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08

시집살이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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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살이

최근 수정 시각: 
1. 개요2. 문제 상황의 종류3시어머니 및 시가 식구들의 구박4. 구박하는 심리
4.1. 자기 집안을 과시하기 위해서4.2남아선호사상의 영향
4.2.1. 20세기의 사회의 영향
4.3. 친딸을 양육하던 방식과의 연관성4.4. 군기 잡으려고4.5. 아들에 대한 소유욕4.6. 그냥 예절이 없고 인성이 나빠서
5. 대처법
5.1. 평범한 가정 속에서의 사소한 다툼5.2. 막장 드라마 사연 수준일 경우
6. 이런 어른은 어떻게 피하면 좋은가?7. 처가살이(처월드)8. 예시9. 어록10. 기타

1. 개요[편집]

결혼한 여성이 파트너 남성의 부모 또는 그에 준하는 가족/친척들과 함께 거주하는 일. 반대말은 처가살이 • 서옥살이 등이 있다.

시집살이는, 사람 사는 곳이라면 시대불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나 존재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어디선가는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시월드 항목에서 시가(媤家) + 월드를 1에 빗댄 말이지만, 오히려 한국에서는 1에 대한 인지도는 전무하고 이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이 문서도 이전에는 시어머니로 리다이렉트 처리된 상태였다. 이에 대한 것은 시어머니 참조. 참고로 시월드 용어가 지상파 TV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된 건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다. 온라인에서는 그 전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만약 시가보다 처가가 권력이 강한 경우라면 여기에서 무조건 예외라고 봐야한다. 처월드를 겪는 건 매우 드물기 때문.

2. 문제 상황의 종류[편집]

우물에 독풀기(원천봉쇄의 오류)를 이용해 논리적인 반론을 거부해버리는 식의 핀잔이 많다. 갑과 을에서 갑이기 때문.[1]
  • 며느리를 보고 '아침밥을 차려주지 않는다'며 타박한다. 시어머니가 "아침은 먹었니? 오늘은 뭐 먹었니?"하고 묻는 것은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 구박할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 묻는 것이다. 아침은 먹었니? 에서 안 먹었다고 대답하면 바로 구박이 시작된다. 먹었다고 대답하면 뭐 먹었니? 가 나오는데 여기에 뭐라고 대답하든 "그 애는 그거 안 좋아하는데/그거 몸에 안 맞는데/그거 건강에 안 좋은데"등의 구박으로 이어진다. 심지어 아들이 원해서 그 메뉴를 차렸고 아들이 맛있다며 좋아했어도 "네가 만든 식사가 그 애 입에 맞겠니? 그 애가 착해서 그렇게 말했겠지"라는 어처구니없는 억측으로 구박한다.
  • 직장인 며느리가 아들보다 돈을 더 잘 버는 것에 열등감을 느낀다. '어차피 나중에 그만둘 거 왜 집안일 소홀히 하니? 그 직장 그만둬라.', '네가 돈 약간 더 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아들 괄시하고 기죽이면 안 된다.'(심지어 아들이 만족하더라도 이 말을 한다. 이게 그냥 무신경한 게 아니라 악의에서 나온 말임을 알 수 있는 증거로, 아들이 만족하고 있으면 절대 아들 앞에서는 이 말을 안한다. 뒤에서 몰래 갈군뒤 아들 앞에 가서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이런 열등감에 의한 구박은 며느리가 천대받는 직장으로 옮기거나 직장을 그만둬야 사라진다. 이때 시어머니는 이겼다는 생각에 무척 기뻐하고 며느리를 조롱한다. 그리고, 자기 아들 가족들은 이제 뭘 먹고 살지? 고통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참고로, 시어머니를 추켜줄 생각으로 며느리가 직장을 그만두면 거의 100% 후회한다. 이런 유형의 경우 전업주부 며느리는 돈을 안 번다고, 아들이 힘들게 벌어온 돈으로 집에서 놀고 먹는 밥벌레 취급하면서 무시.
  • 모르는 게 있으면 '넌 이것도 모르니?' 하고 무시한다. 아는 게 많으면 '잘난 척한다', '가르치려 든다'고 갈군다. 아니 어쩌라고
  • 며느리가 노력, 돈, 시간, 정성을 다해도 전혀 감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며느리가 고급 음식점에서 시부모를 대접하면 '너 편하자고 밖에서 먹자고 했냐'면서 면박을 준다. 선물을 사가면 '너네 집 돈 많아서 좋겠다.'고 빈정댄다.
  • 아기를 늦게 가지거나 안(못) 가진다고 기분 나빠하고 갈군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에게 문제가 있는 경우조차도 며느리를 갈군다.)
  • 자기 아들에 대해서는 '불쌍한 우리 아들', '금쪽 같은 우리 아들'이라 말하면서 며느리는 식구라기보다는 그냥 종년 취급한다. 며느리가 "어머니 아들만 귀한 거 아니고요, 저도 저희 집에서는 귀한 딸이에요."라고 말하면 "그래 그래, 알았다. 참 요즘 계집년들 무서워서 어디 살겠니?"라고 또라이 취급하면 양반이고, "그따위 천박한 집안 딸년 주제에 귀하긴 뭐가?"라며 뻔뻔하게 집안 전체를 무시하기도 한다.
  • 구시대적 남존여비 사상+남의 집 자식이라는 심리가 합쳐져 며느리는 식구가 아닌 천한 종으로 취급한다. 그래서 "며느리 주제에"라는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한다. 동시에 자신과 자신의 딸들은 남존여비 사상에서 예외되는 고귀한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손녀까지 덩달아 차별하기도 한다. 때문에 며느리 혹은 손녀가 "감히 여자가"라는 발언을 똑같이 돌려주면 통곡을 하며 앓아눕는다.
  • 아들한테는 약해서 아들이 며느리의 편을 들면 대부분 꼼짝 못하지만, 좀 독한 시어머니들은 불여시 같은 년이 내 아들을 홀렸다 혹은 여자에 미쳐서 지 애미도 못 알아보는 놈이라고 욕을 한다. 그러나 남편이 며느리 편을 들면 진짜로 꼼짝 못한다.
  • 심한 경우 아들 몰래 돈을 빌려달라든지 돈을 달라든지 사채를 써 달라든지 최악의 경우 빚보증을 서 달라든지 하는 경제적 사고를 몰래 치는 경우가 있다. 결혼 후에는 큰 돈을 쓸 때는 상의하고 나서 쓰는 것이 정상적이다. 한 번이라도 자신 몰래 3,000만원 이상의 돈을 낭비하는 걸 발각해냈다면 웬만하면 이혼을 고민해보자. 이런 사람들 사고방식은 다음엔 어떻게 하면 안 들키고 돈을 빼돌릴까 이기 때문에, 재수 없으면 전재산을 뜯긴 다음에 빈털털이 상태로 이혼 당한다. 특히 시어머니가 보증을 운운한다면 최대한 남편을 설득해서 시어머니에게서 재산을 보호하도록 모든 물리적 방법을 동원하도록 노력하거나, 이게 안 된다면 최대한 빨리 이혼을 해라! 남편과의 정이니 가족끼리의 정이니 하는 걸 따지는 건, 자기 자신과 친정집까지 싸그리 파멸시키는 지름길이다! 이에 자세한 건 보증 항목을 참고.

3. 시어머니 및 시가 식구들의 구박[편집]

시어머니 → 며느리 사이에서 많이 나타난다. 전통적인 한국 문화에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사모님과 계집종 같은 관계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며느리들은 누구든지 이런 대접을 당연히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갑질은 며느리는 물론이거니와, 남편과 아들도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경우가 당연히 많다. 무엇보다도 시어머니라는 이유로 갑질을 시전하는 순간, 높은 확률로 손주들에게 강한 미움을 받을 수 있으므로 시어머니의 악명은 점차 흐릿해지는 추세.[2]

그래서 어머니뿐만 아니라 누이, 동생, 아버지 등 '시'가 붙는 순간 대부분 며느리들의 스트레스의 주범이 된다. 오죽하면 '시'자가 들어가는 단어들은 좋은 단어가 하나도 없다고 자조적으로 이야기한다.시x

시어머니보다는 시누이들이 며느리들 입장에서 더 불편하게 여겨지는 경우도 있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시할머니가 시어머니보다 막장인 경우도 있다.# 물론 시어머니보다 시아버지가 더더욱 개막장인 경우도 있다만.

4. 구박하는 심리[편집]

4.1. 자기 집안을 과시하기 위해서[편집]

남자의 스펙이나 남자 쪽 집안 권력이 여자 쪽보다 더 큰 경우, 시모가 갖은 무시를 할 때도 있다.

또는 상견례 자리에서 시모가 대놓고 "내 아들 정도 되는 남자라면 훨씬 잘 살고 능력 좋은 여자 만날 수 있었는데, 기왕 너한테 장가 보내게 됐으니 감사하게 여기고 내 아들 하늘같이 잘 모셔라." 하는 식으로 무안을 주기기도 하는데, 이 때 친정어머니가 "그쪽 아들놈이 얼마나 잘나서 이러는지 모르겠소만, 우리 딸은 아쉬울 거 전혀 없으니 그렇게 아들이 잘났으면 댁들이 원하는 능력 좋은 며느리 어디 잘 찾아보쇼!!"라고 말하며 상견례를 파토내면, "진짜 별 상그지 집안이 자존심은 살았네그려. 못 배워서 교양 없는 거 티 내는 거야 뭐야?"라며 뻔뻔하게 집안 욕을 한다.

4.2. 남아선호사상의 영향[편집]

조선시대는 노동력이 중시되던 사회여서 남성의 힘을 중요히 보았기에 남아 선호 사상이 존재했다. 물론 여성도 노동력이지만 신체구조상 남성이 더 유리하던 입장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시부모 중에서 며느리를 낮게 바라보는 사람도 존재했으며 남아 선호 사상의 영향력이 강한 199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4.2.1. 20세기의 사회의 영향[편집]
당시에 여성차별이 진짜로 심각하던 것은 상류계층인데, 양반이나 귀족같은 고위층들은 남성의 단순한 "선호"를 넘어서 "우대"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때문에 남존여비라는 형태로 심화되어, 성리학적 사상을 통해서 여성의 권리를 규제하였고, 사대부 여성들은 극심한 차별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개인의 의견을 말하고 싶어도 말이 많은 여성은 양반의 미덕이 아니었기에, 당시 양반들은 여자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시원하게 할 말 하는 것이 고깝게 보았었다.[3]

이러한 상황속에서, 20세기 때 인구의 90%가 양반을 자처하고 여러가지 혼란이 가중되게 되면서, 차별적 시선은 더욱 심화되어 교조화가 이루어졌다. 대다수의 민중에게 사대부의 차별의식이 퍼졌고[4], 이를 지극히 당연시하는 인식마저 생긴 것이었다. 이러한 형태가 21세기 초기까지 이어져왔고 지금은 그러한 색채가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 그 흔적은 남아있다.[5]

4.3. 친딸을 양육하던 방식과의 연관성[편집]

시어머니가 아들딸 차별하여, 딸들에게만 과다한 통금을 먹이거나 집안일을 다 시키거나 자존감을 낮추는 행위 및 발언을 습관적으로 일삼았다면, 그 나쁜 습관[6] 이 며느리에게도 이어질 수 있다. 친딸에게조차 시집살이급의 구박을 하는 시어머니라면 며느리에게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다만 보통 시누도 한통속인 경우가 많은 걸 보면 이런 유형은 소수라고 봐도 무방하다. 보통 시어미들은 남의 집 여자인 며느리만 쓰레기 취급하지, 딸들은 식구라고 챙기고 사고를 쳐도 아들이랑 똑같이 감싸고 두둔한다.

4.4. 군기 잡으려고[편집]

시어머니 쪽에서 자신을 마님 내지는 여왕으로 알고 며느리를 처갓집으로부터 사온 노비로 여기기 때문에 가족으로 대하지 않고 시가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받들어 모시라고 강요한다. 남편은 아내와 어머니를 둘 다 가족이라고 여기지만,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천한 계집종 정도로만 인식한다. 며느리 역시 이 관계에 동의한다면 큰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건 닫힌 사회에서 나타나는 갑질이자 똥군기이므로 감정노동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간단히 말해 군대 선임 내지 직장 상사와 24시간 내내 동거하는 것.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직장 상사가 내 사생활에 참견하고 끼어드는 상황이 평생 계속되는 것이다.
  • 의문없이 복종하게 만들기 위한 사전 학대, 기죽이기: 갈궈서 기를 죽인 다음, 자기 자녀와 자신에게 복종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의문없이 복종하게 만들어 놓으면 사위나 며느리의 재산을 빼앗아서 호의호식하고 사치하기 유리하니까 그렇게 학대하는 것이다.
  • 보상심리에서 기인한 똥군기 잡기: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며느리가 아들의 상대로 눈에 안 차 잔소리와 구박이 심해진다. 보통 우월감열등감 때문에 잘못된 인지도식을 가진 경우이다. 그러나 며느리 역시 남의 집 귀한 이다. 최소한 자기 딸의 반만큼만 해주어도 고부갈등은 없어진다. 사실 시어머니도 예전엔 며느리였을 텐데 천박한 보상심리에 불과하다.

4.5. 아들에 대한 소유욕[편집]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그 동안 힘들게 키운 귀한 아들(=남성)을 냅다 빼앗아가는 동성'이라서 며느리를 홀대하게 된다. 특히 남녀유별이 심한 부권사회일수록 아들은 어머니에게 있어 '여자로 태어나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수단'이다. 한국사에서 가장 여성억압적인 조선후기조차도[7] 여자들끼리 수다를 떨거나 여성적인 취미 등 업무를 봐줄 수 있는 것은 인정받아 최소한의 도피처가 있었지만, 요즘 시어머니 세대에게는 그런 것이 드물었다.[8]

외국의 경우, 남아시아같이 몹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는 여자들끼리 수다를 떠는 것과 자수나 요리를 잘한다고 명성을 날리는 것조차 억압하는 개막장들이 많다.

이것이 크든 작든 심리적으로 꽤 영향을 끼치는 모양이다. 1997년작 한국 영화 올가미에서 이런 형식의 극단적인 인간을 엿볼 수 있다.[스포일러][10]

아들이 장남, 그중에서도 여자형제만 많은 외아들n대 독자종손 등 (남아선호사상적인 시각에서) 일명 귀한 아들일수록 구박의 정도가 더 심해진다(...). 오죽하면 그런 집안의 아들은 결혼상대로 무조건 기피해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 정도고, 실제로 n대 독자나 종손이 결혼 상대 못 구하는 일은 이미 현실이 되었다.[11]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수록, 남편의 경제력이 약할수록 아들 집착은 더 심해지는 경향이 있으며, 한술 더 떠서 홀어머니의 외동아들일 경우엔 완충 작용을 해 줄 다른 가족이 없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1:1 의 권력 다툼 상대가 되기 때문에, 며느리 구박을 안 하는 경우는 보기 어렵다. 홀어머니에 외동아들, 게다가 시어머니가 경제력이 없다면 결혼 기피 1순위이다. 아들의 지원이 끊어지면 본인이 살아갈 수 없으니 죽기살기로 매달리고 괴롭히는 것이다.[12]

단지 소유욕이이나 집착이라고만 치부할수 없는 것이, 우리 사회의 여성 지위와 관계가 있다. 여성이 집밖, 집안에서 경제권 발언권이 없고 지위가 낮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는 남편, 아들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들의 경제력과 발언권이 필요하고, 아내 또한 같은 이유로 남편이 필요하다. 사람은 하나인데 같은 목적을 가진 두 사람이 다툰다는 것. 즉 결혼과 동시에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아들-남편을 두고 주도권을 다투는 경쟁자가 된다. 그런데 이는 대등한 경쟁 관계가 아니고, 시어머니가 연장자이고 서열이 높으므로 당연히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이길 수가 없고, 시집살이는 대대로 내리갈굼이 되는 것이다. 이를 집착이나 소유욕이라고 하면 좁게 해석한 것이 된다. 남편이자 아들인 남자가 사망하여 쟁취할 대상이 사라졌거나, 며느리의 경제력과 발언권이 아들보다 더 큰 집안에서 시집살이가 있지 않은 것은 시잡살이가 주도권 다툼이라는 증거라 하겠다. 결국 여성의 지위가 낮은 가부장적 사회, 여성 노동력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아 임금을 덜 주고, 결국 경제력에서 큰 차이를 만드는 불평등한 사회가 시집살이라는 악습을 만드는 근원이다. 이런 면에서 생각해 보면, 더 이상 남성우월주의 사회라고 보기 힘든 현 세대의 젊은 여성들이 미래에 시어머니가 되었을 때는 고부갈등 문제가 상당 부분 해소될 것이라고 예측할 수도 있다.

4.6. 그냥 예절이 없고 인성이 나빠서[편집]

위의 경우들은 심리적 요인, 사회적 요인이기에 어떻게 시어머니와 인간적으로 친해지면, 원인을 이야기하고 설득하면 답이 보이지만[13], 아예 인성이 글러먹었다면 답이 없다. 이건 그냥 타인의 문제가 아니고 시어머니 본인이 개념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며느리뿐만 아니라 다른 주변인들 모두가 시어머니를 싫어할 수밖에 없다. 다만 며느리가 가장 오래 부대껴야 할 뿐. 이게 최악이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무법천지였으면 가장 먼저 총 맞아 죽을 만한 인간들이 나이만 헛먹고 똥군기갑질 등으로 횡포를 부리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청소년 중 일진이 있고 범죄자가 있듯이, 성인기에도 예절이 없는 어른이나 소인배, 범죄자, 악한 사람 등이 얼마든지 있다. 젊어 양아치면 늙어도 양아치다. 뉴스나 신문기사에 나오는 갑질하는 손님이 당신의 시어머니/장인/장모 등의 위치에 자리잡은 것 뿐이다.
  • 상대가 그냥 근본부터 글러먹은 악한일 경우. 원래 세상에는 상식이 제대로 통하는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로는 차마 못할 상상초월의 인간말종들도 수두룩하기 마련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 당장 예로부터도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간주하는 성악설이라는 이론이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아마도 그 사람이 악한 이유는 아예 없는 그냥 천성 악질이거나 모종의 사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막말로 피 한 방울도 안 섞인 생판 남인데다 악독하기까지 한 인간의 개인 사정에 공감해서 내가 먼저 저자세로 들어갈 필요도 없고, 굳이 그런 구제불능 쓰레기를 위해 성심성의를 다해 가며 시간과 감정을 낭비할 이유는 없다. 개과천선이란 것은 적어도 현실에서는 아주 성립하기 힘든 미사여구에 불과하다.
    물론 굳이 시집살이가 아니라도 세상 살면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글러먹은 인간들을 적지 않은 확률로 마주칠 수밖에 없다 보니, 되도록 이런 작자들을 유하게 다뤄야 한다 싶으면 악한의 심리를 다루는 여러 책을 참조할 것.[14] 가족관계로 얽히지 않은 한 대부분 피하는 쪽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당연히 시집살이는 가족관계일 수밖에 없으니 이게 또 문제.
  • 상대가 사회성이 떨어질 경우. 당연한 사실이지만 나이만 먹었다고 사회성이 저절로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이렇게 사회성도 저급한데 나이까지 많은 노땅들은 뇌까지 굳어 있기 때문에, 당신이 아무리 붙임성을 새로 교육시키려 해 봤자 사실상 갱생은 불가능하다.[15] 애당초 그런 사고방식이 손쉽게 고쳐질 수 있는 것이었으면 늦어도 40살 이전에는 자기가 알아서 다 고쳐진다.

이런 어른들이 하급자나 나이 어린 사람을 보고 하는 충고를 곧이 들으면 안 된다. 이유없는 복종을 하느라 돈과 에너지를 낭비할 뿐더러, 이런 어른들에게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늘어놓으면 보상심리에 젖어 있다며 욕을 먹고, 나중에는 자기 며느리나 사위에게 밉보이게 된다. 듣는 척 하고 무시하자.

최악의 경우에는 상종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답이 될 수 있고, 남편이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안타깝지만 결별이 답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자신에게 최선인지를 잘 따져 봐야 한다.

5. 대처법[편집]

5.1. 평범한 가정 속에서의 사소한 다툼[편집]

일단 시어머니와 아내 양자의 말을 듣는 것부터. 문제의 출발점은 언제나 대화 부족이다. 막장 드라마의 시어머니 수준이 아닌 이상에야 하소연하는 쪽도 뭘 어떻게 해주길 바라서가 아니라 '나 이렇게 힘드니 좀 알아달라규~' 이다.[1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적당히 추임도 넣어줘가며 성실하게 들어주는 것이지 훈수 둬달라는 게 아니라는 것.[17]

게다가 생각해낸 해결책은 유치원생도 생각해 낼 수 있는 의미없는 해결책. 시어머니건 며느리건 자신의 입장에서 미화된 사건해석과 전달을 할 뿐이다. 이에 기반해 이리이리 하라는 훈수대로 해 봤자 사태해결은 말도 안 되지, 그렇다고 곧이 곧대로 얘기하자니 이미 얘기한 것도 있지, 좋게 보이고는 싶지 해서 상황이 코너에 몰리므로 아내는 신경질만 낼 뿐이다.

심각한 게 아닌 것처럼 보이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신경을 끄다가 꼬투리 잡을 것 같으면 화제를 전환하던가 외출하던가 해서 탈출하고 나중에 다른 걸로 때우자. (물론 이런 방식은 임시방편일 뿐 고질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해주지 않는다.) 진짜 무뚝뚝한 남자라면 남에게 공감을 요구해 본 경험이 없을 것이므로 공감해 달라는 요구 앞에서 겉으론 끄덕여도 속으로는 그 필요 자체가 와닿지 않을 것이다.

자기가 생각해서 이건 좀 아니다 싶어 '그건 좀…' 하는 순간엔 본전도 못 건지는 수가 있다. 어차피 이런 하소연은 단순한 감정풀이라 요점도 없고 엄청 길기도 하고. 아내는 자기 남편이라고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라고 하소연을 하다 보면 남편의 입장에서는 그냥 죽어난다.

일단, 상담 전문가들은 남편이 아내 편을 들어주는 편이 가정 유지에 좋다고 한다. 일반적인 경우 부모-자식보다 남편-아내의 결속이 더 약하기 마련이다. 어머니와 아들은 관계상 서로에게 너그러운 편이지만 아무래도 며느리/아내에겐 그러기 힘들고 이 때문에 아내는 집안에 자신을 편들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외로움과 고립감에 휩싸이기 쉽다. 문제의 잘못이 일방적으로 아내에게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우선은 아내의 편을 들고 나중에 어머니에게 따로 찾아가서 어머니를 달래드리는 것이 좋다고 한다.[18]

그러나 이것도 일반론적인 이야기이지 결국 가정 문제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 특히 홀어머니의 외아들인 경우 어머니 입장에서 가족이라고는 아들 하나 남은 셈인데 이런 조언만 믿고 매번 아내 편만 들었다간 어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게 되는 셈. 요령 있게 잘하자. 사실 남자든 여자든 이런 상황이면 결혼을 포기하는게 맞다
이걸 본 여자들은 되도록 홀어머니를 가진 남자를 피하자. 진심이다

여자는 시어머니가 도발한다고 해도 절대로 때리지 말자. (당연한 말이지만) 형사처벌을 받을 수도 있고, 남편이 폭력적인 경우 본인 또한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아무리 억울하다고 해도 폭력은 보통 해결책이 아니다. 시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르게 될 정도로 괴롭힘을 당할 경우, 괜히 전과 만들지 말고 이혼하는 것을 추천한다.

5.2. 막장 드라마 사연 수준일 경우[편집]

막장 드라마 사연 수준으로 올라가고 인터넷에 올렸을 때 공분을 살 사연 정도가 된다면 적극적으로 개입을 해야 한다. 세상에는 상식과 상상을 뛰어넘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것이 바로 당신의 가족일 수도 있다.

아내는 도와주길 바라지만, 대부분의 남편은 제 엄마한테 꼼짝을 못해 그냥 참으라고 하거나, 오히려 며느리 주제에 엄마한테 까불지 말라며 아내만 비난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도피하면 안 된다. 이 정도면 남편도 공범 취급당하며, 실제로 이혼 사유도 충분히 적용 가능하다.

자기 부모님의 부당한 구박이 심하다면,
  • 정말 답이 없는 경우 어머니와 배우자 둘 중 어느 한쪽은 포기해라. 냉정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사이좋은 결혼생활과 사이좋은 부모자식 관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아내 편을 들자니 여자 말 듣느라 낳아준 어미 홀대한다는 소리를 듣고, 어머니 편을 들자니 평생 같이 살 여자의 등쌀이 매섭다. 어차피 이런 집안일 경우 시가와 처가 사이에 서로 니집 내집 편가르기 바빠서 화합의 가능성이 없으니, 양가가 한 식구가 되어 잘 지낼 생각일랑 때려쳐야 한다.
  • 구박당하는 배우자를 성심성의껏 위로해준다.
  • 서로 전화를 할 일을 최소화한다. 예를 들어 장모가 사위를 구박할 경우, 남편이 안부전화를 하는 일이 없도록 배려한다. 전화상으로만 해결될 문제는 딸과 장모 사이에서 해결한다. 장모와 사위 사이에 꼭 통화해야 할 문제라면 반드시 부부가 같이 있을 때 전화를 한다. '안부전화를 하지 않으니 사위가 버릇이 없다', 라고 갈구면 딸 쪽에서 이런 구박은 무시해야 한다.
  • 서로 만날 일을 최소화한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갈굴 경우, 남편 쪽에서 더 이상 아내를 시가에 보내지 않는다. 단, 이것은 남편 쪽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어야 가능하므로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한다. 무조건 "사돈 댁이 딸 교육 제대로 시키지 않았다, 며느리 버릇 없다"는 딋담이 나오게 되는데, 남편이 얼마나 잘 막아주느냐가 관건이다. 남편이 안 막아주면 이 방법은 쓸 수 없는 방법이다.
  • 만나서 말을 최소화한다. 인사 정도만 하자.


상대 부모님의 부당한 구박이 심하다면,
  • 트집잡는 것은 역으로 비꼬아서 부모님이 트집 잡을수록 자신만 손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음식이 맛없다고 트집 잡으면 앞으로 음식을 하지 말고 반찬을 달라고 부탁해본다. 식당을 예약했는데 예약의 성실성을 꼬투리 잡으면 앞으로 예약을 하지 않는다. 직장을 그만두라고 하면 '생활비를 대줄 거냐'고 물어본다.
  • 묻는 말에는 '예 / 아니오 / (침묵)' 3가지로만 대답하도록 한다. '상대가 원하는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대답을 아예 하지 말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한다고 해 놓고 안 하면 욕을 하고, 못 한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욕을 먹기 때문에, 침묵이 갈굼을 피하는 방법이다.
  • 자기 자신이 외벌이를 할 경우, 배우자가 소득이 생길 때까지 배우자의 부모님에게 돈을 쓰지 않는다. 용돈도 드리지 않고 선물도 주지 않는다. (물론, 배우자와 미리 협의해야 한다.)
  • '빙그레쌍년/놈' 모드로 구박에 똑같이 조롱하는 경우도 있다. 나랑 상관없는 다른 부서의 높은 직급 상사라고 생각하면 웃어넘기기 좋다. 어차피 실력 행사는 하지 못한다.근데 남편이 이러면 99% 확률로 아내로부터 찌질하다는 말을 듣는다


시집살이 힘들다면 마인드 컨트롤은 이렇게 하면 좋다.
  • 살면서 이유없는 증오를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처음에는 사태파악 못 하고 '내가 나도 모르게 무언가를 잘못해서 이 사람이 날 싫어하는구나'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면 괜히 힘들어진다. 예를 들어 며느리가 돈을 잘 버는 것이 기분 나쁘다며 싫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 한 비위를 맞출 방법이 없다. 싫은 건 그냥 싫은 것이다. 정성을 다하면 알아줄까? 잘하면 좋아할까? 싫어하는 것을 그만두면 덜 갈굴까? 그냥 대놓고 시비를 걸 수 있는 핑계거리가 필요했을 뿐이지, 정작 그 일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정성에 감동받아 변하기야 할텐데 시간이 대단히 오래 필요하므로 노예 생활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그리고 정성을 안 들여도 어차피 시간 지나 계속 나이먹으며 약해지면 변할 사람은 변한다.변하지 않을 사람은 80이나 90이 돼도 안 변한다
  • 너무 심한 스트레스를 겪을 경우 이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중재하도록 노력해야겠지만, 시월드,처월드 문제는 절대로 칼 베듯이 갈라설 수 없는문제이다. 보수적인 집안이라면 며느리들은 제사,명절에 노동력을 제공해야하고 사위는 일단 얼굴을 덜 마주치는게 최선이지만 그것조차 허용을 하지않는다거나 계속 악습을 강요한다면 계속 붙들고있지말고 결단을 내리는것이 좋다.
  • 세상엔 원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걸 기억하면 좋다.
  • 악의에 받친 말을 들으면 최대한 잊어버리고 웃어넘겨라. 여행 갔던 추억, 코미디 프로그램 같은 걸 기억에 떠올리면 좋다.
  • 그래도 견디기 힘든데 이혼은 하기 싫다면... 자기 부모든 배우자의 부모든, 인연을 끊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 동안 모르고 살았던 것이지, 자식의 배우자에게 악독하게 대한다면 부모의 인성이 문제가 있는 것이므로. 남자든 여자든 결혼 후 최 우선 순위는 자기의 가정이고, 결혼 이후엔 더 이상 부모 가정의 소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연을 끊을 정도의 문제가 있었다면 이후 부모 쪽에서 연락을 해 오더라도 관계가 좋아질 일은 별로 없다. 왜냐 하면 그쪽이 아쉬워서 연락해 온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

6. 이런 어른은 어떻게 피하면 좋은가?[편집]

차라리 결혼 결정 과정에서 막장 짓을 보여주는 정말 지독한 예비 시부모(혹은 예비 처부모)라면 차라리 사태파악 일찍할 수 있어서 결혼을 피할 수 있겠지만, 보통은 결혼 전에는 상대방 부모님이 성격파탄자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없다는 게 문제다. 상대방의 부모님이 아내/남편을 길렀으니 상대방을 보면 되지 않느냐? 고 반문할 수 있지만 그것도 쉬운 것은 아니다. 평소에는 평범한 사람이다가 자신의 자식에 관련된 일이면 역변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남성이 부모가 없으면 십중팔구 여성의 부모님이 그 남자와 결혼을 반대하는 광경을 목도하게 된다. 미래 사위에게 괜히 "부모님 뭐하시니?"라고 묻는 게 아니다.

다행히 우리나라 결혼 과정은 부모님이 개입하는 과정이 많다 보니, 힌트는 얻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 과정에서 상대방 부모님의 행동에 속상해하면서도 일단 이 고비만 넘기고 결혼하고 나면 좀 나아지겠지 하고 부질없이 긍정적으로 생각하거나, 오랫동안 상대방과 연애했는데 이제 와서 헤어지기에는 상대방에 미안해서 혹은 이 나이 되어 다시 새 결혼상대 구할 생각하니 암담해서 그냥 결혼한다. 그리고 결혼 취소 안 했던걸 엄청나게 후회한다. 그러니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는 결혼을 심각하게 다시 고려해보는게 좋다.[19] 상대는 정말 괜찮아 놓치기 싫은데 부모가 막장이라면 (그런 경우는 많지 않지만) 결혼 후 즉시 부모와 인연을 끊을 것을 요구해 보자. 받아들이면 결혼하는 것이고 아니면 파혼이다. 올바른 사람이라면 이미 자신이 막장 부모에게 질려 있을 것이므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 약혼자 부모님이 자신이나 자신의 부모님에게 폭언을 한다든지 학력 재력 기타 등등 이유로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함부로 결혼하면 안 된다. 일반적인 부모님은 사돈 될 사이에서 절대 그러지 않는다. 설사 상대방 집안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이미 결혼하기로 한 사이에 적어도 상대방 앞에서 싫은 티를 내지는 않는다. 양가 상견례는 얼굴 보고 밥이나 먹자는 게 아니라 그래서 하는 거다. 대충 하지 말고, 여러 가지로 물어 보고, 앞날의 계획에 대한 공감과 동의도 구하고, 양가 가족간의 관계, 명절이나 제사 때 어떻게 할지 등등 시시콜콜한 데까지도 양가 부모 함께 있는 자리에서 못박아 두는 것이 좋다. 상견례를 제외하면 결혼 전에 그럴 기회는 거의 없기 때문이며, 상견례는 공식적인 행사이기 때문에 나중에 딴소리 못 한다.
    사례 1: 인사갔다 한우선물세트 가지고옴(2017. 04)
  • 약혼자 부모님이 심한 가정불화(가정폭력이혼)를 겪었던 집안이라면 주의깊게 관찰하는 게 좋다. 일반적인 경우에야 부모님 간의 문제로 끝나고 별 문제 없으나, 통계적으로 자녀 세대에서의 결혼 가정불화가 2배 정도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혼 문서 참조.
  • 약혼자 부모님이 사회통념에 맞지 않을 정도로 과도한 금전적 요구를 한다면 함부로 결혼하면 안 된다. 즉 여자에게 과도한 혼수나 예단비를 요구한다든지, 남자에게 요즘처럼 전세비 비싼 시대에 대출없이 전세비를 다 마련하라고 한다든지. 이것도 상견례 때를 비롯해 결혼 전에 정하는 것이 좋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얘기 하는 것은 결코 흉이 아니다.
  • 약혼자 부모님이 결혼 과정 중에 황당할 정도로 심한 간섭을 한다면 함부로 결혼하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집을 고를 때 상대방 부모님이 예비 며느리나 사위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결정한 뒤 본인들 보고 돈만 내라고 한다면 심한 문제가 있다. 이러면 바로 파혼하라. 그래야 본인 신상에 좋고, 고부갈등 혹은 장서갈등의 해소의 지름길이다.
    사례 1: 요즘 대세길래ㅋㅋ 오빠 여자친구분 사이다썰(2017. 07)
  • 본인이 여성이라면, 예비 남편의 누나-여동생이 양육기에 어떻게 성장했는지 관찰해보자. 이는 생존 및 존엄성의 문제이다. 그들이 성차별의 피해자였다면, 며느리가 될 본인도 예외가 아니다. 예비 시부모가 친딸을 하찮게 대하는데, 과연 며느리를 좋게 대할 수 있을까? 특히 예비 시어머니가 딸을 가혹하게 대했다면 본인에게도 정말로 수습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 물론 자기딸은 잘 대해주고 며느리를 홀대하는 시부모도 있다. 예비 시누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예비 시부모를 직접 관찰하거나, 예비 동서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
    부부 클리닉 사랑과 전쟁 시즌 2동서가 간다 편(2013년 3월 22일)
강조하지만, 이런 식으로 인성이 문제 있는 경우에는 결혼하면 안 된다. 상대 집안에 잘 보이기 위해 없는 것도 만들어가며 노력하는 결혼 전에도 낌새가 보인다면, 결혼 후엔 보나마나다. 청첩장 찍고 식장 예약 다 했어도 그만둬라. 아니, 양가 친척 친구 다 모아 놓고 결혼식을 올렸더라도 그만두는 쪽이 낫다. 체면 같은거 걱정할 필요 없다. 결혼식 왔던 사람들은 적당하게 이유만 댄다면 다들 납득하고, 금방 잊어버린다. 파혼은 큰 스트레스지만 이혼보다는 백배 낫다. 파혼 비용은 고작해야 혼수 반품과 예식장 취소, 집 계약금[20] 정도이지만, 이혼하면 예식 때, 신혼여행 때 등 결혼에 돈은 그냥 까먹는 거라 경제적 손실이 더 크다. 체면이나 심리적 손실 차이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결론적으로, 무작정 빨리 결혼하지 말고 결혼 전에 배우자의 부모님, 배우자의 집안 환경 및 가치관에 대해서 충분히 서로가 알아간 다음 신중하게 결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7. 처가살이(처월드)[편집]

가족에 따라서는 장인/장모 → 사위 사이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데, 이를 처가살이 혹은 처월드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남존여비 사상에 입각한 시집살이 문제가 워낙 심각하게 이어져 온 탓에 아직까지도 시집살이의 사례가 처가살이보다 압도적으로 많지만, 그래도 시대가 변했다는 말이 괜한 게 아니듯 시집살이 문제는 아주 조금씩이나마 줄어드는 반면, 요즘은 고부갈등 이상으로 장서갈등이 문제라는 말처럼 반대로 처가살이가 점차 심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 시집살이가 여자의 내조로 욕을 먹는 경우라면, 처가살이는 남자의 경제력으로 욕을 먹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너같이 아무 능력도 없는 놈한테 금쪽 같은 내 딸 줬으면 여왕처럼 극진히 모실 생각을 해야지, 쥐뿔도 없는 거지새끼 주제에 어디서 대우를 바래?"라며 돈 버는 기계로만 대한다.
  • 시집살이도 마찬가지지만, 여자가 바람이 나도 장모가 되려 남자에게 "아니 내 딸 바람난 게 왜 내 딸 잘못이야? 자네가 돈을 못 벌어오니 남자로도 안 느껴지는데, 이렇게라도 풀어야지!!"라며 자기 딸 감싸기를 시전한다.
  • 귀농한 집안일 경우 "이런 건 남자가 해야지."라며 힘 쓰는 일은 죄다 사위에게 떠넘기기도 한다.

또한 며느리를 괴롭히는 게 주로 시모인 것처럼 사위 역시 마찬가비로 성별이 같은 장인이 많이 괴롭힐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처가살이의 대부분은 장모에게 당한다.

또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못살게 굴면 그에 대한 보복으로 장모나 장인이 사위를 못 살게 구는 경우도 눈에 띈다. 말 그대로 "내 딸을 못 살게 굴면 너네 아들의 목숨은 없다!!" 뭐 이런 거. 다만 이 때 시어머니는 강약약강 사상에 입각하여, 친정 부모에게 뭐라할 수 없으니 결국에는 만만한 며느리에게 전화해서 마구 따진다.

외국에는 이런 경우가 많다. 특히 서양권에서는 왠지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혼인, 가족 관계 내 갈등의 주된 축이 시어머니 - 며느리인 이탈리아를 빼고 오히려 장모들이 사위를 갈구고, 반대로 사위들은 자동차 트렁크에 "여기는 장모석"이란 범퍼 스티커 붙여 놓는 등 장모 - 사위간 갈등이 더 흔한 소재이다.

8. 예시[편집]

8.1. 미치코 상황후/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편집]

대표적이자 가장 호되게 당한 사람은 미치코 상황후이지만, 사실 미치코 황후뿐만이 아니라 일본 황실에서는 대대로 고부 갈등이 내려왔다. 데이메이 황후(사다코) → 고준 황후(나가코) → 미치코 상황후 → 마사코 황후/키코 비까지 고부갈등의 대물림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 일본 황실에서는 남성만이 천황이 될 수 있는데[21]쇼와 덴노의 아내 고준 황후는 결혼 후 줄줄이 공주만 4명을 낳아, 시어머니이자 다이쇼 덴노의 황후였던 데이메이 황후에게 약 30여년 동안이나 지독한 시집살이를 당했다. 아들을 빨리 낳지 못한 것뿐 아니라 고부 간 성격 차이 등도 큰 이유로 작용했다고 한다.

이후 고준 황후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의 길을 걸어, 맏며느리 미치코 황후에게 몹시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켰다. 특히 이전까지 일본 황실의 비(妃)는 황족 내지는 화족(귀족)만 될 수 있었는데, 미치코 황후는 그 수천 년의 전통을 깨고 최초로 평민 출신[22]으로서 황실에 시집와서, 그야말로 시집살이를 당할 좋은 구실이 되었다. 미치코 상황후는 시어머니뿐 아니라 수많은 황실 친인척들 및 심지어 시종들로부터도 온갖 조롱과 모욕을 당했다. 만 59세이던 1993년에는 실어증에 걸리기도 했을 정도다. 미치코 황후 이후의 황실 자녀들이 모두 평민과 결혼한 것을 보면[23]미치코 상황후는 '첫 테이프를 끊은 사람'이기에 혹독하게 당했던 것.

또한 미치코 상황후의 맏며느리 마사코 황후도 아들을 낳지 못하고 일본 황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여[24] 시부모, 황실, 궁내청, 일본 국민들로부터 고달픈 시집살이를 당했다. 그나마 마사코 황후가 황후로 즉위하고 공무에도 힘쓰면서 사이가 완화되었다. 작은며느리 키코 비는 아들(히사히토)도 낳고 약삭빠르게 시부모의 비위도 잘 맞추는 등, 겉으로는 잘 지내는 듯 보이지만 그녀 역시 시집살이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은 듯하다. 마사코 황후에게는 아들이 없고 무남독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만 있지만, 키코 비는 장차 또 얼마나 독한 시어머니가 될지, 매우 끔찍한 일이다.

9. 어록[편집]

형님 형님 사촌 형님 시집살이 어떱뎁까?
이애 이애 그 말 마라 시집살이 개집살이.

《시집살이 노래》 中
남편의 어머니는 아내의 악마다.

- 서양 속담
시어머니의 등뒤엔 악마의 날개가 달려 있다.

독일 속담
시어머니는 설탕으로 만들어도 쓰다.

몽골 속담
어머니 없는 남자와 결혼하는 여자는 행복한 여자다.

스코틀랜드 속담
시어머니가 면실뭉치를 선반에서 떨어뜨리면 며느리의 머리가 깨진다.

터키 속담

10. 기타[편집]

  • 많은 남자들이 '우리 어머니는 아들인 내게 잘 해주니까 내 아내도 딸처럼 여기고 잘 해줄 거다'라고 착각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야 자식이니까 잘해주지 이는 사실 남자가 처가에 들어가 사는 경우보다 아내가 시집에 들어가 사는 경우가 더 많아 자주 눈에 띄기는 하지만... 꼭 남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자든 여자든 자신의 부모, 형제, 자매, 가족이 자신에게 해 주는 만큼 자신의 배우자에게도 잘 해줄거라는 보장이 없고, 자신은 자기 가족을 편하게 대할 수 있지만 자기 배우자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문제다. 사실 이 문제는 자기가 쉽게 "엄마! 밥줘!"라고 외칠 수 있은 만큼 "시어머님!(장모님!) 밥줘!" 라고 외칠 수 있는지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간단한 문제지만(...). 그런데도 왜 아내가(남편이) 자기 가족에게 그렇게 거리감을 느끼는지 잘 모르겠다는 철없는 불평을 하는 사람이 종종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 20~30년 넘게 살아왔던 가정이라 불편한 것을 못 느끼고 있다가 며느리(사위)라는 제3자의 등장으로 불편한 것을 느끼게 되는 경우, 이를 인정하기보다는 새 사람을 이상한(유별난) 사람 취급하여 불편하게 하고 동화시키려 드는 경향이 있는 것도 시집살이의 분명한 원인이다. 서로 다른 두 개체의 사람은 살아온 세월만큼의 자기 세계가 있는데, 이 두 세계의 충돌이 원만하게만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사이에서 완충작용을 해주는 사람(시가라면 남편, 처가라면 아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진다. 위에서 쓴 대로 서로 보는 횟수를 최소화할 수 있다면 최상이지만 현실은 그러기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설프게 중재했다가 오히려 골이 더 깊어지면 자신도 만만찮게 힘들어진다. 위에서 쓴 것 같이 막장스럽고 고집스럽고 가부장적인 사람들만 분쟁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일반적 상황에서는 충분히 정상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도 시집살이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중재자가 얼마나 중요한 포지션인지 두 번 세 번 생각하자.
  • 결혼 계획을 짤 때 합가보다는 분가를 원하는 이유가, 시부모 자체가 싫다기보다는 시부모와의 인간 관계를 부담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 결혼경험이 없는 사람도 평소 집안 분위기를 보거나 명절을 겪고 윗세대의 시집살이를 알게 되는데, 특히 여성들은 지금까지 자라면서 본 어머니가 겪은 시집살이로 인해 자신도 저렇게 될 거라는 생각에서 결혼을 기피하게 되는 경우가 꽤 많다. 명절에 며느리가 친정집에 가지 못하도록 눈치를 주고 일을 시키는 시가, 며느리가 직업을 그만두도록 강요한 시가에다 손녀까지 끌어들여 며느리와 같이 괴롭히는 시가 등등 아직도 무서운 시가들이 존재하고, 이러한 일을 가정의 일원으로서 보고 당했거나 어머니, 주변 여성들에게 직접 들은 사람에게 결혼은 공포라고 느껴질 수 있다. 현대에는 덜해졌다고 하지만 악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으며, 모든 가정의 일을 다 알 수는 없는 법이다. 당사자의 개인사와 가정사는 알 수 없을뿐더러 당사자의 일은 당사자가 정하는 것이니, 개인이 겪은 일로 인해 비혼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윗세대는 더했는데 유난떠는 거냐"고 나무라기보다는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해주자.
  • 모든 시어머니들이 이러는 것은 아니다. 가끔 역으로 자기 친어머니는 욕하고 시어머니를 추켜세우는 기묘한 구조의 며느리도 볼 수 있는데, 정말로 시어머니가 지혜로우시고 착하신 경우 이러는 며느리가 많다. 일례로 어렸을 적 돌아가신 아버지의 시체를 보고 큰 트라우마가 생긴 며느리가 있었는데, 이 이야기를 시어머니가 결혼 초반에 우연히 엿듣고는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이 며느리를 보고 싶어하자 부르고 싶어도 며느리의 트라우마 때문에 결국 부르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 불효를 끼쳐서라도 며느리를 지키고 싶어했던 것. 또는 진짜 친어머니가 막장이고 시어머니가 정상인 사례도 있긴 하다. 대표적인 예가 가수 장윤정.
  • 위의 사례들과 달리 한 술 더 떠서, 시어머니는 정상인데 며느리가 막장인간인 케이스도 있다. 눈에 정말 안 띌 뿐.
  • 한편, 2013년에는 30년 동안 우울증을 앓던 시어머니가 '황혼육아'를 담당하며 손자를 봐주다가 며느리로부터 받는 멸시를 견디지 못해 임신한 며느리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 시집살이 당하는 며느리가 시가식구들의 싸대기를 때리는 장미와 동백이라는 플래시 게임도 있다.
  • 한 때 "시월드"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이 원인은 당연히 시집살이가 매우 고달프게 느껴져서다.

[1] 이 논리적 오류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사막에 있는 '우물에 독을 푼다'는 것은 여행자가 물을 마시면 독으로 죽고, 마시지 않으면 목말라 죽는다는 뜻이다. 예시: 데모하는 것들은 다 때려죽여버려야 혀, 내 말 반대하는 시끼들은 모두 빨갱이 시끼들이여![2] 하지만 오히려 이러면 며느리에게 '순진한 내 아들을 잘도 구워삶았구나', '애미라는 년을 닮아서 자식새끼들도 하나같이 못 배워 처먹었네'라는 핑계로 빈정대거나 나쁜 년으로 만들 수도 있다.[3] 오히려 평민이나 천민들 사이에서는 이런 성별 간 구별이나 차별이 다소 완화된 양상을 보였는데, 농사 짓는데 있어서 여성의 존재가 없어선 안 될 요소였기 때문이다. 일단 여자가 건강하고 아이를 많이 낳아야 일 할 사람이 공급되는 셈이기도 하고, 그게 아니라도 여성의 노동력 또한 남성보다 완력은 적을지언정 농사를 짓고 가내수공업으로 물건을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될 요소였기 때문에 남성들로서도 여자들의 일손 하나하나가 아쉬웠기 때문에 마냥 함부로 대할 수만은 없었다. 여자를 집에 가둬놓고 자수나 놓고 살 만한 여유 자체가 없었던 셈. 그래서 양반들은 자식 벼슬길 막을까봐 재혼을 꺼렸지만, 벼슬길과는 거의 인연이 없는 조선시대 하층민들은 이혼과 재혼을 밥먹듯이 했고, 오히려 이혼과 재혼이 현대 사회보다 훨씬 쉬웠다. 과거 유럽에서도 귀족들은 남자들은 정부를 끼고 살고, 여자들은 방에 갇혀서 신부수업이나 받아야 했으며 결혼과 혼전순결에 대한 교회법도 엄격하고 까다롭게 적용되었지만, 농민이나 농노들은 양가 식구끼리 지참금조로 준비한 예물을 서로 교환하거나 영주에게 돈을 바치고 적당히 날을 잡아 동네 잔치 좀 한 후 같이 살기 시작하면 그게 그냥 결혼으로 인정되고, 남녀가 같이 살기 싫으면 그냥 갈라섰던 것과 마찬가지다.[4] 출가외인칠거지악과 같은 것들은 본래 양반의 성리학적 성차별이었지만 일제강점기를 기점으로 민간에서도 쓰이게 되면서, 20세기의 여러가지 사회적 구조에, 특히 법적인 조항에서조차 영향을 끼치곤 했다.[5] 물론 조선시대의 민간에서 시집살이를 통한 고역이 없던 것은 아니다. 허나 상대적으로 여러 제약들과 차별에 수시로 억압당하던 양반층의 입장을 평민들과 동일시 하기엔 무리가 있다.[6] 그냥 습관이 아니라 이유가 있다. 어머니는 장래 집안의 권력자가 될 아들에게 잘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7] 고려 시대는 대부분 알다시피 여권이 상당했고, 조선 초기에는 제도들을 정비하면서 여자들도 법적으로는 남성과 거의 동등했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성리학 질서가 극도로 강화되면서 현재의 이미지가 정착된 것.[8] 6.25전쟁의 극도의 사회적 혼란을 지나며 너도나도 양반을 자처하기 시작하는 시국이었으나, 한국은 전후 국제 대표 알거지나 다름없어 사람들의 삶은 시궁창이었기에 이런 전통적 질서가 종교처럼 극단화된 시점이기 때문이다.[스포일러] 후반부에서 시모가 여주인공에게 사과를 하는 척 방심시켜서 납치한 뒤, "넌 내가 아들에게 선물한 장난감에 불과하고, 아들이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은 모두 보관해 두는 게 내 법이다."라면서 지하실에 감금한다. 여주인공이 친구의 도움으로 탈출할 때 다시 막아서며, 친구의 면상을 먼저 삽으로 때려 기절시키고, "내가 말했지? 살고 싶으면 조용히 있으라고. 사람도 아닌 것이 감히 사람 흉내를 내? 죽어버려!!!"라는 망언을 내뱉으며 여주인공을 살해하려 들다가 여주인공의 친구에게 소화기로 머리를 얻어맞고 절명하게 된다. 여주인공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고 시종일관 물건 취급하는 시모의 태도로 미루어 짐작컨데, 만약 여주인공의 친정어머니가 등장했더라면 '네년이 저걸(여주인공) 내 아들에게 팔지 않았느냐, 무슨 권리로 판 것을 다시 돌려받으려 하느냐'며 장난감 가게 직원 취급했을 것이다.[10] 물론 현실 시모가 아무리 악랄해도 며느리가 나간다고 할 때 "아이고, 잘 됐다. 제발 우리 모자 인생에서 좀 영원히 사라져 다오. 응?" 하고 알아서 놔줬지, 원한을 품어서라도 저런 짓은 안 한다.[11] 이런 집안의 경우 시아버지가 시어머니보다 더 극성맞기도 하다.[12] 극단적인 실제 예로, 시어머니가 신혼부부 방에 들어와 같이 자려 한다거나 밤에 며느리를 자꾸 부르고 일을 시켜 잠자리를 방해하는 건이 있었다. 부부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자기가 갖고 있던 아들의 재산과 권력이 아이에게 상당 부분 넘어가니까 막으려고 했던 것. 물론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은 안 한다.[13] 예를 들어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은 경우,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한탄을 들어주고 맞장구 쳐줘서 시어머니가 같은 여자라 이해해준다고 좋아하는 경우가 있긴 있다. 그런데 이런것도 하루이틀이다. 몇년간 반복되는 레파토리와 같은 푸념과 하소연을 듣다 보면 듣는 사람마저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마치 이야기를 듣고있는 본인이 감정쓰레기통이 된 듯한 느낌이다.[14] <또라이 제로 조직>, <참아주는 건 그만하겠습니다>, <굿바이 심리 조종자> 등.[15] 게다가 이런 유형의 작자들은 '나이도 어린 놈이 감히 나한테~'라는 선민사상적 사고방식까지 기본 탑재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 당신이 상대보다 단 한 살이라도 나이가 어리다면 직급이고 뭐고 상관없이 하극상까지 벌이는 주제넘는 짓까지 서슴지 않는다.[16] 대충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넘어가는 여자도 있지만 자신이 원하는 반응을 못 얻으면 오히려 상대를 나쁜 놈 취급하며 역정을 내는 여자도 있다. 케바케. 게다가 일일이 받아주는 것도 나름대로 문제다. 푸념에 익숙해져서 남편/아들을 징징 셔틀로 생각하는데 이거 받아주는 것도 일이다. 괜히 상담이 기피직종인 게 아니다.[17] 애초에 여자가 자기 힘들다는 얘길 하는 건 일을 해결해달라거나 해결방안을 제시해달라는 게 아니라, 내가 일은 알아서 해결하겠지만 해결하느라 이렇게 힘들다고 위로 좀 해달라는 표현인 경우이며, 여자어를 해석하는 능력이 부족한 남자들도 괜히 훈수를 둘 이유도 없다.[18] 간단히 말해, 각각의 상황과 그 상황에 맞는 도리 및 판단 문제는 (상황마다 다른 문제인 만큼) 접어두고 단순히 '가정의 유지'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경우 어머니보다는 아내 편을 들어주는 것이 더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부모-자식 사이에는 흔히 세상에서 가장 긴밀하고 튼튼한 인간관계의 예로 쓰일만큼 강한 유대관계가 있지만, 부부 사이는 그렇지 못하다...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면, 끊으려고 하면 이혼 합의 하고 한방에 끊어지는 것이 부부의 관계라는 것. 당장 부모자식간에 절연하는 경우와 부부간에 이혼하는 경우 중 어느 쪽이 더 흔한지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머니에게는 어머니의 남편인 아버지가 있다.[19] 그럼에도 상대와 결혼을 하겠다면 축의금은 안 받는 스몰웨딩을 상대방 부모님에게 물어 볼 것을 추천한다. 거의 이러한 이들은 인성이 아예 안 갖추어진 사람들이므로, 무조건 반대할 거다. 이럴 경우 결혼 이후 시집살이가 심할 가능성이 많으니 무조건 피해라.[20] 이건 인기 있는 집이라면 손해 없이 다시 팔수 있다.[21] 옛날에는 여성 천황도 몇 있었다.[22] 말이 좋아 평민 출신이지 미치코 황후의 친가는 일본 최대의 재벌가 집안출신으로 외가는 구 화족 가문이다. 즉, 미치코 황후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최상류층 가문의 일원이었으며, 재색까지 겸비한 전도유망한 여인이었다. 이런 사람을 단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구박한 것이다.[23] 마사코 황후키코 비노부코 비히사코 비 등[24] 일본 황실은 수천 년의 전통이 그대로 내려오는 매우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집단인데 반해, 마사코 황후는 미국과 유럽에서 오랜 시간 성장하여 대단히 현대적인 인물이었기 때문.

2022/06/07

전병철 ‘치열했던 농민운동 후회한 적 한 번도 없다’ - 경북in뉴스

전병철  ‘치열했던 농민운동 후회한 적 한 번도 없다’ - 경북in뉴스

‘치열했던 농민운동 후회한 적 한 번도 없다’
유경상(경북기록문화연구원 이사장)
승인 2021.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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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 풍양 토박이로 가톨릭농민운동 앞장선 전병철(全炳哲)

1979년은 박정희 유신정권의 말기적 증상이 여러 형태로 등장했던 때다. 정치경제와 사회문화 영역에서 정권의 억압은 드세어지고 있었고 이에 맞선 서민대중의 저항은 필사적이었다. 대도시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은 성당으로 피신해 농성을 했고, 농민들은 인근 중소도시 성당을 근거지로 삼아 저항을 이어갔다.

그해 5월 경북북부권에서는 오원춘 납치연행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천주교안동교구의 전 사제단이 들고 일어났다. 오원춘은 영양군 청기면에 사는 농민이자 안동가톨릭농민회 영양군 청기분회장으로 감자피해보상운동에 앞장섰다가 납치 폭행을 당했다. 한국천주교회와 가톨릭농민회는 한 명의 농민에게 가해진 인권유린을 민주주의와 민중생존권에 반하는 폭거로 받아들였다. 정권의 억압과 탄압에 맞서서 안동 목성동성당에서 시작된 기도회와 항의농성은 유신정권의 몰락을 앞당기는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다.
전병철(68세, 前 안동가톨릭농민회 이사 ․ 예천군농민회장) 회장은 이십대 후반인 70년대 초반부터 고향 풍양에서 농사를 짓다가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해 평생을 농민운동가로 활동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고향을 지키며 생명농업공동체 활동가로 평생의 신념을 지키고 있다.

목성동성당 시국농성 참여로 농민운동 눈뜨다

사제들과 가톨릭농민회 간부가 구속되는 과정에서 1979년 8월 6일 한 청년이 목성동 성당 농성장을 찾았다. 예천군 풍양면에서 3대째 천주교 신자로 농사를 짓던 27살 전병철은 친구 정원해와 함께 이 날부터 목성동성당 농성장에 합류했다. 8월21일 경 큰어머니가 별세해 삼우제를 지내러 나가다가 안동경찰서로 연행돼 이틀간 구류를 살던 중 친척어른들이 몰려 와서 풀려났다. 이로 인해 청년 농민 전병철의 삶의 여정도 크게 바뀌게 된다.
1979년 8월 천주교안동교구 모든 사제단과 안동가톨릭농민회원들이 안동목성동성당에서 시국기도회 및 농성을 펼쳤다. 영양 청기분회장 오원춘 납치폭행 사건에 엄중 항의하는 시국농성은 박정희정권의 몰락을 재촉했으며, 평번했던 청년농민 전병철의 삶을 농민운동가로 전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전병철(68세, 前 안동가톨릭농민회 이사․ 예천군농민회장)씨를 주위 사람들은 평소 전 회장(會長)으로 부른다. 그만큼 오랜 세월 농민운동단체 회장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풍양면 공덕1리로 ‘동림’마을이다. 풍양은 예전부터 예천읍내로부터 남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독자적인 정주생활권을 갖춰온 지역이다. 풍양을 둘러싼 낙동강줄기로 인해 의성 다인면 방향만 육로이고 나머지는 ‘3면이 바다’라는 우스개 소리도 곧잘 듣는 곳이다. 낙동강 중류의 수자원이 풍부해 수리시설이 잘 갖춰져 평야가 넓다. 벼농사를 포함한 각종 작물이 생산되어 예전부터 부촌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이어진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난 전병철에게 성당은 친숙한 놀이터였다. 십대 후반에 외지로 잠깐 나갔지만 군복무를 위해 고향마을로 돌아온 후부터 농사를 짓겠다는 맘이 컸다.

“우리 땅은 별로 없었지만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제대로 짓자는 생각이었죠. 우리 마을 천주교신자들은 다인성당 소속이었지만, 공덕에도 공소(公所)가 있었고 나름 열혈 신자였죠. 그리고 풍양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활권이다 보니 성실하게 농사짓고 성당에 열심히 나가면 됐고요. 20대 초반에 평신도 모임인 빈첸시오 회장을 맡았어요. 70년대 중반, 어느 날 빈첸시오 회장인 제 앞으로 편지 한 통이 왔었죠. 구미에서 온 편지인데 농민회에 가입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공덕 공소 평신도단체 회장은 입회를 의무적으로 한다고 판단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국적으로 회원순서가 182번째, 안동교구 권역에서는 1번이었다. 농민운동단체라는 걸 확고하게 알고 가입한 건 아니지만 운명처럼 곧 농민운동가의 길을 걷는 계기로 작용했다.
1983년 2월 열린 한국가톨릭농민회 제14차 전국대의원 총회. 천주교신자이자 농민운동의 길로 들어선 전병철은 한국가톨릭농민회 182번째 회원이었다.

치열했던 쌍호, 다인, 풍양 농민운동 전국 모범으로

1976년 4월 한국천주교는 ‘한국가톨릭농민회’를 공식단체로 인준했고, 안동교구에서는 1977년 4월부터 농민사목부를 설치해 ‘공소 주변 마을실태조사와 현지농민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 농민지도자연수회를 지속화하는 과정에서 교육을 이수한 농민들은 자연스럽게 회원으로 연결됐고, 분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각 지역의 분회를 기반으로 한 안동가톨릭농민회가 1978년 12월27일~28일에 창립되기에 이른다.

이미 농민지도자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 농촌의 문제점과 농민들의 단결 필요성을 느낀 전병철은 오원춘 납치연행 농성장 참여와 경찰 연행을 계기로 본격적인 농민 권익활동에 뛰어들게 된다.

풍양 인근지역에서는 벌써부터 왕성한 안동가톨릭농민회 분회활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의성 다인본당 상광과 쌍호, 예천 지보 축동의 활동을 지켜보며 1980년 8월21일 풍양분회를 창립하게 된다. 당시 5명 회원이 확보되면 분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풍양에서는 전병철, 최정규, 정상우, 윤종갑 등이 초기 회원이었다.

풍양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부유한 편이지만 빈부격차도 심했다. 그리고 농업관련 제도에 비민주적인 요소가 많았다. 농민 수탈구조와 함께 악습도 여전했고, 농민들의 자의식이 낮아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는 소극성 또한 단단했다.

“70년대 말경 박정희 유신정권과 80년대 초반 전두환 신군부 분위기는 알다시피 서슬이 퍼랬죠. 우리는 교육연수를 통해 농민에게 불이익을 주는 농지세, 수세 문제 등을 재인식하게 됐습니다. 벼품종 선택권 쟁취, 수세 시정, 농협 강제출자 거부 등에 대한 숱한 문제점들을 제기하고 나섰고요. 하지만 농민교육을 하려고 해도 장소를 거부당하는 것은 다반사였고, 심지어 가정집에 모여도 온갖 방해를 해댔죠. 마을유지들이 막 들어와서는 훼방을 놨고요.”
1988년 8월23일 풍양면사무소 앞에서 열린 민주농협 및 의료보험 통합제 쟁취 풍양면농민대회. 1980년대 내내 풍양면 농민회원들은 독자적인 집회를 개최했다. 안동가농 풍양분회 5명으로 출발한 회원들은 80여 명까지 조직을 강화하며 비민주적인 농촌사회의 변화와 농민권익을 위해 활동했다.

농민권익과 농촌공동체에 헌신했던 선배 세대의 좌절까지 기억하고 있다. 80년대 중반 우망이라는 동네에 귀촌한 강학중씨가 정착이후 고추농사 재배기술을 혁신적으로 적용해 상당한 수확을 올렸다. 당연히 가톨릭농민회원이었다. 그는 신협을 만들어 왕성하게 활동을 했지만, 지역기득권에 밀리어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낙동강을 낀 들판이 넓었고 수리시설이 잘 갖춰진 풍양, 지보, 안계, 다인지역에서의 초기 농민회 활동은 만만치 않았다. 기존 비민주적인 제도와 기득권 의식은 철옹성 같았다. 그러다보니 안동가농 실무자들의 활동 또한 치밀하게 전개되었고, 곧 이 지역 가톨릭농민회 활동은 전국의 모범으로 떠올랐다.

“그때 안동가농의 정재돈 총무가 먼저 농촌현장을 다니며 농민들과 대화를 나누며 문제점들을 파악합니다. 그러고 나면 권종대 회장이 교육을 하러 왔죠. 소위 현지교육이 진행되는 거죠. 이후 안동으로 나가서 지도자교육을 받으며 농민회 조직을 강화시켜 나간 거죠.”
풍양면 낙동강변에서 마을잔치와 농민회원들의 친목행사가 열렸다. 천주교 의성 다인성당과 공덕 공소는 일상에서 주민들과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지향했다.

풍양면에 전경 4백 명이 바리케이드 친 적도 있었다

안동, 상주 등 각종 농민집회에 참석을 하면서도 풍양, 안계 면소재지에서도 독자적인 집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집회를 사전에 사찰하고 진압하는 경찰계통에서도 풍양분회 회원들의 단결력은 소문이 나 있었다. 이후 풍양농민회 조직은 80여 명까지 확대되었다. 풍양면 소재지에서 집회가 시작되면 어디에 있다가 모여드는지 2백~3백여 명 넘게 농민들이 결집했고, 전경이 4백 명까지 투입되었다. 일반 주민 중에는 가스통을 차에 싣고 와 대치를 한 적도 있었다.

풍양면 소재지에서 장날 농민집회를 준비하는 건 전병철 회장의 몫이었다. 집회준비가 거의 마무리될 즈음이면 지금까지도 평생 동지관계인 안희문(現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장)과 함께 경찰서나 면사무소에 늘 붙잡혀가 억류되기 일쑤였다.

“실제로 집회가 시작될 때면 나는 할 일이 없었어요. 집회를 개최하기 전에 미리 잡혀 들어가 있으니까. 회원들이 스스로 다 진행을 했던 거지. 한번은 집회가 끝난 뒤였는데 늦은 밤 안희문이가 팬티바람으로 잡혀갔어요. 우리회원 7~8명이 구출하러 쫒아갔다가 모두 잡혀 들어갔죠. 모두 다 조사를 받았는데, 나중에 경찰얘길 들어보니까 ‘전부 본인이 주동자라고 주장했다’는 거야. 보통은 가기 싫은데 누가 오라고 해 참석했다고 진술하는데 우린 모두 다 자기가 주동했다고 진술했다는 거지. 풍양농민회 놀랍다고들 했지. 경찰서에 잡혀 있다 보면 류강하 신부님이 쫒아 들어와요. 그럼 곧 풀려나죠. 안희문이가 비신자였는데 그땐 신부님이 대단하게 보였을 거야. 한참 후에 안희문도 영세를 받았고.”

30대~40대 시절 농민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할 때 그가 소속된 천주교회의 신부들은 의지처이자 든든한 빽(?)이었다. 1984년에 의성 다인성당에 부임한 류강하 신부는 늘 든든한 후견인이었다. 농민이 당하는 게 많은 만큼 공정한 대우를 받기 위해선 누군가 앞장을 서야 하는데 감시와 탄압을 뚫고 나갈 용기를 내는 것이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천주교회와 신부들은 농민운동을 적극 지원했고 성당 신자이자 농민운동에 뛰어든 초기 회원들은 교회의 정신적 지원에 용기를 더 낼 수 있었다.
천주교회 신부님들은 농민운동의 든든히 의지처였다. 특히 1984년 다인성당 류강하 신부(1939~2010)는 가톨릭농민운동을 헌신적으로 지도, 지원했다.

외국소의 무분별한 수입으로 1984년 연말부터 소값이 폭락해 생산비도 건지지 못하고 자살하는 농민들이 속출했다. 1985년 7월 다인성당에서 안동가농 주도로 소몰이 시위가 결정되었다. 7월21일 안계우시장에서 소, 경운기 등이 경찰의 방해로 집결이 어려워지자, 30리 떨어진 다인면에서 경찰의 이중 바리케이드를 뚫고 다시 안계까지 거리행진을 성공시켜낸다. 농민회원들과 일반농민이 함께 대중투쟁의 성과를 이뤄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다인과 쌍호, 청기, 풍양지역 17명의 농민이 강제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풍양에서는 전병철, 정원해, 전연대, 김병원, 안희문, 안영성 등이 예천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러나 다수농민들이 참여하는 지역의 자주적 농민운동으로 발전가능성을 맛보는 쾌거로 평가되었다. 1980년대 내내 전병철은 가톨릭농민회 활동에 헌신했고, 이는 예천군 단위 자주적 농민회 창립으로 이어진다. 1990년 이후 전병철은 예천군 농민회장으로 활동을 이어나갔다.
1997년 구담성당에서 열린 제2회 안동가톨릭농민회 동지회.

90년 이후 친환경농업 실천, 생명농업공동체 활동 앞장

최근 30년 동지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그 당시 안동에서 열린 집회, 교육, 회의 등 횟수를 헤아려보니 연중 72일간으로 집계됐다고 말한다.

“80년대에는 풍양에서 안동까지 길도 꼬불꼬불하고 차편도 불편했지. 한번 나가면 당일치기가 안 되니, 하룻밤을 넘길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힘들다거나 바쁘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어. 실제 농사를 지으면서도 아스팔트농사까지 다 지은 거지. 지금은 대외 활동 없이 농사만 짓는데 그때보다 더 바빠. 참 묘하죠.”

전병철은 중매를 통해 스물아홉 나이에 장가를 들었다. 일곱 살 터울 김숙이(61세)씨는 의성 쌍호 출신이다. 처가 동네가 농민운동으로 유명한 곳이다 보니 남편의 활동을 수긍해줬다. 자녀로 딸을 셋 두게 되는데 아들을 하나 더 낳고 싶어 했다. 농촌에서 큰 희망이 없다고 보였는지 은근히 이농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를 알게 된 조창래 신부가 교육장에서 ‘아들을 낳게 기도해 주면 이농을 포기할 수 있냐’고 말했다. 울진 어느 성당에 가서 기도하면 아들을 낳게 될 거라는 말에 그곳을 다녀왔는데 실제로 늦둥이 아들을 낳게 된다. 지금도 젊은 시절 밖으로만 뛰어다닌 남편을 이해하고 넉넉하게 품어준 마음에 코끝이 찡하다.
29살 청년 전병철과 결혼한 의성 쌍호 출신의 22살 김숙이의 약혼 사진.


29살 청년 전병철과 결혼한 의성 쌍호 출신의 22살 김숙이의 최근 모습. 3녀1남의 자녀를 두었다. 처가 동네는 가톨릭농민운동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1990년대를 맞으며 기존 농민운동은 종교단체의 울타리를 넘어서기 시작한다. 전국 단위 시․군에서 자주적농민회가 결성되는 시기를 맞아 가톨릭농민회는 생명농업으로 새로운 전환을 시도했다.

“풍양지역은 생명농업을 91년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굉장히 빨랐죠. 90년 경 안동교구에서 3박4일 공소 봉사자교육이 열렸는데 교육 과정에 이미 생명농업 커리큘럼이 있었습니다. 각 현장에 가서 생명농업공동체를 만들어 내자는 거였죠. 예천성당에 계시던 남학현 신부가 봉화로 갈 계획 중이었는데 우리가 졸라서 풍양성당으로 모셔왔어요. 남 신부님을 모셔온 후부터 생명공동체 활동을 본격화시켰어요.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연락을 하며 지냅니다.”

20대에 시작한 가톨릭농민회 활동에 대해 전혀 후회해 본 적은 없었다. 90년대 이후부터는 생명농업 활동에 계속 참여하고 있다. 현재는 여러 조합원과 우리밀제분공장을 운영하며 소 몇 마리를 키우고 있다.

2019년 5월 한겨레신문 뉴스에는 친환경 생명농업 활동의 한 장면이 보도되고 있다. ‘예천군 풍양면 한마을 농가 20여 가구가 30여ha에서 우리밀 농사를 지으며 3일간 6회째 우리밀축제를 열고 있다.’ ‘전병철 우리밀축제위원장은 우리밀 재배농가들이 정성들여 가꾼 황금 밀밭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관광객들이 향수를 되살릴 수 있도록 사라져가는 다양한 밀 체험 행사를 준비했다.’
2013년 3월31일 부활주일을 맞아 성당 신자들과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나이를 좀 더 먹은 우리는 멀쩡한데 젊은 층이 아프거나 사고로 많이 죽었어요. 그리고 안타까운 건 예전 활동가 중에 소수이지만 극우적 사고로 바뀐 사람도 있고요. 나보다 한참 젊은데.... 옛정을 생각하면 나무랄 수도 없고. 지방선거가 시작되면서 세력이 갈리고 이쪽은 하나의 정당이 거의 독점해 당선되잖아요. 선거 영향도 크다고 봐요.”

천주교안동교구 선언문처럼 ‘기쁘고 떳떳하게’ 살아온 인생이었다. 늘 선언문의 문구를 되새기며 지낸다. “우리는 이 터에서, 열린 마음으로, 소박하게 살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서로 나누고 섬김으로써, 기쁨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

[위 구술생애사는 계간 예천산천 4호(2020년 겨울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유경상(경북기록문화연구원 이사장)다른기사 보기

McMindfulness: How Mindfulness Became the New Capitalist Spirituality Purser, Ronald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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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Mindfulness: How Mindfulness Became the New Capitalist Spirituality Kindle Edition
기준 Ronald E. Purser (Author) 형식: Kindle 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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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ively and razor-sharp critique of mindfulness as it has been enthusiastically co-opted by corporations, public schools, and the US military.

Mindfulness is now all the rage. From celebrity endorsements to monks, neuroscientists and meditation coaches rubbing shoulders with CEOs at the World Economic Forum in Davos, it is clear that mindfulness has gone mainstream. Some have even called it a revolution.

But what if, instead of changing the world, mindfulness has become a banal form of capitalist spirituality that mindlessly avoids social and political transformation, reinforcing the neoliberal status quo?

In McMindfulness, Ronald Purser debunks the so-called "mindfulness revolution," exposing how corporations, schools, governments and the military have co-opted it as technique for social control and self-pacification. A lively and razor-sharp critique, Purser busts the myths its salesmen rely on, challenging the narrative that stress is self-imposed and mindfulness is the cure-all.

If we are to harness the truly revolutionary potential of mindfulness, we have to cast off its neoliberal shackles, liberating mindfulness for a collective awake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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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페이지

편집자 리뷰

Review
In this insightful book, Ron Purser has evaluated the strengths and weakness of the mindfulness movement, while clearly showing the way to cultivate authentic mindfulness that liberates us from the true causes of individual and collective suffering.”
- B. Alan Wallace, President, Santa Barbara Institute for Consciousness Studies

“Far from being either a harmless form of New Age self-indulgence or meditation dressed up as a medicalized antidote to the ubiquitous stresses of modern life, Ron Purser sees the mindfulness movement as epitomizing a malignant trend of contemporary Western individualism, one that is blinding us to the social problems of inherent in neoliberalism and capitalism, providing an anodyne where what is needed is rigorous analysis and political action.”
- Barry Magid, author of What’s Wrong With Mindfulness

“McMindfulness makes an important critique of self-centered mindfulness and points us towards a new vision for real social change.”
- Christopher Titmuss, author of The Political Buddha

“Ron Purser cuts through the comforting New Age jargon used to promote mindfulness, enabling us to distinguish between the practice and its marketing.”
- Richard Payne, Institute of Buddhist Studies

"Timely and incisive... Purser reveals how mindfulness became a vast industry, promising to cure us of a growing range of psychological ailments, and simultaneously propping up the political and economic system that generates them.”
— William Davies, author of Nervous States and The Happiness Industry

“If you are wondering about whether mindfulness is really a panacea for all our problems, this is the book to read.” — David Loy, author of Money, Sex, War and Karma

"Provocatively illustrates how mindfulness has been hijacked by corporate interests, turned into an opiate of the masses, and how we can radically rethink the meaning of mindfulness in contemporary life.”
— Dr. Steven Stanley, School of Social Sciences, Cardiff University

"Spiky, witty, meticulously researched and thoroughly engaging, McMindfulness is the best assessment of ‘Mindfulness’ to date."
— Manu Bazzano, author of Zen and Therapy: Heretical Perspectives and editor of After Mindfulness: new Perspectives on Psychology and Meditation

"A much needed wake-up call to the dark side of mindfulness-based practices... a must-read.”
– Richard King, Professor of Buddhist and Asian Studies, University of Kent.

"Just the right book at just the right time... May it help turn the tide of western ‘spirituality’ toward a genuine model of personal and social health.”
— Glenn Wallis, author of A Critique of Western Buddhism and Director of Insight Semin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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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e Author
Ronald Purser is a Professor of Management at San Francisco State University. His essays and cultural criticism have appeared in the Huffington Post, Salon, Alternet and Tricycle magazine. His viral article, "Beyond McMindfulness", opened the floodgates for the mindfulness backlash. His recent books include the Handbook of Mindfulness: Culture, Context and Social Engagement and the Handbook of Ethical Foundations of Mindfulness. Dr. Purser began his Buddhist training beginning in 1981 at the Tibetan Nyingma Institute in Berkeley, California and is an ordained Buddhist teacher in the Korean Zen Taego order. He is co-host of Mindful Cranks podcast and is a regular speaker and guests on radio shows and podcasts. He lives with his family and dog in San Francisco, CA. --이 텍스트는 대체 kindle_edition 에디션을 참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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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 : ‎ Repeater (9 7월 2019)
발행일 ‏ : ‎ 9 7월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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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nald E. Purser



Ronald Purser is Professor of Management in the College of Business at San Francisco State University. Dr. Purser earned his Ph.D. in Organizational Behavior from the Weatherhead School of Management at 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 and his B.A. in Psychology from Sonoma State University. He is past Division Chair of the Organization Development and Change division of the Academy of Management.

His essays and cultural criticism have appeared in the Huffington Post, Salon, Alternet, Tikkun, and Tricycle magazine. His viral article, "Beyond McMindfulness", opened the floodgates for the mindfulness backlash. His new book, McMindfulness: How Mindfulness Became the New Capitalist Spirituality, is being published this July by Repeater Books.

His other recent books include the Handbook of Mindfulness: Culture, Context and Social Engagement and the Handbook of Ethical Foundations of Mindfulness. Dr. Purser began his Buddhist training beginning in 1981 at the Tibetan Nyingma Institute in Berkeley, California and is an ordained Buddhist teacher in the Korean Zen Taego order. He is co-host of Mindful Cranks podcast and is a regular speaker and guests on radio shows and podcasts. He lives with his family and dog in San Francisco, CA.
고객 리뷰
별 5개 중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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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 Pepper

별 5개 중 3.0 Important critical response to the mindfulness hype.미국에서 2019년 7월 17일에 검토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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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is encouraging to see someone take a thoroughly critical stance toward a profitable ideological project. And no doubt difficult to do, in an age when almost all access to media is controlled by a few big corporations which are focused exactly on promoting such projects. This book is accessible enough, and engaging enough in its accounts of various mindful practices, that it is possible it may provoke some reaction, and so some critical thought about the newest mantra of neoliberalism. So, kudos to Purser and to Repeater Books for publishing it.

But, of course, I have some concerns.

To begin with, Purser makes it clear that he “do[es] not question the value of adapting mindfulness for therapeutic use, nor do[es he] deny that it can help people”(83). My position on this has always been that in fact this is what we do need to question. That is, that mindfulness does not actually help most people, and those people whom it does “help” it helps to become horrendous human beings.

To some degree, Purser would seem to agree with my last statement. The overwhelming force of his book is in its argument that mindfulness produces a passive subject trained to adapt to the world as it is and never question, and certainly not attempt to change, the social formation. The good subject of neoliberalism blames herself for her suffering, and seeks to avoid even considering the possible existence of any social or material causes of human suffering outside of her own attitude, her own disposition. Such people may, if they are affluent enough, actually be happy enough as they go about the business of reproducing capitalist social relations. But what they are doing is clearly, even on Purser’s account, nothing more than profiting by enabling the oppression of others. I can see how this is therapeutic, if we understand therapy as the adjusting of individuals to better serve the interests of global capitalism—that is, if we grasp that therapists are, as Purser says (quoting Fromm) “the priests of industrial society,” whose goal is “helping the person to become better adjusted to existing circumstance”(258). Given the overall force of the argument, and the approving citation of Fromm, it would seem to me to be a contradiction to still maintain that “the therapeutic functions of mindfulness-based interventions are clearly of value” and so “we don’t need to stop using them” (258).

To be clear, what Purser is advocating is that we “need to do much more”(258). That is, that we should do mindfulness practice, but then add on some critical thinking which will enable active participation in the transformation of society. My position is that this is not possible. That is, that the goal of undertaking mindfulness is exactly to render the subject incapable of the “much more” that Purser, rightly I think, urges us to engage in.

So why this apparent contradiction? Why the simultaneous acceptance of mindfulness as a necessary beginning in the midst of an overwhelming argument that beginning from there forecloses any hope of meaningful progress?

I’ve written a longer response to the book on my blog, Faithful Buddhist, at Wordpress. I cannot provide a link here, because of Amazon policy, but if you’re interested I try to account for the contradiction at the heart of this book there.

49명이 유용하다고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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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a Israel

별 5개 중 5.0 Brilliant!미국에서 2019년 8월 23일에 검토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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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loved "McMindfulness" because it speaks truth to power. There is something fundamentally corrupt about teachers with a few months or a few years of training peddling $5,000 workshops demonstrating one technique pilfered from Buddhism and secularized. To watch the same machine do to mindfulness what Yogaworks and CorePower did to yoga, what Dominos did to pizza, what Starbucks did to coffee, is horrifying. People are stressed out because of the excess competition of late capitalism. This is the problem we need to address. Not administering 10 minute salves that act as brief respites from the rat 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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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n

별 5개 중 5.0 This isn’t a how-to book on mindfulness미국에서 2019년 7월 27일에 검토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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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understand why some of the reviewers have given McMindfulness anything less than a 4-5 star review. This isn’t a how-to book on mindfulness – there are 50,000 of those already on Amazon. No, this book takes on the elite, mindfulness gurus – both teachers, consultants and even the scientists – that have been hawking and promoting mindfulness for companies such as Monsanto, Google, Goldman Sachs – even hailing it as a “transformative” practice for “optimizing warrior performance” in the US Military. This is a take-no-prisoners book. I found Purser’s critique of “privatized mindfulness” and its ideological role in transmitting a neoliberal ethos to be particularly refreshing. Purser is also no newcomer to mindfulness – as he has been a practicing Buddhist for quite some time. The book is a quick read; the chapters are not the typical heavy academic – theory jargon. In fact, Purser does a great job of explaining complex concepts to a lay audience.

36명이 유용하다고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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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ith A. Williams

별 5개 중 4.0 An unsettling view of how mindfulness was commercialized미국에서 2019년 7월 10일에 검토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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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a must-read, well-written and thoroughly researched account of how mindfulness has come to permeate our culture. Whether you apply mindfulness practices or simply hear the buzzword echoed around you, this book is essential reading! The only caveat that I would offer is that this book is not an appropriate ~introduction~ to mindfulness; for readers entirely unaware of it, I would not begin here.

As explained by the author in Chapter 1, the originator of the term "McMindfulness" was Buddhist teacher, psychoanalyst and author Miles Neale who offers this fast-food analogy: McMindfulness is "a feeding frenzy of spiritual practices that provide immediate nutrition but no long-term sustenance." In subsequent chapters, the author examines how mindfulness found its way into myriad institutions- commercial, academic, medical, political, and religious. Why did it become such a buzzword in so many different contexts? The book offers a well-researched narrative.

If you are a proponent of mindfulness and already find it useful, do not fear: this isn't so much a critique of mindfulness itself as an exposé of how it became a commoditized pseudo-spiritual cure-all. This is not an opinion piece; the author has a very strong and broad basis for his concerns, and he presents them quite factually. Frankly, I took minor offense in a few spots. However, on the whole, I feel better informed after reading it, and I will probably revisit certain sections many more times.

I highly recommend this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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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l Smith
별 5개 중 5.0 Excellent critique of Mindfulness영국에서 2020년 1월 2일에 검토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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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an excellent critique of the mindfulness bandwagon, but as the author is a Buddhist it does pull a few punches here and there. "The Unexpected Way" by Paul Williams is more severe critique of Buddhism by a (former) insider. "The Buddha Pill" is better on the "bad science" aspects. But McMindfulness is the definitive hatchet job on Kabat Zinn and MBS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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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rry Hyland
별 5개 중 5.0 Excellent radical critique of mindfulness commodification영국에서 2019년 8월 10일에 검토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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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uch-needed radical critique of the mutation of Buddhist mindfulness through capitalist exploitation, particularly trenchant on corporate and military abu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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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gram
별 5개 중 5.0 Bold, necessary, and often very funny.영국에서 2020년 9월 4일에 검토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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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n Purser does not like Mindfulness's hijacking of the dharma. He drills relentlessly into its fluffy repurposing of Buddhism. Who you gonna 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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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ly Doe
별 5개 중 2.0 Repetitive critique of capitalism that lacks mindfulness in prose and concision캐나다에서 2020년 5월 13일에 검토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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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 repetitive.

There are some good points brought up, especially the removal of ethical teachings which accompany typical buddhist teachings. However, the author broadly and repeatedly blames capitalism and neoliberalism for causing the stresses and anxieties that people seek out mindfulness and meditation to alleviate, without citing specific mechanisms. He also absurdly suggests some vague form of societal and political revolution is the answer that will resolve all these stresses and anxieties. If all the repeated, unproductive, and vague condemnations of capitalism were removed you’d get a book half the length.

The author also seems to lack imagination, or is unable to draw from history. Stress and anxiety have been part of everyday life throughout history and every society, weather in the form of drought, plague, famine, or war. Sure we can make society more equitable and fair, I'm all for it. But the vague utopian world, free from stress and anxiety that the author advocates revolution for, does not exist. How would a societal revolution fix all the stress and anxiety a pandemic like COVID-19 is causing?

It is also deeply ironic that the author readily implies that mindfulness is peddled as a way for tolerating a life in poverty and making people complacent with their oppressed lives in capitalistic societies. In reality, mindfulness is largely practiced by parts of society that have benefited the most from capitalism and neoliberalism, the well-off upper and middle classes, and not poor working classes. Poor people don't have the time or money to take part in mindfulness retreats and meditation classes.

At one point the book weakly attempts to discredit web of scientific knowledge on the biology of stress by citing a single cultural anthropologist. He also tries to discredit the field of stress science by associating a prevalent scientists in the field with big tobacco. Having ties with a notorious industry does not invalidate important scientific discoveries that were made before it.

This book is unproductive in its approach and criticism and does not provide meaningful solutions to what preachers of meditation and mindfulness attempt to do. Instead the author advocates for cultural revolution and the complete dismantling of the capitalist neoliberal system ad nauseam. A rush to revolution without a clear vision of what society should look like post-revolution is a recipe for chaos. The author also doesn't seem to have a clear vision of present day pre-revolutionary society ei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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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atermann
별 5개 중 1.0 Extrem redundant – so gut wie inhaltslos독일에서 2020년 9월 9일에 검토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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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Grunde steht in dem Buch nichts, was nicht schon mit dem Untertitel gesagt ist. Das aber immer wieder. Purser erklärt, dass die Konzerne diese Meditationen verwenden, um gut leitbare, passive Subjekte zu erzeugen, die sich nur noch für sich interessieren, die fest daran glauben, dass die Ursache aller Probleme (ihrer selbst und der Welt) in ihnen liegt, und die glauben, dass sie sie mit Meditation bewältigen können. Dieser Gedanke, der sicherlich nicht falsch ist, wird bis zum Überdruss wiederholt. Was nicht aufgezeigt wird, ist der Mechanismus, wie das funktioniert. Von ernstzunehmenden Alternativen ganz zu schweigen. Stattdessen gibt es jede Menge schickes »Storytelling« und ziemlich wahllos zusammengesammelte Zitate aus allen möglichen Zeitschriften, Fernsehsendungen, Webseiten usw. die alle nichts weiter besagen, als was dieser unendlich wiederholte Gedanke auch schon sagt.

Diese starke Redundanz hat damit zu tun, dass das Buch eine Zusammenstellung von Artikeln ist, die schon an anderen Orten publiziert wurden. Das wird an keiner Stelle offengelegt, aber man erkennt es an zum Teil wörtlichen Übereinstimmungen ganzer Passagen und an Einleitungs- und Schlusspassagen der einzelnen Kapitel, die in einem separaten Artikel sinnvoll sind, aber nicht im Zusammenhang eines Buchs. Der Autor hat sich nicht einmal die Mühe gemacht, die verschiedenen Texte so zu redigieren, dass sie ein neues Ganzes ergeben. Dem Beispiel sollte man folgen und das Buch gar nicht erst lesen und es schon gar nicht kaufen. Es lohnt sich beim besten Willen nic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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