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27

希修 - 공동체의 화합을 위한 초기경전의 가르침 - 보디 스님 편찬

(2) 希修 - < 공동체의 화합을 위한 초기경전의 가르침 - 보디 스님 편찬 > . . 아래의 번호들은 Social and... | Facebook

< 공동체의 화합을 위한 초기경전의 가르침 - 보디 스님 편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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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번호들은 Social and Communal Harmony라는 앨범의 사진 번호. https://www.facebook.com/media/set/?set=a.1557300834641994&ty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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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불교에서의 선악 기준은 자의적이 아니며 (인과라는 자연법칙의 관찰에 의한 것), 공동체의 화합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이해인 right view와 그를 실천하는 윤리적 행동이 그 전제조건. 따라서 right view와 wrong view를 구분하는 일이 중요. ("분별하지 말라"는 부처님이 가르치신 미덕이 아님. 흔히 '지혜'라고 번역되는 'paññā'는 'pajānāti'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이 타니사로 스님의 분석이며, 온라인 사전 wisdomlib.org와 wiktionary.com은 'pajānāti'를 '알다, 구분하다'라고 표기. 즉 불교의 '지혜'란 결국 '분별력 = discernment'이라는 얘기. 8정도 수행을 통해 내가 부처님과 같은 안목을 갖게 되면 9단계에서 Rright Knowledge에 이르며, 10단계가 바로 Right Release = 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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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Ignorance가 병의 근원이라면 해결은 당연히 Knowledge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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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불교윤리의 기초는 그 누구에게도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 그래야 나 자신이 미래와 내세에서 해를 입지 않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세상 모든 존재들을 보호하게 되므로, 그래서 수행 자체가 이타행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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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불교는 고통의 원인을 탐진치로 보는데 탐과 진도 치에서 나오므로 (12연기의 시작도 ignorance) 결국 근본적 해결은 지혜 혹은 Right Knowledge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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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3. 10가지의 대표적 악업. 이 중 5번째의 '분열시키는 말'이라는 것은 '이간질하는 말'을 의미하지 비판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 (#70~71, 110~112, 113 등에서 보듯 바른 비판에는 물론 여러 조건들이 따라붙으며, 무조건 싸우라는 의미는 당연히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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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Right Speech의 기준 => '공동체의 화합!을 원한다면 비판!을 잘 하고 또 잘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 https://www.facebook.com/keepsurfinglife/posts/105043640199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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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쉽게 화내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 것. '어리석은'( =인과를 모르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부적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음 (Sn 2:4). 세상 모든 이들을 감정적으로 사랑/공감하거나 인간적으로 친밀하게 지내는 것은 부처님이 가르치신 '자비'와는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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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2. 누군가가 싫거나 미워질 때는 그의 장점/선행을 기억하려 노력해 보고, 떠오르는 게 있거든 사막에서 발견한 오아시스 물인양 소중히 여기고는 떠나라고 하셨음. (내게 수행의 모범이 되어 주고 나의 잘잘못을 분별하여 훈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거든 그를 가까이 하고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 한다면 무소의 뿔처럼 홀로 지내라는 것이 Sn 1:3, MN 128의 가르침. 이건 출가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재가자들에게는 주위 사람들과 두루 화목하게 지내라고 하셨지만.) 상대의 장점/선행을 기억함으로써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화/미움을 다스리되,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상대를 계속 가까이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 (누군가의 잘못에 대해 "에이, 좋은 뜻으로 한 일이겠지!"라며 억지로 축소/희석/옹호해 주는 게 아니라, 잘못은 잘못이라고 정확히 판단하되 내가 간과하고 있는 다른 좋은 면은 혹 없는지 살피라는 것. 다시 말해, 부정적인 것은 부정적으로 긍정적인 것은 긍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긍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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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3. 누군가가 나를 비난하면 나를 때리지 않음을 감사하고, 누군가가 나를 때리면 나를 죽이지 않음을 감사하라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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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부처님은 남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목적의 논쟁은 금하셨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후세에 정확하기 전달하기 위한 목적이나 다른 전통/스승의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의 논쟁은 장려하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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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 #15. 판단, 저격, 논쟁은 상근기는 안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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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4. 대화 상대로 부적합한 사람: 질문의 형식과 내용에 맞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는 사람, 사실이나 공유된 전제 및 절차에 맞지 않는 얘기를 하는 사람, 대화 맥락을 파악 못 해서이든 자신의 논리가 달려서이든 다른 의도가 있어서이든, 대화 주제에서 벗어나는 얘기를 하며 논점을 흐리고 분위기를 산만하게 만드는 사람, 짜증, 조롱, 공격 (정당하고 적절한 비판이 아닌) 등의 무례로써 타인을 대하거나 이해의 노력 없이 트집만 잡으려고 작정하고 달려드는 사람, 경청해야 하는 것에 대해 경청할 줄 모르는 사람. 대화의 목적은 언제나 무지나 잘못된 견해로부터 스스로 해방되거나 타인을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함 (AN 3: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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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66. 잘못된 대화의 예. 믿음이 없는 이에게 믿음에 대해 말하고, 청정/덕 (계율 준수)에 관심 없는 이에게 청정/덕에 대해 말하며, 배움이 없는 사람에게 배움에 대해 말하고, 인색한 이에게 너그러움에 대해 말하며, 어리석은 사람에게 지혜에 대해 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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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지옥으로의 윤회를 이끄는 어리석음의 예. 비난받아야 하는 사람을 칭찬하고, 칭반받아야 하는 사람을 비난하며, 의심해야 하는 내용을 믿고, 믿어야 하는 내용을 의심하며, 누군가가 믿음에서 준 것을 함부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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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70. 칭찬받아야 할 사람에게 칭찬하지 않는 이, 비판받아야 할 사람에게 비판하지 않는 이, 칭찬받아야 할 사람에게 칭찬 않고 비판받아야 할 사람에게 비판 않는 이, 칭찬받아야 할 사람에게 칭찬하고 비판받아야 할 사람에게 비판하는 이. 이 넷 중 가장 훌륭한 사람은 칭찬받아야 할 사람에게 칭찬하고 비판받아야 할 사람에게 비판하는 정확한 사람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 (동양문화에는 알아도 모른 척 해 주고 이러니 저러니 일일이 말하지 않는 것을 '현명'이라 오해하는 경향이 강한테, 이런 견해는 부처님과는 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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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71. 정확한 사실인가,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인가, 그 내용을 말하기에 적절한 시점인가, 적절한 언어로 표현했는가 등이 Right Speech의 요소. 당장은 상대에게 감정적 상처가 될 만한 내용이라도 이 요소들을 모두 충족할 경우엔 Right Spe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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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72. 타인을 꾸짖고자 할 때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정확한 사실인지, 자비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의 태도)에서 우러나온 동기인지, 표현 방법이 부드럽고 말하기에 적당한 시점인지 등을 고려하여 상대에게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해야. 타인의 꾸짖음을 들었을 때는, 감정이 아닌 사실성 여부에 집중해야 하며, 상대의 말이 사실일 때는 인정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그렇지 않다고 감정 없이 사실만 건조하게 밝혀야. (타인이 나를 모함해도 무조건 묵묵히 듣는 것을 '인욕'이라는 미덕으로 칭송하는 종파도 있지만, 그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님. 내가 비판하는 입장이든 비판받는 입장이든 무관하게 객관적 사실에만 집중하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는 impersonal한 태도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이해. 대부분의 인간이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하기에 남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을 '인격자'라고 우러러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 두 방식은 personal이라는 동전의 양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자신이든 타인이든 동일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야말로 'not 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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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 #17. 매사를 판단 없이 무조건 '긍정적'으로 수용/포용하는 것이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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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80. 자신과 남 모두를 위해 수행하는 사람이 가장 훌륭하고, 자신을 위해 수행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남을 위해서는 수행하지 않는 사람이 그 다음, 남을 위해 수행 (타인에게 부처님의 가르침 실천을 권고)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수행하지 않는 사람이 그 다음, 자신을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수행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 열등하다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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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85. 수다떨기를 좋아하고 마음챙김이 없는 집단은 천박하고, 검소하고 고독을 지키며 수행에 집중함으로써 다음 세대에 모범이 되는 집단은 훌륭. ('조화로운 공동체'라고 하면 우린 흔히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떠올리지만, 함께 생활하더라도 꼭 필요한 얘기 외에는 하지 않고 각자 고독과 침묵을 지키는 것이 수행자 집단으로서의 바람직한 모습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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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수다 (Idle Chatter)가 불교에서 Wrong Speech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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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92. 따뜻한 우정의 10원칙: 청정/덕 (계율 준수),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기억, 서로 서로를 불선에서 선으로 이끌어 주는 좋은 도반이 됨, 타인이 교정해 줄 때 잘 받아들임, 매사 부지런하고 능숙한 일처리, 부처님의 가르침을 즐거움의 원천으로 삼음, 불선을 줄이고 선을 증장시킴, 최소한의 물질만으로 만족, 마음챙김 유지, 지혜. (아무나 무조건 믿어 주고 아무하고나 무조건 친밀하게 지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을 것 같지만, 사실은 세속에서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우정의 조건보다도 더 까다로움. 이런 자질들을 갖추지 못 한 사람과는 서로의 발전에 도움되는 우정이 불가능하다는 얘기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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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94. 수행 공동체가 퇴보하지 않기 위한 7원칙: 법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토론. 수다나 형이상학적 관념적 유희가 아님)을 자주 가짐, 화목,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뭔가를 더하지도 빼지도 않음, 선배 수행자들을 존경, 욕망 제어, 번잡하지 않은 숲속에서 거주, 마음챙김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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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타인을 대할 때의 5금기: 얼굴 정도 아는 사이일 뿐이건만 친한 척, 자신이 갖지 않은 것을 베품, 이간질, 귓속말, 과도한 요구/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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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99. 빠빤쨔 (papañca = objectification)에서 욕망이, 욕망에서 호불호가, 호불호에서 부러움과 인색함이, 부러움과 인색함에서 온갖 적의와 갈등이 일어남. (대상화를 하지 말라는 얘기는 '무엇이 나의 먹이=즐거움=이익이 될 것인가?'를 기준으로 생각지 말라는 뜻이건만, 이걸 '모든 종류의 생각/분별 무조건 금지!'라거나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 일원론nonduality적 사고를 하라'는 의미로 오해하는 분들이 너무 많음. 이런 오해는 결국 선-악, 원인-결과, 윤회, 과거-현재-미래 등의 구분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데, 초기경전은 인과를 부정하는 이런 견해를 "사악 evil"이라 표현 - SN 2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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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104. 수행 공동체의 분열!을 일으키는 행위: 법이 아닌 것을 법이라 부르고, 법을 법이 아니라 말하며, 규율이 아닌 것을 규율이라 하고, 규율을 규율이 아니라 간주하며, 부처님이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하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부처님이 말씀하시 않았다 주장하며, 부처님이 실천하시지 않은 것을 부처님이 실천하셨다 하고, 부처님이 실천하신 것을 부처님이 실천하시지 않았다 우기며, 부처님이 처방하시지 않은 것을 부처님이 처방하셨다 하고, 부처님이 처방하신 것을 부처님의 처방이 아니라고 일컬음. 이와 반대로,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고 무엇을 실천, 처방하셨는지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밝히는 것이 수행 공동체의 화목!을 위한 일이라는 게 부처님의 말씀. (그러나 현실은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 옳고 그름이 따로 없으며 진리는 상대적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은 공동체의 분열을 가져온다"는 오해가 오히려 진리인 양 왜곡되어 있는 상태. 의도적이든 실수이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수행자 집단의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지옥으로의 윤회를 야기하는 악업. 초기경전에서부터 갈라져나간 대승불교야말로 최대의 승가분열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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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 #12. 부처님은 언어/관념/논리에 의한 분별/분석을 금하셨다'
[마성 스님]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대승불교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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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110. 부처님 말씀의 내용 자체에 대해서든 그 내용의 해석에 대해서든 수행자들 사이에 의견 불일치가 있을 경우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싸움'으로까지 이끌지는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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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12. 타인이 뭔가 과오를 저질렀을 때 (i) 그가 감정적으로 나오거나, (ii) 자신의 잘못된 견해를 굽히려 하지 않거나, (iii) 내가 그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안 든다면, 이 3개 항목 모두에 해당되는 경우에는 그 사람과 일정 거리를 두고서 평정심을 유지할 것. 그렇지 않고 0~2개 항목만 해당되는 경우라면, 상대방이 지금 당장은 약간의 감정적 상처를 입는다 해도 가급적 상대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해 볼 것 - 그것이 장기적으로는 상대에게 훨씬 더 큰 이익이 되므로. (남이 무슨 얘기를 하든 무조건 "니가 옳고 내가 틀리다"고 하는 것이 부처님이 가르치신 자비 혹은 겸손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건 사실과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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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남을 비판할 때 주의할 점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상대에게 모욕감을 주기 위한 목적인가 아닌가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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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120. 훌륭한 공동체에서는 선배도 후배를 바로잡아 주고 후배도 선배를 바로잡아 주며, 타인의 훈계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과오에 대해 책임을 지고서 그 결과를 감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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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25.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아 달라고 누군가가 요청한다 해도 그가 비판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교정하는 데에 익숙치 못 한 사람이라면 (오만하다거나 비판받을 때 변명을 늘어놓는다거나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이 아예 없고 무례하다거나 등등), 동료 수행자들은 그를 바로잡아 주지 않을 것이며 신뢰하지도 않을 것. 그러므로 나 역시 동료 수행자들로부터 신뢰받을 만한 사람인지를 늘 성찰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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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128. 재가자가 불선할 경우 출가자는 그 재가자의 보시를 거절할 수 있으며, 출가자가 불선할 경우에도 재가자는 그 출가자에 대한 신뢰를 잃었음을 공표할 수 있음. 모든 출가자를 모든 재가자들이 반드시 신뢰, 존경해야 하는 것은 아님. (#103, 104에서 보았듯이, 공동체의 '분열'을 일으킨 책임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히 전달/실천하는 데에 실패한 사람에게 있지 그 잘못을 정확하게 지적함으로써 바로잡고자 하는 사람에게 있지 않음. 그러나 도둑이 아니라, "도둑잡아라" 외치는 사람이 오히려 "잘난 척한다," "불화를 조장한다"는 틀린! 비난을 받는 것이 인간계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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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31. 자신의 과오를 지적받을 때 회피하거나 변명하거나 감정적 반응을 보이는 사람, 자신의 과오를 교정, 개선하려는 노력에 게으른 사람은 아예 공동체에서 내보내라고. 병든 보리가 발견될 경우 즉시 뿌리째 뽑아서 버려야지 그러지 않으면 밭 전체의 보리가 병들게 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이유 (AN 8:10). 강도가 내 팔다리를 자르는 와중이라 해도 절대로 상대에게 해를 입히지 말고 미워하지도 말라는 것이 부처님이 가르치신 '자비'이고, '용서'라는 것도 상대를 미워하거나 상대가 불행해지기를 바라지 말라는 얘기.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상대의 과오를 무조건 부인, 옹호, 희석해 주거나 상대와 계속 친밀하게 지내라는 얘기도 아님. 인간의 탐진치는 마치 바이러스와도 같으며, 바구니의 사과들 중 단 한 개만 병들어 있어도 이내 모든 사과들이 병들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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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134. 수행자들 사이에 청정하지 못한 사람이 있어 부처님이 법문하기를 거부하시자, 목갈라나 존자가 그에게 나가라고 3번 말함. 그가 계속 모른 체하자 목갈라나 존자가 그를 밖으로 끌어내고 문을 걸어잠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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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143. 누군가를 섬기거나 누군가에게 뭔가를 베푸는 일을 통해 나의 믿음, 청정, 너그러움, 지혜 등이 증가한다면 그 일을 하되, 그 반대의 경우라면 그 일을 하지 말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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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146, 147. 누군가가 농부가 되는 것도, 장인이 되는 것도, 상인이 되는 것도, 하인이 되는 것도, 살인자가 되는 것도, 정복자가 되는 것도, 모두 그 행동에 의한 것. 누군가가 천하게 되는 것도 성스럽게 되는 것도 역시, 타고나는 신분이 아닌 오직 그 행동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 (부처님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하신 적이 없음. 인간의 귀함과 천함은 출생이 아닌 본인의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셨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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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154. 상대주의와 일원론은 옳고 그름의 '초월'이 아니라 '재정립'에 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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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출가자 공동체 안에서의 갈등해결 절차에 대해 부처님이 율장에 정해 놓으신 것을 타니사로 스님이 "Purity of Heart"라는 책의 'Reconciliation, Right & Wrong' 챕터에서 해설하신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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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는 갈등 당사자들이 자신의 의도에 대해 깊이 성찰한 후 과오를 저지른 쪽!의 인정과 반성을 필수! 조건으로 한다. 그러고서 추후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서로 확인/합의하고 실제로도 충실히 이행해야만, 이 전제가 충족되어야만 그제서야 비로소 신뢰회복이 가능해진다. “Beginner’s mind가 Zen mind이니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모두 잊고 새출발!“ 같은, 시비분별을 포기해야 겸손이고 자비이며 용서이고 화해라는 식의 얘기들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오히려 정반대!인 것이다. (Zen은 부처님의 가르침보다 도가와 힌두교에 오히려 더 가까운 것 같다는 것이 나의 주관적인 생각.) 심지어 초기경전은 자타의 고통만 가중시키는 어리석은 이에 대해서는 측은지심을 갖되 (AN 5:162) 멀리하거나 끊으라고 말한다 (Sn 2:4, SN 17:3, Ud 8:7). 스스로 노력 않는 사람의 탐진치를 제거해 주는 일은 심지어 부처님도 못 하시며, 내가 상대의 악한 면을 알면서도 외면/부정하여 스스로 피해자가 되는 것은 상대의 악업을 오직 enable & perpetuate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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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가르치신 의미의 화해와 신뢰회복에 실패할 경우엔 따로 따로 각자의 길을 가되, 그렇다 하더라도 서로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다. 용서란 상대가 고통 받기를 기원하지 않는다는 뜻일 뿐, 관계회복을 의미하지도 상대의 과오를 부인, 희석, 변명해 주는 일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잘못한 쪽의 명확한 인정과 깊은 반성 및 사과가 없는 억지 봉합에는 아무런 의의도 없을 뿐 아니라, 실은 'abuse'이기까지 하다는 것이 타니사로 스님의 말씀. 세상을 '선 vs. 악' or '옳음 vs. 그름'으로 구분하는 것이나 '일원론 vs. 이원론'으로 구분하는 것이나 이분법이기는 마찬가지이며, "옳고 그름이라는 것도 상대적"이라는 관점은 사실 옳고 그름의 초월 (transcendence)이 아니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재정립/재배열 (realignment)일 뿐이라는 것이 타니사로 스님의 통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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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친구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싸우면 되니? 니네 둘 다 잘못했으니 빨랑 화해해!" 식의 전혀 공정하지 않은 닦달은, (i) "부도덕은 나쁘다" 식의 기존 관점을 "판단/분별은 나쁘다"라는 판단/분별로 단순히 바꿔치기한 내로남불이고, (ii) 문제의 본질로부터 시선을 분산시킬 뿐 여전히 이분법적인데다가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 하며, (iii) 시비에 대한 혼란과 위선을 조장함으로써 진실된 관계로 나아가는 일에도 오히려 방해만 되고, (iv) 이왕 하게 된 경험으로부터 배움/성장조차 얻지 못 하게 만들며, (v) 무엇보다, 시비분별과 반성이라는 어렵지만 필수적인 과정에 대한 ‘회피=화=진瞋’ (이건 일묵 스님의 견해)이다. 그러므로 '옳음 vs. 그름'을 완전히 포기하는 상대주의적 혹은 일원론적 관점은 갈등해결이나 화합에 전혀 도움되지 않으며, 대신 옳고 그름의 기준에 대한 합의와 그 적절한 운용이 중요하다는 얘기인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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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공동체 안에서야 가치기준이 명확하고 절대적인데 비해 사회에서야 그렇지 않으므로 다양한 관점에서 매사를 바라보는 일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합리성의 우열을 완전히 포기한다면 그 사회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정글이 될 것이므로 (경쟁을 통해 선택된 ’우월한 = 보다 합리적인‘ 의견이 권력을 갖지 못 하는 공동체는 완전한 무질서 혹은 물리력에 의해 지배됨),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 가치기준을 종종 변화시켜 나가는 유연성이 필요할 뿐, 기본원리는 부처님이 제시하신 방향이 사회에서도 최선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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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이라 해도 무수한 종류의 회색들 간의 차이를 분별해야 하며, 흰색과 검은색의 존재 자체에 대해 완전히 부정하는 일은 특히, 눈뜬 장님으로 또는 인간의 뇌 낭비하고 축생으로 살겠다는 얘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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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잘못을 보면 꾸짖어 주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거든, 보물을 발견해 그 위치를 네게 알려 주는 것이라고 여겨라. 이런 류의 현자를 가까이 해라. 그러면 발전뿐 퇴보는 없을 것이니.
그런 현자가 너를 훈계하고 가르치고 잘못된 행동을 멀리하도록 지도하게 해라. 지혜로운 이는 바른 사람들에게는 부드러울 것이고, 바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부드럽지 않을 것이니."
-- 법구경 7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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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eong Gi Yi
    귀한 말씀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希修
    수행자들의 몸은 각각이어도 마음은 하나인 것.처.럼. ("우린 하나"라고 단정짓지 않았음) 생활하고 있다고 Anuruddhas가 부처님께 말씀드리는 장면이 MN 31에 나오기는 하지만, 이건 수행자들 각각이 conceit = selfhood를 버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철저히 충실하게 생활한 결과이지 "본래 나와 남의 구분도, 부처와 중생의 구분도 없다" 같은 自他不二 (자타불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남과 둘/별개가 아닌 하나"라는 것도 결국 'I am X'라는 자기정체성-10 족쇄들 중 가장 먼저 떨어져 나가는 그룹의-일 뿐이기도 하고.) 세상을 '선 vs. 악' or '옳음 vs. 그름'으로 구분하는 것이나 '이원론 vs. 일원론/비이원론'으로 구분하는 것이나 이분법이기는 마찬가지이며, "옳고 그름이라는 것도 상대적"이라는 관점은 사실 옳고 그름의 초월 (transcendence)이 아니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재정립/재배열 (realignment)일 뿐이라는 것이 타니사로 스님의 통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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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 #16. 이원론이 아닌 비이원론적/일원론적 사고를 하라'
  • 希修
    시비분별의 회피는 어렵지만 중요한 과정에 대한 ‘화=진瞋’일 뿐.
    괴로움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면, 조건에 대한 지혜가 생긴다ㅣ일묵스님ㅣ제따와나선원 월요소참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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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로움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면, 조건에 대한 지혜가 생긴다ㅣ일묵스님ㅣ제따와나선원 월요소참 161.
    괴로움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면, 조건에 대한 지혜가 생긴다ㅣ일묵스님ㅣ제따와나선원 월요소참 161.


2022 김대중의 '지구민주주의' 조성환

(9) 임형택 - <김대중의 '지구민주주의'에 깊이 공감합니다> 대학원 수업에서 원광대 조성환 교수님이 쓰신 「동학사상의... | Facebook


<김대중의 '지구민주주의'에 깊이 공감합니다>

대학원 수업에서 원광대 조성환 교수님이 쓰신 「동학사상의 ‘지구민주주의’의 해석」논문을 통해 '지구민주주의'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지구민주주의'는 "다음 세대의 이익을 위한, 인간 이외의 존재들이 지니는 권리마저도 보장해주는 민주주의"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뛰어난 사상가였음을 새삼 느낍니다.
민주당은 시대를 앞서간 이런 사상을 발전시키지 않고 무엇을 했는지, 큰 아쉬움도 듭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아시아태평양재단 이사장으로 재임하던 1994년 12월 미국외교협회(the Council on Foreign Relations)가 격월간으로 발행하는 영문 저널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실은 글에에 '지구민주주의'를 주창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지구민주주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모든 인간이 자기발전의 권리를 보장받을 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과 무생물까지도 건전한 존재의 권리가 보장되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아시아의 풍부한 민주주의적인 철학과 전통은 지구민주주의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우리의 운명인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아시아 민주주의 사상의 원천으로 유학의 민본과 평천하사상, 불교의 불성사상, 동학의 인내천과 사이여천 사상을 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통이야말로 생태위기 시대에 요청되는 새로운 '지구민주주의'의 사상적 원천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시말해, 아시아에도 서구 못지 않은 심오한 민주주의 철학의 전통이 분명하게 있으며, 그 전통에는 미래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사상적 요소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서양학문에서 민주주의를 배우는데요, 사실 아시아의 사상이 그에 못지않게 훌륭하다는데 공감합니다.

'지구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미래정치를 더욱 연구하고 현실로 만들어보겠습니다.
#김대중_지구민주주의 #동학 #자연경제 #살림경제
#원광대_조성환교수 #임형택_미래정치


동학사상의 ‘지구민주주의’적 해석
The Donghak Thought from the Perspective of Global/Earth Democracy

유학연구
2022, vol.60, pp. 105-130 (26 pages)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조성환 /Jo Sunghwan 1 ,  이우진 /LEE WOOJIN 2
1원광대학교
2공주교육대학교

초록

본고는 ‘지구민주주의’ 개념을 중심으로 동학사상의 현대적 의미를 고찰하고자 하는 시론이다. 

‘지구민주주의(global democracy)’는 1994년에 한국의 정치가 김대중이 제창한 개념이다.

 김대중은 아시아에는 유학, 불교, 동학과 같은 심오한 민주주의 사상 전통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것들을 바탕으로 ‘인간 이외의 존재의 권리도보장해 주는 지구민주주의’를 실현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런 점에서 지구민주주의는‘포스트휴먼 민주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김대중은 동학사상의 어떤 점이‘지구적’인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 뒤에 인도의 환경운동가반다나 시바는 고대 인도의 ‘지구일가(地球一家, Vashdhaiva Kutumkam)’ 사상을바탕으로 ‘지구민주주의(Earth democracy)’를 주창하였다. 

편협한 마음에서 보면 친구와 적이 나뉘지만, 진화된 마음에서 보면 세계는 하나라는 것이다. 
반다나 시바는 지구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자연경제’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였다. 인간경제가 화폐를 교환한다면, 자연경제는 생명을 교환한다. 따라서 
  • 자본주의의 탐욕스런 인간경제를 
  • 만물의 자유를 존중하는 자연경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반다나 시바의 지구민주주의론은 19세기 동학사상가 최시형의 사상과 상통한다.

 최시형은 천지가 만물의 부모이고, 만물은 천지의 동포라고 하여 일종의 ‘지구일가론’을 제창하였다. 
그리고 인간뿐만 아니라 ‘만물도 하늘님’이라는 그의 사상은 
지구민주주의에서 주창하는 ‘인간 이외의 존재의 권리도 존중하라’는 주장과 상통한다. 

나아가서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사상은 
자연경제에서는 생명을교환한다는 
반다나 시바의 살림경제론과 유사하다. 

이처럼 김대중과 반다나 시바는토착사상에 기반하여 미래의 민주주의를 제창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런의미에서 지구민주주의는 지구지역적 민주주의(glocal democracy)라고 할 수 있다. 지구민주주의라는 공통 이념의 사상적 근거를 지역적 전통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This paper aims to show the contemporary meaning of Donghak thought based on the concept of “global/Earth Democracy.” “Global democracy” is a new concept proposed by former South Korean president Kim Daejung in 1994. He asserted that there are profound democracy thoughts such as Confucianism, Buddhism and Donghak in Asia, and we have to realize “global democracy” based on Asian traditions. “Global democracy” means a democracy which guarantees the nonhuman’s rights. In that sense, it is a kind of “posthuman democracy.” At the beginning of the 21st century, environmental activist Vandana Shiva advocated “Earth democracy” based on the ancient Hindu thought “Vasudhaiva kutumkam”, meaning “Earth as one family.” She said that if we look at from the narrow mind, there are friends and enemies, but from the evolved mind there is one family. As a method of realizing Earth democracy, Shiva paid attention to the nature’s economy which exchanges life not money, and asserted that we have to turn from dead capitalism to living economy system. Shiva’s thought resonates with the 19th century Korean thinker Choi Shihyeong’s Donghak thought. He regarded Heaven and Earth as parents of all things, and all things as one family. And based on this thought, he asserted that we should respect nonhuman beings.
Moreover, Choi Shiheong considered eating something as a transformation of life energy from one thing to another, which resonates with nature’s economy in Earth democracy .
Kim Daejung’s global democracy and Vandana Shiva’s Earth democracy is similar in that they are based on indigenous thoughts. In that sense, global/Earth democracy can be called “glocal democracy.” This is because they find the philosophical basis for the future democracy from the regional tradi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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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동학, 반다나 시바, 자연경제, 지구민주주의, 최시형.
Kim Daejung, Vandana Shiva, Global/Earth Democracy, Nature’s economy, Choi Shihyeong

2022 근현대 한국종교의 생태공공성과 지구학적 해석

근현대 한국종교의 생태공공성과 지구학적 해석 - YES24




근현대 한국종교의 생태공공성과 지구학적 해석
모시는사람들 | 2022년 

 320쪽

책소개

〈근대문명 수용과정에 나타난 한국종교의 공공성 재구축〉 연구 성과로 발간하는 총서 제5권이다. 한국에 도래한 서구의 근대는 이성의 강조와 자연과 인간, 자연과 문화를 분리시키는 이분법적 사고에 바탕하는바, 그 결과로 오늘의 인류와 지구가 마주한 ‘인류세’의 시점에서 근대 한국종교의 다양한 사상자원을 인류세 철학 내지는 생태사상으로 재해석하는 시도를 담고 있다. 즉, 서구적 근대 사상의 기조인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인간과 만물의 조화와 공생을 도모하는 새로운 종교로서의 한국종교의 개벽운동인 생명평화운동의 전개 과정과 그 사상적 맥락을 검토하여 〈한국종교의 생명평화운동〉, 〈한국종교의 지구학적 해석〉, 〈기후위기 시대의 종교생태사상〉의 세 단계에 걸쳐서 논구한다.
책의 일부 내용을 미리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미리보기

목차
제1부 한국종교의 생명평화운동

생명평화결사와 『생명평화경』 그리고 생명평화 백대서원 절 명상 / 김석근
1. 머리말: 생명과 평화 그리고 생명평화
2. 불교와 생명평화: 육도중생(六道衆生)이 다생부모(多生父母)
3. 생명평화 사상과 운동
4. 맺음말: ‘동체대비(同體大悲)’와 ‘본래붓다’

통합생태학과 생명평화운동의 접점 / 허남진
1. 머리말
2. 서구의 통합적 지구학으로서 통합생태학
3. 남미의 인간과 지구의 통합적 해방을 위한 통합생태학
4. 한국의 생명평화운동
5. 맺음말

한국 개신교의 생명평화운동과 사상 / 김재명
1. 한국 개신교 생명평화운동의 등장 배경
2. 한국YMCA의 생명평화운동과 사상
3. 기독교환경운동연대의 생명평화운동과 사상
4. 한국 개신교 생명평화운동의 다양성

제2부 한국종교의 지구학적 해석

조선후기 실학의 지구학적 해석 / 김봉곤
1. 머리말
2. 실학자들의 지구와 우주에 대한 인식
3. 실학자들의 재이에 대한 견해
4. 실학자들의 지구 내 존재에 대한 삶의 규정
5. 맺음말

동학사상의 지구민주주의적 해석 / 조성환·이우진
1. 머리말
2. ‘지구민주주의’란 무엇인가?
3. 동학사상과의 비교
4. 맺음말: 지구지역적 민주주의(glocal democracy)

원불교 천지론의 사상적 기원과 지구인문학적 의미 / 허남진·조성환
1. 머리말
2. 천지가 부모이다
3. 천지가 스승이다
4. 천지에 보은하라
5. 맺음말

제3부 기후위기 시대의 종교생태사상


기후위기 시대 원불교사상의 생태학적 재해석 / 이주연·허남진

1. 머리말
2. 기후위기 시대 토착적 생태운동
3. 원불교사상의 생태학적 재해석
4. 맺음말

기후위기 시대 원불교의 역할 / 원영상
1. 머리말
2. 원불교 기후·환경 운동의 실제
3. 기후·환경 운동의 교의적 기반
4. 운동의 지평 확대를 위하여
5. 맺음말

기후위기시대 모노(モノ) 철학의 생태학적 재해석 / 야규 마코토

1. 머리말
2. ‘모노’와 ‘고토’의 언어철학
3. 가마타 도지의 ‘모노학’―아일랜드 바닷가의 ‘모노’ 체험에서
4. 니노미야 손토쿠의 지구인문학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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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0명)
저 : 허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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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대 기초교육원 강사

저 : 조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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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다시개벽] 편집인. 지구지역학 연구자. 서강대와 와세다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였고,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한국 근대의 탄생』과 『개벽파선언』(이병한과 공저)을 저술하였다. 20∼30대에는 노장사상에 끌려 중국철학을 공부하였고, 40대부터는 한국학에 눈을 떠 동학과 개벽사상을 연구하였다. 최근에는 1990년대부터 서양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지구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일관된 문제의식은 ‘근대성’이다. 그것도 서구적 근대성이 아닌 비서구적 근대성이다. 동학과 개벽은 한국적 근대성에 대한 관심의 일환이고, 지구인문학은 ‘근대성에서 지구성으로’의 전환을 고민하고 있다. 양자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지구지역학’을 사용하고 있다. 동학이라는 한국학은 좁게는 지역학, 넓게는 지구학이라는 두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장차 개화학과 개벽학이 어우러진 한국 근대사상사를 재구성하고, 토착적 근대와 지구인문학을 주제로 하는 총서를 기획할 계획이다.

책 속으로

‘생명평화결사’, 『생명평화경』, ‘생명평화 백대서원 절 명상’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도법과 관련해서 한 가지 덧붙이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는 최근 「붓다로 살자 발원문」을 내놓았다. 그 발원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신기하고 신기하도다. 어리석음에서 깨어나 보니 사람이 그대로 오롯한 붓다이네.” 깨어나서 보면 사람이 그대로 붓다, 즉 ‘본래붓다’라는 것이다. 본래붓다인 만큼 거룩한 붓다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붓다로 살자. 그것이 곧 ‘21세기 시민붓다 불교’라는 것이다.
---「생명평화결사와 『생명평화경』 그리고 생명평화 백대서원 절 명상」중에서

최근 인류세는 지질학, 생물학, 기후학, 지구시스템학,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철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횡단하면서 성찰되고 있다. 인류세는 단순히 지질학적, 기후학적 문제가 아닌 인간존재 방식에 대한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또한 인류세는 지구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에게 고통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성적 사유와 함께 지구와 지구 생명체들과의 적절한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재성찰이 아닐까? 바로 여기에 통합생태학의 의의가 있다.
---「통합생태학과 생명평화운동의 접점」중에서

민주화 이후 한국 개신교는 시민운동으로 방향을 잡았고 이때의 구호는 ‘생명평화’였다. 한국YMCA와 기독교환경운동연대가 이렇게 전개된 한국 개신교의 생명평화운동을 주도하였지만, 두 단체의 활동과 사상에서는 적잖은 차이가 있었다. 이것은 비단 두 단체만의 차이가 아니라 한국 개신교 시민운동의 주요한 두 흐름의 분화를 의미한다. 물론 이것이 두 흐름 사이의 대립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두 흐름 모두 ‘정의, 평화, 창조보전(JPIC)’에 기초한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사이의 이해와 강조점이 다르다. 즉, 두 흐름이 사용하는 ‘생명평화’의 실질적 내용이 다른 것이다.
---「한국 개신교의 생명평화운동과 사상」중에서

18~19세기 실학에서는 이러한 우주관이나 자연관의 변화에 대해 전통 유학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관점을 버리지 않으면서 지구 내 존재로서 새로운 형태의 삶을 모색하였다. 홍대용은 개인이나 민족 간의 관계에 절대적인 위계나 차별을 두지 않았다. 기의 변화에 따른 인간의 대응에 따라 인간 사회의 도덕과 왕조 교체의 역사적 정당성에도 변화가 생긴다고 보았다. 홍대용은 먼저 사물은 사람의 관점이 아닌 하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지간에 사람만이 귀하고 금수와 초목은 천하다는 설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조선후기 실학의 지구학적 해석」중에서

일본의 종교사상가 기타지마 기신은 서구 근대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비서구지역의 토착사상에서 찾았다. 동학은 그러한 토착사상을 바탕으로 서구적 근대를 극복하려 한 ‘토착적 근대(indigenous modernity)’의 지구적 사례이고, 시기적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고 평가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동학이 추구한 생명사상은 ‘토착적 지구성’이라고 자리매김할 수 있고, 오늘날의 지구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한국적 사례에 해당한다. 실제로 1985년에 원주지역에서 장일순을 중심으로 일어난 ‘한살림운동’은 동학사상, 특히 최시형의 사상을 시민사회의 차원에서 실천하고자 살림경제와 살림민주주의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따라서 동학은 한국에서 발현한 지구민주주의의 사상적 토대라고 평가할 수 있다.
---「동학사상의 지구민주주의적 해석」중에서

동학과 원불교는 지구를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하고 공경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지구종교’로 해석될 수 있고, 천지보은과 동척사업은 ‘지구윤리’로 이해될 수 있다. 북미의 생태여성주의 신학자 샐리 맥페이그(Sallie McFague, 1933-2019)는 인간을 상호 의존적 존재로 정의하면서, ‘감사’를 지구 위기 시대의 생태윤리로 제시한 적이 있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은 다양하지만, 우리는 자연에 대한 감사를 잊은 채 살고 있고, 따라서 우리의 삶과 상호 의존적으로 연결된 자연에 대해 인식을 새롭게 전환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이끌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서구에서도 지구 위기의 대안으로 동학과 원불교와 같은 천지론이 제창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지구 위기 시대에 동학과 원불교가 지니는 생태적 의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원불교 천지론의 사상적 기원과 지구인문학적 의미」중에서

마음공부의 특징은 개인의 영성을 함양하는 것만이 아닌 전 지구적 차원의 상생과 조화를 함께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작용토록 하는 요건을 뜻하는 ‘경계’의 범위는 개인적 사건들에서부터 전 지구적 상황에 이르기 때문에, 지금의 기후위기 또한 마음공부를 위한 ‘경계’에 해당될 수 있다. 원불교환경연대의 ‘지구를 살리는 초록일상수행’, ‘초록 유무념 챌린지’는 기후위기라는 경계를 통해 실천할 수 있는 마음공부를 제시하고 있다. 이런 시도들을 밑거름 삼아 기후위기 시대의 마음공부를 확장시켜 간다면 좋을 것이다.
---「기후위기 시대 원불교사상의 생태학적 재해석」중에서

한국의 종교계 또한 최근 공동성명서 등을 통해 정부 정책 수립에 힘을 보태고 있다. 각 종교는 정부의 탄소중립 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으로 보인다. 모든 영역에서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는다면 지구의 미래는 없다.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지구 내 모든 존재의 상호 의존성은 지구를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철학이 되었다. 원불교 또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절대은의 사상이 세계의 보편 가치와 소통되고, 함께하는 기반을 충분히 가지고 있음이 증명되고 있다. 원불교환경운동의 전망이 밝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후위기 시대 원불교의 역할」중에서

모노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하늘에는 선악이 없으므로 천리 또는 천도라는 ‘모노(物)’는 벼나 보리도 피와 강아지풀 같은 잡초도 가리지 않고 생장시킨다. 그래서 ‘천도’ 또는 ‘천리자연’ 그대로 방치하면 사람이 논밭도 황무지로 돌아간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모노(者)’는 ‘인도’를 세워서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려서 선과 악을 분별한다. 그는 이러한 천도·천리와 인도의 관계를 물레방아에 비유하면서 절반은 천리를 따르지만 절반은 천리를 역행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벼를 자라게 하자면 끊임없이 잡초를 제거해야 하듯이 선을 보전하고 악을 제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인도·인위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또한 니노미야 손토쿠에 의하면 이러한 ‘인도’를 가르친 것은 아마테라스 신이라는 ‘모노(신령)’라고 보았다.
---「기후위기시대 모노(モノ)철학의 생태학적 재해석」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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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1.
인간의 활동이 인간의 거주 환경인 대기권과 유기체의 생존 근거인 지질학적 차원에까지 그 영향을 끼치고 발자국을 남기는 시대를 일컬어 ‘인류세’라고 한다. 지구온난화, 남북극빙하 극북 지역 및 고산지의 만년빙하의 해빙, 시베리아영구동토층 해빙, 생물대멸종 등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인류세의 징후는 결국 ‘인류 멸망’의 시나리오를 써 나가고 있다.

이러한 인류세의 위기에 대응한 인간의 필사적인 노력은 파리기후협약(신기후체제)으로 대표되는 국가-국제 정치 차원의 노력에 더하여, 민간 차원은 물론이고 학계, 경제계 등에 걸쳐 전방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관적인 전망이 점점 높아지고 깊어지는 중이지만, 이 문제에 관한 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정신으로 할 수 있는 한의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이기도 하다.

인류세의 문제는 당면한 눈앞의 현상에 대한 대증적 요법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최근 300년간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에너지 혁명과 미디어 혁명 등의 수많은 혁명적 변화와 성장 일변도의 체제를 통해 구축해 온, 그리하여 오늘날 ‘전 지구적’으로 압도적인 것이 된 근대문명 자체에 대한 ‘대전환’을 요구하는 흐름으로 귀결되고 있다. 한편에서는 여전히 과학주의에 의거한, 다시 말하면 제4차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신기술 발전, 지속가능한 성장 등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낙관론이 자리 잡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문명의 기저에서부터 근본적인 쇄신과 차원 이동이 요구된다는 의식도 점점 확장되고 있다. 예컨대 오늘날 SF영화나 소설 등에서 타임 슬립이나, 다중우주, 별(別)세계 등을 빈번하게 다루는 까닭도, 현재의 우리 인류가 처한 상황은 지금까지의 인류 상식이나 우주적 법칙을 넘어서는 수준의 대대적이고 근원적인 발상의 전환, 삶의 양식의 변화를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2.
이 책의 공동 저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안을 근대한국의 종교의 지혜에서부터 찾는 일을 오랫동안 해 오고 있다. 근대한국의 종교란 일찍이 ‘서세동점’으로 이야기되는 서구 세계의 압도적인 동래, 즉 자본주의의 세계화 국면에서 한국적 또는 동아시아적 지혜로써 이에 대응하고 또 이러한 ‘자본주의의 세계화’가 예고하는 전 지구적인 파탄에 대한 대안으로써 창도되고 창설되고 창안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후천개벽’이라고 하는 것이며, 특히 근대한국 종교 가운데서도 이러한 입장을 종교적 근간으로 삼는 일군의 종교를 일러 ‘개벽종교’라고 하는 것이다. 이들 개벽종교는 오늘날 ‘생명평화운동’이라는 것으로써 인류세의 종말적 위기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생명평화운동은 한국이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위치에서 오랫동안 구축해 온 지혜의 패턴을 그대로 따르는 가운데, 한국 고유의 사상적, 문화적, 종교적 자원으로서 빚어낸 빛나는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서는 평화라는 말이 사회적 화두가 되어 원폭 투하의 도시 히로시마에 평화의 문(平和の門)을 세운 것을 비롯해서, 평화헌법 수호 시민운동, 학문적인 차원에서의 평화학의 활성화 등의 특징을 드러냈다. 반면에 중국학계에서는 생명에 대한 철학적 접근이 활발한바, 노자 또는 도교의 생명철학, 왕양명의 생명철학 등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에서는 생명과 평화를 아우른 생명평화 담론과 운동이 뚜렷한 흐름을 형성해 왔다. 한국에서도 평화와 생명의 담론이 저류에 흐르고 있었으며, 그것이 개벽종교를 통해 근대적 발화를 하여 오던 중 198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생명평화운동과 생명평화사상으로서의 자기인식을 하게 된다. 장일순 선생, 김지하 시인을 필두로 한 ‘원주그룹’과 2000년에 불교계를 중심으로 시작된 생명평화운동은 그 구체적인 실천 양상이다. 10여 년 뒤에는 그리스도교계에서도 생명평화운동이 전개되었고, 이후로는 한국사회 전반에 생명평화라는 말이 화두가 되었다. 이것은 결국 동학 이래의 한국 근대종교의 자원이 현대적으로 계승되고 개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지금까지 4권의 공공성총서 시리즈를 통해 ‘한국종교의 개벽사상’의 전개와 그 세계사적 의의를 논구해 온 연구자들은 『근현대 한국종교의 생태공공성과 지구학적 해석』을 통해 ‘인류세’라고 하는 당면한 시대현실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연구로의 심화, 전환, 도약을 감행하게 되었다.

김석근의 「생명평화결사와 『생명평화경』 그리고 생명평화 백다서원 절 명상」은 “육도중생(六道衆生)은 다생부모(多生父母)”라는 사상에 바탕을 둔 한국불교의 생명평화 사상과 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구체적인 사례로 2000년대에 시작된 ‘생명평화결사’ 운동과 『생명평화경』, 그리고 생명평화 백대서원 절 명상을 살펴보고 있다. 허남진의 「통합생태학과 생명평화운동의 접점」은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와 프란치스코 교황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고 있는 통합생태학이 오늘날의 지구 위기 해결을 위해 인간, 사회, 환경 생태학의 통합을 시도하는 새로운 학문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생명학, 생명평화운동이 전개되어 있고, 이들을 통틀어서 지구공동체의 공존과 평화를 모색하는 ‘지구평화학’으로 개념화할 수 있다는 점을 제안하고 있다.

김재명의 「한국 개신교의 생명평화운동과 사상」은 현대 한국 개신교의 생명평화운동을 소개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민주화 이후 한국 개신교 시민운동은 ‘생명평화’를 내세웠다. 특히 한국 개신교의 생명평화운동을 주도하는 두 단체, 한국YMCA와 기독교환경운동연대에서 사용하는 ‘생명평화’의 실질적인 내용의 차이를 비교함으로써 그 특질을 뚜렷이 드러냈다. 김봉곤의 「조선후기 실학의 지구학적 해석」은 조선후기 실학이 18~19세기에 유입된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모색한 새로운 지구학에 대해 살펴본다. 동양의 전통적 우주관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이었으나 서양 지리학과 천문학을 통해 지구와 우주, 환경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실학자들은 국가 관계, 인간관, 인간과 만물과의 관계도 균등하고 공생하는 관계로 파악하게 되었다는 점을 천착한다.

조성환, 이우진의 「동학사상의 지구민주주의적 해석」은 오늘날의 뉴질랜드와 에콰도르 등의 남미 각국에서는 지구를 주체로 한 법률이 만들어지고 지구민주주의가 태동하고 있음에 착안하여 한국에서도 최시형은 지구가 “생명의 그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일찍이 100여 년 전부터 선포해 왔고, 생명의 순환을 본질로 보았으며 이것은 오늘날 한살림운동으로도 이어지고 있음을 소개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시각에 입각한 지구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허남진, 조성환의 「원불교 천지론의 사상적 기원과 지구인문학적 의미」는 원불교 천지론은 동아시아의 우주론에 뿌리를 두고, 천지부모론에 기초한 동학의 천지공생사상과도 공통되어 있음을 살핀다. 원불교는 불교를 표방했으나 천지를 스승이나 부모처럼 모시고 은혜로운 존재로 본 점에서는 오히려 동학사상과 유사하다는 것, 우리는 삶과 상호 의존적으로 연결된 자연을 새롭게 인식(전환)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주연, 허남진의 「기후위기 시대 원불교사상의 생태학적 재해석」은 기후위기 시대 토착적 사상과 지식을 기반으로 전개되고 있는 토착적 생태운동과 원불교사상과 한국의 토착적 생태운동으로서의 가치를 살펴본다. 그리고 원불교학의 방향과 가치로 ‘기후은(氣候恩)’에 관한 문학과 예술 담론의 기반을 제시한다는 것, ‘기후위기 시대의 마음공부’에 관한 논의의 저변을 확대하는 것의 두 가지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원영상의 「기후위기 시대 원불교의 역할」은 지구온난화 시대에 대응하는 원불교 활동을 소개한다. 원불교환경연대를 중심으로 한 원불교 환경운동은 그 사상적 기반이 곧 천지은(天地恩)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선종(禪宗) 위앙종(?仰宗)의 ‘일원상(一圓相)’, 장재(張載) 『서명(西銘)』의 건곤(乾坤, 천지)을 부모로 여기는 사상, 대순불전의 『대승본생심지관경(大乘本生心地觀經)』의 은혜사상 등 전통 동양사상의 맥을 이은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논구하였다.

야규 마코토(柳生 眞)의 「기후위기시대 모노(モノ)철학의 생태학적 재해석」은 ‘물건’ ‘사람’ ‘신령’을 의미하는 일본어의 ‘모노’(物?者?靈)에 주목하고 ‘모노학’(モノ學)을 제창한 일본의 신도 사상가 가마타 토지(鎌田東二)를 통해 생태학적 철학을 살펴본다. ‘모노’사상은 인간과 사물, 물질과 영성의 이원론을 뛰어넘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모노’의 시각에서 니노미야 손토쿠(二宮尊德)의 천리/인도 사상을 지구와 인간의 관계를 다시 보고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면서 인간이 지구에게 책임지는 존재로 재정립하는 지구윤리, 환경윤리를 모색한다. 일본의 사상과 한국에서의 생태사상을 비교하는 잣대로서, 이 책의 가치를 높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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