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1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5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25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8장 내버림에 의한 해탈  바보새 01-29 1363 0
24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7장 세 종류의 신앙  바보새 01-29 926 0
23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6장 거룩한 바탈과 귀신바탈  바보새 01-29 806 0
22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5장 滅不滅을 초월하는 至上 자아  바보새 01-29 99 0
21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4장 3성분별  바보새 01-29 970 0
2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3장 밭과 밭알이와 그 분별  바보새 01-29 918 0
19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2장 박티 요가  바보새 01-29 1740 0
18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1장 일체상(一切相)  바보새 01-29 1126 0
17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0장 거룩하신 능력  바보새 01-28 1241 0
16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9장 왕지식과 왕신비  바보새 01-28 1002 0
15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기타 -제8장 브라마 요가  바보새 01-28 1971 0
14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7장 즈나나 비즈나나 요가  바보새 01-23 2783 0
13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6장 진정한 요가(2)  바보새 01-22 926 0
12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6장 진정한 요가(1)  바보새 01-22 1608 0
11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트 기타- 제5장 내버림의 요가(2)  바보새 01-22 928 0
1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5장 내버림의 요가(1)  바보새 01-22 1029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2)  바보새 01-21 1171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1)  바보새 01-21 1120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3장 카르마 요가(2)  바보새 01-20 1040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3장 카르마 요가(1)  바보새 01-20 1663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2장 샴카 요가(2)  바보새 01-20 4766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2장 삼캬 요가(1)  바보새 01-20 1958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장 아르쥬나의 고민  바보새 01-20 6532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책을 읽기 전에  바보새 05-27 1976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바가바드 기타를 읽는 독자들에게  바보새 05-27 1475 0


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2장 샴카 요가(2)
작성자 바보새 16-01-20 05:54 조회4,766회 댓글0건
검색목록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55. 프리다 부인의 아들아, 사람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일체의 애욕을 버리고 자아에 의하여 자아에만 만족할 때에, 그 사람을 일컬어 지혜(般若)가 결정됐다고 하느니라.
자기를 위해서 자아(아트만)에서만 만족을 찾는다는 말은 정신적인 만족을 위해 속에 있는 정신을 들여다볼 뿐이요 밖에 있는 물건들을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밖의 물건은 그 성질상 쾌락 고통을 줄 수밖에 없다. 정신적 만족 혹은 축복은 쾌락이나 행복과는 다른 것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가령 예를 든다면, 부(富)를 가짐으로써 올 수 있는 쾌락이란 나를 속이는 물건일 뿐이다. 정신적인 진정한 만족 혹은 복(福)은 내가 모든 유혹을 이기고 비록 가난과 주림의 고통이 있을지라도 견디어낼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 간디
어떤 물건도 그에게 만족을 줄 수는 없다. 다만 그가 그것 속에서 순수 한 선(善) 곧 하나님을 보는 때에만 그럴 수가 있다. (No creature is to him a comfort save so far as he may apprehend therein pure Good which is God.) — 에케르트
 
56. 고통 속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쾌락 속에서도 애착이 없으며, 애욕도 공포도 분노도 다 벗어버린 사람, 그 사람을 일컬어 생각이 결정된 성자(牟尼)라고 하느니라.
 
57. 어떤 방면에도 애착이 없고 좋은 것을 얻거나 언짢은 것을 얻거나 기뻐도 아니하고 원망도 아니하는 사람, 그 사람은 지혜가 흔들림이 없느니라.
 
58. 마치 거북이 그 사지를 끊어뜨리듯이, 그러한 사람은 제 감관을 감각의 대상(境)으로부터 온전히 끌어들인다. 그런 사람은 지혜가 튼튼히 섰느니라.
 
59. 감각의 대상은 거기에 대해 단식을 하는 사람 앞에서는 사라진다. 그러나 그 맛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극히 높은 이를 보게 될 때는 그 맛도 사라진다.
이것은 단식 또는 그밖의 자기 억제의 방법이 소용없다는 말은 아니 다. 다만 거기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감각의 대상에 대한 욕망을 극복하는 데는 그러한 억제 방법이 필요하다. 다만, 그 뿌리가 뽑히려면 지극히 높은 이에 대한 체험이 있고서야 된다. 고상한 갈망은 저속한 갈망을 정복한다. — 간디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물건이 없음을 가리키는 것 아니다. 만일 욕망이 남아 있으면 물건이 없는 것만으로는 떼어버림이 되지 못한다. 욕망 까지 눌러버려야 떼버림이 된다. 그래야 영혼이 자유한다. 그때는 소유가 아직 남아 있다 해도 관계없다. ⎯십자가의 성요한
저자는 겉으로 피하는 것과 속으로 끊어버리는 것의 차이를 말하고 있다. 몸의 폭군으로부터의 해방만으로는 아니된다. 욕망의 폭군에서까지 해방되어야 한다. — 라다크리슈난
 
60. 왜냐하면, 쿤티 부인의 아들아, 어진 자가 아무리 노력 하고 잘 알고 있더라도, 욕망이란 억제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의 마음을 억지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61. 일체의 감각을 억누르고, 요가로 자리잡고 앉아 나에게 전심(專心)하여라. 감각을 완전히 다스리는 사람이어야만 그 지혜가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다.
정성된 믿음과 그 결과로 오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사람의 노력은 소용이 없다. — 간디
자기 단련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의지와 감정 문제다. 자기 단련은 지고자(至高者)에 대한 환상이 있을 때 쉽게 된다. — 라다크리슈난
종교는 끊임없이 가리워진 돌을 향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모든 제단에 나아감에 있는 것도, 땅에 엎드리는 데 있는 것도, 신의 계신 곳을 향해 손을 드는 데 있는 것도, 짐승의 피로 성전을 물들이는 데 있는 것도, 맹세에 맹세를 거듭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모든 것을 화평한 영혼으로 보는 데 있다. — 루크레티우스
 
62. 사람이 감각의 대상(境)을 골똘히 들여다보면 거기 대한 집착이 생긴다. 집착에서 애욕이 일어나고 애욕에서 분노가 나온다.
애욕(Kama) 욕망(desire, craving).
애욕은 종국에는 분노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끝이 없고 만족할 줄도 모른다. — 간디
감각의 대상을 골똘히 들여다보면(brooding) 마음이 거기 얽혀버리고 주를 골똘히 생각하면 그이 안에 나를 잃게 된다. — 「바가바타 푸라나」
 
63. 분노는 미망을 낳고, 미망에서 기억의 상실이 오고 기억의 상실에서 이성의 파멸이 온다. 이성이 파멸되면 그 사람은 완전히 망해버린다.
이성이 파멸되면 시비 판단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 라다크리슈난
 
64. 그러나 훈련된 자아는 아트만으로 감각을 잘 다스리고, 곱고 밉고를 떠나 있으므로 대상 가운데 걸으면서도 평화에 도달할 수 있다.
 
65. 마음의 평화에서 일체 고통의 소멸이 온다. 마음이 평화하면 그의 이성은 곧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66. 마음의 통일 없는 사람에게 이성 없고, 마음의 통일 없는 사람에게 영감도 없다. 영감이 없는 사람에게는 평화가 없고 평화가 없는 사람에게 어디서 즐거움이 있겠느냐?
영감(bhavana) 간디는 헌신(devotion)이라 했고. 라다크리슈난은 집중력(power of concentration)이라 했고, 세계성전전집에는 정려(靜慮)라 했고, 데이비스(Davies)는 올바른 상태(right condition)라고 했으며. 힐(Hill)은 반성(reflection)이라 했고, 텔랑(telang)은 지식 추구의 유지(perseverance in the persuit of knowledge)라 했고, 에브리맨스 문고판에는 신령 감응(inspiration)이라 해서 가지가지로 번역이 돼 있다.
 
「대학」허두에 있는 “멎을 줄을 안 다음에야 정(定)할 수가 있고, 정하고 난 뒤에야 고요히 할 수가 있고. 고요히 한 후에야 편안할 수 있고, 편안히 한 후에야 깊이 생각할 수 있고, 깊이 생각한 후에야 얻을 수 있느니라”(知止而後有定 定而後能靜 靜而後能安 安而能後能慮 慮而後能得) 란 말이 잘 참고될 듯하다.
 
67. 사람의 마음이 날뛰는 감각을 따라가면 그것이 그 사람의 지혜를 휩쓸어가기를 마치 바람이 물위의 배를 휩쓸듯 한다.
 
68. 그러기 때문에 오, 억센 팔을 가진 자야, 감관을 그 대상으로부터 온전히 물러나게 한 사람이 그 지혜에 흔들림이 없느니라.
 
69. 모든 산 물건에게 밤인 때가 다듬기운 혼에게는 깨는 때요, 모든 산 물건에게 깨는 때는 깨달은 성자에게는 밤이다.
모든 것들이 감각의 대상의 번쩍거리는 빛에 끌릴 때에 성자는 실재를 깨달으려고 열중한다. ᅳ라다크리슈난
니콜슨(Nicholson)은「이슬람의 신비가」(mystics of Islam) 안에서 수피(sufi, 靈知主義者)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밤이 오면 죄수는 감옥을 잊어버리고
밤이 오면 임금은 권세를 잊어버린다.
슬픔도 없고, 득실에 맘을 쓰는 일도 없으며,
이 사람 저 사람이란 생각조차 없다.
이것은 영지자(靈知者, gnostic)의 모습, 그가 깼을 때의 모습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는 그들이 잠이 들거든 깬 줄로 알아라.”
그는 세상 일에 대해 잠을 자고 있다. 낮에도 밤에도,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손에 드신 펜인 듯.
 
70. 그는, 모든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득 차면서도 넘치는 일 없듯이, 모든 애욕이 속으로 흘러들어도 평화를 지킨다.
그러나 애욕을 즐기는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71. 일체의 애욕을 버리고 갈구하는 것도 없이, 나란 생각도 내 것이란 생각도 아니하는 사람은 평화에 이른다.
 
72. 프리다 부인의 아들아, 이것이 브라만 안에 머무는 사람의 상태다. 거기 도달한 사람은 다시 미혹하는 일이 없으며, 비록 임종하는 순간에라도 거기 결정하고 서면 브라만의 니르바나에 들어갈 것이다.
브라만에 머무는(brahmisthiti) 영원한 생명.
브라마 니르바나(brahmanirvana) 범열반(梵涅槃). 영원한 평화, 브라만과 하나됨. 브라만과의 합일이라 한 데 대해 간디는 말하기를 니르바나는 완전한 소멸(extinction) 이 아니다. 내가 이해하는 한으로는 부다의 생활의 중심인 니르바나는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의 완전한 소멸이다. 즉 모든 악독한 것, 모든 썩었고 썩을 수 있는 것들이다. 니르바나는 무덤 속에 있는 캄캄한 죽음의 평화 같은 것이 아니라, 산 평화, 자기 자신을 알고 영원의 가슴팍에 자기 있을 곳을 발견한 줄을 아는 영혼의 산 행복이다. 이 영원의 가슴팍의 있을 곳이 브라마 니르바나다.
니르바나 불교에서는 완전한 상태의 뜻으로 쓰인다. 파다(eamma Pada)는 말하기를 “건강은 최대의 소득이요 자족은 최대의 부요, 신앙은 최선의 벗이요, 열반은 최고의 행복이다”(Health is the greatest gain, contentment is the greatest wealth, fait is the best friend and nirvana is the highest happiness) 라 했다.
이러한 성자들은 니체의 초인, 알렉산더의 신성소유자(神性所有者, deity-bearer)와 공통점이 있다. 즐거움, 정염(靜恬) 내적인 힘과 해방의 의식, 용기, 끈질긴 목적의식, 신 안에서의 단절 없는 생활, 이런 것들이 그들의 특성이다. 그들은 인간 성장의 첨단을 표시한다. 그들은 바로 그 존재와 성격과 의식으로 스스로 인정하는 결점을 넘어설 수 있고 진화의 물결은 보다 높은 새 수준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게 표본을 보여줄 것을 허하고 현재의 이기적이고 부패적인 데서 높이 올라갈 것을 우리게 기대하고 있다.
지혜는 해방의 최고의 방법이다. 그러나 이 지혜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욕심 없는 작업을 제해버리는 것은 아니다. 성자들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이미 브라만 안에 머물고 있으며 이 세상의 불안에서 놓여나 있다. 견고한 지혜의 성자는 무사한 봉사의 생활을 산다. — 라다크리슈난
어떤 사람이 성자를 보고 묻기를 “어떻게 해서 당신은 완전에 도달했습니까” 했더니 그 성자는 대답하기를 “내가 하나님과 합일됨으로써이다. 하나님 이하의 어떤 것에도 나는 안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했다. (Evelyn Underhill의 신비주의) — 에카르트
 
이것이「바가바드기타」라 일컫는「우파니샤드」안에 있는 브라만의 지식 속에서 요가의 학문에 관해서 크리슈나와 아르쥬나가 서로 문답하는 제2장 삼캬 요가의 끝이니라.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4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25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8장 내버림에 의한 해탈  바보새 01-29 1363 0
24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7장 세 종류의 신앙  바보새 01-29 926 0
23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6장 거룩한 바탈과 귀신바탈  바보새 01-29 806 0
22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5장 滅不滅을 초월하는 至上 자아  바보새 01-29 99 0
21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4장 3성분별  바보새 01-29 970 0
2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3장 밭과 밭알이와 그 분별  바보새 01-29 918 0
19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2장 박티 요가  바보새 01-29 1740 0
18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1장 일체상(一切相)  바보새 01-29 1126 0
17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0장 거룩하신 능력  바보새 01-28 1241 0
16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9장 왕지식과 왕신비  바보새 01-28 1002 0
15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기타 -제8장 브라마 요가  바보새 01-28 1971 0
14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7장 즈나나 비즈나나 요가  바보새 01-23 2783 0
13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6장 진정한 요가(2)  바보새 01-22 926 0
12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6장 진정한 요가(1)  바보새 01-22 1608 0
11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트 기타- 제5장 내버림의 요가(2)  바보새 01-22 928 0
1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5장 내버림의 요가(1)  바보새 01-22 1029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2)  바보새 01-21 1171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1)  바보새 01-21 1120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3장 카르마 요가(2)  바보새 01-20 1040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3장 카르마 요가(1)  바보새 01-20 1663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2장 샴카 요가(2)  바보새 01-20 4766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2장 삼캬 요가(1)  바보새 01-20 1958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장 아르쥬나의 고민  바보새 01-20 6532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책을 읽기 전에  바보새 05-27 1976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바가바드 기타를 읽는 독자들에게  바보새 05-27 1475 0


제 2장 삼캬 요가 (1)
 
삼캬(samkhya 혹은 sankhya) 이론이란 뜻.
요가(yoga) 한자로는 유가(瑜伽).
요가는 통일의 뜻으로 쓰이는 말로서 가장 넓은 의미로는 마음과 몸의 통일 즉 의근(意根)과 작업근(作業根)의 통일을 말하는 것이고, 보통은 마음의 통일을 말한다. 그래서 객관(客觀)에 중점을 두면 오감(五感)의 통일이어서 숨을 고르게 하고 의지를 집중시켜서 오감으로 하여금 외계에 붙어버리지 않도록 해서 마음 하나인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을 통일이라고 한다. 주관(主觀)에 중점을 둘 때는 나의 통일이 되는데 나에 대하여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넓게 볼 때는 오감(五感), 오기(五氣), 의지(意志), 이성(理性), 즉 자아를 만들어 가지고 있는 전부를 가리키게 된다. 그때의 나의 통일(atma-yaga)이란 자아의 통일이다. 그러나 좁게 볼 때의 나는 몸 마음을 차지하는 주되는 중심 나만을 가리잤고 한다. 그때의 나의 통일은 나에 의하여 내근(內根)을 통일한다는 뜻으로 나를 주로 한 통일이 된다. 거기서 가장 가까운 것은 이성을 주로 하는 부디 요가(buddhi-yoga), 선정(禪定)에 의한 쟈나 요가(dhyana-yoga), 지식에 의한 즈나나 요가(jnana-yoga), 신념에 의한 박티 요가(bhakti-yoga), 이욕(離欲)을 주로 하는 산야사 요가(sannyasa-yoga), 실수(實修)를 주로 하는 아뱌사 요가(abjuasa-yoga), 이론을 주로 하는 삼캬 요가(samkhya-yoga), 실행을 주로 하는 카르마 요가(karma-yoga)가 된다. 안팎 어디로 보든지 다 마음의 통일 아닌 것 없기 때문에 일반으로 요가라면 마음의 통일로 번역함이 적당하다. 마음의 통일이라는 뜻을 주로 하게 될 때는 마음이 한 방면으로 집중되는 것이므로 경향(傾向), 주의(主義), 신앙(信仰), 교의(敎義) 하는 뜻이 된다. 각 장의 제목에 쓰인 요가는 대개 그런 뜻이다. ① 마음의 통일이 향하는 상태를 주로 할 때는 수행(修行), 수양(修養), 실수(實修), 상유가(常瑜伽) 하는 말로 번역할 수가 있다. 제 5장에서 말하는 요가는 그런 것이다. ② 마음 통일의 방법을 주로 하게 될 때는 행법(行法), 관법(觀法), 상응법(相應法), 유가법(瑜咖法) 하는 말로 할 수 있다. 이것은 ②,④와 서로 통하고 한다. 쓰인 예는 적지만 제 8장 12 같은 것은 여기 속한다. ③ 마음 통일의 결과 즉, 실지(悉地 곧. 成滿位)를 얻은 과상위(果上位)를 또 요가란 말로 표시할 수도 있다. ④제2장, 4장에 그 예가 많다. 마음의 통일로 얻은 힘 즉, 실지(悉地)를 얻은 사람의 현력(現力)을 자재력(自在力), 환력(幻力), 유가력(瑜伽力)이라고 하고도 한다. 제 11장, 18장에 그 예가 있다. ⑤ 그리고 마음 통일을 향하고 있는 사람, 혹은 그것을 이미 얻은 사람을 요기(yogi)라고 하는데 그것을 행자(行者) 혹은 유가행자(瑜伽行者)라고 번역한다. 제6장에 거기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다. ⑥ 마음 통일이 된 사람을 특히 육타(yukta) 혹은 요가 육타(yoga-yukta)라 하고 그 현재 동사를 요감 유지(yogam yuj)라고 해서 ‘마음을 통일한다’ 혹은 ‘요가를 닦는다’ 하는 뜻으로 쓴다. 제 5장, 6장에 가장 많이 쓰인다. ⑦ 전체 18장 700절 중에 요가란 말이 쓰인 것이 157개나 되고 보면 이 책이 스스로를 요가 교전(yoga-sastra)이라고 한 것은 과연 적합한 것을 알 수 있다. — 「세계성전전집」
그릇된 생각으로 인하여 사람은 비(非)를 시(是)로 알게 된다. 그릇된 생각으로 인해 아르쥬나는 친족과 친족 아닌 사람을 차별하게 됐다. 이것이 쓸데없는 차별이란 것을 밝히기 위해 크리슈나는 몸(자아 아닌 것)과 아트만(자아)을 구별하고 몸은 항구하지 못하고 여럿인 데 대해 아트만은 항구하고 하나인 것을 알려준다. 힘씀은 사람이 다스려가는 속에 있지 거기서 나오는 결과에 있지 않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해야 할 것은 오직 그 결과에는 관심말고 제 행동의 방향 혹은 의무를 결정하는 데 있다. 집착 없는, 혹은 무사한 정신으로 제 의무를 다하는 것이 자유에 이르는 길이다. — 간디
 
산자야 말하기를
 
1. 그와 같이 불쌍히 여김에 잡혀 눈에 눈물이 가득 차 어쩔 줄을 몰라하며 낙망하는 그를 보고 마두 귀신을 죽여버리시는 이(크리슈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르쥬나의 ‘불쌍히 여김’은 거룩한 자비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자기 아첨이다. 제 사람을 죽여야 하는 행동에 신경이 쭈그러들어서 하는 것뿐이다. 아르쥬나는 제가 해야 할 일에서 감상적인 자기 불쌍히 여김 때문에 꽁무니를 뺀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스승은 그를 책망한다. 아르쥬나는 카우라바스가 제 친족인 것을 전에도 벌써 알고 있었다. — 라다크리슈난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2. 오, 아르쥬나야, 이 위급한 때에 네게 그러한 망령된 생각이 일어남은 웬일이냐? 이는 마음이 높으신 이들이 품지 않으셨던 바요, 하늘에 이르게 할 수도 없고, 더러운 이름을 가져올 뿐이니라.
마음이 높으신 이들 직역하면 아리안적이란 말이다. 인도 사람의 선조는 아리안 인종이라는데 그 아리안의 뜻은 용맹과 고상(高尙)과 강직(剛直)과 겸양(謙讓)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한다.
 
3. 푸리다 부인의 아들아, 사내답지 못함에 빠지지 말라. 이것은 네게 합당치 않다. 오, 대적을 억누르는 자야, 가엾은 비겁을 떨어버려라. 그리고 일어나라!
 
아르쥬나 말하기를
 
4. 오, 마두 귀신을 죽이시는 이여, 제가 어찌 싸움터에서 공경할 만한 비슈마와 드로나에게 화살을 겨눌 수 있사오리까?
 
5. 이들 존경할 스승들을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이 세상에서 빌어먹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비록 그들이 자기네 이익을 원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제 스승입니다. 저는 그들을 죽임으로써 이 세상에서 피에 물든 복락을 누릴 뿐이옵니다.
피에 물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립 해방의 전쟁이란 것까지도 넣어서, 전쟁치고 피와 원망으로 물들지 않은 것이 있을까?
 
6. 또 우리가 그들을 정복하든 그들이 우리를 정복하든, 그 어느 것이 과연 나은지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죽인다면 살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없는 드리타라슈트라 왕의 아들들이 저기 진을 벌이고 서 있습니다.
 
7. 제 목숨은 슬픈 심정에 오금이 저리고, 제 마음은 어지러워 제 할 의무를 가려낼 수 없습니다. 당신께 묻자옵니다. 확실한 말씀으로 일러주옵소서. 어느 것이 합당하옵니까? 저는 당신의 제자이옵니다. 당신께로 피하여 돌아왔사오니 가르쳐주옵소서.
확실한 아르쥬나는 절망하고 격정하고 의심할 뿐 아니라 또 확실한 것을 간절히 찾고 있다.
스스로 무리인 줄 아는 것은 이성으로 향해 나가는 발걸음이다. 불완전을 의식하는 것은 혼이 살아 있는 증거이다. 살아 있는 한 상하거나 병신 된 점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산 몸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인간의 목숨은 위기를 통하여서 보다 높은 지경으로 나갈 수 있다. 구도자(求道者)가 다 같이 경험하는 것은 빛의 문턱에 가서도 의혹과 어려운 문제의 엄습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혼도 그 속에 빛이 비치기 시작하면 그것이 어둠을 자극해서 맞서 일어나게 한다. 아르쥬나는 친척 친구의 반항이니, 의심이니, 두려움이니, 애욕이니, 욕망이니 하는 안팎의 난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을 다 제단 위에 바쳐 지혜의 불로 태워버려야 한다. 어둠과의 싸움은 빛이 그 사람의 전체를 채울 때까지 계속된다. 아르쥬나는 불행의 습격을 받고 정의와 사악을 분별할 수 없는 혼란에 빠져 제 스승, 자기와 같이 계시는 거룩한 이로부터 오는 빛과 인도를 자기의 자아 속에 찾는다. 사람은 제 하는 방법에만 내맡겨두어서는 아니된다. 제 세계가 온통 파멸된 담엔 사람은 다만 안으로 돌이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의 은혜 속에 밝혀주심을 찾는 수밖에 없다. 아르쥬나는 지식의 탐구자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형이상학적인 것을 찾는 것 아니다. 행동인으로 행동의 법칙, 자기의 다르마, 곤란 속에서 자기해야 할 것을 찾는다. “주여,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아르쥬나와 같이 제 약함을 알고 제 무지를 알아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열심으로 바라서 그것이 무엇임을 깨닫게 되어야 한다. — 라다크리슈난
 
8. 저는 제가 비록 이 땅 위에서 비길 수 없이 부요(富饒)한 왕국을 얻으며 천신(天神)들까지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얻는다 할지라도 제 오감을 다 말리어버리고야 말 이 고뇌를 무엇으로 몰아낼 수 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산쟈야 말하기를
 
9. 구다케샤, 파란타파는 흐리쉬케샤, 고빈다에게 그렇게 말한 다음 다시 “저는 싸우지 않겠습니다” 하고는 잠잠해버렸습니다.
파란타파(Parantapa) 대적을 억누르는 이, 아르쥬나,
고빈다(Govinda) 모든 것을 아시는 주(全知), 크리슈나.
아르쥬나는 스승의 말씀을 기다리지도 않고 제 나름대로 결심을 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구하기는 하면서 마음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니 스승의 일은 더 어려워졌다. — 라다크리슈난
 
10. 오, 바라타시여, 흐리쉬케샤는 두 군대 사이에서 그와 같이 낙망하는 그를 보고 도리어 빙긋이 웃으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웃으심 아르쥬나의 속을 뚫어보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11. 너는 슬퍼할 수 없는 자를 위하여 슬퍼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지혜의 말을 했다. 어진 이는 죽은 자를 위해서도 슬퍼
 
않고 산 자를 위해서도 슬퍼 않는다.
‘지혜의 말’을, 라다크리슈난은 “카쉬미르(Kashimir) 번역에는 ‘너는 분별있는 사람처럼 말하지 못했다’로 되어 있다”고 했으며 간디는 “그러면서 너는 지혜의 빈 말을 했다”로 번역했다.
이 아래 30절까지의 말이 곧 삼캬(samkhya)의 이론이다.
 
12. 나는 일찍이 있지 않았던 때가 없으며, 너도 저 왕들도, 또 이 앞으로도 우리가 있지 않게 될 때는 없을 것이다.
주석가 샹카라(Shankara)는, 여기에 복수를 쓴 것은 그 말하는 것이 서로 다른 우리 육신을 두고 하는 것이요 보편적이며 하나인 대아(大我, Self)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라 했고, 라마누자(Ramanuja)가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와 왕들을 구별해 말한 것은 각 개인의 혼은 불가멸(不可滅)의 것이므로 전우주와 한가지로 영원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라 했다. 여기서 가리키는 것은 절대적인 영(靈)의 영원성이 아니고 경험적인 자아(ego)의 전생(pre-existence)과 후생(post-existence)에 대해서다. 자아가 복수인 것은 경험적 우주 안의 사실이다. 각 개인은 처음의 비존재에서 완전존재로 올라가는 운동 곧 비유(非有, asat)에서 유(有, sat)로 올라가는 운동이다. 삼캬론(samkhya論)에서는 혼(soul)의 복수를 가정하는 데 반해 「기타」에서는 그것을 절충해서 우리는 하나인 크세트라즈나(ksetrajna) 안에 살며, 움직이며, 존재를 가진다고 본다. 브라만은 만물의 근본이지만 그 자신 하나의 물건은 아니다. 브라만은 시간 안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 시간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시 자아는 시(始)도 종(終)도 없다. 혼들은 브라만과 같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는 본질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브라만이다” “네가 곧 그것이다(That art thou)” 하는 말들 그대로다. 수소(Suso)의 말대로 하면 “모든 피조물은 거룩한 본질 속에 그 모형으로 영원 전부터 있었다. 그것들이 거룩한 이상과 일치하는 한 그것들은 창조 전부터 있는 것이요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이다.” “인격 신 곧 창조주는 경험적인 우주와 한가지로 영원히 있다. 어떤 의미로는 그는 경험적인 존재의 총체다. 생명의 주는 자궁(子宮)들 속을 다니신다. 그는 나시는 일이 없으시지만 가지가지 모양으로 나신다.”
샹카라는 말한다. “하나님이야말로 참으로 유일의 전생자(轉生者)시다(transmigrant). 파스칼이 그리스도는 세계 마지막 날까지 고난을 겪으실 것이라고 했던 말과 비교해보라. 그는 인류가 주는 모든 상처를 다 받으신다. 그는 창조된 모든 존재의 상황을 다 견디어보신다. 해방된 혼들은 현재의 생활에서 이미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시간 안에서는 고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가서야 평화에 들어간다. 다만 인격적 지존자(至尊者)는 자유로 제한을 당하시는데 우리는 처를 없이 제한을 당하는 것뿐둴 존재의가 만일 프라크리티(prakriti) 연극의 주인이시라면 우리는 그 연극에 속한 것들이 존재무지는 개인 영혼은 괴롭힐를 다있지만 저 보편적인 영은 어떻게 못한다. 우주의 끝이 올 때까지 개인 영혼들은 서로 다른 질의 내용을 가지고 복수로 계속질의나갈 것이다. 그 다수성(多數性)을 이 우주에서 뗄 수는 없다. 해방된 혼은 참을 알고 그 안에 살 수 있는데 해방되지 못한 것들은 업(業)의 끈에 붙들려매여 생(生)에서 생으로 굴러 간다.” — 라다크리슈난
 
13. 이 몸의 주인은 여기서 어린이와 청년과 어른의 시대를 지내듯이, 그렇듯이 또 다른 몸을 가지는 날이 온다. 어진 이는 그 때문에 당혹하지 않는다.
 
14. 쿤티의 아들아, 감관이 대상과 접촉하면 차고 덥고 즐겁고 괴로움이 일어난다. 그것은 오고가는 것이어서 덧이 없다. 그것을 견디어라. 오, 바라타의 족속아.
감관(感官) 감각을 차지하는 기관, 관(官)은 차지한다는 뜻, 우리 몸에 그것이 다섯이 있다.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그래서 보통 오감(五感) 혹 오관(五官)이라고 한다. 그것이 작용함으로써 감각이 생긴다. 빛, 소리, 냄새, 맛, 살갗에 닿는 느낌이다. 그러면 이에 따른 쾌, 불쾌의 감정이 생기고 그러면 마음이 갈라지고 평안이 깨진다.
이 서로 대립되는 것들은 모두 유한하고 일시적인 원인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들이다. 그러나 브라만에서 오는 즐거움은 보편적인 것이요, 자존(自存)하여서 모든 특수한 원인이나 대상에서 독립하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가분체(不可分體, 떼어놓을 수 없는 몸)가 있어서 복잡한 우주와 접촉함으로써 일어나는 이기적인 존재의 기쁨, 슬픔의 변화를 가능할 수 있도록 붙들어준다. 그 쾌락, 고통의 태도는 습관의 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성공을 반드시 기뻐해야 하고 실패를 반드시 슬퍼해야 하는 까닭은 없다. 우리는 충분히 그것을 꼭같이 평온한 마음으로 대할 수가 있다. 기쁨, 슬픔을 당하는 것은 사아(私我) 곧 의식 때문에, 그것이 생의 습관과 몸에 달려 있으면서 거기 붙어서 지식과 행동을 하고 있는 이상은 언제까지라도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한번 자유를 얻어 거기 대한 관심을 내버리고 신비의 가라앉음 밑에 빠져들게 되면, 즉 그 의식이 밝아짐을 얻으면 그런 것들은 오고가는 것이지 그 자신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에 그 다음에 어떤 것이 와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 라다크리슈난
 
15. 오, 사람 중에 으뜸인 사람아, 그런 것들을 견디어내고 쾌락과 고통을 꼭같이 보는 사람, 그런 어진 이는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이다.
영원한 생명은 죽지 않음과는 다르다. 몸을 가진 자는 다 죽게 되어 있다. 그것은 생사를 초월하는 일이다. 우리가 아직도 슬픔(悲歎) 아픔(哀痛)의 지배를 받고, 물질적인 사건의 시달림을 받으며, 마땅히 뚫고 나가야 하는 의무의 길에서 떨어져나가는 일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우리가 아비쟈(avidya) 곧 무지에 잡혀 있음을 알 수 있다. — 라다크리슈난
 
16. 비유(非有)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하는 것이 유(有) 아닐 수 없다. 이 둘의 궁극(窮極)은 참다움을 본 이에 의해서만 보일 수 있다.
원어(原語)를 모르고 다른 말로 옮겨진 것들만을 보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번역할 수 없다. 영어로 하면 이그지스턴스(existence)와 빙(being)을 어떤 뜻으로 쓰느냐 하는 문제요 한문으로 하면 유(有)와 존재(存在)의 문제다.
참고로 간디 번역에 있는 마하데브 데자이의 보주(補註)를 여기 인용한다.
이것은 모든 것의 불변의 기초가 되는 것(being)과 사라지기 쉬운 것(becoming)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다. 블라바츠키(H.P. Blavatsky)는 그 빙(being)이라는 말 자체부터 잊고 있었으며 장차 있을 그것을 표시하기에는 부적당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 대신 ‘비니스’ (be-ness)라 하면 어떠냐고 하기까지 했다. 모든 비커밍, 모든 이그지스턴스(out-being)는 항구불변으로 있는 것에서부터 솟아나온다.
한문의 유(有)와 재 (在)는 비교하면 좀 서로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유부형재(有父兄在)라 하면 부형이 있어서 있다. 첨의 유는 좀더 근본적이고 재는 좀더 현실적 구체적이다. 유부형이라 하면 때와 곳의 제한 없이 내게 부형 되는 이가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재라 하면 여기 집에 지금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것은 서로 바뀌어 쓰이기도 한다. 우리 말로는 다 ‘있음’이니 참이라는 말이나 붙여서 구별할까? 그때그때의 어감 문제다. 그런 때는 실재라 하면 그만이었는데 그것이 꼭 맞는 것 같지 않아 실존이라 해봤지만 존(存)과 재(在)에는 그 구별이 될 아무 근거도 없다. 이그지스트(exist)가 더 깊은 것 일까, 빙(being)이 더 깊은 것일까? 그러나 그 절 전체의 의미는 그렇게 생각하며 보면 짐작할 만하다. 참과 참 아닌 것에 대해서.
샹카라는 사실적(real, sat)인 것은 그것에 대해 우리 의식이 잘못하는 일이 없는 것이고 비사실적(unreal, asat)인 것은 거기 대해 우리 의식이 잘못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물체에 대한 우리 의식은 다르지만 그 존재에 대한 의식은 다를 수 없다. 비사실적인 것 즉 이 세계의 지나가는 모습들이 언제나 분명한 실재의 모습을 가리고 있다. 라마누쟈는 비사실적인 것은 몸이고 사실적인 것은 영혼이라고 했다. — 라다크리슈난
 
17. 너는 알라, 이 모든 것 속에 속속들이 들어 있는 것(遍滿)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물건이다. 그 변할 수 없는 것을 아무도 꺼버릴 수 없을 것이다.
편만(遍滿) 속속들이 들어 있다(pervade). 삼투(渗透)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속속들이라고 했다. 마하데브 데자이(stretched, spread out)는「이사야」 42장 5절의 “하늘을 창조하시며 펴시고” 하는 말로 자기 번역을 뒷받침했다.
 
18. 영원 불멸이요 헤아려 생각할 수 없는 이가 몸을 쓰고 와 계시는 이 몸들은 끝이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바라타의 족속아, 싸워라.
영원불멸 이 말을 쓴 것은 변경시킬 수도 멸망시킬 수도 없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요, 헤아릴 수 없다 한 것은 또 설명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해도 좋다. 그 어떤 두 가지 뜻이 다 맞는다. 우리 참 자아는 자명한 것이어서 증거도 증명도 소용이 없고, 측량할 수도 없다. 자아는 모든 증명과 측량의 기본이 된다.
 
19. 이것을 죽이는 자로 생각하는 이도, 이것을 죽임을 당하는 자로 생각하는 이도, 다 같이 참을 모르는 이다. 이는 죽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느니라.
이것 아트만, 자아, 현신자(現身者), 몸의 주인, 이것은 삼캬에서 프라크리티와 푸루샤를 구별해서 하는 말이다.
 
20. 그는 나는 일도 없고 죽는 일도 없으며, 일찌기 나타난 일이 없으므로 다시 나타나지 않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는 불생(不生)이요 상주(常住)요 항구(恒久)요 태극(太極)이다. 몸이 죽임을 당하는 때에도 그는 죽임을 당하는 일이 없다.
 
21. 프리다의 아들아, 사람이 만일 이것은 무너뜨릴 수도 없고, 영원이요 불생이요 불멸인 줄을 안다면, 누구를 능히 죽이며 누구를 능히 죽일 수 있게 하겠느냐?
이것을 안다면 어진 이는 천하에 적대하는 사람이 없다(仁者無敵於天下),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 할 때의 인(仁)은 이것 아닐까?
 
22. 사람이 마치 낡은 옷을 버리고 새것을 입는 것과 같이, 그와 같이 이 몸으로 사시는 혼도 낡아버린 몸들을 버리고 다른 새것으로 옮겨가신다.
옮겨간다 영원한 것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는 일이 없지만 몸을 가지고 사는 혼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그럴 때마다 출생하고, 그 과거의 진화와 미래의 필요에 응하여서 자연 속의 물질로부터 마음과 숨과 몸을 꺼내어 자신에 모아가진다. 그 영적인 것(psychic)은 비즈나나(vijnana)요, 그것이 몸(anna),숨(prana), 마음(manas)의 세 겹으로 나타남(三重顯現)을 지지해준다. 이 거친 육신이 떨어져나간 때에도 생기적(生氣的, vital), 또는 심정적(心情的, mantal) 껍질은 아직도 영혼의 탈 물건으로 남아 있다. 다시 태어남은 자연의 한 법칙이다. 생의 가지가지의 형식 사이에는 한 객관적인 관련이 있다.「카다 우파니샤드」(Katha Up.)에는 “마치 곡식알같이 이 유한한 것 (mortal)은 익는 것이고, 또 곡식알과 한가지로 그것은 난다” 했다. 몸으로 삶은 영혼을 위해서 근본적으로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몸을 죽이는 것이 어찌 옳을 수 있을까? 이 구체적인 존재의 세계는 한 의미를 가진다. — 라다크리슈난
 
23. 칼이 그것을 찍을 수 없고, 불이 그것을 태울 수 없고, 물도 그것을 적실 수 없으며, 바람도 그것을 말릴 수 없다.
 
24. 찍을 수 없는 것이 이것이요, 태울 수 없고 적실 수도 없으며 말릴 수도 없는 것이 이것이다. 그것은 영원이요 두루 차 있음(遍滿)이요 불변이요 부동이다. 그는 언제나 하나이다.
 
25. 그는 나타나 뵈지 않는 이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이요 변함이 없는 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러한 그이인 줄 알진대 너는 근심하지 말라.
여기 말한 것은 온전히 삼캬에서 말하는 푸루샤지「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브라만은 아니다, 푸루샤는 모든 형상과 생각과 변화를 뛰어넘은 지경이다. 마음이나 숨이나 몸은 달라질 수 있지만 이것은 그렇지 않다.
크리토(Creto)가 “소크라테스여,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당신을 장사하랍니까? 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대답하기를 ‘어떤 방식이거나 너희 하고 싶은 대로다. 그러나 너희는 우선 나를, 참 나를 붙잡아야지. 걱정 말라, 내 사랑하는 크리토야, 그리고 너희는 내 몸만을 장사한다는 것을 알고,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이거나 보통 하는 대로 너희 생각에 좋은 대로 하여라’” 했다. — 라다크리슈난
 
26. 네가 설혹 그것이 끊임없이 나고 끊임없이 죽는다 생각 하더라도 너는 걱정해서는 안된다, 이 억센 팔 가진 자야.
 
27. 난 자는 반드시 죽는 것이요, 죽은 자는 반드시 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너는 근심하지 말라.
「리어 왕」안에서 에드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은 견딜 줄을 알아야 한다.
세상올 때에 그러했던 것같이, 갈 때에도 또한.
(Men must endure. Their going hence, even as their coming here.)
 
비구니 포타카라(Potacara)가 자식 잃은 어머니들을 위로하기 위해 한말.
 
울지 마라,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오고 싶어 온 것도 아니요,
가고 싶어 가는 것도 아니다.
생각해보라, 네 아들은 이 땅 위에 살려고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 이 짤막한 생을 살려고,
한길로 왔다가 또 다른 길로 가는 것을……
이 생이 그러하면 저 생도 그러하다. 울 것이 무엇이냐?
(Weep not, for such is here the life of man
Unasked he came, unbidden went he hence
Lo! ask thyself again whence came thy son
To bide on earth This little breathing space
By one way come and by another gone……
So hither and so hence-why should ye weep?)
 
나는 들으니 섭생을 잘하는 사람은 뭍으로 다녀도 호랑이나 물소를 만나는 일이 없고, 군(軍)에 들어도 칼날이나 갑옷을 피하는 일이 없다 하더라. 물소도 그 뿔을 내댈 곳이 없고 호랑이도 그 발톱을 박을 데가 없으며 칼도 그 날을 들이밀 데가 없기 때문이다. 어째 그러하냐, 그 죽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蓋聞善攝生者 陸行不遇兕虎 入軍不避兵甲 兕無所投其角 虎無所措其爪 兵無所容其刃夫何故 以其無死地) ᅳ노자
지극한 속이 있는 이는 불로 뜨겁게 할 수가 없고 물에 빠지게 할 수 없으며 춥고 더운 것이 해할 수도 없고 날짐승 들짐승도 상처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至德者 火弗能熱 水弗能溺 寒暑弗能害 禽獸弗能賊 弗謂其薄之也 言察乎安危寧於禍福 謹於去就 莫之能害也) ᅳ 장자
 
28. 모든 산 것의 모양이 그 처음에는 나타나 뵈지 않고, 그 중간에는 보이고, 그 끝에 가서는 다시 뵈지 않는다. 오, 바라타의 아들아, 거기 무엇이 한탄할 것이 있느냐?
 
29. 한 사람은 그것을 보고 놀라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놀랍다 말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그것을 듣고 놀라와한다. 그러나 듣고 나서도 아무도 그것을 참으로 안 자는 없다.
자아의 진리는 만인이 누구나 다 찾을 수 있지만 거기 도달하는 것은 극히 소수이다. 즐겨서 어떤 대가라도 내며 자기단련을 해서 흔들림과 애착이 없는 지경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누구에게나 무차별이지만 대개는 그것을 찾으려는 열심이 없고, 그 열심은 가지면서도 의혹과 우유부단 때문에 떨어지는 사람이 많고, 또 의심치 않아도 난관에 부딪쳐 나가버린다.⎯라다크리슈난
 
30. 모든 몸 속에 들어 계시는 그이는 영원하고 상함을 입는 일이 없으신 이다. 그러므로 바라타의 아들아, 너는 산 물건에 대해서도 걱정할 것이 아니니라.
그와 같이 해서 크리슈나는 순전히 이성에 터잡는 강론으로 육신은 연약한 것이지만 자아 곧 아트만은 영원한 것으로, 설혹 어떤 사정으로 육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는 수가 있더라도 카우라바스들은 내 친척이기 때문에 죽여서는 아니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망상이란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 다음은 아르쥬나의 크샤트리야(Kshatriya)족으로서 할 의무를 사명한다. ⎯간디
 
31. 또한 너의 마땅히 할 의무를 생각해서도 네가 겁을 내는 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냐 하면 크샤트리야족으로서는 의무인 싸움을 하는 것에서 더한 선행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크샤트리야 왕족이라 번역한다. 네 계급 중의 하나.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책임이며, 필요에 의해서는 전쟁을 해서라도 그것을 지켜야 한다.
 
32. 오, 파르다(아르쥬나)야, 그러한 싸움이 구함 없이 오는 것을 만난 크샤트리야는 행복하다. 하늘 가는 문이 열렸다.
하늘 가는 문 「마하바라타」에는 이런 귀절이 있다. “오, 사람 중에 으뜸인 자야, 태양의 성좌를 뚫고 브라만의 지경에 이르는 데는 오직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 하나는 요가에 정통한 출가승이요 또 하나는 싸움을 하다 쓰러지는 무사다.”
 
33. 그러나 네가 만일 이 정당한 싸움을 하지 않는다면 너는 네 의무와 명예를 저버리는 것이요 죄를 얻게 될 것이다.
 
34. 그뿐 아니라, 세상 사람은 언제나 네 불명예를 말할 것인데, 지위 있는 사람에게 불명예는 죽음보다 더 나쁜 것이다.
 
35. 큰 장수들은 네가 겁이 나서 싸움을 피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니 그러면 너는 전에 존경을 받던 모든 이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을 것이다.
 
36. 네 원수들은 가지가지의 더러운 말로 너를 평하며 너를 능력없는 자라 할 것이다. 그보다 더 아픈 일이 또 어디 있겠느냐?
 
37. 네가 죽으면 천당을 얻을 것이요 네가 이기면 이 땅의 즐거움을 누린다. 그러므로 일어나라, 쿤티의 아들아, 싸우기를 결심하여라.
크리슈나는 먼저 가장 높은 진리, 곧 아트만은 영원한 불멸체라는 것과 육신은 지나가버리는 것임을 일러주고, 다음 아르쥬나에게 원하지 않고 닥쳐오는 싸움에서 물러서는 것은 크샤트리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는 그 가장 높은 진리와 의무의 실행은 또 저절로 좋은 것이 따라오기도 한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이제 그 다음 「기타」의 중심적인 교훈을 비치기 시작한다. —간디
형이상적 진리를 보거나 사회적 의무를 보거나 우리의 길은 분명하다. 보다 높은 지경은 우리의 의무를 바른 정신으로 다함으로써 올라갈 수 있게 된다. 다음 절에서 크리슈나는 그 정신을 말한다. — 라다크리슈난
 
38. 쾌락 고통을, 이득 손실을, 승리 패배를 하나로 보고 싸울 태세를 갖추어라. 그리하면 죄를 범함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앞의 절들에서 크리슈나는 불명예와 하늘의 상과 땅의 통치를 생각하라고 강조했다. 세상적인 고려를 하라고 그와 같이 가르치고 나서는 평등관(平等觀)을 가지고 전쟁을 하라고 명령한다. 달라지기를 바라는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지지 말고,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감정의 희생이 되지 말고, 우리의 놓인 상황에 의해서 우리게 지워진 일을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우리가 영원한 것에 신앙을 얻고, 그 실재를 체험하게 될 때. 이 세상의 괴로움은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된다. 루터는 말했다. “저들이 내 생명과 재물과 명예와 자녀와 아내를 다 뺏아간들, 그들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 모든 것은 다 사라질 것이나됬다.뀠님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제 참 목적이 무엇임을 알고 거기다가 자기를 온전히 바치는 사람, 그는 위대한 나됬다다. 비록 그가 다른 모든 것을 빼앗겨버리고 헐벗고 주린 몸으로 홀로 거리를 걸을지라도, 비록 .뀠도 아는 사람이 없고 그 눈동자 속에서 이해해주는 빛을 찾아볼 수 있는 눈이 이려 없을지라도,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제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속의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다.” — 라다크리슈난
맹자가 이르기를, “모든 몬(物)이 내게 갖추어져 있으니 스스로 돌이켜서 정성되면 즐거움이 이에서 더할 것이 없다”(萬物皆備於我 反身而誠 樂莫大焉)고했다.
 
39. 이것은 삼캬에 의해서 너에게 주어진 깨달음이다. 이제 요가에 의한 그것을 들어보라. 오, 파르다야. 네가 만일 이것으로 네 마음을 닦는다면 너는 카르마의 얽맴을 벗어버릴 것이다.
삼캬(samkhya) 한문으로는 승법(僧法), 혹은 수론(數論), 이론. 간디는 여기서는 지식(knowledge)이라 번역했다.
요가(yoga) 에브리맨스 문고판에는 규칙(rule)이라 번역했고 세계성전전집에는 실수(實修)라 했다.
깨달음 지혜(wisdom), 이해(understand).
마음을 닦는다면 간디는 ‘마음가짐에 의지함’(resorting to this sttitde)으로, 라다크리슈난은 ‘지성으로 받아들임’(intelligence accepts it)으로, 일본어역에는 ‘이 각오로 마음을 통일하면’으로 돼 있다.
카르마 업(業, work, action)「노자」「장자」에서 하는 말로 한다면 유위 (有爲)에 해당할 것이다.
바네트(L. D. Barnett)는 말하기를「바가바드기타」는 개인을 초인간적인 능력의 외로운 나라 속에 두어 고립시키자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고, 그것을 사뭇 거룩한 사랑의 가슴속으로 이끌어 들이자는 것이다. 대체로 말해서, 그리 잘됐다고는 할 수 없으나, 두 가지의 요가 혹은 규칙(rule)을 구별해 말한다. 즉 지식의 요가(jnana yoga)와 실수의 요가(Karma yoga)다.
아트만이 불멸체임을 아는 지식은 한탄이 쓸데없음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행동은 지식이 그것을 풀지 못하는 한 얽어매고 있다. 아르쥬나는 취하라고 가르침을 받은 그 무서운 행동의 달림 길에서 어떻게 하면 해방이 될 수 있을까? 이제 행동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과 자유하게 하는 지식에 이르는 두 가지를 다 하게 하는 열쇠를 아르쥬나 앞에 보여준다. 그 것이 요가다. 무집착(無執着) 혹은 무사(無私)의 태도(attitude)다. 요가는 태도라는 뜻으로도 행동이라는 뜻으로도 씌어있다. — 마하데브 데자이
「기타」에서 삼캬는 보통 그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철학의 체계를 의미 하는 것은 아니다. 또 요가도 파탄잘리 요가(patanzali-yoga)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삼캬의 설명은 분명한 푸루샤(自我)와 프라크리티 (非我)의 이 원론인데「기타」에서는 만유의 주인 ‘지극히 높으신 자아’의 실재를 인정함으로써 그것을 초월하고 있다. 삼캬는 불변하는 ‘하나이신 이’ 에 대한 직관을 지적으로 설명해준다. 그것은 지식의 요가이다. 행동의 요가는 카르마 요가이다. 지금까지 말해온 지식은 말로 하거나 학문적으로 토론 할 것이 아니다. 내적인 체험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기타」에서는 삼캬는 지식과 욕망의 포기를 강조하고 있고, 요가는 실행을 강조하고 있다. 자아와 몸과는 서로 다른 것이고, 자아는 이 세계에서 되는 일로는 불가 멸이요 부동이란 것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 행할 것인가? 스승은 부디 요가(buddhi- yoga) 혹은 부디의 통일, 즉 이해의 통일을 설명해준다. 부디(buddhi)는 단순히 개념을 만들어내는 능력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 인지와 분별의 작용도 한다. 이해 혹은 부디는 달관, 불역(不易), 지관(止觀, samata)에까지 훈련되지 않으면 안된다. 마음(manas)은 감관에 연결될 것이 아니라 마음보다는 높은 부디에 의해서 인도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부디와 연합돼야 한다(buddhi- yuka).「기타」의 시대에 형성되고 있었던 삼캬론의 영향이 여기 있는 것은 분명하다. 거기 의한다면 푸루샤는 비활동적이요 그러므로 얽매임이나 해방됨이 실지로 거기서 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24우주 원리의 하나인 부디에서 오는 것이다. 프라크리티에서는 물질의 5요소인 지(地), 수(水), 화(火), 풍(風),공(空)과 물질의 5 근(根)인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과 부디 혹은 지(知)와 의(意)의 분별 원리인 마하트와 아함카라 혹은 자기 감각, 마음과 그 열 개의 감각 능력, 다섯 지식, 다섯 행동이 차례차례로 나온다. 해방 은 부디가 푸루샤와 프라크리티를 분별하게 될 때에 이루어진다.
이 견해가「기타」유신론 속에 받아들여져 있다. 부디는 차부고, 몸이 차고, 감관이 그것을 이끄는 말인데, 그 말을 어거하는 것이 마음(manas)이다. 자아(self)는 부디 위에 있지만 그것은 수동적인 중인이다.「카다 우파니샤드」에는 부디가 차부로서 마음을 통해 감관을 통제하여서 자아를 알 수 있게 한다. 부디가 만일 자아의 의식에 의하여 비쳐줌을 입어서 그것을 제 일생의 빛과 주가 되게 하면 그 인도가 우주 목적과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만일 아트만(atman)의 빛이 부디 위에 적당하게 반사된다면, 다시 말해서, 부디가 만일 모두 어둡게 하는 경향을 깨끗이 벗어버린다면, 그 빛이 일그러지는 일이 없을 것이고, 따라서 부디는 영과 연합이 될 것이다. 사아(私我)의 생각과 분리가 조화의 비전에 의해 사라져버리고 개개가 전체요, 전체가 개개이게 될 것이다. 삼캬와 요가는「기타」안에서는 서로 갈라진 것이 아니라, 같은 목적을 가지면서 서로 다른 방법을 가질 뿐이다. — 라다크리슈난
 
40. 여기는 힘써서 헛된 법이 없고 잘못에 빠짐도 없다. 이 법(다르마)을 조금 지킴으로써만도 너를 큰 두려움에서 건져줄 것이다.
 
41. 쿠루의 아들아, 여기서는 결정적인 태도가 오직 하나 있을 뿐이다. 결정적이 되지 못하는 생각이란 가지가 많고 끝이 없는 법이다.
여기서 이 요가에서는, 혹은 이 일에서는. 참고로, 세계성전전집에서는 ‘현세에서는’이라고 했다.
인생의 실현은 거룩한 계명이 지시해주는 목적에 대해 자기를 온전히 받침으로 되는 것이지 결코 무한한 가능성들을 무턱대고 추구함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다. 한 점에만 집중하는 것은 수양해서만 가능하다. 이리저리 헤매는 것은 자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상태지만, 거기서 벗어나서 자유로와지려면 그것은 자연 혹은 성, 인종 혹은 민족적 신비주의로 될 것이 아니라, 참(reality)에 대한 순수한 체험에 의해서만 될 수 있다. 그런 체험을 기초로 하는 전심(專心)이야말로 최고의 덕이요, 그것은 결코 광신으로 빗나가는 일이 없다. — 라다크리슈난
중용(中庸)의 중(中)이 곧 이것일 것이요, 공자의 오도(吾道) 일이관지(一以貫之)도 이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저 집중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요, 하나이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라, 그 중(中)이 어디냐, 그 일(一)이 뭐냐 가 문제다. 그것은 어디도 아니요 무엇도 아닌 데 있다. 그러기 때문에 노자 장자는 허무, 적막, 염담(恬淡), 무위를 강조했고, 불교에서는 불사선(不思善) 불사악(不思惡)을 말한다. 유대교 기독교의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만을 섬기라고 하면서 자기는 이름이 없다 했고,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이라도 만들어서는 아니 된다고 했다.
 
42,43. 프리다의 아들아, 아지 못하는 것들은「베다」만을 좋아하면서 그것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했고, 애욕을 자기로 삼고 천당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그들이 가지가지의 꽃다운 말을 하며, 향락과 권력을 위해 가지가지의 특별한 의식을 보여 주었으나, 그 말은 결국 행동의 결과에는 전생(轉生)에 이를 뿐이요,
 
44. 향락과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 말에 미혹되어 시비 판단의 지혜를 잃어버리고 확고한 결정이 없기 때문에, 최고의 통일지경에 이를 수가 없느니라.
스승은 여기서 진정한 행동과 의식적인 경건을 구별해서 말하고 있다. 「베다」의 제사의 목적은 물질적인 갚아주심을 얻는데 있지만「기타」는 모든 이기적인 욕망과 행동을 다 버리라고 한다. 그래서 생활 전체를 제물로 삼아서 진정으로 바치라고 한다. ᅳ라다크리슈난
「베다」의식과「기타」가 가리키는 요가를 대립시켜서 하는 말이다.「베다」의식은 천당과 거기 이르는 공덕을 얻기 위해 수많은 예식, 의식을 명한다. 그런 것은「베다」의 짬(眞髓)에서는 먼 것이요 그 공덕은 오래 가지도 못하는 것이므로 쓸데없다. 一간디
「문다카 우파니샤드」(Mundaka Up.)에는 이런 말이 있다. “희생을 바치는 의식만이 효력이 있고 그밖의 것은 아무것도 효력이 없다는 이들 어리석은 자들은 천당에서 행복을 다 누리고 난 다음에는 이 세상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베다」시대의 아리안들은 마치 천진난만한 어린이들같이 인생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인류의 청년시대를 나타낸다. 그들의 생활은 아직도 가지가지의 미혹시키는 꿈으로 더러워지지 않은, 청신하고 매력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또 성년(成年)의 균형 잡힌 지혜를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기타」의 저자는 그 주의를「베다」의 카르마칸다(karmakanda)에 국한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베다」의 교훈의 전부는 아니다.「베다」는 갚아주심 (그것이 일시적인 천당의 것이었거나 또는 새 몸을 타가지고 나는 생활의 것이었거나간에)을 바라고 행동하라고 가르치는데 부디 요가 는 우리를 해방으로 이끌어준다. — 라다크리슈난
 
45.「베다」는 삼성을 그 주제로 삼는다. 그러나, 아르쥬나야, 너는 삼성을 초월하라. (대립하는 두 반대의) 쌍에서 빠져 나오라. 영원한 참에 굳게 서라. 얻음 지킴을 생각지 말라. 자 아를 가져 라.
삼성(三性) 선성(善性, sattva) 동성(動性, rajas), 암성 (暗性, tammas).
성(性) 구나(gunas).
자아 보통 우리들의 의식이 나다 하는 것은 소아(小我) 혹은 거짓 나(self)로 쓰고, 거기 대해 참 깨달음에 의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참 나 혹은 대아(大我, Self)로 쓴다.
자아 가짐 아트마반(atmavan).
자아를 가짐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 — 아파스탐바
출생도 사멸도 없는 영, 곧 불멸의 영을 깨닫는 일, 우리가 알 수 없는 ‘그이’ 를 알게 되는 일이 인생의 진정한 목적이다. — 「우파니샤드」
46. 홍수가 났을 때에 우물이 사람에게 소용이 되는이만큼, 깨달은 브라만에게 모든「베다」가 소용되는 것은 바로 그만큼 하다.
브라만(braman) 두 가지로 번역할 수 있다. 브라만은 깨달은 사람, 혹은 자아의 실현을 한 사람.
이 절에 대해서는 주석자 사이에 논쟁이 많다. 어떤 이는 깨달은 사람 에개는「베다」는 조금도 소용이 없다 하고, 어떤 이는 홍수가 났다 하더라노 우물이 어떤 한정된 소용이 있을 수 있듯이「베다」도 깨달은 자에게 소용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베다의 의식을「베다」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순간 존재의 필요는 없어진다. — 마하데브 데자이
강에서 물을 길어 쓰는 사람은 우물을 그리 가깝게 알지 않듯이 어진 이는 의식 행함에 아무런 애착을 가지지 않는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의식을 지킴이 아무 가치가 없다. — 「마하바라타」
 
47. 네 할 일은 오직 행동에만 있지, 결코 그 결과에 있지 않다. 행동의 결과를 네 동기가 되게 하지 말라. 그러나 또 행동 아니함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 유명한 절 안에는 무사(無私) 원리의 짬이 들어 있다. 우리가 만일 우리 일을 할 때, 가령 밭을 갈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부를 때에, 명예나 이득이나 그런 딴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무사에서 떠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그 선한 뜻 외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성공실패는 그 개인만이 아니고 다른 여러 가지 요소에도 달려 있다. 기요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는 말했다. “나는 싸웠다. 그거면 다다. 승리는 운명의 손에 달렸다.”(I have fought, that is much, victory is in the hands of fate)―라다크리슈난
제갈양(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 “제 몸을 굽혀 다 지치고 부스러질 때까지 하다가 죽은 담에 말 뿐이지, 지고 이기고, 날카롭고 무디고(利害) 하는 데 이르러서는 제 지혜를 가지고 능히 미리 알 바가 아닙니다.” (臣 糊躬盡疼 死而後己 至於成敗利純 非臣之明 所能逆親也)
이것을 목적 생각은 도무지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고 또 해서도 아니된다. 기독 신자라면 곧 그런 반대를 할 것이다. 최고의 목적은 인간 앞에 벌써 놓여 있다. 자아의 실현, 또는 자유다. 모든 행동의 결과를 생각지 말라는 것도 이 목적을 위해서 하는 말이다.
우리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뜻이 톨스토이의 신앙 고백 속에 아름답게 그려져 있는 것을 본다. “결과 포기의 신앙은……우리는 어떤 요구를 가지고 있다는 가정 위에 놓여 있다. 그러나 사람이 그럴 권리는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해서는 아니된다. 그는 자기가 누리고 있는 평안 때문에 언제나 빚을 지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에게 어떤 요구도 할 수가 없다. 이 봉사나 자기 생활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도 다 같이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또 그렇다고 결과를 바라서는 아니되기 때문에 결과를 가지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대로 결과를 포기하기 때문의 궁극의 결과는 더욱더 확실해진다.”
코란은 같은 생각을 다시금 다시금 강조한다. — 마하데브 데자이
우리 행동 뒤에 사욕적(私欲的)인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된다. 그러나 행동의 결과 생각을 떠난다는 것을 모른다는 말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도, 내버린다는 말도 아니다. 떠난다는 것은 미리 생각한 결과가 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미리 생각한 결과가 적당한시기에 가면 틀림없이 온다는 신앙이 확실하다는 증거다. ᅳ간디
 
48. 부의 정복자야, 너는 집착을 내버리고, 요가에 굳게 머물러 서서 되고 안되고를 평등으로 보는 마음을 가지고 행동하라. 평등으로 보는 마음을 요가라 하느니라.
부(富)의 정복자 아르쥬나를 가리킴.
요가에 굳게 머물러(yogasthah) 굳게 속이 가라앉은 마음.
평등으로 보는 마음(samatvam) 속에 균형잡힌 마음.
평등으로 보는 마음, 이것은 자기극복이다. 노여움, 고민, 자랑, 야심 을 극복한 것이다. 속의 법칙의 힘에 의해서 행동하는 사람이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선다. — 라다크리슈난
 
49. 부의 정복자야, 단순한 행동은 이성의 요가보다는 훨씬 떨어진 지경이다. 이성 속으로 피하라. 가엾은 것은 결과를 동기로 삼는 자들이니라.
단순한 행동 자기를 위한 행동, 결과만 보는 행동.
이성(理性)의 요가 부디 요가.
이성 속으로 부디 요가를 닦음으로써.
 
50. 이성의 요가를 닦은 사람은 이 세상에 있어서도 능히 선행과 악행을 다 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일어나 요가에 힘을 쓰라. 요가는 행동의 훈련이다.
 
51. 어진 이는 이성에 의한 요가를 닦음으로써 행동에서 오는 결과를 버리고 생의 얽맴에서 벗어나 모든 고통이 없는 지경고 쟝른다.
모든 고통이 없는 지경 해탈, 혹은 모크샤.
 
52. 네 이성이 미망에서 오는 혼란을 넘어설 때 너는 이미 들은 것과 장차들을 것에 대하여 마찬가지로 관계하지 않게 될 것이다.
 
53. 네 이성이, 비록 많은 들음으로 인해 미혹되면서도, 부동 불변으로 사마디에 머무른다면, 그때 너는 요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들음 「베다」로 해석하는 이도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도 있다.
사마디(samadhi) 한문으로는 삼매(三昧), 의식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가장 높은 종류의 의식을 갖는 지경이다.
정신이 통일되는 그 대상은 거룩한 자아(Dvine Self)다. 부디 요가는「베 다」의식을 뛰어넘어서 우리 의무를 행동의 결과에 대한 아무런 집착도 없이 할 수 있게 되는 지경에 이르는 방법이다. 행동 아니할 수는 없다. 그러나 평등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것이 어떤 행동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다. 무엇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 어떤 정신으로 행동 하느냐가 문제다. — 라다크리슈난
노자의 “함 없는 행위이며, 말씀 아닌 가르침”(無爲之行不言之敎)이라든가 예수의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는 것도, 행동 아니 하고 말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하되 ‘나’라는 의식을 초월해서, 도(道) 자체, 성령 자체가 하게 되는 것이다.
 
아르쥬나 말하기를
 
54. 케샤바시여, 이 튼튼한 지혜의 사람, 삼매에 머무는 사람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생각이 결정된 사람은 어떻게 말을 하며, 어떻게 앉으며 어떻게 걷습니까?
케샤바(Keshava) 크리슈나를 가리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