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06

「真の国際人」新渡戸稲造 (1)世界が愛した“国連の星” | PHPオンライン 衆知|PHP研究所

「真の国際人」新渡戸稲造 (1)世界が愛した“国連の星”
http://shuchi.php.co.jp/article/1125

 PHPオンライン 衆知|PHP研究
「真の国際人」新渡戸稲造 (1)世界が愛した“国連の星”
2012年09月05日 公開
藤井茂 (新渡戸基金事務局長)
《 『歴史街道』2012年9月号より》
東洋人とりわけ日本人にも、西洋の紳士が足もとにも及ばぬような紳士の中の紳士がいる…。そんな清新で強烈な印象を欧州の人々に与えたのが、国連事務次長時代の新渡戸の活躍であった。

思いがけない国連事務次長就任
 「新渡戸君、6千億円かかった大芝居(第一次世界大戦のこと)だ。一つ見物しに行こうではないか」
 後藤新平(当時、拓殖大学学長)の誘いに乗って新渡戸稲造が一緒に欧米の旅に出たのは大正8年(1919)3月である。それは、第一次世界大戦が終わって間もないころであり、新渡戸が東京女子大学の学長についてまだ1年もたっていない時であった。
 ところが、アメリカをまわりパリに着いたとき、一行にちょっとした事件が起こった。結果的にそれは新渡戸の人生を大きく変えるのだが、この時点ではまだ彼自身は知るよしもなかった。
 そのころパリでは、第一次世界大戦終結の平和条約の調印とともに国際連盟が誕生していた。途中から参戦した日本は棚ぼた式に戦勝国になったので、その事務次長の割り当てがきていた。日本全権の西園寺公望や牧野伸顕らは、パリの大使館でその人選に苦慮していた。「語学が堪能で、見識を備えていて、人格も素晴らしく、欧米人のなかで仕事をしても遜色のない人物」という条件だったから、どう考えても、ざらにいるわけはない。
 ちょうどそんな折、後藤や新渡戸らの一行がパリに現われたのである。
 牧野は新渡戸を見て「ああ、ここに適任者がいた」と小さく叫んだという。
 実際はもう少し込みいっているが、後藤や友人たちの強烈な後押しに断りきれず、ついに新渡戸は事務次長の職につくことになった。
 そのとき、知りあいの女性に寄せた、謙虚ななかにも確かな決意のにじみでた彼の書簡が残っている。
 「まったく思いがけなく、また求めずして…事務次長の一人に任命されました。私の職業の変化について考えますと、私は導きの御手が天にあるということをあらためて感じます。自分に手腕があろうとは思いませんが、私の奉仕する大義こそ実に私の全精力を傾けるに値するものです」
 そのころ日本は中国に21ヵ条の要求を突きつけていたので「日本人は(ドイツ人に似て)好戦的で野蛮な国民ではないのか」という風評がたっていた。事務次長についたばかりの新渡戸は、早くも日本人に対する風当たりの強さを敏感に察知している。
 それに対して彼は「なーに損してもよい、馬鹿を見てもかまわぬ、と覚悟を決めて、何をやるにも日本人らしく立派に振舞いさえすれば、だんだんと了解しますよ」と杉村陽太郎(新渡戸の後任の事務次長)に言い含めている。
 それから数年後のある年のクリスマスでのこと、連盟職員が数百名集まった折、人気投票をしたことがあった。
 「このジュネーブ(つまり国際連盟)で最も人気のある人物の名を順に3人あげよ」
 集計した結果、大変なことが起こった。全員が新渡戸の名(InazoNitobe)をナンバーワンとして書いたのである。2位と3位はばらばらだったのに、新渡戸の1位だけは全員一致していた。人気投票といっても、もちろん人格識見なども入ってのナンバーワンだったと思われる。新渡戸という人の評判は、もうこのくらい国際連盟で確固たるものになっていたのである。

東洋人の評価を高めた輝かしい功積
 新渡戸の国際連盟時代の功績といえば、アインシュタインやキュリー夫人ら数多くの世界的な碩学を委員に知的協力委員会を立ち上げて運営したり、スウェーデンとフィンランドの間のバルト海に浮かぶ 6600の島々の帰属問題(オーランド諸島問題)を平和裏に解決したことが知られていて、確かにそれは否定することのできない事実ではある

しかし、忘れてならないのは、それらを認めつつも、それらをはるかに凌駕していることが1つ厳然と存在する。それは、かつて英文『武士道』に記した「義」「勇」「仁」「礼」「誠」「名誉」「忠義」などの徳目を備えた国民である日本人、そしてその代表ともいえる新渡戸稲造という存在を示したことに尽きるといってもよい。

彼自身はそれを「to do」よりも「to be」と表現している。言い換えれば「知的協力委員会の創設やオーランド諸島問題の解決」よりも「日常の新渡戸自身の所作を示した」ことに他ならない。
 その結果、新渡戸の評判は言うまでもなく、日本人ひいては東洋人の評価が急速に上昇した。それまで東洋人は白人より数段下等の民族と思われていたのだが、新渡戸のような紳士の出現で国際連盟(西洋人中心)の職員は、がらっと評価を変えざるを得なくなった。東洋人とりわけ日本人にも、西洋の紳士たちが足もとにも及ばないような紳士の中の紳士がいるという認識である

함석헌의 생애와 한국 근대사 2

뉴스앤조이



함석헌의 생애와 한국 근대사 2
일본 유학과 감옥의 생활
2012년 02월 27일 (월) 23:56:24김백형 (kbh153)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1923년 함석헌은 동경에 도착합니다. 그의 동경 생활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집 한 칸 구하는 것도 매우 힘들었지만, 일본인들은 한국 사람을 보면 "빠가야로, 더러운 조센징"이라고 욕을 하기 일쑤였습니다.

당시 동경고등사범에는 약 50명 정도의 조선 유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공산주의와 아나키즘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함석헌은 비공산주의계 기독교 학생으로서 급진적인 좌익계 학생 그룹으로부터 질시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그는 함흥농업학교 졸업생 김교신(1901~1945)을 만나게 됩니다.

김교신은 1919년에 동경으로 유학을 와서 1920년 11월부터 1927년 조선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우치무라 간조'가 이끄는 성경 공부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1922년에 이곳 동경고등사범학교 영문과에 입학했습니다. 김교신은 석헌에게 우치무라의 성경 공부 모임과 일본 무교회 운동 모임을 소개했습니다.

뒤이어 석헌은 우치무라를 직접 만나게 됩니다.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 기독교 사상가이자 비평가였습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서구에 대해 개방 정책을 취하고 근대화 운동을 추진할 당시에 그는 이미 일본에서는 유명한 성서 해석자였습니다. 젊은 날의 우치무라는 언론인으로 일하며 기독교 평화주의의 입장에서 러일전쟁을 비판하고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우치무라의 그 추종자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교회주의자들'이라고 불렸는데, 우치무라는 스스로는 무교회 원칙에 입각한 기독교도라고 자신의 모임을 칭하였습니다. 우치무라의 무교회 운동은 표면적 형식주의와 교회만의 경건함을 부인했고, 예수의 십자가를 통한 대속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 운동은 교회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제도적인 기성 교회에 속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적인 고정 관념을 부인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치무라는 교회가 건물이나 제도는 아니라고 아님을 주장하며, 어떤 특정 교단이나 교회에 속하기를 거부하면서 성서의 믿음대로 헌신하는 삶을 살기를 열망했습니다.

함석헌은 이러한 우치무라와 무교회 운동 사상에 깊이 감화를 받았습니다. 석헌은 우치무라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았고, 우치무라와 그의 퀘이커 친구인 '니토베 이나조'와 더불어 일본에 있는 '퀘이커 모임'에도 출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퀘이커 모임에서 석헌은 별로 뚜렷한 인상을 받은 것이 없었습니다.

함석헌은 우치무라에게서 얻은 가르침을 두고 나중에 "나는 이따금은 우리가 일본에 36년간 종살이를 했더라도 적어도 내게는 우치무라 하나만을 가지고 바꾸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김교신은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동경 유학 시절 우치무라가 이끌었던 것과 같은 성경 공부 모임, 무교회 운동 모임을 서울에 만들었습니다. 함석헌 역시도 무교회 기독교인으로서 이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김교신은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1927년 7월에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김교신은 <성서조선>을 자신의 몸처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잡지의 이름에서처럼 <성서조선>은 성서와 조선, 즉 하나님의 말씀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고자 한 잡지였습니다. 그러나 일본경찰로부터 <성서조선>은 검열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성서조선>에 실린 함석헌의 글들을 삭제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제는 조선인들의 황국신민 만들기 프로젝트의 하나로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는데, 그 구성원 대부분은 동양 최고의 대학이라던 도쿄제국대학 출신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사편수회를 위해 당시 일본 학계의 최고 두뇌들을 총동원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1916년 1월 중추원 산하 '조선반도사 편찬위원회'를 발족합니다. 그리고 1925년 6월에는 그 이름을 조선사편수회로 바꾸기에 이릅니다.

조선사편수회에서는 총 35권, 전체 2만 40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조선사를 16년에 걸쳐 제작하였습니다. 제작 비용으로는 100만 엔이라는 거액을 들였습니다. 이 일은 일제에 있어서 조선 정신 죽이기를 시도한 최대의 국가사업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제의 계략 아래 함석헌은 조선의 역사를 다시금 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저술하게 됩니다. 석헌은 한국 역사 속에 나타난 절대자의 섭리를 찾으려 했고, 그 섭리를 통해서 조선인이 결코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고난의 아들 예수와 같이 세계사의 모든 짐을 지고 가는 수난의 여왕으로 보려 했습니다.

함석헌이 저술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는 한국 역사를 일제의 무력사에 대항해 정신사를 중심으로 재해석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국 역사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던 씨알들에게 낙관적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를 보는 지혜와 눈을 뜨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조선인이라는 존재가 경멸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있던 시대에 함석헌은 이 책을 통해 조선인의 가능성과 자부심을 보여 줌으로써 한반도의 미래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웅변적이고 서사적으로 제시해 주었습니다.

일제는 1938년부터 모든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요구하기 직하여 일왕을 살아 있는 신으로 받드는 '신도주의'를 조선의 기독교인들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해 일제는 한반도의 모든 학교와 교육기관에서 조선어 사용과 조선사 교육을 금지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결국 함석헌은 오산학교의 교사 자리를 사임해야 했습니다.

오산학교에서 사임한 함석헌은 한동안 오산학교 인근의 과수원을 운영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이어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940년 3월 함석헌의 후배인 김두혁은 자기가 경영하던 평양 근교 송산 농사학원의 경영 및 관리를 함석헌에게 부탁합니다. 석헌은 이를 받아들여 교육, 경영, 관리, 농사일 등 모든 일을 도맡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함석헌은 학생들에게 성경, 역사, 조선어를 가르쳤고 오후에는 모두 밖에 나가 농사를 짓도록 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함석헌은 세 가지 분야에 특히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교육, 기독교 신앙, 농사일'

그런데 1940년 8월 김두혁이 공산주의 활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동경에서 경찰에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때문에 함석헌이 일하던 농사학원 역시도 일본 경찰로서는 공산주의 성격의 학교로 인식되었습니다. 게다가 함석헌은 1940년 2월부터 일제의 의해 시행된 '창씨개명'에도 협조를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결국, 함석헌은 1940년 8월 공산주의 및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녔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감옥에 있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함석헌을 대신해 김교신, 송두용 두 친구가 상주가 되어 장례를 치러 주었습니다.

결국, 1년의 옥고를 치르고 함석헌은 석방됩니다. 그러나 그 후 1942년 3월 <성서조선>은 158호를 마지막으로 폐간을 당합니다. 그리고 두 달여 후 함석헌과 김교신 등은 성서조선의 발행 관계인으로 다시금 체포되어 구금을 당하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장기려, 유달영 등을 포함한 <성서조선>의 독자들 역시도 붙잡혀 구속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함석헌은 감옥 내에서 많은 독서를 하면서 지식의 폭을 넓혀 갔습니다. 특히 '러스킨'과 '톨스토이'의 책들을 읽고 감동을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감옥 안에서 반야경, 법화경, 무량수경, 금강경 등 다양한 불경들을 읽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교도관에게 읽을 만한 책을 달라고 하니 그 교도관이 불교도였던 터라 불교 서적 등을 건네주어 불교 서적을 접할 수가 있었습니다.

함석헌은 감방 대학의 폭넓은 독서를 통해 기독교와 불교, 도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그 근본에서 하나라는 나름의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1년의 감옥 생활에서 석방된 이후에도 '노자'와 '장자'를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점차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갖고 있던 무교회 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함석헌은 이후 1940년대 초반에 와서 자신의 생각과 '우치무라 간조'의 기독교에 대한 생각이 크게 3가지 면에서 다르다는 사실을 자각하였습니다.

△ 첫째 그는 무교회 모임 회원들이 세속인과 일반 정치 문화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함석헌이 보기에 무교회 운동에서 회원들은 서로 수평적이고 동등한 인간관계를 결여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현실 세계나 세속의 사람들과의 관계도 소홀했습니다.

△ 둘째, 함석헌의 예수관과 속죄론에 관한 이해가 '우치무라 간조'의 시각과 달랐습니다.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하나님과 죄에 빠진 인류 사이에서 중개자가 된다는 것이 우치무라의 속죄론이었습니다. 반면 함석헌은 자유인으로서 사람들이 각자의 죄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즉 속죄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빌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예수의 인격적 일치 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함석헌은 신앙의 대상으로 주님을 그저 믿기만 하고 이름을 부르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힘으로 내적인 신앙심을 길러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즉 그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어떤 종교적 규칙이나 특정 종교 지도자의 생각을 그저 따라가거나 의지하지 않고 사람마다 스스로 예수와 독창적인 관계를 맺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 셋째, 함석헌은 식민지 백성이 된 조선 민족과 식민 점령 세력으로서 일본인이 처한 역사적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우치무라는 일본인으로서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화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동경 대지진 직후 약 6000여 명의 조선인이 일본인들에 의해 학살되었음에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침묵을 지켰습니다.

결국, 함석헌은 자신의 종교관이 무교회 운동과 같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기독교 중심주의 종교관이나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라는 시각에 회의를 품기 시작합니다.

당시 함석헌이 인류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 있는 고전 철학은 노장사상이었습니다. 특히 석헌은 노장사상의 연약함, 겸손함, 부드러움, 정념의 순화 같은 가치를 높이 평가하며 노장사상의 유연함과 초월성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노장사상의 영향인지 함석헌은 종교 혹은 사상의 지나치게 기교적인 체계화 그리고 첨예하게 조직화한 힘이나 제도화된 인위적 권위를 거부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조직화한 힘이나 첨예화된 권력은 언제나 잠재적인 폭력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는 종교적 이해관계에 얽힌 당파심이 없었고 인류의 모든 주요 종교를 평등하고 포괄적으로 포용하고 이해하려 힘썼습니다.

그는 다양한 종교의 진리를 통해서 전체 진리의 세계를 파악하려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 석헌에게 노장사상, 그리고 종교적 관용성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노장사상의 본질은 현실 초월적인 경향과 정치권력의 간섭에서 각 개인의 자유스러운 삶을 추구하는 데 있었습니다.

1945년까지 함석헌은 일제에 의해 네 번에 걸쳐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김백형의 다른기사 보기  
ⓒ 뉴스앤조이(http://www.newsnjoy.or.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퀘이커(Quaker) 교도가 생각한 무사도 - 사무라이 (니토베 이나조) II : 네이버 블로그

퀘이커(Quaker) 교도가 생각한 무사도 - 사무라이 (니토베 이나조) II : 네이버 블로그



퀘이커(Quaker) 교도가 생각한 무사도 ­ 사무라이 (니토베 이나조) II 니토베 이나조 / 좋은 책

감상

---

저자인 니토베 이나조는 일본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갔을 당시 퀘이커 교도가 되었고 그의 아내가 된 미

국인 여성도 역시 퀘이커 교도였다. 퀘이커는 17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개신교의 한 분파로서 본적

지 영국에서는 큰 세력을 이루지 못했고 당시 신대륙이었던 미국의 펜실베니아주에 집단 이주함으로서

만개한다. 본래 부패하고 타락한 영국 공교회에 반대하며 성립된 교단인 만큼 신앙의 순수성을 강조했

고, 하나님의 신성을 직접 체험하여 내면의 빛(Inner Light)을 느끼는 것을 중요시하는 약간 신비주의적

전통도 가졌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퀘이커 교도로는 미국의 닉슨 전 대통령과 우리나라의 고 함석헌 선

생이 있다.





신앙의 순수성과 연결되어 평화주의와 양심적 병역거부까지 외치는 퀘이커 교도로서 니토베가 칼 부림

이 난무하는 무사들의 전쟁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는 건 흥미로운 부분이다.

평화를 최상의 교리로 삼는 퀘이커 교도는 공격적인 싸움이든 방어적인 싸움이든 모든 싸움은 야

만적이고 정당치 못하다고 생각하지만, 독일의 사상가 레싱(Lessing)의 말처럼 "결점이 아무리 커

도 그 결점 속에서 덕(德)이 생겨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평화가 아닌 싸움 속에서도 어떤 덕을 찾는 다는 저자의 말이다. 전쟁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덕은 과

연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해 그는 19세기 영국의 사회사상가였던 존 러스킨의 말을 인용한다.

러스킨은 매우 온후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분투의 생애와 숭배자의 열정

으로, 전쟁의 가치를 확신했다. 그는 자신이 저서 "야생 올리브의 왕관(The Crown of Wild

Olive)"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쟁은 모든 기술의 기초라고 말한 것은 전쟁이 인간의 모든 고

귀한 덕과 심적 능력의 기초가 된 다는 뜻도 포함된 것이다. 이러한 점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그야

말로 기이한 감정을 품고 전쟁을 두렵게 생각하기도 했으나 이는 매우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라고

여겼다. ......요컨대 나는 모든 위대한 국가는 진실된 말씀과 평화를 통하여 소모된다는 것을, 즉 국

가는 전쟁 속에서 생겨나고 전쟁 속에서 숨을 거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총탄과 피가 난무하는 전장에서 인간의 가장 고귀한 덕이 발현되며 그걸 통해 모든 기술의 기초가 개발

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평화를 통해서 소모되고 전쟁 속에서 태어난다고 말한다. 이렇게 니

토베는 서양의 저명한 사상가의 이론을 예로 들며 일본의 무사도가 새로운 국가를 창조하는 힘이 된다

는 주장을 한다.



전쟁터에서 발현되는 공동체를 위한 극한의 용기와 희생정신이 대중의 덕성에 보탬이 되는 건 사실이지

만, 그건 정의로운 전쟁을 치를 때의 얘기이다. 그래서 일본 군국주의자의 위험한 향내가 풍긴다는 생각

을 지울 수가 없다.

---


1. 나는 어떻게 퀘이커가 됐나

1. 나는 어떻게 퀘이커가 됐나



함석헌 선생의 생애

정리 : 김정연(adorno27@hanmail.net) 
"그의 하는 바를 보고, 그의 의도를 살피고, 그의 습관을 관찰한다면 사람이 어찌 자기를 숨길 수 있겠는가? 사람이 어찌 자기를 숨길 수 있겠는가?" - 논어(論語) 위정(爲政) 편에서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龍川)서 2남 4녀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의 함석헌은 겁 많고 부끄럼을 타는 내성적인 아이였다고 전해진다. 1916년 함석헌은 기독교계 덕일 소학교를 거쳐 양시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관립 평양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재학 중 육촌형인 함석은의 영향으로 3.1일 운동(1919)에 참가한다. 3.1일 운동은 젊은 함석헌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데, 종교인으로서의 사회 참여 의식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함석헌은 함석은의 지도하에 3.1운동에 직접 관여하게 되는데 손수 태극기를 찍어내고 독립선언서의 사본을 만들어 동포들에게 나누어 주며 시위를 독려하였다. 만일 3.1일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저 "의사가 됐던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무슨 공부를 하여 일본 사람 밑에 있어 그 심부름을 하는 한편 나보다 못한 동포를 짜먹는 구차한 지식 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이후 2년간 학업을 중단 사촌형인 함석규의 권유로 한국 민족주의 운동의 지성소로 알려진 오산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1921)한다. 오산학교에서 함석헌은 그의 장래에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남강 이승훈과 다석 유영모를 만나게 된다. 함석헌은 남강에게서 한국 독립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고, 다석에게서는 노장공맹(老莊孔孟)을 비롯한 다양한 고전철학을 배우게 된다. 이후 회고하기를 "다석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1923년 오산(五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일본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에 재학 중 오산학교 동창생인 김교신의 권유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를 알게 되어 무교회 주의에 영향을 받는데 성서의 진리를 무조건적이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탐구하려는 우치무라의 노력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함석헌은 우치무라에게 세례를 받는 동시에 그의 퀘이커 친구인 니토베 이나조(新戶部稻造)와 함께 퀘이커 모임에도 출석하게 된다. 이때 문하생 6명이 '조선성서연구회'를 결성 (김교신,함석헌,송두용,정상훈,양인성,류석동) 성서를 공부하며 종교적 신앙과 민족애를 접합시키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참 신앙인은 한 쪽을 버리는 대신 그 둘을 함께, 그리고 동시에 끌어안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1928년 동경사범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모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 역사와 지리학을 가르쳤다. 이듬해에 귀국한 오랜 친구인 김교신과 함께 《성서조선》(聖書朝鮮)을 편집하고 글을 실었으며 오산에서 시작한 무교회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함석헌은 특히 1933년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이 잡지에 장문의 글을 연재하는데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글을 통하여 함석헌은 식민사관의 왜곡된 논리에서 벗어나 조선사의 진정한 모습에 다가서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면서 발견한 것은 영광된 민족사가 아니라 굴욕과 시련으로 점철된 참담한 역사였다. 이 발견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함석헌 자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관이 일제의 식민사관이 주장하는 대로 패배주의나 숙명론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함석헌은 조선의 역사가 '고난의 여왕' 또는 '세계사의 하수구'라는 다만 굴욕의 처소일 뿐 아니라 세계의 불의를 정화시킬 희망의 거처라고 본 것이다. 예수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 고난을 당하였기에 비로소 인류의 해방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 뜻에서 성경 속의 예수가 '고난의 아들'로서 인류해방자의 몫을 떠맡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그것을 짐으로써 우리 자신을 건지고 또 억압에 신음하는 모든 약자와 씨알을 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의 역사 해석은 핍박과 억압, 어둠과 그늘 속에서 묵묵히 역사를 만들어온 약자와 패배자들의 삶에 정당한 가치와 의미를 되돌려 주는 작업이었다.

1937년 만주를 침략한 일제는 이후 '충성스런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황국서사' 암송이나 신사참배 또는 징용이나 징병, 위안부 등 일본 제국주의에 팽창을 위한 조선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위기는 함석헌을 비켜가지 않았는데 학생들에게 조선어와 조선역사 대신 일본어로 된 일본 역사를 가르쳐야할 처지에 놓인다. 1938년 봄, 함석헌은 교사자리를 사임 영원히 오산학교 교정을 떠난다.

1940년 평양 근교의 송산 농사학원(松山農士學院)을 인수, 원장에 취임 학생들에게 성경, 역사, 조선어를 가르치고 오후에는 모두 농사를 지었으나, 곧 계우회 사건(1940.8)으로 1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다시 《성서조선》(聖書朝鮮) 사건(1942.5)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미결수로 1년간 복역하였다. 2년 동안의 감방 생활을 견디며 함석헌은 러스킨의 예술관과 공리적인 사회 경제관에 깊은 공감을 느꼈으며, 톨스토이의 저서를 읽고 그의 인도주의적 신앙과 거기에서 바탕을 둔 무정부주의적 사상에 감동을 받았다. 또한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 무량수경(無量壽經), 금강경(金剛經) 등 다양한 불경을 섭렵하였다. 그는 감옥을 '인생의 대학'으로 여겼다.

이후 8.15광복 때까지 함석헌은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그 기간동안 함석헌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독서에 열중하였다. 그는 노장(老莊)을 읽는 동안 종교(특히 무교회 운동)의 역할과 불의한 정치권력(특히 일본 제국주의)과의 관계를 천착하기 시작하였는데, 점차 자기 중심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던 무교회 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안목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치무라의 사상적 그늘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우치무라의 관점과 세 가지 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자각하였는데 우선 그는 무교회 모임의 회원들이 '세속인'과 일반 정치 문제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에게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웃의 친구가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교회 운동은 회원들 간에 서로 수평적이고 동등한 인간관계를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나 이웃과의 관계도 소홀했다. 두 번째로, 함석헌의 예수관과 속죄론에 대한 이해가 우치무라의 시각과는 달랐다. 속죄란,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하느님과 죄에 빠진 인류 사이에서 중개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치무라 또한 이러한 대속관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러한 대속관에 동의하지 않았고, 자유인으로서 사람들이 각자의 죄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함석헌에게 예수의 속죄는 주체적 개인과 하느님 사이의 하나됨이었고, 이 하나됨은 각자가 예수의 일치됨을 체험할 때 일어나는 것이었다. 세 번째로, 함석헌은 식민지 민중이 된 조선 민족과 식민 지배 세력으로서 일본인이 처한 역사적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우치무라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화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관동 대지진 때 일어난 조선인 학살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였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함석헌은 그 자신의 종교, 조선인의 종교, 조선인을 위한 종교를 발견하고자 힘을 기울였다.

함석헌은 일제에 의해 모두 네 번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 시기의 삶에 대해 그는 "나의 유일한 범죄는 내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식민지 백성의 근본적인 곤경을 이처럼 절실하게 표현한 말도 흔치 않을 것이다.

광복(1945. 8)이 되자, 평북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이 되었으나 같은 해 11월에 발생한 신의주학생의거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 비록 학생 봉기의 직접적인 주동자나 배후 조종자는 아니었지만, 공산당원이 아닌데다 기독교인이었던 그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불편한 존재로 여겨졌음은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1947년 단신으로 월남, 1948년에는 각 학교·단체에서 성경강론을 하였다. 이 종교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남한의 총체적 부패와 혼란에 실망한 한편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냉담한 보수적 교회에 대해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대부분을 이루었다. 강의를 통해 함석헌은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고, 이러한 생각을 글로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열린 마음으로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도 받아들였다. 함석헌이 말하는 종교는 제도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삶으로 체현되는 종교였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레 조직과 외양을 불리고 가꾸는 데 치중하는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갔다. 이때의 공개강의를 통해 안병무, 김용준, 김동길 등의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성경 공부 모임은 한국전쟁(1950-1953)중에도 계속 되었다.

1953년 《사상계(思想界)》가 창간된 이후 함석헌은 주로 《사상계》를 통하여 한국 교회와 사회 비판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예컨데 그는 "종교로써 구원을 얻는 것은 신자가 아니요 그 전체요, 종교로써 망하는 것도 교회가 아니요. 그 전체다." 라며 한국교회와 이승만 정권의 어리석음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질책했다. 사회가 처한 어려움이나 문제점에는 냉담하고 교회의 일과 이익에만 관심을 쏟는 '복음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한국 교회에 대해 그가 강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마침내 1956년 7월 4일 함석헌은 시 <대선언>을 통하여 한국 교회에 대해 기꺼이 이단자가 될 것을 선언했다.

"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 끝이 있으리요. ....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더 위대하다. ...."

이후 기형화되고 교조적으로 변질된 교회에 대한 비판은 1953년 풍자적인 비평의 글 〈한국 기독교에 할말이 있다〉라는 글로 신부 윤형중(尹亨重)과 신랄한 지상논쟁을 펴기도 해 큰 화제를 일으켰다. 함석헌은 이 글을 통해 한국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기독교가 '마술적'인 면에서 벗어나 사회의 도덕과 정의를 위해서 앞장서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기독교인들에게도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인이 될 것을 권고했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여 투옥되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라고 말하는 글을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함석헌은 57세의 나이로 해방된 나라의 감방에 다시 투옥되어 고문을 견뎌야 했다.

함석헌은 현실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으면서 한편으로 종교적 사유를 정련하는 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함석헌에게는 이제 기독교만이 유일한 참 신앙이 아니요, 성경만이 진리를 대표하는 유일한 경전이 아니었다. 이러한 변모는 1961년에 제목부터 개정한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머리말에서 함석헌은 이렇게 밝혔다.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이 변할 리가 없지만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결국 따지고 들어가면 하나요, 역사 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 모든 교파적인 것, 독단적인 것을 없애 버리고 책 이름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고쳤다."

1960년 이후 함석헌은 퀘이커교 모임에 참석하여 종교활동을 하였다. 기존의 교회 조직이나 제도에 회의적이던 그가 300년이 넘는 또 다른 종교 조직인 퀘이커교의 신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우선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관심이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 세상의 평화와 사회 정의를 이루는 일에 모아지고 있는 데 공감하였으며, 절대계의 진리와 상대계의 진리를 함께 추구하려는 퀘이커들의 열정에 동의하였다. 성속의 구별이 없이 "모든 삶은 신성하다"는 신앙관과 '속 생명'(Inward Life)과 '속의 빛'(Inner Light)이라는 개념도 함석헌이 주장하는 '속알 밝힘'(낱낱의 개인이 인격을 이루고 혼을 기른다.)이라는 말과도 동의를 이룬다. 특히 함석헌은 퀘이커 예배 형식인 침묵과 불교의 참선을, 그리고 노자가 강조한 명상을 모두 본질에서 비슷한 종교적 행위로 보았다. '궁극적으로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종교적 보편주의는 함석헌에게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1961년 5·16쿠데타 직후 7월 《사상계》에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기고 집권군부세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사실 1960년 이전부터 함석헌은 한국 사회 현실에 대해 줄기차게 발언해 왔고 그 때문에 권력의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그런 의미로의 행동가로 나선 것은 1961년 5.16쿠데타 이후였다. 1962∼1963년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각지를 시찰(이때 10개월동안 펜들힐에서 수학하였다.)하고 돌아온 후, 귀국하여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절박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일은 드디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 나는 이제 결심했습니다. 극한 투쟁을 하기로, 비폭력의 국민 운동을 일으켜 민정을 수립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짐에 따라 5.16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의 부당함을 정면에서 지적하는 대중 강연회를 잇달아 열었다. 동시에 함석헌은 신문과 잡지등에 부지런히 글을 썼는데 대표적으로 《사상계》 1963년 8월호에 기고한 <3천만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등이 있다. 이후 언론수호대책위원회·3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민주수호국민협의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70년 《씨알의 소리》를 발간하여 한국의 민주화와 언론의 자유를 증진하는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이후 《씨알의 소리》는 정권의 탄압으로 폐간과 복간을 되풀이 한다.) 윤보선, 김대중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에 동참하여 공동의장으로 활동하며, 시국 선언을 발표하여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는데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비폭력 저항, 둘째 시민 불복종 운동, 셋째 민주 세력간의 총 단결을 역설하였다. 뒤이어 1976년의 3. 1사건을 통해 유신 헌법 철폐, 박정희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 불구속 기소되고, 1979년의 YM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등 많은 탄압을 받았다. 1970년대 함석헌의 행동이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정치적 투쟁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도 함석헌의 눈과 귀는 열려 있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과 1977년 8월 '방림방직 대책위' 창립, 같은 해 10월 재야 인사들과 함께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한 협의회'를 만들며 사회적 약자를 위해 투쟁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즉사함으로써 유신체제는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다. 동시에 그것은 더욱 포악한 군사 독재의 시작이었다. 게엄령의 해제를 요구하고 대통령 간접선거를 반대하는 평화시위에 참여한 함석헌 등 120여 명을 투옥하여 고문을 가한 보안사의 우두머리가 바로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이어 12.12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하고 권력을 찬탈한다. 1980년 7월 집행유예로 풀려난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가 강제폐간 되어 문필생활을 중단하였으며, 잔인 무도한 전두환 정권에 맞서는 민주화 세력도 1970년대의 민주화 인사들보다 젊고 더욱 조직적인 세대가 사회의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급진적인 주장들이 힘을 얻어 감에 함석헌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힘을 잃어 가는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함석헌은 다시 한번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예언자'의 처지가 된 셈이었다. 1984년에는 민주통일국민회의 고문을 지냈고, 1988년에는 서울평화올림픽의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노태우 정권에 협조하는 행위'로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의인은 그 시대에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속담은 사실일 것이다. 그의 이 마지막 봉사 후 넉 달 뒤인 1989년 2월 4일 함석헌은 그의 고난에 찼던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영원한 외사랑이었던 나라와 민족의 고난은 오늘도 계속 되고 있다. 일평생을 '폭력에 대한 거부', '권위에 대한 저항', '그칠 줄 모르는 진리의 탐구' 등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교조적 종교의 개혁·항일·반독재에 앞장섰다. 저서로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 《수평선 너머》 등 함석헌 전집 20권 등이 있다.



후기

시경(時經) 소아(小雅)편에 '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 길은 따라간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비록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선생님에 대한 동경은 항상 마음 한 편에 있어 왔기에 이 숙제를 못이기는 척 맡았습니다만 결과는 부끄럽기만 합니다. 함선생님의 생애를 짧게 요약 정리한다는 것은 저에겐 분에 넘치는 일이었습니다. 애초에 능력이 안 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긴 분들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간단한 글이라기에 어설프게 끝을 냈습니다. 제가 한 일이라곤 그저 여러분들의 글들을 인용하고 덧붙이는 정도의 수고로움이었습니다. 부실하다 탓하지 마시고 읽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글은 함석헌 이라는 인물의 객관적인 기록이 아닌 제 사적인 감상입니다. 많은 부분 김성수 박사의 "함석헌 평전"과  "www.ssialsori.net"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 한국문화교류센터 ▒

▒ 한국문화교류센터 ▒



그런데 일본의 팽창주의 정책은 단순히 일본의 정치적 책략이나 미국의 정치적 지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큰공을 들여 추진되어 온 문화적 전략의 산물이기도 하다. 문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자 생각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문화적 변화는 곧 삶의 변화이자 사람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일본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문화적 전략이야말로 우리가 일본의 팽창주의에 맞서기 위해 주목해야 할 중요한 대상이다. 

다시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조선이 을사늑약을 강요받고 있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테어도르 루즈벨트는 일본에 관한 한 권의 책을 읽고 일본을 사랑하게 되었다.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가 1899년에 영어로 쓴 ‘무사도’라는 책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홋카이도대학 출신의 농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학을 세운 인물이고, 일본에서는 드문 기독교도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천황신도를 합리화한 제국주의자였다. 그가 쓴 ‘무사도’는 서구 사회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이로써 일본은 서구 사회에서 신비롭고 우아한 나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50년대 초에 라이샤워는 ‘일본의 근대화’라는 논문을 써서 일본을 동양에서 가장 훌륭한 국가로 설명했다. 이런 논문의 바탕에도 역시 니토베 이나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일본의 ‘무사도’는 서구 대중문화에서 서구의 ‘기사도’에 필적하는 동양의 문화유산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로버트 드니로가 주연한 ‘로닌’이라는 제목의 영화에서 ‘로닌’이란 사실 ‘낭인’의 일본 발음이다. 대륙침략의 첨병이자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인 승냥이 무리들이 서구에서는 ‘고독한 영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역사 속의 인물] 거짓의 무사도, 니토베 이나조 - 매일신문

[역사 속의 인물] 거짓의 무사도, 니토베 이나조 - 매일신문



거짓의 무사도, 니토베 이나조
RSS Twitter로 기사보내기 Facebook으로 기사보내기 Google bookmark로 기사보내기 블로그공유 밴드로 기사보내기 
2011-08-03 07:55:05크게보기작게보기프린트이메일 보내기목록
 
 
 
'서양에는 기사도가 있 듯, 일본에는 무사도(武士道)가 있다.' 니토베 이나조(1862~1933)의 '일본의 정신, 무사도'의 서문은 우스꽝스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1900년 미국에서 출간되자 단번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무사도는 '충성과 명예를 가다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다"는 숭고한 개념인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국제연합 사무차장 시절 '일본인은 청소년 교육을 어떻게 하나'라는 질문을 받고 고심 끝에 서양의 기사도에 빗대 일본에는 없던 '무사도' 개념을 만들었다. 1862년 오늘, 무사 집안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공부한 엘리트에 퀘이커 교도인데도 엉뚱하게도 '무사'를 '칼로 수양하는 계급'으로 미화한 것이다.

원래 사무라이는 전쟁 전문가였지, 충성, 명예같은 유교적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메이지유신 전만 해도 봉록을 주는 영주에게만 충성했을뿐, 왕(덴노)이 있는지도 몰랐다.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정적을 암살하거나 등 뒤에 칼 꽃기를 선호하는 집단이었다. 그 '자랑스런' 무사도가 예전에는 힘없는 나라를 침략해 양민을 학살하고, 최근에는 과거에 대한 반성없이 남의 땅을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논리로 쓰이니 웃기는 노릇이다. 무사도는 말장난이다.

박병선(편집부국장)

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 - 유영모.김교신.함석헌을 중심으로

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 - 유영모.김교신.함석헌을 중심으로





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 - 유영모.김교신.함석헌을 중심으로

양현혜 | 김성수 | 이동철 | 박경미 | 서현선 | 김진희 (지은이)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6-12-30

------

서구 기독교 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했던 유영모, 김교신, 함석헌의 삶과 사상을 탐구했다. 자신들의 삶을 통해 식민지 조선인으로서의 민족과 민중의 뼈아픈 경험을 성서와 기독교 신앙에 근거를 두고 해석,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한국적 기독교 사상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세 사상가의 역동적인 삶과 창조적인 사고를 보여준다.



책을 통해 독자들은 이 시대, 이 자리의 한국적 기독교의 의미와 실천이 무엇인가에 대한 통찰과 그 해석의 깊이를 그들의 삶을 통해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머리말



1부 기독교 수용의 한국적 맥락



동아시아의 종교 전통과 한국의 주체적 기독교 수용

- 유영모, 김교신, 함석헌과 유불도 삼교 … 이동철

1. 들어가는 말

2. 동아시아 종교의 기본 성격

3. 유교의 기본 교의와 그 특성

4. 불교의 기본 교의와 그 특성

5. 도교의 기본 교의와 그 특성

6. 맺음말



한국의 '근대성'에 대한 비판과 종교적 대안들에 관한 연구 … 서현선

1. 들어가는 말

2. 유영모: 전통에 대한 주체적 수용과 배타적 진리관의 극복 모델

3. 김교신: 기독교적 권위주의 극복의 모델 - 도덕주의를 바탕으로 한 주체성 확립

4. 함석헌: 식민사관과 민족주의 사관의 극복 모델 - 근대적 주체성을 지닌 씨알 사상

5. 맺음말

---

2부 한국적 기독교의 형성



동양사상의 우주론에 입각한 유영모의 신학 … 김진희

1. 유영모는 누구인가?

2. 유영모의 동양적 우주관

3. 유영모의 인간론

4. 맺음말: 기독교와 동양사상의 접목



김교신, 함석헌 그리고 우치무라 간조 … 양현혜

1. 문제제기

2. 우치무라의 두 개의 'J'

3. 김교신과 함석헌의 우치무라 사상 이해

4.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교'의 논리 구조

5. 함석헌의 역사 철학: 창조적 수고자로서의 조선의 사명

6. 맺음말

---

한국 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 김성수

1. 들어가는 말

2. 사상사적 입장에서 본 퀘이커 주의

3. 함석헌과 퀘이커주의

4. 맺음말: 한국 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의미

----

속죄론과 관련해서 본 함석헌의 예수 이해

1. 들어가는 말

2. 종교와 신앙을 말하는 태도

3. 하나님 이해

4. 현대 역사적 예수 연구와 관련해서 본 함석헌의 예수 이해 … 박경미

5. 속죄론에 대한 재해석

6. 맺음말: 그리스도와 하나인 인격



찾아보기

----

오늘날 한국 교회는 대부분 자본주의적 물질 문명에 포섭당했으며, 그 노예가 되었다. 물질주의라는 괴수에 사로잡힌 교회 마케팅의 현장으로서 한국 교회는 기독교의 본질 자체에 대한 배반이다. 그리고 물질이건 권력이건 외부로부터 침입하는 어떠한 힘에도 굴하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성에 대한 추구는 위의 세 사람의 사상과 실천의 근저에 흐르는 동력이었다.



오늘날 대다수 한국 교회의 모습에서 예수의 생명과 신앙의 자유를 느끼기 어렵다면, 이 세사람의 삶과 사상, 실천에서는 깊은 믿음과 정신적 자유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언어로 말하자면, 자본주의 물질문명에 의한 인간의 노예화야말로 그들이 온몸으로 저항해서 막아내고자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사상과 실천이 지니는 울림은 우리 시대에 더욱 크게 다가온다. - 머리말 중에서

------

저자 : 양현혜

 최근작 : <김교신의 철학 : 사랑과 여흥>,<윤치호와 김교신>,<근대 한·일 관계사 속의 기독교> … 총 20종 (모두보기)

 소개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도쿄 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사학으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윤치호와 김교신》, 《빛과 소망의 숨결을 찾아》, 《근대 한일 관계사 속의 기독교》, 《김교신의 철학: 사랑과 여흥》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일본 사회의 인간관계》, 《기류민의 신학》, 《야스쿠니 신사》, 《동화의 숲에서 절대자를 만나다》 등 다수가 있다.

----

저자 : 김성수

 최근작 : <함석헌 평전>,<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 총 5종 (모두보기)

 소개 :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신진공고, 한국철도대, 방송대 영어과를 다녔다. 졸업 후 철도청에서 일을 하고 있던 그는 1989년 2월 4일 서울대학병원 영안실에 누워 있는 함석헌의 시신을 본 후 공무원 생활을 마감했다. 함석헌에 대한 연구를 하기를 결심한 그는 1990년에 영국으로 떠났다. 1990년에서 1994년까지 영국 에섹스대학(University of Essex) 역사학과에서 공부하였으며,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셰필드대학(University of Sheffield) 동아시아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 이 책은 그의...

---

저자 : 이동철

 최근작 : <사물의 분류와 지식의 탄생>,<중국철학>,<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 … 총 19종 (모두보기)

 소개 :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으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을 연수하였다. 한국사상사연구소 연구원을 역임하고 1997년부터 용인대학교 중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전과 미래연구소 소장으로서 문헌학, 번역학, 정보학에 근거를 둔 동아시아 고전학을 구상 중이며, 사전학, 도상학, 술수학, 박물학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주요 저서로 『지식인과 인문학』(공저), 『인간 동물 문화』(공저), 『한국학 사전 편찬의 현황』(공저)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중...

---

저자 : 박경미

 최근작 : <행복하여라! 하느님 나라의 사람들>,<신약 성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전하다>,<기독교와 세계> … 총 17종 (모두보기)

 소개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독교학과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신약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신학대학원장, 이화여성신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 요한공동체의 문학과 신학』, 『행복하여라! 하느님나라의 사람들』, 『신약성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전하다』, 『마몬의 시대, 생명의 논리』, 『새 하늘, 새 땅, 새 여성』, 역서로는 『갈릴리: 예수와 랍비들의 사회적 맥락』, 『생태학적 치유』 등이 있다.

----

저자 : 서현선

 최근작 : <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

 소개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종교학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6년 현재 이화여대 강사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여성신학의 새로운 지평>(공저), <디지털 세대를 위한 기독교>(공저), <여성과 초대 기독교>(공동편역), <여성과 영성 신학>(공저)이 있다.

---

저자 : 김진희

 최근작 : <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

 소개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Drew University Graduate School에서 조직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

쑥의 효능 | 제다이 위키 | Fandom powered by Wikia

쑥의 효능 | 제다이 위키 | Fandom powered by Wikia



쑥의 효능

32,182총 문서
개 보유
 댓글0
쑥의 효능
쑥은 현대인에게 있어 만병통치약이다.
현대인이 가진 질병의 원인 대부분이 환경오염과 잘못된 식습관으로 인한 독소의 발생 그리고 스트레스에 있기 때문에 독소를 배출하고 몸을 따뜻하게 하며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고 신경을 안정시키는 쑥은 현대인의 거의 모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
특히, 현대여성은 노출이 많은 옷차림으로 인해 몸이 차가워지며 혈액순환이 느리고 장기가 냉해져서 불임을 비롯한 여성 질환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여성에게 쑥은 너무도 필요한 식품이자 피를 맑게 하고 몸을 따뜻하게 하는 선약이다. 더구나 쑥은 상식하여도 아무런 부작용이 없기에 누구나 즐겨 먹어도 부담이 없으며 봄철 입맛을 돋우는 데에도 쑥 향기는 그만이다.
가끔 인터넷 상에 쑥은 독이 있어서 하루정도 물에 우려서 먹어야 한다는 말이 돌기도 하는데 이는 약쑥을 불리는 토종참쑥의 효능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말로써, 다른 음식을 섭취하지 않고 쑥만을 계속 섭취하거나 지나치게 많은 량을 섭취하는 것이 아니라면 참쑥은 부작용이 없다.
호(蒿)라고 불리는 인진쑥에 약간의 독성이 들어있어 장기복용이나 다량 섭취할 경우 약간의 부작용이 있다고는 하나 미미한 정도이다.
참쑥은 아무런 독이 없어서 그 자리에서 새순을 따먹거나 겉절이를 해 먹어도 해가 없으며, 임산부에게도 아무런 해가 없다. 단 공해에 오염된 곳이 아니어야 한다.
쑥이 우리 민족과 함께한 역사는 너무도 오래여서 그 기원을 알 수가 없다.
중국의 진시황이 찾으려 했다는 불로초(봉래초)가 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아마도 우리 쑥의 효능은 동아시아 전체에 명성이 자자했던 모양이다.
쑥은 국화과의 다년생풀이다.
세계적으로는 250여 종이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약 200여종이 자생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형태적인 특성에 따라 약 40여종이 보고되었으나, 일반인이 이것을 구분하기는 대단히 어려우며, 흔히 참쑥, 물쑥, 인진쑥 등의 몇 가지가 알려져 있으며, 이밖에도 물쑥, 제비쑥, 뺑쑥 등이 있다.
쑥은 애와 호와 봉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애(艾)는 의학서(醫學書)에서 애엽(艾葉)이라고 하는 것으로 참쑥을 말한다. 약쑥이라는 뜻으로 의초(醫草)라고도 하는데, 민간에서는 애쑥이라고도 한다. 식용과 약용에 모두 좋은 효과가 있다.
호(蒿)는 인진쑥을 말한다. 식용은 불가하고 약용으로만 쓰이는데 흔히 즙을 내거나 환을 지어 먹는다.
봉(蓬)은 싸주아리쑥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의 백령도나 강화도에서 자라는 것이 품질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시 식용은 불가하고 약용으로만 쓰인다.
쑥은 칼륨, 칼슘, 철분, 등의 무기질이 풍부하고 비타민 A. B. C. D 등의 비타민류, 섬유질, 효소 등의 여러 가지 유익한 영양소를 가지고 있으며, 방향성의 정유는 여러 가지 약리작용이 있다. 특히 정유의 주성분인 시네올(Cineol)은 해열, 진정, 소화액 분비 작용이 있으며, 정신을 맑게 하고 뇌파를 안정시키고, 쑥의 엽록소는 암을 예방하고, 피를 정화하며, 살균, 신진대사 촉진, 항알레르기 작용을 한다. 특히 노화방지, 면역기능 강화, 호르몬 조절 작용을 하는 비타민 A의 경우는 같은 봄나물과 비교해 달래의 2배, 냉이의 3배에 가까운 양을 함유하고 있으며, 해독, 피로회복, 알레르기 예방에 효과가 있는 비타민 C는 같은 중량의 귤과 함량이 비슷하다.
또한 쑥은 체내의 불필요한 나트륨을 배출하는 효과가 있어 염분을 과도하게 섭취하는 사람이나 음식을 싱겁게 먹어야 하는 고혈압환자에게는 더욱 필요한 음식이다. 최근에는 쑥 성분이 말라리아 충을 죽이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하였다.
쑥의 효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첫째, 해독과 살균작용을 한다. 쑥은 농약과 화학비료, 기타 약품의 독을 해독하고 분해하여 체외로 배출하고, 간기능을 활성화시켜 피를 맑게 하고 살균과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한다.
둘째, 노화를 방지한다. 쑥에 다량 함유되어 있는 비타민 A와C는 활성산소의 활동을 억제하고, 타닌 성분은 인체의 불포화지방산이 산소와 결합하는 것을 억제하여 세포의 노화를 방지한다.
셋째, 간 기능을 개선한다. 현대인은 스트레스, 흡연, 음주 등으로 인하여 간 기능이 급격히 저하되고 만성피로로 인한 활력저하, 지방간 등이 발생하기 쉽다. 쑥은 간과 신장을 보하여 생활의 활력을 찾아주며 신허로 인한 요통이나 정력약화를 개선한다.
넷째, 정혈작용과 비만해소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쑥은 몸속의 더러운 피를 걸러주고 맑은 피를 보충한다. 또한 혈액속의 콜레스테롤을 제거하여 혈압을 낮추고 체내의 노폐물을 제거하여 혈액을 맑게 하고, 다량의 섬유질로써 대장을 청소하여 비만과 내장비만을 해소한다.
다섯째, 쑥은 모든 현대여성에게 꼭 필요한 식품이자 선약이다. 쑥은 모든 여성 질환에 효과가 있다. 현대 여성은 노출이 심한 옷차림으로 인하여 몸이 냉해지며 특히 하체가 차가워져 냉, 대하, 생리불순, 자궁출혈, 불임 등의 질병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쑥은 몸을 따뜻하게 하고 피를 맑게 하여 불임을 비롯한 기타의 여성 질환을 치유한다. 특히 산모가 저체온일 경우 신생아가 아토피에 걸리는 확률이 아주 높은 것으로 밝혀졌는데 쑥은 산모의 체온을 상승시켜 태아의 아토피를 예방하며 동시에 태를 안정시켜 더욱 건강한 아이가 출산되도록 도와준다.
여섯째, 항암효과가 있다. 쑥의 인터페론에듀사 성분은 항암작용이 있으며, 쑥 잎에 다량 함유된 비타민A는 발암촉진물질의 기능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또한 쑥뜸은 백혈구의 수를 2~3배로 증가시켜 면역력을 향상시킨다.
일곱째, 위장기능을 강화한다. 쑥은 위장의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여 소화흡수를 돕고 건위작용을 하며 산성음식을 중화하며, 산성체질을 알칼리체질로 바꾸어 준다.
이밖에도 쑥은 손발 저림, 경련, 하열, 자궁출혈, 치질, 신경통, 류머티즘, 고혈압 등에 효과가 있다.
쑥은 단군신화에 등장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쑥을 식, 약용으로 사용한 역사가 아주 길고 쑥이 약효가 우수한 신초로 여겨졌었던 것을 증명한다. 또한 일본의 원폭지역에서 쑥이 가장 먼저 나왔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쑥의 생명력이 다른 어떤 식물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쑥이 공해나 기타 오염물질을 해독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것도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쑥이 오염물질을 해소한다는 것은 오염물질을 그만큼 잘 흡수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쑥을 채취하여 식용이나 약용으로 쓰고자 한다면 반드시 공해나 농약 등의 피해가 없는 곳이어야 한다. 농민들이 사용하는 제초제 중에는 지상부(地上部)만을 죽이는 농약이 있는데, 바로 고엽제의 원료로 만들어진 제초제이다. 이 농약을 사용하면 모든 풀들의 지상부가 죽고 뿌리만 남게 되는데, 생명력이 강한 쑥은 그 후에 다른 풀들에 비하여 급속도로 빠르게 다시 순이 나오게 된다. 만약 쑥을 채취하고자 할 때 주변에 다른 풀이 없고 쑥만 파랗게 돋아 있다면 한번쯤 의심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오염의 피해만 없다면 쑥은 현대인 모두를 건강하게 할 만한 완전한 식품이자 약용식물인 것이다.

니토베 이나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니토베 이나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니토베 이나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니토베 이나조(1862-1933)
니토베 이나조(일본어: 新渡戸 稲造にとべ いなぞう, 1862년 9월 1일 ~ 1933년 10월 15일)는 일본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시대에 걸쳐 활동했던 사상가이자 기독교인, 농업 경제학자, 작가, 교육가, 외교가, 정치가이다.

경력[원본 편집]

그는 국제연맹의 사무차장을 역임하였고 삿포로 농업대학교, 교토 제국대학교, 도쿄 제국대학교, 다쿠쇼쿠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또한와세다 대학교버클리 대학교스탠포드 대학교컬럼비아 대학교, 미네소타 대학교, 해버포드 대학교, 브라운 대학교, 버지니아 대학교, 일리노이 대학교, 제네바 대학교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객원교수 및 명예교수를 지냈다.
그는 도쿄 여자대학교를 창립한 초대 학장이기도 하다.

학문과 사상[원본 편집]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로는 《무사도》가 있으며 일본 화폐 5000엔(円)권에는 한때 그의 초상이 실려 있었다. 그는 당시에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국제주의자였고, 오늘날까지도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1880년대 중반 존스 홉킨스 대학원에서 허버트 백스터 애덤스(Herbert Baxter Adams)에게 국제정치학을 배우며 스스로 계몽된 사회라고 자부하던 나라들이 내세우던 야만인을 문명화해야한다는 사명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일본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문명국 대열에 합류하도록 만들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1885년 삿포로에 사는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이를 밝혔다. 그는 토마스 아놀드(Thomas Anold)가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삿포로의 아놀드 박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포부를 전했다.
그는 일본의 식민정책연구를 통해서 당시 일본인들에게 식민지 정책과 제국에 관한 지식을 가르쳤다. 니토베가 일본에서 개척한 이 학문분야는 일본이 시행하고자하는 국제 정책에 대해서 일반 국민들과 공직에 진출하려는 젊은 관료들이 꼭 공부해야할 분야였다. 그의 연구를 통해서 일본에서 '보호국'이나 '병합'과 같이 일본제국을 규정한 국제용어들이 학문적으로 설명되고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1910년 한국 병합무렵 도쿄의 대학과 직업학교 그리고 고등학교에서는 모두 식민 정책 분야를 가르쳤고 이를 통해 일본인들은 한일병합이 제국주의 정치라는 보다 넓은 국제적 문맥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배웠다. 이렇게 함으로 일본은 미국이 필리핀을 통치하고 프랑스가 베트남을 통치하는 방식과 유사하게 일본제국도 식민지를 통치한다는 상식을 전파했다. 그는 1910년 도쿄대학에서 식민정책과목을 가르칠 때 항상 칠판에 "식민지화는 문명을 전파하는 일이다"라는 글귀를 써넣고 강의를 시작했다. 니토베는 한국인들이 일본 식민주의자들이 자신을 개화시켜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1932년 일본의 만주침략을 논리적으로 옹호했으며, 여름 동안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일본의 행동을 설명했고 미국 CBS 라디오 방송에서 많은 미국 청중을 대상으로 일본의 행동을 정당화했다.[1]

일본의 무사도 - 개정판

알라딘: 일본의 무사도 - 개정판





일본의 무사도 - 개정판 l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8

니토베 이나조 (지은이) | 양경미 | 권만규 (옮긴이) | 생각의나무 | 2006-10-11

-----



2004년에 출간된 <사무라이>의 개정판. 이 책은 2004년 10월까지 일본 5,000엔 권 지폐 속의 인물이었던 니토베 이나조가 1899년 서양인들에게 일본 고유의 정신인 '무사도'를 통해 일본 문화, 일본인, 일본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지 널리 알리려는 목적으로 영어로 쓴 것이다.



이후 17개국에 번역 소개되었으며, 100년이 넘도록 '신비롭고 매혹적인 나라 일본'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공을 세운, 일본 근대의 대표적 저작물이다.



저자는 사무라이 정신을 대변하는 덕목, 즉 의(義), 용기(勇氣), 인(仁), 예(禮儀), 명예(名譽), 극기(克己), 그리고 비장한 죽음 할복(割腹) 등을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해박한 지식과 정연한 논리로 설명한다. 책에는 사무라이 계급의 흥망과 관련된 주요 전쟁, 사무라이의 복장과 전설적 영웅의 모습 등을 담은 희귀한 원색 도판 자료가 풍부하게 실려 있다. 개정판.



서문



제1장 존재를 위한 명분 - 무사의 도덕체계

제2장 무사와 무사도의 성립 - 무사도의 연원

제3장 물질을 초월한 이상 - 의 또는 정의

제4장 무사의 정신이 다다르는 곳 - 용기, 감위견인의 정신

제5장 다스림의 최고덕목 - 인, 측은지심

제6장 다른 이의 마음을 헤아림 - 예의

제7장 참된 마음 - 진실과 성실

제8장 이름에 대한 의무 - 명예

제9장 국가와 주군에 대한 복종 - 충의

제10장 영혼과 품성의 정화 - 무사의 교육과 훈련

제11장 육체를 뛰어넘는 정신 - 극기

제12장 영혼을 내놓는 죽음 - 할복과 복수

제13장 칼 끝에 놓인 정신 - 칼, 무사의 혼

제14장 안쪽에서 주는 도움 - 여성의 지위와 역할

제15장 무사도의 감화 - 야마토 정신

제16장 일본을 움직이는 힘 - 무사도는 여전히 살아있는가?

제17장 불멸의 정신 - 무사도의 미래



역자의 말

해설

-----





저자 : 니토베 이나조 (新渡? ?造 )

저자파일



최고의 작품 투표



신간알리미 신청

 최근작 : <만화로 독파하는 무사도>,<무사도>,<무사도> … 총 50종 (모두보기)

 소개 :

1862년 일본 모리오카 번 하급무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동경대학교를 중퇴하고,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3년간 경제학·문학·역사학을 공부한 뒤 다시 독일로 건너가 본 대학에서 농정 경제학·농학·통계학 등을 전공했다. 귀국 후 삿포로 농학교 교수, 경도제국대학교 교수, 제일고등학교 교장, 동경제국대학교 법학부 주임교수, 동경여자대학교 초대학장, 국제연맹 사무차장을 역임했다. 1899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사무라이>를 출판하고, 1933년 캐나다 태평양 조사회에 참석 중 사망했다. 일본의 5,000엔 권 화폐에 그의 초상이...



역자 : 양경미

저자파일



최고의 작품 투표



신간알리미 신청

 최근작 : … 총 34종 (모두보기)

 소개 : 1955년 서울 출생. 전문번역가이자 ‘됴한글 번역연구회’ 리더로 활동 중이며, 일본어 번역연구회 ‘아지사이(Ajisaii)’ 대표로 있다. 옮긴 책으로는 《라블레의 아이들》 《사무라이》 《태공망 1, 2, 3》 《진주부인 1, 2》 《우리의 타자가 되는 한국》 《천축으로 가는 좁은 길》 《하루가 떠나면》 《심리 경영》 《보딩 스쿨》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라》, 아동문학으로 《노란 코끼리》 《열한 살 인생수업》 《한 송이 꽃》 《내일의 바람》 외 다수가 있다.

역자 : 권만규

저자파일

-----



총 : 7편

  리뷰쓰기

 이 정도 책이 고전이라고?  새창으로 보기

심술보 ㅣ 2008-05-29 ㅣ 공감(2) ㅣ 댓글 (0)

 솔직히 부럽습니다. 이 정도 수준의 책이 서양에서는 고전으로 읽힌다니 말입니다. 이 책은 일본의 5000엔 권 화폐에 그의 초상이 그려져 있을 정도로 일본 근대 최고의 교양인이자 지식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니토베 이나조라는 사람이 미국에서 1899년 출간한 책입니다. 일본의 문화를 궁금해하거나 이질적인 문명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서양인들을 위해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인 무사도를 영어로 설명한 책입니다.

 미국과 독일에서 다양한 학문을 익힌 저자는 서양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일본의 정신인 무사도를 서양의 기독교나 기사도에 못지 않은 고귀한 정신이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종횡무진 서양의 석학들과 바이블을 인용하며 미사여구로 포장한 무사도에 대한 설명이 실로 정교합니다. 그 내용이 간결하면서도 설득력 있어 오랜 시간 서구인들에게 일본을 알리는 교과서 역할을 해 온 책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 왜 서양인들이 일본문화 그 중에서도 사무라이 문화에 그렇게 열광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한데 이 책 내용을 유심히 파고들면 사실 별 게 없습니다. 저자는 마치 무사도가 일본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사상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동아시아 사람이라면 누구나 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조상대대의 전통사상과 그다지 다를 게 없는 것들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선비정신"과 비교하면 지성과 철학이 결여된 조악한 사상일 뿐입니다. 물론 어느 나라나 각자 고유의 문화가 있고 다른 나라의 문화와 비교해 더 낫거나 낮게 평가되어선 안 된다는 점은 전적으로 동의합니다만 무사도가 아시아에서도 특별한 독창적인 문화.사상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점은 분명 왜곡에 가깝다 할 것입니다. 그 증거로 무사도가 표방하는 좋은 덕목들은 모두 우리의 "선비정신"으로 대체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습니다. 오히려 "선비정신"이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맹목적인 무사도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한다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저는 이 별 볼 일 없는 책이 한없이 부럽습니다. 우리는 이런 책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들보다 더 뛰어난 문화를 갖고도 그것을 세계에 알리려는 노력을 게을리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온 세계가 일본문화에 열광하는데 반해 우리나라는 중국이나 일본의 아류국 정도로 인식되는 게 엄연한 현실입니다. 최근 많은 노력이 일어나고 있지만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문화를 제대로 알릴 수 있는 이런 책들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그 전에 우리 스스로 우리 것을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는 마음부터 갖춰야겠습니다. 남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질 일이 없습니다.

------



 20세기 초반 일본 지식인의 무사도 예찬  새창으로 보기

popy1 ㅣ 2007-04-17 ㅣ 공감(1) ㅣ 댓글 (0)

소설, 영화나 만화 등에서 막연하게 보던 일본 무사도에 대해 좀 정리된 시각을 갖고 싶던 차라 받자 마자 읽기 시작했는데 중간에 잠시 딴짓하고 어쩌고 하다보니 끝내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저자는 일본의 5000엔권 지폐 도안으로 남아 있는다 니토베 이나조.  좀 고액권이다보니 한번도 구경하지 못했는데 다음에 일본 갈 때는 이 아저씨 얼굴을 구경하기 위해서라도 꼭 5000엔짜리를 한 장 바꿔봐야겠다.



20세기 초반에 서구인들에게 일본의 정신이자 기조인 무사도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주기 위해 영어로 쓴 텍스트라고 한다.  그런 목적이 있는 만큼 내용이 상당히 쉽다.  더불어 적절하게 사용된 예와 그림 자료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가치가 있다.



무사도가 갖고 있는 문제와 부정적인 부분들을 지적하고 인정하긴 하지만 전체적인 기조는 무사도에 대한 담담한 예찬이다.  그러나 눈쌀을 찌푸르게 할 정도로 국수주의적이거나 눈을 가리고 무조건 내가 제일 잘 났어~라고 외치는 그런 무식함은 배제된 긍정적인 면의 부각.  만약 내가 서구인들을 대상으로 조선의 양반사회와 정신에 대한 글을 쓴다면 -내가 후기 양반 사회의 경직성을 엄청나게 싫어함에도- 이 정도의 기조는 나올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욕은 못한다.  이건 자기가 속한 문화와 사회에 대한 평균적인 애착을 가진 사람이 쓰는 자기 소개서의 한계이자 장점일 것 같다.



전체적으로 일본에 대해 외부인들이 갖고 있는 오해와 환상, 그리고 무사도에 대한 잘못된 정보들을 바로잡기 위한 일본 지식인의 노력이라고 평가해야할 것이다.  소위 사무라이 정신이 일본 사회와 역사에 미친 영향과 소소한 일화들을 알고 이해하는 첫걸음으로는 더없는 선택인 것 같다.



그러나... 이 무사도의 단점이랄까... 극단적인 부분의 피해를 고스란히 몇번이고 맛봐야했던 바로 옆 국가.  반경 밖에서 방관자인 서구인들과 달리 그 미친 칼날에 맞아 피를 흘린 한국인의 입장에서 불편함을 가지는 게 지나친 민족주의나 피해의식일까?



------



 무사도 그림책이 맞긴 한데....  새창으로 보기

joorang ㅣ 2007-04-05 ㅣ 공감(1) ㅣ 댓글 (0)

처음엔 이름에서 또 표지에서 느낌이 그림책인 줄 알았다.

물론 책 내용 중에 그림이 많기도 하지만....

막상 읽기 시작한 책 내용은 생각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1899년 발간된 책을 번역한 것이라는 데 놀랐고 끄 내용에 놀랐다.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사무라이(무사)에 대한 생각이 우리랑 다른 것에 대하여.

뭐 구구절절이 얘기할 필요는 없지만 한 번쯤 읽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서 좀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기에.

"무사도는 글자 그대로 무인 혹은 기사가 지켜야 할 도리로서 무사가 직분을 이행할 때 나아가 생활 속의

언행에서도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도리"라고 말 하면서 나름대로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부여 해 놓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본다면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늘어 놓고 있다.

그것이 일본 사람들의 생각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해설에 적힌 이 수정 교수의 말

" 일본은 강하다. 그것은 적어도 일본에게 있어서는 '선'이다. 숨겨져 있지만 일본인에게는 그러한 의식이, 아니 무의식이 있다. '강함은 선이다.' . '승리는 선이다.' 일본에게 있어 이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때문에 " 한국인이 일본의 '무사도'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는 원칙적으로 '이해와 경계와 대비'이어야 한다."

라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편협한 일본주의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항변  새창으로 보기

dalpan ㅣ 2007-03-12 ㅣ 공감(2) ㅣ 댓글 (0)

벌써 10년이 흘러버렸다. 처음 일본땅에 여행을 가고 나름대로 소중한 경험들을 들고 왔지만, 더 자세히 일본을 들여다 보려해도 마땅한 서적들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기껏 서점에서 구할 수 있었던 책이라야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 영화감독 이규형의 일본문화 소개책자 정도랄까. 이제는 일본문화의 개방으로 영화에서부터 음악, 서적까지 넘쳐나지만 불과 얼마전까지는 상당히 피상적이었다 싶다. 가깝고도 멀다는 말이 실감난다.

이 책은 출간한지 100년이 넘은 책이다. 작가인 니토베 이나조는 그 옛날에 존스 홉킨스에서 공부했고, 귀국해서는 교육자로서 그리고 국제연맹 사무차장까지 역임했으니 꽤 유명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우연찮게도 얼마전에 읽은 책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의 저자는 1만엔 일본지폐, 이 책은 5천엔 일본지폐의 주인공이니 일본은 이미 과거 봉건시대를 접고 근대화 이후 시대에서 그들의 미래를 보고 싶은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국사책에서 보아오던 일본(왜)은 설사 36년간 한반도를 침탈했던 과거를 애써 부인하지 않아도, 백제에게 문화를 전수받고, 조선시대 통신사절을 받아들이던 왠지 왜소해 보이던 국가가 아니었던가 싶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우리가 그런 관념적 과거형 속에 묻혀있을 때, 그들도 놀라듯 그들의 근대화는 말그대로 일사천리였다. 우리에게 일본의 근대화는 무서운 일이었고, 불행한 역사로의 귀결이었다.

이 책은 100여년 전 니토베 이나조가 미국에서 출간한 책으로 물론 영어로 먼저 발간된 책이다. 일본에 대한 외국인의 관심에, 일본의 근원이라고 작가가 판단한 '무사도'의 연원, 덕목, 정신, 의무를 비롯해 무사도의 현재, 미래를 서양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 책이다. 서문에도 나와 있듯이 '왜 일본에는 종교교육을 시키지 않느냐?'는 외국인 교수의 질문에 말문이 막혀 고심한 끝에 그 종교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왔고 일본정신의 근원이라 할 만한 '무사도'에 대한 글을 쓰기로 한 것이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기본적인 정신은 동양에서 살고있는 우리들에게는 그렇게 낯선 것들이 아닌 유교적 가치의 발견이다. 다만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인 인(仁), 예(禮), 용(勇), 충(忠)등의 덕목에 일본 봉건주의의 특수한 계급, 바로 사무라이에게 요구되던 사회적, 역사적 책무와 그들의 의식에 관한 접목들을 시도한다. 어쩌면 오랜 세월 가마쿠라, 무로마치, 전국시대를 거쳐 에도막부에 이르기까지 군사정권으로 유지되어온 일본의 봉건역사에서 사무라이와 무사도 정신은 특수계급의 정신적 지향점을 넘어 일본전역에 뿌리내려 온, 작가의 생각대로 하나의 종교적 의식으로 받아들여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더욱이 이 책을 텍스트로만 접한다면 따분하기 그지없는 책일 수도 있는데, 거의 책의 1/3을 사무라이와 전쟁에 관한 옛 그림 및 도판으로 가득 채우고 있어 내용의 이해도를 높이는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그러나 누차 일본인들이 직접 쓴 책들, 특히 근대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바이지만 인류보편의 가치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글은 실종되고, 대부분이 일본적 가치의 절대화, 이를 통한 편협한 일본주의의 실상을 드러내는 듯해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책의 전반부, 무사도의 기본 정신을 설명하면서 동양사상에서 아주 익숙한 유교적 가치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유사한 내용을 끌어들여 이를 전부 일본화하는데, 동양사상에서 말하는 인류보편의 가치를 마치 일본고유의 것으로 둔갑시키고 이를 찬미한다. 심지어는 서양의 유사 내용도 일본화하는데 여념이 없다.

"일본 속담에 "길 잃은 새가 품속으로 날아들면 사냥꾼이라도 새를 죽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기독교적인 적십자운동의 정신이 이미 일본에 그 뿌리가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듯하다. 일본 국민들은 제네바의 만국적십자조약보다 몇 십 년 앞서, 일본 최고의 소설가 타키자와 바킨의 작품을 통하여 적군의 부상병을 치료해 주는 이야기에 친숙해져 있다." (72p)

이는 어찌보면 편협한 일본주의의 서양인의 전통적 동양무시-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항변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근대화를 이룬 일본이 다른 아시아 국가를 무시하고 제국주의 침탈로 달려간 역사적 사실을 볼 때 결국 이러한 무사도 정신은 일본의 가치이지 인류보편의 가치는 아님이 명징하다.

작가는 칼로 대변되는 무사도 정신에 전통적 유교적 가치로 덧칠을 하고, 절대 등 뒤에서 칼을 꽂지않는, 온화하고 평정심을 가진,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할복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무사들을 그려내나, 칼에 그 마음을 덧씌운다고 칼이 붓이 되지는 않는다. 그저 칼의 가치는 힘(무력)의 가치일 뿐이라는 생각이 갈수록 오히려 강하게 든다. 세계 어디에서도 칼을 쓰던 무인이 지닌 덕목에 충성과 명예를 빼고, 인명살상만 강조하는 민족은 없다. 무사도정신이 일본의 종교적 가치를 능가하는 일본정신의 뿌리라 함은, 결국 힘의 가치를 절대화한다는 편협한 일본을 일본인 스스로 시인한 것에 다름아니다. 100년이 넘게 지난 지금, 다시 우경화되는 일본의 상황에 곱지않은 시선이 가는 것도 이 때문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