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8

아카이브 - 톰 라이트의 신학의 기여와 문제점

아카이브 - 톰 라이트의 신학의 기여와 문제점

톰 라이트의 신학의 기여와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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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 신학의 기여와 문제점

      

이승구 (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현존하는 영국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고 논란의 중심이 되어 있는 복음주의적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성공회(Church of England) 덜햄의 감독(Bishop of Durham)인 톰 라이트(Nicholas Thomas Wright)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948년 12월 1일에 노떰벌랜드(Northumberland) 모르페뜨(Morpeth) 출생으로 1968년에 옥스포드의 엑스터 컬리쥐(Exeter College)에 입학하여 고전학(Classic)을 공부하고 1971년에 우등으로 문학사 학위를 받고(BA with First Class Honours), 위클리프 홀에서 영국 교회의 사제가 되는 과정을 하여 1973년에는 신학으로 문학사 학위(BA in theology with First Class Honours)를 하고, 1975년에는 석사 학위(MA)를 받고, 옥스퍼드의 멀톤 컬리쥐(Merton College)의 Junior Research Fellow, Junior Chaplain(1975-1977), 그리고 캠브리쥐의 다우닝 컬리쥐(Downing College)의 연구원(Fellow)과 Chaplain을 하면서 옥스퍼드에서 박사 과정을 하여 1981년에 옥스퍼드에서 바울 신학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한 후에, 카나다 맥길 대학교의 신약학 조교수(1981-86), 다시 옥스퍼드 올세스터 컬리쥐(Worcester College)의 연구원(fellow), Tutor, Chaplain, 그리고 옥스퍼드의 신약학 Lecturer를 하고서(1986-1993),리취필드대성당(Richfield)의 지방 부감독(Dean,1994-1999),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의 신학자(canon theologian, 2000-2003)로 있다가 2003년에 덜햄의 감독(Bishop of Durham)으로 임직하여 섬기고 있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가 다음 켄터베리 대주교가 되리라고 생각하므로 그는 현재 영국 성공회 신학을 이끌고 가는 매우 중심적 인물 중의 한사람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톰 라이트는 성경을 신뢰하고 성경에 근거한 작업을 하므로 자유주의적이기보다는 복음주의 신학자로 보는 것이 옳고, 그가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신학적 입장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큰 기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톰 라이트의 신학적 기여는 바로 20세기 말과 21세기 초라는 맥락에서 성경을 존중하는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하며 성경신학적인 작업을 하려고 한 것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긍정적 기여 속에 칭의 문제를 비롯한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한 그가 가진 독특한 입장의 표명으로 복음주의 권에서 상당한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복음주의적 이해를 풍성하게 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또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복음주의를 모호하게 하거나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할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톰 라이트의 복음주의적 기여가 크면 클수록 그의 독특한 입장은 그 자신이 의식하지 않은 채 (아니면 그가 의식하는 것일까?) 복음주의에 큰 파괴력을 지닌 공격이 될 수도 있게 된다는 말이다. 이 발제 논문에서는 이와 같이 독특한 입장을 지닌 톰 라이트의 신학적 기여와 문제점을 개괄적으로 살피는 작업을 해 보기로 한다. 
      
I. N. T. Wright의 신학적 기여 
      
수 없이 많은 다양한 신학적 사조들이 나타나고 있는 가운데서 성경과 복음주의적 입장에 반하는 사조들이 주도적인 20세기 말과 21세기 초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톰 라이트의 신학적 기여로 말할 수 있는 점은 수없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 나는 특히 (1) 성경을 신뢰하는 입장을 분명히 한 점, (2) 성경의 역사성을 믿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점, (3) 구원에서의 하나님의 주도권을 잘 드러낸 점, (4) 성경신학적 작업을 하여 신약과 구약을 항상 연관시키면서 이해하도록 한 점, 그리고 (5) 신약 성경적 하나님 나라 이해에 근거한 신학을 잘 제시하고 있는 점 등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세 가지 복음주의적 기여와 두 가지 성경신학적 기여라고 묶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1) 성경을 신뢰하는 입장을 분명히 한 점 
      
라이트가 성경을 신뢰하고 있으며 그런 태도를 신학을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그는 복음주의자이다. 이 점은 부인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강조되어야 할 점이다. 그는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비판을 의식하면서 “자신이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그리고 평생을 성경에 헌신하고 있으며 오직 성경의 원리에 헌신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명백하게 말하면서 “교회가 성경을 더 잘 이해하고 그에 따라서 사는 만큼 교회의 예배와 설교와 공동생활이 더 잘 이루어 질 것”이라고 한다. 라이트는 “성경으로 성경 되게 하는” 것에 큰 관심이 있다. 그는 성경이 말하는 바를 매우 중요시한다. 특히 “바울이 실제로 말하는 바”를 중요시하면서 논의해야 하지 않느냐고 여러 곳에서 말한다. 그는 “참된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더구나 라이트는 많은 신약 학자들이 바울의 저작이 아닌 것으로 여기려고 하는 에베소서나 골로새서도 바울의 저작으로 여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할 정도이다. 물론 그는 이 문제에 모든 것을 걸지는 않고, 다른 가능성을 열어 두면서 논의하고 있다. 그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는 아주 공공연히 에베소서조차도 바울의 저작으로 여기는 입장에서, 그리고 골로새서를 바울의 것으로 보면서 논의하고 있다는 점은 그가 얼마나 복음주의적인지를 잘 나타내 보여 준다고 여겨진다. 
      
(2) 성경의 역사성을 믿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점 
      
여러 다른 측면에 대해서도 그리하였지만 특히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성을 분명히 하고 이에 대한 복음주의적 입장을 확고히 하는 데 라이트는 큰 기여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들을) 만들어 낼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부활을 기대 하지 않았었는데, “예수님은 참으로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 나셨다.” 그래서 라이트는 “만일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제거해 버린다면, 신약 성경 전체와 대부분의 2세기 교부들도 같이 상실하게 될 것이다”고 단언한다. 더구나 기독교가 처음부터 믿어 온 부활은 “공간과 시간을 차지하는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몸(a body in the sense of a physical object occupying apace and time)의 부활”이므로 우리는 부활 때에 옛 자료들(the old material)로부터 창조되었으나 새로운 특성을(new properties) 가지는 그와 같은 변화된 몸(a transformed body)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한다. 라이트는 부활에서 우리가 가지게 될 "변화된 신체성"(transformed physicality)을 강조하면서 “transphysicality”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라이트는 부활에 대한 수정주의적 제안들은 모든 설명력을 상실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와 함께 역사와 역사 연구에 대해서 상당한 함의를 지닌 말도 하니 그것은 “과학은 반복될 수 있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고,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역사는 한번, 그리고 유일회적으로 일어난 것들로 그득하다”는 말도 한다. 
      
그런 점에서 라이트가 성경 기사에 충실하여 부활과 승천이 각기 일어난 사건이지 그 둘을 하나로 섞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매우 분명히 한 것도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각각의 사건들의 역사성을 분명히 한다는 점에서 큰 기여이다. 라이트는 예수님께서 하늘에서도 "철저히 몸을 가진 상태"(in his thoroughly embodied risen state)에 계심을 매우 분명히 말한다. 
      
(3) 구원에서의 하나님의 주도권을 잘 드러낸 점 
      
라이트는 구원에서의 하나님의 주도권을 아주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신앙 자체가 성령님의 부르심의 첫 열매”라는 라이트의 선언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신앙을 가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런 점에서 라이트가 교회는 예수님이 아니고, 성육신의 연장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은 우리 구원에서의 하나님의 주도권을 명확히 하는 일의 한 부분으로 인정받을 만한 것이다. 
      
(4) 성경신학적 작업을 하여 신약과 구약을 항상 연관시키면서 이해하도록 한 점 
      
이는 성경신학자로서의 라이트의 기여라고 할 수 있다. 점점 분과화를 지향해 가는 일이 많은 중에 라이트는 신약을 연구할 때 구약적 배경을 분명히 하는 작업을 하고, 특히 새언약을 아브라함 언약과의 연관성 가운데서 설명해 보려는 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라이트는 계속해서 우리의 신학적 작업에서 창조로부터의 역사와 특히 이스라엘의 역사를 측면적인 것(sideline)으로 취급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목적의 역사의 한 부분임을 강조하면서 구약과 신약을 계속 연결시키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언약 신학을 잘 전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성경 해석에서의 언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학자도 드물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런 강조점은 잘 개발되기만 한다면 세대주의적 이해를 잘 극복하게 하는 좋은 논의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라이트의 성경신학적 기여는 결국 언약 신학적 기여라고 할 수도 있다. 
      
(5) 신약 성경적 하나님 나라 이해에 근거한 신학을 잘 제시하고 있는 점 
      
그 과정에서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언약이 어떤 정확에 들어섰는지를 분명히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스도 사건이야 말로 그의 책 제목이 잘 드러내듯이 언약의 극치(the climax of the covenant)인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세계만민이 언약의 복에 참여 하는 하나님 백성이 되었는지를 라이트는 잘 제시하고 있다. 큰 이야기(metanarrative)의 틀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던 상황 속에서 라이트는 구약과 신약에 이르는 “창조와 언약의 이야기”(a grand story of creation and covenant)라는 메타-내러티브를 아주 분명히 각인시키고 있으며,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여 왔으나 그리스도의 재림에서라야 극 극치에 이르게 되는 신약적 하나님 나라 개념에 충실한 신학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이미와 아직 아니”라는 틀로 주어진 하나님 나라의 틀을 아주 자명한 것으로 여기며 신학하는 학자들이 점증하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여겨진다. 라이트도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이 “나사렛 예수의 삶에서 이미 우리에게 임하여 왔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한다. “나사렛 예수는 단순히 새로운 종교적 가능성이나 새로운 윤리나 새로운 구원의 길만을 도입해 들이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계를 가져오신 것이다.” 예수님이 메시야이시므로 “하나님의 새로운 세대가 결국 현세 안으로 뚫고 들어 온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계가 시작된 것이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하나님 나라적 이해에 근거해서 라이트는 매우 옳게도 우리 구원의 궁극적 목적이 단순히 죽어서 “하늘”(heaven)에 머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되고 영광스럽게 된 몸으로 변화되어 적극적으로 주를 위해 사는 데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매우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라이트는 참으로 하나님 나라적 신학을 위한 좋은 토대를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톰 라이트의 신학적 작업이 얼마나 복음주의적인지를 살폈다. 이 모든 점에서 그는 다른 어떤 이들이 하기 어려운 큰 기여를 복음주의 권에 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성경신학적 작업에도 큰 기여를 했으며 지속적으로 그런 기여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에 우리가 고찰하려고 하는 몇 가지 점에서 아주 독특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복음주의에 대한 그의 큰 기여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복음주의권에 큰 논쟁의 중심이 되어 있다. 가장 심각하고도 중요한 문제인 칭의 이해와 관련된 문제부터 라이트의 문제점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II. N. T. Wright의 문제점 (1): 칭의 이해와 관련된 문제 
      
톰 라이트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그가 전통적 복음주의자들과는 상당히 다른 칭의 이해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 질 수 있다. 사실 이는 복음주의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라고 여겨진다. 이 문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제임스 던(James D. G. Dunn)이 1983년에 그렇게 명명했다고 하고 (또한 던은 톰 라이트가 던 등이 앞자리에 있던 청중 앞에서 행한 1978년 틴델 하우스의 한 발제에서 그런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고 하는데), 여턴 그들을 따라 많은 이들이 그렇게 부르고 있는 소위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 학파와 라이트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은 이미 이 논의가 30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는 전혀 새 관점은 아니고, 이미 수많은 분들이 다양하게 비판한 소위 제2 성전 시대의 유대주의(second temple Judaism)와 바울에 대한 독특한 해석과 관점이다. 
      
물론 라이트는 자신이 샌더스(E. P. Sanders)와 던(J. Dunn) 등이 말하는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음을 여러 곳에서 분명히 밝히고 그들과 자신의 입장을 차별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샌더스의 바울에 대한 이해는 혼동되어 있고(muddled) 명확성이 떨어진다(imprecise)고 라이트는 말한다. 특히 샌더스의 주장에는 주해적 명료성이 결여되어 있고 주해적 근거지음이 부족하다고 한다. 또한 제임스 던은 바울의 기본적인 언약 신학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그의 전형적인 개신교적 반성례주의는 로마서 6장의 핵심을 놓치게끔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기독론과 로마서 7장의 의미, “그리스도 신앙”(pistis Christou)의 의미에서 자신과 던의 30년간의 계속되는 논쟁을 언급하기도 하고, 근자에는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포수기 문제에 대한 입장의 차이와 논쟁을 언급한다. 
      
특히 라이트 자신의 독특한 관심과 관점이 샌더스가 이 문제에 대한 중요한 저서인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주의』를 출판하기 이전, 자신의 옥스퍼드에서의 박사 학위 논문 탐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아주 분명히 제시한다. 그는 자신이 샌더스나 던 등에게서 이런 관점을 배운 것이 아니라 성경에 순종하여 “바울의 생각을 바울을 따라서 생각하려는” 투쟁에서 가지게 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샌더스와 던에 대한 라이트의 이런 언급을 보면서 우리들은 새로운 관점이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으므로 새 관점들의 다양한 형태들을(types of New Perspective) 나누어 고찰해야 한다는 것, 다른 말로 하여 “단일한 새로운 관점”(the new perspective)이 있다기 보다는 “일련의 다양한 관점들”(a disparate family of perspectives)이 있다는 점에 동의함을 밝힌다. 
      
그러나 샌더스와 던 등과 자신의 차이를 분명히 한 후에도 소위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 nomism)에 대한 입장에서는 아주 이상하게도 톰 라이트 자신이 공공연하게 이 분들과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으므로 (라이트 자신이 기꺼이 인정하듯이) 각기 다른 다양한 새 관점들을 하나로 묶는 어떤 특성이 있다는 점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라이트는 유대주의에 대한 샌더스의 설명이 좀 더 다양한 뉴앙스를 염두에 두고 고쳐져야 한다고는 보지만 전통적 바울 이해에 대한 “새 관점의 도전은 다소간 확고히 수립된 것으로 보여진다”는 입장을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라이트는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이를 잘 살펴 본 많은 분들은 라이트가 사실 새 관점을 일반적 대중들에게 적극적으로 널리 보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그는 새 관점을 지켜보는 객관적인 평가자이기 보다는 새 관점을 더 좋은 것을 만들어 특히 복음주의자들에게 널리 보급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라이트는 샌더스의 책을 읽을 때 샌더스가 라이트 자신이 바울에 대해 이해를 통해 생각하고 있던 바를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입장에서 여러 방면을 통해 지지해 준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샌더스의 기본적 주장은 1세기 유대교는 율법주의적이지 않은(a nonlegalistic)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 nomism)를 가지고 있었다, 즉 은혜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들어가서(“getting in") 율법에 대한 순종의 행위로 언약 안에 머무른다는("staying in) 것을 주장하는 입장을 지녔다는 것이다. 샌더스에 의하면, “바울에게서도 유대교 문헌에서와 같이 선한 행위들은 (언약) 안에 머무르는 조건(the condition of remaining in)이지, 그것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earn) 아니다”는 것이다. 라이트는 이런 샌더스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바울 시대의 유대교는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며, 바리새인인 사울은 당대의 많은 유대인들과 같이 이스라엘이 아직도 포수기 상태에 있었고 하나님께서 악을 파괴하시고 이스라엘을 빛나게 드러내실 날이 다가 오고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회개하였을 때 바울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구원관으로부터 구원관을 바꾼 것이 아니라,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하나님이 포수기에 있는 이스라엘을 참으로 해방하시는 일을 하셨다고 믿게 된 것이라고 라이트는 말한다. 즉, 부활과 함께 오는 세대(the age to come)가 이미 왔으므로 이제 기존에 믿고 있던 바에 따라서 이방인들을 추수할 때가 이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새관점 학파는 바울의 이전 사상과 이후 사상의 연속성을 좀더 강조하여 보려고 한다. 
      
또한 기본적으로 라이트는 바울의 글에서 “율법의 행위”(the works of the law)는 그것을 행함으로 공로를 얻는 도덕적 행위가 아니고 그 행위를 행함으로 이교도들과 대조되어 규정되는 유대인의 율법적 행위들이라는 던(Dunn)의 제안이 아주 옳다고 말하며 이는 자세한 주해를 통해 확언되었고, 이를 부인하려는 여러 시도들은 다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라이트는 또한 던에게 동의하면서 바울의 글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하나님 자신의 약속,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고 말한다. 라이트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그 자신이 잘 밝혀서 명확히 하고 있듯이, 샌더스나 던의 영향을 받아서 그리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독특한 성경 해석을 한 것에 근거해서 라이트 자신도 결과적으로는 새 관점 학파에 동의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라이트로 하여금 칭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게 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라이트는 칭의는 “한편으로는 언약의 관점에서, 또 한 편으로는 법정의 (하나님의 최후 심판은 큰 법정 상황과 같을 것이고, 이 법정에서 이스라엘에 승소하게 되는 상황과 같은 것이다!) 관점에서 보는(seen from the point of view) 구속과 구원의 큰 사건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묘사한다. 그런 의미에서 라이트는 칭의는 구원론에 대한 것이기 보다는 교회론에 대한 것이며, “누가 (구원받은 자들 안에) 있느냐를 말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라고 말한다. 
      
이런 라이트의 생각은 그가 바울의 글을 읽을 때 그가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 삶 전체를 가지고 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이것은 다른 말로 해서 “행위에 근거해서” 하시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과 연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이트는 로마서 14:10-12, 고린도 후서 5:10에서 바울이 아주 분명하게 “행위에 근거한 심판”을 말한다고 한다. 또한 고린도 전서 3장의 교회 건축자들에 대한 무서운 구절에서도 이를 확언한다고 하며 이 주제에 대한 주된 구절은 로마서 2:1-6이라고 한다.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하심을 받으리니”라고 말하는 로마서 2:13절 말씀을 매우 강조하면서 바울이 여기서 행위로 말미암는 칭의를 진술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로마서 2:7의 말씀인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라는 말도 이는 이런 자들이 마지막 날에 의롭다 함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전통적 해석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실상 그렇게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함을 받을 존재가 없다는 해석은 다른 해석들과 같이 이 구절들에 대한 주해에 의해서 견지될 수 없다고 라이트는 주장한다. 그리하여 라이트는 전체 삶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선언하실 것을 현재 칭의는 믿음에 근거하여 선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로마서 2장과 3장의 연관성을 생각하며 로마서 3:9, 10의 명백한 선언을 생각할 때 라이트의 이런 주장이 오히려 정당한 주해적 근거를 가지지 못하거나 문맥에서 벗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이 라이트의 칭의 개념이 잘못된 형식적 이유라고 여겨진다. 하나님의 칭의를 주로(mailnly) 그리고 일차적으로 미래 심판으로부터 이해하므로 하나님은 행위에 근거하여 칭의하신다고 주해하는 경향을 그가 가지게 된 것이다. 라이트는 이를 “종국적 칭의”(the final justification)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서 이를 선취하여 적용시킨 것을 “현재적 칭의”(the present justification)라고 한다. 
      
또한 이런 논의 과정에서 라이트는 내용적으로는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을 주장하는 다른 학자들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적극적으로 얻으신 의를 믿는 자들에게 전가하신다는 개념을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런 생각이 “의로운”(righteous)이라는 말이나 “의”(righteousness)라는 말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가 개념을 거부하면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라는 용어는 바울에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 개념은 있다”는 패커의 말을 라이트가 인용하면서 바울의 전가를 말하는 것은 성경에 충실하지 않은 것임을 패커 같은 이도 인정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일은 매우 의아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 동안에 신학에서는 그 의미를 중심으로 논의하여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라이트가 비판하려고 인용하고 있는 것이 라이트의 지나치게 현학적이려는 논의의 문제점을 잘 드러내어 준다고 판단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공로로 얻으신 의의 전가를 거부하는 것에 라이트와 다른 새 관점 학파 학자들의 칭의 개념의 근본적 내용적 문제가 있다고 판단된다. 
      
행위를 가지고 심판하신다는 이 계속되는 라이트의 주장은 사람들로 하여금 라이트가 “반-펠라기우스주의적”(semi-Pelagianian) 주장을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을 낼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성령님의 능력으로 어떤 선행을 한 것이 마지막 날에 그에게 공로로 여겨진다는 것이 바로 천주교회적 “반-펠라기우스” 사상이 주장하는 바였기 때문이다. 라이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약속의 성취에로 받아들여진 자들이 이 땅 가운데서 성령님의 은혜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을 행한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 같다. 이 점에 대해서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가 이를 강조하기 위해 성경을 주해하고 그 결과를 표현해낸 방식은 전통적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표현한 방식과 일치한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그런 현상 앞에서 라이트가 자신을 “반-펠라기우스”주의자가 아니라고 하려면 적어도 자신의 주해 방식과 궁극적 표현 방식을 고쳐야 할 것이다. 
      
(과연 어떤 것이 정당한 표현일까? 성경에 대한 바른 주해에 근거한 정통 개혁파적 이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표현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이 땅 가운데서 성령님의 능력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바를 향해 나아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 공로가 되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해서 하는 일이기에 공로가 되지 못한다. 더구나 그것들조차도 다 부패한 인간성으로 물들어 있는 것이니 그런 일들도 공로가 되지 못하고 따라서 그 자체만으로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할 것이다. 최후의 심판대에서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헌신적으로 산 사람들 조차도 그들의 행위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 공로만으로 공적으로 의롭다함을 선언 받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함을 받았으므로 이미 받은 그 칭의를 공적으로 선언하시는 것이 최후의 심판의 의미이다.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나님 앞에 선한 일을 하게 되나 그것도 부족하여 오직 십자가의 공로에만 근거하여 공적인 칭의 선언이 최후 심판에서 울려 퍼질 것이다.) 그러므로 전통적 이해에서는 이신칭의를 중심으로 보고 이미 믿음으로 받은 칭의를 최후의 심판대에서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을 말한데 비해서, 라이트는 무게의 중심을 미래 심판으로 보고 그로부터 현재의 칭의를 "미래에서 발생할 칭의의 현재적 선취"로 표현하는 것이다. 바른 신학적 구도가 유지된다면 이 표현 자체는 별 문제 될 것이 없으나 라이트의 무게의 중심을 미래에로 옮기는 성향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개혁자들은 그렇게 될 때 칭의와 성화가 혼동이 일어 날 것을 우려하여 천주교회의 칭의를 뒤로 미루어 이를 의화(義化)로 이해하려는 것을 경계하면서 항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강조했던 것을 생각할 때, 라이트의 이런 표현 방식은 개혁자들의 의도와 배치되는 면이 많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자신의 이해에 따라서 라이트는 칭의의 의미를 전통적 개념을 떠나서 자기 나름대로 정의한다. 여기서도 그에 대한 오해가 생길 수 있는 많은 혐의제기(charge)가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라이트는 바울에게서 구원론적으로 중요한 개념이 “부르심”이라고 보면서 “그에 의해 죄인들이 우상들로부터 돌이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라는, 죄로부터 떠나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죽음에서 떠나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왕의 소환명령 같은 부름을 받는 것에 따라 나오는 어떤 것”이라고 정의하려고 한다. 즉, 라이트는 칭의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나온 사람의 삶의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하시는 판결(the verdict which God pronounces)이라고 정의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어떤 사람이 산 전체 삶에 근거해서 미래에 일어난다”고 한다. 그는 심지어 “바울에 의해서 재 정의된 대로의 행위에 근거해서 칭의가 일어난다고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이트는 (칭의가 미래와 현재에 두 번 일어난다는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우리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미래의 심판으로부터 칭의라는 용어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칭의라는 용어 보다는 vindication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그리고 vindication은 부르심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렇게 미래로부터 거꾸로 볼 때에 우리는 이 선언이 무엇이며 왜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이를 주장하는 지를 잘 알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위에서 칭의를 최후 심판과 일차적으로 연관시키는 이런 이해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 지를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이와 같은 라이트의 칭의 이해는 칭의를 “무엇인가를 발생하게 하는 것”으로 보다는 법정적 선언, 즉 선언적 말(a declarative word)과 법정의 언어(lawcourt language)로 본다는 점에서는 종교개혁적 용례를 따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일차적으로 미래 심판과 연관시키는 것에서 그가 칭의의 종교 개혁적 의미를 떠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고 여겨진다.
(이 점을 떠나서 “하나님의 죄 용서에 대한 선언과 언약의 성원됨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은 궁극적으로 두 가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은 개혁신학에서 항상 강조되어 오던 바이므로 이는 (라이트 자신의 주장과는 달리) 라이트가 새롭게 제안 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잘 사랑하는 신학자들의 오랜 이해인 것이다. 특히 칭의에서 죄용서와 입양을 같이 다루어 죄 용서를 소극적 칭의로 말하고 입양을 적극적 칭의로 말하던 전통을 생각해 보라.) 
      
또한 어떤 점에서는 라이트가 바울에 대한 옛 관점이 보지 못하고 새 관점이 가지는 장점이라고 말한 바는 필자가 보기에는 꼭 새 관점을 가져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옛 관점에서 전혀 볼 수 없었고 몇몇 현대 바울 학자들이 강력하게 발견해 준 것이 배후의 기사,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 하나님과 아브라함, 하나님과 언약 백성에 관한 이야기에 대한 바울의 감각과 바울이 말하는 바와 같이 때가 찼을 때에 그 이야기가 그 극치에 이른 방식에 대한 이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해는 새 관점을 가지고서야 마침내 얻게 될 수 있는 이해라고 하기 어렵다. 성경신학적 이해를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바울의 생각 배후에는 그런 기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전제하며 논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이트가 이런 기사적 이해를 리쳐드 헤이스(Richard Hays)에게서 매혹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좋은 점이지만 리쳐드 헤이스에게서 처음으로 이런 기사적 접근이 나타난 것이라고 하기도 어렵고, 이런 기사적 배경은 바른 성경신학을 하는 분들은 누구나 전제로 하든지, 더 명확히 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점을 중심으로 강조하기 원했다면 라이트는 굳이 오해받을 수 있는 새 관점적 입장을 취하여 자신의 입장을 표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라이트의 문제는 근원적으로 자기 나름의 독특한 성경 해석에 사로잡혀서 전통적 성경 해석에 대한 비판이 너무 크게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대개 이렇게 할 때 주해적으로 필연적 경우가 아니라면 이런 해석도 옳고, 저렇게 볼 수 있는 가능성도 용인해야 하는데, 주해와 논의의 과정에서 그것을 놓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사실 라이트는 새로운 관점과 입장을 같이 하기 위해서 성경이 칭의에 대해서 말하는 문맥이 개인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게 됨(individual sinners being put right with God)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 번 언급한다. 예를 들어서, 라이트는 로마서 3:21-31의 문맥에서 바울은 개인의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바울이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면 29절은 유대인과 이방인 문제를 다루는 구절이 갑자기 들어오게 된 것으로 여기게 된다고 말한다. 
      
오히려 바울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모든 죄인들로부터 하나님께서 어떻게 단일한 언약적 가족을 창조하시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그 중요한 문제를 다르면서도 동시에 개인이 어떻게 칭의함을 받는 가의 문제가 같이 다루어지고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트는 바울은 그런 개인의 칭의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함으로 종교개혁적 해석이 지나치게 나아갔다는 시사를 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갈라디아서 2:11-21에서도 라이트는 여기서 문제가 되는 점은 어떻게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누구와 식탁 교제를 해야만 하느냐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는데, 비록 바울의 주된 논의는 식탁 교제 문제일지라도 그것은 이방인이 율법과 상관없이 하나님 백성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함의하므로 바울의 논의 중에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함의를 다 찾을 수 있다. 그런데도 라이트는 자신의 논의를 위해서 바울의 중심 논의만을 중심으로 논의하여 다른 한쪽의 논의가 함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이런 것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예로 라이트가 전현 쓸데없는 “이것이야 저것이냐”(either/or)를 제시하면서 자신이 말하는 것만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예를 들어서, 그는 “우리는 이신칭의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 자체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한다. 또 다른 곳에서는 “복음은 - ‘이신 칭의’가 아니라, 예수에 관한 메시지이다. 따라서 복음은 의, 즉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드러내어 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런 식의 논쟁을 위한 논의가 무슨 유익을 주는지 모르겠다. 라이트가 이신칭의가 복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가 왜 이 둘 다를 같이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 논의가 가져 올 종교 개혁 자체를 파괴할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대립을 시도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라이트가 교회는 바울의 칭의 이해를 이천년 동안 오해해 왔고, 로마서를 어떻게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읽으려 하는 것은 로마서를 수백년 동안 왜곡시킨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와 같은 “불필요한 ‘이것이냐-저것이냐’”를 도입하여 우리를 오도하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이런 접근 가운데서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새롭게 해석한 성경 해석이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라고 생각하면서 비록 자신이 루터와 칼빈이 내용적으로 말하는 바와는 반대의 이야기를 하지만 자신의 입장이 루터와 칼빈이 말한 “오직 성경”의 원리에 충실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결과를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야말로 톰 라이트가 복음주의권에 가장 큰 손상을 끼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주의적 가르침과 다른 가르침을 하여도 그것이 복음주의에 충실한 것일 수 있다는 인상을 주고, 소위 전통적 복음주의적 주장을 하는 분들은 자신들이 오직 성경에 충실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오직 성경의 원리에 충실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신칭의”와 같이 교회가 그와 함께 서고 넘어지는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이런 인상을 주게 되면 전통적 의미의 이신칭의 주장이 그른 것이라는 시사를 주는 것이므로 라이트 등은 자신들의 의도에 반하여 종교개혁을 무색하게 하는 결과를 내게 되는 것이다. 라이트는 중세기 신학자들의 의에 대한 너무나 지나친 집중 때문에 개혁자들이 한쪽으로 너무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나아가게 되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 자신이 말하는 바를 왜곡시켰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라이트 자신이 개혁자들의 말과 바울의 말을 왜곡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라이트 자신은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라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의아해 한다. 자신은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왜 사람들이 이런 비판을 하는 지를 잘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바울이 칭의가 (비록 “바울에 의해 재정의된 의미에서”라는 덧붙이고 있지만) “행위에 근거하여 미래에 일어난다고 했다”고 말할 때에 과연 어떤 반응이 일어 날 것인지를 많이 생각하지 않든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이런 선동적인 용어를 써서 표현하는 듯하다. 전통적 이신칭의 개념을 모호하게 하여 천주교적 해석이 옳을 수 있거나 하나의 해석으로서의 정당한 자리를 가질 수 있다고 할 토대를 마련하는 그의 작업과 그 결과에 대한 불안이 이런 비판을 낳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이트가 자신의 비판적인 입장이 종교개혁의 “전통 가운데서 비판적으로 서 있을 수 있는 권리”(the right to stand critically within a tradition)를 강하게 요청할 때, 한편으로는 그럴 권리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또 한편 그가, 전혀 다른 의도에서라도,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제거하는 주해적 작업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의 논의와 비판적인 대면(critical confrontation)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III. N. T. Wright의 문제점 (2): 지옥 이해와 하늘 이해와 관련된 문제 
      
“지옥”(Gehenna)에 대한 라이트의 이해는 어떤 점에서는 칭의에 대한 이해보다 좀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진다. 라이트가 한편으로는 “게헨나” 즉 “지옥”(hell)에 대해서 이것은 개념이 아니라 장소(a place)라고 말하는 점에서는 좋으나, 그가 이렇게 말할 때 그는 “지옥”이라는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예루살렘 옛 도시 남서쪽 밖에 있는 골자기의 쓰레기더미 장소, 즉 힌놈의 골짜기(Ge Hinnom)만을 생각하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 문맥상 매우 분명하다. 그러므로 지옥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눅 13:3, 5)의 의미는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와 같이 멸망하리라”는 것이라고 라이트는 설명한다. 또한 이 논의를 할 때 라이트가 말하는 바는 우리를 좀더 긴장시킨다. 그는 지옥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가 문제이다 다른 곳에서가 아니고.”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그가 지옥이나 하나님 나라 논의가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을 중요시하는 것이라는 정도로만 말하는 것인지, 그 이상의 함의를 지닌 말인지가 더 이상 논의가 있지 않아 알 수는 없으나 우리를 긴장시키기에는 매우 중요한 진술이라고 여겨진다. 더구나 자신이 지옥에 대한 전통적 이해와 멸절설의 견해의 장점들을 연관시킨 또 다른 안을 제안한다고 하면서 시사하는 것은 우리를 더욱 의아하게 만든다. 
      
라이트는 사람들이 끝까지 참 하나님을 섬겨가지 않으면 그들은 점점 더 이상 하나님을 반영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 간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죽음 이후에 그들은 “자신들의 유효한 선택에 의해서 이전에는 사람이었으나 더 이상 사람이 아닌 존재,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지 않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들은 몸의 죽음과 함께 희망도 없고(beyond hope) 동정도 없는(beyond pity) 상태에로 나아가게 된다”고 한다. 이전에 사람이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더 이상 의미 있는 방식으로 창조주를 반영하지 못하게 되므로 스스로나 다른 이들로부터도 이 세상의 그 어떤 흉악한 범죄자에게 대해 나타나게 되는 동점심도 유발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라이트의 요점은 이전에 사람이었던 사람들이 없어지지는 않으나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상태로 있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그 형벌이 어떤 것이지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라이트는 이런 자신의 설명이 전통적 이해와도 다르며 멸절설과도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라이트가 한편으로는 이전에 인간이었던 존재가 멸절하게 된다는 개념도 배제하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지옥 이해에서 중세의 아름다운 성안에 있는 고문실(the torture chamber)이나 현대의 아름다운 들 한복판에 있는 수용소(concentration camp) 개념을 배제시키려고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이를 피하여 가려고 그가 제안하는 것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인지, 또한 그가 제시하는 것이 과연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을지 잘 모르겠다. 
      
라이트는 이런 제안이 매우 새로운 것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 이런 제안을 한다. 그런데도 자신이 신약 성경과 이 세상의 실재에 대한 인식 때문에 이런 논의에로 나아가게 된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라이트에게 있어서 지옥은 과연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질문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그가 요한 계시록을 말하면서 생명수가 성 밖으로 흘러 나간다는 표현에 주의하면서 “여기에는 큰 신비가 있고, 하나님의 궁극적 미래에 대한 우리의 말에는 이에 대한 여지가 있어야만 한다”고 하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말한 모든 것을 의문시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하나님(the God of surprise)”이시라고 할 때, 우리는 더욱 큰 의혹을 가지게 된다. 그가 이와 같은 식으로 말한 것이, 또한 그가 이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더 분명히 해 주지 않는 것이 상당히 안타까울 뿐이다. 
      
“하늘”에 대한 라이트의 설명은 여러 해석 가능성이 있어서 그렇게 강하게 지적할 수는 없고 또 어떻게 보면 지옥에 대한 라이트의 생각보다는 문제가 덜 하지만, 라이트가 “하늘”(heaven)을 “우리의 일상적 삶의 또 다른 숨겨진 차원”(the other, hidden, dimension of our ordinary life)인 “하나님의 차원”(God's dimension)이라고 말할 때, 또한 예수님의 승천을 “하나님의 공간”, 즉 “하늘"(heaven)로 사라진 것이라고 말할 때, 혹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는 매우 적극적으로 말하고 있는 라이트가 죽은 후부터 재림 때까지의 상황에 대해서는 혹시 적극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하고 그런 표현에 대해 상당히 긴장할 사람들도 상당히 있을 수 있다. 하늘과 땅이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두 가지 서로 다른 차원”이라고 하면서, 따라서 그 “하늘”은 땅과 접선적으로(tangentially) 연관되어 있어서 하늘에 있는 사람은 이 땅에 어디에나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고 할 때에 우리는 그의 진정한 의도에 대해서 의아함을 가지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한 라이트의 독특한 이해는 그로 하여금 “두 가지 다른 공간, 두 가지 다른 물질”, 따라서 “두 가지 다른 시간”이라는 말을 하게끔 한다. 특히 두 가지 다른 시간 등으로 나아 갈 때 다른 신학자들이 이런 개념을 사용하면서 아지 이상한 길로 나아 간 것을 보면서 라이트가 의도하지 않은 오해가 나타난 위험성이 잠재되었을 수도 있음을 생각하면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다른 곳에서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오게 된 유대적 희망의 변화를 말하면서 누가복음을 인용하며 “낙원은 부활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이 안식하는 복된 정원”이라는 말을 하고,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하늘의 거할 곳(a temporary lodging)을 연관시키고 바울이 말하는 죽은 후에 주님과 같이 있는 상태를 말하기에 그렇게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런 의미를 전달하려면 위에서 “하늘”에 대해 말한 바를 좀 수정하는 것이 좋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성도들이 죽은 후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의식하면서 안식적 행복의 상태에서 몸의 부활의 날을 기다린다고 하며, 그런 상태를 “하늘”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하면서도 신약 성경은 일반적으로 그렇게 부르지 않으며 “하늘”(heaven)이라는 용어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왜 그 상태를 “하늘”로 부르는 것을 그가 어려워하는 지 잘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사실 그 자신도 어떤 때는 “하늘 또는 낙원에 있는 교회”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하늘” 용어 사용에 있어서 라이트는 좀 일관성이 없는 측면이 있다고 판단된다. 적어도 그는 “지옥”과 “하늘” 용어 사용에 있어서 동료 복음 주의자들을 상당히 긴장시키는 시사들을 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IV. N. T. Wright의 문제점 (3): 다른 문제들 
      
이외에도 라이트는 여러 점에서 아쉬운 점과 안타까운 점을 드러내어 주고 있다. 라이트가 예정에 대해서 성경에 있는 바를 하나님의 주권과 연관하여 언급하면서도 바울이 그 어디서도 이를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다고 하면서 가장 가깝게 다루는 것이 로마서 9장인데 여기서도 바울은 문제를 진술하는 것뿐이고, 에베소서 1:3-4의 말씀은 설명이기 보다는 찬양일 뿐이라고 언급하고 지나가는 것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므로 그가 로마서 8:29-30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한 하나님의 주도권을 말할 때 그가 말하는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가 잘 드러나지 않게 되고 만다. 필자가 보기에 그는 의도적으로 이 점을 명확히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어떤 곳에서는 여러 가지를 다 생각하거나 언급하면서 말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오직 자신이 선택하여 중요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 하나만을 가지고 그것에만 집중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펴고 있다. 예를 들어서, 바울 이전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참으로 메시야라고 믿고 확언했다는 중요한 주장을 하면서 그 근거를 “바로 그의 부활 때문에”라고 말하고 있는데, 물론 이는 옳은 것이지만 그 논의 양식에 있어서 예수의 메시야 됨의 근거를 부활에만 근거지우는 것은 여러 다른 증거를 무시하고 부활 만에 모든 것을 집중시키는 문제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의 실제성을 강조하려고 하다가 때때로 “인간 예수”(the human Jesus)를 강조하면서 표현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혹시 그가 그리스도를 이해 할 때에 인간 예수 + 신성 식으로 이해하지나 않는가 하는 오해를 낳을 수도 있기에 좀더 주의하였다면 좋았을 표현이라고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라이트가 연옥(purgatory)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논박하고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현재의 삶이 연옥의 기능을 하게끔 되었다는 것을 바울이 여러 곳에서 명확히 한다고 하고, “연옥의 신화는 현재에서 미래로 투사된 알레고리”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어떤 면에서는 불안하다. 이런 말들이 천주교가 말하는 연옥이라는 곳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현재 천주교에서 교황 베네딕트 16세라고 하는 라칭거가 한 바와 같이 연옥 용어를 유지하되 그 의미를 바꾸는 결과와 비슷한 것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것이다. 라칭거는 고린도전서 3장을 주해하면서 주님 자신이 심판의 불이라고 하면서, 최후의 심판 순간에 그가 우리를 영광스럽고 부활한 몸으로 변화시키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이 불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것이 고린도전서 3장에 대한 잘못된 주해임이 분명하다면, 라이트가 왜 연옥을 현세와 연관시키면서 논의하고 있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차라리 좀더 개혁적이 되어 이 모든 용어를 버려버리는 것이 라이트 자신이 그토록 강조하는 성경에 더 충실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었기에 그는 아주 의식적으로 개혁자들에게 반하여 죽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과 그들과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두려고 하고 있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될 수 있는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그 바로 뒤에 하늘에 있는 이들이 이 땅을 사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성경적 교부적 증거를 찾아보지 못했다고 하면서도 왜 우리가 그들과 함께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여지는 말하는 것인지 매우 의아스럽다. 만성절(All Saints Day)와 이를 연결시켜 생각하는 면에서 이는 다음에 언급할 그의 성공회적 의식에서 나온 생각인 듯하다. 
      
또한 라이트의 성공회적 배경이 그의 주해를 일정한 방향으로 몰아가게끔 하는 면도 있다. 그는 세례 문제에 있어서는, 매우 복음주의적 성공회 신학자들과는 좀 달리, 좀더 고교회적인 성공회 신학자들과 함께, 마치 세례에서 메시야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아나는 일 이 발생하는 것과 같이 말하곤 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특히 로마서 6장에서의 바울의 말에 대한 바르고 정확한 이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6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을 볼 때 하나님은 그/그녀를 그리스도 안에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vindication 안에서 보신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 난 것으로 보신다.” 그리고 이것이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 그리고 심지어 루터의 이해였다고 하면서 이를 다른 분들이 언급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매우 기뻐하고 있다. 
      
어떤 곳에서는 충분히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데서도 자신의 생각에 빠져서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를 놓치고 있는 듯이 보이는 부분도 있다. 바로 앞서 언급한 로마서 6장과 관련해서 라아트는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얻으신 공로로 옷 입은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것과 다른 곳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옷 입은 것으로 보고 있다는 말을 함께 적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 데도 라이트는 굳이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공로로 옷 입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말을 강조하고 있다. 라이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은 “의로운” 이라는 말고 “의”라는 말의 잘못된 사용일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칭의를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의의 전가로 생각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선입견 때문에 전통적으로 생각해 왔던 일반적 의미를 배제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예를 들어서, 라이트는 한 곳에서 “바울과 묵시자 요한은 단순히 구원 받은 것이나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킴을 받은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통치에 참여하는 것에 큰 강조점을 둔다는 사실을 많은 교의학자들이 아직 잘 다르지 않은 요점”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이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있을까가 의문스럽다. 개혁신학적 전통 내에서 이미 이를 점들은 언급한 많은 교의학자들은 라이트의 이런 주장에 그저 미소로 응답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라이트의 언약 신학적 기여와 관련해서 그가 언약적 주제를 매우 강조하면서도 17세기 우리 선배 언약 신학자들이 심혈을 들여서 주해하여 정리해낸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의 구별을 라이트 자신은 아주 명확히 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한 비평적 언급도 하고 지나가는 것이 옳을 것 같다. 
      
V. 결론 
      
우리가 이 발제에서 간단히 살펴 본 바와 같이 톰 라이트는 매우 크고 중요한 복음주의 신학자이다. 그만큼 복음주의적 주장(case for evangelicalism)을 우리 시기에 잘 하고 있는 신학자도 드물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큰 인물이다. 예를 들어서, (물론 서로 다른 학문 분과에 속한 두 사람을 비교한다는 것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학계의 분위기를 살펴본다면 (톰 라이트가 자신의 칭의 이해의 변호를 위해 그의 칭의론 책을 기쁜 마음으로 인용하고 있는) 알리스터 맥그라뜨(Alister McGrath)가 복음주의에 대해 한 기여보다 톰 라이트가 한 기여가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에 대한 라이트의 기여가 크면 클수록 칭의 문제나 부활 문제나 지옥 문제 등에 대한 그의 독특한 입장 표명은 복음주의에 그만큼 큰 손상을 가하게 된다. 
      
나는 톰 라이트와 다른 복음주의자들이 이 점을 잘 의식하였으면 한다. 라이트 자신은 자신이 바울의 말하는 바에 충실하며, 바울의 생각하는 것을 따라서 생각하며 극점을 자신이 표명해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복음주의자들이 자신의 이 논의를 따라 오지 않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학을 한 시대를 대상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 모두를 의식하면서 하는 것이다. 라이트는 미래는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평가할 것으로 기대하지만, 지금 그가 논의하는 것은 결국 성경에 충실하려는 개혁자들의 논의 방식을 사용해서 개혁자들의 논의 내용을 부정하는 것이 되며 이는 결국 종교 개혁이 내용적으로는 잘못된 것이거나 지나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라이트 등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 주해의 과정과 결과만 가지고도 항상 라이트 등이 말하는 것과 같은 주해를 해야 할 이유가 없다. 라이트 자신도 자신의 주해가 최소한 20%는 틀릴 수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입장을 변경할 수 있다는 태도를 가진다. 이런 점들에 대해서 우리는 서로 열려진 논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그 논의의 과정에서 라이트 등은 다른 주해 내용을 가지고서 종교 개혁자들의 논의와 그 주장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은 오직 성경에 근거해서 작업하고 주장하는 것이니 자신이 개혁자들의 의도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가 종교 개혁적 “이신칭의” 내용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보면 내용을 상당히 왜곡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성경 주해에 근거해서 작업하는 것에 대해서는 높이 사면서도 20% 틀릴 수 있는 주해 결과를 가지고 종교 개혁 시대의 종교 개혁에 반대하는 분들의 결론과 비슷한 결론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이트의 복음주의에 대한 기여가 크면 클수록 그는 복음주의에 해를 가하는 결과를 내게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는 라이트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가 주의해야 할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 개혁의 형식적 원리인 성경에 충실할 것과 함께 종교 개혁의 내용적 원리인 개혁자들이 이해한 이신칭의 교리에도 충실해야만 한다는 것을 항상 유념해야 할 것이다. 라이트에게 아쉬운 점이 바로 이점이다. 부디 라이트가 종교 개혁의 형식적 원리에만 충실하지 말고 그 내용적 원리에도 충실할 날이 오기를 원한다. 
      
또한 라이트의 논의는 주로 자신의 논점을 밝히는 것으로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많은 분들이 그의 칭의 이해가 가져 올 함의를 의혹에 차서 질문하는 데 그에 대해서는 별로 많은 논의를 하지 않는다. 지옥 등에 대한 우리의 논의에 대해서도 그저 자신의 논의만을 변증하며 나아가는 방식으로 반응할 때 우리의 의혹은 해소되지 않고 증폭해 갈 것이고, 대화의 의미를 잘 발견해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대로 몇 되지 않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칭의나 지옥, 하늘 등과 같이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식으로 학문적 작업이 진행되는 것이 안타깝다. 라이트 등이 이런 점을 의식하면서 학문적 작업을 하여 준다면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성경에 대한 신뢰를 더욱 높이는 방식으로 학문하여 그가 바라는 대로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학문적 작업을 하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그런 날이 속히 올 수 있기 원한다. 
      
논 평 
      
이승구 교수의 논문에 대한 논평 
      
안명준 교수(평택대학교, 조직신학) 
      
지금 세계는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깨어짐의 현상으로 우리를 찌르고 있다. 이런 흐름은 기독교라는 공동체 안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고 우리 신학자들의 임무는 현재의 인간들의 모습 속에서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정직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선포해야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로마 카톨릭교회가 신학자 라찡거를 교황으로 만들었듯이 이젠 성공회에서는 한참 돌풍을 일으키는 신학자 N.T. Wright가 켄터베리 대주교의 강력한 후보로 거론되어 진다는 점이다(S. G. Lee). 
      
본 논문은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있는 신학자 Wright에 대한 정직한 긍정적인 평가와 그가 주장의 문제점들의 핵심을 학문적 비판에 있어서 최고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아쉬운 점들 
      
A. 내용의 분배 문제 
      
(1)과 (2)항목에 비해 (3)항목은<구원에서의 하나님의 주도권을 잘 드러낸 점>
약 5줄 정도로 매우 짧게 서술되었는데 좀더 충분한 설명이 있으면 한다. 
      
B. 글쓰기에 조심할 점들 
      
전문 학술적이 논문임에도 불구하고 표현이 약하게 서술된것이 있다. 
      
1)괄호처리의 문제점과 성경을 잘 사랑하는 신학자들, 생각해 보라, 관주 80번 본문중 내용 설명에서
(이 점을 떠나서 “하나님의 죄 용서에 대한 선언과 언약의 성원됨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은 궁극적으로 두 가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은 개혁신학에서 항상 강조되어 오던 바이므로 이는 (라이트 자신의 주장과는 달리) 라이트가 새롭게 제안 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잘 사랑하는 신학자들의 오랜 이해인 것이다. 특히 칭의에서 죄용서와 입양을 같이 다루어 죄 용서를 소극적 칭의로 말하고 입양을 적극적 칭의로 말하던 전통을 생각해 보라.) 
      
2)가끔 문장의 표현에 어려움을 본다. 예를들면 관주 34에서 표현이 "또 한 편으로는 자신이 이런 용어를 만든 것에 대해서 그리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느낀다고 말한다." 
      
3)수정할 곳
전현을 전혀로 바꾸어야 한다. 라이트가 전현 쓸데없는 “이것이야 저것이냐”(either/or)를 
      
C. 질문 
      
1)라이트가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주의자인지 아니면 성경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적인(case for evangelicalism) 신학자인지 아니면 복음에 대한 신학자로서 어느 정도로 말해야 하는지 질문하고 싶다. 일반적으로 볼때와 중요한 교리로서 이신칭의과 같은 교리를 달리하는 경우에 어떻게 그를 평가해야 할지 궁금하다. 
      
2)후에 라이트를 한국에 초청해서 Debate를 할 의향은 없는지 묻고 싶다. 
      
귀중한 공헌들과 교훈은 
      
라이트의 공헌과 문제점을 공정하게 다루었다. 
      
라이트의 문제의 핵심을 집중적으로 논문을 전개시킨점이 명쾌한 논문이 되게했다. 논평자로서 신학적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하는 바이다. 
      
관주의 사용에 있어서 자신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관련된 참고문헌에 대하여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라이트의 논의 방식에 대한 해부로서 칭의에 대한 라이트의 주장의 논리가 (either/or) 방식으로 보았다. 
      
이승구교수는 신학자들의 주장은 성경에 더 충실해야 함을 말한다. 예를들면 종말론(the God of surprise)과 관련하여 연옥교리와 부활에 대한 설명에서 나타난다.       
 
성공회 신학자 라이트의 교리와 로마 카톨릭교회 신학자 출신 라칭거를 비교하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관찰이다. 예를들면 라칭거가 연옥 용어를 유지하되 그 의미를 바꾼 것과 동일하게 라이트도 그런 위험에 쳐할수 있다고 지적한 점이다. 
      
"라이트 자신이 그토록 강조하는 성경에 더 충실한 것이 아닌가?" 
      
죽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과 그들과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여지를 에 대해서도 신학자의 신학적 배경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것을 지적한다. 
      
신학자의 방법은 자신의 환경에 지나친 의식속에서 성경에 대한 왜곡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이런 성공회적 신학의 전제가 세례의 설명에서 잘 나타난 문제라고 올바르게 비판하였다. 
      
본 논문은 세계적인 신학자의 장점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도 기독교의 교리들을 평가하는데 (N.T. Wright ... the right to stand critically within a tradition) 있어서 신학자들은 성경적인 근거에 자신의 주장을 조심스럽게 점검해야 할 것과 성경적인 사고에(S. G. Lee . . . Calvin and the Reformed Theologians, more biblical understanding) 근거하여 신학의 임무를 수행하려는 새로운 신학의 조류를 어떻게 역평가해야 (S. G. Lee, 비판적인 대면, critical confrontation) 하는지에 대하여 하나의 귀중한 모델로서 신학자들에게 큰 도전을 주고 있다. 
      
이젠 한국 신학자들이 시대의 신학적 Trend를 무분별하게 스펀지처럼을 흡수하는 import! theology(S.G. Lee, merely a retropective attitude)도 아니며 반대적으로 배타적인 성향으로 거부하는 토속신학으로도 기독교 신학의 주체가 될수 없다. 성령의 역사함에서 나오는 성경적 신학만이 하나님의 공동체를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 신학의 미래가 더 나아가 역사적 전통적 참된 기독교 신학의 밀가 Prof. S. G. Lee과 같은 학자들에 의해서 올바른 길을 갈 것이다. 
      
유태화(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1. 들어가는 글 
      
최근 바울신학의 논쟁의 한 중심에 있는 라이트의 신학세계를 이승구 교수님의 수고를 통하여 둘러보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논의를 요약한 후 몇 가지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 논문의 요약 
      
이 교수님은 논문을 두 큰 구도로 정리하였습니다. 신학적 기여와 관련된 것이 하나이고, 문제점과 관련된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전자와 관련하여, ①성경을 신뢰하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 ②성경의 역사성을 믿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 ③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잘 드러낸 것, ④성경신학적 작업을 하여 신구약을 항상 연결하여 보도록 한 것, ⑤신약 성경적 하나님 나라 이해에 근거한 신학을 잘 제시한 것을 들었습니다. 후자와 관련하여, ①칭의 이해와 관련한 문제, ②지옥 이해와 하늘 이해와 관련된 문제, ③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불충분한 설명, ④부활에 있어서, 인간 예수라는 표현을 따로 사용하는 점, ⑤연옥에 대한 불분명한 설명, ⑥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에 대한 개방적 태도, ⑦의식으로서의 세례와 신비적 연합과의 일면적 일치를 드러내는 점, ⑧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대한 명확치 못한 태도와 같은 것을 꼽았습니다. 이 교수님은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포괄적으로는 새 관점의 핵심적 관심사를, 특정해서는 라이트의 신학이 내포한 두 면을 비교적 객관적 자세를 유지하면서 잘 소개해주셨습니다. 
      
3. 논평 및 질문 
      
3.1. 논평 
      
이 교수님이 이 논문에서 상당히 많은 주제를 언급하였습니다만, 주된 논의는 라이트의 칭의 이해에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의 관계에서 이들이 주장하는 것의 새로운 측면이 무엇이지 잘 볼 수 있도록 생산적인 봉사를 하였습니다. 칭의 개념이 형성되는 배경에 대한 소개로부터 글을 시작함으로써 독자가 자연스럽게 새 관점의 주장을 포괄적으로 살피도록 돕고, 또한 핵심적 논점이 무엇인지 집중해서 보도록 하는 배려를 해주었습니다. 즉, 칭의의 현재적 측면과 미래적 측면을 구별하는 것의 문제, 칭의를 개인의 구원이 아닌, 교회의 화해를 위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의 문제를 분명하게 드러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런 논의를 통해서, 라이트가 결과적으로 반-펠라기우스주의에로 돌아선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적 목소리를 냈는데, 이 점에서 상당히 신중하면서도 핵심적인 비판을 제기했다고 생각됩니다. 
      
칭의 문제 이외의 다른 문제 제기에 대하여도 전반적으로 동의가 되지만, 소개된 내용으로만 보아서는 라이트의 주장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파악하는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 교수님이 파악한 내용이 실제로 그러하다면, 라이트가 신학 작업을 경계선상에서 수행하는 그런 성향을 가진 신학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 교수님이 이 글 앞부분에서 라이트를 지나치게 호의적으로 평가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3.2. 질문 
      
①이승구 교수님은 언약적 신율주의에 대한 새 관점주의자의 논의를 진술하면서 (물론 문맥상으로 보면, 칭의 개념을 비판하기 위한 사전 논의로 보이기도 합니다만) 별다른 판단을 내리지 않았는데(8), 이에 대한 개인적인 입장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②현재적 칭의와 미래적 칭의 사이를 지나치게 구별하는 라이트의 견해를 비판하면서(9), 이는 의의 전가 개념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이 교수님은 비판적 입장을 제기하였습니다. 물론, 논평자도 새 관점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며, 또한 전가의 개념이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데 원칙상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공로로 얻으신 의의 전가를 거부하는 것에 .... 칭의 개념의 근본적 내용적 문제가 있다”는 이 교수님의 진술(10)과 함께 떠오르는 논평자의 질문은, 과연 바울의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공로로 얻으신 의의 전가”라는 개념을 발견할 수 있는지 (물론 개혁파의 전통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에 근거해서 그러한 신학적 판단을 내리기는 합니다만), 아니면, “의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내려진 하나님의 법정적 판단인지, 하는 것입니다(고전 1:30, 롬 4:25). 
      
③칭의를 현재적 측면과 미래적 측면으로 구별하고, 미래로부터 칭의를 판단하려는(9) 라이트를 반-펠라기우스주의자로 규정하였는데(10), 만일 라이트가 믿음에 근거한 현재의 칭의와 미래의 전 삶에 대한 평가로서의 칭의 사이에 실제적 불연속성을 상정한다면, 달리 말하여, 실제로 현재 칭의된 자가 미래 칭의를 상실한다는 주장을 상정한다면, 반-펠라기안주의자인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됩니다. 다분히 라이트는 부르심에 근거하여, 혹은 성령의 능력과 관련하여 현재와 미래적 삶을 언급한다(11)는 점에서 칭의 개념이 상당히 모호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나, 단순히 칭의의 미래적 측면을 말한다고 해서 그의 논의가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조금 불편한 판단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리처드 개핀 같은 이도 “‘믿음으로 칭의’되었고, 아직 ‘보는 것으로는’ 아니라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칭의의 미래적 국면을 남겨두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핀도 현재의 칭의와 미래의 칭의 사이에 급진적 불연속성을 상정하지는 않았습니다. 
      
4. 오자 및 띄어쓰기 
      
읽으면서 얼른 눈에 띄는 것만 몇 가지 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4쪽 (5)에서 “언약이 어떤 정확에 들어섰는지”를 “언약이 어떤 정황에 들어섰는지”로 바꾸는 것이 옳지 않은지 싶습니다. ②4쪽 (5)에서 “언약의 복에 참여 하는”을 “언약의 복에 참여하는”으로 바꾸는 것이 옳지 않은지 싶습니다. ③5쪽의 “뚫고 들어 온 것이다”에서 “뚫고 들어온 것이다”로 바꾸는 것이 옳지 않은지 싶습니다. ④5쪽의 “점에서 찾아 질 수 있다”를 “점에서 찾아질 수 있다”로 바꾸는 것이 옳지 않은지 싶습니다. ⑤7쪽의 “뉴앙스”는 “뉘앙스”로 바뀌어야 하지 않은지 싶습니다. ⑥7쪽 밑에서 둘째 줄, “샌더스가 라이트 자신이 바울에 대해 이해를 통해 생각하던 바를”이라는 문장에서 “바울에 대해”가 “바울에 대한”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싶습니다. ⑦14쪽 각주 95번 바로 다음에 “과연 어떤 반응이 일어 날 것인지”를 “과연 어떤 반응이 일어날 것인지”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⑧19쪽 첫 문장의 “그렇게 하는 것은 “의로운”이라는 말고 “의”라는 말의”에서 “말과”로 바꾸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싶습니다. ⑨각주 129번의 인용문 내용에서 “다르지”는 “다루지”로, 그 다음 문장에서 “이를”은 “이런”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5. 나가는 글 
      
학문적인 엄밀함과 함께 교회와 개혁교회의 신학을 사랑하는 마음이 동시에 묻어나오는 이승구 교수님의 좋은 글을 읽으면서, 학문하는 태도와 교회를 향한 자세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칭의론이 위태롭다 < 신학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칭의론이 위태롭다 < 신학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칭의론이 위태롭다
구원론 종말의 시대(1)
기자명 신광은  승인 2017.03.20



뒤로멈춤앞으로

*'교회 없는 기독교 신앙의 시대'에 이어 '구원론 종말의 시대'에 관해 3회에 걸쳐 게재하고자 합니다. - 필자 주
1. 칭의론이 위태롭다
2. 천국과 지옥의 실종
3. 구원-론(logy)의 종말

1. 들어가는 말
오늘날 우리 교회는 큰 위기를 맞고 있다. 나는 이 위기의 본질이 교회가 맞고 있는 중대한 변화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앞서 나는 교회 없는 기독교 신앙의 가능성이 질문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간단히 훑어보았다. 교회 없는 기독교 신앙이 가능할까, 그렇지 않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떤 답을 할 것이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이러한 질문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지금이 중대한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의 상황임을 보여 준다.




뒤로멈춤앞으로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다. 또 다른 패러다임 전환 상황이 우리 교회를 강타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구원론이 종말적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현대 교회는 전통적인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유지하기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이것은 특별히 개신교회의 경우가 더욱 그러한데, 이는 개신교회가 칭의론에 기초해서 구원론을 구성하고, 그 신학적 기초 위에 교회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2. 칭의론의 위기
칭의론은 개신교 신학의 정수다. 지난 500년 전, 루터(Martin Luther)가 칭의론의 기초를 놓은 후, 그 위에 개신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지금 칭의론은 교회 안팎에서 거센 도전을 맞고 있다. 이러한 도전으로 개신교회는 전통적인 칭의론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형국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두 가지 원인이 이 위기를 불러왔는데, 한 원인은 교회 내부의 신학적 논쟁에서 유래했고, 다른 한 원인은 세속적인 방식의 칭의론이 구성되고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1) 칭의론 논쟁

오늘날 현대 교회(특히 개신교회)가 맞이하고 있는 구원론의 중대한 변화는 개신교 칭의론의 위기와 관련되어 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칭의론 논쟁'이 그것을 반영해 준다. 신학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이 주제에 대해 나름 일가견이 있을 줄로 안다. 최근 영국성공회 신학자 니콜라스 토마스 라이트(Nicholas Thomas Wright)를 필두로 새 관점(new perspective) 학파가 신약성서를 새로운 관점으로 이해하도록 성서 독자를 자극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관점이란 바울을 새롭게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바울은 유대주의와 율법주의를 공격하고 은총을 강조한 신학자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새 관점 학자들은 바울이 생각보다 유대주의적이고, 율법에 대해서 우호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본래 성서신학, 그중에서도 신약신학적 주제였다. 그러나 어느덧 그러한 관점은 조직신학의 영역으로 넘어와서 구원론, 그중에서도 칭의론에 중대한 도전을 가하고 있다. 톰 라이트와 같은 이들에 의하면, 개신교 구원론은 율법주의를 공격하고 은총 구원만 주장해 왔다. 이들은 이러한 이해가 잘못된 바울 신학에 기초해 있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신학자들은 이에 발끈하며, 개신교 신학의 기초이자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칭의론을 수호하고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톰 라이트와 존 파이퍼(John Piper)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Wright,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와 Piper, <칭의 논쟁> 등을 참고하라).

한국교회에서도 이러한 논쟁에 참여하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서서히 늘어나는 추세다. 나는 여기서 이 논쟁에 끼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이러한 도전은 지난 500년간 개신교회를 떠받들어 온 기초석이라고 할 수 있는 칭의론이 중대한 위협에 처해 있음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칭의론을 거칠게 요약하면, 칭의는 두 번 이루어진다. 첫 번째는 '회심의 때'이고, 두 번째는 마지막 '종말의 때'이다. 물론 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이 둘을 각각 제1칭의, 제2칭의라고 불러 보자. 단순화시켜 설명하면 제 1칭의는 '은총/믿음'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역사에 끝에 있을 제2칭의는 '율법/순종'으로 가능하다(Wright,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7장 참조). 이 때문에 보수적 신학자들은 그를 율법주의자라고 공격한다.

놀라운 것은 그가 자신의 주장을 사람들이 '율법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굳이 마다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다만 그는 단서를 붙여서 '언약적 율법주의'로 불러 달라고 주문한다. 나아가 제1칭의는 개신교회 칭의론을 다소 포함하는 개념이고, 제2칭의는 가톨릭교회 칭의론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톰 라이트는 자신의 칭의론이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의 칭의론을 에큐메니컬하게 통섭할 수 있다고 말한다(Wright,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9장 참조). 그러나 일부 개신교 신학자는 그의 칭의론이 개신교 칭의론을 뿌리째 뒤흔드는 도발이라고 간주한다.

톰 라이트의 도전은 전통적인 개신교 칭의론이 행위를 좀 더 강조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500년 개신교 신학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개신교회 칭의론이 값싼 은총으로 전락하지 않고, '이신칭의'를 고수하면서도 행위를 강조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어 왔다. 루터(Luther)의 변증법, 칼뱅(Calvin)의 실천적 삼단논법, 웨슬리(Wesley)의 완전 성화론 등이 그 예다. 이러한 시도는 당대에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일부 개신교회 칭의론을 '값싼 은총'이라고 거세게 공격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톰 라이트는 그러한 식의 대안 말고 아예 율법주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쩌면 그는 전통적인 개신교 칭의론 내에서는 믿음과 행위의 균형 있는 강조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고 보고 있는 모양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지금의 칭의론 논쟁은 개신교 칭의론의 시효 만료에 대한 논쟁으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약하면 지금의 칭의론 논쟁은 개신교 구원론의 종말적 상황의 한 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2) 세속 칭의

구원론의 곤경은 신학적인 요인 외에도 비신학적 요인에 의해서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것 같다. 기독교 칭의론의 기본 얼개는 죄에 대한 깊은 고뇌와 하나님의 칭의에 대한 놀라운 감격이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 무서운 죄책감이 루터를 짓누르지 않았다면 '탑의 체험'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청교도 설교자들의 복음 설교의 절반 이상은 죄에 대한 무서운 고발과 불지옥에 대한 공포스러운 묘사에 할애되었다. 그런데 죄의식과 칭의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던 개신교 칭의론은 세속적 정신에 의해 점차 낯설고 이상한 것이 간주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지성인은 개신교회 칭의론을 시대착오적이며, 부조리하고, 낯선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인은 더 이상 개신교회가 제공하는 칭의를 기꺼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개신교회의 칭의 신학이 없이도 자신들만의 세속적 칭의론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속 칭의는 기존의 개신교 칭의론을 곤경에 처하게 하며, 구원론을 종말적 상황으로 내모는 세속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세속 칭의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한자어인 칭의(稱義)란 '(누군가에 의해) 의롭다고 칭함받는다'는 수동적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다. 그러나 영어로 칭의는 justification, 곧 정당화이다. 필자가 '세속 칭의'라고 했을 때, 이는 '세속적 방식의 자기 정당화 논리(secular justification)'를 말한다. 즉 현대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도 성경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자기 정당화 논리를 가지고서 자신의 양심에 위안을 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오늘날 유행하는 세속 칭의는 최소한 세 가지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계몽주의적 톨레랑스(관용) 정신이고, 둘째는 정신분석적 원리이며, 셋째는 사회과학적 원리이다.

가. 톨레랑스 정신

계몽주의자들은 톨레랑스 정신을 지닌 자들이다. 톨레랑스는 쉽게 말해서 논쟁은 하되 폭력은 쓰지 말자는 것인데,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자기 나름의 사상을 가질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 계몽주의자들은 어찌 보면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자들은 '사상(신앙)의 자유'를 위해 헌신하고 투쟁했기 때문이다. 계몽주의자들이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외칠 때, 그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의자유'에 대한 투쟁을 일정 부분 계승하고 있었다.

하지만 극히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고, 종교개혁자들은 그다지 관용적이지 않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의자유를 위해서는 기꺼이 투쟁하고자 했으나, 자신과 신앙이 다른 이들의 자유를 보장해 줄 생각은 별로 가지고 있지 못했다. 계몽주의자들은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편협한 자유관을 비판했다. 특히 이들은 온 유럽을 피로 물들였던 30년간의 종교전쟁을 겪으면서 종교적 신념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존 로크, 존 밀턴, 존 스튜어트 밀, 볼테르 등은 자신들의 자유는 물론이고 자신과 논쟁하는 논적들의 자유도 지켜져야 한다고 확고하게 믿고 투쟁했다.

"I disapprove of what you say, but I will defend to the death your right to say it(나는 당신의 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서 죽기까지 싸우겠소)."

이 말은 계몽주의자들의 톨레랑스 정신을 잘 보여 준다. 설령 생각이 다른 사람이라도 생각할 자유와 말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의 이러한 톨레랑스의 정신은 제퍼슨주의(Jeffersonian)로 이어져 자유의 나라 미국을 건설하게 만들었다. 제퍼슨과 같은 계몽주의자들은 미국이 계몽주의자들이 꿈꾸는 이상 사회이기를 기대했다.

계몽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이상 사회는 한마디로 '자유의 왕국'(the kingdom of freedom)이었다. 그리고 누구라도 이 왕국에 살고자 한다면 그는 톨레랑스(관용의 정신)를 가져야 하며, 타인의 영역을 침해하지 않는 매너부터 익혀야 한다. 자유의 왕국에서는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일에 함부로 간섭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누구로부터도 간섭받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었으며, 자기만의 사적 공간, 곧 프라이버시(privacy)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계몽주의적 톨레랑스 정신은 기독교적 죄에 대한 관념과 충돌한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인이 전도하기 위해 가장 먼저 꺼냈던 말은 "당신은 죄인입니다"였다. 그러나 자유의 왕국에서는 이것만큼 무례하며, 불관용적인 말이 또 없다. 자기 혼자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두고 누가 뭐라 하겠는가. 하지만 다른 누군가를 향해 "당신은 죄인이오"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대단히 교양인답지 못한 말을 내뱉는 것이 된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향해서 '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현대사회에서 기독교 복음 전도가 무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거꾸로 현대인은 다른 누구로부터도 죄인이라는 말을 듣지 않을 권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즉 톨레랑스의 세계 속에서 모든 인간은 오직 타인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현대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자기를 정당화(justification; 칭의)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세속 칭의의 첫 번째 원리이다.

나. 정신분석적 원리

두 번째,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19세기 말에 개척한 학문인 정신분석이 또 다른 세속 칭의의 원리를 제공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신경증 환자의 임상 치료를 진행하면서 성인 환자의 심리적인 문제가 어린 시절 부모나 가족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프로이트 이후, 현대인은 성인이라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100% 책임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일 어떤 성인이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행동을 한다면 그건 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어린 시절에 그의 부모나 가족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정신분석의 원리가 세속 칭의론을 구성하는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여기에 더 중요한 정신분석학적 원리를 추가하고 싶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과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에서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을 적나라하게 까발렸다. 예컨대, 프로이트에 의하면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 젖을 빠는 것은 영양분만 공급받는 것이 아니고, 성적 욕구을 충족하는 행위다. 만일 그 아기가 아들일 경우, 아기의 욕망은 근친상간 욕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오이디푸스적 살부혼모(殺父婚母) 콤플렉스로 이어진다(Freud,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유아기의 성욕' 참고).

이러한 근친욕뿐만 아니다. 통상적으로 모든 인간 안에 동성애, 수간(獸姦), 시간(屍姦) 등의 성향이 '어느 정도는' 다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인간의 무의식 안에는 어느 정도 근친상간, 불륜, 동성애, 페티시 같은 변태적 욕망이 꿈틀대고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앞의 책, '성적 이상' 참고).

어찌 보면 이러한 그의 분석은 성경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의 분석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렘 17:9)이라고 했던 예레미야의 선언이나 "모든 인간은 죄인"(롬 3:23)이라는 바울의 주장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가지 차이가 있다.

프로이트 이론으로는 첫째로, 인간 안에 존재하는 욕망이 그 자체로 선하다는 것인지 악하다는 것인지 평가하기 어렵다. 마치 길바닥에 돌이 존재하듯이 인간 안에는 욕망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건 그냥 '본능'이고, 그 기원은 생물학적이다. 본능은 죄가 아니다.

두 번째로, 프로이트는 억압한다고 욕망은 사라지지 않으며 다만 변형될 뿐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자칫 이렇게 변형된 욕망은 신경증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했다. 하여 욕망의 억압은 정신 건강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주장에 이른다. 욕망에 대한 억압을 주로 일삼는 도덕과 종교는 신경증을 유발하는 주요 요인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욕망은 억압하기보다는 해소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프로이트는 아무하고 끌리는 사람과 성관계를 할 수 있다는 식의 범성욕주의를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는 욕망의 적절한 해소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이상의 세 가지 특징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성경의 가르침 사이의 차이점이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프로이트의 파격적인 주장을 강력하게 비판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점차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현대인은 정신분석학적 원리 속에서 '욕망을 긍정하는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욕망은 죄가 아니다.

사람들은 이 원리를 다른 욕망에도 적용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욕망을 뻔뻔스럽게 내세우는 이들을 천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 광고 카피나 이미지를 통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너무도 뻔뻔스럽게 욕망을 긍정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풍조라는 것이다. 욕망은 이기적이지만, 그래도 욕망은 나쁜 것이 아니며, 욕망을 표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사회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나는 이러한 욕망의 긍정이 정신분석학이 현대인에게 선사한 세속적 칭의론의 또 다른 주요 원리라고 생각한다.

다. 사회과학적 원리

에밀 뒤르켐(Emil Durkheim)의 <자살론>은 인간의 선택과 책임에 대한 중대한 질문을 던졌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때 목숨을 끊는 선택은 누가 한 것인가. 당연히 본인이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뒤르켐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하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는 사회학적 요인을 분석해 냈다.

예컨대 가톨릭 신자보다 개신교 신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여성보다 남성이, 가난한 자보다 부자들이, 기혼자보다 미혼자가 목숨을 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Durkheim, <자살론>, 제2부 참조). 뒤르켐의 주장에 따르면, 한 개인의 선택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원인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다.

뒤르켐의 통찰은 현대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인간은 진공상태에 존재하는 원자적 개인이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사회적 존재이기에 인간의 선택은 전적으로 그 개인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예컨대 미국 사회에서 흑인의 범죄율은 상대적으로 높다. 높은 범죄율의 원인을 전적으로 흑인들 개인의 도덕성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혹할 뿐더러 현실적이지 않다.

높은 범죄율에는 개인을 넘어선 사회구조적 차원이 존재한다. 사회구조적 차원을 무시하는 개인주의적 도덕관은 확실히 현대사회에는 설득적이지 않다. 전통적인 기독교적 인간관은 이러한 사회구조적 차원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는데,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도덕적 차원과 함께 사회구조적 차원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뒤르켐의 교훈이다.

동시에 이러한 사회과학적 원리는 자기 정당화를 위한 논리로 활용되기도 한다. 예컨대 독일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은 유대인 학살의 실무 책임자였다. 그는 가히 살인 기계라고 할 정도로 많은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보내서 유린과 학살을 당하게 했는데, 스스로 자기 손으로 500만이 넘는 유대인을 수용소로 보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이 끝나고 전범 재판을 받을 때, 그는 당시 독일 사회의 구조 속으로 자신의 책임을 던져 버렸다. 자신은 그저 거대한 국가 시스템 일부로서 상부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을 뿐이라고 했던 것이다.

물론 아이히만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처벌을 받았지만, 아이히만은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책임과 사회구조적 문제와의 관계에 대해서 중요한 문제 제기를 했다. 복잡한 사회 속에서 개인은 어디까지, 얼마만큼 책임적 존재일까? 현대사회 속에서 사회구조에 자신의 도덕적 책임을 떠넘기는 행태는 현대인의 자기 정당화 논리로서, 세속적 칭의론의 또 한 원리를 구성한다.

이러한 세속적 칭의론의 원리는 현대인으로 하여금 욕망은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책임은 적극적으로 회피하면서, 누구로부터도 비난을 받지 않으려는 뻔뻔한 인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물론 현대사회는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다소 낯선 새로운 윤리적 관점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예컨대 인권이라든지, 자유나 평등 같은 개념들이 그런 것이다. 하지만 한 개인의 도덕적 탁월성에 대한 강조는 확실히 시들해졌다. 그래서 현대인에게 '도덕'은 굉장히 낯설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가 현대사회는 덕이 상실된 사회라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MacIntyre, <덕의 상실> 참조). 도덕의 상실은 기독교적 칭의론의 상실과 맞닿아 있다. 오늘날 자신의 죄 문제 때문에 높은 탑에 올라 하나님과 대면하며 씨름하는 인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인간'은 천연기념물보다 더 찾기 어렵다. 온통 뻔뻔스러운 인간들뿐이다. 이들에게 기독교 칭의론은 설득적이지도, 매력적이지도 않다. 이것은 구원론의 종말적 상황을 초래하는 또 다른 원인이다.(계속)


신광은
신광은 (기자에게 메일 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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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의 실종
구원론 종말의 시대(2)
기자명 신광은  승인 2017.03.26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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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멈춤앞으로

*'교회 없는 기독교 신앙의 시대'에 이어 '구원론 종말의 시대'에 관해 3회에 걸쳐 게재하고자 합니다. - 필자 주
1. 칭의론이 위태롭다
2. 천국과 지옥의 실종
3. 구원-론(logy)의 종말

1. 들어가는 말
지금 상황을 기독교 구원론의 종말적 상황으로 본다는 말은, 지난 500년 동안 유지되어 온 개신교 신학의 시효가 만료됐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계몽주의 이후 진행되어 온 세속화 현상과 맞물려 기독교 신학 및 신앙의 내용이 설득적 구조(plausibility structure)를 상실했다는 뜻이다.




뒤로멈춤앞으로
세속화(secularization)란 이 세계 속에 충만해 있다고 믿었던 초월적이고 영적인 차원이 해체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세속화는 종종 탈마법화(disenchantment), 혹은 탈신성화(desacralization)와 연관된 개념이다. 세속화 과정은 세계관을 변화시켰고, 이것은 언어와 개념을 변화시켰다. 그러는 사이 기독교 언어와 개념은 낯선 것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가 말하는 기독교 언어의 위기와 유사하다 할 것이다(Borg,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1장). 앞서 나는 세속화 과정이 칭의론의 설득적 구조를 허물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이번 글에서는 '천국'과 '지옥' 개념도 해체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기독교 구원론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 중 하나는 '천국과 지옥'일 것이다. '상징'이라는 말을 썼다고 발끈할 독자들이 있을 줄로 짐작하는데, 이 말 뜻은 천국과 지옥이 상징적인 장소라는 게 아니다. 이 두 개념이 오랫동안 사람들 마음에 강한 상징력(symbolic power)을 행사해 왔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세속화가 진행된 결과 오늘날 천국과 지옥의 상징력은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이 개념들은 거의 빈껍데기가 되어 버렸다.

오래전부터 서구 교회는 지옥의 실존을 부정하고 있으며, 천국에 대해서도 더 이상 많은 설교를 하지 않고 있다. 물론 여전히 한국교회 강단에서는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선포하고, 천국과 지옥을 다녀왔다는 이들의 간증이 그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현대인에게 천국과 지옥은 공허한 말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더 이상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기독교 구원론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이라고 믿는다.

2. 지옥의 실종
벌써 꽤 지난 일이 되어 버렸는데, 저명한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John Stott)가 지옥은 영혼의 멸절이라고 말한 것 때문에 내가 속했던 공동체에서 논쟁이 일어났다. 그때 한 형제가 "지옥이 없다면 뭣하러 힘들게 예수 믿나"라고 했던 말이 나에게 상당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나는 멸절설을 믿지는 않았지만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지옥이 없다고 천국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지옥이 없다고 예수 믿을 이유가 사라지는 이유는 뭘까.' 아마 그 형제는 천국에 대한 소망보다는 지옥에 대한 공포 때문에 예수를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그 형제에게 구원은 '지옥 면피책'이라는 말이 된다.

복음을 지옥 면피책으로 보는 것은 그 형제만의 문제가 아닌 모양이다. C.S. 루이스 전문가인 웨인 마틴데일(Wayne Martindale)도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천국에 가기를 소망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실은 가고 싶지 않았다. 종종 죽은 뒤에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고 말했던 것은 단지 지옥에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Martindale, <C.S. 루이스가 말하는 천국과 지옥>, 20쪽)

신자들로 하여금 기독교 구원을 '지옥 면피책'으로 보게 만든 것은 지난 수백, 아니 수천 년간 신·구교를 막론하고 모든 기독교회가 복음을 전해 왔던 방식이다. 예컨대 18~19세기 대부흥 운동가들의 복음 설교 내용을 보면, 인간이 죄인이라는 무시무시한 고발과 함께 지옥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 가득 채워져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진 죄인들>이라는 설교는 청중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존 웨슬리, 조지 휫필드, 찰스 피니 등이 전한 복음 설교 역시 비슷했다. 그들의 실감 나는 지옥에 대한 묘사 때문에 청중들 중 더러는 실신하고, 더러는 땅바닥을 뒹굴면서 회심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지옥관은 몇몇 성경 구절에 기초해 만들어졌다. 예컨대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으며 사람들이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는 곳(막 9:48-49)이라거나, 유황 불못(계19:20; 20:10)의 이미지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음부의 이미지(눅 16:23-24)로 그려져 왔다. 그러나 사실 완성된 형태의 지옥관은 성경구절뿐만 아니라 여러 신화와 설화, 상징들이 결합되어 만들어졌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Turner, <지옥의 역사> 참조). 사실 단테를 모르는 문화권에서도 유사한 지옥 관념이 있었다. 어쩌면 천국이나 지옥은 집단 무의식 속에 새겨져 있는 원형적 이미지일 것이다. 단테의 <신곡>이나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의 회화적 묘사가 보여 주듯이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는 한결같이 지옥을 굉장히 뜨거운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지질학은 땅속 세계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뜨거운 곳이라고 말해 주었다. 가장 깊은 내핵 지대는 땅속 5,100km부터 자리하고 있는데 온도가 무려 5,400도나 된다고 한다. 지질학은 내핵에서 외핵과 맨틀과 지각에 이르는 상세한 지질학적 묘사를 제공해 준다. 이를 통해서 인류는 마치 엑스레이 사진과 같이 땅속 세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러한 상세 지식은 도리어 지옥의 실존을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너무 많은 지식이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는 여지를 날려 버린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발전에 발맞춰 19세기부터 진보적 신학자들은 일찍부터 지옥의 실존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한편 톰 라이트(N. T. Wright)는 1차 세계대전이 지옥을 추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한 바 있다(Wright,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나라>, 29쪽).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지상이 지옥인데, 무슨 지옥이 또 필요하단 말인가.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 아우슈비츠와 굴락, 원자폭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인종 청소…. 20세기 현대인은 무저갱이 열리고 거기로부터 악과 고통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목도했다. 내세의 지옥을 굳이 상상할 필요가 없는 실존적 상황에 내몰렸다.

이 땅이 지옥이라면 내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지옥에 대한 태도도 바뀌었다. 이 땅이 지옥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 회심하며 천국을 소망하기보다는 차라리 사회 개혁에 참여하는 편이 낫다. 그러다 보니 내세 천국과 지옥에 대한 신앙은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무책임한 방기로 간주되고, 적극적 참여, 곧 앙가주망(engagement)이야말로 책임적 자세로 여겨졌다. 그러면서 점차 지옥에 대한 공포도 사라지게 되었다.

20세기 말이 되면서 진보적 신학자뿐 아니라 보수적 학자 중에서도 지옥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C.S. 루이스는 상당히 참신한 방식으로 지옥을 해석했다. 그는 사실적 묘사보다는 문학적 묘사를 통해서 지옥을 그려 내고자 했다. 또한 그는 지옥을 영원한 고통의 장소라기보다는 "인간성의 쓰레기통이며, 폐허"로 보았다(Martindale, <C.S. 루이스가 말하는 천국과 지옥>, 24쪽) 그렇다고 루이스가 지옥을 알레고리로만 본 것은 아니다. 지옥의 실존을 인정하면서도 현대인의 정서에 맞도록 지옥을 재해석했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에는 존 스토트와 같은 이들은 아예 지옥을 '영혼 멸절'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지옥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지옥은 영벌의 장소가 아니라 인간 존재를 불살라 멸절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고통받는 지옥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랍 벨(Rob Bell)은 아예 지옥을 없애 버렸다. 지옥이 없다는 주장을 담은 그의 <사랑이 이긴다>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Bell, <사랑이 이긴다> 참조). 이 책 덕분에 그는 교회도 사임해야 했다고 전해지는데, 논쟁이 한참일 때 존 파이퍼(John Piper)는 그와 결별했지만, 반대로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과 리처드 마우(Richard Mouw) 등은 그를 지지했다. 지옥을 부정하는 랍 벨에게는 논적만큼이나 든든한 지지자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이미 현대인의 심성 속에서 지옥이 실종되어 버린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현대인은 더 이상 지옥을 믿지 않는다. 아마도 현대의 비기독교인은 랍 벨의 책이 논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조차 생경할 것이다. "아직도 지옥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고?" 하지만 만일 지옥이 없다면 기독교 구원론의 내용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전통적으로 기독교 구원론이 공포 마케팅에 기초해서 지옥 면피책을 제공해 준다는 약속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만일 지옥이 없다면 전통적 구원론은 어떻게 존속될 수 있을까.

3. 천국의 실종
1)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지옥의 실종과 함께 살펴봐야 할 것은 천국의 실종이다. 천국의 실종 역시 세계관 변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과 500년 전만 해도 지구에 사는 대부분 사람은 지구를 우주의 중심이라고 보고, 태양과 하늘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천동설을 정교하게 만든 사람은 2세기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지만 그 사람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은 하늘과 별,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전통 우주관에서 중요한 것은, 첫째 하늘과 땅을 상호 대응 관계로 본 것이다. 땅은 하늘에 대한 땅이고, 하늘은 땅에 대한 하늘이다. 창세기 1장 1절에서도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하였다. 동양에서도 하늘과 땅, 곧 천지(天地)는 만유(萬有)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하늘과 땅, 혹은 천상과 지상은 우주를 구성하는 이원적 요소였던 것이다.

둘째, 땅은 존재의 위계상 최하층을 의미했고 하늘은 최고 정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늘 저 너머에는 신(神)의 거처로서 천상(heaven)이 있었다. 하늘을 신의 거처로 보는 생각은 보편적이었다. 그래서 하늘은 그냥 하늘이 아니었다. 천상은 눈에 보이는 푸른빛의 하늘 그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초월적이고 신비한 세계다. 천상은 지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고, 인간의 상상 너머의 세계다. 그리고 바로 이 천상에 천국이 자리 잡고 있다고 믿었다. 천상이 천국이 위치한 자리였다.

그런데 500여 년 전에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에 의해 지동설이 나타났다. 물론 과거에도 지동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영향력 면에서 미미했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수많은 지지자를 만들어 냈으며, 머지않아 주류 이론으로 부상하게 될 것이었다. 지동설은 먼저 지상과 천상의 이분법적 우주관을 뒤흔들었다. 만일 태양이 중심이라면, 지구가 그 태양을 도는 여러 행성 중 하나라면, 더 이상 지상과 천상은 일대일로 맞대응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지상은 광활한 우주 공간 속을 떠다니는 조그만 암석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또 하나, 천상이 사라졌다. 파란 하늘 너머에는 천상이 아니라 스페이스, 곧 암흑의 허공인 우주 공간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공위성이 찍어서 전송한 푸른빛의 지구 사진은 인류의 마음속에서 아예 천상을 추방해 버렸다. 우주 공간(space)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 현대인은 더는 고대인과 같은 방식으로 지상과 천상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우주상은 전통적인 기독교 천국관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휴거 때 들림받은 성도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성층권을 떠다니는 구름 위에서 살아야 하나? 아니면 화이트홀을 통과해 안드로메다은하로 가야 하나.

펄시 콜레 박사가 쓴 <내가 본 천국>은 현대인의 우주관과 나름대로 조화를 꾀한 천국관을 보여 준다. 천국은 지구에서 수조 마일 떨어져 있으며, 지구에서 천국까지 도달하는 데 6시간 정도 걸리고, 크기는 지구보다 80배나 큰 행성이란다. 만일 그 행성이 우주 어딘가 존재하는 행성이라면 그곳에서도 뉴턴의 만유인력의법칙이 적용될 것이다. 그렇다면 몸무게가 굉장히 무거워질 것인데, 무거운 몸으로 천사와 함께 공중을 날아다니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식의 천국관은 천국이 지상과는 완전히 다른, 초월적인 세계라는 개념을 상당 부분 포기해야만 가능한 관점이다. 천국의 실존이 위태로워졌다.

실종된 천국의 자리를 다시 찾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천상(heaven)을 잃어버린 현대인은 새로운 방식으로 천상의 자리를 찾으려고 시도했는데, 20세기 초반에 예술가들에 의해서 추구된 쉬르 레알(surreal), 곧 초현실이라는 개념이나 뉴에이지 운동은 잃어버린 천상을 다시 찾으려는 시도로 보인다. 과학자나 수학자는 차원(dimension)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예컨대, 애드윈 A 애벗(Edwin A. Abbott)은 <플랫랜드>라는 책에서 3차원보다 높은 다차원 세계를 기발한 상상력으로 묘사해서 보여 주었는데, 그의 말대로라면 어쩌면 천상은 4차원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에 대해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은 상당한 거부감을 느낀다. 예컨대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는 초현실에 대한 추구를 '절망선을 넘은' 신이교주의라며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필자가 볼 때, 이러한 제안은 신이교주의인도 문제지만, 옛날과 같은 보편성을 가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잃어버린 천상이 회복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점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싶다. 천상은 큰 소리를 내고 떠나가 버렸다.

2) 유토피아의 도래

천국이 사라진 자리를 세속적 천국이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유토피아(Utopia)가 도래한 것이다. 현대인은 지옥도 지상에서 발견하고, 낙원도 지상에서 찾는다. 모든 것이 현세에 있다. 유토피아가 도래했다는 말이 독자들에게는 뜬금없이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옛날 사람들이 그토록 꿈꾸었던 유토피아의 사회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 GDP의 성장 그래프를 그려 본다면 지난 수천 년간 수평선을 그리며 완만하게 상승하다가 19세기 이후 수직으로 상승하는 그래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좌우로 뒤집힌 'L'자 형이다. 물론 전 세계에는 여전히 기아와 빈곤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빈부 격차도 그대로이다. 그럼에도 많은 현대인은 더 이상 굶어 죽을 걱정을 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지난 세대에 비하면 놀라운 진전이다. 흥부 씨네 가족의 소원은 "이팝에 고깃국"이지만, 현대인의 고민은 과체중이다. 현대인이 회식 자리에서 먹는 음식은 그 옛날 임금의 수라상보다 진수성찬이다.

약 700년 전,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오기 전 민중들은 얇은 옷으로 겨울을 나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가난한 이들도 오리털 파카 몇 벌은 가지고 있다. 옛날 부산 유생들이 과거 시험 보러 한양까지 가는 시간이 한 달 정도였지만 지금은 2시간이면 갈 수 있다. 조만간 상용화될 하이퍼루프(hyperloop) 음속 열차로는 16분이면 이동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천국이 아니라 지상에서 천사 없이도 개인용 드론으로 하늘을 날 수 있다.

영국으로 여행 간 딸과 길을 걸으며 얼굴을 보고 영상 통화를 할 수도 있다. 그것도 공짜로! 평생 글 한 줄 익히지 못하며 죽어 갔던 옛날의 민중들에게 인터넷은 기적의 교육 공간이다. 고조선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모든 학자들이 가졌던 지식보다 더 많은 지식이 인터넷에 있다. 50%를 넘나들던 유아 사망률은 거의 제로에 수렴할 정도로 떨어졌으며, 호환·마마 등의 많은 질병과 재난은 극복되었다. 19세기 평균 수명은 37세지만 지금은 80세를 너끈히 산다. 그런데 구글은 2050년까지 평균 수명을 500살까지 늘리는 것을 목표로 프로젝트를 가동 중에 있다. 가히 불사의 시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차 대전 이후 대중 여행의 폭발적 증가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중동 지역을 헤매지 않는다. 대신에 실존하는 지상 낙원들을 방문한다. 블로그와 카페, SNS 등에는 지상낙원을 방문한 여행객들의 견문록이 산처럼 쌓여가고 있다. 오큘러스 리프트(Oculus Lift) 헤드셋을 쓰면 영화 '아바타' 속 행성처럼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낙원도 방문할 수 있단다. 더 나아가 아예 2차원 픽셀(pixel) 대신 3차원 박셀(voxel)로 구현된 3D 영상으로 입체 영상 속을 돌아다닐지도 모른다.

소비사회로 진입하면서 기업은 지복점(bliss point)을 찾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사람들이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는 극치의 지점이 바로 지복점인데, 지복점을 찾으면 많은 소비자를 불러 모을 수 있기 때문에 기업은 커피, 소스, 음료, 제과 등의 지복점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 덕에 현대인은 극치의 감각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성 과학은 섹스에서의 극치점, 곧 오르가즘(orgasm)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고 있으며, 이를 돕는 상품이 개발되고 있다. 현대 기술은 현대인에게 최고의 기쁨, 최상의 만족, 천상의 즐거움을 제공해 줄 것이다. 이것이 유토피아의 도래가 아니고 무엇인가.

유토피아와 관련해서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중요한 사람이다. 본래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만든 말인데, 그 말뜻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유토피아가 실제로 도래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유토피아를 도래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주장한 사람이다. 비록 그가 말한 방식으로 유토피아는 도래하지 않았지만, 대신에 그의 영향으로 복지사회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북유럽과 스위스 같은 복지사회는 옛날 사람들의 눈에는 영락없이 유토피아이다.

그럼 점에서 스페인의 마리날레다(Marinaleda)는 흥미로운 도시다. 스페인 자체는 복지국가와는 거리가 멀지만,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투쟁한 결과, 고도의 복지를 누릴 수 있는 자치 구역을 만들 수 있었다. 토마스 모어는 1일 6시간 노동, 부족함이 없는 생활,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유토피아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지금 그런 사회를 유럽과 같은 곳에서는 이미 실현했다. 유토피아는 건설될 수 있다.

기독교의 천국은 사라지고 대신에 세속적 유토피아가 도래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사회를 살고 있다. 지옥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고, 천국에 대한 소망은 옅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from 지옥 to 천국'이라는 기독교 구원론의 공식은 종말적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묵상하고, 전할 수 있을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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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logy)의 종말
구원론 종말의 시대(3)
기자명 신광은  승인 2017.04.13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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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멈춤앞으로

*'교회 없는 기독교 신앙의 시대'에 이어 '구원론 종말의 시대'에 관해 3회에 걸쳐 게재하고자 합니다. - 필자 주
1. 칭의론이 위태롭다
2. 천국과 지옥의 실종
3. 구원-론(logy)의 종말

1. 들어가는 말
마커스 보그(Marcus Borg)는 지금의 기독교 위기를 기독교 언어의 위기로 보았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을 설명해 오던 언어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지적은 옳다. 특히 그가 전통적인 기독교를 '천국 지옥 기독교'라고 부른 것은 참으로 통렬하다.(Borg,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1장) 그러나 나는 그가 기독교 언어의 위기 원인을 정확히 짚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기독교 언어의 위기 원인을 '천당 지옥 기독교관'과 '문자주의'에서 찾았는데(위의 책, 13쪽), 이러한 지적에 동의하면서도 과연 이 두 원인이 전부인지는 묻고 싶다.




뒤로멈춤앞으로
만일 지금의 기독교 위기를 기독교 언어의 위기로 본다면 그것은 구원론 문제만이 아니라 기독교 교리 전체의 위기요, 나아가 기독교 신앙 전반의 위기로 볼 수 있다. 기독교는 유달리 '말'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신교라는 정황 속에서 보자면 이 위기는 무엇보다도 구원론의 위기일 수밖에 없다. 왜냐? 몇 차례 지적했듯이 개신교회는 구원론을 초석 삼아 세워졌기 때문이다. 해서 이번 글에서 나는 구원론과 함께 기독교 신앙 및 교리 전반이 언어의 위기로 말미암아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게 되었다는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2. 게토화된 기독교 언어
기독교 언어의 위기 징후는 어렵지 않게 포착할 수 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 및 신학의 언어가 게토화된 사실에서다.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들의 언어를 교회 밖의 사람들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교회 사람들이 식당이나 카페에 갔을 때 주고받는 '집사님', '권사님', 혹은 '형제님', '자매님'이라는 낯선 호칭이 그 작은 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전도 구호의 생경함은 더욱 말할 것이 없다. 갑작스럽게 전철에 올라탄 50대 여성이 지하철을 휘젓고 다니며 쏟아 내는 종말의 메시지, '회개하라'는 둥,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는 둥,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서 예언한 대로 세상이 흘러간다'는 둥… 노스트라다무스류의 묵시적 언어들은 목사인 나로서도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그 말에 성경 구절에 대한 정확한 인용과 세상 문화에 대한 번득이는 비판과 통찰이 들어 있다는 것이 더욱 당혹스럽다. 차라리 정신병자의 횡설수설이면 좋을 뻔했는데, 진리의 편린들이 들어 있는 바람에 기독교 언어 자체가 청자들에게 미친 소리로 들려지겠다 싶으니 낯이 뜨뜻해진다.

한 구도자가 교회를 찾았다. 교회 안에서 듣는 말은 분명 '한국말'인데 도통 모르겠는 말들뿐이다. 안내하시는 분들의 한복이나 양복도 어색하고, 갑자기 자신을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당황스럽다. 찬송가나 복음성가 내용도 도통 뭔 소린지 모르겠다. 통성 기도할 때나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한다고 중얼거리는 청중들을 보면 어딘가 섬뜩하다. 장로님의 길고 긴 기도는 거의 외계어 수준이고, 설교도 알 듯 모를 듯하다. 설교 본문이 하박국서라는데 이게 도대체 어디 붙어 있는가. 목사가 설교하는데 중간중간에 사람들은 왜 자꾸 '아멘'하면서 끼어드는 걸까.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다는데 그건 또 무슨 뜻인가. 복음서·제자·훈련·리더·목장·사역·선교·지상명령·성령 충만·창조·심판·영성·성숙… 암호들은 끝이 없다.

복음반을 찾았다.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천국, 지옥은 익숙한 단어지만 그다지 마음에 와 닿지는 않는다. 복음반 강사가 가르치는 내용도 알쏭달쏭하다. 중간중간 턱 턱 걸리는 용어들이 신경에 거슬린다. 십자가·보혈·부활·예정·칭의·성화·영화·종말·재림… 끝도 없다. 그리고 결론은 '믿음'이 중요하단다. 믿으면 천국에 간단다. 믿으라고? 뭘 믿으라는 거지? 강사가 하는 말에 그냥 동의하라는 말인가? 인감도장 찍을 필요가 없다면 그까짓 거 '믿는다'고 해 두지 뭐. 근데 그 정도로만 믿어도 천국에 가는 걸까? 에이 설마… 그렇게 갈 수 있는 게 천국이라면 그런 천국은 허당일 것이 분명해.

이처럼 기독교 언어는 외부인 입장에서는 어색함과 낯설음으로 충만하다. 그런데도 자기들끼리는 잘도 쓴다. 그래서 게토화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언어가 마치 갈라파고스제도의 생태계처럼 고립되어 있다는 뜻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기독교 언어의 게토화 현상에 대한 원인으로 관념성과 추상성을 지적하기도 하고, 신학적 개념의 남발, 서양 언어의 무분별한 차용을 지적하는 이도 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지적에 동의한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문제가 있지 않을까.

사실 게토화는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1세기 후반부터 4세기 초,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초대교회 공동체도 로마제국 입장에서 보면 철저하게 게토화된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물고기 표시 같이 자기들끼리만 알아먹는 암호도 많이 만들어 냈다. 초대교회뿐만 아니다. 예수님도 만만치 않다. 흔히 예수님은 비유의 천재요, 소통의 달인이라고 칭송을 받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예수님은 일반 청중에게 전하실 메시지와 제자 공동체에게 전하실 메시지를 늘 구분하셨다.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해석이나, 요한복음 12장부터 나오는 최후의만찬 자리에서의 가르침, 특히 새 계명 수여는 고립된 제자 공동체만을 위한 것이었다. 사도 바울은 어떤가? 바울도 '외인'과 '교중 사람들'(고전 5:12)을 자주 구분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대조 사회'로서의 교회 공동체는 어느 정도 게토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지금의 게토화 현상이 초대교회의 게토화 현상과 사뭇 달랐다는 데 있다. 당시의 게토화 현상이 초대교회가 로마제국 사이에 두었던 필연적 단절과 대조성의 산물이라면, 현대 교회의 게토화 현상은 대조성과는 거의 무관하기 때문이다. 누가 오늘날의 교회를 보면서 교회를 대조 사회라고 생각하겠는가? 세상의 논리가 거의 그대로 교회 안에 들어와 있지 않는가. 기업과 메가 처치는 뭐가 다른가. 마케팅, 경영, 기술의 무분별한 수용은 또 어떤가? 정치 편향성, 물신숭배… 이런, 세상과 교회의 차별이 없다.

기독교는 사실 속으로는 세상과 완벽하게 일치해 버렸다. 다만 겉으로만 기독교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종교 놀음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기독교 언어의 고립주의는 실은 교회가 세상과 똑같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시뮬라시옹(simulation)인 셈이다. 시뮬라시옹은 실재의 부재를 은폐하는 수단이다(Baudrillard, <시뮬라시옹> 참조). 결국 기독교 언어의 게토화 현상은 교회 속에 알찬 신앙의 부재를 은폐하는 수단이다. 상징력을 상실한 상징처럼 기독교 언어는 기표만 남았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전문용어(?)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자신들만 구원받았다는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다. 마치 전문가들이 굳이 어려운 전문용어를 휘갈기면서 비전문가들의 접근을 배제하듯이 교회는 그러한 게토화된 언어로 외부인을 소위 '세상 사람들'이라고 이름 붙이며 배제한다. 기독교 언어의 게토화 현상의 진짜 문제는 그것이 내용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데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다 눈치채고 있다. 껍데기만 남은 기독교 언어가 외인들 가슴에 아무런 울림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조선 지식인들은 성경의 언어가 주는 충격에 전율했다. 여성과 하층민들은 성경의 평등사상에 뛸 듯이 기뻐했다. 지금이야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 경멸적 언어의 대명사지만 100년 전 평양 시대에서는 그 말만으로도 뭇사람을 예수께로 이끌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이다.

그때보다 지금의 기독교 언어는 훨씬 더 세련되어졌다. 그러나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 귀만 간지럽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같은 사실을 교중 사람들만 모른다. 게토 안에서 여전히 자신들만의 언어가 잘 통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최근 교중 사람들조차 서서히 텅 빈 언어의 실체를 느끼고 있다. 매주 강단에서, 그리고 공동체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종교 언어가 가슴을 울리지 못하고, 귀만 간질이는 현상에 이제 교인들도 점차 권태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언어의 게토화 현상의 진짜 위기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3. 교리의 종말
1) 명제적 진리관의 종말

기독교 언어 위기 문제에서 다루어야 할 또 하나의 주제는 '교리의 종말'이다. 오늘날 기독교 교리는 바람 잡는 것 같은 공허한 소리로 들린다. 해서 현대인은 기독교 교리에서 별 감흥을 느끼지도 못하고 있다. 그러나 2,000년 동안 기독교 교리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왔다. 수많은 이단이 만들어진 것도 결국은 교리 때문이고, 수많은 사람이 교리 때문에 죽었다. 신학자들은 신학 개념이나 단어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수십 년을 고심했으며, 그 단어의 무게는 태산과도 같았다. 그런 단어들로 교리가 만들어졌다.

그러한 단어들로 사도신경을 비롯한 수많은 신조(혹은 신경, creed)들이 만들어졌다. 그 신조는 정통과 이단을 결정짓는 표준이 되었고, 그 표준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운명이 바뀌었다. 필리오케(Filióque)라는 단어 하나가 동방과 서방 교회의 분열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헬라어로 ‘i’(이오타) 하나로 아리우스(Arius)가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크리스토토코스(Christotokos)와 테오토코스(Theotokos)의 논쟁으로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이단으로 찍혀져 나갔다.

교리는 신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5세기 동유럽의 민중들은 저잣거리에서 단성론과 양성론에 대해서 열띠게 논쟁했고, 16세기 서유럽 시민들은 루터의 칭의론에 대해서 흥분하며 토론했다. 오늘날 개신교 신자들이 열렬하게 신앙하고 있는 십자가 대속에 대한 믿음도 사실은 12세기 가톨릭 신학자 안셀름(Anselm)의 '만족설' 교리에서 빚진 것이다. 교리는 신자들에게도 중요했다. 특히 가톨릭교회에 비해서 개신교회는 예전과 전통 대신 교리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비록 개신교회 내 경건주의 흐름이 교리를 배척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긴 했어도 교리를 강조하는 정통주의(Orthodoxy) 흐름은 개신교회사 속에서 도도히 이어져 왔다.

그러나 21세기 현대에서는 기독교인조차 기독교 교리를 주제로 밥상머리에서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원인은 기독교 내부에서도 찾을 수 있겠지만 기독교 외부적 원인도 만만치 않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는 교리의 종말이라는 현상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간파했던 사람인데, 그는 그 원인을 현대의 정신에서 찾았다. 그는 19세기 전후로 현대 정신이 '절망선'을 넘으면서 명제적 진리가 멸시 당하게 되었다면서 크게 분노했다. 쉐퍼는 헤겔(G. W. F. Hegel)의 변증법과 키에르케고르(S. A. Kierkegaard)의 실존주의가 인류의 정신을 절망선 너머로 인도했다고 개탄했는데, 이러한 진단에는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19세기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명제로 진리를 표현하는 것을 진부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명제적 진리에 대한 멸시는 기독교 교리의 종말 현상의 원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명제적 진리가 침식당하고 있다는 쉐퍼의 판단은 정확했다. 현대인은 진리를 명제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계몽주의가 똘레랑스의 미덕을 강조한 이래로, 사람들은 점차 절대 진리의 선포보다 '사견'을 전제로 자기 생각을 제안하도록 훈련받아 왔다. 모든 사람이 동의해야 하는 절대적 진리에 대한 신념은 점차 사라졌다. 모두가 각자 자신의 의견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각자는 자신의 의견으로 다른 사람과 토론하고 논쟁할 수 있다. 그러한 토론과 논쟁의 과정에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가설이 '진리'의 지위를 얻는다. 그러나 그 진리라는 지위는 또 다른 진리가 등장할 때까지 잠깐 누리는 명예일 뿐이다.

이러한 진리관은 칼 포퍼(Karl Popper)의 '열린사회'의 개념을 통해 잘 나타난다. 영원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진리는 잠정적이다. 영원한 진리라는 개념은 전체주의를 전제로 하고 있다. 전체주의 사회는 닫힌 사회며, 닫힌 사회는 열린사회의 적이다. 열린사회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다. 모두가 진리를 경합하는 담론의 장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가 열린사회다.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어떤 의견이든 그것이 다른 의견에 의해 반증되기 전까지 그 의견은 진리의 지위를 누릴 수 있다(Popper, <열린사회와 그 적들> 참조).

절대적 진리관의 해체는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에 의해서 더욱 급진적으로 개진되었다.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나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와 같은 이들은 아예 '진리'라는 말 자체를 해체하기에 이른다. 대문자 진리(Truth)는 없다. 소문자 진리들(truths)만 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러한 정서를 가진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모든 형태의 인식론적 제국주의를 단죄한다. 인식론적 제국주의란 '나의 생각만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틀리다'는 식의 진리관이라 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여하한 형태의 인식론적 제국주의도 거부한다.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진리관은 명제적 진리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명제적 진리는 'A는 B이다'라는 식으로 구성될 것인데, 그 방식이나 내용이 오만하기 짝이 없게 느껴진다. 모두가 받아들여야 할 것 같은 강압적인 아우라가 가득하다. 현대의 교양인이라면, "내 생각에는…"이라는 단서를 붙여야 한다. 따라서 명제로 사물의 이치를 설명하려는 독선적인 시도는 자제되어야 한다.

조지 린드벡(George A. Lindbeck)은 <교리의 본질>에서 명제적인 교리의 시효가 만료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현대사회에서 전통적인 '인식-명제적' 형태의 기독교 교리는 '문화-언어적' 형태의 담론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Lindbeck, <교리의 본질> 참조). 교리는 부적절하다. 다만 '담론'이나 '이야기'만 가능할 것이다. 그의 대안에 대해서 동의하든 하지 않든 간에 지금의 시대정신이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지적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러한 명제적 진리관의 위기는 기독교 교리의 위기 원인이 된다. 대부분 기독교 교리(dogma)는 명제적 진리로 표현되어 왔기 때문이다. 니케아신조를 비롯한 여러 신조들(creeds)이나 신앙 공식들(formula)은 압축적 명제의 형태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정리해 주고 있는 것들이다. 신조나 공식, 교리들은 "내 생각에는…"이라는 단서가 없다. 그냥 단순히 명제적 형식으로 진술만 있다. 정의상 신조는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진리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사람들이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그토록 거부감을 가지는 이유다. 기독교 교리는 오만하고 독선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21세기 기독교는 전통적인 기독교를 지탱해 왔던 교리, 곧 -'론'(logy)의 해체적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2) 형이상학의 종말

기독교 교리가 종말적 상황에 처한 또 한 가지 원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현대인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세계에 대해서 진지한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데 있다. 기술의 정신이 편만하게 퍼져 있는 현대사회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들, 혹은 형이상학적인 것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사고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치부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현대인의 관심은 지독히도 '물질적'이고 '현세적'이다. 천상을 잃어버린 현대인은 더 이상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거처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더불어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도 사고할 줄 모르게 되었다.

형이상학(metaphysics)이란 뭘까.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든 말이다. 단어의 뜻을 풀이하자면 '물리학(physics) 뒤(meta)'라는 뜻이다. 그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존재들에 대한 탐구는 물리학(physics)이라고 했고, 물리학 다음에 오는 학문은 존재의 본질(essentia)에 대해서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했다. 이것을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물리학은 형이하학(形而下學), 존재론은 형이상학(形而上學)으로 번역했다. 간단하게 말해서 형이상학은 보이는 세계 너머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형이상학은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이며, 초과학적인 대상에 대해서 탐구하는 학문이다.

형이상학적 사고는 인간의 본성적인 사고라고 할 정도로 오래전부터 발전했다. 신화적(mythos) 사고에서 벗어나 이성적(logos) 사고를 시작하면서부터 그리스인들은 '만물의 근원'(arche)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만물이 아니라 만물의 근원에 대해서 탐구했다. 그들은 만물 배후에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뜻이다. 뒤이어서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사물은 그림자에 불과하고 그 사물의 본질을 담고 있는 '이데아'(Idea)가 천상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했다. 이데아 역시 초월적인 존재다. 비슷하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탐구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 탐구를 형이상학이라고 이름 붙였다.

형이상학적 사고는 자주 '신'에 대한 탐구로 연결된다. 예컨대, 제1원인,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 혹은 일자(The One) 등에 대한 탐구는 고도로 형이상학적이면서, 신학적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중세의 신학자들도 형이상학적 방법론으로 신에 대해서 연구했다. 형이상학은 초월에 대한 학문이고, 그것은 신학과 인척 관계에 있다.

17세기를 지나면서 형이상학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로, 과학혁명과 함께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피사의사탑에서 이루어졌다고 전설처럼 전해오는 갈릴레오의 '자유낙하 실험'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거장의 이론을 단번에 폐기해 버렸다. 바야흐로 과학이 새로운 정신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물리학은 더 이상 형이상학보다 열등한 학문의 자리를 지키려고 하지 않았다.

둘째로, 형이상학의 추락이다. 18세기 칸트(Kant)에 이르러서 형이상학은 중대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는 형이상학을 과학적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순수이성의 영역에서 떼어서 실천이성의 영역으로 옮긴 사람이다. 이제 인간의 이성은 과학적 이성과 형이상학적 이성으로 분리된다. 과학과 형이상학이 분리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곧이어 등장한 유물론자들에 의해서 형이상학은 제거되고 오직 과학적 이성만 남게 된다. 초자연적, 초월적, 초과학적 영역은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형이상학의 위축과 더불어서 신이 존재할 영역도 지상에서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니체 이후로, 이제 신은 지상에 발붙이기 어렵게 되었다. 19세기 이후, 형이상학은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할 일 없는 철학자들의 말장난'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기독교 교리(dogma)가 위기에 내몰린 것도 바로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동안 기독교 교리는 다분히 형이상학적이었다. 예컨대, 삼위일체론 같은 경우는 단적인 예다. 개신교회 구원론도 마찬가지다. 칭의, 전가, 이중 예정, 중간 지식, 속죄 등… 이런 것들은 일상의 삶과 연관되는 개념들은 아니다. 초월적이고 추상적인 관념들이다. 그런데 형이상학이 뜬구름 잡는 소리가 되면서 이러한 기독교 교리도 의심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현대인은 더 이상 이런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이야기들에 귀를 열 마음이 없다. 자신들의 삶에 연관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여기에 기독교 교리의 딜레마가 있다. 본성상 다분히 형이상학적일 수밖에 없는 기독교 교리가 어떻게 현대인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4. 말의 굴욕
마지막으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자크 엘륄(Jacques Ellul)이 말하는 '말의 굴욕'이다. 말의 굴욕은 앞서 언급했던 것들보다 훨씬 근본적인 문제다. 현대사회는 '말'(word)이 굴욕당하고, 능욕당하는 사회다. 말이 뭘까? 말이란 인간과 인간이 서로 소통하는 매개다. 소통이란 마음과 마음, 인격과 인격의 교통이다. 나아가 말은 인간 존재 자체다. 따라서 말을 한다는 뜻은 자신의 존재의 내어 준다는 뜻이다.

전적으로 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말'(word)을 통해 세상 속에 자신을 계시하시기로 결심하셨다. 말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실 때, 성경은 그것을 '말씀'(word)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뜻은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내어 주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이 성육신의 의미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하신 말씀으로 우리에게 내어주신 하나님 자신이다. 우리는 사도들 말을 통해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듣는다. 그리고 또한 말로 기독교 진리를 다른 이들에게 전한다. 말로 진리가 계시된다. 말 이외의 다른 수단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없고, 기독교 진리도 전달할 수 없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말'이 경멸당하고 있다. 그리고 말의 굴욕이 기독교 진리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 자크 엘륄의 통찰이다.(Ellul, <말의 굴욕> 참조) 말이 굴욕당하고 있다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인가. 사안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법정에서는 증언보다 증거가 우선한다. 이는 사람의 말이 의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말은 기본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는 말하는 사람이 진실보다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경험칙이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말이다.

말이 무시당하는 이유는 또 있다. 그것은 말의 부정확성 때문이다. 말은 사물과 1대1 대응 관계를 이루지 못한다. 왜냐하면 말은 대상보다 너무 많은 뜻을 담거나, 반대로 너무 적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엔지니어들이 프로그램을 짤 때, 인간 말 대신에 기계어를 쓴다. 기계어는 대상과 언어가 완벽하게 1대1 대응 관계를 가진다. 기계어는 간단하고, 명료하고, 정확하다. 예컨대, 수학의 계산식은 항구적으로 같은 결과를 산출한다. 하지만 말은 그렇지 않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찰떡'같이 말해도 '콩떡'같이 알아먹어야 한다. 이러한 말의 부정확성에 대한 혐오가 현대사회에서 말이 무시당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된다.

말이 경멸당하는 또 다른 이유는 말이 선전(propaganda) 도구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선거 기간 후보자의 말은 철저하게 표 확보를 위한 수단이자 도구로 간주된다. 말하는 사람의 본뜻은 검증이라는 미명하에 상대방 후보에 의해 왜곡되고 뒤틀린다. 선의가 악의가 되고, 악의가 선의가 된다. 말로 프레임을 설정하고, 의제를 선점하여,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선거는 전쟁이고 말은 전쟁에서 상대방을 죽이고 내가 사는 무기다. 마치 총알이나 대포알과 같다. 선거에서 말의 가치는 오로지 표 득실로 결정된다. 이런 말은 인격과 무관하다. 오염된 말이며, 선전의 도구이다.

그런데 이것은 선거판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술 사회 속에서 모든 말이 선전의 수단이 되고 있다. 기술 사회에서 말은 말하는 사람의 인격과 무관한 기호들이 되고 있다. 말은 말인데 '주인'이 없다. 우리 사회는 광고 카피, 뉴스 멘트, 드라마 대사, 노래 가사로 넘쳐 난다. 그러나 그 말들은 하나같이 주인이 없는 말들이다. 이들 말은 오로지 효과로 측정되는 선전의 도구다. 물건을 사게 하거나, 뉴스를 믿게 하거나, 드라마 시청률을 올리거나, 음반 판매를 촉진하기 위한 선전의 도구이다. 비슷하게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은 친구 관리를 위한 경영이 된다. '좋아요'와 '공유'의 숫자는 영향력을 의미하며, SNS에서 영향력은 자산이다. 이처럼 기술 사회에서 말은 타인을 현혹하거나, 설득하는 수단일 뿐이다.

현대인은 타인의 인격이 말로써 다가오는 무거운 경험을 잃어버렸다. 인격을 담은 대화는 너무 무겁다. 그런 대화는 즐거운 분위기를 깬다. 무거운 대화는 예의 없는 대화다. 대화가 너무 무거우니 카톡을 보낸다. 카톡 메시지는 인격을 한층 걸러내 주기 때문이다. 말은 가벼워졌다. '아브라카타브라' 같은 뜻 없는 주문을 말하면서 재밌어라 할 때, 조롱의 대상은 말 자체다. 비슷하게 낄낄대며 지껄이는 유행어도 말에 대한 조롱이다. 말이 굴욕당하고 있다.

말이 당하는 이러한 굴욕은 기독교 진리의 위기를 초래한다. 기독교 진리는 오로지 말로써만 전달 가능하다. 이때의 말은 정보의 전달이나 선전의 도구, 혹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인격이 담긴 말이라야 한다. 그 말은 천금 같이 무거운 말이다. 그런데 말이 위기에 처했다. 말은 가벼워졌으며, 의심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선전의 도구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말의 위기와 함께 기독교 진리도 위기에 처하고 만다. 듣기 싫은 말을 할 때, '설교하지 마'라고 대응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설교는 권위적인 명령이거나 강요된 설득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혹은 설교는 설교란 장황하고, 의미 없는, 뜬구름 잡는 소리(sound)나 소음(noise)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위기를 가중시키는 것은 설교 역시 선전의 도구가 되고 있다는 데 있다. 설교는 최상의 상품이 되고 있다. 일종의 지적 엔터테인먼트다. 사람들은 설교를 즐기기 위해서 듣는다. 그러나 설교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늘 충돌과 대결이다. 해서 설교는 하나님과 인간의 투쟁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마치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야곱이 대결하듯 청중은 설교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씨름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하여 존재의 변화를 겪는 것이 설교의 본래 목적이다. 하지만 설교가 청중을 끌어모으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수단이 되어 버린 현대 교회에서 설교는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거나, 자존심을 살살 어루만지는 아첨이 되어 가고 있다. 위기는 더욱 깊어지고 있다.

5. 나가는 글
이상이 기독교 언어가 당면한 위기 상황이다. 위에서 보듯이 기독교 언어의 위기는 교회 내부적인 문제도 있지만, 교회 외부적인 문제도 적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것이 내가 마커스 보그와 약간 견해를 달리하는 이유다. 그리고 이 때문에 마커스 보그의 제안, 곧 기독교 언어를 바꾸자는 제안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문제는 더 크고, 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독교 진리를 담지하고, 전달해 왔던 기독교 신앙의 언어와 교리의 언어는 난관에 봉착해 있는 것이다. 특별히 구원론을 초석으로 삼고 있는 개신교회의 경우, 구원-'론'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엔도 슈사쿠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알라딘: [전자책]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eBook]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엔도 슈사쿠 (지은이),이평춘 (옮긴이)
어문학사2015-01-26 
원제 : 白い人·黃色い人



전자책정가  6,600원
종이책 페이지수 : 208쪽

책소개

<침묵>, <깊은 강>, <바다와 독약> 등 종교 소설과 세속 소설의 차이를 무너뜨린 20세기 일본 문학의 거장 엔도 슈샤쿠의 초기작으로, 엔도 슈샤쿠 문학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이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엔도 슈샤쿠는 <백색인>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작가가 유럽과 동양의 종교문화의 차이로부터 겪은 방황, 갈등의 요소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유일신을 갖는 서양의 백색인이기도 하고, 범신론적 신을 섬기는 동양의 황색인이기도 한 작가의 내면에서는 신과 인간, 인간과 신, 신과 신 등 모든 관계의 대립이 발생하여 얽히는데, 소설은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라는 제목을 통해 이를 자연스럽게 시사한다.

프랑스인이면서도 독일 게슈타포의 고문 협력자가 되어 버린 '나'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백색인'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인 나는 프랑스의 평범한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태어난 못생기고 사팔뜨기인 소년이었다. '나'는 어느 날 우연히 하녀 이본느가 폐병 앓는 늙은 개의 목을 새하얀 허벅지로 짓누르며 학대하는 모습을 목격한 후 악마처럼 다가온 학대의 쾌락을 느끼기 시작한다.

'황색인'은 범신론적 세계관을 갖는 황색인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나'가 브로우 신부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 서두를 시작한다. 나는 브로우 신부에게 듀랑 신부가 죽기 전에 자신의 일기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을 언급하며, 뒤에 곧 듀랑 신부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와 교차하여 싣는 특별한 구성방식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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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신의 아이
백색인白い人 7

신들의 아이
황색인色い人 105

역자 후기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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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52“코냑.”
“안 돼요. 못 마시는 걸요.”
여자가 케이프를 벗자 쇄골이 보기 흉할 만큼 확연히 드러났다. 가슴은 7, 8세의 소녀처럼 납작했다.
“별거 아니니까 잠깐 입을 대봐. 그런데 쟈크에게는 아무 말도 안 했지?”
그녀는 괴로운 듯이 눈썹을 찡그렸다.
“저, 당신을 믿어요.”
“안심해, 걱정할 거 없어.”
술잔이 오고감에 따라 여자의 얼굴은 서서히 붉어지고, 땀으로 엉망이 된 화장이 지워지기 시작하더니 주근깨가 드러났다. 망가진 인형처럼 목도 흔들렸다.
“믿~어~요.” 접기
P. 184-185물론 기미코는 20일 아침의 일을 모른다. 이브가 아담을 악으로 유혹했듯이 내게 작은 소리로 유혹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녀는 일본인이 그러하듯 닳아빠진 다다미 위에 앉아 있었을 뿐이다. 그녀의 시선은 얼어붙은 듯 다다미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계속해서 악으로 유혹하는 듯 생각되었다.



저자 및 역자소개

엔도 슈사쿠 (遠藤周作) (지은이)



일본의 대표적인 현대 소설가. 가톨릭 신자인 이모의 집에서 성장하였으며, 열한 살 때 세례를 받았다. 1949년 게이오 대학 불문학과를 졸업한 후 현대 가톨릭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장학금으로 프랑스 리옹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다. 결핵으로 인해 2년 반 만에 귀국한 뒤,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5년에 발표한 《하얀 사람》(白ぃ人)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고, 《바다와 독약》으로 신쵸샤 문학상과 마이니치 출판 문화상을 수상하고 일본의 대표적 문학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엔도는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후, 유럽의 [신의 세계]를 경험한 [나]가 결국 동양의 [신들의 세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자전적 소설 《아덴까지》를 발표했는데, 그 6개월 뒤에 《백색인白い人》을 발표하였고, 또 6개월 뒤에 《황색인黃色い人》을 발표했다. 그리고 백색인으로 1955년 제33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다. 《아덴까지》의 작품 의식을 기반으로 한 《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 역시 엔도가 유럽과 동양의 종교문화의 차이로부터 겪은 방황, 갈등의 요소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1966년에 《침묵》(沈默)을 발표하여 다니자키 준이치로상을 수상했다. 1996년 타계하기 전까지 여러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며, 종교소설과 통속소설의 차이를 무너뜨린 20세기 문학의 거장이자 일본의 국민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침묵》, 《예수의 생애》,《내가 버린 여자》, 《깊은 강》, 《사해 부근에서》, 《바다와 독약》, 《그리스도의 탄생》 등 다수가 있으며 1996년 9월 29일 서거. 東京 府中市 가톨릭 묘지에 잠들어 있다. 접기

수상 : 1980년 노마문예상, 1979년 요미우리 문학상, 1966년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1955년 아쿠타가와상
최근작 : <나의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사무라이> … 총 156종 (모두보기)



이평춘 (옮긴이)


- 와세다대학 대학원 일문학 연구생 수료
- 도쿄가쿠게이(東京學藝) 대학 대학원 일문학 석사
- 도쿄 시라유리여자대학 대학원
<엔도 슈사쿠 문학>으로 문학박사
- 2019년 현재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외래교수


번역서 外
- 엔도 슈사쿠『바다와 독약』가톨릭 출판사
- 엔도 슈사쿠『예수의 생애』가톨릭 출판사
- 엔도 슈사쿠『그리스도의 탄생』가톨릭 출판사
- 엔도 슈사쿠『내가 버린 여자』어문학사
- 엔도 슈사쿠『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어문학사
- 엔도 슈사쿠『엔도슈사쿠 단편선집』어문학사 및 엔도 슈사쿠의 학술논문 다수
- 1986년부터 <영혼과 형식> 현대시 동인회에 참가하며 ‘이평아’라는 필명으로 4권의 동인지 출간 접기

최근작 : <타인의 땅> … 총 9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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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침묵>, <깊은 강>, <바다와 독약> 등 종교 소설과 세속 소설의
차이를 무너뜨린 20세기 일본 문학의 거장
엔도 슈샤쿠의 초기작
<제33회 아쿠타가와상(賞) 수상작>

신학생을 고문하는 사디스트 청년의 고뇌……
유년 시절 개화된 악의 희열 속에서도<신>과 무관할 수 없었던
「백색인」,
신부였던 피에르 듀랑의 <신>과 무관한<신들>의 세계가 운명이 되어 버린「황색인」


이 책의 개요

1
엔도 문학은 다신성을 지니고 있는 동양 정신 풍토 안에서의 기독교 토착화 문제 및 인간에게 있어서의 죄와 악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엔도 문학의 뿌리를 이룬 엔도 슈사쿠의 초기작

종교와 신과 구원의 문제에 관해 고찰한 엔도 슈사쿠는 이미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문학 작가로서, 종교와 인간에 대한 놀라운 통찰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여러 차례 오른 바 있는‘일본 현대문학의 거장’이다. 이번에 번역되어 출간된 <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원제 : 백색인 황색인)은 엔도 슈사쿠의 초기작으로, 엔도 문학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이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엔도는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후, 유럽의 <신의 세계>를 경험한 <나>가 결국 동양의 <신들의 세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자전적 소설 <아덴까지>를 발표했는데, 그 6개월 뒤에 <백색인白い人>을 발표하였고, 또 6개월 뒤에 <황색인 色い人>을 발표했다. 그리고 백색인으로 1955년 제33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다. <아덴까지>의 작품 의식을 기반으로 한 <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 역시 엔도가 유럽과 동양의 종교문화의 차이로부터 겪은 방황, 갈등의 요소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유일신을 갖는 서양의 백색인이기도 하고, 범신론적 신을 섬기는 동양의 황색인이기도 한 엔도의 내면에서는 신과 인간, 인간과 신, 신과 신 등 모든 관계의 대립이 발생하여 얽히는데, 소설은 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라는 제목을 통해 이를 자연스럽게 시사한다.
특히 신의 아이(백색인)은 유일신을 섬기는 백색인(서양인)들의 세계관, 유일신의 세계에 순응하지 않는 백색인의 세계관 그리고 이것의 첨예한 갈등을 인간의 악이 극도로 팽창하던 시기인 독일 나치 침공을 배경으로 묘사한다. 인간에게 있는 악의 본성은 신의 세계에서 어떤 의미인가,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유다의 관계에 대해 간접적으로 고찰하고 있어, 행간에 담긴 엔도 슈사쿠 특유의 종교적 사색을 읽을 수 있다.

신의 아이(백색인)

프랑스인이면서도 독일 게슈타포의 고문 협력자가 되어 버린 ‘나’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소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인 나는 프랑스의 평범한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태어난 못생기고 사팔뜨기인 소년이었다. 엄격한 청교도이신 어머니의 훈육 아래 평범하게 자란 듯하지만 '나'는 어느 날 우연히 하녀 이본느가 폐병 앓는 늙은 개의 목을 새하얀 허벅지로 짓누르며 학대하는 모습을 목격한 후 악마처럼 다가온 학대의 쾌락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일은 이후 ‘나’가 행하는 모든 비도덕적 행위의 모티브가 된다. 나의 내면에는 도덕, 종교, 가정 등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억누르는 것들을 해체시키려는 악의 속삭임이 커지기 시작한다.

(본문 p.25)
나는 그 자신만만한 표정이 매우 싫었다. 이 가톨릭 철학자가 이야기하는 인간의 선과 덕, 인간의 정신적인 진보, 인간의 역사적 성숙이라는 말을 나는 귓가에 들리는 환청처럼 우스꽝스럽게 여기면서 듣고 있었다. 17, 18세인 순진한 학우들은 적어도 이 말들의 진실성과 가치에 대해 의구심을 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내게는 그것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졌을까?

대학에 들어온 후 만난 쟈크는 이마는 벗어지고, 머리카락은 고추처럼 고불고불한 못생긴 신학생이다. 그리스도에게 믿음을 주지 않는 ‘나’에게 쟈크는 ‘그리스도를 닮음’이란 책을 내밀며 하나님과 같이 십자가를 가슴에 짊어질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배반자 유다를 생각하다가 쟈크와 가까이 지내는 마리 테레즈를 농락하기로 결심한다. 무도회에 가지 않도록 신신당부한 쟈크를 무시한 채 마리 테레즈는 너무나도 쉽게 나에게 부름을 받고 무도회에 나간다.

(본문 p.50)
어쨌든 그 여자는 쟈크에게 작은 비밀을 지니게 된 것이다. 작은 비밀은 다른 거짓말, 다른 비밀을 낳고, 그것은 이 배신의 골짜기를 울리면서 무너져 내릴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무도회에서 마리 테레즈를 무자비하게 내팽개치고, 쟈크가 마음속으로부터 깊은 저주를 하도록 만든 후 1년이 지난다. 그 사이 전쟁이 시작되었다. 나는 쟈크와 마리 테레즈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어찌되었든 이제 나와는 상관없었다. 대학에는 두세 번 나갔지만, 옛날 친구는 이미 나를 잊고 있다.
3년이 지난 후 독일 게슈타포의 고문관 통역사로 일하게 된 나는 제6구의 레지스탕트 연락원 역할을 하고 있다가 독일군에게 붙잡힌 가톨릭 신부와 마주치게 된다. 그는 바로 쟈크였다.

(본문 p.63)
내가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생애가 고문을 받아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이 남자 역시 고문하는 자와 고문당하는 자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를 피해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본문 p.92)
“마리 테레즈라는 여학생이 있습니다. 이 녀석 앞에서 그녀를 심문하는 겁니다.”
이날 밤 나는 또 다시 유다를 이용했다.

신들의 아이(황색인)

범신론적 세계관을 갖는 황색인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나’가 브로우 신부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 서두를 시작한다. 나는 브로우 신부에게 듀랑 신부가 죽기 전에 자신의 일기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을 언급하며, 뒤에 곧 듀랑 신부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와 교차하여 싣는 특별한 구성방식을 선보인다.
무엇보다 신들의 아이(황색인)에서는 백색인임에도 불구하고 황색의 신의 세계에 살게 된 듀랑 신부의 삶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신의 아이(백색인)와는 정반대의 세계관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듀랑 신부는 교회의 일본인 신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믿음을 전파하던,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착실한 신부였다. 어느 날 수해를 입고 양친과 여동생 등 가족을 모두 잃어버린 기미코를 만난 이후 한순간 인간의 육욕으로 인해 교회로부터 추방당하기에 이른다.
교회의 신도들로부터 가차 없는 모욕을 당하게 된 듀랑 신부는 근근이 브로우 신부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삶을 연명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배반하였다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기미코를 폭행하기도 한다. 기미코는 듀랑 신부는 더 이상 신부가 아님을, 이제 그리스도는 듀랑의 삶에서 희미해져가는 허상에 불과함을 인식시킨다.

(본문 p.166~168)
“어째서 하느님과 교회를 잊지 못하나요? 잊으면 되잖아요. 당신은 교회를 버렸잖아요. 그러면서 왜, 언제까지나 그것에만 매여 있는 거죠? 오히려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기만 하면, 용서해 주는 부처님 쪽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나는 일어나 망연히 기미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화가 나서 내뱉은 기미코의 이 말은 돌연 계시처럼 내 마음을 찔렀다.
하느님을 배신하고 교회를 버린 지난 8년간, 나는 악몽처럼 하느님의 벌에 시달렸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받아왔다. 나는 자신을 파문한 교회를 미워하고, 그것을 부정하려고 해 보았지만, 한순간도 하느님을 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미코의 말대로 그 하느님을 잊는다면, 그로부터 해방된다면, 더 이상 벌에 대한 두려움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어진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선교한 지 12년, 비로소 오늘 나는 이방인의 (즉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행복을 알았다. 그것이 행복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기미코와 어제 찾아온 치바라는 청년이 지니고 있는 그 동양인 특유의 가늘고 긴, 멍한 눈의 비밀만은 알 듯한 느낌이 든다. 둔한 광택을 띤 그들의 눈은, 죽은 작은 새의 눈을 생각나게 한다. 그 멍한 시선에는 우리 백인이 왠지 기분 나쁘게 느끼는 무감동한 것, 비정한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과 죄에 무감각한 눈이고, 죽음에 대해 무감동한 눈이었다. 기미코가 때때로 외우는, ‘나무아미타불’은 우리가 바치는 기도 같은 것이 아니라 죄의 무감각에 어울리는 주문이다.
오늘부터 나는 구원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껏 내가 자라온 백인들의 방법과는 전혀 상반된 이방인의 방법을 통해서일 것이다. 그 멍하고 생기 없는 눈으로, 서서히 하느님을 잊고 죄를 거듭 지으면, 결국 죽음에 대해서도 죄에 대해서도 무감동해져 갈 것이라는 것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소설은 마지막에 듀랑 신부가 ‘나’에게 자신의 일기를 맡겨 그간의 일들을 브로우 신부에게 전하고자 했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본문 p.198~199)
당신에게 있어 성탄은, 이 어둠 속에 신神께서 빛을 내려주신 밤이겠지요. 하지만 누런 피부색을 지닌 우리들에게는 어둠도, 빛도, 그 구별이 없습니다. 듀랑 씨는 죽기 전에 그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폭격 직전에 류머티즘을 앓는 다리를 질질 끌며 걸어간 그 노인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폭격이 그를 죽인 것이 아닙니다. 일기를 내게 맡긴 이상, 그가 자살했을 것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가 그 때문에 당신네들의 신神으로부터 심판을 받고 있는지, 아니면 심판도 벌도 없는 황색인의 세계, 지쳐서 눈을 감듯 텅 빈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같은 백색인일지라도 듀랑 씨라면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같이 새하얀 그 세계만큼 피부색이 누런 우리들과 동떨어진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이 편지를 쓰게 한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2
엔도는 이 두 작품을 같은 시기에 병행하여 썼고, 같은 해에 두 작품을 각각 발표했다(1955년「근대문학」5.6호/ 1955년 11월). 이처럼 이 시기 엔도에게 있어서는 <백색>과 <황색>은 첨예하게 대립되는 색이었고, 사상이었고, 신관神觀이었다. 엔도에게 있어서 <백색>과 <황색>의 이분법적 대립양상이 싹트게 된 동기는 유년 시절에 받은 세례와 대학 졸업 후 떠난 프랑스에서의 유학체험이었다.
동양인인 엔도가, 더욱이 독특한 범신적 종교양식을 갖고 있는 일본인인 엔도가, 프랑스에서 서양문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증폭되어가는 <백색인>의 세계와 <황색인>의 세계와의 갈등은, 결국 엔도 문학의 뿌리가 되어갔으며, 이와 같은 이질감과 거리감은 이윽고 <백색>과 <황색>이라는 대립되는 <색>의 문제를 야기했고, 결국 이것을 넘어서 <백색인의 세계가 상징하는 신>과 <황색인의 세계가 상징하는 신>의 문제로 귀결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백색인의 세계가 상징하는 신>은 유일신의 ‘신’으로, <황색인의 세계가 상징하는 신>은 일본의 범신론적인 ‘신들’로 묘사되어갔다. 엔도는 이러한 구조 속에서 신과 신들, 신과 인간, 신들과 인간, 신과 선, 신과 악, 인간과 선, 인간과 악의 문제를 형상화해갔다.
또한 <백색인>과 <황색인>은 인간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악과 선의 대립만을 그린 작품이 아니라, 신이 절대적 가치를 갖는 서구인 <백색인의 세계>에서도 그 신을 믿는 인간과, 그 신을 부정하는 인간이 상호 존재하고 있으며, 이 둘 역시도 항시 대립하고 있음을 그리고 있다. 나아가, 이 작품은 설혹 신을 부정하며 신과 격렬히 투쟁하고 있다하더라도, 그 투쟁을 통해서 이르게 되는 어떤 섭리에 대한 고백성사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 두 작품은 고백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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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전통이 장구한 서양의 세계관과 신이 있든 없든 상관없는 동양의 세계관 사이에서,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고민에 직면한다. 어느 세계든지 신을 믿는 인간과 부정하는 인간이 상호 존재하며 갈등하는데, 신에 관한 문제와 투쟁하는 삶의 과정에서 인간은 결국 어디에 이르게 되는가. 
라파엘 2022-10-24 공감 (29) 댓글 (0)


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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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15년도 최애 소설이었던 ‘깊은 강’ 앤도 슈사쿠 작품이 VPL에 있길래 신나서 집었는데 쉽게 읽히면서도 그 가닥이 잡히지 않아 끝까지 찜찜하게 읽었다. 제목에서 보이듯 종교에 관한 이야기이고 1부 백색인의 이야기 2부 황색인의 이야기로 프랑스와 일본에서 각각 다른 주인공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른 두 줄기가 결국 한 줄기로 만나는 포인트가 있겠지만 캐치하지 못했다. 이건 읽은 것도 안 읽은 것도 아니다. 죄송!

발췌

혼자가 되었다. 유산은 앞으로 10년 동안의 내 생활을 보장하고 있다. 나는 자유다.

중위는 얼굴도 들지 않았다. 나는 채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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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dy.K 2018-08-12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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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 이평춘 옮김, 『신의 아이-백색인』/『신들의 아이-황색인』, 어문학사, 2010. 


대단한 책이다. 인간의 본성과 심리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해온 흔적이 남는 책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날카로운 시선으로 접근했기에 그만큼 다가오는 무게감이 다르다. 대단히 무겁게 다가오지만, 그 날카로운 시선과 접근에 소름이 끼칠 정도다. 우리가 이야기하기 어려워하는 소재를 다루었기 때문일까? 뱀도 뱀이라면 싫어한다지만, 우리도 우리의 내면에 숨겨있는 잔혹성과 폭력성을 꺼내 이야기하면 왠지 거부감이 생긴다. 아니라고 우겨보기도 하지만, 그런다고 바뀔 본성이 아니지 않는가. 신의 아이와 신들의 아이. 이 두 작품을 읽어보고 엔도 슈사쿠에 대해 큰 인상을 받았는데, 특히 전자인 『신의 아이-백색인』에 대해 무섭지만, 관심과 애착이 갔다.

역자도 이번 작품을 번역을 마친 후에도 제목을 정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원제인 백색인, 황색인에 부제목을 붙인 채로 출간하였다고 한다. 독자에게 이 책을 접근하는 방법을 제시해준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신의 아이』에는 30년 넘게 신을 믿어왔고, 20년 넘게 종교 문학을 연구해왔지만, 아직도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고민해오고 있다는 작가의 고뇌가 고스란히 뭍어 나온다. 

카톨릭 신자이면서 프랑스 유학을 갔던 작가의 이력을 떠올려봤을 때 순간, 이건 자서전이 아닌가? 착각을 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묘사하기 어려울만큼의 세밀하고 적나라한 감정 묘사와 고뇌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예수쟁이들의 연민만큼 나를 상처 입히는 것은 없었다’는 ‘나’의 고백은 ‘작가’ 자신의 고백이 아닌가 곱씹어 봤었다. 
나와 신학생인 자크, 그리고 마리 테레즈.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전혀 인과관계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몇가지 사건들이 기묘하게 물려나가면서 죄를 낳고, 죄를 낳게 된다. 

성경에 죄의 삯은 사망이  오라는 구절이 떠오르자 이 작품이 비극적으로 끝날 것임을 예감하게 되었다.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악의 심연으로 빠져들어갈 수 밖에 없나. 

폭력과 괴롭힘, 고문과 죽음. 괴롭히는 사람은 어느 순간 어떠한 죄의식도 없이 일종의 정욕적인 희열까지 느끼게 되고 매질을 끝냈을 때는 마치 육욕의 희열이 돌연 사라졌을 때와 같이 허무함마저 느끼는 장면을 보며 왠지 모를 부끄러움과 섬뜩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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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sosh 2010-05-17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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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실존 

첫 시작부터가 심상치 않은 책이었다. 문체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서술역시 매끄럽다. 군더더기도 없지만 문장상의 장식도 매우 절제되어 있다. 기교가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아름답다... 아름답다.... 하는 느낌을 준다. 도대체 이런 책을 수십년 전에 처녀작으로 썻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 이 책 한권만으로도 대문호의 반열에 올라도 손색이 없다. 작품의 깊이로 보아도, 문장의 흠잡을데 없는 맛으로 보아도...

그의 맛깔나는 문장도 문장이지만, 그의 책이 가지는 매력의 백미는 그가 요즘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존재론적 탐구를 진지하게 하고 있는 책이라는 점이다. 흔히들 그를 기독교 문학의 대가라고들 평한다고 한다. 사실 그는 기독교 문학의 중요한 한 분파를 이루는 의 선과악, 원죄, 인간과 신의 관계같은 주제들을 보기드물게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재미 한국인 문인인 김은국도 그와 비슷한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책을 꼭 종교적인 색채로만 읽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지금은 서양에서 기독교가 많이 쇠태하는듯 하지만, 그가 활동하던 시절의 서양에는 기독교인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고, 기독교적인 주제가 광범위하가 문학의 대상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그의 문학은 또한 그의 학창시절 뜨겁게 유행하던 실존적인 색채가 물씬 풍기고 있다. 요즘 실존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실존주의라는 인류의 지적유산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을 대하면서 우리가 생소하지 않은 감동을 느끼는 이유도 바로, 그가 다루는 문제가 시대를 초월한 인류의 공통의 문제점이기 때문이다. 백색인과 황색인에서 동과 서에 따른 차이점이 부각되긴 하지만, 그 차이는 공통점에 비하면 경미한 편이라고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기대어 않은 삶의 의미라는 자못 심각한 주제와 진지하게 씨름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멋진 독서가 되지 않을까... 아무튼 나는 그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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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하늘 2010-05-05 공감(2) 댓글(0)



    
<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 - 엔도 슈사쿠 


 과거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지만 나라마다 믿는 종교의 종류와 그 수는 모두 다르다. 그리고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민감한 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자신이 믿는 믿음이라는 존재가 ‘신’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믿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자신 외에 또 다른 무엇에 의지하고 싶어한다. 그게 바로 종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잠시나마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종교를 찾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신과 인간 그리고 종교의 관계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과 신에 대해 고찰이라고나 할까? 다소 무겁기도 하지만 종교라는 문제에 있어서 어렵다는 생각마저 느끼기도 했다. 「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게 되었다. 처음에는 제목 때문에 이 책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책을 펼치는 순간 종교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제목에서 언급하는 ‘신의 아이(백색인)’는 프랑스인이지만 어릴 때 충격적인 것을 목격한 뒤로 자신도 그 행동을 하게 된다. 이 부분은 나에게도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신들의 아이(황색인)’는 범신론적이며 책에서 등장하는 ‘듀랑’신부는 모두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던 중 ‘기미코’를 만나게 되고 성욕을 이기지 못하고 일을 저지르고 만다. 그 사건을 계기로 그리스도에서 쫓게 나게 되고 신부의 자리까지 박탈당하게 된다. 이 두 이야기는 각각 다르게 전개된다. 하지만, 두 물줄기가 하나의 강이나 호수에서 만나는 것처럼 이 이야기도 한 곳으로 만나게 된다. 각각 다른 종료를 믿고 있고 다른 사건으로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한 문제나 내면적인 요소를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사건이나 그에 대한 결과를 통해서 종교 문제의식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동양과 서양의 종교문제나 그 방식에 대해서 모두 다르고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차이점은 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종교를 믿고 안 믿고가 아닌 각각의 세계관에 대한 인식이나 가치와 생각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다소 무게감이 있고 가벼운 주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풀어가는 전개 방식도 각각 다른 이야기로 시작하여 하나의 덩어리로 모이는 느낌이 들었다. 종교와 인간 그리고 종교와 신에 대한 문제는 아직 풀리지 않고 계속해서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철학적인 요소도 있었고 신의 아이와 신들의 아이에 대한 대립으로 갈등도 생겨나지만, 그것을 자연스럽게 풀어나가고 있었던 것 같다. 작가 ‘엔도 슈사쿠’의 작품을 처음 접했던 터였지만 종교와 신, 인간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해주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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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v 2010-05-19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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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 

종교 소설과 세속 소설의 차이를 무너뜨린 20세기 일본 문학의 거장 엔도 슈샤쿠의 초기작 이라고 하는데 나는 아직 엔도 슈샤쿠의 작품을 접해 못한 상태에서 이 책을 처음으로 접했다,
엔도 슈샤쿠는 종교와 인간에 대한 놀라운 통찰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여러 차례 오른 바 있는‘일본 현대문학의 거장’이라고 하니 이번 기회에 읽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책도 많이 읽어본 경험이 없었기에 이 책은 나에게 그렇게 쉬운 책도 아니며 페이지수는 작은 책이지만 쉽게 넘어가는 그런 책도 아니였다,

신의 아이(백색인)과 신들의 아이(황색인)이 책의 배경은 세계2차 세계 대전 당시이다,,
신의 아이(백색인)은 독일군의 통역 사무관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나치에 치원해서 나치의 고문자의 일원이 된 '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과거를 회상하면서 서술을 한 이야기이다,
나는 못생긴 아이였고 못생겼을 뿐아니라 태어날때부터 사팔뜨기였다,그래서 부모님들로부터 완전하게 사랑받지도 못했고, 아버지는 방탕한 생활,자신의 쾌락밖에 모르는 사람이였으며,어머니는 그런 남편의 영향으로 어린아이인 나에게 엄격한 금욕주의를 강요해서 아이로써 누려야 할 기쁨과 자유를 금하고 책도 읽지 못하고 하면서 철저하게 청교적인 삶을 강요했는데 이런 어머니에 대한 반항으로 오히려 '나'의 육욕은 학대의 코락을 동반하여 눈을 뜨게 된다.
하녀 이본느가 늙은 개에게 가하는 학대와 고문,고통의 광경을 엿보던 12세의 소년 '나'는 생에 결정적인 흔적을 남겼다,
단순히 여성에 대하서만 자신의 가학본능을 느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모든 인류를 괴롭히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기 시작하게 된것이다,
훗날 고문자의 일원이 되어서 피고문자들의 신음소리, 비명,절규소리에 무언가 꺼림직한 정욕적인 유희를 느끼기도 하고 또 대학때 신학도 친구인 쟈크가 레지스탕트 연락책 활동을 한 죄로 잡혀왔을때 그를 고문하고 신의존재를 부인하도록 만들려고 고문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유일신을 섬기는 백색인(서양인)들의 세계관에서 유일신의 세계를 순응해서 살아가는 쟈크와,,유일신을 거부하고 신의존재를 거부하는 '나'의 모습을 통해 인간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악과 선의 대립도 볼수 있었고, 신을 부정하며 신과 격렬히 투쟁하고 있는 '나'의 모습도 보면서 인간이 악으로 극도로 치닫아 있는 모습도 볼수 있어서 씁쓸했다.



신들의 아이(황색인)도 역시 세계2차 대전속의 혼란한 일본의 모습속에서 성당신자인 치바(나)가 사제에게 편지형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기도 하고 또는 듀랑신부의 일기를 옮겨 놓기도 했다,
치바는 성당신자이지만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살아간다. 징용과 노동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일주일에 두번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지만 죽어가는 생명들에게 연민이 전혀 없다. 그리고 어떤 죄의식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으면서 어린시절의 친구 사이키의 약혼녀와 몇년간 계속 불륜의 관계를 맺어오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듀랑신부,,블란서 사제였던 듀랑신부, 사제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야 하건만, 선교지인 일본에서 일본여인을 범해서 교회에서도 추방당하고 매일매일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질 자기 자신을 보며 괴롭고 비참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어째서 하느님과 교회를 잊지 못하나요 잊으면 되잖아요. 당신은 교회를 버렸잖아요. 그러면서 왜, 언제까지나 그것에만 매여 있는 거죠.
오히려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기만 하면, 용서해 주는 부처님 쪽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166
이렇게 괴로움의 나날들속에서도 또 계속 마음속으로 죄를 짓고 또 행동으로도 죄를 짓는 모습이 참으로 씁쓸하고,결국은 인간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악과 선의 대립만을 그린것이 아닐까 한다,
번역자는 이책처럼 번역하기 어려웠던 책도 없었다고 하지만은 책을 읽는 이도 짧은 글이지만은 상당히 무거운 주제와 내용이라서 가벼운 책은 아니라서 마음이 좀 무겁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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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2010-05-1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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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 신들의 아이 새창으로 보기
신에 대한 문제는 어쩌면 신이 존재하든 하지 않든 불가사의하고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나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끝없은 인간의 호기심에 대해서 어떠한 답도 찾을 수 없다면 아마 미쳐버리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아직도 모든 사람들에게 화두가 되고 있는 것.
인간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그리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은 어디에서 온 건인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문제.
이런 문제들은 인류의 지식이나 정신으로도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가 아닐까요?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그 해답을 찾고자 노력하고 또 누군가는 해답을 구했을지도 모르죠.
만약에 신이 있다면 자연히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답은 풀릴 것 같아요.
그러나 이런 문제가 풀리기는 하지만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죠.
신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죠.
이 책에서는 백색인과 황색인으로 나뉘어 각각의 신과 신들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어요.
신일 수도 있고 어쩌면 신들일 수도 있고,
물론 이것은 신이 존재한다는 과정에서 신성과 인성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고 말이죠.
사실 직접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많은 의문이 생기게 되고 여기에 믿음이라는 또 하나의 가정이 발생하고 끝없는 문제와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구도 또 문제, 해답 찾기를 반복하는 게 어쩌면 우리 인류의 삶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만약에 신이 있다면 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섬기어지는지 또 세계가 왜 신의 뜻대로 사랑으로 가득차지 않는지, 왜 인간에게 죄가 있어야 하는지, 선과 악의 문제 등등.
종교에 대한 문제는 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 인간 자신의 이야기이자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조금은 무거운 주제에 대한 탐구이기에 신과 인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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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야루 2010-05-1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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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 엔도 슈사쿠 새창으로 보기

그러니까 일단 이렇게 이야기하고 시작하자..나~~안 무신론자, 신을 믿지 않는자임.. 가만히 보자...그 신이라는 존재감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되지?..신,,어떤쪽에서는 유일신을 외치면서 나를 제외한 모든 신이란 불리우는 것들은 다 우상숭배이니라..하는 경우도 있고...또 다른곳에서는 인간이 곧 하늘이다~!라고 외쳐대는 곳들도 있다..게다가 어느 나라에서는..건담을 신으로 모시는 경우도 있더라...그 나라는 수많은 신이 존재하는 나라이더라...물론 이 소설의 작가 또한 그나라의 사람이더라...근데 이 소설은 미신과 다신의 의미가 부각된 나라에서 카톨릭적 신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죄악과 신을 향한 순결한 정신 사이에 방황하는 누군가를 의지하고 믿음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의 존재라는 가벼움을 소설적 형식을 빌어 신으로의 죄사함(?..이런말 맞나??.)을 보여준다..

 

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짧고 가벼운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면에 있어서는 묵직함이 한 천톤급은 된다..특히나 저변에 깔린 기조가 종교라는 주제와 인간의 나약함과 죄악적 욕망이라는 근원적인 문제일 경우라믄???..하이고!!~~한숨 나온다..그렇다고 종교와 인간의 욕망에 대한 근원적 믿음의 분석적 고찰(?) 뭐 이런 것 같은 박사논문은 아닝께로 독서에 큰 무리는 없다..그냥 소설이다..한 인간의 욕망과 종교적 반항등을 결부시켜 종교의 의미를 부각시키고자 한 작가가 만들어낸 픽션인게쥐...재미는 있다..게다가 밑바닥에 깔린 의미 조차 느낌이 팍온다.. 종교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역시나 싶다...하지만 난 종교인이 아니라 공감의 차원까지는 다가서기가 어려웠다... 하기사 난 욕망떵어리니까능... 게다가 야한 생각을 많이 해서 머리가 빨리 긴다...더벅머리를 벗어나질 못한다...난 야한 여자가 좋다...응??..그래서 신이 날 멀리 하신다??..ㅋㅋㅋ..미안..농담이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상당히 길다...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이라고 만들어진 이유가 있다...이 작품은 두개의 작품을 하나로 묶었다..물론 작품의 성격상 하나의 주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다..같은 시기에 같은 목적으로 같은 느낌으로 집필된 작품이지만 역시 엔도 슈사쿠는 백색인이라는 작품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다..그 후 병행된 작품인 황색인을 엮어 하나의 작품으로 선보인거쥐..지금..옛날에는 같이 묶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하여튼 지금은 같이 묶어서 나왔다...내용은 비슷하다...두 작품 모두 수기와 고백적 형식의 일기와 주인공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입장이 섞여서 작품이 진행된다...주인공들은 종교적으로 신과 밀접한 관계에 놓인 인물들이나 그들은 신을 배신한다..물론 불사파의 조필의 부하였다면 "직사"당했을 것이지만 신은 그들은 용서하시는건지, 알면서 외면하시는건지.. 우짠지 내비둔다.ㅋ ..그들은 인간의 욕망에 굴복하고 비겁하게 생명을 연장하는 나약한 인간으로 묘사된다..ㅋ 백색인에서의 쟈크가 그러했고 황색인에서의 듀랑신부가 그러했다.. 줄거리는 여기까지...뭐 딴거 없다..신에게 반항하고 인간임에 욕망에 불타올라 신을 저버리고 죄악의 길로 들어선 인간의 반항(?)과 고백과 그 뭐라 그러지?.갑자기 생각이 안나네?..저 머시냐?..화장실 같은데 들어가서 신부님한테 고백하는거...뭐지??....앗!! 고해...뭐 그런 내용으로 진행되는 작품되시게따..그러니까..어찌합니까~~어떻해야할까요~~뭐 이렁거..아님 말고..ㅋ

 

짧고 굵은 작품.. 이렇게 평하면 어떨까 싶다.. 종교인이 아니라 공감의 차원과는 별개의 느낌에서 순수한 소설적 감성으로만 이야기한다면 나쁘지 않았다...신이라는 존재와 인간은 절대적으로 멀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더욱더 끌리는 뭔가가 있었다.. 무신론자라는 나의 입장에서 볼때도 굳이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이해가능한 작품으로 인식되어진다.. 하지만 너무 강한 카톨릭적 감성이기 때문에 반감을 가질만한 독자도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릇이 큰 나같이(??) 종교적 포용력이 무한대이신 분들에게는 그럭저럭 읽을 만한 독서가 되었지 싶고...참고로 띠지에 붙은 종교소설과 세속소설의 차이를 무너뜨린 작품이라는 말에는 뭔가 안맞는듯하다...사실 난 종교소설과 세속소설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혹시라도 의미를 아시는 분이 계시다면 좀 알켜 주시라...그 차이가 무었인지..

 

문득 군대에서 이등병때가 생각난다...난 빵 하나를 위해서라면 신을 마주할 수 있다라고..

몇초간 생각해본 적이 있다....뭔 말인쥐 모르겠으나...하여튼 그때는 그랬다..빵이 신보다 강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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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마다 2010-05-16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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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새창으로 보기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어느날부터인가 살면서 한 가지 종교를 가지고  믿음생활을  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최근에 마음속에 아직 믿음은 많이 부족하지만, 한 가지 종교를 선택해서 다니고 있는 중이다.  이유는 친정 작은어머니가  20대의 젊은 외동딸을 병으로 잃고 힘든 상황이 되었는데,  오랜 믿음생활로  믿음을 갖지 않는 사람들보다  굳건하게 잘 견디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이다.  

   사촌 동생이 유명을 달리 한 것이 벌써 몇 년 전의 일인데,  그때부터 작은어머니를 대할 때마다 가슴속으로는 너무도 안타깝고 힘들게 견디고 계시겠지만,  의외로  당신의 딸이  진정  꼭 쓰임이 필요한 좋은 곳에 갔을 것이라고 긍정하는 마음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작은어머니의 믿음에 대해서 여러 차례 물을 기회를 갖게 되면서 내 생각도 깊어지게 되었다.   

 
  과연  인간에게 있어서 종교란 무엇인가? 믿음을 갖는 마음은 어떤 것인가? 에 대해 제법 진지하게 오랜 시간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 살씩 나이 들어 갈수록 내가 더 늙고 병이 들거나, 앞으로 힘든 일들이 닥치더라도  믿는 마음이 있으면 조금 더 의지가 되고, 마음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건 아닐까 고민하곤 했다.  딱 내가 종교에 대해, 믿음에 대해  이런 저런 갈등과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시기에   동, 서양의 종교관. 종교를 공부한 사람들이 종교와 멀어지거나,   죄를 지었을 때의 갈등등에 대한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종교관에 대해서도,  모든  믿음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게된다.  

 
  아직  종교에 대한  지식도, 마음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책을 읽어 나가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동, 서양의 종교적 차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을 읽다가 종교적인 부분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작가에 대한 검색을 먼저 해보게 되었는데,   일본인으로 태어나 어릴 때 가토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청년기에 프랑스로 가토릭 대학에 유학을 한  그에 대한 정보들을  알게 되니,  조금씩  저자가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일부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본느'의 포동 포동한 무릎은 낙인 찍히듯 내 기억 속에 하얗게,   
                                        너무나도 하얗게 남겨졌다.

                        나의 육욕은 학대의 쾌락을 동반하며 눈을 떴다. 

 
   '신의아이 (백색인)'을  읽어가는 동안, 어느 부분은 정말 진지하게, 또 다른 부분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을  만나면서도  인간과 믿음에 대해, 종교와 악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신의아이 (백색인)' 에 등장하는  주인공 '나'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로부터  청교도 적인  생활을 하도록  교육받는다.  그러다가 어느날  우연히  하녀 '이본느'의 하얀 허벅지를 보면서 자신 안에  숨어 있었던   쾌락에 대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차대전중 독일군대의 통역관이 되어,  청년기에  알게 된 신학생 '자크'를 고문하는 입장이 된다.  그러면서  그의 연인인 '마리 테레즈'를 고문실 옆방에 데려와 범한다.   연인을 통해 마지막으로 '자크'의 자백을 받아내고자 했지만, 결국 ' 자크'는 혀를 깨물어 자살하고 만다.   주인공 '나'의  행동들을  따라가면서  한 인간의 내부에서 선과 악,  쾌락과 갈등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어째서 하느님과 교회를 잊지 못하나요? 잊으면 되잖아요.

     당신은 교회를 버렸잖아요. 그러면서 왜, 언제까지나  그것에만 매여 있는거죠?"

      '신들의 아이 (황색인)' 의 파문당한 신부 '듀랑'과  조금씩 어려운 상황의  그를  돕는  또 다른 신부인 '브로우',  그리고 일본인 이자 교회에서  자신으로 인해 쫓겨난 '듀랑' 과 함께 살고 있는 '기미코'.의 이야기이다.   '황색인'은 백인으로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한 순간의 실수로 파면당하면서,  함께 사는 황색인 기미코 사이에서의 갈등을 볼 수 있다.  나 '치바'가  '브로우'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와  자신을 도와주었던 '브로우' 신부를 위험 속에 빠지게 한 '듀랑' 신부의 일기가  내가 브로우 신부에게 말하는 편지내용과 '듀랑'신부가  나와 브로우 신부, 기미코 사이에서의 갈등등을 적은 일기내용이 번갈아 쓰여져서  서로  다른 백색인과 황색인의 눈으로 보는 종교와 갈등을 보여준다.  서양의 유일신을 믿는 종교관을 가진 '듀랑'과   동양에서 살아온 '기미코'가 가진  기독교를 보는 종교관을 보면서  서양인들의 기독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 무거운 추를 무엇으로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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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랄라~ 2010-05-1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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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 운명과 구원에 대한 질문 새창으로 보기
엔도 슈사쿠라는 이름, 들어는 보았으나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있었으나 이 책(혹은 그의 작품 세계 전체?)의 특징을 규정짓는 것은 2년간의 프랑스 유학과 귀국이 아닌가 한다. 유학 후 '신의 세계'를 경험한 '신들의 세계'의 자식인 자신에 대해 쓴 소설이 '아덴까지'라는 작품인데 이 소설을 쓰고 6개월 후에 이 책에 실린 '백색인'을, 그로부터 6개월 후에 '황색인'을 썼다고 한다. 연도는 1955년, 나이는 대략 35세 정도였을 그... 태생적으로 카톨릭 인이었던 그에게도 시대의 특이성과 문명의 이질성은 폭풍처럼 다가왔던 것일까? 이 소설은 그가 느낀 '이물감'을 거침없이 담아낸다. 

제목도 그렇고 책의 구성도 그렇고 작가의 경력으로 봐도 그렇고, 두 편의 소설이 서로 마주보고 대치하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어설프게나마 들어본 적이 있는 일신교와 다신교가 가지는 철학적 차이를 떠올려보기도 했고 말이다. 무엇보다 상당히 경건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소설이 아닐까 기대했었다. 그러나 왠걸? 이러한 기대들은 하나같이 어긋나버리고 말았다.  

이 소설은 싸늘하게 몰아치는 겨울바람처럼 매섭고 격렬하다.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 일그러져 있으며 스스로의 욕망과 죄책감에 휩쓸린 채로 살아간다. 백색인의 '나'는 자신의 이지러짐을 세계에 관통시키려 드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자신과 쌍둥이처럼 닮았으면서도 그 사실을 부정하며 신이라는 이름의 세계로 자신의 이지러짐을 채우려하는 신부 자크는 용납할 수 없는 존재였다. 카인이 아벨을 망가뜨리듯, 그는 자크의 유일한 욕망인 마리 테레즈를 이용하여 자크를 파멸시키고 죽음으로 몰아간다. '나'는 자크를 죽임으로써 세계의 무의미를 증명해냈지만 결국 황폐하고 무감동할 뿐... 황색인은 세 인물의 고백이 어우러지지만 가장 중심에 있는 인물은 '듀랑 신부'이다. 선교사로 일본에 와서 오랜 세월 신부로 봉사해왔던 그는 기미코라는 여인과의 만나 '타락'한 뒤,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로 삶을 살아간다. 죄책감에 빠진 이들이 그렇듯 그는 스스로를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던져놓고, 마침내 '브로우 신부'를 파멸시킴으로써 자신의 '신'을 버린다. 신이 없기에 황색인은 평온하고 무감할 수 있다고, 그들을 닮는 것이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구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황색인의 경우, 듀랑 신부의 입을 빌어 신이 지배하는 세계와 신들이 지배하는 세계를 대조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이런 점이 그다지 중요하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듀랑 신부는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 신과 신들의 세계를 충돌시켰을 뿐이다. 하물며 백색인에서의 '나'는 무신론자이고, 대적자 자크 신부의 신앙 역시 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비롯된 전형적인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들에게 신이 있다면 그건 오히려 '운명'이라는 세계의 무자비함이다. 자크 신부나 브로우 신부는 그것을 숙명이라 읽어냈을 뿐이고, 백색인 '나'나 기미코는 그렇게 보지 않았을 뿐... 차라리 전쟁이라는 욕망의 향연장에서 지치고 패배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을 인간상들의 모습, 어쩌면 이 글을 쓸 때 엔도가 느꼈을 무력감이 그 모습에 비추어 보일 따름이다.  

결국 이 한 쌍의 소설은 거울을 마주본 듯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신과 신들은 구원을 주지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장난처럼 운명에 휩쓸려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지푸라기라도 움켜잡지 않으면 버티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기에 신의 끄트머리라도 붙들려고 하는 듀랑 신부든, 무의미를 입에 달고 다니는 백색인의 '나', 황색인의 '치바'든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 책은 답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질문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아직 젊은 시절, 전쟁의 상처가 남아있던 시절에 씌여졌던 작품이어서일까? 두껍지 않은 이 책 안에 작가는 평생에 걸쳐 고민해야할 화두를 던져둔 것이 아닐지... 생을 살아가며 작가가 나름의 답을 찾는지는 다른 작품들을 읽어봐야 알 일이리라. 그 답을 들어보고 싶기도, 듣지 않고 싶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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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믈버서난달 2010-05-19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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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색만큼이나 확연히 다른 동서양 종교적 세계관의 차이와 갈등 새창으로 보기
이웃 나라 일본은 야오요로즈카미쿠니(八百万神國), 즉 8백만의 뭇 신들의 나라라고 스스로를 자칭한다. 이러한 만신들을 숭배하는 일본의 민족 종교 신도(神道)는 전체 인구의 95 % 이상인 1억 1천만 명이 숭배할 정도로 일본의 국교로서 자리를 잡았고, 우리보다 일찍 개항했음에도 기독교는 1 % 도 채 안 되는 100 만 명 남짓 정도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기독교가 뿌리 내리지 못한 일본에서 기독교를 주제로 한 “침묵”, “예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 “깊은 강”등을 써왔으며, 종교소설과 세속소설의 경계를 무너뜨린 20세기 문학의 거장으로 여러 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다는 “엔도 슈사쿠”는 특이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번에 어문학사(2010년 4월)에서 출간된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은 종교와 신, 구원의 문제에 관한 그의 일련의 문학세계를 일컫는 “엔도문학”이 형성되기 이전의 초창기 작품으로 그의 문학 세계의 시발점이 되는 작품이라고 한다. 이전에 그의 작품들을 읽어보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 작품이 그의 다른 작품들과 어떠한 경향적 차이가 있는지는 알 수 가 없지만 200여 페이지의 짧은 분량임에도 그가 고민해왔다는 서양과 동양의 종교문화의 차이로부터 겪은 방황, 갈등의 요소들을 어느 정도 엿볼 수는 있었던 그런 책이었다.  


 책은 기독교 유일신앙의 세계인 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 즉 백색인의 세계와 앞에서 말한 동시대의 온갖 만신들의 나라 일본, 즉 황색인의 세계로 나누어진다.  

먼저 백색인의 세계부터 간단하게 요약해보자.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태어난 못생기고 사팔뜨기 소년인 “나”는 어느 날 우연히 늙은 개의 목을 하얀 허벅지로 짓누르며 학대하는 하녀 이본느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 청교도적인 일상에서 일탈하는 그런 쾌락을 느끼게 된다. 대학에서 엄격한 종교적 신념 속에서 생활하는 신학생 “자크”를 만나면서 유일 신앙인 기독교에 대하여 더욱 반발심을 느끼게 되고, 그의 사촌 여동생인 “마리 테레즈”를 그리스도를 배신한 유다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그녀를 쟈크가 그렇게 가지 말라고 당부하던 무도회장에 데려간다.  

나의 입가에는 엷은 웃음이 떠올랐다. 자크에게 있어서 유다가 누구인지, 나는 그때 알았던 것이다 (P.47). 어쨌든 그 여자는 쟈크에게 작은 비밀을 지니게 된 것이다. 작은 비밀은 다른 거짓말, 다른 비밀을 낳고, 그것은 이 배신의 골짜기를 울리면서 무너져 내릴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P.50) 

그로부터 3년 후 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게 되면서 “나”는 게슈타포 통역사로 일하게 되고 그 곳에서 레지스탕스 연락관으로 일하던 신부 “자크”를 만나게 된다. “나”는 종교적 신념과 정의를 부르짖는 쟈크를 비웃으며 마리 테레즈를 잡아와 고문실 옆방에서 그녀에게 위해를 가해 예수를 배신한 유다처럼 그에게도 배신을 강요하지만 그는 고문과 더럽혀지는 그녀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혀를 깨물어 자살하고 만다.  

백색인의 세계가 기독교적인 세계관 내부에서의 갈등에서 비롯된 악을 이야기한다면 황색인의 세계에서는 운명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는 세계에서의 구원과 믿음에 대한 정반대의 종교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8년전 한순간의 욕정에 의해 파문당한 신부 듀랑은 성당의 후배 신부인 브로우 신부의 보살핌으로 근근히 살아간다 . B29가 일본 영토를 직접 폭격하는 전쟁의 막바지 무렵, 듀랑은 자신의 가지고 있는 권총이 발각될까 두려워 브로우 신부의 사제관에 몰래 숨어들어 권총을 숨겨놓고, 거짓 투서를 보내 결국 브로우 신부는 잡혀가게 된다. 그러면서 이 낯선 땅에서의 기독교의 구원과 배신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괴로워하게 된다. 

선교한지 12년, 비로소 오늘 나는 이방인의(즉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행복을 알았다. 그것이 행복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단언할 수 없다. (중략) 그것은 하느님과 죄에 무감각한 눈이고, 죽음에 대해 무감동한 눈이었다.(중략) 오늘부터 나는 구원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껏 내가 자라온 백인들의 방법과는 전혀 상반된 이방인의 방법을 통해서 일 것이다. 그 멍하고 생기 없는 눈으로, 서서히 하느님을 잊고 죄를 거듭 지으면, 결국 죽음에 대해서도 무감동해져 갈 것이라는 것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P.168)

일본인들은 하느님의 존재와 상관없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죄의 고통, 구원에 대한 갈망, 우리 백인이 인간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감각하게, 애매모호한 상태로 살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가 있는지, 이해가 안된다 (중략). 금빛 털이 나 있는 손등은 분명히 백인의 손이었고, 하느님을 믿든지, 미워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백인종의 손이었다, 나는 황색인이 될 수 없었고, 이 피부색 또한 바꿀 수 가 없었다. -(P.191) 

작가는 동, 서양의 종교적 세계관의 차이를 백색인의 세계와 황색인의 세계로 정의하여 모든 인간 운명의 배후에는 신의 은밀한 섭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믿는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그 섭리조차도 하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동양적 - 엄밀하게 말해서는 일본 - 세계관의 차이 때문에 확연히 다를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듀랑이 백인들의 방법과는 다른 구원의 방법을 찾았음에도 결국 자신의 피부색을 바꿀 수 없다고 독백하는 부분에서 이미 운명으로 결정되어 결코 좁혀지지도 않고 넘을 수 없는 두 세계의 간극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엿볼 수 가 있었다. 서로 다른 종말과 구원에 대한 인식, 범신론의 세계는 결국 유일신의 세계에 정복당할 수 밖에 없다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 간격을 좁히기 위한 인위적인 행동에서 비롯된 갈등보다는 서로 다른 차이를 인정하고 평행의 길을 걸어가자는 것이 작가의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종교 간의 차이와 갈등에 관심을 두고 출발했던 작가의 문학관이 과연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그의 문학세계에 있어 본격적인 작품들이 더욱 궁금해졌다. 물론 아직 문학의 방향성이 정립되지 않은 초창기의 작품이어서 이 작품을 통해 엔도 슈사쿠 전체를 이야기하기에는 비약이 심하겠지만, 적어도 엔도 슈사쿠 문학 전반을 꿰뚫는 주제라는 종교에 대한 그의 고민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으로서는 이 책이 손색이 없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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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미르 2010-05-06 공감(1) 댓글(

230408 Namgok Lee | 공자

(4) Namgok Lee | Facebook
230408
Namgok Lee
1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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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儒家)로서 학문을 시작하였으나 유가와 절연(絶緣)하고 독자적인 학파를 형성한 묵자가  유가를 격렬히 비판한 배경이 된 것은 유가 가운데 유교의 진정한 원리는 전혀 알지도 못하거나 거기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정치적인 출세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에만 몰두한 사람이 너무나 많았던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와 동시에 공자의 사상과 행태에 만족하지 못한 묵자의 급진성(공자는 이런 사람을 狂者라고 부른 것 같다)을 현대인들 가운데 일부가 공자보다 더 높이 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급진성이 비록 평등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감각에 와닿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인류 보편사(人類普遍史)의 진행에서는 그 영향력이 공자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국소적이다.

그 중요한 차이를 H.G.크릴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묵자는 자기가 누구보다도 세상의 악을 고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고 믿었으며, 공자와 달리 다른 사람에게 자유로운 선택이나 판단의 여지를 허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나의 가르침만으로도 충분하다. 내 가르침을 버리고 스스로 생각하려는 것은 추수를 포기하고 낟알을 줍는 것과 같다.”
묵자는 빈곤, 무질서 및 전쟁을 비롯한 이 세상의 죄악을 엄격한 권위주의적인 체제로 구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각 집단의 구성원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지도자와 일치되어야하며” 각 집단의 지도자는 다시 그 상급자와 일체가 되는 방식으로 최종적으로는 천자(天子)에게까지 연결되어야 한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 가운데 다음 구절을 연상케 한다. “통합국가의 헌법을 제정하는 원리는 모든 지도자는 하급자에 대해 권위를 갖고, 하급자는 상급자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공자는 사유에 대한 원칙을 제시하였지만, 진리의 고정된 척도는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개인에게 스스로 진리를 발견하는 책임을 맡겼고 그것도 각자의 자유에 일임하였다.
그러나 지적(知的) 자유에는 필연적으로 정신적 노고가 따르기 때문에 인간은 대체로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공자가 인간의 정신에 제공한 것은 ‘평화가 아닌 검(劍)’이었다.
제자 가운데 공자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극소수였고 따라서 공자의 시체가 식자마자 제자들이 아늑한 지적 안식처를 세우고 그 안에서 성전(聖典) 및 결코 오류를 범할 수 없는 성인의 권위를 찾기 시작한 것은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크릴의 맹자에 대한 다음의 언급도 시대를 넘어 오늘의 유사(類似) 진보주의자들을 돌아보게 한다.
<맹자는 당시의 비교적 우수한 유가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사람이지만, 유가 특유의 약점 즉  상류사회를 선망하는 속물(俗物)이었다. 그의 생활이나 여행은 사실 극히 사치스러웠지만 그는 훨씬 더 사치스러운 왕후(王侯)들을 크게 선망하였다.
맹자는 정의만 구현된다면 자기도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이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지위나 사치를 경멸하고 덕(德)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척하였지만, (햄릿에 나오는) 귀부인처럼 도에 지나친 항의를 많이 하였다.>


Namgok Lee
1 d
  · 
'일미진중함시방'
내 마음 안에는 내가 싫어하고 반대한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이 함께 들어있다.
몸이 안좋으니까 잘 보인다.
공자가 일관한 것은 오직 '수기修己' 였다는 것.
그의 모든 외적 활동은 그것의 자연스러운 외화外化.
공자 사상이 그 숱한  풍랑과 왜곡을 겪으면서도 고전古典으로 살아남아 미래를 열어가는 메시지로 작용하는 핵심.

Namgok Lee
3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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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G.크릴의 공자를 읽으면서 드는 단상 하나.
맹자 대(代)에 오면 유자들 가운데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당당하게 유세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맹자는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조언할 때는 그들을 경멸해야 한다.”고 말하며, 
순자는 “진정한 군자는 천지와 동격이기 때문에 훌륭한 유자가 극도의 궁핍한 처지에 빠져도 왕후는 감히 그와 명예를 다툴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들의 자존감을 높였다.
그런데 어떻게 포악한 군주들이 유자들이 ‘혁명’을 설교하는 것을 그대로 두었으며, 극단적인 모욕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에게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였는가?
군주들이 전(全) 중국(中國)을 차지하려는 각축전에서 학자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경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맹자는 수십 대의 수레와 수백명의 종자를 거느리고 여행하였고 제후(諸侯) 사이를 전전하면서 식록(食祿)을 받았다.
물론 구성원의 수가 많아지면 뛰어난 사람들이 다수를 점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맹자는 당시 사람들이 인격을 수양하는 유일한 목적이 높은 지위를 얻으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일단 목적을 달성하면 주의주장은 더 이상 불필요한 것으로 내던져 버린다고 말하고 있으며 순자도 자기 자신이 유가이면서도 그가 속유(俗儒)라고 부른 자들을 통렬히 비난하였다.
일찍이 공자는 ‘예(禮)’의 자구(字句)에 얽매여 그 정신을 망각하는 것을 특별히 경고하였으며, ‘도(道)’에 뜻을 두고 있는 척하면서 개인적인 쾌락과 출세에 관심을 가진 사람을 비난하였다.
논어 옹야 편에 자하라는 제자에게 소인유(小人儒)가 되지말고 군자유(君子儒)가 되라고 당부하는 말이 나온다.
군자(君子)의 특성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논어 이인편에 나오는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는 말이다.
실제로 인간은 어느 한 쪽으로만 되어 있는 경우는 없다. 다만 이(利)와 의(義) 어느 쪽에 더 끌림이 있는가는  인간을 평가하는데 가장 중요한 지점이 아닌가 한다.
공맹시대의 유자를 요즘 말로 하면 폴리페서(polifessor) 쯤 될 것이다.
맹자나 순자 정도 되는 당당한 폴리페서(polifessor)도 드물지만, 소인유(小人儒)와 비슷한 사람이 많다.
내가 보기에는 진보냐 보수냐 하는 차이보다 군자유(君子儒)와 소인유(小人儒)의 차이가 더 본질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적어도 의(義)에 끌림이 더 강한 지식인이나 정치인이라면 그가 보수건 진보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이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위기들을 넘어설 수 있는 지혜와 힘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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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6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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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시카고에서 출생한 미국의 학자 H.G.크릴이 ‘개혁가 공자’를 서술하고 있다.
이런 시도야말로  인류 보편의 사상적 거인으로서 또 위대한 개혁가로서 공자의 진면목을 밝히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을 일부 발췌한다. 
“공자가 주장한 개혁이 과연 ‘민주적’이었다고 말해도 좋은지, 또 만약 그렇다면 어느 정도 ‘민주적’이었는가?
오늘날의 민주정치는 19세기말 및 20세기의 산물이며 최근에 확대된 인류의 경험 뿐 아니라 자연과학 사회과학 및 산업화 등과 같은 현대적 혁신에 크게 기초를 둔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처했던 상황이 현대민주주의 옹호자들이 처했던 상황과 크게 상이相異하였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사상 사이의 相致點(상호일치점)이 있다면 오히려 특별한 흥미를 자아낸다.
매리앰(C.E.Merriam)은 ‘민주주의의 기본 가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1.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 차별보다는 우애 원칙에 근거한 개성의 보호 및 함양의 중요성, 근거도 없이 또는 과도하게 인간차별을 강조하는 데서 비롯된 특권의 폐지.
2. 인류의 완벽성을 부단히 지향하는 것에 대한 확신.
3. 국가의 수익은 본래 집단적인 수익이므로 크게 지연되거나 지나친 차별없이 가능한 한 신속하게 전사회에 분배되어야 한다는 가정.
4. 사회의 방향과 정책의 기본적인 문제에 관해 최후 결정을 대중이 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 그리고 그런 결정을 표현하기 위한 절차를 인정하고 그 결정이 정책으로 반영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
5. 폭력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합의 과정을 거쳐 의식적인 사회변화를 성취할 수 있다는 신념.
이 가운데 4개의 항목은(4번을 제외한 모두) 기본적으로 공자의 사상과 일치하는 것이 분명하고 어떤 것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는 것도 있다.
투표와 관련된 나머지 한 항목이 실제로 가장 중요한 것 같은데, 공자는 대중이 정치를 좌우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앞에서더 지적하였지만 고대 중국에는 투표라는 개념은 없었던 것 같다. 프랑스 혁명이 한참 진행중이었던 1791년 프랑스 헌법이 제출되었을 때, “보통선거안을 부결하는 것이 무산계급은 문맹이고, 투표를 하려면 일정한 훈련과 경험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변호될 수 있었다면” 기원전 500년경 공자가 중국의 정치를 농민계급에게 넘길 것을 제안하지 않았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공자가 이상적인 교육상태나 그 비슷한 상황이라면 대중이 정치를 좌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는지의 여부다. 이것은 답변하기 어려운 문제인데,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것을 종합하여 정치 권력에 관한 그의 의견을 체계적인 서술로 제시해보자.(공자가 결코 이런 것을 제시한 일은 없는 것 같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정부의 고유한 목적은 전체 백성의 복리와 행복이다.
이 목적은 정치에 가장 유능한 사람이 국정을 담당할 때 비로소 달성될 수 있다.
위정자의 능력은 가문, 재산 또는 지위와 필연적인 관련성이 없으며, 오직 인격과 지식에 달려 있다.
인격과 지식은 적절한 교육의 산물이다.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능력을 발휘하도록 교육은 널리 보급되어야 한다.
따라서 적절한 교육을 받은 결과 가장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가 된 사람을 전체 국민 가운데서 선발하여 정치를 위임해야 한다.
이것은 백성 전체가 정치를 좌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결국 일종의 귀족정치 제도이지만, 가문이나 재산에 의한 귀족정치가 아니라 덕망과 능력에 의한 귀족정치이다. 민주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공자의 태도에는 가장 유능한 사람이 임용되는 것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없다는 결함이 있지만, 이것은 역사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공자의 제도에는 전체 백성이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정치란 백성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이론은 확실히 백성들에게 막연하나마 ‘이론상’의 거부권을 부여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정부의 형태나 제도적인 장치의 중요성은 과소 평가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 형태나 제도의 기초가 될 뿐 아니라 그것을 수행하는데도 필요한 정신이나 철학보다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인간의 경험으로 충분히 증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진리는 (또는 적어도 진리의 이해는) 부단히 발전 또는 개화 과정에 있으며 모든 사람이 진리를 창조하고 발전시키는데 참여할 수 있다는 신념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반면에, 진리를 고정적이고 절대적인 실재로 생각하는 철학은 모두 정치적 전체주의의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는 것도 명백해졌다.
(중략)
공자가 절대론의 입장이 아니라 진리의 부단한 탐구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진리를 말하지도 않았고, 절대적인 가치척도를 제시하지도 않았으며, 그들 스스로 진리에 도달하도록 교육하였다.”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하여 목숨을 뺏고 뺏기는 권력투쟁이  공자의 제자를 자처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졌다는 것은 얼마나 빗나간 것인가?
서양의 학자가 본 공자가 그 유명한 주자(朱子)가 본 공자보다 훨씬 공자의 진실에 가깝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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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1 April at 08:45
  · 
크릴의 공자를 읽고 있다.
개혁가로서의 공자를 논하는 장(章)의 일부를 발췌 소개한다.
“공자의 교육론이 혁명적 성격을 띄었다는 것은 여러 다른 주장들 예컨대 노자나 한비자와 비교해볼 때 뚜렷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것이 혁명적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공자 당시에 그의 정치적 주장에 아무도 경계심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은 공자가 개혁가로서 상당한 능력을 갖고 있었음을 잘 말해준다. 맹자와는 달리 공자는 결코 폭군을 죽여야 한다거나 제왕과 농민이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을 직선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의 전체적인 운동은 시작도 되기 전에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좀 더 신중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1세기 뒤에 맹자가 아무 탈 없이 직선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기초를 쌓았던 것이다. 이것은 확고한 방침에서 나온 것 같은데, 부패한 정부 아래 살고 있는 사람은 기회가 오면 용감하게 행동할 용의를 갖고 있어야 하지만 말을 할 때는( 그 자체로는 상황을 바로 잡을 수 없기때문에) 다소 신중해야 한다는 견해를 공자는 표명한 적이 있었다. (憲問 편)”
이 글을 읽으면서 이와 상반되는 상황이 요구되는 시대나 사회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극단적 상황에 극단적 대응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다.
이 극단적 대응 또한 또 다른 극단(極端)이기 때문에 결코 그 자체가 안정되고 평화로운 개혁을 이루기가 어렵지만, 그 후에 나타날 건강하고 조화로운 개혁을 예비하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일 수 있는 것이다.
계속되는 악순환으로 전체가 붕괴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렇게만 된다면 역사는 거칠게나마  순항(順航)할 것이다.
사후(事後)에는 보이지만, 진행 중일 때는 모르는 일들이 역사 속에는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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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26 March at 09:57
  · 
이수태 저 ‘공자의 발견’에 이어 H.G.크릴 저 ‘공자, 인간과 신화’를 두 번 째 읽고 있다.
크릴에게서 학자의 진면모(眞面貌)를 느끼게 한다. 
나는 논리적인 성격도 있지만, 직관적인 성향이 강해서 학자의 길에 들어서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요즘은 학자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사람들과 책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오늘 읽다가 ‘예언자의 신뢰도를 높여주는 것은 백발보다 나은 것이 없다’라는 코멘트 앞에서 혼자 웃는다.
나는 80이 다 되었지만, 흑발(黑髮)이다.
그 말대로라면 나는 예언자의 길을 갔어도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이다.  사이비 예언자의 유혹에서 아예 생래적으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머리 색깔이 아닌 말과 행동으로 사이비 예언자를 감별하는 능력은 다소나마 갖추고 있다는 생각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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