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4

천주실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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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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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실의》(天主實義) 또는 《천주실록》(天主實錄)은 로마 가톨릭교회교의를 변증한 기독교 변증서이며,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출간하였다.


목차
1역사
2내용
3같이 보기
4각주


역사[편집]

천주실의는 예수회 선교사마테오 리치1584년 저술한 《천주실록》(天主實錄)의 개정판이며, 1593년이나 1594년에 저술했다고 추정한다. 당시 선교사 저서는 해당선교지 책임자의 검사를 거쳤기 때문에, 라틴어 요약본 형태로 1597년경 발리냐노와 일본선교 교구장 루이스 세르퀘이라(Luis Cerqueira)에게 제출했었다. 하지만 라틴어 요약본이 검열에 통과하기도 전에 이미 《천주실의》는 고급 독서 문화가 있던 명나라 말기 사대부들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기독교 하나님이 유교의 상제와 같다는 주장과 기독교의 인간 이해가 양명학과 상당히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국 지식인들의 관심으로 천주실의는 1594년 남창(南昌)에서 초판을 인쇄했으며, 1601년 베이징에서 《1601년 베이징판 천주실의》를 출간했다. 선교책임자에게 출간을 승인 받은 마테오리치1603년 베이징에서 증보판 《천주실의》를 출간했으며, 1605년이나 1606년 항주(抗州)에서 《항주판 천주실의》를 출간했다.


내용[편집]

천주실의 내용은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이를 유지하시는 하느님'을 소개하며,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유교의 상제(上帝)는 기독교의 하느님(天主)이라고 주장했다.[1]
  • 유교의 기초적 교리를 인정.
  • 하늘나라의 존재를 언급하고, 인간의 영혼 불멸성을 강조.
  • 인간의 영혼이 신령스러움을 중국 고전들을 통해 입증.
  • 하느님이 동물을 창조한 것은 인간이 이용하도록 하기 위해서임.
  • 죽은 후에 천국지옥이 있음.
  • 성선설을 지지, 모든 행위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달림.
  • 천주교 사제결혼하지 않는 이유, 《천주교해략》을 읽을 것을 권함.

같이 보기[편집]
마테오 리치


각주[편집]

기독교 사상2005년 10월호-세계교회사에 나타난 선교인물(2):복음과 문화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한 마테오리치,김상근,대한기독교서회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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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명/저자명
마테오 리치의 예수회적 유교 해석에 대한 일고찰 : 『천주실의』를 중심으로 / 정태식
발행사항
서울 : 대한철학회, 2005.08.31
수록지명
哲學硏究 : 대한철학회논문집. 제95집 (2005. 8), pp.371-393
자료실
정기간행물실(524호)  도서위치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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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어번호
KINX2005117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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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마테오 리치의 예수회적 유교 해석에 대한 일고찰 : 『천주실의』를 중심으로 / 정태식 1

[논문개요] 1

I. 들어가는 말 2

II. 『천주실의』의 저술배경에 대한 평가 3

III. 마테오 리치의 논리전개 방식 8

IV. 유교에 대한 예수회적 재해석 12

1. 천주(天主)의 존재 증명 12

2. 내세의 존재와 인간 영혼의 불멸 16

3. 덕성의 함양과 영생을 위한 행위논리의 전개 18

V. 나가는 말 20

참고문헌 21

〈Abstract〉 22

초록보기더보기

종교의 현실적인 실천에 따른 종교의 역사성은 사고논리와 행위논리로 구성되는 종교의 의미체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 가능성을 허용하고 제공해준다. 본 논문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유교에 대한 예수회적 재해석에 대하여 논함을 목적으로 한다. 

주로 자연법 내지는 자연신학의 논리를 가지고 선진유학의 경전을 참고로 하여 그리스도교만의 독특한 사고논리의 주제를 논한 리치는 불교와 도교는 물론 성리학의 의미체계에 대한 도전을 주저하지 않았다. 

따라서 본 논문은 지금까지의 천주실의에 대한 평가를 재검토하고 리치가 예수회적 유교해석을 위해 계시나 계시신앙에 대한 언급대신에 인간의 자연이성과 철학적 사고능력에 호소하는 방식을 택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예수회 선교사로서의 리치가 기존의 유교전통이 지지하는 사고논리와 특별히 구별되는 주제들, 예컨대 천주의 존재에 대한 증명, 내세의 존재와 인간 영혼의 불멸에 대한 증명,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사고논리를 바탕으로 하여 실천되어져야 할 행위논리, 특히 덕성의 함양과 영생의 길 등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논문의 주요 논지는 리치의『천주실의가 보유(補儒)를 위한 작업일 수도 있고 선교전략의 일환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 당시의 지배적 정치 사회적 이데올로기였으며 정학이었던 성리학과 구별되는 새로운 방식의 유교 해석이었다는 것이다.

The historicity of religion followed by religious practices allows and provides the potentiality for the reinterpretation of the meaning system of religion that is composed of the logic of thought, and the logic of action. This study aims to discuss about the reinterpretation of Confucianism made by Matteo Ricci in his T'ien-chu Shih-I(The True Meaning of the Lord of Heaven) with the perspective of Jesuit theology. Ricci dealt with some subjects peculiar to Christianity with the logic of natural law and natural theology and by referring to Confucian classics of ancient times, and did not heasitate to criticize the meaning system of Buddhism, Taoism, and even Neo-Confucianism.

Thus, first we examine the hitherto evaluations of T'ien-chu Shih-I, and clarify that Ricci, in the midst of his performing of Jesuit interpretation of Confucianism, had appealed to the natural reason of human being and his or her philosophical intellectuality rather than to revelation or the faith in revelation. Second, we discuss some subjects which are different from the logic of thought supported by the existing Confucian tradition. They are the existence of the Lord of Heaven, the existence of other world, the immortality or everlasting of soul, and the self-cultivation and cultivation of virtue which are required for the fulfillment of the newly given teleology, that is salvation.

The main theme of this study is as follows: T'ien-chu Shih-I could be a work for the complement of Confucianism, or for the mission strategy of the Jesuit Order, but it was above all a new interpretation of Confucianism with different ways which are unique and distinguished from those of Neo-Confucianism, the dominant socio-political ideology and academic orthodoxy of those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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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실의(天主實義)천주교문헌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6037

               중국 북경에서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가 한역(漢譯)하여 1603년에 간행한 교리서.
                천주교교리서.확대하기축소하기프린트URL의견제시트위터페이스북의견제시항목명천주실의이메일올바른 형식의 이메일을 입력해 주세요.의견10자 이상 상세히 작성해 주세요.첨부파일파일선택천주실의 / 상권(표지)분야천주교유형문헌성격교리서, 천주교교리서편저자마테오 리치(Ricci,M., 利瑪竇)제작시기1603년, 1607년(간행)권수2권간행자발리니아니(Valignani, 范禮安), 이지조(1607)시대조선성격교리서, 천주교교리서편저자마테오 리치(Ricci,M., 利瑪竇)제작시기1603년, 1607년(간행)권수2권간행자발리니아니(Valignani, 范禮安), 이지조(1607)
              정의
            중국 북경에서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가 한역(漢譯)하여 1603년에 간행한 교리서.천주교교리서.서지사항상·하 2권.내용모두 8편으로 나누어 174항목에 걸쳐 서사(西士)와 중사(中士)가 대화를 통하여 토론하는 형식으로 꾸며진 가톨릭교리서이며 호교서(護敎書)이다.중사는 중국사람을 대변하는 박학다식의 학자이고, 서사는 가톨릭사상과 스콜라철학을 겸비한 서양학자로 저자 자신이라 할 수 있다.이 책은 전자의 입을 빌려 전통유학의 사상과 불교·도교를 논하게 하고, 후자가 스콜라철학과 선진공맹(先秦孔孟)의 고전을 들어 천주교의 교리를 펴고, 그 사상을 이론적으로 옹위(擁衛)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대화형식을 빌려 진술된 문장은 사서육경과 그 밖의 경전을 적절하게 인용하여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천주교의 입장을 이해하도록 유도하고 있다.유교서뿐만 아니라 불교·도교서도 자주 활용하여, 견강부회(牽强附會)하지 않고 차근차근 타이르듯이 이끌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승복하지 않을 수 없게 꾸며져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마테오 리치가 중국 학예(學藝)에 얼마나 통달하였는가를 엿볼 수 있다.고어(古語)를 구사하고 성어(成語)·성구(成句)는 가급적 오랜 원형을 찾아 사용하였고, 고사(故事)의 내력을 광범하게 활용하고 있다. 이 책을 편술한 시기는 1593(선조 26)∼1596년으로 보이나, 정식 간행된 것은 저자가 북경(北京)에 거주하게 된 뒤인 1603년의 일이다.그 뒤 제2판이 발리니아니(Valignani, 范禮安) 신부에 의하여 광둥성(廣東省)사오저우(韶州)에서 간행되고, 1607년 쟝수성(江蘇省)저장(浙江)에서 이지조(李之藻)에 의하여 제3판이 나왔다. ‘천주실의’라는 책이름은 ‘De Deo Verax Disputatio’를 번역한 것으로, 직역하면 ‘하느님에 대한 참된 토론’이라는 뜻이다.내용은 천주교 신앙의 모든 문제를 다루지 않고 몇 가지 중요한 교리, 특히 본질적 문제만을 다루어 마침내 신앙과 계시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이론을 폈고, 이를 인간의 이성과 자연적인 식견으로 입증하며 전개해 놓았다.상권의 제1편에서는 인간 지능을 설명하고, 인류의 공통사상과 운동력과 질서의 논증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한편, 인간은 신과 그 속성(屬性)에 대한 소극적 인식을 가졌음을 논하였다.제2편에서는 불교·도교를 논박하고, 유교에 대하여는 제1질료(第一質料)라 할 태극설(太極說)을 제하고는 대체로 찬동하는 논리를 폈다. 실체(實體)와 우연을 설명하면서 신은 모든 완전성을 지닌 실체임을 역설하고, 중국 고대사상에서의 상제(上帝)의 성격을 11종의 중국 고대문헌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제3편에서는 천국의 필요성을 말하고 식물의 생장력, 동물의 감각력, 인간의 지적 영혼(知的靈魂)의 차이를 명확히 규정하고, 그것의 단성(單性)·영성(靈性)·불멸성(不滅性)을 논증하고 있다.제4편에서는 중국 고전에서 예를 지적해 가며 고대신령(古代神靈)에 대한 신앙을 논증하여 인간 영혼이 신령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능과 불능의 차이를 보여주고, 악마와 지옥의 기원에 대한 범신론적 일신론(汎神論的一神論)을 논박하였다.하권의 제5편에서는 윤회설의 창시자가 피타고라스(Pythagoras)이며 불교가 그것을 채용하여 윤회설을 중국에 전한 것이라고 하고, 만물이 모두 인간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므로 불교에서 살생을 금함이 옳지 않음을 밝혔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재계(齋戒)의 동기와 본질을 설명하였다.제6편에서는 참된 뜻에서의 소망과 두려움의 정당성을 밝히고, 그것은 사후(死後)의 상벌로만 옳게 실현됨을 강조하고, 지옥·천국 및 연옥에 관한 교리를 설명하며 이에 대한 비방을 논증적으로 반박하였다.제7편에서는 천주에 대한 인간성과 선악, 자유의지와 인간의 목적을 설명하고, 천주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주축으로 하는 그리스도교설을 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가장 확실한 지식이고, 사랑은 가장 고귀한 덕행임을 설명하고, 종교적 무관심주의의 오류를 갈파하였다.제8편에서는 유럽의 관습과 천주교 성직자들의 독신제를 설명하고, 중국에서의 잡다한 종교생활을 개탄하면서 중국 고대는 사정이 달랐음을 밝히고 있다.끝으로, 원죄(原罪)를 말하고 천주강생(天主降生)과 신법공포(神法公布)를 설명하고, 진리의 생활을 원하는 사람은 『천주교해략 天主敎解略 Doctrina Christiana』으로 공부하고 천주교에 귀의하여야 한다고 결론짓고 있다.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우주만물에는 창조주와 주재자가 존재하여 끊임없이 만물을 안양(安養)하고 있으며, 둘째 인간 영혼은 불멸한 것으로 후세에 각자의 행실에 따라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응징이 있음을 밝혔다.셋째 불교의 윤회설을 배격하고 오로지 사랑의 그리스도교 신앙만이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이고, 중국 고경(古經)에 이미 이와 같은 가르침이 밝혀져 있으니 공부하고 귀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의의와 평가이 책은 동북아시아 유교전통사회에 가톨릭신앙을 심어 준 책이며, 중국 고대사상과 서구 윤리사상의 습합논리(習合論理)의 첫 작품이었고, 동양문화권에 그리스도교 가치체계를 첨가하는 시발을 이룬 점에서 사상사·문화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내용청나라 건륭제(乾隆帝)는 『천주실의』가 비록 이질문화인의 저술이나 중국인에게 큰 영향을 준 양서로 보고, 이를 『사고전서 四庫全書』에 수록하게 하였다.마테오 리치는 이 책에서 현세에서의 윤리·도덕 실천의 가치를 인간 당위성에서 논하는 공자(孔子)의 유교사상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찬양하면서 천주교설을 폈고, 우상론적인 불교와 도교를 논박하여 중국사상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또한, 고등호교론(高等護敎論)과 교리해설에 있어 일방적으로 서구 교회학자들의 이론이나 논증만을 구사한 것이 아니라, 놀라운 한문 독파력을 통하여 이해, 체득한 중국 고대문헌을 적절하게 사용하며 중국 지식인들을 설복하였다.그는 신념을 갖고 불교와 도교의 허구와 오류를 공박하였다. 유교에 대해서는 다만 태극설만을 배격하였으며, 윤리면의 일치, 우상숭배의 배격, 상제·천주의 합일성에서 그리스도교와의 전이가 가능하다는 보유론적 이해(補儒論的理解)를 폈다.이러한 『천주실의』의 논리에 대하여 유·불·도교자들의 반박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종진지(鍾振之)의 『천학초징 天學初徵』·『천학재징 天學再徵』 등 척사론(斥邪論)의 논설이 쏟아져 나왔고, 이런 역사적 문헌을 수합한 『벽사집 闢邪集』이 나왔다. 또 일본에서도 1861년 같은 성격의 책으로 『벽사관견록 闢邪管見錄』이 간행되었다.한편, 천주교 내에서도 마테오 리치의 보유론적 그리스도교리 해설은 영합주의적인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는 반박이 일어나, 뒷날 중국교회에서 배공제조(拜孔祭祖)의 해석문제로 전례문제(典禮問題)가 야기되는 불씨가 되기도 하였다.이 책은 1603년 북경에서 출간된 뒤 상당히 빠른 속도로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동북아시아 각국으로 유포되었다. 즉, 출간 다음해인 1604년에 이미 일본에 전해졌고, 우리 나라에서도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에 상·하 8편의 편목이 소개되고 촌평이 실려 있다. 같은 시대 이수광(李睟光)도 『지봉유설』에서 편목을 대략 열거하고 있다.이러한 사실로 보면 『천주실의』는 출간 20년 내 외교관계로 북경을 출입하는 사대사행원(事大使行員)들에 의하여 우리 나라에 들어와, 일부 유교지식인 사이에 열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다른 한역서학서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열독되고 논평되었다.이익(李瀷)이 「천주실의발 天主實義跋」을 지어 이 책에 대한 큰 관심을 일으키자 그의 학문을 따르던 신후담(愼後聃)·안정복(安鼎福)·이헌경(李獻慶) 등이 『천주실의』와 그 밖의 서교서(西敎書)를 읽고 각기 『서학변 西學辨』·『천학고 天學考』·『천학문답 天學問答』 등을 엮어 유학적 관점에서 예리하게 논평하였다.이와 반대로, 『천주실의』에 담겨져 있는 천주교교리를 이해, 소화하여 마침내 천주교신앙에 도달하게 된 학자들도 있었다.이벽(李檗)·권철신(權哲身)·권일신(權日身)·정약종(丁若鍾)·정약용(丁若鏞)·이승훈(李承薰) 등이 천주교신앙 실천운동을 일으켜, 1784년(정조 8) 조선천주교회를 창설하게 된 데에도 이 책이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한자로 엮어진 『천주실의』는 일반대중에게는 가까이 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에 따라 한글 번역본이 나왔는데, 18세기 중엽의 한글 고사본(古寫本)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의의와 평가이 책은 사상적으로 서양 그리스도사상과 동양 유교사상의 융합, 습합(習合)된 문헌이라는 점에서 종교사뿐만 아니라 사상사적으로도 중시되는 문헌이다.
          참고문헌
        성호문집(星湖文集)「천주실의해제」(이원순,『교회사연구자료』 4·5,한국교회사연구소,1972)
          집필자집필
            (1997년)이원순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천주실의(天主實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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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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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중앙 국립 도서관 에 있는 "신의 기록"원고
" 신의 기록 "(1630 년 발행)은 명나라 완리 11 년에 중국 의 예수회 선교사 인 뤄밍 지안 (Luo Mingjian) 의 중국어 번역가의 도움을 받아 마테오 리치 가 한자로 쓴 가톨릭 신학 작품 입니다. 베이징 에서 출판. 이것은 서양인이 중국어로 쓴 최초의 기독교 신학 작품 입니다 .

이 책은 원래 한 서면 에 라틴어 로 루오 Mingjian 로 번역, 중국어 마테오 리치와 중국의 재능에 의해 , 그리고 출판 에 오칭 . 나중에 Ricci는 혼자서 4 권의 책을 공부했고 중국과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많은 수정을했습니다. 책의 내용의 일부는 분명히 중국의 전통 받아 유교를 , 그리고 병합 천주교를 유교로. "신의 기록" 은 16 세기부터 18 세기까지 중국, 일본 및 기타 지역에서 천주교 의 확산 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했습니다. 특히 그 내용은 유교 윤리의 개념에 적응하여 중국 학자-공식 수업 에서 비교적 쉽게 받아 들여질 수있다 .

"신의 기록"은 또한 중국에 도입 된 첫 번째 주 시스템으로, 중국 전통 은 매월 3 일씩 상, 중, 하 10 일로 나뉘 거나, 달에는 2 일로 나뉩니다 . 기독교 는 한 달을 4 주로 나누고 매주 고정 된 종교 및 문화 생활을합니다. 이 책은 또한 유럽 의 천주교의 상황과 예수회의 부상을 설명하는 "예수회"를 소개합니다 . "하나님의 현실"의 마지막 장의 제목은 "일반적으로 서양의 관습을 말하는데 설교자는 결혼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이 서양 지구에서 태어난 이유를 설명한다"입니다. 가톨릭 국가의 본질은 교황 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 "가장 영예로운 지위를 가지고 세계를 가르치는 것은 황제이며, 그는 세상에 지시를 내리는 데 하나님을 계승하는 데 헌신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강조 의 사도 예수 베드로 베드로 후 의 설립 교회 에서 바티칸 이 예수님과 영적인 연결뿐만 아니라 물리적 인 연결뿐만 아니라이있다, 그래서 교황이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Matteo Ricci가 카톨릭 교회 의 독특하고 우월하다고 생각 합니다.

참고 문헌 
송 롱 페이 : "마테오 리치의"신의 진정한 의미 "와 유교의 통합과 곤경 " .
쉬광 타이 : "명나라 후기 서양"분류 이론 "의 중요 단어 소개 및 번역 : 마테오 리치의"신의 진정한 의미 "에서"밍 리 탄 "으로) .
Xu Guangtai : "마테오 리치의"신의 진정한 의미 "에서 Gewuqiang의 원리" .

알라딘: 天主實義(천주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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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主實義(천주실의) - 신학총서 23 
마테오 리치 (이마두) (지은이),이수웅 (옮긴이)분도출판사1988-04-20



天主實義(천주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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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쪽148*210mm (A5)234gISBN : 6000038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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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상권]

제1편: 천주가 처음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주재하고, 안양(安養)함을 논함
제2편: 사람들을 천주 오인(天主誤認)에 대한 해석
제3편: 영혼의 불멸과 동물과의 큰 차이를 논함
제4편: 귀신과 영혼의 차이와 천하만물이 일체일 수 없음을 해석함

[하권]

제5편: 윤회 및 살생금지설의 오류를 변박하고 재소(齋素)의 정의(正義)를 설명함
제6편: 뜻이 없을 수 없음을 해석하고 아울러 사람이 죽은 뒤 천당과 지옥의 상벌이 있어 사람들 소행의 선악에 대한 보상을 논함
제7편: 인성(人性)의 본선(本善)을 논하고 천주교도의 정학(正學)을 논함
제8편: 서양 풍속을 들어 신부 불혼(神父不婚)이 뜻을 논하고 아울러 천주가 서토(西土)에 강생함을 해석함

저자 및 역자소개
마테오 리치 (이마두) (Matteo Ricci)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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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2년 이탈리아 교황령 마체라타에서 태어나 1571년 예수회에 입회했다. 예수회는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세운 가톨릭 수도회로서 뛰어난 지성과 건강한 육체와 함께 매력적이고 헌신적인 성품을 지닌 당대 엘리트만을 엄선해 가입시킨 조직이다. 1572년에는 예수회의 피렌체 기숙학교에서 인문과학을 공부했고, 1573년에는 로마대학교에서 철학과 기하학, 천문학 등을 공부했다. 리치가 중국 선교 활동 과정에서 탁월한 과학적 재능을 발휘했던 것은 이러한 지적 배경이 바탕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580년에는 로마 가톨릭 사제 서품을 받았... 더보기
최근작 : <벗은 제2의 나다:마테오 리치의 교우론>,<마테오 리치 중국 선교사 2>,<마테오 리치 중국 선교사 1> … 총 11종 (모두보기)
이수웅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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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충북 중원 출생
중국(대만) 문화대학 중국문학과 졸업
同대학원 석사과정 및 박사과정 수료
'송대시인 주희의 詩와 조선 이퇴계 詩의 비교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건국대학교 중국문학과 교수

주요 저/역서
<天主實義>, <敦煌文學과 藝術>, <西域詩選>
<中國語會話>, <毛澤東詩選>, <中國娼妓文化史>
한국 ‘용재학술상’ 수상
中國 北京大學에서 <朱熹와 退溪詩 北較硏究> 출간
최근작 : <서역기행>,<우리말 시경>,<중국문학기행> … 총 24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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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참고자료
이 사료는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李瀷, 1681~1763)의 시문집 『성호전집(星湖全集)』권55에 수록된 천주교와 관련된 「발천주실의(跋天主實意)」의 내용이다. 「발천주실의」는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저술한 『천주실의(天主實義)』에 대해 이익이 연구한 글이다. 『천주실의』는 조선 후기에 가장 많이 읽은 천주 교리서로, 17세기 초에 이미 북경에서 간행되었고 곧 이어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의『지봉유설(芝峯類說)』에 실리면서 조선에도 전래되었다.

『천주실의』는 모두 8편으로 나누어 174항목에 걸쳐 서사(西士)와 중사(中士)가 대화를 통해 토론하는 형식으로 꾸며진 가톨릭 교리서이며 호교서(護敎書)이다. 중사는 중국 사람을 대변하는 박학다식한 학자이고, 서사는 가톨릭 사상과 스콜라 철학을 겸비한 서양 학자로 저자 자신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전자의 입을 빌려 유학 사상과 불교⋅도교를 논하도록 하고, 후자가 스콜라 철학과 선진공맹(先秦孔孟)의 고전을 들어 천주교 교리를 펴고 그 사상을 이론적으로 옹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대화 형식을 빌려 진술된 문장은 사서육경(四書六經)과 그 밖의 경전을 적절하게 인용하여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천주교의 입장을 이해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러한 천주 교리서에 대해 당시 유학자들은 일면 호기심을 가지고 탐독하는가 하면 일면 이를 비판하였다. 이익의 「발천주실의」는 그 대표적인 글이라 하겠다.

이익은 천주교가 유교와는 흡사하고 불교⋅도교와는 다르다는 마테오 리치의 ‘신유배불론(新儒排佛論)’에 반대하였다. 그는 오히려 천주교가 불교와 같은 성격을 가진 종교이고 천주교의 천당 지옥설은 불교의 윤회설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현혹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익은 천주교의 교리에도 일리가 있음을 은연중에 인정함으로써 이에 대한 동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글이 발표 된 후 『천주실의』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서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익의 학문을 따르던 신후담(愼後聃, 1702~1761)⋅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헌경(李獻慶, 1719~1791) 등이 『천주실의』와 그 밖의 서교서(西敎書)를 읽고 각기 『서학변(西學辯])』⋅『천학고(天學考)』⋅『천학문답(天學問答)』 등을 엮어 유학적 관점에서 예리하게 논평하였다.

18세기 후반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때에 이르러 이익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서울 부근의 남인 학자들은 유교의 고경을 연구하는 가운데 하늘의 의미를 주희(朱憙, 1130~1200)와 달리 해석하면서 천주교의 천주(天主)를 옛 경전의 하늘과 접합시켜 받아들였다. 즉 자신의 유학을 천주교를 통해 보완하면서 차츰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남인들은 서울과 아산⋅전주 등지에 신앙 조직을 만들고 포교에 들어갔는데, 불우한 처지의 양반이나 중인, 그리고 일부 유식한 평민들이 입교하였다.

서양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천주교가 퍼진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전래의 경천(敬天) 신앙이 천주교 전파를 쉽게 하는 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도가 늘어갈수록 유교식 제사를 무시하는 행위가 불효와 패륜으로 비쳐졌다. 제사는 한국인에게 가장 중요한 효행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서양인들과 연결된 행위가 국법을 어기는 일이 많아 국가의 금압(禁壓)을 받게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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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실의 』(天主實義)의 내용과 그 의미
Content and Meaning of 「 The Truth Meaning of Lord of Heav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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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송영배
Issue Date
1995
Publisher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Citation
철학사상, Vol.05, pp. 213-241
Keywords
마테오 리치; 아퀴나스; 인간론; 윤리학; 천주실의 평가
Abstract
『천주실의』의 저자는 명말(明末)에 중국에 와서 중국문화에 적응하여 로마의 카톨릭교회[天主敎]의 도리를 본격적으로 전교하여 최초로 성공한 이탈리아의 마체레타(Macereta)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利瑪竇 1552-1610)이다. 이런 그의 중국전교의 시발점은 예수회의 동방전교의 시발자인 프란치스코 사베리오(Franciscus Xaverius 1506-1552)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사베리오는 1541년에 인도의 폴투갈 식민지인 고아(Goa)에 왔으며 인도의 토착민들에게 열심히 기독교를 전교하였다. 그러나 더 큰 야망을 가진 그는, 당시 폴투갈 상인들로 부터 얻은 중국과 일본에 대한 새로운 정보에 따라서, 우선 일본의 전교에 직접 나섰다. 1549년 일본의 가고시마(鹿兒島)에 도착한 이래 그는 많은 전교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일본의 도착에서부터 그를 늘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다음과 같은 일본인들의 반박이였다. 기독교의 교리는 참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참이라면 중국인들이 분명히 오늘날까지도 모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일부 일본인들에게 중국문화의 권위는 대단한 것이었다. 따라서 사베리오는, 이들 "서양의 구도승들과 상인들이 13세기 중엽 발견의 시대"(Age of Discovery)이래 계속 꿈꾸어 온 기독교 전세계군주국(Universal Monarch)이나 천년왕국(Millennial Kingdom)의 추구"의 마지막 완성은, 결국 이들 중국의 지식인들에 대한 전교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일본과 중국같은 고급문화를 상대로 하는 전교사업에는 높은 학식과 인덕이 겸비된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1552년 중국대륙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사망하자, 그의 후임이 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는 그의 유지를 그대로 받들어 우선, 고아로부터 루지에리(Michele 꼏햗갸 1543-1607)를 1579년 마카오로 불렀다. 그로 하여금 삼년여에 걸쳐서 중국어와 한문을 열심히 배우게 하면서 중국인들과의 몇가지 예비적인 접촉시도를 해보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또한 마침 당시 고아에 와있던 젊은 마테오 리치신부를 마카오로 불러서(1582.8.7), 이 둘로 하여금 중국전교사업을 맡게 하였다. 이런 교섭의 결과, 루지에리와 리치는 기독교 사상을 전교하기 위하여 중국의 광동(廣東)성 조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1583.9.10).
ISSN
1226-7007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0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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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Philosophy (철학과)철학사상철학사상 05호 (1995)


『 천주실의 』(天主實義)의 내용과 그 의미
Content and Meaning of 「 The Truth Meaning of Lord of Heaven 」
Cited 0 time in Web of ScienceCited 0 time in Scopus
Authors송영배Issue Date1995Publisher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Citation철학사상, Vol.05, pp. 213-241Keywords마테오 리치; 아퀴나스; 인간론; 윤리학; 천주실의 평가Abstract『천주실의』의 저자는 명말(明末)에 중국에 와서 중국문화에 적응하여 로마의 카톨릭교회[天主敎]의 도리를 본격적으로 전교하여 최초로 성공한 이탈리아의 마체레타(Macereta)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利瑪竇 1552-1610)이다. 이런 그의 중국전교의 시발점은 예수회의 동방전교의 시발자인 프란치스코 사베리오(Franciscus Xaverius 1506-1552)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사베리오는 1541년에 인도의 폴투갈 식민지인 고아(Goa)에 왔으며 인도의 토착민들에게 열심히 기독교를 전교하였다. 그러나 더 큰 야망을 가진 그는, 당시 폴투갈 상인들로 부터 얻은 중국과 일본에 대한 새로운 정보에 따라서, 우선 일본의 전교에 직접 나섰다. 1549년 일본의 가고시마(鹿兒島)에 도착한 이래 그는 많은 전교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일본의 도착에서부터 그를 늘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다음과 같은 일본인들의 반박이였다. 기독교의 교리는 참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참이라면 중국인들이 분명히 오늘날까지도 모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일부 일본인들에게 중국문화의 권위는 대단한 것이었다. 따라서 사베리오는, 이들 "서양의 구도승들과 상인들이 13세기 중엽 발견의 시대"(Age of Discovery)이래 계속 꿈꾸어 온 기독교 전세계군주국(Universal Monarch)이나 천년왕국(Millennial Kingdom)의 추구"의 마지막 완성은, 결국 이들 중국의 지식인들에 대한 전교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일본과 중국같은 고급문화를 상대로 하는 전교사업에는 높은 학식과 인덕이 겸비된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1552년 중국대륙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사망하자, 그의 후임이 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는 그의 유지를 그대로 받들어 우선, 고아로부터 루지에리(Michele 꼏햗갸 1543-1607)를 1579년 마카오로 불렀다. 그로 하여금 삼년여에 걸쳐서 중국어와 한문을 열심히 배우게 하면서 중국인들과의 몇가지 예비적인 접촉시도를 해보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또한 마침 당시 고아에 와있던 젊은 마테오 리치신부를 마카오로 불러서(1582.8.7), 이 둘로 하여금 중국전교사업을 맡게 하였다. 이런 교섭의 결과, 루지에리와 리치는 기독교 사상을 전교하기 위하여 중국의 광동(廣東)성 조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1583.9.10).ISSN1226-7007LanguageKoreanURIhttps://hdl.handle.net/10371/10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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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아퀴나스의 목적인과 능동인의 관계를 중심으로-*1)
양 명 수
【주제분류】윤리학, 형이상학
【주요어】리, 천주, 능동인, 목적인, 초월, 내재
【요약문】아퀴나스나 주희는 존재의 이유가 존재보다 앞선다고 하는 중세
의 사유방식을 대변하고 있다. 그래서 우주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천주나
리는 모두 목적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모두 도덕적 자기완성을 인간
의 중요한 목적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 목적을 실현하는 힘이 어디서 오느
냐에 따라서 천주와 리가 달라진다. 능동인은 그 문제에 대한 답이라고 봐
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창조론과 도덕에서의 은총론을 결정짓는 것은
능동인이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는 이념으로 통치할 뿐 아니라 개별 현상에
직접 개입함으로 통치한다. 그처럼 능동인이 사물 밖의 초월자에게 주었기
때문에, 천주는 기본적으로 초월자다. 초월자이지만, 형상인으로 또는 능력
으로 내재한다. 반면에 성리학에서 리는 보편적 표준으로 초월적이지만, 각
구일극(各具一極)으로 내재해 있으며, 능동인은 리의 몫이 아니라 기의 몫
이다. 그래서 리는 이념으로 또는 천명으로 통치할 뿐이며,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존재론적 실체가 아니다. 천주는 목적이지만 목표가 될 수 없다
면, 성리학의 리는 성인관(聖人觀)에 기초해서 목적이자 목표가 된다.
* 이 논문은 철학 사상 28호에 발표한 글, 천주실의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리와 천주의 개념을 중심으로 의 후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216 논문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네 가지를 사물의 생성 변화의
원인으로 본다. 그 원인이란 질료인(質料因), 형상인(形相因), 능동인
(能動因), 목적인(目的因)이다. 그런데, 우리말에서 ‘원인’이라고 하면
‘까닭’이 먼저 생각난다. 생성의 원인이라고 할 때, 무엇보다 먼저 생
성되는 까닭을 말하는 것 같다. 생성의 ‘까닭’이란 말하자면 존재의
‘목적’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일 다른 원인보다도 목적인이 우선한다
면, 목적이 있어야 존재가 있게 된다는 뜻이 된다. 그런 명제는 아퀴
나스 신학의 기본 구조를 잘 보여준다.
마테오 리치는 아퀴나스 신학에 바탕을 두고 기독교의 천주를 중
국인에게 설득하려고 했다.1) 그는 천주실의 에서 천주가 모든 피조
물의 덕성을 빼어나게 자기 속에 가지고 있는 분이요, 가장 완전하고
돈독해서 비교할 수 없다고 한다.2) 이는 기독교의 하느님이 ‘최고선’
으로 이해되는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 개념과 선이라는 도덕적
개념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사실 도덕적 완전성 때문에 하느님은
하느님이 된다고 봐야 한다. 도덕적 완전성이란 중세 철학에서 인간
의 목적이기도 한데, 바로 그 도덕성 때문에 하느님이 인간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 목적이 만물의 존재의 이유가 된다면
선하신 하느님은 우주 전체의 목적인이 되는 것이다. 세상을 창조하
고 주재하는 천주의 능력도, 세상의 존재 이유가 되시는 하느님의 덕
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생성론인 창조론은 독
1) 학자들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가 아퀴나스 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는 점에 일치한다. 다만 천주실의 의 바탕이 된 토미즘이 전통적 토미즘
이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 선교지에 대한 개방적 신학의 필요성과 르네상
스 인문주의 영향을 입은 스페인 토미즘 또는 제 2의 토미즘이라는 연구
가 있다. 김상근,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에 나타난 16세기 후반 예수회
교과과정과 예수회 토미즘의 영향 , 한국기독교신학논총 40집(서울: 한국
기독교학회, 2005). 그러나 제 2의 토미즘이라는 것도 결국 아퀴나스 사상
에 들어 있던 자연계시의 주장을 특별히 강조한 것이며, 여전히 아퀴나스
신학 안에 있는 것임을 두말할 필요가 없다.
2) “어느 것은 아랫것의 덕성을 빼어나게 자기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천주께서
만물의 본성을 자기 속에 자지고 계시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마테오
리치, 천주실의 2-12, 송영배 외 역(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p.96.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17
특한 도덕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마테오 리치는 만반의 이치가 하느님
의 덕성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함으로써,3) 세상의 조화와 운행이 도
덕적 선의 원리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창조와 주
재의 능력이 도덕성의 문제와 매우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천주와 성리학의 리는 만물의 목적인으로서 세상의
조화와 운행의 주재자다.4) 그런데 주재의 핵심은 도덕 행위의 주체
문제다. 우주론의 핵심은 도덕론이다. 그런데 목적이 직접 주재하느냐에
따라 목적인이 동시에 능동인이 되는지가 결정된다. 논란이 많은 리의
능동성 문제도 결국 그 문제다.
아퀴나스 신학이나 성리학이나 모두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철학
적 노력으로서 목적론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목적론이란 헤
겔식의 역사적이고 수평적인 텔로스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자
기완성의 목적을 의미한다. 아퀴나스 신학에서 하느님은 만물의 목적
인으로 설명되고, 성리학의 리(理)도 만물의 궁극적 표준으로서 목적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뒤에서 보듯이 리는 목적이기 보다는
목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성리학은 뒤에서 보듯이5) 아퀴나스의
목적론적 세계관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에 목적
인의 모습이 있다고 할 때, 그 목적인이 동시에 능동인이 되느냐는 문
제에서 아퀴나스 신학과 성리학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아퀴나
스에게서는 만물의 형상인이자 목적인인 하느님이 동시에 능동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능동인이나 운동인의 문제가 자연학에서 제기되었지만,
그것이 목적인과 연결되면 도덕 실현의 원동력에 관한 문제가 된다.
3) “천주의 본성은…그 정묘한 덕성 안에 만반의 이치를 내포하고 모든 만물의
성질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그 능력은 온갖 것을 갖추지 않은 바가 없습니다.”
(天主性…以其精德 包萬般之理 含衆物之性 其能無所不備也) 천주실의 2-12, p.96.
4) 정이(程頤)가 상제라는 이름을 주재하는 태극을 가리키는 것으로 정리한 이
후에, 주희나 퇴계 이후 조선 성리학자들은 태극이나 리가 주재한다는 표현
를 받아들인다. 참조. 이광호, 상제관을 중심으로 본 유학과 기독교의 만남 ,
유학사상연구 제 19집(서울: 한국유교학회, 2003).
5) 주 25의 본문.
218 논문
다시 말해서 선의 실현을 주재하는 주체가 누구냐의 문제가 된다. 아
퀴나스의 자연학은 형이상학을 말하기 위한 것이요, 생성의 운동인이
란 실제로는 선 실현의 능동인을 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Ⅰ. 목적인의 우선성과 능동인과의 관계
아퀴나스에게서 목적인이란 모든 사물의 존재 이유를 가리킨다. 다
시 말하면, ‘왜 존재하는가’의 문제다. 존재 이유는 존재의 원인 중에
서 가장 높은 위치에 속한다. 이미 자연의 원리 에서 아퀴나스는 목
적인(causa finalis)을 원인 중의 원인이라고 했다.6) 작용자(operans)
또는 능동자(effeciens)는 목적 없이 행위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 점은
신학대전 에서 다시 확인된다. “목적인의 원인성은 제일 먼저 것(prima)
이다. 그 이유는 능동자가 작용하는 것은 목적 때문이 아니면 작용하
지 않으며, 능동자에 의해 질료는 형상에로 움직여지기 때문이다. 따
라서 목적은 원인들의 원인(causa causarum)이라고 불리운다.”7) 모든
존재는 존재 이유로서의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 목적이란 무
엇인가? 그것은 ‘선’이다. 아퀴나스에게서 목적이란 모든 사물이 욕구
하는 것인데, 그것은 선이라고 하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8) 선이란
좋음을 말하는 데, 모든 사물은 좋은 것을 바라게 되어 있다. 좋은
것은 쾌락을 주는 것(delectabilia)이 있고, 유익한 것(utile)이 있고, 그
자체로 선한 것(honestum)이 있다.9) 그런데 모든 욕구 운동의 종점은
6) 토마스 아퀴나스, 자연의 원리들 , 김율 옮김(서울: 철학과 현실사, 2005), p.71.
7)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 , Part1, Question 5, article 2 (앞으로는 1, 5,
2로 표기한다), 정의채 역(서울: 성 바오로 출판사, 1989), p.99. 신학대전 1
은 한국어 번역본의 권수를 가리킨다.
8) 아퀴나스에서 선이란 흔히 생각하는 도덕적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바람직하고(desiralble) 옳고(right) 아름다운(beautiful) 것을 통틀어 말한
다. 말하자면 존재의 완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참조, 류지황, 선과 악의
주체는 누구인가-토마스 아퀴나스와 임마누엘 칸트의 도덕론 비교분석 ,
신앙과 학문 12권 1호(서울: 기독교학문연구소, 2007), p.126.
9) 신학대전 1 , 1, 5, 6, p.110.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19
‘그 자체로 선한 것’이며, 거기서 운동은 쉼(quies)을 얻는다. 그 자체
로 선한 것이란 덕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되는 것이다.10) 물론 이것을
아퀴나스는 ‘완전’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도덕이란 하느님의 선하
심을 닮아 자기 완전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사람
이 참사람이 되는 것이 도덕이다.
그리하여 아퀴나스의 신학은 도덕론에 그 바탕을 두고 있음이 그러
난다. 선이 존재의 목적이다. 그것은 천지 만물은 물론이고 하느님에게
도 적용된다. 창조자인 하느님은 자신의 선하심을 전달할 목적으로 만
물을 창조했다.11) 그리고 천지 만물의 목적은 하느님의 선성이다.12)
흔히 신학에서 만물의 목적을 하느님이라고 할 때, 그 하느님은 선하신
하느님을 가리킨다. 하느님은 최고선으로서 만물의 목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만물의 자기완성과 연관된다. 만물은 하느님의 선하신 완전성을
목적으로 삼음으로 그의 유사(similitudo)인 자기 완전성에 도달하려고
의도한다.13) 만물의 목적은 하느님이면서 동시에 자기완성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목적이 자기완성에 있다고 할 수도 있는데, 중세의 신학자 아
퀴나스에게 하느님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자기완성을 목적으로 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자기의 고유한 완성을 욕구함으로써
하느님 자신을 욕구한다.”14) 그는 하느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연 사
물들도 하느님을 목적으로 하여 욕구한다고 본다.15) 물론 인간이나 다른
10) 아우구스티누스도 이렇게 말한다. “덕이란…인간적 선 가운데 절정을 이
룬다.”( 신국론 , 19, 4, 3. 성염 역, 분도출판사, 2004, p.2151) 아퀴나스가
선을 욕구의 대상으로 말하는 것은, 그의 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적임을 암
시하는 것이며, 자연신학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죄를 강조하는 개신교
전통에서 선은 좀처럼 욕구의 대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개신교 전통에
서 나온 칸트의 윤리에서 선은 그런 욕구로부터의 단절에서 발생한다. 그
리고 욕구의 대상이 선이면 선이란 주체 밖에 있게 되는 것인데, 칸트에
게서 선이란 주체의 의지에 있을 뿐이다. 그것은 칸트가 중세의 존재론에
서 벗어난 근대적인 주체 철학자임을 말해준다.
11)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6 , 1, 44, 4, 정의채 역(서울: 바오로 딸, 1999), p.79.
12) 신학대전 6 , 1, 44, 4, p.79.
13) 같은 곳.
14) 신학대전 1 , 1, 6, 1, p.113.
15) 참조. 신학대전 6 , 1, 44, 4, pp.75, 79. 신학대전 16 , 2, 1, 2, 정의채 역(서울:
220 논문
피조물의 자기완성이 하느님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라고 할 때, 하느님
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목적이란 도달할 목표가 아니라 존재의 이유
로서, 모든 사물이 그것을 위해 있는 것이다.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
에서 목적인을 ‘爲者’로 표현한 것16)도 그 때문으로 보인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의 목적이요, 인간의 자기완성은 목표다.17)
아퀴나스의 형이상학이 도덕론에 바탕을 두고 있음은, 그가 능동인을
선의 능동성으로 파악하는 데서 분명해진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원인
주는 데 있어서는 첫째로 능동자를 움직이는 선과 목적이 발견되고
둘째로는 형상에로 움직이는 능동자의 행동이, 셋째로는 형상이 이루어
진다.”18) 목적인이 능동인보다 앞선다는 것은, “능동자를 움직이는 선”
을 가리킨다. 이것은 만물의 목적인 선이 자기 확산적이라고 믿는 것
이며, 능동자의 운동도 선의 자기확산의 운동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
것을 가리켜 아퀴나스는 “목적이 움직여준다는 것”19)이라고 한다. 하
느님은 제일 능동인이요 운동인으로서 세상 만물을 만들어냈지만, 하
느님으로 하여금 제일 능동인이 되게 한 것은 하느님의 선하심이다.
선함을 전달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목적이 창조 행위를 일으켰다. 하
느님은 모든 사물에 목적을 부여하는 분으로서 첫 행동자(primum agens)
다. “목적이 움직여준다”는 것은 그 말이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이유가
존재에 앞선다. 그것을 아퀴나스는 “원인 주는 데 있어서(in causando)
선은 유(有, ens)에 선행한다”20)고 한다.
물론 존재 또는 유는 개념상 선에 앞선다. 다시 말해 처음 지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존재다. “그 자체로 확실한 것”이 아닌 “우리에게 확
바오로 딸, 2000), p.69.
16) 천주실의 , 1-6, p.58.
17)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2-1부에서 인생의 목적을 행복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행복은 덕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자기완성의 문제로 연결된다. 그런
논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에서 유래한다. “행복에 결정적인 것은 탁월성
(덕)에 따르는 활동이고, 그 반대의 활동은 불행에 결정적이다.”(아리스토텔
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 이창우 외 옮김, (서울: 이제이북스, 2008), p.40.
18) 신학대전 1 , 1, 5, 4, pp.103, 104.
19) 신학대전 1 , 1, 5, 5, p.104.
20) 신학대전 1 , 1, 5, 2, p.99.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21
실한 것”은 존재다. 그렇게 보면 능동인이 목적인에 앞선다. 현실적
존재란 질료와 형상의 결합을 이끄는 작용 또는 운동으로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학의 영역에서 볼 때 그렇다.21) 그러나 형이상
학의 관점에서 보면 선이 존재에 앞선다. 이 말은 존재의 목적이 존재
에 앞선다는 것이다. 아퀴나스 신학이 중세의 목적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목적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으며, 존재자는 선을 실현하기 위
해 있다. 최고선은 존재 자체인 하느님이므로, 결국 존재는 하느님을
위해 있다는 말로 귀결된다. 아퀴나스에게서 존재의 문제는 이 땅의
존재자들 곧 제일 실체로부터 시작되지만, 선의 문제는 궁극적인 것
곧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다. 제일 실체는 단적으로 존재하기는 하지
만 단적으로 선하지는 않다. “선은 욕구될 만한 것인 완전의 이유
(ratio perfecti)를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궁극의 이유(ratio ultimi)를 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완전한 것이 단적으로 선(bonum
ultimi)이라 불리운다.”22) 궁극적으로 완전한 것 곧 초월자로부터 세상
만물이 생겼다고 함으로써, 선에서 존재가 생긴 것으로 말하려는 것이
다. 물론 하느님에게서는 존재와 선은 완벽히 일치하지만, 피조물의
존재는 그 존재 이유 곧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존재한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선하다’23)는 유명한 선언도 그처럼 선에서 존재
가 나왔다는 것 또는 존재의 목적이 존재에 앞선다는 관념을 반영하
는 명제다.
만물의 생성 변화를 일으키는 근원적인 힘을 생각한다면 능동인 또
는 운동인을 찾게 된다. 만물의 생성 변화란 변화요 운동이기 때문이
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변화의 운동을 관찰하는 데서 생긴 것이 아니
라, 아퀴나스의 신학이나 성리학이나 인생의 의미와 존재의 까닭을 묻
21) 이 문제를 자연의 원리들 에서는, 능동자는 생성의 방식에서 앞서고 목적
은 실체와 완성의 방식에서 앞선다고 한다. 목적이 없는 운동은 없다. 형상
과 질료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어서, 형상은 질료보다 완성에서 앞서고, 질
료는 형상보다 생성과 시간에서 앞선다고 말한다. 자연의 원리들 , p.75.
22) 신학대전 1 , 1, 5, 1, p.96.
23) “어떤 것이 유인한 그것은 선인 것이 명백하다.” 신학대전 1 , 1, 5, 1, p.95.
222 논문
는 데서 생긴 것이다. 거기서는 목적인이 중요시 된다. 재미있는 것은
아퀴나스와 무관하게 퇴계 사상을 연구한 윤사순 교수가 태극의 근원
됨을 두고 ‘원인’과 ‘이유’를 구분해서 생각한다는 점이다. 윤 교수의
의도를 볼 때 원인은 생성 원인과 관련된 우주론적 개념이고, 이유는
당위와 관련된 도덕론적 개념이다.24) 그러한 구분을 아퀴나스가 사용
하는 네 가지 원인과 관련시켜 보면, 능동인과 목적인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리학의 태극은 궁극적인 것으로서, 인과 관계를 따
른 ‘원인’이라기보다는 만물이 존재하는 의미를 정해주는 ‘이유’이며,
따라서 능동인이 아니라 목적인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25)
주희나 퇴계가, 이치로 볼 때 사물이 없어도 사물의 리는 있었다고
하는 것이나, 리가 기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은 존재보다 존재의 이유가
먼저 있었다는 목적론적이고 가치론적인 사유 방식을 표현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리는 순선(純善)이요 완전한 선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결국
아퀴나스의 하느님이 최고선으로서 사물의 목적이 되듯이, 리 역시
최고선으로 사물의 목적인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주희나 퇴계가
리를 인의예지의 덕이라고 볼 때, 만물은 인의예지의 덕을 실현하기
위해 있다. 인(仁)이란 생의(生意)이니, 리가 만물의 목적이라는 것은
만물이 생생하게 살기 위해 있다는 말도 될 것이다. 그것은 리를 만
물의 목적인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아퀴나스의 목적론적 세계관과는
다름을 암시한다. 아퀴나스에게서 목적인은 사물 밖의 하느님으로서,
피조물은 그 하느님을 위해 있다. 그러나 성리학에서 리는 사물 안에
24) 원인은 필연 법칙에 적용되는 개념이고, 이유는 당위에 적용되는 개념이
라고 본다. 윤사순, 퇴계의 태극생양의관 , 아세아 연구 , (서울: 고려대
학교 아세아문제 연구소, 1969), 12권 3호, p.231 주11. 태극이나 리는 우
주론적이고 도덕적인 두 측면을 지니고 있는데, 윤사순 교수가 말하는 원
인은 우주론적인 근원을 가리키고 이유는 가치론적이고 도덕적인 근원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5) 윤사순 교수가 지적하는 퇴계의 태극생양의 해석의 문제점은, 퇴계의 태
극이 목적인일 뿐 아니라 동시에 능동인도 되는 데 따르는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위의 글). 바로 그것이 퇴계 학설의 독창성인데, 그렇다고 태
극이 아퀴나스적인 의미에서의 능동인일 수는 없다. 여기서는 더 이상 논
하지 않겠다.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23
있으므로, 사물들이 그 밖의 누구를 위해 사는 그런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존재의 목적이라는 개념이 성리학에 썩 어울린
다고 할 수는 없다.26) 그러나 태극이 표준으로서 만물이 바라보는 궁
극이요, 기준점이 된다는 점에서 목적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언뜻 보면 아퀴나스의 목적인은 사물의 욕구의 대상으로 설
명되고, 성리학의 목적인인 리는 천명(天命) 또는 당위 법칙으로 설명
되는 점도 다르다. 그것은 아퀴나스의 신학이 자연신학으로서 인간
욕구의 타락을 그리 강조하지 않기 때문인데, 만일 인간의 악의 성향
에 좀 더 주목한다면 인간이 바라보는 선이라는 목적은 당위의 측면
이 더 부각될 것이다. 아퀴나스에게서도 하느님은 욕구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당위이고, 성리학에서도 태극은 당위이지만 동시에 욕구의 대
상이다. 다시 말해서 아퀴나스의 하느님과 성리학의 리는 모두 인간
이 바라는 것이지만 도달하지 못해 당위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한편 윤 교수는 사물에 갖추어져 있는 태극(各具一極) 또는 사물에
갖추어져 있는 리(所具事物之理)는 표준으로서 사물의 생성 형식 또
는 본질을 뜻한다고 본다.27) 생성 형식이나 본질은 정확히 아퀴나스
가 말하는 형상인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리는 곧 형상인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리는 목적인이면서 형상인이라고 할 수 있다.
태극이나 리는 궁극적이고 완전한 선으로서 되어야할 바의 기준이요,
도덕적 행위와 마음씀씀이의 표준이 된다. 사실 이데아론을 말한 플
라톤 이후 사물의 형상의 궁극은 선의 형상이므로, 그렇게 보아도 형
상인과 목적인은 일치한다. 풍우란(馮友蘭) 역시 리를 형상인과 목적
인으로 본다.28) 성리학은 도덕 형이상학으로서 존재의 의미와 이유를
중심으로 우주론을 전개한 사상임을 알 수 있다. 태극이나 리는 목적
인이나 형상인으로서 만물의 근원이 된다.
26) 송영배 교수는 아퀴나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이 오늘날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의
구심을 품는다. 송영배, 동서철학의 교섭과 동서양 사유방식의 차이 , p.28.
27) 윤사순, 위의 글, p.232.
28) 풍우란, 중국철학사 하 , (서울: 까치, 1999), p.541. 주26. 그는 질료인과
능동인을 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224 논문
그러나 리를 목적인과 형상인으로 보더라도 그것이 능동인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리가 아퀴나스의 목적인이나 형상인과 꼭 일치하
는 것은 아니다.
아퀴나스와 성리학의 결정적인 차이는 목적인이 동시에 능동인이 될
수 있느냐는 데 있다. 목적인이 동시에 능동인이 된다면 목적인이 선의
실현의 주체가 된다. 흔히 능동인을 우주론적인 생성의 문제와 관련해
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선의 실현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기독교 신학
의 의미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아퀴나스 신학에서 하느
님은 능동인으로서 만물의 생성과 변화에 직접 관여한다.29) 그런데 앞
에서 본대로 그 능동인을 능동인 되게 하는 것은 목적인이므로, 하느
님의 직접 섭리란 피조물에 선의 질서를 부여하고 그 생성 변화가 선의
원리를 따라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때 능동인은 선의 실현을 이끌
고 주도한다는 의미에서 선의 원인이 된다. 그것은 자유의지를 지닌 인
간에게도 해당된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니고 주체적으로 선을 실현하
지만, 모든 선의 실현은 하느님의 직접 섭리에 따라 발생한다. “자유의지
의 행위 자체는 원인으로서의 하느님께 환원되는 것”30)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성리학의 리는 사물의 존재 이유가 되지만, 능동인이 아니기 때
문에, 그 존재 이유대로 실행하는 원동력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성리학은 도덕의 실현에서 인간의 마음의 주재를 확고하게 지킨다.
퇴계의 성리학에서 논쟁점이 된 문제 곧 리동(理動)의 문제는 그런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성리학은 리의 무조작(無造作)과 무정의(無
情意), 무위(無爲)를 주장함으로 리가 직접 움직이는 것이 아님을 말했
다. 물론 리를 소이연(所以然)이라고 할 때 리의 능동성을 완전히 배
29) 아퀴나스에게서 생성이란 질료가 새로운 형상을 입는 것이요, 잠재태가
현실태가 되는 것인데, “잠재태로 있는 것은 그 스스로 현실태로 옮겨갈
수 없다”( 자연의 원리들 , p.47). 이것이 아퀴나스 자연학의 가장 큰 전
제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모든 사물의 생성에는 어떤 사물의 형상을 잠
재태에서 현실태로 이끌어가는 작용자(operans)가 필요하다. 아퀴나스가
만물의 근원으로 말하고자 하는 하느님은 초월자다. 초월자 하느님은 사
물의 생성 변화 밖에서 그 변화의 능동인이 된다.
30)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3 , 1, 22, 2, 정의채 역(서울: 바오로 딸, 2000), p.139.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25
제하지는 않은 듯이 보이는 부분이 있어서 논란이 많다. 그러나 성리
학에서 능동성은 기본적으로 기(氣)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물리적
으로 운동은 기가 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태극이나 리가 아퀴나스적인
의미의 능동인이 될 수 없다. 다만 소당연과 소이연이 일치한다고 함
으로써, 도덕적 당위를 우주의 운행 원리에서 끌어내려고 했으며, 그
래서 우주론이 들어온 것이다. 그것은 만물의 생성 조화와 세상사가
필연적인 도덕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함으로써, 도덕의 실현을 격려
하고 설득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퇴계 같은 경우에 소이연(所
以然)보다는 소당연(所當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는데, 31)
그것은 주역의 자연의 원리인 원형이정(元亨利貞)을 맹자의 인의예지
로 본 주희도 마찬가지다. 성리학이 도덕 형이상학일 뿐, 아퀴나스적
인 존재론에 관심이 있지 않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성리학의
‘소이연’이 아퀴나스 신학의 ‘원인’(causa)과는 다른데,32) 그것은 결국
소이연이 결코 능동인이 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퇴계가 리동(理動)에 앞서 고봉과의 논쟁에서 리발(理
發)을 말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리발은 도덕 실현에서 인간
의 주재를 약화시키고 리의 능동성을 주장하는 듯이 보여서 조선 시대
성리학의 가장 큰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퇴계의 리발은 결국 율곡이
말한 대로 리의 무위성을 깨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고, 고봉이 말한
대로 리가 정의(情意)가 있고 조작(造作)이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
다. 그럴 경우의 문제점은 성리학이 신학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점이
다. 리가 초월적 인격체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퇴계는 도덕론
에 있어서의 리발 이후에 우주발생에서의 리동(理動) 그리고 일종의
인식론에서의 리도(理到)를 말함으로 리의 능동성을 일관되게 주장해
나갔다. 리의 능동성은 순선(順善)의 능동성이다. 다시 말해 도덕적 순
31) “궁극적으로 논한다면 소당연을 이치라고 하는 말이 보다 좋을 듯합니
다”(窮極論之 當然者 爲理之說 爲長) 이황, 국역 퇴계전서 7 (서울: 퇴계
학연구원, 2003), p.82. 退溪先生文集 25, 7. 鄭子中與奇明彦論學 有不合 以
書來問 考訂前言以答如左 .
32) 참조, 양명수, 천주실의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 철학사상 28호(서울: 서울대학교철학사상연구소, 2008), p.184.
226 논문
선이 인간의 의지를 움직이고(理發), 우주적 자기확산의 힘을 가지고 있
으며(理動), 진리 인식을 주도한다는 것(理到)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런데, 여기서 핵심은 리발 곧 도덕론이다. 리의 능동성이 도덕론에서
이해되면, 실제로는 인간 안의 도덕법이 마치 인간을 넘어 인간을 주
재하는 듯함을 가리킨다. 그것은 인간의 악의 성향을 심각하게 인식할
때, 선을 이루는 것이 마치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여기는 것으
로서, 칸트가 실천이성비판 에서 도덕법이 마치 인간을 끌고 가는 것
처럼 말한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퇴계나 칸트에게서 그 도덕법은 인간
안의 것이며, 바깥의 초월자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래서 칸트는 선의 실
현을 이성의 자기 동의라고 했고, 33) 퇴계는 리발을 인간이 도덕 주체
로서 참다운 주재를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34) 그러므로 퇴계는 순선의
능동성을 통해 도덕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며, 우주 발생에서 아
퀴나스의 하느님과 같은 능동인을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천지 창조를 주재하는 능동인 곧 자신은 움직여지지 않으면서 모든 것
을 움직이는 제일 능동인의 개념이 없다. 물론 그가 태극을 가리켜 ‘고
요하나 움직이고 움직이나 고요하다’(靜而動 動而靜)고 하는 것은 어떤
초월적 면모를 태극에 부여하려는 의도가 엿보이지만, 그것은 역시 우
주 발생론적 관심이 아니라 도덕적 관심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퇴계의 철학에서 리는 목적인이나 형상인이 될 수는
있지만, 아퀴나스적인 의미에서의 능동인은 아니라는 얘기다.
퇴계나 주희의 성리학에서 목적인이 동시에 능동인이 될 수 없다
는 것은, 선의 실현의 주체가 결국 인간이라는 말이다. 퇴계의 리발
이나 리동은 선의 실현이 인간 자신을 넘어선 우주적 선의 힘에 의
해 이루어지는 측면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리발이나 리동의 리
가 능동인이 될 수 없으므로 결국 선의 실현의 주체는 인간으로 귀
결된다. 그러나 아퀴나스에게서 목적인은 능동인이므로 목적인인 하
느님이 그 목적 달성을 스스로 이끈다. 다시 말해 선의 실현을 하느
33) I. Kant, 실천이성비판 , 백종현 옮김, (서울: 아카넷, 2004), p.183.
34) 이 문제에 대해서는 참조. 양명수, 칸트의 동기론에 비추어 본 퇴계의 리발 ,
퇴계학보 123집(서울: 퇴계학연구원, 2008).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27
님이 주도한다. 능동인의 개념은 이처럼 도덕 실현의 주체 문제와 긴
밀하게 관련이 있으며, 제일 능동인이 제이 능동인을 창조하는 창조
론도 결국 인간의 선의 의지를 하느님이 주관하고 있음을 말하는 문
제로 연결된다. 그리고 창조론은 오히려 그러한 도덕론의 신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Ⅱ. 내재(內在)의 차이
목적인과 능동인의 관계의 차이는 기독교의 하느님과 성리학의 리
의 초월성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바로 내재의 차이를 가
져온다. 초월을 말하면 반드시 내재를 말하여야 하는데, 어떤 모습으
로든 내재 없는 초월자는 인간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내재의 문제는 천주나 리라고 하는 초월자가 어떻게 만물
과 함께 하는지 또는 어떤 방식으로 만물 속에 있는지의 문제다.
천주실의 4권에는 이와 관련하여 중국선비와 마테오 리치의 깊이
있는 토론이 나온다. 초월자가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중국 선비는 중국의 옛날 선비들이 “우주 만물의 본성은
모두 선하며 큰 이치를 가지고 있어서 다시는 바꿀 수 없음을 분명
하게 살폈습니다.”고 한다.35) 이것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사물이 선
한 본성을 갖고 있고 그것을 리(理)라고 한다는 얘기다. 즉 리는 만
물이 자기 속에 가지고 있는 선한 본성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사물
들이 크거나 극미한 차이는 있어도, 그것들의 본체는 하나의 몸이라
고 생각하였습니다.”고 한다.36) 수많은 사물들에 각각 들어 있는 성
(性)은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럿이면서 하나인
리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여럿은 하나고, 거꾸로 그 하나가 여럿을
낳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태극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가 여럿을 품고
35) 천주실의 4-7, p.190.
36) “物有巨微 其性一體”, 천주실의 4-7, p.190.
228 논문
있는 것이지만, 각구일극(各具一極)의 관점에서 보면 그 여럿의 극이
각각 하나의 태극이다.
여럿이 하나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나 자연 사물이나 같은 리를 품
고 있다는 것으로서, 마테오 리치가 주장하는 존재의 위계질서를 사
실상 부인하는 것이다. 아퀴나스 신학에서 피조물들은 그 종에 따라
각기 다른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물이 같은 성(性)을 지
니고 있을 수 없다. 마테오 리치는 아퀴나스를 따라 식물과 동물을
각각 생혼(生魂)과 각혼(覺魂)이라고 하고, 사람은 그들과 달리 추리
하는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영혼(靈魂)이라고 분류하였다.37) 그러한
존재의 계층은 모든 피조물이 같은 리를 지니고 있다고 보는 성리학
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성리학도 인문주의로서 존재의 계층이 없지
않지만, 그것은 아퀴나스 신학과 달리 모두 피조물이 동일한 리를 지
니고 있는데 서로 기질이 달라 리가 통하는 정도가 다를 뿐이다. 그
것은 동식물과 인간의 본질(essentia)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서, 아퀴나스 신학과 다르다. 성리학에서 모든 피조물이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은 리가 하나이면서 동시에 여럿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것은 사실 앞에서 말했듯이 여럿에서 하나를 본 것이라
고 할 수 있다. 여러 사물에 들어 있는 본성이 모두 같다고 하면서
하나의 본성론이 나오는 것이고, 그 하나의 본성이 수많은 사물 속에
들어가 사물을 주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분수(分殊)에서 리일
(理一)을 보는 것이요, 하나의 리라는 보편자 또는 초월자를 말하더라
도 그 초월자가 철저하게 내재에 기반을 둔 것이라는 말이다. 그 점
이 아퀴나스나 마테오 리치의 기독교 신학과 다르다.
리가 하나이면서 여럿인 것은 성리학의 특징이며 기독교의 천주와
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그것은 초월적 리가 사물 속에 일일이 내
재하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다. 그래서 중국 선비는 이렇게 말한다.
“천주이신 상제는 바로 개개의 사물에 내재하여, 만물들과 더불어 하
나가 된다.”38) 이것은 기독교의 천주를, 천인합일(天人合一)을 말하는
37) 천주실의 5-4, p.240.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29
유학 식으로 이해한 것이다. 만일 천주라는 초월자를 인정한다 하더라
도, 그것은 철저하게 사물 안에서 그 사물과 하나가 되는 존재일 수밖
에 없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주장은 앞에서 말한 대로 성리학이 상제
라는 개념을 통해 주재하는 초월자를 말하더라도, 내재를 근거로 해서
초월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 안에 들어 있는 선한 덕성, 그 덕성이 나
를 주재하고 세상사를 주재해 나가는 것이요, 그 덕성은 나뿐 아니라
만물에 똑같이 들어 있는 덕성이요, 만물에 들어 있는 같은 덕성이므
로 하나의 보편적인 덕성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나라고 하는 개별자
를 넘어선 초월자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의 덕성이 온 우
주를 지배하고 주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중국 선비의 주장
은, 천주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상당한 교육적 효과가 있다고 생각
한 것 같다. 그래서 이어 말하길, 타자를 해하는 것은 그 안에 있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한다.39) 만일 마테오 리치를 따라 인격신
을 인정하되, 그 초월성을 삭감하고 그것이 만물 안에 들어 있다고 하
면, 타자를 귀하게 여기고 선을 베풀도록 권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
다. 그러나 천주의 초월성이 사라진다는 것은, 선을 베푸는 일이 여전
히 인간의 당위로 남아 인간이 수행해야할 일로 남아 있을 뿐이고, 선
의 실행에 천주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그것은 마
테오 리치의 천주와는 완전히 다르게 된다. 초월자의 내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것은 초월자의 초월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로 직
결되고, 그 초월은 결국 도덕 실행의 능동성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테오 리치는 중국 선비의 주장을 반박한다. 천주가 사물
에 내재해서 사물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조물주와 사물을 동등하게
보는 것으로써 교만이라고 본다. 땅위의 백성을 하늘의 상제와 동등
하게 볼 수 없다는 것이다.40) 그는 천주와 사람이 한 몸이 아니라고
한다.41) 천주와 사물이 같지 않음을 말하기 위해, 그는 천주의 성(性)
38) “天主上帝 卽在各物之內, 以與物爲一”, 천주실의 4-7, p.190.
39) “勿害物 以侮其內心之上帝焉”, 천주실의 4-7, p.190.
40) 천주실의 4-7, p.192.
41) “吾於天主 非共爲一體”, 천주실의 4-9, p.201.
230 논문
과 사물의 성(性)이 다르다고 본다.42) 마테오 리치로서는 만물이 존재
한다는 것은 그 만물보다 뛰어난 초월자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피조물
의 선한 본성은 조물주에게서 나온 것이지만 피조물은 또한 서로 해
치고 죽이는 일도 있다. 그러나 천주에게는 해치는 이치가 없으니,43)
피조물의 덕과 천주의 덕을 비교할 수 없다. 아퀴나스 식으로 말하자
면 서로 다른 천주와 사물의 성(性)은 형상을 가리키는것으로서, 천주
의 성(性)은 “본질에 의해”(per essentiam) 있는 것이고, 사물의 성은
그 본질에 참여함으로 있는 “참여된 형상”(forma participata)이다.44)
본질과 그 본질에 참여하는 자는 조물주와 피조물의 거리가 있다. 완
전함과 불완전함의 거리가 있다. 그런 점에서 마테오 리치는 천주와
사물이 한 몸일 수 없다고 한 것이요, 천주의 성과 사물의 성은 다르
다고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테오 리치가 볼 때, 만일 천주가 사
람 속에 있어 한 몸이 되었다면, 악이 없어야 한다. 사람이 천주와
한 몸이라면, 천주가 온전히 “한 몸의 주인”(一身之主)이 되었으니,
모든 것이 선하신 천주의 뜻대로 되어져야 하는데, 여전히 사람이 사
욕(私欲)에 빠져 사행(邪行)을 저지르는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
이다.45) 그처럼 한 몸이 되었다고 하면,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인간의
악에 대해 그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만물의 행동은
그 사물들에 달려 있지 않고 모두 천주가 한 일들”46)이 되기 때문이
다. 그는 묻는다. “소인들이 벽을 뚫고 담을 뛰어넘고 들에서 행인들
을 못 가게 막는 것도 그들의 죄가 아니고, 또한 천주들로 하여금 그
러한 죄를 짓게 한 것입니까?”47) 이 문제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느
님의 직접 섭리를 어떻게 양립시키느냐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교 신학
에서도 논의가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모든 생성 변화와 인간 의지의
42) 천주실의 4-9, p.202.
43) 천주실의 4-9, p.203.
44) 신학대전 1 , 1, 3, 8, p.82.
45) 천주실의 4-9, p.204.
46) 천주실의 4-9, p.205.
47) 천주실의 4-9, p.206.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31
능동인이라면, 악한 행위까지도 하느님이 한 것이 된다. 그러나 그런
식의 주장은 고대 이래의 범신론이나 헤겔의 정신 현상학에 이르기까
지 내재주의의 위험으로 여겨져 왔다. 선은 하느님이 한 것이지만,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 이
후 그리스도교 신학의 일반적 공식이다. 아퀴나스는, 인간이 하느님의
보편적 통치에는 저항할 수 없으나, 특수한 것에 의한 하느님의 통치
에는 저항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악의 문제를 정리했다.48) 그것은 더
크게 보면 악의 문제에 대한 신정론의 주제이기도 하지만, 여하튼 하
느님이 사물 안에 들어 있다는 내재주의의 표현을 꺼려온 것이 그리
스도교 전통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내재주의를 꺼려한 것은, 근본적으로 하느님
과 사물이 모두 실체로 이해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나의 실체가
다른 하나의 실체 속에 들어 있다면 둘 중의 하나는 그 실체성을 잃
게 된다. 하나의 실체는 다른 실체와 거리를 두고 그 마음이 하나가
될 수는 있어도, 실체적으로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천
주가 사물 속에 들어 있어 사물과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천주가 사물
의 성분이 되든지, 아니면 사물이 그 실체성을 잃고 천주의 실체성만
살아 있든지 하게 될 것이다. 마테오 리치에 따르면 전자의 경우는
천주의 개념상 모순이다. 만물의 주인이 만물의 구성 성분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경우에 천주의 실체성만 살아 있다는 것은
천주가 만물 속에서 “높으신 주님이 되어 한 몸의 권력을 마음대로
장악하고 있다”49)거나 또는 “만물은 껍데기와 같은 것이며 천주가
그것들을 사용하는 데, 마치 장인이 자기의 도구를 사용하는 것”50)과
같이 된다. 이처럼 천주와 사물의 관계를 장인과 도구의 관계로 보면,
그것은 천주의 주인됨을 한껏 높이는 것 같지만, 앞에서 본대로 사람
이 저지르는 악도 모두 하느님이 하는 것이 되어 선하신 하느님의
본성과 모순이 된다. 인간의 자유의지까지도 섭리하는 보편적 능동인
48) 장욱,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 (서울: 동과서, 2003), p.89.
49) “如爲尊主而專握一身之柄”, 천주실의 4-9, p.204.
50) “物如軀殼, 天主使用之, 若匠者使用其器械”, 천주실의 4-9, p.205.
232 논문
으로서의 하느님이라고 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
다.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부정했을 때, 무엇보다도 악의 문제를 설명
할 수 없다. 마테오 리치의 주장을 보건대 대체로 그런 각도에서 설
명을 펼치는 것 같다. 악의 문제는 이 정도에서 논의를 마치자.
그렇다면 기독교 신학은 하느님의 내재를 부인하는가? 앞에서 말한
대로 내재가 없는 초월자는 인간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성리
학과 달리 하느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기독교에서 하느님의 내재성은
어떤 식으로 설명되는가? 마테오 리치는 먼저 하느님은 사물 밖의 존재
임을 강조한다. 그것은 사물의 소이연을 말하는 방식에서, 성리학에서
말하는 음양은 사물 속에 있는 소이연이지만(在物之內分), 천주는 무엇
보다도 만물을 만든 운동인(causa efficiens)으로서 사물 밖에 있는 것
(在物之外分)이라고 한다.51) 앞에서 우리는 목적인과 운동인은 사물 밖
에 있는 것으로서 천주의 초월성을 밝히는 데 사용된 개념임을 보았다.
그러므로 초월자 천주가 사물에 내재한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 집에 있
는 것처럼 사물의 장소에 있는 것일 수 없고, 손발이 몸에 붙어 있는
것처럼 천주가 사물의 부분일 수도 없으며, 흰 말 속의 흰 색처럼 천주
가 실체의 속성으로 존재할 수도 없다.52) 그렇다면 천주는 어떤 방식으
로 사물과 관계를 맺는가? 마테오 리치는 이렇게 말한다. “(천주께서)
사물 속에 계신다는 것은 원인이 그 결과 속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것은 마치 햇빛이 그것에 의해 비추어진 수정 속에 있음이나, 불이 그
것에 의해 달구어진 발간 쇠 속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53) 아퀴나스는
불과 불타는 것의 비유를 들어 원인이 결과에 내재하는 예로 삼았다.54)
원인이 결과에 내재하는 것이란 천주가 “모든 것을 있게 하는 원인으로
서 만물 안에 존재한다”55)는 말이다. 만물의 존재와 행위는 하느님의
51) “天主作物 爲其公作者 則在物之外分矣”, 천주실의 4-9, p.209.
52) 천주실의 4-9, p.209.
53) “惑在物 如所以然之在其已然 若日光之在其所照水晶焉 火在其所燒紅鐵焉”,
천주실의 4-9, p.209.
54) 신학대전 1 , 1, 8, 1, p.135.
55) 신학대전 1 , 1, 8, 1, p.136.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33
작용이며, 존재와 행위의 원인으로서 하느님은, 존재하고 행위하는 만물
안에 존재한다. 아퀴나스는 말한다. “만물에 대해 직접적으로 작용한다
는 것은 하느님의 가장 큰 능력에 속한다. 따라서 자체 안에 하느님을
갖지 않을 만큼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56)
그러므로 만물의 생성 변화에 직접 개입하는, “다른 것 속의 작용의 근
원”57)이라는 의미에서 “그 능력으로” 만물 안에 있다. “능동자는 능력
에 의해 다른 것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58)
앞에서 우리는 능동인이 사물 밖의 것이라고 했다. 성리학의 소이
연은 기본적으로 내재이지만, 아퀴나스 신학의 원인은 기본적으로 사
물 밖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고 했다. 그것은 만물이 스스로 생성
변화하지 않고, 무에서 유를 만든 하느님의 영원한 창조 행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뜻에서 기독교 신학의 특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다시 능동인이 사물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까
닭인가? 그것은, 만물의 능동인으로서의 하느님이 사물 안에서 모든
작용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다. 초월자는 내재한다. 그러나 ‘초월자’가
내재하는 것이다. 존재 자체는 원인으로서 모든 존재에 공통되는 것
(communissium)이다. 그런 점에서 초월자는 사물에 내재하는데, 그것
은 원인으로서 그렇다. 피조물 밖의 존재가 피조물 안까지 영향과 작
용을 미치는 것이다. 그것이 작용인 또는 능동인이다. 그것을 가리켜
아퀴나스는 ‘능력에 의해 다른 것 안에 있다”고 한다. 그것은 하느님
의 능력이 사물들 속속들이 미친다는 의미다. 하느님은 자신의 지성
과 의지에 의해 피조물에게 내적으로 관여한다.59) 그래서 피조물들
맘대로 되는 것은 없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내재란 하느님
의 전능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능동자가 능력으로 다른 것 ‘안
에’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능력이 밖에서 떠밀어 생성변화를 일으키
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 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작용은 타율이
56) 신학대전 1 , 1, 8, 1, p.136.
57) 신학대전 1 , 1, 8, 3, p.143.
58) 신학대전 1 , 1, 8, 3, p.143.
59) 장욱, 위의 책, p.88.
234 논문
아니라 자율적인 행위를 일으킨다는 말이다. 인간의 자율을 희생시키
지 않고 일어나는 하느님의 작용이라는 의미가 있다. 또는 거꾸로 말
하면 인간이 자율적으로 하는 일도 알고 보면 하느님이 하는 일이라
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선한 행위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점은
더 이상 논하지 않겠다.60)
한편 능동자가 ‘능력으로’ 안에 있다는 것은, 안에 있다고 서로 실
체가 섞여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느님은 “자기 실
체”(sua substantia)로서 만물 안에 있다.61) 또는 아퀴나스는 하느님의
현존(praesentiam)을 가리키기 위해, “국왕이 실제로 모든 곳에 현존
하지 않을지라도 그 능력에 의해 전국에 있다고 한다”62)는 예를 든
다. 마테오 리치 역시 빛나는 수정이나 불붙은 쇠의 비유를 통해서
그 점을 말한다고 봐야 한다. 빛과 빛을 받아 빛나는 수정은 별개의
실체다. 그리고 불과 그 불이 달군 붉은 쇠는 별개의 실체다. 마테오
리치가 이 비유를 통해 말하려고 한 것은, 천주가 사물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천주와 사물은 별개라는 것이다. 내재를 말하더라도 천주와
사물 각각의 실체성은 유지되어야 한다. 각각의 실체성이 유지되어야
됨으로 각각의 본성도 따로따로다. 그래서 마테오 리치도 말한다. “빛
이 비록 수정에 있고 불이 비록 쇠 속에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각
사물이나 각 물체는 본성이 뒤섞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63)
이처럼 천주와 사물의 각각의 실체성을 유지함으로 각각의 본성을
유지하는 까닭은, 하느님의 선한 본성과 현실의 악을 만드는 피조물
의 본성을 구분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사실 인간에게 집중되
어 있는 문제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하느님을 닮아 본
래 선하다고 하지만, 현재 상태에서는 그 본래성을 잃고 타락했다고
60) 마테오 리치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좋은 점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천주의 좋으심에 있는 것이지, 사람의 좋은 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愛
人之善緣 在天主之善 非在人之善). 천주실의 7-11, p.372. 사람의 선함은
그 사람의 선함이 아니라 천주의 선함이라는 얘기다.
61) 신학대전 1 , 1, 8, 3, p.143.
62) 신학대전 1 , 1, 8, 3, p.142.
63) ”如: 光雖在水晶 火雖在鐵 然而各物各體 本性不雜”, 천주실의 4-9, p.210.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35
보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을 가리켜 제 2의 본성이라고 한다. 본
래 하느님이 만든 인간의 모습과 완전히 바뀌어졌다는 것이다. 그럼
으로써 하느님과 인간의 본성의 차이를 확대시켰는데, 그런 신학은
좀 변형되긴 했지만 아퀴나스와 마테오 리치에게도 이어졌다.64) 그래
서 마테오 리치는 인간이 물질성(形性)과 정신성(神性)이라고 두 가지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수심(獸心)과 인심(人心) 두 마음을 지닌다고
한다.65) 신성은 하느님을 닮은 본래의 선한 모습이지만, 수성은 타락
하여 또 하나의 본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마테오 리치는 1아
우구스티누스를 따라 사람이 “물려받은 잘못에 따라서 본성의 온전함
을 계승할 수 없고 태어나면서 결함을 지닌 것”66)이라고 한다. 그것
을 제 2의 본성이라고 한다.67)
인간의 본래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의 차이에 대한 인식은 성리학에
도 없지 않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구분한다.
마치 두 개의 성이 있는 것처럼 되고, 그 점은 퇴계 같은 경우에 두드
러진다. 그렇지만 성리학에서 인간의 본성이라면 역시 본연지성을 가
리킬 뿐이고, 기질지성은 세상에 살면서 생긴 악습으로서 경계의 대상
이 되지만 인간의 선한 본성을 완전히 없앨 정도로 여겨지지는 않는
다. 그래서 선한 초월자를 요청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천주실의
에서 중국선비가 하느님뿐만 아니라 사람들 역시 지극한 덕을 갖추고
있다고 한 것이나,68) 성인관을 내세워 “하느님 혼자서 스스로 짓고 스
스로 세워서 지극한 통치에 이르렀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69)고 하면서 마테오 리치가 말하는 천주를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
64) 인간의 타락에 관해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완전한 타락을 말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리학보다는 타락의 심각성을 인정한다
고 봐야한다.
65) “그렇다면 사람은 또한 두 가지 본성을 지닌 것입니다. 그 하나는 물질성
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성입니다.”(則亦有二性 一乃形性 一乃神性也) 천주
실의 3-5, p.130.
66) “則爲其子孫者 沿其遺累 不淂承性之全 生而帶疵”, 천주실의 8-6, p.421.
67) “人所已習 可謂第二性”, 천주실의 8-6, p.422.
68) “하느님의 덕은 진실로 두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 역시 지극한 덕을 갖
추고 있는 것입니다.”(上帝之德固厚 而吾人亦具有至德) 천주실의 4-8, p.193.
236 논문
으로 보려는 태도70)는 그러한 성리학적 인간관에서 나온 것이다.
마테오 리치는 천주와 사물의 본성이 섞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천
주가 만물을 떠나 있을 수는 없다고 한다.71) 여기서 말하는 천주와
사물간의 불상잡 불상리(不相雜 不相離)는 성리학에서 말하는 리와
기의 불상잡 불상리와는 다르다. 리는 기본적으로 기를 떠나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리가 기 속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만, 천주가
사물을 떠나서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천주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다. 리의 무정의 무조작(無情意 無造作)은 천주에게서 부정된다.
하느님은 자유로운 의지로 사물을 내고 보존한다.72) 그래서 은총이
다. “은총만이 사물 안에 하느님을 존재케 하는 독특한 양식을 이룬
다.”73) 천주는 무에서 유를 만든 창조주로 믿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사물 밖의 천주가 사물을 떠나지 않는 것일
뿐이며, 사물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어 떠날 수 없는 것이 아니다.74)
그리고 리는 리일분수(理一分殊)로서 모든 사물에 들어 있는 본성이
지만, 천주는 오직 한 분으로서 모든 사물의 본성이 아니며, 사물의
본성과 별개의 본성을 가진다. 다만 사물들이 천주의 본성에 참여할
뿐이다. 그 본성으로 말하면 하느님은 만물 안에 있다고 할 수 없다.
“하느님은 그 본성의 탁월성으로 말미암아 만물 위에 있다.”75) “만물
위에 있음”, 그것은 초월성을 가리킨다.
69) “未聞 蔑先聖 而上帝自作自樹 以臻至治”, 천주실의 4-8, p.193.
70) “方寸間 儼居天主”, 천주실의 4-8, p.194.
71) “但光可離水晶 天主不可離物”, 천주실의 4-9, p.210.
72) 마테오 리치는 리에는 의지가 없고, 하느님은 만물을 내고자 하는 의욕과
의지가 있다고 말한다( 천주실의 2-8, p.89). 천주의 주재는 그처럼 의지
문제와 연결된다. “발생하는 모든 일들의 작용인들치고 의지적 원인들로
귀결되지 않는 것이 없다.”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5, 9, 4, p.553.
73) 신학대전 1 , 1, 8, 3, p.143.
74) 이처럼 하느님의 자유의지와 은총을 강조하면, 세계의 존재는 우연이 된다. 참
조. 서병창, 신 안에서 자립적인 인간 (서울: 동과서, 2002), p.164 이하. 양태
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에서 다섯 가지 길과 그것의 형이상학적
구조 , 철학과 현상학 연구 제35집(서울: 한국현상학회, 2007), pp.123, 124. 현
대 신학은 이 점을 수정하려고 했다.
75) 신학대전 1 , 1, 8, 1, p.136.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37
그러므로 하느님의 초월성이란 선하신 하느님과 그렇지 못한 피조
물 특히 인간의 차이를 염두에 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을
존재 자체라고 해서 완전한 존재로 보는 까닭도, 그 덕의 완전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느님을 최고의 개체(maximum
individium)로 봄으로,76) 피조물과 별개의 실체로 보는 것 역시 마찬
가지 발상이다. 하느님을 개체요 실체로 보는 것은 실체인 피조물과
근본적인 거리를 만드는 사고방식이다. 그 거리란 바로 덕성의 거리
다. 하느님의 능력이 피조물 속속들이 미친다는 점을 강조하면 하느
님에게서 떨어져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도 사물이 하느
님에게서 떨어져 있다고 함은 본성과 은총의 비유사성 때문에 그런 것
이다. 그것은 하느님 자신이 그 본성의 탁월성 때문에 만물 위에 있는
것과 같다.”77) 하느님과 피조물은 그 덕성이 다르고, 그 다름이 둘 사
이의 떨어져 있음을 만들고, 떨어져 있음이 개체 곧 실체 개념을 만드
는 것이다. 그리고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다름과 떨어져 있음은 결
국 위에 있음이다. 마테오 리치가 하느님이 사물 안에서 사물과 하나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까닭도 바로 그 하느님의 덕성의 탁월성에 있다.
마테오 리치는 만물의 본성이 선한 것을 가리켜 천주의 흔적이라
고 한다.78) 이것은 선함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생겼다고 보는
아퀴나스의 신학을 반영하는 것이다. 존재하고 있는 한 선하며, 모든
존재는 최고선으로 존재 자체인 하느님에게서 유출된 것이다. 그래서
아퀴나스 신학은 피조물의 하느님과의 유사성(smilitudo)을 말한다. 피
조물은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유사성은 유비(analogia)에
76) 신학대전 1 , 1, 11, 4, p.185. 주희의 성리학은 아퀴나스의 신학과 유사
한 점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밀한 차이를 말하지 않은 채 비슷함
을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예를 들어 태극을 충만한 ‘존재’로 보는
것(소병선, 주자학과 토미즘 , 서울: 동과 서, 2006, p.102)은 옳지 않다.
아퀴나스에게서 신은 존재 자체요, 최고 개별자다. 그러나 성리학의 리는
그런 존재일 수 없고, 세상과 별개의 개별자일 수 없다. 아퀴나스의 형이
상학은 존재론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주희는 도덕의 문제를 그런 존재론
으로 발전시키지 않았다.
77) 신학대전 1 , 1, 8, 1, p.136.
78) 천주실의 4-9, p.207.
238 논문
따른 닮음이다. 유비라고 하는 것은 유사성과 차이를 모두 지닌 개념
이다. 비슷하지만 어떤 동등함이나 연속성을 거부하는 개념이다. 먼저
비슷한 점을 보자. 모든 사물은 존재하는 한, 존재 자체인 하느님과
비슷하다.79) 일단 이러한 유비를 인정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에 대해
매우 높은 의미와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존재하는 것
들은 그것이 아무리 덧없는 피조물이라도 가치가 있다. 그것은 하느
님의 선에 참여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모방한다는 말이다. 하느님은
피조물의 원형이다. 존재 자체는 모든 존재의 형상(forma)이다. 그처
럼 피조물이 하느님의 완전함에 참여하고 있으며, 피조물이 “하느님
을 모방한다는 점에서 하느님과 비슷하다.”80) 그 모방을 ‘참여’라고
하는 개념으로도 설명된다는 것은 앞에서도 보았다. 원래 형상인은
사물에 내재한다. 그런데 형상인으로서 내재한다는 것은 되어야 할
목표나 목적으로 내재하는 것이다. 참사람이라고 하는 형상은 인간이
도달할 목표이지만, 그 참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바라고 섬
겨야 한다. 그러므로 참사람을 바라고 욕구하는 인간은 곧 하느님을
바라고 위하고 사랑하게 된다. 그것은 하느님을 목적으로 삼고 섬긴
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하느님은 인간의 목적인이기도
하다. 참사람은 인간의 형상이지만 목적인이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목적인이자 형상인이다. 하느님을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요,
나를 위하는 것이란 나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테오 리치는 위
기지학(爲己之學) 곧 나를 위하는 학문인 유학의 이상은 천주를 위함
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보고, 그것은 곧 자기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81)
자기완성이란 참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하느님은 목적인으로서 바깥이지만, 참사람이라는 형
상을 통해 나의 모방인 곧 형상인이 됨으로 내재한다. 결국 하느님의
79) 신학대전 1 , 1, 4, 3, p.92.
80) 신학대전 1 , 1, 4, 3, p.92.
81) “어찌 자기완성이 자기를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천주를 위하는 것이 바
로 사람이 자기를 완성하는 소이가 되는 것입니다.”(烏有成己而非爲己者
乎? 其爲天主也 正其所以成也) 천주실의 7-7, p.357.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39
내재는 능동인의 각도에서 설명될 뿐 아니라 형상인의 차원에서도 설
명된다. 마테오 리치는 하느님이야말로 내가 부모보다 더 가깝게 사
랑하는 분으로서, 사람의 밖이 아니라고 한다. “사람들 중에 비록 부
모처럼 가깝더라도 천주와 비교하면 오히려 ‘밖’이 됩니다. 하물며 천
주는 항상 사물 속에 존재하고 계시기에, 스스로를 ‘밖’으로 보지 않
습니다.”82) 리가 사물 속에 존재한다(在物內)고 하여 속성이라고 비
판했는데, 여기서 같은 표현을 천주에게 적용하고 있다. 이것은 하느
님이 형상인으로서 내재하는 것을 말하며, 원형으로서의 형상인은 원
래 사물에 내재하는 것이다.83) 그런 점에서 능동인의 내재보다 더욱
설득력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내재는 하느님이
인간의 자기완성의 원형이 된다고 하는 도덕적 차원에서 설명되는 것
이고, 그런 도덕의 문제가 하느님의 초월과 내재 모두에 깔려 있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보면 하느님은 목적인으로 초월적이고, 모방인이
요 형상인으로서 내재한다. 여하튼 모방인의 내재를 통해 이처럼 피
조물과 하느님의 유사성을 인정하는 것은 플라톤과의 차이를 드러내
는 것이다. 질료를 잠재태로 보는 아퀴나스와 달리 플라톤 학파에서
는 질료를 비존재라고 보기 때문에 질료의 선함을 무시한다. 그 결과
현상 세계 곧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진 제일 실체의 실체성을 약화
시키고 무의미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하느님과 피조물의 유사성이라
는 개념은 기독교적인 세계 긍정으로 플라톤 학파의 이원론을 극복하
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여전히 초월자로서 완전하게 모방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은 하느님에 미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하느님
과 유사하지 않다. 그렇게 보면 피조물은 “하느님과 유사하며 유사하
지 않다.”84) 모방하더라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농도의 짙고 옅음
82) “人之中 雖親若父母 比于天主者 猶爲外焉. 況天主常在內物 自不當外” 천
주실의 7-7, p.358.
83) 아퀴나스의 자연학에서 목적인과 능동인은 사물 밖이고, 형상인과 질료인
은 사물에 내재한다. 형상인은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 불완전하게 사물에
내재하는 것이다.
240 논문
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종적(種的)으로도 류적(類的)
으로도 상통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85) 피조물과 하느님의 유사성
은, 같은 종인 사람과 사람끼리 닮았다거나, 같은 류인 사람과 동물
이 서로 닮았다거나 하는 식이 아니다. ‘상통’(communicatio)할 수 없
는 유사성이란 ‘서로 닮았다’는 말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
람끼리의 유사성을 두고, 또는 사람과 동물의 유사성을 두고 서로 닮
았다는 말을 할 수 있지만, 하느님과 피조물에는 그런 표현을 쓸 수
없다. “어떤 의미로 피조물이 하느님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하
느님이 피조물과 비슷하다고는 할 수 없다.”86) 그것이 아퀴나스가 말
하는 유비에 의한 유사성이다.
사실 인간의 타락을 심각하게 보아서 현재의 본성을 악하다고 보
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개신교 전통에서는 아퀴나스가 말하는 존재의
유비라는 것이 큰 공격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은 유사성을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속죄 없이 존재하는 모든 것 또는 자연 인간의 선의 가
능성을 말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87) 그리고 하느님을 모방의
대상으로 말함으로써 마치 인간의 목표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88) 그러나 아퀴나스에게서 하느님은 만물의 목적이지만 목
84) 신학대전 1 , 1, 4, 3, p.92.
85) 같은 곳.
86) 신학대전 1 , 1, 4, 3, p.93.
87) 그런 자연신학적인 경향을 마테오 리치가 물려받았다. “대개 사람들이 도
리를 추론할 수 있으면 양능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근본이
병들었음을 인정한다면, 그것을 다시 치료할 수 있습니다.”(蓋其能推論理
則良能常存 可以認本病 而復治療之) 천주실의 7-1, p.343. 양지(良知) 양
능(良能)은 맹자가 말한 것으로 인간이 선을 알고 행할 수 있다는 것이
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속죄의 신앙 없는 자연 상태에서도 선의 가능
성이 어느 정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아퀴나스의 자연신학을 반영하
는 것이다. 마테오 리치의 사상적 기반이 된 예수회 토미즘에서 역시 양
능을 강조했다. 김상근, 위의 글, p.305.
88) 이런 자연신학 때문에 마테오 리치는 천주실의 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얘
기하지 않고 상제를 빌어 천주를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가톨릭 안에서도
마테오 리치의 천주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같지 않다고 비판하는 사람
들이 있었다. 참조. 황종렬, 마테오 리치의 천-상제관에 대한 동아시아의
응답 한국종교연구 제6집(서울: 서강대학교 종교연구소, 1999), p.80.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41
표가 될 수 없음을 앞에서 보았다. 아퀴나스의 유비는 유사성을 말하
지만, 하느님의 초월성을 매우 강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89) 그는
하느님이 모든 피조물에 공통된다(communissio)는 것을 인정하지만,
하느님과 피조물의 상통(communicatio) 곧 코뮤니케이션을 부정할 정
도로 하느님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에게서 하느님은 최고선으
로서 “류 밖에 있으며 모든 류의 근원인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느
님은 그 초과로 인해(per excessum) 다른 것과 비교된다.”90) 그러므
로 비교란 사실상 비교 불가능을 의미한다. 그래도 비교를 말하는 것
은, 하느님을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말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선이지
만, 최고선이라고 하는 것은 피조물과 비교해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것
이라는 말이다. 관계(relatio)를 시켜본 것이다. 그런데 그 관계는 피
조물 쪽에서 하느님과 관계하여 말하는 것이지, 하느님이 피조물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말해질 때
이런 관계(relatio)는 하느님 안에 실재적으로(realiter) 있는 것이 아니
고 다만 그것은 피조물 안에만 실재적으로 있는 것이다.”91) 하느님과
피조물의 유사성이 일방적이듯이, 관계도 일방적이다. 이것은 하느님
의 선과 피조물의 선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의
일방성은, 피조물은 하느님과 관계없이 있을 수 없지만, 하느님에게
피조물과의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서 세상없이도
하느님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자유로운 은
총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의 일방성은 현대 신학에서 비판
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 중세 신학자 아퀴나스에게는 하느님의 주권
을 확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능동인의 문제는 도덕적 관점에서 보면 선의 목적을 달성할 힘을
목적 그 자체가 주느냐의 문제다. 그리고 그런 도덕적 관점이 자연학
89) 아퀴나스가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에 유비를 사용할 때 특정한 관계를 필
수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참조, 박승찬,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비
개념에 대한 재조명 , 1집(서울: 서강대학교신학연구소, 1999), p.209.
90) 신학대전 1 , 1, 6, 2, p.116.
91) 신학대전 1 , 1, 6, 2, p.115.
242 논문
과 우주 발생설에 영향을 준다. 성리학에서는 목적인이 능동인이 되
지 않는다. 리는 만물의 표준으로 목적인이 되어서 초월성을 띠지만,
능동인은 기의 몫이다. 선의 실현은 철저하게 인간의 주재 하에 일어
나는 일이요, 초월자는 기본적으로 내재한다. 리는 마음 안의 성(性)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또는 마음 밖 사물 안에 내재한다. 사물의
본성이 리다. 그러한 내재성은 성선설에서 생기는 것이다. 인간의 본
성이 선하므로 스스로 선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성리학은
인간의 일상적 감정이 타락해 있음을 어느 정도 감안해서 기질의 성
이라고 하는 말을 만들었으며, 그러한 악의 가능성과 악의 현실 때문
에 리라고 하는 초월적 원리에 주재를 맡기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선한 본연의 성만 인간의 본성이라고 보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제 2
의 본성론으로 가지 않고, 그래서 리의 주재는 다름 아닌 마음의 주
재로 남는다. 그리고 수양론을 강조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악
함을 심각하게 보아서 제2의 본성론을 말했다. 그것은 “백성의 착한
본성은 이미 사라졌고, 또한 추악한 것에 습관 들어 쉽게 악에 빠져
들기 때문에 선을 세우기가 어려움”92)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선의 목
적을 달성하는 힘이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다. 수양론만으로는 불충
분하고 은총 곧 하느님의 개입이 필요하다. 그래서 마테오 리치는 유
학의 결함을 수양만 강조하는 데서 찾으며, 의지가 약하여 수양을 할
수 없는 불능의 인간의 상태를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93)
그 불능 때문에 하느님이 능동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선의 주재는 하느님의 몫이요, 하느님은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물 밖의
92) “但民善性旣滅 又習乎醜 所以易溺于惡 難建于善耳” 천주실의 8-6, p.422.
93) “제가 보기에는 선비님의 나라 선비들의 문제점은 바로 이런 것에 있습
니다. 다만 밝은 덕의 수양만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의지가 쉽게 지
쳐서 자기 스스로를 독려해 나가며 수양해 나갈 수 없음을 모릅니다.”(吾
竊視貴邦儒者病正在此 第言明德之修 而不知 人意易疲 不能自勉而修) 천주
실의 7-12, p.376. 리치가 행위논리에 초점을 맞추어 유학과 그리스도교를
연결하고 있으며, 신앙이라는 새로운 행위논리를 제시했다는 주장도 같은
얘기다. 정태식, 마테오 리치의 예수회적 유교 해석에 관한 일고찰-천
주실의를 중심으로 , 철학연구 95집(서울: 대한철학회, 2005), p.379.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43
초월자다. 하느님은 목적인인 동시에 능동인이다. 목적인으로서 사람
과 사물 밖이지만 형상인으로 내재한다. 사람과 사물 밖의 능동인이지
만, 사물 속속들이 능력을 미치는 능동인으로 만물 안에 내재한다. 성
리학의 리가 기본적으로 내재이면서 초월인 것과 달리, 기독교의 하느
님은 기본적으로 초월자로서 내재한다. 리는 목적인과 형상인으로 주
재하지만, 그래서 퇴계처럼 정이동(靜而動)이라고 표현하지만, 그것은
능동인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주재하는 실체는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
의 하느님은 목적인과 형상인으로서 뿐 아니라 능동인으로 주재한다.
성리학의 리의 주재도 섭리라는 말을 쓸 수 있지만, 아퀴나스는 ‘직접
섭리’라는 말로 하느님이 사물 하나하나의 운동을 주관하고 있음을 표
현하고자 했다. 그것은 인간론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악함이 얼마나 심각하다고 보느냐의 차이다. 태극생양의(太極生兩儀)
를 말하는 성리학의 우주발생론이나 하느님의 창조를 말하는 기독교
의 창조론 역시 그런 인간론과 도덕론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완전히 물리적인 사실을 말하는 것 같은 아퀴나스의 자연학에도 도덕
론이 깊이 배어 있다. 중세는 물리학과 윤리학을 나눈 칸트의 근대와
달리 도덕적 관점으로 온 세상을 보았던 것이다. 아퀴나스 신학을 이
어받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에도 그런 관점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다만 선의 실천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강조한 아퀴나스는 존재
자체를 믿고 경배하는 존재론이 형이상학으로 발전했고, 성리학은 도
덕형이상학으로서 인문주의에 충실하였던 것이다.94)
Ⅲ. 맺는 말
아퀴나스나 주희는 존재의 이유가 존재보다 앞선다고 하는 중세의
사유방식을 대변하고 있다. 그래서 우주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천주나
94) 학자들은 유학자들이 도덕적 실천을 통해 궁극적인 것을 경험했다는 데 대개 일
치한다. 다시 말해 성리학의 초월경험은 내재적인 도덕성에 있었다. 문석윤, 유
교적 기독교는 가능한가 , 헤겔연구 8집(서울: 한국헤겔학회, 1998), pp.723, 724.
244 논문
리는 모두 목적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이나 성리
학의 태극생양의(太極生兩儀) 같은 우주발생론도 모두 도덕적 관심과
짙게 연결된 것이다.95) 이 세상이 어떻게 생성 변화되느냐는 얘기는
선의 실현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의 문제가 된다. 목적의 실현의 힘
이 어디서 나오느냐는 문제다. 그것은 능동인의 문제다. 거기서 그리
스도교와 성리학은 차이를 보인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창조론과 도덕
에서의 은총론을 결정짓는 것도 능동인이다. 천주는 이념으로 통치할
뿐 아니라 개별 현상에 직접 개입함으로 통치한다. 그처럼 능동인이
사물 밖의 초월자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천주는 기본적으
로 초월자다. 초월자이지만, 형상인으로 또는 능력으로 내재한다. 반
면에 성리학에서 리는 보편적 표준으로 초월적이지만, 각구일극(各具
一極)으로 내재해 있으며, 능동인은 리의 몫이 아니라 기의 몫이다.
그래서 리는 이념으로 또는 천명으로 통치할 뿐이며,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천주는 목적이지만 목표가 될 수 없다면, 성리학의 리는 성
인관(聖人觀)에 기초해서 목적이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목표가 된
다. 그렇게 보면 성리학의 소이연(所以然)과 아퀴나스 신학의 원인
(causa)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주희가 말한 형이상(形而上)과 아퀴나
스의 메타 피지스(meta-physis)는 다르다. 하나는 도덕형이상학으로
인문주의에 머물고, 다른 하나는 신학으로 종교가 된다.
투고일: 2008. 11. 03.
심사완료일: 2009. 01. 12.
게재확정일: 2009. 01. 20.
95) 기독교와 유교의 대화의 지평을 인간의 양심의 소리에서 찾아야 한다는 얘기
(송영배, 위의 책, p.68)도 결국 도덕의 문제가 핵심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양명수
이화여자대학교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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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의채 옮김, 신학대전 6 , 서울: 바오로 딸, 1999.
 , 정의채 옮김, 신학대전 16 , 서울: 바오로 딸, 2000.
아리스토텔레스, 이창우 외 옮김, 니코마코스 윤리학 , 서울: 이제이북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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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황, 선과 악의 주체는 누구인가-토마스 아퀴나스와 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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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상 28호(서울: 서울대학교철학사상연구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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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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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욱,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 , 서울: 동과서,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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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중심으로 , 철학연구 95집, 서울: 대한철학회, 2005.
풍우란, 박성규 옮김, 중국철학사 하 , 서울: 까치, 1999.
황종렬, 마테오 리치의 천-상제관에 대한 동아시아의 응답 , 한국
종교연구 제6집(서울: 서강대학교 종교연구소, 1999).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47
ABSTRACT
Christian God in The True Meaning of the Lord
of Heaven (T'ien-chu Shih-i) and Neo-Confucian
Li (理) in the Light of the Final Cause and the
Efficient cause of Aquinas
Yang, Myung-Su
Matteo Ricci's T'ien-chu Shih-I (天主實義) is well known for its
historical value regarding the encounter of Eastern and Western
cultures. Its tremendous effect on Korean society in the epoch of
Cho Seon Dynasty has prompted many Korean scholars to question
the philosophical and theological essence of Matteo Ricci's apology
to Christianity. This study is in line with those previous works on
the possible comparison of the Western God and the Confucian
principle known as the Great Ultimate: (太極) or Li: (理). What is
especially of interest to this study is that the position of the
efficient cause in its relation with the final cause may explain
definitely the difference of the Christian God and Neo-Confucian Li.
Following Aquinas, Matteo Ricci regards the Christian God as both
the final cause and the efficient cause of myriad things of this
world, while Li cannot be the efficient cause at all. Li is possibly
the final cause as the ultimate standard, but the efficient cause must
be attributed to Ki: (氣, the material force) in the Neo-Confucian 
248 논문
philosophical system. This seemingly cosmological difference between
God and Li leads us to examine the moral foundation of both
metaphysics. The fact that the Christian God works as both the
final cause and the efficient cause means that God is the ultimate
goal of moral self-accomplishment of human beings and, at the
same time, He moves us toward the goal. It is God who causes
and leads the achievement of moral goodness. On the contrary, the
famous debate on the issue of whether Li is active or not among
Korean Neo-Confucian scholars reflects the fact that moral initiative
in the Neo-Confucian system cannot be found anywhere else than in
the human mind. Li rules only as a moral ideal, while the Christian
God rules as an ideal and by direct involvement in moral
accomplishment. This difference of transcendence of Li and God is
linked to the immanent character of both, and, ultimately, to the
different anthropology regarding moral capability of human beings in
Christian and Neo-Confucian culture.
Keywords: T'ien-chu, Li, the efficient cause, the final cause,
transcendence, imman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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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V. Smith
4.0 out of 5 stars The True Meaning of Matteo Ricci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September 26, 2000
Simplicity at its finest: Chinese on one page, English on the other. Allows you to see exactly what Ricci was up to without a commentary pushing one's political agenda. That is, reading the text of "True Meaning" for oneself, one can conclude the truth about Matteo Ricci. He did not misunderstand the chinese, nor force them into conversion (one man against millions?) as the 'liberals' claim. Rather his understanding, respect and love for them was profound. He did not "water-down" or "sell-out" the Catholic faith by conceding or accomodating too much as so-called 'conservatives' claim. He did what any Catholic must do: he became all things to all men. And like St. Paul in the Agora, he presented the Real Christ in such a way that Christ was a)understandable to the people listening and b)true to the person of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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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Zero Morpheme
5.0 out of 5 stars Original Research Material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September 25, 2007
Indispensable original research material available for anyone who is working on religion, Christianity in China, interreligious conversations between the East and West. Highly recommen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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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수 [내용을 한 줄도 모르지만, 나를 전율시킨 책] ‘천주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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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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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을 한 줄도 모르지만, 나를 전율시킨 책]

이 책은 16세기 말,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시기, 마테오리치라는 서양 선교사가 쓴 ‘천주실의’라는 책이다.
 
기독교인도 아닌 내가 이 책을 얻기 위해 애를 썼다. 국내에서는 판매되지 않아, 몇 년 전 중국 갔을 때 서점을 뒤적여 댔었고, 여차저차 해서 화교분의 도움을 얻어 손에 쥐게 되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100% 한자로 쓰여 있다. 하여 무슨 내용인지는 단 한줄도 이해하지 못한다. ㅠㅡ 그럼에도 이 책은 나의 가장 애장하는 도서 중 하나가 되었다. 그 이유는 이 책의 존재 자체가 나를 전율시켰기 때문이다.
내가 느낀 전율의 1000분의 1이라도 이 글을 통해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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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리치는 이탈리아 선교사이다.
1552년 이탈리아의 마체라타에서 태어났다. 이후 예수회에 들어가 수학, 과학, 천문, 역법 등을 배웠고, 중국으로 선교를 떠난다.
당시 서양의 선교 행위는 제국주의 확장과 맞물려 있는 터이기에 다소 부정적 느낌을 떨쳐버릴 수는 없지만, 그가 겪은 환란을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용서가 된다.
마테오리치는 서양의 동양 지배를 위한 군사 작전의 첨병으로 투입된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의 순수한 사명으로 중국으로 향했다. 그에 따라 홀로 고난의 여정을 감내해야 했다.
1577년 장대한 여행은 시작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인도를 거쳐, 명타라 광둥성에 들어 와 6년 간 머물며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공부했다. 1582년에는 마카오에 도착해 입지를 다진 후에, 1599년 난징에 갔다 추방 당했고, 1601년에는 꿈에 그리던 중국의 수도 북경에 들어가 선교 활동을 이어갔다.
간단하게 소개한 여정 안에는 그의 20여년의 방랑 세월과 수많은 죽을 고비가 내포되어 있다. 지금처럼 교통과 치안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에 혼자서 이곳저곳 나라의 경계를 드나들어야 하는 과정이 오죽했겠는가. 태풍으로 침몰하기 직전의 화물선 짐칸에서 배멀미를 참아내고, 산길을 걷는 중에 화적떼를 만나 도망가고, 생면부지의 장소에서 낯선 언어를 배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지역 관료들을 구슬리고 거주권을 얻어가는 과정 과정이 모험의 연속이었다.
더군다나 당시의 해외 선교 활동은 그 자체가 자신의 생을 내 던진 행위였다. 중국에서 몇 년 선교를 하고 다시 고향인 이탈리아로 돌아 갈 수 있는 일이 아니였다. 이미 중국을 향해 출발할 때부터 더 이상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함을 각오 해야 했다. 배 위에서 멀어져가는 고향땅을 바라보며 느꼈을 찹찹한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인생을 걸고, 죽을 고비를 넘어 낯선 장소인 중국에 안착했다고 해서 그의 사명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어떻게 중국인들에게 포교를 할 것인가!

마테오리치는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 더군다나 지역마다 방언이 다른 방대한 대륙에서 홀로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 고군분투를 했다. 기초 언어를 익힌 후부터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했을 테고, 자신의 소임을 이루기 위한 방법론을 찾기 위해 몰입했을 것이다. 사람들의 습성과 취향, 문화, 가치가 다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서 기독교를 전달하려 하는 것 자체가 계란으로 바위 치는 일이었기에 수도 없는 시도와 좌절을 맞봐야 했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이 서양 선교사를 요사스러운 존재로 여겨 비난과 협박을 이어갔고, 관료들은 풍기문란의 죄목을 갖다 붙였다. 흉기를 휘두르는 주민에 의해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고, 관아에 투옥되는 일이 빚어졌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마테오리치는 중국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론에 몰입했다.
우리가 만약 그 상황에 내 던져졌으면 어찌 했을까? 우리는 누군가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 상대를 알고 설득하기 위한 노력보다 먼저 다짜고짜 잔소리부터 한다. 사명감이 높은 사람일수록 큰 목소리로 줄기차게 잔소리를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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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테오리치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방법론으로 접근했다. 마태오 리치는 중국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유교 및 불교, 도교의 경전을 공부하기 시작 했다. 동양정신을 이해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치열하게 경전을 공부해, 지식이 높아지자 글 꽤나 읽는 사대부들과 교류가 가능해 졌다. 노랑머리를 한 서양인이 중국어를 사용하며 중국 문화에 박식한 모습을 보이자, 중국인들의 호감도가 높아졌다.
특히나 마테오리치는 명나라 황제와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대부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를 통해 백성들에게까지 신앙이 전파될 것을 고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이 좋아하는 것에 마음을 열게 해 주어야 했다.
마태오 리치는 그가 배운 수학과 과학, 천문, 지리학 지식을 이용해서 사대부들의 친분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처음 보는 서양의 문물과 지식에 중국인들은 호기심을 보였고 급기야 자금성에서 명나라 황제 만력제를 접견하기까지 했다. 사대부들과의 깊은 친분관계를 맺었다. 사대부들은, 마테오리치가 그린 세계지도와 천문, 역법 지식, 과학에 대해 광적인 관심을 갖고 앞다투어 마테오리치를 자신들의 향연에 초대하였다.
하지만 마테오리치가 인생을 내던져 중국으로 온 것은 사교모임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고관대작들과의 친분을 얻은 것은 단지 ‘첫 걸음’을 뗀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신에 대한 이해가 없는 중국인에게 기독교리를 전할 것인가’가 그의 필생의 과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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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 위해서 동양정신의 핵심을 보다 더 치밀하게 파고 들어야 했다. 무서운 집중력으로 유교 경전을 공부했다. 웬만한 사대부들이 읊조리는 유학의 수준을 넘어서게 되었다. 사서삼경을 거꾸로 암송할 정도의 능력을 갖게 되었다.
생각해 보라. 우리처럼 한자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도 한자를 보면 치가 떨리는 판인데, 20대 중반까지 한자가 어떻게 생긴 줄도 모르던 서양의 선교사가 숙소에 들어앉아 사서삼경을 암송하고 중국인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을 말이다.
그렇게 자신의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동양의 정신’을 꿰뚫어 가던 서양의 선교사는 동양 정신을 이해한 정점에서 그의 역작 ‘천주실의’를 써 냈다. 그리고 이 책은 중국은 물론 동양 역사를 바꿔놓았다.
이 책이 만들어지면서, 마테오리치와 교감하던 중국의 왕족과 고관대작들의 상당수가 카톨릭에 귀의하게 되었고, 마테오리치 사후 40년 간 중국에 15만명의 카톨릭 신자를 만들어내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동양에 카톨릭을 뿌리 내리게 한 인물이 바로 마테오리치였다.
 
도대체 ‘천주실의’라는 책이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유교에 맹신하던 중국인들이 갑자기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일까. 하느님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나라에서 갑자기 ‘하느님 믿습니다’라고 목 놓아 찬송하게 되었을까. 갖은 박해로 수도 없는 신자들이 살육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성경을 저버리지 않는 믿음의 전통이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바로 거기에 마테오리치의 진가가 발휘되었다.

마테오리치는 ‘신’에 대한 개념 조차 없는 중국인들에게 난데없이 성경책을 들이밀어 봤자 통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실로 그 전에 아시아에 파견되었던 선교사들이 처형 당하거나, 아무 주목을 받지 못하고 홀로 처량하게 걸인 생활을 하다 죽어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여 어떻게 동양인들의 정신 속에 들어갈까 고민을 했고, 유교 체계를 성경 원리에 접목 시키기로 마음 먹는다. 마테오리치는 유교 경전 속에 ‘상제’ ‘천주’ 라는 개념을 발견한다. 이는 ‘하늘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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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적 정서에서 우리는 흔히 천지 만물을 관장하는 존재로 ‘(옥황)상제’를 떠올린다. 여기서 쓰인 ‘상제’라는 표현이 바로 서양의 하느님의 의미와 통한다. 이는 주로 도교에서 지칭하는 ‘절대자’를 뜻하지만, ‘유불선’이 한 꾸러미로 작용하던 동양 정서에 ‘상제’의 개념은 유교 경전에서도 곳곳에 사용 되었다.
유교 자체가 ‘인륜의 원리’를 체득하기 위한 학문이기는 하지만, 이는 ‘천륜’이 기반 되어 있는 것이고, 필연적으로 ‘절대자’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사극을 보면 ‘천벌을 받을 놈’이라는 식의 관용 표현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유교에서는 ‘만물을 관장하는 절대자’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인륜’을 살피기에도 버거운 시대 상황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유교를 수용한 권력자들은 유교를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한 조직운영- 인성함양의 원리 쯤으로 생각했기에 ‘천상계’의 문제에 관한 형이상학을 쓸데 없는 것으로 여겼다. 하여 유교경전에서의 ‘상제’ ‘천주’의 의미를 거세시키다 시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테오리치가 나타나 ‘상제’ ‘천주’ ‘천의(하늘의 뜻)’의 의미를 재해석하기 시작한다. ‘당신들도 부지불식간에 하느님을 믿고 있었다’며 설법하기 시작한다. 유교를 성경적으로 재석 해 냈다.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정신에 다리를 놓은 것이다.
 
물론, 이 와중에 다소의 타협이 있었다. 유교는 제사의 형식을 중요시 했는데 그것은 ‘나 이외의 다른 신을 믿지 말라’는 십계명의 율법을 어기는 일이었다. 하지만, 유교국가에서 유교의 가장 중요한 형식을 무턱대고 ‘신의 가르침과 어긋 난다’며 배척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고리타분한 강단 신학자가 할 일이지,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인생을 내 건 인물이 할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욕심을 다 채우려 했으면 마테오리치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욕심을 비우고 실질적 변화를 갈망했기에 그의 이름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하여간 그렇게 ‘천주실의’라는 책이 만들어졌다. 번역해 보자면 ‘하나님의 참의미’ 쯤 된다.
 
이 책에서 이뤄낸 작업 자체가 너무도 천재적이고 교묘히 이뤄진 작업이다보니, 중국인들은 설득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학의 원리를 기술적으로 차용하여 쓰인 글이기에 이를 반박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유교에 전통한 유학자, 사대부들일수록 그 논리에 탄복해 깊이 빠져들었다.
이 파급력은 중국을 넘어 아시아 전역으로 퍼졌다.
조선의 경우 성호 이익조차도 ‘이 책에서 취할 것이 있음’을 인정했을 정도이다. 유교의 현학성에 반발해서 실질을 추구하던 실학파의 거두 성호 이익이 그런 얘기를 했단다. ‘하나님의 참 의미’를 전하 위해 마테오리치가 쓴 책에서 취할 것이 있다고 말이다. 얼마나 설득력 있는 책을 썼기에 국경을 건너 실학파의 거두의 마음까지 움직이게 했던 것일까. 이익의 제자들은 이후 한국 카톨릭의 뿌리가 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었다. 18세기 중반, 벼슬길이 막혀 장사꾼의 삶을 살며 팔도를 유랑하던 한 젊은이가 난세를 한탄했다. 그러다 울산의 여시바윗골에 머물 던 중, 의문의 승려로부터 책 한권을 얻게 된다. 그런데 그 책은 유교도 불교도, 도교도 아닌 것이 뭔가를 알 수 없는 아주 오묘한 그것이었다고 한다. 그 청년은 그 책이 주는 강렬한 경험을 마음속에 품고 이후에 신흥 종교운동을 시작했으니 그 것은 바로 동학이었고, 그 오묘한 책을 잃은 이는 동학의 시조 ‘수운 최제우’이다. 도올 김용옥은 이 당시 최제우가 받았던 책이 ‘천주실의’라고 단언한다. 당시 그러한 아시아 여러 종교의 원리를 오묘하게 조합했던 책은 천주실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동학교도들이 조선시대가 강제하는 유교 전통에 입각한 ‘사농공상’의 위계질서와 반상의 차별을 거부하고, 가진 자 못가진자, 남자 여자 구분 없이 어우러져 사는 대동 세상을 꿈꾸는 지향성은, 로마 황제정 시기 박해받던 기독교인들의 모습과 닳아 있기도 하다.
천주실의의 파급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우리가 흔히 길에서 마주치는 ‘도를 아십니까’ - 대순진리교 조차도 ‘마테오리치’를 자신들 믿음의 스승으로 규정하고 있을 정도이니, 국내의 수도 없는 다양한 종교 속에 녹아들어간 ‘천주실의’의 영향력은 실로 지대한 것이다.
부연하자면, 마테오리치는 동양에 천주교를 전한 천주교의 성자인데, ‘천주교’라는 표현 자체를 마테오리치가 도입했다. 만약 마테오리치가 자신이 정립한 학문을 ‘천주학’이라고 중국어로 명명하지 않고 ‘상제학’이라고 명명했다면, 지금 우리가 흔히 보게 되는 ‘천주교 성당’은 ‘상제교 성당’으로 지칭되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마테오리치는 아시아 종교 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사실
남의 나라에 들어가 남의 나라 사람들에게, 자신이 믿고 있는 믿음을 주입시켜주는 행태 자체가 적절한 것이냐는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나처럼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자신의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 강압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기 개인의 노력, 성실성, 집중력, 치밀함으로, 사람들의 세계관을 바꿔 놓은 것은 참으로 경외로운 작업이라 할 것이다.
마테오리치는 여느 ‘실패한 광신도’들처럼 타인에게 자신의 믿음을 강요 했던 것이 아니다. 타인이 발디디고 있는 거대한 산을 정복하려는 무모함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산을 아래로부터 허물어 트려 그 산위에 있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밀려 내려오게 만든 것이다. 자신의 모든 지적 – 감성적 에너지를 쏟아 부었고, 자기 인생과 목숨을 내던진 도박으로 이뤄낸 성과이다. 그 파동은 몇 세기를 지난 지금까지 강력히 진동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어떤 일을 이뤄 내기 위한 ‘방법론’의 대가로서 마테오리치를 스승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면 다짜고자 어깨에 견장차고 달라들어 이사람 저 사람에게 꼰데질하고, 물어 뜯고, 어제까지의 동지도 한순간에 적 취급하고, 작은 이해 차이를 견디지 못해 사분오열하며 끊임없이 자신들이 서 있는 지반을 갉아 먹고 있는 우리들. 우리가 배워야할 인물이 바로 마테오리치가 아닌가 싶다.
마르크스와 레닌 주의로 무장해 ‘나만 옳고 타인은 죄다 타도해야할 적’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이 모든 진보 운동계를 점령한 터다. 심지어 동물운동계에까지 이 맑스주의가 점령해서 ‘고기(돼지고기, 쇠고기)를 먹는 이들을 동물혐오자’라고 규정하는 터이고, 이 때문에 맥없는 돼지고기 정육점 앞이 동물운동가들의 투쟁의 장소가 되기까지 한다.
 
물론,
‘고기를 먹지 말자’고 ‘동물들도 생명이 있다’권하고, 홍보할 수는 있다. 나 역시 그러하니까. 하지만, 레디컬 맑스주의에 한번 빠지면 그렇게 [권하고 홍보하는 것]과 [타도의 기치를 높이는 것]의 차이를 모르게 된다. 이 때문에 허고 헌 날 자신이 가진 신념을 남들에게 강요하고 주입시키려 끝없는 분란을 빚어낸다. 동물운동계에서도 이럴 진데, 다른 여러 방면의 사회 운동분야는 말할 수도 없다. 그렇다보니 서로 자기 관심분야에만 매진해 서로 삿대질을 해 대고 있는 것이다.
 
실은,
우리네 인생사 모든 것이 ‘믿음’이고 모든 것이 ‘종교’이다. 특정 종교를 믿고 있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민주당’ ‘정의당’ ‘국민의 힘’ 등을 맹신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종교를 믿는 것과 같다. 어떤 일정한 ‘이념체계’ ‘신념체계’ 자체가 실은 ‘종교적 믿음’과 한치가 다르지 않다. ‘종교’와 ‘신념’ 사이의 경계는 희미하다.
그렇다보니 이러한 ‘신념에 빠진 사람들’은 ‘광신도’와 똑같은 모습을 보인다. 자신이 어떤 정치인을 지지하고, 어떤 정당을 지지하고, 어떤 가치를 갖게 되면, 그 순간 부로 광신도 처럼 앞뒤 안 가리고, 진영논리에 빠져서 허우적 댄다.
이런 이들이 광신도들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자신의 믿음’이 ‘종교적 맹신’과 똑같다는 것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스스로 오직 ‘진리와 정의’를 믿고 있다고 100% 확신할 뿐이다.
 
자기가 ‘사회적 약자’를 대변한다거나, 혹은 ‘국가적 대의’를 위한답시고 스스로의 어깨에 견장을 차면, 눈빛이 달라진다. (진보나 보수의 행태가 천편 일률적이다.) 물불 안 가리고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짓밟으며 ‘진리와 정의의 기치’를 내 걸고 진군한다. 서로 먼저 산 꼭데기로 올라가서 깃발 꽂기를 하려는 행태를 보인다.
그러한 ‘독단’은 과거에는 보수의 전유물이었는데, 지금은 진보가 애용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라는 수식만 앞세우면 자신들이 무슨 주장이든지 할 수 있다고 여긴다. ‘정의의 깃발’만 내 걸면 어떤 행동을 해도 된다고 믿는다. 그렇다보니 민주-진보 진영 내에 서로 간에 조금만 이해의 차이가 생기면 끊임없이 패가 갈라져 사분오열하는 것이다. 이슈가 하나 생길 때 마다 그 분열이 한 번씩 추가 된다.
 
기실 그 분열의 원인은 외부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 것이다. 내적 분열이 있는 이들이 필연적으로 외부를 그렇게 끊임없이 분열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적 분열의 원인은 앞서 논한 ‘광신적 믿음’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의 믿음 데로만 재단하는 잘 못된 습관이 들다보니, 모든 것이 다 손가락질하고, 비난하고, 심판할 꺼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 분노와 증오감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작금 진보 운동에 증오가 샘솟듯 분출하는 이유이다.
그 말로는 ‘공멸’이다. 뻔히 눈에 보이는 결과이다. 이 자명한 결과를 못 보는 것은 맑시즘을 기괴하게 극단화 시킨 ‘탐욕’ 때문이다. 개똥도 약으로 쓰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맑시즘이라는 황금 덩이를 그렇게 개똥으로 만들어 내기도 한다.
모든 것을 맑시즘적 이분법으로만 재단해서 ‘선-악’ ‘진리-거짓’으로만 구분하려 하니, 자신과 다른 것은 죄다 ‘타도해야할 적’으로만 보이는 것이다. 적당히 내려놓고, 비우고 양보도 하고, 물러 서기도 해야 하는데, 그 믿음과 신념에 대한 ‘탐욕’에 휘둘리는 것이다.
결국 ‘광신’이 동반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같은 편도 쫓아내고, 없는 불화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진보들 끼리 서로 옳다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싸우며 공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 바로 ‘천주실의’이다.
 
내용을 몰라도 된다. 책 꽃이에 꽂아 놓고, 이 책이 어떤 인고의 노력을 통해 만들어 졌는지, 생각이 다른 타인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세계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숙고해 보는 것으로 족하다.
 
만약 우리가 선교사이고, 우리가 지금 하는 진보운동 방식대로 다른 사람을 선교했다면 어떤 결과가 생겼을지를 상상해 보라. 상상력을 발휘하느라 시간 낭비할 것도 없다. 우리는 그냥 우리 주장만 하다가 광신도로 찍혀서 대중이 휘두르는 도끼를 맞았거나 옥사했을 것이 뻔하다. 그것이 지금 우리 민주-진보의 수준이다. 그런데 그 숫자가 많고, SNS 네트워킹을 통해 광신에 빠진 사람들 끼리 세력화 하다 보니, 그 ‘광신의 집단성’ 속에서 자기 존재를 상실한다.
그게 더 무서운 일이다. SNS가 없었다면 일상 속에서 주변사람들과의 비교로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을 직시할 용기가 없다보니, 자신과 같이 ‘결핍된 거울상’을 찾아 인터넷상을 헤엄치는 것이고, 그 아둔한 집단성 속에 안주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기호가 존재를 전복하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가상이 실재를 압도 한 것이다. 아둔함이 명증함을 짓누른 지 오래이다.
‘목소리만 크면 이기는 세상’이 이렇게 구현되고 있다.
한번 돌아보자. 스스로를 진보라고 참칭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스스로 노력도 않고, 공부도 않고, 반성도 않고, 소통의 기회도 찾아보려 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정의로운 말들’만 쏟아내며, ‘정의의 깃발’을 휘날리며, 자기 아래 모이지 않는 이들을 다짜고짜 ‘적’ 취급 하는, 그 깊은 나르시즘의 늪으로 끝없이 빠져들고 있는지를.
그러니 진보 운동 판이 사분오열되어, 자기 파이만 넓히기 위해 혈안이 되어 그 난리를 떨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진보 운동판을 이 모양 이 꼴을 낸 100여개의 분파는 나머지 99개의 분파가 잘 못하고 자신들은 추호도 잘 못이 없음을 100% 확신한다. 코미디 같지 않는가. 더욱 코미디 같은 사실은 이 코미디 같은 사실이 그들에게는 몹시 진지하다는 것이다.

16세기 서양의 선교사가 걸어온 길을 한번만이라도 되돌아 보자. 나 부터 스스로를 통렬히 반성하며 뜯어 고쳐야 한다.
내가 내 주장만 쏟아내서는 안 된다. 내 이념과 가치만 상대방에게 강요한 결과로 어떤 분란과 갈등이 빚어졌는지를 반성해야 한다. 서로의 이해 차이가 어디서부터 생겼고, 어떻게 하면 그 간격을 메울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왜? 사람들이 자신들의 얘기를 듣지 못하는지 먼저 고민해야지 다짜고짜 삿대질 하면서 ‘적’취급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가 선교사가 되었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
하지만 ‘광신’에 빠져 있는 이들은 그러한 ‘숙고’를 마치 ‘불의와의 타협’인양 주저할 것이다. 거기서부터 첫 단추가 잘 못 꿰어진 것이다. ‘내 자신의 아집을 덜어내지 못한 활동’이 어떻게 상대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겠는가.
그 성찰이 시작되는 순간.
그간 ‘나만 옳고, 나만 선이고, 나만 진리야’라고 했던 생각이 ‘예수천국 불신지옥’과 한 치가 다르지 않음을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그 광신의 덫에서 벗어나 명증하게 상황을 관조하는 순간! 불면의 밤을 지새게 했던 그 수많은 문제들의 태반이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시작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첫 매듭을 푸는 바로 그 순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본격적으로 포교에 나설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이다. 지금껏 반목하고 있었던 사람들 귀에 ‘들리는 얘기’를 할 수 있는 준비가 바로 그 때 되는 것이다.
그 전까지 우리는 그저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피켓을 들고 절 앞을 찾아가 험담을 퍼붓는 광신도 일 따름이다. 나와 세계가 나뉘어졌다는 것을 모르고 자신의 욕망대로 세상이 움직이는 줄 아는 ‘유아’ 일 따름이다. 아무리 장엄하고, 격렬하고, 그럴싸한 주장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간난 요람에서 지르는 간난 아기의 울음소리일 뿐이다.
냉정히 되돌아보자.
그간 내 자신이 얼마나 간난 아기 울음 수준의 활동을 해왔는지를 말이다. 세상이 변하기를 바라는 간절함은 전혀 없고, 자기 목소리만 크게 외치는 것에만 스스로의 열정을 낭비하지 않았냐는 말이다.
나는 스스로 내 활동의 수준을 잘 아니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 같은 책을 굳이 사서 책상 위에 놓고 스스로의 반성의 기회를 삼고 있다. 나는 최고이지는 못해도 내 주제는 알아 꼴지는 되지 않으려고 부단하게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보면 진보운동 판이 절망적일 수 밖에 없다. 광신적 믿음에 기반해 있는 사람들 끼리 서로 잘났다고 삿대질 하며 진보의 기반을 철저히 파괴하면서도, 그 문제에 대한 고민과 성찰의 필요성을 일말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만 바뀌면 된다’고 철저히 믿고 있다. ‘남 탓’ 일색이다. 모든 진보운동에 이 독단의 전염병이 퍼져있다. 이 난립한 광신의 홍수가 도무지 21세기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자.
이제 한 문장도 이해하지 못한 책의 서평을 마무리할 때이다.
 
마테오리치는 1610년. 58세의 나이에 30이 넘는 타향살이 끝에 중국의 모처에서 숨을 거둔다. 하지만 그의 책은 근현대사를 관통해 아시아의 역사를 바꿔놓았으며, 돌고 돌아 21세기를 살고 있는 내 손에까지 이렇게 올려졌다.
 
내용 해석은 안 되지만 이 책에는, 저자의 [세태를 관조하는 깊은 정신]과 [치열한 문제의식]과 [공학적 정교함]이 오롯이 담겨, 나태와 교만, 나르시즘에 빠져 있는 나의 정수리를 내리 치며 묵직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어떻게 해야 내가 스스로 빠진 광신의 덫을 벗어날 수 있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해야 세상을 변화시킬 마중물이 될 수 있을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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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실의 [ 양장 ]
마테오 리치 저 / 송영배 역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0년 05월 20일
  
책소개
『천주실의』는 1583년 명나라 말기에 중국으로 온 이탈리아 태생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중국 선비와 서양 선비, 즉 자신과의 대화 형식을 빌어 저술한 것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명나라 말 관료이며 대학자인 서광계나 이지조 등을 천주교도로 개종시키는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서학을 성립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일찍이 이수광이 이 책을 소개한 바 있으며, 이후 조선의 지식인 중에는 이 책을 통하여 천주교를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본 번역판은 지금까지 나온 판본을 비교하여 원전 비평을 했을뿐더러 불어판과 영어판을 구해 살펴보면서 가능한한 원본에 가까운 직역을 시도했다.

목차
머리말
일러두기
서문
『천주실의』상권
『천주실의』하권
발문
부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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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자 : 마테오 리치
1552년 출생했으며 로마 성 안드레아의 큐리날 신학원, 프로렌스 예수회 대학, 로마 예수회 대학에서 수학했다. 1578년에는 인도의 고아에 도착하여 신학을 배우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강의했다. 1583년 중국의 짜오칭에 안착하였고, 1594년에는 『사서』의 라틴어 번역본을 완성하여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중국을 이해시키는 교과서로 사용하였다. 그 외 저서로는 첫 한문 저작 『교우론』, 『서양기억술』, 『크라비어코드를 위한 8곡』, 『곤여만국전도』, 『천주실의』, 『기인십편』, 『예수회에 의한 기독교의 중국 전교에 관하여』 등이 있다. 1609년 중국에 최초로 '성모 마리아회'를 창립하였고 1610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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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송영배(宋榮培) : 서울대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
임금자(任金子) : 수원 가톨릭대학교 교수
장정란(張貞蘭) : 덕성여대, 성신여대, 서강대 강사
정인재(鄭仁在) :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조광(趙珖) : 고려대 문과대학 한국사학과 교수
최소자(崔韶子) : 이화여자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