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3

"그분은 제 소리를 냈던 사람입니다" ①-2 윤정현 신부 인터뷰

"그분은 제 소리를 냈던 사람입니다" - 아주경제


"그분은 제 소리를 냈던 사람입니다"
황호택 논설고문·서울시립대 초빙교수
입력 : 2021-01-13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 ① 윤정현 신부 <上>






윤정현 신부는 인터뷰에서 "다석은 동양철학과 기독교 사상을 회통했던 큰 스승"이라고 말했다. [사진=유수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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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낳은 위대한 종교 철학자 다석(多夕) 류영모(1890~1981)는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후반에 세상을 떠났다. 지금 지구는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근본주의 신앙으로 인한 전쟁과 살육이 그치지 않는다. 한국같은 다원주의 종교국가에서도 종교간 갈등이 심한 편이다. 세계의 한쪽에서는 탈(脫)종교 현상이 번지고, 다른 쪽에서는 근본주의 종교가 세계 평화를 깨트린다. 다석이 서구의 기독교 정신과 동양 전래의 유불선(儒佛仙) 사상을 회통(會通)해 풀어낸 다원주의 종교철학은 종교적 혼돈의 시대 21세기에 더욱 빛을 발한다. 다석에게서 직접 배운 제자, 다석을 연구한 학자들을 찾아 큰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인터뷰 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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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현 신부(대한성공회)는 한국이 낳은 위대한 종교철학자 류영모 연구로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 제목은 ‘없이 계시는 하느님, 절대자에 대한 류영모의 이해’. 그런데 그보다 먼저 류영모 연구로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있었다. 제1호 ‘류영모 박사’는 정통 기독교 재단 집안 출신이어서 비정통 기독교인을 연구해 세계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류영모 연구로는 두 번째로 박사학위를 받은 윤 신부의 이름이 더 빛이 나게 됐다.
코로나가 맹위를 떨치던 연말 9인승 카니발을 타고 윤 신부가 사는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마을을 찾아갔다. 그는 2015년 2월 청주교회의 사제직을 내려놓고 고향인 전북 고창으로 왔다. 윤 신부가 태어난 마을은 그가 지금 거주하는 반암리에서 10km가량 떨어져 있다. 신라왕릉보다도 큰 마한의 봉덕리 고분군이 있는 마을이다. 인근에는 청동기 시대의 유적인 고인돌이 500여 기나 분포해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성공회 사제는 노후 복지가 가톨릭 사제만 못한 것 같다. 연금도 없고 거처도 제공되지 않는다. 자력으로 여생을 꾸려야 한다. 그는 봉덕리로 가고 싶었다. 그런데 왜 고인돌 마을로 가지 않았을까. 나는 처음에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요한복음 4장 44절)는 구절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집사람이 여성 쉼터를 하는데 전세 계약을 하고 2년 지나면 주민들이 싫어해 집주인이 재계약을 안 해줍니다. 동네 집값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10~20명이 거주하자면 큰 집이 필요하고 이사 다니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20년 동안 열댓 번 옮겼을 겁니다.”

천자문 거꾸로 외운 '3대 천재'로 소문

윤 신부의 아내 김미령 씨는 서울에서 성매매 여성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미혼모 여성의 자녀를 돌보는 일을 한다. 미혼모 가운데는 여고생들도 있다. 미혼모가 아이를 낳고 세상 속으로 숨거나 학교로 돌아가면 아이는 입양될 때까지 쉼터에서 돌본다. 출산율이 1.0 밑으로 내려간 나라에서 이런 아이들을 잘 돌봐서 훌륭하게 키워야 할 것이다. 아버지를 모르니 모두 새로운 성씨와 본관을 만들어준다. 성씨의 시조가 되는 아이들이다.

-신부로 사목을 하다가 영국 버밍엄 대학에 유학 가 다석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는데요. 왜 다석이었습니까?

“내가 성공회 사제라서 영국교회의 장학금을 받고 갔습니다. 영국 버밍엄에서 박사학위를 하자면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창조적인 걸 만들어내기도 쉽지 않고, 영국의 사상이나 철학을 비평할 수 있으려면 몇 십 년 공부해야 하는데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요.
그런데 다석의 제자인 박영호 선생이 1996년도부터 스승에 대해 문화일보에 연재한 걸 책으로 펴냈습니다. 내가 신학교에서 접하지 못한 것이 가득했습니다. 영국에서 배우면서 창조적인 방법론을 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고민하다가 종교간 대화에 착안해 영국의 존 힉이라는 학자와 류영모를 비교 분석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기독교 밖의 기독교인 다석 류영모

-다석은 전통적인 유불선 종교사상으로 기독교를 바라보고, 다시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동양의 유불선을 회통하여 다원주의 종교철학을 형성했는데요.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다석에게는 기독교와 유교와 불교, 노장철학 중에 어느 것이 먼저였습니까?

“그분의 삶 자체가 종교 다원주의의 토대가 되었다고 봅니다. 그 당시 한국의 지식인들은 불교적 바탕에 노장사상 같은 것들을 기본적으로 접하고 살았습니다. 류영모는 어렸을 때부터 천자문을 깨치고, 통감과 사서를 공부했습니다. 그 당시에 다석은 이광수 최남선과 함께 3대 천재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다석은 천자문을 거꾸로도 외웠습니다. 그 정도로 머리가 좋으신 분입니다. 동양 고전을 완전히 이해한 상태에서 1900년대 우리나라가 국운이 기울고 희망이 없을 때 ‘대한제국이 왜 멸망의 길로 가는가’ ‘대안은 무엇일까’하고 고민하다가 YMCA에서 강연을 듣고 기독교에 심취했습니다. 안창호 윤치호 서재필 선생같이 쟁쟁한 분들이 YMCA에서 강연을 했지요.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열다섯 살 때인 1905년에 기독교인이 됐습니다. 그해 종로 5가에 있는 연동교회를 나가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경신학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기독교를 통해 일찍 서양문물을 접하게 된 겁니다.”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비교종교학 명예교수 오강남은 저서 <예수는 없다>에서 한국에 온 선교사 대부분은 중국 일본에 간 선교사와 달리 미국 남부에서 온 근본주의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기술한다. 한국 교회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성경을 일자일획 가감 없이 문자 그대로 믿고,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기독교 배타주의 문화를 근본주의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여왔다는 것이다. 이런 기독교 근본주의 신앙은 미국과 미국 선교사의 영향을 받은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나라에서만 서식하고 있을 뿐 서방 유럽 같은 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현상이라고 오 교수는 말했다.
다석은 오산학교에서 춘원이 빌려준 일본어판 톨스토이 전집을 탐독했다. 톨스토이는 4대 복음서를 간추려 ‘요약복음서’를 펴냈는데 동정녀로부터 예수가 탄생한 이야기나 예수의 부활을 빼버렸다. 류영모의 서가에는 톨스토이에 관한 책들이 가장 많았다. 박영호는 다석이 오산학교에서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 비정통 신앙으로 전향했다고 ‘다석전기’에서 결론을 내린다.

-오 교수의 견해대로 유불선 문화에 배타적인 선교사들의 근본주의적 설교가 류영모의 사고에 점차 맞지 않았다고 봐야 하나요?

“기독교 선교사들이 편협한 사고에 젖어 있고 일부만 가르친다고 봤죠. 남의 얘기를 앵무새처럼 전달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진정한 사상가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나 사상을 완전히 소화해서 제소리를 내야 한다고 다석은 말했습니다. 다석은 ‘불경도 먹고, 유교 경전도 먹고, 모든 걸 먹는 거지’라며 자신의 위장은 그 어떤 것도 소화시킬 수 있는 철벽위장이어서 완전히 소화해 내 자신의 소리를 낸다고 했습니다. 다석 류영모 사상 중 중요한 부분 하나가 ‘제소리 내기’입니다.

다석, 오산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敎學相長

-오산학교에 가르치러 가서 배워온 셈이군요. 춘원 말고 다석에게 영향을 준 분이 또 있습니까?

“다석은 오산학교를 기독교 학교로 만들었습니다. 거기서 이광수 여준 신채호 선생을 만났죠. 다석이 오산학교에서 기독교를 열심히 전도하니까 노장 사상에 밝은 여준이 ‘성경만 보지 말고 도덕경 천부경도 읽어보고 동양 고전 공부를 해보라’고 권유했지요. 여준 선생은 기독교가 한쪽으로 치우쳐서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류영모 선생도 초기에는 그런 면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준 선생이 다석에게 다양한 책을 읽고 사고를 넓게 가지라고 권했습니다.”

-다석의 삶을 보면 목가적인 생활을 추구한다든가, 죽을 날을 정해놓고 가출을 한다든가, 톨스토이 따라 하기가 있었다고 하면 다석에 대한 결례가 될까요?

“톨스토이를 닮으려고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대목이 있습니다. 다석 사상에서 한 축은 마하트마 간디의 영향을 받았고, 다른 축은 톨스토이, 그리고 헨리 소로 등 그 당시 지성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

-다석에게 영향을 준 간디 정신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간디의 평화사상이라든가, 다원적인 종교사상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인도는 영국 식민지로서 영국 교회가 많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간디도 영국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는 ‘왜 교회에 나가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영국인들이 가르치는 교회는 싫다. 하지만 예수나 성서는 좋아한다’고 답했습니다. 다석도 같은 입장이었죠. 서구 선교사들이 전해주는 교회는 싫지만 예수나 성서는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새뮤얼 헌팅턴은 이슬람교의 호전성을 지적하며 “이슬람의 국경선은 피에 젖어 있다”는 말을 했다. 이슬람국가(IS)가 벌인 피의 살육전을 보더라도 헌팅턴의 지적을 완전히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경향이 강하다.

-다석의 종교다원주의가 종교간 화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나라 개신교는 대부분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교파가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다석 사상을 이단 또는 비정통이라며 용납하지 않습니다. 다석은 자신이 정통 신앙주의자가 아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을 범신론(汎神論)이라고 말해도 된다고 했지요. 하지만 스스로는 범재신론(汎在神論)자라고 말했습니다. 범신론은 ‘나는 나무다‘ ’나는 신이다’라는 식으로 불교 신론(神論)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나무 안에 내가 있고, 내가 나무 안에 있다’ ‘나는 하느님 안에 있다’고 말하면 범재신론이라고 합니다. 범재신론은 ‘나는...이다’라는 범신론을 넘어설 수 있는 논리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단이라도 좋다. 나는 내 소리를 낼 뿐"이라고 다석은 말했습니다. 내가 깨닫고 느낀 사상을, 우주와 하나가 되어 내 소리를 낸다고 말했습니다. 생각하는 곳에 하느님이 있다고 다석이 말했지요.”

유태인들 선민사상을 한국 기독교 그대로 받아들여

-성공회 사제로서 교회를 이끌면서 다른 종교나 교파와 갈등을 겪기도 했을 텐데요.

“장례를 집전할 때 보면 온갖 종교 사람들이 다 모입니다. 고인의 형제자매들 간에 기독교식으로 치러야 할지, 유교식으로 치러야 할지 논란이 벌어질 때도 있습니다. 사람이 돌아가셨으면 하느님이 구원을 결정하실 일이지, 장례를 어떻게 치르느냐에 따라서 지옥 갈 사람이 천당 가고, 천당 갈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성공회식을 고집하지 않고 유가족들이 하자는 대로 합니다. 성공회식으로 하더라도 상여 메고 나가면서 동네 풍습을 따를 때도 있습니다. 매장할 때 성수를 뿌리고 흙을 덮기도 하고, 봉분할 때 찬송가도 부르고… 며느리가 기독교 신자고 시어머니가 불교신자일 경우 싸움이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런 갈등 현장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 하느님은 과연 어떤 분이실까’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다석을 공부하면서 하느님은 종교 위에 계신 분이지, 종교 안에 계신 분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라인홀드 니버가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을 썼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리스도는 문화 위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문화 안에 또는 문화 아래 또는 어떤 철학과 사상, 이런 것에 갇힐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유태교 문화 속에서만 역사하는 분이 아니고, 우리 문화에서도, 중국 문화에서도 역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유태인들은 민족주의적 선민사상, 유대신앙 안에서만 하느님이 역사한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런 편협한 믿음을 한국 기독교가 받아들였습니다."

-다석이 톨스토이의 신앙에 가깝고 종교적 다원주의에 기우신 분인데… 사도신경이 아니라 산상수훈의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했더군요.

“예수가 성경책을 쓴 것이 아니고 말씀만 전하셨습니다. 베드로, 마태오, 루가가 각기 흩어져서 ‘우리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가르쳤습니다. 각각 자신의 공동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100년이 지나 책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가 사람인지 신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후대의 교부들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만들고 신자들에게 최소한의 이러한 기본 교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교리학습을 위해 만든 것이 사도신경이고 교리며 신념체계입니다.”



윤 신부가 황호택 논설고문(왼쪽)과 고창 반암마을 인월재를 거닐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유수민 인턴기자]

-마태복음에 나오는 산상수훈은 사도신경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본래 말씀이고 사도신경은 이를 해석해서 교리로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념체계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을 잘 섬기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아주 단순한 가르침입니다. 이를 설명하고 해석하다 보니 철학, 사상이 붙고 교리도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스 철학이 거기 첨부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 때에 신학대전이라는 교리 신학 책이 만들어졌습니다. 산 위의 눈 한 뭉치가 굴러 내려오면서 커다란 눈덩이가 되면서 그 속에는 돌과 티끌, 온갖 것이 들어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단순한 진리에 잡다한 이야기와 교리, 신념체계가 반영된 것입니다.
다석은 교리적인 것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교리적인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삶이 중요하지 교리가 중요한 건 아니죠. 게임기 안에 여러 프로그램을 넣으면 우리가 조종하는 대로 메트릭스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와 같이 신념, 교리 체계라는 종교 안에 신자들이 들어가 있으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교리적인 사람이 됩니다. 제도 교회, 제도 신앙 안에 맴도는 것, 교회 안의 노예가 되는 것이죠.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념체계 안에서 만족하는 것에 그치게 되지요. 그래서 제도종교는 현상과 신념 체계의 유지를 중요하게 여기게 됩니다. 다석은 이건 아니라고 봤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말씀, 예수님 말씀을 삶으로 사는 것이죠. 동정녀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교리 생활에서는 그것이 중요하고 안 지키면 이단이라고 취급합니다. 옛날에는 이단으로 몰아 퇴출시키거나 화형시키고 했는데 종교가 해서는 안될 짓을 한 것이죠.”

-정통 신앙에서는 동정녀 마리아에서 예수가 태어났다는 것과 예수의 부활을 믿느냐 아니냐로 신자와 비신자를 가른다고 하는데, 그런 입장에서는 다석이나 톨스토이는 비정통인가요?

”그렇습니다. 정통주의의 교리 체계 즉 사도신경 신념체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이냐, 예수를 해석한 제도 교회의 가르침이냐의 차이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있고 불교가 따로 있는 것처럼. 예수님 하느님의 말씀이 있고 제도교회가 있는데 꼭 일치하지는 않는 거지요. 어떤 면에서는 제도교회의 재산 축적, 성범죄 등은 예수님과는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

-’산상수훈’의 핵심사상은 무엇이죠?

“하느님 나라죠. 하느님 나라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Kingdom of god)와 하늘나라(Kingdom of heaven). 하늘나라는 죽어서 갈 수 있는 곳이라면 하느님의 나라는 내가 사는 세상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면 내 안에 이미 하느님 나라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면 이미 하느님 나라가 실현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그리스도교는 대개 하늘나라를 많이 가르칩니다.”

(인터뷰어 황호택 논설고문·정리 박하늘 인턴기자)


<윤정현 신부 약력>

-1955년 출생
-1976년 중앙정보부에 체포돼 고문을 받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6월 자격정지 1년 6월
-1982년 연세대 신학과 졸업
-1984년 성공회 사목신학연구원 졸업
-1986년 성공회 부제 서품 후 춘천교회 사목
-1987년 사제서품
-1990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선교훈련원 간사, 윤석양 이병의 보안사 민간인 사찰 파일 폭로 지원
-1993년 청원 묵방교회 관할사제
-1995년 서강대 대학원 입학
-1996년 영국유학
-2000년 정읍교회 관할사제
-2003년 영국 버밍험 대학에서 유영모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
-2004년 대전주교좌성당 주임사제
-2004년 성공회대 신학전문대학 겸임교수
-2008년 22차 세계철학대회에서 “Non-Existent Existing God” 이라는 제목으로 다석 유영모의 신관(神觀) 발표.
-2010년 청주수동교회 관할사제
-2015년 신부 정년(65)을 채우지 않고 고창 반암마을로 귀촌해 수도 및 연구 활동



윤정현 신부의 인터뷰를 영상으로 확인하려면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https://youtu.be/kmeuBoY21UU


"나를 섬기면 종교된다" 다석이 경계
황호택 논설고문·서울시립대 초빙교수
입력 : 2021-01-20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② 윤정현 성공회 신부 <下>

윤 신부와 나는 1955년생 양띠 갑장이다.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교과서(국정)를 읽고 박종철 사건을 비롯해 동세대의 경험을 공유했다는 이야기다. 나이를 알고 나니 또래집단(cohort) 의식이 생겼다. 윤 신부가 차를 따를 동안에 서울서 갖고 간 내 저서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항쟁’을 내놓았다.
내가 “제가 3년 전에 쓴 책인데요. 박종철 탐사보도가 6월 항쟁의 불꽃에 기름을 부었다는 관점에서 썼습니다”라고 하자 그는 “6월항쟁이면 제가 사제 서품받았을 때인데…”라며 책을 들춰봤다. 나중에 보니 “없이 계시는 하나님” 박사학위 논문 첫머리의 ‘연구동기와 목적’ 주석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언급돼 있었다.
그는 대학입시에서 공과대학을 지원했으나 실패하고 재수 학원에 다니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대화를 하던 중 박정희 대통령과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을 했다. 참석자 중 한 사람이 중앙정보부에 고자질하는 바람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얽혀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징역을 산 전과 때문에 공대를 나와 가지고는 취직이 어렵다는 판단이 들어 연세대 신학과에 들어갔다.


독재정권 시대에 민주화 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른 윤정현 신부가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항쟁> 책을 보고 있다. [사진=유수민 인턴기자]


춘천교회 부제로 일하면서는 강원대 한림대 학생들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춘천에는 군인 가족과 보수적인 이북 출신 주민이 많이 살았다. 누군가 교회 간판을 떼어가기도 했고 취객이 밤중에 교회에 들어와 “누가 힘이 센지 윤 신부 나와 한번 겨뤄보자”고 소리 지르는 일도 있었다. 1990년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현 NCCK)에 파송돼 선교훈련원 간사로 일했다. 그 무렵 윤석양 이병이 KNCC 사무실에서 보안사 민간인 사찰 문건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윤 신부는 기자회견을 마친 윤 이병을 경찰의 감시를 뚫고 밖으로 빼돌리는 일을 성공시켰다.
이런 삶의 이력을 알고 나서 박종철 책을 선물로 챙긴 선견지명(先見之明)에 잠시 흐뭇했다. 신부도 족보를 따지는지 그의 책꽂이에는 ‘파평윤(尹)씨 참의공파보(參議公派譜)’같은 책이 꽂혀 있었다.

-하늘나라에 가면 몰라도 이 세상에선 먹는 것이 중요한데요. 하루에 몇끼 식사를 하십니까?

”저도 한때는 다석 선생을 닮기 위해 하루 한 끼를 먹었습니다. 다석 선생은 하루 한 끼를 저녁 무렵에 드셨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사목을 하다보니 신도 집에 초대받으면 불편했습니다. 초대받았는데 안 먹을 수도 없고요. 여기서는 산에서 육체적 노동을 하다 배가 고프면 먹고, 고프지 않으면 안 먹습니다. 하루에 한 끼 먹을 때도 있고, 두 끼 먹을 때도 있습니다.

-하루 세 끼를 규칙적으로 먹어야 건강하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저는 배꼽시계에 따라 먹습니다. 아침은 먹지 않습니다. 1983년 정도부터 안 먹었습니다.”
-옛날에 한국 사람들도 겨울에는 해가 짧고 식량이 부족하니까 1일 2식을 했습니다.
“서양도 1일 3식한 역사가 오래되지 않아요. 중세에는 먹을 것이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 한끼도 했습니다. 아침에는 아주 간단하게 하고 저녁을 정찬으로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잉여농산물이 많으니까 잘 먹는 거지요. 서양에서도 중세 때는 수도원에 먹을 것이 없어서 하루에 한 끼를 먹었다더군요. 그래서 배고픔을 잊게 하려고 3시간마다 기도를 했습니다. 하루에 아홉 번. 그 정도로 서구도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

-이 집에서 거주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계속 고영재(顧影齋)에 있다가 작년 봄부터 옮겨왔습니다. “
귀향 초기에 윤 신부는 반암골 산기슭에 컨테이너를 들여놓고 살았다. 쇠로 된 집은 여름엔 달구어진 깡통 같았고 겨울엔 냉장고로 변했다. 그래서 컨테이너 바깥 쪽으로 흙벽을 쌓고 지붕을 얹고 골방을 만들어 붙였다. 철제컨테이너와 흙벽의 복합건물이다. 식수는 계곡물을 끌어다 탱크에 받아 썼다.
고영재라는 현판은 청주의 운당 이쾌동 선생이 써준 글씨다. ‘고영’은 그림자를 돌아본다는 뜻이다. 책을 읽을 때 활자 뒤에 숨은 이야기를 상상하고, 차를 마시면서 사물의 보이지 않는 본질을 논한다는 의미다.



선석농원의 유산양들. 왼쪽이 윤정현 신부.[사진=유수민 인턴기자]

고영재 옆 선석농원에서는 개들을 사육하고 젖을 짜는 유(乳)산양을 몇 마리 기른다. 이름은 그럴듯하지만 밭 두어 뙈기가 전부다. 반암골은 예부터 선인취와혈(仙人醉臥穴)이라고 불렸다. 선인들이 내려와 취해 누운 골짜기라는 뜻이다. 여기서 ‘선’을 따고, 그가 평생 연구하는 유영모의 아호인 다석(多夕)에서 ‘석’을 가져와 선석이라 지었다. 산양고기는 먹지 않고 새끼를 낳고 죽으면 그냥 묻어준다. 정이 들어서 먹을 수가 없다.
아내가 양육하던 성씨의 시조들이 하나 둘 오면서 추위를 피할 곳을 찾게 됐다. 고영재에서 1.5km 떨어진 반암 마을에 건설업자가 지은 집 한 채가 법적 분쟁에 휘말려 귀곡산장처럼 잡초가 우거진 채 11년째 비어 있었다. 부도가 나서 경매에 나온 것을 육촌이 덜컥 낙찰 받으니 집안싸움이 벌어졌다. 윤신부가 대출을 껴안고 사들여 수리하고 페인트칠 하니까 살 만해졌다.
이 집의 당호를 인월재(引月齋)라 지었다. 덕산으로 솟아오르는 달을 끌어들이는 집이다. 내가 찾아갔을 때 마당에서 바둑이(스피츠) 여덟 마리가 뛰어 놀았다. 무척 순한 종자다. 윤 신부가 한 마리 가져가라고 했지만 나는 집에서 고양이를 기른다. ‘달형제’라는 분이 쉼터의 어린이를 안고 있었다. 달형제는 매년 산티아고 순례길 300km를 맨발로 걷는 사람이다.

-인월재, 고영재… 한문 이름을 좋아하는군요. 다석 연구도 한문을 모르면 하기 어려웠겠지요. 언제 한문 공부를 했습니까?

“80년도에 광주 항쟁 때 계엄령으로 학교가 문을 다 닫았잖아요. 그 때 피신해있다가 집에 내려와 서당에서 공부했어요. 그 뒤로는 연세대 이가원(李家源) 교수 반에서 한문강의를 들었습니다. 학부 졸업 후에도 계속 혼자서 공부를 했지요.”

인간이자 사상가 예수를 후대인이 신격화

-고창에 영성공동체를 설립할 계획이라고 들었는데요.

“여기서 한 6km 떨어져 있어요. 이길재 선생이 은퇴해 고창군 부안면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분이 선대로부터 받은 땅이 십 만평 있는데 4년 전부터 같이 재단법인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류영모 사상, 광주 동광원을 설립한 ‘맨발의 성인’ 이현필의 가난 정신, 동학혁명의 성지니까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이어받아 함께 농사도 짓고, 생활수도회와 같은 영성공동체를 만드는 작업을 했거든요. 재단법인을 설립하려면 기본자산이 20억 원이 있어야 한다는데 그 땅이 공시지가로 그렇게 안돼서 잠깐 보류하고 있는 거예요.”
반암리에는 동암 백남운의 생가가 보존돼 있다. 연희전문 교수였는데 월북해 북한에서 초대 교육상을 했고 최고인민회의(국회) 의장도 지냈다.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여기에 남아 있는 후손들은 박해를 받아 어렵게 살았다. 반암 마을에는 인촌 김성수 전 부통령의 할머니 묘와 제각(祭閣)도 있다. 윤 신부는 이곳이 정감록 비결에 나오는 십승지지(十勝之地)여서 묘가 많다고 말했다.

-다석이 훈민정음이나 한글에 대해서도 공부를 많이 했더군요. 그런데 한문을 번역한 순 우리말이 더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없이 계시는 하느님’을 쉽게 설명해주시죠.

”다석은 한글 가지고 놀이를 하셨습니다. 글자를 합성해서 그림문자 같은 걸 만드셨습니다. 여러 한글 자모음 조합을 통해 입체감 있게 강의안 한 장에 그려넣었지요. 그걸 가지고 두, 세 시간 강의를 하셨습니다. 어렵지만 반복해서 읽다 보면 이해가 됩니다.
다석은 아래아(ㆍ) 반치음(ㅿ) 옛이응(ㆁ) 여린히읗(ㆆ)이 없어진 걸 아쉬워했습니다. 우리가 옛한글 중에 쓰지 않는 4가지를 사용하면 세계 어느 나라 소리도 다 표현할 수 있는 문자입니다. 네모와 세모와 원 안에 한글 자모가 다 들어갑니다. 천지인 사상이 그대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도 가온찍기 한 사람이라고 해석합니다. 네모에 열 십자를 해서 가온을 찍습니다. 인간 예수가 하느님과 소통하는 가온찍기를 해서 말씀을 전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간디도 그냥 간디인데 ‘마하트마’는 위대하다고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인간 예수인데 사람들이 존경한 나머지 예수를 높이 하느님 자리에 올려놓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예수가 된 것이죠. 그러한 그리스도를 류영모는 가온찍기라는 말로 다 표현합니다.
서양의 신론과 동양의 신론에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은 눈에 보이는 것에, 동양은 ‘무(無) 허(虛) 공(空)’에 관심이 큽니다. 도덕경이나 불교의 공사상 노장사상의 허, 무 사상은 비(非)존재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서양은 존재가 아닌 것은 그냥 물음표로 남깁니다. 다석 류영모에서는 유무(有無) 상통(相通)합니다. 하나의 존재에서 있음(有)과 없음(無)이 공존하고 그 자리에 절대자가 계시다고 한 것이죠. 그것이 동양적인 개념입니다. 하느님은 존재라는 개념에서 보이고 느껴져야 하는데 하느님은 영적인 존재이므로 안 보입니다. 그럼 비존재인가? 무인가? 그건 아닙니다. 영적으로 계십니다. 유무 상통하기 때문에 있으면서도 없고, 없다고 하자니 영적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신의 개념을 유무상통으로 ‘없이 계신다’고 설명한 것이죠. 유와 무, 존재와 비존재의 사상을 통틀어서 설명해냈습니다.”

함석헌, 다석의 '씨알' 대신 옛글 쓴 속사정

-다석의 조어(造語) 가운데 씨알이라는 말이 많이 쓰이는데 씨알 사상의 핵심은 무엇이죠? 류영모와 함석헌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해주면 좋겠습니다.

“다석이 1959년 도덕경을 순 우리말로 완역했는데 백성 민(民)자를 그때 ‘씨알’로 번역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다석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씨알’이라는 말을 좋아했습니다. 그때 다석은 함석헌 선생의 인기에 가려져 있는 분이었습니다. 1970년대에 우리나라 유신헌법과 억압정치 상황에서 함 선생이 권위주의 정치에 저항하는 운동을 했습니다. 그때 냈던 잡지가 ‘씨알의 소리’인데, 백성들의 소리, 스스로 외치는 소리라는 뜻이죠. 70년대 ‘씨알의 소리’를 낼 때는 류영모 선생과는 결별한 상태였습니다. 60년대 초반까지는 류영모 선생과 함석헌 선생이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각별했습니다. 그즈음 함 선생의 여자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그 뒤로 다석은 함석헌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함 선생은 다석을 끝까지 모셨습니다. 다석이 내다보지도 않는데, 집에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나의 해석인데 류영모 선생이 ‘씨알’을 쓰지 말라고 하기 때문에 함 선생은 ‘알'을 옛글 '아래아 알'로 쓴 것이죠.



씨알의 소리 통권 50호 표지

-그때 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은 다석을 잘 모르지 않았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류영모를 함석헌의 스승 류영모로 알았지요?

“류영모 선생은 제소리를 내라고 했고, 제소리를 낼 줄 알면 찾아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일종의 졸업을 시키신 것이죠. 그런데 졸업생 함석헌이 더 커버렸지요.”
언론인 이규행은 “다석이 이승을 떠났을 때 부음(訃音) 한줄 신문에 나지 않았다”며 매스컴의 허망함과 지식인의 맹점을 드러냈다고 자책하는 말을 했다. 그러나 다석이 부음 기사에 실릴 만큼 세속적으로 유명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된다. 함석헌은 유신시대에 민주화운동을 하며 윤보선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공동의장을 할 정도로 이름이 높았다.

‘마하트마 간디는 13살에 혼인해 37살에 금욕생활에 들어갔다. 류영모는 25살에 혼인해 51살에 금욕생활에 들어갔다. (박영호 저 ‘다석전기’).

-보통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다석의 해혼(解婚)과 금욕이 극단주의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1942년 가정생활을 하면서 종교생활을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개 인도사람들을 보면 마흔이 됐을 때 출가를 합니다. 다석은 52살 때 정신 생활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 가정생활을 중요시 않고, 정기를 태워서(바탈태우), 우리가 하느님의 자리까지 올라가서 소통하는 에너지로 쓰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가정생활을 하지만 부부생활은 안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윤 신부는 인터뷰 중에 “다석을 존중하되 신격화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다석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다석을 성인으로 높일 뿐 아니라 신화화해서 세계 5대 성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분도 인간이고 사상가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도 남을 섬기면 우상숭배라고 하셨는데 후세 사람들이 예수님도 하느님 자리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천주교는 더 심해서 예수님을 낳은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 자리까지 올렸습니다. 나는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다석도 사람을 섬기면 우상숭배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외에는 섬기지 말라고 하셨죠. 다석 본인도 본인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상이든 체계화하면 종교가 되게 마련입니다. 다석은 그런 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다석 사상에는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도 녹아있다고 말씀하시는데…동학이 백성을 최고의 가치에 두는 철학은 좋았지만 주술, 부적같은 것은 미신이라고 비판 받을 수 있지요.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의 복장(腹藏)에 있는 비기(祕記)를 손화중이 꺼내가서 군사가 많이 모여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선운사 도솔암이 미륵신앙의 중심지입니다. 메시아 사상처럼 미륵세계가 올 거라는 신앙이죠.”
손화중 장군의 삶을 성공회 신부의 설명으로 풀어본다. 고창 무장현에서 전봉준 장군이 접주인데, 손화중 장군은 접주를 거느리는 포주였다. 그래서 따르는 신도와 군사가 많았다. 세력도 크고 인품도 있고 공부를 많이 한 선비였다. 세상을 새롭게 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전봉준이 몇 번 찾아왔다. 처음에는 손화중이 상대를 안 하다가 전봉준이 계속 와서 설득하니 참여하게 되었다. 그래서 동학운동을 처음 시작한 창의문 낭독에 손화중이 나간 것이다. 비결서를 가졌다고 하면 사람들이 더 많이 따르고 신격화할 것이 아닌가. 비결서의 존재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대개 우리가 절이나 불상을 조성할 때 기록 같은 걸 넣는다. 그런데 검단선사가 도솔암을 만들고, 마애불을 조성하면서 복장에 불경이나 조성 경위를 적은 유물을 넣었을 것이다. 비기(祕記)가 전설로 내려온 사연이다.


손화중의 전설이 서려 있는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사진=황호택]

이 일대에는 전라관찰사 이서구의 일화가 많이 있다. 이서구가 전라관찰사로 와서 비결서가 있다고 하니 꺼내보려고 했다. 그런데 열어보다가 벼락이 떨어져 ‘전라관찰사 이서구가 본다’라는 대목만 읽고 덮었다. 여기에 손화중이 이서구가 보지 못한 비결서 내용을 다 보았다는 전설이 붙은 것이다. 아마 비결서를 갖고 있다는 말 때문에 농민군이 많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민중의 열망을 엿볼수 있는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총을 가졌는데 농민군은 부적을 품고 죽창으로 돌격하다가 실패했는데…?

”동학군도 총을 피하기 위해 큰 대나무 방패를 밀면서 가기도 하고 나름대로 전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식 총이 워낙 위력을 발휘하니까 겁나서 도망가다 서로 넘어지면서 죽은 경우도 많습니다.“

천부경도 배달민족 사상이 구전되다 기록된 것

-대종교의 천부경에 대해서 사학계가 위서(僞書)로 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천부경을 다석이 해석한 것에 큰 의미를 두어야 하나요?

”예수님의 말씀도 나중에 기록된 것입니다. 성경도 옛 어른들이 말로 ‘창세기에 어떻더라’는 이야기가 율법사들을 통해 구전(口傳)되다가 기원전 500년 경에 문자로 기록이 된 것 아닙니까. 그와 같이 천부경도 배달민족의 사상이었는데 나중에 내려오는 얘기들이 기록됐다고 봅니다. 그 기록이 역사적으로 실증할 수 있는 자료냐, 이런 것보다도 우리 민족의 사상, 철학을 엿볼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구전으로 ‘단군은 이런 분’ 이라는 식의 이야기들이 내려왔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사상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다석은 중국과 다른 우리 민족 고유 사상을 찾고 해석했습니다. “

인터뷰를 마치자 배꼽시계가 알람을 울렸다. 윤 신부의 안내로 심원 앞바다 ‘금단양만’이라는 식당에 가 고창 복분자주에 장어를 먹었다. 이제 자연산 장어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아직 인공부화 기술이 개발되지 않아 치어를 사와 사료를 먹여 키운다.
신부는 식당에서 장어를 손질하고 남은 부스러기 고기를 받아 다시 고영재로 왔다. 개들이 밥을 가져온 줄 알고 꼬리를 치며 달려왔다. 산양들도 내려왔다. 윤 신부는 바로 옆 국가지질공원으로 우리를 데려가 병바위 앞에서 사진을 찍어주었다. 술병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병바위를 오르는 마삭덩굴과 담쟁이들은 암벽 타기에 지친듯 모두 갈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인터뷰어 황호택 논설고문·정리 박하늘 인턴기자)

하늘로 이끄는 뜻이 한글에 있다 하셨죠 ⑤-6 이정배 교수 인터뷰

하늘로 이끄는 뜻이 한글에 있다 하셨죠 - 아주경제


하늘로 이끄는 뜻이 한글에 있다 하셨죠
황호택 논설고문입력 : 2021-02-17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⑤ 이정배 교수 <上>

고층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선 서울에서 인사동 삼청동 부암동 같은 곳은 그나마 옛 모습을 간직한 동네다. 한양도성 성곽이 지나가고 사소문(四小門) 중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이 자리 잡고 있다. 부암동에는 김환기 미술관, 윤동주 문학관, 석파정 서울미술관, 젓가락 갤러리 ‘저집’ 등 문화 명소가 많다. 고풍스런 동네에 눈발이 날리니 분위기가 더 살아나는 것 같다. 윤동주 문학관 옆에 차를 세우는데 이정배 교수가 우산을 들고 마중 나와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교수의 집은 문학관에서 멀지 않았다. 대문에서 안채로 이르는 가파른 돌계단이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 교수 집 2층 창밖으로 부암동의 푸근한 설경(雪景)이 액자 그림 처럼 내다보였다. 이 모습을 놓치기 아까운 듯 인턴기자가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 교수가 고창의 윤정현 신부가 보낸 것이라며 곶감을 내놓았다. 고영재 부근 야산의 감을 따서 깎고 말려 보낸 정성이 대단하다. 릴레이 인터뷰 1호가 3호에게 보낸 곶감이다.
다석은 수를 좋아하고 셈을 즐겼다. ‘호암(문일평)이 52세(1만8545일)로 가시니 나보다 627일 먼저 나시었다.’(다석이 쓴 추도문) 다석은 이런 식으로 숫자 기록을 많이 남겼다.

-윤정현 신부, 이 교수 그리고 인터뷰어가 공교롭게도 모두 1955년생 양띠입니다. 다석이 지금 살아있으면 132세였을 텐데요. 55년생인 우리 나이의 딱 두 배가 132네요. 다석도 숫자 계산을 하다가 기묘한 우연을 발견하면 즐거워했습니다.

“다석을 공부하는 우리가 지금 다석 나이의 절반, 그러니까 다석의 허리춤 정도에 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다석은 ‘나만 따르라’ ‘추종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길 삼아, 다리 삼아 한 번 건너라’고 했습니다. ‘나의 허리춤을 잡고 씨름하라’는 의미로 새기고 싶습니다.

-2020년, 작년이 정년이었군요. 정년 4년 반을 앞두고 학교를 떠났더군요.

“31살에 교수로 부임해 30년을 재직했기에 남들 할 만큼 충분히 일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학내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학생들 편에서 학교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지요. 교수직 사퇴를 배수진으로 치고 학교 당국과 씨름하고 갈등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누군가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세월호가 주는 충격이 컸습니다. 강단 신학자로만 학교에 머무는 것이 제 양심에 허락지 않았죠. 국가와 교회 공동체의 문제에 우리가 뛰어들어서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겸사겸사 몇 가지 이유가 겹쳐 일찍 나오게 되었습니다.”



다석의 묘소는 둘째 아들 자상이 꾸리던 강원도 평창의 농장 인근에 있다. 다석은 화장을 하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아들들이 듣지 않고 묘소에 모셨다. 다석 부부 합장묘를 참배한 이정배 이은선 교수 부부. [사진=이정배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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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저서 <빈탕한데 맞혀놀이>의 도입부에 자전적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서울에서 사업을 일구었다가 실패한 아버지가 고향으로 가기 싫어 처가가 있는 충북 보은으로 이사 갔다. 그렇지만 자식들은 서울로 보냈다. 누나는 이화여대에 다녔다. 그는 영락교회 재단인 대광 중고교에 다니다 기독교를 접했고, 누나와 친구들의 영향으로 감리교신학대학에 들어갔다.

“저희 집안은 전통적 유교 집안입니다. 아버님은 제사를 지내면서 울기까지 할 정도로 조상들에게 죄의식 같은 것을 가지고 살아가던 분이었지요. 나는 그런 배경에서 대광중고교를 다니면서 기독교를 알게 돼 감리교 신학대학에 갔어요. 김리교 신학대학 학생들 중에 목사 장로의 아들 딸이 많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자녀는 나를 포함해 몇 사람 없었던 것 같았어요. 생각만큼 학교 공부가 재미없었습니다. 학교를 떠날 생각을 하던 차에 대학 3학년 무렵 스위스 바젤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변선환 교수를 만났죠.

그 당시 나는 기독교 교리에 깊이 빠져서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데, 그럼 우리 부모님은 어떡하나…”라는 고민이 컸습니다. 그런데 변 교수가 새로운 신학 사조를 알려주었습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유교적, 무속적, 불교적 바탕이 매우 소중하고, 서양 사람들이 갖지 못한 정신적 자산을 잘 활용하면 좋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를 학문의 길로 이끌어 준 것이지요. 새로운 기독교, 새로운 신앙 양식에 눈 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도마복음 "우리를 나간 한 마리 양이 되라"

변 선생의 뒤를 이어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공부하고 돌아왔더니 이화여대에서 정년퇴직한 김흥호 교수(1919~2012)가 명예교수로 와 있었습니다. 바로 옆방에 있던 그분의 가르침을 받게 됐지요. 김 교수는 자신도 다석한테 그렇게 배웠다면서, 나를 한 시간씩 일찍 학교 나오게 해서 다석 사상을 가르쳐 줬어요. 그렇게 2년 이상에 걸쳐 다석에 입문했지요.”

방에 김흥호 선생이 1993년 이 교수에게 써준 글씨가 걸려 있었다. 송나라 시인 육유(陸游)가 쓴 시구 ‘시성비취묵(詩成飛醉墨)’이었다. ‘시가 떠올라 취중에 붓을 휘갈기다’라는 뜻이다. 이 교수는 하느님의 영에 취해서 학문에 몰두하라는 김흥호 선생의 분부 같다고 해석했다.

-초기 예수 공동체의 도마복음에는 동정녀, 예수님의 부활, 재림, 대속(代贖) 신앙 이런 것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성경의 정경화(正經化) 과정에서 예수가 신격화했다고 하던 데요.

“예수 사후(死後),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국교화하는 AD 4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누가 옳고 그르고, 누구는 정통이고, 누구는 이단 같은 구분이 없었습니다. 도마복음서가 있었던 것은 도마를 추종하는 예수 공동체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사실 최초의 복음서라고 하는 마가복음서도 예수의 죽음으로 끝맺음을 했습니다. 부활에 대한 언급이 없다가 한 세기 지난 이후에 부활 이야기를 첨가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기독교 초기에는 예수님의 생애를 기억하고 따르던 공동체들이 많았습니다. 도마복음서의 공동체도 그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양 99마리가 있는 우리를 떠나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죄인이라 하고, 그 양을 다수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오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지요. 하지만 도마복음서는 차라리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되라고 합니다. 기존 교회가 제도(교리)화 하고 성직자 중심으로 변질돼 가는 정황에서 오히려 도마복음서는 인간의 자유를 강조했습니다. 인간을 진정 자유롭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본 것이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되는 과정에서 도마복음서는 제도를 부정하는 거추장스러웠던 책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정경에서 제외된 측면이 있습니다.”

-부활 이전과 이후의 예수는 성경에 다르게 묘사돼 있는가요.

“가장 먼저 쓰인 마가복음서는 예수님이 30세 될 때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는 모습부터 시작합니다. 
그것보다 조금 늦게 쓰인 마태복음은 예수의 생애를 30년 소급해 예수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예수의 삶이 조금씩 도그마화하고 교리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보다 조금 더 늦게 쓰인 누가복음서에는 예수의 재림, 승천, 심판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리고 가장 늦게 쓰인 요한복음에는 예수를 로고스인 하나님과 동격이라 묘사합니다.

 나중에 쓰인 복음서일수록 예수님에 대한 신성화, 예수님에 대한 교리화, 도그마화 하는 과정이 두드러집니다. 이에 반해 예수 어록을 담고 있는 도마복음은 예수의 생애를 중심으로 기록했습니다."


김흥호 교수가 제자 이정배 교수에게 써준 '시성비취묵'(詩成飛醉墨) 글씨 [사진=황호택]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려 죽음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속죄(贖罪)를 대신(代身)했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영생한다는 대속(代贖) 신앙은 정통 기독교의 중심 교리인데요. 그러나 다석은 대속 신앙에 대해 “나와 관계 없다”고 했는데요?

“톨스토이가 스스로를 비정통이라고 선언했던 것처럼, 다석도 스스로 비정통이라고 했습니다. 다석이 본래는 주일 아침만 되면 연동교회 승동교회 새문안교회 등 여러 교회를 다녔고,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을 기독교로 인도할 만큼 정통 신앙에 빠져 있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일본 유학 시절에 우치무라 간조를 만났습니다. 그의 일본식 기독교에 접하면서 다석의 마음속에는 한국식 기독교라는 형상이 잡혀갔겠죠.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적 기독교를 표방했으나 루터의 대속 신앙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석은 일본적 기독교는 물론 대속 사상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뒤 일본에 갔던 함석헌도 이 점에서 동일합니다. 대속 사상은 동물을 잡아 피를 바쳐야 했던 유대 민족의 제사 풍습의 연장선에서 나온 예수에 대한 이해지, 오늘날 우리 동양 사람들에게는 낯설다고 본 것이지요.
서양의 기독교가 예수를 통해 구원 받는 대속 신앙을 가르쳤다면 동양은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서 해탈의 길을 가는 자속(自贖) 신앙이라고들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대속과 자속의 의미를 철저히 구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예수의 삶이 있었고, 그 삶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인 이상 이 길이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란 차원에서 대속의 뜻을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그 길을 따라 살다가 우리도 그처럼 길이 되는 것, 바로 그것을 자속이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가 우리보다 앞서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는 대속이고, 그 길을 따라가다가 우리도 그 길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 자속입니다.
그렇기에 대속 신앙이라는 말을 폐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다석은 우리들 일상의 삶 자체가 대속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하지요. 물론 나 역시 인습적으로 사용되는 교리적 대속 신앙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이 커질수록 기독교가 풀어가야 할 숙제입니다. 대속은 틀렸고 자속은 맞다는 양자택일(兩者擇一)적 이해는 오히려 다석의 생각을 그릇되게 할 수 있습니다.”

-유교적 인식이 강한 아버지께 혼날까 봐 신학대학 진학을 상당 기간 숨겼다고 했던 데요.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 시대의 양반들은 왜 기독교를 반대했습니까.

“‘예수 믿고 자기 조상도 못 알아볼 놈’ ‘부모가 죽어도 제삿밥도 안 챙겨줄 자식’이라는 우려가 있었던 거죠. 아주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 조상을 안 챙기는 기독교 체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땅치 않았던 것입니다. 유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이 하느님만 알고, 집안도, 제사도 모르는 사람들로 여겼습니다. 아버지도 그런 걱정을 한 거죠. 저를 손사래 하며 서울로 보낸 데는 가문의 영광을 회복해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살던 시골 동네에 신학대학을 나와 누추한 교회에서 목회하는 전도사가 있었는데 자식의 앞날이 그렇게 되는 게 아닌가 걱정을 했던 것 같아요. 당시 나는 교회에서 배운 배타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졌기에 아버지의 유교적 삶이 못마땅하게 보였습니다. 아버지에 맞서다 생전 안 맞아보던 뺨도 몇 차례 맞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지요. 이래저래 큰 불효를 했습니다.”
가톨릭이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엄청난 희생자를 낸 것은 장례와 제사 문제 때문이다. 전라도 금산(지금은 충남)에 사는 양반 윤지충이 천주교를 믿으면서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고 어머니의 장례를 가톨릭 예식으로 치렀다. 그는 1791년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신해박해다.

-가톨릭이 가혹한 박해를 받은 이후에도 개신교 선교사들이 와서 조상숭배는 미신이라고 근본주의 교리를 가르치면서 기독교와 전통사회의 갈등이 심해졌다는 시각이 있는데요.

“맞는 말씀이죠. 당시 한국에 왔던 많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대부분 보수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구 우월의식, 제국주의 의식을 지니고 한국에 왔기 때문에 ‘한국 것은 미개하다’고 생각한 거죠. 그것을 기억, 답습하여 한국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에 가서 우리가 경험했던 그대로 아프리카 사람들의 풍습과 문화를 함부로 재단하는 행태가 많습니다.
다수의 유교인들은 기독교인을 조상을 홀대하는 못된 사람으로 봤습니다. 하지만 다석은 오히려 유교의 병폐가 조상밖에 모르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둘 다 문제라는 것이죠. 조상의 끝이 하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조상을 유(有)라고 하면 하늘은 무(無)다, 없음까지 올라가야만 진짜 유교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도 조상의 의미를 소중히 여길 때 진정한 기독교가 될 수 있다’고 했지요.”

이 인터뷰에 나오는 성경 구절은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동번역한 성경 2판(1999년)을 인용했다. 공동번역 성경은 요즘 우리가 쓰는 말로 돼 있어서 읽기가 부드럽다. 그렇지만 빨간색 테두리가 있는 관주 성경의 옛글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직도 그 성경에 애착을 갖는다. 결례되는 비유일지 모르지만 소주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지금도 빨간 뚜껑의 진로 소주만 마시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로다.’(공동번역 성경)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관주성경)


다석은 광주 동광원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 대해 강의하면서 하느님의 ‘외아들’(공동번역) 보다는 하느님의 ‘독생자’(獨生子·관주성경)에 애착을 보인다. 다석은 독생자를 다시 ‘한(獨) 나신(生) 분(者)’이라고 순우리말로 바꾸어 풀이한다. 그러나 다석은 로마서 8장 4절을 소개하면서 공동번역이 알기 쉽게 되어있다고 말한다. 60년 동안을 보던 그 관주성경보다는 공동번역 성경을 보고 참뜻을 깨달았다고 술회한다.

-다석은 한글 사랑이 각별해서 순 우리말로 된 종교 용어를 많이 만들어냈는데요. 그런데 거의 안 쓰이던 순우리말로 조어(造語)를 하다 보니 더 어려워진 것이 많아요.

다석의 한글사랑과 십자가 신학


“흔히 중국의 글자는 뜻글자고 한글은 소리글자라고 구분하잖아요? 우리는 보통 아설순치후(牙舌脣齒喉)라고 해서 혀가 구강의 어느 부분에 닿느냐에 따라 소리를 구분합니다. 하지만 다석은 한글 또한 뜻글자로 보았고 우리 민족을 하늘로 이끄는 천문(天文)이라고 했죠. 세종대왕은 훈민(訓民)의 차원을 넘어 천문(天文)으로 격상시켰습니다. 
무엇보다 다석은 모음의 원리가 천지인(天地人) 3재(三才) 사상을 기초로 했다고 봤습니다. 농경 중심의 중국 문명은 음양론에 토대를 두었고, 시베리아 수렵문명권인 한국의 문화는 천지인 3재 사상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다석은 천지인 3재 사상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풀었지요.
 땅(ㅡ)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는 고된 인간의 삶(ㅣ)이 3재론 속에 담겼다고 봤습니다. 다석은 이 3재를 합해서 십자가로 풀었습니다. 땅이라고 하는 것은 욕망, 현실의 세계인데, 이 땅을 뚫고 올라가는 과정이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가야 할 길이라 한 것입니다. 기독교로 말하면 십자가고, 불교로 말하면 성불(成佛)이겠습니다.

다석은 한글이 단순히 소리글자가 아니고 우리 민족을 하늘로 이끌려는 뜻을 담은 글자라 믿었습니다. 자음 역시 삼수(三數) 변화를 퉁해 설명하면서 인간의 삶을 고양시키는 뜻을 담았다 했지요. ‘ㅅ(시옷)’ ‘ㅈ(지읒)’ ‘ㅊ(치읓)’의 변화를 보십시오. 이걸 선생님은 ‘삶-잠-참’으로 설명하세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잠을 자야 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잠이란 죽음을 말합니다. 인간은 한 번 죽어야만 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선생님은 한글에 뜻이 있고, 그 뜻이 우리 인간을 하늘로 이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 교수가 책 제목으로 빌려 쓴 ‘빈탕한데 맞혀놀이’도 어렵죠. 좀 쉽게 설명해줄 수 있습니까?

“빈탕이라고 하는 것은 허공, 무, 없음이라는 말인데 결국 그 없음에 맞춰 살아가는 게 인간이 이 땅에서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없이 계신 하느님이 인간 속에 바탈로서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빈탕은 곧 어둠이기도 합니다. 빛으로 드러난 세상에서 견물생심(見物生心)하지 말라는 뜻도 담겼습니다. 어둠 속에서 더 큰 것과 하나 되는 삶을 살자는 초대이자 부름입니다. 
예컨대 인간은 꽃이 있으면 꽃만 보고 ‘이쁘다, 좋다, 꺾고 싶다’라는 욕망을 갖지만 꽃을 꽃 되게 하려면 그것을 있게 한 허공, 빈탕한데가 있어야 합니다. 
이를 알아야 없이 계신 하느님처럼 인간도 없이 살 수 있지요. 하지만 인간은 늘상 덜 없는 존재, 그래서 더러운 존재로 살고 있습니다. 덜 없다는 것은 늘 욕망적인 존재로, 탐진치(貪嗔癡)의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덜 없다’는 것을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더럽다’가 되는 거예요. ‘덜 없는’ 존재가 ‘더러운’ 존재가 되는 거죠. 
없이 계신 하느님을 자신의 바탈로 모신 인간이 할 일을 자신 속 탐진치를 벗는 길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이 땅에 온 이유고 살아야 할 목적입니다. 빈탕한데 맞혀놀이가 다석의 구원관입니다.”


부암동 집 대문 앞에서 이 교수(왼쪽)와 황호택 논설고문.[사진=이주영 인턴기자]

-다석이 십자가를 동양적으로 재해석해서 일좌식(一坐食) 일언인(一言仁)이라는 말을 하는데요. 일좌식은 한 끼 식사와 명상이지요. 그런데 일언인은 제자나 연구자들의 해석을 들여다봐도 조금씩 다르고 잘 이해가 안 가요.

“김흥호 선생은 다석의 기독교를 한마다로 동양적 기독교라 풀었고 그 핵심이 일좌식 일언인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일좌식 일언인은 김흥호가 이해한 다석 사상의 본질입니다.

 ‘일좌’는 말 그대로 앉아있는 것, 명상을 의미하고, ‘일식’은 하루에 한 끼 먹는 것이죠.

일언은 남녀관계를 풀어 끊는 것입니다. 다석은 뜻과 맛이라고 하는 개념을 대비시켜 이해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맛을 찾아 살지만, 선생님은 뜻을 찾아 사는 것이 인간이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라고 말했어요. 아마도 맛중의 맛이라고 하는 것이 남녀의 관계가 아닐까요. 그래서 ‘일언’이라고 말로 인간이 색에 사로잡혀 사는 것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쳤습니다. 말씀에 사로잡히면 사람은 맛을 버리고 뜻을 찾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김흥호 선생은 마지막 일인(一仁)을 명(名)과 관계시켜 이해했습니다. 한마디로 헛된 명예욕을 벗자는 것이지요. 누구에게나 있는 몸을 갖고서 ‘몸성히’를 실천하라고 했습니다. ‘몸성히’로 인해 마음이 편안해지면(마음 놓이)로 자신의 바탈을 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교수는 다석의 ‘일좌식 일언인’에서 인에 대한 해석이 가장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저서 ‘유영모의 귀일신학’에서 ‘일인은 늘상 걷는 일을 뜻한다’고 풀이했다. 이 교수는 “어질 인이 걷기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왜 다석이 여기서 인을 사용했는지 잘 알지 못하겠으나 가늠할 여지는 있다”고 했다. 두 발로 어디든 다니고 아침마다 냉수마찰을 해 몸을 건강하게 한 것이다. 한마디로 몸성히를 삶의 근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라고 해설했다.

다석의 一日一食과 늘상 걷기

그러나 다석은 1971년 광주 동광원 강의에서 인(仁)에 대해 “유교에서 추구하는 인”이라고 하면서 ‘어질 인’이 아니라 ‘성언 인’이라는 순우리말로 푼다. 성은 ‘(몸이) 성하다’에서, 언은 ‘언니’에서 따왔다. 그래서 성언을 찾아서 그 성언을 완전히 이루는 것, 그래서 참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인이라고 다석은 말한다.

-다석은 40년 동안 일일일식(一日一食)을 하고 체조와 늘상 걷기 등으로 건강을 다져서 그 시대로서는 드물게 91세 장수를 했는데요. 다석을 따르는 분들 중에 그런 수행법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분들이 많습니까. 윤정현 신부는 한 때 일일일식을 하다가 포기하고 배꼽시계에 맞춰 먹는다던데요. 

“다석을 공부하는 사람 중에서 일일일식을 시도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요. 김흥호 선생은 38살 무렵부터 일일일식과 해혼(解婚)을 실천했고 그것이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함석헌 선생은 그걸 실천하려고 했다가 포기한 적이 있었지요. 나 역시도 시도했으나 거듭 실패를 했습니다. 저는 일일일식을 문자적으로, 소승적으로 생각하지 않고자 합니다. 오히려 이것을 문명비판적인 차원에서 단순성(Simplicity)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사실 다석은 하루 한 끼를 드셨으나 잡수신 양이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루 한 끼에 집착하는 문자적 의미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단순성, 즉 최소한의 물질로 살려고 하는 노력이 중요할 것입니다. 최소한의 물질로 삶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기후(생태)붕괴 시대의 일식의 의미라 믿습니다. 이 때 물질, 곧 최소한의 물질은 정신이 되는 것이겠지요. 다석 자신도 하루 한끼 식사를 자기 생명을 바치는 정신적 행위라 여겼습니다. 내 몸이 얼마나 가난한가, 최소한의 물질로, 정신으로 살아낼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이 중요합니다.” <인터뷰어 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이정배 교수 약력>

-1955년 출생
-1974년 대광고 졸업
-1974~1981년 감리교 신학대학 및 대학원
-1981~1986년 스위스 바젤 대학교 신학부 조직신학 전공
-1986~2017년 감신대 교수
-2010~2011년 한국조직 신학회 회장
-2012~2013년 한국문화신학회 회장
-2011~2012년 한국 기독자 교수협의회 회장-1992년 서울에서 열린 JPIC(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 대회를 계기로 토착화 신학과 생태신학을 연결하고자 애쓰다-강원도 횡성에 독서와 기도, 노동이 어우러지는 현장(顯藏)아카데미 조성 중
-<생태영성과 기독교의 재주체화>(2010) <한국 개신교 전위토착신학연구>(2003)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2008) <빈탕 한데 맞혀 놀이>(2011) <유영모의 귀일신학>(2020) 등 저서 다수




21세기 생태문명의 맹아를 담은 다석 사상
황호택 논설고문입력 : 2021-02-24 16:06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⑥ 이정배 교수<하>

이정배 교수의 스승인 변선환 전 감신대 학장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폭탄 선언과 함께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종교다원주의를 제창했다. 그는 기독교와 불교 간 대화를 중심으로 종교간 대화를 활성화하는 운동도 벌였다. 그러다 결국 보수적인 기독교계 목사들의 표적이 되다시피 해 소속된 감리교단으로부터 출교(黜敎)당했다. 변선환 신학을 계승한 대표적인 제자가 이정배 교수다.

-변선환 학장이 1992년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가 주도하는 교리수호대책위원회로부터 출교 조처를 당했더군요. 김홍도 목사는 지난해 광화문에서 광복절 태극기 집회를 주도한 전광훈 목사를 대형교회 부흥 목사로 데뷔시켜준 사람인데요.

"그 당시 변 교수는 감리교신학대학 학장이었죠. 70,80년대부터 부흥목사들이 교회들을 크게 키우기 시작했어요. 그 결과로 교회가 엄청난 권력기관이 됐고, 부흥목사들이 교단 정치를 하면서 신학대를 입맛대로 좌지우지하려고 했습니다. 그 와중에 대학을 학문적으로 지키려고 했던 변선환 박사가 눈엣가시였던 것이지요. 변 학장은 신학대학을 금권과 교권으로부터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흥목사들은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변 학장의 신학적 소신을 이단(異端)이라고 몰아 출교를 시켰죠. 나도 그 때 교수였는데, 변 학장이 출교당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봤습니다, 학생들 수백 명이 출교를 막으려고 금란교회에 몰려갔다가 교회가 동원한 어깨들에게 폭행을 당했습니다.”

-종교인 중에서도 개신교가 유달리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태도를 가진 것 같아요.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배타적인 태도가 주로 성경 구절로부터 도출되었다고 말했는데, 주로 어떤 구절을 인용합니까?

“보통 구약성서 출애굽기 20장 3절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신약성서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가 대표적입니다. 이 두 구절을 이웃 종교를 부정하는 원리로 쓰죠. 

하지만 구약성서의 경우 핍박을 받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고백적으로 했던 말입니다. 자신들 하느님이 최고, 절대라 고백함으로써 종살이하던 이국땅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가 다수의 종교가 되고, 제국주의라고 비판 받는 마당에 고백적으로 이야기했던 언어를 교리적인 차원으로 바꿔놓으면 이런 기독교의 정체성은 사람 잡는 정체성이 되어버리죠. 이런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습니다.
다석은 신약성서 언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란 말씀도 달리 이해했지요. 예수가 말한 ‘나’는 육체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자신 속의 바탈, 없이 계신 하느님, 곧 ‘얼나’를 일컫습니다. 다석은 우리 역시 ‘나는 길이요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라고 권면합니다. 이처럼 다석은 배타적인 성서 언어를 보편적으로 달리 사용하였습니다.”



이정배 교수의 뒤편 창 밖으로 부암동의 포근한 설경이 보인다. [사진=황호택]

-이 교수가 쓴 논문 중에 ‘천부경을 통해서 본 동학과 다석의 이해’도 있더라고요. 모든 종교가 하나로 통한다는 다석의 귀일사상(歸一思想)이 천부경에서 비롯됐나요?

“예.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요. 유불선에 능통한 다석이 정작 동학을 언급하지 않았고, 언급하더라도 부정적인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여기서 다석과 동학을 연결 지어 생각해봐야겠다는 학문적인 관심이 생겨났지요. 그 연결 고리가 바로 천부경이었습니다. 천부경에 근거해서 동학을 보았고 바로 그 동학의 빛에서 다석 사상을 조명할 수 있었습니다. 동학을 단지 부적을 신뢰하는 비합리적 종교로 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천부경은 천지인, 3재 사상의 틀로 구성되었습니다. 천부경의 상경은 하늘, 중경은 땅, 하경은 인간을 주제 삼았습니다. 그 중 하경의 핵심은 ‘인중천지인(人中天地一)’이란 말 속에 담겼는데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이 중심이란 사상입니다. 한 유교 학자는 여기서 천인합일(天人合一)을 넣은 ‘천인무간(天人無間)’을 보기도 했지요. 저는 이 말을 갖고서 동학과 다석을 회통(會通)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서구에서 말하는 종교 다원주의 이론과도 변별된다고 여겼지요, 종교다원주의는 큰 틀에서 기독교를 유일 절대의 종교로 보지 않고 제 종교가 저마다 자기 식대로 구원의 길을 간다는 가치 다원주의를 적시합니다. 예수와 붓다 공자 같은 위대한 성인들이 궁극적 실재의 다른 표현이란 것이 서구 종교다원주의 이론의 골자입니다.

하지만 다석은 그 차원을 넘어서지요. 예수 석가 뿐 아니라 우리 인간도 그들과 똑같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라 하였습니다. 인중천지일, 모든 인간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없이 계신 이가 인간 속에 ‘바탈’로서 자리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서구는 붓다 공자 같이 위대한 인물들을 통해서 다원주의 신학을 정립했습니다. 

하지만 다석은 ‘없이 계신 하나님’을 인간 개개인의 마음(바탈)속에서 찾았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덜 없는 상태에서 뛰쳐나와,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면서 하나님에게 나갈 수 있는 존재라 본 것입니다. 그런 힘이 예수 뿐 아니라 우리 인간 속에 있다고 하였지요. 궁극적으로 인간 속에서 없이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귀일사상의 핵심입니다. 예수가 그랬듯이 우리도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도 예수처럼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처럼 되고 성불(成佛)하고,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의 과정에서 모두 하나로 통한다는 것이 귀일 사상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에는 하느님이 엿새 만에 우주를 창조하고 일곱 번째 되는 날에 쉬었다고 하는데요. 다윈의 진화론으로 보면 허황한 이야기가 아닐까요.

창조론과 진화론이 대립하지 않고 창조적인 진화, 진화적인 창조로 봐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진화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창조가 일어난다는 것을 오늘날 기독교가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으로부터 6천 년 전에 6일 만에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조과학의 논리는 사이비 과학이고 사이비 신학이죠. 지적 설계론은 창조과학의 발전된 형태이긴 하나 근본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성서 속의 천지창조 기사는 이스라엘 민족이 BC 580년 이후에 포로로 잡혀가서 바빌론의 문명을 경험하며 고백한 하나의 문서입니다. 그 자체로 과학적 진술이나 교리가 될 수 없습니다. 진화의 한 방향을 이끄는 신적인 원리가 있다는 측면에서 진화와 창조는 함께 가야 옳습니다. 진화론만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이런 측면에서 과학과 종교의 대화는 아주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되었습니다. 다석이 물리학에 관심이 있었던 이유도 과학적 사고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변선환 아키브에서 제자들이 펴낸 책들[사진=이정배 교수 제공]

-다석을 연구하는 이 교수의 학문적 입장은 어떤 것입니까?


“제가 다석을 연구하는 이유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서구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한국적 토양에서 기독교를 이해했던 감리교의 토착화 신학 전통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다석 사상은 지금까지 그 어떤 토착화 신학보다 도발적이고 창발적이라 생각합니다. 이로써 일본 교토학파의 기독교 이해를 능가하는 한국적 신학을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지하듯 일본 선불교를 배경으로 한 교토학파는 공(空·Śūnyatā) 개념을 갖고서 신의 죽음 이후의 신학을 재정립했습니다. 서구신학이 로고스 개념을 가지고 신학을 만들었다면,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 이후, 공 사상의 개념으로 신학을 재구성한 일본적 기독교가 서구에서도 주목받습니다. 하지만 나는 불교만 아니라 민족 고유한 천부경에 터해 유불선을 통섭한 다석학파의 기독교가 훨씬 탈(脫)서구적이며 동시에 보편적이라 여겼습니다. 

이를 위해서 나는 다석만 연구한다든지, 함석헌 박영호 김흥호 등 어느 한 인물에 치중한 개별 연구를 넘어서야 하다고 생각 합니다. 다석과 함석헌 간의 차이가 있고, 함석헌과 김흥호가 다르고 박영호와 김흥호 간의 변별력 그 자체가 다석 학파의 기독교를 성립시키는 주요한 근거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다석 연구자들 간에도 무수한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옳고 그름의 논쟁을 벌이기보다 어떻게 다석을 재해석하고 발전시켰는가를 봐야 옳습니다. 이 점에서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모든 분들을 연구하고픈 학문적 욕심이 있습니다. 일본의 교토학파의 기독교처럼 한국에는 다석학파의 기독교가 있음을 서구에 알리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가 대속적인 기독교 대신 수행적인 기독교를, 배타적인 기독교가 있었다면 불이(不二)적이고 귀일적(동양적) 기독교를 생각할 때가 되었습니다.”

-다석 학파의 계보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분을 통해서 혹은 어떤 방식으로 다석을 알게 됐는지에 따라 시각 차이가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김흥호 선생을 통해 다석에 입문한 신학자입니다. 지금의 기독교가 다석 사상을 수용할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교회에서 다석 사상은 아직 이단처럼 취급받습니다. 그럴수록 김흥호 선생은 다석을 교회 밖의 다원주의자 사상가로만 자리매김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끝까지 교회 안에서 다석을 정착시키고자 애쓰셨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스스로에게서 모순도 느꼈을 것입니다. 이화여대와 감신대라는 기독교 학교 안에 있었기에 다석을 기독교 틀 안에서 가르쳤습니다. 다석을 교회의 교사로서 만들고자 하신 것이지요. 다석 사상을 교회 안에 들여놓겠다는 생각을 나는 동의하고 지지합니다. 물론 다석 사상을 기독교 밖에서 더 넓게 이해하는 것에 찬성하지만요.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김흥호 선생을 통해서 다석을 배웠기에 대속을 버리고 자속만 취하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석에게 예수가 유일한 스승이었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물론 인습적인 구세주로서 예수의 이해는 버렸지만요.”

불교계 유교계에서도 다석 연구자 많이 나와야

-불교계 유교계에서도 다석에 대해 연구하는 분이 있나요?

“더러 있기는 하지만 주로 기독교 신학자들이 다석을 연구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웃 종교들에서 다석 연구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유교에서는 고인이 된 도원 류승국 교수가 대표적으로 다석을 좋아했고 연구했습니다. 기독교 신학자들 혹은 기독교를 바탕한 종교학자들의 연구만으로 향후 다석 사상이 충분히 발전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안병무 선생이 다석 사상을 민중신학으로 발전시킨 것은 큰 공헌입니다. 다석 사상을 세상에 알린 박영호 선생의 공로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다석 사전을 만들고 있는 가톨릭 정양모 신부의 역할도 대단합니다. 다석을 한국의 하이데거로 여기며 그의 말 속에 담긴 철학적 뜻을 살핀 철학자 이기상 교수의 역할도 높이 평가합니다.

-시인 고은이, 다석에 대해 ‘총기가 넘치나 부질없는 생각을 한 늙은이’라고 코멘트를 한 게 있던데요.

“<만인보>에 적힌 이 표현에 대해 정양모 신부가 제일 분노했지요. 고은 시인으로서는 다석이 한글을 너무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고 불평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과 소통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시인으로서는 다석의 언어가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은 시인은 다석이 왜 한글을 그렇게 풀어내려고 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지 못했습니다.”

-다석의 종교관에 많은 부분 공감을 하면서도 다석의 삶 중에는 이해가 잘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자식들을 중학교까지만 가르치고, 자신도 일본 유학을 갔다가 그만두고 돌아오고….

“다석의 행동 중에 기행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결혼한 날 신부를 놔두고 일주일 동안 목포 처가에 혼자 갔다 온 일도 있고, 그리고 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져서 사경을 헤맨 일을 두고도 말이 많습니다. 오산학교 교장을 했고 교육자로 살았음에도 아마 다석 입장에서는 자녀들을 자기 방식대로 키우면서 자연스럽게 익히고 배우도록 하려던 것이 아니었겠나 하고 생각해봅니다. 스스로 하는 공부, 기계적인 학습이 아니라 생각하는 힘의 중요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일종의 홈스쿨링(homeschooling)이나 가정교육(home education) 같은 생각을 가졌던 것이냐는 질문에는 조심스러운지 답변을 하지 않았다.

-정통 기독교에서는 동성애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하는데요. 이 교수는 글에서 동성애를 인정하던 데요.

“오늘날 동성애는 과거 천동설 지동설 논쟁처럼 이제 과학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아닌 다른 동물, 식물 세계도 동성애의 비율이 대략 10% 남짓 정도 된다고 하죠. 단지 지금까지는 과학적으로 증명을 못했을 뿐입니다. 세계적인 스테디셀러를 여러 권 펴낸 유발 하라리도 최근 커밍아웃했죠. 기독교는 동성애의 성적 문란함에 초점을 맞추지만, 역사적으로 성소수자(性少數者·sexual minority)들이 창조적인 일을 엄청나게 해냈습니다. 동성애를 병이나 죄로 다루기보다는 그들 성정체성(성지향성)을 인정해주는 것이 그들에게는 구원이고 복음이라 생각합니다.”

동성애를 범죄로 보지 말고 성 정체성 인정해줘야

-성경에 동성애에 반대하는 구절이 더러 있지요?

“구약 롯기에 남색(男色) 이야기가 있고, 로마서에 보면 어린 소년들을 성적으로 농락하는 얘기가 나오는데요. 이것은 사실 동성애의 문제로 보기보다 권력의 문제로 봐야 옳은 거지요. 설령 성서 어느 부분에 그런 기록이 있다 할지라도, 과거에 그랬다고 해서 지금도 그것이 진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의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XY 염색체만 알았는데 XXY 염색체도 존재하는 현실입니다. 그렇기에 성지향성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들을 자꾸 억압하고 몰아치면 음지로 들어갈 수밖에 없고 나쁜 일이 생겨날 수밖에 없어요. 이들을 불행한 존재로 만든 데는 역설적으로 기독교의 책임이 큽니다.”

-세월호 아픔에 참여하는 이 땅의 신학자들 모임을 결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데, 한국에서 세월호를 바라보는 시각도 보수와 진보로 구분되는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팩트는 분명히 있는데 서로 다른 오피니언을 만들며 싸우잖나요. 세월호를 가지고 정치가들이 이데올로기 싸움을 조장했어요. 팩트를 명확히 밝히면 오피니언 간의 갈등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시민 사회와 함께 정치인을 움직여 진실 규명하는 일에 앞장서고자 합니다. 지금도 청와대 앞에서 세월호 어머님들 추위에 노숙하고 있어요.”

이정배 교수의 부인은 여성 신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이은선 세종대 명예교수다. 성균관대 동양철학 대학원에서 ‘조선 유교의 종교성’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남편과 함께 스위스 바젤에서 신학대학 박사 논문을 받았는데 한국에서 공부를 더해 박사학위를 두 개나 갖게 됐다.

“저희 집사람에 대해 물어줘서 고맙습니다. 부부관계를 너머서 학문적 동지로 살고 있습니다. 바젤 대학에서 변선환 선생 내외분과 같은 교수 지도 하에 논문을 썼습니다. 지도 교수는 알버트 슈바이처와 칼 야스퍼스를 배경으로 독창적인 신학 활동을 하던 분이었지요. 그의 지도하에 변 선생 내외는 기독교와 불교, 우리 부부는 유교를 주제로 논문을 썼습니다. 저는 주자학 쪽으로, 저희 집사람은 양명학을 주제로 기독교와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이은선 교수는 부족한 한문 공부를 더하면서 8년에 걸쳐 한국 철학 분야에서 유교의 여성 종교성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습니다. 향후 미래가 중국 문명과 미국 문명의 갈등으로 본다면, 종교로는 유교와 기독교가 될 텐데, 지금과는 다른 유교가 필요하고, 지금과는 다른 기독교가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비판적인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최근 설립한 한국 신(信) 연구소를 통해 기독교를 유교적으로, 여성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화전민의 집을 사서 가꾼 횡성 현장아카데미는 노동과 기도의 공동수행체로 꾸리고 있다. [사진=이정배 교수 제공]

-부암동 아카데미에서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하는지요?

“여기서는 주로 학문적 토론의 장이 열리며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70년과 기독교’라고 하는 책은 2년간 작업해서 이번에 출판합니다. ‘종교개혁 500년과 이후 신학’ ‘3·1 선언 100주년과 이후 기독교’ 등의 책도 앞서 펴냈지요. 이은선 교수의 선친인 고 이신 박사의 연구서 ‘환상과 저항의 신학’, 그리고 해천 윤성범 교수 탄생 100주년을 추모한 ‘우주 보편적 영성으로서의 성과 효’란 책도 발간했습니다.”

부암동 집 대문에 현장(顯藏)아카데미라는 문패가 붙어 있었다. 유승국 선생의 작명이다. 인(仁)의 주역적 표현이 현장이라고 한다. 드러나기도 하고 감춰진다고 해서. 횡성에서는 화전민의 집을 사서 20년째 가꾸며 예배드리고 농사를 짓고 수확도 함께 한다. 횡성은 노동과 기도의 수행 공동체이고, 부암동은 학문 공동체다.

-생태신학에 관한 논문을 많이 쓰던데요. 다석의 가르침과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다석을 생태 신학적으로 연구해서 외국어 논문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갖더라고요. 우선 앞서 말씀드린 
  • 일식(一食)의 개념을 simplicity(단순함)로 본 것이 생태적인 사유(思惟)의 핵심이라 생각합니다. 
  • 다석의 말씀 중 중요한 것으로 견물생심(見物生心)과 견물불가생(見物不可生)이란 말이 있습니다. 
  • 견문불가생, 즉 물건을 보고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다석의 가르침이에요. 
  • 서구의 신학과 철학에서 존재는 언제나 ‘있음(유·有)’ ‘Sein'의 차원으로 설명됩니다. 하지만 ‘있음’을 우선하는 세계관에서 견물생심의 유혹은 결코 소멸될 수 없을 것입니다. 
  • 견물불가생이 가능하려면 있음보다 ‘없음’을 더 중요시하고, 빛보다 ‘어둠’에 무게중심을 두는 새로운 철학이 요구됩니다.

알다시피 유영모 선생의 아호인 ‘다석(多夕)’엔 저녁 석(夕)이 3개 들어있지요, 이기상 교수가 ‘태양을 꺼라’라고 멋지게 풀어서 다석 사상의 핵심을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빛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의식의 세계죠. 그런데 다석은 ‘빛(의식)을 꺼라’ ‘태양을 꺼라’고 말합니다. 빛이 꺼질 때 광대한 우주의 본질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다석은 생각의 빛을 끄고 보이는 세계를 단절하는 의식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있음을 근거로 하는 서구적 인식으로는 우리의 자본주의 문명을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꽃만 보는 것이 아니라 꽃을 있게 하는 테두리를 먼저 보는 것, 그렇게 하면 견물불가생, 물건을 탐욕의 대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놔둘 수 있지 않은가요?”

부암동은 다석이 과수원을 가꾸고 축산을 하고 수행을 하며 살던 구기(舊基)동에서 버스 두세 정거장 거리다. 원래 인터뷰를 횡성 현장아카데미에서 하려고 했으나 눈이 많이 오고 찻길이 험해서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이 교수와 우리 일행은 두 시간 동안 인터뷰를 마치고 부암동의 한 식당에서 치킨과 볶음밥을 먹고 눈길을 걸어가다가 헤어졌다. 

다석 사상은 한국 신학의 광맥 ⑦ -8 김흡영 교수-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

다석 사상은 한국 신학의 광맥 - 아주경제

다석 사상은 한국 신학의 광맥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
입력 : 2021-03-03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⑦ 김흡영 교수<上>

경북 영주는 중국에서 들여온 한국 유학의 본향이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安享)을 배향하는 소수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소수서원에서 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무섬마을은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감싸고 흘러가는 전형적인 물도리 마을이다. 다양한 형태의 구조를 지닌 40여 채 고택이 옛 그대로 남아 있다. 반남 박씨와 선성 김씨의 집성촌이다. 이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이 해우당(海愚堂) 고택이다. 이 건물은 선성 김씨 입향조인 김대(金臺)의 손자가 1830년에 건립했고 고종 때 의금부 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이 1879년에 중수(重修)했다. 사랑채에 걸려 있는 해우당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글씨다.
시원(始源) 김흡영 전 강남대 신학과 교수(72)는 해우당의 5대손이다.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자란 그가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집안에 파란을 몰고 왔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무섬마을은 아직도 유교적인 관습과 사고방식이 철저히 뿌리박혀 있다. 한국의 큰 마을에는 으레 교회가 들어서 있지만 무섬마을에는 교회가 없다. 국가에서 유교 문화 존속 마을로 공인했다. 김 교수는 해외에 오래 있었고 신학과 교수를 지내다 보니 고향 마을에 가면 가끔 자신이 이방인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지금 연구하고 묵상하고 글 쓰는 곳은 소수서원에서 조금 떨어진 소백산 자락에 있습니다. 영주에 살다 보면 ‘아직도 기독교는 우리 종교가 아니다’라는 느낌이 듭니다. 나의 글방에서 산 너머로는 부석사, 왼쪽으로 소백산 비로봉이고, 오른쪽으로는 소수서원입니다. 유불선의 고적을 가까이 두고 ‘나의 신앙 기독교는 무엇인가’를 20년간 명상했습니다. 거기서 나온 생각을 글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에 다석이 좋은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GTU 신학대학원 전 총장 다니엘 레만 랍비(가운데)와 현 총장 유리아 김 박사(왼쪽)가 해우당을 찾았다.[사진=김흡영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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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는 원래 공학도였다. 서울대 항공우주공학과를 나와 전공을 살려 대한항공에 입사했다. 그 후 미국 뉴욕에서 무역상사 주재원 생활을 하다가 종교적 체험을 하고 신학을 공부했다.
“집사람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아내는 유교 풍습이 배인 집안에 시집와서 처음엔 나와 종교 문제로 갈등이 좀 있었습니다. 나는 이방 종교인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다투다 보면 저희 집사람이 항상 마지막에 꺼내는 말은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이더라고요. 내가 논쟁에서는 밀리지 않았지만 하나님이라는 소리는 머리에서 뱅글뱅글 돌았죠. 하나님이 뭔지 알아야겠다 싶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내가 쓴 ‘도의 신학 Ⅱ’라는 책의 부록에 나오는 간증처럼 하나님께서 밤 중에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확연히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유가로 똘똘 뭉친 집안에서 자란 내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거죠.”

그가 기독교에 귀의한 후 1982년 어머니 장례식 때 사달이 났다. 아버지는 종교에 관해 관용적이었다. 그는 장남으로서 맏상주의 유교적 권한을 행사해 어머니 장례를 기독교식으로 치렀다.
“그때 나는 아주 적극적인 기독교도였습니다. 종파는 장로교였죠. 1970년대 뉴욕의 한국 교회들이 엄청난 전도와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던 시절이었어요.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하늘나라가 있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게 최고고 절대였죠. 그 누구도 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저희 어머님이 덕을 베풀어 일가친척과 동네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었어요. 장례식에 400~500명이 모였는데 기독교로 장례를 치르니 어른들 사이에 난리가 났습니다. 나중에는 집안 어른들과 친척들이 옛 식으로 따로 하시더라고요. 나를 지극히 아껴주던 큰어른은 매우 슬픈 표정으로 ‘네놈이 어떤 신앙과 종교를 가져도 좋지만, 천 년 이상 지켜온 전통을 깨버릴 줄은 몰랐다’ 하고 돌아서서 가버리셨습니다. 그때 내가 깜짝 놀랐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분명히 깨닫고,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 결과는 친척에 큰 아픔을 주고 우리 전통을 깨버리는 배신이었습니다. 이게 과연 옳은가. 거기서 나의 신학이 시작된 것이죠.”

"이웃 종교 품는 기독교가 되어야"

-지금 다시 어머니 장례식을 치른다면 기독교 식을 고집하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물론이죠. 지금껏 내가 30년간 한 일이 ‘그래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외국의 신학자들이나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한국 기독교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교회도 한국 종교의 막내라는 것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우리의 과거인 전통 종교를 품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기독교 장례식과 유교 장례식에서 두드러진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가장 큰 차이는 장례식의 주체가 누가 되느냐죠. 기독교 장례식의 주체는 하나님이죠. 진행은 목사가 하지만. 유교는 주체는 조상이고, 진행은 가족이 합니다. 신의 권위보다 조상에 대한 효(孝)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반면 기독교에선 철저히 신의 권위 아래서 하지요. 유교적인 장례는 효를 가장 중시하는 거죠. 기독교는 조상과 관련된 제사를 미신적 요소라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잘못 알고 있는 것이죠. 귀신하곤 사실 관계가 없습니다. 한국에서 기독교는 이제 가장 강력한 종교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천년이 넘는 유교 불교의 전통 앞에서 기독교의 독특성 차별성이 중요했지만 우주를 섭리하는 하나님을 진정 믿는다면 이웃 종교를 품는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입장입니다.”

김 교수는 다작(多作)이다. 공저를 포함해 저서가 39권 (영문 25권, 한글 14권)이고 논문도 58편이 넘는다. 다석 류영모에 관한 저서인 <가온찍기>(2013)에는 ‘다석 류영모의 글로벌 한국신학 서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베스트 셀러는 아니지만 대한민국 학술원의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됐고 학술서로는 드물게 3판이나 찍었다.

“미국에서 프린스턴 신학교와 캘리포니아 버클리의 GTU에서 10년간 신학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우리 종교의 광석을 찾는 게 나의 큰 고민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우리 한국의 사상가 퇴계와 왕양명을 비롯해 신유학을 부지런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다 한국에 들어왔더니 강남대 동료 교수가 날 보고 이화여대 교회에 가서 김흥호 목사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고 해서 따라나섰죠. 김 목사가 우리의 경전과 성경을 비교해서 강의하더라고요. 김 목사가 그동안 강의한 카세트를 몇 백 개 주더라고요. 출퇴근할 때마다 차 속에서 들었습니다. ‘아차, 이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고 다석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서 <가온찍기> 표지

다석을 세계에 어떻게 소개시킬 것인가? 다석의 기독론을 영문으로 제일 먼저 썼는데요. 20세기 말 정평 있는 세계적인 수준의 종교 분야 단행본에 다석에 관한 글을 올린 건 내가 처음일 겁니다. 그 다음부턴 내가 개발한 ‘도의 신학’에 관련된 글들에서 조목조목 다석의 통찰을 집어넣고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석을 이해하는 해외 학자들이 늘어나는 데 도움을 줬다 할까요. 강남대학의 대학원 코스에도 최초로 다석 강좌를 넣었습니다.

다석은 정말 자유스럽게 동서를 회통(會通)해 풀어냈습니다. 과연 이것을 서양 기독교 신학 체계 속에서 기독교를 배운 목회자와 신학생들에게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 고민했죠. 다석 사상은 한국의 미래를 위해 위대한 광맥입니다. ‘아이고 다석 멋지다’ 라는 찬탄으로 그칠 게 아니라 교육의 소재로 어떻게 사용할 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후학들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김 교수는 저서 <가온 찍기>에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대부분은 아직도 반문화적으로 이식되고 기계적으로 전수된 서구적인 신학을 추종하기를 원한다’고 진단했다. 이런 보수적인 풍토에서 다석의 독창적인 생각을 다른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질문’이라고 했다.

-자문자답(自問自答)을 해본다면….

“지금은 정통 보수 기독교인들이 다석의 사상을 받아들이기가 정말 어려울 겁니다. 그러자면 껍데기를 여섯 번은 벗어야 하니까요. 알을 까는 것처럼. 특히 한국 기독교는 너무 굳어지고 단단해져서 시간이 걸릴 겁니다. 어느 정도 열려있는 기독교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서서히 변화시켜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사서삼경을 구약 대접하라’는 다석의 말은 동양문화라는 바탕 위에서 기독교를 바라본 인식을 잘 드러낸 말 같은데요. 동양의 전통문화를 미개한 것으로 바라보던 ‘선교사 신학’이 한국 교회를 주도하던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시대를 앞서간 생각이 아닌가요?

"한국뿐 아니라 세계 종교의 흐름 속에서도 시대를 앞서간 분입니다. 한국 기독교계보다는 세계 기독교계가 더 빨리 다석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다석은 학자들에게 정말 힘든 숙제입니다.
영어로 논문을 몇 편 쓰고 있는데 정말 어려워요. 기독교의 지평을 넘어서 동양의 모든 경전을 회통하는 개념을 외국인들에게 하나하나 설명하려면 힘이 들어요. 그 다음 문제는 한글이에요. 한문은 세계적 수준에서 소통이 됩니다. 그런데 한글은 다석이 또 새로운 자기만의 우주를 만들어 놓아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다석이 ‘산보’ 또는 ‘정신 하이킹’이라고 이름을 붙인 기도문이 있습니다. 내가 ‘산보’를 stroll(sanbo), 정신 하이킹을 spiritual hiking으로 번역해 보았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서구 신학자의 제자들에 의해 이끌려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전략도 외국 신학의 제자가 된 사람을 개혁하는 것은 어렵고, 오히려 외국에서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을 목표로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문으로 훨씬 더 많이 쓰고 있습니다.”

-“다석은 ‘최후까지 진실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고 이 사람은 선생이라고는 예수 한 분밖에 모시지 않았습니다’라고 여러 군데서 강조하더군요. 그렇지만 다석을 종교다원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김흡영 교수는 다석을 기독교라는 신앙을 벗어나지 않는 곳에 두고 싶었던 김흥호 이화여대 전 교수의 신학과 맥이 상통하는 것 같은데요.

“일단 다원주의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신학을 하면서 종교 다원주의를 놓고 외국 신학자와 논쟁을 여러 번 했습니다. 서구에는 기독교밖에 없었잖아요. 그들은 선교를 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미국 유럽을 넘어 아시아로 오니까 엄청난 종교들이 있던 거예요. 그래도 서구보다 열등하니까 계몽시켜야 하겠다고 선교를 했지요. 그러나 아시아의 종교들은 기독교보다 오래된 종교들이라 파면 팔수록 뭔가 나오는 거죠.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종교 다원주의입니다. 기독교밖에 없고 기독교가 최상이라는 종교적 생각을 가진 서구 사상에서 나온 인식론적 개념이죠. 선교 전략하고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되죠. 우린 기독교 이전에 유교 불교 도교 등 여러 종교가 있었는데 여기에 기독교가 끼어든 것입니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종교의 다원성이 우리의 맥락입니다. 전혀 모르다가 이제야 깨달았다는 서구의 종교다원주의를 그대로 신학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기본이 안 된 거죠. 한국의 종교는 상생적이고 이웃으로 살아가는 것을 중시하지만, 서구적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못 살아요. 그래서 끊임없이 종교 전쟁을 한 것이 아닙니까. 한국은 종교 전쟁이 없어요.
다석은 기독교를 넘어선 사람이죠. 한국 종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한국적 신학을 할 수 없습니다. 종교다원주의라서 그렇게 한 게 아니죠. 다석을 종교다원주의자라고 주장하면 얘기를 거꾸로 하는 것입니다.”

"다석은 제도권 테두리 벗어났지만 예수의 제자"

-다석은 기독교 테두리의 안에 있었습니까? 밖으로 나갔습니까?

“기독교의 제도권 테두리는 벗어났으나 예수의 제자인 건 틀림없습니다. 예수의 제자로서 예수의 도를 따라간 분입니다. 그리고 내가 김흥호 목사의 계보냐는 질문을 한 것이라면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하나님께서 직접 불러주신 나는 어떠한 계보도 없습니다.”

-해방 후 신학은 ‘신학 오퍼상’들이 들여온 ‘수입신학’ ‘번역신학’의 천국이었다고 서술했더군요. 기독교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보다 앞섰던 서구문명을 받아들인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 아니었나요?

“그건 학자로서, 제 범위를 벗어나니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한국의 신학교육에서 교재와 같은 책이 한 권 있었어요. 유동식 교수가 한국 신학의 광맥으로 감신대의 정경옥(자유주의), 총신대의 박형룡(보수주의), 한신대의 김재준(진보주의) 교수를 꼽았습니다. 셋 다 모두 미국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습니다. 박형룡과 김재준 두 분은 장로교로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정경옥은 시카고에 있는 개럿 신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그 분들이 미국에서 잠깐(2~5년) 배운 걸 한국에 수입해서 가르친 거죠. 그러니까 한국 신학의 광맥은 서구 신학, 특히 미국 신학이 뿌리라는 건데 그게 말이 됩니까. 

서구 신학은 서구인들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의 신앙 고백이죠.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한국인들에 신학의 광맥은 그게 다일 수 없지요. 신학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기도하면서 자기가 느낀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 자기의 이해와 통찰을 체계화한 것이거든요. 그런 관점에서 한국신학의 광맥은 오히려 다석 같은 분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신학 공부를 40년 했는데,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나의 총체적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봤을 때 남의 것을 베끼고 남의 소리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지 않더라도 제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 신학입니다. 한국의 자생적 신학을 한 대표적인 분으로 단연 류영모를 꼽겠습니다.”


김흡영 교수(왼쪽)와 대담하는 황호택 논설고문.[사진=유수민 인턴기자]

-다석의 좌우명인 ‘일좌식(一坐食) 일언인(一言仁)’ 중에서 일인(一仁)의 해석이 어렵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일인이 늘상 걷는 것이라는 해석은 누구한테 나온 것인지요.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김 교수의 저서 ‘가온찍기’에서는 십자가의 살신성인(殺身成仁)에서의 인, 예수가 십자가에서 희생적 행위를 통해 인을 실현한 것에서 다석은 그리스도의 참된 의미를 발견했다고 했는데요. 이것이 일인의 해석에 더 적합해 보이는데요. 다석은 동광원 강의에서는 ‘성언 인’이라고 했어요.

“다석은 소리글자인 한글을 한문처럼 여러 의미를 가지는 문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독특한 천재성 때문에 끊임없는 논쟁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맥락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지요. 한 신학자가 하버드에서 내 논문을 가지고 발표를 했는데 한국어를 전공한 한 참석자가 한글은 표음문자인데 어떻게 그렇게 해석하냐고 질문해서 대답을 제대로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다석은 표음(表音)문자를 표의(表意)문자로 바꾸는 작업을 한 것입니다. 동광원 강의에서 ‘성’은 몸이 성하다는 의미입니다. 몸을 비하하는 건 다석과는 거리가 먼 해석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석의 사유에 있어선 몸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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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다석의 숨신학과 몸신학은 선불교의 실천수행법인 참선 같은 인상을 줍니다. 다석의 숨신학 몸신학은 선도(仙道)와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가요. 그리고 몸신학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A: “우선 ‘몸신학’ ‘숨신학’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독자들도 가끔 혼란스러워 하는데, 이 용어는 다석이 아니라 제가 창안한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다석을 선도 수행자로 보는 입장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김흥호 목사는 스스로 호흡 수련을 했던 것 같습니다. 나도 선도 수행을 오래 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는 다석의 글을 읽으면 머리에 잘 들어와요. 그렇지만 수행을 안 해본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나라 선도의 맥을 잇고 있는 국선도에서는 3가지 기본적인 수련이 있습니다. 첫째는 조신(調身), 둘째는 조심(調心), 셋째는 조식(調息)입니다. 조신은 몸을 성히, 조심은 마음을, 조식은 숨을 고르는 것입니다. 
다석이 바탈을 닦는다고 말씀하실 때 단전호흡에 가까운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아요. 
선도 수련에 중요한 성명쌍수(性命雙修)라는 말은 성(후천의 바탈)과 명(선천의 몸과 숨)을 동시에 수련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국선도는 성명쌍수 중 성의 수련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석 사상을 말할 때 보통 성 수련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몸 수련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석의 핵심 사상인 ‘빈탕한데 맞혀놀이’하늘의 움직임과 내 숨과 몸의 움직임이 공명(율려)해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석을 이해하려면 선도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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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황호택 논설고문· 정리=이주영 인턴기자>

<김흡영 교수 약력>
-1949년 출생
-1967년 경기고 졸업
-1971년 서울대 항공공학과 졸업
-1972년~73년 대한항공 근무
-1973년~83년 대우, 삼화 등 종합상사 해외주재원 근무
-1986년~87년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신학, 교역학 석사
-1992년 GTU 철학 박사(신학 및 종교철학)
-1993년~2014년 강남대학교 신학과 조직신학 교수
-1997년 하버드 대학 세계종교연구소 선임연구원
-2002년~ 세계종교과학학술원(ISSR) 창립정회원
-2005년~ 한국과학생명포럼 대표
-2006년~2012년 아시아신학자협의회(CATS) 총회 공동의장
-2007년~2008년 일본 도시샤 대학 ‘유일신 종교 학제간연구소’ 등 선임연구원
-2012년~2013년 한국조직신학회 회장
-2020년~ 예일대학 종교와 생태포럼 자문위원
-저서로는 <道의 신학>(2000) <현대과학과 그리스도교>(2006) <道의 신학Ⅱ)(2012) <가온찍기>(2013) <왕양명과 칼 바르트>(2020) 등 영문 25권, 국문 14권이 있고 논문은 58편 이상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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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골짜기 정신에서 세계 사상 나온다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입력 : 2021-03-10 16:28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⑧ 김흡영 교수<下>

조선 사회는 유교 중에서도 가장 근본주의적인 성리학의 지배를 받으면서 본산인 중국보다 더 유교적인 사회가 됐다. 유학의 지나친 보수성과 배타성으로 결국 조선 유교사회를 멸망시켰다고 김흡영 교수는 <가온찍기>에서 지적한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1,000년 동안 꽃을 피웠다. 조선에서 억불숭유(抑佛崇儒)를 했다고 하지만 민간에서는 물론이고 왕실의 여인들까지도 불교 신앙에 의지했다. 조선은 국방의 중요 부문을 사찰과 승려에 의존할 정도였다. 개신교는 유교 불교에 비해 역사가 짧지만 세계 최대의 교회가 한국에서 나왔다. 북한의 김일성교를 종교로 분리하는 학자들도 있다. 세계에서 공산주의가 멸종 단계로 접어들었지만 북한에서는 아직도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인들이 과잉 종교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제가 오랫동안 생각해본 주제입니다. 저는 이걸 골짜기 멘탈리티(mentality·사고방식)라고 합니다. 한국인들은 골짜기 사람들이라 처음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대신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오랫동안 원형을 간직합니다. 세계에서 불교나 유교나 한국처럼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나라가 없습니다. 중국도 불경 원전이 없어져서 한국에 와서 원전을 받아간 적이 있고 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중국엔 유교적 제사 같은 것이 사라져서 한국에서 배워갔죠. 한국의 이데올로기도 공산주의 자본주의 둘 다 원형에 가깝죠. 그런데 개신교는 선교사들이 가지고 들어올 때부터 근본주의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교회에도 골짜기 멘탈리티가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경을 읽어보면 6장에 ‘곡신불사 시위현빈(谷神不死 是謂玄牝) 현빈지문 시위천지근(玄牝之門 是謂天地根)이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골짜기의 신은 영원히 죽지 않고 이것을 현빈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Mysterious Female(신비로운 여신)로 번역을 하지요. 이 현빈의 문이 천지만물의 근본이지요. 사실 모든 게 골짜기에서 시작하거든요. 사람도 현빈의 골짜기에서 시작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골짜기가 모든 것의 시작, 시원(始源)이에요(김 교수는 始源을 字로 쓰고 있다). 그런 의미로 바라보면 한반도가 세계의 골짜기라고 볼 수 있죠. 다석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세계를 살리는 사상과 영성은 한반도 골짜기에서 나온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김흡영 교수가 소수서원 취한대를 찾았다. 그의 고향인 무섬마을은 여기서 차로 30여 분 거리에 있다. [사진=경향신문 제공]
 
-류영모 신학은 지나치게 금욕주의적이고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는데요. 다석사상의 대중화에 장애가 되지 않을까요?

“(웃음) 지금 이 질문이 다석의 제자들에게는 조금 불편할 것 같습니다. 그 분들은 참 치열하게 다석을 따라서 일일일식(一日一食)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다석의 윤리와 일상은 몸서리치도록 치열합니다. 나도 몇 년 일식을 해봤는데, 나는 좋지만 주위 사람들이 힘들어해요. 내가 밥 먹었는지 여부를 아내와 자식이 신경 쓰기 시작해요. 밥 먹을 때와 배고플 때는 표정부터 다르니까…. 나는 도를 닦는다고 할지 모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을 주는 거예요. 학교에서도 배가 고플 땐 강의가 조금 달라지는 것 같고요. 물론 제가 도가 모자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다석은 귀한 도인이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이율배반적이에요. 그분이 ‘빈탕한데’ 즉 텅빈 데를 주장하신 분인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너무도 꽉 차 있거든요. 누가 들어설 틈이 없어요. 말은 ‘비워 두라’고 하지만 꽉 찬, 그래서 사실 몸과 이웃이 품어지는 공간이 과연 있었던가 하는 그런 의문도 가질 수 있죠. 그러기 때문에 제자들이 몸을 지나치게 비하하는 생각을 갖게 됐을지도 모르죠.”

그는 여기서 다석의 큰아들과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다석은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지 않았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버클리대학 도서관에서 사서 한 명을 만난 적이 있는데, 내가 다석 자료를 찾고 있으니까 그분이 관심을 표시하더라고요. 자기가 다석은 직접 못 만났지만 다석의 아들과 교제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다석의 아들이 워싱턴에 살 때 은퇴하고 세상을 뜰 때까지 거의 매일 워싱턴 대학 도서관에 나오셨대요. 그분은 언어에 천재적이었답니다. 대학을 안 나왔는데도 박사과정의 한국인 학생들을 많이 도와줬대요. 다석 어른의 고집 때문에 대학도 못 가고, 대학자가 될 만한 소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워싱턴대학의 도서관에 앉아서 소일 삼아 후학들을 도와준 거죠. 물론 그것도 좋은 일이지만 다석이 우수한 아들에게 기회를 안 준 거죠. 과연 그런 교육이 옳은 것인가. 그러한 태도가 다석 사상을 대중화하고 세계화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후학들은 그걸 지혜롭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다석은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첫째아들 의상은 해방 후 미국 대사관에 근무하다 6·25 전쟁이 나자 일본 맥아더 사령부에 근무하면서 공문을 번역하고 미군방송에서 우리말 방송을 했다. 의상은 휴전 회담을 할 때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참여했을 만큼 영어 실력이 출중했다. 그는 후에 미국으로 이민 갔다. 김흡영 교수의 글에 나오는 다석의 아들은 의상이다. 둘째 자상은 평창에서 농사를 지으며 벌을 치고 젖양을 길렀다. 다석은 여름 8월 한달 동안 YMCA 강의가 쉬는 때면 매년 둘째 아들네 평창 농장에 갔다. 다석 부부와 자상의 묘소가 평창에 있다. 셋째 각상은 무선통신사를 하다 일본 여인과 결혼해 일본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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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수행 중시한 다석 사상, 몸과 얼 이원론으로 나눠선 안돼

-그리스도교 신학이 종교개혁 이후 말과 글 중심으로 환원되어 몸을 망각했다고 ‘가온 찍기’ 책에 썼는데요. 서양 기독교사에서 종교개혁 이전 중세에는 실천수행이 그렇게 중요했습니까?

”중세까지는 수도원에서 몸을 쓰는 그런 수행 전통이 있었죠. 제도권과 수도원은 늘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제도권은 항상 부패하게 되고 그러면 기도원 운동이 일어나서 기독교가 새로워지는 식이죠. 루터가 위대한 종교개혁 사상을 펼쳤는데, 내가 보기에 큰 역할을 했지만 독이 되기도 했어요. 이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구원이 개인보다는 교회와 사제를 통해서 이루어졌거든요. 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성(Coram Deo)을 신학의 핵심으로 본 점은 엄청나지만, 개인주의적이고 영혼 중심주의적인 생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사이의 몸이 날아가 버렸죠. 나라는 것은 영혼일 뿐만 아니라 천지인 중에 몸과 함께 연결된 ‘점’입니다. 천지인이라는 큰 맥락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은 가온찍기입니다. 그걸 분명히 해준 이가 다석이죠. 과거의 기독교에선 그러한 몸 수행이 있었지만, 근대에 와서는 상당히 약화했고 그것을 빨리 회복해야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다석의 통찰이 굉장히 유의미합니다.”

실제로 다석은 요가 체조 등을 통해 몸을 단련했다. 그 때문인지 하루 한 끼만 먹고서도 91세까지 장수했다.
-몸성히 맘놓이 바탈태워가 다석의 인간론, 몸신학의 핵심이라고 했는데요, 모든 경전이 이 세 가지의 가르침에 수렴한다고까지 했습니다. 다석 몸신학을 요점만 쉽게 설명해보세요.

“몸을 성하게 한다는 것은 ‘참몸’을 만드는 거죠. 체조를 통해서. 다석이 체조(體操)라고 했어요. ‘맘놓이’는 정조(情操)라고 하세요. 참마음으로 나아가는 수행이죠. ‘바탈태워’는 지조(志操)라고 하셨어요. 의지, 바탈을 닦아가는 것이죠. 그것이 아까 말씀드린 몸 고르기(調身), 마음 고르기(調心), 숨고르기(調息)와 연관이 있습니다. 다석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이분의 ‘성명쌍수(性命雙修)'에서 성을 고르는 것(바탈태워)만 볼 게 아니라 몸과 숨을 연마해서 명을 고르는 게(몸성히, 맘놓이) 포함돼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에서 바울이 예배의 최고의 경지는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거라고 했어요(로마서 12장 1절). 다석이 그것을 기독자(基督者)라는 한시로 기막히게 표현했습니다. ‘기도배돈원기식(祈禱陪敦元氣息) 찬미반주건맥박(讚美伴奏健脈搏)’ 내 몸이 숨을 쉬는 게 기도다. 기도란 생명의 원기인 하나님을 들이마시고 쉬는 것이라 했죠. 찬미반주건맥박은 성가대가 악기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찬송뿐 아니라 내 맥박이 뚝딱 뛰는 게 찬미반주라는 것입니다. 이게 몸신학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몸에 대한 통찰을 통해 얼나로 나아가는 것이 다석의 핵심이라고 하면 틀리진 않았지만, 몸의 중요성이 희석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몸나가 곧 우리가 극복해야 할 ‘이기적인 나’라는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몸을 비하하고, 정신에 비해 육체를 쓸모없는 것으로 보는 서구 이원론에 맞닿게 될까 우려됩니다. 주역을 공부해보면 지천태(地天泰)라는 괘가 나옵니다.
  지천태는 하늘이 아래에 있고 땅은 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이 삽니다. 하늘은 빛을 아래로 비추고 땅은 물을 올려주어야 합니다(水昇火降). 그래야 나무와 생명이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몸은 땅이고 얼은 하늘이죠. 성명(性命) 수행은 얼이 내려가고 몸은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길이죠. 혼(얼)은 올라가고 몸이 내려가면 혼비백산이란 말 그대로 되는 파멸의 길입니다. 몸은 필요 없고 정신만 필요하다는 것 때문에 생태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영성적 문제는 어떻게 몸인 지구를 회복시키는가에 있어요. 우리의 몸을 살리자면 어떻게 독을 빼느냐가 중요한 문제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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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인공지능이 나오고 코로나도 뛰쳐나왔습니다. 이 골치 아픈 몸을 없애고 수퍼 머신 바디(body)를 만들자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과학기술을 이용해 사람의 정신적, 육체적 능력을 개선하려는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과 첨단 기술에 의해 완전히 성능이 증강된 인간 이후의 존재자인 포스트휴먼(post-human)의 등장을 예고하는 시대입니다. ‘영생을 꿈꾸는 초지성이 되어야 한다’ ‘몸을 넘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종교와 인류가 처한 최대 난제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몸나’ ‘얼나’로 구분해 따지고 있으면 설득력이 떨어지는 거죠.

생태계 파괴한 근거 제공한 기독교 자성 나와야

-다석의 한글 놀이는 재밌지만 어렵습니다. 그의 한글신학에는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한글창제 원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가요? 다석의 한글 사랑에 대한 김흥호의 해설을 읽다보면 구약에 나오는 유태인의 선민(選民)사상을 닮은 것 같습니다. ‘한글은 우리 민족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계시라고 생각한다. 한글은 하나님의 글이요. 정음은 복음이다. 한글만으로도 인간은 구원 받을 수 있다…’

“저도 다석 선생님의 한글놀이를 ‘참 재밌다’ ‘오묘하다’ ‘어떻게 이분이 이런 생각을 했을까’라고 무릎을 칩니다. 기가 막힌 용어들이 나오는데 어떻게 보면 한글을 다시 창제한 거죠. 다석의 한글 사용을 훈민정음 시대와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서양어의 단어도 시대에 따라 바뀌지요. 다석이 한 것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묘하게도 한글은 철저하게 천(天) 지(地) 인(人)으로 나뉘어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사이버 시대에 가장 잘 통용할 수 있는 글자라고 볼 수 있죠. 한글엔 틀림없이 그런 미스터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주신 글인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석은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결국 철학 신학 특히 인문학은 언어의 싸움입니다. 현대의 대표적 철학자 하이데거는 모든 철학을 독일어로 만드는 작업을 했습니다. 깊은 통찰, 철학, 사상을 알려면 먼저 우리의 언어의 지평으로 들어와라, 그러고서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이데거를 배우려면 독일어를 열심히 하고, 독일어 안에 들어가서 그 어원을 찾아내야 겨우 이해할까 말까 하는 정도까지 갑니다. 다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생태신학이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성경에 신이 인간에게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해 자연파괴로 이어졌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기독교는 오늘날 생태계의 파괴를 비롯한 어려운 위기를 가져온 종교적인 근거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20세기 중반부터 강렬하게 받았습니다. 생태신학은 거기에 대한 대답으로 나오기 시작했는데요. 서구와 세계를 지배한 로고스 신학은 철저하게 지적인 것이기 때문에 결국 몸과 자연을 비하하고 억압하는 데 별 문제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도(道)의 신학을 주장해왔습니다. 정신 중심의 로고스 신학에서 몸과 자연 친화적인 도의 신학으로 모형전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몸과 여성의 소중함을 복구하고 생태계를 복구해야 한다는 것을 에코 페미니즘(eco feminism)이라고 합니다. 생태의 위기를 맞아 서양에서 내놓은 가장 유력한 신학이고 사상인데, 아직도 서양의 이원론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도 사상이나 태극 사상은 상극을 넘어 상생을 주장해왔습니다. 생태신학에 다석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몸나 얼나로, 몸과 얼을 갈라놓으면 다석의 중요성이 희석될 수 있습니다. 생태계를 살릴 수 있는 것은 서구의 영혼 중심적인 사유체계에서 몸과 숨의 영성을 회복해야 하는데, 그것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 다석 사상에 있다고 나는 주장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꾸로 몸과 얼을 자꾸 구분하려 드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석은 몸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염통 노래' '밥통 노래'는 왜 했겠습니까? 염통을 바라보면서, 염통이 몸에서 하는 무언가를 보면서, 깊은 명상에 들어가서 몸으로 수행하며 하는 얘기거든요. 몸통 노래, 밥통 노래를 이야기하는 분을 두고 몸과 얼을 구분해야 한다고 하면 핀트가 어긋난 것이죠. 숨도 마찬가지입니다. 숨도 목숨, 말숨, 우숨으로 나뉘거든요. 그의 사상은 결국 몸과 숨으로 말과 글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것이 말과 글의 신앙이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본래 신앙은 말을 넘어서 몸으로, 글을 넘어서 숨으로 하는 차원의 신앙으로 승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구 생태신학의 경우 몸에 대해서는 강조하지만, 숨이라는 걸 모릅니다. 숨이 사실 가장 중요한데, 숨이 없으면 생명은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음 세대에 기계 인간이 되고 인간이 사이버 세계에 들어간다고 한다면, 그 사이버 세계와 기계인간이 인간과 다른 점은 몸과 숨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사이버 세계에 들어간다는 의미 아시죠? 게임을 할 때 자기 아바타 속에 들어가버려요. 아바타와 자기를 분리하지 못해요. 그건 고치기 힘든 병이 되어버립니다. 아바타는 몸과 숨이 없거든요. 그러한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영성의 비밀이 몸과 숨에 있는데, 그걸 몸과 얼로 나누기 시작하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김 교수의 책에서 다석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문자 그대로 믿었다고 했는데요. 이것은 시기적으로 언제쯤입니까. 다석도 기독교에 대한 사상이 변화를 겪지 않습니까. 부활은 로마의 국교가 된 뒤 예수가 신격화하면서 첨가된 것이라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던데요.

”동광원 마지막 강의 같은 것을 들으면, 분명히 그분은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성육신 신앙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평신도들 앞에서 편하게 이야기하느라 그런지 모르지만 그 자체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소수서원 강학당에서 미국의 동양계 신학교육자들이 유교예절 교육을 받았다. [사진=김흡영 교수 제공]

-다석은 “예수의 재림만을 바라고 있는 것은 자기 욕심이고 정말 해야 할 일은 예수를 따라 자기의 생명완성에 정진하는 일”이라고 했는데, 다석은 예수의 재림에 부정적이었나요?

“기독교 신앙과 예수를 얘기하면서 성육신과 부활을 부정할 수 없었을 거예요. 다석도 예수님의 제자인 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재림의 문제는 어느 신학자도 다 고민하는 거예요. 재림이 있다고 하면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고 값싼 은총을 믿는 사람들에겐 굿 뉴스지요. 그러나 이미 천당 가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삶의 현장 속에서 윤리와 도덕을 간과하거나 무시할 가능성이 큰 것이죠. 우리 기독교인의 윤리적 책임과 사회적 도덕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재림의 문제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검토해야 합니다. 현재 이 시점에서 예수의 도를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는 데 방점을 찍어야지, 재림을 기다리면 된다는 식의 싸구려 신앙은 곤란하다고 말씀하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책 제목인 가온찍기를 쉽게 설명하면….

"‘가온찍기’라는 건, 기역은 하늘, 니은은 땅이고. 그 사이 ‘아래 아’는 천지인의 자리 속에서 자기의 참 자리를 찾아서 찍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천지인이라는 연결망 속에서 자기의 자리를 찾아내는 거죠. 결국 신앙이라는 것은 하늘(하나님)과 땅(자연), 그리고 나의 관계성 속에서 통합적이고 전체적이고 총체적인 ‘나’라는, 즉 ‘참나’를 찾는 것부터 신학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의미죠. 거기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요.(웃음)”

“어려운 얘기지만 쉽게 얘기하겠다”고 해놓고 더 어려워진 것 같다.

-학자로서 앞으로 구상을 말해주기 바랍니다.

“겨울에는 추워서 서울에 있습니다만 봄이 되면 다시 서울과 영주를 왔다 갔다 할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은 신학자로서 한국 기독교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는 우리의 과거와 단절되었거든요. 우리의 과거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이죠.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는 과학기술의 시대입니다. 코로나와 기후변화 같은 것도 과학기술을 통해 또 해결해야 합니다. 인공지능을 필두로 한 과학기술 시대에 우리의 신앙, 종교, 영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저는 다석의 통찰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우선 국내에서 도의 신학을 대중화하고 또 세계로 나아가 도의 신학 및 몸과 숨의 영성을 가지고 죽어가는 지구촌을 살리는 영성의 자료로써 이바지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는 “다석이라는 선지자는 내가 지금 발전시키고 있는 ‘도(道)의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광맥의 하나”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인터뷰=황호택 논설고문 ‧ 정리=이주영 인턴기자>

다석은 새로운 영성의 종교혁명가 9-⑩ 심중식 소장 -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

다석은 새로운 영성의 종교혁명가 - 아주경제

다석은 새로운 영성의 종교혁명가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
입력 : 2021-03-24 


다석은 통일 대신 귀일(歸一)하자고 했죠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
입력 : 2021-03-17 17:09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⑨ 심중식 소장<上>

광주 동광원과 벽제 동광원은 육신의 즐거움을 끊고 고신극기(苦身克己)의 삶을 산 무명(無名)의 성자 이세종 이현필과 다석 류영모의 정신이 서려 있는 곳이다. 다석은 1948년 광주 동광원 수양회에서 첫 강의를 했고 1971년 여름 수양회까지 매년 연초와 광복절 전후에 광주에 찾아와 말씀을 전했다.
다석이 81세이던 1971년 동광원 여름 수양회에서 한 마지막 강의는 학력이 낮은 동광원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다석의 신앙과 생각을 풀어내 소중한 자료로 남았다. 심중식 귀일연구소장이 오래 돼서 녹음 상태가 좋지 않은 테이프를 원음에 충실하게 풀어 <한나신 아들 예수>라는 책으로 펴냈다.
동광원을 세운 이현필의 스승 이세종(1877~1942)은 집안이 가난해 어린 시절부터 머슴으로 살았지만 근검절약해 동네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되었다. 무학의 이세종은 성경을 읽기 위해 한글을 깨쳤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부터 가난한 이웃의 고통과 슬픔을 생각하며 차마 배불리 먹지 못하고 따뜻한 잠도 잘 수 없다”며 채무자들을 모아놓고 빚문서를 태워버렸다. 창고 문을 열어 양식과 재물을 주위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길 가는 나그네나 거지들이 오면 대접해 보냈다.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수도자의 삶을 살던 이세종은 아내를 누님이라 부르며 부부생활을 끊고 해혼(解婚)을 했다. 하루 한끼만 먹고 육식도 금했다. 그가 부엌 구정물 통에 빠져 버둥거리는 쥐를 구해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주식은 쑥범벅이었다. 그는 성경을 거의 외울 정도로 많이 읽었다. 그가 기도터를 세우고 성경을 가르치자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1937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였던 정경옥은 전남 화순에 살던 기독교인 이세종을 만나고 나서 신학잡지 <새사람>에 “도암의 숨은 성자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글로 소개했다. 정경옥은 마하트마 간디보다 더 존경할만한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세종은 세속적 명리와 욕심을 끊겠다며 원래 이름을 버리고 ‘빌 공(空)’자를 써서 이공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마하트마 간디와 이공이 실천한 일일일식(一日一食)과 해혼을 다석도 따라 했다. 이공의 수제자가 바로 이현필이다.


벽제 동광원 뒷산에서 심중식 소장.[사진=유수민 인턴기자]
다석은 1946년 서울YMCA 현동완 총무의 이야기를 듣고 이세종의 자취를 찾아 화순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공이 작고한 지 몇 년 뒤였다. 현 총무는 세계의 성자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온 다석과 현 총무를 광주역으로 이현필(1913~1964)이 마중 나갔다.
이현필은 1948년 여수순천 사건으로 발생한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해 6·25 전쟁 중에는 600여 고아들을 보살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가정으로 돌아갈 수 없는 폐결핵 환자들을 거두어 주었다.
이현필과 마더 테레사(1910~1997)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일생 동안 버림받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낮은 자세로 섬기며 살았다. 이현필은 가톨릭 같은 교회나 조직의 지원도 없었다.
이현필은 스승 이공의 가르침에 따라 이나 벼룩도 죽이지 않고 놓아주었다. 길을 다니다 벌레를 밟아 죽일까 염려해 맨발로 다녔다는 일화도 있다. 불교의 불(不)살생 교리 형성에 영향을 준 인도 자이나교의 수행자들과 비슷한 삶의 자세였다.
다석은 당대에 이광수 등과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라고 불릴 만큼 지식인 사회에서 알려진 사람이었지만 이현필은 변변한 학력이 없는 초라한 시골 청년이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진리를 구하는 정직한 구도자로서 식색(食色)을 초월하여 절대이신 하나님만을 모시는 진실한 신앙인이었다. 광주를 빛고을이라는 우리말로 처음 고쳐 부른 사람도 다석이다.

食色을 초월하는 하루 한끼와 해혼(解婚)

벽제 계명산 앵무봉 골짜기에는 현동완 YMCA 총무가 찾아와 기도를 드리는 움막이 있었다. 1956년 현 총무를 따라왔던 정한나 수녀가 이듬해 이희옥 박공순 수녀와 함께 수도처를 개척했다. 수녀 세 사람이 농사를 짓고 수도생활을 하면서 이 지역 사람들이 수녀골이라고 불렀다. 이현필은 1964년 52살 때 광주에서 이곳을 찾아와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벽제 동광원은 다석이 살던 구기동에서 두 시간 정도면 걸어서 올 수 있는 곳이다. 다석은 웬만한 거리는 모두 걸어 다녔다. 다석은 가끔 이곳에 와서 동광원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강연도 하고, 예배도 보았다. 1919년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정재용도 벽제리 웃골에 살았다. 다석은 벽제 동광원에 들를 때면 꼭 정재용의 집을 찾았다.
동광원, 귀일원, 귀일사상연구소 등은 이세종 이현필과 다석의 사상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자매 기관이다. 현재(鉉齋) 김흥호 목사가 다석의 뒤를 이어 동광원 수양회 강사를 하다 2002년 경부터 나이가 들어 그만두면서 심중식 귀일사상연구소장이 강사를 맡았다. 현재는 다석이 아끼는 제자인 김 목사에게 내려준 호다.

-이현필 성인은 굶기를 예사로 하고 나중에 부부관계를 끊는 해혼을 했습니다. 금욕적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자기학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런 삶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이현필 선생이 어떻게 사셨는지 살펴보면 눈물겨울 정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한 사랑의 고통을 몸소 겪으며 자기를 극복하려는 고신극기의 삶을 사셨죠. 지금 기준으로 보면 과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당시 거의 모든 국민이 하루 한끼도 제대로 못 먹고 굶주리던 시절이었죠. 전쟁 통에는 하루에 고구마 몇 개로 연명했습니다. 내가 안 먹으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먹지 않겠는가, 그런 자비와 사랑에서 우러난 행위였지 자기학대는 아니었습니다.”

-동광원과 귀일원 사람들은 귀일(歸一)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요. 어떤 뜻이 담겨 있습니까?

“다석이 1955년 6월 2일에 쓴 일지를 보면 귀일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統一爲言 人間譌 (통일위언 인간와)
歸一成言 天道誠 (귀일성언 천도성)

한시를 풀이하면 이런 뜻이죠. ‘통일(統一)을 이루겠다 떠드는 것은 인간들이 하는 거짓이다. 귀일(歸一)하여 말씀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법도요, 진실이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통일하겠다고 야단을 쳤습니까. 우리나라가 해방되자마자 이념 때문에 남북으로 갈려서 서로 싸우면서 계속 통일을 부르짖었습니다. 6·25 전쟁 3년 동안 참화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분단과 전쟁의 참화를 겪은 다석은 정치지도자들이 떠드는 통일이란 말을 싫어했습니다. 다 제 욕심에서 나온 통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귀일은 자기를 부인하고 극복하여 무아(無我)가 되어 진리이신 한 분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길에 순종하는 통일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 그이의 마음 안에서 녹아져 너도 없고 나도 없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가 되자는 운동입니다. 귀일의 의미가 다석과 이현필에 의해서 기독교식으로 해석되고 공동체적 사회원리로 확장되었지만 이 말은 원래 선불교에서 나온 말입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우주 만물이 하나로 돌아간다.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갈까’ 라는 유명한 화두입니다. 법화경에 일승(一乘)을 설명하면서 ‘회삼귀일(會三歸一 · 셋이 모여서 하나로 돌아간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에 비해 통일은 해방 후 분단된 조국 현실을 놓고 나온 정치적 의미의 새로운 용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석은 통일을 말하지 말고 귀일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각자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진실이 되면 진리 안에서 진정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통일 전쟁이 부른 참화

이현필은 말년에 정인세 원장에게 ‘귀일원을 하시오’라고 권했습니다. 귀일원을 통해 우리 사회에 한 사람이라도 소외되거나 버림받는 영혼이 없는 그런 민주적인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귀일원은 현재 약 150여명의 장애인들과 50여명의 직원들이 함께 지내고 있다. 직원들 가운데 동광원 출신은 거의 은퇴하고 수녀님들 몇 분이 함께 생활하며 봉사하고 있다. 심 소장은 귀일원의 천사 복은남 수녀 이야기를 들려줬다. 복 수녀는 이현필의 초기 제자로 여러 언님(다석이 만든 말로 동광원에서는 수사 수녀를 이렇게 부른다)들이 따랐다.
“복 수녀는 귀일원에서 어려운 환우들을 돌보며 생활했는데 언제나 그 얼굴이 화평하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분이 맡은 환우 중에 사고를 당하여 꼼짝도 못 하고 24시간 누워 지내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환우의 얼굴이 항상 밝아 차츰 사람들에게 천사의 얼굴로 소문이 났습니다. 사람들이 그 환우를 보기 위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환한 천사의 얼굴을 만들어준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복은남 수녀였습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날마다 그 환우의 침대 밑에서 생활하며 조금이라도 환우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곧바로 일어나서 수발했습니다. 식사는 물론이고 대소변과 목욕, 자세를 돌려주고 옷 갈아입히고 세수를 시켜주고 온종일 쉴 새 없이 돌봤습니다. 그렇게 십수 년을 한결같이 지극 정성을 다하자 환우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밝아지게 된 것입니다. 복 수녀에게 ‘얼마나 힘드시냐’고 물으면 “힘들다니요? 제가 주님을 섬기는 일인데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하신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번화한 도시에 있는 정신장애인 수용시설이지만 지금까지 쇠창살 자물쇠 등의 격리시설이나 통제 없이 한 가족이 되어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저절로 동화되고 치유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헌신성과 영적 감화의 능력이 대대로 축적되어 흐르는 곳이 귀일원이라 하겠습니다.”



이현필 묘소 앞에서 대담하는 심중식소장(왼쪽)과 인터뷰어. [사진=유수민 인턴기자]
이현필 신앙공동체가 가족과 사회에서 버림받은 고아와 불치병자들을 돌보기 위해 시작한 동광원은 1965년 사회복지 법인 귀일원으로 이름이 바뀐다. 귀일원에서 정신장애 및 지체장애인들을 보살피던 언님들이 정년 퇴임하여 갈 곳이 없게 되자 남원시 대산면에 새로 터를 닦아서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다. 그것이 현재의 남원 동광원이다. 동광원과 귀일원은 이현필의 제자들이 세운 신앙공동체이자 사회복지 봉사 기관이다. 2010년부터 귀일원에서 귀일사상의 연구와 전파를 위해 귀일사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대학시절 함석헌 선생과 <씨알의 소리>에 접하고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다지요. 그러다 방향을 전환해 1981년부터 현재를 찾아가 다석을 공부하고 실존적 신앙을 배우게 됐다면서요?

“시골 출신이라 서울에 대한 동경이 무척 컸습니다. 그러나 정작 서울대에 들어와 보니 고등학교 시절과 질적으로 다를 게 없었습니다. 이제 남과 경쟁하는 일은 그만두고 내가 갈 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막막했습니다.
몇몇 동아리에 들어가 공부를 했습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에리히 프롬의 책을 시작으로 역사학 및 사회과학 서적을 보면서 고민이 많아졌습니다. 학교에서 몇 번 데모를 하고 친구들을 따라 함 선생 집회에 참석하면서 인생이 무엇인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생각하게 됐습니다. ‘독재 타도! 민주평화통일 만세!’ 라고 외치지만 저에게는 용기가 없을 뿐 아니라 목숨이 아까웠습니다. 내가 세상에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누구인가.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나. 처음으로 실존적 물음을 해보면서 내 자신이 백지장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수와 성경 그리고 기독교를 알고 싶어 기독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함 선생의 <씨알의 소리>를 구독하고 동양 경전들을 읽어보고 김태길 교수님을 찾아가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5·18을 겪고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만난 분이 현재였습니다. 현재가 이끄는 이화여대 연경반(硏經班)에 처음 참석했을 때 선생은 시국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종교철학적인 이야기만 하니까 너무 현학적이지 않은가 하고 거부 반응이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하루 한끼를 먹으며 세속을 초탈한 도인같은 느낌이 들고 동양경전과 성경을 새롭게 그리고 쉽게, 깊은 내용으로 풀어주는 것을 보고 차츰 말씀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관심을 끌었습니다. 현재는 다석을 만난 지 6년 만에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시고 일식(一食)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참 스승을 모시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복음 14장 6절)는 독특한 해석이 제게 천둥 같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바울 사상이 지배적이었지만 이제는 요한 사상으로 기독교를 다시 살려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과 바울서신은 로마사람들을 위한 복음이지만 요한복음이야말로 동양인을 위한 복음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요한복음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귀가 열려야 눈이 열린다

-어떻게 동광원과 인연을 맺게 됐습니까?

“연경반에서 현재는 다석뿐 아니라 이현필 선생과 동광원에 대해 가끔 말했습니다. 1985년 박영호 선생의 <다석 유영모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전기를 읽었습니다. 엄두섭 목사가 1977년 쓴 <맨발의 성자 이현필>이라는 책도 봤습니다. 현재는 다석과 함께 광주에 내려가 이현필 선생을 만났던 이야기도 해주었습니다.
이현필 선생이 옷 속에 있던 이가 소매로 기어 나오니까 그것을 잡아서 너도 함께 살아야지 하면서 다시 자기 품속으로 집어넣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 YMCA 화장실이 아주 더러운 공중화장실이었는데 이 선생이 제일 깨끗한 화장실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선생께서 직접 또는 제자를 시켜 계속 청소하고 관리를 하니까 가장 깨끗한 화장실이 되었다고 합니다. 가장 더러운 곳을 가장 깨끗한 곳으로, 가장 척박한 땅을 가장 비옥한 옥토로 만드는 사람들이 이현필의 동광원 사람들이라고 김흥호 선생은 소개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벽제 동광원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갔을 때 아무리 둘러봐도 동광원 간판이 없었습니다. 허름한 토담집들이 두어 채 있는데 거기가 동광원이었습니다.
그 당시 현재가 동광원 여름 수양회에서 강사로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2002년 현재가 동광원 수양회에서 이제 나이가 많아서 더는 찾아오기 힘들다고 하자 동광원 사람들이 제자라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2003년 내가 처음으로 동광원 수양회 강사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다석, 현재, 그리고 나로 이어지는 3대(代) 강사라 할까요. ”

-현재의 강의를 녹취 편집해 주역, 원각경, 양명학, 법화경, 화엄경 강해를 펴냈는데요.

“1981년 현재의 이화여대 연경반에 출석하면서 종교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주된 관심은 진리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다석이 52세에 중생(重生) 체험을 했다는데 그게 어떤 것일까. 현재는 35세에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데 그게 어떤 체험일까. 사도 바울이나 아우구스티누스, 감리교를 시작한 존 웨슬리나 모두 거듭남의 체험을 가졌는데 나는 언제 어떻게 하면 그런 체험을 가질 수 있을까?
현재는 늘 귀가 열려야 눈이 열린다 했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듣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자 선생의 말씀이 점점 더 깊이 다가왔습니다. 깊이 심취해서 듣고 있으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습니다. 이제 무슨 말인지 거의 다 알아듣는가 싶었지만 그게 곧바로 제 것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현재의 말씀이 어떻게 하면 나의 이야기로 될 수 있을까?
그걸 놓고 고민하다가 현재와 좀 더 가까이 지내기 위해서 붓글씨를 배웠습니다. 매주 토요일이면 댁으로 찾아가서 차로 한 시간쯤 걸리는 곳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그렇게 두 시간을 배우고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다시 댁으로 모셔드린 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던 1992년 5월 5일 새벽에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영적 차원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기쁨과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동광원 옆에 있는 현동완 YMCA 총무의 기도터. [사진=황호택]
그후 나도 일식을 시작하면서 현재의 강의를 녹취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석의 일좌식(一坐食) 일언인(一言人)을 따라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식과 해혼(解婚)은 일언이고, 일좌는 현재의 강의를 듣는 것이고, 일인(一仁)은 녹취를 푸는 것이었습니다. 다석이나 현재의 모든 말씀을 요약하면 일식 일언 일좌 일인입니다. 일식은 주야통(晝夜通)이요, 일언은 생사통(生死通)이요, 일좌는 천지통(天地通)이요, 일인은 유무통(有無通)이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역강해>로부터 시작하여 <법화경 강해> <화엄경 강해>까지 계획대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날마다 땅 파고 김 매며 농사짓고 예배드리는 일이 동광원의 일상인데요. 이런 수도자적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일상에서 수도자로 사는 삶, 그것이 가장 자연스런 삶이요, 가장 자기답게 사는 삶이요,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 하겠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일상적 수도자의 삶이 되면 거기에 무슨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의미가 있어 사는 것도 아닙니다. 배고프면 먹고 고단하면 자는 생활, 그처럼 그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니까, 자유요, 평화와 기쁨의 삶이지 조금도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지에 이르기까지 거쳐야 하는 길은 좁고 험난합니다. 선불교에서 3단계를 이야기합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런 1단계에서 얻는 평상심은 도라고 할 수 없겠습니다. 그런데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라는 2단계를 거쳐서 마지막에 산은 역시 산이요, 물은 역시 물이라 하는 3단계에 이르러 고요한 평화를 얻게 됩니다. 그런 평상심을 일상에서 살아내는 것이 마지막 수도자의 삶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3단계를 심우도(尋牛圖)에서는 10단계로 표시하는데 일체 공(空)이 되었다가 마지막에 시정 바닥으로 다시 내려가서 남을 도우며 살아간다는 입전수수(入廛垂手)입니다. 공자로 말하면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경지입니다. 지천명(知天命)과 이순(耳順)을 지나 평상심이 되니까 이제 마음대로 해도 조금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그런 자유의 경지입니다. 동광원에서는 일생 험난한 온갖 역경을 겪고 난 뒤에 일체를 하나님의 손길에 맡기고 감사와 기쁨으로 사는 언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심중식 소장 약력>

-1957년 출생
-1977~81년 서울대학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 대학시절 5.18을 겪고 좌절을 겼다 이화여대 김흥호 교수를 만나 다석 유영모의 동양적 기독교와 주체적 신앙을 알게 됨
-1981~83년 서울대 공대 대학원.
-1981~2011년 30여년 동안 현재(鉉齋) 김흥호 선생에게 동양경전과 성경을 배움.
-1992년부터 일일일식하며 스승의 강의를 녹취 편집하여 주역강해, 원각경강해, 양명학공부, 법화경강해, 화엄경강해 등을 출간.
-2003년부터 다석과 김흥호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자생적 기독교 수도공동체인 동광원, 귀일원에서 수양회 강사로 참여
-2010년 귀일연구소소장으로 활동하며 귀일영성학교 운영중
-2018년 <맨발의 사랑 이현필의 삶과 신앙> 편저
-2020년 다석이 1971년 8월 광주 동광원에서 행한 마지막 강의를 정리한 <한나신 아들 예수>를 편찬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⑩ 심중식 소장<下>

1950, 60년대 시골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리면 유명한 부흥 목사들이 와서 현란한 쇼맨십을 보여주는 설교를 했다. 요즘 케이블 채널에서 인기를 끄는 장경동 목사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TV도 없었을 때의 이야기다. 교육 수준이 낮고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우선 교회로 끌어들이는 데 효과적인 선교 방식이었다.
<한나신 아들 예수> 머리말에 나온 것처럼 다석이 동광원에서 한 강의는 학력이 거의 없는 신도들을 상대로 비교적 쉽게 풀어서 한 말씀이다. 그래도 여전히 딱딱하고 어렵다. 엔터테이너 부흥사가 인기를 끌던 시대에 다석을 모셔와 강의를 들은 이현필과 동광원 식구들은 기성교회 사람들과는 생각이 달랐던 것 같다.
“물론 다석이 강의할 때 대부분은 알아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알아듣는 이는 이현필 정인세 김준호 김금남 등 몇 사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석은 한 사람, 아니 반 사람만 있어도 그 영혼을 위해 말씀을 다했을 분입니다. 그리고 다석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한마디라도 기억했다가 두고두고 곱씹으며 사는 동광원 언님들을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최옥남 언님은 “일러 이에 이르시니 이겨 일즉 이러나서 이룬 일을 이루어라”는 구절을 늘 외고 있었습니다. 또 어떤 언님은 “있다시 온 옛다시 간 없이 있을 나”라는 구절을 외며 살았습니다. 수녀 수사로서 순결과 초월의 믿음으로 사는 그 수도의 길에 다석이 동행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큰 힘이요 격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벽제 동광원을 자주 찾았던 다석

-심 소장이 책으로 출간한 다석의 마지막 강의는 다석학에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다석은 책을 저술하지 않고 20여 년 간 일기를 남겨 놓았습니다. 그 일기를 모아서 나온 책이 <다석 일지> 4권입니다. 그런데 그 책은 주로 시(詩)로 되어 있는데 일반인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워 다석 직제자들의 풀이를 읽어봐야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가 간단히 해설을 붙인 <다석일지 공부> 7권을 솔출판사에서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현재가 속기사를 시켜 1년 동안 다석의 YMCA 강의를 속기한 자료가 책으로 나온 것이 <제소리>입니다. 박영호 선생이 이를 보강하고 해설을 붙인 책이 <다석강의>입니다. 그리고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연경반 강의를 주규식이 노트한 것을 바탕으로 박영호 선생이 펴낸 책이 <다석 씨알강의>입니다. 그리고 다석이 1971년 동광원 여름수양회에서 1주일 간 한 강의를 녹취해 나온 책이 <다석 마지막 강의>입니다. 이같이 여러 책이 나왔지만 다석의 육성과 대조할 수 있는 책은 <다석 마지막 강의> 뿐입니다.
내가 이번에 새로 <한나신 아들 예수>를 다시 편집한 경위는 머리말에 적어 놓았습니다. 다석의 남아있는 유일한 육성이기 때문에 그 사상과 믿음과 영성을 연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객관적인 자료라 하겠습니다. <다석 일지>도 다석이 직접 기록한 1차 자료이지만 시적인 표현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해석에서 논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석의 동광원 강의는 쉽게 풀어서 말한 내용이라 훨씬 이해하기 용이하고 해석상 논란이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다석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동광원 마지막 강의를 직접 듣는 것입니다. 다만 녹음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서 그것을 듣기 쉽게 책으로 나온 것이 <한나신 아들 예수>라 하겠습니다. <한나신 아들 예수>도 녹취 과정에서 잘못되거나 누락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부분을 찾아내 자꾸 보완해 나감으로써 완성도가 높은 책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동광원을 만들고 평생 봉사하는 삶을 산 성자 이현필의 초상 [사진=유수민 인턴기자]
 
-이현필은 굶기를 예사로 하고 극한의 고통을 감내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도 있는데요. 풍요의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기준에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이현필 선생이 살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이현필 개인의 실존적 상황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자기처럼 살라고 가르치거나 본을 보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1940년대 1950년대에 거의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배불리 먹는다는 것이 죄의식으로 다가올 정도였습니다. 다 굶고 있는데 어찌 나만 배를 불릴 수 있느냐?
하늘나라에서는 맨 꽁무니가 꼭대기라 했습니다. 이현필은 버스나 기차를 타도 맨 마지막에 타고 밥을 먹어도 맨 마지막에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좋은 것은 모두 남에게 먼저 양보하고 남은 것이 있으면 그때 참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를 특히 강하게 의식하며 살았던 분이 무아(無我)를 추구했던 이공 이현필 선생이라 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신앙인이 자기를 이기고 도를 실천하는 길은 식색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현필의 스승 이세종은 이런 길을 성령 충만의 가난이라 했습니다. 조선시대 서당에서 배우는 명심보감에 포난사음욕(飽暖思淫慾)이요 기한발도심(飢寒發道心)이라 했습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음욕이 일어나고 춥고 배고플 때 구도의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이긴다는 것은 결국 식욕과 성욕을 벗어나는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이현필 선생이 6.25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분들이 희생을 치렀습니다. 미국인 유화례 선교사를 모시고 화학산에 들어가자 공산 빨치산들이 그들을 잡아내려고 혈안이었습니다. 화순 도암에서 세 분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순교자들의 희생 덕분에 살아나기는 했지만 죄의식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누구보다 큰 죄인이라는 생각에서 회개와 기도를 하며 살았습니다. 후두 결핵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약을 쓰지 않았습니다. 결핵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약을 써서 다 치료해주고 자기가 마지막으로 남게 되면 그때 약을 먹고 치료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약이 아주 귀한 시절이기 때문에 그런 비싸고 귀한 약을 어떻게 차마 자기가 먼저 먹을 수 있느냐는 심정이었습니다.
쥐나 이도 죽이지 않은 것은 전통적인 불교의 불(不)살생 신앙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경에도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현필이 말하길 천지는 나와 한 몸이요, 만물은 나와 한 지체라 했는데 이런 만물일체지인(萬物一體之仁)의 사랑 때문에 저절로 그렇게 한 것이라 봅니다. 요새 언어로 말하면 우주적 생명의식과 생태학적 영성이 강했던 분들이라 하겠습니다.”

다석의 육성이 남아 있는 동광원 강의

-다석은 이 세상에 나온 어떤 사상이나 주의도 미정고(未定稿)라 했는데요?

“다석은 주의(主義·이즘)를 반대하였습니다. 민주주의가 좋지만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려면 주의가 없어져야 된다고 했습니다. 민주도 주의가 되면 또 다른 전제정치가 된다는 것입니다. 미정고에 불과한 그런 주의나 사상에 붙잡히면 참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존 힉이라는 분이 종교다원주의 이론을 발표했는데 거기에도 진실이 있겠지만 그것도 미정고에 불과한 것입니다. 종교간 대화로써 평화를 이루자는 취지엔 찬동하고 지지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원주의라 하여 모든 종교가 같다고 생각한다면 다석의 뜻과는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석은 ‘나는 다른 아무것도 믿지 않고 말씀만 믿는다. 여러 성현(聖賢)들이 수천 년 뒤에도 썩지 않는 말씀을 남겨 놓았는데 그걸 씹어 먹고 산다. 이렇게 말하면 종교통일론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통일은 싫다. 통일이 아니고 귀일(歸一)이라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종교가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 고유의 개성을 가지고 발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인류 전체를 위해서 하나가 되어 일하자는 것이 귀일입니다. 공자가 말하길 소인은 같으면서 불화하는 사람이고 대인은 각각 다른 입장에서 화합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 같아져야 한다면서도 서로 다투며 화합이 되지 않습니다. 대인은 화이부동(和而不同), 서로 화합하여 하나가 되기 위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불교가 각기 특성을 살려 나가야지 모두가 같다고 해서 각자의 특성을 없애려 든다면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생명력을 잃게 되지 않을까요?”

-심 소장은 현재(김흥호)의 제자인데요. 현재의 제자들과 박영호 선생과 그 제자들이 다석을 보는 입장이 좀 다른 것 같던데요. 다석이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는 관점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현재는 다석을 참 크리스천이라고 보는 데 비해 박영호 선생은 다석을 탈(脫)기독교 또는 기독교를 초극한 분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박 선생은 다석이 얼나를 깨치고 솟나신 분이요, 종교다원주의의 선구자로서 유불선과 기독교를 회통하고 종교를 초월하신 분이라고 본 거지요. 특히 박 선생이 불교의 니르바나를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고 하면서 불교나 기독교나 궁극적 진리에서는 같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런 주장에 동조하시는 분들도 많은 듯합니다.



광주 동광원(지금의 귀일원)에서 집회를 마치고 여성 신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 중 가운데가 다석. [사진=동광원 제공]
다석은 20대부터 정통 기독교를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초에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톨스토이와 간디의 영향을 받아서 다석은 그동안 진리로 믿었던 기독교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성경과 함께 불경이나 유교의 사서삼경을 보며 자득(自得)한 것을 YMCA 연경반에 나가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52세에 성령을 체험하고 ‘부르신 지 38년 만에 믿음에 들어감’이라는 글을 김교신이 발행하는 <성서조선>에 발표했습니다. 이 글에서 다석은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할 때 노자의 몸도 아니고 석가의 맘도 아니고 공자의 집도 아니고 예수의 인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다석이 말하는 새로운 믿음에 들어감이란 의미가 무엇일까요? 52세 때인 이 당시의 믿음은 기독교 믿음이지 유교나 불교의 믿음이라 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다고 또 다석이 정통 기독교로 돌아갔다는 의미도 아니지요.
무엇보다 다석이 82세에 동광원에서 마지막 강의를 했는데 그 말씀을 들어보면 다석은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예수의 정신으로 사는 참 크리스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석의 동광원 마지막 강의가 다석을 연구하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무교회자로 알려진 일본의 우치무라와 한국의 김교신 선생은 제도적인 교회를 거부하고 본래의 교회를 회복하자는 분들이지요. 다석은 김교신 선생과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신앙 기조는 조금 달랐습니다. 같은 크리스천이지만 김교신은 바울 사상에 기초한 정통교리를 받아들인 분이고 다석은 바울 사상을 벗어난 분이었습니다. 나는 다석을 새로운 기독교 영성을 보여 주신 종교 개혁자, 또는 종교 혁명가로 봅니다. 기독교 탈출자나 초극자(超克者)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미리 보낸 질문에 대한 서면 답변인데 상당히 길어서 분량을 줄여 싣는다.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다석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다석이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관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박영호 선생과 그 제자들로서는 다석이 기독교라는 한 종파의 교리를 넘어섰다고 하는 관점도 양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재가 이화여대에서 다석 연경반을 꾸릴 때는 150~200명씩 모였다고 들었다는데요. 현재가 돌아가시고 이명섭 전 성균관대 교수가 3년 정도 끌고가다가 해체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모임이 왜 오래 지속하지 못했습니까?

“이명섭 선생이 용인에서 오기 때문에 매주 참석하시기엔 너무 거리가 멀었습니다. 사모님이 운전을 하고 모셔왔는데 사모님이 아프면서 지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화대학 교회에서 담임 목사님 중심으로 연경반을 이어가는 것이 바람직했겠지요. 현동완 총무가 세상을 떠나자 다석이 하던 YMCA 연경반도 그만두게 되었는데 새로 부임한 총무가 다석의 연경반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기존 교회나 교단에서 신학을 한 목사들이 다석이나 현재의 사상과 신앙을 용납하기에는 아직 때가 일렀던 거지요.”

뜻 모르고 주르륵 외는 것은 기복신앙

-다석은 사도신경에 대해 “더덕더덕 다 주워 모은 것이지 생명이 통하지 않는다. 요긴한 게 아니다”라는 비판적인 말을 했는데요.

“이 부분은 <한나신 아들 예수> 동광원 마지막 강의에 비교적 잘 나와 있습니다. 더덕더덕 주워 모은 것으로 생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생명이 통하지 않는 그런 글을 무슨 신조라고 조르르 욀 필요가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불교에서도 신자들이 염불한다고 뜻도 모르고 그저 경을 읽거나 외기만 하면 부처님이 병도 물리치고 여러 액운을 벗겨주신다고 믿는 것은 기복신앙이 될 수 있지요. 사도신경도 그렇게 생명 없이 조르르 욀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이지 그 내용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 했습니다. 아무리 외워봐도 생명이 통하지 않는데 왜 이런 것을 형식적으로 굳이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사도신경이 12 사도가 한마디씩 한 것을 모아놓았다는 전설이 있는데 아마 그것 때문에 주섬주섬 모아놓은 것이라 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심 소장은 주역에 조예가 깊다고 들었습니다. 다석은 모든 동양 고전에 밝았지만 주역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하지요. 보통 사람들은 주역 하면 점치는 책으로 인식하는데요.

“유교 삼경에 서경 시경 역경이 있습니다. 현대식으로 서경은 역사, 시경은 문학, 주역은 철학이라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주역에는 우주관과 세계관과 인생관이 들어있습니다. 주역은 이진법 수리철학이라 하겠습니다. 두 기호를 사용하여 이진법을 쓰게 되면 3자리 수는 8, 6자리 수는 64가 됩니다. 인생과 자연과 우주의 요소를 8가지로 구분하고 인생과 자연과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64가지로 범주화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8가지 요소들이 서로 부딪혀 일어나는 64가지 상황 속에서 나는 지금 어떤 상황에 있고 그 상황 안에서 어떤 자리에 있느냐 하는 것을 밝혀보자는 것입니다. 같은 상황이라 해도 그 자리는 또한 6개로 구분되어 있으니까 64 곱하기 6 하면 384가지의 경우가 나옵니다. 인생과 역사 사회의 모든 문제를 64개의 상황과 384가지 처지로 구별하여 설명하는 체계입니다.

하늘의 빛과 땅의 힘과 사람의 숨이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주역의 길입니다. 시간과 공간과 인간이 합쳐져 6차원의 세계를 펼쳐가는 것입니다. 주역에 관하여 유명한 말이 무극이 태극(無極而太極), 태극생양의(太極生兩儀)입니다. 그러니까 무극( ○ ) 태극 ( · ) 음양(∽), 이 셋이 핵심 개념인데 음양은 4상 8괘 64괘로 무한히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태극도(太極圖)입니다. 생명(○)과 진리(․)와 도道(∽)를 그린 것입니다. 주역은 복희伏羲)의 체험과 문왕(文王)의 표현과 공자(孔子)의 해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공자의 해석을 깊이 생각하고 문왕의 표현을 삶으로 실천해가다가 종당에 복희의 근본체험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빛과 힘과 숨을 통하여 일체지인(一体之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경(易經)을 통해서 지천명(知天命)하고, 이순(耳順)하고,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함으로 나 자신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역경은 점치는 책이 아닙니다. 우주의 원리와 인생의 윤리를 알려주는 책이지 점치는 책이 아닙니다. 역경은 한마디로 궁신지화(窮神知化) 성덕야(盛德也), 절대자에 부딪쳐서 나 자신이 변화되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길을 알려주는 책이라 하겠습니다.”



벅제 동광원에서 이현필 기념관이 완공을 앞두고 있다. [사진=유수민 인턴기자]

1964년 이현필 선생은 광주에서 아픈 몸을 이끌고 벽제에 와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현동완 총무의 기도처가 있는 계명산 골짜기의 모임에 다석은 자주 참석했다. 이현필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하자 다석은 무릎을 탁 치시며 “아, 시원히 잘 가셨소!” 했다고 한다. 다석은 계명산을 찾아올 때마다 “이 선생~ ! 이 선생 ~” 하고 살아있는 사람처럼 불렀다고 심 소장은 전했다.
이현필은 죽기 직전에 “나는 죄인이니까 거적에 싸서 그냥 아무나 밟고 다니는 길에 묻어라. 봉분을 만들지 말고 평토장(平土葬)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현필의 스승인 이세종도 산골에서 숨을 거두며 관, 수의, 비, 묘를 만들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이공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되었다. 제자인 이현필 선생도 세상을 떠나며 수의나 관을 쓰지 말고 길가에 묻으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관을 구해서 가까운 산 언덕에 무덤을 썼다. 1990년대 말에 동광원 출신으로 아프리카 선교사를 갔던 박찬섭 목사가 이현필 선생의 무덤을 찾느라 몇 시간을 헤맸다. 스승의 무덤을 어렵게 찾아낸 박 목사는 ‘성인의 무덤을 이렇게 방치해서 되겠느냐’고 주위를 설득해 봉분을 만들고 묘비를 세웠다. 묘비의 글은 엄두섭 목사가 짓고, 묘비엔 현재의 붓글씨를 새겼다.
벽제 동광원에서 이현필 기념관이 완공 단계에 접어들었다. 동광원에서 이현필과 다석의 가르침을 받은 임락경 목사가 한옥으로 짓자고 발의해 이현필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근사한 집을 갖게 됐다.

-수도권에 있는 벽제 동광원에서 수녀들이 밭농사 짓는 것도 좋지만 젊은이들이 찾아와 다석과 이현필의 정신을 잇는 영성공동체로 활성화하는 방안을 세웠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던데요.

“좋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신도 중심의 동광원 영성공동체가 활성화할 때 교회가 새로워질 것이며 신학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새롭게 갱신하는 교회가 되어야 생명력이 있지, 그렇지 못하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말라버릴 것입니다. 다석과 이공의 귀일신앙으로 평신도 영성공동체가 활성화하면 교회가 달라질 것이고 갱신된 교회라야 사회에 새 물결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과제는 양극화와 생태계 및 환경파괴, 그리고 가치관 혼돈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시대적 과제를 풀어낼 수 있는 새로운 한국 사상과 영성이 다석과 동광원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벽제 동광원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언님들이 차려준 점심을 먹었다. 계명산의 쑥과 찹쌀로 빚은 쑥개떡이 별미였다. 김치와 깍두기도 농약을 뿌리지 않은 유기농 채소에 젓갈을 쓰지 않아 맛이 담백했다. 점심 후에는 현동완 총무의 기도처와 이현필 선생의 묘소, 기념관을 둘러보고 계명산을 떠났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없이 계신 하느님…' 낸 이정배 교수2009.03.12

'없이 계신 하느님…' 낸 이정배 교수


'없이 계신 하느님…' 낸 이정배 교수
입력 2009.03.12

하루 한 끼만 먹고, 항상 걸어 다녔으며, 널빤지 위에서 잠을 잔 다석 유영모(1890~1981)는 함석헌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진면목을 아는 이는 드물다. 유불선과 기독교 등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을 두루 회통한 그의 정신세계는 대단히 넓고 깊다.

현대적 의미의 종교다원주의의 선구자로 해석되기도 하다. 그에 대한 연구는 소수의 제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져왔고, 학계에서는 지난해 서울에서 열린 세계철학대회를 통해 공식적인 논의가 시작됐을 뿐이다.

토착 신학을 연구해온 이정배 감리교신학대 교수가 유영모의 신학세계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모시는사람들 발행)을 냈다.

"오늘의 세상을 살릴 수 있는 기독교의 길이 다석 신학 속에 있다고 믿습니다." 이 교수는 위기에 빠진 한국기독교가 다시 소생하려면 함석헌, 김교신, 김재준, 이용도와 같은 초기 지도자들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하며, 그 사상적 원점이 유영모라고 말했다.

"유영모는 가장 한국적인 정신의 맥을 갖고 기독교를 이해한 분입니다. 그의 사상을 통해 한국기독교는 성장, 물량화, 기복 위주의 가벼운 기독교가 되기 이전의 정신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 교수는 유영모에 대한 이해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그의 사상이 한국적일 뿐만 아니라 충분히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담론이기 때문에 유영모는 한국이나 동양의 신학자가 아니라 세계의 신학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영모가 말하는 하느님은 '없이 계신 분'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동양적인 사유방식으로 하느님을 이해한 것입니다. 서구의 존재론이니 실체론의 사상적 틀과는 완전히 다르며, 불교의 공(空)의 논리와 만납니다. 그런 하느님이 인간 삶의 밑둥, 본성 속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같은 다석신학의 본질이 서구신학의 최근 경향에 견줄 수 있는 선진적인 것이라고 이 교수는 강조했다. 요즘 목사나 신부들 가운데 예수를 '스승'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유영모는 예수를 구세주가 아니라 자신의 스승이라고 표현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이 교수는 말했다. '덜 없는 인간'은 유영모의 인간 이해다. 인간도 '없어야' 하는데 '아직 덜 없는'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유영모의 사상을 다산 정약용에서 시작되는 유교적 기독론의 맥락이나 역사적 예수 연구, 동학과도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다. "유영모는 순수 우리말로 철학을 한 분인데, 경전 전문을 우리말로 풀이한 것은 '노자'와 '천부경'뿐입니다. 천부경이 다석 사상의 근간이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교수는 과거의 유영모에 대한 이해는 소수의 추종자 중심이었으나, 최근에는 종교적 사고의 근거로 유영모를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그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유영모는 기독교 신자가 된 지 38년째 되던 해에 불교 선승들의 오도송에 해당하는 오도시를 지은 적이 있다. 이화여대 교수를 지낸 작곡가 조병옥씨가 20년 전 이 오도시에 곡을 붙여 부른 '믿음에 들어간 이의 노래'가 이 교수의 책을 통해 처음으로 소개됐다.

"지난해 10월 서울 장충동의 대안교회인 겨자씨공동체에서 유영모에 대해 설교를 하는 날, 마침 조씨가 이 곡을 알려주려고 악보를 가져왔습니다. 특별한 인연에 매우 놀랐습니다." 이 교수는 "지금까지 유영모는 교회 밖의 인물로 그려졌지만, 교회 안에서 교회적인 인물로 이야기할 때 그로부터 얻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남경욱 기자 kwna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