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14

알라딘: 행성 시대 역사의 기후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알라딘: 행성 시대 역사의 기후


행성 시대 역사의 기후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지은이),이신철 (옮긴이)에코리브르2023-05-30







크게보기

정가
30,000원
판매가
27,000원 (10%, 3,000원 할인)
마일리지
1,500원(5%) + 멤버십(3~1%)
+ 5만원이상 구매시 2,000원
배송료
무료
311
양탄자배송
오후 1시까지 주문하면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중구 서소문로 89-31 기준) 지역변경
역사학 주간 4위, 역사 top100 5주|
Sales Point : 2,530

0.0 100자평(0)리뷰(0)
이 책 어때요?

카드/간편결제 할인
무이자 할부
소득공제 1,220원






수량






책소개
인도 콜카타에서 태어나 학부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MBA를 마친 뒤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가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몇십 년 동안 기후변화의 의미를 탐구한 매우 영향력 있는 역사가다. 그는 기후변화가 역사, 근대성, 지구화라는 오래 지속돼온 관념을 뒤집는다고 주장한다. 《행성 시대 역사의 기후》의 과제는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파악하고, 인문학자들이 다시 생각해보기를 꺼리는 관념들, 즉 인간 행위의 변화한 본성으로부터 보편적인 것의 새로운 수용에 이르는 관념들과 대결하게 하는 것이다.

차크라바르티는 이 책에서 현대 인류가 부딪힌 기후변화 문제를 역사 연구와 결합한다. 기후변화는 인류의 역사가 우리 행성의 역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너무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그런 까닭에 역사가들은 더는 물질적 현실과 비인간의 세계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한나 아렌트, 카를 슈미트, 브뤼노 라투르, 얀 잘라시에비치 등과 같은 사상가들에게서 영감을 얻어 역사학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잘 근거 지어진 설득력 있는 관점을 제시한다.


목차


서론 행성적인 것의 고지

1부 지구와 행성
1 네 가지 테제
2 결합된 역사들
3 행성: 인간주의적 범주

2부 근대적이라는 것의 어려움
4 근대적이라는 것의 어려움
5 행성적 열망: 인도에서의 한 자살 읽기
6 지속하는 우화의 폐허에서

3부 행성적인 것 마주하기
7 인류세 시대
8 인간학적 개간을 향하여

후기 지구적인 것은 행성적인 것을 드러낸다: 브뤼노 라투르와의 대화

감사의 글

찾아보기
접기


추천글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23년 6월 2일자 '책&생각'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23년 6월 2일자 학술지성 새책
서울신문
- 서울신문 2023년 6월 2일자 '책꽂이'
조선일보
- 조선일보 2023년 6월 3일자 '한줄읽기'



저자 및 역자소개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Dipesh Chakrabarty)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1948년 인도 콜카타에서 태어나 콜카타 대학교 프레지던시 칼리지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콜카타의 인도경영 연구소(Indian Institute of Management Calcutta)에서 MBA 학위를 받은 뒤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교에서 역사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시카고 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이다. 시카고 대학교 델리 센터장이고 시카고 현대이론센터 교수이며, 영문과 부교수이자 로스쿨 교수이기도 하다. 서벌턴 연구(Subaltern Studies) 집단의 창립 일원이며, 〈아메리칸 히스토리컬 리뷰(American Historical Review)〉와 〈퍼블릭 컬처(Public Culture)〉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지은 책으로 《근대성의 거처들: 서벌턴 연구의 여파에 따른 에세이들(Habitations of Modernity: Essays in the Wake of Subaltern Studies)》 《유럽을 지방화하기: 포스트식민 사상과 역사적 차이(Provincializing Europe: Postcolonial Thought and Historical Difference)》 《노동 계급의 역사 다시 생각하기: 벵골 1890~1940(Rethinking Working-Class History: Bengal, 1890~1940)》 등이 있다. 또한 《식민적인 것에서 포스트식민적인 것으로: 이행 중인 인도와 파키스탄(From the Colonial to the Postcolonial: India and Pakistan in Transition)》 《코스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을 공동 편집하기도 했다.
접기

최근작 : <행성 시대 역사의 기후>,<유럽을 지방화하기> … 총 35종 (모두보기)

이신철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건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관동대학교 VERUM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논리학》 《진리를 찾아서》 《철학의 시대》(이상 공저)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정치철학》 《조선사상사》 《헤겔 강의록 입문》 《미래 가능성》 《새로운 철학 교과서》 《트랜스크리틱》 《이성의 운명》 《헤겔 『논리의 학』 입문》 《제국적 생활양식을 넘어서》 《순수이성비판의 기초개념》 《학문론 또는 이른바 철학의 개념에 관하여》 《역사 속의 인간》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신화철학》... 더보기

최근작 : <뉴래디컬리뷰 2023.여름>,<철학의 시대>,<논리학> … 총 53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에코리브르
출판사 페이지
신간알리미 신청


최근작 : <우아한 분자>,<어떤 죽음에도 당신의 책임은 있다>,<행성 시대 역사의 기후>등 총 140종
대표분야 : 환경/생태문제 1위 (브랜드 지수 152,491점), 과학 15위 (브랜드 지수 203,542점), 역사 27위 (브랜드 지수 38,412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인류세, 인간의 조건에 대한 새로운 성찰!

인간 중심의 지구화 역사로는 기후변화가 제기하는 인간적·정치적 문제의 복잡성을 이해할 수 없으며, 인류 역사와 행성의 길고 깊은 역사라는 불균형적 시간 척도 사이에서 새로운 이해의 방법을 모색한다

인도 콜카타에서 태어나 학부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MBA를 마친 뒤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가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몇십 년 동안 기후변화의 의미를 탐구한 매우 영향력 있는 역사가다. 그는 기후변화가 역사, 근대성, 지구화라는 오래 지속돼온 관념을 뒤집는다고 주장한다. 《행성 시대 역사의 기후》의 과제는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파악하고, 인문학자들이 다시 생각해보기를 꺼리는 관념들, 즉 인간 행위의 변화한 본성으로부터 보편적인 것의 새로운 수용에 이르는 관념들과 대결하게 하는 것이다.
차크라바르티는 이 책에서 현대 인류가 부딪힌 기후변화 문제를 역사 연구와 결합한다. 기후변화는 인류의 역사가 우리 행성의 역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너무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그런 까닭에 역사가들은 더는 물질적 현실과 비인간의 세계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한나 아렌트, 카를 슈미트, 브뤼노 라투르, 얀 잘라시에비치 등과 같은 사상가들에게서 영감을 얻어 역사학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잘 근거 지어진 설득력 있는 관점을 제시한다.

책의 구성

서론 “행성적인 것의 고지”로 시작하는 이 책은 1부 “지구와 행성”(1 네 가지 테제, 2 결합된 역사들, 3 행성: 인간주의적 범주), 2부 “근대적이라는 것의 어려움”(4 근대적이라는 것의 어려움, 5 행성적 열망: 인도에서의 한 자살 읽기, 6 지속하는 우화의 폐허에서), 3부 “행성적인 것 마주하기”(7 인류세 시대, 8 인간학적 개간을 향하여)와 후기 “지구적인 것은 행성적인 것을 드러낸다: 브뤼노 라투르와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논의는 간결하면서도 필수적인 정보를 망라하며, 논지를 논리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전개한다.

1부 “지구와 행성”에서 차크라바르티가 내세우는 주장의 핵심은 지구/행성의 구별이다. 그에 따르면 ‘지구온난화’와 ‘지구화’에서 ‘지구’의 의미는 서로 다르다고 한다. ‘지구화’에서 ‘지구’는 인간 중심적 구조를 가리킨다. 지구화의 역사는 인간이 탐험과 정복 및 기술을 통해 지구에 대한 감각을 만들어낸 역사이며, 지구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망으로 축소된 역사다. 반면 ‘지구온난화’에서 ‘지구’는 대지 시스템으로서 행성을 의미한다. 행성은 인간을 탈중심화하며, 따라서 인간은 수많은 생명체 가운데 하나의 종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행성의 역사와 많은 사람이 자본주의라 일컫는 최근의 인류 역사는 전혀 상관이 없는 서로 다른 것으로 다루어진다. 하지만 기후변화 문제에서는 서로 다른 시간성이 결합한다고 주장하는 차크라바르티는 이것이 역사와 인간 그리고 정치를 바라보는 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숙고한다. 탄소는 수십만 년 동안 대지 시스템에서 순환하며 기후와 다양한 형태의 생명체에 복잡한 결과를 초래했다. 나아가 현재의 기후변화는 인위개변적인 것이 분명하고, 같은 행성 시스템을 통해 모든 사람과 모든 생명체에 영향을 미친다. 사실 현재의 팬데믹, 재생 가능 에너지, 화석연료, 기후변화, 극단적 기후 사건, 물 부족, 생물 다양성의 상실, 인류세, 전 지구에 걸친 권위주의적·인종차별적·외국인 혐오적 정권의 부상 등은 우리의 행성 차원에서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과 관련 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인간적 규모의 일상적 정치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느리고 장기적인 과정을 고려하지 못한다. 차크라바르티는 우리의 정치 제도와 그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매우 인간 중심적이고, 따라서 기후 위기가 대부분 지속가능성과 인간 불평등의 문제로 다루어지고, 관련 담론이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를 스스로 성찰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두 가지 관점, 즉 행성적인 것과 지구적인 것에서 동시에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2부 “근대적이라는 것의 어려움”에서는 자유의 근대적 이념이 근대성과 근대화의 다양한 비판자들에게 도전받은 뒤에도 여전히 그 매력을 유지하는 이유를 탐구한다. 여기서 차크라바르티는 포스트식민 국가들의 자유 개념과 화석연료 및 증대된 에너지 필요 사이의 밀접한 연관, 정치적인 것과 인간 몸의 연관, 인간의 도덕적 삶과 동물적 삶의 구별 등이 현재의 생물권 위기에서 어떻게 실패하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그는 지구의 오랜 역사, 지구상의 다세포 생명체, 그리고 최근의 인간과 자본주의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문제 전체의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물론 환경사학자들은 역사에서 비인간 행위의 중요성을 오랫동안 논의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으로 배경이나 외부적 작용으로 파악되는 데 그쳤다. 차크라바르티는 우리의 일상과 복지가 비인간 세계와 대지 시스템의 거대한 과정과 내적으로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아울러 인위개변적인 지구온난화 시대에 인간의 번영과 인간 사이의 정의 물음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몸과 지구의 비인간 요소 사이의 연결을 축소하는 것은 인간의 번영이라는 목표 전체를 실패로 규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미 거대한 지질학적 과정을 우리의 정치와 얽어매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차크라바르티는 인류의 역사와 지구의 자연사가 서로 하나로 얽혀 있으며, 따라서 인간 중심의 지구화 역사로는 기후변화가 제기하는 인간적·정치적 문제의 복잡성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2017년 출간된 윌리엄 코널리의 책에 대한 오마주인 3부 “행성적인 것 마주하기”에서 차크라바르티는 인류 역사와 행성의 길고 깊은 역사라는 불균형적인 시간 척도들 사이에서 새로운 이해의 방법을 모색한다. 그는 얀 잘라시에비치가 행성 중심 사유 양식이라 일컫는 것을 해명하는 가운데 그 모든 문제를 껴안고 있는 ‘인류세’라는 새로운 지질 시대 개념이 우리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적합한 개념일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인류세를 논의할 때 ‘대지 역사와 세계사 사이의 항구적인 개념적 교통’이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인류세’가 지질학적 시간의 척도일 뿐만 아니라 본래는 인간이 대지에 미친 영향의 정도를 측정하는 척도이기도 하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 개념은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다. 물론 인류세와 관련해서는 무엇이 인류세를 초래했는지, 언제 인류세가 시작되었는지, 누가 이 시대의 개시에 책임이 있는지, 그리고 이 시대의 명칭으로 ‘자본세’나 ‘경제세’가 더 적절한 것은 아닌지 등 해결되지 않은 물음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인류세는 이제 대지과학자와 인문학자를 하나로 모으는 데 성공했으며, 차크라바르티는 바로 여기에 이 개념의 설명적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인류세라는 용어가 현재의 기후 위기를 설명하는 데 널리 사용되는 유행어이지만, 차크라바르티는 이 개념을 능숙하게 분석하고 우아하게 논증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현재의 기후 위기는 인류의 가장 커다란 위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 위기는 문명을 통해 강력해진 인간의 힘이 대지 시스템 전체를 교란한 결과다. 인간이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 즉 ‘인류세’를 초래한 것이다. 또 그것은 문명을 번성하게 한 충적세의 온화한 조건들을 사라지게 하고, 이 지구에서 인간의 생존 조건을 위기에 몰아넣고 있다. 이러한 ‘인류세’는 환경을 지배함으로써 미래를 만들어가는 인간에 대한 근대의 믿음을 다시 반성하고, 이 지구에서 앞으로도 인류가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할 것을 요구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과 지구의 미래에 대한 과학적인 파악, 윤리적·철학적 반성과 고찰, 그리고 그에 기반을 둔 정치적·실천적 전망이 필요하다.
따라서 디페시 차크라바르티의 이 책 《행성 시대 역사의 기후》는 인간과 자연환경의 상호작용에서 비롯한 기후변화의 위기 상황을 과학적으로 파악하고, 그와 관련한 윤리적·정치적·철학적 사유의 기본 원리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현재 상황을 총체적으로 살펴 미래를 위한 대안을 찾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접기
====
The Climate of History in a Planetary Age
Google preview button
 Save cover preview Save Cover Previewfor The Climate of History in a Planetary Age
The Climate of History in a Planetary Age
Dipesh Chakrabarty





====
For the past decade, historian Dipesh Chakrabarty has been one of the most influential scholars addressing the meaning of climate change. Climate change, he argues, upends long-standing ideas of history, modernity, and globalization. The burden of The Climate of History in a Planetary Age is to grapple with what this means and to confront humanities scholars with ideas they have been reluctant to reconsider—from the changed nature of human agency to a new acceptance of universals.

Chakrabarty argues that we must see ourselves from two perspectives at once: the planetary and the global. This distinction is central to Chakrabarty’s work—the globe is a human-centric construction, while a planetary perspective intentionally decenters the human. Featuring wide-ranging excursions into historical and philosophical literatures, The Climate of History in a Planetary Age boldly considers how to frame the human condition in troubled times. As we open ourselves to the implications of the Anthropocene, few writers are as likely as Chakrabarty to shape our understanding of the best way forward.
READ LESSABOUT THE CLIMATE OF HISTORY IN A PLANETARY AGE
296 pages | 2 halftones | 6 x 9 | © 2021

Earth Sciences: ENVIRONMENT

History: ENVIRONMENTAL HISTORY, HISTORY OF IDEAS

Literature and Literary Criticism: GENERAL CRITICISM AND CRITICAL THEORY

REVIEWS
















TABLE OF CONTENTS
Introduction: Intimations of the Planetary

Part I: The Globe and the Planet

1 Four Theses
2 Conjoined Histories
3 The Planet: A Humanist Category

Part II: The Difficulty of Being Modern

4 The Difficulty of Being Modern
5 Planetary Aspirations: Reading a Suicide in India
6 In the Ruins of an Enduring Fable

Part III: Facing the Planetary

7 Anthropocene Time
8 Toward an Anthropological Clearing
Postscript: The Global Reveals the Planetary: A Conversation with Bruno Latour
 
Acknowledgments
Notes
Index
===



Embracing Divine Purpose - Sunrise Ranch

Embracing Divine Purpose - Sunrise Ranch

Open Windows

An Interfaith Soul Care Blog
Sunrise Ranch > Open Windows > Embracing Divine Purpose

Embracing Divine Purpose


This Week's Quotation:


You must not let your life run in the ordinary way; do something that nobody else has done, something that will dazzle the world. Show that God's creative principle works in you.

~ Paramahansa Yogananda

Embracing Divine Purpose




Bexx Biehl-Kashyap Reiki Master, Yogini/Certified Yoga, and Meditation Teacher

In this vast world of routines and conformity, it is the courage within us that enables us to rise above the ordinary and explore uncharted territories. Yogananda's words remind us that our lives were never meant to blend in—instead, they are destined to radiate as luminous expressions of the Divine within. Embracing this truth sets ablaze the flame of purpose, guiding us toward a life imbued with profound meaning and fulfillment.

Living purposefully does not require grand gestures or global recognition. It beckons us to align our actions with the deepest truths that reside within, allowing the creative force that flows through us to find its unique expression. Within the depths of our being lies a treasure trove of untapped talents, passions, and dreams waiting to be unveiled and shared with the world. As we summon the courage to pursue these aspirations, not only do we nourish our own souls, but we also inspire others to embark on their own extraordinary journeys. We radiate as beacons of hope, casting a luminous light that illuminates the paths of those who walk alongside us.

Discovering our unique path calls for introspection and self-discovery, attuning ourselves to the whispers of our soul while silencing the clamor of societal expectations. In the serene moments of inner stillness, we connect with the Divine wisdom that guides our steps. This connection creates self-awareness that empowers us to transcend fear, embrace uncharted realms, and place our unwavering trust in a higher power to illuminate each step along our journey.

As we fearlessly venture forth, we set in motion a ripple effect that reverberates throughout the world. Living in perfect alignment with our purpose, we extend an invitation to others, empowering them to do the same. Together, we create a symphony of harmonious souls; each engaged in their unique and sacred callings. Through our authentic existence, we kindle a flame that spreads, inspiring and empowering others to ignite their own lives with purpose.

Let us hold in our hearts the remembrance that life is an extraordinary gift bestowed upon us to be cherished and honored through purposeful living. As Yogananda's eloquence so beautifully conveys, our lives possess an inherent potential to dazzle the world, illuminating the creative principle of the Divine that resides within each of us. Together, we co-create a world where every individual's light shines brilliantly, and the uniqueness within us all is joyously celebrated.


About Open Windows


We, the authors of this blog, dedicate it to the transparent exploration of the world's sacred scripture and enlightened spiritual thought. We believe that the original inspiration of all faiths comes from a common source, named and revered in a myriad of ways. With that understanding, the innumerable symbols, beliefs, and practices of faith cease to divide. They become open windows to a common reality that inspires and unifies us. We find deeper insight and nourishment in our own faith and from the expression of faith from others.

We hope these weekly quotations and meditations speak to your heart and soul.


Posted on: July 13, 2023

21세기 약사경 미혹의 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으로

 21세기 약사경  

http://www.silsangsa.or.kr/bbs/board.php?bo_table=dharmatalk1&wr_id=345



미혹의 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으로

 


 

 구업을 맑게 하는 진언 


〔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3번)



 땅을 편안하게 하는 진언


〔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3번)



 법의 창고 여는 진언


세상에서 가장높고 매우깊어 미묘한법

백천만겁 지나도록 만나뵙기 어려워라.

내가이제 보고듣고 받아지녀 외우오니

부처님의 진실한뜻 알아지길 원합니다. 


〔 옴 아라남 아라다 〕(3번)



《 찬탄과 귀의 》


길을잃어 방황하는 뭇생명을 돌보시는 

약사여래 부처님께 지성귀의 하옵니다


질병으로 신음하는 뭇생명을 돌보시는 

약사여래 부처님께 지성귀의 하옵니다


가난으로 고생하는 뭇생명을 돌보시는 

약사여래 부처님께 지성귀의 하옵니다


외로움에 눈물짓는 뭇생명을 돌보시는 

약사여래 부처님께 지성귀의 하옵니다


억울함에 가슴치는 뭇생명을 돌보시는 

약사여래 부처님께 지성귀의 하옵니다


증오심에 시달리는 뭇생명을 돌보시는 

약사여래 부처님께 지성귀의 하옵니다


분노심에 몸을떠는 뭇생명을 돌보시는 

약사여래 부처님께 지성귀의 하옵니다


복수심에 불이타는 뭇생명을 돌보시는

약사여래 부처님께 지성귀의 하옵니다


멸시당해 눈물짓는 뭇생명을 돌보시는

약사여래 부처님께 지성귀의 하옵니다


억압당해 절규하는 뭇생명을 돌보시는

약사여래 부처님께 지성귀의 하옵니다



 업장을 참회하는 진언


예로부터 지금까지 내가지은 모든허물

그모두가 뿌리없는 탐진치로 인함이라

내가이제 정성모아 몸과마음 다바쳐서

쌓인허물 거듭거듭 지심참회 하옵니다


〔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3번)


 약사여래 치유광명 대다라니


가는이여 가는이여 광명의길 가는이여

어두움을 떨쳐내고 광명의길 가는이여


보는이여 보는이여 이 세상  모든존재 그물코로 보는이여

시방세계 부처님을 뵈옵듯이 뭇생명을 부처로 보는이여

오고가며 인사하는 우리이웃 우리친구 부처로 보는이여


아는이여 아는이여 그대가 나임을 아는이여

너와내가 둘이아닌 한몸임을 아는이여

하나속에 여럿있고 여럿속에 하나있음 아는이여

순간이 영원이요 영원이 순간임을 아는이여

순간순간 하나하나 저마다가 소중함을 아는이여


〔 옴 비살서 비살서 비살사 삼몰아제 사바하 〕(3번)



《 약사여래 21세기 큰 서원 》


21세기 큰 서원의 주인공인 

대자대비 약사여래 부처님께 지성발원하옵니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 혐오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죽음도 빛나고 삶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젊음만을 좋아하고 늙어감을 싫어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늙음도 빛나고 젊음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남성만 존중하고 여성을 비하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여성도 빛나고 남성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인간만을 사랑하고 자연생태 괴롭히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자연도 빛나고 인간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자기만을 내세우고 상대방을 내려보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상대도 빛나고 자기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개인만 앞세우고 공동체를 뒤로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공동체도 빛나고 개인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침묵은 금이고 대화는 흙이라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대화도 빛나고 침묵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대자대비 약사여래 부처님께 지성발원 하옵니다


소유만을 추구하고 존재가치 외면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존재도 빛나고 소유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부자만 떠받들고 가난한이 무시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소박함도 빛나고 풍족함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특별함만 좋아하고 평범함을 멸시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평범함도 빛나고 특별함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경쟁만을 좋아하고 협력상생 거부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협력도 빛나고 경쟁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내편만 좋아하고 상대편을 배척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상대편도 빛나고 우리편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서울에만 집착하여 지역사회 홀대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지역도 빛나고 서울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도시만을 좋아하고 농촌마을 방치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농촌도 빛나고 도시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출가불자 우대하고 재가불자 경시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재가도 빛나고 출가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절집안만 중시하고 이웃마을 방관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마을도 빛나고 절집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나무 대자대비 약사여래불 

나무 일광변조 보살마하살

나무 월광변조 보살마하살 (3번)


대자대비 약사여래 부처님께 지성발원 하옵니다


전쟁테러 생명파괴 어리석은 재앙이니 

무기없고 폭력없는 세계평화 원합니다.


국가민족 인종계급 이모두가 망념이니 

지구촌의 가족으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인간만이 이세상의 주인이란 생각놓고 

인간자연 뭇생명들 화목하길 원합니다.


기후위기 불러오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산하대지 조화로운 밝은문명 원합니다.


성장이윤 집착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나누면서 서로돕는 밝은문명 원합니다.


기업노동 반목하면 모두에게 해로우니 

함께가는 노사문화 가꿔가길 원합니다


성현들은 한결같이 사랑평화 원했으니 

이웃종교 존중하는 종교평화 원합니다.


대자대비 약사여래 부처님께 지성발원하옵니다


소외박탈 커져가는 차별사회 넘어서서 

평등하게 주인되는 세상살이 원합니다.


앞만보고 달려가는 일등주의 멈추고서 

함께사는 협동문화 가꿔가길 원합니다.


윤리없고 사랑없는 지식정보 위험하니 

존재실상 바로보는 참된지혜 원합니다.


주의주장 사로잡힌 자기견해 집착않고 

참된변화 가져오는 중도실천 원합니다.


나와세상 둘로보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중도연기 밝은문명 가꿔가길 원합니다.


대자대비 약사여래 부처님께 지성발원하옵니다


획일성만 강요하는 미혹문명 넘어서서 

다양성을 꽃피우는 깨달음의 문명으로


인위조작 지배하는 미혹문명 넘어서서

자연모습 닮아가는 깨달음의 문명으로


최고만을 고집하는 미혹문명 넘어서서

단순하고 소박한삶 깨달음의 문명으로


죄의식에 시달리는 미혹문명 넘어서서

본래붓다 동체대비 깨달음의 문명으로 


죽임의 문명에서 살림의 문명으로

차별의 문명에서 평등의 문명으로

분열의 문명에서 공존의 문명으로

업보중생 문명에서 본래붓다 문명으로

미혹의 문명에서 깨달음의 문명으로 

하루속히 전환되게 하옵소서

                                 

나무 대자대비 약사여래불

나무 일광변조 보살마하살

나무 월광변조 보살마하살 (3번)

                                 


 원성취진언


〔 옴 아모카 살바다라 사다야 시베 훔 〕(3번)

                                 


 광명진언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르타야 훔〕(3번)


부지런히 정진하라 부지런히 정진하라

부처님의 열반유훈 가슴깊이 새깁니다

여래의뜻 삼학수행 원만하게 이루어서

한량없는 공덕으로 온세상을 장엄하니 

너도나도 모두함께 해탈열반 누리소서


〔 마하반야바라밀 〕(3번)



 네 가지의 큰서원을 세웁니다


가이없는 모든중생 제도하길 원합니다

다함없는 삼독번뇌 모두끊기 원합니다

한량없는 가르침을 다배우길 원합니다

위가없는 부처님도 이루기를 원합니다



 모든발원 마치옵고 삼보전에 귀의하네


시방세계 항상 계신 보배로운 부처님께 지성귀의 하옵니다

시방세계 항상 계신 보배로운 가르침에 지성귀의 하옵니다

시방세계 항상 계신 보배로운 승가앞에 지성귀의 하옵니다 (3번) 


젊음도 빛나고, 늙음도 빛나라! | 미혹의 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을 여는 지혜, 지리산 실상사 '21세기 약사경'






0:06 / 33:39


젊음도 빛나고, 늙음도 빛나라! | 미혹의 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을 여는 지혜, 지리산 실상사 '21세기 약사경'

조현TV휴심정
113K subscribers

Subscribed

481


Share

11,082 views  Nov 5, 2020  #도법스님 #법인스님
전북 남원 실상사는 지리산 산골에 있다. 그러나 그곳에선 시대를 고민하는 이들이 늘 찾아든다. 대화가 끊이지않는 곳이다. 실상사를 주변으로 공부모임, 철학모임, 장담그기모임, 공방등 50여개의 동아리도 있다. 전국 시골에 빈집이 늘지만 실상사가 있는 산내면은 전국에서 귀농인이 가장 많다. 그 중심에 도법 스님이 있다. 그 실상사에 얼마전 조계종 교육부장과 참여연대공동대표를 지낸 법인스님과 함께했다.

그들이 최근 일을 냈다. 경전을 낸 것이다. ‘21세기 약사경’이다. 원래 약사여래불은 병을 고쳐주는 부처님이다. 그러나 어찌 병이 몸의 병뿐일까. ‘코로나’는 병든 문명을 말해준다. ‘21세기 약사경’은 미혹의 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을 여는 지혜의 경전이다. 이미 그 경전으로 실상사에 천일기도가 시작됐다. 시작은 미약하되 끝은 창대할만큼 심오한 내용이다. 이 경을 놓고 도법 스님과 법인 스님, 조현 기자가 실상사 툇마루에 앉아 격의없는 대화를 나눴다. #도법스님 #법인스님 #21세기약사경
====



부처와 예수, 한반도의 해법을 고민하다 _ 도법스님 미국 방문기 2013 | 실상사

부처와 예수, 한반도의 해법을 고민하다 _ 도법스님 미국 방문기 > 법회와 설법 | 실상사

부처와 예수, 한반도의 해법을 고민하다 _ 도법스님 미국 방문기

작성자 실상사 13-05-10 
조회9,621회 

'부처'와 '예수', 한반도의 해법을 고민하다
[대담] 도법 스님과 울리히 두크로 하이델베르크 석좌 교수

13.05.08


▲ 도법 스님
ⓒ 안희경
지난 4월 19일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 제임스 채플에서 도법 스님은 세계에서 모인 신학도와 불교도에게 질문을 던졌다.

"붓다가 도둑질을 했다면, 그를 무엇이라고 부르겠습니까?"

도법 스님의 답이다. "그렇다면 그는 도둑입니다." 이어서 "불교인은 오랜 시간 깨달음의 관념에 구속돼 고통 받아 오고, 기독교인은 신의 관념 속에 구속돼 고통 받아 왔다"고 꼬집었다. 도법 스님은 "붓다의 뜻, 예수의 뜻은 관념이 아니라 행위로써, 실천으로써 좇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순간의 침묵 뒤에 청중의 뜨거운 박수가 이어졌다.

도법 스님은 "지금 당장 붓다처럼 행동하고, 예수처럼 실천하자"라고 강하게 당부했고, 이는 환경 파괴, 여성·인종 차별, 전쟁과 폭력, 경제적 불평등, 내면의 성찰 등 세계의 석학과 활동가들이 발표하고 토론해 온 '세계 불교 기독교 콘퍼런스'의 여러 의제를 압축적으로 모아낸 본질적 메시지가 됐다.

바로 그 붓다의 행동, 예수의 실천이 현재 고통 받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해 봤다. 도법 스님과 독일의 행동하는 석학이자 신학자인 울리히 두크로 교수와의 대담이다.

"평화 운동의 진짜 열쇠는 긴장 해소에 있어"

울리히 두크로는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조직신학과 석좌교수로서, 사회·경제적 문제를 연구해온 석학이며, 금융 세계화에 따른 폐해를 비판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국제조직인 국제금융관세연대(ATTAC)의 독일 지부를 만든 활동가이기도 하다. 이번 콘퍼런스에서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고통'이라는 주제 발표를 했으며, 국내에도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대안>, <성서의 정치경제학> 등 그의 저서가 소개돼 있다.

도법 스님과 울리히 두크로 교수의 대담은 지난 4월 19일 오후 9시 유니언 신학대학 소셜홀에서 필자의 사회로 진행됐다.



▲ 울리히 두크로 교수.
ⓒ 안희경
- 두 가지 큰 줄기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한국인들이 당면한 안보 문제로, 위협적인 갈등에서 벗어나 평화를 키워가는 해법이고요. 두 번째는 평화 문제를 포함해 모든 갈등의 바탕을 이루는, 점점 더 치열해지는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환경적인 재앙까지 빈번하게 이어지면서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이기에 공포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울리히 두크로 "두 가지는 하나로 연결돼 있지요. 평화 역시 자본주의와 관계되니까, 하나를 짚어도 전체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우선, 50년 넘도록 초강대국들의 게임장이 돼버린 한반도와 그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한국인에게 안타까운 제 마음을 전합니다.

미국은 한국을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오래된 전진기지에서, 중국을 에워싸는 기지로 바꿔가고 있습니다. 지난해 1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태평양에 군사력을 새롭게 배치했죠. 800여 개의 미군부대가 세계에 퍼져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미국이 서방에 자신들의 이런 군사 계획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카운터 파트너로 북한이 필요하겠구나 싶습니다.

한반도는 미국의 관심이 가장 고조된 지역입니다. 여기 얽혀 있는 중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인 관점까지 포괄적으로 비판하지 않고는 한반도 긴장을 풀기 어렵죠. 바로 이런 국제적인 관점에서 미국과 강대국들의 전략과 선전을 해체해내야 합니다. 서구 사람들도 한국인들과 연대하며 일할 수 있습니다."

도법 스님 "한반도 문제는 당사자가 남과 북이잖아요. 현재 상황에서 보면 북한에 비해 남한이 경제력을 위시해 국력이 월등하니까, 대한민국이 주체적으로 어떻게 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이 서로 갈등하고 있습니다. 진영을 넘어서서 민족의 문제를 함께 풀려는 입장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저는 (이런 상황에서) 종교인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식민지 아래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경험이 있어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기독교 입장, 천도교 입장, 불교 입장을 내려놓고 하나로 행동했죠.

왜냐하면, 그때 민족의 최우선 과제는 기독교도, 천도교도, 불교도 아니었기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가 정당성을 가지려면 종교계가 한반도의 평화,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 나서야 합니다. 각 구성원들에게 교육하고, 한국 사회에 공론화시켜야 합니다. 우리 국민이 사안을 절실하게 바라보도록 바탕을 만들어놓게 된다면, 정부와 대통령도 그런 방향에서 바라보게 된다고 봅니다.

이 바탕 위에서 중국을 설득하고, 미국을 설득하고, 일본과 러시아를 설득해 우리 입장을 관철할 힘을 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런 주체의 자각 없이는 결국 우리 의지와 관계없이 또다시 분단 초기처럼 흘러가리라 봅니다."

- 국제적인 관계 속에서 보려는 두크로 선생과 달리 도법 스님은 한국인 내부의 인식과 노력을 강조하며 그 속에 분산돼 있는 역량의 대립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미 통일을 경험한 독일의 경우 역시 강대국들 속에서 주체의 역량을 키우기 어려웠던 환경이었다고 보는데요. 어떻습니까?

울리히 두크로 "이런 비슷한 상황에서 냉전시대 동독과 서독은 강력한 평화운동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평화운동에서 '보편적인 안보 개념'을 키워야 한다는 겁니다. 세계의 열강들은 한국과 북한이 서로를 적대시하며 긴장 속에서 지켜가는 안보를 원합니다.

독일에서도 그랬죠. 그러나 독일의 사회민주주의 세력들은 안보란 '동독과 서독이 협력해서 이뤄내는 평화'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어요. 적대시하는 대립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는 상태가 진정한 안보라는 입장을 키워갔습니다. 평화운동의 진짜 열쇠는 긴장을 해소하고 사람들이 함께 하는데 있습니다."

GNP 200배 성장한 지금의 한국, 왜 길을 잃었을까



▲ 참여불교 심포지엄에서 발표하는 도법 스님과 이를 통역하는 혜민 스님.
ⓒ 안희경

- 한국인들의 입장 가운데 대등한 군사력으로, 힘의 균형을 통해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자는 입장도 있고, 또 통일 자체에 대해 혼돈과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며 부담스러워하는 입장도 있습니다. 어쩌면 '전쟁으로도 내 삶을 흔들지 말고, 통일로도 부담을 주지 말라'는 피로감일 수도 있겠습니다. 현재 그만큼 살기 힘들다는 호소입니다.

도법 스님 "그건 이분법적인 접근입니다. 지난 100년 동안 우리의 생활 깊숙히 파고 들어온 '너를 이겨야 내가 산다'는 문화입니다. 이분법적 세계관과 적대적 방법론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반응하는 한 끊임없이 죽임과 죽임을 당하는 불안과 공포가 생산될 수밖에 없어요. 이미 우린 역사 속에서 그걸 확인했습니다.

미국의 국익 논리, 대한민국의 국익 논리, 한반도 우리 민족의 이익 논리에서 진짜로 바라본다면, '지금의 분단 상황이 돈 벌기에 더 좋고, 내 기득권을 지키기 더 좋다'는 입장은 몇몇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국익이라고 할 때는 국가 구성원 전체를 염두에 둬야 하고, 한반도의 이익도 민족 구성원 전체의 이익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큰 방향과 기본 원칙을 확고하게 해서 단계별로 접근해 나가야 합니다. 평화를 일궈내는 일을 종교계가 풀어내면, 지역적인 사안과 개별적인 사안들도 많이 풀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 여기서 현재 경제시스템의 조건을 바라볼 때라고 봅니다. 울리히 두크로 교수께서는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교회가 나서서 성경의 근본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 보면 한국의 최대 교파인 장로교의 근간인 칼빈을 비롯해 후기 기독교가 자본주의의 개발 경쟁을 지원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 신이 주신 선물이다'라는 말도 자주 듣곤하는데, 기독교 정신이 자본주의의 대안이라는 주장에 의문이 생깁니다.

울리히 두크로 "칼빈주의 기독교가 자본주의와 관계가 깊다는 선입견이 있지만, 실상은 아닙니다. 부는 '모든 사람이 충분히 소유하고 풍성하게 갖도록 공유돼야 한다'는 것이 칼빈의 가르침입니다. 자본주의는 루터가 나온 15, 16세기보다 훨씬 전인 13, 14세기에 출현했어요. 루터 이전에도 와잇 클릭비라는 기독교인은 자본주의 때문에 고통받는 농민들과 함께 운동을 해왔고, 나중에 나온 루터도 자본주의에 반대했습니다.

자본주의의 뿌리는 기원전 8세기 화폐가 거래되기 시작한 그 시점에 있는데, 나중에 후기 자본주의시대만 확대해서 자본주의라고 강조되고 있죠. 옛날 종교인들, 노자, 공자, 예수, 부처,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이들 모두는 이 탐욕적인 돈에 대해 거리를 두도록 가르쳤습니다. 루터도 성경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정신을 당시 교회에 불어넣었습니다. 개혁가들은 이후 출현하는 발전된 자본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죠. 다만 그 이후에 등장한 미국 청교도주의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기독교를 제압하고, 자본주의와 하나로 연결돼 나갔던 겁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요구하는 건 우리가 피부로 경험하는 지구의 파괴를 막기 위해 모든 공동체가 다같이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경제와 개발의 탐욕에서 개인들도 벗어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일을 최후의 심판 때 핵심 기준으로 삼아 가난한 자들과 예수님을 완전하게 동일시했습니다.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무엇보다 자발적인 분배 현상이 일어나야 하고, 그럼으로써 평등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 칼빈을 비롯해 칼빈을 따르는 이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제도화된 탐욕이 개인적인 욕망과 하나로 엮어져 축적돼 왔습니다. 자본주의는 사람의 욕심과 탐심을 필요로 하고, 그 탐심으로 계속 강화되고, 그것이 더 거세지는 제도입니다. 그리스도 정신과는 반대입니다."

도법 스님 "20세기 100년을 보면, '더 많이 갖자, 더 편해지자, 그러면 세상은 더 좋아질 것이다'라며 달려왔습니다. 특히 한국 사회는 그렇게 해서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이뤘죠.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국민총생산(GNP) 100달러 수준에서 지금은 2만달러이니 200배 더 커졌지만, 사람 관계는 극단적으로 불신하고 미워하면서 결국은 젊은이들의 자살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연 생태까지 심각하게 파괴하고 오염시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농촌 사회는 해체되고, 농업은 무너지고, 그것이 국민들의 생명과 건강을 병들고 위험하게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어디에서 우리가 길을 잃은 것인가?' 저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그 심층적인 원인이 잘못된 세계관에서부터 나옵니다. 이 세상은 한 사람, 한 사람 존재들이 다 연결돼 있고, 의지해 있고, 영향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 전통 속에는 이런 세계관과 정신으로 살았던 마을 공동체가 있었죠. 그 마을 공동체의 내용을 단순화시키면 이웃과 이웃이 서로 믿고 협력하고 나누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문화가 됐고, 마을의 운영 체계로 제도화돼 살아왔습니다."



▲ '불교인은 오랜 시간 깨달음의 관념에 구속되어 고통 받아 오고, 기독교인은 신의 관념 속에 구속되어 고통 받아 왔다'고 관념을 벗어나야 한다고 발언하는 도법스님.
ⓒ 안희경

- 공동체적인 삶이 지속가능한 대안이 되려면, 그 안에는 안정된 일자리가 마련돼야 한다고 봅니다. 과당 경쟁은 모두가 소유하기 어려운 제한된 조건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 아닐까요?

도법 스님 "우리에겐 소유도 필요하고, 생활의 편리를 위한 기술도 필요합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심각한 모순과 위험에 직면했어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중심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 관계에서 서로 신뢰를 회복했을 때, 자본주의의 이기주의, 경쟁주의, 정복주의를 넘어서거나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나온다고 봅니다."

울리히 두크로 "행복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어느 정도까지만 충족되면 행복하다고 느낀다고 합니다. 그 상태에서 더 많이 가질수록 행복이 증가하지는 않다고 나옵니다. 그럼 무엇이 진정으로 행복하게 우리를 만들어 주느냐 하면, 그것은 좋은 관계에서 나와요. 단 둘의 사이뿐만 아니라, 자연이나 사회와의 관계도 원만해야 행복합니다.

이는 종교적인 신념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자본은 증식한다'라고 정의되는 그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자본은 환금 자산을 말하는데, 이는 더 많이 가지면 늘어날 것이라는 정의죠. 자본은 반드시 증식될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산업화 사회는 우리에게 에너지와 자원도 투자의 대상이라고 말합니다.

제한적인 지구에서 제한없이 증식될 거라는 아이디어입니다. 그런데, 만약 모든 지구 사람들이 미국인처럼 생활하려고 한다면 지구가 6개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합니다. 유럽 사람처럼 살려면 지구가 3개 더 필요하죠. 이 의미는 자본주의가 수학적으로 가능성이 없는 제도라는 걸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모든 사람을 충족시켜줄 경제가 필요합니다. 이는 불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이며, 성경에도 나와있는 내용입니다. 나누는 겁니다.

지구에서 생산되는 것을 모든 사람이 똑같이 나눈다면, 모두 충분하게 소유할 수 있습니다. 지구의 생산량은 120억 사람에게 충분하다는 UN 연구자료에 따르면, 현재 70억 지구 인구가 충분히 나눌 수 있는 양이 되고, 우리 손자들도 이 지구를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커지게 됩니다."

도법 스님 "그런데,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감각적으로 물질적 풍요를 갈망합니다. '왜 계속 인간이 탐욕을 부리는가?'에 대한 해답이 없다는 것이 현재의 문제입니다."

울리히 두크로 "자본주의는 탐욕을 반겼고, 탐욕이야말로 경제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자본주의가 근본적 문제입니다. 환경 문제, 사회 문제에 대한 해답을 자본주의에서는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변화를 가져갈 수 있을까요? 시스템과 개인의 욕망을 다스리는 새로운 협동경제가 필요합니다. 오스트리아에서 2년 전에 15개 중소기업들이 '공동의 선'을 향한 착한 경제를 주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재투자하도록 이윤을 내지만, 기업 정신은 이윤을 내는 것이 주요 목표가 아니라 좋은 기업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2년 뒤에 800개 이상의 중소기업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겠다고 모여들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우리 시대의 경제를 치유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여기서 스님에게 익숙한 인도의 예를 들어 봅시다. 농사가 기업형 농업으로 바뀌었습니다. 기업으로 바뀌고 나서 매일 평균적으로 54명의 농부가 자살했습니다. 자본화된 농업으로 인해 빚 때문에 죽은 겁니다. 그리고 작은 기업들이 새로운 협동의 양식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착한 경제를 위해서죠. 건강한 먹거리 이런 경제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경제입니다. 동시에 사회 운동도 신자유주의가 증진하려고 했던 수자원, 에너지, 교통의 사유화를 막고자 나서고 있습니다."

도법 스님 "네, 이 욕망이 제도화되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죠. 왜 이기적 욕망에 매몰될까? 불교의 세계관으로 보면, 이 세상의 어떤 존재도 따로 홀로는 살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동시에 어떤 누구도 온전히 함께만 살 수도 없게 되어 있죠. 어떤 측면은 함께 살아야 할 부분이 있고, 어떤 측면은 또 따로 살아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함께 하는 부분은 거의 사라지고, 온통 개인으로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따로'와 '함께'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생명의 법칙, 존재의 법칙에 대한 집중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도 더불어 함께 사는 개인의 주체적 역할도 중요하고, 이런 세계관이 사회의 시스템과 문화로도 반영돼야 합니다. 협동과 나눔의 삶을 문화와 철학으로 그리고 사회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 울리히 두크로 교수의 대안은 경쟁의 틀을 협동 틀로 바꿔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착한 경제를 지향하자는데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도법 스님께서 무게를 더 두는 부분은 '주체의 자립이 결국은 타인의 협조 속에서 가능할 수 밖에 없다'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명 본질에 대한 이해를 높여 인식 전환으로 현실적 방법을 모색해 나가자는 데 있다고 볼 수 있구요.

하나의 지향을 향해 나아가는 방식에서 집중하는 부분이 교차하지만, 이 둘이 하나가 될 때 보다 지속가능한 변화를 이루는 동력이 될 수 있다 여겨집니다. 이 시간이 계기가 되어 더욱 활발한 동서 교류, 종교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연대가 이뤄졌으면 합니다.


=================================================
울리히 두크로(Ulrich Duchrow) 하이델베르크 석좌 교수

울리히 두크로는 조직신학과 에큐메니칼 신학 교수로서 사회·경제적 문제를 집중 연구해온 석학이다. 경제와 생태적 정의를 키워가고자 조직된 세계 교회주의 풀뿌리 네트워크인 카이포스 유로파 공동 창업자고,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에 따른 폐해를 비판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창립된 국제금융관세연대(ATTAC)을 독일에 창설하였다.

울리히 두크로는 금융자본을 통한 종속적 세계화 반대 및 대안 세계화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여러나라 언어로 번역된 여러 책을 펴냈다. 국내에 출간된 저서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대안>, <성서의 정치경제학> 등이 있으며, 2012년에는 독일어와 영어로 <탐욕의 돈 초월하기>를 써서 화제가 되고 있다.
----------------------------------------------------------------------------------------
도법 스님(조계종 '자성과 쇄신 결사추진본부' 화쟁위원회 위원장)

18살이 되던 해 출가했고, 1990년 불교 결사체인 선우도량을 만들어 청정불교 운동을 이끌었다. 1995년 지리산 실상사 주지로 부임해 귀농학교, 대안학교, 환경운동 등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운동을 펼쳤다. 2004년 실상사 주지 소임을 내려놓은 후, 생명평화 탁발순례의 길을 떠났다.

이후 5년 동안 3만 리를 걸으며 8만 명의 사람을 만나 생명 평화의 가치를 전했다. 현재 지리산 실상사 회주이자, 대한불교 조계종 '자성과 쇄신 결사추친본부' 화쟁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며, 다툼 없고 평화로운 사회로 가는 길을 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지금 당장>, <내가 본 부처>, <망설일 것 없네 당장 부처로 살게나> 등이 있다.

-----------------------------------------------------------------------------------------

지금 당장 붓다로 살자 _ 국제컨퍼런스 강연소식과 강연문전문 [2013 ] 실상사

지금 당장 붓다로 살자 _ 국제컨퍼런스 강연소식과 강연문전문 > 법회와 설법 | 실상사


지금 당장 붓다로 살자 _ 국제컨퍼런스 강연소식과 강연문전문
작성자 실상사 13-04-25


도법스님, "지금 당장 붓다로 살자"
美유니온신학대학원 강연서 세계 종교인들에 역설

2013년 04월 22일 (월) 박봉영 기자 budgate@hanmail.net

▲ 도법스님의 강연모습.

조계종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장 도법스님은 19일 세계적 참여불교인과 해방신학자들 앞에서 화엄경의 본래부처론과 동체대비행에 바탕을 둔 생명평화 사상을 역설했다.
강연은 미국 유니온신학대학원 국제 컨퍼런스에서 이뤄졌다. 도법스님은 '나의 불교수행, 화엄세계관과 생명평화운동-지금 당장 붓다로 살자, 붓다로 행동하자'는 제목으로 강연에 나섰다. 결사추진본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이날 강연 소식을 전했다.
도법스님은 "붓다란 먼 훗날 도달해야 할 저 멀리 있는 신비하고 특별한 어떤 목적지나 경지가 아니다. 지금 당장 그대와 내가 본래 거룩한 붓다임을 알고 서로를 지극 정성으로 잘 모시고 섬기면 그 자체가 붓다로 살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 밖에 또 다른 무엇이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생명평화무늬를 소개하는 것으로 강연은 시작됐다.
도법스님은 "온 우주의 유형‧무형의 모든 존재들이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며 살도록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생명평화무늬가 인류 역사의 많은 지성들에 의해 파악되고 제시된 보편적 세계관의 총화”라며 “모든 존재들이 나의 생명을 낳고 길러내는 거룩하고 신비한 모체이므로 당연히 지극 정성을 다하여 서로 잘 모시고 섬겨야 한다"고 역설했다.
도법스님은 자신의 삶과 수행의 역정 속에서 어떻게 생명평화사상에 도달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실천을 벌여왔는가에 대해서도 말했다. 실상사를 중심으로 한 대안적 운동, 생명평화결사, 생명평화탁발순례, 천성산, 새만금, 봉은사,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 등 갈등해결 노력, 종교평화선언 발표와 자성과쇄신결사운동등을 세계의 참여 종교인들에게 소개했다.


▲ 강연에 앞서 열린 세계 참여불교인들과의 대화 모습.

도법스님은 결론적으로 모든 종교가 갈 길은 생명평화의 길이라고 역설하며 지구촌생명평화공동체를 만드는데 모든 종교인들이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다.
"인류문명사를 성찰적으로 살펴볼 때 존재법칙에 어긋나고 생명가치를 망각한 채 상대에 대한 불신과 분노, 증오와 공포의 마음으로 온갖 그럴듯한 명분으로 편 가르고 싸우고 이기고 지배하는 방식의 그 어떤 길도 우리가 갈 길이 아닙니다. 그 누가 뭐라 해도 오늘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인내와 관용과 비폭력 평화의 마음으로 온 우주의 모든 것들이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며 함께 살아가야 할 한 몸 한 생명임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생명평화무늬의 길입니다. 생명평화의 삶, 생명평화의 세상은 모든 인류의 영원한 염원이며 21세기 시대정신입니다. 우리 종교가 나서서 실현해야 할 21세기 절체절명의 화두는 바로 ‘지구촌 생명평화 공동체’입니다. 그 역할을 제대로 할 때 비로소 종교가 종교다워집니다."
한편, 도법스님은 17일, 18일 진행된 각종 토론회에 참여했으며 19일에도 참여불교 동서양의 대화에 법륜스님(정토회 지도법사), 슐락시바락사 등 세계적인 참여불교인들과 함께 토론 패널로 참여했다. 울리히 두흐로브(독일 하이델베르그대 교수), 폴 니터(미국 유니온신학대학원 교수) 등의 종교인들과도 단독 대담을 가지기도 했다.
도법스님은 21일에는 뉴저지 소재 원각사(주지 지광스님)에서 현지 불자들을 대상으로 법문을 진행했으며, 22일부터 24일까지 미국 동부의 기독교, 유대교, 힌두교, 시크교 등 다양한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 종교간 대화를 나누고 종교간에 사회적 실천을 공동으로 벌여나가는 방안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눌 예정이다.


▲ 도법스님과 법륜스님.

다음은 강연문 전문이다.

[법문] 사람들과 관계에서 힘들고 괴로울 때...해강스님 법회와 설법 | 실상사

[법문] 사람들과 관계에서 힘들고 괴로울 때...해강스님(5월첫주 서원법회) > 법회와 설법 | 실상사



[법문] 사람들과 관계에서 힘들고 괴로울 때...해강스님(5월첫주 서원법회)
작성자 실상사 12-06-09 10:17 조회8,730회 댓글0건

검색
목록


2012년 5월 서원법회


사람들과 관계에서 힘들고 괴로울 때


해강스님 (실상사 주지스님)


“그가 나에게 거친 말로 욕하고 비방하며
내 마음을 아프게 했네.
나를 때리고, 나를 누르고, 이겼네”
이렇게 마음에 간직하면 괴로움은 더욱 커지고
이렇게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미움과 원한 사라지고 마음은 고요해 진다네.

미움을 미움으로 갚으면
끝내 미움은 사라지지 않나니
오직 참음과 사랑으로 대할 때
미움은 사라지나니 이것은 영원한 진리라네.

아무리 교묘한 말로 남을 비난하더라도
깨끗한 사람은 더럽히지 못하나니
바람을 거슬러 먼지를 뿌리는 짓처럼
비난은 도리어 자기를 더럽힌다네.

“남의 허물만 꾸짖지 말고
힘써 내 몸을 살펴보자”
사람들이 만일 이렇게 알고 행하면
누구와도 다툼 없이 고요하리라.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어도
큰 바위는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어진 마음 지니고 뜻을 굳게 세우면
비방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다네.

예로부터 경쟁하는 사람들은 서로 헐뜯어
이러하면 이렇다고 비난하고
저러하면 저렇다고 헐뜯나니
경쟁하며 비방 받지 않는 사람 세상에 없네.

너와 내가 다퉈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이긴 사람은 원한을 불러와 괴로워지고
진 사람은 슬픔에 빠져 괴로워지나니
이기고 지는 다툼을 떠나 사는 사람 늘 평화롭네.

백만의 적과 싸워 이긴 승리보다
나 하나와 싸워 이긴 승리가 더욱 값지네
아무리 강한 상대와 싸워 이긴 승리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거둔 승리는 더욱 고귀하다네.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잘 가꾸어가라
잘 참고 너그러우며, 잘 베풀고 인자하라
미움에 사랑으로 대하고 원한을 자비로 감싸라
평화와 행복은 그대의 것이리라.
『법구경』



눈 내리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연초록이 보기가 좋지요? 아무리 바쁘게 사시더라도 가끔씩 지리산 쪽을 쳐다보세요. 연초록은 눈만 맑게 해줄 뿐 아니라 마음도 아주 맑게 해준다고 합니다. 아마 산색이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때가, 산에서 뿜어내는 색깔이 우리 마음에 가장 크게 파장을 일으킬 때가 이때쯤이 아닐까 싶어요. 아기손만큼 이렇게 쭉 나온 새잎의 연초록 빛깔이 눈도 정화를 시켜주고 마음도 정화시켜준다고 합니다. 틈틈이 하늘도 한번씩 쳐다보시고 산도 한번씩 쳐다보셔서 하늘색으로 마음도 맑히시고 산의 연초록색으로 눈도 맑히시길 바라겠습니다.

앞자리에 서울 사시다 남원으로 귀향하셔서 오늘 첫 법회에 참석하신 분들이 계시네요. 잠시 일어서서 인사하실까요? 얼마 전에 첫손주도 보셨다고 합니다. 축하의 박수 부탁드립니다.(대중 박수) 용춘란 보살님은 이사하셨다면서요. 이사 떡공양도 올리셨고, 어디로 이사하셨어요? 중기로 이사오신 거예요? 중기가 터가 좋은가봐. 다들 중기로 모이는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어떤 분이 집짓는다고 집터를 봐달라고 해서 가서 봤는데 중기 쪽이 상당히 건방진 터더라구요. 이 골짜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 실상사입니다. 그런데 중기 땅이 이 실상사를 내려다 보는 곳이더라구요.(대중웃음) 그래서 그런가 중기로들 많이 모이는 것 같아요. 또 복덕행보살님은 어제부터 오셔서 자원봉사를 하시고 오늘 과일공양도 올려주셨네요. 고맙습니다. (대중박수)

일요일마다 어린이법회를 하는데 십여년전만 하더라도 2~30명씩 모였거든요. 요즘에는 시골에 아이들도 별로 없구요. 있더라도 일요일에 잘 나와놀지 않는 것 같아요, 시골마저도. 그동안 절에서도 제대로 신경써주지 못했어요. 그러다 보니 어린이법회때 아이들이 몇 안나오는데요, 그래도 몇 년간 꾸준히 어린이법회에 무구행보살님을 비롯해 몇몇 선생님들이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일요 법회가 이어지고 있고요, 아이들 생일 때마다 광주보살님들이 아이들 위해 케잌을 사다주십니다. 고맙습니다.

아시다시피 얼마 안있으면 부처님 오신 날이죠. 부처님 오신 날을 위해서 절에서 준비하고 있는 행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실상사 홈피에 들어가 보시면 뭘 하는지 자세히 안내되어 있으니 살펴보시길 바라고 그렇지 않으신 분들은 나누어드린 실상사 안내문을 참고하셨다가 일부러라도 시간 내셔서 참석하시길 바랍니다. 재미있는 것도 많습니다. 노래자랑 참석들 많이 하세요. 이번에는 마을대항으로 마천까지도 참석한답니다.


지리산댐, 왜 문제인가

제가 오늘 여러분들께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곳저곳만의 문제는 아닙니다만 어쨌든 인간은 자기 이해관계와 딱 부딪혀야만 눈을 뜨는 못된 습성이 있습니다. 우리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천년넘게 실상사가 의지해 온 이 지리산에 총체적 위기가 닥쳤지요. 골프장, 스키장, 케이블카 등등의 문제가 있는데, 두 차례에 걸쳐서 지리산댐 건설을 막아냈습니다만 이번에 또다시 지리산댐이 시작되었습니다.

계획상, 서류상에는 실상사가 수몰되지는 않습니다. 만수위 때에는 실상사 끄트머리, 경상도와 전라도 경계선까지 물이 찬다고 합니다. 댐의 크기가 빌딩 50층 높이입니다. 140미터가 넘습니다. 높이로는 전국에서 가장 높은 댐이고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이가 긴 댐이 진주 남강댐이라고 합니다. 진주 남강댐에 이어 길이로는 두 번째로 긴 댐을 만든다고 합니다. 높이는 가장 높구요. 그런데 아시겠지만 댐은 일단 만들어지면 국가보안시설이 됩니다. 함부로 접근할 수도 없구요. 그러고 나서 높이를 보강하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그런데 이 댐이 명목은 홍수조절용이라고 하는데 홍수조절용은 그렇게 만들지 않습니다. 홍수조절용 댐이 아니라, 4대강사업으로 해서 낙동강의 취수원이 다 없어졌습니다. 낙동강 취수원을 통해서 물먹고 사는 부산사람들을 위해서 5개의 댐을 만드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지리산댐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산쪽 시민들의 식수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5개의 댐을 다 합해도 낙동강 취수원에서 취수했던 물보다 적습니다. 그러니까 계속 취수하는 곳을 넓힐 수밖에 없고 취수원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곳의 댐은 일단 지어놓고 다음에 보강해서 물을 더 많이 담게 하기 위해서 댐을 높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봐도 뻔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처음 만들 때는 실상사가 안 잠기지만 거기서 2~3미터만 높이면 실상사는 수몰됩니다. 실상사뿐만 아니라 산내 전체가 수몰됩니다. 이것은 뻔히 보이는 수순입니다. 1단계로 짓고 2단계는 실상사를 중심으로 산내전체가 잠기는 수순입니다. 이것은 실상사나 이 지역에 사시는 우리에게 닥친 매우 중요한, 그야말로 생존의 문제입니다. 이 점에 대해 우리가 좀 더 관심을 갖고 적극적인 행동을 취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지역민들은 대부분 나라에서 한다는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마치 큰 죄를 짓는 일인양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나라를 무서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앞장서 나서기를 꺼려합니다. 물론 지금도 많은 분들이 동참하고 있습니다만 2002년도에 댐을 물리칠 때에도 실상사가 중심이 되어 시작해서 좋은 성과를 얻었습니다. 이번에도 실상사가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 역할은 스님들만의 일은 아니지요. 또 산내면에 사는 실상사 신도들만의 일도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께서 좀 더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우리가 불사를 위해 천일기도를 올리지만 불사를 아무리 잘 해놓으면 뭐합니까. 함부로 속단할 수는 없지만 일단 댐공사가 이루어지고 나면 그다음에는 아마 십년 안팎에 2차 보강공사가 이루어질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합니다. 그러니까 댐이 일단 완공되고 십년 이쪽저쪽에는 산내가 수몰될 수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을 잘 인지하셔서. 지금 단계에서 못 막아내면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일단 공사가 시작되어 버리면 막기 어렵습니다. 지금 공사가 시작되기 전이니까 많은 관심 가져주시고 동참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내가 돈 벌어서 내 돈 내고 밥 사먹는다고 생각하세요?

오늘날 우리나라 뿐 아니라 자연환경 파괴문제는 지구촌의 총체적 위기문제입니다.
어제 서울 동대의 부총장 부부가 오셨는데 부인께서 이혼상담 일을 하신다네요. 요즘에 이혼률이 매우 높답니다. 이혼 상담하는 연령층도 많이 내려오고 황혼이혼도 많다네요. 그리고 황혼이혼에서는 대개 남자들이 버려진다네요. 거사님들 조심하세요. (대중 웃음) 눈치도 보시고 더욱 잘하세요.

그런데 실제로 얘기를 들어보면, 상담하시는 분은 60이 다 되신 옛날 세대분이잖아요. 당신이 자랐던 시대와 세대차이가 엄청 나는 거예요. 당신 가치로 보면 아무 문제도 아닌 것이 지금 이혼하고자 하는 세대에게는 매우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한걸음 물러나서 보면 사실 얼마든지 서로 양보할 수 있는 문제들도 많이 있답니다. 실제로 헤어지는게 좋겠다는 부부도 없잖아 있지만 그렇다는 것이지요. 이혼문제도 사회문제이지만 오늘날 보면 성인뿐 아니라 학생들의 자살, 인간성 상실에 따른 많은 사회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류미래를 걱정하는 선지자들은 오늘날 지구촌의 문제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지요. 하나는 환경오염, 자원고갈 등의 환경생태문제, 또 하나는 인간성 상실에 따른 문제.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눈답니다. 인간성 상실에 따른 문제는 아주 폭이 넓습니다. 전쟁부터 시작해서 종교간․세대간․빈부간의 갈등 같은 것들도 인간성 상실에 바탕하고 있는 것들이지요.

어쨌든 지구촌이 이대로 굴러가서는 미래가 암담하다고 하는 것에 공감하고 많은 눈 밝은 선지자들이 고민을 하고 대안을 찾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문명은 서구문화 중심입니다. 서구 문명이 현 인류전체 문명을 이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도 한번 보세요. 여러분 삶의 방식을 보면 김치나 된장국을 빼고는 입고 있는 옷을 시작해서 거의 서구문명식이지요?

오늘날 우리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많은 문제들이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지구촌 전체의 문제들인데 이런 문제들의 원인은 바로 서구문명을 이끌어 낸 사상과 철학의 문제로 귀결합니다. 다시 말해서 서구적 세계관의 문제입니다. 근본원인은 세계관의 문제, 즉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오늘날의 이 문명이 만들어진 것이고 그 문명에서 오늘날 현대문명의 위기가 초래된 것이라는 것이죠.

전문가들은 17세기 이후로 지구촌을 이끄는 문명의 세계관을 기독교적 세계관과 물질적 세계관, 이렇게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그런 세계관들이 오늘날 현대의 찬란한 문명을 만드는데 선두적 역할을 하고 토대가 된 것입니다. 매우 큰 장점도 있지요. 그러나 또한 그런 세계관이 오늘날 현대문명의 위기 역시 초래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명의 위기, 현대 삶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안의 세계관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대체로 보면 천장에 먼저 닿은 공이 먼저 떨어지죠? 또 땅에 먼저 넘어진 사람이 먼저 일어서잖아요? 그렇듯이 현재를 반성하고 미래를 준비하는데 있어서도 사실 서양 사람들이 더 앞서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런 식의 문명과 세계관으로써는 인류의 미래가 암담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그에 대한 대안들을 찾아왔었죠.

종교계․철학계․학계․시민사회계 등 각계각층에서 찾아왔는데 오랫동안 다른 장에서 찾다가 매듭을 짓는 단계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 공통점은 자유주의, 분리주의, 경쟁주의, 자본주의로는 안된다는 것이에요. 반대로 공존과 상생주의로 즉, 오늘날의 세계관과 문화는 개인의 자유를 매우 중요시 여기죠. 그래서 대체적으로 오늘날의 문명을 개체주의 문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개인주의, 자유주의는 경쟁을 전제합니다. 오늘날 사회는 경쟁을 요구하고 1등만을 최고로 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젊은이들, 학생들이 자살하는 이유가 그 경쟁에서 밀려서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런 경쟁이 아니라 공존과 상생만이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라고 그들은 답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공존과 상생의 세계관의 사상을 찾다 보니까 그들은 동양사상에서 답을 찾고요. 동양사상 중에서도 특히 불교에서 그 답을 찾는다고 합니다. 불교에서 희망을 본다는 것이지요.

불교의 사상은 매우 폭 넓은데 그 중 무엇에서 그들은 현대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의 찾는가. 그것은 연기법입니다. 공존과 상생을 얘기하는 세계관은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이지요. 아시듯이 연기법은 어느 것 하나도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지요. 생겨나는 것도 존재하는 것도 없다고 합니다. 그 무엇도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생겨날 수도 존재할 수도 살아갈 수도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뭐, 내가 돈 벌어서 내 돈으로 내 밥 사먹고 사는 것 같지만 한걸음 물러나서 보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존재 없이는, 내 옆에 다른 사람 없이는 우리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다른 존재에 의지하지 않고는 우리의 삶은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세상은 사람과 더불어서 뿐만 아니라 사람 아닌 다른 모든 자연과 더불어 존재합니다. 나를 존재하게 하는 다른 존재에 대해서 고마워할 줄 알고 또 그 존재가 소중한 줄을 알아야 합니다. 산이 비록 저렇게 말없이 있지만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고 만들어 준 소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인간의 욕심에 의해서 뭐든지 편한대로 챙기고 많이 가지면 좋다고 하는 그런 잘못된 세계관과 가치관에 의해서 함부로 다뤄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 과정에서 지리산댐도 생기는 것이고 그런 문명의 흐름과 생각의 흐름에 실상사는 잠기는 것입니다. 산내는 잠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리산댐이 생겨서 실상사가 수몰위기에 처한 이 시점에서 밖으로는 이것을 막아내도록 힘을 합해야 할 것이며 또 이걸 계기로 안으로는 나와 우리의 삶, 사상, 정신들을 되돌아보며 살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런 바람입니다.

어쨌든 살면서 누구나 다 행복하고 잘살고 싶어하잖아요? 말씀드렸듯이 사람도 다른 존재에 의지하지 않고는 생겨날 수도 없고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또 삶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을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 핵심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입니다.

역시 사람의 삶에서도 다른 어떤 존재보다도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 삶의 성격과 내용과 질을 만드는데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내가 관계하고 있는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내가 얼마나 어떻게 관계를 잘 이끌어 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가만히 한 번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면 그런 줄을 봅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가 그렇듯이 인간존재 자체가 관계에 의해서 비로소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삶 자체가 관계입니다. 삶이란 다른 말로 관계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삶이 관계니까 그 삶을 풍부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서는 관계를 잘해야 되는 것이지요. 이 세상 모든 유정, 무정의 다른 존재와도 관계를 잘 해야겠지만 일단 우선은 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만들어내는 것, 나와 인연된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요.

그런데 잘 안되는게 그것이죠 ? 이상하게도 조금 먼 사람하고는 관계가 잘 되는데 가까운 사람과는 더 안되는 것 같아 ! 왜 그럴까요? 아마 잘 안되는게 부부간이죠 ? 가장 잘 맞을 것 같으면서도 또 가장 잘 통해야 되는 대상이면서도 잘 안통하고 잘 안맞는게 누구에요 ? 웬수 놈의 서방이고 웬수 놈의 마누라지요 ? (대중 웃음) 허허허. 그렇지 않아요 ? 저는 안가봐도 알아요. 가봐서 그런게 아니고. (대중 웃음) 그러나 그 관계를 떠나서는 나의 삶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관계로 이루어진 삶은 관계를 잘 만들어야 행복하고 아름답고 삶이 즐거운 것입니다.

관계를 어떻게 해야 잘 만들까? 여러 가지 길이 있고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요. 그런데 그 중에서 저는 관계와 인연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우선이라고 봅니다. 사실 결혼할 때, 뭐 부부관계를 자꾸 얘기해서 그런데… 서로 죽고 못살아서 한거잖아요, 그렇잖아요 ? 결혼하고 연애할 때는 이쁘고 멋지고 좋았잖습니까. 그 이쁘고 멋지고 좋은게 그게 지나다가 수퍼마켓에서 구멍가게에서 돈 주고 살 수 있는 것입니까 ? 아니잖아요.

흔히 인연을 얘기하면서 옷깃만 스치기 위해서도 5백생의 인연이 필요하다고 하잖아요. 이 생에서 부부로 만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생의 인연을 필요로 할까요 !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소쩍새는 봄부터 그렇게 피를 토하고 우는데 너와 내가 이 세상에 부부로 만나서 한평생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전에 얼마나 많은 인연의 공든탑을 쌓아왔겠어요. 그렇게 해서 만난 인연입니다. 엄청나게 소중한 인연입니다. 그리고 내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인연입니다.

부부가 그렇듯이 가족이, 형제가, 친지가, 이웃이, 직장 동료가, 내 삶의 동선에서 걸리는 모든 존재들이, 이쁜 놈이든 미운 놈이든 사실 따지고 보면 내 삶을 이렇게 살게 하는 내 삶을 존재케 하는 매우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주변의 인연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늘 마음속에 새겨야 합니다. 그냥 ‘아, 소중한 거야’라고 그냥 하고 말면 안되지요. 소중하다는 것을 마치 최면 걸듯이 자꾸 되뇌어야 합니다. 인연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라야만이 타인에게, 다른 인연 존재들에게 함부로 하지 않으며, 그래야 관계가 부드러워지고 아름다워지고 좋아지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불자는 관계를 늘 소중히 생각하고 늘 잘 만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수행이지 수행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와 가까운 존재와 관계를 잘 만들어내지 못하면서도 무슨 도력이 있는 양하고, 팔만사천경 좔좔 외우고 하는 것, 이것은 다 뻥입니다. 허풍선이에요. 자기 주변의 관계를 잘 만들어내는 것이 수행입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부처는 자신의 삶의 동선에서 만나지는 모든 관계와 더불어서 아름다운 관계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게 부처에요. 그러니까 그 부처는 어딜 가든 누굴 만나든 보는 사람은 다 환희롭고 기쁘고 행복한 거잖아요. 만나는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언제 어디가 되었든지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 이게 부처지요. 안그래요?

불자의 수행이라는 것은 내 주변의 존재들과 관계를 잘 만들어내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을 버려두고 다른 어떤 것, 참선을 하루에도 열 시간씩, 금강경을 하루에도 몇 번씩 독송한다, 이게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걸 뭐할라고 합니까 ? 그런 것은 내 주변 삶의 존재들과 관계를 잘 만들어가서 내 삶을 행복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고 방법이고 기술을 익히는 것입니다. 그게 목적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불자는 늘 관계를 살펴야 합니다. 어떻게 살펴야 하느냐. 내가 나 아닌 다른 존재,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상대에게 어떻게 다가서고 있는가. 이 점을 늘 살펴야됩니다. 부부관계에서는 내가 부인을 내가 남편을 어떻게 보는가. 또 내가 그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가고 있는가. 이 점을 늘 살펴야 돼요. 이 점을 살피지 않고 놓쳐버리면 관계를 제대로, 자기가 원하는대로 만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걸 늘 살펴야 돼요. 수행은 찰나 찰나 자신을 살피는 것이고 자신을 살핀다는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이 점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교과서적 정답으로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가장 불자다운 시각일까요 ? 그렇죠. 부처로 보는 겁니다. 다른 모든 존재를, 내 주변에 관계 맺는 모든 존재를, 미운 놈이든 고운 놈이든, 비록 지금은 어찌어찌해서 미워질지라도 부처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로 보고 부처로 모시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으로 타인을 바라볼 적에,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은 절대로 관계가 헝클어질 수가 없지요.

그럼 어떤 모습으로 상대에게 다가서야 할까요? 교과서같은 정답으로 얘기한다면 어떤 모습으로 상대에게 다가서야 할까요? 립스틱 짙게 바르고? (대중 웃음) 맞아요, 립스틱 짙게 바르고. 립스틱 왜 발라요? 나도 좋지만 상대에게 예쁘게 잘 보이려고 바르지요 ? 그것을 불교에서는 보살이라고 합니다.

상대에게 다가설 때는 보살의 자세와 보살의 마음과 보살의 태도로 다가서야 됩니다. 보살이 뭔지 모르겠어요? 어려우면 괄호치고 어머니라고 쓰고 괄호 닫습니다. 자식을 대하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다가서는 겁니다. 그렇게 상대를 바라보고 이렇게 다가설 수 있는 사람의 관계는 당연히 아름답고 부드럽고 행복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거 하루아침에 안되지요 ?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이라면 제가 여기 앉아서 이런 얘기 할 필요도 없겠지요.

세상에 하루아침에 제 마음대로 되는 것, 없습니다. 늘 반복해서 계속 노력하는 것, 이 길 밖에는 없어요. 그게 곧 삶이지요. 그런데 늘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힘들고 괴로워합니다. 그랬을 때 어떻게 할까. 그랬을 때 부처님은 뭐라고 했을까. 부처님 말씀 중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힘들고 괴로울 때 새겨볼 만한 말씀들을 모아봤습니다.

오늘 나눠드린 법회자료 다 받으셨죠? 먼저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주지스님, '사람들과 관계에서 힘들고 괴로울 때 새겨보는 부처님 말씀' 낭송>

법구경 말씀입니다. 말씀은 들을 때는 좋아. (대중웃음) 그런데 미운 놈, 사랑하기가 그렇게 쉬워요? 미운 놈 미워하기는 대단히 쉽습니다. 그렇잖아요? 미움은 마음 일으키는 동시에 상대에게 화살이 되어 쏘아져 갑니다. 밉다는 생각과 동시에 내 미워하는 마음의 화살이 상대에게 쏘아져 갑니다. 이 화살을 멈추고 꺾고 쏘지 않기란 매우 힘듭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뭐라고 하셨어요? 이건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백만의 적과 싸워 이긴 것보다 나 하나와 싸워 이긴 승리가 더욱 값지다’고 하신 것이지요. 그렇지 않고 마음만 먹으면 바로 된다면 부처님이게? 하고 또 하는 거에요. 그리고 또 한 가지, 하고 또 하는 과정에 뭔가 지침이 있어야 해요.

그럴 때 이런 부처님의 말씀을, 미운 놈 있을 때, 미운 놈 있어서 내 마음속에 증오가 끓고 분노가 끓을 때 가만히 앉아서 가부좌를 하고 허리를 곧추 세우고 심호흡을 계속해서 반복하면 체온의 온도계가 내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으실 겁니다. 체온의 온도계가 싸악 내려가면 그때 조용히 이런 법구경 말씀들을 읽어 보세요. 비싼 종이 그냥 드린 것 아니에요. 갖다 똥 닦을 때 쓰지 마시고 뒀다가 조용조용하게 읽어보시면요.

이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부처님 말씀의 신비한 힘입니다. 가라앉아지고 그런 것들이 한 번해, 두 번해 할 적마다 힘으로 쌓입니다. 한번 하면 한 번의 힘으로 열 번 하면 열 번의 힘으로 쌓입니다. 계속 반복하면 그만큼의 힘이 쌓이구요. 그 힘에 의해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그걸 불교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도력’이라 하고 ‘법력’이라고 합니다. 그게 도력이고 법력이에요. 아시겠지요?

이 자리의 누구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금 현재 힘들고 괴롭지 않은 사람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 힘들고 괴로울 때 남을 미워하기 쉽고 남을 증오하기 쉬운데 남을 미워하고 증오한 만큼 자신의 마음은 깎여 나갑니다. 헐벗어집니다. 상처받습니다. 그것을 잘 다듬고 상처를 없애는 것은 사랑과 자비뿐입니다. 사랑과 자비로 내 마음의 상처를 보듬는다는 생각으로 다 같이 읽어보고 마치지요.

<모두 함께 '사람들과 관계에서 힘들고 괴로울 때 새겨보는 부처님 말씀' 합송함>

이렇게 하여 여러분의 삶이 평화롭고 행복하고 아름다워지시고 나날이 웃음꽃 피는 그런 시간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밥 먹으러 갑시다. (대중 큰 박수)

[법문] 비폭력과 종교평화...해강스님 법회와 설법 | 실상사

[법문] 비폭력과 종교평화...해강스님(10월첫주 서원법회) > 법회와 설법 | 실상사

[법문] 비폭력과 종교평화...해강스님(10월첫주 서원법회)
작성자 실상사 11-11-15
 
10월 첫째주 서원법회


비폭력과 종교평화선언
해강스님 (지리산 실상사 주지)



정토사에서 사찰 순례 겸 우리 법회에 함께 하셨습니다. 정토사에서 오신 분들께 환영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짝짝짝”

반갑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만, 늘 법회 할 적마다 법당이 좁아 이렇게 밖에 앉으시게 해서 주지 소임자로서 면목이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법당이 좁아서 한데 나 앉은 신도님들에게 제가 미안해하고 면목 없어 할 이유가 없더라고요.^^* 절 불사는 즉 도량을 만들고 법당을 짓는 역할은 원래 스님들의 일이 아닙니다. 재가자들의 역할이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언제부터 그랬는지 절을 짓고 가꾸고 하는 일이 스님들의 역할이 되고 재가자들은 스님들이 절 짓고 관리하는데 동참이나 하는 것으로 되어 버렸고 우리는 대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에 맞게 엄밀히 따져 보지요. 불교에서 최초의 사찰이 무슨 절인 줄 아세요? 그렇습니다. 죽림정사입니다.
그런데 죽림정사 지을 때 부처님이 불사 기획하고 화주 다녔다는 이야기 들어보셨어요? 못 들어봤지요? ^^*
죽림정사 지을 때 부처님이 벽돌 나르고 신도들에게 “우리 절 지으려니까 시주하시오, 뭐 하시오” 그런 적 있어요? 그런 적 없어요.

절이란 본래 재가자들이 스님들의 수행처로 만들어주셨던 것이고, 그래서 스님들은 그런 수행처를 주시면 거기 살고 없으면 말고 그런 겁니다. 죽림정사도 그렇고 기원정사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바로 말하자면은 지금 우리 실상사는 법당이 좁아서 의식을 할 때는 밖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런 것들을 빨리 벗어나기 위해 그럴만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역할은 주지인 저 같은 출가자들의 역할이 아니고 재가자의 역할입니다. 또 재가자들이 판단해서 ‘뭐, 난 한 데 앉는 것이 좋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 사실은 주지인 제가 법회 때마다 기도 때마다 신도님들이 밖에 앉으신 것에 대해 미안해 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렇죠? (...) 동의를 안 하시나봐요? 대답 소리가 별로네요.

실상사는 지금 중창불사를 발원하고 천일기도도 두 번째 하고 있습니다. 중창불사를 발원하고 기획을 하고 불사세미나를 하고 한지가 벌써 4~5년 쯤 됩니다. 그런데 불사한다고 4~5년 쯤 이러고 있는데 뭐 하나 지어 놓은 것이 없어요. ^^

그렇지만 실상사 불사는 눈에 보이는 형이하학적인 건물 불사 이전에 이미 불사를 발원하고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불사를 많이 해 왔습니다. 그런 정신의 불사를 바탕으로 그런 정신을 담고 키울 수 있는 건물은 금방 이루어지리라 생각을 합니다.

******

올해 서원법회에서는 불자들의 가장 중요한 수행 덕목인 불살생에 대해서 계속 말씀을 드려왔습니다. 불살생이란 단지 산목숨을 죽이지 않는 것만이 아니고 더 나아가서 비폭력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불살생이라고 말씀 드렸었지요. 그런데 ‘비폭력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불살생의 계를 지키는 것이고 또 불제자로서의 부처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행덕목이다’ 라고 알고만 있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실현해 내기 위해서 서원법회 때 함께 하시는 분들과 공동의 서원을 세웠었습니다.
‘불살생을 실천하는 하나의 구체적 수행방법으로써 육식을 줄이고 채식하기, 채식을 늘려가기, 그리고 더 나아가서 마지막에는 육식하지 않는 채식주의자가 되기’ 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서 ‘모피라든지 가죽 제품 등을 사용하지 않겠다’라는 서원을 함께 세웠었습니다. 서 너 차례에 걸쳐서 육식의 문제와 그리고 모피라든지 가죽제품의 사용 문제 등등에 대해서 말씀 드렸고 우리 함께 서로 약속했고 그 약속을 부처님 전에 절을 세 번 하면서 서원을 세우고 약속을 했었습니다.

어때요? 벌써 상당 기간이 지났는데 그 약속, 그 서원 잘 이행하고 계신가요? (대중: 네..) 정말이요? (대중: 부족해요.) 부족해요? 그런 겁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본래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공부도 하고 그런 게 수행이에요. 마치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다시 넘어지고 또 일어섰다 다시 넘어지고 또 일어서고... 넘어질지라도 반드시 일어서겠다는 그 마음만 잊지 않고서 계속 일어서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넘어지는 횟수가 줄어들고 넘어져서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점점 잘 일어서게 되고 잘 걷게 됩니다. 이게 수행이에요. 수행은 다른 것 없습니다. 잘 안 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 그 가치를 잊지 말고 계속 시도하고 또 하고 또 하는 것, 이것이 수행입니다.

이 이야기는 회주스님 역시 법회 할 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또 하고, 또 하고 어떻게 ? 밥 먹듯이, 죽어라고 ”
그러다보면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정말로 내 삶이 아름다워지고 깨끗해지고 향기로워져 갑니다.
그게 수행입니다. 길가다 어느 날 갑자기 번갯불 펑 터지듯이 그렇게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가 옆길로 샜네요.

제가 그동안 여러분께 불살생의 정신으로 수행하는 것, 그것도 우리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법들로써 채식하기와 모피나 가죽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것 등등을 말씀을 해 왔는데, 오늘 역시 그러한 일환으로 다른 관점에서 불살생의 문제, 비폭력의 문제를 다뤄봤으면 합니다.

인류가 생겨나면서, 종교라는 것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생겨났지요. 종교라는 것이 인간들에게 생겨난 가장 큰 이유가 뭘까요? 불안해서? 그런 분들도 있지요. 불안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 맞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어떤 종교든지 간에 인간의 삶을 보다 더 평온하게 보다 더 행복하게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지요.

“내 종교 믿으면 삶이 고달파진다. 내 사상, 내 가르침을 따르면 인생이 불행해진다”
이렇게 가르치는 종교 보셨나요? 없지요. “내 종교를 믿으면, 내 가르침을 따르면 삶이 진정 행복해 질 것이다” 모두 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거짓은 아니지요.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바로 그러한 것이니까요. 모두 ‘인간 삶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류사를 들여다보면 그렇게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펼쳐 진 가르침의 종교들이 안으로는 서로 싸우고 밖으로 다른 종교와 부딪히고 싸움으로 인해서 인류 사회의 불행을 만들어 내는 데 큰 몫을 차지합니다.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이지요. 다양한 종교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나라인데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종교가 서로 다르다고 해서 사상의 대립으로 인해서 크게, 민족의 운명이 걸릴 정도로 크게 또는 그것으로 인해 사람이 죽어가고 하는 그러한 분쟁은 없었습니다. 새로운 종교가 자리 잡는데 있어서 정치적 문제나 탄압을 받은 적은 있어도 종교 간의 대립을 통해서 사람이 죽어가거나 피의 대립과 파탄의 갈등은 아직은 없었습니다만, 현재 소소하게 일어나는 종교간의 문제를 보며 많은 이들이 염려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간과하고 그대로 놔뒀다가는 앞으로 다른 나라에서 보듯이 피의 전쟁과 대립을 불러올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도 이제 종교 간의 화합과 화해 또 서로 공존을 도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현실에 당면해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조금 정치적 색깔을 띨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서 조금 언급하기가 그렇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 그러한 문제들이 계속 수면에 잠재되어 있다가 현 정부 들어와서 표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우려를 표하고 근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또는 각 종교 안에서도 건전하고 바른 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바라는 것은 종교 간의 화합과 화쟁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대한불교조계종단의 화쟁위원회에서 조계종 종단의 이름으로 ‘종교평화선언’을 발표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종교 간의 평화를 이루어 내는 것은 오늘날 우리 현실 삶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또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실천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동안에는 간과되어 있다가 다행이도 늦게나마 조계종단 화쟁위원회에서 ‘종교평화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 ‘종교평화선언’이 발표되어지자 세간에서 아주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아마 신문이나 뉴스 매체를 꼼꼼하게 잘 보시는 분들을 접하셨을 텐데 여러 신문과 텔레비전 매체에서 조계종단의 ‘종교평화선언’을 매우 크게 다뤘습니다. 중앙일보의 경우 전면에 다루고, 주요 일간지에서는 사설에서도 다루고 텔레비전에서는 9시, 8시 뉴스가 메인 뉴스라던데, 거기서도 다루고 그랬습니다.

오늘 아침 스님들 차담시간에는 이 문제에 대해서 서로 토론하고 함께 대화를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온 얘기인데, 일제 해방 이후에 한국 불교계가 새롭게 정비를 하고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 역사가 5~60년 되지요. 5~60년 역사에서 불교계가 사회 문제를 가지고 즉, 다시 말해서 자신들의 이해득실과 관련되지 아니한 사회 공통의 문제를 가지고 불교계의 목소리를 내어서 사회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또 좋은 평가를 얻고 또 큰 반응을 일으킨 것이 없었습니다.
엄밀히 보면 이 ‘종교평화선언’이 최초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조계종에서 내 놓은 ‘종교평화선언’은 사회에서 큰 관심과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불교계 내에서는 몰라요. 관심도 없어요. 겨우 몇몇 분들이 거기에 대해서 말할 뿐이고 또 몇몇 분들이 거기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할 뿐입니다. 정작 불교계 내에서는 그런 것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또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더라’하고 넘어가 버립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그동안에 비폭력 문제를 다뤄왔었는데 비폭력 문제를 다루는 일환으로 조계종의 ‘종교평화선언’에 대해서 함께 공유를 했으면 하는 생각에서 들고 나왔습니다.

이것은 말씀드렸듯이 조계종의 ‘종교평화선언’을 준비한 단체가 화쟁위원회입니다. 화쟁위원회를 이끌고 계신 분이 우리 절에 회주로 계시는 우리가 스승으로 모시고 함께 사는 도법스님이십니다. 일단 우리가 스승으로 모시고 함께 사는 스님이 리더가 되어서 만들어낸 작품이 ‘종교평화선언’이고요. 그리고 그것이 조계종의 역사, 한국 불교의 역사에서 사회에서 최초로 ‘아! 정말 불교가 멋있다! 정말 잘 한다!’ 요즘의 속된 말로 ‘한방 쐈다!’ 이렇게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킨 사건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분을 모시고 사는 우리 절의 신도님들이나 우리 안의 식구들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 또 그것이 무엇인지, 별 관심도 없어요. 그래서 제가 오늘 바로 이것을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한번쯤 내용을 살펴봤으면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내용이 엄청 깁니다. 밥 먹기 전까지 법회를 마쳐야 되는데 어렵겠습니다. 누가 그러대요. 서원법회 때 주지스님 법문이 회주스님 법문보다 훨씬 좋대요. 내용이 좋아서가 아니고 짧게 해서. 하하하!.....

짧게 해서 좋다고 그러는데, 배고프지 않게 밥 시간에 맞춰 마쳐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 전문을 축약해 놓은 줄임본을 살펴보겠습니다. 괜찮겠지요? 싫으시다면 딴 이야기 하고요.
서문을 잠깐 읽어 드릴게요.

<지금 우리사회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다인종, 다문화 사회입니다. 이와 함께 한국사회는 다종교 사회입니다. 기독교, 불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천주교, 민족종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가 한국사회에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믿음과 진리관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연기적 세계관은 서로 다른 인간들이 상호 존중하고 상생할 수 있는 평화적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연기적 세계란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돼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과 ‘저것’ ‘나’와 ‘남’은 서로 별개의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연관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연기적 세계관으로 본다면 반목과 대립은 바람직한 생존의 방식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저것’을 부정하는 것은 ‘이것’ 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남을 부정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남을 인정해야 하고 나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남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 연기적 세계관의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웃종교는 ‘이웃’에 있는 나 자신의 종교이며, 내 종교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연관된 존재일 뿐 아니라 서로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 나의 종교가 우주 전체를 담고 있듯이 상대의 종교 또한 우주 전체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 인연의 차이일 뿐입니다. 각자의 다른 인연이 만들어내는 다양성은 ‘있는 그대로’ 세계의 실상이며 아름다움입니다. 바로 이러한 세계관이 불교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다원적 상황을 이해하는 관점이며, 이웃종교와 관계 맺기를 원하는 바탕입니다.>

이웃종교에 대한 관용과 열린 정신은 기원전 3세기 중엽 인도의 아쇼카왕이 남긴 새김글에도 잘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선언문의 부제가 ‘21세기의 아쇼카 선언’입니다.


잠시 아쇼카란 인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넘어가야 이해하는데 보탬이 될 것 같습니다. 아쇼카란 인물은 인도사람입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5~600년이 지난 다음에 태어난 사람인데요. 인도는 땅덩어리가 큽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마 우리나라 남북한 합한 것의 열배도 넘을 거예요. 인도 땅이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동에서 서로 기차를 타고 가도 30시간 이상 넘어 가야니까요. 부럽지요? 인도가면 제일 부러운 것이 땅덩이 큰 것입니다. 그렇게 큰 땅덩어리니까 당시 인도는 여러 국가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인도를 최초로 거대한 통일 국가로 만든 것이 바로 아쇼카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역사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듯이 다양한 국가들을 하나로 통일 시키는데, “통일 시키자” 하니까, “그러자” 하며 합해졌을까요? 아니지요. 다양한 여러 국가를 하나로 통일시키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할까요? 엄청난 피의 살육 전쟁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지요.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통일시키겠다는 이름으로 전쟁을 벌여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인물이 바로 아쇼카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이렇게 하면 좋겠다는 욕망에 의해서 뭔가 기대하고 뭔가 이뤄놓고 보면, 막상 이뤄놓고 보면 어때요? 허무하지요. 별거 없습니다. 해 놓고 보면, 허망하고 허무합니다. 그리고 냉정하게 자신이 했던 행위를 돌아보게 됩니다. 아쇼카 역시 그러했지요. 통일시키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수많은 나라들을 전쟁을 통해 복속 시켜서 대통일 국가를 만들었는데 막상 만들고 보니까 허무하고 그래서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보니 너무도 많은 피의 살육을 벌였던 거예요.

그래서 아쇼카대왕은 참회하는 마음에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하고서 매우 독실한 불교신자가 됩니다. 매우 독실한 불교신자가 된 다음에 아쇼카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립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 뭐가 있냐면... 인류 역사에 보면 동서고금에 많은 통치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서로 인정하고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실제로 구체적으로 행동하고 매우 강력하게 실천해 옮긴 인물은 없습니다. 아쇼카왕 이전에 전무하고 아직까지도 후무합니다.

실제로 아쇼카왕은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다 보니까 불교가 정말 불교답기 위해서는 다른 종교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고 그래서 아쇼카왕은 국법으로 모든 종교를 자신의 종교인 불교와 평등하게 대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법을 만들어서 그것을 직접 실천했고 그 법령을 돌기둥에 세워서 곳곳에다 모셔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부처님의 성지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쇼카왕 덕분이에요. 아쇼카왕이 부처님의 성지를 순례하고 부처님 성지 마다 큰 돌기둥을 세워서 ‘이곳이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이다, 이곳이 부처님께서 초전 법륜을 굴리신 곳이다.’ 이렇게 돌기둥에 새겨 놓았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발견 되어서 ‘아! 이곳이 부처님의 탄생지이고, 이곳이 열반지이구나!’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이 여러 종교의 존중 원칙에 관한 법령을 아쇼카왕이 돌 기둥에다 새겨 세워놨지요.

여담입니다만, 아쇼카왕의 석주의 꼭대기에는 사자가 있습니다. 사자머리가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에도 인도의 나라를 상징하는 상징입니다. 인도의 국기, 인도의 돈, 인도의 문양, 이런 모든 것에 다 들어갑니다. 어쨌든 그만큼 인도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인데 그분이 석조에다 뭐라고 적어 놨느냐면 “저 아쇼카왕은 모든 종교의 신자들, 그들이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모두를 존경합니다." (그러니까 불교의 스님만 존경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종교의 성직자들도 나는 불교 신자이지만 다 존경하겠다는 것입니다.) 각 종교마다 기본 교리는 다를 수 있으며 자신의 종교를 선전하느라 남의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어떤 의도에서든 자신의 종교에 오히려 더 큰 해악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조화가 최선입니다.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존경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자신의 종교도 발전하게 되고 진리도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다른 종교도 차별 없이 공평하게 법으로 보장해서 대우를 했습니다. 인류사에서 동서양을 통틀어 종교에 관한 다른 왕들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엄청난 사건이고 대단한 일인 것입니다. 아쇼카왕의 석조의 문언을 인용해서 서문의 내용이 계속되는데, 조금만 더 읽어보고 내용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우리 불교인은 이 내용을 역사적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소중하게 실천해야 할 가르침으로 받아들여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이와 함께 우리 불교인은 오늘날 종교 간의 갈등상황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반성합니다. 연기적 세계관은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부처님의 관점이며, 불교가 세상과 관계 맺기를 원하는 방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불교인들은 이웃종교를 진정으로 ‘이웃’으로 생각하는데 충분하지 못했으며 이웃종교인의 허물을 내 허물로 여기고 그들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는데 충분하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이웃종교를 질시하거나 경쟁하는 상대로 여겼던 적은 없었는지 반성합니다. 그리고 이웃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귀 기울여 배우려는 노력이 충분하지 못하였음을 반성합니다. 이런 반성과 참회 위에서 우리 불교인은 한국사회의 종교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불교적 입장과 실천을 다음과 같이 천명합니다.>

‘종교평화선언문’은 이렇게 말하고서 다섯 가지의 자기 약속을 내 놓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서 ‘연기’라는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서로가 서로에 의지해서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결국, 제가 누차 우리 신도님들에게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만, 내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흔히 내 아버지 어머니만 있으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생각하지요. 어머니 아버지가 나를 낳으셨다고 생각하는데 천만에. 세상에 어머니 아버지만 있으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가깝게는 어머니 아버지를 포함해서 이 세상에는 크던 작던 간에 수많은 존재들이,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한다면 이 세상에 나를 제외한 모든 존재들이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나를 이 세상에 살아가게 하는데 모두 힘을 보태고 있는 것입니다. 힘을 보탰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바로 나를 낳은 어머니이고 나를 기르는 아버지인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바라봐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 ‘연기’입니다. 이것이 불교가 세상을 바라보는, 불제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세상이 모든 존재, 우리 절의 꽃님이 까지도 나를 낳고 기르는 어머니이고 아버지인데, 종교가 다른 사람은 어떨까요?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나와 정말 무관하고 종교가 다르니까 저 놈은 확 쥐어박아야 하는 놈일까요? 아니라는 것이지요.

정말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리가 다른 이와 어떤 차이가 있던지, 어떤 다름이 있던지 간에 그 차이와 다름은 결국 나에게 보탬이 되는 나를 낳고 나를 성립시키고 살아가게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세상에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생겼다고 보세요. 그러면 세상에 남자는 남자만 있고 여자는 여자만 있을 것 아닙니까? 세상이 되겠어요? 안됩니다. 달라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달라야 되요.

그렇듯이 너와 나는 달라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다른 점이, 너와 내가 다르기 때문에 헤어지고 대립해야 되는 것이 아니요, 다르기 때문에 비로소 만나야 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똑같으면 만날 수도 없어요. 서로 다르기 때문에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부처님의 진리를 부처님의 가르침이 존재한다면 다른 종교에 대해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는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평화를 위한 종교인의 선언(21세기 아쇼카 선언)에서

첫 번째로 선언한 것은 ‘열린 진리관’입니다.

대체로 많은 종교인들은 자기 종교의 사상만이 진리라고 이야기 합니다. 대부분의 유일신을 믿는 종교가 그러한 성향이 강합니다. 그러면 불교는 안 그럴까요? 천만에, 많은 불교인들도 불교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여기서 불교가 최고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 '발' 들어보세요? ^^ 아무도 발 안 드네.(웃음) 보세요. 여러분도 다 불교를 최고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정말 불교가 최고일까요? 천만에요. 불교는 최고 아닙니다. 왜? 불교는 최고가 아님으로써 비로소 최고가 됩니다.
최고라는 것이 뭘까요? 다른 것과 다른 것입니다. 너보다 내가 잘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부처님의 연기적 세계관이 ‘어떤 존재가 어떤 존재보다 더 잘난 놈이 있다.’ 이렇게 바라보는 세상이 아니란 것이지요. 불교는 절대 그렇게 세상을 보도록 가르치지 않습니다.

세상에 최고는 없습니다. 최고가 없으니까 가장 못난 놈도 없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잘나고 못난, 최고 최저의 차이가 아니라 서로 다를 뿐입니다. 다름이 있을 뿐이고 우린 그 다름으로서 비로소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종교도 다른 종교대로 그들의 진리를 믿기에 그렇게 인정하고 존중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열린 진리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고 불교만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이웃종교에도 이웃종교 나름의 진리가 있다고 인정해준다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가 불교의 진리를 인정하든 말든 그것은 그들의 문제인 것입니다. 불제자는 불제자의 마음으로, 부처님의 법에 의해서 다른 종교나 다른 사람의 존재와 그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이 ‘진정 불제자다운 태도요, 마음 씀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가 ‘종교 다양성을 존중하겠다.’라는 것입니다.

한국사회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큰 종교, 작은 종교 등 다양한 종교가 있는데 만약에 세력이 큰 종교만을 종교라고 인정한다면 그것이 옳은 태도일까요? 세상을 그렇게 한번 봅시다. 힘 센 놈만 사람인가요? 힘 센 놈만 한국 사회에 권리가 있나요? 힘 센 놈만 대접 받아야 됩니까? 마찬가지잖아요. 힘없는 종교는 종교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세상살이에서도 힘 있는 사람만 존중하고 힘없는 사람은 핍박 받아야 한다는 논리와 뭐가 다릅니까? 똑같은 거지요.

종교는 큰 종교든 작은 종교든 어떤 식의 종교이든 간에 그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해줘야 합니다. 불교는 내 종교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종교 또한 소중하게 대해주고 여겨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니까, 현재 상황이 그러니까 그렇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 아까도 말했듯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연기적 세계관에서 본다면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이도 소중한 것입니다. 다른 이를 소중하게 여겨야 비로소 자신이 소중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셨어요. 이렇게 가르치셨는데 ‘불교만이 최고다. 다른 종교는 우스워, 안 소중해! 다른 데는 별 볼일 없어! 종교로 인정할 수 없어! 진리를 인정할 수 없어!’ 이런 태도는 불교로 살아가는 태도가 아닙니다. 불제자의 태도가 아니고 불교를 모르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세 번째, ‘전법과 전교의 원칙’입니다.

믿음을 전하는 일은 곧 자신의 믿음을 다듬어 가는 과정이지요. 서로 다른 믿음을 지닌 이들과 어우러지면서 큰 조화를 이뤄가는 과정이 즉 ‘포교’입니다. 전도와 전법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전도와 전법이라는 것이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을 ‘야! 그 종교 별 볼일 없어!, 그것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 절 좀 봐봐. 훨씬 더 좋아! 이리로 와!’라고 개종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아쇼카 선언, ‘종교평화선언’이 나오고 난 뒤에 불교계 안에서 일부 불자들이 가장 문제 삼는 이슈 중에 한 가지가 바로 이 점입니다. 그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도하는 것이 개종으로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교를 또는 포교를 포기하는 일이다’라고 얘기합니다.

저는 생각을 달리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을 그 종교를 버리고 이 종교로 오라고 꼬드겨 내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떤 종교, 어떤 신앙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본인의 판단에 의해서입니다. 단, 불제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른 이에게 전하는 목적은 뭔가 하면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녹야원에서 교진여 등 다섯 명의 비구에게 가르침을 처음 굴리시고 그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깨닫고 난 뒤에 부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이제 전법의 길을 떠나라. 다섯 명이 함께 몰려다니지 말고 (몰려다니면 아마 일 저지를까봐 그랬나 봐요.(웃음)) 각각 다섯 군데로 흩어져서 가라. (그래야 여러 군데를 갈 것 아닙니까? 뭐 하러 가?) 가서 나의 가르침을 전하라. (무엇을 위해서?) 세상 사람들의 행복과 안락을 위해서.”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세상의 평화와 안락을 위해서 가르침을 전하라" 하셨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그 종교는 몹쓸 종교니까 따르지 말고 내 불교로 끌어와라", "개종시켜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내가 좋은 것을 가졌으면 다만 내 좋은 것을 드러내면 됩니다. 드러내면 다른 사람이 들여다보고 아 좋으면 다른 사람이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교를 포교하는 전법하는 가장 좋은 자세는 불제자가 불제자답게 모범적으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모범적으로 마음 쓰고 모범적으로 말하고 불제자답게 행동하면, 누가 봐도 그 모습이 좋으면, 그리고 그 사람이 그렇게 아름답게 생활하고 아름답게 마음 쓸 수 있는 근거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다고 알게되면,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자는 당연히 따라 올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지나가다가 개똥을 보면 어때요? 찡그리지요. 그렇지요? 개똥을 보고서 코를 들이미는 사람 봤습니까? 우리 꽃님이가 막 싸 놓은 따끈따끈한 개똥에 코를 들이미시는 분, 두 종류이지요. 변태거나 또는 그것을 특별하게 연구하시는 분 아니면 안 할 겁니다.

그런데 요즘 가을에 저 뒤로 가면 소국이 많이 핍니다. 지나는 길에 노란 국화가 피어있으면 어때요? 예쁘잖아요. 자기도 모르게 눈이 뻥 뜨이고 코를 갖다댈 수밖에 없습니다. 기분이 좋지요. 그렇잖아요. 이런 겁니다.

이런 거예요. 내가 세상에서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면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는데 그 거름이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거름삼아서 세상의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서 향기를 풍기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요? 나비가 날아들고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집니다. 그러면 당연히 따라와요.

여러분, 아침에 집에서 나오면서 옷매무새도 가다듬고 화장도 하고 그러죠. 왜 하셨어요? 스스로의 만족도 있지만, 다른 이를 배려하는 마음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다른 이를 배려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만약에 전법이라는 것이 다른 종교인들의 개종을 목적으로 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투쟁입니다. 이것은 평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싸움질을 하자는 것입니다. 일부 종교에서 오랜 종교적 전통을 가진 나라로 전도를 하러 가고 포교를 하러 갑니다. 그게 잘 될까요? 잘 안되지요, 그게 바른 태도일까요? 세상으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잖아요. 그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그렇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해 봐도 그렇고 부처님 가르침의 전도와 전법과 포교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개종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고 바로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더 확고히 하고 다듬어 가는 과정일 뿐이고 다른 종교를 가졌던 사람이 불교로 개종하는 것은 그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거시적인 것입니다.


네 번째, ‘공적 영역에서의 종교 활동’입니다.

국가와 종교는 분리되어 있지요. 정교분리는 늘 이야기 하지만 인류역사에서는 정교분리가 제대로 된 적이 없어요. 지금도 그렇지요. 엄밀하게 말해서 종교와 정치는 한 뿌리입니다. 태어난 것이 옛날에 한 뿌리였어요. 그러다보니까 나눠 가지고 제 역할을 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종교대로, 정치는 정치대로 나눠져야 한다는 판단을 바꿀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공적영역, 다시 말해서 사회의 정치인이나 관리라든지 아니면 어떤 집단에 공공의 책무를 맡은 사람이 자기의 직책과 자기의 이해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을 이용해서 자기 종교를 펼치고 다른 종교를 탄압하고자 하는 것은 옳지 않은 태도라는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불교는 한국사회에서 그런 부분에 취약하기 때문에 두 말할 필요도 없겠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우리가 가장 좁은 단위인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 아버지가 절에 다닌다고 자식들에게 절에 다닐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강요해서는 안 되고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아까 전법에서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 부모님이 정말 잘 산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면 자식들은 당연히 따라오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되는데 아버지라는 권리와 권력을 내세워서는 자신의 신념을 가족들에게 강요하는 것, 이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사회에서 나름대로 자기 위치가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소단위일 수도 있고 때로는 더 큰 집단에서 높은 위치에 있을 수도 있는데 바로 그런 것을 이용해서 종교나 포교활동을 하는 것, 다른 이의 믿음을 강요하는 그리고 술수를 부리는 행위는 옳지 않다는 이야기이지요. 결국은 그것 때문에 종교가 대립하게 되고 결국은 비극을 불러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 ‘종교평화선언’에서는 ‘우리 불교인들은 공적영역에서 그런 식으로 종교를 강요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다.’ 라는 그런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평화를 통한 실천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세상사와 종교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종교가 생겨난 이유도 세상사를 평안하기 위한 목적을 걸고 나왔기 때문에 더욱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세상살이는, 현실의 삶은 종교 이상을 실현해내는 좋은 자리이고 종교 이상을 판단해내는 좋은 잣대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이 세상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올바른 가르침을 판별하는 기준을 어디다 둘 것인가?
대부분의 불교 신도들은 스님을 따릅니다. 이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 생겨난 불교집단에 와서는 부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스님을 따라요. 우습지 않아요? 우습잖아요. 그래서 ‘어느 스님 유명하다더라.’ 우~ 몰리고 ‘어느 스님 기도 발이 잘 받는다더라.’ 우~ 몰리고 그러지요. ‘어느 스님은 텔레비전 나왔었다더라.’ 또 그리로 모이고 무슨 신앙도 유명세를 따라 무슨 연예인들 팬클럽 같이 쫓아다닌다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 실망할 일도 많이 생깁니다. 지난 번에 뉴스 보니 어느 연예인이 탈세로 뉴스에 났던데, 겁나게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연예인이라면서요? 그런데 탈세했다고 하루아침에 야단 났데요. 그런 거예요. 사람을 믿으면 늘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연애를 해봐서 알잖아요. 아니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도 어느 순간에 실망을 주잖습니까? 아닌가봐? 이분들은 사랑을 아직까지 만족스럽게 하시는 분들인가 봐. 저는 그렇더라고요.(웃음) 그러니까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게 됩니다.

그럼, 뭘 믿어야 될까요? 그렇지요. 법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에다 법을 클로즈업 시켜서 사람을 봐야하는 것이지 법에다 사람을 갖다 붙여서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그러셨지요. 나를 믿지 말고 법을 믿어라 그러셨습니다. 심지어 부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법을 따르게 했는데 아무리 후대 스님이 잘 나고 훌륭하더라도 부처님만 하겠어요? 그렇잖아요. 법에 의지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고 본다면 세상의 어느 종교가 다른 종교 믿는 사람은 싹 죽여 버려라! 이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러대요. 이슬람교가 한 손엔 코란, 한 손엔 칼 들고 믿을래? 죽을래? 그랬다고 하는데, 그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 전해진 것입니다. 이슬람교 사상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불교보다도 훨씬 더 평화주의입니다. 뭐 한 손엔 코란, 한 손엔 칼 들고 안 믿으면 죽인다? 이것 전혀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다. 코란의 가르침에는 그런 것 없습니다. 코란의 가르침을 보면 ‘아하! 진정한 보살행의 구체적인 묘사가 바로 이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종교든지 다 세상사람들의 평화와 행복을 애기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종교를 신앙하는 집단에서 보여주는 행위는 좀 다릅니다. 내가 다른 종교는 언급하지 않겠는데요. 우리 종교만 놓고 보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에서 보면, 주지 자리 놓고 싸움하는 것이 나와요? 안 나오잖아요. 그렇지요? 신도 많이 끌어들이기 위해서 다른 절과 경쟁하라는 말이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없어요. 자꾸 이런 이야기 하면 자기 얼굴에 침 뱉기이니까. 대충 눈치 빠른 분들은 이해하시지요? 그런 이야기 없습니다. 그런데 집단에서는 더러 그렇게 행합니다. 불교라는 이름으로 행합니다. 불교라는 포장지를 씌워서 합니다.


그러나 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믿어야 할 것이 사람이 아니고 따라야 할 것이 사람이 아니고 법입니다. 바로 평화를 통한 실천이라고 하는 것은 법에 의해서 생각하고 법에 의해서 행동한다고 한다면 종교 간의 갈등 상황도 충분히 해소될 수 있는 것이고 아예 생겨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 간의 갈등과 대립도 법에 의해서 진리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루어진 집단, 즉 사람의 문제입니다. 진리와 법의 문제가 아니고 사람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즉, 평화적인 가르침에 의해서 다른 종교와 함께 하겠다는 태도를 선언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그러셨지요? 미움은 미움으로써 절대 해결할 수 없다고 그러셨지요? 미움을 해소하는 방법, 법구경에 나오지요? 미움은 오직 사랑으로써 없앨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양한 신념을 가진 다양한 존재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불교가 아무리 포교를 열심히 하고 아무리 훌륭한 스님이 많이 나오신다고 해도 이 세상사람 모두가 불교신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더불어서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과 대립하지 않고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평화로써 대해야 합니다.

설령 문제가 생겼더라도 문제를 해소하는 방법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아니고 평화로써, 미움이 아닌 사랑으로써 그리고 대립과 갈등이 아닌 자비로 대할 때만이 비로소 문제는 해결되어진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불교요, 그것이 바로 불제자로 살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부처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다섯 가지 선언을 해 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다섯 가지 선언을 하고, 마지막으로 평화를 위한 불교인의 서원을 세웠는데요.
잠깐 읽어드리고 마치겠습니다.


□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의 서원 □

우리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고통에서 벗어나 평화와 안락을 얻고자 하듯이
이웃종교인들도 그들이 믿는 종교를 통해 평화와 안락을 구하고 있습니다.
길은 다르지만 우리가 이르고자 원하는 바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이웃종교의 가르침도 소중하게 여기겠습니다.
내 종교의 관점과 언어로 이웃종교를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입장과 언어로 그들의 종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웃종교인과 더불어 고통 받고 소외된 모든 생명들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겠습니다.
그들과 함께 지구촌 곳곳의 가난과 질병을 퇴치하고 전쟁과 폭력을 방지하며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환경파괴를 막아
모든 생명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것이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의 서원입니다. 제목은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의 서원’이라고 했지만 안으로 들여다보면 내 삶의 평화를 위한 나의 서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비춰보고 나의 삶을 다듬어보고 다른 이, 다른 종교, 나와 다른 존재들을 대한다면 바로 내 안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내 주변의 평화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제가 대충대충 징검다리 건너 뛰 듯이 말씀드렸지만 이 선언문의 전문은 조계종 홈페이지에 들어가시면 볼 수 있습니다. 또 실상사 홈페이지에도 올려놓겠습니다. 인터넷 하시는 분들은 들어가 보시고요. 혹여 필요하신 분들은 다음에 오시면 자료를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직 초안입니다. 완성본이 아니라는 겁니다.

초안을 발표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불교는 어떠한 것을 만들어 갈 때 대중이 함께 논의해서 만들어가는 전통이 있습니다. 초안을 내어놓고 대중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종교평화선언도 앞으로 대중들의 다양한 의견을 통해서 다듬어진 완성본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도 여러분께서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시고 좋은 의견도 내 놓으시고 그랬으면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바로 ‘종교평화선언’은 다른 종교와의 평화를 위함일 뿐만 아니라 ‘ 내 안의 내 삶의 평화를 위한 수행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것이 나온 다음 불제자들 사이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왔느냐면,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전도, 개종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포교를 포기하는 것이냐?’는 이야기가 나왔었습니다. 또 하나는, 실상이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언급을 하지요. 기독교 같은 경우 불교에 대해 아주 공격적인데 불교는 그것에 대해 ‘때려라!’ 하고 열린 자세로 나가면 얻어맞기만 하고 결국은 우리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냐? 이런 염려를 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의견들이 있습니다. 의외로 많은 것 같아요. 더 나아가 ‘이렇게 한 들, 저쪽에서 안 받아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쪽에서 막 때리면 맞고만 있을 것인가? 결국은 그러다 다 놓쳐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런 염려를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료집에 바로 그런 염려들에 대한 답으로 써 놓은 것이 한 가지 있는데 제가 그것을 인용해서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해인사에 머무셨던 성철스님 법문을 인용해서 말씀을 해 놓았어요. 성철스님이 뭐라고 하셨냐면,
“상대가 나를 해롭게 하면 할수록 더욱더 상대를 받들어 섬겨라. 우리 부처님을 우리 불교를 제일 욕하고 스님들을 제일 공격하는 그 사람들이 극락세계에 가도록 제일 먼저 기도하고 축원하고 절 합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다른 종교인들이 불교를 비방하고 공격 할수록 자꾸 절하고 기도하고 축원하는 그런 사상과 태도로 모든 사람들에게 불교를 선전하고 그런 사상으로 일상생활을 실천해보십시오. 그러면 불교는 바닷물이 밀려들듯이 온 천하를 덮을 것입니다. 그것이 생활화 되면 모든 사람들이 불교에 대해서 감동하고 감복해서 불교가 그런 것인가 해서 불교를 안 믿으려야 안 믿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누가 성철스님한테 물어 봤었나 봐요. 여기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저쪽에서 아무리 큰 불을 지르더라도 이쪽에서 자꾸 물을 들이붓는다면 그 불은 결국 꺼지게 될 것입니다. 저쪽에서 큰 불을 지른다고 나도 같이 불을 지른다면 너와 나를 함께 태우게 되는 것이니까 그쪽에서 아무리 불을 지른다고 해도 우리 쪽에서는 자꾸 물을 붓는다면 결국 불은 물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싸우자고 덤벼드는 사람과 싸우지 않고 평화를 이루는 방법인 것이고, 또 불교적으로 생각해봐도 불제자가 능히 취해야 할 태도와 마음 씀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여러분께서 좀 더 마음과 관심을 내셔서 ‘종교평화선언’을 한번쯤 접해보시고 읽어보시고 새기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것이 곧 내 안의 평화를 이뤄내는 것이고 다른 존재를 비폭력으로 대하고 비폭력으로 대함으로써 다른 존재와 더불어서 함께 평화를 만들어내는 진정한 불제자의 수행이요 방법인 것입니다.
오늘 법문은 ‘종교평화선언’을 공유하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생명평화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_2 ... 도법스님 > 법회와 설법 | 실상사

생명평화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_2 ... 도법스님 > 법회와 설법 | 실상사

생명평화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_2 ... 도법스님
작성자 실상사 10-10-30
79회 다운로드 DATE : 2010-10-30 01:34:15


*정독하실 분들은 첨부파일을 열어서 보시기 바랍니다.

2. 대승불교의 수행

1) 대승불교의 기본 사유 방식


붓다, 그는 고통으로부터 해탈한 사람, 탐진치가 소멸되어 열반에 도달한 사람이다. 그는 어떻게 해탈했는가? 붓다, 그는 오랜 사유 끝에 붓다의 출현, 붓다의 깨달음 여부와 관계 없이 본래부터 있는 보편적 진리를 발견했고 그 진리를 연기법이라고 했다. 내용을 보면 서로 의지하여 서로 존재하게 하고 서로를 빛나게 하는 사랑의 법칙이다. 붓다 그는 우주의 보편적 진리의 길을 발견하고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감으로써 고통으로부터 해탈하고 궁극의 열반에 도달했다. 우리는 그의 가르침을 불교라고 한다. 붓다의 가르침은 팔만 사천 법문이라고 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다. 왜 그렇게 많은 것일까? 붓다의 가르침은 논리적 정합성을 갖는 단일한 체계의 이론서가 아니고 병에 따른 처방전이기 때문에 병의 수만큼이나 처방도 많다. 또는 그 때 그 때 사람의 수준이나 문제에 따른 해결책으로 내놓은 것이기 때문에 사람 수만큼 많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팔만 사천 법문을 종합하여 그 사유방식의 본질적 핵심을 간단하게 함축하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작자수(自作自受) ”이다. 풀어보면 “자신이 행위 하는 대로 그 삶이 이루어진다. 자신이 만든 것은 자신이 받는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체적이고 자립적이고 창조적으로 살아야 한다.”이다. 부처, 부모 그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죽으나 사나, 좋으나 궂으나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살아야 한다. 아무리 길이 잘 닦여져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주체적으로 가야만 그 길이 자신의 길이 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여실지견(如實知見. 연기법 즉 사랑의 법칙을 아는 것 - 지혜의 길) 여실지견행(如實知見行. 사랑의 법칙대로 실천하는 것 - 자비의 길)”이다. 풀어보면 “현실적으로 직면한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 그리고 그 내용(사랑의 법칙)에 따라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라. 그러면 삶이 편안하고 자유롭다”이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직면한 존재의 실상을 떠나서는 어디에서도 길을 찾을 수 없다. 왜 그런가? 다른 데에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바로 지금 여기 직면한 존재의 실상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왜 그런가? 그 곳에 길이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를 좀 더 간추려 정리하면 하나는 주체적인 삶만이 그 삶이 참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 사실과 진실, 즉 직면한 실상에 근거하여 삶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가지를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면 언제나 그대가 직접(自歸依) 법의 길(法歸依)을 가면 그 길을 가는 만큼 해탈 열반이 바로 그대의 삶이 된다는 뜻이다.

2) 대승불교 수행의 기본 관점과 태도

대승불교 수행론의 기본 관점과 태도는 청매선사의 십무익송(十無益頌)을 참고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사료된다. 십무익송의 핵심은 보편적 진리에 입각한 올바른 방향과 길을 모르고 수행을 하면 아무리 용맹정진을 해도 이익이 없다는 것이다. 방향을 잘못 잡을 경우 마치 가야 할 목적지가 동쪽인데도 불구하고 서쪽을 향하여 줄기차게 달려가는 것처럼 된다는 뜻이다.
다음은 십무익송이다.
○ 삶(마음)과 직결시켜 살피지 않으면 경전을 보아도 이익이 없다.
○ 바른 법에 대한 이해와 믿음에 근거하지 않으면 고행을 해도 이익이 없다.
○ 원인을 가볍게 여기고 결과만을 중요하게 여기면 도를 탐구해도 이익이 없다.
○ 마음(삶)이 진실하지 않으면 교묘하게 말을 잘 해도 이익이 없다.
○ 존재의 본질이 실체없음(空)을 달관(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인정하고 받아들임)하지 않으면 좌선을 해도 이익이 없다.
○ 아만심을 극복하지 않으면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다.
○ 스승이 될 덕이 없으면 대중을 모아도 이익이 없다.
○ 뱃속에 교만이 꽉 차 있으면 유식해도 이익이 없다.
○ 한평생 괴각으로 사는 사람은 대중과 함께 살아도 이익이 없다.
○ 안으로 참다운 덕이 없으면 밖으로 점잖은 행동을 해도 이익이 없다.
우선 참선 ․ 구도 ․ 고행 등에 관계된 것을 살펴 보는 것이 좋겠다.
“보편적 진리인 정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확신이 없으면 목숨 걸고 고행을 해도 이익이 없다. 존재의 본질이 실체 없음을 달관하지 않으면 밤낮으로 좌선을 해도 이익이 없다. 원인과 과정을 소홀히 하고 목적과 결과 만을 중요하게 여기면 용맹심으로 도를 구해도 이익이 없다.” 등 아주 중요한 내용들이다. 십무익송의 내용으로 보면 그냥 치열하게 참선을 한다고 해서, 고행을 한다고 해서, 도를 구한다고 해서 수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과 길, 즉 본래부처의 길을 따라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방향과 길이 없이 맹목적으로 수행을 하면 당사자의 의도나 바람과는 정반대로 소유심, 소구심, 소득심, 속효심이라는 고질병 또는 기복주의,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이 농후하다. 명심해야 할 일이다.

3) 대승불교 사유로 본 본래부처와 대승불교 수행론

오늘의 한국불교 현실은 비연기적 사고인 실체론적 불교관과 이분법적 실천론인 비중도적 수행론에 빠져 매우 혼란스럽다. 초기불교다, 대승불교다, 교학불교다, 참선불교다 하고 비연기적 사고로 서로를 분리시켜 선후, 경중, 우열을 따지는 왜곡된 불교관으로 인해 참불교, 정법불교가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이론(앎)과 실천, 수행과 일상의 삶, 수행과 깨달음, 자리행과 이타행, 개인 수행과 현실 참여, 자기 완성과 사회 완성 등을 이분법적으로 분리시키는 비중도적인 양극단의 수행론으로 인해 수행자들의 회의와 갈등과 방황이 확대 심화되고 있다. 이에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교학불교와 참선불교, 앎과 실천, 수행과 일상의 삶, 수행과 깨달음, 자리행과 이타행, 개인 수행과 현실 참여, 자기 완성과 사회 완성이 연기 중도적으로 통일되는 길을 열어가고자 본래부처와 대승불교 수행론을 모색해보려고 한다.
우선 불교가 어떤 가르침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불교란 고통에 찬 삶을 살아야 하는 나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내 생명은 어떤 존재인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인류의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화두에 대해 해답을 제시하는 가르침이다. 그 해답을 초기에는 유아독존, 화엄에서는 본래부처, 선가에선 본래면목이라고 했다. 잘 알다시피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은 본래부처론이다. 따라서 본래부처라는 개념에 담긴 의미를 좀 더 세밀하게 따져보는 것이 좋겠다.
본래부처에 담긴 뜻을 간추려 보면 다섯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다.
첫째는 천하에 제일 귀한 존재임을 뜻한다. 온 우주 그 어디, 그 무엇도 내 생명보다 더 귀한 존재는 있지 않다. 천하의 그 무엇으로도 비교하거나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가치의 존재인 것이다.
둘째는 천하에 제일 주체적인 존재임을 뜻한다. 그 누구, 그 무엇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죽으나 사나 자기 삶은 자기 스스로 살아야 하는 매우 주체적인 존재인 것이다.
셋째는 천하에 제일 완성된 존재임을 뜻한다. 그 누구, 그 무엇도 자기 필요대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는데, 생명의 존재인 나는 자유자재로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대단히 완성된 존재인 것이다.
넷째는 천하에 제일 창조적인 존재임을 뜻한다. 자신의 행위대로 그 삶이 창조된다. 스스로 중생의 삶을 살면 중생의 삶이 창조되고 부처의 삶을 살면 부처의 삶을 이루는 매우 창조적인 존재인 것이다.
다섯째는 천하에 제일 고마운 존재임을 뜻한다. 연꽃은 연못에 의지하여 생명을 갖고, 연못은 연꽃에 의지하여 생명을 갖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의 의지처요, 뿌리요 모체이다. 마찬가지로 온 우주의 낱낱 존재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을 낳고 길러주는 너무나 고마운 존재인 것이다.
전체적으로 정리하면 생명 자체는 천하에 제일 귀중하고 거룩하고 신비한 존재이다. 세상에 생명을 낳고 살게 하는 일보다 더 거룩한 일, 신비한 일, 위대한 일, 중요한 일, 불가사의한 일은 없다. 매 순간순간 우주의 낱낱 존재들이 사랑의 법칙에 따라 서로가 서로의 생명을 낳고 살게 하는 신비한 기적, 불가사의한 기적을 일으키고 있다. 얼마나 대단한가. 우리 모두는 존재 자체가 신비의 존재, 불가사의의 존재, 기적의 존재이며 동시에 매 순간 순간 신비 속에, 기적 속에, 불가사의 속에 살고 있다. 또는 언제 어디에서나 항상 신비, 기적, 불가사의를 일으키는 주체로 살고 있는 것이다.
매일매일 만나고 있는 존재 하나하나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그대와 나의 생명을 낳고 길러주는 너무나 귀하고 고맙고 대단한 존재들인데 어찌 지극히 모시고 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견문각지에 만나는 존재 그 누구나 할 것 없이 본래부처이므로 지극히 잘 모시고 섬겨야 할 일이다. 바로 대자대비의 보살행이다. 당연하고 좋은 일이다. 너무나 본래부처다운 행주좌와라고 하겠다. 스스로 천하에 거룩하기 그지없는 원만구족한 본래부처인데 어찌 무한한 자부심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스스로 그 무엇 하나 부러울 것도 부족할 것도 없는 원만구족한 본래부처이므로 행주좌와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져야 마땅할 일이다. 바로 대무심행이다. 당연하고 멋진 일이다. 너무나 본래부처다운 행주좌와라고 하겠다.

본래부처론으로 보면 수행해서 다시 부처되려고 하는 이분법적인 어리석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이미 본래부처인데 다시 부처되려는 어리석은 짓을 해야 할 까닭이 없다. 절집에는 자신 또는 존재 자체가 부처임을 모르고 특별히 따로 부처를 찾아 천하를 헤매고 다니는 무지한 중생을 비유해서 “소를 타고 있으면서 다시 소를 찾는 사람과 같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본래부처인데 어디에 가서 다시 부처를 찾을 것이며, 본래부처인데 수행한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다시 부처가 이루어지겠는가? 한갓 부질없는 헛수고요 전도몽상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본래부처임을 알고 믿고 지금 당장 부처로 사는 것이다.

그럼 본래부처로 사는 삶은 어떤 것일까? 초기에는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我當安之)라고 했고 화엄불교에서는 동체대비(同體大悲)라고 했고, 선가에서는 행역선 좌역선(行亦禪坐亦禪) 또는 대무심(大無心)이라고 했다. 풀어 보면 “뭇 생명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내가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겠다.”, “뭇 생명들을 내 생명처럼 모시고 섬기는 삶에 나의 전 존재를 바치겠다.”, “움직일 때에도 대자비의 본래부처로 움직이고, 앉을 때에도 대자비의 본래부처로 앉는 대무심행의 삶을 사는데 전심전력하겠다.”이다. 그 가운데에서 본래부처행인 보현 십대 행원을 간단히 간추려 함께 할 필요가 있겠다. 다만 보현행원을 보다 더 역동적으로 접근하도록 하기 위해 원래 사용해온 부처, 여래라는 인격적 개념을 여기에서는 인드라망 존재라는 개념으로 바꾸어서 재구성해본다.

첫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께 예경 올립니다.
둘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를 찬탄합니다.
셋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께 공양 올립니다.
넷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에 대한 무례의 업장을 참회합니다.
다섯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의 공덕을 함께 기뻐합니다.
여섯째, 모든 인드라망 법의 바퀴 굴리기를 간청합니다.
일곱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들이 온전히 머물기를 청합니다.
여덟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를 따라 배웁니다.
아홉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에 수순합니다.
열 번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에 회향합니다.

조금 더 첨언한다면 본래부처인데 괜히 다시 부처를 구하고 찾고 이루려는 헛고생하지 말고 지금 당장 본래부처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온 존재를 다 바쳐 보현행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본래부처로 사는 참 보살행이요 참 정진이다. 그야말로 행역선 좌역선(行亦禪坐亦禪)이다. 본래부처이니 지금 바로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할 때까지 죽을 힘을 다해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본래부처답게 살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대승불교 수행론의 진면목이 이러함을 분명하게 직시할 일이다.

4) 하나의 길로 만나는 대승불교(본래부처)와 초기불교 수행론(팔정도)

대승불교 수행론의 기본은 본래부처와 동체대비행이다. 대승불교 수행자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과 길의 기본은 바로 본래부처와 보현행이다. 본래부처로 사는 것을 화엄에서는 보현행이라 했고 선가에서는 대무심행이라 했다.
부처님께서 가르쳐준 초기불교 수행론의 기본은 사성제 팔정도이다. 내용을 단순화시켜보면 직면한 일상의 삶을 법의 정신에 맞게 마음쓰고 말하고 행동하고 살면 그 자체가 해탈이요 열반의 삶이라는 가르침이다.
서두에 이야기 했던대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교학불교와 참선불교, 수행과 일상의 삶 등이 하나의 불교 수행으로 통일되는 길을 열어가는 차원에서 본래부처와 팔정도를 접목시켜 보려고 한다.
본래부처와 동체대비행에 대해서는 대승불교 수행론에서 이미 설명했으므로 여기에서는 팔정도에 대해서만 설명을 하겠다. 팔정도가 특별하고 여러 가지 어렵게 보이지만 내용을 사실적으로 간추려보면 오히려 매우 평범하고 현실적이다. 그러니까 팔정도라는 것이 다른게 아니고 바로 자신의 삼업활동을 법과 교법에 맞게 하라는 것이다. 즉 지금 당장 자신이 법에 맞게 마음을 쓰고 법에 맞게 말을 하고 법에 맞게 행동을 하고 사는 것이 팔정도요 초기불교의 기본수행이라는 의미이다. 같은 맥락에서 초기불교 시대에 사용해 온 법이라는 논리적 개념을 대승불교 시대에 사용해 온 본래부처라는 인격적 개념으로 바꾸어 본래부처와 팔정도 즉 본래부처와 삼업활동의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첫째가 정견(正見)이다. 지금 직면한 존재의 실상, 법의 실상인 본래부처를 사실대로 보고 이해하는 견해가 바로 정견이다. 정견이 그대로 부처의 견해이다. 대부분 정견을 거친 다음 더욱 향상 발전해서 부처의 견해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정견 자체가 부처의 견해이다. 그 밖에 부처의 견해가 따로 있지 않다. 만일 정견 말고 부처의 견해가 따로 있다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전도몽상의 견해일 뿐이다. 수행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지금 여기 현장의 일상적 삶에서 매 순간순간마다 직면한 존재의 실상인 본래부처를 사실대로 보고 이해하는 견해를 바르게 갈고 다듬고 적용시켜 실천하는 것이 정견 수행이요 깨달음의 수행인 것이다.

둘째는 정사유(正思惟)이다. 정견의 경우처럼 본래부처를 사실대로 거듭 사유 음미하는 것이 바로 정사유요, 그대로 부처의 사유이다.

셋째는 정어(正語)이다. 마찬가지로 본래부처답게 말하는 것, 즉 여어(如語) 실어(實語) 불이어(不異語) 불광어자(不誑語者)로 사는 것이 바로 정어요, 그대로 부처의 정어이다.

넷째는 정업(正業)이다. 본래부처답게 행동하는 것이 바로 정업이요, 그대로 부처의 행위이다.

다섯째는 정명(正命)이다. 본래부처답게 의식주 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정명이요, 그대로 부처의 생활이다.

여섯째는 정정진(正精進)이다. 본래부처답게 살려고 줄기차게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정정진이요, 그대로 부처의 정정진이다.
일곱째는 정념(正念)이다. 본래부처임을 항상 잊지 않고 분명하게 알아차림이 바로 정념이요, 그대로 부처의 정념이다.

여덟째는 정정(正定)이다. 본래부처에 대한 이해와 확신이 언제나 흔들림 없이 확고부동함이 바로 정정이요, 그대로 부처의 정정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본래부처의 삶인 팔정도를 더 단순화시키면 한 마디로 칠불통게(七佛通偈)의 내용이 전부라고 해도 괜찮다고 본다. “죽을 힘을 다해 나쁜 짓 하지 않고, 지극정성을 다해 좋은 일을 실천한다. 그리고 나쁜 일 하지 않고 좋은 일을 하는 그 마음을 오염되지 않고 청정하게 하는 것, 그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불교 수행론이 천 가지 만 가지 같지만 실상은 어떤 불교 수행론도 칠불통게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칠불통게 내용대로 일상의 삶을 가꾸어간다면 그 삶이 본래부처의 삶이다. 그 삶이 행주좌와에 온전히 젖어들어 무르익을 경우 그것을 완성된 깨달음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거듭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본래부처가 있어야 할 곳과 때는 언제, 어디일까? 바로 지금 여기 현장이다. 본래부처가 행동하고 살아야 할 곳과 대상은 누구일까? 바로 두 발을 딛고 있는 그 자리요, 만나고 있는 그 사람이다. 따라서 현장이 도량이요, 만나는 사람사람이 본래부처이므로 매 순간, 매 상황마다 만나는 그 사람을 본래부처로 잘 모시고 섬기는 것이 참된 수행이요 본래부처다운 행동이다. 팔정도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하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교학불교와 참선불교, 수행과 일상의 삶이 저절로 하나의 길로 통일된다.

서로 분리시키고 서로 다르다고 우열을 다투어야 할 까닭이 어디에도 있지 않다. 중생의 병을 치유하는데 적절한 처방이라면 그 이름이 초기불교면 어떻고 대승불교면 어떤가. 불교면 어떻고 기독교면 어떤가? 참선불교라고 특별대접하고 교학불교라고 푸대접하는 것이 과연 불교적이겠는가. 수행 따로, 일상의 삶 따로라면 그것이 선방에 있든 법당에 있든, 산중에 있든 도심에 있든 참된 불교 수행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직하게 물어보고 겸손하게 돌아볼 일이다.


3. 맺음글


생명 평화 운동 진영에서 사용하는 언어, 대승불교 수행론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서로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보면 ‘우주의 존재 법칙인 보편적 진리 즉 사랑의 법칙에 따라 살면 고통으로부터 해탈한다. 또는 행복한 삶이 이루어진다. 사랑의 법칙에 따라 가정과 사회를 가꾸고 운영하면 화목한 가정, 평화로운 세상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므로 굳이 결론짓는다면 대승불교 수행론을 현대화, 대중화, 일상화 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생명 평화 운동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한국 불교가 자신의 존재 의미를 빛나게 하고자 한다면 하루 빨리 적극적으로 나서서 신대승불교운동으로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 생명 평화 운동을 펼쳐야 마땅하다고 본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