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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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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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요한
하도 너무 많은 인물과 사상과 철학과 주의가 내게 영향을 끼쳐서 나도 내 자신을 딱히 정의할 수 없으나,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성경을 100% 신뢰하는 것과 그리고 오늘보다는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서 타협하지 말고 계속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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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한ndrotpoSest63g7  · 1. 돌이켜보면, 제 주변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첫째, 끊임없이 제게 무언가를 해달라고 하는 사람입니다.둘째, 끊임없이 제게 무언가를 해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당연히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은 저를 피곤하고 힘들게 만드는 유형입니다.2. 그래서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혹시 나도 내가 필요할 때만 누군가를 찾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그런 일이 있다면 진심으로 반성하고 참회합니다.그리고 기왕이면 나도 누군가에게 더 많이 나누고 베푸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3. 매일 저녁에 기도하면서 지난 10년 간 단 한 번도 빼놓지 않은 기도가 있습니다."주님,저를 지금까지 도와준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새물결플러스와 새물결아카데미가 버틸 수 있었습니다.저는 그 도움을 다 기억 못해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두 아십니다.저는 그 도움을 다 못 갚아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갚절로 갚아주실 수 있으십니다.부디 저를 도와주신 분들의 선한 의지와 따뜻한 심장과 친절한 손길을 기억하시고, 그분들의 인생에 가장 필요한 은총으로 채워주옵소서."4. 아주 가끔씩은,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응징하고 복수하는 기도를 할까 하는 유혹이 들기도 하지만, 그런 허접하고 허망한 기도를 해서 뭐하겠나 싶어 이내 마음을 접습니다.5. 인생이 짧습니다.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좋은 기억을 간직하며 살기에도 모자랍니다.제게 늘 넉넉한 인심을 베풀어주셨던 모든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Intro
대표 at 도서출판 새물결플러스 &새물결아카데미
Lives in Seoul, Korea
From Seoul, Korea
Followed by 41,575 peoplePosts김요한
  · 오늘날처럼 '기독교'가 '죽'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에 돌을 던지기는 편해도 기독교를 변호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그런 면에서 종교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는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그는 기독교를 옹호하고 칭찬하는 데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모두 쏟아붓기 때문이다.… See more14 comments

최강렬셋다 구입하고 읽었어요. ㅋReply3 dYosub Lee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의 책을 기독교 출판사에서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불가지론자라기 보다는 진정 가나안 성도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그의 저작들을 읽을 때마다 듭니다Reply6 d"Most relevant" is selected, so some comments may have been filtered out.김요한
  · 1. 박정희 때 서울 강남을 개발한다며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을 경기도 광주(현 성남)로 강제 이주시켰다.2. 전두환-노태우 때 서울올림픽 개최하는 데 미관상 국격을 떨어뜨린다며 서울의 소위 달동네 사람들을 강제로 경기 외곽으로 쫓아냈다. 이 때문에 많은 달동네 사람들이 산 기슭에 땅을 파고 비닐로 지붕을 만들어 생활하기도 했다.3. 윤석열 때 (앞으로) 반지하에는 사람이 못 살게 하겠다고 밝힌 것은, 뜬금없는 정책이 아니라 한국의 우파 정치 세력이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맥락이 있는 정치적 행위다.… See more24 comments

Woo Shin Lee슬픈 사실은 그렇게 쫓겨난 사람들이 윤석렬과 국짐당같은 수구정당을 찍는다는 것.Reply1 w김요한Sorpesdont0 · 논어에 '부지육미'란 말이 나옵니다.쉽게 말해 '고기 맛을 잊었다'는 뜻입니다.'부지육미'는 종종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안다'는 뜻으로  변형되어 회자됩니다.즉 어렸을 때 가난해서 고기를 못 먹고 자란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고기 맛을 제대로 알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See more29 comments

오태헌모름지기 사람은 자기 븐수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평생을 본인 입맛대로 수사와 기소하는 것 밖에 모르는 9수인생이 국민의 안전과 나라의 국익을 알기나 하겠습니까! 안타까운건 저런 자를 계속 찍고 옹오하는 사람들이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는게 문제인거죠! 언제나 혜안을 가지고 투표를 할건지....Reply1 w김요한
  · 나는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이지만, 한국의  주요 종교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아니, 한국의 주요 종교가 한국사회의 미래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한다.더 심하게 이야기하면, 한국의 주요 종교들은 대체로 우리 사회의 '암적' 존재와 같다고 생각한다.… See more42 comments

박규택종교가 할 일은 이런 피라미드 사회를 뛰어 넘어 모든 사람이 같은 높이에서 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피라미드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삶을 견디는 사람에게 신앙의 이름으로 마약을 투여하는 것이 아니라. 아멘Reply1 w김요한

국민이 탄 배가 가라앉는 데도 집에서 안 나온 대통령이나,국민이 사는 집이 침수되는 걸 보면서도 본인은 집에 갔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대통령이나 본질은 똑같습니다.무능하고 사악합니다.44 comments

이기송그분께서는 (무)능하고 (사)악하기에 (무사)한가 봅니다~Reply1 w"Most relevant" is selected, so some comments may have been filtered out.김요한
  · 1. 올 여름에 우리 직원들에게 고급 텀블러를 하나씩 사서 선물했다.우리 직원들뿐 아니라 회사를 방문하는 분들께도 하나씩 선물했다.텀블러 구매 비용으로 쏠쏠히 쓴 셈이다.여름에는 텀블러 사용이 머그컵보다 훨씬 낫다.… See more19 comments

정운희Reply1 w"Most relevant" is selected, so some comments may have been filtered out.김요한
  · 매주 월요일은 '바이블에센스'를 촬영하는 날이다.요즘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바이블에센스가 길을 잃었다'는 푸념(?)을 하곤 한다.애초에 이 성경 강의 영상을 만들 때만 해도 나름 짧고, 재밌고, 발랄한 컨셉으로 가려고 했는데, 막상 시작을 하니 갈수록 길고, 무겁고, 딱딱하고, 진지한 모드로 직진하고 있다.… See more31 comments

이창훈Reply1 w김요한

대통령직이 뭐하는 자리인지도 모르고 거기 앉아 있는 윤석열은 그렇다쳐도 아직도 그를 지지하는 20%대의 사람들은 대체 뭐하는 건가?얼마나 더 피눈물을 흘려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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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업 현상. 아.. 나는 왜 이 글을 쓰고 있나.. - 뽐뿌:종교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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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업 현상. 아.. 나는 왜 이 글을 쓰고 있나.. 1
Humble_David2012-09-17 11:17 | 조회 : 7212 / 추천 : 1
링크 : http://humbledavid.woobi.co.kr/42



박성업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들이 많더라구요.
그래서 실제로 어제 좀 정리해서 글을 써봤습니다.
근데 사실 정리가 안되어서 다시 쓸려고 고민중입니다.
거기다가 박성업 fb에서 몇몇 논쟁을 하면서 더 신기한 사실들을 발견했거든요 ^^

여튼 박성업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도 있는것 같아서 글 나눌려고 가져옵니다 :)



박성업 현상. 아.. 나는 왜 이 글을 쓰고 있나..




이 사람에 대해 고민하면 할수록 한국교회에 대한 비참함이 생긴다. 마음이 너무 안좋다.

01.
가끔 나는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기독교적 논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무성할때에 다른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하는 독특한 "관점"이 생길때가 있다. 예전에는 그것자체가 "성령"을 잘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그때만 생각하면 완전 부끄러움ㅋㅋㅋㅋㅋ) 때로 그런 독특한 관점을 썰로 풀다보면 평생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서 기독교적/공동체적/신학적/신앙적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또 제자그룹을 이끌기도 하고 이렇게 평생 글만 쓰고 강의만 불려다니며 사는 것이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든다.(과연 나는 그런 삶을 살아나갈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치열한 고민이다.)

그런데 솔직히 "박성업"이란 인물과 그러한 인물로 일어난 "박성업 현상(?)"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하다보니 참 내 스스로에게 한심한 생각들이 많이 든다. 지금까지 많은 기독교적 인물을 언급하거나 비평하는 글들을 써왔고 주변 후배들에게도 참 많은 기독교 인물들을 비평했다. 일례로 김동호 목사님, 이찬수 목사님, 전병욱 목사, 박옥수 목사 등이었다. 뭐 그런데로 이런 분들을 언급하고 비평하는 것들이 "생산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각기 인물마다 한국기독교의 역사적 맥락에 있어 흐름을 짚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성업이란 인물을 내가 구지 거론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 박성업현상 혹은 박성업에 대해서 내가 언급할만큼 그의 사상이 파격적이거나 혹은 뚜렷한 색을 가지고 있을까? 흠.... 솔직히 지금까지는 기분이 찝찝하다.

02.
일단 박성업을 까기전에 소위 나 스스로의 흑역사(?)부터 고백하고 가야겠다. 나는 2008년쯤부터 2010년까지 횟수로 따지자면 약 3년에 걸쳐 소위 "신사도운동". 즉 성령운동에 빠져있었다. 이른바 성령, 은사, 체험등을 무시하는 기존 교단에 대한 반항행위였고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기독교의 단면을 경험하고 싶었던 연유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쪽 계열의 사람들과 교제하고 또 인터넷 카페를 살펴보니 대부분의 은사주의가 "시한부적 종말론"과 묘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한때 한국교회를 24시간 기도신드롬으로 물들였던 IHOP도 시한부적 종말론을 갖고 있다는 설이 있다.)

즉 "시한부 종말론"은 어떤 특정한 시간대가 오면 재림예수가 세상에 도래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기본적으로 "재림신앙"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재림"의 도래가 어떤 구체적 방법을 통해서 이뤄질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성경의 특별한 예언적 해석(그런게 있나?)를 통해서 자신들에게 풀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아야할 사실은 성서는 우리에게 "대언"하는 것이지. "예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인즉슨, 미래를 예견하고 미래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일종의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말은 방법론에서부터, 즉 시작부터 틀렸다. 그리고 구약성서 전반적으로 기대하는 "종말"은 비참하고 우울한 심판의 개념이 아니라 권세들이 심판당하는 기쁨과 환희의 시간이다. 그런면에서 오히려 바르게 "재림"을 기대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환희와 기쁨을 대망하며 소망을 가져야하는 것이지 마치 주인이 돌아올 것을 걱정하며 자신의 행위를 날마다 점검하는 종의 모습으로 기다리는 것은 구약성서를 싸그리 무시하고 자신만의 관점으로 성서를 잘못 해석한 결과이다.(참고로 다미선교회가 가장 잘 알려진 시한부종말주의자였다. 실제로 뉴스에서도 다미선교회를 생중계했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보자. 성령운동은 시한부종말론과 묘하게 결합된다.(실제로 다미선교회 출신의 성도들이 대부분 현 성령운동하는 교회로 흡수되었다) 그 이유는 시한부종말론을 대망하는 많은 성도들이 신비를 많이 경험했던 연유때문이다.(예언이라던가 환상과 관련된 부분..) 즉, 성령운동하는 교회는 그런 은사자를 필요로 하고, 시한부종말론자들은 자신을 환영할 새로운 "교회"의 토대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성령운동"의 큰 두 맥락을 짚고 갈 필요가 있다. 존 오스틴, 조엘 오스틴, 케네스 해긴, 조용기 등으로 대표되어지는 "믿음운동"이라는 개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부분이다. 이들은 "성도의 성결"과 "성령의 나타남"에 대해 크게 연관시키지 않는다. 마치 구원이 절대적 은총의 행위듯이, 성령의 나타남도 절대적 은총의 행위라고 말한다.(저런 인물들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런 견해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반면 우리나라 기도원운동역사에서 주로 찾을 수 있는 "성결운동"이 있다. 소위 산속에 숨겨진 은사주의 단체에서 주로 발생하는 이러한 "성결운동"은 기본적으로 "성도의 성결"과 "성령의 나타남"을 인과관계로 묶어버린다. 극단적 성결을 통해서 성령의 나타남을 경험하는 것이다.(이러한 모습은 마치 무당의 신내림굿을 갈망하는 행위를 보는 듯 하다.)

이러한 "성결운동"은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주 흐름이다. 그리고 이런 산속에 숨어져있던 기도원에서 나타나던 성령운동의 흐름이 영동제일교회, 큰믿음교회와 같은 대형교회(?)라는 틀과 또 부흥회라는 형식을 만나면서 한국교회 전반적으로 보편화된다. 실제로 그쪽 교회들은 "성결"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이러한 시한부종말론의 흐름, 성령운동의 흐름, 성결운동의 흐름. 이 모든 흐름이 짬뽕으로 얽힌 것이 바로 소위 "박성업 현상"이다.

03.
실제로 나 스스로가 신사도운동에서 회심하게된 계기가 바로 "박성업"이었다. 그 이유는 그에게서 모든 성령운동, 성결운동, 시한부종말론의 극단적 모습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등장은 "데이빗 오워"라는 용하게 예언한다던 선지자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근데 묘하게도 데이빗 오워는 그런 박성업의 극단적 모습과 흡사한 메시지를 전국적으로 선포하고 다닌다. 그리고 묘하게도 그의 예언은 빗나간다.(물론 회개가 한반도 전쟁위기를 막았다고 말하는 성도들도 있겠지만ㅋ)

여튼 박성업을 철저하게 까발리기전에 일단 그에 대한 칭찬부터 해주고 가자. 그게 예의인것 같다. 그는 참 매력적인 사람이다. 자신의 나름의 삶을 모두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겉모양을 취한 사람이다.(그의 삶의 괘적이 어찌 변할지는 모르니 그가 아예 잘못되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내가 보기엔 그는 분명 진심이 가득한 열정적 사람이다. 마치 사도 바울을 보는 것 같다.) 또한 그의 메시지를 들어보면 자신이 믿고 있고 견지하고 있는 바를 대단하게 열정적으로 말한다. 또 그는 돈, 여자, 명예에 큰 관심이 없다. 오로지 그의 두 눈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적 가치에 고정되어있다. 그는 분명 명예와 타협하고, 물질주의와 타협하고, 겉모습은 "형제님", "자매님"하지만 내면에 감춰진 억제된 무수한 음란함을 가진 일반적 한국교회와는 분명 비교되는 모습이다.(물론 실제 그의 삶을 잘 몰라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수많은 청년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같은 타협하지 않고 올곧은 열정적인 사람에게 소위 "마음"을 주는 것이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국교회의 심각한 고뇌가 필요하다. 왜 우리는 한국그리스도인 청년들의 마음을 얻을 만한 공동체를 만들지 못하는가? 왜 데이빗오워나 박성업 따위에게 왜 홍대새교회따위에게 그들의 마음을 빼앗기는가?)

04.
박성업을 먼저 까야할 것은 "거룩"의 관점에 대한 부분이다.

이 부분을 까는 이유는 현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너무나 소홀하게 생각하고 개념을 정리하고 있으며 또한 그렇기에 좌절하고 "죄책감"에 빠지게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거룩'이 무엇인가? 하느님은 "거룩"하다고 해명되어있는데 하느님이 왜 '거룩'하며 그가 거룩한 것처럼 우리가 '거룩'해야한다는 말씀은 또 무슨 의미인가?

'거룩'은 구별됨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성문제, 주초문제, 도덕성문제에 주로 적용시킨다. 그래서 혼전순결을 주장하고 주초를 금지하며 또한 바르고 착하게 살아야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솔직히 따져보자. 그러한다면 "물질"에 대한 거룩함은 무엇인가? 그것은 "십일조"인가? 왜 정규직의 취업을 원하는 일반인과 구별된 모습을 위해 "비정규직"을 원하지는 않는 것인가? 왜 높은 연봉의 직장을 원하는 사람들과의 구별된 모습을 위해 저연봉 혹은 자발적 봉사를 택하지는 않는 것인가? 뭔가 이상하지 않는가? 그럼 따져보자. 하느님이 '거룩'하다는데.. 그럼 하느님은 성관계를 왜 만드셨는가? 왜 담배와 술이 있게 하셨는가? 왜 예수님은 포도주를 만드셨는가?

물론 이런 주장에 체계적으로도 반박이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의미는 '거룩'에 대한 문제다. 하느님이 왜 거룩한가? 어떤 면에서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느님은 피조물과 달리 구별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즉 피조물된 우리 모두와 구별되어있다는 신에 대한 경외함의 표현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하라"는 명령은 무엇인가? 우리의 단순한 행위에 대한 선언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성에 대한 선언이다. 즉, 하느님이 피조물과 다른듯이 히브리민족 또한 다른 민족과는 다르다는 그들만의 표현인 것이다.(그랬기에 그 거룩을 드러내기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았다.) 즉, 히브리인들은 "구별된 존재"를 드러내기위해 율법을 지킨 것이지. 율법을 지켜서 거룩한 것은 아니란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린 스스로가 하느님앞에 자율적이고 자발적으로 "거룩함"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낼 수 있다. 이는 dogma로 지정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것이다.(마치 사랑의 언어가 다른것처럼)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거룩한 삶'은 대부분 이 세상에서 단순히 상식적으로 사는 삶에 불과하다. 왠만한 상식적인 사람이고 자신의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라면 살 수 있는 삶이다. 그러한 삶의 방식에다가 '거룩'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오히려 하느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런 면에서 박성업의 거룩에 대한 관점은 하느님을 심각히 모독하고 있다. 그는 분명 대중가요와 모든 미디어매체가 사단에 의해 오염되었다며 '백워드매스킹'이라는 해괴망측한 이야기를 통해 이야기했다. 한번 따져보자. '사단이 세상 신'이라는 성서의 말씀은 어떤 의미인가? 그 말씀은 하느님의 통치가 임박했지만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는 의미에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박성업은 그러한 사단의 존재를 온 세계의 왕으로 높여주었다. 그리고는 미디어를 쥐고 모든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왕중의 왕으로 높여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미디어에 대한 사단의 괘계앞에 무능한 하느님에 대한 모습을 만들었다. 그가 말한 그리스도인의 적합한 반응은 무엇인가? 바로 미디어와의 단절이다. 즉, 우리의 하느님이 무능하니 우리는 사단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써야된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를 거룩하게 지키기위해(?) 미디어와 단절되라는 명령이다. 물론 미디어에 중독되고 미디어에 사로잡히다보면 인간의 주체성은 소멸된다. 하지만 그러한 의견이 단순한 개인에 대한 주관적 "권면"일 경우와 공동체를 향한 도그마가 되어 객관적으로 선포되는 경우는 조금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고백하는 하느님의 거룩이 그러한 것인가? 그렇다면 예수는 왜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었는가? 이 성서의 고백은 우리가 개념화하고 카테고리화한 거룩의 개념과 하느님의 거룩의 개념은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반증이다.

하느님의 거룩.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에 의해 하느님앞에 구별되었다는 성서의 증언이다. 그것은 철저히 피동적인 결과이다. 이것은 철저히 하느님께 속한 것이다. 우리의 행위에 속한 것이 아니란 것이다. (물론 개인마다 주관적으로 그러한 하느님의 거룩이라는 행위에 반응하는 부분은 다를 것이다. 우리는 그 행위를 "거룩"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구체적 응답의 행위를 카테고리화한다거나 정형화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광대하심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05.
그리고 박성업을 까는 이유는 "무비판적 우경화"이다.

실제로 그가 주장하는 정치적 입장, 백워드매스킹은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세력과 미국의 정치적 극우주의자들이 만나서 만들어진 가르침들에 불과하다. 실제로 유럽의 에큐메니컬하고 사회참여적이며 체제에 대해 대항하는 마치 예수의 삶과 흡사한 성령운동(진첸도르프의 공동체, 때제공동체)과는 달리 북미오순절운동은 체제에 대해 순응적이고 또한 전쟁에 대해 예언하고 권면하며 전쟁을 위해 기도한다.(중동 vs 미국의 대결구도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들은 공화당 정권을 지지하고 공화당 지도자들을 위해 축복하고 그들을 위해 예언한다. 또한 그러한 북미오순절운동의 대부분의 거물급 인사들은 이미 사회적 지도층이다. 이들의 삶의 자리는 과연 예수를 닮았는가? 아니면 헤롯을 닮았는가? 나사렛사람을 닮았는가? 아니면 로마인을 닮았는가? 히브리인을 닮았는가? 아니면 애굽왕 바로를 닮았는가?

실제로 내가 구독하는 대다수의 목회자의 페이스북중에 가장 많은 "좋아요"를 누르게끔 만드는 새물결선교회의 김요한 목사님의 페이스북에는 오늘 "교인들의 보수화, 기득권화"를 걱정하시는 이야기가 올라왔다.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이었다. 그 이유는 예수, 초대교인, 바울, 히브리인 등등 성서에 등장하는 중심인물의 삶의 자리는 대다수가 피지배층이며, 성서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하느님의 모습은 그러한 피지배층의 신원과 탄원에 응답하시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반면 하느님에 의해 심판받는 쪽은 언제나 기득권측이다.) 그러한 하느님에 대한 전형적인 고백은 바로 산상수훈에서 발견된다고 생각한다.
교인들이 부자가 되면 교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됩니까?ns="http://www.w3.org/1999/xhtml"> 교인들이 부자가 되면 자연스럽게 교인들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보수주의자가 됩니다.ns="http://www.w3.org/1999/xhtml"> 보수란 기존의 질서와 힘, 이해관계와 가치를 보존하고 파수하는 사람들입니다.ns="http://www.w3.org/1999/xhtml"> 교인들이 부자가 되었다는 것은 지켜야 할 기존의 것들이 많아졌다는 뜻입니다.ns="http://www.w3.org/1999/xhtml"> 따라서 그들이 보수주의자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ns="http://www.w3.org/1999/xhtml"> 그런 교인들이 늘어나면, 목사는 그런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보수적 가치에 기반을 둔 설교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ns="http://www.w3.org/1999/xhtml"> 그러면 보수적 가치를 지닌 교인들은 그런 목사에게 더 넉넉한 생활과 활동의 보장을 통해서 보상을 해줍니다.ns="http://www.w3.org/1999/xhtml"> 이렇게 해서 양자간에 서로 상호공존하는 거래가 성사됩니다.ns="http://www.w3.org/1999/xhtml">ns="http://www.w3.org/1999/xhtml"> 교인들이 부자가 되면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일어납니다.ns="http://www.w3.org/1999/xhtml">ns="http://www.w3.org/1999/xhtml" class="text_exposed_hide">...ns="http://www.w3.org/1999/xhtml" class="text_exposed_show"> 그것은 자신의 부와 힘을 기반으로 이제 상당한 수준의 문화 현상을 체험하는 교인들의 전방위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교회가 다양한 종교 상품들을 개발하고, 그 상품을 매개로 해서 부자 교인들을 교회 안에 묶어두려고 시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종교 상품들이 거래되는 시장으로 변질됩니다.
목사는 종교 상품을 기획하고 개발해서 진열대에 올려놓기 바쁘고, 교인들은 그것을 소비하기 바빠지는 것이지요.

가장 큰 문제는 이런 구조가 형성되면,
우리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차원은 소멸되어 버리고,
우리가 시장에서 거래하는 종교 상품이 하나님의 주권자적인 은혜를 대체하며,
우리가 그런 상품을 얼마나 많이 구매하고 소비했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구원의 질이 결정된다는 아주 나쁜 생각과 가치관이 똬리를 튼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메가 처치 안에서 행해지는 화려하고 현란한 예배와 각종 훈련과 조직들이 다 이런 맹점을 띠고 있다는 것을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치명적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가처치가 아닌 대다수 교회들 조차도 이런 구조를 부러움의 눈길로 ㅉㅗㅈ아가기 바쁘다는 것입니다.

From 김요한 목사님의 Fb



실제로 나의 정치적 성향은 중도진보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반우경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 이유는 내 삶의 자리가 피지배층의 삶의 자리이고 지배층의 정책변화에 따라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삶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나의 삶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반우경화. 즉 중도진보라는 색깔을 견지하게 만들었다. 그럼 나사렛인 예수, 히브리인, 바울, 초대교인등의 정치적 성향은 무엇일까? 물론 그들이 어떤 정당을 택하고 지지하겠느냐는 질문은 좀 부적합하긴하다.(특히나 민감한 이 시기에 ㅋㅋ)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분명 지배층과 대립해왔고 그들을 향한 하느님의 메시지는 피지배층을 위한 메시지였음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박성업을 비롯한 소위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세력들은 이러한 "우경화"에 대한 성서적 인식이 없다. 그들은 오로지 "공산주의"를 사단으로 몰고간다.(전형적인 이승만 장로님의 "반공주의"논리요 MB장로님의 "반공주의"논리이다.) 물론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를 실현해가던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서는 그런 입장을 견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산주의라는 구체적 세력이 절대적 사탄의 개념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면 지금 현 사회의 자유민주주의,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은 과연 무엇인가? 그 또한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인간의 본질적인 행복을 방해하는 "사탄적"체제가 아닌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공산주의"가 더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체제는 인간을 위협하고 본질적 행복을 방해하는 "사탄적"요소가 있다는 것이다.(물론 그렇다고 모든 체제를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어쩔수없는 인간의 본질이기에..) 허나, 공산주의만을 극단적인 사탄적 요소의 체제인 것처럼 몰아가는 행위는 잘못되었다.

또한 그토록 그들이 주장하는 통일, 북한민들에 대한 긍휼에 대한 부분에 대한 "방법론"은 딱딱하기만 할까도 솔직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다. 이런 우경화된 기독교세력은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사단의 앞잡이 혹은 김일성에게 공산화된 빨갱이로 취급한다. 그들의 이른바 "햇볕정책"이 북한에게 전쟁무기를 공급했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연 어떤 방법이 동북아 속에서 남북공조와 남북통일로 이끌 수 있는 것일까? 더 좋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가장 좋은 결과를 낸 정책들이 바로 "햇볕정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북한 체제"는 사탄의 체제이며 그런 사탄과는 절대로 타협할 수 없고 정복해야만 할 대상이라고 생각한다.(그렇기에 그들은 우경화된 정치정책을 지지한다.)

06.
아 힘들다. 이번에는 두가지를 동시에 까보자. 바로 "신비주의"와 "근본주의"의 묘한 짬뽕이다.
실제로 "성령운동"의 장점은 바로 자유이다. 그러한 자유는 묘하게 모호성과 연결된다. 실제로 그러한 "성령"과의 교통을 주장하던 많은 단체들이 기존 교회와는 차원이 다른 자유를 경험해왔고 그 자유를 바탕으로 사회적인 수많은 현안에 대해 실질적 참여로 연결되었다. (진첸도르프의 공동체도 그랬고 조지폭스의 퀘이커도 그랬다.) 이는 "신비주의"가 기존의 "문자주의" 혹은 "교리주의"와는 상반된 점이다. (물론 장점과 단점이 있겠지만..) 실제로 문자주의, 교리주의와 상반된 역사적으로 올바르게 흐른 성령운동은 묘하게 자유롭게 흐르지만 개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 서로의 다름은 묘하게 결합되어 시너지를 발휘한다. 그것이 바로 성령운동의 장점이다. 반면 상반된 문자주의, 교리주의의 단점은 바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데 있다. 무조건 교리, 문자라는 틀속에 개인을 무시하고 단체의 주장만을 존중한다.

하지만 이상하게 박성업은 "신비" 혹은 "성령"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그의 주장은 "근본주의적"이다.(한국교회/미국교회에만 나타나는 현상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말씀"과 "성령"을 동시에 추구한다고 말하면서 그들이 추구해서 얻은 성령의 계시, 깨달음은 묘하게 "말씀화"되어 "교조주의"라는 틀속에서 성도들을 억압한다. 성령운동의 장점은 서로의 환상과 계시, 경험들이 묘하게 어울리는 것인데, 이른바 근본주의적 성령운동은 어떤 은사자의 환상, 계시, 경험들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고는 그러한 가치로 인해 따르는 성도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되고, 다른 경험을 한 성도들의 경험은 "혼탁하다"는 평가와 함께 무시당하면서 그러한 "절대적가치"는 점점 높아져만 간다. 그러다보니 은사자와 피은사자의 간격은 점점 커지고 교리주의, 문자주의가 지닌 강압성보다 훨씬 더 큰 강압성으로 성도들을 압박한다.(그들은 궁극적 하느님의 몇 안되는 체널러기에 ㅋㅋ)

그의 대부분의 글들은 그러한 근본주의적 성령운동의 단점을 뚜렷하게 띄고 있다.참고로 그가 올린 글 하나를 첨부해본다.

ns="http://www.w3.org/1999/xhtml">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는 없지만 신학은 공부한 사람과 대화를 하면 대화가 안통해서 깝깝해 미칠때가 있다. 하나님에 대한 무슨 말을 해도 오로지 자기가 알고 배웠다는 신학 카테고리들 중 하나로 밖에 인식 못한다. "그건 은사주의, 이건 복음주의, 그건 세대주의, 그건, 이건...." 있는 그대로 하나님에 대해 못나눈다. 자기가 공부했다고 하는 신학의 틀로 인식하는 것 외에는 그냥 유기적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못듣는다. 마치 언어장애 걸린것 처럼.... 자기가 자부하는 지식 때문에 말이다.....
마찬가지로 신학뿐아니라 세상과 관련된 이야기도 지금 우리는 무슨 말을 해도 그냥 그 말 자체에 대한 유기적인 대화가 아니라 오로지 세상이 만들어 놓은 틀로 밖에 인식을 못한다. 좌냐 우냐 보수냐 진보냐... 이 말꺼내면 우파 저 말꺼내면 좌파..

From 박성업의 Fb



실제로 그가 느끼는 깝깝함이 무엇인지는 나도 알 것 같다. 한국사회는 "정답"이라는 것이 뚜렷해야만 인정받는 사회다. 그러다보니 인문학보다는 실용적 학문이 인기가 많다. 그러다보니 신학조차 실용화되어버린다. 교리와 교리속에 담겨진 세계를 이해하기보다는 교리내용 자체를 달달달 외우고 말하고 서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교리와 교리속에 담겨진 세계를 경험할때 주어지는 자유로움보다는 딱딱함이 가득한 신학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허나, 박성업 그는 딱딱함이 가득한 신비주의자다. 그에게는 신학적 통찰력도 없고 신학적 사유도 결여되어있다. 오로지 그에게 주어지는 신비적인 음성은 소위 "안통해서 깝깝해 미치게 만드는" 권위가 부여된다. 다른사람의 비판적 권면조차도 자기가 경험한 카테고리틀속에 주어넣어서 "유기적이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행위"들을 보지 못한다. "마치 언어장애 걸린 것처럼 자기가 자부하는"신적 경험때문에 그렇다.

참고로 신비주의자들은 교회역사 대대로 존재했다. 그들에게는 항상 "위험성"이 존재했다. 허나 그들의 "위험성"을 통제하는 것은 바로 교회의 "역사성". 즉, 내부와 외부의 활발한 소통을 통해서 였다. 그러한 열려진 대화를 통해 그들이 가진 한계 자체를 스스로 보정하고 교정했다는 것이다.(실례로 빈야드의 존윔버가 그랬다. 그는 실제로 성령운동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지만 신사도운동의 모호하고 신비한 이야기만 하던 예언자/선지자들과 동역하다가 자신의 손으로 쫓아낸 과거가 존재한다.)

07.
까다보니 깔게 너무 많다. 어쩌면 한국교회의 비정상적이고 비논리적인 모든 행위들의 교집합. 아니 합집합이 바로 박성업현상이 아닌가 싶다. 그는 놀라울만큼 단순하다. 미디어의 영향을 최대한 피해야한다. 그리고 말씀 기도(라 부르고 그들만의 종교생활이라 부른다)에 전무해야한다. 또 예수에 목숨을 걸어야하며 자신의 삶을 거룩하게 지켜야한다. 또 북한정권이 무너지길 위해 기도해야한다. 또 진보적 개혁적 인사들이 정권에 집권하는 것을 막기위해 끝없이 기도해야한다. 요정도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는 2000년이 넘도록 사회와 그리고 역사와 대화해왔다. 초대교회조차 구약에 주어졌던 야훼와의 역사와 대화했다. 또한 이방인교회들은 헬라철학까지도 대화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들이 경험한 신체험을 한없이 객관화시키고 사회속에 논증해왔고 해명해왔다. 그러한 작업들이 바로 "변증법"이다.

그러한 "변증법"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교리가 맞다고 우기는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인 기독교교리를 해체하는 작업이었고, 더욱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틀에 맞춰서 예수와 하느님나라를 해명하는 것들이었다. (실제로 신학자 폴 틸리히는 이와 같은 부분을 언급하며 종교는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고 이야기했다.)

혹시라도 박성업씨 혹은 박성업을 따르는 성도들이 보고 있다면 딱 한마디만 들어줬으면 좋겠다. "대화". 이것이 중요하다. 하느님과 "대화"라는 종교적 행위는 사실상 주관적 경험으로의 몰입이다. 하느님은 제우스와 같은 초월적인 세상밖의 어떠한 존재 혹은 체널이 아니기 때문이다.(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개념 자체는 하느님에 대한 신성모독과 다름없다. 실제로 틸리히는 존재와 실재의 경계선상에 있다고 고백했다. 우리가 측량할 수 없다는 의미다.) 오히려 하느님은 역사속에 존재하고 역사속에서 우리와 만난다. 어떤 면에서 "역사가 심판한다"라는 말은 곧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결국 역사와 시간의 흐름에 의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나치가 멸망하기전에는 나치와 손잡았던 독일교회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겠는가? 예수를 죽였던 유태인의 후손을 살해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겠는가? 이 모든 것이 역사의 심판결과이며 하느님의 말씀이다.) 물론 일부는 왜곡된 것도 있을테고 일부는 해석해야되는 것도 있을 것이다. 허나 역사가 흐르면 흐를수록 그 실체적 진실은 드러나게 되어있다.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계시, 환상, 음성 이 모든 것은 좋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도 가끔 경험한다.(요즘은 기도 잘안해서 모르겠다만;;) 허나 그러한 사건들보다 중요한 것은 사건을 해석하는 "관점"이다. 그러한 "관점"은 신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배워야되고 넓혀야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하는 것이다.(신학은 오랫동안 하느님과 인간의 주관적 대화를 지속적으로 객관화시킨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신학"을 무시할때 결국 모든 주관적 성령체험은 "자기에게로 몰입"이 되어버리고 스스로가 갇혀버리는 것이다.(실제로 이런식으로 이단이 되고, 소수종파가 된다.)

P.S
솔직히 너무 급하게 또한 어떤 주제를 물자마자 글이 쏟아져서 너무 난장판된 글이 된 것 같다. 언제쯤 차근차근 정리해서 올려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느낀점은 명백하다. "한국교회의 현실이 슬프다"는 것이다. 언제쯤 신학무용론과 "체험중심의" 극단적인 실용주의의 기독교현실이 회복되어질까? 아니 이러한 한국기독교의 현실의 틀이요 배경이요 땅인 한국사회는 어떻게 회복될까? 지속적으로 정권교체가 일어나고 정치적 혁신이 일어나면 가능할까? 아니면 주님이 오셔야만 가능할까? 참으로 한숨이 내쉬어지는 밤이다.

곧 정리해서 다시 올릴 것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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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쌔우 0 0

앗 좋은글감사합니다.
예전엔 데이빗님 블로그에 글보러 자주갔었는데 블로그가안들어가지더라구요ㅠㅜ

제 학교친구들(신학생들)중에도 박성업 친구맺고 좋아요누르는 녀석들 꽤 있던데 한숨이 절로나옵니다...

2015-09-10 10:26 * | 덧글

[스크랩] 한국교회 이단종파/유사기독교/사이비 현황

[스크랩] 한국교회 이단종파/유사기독교/사이비 현황


무(無)

교회주의 6인동과

교회론자

퀘이커교(죠지폭스)

KICCC

무교회주의

조선기독교회

조선기독교

KICCC

KICCC

(신상철파)그릇된 교회론 주장

(김장호파)그릇된 교회론 주장

성서조선(김교신)

류석동과 신비주의

무교회주의 함석헌

장도원 무교회사상

송두용의 제2창조설

KICCC

무교회주의자로서 무교회론 주장 1945년 사망

무교회주의자/그리스도의옷 사상론 전개/교회에 기초하지 않는 산앙주의자

교회무용론.교회 증오주의자/성례론부정/삐뚤어진 일개사상가/씨알신학가

신앙은 그리스도와 개인적 경험론 주장/교회의 모든 행동 실천.조직 거부

급진적 무교회주의 지양 온건한 무교회주의 포방/성육신부정/제2창조설 주장

종교친우회

KICCC

무교회주의 주장

새생활 영성훈련원(박철수목사)

기독교영성신학연구

기독교영성운동본부

기독교영성홍보선교

KICCC

2000년 5월

(일명 아시아교회)4단계 신앙론.영서육체이탈론.직통계시등 그릇된 교회론 주장

현대종교

1998년

박철수목사 신학과 신앙에 문제 제기

예장합동

2001년/86회

참석을 금한다 결의

예장합신

2001년/86회

풍자적성경해석과 신비주의 것으로 위험 /참석 도입 금지령

예장호헌

1998년 7월

박철수목사 사상문제에 이의를 제기 지적 /박철수목사 교단에서 탈퇴

예장고신

문제 심각성 파악 /교회에 주의문 배포

예 성

2001년/94차

이단성 조사/ 경계령결의/ 조사보고서가 나올 때까지 참여 금지


13 도봉구 함석헌기념관 건립 반대사건 - 서울퀘이커모임의 대표를 맡고 있는 김요한씨를 만났다.

"씨알들 아옹다옹하는 도봉구, 함석헌과 잘 어울려" - 오마이뉴스

"씨알들 아옹다옹하는 도봉구, 함석헌과 잘 어울려"
[인터뷰] 서울퀘이커모임 대표 김요한 서기
2013.11.26 
김성수(wadans)

공감13 댓글1

정부는 그동안 박정희 기념관에는 208억 원, 전두환을 기념하는 일해공원에는 68억 원의 혈세를 지원했다. 그러나 평생을 독립 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일생을 바친 함석헌(1901~1989) 기념관 건립은 지금 좌초 위기에 있다. 이미 서울시에서 도봉구에 배정한 15억 원 조차 새누리당이 예산 문제와 함석헌의 '이념'을 문제 삼아 반대하고 있어 반납해야 할 형편에 직면해 있다.

함석헌은 '한국의 간디'라고 알려져 있던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한국의 사상가이자 인권운동가였지만 그 삶을 퀘이커교도로 마감했다. 퀘이커교는 17세기 중반 영국 랭커셔 지방에서 조지 폭스(1624-1691)에 의해 창설된 기독교의 한 종파다. 퀘이커교엔 목사나 신부가 없고 평신도 중심으로 모임집(Meeting House)에서 주일마다 침묵 예배를 드린다.

퀘이커교는 세계교회연합회회원이지만 기독교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내세구원보다는 사회개혁과 세계평화에 관심이 많고 과학과 종교간 대화를 많이 시도한다. 1947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바 있고 퀘이커 과학자가 많다. 영국에서는 병원시설개선운동, 여성참정권운동, 교도소시설개선운동에 앞장섰고, 미국에서는 노예제도폐지운동, 반전반핵운동, 종교간 대화에 앞장섰다. 1950년대에는 한국전쟁 피난민을 도왔고 1970-80년대는 한국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을 지지했다.


한국에는 1950년 대 후반 소개된 퀘이커교에 함석헌은 50년대 후반부터 심취했고 그때부터 퀘이커교도로서 그 삶을 살았다. 서울퀘이커 모임은 지난 24일 "도봉구의회 새누리당 신창용 구의원은 그동안 도봉구 주민들의 숙원사업인 평화주의자 '함석헌 선생' 기념관 건립 사업에 제동을 걸고 있다"며 성명서를 발표했다. 서울퀘이커모임의 대표를 맡고 있는 김요한씨를 만났다.

다음은 함석헌기념관 건립 반대사건과 관련하여 지난 25일 김요한 서기와 주고받은 일문일답이다.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독립운동가를 일개 구의원이"



▲ 김요한 서기(좌측)
ⓒ 김성수


- 함석헌 기념관 건립을 이념 문제로 반대하는 신창용 구의원의 발언과 행동이 왜, 어떤 문제가 된다고 보는가?
"도봉구 주민들의 숙원사업인 함석헌 선생이 마지막 생애를 보낸 쌍문동 옛집을 기념관으로 꾸미는 계획이 무산될 위기에 처해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 이유를 언론을 통해 알고 퀘이커서울모임 친우들은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더욱이 도봉구의회 재무건설위원장 신창용 의원(새누리당)이 기념관 건립 반대를 위해 내세우는 이유가 함석헌 선생의 이념에 대한 곡해에서 비롯된 악의적 비판에 있음을 알고는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친우들의 뜻이 있었다. 함석헌 선생의 어느 글에 신 의원이 말하는 "국체를 부인하고, 북한괴뢰와 대한민국을 동일시했다"고 기록되어 있단 말인가? 만약 신 의원이 의도적으로 요즘 득세하는 '종북 몰이'에 편승해 함석헌 기념관 건립을 반대한다면 이는 그 자신이 역사와 실정법 앞에 크나큰 죄를 지은 것이다."

- 서울퀘이커모임은 지난 24일 성명서를 통해 "신창용 의원이 함석헌기념관 건립 반대주장을 즉시 철회하고 공개사과 할 것을 요구한다" 고 밝혔다. 만약 신창용 의원이 서울 퀘이커모임의 그런 제안을 수용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퀘이커 서울모임은 이념문제로 함석헌 기념관 건립을 반대한 신창용 구의원에 대해 곧 의원직 제명을 추진할 것이다. 그 후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재단, 함선생 유가족, 광복회 등과 더불어 고인(함석헌)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신창용 의원을 고소할 것이다. 아울러 내년 지자체 선거에 여러 단체들과 연합해 신창용 의원 낙선 운동을 전면적으로 전개할 것이다. 도대체 국가에서 인정하고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독립운동가를 일개 구의원이 이념을 문제 삼아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 요즘 '정교분리'라는 말이 유행인데 도봉구 의회의 결정(정치적인 일)에 퀘이커(종교)가 관여하는 것이 아닌가?

"퀘이커는 정치적인 일과 비정치적인 일을 별로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사회 거의 모든 일, 즉 세금 문제, 복지, 교육, 국정원과 국방부 등의 대선 관여 등은 모두 우리 국민들의 삶과 동떨어진 '정치적인 일' 이 아니다. 그런 모든 일은 우리 시민들의 일상사와 깊이 관여되어있다. 이번 도봉구 의회 결정도 좌우이념을 떠나 상식적으로 일반인들에게 이해와 설득이 전혀 안 되는 억지다. 어떻게 이미 서울시에서 함석헌 건립 예산으로 15억 원이 배정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국가에서 인정한 독립운동가를 이념이 문제라고 반대하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는 신창용 구의원의 만행일 뿐이다."

- 함석헌은 도봉구 차원 보다는 국가차원에서 기념해야 할 인물이기에 "더 두고 보자, 진보정권으로 바뀌면 그 때 국가적 차원에서 기념관 건립을 천천히 추진하자"는 의견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그런 생각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함석헌과 정치 단위적인 차원의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살림살이'가 있고, 씨알들이 아옹다옹하는 도봉구 마을 한복판에 기념관이 자리를 잡는 것이 함석헌에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성경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는 구절이 있듯이 조그만 동네 도봉구 쌍문동이 함석헌 기념관 하나로 인해 분명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부디 도봉구의회 새누리당 의원들이 이번 기회에 전향적인 사고로 함석헌의 가치를 알고, 주민들과 힘을 모아 함석헌 기념관 건립에 힘을 보태기를 바란다."

- 함석헌은 퀘이커 교도였다, 퀘이커가 무엇이고 함석헌과 퀘이커와는 관계는?
"퀘이커는 '하나님 섭리는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라는 보편주의를 바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기독교 소수 종파다. 목사도 교리도 없이 그저 몇몇이 모여 침묵예배를 한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내면의 빛', '선한 양심'의 소리에 따라 친우의 뜻을 모아 함께 행동하는데, 그것은 주로 평화, 평등, 간소함, 정직, 공동체를 지향한다. 우리는 이런 믿음 생활을 '집단적 신비주의'라 한다. 지금도 퀘이커 친우들 중에는 "'함석헌의 삶'에서 '예수의 삶'을 보았다"라고 하는 분들이 여럿 있다. 함석헌은 한국 퀘이커 초기 회원이었고, 생애 마지막까지 퀘이커로 사셨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는 것 같다. 함 선생도 그렇게 했듯이 퀘이커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일부러 드러내놓지는 않기 때문이다."

- 왜 퀘이커주의가 함석헌 삶과 사상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고 생각하나?
"함석헌이 사회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직접 우리나라 현실 문제에 참가하게 된 경위의 배후에는 퀘이커주의가 있다. 초기 퀘이커 지도자였던 조지 폭스(1624~1691)는 인간 평등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폭스는 사회약자를 돌보는 것이 참된 종교라고 전했다. 함석헌이 '항시 추구하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퀘이커교도로 마감한 것도 사회약자를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퀘이커주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친우회 (퀘이커) 서울모임 성명서

도봉구의회 새누리당 신창용 구의원은 그 동안 도봉구 주민들의 숙원사업인 평화주의자 '함석헌 선생' 기념관 건립 사업에 제동을 걸고 있다. 신창용 구의원은 함석헌기념관 건립반대이유로 함석헌 선생의 이념문제를 들었다. 특히 신창용 의원은 함석헌 선생이
1958년 <사상계> 잡지에 6·25전쟁에 대해 비판하면서 "국체를 부인하고, 북한괴뢰와 대한민국을 동일시했다"고 지적했고 그것이 반대 이유라고 밝혔다. 그 외에도 신창용 의원은 "예산낭비"라서 함석헌기념관 건립을 반대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함석헌 선생은 평화를 무엇보다도 중요시 하는 우리 퀘이커 서울모임 회원이었으며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두 번 이나 오른 분이다. 그는 해방 직후 신의주학생의거의 주역이었으며 북한공산정권의 박해를 받아 월남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런 함석헌 선생에 대해 '이념문제' 와 '국체부인' 등 이유로 기념관건립을 반대하는 신창용 구의원의 망언에 대해 우리 퀘이커 서울모임은 분노한다. 함석헌 선생은 우리 현대사의 어려운 고비마다 비폭력과 평화주의로 모범을 보여준 민족의 스승이었다. 그래서 세계평화에 관심을 갖는 서구인들 사이에서도 '한국의 평화주의자로서' 함석헌 선생을 기억하고 있다.

함석헌 선생은 현 새누리당의 뿌리인 노태우 정권하에서 '88서울올림픽평화대회 위원장'을 지냈다. 더욱이 지금 신창용 의원이 몸담고 있는 새누리당 이명박 전 대통령조차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직후 함석헌 선생의 시를 가장 애송시라며 공개 낭독했다. 게다가 현재 함석헌 선생 유해는 국립현충원에 안치돼 있다. 우리 정부가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함석헌 선생의 공로를 공식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념문제로 함석헌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신창용 구의원은 먼저 노태우나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이념을 문제 삼아야 한다. 또 "국체를 부인한" 함석헌을 국립묘지에 안장한 대한민국 정부 이념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우리 퀘이커 서울모임은 이번 함석헌 기념관 건립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되길 기대한다. 그래서 우리 젊은이들에게 우리 현대사를 올바르게 알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줌으로써, 우리 현대사에도 세계에서 존경할만한 스승이 있음을 알고 자긍심을 갖게 해주기를 바란다. 이런 면에서 이번 신창용 의원의 "함석헌기념관 반대"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우리 퀘이커 서울모임은 신창용 의원이 함석헌기념관 건립 반대주장을 즉시 철회하고 공개사과 할 것을 요구한다. 만약 이러한 우리요구를 신창용 의원이 묵살 할 경우, 우리 퀘이커 서울모임은 이념문제로 함석헌기념관 건립을 반대한 신창용 구의원에 대해 의원직 제명을 추진할 것이며 고인(함석헌)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것임을 엄숙히 선포한다.

2013년 11월 24일
종교친우회 (퀘이커) 서울모임



한편, 기자는 지난 22일 신창용 구의원과 한 통화에서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이에 신창용 의원은 "도봉구청장이 함석헌 기념관 건립 추진 과정에서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건립 반대 이유를 밝혔다. 그러면서 함석헌 선생에 대한 입장은 밝히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 신 의원은 또한 <경향신문> 등 다른 언론에 자신의 입장이 잘못 보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기자는 신 의원에게 추가 질문을 하기 위해 26일 다시 전화를 했지만 신 의원은 응답하지 않았다.


태그:#함석헌, #신창용, #김성수, #퀘이커, #김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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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1

Thomas Kelly: Some New Insights

Thomas Kelly: Some New Insights
Quaker Religious Thought
Volume 85 Article 2
1-1-1995

Thomas Kelly: Some New Insights
T Canby J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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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mann Lotze thomas ke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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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KELLY: SOME NEW
INSIGHTS
 T. CANBY JONES
O God, thou art my God, early will I seek thee;
my soul thirsteth for thee, my flesh longeth for thee
in a dry and thirsty land, where no water is,
To see thy power and thy glory, as I have seen thee
in the sanctuary.
Because thy lovingkindness is better than life,
my lips shall praise thee.
Thus will I bless thee while I live; I will lift up
my hands in thy name.
My soul shall be satisfied as with marrow and fatness,
and my mouth shall praise thee with joyful lips,
When I remember thee upon my bed, and meditate
on thee in the night watches.
Because thou hast been my help, therefore, in the shadow
of thy wings will I rejoice. (Psalm 63:1-7 KJV)


I VIVIDLY REMEMBER HEARING THESE WORDS burst forth from the lips of
Thomas R. Kelly, both in meetings for worship and in the student
group that met in his home. In two recent gatherings we have sought
to recapture and understand more fully that thirst for God’s presence
which consumed Thomas Kelly both in his life and in his writings.
The first gathering was entitled “Renewing the Spirit of Community: Centennial Colloquium on the Life and Work of Thomas Kelly.”
This colloquium was held June 4-6, 1993, at the Thomas R. Kelly
Religious Center of Wilmington College, Wilmington, Ohio, on the
one-hundredth anniversary of Kelly’s birth. Ron Rembert, associate
6 • T. CANBY JONES
professor of religion and philosophy at Wilmington College, planned,
hosted, and found funding for this centennial event. Funding was
provided by the Ohio Humanities Council.
This issue of Quaker Religious Thought contains the four major
papers delivered at that gathering. E. Glenn Hinson, professor of spirituality, worship, and church history at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Richmond, Virginia, opened with the keynote address on “The Impact of Thomas Kelly on American Religious Life.” The following day
Elaine Prevallet, Roman Catholic sister of Loretto and director of Knobs
Haven Retreat Center, Nerinx, Kentucky, presented a paper on “A
Testament of Devotion: A Personal Response.” She was followed by
Howard R. Macy, professor of religion and biblical studies at George
Fox College, Newberg, Oregon, with a paper entitled “Thomas Kelly:
At Home in the Blessed Community.” The final paper included in this
issue is a study of Kelly’s religious background and development by his
son, Richard Macy Kelly, director of the AIDS program for the Baltimore (MD) City Health Department and author of Thomas Kelly, A
Biography. His paper is called “New Lights and Inner Light.” Thomas Kelly’s daughter, Lois Kelly Stabler, was also present and delighted
us with reminiscences of her father and her mother, Lael Macy Kelly.
The second gathering in which we gained new insights into Thomas Kelly and his message occurred at Quaker Hill Conference Center, Richmond, Indiana, April 15-16, 1994. It was a workshop called
to take a fresh look at Kelly’s life and commitment as revealed through
his sermons. Manuscripts of hese sermons, written between 1919 and
1934, were found by Ron Rembert in the Haverford College Quaker
Collection. The title of the workshop was “Love Held Him There,” a
phrase from the most striking of Kelly’s sermons. The sermon was
built around the quotation from Catherine of Siena, “For nails could
not have held the God-man to the Cross, had not love held him there.”
In what follows I will discuss things learned about Thomas Kelly’s
life, character, and thought, both from the 1993 Colloquium and the
1994 Workshop. I should mention that Josh Brown, pastor of West
Richmond (Indiana) Friends Meeting, with my help, is preparing a
series of twenty-five Kelly sermons for publication in the near future.
We turn now to consideration of the new insights about Thomas Kelly
gained from the two gatherings, with special emphasis upon those papers that appear in this issue of Quaker Religious Thought.
SOME NEW INSIGHTS • 7
Glenn Hinson stresses that after thirty years of teaching seminary
courses on spirituality and Christian devotion Kelly’s A Testament of
Devotion ranks among the best of the Christian classics. In fact, it has
done more to change lives among his students than any other. He
thinks that Kelly speaks to our condition so effectively because of his
simple and yet profound approach to a life of unreserved commitment
to the immediate presence of God in our midst. In spite of the “turmoil and fitfulness of our time-torn lives,” Kelly affirms, “God can be
found!” Elaine Prevallet agrees with Hinson, that Thomas Kelly reaches
our hearts because he speaks as an “authentic.” Not a person ready to
share “knowledge about religious phenomena and experience,” Kelly
communicates direct acquaintance with and the immediate experience
of practicing God’s presence. Howard Macy joins Prevallet and Hinson
in stressing the centrality of experiencing and living in “the Beloved,
or Blessed, Community” to the realization in us of “God-enthralled
lives.” Kelly expresses it: “We know that these souls are with us,
lifting their lives and ours continuously to God....It is as if…we were
within them and they were within us. Their strength, given to them
by God, becomes our strength, and our joy, given to us by God, becomes their joy. In confidence and love we live together in Him.”1
Prevallet highlights the integration of inward and the outward as a
very important characteristic of Kelly’s life and message. She stresses
the creative interplay between the depths of our lives, in which we live
in constant communion with God, and the external involvement with
human needs, which we find so exhausting. She emphasizes with Kelly
that it is at “the deep level of prayer and divine attendance…that the
real business of life is determined.” The implication is clear. Social
concerns, no matter how altruistic, will not “move mountains” unless
they originate in a life of continual prayer. Prevallet is also thankful for
Kelly’s wisdom in saying, “We cannot die on every cross, nor are we
expected to.” God shapes specific tasks, fitted to our capacities and
talents, for us to carry out. The rest we leave to others.
Howard Macy drives home Kelly’s Quaker use of the Scriptures.
Hungrily we read the Scriptures “to find new friends for the soul,”
Kelly says. We hunger to live in the same life and power in which the
prophets and apostles lived. They, through the medium of Scripture,
become our spiritual guides and mentors. Macy expresses it in an
unforgettable sentence. “So we read the Bible, then, to be joined to
part of the Blessed Community and feel our way back to the Source,
8 • T. CANBY JONES
so that the same ‘Living Spring’ may bubble up within us.” We find
the same kind of fellowship with the saints through the ages since
Scripture.
From Richard M. Kelly’s “New Lights and Inner Light” we learn
much of the religious background of Thomas R. Kelly and his forebears. Contrary to the conviction of Thomas Kelly’s mother, Madora
Kersey Kelly, that the Kelly ancestors were Scotch-Irish Quakers, Richard Kelly demonstrates that the Kelly family of the Schooley community near Londonderry, Ohio, were “New Light Presbyterians” or
“Christians” later known as “Disciples” or “Church of Christ.” They
were converted to Quakerism by the preaching of Quaker evangelists
in 1868. Richard Kelly thinks that the mainline Protestant element of
his father’s faith derives from that Presbyterian background and is a
major reason for the appeal of Kelly’s message to a wide spectrum of
people. A second important element of his father’s faith—and its appeal—was the evangelical holiness Quakerism in which he was reared.
A third element in that wide appeal was his deep acquaintance with the
mystical and inward prayer life of the Christian tradition, first introduced to Thomas Kelly by Rufus M. Jones at Haverford College.
A fourth element in Thomas Kelly’s wide appeal Richard Kelly traces
to his father’s two trips to Germany. Tom and Lael Kelly were sent
first to Berlin by th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to found a
Friends Center there as a follow-up to a Quaker child-feeding in Germany during the years following the First World War. This writer believes that the German experience added a cosmic dimension to Thomas Kelly’s experience of Christ, and opened him to cosmic truths in
the world’s great religions and philosophies. In his second visit, to
Nazi Germany, in the summer of 1938, Thomas Kelly was so overwhelmed by the oppression and suffering of the German Jews, Quakers, and other Christians with whom he met that he felt “ploughed
into the furrows of the world’s sufferings.” He also learned from their
heroic courage what it means “to rise radiant in the sacrament of pain.”
From Lois Kelly Stabler, Thomas Kelly’s daughter, as well as from
his son Richard, we learned many foibles of Kelly’s character, some
positive and some negative. For example, his condescension toward
the restrictive evangelicalism, provincialism, and low scholarly standards of the midwestern United States where he had been reared, was
very pronounced. Also, as his son insists, Thomas Kelly was an intellectual elitist at that time. Richard Kelly also reports that his mother,
Lael Kelly, with some amusement worried whether there would be
SOME NEW INSIGHTS • 9
“enough Ph.D.’s” in their Brightwater, Maine, vacation community
to satisfy her husband! On a more positive note, as Douglas Steere
makes clear in his biographical memoir prefacing A Testament of Devotion, throughout all of Thomas Kelly’s adult life, with the exception
of the last three years, Kelly had a driving ambition to become a recognized philosopher in the academic world. On the really positive side,
laughter and joy in living were outstanding characteristics of Kelly.
This included the freedom to laugh at himself. This same happy atmosphere prevailed in the Kelly home and family. Lael Kelly, a person of
great warmth and strength in her own right, contributed much to that
happy atmosphere.
Lois Stabler pointed out the two best things that happened to her
father. The first was his marriage to her mother, Lael Macy Kelly. The
second “best” thing to happen was his blanking out at his Ph.D. oral
exam at Harvard in 1937. This scholarly disaster suddenly and gloriously freed Thomas Kelly to become the totally spiritual person he had
in the depths of his being longed to become. Thereafter new spiritual
power and authenticity flowed from his words and reached new depths
in the hearts of eager audiences.




---

At my suggestion following the Colloquium, Ron Rembert made a study of both Kelly doctoral theses. 

The first one, at Hartford Seminary in 1924, was entitled 
“The Place of Value-Judgments in the Philosophy of Hermann Lotze.” 

The second one, at Harvard in 1937, was entitled 
“Explanation and Reality in the Philosophy of Emile Meyerson.” 

At the Quaker Hill Workshop in 1994 Ron Rembert
reported that the Harvard thesis on Meyerson was exceedingly technical and did not reflect the fresh cosmic vision and concern we associate with Kelly. 

By contrast the 1924 thesis on Lotze does so, he said.
Rembert selected for emphasis the most striking quotation he found
from the Lotze thesis. 

“It is a fundamental thought in Lotze’s mind
that reconciliations are more nearly the truth about reality than conflicts. He is deeply convinced at the start that a harmonious relation
does exist, and so seeks to vindicate his faith.” 

We spent considerable
time at the workshop thinking out the implications of this statement.2
An important facet of Thomas Kelly’s concern which deserves further study, and which we did not focus on in our 1993 colloquium or
our 1994 workshop, is Kelly’s deep interest in East Asian and South
Asian philosophy and religion. 

He took advantage of his time of teaching in Hawaii to steep himself in Chinese and Indian philosophy and as
a result developed a course in each of these fields to teach at Haverford
College. 

Several of Thomas Kelly’s sermons before the trip to Hawaii
also reflect this concern.

To Thomas Kelly the cosmic Light of Christ, which so fully suffused his life and thought, knows no cultural limits. Beyond its Middle
Eastern origins and West European cultural expressions this Light is
found shining in some form in the lives of all persons in all cultures.

Perhaps the most important outcome of both gatherings, the
Colloquium and the Workshop, in the opinion of this writer, was the
characterization of Thomas Kelly as an “evangelical mystic.” 

This writer
has never heard of anyone so characterized before. In his paper, Richard Kelly clearly demonstrates that his father never lost the evangelical
fervor of his youth, even though it came to be expressed in more cosmic terms. In our Quaker Hill Workshop we became convinced that
the sermons of Thomas Kelly (1919-34), which we were studying,
never lost that call to complete commitment to God we associate with
A Testament of Devotion. The fact that his most moving sermon is
based on a text from a medieval saint and mystic, Catherine, only confirms this judgment. Furthermore, Glenn Hinson sees Thomas Kelly
as having recaptured mainstream Quaker spirituality, and he considers
that present day Quakers neglect him at their peril.

Is “evangelical mystics” what Thomas Kelly is challenging all of us
to become? Savor the following essays and decide for yourself.

14 설교 - 펜들힐에서의 만남 조성희 자매

설교 - 펜들힐에서의 만남

설교에배소서
펜들힐에서의 만남 조성희 자매 

 2015.10.16  | 메뉴 건너뛰기쓰기

성경본문엡5:8-9
설교자조성희 자매참고
http://www.saegilchurch.or.kr/284937

펜들힐에서의 만남(에베소서 5장 8-9절)

2014년 2월 2일 주일예배

조성희 자매(새길교회 교우)


공동체에게 감사 인사

지난 10여 년간 제게 풍성한 사랑을 베풀어 주신 새길 자매, 형제들에게 감사의 인사를드립니다. 또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제게 인격을 가르쳐 주시고 삶에 모범을 보여주신 스승 이정모 선생님, 감상적인 제 신앙에 논리를 가르쳐 주신 길희성 선생님, 나이를 뛰어넘어 좋은 친구가 되어 준 지복임 선생님, 신앙의 자극을 주었던 배정은, 이창엽 친구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새길에 있는 동안 항상 앞에서 세 번째 자리를 지켜주셨던 박민병, 송요엽 선생님과 언제나 옆에 있을 줄 알았던 임동건, 박옥진 선생님, 그리고 최근 우리를 떠난 오랜 형제, 자매들과도 보고 싶다는 마음을 전합니다.

나는 왜 길을 떠났나?

작년 1월 말에 저는 지난 22년간 어린이 관련 교육회사에서 교육 프로그램 기획 및 교재 개발자로 살아 왔던 월급쟁이의 생활을 정리하고, 남은 제 인생을 좀 더 의미 있는 시간에 집중할 것을 생각하며 3년간 저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생각과 삶을 일치시키고, 어려운 사람의 편에 서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은 이 시간에 제가 생각한 목표는 영어 공부와 퀘이커리즘을 경험하고 공부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싶은 생각이 있지요. 영어 공부는 미국의 강한 영향 속에 살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나이가 들어도 계속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려는 것과 한국의 좁은 땅과 문화적 제약을 뛰어 넘어 국제적인 시야를 갖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욕구에서 도전하는 것입니다. 퀘이커리즘 공부는 ‘인생과 우주 그 자체’의 의미를 알고 싶었고 제게 중요한 부분이 된 새길 공동체를 좀더 넓고 깊게 발전시키고, 남은 인생에 영향을 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소망에서 출발했습니다. 작년에 저는, 15일간 인도 여행을 하고, 5개월간 필리핀에서 영어 공부를 했고, 9월 중순부터 12월 중순까지 미국 펜들힐에서 학생으로 머물며 영적 여행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또 얼마 있다가 다음 행선지를 향해 길을 나서게 될 것입니다.

펜들힐을 가기 전에 들른 인도와 필리핀의 경험은 동양인으로서의 뿌리를 자각한 기회였고, 우리가 너무 쉽게 잃어버린 과거를 보고 온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서양사회에서 영어와 퀘이커리즘을 배울 때에도 저 자신을 잃지 않고 동서를 연결하려는 태도를 갖게 할 귀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펜들힐이란 어떤 곳인가?

펜들힐은 미국 펜실바니아 주, 필라델피아 근처에 있는 퀘이커 수도원이자 평신도의 내적 성장을 위한 학교입니다.

퀘이커는 1647년 영국에서 시작한 기독교 신앙 운동의 하나로 개신교에서는 가장 진보적인 종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없이 평신도 한 명 한 명이 목사 역할을 하며, 예배에서 모든 형식과 계획을 없애고, 고요함 속에서 성령의 임하심을 믿으며, 자신에게 찾아온 하느님의 가르침을 공동체와 나누는 것이 특징이지요. 예배는 공동체가 고요함 속에서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씨앗, 하느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불어 넣어 주셨던 하느님 닮은 형상을 일깨우고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예배에는 설교나 찬송이 없습니다. 그냥 고요함 속에서 각 사람에게 찾아온 하느님을 만나고, 그 만남을 공동체와 나누라는 부르심을 받은 자가 일어서서 증언하는 감화(vocal ministry)가 있을 뿐입니다. 감화는 짤막한 단락이나 시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찬송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저는 이 퀘이커 예배에서 하느님을 경외하며 드리는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체험했습니다. 무수히 많은 상념들을 떨쳐내고 고요함 속에서 하느님과 만나는 기다림의 시간을 갖는 것, 고요함 속에 들어가는 행위는 바로 자기를 비우고 내 안에 하느님이 들어 오실 공간을 마련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쉽게 되지 않지만, 자꾸 연습하고 하느님을 만나려는 소망을 가지면 문이 열리지요.

펜들힐은 미국에 있는 퀘이커 평신도 사제 교육을 위해 1930년에 세워졌는데 지난 83년동안 퀘이커만이 아니라 다양한 교파에서 찾아 온 학생들이 1학기 3개월 과정에 참여하거나 가을, 겨울, 봄학기로 이어지는 1년 과정에 참여하면서 내적 성장을 이루고 돌아간 곳입니다. 또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있는 주말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아무런 프로그램도 참여하지 않고 그곳에 머물면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돌아가기도 합니다.

과정을 모두 마친 제가 펜들힐에 대해 느낀 것은 ‘펜들힐은 어머니다.’ 입니다. 저는 펜들힐 공동체를 통해 ‘어머니 하느님’을 경험했습니다. 그곳은 매우 여유롭고 풍족했으며, 모든 것이 수용되는 분위기 속에서 자기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합니다.

펜들힐에서는 모두가 부드럽게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원하면, 그것을 하십시오.’

아마 펜들힐에서의 자유와 충만함(mindfulness)의 경험을 통해 ‘진정한 인간다움’ 곧 ‘하느님의 자녀됨’을 느끼게 하고, 그것을 모델로 펜들힐을 나설 때, 바깥 세상의 그렇지 않음에 변화를 줄 힘을 길러 주기 위함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함석헌 선생님이 62년, 67년에 펜들힐 학생으로 머물면서 ‘펜들힐의 명상’이란 유명한 글을 쓰셨고, 한명숙 전 국무총리와 박성준 교수도 이곳에 계셨고, 정지석 목사님은 이곳에서 2000년 머물면서 우리나라 평화학 박사 1호 논문을 준비했고, 큰딸 세온을 낳았습니다. 또 2010년에는 국경선 평화학교의 비전을 보시기도 했지요.

저는 작년 가을 이곳에서 김경재 선생님을 가까이서 뵈며 많은 것을 배웠고, 펜들힐에 온 성공회 신부님과 30년 만에 만난 대학 동창과 학생으로 있으면서 서로를 깊이 드러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나는 펜들힐을 어떻게 알았나?

여기서 잠깐 펜들힐을 가기까지의 인연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퀘이커들은 이를 커넥션(connection)이라 말하며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데, 저도 돌이켜 보니,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예배하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의 인연의 사슬로 엮여 있음을 신비롭게 느끼게 됩니다. 제가 펜들힐을 알게 된 것은 2010년 정지석 목사님이 새길 공동체를 떠나 펜들힐에 가셨을 때입니다. 퀘이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을 때인데, 전옥희 선생님을 만나 펜들힐에서의 경험을 듣고, 홈페이지를 둘러보면서 저도 가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지요.

당시 저는 새로 옮긴 회사에서 저를 뽑은 대표이사가 그만 두면서 회사 안에 입지가 불안정해졌고, 오랜 직장생활로 극심한 피로를 느끼던 중, 사직서를 내고 집에서 쉬고 있었을 때입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제대로 놀아 본 적이 없어서 ‘무엇을 하며 쉬어야 할지’ 방법을 몰랐고, 돈도 없었습니다.

그런 제게 펜들힐은 ‘언젠가는 갈 곳’ 이란 소망이 되었고 회사를 그만 둔 실업자에게 ‘펜들힐을 가기 위한 준비’ 로 집중할 것이 되었지요.

그때 미국 유학 중이던 정경일 형제에게 메일을 보내 ‘펜들힐에 가고 싶은데 어떻게 영어 공부를 하면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정경일 형제는 펜들힐에 가는 것을 기쁘게 격려해 주면서, 영어 공부를 위해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인 On being.org 사이트를 소개해 주면서 그곳에서 영어 음성과 텍스트 파일을 다운 받아 영어를 듣고 공부할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 사이트는 신앙, 종교, 윤리 등의 문제를 현대 뇌과학에서부터 고대 영적 전통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분야의 전문가들과 만나 대담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이 사이트에서 자료를 다운 받아 듣고 읽으면서 저는 그때까지 제가 가졌던 좁은 시야의 생각의 틀을 깨고 과학과 종교, 삶을 분리해서 보았던 것을 연결하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또 이 기간에 저는 함석헌과 그 제자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새길 넥스트를 월 1회 맡고 있었는데, 이전에는 시간이 없어서 읽지 못했던 전기문이나 자서전을 읽고 학생들에게 소개했지요. 사진 저널리스트 유진 스미스, 유진 스미스가 찍은 슈바이처, 그리고 간디 자서전을 읽으려고 책을 펼쳤는데, 번역자가 함석헌 인 것을 보고, 제가 모두 외국 사람의 삶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간디보다 함석헌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함석헌 평전’ 을 읽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함석헌이야말로 우리 현대사를 살아온 분으로 우리 시대의 참 스승이고,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분임을 깨달았습니다.그 이후 함석헌이 직접 쓴 책을 읽으면서, 그 글의 쉽고 힘 있음, 사상의 종횡무진에 감탄했고 역사가이자 기독교인이신 선생님에게서 한국인으로서의 주체성과 그 사상의 뿌리 같은 것을 느꼈지요.

그리고 함석헌 기념사업회에서 실시한 함석헌의 저서 ‘뜻으로 본 한국 역사’ 강의를 그의 제자들에게 들었습니다. 총 3개월 12회에 걸쳐 들으면서 대학을 졸업한 이후 눈을 감고 있었던 역사의식을 다시 일깨우게 되었습니다.이 강좌에서 저는 ‘함석헌 연구’로 영국에서 학사, 석사, 박사 논문을 쓰고 그것을 토대로 ‘함석헌 평전’을 쓴 저자 김성수 박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서 ‘자신이 믿는 것을 삶속에서 실천하며 사는 퀘이커의 삶’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저도 ‘퀘이커리즘을 공부하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지요.

또 함석헌에 관한 자료를 찾던 중, 정지석의 박사논문이 ‘퀘이커 평화 증언; 함석헌의 평화 사상과 한국 통일 신학’ 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정지석 목사님을 새로 알게 되었습니다. 새길에 계시는 동안 그 진면목을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2010년 11월, ‘뜻으로 본 한국 역사’ 강의가 끝날 무렵, 저는 다시 취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년을 눈썹 휘날리게 바쁘게 일하면서 저의 영적 여행을 할 수 있는 여비와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김성수, 정지석, 정경일 이 세 분은 제가 펜들힐 지원서를 낼 때 필요한 세 명의 추천인이 되어 주었고, 보잘 것 없는 삶을 살아 왔다고 생각한 저에게 펜들힐로 갈 수 있는 길을 무료로 열어준 분들입니다. 아마 남은 인생은 제가 받은 친절을 다시 다른 분들에게 되로 갚는 시간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는 펜들힐에서 무엇을 배웠나?

2년 동안 펜들힐에 가는 꿈을 마음 속에 지니면서 살았습니다. 왜 그렇게 가고 싶었을까요? 제 마음 속에 펜들힐은 저의 ‘영적인 고향’ 과도 같았습니다. 그곳에 가면 제 인생 후반부에 영향을 미칠 특별한 만남이 있을 것 같고 새힘을 얻을 것 같은 설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펜들힐에서의 제 여정은 제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고, 순간순간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과정을 모두 마치고 나서야 하느님이 왜 제게 그런 고통을 주셨는지 깨닫게 되었고, 그것의 깊음에 신비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장애인으로 살아 보기

펜들힐 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영어를 못해서 오는 답답함과 외로움이었습니다. 펜들힐 지원서에 제 영어 실력을 ‘잘함 good’ 이라고 표시했는데, 나중에 제 실력이 ‘거의 잘 못함 poor’ 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펜들힐에 와서 첫날 식탁에 앉아 간단한 인사를 하고, 사람들이 나누는 사소한 대화를 전혀 알아 듣지 못한 순간부터 저는 얼어 붙기 시작해서 침묵 예배 중에 나오는 감화, 간단한 공고 사항, 수업 시간에 지시와 의견 나눔 등을 거의 알아 듣지 못하면서 의기소침해졌고 매순간 영어 때문에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현실 영어는 제가 그 동안 들었던 아나운서의 또박또박한 발음이나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쉽게 말하는 영어 선생님 영어가 아니라, 다양한 톤과 억양, 빠른 속도, 이해할 수 없는 슬랭 등이 혼합되어 잘 알아듣기가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제 상대방들은 미국에서만 주로 살았던 사람들이고 저와 같은 외국인을 많이 상대해 보지 않아 대화의 속도 맞추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말하기를 즐기는 미국 사람과 영국 사람들 틈에서 저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인으로 살았고 읽기와 쓰기가 능숙하지 못한 무학의 위치에서 지냈습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가시는지요?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온통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지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 그 자체에 대해 의미를 나누며 그것을 소통하는 가운데 친구를 사귀겠다는 욕구가 있었는데, 사소한 대화에서부터 모든 소통의 도구가 ‘언어’, 바로 ‘영어’ 가 중심이 되어 친구를 사귀는 길이 막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이 경험을 통해 저는 세상의 질서가 어떻게 편성되었는지를 비로소 볼 수 있게 되었고, 누가 내게 친구가 되어 주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제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경험이었는데, 이것을 통해 저는 우리나라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가 겪는 이중고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고, 미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사는 한국인들이나 이민자들이 겪는 어려움과 소외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머리가 좋지 않다’고 흔히 말하는 기준이 철저하게 ‘언어적인 것에 유창한 가 아닌 가’로서만 평가한다는 교육심리학자들의 비판의 의미도 알게 되었고, 영어가 권력이 되었다는 의미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경험은 제게 새로운 문을 열어 주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상대를 이해하고 관계 맺는 방식이 언어 이외에 더욱 원초적이고 선험적인 비언어적인 것으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을 통해 소통의 참 의미를 알게 된 것입니다.

펜들힐 나무들과의 교감

무엇보다 펜들힐의 공간에서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면서 자연과 깊은 대화를 하게되었습니다. 특히 항상 말없이 옆에 있어주고 자신의 변화를 보여 주는 펜들힐의 나무들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나무들의 가지 뻗침의 다양함, 잎사귀의 다채로움, 같은 듯하면서 다른 색을 가진 그들의 다양함을 인식하고 나무의 이름들을 알고 싶다고 생각했지요.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뒤뜰에서 나무를 바라보던 중, 펜들힐의 정원을 관리(Ground Manager)하면서 28년을 살아 온 로이드를 만났습니다.


“로이드, 펜들힐에 있는 나무 이름을 알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래요? 내가 그린 펜들힐 나무들의 위치와 이름이 적힌 지도가 있어요.

내일 아침에 내가 그 지도를 에리(에리는 제 영어 이름입니다)의 우편함에 넣어 줄게요.

어떤 나무들이 궁금해요? 지금 나와 같이 가서 그 나무를 봐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매일 오가며 보았던 미술실 앞에 있는 나무 쪽으로 같이 가서 그 나무 이름이 애플크랩(apple crab)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고, 그 옆에 있는 키 큰 버드나무가 로이드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 심은 나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브린튼 하우스 가는 길 왼편에 있는 특이하게 생긴 버드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를 발견하면 자기에게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침묵 예배가 끝난 후 제 우편함에서 로이드가 놓고 간 펜들힐 나무들의 위치와 이름이 적힌 지도와 나무 그림 사전과 로이드 명함 뒤에 적힌 메모를 보았습니다.

‘에리, 여기 지도에요. 그리고 참고할 만한 책을 놓고 갑니다. 마음껏 보고, 나중에 돌려주세요. 로이드’

그날 저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제 작은 질문에 귀를 기울여 주고, 한 두 마디의 대답으로 끝나지 않고, 저와 함께 나무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서, 그것의 이름을 알려 주고, 또 제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서 그것을 챙겨 주는 친절함에 감격했습니다.


비언어적인 소통의 도구, ‘진심’으로 다가가기

로이드의 친절함 덕분에 나무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면서 사진을 찍거나 사진으로 표현할 수 없는 제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면서 ‘자세히 보는 연습’을 하게 되었지요. 또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이나 표정을 관찰하면서 그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저와 같은 구도자, 자신의 참 모습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난 사람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먼저 긴장을 풀고 마음의 문을 열자 소통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들은 저의 영어 못함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기다려 주었고, 제가 자신들을 그릴 때 모르는 척 그대로 내버려 두었고, 때로는 모델이 되어 주기도 했습니다.


퀘이커 신앙과 실천에 대한 공부

펜들힐에 간 주된 목적이 퀘이커리즘을 경험하고 공부가 더 필요하다면 나중에 영국의 우드브룩으로 가서 정식으로 퀘이커 석사 과정을 밟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Doug Gwyn의 ‘An introduction Quaker Faith and Practice’ 라는 정규수업과 Ben & Deborah의 ‘Inquirer’s weekend’ 라는 주말 워크샵 참여, 펜들힐의 학생 교육 담당자인 Bridget과 함께 하는 ‘A continuing conversation on Quakerism’ 을 들으면서 퀘이커리즘을 많이 알려고 했습니다.

선생님들의 정성스럽고 친절함, 그들의 검소한 생활 태도 등을 통해 퀘이커들이 자신들을 드러내는 여섯 가지 생활신조 SPICES인 검소함 Simplicity, 평화주의 Peace, 온전함 Integrity, 공동체 의식 Community, 평등주의 Equality, 자연에 대한 청지기로서의 자세 Stewardship 등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3개월간 10주간 수업을 들으면서 저는 퀘이커리즘에 관한 큰 그림을 갖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퀘이커리즘을 말할 때 ‘신앙과 실천’을 함께 말함으로써 믿음과 삶을 분리하지 않고 다루고 있었는데, 그것은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있는 하느님의 씨앗을 가진 우리 자매 형제들이 그 존엄성을 파괴당할 때 그대로 있지 않는 절대자의 음성을 외면하지 못하는 퀘이커 공동체의 예배에서 비롯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 나의 발견

지난 3개월 동안 저는 참된 나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것을 보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모든 교육과정은 영적인 성숙을 위해 치밀하게 잘 짜여있습니다. 수업을 준비하는 시간과 교실에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과정에서, 영적 선배(Spiritual nurturer)와의 정기적인 대화를 통해서, 한국 친구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면서 또 매일의 노동과 공동체 전체가 하는 수요 노동 등 여러 가지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참된 나의 존재를 발견하는 과정이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공동체와 함께하는 침묵의 시간은 제 안에 감추어 두었던 무의식의 세계를 끌어 올리고 참 나를 자각하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이 시간이 참된 나를 발견하게 하는 자리이며 저의 좋은 씨앗을 싹 틔우기 위한 연습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인종, 계급, 성 차별 등에 관한 용감한 대화’ 라는 수업을 들으면서 미국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억압의 문제를 개인적, 제도적, 문화적인 차원으로 이해하면서, 그것과 무관하지 않는 내 안의 억압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사회의 억압의 틀을 공부하면서 저는 한국 사회 안에 있는 자기 존재의 부정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고, 자신의 뿌리를 잃은 채 유령처럼 살아온 우리나라의 아픈 현실을 자각했습니다. 친구의 모습을 통해 나를 이해하게 된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그리고 저는 계속 제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참 나인가? 나의 뿌리는 무엇인가? 하고요. 그러면서 저는 저의 기억을 구성하고 있었던 여러 가지 것들을 끄집어 올리면서 그것들의 의미를 되새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찬란하게 아름다웠지만, 억압으로 점철되었던 제 젊은 날의 모습을 회상하게 되었습니다. 그 기억의 실마리를 제공하며 끊임없이 제 앞에서 그때를 연결시켰던 제 대학 동창을 펜들힐에서 30년이 다 되어 만나 다시 친구가 되면서 젊은 날의 나의 약점들을 끌어안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

저 개인적인 삶이나, 우리 사회에 내재한 억압의 사슬 등을 자꾸 들여다보고 싶어집니다. 또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에 관심을 갖고 싶습니다. 한국에 돌아오면, 스쳐 지나갔던 것들을 좀더 눈 여겨 보고 한국의 색, 한국의 무늬, 한국의 음악, 한국의 춤, 한국 음식 등을 주의 깊게 알아보려고 합니다.

제 어머니와 스승님이 살아오신 삶을 좀 더 자세히 들어 보려고 합니다. 마치 제가 펜들힐에서 저의 영적 자서전(Spiritual Autobiography)을 썼던 것처럼 저의 어머니와 스승님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써 보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내 이름은 성희

마지막으로 제 이름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펜들힐에서 저는 처음에 제 한국이름 조성희 대신에 ‘에리 조 Ehri Cho‘ 라고 저를 소개했습니다. 에리 Ehri 는 제 영어 이름인데, 영어를 처음 배울 때 외국인들이 쉽게 기억하고 부르게 하려고 오래 전부터 사용한 이름입니다. 사실 제 한국 이름의 ‘성희’가 별 의미가 없어서 그런 것도 있었고요.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이 한국에 와서 저를 찾을 때 아무도 모르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과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 주실 때 ‘성희’ 의 소리가 예뻐서 지어 주신 것인데 왜 그것을 몰랐나 하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래서 제가 제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습니다.

성희 成(이룰 성) 姬(여자 희) 에서 誠(정성 성) 喜(기쁠 희)’ 의 의미가 담긴 이름으로요. 영어로 하면 ‘Integrity with joy’, 기쁨 속에서 온전한 삶을 추구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지요. 그래서 제 이름을 생각하면서 퀘이커의 삶 ‘네가 믿는 바를 삶으로 보여 주라 Let your life speak’ 를 따르며 살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토마스 켈리 영원한 현재

영원한 현재


내 삶의 주도자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영원한 현재를 살았던 퀘이커 전통의 신비가 토마스 R. 켈리의 명 저서!

여기 지금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한 현존의 순간이다.



추천사


토마스 켈리는, 주님, 당신의 뜻이 저의 뜻이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기도야말로 온당한 기도라고 말하고 있다. 아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순전한 기도는 단순히 아버지, 하늘의 눈을 통해서 땅의 것을 보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일 것이다. 켈리는 다시 이렇게 쓰고 있다.

전적으로 순종하고 전적으로 복종하고 전적으로 듣는 삶이야말로 놀랄 만큼 온전한 삶이다.
그러한 삶의 기쁨은 광채를 발하고 그로 인한 평화는 심오하며, 그것에서 나온 겸손은 깊이가 있으며, 그 힘은 세계를 뒤흔들고, 그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그 단순함이란 어린 아이의 믿음과도 같은 것이다.

-고든 맥도널드



토마스 켈리는 이 책을 통하여 지극히 평범한 장소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선물로 우리에게 주고 있다.
나는 워싱턴 공항에서 처음으로 『헌신의 약속』을 읽기 시작한 이후, 종종 그 책을 다시 읽곤 한다. 그 책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는 어떤 “위대한 영혼의 현존”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리처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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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는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영혼의 성소, 거룩한 장소, 신적 중심, 말하는 음성이 있다. 영원이 우리 마음 안에 있으면서, 그것이 우리들의 진부한 삶을 공격하고, 놀라운 운명에 대한 암시로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며, 영원 자체를 상기시켜 준다.

이러한 설득에 굴복하는 것, 몸과 마음으로 기꺼이 내면의 빛에게 온전히 헌신하는 것이 참된 삶의 시작이다. 그것은 하나의 역동적인 중심, 우리의 내면에서 탄생을 추진하는 창조적인 생명이다.
내면의 빛은 하나님의 얼굴을 조명해 주며 사람들의 얼굴에 새로운 영광과 새로운 그림자를 던져준다. 그것은 우리가 억제하지만 않으면 싹을 내고 성장할 씨앗이다. 그것은 영혼의 쉐키나(Shekinah),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현존이다.



여기에 「주무시는 그리스도」, 우리가 세상적인 형태로 옷 입는 영혼이 되어야 할 분이 계시다. 그분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계신다. 독자들은 이미 이 내면의 생명과 빛을 알고 있다. 우리의 인식은 내면에 있는 이 빛에 의해서 주어진다. 오늘날과 같은 인문주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모든 것을 주도하는 것은 인간이요, 반응하는 측이 하나님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는 주도하시는 분이시요, 우리는 응답하는 자들이다. 연인이요, 고발자요 빛과 어두움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강요하신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린다.” 외면적으로 우리가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밀한 임재와 작용에 대한 반응이며 증명서이다.



우리의 내면에 계신 분은 우리를 은밀하게 설득하여 그분에게 있는 놀라운 내적 생명을 향하게 하며, 그럼으로써 우리가 항상 내면의 빛의 광채를 통해서 세상을 보며, 이 내면의 중심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이웃에게 응답하게 하신다. 이 표면적인 말보다 훨씬 더 훌륭한 스승이신 그분께 순종하면, 이 말이 표현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스승을 찾게 될 것이다.



내면의 빛, 내면의 그리스도는 특별히 소규모의 종교 집단의 것으로서 단순한 신념으로 받아들여지거나 거부되는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려는 모든 기독교인들과 기독교인 집단들이 “참조해야 할 살아있는 중심”이시다. 그분은 생각의 종착점이 아니라 활동의 중심이요 근원이시다. 그분은 논쟁의 문제가 아니라, 헌신의 헌장이시다. 종교에서 우선적인 것은 이론이나 교의가 아니라 실천이며, 기독교적인 실천은 표면적인 행위 안에서 고갈되지 않는다. 그것은 뿌리가 아니라 열매이다.
실천하는 기독교인은 우선적으로 내면의 성소를 향한 영혼의 영원한 회귀를 실천하는 사람, 세상에 그 빛을 가져다주고 다시 판단하는 사람, 소란스럽고 변덕스러운 세상에 빛을 가져와 그것을 재창조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해야 그 생명과 능력을 붙잡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살 것인가? 밤낮으로 존재 전체를 기울여 영혼의 깊은 곳에서 부르시는 분을 향해 기도하고 예배하며 복종하는 일을 조용히, 그리고 끈질기게 실천해야 한다. 내면의 태도를 결정하는 정신적인 습관들이 확립되어야 한다. 여러 주, 여러 달, 여러 해 동안 실천과 실수, 실패와 회복을 거듭하면서 내적으로 은밀하게 하나님을 향하는 태도가 확고해져 간다. 로렌스 수사가 발견했듯이, 그것은 단순한 기술이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야 확고함을 얻을 수 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동안,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에 완전히 포기하고 기쁨으로 고요히 내면에 계시는 그분께 당신의 온전한 자아를 바치라. 비록 희미하더라도 고요히 찬송하면서 겸손히 빛을 향하라. 감각과 의미의 표면 세계와 접촉을 유지하라. 방심 상태에서는 훈련이 안 된다. 친구들과 함께 걷고 말하고 일하고 웃으라. 그러나 그 배후에는 단순한 기도와 내적 예배를 멈추지 말라. 하루 종일 그렇게 생활하라. 내면의 기도가 잠들기 전에 행하는 마지막 행동이 되게 하고, 잠에서 깨어나서 행하는 첫 번째 행동이 되게 하라. 그렇게 행하면, 언젠가는 로렌스 수사가 기록한바, “성령의 바람을 소유한 사람은 잠잘 때에도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다른 지인들은 멀어진다. 그들과의 관계가 늘 피상적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여러 해 동안 함께 일하며 행복한 관계를 유지했을 수도 있지만, 중심의 깊은 침묵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한 적이 없고 또 영원의 빛이 밝게 비취는 곳에서 함께할 수 없음을 지금은 알고 있다. 그들 역시 하나님께 온전히 사로잡히고 빛에 집중하기 전까지는, 우리와 의례적인 인사로 짧은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을 뿐이다. 비전이 희미한 그들에 대해 동정심이 생길 수도 있지만, ‘중심’ 속에서 함께 살아가도록 묶어주는 사랑의 관계는 소수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 감격적인 친교를 통해 기존의 우애 관계는 과감하고도 활기차게 해체되거나 천상의 뜨거운 열기에 의해 변화된다.



우리는 냉철한 신학과 뜨거운 가슴을 동시에 지닌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시들과 성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읽는 가운데 친교 범위는 더욱 확대된다. 경건한 의식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벗을 더 많이 찾으려는 뜨거운 갈망으로 성경을 읽는다. 성경에 수록된 역사적 교훈을 훑고 지나가면서, 그 ‘중심’과 ‘생명’과 ‘능력’ 가운데 살았던 성경 기자들을 만난다. 또한 경건한 문학서를 통해 조명을 받는다.
거룩한 친교의 최종적인 근거들은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 안에 잠긴 인생들은 사랑 안에 잠기고, 그분 안에서 서로를 알며, 또한 사랑 안에서 서로를 안다. 하나님은 매개체, 모체, 핵심, 용매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이들에게 강권적으로 임한다
모든 영혼은 최종적인 기반을 지니고 있고, 그 최종적인 기반은 단 하나인 거룩한 기초이며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다. 친교 중에 있는 사람들은 그분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 이는 마치 모든 산들이 같은 땅으로 낮춰져서 연결되는 것과 같다. 그들은 그분을 통해 서로를 이해한다. 하나님은 만유 안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시며, 그분의 뜻에 순응하는 자들을 연합시키시고, 또한 그들을 그분의 영광과 기쁨으로 가득 채우신다.


하나님을 통해 맺는, 모두에 대한 각자의 관계는 실제적이고 객관적이며 실존적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것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권적으로 임한다. 그리고 자신의 심령을 두드리는 그 사랑에 순복하는 사람은 그것에 사로잡히고 변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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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너무나 순간적이어서 잡아두거나 거기에 머물 수 없다. 정말 찰나적이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이 머무신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은 현재에 현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보았노라, 체험했노라, 알았노라 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과거로 물러나 버렸다. 저자 토마스 R. 켈리는 퀘이커 전통의 현대 신비주의가이며 심층 심리가이다. 그는 “여기 지금” 즉, 하나님 현존의 순간의 중요성을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다. 세상적인 시간은 순간적이며 찰나적이지만,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물 때 찰나적인 시간은 영원(ETERNITY)으로 확장된다. 이승에서 천국을 체험하는 순간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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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켈리(Thomas Kelly)

1893년 남서부 오하이오의 한 농가에서 태어난 토머스 켈리는 퀘이커교도의 부모 밑에서 신실하게 자라났다. 퀘이커 전도자이면서 교육자이고,강연자,작가,학자였던 그는 월밍턴 대학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하다가, 해버퍼드 대학에서 루퍼스 존스에 매료되어 철학과 진리 탐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하버드 등에서 학생들에게 철학을 가르치면서는 학문적인 성취와 동양선교에 열정을 품었고, 일본과 극동 선교사를 꿈꾸면서 YMCA와 독일인 전쟁포로들을 위해 자원봉사로 일하기도 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는 탐구와 깊은 묵상을 멈추지 않았던 그는 풍성한 삶과 순종의 원리를 은혜롭게 묘사한 이 책을 완성하게 되엇다. 책을 통해 그가 경험한 영혼의 회복,하나님과 맺은 내적 친교와 연합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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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글 / 9

1. 내면의 빛 / 15

2. 거룩한 순종 / 43

3. 복된 공동체 / 77

4. 영원한 현재와 사회적 관심 / 93

5. 삶의 단순화 / 121


역자

후기 /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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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현재] 도서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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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우*진 (yusu*** , 일반회원) | 조회: 10 | 날짜: 2018-02-10 23:06:44
그 어느 때보다 각박함, 삭막함, 경쟁이 삶의 골수깊이 박혀버린 시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IT를 비롯한 4차산업을 동경하며, 보다 편리하고 나아진 삶을 향유코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과 마음은 늘 피곤하고, 아파하며, 심지어 어느 특정한 상황 속에선 극심히 격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소위 종교를 창시한 사람들, 철학 사상가들이 이러한 문제를 놓고 해결코자 평생 치열히 고된 싸움을 했지만, 결국 온전히 해결치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오직 한 분.

하나님의 독생자되신 주 예수님께서, 아무런 죄도 없으셨음에도 평생 죄인으로 살다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모든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단 한 번 못박히심으로, 보혈을 통해 모든 죄를 사해주셨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머무신 후, 하늘로 올라가시사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에 좌정하시며, 반드시 마지막 때에 재림을 하신다.



주 예수님을 왕으로 고백하며, 세상과 당당히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는 삶을 누리며 확장시키는 사람들.

바로 주님의 자녀들이자, 거룩한 백성들이자, 크리스천이라 알려진 존재들이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흐른 현 시점.

복음에 합당한 삶은커녕, 주 예수님의 향기조차 전혀 드러내지 못하는 농후함 속에서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 조롱, 지탄을 받는 1급 대명사가 된 지가 이미 오래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다시 주님의 깊고도 신비한 현존하심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간결히, 그러나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우리들에게 가르쳐준다.

특히, 삶에서 온전하고 거룩한 순종의 열매 맺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갖는 단순함'이 큰 기쁨이자 강한 것들 중에 가장 강한 것이란 점이 내게 큰 감동이자 도전으로 와닿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은 체계적이고 복잡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그릇되고 거짓된 신념을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모든 루트 속에서 세뇌작업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며 깊이 교제하는 삶은 그렇게 복잡하지가 않다.

진리는 단순하지만, 그 효력은 강력하며 영구하다는 이야기를 성장하면서 많은 분들에게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잊혀지질 않는다.

세상의 인식체계는 얼핏보면 체계적인 것 같고, 합리적인 것 같아서 구미에 척척 맞는 것으로 착각되기가 일쑤이지만, 접하면 접할수록 질리고 역겹고 단조로움 등의 고통을 모든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짐지우게 하는 속성이 있다.



 반면, 깊이 말씀을 묵상하며, 고요하고 침묵 깊은 기도를 통해 주님과 친밀한 사귐을 영위하는 삶은 처음엔 너무나 단순해서 깜짝 놀라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강해지고 깊어지며, 심지어 다가올 마지막 때의 큰 환난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영적군사로 성장 성숙케 한다.



 매순간 영원한 현재이신 주 예수님과의 깊고도 친밀한 동행을 내 모든 삶에서 영위하며 나아갈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한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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