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7

천도교와 지구인문학 : 천도교회월보 를 중심으로 박길수 (원광대학교 불교학과 박사과정)

 

천도교와 지구인문학 :             천도교회월보 를 중심으로

박길수 (원광대학교 불교학과 박사과정)

1. 들어가는 말

지구인문학 은현재의세계 지구공동체 가- ’ 도달한 실존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학문적 방법론 또는 관점과 태도로서 제안된 것이다. 최근 들어 조성환 허남진은이러한 새로운 학문 경향을 한국적 맥락의 특수성을 반 영하여지구인문학 이라는틀로 명명하고 학문적 도전을 전개하고 있다.1)

지구인문학이 이러한 지구화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되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보면, 한국에서 지구화가 가 시화되는 시기에 이를 포착하고 그에, 따른 근본적인 변화를 읽어낸 다음 궁극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은 동학 (東學)으로부터 시작되는개벽종교 라는점을 알 수 있다. ‘서학에 대한 동학 이라는시각을 탈피하고, ‘우리 학문으로서의 동학 을보편학으로서의 개벽학2)으로 읽어낸 바탕에서 지구인문학이라는 발상이 가능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 글은 동학이천도교(天道敎)’라는 근대종교로 개신(1905)한 이후 창간된 기관지(機關誌)인 천도교회월 보 의 초기 텍스트(1910-1922)에 나타난 지구인문학적 비전과 전망에 관한 기본적인 고찰을 한다. 이를 통 해 동학 천도교가- 지구인문학의 원천이자 원형이며, 보고라는 점을 소명하고, 향후 본격적인 연구의 출발점 으로 삼고자 한다.

2. 연구의 배경과 범위

1) 동학에서 천도교로의 개신 동학은 신과 인간에 대한 이해[侍天主], 만물의 관계에 대한 이해[同歸一體], 지구를 포함한 전 우주적 차원에서의 삶의 태도[三敬-敬天 敬人 敬物․ ․ ], 천지인만물의 비전[人與物開闢] 등 여러 방면에서, 그 창도기 에 이미 새로운 지구인문학적 이념을 골간으로 제시하면서 출발하였다. 동학시대(1860-1904)에 형성 된 지구인문학적인 비전은 천도교시대(1905-현재) 이후 서구사회와의 교류 접촉면이넓어지면서, 새로운 전개 양상을 띤다. 천도교시대를 연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1861-1922) 1900년 초부터 동학의 체 제를 개편하고 자주적 근대화를 위한 정치 사회 문화․ ․ 방면의 노력(민회운동, 혁신운동)을 기울이던 중, 1905 12 1일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공포하고, ‘근대적 제도종교 로탈바꿈시 킨다. 1905년 이후 천도교는 교단 제도를 정비하고, 근대적 교육기관, 언론 출판- 기관을 설립 지원 경영․ ․

1)   조성환 허남진  , 「지구인문학적 관점에서 본 한국종교 홍대용의-              의산문답과               개벽종교를 중심으로」,            신종교연구 제43, 2002, 92~94쪽 참조.

2)   cf. 김용휘,           우리 학문으로서의 동학 , 책세상, 2007.; 조성환,                한국근대의 탄생 개화에서-   개벽으로 , 모시는사 람들, 2018.11; 조성환 이병한         ,                 개벽파 선언 , 모시는사람들, 2019.9.

을 하면서 한국사회에 전면에 등장한다.

2)                     1900년대 천도교 교리의 재해석 이러한 제도적 정치적운동과 더불어 동학시대의 교리를 재해석하는 작업도 전개된다. 1900년부터 1922년까지는 이러한교리 재해석작업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이다. 이 작업은 각종 교서(敎書) 의 간행, 기관지(機關紙와 機關誌) 발행, 교육기관 운영 등을 통해 전개된다. 이 중에서도 1910년에 창 간된 천도교회월보 는천도교 교리 형성기 를주도적으로 견인한 기관지(機關誌)이다.

3)                     천도교회월보 의 역사적 의의 이 글은천도교시대 의교리 담론의 폭발적인 성장과 확장을 주도한 천도교회월보 를 통해 1910년에 서 1922년까지 사이에 천도교시대에 지구인문학적인 비전이 어떻게 발전하고 성숙해 갔는지 고찰한다. 1910년은 천도교회월보 가 창간된 해이며, 1922년은 천도교 교주인 의암 손병희가 환원(1922.5.19) 한 해이다. 이 시기(1910-1922)는 천도교 시대 초기(1900-1909)의 교리화 성과를 계승하면서, 천도 교회월보 를 통해 그 내용을 심화시켜 가는 시기이다. ‘천도교시대 의최초의 근대적 언론매체로는만 세보≫(1906.6.17 창간-1907.6.29)에 이어 창간한 매체가隆熙4’(1910) 8 15일 창간호를 발행한 이래 1937년까지 28년 동안 통권 296호까지 발행한 월간 기관지(機關誌)가 천도교회월보 이다. 천도 교회월보 는 천도교의 기관지였지만, 천도교시대에 걸맞은 교리의 재천명뿐만 아니라 당대의 대중계몽 과 문명개화 등의 시세(時勢)를 반영한 언론매체이기도 하다.3) 그동안 천도교회월보 를 통한천도교 이해 는극히 한정된 수준에 머물렀다. 특히 천도교회월보 는천도교의 언론출판운동, 문명화 촉진과 근대 계몽 이라는차원에서 주로 언급되었다.

4)                     선행연구 검토 김응조는 교단사적인 차원에서 천도교회월보 의 창간에서 폐간에 이르기까지 편집진과 편집 방향, 일 제 당국의 탄압 상황 등을 소개하였다. 김정인은 천도교회월보 가 1911 6월호(통권11)부터 설치 한 “‘언문부 에실린 논설, 기사, 잡보, 휘보 등을 통해 1910년대 민중의 삶과 그 변화의 단편을 추적하여민중들이 국망(國亡) 이후 천도교로 집결하여 가족공동체 중심의 종교활동을 영위하면서 근대 적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 을구명하였. 박상란과 우수영과 김정희는 각각 천도교회월보 내의영 적담(靈蹟談)’소설천덕송 의수록 현황과 특징을 분석하였다.4) 또 고건호는 천도교회월보 에 게재된 기사와 이돈화의 단행본들 분석하여 이돈화의신종교론 을논구하면서, 이돈화가종교 로서의천도교의 위상을 정립하고, 종교적 진리의 정당성을 사회적으로 확장하며, 종국에는 천도교를 중심으로

3)                     김정인, 1910년대 天道敎會月報 를 통해서 본 민중의 삶」, 韓國文化 제30, 서울대학교한국문화연 구소, 2002.12.

4)                     김응조, 「천도교의 기관지 <천도교회월보 와>  <신인간>, 『신인간』 통권438, 1996.4(4월호), 100-120

.( 개벽과 동학혼 (),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20.3, 45-72쪽 재수록).

김정인, 1910년대 天道敎會月報 를 통해서 본 민중의 삶」, 韓國文化 제30, 서울대학교한국문화연 구소, 2002.12.

박상란, 「근대전환기 영적담(靈蹟談)의 양상과 의의 - 『천도교회월보』 소재영적실기(靈蹟實記)’를 중심으

로」,         한민족문화연구  52, 한민족문화학회, 2015.

우수영,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 수록 소설의  담론   전개」,    현대소설연구   64, 한국현대소설학회,

2016.12. 김정희, 「 천도교회월보 에 나타난 일제강점기 천덕송」, 공연문화연구 35, 한국공연문화학회, 2017.8.

종교와 철학, 과학을 통일하여사회개조운동의 구심 에세우고자 하였다고 주장하였다.[1]) 그 밖에도 1900년대 천도교 연구에서 천도교회월보 내의 기사들이 단편적으로 인용, 언급되고 있다.

이상의 연구들에서는교리 정립기 에천도교회월보 에 반영된 교리 사상적특징, 그중에서도 천도교의 개벽사상의 근대적 표현인지구인문학적관점이 어떻게 조형되고 발전하는지에 대한 분석은 전무하다. 따라서 천도교 교리 정립기인 1910년대의 천도교회월보 기사를 전반적으로 분석하여 그 특질을 구명 하는 작업은 이제 막 출발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3.  천도교회월보 와 지구인문학적 사고

1)              천지인물(天地人物) 일원의 개벽적 전망 천도교회월보 창간호의 「천도교회월보취지문」[2])은 천도교회월보 발행 취지를 천도교의 역사적, 교리사상적 맥락에서 밝히고 있다; “(1)천도교의 진리는 이 세상에 난 지 3()에 걸쳐 고난 속에서 이어져 왔으 나 육대주의, 인류를 두루 이롭게 할 것이다. (2)전 지구적인 차원 그리고 전 인류적인 차원에서 영성의 새로 운 광채(光彩)를 더하고[靈性之新光彩], 학술의 새로운 지식을 더하며[學術之新知識], 제도의 새로운 의피(衣被)가 될 것이다[制度之新衣被]. (3)하늘이 새로워지고 도()가 새로워졌으므로 지구상 인류 또한 새로워질 것임을 세계 등족(等族=모든 민족 인류 이) 알게 할 것이다. (4)나아가서 비잠동식(飛潛動植)이 더불어 새워질 것이며 (5)이 모든 것은같은 뿌리 에서나온 존재임을 믿고 어짊과, 자비 사랑과, 천인합일에 이르게 할 것이 다 필자( 요약).”

(1)은 천도교 진리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인류 문명을 이롭게 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2)에서영성 은종 교적 정신적, 측면을, ‘학술 은사상적 철학적, 측면을, ‘제도 는정치적 사회적, 측면을 대표하는 것이다. 한마 디로 사회 전 부문에 걸쳐 새로운 사상[光彩]과 지식(知識)과 문화[衣被]를 창조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3) (4)에서는 천도교회월보 의 관심 범위가(, 한울)-(, 진리)-(, 교단 와)’ 세계 인류는 물론이고, 비잠동식(飛潛動植)의 동식물과 사물에 두루 미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그 이후 지속적으로 관 심의 대상이 된다.[3]) 천 지 인 이- - ’ 새로워진다는 것은 천도교의 개벽사상의 기본 목표인새 하늘 새 땅에 사 람과 만물이 또한 새로워질 것8)이라는 구절의 의연인바, 천도교회월보 가 곧개벽 사상을그 기본 출발점 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에서는 좀더 포괄적으로 첫째, 만물의 유기적 연결성, 둘째, 당대의 유력한 동서종교의 기본 이념을 포함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좀더 정치(精緻)하게불이설 로도표현되는데 김중건은, 신리기형(神理氣形)의 사천(四天)과 공산법 리(公産法利)의 사지(四地), 초궁삼(穹三)의 삼족(三族), 유불선(儒佛仙)의 삼교(三敎) 등이 모두한 하늘의 소산 이라하였고, 사람의 생사(生死), 만물의 유무(有無), 천지인(天地人)의 일이삼삼이일(一而三三而一)로서 물()로서 보면 불일(不一)이나 천()으로 보면 불이(不二)하다고 하였다.[4]) 그 밖에도 다수의 필자들이 불이 설을 설파하는바 삶과, 죽음이 하나요 천지만유는, 본래 한 한울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요 이, 세상 만물이 모 두 천도(天道)와 지도(地道)로 말미암아 형성된 것이며 나와, 한울이 하나요 도, ()가 본래 하나로서 그로부터 비롯하는 천인 만물이- 모두 하나이며 천덕(天德)과 인덕(人德)이 또한 하나이고, 하늘이 육신을 품고 성령이 천지를 품어 그 안에 천지만물이 모두 살아가는 이치는 하나이며 한울과, 사람의 조화가 하나이고, 천지와 도 덕과 생사와 선악과 애증(愛憎)이 불이(不二)이고(李昌薰), 사해일가 천포형제(四海一家 天胞兄弟)로서 하나라 고 하여 만물일원의 관점을 일관되게 강조한다.10)

2)              전 지구적 전망 천도교회월보 1주년에 이종린은 「본보 1주년 기념에 대한 감상 에서」 (1) “한 방울의 물이 크나큰 시련을 딛고 흐르고 흘러 바다를 이루고 한, 줌의 흙이 쌓이고 또 쌓이기를 거듭하여 6대주를 이루는 것처럼 (2) “천 도교는 이 세상을 건지기 위해 태어나고, 천도교회월보 는 천하의 태평한 세월을 향해 열어젖힌 지 1년에 불과하여 세상에 다 펴지지 못하였고 세계의, 주역이 되지 못하였으며 아직, 안목이 충분하지 못하지만 먼 장 래를 생각하며 기념하 지않을 수 없다고 밝힌다.11)

2주년 기념호 기념사에서는 천도교회월보 가벽항궁촌에 들어앉아서도 능히 세계 만국 형편과 좋은 의 견을 들을 수 있게 하고능히 세계일을 듣게 하고능히 천하만국 형편을 보게 하는 큰 기관이라고 하였 다.12) 3주년 기념호 기념사에서는 천도교회월보 발행 취지를 (1) “무극대도의 진리를 발포(發布)하고, 한울 과 사람이 합하여 하나가 되는 원칙을 밝혀서 세계 억억중생을 건지 고” (2) 세계를 풍동(風動)하여 우리 도의 목적을 만국에 광포(廣布)하는 것이라고 하였다.13)

이러한각오 와’ ‘포부 를반영하여 각종 교설(敎說)들 또한 전 지구적 우주적( ) 전망 하에 전개되었다. 야뢰 이돈화는 「우주설(宇宙說)」에서 이 우주는 절대공(絶代空)으로부터 상대세계[萬殊一理]로 화생하여, 자연의 순환[循環之理]로 운행하고, 순환하는 데서 필연적으로 운명(運命)이 생겨나며, 이 운명을 깨달은 자가 곧 달 인으로서의 수운 선생이고 그, 가르침을 이 세상에 펼치는 천도교는만종교(萬宗敎) 만철학(萬哲學)을 포함하 여 진보시대의 최후종교로 후천오만년을 지도해 나갈 것이라고 하였다.”14) 김중건은 “‘시방세계와 억억인생을 한 방의 한 가족으로 여길 수 있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15)

3)              근대 과학을 통한 인지혁명

천도교회월보 창간호부터 천도교 교리를 천명하는교리부(敎理部)’ 외에 학술부(學術部), 기예부(技藝部詞藻; 詩文) 외에 물가부(物價部)까지 포함하여 폭넓은 기사를 게재하였다 특히. 학술부는 물리학, 화학, 지리 학 경제학, 서학 서구학문 인- ’ 신학문(新學文)의 각 부문의 포괄하여 독자들의, 민지(民智) 계발을 추구하였 다.

창간호에 오늘날 천문학(天文學)에 해당하는 「지문학(地文學)의 정의(定意)」를 소개한 데 이어 1910년대 내내 이러한학술부 기사는매호 게재되었다.16) 「지문학의 정의 에서는」 일월성숙(日月星宿)을 우러러 관찰

10)            오상준(), 「생사불이설(生死不二說),          천도교회월보            통권9, 1911.4.15, 9-11쪽 外 11) 이종린(李鍾麟), 「본보 1주년 기념에 대한 감상」,              천도교회월보            통권13, 1911.8.15, 1-5.

12)   중고산인(李鍾一), 「월보기념에 대하여」(언문부),          천도교회월보            통권25, 1912.8.15, 48-50.

13)   중고산인(李鍾一), 「월보 발행하는 취지에 대하여」,    천도교회월보            통권37, 1913.8.15, 1-5.

14)   이돈화(李敦化), 「우주설(宇宙說), 천도교회월보            통권21, 1912.4.15, 9-12.

15)   김중기(金重基), 「사해붕우도일신(四海朋友都一身),    천도교회월보            통권24, 1912.7.15, 26-27.

16)   1920년대 이후 학술부 기사는 거의 사라지고, 천도교 내의 교리적 담론이 주를 이루게 된다. 이는 1920 6 월 창간된 개벽 잡지를 통해 이러한 방면의 학문을 소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고[5][仰察] 밝히는 학문을 천문학이라 하고 화기수토, (火氣水土)의 실제 이치를 굽어 관찰하고[俯察] 연구하는 학문을 지리학이라한다고 하면서천문과 지리의 관계를 발췌하여 서술함으로써 한 과학을 더하는 학문을 지문학(地文學)이라고하는데, 천도교회월보 는천문지리와 자연지리로부터 정치지리에 이르기까지 대략을 밝혀 나가겠다고 한다.17)

제 호부터는2 「무기화학」 연재로서 물질과 에너지, 물리적 변화와 화학적 변화, 화학과 물리학의 관계, 화 학의 효용 등을 언급하여 물리학의 거시 세계에 대비되는 미시 세계에 관한 안목을 제시한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천도교회월보 에서는우주관’ ‘우주설 과같은 근대 이후의- 세계관으로 이어지는 논설들을 게재 하기에 이른다.[6]) 또한 제 호4 (1910.11)부터는 「각국종교내력 을」 8회에 걸쳐 연재하면서 세계 종교사를 개 관하였고, 그 밖에 임산학, 화학, 의학(서양의학, 한의학), 위생학, 부인학, 교육학, 법률학, 경제학(治産學 포 함), 경영학(事務學 포함), 농사학, 양돈학, 사회학, 위생학, 논리학, 심리학 등의 거의 전 부문에 걸쳐 지속적 으로 확장시켜 나갔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천도교회월보 의 기자(記者)들은 물론이고 독자들은 하늘 인간의- 수직적 관계로부터 하늘과 인간과 만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이 지구상에 수많은 나라와 수많은 기후, 지리, 인문(문화)적 다양성 속에서 서로 협력 관계를 이루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인지혁명을 이루어 낸다.

4)  과학혁명 너머의 종교혁명 - 미래의 종교 이 시기 천도교회월보 가 일관되게 주창하는 중요한 논점은후천의 신종교 천도교 이다’ . 천도교는 선천 (先天) 시대 종교의 한계와 적폐를 극복한 신종교라는 것이다 그리고. 곧 후천종교로서의 천도교의 시대가 도 래한다는 것이다.[7]) 그러나천도교 의강조는 호교론(護敎論)에 머물지 않고, 근대 이후의 세계와 인류를 구 원할 핵심이 바로 ‘(신 종교 임을) ’ 주장하는 데 있다. 이는 근대 세계가과학 에의해 수립되었으며, 이것이 근 대의 문명을 나은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또한, 과학이 초래한 문제점이 극명하므로 근대, 이후의 새 세계는종교 가중심이 되어 이끌어갈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다.[8]) 이러한 논리는 종국에서종교통일론 으로귀결된 다. 종교통일은 첫째는 전통적인 유불선합일론에 대한 심화로부터 출발한다.[9]) 이는장래의 종교 가하나로 귀일[歸一, 統一]되는바, 이것은 단지 현재의 종교만이 아니라 종교와 과학,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미래의 종교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통일 그자체가 아니라, ‘종교 가과학과 철학을 포월하 여 세계일가(世界一家), 만족일원(萬族一員), 만물일체(萬物一體)의 새 세상을 구현하는 지도이념이 된다는 데 있다. 이때의 종교는 이미 전통적인 의미의 종교를 넘어선종교 너머 의종교, ‘이후 종교 로서 ()종교적 인 종교이다.[10][11]) 그것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종교가 전망하는 새로운 종교이기도 하다.23)

5)  영성적 세계관 천도교회월보 를 통해 천도교의 지구인문학적 전망을 조형해 나간 당시 천도교 지식인들은 세계의 위력 을 가능케 하는 과학에 대하여 반()과학주의를 취하지 않으며 오히려, 개조와 문명의 이름으로 과학에 대한 수용과 학습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러나과학 너머, 최후의 종교로서의 신종교 천도교 를( )’ 지향하는 만큼 영 성(靈性)에 대한 깊은 관심을 통해 과학을 포월(包越)하는 동력을 삼는다 영성이. 전체로서의 성령 즉, 한울님 의 영지(靈智)와 영능(靈能)을 가리킨다면 시천주, (侍天主), 내 몸에 모신 한울님의 영지영능은성령(性靈)으로 표현된다 인간은. 이 성령이 만물 가운데 최령(最靈)한 존재라는 점에서 만물, (萬物)에 대한 무한 책임을 지는

존재이기도 하다.24)

6)  세계 개조의 지향

20세기 초기 한국사회의 트렌드를 보여주는 단어 두 개를 들자면개조 와’ ‘청년 을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것을 거칠게 정리하자면, 1910년의 국망(國亡) 이후 청년들이 기성세대의 무능함을 타기(唾棄)하면서 청년들 이 구세대, 구시대, 구한국을 개조하여 새 사회, 새 시대, 새 한국 독립 을( ) 이루겠다는 의지가 충만하던 분위 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920년에 창간된 개벽 은 이러한 개조사상을 전면에 내세운 잡지이다. 그런데 천도교회월보 에서는 이미 1919 12월부터개조 와’ ‘천도교 의관계를 집중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하여 1921년까지 지속적으로 논구해 나갔다. 이후 개벽 지에서 좀 더 본격적으로 논의하게 되면서, ‘개조 에대 한 언급의 빈도는 줄어가지만 이는, 다시개벽 을키워드로 하는 논의로 전환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 상이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천도교회월보 나 개벽 에서의 개조가 서구 근대 지향의 의미가 아니라개벽을 지향하는 의미라는 점을 말해준다.25)

천도교회월보 에서 보여주는 개조의 (후천의 새로운) 종교가 근본 바탕을 제공하는 개조이며(李敦化), 천 도교의 정신에 의해서만 올바르게 전개될 개조이며(玄波, 박래홍). (후천) 도덕 지향의 개조이고(源菴, 오지 영), 인내천 세계를 지향하는 개조이며(花岡, 박사직; 金明昊; 朴達成), 가정으로부터 세계에 이르는 전면적인 개조(獨嘯生; 姜仁澤)라고 할 수 있다.26)

4. 나가는 말 올해는 천도교회월보 가 창간된 지 11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0년 전의 세계와 지금의 세계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천도교회월보 를 통해 들여다보면 110년 전 동학 천도교의- 지식인들이 바라보았던 세계의 문제는 지금 여기의- 세계에 고스란히 더, 심화되고 확장된 형 태로 계승되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110년 전의 세계나 지금의 세계가서구 세계의 확장 으로서서구적 근대화 가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근대 이후 를전망하는개벽적 시선’ ‘천도교의 지구인문학적 전망 또한’ 1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이다. 그 사이 천도교의 주체적인 역량(敎人數, 재정 규모, 당대 사회에서의 영향력 은) 비교할 수 없 을 만큼 위축되었으나, 외재적 환경, 다시 말해지구인문학 을요청하는 세계의 요구는 당시에 비하여 훨씬 강도 높게 진행되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천도교회월보 를 중심으로 근대 시기 천도교의 지구인문학적 관점과 태도를 고찰해 보았다.

24)                  1910 8월부터 1922년까지영성 과’ ‘성령 에관한 글은박춘갑(朴春甲), 「성령수련과 육신보호는 오교(吾敎) 의 지반(地盤), 천도교회월보 통권2, 1919.9.15, 26-28.” 외에 20여 편에 이른다.

25)                  1910 8월부터 1922년까지 천도교회월보 에 게재된개벽 에대한 주요한 글은김중건(金中建), 「후천개벽 설(後天開闢說), 천도교회월보 통권21, 1912.4.15, 40-43.” 외에 10여 편에 이른다. . 26) 1910 8월부터 1922년까지 천도교회월보 에 게재된 개조에 관한 글은이돈화(李敦化), 「개조(改造)와 종교 」, 천도교회월보 통권112, 1919.12.15, 4-8.” 이에 10여 편에 이른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접근은 이제 겨우 첫걸음을 뗀 정도이다. 1910년부터 1922년 사이에 천도교회월보 에서 기본적인 조형(造形)을 마친천도교 지구인문학 은’ 1922년 손병희 사후에도 계속해서 천도교회월보 를 통 해 전개되는 한편으로 1920 6월 창간된 개벽 , 1926년 창간된 신인간 등을 통해 좀 더 사회 속으로 깊 숙이 침투하면서 좀 더 본격적인 담론으로 전개되었고 이돈화, 등 천도교단 내 철학 사상가의단행본[12])을 통 해 심화되어 나갔다. ‘천도교 지구인문학 은이 글에서 살핀 1910년대의 담론들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고, 나 아가 이후의 제반 텍스트들을 함께 논의해야 비로소 그 실체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앞으로 좀 더 본격적이고, 깊이 있는 논구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재확인하고 새로운 출발점에 서는 것일 뿐 임을 밝혀 둔다.



[1] ) 고건호, 종교 되기 와-                       종교 넘어서기- ’: 이돈화의 신종교론」,        종교문화비평                 7, 한국종교학회, 2005().

              고건호, 「천도교 개신기종교 로서의 자기인식」, 종교연구 38,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05.

[2] ) 羅龍煥, 「天道敎會月報趣旨」, 天道敎會月報 創刊號, 1910 8월호, 1910.8.15.

[3] ) 이종린(李種麟), 「이물관천즉천역물(以物觀天則天亦物) 이천관물즉물역천(以天觀物則物亦天), 천도교회월 보 통권33, 1913.4.15, 5-7.

              윤형삼(尹衡三), 「천지만물이 활아심두(活我心頭), 천도교회월보   통권38, 1913.9.15, 20-21.

무기명, 「지구상인류만원기(地球上人類滿員期), 천도교회월보            통권44, 1914.3.15, 33. 8)                  海月神師法說 「開闢運數」, “新乎天新乎地 人與物亦新乎矣.”

[4] ) 김중건(金中建), 「불이설(不二說), 천도교회월보 통권2, 1910.9.15, 23-24.

[5] ) 2호 이후에는 물리학, 지리학 등의 각 분과 학문별로 1~2쪽씩 3~5개의 분과에 대해 연재가 이루어진다.

[6] ) 이돈화(李敦化), 「우주설(宇宙說), 천도교회월보 통권21, 1912.4.15, 9-12. 外 多數.

[7] ) 1910 8월부터 1922 5월까지, ‘천도교 시대의 도래 의의의를 주장하는 글은박명선(朴明善), 「오교(吾敎) 는 인류생활의 원기(元氣), 천도교회월보 통권4, 7-9.” 외에 30여 편에 이른다.

[8] ) 1910 8월부터 1922 5월까지, ‘종교 시대의 도래 를         주장하는 글은이관(李瓘), 「초매(草昧)시대 종교와 문 명시대 종교설」, 천도교회월보           통권4, 1910.11.15, 13-16.” 외에 40여 편에 이른다.

[9] ) 박명선(朴明善), 「유불선합일해(儒佛仙合一解), 천도교회월보 통권6, 1911.1.15, 14-17. 2.

[10] ) 앞의 고건호 「종교 되기 와-                                          종교-넘어서기’: 이돈화의 신종교론」 참조.

[11] ) 1910 8월부터 1922년까지 종교통일론과 종교와 과학, 철학과의 습합에 관한 글이관(李瓘), 「종교통일론」, 천도교회월보 통권10, 1911.5.15, 1-5.” 외에 20여 편에 이른다.

[12] ) 인내천요의 (1924), 수운심법강의 (1926), 천도교리독본 (1925), 신인철학 (1930), 자수대학강의 (편저, 1935), 동학지인생관 등

공화(republic)의 사상적 토양과 에토스 정의 : 유학의 화(和), 화동(和同)을 중심으로 김단아

 


【한국종교 분과】

[한국종교분과 4발표]

공화(republic)의 사상적 토양과 에토스 정의 :   유학의 화(), 화동(和同)을 중심으로

김단아(서강대학교 철학과

1. 서론

동아시아에서 공화(共和)는 왜 republic의 번역어로써 채택되었는가? 공화에 대한 개념사적 연구들은 위

질문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을 제시하고 있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결론에 귀착한다.

이 지점에서 상상해 볼 만한 질문은, ‘만약 중국의 經書와 역사서를 통해 형성된 이러 한 동아시아의 지적 토양이 없었다면 과연 共和政體와 같은 제서구의 정치제도가 어 떠한 방식으로 수용 및 정착될 수 있었을까?’라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수용자에게 전혀 이질적인 정치제도라면 공화제 설립의 구호가 과연 대중에게 어떠한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비록 그 이해의 방식이 오해에 기초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독립적 으로 발전해 온 두 전통이 조우한 데에는 그것을 전달, 융합, 재구성할 수 있었던 공 동의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1)

, 공화주의는 republic의 공허한 번역어가 아니며 양자가 지닌 공통점 때문에 접목된 단어라는 주장이 선 행 연구들의 공통된 가정이다 이에. 더 나아가 정상호(2013: 2016), 신주백(2017)은 공화주의가 republic의 번역어로써 기능하게 된 이유는 대동(大同)이라는 사상적 토양이 마련되어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본 논문이 주목하였고 강조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군주제의 부정 테제로서 공화가 수천 년동안 중앙집권적 왕권국가를 유지해 왔던 한국과 중국에서 쉽게, 그리고 급속 하게 뿌리 내릴 수 있었던 토착적 맥락이다. 서양에서 공화(res publica)의 본질을공공의 일 로생각한 것처럼 동양에서도 아주 오랫동안 국민 공의의 대변자로 표상되 는 군주가 사사로움을 버리고 애민과 선정을 향한대동공화(大同共和)의 정치 를이상 향으로 꿈꿔왔다.2)

정상호는 천하를 공공의 것으로 인식하고 애민정치의 시행을 목표로 하는 대동사회가 당시, 학자들이 공화주 의를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었던 사상적 기반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대동사회는 유가의 이상향으로 여

1)   이정환. 2013. “왕권찬탈과 정통주의 군주제 : 전근대 중국, 한국, 일본에서의 共和에 대한 재해석의 역사.” 대 동문화연구 제82, p. 449.

2)   정상호. 2016. “동아시아 공화(共和) 개념의 비교 연구.” 한국정치학회보 505, p. 232.


겨졌으며, 실현을 위해 유학자 집단에서 여러 방법들을 고안해왔다. 대동사상이 유가에서 차지한 위상을 고 려한다면 정상호의, 주장은 일견 타당한 가설로 보인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정상호의 주장은 타당치 않다.

우리는 여기에서 갈등을 인정하고 조화롭게 포용하려는 마키아벨리나 메디슨의 공화 주의와 달리, 갈등을 부정하고 원천적으로 제거하려는 공화주의에 대한 동양적 또는 한국적맥락의 그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3)

위 주장은 대동사상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대동은. 정상호의 주장처럼 형식적인 동일(同一)이 아닌, 차 이를 인정한 채 한데 어우러짐을 추구하는 화동(和同)을 뜻하는 사상이다(장현근, 2012). 따라서 본고는 대동 사상이 공화주의가 수용될 수 있었던 사상적 토양이라는 정상호, 신주백의 주장을 수용하나, 다른 논거를 제 시하여 정당화하고자 한다. , 대동사상의 요체인 화동, 특히 화()에 주목하여 공화주의의 사상적 기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본고는 실증적 연구나 개념사적 연구가 아닌, 사상사적 연구임을 미리 명시한다. , 화나 공화에 대한 사 료적인 해석을 주된 연구의 방법으로 삼지 않고 기존, 개념사적 연구에서 배재되어왔던화 사상에주목하여 공화주의의 기틀로 여겨졌던 대동사상을 재해석한다. 또한 공화를 화를 통해 정의하는 과정을 통해 현대 한 국에 부재하고 있는 공화의 에토스(ethos)를 우리의 사상적 토양 속에서 발견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2. 유학의 화()

군자는 화하면서 동하지 않고 소인은, 화하면서 동하지 않는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널리 알 려진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공자의 화는 동일과 구분되는차등적 지위의 개체들이 분명히 구분된 상태 에서 서로 어우러지는 것 을말한다 김단아( , 2020 : 77). 즉 타자에 대한 순응을 전제하는 동일과 달리 화는 여러 개체들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화는, 여러 개체들이 구분되어진 정적인 상태를 이르는 것이 아니라 개체들 사이의 상호 작용이 활발히 벌어지는 동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이질적인. 개체들 간의 상호작용은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하 며 갈등, 과정을 거치면서 개체들은 화해를 통해 균형을 찾아간다(Li Chenyang, 2014 : 9). 균형은 어느 한 쪽의 양보나 굴복을 통해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체들의 변화를 통해 가능하다.

화에 대한 이와 같은 추상적인 서술은 화를, 국 요리에 비유한 다음과 같은 안영(晏嬰)의 설명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동과 화는) 다릅니다. ()는 국을 끓이는 것과 같아서, 물・불・식초・젓갈・소 금・매실로 어육을 끓일 때, 불을 때서 익히고서 요리사가 간이 알맞도록〔和〕알맞게 잘 조절합니다〔齊〕. 간이 부족하면 (양념을) 첨가하고, 간이 지나치면 (물을) 부어 요 리하므로, 군자는 이런 음식을 먹고 마음을 화평하게 지닐 수 있습니다.4)

3)    정상호. 2013. “한국에서 공화(共和) 개념의 발전 과정에 대한 연구.” 현대정치연구 62, p. 11.

4)    春秋左氏傳 , 「魯昭公」 , 20, “. 和如羹焉, 水火醯醢鹽梅以烹魚肉, 之以薪, 宰夫和之, 齊之以味, 濟其不及, 以洩其過. 君子食之, 以平其心.” : 차민경. 2020. “『논어 에』 나타난 공자의 ()’의 세계관과 상생에 관한 소고.” 유학연구 50, p. 278에서 재인용.

국을 요리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재료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릇 안에 재료들을 넣고 물을 붓는 것만으로 국은 완성되지 않는다. 각각의 재료들이 화학 반응을 통해 변용을 거쳐야만 국은 완성될 수 있다. 그런데 단 순히 국을 끓이는 것에서 더 나아가 맛있는,         국을 요리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성을 갖춰야 하는가? 각 재료들 이 지닌 고유한 맛이 유지되면서도, 그것들이 국 전체의 맛을 해치지 않아야한다. 요리사는 재료들을 가감하 면서 마침내 그 지점을 발견한다 이처럼.   국의 재료들이 각각의 맛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맛을 내는 것처럼, 화는 여러 개체들의 종합적인 상호 작용을 통해 균형과 안정에 이르는 과정들을 총체적으로 뜻한다. 또한 국 요리의 목적이 재료들 간의 조화 그 자체이듯 화의,                목적도 화가 실현된 사회 조화로운, 사회 그 자체라고 이 해할 수 있다.

국을 끓이면서 간을 보는 사람이 필요하듯 화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다. 유학에서 그 기준 은 예()이다. 예의 주된 기능은 마디지음, 구분지음()으로, 개체들 간의 구별을 심화시킨다. 따라서 예에 는 계급의, 재생산을 정당화하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예의, 적용 앞에서 모든 계급은 평등하게 여겨졌다. 즉 예의, 적용과 실천은 모든 계급에게 요구되었으며 왕조차도 엄격하게 예의 제약을 받았다 특히. 조선에서 예는 왕과 고위공직자들의 권력 남용과 자의적인 통치를 방지하는 기능을 해왔기에 조선의, 군주는 입헌군주 에 상응하는 지위를 유지해왔다(함재학, 2008).

이와 같은 예의 이중적인 특성 작용은- 차이를 고착화하면서 적용에는 평등한 특성 은- 화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일러준다 즉 화는. , 개체들을 분별하는 기준과 그, 기준들을 모든 개체들이 수용하고 실천했 을 때 실현가능하다. 예컨대 오늘날 실행되고 있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적용을 위해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을 분별하는 기준이 필요하다. 동시에 법에 대한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동의와 실천이 필요하다. 두 조건이 만족되어야만 해당 법을 통해 사회의 조화를 도모할 수 있다.

3. 공화(共和)의 개념사

지금까지 논의한 바에 따라 화에 주목하여 공화(共和)를 해석한다면 화, ()를 함께 한다()는 뜻으로 이해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3, 특히 조선과 현재 한국에서 쓰이고 있는 공화는 화의 함의를 담지하지 못 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공화에 대한 역사적인 해석과 더불어, 좌우대립, 분단이라는 사건과 함께 정치적인 용 어로 변모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죽서기년 에서 공화는 주()대 폭정에 대항하여 여왕(呂王)을 내몰고 공백(共伯)의 화()라는 인물이 대 리 정치를 한 시기를 이른다 왕가의. 혈통을 받지 않은 이의 통치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공화는 세습군주제 를 위협하는 정치체제로 여겨졌으며, 전근대 동아시아 3국에서 공화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 되었다(이정환,

2013).

사마천의 사기 에서도 주대 공화는 왕이 없는 시기로 묘사되지만, 공백의 화가 아닌 주공과 섭공이라는 두 신하가 공화, 즉 공동으로 화합하여 국정을 다스린 시기로 서술된다. 이와 같은 사마천의 서술에 따르면 공화는 세습군주제와 대치되는 시기가 아니며 세자가, 장성한 뒤 대를 이을 수 있도록 신하들이 일정기간 동 안 대리 청정하는 시기로 이해된다.

그러나 사마천의 서술과 달리, 동아시아에서 공화는 임금이 부재한 정치체제로 주로 여겨졌다. 광해군일 기 와 고종실록 에 따르면 공화는 세습군주제가 시행되지 않은 시기로 이해되며, 특히 개화기 이후 공화는 구미의 정치제제를 이르는 말로 통용되었음을 실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저들 독립협회 은( ) 구미(歐美)의 공화(共和) 정치를 우리의 전제(專制) 정치의 옛 법에 옮기려고 하며, 대신을 제멋대로 쫓아내는 것을 식은 죽 먹기로 여기고 있으니, 이것이 첫 번째 죄입니다.5)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요원한 것을 따르는 무리들이 (중략) 다른 나라의 민주와 공화 의 제도를 채용하여 우리나라의 군주 전제법을 완전히 고치려고 합니다.6)

이처럼 죽서기년 의 영향으로 공화는 통치의 에토스(ethos)보다는 정치 제도의 측면에서 주로 논의되었다

(이영록, 2010).

4. 화동(和同)

금기시 여겨졌던 공화 대신 조선에서 널리 사용된 단어는 대동(大同)이었다 오늘날. 대동에 대한 오해로 인 해 대동을 민주주의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대동은 모든 분별과 구분이 없어지는 묵 가의 상동(尙同)과 달리 차이를, 인정하고 이견들의 조화를 이루는 화동(和同)을 의미한다(장현근, 2012).

신주백(2017)에 따르면 이와, 같은 대동사상은 동학농민운동과 대동단결선언 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무장기포의 포고문을 살펴보면 대동이 평등사상이나 신분 철폐와는 거리가 먼 사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신하된 자들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생각을 하지 않고,鳳位만 도둑질 하며,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아부를 일삼으면서 忠課하는 선비를 요망한 말을 한다고 이르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라고 한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 고, 바깥으로는 백성을 학대하는 벼슬아치가 많다. 인민의 이목이 나날이 변하며, 들어와서는 삶을 즐길 생엽이 없고 나와서는 몸뚱이를 보존할 계책이 없도다. 훨政이 날로 심해지고 원성이 연이어져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융기와 상하의 구분이 드디어

무너져 남김이 없도다.7)

위의 인용문에 따르면 동학농민군은 오히려 군신, 부자, 상하라는 위계 질서의 흐림을 지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농민군들은. 삼강오륜에 따른 구분을 다시 바로 잡는 것이 민()들의 역할이라고 보았으며, 신분 제의 철폐나 민주주의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대동은 프랑스 혁명과 달리 특정 계급의 배제나 타도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군주제, 귀족제, 민주제를 모두 조화시킨 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정체처럼, 동학 농민군들은 군주 신하 민중들, , 중 어느 한 쪽을 배재하지 않고도 고유한 정치 공간만을 보장해준다면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집강소를 통해 고유한 정치권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그러나. 운동의 실패와 한일 강제 합병으로 인해 군주제가 철폐되면서 대동에 기반한 정치 개혁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대동사상의 부활은 1910년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등 14명이 발표한 대동단결 선언 에서 살펴볼

5)   而彼以歐美共和之政, 欲移我專制舊規, 擅逐大臣, 視若茶飯常事, 其罪一也.”( 고종실록 38, 고종 35 12 11 일 陽曆 3번째기사). 한국고전종합DB

6)   而比年以來, 喜新遠之輩...欲用他國民主共和之俗, 一變我邦君主專制之規, 卒之有甲午、乙未之變.”( 고종실록 38, 고종 35 12 9일 陽曆 3번째기사).한국고전종합DB

7)   皮長東徒布告      : 신주백. 2017. “1910년 전후 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정체로 정치이념의 전환 공화론과 대동론을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 93, p. 164 재인용.

수 있다 신주백. (2017)은 선언의 제목에 일치단결이나 총단결이 아닌 대동단결이 사용된 이유가 있으리라 짐 작한다. 대동을 화동으로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대동단결 선언의 요지를 쉬이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대동 단결선언 은 일제와의 동화(同化)를 거부하고 순종의 서거로 주권을 이양 받은 한민족(韓民族)간의 화합을 주 장한다.

불쌍한 우리 자손에게 유습이 대대로 전하여져 당동벌이(黨同伐異)의 중독에 빠져서는 우리의 앞길은 영겁에 희망이 없다.8)

대동단결선언 은 당시 분리된 독립단체들 중 어느 쪽의 의견이 더 타당하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야 한다 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동단결선언 이 비판하고 있는 것은 각 단체들이 합의나 양보 없이 자신들의 의견만 이 옳다고 주장하는 현실이다 따라서. 단체들과 개인들은 회의를 통해 분리된 여론들을 종합하고통일적 유 기체 를건설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구체적인 실현 방식은 제시되지 않았지만 통일적, 유기체의 건립을 지지한다는 언급을 통해 특정, 단체가 다른 단체들을 흡수하는 것이 아닌 각, 단체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기관을 구상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대동단결선언에 영향을 받아 설립 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화동의, 정신을 이은 좌우 인사들과 단체들의 합작에 의하여 구성될 수 있었다.

신주백은 주권이 일반 민중들에 귀속되었다는 주장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공화(republic)과 대동사상의 접 합이 대동단결론 에서 성사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가의 쇠락함과 정치 질서의 문란을 걱정하며, 자신 들을 정치 주체로 인식하기 시작한 동학농민운동에서 이미 한국적 공화주의는 싹트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 다 그러나. 일련의 정치적인 사건을 거치면서 대동과, 공화는 다시 분리되었으며 이후 공화는 민주에 흡수되 거나 정치 체제를 이르는 표현에 그친다.

5. 공화(共和)

화는, 군주를 부정했던 역사적 사건 때문에 공화가 아닌 대동 속에서 그 사상적 명맥을 이어왔다. 한일 강 제 합병으로 군주제의 폐지로 형식적인 평등이 도래한 뒤 공화는 민주와 결합되어민주공화 라는단어로 대 한민국임시헌장의 제 조에서1 등장한다 그러나. 조소앙의 민주공화는 민주주의와 동일한 개념이며, 귀족공화 에 대비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강정인 권도혁( · , 2018). 이후 임시정부, 건국헌법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 지 헌법에 명시된 민주공화 특히, 공화는군주가 없는 정치 체제 로이해되고 있다 민주와. 결합된 공화는 이 후, 공산주의와 대립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가리키거나, 북한의 정치체제와 대비되는 민주정치를 이 르는 정치적인 용어로 변모하게 되었다(이영록, 2010).

공화주의, 민주공화의 에토스에 대한 논의는 오늘날에도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사상적 전 통과 유리되지 않으면서도 (민주 공화의) 에토스를 정의할 수 있다 예컨대. 재야학자 설의식은 다음과 같이 민 주공화를 정의하였다.

민주주의의 명분을 세우는 바에 우리의 국체는민주공화 라는이 글자에 요약될 뿐이 오 또 그로써 족하다. ‘민주 인지라모든 주권이인민 에게있음이 물론이오니 인민으 로부터 발원되지 않는 권력의 존재는 일절로 부정되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공화 인

8) 조성일, 2020,  100년 후에 다시 읽는 독립선언서 , 서울: 다차원북스, p. 119.

지라 모든 정책이 전체의 조화에 있음도 물론이니 전체의 균형이 확보되지 않는 권력 의 편재도 일률로 부정되어야 할 것이다.9)

설의식은 갈등의 조정을 통해 균형을 찾아가는 화의 특성에 따라 공화의 에토스를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 이 화에 주목한 공화의 에토스 서술은 republic의 의미와 유리되지 않으면서도 전통 사상과 접목시킬 수 있 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설의식의 주장에 이어서 화를, 통한 공화의 에토스를 정의하고자 한다.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화는, 구성원들 간의 차이를 인정했을 때 추구할 수 있다 또한. 화는, 갈등을 회피하 지 않고 그것을 추동력 삼아 변화를 통한 합의와 균형에 이른다. 공화는, 화를 함께 추구하는 것이다. , 사 회 구성원들이 사회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제거하거나 흡수시키려는 시도 대신, 화해를 추구 하는 노력들을 통해 균형에 이르는 것이다 공자가. 화의 도구로 예를 제시했듯이 현대에서는, 법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화의 목적이 화 그 자체이듯이 공화의, 목적도 공화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구체적인 이해를 위해 민주와 공화를 비교해보겠다 민주주의를. 통해 모든 개체들은 형식적으로 평등해진 다. 가령 투표에서, 국민 일인이 행사하는 표의 가치는 모두 동등하며 개인들이 지니고 있는 차이들은 모두 무시된다. 그러나 투표와 같은 형식적인 대의민주주의만으로 사회의 조화는 실현시킬 수 없다. 공화는 투표 를 통해 묵살되었던 소수자들의 의견, 형식적인 평등으로 인해 은닉되었던 차별과 갈등에 주목한다. 조화로 운 사회로의 진입을 방해하는 의견의 대립뿐만 아니라, 성 계급, , 장애에 따른 차별과 갈등을 직시하고, 그것 들을 시정하기 위한 조치들이 바로 공화이다 가령. 수적으로 대표될 수 없는 소수자들을 각 정당의 비례대표 로 선출하는 시도들을, 공화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갈등의 형식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 민주주의라면 갈등을, 실질적으로 해소하는 것이 공화이다.

공화의 목적 그 자체가 조화로운 사회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공공선을 추구하는 republic의 에토스와 유 리되지 않는다. 이미 조선시대부터 대동사상을 통해 군주와 관료들은 국가를 공적인 것으로 이해하였고, 예 로 인해 서구의 황제나 귀족과 같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까지 공화의 주재 자는 왕과 신하들로 한정돼있었다 동학농민운동을. 거점으로 민들 또한 공화의 주체로서 스스로 인식하기 시 작하였으며 3.1운동을 통해 온전한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게 되었다. 오늘날 공화는 다양한 계층의 사회구성 원들의 참여를 통해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즉. , republic은 서구로부터 수용된 개념이지만, , 화동, 공화로 이어지는 사상적 토양 속에서 새로이 움틀 수 있는 개념이다.

6. 오늘날 공화의 함의

공화는 다양한 개체들의 차이를 존중하고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들을 조절하며 균형과 안정을 지향하 는 사회 구성원들의 노력을 의미한다 지난. 4월 투표를 통해 구성된 21대 국회는 공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가? 혹은 21대 국회 자체는 조화로운가? 이번 21대 국회는 이전과 달리 여성, 청년, 장애인, 북한 이탈주민 등 다양한 소수자들이 입성했다 그러나. 여전히 낮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어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다고 볼 수 없다. 무엇보다국회의원 평균 재산이 국민 평균치의 5.1배이고, 부동산재산은 4.5배 를기록하고 있다10). 대부분의 국민들과 유리되는 계층에 속한 다수가 국민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공화는 대의 민주주의가 지

9) 설의식, 「임정을 앞두고」, 새한민보편집국, 임시정부수립대강 : 미소공위자문안답신집 (새한민보사, 1947), 12 : 이영록. 2010. “한국에서의 민주공화국 의개념사.” 법사학연구 42, p. 66 재인용.

10)“[기자회견]         21        국회의원  부동산      신고재산  분석결과  발표”,        경실련,     2020   10        7          접속, http://ccej.or.kr/61638

닌 한계를 보완하여 실질적 평등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공정하고.          민주적인 과정을 통 해 구성된 국회는 수적인 대표성을 지니지만 계층의,       다양성 또한 대표하고 있는지 물음을 던져야할 때이다. 다양한 계층들을 대변할 수 있도록 앞으로,                  국회를 다채롭고 조화롭게 구성하는 것이 공화의 과제가 될 것이 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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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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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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