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18

상좌부 (테라와다) 불교 - 위키백과, 남방불교, 남전불교

상좌부 불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상좌부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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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 Khung Taphao salakabhatta 2009.jpg

상좌부 불교(上座部佛教) 또는 테라바다 또는 테라와다(Theravada)[1]는 부처의 계율을 원칙대로 고수하는 불교를 말한다.[2][3] 대중부 불교와 함께 인도 불교의 2대 부문(部門)의 하나이다.

테라바다(Theravada)라는 말은 "장로(長老)들의 길"이란 뜻으로 상좌부(上座部)라고 한역되었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고타마 붓다가 사용한 언어인 팔리어(빠알리어)로 된 경전을 근간으로 하는데, 이는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대승 경전과 대비된다. 이 팔리어 경전(아함경과 78% 일치하는 니까야)은 기원전 1세기경 스리랑카에서 최초로 쓰인 것으로 서력 기원후에 형체를 갖추어가기 시작한 대승권의 산스크리트어 경전이나 다른 경전보다도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이 더 정확하게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4]

불교 전통 연표[편집]

연표: 불교 전통의 성립과 발전 (기원전 450년경부터 기원후 1300년경까지)v • d • e • h

 450 BCE250 BCE100 CE500 CE700 CE800 CE1200 CE

 

인도

원시불교

 

 

 

부파불교대승불교밀교·금강승

 

 

 

 

 

스리랑카 · 
동남아시아

 상좌부 불교

 

 
 

 

 

 

중앙아시아

 

그레코 불교

 

티베트 불교

 

비단길을 통한 불교 전파

 

동아시아 · 
··

 천태종 · 정토종 · 일련종

밀교 · 진언종

 

 

 450 BCE250 BCE100 CE500 CE700 CE800 CE1200 CE
 범례: 상좌부 불교 전통 대승불교 전통 밀교·금강승 전통

역사[편집]

불멸 후 100년의 근본분열로 교단은 두 부파로 나뉘었는데 그 중 보수파인 상좌의 사람들에 의한 일파가 상좌부이다.

북방불교의 자료들에 의하면 불멸(佛滅) 후 100년 아쇼카왕 치세 때, 마하데바(Mahadeva: 大天)라고 하는 진보파 비구가 교의에 관한 5개조의 신설(新說)을 제창하고 그 승인을 교단에 구했을 때에, 또는 남방불교의 자료인 실론의 《도사(島史)》나 《대왕통사(大王統史)》에 따르면, 와지족의 비구가 계율에 대한 십사(十事)의 신설(十事非法)을 주창했기 때문에(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후자가 승인되고 있다) 불교교단이 신설에 찬성하는 진보파의 대중부(大衆部)와 이에 반대하는 보수파의 상좌부(上座部)로 양분되었다. 이것이 근본분열(根本分裂)이며, 이를 계기로 부파불교의 시대로 들어간다.[5] 인도의 아쇼카 왕 때인 기원전 3세기에 상좌부의 주도로 빠알리어로 행한 제3차 결집 직후, 아쇼카 왕의 아들 마힌다 장로를 통해 제3차 결집의 결과물을 가지고 상좌부는 스리랑카에 정착하였다. 스리랑카의 상좌부는 스스로를 "분별설부(Vibhajjavada)"[6]라 불렀으며 암송되어 오던 제3차 결집의 빠알리어 대장경을 기원전 1세기에 싱할리문자로 기록하였다. 현재의 테라와다는 이 분별설부의 삼장을 계승하였다. 주로 동남아시아에 분포하여서 남방 불교라고도 불린다.

이후 북방에서는 상좌부가 불멸 후 300년 초에 본상좌부(本上座部)와 설일체유부(說一體有部)로 나뉘고 본상좌부는 히말라야 지방으로 옮겨 설산부(雪山部)라고 불리었으며, 캐시미르 지방을 본거(本據)로 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후의 분파에 의한 8부의 성립은 모두 설일체유부의 것으로 된 것이며, 따라서 유부는 상좌부계(上座部系) 중에서도 여러 부파 중 최대의 것이 되었고, 후에 일어난 대승불교의 소승불교에 대한 비판 · 논란(論難)은 거의 모두 이 유부에게 돌려지는 상태였다. 그래서 북방에서는 상좌부불교라고 하면 당연히 설일체유부가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기원후 2세기 중반에 카니시카왕 대에 설일체유부를 중심으로 산스크리트어로 기록한 제 4차 결집이 있었다. 북방의 아함경은 주로 이 제 4차 결집의 산스크리트어 기록을 한역한 것으로 보여진다.

설일체유부[편집]

원래 본상좌부(本上座部: 설산부)와 설일체유부는 입장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본상좌부에서는 과 을 중시한 데 대하여 유부에서는 (論)을 중시하였다. 은 교법에 대한 연구로서의 아비달마이며, 유부가 전거(典據)로 삼은 것은 기원전 2세기 카티야야니푸트라(Katyayanputra: 迦多衍尼子)가 저술한 《발지론(發智論)》이었다.

그 후 6종의 논이 만들어져 합하여 《6족발지(六足發智)》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행하여졌으며, 기원 2세기 쿠샨 왕조의 카니시카왕의 보호 아래 연구 성과에 대한 집대성(集大成)이 이루어져서,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200권의 대저(大著)로 발전하여 유부의 교의가 완성되었다. 비바사(毘婆沙)란 분석 또는 주석이라는 뜻으로, 《발지론》을 축어적(逐語的)으로 해석하면서 다른 여러 부파의 교설을 백과전서(百科全書)처럼 인용하고 이를 유부의 입장에서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대비바사론》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이의 강요서(綱要書)가 만들어지고, 특히 4세기에 세친(世親)이 저술한 《구사론(俱舍論)》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중시되었다. 세친은 유부(有部)에서 최후로 분파하여 경전만을 의지(依支)하는 경량부(經量部)에 속하며, 《구사론》을 통해 유부의 교리를 비판적으로 해설하였다. 예를 들면, 《구사론》 〈수면품〉에서 세친은 삼세실유설을 경량부적 입장, 즉 과미무체설의 입장에서 반박하고 있다.

북방에서는 본상좌부 불교에서 분파한 유부는 교리적인 연구면에서 크게 진전하여 학문불교적인 색채가 농후했으며, 북방에서 불교의 전통적인 사상을 이어받아 학문적인 논장으로 변형 확장시킨 부파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남방불교의 테라와다[편집]

북방의 상좌부에서 설일체유부가 분파되기 전에, 기원전 3세기의 상좌부 주도로 빠알리어로 이루어진 제 3차 결집에서 포교를 결정함에 따라, 마힌다 장로를 통해 스리랑카(실론 섬)로 전해진 상좌부(테라와다)는 빠알리어로 이루어진 제 3차 결집의 과 을 잘 간직하고, 위빳사나 수행 중심의 불교로 이어졌다. 남방의 테라와다는 설일체유부와 다른 칠론을 발전시켰고, 빠띠삼비다막가[무애해도]의 위빳사나 수행 전통을 이어가, 수행 중심의 아비담마 이론을 집대성한 위수디막가[청정도론]를 기원후 425년 전후에 완성했다[7]. 스리랑카의 테라와다는 동남아시아로 확장되어 현재 태국에서는 계행이, 미얀마에서는 아비담마와 위빳사나 수행이, 스리랑카에선 경전 연구가 특히 뛰어나다고 한다. 상좌부 불교[테라와다]는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 지역에 널리 퍼졌으므로 남방불교, 남전불교라고 불리게 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알파벳으로 Theravada로 표시하는 글자에서 v발음은 영어의 v가 아니라 우리말의 순경음ㅂ(ᄫ)으로, 남방불교 지역에서는 '우/오'로 발음된다. 즉 우리말로 보다 정확한 표기는 '테라ᄫᅡ다'이며 실제 발음은 '테라와다'이다. vipassana의 실제 발음이 '위빳사나'인 것과 같다. 우리말에서도 15세기 말을 일부 간직하는 경상도말에서는 아직도 "덥어라[더ᄫㅓ라]" "고맙아[고마ᄫᅡ]"하는 것을 현대의 서울말에선 "더워라," "고마와"라고 하는 것과 같다.
  2.  윤대헌. ‘불교성지’ 미얀마…2500년 佛밝힌 ‘신비탐험’. 스포츠경향. 기사입력 2006년 6월 7일. 최종수정 2008년 12월 25일.
  3.  김도연. 2500년전 ‘부처의 길’… 한발한발 따라 걷다. 문화일보. 기사입력 2012년 5월 22일. 최종수정 2012년 5월 22일.
  4.  보리수선원
  5.  종교·철학 > 세계의 종교 > 불 교 > 불교의 분파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세계의 종교/불 교/불교의 분파 > 소승20부,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6.  여기서 '분별(vibhajja)'이란 개념적으로 분석한다는 말이 아니라 해체하여 본다는 뜻이다. 관념적으로 조립된 전체상과 부분상으로서가 아니라, 관념으로 조립하여 구성하기 이전에 이미 해체(vibhajja)되어 실제로 나타나 있는 그대로를, 즉 관념으로 조립하는 시간 지체나 왜곡없이 현재 일어난 것을, 현재 일어난 그 자리에서 바로 알아차림이 vibhajja다. "상좌부 불교를 일본학자들은 분별상좌부라고 옮겼는데 분별이란 말이 상대를 폄하하는 말인 듯해서 잘 사용하지 않는다".(초기불교입문(초기불전연구원): 40-43).
  7.  청정도론1(초기불전연구원): 40쪽

참고 문헌[편집]

조성환의 [K-사상사] 기후변화 시대의 인간의 행위 – 다른백년

Sunghwan Jo
  · 
이병한 대표의 제안으로 <다른백년>에 다시 연재를 시작했다. 앞으로 6개월간 매달 2차례씩 <조성환의 K-사상사>라는 이름으로 글을 써야 한다... 


기후변화 시대의 인간의 행위 – 다른백년


조성환의 [K-사상사]
기후변화 시대의 인간의 행위

기화(氣化)와 경행(敬行) – 개벽파선언은 지구학선언이다

조성환 2022.06.15






기후변화 시대의 인간의 행위

3년 전에 다른백년에서 <개벽파선언>으로 인사를 드렸는데, 이번에는 <K-사상사>라는 제목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그것도 서신 교환이 아니라 단독 저술이다. 그래서 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귀한 기회를 주신 이병한 대표님께 감사드린다.

3년 전의 기획이 ‘개벽학’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됐다면, 이번 연재는 ‘지구학’으로 관심이 확장되었다. 따라서 이번 <K-사상사>는 지난 3년 동안의 지구학의 여정을 소개하는 자리가 될 것 같다.

사실 개벽학과 지구학, 지구학과 개벽학은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이미 《개벽파선언》에서 이병한 선생이 “개벽학은 지구학이다”라고 천명했듯이, 개벽학에는 지구학적 문제 의식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지난 2년 반 동안은 이것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개벽파선언》은 “지구학선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도 한국 인문학계에서 최초로 지구학을 선언한 사건이었다.

다만 당시에 나는 아직 지구학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개벽파선언》 독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우연히 ‘지구인문학’ 개념이 머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2년 반이 지난 지금은 ‘인류세인문학’으로 관심이 좁혀졌다. 차크라바르티 식으로 말하면 ‘행성인문학(planetary humanities)’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다만 아직 ‘행성’이라는 말은 국내에서는 생소해서 ‘지구’를 사용하기로 한다).



과학인문학과 지구인문학

‘인류세(anthropocene)’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지구인문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눈치챘을 것이다. 인류세와 같이 지구적 차원의 담론을 통칭하는 신조어다. 형태만 보면 라투르가 말하는 ‘과학인문학’의 ‘과학’에 ‘지구’가 들어간 모양이다.

지구인문학의 주어가 ‘지구’라면 종래의 인문학의 주어는 무엇일까?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인간이다. 마치 ‘근대’라는 말에 ‘서구’라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듯이, ‘인문학’에는 ‘인간’이라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들만의 인문학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사회와 국가가 인문학의 중심 주제였고, 자유나 권리, 복지나 공공성 같은 ‘가치’들은 인간에 한정되었다.

그런데 라투르의 과학인문학이 그렇듯이, 지구인문학은 인간 이외의 존재, 즉 사물까지도 그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사물(hyperobject)인 지구를 주어 자리에 넣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여기저기에서 징후가 나타나듯이, 지구의 거주가능성(habitability)이 문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가장 기본적인 물음이 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이제서야 인간의 생존 조건의 가장 근저에 지구라는 거주지가 있었음을 깨닫기 시작한 모양이다. 아니 사실은 ‘인류’가 아니라 ‘나’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러한 자각을 한 선각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이다.



지구는 인간의 조건이다

20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의 조건’이 뭐냐고 묻는다면 주저없이 ‘국가’라고 답했을 것이다. 국적이 없으면 난민이 되고, 나라를 잃으면 주권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님’을 주제로 한 “님의 문학”이 등장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자유를 상실한 식민지 지배 하에서, 한국인이 추구했던 보편적 가치(생명, 평화, 자유)를 ‘님’이라는 시어로 그리워 한 것이다. 그래서 만해의 《님의 침묵》(1926)은 80년대로 말하면 〈님을 위한 행진곡〉에 다름 아니다. 다만 그 님의 성격이 종교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차이는 있지만.

그런데 한반도가 식민지에서 해방되고 근대 국가를 만들어 갈 무렵에, 아렌트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다. 인간의 조건을 ‘지구’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지구는 가장 핵심적인 인간의 조건이다(The earth is the very quintessence of the human condition).” –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옮김, 《인간의 조건》 「서론」, 한길사, 2020, 78쪽.

이 한 마디는 우리가 《인간의 조건》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던져주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면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지구”이다. 실제로 《인간의 조건》(Human Condition)의 영어 원서에는 ‘earth’라는 말이 200번 넘게 나오고 있다. 아렌트를 ‘지구인문학’적 관점에서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이 책이 쓰여진 시점이 1958년인 점을 감안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거주지로서의 지구

그렇다면 지구는 어째서 인간의 핵심 조건인가? 이에 대해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구는 우주에서 인간이 별다른 노력 없이, 그리고 그 어떤 인공물도 없이 움직이고 숨 쉴 수 있는 거주지(habitat)를 제공하는 유일한 곳이다. – 《인간의 조건》, 78쪽

지구가 인간의 조건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유일한 거주지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구 안에서 다른 유기체와 관계를 맺으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지구 내 존재’이다(김봉곤・야규 마코토, <‘실학’의 지구기학>, 《지구인문학의 시선》, 모시는사람들, 2022, 194쪽). 프랑스의 철학자 에드가 모랭의 표현을 빌리면 “지구가 인류의 조국”인 것이다(에드가 모랭・안느 케른 지음, 이재형 옮긴, 《지구는 우리의 조국》, 문예출판사, 1993). 사실 전통 시대의 문명은 대개 이런 인간관과 자연관을 표방하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천지론(天地論)이나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이상 대표적인 예이다.



자연세계와 인공세계

그러나 과학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은 지구라는 천연 조건과는 별도로 인간만의 거주 조건을 따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지구로부터의 독립을 감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과학기술에 의한 인공세계의 구축이다. 여기에서 세계는 둘로 양분된다. 하나는 자연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인공세계이다. 동아시아적으로 말하면 천인분리(天人分離)의 시작이다.

인간 실존은 인공적 세계를 가진다는 점에서 단순히 동물적인 환경과 구분된다. 그러나 생명 자체는 이런 인공적 세계 밖에 있으며, 인간은 이 생명을 통해 살아 있는 다른 모든 유기체와 관계한다. 《인간의 조건》, 78쪽.

그런데 아렌트가 보기에 ‘생명’은 인공세계만으로는 살 수 없다. 생명은 필연적으로 다른 생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세계가 없으면 인공세계도 무용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세계는 인공세계가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노자 식으로 말하면, 방이라는 용도를 가능하게 하는 텅 빈 허공이다.

반면에 자연 세계는 인공세계 없이도 얼마든지 유지될 수 있다. “생명은 인공세계 밖에 있다”는 아렌트의 말은 “생명은 인공세계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말에 다름아니다. 결국 인공세계는 생명의 편의를 위한 부차적인 조건일 수는 있어도, 생명의 본질적 조건은 아닌 셈이다.



지구파괴와 정치개벽

문제는 자연세계와 인공세계의 분리라는 그 사실보다는 양자의 부조화 상태이다. 자연과 인공, 달리 말하면 무위(無爲)와 유위(有爲)가, 조화를 이루는 상생관계가 아니라,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파괴하는 상극관계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능력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과연 과학과 기술의 새로운 지식을 이런 목적에 사용하기를 원하는가 하는 문제다. 이 질문은 과학적 수단으로 결정될 수 없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정치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전문과학자나 직업정치가의 결정에 맡길 수 없다. – 《인간의 조건》, 79쪽.

여기에서 아렌트는 인간에 의한 자연 파괴는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과학을 어떻게 쓸 것인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 식으로 말하면 “정신이 물질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문명의 이기(利器) 그 자체가 악이 아니라, 그것을 쓰는 인간의 마음에 따라 선도 될 수 있고 악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씀이다. 인간이 이성을 갖고 있는 한 과학의 발달은 멈출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갖고 있는 또 다른 이성은 – 박중빈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의 ‘정신’은 – 그것을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런 도덕적인 힘을 기르는 것을 천도교와 원불교에서는 ‘정신개벽’이라고 하였다. 결국 아렌트는 개벽학적으로 말하면 “지구파괴 시대의 정치개벽”을 고민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아렌트는 이 문제를 개인의 수양이나 도덕의 차원에서 논하지 않는다. 정치철학자답게 ‘정치’의 영역으로 끌고 간다. 바로 여기에서 과학과 정치의 이분법이 다시 물어지게 된다. 과학이 과학의 영역으로 끝나지 않고, 정치의 문제와도 깊게 관련되는 것이다. 라투르 식으로 말하면 인간과 자연, 문화와 자연은 결코 근대인이 생각하듯이 이원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라투르는 말한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인 적이 없었다!”고.



인간해방과 지구소외

천도교나 원불교에서 ‘정신개벽’을 주창한 것은 당시 일본을 통해 들어온 물질문명의 충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렌트는 어떻게 해서 지구인문학적 관점을 갖게 되었을까? 당시는 아직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유행하던 시대도 아니었다. 따라서 단순한 과학기술의 발달만으로는 지구적 차원의 물음을 던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 계기를 제공한 것은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의 발사였다. 《인간의 조건》이 나오기 1년 전에 소련에서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것이다. 지금도 그렇듯이 당시의 메스콤에서는 인간 이성의 최대 성과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 아렌트의 해석은 달랐다.

“인간의 아버지인 신을 거부하면서 시작되었던 근대의 인간 해방과 세속화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의 어머니 지구를 거부하는 치명적인 결과로 끝나야 하는가?” – 《인간의 조건》󰡕 78쪽.

여기에서 아렌트는 과학기술을 이용한 지구탈출을 인류 해방의 사건이 아니라 ‘지구 거부’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속화된 인간이 자신의 생존 조건인 지구를 버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그것을 ‘지구소외’라는 말로 개념화하였다( 《인간의 조건》 316쪽, 330쪽). 따라서 아렌트의 해석대로라면 1957년은 인간에 의한 지구소외의 원년이 되는 셈이다.

확실히 근대 유럽적 세계관에서 보면 지구는 인간을 구속하는 “감옥”일지 모른다(77쪽). 인간은 끊임없이 ‘진보’할 수 있다는 이상이 서구 계몽주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과학기술과 결합하여 비로소 지구탈출이라는 이상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근대적 또는 비유럽적 세계관에서 보면 지구는 인간의 ‘어머니’에 다름 아니다. 아렌트가 말한 ‘어머니 지구(Mother Earth)’는 서구의 성서 전통의 배경에서 나온 표현이다. 동아시아에서는 그것을 ‘천지(天地)’라고 불렀다.



천지(天地)와 자연(Nature)

《농본주의를 말한다》의 저자 우네 유타카(宇根豊)는 자연과 천지의 차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연과 천지는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관점이 완전히 다릅니다. 천지와 사람은 하나가 될 수 있지만, 자연과 인간은 별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천지는 사람을 감싸고 있지만, 자연은 인간의 외부에 있어서 대상화되어 있습니다. 요컨대 자연관과 천지관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명사 ‘자연’은 메이지 20년대(1887~1896)에 ‘nature’의 번역어로서 당시까지 ‘자연스럽다’라는 의미로밖에 사용되지 않던 부사의 ‘자연’이라는 표현에 새롭게 의미를 부여한 말입니다. 에도시대에는 ‘nature’에 해당하는 일본어가 없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들의 선조는 인간과 자연을 나누지 않고 인간도 자연도 포함하는 ‘천지’라는 단어밖에 사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 우네 유타카 지음, 김형수 옮김, 《농본주의를 말한다》, 녹색평론사, 2021, 62쪽.

‘자연(自然)’은 《논어》나 《맹자》에는 나오지 않는 개념이다. 《노자》나 《장자》에 등장하는 말이다. 즉 도가(道家)에서 유래하는 철학 용어이다(물론 나중에는 주자와 같은 신유학에도 수용되지만). 도가 문헌에서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다’, ‘원래 그러하다’는 의미의 술어였다. 이 말이 19세기에 서양어 nature의 번역어로 채택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서양어 nature에 해당하는 동아시아적 개념은 천지(天地)였다. 그렇다면 nature와 天地의 차이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우네 유타카는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다. “nature는 인간과 분리되지만 天地는 인간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nature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전형적인 서구 근대적 자연관을 대변한다. 그것은 인간의 거주지나 조건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자원이자 도구로서의 자연이다. 이러한 자연관이 자연소외를 낳은 것이다. 그렇다면 아렌트가 지적한 지구소외(earth alienation)는 자연소외(nature alienation)의 궁극이자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의 가장 큰 범위가 지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건을 바꾸는 인간

반면에 동아시아에서 천지는 전통적으로 인간의 조건으로 생각되어 왔다. “하늘은 덮어주고 땅은 실어준다”[천부지재天覆地載]는 유명한 말이 있듯이, 만물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햇볕과 땅에서 제공하는 곡식, 그리고 바다에서 생산하는 먹거리 등의 도움으로 생명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지는 인간과 만물의 생존 조건에 다름 아니다.

이와 같은 천지관을 윤리화하고 의례화한 것이 19세기 동학사상가 해월 최시형이다. 해월은 “천지야말로 만물의 포태(胞胎)”라고 하였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이 태아를 잉태하고 있듯이, 천지가 만물을 품으면서 길러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월에게 있어 천지는, 아렌트 식으로 말하면 “인간의 거주지”에 다름 아니다. 그것도 천연의, 유일한, 신성한 거주지이다. 다만 해월은 그것을 종교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으로까지 밀고 갔다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천지에 대한 공경과 감사의 태도를 경물(敬物)과 식고(食告)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인류세라는 시대 규정은 nature나 天地와 같은 동서양의 자연 인식을 근본적으로 무너뜨리고 있다. 인간이 자연의 영역에 침입하면서 자연의 존재 방식까지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기후변화다. 기후는 개념적으로는 천지 중에서 ‘천’에 해당한다. 따라서 동아시아적으로 말하면 기후변화는 “인간이 하늘을 바꾼 사건”이다. 이렇게 인간(anthropo)의 영향력이 커진 시대(cene)를 과학자들은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래서 인류세적 관점에 의하면 인간과 자연은 완전히 분리된 존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천지 안에 포함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천지 안에 살면서 천지를 개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 식으로 말하면 인간 세계가 자연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고, 그 변화가 다시 인간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인간 세계든 자연 세계든 ‘기후’라는 조건 없이는 살 수 없다. 인류세는 인간에게 가장 핵심적인 생존 조건 중의 하나가 ‘기후’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nature/天地에서 ‘가이아’로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가 ‘가이아(gaia)’에 주목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근대적인 nature 개념으로는 인류세적인 지구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이아’는 원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의 이름인데, 1970년대에 영국의 대기화학자 제임스 러브록이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지구의 대기를 연구하던 러브록은 1965년 어느 날, “지구가 스스로 기후와 그 구성 성분을 조절함으로써 모든 생물들에게 적합한 환경 조건을 유지시키고 있다”는 통찰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지구를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지구를 여신 ‘가이아’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러브록에 의하면, 가이아는 단일한 전체로서의 지구를 의미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Globe’로서의 지구가 아니다. 지구의 환경 조성은 지구에 사는 모든 구성원들의 합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의 구성원에는 인간은 물론이고 바다, 바위, 대기와 같은 무생물들도 포함되어 있다.

지구는 화성이나 금성과는 달리 (…) 생물들이 살기에 적합하도록 항상 스스로 환경을 조절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지구가 갖는 이런 속성은 태양계 내에서 지구가 차지하는 특별한 위치 때문이 아니라, 지표면에서 생활하는 생물체들 덕분이다. (…)

지구 생물권(biosphere)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생물체들과 대기, 해양, 암석 등 사실상 지구의 모든 존재들이 지구의 조절 작용에 함께 관여하고 있다.

– 제임스 러브록 지음, 홍욱희 옮김, 《가이아 –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 「서문」, 갈라파고스, 2018, 9쪽, 12쪽.

여기에서 ‘생물권’은, 역사학자 토인비에 의하면, 떼이야르 드 샤르뎅이 쓴 개념으로,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얇은 막(film)”을 가리킨다. 그것은 육지와 해양과 대기로 둘러싸인 막으로, 생물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거주지(habitat)이다(A.J. 토인비 지음, 강기철 옮김, 《세계사 : 인류와 어머니되는 지구》, 1983, 제2장 「생물권」, 20쪽). 따라서 아렌트가 “지구는 인간의 유일한 거주지”라고 했을 때, 이 거주지는 샤르뎅의 개념으로 말하면 ‘생물권’에 해당한다.

그래서 결국 가이아 가설에 의하면, 지구의 환경은 지구의 구성원들이, 달리 말하면 천지에 사는 만물들이, 각자 만들어 가고 있는 셈이다. 그것을 러브록은 편의상 “지구가 조절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엄밀히 말하면 “만물이 조절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만물,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모두가 지구환경을 만들어 가는 구성원이라는 점에서는 동등하기 때문이다.



가이아와 한울/하늘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에 의하면, 지구상에 거주하는 만물은 지구라는 공간에 수동적으로 살고 있는 객체가 아니다. 토마스 베리의 개념을 빌리면 객체가 아닌 ‘주체’이다. 자신들의 거주 환경과 생존 조건을 능동적으로 만들어 가는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물은 하나의 ‘행위자(agent)’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는 20세기 초에 천도교에서 제창한 ‘한울’ 개념을 연상시킨다. 한울은 종래의 ‘천지’와는 다른 동학적 ‘지구’ 내지는 천도교적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새로 고안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가이아’ 역시 종래의 지구과학적 지구와는 다른 지구를 설명하기 위해 소환된 개념이다.

다만 한울과 가이아가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는 좀 더 면밀히 검토해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한울’의 ‘한’(大+一) 개념은 ‘전체성’으로 이해될 소지가 있다. 반면에 가이아는, 「가이아는 전체성의 신이 아니다(Gaia is not a totality of God)」(2017)는 라투르의 논문 제목이 말해주듯이, 전체성보다는 ‘개체성’이 강조되는 개념이다.

반면에 천도교에서 한울을 ‘자신(自神)’이나 ‘자천(自天)’, 즉 “자기 안의 신”이나 “자기 안의 하늘”이라고 설명하는 점을 감안하면, 한울이 반드시 전체성을 지칭하는 개념이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각 개체들의 독자성과 고유성을 강조하고 있는 느낌도 든다. 그런 점에서는 “만물이 하늘님이다”는 해월의 하늘철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이든 한울이든 종교적 뉘앙스가 강한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영성의 다른 이름이고 경건의 충만이다. 그래서 해월에게 있어 만물은 하늘같이 신성한 대상으로 다가온다. 반면에 라투르는 가이아를 종교적으로 이해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이 점은 그가 가이아를 “자연에 대한 가장 궁극적인 세속적 이름”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는 점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Latour, Facing Gaia, Ch.3). 이에 대해 해월의 하늘은 “자연에 대한 가장 궁극적인 신성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라투르가 가이아 존재론을 말하고 있다면, 해월은 가이아 신학론까지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이아다

가이아를 종교적으로 이해하든 세속적으로 해석하든, 러브록의 가이아 개념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이아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가이아는 각각의 행위 주체들의 총체를 말하는데, 그 행위 주체들이 지구환경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우리 모두가 가이아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인류세는 우리에게 ‘인간 행위’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주었다. 인간의 산업활동이 지구의 기후를 바꾸기 시작한 시대가 인류세라면, 그리고 그 변화가 인간의 조건을 위협하고 있다면, 인간의 행위 하나하나가 미치는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사회의 영역을 넘어서 지구라는 행성적 차원에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작게는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에서, 크게는 핵폭탄의 버튼을 누르는 행위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가 지구환경에 영향을 주고 있다면 어찌 신중히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敬行]! 일찍이 한나 아렌트가, 그리고 최근에는 라투르가 ‘행위’ 개념에 천착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인류세란 결국 인간 행위의 ‘지구성(globality)’ 내지는 ‘행성성(planetarity)’에 주목한 시대이자, 인간을 ‘지구행위자’, 즉 “지구환경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행위자(planetary agent)”로 규정한 시대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인류세와 가이아, 가이아와 인류세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인류세라는 시대 인식은 가이아의 관점에서 인간을 다시 생각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마치 해월이 “하늘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게 서로가 서로를 길러주는 기화(氣化)의 작용이다”고 했듯이, 가이아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야말로 기화의 작용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다만 그 기화가 대기의 변화, 즉 ‘기후변화’라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진 출처 : https://ar.pinterest.com/pin/763078730613013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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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편집인. 지구지역학 연구자. 서강대와 와세다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였고,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한국 근대의 탄생'과 '개벽파선언'(이병한과 공저),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을 저술하였다. 20∼30대에는 노장사상에 끌려 중국철학을 공부하였고, 40대부터는 한국학에 눈을 떠 동학과 개벽사상을 연구하였다. 최근에는 1990년대부터 서양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지구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일관된 문제의식은 ‘근대성’이다. 그것도 서구적 근대성이 아닌 비서구적 근대성이다. 동학과 개벽은 한국적 근대성에 대한 관심의 일환이고, 지구인문학은 ‘근대성에서 지구성으로’의 전환을 고민하고 있다. 양자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지구지역학’을 사용하고 있다. 동학이라는 한국학은 좁게는 지역학, 넓게는 지구학이라는 두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장차 개화학과 개벽학이 어우러진 한국 근대사상사를 재구성하고, 토착적 근대와 지구인문학을 주제로 하는 총서를 기획할 계획이다.

[김조년] 스스로 제 발로 서서, 그러나 또 함께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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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스스로 제 발로 서서, 그러나 또 함께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22.05.17 13:36  수정 2022.05.17 13:4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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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대 명예교수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 놀이 할 사람 여기여기 붙어라’ 하며 놀이동무들을 모으던 아주 좋은 기운은 또 다른 방향으로 틀어져 아주 나쁜 기운으로 작용할 때도 참 많다. 아마 모든 사람은 어렸을 때나, 학교에 다닐 때, 또는 사회생활을 할 때 이런 방법으로 자기 패를 모으고 힘을 자랑하던 분위기가 있던 것을 많이 경험하였을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든 힘이 센 쪽, 즉 공부를 잘하든가, 운동을 잘하든가, 그림을 잘 그리고 노래를 잘하든가, 글을 잘 쓰거나 말을 잘하든가 아니면 특별히 예쁘든가 멋지게 생겼다든가, 그렇지 않지만 어떤 매력으로 사람을 끌어 모으는 재주가 있든가 할 때는 그런 방법으로 사람을 끌어모으는 데 별로 어려움이 없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렇게 잘난 힘으로 사람을 모아 자기편을 만들고 거기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따돌리고 골리고 어렵게 만들던 일들도 매우 많았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와 반대로 약하든가 좀 남에게 떨어지든가 하는 사람들은 자기편으로 사람을 끌어모으려고 애를 써보아도 잘 안 되어 언제나 이리저리 밀리고 채이던 일들이 있었던 것도 기억할 것이다. 이런 모습은 온갖 곳에 다 있는 듯이 보인다. 특히 정치계나 국제관계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노골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평화로운 시대는 덜 하지만, 전쟁상황이나 어떤 위기상황이 왔을 때는 아주 분명하게 이런 힘모으기, 패거리짓기가 노골화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아주 복잡한 역학관계가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금방 안다. 그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고 나토가 개입하면서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렵게 되어 간다. 한 지점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런 전쟁상황이 펼쳐진 데는 아주 복잡한 이유와 계산이 있었겠지만, 그것이 진전되면서 문제는 간단히 되지 않고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죽고, 삶의 터전을 떠나서 피난하고, 상당히 많은 도시와 건물과 시설들이 파괴되고 어마어마한 것들이 잿더미로 변한다. 고도로 개발된 첨단무기들이 동원된다. 이렇게 하여 매일 매순간 파괴되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는 일들이 벌어지지만, 이렇게 되면 될수록 더 힘을 확장하고 돈을 벌고 윤택해지는 세력이 있다. 군수산업이고 그것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기업과 나라들이다. 충돌지점은 파괴되고 한없이 괴로움을 당하지만, 그곳에 강력한 무기를 보내고 싸움을 부추기는 세력은 언제나 이득을 본다. 그러나 혼자서 그 일을 감당하기에는 언제나 부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온갖 명분을 내세워 다른 세력들이 그 전쟁에 참여하기를 독려한다. 여기에 두 세력들은 온 세계의 다른 세계들을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할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미ㆍ일ㆍ호주ㆍ인도가 참여하는 동맹체인 쿼드(Quad)에 참석하는 길에 한국에 와서 윤석열 대통령과 만난다. 나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걱정한다. 취임한지 열흘 남짓에, 아직 업무파악이나 국제정세에 대한 판단과 감각이 세워지지 않아 분명한 방향이 설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민감한 시기에 세계에서 강력한 나라의 대통령을 만난다는 것은 큰 부담이다. 특히 현대역사에서, 한ㆍ미 사이는 동맹관계를 유지한다고 하지만, 족속관계라고 할만큼 기울어진 상황이었는데, 지금 만나는 것은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일정을 거부하거나 미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매우 불편한 사실관계의 이야기들이 오고갈 것이 분명하다. 이런 것들은 언제나 힘의 역학관계다. 국익이라는 것을 바탕에 깔고 있지만, 명분은 항상 평화롭고 평등한 국제질서를 귀하게 한다는 것을 내세운다. 이러한 때 약한 세력은 자주 울며 겨자 먹는 식으로 불리한 대화에 참여하고 이끌려 간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번에는 많이 듣고,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하고 다음 만남을 약속하는 정도로 하되, 무엇인가를 쉽게 결정하지 않는 만남이 되면 좋겠다.


 
물론 국제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합종연횡을 반복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독자노선을 당당하게 걸어야 하는 것도 상식이다. 언론에도 가끔 나오고 실제로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한국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군사참여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고급살상무기를 직접이든 간접으로든 지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예를 들어 한국산 고급 살상무기를 직접 지원하기 곤란하면 미국을 통하여 지원하도록 미국이 중간역할을 하겠다는 식의 꼼수를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단 말이다. 지금은 과학과 기술이 서로 얽혀 있는 때이기 때문에, 어느 첨단무기가 어느 나라 어느 블록의 기술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뒤섞여 있다. 수없이 복잡한 기술제휴를 통하여 만들어진 것들이다. 다시 말하면 러시아의 기술협력이나 지원을 통하여 만들어진 무기를 우크라이나로 보내서 그 무기로 러시아를 공격하는 데 사용하게 된다고 할 때 얼마나 더 복잡하고 놀라울 것인가?

그 대신 아주 고급스런 평화체계를 이루는데 노력하면 좋겠다. 쿼드(Quad)에는 참여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인도ㆍ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인 IPEF에 가입한다면, 환태평양경제동반자 협정인 CPTPP에도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언제나 노력했듯이 한ㆍ중ㆍ러ㆍ일ㆍ몽ㆍ북한을 엮는 동북아시아 평화와 문화 그리고 경제를 긴밀히 교류하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좋겠다. 상대방을 고립시키고 누르기 위한 공동체를 꾸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고 화해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공동체를 꾸리는 데 노력하면 좋겠다. 힘의 관계는 종속관계일 가능성이 크지만, 평화관계는 대등한 자리에 서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어느 세력과든 적대관계를 만들 일은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미국에 끌려가는 대화가 없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