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04

알라딘: 지속가능한 나이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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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나이듦 - 노년의 질병,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정희원 (지은이)두리반202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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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초고령 사회를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 사회가 알아야 할 노화와 노쇠, 그리고 나이듦에 대한 이야기다. 노화와 노쇠의 정의부터, 노화가 일어나는 생물학적 메커니즘, 그리고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노화를 늦추는 방법들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노년내과 의사이면서 동시에 생물학을 공부한 이학박사인 지은이가 연구와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노년기 질병의 특성과 치료 방법,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노인의학적 문제들, 그리고 공동체로서의 우리 사회가 풀어가야 할 노인 문제들까지 짚어보며, ‘나이듦’이 저주가 아닌 축복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제언들을 살펴본다.


목차


프롤로그 노인,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1부 시간: 노년을 맞이한다는 것
01 노화란 무엇인가
02 노후 준비는 미래를 위한 장기투자
03 달콤한 것이 이로울 가능성은 적다
04 평균수명은 계속 늘어날까?
05 노화를 지연하는 메커니즘
06 지속가능한 3차원 절식
07 변동성,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08 채울 것과 비울 것
09 인생의 포트폴리오

2부 질병: 노년의 질병,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01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까?
02 만성질환은 대개 노화 축적의 결과다
03 노년기 다약제 사용의 문제
04 오컴의 면도날과 히캄의 격언
05 질병만 보아서는 안 되는 노년의 입원
06 AI가 의사를 대체할 수 있을까?
07 노쇠를 되돌릴 수 있을까?
08 신체적 노쇠를 방어하는 다섯 가지 요소
09 노쇠의 끝과 연명 의료

3부 사회: 초고령 사회의 지속가능한 미래
01 누가 노인일까?
02 스냅샷의 오류
03 중위 연령과 N포세대
04 인구가 줄면 집이 남을까?
05 고령화 사회와 육류의 미래
06 돌봄이 필요해지는 노년
07 노년 의료 서비스 체계에 명확한 선을 그을 순 없다
08 노인과 연령주의

에필로그 지속가능한 나이듦에 대하여
접기


책속에서


한편으로는 노화를 질병, 치료 대상으로 간주하고 암이나 감염병처럼 치료 방법을 개발하려고 한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기 위해 노력한 지 2,000년이 넘게 흐른 지금까지 아무도 성공한 사례가 없지만, 그런 방법이 개발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주도적 유전자 변이에 의해 발생하는 일부 암과는 달리, 사람의 노화는 여러 장기와 조직의 구조, 기능 이상이 오랜 시간 동안 섞이고 상호작용한 최종 결과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어떤 생물학적 경로에 개입하는 한 가지 약물이 ‘이미 노화의 결과물인 노쇠가 나타난 사람’에게서 눈부신 효과를 보일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수십 년간 동물과 사람을 통해 연구된 결과들이 이를 증명한다. 오히려 많은 연구들을 종합하면 노화의 속도는 개인이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조절이 가능하다. 그다지 비싼 돈을 들이지 않아도, 또 뼈를 깎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말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접기
P. 136~138 의과대학에서는 질병을 중심으로 공부를 하고, 그 질병의 증상이나 징후, 검사 패턴이 어떤지를 주로 배운다. 반면에 환자는 불편함을 가지고 병원에 온다. 거꾸로다. 실제 진료에서 환자의 불편함에서 시작해 문제를 푸는 과정은 주로 전공의를 하면서 학습하게 된다. 전공의 수련 과정은 이상적으로는 아기들이 손을 이리저리 뻗어보면서 세상을 배우는 과정인 팅커링tinkering과 비슷하다. 지도전문의가 책임을 지고 안전망을 유지해주면서, 전공의는 여러 가이드라인이나 교과서에 근거해서 어느 정도 스스로 의사결정을 시도한다. 전공의는 스스로 내린 다양한 의사결정에 대해 지도전문의와의 회진을 통해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으로 피드백을 받거나 또는 조금 더 공부해야 할 학습 목표를 제공받게 된다. 윌리엄 오슬러 같은 19세기의 대가들이 미국의 존스홉킨스 대학을 시작으로 이런 도제식 교육 방법을 확립했고, 지금은 전 세계의 전공의들이 비슷한 방법으로 수련하고 있다. 이런 수련 끝에 의사들의 머릿속에는 어떤 사고 과정의 컴퓨터 회로가 형성되는데, 환자가 가지고 온 문제를 풀어나가는 이런 생각의 과정을 행동경제학적 방법을 차용해 재미있게 기술한 책이 제롬 그루프먼Jerome Groopman의 《닥터스 씽킹》이다. 요약하자면 의사들은 불확실성 속에 경험에 기반한 휴리스틱heuristics이라고 하는 여러 가지 직관적 어림짐작과 베이지안Bayesian이라고 하는 이성적이고 수치화된 확률 계산을 이용해서 잠정 진단을 수정해나간다.
― <오컴의 면도날과 히캄의 격언> 중에서 접기
P. 149~150 40세 남자인 C는 별다른 지병 없이 비교적 건강하게 살아오다가, 건강검진에서 담낭(쓸개)에 용종이 발견되었다. 담낭 절제술이 필요하다는 권고를 받았고, 종합병원에 입원해 첫째 날 간단한 검사를 받고, 둘째 날 수술을 하고, 셋째 날 통증은 아직 있지만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어 퇴원을 할 수 있었다. …… 그러나 C 씨와 동일한 담낭 절제 수술을 받았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다른 D 할머니의 사례를 보자. C 씨와 D 할머니는 모두 내가 경험한 실제 환자다. 84세 여성인 D 할머니는 집에서 실내 일상생활은 독립적으로 할 수 있었고, 무리하지 않게 집 앞 산책 정도는 해오고 있었다. 그동안 당뇨, 고혈압과 무릎 관절염, 척추관 협착증으로 여러 병원들을 다니고 있었다. 2년에 걸쳐서 담낭염과 담도염으로 항생제 치료를 받았는데 이번에 담낭을 절제하기로 했다.
수술은 잘 됐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할머니는 계속 자려고 하고 먹지 않았다. 앞 장에서 보았던 섬망이 생긴 것이다. 누워서 자기만 하는 할머니 몸에 들어가는 것은 수액과 항생제뿐이었다. 얼마 후 가래도 늘고 열이 나면서 호흡이 가빠지고 산소 수치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폐 사진을 찍어보니 폐를 둘러싸고 있는 흉막 공간에는 물도 찼고, 폐렴도 생겨 있었다. 광범위 항생제가 처방되었고, 할머니는 계속 자기만 했다. 가만히 누워 있다 보니, 엉덩이에는 욕창이 생겼다. 며칠이 지나면서 다행히도 열이 떨어지고, 할머니는 눈을 떠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지만, 이제는 침대에서 일어날 힘이 없었다. 죽을 떠먹여드려도 잘 넘기지를 못했다.
― <질병만 보아서는 안 되는 노년의 입원> 중에서 접기
P. 260~261 사람이 기계가 아니고 생명체라는 점을 놓치면, 간혹 현상을 잘못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한 연구 보고서는, (요양병원과 요양원의) “서비스가 분절되고 중복된 상태에서 제대로 서비스가 연계되지 못한 채 운영되다 보니 요양이 필요한 노인이 요양병원에 입원하고, 의료적 처치가 필요한 노인이 요양시설에 입소하는... 더보기
청량음료나 주스라는 것은 아예 세상에 없는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포도당과 과당 등 단순당은 노화를 지연시키는 기능을 정반대로 끌고 간다. - blessing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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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죽음보다 무서운 늙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은 의사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젊고 건강하고 아름답지 않은 모든 것은 버려질 위기에 처하게 되는 한국 사회에서, 다가오는 고령화 시대는 모두가 애써 외면하는 어두운 미래의 모습이자 인구 소멸의 지름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사려 깊은 노년내과 의사인 지은이는 그의 풍부한 생의학적・인문사회적 지식과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우리의 노년을 감당할 수 있는, 어쩌면 손꼽아 기다릴 수도 있는 ‘지속가능한 미래’로 만들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우리 사회의 분절된 정책과 의료와 인간에 대한 생각들을 통합해서 노화라는 ‘코끼리’를 다룰 수 있게 된다면 말이다.
- 김선영 (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교수)

이 책은 노화 현상에 대한 단편적인 과학 저술서가 아니다. 지은이의 임상적 경험과 과학적 성찰, 그리고 사회적 고민을 엮어 나이듦을 맞이하는 개인과 사회의 편향된 인식을 날카롭게 지목한다. 그리고 문제의 근본을 찾아 담담하게 생각과 정책의 변화를 주문한다. 그래서 이 책은 건강에 관심 있는 일반인, 노화에 입문하는 의사와 과학자, 그리고 정책을 기획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용할 것이다. 모두에게 한정된 시간, 이 책으로 개인과 사회가 더 이상의 시행착오가 없길 바란다.
- 장일영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




저자 및 역자소개
정희원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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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며,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전문의를 취득했다. 의과대학 시절, 호른을 연습하던 중 근육 유지의 중요성을 깨닫고 근감소증에 관심 갖기 시작했다. 이후 내과 실습을 돌며 노인의학에 완전히 매료되었으며, 내과 전공의 시절 노쇠에 대해 연구하다가 공부에 대한 갈증이 생겨 의과학대학원에 들어가 이학박사를 취득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세상에는 한두 가지 법칙에 따라 끼워 맞춰지지 않는 것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사람에게서 노화와 연관된 파라미터들을 모아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일을 연구했으며, 같은 방법을 써서 소규모의 자산 포트폴리오를 설계하기도 했다. 노인의학 학술지 《AGMR》의 부편집장을 맡고 있으며, 문제 풀기를 좋아하나 교조주의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두려워한다. 현재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임상조교수로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당신도 느리게 나이 들 수 있습니다》가 있다. 접기

최근작 : <지속가능한 나이듦 (리커버)>,<당신도 느리게 나이 들 수 있습니다>,<지속가능한 나이듦> … 총 6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모두가 외면해온 고령화 시대, 지속가능한 미래를 꿈꾸다”

의학의 발달과 사회적 자원의 증가로 인해 노년 인구가 급격하게 늘면서 우리나라는 고령 인구 비율이 전체 인구의 20퍼센트 이상인 초고령 사회를 눈앞에 두고 있다. 고령 인구의 증가가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라지만 초고령 사회 진입 속도가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르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특히 저출산 현상과 맞물리면서, 고령 인구의 증가는 미래 세대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처럼 고령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사회에서 ‘노화’, ‘노쇠’, ‘나이듦’이라는 주제는 누구도 들추고 싶지 않은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반드시 공론화되어야 할 주제다. 노년내과 의사인 지은이는 이 책을 통해서 ‘나이듦’에 대한 통시적이며 광범위한 접근을 시도해 우리가 개인적・사회적으로 노인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1부 <시간: 노년을 맞이한다는 것>에서는 생물학적 노화가 어떻게 노년의 모습을 만드는지, 그리고 과학이 알려준 노화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을지를 이야기한다. 노화의 정의나 노쇠의 메커니즘을 다루는 것뿐 아니라 왜 노화가 발생하며 어떻게 하면 노화를 늦출 수 있을지에 대한 실용적인 팁도 제공한다. 또한 TV나 언론에서 광고하는 항노화 건강식품들의 허구성을 지적하며, 노화를 방지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더 먹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불필요하고 좋지 않은 것들을 덜어내는 과정임을 알려준다.
2부 <질병: 노년의 질병,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에서는 노화의 결과이기도 한 노년기 질병이 가지는 특징들과 우리나라에서 특히 간과되고 있는 여러 노인의학적 문제들에 대해 짚어본다. 특히 노년내과 의사로서 직접 진료하고 경험한 노인병 사례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에서 주치의 제도가 정착되지 못해 다수의 병을 안고 살아가는 노인들이 각각 다른 병원에서 다른 담당의를 만나야 하는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하고, 여러 약을 함께 복용하는 데서 오는 노년기 다약제 사용 문제나 노인의 경우 개개인의 건강 상태에 따라 일괄적인 처방이 불가능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짚어본다.
3부 <사회: 초고령 사회의 지속가능한 미래>에서는 범위를 좀 더 넓혀 노화와 고령화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문제를 복합적으로 다룬다. 구체적으로 우리 사회가 노인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노인 복지 시스템에는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그리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우리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등 사회적 이슈와 해결 방안을 살펴본다.

“나이듦의 문제, 외면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

지은이는 서울아산병원의 노년내과 의사다. 일반외과, 응급의학과, 소화기내과, 성형외과, 정형외과, 산부인과 등 수많은 과가 있지만 노년내과는 왠지 익숙하지 않다. 그만큼 노인의학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생소한 분야에 속하며, 노년내과를 갖추고 있는 병원도 드물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2017년에 이미 고령 사회에 진입했고, 2026년에는 초고령 사회에 이르게 되며, 2030년대가 되면 전 세계에서 가장 기대수명이 긴 나라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노인의학은 점차 그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와 경제 수준이 비슷하거나, 고령화를 앞서갔던 나라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노인의학을 육성해왔음에도 우리나라는 노인의학에 대한 교육이 산발적일 뿐 아니라 교육의 양과 질이 선진국에 비해 현저히 낮다. 그러다 보니 노인의 특성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건강하고 젊은 사람에 준하는 처방을 하기 일쑤다. 이러한 처방은 드물지 않게 문제를 일으킨다.
예를 들어 노화가 진행된 노인에게 부작용이 생기는 약을 처방해, 건강하던 노인이 순식간에 미음 이외에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고, 젊은이들은 사나흘이면 퇴원할 수 있는 담낭 절제 수술을 한 할머니가 기존 체력과 근력 부족 때문에 수술 이후 몇 주가 되도록 퇴원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노쇠, 인지기능 저하, 다중이환, 근감소증 등 노년기 주로 나타나는 질병과 문제들에 대해 관심이 부족하다 보면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로 인해 큰 고통을 겪게 될 수도 있다. 이에 지은이는 어르신들뿐 아니라 젊은이들도 노인성 질병과 사회적 노인 문제 등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개인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좀 더 세밀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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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를 보여주면서 노화/노쇠/노년/나이듦에 대한 접근과 진료를 하는 경험을 들려주는 것은 좋았지만, 기대를 많이 해서 그런지 그만큼 미치지 못했던 같다. 하지만 이 책이 한국에서 노인학이 굳건하게 자리 잡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응원을 보낸다.
라로 2022-11-06 공감 (2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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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와 나이듦에 대해 폭넓게 조망해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추천합니다.
! 2021-11-29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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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노년 내과 의사가 친절하게 풀어서 알려주는 노쇠, 노화, 나이듦의 이야기.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하여 정책방향까지 차분하게 제시한다. 이 책을 3주만에 작성했다는 사실에 더 깜짝 놀랐던 후기.
돌맨 2023-01-09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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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노화라는 코끼리를 위한 사회계약



“나이가 들면 다 장애인이 된다”



지난 21대 총선에서 미래통합당 관악 갑 후보로 출마한 김대호 씨는 지역 장애인 체육시설 건립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함으로써, 사실상 정치인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흥미로운 점은 김대호 씨의 발언이 “장애인 차별”이 아닌, “노인비하”로 보도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다 장애인이 된다는 이야기를 일종의 모욕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두려움을 보여준다. 점점 침침해지는 눈, 나도 모르게 절게 되는 다리, 예전 같지 않은 소화력 등 나이가 들수록 달라지는 몸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장애인”이라는 말에 갑작스레 폭발한 건 아닐까. 의도한 것 같지는 않지만, 김대호 씨는 어쨌거나 노화라는 “방 안의 코끼리”를 모두에게 드러낸 셈이다.



물론 코끼리의 존재를 인지한다 해서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오히려 그 덩치에 놀라 호들갑을 떨며 잘못된 대책을 내놓거나, 최악의 경우 책임소재를 두고 옥신각신하다 자멸할 수도 있다. 그 점에서 노년내과 의사인 정희원이 쓴 『지속가능한 나이듦』은 흔치않은 책이다. 코끼리를 못 본 체 하지도, 그렇다고 그 위험을 과도하게 부풀리지도 않는다. 담담하고 차분하게, 지은이는 어떻게 하면 노화라는 코끼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사회에서 개인에 이르기까지, 노인과 비노인을 아우르며 각 층위에 맞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지은이의 탁월함과 진지함에 여러 번 놀라며 책을 읽었다.



책은 노화를 최대한 늦출 수 있는 방법을 다룬 1부와 노년의 질병에 대한 2부, 사회 차원의 대안을 고민하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목차를 그대로 따라가면 재미없으니 순서를 뒤집어 보자. 지은이는 이른바 “초고령사회”에 대한 일각의 두려움은 상당히 과장되었다고 여긴다. 오늘날 언론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폐지 줍는 노인들과, 앞으로 노인이 될 이들은 꽤나 이질적인 집단이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현재의 기준에 따르면 머지않아 노인으로 분류될 1960년대 생은 현 시점의 노인인 1930~40년대 생과 달리 비교적 건강하고, 아직 일할 능력이 있으며,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췄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앞으로 노인인구가 늘어난다 해서 정확히 이에 비례해 부담이 커진다는 건 터무니없는 진단이다.



오히려 문제는 65세 이상을 노인으로 분류하는 현재의 기준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충분히 일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람을 65세가 넘었다는 이유로 은퇴시키고, 연금까지 주어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은이는 무려 70년 동안이나 바뀌지 않고 있는 노인의 기준을 조금씩 뒤로 밀어내서, 최종적으로 77세 정도로 상향하자고 제안한다. 물론 이에 따를 여러 혼란과 저항을 알고 있기에, 지은이는 앞으로 15년간 1년에 4개월씩 노인 기준을 상향하고, 그 뒤에는 28년간 1년에 3개월씩 상향하는 대안을 제시한다. 만약 2022년부터 이렇게 상향을 시작하면 2065년에는 노인 기준 연령이 77세에 도달하므로, 국민연금 고갈과 과도한 총부양비 문제도 어느 정도 완화하면서 사회적 저항 역시 최소화할 수 있다.



노인의 기준이 뒤로 밀리면, ‘젊은이’의 기준 역시 똑같이 밀린다. 1950~60년대에 젊은 청년이 장군도 되고 건설회장 사장이 될 수 있었던 건 당시 중위 연령이 19세 정도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당시 20~30대는 오늘날 40대와 비슷했다는 것이다. 1972년생인 유재석의 현재 나이는 1960년생인 이경규가 《남자의 자격》에 출연하던 때와 같지만, 어느 누구도 그때의 이경규와 지금의 유재석이 ‘똑같이’ 늙었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지은이에 따르면, 1981년생은 만으로 쉰이 되는 2031년에야 1967년생이 만으로 서른이었던 1997년에 누린 사회적 지위에 이를 수 있다. 앞 세대가 똘똘 뭉쳐 기득권을 수호하고 사다리를 걷어차 버려서가 아니라, 생애주기가 전체적으로 길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맞춰 사회시스템을 전체적으로 재정비하고, 개인 역시 더 길어진 삶에 적응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물론 과거에 비해 사람들이 더 오래, 건강하게 살게 되었다 해도 노화를 피해갈 수는 없다. 또 앞으로 노인이 될 60년대 생이야 그렇다 쳐도 이미 노인인 30~40년대 생의 질병과 장애, 빈곤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노화라는 ‘정해진 미래’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지은이는 “살던 곳에서 나이 들기”라는 현재의 재가 중심 서비스에 의문을 던진다. 서비스 제공자가 여러 곳을 순회해야 하는 만큼 효율이 떨어지고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돌봄은 저밀도의 재가 중심이 아니라 고밀도의 시설 중심이어야 한다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아마 눈 밝은 독자라면 마강래의 『지방도시 살생부』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원격의료의 도입 역시 고려해봄직하다.



나아가, 지은이는 보건복지부를 보건부와 복지부로 쪼개려는 일각의 움직임에도 단호하게 반대한다. 그도 그럴 것이 특히 노인에게 질병과 장애, 돌봄은 복잡하게 얽혀있어 어느 하나만 떼어내기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노화가 진행되면 기력이 쇠하고, 병에 걸리기도 훨씬 쉬워지며, 다른 사람의 돌봄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앞으로 고령화에 따른 노인인구의 증가가 한국사회의 중요한 과제가 되리라는 점이 무척이나 자명한 만큼, 보다 통합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라도 보건과 복지의 긴밀한 연계는 꼭 필요하다.



노인 문제를 고민할 때의 이러한 ‘복잡성’은 노화에 따른 질병을 다룰 때도 그대로 적용된다. 적어도 노년의 질병에 대해서만큼은, 해결책은 간단명료할수록 좋다는 “오컴의 면도날”이 제 역할을 못한다. 나이를 먹어가며 얻게 된 여러 지병과 더 이상 제 기능을 못하는 장기가 상호작용하며 일종의 복잡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무려 1년 넘게 소화 장애와 파킨슨병 증상이 멈추지 않던 70대 후반 A씨의 고통이 고작 진통소염제 한 알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진통소염제와 함께 처방한 소화제가 신경계 부작용을 일으키고, 이로 인해 처방받은 파킨슨 약이 구역과 구토를 일으키고, 이것이 다시 소화제 처방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일으킨 것이다.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등산과 골프를 즐길 만큼 건강하던 A씨는, 다른 사람의 부축 없이는 걷지도 못하고, 흰죽과 미음밖에는 먹지 못할 정도로 약해지고 말았다.



주치의 제도가 없는 상황에서 급격히 의료자원이 풍부해지며 환자가 곧바로 전문의를 만날 수 있게 된 한국의 ‘독특한’ 의료시스템 역시 A씨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구토를 하면 내과 의사를 찾고, 손발이 떨리면 신경과 의사를 찾는 식으로 질병 중심의 진료를 받은 결과, 오히려 약물 사이의 예상치 못한 상호작용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지은이는 A씨가 지난 1년간 복용했던 약들의 ‘자서전’을 꼼꼼히 살핀 결과 복잡계를 건드린 원인을 찾을 수 있었고, A씨는 밥과 김치를 먹고 지팡이 없이 병원에 걸어올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었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노인의학은 얽히고설킨 이어폰 줄을 풀어가는 일과 비슷한, 일종의 역추적 문제풀이인 셈이다.



이렇듯 노년의 질병은 원인을 찾기도, 상태를 호전시키기도 무척이나 어렵다. 하지만 지은이는 노화에 대응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잘 먹고, 꾸준히 운동하고, 스트레스를 관리하면 노화를 (아예 막을 순 없지만) 최대한 지연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본격적으로 노화에 따른 변화가 진행되는 50대 이전에 이를 실행에 옮길 필요가 있다. 마치 적금을 드는 것처럼 매일 매일의 조그만 실천이 노화의 그래프를 최대한 길고 완만하게 ‘연착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단언한다, 기술이 발전해 노화를 멈추고 영원한 젊음을 누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물학의 발전이 인류에게 무병장수를 선물하리라는 희망은, 마치 컴퓨터 게임을 잘 하기 위해 반도체 공학을 공부하는 것과 같은 전형적인 “생목의 오류”다. 심지어 지은이는 어린 시절에는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나이가 든 뒤에는 우수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된 1960년대 생에 비해 어릴 때부터 전자기기와 불량식품에 둘러싸여 생활한 1980~90년대 생의 평균수명이 더 낮을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마저 내놓는다. 한때 트위터에서 유행했던 글처럼, 우리는 고장 난 스마트폰 같은 몸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할 운명이다.



이 운명은, 아무리 영양제와 건강식품을 챙겨먹는다고 한들 절대 바꿀 수 없다. 오히려 역효과만 낼 뿐이다. 방법은 단 하나, 절식하고, 운동하고,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길 뿐이다. 특히 절식! 설탕은 금물이다. 탄수화물도 줄일수록 좋다. 인간은 좀 적게 먹는다고, 식사횟수 좀 줄인다고 크게 잘못되지 않는다. 오히려 건강해진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어차피 고기를 소화하기 힘들어하는 노인인구가 늘어난다면 대체육 시장이 발달하고 소고기는 최상류층의 사치품이 될 테니 미리 적응한다는 마음으로 지금부터 고기를 줄이면 된다.



당연하겠지만, 책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는다. 아니, 동의하지 못한다가 정확한 표현이겠다. 노화를 최대한 늦추기 위한 로드맵이 너무나 따라가기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솔직히 이건 뭐 평생 수도승처럼 살라는 얘긴가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어야하는 이유는 그저 노화라는 ‘불편한 진실’을 폭로하는데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출간된 전현우의 『거대도시 서울 철도』와 마찬가지로, 『지속가능한 나이듦』 역시 노화에 대한 새로운 ‘사회계약’을 제안한다. 노인의 기준은 몇 살로 잡을 것이며 새로운 기준에 따라 개인과 사회의 라이프 사이클은 어떻게 재조정될 것인지, 노인에 대한 의료와 복지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며 이를 위해 어떠한 물적, 제도적 조건이 필요한지, 노화를 최대한 늦추기 위한 삶의 방식은 무엇인지까지, 노화에 대해 논의하고 합의할 사항이 이렇게나 많다. 노화라는 코끼리에 어찌 대처할지 몰라 쩔쩔매지 않고 보다 나은 사회계약을 고민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첫 단추로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이 읽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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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찬근 2021-12-11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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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노화란 어떤 의미일까



나이드는게 무섭고 늙어가는게 싫어서

나이들기 전에 죽어버릴까?하는 무서운 생각도 했었다.10대 시절에.

대체 나이들고 늙어가는게 한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했다.

사실 지금도 이 책을 읽고 난 지금도 머리와는 다르게 늙어가는 내 신체가 두렵다.

아플것이고 신체 능력도 떨어질 것이고 얼굴엔 주름이 가득할 것이고 . .

하지만 가장 두려운 것은 치매같은 기억력 감퇴 관련 질환으로 내가 누군지도 기억하지 못하게 될까 두렵다.

이 책을 쓰신 정희원 교수님은 우리에게 생소한 노년내과에서 겪은 임상과

노화의 의학적 의미,사회적인 노화,그리고 우리가 잘 구분하지 못하는 노화와 노쇠에 관한 이야기,

의학적으로 나이먹었으나 시간을 거슬러 사는 사람이 많아진 현재 노인들에 관한 이야기 등등

굉장히 다양한 관점에서 나이듦에 관해 설명해주고 고찰하고 있다.

단순히 두루뭉술하게 알고 있는 노화와 노쇠에 관해 의학적인 개념을 곁들어 설명해주셔서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다.

누구에게도 공평하게(?) 찾아오는 노화라는 신체 현상에 대해

더 이상 막연히 두려워하고 터부시해선 안될것 같다.

이유는

내가 이미 노화를 맞이하고 있어서,

이왕 나이들어갈 거 즐겁게 맞아야 앞으로 남은 삶을 행복하게 보낼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이 책을 쓰신 정희원 선생님도

우리 모두 다 나이들어간다.

신생아보다 노인의 수가 더 많아진 지금

우리가 나이듦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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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징어 2021-12-13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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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조상숭배의 나라 | 중앙일보

[송호근 칼럼] 조상숭배의 나라 | 중앙일보

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조상숭배의 나라
중앙일보
업데이트 2010.09.28

지난 추석 명절을 잘 쇠셨는지, 부모와 일가친척은 평안하신지, 조상은 만나뵈었는지, 그리고 청명해진 가을밤 그윽한 달빛을 맞으셨는지. 우리 정서엔 꼭 들어맞는 이런 인사의 뒤편에는 앞앞이 말 못하는 갑갑증과 파열음이 꿈틀대고 있다. 부모, 친지와의 만남이 항상 저 환한 달빛과 같으면 좋으련만, 가족사엔 언제나 기대와 원망들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어 서로의 감정선을 건드리지 않으려면 남다른 노력이 필요한 게 명절이다. 말이 명절(名節)이지 수백 년 대물림된 행사를 치러야 하는 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흐뭇한 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 한국만큼 명절이 제례(祭禮), 특히 조상 제사로 일관되는 나라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말 개화기 선교사들은 아름다운 자연과 미몽의 백성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은자의 나라’로 뭉뚱그려 묘사했는데, 세계에서 유례없는 조상숭배 열기만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유교 문명의 종주국인 중국은 물론 주변국인 일본과 월남에서도 조상 제사를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교문화권, 아니 세계에서 한국이 조상 제사를 지내는 유일한 나라가 된 까닭, 오늘날까지도 후손들이 위패 앞에 은덕을 비는 나라가 된 까닭을 정작 우리도 잘 알지 못한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풍경인가라고 어른들은 짐짓 위엄스러운 표정을 짓겠지만, 남녀 간 불합리한 역할, 가족 간 불공평한 노력봉사와 비용조달에 가슴앓이하고 시간을 쪼개 품앗이해야 하는 번거로움에 소소한 갈등이 끊이지 않는 게 요즘의 추세다. 아마 귀경길에서 언쟁깨나 했을 부부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 소중한 시간을 의례에 쏟아붓고 허둥지둥 돌아설 때 그런 회의가 들지 않겠는가. 우리는 왜 이렇게 유별난 ‘조상숭배의 나라’가 되었을까?

1894년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 여사는 오백 년 도읍지 한양에 종교시설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종교 없는 제국은 없다는 문명사적 시선으로 보면, 사찰은커녕 공자 사당 하나 없는 유교국가의 수도가 이상했을 것이다. 대신 그녀는 무속과 민간신앙에 푹 빠져 있는 조선인들을 목격했다. 콜레라가 습격한 마을엔 고양이 그림이 붙어 있을 정도였다. 가는 곳마다 무당이 있었고, 으슥한 곳마다 귀신이 살았다. 귀신 종류도 다양해 그녀는 36가지 귀신 이름을 세다가 그만두었다. 이 과도한 무속과 민간신앙을 조상제례로 전격 대치한 계기가 바로 조선 건국이다. 고려 말까지도 명절은 하늘과 자연을 경외하는 집단축제였다.

불교에서 유교로 전환한 조선은 민간신앙을 일소할 방법을 주자학에서 찾았다. 제천(祭天)과 제사(祭祀)가 그것이다. 경복궁 우측에 사직단을 지어 하늘신과 토지신에게 제례를 올리고, 좌측에 종묘를 지어 제사의 기원을 마련했다. 15세기 말 성종은 아예 『경국대전』을 편찬해 국법으로 반포했다. 예제(禮制)에 이런 조항이 있다. ‘6품 이상 문관이나 무관은 3대까지 제사 지내고 7품 이하는 2대까지, 일반 서민은 부모에게만 제사 지낸다.’ 잡신을 섬기는 자는 처벌되었다. 빈곤한 서민은 위패를 모시고, 명절 땐 두어 가지 음식으로 족했다. 굶는 판에 더 차릴 것도 없었다. 그러던 것이 양반이 향촌을 장악해 가는 과정에서 봉제사는 충군효친의 규율 수단이 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엄격한 격식과 요란한 상차림이 강제됐다. 조상숭배가 통치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놓이자 봉제사는 곧 가문의 위세경쟁으로 변했다.


유교는 내세관이 없는 게 특징이다. ‘조상숭배의 나라’에서 불교와 주술신앙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다. 미국 선교사 헐버트는 『대한제국멸망기』에서 ‘코레아인들은 사회생활에서는 유교에, 사고방식은 불교에 속하며, 곤경에 빠지면 귀신을 믿는다’고 썼다. 21세기 대명천지에 귀신을 믿는 사람은 이제 없어졌고, 외래종교가 유입되자 한국은 다종교사회로 변했다. 그런 와중에 유교는 제천(祭天) 기능을 다른 종교에 넘겨주고 주로 생활의례, 특히 제례(祭禮)로 살아남았다. 명절이라는 축제의 시간을 제사로 종종걸음을 쳐야 하는 ‘조상숭배의 나라’가 된 역사적 배경이다.

이런 내력을 알았다고 해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조상을 기리는 방식은 여럿인데 왜 반드시 상차림 형식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조상숭배가 왜 자기 가문(家門)에만 국한돼야 하는가. 전자는 덮어두고라도 후자는 의미심장하다. 탁월한 학자와 선비, 그리고 민족 영웅과 구국의 정치가들이 가득한 오천 년 역사에서 국민 모두가 사랑하고 존경할 선현들을 기리는 데는 인색했다. 명절마다 천여만 명이 이동하고, 집집마다 족보 하나쯤은 갖춘 세계 유일의 ‘조상숭배의 나라’에서 다 같이 숭배할 조상이 이처럼 없는 것도 너무 특이하지 않은가.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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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2010.10.02 01:58


송호근은 크리스챤이라 생각된다.. 나는 종교를 믿지 않고 유물론적 사고를 가져서 지금의 이런 허례허식적 습관?을 좋아 하지는 않지만 당신처럼 말하는 사람도 좋게 보이지는 않는다. 당신처럼 똑똑하지 못하여 대다수가 바보같다고 생각하는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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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2010.09.28 20:59


역사적으로 지대한 교훈을 주는 인물만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조상을 존경하고 섬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실 때 존경하고 섬기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살아계실 땐 존경하거나 섬기지도 않으면서 죽고 난 후에 존경하는 척 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명절 때 제사지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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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jh1****2010.09.28 16:57


사회학자로서 좋은 지적이다. 보수 논객에게서 쥐소리만 들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는데 고양이 소리도 내는 구나.

유교와 조상숭배

유교와 조상숭배


유교와 조상숭배 문화권 선교    


(예장 노인대학 연합회 회보에서 발췌) 


" 유교의 윤리적 중심이 되는 충효사상은 유교를 하나의 종교로써 대변하게

 하는 조상숭배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유교권 선교는 오랜 선교역사에도 불구하고

 부진하였고, 또 유교권 선교를 위한 전략도 변변치 못한 실정이다. " 


서언 


  유교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은 보통 하나의 종교라기보다는 오히려 인륜과

정치윤리론에 가깝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교의 윤리적 중심이 되는 충효사상

은 유교를 하나의 종교로서 대변하게 하는 조상숭배라는 뚜렷한 종교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유교권 선교는 오랜 선교 역사에도 불구하고 부진하였고, 또 유교권 선교를

위한 전략도 변변치 못한 실정이다. 우리 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에서도

끊임없이 시행해 오던 조상 제사는 유교의 종교적인 행사이고, 그 뿐 아니라

무속문화권에  토착화된 고등종교들과 사이비 이단종파들까지도 거의 예외 없이

시행해온  공통적인 의례이며, 심지어는 카톨릭 신자들과 일부 개신교도까지도

이를  허용하는  실정이다.

  한국의 경우처럼 무교적인 영성과 고등종교들의 범신론으로 가득했던

아시아에서는

 영들의 충돌이나 영분별이 요청되지 않는다. 오히려 유.불.선교 및 힌두교와

그 이단들은 무교적인 다신론과 함께 병행주의 또는 포괄주의적인 형태로서

공존해 왔던 것이다.

  기독교가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다원주의와 혼합주의  문화권에서

만나는 조상숭배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조상숭배 문화권에서 선교사가

 배척을 받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 중국의 예수회선교의 경우처럼 제사를 용납하면

서 관용주의적인 접근을 시도할 것인가? 아니면 루스드라에서의 바울과 바나바처럼

강력하게 우상숭배를 저지하고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주께 돌아오라는(행 14:14-18)

 충돌을 겪을 것인가?

  갈라디아서 1장 6절부터 9절과 고린도전서 9장 19절에서 23절의 바울서신

내용이 나타내는 복음과 문화의 긴장관계는 오늘날 선교현장에서 일어나는 복음의

 유일성과 문화의 다양성 사이의 갈등관계와 대조된다.

  조상숭배 문화권에서 제시된 토착화 신학은 지금까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하나는 조상숭배를 단순한 윤리적인 의례로 보아 허용하자는 입장이다. 조상숭배와의

타협과 충돌을 번복해 왔던 천주교회의 선교역사를 살펴보면, 이 두 입장이

 서로 다른 한쪽 성격을 무시함으로써 현지 선교의 심각한 문제를 기피해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그 해답을 제시해야 할 사명이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 유교의 귀신숭배와 제시원리 


  고대의 의례에 관한 공자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 고전 '예기'(J B )는

백신(FzIw)을 대상으로 붉은 송아지를 잡아서 희생제를 드리는 제의를  기록하고

 있다. {{ footnote }}  백신중에는 일월성신, 사방신, 천지산천, 죽은 사람들의

혼들을 다

포괄하고 있다.

  그들은 또 괴상한 일을 하는 모든 것을 {{ footnote }}  신(Iw)이라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이들은 상제(G M )를 최고신으로 숭배했으며 모든 자연신들은 상제의 군신 내지는

하늘의 현현으로서 숭배했던 것이다. {{ footnote }}  이러한 자연숭배나 상제숭배

및 조상숭배

신앙은 은나라(BC1766~1123)시대의 제사와 정복에 관한 갑골문 16만편을  발견함에

{{ footnote }}

 따라 확실해진 것이다. 그들의 삶은 제의 중심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교문화 속에서 중국과 한국 초기의 카톨릭 선교를 통하여 크게 문제시된

 조상숭배에 대해서 유교와 천주교의 신앙과 교리를 대조, 연구함으로써 선교연구에

  공을 세운,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수원의 카톨릭

신학대학 교수 최기복 신부는, 고대 조상들이 사후에도 하늘에서 상제를 모시고

 살고  있으며, 그들은 후손들이 복과 화를 내린다고 믿었다고 하며 {{ footnote

}}  주대(BC

1222~247)에  이르러서는 신 중심적 관심으로부터 인간 중심으로 바뀌면서,

인격적이고 최고신으로 숭배했던 '상제'와 같은 뜻으로 'O '을 사용하고 점점

군왕의 통치와 덕복을  중심으로 내면화하게 되었다. 이 때에 '인간은 신의

주재자'이며, '백성은 신의  주인'이라는 사상 {{ footnote }} 까지 나타난다. 


%% 공자의 신앙 


  이러한 인본주의적 동향 속에 당시 타락한 지도자들 밑에서 기근과 홍수와

 질병까지 돌아 도탄에 빠진 백성들 {{ footnote }} 을 지도해야 하는 하나의

법무장관 {{ footnote }} 으로서,

 공자의 본래적인 관심은 인륜과 정치윤리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재래 종교들에

대해 비판하거나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수용하는 입장에 서 있는 윤리철학

적  지도자였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그의 효도윤리는 무속신앙과 자연신앙이

혼합되어 있었다.

  공자는 그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는 것이 지혜이며, {{ footnote

}}  능히 사람을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능히 귀신을 섬기겠는가? 생을 알지 못하면서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라는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취한듯하지만, {{ footnote }}  그가

귀신 숭배를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제사할 귀신(대상)을 바로 알고 제사할

 것과, {{ footnote }}   제사할 때는 반드시 자신이 참여할 뿐만 아니라 그

대상이 조상 내지

귀신(Iw)이 살아  있는 듯이 대할 것을 가르쳤다. {{ footnote }}

  공자 자신도 귀신에게 제사할 때는 반드시 재계(몸과 마음을 깨끗이 함)하고

 의복과 음식, 거처지까지도 구별하였다. {{ footnote }}  논어에는 공자가 식사

전엔 반드시

 고수레(음식을 조금 떼어 바침)를 하였다는 것과, {{ footnote }}  마을사람들이

푸닥거리를

할 때는  조복을 입고 동쪽 섬돌에 서 있었다는 것과, {{ footnote }}  붉고 뿔이

반듯한 송아지를

산천의  신이 받지 않겠느냐

 {{ footnote }} 는 희생제에 대한 관심과 그의 자연신앙도 진술되어 있다. 


%% 귀신의 개념 


  공자의 개념 속에서는 신(Iw)과 귀신(B4Iw)의 개념이 구별되지 않는다. 또

 번역가들도 그의 'Iw' 개념을 귀신으로 번역하는 것이 보통이다. 전통유교에서

 '귀신' 또는 '귀'와 '신'은 인간론과 우주론을 구성하고 있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귀신이란 첫째로 신적 근원자를 일컬어 천(O ), 신, 상제, 기(B ) 등과

동일시되고

, 둘째로 만물의 생성(신)과 사멸(귀), 양의 신령(신)과 음의 신령(귀), 펴는

것(신)과 돌아 가는 것(귀), {{ footnote }}  산 사람(신)과 죽은 사람(귀) {{

footnote }} 을 일컫는다.

  성리학자들은 살아 있는 사람을 반은 신이며 반은 귀라고 하는데,  살았을

 때는 신(Iw)이 주(N\)가 되고, 죽은 후에는 귀(B4)가 주가 된다고 한다. {{

footnote }}  '예기'에는

 사람의 몸이 기(B )와 백(F{)이 있어, 전자를 신의 신기한 작용으로 보면서,

 사람이 죽으면 기가 하늘로 또올라서 영원한 신령의 무리 속에 들어간다고

한다. {{ footnote }}   후대에 성리학자들은 '예기'의 기와 백 대신에 혼(RH)과

백(F{)의 개념을

사용하며,  혼을 신(Iw)이고 백은 귀(B4)라고 생각하고, 이 혼과 백은 사람이

죽음으로써  갈라진다고 본다.

  혼은 천(O )으로 돌아가고 백은 지(N )로 돌아가, 혼백은 산화되어  일원기(L K

B

)로 돌아감으로써 고유성이나 개체성은 더이상 존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신유교의

사상이다.

  그러나 이 신화론은 무속신앙과 결합되어 완전소멸이 아니라 제사를 통한

감흥으로 죽은 자의 현재를 경험하는 강신술(spiritism)과 혼합되었다. 유자들은

 원한에 맺혀 죽거나 흉사의 경우엔 혼이 산화되지 않고 한동안 요괴가 되어

'신적 작용'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 footnote }}

  위와 같이 성리학은 사령이 근원자로 돌아가 원기(K B )가 되고 기가

산화될지라도

 오히려 그 이(L ;태극과 동일시됨)는 없어지지 않음으로 지성으로 제사를

지내면 그 제물을 흠향할 수  있다 {{ footnote }} 는  범신론적  신인동격

사상과  무속적

 강신신앙(spiritism)의 두 가지 중요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 두 가지가 실현되는 곳이 바로 조상숭배 제의이다. 유교의 범신론적 사상체계

속에서 조상신은 천신(O Iw)과 본질적으로 동일시되고, 조상숭배가 바로 천(O )

숭배와 마찬가지로 간주되어, 조상은 유교에서 유일한 숭배 대상이 되고 있다. {{

footnote }} 
 


%% 성(Hu), 효와 귀신 숭배의 동일 


  유교의 상제례에서 절대적인 요소는 성(Hu)이다. 보통 지성 또는 정성으로

 이해되는 성자(HuL )는 중용에서 만물의 마침이며 시작이라 하고 성실(Hu)하지

 않으면 만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성실(Hu)은 스스로 자기를 이루고 만물을 이룬다고도 하고,  지극한  정성(Hu)은

신과 같은 것 내지 귀신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Iw,K ,B4Iw). {{ footnote

}}

  성(Hu)이란 위와 같이 만물실존의 근거일 뿐 아니라 도덕 실천의 근거로써

 중요 20장에서는 도를 아는 지식(도란 여기서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의 5륜을 말함), 도를 체득하는 인(L ), 도를 실천하는 용기,

즉 지,  인, 용(N , L , Ky)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유교의 개념

중의 하나이다.

  또 18세기 한국 천주교도 이벽(1754~1786)에 의하여 설명된 유교의 정성(Hu)이란

제사 지낼 때 귀신(내지 신)을 파악할 수 있고 귀신을 전할 수도 있게 되는

개념으로서 {{ footnote }}  '음,양' 귀신은 본래 초감각적 이지만 그것이

가감각적(@ @N@%Ms)이

되는 것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조상을 제사지낼 때 발현하고,  가장

보편적으로는

  음, 양, 기(B )가 여러가지로 결합함으로써 가감적인 형태를 지닌 물체가

형성될 때 발견된다 {{ footnote }} 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제사드릴 때는 성(Hu)에 의하여 귀신의 존재 여부가 결정되고,

제물의 흠향여부가 결정된다. 율곡도 산 사람이 성경(Hu@ )하면 귀신도 존재하고,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조상이 거처하신 곳을 생각하고, 웃고 말하던 것, 즐거워하던 것,

좋아하던 것을 생각하여 사고가 완연히 목전에 계심을 보게 될 때  '산화된

 기(B )'가 이에 격감한다는 것이고 기(B )가 소멸되었더라도 이(L )가 역시

격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 footnote }}

  그러므로 제사와 성(Hu)은 부모사별을 막는 효행으로 절대시되고,효도의

실행원리가 된다. 유교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악덕으로

여겨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기'(J B )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성(Hu)은 제사를 준비하는 재계의

과정에서 실현된다. 10일간 욕망을 끊고 마음을 가다듬고, 심신을 깨끗이 하며

음식과 행동을 삼가며, 음악을 듣지 않고 부정을 피하며 재계함으로써 신령을

 맞을  준비를 하면, 고인의 모습이 끊임없이 눈앞에 떠오르고, 제삿날엔 고인의

영혼이 그  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고인의 음성을 듣는 느낌이 든다.

  효애(R I )의 마음이 골몰하면 부모의 영혼이 눈앞에 떠오르고, 효경(R @ )의

정성을 다하면 영혼이 그에 감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향을 피워 혼(RH)기를

모시고 술을 부어 백(F{)기를 모셔서 합일시키고 신령을 감흥케 한다는 것이다. {{

footnote }}

 영혼의 감흥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자 속에 내재화하는  것으로

 상제례는 완성이 된다.

  신령이 내 안에 있다는 느낌은 슬픔과 공허감을 안정시켜 주고 사자와  일체감과

통교를 느끼는 것이다. {{ footnote }}  '예기'는 귀신의 실재에 대하여, 사람이

죽으면 그 정기가

뭉쳐서 강한 향기를 뿜어 느끼는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고, 신령이

 강림하면 곧 사라져 버릴 때가 가까워지기 때문에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 {{ footnote }}

  이와 같이 유교는 전통적인 무속신앙을 그대로 수용하여 귀신을 섬기고 이를

 효로서 못박아 절대시하였다. 예기는 예(J )의 가장 중요한 것을 제사라 하고

제사의 10가지 윤리 중에 그 첫번 것을 '귀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한다. {{

footnote }}

  제의의 목적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귀신과 동하게 하는 것과 도의를 흥하게

하는 것으로서, 제사를 통해서 효가 시행되고, 효자가 아니면 부모를 제사할

수도  없다고 한다. {{ footnote }}   효성을 측정할 때는 첫째 생시에 부모를

봉양하며 그 효순(R I&

)으로서 효를 측정하며, 둘째 부모가 죽으면 상례를 시행하되 그 비애의 강도로서

효를  측정하고 셋째 상례 후에는 제사를 지내며, 그 경애함과 정기적인 제사로서

효를  측정한다. {{ footnote }}

  유교 제의의 이러한 양면적(효와 우상숭배)인 의미는 기독교 선교에 엇갈린

견해를 낳았고, 그 대표적인 본보기를 중국 카톨릭 선교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조상숭배 문화권 선교 전략 


  예수회의 선교 전략에 대한 평가

  예수회는 유자들의 거부감과 이질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한 때 승복을 벗고

 유복을 입어 한문을 연구하며 스스로를 서유(H L )라고 칭하고, 서양인의 발달된

 과학지식과 기술을 소개하면서 중국인의 호의를 얻어 점진적으로 선교의 발판을

마련하려고 했다. {{ footnote }}

  이러한 선교 전략은 보통 문화순응설(accomodation)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회보다 약 반세기 후에 중국에 입국한 도미니크회(Dominikaner 1631)와

프란체스코회(Franziskaner 1633)는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선교방침을 혼합주의라고

비난하고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과 통일성을 강조하였鑁.

  이들은 조상숭배와 공자 공경 의례를 미신과 우상숭배라고 비판하고 상제라는

개념도 태극보다 하위개념임으로 오직 천주만을 신개념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인노센스(Innocenz) 10세는 1648년 조상숭배와 공자공경

의례를  금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회는 이들의 17개 항질의서가 시골 무식층과 접촉한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고 반박함으로써(1651),알렉산더(Alexander) 7세는 1656년에 다시

 미신적인 것이 제거된다면 사자(G L )에 대한 공경의식을 허락한다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또 다시 도미니크회(Dominikaner)는 이의를 제기하였고,  교황청은

마침내 1699년 위의 두 훈령을 종합하고 말았다. 즉 1656년에 내린 관용 결정이

 1648년의 금지결정을 무효화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훈령에 언급한 모든

것을 다 지켜야 하며, 제기된 문제점과 환경에 따라 지킬 것을 선언하였다. {{

footnote }} 


  이와 같은 제의 논쟁은 유교권에서 오늘까지 계속되면서 효성이나 우상숭배의

그 한쪽만을 지지하면서 다른 한쪽을 무시하려는 경향이었다. 1664년에  일어난

 박해 후에 1668년 중국 선교사들은 42개의 조항을 발표하였다. 제41항은 그들이

왜 적응주의적 선교 방책을 택하였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조상제사 문제로

말미암아 수많은 중국인에게 구원의 문을 닫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

footnote }} 


  사실상 1692년부터는 청나라의 황제 강희제의 관용령으로 {{ footnote }}

예수회는  법적으로

포교의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트(Clement) 11세가 중국의 제사를

우상숭배로 정함에 따라 예수회는 강희제의 후계자  세종(1721년  즉위)과

고종  황제(1736년 즉위)의 광폭한 핍박과 순교의 역사 속에서도 예수회는 북경에

머물 수 있었으나 교인수는 줄어들고 교회는 황폐하게 되었다.

  19세기에는 모든 일을 새로 시작해야 했다. {{ footnote }}   그러면 예수회가

취한  적응주의적

선교방버은 전략적으로 합당한가?  물론 악습을 변경하는 일에는 진리를  받아들일

자세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1659년의 훈령과 같이 악한 습관을  변경시킬

 때에 자제와 침묵으로 하고, 진리를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를 가질 때에 하라 {{

footnote }} 는

 지시는 옳다. 문제는 적대감을 피하기 위해 미신적인 의례에 참여해야 하는

순응주의적 선교 전략이 복음의 순수성을 보존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다.

  선교는 충돌과 배척으로 인하여 차단되어도 안 될 것이고, 관용과 타협으로

진리의 절대성이 파괴되어도 안 될 것이다.  하르텐스타인(K.Hartenstein)이

 1933년에 혼합주의는 성경적 증거가 파괴된 아주 위험한 하나의 '새로운 종교'라고

 하는  경고를 기억해야 된다. {{ footnote }}

  한신대 박근원 박사는 유교의 제례에 관하여 진술하며, 현대는 제사를 지내며

절할 때 자기 조상을 우상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 footnote }} 고 일축해 버린다.

왜정시대

 신사참배시에도 역시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고 다만 황실이 선조와 그 덕을

찬양할 뿐이라고 하여 기독교인을 참여시켰고, 예수회도 조상제사를 숭배가

아니라 추모와  효성이라 하여 허용하고, 신주를 귀신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자손의 사모지심의 의지처라고 하여 허용했던 것과도 일맥 통한다.

  현대 천주교와 일부 개신교 역시 같은 입장에서 이를 허용하고, 조상제사도

지내고 주일예배도 드리는 방법을 택하는 교인들이 현재도 많이 있다.

  그런데 이들은 제사 대상 없이 제사를 지낸단 말인가?  무속시대로 부터

유자들을 통해 지금까지 숭배해 왔던 불멸의 영혼(또는 B  내지 L )에 대한

신앙이  현대에 와서 잊혀졌거나 파괴되었다는 말인가?  사실 제사행위와

숭배행위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제물을 바치는 것이 혹 숭배행위가 아니라고

고집할지라도,  귀신(죽은 조상)과의 친교행위인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죽은

자에게 기도는 하지 아니할지라도, 사자(G L )와 분리되는 것은 거부하고 있다.

현대의 유자들도  세속시대에 살면서 불가지론적이거나 불성실해질 수는 있으나,

영혼불변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고연령층이 될수록 조상숭배는

더욱 실제적이 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천주교회와 기독교가 다 우상숭배를 옳다고

 동의한 일은 없다. 동의하는 사람들은 조상제사가 우상숭배가 아니라 윤리적

 행위라고 전제해 놓고 찬성하는 것이었다. 조상숭배에 개방적인 입장인 박근원

박사도 "제사가 조상을 우상으로 섬기는 예식이라면... 그것은 기독교의 신앙에

위배되는  행위이다."라고 못박고 있다. {{ footnote }}

  비록 천주교가 마리아 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죽은 '성인들'에게 기도하며,

성도들의 통공(P Af)의 신앙을 가졌을지라도, 조상숭배의 맥락에서는 죽은 사람의

혼에 제사하고 기도하는 일에는 동의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유교의 제의가 효와 조상숭배가 뗄 수 없이 연합되어 있어서, 둘 중에

하나만을 기호대로 선택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위에서 고찰한 것과 같이

유교제례의

 숭배 대상은 사령임을 논란할 필요도 없다. 현재도 우리나라의 유교식 상례는

불명의 영혼을 위해 초헌(혼을 불러 회복시킴)과 3헌제(혼의 방황을  염려하여

 드리는 제사)와 위령제(시체매장 후 무덤 앞에서 드림)등을 드리며 상제례를

거행하고  사당에 죽은 조상의 이름을 새긴 신주를 모시고 제물을 드리며 사건을

고하면서 죽은 자와의 교통을 꾀하고 있다.

  예수회나 천주교의 교황청이 중국의 조상숭배를 효성으로서 해석한 것은

온당한 처사가 아니었다. 카톨릭 선교사들은 우상숭배를 제거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조상숭배가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근거 있는 진술도 하지 못했다. 
 


  조상숭배 문화권에 대한 선교 전략적 제언 


  조상숭배 문화권 선교 전략이라면, 우리는 지금 선교적 불모지가 되었던

중국보다는 한국의 문제를 다루는 것도 무방하다고 느끼고 있다. 우리는 유교와

한국의 3대 제일(N L )인 기일(B L )과 추석과 정월 초하루의 절기를 접촉점으로

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첫째로는 기일에 귀신에게 지내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변조한

추도회가 있다. 추도회는 선교적 측면에서 비기독교인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교회 담을 넘어서 봉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추도회는 복음의

 수용도가 비교적 높은 감정 상태와 접하게 되고, 인간의 한계성, 죽음, 사후

세계,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에 관한 메시지가 더욱 긴박하게 요청된다.

  그러나 추도회에는 종래의 제례와 잘 분별되지도 않은 채 어떤 변이된 형태의

조상숭배로 알고 참여하는 불신자들이 끼어든다. 이 때 집례자는 이들을

자연스럽게

 포용하고 메시지를 통해서 계몽한다. 일부 신자 중에서도 이런 혼돈을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추도회에 관한 철저한 사전 교육이 필요하다.

  추도회 진행 중에 재래 우상숭배의 잔재가 남아 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현실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추도식 거행자와 그렇지 못하고 귀신과 연합하고자

하는 추도식 동참자들이 섞여 있다.

  그러므로 젯상을 차려 놓고 예배를 드리려는 고집과, 그것을 거절당했을 때의

섭섭함을 숨기지 못하는 신자들의 갈등이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무엇을

전했는가보다 그들이 무엇을 받아들였는가이다. 전한 메세지와 전달된 메세지는

같은 것이어야 한다.

  추도회는 귀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며, 그

공경과 추모의 대상이 귀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점이다.  효도의 대상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이라는 점이다. 고 윤성빈 박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을 효의 표본이며 기독교의 핵심으로 보게 하는 토착화론을

 제시했다. 그것도 일리가 있으나 효자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기독교인이어야 한다.

  기독교가 전통문화의 아름다운 유산인 효행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조상숭배와

효행을 다 거부하는 문화 파괴론자로 나타날 것이다. 기독교가 도덕의 근본을

허물어 버린다는 유자들의 비난에 대답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길은 효행, 바로

 이것뿐이다.

  죽은 사람에게가 아니라 산 사람에게의 효행이다. 효행을 통해 전통적인 고부

간의 갈등이 해소되고 가정은 화목하게 될 것이며, 유자들은 예수 믿는 며느리를

 구할 것이 아니겠는가? 효를 이어나가는 것이 제사의 중요한 목적이 되기에

추도회를 통해서 역시 가족 공동체의 화목을 꾀하며 전통적인 대가족 문화 유산에

충돌을 빚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째로는 추수 감사를 가장 큰 명절인 추석에 지내는 것이다. 이날을 총동원

 주일로 지켜 온 가족이 전통적으로 지키던 중추절 감사제를 교회로 나와 지키는

것이다. 또 둘째 날은 무덤에서 예배는 드리지 않더라도 성묘를 하여 조상의

덕은 기리고, 가족이 화목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한다.

  전통 성묘와 달라진 것은 예배 대상과 예배 형식일 것이다. 추수한 예물은

 젯상에 놓는 것이 아니라 교회 강단 앞에 놓고, 젯상 앞에 구부려 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고,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귀신이 내려준 음식을 음복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하나님

앞에서 애찬을  나누고 친교하는 것이다.

 셋째는 정월 초하루 명절 행사를 부흥사경회로 모이는 것이다. 무속문화에서

익숙해진 한국인의 기복신앙은 범신론자들과는 반대로 타력구원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적 장점이 있다. 신자들의 다수는 기복 신앙적인 이기적이고

유치한 단계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현재 유행이 되고 있는

 '신년  축복성회'의 일반적 동기가 그렇다.

  그러나 기복신앙은 예수께 나아왔던 열 문둥이 중에서도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난 타락한 보통 인간의 욕구이다. 신년 축복성회를  개최하는

것이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이 되어버릴 위험도 있으나 새해 첫날부터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복을 구하는 모습은 아름답지 않은가?

  교회는 평소에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기복신앙에 머물지 않도록 잘  양육을

 해야 할 것이다. 태양신을 섬기던 서양에서 크리스마스를 기독교적으로 경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섬기고, 우상숭배를 완전히 제하고 기독교적 신앙으로

대치해  버렸다.

  조상숭배를 중심으로 모였던 과거 유교적인 명절이 변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명절이 되며, 아름다운 문화적 덕목인 효행을 기독교에서 실행함으로써 기독교

 복음은 종교성이 약하고 형식화한 유교윤리에 접목되어 그 활기를 찾게 될

것이다.

  유교권 선교의 심각한 문제는 바로 효행이다. 안일하고 세속적이며 이기주의적인

현대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참으로 실행할 수 있을까? 효행 없는 유교권 선교는

 생각하기 어렵다. 효행 없는 복음전도, 선행 없는 기도생활... 이것은 오히려

유교권 선교를 가로막는 역할이 될 것이다.

  문제는 조상제사를 포기함으로써 효성을 실행하는 일이 좌절될  때,  선교사들이

그 대응책을 제시하지 못했다는데 있다. 천주교는 오히려 더 우상을  만들어

 놓고 숭배한다는 비난까지 받았던 것이다. {{ footnote }}   기독교가 부모공경에

대한 계명뿐만이

아니라, 제사 때에 우러나오는 지성과 효를 능가할 만한 실제적인 해답을 주지

못하면, 유교권 선교에서 우상숭배를 제거하기에 큰 어려움이 될 것이다.

  세속화 시대의 개인적, 사회윤리적인 부패와 타협, 이것이 교회 안에 있을

때 어떻게 교회가 효를 실행하겠는가? 우리는 우상숭배와 타협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십계명대로 살아 있는 부모님께 효도를 해야 한다.  부모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 이것이 조상숭배 문화권에서의 선교의

길이다.  그러므로 선교사업에 앞서 교회의 복음화운동과 회개운동이 더 불가피하게

 여겨진다.

  넷째는 신학의 '토착화'이다. 이미 이조시대에 천주교  학자  이벽(1754-1786)은

유교의 중심 교리 중에 하나인 성(Hu)이라는 개념을 기독론에 연결함으로써

토착화를 시도했다. 그는 성(Hu;일반적으로 지성 또는 정성으로 앎)을 글자

풀이 하여 말씀(J4)이 이루어짐(Hj),즉 성육신으로 설명했다. 이벽은 바로

기독론을  성(Hu)에 접목시킨 첫번째 토착화 신자이다.

  그는 성(Hu)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적용시킨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설명한다. "성(Hu)을 지니고 있는 자는 그의 인간적인 약함에도

불구하고 강하니 이것은 그리스도교에서 인간에 내재하는 성령의 작용과도 같은

 것"이라고 한다. {{ footnote }}

  이벽이 성령을 인간 속에 내재하는 작용이라고 설명한 것은 성령이 인간

사역의 주체가 됨을 말하나, 성령을 인격이라고 보기보다는 비인격적인 힘과

적용으로  읽혀짐에 따라, 오히려 유교 범신론적인 기(B )와 혼돈될 수 있는

개념이다.  현대에 와서 고 운성범 박사는 성(Hu)의 신학을 저술하고 이벽과

마찬가지로 성(Hu)을  풀이하며 '말씀이 이루어짐'내지 '참말'(Tat-Wort, Wort

Tat) {{ footnote }} 이라  하고,  동양에서 낯선 '계시'라는 개념 대신에 사용할

것을 제시했다. {{ footnote }}

성(Hu)의 임잰는 말씀의  임재요(p.105) 성(Hu)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고  참

 말씀이며,  말씀의  성육신이고(p.34) 도이며, 로고스라고 한다. 또 '하나님과

인간과의 중간','사람과  사람과의 중간'그리고 '삶과 사물과의 중간'이 바로

성(Hu)이라고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성(Hu)의 완성이라 하였다(p.901).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의 모습을 완전히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p.48).

  이와 같이 윤성범 박사도 이벽과 마찬가지로 성(Hu)을 성령으로 보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의 생명을 통해 새로운 생활을 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하였다.(p.104).

윤 박사의 성(Hu)개념은 오늘날과 같이 인간의 영, 사령, 귀신과도 혼돈하는

 '영'의 개념이 아니라, 성령을 하나님의 영이며 신적 본질로 묘사하고 있다. 


  윤 박사가 신학적으로 위에 진술한 것처럼, 정서으이 효력을 통하여  흩어진

 기(B )가 모아지기도 하고 산화되었던 귀신이 다시 형체가 되기도 하고, 만물이

존재하게도 되는 범신론적인 유교적 개념을 통하여 화육하신 하나님과  계시와

 성령을 접목시키려는 시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성(Hu) 개념은 인간을 신적 위치에 두거나 하나님의  역사를  대신하려는

인간 신격화의 환상에 빠질 위험이 있는 개념이며, 또 인간의 정성을  통한

 성취, 노력에 의한 구원관 등으로도 발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Hu)이나

또는 다른  범신론적 개념에 의하여 신학을 토착화하려면, 머저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피조물  간의 본질적인 차이를 명시하고, 신인동격 사상의 위험을

방지하여 인간 기질의 무능과 타락, 죄악으로 인한 파멸을 알게 하며, 또 구원받은

사람조차  철저한  신의존(IwLkN@)에 의한 구원 내지 사역이 있을 뿐, 결코

하나님의 위치에 서거나  대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시해야 할 것이다. 


결어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일은 보렌(R.Bohren)이 지적한 바와 같이 관혼상제

의식집행은 복음선포(Kerygma)외 교제(Koinonia)와 봉사(Diakonia)와  선교적

 기회이며, 교회와 세상의 동반자적 기회로서 좋은 가능성을 열고 있다는 것이다.

{{ footnote }}

 우리는 유교의 제례가 기독교의 접촉점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효성과 우상숭배의 혼합문화권에서 우리가 대답해야 할 선교학적 문제는

이것이다.

  %% 기독교가 유교의 효행을 능가하는 행위를 보여 주어야 한다.

  %% 종교적 감정을 충족시킬 수 있는 바른 신앙 대상을 분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 사랑의 감정을 충족시킬 수 있는 혈연 공동체를 형성할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 제자 양육을 통한 교회의 자립과 자력전파의 토착화의 실현이다. 


  크래머(H.Kraemer)가 지적한 대로 유교와 다른 고등종교들은 보통 교리적

차이나 대립은 별 의미가 없다고 여긴다. 이들은 관용주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그들의 전통적인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절대적이어서 그들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는 죄악으로 여긴다. 이들은 진리 문제가 타오르면

곧 바로 투쟁적이 되고 핍박한다.  그것은 진리 때문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동기로 일어난다.

  크래머(Kraemer)는 이러한 비관용성(Unduldsamkeit)을 '가상적 관용' 또는

'표면적 관용'(Schein Duldsamkeit)이라고 칭한다. {{ footnote }}   그러므로

현지인 신자들은

 핍박을 받을지라도 그 공동체 속에 머물러서 더욱 사랑을 실천하고 효행으로

본이  됨으로써, 기독교인들이 착한 사람들이고, 전통문화의 파괴자가 아니라는

것이  알려져야 한다. 유교 문화권 선교사들은 사랑의 실천으로 현지인들의

오해와 불신앙을  극복해 나가고, 사역할 때마다 부딪히고 복음과 함께 배척을

당할 것이  아니라,  속히 충실한 현지인 제자들을 양육하여, 그들로 하여금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함으로써 전달자와의 이질감을 축소시켜야 할 것이다.

선교사는 배척을 받을지라도  복음은 살아남아야 한다.

  주의 말씀이 흥황하던 두란노서원에서는 현지인들이 와서  자복하고  마술사들이

스스로 그 책을 불사르니 은 오만이나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행 19:18 이하).

먼저 진리를 받아들이면 그들 스스로가 악습을 폐지할 것이다%R 
 
 
 
 


예기 23, 제법. 맹자도 FzIw신앙을 묘사하며, 순임금이 제시한즉 백신이 흥향하니 


O 이 받아들인 것이라고 한다(맹자 9반장 G  5)

  예기 24.제의.

   금장태,선진유교의 제례<기독교와 관혼상제> 박근원 편, 전망사 1984.

pp.260~266.

   lbid, p.256.

   최기복, 유교와 서학의 사상적 갈등과 상화적 이해에 관한 연구, (Diss)

성균관

대학교 1988.p.90.

    금장태, p.271 하~ 296. 맹자에 이르러도 O 과 FzIw(맹자9만장 상5, 14진심Q\1 


4)과 상제에 대한 신앙은 그대로 전술되고 있다(맹자 8이무 Q\25 : 악인도

재계목

욕하면 상제에게 제사할 수 있다). 
 


   Wilhelm, R., Lao-tse und der Taoismus. Stuttgart 1925.8,12,16.

   Forke, A, Geschichte der alten Chinesischen Philosophie, in;Abhandlungen 


aus dem Gebiet der Auslandskunde Bd.25,Hamburg 1927,pp.99~103."Justizministe- 


rn".

   논어6 옹야20.

   논어11 선진11, 맹자는 성스러워서 할 수 없는 것(불가지한 것)을 신이라고


였다(맹자 14 진심Q\25)

   논어2 위정24.

   노어3 팔일12.

   논어10 향당7.

   lbid.10향당 8.

   lbid, 10향당10.

   논어6 옹야4. 공자의 자연신앙은 맹자에게도 전승되어, 깨끗한  희생제를

 사직(흙귀신과 곡식귀신)에게 드려도 가뭄과 홍수가 나면 사직을 바꾸어야

한다고 가르쳤다(맹자 14 진심 Q\ 14). 이 토신제는 이조시대에도 주자와 율곡의

주장대로  사시제를 지낸다음에 행해졌고 토신에게 복을 주기도 했다.(김춘동,

한국J 속사<한국민속대관 1. 흥일식 편, 서울 1980, p710)

  중용 16장.

   예기 23 제법.

   최기복,p110f.

   예기 24 제의

    최기복,pp  114~116.  157.219.  M.Ricci,천주실의(이수응  역).   분도출판사

1988.p66.Ricci도 비명에 죽은 사람의 기가 흩어지지 않는다는 당시 중국인의

사상을 기록하고 있다.

   유승국, 한국의 유교 <교양국사 총서>,민족문화 추진회 1977, p305f. 부록

693f

   금장태 p256

   중용24장.

유교와 조상숭배 문화권선교

kcm 한국컴퓨터선교회



2000년대를 향한 민족과 세계복음화 회의 자료집

유교와 조상숭배 문화권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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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은 보통 하나의 종교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륜과 정치윤리에 가깝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선교역사에도 불구하고 유교권 선교는 부진하였고, 또 유교권 선교를 위한 전략도 변변치 못한 실정이다. 우리나라에 뿐만아니라 중국에서도 끊임없이 시행해 오던 조상제사는 유교의 종교적인 행사이고 그뿐 아니라 무속문화권에 토착화된 고등 종교들과 사이비 이단종파들까지도 거의 예외없이 시행해온 공동적인 의례이며,심지어는 가톨릭 신자들과 일부 개신교도까지도 이를 허용하는 입장이다. 한국의 경우처럼 무교적인 영성과 고등종교들의 범신론으로 가득했던 아시아에서는 영들의 충돌이나 영분별이 요청되지 않았다. 오히려 유불선교 및 힌두교와 그 이단들은 무교적인 다신론과 함께 병행주의 또는 포괄주의적인 형태로서 공존해 왔던 것이다. 기독교가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다원주의와 혼합주의 문화권에서 만나는 조상숭배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조상숭배 문화권에서 선교사가 배척을 받지않고 살아남기 위해서 중국의 예수회 선교의 경우처럼 제사를 용납하면서 관용주의적인 접근을 시도할 것인가? 아니면 루스드라에서의 바울과 바나바처럼 강력하게 우상숭배를 저지하고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주께 돌아오라는 (행14:14-18) 충돌을 겪을 것인가?

조상숭배 문화권에서 제시된 토착화 신학은 지금까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조상숭배를 단순한 윤리적인 의례로 보아 허용하자는 입장이고,다른 하나는 단순한 종교적인 의례로 보아 결코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조상 숭배와의 타협과 충돌을 번복해 왔던 천주교회의 선교역사를 살펴보면, 이 두 입장이 다 그 다른 한쪽 성격을 무시함으로써 현지인의 심각한 문제를 기피해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그 해답을 제시해야 할 사명이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I. 유교의 귀신숭배와 제사원리

고대의 의례에 관한 공자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고전 예기는 백신을 대상으로 붉은 송아지를 잡아서 희생제를 드리는 제의를 기록하고 있다.1) 百神중에는 일월성신,사방신,천지산천,죽은 사람들의 혼 등을 다 포괄하고 , 그들은 괴상한 일을 하는 것2) 을 신이라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이들은 상제를 최고 신으로 숭배했으며 모든 자연신들은 상제의 군신 내지 하늘의 현현으로 숭배했던 것이다.3) 이러한 자연숭배나 상제숭배 및 조상숭배 신앙은 은나라(1766-1123)시대의 제사와 점복에 관한 갑볼문16만편의 발견4)에 따라 확실해진 것이며, 그들의 삶은 제의중심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교문화 속에서 중국과 한국 초기의 가톨릭 선교를 통하여 크게 문제시된 조상숭배에 대해서 유교와 천주교의 신앙과 교리를 대조 연구함으로써 선교연구에 공을 세운 성균관 대학교 동양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수원의 가톨릭 신학대학교 교수인 최기복 신부는 고대 조상들이 사후에도 하늘에서 상제를 모시고 살고 있으며,그들은 후손들이 복과 화를 내린다고 믿었다고 진술하고 있다5) 그러나 주대(1222-247)에 이르러서는 신중심적인 관심으로부터 인간중심으로 바뀌면서 인격적이고 최고 신으로 숭배했던 "상제" 대신에 "天"을 사용하면서 군왕의 통치와 덕목을 중심으로 내면화하게 되었다.이때에 "인간은 神의 주재자"이며,"백성은 신의 주인"이라는 사상6)이 나타난다.

1. 공자의 신앙

이러한 인본주의적 동향 속에서 당시 타락한 지도자들 밑에서 기근과 홍수와 질병까지 돌아 도탄에 빠진 백성들7)을 지도해야하는 "법무장관"8)으로서 공자의 본래적인 관심은 인륜과 정치윤리에 있었다. 그는 재래 종교들에 대한 비판이나 거절이 아니라 수용적인 입장에 선 윤리철학적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의 효도윤리는 무속신앙과 자연신앙과 혼합되어 있었다. 공자는 그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는 것이 지혜이며9),능히 사람을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능히 귀신을 섬기겠는가? 생을 알지 못하면서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라는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취한듯 하지만.10),그가 귀신 숭배를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제사할 귀신(대상)을 바로 알고 제사할 것과11),제사할 때는 반드시 재계(몸과 마음을 깨끗히 함)하고 의복과 음식과 거처지까지도 구별하였다.13) 논어에는 공자가 식사 전에 반드시 고수레(음식 조복을 입고 동쪽 섬돌에 서 있었다는 것과14),붉고 뿔이 반듯한 송아지를 산천의 신이 받지 않겠느냐16) 는 희생제에 대한 관심과 그의 자연신앙과 진술되어 있다.

2. 귀신의 개념

공자의 개념속에서는 신과 귀신의 개념이 구별되지 않고, 또 번역가들도 그의 '신' 귀신으로 번역하는 것이 보통이다. 선진유교에서 "귀신"또는 "귀"와 "신"은 인간론과 우주론을 구성하고 있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사용된다.귀신이란 첫째로 신적 근원자를 일컬어 ,天,신,상제,氣등과 동일시되고, 둘째로 만물의 생성(신)과 사멸(귀)17),산사람(신)과 죽은 사람(귀)18)을 일컫는다. 성리학자들은 살아있는 사람을 반은 신이며 반은 귀라고 하는데, 살았을 때는 신이 주가 되고, 죽은 후에는 鬼가 주가 된다고 한다.19) "예기" 에는 사람의 몸이 氣와 魄 이 있어, 이를 역시 신의 기한 작용과 혼의 신기한 작용으로 보면서 사람이 죽으면 기가 하늘로 떠올라서 영원한 신령의 무리 속에 들어간다고 한다.20).성리학자들은 에기의 기와 백 대신에 魂과 魄의 개념을 사용하며, 혼은 신이고 백은 귀라고 생각하고 사람이 죽음으로써 혼과 백은 갈라진다고 본다. 혼은 天으로 돌아가고 백은 地로 돌아가, 혼백은 산화되어 一元氣로 돌아감으로써 고유성이나 개체성은 더 이상 존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신유교의 사상이다. 그러나 이 산화론은 무속신앙과 결합되어 완전소멸이 아니라, 제사를 통한 감흥으로 사자의 현재를 경험하는 spiritism(강신술)과 혼합되었다. 유자들은 원한에 맺혀 죽거나 흉사의 경우엔 혼이 산화되지 않고 한동안 요괴가 되어 "신적작용"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21)

위와 같이 성리학은 사령의 근원자로 돌아가 일원기가 되고 기가 산화될 지라도 오히려 그 理는 없어지지 않음으로 지성으로 제사를 지내면 그 제물을 흠향할 수 있다22)는 범신론적 신인동격 사상과 함께 무속적 spiritism의 두가지 중요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 두가지가 실현되는 곳이 바로 조상숭배 제의이다. 유교의 범신론적 사상체계 속에서 조상신은 천신과 동일시 되고, 조상숭배가 바로 천숭배와 마찬가지로 간주되어,조상은 유일한 숭배대상이 되고 있다.23)

2. 誠一효과가 귀신숭배의 통일

유교의 상제례에서 절대적인 요수는 성이다. 중용에 성자는 물의 마침이며 시작이다. 성하지 않으면 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은 스스로 자기를 이루고 물을 이룬다.24) 고 한바와 같이,제사드릴 때는 성에 의하여 귀신의 존재여부가 결정되고,제물의 음향여부가 결정된다. 이와 같이 율곡도 산 사람이 誠敬하면 귀신도 존재하고,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조상이 "거처하신 곳을 생각하고, 웃고 말하던 것,즐거워 하던 것, 좋아하던 것을 생각하여 사고가 완연히 목전에 계심을 보게 될때 "산화된 기가 이에 격감한다는 것이고 기가 소멸되었더라도 理가 역시 격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25) 그러므로 제사와 성은 부모사멸을 막는 효행으로써 절대시 된다.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큰 악덕이다. 예기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성은 제사를 준비하는 재계의 과정에서 실현된다. 10일간 욕망을 끊고, 마음을 가다듬고, 심신을 깨끗이 하며 음식과 행동을 삼가며, 음악을 듣지 않고 부정을 피하며 재계함으로써 신령을 맞을 준비를 하면, 고인의 모습이 느껴지고, 고인의 음성을 듣는 느낌이 든다. 효애의 마음이 골몰하면 부모의 영혼이 눈앞에 떠오르고, 효경의 정성을 다하면 영혼이 그에 감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향을 피워 혼을 모시고 술을 부어 魄기\'b8� 모셔서 합일시키고 신령을 감흥케 한다는 것이다.25) 영혼의 감흥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자속에 내재화하는 것으로 상제례는 완성이 된다. 신령이 내안에 있다는 느낌은 슬픔과 공허감을 안정시켜주고 사자와 일체감과 통교를 느끼는 것이다.27) 예기는 귀신의 실재에 대하여,사람이 죽으면 그 정기가 뭉쳐서 강한 향기를 뿜어 느끼는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고, 신령이 강림하면 곧 사라져버릴 때가 가까워지기 때문에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28)

이와같이 유교는 전통적인 무속신앙을 그대로 수용하여 귀신을 섬기고 이를 효로서 못박아 절대시하였다. 禮記는 禮의 가장 중요한 것을 제사라 하고, 제사의 10가지 윤리 중에 그 첫번 것을 "귀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한다.29) .제의의 목적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귀신과 통하게 하는 것과 도의를 흥하게 하는 것으로써,제사를 통해서 효과가 시행되고, 효자가 아니면 부모를 제사할 수도 없다고 한다.30).효성을 측정할 때는 1.생시에 부모를 봉양하며 그 이순으로써 효를 측정하며 2.부모가 죽으면 상례를 시행하되 그 비애의 강도로서 효를 측정하고, 3. 상례 후에는 제사를 지내며,그 경애함과 정기적인 제사로서 효를 측정한다.31) 유교 제의의 이러한 양면적(효와 우상숭배)인 의미는 기독교 선교에 엇갈린 견해를 낳았고, 그 대표적인 본보기를 중국 가톨릭 선교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II. 천주교 유교제의에 관한 이해

1. 선진 유교에 대한 이해

중국 전통유교에 호의를 가지고 조상제사와 공자숭배 의례에 대해서 수용적인 자세로 접근한 예수회(Jesuit)는 유교를 인간 본성에 따라 조물주를 경외하고 천리에 순응하는 종교로써 천주교의 기본교리에 위배되지도 않는다고 보았으며,유교의 제의를 종교의식이라기 보다는 단지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의례로서 받아들였다. 예수회는 조상제사에 대하여 "생시와 같이 계속 애정과 감사를 표하기 위함이여 사자가 음식물을 필요로 하거나 또는 제물을 먹기 때문에 드리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사자를 신으로 생각하지 않을 뿐아니라 그에게 무엇을 구하지도 않는다"고 변호하고,공자 숭배 의례도 "공자를 신으로서가 아니라 다만 先師로 생각하여 감사드릴 뿐이요, 그에게 기도문을 염하거나 어떤 청원을 드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정식제사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예수회는 이렇게 함으로써 유교를 천주교와 접목시켜 천주의 존재론과 영혼 불멸론, 사후 천당 지옥설,愛主愛人의 도를 설명하려고 하였으며 32),선진유교가 천주를 섬겼다는 것을 유교경전을 통해서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2. 신 유교에 대한 이해

그러나 예수회는 송대(960-1279)의 신유교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Matteo Ricci는 성리학의 태극론과 이기론을 무신론이라고 배척하고,천주를 상제와 동일시하여,상제에게는 제사를 하나 태극 또는 理에는 제사하지 않는다는 예를 들어,태극에서 만물이 생성했다는 주장을 부정하고 천주가 만물을 무로부터 창조했다고 하여 상제는 창조자이고 또 심판자라고 가르쳤다 33).Ricci는 또 사후인간은 귀신이 아니라 선령(천당에 간 영혼)과 악령(지옥에 간 영혼)으로 칭할 것을 주장하고,인간의 영혼은 타물로부터 생출한 것이 아니라 천주의 창조물이고 자립체임으로 신체가 소멸해도 불멸자존한다고 설명하였다.34).물론 이 "자립체"또는 "불멸자존"이라는 개념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Ricci는 태극을 物자체도 아니고 物의 성분도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이러한 가르침이 유교 경전이나 성현들의 가르침에도 전혀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36) 그러나 선진유교를 들어 신유교 학자들을 비판하며 천주교와 동일시하려던 바로 그점이 Ricci의 결정적인 약점이 되었다. Ricci의 선진유교가 무속신앙과 혼합주의를 형성했고,처음부터 범신론적 세계관과 인간관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알지 못했고 고대의 상제숭배 신앙만을 알았던 것이다. 이것이 유지들의 비판 거리가 된 것이다.

M.Ricci는 신유교의 영혼산화론에 반하여 영혼불멸론을 주장하고 이를 선진유교의 사상에서 증명하려고 애를 썼다.36) 그는 또한 성리학의 조상제사를 허례라고 비판하고 기독교인(선령)은 죽어 천국과 영복으로 비 기독교인(악령)은 지옥과 영벌로 떨어짐으로 산자와 죽은자의 통감은 불가능하고,제사가 사자의 영혼에 아무 유익이 되지 않을 뿐더러,죽은 영혼이 제사를 흠향하러 세상에 올 수도 없고,제사는 오히려 악마가 흠향하고 선조가 영혼이 임재한 것처럼 속인다고 하였다. 또 마귀를 섬기는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였다.37) 이것은 신유교 학자들의 반감과 반박을 불러 일으켰다.

예수회는 조상제사를 허용했으나 추모와 봉헌으로써 이해했고 신령과의 감격은 부인했다. 또 신주를 허용하면서 거기에 혼이 깃들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손의 사모지심의 의지처로써 허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교가 예수회 선교사들의 생각 속에서 그 철학적 본질이 파괴될리는 없다. 결국 예수회는 유교의 상제례를 관용함으로써 우상숭배 행위를 허용하고 만것이다. 어떻게 조상숭배로부터 효성을 장려하면서 미신을 분리해낼 수 있겠는가?

III. 조상숭배 문화권 선교전략

예수회는 유자들의 거부감과 이질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한때 승복을 벗고 유복을 입고 한문을 연구하며 스스로를 서유(西儒)라고 칭하고,서양인의 발달된 과학지식과 기술을 소개하면서 중국인의 호의를 얻어 점진적으로 선교의 발판을 마련하려고 했다.38)그러나 예수회보다 약 반세기 후에 중국에 입국한 Dominikaner(1631)와 Franziskaner(1633)는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선교방침을 혼합주의라고 비난하고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과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조상숭배와 공자공경의례를 미신과 우상숭배라고 비판하고 상제라는 개념도 태극보다 하위개념임으로 오직 천주만을 신 개념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Innocenz10세는 1648년 조상숭배와 공자공경의례를 금하게 되었다(1651).그러나 예수회는 이들의 17개항 질의서가 시골 무식층과 접촉한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고 반박함으로써(1651), Alexander7세는 1656년에 다시 미신적인 것이 제거된다면 사자에 대한 공경의식을 허락한다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또 다시 Dominidaner는 이의를 제기하였고, 교황청은 마침내 1669년 위의 두 훈령을 종합하고 말았다. 즉 1659년에 내린 관용결정이 1645년의 금지 결정을 무효화 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훈령에 언급한 모든것을 다 지켜야하며,제기된 문제점과 환경에 따라 지킬 것을 선언하였다.39) 위와같은 제의논쟁은 유교권에서 오늘까지 계속되면서 효성이나 우상숭배의 그 한쪽만을 지지하면서 다른 한쪽을 무시하려는 경향이었다. 1664년에 일어난 박해 후에 1668년 중국 선교사들은 42개의 조항을 발표하였다. 제41항은 그들이 왜 적응주의적 선교방책을 택하였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조상제사 문제로 말미암아 수많은 중국인에게 구원의 문을 닫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사실상 1652년부터는 예수회만 법적으로 포교의 자유를 누렸고, 그들이 그때부터 1705년까지 얻은 신자는 30만명이나 된다는 것이다.40) 그러면 예수회가 취한 적응주의적 선교방법은 전략적으로 합당한가? 적대감을 피하기 이해서 미신적인 의례에 참여할 수 있으며, 1659년의 훈령과 같이 악한 습관을 변경시킬 때에 자제와 침묵으로 하고, 진리를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를 가질 때 하라41)는 지시는 옳은가? 물론 악습을 변경하는 일은 진리를 받아들일 자세가 선행되어야 할 거이다. 문제는 적응주의적 선교전략이 복음의 순수성을 보존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다. 선교는 충돌과 배척으로 인하여 차단되어도 안될 것이고, 관용과 타협으로 진리의 절대성이 파괴되어도 안될 것이다.1931년은 혼합주의의 필연성을 주장한 H.W.Schomerus는 선교의 과정으로써 전통적인 것이 형성되거나 개종을 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42) 이러한 주장과는 반대로 K.Hartens- tein은 1933년에 혼합주의는 성경적 증거가 파괴된 아주 위험한 하나의 "새로운 종교"라고 경고하였다.43) 이조시대에는 불명의 영혼을 위해 위령제(혼을 불러 회복시킴)과 3헌제(혼의 방황을 염려하여 드리는 제사)와 사당에 죽은 조상의 이름을 새긴 신주를 모시고 제물을 드리며 사건을 고하면서 죽은 자와의 교통을 꾀하였다.

현대는 박근원 박사의 진술처럼 제사를 지내며 절할 때 자기조상을 우상처럼 생각하지 않는다고 44) 한마디로 일축해 버리면서 유교의 제의를 허용할 수 있겠는가?과거 예수회나 현대의 천주교인들처럼 조상제사도 지내고 주일예배도 드리는 방법을 택하는 교인들이 현재도 많이 있다. 그런데 이들은 제사 대상도 없이 제사를 지낸단 말인가? 무속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숭배해왔던 불명의 영혼(또는 氣내지 理)에 대한 신앙이 현대에 아서 잊혀졌거나 파괴되었다는 말인가? 현대의 유자들도 영혼불멸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이 세속시대에 살면서 불가지론적이거나 불성실해질 수는있다. 그러나 그것이 조상숭배를 더 추구하고 있는 형편이며, 고연령층이 될수록 조상수배는 더욱 실제적이 된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천주교회와 기독교가 다 우상숭배를 옳다고동의한 일은 없다. 동의하는 사람들은 조상제사가 우상숭배가 아니라 윤리적 행위라고 전제해 놓고 찬성하는 것이었다.조상숭배에 개방적인 입장인 박근원 박사도 "제사가 조상을 우상으로 섬기는 예식이라면...그것은기독교의 신앙에 위배되는 행위이다"라고 못밖고 있다.45) 비록 천주교가 마리아 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죽은 "성인들"에게 기도하며, 성도들의 통공의 신앙을 가졌을 지라도,조상숭배의 맥락에서는 죽은 사람의 혼에 제사하고 기도하는 일에는 동의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유교의 제의가 효와 조상숭배가 뗄수없이 연합되어 있어서 둘중에 하나만을 기호대로 선택할 수 없다는데 있다. 위에서 고찰한 것과 같이 유교제례의 숭배대상은 사영임을 논란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예수회나 천주교의 교황청이 중국의 조상숭배를 효성으로써 선택한 것은 온당한 처사가 아니었다. 가톨릭 선교사들은 우상숭배를 제거하지도 못했고,그렇다고 조상숭배가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납득할 만하고 근거있는 진술도 하지 못했다. 문제는 조상제사를 포기함으로써 효성을 실행하는 일이 좌절될 때 선교사들이 그 대응책을 제시하지 못했다는데 있다. 천주교는 오히려 더 우상을 만들어 놓고 숭배한다는 비난까지 받았던 것이다.46) 기독교가 부모공경에 대한 계명 뿐만이 아니라,제사때에 울어나오는 지성과 효를 실행할 만큼한 실제적인 해답을 주지 못하면,유교권 선교에서 우상숭배를 제거하기에 큰 어려움이 될 것이다. 세속화시대의 개인과 사회윤리적이 부패와 타협,이것이 교회안에 있을 때 어떻게 교회가 효를 실행하겠는가? 우리가 우상숭배와는 타협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10계명대로 산 부모님께 효도를 해야한다.부모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 이것이 조상숭배문화권에서의 최선의 길이다. 그러므로 선교사업에 앞서 교회의 복음화운동과 회개운동이 더 불가피하게 여겨진다.

닫는 글

한가지 주목해야할 일은 R.Bohren이 지적한 바와 같이 관혼상제 의식 집행은 Kerygma와 Koinonia와 Diakonia의 선교적 기회이며,교회와 세상의 동반자적 기회로써 좋은 가능성을 열고 있다는 것이다.47) 우리는 유교의 제례가 기독교의 접촉점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효성과 우상숭배의 혼합문화권에서 우리가 대답해야할 선교학적 문제는 이것이다. 1) 기독교가 유교의 효행을 능가하는 행위를 보여주어야 한다. 2) 종교적 감정을 충족시킬 수 있는 참 신앙 대상을 분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3) 사랑의 감정을 충족시킬 수 있는 혈연적인 공동체를 형성할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H.Kraemer가 지적한대로 유교나 다른 고등종교들은 보통 교리적 차이나 대립을 별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관용주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그들의 전통적인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절대적이어서, 그들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는 죄악으로 여긴다.이들은 진리문제가 나오면 곧 바로 투쟁적이 되고 핍박한다.그것은 진리 때문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동기로 일어난다.Kraemer는 이러한 비관용성 (Undrldsamkeit)를 "가상적 관용"또는 "표면적 관용"(Schein-Duldsamkeit)이라고 칭한다48).그러므로 현지인 신자들은 핍박을 받을지라도 그 공동체 속에 머물러서 더욱 사랑을 실천하고 효행으로 본이 됨으로써,기독교인들이 전통문화의 파괴자라는 오해를 벗도록 해야할 것이다. 유교 문화권 선교사들은 사랑의 실천으로 현지인들의 오해와 불신앙을 극복해 나가고, 사역할 때마다 부딪히고 복음과 함께 배척을 당할 것이 아니라 속히 충실한 현지인 제자들을 양육하여, 그들로 하여금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함으로써 전달자와의 이질감을 충족시켜야 할 것이다. 선교사는배척을 받을지라도 복음은 살아남아야 한다. 주의 말씀이 흥황하던 두란노 서원에서는 현지인들이 와서 자복하고 마술사들이 스스로 그 책을 불사르니 은 오만이나 되었다(행19:18하)는 기록이 있다. 먼저 진리를 받아들이면 그들 스스로가 악습을 폐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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