 무라타카 1500석, 160호 750명, 기타아키타 제일의 오무라에서 근향의 여러 마을을 위압하고 있었다. 그러나 창익이 귀촌했을 때, 마을은 호력의 기근으로 피폐하고, 창익은 유력지주와 마을 관리층을 문인으로 하면서, 음식의 비용 이 가사무 신사의 정지 등, 마을 구제안을 향중에 제안해 실현하고 있다. 온천사의 과거장에 '창익로'와 이례적인 경칭이 붙여져 있는 것은 마을사람의 경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미야케 마사히코 2016년 4월 18일]

사상과 저작

창익의 사상은 기일원론, 사회변혁론, 존왕론을 특색으로 한다. 근원적 ​​실재인 '활진'이 분화하여 만물을 생성하는 영위를 '직경'이라고 한다. 지상에서 생성된 최초의 존재는 쌀이며, 쌀로부터 사람이나 조수충충어가 분화한다. 사람의 생산 활동도 '직경'이다. 만물은, 남자와 여자, 물과 불이라고 하는 쌍을 이루고 있어, 남자의 본성은 여자, 여자의 본성은 남자와, 서로 대립하는 것의 성질을 자기의 본성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를 '호성'이라고 한다. 「직경」을 실시해 「호성」을 유지하는 한, 자연이나 사회, 신체는 모순없이 조화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를 '자연의 세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성인 이나 인도의 석가 등이 나타나, 지배하고 수탈하는 것과 지배되어 생산에 따르는 것과의 절대적 대립 관계 ‘이별’을 만들어낸다. 「이별」에 근거한 제제를 「사법」, 「사법」이 행해지는 시대를 「법세」라고 한다. 「법세」는 「직경」과 「호성」이 부정되는 반자연적 상태이므로, 재해나 투쟁이나 병이 끊이지 않는다. '법세'를 '자연의 세상'으로 변혁하기 위해 과도적 사회가 구상된다.

 그 과도적 사회는, 「법세」의 계급이나 신분 등을 형식적으로 유지하면서도, 모든 사람에게 「직경」시키는 것에 의해, 실질적으로 「2별」을 형해(게이)화시켜 가는 사회이다. 과도적 사회의 권력은 전국적으로는 「가미」(천황), 지역적으로는 「일가 일족」(혈연 공동체)을 기반으로 한다. 후자의 자치를 '읍정'이라고 한다.
과도적 사회에 '직경'과 '호성'을 구현한 진정으로 올바른 사람 '정인'이 나타났을 때 '자연의 세상'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過渡的社会に「直耕」と「互性」を体現した真に正しい人「正人」が現れたとき、「自然の世」に移行するのである

창익은 중국의 왕을 부정하지만, 일본의 천황은 수탈자가 아니라고 존중한다. 神仏混淆 등 후세의 신도를 부정해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신도는 「자연」의 체현으로서 존중한다. 창익의 사상 경향 가운데 존왕 척패론의 계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창익의 문장에는 도호쿠 방언 특히 아키타 방언의 특징이 관철되어 그 사상을 규정하고 있다.

 창익의 저서 로서 ' 자연진영도 '(도쿄대학 종합도서관 소장의 책 과 게이오 기주쿠대학 도서관·무라카미 슈아키 소장의 간본이 있다), ' 통도 진전 '(경대 도서관 소장), '자연 진영도 단맛의 제약 자연의 기행'(우에스기 슈소장), '확룡선생운경경'(동) 등이 있다.

[미야케 마사히코 2016년 4월 18일]

『안도 창익 연구회편 『안도 창익 전집』 전 21권(22분 권)・별권 1・증보 편 3(1983~2004・농산 어촌 문화 협회)』 ▽ 』(1970·호초 서방)』 ▽ 『하버트 노먼 저, 오쿠보 겐지역 『잊혀진 사상가――안도 창익의 일』(『하버트 노먼 전집 제3권』 소수・1977・이와나미 서점)』 ▽ 『미야케 마사히코편 『안도 창익의 사상적 풍토 오다테 니이다 민속지』(1983・그렇고)』

[참조항목] | 자연진영도 | 통도진전
출처 쇼가쿠칸 일본 대백과 전서(닛포니카) 일본 대백과 전서(닛포니카)에 대한 정보 | 범례

아사히 일본 역사 인물 사전 「안도 창익」의 해설
안도 마사아키

몰년:보력 12.10.14(1762.11.29)
생년:원록 16(1703)에도
중기의 농본 사상가. 저자로서의 호는, 처음 확룡당 안씨 마사노부 후 확룡당 료나카. 농가의 당주로서의 자칭은 손좌위문. 창익은 한방의(후세방계)로서의 호. 아키타 번령 의 데바국 아키타군 후이다무라(아키타현 오다테시) 출신. 생가 는 간소(촌장 상당)층의 농가였지만 몰락. 니이타무라를 나와, 연기 1(1744)년부터 호력 8(1758)년까지 하치노헤 번령의 육오국 미토군 하치노헤 성하(아오모리현 하치노헤시)에서 마을 의사를 개업 . 번의 신용 두껍고, 문인에게도 상사층이 많다. 8년 후이이타무라로 돌아가 본가의 당주가 된다. 안도가는 타지를 전부 잃고 궁핍 상태에 있었지만, 창익은 가산의 회복에 노력해, 3년 후에는 고20석 6두여를 소지. 후이다무라도 기근으로 피폐하고 있어 창익은 지주층의 문인들과 마을 기합을 지도, 지출이 많은 각종 신사를 일시정지하는 전통적 절약 방법으로 재건을 도모했다. 주저 는 논문 '자연 진영도', 간본 '자연 진영도', '통도 진전' 등으로 동북 방언의 특징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창익은 생산활동을 자연, 사회, 인체의 통일원리로 삼아 만명이 사유지를 가지고 생산활동에 따른 신분차별이 없는 사회를 이상으로 무사가 농민의 생산을 수탈하는 봉건영주 제 를 비판 . 하지만 집을 생산의 단위로 하고 가부장제를 긍정하기 위해 여성차별을 내포. 생산에서 소외되고 있는 장애인이나 피차별민도 차별. 유교, 불교, 무도(神儒仏混淆의 신도), 노장, 법가 등을 부정해도, 자연 신도(神儒仏混淆 이전의 신도)는 일본과 일본인을 최우수로 해, 이국·이민족 차별 내포. 중국의 왕을 수탈자로서 부정하는 한편, 일본의 천황을 자연신도의 체현자로 농업의 보급자로서 긍정. 현실의 차별사회를 이상적인 평등사회로 변혁하기 위한 과도적 사회로서 천황에 의한 전국 지배와 ​​일가 일족에 의한 지역 지배를 구상했다. 스스로 붙인 사호는 수농 태신. 계명은 처음으로 현정도인 선정문, 이어서 견승도인사, 이후 창안구익신사. 묘석은 오다테시 니이다의 조동 종교 마쓰야마 온천사 경내에 있었고, 위패는 니이다의 문인 아다치 세이자에몬의 집(현필두자 유이치)에게 전해졌다. <저작> 안도 창익 전 집간 행회 감수 『안도 창익 전집』전 10권
(미야케 마사히코)

출처 아사히 일본 역사 인물 사전:(주) 아사히 신문 출판 아사히 일본 역사 인물 사전에 대해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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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타니카 국제대백과사전 소항목사전 「안도창익」의 의미・알기 쉬운 해설
안도 창익 안도 쇼에키

[생]타카나가 4(1707)?.
[몰] 몰년 미상 에도
시대 중기의 사상가. 전기 는 별로 분명하지 않지만, 창익 연구를 종합하면, 아키타번 쿠보타 성 아래에서 태어나 혼초와 의학을 수습한 후 남부 하치노헤로 이주해, 마을 의사로서 생활, 만년은 나가사키에 가서 해외의 사정을 연구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활동은 향보~보력 연간(1716~64)으로 간주되어 의사로서보다는 사상가로서 매우 특이한 활동을 했다. 저서는 공간된 것으로는 「공자 1 세 변기」와 「자연 진영도」(3권, 3권, 1753)가 있고, 미간의 것으로는 「자연 진영도」(100권, 92권) ) 『통도 진전』(5권)이 있다. 그 사상의 특징은 봉건사회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만민평등에 의한 농경중심주의에 있다. 공자, 묘자를 비롯해 지금까지의 도덕교리는 농민에 대한 계급 지배를 합리화한 것에 불과하고, 또 도쿠가와 봉건제는 그 구체화라고 철두 철미 공격했다. 그의 농경주의는 일면에서는 복고적이지만, 그 근저에 있던 인간의 일체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차별의 폐지, 남녀 동권의 평등주의의 주장은 매우 시대를 넘은 보편 성을 가지고 있다.
출처 브리타니카 국제대백과사전 소항목사전 브리타니카국제대백과사전 소항목 사전에 대한 정보

백과사전 마이페디아 「안도 창익」의 의미・알기 쉬운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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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창익【안도쇼에키】

에도 중기 사상가, 의사. 전기에는 불명한 부분이 많지만, 아키타번의 상층 농민의 집에서 태어나, 1744년에는 하치노헤에서 마을 의사를 개업하고 있어, 1745년에는 하치노헤번사, 번의사, 스님 등의 지식층과 박학의 학자로서 교류하고 있다. 1750년대 전반에 주저, 고본《자연진영도》를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저에서 창익은 당시의 신분제사회와 유불사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지배·피지배 관계가 없는 만인이 <직경>(농업생산)에 종사하는 <자연세계>를 제창했다. 1758년 고향으로 돌아가 생가를 부흥, 마을 역인층을 문인으로 마을을 지도해, 흉작에 의한 피폐로부터 구해, 모두로부터 수농대신을 명했다. 저서에는 그 밖에 간본《자연 진영도》《통도 진전》 등이 있다. 에도기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메이지기에 카노 마키요시가 발견·소개하고, 제2차 대전 후 EH 노먼의《잊혀진 사상가》에 의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지만, 창익의 사상의 위치 에 대해서 그러나 정설을 보지 않는다.
출처 주식회사 평범 사 백과사전 마이페디아에 대해서 정보

디지털판 일본인명 대사전+Plus 「안도 창익」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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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창익 안도-쇼에키

1703년?~1762년 에도 시대 중기의 사상가.
겐로쿠(겐로쿠) 16년? 출생. 연향 원년경 육안(무츠) 하치노헤(아치모리현)에서 마을 의사를 하고 있었던 것과, 만년 데바(데와) 후이이다(아키타현)에 헹구고 있던 것 이외는 불상. 봉건적인 신분제도를 비판하고 철저한 평등주의에 근거하는 이상적인 사회 「자연의 세상」을 주장. 보력 12년 10월 14일 사망. 60세? 메이지 32년경 카노우 코키치에 의해 그 저서 「자연 진영도」가 소개되고, 또 제2차 대전 후 EH 노먼의 「잊혀진 사상가」로 히로쿠 세상에 알려졌다. 글자(아자나)는 양중. 통칭은 손좌위문. 호는 확룡당, 야나기 가지. 저작은 그 밖에 「통도 진전」등.
【격언 등】 부를 원하지 않고, 가난을 초대하지 말라. 유저를 생각하지 않기보다는, 무·버림을 위해(나)자자레(「자연 진영도」)
출처 코단샤 디지털판 일본인명 대사전+Plus에 대한 정보 | 범례

왕문사 일본사사전 삼정판 「안도 창익」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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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창익 안도 쇼에키

? ~1762에도
중기의 사상가·의사
아키타에서 태어나, 의학·혼초학을 수습해, 육안(아오모리현) 하치노헤(하치노헤)에서 동의를 개업. 이후 나가사키에 서유럽 사정을 알기 위해 유학했다고 하는데 사력은 불명. 『자연 진영도』 『통도 진전』을 저술하고, 무사・성인・군자를 불경식의 도둑이라고 극언하고, 통치자가 없는, 만인이 경작에 종사하는 평등한 「자연세」를 이상 라고 하는 사상을 설했다.
출처 왕문사 일본사사전 삼정판 왕문사 일본사사전 삼정판에 대한 정보

디지털 대사천 「안도 창익」의 의미・읽기・예문・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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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쇼에키[-시야웨키]【안도 마사유】

[1703~1762]에도 중기 사회사상가·의사. 데와 사람. 봉건사회 와 그것을 지지하는 유학 · 불교 를 비판.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생산에 종사하고 생활하는 '자연의 세상'을 주창했다. 저 「자연 진영도」 「통도 진전」 등.
사쿠라다 히사 히사의 소설. 쇼와 44년(1969)간. 의 전기 소설.
출처 쇼가쿠칸 디지털 대사천에 대한 정보 | 범례

정선판 일본어 대사전 「안도 창익」의 의미・읽기・예문・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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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쇼에키【안도 창익】

에도 중기의 사회 사상가. 데와 사람. 글자는 양중, 호확룡당. 본업은 의사. 봉건사회의 제도습속을 비판하고 철저한 평등주의를 주장. 모든 사람이 농경에 의해 사는 자연세를 이상으로 했다. 주저 「자연 진영도」 「통도 진전」. 보력 12년( 1762 ) 몰.
출처 정선 판 일본어 대사전 정선판 일본어 대사전에 대한 정보

세계대백과사전 제2판 「안도창익」의 의미・알기 쉬운 해설
안도쇼에키【안도 창익】

1703? -62 (원록 16? - 보력 12) 에도
중기의 의사, 사상가. 글자는 양중, 호는 확룡당. 전기에는 불명의 점이 많아, 확실히 알려져 있는 것은, 1744-46년(延享1-3) 무렵, 육안의 하치노헤의 성하에서 마을 의사로서 생활하고 있었던 것과, 만년의 약 5년간을 데와쿠니 아키타군 니이다무라(현, 오다테 시내)로 보내, 이 땅에서 몰린 것만으로, 주요 저술을 완성한 것은, 52-55년(보력 2-5)경 라고 추정되지만, 그 시기에 어디에 거주하고 있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하치노헤에서 창익의 문인은 의사, 번사, 신관, 상인 등 각종 직업에 속하고 있어 같은 시절 마쓰마에, 에도, 교, 오사카, 나가사키에도 소수의 문인이 있었다.
출처 주식회사 평범사 세계대백과사전 제2판에 대해서 정보

세계 대백과 사전 내 안도 창익 의 언급
【자궁】에서

… 이집트에 널리 전해지는 가장 강력한 부적은 여신 이시스의 자궁을 그 인대나 질과 함께 따랐다. 자궁을 장기로 하는 설은 많지만, 안도 창익과 같이 신장 전, 간 아래, 대장 뒤의 공간이 자궁으로, 형태는 없다고 하는 생각도 있었다(《통도 진전》). 파라켈수스는 3종의 자궁을 전한다. …

【자연 진영도】에서
… 안도 창익 의 주저. 제목은 자연스러운 세계의 근원을 이루는 <진>(또는 <활진>)이 운영하는 길, 즉 자연계의 법칙성을 의미한다. …

【통도 진전】에서
… 안도 창익 저. 4권 5권으로 구성된 1부가 게이오 요시카쿠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

※「안도 창익」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용어 해설의 일부를 게재하고 있습니다.

출처 | 주식회사 평범사 세계 대백과 사전 제 2 판에 대해서 |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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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直耕」とは何か : 飢饉と『自然真営道』
高木 松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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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年 8月4日
農業尊重へ崇高な理念を紹介
東奥「安藤昌益―直耕思想いま再び」

江戸中期の独創的思想家として知られる安藤昌益。八戸の町医者だった彼は、封建の世にあって徹底した平等思想を説き、男女が助け合い田畑を耕す「直耕(ちょっこう)」を唱えた。人はみな額に汗して働くべきだとの崇高な理念だ。マネーゲームに踊らされた末に経済危機に陥り、働くところさえ奪われる時代に、昌益が問い掛けるものは何か。4月開始の特設1ページ大型企画(毎週金曜日)は「昌益探しの旅」を続けている。

昌益を社会批判に向かわせたきっかけは寛延2(1749)年の「猪(いのしし)飢饉(けがじ)」。凶作のうえイノシシに田畑を荒らされ、数千人の餓死者が出た。八戸藩では藩財政のため大豆を作らせたが、栽培した後に放置された焼き畑にワラビやクズが繁茂、イノシシが食べて繁殖した。「自然の生態系を壊す者、それは自ら耕さずむさぼり食う支配階級」と、昌益は痛烈に批判した。

こうした昌益の思想を「わが国に大思想家あり」と紹介したのが狩野(かのう)亨吉(こうきち)博士。今年は博士が明治32(1899)年に昌益の「自然真営道」百巻本を入手してから110周年に当たる。残念ながら関東大震災で焼失し現存は15巻15冊のみだ。カナダの外交官ハーバード・ノーマンは第2次大戦後、「忘れられた思想家」を書いて昌益を世界に紹介した。連載は昌益研究の歴史を解き、不明な部分の多い昌益の京都修行や八戸時代も推察する。今秋には昌益ファンの手で市内に資料館がつくられる。

取材・執筆の吉田德寿編集委員(八戸支社駐在)は「食糧基地であり農業が基本の青森で、むつ小川原などの工業開発が優先されるのはおかしいと思い、農を大事にした昌益の思想をいつか紹介したいと思っていた。政治も社

농업 존중에 숭고한 이념을 소개
히가시오쿠 「안도 마사익―직경사상 지금 다시」

에도 중기의 독창적 사상가로 알려진 안도 창익. 하치노헤의 마을 의사였던 그는, 봉건의 세상에 있어 철저한 평등 사상을 설교해, 남녀가 서로 돕고 타바타를 경작하는 「직경(초경)」을 주창했다. 사람은 모두 이마에 땀으로 일해야 한다는 숭고한 이념이다. 돈 게임에 춤을 춘 끝에 경제 위기에 빠져 일하는 곳마저 빼앗기는 시대에 창익이 묻는 것은 무엇인가. 4월 개시의 특설 1페이지 대형 기획(매주 금요일)은 「창익 찾기의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창익을 사회비판으로 향하게 한 계기는 관연2(1749)년의 '이노시시 기근(케가지)'. 흉작 후 멧돼지에 논밭을 거칠어져 수천명의 아사자가 나왔다. 하치노헤번에서는 번재정을 위해 콩을 만들었지만, 재배한 뒤 방치된 구운 밭에 고사리와 쓰레기가 번식, 멧돼지가 먹고 번식했다. “자연의 생태계를 부수는 자, 그것은 스스로 경작하지 말고 먹는 지배계급”이라고 창익은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러한 창익의 사상을 「우리나라에 대사상가 있다」라고 소개한 것이 카노 쿠시 박사. 올해는 박사가 메이지 32(1899)년 창익의 '자연진영도' 백권책을 입수한 지 110주년에 해당한다. 불행히도 간토 대지진으로 소실되어 현존은 15권 15권뿐이다. 캐나다 외교관 하버드 노먼은 2차 대전 후 '잊혀진 사상가'를 써 창익을 세계에 소개했다. 연재는 창익연구의 역사를 풀고, 불명한 부분이 많은 창익 교토 수행과 하치노헤 시대도 추찰한다. 올 가을에는 창익팬의 손으로 시내에 자료관이 만들어진다.

취재·집필의 요시다 히로시 편집 위원(하치노헤 지사 주재)은 “식량 기지이며 농업이 기본의 아오모리로, 무츠오가와라 등의 공업 개발이 우선되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해, 농을 소중히 한 창익의 사상을 언젠가 소개하고 싶다. 정치도 사회도 문제 투성이의 지금이야말로 창익을 재검토해 주었으면 한다. 현재 18회 연재는 내년 ​​3월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심사실)
                   
      

왕기정인(枉己正人) - 고사성어 - jang1338

왕기정인(枉己正人) - 고사성어 - jang1338

왕기정인(枉己正人)
작성자장경식|작성시간19.01.25|


왕기정인(枉己正人)

자기는 삐뚤어진 짓을 하면서 남을 바로잡으려 한다는 뜻으로, 자기 자신은 바르지 않으면서 남을 바르게 하려 하다는 말이다.

枉 : 굽힐 왕(木/4)
己 : 몸 기(己/0)
正 : 바를 정(止/1)
人 : 사람 인(人/0)

출전 : 맹자(孟子) 만장상(萬章上)


맹자(孟子) 만장상(萬章上) 7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01
萬章問曰; 人有言, 伊尹以割烹要湯, 有諸。
만장이 물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윤(伊尹)이 요리하는 기술을 가지고 탕(湯)에게 등용되기를 요구하였다’ 하니, 그러한 일이 있습니까?”

02
孟子曰 : 否. 不然. 伊尹耕於有莘之野 而樂堯舜之道焉。非其義也, 非其道也, 祿之以天下, 弗顧也, 繫馬千駟, 弗視也。非其義也, 非其道也, 一介, 不以與人, 一介, 不以取諸人。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윤(伊尹)이 유신(有莘)의 들에서 밭을 갈면서 요순(堯舜)의 도(道)를 즐겨서, 그 의(義)가 아니며 그 도(道)가 아니면 천하로서 녹(祿)을 주더라도 돌아보지 않고, 말 사천 필을 매어 놓아도 보지 않았으며, 그 의가 아니며 그 도가 아니면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에게 주지 않고,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다.”

(講說)
주자의 주석(註釋)이다. "사기(史記) 은본기를 상고해 보면, “이윤(伊尹)이 도(道)를 행하여 훌륭한 군주(君主)를 만들고자 하였으나 방법이 없자, 마침내 유신(有莘)씨의 인신(媵臣)이 되어 솥과 도마를 지고 (찾아가서) 맛있는 음식으로 탕왕(湯王)을 설득하여 왕도(王道)를 이르게 했다.” 하였으니, 전국시대에 이러한 말을 하는 자가 있었다.

03
湯使人以幣聘之, 囂囂然曰我何以湯之聘幣爲哉, 我豈若處畎畝之中, 由是以樂堯舜之道哉。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탕(湯)이 사람을 시켜 폐백(幣帛)을 가지고 초빙(招聘)하자 거리낌 없이 말하기를, ‘내가 탕(湯)이 초빙하는 폐백을 가지고 무엇을 하겠는가? 내 어찌 밭이랑 가운데 있으면서 이로 말미암아 요순(堯舜)의 도(道)를 즐기는 것만 같겠는가?’ 하였다.

04
湯三使往聘之, 旣而, 幡然改曰, 與我處畎畝之中, 由是以樂堯舜之道, 吾豈若使是君, 爲堯舜之君哉, 吾豈若使是民, 爲堯舜之民哉, 吾豈若於吾身, 親見之哉。
탕(湯)이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서 초빙하자, ‘내가 밭이랑 가운데 있으면서 이로 말미암아 요순(堯舜)의 도(道)를 즐기기보다는, 내 차라리 이 임금으로 하여금 요순 같은 임금이 되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고, 내 차라리 백성으로 하여금 요순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며, 내 차라리 내 몸에서 직접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05
天之生此民也, 使先知覺後知, 使先覺覺後覺也。予天民之先覺者也 予將以斯道覺斯民也。非予覺之而誰也。
하늘이 이 백성을 낳고서는 먼저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늦게 아는 사람을 깨우치게 하며, 먼저 깨닫는 사람으로 하여금 늦게 깨닫는 사람을 깨우치게 하였다. 나는 하늘이 낸 백성 중 선각자이니, 나는 장차 이 도(道)를 가지고 백성을 깨우칠 것이다. 내가 깨우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깨우쳐야 하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06
思天下之民, 匹夫匹婦, 有不被堯舜之澤者, 若己推而內之溝中, 其自任以天下之重如此, 故就湯而說之, 以伐夏救民。
천하의 백성 중에 필부필부(匹夫匹婦)라도 요순(堯舜)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자기기 그를 밀어서 도랑 가운데로 넣는 것과 같이 여겼으니, 그가 천하의 중책(重責)을 스스로 담당하는 것이 이와 같기 때문에, 탕(湯)에게 나아가 설득하여 하(夏)나라를 정벌하고 백성을 구제한 것이다.”

(講說)
이윤(伊尹)이 탕(湯)임금으로부터 세 번의 초빙(招聘)을 받고서 나아갔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요·순(堯舜)의 도(道)를 통하여 임금을 성군(聖君)으로 만들겠다는 것과, 둘째 백성들을 요·순(堯舜)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하늘이 낸 백성 중에 자신이 먼저 깨우친 자이니 백성들을 깨우치고 구제하기 위한 중책을 자임하고 나아간 것이다.

주자(朱子)의 주석이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옛 선정(先正) 보형(保衡)[伊尹]이 우리 선왕[湯王]을 진작시켜 ‘내 능히 우리 군주를 요·순과 같은 임금으로 만들지 못하면 그 마음에 부끄러워함이 시장에서 종아리를 맞는 것과 같았다.’ 하였으며, 한 지아비라도 살 곳을 얻지 못하면 ‘이것이 나의 죄이다.’ 라고 했다.” 하였으니, 맹자가 이 말씀을 여기에서 취한 것이다. 이때에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이 무도하여 백성들에게 포악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탕왕으로 하여금 하나라를 정벌(征伐)하여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한 것이다.

07
吾未聞枉己而正人者也, 況辱己以正天下者乎。聖人之行不同也。或遠或近, 或去或不去, 歸潔其身而已矣。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자기를 굽히고서 남을 바로 잡는다는 것은 듣지 못했으니, 하물며 자기를 욕되게 하여 천하를 바로잡는 것에 있어서랴. 성인의 행동은 같지 않다. 혹 멀리 가기도 하고 혹 가까이 있기도 하며, 혹 떠나기도 하고 혹 떠나지 않기도 하지만, 귀결되는 것은 그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일 뿐이다.

08
吾聞其以堯舜之道要湯, 未聞以割烹也。
나는 그가 요순(堯舜)의 도(道)를 가지고 탕(湯)에게 요구했다는 말은 들었어도, 요리술을 가지고 요구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09
伊訓曰; 天誅造攻, 自牧宮, 朕載自亳。
이훈(伊訓)에 이르기를, ‘하늘이 벌을 주어 공격을 처음 시작한 것은 목궁(牧宮)에서부터였지만, 나의 일은 박(亳)에서 시작되었다’ 고 하였다.”

(講說)
자신을 욕되게 함은 자신을 굽힘보다 심하고, 천하를 바로잡음은 남을 바로잡음보다 어려우니, 만일 이윤(伊尹)이 할팽으로써 탕왕에게 등용하기를 구했다면 자신을 욕되게 함이 심한 것이니, 어떻게 천하를 바로잡을 수 있었겠는가. (…) 성인의 행실이 비록 똑같지는 않으나 그 귀결은 몸을 깨끗이 함에 있을 뿐이니, 이윤이 어찌 할팽(割烹)으로써 탕왕에게 등용되기를 구하였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훈(伊訓)은 상서(尙書)의 편명이니, 맹자께서 인용하여 하나라를 정벌해서 백성을 구원한 일을 증명하신 것이다. 하늘에 걸(桀)에게 벌을 주는 것은 목궁(牧宮)을 공격하는 데서 시작하였지만, 걸(桀)을 정벌하는 이윤(伊尹)의 뜻은 이미 이윤이 박(亳)에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註)
맹자(孟子)는 하조(夏朝)를 멸망시킨 탕(湯)과 이윤(伊尹)을 극력 옹호(擁護)했다. 夏朝가 수립된 후 일부에서는 줄곧 夏朝를 동경하는 세력이 있었고, 이 같은 맥을 타고 이를 근거하여 만장(萬章)은 이윤이 특이한 위치에서 湯에게 등용된 사실을 들어 은근하게 湯과 伊尹을 비판(批判)한 것 같다.

탕왕(湯王)은 구척장신(九尺長身)에다 준수한 용모를 갖추고 관인후덕(寬仁厚德)한 성품까지 겸비한 인물이었고, 그의 은택(恩澤)은 금조(禽鳥)에까지 미쳤다고 역사는 적었다. 게다가 그는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서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철저하게 능력위주로 발탁했다.

유신(有莘)에서 인의지도(仁義之道)를 혼자 즐기며 밭 갈고 있는 이윤(伊尹)을 한 번도 아니고 무려 세 번이나 예물을 갖추어 사자를 파견하여 초빙했다는 기록에서도 우리는 湯이 훌륭한 인물을 구하기 위해 노력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소위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정치적 제스처는 아마도 탕왕(湯王)의 이 같은 예빙(禮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최고지도자가 왕좌지재(王佐之才; 왕을 도울 만한 재능)를 얻기 위해 삼고초려하기는 쉽지 않다.

상(商)의 탕(湯)과 주(周)의 무왕(武王) 역시 그들이 즉위하기 전에 이윤(伊尹)과 강여상(姜呂尙)을 초빙했고, 촉한(蜀漢)의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을 삼고초려한 시기 또한 한중왕(漢中王)도 되기 전이었다.

湯이 예빙(禮聘)한 伊尹은 고귀한 신분이 아닐 뿐 아니라 탕처(湯妻)가 시집올 때 데리고 온 미천(微賤)한 배가(陪嫁) 노예로서 탕가(湯家)의 주방일을 보았던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만장(萬章)이 요리 솜씨로서 伊尹이 湯에게 등용되었다는 견해는 이 같은 설에 근거했다.

처음에 湯은 伊尹의 요리 솜씨에 호감을 가졌다가, 오랜 접촉을 통하여 주방일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 있어서 탁월한 인물임을 확인 후,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 국가대소사를 함께 논의하는 관계가 되었다. 벌하구민(伐夏救民)이라는 정치적 목표는 伊尹에 의해 설정된 것이다.

伊尹에 관한 이 같은 설을 인정한다면 湯이 세 차례나 사자를 파견하여 하말(夏末) 난세(亂世)에 결신(潔身; 몸을 깨끗하게 가짐)하고 있는 그를 초빙했다는 기록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만장(萬章)은 이윤(伊尹)이 탕가(湯家)의 주방장이었다는 설을 믿었고, 0맹자(孟子)는 이를 부정하고 유신(有莘)의 들판에서 요순(堯舜)의 도리를 즐기며 농사짓는 은거사인(隱居士人)으로 인식했다.

이윤의 신분이 노예였다고 해서 이윤의 품격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노예를 중용한 湯의 진보적인 인재발탁 또한 역사에 길이 남을 위업으로 기억될 것이다. 맹자는 이윤을 난세에 한 치의 부정도 저지르지 않고 개결(介潔; 성질이 굳고 깨끗함)하게 살아온 지사(志士; 절의가 있는 선비)라고 했다.

이윤의 신분이 무엇이었던 간에 夏의 신민(臣民)으로서 걸왕(桀王)을 제거하고 상조(商朝)의 개국공신이 된 것은, 유가(儒家)의 명분론(名分論)으로 봐서 이신벌군(以臣伐君; 신하로서 임금을 침)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맹자 역시 이 같은 점을 알았기 때문에, 폭군 桀의 백성을 성군 堯舜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은 하늘의 뜻이고, 하늘의 숭고한 이 뜻을 이윤이 湯을 도와 성취했다는 논리를 폈다.

보천지하(普天之下; 온 하늘의 아래라는 뜻으로 온 세상을 일컫는 말)에 사는 백성은 존비귀천(尊卑貴賤; 지위의 높고 낮음과 신분의 귀하고 천함)을 막론하고 훌륭한 지도자 밑에서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고 이윤은 주장했다.

필부(匹夫) 필부(匹婦)와 선지(先知) 후지(後知)와, 선각(先覺) 후각(後覺) 그리고 사도(斯道) 사민(斯民) 등의 대응논리는 평등과 계몽 및 교화 논리까지 구비한 것으로 오늘날 개혁의지와도 접맥된다.

선각자는 우매한 후각자를 계몽할 사명(使命)이 있고, 정당한 이데오로기[斯道]는 마땅히 백성[斯民]에게 향유하게 해야 하는 것이 자신에게 부여한 하늘의 소명이라고 했다.

이 같은 소명을 실천하기 위해 이윤은 湯에게 벌하구민(伐夏救民)의 정책지표를 제시했고, 湯은 기꺼이 이를 가납하여 桀을 정벌했다. 이에 대해 湯은, ‘내가 처음 이윤과 함께 ?에서 모의한 뒤 마침내 하늘의 뜻을 따라 桀을 誅(주; 베다)했다.’라고 했다.

하늘의 뜻을 따랐다는 것은 요즘의 여론을 따랐다는 것과 같고 또 민주주의니 민주화니 하는 말 등과 동일하다. 이윤이 夏朝를 전복코자 한 강한 의지는 그의 신분이 노예였다는 사실과도 얼마간 관계가 있을 법하다.

스스로 잘못된 자(枉己者)는 사람을 바른길로(正人) 이끌지 못함이 당연한데, 어찌 천하를 올바르게 할 수 있느냐고 탕왕을 평가하면서, 맹자는 湯과 이윤의 伐夏救民은 당연한 것이라고 논했다.

난세에 몸을 피하거나(遠) 관직에서 물러나는(去) 것도 도리이지만,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여(近) 직위를 고수하며(不去) 국가를 개혁하는 것도 모두 성인의 행동이라고 했다.

그러나 遠·近과 去·不去는 어디까지나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는 결신(潔身; 몸을 깨끗하게 가짐)하는 자에게 한해서는 동일한 것이라고 맹자는 밝혔다. 이윤이 湯을 도와 商朝를 개국한 위업(偉業)은 결신(潔身)을 근거한 도덕성을 확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진단했다.

결론적으로 맹자는 요리 솜씨로써 湯으로부터 직위를 얻었다는 만장(萬章)의 설을 일축하고, 도덕적 순수성(潔身)과 백성에 대한 뜨거운 救民精神으로 말미암아 湯에게 등용되었다고 논정(論定; 논의하여 결정함)했다. 결신(潔身)을 강조한 맹자의 준엄한 논조는 오늘의 혼탁한 정치 현실에도 귀감이 될 것이다.


⏹ 이하는 허권수 교수의 왕기정인(枉己正人), 자기는 삐뚤어진 짓을 하면서 남을 바로잡으려 한다의 글이다.

맹자(孟子)의 제자 만장(萬章)이 어느 날 맹자에게, “은(殷)나라의 유명한 정승 이윤(伊尹)도 처음에는 자기의 뛰어난 요리 솜씨를 가지고 탕(湯)임금에게 접근해서 발탁되었다면서요?”라고 물었다.

맹자가 “아니야! 그렇지 않아. 이윤이란 분은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옛날 거룩한 임금인 요(堯)임금 순(舜)임금의 도(道)를 즐기면서 보람있게 살고 있었어. 그분은 정의가 아니고 도리가 아니면 천하의 수입을 다 월급으로 주어도 돌아도 안 본 분이었어. 정의나 도리가 아닌 것은 하나도 남에게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은 분이야”라고 대답했다.

맹자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해 주었다. “탕임금이 예물을 갖추어 그분을 초빙했지만, 탕임금이 예물을 보내어 나를 초빙한다고 내가 왜 가겠는가? 벼슬에 나가는 것이, 내가 시골에 살면서 요임금 순임금의 도를 즐기는 것만 하겠는가?”라고 했다.

탕임금이 포기하지 않고 사신을 세 번이나 보내자, 그제서야 이윤은 ‘우리 탕임금을 요순임금처럼 만들고, 우리 백성을 요순임금의 백성처럼 만들어야지. 내가 아니면 이 백성들을 누가 깨우치겠는가?’라고 생각하고 벼슬에 나갔지. 천하의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서야.

자기는 삐뚤어진 짓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바로 잡는다는 것을 나는 듣지 못했어. 하물며 자기를 욕되게 해가지고 천하를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성인들의 처신이 구체적인 것에 들어가면, 꼭 같지는 않지만, 결론은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했다는 거야.”

발탁되는 과정에서 뇌물을 쓰는 등 부정한 방법을 쓴 사람은 백성을 잘 다스릴 수가 없고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 없다.

역대의 대통령들이 대통령이 되는 과정이 정당하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정정당당하게 국민들을 다스릴 수가 없다.

최고통치자가 정당하게 정권을 창출했으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시위는 다 불법이 된다. 정당성이 없기 때문에 시위 때문에 최고통치자가 쫓겨나기도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비교적 정당하게 대통령이 되었다. 정정당당하게 잘하면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될 수 있다. 그러지 않고 반대파에는 엄격하면서 자기파에는 관대하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사람의 저항을 받을 수 있다.

지금 청와대나 여당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문제가 계속 생기고 있어 여야 간의 시비가 점점 늘어난다. 자기파의 사람들 조사하기를 박근혜 대통령 측근들 조사하듯이 엄격하게 철저히 해야 한다.

좋은 사례가 멀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 때 문고리 삼인방의 비리가 계속 터져 나왔고, 정윤회 문건 사건이 터져 나왔을 때, 박 대통령은 잡아떼기로 일관했다. 나중에 조사해 보니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지금은 대통령이 힘이 있어 검찰이고 언론이 모두 집권세력에 우호적이라 묻히지만, 좀 세월이 더 지나가 대통령이 힘이 빠지면 다 자기들 생존을 위해서 돌아선다. 자기는 삐뚤어진 짓 하면서 다른 사람을 바로잡을 수는 없다. 자기가 정정당당해야 한다.

▶️ 枉(굽을 왕, 미칠 광)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나무 목(木; 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王(왕)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枉(왕, 광)은 ①굽다, 휘다 ②굽히다, 복종하다 ③사특(邪慝)하다(요사스럽고 간특하다) ④능멸(凌蔑)하다 ⑤(누명을)씌우다 ⑥억울(抑鬱)하다, 원통(冤痛)하다 ⑦잘못, 과실(過失) ⑧원죄(冤罪: 억울한 죄) ⑨헛되이, 부질없이, 그리고 ⓐ미치다(말과 행동이 보통 사람과 다르게 되다)(광) ⓑ어지러운 모양(광)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굽힐 굴(屈), 굽을 만(彎), 꺾을 절(折), 굽을 곡(曲), 굽을 요(橈), 굽을 오(迂)이다. 용례로는 남이 자기 있는 곳으로 찾아오는 일을 높여 이르는 말을 왕림(枉臨), 휘어 구부러짐 또는 휘어 굽힘을 왕곡(枉曲), 법을 왜곡하여 서명함을 왕서(枉署), 법을 왜곡하여 함부로 사람을 가둠을 왕수(枉囚), 억울한 죄로 인하여 일찍 죽음을 왕요(枉夭), 법을 왜곡하여 형벌함을 왕형(枉刑), 사실을 거짓되게 고함을 왕고(枉告), 정도를 그르침을 왕도(枉道), 법을 왜곡함을 왕법(枉法), 재앙이나 살해에 의하여 죽음을 왕사(枉死), 의지를 굽힘을 왕의(枉意), 억눌려 굴복함을 왕굴(枉屈), 법률을 굽히어서 부정한 판결을 함을 왕단(枉斷), 도리를 어기어 현혹시킴을 왕혹(枉惑), 편벽되고 부당함을 편왕(偏枉), 처신이나 행동이 매우 그릇됨을 위왕(危枉), 깊숙하고 후미진 곳을 유왕(幽枉),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헛걸음한 방문을 이르는 말을 허왕(虛枉), 굽은 것을 바로잡음을 교왕(矯枉), 휘어져 굽음을 굴왕(屈枉), 짧은 것은 굽히고 긴 것을 편다는 뜻으로 小를 희생시켜 大를 살린다는 말을 왕척직심(枉尺直尋), 구부러진 것을 바로잡으려다가 너무 곧게 한다는 뜻으로 잘못을 바로 잡으려다 지나쳐 오히려 일을 그르침을 이르는 말을 교왕과직(矯枉過直), 잘못을 바로 고치려다 지나쳐 오히려 나쁜 결과를 가져옴을 의미하는 말을 교왕과정(矯枉過正) 등에 쓰인다.

▶️ 己(몸 기)는 ❶상형문자이나 지사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본래 구불거리는 긴 끈의 모양을 본떴고, 굽은 것을 바로잡는 모양에서 일으키는 일의 뜻으로 쓰인다. 일으키다의 뜻은 나중에 起(기)로 쓰고, 己(기)는 천간(天干)의 여섯번째로 쓰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己자는 '몸'이나 '자기'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여기서 말하는 '몸'이란 '나 자신'을 뜻한다. 己자의 유래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일부에서는 사람이 몸을 구부린 모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굽의 있는 새끼줄을 그린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己자와 결합한 글자를 보면 새끼줄이 구부러져 있는 모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다만 己자가 단독으로 쓰일 때는 여전히 '나 자신'이라는 뜻을 가지게 된다. 己자는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상용한자에서는 뜻과 관련된 글자가 없다. 다만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새끼줄이나 구부러진 모양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으니 상황에 따른 적절한 해석이 필요하다. 그래서 己(기)는 ①몸 ②자기(自己), 자아(自我) ③여섯째 천간(天干) ④사욕(私慾) ⑤어조사(語助辭) ⑥다스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육십갑자(六十甲子)의 여섯 번째를 기사(己巳), 열여섯째를 기묘(己卯), 스물여섯째를 기축(己丑), 서른여섯째를 기해(己亥), 마흔여섯째 기유(己酉), 쉰여섯째를 기미(己未)라 한다. 그리고 자기의 물건을 기물(己物), 자기 마음을 기심(己心), 자기가 낳은 자녀를 기출(己出), 자신의 의견이나 소견을 기견(己見), 자신의 초상을 기상(己喪), 자기의 소유를 기유(己有), 자기의 물건은 기물(己物), 제 몸이나 제 자신 또는 막연하게 사람을 가리키는 말을 자기(自己), 자기 이익만 꾀함을 이기(利己), 자신의 몸을 닦음을 수기(修己), 안색을 바로잡아 엄정히 함 또는 자기자신을 다스림을 율기(律己), 자기 몸을 깨끗이 함을 결기(潔己), 몸을 가지거나 행동하는 일을 행기(行己), 신분이나 지위가 자기와 같음을 유기(類己), 자기를 사랑함을 애기(愛己), 자기 한 몸을 일기(一己), 자기에게 필요함 또는 그 일을 절기(切己), 자기가 굶주리고 자기가 물에 빠진 듯이 생각한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겨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함을 일컫는 말을 기기기익(己飢己溺), 중종때 남곤 일파 조광조 등을 쫓아내어 죽인 사건을 일컫는 말을 기묘사화(己卯士禍), 기미년 3월1일 일제에 항거하여 일어난 한국의 독립운동을 일컫는 말을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 자기 스스로를 돌이켜 봄을 일컫는 말을 자기관찰(自己觀察), 모든 사고와 판단과 행동을 자기 중심으로 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자기본위(自己本位), 자기의 이해와 쾌락과 주장을 중심으로 삼고 남의 처지를 돌보지 않는 주의를 일컫는 말을 애기주의(愛己主義), 자기 존재를 인정 받으려고 남에게 자기를 과시하는 심리적 경향을 일컫는 말을 자기과시(自己誇示), 스스로에게 황홀하게 빠지는 일을 일컫는 말을 자기도취(自己陶醉), 자신의 생활은 검약하게 하고 남을 대접함에는 풍족하게 함을 이르는 말을 약기유물(約己裕物) 등에 쓰인다.

▶️ 正(바를 정/정월 정)은 ❶회의문자로 하나(一)밖에 없는 길에서 잠시 멈추어서(止) 살핀다는 뜻을 합(合)하여 바르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正자는 ‘바르다’나 ‘정당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正자에서 말하는 ‘바르다’라는 것은 ‘옳을 일’이라는 뜻이다. 正자는 止(발 지)자에 一(한 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갑골문에 나온 正자를 보면 止자 앞에 네모난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성(城)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正자는 성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正자는 성을 정복하러 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데는 정당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正자는 자신들이 적을 정벌하러 가는 것은 정당하다는 의미에서 ‘바르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正(정)은 (1)옳은 길 올바른 일 (2)부(副)에 대하여 그 주됨을 보이는 말 (3)종(從)에 대하여 한 자리 높은 품계를 나타내는 말 품수(品數) 위에 붙어 종과 구별됨. 정1품(正一品)으로 부터 정9품(正九品)까지 있었음 (4)조선시대 때 상서원(尙瑞院), 사역원(司譯阮), 봉상시(奉常寺), 내의원(內醫院), 내자시(內資寺) 등의 으뜸 벼슬 품계는 정3품(正三品) 당하(堂下) (5)조선시대 때 세자의 중증손(衆曾孫), 대군의 중손(衆孫), 왕자군(王子君)의 중자(衆子) 등에게 주던 작호(爵號) 품계(品階)는 정3품(正三品) 당하(堂下)임 (6)고려 때 전농시(典農寺), 서운관(書雲觀), 사의서(司醫署), 내알사(內謁司), 사복시(司僕寺)의 으뜸 벼슬 품계(品階)는 정3품(正三品)에서 정4품(正四品)까지 (7)신라 때 상사서(賞賜署), 대도서(大道署)의 으뜸 벼슬 35대 경덕왕(景德王) 때 대정(大正)을 고친 이름으로 뒤에 다시 대정으로 고침 (8)정립(定立) (9)정수(正數) 플러스(Plus) 등의 뜻으로 ①바르다 ②정당하다, 바람직하다 ③올바르다, 정직하다 ④바로잡다 ⑤서로 같다 ⑥다스리다 ⑦결정하다 ⑧순일하다, 순수하다 ⑨자리에 오르다 ⑩말리다, 제지하다 ⑪정벌하다 ⑫관장(官長: 시골 백성이 고을 원을 높여 이르던 말) ⑬정실(正室), 본처(本妻) ⑭맏아들, 적장자(嫡長子) ⑮본(本), 정(正), 주(主)가 되는 것 ⑯정사(政事), 정치(政治) ⑰증거(證據), 증빙(證憑) ⑱상례(常例), 준칙(準則), 표준(標準) ⑲처음 ⑳정월(正月) ㉑과녁, 정곡(正鵠: 과녁의 한가운데가 되는 점) ㉒세금(稅金) ㉓노역(勞役), 부역(負役) ㉔네모 ㉕군대 편제(編制) 단위 ㉖바로, 막, 때마침 ㉗가운데 ㉘가령, 설혹, ~하더라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바를 광(匡), 바로잡을 독(董), 곧을 직(直), 바탕 질(質),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거짓 위(僞), 버금 부(副), 돌이킬 반(反), 간사할 간(奸), 간사할 사(邪), 그르칠 오(誤)이다. 용례로는 어떤 기준이나 사실에 잘못됨이나 어긋남이 없이 바르게 맞는 상태에 있는 것을 정확(正確),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성품이 바르고 곧음을 정직(正直), 바르고 옳음을 정당(正當),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를 정의(正義), 특별한 변동이 없이 제대로인 상태를 정상(正常), 올바른 길을 정도(正道), 꼭 마주 보이는 편을 정면(正面), 옳은 답이나 바른 답을 정답(正答), 일정한 격식이나 의식을 정식(正式), 본래의 형체를 정체(正體), 진짜이거나 온전한 물품을 정품(正品), 엄하고 바름을 엄정(嚴正), 옳지 않음이나 바르지 않음을 부정(不正), 공평하고 올바름을 공정(公正), 그릇된 것을 바로잡음을 시정(是正),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아서 고침을 수정(修正), 알맞고 바름을 적정(適正), 거짓이 없이 참을 진정(眞正), 잘못을 고쳐서 바로 잡음을 정정(訂正), 잘못된 것을 바르게 고침을 개정(改正), 태도나 처지가 바르고 떳떳함을 정정당당(正正堂堂), 소나무는 정월에 대나무는 오월에 옮겨 심어야 잘 산다는 말을 정송오죽(正松五竹), 옷매무시를 바로 하고 단정하게 앉음을 정금단좌(正襟端坐), 마음을 가다듬어 배워 익히는 데 힘씀을 정심공부(正心工夫),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정성스레 함을 정심성의(正心誠意) 등에 쓰인다.

▶ 人(사람 인)은 ❶상형문자로 亻(인)은 동자(同字)이다.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서 있는 것을 옆에서 본 모양을 본뜬 글자. 옛날에는 사람을 나타내는 글자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썼으나 뜻의 구별은 없었다. ❷상형문자로 人자는 ‘사람’이나 ‘인간’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人자는 한자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글자이기도 하다. 상용한자에서 人자가 부수로 쓰인 글자만 해도 88자가 있을 정도로 고대 중국인들은 人자를 응용해 다양한 글자를 만들어냈다. 이전에는 人자가 두 사람이 등을 서로 맞대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해석을 했었지만, 갑골문에 나온 人자를 보면 팔을 지긋이 내리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었다. 소전에서는 팔이 좀 더 늘어진 모습으로 바뀌게 되어 지금의 人자가 되었다. 이처럼 人자는 사람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부수로 쓰일 때는 주로 사람의 행동이나 신체의 모습, 성품과 관련된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人(인)은 (1)사람 (2)어떤 명사(名詞) 아래 쓰이어, 그러한 사람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사람, 인간(人間) ②다른 사람, 타인(他人), 남 ③딴 사람 ④그 사람 ⑤남자(男子) ⑥어른, 성인(成人) ⑦백성(百姓) ⑧인격(人格) ⑨낯, 체면(體面), 명예(名譽) ⑩사람의 품성(稟性), 사람됨 ⑪몸, 건강(健康), 의식(意識) ⑫아랫사람, 부하(部下), 동류(同類)의 사람 ⑬어떤 특정한 일에 종사(從事)하는 사람 ⑭일손, 인재(人才)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어진 사람 인(儿),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짐승 수(兽), 짐승 수(獣), 짐승 수(獸), 짐승 축(畜)이다. 용례로는 뛰어난 사람이나 인재를 인물(人物), 안부를 묻거나 공경의 뜻을 표하는 일을 인사(人事),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인권(人權), 한 나라 또는 일정 지역에 사는 사람의 총수를 인구(人口), 세상 사람의 좋은 평판을 인기(人氣), 사람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여 이르는 말을 인류(人類), 사람의 힘이나 사람의 능력을 인력(人力), 이 세상에서의 인간 생활을 인생(人生), 학식과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인재(人材), 사람의 수효를 인원(人員), 사람으로서의 됨됨이나 사람의 품격을 인격(人格), 사람에 관한 것을 인적(人的), 사람을 가리어 뽑음을 인선(人選),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을 인위(人爲), 사람의 몸을 인체(人體), 사람의 얼굴의 생김새를 인상(人相), 한 사람 한 사람이나 각자를 개인(個人), 나이가 많은 사람을 노인(老人), 남의 아내의 높임말을 부인(夫人), 결혼한 여자를 부인(婦人), 죽은 사람을 고인(故人), 한집안 사람을 가인(家人), 장사하는 사람을 상인(商人), 다른 사람을 타인(他人),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뜻으로 사람의 삶이 헛되지 아니하면 그 이름이 길이 남음을 이르는 말을 인사유명(人死留名), 인생이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인생무상(人生無常),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이 짧고 덧없다는 말을 인생조로(人生朝露), 얼굴은 사람의 모습을 하였으나 마음은 짐승과 같다는 인면수심(人面獸心), 정신을 잃고 의식을 모름이란 뜻으로 사람으로서의 예절을 차릴 줄 모름을 인사불성(人事不省), 사람의 죽음을 몹시 슬퍼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인금지탄(人琴之歎) 등에 쓰인다.

2023/05/27

규장각 특별강연: “한국적 경험과 융합 그리고 시각적 언어” -

규장각 특별강연: “한국적 경험과 융합 그리고 시각적 언어”



규장각 특별강연: “한국적 경험과 융합 그리고 시각적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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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국제한국학센터

10:46 AM (12 hou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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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특별강연을 개최합니다. 본 강연에는 신준범 오리건주립대학 교수님께서 “한국적 경험과 융합 그리고 시각적 언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해주실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제목: “한국적 경험과 융합 그리고 시각적 언어”

강연자: 신준범 오리건주립대학 교수

사회자: 조인호 서울대 동양화과 학과장

토론자: 김수정 (서울대 디자인과)

일시: 2023년 6월 5일 월요일, 16:00 - 18:00

장소

- 대면: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대회의실 (4층)

- 비대면: 줌(Zoom) 온라인회의



본 특강은 한국어로 진행되는 대면/비대면 하이브리드 행사입니다.

- 대면 사전등록: https://forms.gle/CrfqEkUnJkTpyZUFA

- 비대면(Zoom) 링크: https://snu-ac-kr.zoom.us/j/93014457045?pwd=bmE1UGpqbFg0NFAwSmVRaDgrWUlGZz09

(ID: 930 1445 7045/PW: 443458)



강연자 소개:

신준범 교수는 현재 오리건주립대학교의 그래픽 디자인과 부교수 및 학과장이자, 제임스-매디슨 대학교의 인터랙티브 미디어 앤 그래픽 디자인과 조교수이다. 이외에도 그는 국제 인간공학 및 디자인 학술대회(AHFE International, Human Factors in Communication of Design) 기술위원,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Korean-American Scientists and Engineers Association, KSEA)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및 이사, 한국 산업기술진흥원(Korea Institute for Advancement of Technology, KIAT) 글로벌기술협력지원단 위원, 한미 과학기술 학술대회(US-Korean Conference, UKC)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및 준비위원 등을 역임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권위적인 국제 디자인 공모전인 그라피스(Graphis)에서 디자인과 포스터 부분에서 다수의 수상경력이 있으며, 50회가 넘는 국제 전시를 한국은 물론 미국, 캐나다, 이태리, 일본, 중국 등 세계 각국에서 전시한 바 있다. 신준범 교수는 퍼듀 대학교에서 비주얼 커뮤니케이션과 인터랙션 디자인 복수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발표 요약:

한국은 풍부한 문화 유산과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속에서 일상과 예술 그리고 디자인 통해 새롭게 융합과 창조의 가치를 아름다움으로 끌어 낸다. 한국적 문화와 다른 예술 양식을 융합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새로운 시각과 아이디어들을 도출해 내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국의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반영하는 독특하고 역동적인 시각적 언어를 만들어 낸다. 문화와 예술, 디자인, 기술의 융합을 바탕으로 창조한 작품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과 경험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우리 문화를 보호하고 다양성을 존중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사회적 환경 변화의 중심에 있는 예술과 디자인은 새로운 트렌드와 문화를 창조함을 모색한다.

기타 문의사항은 icks@snu.ac.kr(Tel. 02-880-9378)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Dear all,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is hosting a special lecture with prof. Jun Bum Shin from Oregon State University. He will give us a lecture titled “The way of thinking: Emerging Korean culture in visual communication design.”



Title: “The way of thinking: Emerging Korean culture in visual communication design”

Lecturer: Jun Bum Shin, Associate Professor, Oregon State University

Moderator: Inho Cho, Chair of the Department of Oriental Painting, SNU

Discussant: Suzung Kim (SNU Dept. of Design)

Date: June 5 (Mon), 16:00-18:00

Venue: Kyujanggak Conference Rm. (4F) & Online (Zoom)



This lecture will be conducted in Korean. Please refer to the following links for in-person/online registration.

- In-Person Registration: https://forms.gle/CrfqEkUnJkTpyZUFA

- Online Zoom Link: https://snu-ac-kr.zoom.us/j/93014457045?pwd=bmE1UGpqbFg0NFAwSmVRaDgrWUlGZz09

(ID: 930 1445 7045/PW: 443458)





About the Lecturer:

Jun Bum Shin joined, an assistant professor of graphic design in the School of Arts and Communication, the faculty in 2015 at Oregon State University after four years in a similar role at James Madison University in Harrisonburg, VA., and three years as a graduate teaching assistant at Purdue University in West Lafayette, IN.

He holds Master of Fine Arts and Bachelor of Arts degrees in Visual Communications Design from Purdue and also studied at the Korean Institute of Design Promotion in Korea and the Academy of Art University in San Francisco. He’s an award-winning artist and designer whose scholarly publications have focused on designing and directing professional journals.



Abstract:

The innovation and inspiration for Jun Bum Shin’s work come from his home country, Korea. Korean culture has a rich cultural heritage, and innumerable unique and beautiful aspects that can be incorporated into art and design. The lecture will be communicated with audiences based on his work mostly related with Korean culture. Jun Bum shin is using his cultural background as a source of inspiration, resulting in works that are both innovative and deeply rooted in Korean culture in the field of visual communication design. This fusion of traditional and modern elements creates a unique and dynamic visual language that reflects the rich cultural heritage of Korea.



Please contact icks@snu.ac.kr (Tel. 02-880-9378) for more in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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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Center for Korean Studies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451 Bldg.103

1 Gwanak-ro, Gwanak-gu, Seoul

Republic of Korea, 08826

T +82.2.880.9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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