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30

알라딘: 천부경 - 삼일신고 참전계경 최민자 [국민강좌] 천부경과 국학

알라딘: 천부경


천부경 - 삼일신고 참전계경   
최민자 (지은이)모시는사람들2006-05-25

양장본
904쪽

책소개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을 정치(精緻)한 학문적 기준과 영적 체험을 기반으로 주해한 책. 재야사학의 대상으로만 다루어졌던 이들 경전에 강단학자의 주해를 통해 새롭게 접근했다.

지은이는 천부경은 단순한 종교 경전이 아니라 정치적 권위의 상징인 동시에 나라를 경영하는 정치 대전이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보편적 지식 체계에서 수용할 수 있는 학술적 접근을 통한 선행 연구가 없어 연구자들의 접근이 어려웠으며, 그 결과 학계의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고 말한다.

책은 수천 년 동안 국가 통치엘리트 집단의 정치교본이자 만백성의 삶의 교본으로서 전 세계에 찬란한 문화, 문명을 꽃피우게 했던 천부경이 유일신 논쟁, 창조론- 진화론 논쟁, 유물론-유심론 논쟁, 신-인간 이원론, 종교의 타락상과 물신 숭배 사조, 인간소외 현상 등에 대해 그 어떤 종교적 교의나 철학적 사변이나 언어적 미망에 빠지지 않고 단 81자로 명쾌하게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먼저 원문을 번역하고, 지은이가 이해한 방식으로 이를 해설하였으며, 원문 번역에 대한 주해를 붙이고, 그리고 각주에서 해당 경전들과 비교 분석함으로써 천부경이 전 세계 종교와 사상의 원류라 할 만한 진경(眞經)임을 밝혀낸다. 특히 삼일신고의 중핵을 이루는 '성기원도 절친견 자성구자 강재이뇌(聲氣願禱 絶親見 自性求子 降在爾腦)'에 대한 해석석은 이 책에서만이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참전계경의 경우에도 단순히 문자로 풀지 않고 저자의 영적 체험을 기반으로 한 정치(精緻)한 해석을 통하여 그 이치를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예를 들면 신체의 아홉 구멍(九竅)과 마음의 아홉 구멍의 관계, 사람이 태어날 때 여덟 가지가 다르고 아홉 가지가 특수하게 다른 것에 관한 해설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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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문 : 하늘소리

1부 : 천부경

1장 : 천부경의 이해
2장 : 천부경의 주해

2부 : 삼일신고

3장 : 삼일신고의 이해
4장 : 삼일신고의 주해

3부 : 참전계경

5장 : 참전계경의 이해
6장 : 참전계경의 주해

부록 : 참고문헌의 요체, 색인



책속에서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에서 마음을 밝히는 가르침을 근본으로 삼은 것은 정치의 주체인 인간의 마음이 밝아지지 않고서는 밝은 정치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밝아진다고 하는 것은 내재적 본성인 신성을 깨달아 우주만물이 결국 하나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고 이는 곧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들 경전의 가르침은 재세이화,홍익인간의 이념과 경천숭조(敬天崇祖)의 보본(報本)사상 속에 잘 구현되어 있으며, 참전계경에서는 그러한 성통공완(性通功完)에 이르는 길을 366사로써 제시하고 있다. 이들 세 경전을 관통하는 핵심 사상인 천,지,인 삼재의 조화는, 생명현상을 개체나 종(種)의 차원이 아닌 생태계 그 자체로 인식하여 이 우주가 상호 작용하는 네트워크체제로 이루어져 있다는 현대 물리학의 생태적 관점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가 정치의 요체를 사람이 아닌 제도와 정책에 둠으로써 인간소외현상을 야기시켰다면, 이들 사상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대립성과 분절성을 지양하고 융합과 조화에 그 토대를 둠으로써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인간소외문제를 극복할 수 있게 할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추천글
한민족의 3대 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을 정치(精緻)한 학문적 기준과 영적 체험을 기반으로 주해한 책. 그동안 '국학(國學)' 또는 '재야사학'의 대상으로만 다루어졌던 이들 경전이 강단학자의 주해를 통해 새롭게 접근됨으로 해서, 천부경이 전 세계 종교와 사상의 원류라 할 만한 진경(眞經)임을 밝혀내었다.
- 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인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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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자 (지은이) 

● 現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 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학교(Arizona State University) 정치학 석사
● 영국 켄트대학교(University of Kent at Canterbury) 정치학 박사
● 중국 북경대학교 객원교수
● 중국 연변대학교 객좌교수(客座敎授)
● 1994년 장보고 대사의 해외거점이었던 중국 산동성에 장보고기념탑 건립(건립위원장, 현지 문물보호단위로 지정)
● 1999년 중국 훈춘에서 유엔측 대표, 중국 훈... 더보기
최근작 : <동학과 현대 과학의 생명사상>,<호모커넥투스>,<전라도 전주 동학농민혁명> … 총 21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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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수천 년 동안 국가 통치엘리트 집단의 정치교본이자 만백성의 삶의 교본으로서 전 세계에 찬란한 문화․문명을 꽃피우게 했던 천부경은, 현재 지구촌의 종교세계와 학문세계를 아우르는 진리 전반의 문제와 정치세계의 문명충돌 문제의 중핵을 이루는 유일신 논쟁, 창조론-진화론 논쟁, 유물론-유심론 논쟁, 신-인간 이원론, 종교적 타락상과 물신 숭배 사조, 인간 소외 현상 등에 대해 그 어떤 종교적 교의나 철학적 사변이나 언어적 미망에 빠지지 않고 단 81자로 명쾌하게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집일함삼(執一含三)’과 ‘회삼귀일(會三歸一)’을 뜻하는 일즉삼[一卽多]/삼즉일[多卽一]의 원리에 기초한 천부경의 천․지․인 삼신일체 사상은 유일신 논쟁을 침묵시킬만한 난공불락의 논리구조와 ‘천지본음(天地本音)’을 담고 있다.

즉 본체-작용-본체와 작용의 합일, 정신-물질-정신과 물질의 합일, 보편성-특수성-보편성과 특수성의 합일이라는 천부경 81자의 변증법적 논리구조는 천ㆍ지ㆍ인 삼재의 융화를 바탕으로 일즉삼ㆍ삼즉일의 원리가 인간 존재 속에 구현되는 함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삼신불(三身佛: 法身․化身․報身)이나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 聖父․聖子․聖神), 그리고 동학의 내유신령(內有神靈)/외유기화(外有氣化)/각지불이(各知不移)는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의 중핵을 이루는 천/지/인 삼신일체의 가르침과 그 내용이 같은 것이다.

또한 본서는 선교(仙敎),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천도교[동학] 등 전 세계 경전과 현대 물리학 - 특히 양자론 - 과의 비교 분석을 통해 동서고금 사상의 정수를 섭렵케 함으로써 무수한 진리의 가지들이 결국 하나의 진리로 되돌아감을 보여주고 있다.

일즉삼/삼즉일의 원리에 기초한 세 경전의 가르침은 인간 존재의 세 중심축이랄 수 있는 종교와 과학과 인문 즉 신과 세계와 영혼의 세 영역(天地人 三才)의 분절성을 극복하게 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세 중심축’의 연관성 상실을 초래한 근대 서구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치유할 수 있는 묘약(妙藥)을 함유하고 있다. 이는 전일적이고 생태적이며 영적(靈的)인 현대 물리학의 새로운 실재관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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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걸음 2006-05-21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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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뿌리를 찾아서)/국학원 국민강좌
[92회 국민강좌] 
천부경과 국학 - 성신여대 교수 최민자님 -

海天(해천) 2018. 2. 2. 09:22


https://www.youtube.com/watch?v=Hj5GuldoBH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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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회 국민강좌] 천부경과 국학
.- 성신여대 교수 최민자님 -


1. 프롤로그: 왜 오늘날 천부경인가?

전일적 패러다임(holistic paradigm)으로 압축되는 현대 과학의 핵심 원리는 동양에서는 이미 9,000년 이상 전부터 정립된 것이다. 약 6,000년 전 환웅천황 때 녹도(鹿圖) 문자로 기록되어 정치대전이자 삶의 교본으로서 활용되었던 『천부경(天符經)』의 삼신일체(三神一體, 三位一體) 사상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전일적 패러다임을 기용하여 혼돈 속의 질서를 찾아내려 하는 복잡계(complex system) 과학 또한 그 당시에 정립되어 실생활에서도 활용되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1부터 10까지 숫자들의 순열 조합으로써 삼라만상의 천변만화(千變萬化)에 질서를 부여하는 천부경의 3화음적 구조――즉, 생명의 본체-작용-본체와 작용의 합일――자체가 복잡계인 생명계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정립될 수 없는 것이다. 우주만물은 모두 간 것은 다시 돌아오고 돌아온 것은 다시 돌아간다는 자연의 이법(無往不復之理)은 일체가 초양자장에서 나와 다시 초양자장으로 환원한다는 양자이론과 조응한다. 이렇듯 상생상극하는 천지운행의 현묘한 이치는 양자역학의 비국소성의 원리, 복잡계의 특성인 프랙털 구조, 자기조직화, 비평형, 비가역성, 비선형성, 초기조건에의 민감성, 요동(fluctuation)현상, 창발현상을 함축하고 있어 생명의 기원과 세상사의 신비를 연구하는 오늘날의 복잡계 과학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천부경은 가장 오래된 ‘새것’이다. 수천 년 동안 정치대전이자 삶의 교본이었던 천부경을 배제하고서는 국가적?민족적 정체성을 논할 수도, 국학을 논할 수도 없다. 천부경은 우리의 국혼(國魂)이기 때문이다.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부도지(符都誌)』에서도 밝히고 있거니와, 천부경은 상고시대 아시아의 대제국 환국(桓國)이 세계의 정치적?종교적 중심지로서, 사해의 공도(公都)로서, 세계 문화의 산실(産室) 역할을 하게 했던 ‘천부보전(天符寶典)’이었다. 환인, 환웅, 단군[환검] 이래 전해진 천부사상의 가르침은 천신교(天神敎), 신교(神敎), 수두교(蘇塗敎), 대천교(代天敎, 부여), 경천교(敬天敎, 고구려), 진종교(眞倧敎, 발해), 숭천교(崇天敎?玄妙之道?風流, 신라), 왕검교(王儉敎, 고려), 배천교(拜天敎, 遼?金), 주신교(主神敎, 만주)1) 등으로 불리며 여러 갈래로 퍼져 나갔다. 파미르고원의 마고성에서 시작된 우리 민족은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에 이르는 과정에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가 우리의 천부(天符) 문화를 세계 도처에 뿌리내렸던 것이다. 아시아의 대제국 환국(桓國)의 12연방 중 하나인 수밀이국(須密爾國)은 천부사상으로 오늘날 4대 문명이라 일컬어지는 수메르 문화를 발흥시켰으며, 특히 수메르인들의 종교문학과 의식이 오늘날 서양 문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진 바이다.

이처럼 우리의 천부사상이 동?서양의 문화?문명을 발흥시킨 모체였다는 사실이 점차 밝혀지고 있는 것은, 하늘(天)과 성(性)과 신(神)이 하나로 용해된 천부사상에서 전 세계 종교와 사상 및 문화가 수많은 갈래로 나누어져 제각기 발전하여 꽃피우고 열매를 맺었다가 이제는 다시 하나의 뿌리로 돌아가 통합되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도 세계 각지의 신화, 전설, 종교, 철학, 정치제도, 역(易)사상과 상수학(象數學), 역법(曆法), 천문, 지리, 기하학, 물리학, 언어학, 수학, 음악, 건축, 거석(巨石), 세석기(細石器), 빗살무늬 토기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천부 문화의 잔영을 찾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인류의 문화?문명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약 9,000년 이상 전부터 찬란한 문화?문명을 꽃피웠던 우리 상고사와 그 중심축으로서 기능하였던 천부사상을 아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 국학의 뿌리랄 수 있는 천부사상의 르네상스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상합하는 이치로 새겨볼 수 있을 것이다.

‘집일함삼(執一含三)’과 ‘회삼귀일(會三歸一)’2)을 뜻하는 일즉삼[一卽多]?삼즉일[多卽一]의 원리에 기초한 천부경의 삼신일체 사상은 일체의 생명이 천?지?인 혼원일기(混元一氣)에서 나와 다시 그 하나인 혼원일기로 돌아감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초월성인 동시에 내재성이며, 전체성[一]인 동시에 개체성[多]이며, 우주의 본원인 동시에 현상 그 자체인 생명의 본질을 일즉삼?삼즉일의 논리구조로써 명징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존재의 자기근원성과 전일성에 대한 천부사상의 인식은 일체의 생명이 자기생성적(self-generating) 네트워크체제로서의 우주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 근원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본 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자본자근(自本自根)?자생자화(自生自化)하는 ’하나(一)‘3)의 조화, 즉 생명의 파동적 성격을 깨닫게 되면 본체계와 현상계를 회통(會通)하게 됨으로써 내재와 초월, 본체와 작용이 결국 하나임을 알게 된다. 신과 인간의 이분법적 도식화는 본체계와 현상계를 상호 관통하는 ’하나(一)‘의 조화 작용을 깨닫지 못한 데 기인한다. 일체의 이분법이 폐기된, 이른바 ’무리지지리 불연지대연(無理之至理 不然之大然)‘4)의 경계에 이르면, 삼라만상은 ‘하나(一)’가 남긴 자국들에 불과한 것임을 알게 된다.

수천 년 동안 국가 통치엘리트 집단의 정치대전이자 만백성의 삶의 교본으로서 전 세계에 찬란한 문화?문명을 꽃피우게 했던 천부경은, 현재 지구촌의 종교세계와 학문세계를 아우르는 진리 전반의 문제와 정치세계의 문명충돌 문제의 중핵을 이루는 유일신 논쟁, 창조론?진화론 논쟁, 유물론?유심론 논쟁, 신?인간 이원론, 종교적 타락상과 물신 숭배 사조, 인간 소외 현상 등에 대해 그 어떤 종교적 교의나 철학적 사변이나 언어적 미망에 빠지지 않고 단 81자로 명쾌하게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천도(天道)에 부합하는 천?지?인 삼신일체 사상은 유일신 논쟁을 침묵시킬만한 난공불락의 논리구조와 ‘천지본음(天地本音)’5)을 담고 있다. 무수한 진리의 가지들이 결국 하나의 진리로 되돌아감을 보여주는 천부사상은 인간 존재의 ‘세 중심축’―종교와 과학과 인문, 즉 신과 세계와 영혼의 세 영역(天地人 三才)―의 연관성 상실을 초래한 서구적 근대의 극복을 통해 신문명의 개창 원리로 작용할 수 있다. 오늘날 천부경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천부경의 전래

『천부경』은 우주만물의 창시창조와 생성, 변화, 발전, 완성의 원리를 밝힌 총 81자로 이루어진 우리 민족 으뜸의 경전이다. 한민족 정신문화의 뿌리이며 세계 정신문화의 뿌리가 되는 큰 원리를 담고 있어, 『삼일신고(三一神誥, 敎化經)』, 『참전계경(參佺戒經, 366事, 治化經)』을 비롯한 우리 민족 고유의 경전과 역(易)사상에 근본적인 설계원리를 제공하였다. 「태백일사(太白逸史)」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등에는 천부경이 지금으로부터 약 9,000년 전 천제 환인(桓仁)6)이 다스리던 환국(桓國)7)으로부터 구전된 글이라고 나와 있다.8) 그 후 약 6,000년 전 배달국 시대에 환웅(桓雄)이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문자인 사슴 발자국 모양을 딴 녹도 문자로 기록케 하여 전하다가, 단군조선에 이르러서는 전문(篆文)으로 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천부경은 훗날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전자(篆字)로 기록해 놓은 옛 비석을 보고 다시 한문으로 옮겨 서첩(書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한 것이다.9) 최치원 이후 천부경은 조선 중종 때 일십당주인(一十堂主人) 이맥(李陌)이 태백일사(太白逸史)에 삽입하여 그 명맥을 잇다가 1911년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가 『환단고기(桓檀古記)』를 편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환단고기』는 신라 승려 안함로(安含老)의 『삼성기(三聖記)』와 원동중(元董仲)의 『삼성기(三聖記)』, 고려 말 행촌(杏村) 이암(李?)의 『단군세기(檀君世紀)』, 고려 말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의 『북부여기(北夫餘紀)』 그리고 이암의 현손인 이맥의 『태백일사』를 합본한 것으로 우리 환단(桓檀: 환국ㆍ배달국ㆍ단군조선)의 역사를 알게 해 주는 소중한 역사서이다. 『환단고기』 내의 여러 기록들은 천부경이 환국ㆍ배달국ㆍ단군조선ㆍ부여ㆍ고구려ㆍ대진국[발해]ㆍ고려로 이어지는 우리 역사 속에서 국가적으로 매우 중시되었던 경전임을 밝히고 있다.

「삼성기」ㆍ「단군세기」ㆍ「태백일사」 등은 천부경이 우리 국조(國祖)이신 환웅천황과 단군왕검의 제왕적 권위를 상징하는 징표로서 천제의 즉위식이나 제천의식 거행시 ‘천부보전(天符寶篆)’으로 받들어진 성스러운 경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만세의 경전으로서 만백성을 교화시키고자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쳤다는 사실도 전하고 있다. 말하자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하는 정치 교본이자 임금과 신하와 백성 모두가 반드시 숙지해야 할 삶의 교본이었던 셈이다. 삼성기에는 환웅천황이 개천하여 백성들을 교화할 때 천경(天符經)과 신고(三一神誥)를 강론하여 크게 가르침을 편 것으로 나와 있고,10) 단군세기에도 ‘천경’과 ‘신고’가 나오고 있고 천부경의 핵심 원리인 삼신일체를 의미하는 ‘집일함삼’과 ‘회삼귀일’의 천계(天戒)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마한세가(馬韓世家) 상편에는 윷놀이를 제정하여 환역(桓易)을 풀이한 것이 바로 신지 혁덕이 기록한 ‘천부(天符)’의 남긴 뜻이라고 하고 있고,11) 번한세가(番韓世家) 상편에는 ‘천부왕인(天符王印)을 차면 험한 곳을 지나도 위태롭지 않고 재앙을 만나도 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고 하고 있다.12)

이 외에도 천부경의 원리나 가르침을 거론한 자료는 적지 않으며, 그 명칭 또한 천부경 또는 천경(天經), 진경(眞經), 천부(天符), 천부진경(天符眞經), 천부보전(天符寶篆), 천부보전(天符寶典), 금척(金尺) 등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천부경ㆍ삼일신고ㆍ참전계경을 압축한 『단군팔조교(檀君八條敎)』, 환국ㆍ배달국ㆍ단군조선에 이르는 역사와 천부경의 원리를 총 180자로 밝힌 『신지비사(神誌秘詞)』, 박제상의 『징심록(澄心錄)』 15지(誌) 가운데 제1지인 「부도지」,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징심록추기(澄心錄追記)』13), 발해국 시조 대조영(大祚榮, 高王)의 아우 반안군왕(盤安郡王) 대야발(大野勃)의 『단기고사(檀奇古事)』 등에 천부경의 원리와 그 가르침이 나타나 있으며,14) 또한 조선 정조(正祖) 5년 구월산 삼성사에 올린 치제문(致祭文)15)에 ‘천부보전(天符寶篆)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사실적 물증이 없으나 우리 동국역사에서는 신성하게 일컬어지며 세세로 전해져 왔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천부경의 지속적인 전승과 심대한 가치를 짐작케 한다.

『천부경』 원문 81자가 모두 수록된 문헌과 자료로는 대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이맥의 『태백일사』에 실려 있는 <태백일사본(太白逸史本)>이다.

둘째, 1916년 계연수가 묘향산 석벽에서 발견, 이를 탁본하여 이듬해인 1917년 단군 교당에 전했다는 <묘향산 석벽본이다.

셋째, 성균관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는 『최문창후전집(崔文昌候全集)』의 <최고운 사적본(崔孤雲 事跡本)>이다.

넷째, 조선 말 대유학자 노사 기정진(盧沙 奇正鎭) 계통으로 전해온 <노사전 비문본(蘆沙傳 碑文本)>이다.

다섯째, 고려말 6은(六隱) 중의 한 사람인 농은 민안부(農隱 閔安富)의 <농은 유집본(農隱 遺集本)>이다.


여기에는 천부경 81자가 한자의 초기 형태인 갑골문(甲骨文, 象形文字)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것이 <태백일사본>과 <묘향산 석벽본>으로 이 양 본은 전문이 모두 일치하고 있다.


3. 천부경의 구조

『천부경』은 본래 장이 나누어져 있지 않았지만, 필자는 천부경이 담고 있는 의미를 보다 명료하게 풀기 위하여 상경(上經) 「천리(天理)」, 중경(中經) 「지전(地轉)」, 하경(下經) 「인물(人物)」의 세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상경 「천리」는 ‘一始無始一析三極無盡本 天一一地一二人一三 一積十鉅無?化三’ 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하나(一)’의 본질과 무한한 창조성, 즉 천?지?인 혼원일기인 ‘하나(一)’에서 우주만물이 나오는 일즉삼(一卽三)의 이치를 드러낸 것이다. 중경 「지전」은 ‘天二三地二三人二三 大三合六生七八九 運三四成環五七’ 로 구성되어 있으며, 음양 양극간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으로 천지운행이 이루어지고 음양오행이 만물을 낳는 과정이 끝없이 순환 반복되는 ‘하나(一)’의 이치와 기운의 조화(造化) 작용을 나타낸 것이다. 하경 「인물」은 ‘一妙衍萬往萬來用變不動本 本心本太陽昻明人中天地一 一終無終一’ 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주만물의 근본이 ‘하나(一)’로 통하는 삼즉일(三卽一)의 이치와 소우주인 인간이 대우주와 합일함으로써 하늘의 이치가 인간 속에 징험(徵驗)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천부경의 구조를 본체와 작용의 관계로 살펴보면, 상경 「천리」의 ‘천일 지일 인일(天一地一人一)’은 한 이치 기운을 함축한 체(體)의 측면을 나타낸 것으로 법신(法身) 즉 내유신령(內有神靈: 내재적 본성인 신성)과 조응하는 것이라면, 중경 「지전」의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天二三地二三人二三)‘은 한 이치 기운의 조화 작용인 용(用)의 측면을 나타낸 것으로 화신(化身) 즉 외유기화(外有氣化: 氣化의 작용)와 조응하는 것이고, 하경 「인물」의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은 한 이치 기운과 하나가 되는 상(相)의 측면을 나타낸 것으로 보신(報身), 즉 각지불이(各知不移)와 조응하는 것이다. 내유신령과 외유기화는 법신과 화신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본체와 작용의 관계로서 그 체가 둘이 아니므로 모두 일심법이다. 법신[內有神靈]이 염(染)?정(淨) 제법(諸法)을 포괄한 가능태라면, 보신은 자성(自性)의 자각적 주체가 되는 구체적 현실태이다. 천부경의 ‘천일 지일 인일’?’천이삼 지이삼 인이삼‘?’인중천지일‘은 천ㆍ지ㆍ인 삼신일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천부경의 천ㆍ지ㆍ인 삼신은 불교의 법신?화신?보신, 동학의 내유신령?외유기화?각지불이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자성[一心]의 세 측면16)을 나타낸 것이다.

이렇듯 천부경 81자는 본체-작용-본체와 작용의 합일[정신-물질-정신과 물질의 합일, 보편성-특수성-보편성과 특수성의 합일]이라는 ‘생명의 3화음적 구조(the triad structure of life)’17)로 이루어져 있는 까닭에 필자는 천부경을 생명경(生命經)이라고 부른다. 생명의 본체를 나타낸 「천리」는 한 이치 기운(一理氣)18)을 함축한 전일적인 의식계[본체계]이고, 그 작용을 나타낸 「지전」은 한 이치 기운의 조화 작용을 나타낸 다양한 물질계[현상계]이며, 본체와 작용의 합일을 나타낸 「인물」은 이 양 세계를 관통하는 원리가 내재된 것으로 한 이치 기운과 하나가 되는 일심의 경계이다. 다시 말해 본체가 내재적 본성인 신성[靈性]이라면, 작용은 음양의 원리와 기운의 조화(造化) 작용으로 체(體)를 이룬 것이다. 본체가 초논리?초이성?직관의 영역인 진제(眞諦)라고 한다면, 작용은 감각적?지각적?경험적 영역인 속제(俗諦)이다. 본체와 작용의 합일은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의 경계이다. 천부경의 실천적 논의의 중핵을 이루는 ’인중천지일‘은 천?지?인 삼신일체의 천도가 인간 존재 속에 구현된 것으로 인간의 자기실현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러한 ‘생명의 3화음적 구조'는 생명의 본질 자체가 본체와 작용의 상호 관통에 기초해 있는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통섭적 세계관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다. 그 비밀은 인간의 의식 확장에 있다. 의식이 확장되면 본체와 작용이 하나임을 자연히 알게 된다.

생명은 본래 분리 자체가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절대유일의 하나인 까닭에 때론 ‘하나’(님) 또는 유일신[유일자]이라고 명명되기도 한다. 우주의 실체는 의식이므로 절대유일의 하나는 곧 하나인 마음, 즉 일심[自性]이다. 천부경의 삼신일체(三神一體: 天?地?人), 불교의 삼신불(三身佛: 法身?化身?報身),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 聖父?聖子?聖靈), 그리고 동학 「시(侍: 모심)」의 세 가지 뜻인 내유신령?외유기화?각지불이는 모두 일심의 세 측면19)을 나타낸 것이다. 체(體)?용(用)?상(相)을 나타낸 불교의 삼신불, 기독교의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그리고 동학의 내유신령?외유기화?각지불이는 모두 천부경에서 말하는 ‘생명의 3화음적 구조’, 즉 천?지?인 삼신과 조응한다. 이러한 변증법적 논리구조는 천ㆍ지ㆍ인 삼재의 융화를 바탕으로 일즉삼ㆍ삼즉일의 원리가 인간 존재 속에 구현되는 함의를 지니고 있다.


4. 천부경의 요체 및 주해

『천부경』은 천ㆍ지ㆍ인 삼신일체의 천도를 밝힘으로써 ‘천부중일(天符中一)’20)의 이상을 명징하게 제시한 전 세계 경전의 종주(宗主)요 사상의 원류라 할 만한 진경(眞經)이다. 여기서 삼신일체[三位一體]란 각각 신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작용으로만 삼신(三神)이며 그 체는 일신[唯一神]이다.21) 말하자면 ‘하나(一)’인 혼원일기[唯一神]에서 천ㆍ지ㆍ인 셋[三神]이 갈라져 나온 것이므로 천ㆍ지ㆍ인이 각각 있는 것이 아니고 작용으로만 셋이라는 뜻으로 천ㆍ지ㆍ인 삼신이 곧 유일신이다. 이는 곧 유일신의 실체를 밝힌 것으로 그 유일신이 바로 천ㆍ지ㆍ인 혼원일기인 ‘하나(一)’, 즉 ‘하나’님[天主?ALLAH?Brahma?道]이다. 궁극적 실재인 ‘하나(一)’는 그 자체는 생멸하지 아니하면서 만유를 생멸케 하고 또한 그 자체는 무규정자[道常無名]이면서 만유를 규정하며 만유에 편재해 있는 무시무종의 유일자[唯一神, 道]이다. 이미 9,000년 이상 전부터 모든 종교와 진리의 모체가 되어 온 우리의 신교(神敎)는 바로 이러한 일즉삼?삼즉일의 원리에 기초한 삼신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천부경을 관통하는 신교적 사유의 특성은 한마디로 대통합이다. 이는 전일적이고 생태적이며 영적(靈的)인 현대 물리학의 새로운 실재관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반목과 갈등은 생명의 본체인 유일신의 실체를 직시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무시무종(無始無終)이며 무소부재(無所不在)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인 생명의 본체인 유일신[天主?하늘(님)]은 곧 우리의 참본성이다. 천ㆍ지ㆍ인 삼신은 참본성, 즉 자성의 세 측면을 나타낸 것이다. 참본성을 알지 못하고서는 인간의 자기실현은 불가능한 까닭에 모든 경전에서는 그토록 우상숭배를 경계했던 것이다. 참본성이 바로 절대유일의 ‘참나’인 유일신이다. 따라서 유일신은 특정 종교의 신도 아니요 섬겨야 할 대상도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며 우주만물 그 자체다. 참본성(性)이 곧 하늘(天)이요 신(神)이다.

천부경에서 근원적 일자(一者)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냥 ‘하나(一)’라고 한 것은 무수한 진리의 가지들을 하나의 진리로 되돌리기 위한 우리 국조의 심원(深遠)한 뜻이 담겨진 것이다. 유일신 논쟁은 단순히 종교 차원이 아닌 우리 삶 속에 뿌리박은 심대한 문제이다. 삶과 종교, 종교와 종교, 학문과 종교의 화해를 통해 진정한 문명이 개창될 수 있기 위해서는 유일신 논쟁이 명쾌하게 종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체의 생명이 하나인 혼원일기에서 나와 다시 그 하나인 혼원일기로 돌아가는 이치를 통해 우리 인류 또한 천지에 뿌리를 둔 ‘한생명’임을 직시하게 하고, ‘중일(中一)’의 실천적 삶을 기반으로 한 재세이화ㆍ홍익인간의 이상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천부경은 단순히 우리 민족 고유의 경전이 아니라 모든 종교와 진리의 모체가 되는 인류의 경전이다. 우주의 순환, 천체의 순환, 생명체의 순환, 그리고 의식계의 순환과 더불어 일체 생명의 비밀을, 그 어떤 종교적 교의나 철학적 사변이나 언어적 미망에 빠지지 않고 단 81자로 열어 보인 천부경이야말로 모든 종교와 진리의 진액이 응축되어 있는 경전 중의 경전이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상편에서는 하늘의 기틀과 마음의 기틀, 땅의 형상과 몸의 형상, 그리고 사물의 주재함과 기(氣)의 주재함이 조응하고 있음22)을 보고 천ㆍ지ㆍ인 삼신일체의 천도가 인간 존재 속에 구현(人中天地一)되어 있음을 명징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삼라만상의 천변만화가 모두 한 이치 기운의 조화 작용인 까닭에 ‘하나(一)’와 우주만물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를 잡아 셋을 포함하고 셋이 모여 하나로 돌아가는 것(執一含三 會三歸一)’이라고 한 것이다. 필자가 천부경을 하늘의 이치(天理)와 땅의 운행(地轉)과 인물(人物)이라는 주제로 삼분하여 조명하는 것은 『천부경』이 천?지?인 삼재의 융화에 기초하여 하늘(天)과 사람(人)과 만물(物)을 ‘하나(一)’로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분류는 천부경을 보다 자세하게 풀이한 삼일신고의 내용과도 부합되는 것이다.


① 상경(上經) 「천리(天理)」

상경 「천리」에서는 근원성?포괄성?보편성을 띠는 영원한 ‘하나(一)’의 본질과 무한한 창조성, 즉 천?지?인 혼원일기인 ‘하나(一)’에서 우주만물이 나오는 일즉삼(一卽三)의 이치를 드러내고 있다.

一始無始一 析三極無盡本

“‘하나(一)’에서 우주만물이 비롯되지만 시작이 없는 ‘하나(一)’이며, 그 ‘하나(一)’에서 천?지?인 삼극이 갈라져 나오지만 근본은 다함이 없다”는 뜻이다. 궁극적 실재인 ‘하나(一)’에서 우주만물이 비롯되지만 그 ‘하나(一)’는 감각이나 지각을 초월해 있으며 인과법칙에서 벗어나 자본자근?자생자화하는 절대유일의 ‘하나(一)’23)인 까닭에 시작이 없는 것이라 하여 ‘일시무시일’이라고 한 것이다. 시작이 없다는 것은 곧 끝이 없다는 것이며,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하나(一)’에서 천?지?인 삼극이 갈라져 나오지만 그 근본은 다함이 없는 것이라 하여 ‘석삼극무진본’이라고 한 것이다.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하늘의 본체(天一)가 첫 번째(一)로 열리고, 땅의 본체(地一)가 두 번째(二)로 열리고, 인물(人物)의 본체(人一)가 세 번째(三)로 생겨나게 된다”는 뜻이다. ‘천일(天一)?지일(地一)?인일(人一)’은 ‘하나(一)’의 본체를 천?지?인 셋으로 나눈 것으로 그 근본은 모두 하나로 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一)’의 묘리(妙理)의 작용으로 천지가 열리고 인물이 생겨나는 무위의 천지창조 과정을 일(一), 이(二), 삼(三)의 순서로 나타낸 것이다. 이는 『황극경세서(黃極經世書)』에서 자회(子會)에서 하늘이 열리고(天開於子), 축회(丑會)에서 땅이 열리며(地闢於丑), 인회(寅會)에서 인물이 생겨나는(人起於寅) 선천개벽24)이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한 것과 일치한다.


一積十鉅 無匱化三

“‘하나(一)’가 쌓여 크게 열(十)을 이루지만 다시 다함이 없이 천?지?인 삼극으로 화한다”는 뜻이다. ’하나(一)‘의 묘리(妙理)의 작용으로 우주만물이 생장?분열하고 수렴?통일되지만 그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장?분열하는 천?지?인 삼극의 천변만화의 작용이 있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과정은 다함이 없이 순환 반복되는 것이라 하여 ’일적십거무궤화삼‘이라고 한 것이다. ’하나(一)‘가 묘하게 피어나 생장?분열하여 열매(十)를 맺게 되지만 다시 종자인 ’하나(一)‘가 되고 그 ’하나(一)‘에서 천?지?인 삼극이 갈라져 나오는 과정이 끝없이 순환 반복되는 것이다.


② 중경(中經) 「지전(地轉)」

중경 「지전」에서는 음양 양극간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으로 천지운행이 이루어지고 음양오행이 만물을 낳는 과정이 끝없이 순환 반복되는 ‘하나(一)’의 이치와 기운의 조화 작용을 나타내고 있다.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하늘에도 음양(二, 日月)이 있고, 땅에도 음양(二, 水陸)이 있으며, 사람에게도 음양(二, 男女)이 있어 음양 양극간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으로 천지운행이 이루어지고 우주만물이 생장?변화한다”는 뜻이다. 이는 『도덕경』에서 "도(道)는 일(一)을 낳고, 일은 이(二)를 낳으며, 이는 삼(三)을 낳고, 삼은 만물을 낳는다"25)라고 한 것과 그 맥을 같이한다. ‘도(道)’는 천부경의 ‘하나(一)’와 같고, ‘일(一)’은 천부경의 ‘천일 지일 인일’의 일(一)과 같이 도의 본체를 나타낸 것이며, ‘이(二)’는 천부경의 ‘천이 지이 인이’의 이(二)와 같이 도의 작용을 나타낸 것이고, ‘三’은 천부경의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의 삼(三)과 같이 사람과 우주만물을 나타낸 것이다.


大三合六 生七八九

“대삼(大三), 즉 하늘의 음양(天二)과 땅의 음양(地二)과 사람의 음양(人二)이 합하여 육(六)이 되고, 육(六)에 천?지?인 기본수인 일(一), 이(二), 삼(三)을 더하여 칠(七), 팔(八), 구(九)가 생겨나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一)’의 진성(眞性)과 음양오행의 정(精)과의 묘합으로 우주자연의 사시사철과 24절기의 운행과 더불어 감(感)?식(息)?촉(觸)이 형성되면서 만물이 화생하는 과정을 칠, 팔, 구로 나타낸 것이다.26) 칠, 팔, 구라는 숫자, 그리고 칠, 팔, 구를 합한 24절기의 24라는 숫자―이 숫자들의 순열 조합은 우주섭리가 써내려가는 생명의 대서사시요, 천?지?인 혼원일기가 연주하는 생명의 교향곡이다. 따라서 일체의 생명은 우주적 생명이다.

運三四 成環五七

“천?지?인 셋(三)이 네(四) 단계――‘하나(一)’, ‘천일 지일 인일’, ‘천이 지이 인이’,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를 운행하면서 오행[五]이 생성되고 음양오행[七]이 만물을 낳는 과정이 끝없이 순환 반복되는 원궤[環]를 이룬다”는 뜻이다. 천?지?인 셋(三)이 네(四) 단계를 운행하면서 오(五)와 칠(七)의 순환 고리를 이루는 이 숫자들의 묘합에서 하도낙서(河圖洛書)27)로 설명되는 음양오행, 팔괘가 나오고 천지운행의 원리가 나온다. 삼(三)과 사(四)의 수리(數理)를 운용하여 오(五)와 칠(七)의 순환 고리를 이루는 바가 표징하는 인간세계의 윤회란 오욕칠정이 낳은 우리 내부의 부정적인 에너지가 다함이 없이 카르마(業)의 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③ 하경(下經) 「인물(人物)」

하경 「인물」에서는 우주만물의 근본이 ‘하나(一)’로 통하는 삼즉일(三卽一)의 이치와 하늘의 이치가 인간 속에 징험(徵驗)되는 일심의 경계를 보여준다. 상경 「천리」가 가능태라면, 하경 「인물」은 구체적 현실태로서 ‘천부중일(天符中一)’의 이상을 제시한다.

一妙衍萬往萬來 用變不動本

“‘하나(一)’의 묘리(妙理)의 작용으로 삼라만상이 오고 가며 그 쓰임(用)은 무수히 변하지만 근본은 다함이 없다”는 뜻이다. 우주만물이 다 지기(至氣)인 ‘하나(一)’의 화현이고, 우주만물의 생성?변화?소멸 자체가 모두 ’하나(一)’의 조화의 자취이니, ‘하나(一)’의 묘리의 작용으로 삼라만상이 오고 간다고 한 것이다. ‘하나(一)’는 만유의 본질로서 내재해 있는 동시에 만물화생의 근본원리로서 작용하므로 그 쓰임은 무수히 변하지만 근본은 변함도 다함도 없는 까닭에 ‘용변부동본’이라고 한 것이다. 우주만물은 ‘하나(一)’에서 나와 다시 ‘하나(一)’로 복귀하므로28) ‘하나(一)’의 견지에서 보면 늘어난 것도 줄어든 것도 없다.


本心本太陽 昻明 人中天地一

“인간의 근본 마음자리는 우주의 근본인 태양과도 같이 광명한 것이어서, 이렇게 환하게 마음을 밝히면 천ㆍ지ㆍ인 삼신일체의 천도가 인간 존재 속에 구현된다”는 뜻이다. 환하게 마음을 밝힌다는 것은 본래의 자성을 회복하는 것이요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는 곧 소우주인 인간이 대우주와 하나가 되는 것으로 인간의 완전한 자기실현이다. 천부경의 진수는 ’인중천지일‘에 있다. 사람의 마음이 밝아지면 천?지?인 삼재의 조화의 열쇠는 저절로 작동하게 된다. 이 세상에서 새로이 이룰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본래의 자성을 회복하는 일만이 있을 뿐이다.


一終無終一

“(‘하나(一)’에서 우주만물이 비롯되고 다시) ’하나(一)‘로 돌아가지만 끝이 없는 영원한 ’하나(一)’”라는 뜻이다. 끝이 없다는 것은 곧 시작이 없다는 것으로, 무시무종의 영원한 ’하나(一)‘로 『천부경』은 끝나고 있다. ’일종무종일‘의 의미는 ’일시무시일‘의 의미와 사실상 같은 것임에도 굳이 대구(對句)를 사용한 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하나(一)‘라는 의미를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다함이 없는 생명의 순환 고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만유 속에 내재하는, 동시에 초월하는 이 ‘하나(一)’인 참자아를 깨닫게 되면 그 어떤 환영(maya)이나 슬픔도 없으며 죽음의 아가리로부터 벗어나 불멸에 이르게 된다.


V. 에필로그: 신문명의 도래

20세기 이래 새로운 문명의 도래에 대한 예단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근대적 인간은 인간 존재를 전체적 유기체로서가 아니라 육체 속에 내재하는 고립된 자아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도구적 이성’의 기형적 발달을 가져왔다. 오늘날 전 지구적 차원의 테러와 만연한 폭력현상은 오랜 탄성을 지닌 에고가 그 필연적인 소멸에 앞서 더 강력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동트기 전 어둠이 가장 짙은 것과 같은 이치다. 이 시대의 혼돈은 물질시대에서 의식시대로의 대전환기에 나타나는 불가피한 산고(産苦)다. 그러나 낡은 관념이 지배하는 사고의 형태들이 무너지고 의식의 변환을 경험한 사람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2010년대 초반부가 양자 변환(Quantum Shift)의 시기가 될 것이라는 예단도 나오고 있다. 새로운 문명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여는 신인류에 의해 건설될 것이다. 새로운 문명의 건설자인 21세기형 인간은 흔히 호모 레시프로쿠스(Homo Reciprocus: 상호 의존하는 인간)?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공생하는 인간)로 불린다.


새로운 우주론에서 우주는 ‘상호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에너지-의식의 그물망’이다. 양자파동함수(Quantum Wave Function)의 붕괴를 결정짓는 것은 바로 의식이며, 이는 ‘본질적 삶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현상을 통제하는 주체가 심판의 신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임을 의미한다. 신성과 이성이 조화를 이루었던 상고와 고대 일부의 제정일치시대, 세속적 권위에 대한 신적 권위의 가치성이 정립된 중세초기, 왜곡된 신성에 의한 이성의 학대가 만연했던 중세, 신적 권위에 대한 세속적 권위의 가치성이 정립된 근세초기, 왜곡된 이성에 의한 신성의 학대가 만연한 근대 이후 물질만능주의 시대를 거쳐 이제 우리 인류는 신성과 이성, 정신과 물질, 의식과 제도의 대통합시대를 열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그것은 곧 완전한 소통?자치?자율에 기초한 생명시대의 개막이다.

천부경이 마음을 밝히는 가르침을 근본으로 삼은 것은 정치의 주체인 인간의 마음이 밝아지지 않고서는 밝은 정치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밝아진다는 것은 내재적 본성인 신성을 깨달아 우주만물이 결국 하나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고 이는 곧 상생의 삶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천부경의 가르침은 재세이화?홍익인간의 이념과 경천숭조(敬天崇祖)의 보본(報本)사상 속에 잘 구현되어 있다. 천부사상은 생존의 영적 차원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생태적 지속성(ecological sustainability)을 띤 지구생명공동체의 구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에 대한 전일적 시각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생명가치를 활성화시키고 바람직한 생명문화가 뿌리내릴 수 있게 하는 선결 과제다. 현대 민주주의가 정치의 요체를 사람이 아닌 제도와 정책에 둠으로써 인간소외현상을 야기했다면, 천부사상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대립성과 분절성을 지양하고 상생과 조화에 그 토대를 둠으로써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인간소외문제를 극복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생명 패러다임으로의 이행을 위해서는 생명에 대한 온전한 앎을 높여가야만 한다. 진리에 대한 명료한 인식이 없이는 새로운 계몽시대를 열 수가 없다. 인류 의식의 성장으로 물신(物神)들이 황혼을 맞고 있는 지금, 만유의 중심에 내려와 있는 신성이 바로 신의 실체이자 우리의 참본성임을 직시함으로써 천·지·인 삼재의 융화에 기초한 진정한 문명을 개창하는 것이 문명의 대전환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시대적 과제다. 오늘날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 간의 문명 충돌의 본질은 종교 충돌이며 그 핵심에는 유일신의 존재가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 삶과 종교, 종교와 종교, 종교와 학문 간 불화의 단초가 되고 있는 ‘유일신’ 논쟁은 진리의 편린에 집착함으로 인해 큰 진리가 가려진 데서 오는 것으로 단순한 종교 논쟁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뿌리박은 심대한 문제다.

우리 모두는 생명과 평화로 가는 길을 찾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류와 우주자연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함께 인간과 지구에 대한 새로운 관계정립이다. 이제 인류의 사상사는 생명의 본체[의식계]와 작용[물질계]의 상호 관통이란 측면에서 전일적 패러다임에 의해 새로 씌어져야 한다. 현대 물리학의 눈부신 진보는 종교의 영역에 갇혀있던 동양적 지혜의 정수를 과학적으로 풀어냄으로써 보편적 지식체계로 거듭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물리(物理)와 성리(性理)를 통섭하는 보편적 지식체계는 여전히 구축되지 못한 채 생명에 관한 지식의 파편들만 난무하여 새로운 문명의 개창을 위한 생명문화의 창출이 궤도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의 인류가 처한 딜레마는 다양한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모두 생명에 관한 문제와 관련되어 있으며 또한 거기서 파생된 것이다. 천부경의 생명사상은 21세기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이 시대의 신곡이다.

진정한 문명은 내재적 본성인 신성에 대한 깨달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은 곧 우주만물의 전일성과 생명의 유기성을 깨닫는 것으로 천부사상의 중핵을 이루는 것이다. 문명의 대전환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천부사상은 전일적이고 생태적인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제시함으로써 서구의 기계론적 세계관의 근저에 있는 가치체계의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서구적 근대의 극복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미회(未會: 우주의 8월(陰))인 우주 가을로의 초입(初入)에서도 여전히 사상적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 인류에게 천부경은 ‘표월지지(標月之指)’로 다가서고 있다. 뉘라서 진리의 달을 가리키는 우리 국조(國祖)의 손가락을 외면하랴! 이 순간에도 천부경은 숫자로써 숫자가 끊어진 법을 보여 주고자 무진등(無盡燈)으로 타오르고 있다. 참으로 역사의 종언이 아니라 ‘하나(一)’의 원리가 용해되어 흐르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다. 천부학(天符學)으로 대표되는 우리 국학의 중흥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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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 [天符經과 國學]

○ 일시 : 2011년 2월 15일(화요일) 오후 7시
○ 장소 : 광화문 삼청동 입구 대한출판문화협회 4층(전화:02-735-2701~4)
○ 강사 : 최민자 (성신여대 교수, 동학학회 회장)
○ 문의전화 : 02-766-1110, 041-620-6700, 010-7299-6043

출처 : 국학원 http://www.kookhakwo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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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은 모든 종교와 진리의 모체가 되는 원리를 담고 있다.
물병자리
2009-06-23 16:38:48 │ 조회 1873


천부경은 모든 진리의 모체



천부경은 수천년 동안 국가 통치 엘리트 집단의 정치교본이자 민초들의 삶의 교본으로서 전 세계 찬란한 문화와 문명을 꽃피우게 했지요. 현재 문명 충돌의 중핵을 이루는 유일신 논쟁, 창조론과 진화론 논쟁, 유물론과 유심론 논쟁, 신·인간 이원론 등에 대해 그 어떤 종교적 교의나 언어적 미망에 빠지지 않고 단 81자로 명쾌하게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신여대 최민자(51·정치외교학) 교수가 우리 민족의 3대 경전을 주해한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모시는 사람들)을 펴내 주목된다. 그동안 이들 경전은 국학이나 재야 사학의 연구 대상으로만 다뤄졌으며, 주류 학계에 속한 학자의 주해서가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최 교수는 영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 국내 강단에서 오랫동안 정치학을 가르쳐 왔지만, 주변에서 ‘평화주의자’ 내지 ‘생태환경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장보고 대사의 해외 거점이었던 중국 산둥성에 ‘장보고 기념탑’을 건립하는가 하면, 민간인 신분으로 유엔평화센터(UNWPC) 건립 위원장을 맡아 북한·중국·러시아 3국의 접경지역인 두만강 하구 일원 2억여평을 환경생태지역으로 묶어 동북아시대의 세계평화 중심지로 탈바꿈시킬 초대형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한마디로 여걸이다.

천부경에 주해를 달기로 결심한 것은 지난해 9월. 총 904쪽짜리 방대한 ‘천부경…’ 주해서는 5개월여 만에 완결됐다. 그럼에도 구절구절마다 독창적 번역 솜씨를 보이는 데다 학제적으로 펼쳐내는 해설이 명징해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천부경은 우리 민족을 교화하기 위해 9000여년 전 상고시대에 나온 교훈 경전으로서 내용이 81자로 압축돼 있으며, 태백산에 있는 단군전비를 통일신라시대 석학인 최치원(857∼?)이 당시 한문으로 옮겨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집일함삼(執一含三)’과 ‘회삼귀일(會三歸一)’을 뜻하는 일즉삼(一卽多)·삼즉일(多卽一)의 원리에 기초한 천부경의 천·지·인 삼신일체 사상이 유일신 논쟁을 해소할 만한 난공불락의 논리구조와 ‘천지본음(天地本音)’을 담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불교의 삼신불이나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의 중핵을 이루는 천·지·인 삼신 일체의 가르침과 그 내용이 같은 것이지요.”

최 교수는 정치, 사회, 과학, 역경, 양자역학, 천문지리, 각 종교 경전 등 수백권의 문헌을 참고하며 주해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원문을 번역하고 자신이 이해한 방식으로 이를 해설했으며, 원문 번역에 주해를 붙이고 각주에서 해당 경전들과 비교 분석해 놓았다.

천부경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고 의인화해 놓은 것이 360자의 ‘삼일신고’요 ‘참전계경’인데, 최 교수는 ‘삼일신고’의 중핵을 이루는 구절도 정치하게 해석해 놓고 있다.

“천부경은 단순히 우리 민족 고유 경전이 아니라 모든 종교와 진리의 모체가 되는 인류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 교수는 지구과학도 3차원, 4차원의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도 천부경에서 그 비밀의 열쇠를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진리는 모두 하나로 통한다”는 그는 전 세계 종교 통합의 열쇠가 천부경의 논리 구조에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종교는 꼭 필요한 과정이었으나, 다시 ‘이름 없는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 그는 구태여 이름을 달자면 ‘하나’라고 강조했다. “지구상의 위기는 인식의 위기입니다. 이 위기를 청산하려면 인식의 확장과 전환이 필요합니다.”

조만간 현재 초빙교수를 맡고 있는 중국 옌볜대로 돌아가 유엔세계평화센터를 건립하는 일에 박차를 가할 예정인 최 교수는 “제 책을 보고 논쟁이나 공개토론을 벌이자면 기꺼이 응하겠습니다”고 잘라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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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스피노자의 사상과 그 현대적 부활

알라딘: 스피노자의 사상과 그 현대적 부활


스피노자의 사상과 그 현대적 부활   
최민자 (지은이)모시는사람들2015-08-31




책소개

당대의 보수적인 철학계와 종교계로부터 신성을 모독한 무신론자로 비판받으면서도 철학과 정치학의 통섭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에 전력투구한 스피노자의 철학과 사상의 특질을 동서양의 사상 속에서 해명하고 그 현재적 의의를 재조명한 책. 스피노자는 오늘의 우리에게 미래지향적인 전망을 찾아갈 수 있는 통섭적인 세계관을 제공한다.

스피노자가 당대에 정치적으로나 종교적, 철학적으로 고난을 받은 이유는 그의 철학체계가 근대성과 탈근대성, 종교성과 탈종교성의 접합이라는 특질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피노자는 감정의 메커니즘을 구명함으로써 감정의 정글을 벗어나는 법을 알려주었고, 권력에 대항하는 철학을 전개함으로써 풀뿌리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펼쳐 보였다. 또한 최고 단계의 인식 방법인 직관지를 통해 교유하는 완전한 공동체로서의 코뮤니즘을 세우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스피노자는 인간에게서 신을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신에게서 인간을 해방시킴으로써, 신인류의 탄생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일원적 범신론으로 지칭되는 스피노자의 자연의 필연적 법칙성에 대한 이해는, 인간이 신과 소통하는 세상을 구가하고자 했으며, 바로 그 점에서 스피노자는 미래의 철학자이기도 한 것이다.

목차

제1부__ 스피노자의 사유체계와 존재론적 정치학

01 철학적 사색에 바쳐진 45년
02 『에티카』: 자유인의 삶을 향한 철학적 여정
03 『정치론』: 민주주의를 위한 ‘자유의 송가(頌歌)’

제2부__ 스피노자의 사상과 그 현대적 부활

04 스피노자 사상의 특질: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접합
05 스피노자와 동양사상과의 대화
06 스피노자 사상의 현대적 부활

책속에서
1. 억압과 독단과 불관용에 맞서 싸우며 자연의 필연적 법칙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신과 인간 본성에 관한 정치(精緻)한 분석을 통해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 인간과 신이 소통하는 세상을 구가하고자 했던 스피노자,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혁명가이자 네오휴머니즘의 구현자이다. 그는 학문적 영역에로 철수하여 세계를 단지 해석만 하는 다른 철학자들과는 달리 사변과 실천, 철학과 정치학의 통섭을 통하여 ‘다중’의 구성적 역량을 증대시킴으로써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에 전력투구한 철학자의 한 예로서 오래 기억될 것이다.

2. 스피노자의 통섭적 사유체계는 근대적인 동시에 탈근대적이며, 전체 존재계에 대한 포괄적?직관적 통찰인 동시에 개체의 완전한 인식이고, 실체와 양태의 필연적 관계성에 대한 완전한 통찰임을 보여준다. 근대성의 정초를 대안적 방식으로 제시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의 사상은 신앙과 이성의 분리를 주장하면서도 두 영역의 조화를 강조한다. 그의 정치적 자유 개념은 공화주의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지녔으며, 자연의 합리적 질서에 대한 참된 인식을 통해 정념을 극복하고 정신의 능동성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 레오 스트라우스는 스피노자를 최초의 자유민주주의 철학자로서 근대 정체(政體)를 정초(定礎)한 인물로 평가한다.

3. (스피노자의 대표작) <에티카>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신 또는 자연(Deus sive Natura)’의 질서에 대한 참된 인식과 사랑이다. 우리의 내면에서 자유와 긍정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게 되는 것은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 충만할 때이며, 그러한 사랑은 자연의 합리적 질서에 대한 참된 인식에서 나온다. 그런데 참된 인식을 위해서는 ‘신 또는 자연’이라고 부르는 실체의 본성과 구조를 파악해야 하므로 형이상학 체계를 포함해야 하고, 지성에 기초한 올바른 인식이 선행되어야 하므로 인식론을 포함해야 하며, 정념의 예속에서 벗어나야 하므로 심리학을 포함해야 한다. 그리하여 윤리학 및 도덕철학[정치철학]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최고의 인식 유형인 제3종의 직관지(直觀知)는 전체 존재계에 대한 포괄적?직관적 인식이며 개체의 완전한 인식이고 실체와 양태의 필연적 관계성에 대한 완전한 인식이다.

4. 스피노자 사상과 현대 과학의 생명사상과의 접합은 전일적 우주에 대한 통찰에서 드러나며, 생명의 ‘자기조직화’ 원리는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이 폐기된 창조성의 원리로서 생명의 전일성과 자기근원성을 본질로 삼는다. 스피노자의 사상과 철학은 우리 삶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인식의 빈곤 상태에서 기인하는 것임을 말하여 준다. 무지와 망상, 분노와 증오, 갈망과 탐욕, 시기와 질투, 교만과 불신 등이 참된 인식을 가로막는 마야의 장막이다. 그 어떤 고통이나 두려움도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의 정신체, 감정체가 지닌 색상에 의해 채색되고 형상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인간 본성과 감정의 힘에 관하여 논증하며 의식의 이행을 통한 참된 인식의 긴요성을 설파한 것이다.

5. 스피노자의 일원론적 범신론은 만물이 개별의 이(理)를 구유하고 있지만 그 개별의 ‘이’는 보편적인 하나의 ‘이’와 동일하다는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명제와 일맥상통한다. 또한 이일(理一)과 분수(分殊)를 통체일태극(統體一太極)과 각일기성(各一其性)으로 명쾌하게 설명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관점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슈가 되고 있는 보편성과 특수성, 전체성과 개체성의 합일을 표징하는 것이다. 스피노자 사상의 현대적 부활은 그의 철학체계 속에 나타난 신, 자연, 인간 그리고 자유와 행복에 대한 그의 주장이 지속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들이며, 그의 사상으로부터 오늘날에도 우리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 대안문명 건설의 단초가 거기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6. 스피노자의 체계에서 관념의 적합성은 지성에 비례하며 신의 무한 지성에서 극대화된다. 적합한 관념을 늘려간다는 것은 신의 무한 지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고 인식 및 이해 수준이 높아지는 것이어서 현상의 배후 원리를 통찰할 수 있게 되므로 세상사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진정한 자유와 지복(至福)의 삶을 구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7.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대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는 의식하지만 그 행위를 결정한 원인에 대해서는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를 자유라고 믿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예컨대, 젖먹이가 젖을 욕구하는 것, 성난 아이가 복수하려는 것, 겁쟁이가 도망하려는 것, 술주정뱅이가 횡설수설하는 것, 미치광이?수다쟁이?아이들의 충동적인 언행 등이 정신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한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을 통하여 이러한 정신의 결정이란 것이 한갓 충동에 지나지 않으며 신체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변화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정신의 결정[충동]과 신체의 결정이 본성상 동시에 일어나며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라고 말한다.

8.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 그리고 욕망의 세 가지 감정에서 파생되는 수십 가지의 감정―즉 욕망, 기쁨, 슬픔, 경탄, 경멸, 사랑, 증오, 애호[호감], 혐오, 헌신, 조롱, 희망, 공포, 안도(安堵), 절망, 환희, 회한[낙담, 양심의 가책], 연민[동정], 호의, 분노, 과대평가, 과소평가[멸시], 질투, 동정, 자기만족, 겸손, 후회, 오만[교만], 소심[自卑], 명예, 치욕, 동경, 경쟁심, 감사, 자비심, 분노, 복수, 잔인[잔혹], 겁[두려움], 대담[용감], 소심, 공황[당황], 공손함, 명예욕, 탐식, 음주욕, 탐욕, 색욕 등 48가지―을 연역적 형식으로 정밀하게 기하학적 심리학을 전개하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거나 회피하는 것, 또는 선택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자기보존의 노력에 의해 추동되며 동시에 자기실현의 힘을 증대시키기 위한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것을 추구하거나 선택하는 것은 그것이 기쁨을 가져오고 자기실현의 힘을 증대시킬 것이라고 의식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것을 회피하는 것은 그것이 슬픔을 가져오고 자기실현의 힘을 감소시킬 것이라고 의식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무엇이 유용하고 유용하지 않은지, 무엇이 더 좋고 더 나쁜지, 무엇이 최선이고 최악인지를 각자 자신의 정서로 판단하거나 평가한다는 것이다.

9. 스피노자는 인간이 자기보존의 욕구에 휘둘려 정념에 빠지면 예속 상태에 놓이게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의 가치판단이 각자의 정념에 근거하지 않고 적합한 인식에 근거할 경우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력이 회복되므로 개인의 자기실현의 힘 또한 증대되게 된다. 감정을 완화하고 억제하는 인간 역량의 결여를 스피노자는 예속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감정에 종속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아닌 운명의 지배하에 있으며 자신에게 더 좋은 것을 알지만 종종 더 나쁜 것을 따르도록 강제되는 만큼 운명의 힘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그 자신의 본성 안에서 고찰될 때는 완전하다거나 불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영원한 질서와 자연의 확고한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면 특히 그러하다.

10. 최고의 선(善)은 최고의 유익한 것이며 이는 곧 신에 대한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 단계에 이르면 외물(外物)에 대한 예속에서 벗어나게 되므로 이성에 의한 자기보존이 가능해지고 사리(私利)는 공리(公利)에 연결된다. 말하자면 자리이타(自利利他)가 실현되는 것이다. 자유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성의 명령’에 따라 자기 본성의 법칙에 의해서만 행동하는 자를 일컫는 것이다. 자연 안에는 무수히 많은 코나투스, 즉 자기보존의 노력이 있다고 언급한다. 개체성을 존속시키기 위한 노력들이 상호 대립하고 지속적으로 투쟁하며 인과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는 자신을 약화시키거나 파괴하는 것들에 대항하고, 정신은 자신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11. 덕 있는 사람, 즉 자유인은 슬픔의 감정을 억제할 수 있도록 더 강한 기쁨의 감정을 유발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자이다. 그 방법이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전체 존재계와의 관계 속에서 조직적으로 이해하고 총체적 진리를 통찰함으로써 슬픔이란 것이 인간의 유한한 능력으로는 피할 도리가 없는 것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정념을 완전히 이해하면 감정은 질적 변화를 일으키게 되므로 우리의 삶은 능동적인 것으로 변한다. 스피노자의 체계 속에서 덕, 능력, 이성, 적합성[타당성], 능동성, 자유, 행복은 동일한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스피노자가 감정의 스펙트럼을 인식의 영역과 결부시켜 정밀하게 다룬 것도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정념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을 도덕적 성장에 필요한 과정으로 이해를 하는 사람은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므로 모든 경험을 지성의 계발을 가져오는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12. 스피노자의 철학은 인간 감정의 구조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감정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하고 나아가 긍정적인 삶의 에너지를 공급해준다. 이성의 명령에 따라 생활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신적 본성의 필연성에서 생겨나고 자연의 영원한 법칙과 규칙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기 때문에 미워하거나 조소하거나 경멸할 만한 것도, 연민을 느낄 만한 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13. 우리가 갖게 되는 감정의 원인이 무엇이며 왜 그것을 경험하는지를 적확(適確)하게 지각할 때 부분적이고 우연적이며 수동적인 인지는 전체적이고 필연적이며 능동적인 통찰과 이해로 대체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정을 더 잘 인식할수록 그만큼 감정은 우리의 통제 하에 있게 되고, 또 정신은 그만큼 감정의 영향을 덜 받는다.” ... 스피노자는 “감정에 대한 참된 인식에 근거하는 치료법보다 더 탁월한 치료법은 우리의 능력 속에 없다. 왜냐하면 정신은 적합한 관념을 사유하고 형성하는 능력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역설한다.

14. 스피노자에 의하면 ... 최고의 인생이란 (신에 대한 참된 인식이자 사랑으로서의) 직관지를 가지고 자연의 필연적 법칙성을 이해하며 주체적이고도 능동적으로 사유하고 행동함으로써 지고의 자유와 행복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철저한 자유주의자였던 그는 자유를 추동해내는 지성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조화적 질서의 유지와 보편적 자유의 실현을 위해 공동의 법에 기초한 민주국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국가란 법과 자기보존의 능력에 의해 확립된 사회이며, 시민이란 국가의 법에 의해 보호되는 이들이다. 스피노자는 대중의 자율성과 능동성 그리고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는 비이성적이고 덕이 없는 국가로서 부도덕과 무질서와 불복종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았다.

15. 스피노자에게 민주주의란 단순한 유토피아적 이념이 아니라 정치적?법적 상태로서 도덕적?실천적 과제인 동시에 정치적 최고선이었다. 근대국가가 태동하던 격랑의 시기에 그가 철학적 사변에 머물지 않고 도전적인 정치 현안에 응답하며 개개의 인간 본성에 주목하여 전복적인 새로운 방향을 정초한 것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하다.

16. 스피노자의 경우 자연 상태에서 국가 상태로의 이행은 기본적 안전은 물론 이성적 삶과 보편적 자유의 실현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홉스와 차별화된다. ... <정치론>에서의 자유는 특히 정치공동체적 요소와 강하게 결부되어 나타난다. 즉 시민의 자유는 국가의 안전과 관계되고, 국가의 안전은 훌륭한 법률과 제도에 의해 보장된다는 것이다. 시민의 덕성이 충만하고 정치지도자가 절제와 지혜의 덕을 발휘하여 자신의 책무를 다할 때 로마가 번성했던 것처럼, 스피노자의 체계 속에서도 덕과 법제도는 지복(至福)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17. 1960년대 말 이후 스피노자 연구의 르네상스는 20세기 후반 프랑스 구조주의(또는 포스트구조주의) 운동과 긴밀하게 결부되면서 구조주의 운동의 철학적 기초를 제시하고 그 쟁점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다. 자크 데리다, 미셸 푸꼬,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자크 라캉, 롤랑 바르트, 들뢰즈 등의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근대 자유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형성한 인식의 주체, 사유의 주체로서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자아의 진리관을 거부하고 주체의 해체를 통해 주체와 객체의 명확한 구분이 사라지게 함으로써 포스트모던 시대를 열었다. ...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의 해체는 실체와 양태의 일원성에 기초한 스피노자의 관점과도 일맥상통한다. 스피노자 역시 오직 인간 행위가 능동인 경우에만 자유이고 현실적 주체인 것으로 보았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최민자 (지은이) 

● 現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 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학교(Arizona State University) 정치학 석사
● 영국 켄트대학교(University of Kent at Canterbury) 정치학 박사
● 중국 북경대학교 객원교수
● 중국 연변대학교 객좌교수(客座敎授)
● 1994년 장보고 대사의 해외거점이었던 중국 산동성에 장보고기념탑 건립(건립위원장, 현지 문물보호단위로 지정)
● 1999년 중국 훈춘에서 유엔측 대표, 중국 훈... 더보기
최근작 : <동학과 현대 과학의 생명사상>,<호모커넥투스>,<전라도 전주 동학농민혁명> … 총 2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근본적으로 대안적이고 구체적으로 혁명적인
스피노자의 철학

■ 이 책은
‘철학자들의 예수그리스도’라고 불리면서 당대의 보수적인 철학계와 종교계로부터 신성을 모독한 무신론자로 비판받으면서도 철학과 정치학의 통섭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에 전력투구한 스피노자(1632-1677)의 철학과 사상의 특질을 동서양의 사상 속에서 해명하고 그 현재적 의의를 재조명한 책이다.

■ 출판사 서평

비참할 땐 스피노자

오늘날 스피노자가 새롭게 주목받는 것은 그의 사상이 지금 이 시대에 특별히 유용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오늘날 물질적인 풍요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이 최악의 비참함을 면치 못하는 까닭은 인간의 무지와 망상, 분노와 증오, 갈망과 탐욕, 시기와 질투, 교만과 불신 등에 사로잡혀 존재의 본질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감정의 메커니즘을 구명함으로써 감정의 정글을 벗어나는 법을 알려주었고, ‘다중(多衆)’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권력에 대항하는 철학을 전개함으로써 풀뿌리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펼쳐 보였다. 또한 최고 단계의 인식 방법인 직관지(直觀知)를 통해 교유하는 완전한 공동체로서의 코뮤니즘을 세우고자 했다.

스피노자는 왜 현대적인가?

‘스피노자의 현재적 유용성’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이탈리아 출신의 철학자 네그리의 말을 빌려 이 책은 그것을 다음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스피노자는 모든 근대적 사고의 적대자이다. 억압적인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이고, 존재의 충만함을 기반으로 한 본원적 도약인 까닭에 오늘을 위한 사고의 출발선이다.
둘째, 스피노자는 삶과 죽음, 건설과 파괴 사이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슈가 되고 있는 자유의 가능성과 집단적 창조의 가능성으로서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셋째, 스피노자는 자유의 구성과 발전을 주관하는 능력인 윤리적 힘의 증대를 통해 존재론과 윤리학이 결합된 존재론적 정치학을 전개함으로써, 존재의 긍정과 지속 그리고 풍요로움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넷째, 우리의 내면에 자유와 긍정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게 되는 것은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 충만할 때라는 스피노자의 생각은 논리주의의 폐해에 시달리는 오늘날에도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스피노자의 철학이 갖는 영웅적인 면모, 즉 ‘자유의 욕망과 상상, 다중 속에서의 혁명, 그리고 상식의영웅주의’는 오늘날에도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특징 다섯 가지

이 책의 저자는 스스로 본서의 특징을 다음 다섯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스피노자의 통섭적 사유 체계를 규명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현안인 대안적인 통섭학과 공존의 대안사회 마련에 유익한 단서를 제공한다.
둘째, 스피노자 철학에서 제시하는 철학적 이상과 정치적 현실, 공동체와 개인의 접합 가능성을 탐색하여 관계성과 소통성의 심원한 의미를 일깨우고 자연의 합리적 질서에 대한 참된 인식을 촉구한다.
셋째, 실체와 양태, 신과 우주만물의 필연적 관계성에 대한 스피노자의 관점이 우주적 생명을 표상한 것이며 아울러 생명의 전일성과 자기근원성을 바탕으로 한 스피노자의 에코토피아적 비전이 현대 물리학의 전일적 실재관과 조응한다는 것을 밝힌다.
넷째, 스피노자와 동양사상과의 대화를 통해 스피노자의 철학체계에 대한 이해를 확장·심화시키고, 자기생성적 네트워크체제로서의 ‘참여하는 우주(participatory universe)’의 실상을 밝히며,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통제하는 주체가 심판자로서의 신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임을 밝힌다.
다섯째, ‘스피노자의 현재성’을 재조명하고, 생명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과학적 성찰을 통해 21세기 새로운 문명의 표준 형성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참된 인식은 신을 직관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신이 만물의 근원이자 만물에 내재하는 참본성으로, 신=자연=실체라고 주장한다. 신은 전체적이고 필연적이며 능동적인 통찰과 이해, 다시 말해 직관지로서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다. 신은 기쁨이나 슬픔의 감정 어느 것에 의해서도 작용 받지 아니하므로, 그 스스로는 아무도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않으며 관여하지 않는다. 신에 대한 사랑은 이성의 명령에 따라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이고,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사랑은 질투나 시기심의 감정으로 더럽혀질 수 없다. 오늘날 종교충돌과 문명충돌 그리고 정치충돌은 신에 대한 참된 인식과 사랑이 결여된 데서 오는 것이다. 신에 대한 사랑은 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즐긴다고 우리가 표상할수록 더 강해진다. 신에 대한 사랑은 모든 감정 가운데 가장 항구적이다. 신은 가장 적합한 관념이므로 오직 신[자연=실체, 참본성]에 대한 사랑 속에서만이 인간은 일체의 정념에서 해방되어 심신의 안정과 자유를 얻고 능동성을 발휘함으로써 지속적인 완전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민주주의란?

스피노자의 3대 저작 <정치론>, <신학정치론>, <에티카>는 전 지구적인 자유민주주의의 보편혁명을 추동한 원동력으로 평가된다. 스피노자는 자유란 천부 인권이 아니라 민주정이라는 정치공동체를 통해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정치사상은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수립하여 자유를 영속화 데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민주정은 자유를 제도화하기 위한 장치라고 본다. 따라서 국가란 개인의 자유 촉진에 복무해야 하는 기구이므로 법률로서 개인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는 민주정이 인간의 본성과 가장 잘 조화를 이루는 최선의 정부 형태임을 밝히고 있다.

현대 이후의 미래 세계와 스피노자가 가리키는 길

400년 전 인물인 스피노자는 지속가능한 지구 문명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오늘의 우리가 통섭적 세계관을 통한 미래지향적인 전망을 찾아갈 수 있도록, 통섭적인 세계관을 제공한다.
스피노자가 당대에 정치적으로나 종교적, 철학적으로 고난을 받은 이유가 된 것은 그의 철학체계가 근대성과 탈근대성, 종교성과 탈종교성의 접합이라는 특질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러한 특질이 오늘의 우리에게 보배로운 사상적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스피노자는 인간에게서 신을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신에게서 인간을 해방시킴으로써, ‘신인류’의 탄생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일원적 범신론으로 지칭되는 스피노자의 자연의 필연적 법칙성에 대한 이해는, 이난이 신과 소통하는 세상을 구가하고자 했으며, 바로 그 점에서 스피노자는 미래의 철학자이기도 한 것이다. 접기

Fearless Curiosity: Quakers and Native Americans




Fearless Curiosity: Quakers and Native Americans
9,444 views
Mar 2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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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us Video: When William Penn came to Pennsylvania, he and other Quakers had a unique approach when it came to Native Americans. 
But as Quaker painter Adrian Martinez discovered when researching for his project “Where Two Worlds Meet“, despite their peaceful approach, 
the Quakers didn't always have the best intentions in mind for the American Indians.

No weapns,
nothing to sell or buy.
No prostellising.
Wan't to know about them.
treating them with respect. = having a curiosity about them.
Who are you?
====
26 Comments
Sejin Lifeforce 生命
Add a public comment...
Jonathon Woodgate
Jonathon Woodgate
3 years ago
I’m finding this series of videos very interesting... I identify with more and more in each video... I think I’ve always been a Quaker deep down...

30


B Simpson
B Simpson
1 year ago (edited)
Two compliments:
For this remarkably educational QuakerSpeak video series. I am a sometime attender in Wooster, Ohio. 
And THANK YOU for so effectively holding the two sides, white interest and native disenfranchisement, in tension. The speaker didn’t go into detail, but if folks watching and reading are interested in more history, research the Walking Purchase.

8


Andrea Brewer
Andrea Brewer
3 years ago
Wonderful vlog.  Thank you for your honest assessment of the history between the two groups.

4


Way To Go Raw
Way To Go Raw
6 months ago
I so love that curiosity is respect! I have always thought that but never known anyone that thought the same! thank you

3


Philip May
Philip May
3 years ago
Thank you so much. I think you defined it so beautifully with 'When two worlds meet'. Not only two different worlds but our interior worlds. For you Native Americans and Quakerism, for me Haiku and Quakerism. Well done.

3


J B
J B
3 years ago
Thanks for the beautiful painting, and this informative video-much food for thought.

5


Page Page
Page Page
1 month ago
Fully aware. Hella long memory, especially when religions are involved. Fancy that.



Anthony McCarthy
Anthony McCarthy
1 month ago
The Jesuit reduction in and around Paraguay is something you should consider as something similar and longer lasting, though it was eventually destroyed by the rich and powerful.



Amauri Costa
Amauri Costa
2 years ago
Não existe Quaker no Brasil !

2


USS_Catfish_the_tv_show
USS_Catfish_the_tv_show
1 year ago
Sad for Brazil



mark lloyd
mark lloyd
2 years ago
So sad a crime

2


J Lord
J Lord
2 years ago
For the most part yes but William Pen was different he did not kill any Native Americans.

2


M H
M H
9 months ago
 @J Lord  But Penn's arrival upset their way of life.  Let's not sugarcoat it.

3


J Lord
J Lord
9 months ago
 @M H  i thougth he simply brougth land of them



harold Denton
harold Denton
2 months ago
People including the native American Indians conquered other tribes and nations. They were not exactly civilized themselves.



M H
M H
1 month ago
 @harold Denton  What's " civilized " ❓



Joaquin Alejandro Granados
Joaquin Alejandro Granados
1 year ago
The Native Americans were problematics persons and they fought with many other people becuase they feel very stressed with the civil war and they are the people who consist one of the more than five hundred (500) distinguished tribes that still endure as sovereign states with the United States' present geographical boundaries, and the Quakers were pacific persons and they live civilized all the time and the enjoy the life and were kind with the other people and they help them too, they teach the other people to read the bible and they always were a servicial too.

1


tch u lv lv po ha
tch u lv lv po ha
3 months ago
You are barking up so many misconceptions. We have sovereign nations and we honored the sovereignty of other tribes. We didn't fight that often, as we had ceremonial games we played in place of fighting such as Kabutcha Toli' and other games. Please stop.

3


Joaquin Alejandro Granados
Joaquin Alejandro Granados
2 months ago
 @tch u lv lv po ha  Oh sorry, I just fulfill one homework that i done of history but it happened de last year.

1


Mirza Ghalib
Mirza Ghalib
2 months ago
 @Joaquin Alejandro Granados  he's lying to you... games instead of war? whatever... native Tribes took slaves among other tribes they fought with....

1


Joaquin Alejandro Granados
Joaquin Alejandro Granados
2 months ago
 @Mirza Ghalib  Oh thanks for the information, now I understand that he is wrong, i wrote this opinion on youtube becuase it was an activity that i participated on history. Thank you.



M H
M H
1 month ago
 @Mirza Ghalib  .... and Quakers owned slaves too

Visions of a Strong Quaker Future - Friends Journal

Visions of a Strong Quaker Future - Friends Journal

Visions of a Strong Quaker Future
October 1, 2021

By Johanna Jackson


Illustration by virinaflora.

How Do We Build a Religious Society That’s Creative, Relevant, and Thriving in 30 Years?
As Friends, we are called to be imaginative and brave in envisioning the future. Don McCormick (FJ Feb. 2018) asked us: “Why is there no vision for the future of Quakerism?”  He offered several starting points. Ann Jerome wrote “Selling Out to Niceness” (FJ Sept. 2019) and described our urgent need for renewal. She called us to step into our witness in the world.

Cai Quirk and Alison Kirkegaard (FJ Feb. 2021) then asked us: “What could happen if we modern Friends embrace the heat of the transformative fire amongst us today?” They challenged us to welcome the heat of that fire. As Michael Sperger (FJ Aug. 2021) noted, “We seem convinced as a group that Quakerism is doomed to fade away.” However, “in every moment, the future contains a range of possible outcomes.”

We are at a crossroads. It is time to gather our creative power, admit the truth, and reinvent ourselves. We have the energy and ability to be thriving in 30 years. We need to form a collaborative vision and work intentionally toward our goal.

The Listening Project
The Listening Project (forwardinfaithfulness.org/listening) is a series of creative conversations rooted in love. JT Dorr-Bremme and I began holding listening sessions in 2020. We meet via Zoom and hold worship sharing. We’ve met with nearly 30 Friends from seven yearly meetings. We have found ourselves inspired, troubled, and altered by the stories shared.

While listening, we learned that the gifts of many younger Friends are blocked by the Quaker structure. (By “younger,” we typically mean Friends under the age of 55.) As we shared these findings with the wider community, some Friends expressed grief at our findings. Several older Friends had no idea that younger folks were running into barriers. Younger Friends shared relief to learn they were not alone in their experiences. There is certainly a generation gap in our community: some truths are easily buried or hidden from sight.

At Pacific Yearly Meeting annual sessions last year, Mica Estrada reminded us:

If we really want to be radically inclusive, we will have to surrender and let go of what is precious to us—perhaps power, perhaps things that make us feel comfortable, that make us feel safe in the world.

The path to spiritual renewal will involve some tough sacrifices. However, if we move in faith, then we will have all that we need.


Illustration by artinspiring.

Sources of Blockage
Sharing our findings across generations requires some delicate translating. The truth may be alarming to some Friends, while encouraging to others. 

In many parts of the United States, Quakers are saying and doing things that directly contribute to our own decline. If we want to be creative, relevant, and thriving in 30 years, we need to address these behaviors and take an honest look at our structures. How well do they meet the needs of the whole community?

The behaviors that block us include: conflict avoidance, politeness, gatekeeping, giving advice, and being dismissive. A number of Friends named these behaviors in listening sessions; they are not isolated trends. The blockage affects everyone, but it impacts Friends under 55 and newcomers in particular. Participating in a community is both distressing and fatiguing when these behaviors show up.

These behaviors stem from societal pressures in the United States, including age segregation, capitalism, competition for control, ageism, racism, and a tough generational transition. Quakers like to say that we are “in the world but not of it.” This axiom, however, overlooks the fact that we are influenced by societal pressures and norms, just like everyone else.

If we want Spirit to flow freely, we need to address our behaviors and their root causes. For now, I will focus on three barriers: age segregation, ageism, and giving advice. I will share quotes from participants in the Listening Project. Some people are quoted anonymously, others with names attached, according to their preference.

When we assume that young people want separate spaces, we lose opportunities to collaborate. We also shrink the depth and vibrancy of our community. 

Age Segregation
Older and younger Quakers tend to have very different experiences with the following: U.S. institutions, Quaker structure, job security, geographic mobility, and being heard inside their Quaker community. Age segregation constricts our ability to reach each other across this gap. It prevents us from showing up meaningfully for one another.

Often, we create age-specific groups with good intent. For example, young adult Friends (YAFs) can attend YAF programs and meet with their peers. Unfortunately, some YAF programs are scheduled at the same time as other Quaker programs. One participant from the Listening Project, Analea Blackburn, described the barriers that this creates. When she was 16, Blackburn wanted to attend business meeting at annual sessions. However, the schedule wasn’t set up for youth to easily attend. “I was a clerk for my age group,” she said, “so I had to stay in JYM [Junior Yearly Meeting] in the morning. I had to choose between being a clerk for the day or going to business meeting.” The structure blocked her from participating. If JYM had ended 30 minutes earlier, she could have attended the adult business meeting.

A second Friend echoed this perspective. In his yearly meeting, as well, younger Friends are often set apart from older Friends. He notes: “Our community, structures, clerks, and business meetings were separate.” When asked to co-clerk this YAF group, he felt torn. He reports wanting to be “in the big tent” with the larger community, but finding it difficult to turn down an opportunity to use his gifts. Leadership within his age group meant sacrificing his participation in the wider body.

When we assume that young people want separate spaces, we lose opportunities to collaborate. We also shrink the depth and vibrancy of our community. One participant from the Listening Project, Melinda Wenner Bradley, told us: “I don’t want to belong to the Religious Society of Grown-ups. We have a different community if it’s only adults and no one who grew up in our tradition. What is lost when there are no more children and teens—and the adults they grow into?” Her words speak to the grief that many meetings feel when they reach a point of having no children. “Unless we pay more attention to children and young people and their parents,” she asked, “what does the future hold for us?”

Integration and vibrance takes careful attention. Emily Provance, a Quaker minister, offers several resources for age integration on her blog, Turning, Turning. One 2017 essay, “What Multiage Inclusion Might Look Like,” pinpoints cultural barriers in the Quaker world and reimagines them transformed.

We can also assess our schedules at yearly meeting and other gatherings. What would younger Friends be blocked from attending because of conflicting schedules? I’d recommend asking young folks if they want to attend these events, and restructuring if needed. Though event planners cannot please everyone, this labor supports our mutual healing.


Illustration by artinspiring.

Ageism
Ageism, which includes a range of dismissive behaviors, is present in our Quaker community. JT and I heard from many Friends under 40 who reported feeling that their voices were not valued in Quaker spaces. This was unfortunate news to hear. One teen told us: “I feel like I can’t really speak my mind.” This Friend was referring to conflict aversion, yet their feelings were shared by others. Another teen said: “I love being a Quaker. I feel very connected to the Quaker community. But I do wish that I was more included, because right now it feels like an uphill struggle to have my voice heard.”

Like racism, ageism hampers our ability to live out true equality. A Friend in her 40s described some of the blind spots present in her community. She started attending Quaker meeting when she was 25. “I had a bachelor’s and a master’s degree, and I’d been in the Peace Corps. I was working full-time; I saw myself as an adult. It took me a while to realize that I was seen as a young adult by my meeting.” Several other Friends have echoed this sentiment in conversation. An older Friend once told me: “I never thought of myself as a junior adult.” In light of this feedback, JT and I have begun using the phrase “Friends under 55” to describe our peers.

Combating ageism requires that we face difficult truths: Quakers can be slow to meet the needs of Friends under 55. This includes parents, children, millennials, and Generation Xers. In listening sessions, many Friends under 55 described being on the fringe of their community. Often, Quaker groups can prioritize the needs, preferences, and voices of older Friends over the needs of younger Friends. 

We may need to examine how our communities operate. Whose needs are not being met? What are the unmet needs? In a listening session, Melinda Wenner Bradley noted that Friends can be quite adaptable in their efforts to welcome all people. However, Quakers are much more likely to rearrange things for an older Friend than a younger Friend. “I’ve never heard someone say, ‘There’s a six year old, who really needs X in order to participate.’ Those are words I’ve never heard.” If we want to grow, we need to meet the needs of parents and children.

Deep within, we yearn to be all together, even if we are blocked by certain barriers at times. We have tough work ahead of us, but we are well-equipped with knowledge and strong hearts. We can work collaboratively in the present.

Giving Advice
In our research, many teens report that they are receiving unwanted advice from adults rather than simple listening. When a teen shares about a life decision or circumstance, adults may interject with suggestions. This trend does not represent every adult, or every instance, but it is a noticeable pattern. This form of ageism creates frustrating barriers.

I have noticed this trend in my own life. I often find it easy to offer advice when I’m speaking with someone younger than me. Reflexively, I may be thinking, “This person is in distress. Surely I have some life experience that could help them!” I can forget to ask the person whether they actually want advice. When listening, I am more likely to lapse into offering solutions if the speaker is younger than I am.

With introspection, we can assess our individual patterns. How often do I give suggestions? When I offer advice, is it warranted? What motivates my behavior? These queries can guide our interactions. As my Al-Anon program reminds me, our goal is to give others “the dignity to live out their own consequences.”

In addition, we can build structures that encourage deep listening. New York Yearly Meeting launched a mentorship program that supports intergenerational friendship; Friends General Conference is beginning a similar program that starts this fall. Last January, Pacific Yearly Meeting invited younger Friends to speak to a round table of older Friends. In June, Friends in Philadelphia Yearly Meeting brainstormed about the future of Quakerism as part of their annual sessions. All of these efforts contribute to cultural change.

Some solutions are emerging outside of traditional boundaries. While exploring and brainstorming in a listening session, JT and I considered the idea of holding clearness committees with teens. A teen could bring their question forward, inviting older and younger Friends to join them in discernment. Friends across ages would have a clear reason to connect with a spiritual goal. With practice, older Friends seeking clearness could invite teenagers to accompany them on the journey as well. Teens could hold space and offer listening. This exchange would open new moments of witness.

Wouldn’t that be a radical change? We could accompany each other in ways that are relevant, loving, and grounded. JT and I are still developing this idea. We will post resources on our website (forwardinfaithfulness.org).

Radical Change
To build a strong Quaker future, younger Friends are calling us into radical equality. We can rise to that call. “As young adults,” Analea Blackburn said, “we don’t want to take over the meeting. We don’t want to suppress the voices of older Friends. But we want to be on the same level and respected in the same way. And I think that means changing the fundamental culture of Quakerism as we know it.”

To provide spiritual nourishment, we may need to shed excess structure. Last summer, Callid Keefe-Perry spoke to Friends at Three Rivers, a worship group that is radically reclaiming our faith. He asked: “Are we following the Power? Are we seeking life and life more abundant? Some practices might not be deadly, but they might not be life-giving. We need to move toward the Life.” What an invitation!


Illustration by Bro Vector.

Vision for the Future
This is the time to gather creative ideas and clarify our vision for the future. We can admit the truth. We can experiment, harnessing our collective power.

One vision of the future emerged during a listening session, and I’d like to share it here. Melinda Wenner Bradley described a powerful experience of unity in worship. While traveling, she felt something rise in her when the children returned to worship. As they trickled in, she felt and heard the message, “Now we’re all here.” It was a deep and riveting moment. Wenner Bradley says: 

That has become like a prayer that rises in me whenever I’m in a place and the children join us in worship. “Now we’re all here.” When we prepare the space and ourselves for all-ages community worship, those times are grounded and joyful. Community worship is gentle and filled with Light. It’s not jumping-around joy. Actually, what it really is, is being filled with love.

May we open ourselves to be filled with that love. Deep within, we yearn to be all together, even if we are blocked by certain barriers at times. We have tough work ahead of us, but we are well-equipped with knowledge and strong hearts. We can work collaboratively in the present.

Thank you to Analea Blackburn, Melinda Wenner Bradley, and Robin Ertl, who provided feedback on this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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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anna Jackson
Johanna Jackson is a millennial Friend. She travels in the ministry with JT Dorr-Bremme. Together, they focus on faithfulness and revitalization of Friends. Their website is forwardinfaithfulness.org. Johanna’s prior work on this topic includes “Preserving Quaker Heirlooms” (FJ May 2021) and “New Quaker Communities” (for Philadelphia Yearly Meeting, pym.org, June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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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thoughts on “Visions of a Strong Quaker Future”

George L Hebben
Plainwell, October 29, 2021 at 11:41 am
The statement “The truth may be alarming….” throws your entire article into doubt. You have no idea if what you think is the truth actually is the truth. It is alarming that you believe that it is, and more alarming that you present it as such. Perhaps “The information we present may be alarming..” might be more accurate.
.Be very, very, careful of using the universal “we”; such usage has become all too common in the speech and writing of Quakers. Statements that begin with “We need…” or “We ought…” are usually incorrect. No one can speak for all Quakers.

Reply


John Maynard
New York, New York, October 29, 2021 at 11:57 am
And then there is racism, which at 15th street means that Friends welcome some people who come to meeting and not others. Friends invite some newcomers and not others to social hours and committee and business meetings.
And then there is classism, for we are schooled, professionally working, educatedly speaking, and quietly dressed. Others stand out.
And then there is the fact that New York City meetings are mostly about money and property. No prestige any more. Speaking in meeting seems to involve all the great wisdom I have to share with others. Testimonies have more to do with history than with the present. Since Covid-19 shut down a night shelter for 15 people, closed the meeting house for AA and two other church groups, and separately incorporated the Friends’ Seminary elementary-through-high-school, being a Friend at 15th street has had only to do with Zoom meetings and talking, but not doing anything, about social issues.
And then there is language, specifically Friends’ use of certain words – possibly different in each Friends’ meeting – to describe what we are, or wish we were, doing. It shows up in introductory handbills about Friends that put history and jargon together and give newcomers no reason to return to meeting.

Reply


Johanna Jackson
State College, PA, October 31, 2021 at 10:01 am
Reader John Maynard points out many of the cultural problems that are present in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These include racism, classism, and a consolidation of power, as well as the barriers described in my article. Addressing barriers is urgent and important work! In writing for Friends Journal, I needed to let go of several meaningful topics in order to share about only a specific few.

Fortunately, other Friends out in the world can speak more directly to John’s concerns. These include:

— Ayesha Imani’s QuakerSpeak video, “How Does Culture Influence Quaker Worship?”

— Lisa Graustein’s article, “Noticing Patterns of Oppression and Faithfulness” (FJ, Feb 2020)

— Don McCormick’s interview with George Lakey, “The Middle Class Capture of Quakerism and Quaker Process” (FJ, Oct 2020)

All four of these Friends (four, since Don McCormick’s article draws heavily on wisdom from George Lakey) have helped me get clear on the kind of Quakerism I want to see in the future. They motivate me to change my life in subtle ways as I begin to work toward that future. Prophetic voices like these sometimes make me uncomfortable. However, they call me into the fullness of life.

Additional resources I would recommend include:

— FGC’s resources on challenging racism
https://www.fgcquaker.org/resource-type/challenging-racism

— New England Yearly Meeting’s resources on Inclusion in our Meetings
https://neym.org/inclusion-our-meetings

— Carlos Valentin’s vocal ministry on complacency in Western Friend
https://westernfriend.org/complacency

And on a final note, I think many Quakers can agree that no one article can cover every cultural problem present for liberal, unprogrammed Friends in a satisfying way. (If it did, I doubt that the article would fit inside the word limit for Friends Journal. It would probably be written by many people, revised continuously, grow longer than the Lord of the Rings series, and still be contentious.) However, I trust that in writing from my perspective, other people will rise and contribute their voices over time.

Reply


Don Hollister
Yellow Springs, Ohio, October 29, 2021 at 4:51 pm
And sit together in silence.

Reply


Johanna Jackson
State College, PA, November 9, 2021 at 2:42 pm
I agree with George Hebben about the importance of careful speech and avoiding generalizations. However, it is not possible to do the work that I am called to do, some of which is advocacy, without speaking somewhat to the overall picture. In writing this article, I decided to offer difficult truths that had been shared with JT and me. Some of my work in the Quaker community is about pointing out the prevalence of these patterns.

After reading George’s comment, I took a look at the use of the word ‘we’ in the article. I wondered: what would it be like if those statements were not true? Could some of them be untrue? I came up with a list of converse statements, some of which I will share here:

— Perhaps Quakers are not called to be imaginative and brave in the future.
— Maybe there are Friends who do not yearn to be together, or who feel they do not have strong hearts and knowledge.
— Maybe there are those among us who are unable to rise to the call of radical equality.

These statements may be true in some cases; however, they seem to undersell our potential as a group. A question I have remaining for George is this: What part(s) of the article conflict with your personal experience of Truth? What do you envision for a strong Quaker future? That is what I am really curious about.

Reply


Marian Dalke
Philadelphia, November 29, 2021 at 11:42 am
Thank you for your article, Johanna. I wonder how the doomsday Quakerism attitude is akin to our desperation of climate change/extinction? Many Black science fiction authors invite us to imagine a future beyond the present we currently know. There is so much despair and fear in our present- yet what if we do imagine what the future could be, and steward that into being as we’re best 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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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과 현대과학의 만남…과학과 영성 그리고 진화에 대한 통섭적 이해 - 대학지성 In&Out



동학과 현대과학의 만남…과학과 영성 그리고 진화에 대한 통섭적 이해 - 대학지성 In&Out






동학과 현대과학의 만남…과학과 영성 그리고 진화에 대한 통섭적 이해
최민자 성신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승인 2021.11.29

■ 책을 말하다_ 『동학과 현대과학의 생명사상』 (최민자 지음, 모시는사람들, 472쪽, 2021.09)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가 팬데믹 단계에 돌입한 이후 다양한 변이 바이러스, 즉 영국의 ‘알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베타’, 브라질의 ‘감마’, 전염력이 훨씬 강한 인도의 ‘델타’ 변이에 이어 최근에는 더 치명적인 페루발 ‘람다’ 변이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감염자가 급증하는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도 델타 변이 바이러스가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어 코로나 시즌 2가 시작되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더욱이 질병관리청 국립보건연구원의 ‘코로나 백신 접종자 면역원성 분석 중간 결과’에 따르면 바이러스를 무력화하는 중화항체(中和抗體)량이 백신별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는 데다가, 델타 바이러스에 대한 중화항체량이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과 화이자 백신 모두 각각 3개월 뒤와 5개월 뒤 접종 직후보다 절반 수준으로 낮아지는 등 백신효과의 지속력이 약화되고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미항공우주국(NASA) 등에 따르면 코로나 변이도 심각하지만 기후변화는 더 심각한 것으로 나타난다. 지구 온난화로 빠르게 녹고 있는 북극 빙하, 그린란드 빙하 그리고 남극 빙하가 바다로 유입되어 해류 순환 시스템을 바꾸고, 이로 인해 곳곳에 기후재앙이 닥칠 수 있다는 경고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과학계에서는 지구 자기장의 급속한 감소와 자기장의 교란으로 지자극(地磁極)의 역전 가능성, 즉 지구 극이동의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전망한다. 지자극 역전으로 북극(N극)과 남극(S극)이 뒤바뀌는 현상이 일어나면 방향 감각을 자력에 의지하는 수천 종의 새와 물고기와 포유동물이 대멸종에 직면할 수도 있다. 지자극 역전 시 지축의 변화도 함께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대변화가 동시에 일어나게 되면 대규모 지진과 쓰나미, 화산폭발 등으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절멸의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또 하나의 전 세계적 현상은 인공지능(AI) 기술의 진화와 그 역기능에 대한 고민 또한 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무기 통솔체계에서부터 민간 상업 분야에 이르기까지 인공지능의 응용범위는 실로 방대하며 심지어 정보의 바다 자체가 인공지능의 자유의지와 자의식이 싹트는 토양이 될지도 모른다며 인간과 인공지능을 구분하는 마지노선이 무너지게 될 수도 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따라서 인공지능에 대한 윤리적 제어를 통해 인간과 인공지능의 공존을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인공지능 윤리는 개발자와 과학자들의 윤리, 인공지능 시스템에 내재한 윤리 코드, 인공지능 시스템이 학습하고 추론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윤리 문제로 대별될 수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 닉 보스트롬은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인공 초지능이 등장하고 지능 대확산(intelligence explosion)이 일어나면, 특히 인류에게 비우호적인 초지능이 등장하면 인간의 운명은 이 초지능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 해결책의 단초를 ‘최선의 인간 본성’에서 찾고 있다.

이처럼 인류가 직면한 위기는 그 형태가 다양한 것 같지만, 그 본질은 모두 인간의 의식 패턴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 패턴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설정한 가이드라인은 실효성을 발휘할 수가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우주의 본질인 생명에 대한 몰인식에서 파생된 것이다. 생명은 곧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며 ‘불가분의 전체성(undivided wholeness)’이고 생명의 ‘자기조직화’에 의해 만물이 화생(化生)하는 것이니, 생명은 전일적이고 자기근원적이다. 이러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공심(公心)이 발현되어 ‘하나됨’을 자각적으로 실천하는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역사상 그 치열했던 철학적 사색과 과학적 탐색은 우주의 본질인 생명에 대한 규명을 통해서만이 모든 것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미망의 삶을 마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생명을 아는 것은 곧 ‘만사지(萬事知)’, 즉 만사를 아는 것이다.

세계는 지금 후천개벽의 티핑포인트로 다가서고 있으며 한반도는 이원성과 분리성을 대표하는 마지막 사례가 되고 있다. 지구 문명이 대변곡점에 이르렀다는 징후는 지구의 생태 위기와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부상, 그리고 과학과 영성의 접합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맞고 있는 지금, 우리 모두가 이 거대한 개벽의 파도를 타고 넘으려면 삶의 존재론적 반경을 설정하는 ‘세 중심축’, 즉 과학과 영성 그리고 진화에 대한 통섭적 이해가 절실히 요구된다. 동학에서 진화는 ‘내가 나 되는 것’을 향한 복본(復本)의 여정이다. 우리가 진화의 바다에서 의식의 항해(voyage of consciousness)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문명의 배’ 그 자체에 몰입한다면 생명과 평화의 문명은 개화할 수가 없다. 동학의 통섭적 사유체계는 포스트휴먼 시대가 처한 존재론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데 유효한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저서 『동학과 현대과학의 생명사상』(서울: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21)의 특징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동학과 현대과학의 사상적 근친성을 생명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학과 현대과학의 사상적 조우(遭遇)의 단초는 현대 물리학의 ‘의식(意識)’ 발견에 있다. 양자계(quantum system)가 근원적으로 비분리성(nonseparability) 또는 비국소성(nonlocality)[초공간성]을 갖고 파동인 동시에 입자로서의 속성을 상보적으로 지닌다는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적 관점은, 본체계와 현상계의 이분법이 폐기된 동학의 불연기연(不然其然)적 세계관과 상통한다. 또한 생명을 ‘하나’인 혼원일기(混元一氣, 至氣)로 보는 동학과, 우주만물을 잇는 에너지장(場) 즉 매트릭스(Matrix)로 보는 현대 물리학의 관점이, 생명을 비분리성·비이원성(nonduality)을 본질로 하는 영원한 ‘에너지 무도(energy dance)’라고 보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상통함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동학과 현대과학의 통섭적 생명관에 대한 비교 고찰을 통하여 생명의 본질 자체가 주체-객체 이분법이 폐기된 ‘참여하는 우주(participatory universe)’의 경계임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신성한 영(神靈, 靈性)’인 동시에 ‘기화(氣化, 物性)’로 나타나는 일심(一心, 天‧神‧靈)의 이중성을, 파동인 동시에 입자로 나타나는 양자계의 역설적 존재성과 회통(會通)시킴으로써 생명의 본체와 작용, 내재와 초월이 합일이며, 일심[에너지場, 매트릭스] 이외에 다른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네트워크가 상호작용하며 스스로 만들어내는 다양한 패턴을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라고 명명하는 복잡계 과학의 관점을, 만물화생(萬物化生)의 근본 이치를 제1원리인 하늘(天‧神‧靈)의 자기현현(self-manifestation)이라고 보는 동학의 관점에 조응시킴으로써 생명의 전일성과 자기근원성의 심원한 의미를 실제 삶의 영역에서 들여다볼 수 있게 한 점이다.

셋째는 생명 현상을 전일적 흐름, 즉 홀로무브먼트(holomovement)로 보는 양자물리학의 관점을, 생명의 본체[天‧神‧靈]와 작용[우주만물]의 묘합 구조로 보는 동학의 ‘시(侍: 모심)’ 철학에 조응시킴으로써 통합적 비전에 의해 세계가 재해석될 필요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극도로 분절되어 있는 현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순수한 전일적 양태로 이들을 다시 통합할 수 있는 비전이다. 존재의 세 차원인 물질계, 양자계 그리고 비국소적[靈的] 영역은 곧 우리 의식의 세 차원으로 각 상위 차원이 하위 차원을 포괄하는 동시에 초월하는 진화적 홀라키(evolutionary holarchy)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앎의 세 양태, 즉 육의 눈(肉眼), 마음(정신)의 눈(心眼), 영의 눈(靈眼)과 상호 조응한다. 과학혁명은 패러다임의 변환과 연계되어 있고 패러다임 변환은 사회구조 변화와 맞물려 의식의 진화를 위한 최적 조건의 창출과 관계된다.

넷째는 현실 세계가 부분이 전체를 포함하는 홀로그램과 같은 일반원리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홀로그램 우주론과, 우주만물[부분]이 하늘[전체]을 모시고 있다며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마저 넘어선 동학의 평등무이(平等無二)의 세계관이 물질의 공성(空性)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상통함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물질의 공성이란 우리가 물질이라고 지각하는 것이 에너지 진동에 불과하며 99.99%가 텅 비어 있다는 말이다. 이 우주는 상호 연관과 상호 의존의 세계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만물만상이 끝없이 상호 연결된 생명의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두 입자가 공간적으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비국소적으로(nonlocally)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매개체 없이도 즉각적으로 서로의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는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 이론과도 상통한다. 양자역학의 확률론적 해석과 결정론적 해석 간의 논쟁은 인식론상의 문제다. 양자역학이 물리학으로만 남을 수 없는 이유다. ‘양자 형이상학’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바로 여기에 동학과의 접점이 있다.


최민자 성신여자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미국 애리조나주립대학교(Arizona State University) 정치학 석사, 영국 켄트대학교(University of Kent at Canterbury) 정치학 박사, 중국 북경대학교 객원교수, 중국 연변대학교 객좌교수(客座敎授) 역임. 

저서로 
『무엇이 21세기를 지배하는가』, 
『빅 히스토리: 생명의 거대사, 빅뱅에서 현재까지』, 
『스피노자의 사상과 그 현대적 부활』, 
『새로운 문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한반도發 21세기 과학혁명과 존재혁명』 등 

다수가 있다.

2021/11/28

사티쉬 쿠마르 ― 땅 위를 걷는 사람 – 녹색평론

사티쉬 쿠마르 ― 땅 위를 걷는 사람 – 녹색평론
2000.07.01.
사티쉬 쿠마르 ― 땅 위를 걷는 사람
녹색평론 통권 제53호 데릭 젠슨

사티쉬 쿠마르(Satish Kumar)는 인도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마을의 한 점성가는 그의 인생은 끝없는 여행이 될 것이며,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예언은 맞았다.
쿠마르의 부모는 아힘사(생물을 해치지 않음)의 원칙에 철저한 자이나교의 신자들이었다. 쿠마르가 네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었는데, 이 일은 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후 쿠마르와 그의 어머니는 점점더 많은 시간을 절대적인 비폭력을 가르치며, 음식을 구걸하면서 이곳저곳을 떠도는 자이나교 승려들 곁에서 보냈다. 승려들은 어린 쿠마르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그가 ‘영적인 혼’을 지녔다고 했다. 아홉살 때 몇몇 친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쿠마르는 자이나교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모든 친지들과의 접촉을 끊고, 세속적인 관심을 멀리한 채 9년간 자이나교 승려로서 인도를 걸어서 횡단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세상과의 단절이 그의 영성을 더욱 깊게 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질식시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종단을 떠났지만 걷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그는 인도의 토지개혁운동에 참가하여, 수천명의 사람들과 함께 걸어다니면서, 불가촉천민들에게 땅을 나누어줄 것을 부유한 지주들에게 요청하였다. 그의 걷기가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여러해 뒤 그는 핵무기에 반대하기 위해 돈 한푼 없이 인도에서 모스크바, 파리, 런던 그리고 위싱턴 디씨까지 걸어서 갔다. 후에 그는 영국에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많은 성지 순례여행을 물론 걸어서 했다.
지난 25년간 쿠마르는 생태적 사고와 전통문화, 그리고 자연의 지혜를 탐색하는 격월간 잡지《리서전스》를 편집하고 발행했다.
쿠마르는 또한 영국의 슈마허 칼리지를 설립하는 데 관계했다. 이 칼리지는《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E. F. 슈마허의 생태적 시각을 조명하고 가르치는 강연들로 시작해서 전일적인 국제적 에콜로지 센터로 성장했다. 학생들은 생태적 관점에서 경제, 철학, 사회 및 과학적 주제들을 공부한다. 학교가 지지하는 평등주의와 생태적 인식의 원칙을 실천하기 위해서 학생들과 선생들은 요리에서 빨래까지 모든 일들을 같이 하며, 함께 살고, 먹고, 일한다.
쿠마르는 그의 자서전《목적지 없는 길》을 포함한 많은 책들을 편집하고 저술했다. 그는 영국의 노스 디본에서 그의 아내 쥰 미첼과 같이 살고 있다.

나는 삼월의 어느 맑은 날 샌프란시스코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그를 만났다. 그가 막 방송을 마친 참이었다. 거기서 우리는 작은 카페로 걸어가 케이크 한조각을 앞에 두고 앉았다. 나는 그의 온후함과 사소한 것으로부터 곧바로 생태적 문제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 곧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내가 미처 녹음기를 켜기도 전에 그는 생태적 문제뿐만 아니라 완전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데릭 젠슨)

* * *



쿠마르 나는 매 순간을 창조적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예전에 내가 썼던 것이나 말했던 것으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현재를 살고, 항상 주의를 집중하며 산다는 거지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과 듣는 것, 보는 것들을 항상 의식하는 겁니다. 내 주위와 정신과 감정에 무감각해지지 않고, 항상 깨어있는 것 말입니다.

젠슨 그건 너무 많은 일이 아닌가요?

쿠마르 그렇습니다. 그러나 고된 일은 아니죠. 무감각하게 만드는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죠. 창조적인 일이고, 그래서 도전적이며 즐거운 일입니다. 삶을 ‘벼랑’에서 살기 시작하면, 그래서 진정한 위험을 감수하면서 산다면, 매 순간이 모험이 됩니다. 물론 매우 힘든 삶의 선택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그런 삶을 통해 일 자체로 활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삶이 정해진 틀속으로 들어가버리면 ― 수입, 집, 생활, 책 등 모든 게 정돈되고, 계획되고, 조직된다면 ― 일의 양은 적어지겠지만, 아마 … 글쎄요, 당신의 느낌이 어떨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나라면 불만족스러워질 겁니다.

젠슨 어떻게 이런 삶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쿠마르 중국인들이 어떻게 만리장성을 쌓았습니까? 벽돌 한장을 놓고 그 위에 다시 한장을 놓았던 겁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핵무기에 반대해서 평화행진을 하면서 인도에서 모스크바, 파리, 런던, 워싱턴 디씨까지 걸어간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걸음씩, 한걸음씩 걸었던 겁니다. 도보여행을 하거나 소설을 쓰거나 인생을 살아가거나 모든 긴 여정들은 끈질기고 지속적인 작업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시스틴 성당의 천장을 보면 “굉장하구나.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지?” 하고 감탄하게 됩니다만, 그 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한번 붓질을 하고 그 다음에 또 한번의 붓질을 한 겁니다. 매번 여기에는 어떤 색을 넣을 것인지, 어떤 질감을 나타낼 것인지 자문하면서 말입니다. 그게 창조적인 과정입니다.
예술작품을 창조해내는 일과 삶을 만들어나가는 행위는 매우 유사합니다. 책을 한권 쓰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일단 종이를 앞에 두고 앉아서 문장 다음에 문장, 문단 다음에 문단, 페이지 다음에 페이지를 계속 쓰는 겁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이죠. 순간 순간, 하루 하루, 일년 다음에 일년, 그렇게 삶이 다할 때까지 사는 겁니다. 삶 역시 책이고, 예술작품이며, 창조적인 과정입니다.
이제 당신의 질문에 답을 하자면, 나는 활력있게, 주의를 기울이며, 열린 마음과 창조성을 통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딛어서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 62년에 걸친 여정이었죠. 그 여정은 항상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삶을 창조하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젠슨 그럼 의식적으로 당신의 삶을 만들어왔다는 말씀인가요?

쿠마르 언제나 그래왔죠.

젠슨 그 점이 예외적인 것이라는 걸 느끼십니까?

쿠마르 나는 다행하게도 어머니나 교육에 의해서 억압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홉살에 자이나교 승려가 되는 것 같은, 위험하고 모험적인 길을 걸을 기회가 있었던 거죠. 그 당시에도 그것은 모험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예외적이라 할 수 있겠죠.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삶은 다 예외적인 겁니다. 만일 단순히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예술작품의 창조과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미 예외적인 것이 됩니다.

젠슨 삶의 과정이 바로 예술창조라는 개념은 여러 예술가들의 말을 연상시키는데요. 그런데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은 외부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만.

쿠마르 예술이 그런 식으로 세상과 분리된다는 건 매우 비극적인 일입니다. 나의 관점으로는 예술과 삶, 그리고 세상은 크게 보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스튜디오나 뭐 그런 곳에서 순간적으로 고립될 수는 있어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문화의 아주 커다란 오류입니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는 믿음 말입니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명상을 할 때 혼자 있다고 느끼기는 합니다만, 내가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건 아닙니다. 이런 점에 관련해 내가 즐겨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주의 모든 곳으로부터 고귀한 생각들이 내게 오게 하라. 그리고 그 보답으로 나의 고귀한 생각들이 온 세상으로 퍼지게 하라.”
책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도자기를 빚거나 혹은 인생을 살거나 모든 창조적인 예술가들은 보다 큰 세상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물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작가는 종이를 사용하는데, 그 종이는 나무에서 얻은 것입니다. 그 사람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음식을 소화합니다. 정신적, 감정적인 면에서도 작가는 사회를 들이마시고 있습니다. 예술은 우리 전체에 대한 반응이며, 그것을 사회에 보여주는 일입니다. 사회는 그에 대해서 반응을 합니다. 마치 우리가 나누고 있는 대화와 같죠. 당신이 질문을 하고 나는 거기에 대답을 합니다. 상호의존적이죠.

젠슨 만일 삶이 예술과 같다면, 삶은 대화라고 할 수 있습니까?

쿠마르 그렇습니다. 긴, 60년 동안의 대화이죠.

젠슨 누구와 말입니까?

쿠마르 타자들이죠. 이 타자들은 결국 모든 것입니다. 나무나 강, 새나 산, 배우자, 자식들, 조상들 모두입니다. 내 어머니 얘기를 했는데, 어머니도 이 대화 속에 있습니다. 죽어서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나의 스승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베다에 대해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 모두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삶은 과거와의 대화이고, 미래와의 대화입니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대화인 것입니다.

젠슨 당신의 생각들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것입니까?

쿠마르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나누는 얘기들은 바로 내 삶에서 직접 나온 것입니다. 내 삶의 대화는 죽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네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의 주검과 어머니가 울며 상복으로 갈아입으시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충격을 받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나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죽음이란 무엇인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젠슨 죽음이 삶의 대화를 시작하는 보편적인 출발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당신의 경우가 특별한 것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쿠마르 모두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특별합니다. 모든 대화가 모든 이들에게 있어서 각각 독특한 것입니다. 내 삶의 대화는 죽음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는, 내가 죽음의 공포와 그 존재, 그리고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세상을 버려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아홉살에 나는 자이나교 승려가 되었습니다.
자이나교는 약 2500년 전 인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자이나교는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해치지 않는다는 아힘사의 원칙에 굉장히 철저합니다. 그들은 비폭력주의자이고, 물론 채식주의자들입니다. 그러나 그게 모두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나는 입을 여덟겹의 천으로 가리고 다녔는데, 그 까닭은 공기중의 생물을 우연히라도 해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천을 오직 먹을 때만 풀 수 있었는데, 먹는 동안 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옷이나 다른 소지품들 ― 이불, 동냥그릇, 책들 ― 을 일일이 검사해서 벌레가 그 안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그리고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얻은 것은 없는지 확인했습니다. 매우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어서 벌레나 풀을 밟지 않도록 했고, 앞을 잘 볼 수 없는 밤에는 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실내에서도 내 앞을 부드러운 털로 쓸면서 움직였습니다.
승려들은 먹을 것을 구걸합니다. 규칙에 따라 우리는 문을 열어놓은 집에서 채소로 만들어진, 그리고 기쁘게 주는 음식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참을성을 기르기 위해서 다른 조건들이 덧붙여지기도 했습니다.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마하비르는 노예로 팔려서 한쪽 발은 집밖에 다른 한쪽 발은 집안에 묶여있는 공주에게서만 음식을 받겠다고 맹세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있어야 하고, 물에 불린 콩을 대나무 접시에 담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승려로서 나는 옷을 빨지 않았고 다 닳아서 헤져 못 입을 때까지 입었습니다. 목욕을 하거나 양치질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느날 스승 옆에서 머리를 긁어 벼룩이 몇마리 떨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스승은 생물을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에 그 벼룩들을 다시 머리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젠슨 섹스는 어떻습니까?

쿠마르 금지됩니다. 섹스는 세속의 것입니다. 자이나교에서는 목샤 ― 영혼의 구원 ― 를 얻기 위해서는 모든 욕망과 몸에 대한 집착과 관계를 버려야 한다고 믿습니다. 남편이나 아내, 아버지나 어머니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인간들 사이의 사랑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젠슨 제게는 상당히 끔찍하게 들리는군요.

쿠마르 그것은 자이나교의 죽음에 대한 반응입니다. 어떻게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가? 만일 삶이 삼사라 ― 탄생과 죽음의 끊임없는 순환 ― 라면 자이나교 승려의 목표는 그 순환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젠슨 왜 자이나교를 떠났습니까?

쿠마르 주된 원인은 내 친구 하나가 마하트마 간디에 관한 책을 준 것이었습니다. 친구에게 종교적인 책이 아니면 읽을 수 없다고 했더니 그 책은 매우 깊은 의미에서 종교적인 책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읽었습니다. 간디는 바로 지금 이곳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현재의 삶과 세계에서 사람을 분리시키려는 종교는 단순한 현실도피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신을 대면하기 위해 승려는 이 세상에는 등을 돌려야 한다는, 내가 배운 바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었습니다.
큰 도시에 처음 가게 되었을 때 또다른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 도시에서 우리를 안내하던 사람은 지팡이 속에 큰 칼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나는 스승께 물었습니다. 스승은 “우리는 칼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승려가 아니지 않느냐. 그는 세상과 타협하며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후에 그 안내인에게 직접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럼 당신이나 스승께 무슨 일이 일어나면 난 그저 구경만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래도 우리는 비폭력을 믿지 않습니까?”
“우리가 당신들을 보호해주지 않으면 당신들은 비폭력적으로 살 수 없습니다. 당신들은 먹을 것을 만들고 요리하는 데 폭력적인 부분이 있다고 해서 음식을 만들지 않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 일을 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살 겁니까?”
그 안내인은 나에게 가장 기본적인 모순을 지적해준 겁니다. 우리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살고자 한다면, 다른 누군가가 우리 대신에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이 세상이나 경험 또는 육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승려생활이 진리에 대한 추구를 도리어 엄격히 제약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나는 교단을 떠나 세상 속에서 열반을 찾기로 했던 것입니다.

젠슨 그래서 더이상 세상을 포기할 수 없게 되었군요?

쿠마르 그러나 승려생활은 그 이후 나의 삶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 생활의 경험으로 나는 육체적인 고통과 더불어 사는 법을 체득하였습니다. 맨발로 뜨거운 땅 위나 가시밭길을 걷는다거나, 돈과 집, 부모 없이 살고 먹을 것을 구걸하는 일 말입니다. 그런 시기를 지나온 것은, 되돌아보았을 때, 내게 아주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정신과 세상을 분리시키는 것 ― 영성은 성자를, 예술은 예술가를, 음악은 음악인을 위한 것일 뿐이며, 보통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는 것 ― 이 옳지 않다고 이해하게 되었을 때, 이 새로운 길을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계속 갈 수 있는 준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어린시절을 승려로서 지낸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실은 그 경험에 대해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교단들이 영성을 잃어버리고 그 조직의 규율에만 집착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진리를 찾는 것보다 조직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되어버리죠.

젠슨 세상을 포기하는 것과 개인의 자유로운 영혼의 질식 사이에 관계가 있습니까?

쿠마르 내 경우에는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실제로 나를 아주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그 단계에서는 얼마나 적절하고 유익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영혼에 더이상 도움이 되지 않게 되자 내가 떠날 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 “나는 떠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승려의 삶을 떠나게 된 가장 핵심적인 깨달음은 삶으로부터의 도피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혼은 일상의 삶에서 단련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밖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 지구, 땅, 사람들 ― 아름다운 것이며, 고통과 괴로움도 그 아름다움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깨달음은 사회,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적인 무대로 나를 뛰어들게 하였습니다. 나는 삶의 총체성이야말로 최고의 가치임을 확신했습니다.

젠슨 자이나교를 떠난 후에는 무엇을 했습니까?

쿠마르 나는 비노바 바브와 같이 일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간디와 함께 일했던 분으로, 간디의 정신적인 후계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주로 가장 빈곤한 계층, 즉 하리잔 ― 불가촉천민 ― 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기 위한 토지개혁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도 전역을 걸어서 다니면서 하리잔들과 지주들에게 땅도 공기나 해, 물과 같이 신의 선물이며, 모든 사람들 ― 그는 ‘흙의 아들들’이라고 불렀습니다 ― 은 땅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나의 위는 무척 작지만 가난한 자들의 위는 매우 크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5천만에이커의 땅을 요구했습니다. 300에이커를 소유한 지주가 단 1에이커만 내놓을 때에 그는 만일 사원을 짓는 일이라면 그것으로 되겠지만 가난한 이들이 땅을 갖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기 때문에 6분의 1은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땅을 내놓았습니다.
전에 내가 아직 승려였을 때, 삶과 영성은 다소 추상적인 개념들이었는데, 비노바 바브를 만나면서 그것들이 현실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새롭고 실제적인 질문들이 생겼습니다. 지주에게 예속되어 착취당하며 가난으로 고통받는 땅 없는 노동자들을 접했을 때, 나의 영성은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가? 경제, 정치, 사회적 차별의 문제에 대해 비폭력, 진리, 영성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땅의 소유권이 천부의 것이고, 가난한 농민들은 일을 하고 그들을 섬기기 위해 태어났으며, 이 모든 것들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믿는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열 수 있을 것인가? 자신들의 처지를 운명 ― 전생의 업으로 인해 주인을 섬기도록 태어났다는 ― 이라고 믿는 불가촉천민들의 마음에 다가가는 것도 똑같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의 마음을 열어 그들 역시 자유로운 영혼을 지니고 있으며, 당연히 다른 모든 이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세상과 대화하며 평등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이해시킬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내게는 꼭 해내야 하는 모험과 같았습니다. 토지개혁운동을 통해서 나는 승려생활의 개인적 영성을 집단적 영성으로 확대시킬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우리는 많은 지주들이 땅을 내놓게 했고, 또 많은 하리잔들이 그 땅을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비노바가 요구한 5천만에이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4백만에이커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난하고 땅이 없는 천민들로 하여금 그 땅에서 경작하고, 우물을 파고, 곡식을 기르고 공동의 교육체계를 갖추도록 도왔습니다.
이런 노력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가 지주들과 천민들을 서로 적대적인 관계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동반자적인 관계였습니다.

젠슨 그러나 동반관계란 그 개념에 있어서 서로 대등한 입장에 근거하는 게 아닙니까? 어떻게 한쪽은 부유하고 다른 한쪽은 가난한데 동반자 관계가 성립할 수 있습니까?

쿠마르 나는 영성적 동반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지주들이 소작인들의 선의와 선한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힘의 균형은 변하기 시작할 겁니다. 궁극적으로 진정한 동반자 관계는 사회적 정의와 경제적 평등을 요구하겠지만, 당장의 현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비노바의 토지개혁은 영성적 변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동반자의 관계로 살 수 있고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는 그런 미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시작을 했습니다. 많은 지주들이 그들의 땅의 6분의 1이 아니라 전부를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젠슨 대화를 거부하는 지주들에게는 어떻게 했습니까?

쿠마르 우리는 그들이 “오늘은 대화를 거부해도 내일 일은 모른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당신과 내가 앉아있는 이 카페에 들어오려면 먼저 출입문을 찾아야겠지요. 다른 곳으로 들어오려고 하다가는 벽에다 머리를 부딪히게 될 뿐입니다. 지주들의 마음을 여는 것도 비슷합니다. 기다리고 찾으면 약한 부분, 마음을 여는 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 문을 찾지 못했어도 다음날은 찾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문이 잠겨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열쇠를 찾았다 해도 녹이 슬어있을지도 모르며, 기름칠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일이 많기는 했지만, 우리가 한발자국씩 나아간다면 궁극적으로는 문이 열리고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만일 저항에 부딪히면 물러났다가 다음에 다시 그 지주의 친구 ― 이미 땅을 내놓은 ― 와 같이 찾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 지주는 우리의 말을 들을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아니라면, 다시 다음에 찾아가는 겁니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려면 끈질기고 참을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노바 바브는 1955년에 토지개혁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1985년까지 30년 동안 땅 없는 이들에게 땅을 찾아주려고 온 인도를 걸어다녔습니다.

젠슨 만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착취를 멈추지 않겠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들이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면요? 히틀러 같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까요?

쿠마르 집이 불에 타서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물을 많이 끌어와서 불이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비폭력은 예방책으로서의 원칙입니다. 집에 불이 붙기 전에 먼저 소화기와 탈출 통로, 비상구를 확보해야 합니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을 비폭력적으로 교육해야 합니다. 미디어도 비폭력으로 교육해야 합니다. 만일 누군가 불만을 가진다면 무시하거나 억압해선 안됩니다. “무엇이 문제냐?”고 묻고, “의논해보자”고 하면서 들어야 합니다.
히틀러라면 어찌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1차대전 이후의 독일의 문제가 무엇이었나를 짚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조약을 맺었습니까? 독일인들에게 “당신들이 전쟁을 일으켰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우리가 한 짓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미국이 이라크에 대해서 하고 있는 일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새로운 히틀러의 씨앗을 뿌리는 짓입니다. 사담 후세인이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나서서 저항할 것입니다. 자기 나라가 파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틀러와 같은 이가 등장한 다음에는 비폭력에 대해서 생각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입니다.
지금 내가 얘기하는 것은 비폭력의 문화를 만들기 위해 교육, 자비심, 너그러움, 평등, 위엄 그리고 남에 대한 배려의 방법들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읽고, 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하기를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갈등에 대처하는 법도 어려서부터 배워야 합니다. 바로 아이들로부터 비폭력의 문화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미디어, 광고, 정부, 경찰, 법정으로 퍼져나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관에서는 단순히 벌주기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비폭력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두 폭력이 자라나는 것을 그저 내버려두다가 히틀러나 사담 후세인 같은 인물이 등장하면 놀랍니다. 우리는 “그는 악마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만든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히틀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를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우리의 책임입니다.

젠슨 아직 평화로운 토착문화가 많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희망적인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말레이시아의 시메이나 브리티시 콜롬비아의 오카나간스 같은 곳 말입니다.

쿠마르 이들 문화가 많은 경우 인간에 대해서만 아니라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해서도 비폭력적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도축장에서 동물들을 죽이고 공업의 형태로 농사를 짓고 동물들을 가혹하게 다룬다면, 그런 잔혹성이 우리의 마음에 배어들어 다른 인간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젠슨 우리가 먹는 것들이 결국 우리 자신을 만들지요.

쿠마르 모두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연과 평화롭게 지내야 합니다. 비폭력은 히틀러와 관계된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빙산의 일각일 뿐이죠. 비폭력은 삶의 방식입니다.

젠슨 비노바 바브와 함께 당신은 땅을 위해 걸었습니다. 1962년부터는 평화를 위해 걸었습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쿠마르 마치 지금처럼,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다가 신문의 글이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90세의 영국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이 핵 반대 시위를 하다가 투옥되었다는 글이었습니다. 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는 “90세에 평화를 위해서,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감옥에 가는 사람이 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동료 프라바커 메논과 의논하여, 핵 강대국들의 수도인 모스크바, 파리, 런던, 워싱턴까지 평화행진을 하자고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버트란드 러셀에게 우리가 도우러 간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나는 매우 늙었으니 빨리 걸으라”고 답장을 했더군요.
우리는 기부금을 받기 시작했는데 비노바는 돈 없이 가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러 대륙을 거쳐,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다른 종교를 믿으며, 다른 정치체제를 가진 나라들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노바는 “만일 돈이 있으면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모텔에서 잠을 잘 것이 아니냐. 그러나 돈이 없으면 무방비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너희들은 남을 믿어야 하고, 두려움을 없애야 하며, 믿음을 가져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들을 찾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돈 없이 걸어서 인도를 출발했습니다.

젠슨 그것이 당신의 삶의 패턴인 것 같습니다. 아무런 방비 없이 미지의 세상으로 걸어나가는 것 말입니다.

쿠마르 먹을 것을 구걸하는 것과 토지를 구하는 것, 그리고 평화를 호소하는 것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땅을 내놓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잠잘 곳을 베풀어줄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고 믿게 하였습니다. 그때까지 나의 삶은 믿음으로 이루어져왔던 것입니다.

젠슨 사람들이 실제로 도움을 주었습니까?

쿠마르 네,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온 마을 전체가 먹을 것을 들고 우리를 환영하러 나오기도 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우리를 위해 잔치를 열고 우리의 발을 씻어주기도 했습니다. 나는 난처하게 여겼지만 사람들이 굳이 그렇게 하겠다더군요. 신발을 만드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신발을 주었습니다. 우체국 직원은 우표를 주었습니다. 이발사는 면도를 해주고, 택시기사들은 우리를 태워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제안은 거절해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주었지만 그것도 또한 받을 수 없었습니다. 폴란드에서는 어떤 아이가 자기 집을 방문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정 코스에서 상당히 벗어나야 했지만 우리는 그 청을 받아주었습니다. 동베를린 경계에서 한 보초는 자신도 총을 버리고 평화를 위한 싸움에 동참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흑해 근처의 조지아에서는 여성들이 자기네가 일하고 있는 홍차 공장에 와서 얘기를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전 세계의 보통 사람들이 바로 핵폭탄의 짐을 지고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폭탄을 만들기 위한 비용을 부담하는 것도 우리들이고, 그로 인해 죽는 것도 우리들이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목소리를 내어 그것에 반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얘기를 듣고 한 여성이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뛰어나가 홍차 네상자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이것들을 모스크바의 우리 지도자와 프랑스 대통령, 영국 수상, 미국 대통령에게 전해주세요. 그리고 이 말을 같이 전해주세요. 만일 폭탄을 떨어뜨릴 생각이 들면 잠깐 멈추고 이 차를 한봉지 타서 마시라고요. 그러면 세계의 보통 사람들은 폭탄이 아니라 빵을, 죽음이 아니라 삶을 원한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겠지요.” 그녀의 말은 매우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우리는 그대로 했습니다.

젠슨 행진에 반대하는 사람을 만나지는 않았습니까?

쿠마르 우리가 만난 사람들 중 평화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평화를 얻을 수 있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한 마을에서의 일인데, 그 집의 남편이 우리를 초대했습니다만, 그 아내는 우리를 쫓아내더군요. 표면적으로는 남편이 밤을 묵어갈 손님을 데리고오는 데 그만 질려버렸다고 말했습니다만, 실은 정치와 평화를 얘기하며 인도에서 온 비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조지아주의 올바니에서의 일인데, 나는 한 영국인 친구와 카페에 갔습니다. 우리는 앉아서 치즈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했습니다. 웨이트레스는 주문을 받고 가더니 돌아와서 샌드위치가 다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커피만 달라고 했습니다만, 그것도 없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매니저에게 항의했지만, 그는 어떤 손님을 받을지는 자기가 정할 수 있으며 우리는 나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되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권총을 꺼내들더니 내 가슴을 겨누더군요. 내 친구가 나를 막아섰고, 다른 손님들이 우리를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그 전에는 어떤 경우에도 내 피부색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핵에 찬성하는 사람이 있었느냐고 물었지요? 그 답은 아니오입니다.

젠슨 보통 사람들과 그들을 대변한다고 나선 이들의 반응은 어떻게 달랐습니까?

쿠마르 정부들의 반응은 우리를 친절하게 대접하는 데서부터, 문제는 자신들이 아니라 적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내는 경우까지 다양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감옥에 갇혔다가 국외로 추방당했습니다.

젠슨 환경운동이나 반기업운동의 경우에도 그와 같은 차이가 나타납니다. 보통 시민들은 연어의 멸종을 원하지 않고, 다국적 기업들을 좋아하지도 않죠. 그러나 실제 행동에는 큰 차이가 …

쿠마르 한편으로는 기업과 정부기관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보통 사람들이 있죠.

젠슨 그리고 또 이런 기관들 내에서 활동하는 개인과 그 기관들 자체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쿠마르 그것은 일자리와 집과 자동차를 소유하고 저당권, 보험, 연금을 가지는 것이 정상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도록 우리가 선전이나 광고, 교육, 미디어를 통해 심리적 조작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이상하거나 반사회적이라고 믿도록 세뇌된 거지요.

젠슨 동감입니다. 나는 콜로라도 광산학교에서 물리학으로 학위를 받았습니다. 동창들은 대부분 핵잠수함이나 다국적 정유회사, 광산기업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틀에 묶여서 살 수 없었던 거죠. 어떤 이들은 내게 마련되어 있는 삶을 벗어날 수 있었다고 용감하다고 합니다만, 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나는 불행했습니다.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데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함정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다른 대안이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됩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통제하기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쿠마르 두려움은 우리 사회의 지배요소입니다. 어린시절부터 부모, 학교, 정부가 두려움을 키워줍니다. 두려워하도록 양육되었기 때문에 안전을 갈구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아주 쉬운 형태의 거짓 안정을 제공합니다. 돈이죠. 그래서 결국 우리는 달러의 독재 밑에서 살게 됩니다. 이것은 공적 삶뿐만 아니라 사적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젠슨 이런 사고가 어떻게 뿌리를 내리는 걸까요?

쿠마르 광고가 큰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상품을 사면 행복해지고, 안전하고, 사랑받고, 남들의 부러움을 사며, 존경받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매일 봅니다. 매일 10억달러가 광고에 쓰여집니다. 매일 말입니다! 일년에 3650억달러입니다!

젠슨 그런 수치를 들을 때마다 몇년 전에 읽었던 비교 수치가 떠오릅니다. 70년대 후반에 천연두를 없애는 데 약 3억달러가 들었다고 합니다. 그보다 좀더 적은 비용으로 5억명의 어린이들에게 수두, 디프테리아, 홍역의 예방접종을 할 수 있고, 그래서 매년 2500만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10억달러면 제3세계의 5백만 어린이들을 1년 동안 학교에 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매주 광고에 들어가는 비용으로 깨끗한 물이 부족한 모든 사람들에게 물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쿠마르 단지 악하거나 부패한 지도자들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지주들보다 하리잔들의 마음에 접근하는 것이 더 어려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의 삶을 통제할 권리, 핵폭탄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살아갈 권리나 온전한 세상에서 깨끗한 공기와 물을 마시며 살아갈 권리가 모두 자신들에게 있음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 대신 그들은 세뇌되고, 조작된 대로 살아가고 있지요. 우리의 마음, 존재, 눈, 사고는 한 방향을 향해 있습니다. 전지구적 단일문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 생산자이고 제조자이며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해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용기를 찾아야 합니다. 용기는 각자의 신념에서 올 수도 있고, 실패로부터 올 수도 있습니다. 결혼의 실패에서 올 수도 있습니다. 사회가 붕괴되는 데서 올 수도 있습니다. 혹은 당신이 그러했듯이, 비록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보여도 만족이나 성취감을 찾지 못하여 공허감이나 고통, 불행을 느끼는 데서 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일단 그런 공허를 느끼기 시작하면, 사슬을 깨뜨리기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산업사회에서 인간의 영혼이 치러야 하는 대가는 엄청난 것입니다. 대량생산 사회는 몹시 추악합니다. 아주 작은 예로 세라믹과 폴리스틸렌의 촉감 차이를 비교해보세요. 폴리스틸렌 사용에서 생기는 쓰레기는 차치하고라도 말입니다. 맨발로 흙을 밟으며 걷는 것과 아스팔트 위를 걷는 것을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가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영혼은 굶주려 죽어버리게 됩니다.

젠슨 산업문명이 얼마나 더 지속되리라 보십니까?

쿠마르 소련은 붕괴했죠. 아파르트헤이트도 사라졌습니다. 이 산업주의, 물질주의의 단일문화가 영원히 지속될 거라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영구히 노예상태로 내버려두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의 모든 시스템은 모래 위에 서있습니다. 생태적으로나 영성적으로나 이런 체제는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궁극에는 인간 영혼이 승리할 것입니다. 나는 현재 우리에게 닥치고 있는 다방면에 걸친 환경재앙 때문에 결국 우리가 더 나은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믿습니다. 유기농산물, 수공예품이나 예술작품들, 음악, 시, 그리고 땅으로 말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필요한 물건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삶과 자연, 사랑을 예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상호의존적으로 될 것입니다. 서로 돕고 살게 될 것이고 영혼을 살찌우는 사회로 돌아갈 것입니다.

젠슨 많은 환경운동가들은 회색곰이나 연어 혹은 그밖의 생물들이 산업문명이 붕괴할 때까지 멸종되지 않게 하여 그들에게도 삶을 지속할 기회를 주기 위해 일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또 그때가 되었을 때, 다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남기기 위해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하려 한다는 토착민들도 있습니다. 당신이 하는 일에도 그와 같은 요소가 있다고 느껴지는데요. 공동체의 의미를 유지하고, 공동체적 삶의 형태를 보존하려는 시도 말입니다.

쿠마르 그런 문제에 관련해서 내가 사용하는 두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는 구명보트를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업문명이라는 배가 침몰할 때 우리도 함께 가라앉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대안적 기술, 공동체, 예술, 작은학교, 수공예 ― 이런 것들이 바로 구명보트입니다.
또하나의 비유는 “어둠을 저주하기보다는 단 하나의 촛불이라도 켜는 게 낫다”는 것입니다. 건설적인 계획 하나를 시작하는 게 세상이 얼마나 나쁜지 끝없이 말하고 있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기술주의 대중사회를 비판하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넘어 대안을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잡지《리서전스》와 슈마허 칼리지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나는 승려생활의 영성적 토대와 토지개혁운동을 통한 사회적인 관심, 세계를 걸으면서 추구했던 평화에 대한 이상과 땅 위를 걸으면서 발견한 생태적 관심을 아우르는 비젼을 널리 퍼뜨리려고 합니다. 땅 위를 걸어가면 나무, 강, 나비, 딱정벌레 같은 자연과 아주 가까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줍니다. 나는 내 두 다리가 내 신체에서 가장 창조적인 부분이고, 걷기가 에너지의 가장 창조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두가 자연의 아름다움, 즉 생명과의 친밀한 접촉을 통해 얻어진 것입니다.
비폭력의 문화를 건설하는 데 비방(秘方)이나 지름길은 없습니다. 매우 힘들고, 고통스럽게 느린 작업입니다. 참을성이 아주 많아야 합니다. 자비심도 필요합니다. 참을성과 자비심은 비폭력의 두가지 덕목입니다. 문화는 한사람, 한사람씩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거대한 하나의 운동, 하나의 큰 대화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김형수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