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8

엔도 슈사쿠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알라딘: [전자책]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eBook]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엔도 슈사쿠 (지은이),이평춘 (옮긴이)
어문학사2015-01-26 
원제 : 白い人·黃色い人



전자책정가  6,600원
종이책 페이지수 : 208쪽

책소개

<침묵>, <깊은 강>, <바다와 독약> 등 종교 소설과 세속 소설의 차이를 무너뜨린 20세기 일본 문학의 거장 엔도 슈샤쿠의 초기작으로, 엔도 슈샤쿠 문학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이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엔도 슈샤쿠는 <백색인>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작가가 유럽과 동양의 종교문화의 차이로부터 겪은 방황, 갈등의 요소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유일신을 갖는 서양의 백색인이기도 하고, 범신론적 신을 섬기는 동양의 황색인이기도 한 작가의 내면에서는 신과 인간, 인간과 신, 신과 신 등 모든 관계의 대립이 발생하여 얽히는데, 소설은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라는 제목을 통해 이를 자연스럽게 시사한다.

프랑스인이면서도 독일 게슈타포의 고문 협력자가 되어 버린 '나'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백색인'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인 나는 프랑스의 평범한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태어난 못생기고 사팔뜨기인 소년이었다. '나'는 어느 날 우연히 하녀 이본느가 폐병 앓는 늙은 개의 목을 새하얀 허벅지로 짓누르며 학대하는 모습을 목격한 후 악마처럼 다가온 학대의 쾌락을 느끼기 시작한다.

'황색인'은 범신론적 세계관을 갖는 황색인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나'가 브로우 신부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 서두를 시작한다. 나는 브로우 신부에게 듀랑 신부가 죽기 전에 자신의 일기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을 언급하며, 뒤에 곧 듀랑 신부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와 교차하여 싣는 특별한 구성방식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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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신의 아이
백색인白い人 7

신들의 아이
황색인色い人 105

역자 후기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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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52“코냑.”
“안 돼요. 못 마시는 걸요.”
여자가 케이프를 벗자 쇄골이 보기 흉할 만큼 확연히 드러났다. 가슴은 7, 8세의 소녀처럼 납작했다.
“별거 아니니까 잠깐 입을 대봐. 그런데 쟈크에게는 아무 말도 안 했지?”
그녀는 괴로운 듯이 눈썹을 찡그렸다.
“저, 당신을 믿어요.”
“안심해, 걱정할 거 없어.”
술잔이 오고감에 따라 여자의 얼굴은 서서히 붉어지고, 땀으로 엉망이 된 화장이 지워지기 시작하더니 주근깨가 드러났다. 망가진 인형처럼 목도 흔들렸다.
“믿~어~요.” 접기
P. 184-185물론 기미코는 20일 아침의 일을 모른다. 이브가 아담을 악으로 유혹했듯이 내게 작은 소리로 유혹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녀는 일본인이 그러하듯 닳아빠진 다다미 위에 앉아 있었을 뿐이다. 그녀의 시선은 얼어붙은 듯 다다미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계속해서 악으로 유혹하는 듯 생각되었다.



저자 및 역자소개

엔도 슈사쿠 (遠藤周作) (지은이)



일본의 대표적인 현대 소설가. 가톨릭 신자인 이모의 집에서 성장하였으며, 열한 살 때 세례를 받았다. 1949년 게이오 대학 불문학과를 졸업한 후 현대 가톨릭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장학금으로 프랑스 리옹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다. 결핵으로 인해 2년 반 만에 귀국한 뒤,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5년에 발표한 《하얀 사람》(白ぃ人)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고, 《바다와 독약》으로 신쵸샤 문학상과 마이니치 출판 문화상을 수상하고 일본의 대표적 문학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엔도는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후, 유럽의 [신의 세계]를 경험한 [나]가 결국 동양의 [신들의 세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자전적 소설 《아덴까지》를 발표했는데, 그 6개월 뒤에 《백색인白い人》을 발표하였고, 또 6개월 뒤에 《황색인黃色い人》을 발표했다. 그리고 백색인으로 1955년 제33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다. 《아덴까지》의 작품 의식을 기반으로 한 《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 역시 엔도가 유럽과 동양의 종교문화의 차이로부터 겪은 방황, 갈등의 요소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1966년에 《침묵》(沈默)을 발표하여 다니자키 준이치로상을 수상했다. 1996년 타계하기 전까지 여러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며, 종교소설과 통속소설의 차이를 무너뜨린 20세기 문학의 거장이자 일본의 국민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침묵》, 《예수의 생애》,《내가 버린 여자》, 《깊은 강》, 《사해 부근에서》, 《바다와 독약》, 《그리스도의 탄생》 등 다수가 있으며 1996년 9월 29일 서거. 東京 府中市 가톨릭 묘지에 잠들어 있다. 접기

수상 : 1980년 노마문예상, 1979년 요미우리 문학상, 1966년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1955년 아쿠타가와상
최근작 : <나의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사무라이> … 총 156종 (모두보기)



이평춘 (옮긴이)


- 와세다대학 대학원 일문학 연구생 수료
- 도쿄가쿠게이(東京學藝) 대학 대학원 일문학 석사
- 도쿄 시라유리여자대학 대학원
<엔도 슈사쿠 문학>으로 문학박사
- 2019년 현재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외래교수


번역서 外
- 엔도 슈사쿠『바다와 독약』가톨릭 출판사
- 엔도 슈사쿠『예수의 생애』가톨릭 출판사
- 엔도 슈사쿠『그리스도의 탄생』가톨릭 출판사
- 엔도 슈사쿠『내가 버린 여자』어문학사
- 엔도 슈사쿠『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어문학사
- 엔도 슈사쿠『엔도슈사쿠 단편선집』어문학사 및 엔도 슈사쿠의 학술논문 다수
- 1986년부터 <영혼과 형식> 현대시 동인회에 참가하며 ‘이평아’라는 필명으로 4권의 동인지 출간 접기

최근작 : <타인의 땅> … 총 9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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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침묵>, <깊은 강>, <바다와 독약> 등 종교 소설과 세속 소설의
차이를 무너뜨린 20세기 일본 문학의 거장
엔도 슈샤쿠의 초기작
<제33회 아쿠타가와상(賞) 수상작>

신학생을 고문하는 사디스트 청년의 고뇌……
유년 시절 개화된 악의 희열 속에서도<신>과 무관할 수 없었던
「백색인」,
신부였던 피에르 듀랑의 <신>과 무관한<신들>의 세계가 운명이 되어 버린「황색인」


이 책의 개요

1
엔도 문학은 다신성을 지니고 있는 동양 정신 풍토 안에서의 기독교 토착화 문제 및 인간에게 있어서의 죄와 악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엔도 문학의 뿌리를 이룬 엔도 슈사쿠의 초기작

종교와 신과 구원의 문제에 관해 고찰한 엔도 슈사쿠는 이미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문학 작가로서, 종교와 인간에 대한 놀라운 통찰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여러 차례 오른 바 있는‘일본 현대문학의 거장’이다. 이번에 번역되어 출간된 <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원제 : 백색인 황색인)은 엔도 슈사쿠의 초기작으로, 엔도 문학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이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엔도는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후, 유럽의 <신의 세계>를 경험한 <나>가 결국 동양의 <신들의 세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자전적 소설 <아덴까지>를 발표했는데, 그 6개월 뒤에 <백색인白い人>을 발표하였고, 또 6개월 뒤에 <황색인 色い人>을 발표했다. 그리고 백색인으로 1955년 제33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다. <아덴까지>의 작품 의식을 기반으로 한 <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 역시 엔도가 유럽과 동양의 종교문화의 차이로부터 겪은 방황, 갈등의 요소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유일신을 갖는 서양의 백색인이기도 하고, 범신론적 신을 섬기는 동양의 황색인이기도 한 엔도의 내면에서는 신과 인간, 인간과 신, 신과 신 등 모든 관계의 대립이 발생하여 얽히는데, 소설은 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라는 제목을 통해 이를 자연스럽게 시사한다.
특히 신의 아이(백색인)은 유일신을 섬기는 백색인(서양인)들의 세계관, 유일신의 세계에 순응하지 않는 백색인의 세계관 그리고 이것의 첨예한 갈등을 인간의 악이 극도로 팽창하던 시기인 독일 나치 침공을 배경으로 묘사한다. 인간에게 있는 악의 본성은 신의 세계에서 어떤 의미인가,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유다의 관계에 대해 간접적으로 고찰하고 있어, 행간에 담긴 엔도 슈사쿠 특유의 종교적 사색을 읽을 수 있다.

신의 아이(백색인)

프랑스인이면서도 독일 게슈타포의 고문 협력자가 되어 버린 ‘나’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소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인 나는 프랑스의 평범한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태어난 못생기고 사팔뜨기인 소년이었다. 엄격한 청교도이신 어머니의 훈육 아래 평범하게 자란 듯하지만 '나'는 어느 날 우연히 하녀 이본느가 폐병 앓는 늙은 개의 목을 새하얀 허벅지로 짓누르며 학대하는 모습을 목격한 후 악마처럼 다가온 학대의 쾌락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일은 이후 ‘나’가 행하는 모든 비도덕적 행위의 모티브가 된다. 나의 내면에는 도덕, 종교, 가정 등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억누르는 것들을 해체시키려는 악의 속삭임이 커지기 시작한다.

(본문 p.25)
나는 그 자신만만한 표정이 매우 싫었다. 이 가톨릭 철학자가 이야기하는 인간의 선과 덕, 인간의 정신적인 진보, 인간의 역사적 성숙이라는 말을 나는 귓가에 들리는 환청처럼 우스꽝스럽게 여기면서 듣고 있었다. 17, 18세인 순진한 학우들은 적어도 이 말들의 진실성과 가치에 대해 의구심을 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내게는 그것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졌을까?

대학에 들어온 후 만난 쟈크는 이마는 벗어지고, 머리카락은 고추처럼 고불고불한 못생긴 신학생이다. 그리스도에게 믿음을 주지 않는 ‘나’에게 쟈크는 ‘그리스도를 닮음’이란 책을 내밀며 하나님과 같이 십자가를 가슴에 짊어질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배반자 유다를 생각하다가 쟈크와 가까이 지내는 마리 테레즈를 농락하기로 결심한다. 무도회에 가지 않도록 신신당부한 쟈크를 무시한 채 마리 테레즈는 너무나도 쉽게 나에게 부름을 받고 무도회에 나간다.

(본문 p.50)
어쨌든 그 여자는 쟈크에게 작은 비밀을 지니게 된 것이다. 작은 비밀은 다른 거짓말, 다른 비밀을 낳고, 그것은 이 배신의 골짜기를 울리면서 무너져 내릴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무도회에서 마리 테레즈를 무자비하게 내팽개치고, 쟈크가 마음속으로부터 깊은 저주를 하도록 만든 후 1년이 지난다. 그 사이 전쟁이 시작되었다. 나는 쟈크와 마리 테레즈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어찌되었든 이제 나와는 상관없었다. 대학에는 두세 번 나갔지만, 옛날 친구는 이미 나를 잊고 있다.
3년이 지난 후 독일 게슈타포의 고문관 통역사로 일하게 된 나는 제6구의 레지스탕트 연락원 역할을 하고 있다가 독일군에게 붙잡힌 가톨릭 신부와 마주치게 된다. 그는 바로 쟈크였다.

(본문 p.63)
내가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생애가 고문을 받아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이 남자 역시 고문하는 자와 고문당하는 자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를 피해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본문 p.92)
“마리 테레즈라는 여학생이 있습니다. 이 녀석 앞에서 그녀를 심문하는 겁니다.”
이날 밤 나는 또 다시 유다를 이용했다.

신들의 아이(황색인)

범신론적 세계관을 갖는 황색인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나’가 브로우 신부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 서두를 시작한다. 나는 브로우 신부에게 듀랑 신부가 죽기 전에 자신의 일기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을 언급하며, 뒤에 곧 듀랑 신부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와 교차하여 싣는 특별한 구성방식을 선보인다.
무엇보다 신들의 아이(황색인)에서는 백색인임에도 불구하고 황색의 신의 세계에 살게 된 듀랑 신부의 삶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신의 아이(백색인)와는 정반대의 세계관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듀랑 신부는 교회의 일본인 신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믿음을 전파하던,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착실한 신부였다. 어느 날 수해를 입고 양친과 여동생 등 가족을 모두 잃어버린 기미코를 만난 이후 한순간 인간의 육욕으로 인해 교회로부터 추방당하기에 이른다.
교회의 신도들로부터 가차 없는 모욕을 당하게 된 듀랑 신부는 근근이 브로우 신부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삶을 연명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배반하였다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기미코를 폭행하기도 한다. 기미코는 듀랑 신부는 더 이상 신부가 아님을, 이제 그리스도는 듀랑의 삶에서 희미해져가는 허상에 불과함을 인식시킨다.

(본문 p.166~168)
“어째서 하느님과 교회를 잊지 못하나요? 잊으면 되잖아요. 당신은 교회를 버렸잖아요. 그러면서 왜, 언제까지나 그것에만 매여 있는 거죠? 오히려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기만 하면, 용서해 주는 부처님 쪽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나는 일어나 망연히 기미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화가 나서 내뱉은 기미코의 이 말은 돌연 계시처럼 내 마음을 찔렀다.
하느님을 배신하고 교회를 버린 지난 8년간, 나는 악몽처럼 하느님의 벌에 시달렸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받아왔다. 나는 자신을 파문한 교회를 미워하고, 그것을 부정하려고 해 보았지만, 한순간도 하느님을 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미코의 말대로 그 하느님을 잊는다면, 그로부터 해방된다면, 더 이상 벌에 대한 두려움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어진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선교한 지 12년, 비로소 오늘 나는 이방인의 (즉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행복을 알았다. 그것이 행복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기미코와 어제 찾아온 치바라는 청년이 지니고 있는 그 동양인 특유의 가늘고 긴, 멍한 눈의 비밀만은 알 듯한 느낌이 든다. 둔한 광택을 띤 그들의 눈은, 죽은 작은 새의 눈을 생각나게 한다. 그 멍한 시선에는 우리 백인이 왠지 기분 나쁘게 느끼는 무감동한 것, 비정한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과 죄에 무감각한 눈이고, 죽음에 대해 무감동한 눈이었다. 기미코가 때때로 외우는, ‘나무아미타불’은 우리가 바치는 기도 같은 것이 아니라 죄의 무감각에 어울리는 주문이다.
오늘부터 나는 구원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껏 내가 자라온 백인들의 방법과는 전혀 상반된 이방인의 방법을 통해서일 것이다. 그 멍하고 생기 없는 눈으로, 서서히 하느님을 잊고 죄를 거듭 지으면, 결국 죽음에 대해서도 죄에 대해서도 무감동해져 갈 것이라는 것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소설은 마지막에 듀랑 신부가 ‘나’에게 자신의 일기를 맡겨 그간의 일들을 브로우 신부에게 전하고자 했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본문 p.198~199)
당신에게 있어 성탄은, 이 어둠 속에 신神께서 빛을 내려주신 밤이겠지요. 하지만 누런 피부색을 지닌 우리들에게는 어둠도, 빛도, 그 구별이 없습니다. 듀랑 씨는 죽기 전에 그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폭격 직전에 류머티즘을 앓는 다리를 질질 끌며 걸어간 그 노인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폭격이 그를 죽인 것이 아닙니다. 일기를 내게 맡긴 이상, 그가 자살했을 것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가 그 때문에 당신네들의 신神으로부터 심판을 받고 있는지, 아니면 심판도 벌도 없는 황색인의 세계, 지쳐서 눈을 감듯 텅 빈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같은 백색인일지라도 듀랑 씨라면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같이 새하얀 그 세계만큼 피부색이 누런 우리들과 동떨어진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이 편지를 쓰게 한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2
엔도는 이 두 작품을 같은 시기에 병행하여 썼고, 같은 해에 두 작품을 각각 발표했다(1955년「근대문학」5.6호/ 1955년 11월). 이처럼 이 시기 엔도에게 있어서는 <백색>과 <황색>은 첨예하게 대립되는 색이었고, 사상이었고, 신관神觀이었다. 엔도에게 있어서 <백색>과 <황색>의 이분법적 대립양상이 싹트게 된 동기는 유년 시절에 받은 세례와 대학 졸업 후 떠난 프랑스에서의 유학체험이었다.
동양인인 엔도가, 더욱이 독특한 범신적 종교양식을 갖고 있는 일본인인 엔도가, 프랑스에서 서양문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증폭되어가는 <백색인>의 세계와 <황색인>의 세계와의 갈등은, 결국 엔도 문학의 뿌리가 되어갔으며, 이와 같은 이질감과 거리감은 이윽고 <백색>과 <황색>이라는 대립되는 <색>의 문제를 야기했고, 결국 이것을 넘어서 <백색인의 세계가 상징하는 신>과 <황색인의 세계가 상징하는 신>의 문제로 귀결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백색인의 세계가 상징하는 신>은 유일신의 ‘신’으로, <황색인의 세계가 상징하는 신>은 일본의 범신론적인 ‘신들’로 묘사되어갔다. 엔도는 이러한 구조 속에서 신과 신들, 신과 인간, 신들과 인간, 신과 선, 신과 악, 인간과 선, 인간과 악의 문제를 형상화해갔다.
또한 <백색인>과 <황색인>은 인간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악과 선의 대립만을 그린 작품이 아니라, 신이 절대적 가치를 갖는 서구인 <백색인의 세계>에서도 그 신을 믿는 인간과, 그 신을 부정하는 인간이 상호 존재하고 있으며, 이 둘 역시도 항시 대립하고 있음을 그리고 있다. 나아가, 이 작품은 설혹 신을 부정하며 신과 격렬히 투쟁하고 있다하더라도, 그 투쟁을 통해서 이르게 되는 어떤 섭리에 대한 고백성사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 두 작품은 고백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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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전통이 장구한 서양의 세계관과 신이 있든 없든 상관없는 동양의 세계관 사이에서,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고민에 직면한다. 어느 세계든지 신을 믿는 인간과 부정하는 인간이 상호 존재하며 갈등하는데, 신에 관한 문제와 투쟁하는 삶의 과정에서 인간은 결국 어디에 이르게 되는가. 
라파엘 2022-10-24 공감 (29) 댓글 (0)


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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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15년도 최애 소설이었던 ‘깊은 강’ 앤도 슈사쿠 작품이 VPL에 있길래 신나서 집었는데 쉽게 읽히면서도 그 가닥이 잡히지 않아 끝까지 찜찜하게 읽었다. 제목에서 보이듯 종교에 관한 이야기이고 1부 백색인의 이야기 2부 황색인의 이야기로 프랑스와 일본에서 각각 다른 주인공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른 두 줄기가 결국 한 줄기로 만나는 포인트가 있겠지만 캐치하지 못했다. 이건 읽은 것도 안 읽은 것도 아니다. 죄송!

발췌

혼자가 되었다. 유산은 앞으로 10년 동안의 내 생활을 보장하고 있다. 나는 자유다.

중위는 얼굴도 들지 않았다. 나는 채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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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dy.K 2018-08-12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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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 이평춘 옮김, 『신의 아이-백색인』/『신들의 아이-황색인』, 어문학사, 2010. 


대단한 책이다. 인간의 본성과 심리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해온 흔적이 남는 책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날카로운 시선으로 접근했기에 그만큼 다가오는 무게감이 다르다. 대단히 무겁게 다가오지만, 그 날카로운 시선과 접근에 소름이 끼칠 정도다. 우리가 이야기하기 어려워하는 소재를 다루었기 때문일까? 뱀도 뱀이라면 싫어한다지만, 우리도 우리의 내면에 숨겨있는 잔혹성과 폭력성을 꺼내 이야기하면 왠지 거부감이 생긴다. 아니라고 우겨보기도 하지만, 그런다고 바뀔 본성이 아니지 않는가. 신의 아이와 신들의 아이. 이 두 작품을 읽어보고 엔도 슈사쿠에 대해 큰 인상을 받았는데, 특히 전자인 『신의 아이-백색인』에 대해 무섭지만, 관심과 애착이 갔다.

역자도 이번 작품을 번역을 마친 후에도 제목을 정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원제인 백색인, 황색인에 부제목을 붙인 채로 출간하였다고 한다. 독자에게 이 책을 접근하는 방법을 제시해준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신의 아이』에는 30년 넘게 신을 믿어왔고, 20년 넘게 종교 문학을 연구해왔지만, 아직도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고민해오고 있다는 작가의 고뇌가 고스란히 뭍어 나온다. 

카톨릭 신자이면서 프랑스 유학을 갔던 작가의 이력을 떠올려봤을 때 순간, 이건 자서전이 아닌가? 착각을 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묘사하기 어려울만큼의 세밀하고 적나라한 감정 묘사와 고뇌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예수쟁이들의 연민만큼 나를 상처 입히는 것은 없었다’는 ‘나’의 고백은 ‘작가’ 자신의 고백이 아닌가 곱씹어 봤었다. 
나와 신학생인 자크, 그리고 마리 테레즈.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전혀 인과관계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몇가지 사건들이 기묘하게 물려나가면서 죄를 낳고, 죄를 낳게 된다. 

성경에 죄의 삯은 사망이  오라는 구절이 떠오르자 이 작품이 비극적으로 끝날 것임을 예감하게 되었다.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악의 심연으로 빠져들어갈 수 밖에 없나. 

폭력과 괴롭힘, 고문과 죽음. 괴롭히는 사람은 어느 순간 어떠한 죄의식도 없이 일종의 정욕적인 희열까지 느끼게 되고 매질을 끝냈을 때는 마치 육욕의 희열이 돌연 사라졌을 때와 같이 허무함마저 느끼는 장면을 보며 왠지 모를 부끄러움과 섬뜩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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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sosh 2010-05-17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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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실존 

첫 시작부터가 심상치 않은 책이었다. 문체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서술역시 매끄럽다. 군더더기도 없지만 문장상의 장식도 매우 절제되어 있다. 기교가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아름답다... 아름답다.... 하는 느낌을 준다. 도대체 이런 책을 수십년 전에 처녀작으로 썻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 이 책 한권만으로도 대문호의 반열에 올라도 손색이 없다. 작품의 깊이로 보아도, 문장의 흠잡을데 없는 맛으로 보아도...

그의 맛깔나는 문장도 문장이지만, 그의 책이 가지는 매력의 백미는 그가 요즘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존재론적 탐구를 진지하게 하고 있는 책이라는 점이다. 흔히들 그를 기독교 문학의 대가라고들 평한다고 한다. 사실 그는 기독교 문학의 중요한 한 분파를 이루는 의 선과악, 원죄, 인간과 신의 관계같은 주제들을 보기드물게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재미 한국인 문인인 김은국도 그와 비슷한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책을 꼭 종교적인 색채로만 읽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지금은 서양에서 기독교가 많이 쇠태하는듯 하지만, 그가 활동하던 시절의 서양에는 기독교인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고, 기독교적인 주제가 광범위하가 문학의 대상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그의 문학은 또한 그의 학창시절 뜨겁게 유행하던 실존적인 색채가 물씬 풍기고 있다. 요즘 실존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실존주의라는 인류의 지적유산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을 대하면서 우리가 생소하지 않은 감동을 느끼는 이유도 바로, 그가 다루는 문제가 시대를 초월한 인류의 공통의 문제점이기 때문이다. 백색인과 황색인에서 동과 서에 따른 차이점이 부각되긴 하지만, 그 차이는 공통점에 비하면 경미한 편이라고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기대어 않은 삶의 의미라는 자못 심각한 주제와 진지하게 씨름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멋진 독서가 되지 않을까... 아무튼 나는 그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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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하늘 2010-05-05 공감(2) 댓글(0)



    
<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 - 엔도 슈사쿠 


 과거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지만 나라마다 믿는 종교의 종류와 그 수는 모두 다르다. 그리고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민감한 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자신이 믿는 믿음이라는 존재가 ‘신’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믿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자신 외에 또 다른 무엇에 의지하고 싶어한다. 그게 바로 종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잠시나마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종교를 찾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신과 인간 그리고 종교의 관계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과 신에 대해 고찰이라고나 할까? 다소 무겁기도 하지만 종교라는 문제에 있어서 어렵다는 생각마저 느끼기도 했다. 「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게 되었다. 처음에는 제목 때문에 이 책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책을 펼치는 순간 종교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제목에서 언급하는 ‘신의 아이(백색인)’는 프랑스인이지만 어릴 때 충격적인 것을 목격한 뒤로 자신도 그 행동을 하게 된다. 이 부분은 나에게도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신들의 아이(황색인)’는 범신론적이며 책에서 등장하는 ‘듀랑’신부는 모두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던 중 ‘기미코’를 만나게 되고 성욕을 이기지 못하고 일을 저지르고 만다. 그 사건을 계기로 그리스도에서 쫓게 나게 되고 신부의 자리까지 박탈당하게 된다. 이 두 이야기는 각각 다르게 전개된다. 하지만, 두 물줄기가 하나의 강이나 호수에서 만나는 것처럼 이 이야기도 한 곳으로 만나게 된다. 각각 다른 종료를 믿고 있고 다른 사건으로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한 문제나 내면적인 요소를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사건이나 그에 대한 결과를 통해서 종교 문제의식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동양과 서양의 종교문제나 그 방식에 대해서 모두 다르고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차이점은 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종교를 믿고 안 믿고가 아닌 각각의 세계관에 대한 인식이나 가치와 생각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다소 무게감이 있고 가벼운 주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풀어가는 전개 방식도 각각 다른 이야기로 시작하여 하나의 덩어리로 모이는 느낌이 들었다. 종교와 인간 그리고 종교와 신에 대한 문제는 아직 풀리지 않고 계속해서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철학적인 요소도 있었고 신의 아이와 신들의 아이에 대한 대립으로 갈등도 생겨나지만, 그것을 자연스럽게 풀어나가고 있었던 것 같다. 작가 ‘엔도 슈사쿠’의 작품을 처음 접했던 터였지만 종교와 신, 인간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해주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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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v 2010-05-19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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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 

종교 소설과 세속 소설의 차이를 무너뜨린 20세기 일본 문학의 거장 엔도 슈샤쿠의 초기작 이라고 하는데 나는 아직 엔도 슈샤쿠의 작품을 접해 못한 상태에서 이 책을 처음으로 접했다,
엔도 슈샤쿠는 종교와 인간에 대한 놀라운 통찰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여러 차례 오른 바 있는‘일본 현대문학의 거장’이라고 하니 이번 기회에 읽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책도 많이 읽어본 경험이 없었기에 이 책은 나에게 그렇게 쉬운 책도 아니며 페이지수는 작은 책이지만 쉽게 넘어가는 그런 책도 아니였다,

신의 아이(백색인)과 신들의 아이(황색인)이 책의 배경은 세계2차 세계 대전 당시이다,,
신의 아이(백색인)은 독일군의 통역 사무관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나치에 치원해서 나치의 고문자의 일원이 된 '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과거를 회상하면서 서술을 한 이야기이다,
나는 못생긴 아이였고 못생겼을 뿐아니라 태어날때부터 사팔뜨기였다,그래서 부모님들로부터 완전하게 사랑받지도 못했고, 아버지는 방탕한 생활,자신의 쾌락밖에 모르는 사람이였으며,어머니는 그런 남편의 영향으로 어린아이인 나에게 엄격한 금욕주의를 강요해서 아이로써 누려야 할 기쁨과 자유를 금하고 책도 읽지 못하고 하면서 철저하게 청교적인 삶을 강요했는데 이런 어머니에 대한 반항으로 오히려 '나'의 육욕은 학대의 코락을 동반하여 눈을 뜨게 된다.
하녀 이본느가 늙은 개에게 가하는 학대와 고문,고통의 광경을 엿보던 12세의 소년 '나'는 생에 결정적인 흔적을 남겼다,
단순히 여성에 대하서만 자신의 가학본능을 느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모든 인류를 괴롭히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기 시작하게 된것이다,
훗날 고문자의 일원이 되어서 피고문자들의 신음소리, 비명,절규소리에 무언가 꺼림직한 정욕적인 유희를 느끼기도 하고 또 대학때 신학도 친구인 쟈크가 레지스탕트 연락책 활동을 한 죄로 잡혀왔을때 그를 고문하고 신의존재를 부인하도록 만들려고 고문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유일신을 섬기는 백색인(서양인)들의 세계관에서 유일신의 세계를 순응해서 살아가는 쟈크와,,유일신을 거부하고 신의존재를 거부하는 '나'의 모습을 통해 인간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악과 선의 대립도 볼수 있었고, 신을 부정하며 신과 격렬히 투쟁하고 있는 '나'의 모습도 보면서 인간이 악으로 극도로 치닫아 있는 모습도 볼수 있어서 씁쓸했다.



신들의 아이(황색인)도 역시 세계2차 대전속의 혼란한 일본의 모습속에서 성당신자인 치바(나)가 사제에게 편지형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기도 하고 또는 듀랑신부의 일기를 옮겨 놓기도 했다,
치바는 성당신자이지만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살아간다. 징용과 노동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일주일에 두번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지만 죽어가는 생명들에게 연민이 전혀 없다. 그리고 어떤 죄의식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으면서 어린시절의 친구 사이키의 약혼녀와 몇년간 계속 불륜의 관계를 맺어오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듀랑신부,,블란서 사제였던 듀랑신부, 사제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야 하건만, 선교지인 일본에서 일본여인을 범해서 교회에서도 추방당하고 매일매일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질 자기 자신을 보며 괴롭고 비참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어째서 하느님과 교회를 잊지 못하나요 잊으면 되잖아요. 당신은 교회를 버렸잖아요. 그러면서 왜, 언제까지나 그것에만 매여 있는 거죠.
오히려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기만 하면, 용서해 주는 부처님 쪽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166
이렇게 괴로움의 나날들속에서도 또 계속 마음속으로 죄를 짓고 또 행동으로도 죄를 짓는 모습이 참으로 씁쓸하고,결국은 인간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악과 선의 대립만을 그린것이 아닐까 한다,
번역자는 이책처럼 번역하기 어려웠던 책도 없었다고 하지만은 책을 읽는 이도 짧은 글이지만은 상당히 무거운 주제와 내용이라서 가벼운 책은 아니라서 마음이 좀 무겁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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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2010-05-1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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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 신들의 아이 새창으로 보기
신에 대한 문제는 어쩌면 신이 존재하든 하지 않든 불가사의하고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나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끝없은 인간의 호기심에 대해서 어떠한 답도 찾을 수 없다면 아마 미쳐버리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아직도 모든 사람들에게 화두가 되고 있는 것.
인간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그리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은 어디에서 온 건인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문제.
이런 문제들은 인류의 지식이나 정신으로도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가 아닐까요?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그 해답을 찾고자 노력하고 또 누군가는 해답을 구했을지도 모르죠.
만약에 신이 있다면 자연히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답은 풀릴 것 같아요.
그러나 이런 문제가 풀리기는 하지만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죠.
신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죠.
이 책에서는 백색인과 황색인으로 나뉘어 각각의 신과 신들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어요.
신일 수도 있고 어쩌면 신들일 수도 있고,
물론 이것은 신이 존재한다는 과정에서 신성과 인성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고 말이죠.
사실 직접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많은 의문이 생기게 되고 여기에 믿음이라는 또 하나의 가정이 발생하고 끝없는 문제와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구도 또 문제, 해답 찾기를 반복하는 게 어쩌면 우리 인류의 삶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만약에 신이 있다면 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섬기어지는지 또 세계가 왜 신의 뜻대로 사랑으로 가득차지 않는지, 왜 인간에게 죄가 있어야 하는지, 선과 악의 문제 등등.
종교에 대한 문제는 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 인간 자신의 이야기이자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조금은 무거운 주제에 대한 탐구이기에 신과 인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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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야루 2010-05-1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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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 엔도 슈사쿠 새창으로 보기

그러니까 일단 이렇게 이야기하고 시작하자..나~~안 무신론자, 신을 믿지 않는자임.. 가만히 보자...그 신이라는 존재감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되지?..신,,어떤쪽에서는 유일신을 외치면서 나를 제외한 모든 신이란 불리우는 것들은 다 우상숭배이니라..하는 경우도 있고...또 다른곳에서는 인간이 곧 하늘이다~!라고 외쳐대는 곳들도 있다..게다가 어느 나라에서는..건담을 신으로 모시는 경우도 있더라...그 나라는 수많은 신이 존재하는 나라이더라...물론 이 소설의 작가 또한 그나라의 사람이더라...근데 이 소설은 미신과 다신의 의미가 부각된 나라에서 카톨릭적 신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죄악과 신을 향한 순결한 정신 사이에 방황하는 누군가를 의지하고 믿음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의 존재라는 가벼움을 소설적 형식을 빌어 신으로의 죄사함(?..이런말 맞나??.)을 보여준다..

 

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짧고 가벼운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면에 있어서는 묵직함이 한 천톤급은 된다..특히나 저변에 깔린 기조가 종교라는 주제와 인간의 나약함과 죄악적 욕망이라는 근원적인 문제일 경우라믄???..하이고!!~~한숨 나온다..그렇다고 종교와 인간의 욕망에 대한 근원적 믿음의 분석적 고찰(?) 뭐 이런 것 같은 박사논문은 아닝께로 독서에 큰 무리는 없다..그냥 소설이다..한 인간의 욕망과 종교적 반항등을 결부시켜 종교의 의미를 부각시키고자 한 작가가 만들어낸 픽션인게쥐...재미는 있다..게다가 밑바닥에 깔린 의미 조차 느낌이 팍온다.. 종교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역시나 싶다...하지만 난 종교인이 아니라 공감의 차원까지는 다가서기가 어려웠다... 하기사 난 욕망떵어리니까능... 게다가 야한 생각을 많이 해서 머리가 빨리 긴다...더벅머리를 벗어나질 못한다...난 야한 여자가 좋다...응??..그래서 신이 날 멀리 하신다??..ㅋㅋㅋ..미안..농담이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상당히 길다...신의 아이-백색인, 신들의 아이-황색인이라고 만들어진 이유가 있다...이 작품은 두개의 작품을 하나로 묶었다..물론 작품의 성격상 하나의 주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다..같은 시기에 같은 목적으로 같은 느낌으로 집필된 작품이지만 역시 엔도 슈사쿠는 백색인이라는 작품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다..그 후 병행된 작품인 황색인을 엮어 하나의 작품으로 선보인거쥐..지금..옛날에는 같이 묶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하여튼 지금은 같이 묶어서 나왔다...내용은 비슷하다...두 작품 모두 수기와 고백적 형식의 일기와 주인공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입장이 섞여서 작품이 진행된다...주인공들은 종교적으로 신과 밀접한 관계에 놓인 인물들이나 그들은 신을 배신한다..물론 불사파의 조필의 부하였다면 "직사"당했을 것이지만 신은 그들은 용서하시는건지, 알면서 외면하시는건지.. 우짠지 내비둔다.ㅋ ..그들은 인간의 욕망에 굴복하고 비겁하게 생명을 연장하는 나약한 인간으로 묘사된다..ㅋ 백색인에서의 쟈크가 그러했고 황색인에서의 듀랑신부가 그러했다.. 줄거리는 여기까지...뭐 딴거 없다..신에게 반항하고 인간임에 욕망에 불타올라 신을 저버리고 죄악의 길로 들어선 인간의 반항(?)과 고백과 그 뭐라 그러지?.갑자기 생각이 안나네?..저 머시냐?..화장실 같은데 들어가서 신부님한테 고백하는거...뭐지??....앗!! 고해...뭐 그런 내용으로 진행되는 작품되시게따..그러니까..어찌합니까~~어떻해야할까요~~뭐 이렁거..아님 말고..ㅋ

 

짧고 굵은 작품.. 이렇게 평하면 어떨까 싶다.. 종교인이 아니라 공감의 차원과는 별개의 느낌에서 순수한 소설적 감성으로만 이야기한다면 나쁘지 않았다...신이라는 존재와 인간은 절대적으로 멀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더욱더 끌리는 뭔가가 있었다.. 무신론자라는 나의 입장에서 볼때도 굳이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이해가능한 작품으로 인식되어진다.. 하지만 너무 강한 카톨릭적 감성이기 때문에 반감을 가질만한 독자도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릇이 큰 나같이(??) 종교적 포용력이 무한대이신 분들에게는 그럭저럭 읽을 만한 독서가 되었지 싶고...참고로 띠지에 붙은 종교소설과 세속소설의 차이를 무너뜨린 작품이라는 말에는 뭔가 안맞는듯하다...사실 난 종교소설과 세속소설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혹시라도 의미를 아시는 분이 계시다면 좀 알켜 주시라...그 차이가 무었인지..

 

문득 군대에서 이등병때가 생각난다...난 빵 하나를 위해서라면 신을 마주할 수 있다라고..

몇초간 생각해본 적이 있다....뭔 말인쥐 모르겠으나...하여튼 그때는 그랬다..빵이 신보다 강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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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마다 2010-05-16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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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새창으로 보기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어느날부터인가 살면서 한 가지 종교를 가지고  믿음생활을  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최근에 마음속에 아직 믿음은 많이 부족하지만, 한 가지 종교를 선택해서 다니고 있는 중이다.  이유는 친정 작은어머니가  20대의 젊은 외동딸을 병으로 잃고 힘든 상황이 되었는데,  오랜 믿음생활로  믿음을 갖지 않는 사람들보다  굳건하게 잘 견디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이다.  

   사촌 동생이 유명을 달리 한 것이 벌써 몇 년 전의 일인데,  그때부터 작은어머니를 대할 때마다 가슴속으로는 너무도 안타깝고 힘들게 견디고 계시겠지만,  의외로  당신의 딸이  진정  꼭 쓰임이 필요한 좋은 곳에 갔을 것이라고 긍정하는 마음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작은어머니의 믿음에 대해서 여러 차례 물을 기회를 갖게 되면서 내 생각도 깊어지게 되었다.   

 
  과연  인간에게 있어서 종교란 무엇인가? 믿음을 갖는 마음은 어떤 것인가? 에 대해 제법 진지하게 오랜 시간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 살씩 나이 들어 갈수록 내가 더 늙고 병이 들거나, 앞으로 힘든 일들이 닥치더라도  믿는 마음이 있으면 조금 더 의지가 되고, 마음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건 아닐까 고민하곤 했다.  딱 내가 종교에 대해, 믿음에 대해  이런 저런 갈등과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시기에   동, 서양의 종교관. 종교를 공부한 사람들이 종교와 멀어지거나,   죄를 지었을 때의 갈등등에 대한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종교관에 대해서도,  모든  믿음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게된다.  

 
  아직  종교에 대한  지식도, 마음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책을 읽어 나가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동, 서양의 종교적 차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을 읽다가 종교적인 부분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작가에 대한 검색을 먼저 해보게 되었는데,   일본인으로 태어나 어릴 때 가토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청년기에 프랑스로 가토릭 대학에 유학을 한  그에 대한 정보들을  알게 되니,  조금씩  저자가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일부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본느'의 포동 포동한 무릎은 낙인 찍히듯 내 기억 속에 하얗게,   
                                        너무나도 하얗게 남겨졌다.

                        나의 육욕은 학대의 쾌락을 동반하며 눈을 떴다. 

 
   '신의아이 (백색인)'을  읽어가는 동안, 어느 부분은 정말 진지하게, 또 다른 부분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을  만나면서도  인간과 믿음에 대해, 종교와 악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신의아이 (백색인)' 에 등장하는  주인공 '나'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로부터  청교도 적인  생활을 하도록  교육받는다.  그러다가 어느날  우연히  하녀 '이본느'의 하얀 허벅지를 보면서 자신 안에  숨어 있었던   쾌락에 대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차대전중 독일군대의 통역관이 되어,  청년기에  알게 된 신학생 '자크'를 고문하는 입장이 된다.  그러면서  그의 연인인 '마리 테레즈'를 고문실 옆방에 데려와 범한다.   연인을 통해 마지막으로 '자크'의 자백을 받아내고자 했지만, 결국 ' 자크'는 혀를 깨물어 자살하고 만다.   주인공 '나'의  행동들을  따라가면서  한 인간의 내부에서 선과 악,  쾌락과 갈등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어째서 하느님과 교회를 잊지 못하나요? 잊으면 되잖아요.

     당신은 교회를 버렸잖아요. 그러면서 왜, 언제까지나  그것에만 매여 있는거죠?"

      '신들의 아이 (황색인)' 의 파문당한 신부 '듀랑'과  조금씩 어려운 상황의  그를  돕는  또 다른 신부인 '브로우',  그리고 일본인 이자 교회에서  자신으로 인해 쫓겨난 '듀랑' 과 함께 살고 있는 '기미코'.의 이야기이다.   '황색인'은 백인으로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한 순간의 실수로 파면당하면서,  함께 사는 황색인 기미코 사이에서의 갈등을 볼 수 있다.  나 '치바'가  '브로우'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와  자신을 도와주었던 '브로우' 신부를 위험 속에 빠지게 한 '듀랑' 신부의 일기가  내가 브로우 신부에게 말하는 편지내용과 '듀랑'신부가  나와 브로우 신부, 기미코 사이에서의 갈등등을 적은 일기내용이 번갈아 쓰여져서  서로  다른 백색인과 황색인의 눈으로 보는 종교와 갈등을 보여준다.  서양의 유일신을 믿는 종교관을 가진 '듀랑'과   동양에서 살아온 '기미코'가 가진  기독교를 보는 종교관을 보면서  서양인들의 기독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 무거운 추를 무엇으로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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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랄라~ 2010-05-1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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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 운명과 구원에 대한 질문 새창으로 보기
엔도 슈사쿠라는 이름, 들어는 보았으나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있었으나 이 책(혹은 그의 작품 세계 전체?)의 특징을 규정짓는 것은 2년간의 프랑스 유학과 귀국이 아닌가 한다. 유학 후 '신의 세계'를 경험한 '신들의 세계'의 자식인 자신에 대해 쓴 소설이 '아덴까지'라는 작품인데 이 소설을 쓰고 6개월 후에 이 책에 실린 '백색인'을, 그로부터 6개월 후에 '황색인'을 썼다고 한다. 연도는 1955년, 나이는 대략 35세 정도였을 그... 태생적으로 카톨릭 인이었던 그에게도 시대의 특이성과 문명의 이질성은 폭풍처럼 다가왔던 것일까? 이 소설은 그가 느낀 '이물감'을 거침없이 담아낸다. 

제목도 그렇고 책의 구성도 그렇고 작가의 경력으로 봐도 그렇고, 두 편의 소설이 서로 마주보고 대치하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어설프게나마 들어본 적이 있는 일신교와 다신교가 가지는 철학적 차이를 떠올려보기도 했고 말이다. 무엇보다 상당히 경건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소설이 아닐까 기대했었다. 그러나 왠걸? 이러한 기대들은 하나같이 어긋나버리고 말았다.  

이 소설은 싸늘하게 몰아치는 겨울바람처럼 매섭고 격렬하다.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 일그러져 있으며 스스로의 욕망과 죄책감에 휩쓸린 채로 살아간다. 백색인의 '나'는 자신의 이지러짐을 세계에 관통시키려 드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자신과 쌍둥이처럼 닮았으면서도 그 사실을 부정하며 신이라는 이름의 세계로 자신의 이지러짐을 채우려하는 신부 자크는 용납할 수 없는 존재였다. 카인이 아벨을 망가뜨리듯, 그는 자크의 유일한 욕망인 마리 테레즈를 이용하여 자크를 파멸시키고 죽음으로 몰아간다. '나'는 자크를 죽임으로써 세계의 무의미를 증명해냈지만 결국 황폐하고 무감동할 뿐... 황색인은 세 인물의 고백이 어우러지지만 가장 중심에 있는 인물은 '듀랑 신부'이다. 선교사로 일본에 와서 오랜 세월 신부로 봉사해왔던 그는 기미코라는 여인과의 만나 '타락'한 뒤,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로 삶을 살아간다. 죄책감에 빠진 이들이 그렇듯 그는 스스로를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던져놓고, 마침내 '브로우 신부'를 파멸시킴으로써 자신의 '신'을 버린다. 신이 없기에 황색인은 평온하고 무감할 수 있다고, 그들을 닮는 것이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구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황색인의 경우, 듀랑 신부의 입을 빌어 신이 지배하는 세계와 신들이 지배하는 세계를 대조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이런 점이 그다지 중요하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듀랑 신부는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 신과 신들의 세계를 충돌시켰을 뿐이다. 하물며 백색인에서의 '나'는 무신론자이고, 대적자 자크 신부의 신앙 역시 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비롯된 전형적인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들에게 신이 있다면 그건 오히려 '운명'이라는 세계의 무자비함이다. 자크 신부나 브로우 신부는 그것을 숙명이라 읽어냈을 뿐이고, 백색인 '나'나 기미코는 그렇게 보지 않았을 뿐... 차라리 전쟁이라는 욕망의 향연장에서 지치고 패배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을 인간상들의 모습, 어쩌면 이 글을 쓸 때 엔도가 느꼈을 무력감이 그 모습에 비추어 보일 따름이다.  

결국 이 한 쌍의 소설은 거울을 마주본 듯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신과 신들은 구원을 주지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장난처럼 운명에 휩쓸려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지푸라기라도 움켜잡지 않으면 버티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기에 신의 끄트머리라도 붙들려고 하는 듀랑 신부든, 무의미를 입에 달고 다니는 백색인의 '나', 황색인의 '치바'든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 책은 답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질문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아직 젊은 시절, 전쟁의 상처가 남아있던 시절에 씌여졌던 작품이어서일까? 두껍지 않은 이 책 안에 작가는 평생에 걸쳐 고민해야할 화두를 던져둔 것이 아닐지... 생을 살아가며 작가가 나름의 답을 찾는지는 다른 작품들을 읽어봐야 알 일이리라. 그 답을 들어보고 싶기도, 듣지 않고 싶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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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믈버서난달 2010-05-19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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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색만큼이나 확연히 다른 동서양 종교적 세계관의 차이와 갈등 새창으로 보기
이웃 나라 일본은 야오요로즈카미쿠니(八百万神國), 즉 8백만의 뭇 신들의 나라라고 스스로를 자칭한다. 이러한 만신들을 숭배하는 일본의 민족 종교 신도(神道)는 전체 인구의 95 % 이상인 1억 1천만 명이 숭배할 정도로 일본의 국교로서 자리를 잡았고, 우리보다 일찍 개항했음에도 기독교는 1 % 도 채 안 되는 100 만 명 남짓 정도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기독교가 뿌리 내리지 못한 일본에서 기독교를 주제로 한 “침묵”, “예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 “깊은 강”등을 써왔으며, 종교소설과 세속소설의 경계를 무너뜨린 20세기 문학의 거장으로 여러 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다는 “엔도 슈사쿠”는 특이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번에 어문학사(2010년 4월)에서 출간된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은 종교와 신, 구원의 문제에 관한 그의 일련의 문학세계를 일컫는 “엔도문학”이 형성되기 이전의 초창기 작품으로 그의 문학 세계의 시발점이 되는 작품이라고 한다. 이전에 그의 작품들을 읽어보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 작품이 그의 다른 작품들과 어떠한 경향적 차이가 있는지는 알 수 가 없지만 200여 페이지의 짧은 분량임에도 그가 고민해왔다는 서양과 동양의 종교문화의 차이로부터 겪은 방황, 갈등의 요소들을 어느 정도 엿볼 수는 있었던 그런 책이었다.  


 책은 기독교 유일신앙의 세계인 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 즉 백색인의 세계와 앞에서 말한 동시대의 온갖 만신들의 나라 일본, 즉 황색인의 세계로 나누어진다.  

먼저 백색인의 세계부터 간단하게 요약해보자.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태어난 못생기고 사팔뜨기 소년인 “나”는 어느 날 우연히 늙은 개의 목을 하얀 허벅지로 짓누르며 학대하는 하녀 이본느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 청교도적인 일상에서 일탈하는 그런 쾌락을 느끼게 된다. 대학에서 엄격한 종교적 신념 속에서 생활하는 신학생 “자크”를 만나면서 유일 신앙인 기독교에 대하여 더욱 반발심을 느끼게 되고, 그의 사촌 여동생인 “마리 테레즈”를 그리스도를 배신한 유다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그녀를 쟈크가 그렇게 가지 말라고 당부하던 무도회장에 데려간다.  

나의 입가에는 엷은 웃음이 떠올랐다. 자크에게 있어서 유다가 누구인지, 나는 그때 알았던 것이다 (P.47). 어쨌든 그 여자는 쟈크에게 작은 비밀을 지니게 된 것이다. 작은 비밀은 다른 거짓말, 다른 비밀을 낳고, 그것은 이 배신의 골짜기를 울리면서 무너져 내릴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P.50) 

그로부터 3년 후 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게 되면서 “나”는 게슈타포 통역사로 일하게 되고 그 곳에서 레지스탕스 연락관으로 일하던 신부 “자크”를 만나게 된다. “나”는 종교적 신념과 정의를 부르짖는 쟈크를 비웃으며 마리 테레즈를 잡아와 고문실 옆방에서 그녀에게 위해를 가해 예수를 배신한 유다처럼 그에게도 배신을 강요하지만 그는 고문과 더럽혀지는 그녀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혀를 깨물어 자살하고 만다.  

백색인의 세계가 기독교적인 세계관 내부에서의 갈등에서 비롯된 악을 이야기한다면 황색인의 세계에서는 운명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는 세계에서의 구원과 믿음에 대한 정반대의 종교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8년전 한순간의 욕정에 의해 파문당한 신부 듀랑은 성당의 후배 신부인 브로우 신부의 보살핌으로 근근히 살아간다 . B29가 일본 영토를 직접 폭격하는 전쟁의 막바지 무렵, 듀랑은 자신의 가지고 있는 권총이 발각될까 두려워 브로우 신부의 사제관에 몰래 숨어들어 권총을 숨겨놓고, 거짓 투서를 보내 결국 브로우 신부는 잡혀가게 된다. 그러면서 이 낯선 땅에서의 기독교의 구원과 배신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괴로워하게 된다. 

선교한지 12년, 비로소 오늘 나는 이방인의(즉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행복을 알았다. 그것이 행복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단언할 수 없다. (중략) 그것은 하느님과 죄에 무감각한 눈이고, 죽음에 대해 무감동한 눈이었다.(중략) 오늘부터 나는 구원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껏 내가 자라온 백인들의 방법과는 전혀 상반된 이방인의 방법을 통해서 일 것이다. 그 멍하고 생기 없는 눈으로, 서서히 하느님을 잊고 죄를 거듭 지으면, 결국 죽음에 대해서도 무감동해져 갈 것이라는 것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P.168)

일본인들은 하느님의 존재와 상관없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죄의 고통, 구원에 대한 갈망, 우리 백인이 인간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감각하게, 애매모호한 상태로 살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가 있는지, 이해가 안된다 (중략). 금빛 털이 나 있는 손등은 분명히 백인의 손이었고, 하느님을 믿든지, 미워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백인종의 손이었다, 나는 황색인이 될 수 없었고, 이 피부색 또한 바꿀 수 가 없었다. -(P.191) 

작가는 동, 서양의 종교적 세계관의 차이를 백색인의 세계와 황색인의 세계로 정의하여 모든 인간 운명의 배후에는 신의 은밀한 섭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믿는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그 섭리조차도 하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동양적 - 엄밀하게 말해서는 일본 - 세계관의 차이 때문에 확연히 다를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듀랑이 백인들의 방법과는 다른 구원의 방법을 찾았음에도 결국 자신의 피부색을 바꿀 수 없다고 독백하는 부분에서 이미 운명으로 결정되어 결코 좁혀지지도 않고 넘을 수 없는 두 세계의 간극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엿볼 수 가 있었다. 서로 다른 종말과 구원에 대한 인식, 범신론의 세계는 결국 유일신의 세계에 정복당할 수 밖에 없다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 간격을 좁히기 위한 인위적인 행동에서 비롯된 갈등보다는 서로 다른 차이를 인정하고 평행의 길을 걸어가자는 것이 작가의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종교 간의 차이와 갈등에 관심을 두고 출발했던 작가의 문학관이 과연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그의 문학세계에 있어 본격적인 작품들이 더욱 궁금해졌다. 물론 아직 문학의 방향성이 정립되지 않은 초창기의 작품이어서 이 작품을 통해 엔도 슈사쿠 전체를 이야기하기에는 비약이 심하겠지만, 적어도 엔도 슈사쿠 문학 전반을 꿰뚫는 주제라는 종교에 대한 그의 고민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으로서는 이 책이 손색이 없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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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미르 2010-05-06 공감(1) 댓글(

230408 Namgok Lee | 공자

(4) Namgok Lee | Facebook
230408
Namgok Lee
1 d
  · 
유가(儒家)로서 학문을 시작하였으나 유가와 절연(絶緣)하고 독자적인 학파를 형성한 묵자가  유가를 격렬히 비판한 배경이 된 것은 유가 가운데 유교의 진정한 원리는 전혀 알지도 못하거나 거기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정치적인 출세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에만 몰두한 사람이 너무나 많았던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와 동시에 공자의 사상과 행태에 만족하지 못한 묵자의 급진성(공자는 이런 사람을 狂者라고 부른 것 같다)을 현대인들 가운데 일부가 공자보다 더 높이 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급진성이 비록 평등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감각에 와닿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인류 보편사(人類普遍史)의 진행에서는 그 영향력이 공자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국소적이다.

그 중요한 차이를 H.G.크릴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묵자는 자기가 누구보다도 세상의 악을 고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고 믿었으며, 공자와 달리 다른 사람에게 자유로운 선택이나 판단의 여지를 허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나의 가르침만으로도 충분하다. 내 가르침을 버리고 스스로 생각하려는 것은 추수를 포기하고 낟알을 줍는 것과 같다.”
묵자는 빈곤, 무질서 및 전쟁을 비롯한 이 세상의 죄악을 엄격한 권위주의적인 체제로 구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각 집단의 구성원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지도자와 일치되어야하며” 각 집단의 지도자는 다시 그 상급자와 일체가 되는 방식으로 최종적으로는 천자(天子)에게까지 연결되어야 한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 가운데 다음 구절을 연상케 한다. “통합국가의 헌법을 제정하는 원리는 모든 지도자는 하급자에 대해 권위를 갖고, 하급자는 상급자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공자는 사유에 대한 원칙을 제시하였지만, 진리의 고정된 척도는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개인에게 스스로 진리를 발견하는 책임을 맡겼고 그것도 각자의 자유에 일임하였다.
그러나 지적(知的) 자유에는 필연적으로 정신적 노고가 따르기 때문에 인간은 대체로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공자가 인간의 정신에 제공한 것은 ‘평화가 아닌 검(劍)’이었다.
제자 가운데 공자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극소수였고 따라서 공자의 시체가 식자마자 제자들이 아늑한 지적 안식처를 세우고 그 안에서 성전(聖典) 및 결코 오류를 범할 수 없는 성인의 권위를 찾기 시작한 것은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크릴의 맹자에 대한 다음의 언급도 시대를 넘어 오늘의 유사(類似) 진보주의자들을 돌아보게 한다.
<맹자는 당시의 비교적 우수한 유가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사람이지만, 유가 특유의 약점 즉  상류사회를 선망하는 속물(俗物)이었다. 그의 생활이나 여행은 사실 극히 사치스러웠지만 그는 훨씬 더 사치스러운 왕후(王侯)들을 크게 선망하였다.
맹자는 정의만 구현된다면 자기도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이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지위나 사치를 경멸하고 덕(德)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척하였지만, (햄릿에 나오는) 귀부인처럼 도에 지나친 항의를 많이 하였다.>


Namgok Lee
1 d
  · 
'일미진중함시방'
내 마음 안에는 내가 싫어하고 반대한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이 함께 들어있다.
몸이 안좋으니까 잘 보인다.
공자가 일관한 것은 오직 '수기修己' 였다는 것.
그의 모든 외적 활동은 그것의 자연스러운 외화外化.
공자 사상이 그 숱한  풍랑과 왜곡을 겪으면서도 고전古典으로 살아남아 미래를 열어가는 메시지로 작용하는 핵심.

Namgok Lee
3 d
  · 
H.G.크릴의 공자를 읽으면서 드는 단상 하나.
맹자 대(代)에 오면 유자들 가운데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당당하게 유세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맹자는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조언할 때는 그들을 경멸해야 한다.”고 말하며, 
순자는 “진정한 군자는 천지와 동격이기 때문에 훌륭한 유자가 극도의 궁핍한 처지에 빠져도 왕후는 감히 그와 명예를 다툴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들의 자존감을 높였다.
그런데 어떻게 포악한 군주들이 유자들이 ‘혁명’을 설교하는 것을 그대로 두었으며, 극단적인 모욕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에게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였는가?
군주들이 전(全) 중국(中國)을 차지하려는 각축전에서 학자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경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맹자는 수십 대의 수레와 수백명의 종자를 거느리고 여행하였고 제후(諸侯) 사이를 전전하면서 식록(食祿)을 받았다.
물론 구성원의 수가 많아지면 뛰어난 사람들이 다수를 점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맹자는 당시 사람들이 인격을 수양하는 유일한 목적이 높은 지위를 얻으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일단 목적을 달성하면 주의주장은 더 이상 불필요한 것으로 내던져 버린다고 말하고 있으며 순자도 자기 자신이 유가이면서도 그가 속유(俗儒)라고 부른 자들을 통렬히 비난하였다.
일찍이 공자는 ‘예(禮)’의 자구(字句)에 얽매여 그 정신을 망각하는 것을 특별히 경고하였으며, ‘도(道)’에 뜻을 두고 있는 척하면서 개인적인 쾌락과 출세에 관심을 가진 사람을 비난하였다.
논어 옹야 편에 자하라는 제자에게 소인유(小人儒)가 되지말고 군자유(君子儒)가 되라고 당부하는 말이 나온다.
군자(君子)의 특성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논어 이인편에 나오는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는 말이다.
실제로 인간은 어느 한 쪽으로만 되어 있는 경우는 없다. 다만 이(利)와 의(義) 어느 쪽에 더 끌림이 있는가는  인간을 평가하는데 가장 중요한 지점이 아닌가 한다.
공맹시대의 유자를 요즘 말로 하면 폴리페서(polifessor) 쯤 될 것이다.
맹자나 순자 정도 되는 당당한 폴리페서(polifessor)도 드물지만, 소인유(小人儒)와 비슷한 사람이 많다.
내가 보기에는 진보냐 보수냐 하는 차이보다 군자유(君子儒)와 소인유(小人儒)의 차이가 더 본질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적어도 의(義)에 끌림이 더 강한 지식인이나 정치인이라면 그가 보수건 진보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이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위기들을 넘어설 수 있는 지혜와 힘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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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6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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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시카고에서 출생한 미국의 학자 H.G.크릴이 ‘개혁가 공자’를 서술하고 있다.
이런 시도야말로  인류 보편의 사상적 거인으로서 또 위대한 개혁가로서 공자의 진면목을 밝히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을 일부 발췌한다. 
“공자가 주장한 개혁이 과연 ‘민주적’이었다고 말해도 좋은지, 또 만약 그렇다면 어느 정도 ‘민주적’이었는가?
오늘날의 민주정치는 19세기말 및 20세기의 산물이며 최근에 확대된 인류의 경험 뿐 아니라 자연과학 사회과학 및 산업화 등과 같은 현대적 혁신에 크게 기초를 둔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처했던 상황이 현대민주주의 옹호자들이 처했던 상황과 크게 상이相異하였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사상 사이의 相致點(상호일치점)이 있다면 오히려 특별한 흥미를 자아낸다.
매리앰(C.E.Merriam)은 ‘민주주의의 기본 가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1.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 차별보다는 우애 원칙에 근거한 개성의 보호 및 함양의 중요성, 근거도 없이 또는 과도하게 인간차별을 강조하는 데서 비롯된 특권의 폐지.
2. 인류의 완벽성을 부단히 지향하는 것에 대한 확신.
3. 국가의 수익은 본래 집단적인 수익이므로 크게 지연되거나 지나친 차별없이 가능한 한 신속하게 전사회에 분배되어야 한다는 가정.
4. 사회의 방향과 정책의 기본적인 문제에 관해 최후 결정을 대중이 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 그리고 그런 결정을 표현하기 위한 절차를 인정하고 그 결정이 정책으로 반영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
5. 폭력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합의 과정을 거쳐 의식적인 사회변화를 성취할 수 있다는 신념.
이 가운데 4개의 항목은(4번을 제외한 모두) 기본적으로 공자의 사상과 일치하는 것이 분명하고 어떤 것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는 것도 있다.
투표와 관련된 나머지 한 항목이 실제로 가장 중요한 것 같은데, 공자는 대중이 정치를 좌우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앞에서더 지적하였지만 고대 중국에는 투표라는 개념은 없었던 것 같다. 프랑스 혁명이 한참 진행중이었던 1791년 프랑스 헌법이 제출되었을 때, “보통선거안을 부결하는 것이 무산계급은 문맹이고, 투표를 하려면 일정한 훈련과 경험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변호될 수 있었다면” 기원전 500년경 공자가 중국의 정치를 농민계급에게 넘길 것을 제안하지 않았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공자가 이상적인 교육상태나 그 비슷한 상황이라면 대중이 정치를 좌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는지의 여부다. 이것은 답변하기 어려운 문제인데,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것을 종합하여 정치 권력에 관한 그의 의견을 체계적인 서술로 제시해보자.(공자가 결코 이런 것을 제시한 일은 없는 것 같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정부의 고유한 목적은 전체 백성의 복리와 행복이다.
이 목적은 정치에 가장 유능한 사람이 국정을 담당할 때 비로소 달성될 수 있다.
위정자의 능력은 가문, 재산 또는 지위와 필연적인 관련성이 없으며, 오직 인격과 지식에 달려 있다.
인격과 지식은 적절한 교육의 산물이다.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능력을 발휘하도록 교육은 널리 보급되어야 한다.
따라서 적절한 교육을 받은 결과 가장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가 된 사람을 전체 국민 가운데서 선발하여 정치를 위임해야 한다.
이것은 백성 전체가 정치를 좌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결국 일종의 귀족정치 제도이지만, 가문이나 재산에 의한 귀족정치가 아니라 덕망과 능력에 의한 귀족정치이다. 민주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공자의 태도에는 가장 유능한 사람이 임용되는 것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없다는 결함이 있지만, 이것은 역사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공자의 제도에는 전체 백성이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정치란 백성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이론은 확실히 백성들에게 막연하나마 ‘이론상’의 거부권을 부여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정부의 형태나 제도적인 장치의 중요성은 과소 평가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 형태나 제도의 기초가 될 뿐 아니라 그것을 수행하는데도 필요한 정신이나 철학보다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인간의 경험으로 충분히 증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진리는 (또는 적어도 진리의 이해는) 부단히 발전 또는 개화 과정에 있으며 모든 사람이 진리를 창조하고 발전시키는데 참여할 수 있다는 신념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반면에, 진리를 고정적이고 절대적인 실재로 생각하는 철학은 모두 정치적 전체주의의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는 것도 명백해졌다.
(중략)
공자가 절대론의 입장이 아니라 진리의 부단한 탐구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진리를 말하지도 않았고, 절대적인 가치척도를 제시하지도 않았으며, 그들 스스로 진리에 도달하도록 교육하였다.”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하여 목숨을 뺏고 뺏기는 권력투쟁이  공자의 제자를 자처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졌다는 것은 얼마나 빗나간 것인가?
서양의 학자가 본 공자가 그 유명한 주자(朱子)가 본 공자보다 훨씬 공자의 진실에 가깝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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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1 April at 08:45
  · 
크릴의 공자를 읽고 있다.
개혁가로서의 공자를 논하는 장(章)의 일부를 발췌 소개한다.
“공자의 교육론이 혁명적 성격을 띄었다는 것은 여러 다른 주장들 예컨대 노자나 한비자와 비교해볼 때 뚜렷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것이 혁명적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공자 당시에 그의 정치적 주장에 아무도 경계심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은 공자가 개혁가로서 상당한 능력을 갖고 있었음을 잘 말해준다. 맹자와는 달리 공자는 결코 폭군을 죽여야 한다거나 제왕과 농민이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을 직선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의 전체적인 운동은 시작도 되기 전에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좀 더 신중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1세기 뒤에 맹자가 아무 탈 없이 직선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기초를 쌓았던 것이다. 이것은 확고한 방침에서 나온 것 같은데, 부패한 정부 아래 살고 있는 사람은 기회가 오면 용감하게 행동할 용의를 갖고 있어야 하지만 말을 할 때는( 그 자체로는 상황을 바로 잡을 수 없기때문에) 다소 신중해야 한다는 견해를 공자는 표명한 적이 있었다. (憲問 편)”
이 글을 읽으면서 이와 상반되는 상황이 요구되는 시대나 사회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극단적 상황에 극단적 대응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다.
이 극단적 대응 또한 또 다른 극단(極端)이기 때문에 결코 그 자체가 안정되고 평화로운 개혁을 이루기가 어렵지만, 그 후에 나타날 건강하고 조화로운 개혁을 예비하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일 수 있는 것이다.
계속되는 악순환으로 전체가 붕괴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렇게만 된다면 역사는 거칠게나마  순항(順航)할 것이다.
사후(事後)에는 보이지만, 진행 중일 때는 모르는 일들이 역사 속에는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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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26 March at 09:57
  · 
이수태 저 ‘공자의 발견’에 이어 H.G.크릴 저 ‘공자, 인간과 신화’를 두 번 째 읽고 있다.
크릴에게서 학자의 진면모(眞面貌)를 느끼게 한다. 
나는 논리적인 성격도 있지만, 직관적인 성향이 강해서 학자의 길에 들어서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요즘은 학자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사람들과 책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오늘 읽다가 ‘예언자의 신뢰도를 높여주는 것은 백발보다 나은 것이 없다’라는 코멘트 앞에서 혼자 웃는다.
나는 80이 다 되었지만, 흑발(黑髮)이다.
그 말대로라면 나는 예언자의 길을 갔어도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이다.  사이비 예언자의 유혹에서 아예 생래적으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머리 색깔이 아닌 말과 행동으로 사이비 예언자를 감별하는 능력은 다소나마 갖추고 있다는 생각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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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나가오 다케시 일본사상 이야기 40

알라딘: 일본사상 이야기 40

일본사상 이야기 40 - 일본사상총서 4 
나가오 다케시 (지은이),박규태 (옮긴이)
예문서원2002-05-15

309쪽


목차
한국의 독자들에게
저자의 말 - 독특한 유혹으로서의 일본 사상
옮긴이의 말 - 감추는 꽃과 보여 주는 꽃: 일본 사상의 두 얼굴

제1부 고대편

1. '일본인의 마음'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2. 왜 '천황은 존귀하다'고 하는가
3. 일본 제1호 사상가는 누구일까
4. 헤이안 불교는 나라 불교와 어떻게 다른가
5. 신불습합을 합리화한 본지수적설
6.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헤이안 귀족문화

제2부 중세편

7. 무사도, 그 긴 역사의 시작
8. '무상관'에 젖은 은자의 사상
9. 불교가 활짝 꽃핀 가마쿠라 시대
10. 일본 특유의 선종이 일어나다
11. 두 권의 책에서 일본인의 역사관을 읽는다
12. 무사도는 시대와 더불어 어떻게 변해 갔는가
13. '유현미'로 대표되는 무로마치 시대의 예술관

제3부 근세편

14. 봉건 질서의 출발점, 주자학
15. 에도 시대 무사도의 기본은 무엇인가
16. 전투자로서의 무사도
17. 일본 양명학은 정열적인 사상이다
18. 에도 시대의 사회정의는 오늘날과 어떻게 다른가
19. 고학은 왜 새로운 학파인가
20. '화혼양재' 정신을 낳은 프래그머티즘적 주자학
21. 조닌 사상가들
22. 국학이란 무엇인가
23. 에도 시대에는 신도를 어떻게 해석했는가
24. 에도시대의 상식이었던 존왕 사상
25. 두 유형의 양학자
26. 사무라이들에 의해 주창된 중상주의
27. 막말 사상의 다섯 가지 키워드
28. 뛰어난 독창성을 보여 준 사상가들

제4부 근대편

29. 근대 일본 사상의 방향성을 결정한 인물들
30. '정한론'에서 '탈아론'으로
31. 근대 일본이 기독교를 배척한 까닭은 무엇인가
32. 무사도는 영원불멸인가
33. 자유민권운동의 급속한 보급과 쇠퇴
34. 메이지 후기는 사회주의 시대였다
35. 다이쇼 데모크러시의 시대적 한계
36.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사회정의
37. 낭만주의는 일본의 전통적 미의식을 재구축했다
38. 완전히 새로운 발생에서 생겨난 민속학
39. 독창성이 뛰어난 니시다 철학
40. 지극히 일본적인 사상가가 설한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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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나가오 다케시 (長尾剛) (지은이) 

도쿄 출생으로 동양대학 대학원을 수료했다. 논픽션 작가이자 역사 작가이며 일본사, 일본문학, 유교, 불교, 심리학 등 인문과학 장르를 알기 쉽고 흥미롭게 집필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다양한 고전문학을 독창적으로 번역하여 저술하였으며, 아동서도 다수 집필하였다. 
최근에는 한국, 중국, 대만 등 아시아 전역에서 저서가 출간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손에 잡힐 듯 융 심리학을 알 수 있는 책>, 
<세상에서 가장 쉬운 동양사상 시리즈>, 
<사카구치 안고 인생 마지막의 말>, 
<쉽게 읽을 수 있는 고전 시리즈> 등이 있다.

최근작 : <초역 논어의 말>,<유쾌한 성경책>,<초역 괴테의 말> … 총 51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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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태 (옮긴이)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다. 동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학교 일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 『일본 재발견 : 일본인의 성지를 걷다』, 『일본정신분석』(2018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 선정작 및 2019 종교문화비평학회 학술상 수상작), 『일본 신사(神社)의 역사와 신앙』(2018 세종도서 학술부문 우수도서), 『포스트-옴 시대 일본 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 : 옴 사건·일본교·네오-내셔널리즘』(2016 대한민국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 『일본 정신의 풍경』, 『상대와 절대로서의 일본』,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노케히메까지』, 『일본의 신사』, 『애니메이션으로 보는 일본』 등이 있고, 주요 역서로 『일본문화사』, 『국화와 칼』, 『황금가지』, 『세계종교사상사 3』, 『일본 신도사』, 『신도, 일본 태생의 종교 시스템』, 『현대 일본 종교문화의 이해』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현대 일본의 순례 문화>,<일본 재발견> … 총 47종 (모두보기)

수심결 강의 ‘마음 닦는 길’ 다시 펴내 :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서울분원 법련사

수심결 강의 ‘마음 닦는 길’ 다시 펴내 :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서울분원 법련사

수심결 강의 ‘마음 닦는 길’ 다시 펴내

2020-08-11
조회수 352

글쓴이 : 불일출판사
작성일 : 2008-10-08 오후 8:42:23
강건기 교수 “수심결은 자기회복 메시지 던져줘”
보조스님 수심결 강의록 ‘마음 닦는 길’ 다시 펴내









1990년 제1회 불교출판문화상 대상을 받고 9쇄 까지 펴내는 등 큰 인기를 끌었던 강건기 (전북대 철학과) 명예교수의 강의본 <마음 닦는 길> 이 새로 나왔다. 보조스님의 <수심결>(修心訣)을 강건기 교수가 풀어 쓴 책이다.




참마음과 상통하는 공적영지, 개정판서 보강

일상 생활인의 든든한 ‘삶의 지표’ 전해줄 것




책이 나온 과정이 재미있다. 인연이란 묘하다는 느낌을 새삼 받는 출간 뒷 이야기는 이렇다. 1979년 뉴욕대학 유학시절 박성배 교수와 함께 수심결을 매주 읽고 토론하기로 했다.




박 교수는 강의로 바빠 제1장 1절만 참여하고 빠지는 바람에 강 교수 혼자 독해를 주도했다. 귀국 후 5~6년 지나 출판사 세 곳에다 원고를 보냈는데 모두 거부했다, 그 중에는 국내 굴지의 출판사도 있었다. 강 교수는 그 뒤 당시 조계총림 방장 일각스님과 함께 동남아불교 성지순례를 간 자리에서 강의본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3~4년이 흐른 어느 날 갑자기 당시 송광사 주지 현호스님과 법정스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방장스님께 이야기를 들었는데 책을 내자는 것이다.




<사진> 강건기 교수의 〈수심결〉 강의본 〈마음 닦는 길〉이 20여년만에 새롭게 나왔다. 아래는 ‘마음 닦는 길’ (원저 지눌, 강의 강건기/불일출판사) 표지 사진.




송광사는 보조스님 종재와 효봉스님 기일을 맞아 매년 책을 한권씩 냈는데 그 해는 예정작이 없었다. 강 교수는 출판사 세 군데서 퇴짜를 맞아 자신도 없는데다 대학노트에다 공부하며 쓴 것이라 다시 고치고 타이핑도 해야 한다며 불가능하다고 거절했다. 하지만 두 스님은 여름방학 동안 마무리 하라며 일방적으로 출간을 못박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여름방학을 거의 다 보내고 약속한 원고 제출일이 임박해 마음이 조급해져 있을 때였다.




불지사 김형균 실장이 우연히 놀러왔다가 이야기를 듣고는 원고를 타이핑 해줄테니 노트를 달라고 했다. 설마 했는데 며칠 뒤 깨끗하게 정리된 원고를 보내왔다. 우여곡절 끝에 나온 책은 불교신문이 제정한 불교출판문화대상 첫해 대상작으로 선정됐다. 9쇄까지 찍는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지난 3일 송광사 탑전에 머물던 강 교수가 서울 법련사에 왔다. 보조사상연구원 창립 회원들이 모여 연구원 활성화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개정판 이야기도 들을 겸 강교수를 만났다. 강 교수는 처음본과 개정본은 완전히 다른 책이라는 말부터 꺼냈다.




“세 가지가 다르다. 우선 이름 그대로 보조스님의 <수심결>은 마음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초판본에 마음에 대한 설명이 미흡했다. 지눌은 ‘육체는 다시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돌아가지만 한 물건은 길이 신령스러워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했는데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는 말은 참 마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우주와 둘이 아닌 하나(不二)인 바탕을 가리킨다. 즉 우리들 마음의 참 모습이 허공과 같아서 하늘 땅을 뒤덮는 하나의 바탕인 것이다.” 강 교수의 이 설명은 초판본에는 없다. 초판에서는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 마음이란 과연 어떤 마음이며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알 수 있을까”하고 묻는다. 30년 전에 묻고 30년 뒤에 스스로 답한 것이다.




“두번 째 다른 점은 돈점논쟁이다. 성철스님은 돈오점수를 비판하며 <수심결>을 대표적으로 꼽았다. 하지만 돈점 문제에 대해 지눌은 <육조단경>의 입장 즉 돈문(頓門)에 서 있다. 그러나 당시 고려 불교 현실을 볼 때 돈오돈수를 몇이나 받아들이고 따랐겠는가. 돈오하는 즉시 더 닦을 것 없는 사람을 위해 자상하게 가르치고 철저하게 지도할 필요가 있는가. 지눌은 돈문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현실에 반영한 것이다. 깨침과 닦음의 문제에 대해 지눌은 돈오돈수 역시 길게 보면 돈오점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만큼 보조의 사상은 핵심을 담고 있으면서 또 대단히 창조적이다”




초판본이 점수(漸修)입장을 옹호하고 단순히 설명하는데 치중했다면 개정본은 <수심결>의 바탕이 결코 <단경>과 다르지 않음을 적극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세번째는 공적영지지심(空寂靈知之心)에 관한 내용을 보강했다. ‘공적’은 텅비었다는 말이고 ‘영지’는 환히 밝다는, 풀어 쓴다면 ‘텅빈 충만’인데 서로 모순된다. 공존할 수 없는 상태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경험적 영역이다. 공적영지란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 바탕’ 즉 우리의 참 마음과 상통한다. 그것은 본래의 원천으로 밝은 바탕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수심결이 현재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강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현대 우리는 자기 상실 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본래 나를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수심결은 직접 자기회복 메시지를 던져준다” 법정스님도 “수심결은 수행자들만의 수행 지침서에 그치지 않고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 하나의 무게를 어쩌지 못해 앓고 있는 일상 생활인들에게 든든한 삶의 지표가 될 수있다. 온갖 모순과 갈등의 요인이 어디에 있는지 그 요인들을 어떻게 극복하여 본래 자기 모습을 되찾을 것인지를 낱낱이 지적하면서 가르쳐주고 있다”고 했다.




보조사상연구원 이사장인 현호스님은 책을 5000권 찍어 1000권만 시중 서점에 내보내고 나머지는 법공양으로 돌렸다. “불교는 사람마다 본래 구족하고 있는 마음 자리를 알고 깨닫고 잘 쓰는 수심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심결 법문을 접하는 모든 이들이 본래 청정한 마음 자리를 깨달아 안심입명하기를 삼보전에 간절히 발원합니다” <연락처 : 불일출판사 : 02-733-5322(서울 법련사 내)>




- 불교신문 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

알라딘: 마음 닦는 길 - 지눌 (지은이)

알라딘: 마음 닦는 길

마음 닦는 길 
지눌 (지은이)
불일출판사1990-04-01

- 품절 확인일 : 2017-03-11

새상품 eBook 중고상품 (10)

236쪽

저자 및 역자소개
지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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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의 승려. 속성은 정씨이며 스스로 목우자(牧牛子)라 칭하길 좋아했다. 시호는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고려의 수도 개경 서쪽 통주 지방(지금의 황해도 서흥군 동주)에서 국자감의 학정이었던 아버지 정광우(鄭光遇)와 어머니 조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불심이 매우 깊었던 분으로 어린 시절 병약했던 지눌이 병으로 고생하자 불보살께 완쾌되면 출가시키겠다는 서원을 세운다. 그리고 9세 무렵 병이 쾌차하자 출가시켰다고 전한다.
25세 되던 1182년 개경 보제사(普濟寺)에서 담선법회 형식으로 치러진 승과에 합격했다. 이곳에서 이미 정혜결사(定慧結社)의 의지를 다지게 된다. 그러나 곧 남하해 창평(昌平) 청원사(淸源寺)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읽다가 첫 번째 깨달음을 얻는다. 1185년 가을에는 지금의 경북 예천에 있는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로 옮기는데 이곳에서 두 번째 전환기를 맞는다. 이에 대해서는 자신의 저서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 서문에서 “‘여래의 지혜도 이와 같아 모든 중생은 이미 갖추고 있다. 다만 어리석어 깨닫지 못할 뿐이다’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적고 있다. 1188년 노장 득재선백(得才禪伯)의 초청으로 공산(公山) 거조사(居祖寺) 에 합류하고 1190년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최초의 저술이며 불교계에 영원히 기록될 ≪권수정혜결사문≫을 발표했다. 결사 공동체의 수행자가 늘어나자 1200년 길상사(지금의 송광사)로 자리를 옮기고 1205년 정혜사에서 수선사(修禪社)로 이름을 바꾸었다. 거조사를 떠나 길상사에 이르기 전 약 3년간 지리산의 상무주암(上無住庵)에 머무르며 선 수행을 깊이 했다. 이곳에서 대혜종고(大慧從?)선사에 의해 완성된 간화선을 만났고 이것이 지눌의 마지막 심기일전의 모습이다. 길상사는 1197년부터 1205년까지 중창불사를 했는데 1200년부터 지눌도 이 불사에 몸소 동참했다. 대중에 앞장서 몸을 아끼지 않는 울력에 동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왕이었던 희종(熙宗, 1204∼1211 재위)은 120일의 축일을 제정하기도 하고 친히 송광산에서 조계산으로, 길상사에서 수선사로 이름을 바꾸도록 명해 현판을 내리기도 했고, 금란가사를 만들어 지눌에게 선사했다. 불사가 끝난 1205년에는 불교에 입문한 초심자들이 익혀야 할 규범과 사상을 담은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을 저술했다. 1210년, 모친을 천도하는 법연을 베풀고 수십 일이 지나 병이 들었다. 다시 8일 뒤 제자들과 법담을 나누고 평소처럼 고요히 앉아 좌탈입망했다. 희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해서 불일보조국사라는 시호와 탑에는 감로(甘露)라는 이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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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윤홍식의 수심결 강의>,<수심결>,<절요> … 총 18종 (모두보기)

마이리뷰

     
강건기 교수의 수심결 강의

1990년에 처음 간행된 이 책은 보조국사 지눌의 주요저술 중 하나인 [수심결]을 강건기 교수가 강해한 것이다. 출간 당시에 제1회 불교출판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수심결]의 정식제목은 [목우자수심결]로('목우자'는 지눌의 호), 지눌 고유의 정혜쌍수, 돈오점수를 주장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이로부터 조계종의 법맥이 이어지고 교선일체를 특징으로 하는 한국불교의 흐름이 강화된 것은 물론이다. 지눌의 저술들은 대개가 논문 정도의 분량이어서 모으면 대략 1권 정도가 되는데 이렇게 모아 출간한 몇 가지 책들이 현재 거의 절판된 상태이다. [수심결]만 따로 나와있는 것도 마찬가지여서 재정리가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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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라트 2003-07-10 공감(2)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