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23

From MLK to Silicon Valley, how the world fell for ‘father of mindfulness’ | Vietnam | The Guardian

From MLK to Silicon Valley, how the world fell for ‘father of mindfulness’ | Vietnam | The Guardian


From MLK to Silicon Valley, how the world fell for ‘father of mindfulness’

Thich Nhat Hahn leading people in a walking meditation in 2013. Photograph: Zuma Press/Alamy


The Vietnamese monk Thich Nhat Hanh, who has died at 95, gave his movement a global reach and influence

Before he got sick, Thich Nhat Hanh urged his followers not to put his ashes in a vase, lock him inside and “limit who I am”. Instead, the Vietnamese Zen Buddhist monk, poet and peace activist apparently told them: “If I am anywhere, it is in your mindful breathing and in your peaceful steps.”

And after the 95-year-old’s death on Saturday, the breadth of the legacy of his extraordinary life was laid bare as news of his death reverberated around the world, drawing tributes from leading figures from across psychology, religion and social justice.

The Dalai Lama, the spiritual leader of Tibetan Buddhism, said he lived “a truly meaningful life”, adding: “I have no doubt the best way we can pay tribute to him is to continue his work to promote peace in the world.”

Hanh, known as the “father of mindfulness” and a leading advocate of “engaged Buddhism”, rose to prominence and was exiled from his home country over his opposition to the Vietnam war. After persuading Martin Luther King to speak out against it, the civil rights leader nominated him for the Nobel peace prize in 1967, writing that he did not know of anyone more worthy “than this gentle Buddhist monk from Vietnam”.

‘Thay’ with Martin Luther King Jr at a press conference in Chicago in 1966
‘Thay’ with Martin Luther King Jr at a press conference in Chicago in 1966. Photograph: Edward Kitch/AP

Hanh’s influence even reached the tech world. In 2013 he spoke at Google’s headquarters in Silicon Valley, telling workers: “We have the feeling that we are overwhelmed by information. We don’t need that much information.”His influence also spanned clinical psychology, with his 1975 book The Miracle of Mindfulness laying the foundations for what would later be used to treat depression and described as mindfulness-based cognitive therapy.

“He was there at the very start of bringing mindfulness from east to west,” said Mark Williams, emeritus professor of clinical psychology at Oxford University and founding director of the Oxford Mindfulness Centre. Williams first heard about mindfulness from Marsha Linehan, a professor of clinical psychology at the University of Washington, who he said kept Hanh’s book in her pocket and referred to it as her “bible”.

He said: “I first met her in the late 80s but this was published in 1975 so she had been using that book to influence her, and it was her work and her advice that influenced us in seeking to incorporate mindfulness into our approach to preventing depression, which then became known as mindfulness-based cognitive therapy.”

Buddhist monks and nuns greet Thich Nhat Hanh (centre) at a temple in Hue, Vietnam, in 2020
Buddhist monks and nuns greet Thich Nhat Hanh (centre) at a temple in Hue, Vietnam, in 2020. Photograph: Linh Pham/Getty Images

Today, mindfulness is a ubiquitous term of modern life, but without Hanh’s influence western mindfulness would not, he believes, be what it is today.

Williams said: “What he was able to do was to communicate the essentials of Buddhist wisdom and make it accessible to people all over the world, and build that bridge between the modern world of psychological science and the modern healthcare system and these ancient wisdom practices – and then he continued to do that in his teaching.”

Those who met Hanh said his presence was unlike anything else they had encountered.

Anabel Temple, a member of Heart of London Sangha, part of Hanh’s monastery network, first came across his teachings in his book Being Peace 30 years ago. She travelled with him in China and Vietnam in 2005, when he returned after four decades of exile, and has been to his Plum Village monastery in France many times. Scrolling through her phone, she shows dozens of photos of Hanh – also known as “Thay”, or teacher – travelling.

“He had that sort of way. You go into a room and there were hundreds of people there in a Dharma talk, but he had that ability to feel he was singling you out personally in that room, speaking directly to you,” she said.

The last time Temple saw him was at Plum Village before a stroke, which left him unable to speak, in 2014. Four years later he returned to Vietnam and because of his ill health was permitted by the authorities to spend his final days at the Tu Hieu temple.

It is not yet clear how the government of one-party Vietnam, which is wary of organised religion, will react to his funeral, which began yesterday and will last five days.

“Thay was such humility, such dignity, such presence,” said Temple. “He was funny, angry, sad. He took childlike delight in things and also a profound peace and calmness and an extraordinary humanity.”

Suryagupta, chair of the London Buddhist Centre, first encountered him at a retreat in England about 25 years ago. “He is definitely a giant of a man and I had the good fortune to be on retreat with him in my early days of exploring Buddhism,” she said.

“What was so striking was, whenever he walked into a space, sometimes there would be hundreds of people there, without saying a word literally as soon as he walked in his presence would instil this sort of stillness and quietness in the crowd… and a softness, you felt yourself relax and be alert somehow in his presence.” Suryagupta said his inclusivity was a central feature of his teaching. “He showed that Buddhism was really available for everybody and as a Black woman that was really important to me.”

He died peacefully surrounded by his followers in Tu Hieu temple – the same temple that his spiritual journey started – where they will hold a week-long funeral.

Marianne Williamson, author and former US presidential candidate, said: “He was a great spiritual teacher obviously who brought millions of people around the world into a deeper understanding of the tenets of Buddhism and how to apply them in our daily lives.”

But she is certain that his legacy will live on. “His gift to the planet was so significant I don’t think it will in any way lessen with his death. With some people, and certainly there are those we all know of today, their negativity permeates the consciousness of the planet,” she said. “With Thich Nhat Hanh, his love and compassion permeated the consciousnesses of the planet and now it’s our responsibility to carry it forward from here.”

틱낫한이 서양에 영향을 끼친 까닭과 배울 점 / 이도흠 불교평론

틱낫한이 서양에 영향을 끼친 까닭과 배울 점 / 이도흠 < 상좌불교 < 특집 < 기사본문 - 불교평론

틱낫한이 서양에 영향을 끼친 까닭과 배울 점 / 이도흠
기자명 이도흠   입력 201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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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불교, 무시할 것인가 포용할 것인가


1. 머리말

틱낫한(Thích Nhất Hạnh) 스님! 1926년 10월 11일 작은 나라 베트남에서 태어나 달라이 라마와 함께 세계 2대 생불로 추앙받는 이, 베트남전 반대와 평화운동을 주도하여 1967년 노벨상 후보로도 오른 이, 베트남의 임제종을 대표하는 스님이자, 상즉종(相卽宗, Order of Inter-being)의 창시자, 100권에 이르는 저서를 지은 시인이자 사상가로 그 저서 가운데 상당수가 미국과 유럽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읽히고, 프랑스의 자두마을(Plum Village), 미국의 단풍림승원(Maple Forest Mo-nastery)과 청산법원(Green Mountain Dharma Center), 녹야원 승원(Deer Park Monastery)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음은 물론, 틱낫한센터가 다른 종교에는 철옹성인 이스라엘에도 있는 사상가이자 명상운동가이다.

2010년 5월 28일 현재 틱낫한으로 구글에 검색하면 10,800,000건이 뜬다. 그의 책은 적지 않은 종이 미국과 서양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고 또 스테디셀러다. 그의 음성과 노래와 법문이 담긴 오디오와 시디도 만만치 않게 팔리며, 그의 글은 서양의 대안문명, 명상, 평화를 추구하는 잡지에 즐겨 인용된다. 심지어 증권투자를 설명하는 글에도 그의 글이 인용되고 응용되기도 한다.

그는 달라이 라마와 함께 서양의 대중과 지식인이 가장 존경하는 동양인이다. 자두마을과 승원엔 연일 수백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방문객과 수행자가 찾아들고, 여기서 명상과 수행을 접한 이들, 그의 글을 읽은 이들은 물질보다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는 삶으로, 욕망을 증대하는 것보다 자발적으로 절제하는 삶으로, 갈등과 싸움보다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삶으로 바꾸고 있다. 소국의 틱낫한 스님이 서양인에게 이리 깊은 감동을 주고 영향력을 미치는 비결은 무엇일까? 특히 그는 임제종의 법맥을 계승한 자이면서 초기경전에 근거한 마음챙김 수행을 추구하는 자다. 이런 그에게서 한국 불교가 배울 점은 무엇인가.


2. 틱낫한의 사상과 수행법

1) 서로 존재(inter-being)의 연기론과 보살행

스님의 사상을 대표하는 핵심 개념은 스님이 창시하여 이끄는 불교를 상즉종(相卽宗, Order of Inter-being)이라 할 정도로 ‘서로 존재(inter-being)’라는 것이다. 이는 간단히 말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상호 침투하면서 다른 것들과 공생을 바탕으로 한다는 의미다.

지금 한 탯줄은 당신을 태양과 연결해 주고, 다른 탯줄은 하늘의 구름과 맺어주고 있죠. 구름이 거기 존재하지 않는다면, 비도, 마실 물도 없죠. 구름이 없다면, 우유도, 차도, 커피도, 아이스크림도,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못하죠. 탯줄은 당신을 강과 맺어 주고, 다시 숲과도 이어 줍니다. 계속 명상한다면, 당신이 이 모든 사람들, 그리고 우주의 삼라만상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당신의 삶은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뿐만 아니라 식물과 광물과 공기와 물과 대지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틱낫한 스님은 연기론을 삼라만상의 상생(相生)과 연결시켜 설명한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서로 관련을 맺고 있으면서 서로 조건이 된다. 햇빛, 태양, 토양, 씨앗, 비료, 농부 등 모든 것이 꽃의 개화에 관계한다. 어느 하나라도 없거나 부족하면 꽃은 피지 않는다. 세상에 별개의 사물이란 없다. 모든 것은 우주의 상호의존적인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는 것이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서로 관련을 맺고 있고 서로 조건이 된다. 이렇듯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른 것들과의 상생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는 주변의 모든 생명체뿐만 아니라 식물과 광물과 공기와 물과 지구에 의존하면서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틱낫한은 화엄 연기론을 바탕으로 연기의 진리를 좀 더 역동적으로 전개한다.

자, 옥수수 낟알을 심읍시다. 일곱 날이 지나면 싹이 트고 옥수숫대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옥수숫대가 우리의 키만큼 높이 자란 후 심었던 낟알을 볼 수 없죠. 하지만, 낟알이 죽었다고 말하지는 마세요.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옥수숫대에서 아직 옥수수 씨를 볼 수 있습니다. 옥수숫대는 미래를 지향하는 낟알의 이어진 몸이며, 낟알은 과거를 지향하는 옥수숫대의 이어진 몸입니다. 낟알이 미래를 향해 자신을 던지면 낟알이 사라지면서 그 몸에서 옥수숫대가 자라고, 옥수숫대는 낟알에 담긴 유전자 정보대로 키가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당분이 십 퍼센트 담겨 있다면 그 성분대로 자라고 있으니 옥수숫대에 낟알이 담겨 있습니다. 둘은 같은 사물이 아니지만, 서로 완전히 다르다며 떨어트려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옥수숫대와 씨의 관계처럼, 당신과 엄마 또한 완전히 같은 사람은 아니지만, 서로 전혀 다른 인간 또한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서로 의존하고 조건이 되면서 관계를 맺는 연기의 진리입니다. 어떤 사람도 홀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존재하려면, 우리는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서로 보듬어 주는 ‘서로 존재’이어야 합니다.

이 대목을 보면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에서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연기론을 씨와 열매의 비유로 설명한 것과 유사하다. 낟알과 옥수숫대는 하나가 아니라 별개의 사물이다[不一]. 하지만, 낟알이 찰옥수수면 찰옥수수가 열리는 옥수숫대가 자라고, 옥수숫대가 메옥수수이면 그 유전자를 가진 낟알이 나온다. 그러니, 둘도 아니다[不二]. 낟알은 옥수숫대 없이 존재하지 못하고, 옥수숫대 또한 낟알 없이 존재하지 못하니 공(空)하다. 하지만, 낟알이 땅에 떨어져 자신을 소멸시키고자 하면, 거기서 싹이 나고 옥수숫대가 자란다. 겉으로 보면 옥수숫대에 낟알이 없는 것 같지만 낟알에 담긴 유전자 정보는 그대로 존재하여 옥수숫대를 형성하니, 옥수숫대 안에 옥수수 씨가 담겨 있는 것이다. 옥수숫대는 미래를 지향하는 낟알의 연속체이며, 낟알은 과거를 지향하는 옥수숫대의 연속체이다. 둘은 같은 사물이 아니지만, 서로 완전히 다르다고 분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존재는 상즉상입(相卽相入)한다.

우리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뭇생명, 사람과 우주 삼라만상의 관계가 이와 같다. 이것이 바로 서로 의존하고 조건이 되면서 관계를 맺고 상즉상입하는 연기의 진리다. 어떤 사람도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 존재하려면, 우리는 ‘서로 존재(inter-being)’이어야 한다. 이 사람도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나도 저 사람에 영향을 미친다. 서로가 서로 안에 들어와 있다. 저 사람이 웃으면 나의 근육도 긴장을 푼다. 내가 미소를 지으면 저 사람의 근육도 긴장을 풀며 엔돌핀이 몸 안에 돈다. 이처럼 인간은 다른 사람들, 우주 삼라만상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면서 서로가 상즉상입하는 ‘서로 존재’다. 이처럼 서양의 현상학이나 실존주의 철학에서 말하는 존재와 차이를 갖는, 다른 존재들과 인드라망처럼 관련을 맺고 또 서로 조건이 되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존재가 바로 ‘서로 존재’이다.

모든 것이 연기되어 있고 무상하므로 무아(無我)다. 하지만, 씨가 자신을 소멸시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것에서 보듯, 자신을 부정하여 다른 것을 존재하게 한다. 이런 상호 관련과 조건 속에서 가유(假有)로서 찰나의 순간 존재하는 것은 있다. 이처럼 연기와 무상을 인정하면서도, 가유로서 존재하며 다른 존재와 연관을 맺고 스스로는 공하지만 다른 것과 상생, 상즉상입의 관계 속에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을 틱낫한은 ‘서로 존재’로 명명한다.

서로 존재는 스스로는 공하지만, 다른 것과 관련 속에서만 존재를 드러내기에 다른 것과 상생과 상즉상입을 전제로 한다. 싸우는 두 사람이 서로 이복형제라는 사실을 알면 싸움을 중지할 것이다. 서로 미소 짓는 일이 서로의 몸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면 미소를 짓게 된다. 그러기에 연기론은 보살행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서로 존재이기에 나의 미소는 상대방을 미소 짓게 하고, 나는 다시 그 미소를 보면서 행복해진다. 내가 선의 씨앗에 물을 가려 주어 이를 꽃으로 피어나게 하면, 그도 또한 선의 씨앗에 물을 주어 꽃으로 피우고 어느새 세상은 평화와 자비, 형제애, 사랑, 비폭력의 아름다운 꽃이 흐드러진 꽃밭이 된다.

2) 불성의 꽃밭론

틱낫한 스님은 인간의 마음을 밭에 비유한 불교식 비유와 일체 중생에 불성(佛性)이 있다는 대승의 불교관에 따라 불성론을 설명한다. 그는 역사상의 부처님과 살아 있는 부처님, 곧 궁극적인 부처님을 구분한다.

역사상의 부처님은 오늘날 인도와 네팔 국경에서 가까운 카필라 성에서 태어났다. 결혼을 했고 아이도 하나 두었다. 출가해 여러 가지 명상을 수행하다가 득도했다. 80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가르침을 전했다.

살아 있는 부처님은 궁극적인 실재의 부처님으로서 모든 사상이나 관념을 넘어서는 분이다. 우리가 언제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분이다. 살아 있는 부처님은 카필라 성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쿠시나가르에서 죽지도 않았다.

역사상의 부처님은 역사적으로 실재한 고타마 싯다르타이며, 살아있는 부처님은 궁극적인 실재이자, 살아서 우리 안에 늘 내재한 분이라 우리가 언제나 가까이 다가가서 만날 수 있다고 보았다. 틱낫한은 이를 《법화경》 〈신해품〉의 우화를 통해 설명한다. 집을 떠나 50년이나 가난하게 살던 아들이 어느 날 막일꾼 자리를 얻기 위해 왕실 가족까지 찾을 정도로 부유한 상인의 집에 간다. 그 상인이 바로 그의 아버지였는데 아들은 몰라보지만 아버지는 한눈에 알아본다. 아버지는 아들이 충격을 받을까 봐 아들에게 모른 체하고 낮은 일자리에서 서서히 높은 일자리를 주며 돌본다. 죽을 때가 돼서야 그는 그가 친아들임을 밝힌다. 이를 두고 틱낫한은 “이 대목은 부처가 《법화경》을 통해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으므로 누구나 부처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가르쳐주는 순간과 같다. 그리고 빈궁한 아들의 마음 상태는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길에서 자신도 부처의 자식이며 보살이라는 가르침을 듣고, 이를 인정하는 성문의 마음 상태와 흡사하다.”고 지적한다.   

틱낫한은 철저하게 ‘본래성불(本來成佛)’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깨달음에 이르렀느냐고, 부처에 오른 것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에게 “당신은 부처가 아닙니까?”라고 되묻는다고 한다.  

그럼 모든 인간에게 불성이 있는데 왜 악이 행해지는가. 그는 이 문제를 선과 악의 씨앗과 꽃밭의 비유로 설명한다. 인간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지만 악이 행해지는 것은 인간의 마음밭에 선의 씨앗도 있고 악의 씨앗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어떤 때 선의 씨앗이 싹을 틔우게 하지만, 어떤 때는 탐욕과 어리석음과 분노로 악의 씨앗을 싹트게도 한다. 행복, 사랑, 자비, 평화, 형제애, 평등, 비폭력의 씨앗에 물을 주고 폭력, 두려움, 증오의 나쁜 씨앗에는 물을 주지 않으면, 선의 씨앗이 싹을 틔워 꽃으로 피어나 행복과 평화의 꽃밭을 만든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가려서 물 주기 수행이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밭에 행복, 사랑, 자비, 평화, 형제애, 평등, 비폭력 등의 긍정의 씨앗도 있고 증오, 폭력, 두려움, 화, 집착 등의 악의 씨앗도 있으므로 긍정의 씨앗에 물을 주어 싹을 틔우고 꽃으로 피어나게 하고 악의 씨앗엔 물을 주지 않아 자라지 못하게 하는 수행을 뜻한다.

꽃밭에 어떤 식물이 잘 자라지 못할 때 그 식물을 나무라는 이들은 없다. 물이나 영양, 햇빛이 부족한가, 땅이 좋지 않은가 살핀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나쁜 일을 행하거나 쉽게 화를 내는 것은 선의 씨앗에 물을 주는 것을 게을리하였기 때문이지, 그 사람의 탓이 아니다. 어떤 악한 사람이라도 선의 씨앗에 물을 주고 악의 씨앗엔 물을 주지 않는, 가려서 물 주기 수행을 하면 좋은 사람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사람들은 물 주기를 곧잘 잊어버리거나, 생각이 나도 잘 실천하지 않는다. 때로는 악의 씨앗에 물을 주어 분노와 증오와 화를 키운다. 

이처럼 틱낫한은 본래성불의 입장에서 수행과 선을 결합시켜 불성의 꽃밭론을 전개한다. 누구나 불성이 내재되어 있으며, 수행을 통해 그를 만날 수 있으며 선이라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을 깊은 지혜로써 깨달아 바로 불성을 보는 것이다. 그 순간 그곳은 선과 깨달음의 꽃밭이 된다. 그에게 부처와 깨달음과 선은 하나다.
 
3) 지금 이 순간의 깨달음

틱낫한 스님의 사상은 ‘지금 여기에서’ 출발한다. 스님은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여 이 순간의 경이에 만족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으라고 말한다.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몸과 삶에 대해 마음을 가다듬어 깨닫는 순간, 우리는 ‘진정한 우리 집’에 있는 것입니다. 몇몇 사람은 부모님의 집에 살면서 집처럼 편안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집 밖의 세상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엄마 뱃속에 있는 ‘자식들의 궁궐’처럼 진실하고 청정한 집이 있습니다. 비록 당신이 어떤 지역, 어떤 나라, 어떤 지정학적 지점, 어떤 문화적 집단, 어떤 인종 집단에 속하지 않는다고 느낄지라도, 우리에게는 진정한 집이 있습니다. 엄마의 몸속에 있을 때 집과 같은 평안함을 느꼈죠. 아마 당신은 평화롭고 안전한 그곳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의 몸 안에도 그 집이 있으며, 그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당신의 진정한 집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그 집은 시간이나 공간, 국적이나 인종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당신의 진정한 집은 추상적인 이데아가 아니라 당신이 언제든 만질 수 있고 매 순간 살 수 있는 곳입니다. 당신이 마음챙김 수행과 참선을 하여 붓다의 가피를 받으면, 바로 그 순간 당신의 몸과 마음은 완벽한 평안함으로 충만해져 진정한 집에 이르는 것입니다. 누구도 당신에게서 그 집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나라를 점령하고 당신을 감옥에 가둘 수는 있지만, 당신의 진정한 집과 자유를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우리 앞에 닥치지 않았다. 우리는 오직 현재를 살아간다.” 과거가 이미 없는데, 과거에 얽매인 이들은 현재의 경이와 즐거움을 모른다. 그들에게 과거는 감옥이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미래에 사로잡힌 이들은 미래의 승진과 출세, 혹은 내일에 대한 두려움에 포로가 되어 지금 이 순간의 아름다움을 즐기지 못한다.

우리가 찾고 있는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에 있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우리는 이런 경이를 만날 수 없다. 내일로 미루는 자, 과거에 묶여있는 이들은 지금 내 앞에 펼쳐지는 현재의 아름다움과 경이를 만나지 못한 채 지나친다. 오직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최고의 경이로움과 행복과 만날 수 있다.

집에 가서 깨달음의 숨을 쉬면, 몸과 마음은 아주 빠르게 함께 하나가 됩니다. 자, 들숨을 쉬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들숨에만 정신을 집중합니다. 들숨에 자신의 백 퍼센트를 투여하여 집중합니다. 당신은 곧 들숨이 됩니다. 들숨에 집중하며 참선을 하면 어느 순간에 몸과 마음은 하나가 됩니다. 바로 그 순간 당신은 완전히 살아 있고 전적으로 참여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완벽한 극락인 엄마의 자궁 속으로 돌아가려고 더 이상 열망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은 이미 바로 거기, 당신의 집에 다다른 것입니다.

숨을 들이쉬면서 마음에는 평화를 담는다. 숨을 내쉬면서, 얼굴에 미소를 짓는다. 그러면  나는 내가 살아 숨 쉬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경이로운 순간임을 느낀다. 숨을 쉬면서 능선 위로 이어진 푸른 하늘, 초록빛으로 반짝이는 봄날의 숲, 비 내린 뒤 물안개에 잠긴 시냇가, 단풍이 곱게 든 사이로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가을 저녁의 오솔길, 눈이 내려 온 들판이 은세계로 변한 위로 불쑥 솟아 있는 두 그루 소나무, 그리고 계절에 관계없이 동네 마당이나 아파트의 놀이터에서 해맑게 웃으며 뛰어노는 아이들을 떠올린다. 멈춰 서서 조금 깊게만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절로 숨을 깊이 쉬게 되고, 절로 얼굴 가득 미소가 번지는 이 순간이다. 미소를 짓는 순간 온 얼굴의 힘살들은 긴장을 풀고 엔돌핀이 돌며, 온몸에 따스한 에너지가 감돈다. 이 순간 나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남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불성이다. 우리 얼굴을 본 이들 또한 미소를 짓는다. 그 순간 그의 마음밭에 있는 선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으로 피어난다. 이것이 보살행이다.

틱낫한 스님이 깨달은 화두는 “나는 도착하였다. 나는 집에 있다.(I have arrived. I am home.)”이다. ‘집’의 의미는 ‘깨달음, 열반, 극락’ 등과 통하며 ‘자궁’과도 통한다. 숨쉬기 명상, 걷기 명상, 품어 안아 주기 명상 등 마음챙김 수행의 궁극 목적은 자궁이나 집과 같이 모든 고통을 없애고 ‘지금 여기에서’ 마음이 지극히 평안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그의 글을 읽노라면, “고향의 집안일 날로 황량해 가고/ 나그네 속세에서 갈 길 멀어라/ 마음 따라 눈 돌려 사알짝 보면/ 그 발밑 서 있는 곳 바로 내 고향(古園家業日荒凉/ 遊子迷津去路長/ 若向箇中廻眼覰/ 元來脚下是吾鄕”이란 고려 말 선승 충지(冲止, 1226~1292)의 선시가 떠오른다.

유리창의 티끌만 지우면 청정한 하늘이 드러나듯, 내 안에 불성이 있으니 마음의 티끌만 없애 버리고 미소를 지으면, 내 안의 부처가 드러난다. 그러니 내 몸이 곧 부처요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는 이곳이 바로 집이요, 극락이다.

4) 위빠사나와 선을 결합한 수행법

틱낫한 스님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우리 승가는 임제종의 법맥을 잇고 있고, 저는 임제종 41대이며, 제자들은 42대로 선불교 전통과 맞닿아 있다.”고 하였다. 그가 가장 애독하는 경전은 《법화경》이다. 하지만, 그의 수행법은 철저히 빠알리 경전에 입각한 것이다. 그의 수행법은 팔리정전(巴利正典) 중부(中部 Majjhima Nikaya) 부단품(不斷品 Anupada-Vagga)의 한 경전으로 몸에 관한 명상과 수련에 대한 경전인 《신행념경(身行念經, Kayagatasati Sutta)》, 네 가지 거대한 명상에 관한 법문, 즉 몸(身)·느낌(受)·마음(心)·대상(法)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을 다룬 장부(長部 Digha Nikaya), 《대품(大品 Maha-Vagga)》 《대념처경(大念處經, Mahasatipatthana Sutta)》에 바탕을 두고 있다.

‘몸 속의 몸에 대한 명상’인 《신행념경(身行念經 Kayagatasati Sutta)》에서 붓다는 몸의 각 부분과 전신에 담겨 있는 긴장을 푸는 수련 방법을 얘기합니다. 편안하게 몸을 눕히고 엑스레이 촬영기가 지나가듯 전신을 죽 훑어본 다음 신체의 각 부분에 집중하세요. 머리에서 시작하여 발끝에서 마치세요. “숨을 들이쉬면서 내 머리를 생각합니다. 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향해 미소를 보냅니다.”라고 말해 보세요. 계속해서 나머지 몸도 그리 해 보세요. 봄날에 농부가 가을의 풍요로운 수확을 꿈꾸며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종자를 바라보듯, 엑스선이 아니라 마음챙김 수행의 빛으로 몸을 바라보세요. 더도 말고 십오 분만 마음챙김 수행을 하여 그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로 몸을 천천히 바라보세요.

충분히 깨달은 마음으로 몸의 각 부분을 인식하고서 마음챙김 수행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로 몸을 살며시 얼싸안으세요. 그러면 몸의 각 부분은 긴장을 풀고 평안해집니다.

미소야말로 몸을 가장 평안하게 하는 방편입니다. 엄마의 뱃속에서 지은 첫 미소는 완벽하게 평안한 미소였습니다. 얼굴엔 수많은 힘살이 있습니다. 화를 내거나 두려워하면 힘살이 긴장을 합니다. 하지만 들숨을 쉬며 얼굴의 힘살들을 생각하고 날숨을 쉬며 그 힘살들에게 미소를 짓는다면, 얼굴의 힘살들은 긴장을 풀어버릴 것입니다. 들숨과 날숨과 더불어 얼굴이 바뀝니다. 한 번 짓는 미소가 기적을 불러옵니다.

《신행념경》에서 붓다는 몸 안에 있는 자연의 네 원소를 깨달으라고 하였습니다. 자궁 속에서 물, 불, 공기, 흙은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태아가 자궁의 양수 속에서 쉴 때 엄마는 산소와 영양분을 보내 자궁의 균형을 유지합니다. 태어난 후에 네 원소 사이의 균형이 잘 이루어지면 건강하죠. 하지만 이 균형을 잃으면, 우리의 몸은 온기를 잃고 제대로 숨을 쉬는 데도 지장을 받습니다. 때때로 명상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어 숨을 쉬면, 네 원소가 자연스럽게 다시 균형을 되찾습니다. 

붓다는 몸의 위치와 행위도 깨달으라고 하였습니다. 좌선을 할 때,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앉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고요함과 굳셈과 평안함을 이루고 유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앉습니다. 앉건, 걷건, 서건, 눕건, 매 순간 우리는 몸의 위치를 인지할 수 있습니다. 일어나건, 몸을 숙이건, 웃옷을 입건,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인식합니다. 이런 인식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몸과 삶에 대해 마음을 가다듬어 깨닫는 순간, 우리는 ‘진정한 우리 집’에 있는 것입니다.

틱낫한의 입장에서 볼 때 수행이란 현재를 충만히 사는 것이다. 마음챙김(mindfulness)은 온전히 깨어 있으면서 삶의 매 순간을 깊이 있게 사는 것이다. 마음챙김 수행은 밥을 먹든, 걸어가든, 참선을 하든 마음을 집중하여 숨을 쉬면서 깨어 있는 마음으로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과 기쁨을 자각하며 그를 행하는 수행법이다. ‘지금 여기에서’ 현재의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투여하여, 하나하나에 대해 깊이 음미하여 내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타인, 또는 세계와 조화와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한 잔의 물을 마실 때도 우리는 깨어 있는 마음으로 마시거나 다른 생각을 하며 마실 수 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물을 마실 때, 나는 진정한 존재가 된다. 명상은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몸 안에서, 느낌 안에서, 마음 안에서, 그리고 이 세계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깨닫는 것이다.

그의 수행법은 몸과 마음 자체, 또 그 변화와 움직임을 관찰한다는 점에서는 위빠사나 수행과 같지만, 지금 여기에서 자연이든, 사람이든 모든 대상과 철저히 하나가 된다는 점은 선과 같다. 초기경전에 입각했지만 임제종의 생활선풍이 섞여 있는 것이 그의 수행법의 요체다. 예를 들어, 위빠사나가 발을 옮길 때마다 하나하나의 동작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데 반하여, 틱낫한의 걷기 명상은 걸으면서 꽃과 나무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를 가슴에 품으면서 마음에 평안함을 갖는 데 더 초점을 둔다.

일상이 바로 도(道)다. 앉고, 걷고, 먹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앉고, 걷고, 먹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깨달음이란 앉아 있을 때 앉아 있음을, 걸을 때 걷고 있음을, 먹을 때 먹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앉아 있으며 앉아 있음의 즐거움을 알고, 걸을 때 걷는다는 것에 기뻐하고, 먹을 때 먹음의 행복에 환희심을 내는 것이다. 한 잔의 물을 마실 때도 저 구름이 비를 내리고 냇물이 되어 흐르고 어느 나무가 품어 땅에 스미어 있다가 샘으로 솟아 내 몸으로 들어옴을 안다. 저 구름이 없었다면, 냇물이 없고 숲이 없고 땅이 없었다면 저 물이 없음을 인식한다. 그 물이 내 몸으로 들어가 마른 몸을 적시고, 물에 담긴 미네랄과 산소가 온몸의 세포에 얼마나 강한 활력을 줄 것인가 생각하며 기뻐한다. 그리 에너지를 되찾은 몸이 저 땅과 사람을 위하여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더욱 환희심에 잠긴다. 그 순간 물은 내 몸이 된다. 물과 내 몸과 마음은 100퍼센트 하나가 된다. 내가 100퍼센트 나 자신이기 때문에 물 또한 내게 스스로의 모습을 100퍼센트 드러낸다. 따라서 나와 물이 둘 다 진정한 존재가 되고, 물을 마시는 순간 삶이 그곳에 참으로 존재하게 된다.

걷든, 앉든 숨을 쉬면서 명상에 잠기고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경지, 지금 여기 이 순간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숨을 들이쉬면서 내 몸을 바라보며 마음에 평화를 담는다. 숨을 내쉬면서 온몸의 힘살들의 긴장을 풀며 얼굴에 미소를 짓는다. 이 순간 우리는 느낀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됨을, 내가 살아 숨 쉬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경이로운 순간임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걸으면,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이 곧 극락이 된다. 숨을 들이쉬면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 내 조상들과 부모님과 세상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걷고 있음을 실제 현실처럼 자각한다. 자각하는 순간 진리의 비가 우리 잠재의식의 깊은 곳에 있는 선의 씨앗을 흠뻑 적신다. 그리하여 내일 다시 걷거나 숲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거나, 출근을 하여 잠시 창밖으로 하늘을 쳐다보는 순간, 그 씨앗에 싹이 돋아날 것이다. 타인을 사랑하고 배려하고 그와 공존하려는 마음이 꽃처럼 피어날 것이다. 이 순간이 깨닫는 바로 그 순간이며 발을 디디고 있는 그곳이 바로 정토다. 틱낫한에게 명상과 선과 정토는 하나다.


3. 틱낫한이 서양에 영향을 미친 까닭

틱낫한에 대해 비판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서양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으며, 다른 스님들이 소신공양을 하고 처형되거나 수용소에 갇힐 때 홀로 프랑스로 갔다. 그의 사상도 쉽고 명료하지만, 심오함은 조금 떨어지며 그만의 독창적인 점은 부족하다. 책도 내용이 많이 겹친다. 하지만, 그의 불교사상이 서양인에게 가장 많은 공감을 주고, 또 서양인의 일상에 명상과 수행을 가져다주고, 그들이 마음의 평안과 자비를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데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족적이다. 그의 책은 쉽고 평이하게 읽히지만, 마치 잘 쓴 선시처럼 진여에 다가간 자만이 낼 수 있는 내공이 느껴져 곱씹으면 씹을수록 깊이 있는 울림이 있다. 《법화경》이든 《금강경》이든 핵심을 간파하여 이를 쉽게 전달하는 것이 그의 특징이기도 한다.

틱낫한이 서양인에게 깊은 감동을 준 까닭은 개인의 능력과 함께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이 작용하였다. 무명의 승려를 전 세계적인 인물로 만든 것은 스승 틱꽝득(Thích Quảng Đức, 釋廣德, 1897∼1963) 스님의 소신공양이다. 그는 종교의 자유와 후에시에서 학살당한 가족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1963년 6월 11일 사이공의 미국대사관 앞에서 소신공양하였다. 이것이 나중에 퓰리처상을 받은 말콤 브라운의 사진을 통해 서양에 알려졌다. 화염 속에서도 전혀 표정의 일그러짐 없이 결가부좌를 흩트리지 않은 채 조용히 죽음에 이르는 의젓한 모습은 많은 충격을 주었다. 서양인이 이를 자살과 유사한 것으로 생각하자 틱낫한 스님은 마틴 루서 킹 목사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 속에서 틱낫한은 “1963년 베트남 스님들의 소신공양은 서구 기독교의 도덕 관념이 이해하는 것과는 아무래도 좀 다릅니다. 언론들은 그때 자살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 본질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항 행위도 아닙니다. 분신 전에 남긴 유서에서 그 스님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압제자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베트남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틱낫한은 ‘현실참여불교재단’을 설립해 베트남 청년불자들을 모으는 한편 불교의 자비정신을 통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베트남 농촌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틱낫한은 불교평화연맹(Buddhist Peace Fellowship, 美)을 방문해 베트남 평화운동을 국제적인 운동으로 발전시켰고, 이를 계기로 1967년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추천됐다.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는 1967년도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틱낫한을 추천하며 “베트남의 역사는 외세와 타락한 부자들의 착취로 가득하며, 지금도 베트남인은 전쟁과 압제로 인하여 가혹하게 억압받고 헐벗고 굶주리고 있습니다. 틱낫한 스님은 베트남인들에게 이 같은 악몽에서 벗어나 합리적으로 통치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는 전 세계 이곳저곳을 다니며 정치가, 종교지도자, 학자와 작가들을 만나 평화사상을 전파하고 지지를 끌어냈습니다. 그의 평화사상은 모든 종교가 서로 대화하고 세계인이 형제애와 인류애를 가지고 만나는 데 중요한 기념비를 세울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틱낫한은 반전평화운동을 전개하는 지도자로 나서고, 미국의 히피와 68혁명세대가 이에 동참하며, 이들 중 상당수가 불교에 심취하게 된다. 이들에게 명상과 마음챙김 수행과 평화의 메시지는 아주 밝고도 분명한 빛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틱낫한은 서양인에게 불교의 자비와 사랑을 바탕으로 한 반전평화운동의 현자로 부각된다.

또 하나는 대안의 삶의 추구 경향이다. 서양은 근대화와 산업화로 물질문명의 풍요를 이루었으나 소외의 심화, 불안과 고독의 일상화 등 내면의 빈곤을 겪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 소외와 고독, 불안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안을 이루는 삶, 빠르고 충만한 삶에서 느리고 여백이 많은 삶을 지향하게 되었다. 이런 삶을 지향하는 이들 중 상당수가 서양의 명상과 수행에서 부족함을 느끼고, 불교의 명상과 수행에서 답을 찾게 되었다. 이런 붐이 불교, 그중에서도 달라이 라마와 틱낫한을 중심으로 한 명상과 수행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특히, 패럴랙스 출판사는 그런 운동과 삶의 구심점이 된다. 이 출판사는 1986년에 틱낫한 스님의 책을 전담하여 발행하는 출판사로 출발하여 100권에 가까운 틱낫한 스님의 책과 시디, 오디오를 발행하고 있다. 그중 채 열 권에 이르지 않는 책이 틱 스님 이외의 저자인데, 그는 아난, 달라이 라마, 그리고 고은이다. 고은은 《무엇? 108선시집》을 이 출판사에서 발행하였다.

이런 두 가지 맥락이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틱낫한 개인의 역량도 무시하지 못한다. 틱낫한이 서양에 영향을 끼친 제일 요인은 불교 사상과 수행을 현대화, 대중화, 서양화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불교철학을 서양의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개념인 행복, 평화, 사랑, 공존과 결합시켰다. 그는 서양인에게 만물이 무상(impermanence)한 것이니 그를 통해 현실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찰나의 순간에 만족하고 기뻐하라고 권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안의 모든 것과 서로 관련을 맺고 있어 무아(non-self)한 것이니, 모든 것과 공존하는 평화의 길을 걸으라고 가르친다. 모든 것은 고통이고 고통은 집착과 무지에서 오는 것이니, 욕심과 증오와 화에서 벗어나 열반(nirvana)에 이르라고 말한다.

만일 당신이 시인이라면 이 한 장의 종이 안에서 구름이 흐른다는 것을 분명히 볼 것입니다. 구름이 없다면 비는 내릴 수 없고,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나무는 자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면 종이를 얻을 수 없습니다. 종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구름이 필수입니다. 만일 구름이 이곳에 없다면 종이도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름과 종이는 서로 공존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종이 안을 더욱 더 깊이 들여다보면 햇빛을 볼 수 있습니다. 햇빛이 없다면 숲이 성장할 수 없고 아무것도 자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들조차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햇빛 또한 이 한 장의 종이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이와 햇빛은 서로 공존합니다.
 
틱낫한은 종이와 구름의 비유를 통해 연기론에 대해 쉽고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고, 이를 공존과 연결시키고 있다. 연기론에서 상호 관련성에 대해 말하지만, 가장 핵심인 시간에 따른 인과관계나 서로 조건이 되는 상호 의존성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중중무진의 화엄의 연기론과 같은 단계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사상이 쉽고 명료하지만 심오함은 덜하다고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틱낫한의 선택이다. 하나는 실체론에 젖어 있는 서양인에게 관계성의 사유로 전환하여 구체적으로 세계를 이해시키려는 뜻이고, 연기론을 서양의 공존과 평화의 철학과 관련시키면서 새롭게 해석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수행도 마찬가지다. 

그가 포옹하기 명상에 대해 서술한 것을 먼저 들어보자.

저는 가족의 누구에겐가 화가 났을 때, 또 화가 나지 않았을 때도 마찬가지로 품어 안는 명상을 할 것을 권합니다.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우리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금으로부터 삼백 년 동안 존재하리라고 마음으로 생생하게 그려보세요. 그러고 나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일은 팔을 벌리고 그를 껴안는 것입니다. ……숨을 들이쉬면서 나는 지금 이 순간의 삶이 너무도 진귀함을 압니다. 숨을 내쉬면서 삶의 이 순간을 소중히 품습니다. 그를 품어서 안아 주기를 간절히 열망한다고 말하면서 당신 앞의 사람에게 미소를 보냅니다. ……상대방을 따뜻하게 품어 안아서 당신의 몸과 마음이 함께 절대 현존과 삶의 충만함을 창조하는 이 순간, 이것은 의식입니다. ……당신 또한 세 단계의 마음챙김 숨쉬기 수행을 실행해 보세요. 첫 들숨과 날숨을 쉬는 동안에 당신과 사랑하는 사람이 모두 살아 있음을 의식하세요. 둘째 들숨과 날숨을 쉴 때는 당신과 사랑하는 사람 모두 지금으로부터 삼백 년 동안 이곳에 존재하리라고 생각하세요. 셋째 들숨과 날숨을 쉴 때 당신과 그가 모두 살아 있다는 깨달음으로 다시 돌아가세요. 당신의 포옹은 점점 깊어질 것이고, 그래서 당신은 더욱 행복할 것입니다.

위의 수행을 어렵다고 하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쉽고 누구나 일상에서 할 수 있으면서도 반복하는 사이에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포옹하면서 상대방에 숨겨진 불성을 드러내고 나도 그에 감화를 받아 불성을 드러내는 방법이다. 그는 2,600년 만에 처음으로 계율을 현대화한 스님이기도 하다. 2003년 3월 31일 서울에 있는 중앙승가대학교에서 컴퓨터와 자동차, 인터넷 사용에 맞도록 개정된 계율을 발표한 바 있다. 
둘째, 틱낫한은 대승과 상좌불교를 유연하게 넘나들면서 회통(會通)하고 있다. 그는 임제종의 41대로 가장 애독하는 경전은 《법화경》이지만, 《법화경》과 《금강경》 같은 대승경전을 해석할 때 상좌불교식 해석과 대승불교식 해석을 겸한다. 그의 수행법은 팔리정전인 《신행념경(身行念經》 과 《대념처경》에 바탕을 둔 것이지만, 지금 여기에서 마음의 평안과 깨달음에 이르려는 것은 임제종의 생활선과 맥을 닿고 있다.

《틱낫한 스님이 읽어주는 법화경》을 보면, 《법화경》을 역사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기(1장~10장, 12~14장), 궁극의 차원으로 들어가기(《법화경》 11장, 15-19장, 22장), 실천의 문을 열기(20장, 23~28장),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 육바라밀, 보시, 지계, 포용성, 정진, 선정, 지혜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다.

역사적인 차원은 우리를 기원전 5세기경 인도에서 가르침을 펼쳤던 부처와 만나게 해 준다. 우리는 그 역시 인간이었음을 깨닫고, 진리를 향한 그의 열망과 수행, 그가 걸었던 길을 열심히 쫓아가게 된다. 궁극의 차원은 부처의 가르침이 갖는 영원한 의미, 시공간을 초월한 법의 본질을 보여 준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누구나 이 영원한 의미를 발견할 것이므로, 궁극의 차원과 만나기 위해 다른 어딘가를 헤맬 필요는 없다. 부처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우리도 역사적 차원의 일상 속에서 궁극의 삶이 주는 기쁨과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법화경을 공부할 때는 경이 어느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시선을 지상에 고정시키고 있을 때-나무와 풀, 언덕과 산, 혹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을 때-우리가 서 있는 곳은 역사적인 차원, 삶과 죽음의 세계이다. 그러나 허공을 응시할 때는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궁극의 차원 속으로 들어간다.
 
마명(馬鳴)이 생멸문(生滅門)과 진여문(眞如門)으로 나누었듯, 틱낫한은 역사적인 부처와 살아 있는 부처, 역사와 삶 차원의 불교와 궁극의 깨달음으로서 불교를 나눈다. 전자가 상좌불교와 가깝다면 후자는 대승과 가깝다. 그는 “《법화경》의 문을 열어 놀라운 법을 만나려면, 이처럼 역사적인 차원과 궁극의 차원을 모두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마명이 진속불이(眞俗不二)를 설파하였듯, 비록 대승경전이라도 두 가지 차원에서 보아야 불교의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지적하듯, 그래야만이 역사적 부처를 따라 진리를 향한 그의 열망과 수행의 길을 지극하게 추구하게 되며, 궁극의 차원으로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궁극적인 실체로서의 진여실체에 이른다. 

셋째, 틱낫한은 시인이기도 하지만, 능란하고 정확하게 은유(meta-phor)를 사용하여 이해를 쉽게 하면서도 감성에 호소하는 시적인 문장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은유란 한 개념이나 대상을 다른 개념이나 대상과 견주어 양자 사이의 유사성(likeliness)을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를 유추(類推, analogy)하여 한 대상이나 개념을 다른 무엇으로 전이하여 비유하는 것이자, 담론 안에서 작동 시 수용자가 주어진 세계관과 문화 안에서 형성된 개념 체계와 상상력에 따라 원관념과 매체관념 사이의 관계를 유추하여 의미작용을 일으키는 방식이자 행동하는 양식이다. 창조의 장에서 보면 은유는 두 개념이나 대상 사이의 유사성을 유추하는 것이다. 수사의 장에서는 은유는 전이다. 해석의 장에서 보면 이는 원관념과 매체관념 사이의 동일화이다. 소통의 장에서 보면 발신자가 보낸 코드에 대하여 수신자가 유사성의 유추에 의하여 해석한 의미작용을 일으키고 이에 따라 실천하는 양식이다.

철학의 생성의 면에서 보면, 반달에서 색즉시공이나 화엄의 은밀현료구성문을 떠올리듯 사물의 어떤 속성이나 실체를 발견하는 자체가 은유다. 철학의 이해와 수용의 측면에서 보면, 인언견언(因言遣言)의 진리를 달과 손가락의 비유를 통하면 이해가 쉽듯, 추상적인 무엇을 사물로 전이하여 유사성의 유추에 의해 의미작용을 일으켜 의미를 해석하는 매개로 작용하는 것이 은유다. 틱낫한 스님은 불성을 꽃으로, 연기를 구름과 종이의 관계로 비유하듯, 어렵고 추상적인 불교 개념을 일상의 사물의 은유로 대체하여 쉽게, 핵심을 파악하게 하는 한편, 은유의 시적 표현을 통해 논리적 이해와 함께 감성의 설득도 꾀하고 있다. 그의 글이 쉬우면서도 생각할수록 감동과 울림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넷째, 틱낫한은 환유를 즐겨 사용하여 구체성을 갖는 해석과 감동을 유도한다. 

환유란 한 개념이나 대상을 다른 개념이나 대상과 견주어 양자 사이의 인접성(contiguity)을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를 연합적으로 연결하여 한 대상이나 개념을 경험적 기호로 대체하여 비유하는 것이자, 담론 안에서 작동 시 수용자가 주어진 세계관과 문화 안에서 형성된 경험과 기억에 따라 원 대상과 비유 대상 사이의 연합적 연상을 하여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차이를 유추하여 의미작용을 일으키는 방식이자 행동하는 양식이다. 창조의 장에서 보면 환유는 두 개념이나 대상 사이의 인접성을 유추하는 것이다. 수사의 장에서는 환유는 경험적 대체다. 해석의 장에서 보면 이는 원래 대상과 비유 대상 사이의 연합적 연상을 통한 구체적 해석이다. 소통의 장에서 보면 발신자가 보낸 코드에 대하여 수신자가 자신의 맥락에서 인접성의 유추에 의하여 해석한 의미작용을 일으키고 이에 따라 실천하는 양식이다. 간단히 말하여 환유는 칠판−지우개, 학자−먹물, 촌놈−핫바지처럼 인접성에 따른 유추다. 이 때문에 은유가 동일성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는 반면에, 환유는 이를 깨는 구체성과 관련이 된다. 틱낫한은 나무와 꽃, 대지, 차, 쌀 등 아름다운 자연의 대상과 우리 주변의 일상의 사물을 수시로 등장시켜 삶과 일상의 구체성 속에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불교 세계를 느끼도록 한다. 예를 들어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최상품의 바나나, 벌꿀, 달콤한 쌀, 사탕수수”에 비유한다. 이를 한국식으로 바꾸어 “우리 어머니의 사랑은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밥, 붉게 잘 익은 사과, 달콤한 벌꿀, 쫄깃쫄깃한 인절미와 같습니다.”라고 말해 보자. 추상적인 사랑이 구체적인 사물로 전환되고, 그 구체적인 사물과 연관된 유년의 기억과 추억이 떠오르며 어머니의 사랑을 깊으면서도 가깝게, 바로 옆에서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다섯째, 교리와 사상과 수행과 삶이 일치하였다. 

틱낫한은 16세에 출가한 이후 60여 년을 쉼 없이 경전을 읽고 수행을 하고 시를 짓고 글을 썼다. 개인의 고통만이 아니라 사회의 고통, 나만의 평안과 행복이 아니라 타인의 평안과 행복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세계를 순회하며 반전 평화운동을 전개하였고 불교평화대표단 의장으로 파리평화회의를 이끌었다. 그는 지금도 자두마을에서 찾아오는 사람들과 함께 걸으며 명상을 하고 책을 읽고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다. 달라이 라마와 함께 세계 종교계에 핀 두 송이 꽃, 살아 있는 부처라 불리고 노벨상 후보로 추천될 정도로 높은 자리에 이르렀지만, 지금도 몸소 채소밭을 가꾸며 소박하게 살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진 숲에 감동하면서 숨을 쉬고 내쉬면서 모든 것에 감사하고 내 몸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사랑하며 자신이 서 있는 곳을 극락으로 삼아 매 순간 환희심에 충만하여 살아간다. 이처럼 교리와 사상과 수행이 일치하는 삶이 서양인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여섯째, 명상 및 승가 공동체의 설립과 운영이다. 

그는 자두마을을 비롯하여 미국의 단풍림승원, 청산법원, 녹야원 승원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그는 공동체의 눈은 공동체 몸의 응집된 통찰력이자 지혜라고 단정한다. 그곳에서 그는 승려는 물론, 탐방객과 함께 수행을 하고 가르침을 전한다. 그들은 명상과 수행을 하면서 스스로 깨닫는 한편, 그들만의 계율을 지키며 더불어 살면서 공존과 평화의 지혜를 터득한다. 이곳에 며칠만 들른 사람도 깊이 감동을 하고 생활 방식과 세계관을 바꾸게 된다. 더구나 걷기 명상, 포옹하기 명상, 설거지 명상 등 모든 생활 자체가 명상이고 수행이며, 어린이와 가족이 함께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틱낫한 작곡의 노래를 부르며 수행하기에 참가자는 거의 대부분이 매료될 뿐만 아니라 불교와 틱낫한의 사상과 수행법과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일곱째, 그는 온화한 평화주의자로 비폭력 평화운동을 전개한다는 점이다. 

그는 과거의 이력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평화와 행복과 자비를 역설하고 실천한다. 자두마을뿐만 아니라 단풍숲 승원(Maple Forest Monastery) 등에서 이곳에 오는 이들을 따스하게 품어 안아 준 다음 함께 숨을 쉬고 명상을 하고 걷는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서로가 마음밭에 있는 평화와 자비, 공존의 씨앗에 물을 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의 씨앗은 꽃으로 피어나 흐드러진 꽃밭을 이룬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온화하고 평안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그일 것이다. 늘 마음이 평화로운 분이며 다른 이들을 평안하게 하고 미소 짓게 하는 데도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이다. 그의 미소를 대하면, 그의 환한 얼굴을 마주하면, 그의 지혜로운 말씀을 들으면, 그의 너른 가슴에 안기면 방금까지 화를 내고 싸웠던 이들도 엄마 품에 안긴 아가처럼 평안함과 행복함을 느낀다.


4. 한국 불교가 배울 점

한국불교에서도 틱낫한과 비슷한 승려를 찾으라면 단연 도법 스님이 떠오른다. 한국이라는 지역적 특성과 언어의 한계 때문에 세계적인 명성까지는 얻고 있지 못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틱낫한을 능가하는 점도 있다. 온몸을 던져 사회적 실천을 하는 점, 도법 스님이나 불교를 따르는 이들뿐만 아니라 산내면의 주민과 더불어 공존하는 공동체를 추구한다는 점, 지리산의 자연과 절과 사람과 하나가 되는 삶을 추구한다는 점, 절과 대안학교와 한생명, 인드라망공동체와 같은 조직, 귀농학교 등이 한데 어우러진 지역공동체를 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틱낫한보다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주류 불교는 아직 고식과 아집과 아만에 휩싸여 있다.

송의 《석자비탁집(釋子非濁集)》 에 보면 신라 사람 승유(僧兪)가 아함경을 공부하는 이를 보고 나무라자 꿈에 천동자(天童子)들이 나타나서 승유를 때리며 “소승으로서 사다리를 삼아 대승에 이르는 것이 그대 나라 법식이다.”라고 말한다. 《삼국유사》 〈흥법〉 편 ‘원종흥법 염촉멸신(原宗興法 厭髑滅身)’ 조에서도 “대, 소승의 불법이 서울의 인자한 구름이 되어 여러 곳의 보살이 세상에 나타나기도 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원효의 저서에도 대승과 소승의 경전, 대승적 해석과 상좌불교적 해석이 회통하고 있다. 이제 한국불교도 틱낫한 스님이 행한 것처럼, 간화선을 종지로 하되, 상좌불교의 교리, 계율, 위빠사나의 수행법을 과감하게 수용하여 양자를 종합한 것을 21세기 한국불교의 지향점으로 삼아야 한다.

21세기 대중은 경전에는 없는 고통과 욕망에 휘둘리고 있다. 지금 대중은 미디어의 조작에 따른 고통, 정치적 억압과 폭력에 따른 고통, 환경파괴에 따른 고통, 상대적 박탈감에 따른 고통, 공동체의 해체에 따른 고독과 고통, 자본주의 체제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물화(物化)와 소외에 따른 고통, 해마다 수십 억 개체의 인간과 생명이 죽어가는 고통, 디지털 시대에 와서 가상과 시뮬라시옹에 현혹되는 고통 등 중세와 분명히 다른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에게 중세적 고통을 멸하라고 한다면 대중은 고승의 설법일지라도 공허할 수밖에 없다. 이제 스님들은 한국 대중들이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실에 함께 서서 그들이 실제로 겪고 있는 고통이 무엇인가 성찰하고, 더 나아가 이에 공감하면서 그들의 고통이 치유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하려면 달라진 사회와 대중을 알아야 하고, 이를 잘 분석하고 종합한 서양의 인문학과 사회과학도 공부해야 한다. 아울러, 대안은 보수적인 것에서 진보적인 것까지 여러 차원이 있겠지만,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고통이 해소될 수 있는 사회개혁과 가난하고 소외된 중생의 구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승려대회에 대중들이 외면한 가장 큰 이유는 그동안 한국불교가 보살행을 관념으로만 외쳤지 실천행을 별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가한 자를 승려라 할진대 온라인으로는 세속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승려 가운데 육식을 하거나 생명을 해하는 일을 다반사로 하는 이들도 많다. 서양의 스님이나 불교도들에게 한국 불교의 인상을 말하라고 하면 부정적인 인상 가운데 첫째로 등장하는 것이 스님의 육식과 쥐와 같은 동물의 살생이다. 한마디로 진리와 계율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승려가 너무도 많다. 염불보다 잿밥, 곧 돈과 권력에 더 이끌리는 승려도 비일비재하다. 일부지만, 이들로 인하여 대중들은 승가뿐만이 아니라 불교 자체에 대해 회의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큰스님들은 권위를 버리고 누구든 아랫사람을 대하면 미소를 짓고 따스하게 포옹해 주는 삶의 자세와 넉넉함이 필요하다. 종단도 관료화에서 벗어나고 권력에서 독립해야 한다. 계율을 현대에 맞게 수정하되, 계율과 더불어 자유로운 승가공동체를 추구해야 한다.  

경전의 한글화와 대중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지만, 아직 한문투의 문장, 현학적인 개념어와 기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 틱낫한스님이 이룩한 것처럼 경전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문장화하고, 불교사상서들은 좀 더 정확하고 명료한 은유와 환유를 사용하여 쉬우면서도 핵심의 진리에 다가가게 해야 한다. 

21세기 오늘, 대중들 또한 화폐증식, 재현의 위기, 가상성 등 경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욕망을 과잉발산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당위적으로 욕망의 소멸을 말한다면, 경전상의 계율만을 고집한다면, 스님 독단의 모노드라마와 같은 수행법과 의례만을 강요한다면, 종단이 관료들의 성으로 남는다면, 한국 불교는 차츰 소수 종교로 전락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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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양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의상·만해연구원 연학실장, 한국학연구소 소장, 《문학과 경계》 주간 등 역임. 현재 실상사 화엄학림 외래강사,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원 통일법요집편찬 연구위원. 저서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등 다수. 본지 편집위원.

 이도흠 ahurum@hanmail.net

[깨어있음 - 지금 이 순간에 대한 탐구] 브라이언 피어스 We Walk the Path Together

<깨어있음 - 지금 이 순간에 대한 탐구> 
We Walk the Path Together
브라이언 피어스 (지은이),박문성 (옮긴이)
불광출판사2022-01-28 

전자책정가15,400원
종이책 페이지수 464쪽


책소개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영적인 생각과 지혜를 하나로 묶는 데 꾸준한 관심을 보여온 브라이언 피어스 신부의 저서. 저자에게 영감을 준 두 명의 영성 대가는 14세기 독일의 영성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신부와 현대의 틱낫한 스님이다. 저자는 시대적으로 동떨어져 있는, 게다가 아주 다른 종교적 전통에 속해 있는 두 사람을 한 자리에 불러 대화를 시도한다. 그가 주목한 것은 불교의 마음챙김(mindfulness).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마음챙김 수행을 통해 저자는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 하느님 나라는 오직 지금뿐임을 깨닫기에 이른다.

종교간 대화를 통해 더 나은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했다고 한 저자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이 책을 통해 그리스도교 전통에 잠들어 있던 보석 같은 가르침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 불교도들은 마음챙김이라는 익숙한 수행이 불교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타당성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마음챙김 수행이야말로 해탈로 가는 여정의 든든한 동반자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분명한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책 전반에 흐르는 두 종교의 조용하고 평온한 어울림은 자신과 다른 것에 마음을 여는 ‘관대함’ 덕분이다. 두 영성가의 지혜와 깨달음이 담긴 아름다운 언어들은 우리를 단순히 도량 넓은 인간이 아니라 균형 잡힌 인간으로 이끈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그리스도교와 불교도만이 아니라 분열과 다툼, 갈등으로 메말라가는 현대 사회를 구원해줄 깊은 물줄기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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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추천사
한국어판 추천사
감사의 말

머리말

제1장. 관대함
1. 대화의 음악
2. 관대함의 실천
3. 대화의 위험

제2장. 마음챙김과 영원한 현재
1. 지금 이 순간
2. 귀향
3.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있다
4. 봄으로서의 깨어 있음

제3장. 성령의 숨결
1. 숨쉬기를 다시 배우기
2. 하느님 마음에서 흘러넘치는 생명수
3. 다양한 소리, 그러나 하나의 성령
4. 사랑의 마음

제4장. 물과 물결
1. 물에 흠뻑 젖은 근거
2. 바다의 물 한 방울
3. 세례와 살아 있는 물
4. 이름을 부름
5. 의지 또는 은총
6. 성사
7. 물 만지기, 하느님 만지기

제5장. 예수와 하느님
1. 사랑의 순례로서 삼위일체
2. 삼위일체와 상호의존적 존재
3. 위대한 숨

제6장. 그리스도
1. 은총
2. 하느님의 말씀
3. 붓다의 몸, 그리스도의 몸
4. 성체

제7장. 고통
1. 사성제(四聖諦)
2. 이욕(離欲)

제8장. 고통에서 오는 연민
1. 깊이 들여다보기
2. 연민, 위험을 무릅쓴 사랑
3. 사랑의 실천

제9장. 십자가라는 나무
1. 자유로 가는 길
2. 생명의 나무인 십자가
3. 십자가의 형상
4. 그는 고통을 피하지 않았다

제10장. 활짝 피어오른 사랑
1. 그리스도의 몸을 어루만지기
2. 비폭력적 사랑의 십자가
3. 무엇이든, 단지 있다
4. 평정심과 십자가
5. 옆으로 누워 있는 붓다

맺음말 : 여정과 발우

옮긴이의 말
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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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89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현존 안에 사는 것, 하느님의 견고한 사랑에서 안식을 얻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이 참으로 갈구하는 바라고 믿는다. 그런 사랑을 느끼려면 깨어 있는 상태로 주의를 기울이면서 살아야 한다. 태이가 가르치는 마음챙김 수행이 바로 그것이다.

P. 101~102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이것은 지금 이 순간에 자유를 만끽하며 사는 것이다. 즉 지금 여기에서 눈을 부릅뜨고 하느님의 현존과 섭리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다. 태이는 마음의 산란함과 태만이 마음챙김 수행을 방해하는 적이라고 규정한다. 에크하르트는 집착이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을 기다리는 자유를 앗아간다고 경고한다. 지금 여기에 깨어 있으면서 눈을 부릅뜨고 사는 것이 영성적 자유의 문을 여는 열쇠다. 

P. 137
일상에서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실천하려 할 때마다, 우리는 매번 장애물을 만난다. 또 그것을 넘어가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곤 한다. 태이는 매일 마음챙김 수행을 하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음챙김 수행은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과 만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이웃이 지닌 마음과 만날 수 있다. 그것이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P. 154
씨앗과 같은 우리는 ‘충만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존재 그 자체까지 완전히 성장한다. 물방울이나 물결이 “바다가 된다.”라는 에크하르트와 태이의 말이 진실이라면,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리는 그저 소멸하는 것일까? 우리가 하느님에게 녹아들어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런 의문들에 대해, 에크하르트는 지혜를 지닌 스승의 재치와 유쾌함으로 답변한다. 물 한 방물은 바다에 떨어진 다음 “하느님을 찾는다. 자기 자신을 찾는 것과 하느님을 찾는 것은 실제로 하나의 행위이며 같은 행위다.” 

P. 214
그리스도인은 의문을 갖는다. 어떻게 하느님께 돌아간단 말인가? 그러면 태이는 간단하게 대답한다. “마음챙김 수행을 통해서 돌아갑니다.” 그리스도인도 이 가르침을 따를 수 있다. 마음을 다한 영성수련을 통해 삼위일체가 신학서적의 굴레에서 벗어나 일상 안에 실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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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브라이언 피어스 (Brian J. Pierce) (지은이) 

도미니코 수도회 신부.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제도의 도미니코 가족수도회의 성소 담당자, 도미니코 관상수녀회 총장의 지도신부였다. 이후 전임 순회 설교사로 돌아왔다. 가톨릭과 불교, 두 종교의 영적인 생각과 지혜를 하나로 묶는 데 관심을 기울여 왔으며, 2005년 출간한 이 책을 통해 종교간 대화가 서로의 목표와 영적 실천을 더 풍부히 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저서로 『예수와 탕자 : 전적인 자비의 하느님(Jesus and the Prodigal Son: The God of Radical Mercy)』이 있다.
최근작 : <깨어있음> … 총 10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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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성 (옮긴이)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속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1995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한국인이 가진 종교적 심성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 1998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인도철학과에 학부 편입, 2007년 논문 「『깨달음 달의 출현』의 해탈관 연구」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9년부터 2019년까지 가톨릭대학교 동양철학 교수로 재직했다. 
2007년부터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위원회 위원으로서 종교간 대화에 참여해 왔으며, 2019년부터 동 위원회에서 총무를 맡고 있다. 

역서로 『산스크리트어 통사론』이 있다. 약 15년간 번역에 매달린 이 책은, 불교경전 연구에 필수인 산스크리트어 문법서로, 타 종교의 언어를 이해함으로써 서로의 진리를 평화롭게 나눌 수 있다는 평소의 신념이 담겨 있다.

최근작 : … 총 3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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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신은 누구인가? 신은 어디 있는가?
신은 어떻게 고통을 치유하는가?
그리고 구원은 무엇인가?

인류의 오래된 질문, ‘마음챙김’으로 답하다!

“모든 종교의 뿌리에는 하나의 수맥이 흐른다.” 종교간 대화를 통해 이웃 종교의 가르침에 진지하게 접근하면, 그 이웃 종교의 가르침을 통해 내 종교의 가르침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브라이언 피어스 신부는 종교간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풍요로운 결실을 인상적으로 그려낸다.
저자 브라이언 피어스 신부는 틱낫한 스님이 설명하는 마음챙김 수행에 주목하는 한편, 불교의 마음챙김 수행을 연상시키는 ‘깨어있음’이라는 신앙적 실천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특히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가르침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의 목표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종교간 대화라는 관점에서 불교의 마음챙김과 그리스도교의 ‘깨어있음’을 비교하고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의 ‘깨어있음’이 갖는 중요성에 주목할 것과, ‘깨어있음’을 일상의 영성생활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할 것을 주문한다. 이 책은 그것이야말로 우리들 자신의 삶으로 예수를 부활시키는 길이고, 제도권 교회에 갇혀 있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참된 생명력을 불어넣는 길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하느님이 누구이고 어떻게 이 현실에 역사하는지에 대한 답변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제시된다. 영원한 하느님은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만 현존한다. 우리는 마음챙김 혹은 ‘깨어있음’을 실천함으로써 그러한 하느님과 만나게 된다. 그 만남을 통해 우리는 분열된 세계의 일치를 이루어 낼 수 있고, 서로의 경계를 초월한 참된 사랑을 할 수 있으며, 불가항력적인 고통 속에서도 평정을 누릴 수 있다. 우리의 삶을 구원하고 우리의 시대와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열리기 시작한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과 불교도 모두가 읽어야 할 책이다. 저자는 종교간 대화에 참여함으로써 더 나은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했다고 고백한다. 저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 책을 통해 그리스도교 전통에 잠들어 있던 보석 같은 가르침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발견을 통해 더 깊이 있는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불교도들은 이 책을 통해 마음챙김이라는 익숙한 수행이 불교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타당성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음챙김 수행이야말로 해탈로 가는 여정의 든든한 동반자가 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이웃 종교의 가르침을 통해
내 종교의 가르침을 더욱 깊이 이해하려는 대담한 여정

이 책의 저자인 브라이언 피어스 신부(Brian J. Pierce) 신부는 틱낫한 스님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된 불교 전통의 수행인 마음챙김(mindfulness)에 주목한다. 
마음챙김 수행에서 영감을 받은 저자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여러 가르침, 특히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자였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신부의 가르침에 나타나는 <그리스도교적 “깨어있음”>을 재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영성생활의 길을 찾아 나선다.

예수는 악마에게 사로잡힌 딸을 치유해 줄 것을 청하는 이방인 여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종교와 전통이 다른 이방인과 대화하는 것은 당시의 문화적, 종교적 규범에 위배되는 것이었지만, 예수는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고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저자는 마태오복음에 기록된 이 일화를 예수가 몸소 보여준 좋은 대화의 사례로 든다. 그리스도교 전통에 본래 있던 대화의 정신은 한때 희미해지기도 했으나 현대에 들어와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가톨릭교회가 선포한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 우리시대」에 보이는 이웃 종교에 대한 존중의 태도로 부활한다. 그리고 40년 후, 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종교간 대화는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고 강조하기에 이른다. 가톨릭 신부인 저자는 자신이 속한 전통 안에 숨 쉬고 있었던 이러한 대화의 정신을 인식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라는 범주를 넘어 불교의 가르침에 접근해 간다.


마음챙김으로 재발견하는 <그리스도교의 ‘깨어있음’>

틱낫한의 가르침을 통해 저자는 불교의 마음챙김(mindfulness) 수행을 발견한다. 마음챙김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일상의 매 순간을 생기 넘치고 깊이 있게 사는 것이다. 마음챙김을 통해 삶을 성심성의껏 살아가면 참된 삶을 맛볼 수 있다. 이것이 삶에서 일어나는 참된 기적이다.

불교의 마음챙김 수행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깨어있음’이 갖는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을 돕는다. 그리스도교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깨어있음을 설명한다. 
  •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가 구원사업을 완성하기 위해 인간의 본성을 취한 강생(降生)의 신비는 하느님의 말씀이 지금 이 순간 바로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이 깨어있음이다. 
  •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구절, 
  • 그리고 신랑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열명의 신부들의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 또한 이 깨어있음이다. 
  • 현대의 영성가인 토머스 머튼 또한 깨어 있으면서 주시하는 것이 영성생활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에크하르트는 마음챙김 혹은 깨어있음을 ‘민첩한 인식’이라고 부른다. 
에크하르트는 이것을 “모든 일에서 자기 자신과 자기 내적 존재에 대한 민첩한 인식”으로 설명한다. 
  • 그것은 눈을 크게 뜨고 정신을 집중하여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인지하는 것이고, 
  • 그럼으로써 지금 이 순간에 숨겨진 경이로움을 보는 것이다. 
  • 에크하르트는 “오늘을 무엇이라 말할까?”라고 자문하고 “영원”이라고 답한다. 
  •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하느님이 영원이다. 바로 이 순간이 영원한 현재다. 
  •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과 공간은 오로지 지금 여기뿐이다. 
  •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의 ‘민첩한 인식’을 통해 하느님을 만난다.

깨어있음,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필요한 것

잠든 사람은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예수가 죽은 뒤 걱정과 슬픔에 사로잡혀 엠마오 마을로 가던 예수의 두 제자가 그들이 만난 나그네가 예수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삶의 온갖 걱정과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들도 지금 이 순간에 대한 마음챙김 혹은 깨어있음을 실천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챙김 혹은 깨어있음을 통해 지금 이 순간에 있는 하느님을 만날 때 비로소 자유롭게 된다. 루카복음에 나오는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따뜻한 환대를 받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성심성의껏 살아감으로써 참된 자기를 발견할 때 은총을 받게 된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난 두 제자는 자문한다. “우리의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예수의 두 제자의 마음속에 타올랐던 불길, 즉 살아 있는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만남은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항상 타올라야 한다. 

그때 하느님 나라는 먼 곳에, 혹은 먼 미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현존하면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즉 “하느님 나라는 바로 지금이다.”

지금까지 그리스도교는 ‘이런 이런 것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윤리적 계명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 결과 영성생활이 즐겁고 마음 벅찬 삶의 한 형태임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전통의 깨어있음을 실천한다면, 즉 지금 이 순간에 현존하는 하느님을 항상 인식하며 살아간다면 활기찬 영성생활을 되살려낼 수 있다.


마음챙김 혹은 깨어있음의 힘 1 : 분열된 세계가 일치에 이른다.

마음챙김 혹은 깨어있음을 통해 우리는 우리 안에 머무는 하느님과의 합일을 경험하며, 이때 우리에게 성령이 강림한다. 성령은 모든 것을 완전히 살아 있게 하고, 완전히 실재하고 하고,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는 하느님의 힘이다. 성령은 분열된 세계를 하나로 일치시킨다. 성령이 이룩한 조화와 평화 속에서 우리를 서로 갈라놓는 경계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행전 4장 32절)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말한다.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 현존한다는 것을 아는 그 사람만이 평화를 안다.”

성령의 힘이 이루어 낸 일치 속에서 우리는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를 본다. 병에 걸린 채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이고, 고통받는 이의 비참한 모습이 그리스도의 모습이며, 나를 모욕하고 해치려는 이의 분노에 찬 얼굴이 그리스도의 얼굴임을 본다.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체입니다.”(1코린토 12장 27절) 이러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을 때 우리의 마음에는 사랑이 가득하게 된다. 성령의 힘에 의해 하느님과 모든 피조물은 사랑의 마음에서 하나가 된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는 매 순간이 성령에게 개방된 순간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이 일상에서 역사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말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랑은 성령이다.”

마음챙김 혹은 깨어있음의 힘 2 : 고통을 무릅쓴 사랑을 감행한다.

틱낫한은 마음챙김의 한 형태인 ‘깊이 들여다보기’를 실천하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관찰자와 대상 사이의 구분이 사라질 정도로 집중된 상태에서 사물 또는 사람을 들여다보는 것이며, 우리 자신의 정서적 색안경을 벗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깊이 들여다보기’를 행할 때 우리의 눈은 기만과 이기주의와 죄로부터 치유된다. 그리고 비로소 하느님의 눈 부신 빛으로 이웃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눈으로 이웃의 고통을 들여다볼 때 우리의 마음속에서 연민이 싹튼다. 누군가에 대한 연민의 마음 갖고 산다는 것은 그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 고통을 수반할 가능성까지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에 따르는 고통이야말로 연민이 의미하는 모든 것이다.

예수의 삶은 고통을 무릅쓴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예수의 가르침과 활동은 소외되고 가난하며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는 나환자를 끌어안았고, 창녀와 간음한 사람을 용서했으며, 죄인 또는 세리와 함께 식사했다. 예수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며, 그 역시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렇게 행동해야만 한다고 확신했다. 하느님이 사랑하는 방식이 바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종교적, 정치적 권력에 도취된 당시의 지배층은 예수의 행동이 그들의 기득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였고, 결국 그들은 예수를 죽였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하느님의 사랑이 고통을 무릅쓰는 것임을 증명한다. 하느님은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그들의 아픔을 모르는 척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느님은 고통받는 그들에게 다가온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마음챙김 혹은 깨어있음의 힘 3 : 고통 속에서도 평정을 누린다.

에크하르트는 하느님 안에 굳건히 뿌리내린 내린 삶, 즉 지금 이 순간에 살아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고통에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 즉 ‘빈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빈 마음’으로 살아갈 때 결과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기도와 일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내면의 평온과 자유를 얻을 수 있으며, “단지 있는 것”일 뿐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평정심은 고통을 낭만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한순간의 삶만을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다. 에크하르트식으로 말하면 고통은 하느님 안에 있고, 고통이 하느님이다. 따라서 고통은 원수가 아니고, 억제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그저 우리의 일부일 뿐이다.
평정심 수행은 영성생활이란 고통 없는 삶이 아니라 고통 안에서 자유로운 삶을 말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고통을 극복해야만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이분법적 사고는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일 뿐이다. 해방은 다른 곳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실현된다.


<마음챙김에서 찾는 참된 신앙 Q&A>

Q. 불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에는 공통의 영성적 기반이 있는가?”
A. 불교의 마음챙김(mindfulness)은 그리스도교의 ‘깨어있음’과 통한다.

Q. 하느님은 어디에 있는가?”
A. 하느님은 영원하지만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현존한다.

Q. 하느님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A. 지금 이 순간에 대한 마음챙김 혹은 깨어있음을 실천할 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Q.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A. 지금 이 순간에 현존하는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때,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고통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Q. 구원은 언제 오는가?”
A. 구원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지금 이 순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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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깨어있음 [지금 이 순간에 대한 탐구] 

 저자 브라이언 피어스는 도미니코 수도회 신부이다.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제도의 도미니코 가족수도회의 성소 담당자를 역임했고, 전임 순회 설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과 불교, 두 종교의 영적인 생각과 지혜를 하나로 묶는 데 관심을 가지고 『깨어있음』을 2005년 출간했다.

 도미니코회(Ordo Fratrum Praedicatorum) 「성 도미니코 데 구스만」이 프랑스 툴루즈에서 1216년에 교황의 인가를 받아 설립된 수도회이다. 신앙의 진리를 만인에게 설교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수도회이다. 가톨릭의 신부나 수녀는 많이들 보고 알고 있을 것이다. 가톨릭의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교황(Papa)를 중심으로 품계가 나누어져 있다. 주교품 >사제품 >부제품 순으로 품계가 나뉘고, 교황이나 추기경 대주교는 주교품이다. 주교, 신부, 부제는 부제품이다. 중간에 사제품이 위치하는데, 한국에서는 성당의 위상이 크지만, 유럽에서는 수도회의 위상이 큰 곳이 매우 많다. clero secular(재가 수도사, 교구 성직자)로 사람들 속에서 성직자의 역할을 하며, clero regular(청빈, 순종 및 순결의 세 명세를 지키는 수사, 수도회 성직자)로 불교의 절처럼, 수도회 안에서 평생 성직자로 살아간다.

아직 가톨릭에는 여성의 서품이 허용되지 않고 있어서, 교황, 추기경, 수도사제는 남성만이 받는다. 일부 사제 중에서 남녀의 차별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지만, 2000년 동안 남성 위주로 보수적으로 굳어진 가톨릭의 법을 개선하기는 역부족이다. 수도회는 ‘활동수도회’와 ‘봉쇄수도회’로 나뉜다. 평생 수도원 안에만 머무르며 기도와 노동을 하는 곳이 봉쇄수도회이며, 의료, 교육, 복지, 성당 등 세상 속에서 다양한 사도직 활동을 하는 곳이 활동수도회이다. 우리가 성당에서나 길에서 마주치는 수녀 대부분이 이런 활동수도회 소속이다. 여자들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성인 수사의 수가 극히 적은 것도 있고, 수도회 안에서 기도를 하는 수사들이 많아서 잘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깨어있음』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가장 전쟁을 많이 한 종교는 무엇일까? 

기독교이다. 그럼 반대로, 종교라는 이름으로 이교도 탄압, 종교재판, 종교전쟁을 일으키지 않은 유일한 종교로 불교가 있다. 작은 분쟁까지 완전무결하다 할 수 없지만, 기독교나 이슬람처럼 교리상의 이유 등으로 대규모 전쟁을 벌인 예는 없다. 그것은 불교의 근본적인 교리에 있는데, 살생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살생을 금한다는 것은 결국 대승적으로 다른 것들에 대한 존중이 밑바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브라이언 피어스 신부가 하느님께 돌아가는 방법을 틱낫한 스님에게서 찾은 이유일 것이다.

책은 신부의 평생에 걸친 영성의 결과물이며, 오랜 수행과 종교 간 대화를 통하여 더 나은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책의 가장 핵심주제이기도 한 「마음챙김」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마음챙김은 당신이 일상의 각 순간을 철저히 생기 넘치고 깊이 있게 사는 것이다. 마음챙김은 자가 양육과 치유를 위한 생명의 경의를 접하게 한다. 그것은 또한 당신이 고통을 끌어안고서 기쁨과 자유로 탈바꿈하도록 한다.” 「p.63] 마음챙김이란 우리 스스로가 고통을 기쁨과 자유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 외롭다고 느끼는 것,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것 등 모든 것이 환경에 의한 영향일 수 있으나, 최종적으로 그 감정을 수용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400쪽에 넘친 방대한 이야기는 이런 마음챙김을 찾아가는 신부의 여정과 명상을 담고 있다. 넘어지면 엄마가 일으켜 줄 때까지 우는 아이가 있고, 넘어져도 크게 다친 게 아니면 ‘괜찮아’라며 훌훌 털고 일어나는 아이가 있다. 두 아이 모두 넘어진 외부적인 상황은 같지만, 그 상황을 대하고 받아들인 마음은 다른 것이다. 복잡한 언어들이 오가고, 수없이 많은 상황과 디지털 데이터 속에서 나의 마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나는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행복은 나의 발등 앞에 있고, 나는 오늘을 가장 행복하게 산다.’라고 말이다. 책을 통하여 우리가 어떠한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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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촌 2022-01-13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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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합이 주는 깨달음

이 책은 불광출판사에서 나온 브라이언 피어스 <깨어있음> 이라는 책이다. 부제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한 탐구: "틱낫한과 에크하르트, 마음챙김으로 여는 일상의 구원" ->위대한 영성가 에크하르트 신부와 틱낫한 스님에게서 찾은 그리스도인과 불교도가 만나는 한 지점에 대하여, 브라이언 피어스는 도미니코 수도회 신부다. 가톨릭과 불교 두 종교의 영적인 생각과 지혜를 하나로 묶는 데 관심을 기울여 왔다고 전해진다. 그리스도교의 카톨릭 신부가 틱낫한과 에크하르트를 통해 '마음챙김'을 구성한다. 라고 했을 때 솔직히 신기했다. 사실 그리스도교를 그닥 좋아하지 않지만 과연 두 종교가 만나는 지점이 있을까 라는 호기심이 생겼고내 생각과는 다르게 분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종교의 조화로운 관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입부에서도 관대함이 잘 묻어나고 있었는데 번역용어에 대한 부분을 보면 '이웃종교'라는 문장이 있다. '이웃 종교는 타종고 전통 혹은 타종고로 번역될 수 있지만 종교간 대화를 주제로 하는 본서의 취지에 따라 이웃 종교로 번역한다.' (P, 23)라는 입장을 밝힌다.

어쩌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 종교의 민낯을 보면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존재와 가치는 무한한 가능성이 아닐까. 모든 종교가 이런 마인드 라면 미워할 필요가 없을 텐데 그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조금은 그래도 가톨릭에 대한 감정이 누그러지기도 했고, 마음챙김이라는 관점이 정말 다양하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일전에 읽었던 불교적 마음챙김도 있었지만 (A) 이렇게 화합하는 관점도 있는 (B)라는 마음챙김이라는 하나의 범주를 여러 각도에 따라서 배우고 범위를 재확장 시키는 계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많이 부족한 사람임을..이 신부의 관점이 많은 성직자나 신도에게도 제공되면 얼마나 좋을까. 같은 가톨릭 성직자 이면서도 한국과는 정말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긴한다. 요즘 정치 문제로 조계종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종교가 기독교인 어떤 정치 후보자의 망언 때문이다. 이 책을 꼭 읽어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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