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08

예언자- 머리말 > 번역물 | 바보새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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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 예언자- 머리말
작성자 바보새 14-01-27 16:36 조회1,9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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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영어를 말하는 나라에 한번 가본일도 없이, 영어로 자기를 발표하는 사람들과 한마디 말도 하여 본 일 없이 영어로 된 글을 번역하는 것은 영어에 대한 모욕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이 글을 우리말로 옮겨보고 싶었다.
문학을 모르고, 더구나 시인이 아닌 사람이 시를 번역하는 것은 시와 시인에 대한 업신여김일 수밖에 없다.
 
그런 줄을 알면서도 이 글을 꼭 우리 귀에 들려주고 싶었다.
나 아니라도 다른 사람이 할 사람이 있고, 또 이미 먼저 번역한 이가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내가 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그만두고 나 자신에 대한 잘못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내가 꼭 한번 내 말로 해보고 싶었다.
어떤 이들, 나를 아노라 하는 이들은, 내가 말을 또 하고 글을 또 쓰는 것을 보면 “저 거짓말쟁이가 또 말을 해?” 할 것이다. 사실 분명히 죄를 지은 것이 있는데 얘기를 하는 것은 미운 일이요 어리석은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천도 알고 만도 알면서도 이것만은 기어이 말하고 싶었다. 말하면 꼭 들을 귀가 있을 것 같고,들으면 틀림없이 혼의 피어남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이 나만 같이 생각되었다.
이것은 남의 글 옮김이 아니라 내 혼의 마주하는 얘기다.
나의 칼릴 지브란 알아들음이요, 거기 대한 고개 끄덕임이다.
따라서 ‘그이’ 알아들음이요. ‘그이’ 눈동자 보고 내 눈동자 반짝임이다.
정말『예언자』쓴 이는 ‘그이’이기 때문이다.
또 내 영원의 뱃길 뱃동무 보고 하는 나의 손시늉이요 몸짓이다.
따라서 ‘그이’에게 드리는 내 손모음(合掌)이요 내 반벙어리 노래다.
 
그것은, 정말 내 말을 들어주고, 나와 함께 고생하고, 아파하고, 싸우고, 한끝까지 같이 가서 하나 되는 이는 ‘그이’이기 때문이다.
문법적으로 바로 풀었나 잘못 풀었나가 문제 아니다. 어느 나라 말도 어떤 문장도 하늘나라 말에는 다 서투른 사람들이다.
그보다도, 하늘나라에 문법 있을까?
말을 아름답게 다듬었나 못 다듬었나가 문제 아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과 짐승과 꽃과 똥덩이와, 만물을 다 불러 넣어 가지고 하는 생명의 노래에 곱고 미운 것이 어디 따로 있을 리가 없다.
살았노라, 내가 죽었다 다시 살았노라, 죽음이 곧 삶이더라, 지옥 밑에 천당이 뚫렸더라 하는 말밖에 더 아름다운 시가 어디 있을까?
죄를 지었으면 죽은 체하고 가만 있거라, 그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반밖에 못되는 진리다. 죄인이야말로 말할 자격이 있더라. 그것은 죄인이 되어보니 알겠더라.
 
‘빛이 있을지어다.’는 캄캄한 혼돈(渾池)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왔고 말씀이 생명의 빛을 낸 것은 살(肉)속에 갇혀서야 했다.
꿀 먹은 사람은 벙어리가 되어도 좋아도, 독을 삼킨 사람은 큰 소리로 토하여야 할 것이다. 그 소리를 듣기 싫다는 사람이 참 시, 참 음악을 알까?
방안에 단정히 옷을 입고 앉은 사람은 돌부처와 다름이 없을 수 있어도 똥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 거기서 뛰어올라오는 사람의 팔다리는 그것이 정말 생명의 춤일 것이다.
물이 완전히 맑아진 다음에 마시려다가는 목이 먼저 타 죽겠더라. 맘이 다 깨끗해진 다음에 말하려다가는 혼이 질러 말라 버리겠더라.
죄는 무섭지만 삶은 죄보다 더 무섭더라.
벙어리는 남의 귀를 아프게 해서야만 남의 귀를 즐겁게 하는 데 이를 수 있고, 천성이 까마귀인 줄 안 다음에는 창파에 씻자던 생각은 어서 그만두고 해가 아주 지평선 아래 떨어지기 전 사뭇 서편 하늘로 날아드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겠더라.
또 해가 져도 괜찮아, 맨 처음의 어둠속에 학이 어디 따로 있고 까마귀 어디 따로 있다더냐?
어둠 속을 노래로 밝히자!
혼의 노래에는 웃음, 울음이 따로 있지 않더니라. 잘잘못도 없느니라.
그리하여 내 소리는 못되더라도 내가 하고 싶으면서 못하는 말 대신 해 주는 입을 빌리기로 하였다.
 
칼릴 지브란은 나를 똥간에 빠진 데서 이끌어냈다, 제 손에도 똥을 쥐면서…….
그럼 내가 부끄러울 것이 없다. 그의 꾸부림이 나의 일어섬이요, 그의 더러워짐이 나의 깨끗해짐이라면, 내가 이 손으로 그를 부쩍 쥠이 그에 대한 고맙담 아니겠나?
나는 그의 말을 내 말이나 되는 양, 그이 보고, 또 그의 사랑이요 내 사랑인 저 오르팔리스 사람들보고 하리라.
한 많은 이 1960년이 오자마자 아직도 채 녹지 않은 눈 위에 새 꿈을 그리는 하룻날, 내 60년 쌓아온 모래 탑은 와르르하고 무너졌다.
나와 같이 그 모래 탑을 쌓던 바로 그 사람들이 무너뜨렸다. 모래 탑을 가지고 진짜나 되는 양 체하고 뽐내는 내 꼴이 미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당연하였다.
내 눈에 모래를 뿌리고 내 얼굴에 거품을 끼어 얹고 발길로 차 던지고 저희도 울며 갔는지 손뼉 치며 갔는지 나 몰라.
나는 영원의 밀물 드나드는 바닷가에 그 영원의 음악 못들은 척 뒹굴고 울부짖고, 모래에 얼굴을 파묻고 죽었었다.
그동안 왔대야, 무한의 장변을 헤매어 다니는 거지들이 세상모르고 와서 저희보다 더한 나보고 도와 달라 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거기서도 도둑질을 해먹는 것들이 와서 그나마 깉은 내 누더기 속에서 뽑아간 것이 있고, 그 남은 모래탑 자국을 다시 한 번 더 짓밟고 거들떠보지도 못하는 낯에 또 한 번 침을 뱉고 간 것뿐이었다.
꽃이 피었다 지고, 장마가 졌다가 개고, 시든 열매가 다 익어 떨어지는 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다.
누가 꼭 일으켜 주어야만 될 것 같은데,조금 부축만 해주면 꼭 일어 설 것 같은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따금 저 멀리서 귓결에, 어서 일어나라는 소리가 들려는 왔건만,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원망은 아니 하기로 힘썼다.
 
십자가도 거짓말이더라.
아미타불도 빈말이더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도 공연한 말뿐이더라.
내가 장 발장이 되어보고자 기를 바득바득 쓰건만 나타나는 건 밀리에르가 아니고 자베르 뿐인 듯이만 보이더라.
무너진 내 탑은 인제 아까운 생각이 없건만, 저 언덕 높이 우뚝우뚝 서는 돌탑들이 저물어가는 햇빛을 가리워 무서운 생각만이 들었다.
누구 원망이 아니라 내 생각에 그러했단 말이다.
멍청히 서울과 천안을 왔다 갔다 하는 동안 한가하여 물에 산에 놀기나 하는 듯, 동해로 남해로 싸다니는 동안 내 혼은 이렇게까지 맥빠지고, 비뚤어지고, 떨어져 영원의 바닷가에 죽은 솔피처럼 밀려 들어왔다 밀려 나갔다 하는 줄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 동안에 내가 그 물결과 싸우며 기도를 했다면 어느 누가 곧이 들을까?
누구 들으라고 한 기도야 아니지만……
그런데 가을도 깊어 사나운 서풍이 또 불기 시작하여,
“나는 인생의 가시밭에 엎드렸노라, 피 흘리노라.
오, 바람아, 나를 일으키려마, 잎새처럼 물결처럼 구름처럼.”
하는 셸리의 노래만이 생각나는 날, 문득 한 소리가 날아왔다.
그것은 레바논의 백향목 가지 꼭대기에서 일어나 지중해를 건너 대서양을 건너 로키 산맥을 넘고 태평양을 건너 뛰어오는 소리였다.
 
나는 한번 듣고 일곱 해 동안을 잊었던 칼릴 지브란의『예언자』를 다시 읽게 되었다. 그것은 내 속에서 자고 있지 않았었다.
그 부르는 소리가 이러했다.
“너희가 너희 모래 탑을 쌓는 동안 바다는 더 많은 모래를 가 쪽으로 가져왔고
또 너희가 그것을 무너뜨릴 때는 바다도 또 너희와 한가지 웃더라. 진실로 바다는 언제나 단순한 것들과 함께 웃더라.”
“너희 영그러운 몸은 바다 같으니라.
영원히 더럽히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해를 향해 걸어가는 자들아, 땅 위에 그려진 어떤 그림자가 너희를 능히 붙잡을 거냐?”
“너희 고통은 너희 깨달음을 둘러싸는 껍질를 깨침이니라.”
“악이란 뭐냐? 스스로 주리고 목말라하는 선일뿐이니라.”
“모래와 거품”을 노래하는 지브란은 자기도 그 거품을 마시고 그 모래를 뒤집어쓰는 사람이 되어서 나를 일으켜주었다.
그의 “심장의 뛰놂이 내 가슴에 있었고”, 그의 “숨이 내 얼굴에 와 닿았고”, 그리고 그는 나를 알아주었다.
죄인의 친구를 처음으로 만났다.
 
나는 내 어릴 적에 똥간에 빠졌던 일을 돌이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날 학교에서 변소에 갔다가 그만 발을 잘못 디디어 가느다란 둥글나무 둘을 건너 놓은 데서 반 길이나 되는 밑엘 떨어져 옷이며 얼굴이며 왼통 똥칠을 했던 일이 있었다.
그렇게 가는 나무를 놓은 다음에는 어느 놈이 빠져도 빠지게만 되어 있었고 또 그렇지 않더라도 사람이 밥을 먹는 이상 똥은 누게만 생겼고, 변소가 있는 이상은 어느 때 어느 누가 똥을 묻히는 일이 있어도 있게 마련이건만, 아무도 그렇게 된 나를 보고 제 일로 아는 사람은 없었고 “그거 어째 그랬느냐?” 하는 얼굴들뿐이었다.
나는 선생님도 동무들도 흉을 볼까봐 두려운 생각뿐이요,
때 마침 여름이 되어 강냉이가 길 넘게 자란 때라, 그 강냉이는 아무 시비도 흉도 아니 볼 듯해, 그 푸른 터널 속을 혼자 걸어 집으로 어머니에게로 갔다.
어머니는 잠깐 놀래는 듯했으나, 욕도, 때리지도 않고 곧 옷을 벗기고 씻어주었다.
평소에는 새 옷을 줄 때면, 더럽히지 말라 신신당부하던 어머니요, 그래서 사실은 맘도 별로 놓지 못하고 놀군한 어머니건만…….
그렇지, 어머니밖에 없지.
 
글을 읽다 말고 나는 책머리에 있는 초상을 다시 보았다.
보나마나 이 책을 쓴 것은 우리 어머니다. 지브란이 뭐라 했나?
“또 너 망망한 바다여, 잠잘 줄 모르는 엄마야
너 만이 강물과 시내에겐 평화요 자유더라.”
나는 내 옷을 들여다보고 내 손을 맡아보았다.
지금은 아무 얼룩이도 아무 냄새도 없다.
또 다시 보았다. 이 옷이 왼통 똥이요, 이 주름진 살이 왼통 똥이다.
그 순간 억만 화살이 몸에 와 박힌다.
마른 기억아 물러가라, 나는 지브란과 함께 노래하련다.
“우리 옛 어머니의 아들들이여, 그대들 물결 위에 타는 자들이여,
너희는 내 꿈속에 얼마나 자주 찾아 왔었느냐? 인제 너희는 내가 깨는 때에 왔구나. 그 깸은 나의 한층 더 깊은 꿈이니라.
가야지, 어서 가야지, 순풍에 돛을 잔뜩 달고 어서 가야지.”
우리 엄마는 바다요, 나도 바다다.
 
칼릴 지브란을 내가 첨으로 만난 것은 일곱 해 전이다.
전쟁 후 잿더미가 된 서울에 와서 우리가 불사조(不死鳥)라면 이 속에서 살아나련만 하고 있던 때이다.
그 잿더미를 들추적거려 보느라고 구약의 인물들을 고쳐 읽고 있는 때에 미국에 가 있는 신영일 님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보내준 것이 이 『예언자』였다.
듣는바 첨인 이름이요, 보내는 이도 지브란에 대해 아무 소개도 없었다.
한 번 읽고 곧 이것은 한때 유행하고 지나갈 글이 아님을 알았다.
혼자 읽기는 아까운 마음에 타자를 해서 몇 사람이 몇 차례 모여 읽은 일이 있었고 우리말로 옮겼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으나, 내 영어에 감히 엄두가 아니 났다.
그 후『사람의 아들 예수』(Jesus the Son of Man)를 얻어 읽게 되자 지브란을 알고 싶은 생각은 더 간절했으나 이날껏 그리 되지 못하였다.
그렇게 높고, 그렇게 넓고, 그렇게 아름다운 혼인데, 차차 알고 보니 벌써 몇십 년 전에 세계적으로 이름났던 글이요 마흔 가까운 말로 번역이 되어 있었다는데, 어째 우리나라에선 이리도 모를까?
미국 갔다 온 사람들, 문학 한다는 사람들이 미웠다.
아니다, 내가 듣고 봄이 좁아서 그렇겠지.
남을 나무랄 것이 없지, 나 자신 일곱 해를 두고 때때로 읽는다 하면서도 지브란을 참 알지는 못하였다.
인제 내 모래 탑이 무너져 보고, 똥간에 빠져 강낭밭 고랑밖엔 몸을 둘 곳이 없어진 다음에야 그의 말이 새삼스레 생각이 났고, 다시 읽어 그의 입을 통해 오는 어머니 음성을 들었다.
인제 생각해보니, 지브란이라는 말의 뜻이 ‘영혼의 위로자’ 혹은 ‘고치는 자’ 아닌가?
나도 몇 십 년 전부터 그리 생각했고 그도 그러지만 ‘우연’은 없다.
그럼 그는 저 자신이 이때에 넘어진 나를 일으켜주려 뽑힘을 입고 고임을 받은 예언자신지도 모르지.
 
사상으로 하면 지브란은 반드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저는 소위 새 것을 내두르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맨 처음의 호수에서 흘러나는 한 줄기 흐름이다.
처음부터 있는 말씀을 새 옷을 입혀 내놓은 사람이다.
옛 곡조를 새 마음으로 새 소리갈로 노래한 사람이다.
그는 ‘한삶(大生命)의 깊은 마음의 한 가닥’ 이로라 한다.
그는 사상가가 아니요, 무슨 주의자가 아니요, 종교가도 아니었다.
시를 지었으나 그 시는 미장원에서 나온 미인 같은 시가 아니요, 그림을 그렇게 많이 그렸으나 그의 그림을 본 사람은 말하기를 “그저 그림만은 아니다”고 하였다.
그는 그저 산 사람이요 살잔 사람이었다. 너희가 나를 구태여 이름을 짓는다면 “나는 살기주의자(Life-ist)다” 했다.
그는 단순을 좋아하고 위선(偽善)을 미워했다.
그는 시꺼먼 좋은 흙(Black good earth)을 사랑하여 자기가 내는 책도 시꺼먼 책이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을 “우리의 날개 돋쳐 올라간 자아(自我)”라 하고, 우리 혼을 허공의 에델 속에 펼칠 것이라 하면서도, 겸손한 마음에 사람은 어디까지 땅의 아들이라 하여, 현대 문명이 정신의 자람은 없이 몸부터 난다 하여 비행기를 싫어하였다.
나무를 좋아하여 나무가 만일 한 그루만이었더라면 사람들이 엎드려 예배를 했을 것이라 하며,
뉴욕 시의 가로등이 없어지고 달빛, 별빛에 본다면 참 좋을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양과 서양이 한데 녹아든 점이다.
그는 그 난 곳이 저 유명한 레바논의 백향목이 서 있는 브샤리의 산촌인 것같이 그의 사상도 한편에는 기독교적인 것이 있으면서 또 한편은 매우 인도적이다.
그의 예언자 알무스타파는 결코 셈 인종식의 예언자가 아니요, 차라리 인도의 성자 같은 성격이다.
 
지브란 저 자신이 어릴 적에 ‘작은 화산’이로라고 자칭했듯이 맹렬한 점이 있었고, 한번 노하여「반항정신」이란 시를 쓰면 그것이 젊은 아라비아 혼을 온통 불붙여 그때의 터어키 제국으로 하여금 벌벌 떨게 하고 그 자라났던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파문령을 내리게까지 되었지만 후일에 그 혼이 훨씬 자라고 나면 그 모습은 차라리 ‘녹아서 흘러 밤을 향해 노래불러주며, 조용히 흘러가는 시내’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글 이름이 세계적으로 높아지자 본국의 유지들이 돌아 와서 지도자가 되어 달라 했을 때, 그는 자기가 그들의 정치적인 기대를 맞추어주지 못할 것을 알고 욕을 먹으면서도 거절했었다.
그는 평화주의자였다. 제국주의적인 물질문명이 한참 맹렬히 일어나던 20세기 첨에 있어서 그는 그 운명을 벌써 예언하였고, 괴물 같은 소위 진보라는 것이 아직도 동트기 전의 동틈이라고 했다.
그는 그것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름다움을 주장하였다. “아름다움을 창작하고 그 밖의 모든 것은 지옥으로 가라 하라” 하였다.
“내가 저 바닷가에 도시를 하나 세운다면, 나는 바닷가 한 섬에다가 자유의 신상(神像)을 세우지 않고 아름다움의 신상을 세울 것이다. 그 이유는 자유의 발밑에서는 사람들은 항상 싸울 것 밖에 없지만, 아름다움의 얼굴 앞에서는 모든 사람은 서로서로 형제같이 손을 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는 긴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가지면서도 생존경쟁의 사나운 물결에 휩쓸려 자포자기의 지경에 이르렀던 아라비아에 났다.
그는 그렇게 된 민족에게 굳어진 도덕 교훈과 말라빠진 종교 교리가 아무 산 기운을 소생시키는 힘이 될 수 없고 그저 몰아치고 비판하는 책망만으로는 죽은 시체에 채찍을 더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는 영원을 가졌다” 하는 그는 또 한편으로는 다 썩은 듯한 그 살 속에 불에도 타지 않고 물에도 빠지지 않고, 바람에도 마르지도 않는 혼이 살아있는 것을, 구름바다 속에서 반짝이는 별을 보듯이 보아냈다.
그는 꽉 믿었다.
따뜻한 햇볕만 쬐면 씨는 곧 굳은 껍질을 터치고 나올 힘을 그 속에 가진 것을 꽉 믿었다.
필요한 것은 짐승 잡아 피 흘려 하는 제사도 아니요,
화 있을진저 하는 책망도 아니요,
칼날 같은 비판도 아니요,
두더지같이 하는 지하운동도 아니요, 타락한 중에도 믿어주고, 무지한 중에도 알아주고, 넘어진 중에서도 같이 붙들어 일으켜주고, 같이 흙이 묻은 손으로나마 서로 떨어주는 혼의 아름다운 빛뿐이다.
구약의 예언자가 늦은 가을 몰아치는 서풍 같다면, 지브란의 예언자는 이른 봄에 얼음을 녹이는 봄바람이다.
그리고 거기 예수의 어느 면목이 있지 않나? 사람들이 지브란의 예수전을 지브란 복음이라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지브란의『예언자』는 그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그것을 쓴 것은 열다섯의 소년 때였다.
파리에 가서 화가로 이름을 날리던 때도 그는『알무스타파』는 늘 끼고 다녔다.
몇 번을 고쳐 써 스물다섯 살 때에 어머니께 보였을 때, 세상에서 자기를 가장 잘 이해하였다는 그 어머니는 “좋다, 그러나 아직 때가 멀었다” 했다.
그것은 아직 ‘푸른 과일’이어서 그 빛과 향기와 맛이 무르익지 못했었다.
그가 서른다섯 살에 미국에서 그것을 영문으로 발표한 때는, 발표하기까지 다섯 해 동안에 다섯 번을 고쳐 썼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누가 봐도 그의 글이 결코 미문은 아니다. 오히려 평범하고 수수한 말이다.
그는 글을 다듬은 것이 아니라 제 혼을 다듬은 것이다.
그 따뜻한 빛이 아라비아의, 또는 세계 허다한 지친 혼에 소생하는 힘을 주었다.
지브란이 곧 민족의 위인이 되고 그의 글이 아라비아 문학에 새로운 문제를 일으키게 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나는 지브란에게서 한 친구를 발견하였다.
그는 말했다. “벗을 사귀는 데 정신을 깊이 하는 밖에 아무 목적도 주지 말라.”
그는 내가 빠진 밑바닥, 지옥바닥, 멸망할 자만이 있다는 그 바닥에 내려와서 따뜻한 손으로 일으켜 거기서도 오히려 일어설 수 있게 함으로 내 정신을 한층 깊게 하여 주었다. 지옥 밑바닥에서 보는 하늘은 유난히 높았다.
 
내게 스승이 없지 않고 친구도 없지 않았으나 아무도 그 이름들을 가지고 나를 찾아주는 이는 없었다.
그리하여 석가도, 예수도, 공자도, 맹자도, 노자도, 장자도, 톨스토이도, 간디도, 남강도, 내촌도, 다 내가 이름도 부를 수없이 되었다.
인젠 나는 무슨 교도도, 누구의 제자도, 누구의 친구도 될 자격이 없고 다만 한개 배 깨어진 자다.
다만 칼릴 지브란만은 들의 한 송이 작은 풀꽃같이 이름이 없었으므로 아무도 독점하려 하지 않았고 자유로 그 의로운 나그네의 옆에 올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말하기를, “알아줌에는 구속함이 들어 있다”고 한다.
혹은 지브란은 그렇기 때문에 정말 영혼의 위로자요 의사이신 ‘그이’가 그 의인의 구속을 면하고 몰래 나 같은 것에게 오시려고 허술한 옷을 갈아입으신 것인지도 모르지.
어느 의미로는 내가 이 나라의 대표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의인보다는 죄인이 많지 않을까?
제 잘못으로거나 남의 잘못으로거나 세계의 큰길 위에 앉은 늙은 갈보요, 수난의 여왕이지.
또 어느 의미로는 우리나라는 세계의 대표 아닐까?
이리하여 나는 이 글을 우리말로 옮겼다. 군인에게도, 학생에게도, 농사꾼에게도, 엉터리 장사꾼에게도, 깡패에게도, 사창굴의 짓밟힌 꽃에게도, 철창 밑에 매어 논 승냥이에게도 다 한  권씩 주고 싶어서…… 그들도 다 내 마음일 것만 같아서…….
인제 보니 미운 사람, 몹쓸 사람은 하나도 없더라. 
 
옮기자니 부족한 내 영어에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 일찍이 이것을『여원』(女苑)지에 발표했던 윤정은 님께로 갔더니, 다 번역해 놓은 원고를 아낌없이 빌려주고 또 같이 읽으며 고쳐주어서 많이 도움이 되었고, 칼릴 지브란의 짤막한 전기를 부탁하여 실리게 되었으므로 그 고맙단 말을 여기 붙여둔다.
1960년 겨울 함석헌
 
 
 
 
새 판에 붙이는 말

내가 예언자를 처음으로 읽은 것은 이십여년 전 일인데 오늘까지도 이 책을 놓지 않고 다시 맛보고 다시 맛봅니다. 이것은 씹을수록 맛나는 영을 살찌워 주는 글입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옮길 때 나는 될 수 있으면 번역 냄새가 아니나도록 하고자 노력도 했습니다만, 그보다도 어떻게 하면 그 글 뒤에 숨은 지브란의 정신과 그 혼의 입김을 붙잡아 전할 수 있을까 해서 내 딴으로는 애를 쓰노라 했습니다. 어떤 때는 다 아는 단어인데도 붓대를 놓고 몇 시간 며칠도 있어야 했고, 심하면 원고를 인쇄에 넘기는 날까지 의문표를 질러 놓고 지브란과 계속 문답을 한 것도 있습니다.
 
그 덕택에 좋은 친구를 많이 얻었고, 요새는 지브란 붐까지 일어난다니 어쨌거나 고마운 일입니다.
‘씨알의 소리’에 특집으로 낼 때 부수도 넉넉히 하노라 했는데 다 나가고 없습니다. 이번에 내는 것은 거기 조금 수정을 했고 또 원판에 있는 그림이 좋기 때문에 분발해서 그것을 다 넣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지브란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좋겠기에 거기 도움이 될까 해서 생전에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미카엘 나이미의 ‘칼릴 지브란’에서와 그의 일생의 협조자였던 바바라 영의 「레바논에서 온 이사람」에서 한 절씩을 옮겨 넣어습니다. 나이미는 유명한 아랍 문학가요, 영은 당시 미국의 젊은 여류 시인으로서 지브란이 처음으로 예언자의 낭독회를 열었을 때 그 매력에 사로잡혀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 원고를 받아쓰며 정리하며 충실한 협력자 노릇을 했던 친구입니다.
 
지브란은 자기가 만일 이상향을 건설한다면 그 입구에는 정의 신상을 세우지 않고 아름다움의 신상을 세우겠다 했습니다. 그 이유는 정의의 신 앞에서는 항상 싸움이 끊이지 않지만 아름다움의 신 앞에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오늘의 아랍, 오늘의 레바논을 지브란이 와 본다면 그 마음이 어떠할까요? 아랍은 그만두고, 나는 이 살벌해지고 썩어지고 매정해진 이 우리나라에 지브란을 읽음으로 인해서 다 죽어 없어져 가는 이성과 인정과 혼에 얼마쯤이라도 소생하는 기운이 돌아왔으면 합니다.
 
1976. 2. 22.  함석헌

[낡은책]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사벨라 버드비숍, 이인화 역, 살림, 1994, 603쪽)

참세상 기사게시판 :: 낡은책 :: “멍한 상태로 세상에 걸어나온 한국” - [낡은책]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사벨라 버드비숍, 이인화 역, 살림, 1994, 603쪽)

“멍한 상태로 세상에 걸어나온 한국”
[낡은책]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사벨라 버드비숍, 이인화 역, 살림, 1994, 603쪽)
이정호(민주노총 미비실장) 2010.10.10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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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양반은 민중의 피를 빠는 흡혈귀

1895년 청일전쟁으로 폐허가 된 평양을 본적이 있는가. 1895년 1월 패배한 동학혁명의 주인공 김개남의 목을 끌고 다니며 시체의 입에 흙을 집어넣는 서울 시민들의 꼴을 본적이 있는가. 지독한 근시에 병약했던 순종의 세자 때 얼굴을 본적이 있는가.

이 책은 115년이나 된 낡은 책이다. 영국 여성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898년 이 방대한 책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을 두 권으로 냈다. 정확히 90년 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낸 선물도 이 책의 1898년도 판이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831년 영국 요크샤 주 보르브릿지 홀에서 태어나 이 책을 쓸 때 이미 60대 중반의 할머니였다. 왕립 지리학회에 들어간 최초의 여성이던 비숍은 1894년 2월말 한국에 도착해 이후 4년 동안 4번이나 한국을 드나들면서 고종과 명성왕후, 왕세자 등을 4번이나 알현하고 1897년 1월 서울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갔다.

뗏목으로 한강을 거슬러 올라 고담삼봉이 화려한 단양까지 갔고, 다시 여주에서 동북으로 말을 타고 금강산을 둘러봤다. 다시 일산을 넘어 평양을 넘어 북쪽으로 여행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선 북으로 연해주까지 조선인들을 만나러 다녔고, 다시 두만강 국경을 넘어 원산까지 내려왔다. 중국과 만주의 조선인도 봤다.

잘 생기고 똑똑한 한국인

이 책은 지리학 지식을 활용한 전문여행기다. 비숍 스스로의 표현대로 “미약한 독립 왕국(조선)이 멍한 상태로 세상을 향해 걸어 나오는” 구한말의 우리의 모습이 생생하다. “공격적인데다가 서로 담합한 서구 열강들은 이 유서 깊은 왕국의 전통에 조종을 울리며 시끄럽게 특권을 요구하고 있다”(서론)는 비숍의 표현은 너무도 적절하다.

비숍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비숍은 나름 객관적으로 한국을 보려고 했지만 결국엔 서구 제국주의의 눈으로 한국을 볼 수밖에 없었다. 비숍은 동학혁명군을 반란군이 아니라 ‘무장한 개혁자’로 봤다. 조선 백성은 일본, 중국보다 키도 크고 잘 생기기까지 한데다가 활기차고 영민하다고 봤다. 군사정권 시절 내내 자원빈국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게도 비숍은 금광이 많고 석탄의 품질은 최상급이라고 소개했다. 비숍의 눈엔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문자를 갖고 있고 문자해독률도 상당히 높았다. 도덕적 우월성과 치안 등 사회제도도 높이 평가했다. 반면 금강산에서 본 한국의 불교를 우상숭배로 여기는가 하면, 원산에서 본 천일염을 아주 지저분하고 순도가 떨어진다고 기록한 부분에선 우습기까지 하다. 한국의 감옥제도를 일본식으로 민주개혁했다고 기록한 부분도 코미디 수준이다.

이 책을 번역한 이인화는 80-90년대 운동권 뒷이야기를 그린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와 정조와 정약용을 다룬 <영원한 제국>, ‘박정희 평전’으로 시작해 미처 끝내지 못한 <인간의 길>을 쓴 소설가다. 지금은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다. 대학원 때 제 스승을 주제로 학위논문을 써 유명세를 치렀다. <인간의 길> 서문엔 “내가 죽어 저승사자가 ‘당신은 뭐하던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소설 인간의 길을 쓴 소설가’라고 답하겠노라”라고 박정희 숭배론 수준의 기염을 토했다.

소설가 이인화가 100년만에 첫 번역

이인화는 이 책을 1994년에 처음으로 번역했다. 이인화는 이 명저가 아직도 번역되지 않은 이유를 “영어를 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을 몰라서 번역하지 못했다”고 토로하면서 7장에 나오는 ‘벽절’이란 절이 신륵사의 다른 이름이란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일전에 내가 죽산 조봉암을 [낡은책]에 소개하면서 자유시참변을 조봉암의 표현대로 조선의 공산주의 세력간의 파벌싸움으로 기록하자 독자 한명이 덧글로 “내 다른 건 몰라도 자유시참변을 공산당 파벌간의 책임으로 말하는 건 너무 심하지 않소! 그건 소련공산당이 이르쿠츠파를 앞세워 독립군을 살상한 사건이오. 님 말씀대로라면 명성황후도 일본이 아니라 대원군이 죽인게 맞소!!!”라고 항변했다. 자유시참변은 70년대부터 지금까지 중고등학교 반공교과서인 도덕과 국민윤리 시간에 같은 이름으로 등장한다.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다. 덧글의 독자에겐 죄송하지만 비숍의 눈엔 명성황후를 죽인 게 일본이기도 하고 대원군이기도 하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3시 명성왕후를 시해하러 들어온 일본인들은 용산의 대원군 집에서 대원군과 함께 대궐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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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흥미로운 나라 한국

나는 1894년 겨울(2월)과 1897년 봄 사이 4번 한국을 답사했다. 처음 한국은 가장 재미없는 나라였다. 그러나 곧 청일전쟁 동안 불안 속에 알 수 없는 한국의 운명을 깨달으면서 강렬한 흥미를 가졌다. 내가 믿을 만한 한국 관련 자료는 미션스쿨을 운영하는 외국인 교사들의 것이었다.

한국의 영국 총영사 힐리어, 한국정부의 재정고문 브라운, 러시아 공사 베베르, 존스 목사와 게일 목사에게 관대한 도움을 받았다. 제물포 영국 영사 윌킨슨이 쓴 <한국 정부>가 있다. 이 책에 나온 동판화들은 셋만 빼고는 내가 직접 찍은 사진을 토대로 직접 그렸다. 이 책이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 1897년 11월 이사벨라 버드 비숍

멍한 상태로 세상으로 걸어나온 한국

1894년 겨울 내가 한국으로 떠나려 할 때 유럽 사람들은 한국이 그리스 연안 어디쯤 있다고 했다. 서구에 한국을 처음 소개한 문헌은 리쇼펜 남작의 중국에 관한 책의 575면에서다.(9세기경 아라비아 지리학자 코르다베의 책 <제국지>)

한국인들은 중국인, 일본인과 매우 다르다. 한국인들의 일상적 표현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활기차다. 체격도 좋은 편이다. 성인 남자의 평균 신장은 163.4cm다. 이는 A. B. 스트리플링이 1897년 1월 서울지역에서 1060명의 성인 남자를 대상으로 재어본 값이다. 한국인들은 도덕적으로 지극히 건전하다. 인구는 1천2백만~1천3백만명이다. 한국인들은 대단히 명민하고 똑똑한 민족이다. 여자들은 격리돼 열등한 지위다. 한국은 남북으로 965.6km 동서로 217.2km다. 면적은 영국보다 조금 작다.

한강은 273.5km 이상이 상업상의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된다. 모든 항구가 겨울에 얼지 않는다. 좋은 항구는 부산과 원산이다. 실용적인 식물은 거의 없다. 인삼은 예외다. 한국 세관에 따르면 1896년 총 1,360,279달러 어치의 사금을 수출했다. 밀수출 역시 비슷했을 것이다. 석탄의 품질은 최상급이다.

한국 왕의 권력은 여전히 절대적이다. 한국은 13개 지방구역과 360개의 단위 행정구역이 있다. 1897년 1월 현재 부산 원산 제물포의 항구엔 11,318명의 외국인 거주자와 266개의 외국 사업체가 있다. 이 가운데 일본인이 10,711명(230개 회사)이다. 영국인은 65명이다. 중국인은 2500여명이다. 도로의 불편함은 악명 높다. 한국 민족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자신들의 알파벳, ‘언문’을 갖고 있다. 한국인의 문자해독률은 상당히 높다. 한국에는 국민 종교가 존해하지 않는다. 이 미약한 독립 왕국은 멍한 상태로 세상을 향해 걸어 나오고 있다. 공격적인데다가 서로 담합한 서구 열강들은 이 유서 깊은 왕국의 전통에 조종을 울리며 시끄럽게 특권을 요구하고 있다.

왜색 도시 부산

나가사키항에서 부산항까지는 증기선으로 15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동강난 그림자 섬이라는 뜻의 절영도(사슴섬)는 부산항을 보위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영도에 석탄 공급지와 검역병원을 세웠다. 1883년 부산항 개방 때 거주 외국인 수는 1500명에서 1897년엔 5564명으로 늘었다.

낙동강은 80.5km를 증기선으로 항해할 수 있고 정크선으론 사문까지 160km를 더 간다. 가벼운 보트로는 연안에서 274km 상류의 상진까지 올라갈 수 있다. 부산의 거주지는 일본풍이다. 한국인은 중국인 일본인과 닮지 않았고 두 민족보다 훨씬 잘 생겼다. 나는 부산 구 시가지를 조사하려고 영국 여인 우나(Una)와 동행했다. 우나는 한국어를 거의 토착인처럼 구사했다.

제물포에서 마포 가는 길

제물포의 현직 영국 부영사 윌킨슨이 나를 마중나와 지극한 호의로 환대해 주었다. 무역은 중국인들이 일본인들을 훨씬 앞지르고 있었다. 제물포 주민들은 6천7백명이다. 나는 제물포에서 마포까지 6명의 가마꾼이 드는 교자에 앉아 7시간을 갔다.

1883년의 통상조약들 이후 외국인들은 도시의 곳곳에 자기들의 거주지를 마련하고 한국의 수도에서 한국적인 것들을 서서히 훼손시켜가고 있었다. 서울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변화는 건설중인 명동성당이다. 인구 25만명으로 추산되는 서울은 세계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수도 가운데 하나다. 이만큼 좋은 입지조건을 가진 수도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유럽에는 서울처럼 치안이 잘 유지돼 여자들이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지 않고도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는 도시가 전혀 없다. 그러나 서울의 불결함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남산 기슭엔 5천명에 육박하는 일본 조계가 있는데 대조적으로 매우 청결하다. 한국의 남편들이 계속 흰 옷을 고집하는 한 빨래는 한국 여인들의 신산한 운명과도 같다. 한국의 여인들은 빨래의 노예다.

서울과 한강의 나룻배 여행

1884년 개항되자 ‘미국 감리교회’와 ‘북 장로교회’가 서울에 왔다. 한국의 개신교 기독교인 수는 777명이다. 로마 카톨릭 교도는 28,802명이다. 젊은 선교사인 밀러씨가 나의 나룻배 여행을 도와 주었다. ‘왕’이란 이름의 중국인 하인을 통역 보조로 제공해 주었다. 1894년 4월 14일 밀러씨의 하인인 이체온 씨를 만났다. 우리의 배는 하루 16km 이상은 결코 가지 않았다.

남한강 상류로 가는 배 위에서 5주 동안을 보냈다. 사방엔 많은 나무들이 있었다. 한강은 강원도 금강산에서 발원한다. 나는 한강에서 하루 평균 75개의 정크가 물길을 오르내리는 걸 봤다. 한강과 영원 사이 강변에만 176개의 마을이 있었다.

여주에서 본 한국의 기생충들

나는 배 안에서 버로즈나 웰컴즈 등 타블로이드판 신문을 읽으며 마시는 오후 차시간은 결코 빠뜨리지 않았다. 여주에 도착한 건 4월19일이었다. 여주는 한국 군중이란 비록 적대적이지 않더라도 다루기 어렵고 몹시 불쾌하다는 걸 느끼게 한 첫번째 마을이었다.

주인집 부인은 매우 예쁘고 더할 나위 없이 고운 피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내 옷을 이리저리 조사하거나 날 이리저리 끌고 다니거나 모자를 벗겨 써 보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잡아 펴 보기도 하며 내 머리핀에 정신이 팔리기도 하고, 비명 같은 웃음소리를 지르며 내 장갑을 끌어내리기도 했다. 14개나 이어지는 방들을 보여 주었다. 번쩍이는 야한 금박 속의 큰 거울이나 프랑스식 시계가 있었다. 돈으로 처바른 저속함을 보여줬다.

집주인은 18살의 젊은이다. 프랑스식 시게, 독일식 거울, 미국산 담배, 벨벳 덮개를 깐 의자 등 값비싸고 번지르한 외제품에 대한 열광이 돈 있는 젊은 멋쟁이들에게 번져가고 있다. 이런 것은 한국인의 소박한 근면성을 저속하게 타락시키고 있다. 난 내 배의 검소한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여주에 단양까지

한국 사람들은 과음하는 관습이 유난스럽다. 주정뱅이를 보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 한국의 발효된 술은 건강에 좋은 것은 아니었다. 강한 냄새와 토할 것 같은 맛을 내는 흰색 술까지 다양하다. 뀰껍질을 말리는 것은 한국 주부들의 큰 일 중의 하나다. 모든 초가집 지붕에는 말린 뀰껍질들이 고드름처럼 매달려 있다. (곶감 말리는 걸 보고, 잘못 이해한 듯하다.)

서울에서 떠난지 13일만에 단양에 도착했다. 원주라는 중요한 도시까지 약 60리 정도 되는 운항로가 있다. 남한강은 단양에서 북쪽으로 길고 거센 급류를 형성한다. 우리를 보러 먼 길을 걸어와 한번도 외국인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며 그 댓가로 달걀을 내 놓았다. 한강의 미는 가장 아름다운 강 마을인 도담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한국의 악담 중에는 기득권 계급인 양반이나 귀족들에 대한 것이 아주 많다.

가평에서 다시 춘천으로

마재로 가는 분기점에 왔을 때 뱃사람들은 되돌아 가고 싶어했다. 한참 동안의 언쟁 끝에 결국 계약을 완료하기로 합의하고 서늘하고 화창한 오후에 북한강으로 들어섰다.

이틀을 혹독하게 작업한 후 우리는 아름답게 자리잡은 ‘가평’ 읍에 도착했다. 춘천은 요새였다. 약 3백명의 주둔군이 있었다. 인구는 3천명에 달했다. 춘천에 와서는 원산으로 가는 역참에서 멈춰 육상 여행을 하려고 말을 높은 값을 치르고 세내었으나 말과 마부가 모두 괜찮아 보였다. 정식으로 서명하고 우리는 배여행을 계속했다. 인구 4백명의 조그만 가평에 다시 도착했다. 낭촌에서부터 한강 아래로 내려가 뱃기미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거룻배에서 마지막 날인 일요일을 보내려고 멈추었다. 거룻배에서 5주 반 동안 보낸 뒤였다.

영국에 비해 한국의 결혼은 지극히 건전하고 도덕적이다. 신랑이 신부 아버지에게 돈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부도 아버지에게 지참금을 받지 않는다.

말을 타고 금강산으로

뱃기미에서 우리는 배를 버리고 북한강 상류를 따라 금강산으로 향했다. 한국의 조랑말은 체격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강인해 73~91km까지의 짐을 운반하는데 형편없는 사료를 먹고도 날마다 하루에 48km씩을 간다. 주인이 대충 먼지를 치우고 나면 왕씨가 기름을 먹인 두 장의 두꺼운 종이와 함께 아마인유를 입힌 커다란 양털 요를 바닥에 깔아주는데 이것은 여행 동안 나의 야전 침대로, 의자로, 보자기로, 아주 유용했다.

한국 여관의 숙박 요금은 터무니없이 싸다. 등잔과 따뜻한 구들이 있는 방에는 요금이 없다. 그러나 나는 하루 밤에 1냥씩 숙박요금을 치렀다. 한국 여관에 느낀 나쁜 기억은 버릇없고 어떻게 감당해 볼 도리가 없는 사람들의 호기심, 특히 여자들의 호기심이었다. 나의 마부들은 다시 이성을 잃었다. 싸움이 벌어졌다. 마부들은 그들의 굵은 몽둥이로 횃불 든 농부들을 때렸다. 나는 나의 마부들에게 욕을 퍼부어대며 말채찍으로 마을 사람들은 두들겨팼다.

단발령을 넘어 장안사로, 유점사로

금강산의 서쪽 경계선인 해발 402미터의 단발령을 넘었다. 그 뒤로 해발 1638미터가 넘는 금강산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가 솟아 있었다. 장안사의 첫 인상은 숲속에 자리한 규모의 엄청남이었다. 표훈사의 승려들은 친절했다. 엄격한 채식주의였다. 나는 주인들의 편견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차나 밥, 꿀물, 잣으로 식사를 때웠다.

불교는 중국 불교가 도교의 반신(半神)적 영웅들 밑에서 질식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마숭배로 얼룩져 있었다. 문도와 같은 일본의 거대한 종교개혁을 특징지우는 현세의 정의실현에 대한 높은 포부와 열망 같은 것은 알려진 바가 없었다. 한국의 승려들은 무척 무식하고 미신적이었다.

정중하고 후한 대접을 받았다. 장안사에서 유점사로 가는 17.7km 길에는 세 개의 큰 사찰인 표훈사와 마하연, 유점사가 나온다. 나의 하인은 두 개의 긴 막대기 사이에 가벼운 자리를 깔고 동아줄을 매듭지어 발 둘 데를 만들고 등나무 줄기로 등받이를 해서 남여를 만들었다. 삭발하지 않은 한 아이에게 우리 통역인 이체온씨가 닭고기 한 조각을 주었다. 그러나 먹지 않았다.

금강산을 넘어 원산 앞바다까지

장안사를 떠나 원산으로 가기 위해 마패령을 지났다. 나는 (강원도 통천군 벽양면) 중대리와 다른 여러 곳에서 한국인들의 대단한 식탐을 목격했다. 한국인은 매일 1.8kg의 밥을 먹는 게 그다지 위에 부담이 되지 않는다. 통천이라는 마을은 동해 바다에서 3.2km 정도 떨어졌다. 한국 어부들은 기업적 조직화가 긴급하게 요구된다. 오이센 씨는 1891년 원산의 과세 보고서에서 ‘해안을 따라 쳐 놓은 조잡하고 대충 만든 그물에서 고기들이 빠져나가 버리는 한국의 어업을 개탄했다. 계획적으로 만든 염전도 있는데 소금 만드는 공정은 완전히 원시적이다. 이렇게 만든 소금은 울퉁불퉁하고 지저분해서 순도가 매우 떨어진다.

여관 주인은 특히 외국인을 재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우리 친절한 마부를 성나세 했다. 그는 쥐어짜는 듯한 큰 목소리로 ‘우리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모두 지불했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오백나한상이 있는 대찰 석왕사는 이성계가 수련한 곳이다.

동학군 - 무장한 개혁자들

원산을 따라 동해안 오지를 오래 여행하는 동안 나는 정치적 사건들을 전혀 몰랐다. 단지 반란을 일으킨 동학군과 정부군 사이의 충돌의 소문을 약간 들었을 뿐이다. 동학군의 봉기는 과격한 충돌이나 쓸데없는 피흘림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6월17일 증기선으로 원산을 떠나 6월19일 부산에 도착했을 때 나는 항구에 있는 일본 포함을 발견하고도 놀라지 않았다. 220명의 일본군이 그 날 아침 히고마루호에서 내려 언덕에 있는 절에 숙영중이란 사실과 동학군이 부산과 서울 사이의 전신을 끊어버렸다는 걸 알았다.

부산에서 장사하는 거류민들을 많이 가진 일본은 보호를 위해 상당한 조치를 취하는 게 당연하지 않는가. 일본이 취한 조치는 유럽인들 사이에 지극히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6월21일 아침 일찍 배로 제물포에 도착하자 매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일본 해군의 큰 함대 하나, 작은 군함 여섯 척, 미국 기함 한 척, 프랑스 배 두 척, 러시아 배 한 척, 중국배 두 척이 항구 밖에 있었다.

제물포 항구가 외국 군대의 캠프로

따분하기 그지없던 제물포 항구가 완전히 바뀌었다. 숱한 행진 대열 속에서 일본군의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제물포의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서울을 향해 탄환과 포탄을 수송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캠프는 질서정연했고 조용했다. 시내엔 일본군 초병들이 통행인을 검문했다.

얼떨떨한 한국 군중들은 흐느적거리며 그들의 제물포 항구가 외국 군대의 캠프로 변하는 걸 멍하니 바라보면서 길거리에서 어슬렁거리거나 언덕에 앉아 있었다. 일본은 그들이 성취하려는 목표를 위해 한국에 왔다. 그 목표는 동학군의 승리로 인해 위험에 봉착했다고 선전하는 한국 내의 일본인의 효과적 보호라는 미명 아래 잘 은폐돼 있었다. 이날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은 오시마 오시마사 소장의 혼성여단으로 보병 5800명, 하사관 584명, 위관 187명, 좌관 16명, 기병 300명이었다.

동학군은 너무나 확고하고 이성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어 나는 그들의 지도자들을 ‘반란자’라기 보다 차라리 ‘무장한 개혁자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동학군이 한반도 군사개입의 빌미를 제공하자마자 일본은 가다렸다는 듯이 여심을 드러냈다.

일본군은 수도 서울의 강나루 마포를 점유하고 막강한 군사력으로 서울의 남산에 눌러앉았다. 내가 제물포에 막 도착한 바로 그 날 오후 영국 부영사가 나를 방문해 그 날 밤 안으로 한국을 꼭 떠나주기를 당부했다. 그 날 밤 나는 두 명의 영국인 환자와 함께 항구에 매어 있던 일본의 기선 히고마루호를 타고 제물포를 떠났다.

청일전쟁을 피해 만주로 가다

일본 체푸에 도착한 나는 영국 공사관까지 경사가 급한 언덕을 걸어서 올라가야만 했다. 나는 히고마루호를 타고 다시 만주의 잉쿠로 갔다. 라오허(요하) 하구 잉쿠에 도착했다. 만주 여인들은 보통 한족보다 더 키가 크고 더 건장하다. 만주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중국 본토의 여성들보다 훨씬 높다. 열병에 걸려 홍수가 난 랴오허를 떠돌다가 나는 뉴창을 7월3일에 떠났다. 8일 뒤 펭티엔에 도착했다.

펭티엔은 만주의 오랜 수도로 1644년 중국의 황위에 올랐던 황가의 선조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특별한 혜택을 누린다. 기독교에 주어지는 우호적인 분위기는 펭티엔의 특징이다. 한국 국왕은 많은 망설임 끝에 중국의 도움을 요청했다. 중국의 장군 위여귀는 3천명을 이끌고 아산만에 상륙했고 일본의 장군 오시마 요시마사는 제물포와 서울을 강점했다.

1894년 8월 1일 청일전쟁이 선포된 뒤 정세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일본이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군은 만주를 통해 육로로 행군해야 했다. 중국군은 하루에 1천명 꼴로 펭티엔을 지나갔다. 이들은 남쪽으로 행진하는 걸 자랑스러워하며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그러나 신식 무기로 무장한 병사는 거의 없었다. 얼마 뒤 평양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그들 중국군은 모두 우산이나 부채를 지니고 있었다. 막강한 화력의 무라다 연발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이들 수 천의 병사를 맞닥뜨리게 한 건 자살행위였다.

번창하는 동방의 보물 블라디보스토크의 한국인

나는 베이징에서 엔타이로 돌아가 사태를 지켜봤다. 나는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증기선을 끈기있게 기다렸다. 나가사키는 따뜻한 가을 날씨였다. 그러나 내가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니 항구로 둘러싸인 언덕은 겨울의 첫눈으로 덮여 있었다. 웃고 떠드는 한국 소년 4~5명이 나를 잡아당겼다. 부두에는 수백 명의 한국인이 있었다. 나는 마차에 타자 ‘골든 흘 호텔’이라고 말했다.

이 도시의 발전은 괄목했다. 예전엔 삼림지역이었다. 1863년 많은 나무를 베었다. 1872년 60명의 해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1878년 블라디보스톡 인구는 1400명이었다. 1897년엔 2만5천명으로 늘었다. 짐마차꾼이나 짐꾼을 하면서 살아가는 3천명의 한국인과 2천명의 중국인이 있다.

시베리아의 한국인 정착민들

러시아령 만주엔 약 2만명의 한국인이 산다. 시베리아 통신청의 총책임자 아이드만 청장은 나와 동행하려고 휴가까지 냈다. 하이드만은 발칸 출신의 독일인으로 러시아 고위 관료가 됐다.

해가 뜨자마자 증기선을 타고 블리디보스톡을 떠났다. 7시간 뒤 포시만으로 97km를 달렸다. 포시만은 크고 멋진 막사와 창고가 있는 하나의 큰 군사 역사였다. 한국인 정착민도 있었다. 우리는 우편마차에 자리를 잡았다. 마차는 전속력으로 달려서 2시간만에 노보키예프에 도착했다. 우리는 ‘쿤츠 앤 알레르스’ 상사의 지점장에게 친절한 대접을 받았다.

노보키예프는 거대한 군사도시다. 한국인들은 수송을 맡았다. ‘쿤츠 앤 발에르스’ 상사의 직원 중에서 유럽 복장을 한 젊은 한국인 하나가 그의 신사다움과 바지런함 때문에 알아보기 쉬웠다. 한국인들은 능동적으로 중국령 만주로 가서 여윈 동물을 싼 값에 사서 살이 찌도록 키워 비싼 값에 되판다.

하바로프스크 근처의 한국인들은 농산물 유통업에서 중국인들과 경쟁해 완승을 거두었다. 현재 하바로프스크의 야채 공급은 거의 한국인들의 손에 있다. 한국인 촌락은 주위에 산재했다. 마을 농장은 깨끗하고 잘 청소돼 있었다. 러시아와 한국의 아이들은 서로서로 섞여 앉아서 수업을 들었다. 얀칠레는 매우 부유한 마을이다. 깨끗한 경찰서에서 한국인 중사는 내 요구사항을 받아적고는 통역자의 역할을 하는 똑똑한 한국인 경찰관을 찾으러 밖에 나갔다. 이 마을에 거주하는 4백여 한국인 경찰관들은 그리스 정교를 믿고 있었다.

두만강 국경 경흥까지

한국의 국경으로 여행과 한국을 향한 경흥까지 여행. 경흥은 1888년의 무역 협정으로 키차의 모델에 따라 하나의 시장을 개척하려는 희망에서 러시아 국민의 거주지로 개방된 도시다. 한국인 마부와 한국인 길잡이가 있었다. 이 모든 멋진 지역은 한국인들이 개척한 것이다.

농장 경영자로, 노장의 소유자로 한국인들은 자신의 토지를 최고의 것을 만든다. 나는 120여 세대가 사는 사레치예 마을에서 잠시 머물렀는데 그 저택들은 아주 멋졌다. 그리고 그 곳의 한국인들은 다양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러시아와 한국의 국경은 17.7km에 불과하다. 우리는 사요니의 부유한 한국인 마을을 지나갔다.

시베리아 정착민의 성공

1863년 이전 13가구가 함경도에서 국경을 건너 포시만 북쪽에서 조금 떨어진 티젠호 주변에 정착했다. 1866년에 와선 1백여 가구가 정착했다. 한국인 이주민 전체는 1만6천~1만8천명이었다. 1884년 이전 시베리아에 정착한 한국인들은 이제 러시아 국민으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지금까지 10년 동안 그들이 구매한 땅에서 정착해 왔음을 증명하는 사람도 역시 똑같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크라스노예와 노보키예프 사이의 촌민들은 러시아 이주 한국인들의 표본이다. 이 곳의 한국 남자들에게는 고국의 남자들이 갖고 있는 그 특유의 풀죽은 모습은 없다. 이 곳에서 한국인들은 번창하는 부농이 됐고 근면하고 훌륭한 행실을 하고 우수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로 변했다. 나는 서 아시아 정복지에서 거둔 러시아 정부의 성공을 주목했는데 유랑적이고 공격적인 투르크 부족을 질시정연하고 평화롭고 정착된 농업민으로 정착시켰다.

며칠 뒤 나는 중국령 만주지역에 있는 훈춘에 갔다. 훈춘은 군사요충지다. 산악지역 한 가운데인 훈춘은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인들이 개간해 기름지고 관개가 잘 된 계곡으로 넘쳐났다. 1500명의 코사크인으로 구성된 러시아 군대는 훈춘에서 흑룡강까지 30개 초소에 나뉘어 배치됐다. 한국인 마을을 약탈하려고 넘어오는 중국 마적들을 체포해 중국 관리에게 넘겨주지만 즉시 방면돼 다시 약탈을 반복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

내가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온 후 ‘쿤츠 앤 발에르스’ 상사가 젊은 덴마크인 통역자를 소개해 주었다. 나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동부 구간을 조사하며 한 주일을 보냈다. 철도는 우수리 강 위에 놓여진 우수리 대교 옆의 작은 마을까지 이르렀다. 평균 속도는 고작 시속 19.3km 정도였다. 현재의 짜르는 이 철도에 열광적 관심을 보인다. 현 짜르가 황태자 시절 1891년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할 때 이 사업을 시작했다. 우수리 구간 철도는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112km 구간의 철도다. 현재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일당 80센트를 받는 중국인 인부들이 건설중이다.

나는 니콜스코예에서 즐거운 이틀을 보냈다. 나는 이 정착촌 주변 32km를 마차로 드라이브하면서 어디에서나 번창한 농장과 초원 위에서 농사 짓는 마을, 러시아인, 한국인을 보았다. 네콜스코예는 거대한 군사도시이기도 했다. 9천명에 달하는 보병과 포병이 상주하고 있다.

청일전쟁 직후 고종 면담

겨울의 마지막에 나는 일본 증기여객선으로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원산에 도착했다. 원산은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청일전쟁 중 일본 노무자들에게 과다한 임금이 나간 탓에 원산의 한국 사람들은 부유해져 있었다. 1만2천명 정도의 일본군이 평양으로 향해 가는 도중에 이곳 원산을 거쳐 갔다.

나는 원산에서 배로 부산을 거쳐 1895년 1월 5일 제물포에 닿았다. 일본 점령기의 중국 거리는 궤멸적 모습이었다. 일본 거리는 어디나 최상의 활기가 넘쳤다. 말에 올라타 서울로 가는 동안 내내 눈이 내렸다. 무척 치안이 안정된 나라여서 보호를 받을 필요도 없이 나는 마부도 없이 오리골까지 혼자 갔다. 서울서 나는 영국 총영사인 힐리어의 집에서 5주간 머물렀다. 나는 조랑말 한 필과 병사 한 명을 얻어 시내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중국으로부터의 독립 = 일본에 종속

일본은 해가 치솟는 기세로 일어섰다. 일본은 서울에 대단위 군대를 주둔시키고 내각의 지도급 인사 몇 명도 지명했으며 일본 장교가 한국군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명목상의 왕권만 남은 왕은 이런 상황을 참고 수긍했으나 명민하고 자존심이 강한 왕비는 일본에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이노우에 백작이 일본 공사로 활약하면서 그의 강경하고 능란한 술책으로 인해 겉으로는 모든 것이 평탄했다.

1895년 1월 8일 일본은 왕에게 공식적으로 중국의 종주권을 폐기하는 동시에 불쾌하기 짝이 없는 조공을 일소할 것을 요구했다. 한국 국왕이 엄숙하게 종묘 사직 앞에 나아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개혁을 단행할 것을 맹세하라고 강요했다. 왕은 계속 미루고 있었다.

늙고 진중한 사람들은 이틀 전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탄식했다. 많은 군중들이 언덕 위에서 덕수궁의 마당에서 벌어지는 이충격적인 광경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군중들은 한 점 미소도, 한 마디 말도 없었다. 하늘은 어둡고 흐렸고 차가운 겨울 바람이 불었다. 마치 한국의 미래에 불길한 징조를 알리는 듯 불었다.

부마 박영효는 국왕보다 더 큰 권력

단정하고 깔끔한 푸른 울스터 외투를 차려 입은 일본 경찰들의 행렬 속에 있었다. 일본 경찰은 1884년 정변의 주역이었던 내부 대신 박영효의 특별 경호대였다. 일본 경찰대를 거느린 박영효의 위풍당당함은 국왕의 위엄을 능가했다. 박영효는 죽어 마땅한 반역자였다. 그러나 일본의 협박을 받은 왕은 그를 용서해 격하된 그의 조상들의 지위를 복권시키고 해외 추방된 그를 다시 불러 고위 공직에 임명해야만 했다.

도로에는 한국의 기마병이 어설프게 서 있었다. 양쪽에 유리창을 낸 평범한 목재 가마를 타고 단 네 명의 수행원의 보좌를 받으며 낙담한 통치자가 나타났다. 외제 안장과 외국인 경호원들로 돋보이는 내부 대신 박영효가 탄 검은 당나귀가 있었다. 이 모든 행보가 일본이 마련해 놓은 일이었다.

한국의 왕비 명성왕후

왕비가 나를 사적으로 초대했다. 미국인 의료 선교사이자 왕비의 주치의인 언더우드 여사를 따라서 갔다. 일본 경관 한 명이 큰 문 앞에 서 있었다. 여섯 명의 한국인 보초병들이 빈둥거리고 있었다. 중년의 상궁이 우리를 맞았다. 저녁 식사는 놀랍게도 서양식으로 차려졌다. 왕세자와 왕비는 세 개의 진홍빛 벨벳 의자 앞에 서 있었다.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했고 퍽 우아한 자태에 늘씬했다. 윤 나는 칠흑 같은 흑발에 피부는 너무도 투명해 꼭 진주빛 가루를 뿌린 듯했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었다.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면 그녀의 얼굴을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왕은 작은 키에 병약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왕은 천성이 온화했다. 대화 동안 왕비는 왕을 몹시 채근했다. 왕세자는 통통했으나 병약해 보였다. 불행히 심각한 근시였다. 알현하는 동안 왕비와 왕세자는 줄곧 손을 꼭 잡고 앉아 있었다. 왕은 마흔 셋이고 왕비는 마흔 넷이었다. 나는 궁궐에서 딱 한 번 대원군을 본 적이 있는데 날카로운 눈빛과 위엄이 넘치고 원기왕성한 제스츄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영국의 관리 등용제도와 ‘귀족 이 아닌’ 사람이 정부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는지 둗도 답했고 영국 귀족들은 어느 정도의 권리를 가지는지, 귀족은 하층민을 어떻게 대하는지 물었다. 탁지부 대신(재무장관)이 왕비의 개인 경비에 제재를 가할 수 있는지도 물었다. 수상의 위치를 점하는 내부 장관의 임무에 관해서도 많은 질문을 던졌다. 장관이 명령에 따르지 않을 때 왕비가 장관을 해임할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알현실에 한 사나이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을 문 틈으로 확실히 보았다. 뒤이어 통역관이 “오늘은 전하의 말씀을 통역해 내기가 퍽 어렵나이다”라고 말한 점은 재치있었다. 그 ‘그림자’는 바로 왕이 특별히 불신하는 6부 대신 중 한 사람의 측근이었다. 9개월 뒤 내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왕비는 이미 야만적으로 시해된 뒤였고 왕은 사실상 궁궐에 갇힌 죄수였다. 궁궐에서 가진 4번의 알현은 두번째 한국 방문의 대단한 수확이었다.

단발령 등 을미개혁의 파란과 이노우에

1895년 1월 서울은 이상 기류에 휩싸였다. ‘낡은 질서’는 변해가지만 새 것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 왕은 1894년 6월 일본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한 이래로 ‘봉급받는 자동인형’과 다름없이 되었다. 한때 막강한 세도를 자랑하던 민씨 일파는 더 이상 공무에 간섭할 수 없도록 축출됐다.

1894년 9월 17일 평양에서 중국군을 격파한 일본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았다. 일본 근대화의 기수인 이노우에 백작은 1894년 10월 20일 조선공사로 부임해와 실제 한국 정부를 통치했다. 일본인들은 과거에 영국이 이집트에서 그랬듯이 그들의 목적은 한국 정부를 개혁시켜 주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이노우에 백작은 한국 상류층의 젊은이를 뽑아 2년간 일본에 보냈다. 한국의 일반 백성들은 임금이 당하는 수모에 치를 떨며 분노했다.

한국 관료제도라는 아우게아스왕의 외양간을 청소하는 일을 일본이 수행하고 있었다. 헤라클레스가 수십 년간 한 번도 청소하지 않은 아우게아스왕의 외양간을 강물을 끌어들여 말끔히 치웠다는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

무력 도발은 일본이 행한 전략상의 실수 중 가장 큰 것이었다. 즉 1894년 6월 왕궁을 침입해 임금을 포획한 행위는 물론 이전의 모반자들에게 높은 관직을 준 것도 중대한 실수였다. 동학은 1895년 1월 초 전멸해 한국의 관리들이 교주 김개남과 성재식의 머리를 서울로 압송하고 있었다. 고장난 회중시계가 길에 떨어져 있었다. 어린 아이들이 시계를 분해해 개에게 물어뜯긴 시체의 입 속에 장난으로 처넣었다. 이런 끔찍한 광경이 1주일 동안이나 계속됐다. 1895년 2월 5일 나는 대단히 아쉬워하며 서울을 떠났다.

왕비의 최후 - 을미사변의 전말

1895년 5월 청일전쟁은 공식 종결됐다. 중국과 일본은 시모노세키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막대한 배상금과 타이완섬을 얻었다. 내가 여러 달 중국의 남부와 중부를 여행하고 난 뒤 일본에서 여름을 보내다가 나가사키에 간 것은 1895년 10월이었다. 왕비가 피살됐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문을 들었다. 나는 즉시 제물포로 갔다가 바로 서울로 가 힐리어 공사와 함께 숨막히는 두 달을 보냈다.

이노우에 백작은 한 달 전에 이임했고 서울엔 후임으로 외교 경험이라고는 없지만 군인으로 유능한 미우라 자작이 와 있었다. 한국의 왕비가 저명한 일본 정치인 이노우에의 간곡한 약속에 기댔던 것도 그다지 무리는 아닐 성 싶다. 이노우에 백작은 이임 직전 왕비를 알현한 자리에서 1895년 6월 오토리가 왕궁에 침입한 이후 수립된 대원군 정권을 얘기했다. 왕비는 이노우에 백작에게 “내가 귀국에 건의한 여러 제안이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게 유감이에요. 그런데 귀국에 별로 호의적이지도 않았던 대원군에게는 여러 도움을 주더군요”라고 말했다. 이노우에 백작은 “왕비의 의혹을 누그러뜨린 뒤 한국의 독립을 확고한 기반위에 놓는 것과 한국의 왕가를 강화시키는 것이 우리 일본정부의 진정한 소망임을 힘주어 말씀드리고 왕족이라도 모반을 일으키면 우리 일본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왕가를 꼭 지킬 것이라고 확신을 드렸습니다. 근심이 해소된 듯이 보였습니다”라고 알현 내용을 본국에 급송했다.

미우라 자작과 대원군 사이에 잘 알려진 합의가 그 실행을 향해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미우라는 먼저 일본군 사령관에게 왕국 문 바로 앞에 병영을 주둔케 하고 거기에 일본인이 훈련시킨 한국군대인 훈련대를 배치했다. 일본군을 동원해 대원군이 입궐하도록 도와 주었다. 미우라는 일본인 두 사람 산성신보 사장 아다치와 군부와 궁내부 고문인 오카모토에게 대원군이 사는 용산부터 대원군의 왕궁 행차에 경호를 맡겼다. 미우라는 암살 성공에 따라 20년간 일본을 괴롭히던 해악을 근절할 수 있음도 주지시켰다. 왕궁에 들어가자마자 왕비를 처치하라고 지시한 것도 미우라 공사였다. 미우라의 첩자 중 한 사람은 마침 비번이던 일본인 경찰관에게 민간인 복장을 하라고 명하고 그들에게 칼을 줘 대원군의 집으로 보냈다.

1895년 10월 8일 오전 3시 일본인들은 대원군을 호위하고 용산을 출발했다. 도중에 10명은 한국인 경찰관을 붙잡아 정복을 벗겨 입었다. 대원군 일행은 서대문 밖 입구에서 훈련대를 만나 일본 군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궁을 향해 들어갔다. 왕궁 문 앞 호위병을 죽인 뒤 조금 더 들어가 왕과 왕비의 처소에 도착했다.

나는 이 내용을 히로시마 법정의 판결문에 따라 서술한다. 나는 그 재판을 시종일관 지켜보았다. 판사는 검사와 변호사를 작은 내실로 안내하더니 잠시 뒤 나와 불시에 모든 피고인에게 ‘증거 불충분’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야만의 1895년 10월 8일 새벽

왕비 피살에 앞선 여러 사건을 살펴보자. 10월 경 훈련대와 서울 경찰국 사이에 말썽이 났는데 서울 경찰국이 완패했다. 1천 명 정도의 장병을 거느린 훈련대는 홍계훈 연대장의 지휘를 받았다. 홍계훈(?~1895)은 1882년 왕비를 위험에서 구출한 훌륭한 군인으로 왕가의 신임을 받았다. 홍계훈은 1882년 임오군란 때 민비를 궁궐에서 탈출시킨 공로로 중용됐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양호초토사로 출병해 전봉준의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이고 전주화약을 맺고 유혈충돌 없이 철군했다. 1895년 을미사변 때 훈련대장으로 광화문을 수비하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왕국을 지키던 구식 군대의 ‘현’이라는 연대장도 1884년 왕비의 생명을 구했다.

10월 첫째 주 이 구식군대의 병력을 크게 줄였다. 1895년 10월 7일 밤 일본인 교관이 인솔하는 훈련대는 작은 소란을 일으키며 궁 안에서 전진과 후퇴를 계속했다. 벽 아래 2백명이 넘는 훈련대 병사가 잠복했다. 출입구 쪽에서 난타하는 소리와 사격소리가 뒤를 이었다. 훈련대 지휘관인 홍 연대장은 대문 앞에서 일본인 관리에 의해 단칼에 쓰러졌고 8발의 총격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훈련대원들은 일본인들을 따라 궁내 모든 방향에서 떼지어 몰려 들었고 민간 복장으로 칼로 무장한 일본인들은 왕비의 소재를 미친 듯이 따져 물으며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 끌었다. 2.1m의 베란다에서 대기하던 궁녀들을 내던지기도 했고 칼로 베고 발로 차고 심지어 궁녀들을 무자비하게 죽여버리기조차 했다. 일본인들이 초소 안으로 들어왔을 때 불운한 임금은 그들의 주의를 분산시켜 왕비에게 피신할 시간을 주기 위해 그가 똑똑하게 보일 수 있는 방 앞에 섰다. 그러나 일본인 자객들은 대검을 휘두르며 임금을 밀어내고 그의 면전에서 궁녀들을 데려다가 머리채를 질질 끌고 다녔다. 내실에 있었던 왕세자도 끌려나와 그의 모자를 찢기고 머리채를 끌리웠다.

궁녀들과 함께 발견된 공주는 머리를 맞고 칼로 베어져 아래로 내던져졌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경보를 울렸다. 암살자들이 몰려 들어 왔을 때 그는 왕비 앞에 두 팔을 쳘쳐 그녀를 보호하고자 애썼다. 여기 저기 상처를 입었는데도 이경직(1841~1895)은 있는 힘을 다해 임금이 계신 베란다 앞까지 자기 몸을 끌고 가서 그 곳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갔다. 자객들을 피해 도주한 왕비는 곧 그들에게 잡혀서 칼에 찔렸다. 왕비가 죽은 듯이 쓰러져 있을 때 약간 정신을 차려 왕세자는 안전하냐고 물었다. 그 순간 한 일본인이 그녀의 가슴 위로 덮쳐 대검으로 그녀를 베어 버렸다. 일본인들은 그녀를 비단으로 된 누비이불로 꽁꽁 묶어 널판 위에 누인 뒤 사슴공원 부근의 작은 소나무 숲으로 운반해갔다. 그 곳에서 등유를 몸 위에 붓고 장작을 둘러치고 불태웠으니, 남은 것은 단지 몇 개의 뼈 조각 뿐.

민비를 암살한 을미사변의 정치적 동기는 암살에 참여했던 고바야가와 히데오의 회고록에 잘 요약됐다. 회고록은 “민비는 간섭을 싫어했다. 조선인들은 일본을 혐오하고 러시아에는 그러지 않았다. 민비는 러시아에 더 의지하고 싶어했다. 오직 비상한 수단으로 조선과 러시아의 관계를 단절시킬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왕실의 중심 인물인 민비를 제거해 러시아와 조선의 결탁을 근본적으로 파괴할 수밖에 다른 좋은 방법이 없었다”.

왕비 시해 이후의 정국

미우라 자작은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인 스기무라와 자객들을 이끌고 입궐했다. 임금의 개인적 수행원들까지도 침입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명령 아래 놓이게 되었다. 사흘 뒤 관보에 왕비에게 파렴치한 모욕을 주는 국왕의 칙령이 공표됐다. 칙령은 국왕의 것으로 둔갑돼 발표했다. 다른 여섯 대신의 서명도 있었다. 궁내 대신 이재면, 총리 김홍집, 외부 김윤식, 내부 박정양, 탁지 심상훈, 군부 조희연, 법부 서광범, 학부 서광범, 농상부 정병하.

열흘 뒤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음을 즉각 증명했던 일본 정부는 미우라 자작과 스기무라, 군무아문의 고문관이었던 오카모토를 소환해 체포했다. 단 두 사람 미우라와 스기무라만 판결을 내렸다. “미우라의 선동으로 왕비 시해결정이 내려지고 공범자를 모으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다른 10여 명은 위의 두 사람에 의하여 왕비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미우라의 후임으로 유능한 외교관인 노무라가 부임했다. 이노우에 백작이 내한해 일본 천황의 조의도 표했다. 일본은 아무리 범행사실을 부인해도 소용이 없었다. 왕은 독극물의 공포에 시달렸다. 미국인 군사 고문관인 다이 장군은 늙고 허약했던 인물로 궁중 도서관 가까이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북부 여행을 위해 11월 7일 서울을 떠났다. 훈련대는 여전히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고 임금은 갇힌 수인으로 계속 남았다. 임금은 암살의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서울에서 고양까지

통역자의 훌륭한 역할. 그는 영어를 상당히 잘했고 항상 밝고 예의바르고 영리하고 천성이 착했다. 힐리어 공사관 호위병인 임씨를 나의 하인으로 동반하게 해 주었다. 임은 유능하고 충실하고 민첩하고 원기 왕성했다. 1895년 11월 7일 서울을 출발했다. 정오에 우리는 고양에 도착했다. 20~30명의 일본군이 숙영하고 있었다.

파주를 거쳐 개성으로

개성의 여인숙은 형편없지만 이씨의 친구 한 사람이 친절했다. 나는 그 집에서 이틀 동안 기분좋게 묵었다. 생각해 보면 외국의 연약한 여인이 혼자 커다란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작은 골목에 붙어있는 거처에서 수행원도 없이 영어를 단 한 마디도 모르지만 내 돈이 어디에 있는지는 훤히 알기 때문에 마음만 먹는다면 내 목을 찌르고 돈을 털어 갈 수도 있는 병사와 함께 대문도 잠기지 않고 자물쇠도 없는 방에서 아무런 불안감 없이 네 활개를 뻗고 누워 있었다. 나의 이런 저런 천역덕스런 설명들에는 한국의 민심을 알게 하는 뭔가가 있을 것이다.

청일전쟁 직후의 평양

황해도 서흥군. 한국 관리들은 살아있는 민중의 피를 빠는 흡혈귀다. 경기지방과 황해지방의 경계인 예성강 줄기의 대부분 관리들은 안락과 사교를 위해서 서울에 살았고 거기에는 하급관리만 남겨 놓았다. 관청 건물에는 40명의 일본군인이 주둔했다. 깔끔한 상사 한 명이 내게 인사를 하더니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지 물었다. 그들이 그렇게 물을 권리가 있는지 그리고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일본의 영향 아래에서 은으로 만들어진 엔화는 서서히 한국 경제의 내부로 침투하고 있었다. 평양을 처음 보고 나는 무척 기뻤다. 평양은 주위 경관이 훌륭했고 능숙한 솜씨로 가꾸어져 멀리서 봐도 아름다웠다.

일본군 철수를 무서워하는 평양 사람들

8만의 인구를 가진 번창하던 평양은 쇠락해 1만5천 주민만 남았다. 가옥의 4/5가 부서졌고 거리와 골목은 쓰레기로 꽉 차 있었고 언덕은 무너지고 한때 집들로 붐볐던 골짜기엔 기분 나쁜 잔해만 있었다. 초기에 여기선 실제 전투도, 약탈도 없었다.

일본군들은 기둥과 목조물을 부수고 지붕을 땔감으로 사용했다. 마루 위에 불을 피우고 그대로 방치해 집이 타버리기도 했다. 일본군들은 전쟁 후 3주일 동안 피난민들이 남겨둔 재산을 약탈했다. 뒤 이은 점령기 동안 일본 군대는 정당하게 행동했고 마을과 이웃에서 거둬온 전리품을 꼼꼼하게 배상했다. 사람들은 일본군을 아무 미워했지만 일본군 때문에 평화로운 질서가 유지되는 걸 인정했다.

평양전투의 실상

청국 파견군의 총사령관이던 위여귀 장군은 1894년 9월 15일 평양 칠성문 전투에서 전사했다. 일본군은 세 개의 산꼭대기에 있는 세 개의 중국 진지를 점령했다. 전투라기보다 대량학살이었다. 2~4천명의 중국군인과 사람들이 학살됐다. 일본군은 고전한 끝에 오시마 장군의 용감한 돌격으로 그곳을 탈환했다. 아마도 평양 전투는 청일전쟁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평양 북쪽의 부촌(富村)들

우리는 먼저 안주대로를 따라 걸었다. 중국 기병대가 방어하는 참호를 향해 일본군이 소총돌격을 감했던 언덕이 보였다. 평양 북방의 마을들은 한국의 다른 시골마을보다 훨씬 더 반듯하고 청결했다. 우리는 자산과 은산 지역을 통과했다. 가창에서 덕천까지 여행길은 큰 산의 아무 재혹적인 경치를 감상했다. 유능한 통역자 이체온은 멀지 않은 곳에서 계속 담배를 피며 앉았다. 평양을 지나 북쪽으로 알일령을 통과하는 험로를 걸었다. 알일령은 높이가 해발 1020m의 교역로였다.

평양의 무당과 기생

주민들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파렴치하게 약탈하고 여자들을 강간하는 중국 병사로부터 시달린 일을 고통스럽게 호소했다. 평양은 오래전부터 기생과 고급 창녀, 요설가로 우글거렸고 부와 파렴치한 비행으로 악명 높았다. 전쟁 이후 그 곳에는 매우 큰 변화가 있었다. 140명의 기독교 신자가 있었다. 임시교회는 너무 붐벼 많은 예배자들이 밖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헌금도 풍족했다.

단발령과 아관파천

1896년 한국에서 구시대가 막을 내리고 개화의 여명이 열렸다. 지방마다 분쟁이 잦았고 많은 관료들이 죽임을 당했고 일부 반란군들은 서울을 함락시키려고 위협했다. 일본의 영향력은 쇠퇴하고 있었다. 친일 정권은 전국에 걸쳐 붕괴되고 있었다.

상투 폐지는 1895년 12월 30일 법령을 제정했는데 청천벽력이었다. 훈련대의 3명의 사령관은 무기를 빼들고 궁성에 들어가 즉시 정부에 고용된 사람들에 대해 단발 법률의 제정을 요구했다. 다음 날 관보에 왕이 머리를 잘랐다는 기사와 함께 왕명에 의한 법령이 공포됐다. - 1894년 음력 11월 15일 내부 대신 유길준

단발령은 일본에 의해 한국인이 일본인과 똑같이 보이게 하려는 수작으로 믿어졌고 일본식 관습에 맞추려는 것으로 생각됐다.

1896년 2월 2일 아침 국왕과 왕세자는 동이 틀 무렵 궁녀들이 타는 가마를 타고 보초들의 의심을 조금도 받지 않고 경복궁의 성문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했다. 왕은 이후 1년 이상 그의 비밀수용소로 대여될 공사관의 커다란 방에 들어서면서 두려움에 떨었다. - 1896년 2월 11일 내부 및 총리 대신 박정양

같은 날 수천 명의 백성들이 단발령을 취소하는 명령을 읽었고 체포가 가능했던 관료들, 관청의 집무실을 지키다 체포된 총리대신을 비롯해 농부 대신, 탁지부 대신은 붙잡혀 거리에서 참수 당했다. 격분한 군중들은 상투를 자르게 한 장본인이 총리 대신이라고 여겨 정말 잔인하게 시체를 모독하고 손발을 잘라내는 등 극도의 야만성을 보였다. 왕의 탈출을 도운 엄씨와 박씨라는 궁정의 상궁들이 항상 왕의 곁에 보였다. 영국와 미국 대사관과 인접했고, 정동에 죽은 왕비를 위한 비각을 속히 짓게 했다. 손가락 하나의 뼈, 왕비의 잔유물을 옮겼다.

근대교육의 도입

쓸모 있는 사람을 기르는 대학이란 뜻의 배재대학은 1887년 왕이 이름 지은 학교다. 미국 침례교 기독교회에 속하는 이 학교는 개교 후 11년간 목사인 아펜절러 교장이 봉사했다. 1897년 5월 유능하고 박식한 학자 헐버트 박사의 열정적 지도 하에 국립영어학교와 일반대학들이 세워졌다.

한국 시장에서 영국의 큰 경쟁자는 일본이다. 일본은 한국 해안에 20시간 내에 접근할 수 잇는 강력한 라이벌일 뿐 아니라 현재 한국의 무역을 거의 독점하는 무서운 상대다.

1897년 다시 고종 접견

나는 1895년 12월 25일 한국을 떠나 중국으로 갔다. 중국에서 6개월 보내며 중국의 서쪽을 여행했다. 석 달 동안 일본 난태산 주위에 체류했다. 내가 서울에 돌아온 것은 1896년 10월 중순으로 이 때부터 1897년 겨울까지 서울에 머물렀다.

나는 1896년 10월 보름달을 보며 제물포에 도착했다. 나의 심복 임씨와 서울에 들어왔다. 성문을 열어주라는 명령은 똑똑한 우두머리인 예차윤이 했다. 그는 서울 서쪽 쓰레기 더미와 악취를 제거한 장본인이었다. 국왕은 일본의 왕자를 접견하기 위해서 경운궁에 갔다. 왕은 나를 정식 면담에 초청했다. 일본 군복을 입은 한국인 파수병들이 경운궁의 입구를 어슬렁거리며 지켰다.

나는 왕과 세자에게 세 번의 절을 올렸다. 왕의 처소에서 왕과 두 차례 비공식 접견했다. 일본이 한국에서 행한 정치는 야만적이고 잔인했지만 거시적으로는 한국의 진보와 정의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서울은 현재 지나치게 많은 경찰력으로 무장했다. 3백명이면 충분함에도 서울의 경찰력은 4배인 1천200명이 넘었다. 군인들은 한 달에 5달러50센트를 받는데 이는 세계에서 급료를 제일 많이 받는 군대다.

지저분한 도시였던 서울이 이제는 극동의 제일 깨끗한 도시로 변했다. 넉 달 동안 일어난 일이다. 현 중앙관세청장이며 미구에 서울시장이 될 유능하고 지성적인 관리인 예차윤의 정열과 능력 때문이었다. 예차윤은 일찍 워싱턴을 시찰했다.

1897년 서울서 가장 놀랄 변화는 감옥제도의 개선이다. 이는 스트리플링 때문이다. 그는 상해 경찰이었는데 한국 경찰의 고문관이 된 이후 일본인이 주장한 감옥제도의 개혁을 인간적이고 계몽방식으로 수행했다.

한국에 부치는 마지막 말

한국은 가난한 국가가 아니다. 미개발 자원은 많고 기후는 최상이다. 한국의 관청도 많이 나아졌다. 재정고문 맥레비 브라운의 재정 수행능력으로 한국의 재정 개혁은 상당한 결실을 거두었다. 브라운이 부임한 몇 달 뒤 탁지부라는 아우게네스의 외양간이 청소되었다. 타락한 군대는 해산시켰다. 1896년 재정에서 150만달러가 남아 3백만달러의 일본 대부금 중 1백만달러를 상환했다.

1896년과 1897년 동안 일본의 근신을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외교가 은밀하고 과묵하다는 것 뿐만 아니라 꾸준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일본 외교의 기틀은 지금까지 한국의 어떤 정치적 변동에도 영향 받지 않았다. 러시아는 한국에서 패권을 획득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동시에 일본의 영향력은 조용하고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었다. 영국이 한국에서 소유한 것은 이전에 여왕 폐하의 중국 영사였고 현재 관세청장인 맥레비 브라운의 수완, 관록, 외교적 재주 뿐이다.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의 운명을 놓고 서로 대결한 상태에, 내가 한국을 떠나게 된 것은 매우 유감이다. 내가 처음에 한국에 대해서 느꼈던 혐오는 이제 거의 애정으로 바뀌었다.

겨울 아침의 부드러운 공기 속에서 눈덮인 서울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영국 정부의 작은 기선인 상해행 헨릭호를 타고 제물포를 떠났다.

역자해제 :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생애

이 책은 1898년 1월 런던 세인트 제임스 신문사가 두 권으로 출판했다. 같은 해 뉴욕에서 출판됐다. 88 서울 올림픽 당시 엘리자베스 여왕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낸 선물도 이 책 한 권이었다. 여사가 죽은 직후에 안나 M. 스토우다트가 쓴 <이사벨라 버드의 생애>(1907)과 66년 뒤 간행된 패트 바아의 <이사벨라 버드 이야기>(1970)이 있다.

1831년 10월 15일 영국 요크샤 주 보르브릿지 홀에서 태어났다. 친정은 캔터베리 대주교인 섬너 경의 가문으로 유서 깊은 성직자 집안이었다. 병약했던 이사벨라는 신경통으로 몹시 고생했다. 키는 160cm로 크지 않았지만 얼굴과 몸매는 아름답고 우아했따. 1854년 23살 때 캐나다와 미국을 여행했다. 헬리팩스에서 보스턴, 신시내티, 시카고, 디트로이트, 캐나다 터론토, 퀘벡, 몬드리올을 7개월간 돌았다. 1856년 1월 런던의 유명 출판사 머레이에서 <미국의 영국 여인>이란 여행기를 내 베스트셀러가 됐다. 책에서 이사벨라는 미국 남부의 노예제를 비판하고 흑인과 인디언에 강한 애정을 보였다. 1857년 이사벨라는 다시 미국으로 가 노예주인 버지니아, 사우스 케롤라이나, 조지아를 돌며 교회를 통한 흑인과 인디언의 인권운동에 헌신한다.

20대 이사벨라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린다. 29살에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로 이사해 철학적 내용의 시를 발표했다. 빅토리아 시대가 여성에게 강요하던 사회적 문화적 차별이 우울증 원인이었다.

제국의 어둠 속에는 마르크스가 <자본론>(1867)에서 증언한 비참한 영국의 노동계급과 위선적인 가족 윤리에 옭죄인 여성들. 다윈이즘의 충격에 허우적거리는 지식인들이 있었다.

1866년 어머니가 죽자 우울증은 더 심했다. 이 때 의사 존 비숍을 만났다. 41살이던 1872년 이사벨라는 홀로 하와이로 여행가 건강 회복을 시도했다. 미국 록키산맥의 요양소에서 몇 달 보냈다. 거기서 그녀가 “내 깡패 같은 남자”로 부르며 평생 잊지 못한 연인 ‘짐 뉴젠트’를 만났다.

40이 넘어 대학 강의를 청강하며 지리학 공부를 시작했다. <알려지지 않는 일본>(1880)을 썼다. 이사베랄는 1881년 3월 8일 존 비숍과 51살의 나이에 결혼했다. 비숍은 원래 죽은 동생 헨리에타의 연인이었다. 존은 빈혈에 시달리다가 1886년 3월 6일 죽었다.

1889년 58살에 중동 여행에 나서 이슬람 세계를 보고 인도까지 간다. 뉴욕의 프레임 H 레벨사에서 <티베트 미니중들>(1894)로 냈다. 1893년 비숍은 한국 여행을 계획한다. 류머티즘이 악화됐고 폐도 안좋았다. 1894년 2월말 한국에 도착해 이후 4년 동안 4번 한국을 드나들었다.

1901년 71살에 다시 아프리카 여행을 결행한다. 모로코를 출발해 1천마일 이상을 말로 달린 대장정 끝에 사하라 사막을 횡단해 아틀라스 산맥에 오른다. 6개월간의 강행군으로 모로코로 돌아온 여사는 패혈증으로 3주 동안 앓았다. 1904년 10월 10일 에딘버러 자택에서 74살에 죽었다.

마포에서 배로 한강 상류를 오르는 여행은 비숍 여사와 젊은 미국인 선교사 밀러, 밀러의 한국인 하인 이체온, 왕씨라는 중국인 통역자, 뱃사공 김씨와 그의 조수 등 모두 6명이었다. 먼저 남한강 상류를 보고, 북한강 상류를 답사한다.

이 책에 필적하는 한국의 구한말을 다룬 명저는 두 권 더 있다. 월리엄 엘리어트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1882)과 프레드릭 아서 매켄지의 <한국의 비극>(1908)이 그것이다. 그리피스의 책은 한국 고대 중세사까지 다뤄 구한말은 조금 밖에 없다. 한국의 정파를 다룬 25장은 당쟁을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게 취재했다. 노론과 남인 사이에 초미의 쟁점을 설득력있게 묘사했다. 그러나 그리피스의 책 마지막의 서구중심주의적 한계는 저서의 곳곳에서 서구와 한국의 비교를 문명과 야만이라는 무지한 도식으로 몰고가 비숍 여사의 저서가 갖는 미덕과 여러모로 대조가 된다.

매켄지의 <한국의 비극>은 일본의 야심과 제국주의 본질을 날카롭게 통찰하고 일본의 죄악을 고발한다. 의병종군기는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인류의 양심을 증언한다. 그러나 저자가 데일리 메일지의 신문기자라는 한계 때문에 충격적 사건의 전달에 집중하는 아쉬움이 있다.

비숍의 책도 미덕만 있는 게 아니다. 일본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태도를 보인다. 영국이 일본을 도와 러시아 남진을 저지하려 했던 당시 영국 사회의 분위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빅토리아 시대를 살았던 영국인의 심정적인 편향과 선입견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이 명저가 아직도 번역되지 않은 이유. 영어를 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을 몰라서 번역하지 못했다고 본다. 7장의 ‘벽절’이란 이름의 절이 신륵사의 다른 이름이란 사실을 이대 정재서 교수님에게 확인했다.

시간순서로 본 비숍의 한국여행

11개월 동안 한국을 현지답사. 지리학자로 명망과 친정인 영국 왕실의 지친이란 신분 때문에 여사는 남자옷을 입고 궁궐을 자유롭게 출입했다.

* 1894년
2월23일 부산에 도착 하루 체류
2월27일 부산을 출발 3일 항해 제물포 도착
3월 1일 서울 도착해 50일간 체류
4월14일 한강을 거슬러 나룻배 여행 시작
5월21일 나룻배 버리고 육로로 금강산 향해 떠남
6월14일 금강산을 떠나 육로로 북상해 원산 도착
6월19일 원산을 떠나 증기선으로 부산 도착
6월21일 새벽 부산을 떠나 증기선으로 제물포 도착
6월21일 밤 제물포 탈출, 만주로 감
6월23일 중국 체푸 도착, 청일전쟁 발발
6월26일 잉쿠 도착
7월 3일 잉쿠 출발. 나룻배러 랴오허강 거슬러 올라감
7월13일 펭티엔 도착.
8월25일 펭티엔 출방, 잉쿠로 귀한
8월 말 베이찡 거쳐 엔타이 도착
9월 초 엔타이 출발. 배로 5일만에 나가사키 도착
9월 중순 나가사키 출발, 블라디보스톡 도착
9월 말 프리모르스크, 노보키에프, 포시만 거쳐 두만강까지 여행. 러시아령의 한국인 취재
10월 초 시베리아 횡단 철도 따라 니콜스코예, 스파스코예 거쳐 우수리강까지 답사
10월 말 블라디보스톡에서 원산, 부산 거처 나가사키로 감

* 1895년
1월 5일 나가사키에서 제물포 도착 혼자 말 타고 서울 입경
2월 5일 서울을 떠나 4개월 동안 중국 중부와 남부 답사
6~10월 일본 답사
10월15일 민비시해 소식 듣고 제물포로 돌아옴. 고종 알련
11월 7일 서울 떠남 고양 파주 개성 서흥 봉산 황주 평양, 자산, 가창, 덕천, 안주, 알일령, 무진대, 순천 거쳐 다시 평양옴
12월 중순 포산에서 증기선으로 제물포 귀환
12월25일 한국 떠나 6개월간 중국 서부 답사
12월30일 단발령 발표

* 1896년
2월 2일 아관파천
6월 말 중국을 떠나 일본으로 감
10월20일 제물포에 도착. 서울에서 고종 알현

* 1897년
1월25일경 서울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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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숍 , 이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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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향원익청] 연해주의 별, 최재형

[곽병찬의 향원익청] 연해주의 별, 최재형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연해주의 별, 최재형
등록 :2017-02-28


그는 저의 재산과 능력과 기회를 공동체에 바쳤다. 내륙의 한인들에겐 소, 돼지, 닭 등을 길러 군납할 수 있도록 했고, 슬라뱐카 등 해안가 한인들에게는 연어를 잡아 살과 알을 납품하도록 했다. 마을에는 학교와 공원을 세웠다. 한인들이 그를 어찌나 존경하고 따랐는지, 1907년 연해주로 건너온 안중근은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기억했다.
1909년 최재형은 주 2회 발행하는 <대동공보>를 인수해 운영했다. <대동공보> 주필은 ‘시일야방성대곡’으로 투옥됐던 장지연이었다. 안중근도 여기에서 근무하며 때를 기다리도록 했다. 1909년 10월26일 하얼빈 역에서 7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토 히로부미와 그 수행원들이 쓰러졌다. 안중근의 권총은 최재형이 건넨 8연발 브라우닝식 권총이었다.

19세기 말 연해주 한인 마을을 방문한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은 여행기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조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약하고 의심 많으며 위축된 특징이 이곳에서는 솔직함과 독립심을 가진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었다.”
비숍이 여행했던 1890년 중후반은 러시아 귀화인 최재형(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이 도헌(읍장)으로 있을 때였다. 러시아어를 자유자재 구사했던 최재형의 성실성과 능력을 높이 산 러시아인들은 그에게 통역, 도로 및 막사 공사 하청, 식료품 등의 군납을 맡겼다. 그는 서른이 되기 전에 연해주 굴지의 거부가 되었다. 도올 김용옥이 ‘동양의 카네기’에 비유할 정도였다.

 하지만 카네기처럼 돈벌이에 중독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저의 재산과 능력과 기회를 공동체에 바쳤다. 내륙의 한인들에겐 소, 돼지, 닭 등을 길러 군납할 수 있도록 했고, 슬라뱐카 등 해안가 한인들에게는 연어를 잡아 살과 알을 납품하도록 했다. 마을에는 학교와 공원을 세웠다. 그런 최재형을 러시아 정부는 도헌으로 추천했고, 연추 읍민들은 쌍수로 환영했다. 한인들이 그를 어찌나 존경하고 따랐는지, 1907년 연해주로 건너온 안중근은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런 최재형에겐 천형과도 같은 낙인이 있었다. 그의 아비는 함경북도 경흥 송 진사 댁 노비였고, 어미는 빚에 팔려 간 기생이었다. 러시아로 귀화했지만, 조선 양반들에게 그의 가족은 여전히 종놈의 집안이었고, 그는 노비였다. 그는 9살 되던 1869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할아버지, 형 부부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땅 지신허에 정착했다.
지신허엔 착취와 억압은 없었다. 그러나 헐벗고 굶주림은 여전했다. 최재형은 11살 때 무작정 가출했다. 항구도시 포시예트 부둣가에 쓰러져 있던 그는 천우신조로 무역선 빅토리아호 선장 부부의 눈에 띄었다. 이들의 배려로 최재형은 무역선에 올라 7년 동안 포시예트에서 일본, 중국,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 탄자니아, 남아프리카공화국, 포르투갈, 프랑스, 네덜란드를 거쳐 네바강을 거슬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두 차례 왕복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선장으로부터 비즈니스를 배우고, 선장 부인으로부터 러시아어와 문학 역사를 배웠다. 선장 부부가 무역을 청산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면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모르스키 무역상사에서 3년간 근무했다.
1881년 가족을 찾아 연추로 갔다. 한인들은 여전히 궁핍했다. 그는 기회가 보장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지 않았다. 연추에 남아, 한인들과 함께 일하고, 함께 벌고, 함께 마을을 가꾸고, 함께 아이들을 가르쳤다. 도헌이 되기 전 니콜라옙스코예소학교를 사재로 지었고, 도헌이 된 이후 한인마을마다 32개의 소학교를 세웠다. 도헌 월급은 모두 장학금으로 출연했다. 1899년 중국에서 의화단 사건이 일어났다. 북경의 외국 공관들까지 공격당하자, 러시아는 이를 핑계로 만주에 20만 대군을 진주시켰다. 최재형의 군납사업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 무렵 간도관찰사 이범윤이 찾아왔다. 그는 최재형을 보자마자 자신이 왕실의 일족임을 내세우며, 고종이 내린 마패를 꺼내 보였다. “이 마패를 지닌 사람은 황제 폐하를 대신한다는 걸 명심하시오. 당신도 나를 무조건 도와야 하오.” 고압적이었다. 최재형이 노비 출신인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조선은 양반의 나라였다. 그 조선을 망친 것은 다름 아닌 그 부패하고 무능하고 무책임한 양반들이었다. 그런 양반 가운데 한 사람이 러시아에선 개뼈다귀만도 못한 마패를 들고 위세를 떨고 있다. 돈 내놓으라고 호령한다. 최재형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두말 않고 자금을 건넸다. ‘간도의 호랑이’ 이범윤의 사포대는 그렇게 창설됐다. 그런 이범윤이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자 사포대와 함께 연추로 이주했다. 정부의 소환령을 거부하고 러시아 편에서 일본과 싸우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을 보살피고 지원하는 건 최재형의 몫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러시아의 허무한 패배로 끝났다.
이범윤 부대에는 양반 출신이 많았다. 그들은 ‘노비 출신 최재형’을 얕잡아 보았다. 툭하면 명령하듯 다그쳤다. 무기를 사와라, 의병을 모아라, 군자금을 모아라 지시만 하려 했다. 그들은 양반의 나라를 되찾기 위해 초조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다른 ‘양반’도 있었다. 안중근 신채호 이상설 등은 특별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최재형은 1908년 5월 해외 최대의 독립운동 단체인 동의회(총장 최재형)를 창립했다. 동의회는 최재형이 내놓은 1만3천루블, 이위종의 부친(이범진 전 러시아 공사)이 전해온 1만루블, 최재형과 안중근이 모금한 6천루블을 기금으로, 6월 이범윤 총대장에 안중근을 참모중장으로 한 연추의병을 창설했다. 연추의병은 7월부터 국내의 홍범도 부대 등과 연합작전을 펼쳐 접경지역의 일본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나 9월 안중근의 실수로 영산전투에서 대패했다.
연추의병이 해체되자 1909년 최재형은 주 2회 발행하는 <대동공보>를 인수해 운영했다. <대동공보> 주필은 ‘시일야방성대곡’으로 투옥됐던 장지연이었다. 안중근도 여기에서 근무하며 때를 기다리도록 했다. 1909년 10월26일 하얼빈 역에서 7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토 히로부미와 그 수행원들이 쓰러졌다. 안중근의 권총은 최재형이 건넨 8연발 브라우닝식 권총이었다. 각종 정보는 <대동공보> 편집장 이강이 제공했다. 당시 안중근의 신분은 <대동공보> 특파기자였다.
일제는 집요하게 ‘배후’를 캤다. 안중근은 한사코 자신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며 총독은 김두성이라고 우겼다. 의병장 유인석이니, 고종이니 혹은 최재형이니 구구했지만 ‘김두성’을 앞세워 안중근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를 보호할 수 있었다. 순국 후 최재형은 그의 가족을 보살폈다. 최재형은 또 <대동공보>에 400루블을 따로 보내, 안중근 순국에 관한 특별판을 제작하도록 했다.
조선의 병탄 뒤 연해주 상황은 바뀌었다. 러시아는 일제의 압력에 따라 항일 독립운동지사들을 혹심하게 탄압했다. 유인석 등이 추진하던 13도의군이 좌절됐으며, 지휘부 40여명이 체포돼 8명이 추방됐다. <대동공보>도 폐간됐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최재형이 아니었다. 당시 연해주는 망명한 독립지사의 집결지였다. 최재형은 이들과 연해주 한인을 망라한 단체를 조직했다. 한인 동포에게 실업을 권장하고 일자리를 소개하며 교육을 보급하는 것을 표방한 권업회였다. 회장 최재형, 부회장 홍범도 체제로 출범한 권업회는 1914년 강제로 해산당할 때 회원이 무려 8579명에 이르렀다. 기관지 <권업신문>의 주필은 신채호였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최재형은 또 선택해야 했다. 그에겐 이념이 없었다. 조국만 있을 뿐! 어느 쪽이 일본에 맞서 싸울 것인가? 혁명군인가 반혁명군인가. 일본은 반혁명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최재형은 환갑의 나이에 항일 빨치산 전선으로 나갔다. 큰아들은 이르쿠츠크 전선에서 전사했다. 둘째 아들은 연해주 빨치산 참모장으로 싸우고 있었다.
1920년 4월4일 밤 일본군이 전면적인 빨치산 토벌에 나섰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이 불탔고, 한인 300여명이 학살당했다(4월참변). 그날 밤 최재형은 가족을 지키려 우수리스크 자택으로 돌아왔다. “엄마와 누나들은 아버지에게 빨치산 부대로 도망가라고 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내가 도망치면 너희 모두 일본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할 것이다. 나는 살아갈 날이 조금 남았으니 죽어도 좋다. 너희들은 더 살아야 한다.’ … 다음날 새벽 열린 창문으로 일본군에 끌려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다섯째 딸 올가의 회상) 최재형은 왕바실재 산기슭에서 동지 김이직과 엄인섭 등과 함께 학살당했다.
매년 4월5일이면 우수리스크의 ‘영원한 불꽃 추모광장’에서는 지방정부 주관으로 4월참변 추모제가 열린다. 왼쪽엔 한인 희생자, 오른쪽엔 러시아인 희생자의 위패가 놓이고, 중앙엔 최재형 초상화가 놓인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784592.html#csidx3ab04903d458a8b9a8358230e10d949 

IsabellaBishop on Tong-hak in

Korea and her neighbors; a narrative of travel, with an account of the recent vicissitudes and present position of the country

by Bird, Isabella L. (Isabella Lucy), 1831-1904

Publication date 1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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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서평

목차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1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2

본문내용

비숍은 제3자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더욱 동학농민혁명운동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묘사했다고 생각을 한다. 이런 사실들로 보아 그 동안 우리들이 알고 있었던 동학혁명운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우리들은 그 운동이 자랑스러운 아래로부터의 개혁운동이라고 알려져 있기는 했지만 매우 난폭하고 정부를 엎기 위한 운동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즉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혁명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왕에 대한 충성심은 유지한 채 지방관들의 부패를 근절시키기 위한 운동이었다는 점은 내게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또한 이들의 선언문은 그들의 이익을 전혀 표방하지도 않았으며 외국인들에 대한 적개심도 없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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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visiting them a year later I found them still well and happy. The excitement among the Koreans consequent on the Tong-hak rebellion and the war had left them unmolested. A Japanese regiment had encamped close to them, and, by permission, had drawn water from the well in their compound, and had shown them nothing but courtesy. Having in two years gained general confidence and good-will, they built a small bungalow just above the old native house, which has been turned into a very primitive orphan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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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newspapers. The Tong-haks (rebels, or armed reformers) were strong in a region immediately to the south of the great bend, which showed some dissatisfaction with things as they were, and a desire for reform in some minds.


Page -205-


HAVING heard nothing at all of public events during my long inland journey, and only a few rumors of unlocalized collisions between the Tong-haks (rebels) and the Royal troops, the atmosphere of canards at Won-san was somewhat stimulating, though I had already been long enough in Korea not to attach much importance to the stories with which the air was thick. One day it was said that the Tong-haks had gained great successes and had taken Gatling guns from the Royal army, another that they had been crushed and their mysterious and ubiquitous leader beheaded, while the latest rumor before my departure was that they were marching in great force on Fusan. Judging from the proclamation which they circulated, and which, while stating that they rose against corrupt officials and traitorous advisers, professed unswerving loyalty to the throne, it seemed credible that, if there were a throb of patriotism anywhere in Korea, it was in the breasts of these peasants. Their risings appeared to be free from excesses and useless bloodshed, and they confined themselves to the attempt to carry out their programme of reform. Some foreign sympathy was bestowed upon them, because it was thought that the iniquities of misrule could go no further, and that the time was ripe for an armed protest on a larger scale than the ordinary peasant risings against intolerable exactions. But at the very moment when these matters were being discussed in Won-san with not more than a languid interest, a formidable menace to the established order of things was taking shape, destined in a few days to cast the Tong-haks in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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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bellion in southern Korea was exciting much alarm in the capital. Such movements, though on a smaller scale, are annual spring events in the peninsula, when in one or other of the provinces the peasantry, driven to exasperation by official extortions, rise, and, with more or less violence (occasionally, fatal), drive out the off'ending mandarin. Punishment rarely ensues. The King sends a new official, who squeezes and extorts in his turn with more or less vigor, until, if he also passes bearable limits, he is forcibly expelled, and things settle down once more. This Tong-hak (*'Oriental " or ''National") movement, though lost sight of in presence of more important issues, was of greater moment, as being organized on a broader basis, so as to include a great number of adherents in Seoul and the other cities, and with such definite and reasonable objects that at first I was inclined to call its leaders " armed reformers " rather than '* rebels." At that time there was no question as to the Royal autho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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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ong-hak proclamation began by declaring in respectful language loyal allegiance to the King, and went on to state the grievances in very moderate terms. The Tong-haks asserted, and with undoubted truth, that officials in Korea, for their own purposes, closed the eyes and ears of the King to all news and reports of the wrongs inflicted on his people. That ministers of State, governors, and magistrates were all indifferent to the welfare of their country, and were bent only on enriching themselves, and that there were no checks on their rapacity. That examinations (the only avenues to official life) were nothing more than scenes of bribery, barter, and sale, and were no longer tests of fitness for civil appointment. That officials cared not for the debt into which the country was fast sinking. That " they were proud, vainglorious, adulterous, avaricious." That many officials receiving appointments in the country lived in Seoul. That " they flatter and fawn in peace, and desert and betray in times of trou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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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the events of the two or three days before I landed at Chemulpo threw the local disturbance into the shade, and it is only with the object of showing with what an excellent pretext for interference the Tong-haks had furnished the Japanese, that I recall this petty chapter of what is now ancient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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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ong-haks, as was mentioned in chapter xiii., had on several occasions defeated the Royal Korean troops, and after much hesitation the Korean King invoked the help of China. China replied promptly by giving Japan notice of her intention to send troops to Korea on 7th June, 1894, both countries, under the treaty of Tientsin, having equal rights to do so under such circumstances as had then arisen. On the same day Japan announced to China a similar intention. The Chinese General, Yi, landed at A-san with 3,000 men, and the Japanese occupied Chemulpo and Seoul in fo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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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ong-haks, who had respectfully thrown off allegiance to the King on the ground that he was in the hands of foreigners, and had appointed another sovereign, had been vanquished early in January, and their king's head had been sent to Seoul by a loyal governor. There I saw it in the busiest part of the Peking Road, a bustling market outside the *' little West Gate," hanging from a rude arrangement of three sticks like a camp-kettle stand, with another head below it. Both faces wore a calm, almost dignified, expression. Not far off two more heads had been exposed in a similar frame, but it had given way, and they lay in the dust of the roadway, much gnawed by dogs at the back. The last agony was stiffened on their features. A turnip lay beside them, and some small children cut pieces from it and presented them mockingly to the blackened mouths. This brutalizing spectacle had existed for a w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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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 345Tol Maru, 302. Tomak-na-dali, 85. Tombs, 77. Tong-haks, the, 29, 80, 177, 180,

Page -548-


181, 206, 264, 370. Tong-ku, 131. Top-knot, the, 359, 360, 361,

264 Korea and Her Neighbors

to which the sovereign was exposed. The forcing of former conspirators into high office was a grave error, and tactless proceedings, such as the abolition of long pipes, alterations in Court and other dress, many interferences with social customs, and petty and harassing restrictions and regulations, embit- tered the people against the new regime.

The Tong-haks, who had respectfully thrown off allegiance to the King on the ground that he was in the hands of for- eigners, and had appointed another sovereign, had been van- quished early in January, and their king's head had been sent to Seoul by a loyal governor. There I saw it in the busiest part of the Peking Road, a bustling market outside the *' little West Gate," hanging from a rude arrangement of three sticks like a camp-kettle stand, with another head below it. Both faces wore a calm, almost dignified, expression. Not far off two more heads had been exposed in a similar frame, but it had given way, and they lay in the dust of the roadway, much gnawed by dogs at the back. The last agony was stiffened on their features. A turnip lay beside them, and some small chil- dren cut pieces from it and presented them mockingly to the blackened mouths. This brutalizing spectacle had existed for a week.

Three days later, in the stillness of the Korean New Year's Day, I rode with a friend along a lonely road passing through a fair agricultural valley among pine-clothed knolls outside the South and East Gates of Seoul. Snow lay on the ground and the grim sky threatened a further storm. It was cold, and we observed with surprise three coolies in summer cotton clothing lying by the roadside asleep; but it was the last sleep, for on approaching them we found that, though their attitudes were those of easy repose, the bodies were without heads, nor had the headsman's axe been merciful or sharp. In the middle of the road were great, frozen, crimson splashes where the Tong- hak leaders had expiated their treason, criminals in Korea, as in old Jerusalem, suffering "without the gate."


A Transition Stage 265

A few days later an order appeared in the Gazette abolish- ing beheading and ''slicing to death," and substituting death by strangulation for civil, and by sliooting for military capital crimes. This order practically made an end of the prerogative of life and death heretofore possessed by the Korean sovereigns.

So the '' old order " was daily changing under the pressure of the Japanese advisers, and on the whole changing most de- cidedly for the better, though, owing to the number of reforms decreed and in contemplation, everything was in a tentative and chaotic state. Korea was " swithering " between China and Japan, afraid to go in heartily for the reforms initiated by Japan lest China should regain position and be ''down" upon her, and afraid to oppose them actively lest Japan should be permanently successful.

On that same New Year's Day there was more to be seen than headless trunks. Through the length of Seoul, towards twilight, an odor of burning hair overpowered the aromatic scent of the pine brush, and all down every street, outside every door, there were red glimmers of light. It is the custom in every family on that day to carry out the carefully preserved clippings and combings of the family hair and burn them in potsherds, a practice which it is hoped will prevent the entrance of certain daemons into the house during the year. Rude straw dolls stuffed with a few cash were also thrown into the street. This effigy is believed to take away troubles and foist them on whoever picks it up. To prevent such a vicarious calamity, more than one mother on that evening pounced upon a child who childlike had picked up the doll and threw it far from him.

On that night round pieces of red or white paper placed in cleft sticks are put upon the roofs of houses, and those persons who have been warned by the sorcerers of troubles to cdtne, pray (?) to the moon to remove them.

A common Korean custom on the same day is for people to paint images on paper, and to write against them their troub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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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s

Korea and her neighbors; a narrative of travel, with an account of the recent vicissitudes and present position of the country

by Bird, Isabella L. (Isabella Lucy), 1831-1904


Publication date 1898-

Korea and her neighbors; a narrative of travel

by bird, isabella l. (isabella lucy), 1831-1904

texts 


김용옥 유튜브 동학

 도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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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김용옥] ❤️ 도올TV 멤버십을 시작하고 '맹자강의'를 업로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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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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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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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김용옥][ENG]🔥동학선언문 Donghak Manifesto - 동학혁명국가기념일 3주년을 맞이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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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김용옥][ENG]🔥동학선언문 Donghak Manifesto - 동학혁명국가기념일 3주년을 맞이하여

On the Occasion of the Three-Year Anniversary of Establishing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National Memorial Day2021년 5월 11일 May 11, 2021조선의 철학자 도올 김용옥D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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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곤

선생님,

선생님의 동학선언문 감동으로 들었습니다. 150년전에 이미 진정한 삶의 혁명을 우리가 마련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를 동학을 통해 이뤄낼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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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권

~ 못다 한 꿈을 문명의 시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우리가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 이루어 ~ 어려움과 고통으로 살아가셔야만 하셨던 분들의 영전에 우러러 위로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 시대를 떠올리면 가슴이 미여지고 안타까움에 가슴이 먹먹해짐니다. ~ 이제는 촛불이 아닌 횃불을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 정치가 달라진 것도 없고 의식과 사고도 깨어나지 못하고 붕당의 모리배 정치에 빠져 있어~ 진정성 없는 입술로 국민을 현혹하며 우롱하며…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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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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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2etS1prhaonsoroced  · 

[KBS전주] 동학과 어린이 - 녹두꽃에 피어난 촛불 핵심정리 |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도올 김용옥 선생 특별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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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전주] 동학과 어린이 - 녹두꽃에 피어난 촛불 핵심정리 |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도올 김용옥 선생 특별강연#도올 #김용옥 #선생 #특별 #강연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정읍 #전주 #KBS #녹두꽃 #강의 KBS전주총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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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권

~ 녹두 꽃에 피어난 촛불이지만 촛불의 열망에 답하는 정치는 찾아 볼 수가 없으니 ~ 어찌해야만 하오리까? ~ 이제는 촛불이 아닌 횃불을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 정치가 달라진 것도 없고 의식과 사고도 깨어나지 못하고 붕당의 모리배 정치에 빠져 있어~ 진정성 없는 입술로 국민을 현혹하며 우롱하며 기만 하기에 안간힘을 다 쓰고 있을 뿐 기대 할만한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있으니 우리의 미래가 참으로 우려스럽습니다. ~정치권의 말마다 …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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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ti5 SMpaoggeaycSc anmrsot rud1i9:fe1dt1  · 

[도올김용옥] 노자 107 소국과민, 나라의 크기를 작게 하고 나라의 인구를 적게 하라 - 중국에서 노자가 환영 받지 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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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권

~ 침략으로 남의 나라를 많이 빼앗는 싸움 잘하는 사람이 영웅호걸로 일컬어지던 ~ 과거에는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리하였었습니다만은 ~ 특히 중국은 ~ 전챙으로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시하는 살인마의 기질을 가진 국가라고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전쟁에서 의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무런 죄 의식을 갖지 않았던 시대의 의식과 사고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어 문명의 시대에도 전쟁 무기 개발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이러한 나라들은 악마의 피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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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ti5 SMpaoggeaycSc anmrsot rud0i6:fe5dt0  · 

[북 리뷰 040] 도올 김용옥 [동경대전] 부록 - 어린이날 특집 "어린이가 하느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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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동학혁명 #어린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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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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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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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김용옥] 노자 106 역사를 다시 알아야 할 때다 - 임진왜란부터 지금까지 전시작전권이 없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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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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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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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김용옥] 노자 105 거대한 원한은 아무리 화해해도 원망의 앙금이 남는다 - 갑질하지 마라 - 하늘의 도는 편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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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권

~ 선생님의 말씀이 하늘의 말씀입니다. ~ 붕당의 모리배 정치 이제는 때려 치우고 ~ 문명 시대에 ~ 문명 정치로 나가야만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 지금의 정치 풍토로는 앞으로 천만 년이 지난다 해도 ~ 국민의 고혈만 흡취 하는 정치 밖에 되지 못하는 정치 제도인 것입니다. ~ 지금의 ~ 정치 풍토를 360도로 확 바꿔 ~ 국론과 국력을 모아 온 국민들께서 정치를 하시는 범국민통합정치문화로 나가야만 보다 안정과 지속 가능 발전으로 나가며 우…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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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ltSp2onl9 SAprilhsl oatS a1ug7ue:sor5segsd9rt  · 

[도올김용옥] 노자 104 초대교회의 최대 사기는 '대속', 내 죄를 왜 딴 사람이? - 나라의 주인이 될려면 그 나라의 모든 죄를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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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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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라의 글쓰기 '책 이야기/글쓰기_스토리텔링' 카테고리의 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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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ㅡ 영국 지리학 자의 구한말 조선에 대한 종합적 보고서 by sheshetistorycom 릴 라 2019. 1. 8.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ㅡ 영국 지리학

자의 구한말 조선에 대한 종합적 보고서

by sheshetistorycom 릴 라 2019.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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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닙니다. 저자가 밝힌 대로 조선에 대한 한 지리학자 의 '연구서'예요. 영국 태생의 지리학자이자 여행가인 그녀는 1894년 조선에 첫발을 내딛은 이래 4년간 조선을 네 차례 방문하고 조선 각지의 문물, 역사, 풍습, 정치, 지리에 대한 기록을 남깁니다. 책장을 넘기며 곳곳에서 감탄했어 요. 저자의 놀라운 관찰력과 묘사의 치밀함 때문이었죠. 한 사회를 겉에서만 보 는 게 아니라 그 사회를 작동하고 있는 정치, 사회적 구조까지 세밀하게 들여다 보는 저자의 여행기를 따라가노라면 어느새 구한말 조선의 풍경 속에 풍덩 빠 져들게 됩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묘사를 보노라면 당시 조선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 황이었나 절감하게 되고, 국권을 잃어가는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길이었는 가를 또렷이 인식하게 돼요. 저자는 양반 계급에 대하여 여러 장에 걸쳐 반복해 서 기생충, 흡혈귀라고 원색적인 비난을 가합니다. 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관 료주의, 매관매직, 부정부패야말로 조선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심각한 질병임을 저자는 분명히 짚고 있어요(D는 인도에 빨대 꽂은 영국에 비하면 조 선의 양반은 귀여운 수준이라 말하지만). 그리고 미래 조선 사회의 희망을 가장

https://sheshe.tistory.com/993 2/30

가난한 농부들, 그들의 애국심과 노동으로부터 발견해냅니다. 그들이야말로 국

가를 지탱하는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렇게 500페이지가 넘는 이 이야기의 결

말에 이르게 되면 알게 됩니다. 타국에 대한 이렇게 풍부하고 상세한 묘사가 지

리학자로서의 저자의 열정 뿐 아니라 조선이라는 낯선 나라에 대한 애정에서

기인한다는 것을요. 그것이 독자에게 잔잔한 감동을 안겨 주는 책입니다.

##

어떤 의미에서 서울은 곧 한국이다. 진흙벽의 토막이 늘어선 누추한 골목길, 두

껍게 얹힌 갈색 지붕, 오물과 녹색 때가 낀 냄새 나는 도랑 등의 예만 들어보더

라도 서울은 여러 다른 지방 도시와 다를 것이 없다. 시골 지역에서 특별한 상

품이 있는 곳은 많지 않으며, 서울의 잡화상은 모든 시골 마을의 상점을 대표한

다. 흰 의복과 갓 쓴 모습은 어디를 가도 서울과 똑같다. 어떠한 국가적 생활도

오직 이 수도에만 존재한다. 우리들 나라에서도 농업 지역에서 런던으로 가까

이 갈수록 이런저런 정치적 동향에 민감한 것처럼, 한국에서는 서울로 가까이

갈수록 같은 모습을 보인다.

서울은 정부가 위치한 곳일 뿐만 아니라 공적 생활의 중심이며 관리로 등용되

는 유일한 길인 문학 시험이 치러지는 곳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서울에서 무언

가 '한 껀 건지기'를 늘 바라고 있다. 따라서 서울로 향하는 영속적이고 잠재적

인 인력이 항상 일정하게 존재한다. 맑은 오후에 양반들의 걸음걸이를 흉내내

어 팔을 흔들고 어슬렁거리며 넓은 도로를 따라 걸어가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관직을 갈망하는 사람들이다. 여론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땅에서 여론으로

대중적인 감정의 폭발은 오직 서울에서만 존재한다. 한국인들이 서양문명과의

전혀 원치 않았던 접촉 때문에 최초로 압박감을 느끼는 곳도 서울이다. 오직 서

울에서만 깊은 잠에서 깨어나 반쯤 조는 두 눈을 문지르며 몽롱하게 주위를 둘

러보며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어리둥절해 하는 한국의 현재가 드러난다.

https://sheshe.tistory.com/993 3/30

서울은 또한 상업의 개념이 오로지 행상으로만 제한되어 있는 나라의 상업적

중심이다. 모든 비즈니스가 서울에서 행해진다. 전국의 상점들은 서울로부터

물품들을 공급받고 있다. 조약항으로 갔다가 배에 실리지 않는 모든 생산물은

서울로 집중된다. 그 곳은 또한 나라의 운수업을 행하는 짐꾼들의 상단과 몇몇

품목에서는 실제적으로 독과점을 형성하고 있는 큰 상인 조합의 중심이기도 하

다.

모든 한국인들의 마음은 서울에 있다. 지방 관리들은 수도에 따로이 저택을 갖

고 있으며, 연중 많은 기간 부임지의 직무를 경시해도 된다고 믿고 있다. 대부

분의 토지 소유자들은 수도에 살고 있는 부재 지주들이며, 그들은 지대를 받기

위해 지방으로부터 민중들을 '쥐어짠다.' 여행 중의 음식값과 숙박료를 댈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일 년 중에 한 번이나 두 번 서울로 걸어 오며, 어느 계급일

지라도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단 몇 주라도 서울을 떠나 살기를 원치 않는다.

한국인들에게 서울은 오직 그 속에서만 살아갈 만한 삶의 가치가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서울에는 어떠한 예술 작품도 없으며, 고대 유물도 거의 없다. 공중의

광장도, 아주 드물게 벌어지는 '거둥'을 제외하면 어떠한 행사도, 극장도 없다.

서울에는 다른 도시들이 소유하고 있는 문화적 매력이 결핍되어 있다. 오래된

도시이지만, 서울엔 어떠한 유적도, 도서관도, 문단도 없다. 최근까지 다른 대

체물 없이 계속된 종교에 대한 무관심은 사원들을 전혀 남겨 놓지 않았고, 여전

히 영향력을 갖고 있는 미신들로 인해 시내엔 단 하나의 묘지도 없다. pp77-7

9

##

https://sheshe.tistory.com/993 4/30

관아 안에는 한국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기생충들이 우글거렸다. 거기엔 티롤

모자를 쓰고 푸른색이 주색인 조잡한 면직 제복을 입은 군인들과 포졸들, 문필

가들, 부정한 관리들, 늘 일이 손에 달린 척 가장하는 전령들이 있었고, 많은 작

은 방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마루에 모여 앉아, 서예 도구를 옆에 놓고 긴 장

죽에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

한국의 악담 중에는 기득권 계급인 양반이나 귀족들에 대한 것이 아주 많다. 그

들은 생업을 위해서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하고, 친척들에 의해 부양받는 것도 전

혀 수치스러운 일이 되지 않으며, 일부는 아내가 바느질과 빨래로 남몰래 일하

여 먹고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양반은 담뱃대조차 자기가 가져오지 않는

다. 양반의 자제는 그들의 공부방에서 서당까지 그들의 책을 직접 들고 가지 않

는다. 이 기생충이나 다를 바 없는 계급은 여행할 때 그가 소집할 수 있는 만큼

의 많은 하인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 관습적으로 요구된다. 그는 하인이 인도

하는 말을 타며, 절대로 남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전통적인 관습이다.

그의 하인은 백성들을 윽박지르고 위협하여 닭과 달걀을 돈도 주지 않고 빼앗

아 온다. 이것이 백기미 마을의 팻말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백성들, 즉 권리가 없는 대중은 세금을 어깨에 짊어져야 하고, 양반에 의해 핍

박받고 급료 없이 노동해야 할 뿐만 아니라, 부채로 인해 혹독한 부역을 해야

하는 것이 보통이다. 상인이나 농민이 어느 정도의 현금을 저축했다는 소문이

나거나 알려지면 양반이나 관료는 빌려준 돈을 찾는다. 실제로 그것은 과세이

다. 왜냐하면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탈세 혐의로 감옥에 갇혀서 그 자신이나

자신의 친척이 요구하는 돈을 지불할 때까지 매일 아침 매질을 당한다. 혹은 사

실상 석방이 된 후 돈이 준비될 때까지 조금씩 먹으며 양반의 집에 붙잡혀 있게

되기 때문이다. 부채의 명분으로 부역을 시키는 사람은 최고의 귀족이다. 그러

나 빌려준 사람은 원금과 이자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귀족은 집이나 땅을 살 때

돈을 주지 않고, 관리들도 그 지불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매우 당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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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 8.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ㅡ 영국 지리학자의 구한말 조선에 대한 종합적 보고서

https://sheshe.tistory.com/993 5/30

내가 나의 사공에게 급료를 지불했던 뱃기미에서는 어떤 양반의 하인이 급료

없이 서울까지 기와를 가져 가려고 모든 배에 압력을 넣고 있었다. 김씨는 현금

으로 급료를 받은 후, 강 아래로 몇 개의 대단찮은 것을 가지고 가는 것에 대해

내게 양해를 구했다. 일행이 말하기를 외국인을 태우고 있는 내 배는 부역에서

제외된다고 한다.

##

대개 매파가 기초적인 혼담을 위해 고용된다. 그러나 우리 영국에 비해 한국의

결혼은 지극히 건전하고 도덕적인 성격을 갖는다. 신랑이 신부의 아버지에게

돈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부도 아버지에게 지참금을 받지 않는다. 신부는

보통 놋쇠 크램프와 장식이 달린 멋진 혼수 상자 안에 혼수를 준비할 뿐이다.

약혼식은 없으며 혼약이 이루어진 뒤에도 결혼식은 몇 주 혹은 몇 달씩 지체된

다. 거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택일된 날 저녁에 신랑의 아버지는 시눕의 아

버지에게 결혼 서약서를 보내는 데(납폐) 신부의 아버지가 여기에 대해 답장할

필요는 없다. 이 때 비단 두필 가량이 신부에게 보내지는데 그 비단에서 결혼식

날 입을 신부의 겉옷이 만들어진다.

##

아내는 남편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강하게 의식하는 반면 남편은 거의 그런 것

을 의식하지 않는다. 남자가 자신의 아내에게 외형적인 존중의 표시를 하는 것

은 온당하지만 아내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든지 그녀를 동등한 반려자로 대우

한다든지 한다면 그는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다. 상류층에서는 신랑이

신부와 3~4일간 동침한 뒤 상당한 기간 동안 그녀를 떠나있게 해 신부에 대한

그의 무관심을 표시하는 예도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양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나의 인상에는 상업적인 이해 집단이나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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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 8.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ㅡ 영국 지리학자의 구한말 조선에 대한 종합적 보고서

https://sheshe.tistory.com/993 6/30

일하는 그런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다른 계급과의 유대 관계가 금지된 사람

들이, 말하자면 상류 계급의 사람들보다 하류 계급의 사람들이 훨씬 행복한 결

혼 생활을 누리는 것 같았다.

한국의 여성들은 항상 멍에를 짊어지고 산다. 그들은 남자와의 차별을 자신의

자연적인 몫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결혼에서 애정을 기대하지 않으며 구습을

타파하겠다는 생각은 결코 할 수가 없다. 대개 그들은 시어머니의 지배에 순종

하며, 시어머니의 뜻을 거스른다거나 화를 낸다거나 말썽을 일으키는 며느리들

은 그들이 아내의 지위에 머물러 있는 한, 심한 매질로 교정되게 된다. 그러나

상류 관료계층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이들

남편의 경우 유일한 대응책이 이혼이며 재혼은 매우 힘들기 때문에 대개 아내

의 성깔 사나움을 자신의 팔자 소관으로 돌리고 그저 참아야 한다. 그러나 자신

을 괴롭히고 가정의 평화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정조까지도 의심스러울 지경이

라면 그는 아내를 관청(예조)에 넘길 수 있다. 관청까지 넘어가는 지경에 이르

면 그 여자는 관리로부터 심한 매질을 당하고 신분적 지위가 박탈되며 하인배

에게 시집보내어진다. (...)

한국의 아내들은 어머니가 되는 순간 갑자기 지위가 격상된다. 물론 계집아이

는 그 탄생이 다른 동양권의 나라들처럼 쓸데없이 여겨지거나 천대받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노후에 부모를 봉양할 수 없고 조상의 제사를 지낼 수 없기에

사내아이만큼 환영받지 못한다. 계집아이의 탄생이 심상한 데 비해 첫 아들의

탄생은 엄청난 경축의 기회를 제공한다. 첫 아들에게 이름이 지어진 뒤 그 어머

니는 '누구 누구의 모친'이라는 경칭을 얻으며 시댁에서의 발언권이 확실해진

다. 첫아들이 걸음마를 시작할 때는 온 집안에 환호가 울리는 순간이다. 그래서

인지 한국의 아이들은 요람에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품에서 키워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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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 8.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ㅡ 영국 지리학자의 구한말 조선에 대한 종합적 보고서

https://sheshe.tistory.com/993 7/30

우리가 떠나기 바로 전에 늙은 주지가 우리를 퍽 깔끔한 자신의 방으로 초대해

서 몸소 정중한 식사 대접을 해주었다. 기름기 많은 잣과 꿀을 듬뿍 넣어 만든

떡과 쌀을 튀겨 꿀을 바른 유과, 달콤한 떡, 중국식 사탕과자, 꿀 그리고 꿀차에

잣을 띄워서 내놓았따. 이 견과류의 기름은, 강요된 채식생활을 하는 동안 결핍

된 동물성 지방을 보충해 주었따. 그러나 풍부한 식물성 지방과 꿀은 곧 물리게

했다. 그래서 주지는 우리를 대접하는 데 소홀히 한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을

했다. 이 산사에서의 일반적인 문화란 불교에 원천을 두고 있는 것으로 그 자상

한 접대나 배려, 행동거지의 온후함은 한국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그 꼴꼴난

공자의 후예들이 가진 교만함과 거만함, 오만방자함이나 자만심과 아주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모든 승려들과 헤어지고 짐꾼들이 정중한 작별인사를 해왔을 때 어떤 노승은

얼마간의 거리까지 우리를 따라와 주었다.

##

동해안의 오지들을 오래 여행하는 동안 나는 정치적인 사건들에 대해 전혀 알

지 못했다. 단지 반란을 일으킨 동학군과 정부군 사이의 충돌에 대해 약간의 소

문들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 나에게 원산에서 들은 소문은 다분히 자극적이

었다. 비록 내가 허풍 짙은 이야기들을 다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충

분할 만큼 오랫동안 한국에 있어왔지만 말이다. 어느 날은 동학군이 거대한 승

리를 쟁취했고 정부군으로부터 개틀링 기관총을 탈취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또

어느 날은 그들이 산산히 흩어졌고 그들의 신비스럽고 신출귀몰하는 지도자의

목이 베어졌다고도 했다. 그러나 내가 출발하기 전 가장 최근의 소식은 그들이

부산에서 엄청난 세력으로 행진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동학군이 부패한 관료들과 배반한 밀고자에 대항해 우발적으로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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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농민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왕권에의 확고한 충성을 고백하는

그들의 선언으로 판단해 볼 때, 한국 어딘가에 애국심의 맥박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농민들 가슴속 뿐이라는 것은 확실해 보였따. 동학군의 봉기는 과격한

충돌이나 쓸데없는 피흘림은 없는 것처럼 보였고, 자신들의 개혁 프로그램을

수행하기 위한 시도에 자신들을 한정시키고 있었다. 정부의 실정이 더 이상 계

속될 수 없고, 부패한 관리들의 참기 어려운 강탈에 대항한, 평범한 농민 봉기

보다는 훨씬 큰 규모의 무장항쟁을 벌일 시기가 무르익었따고 생각되었기 때문

에, 몇몇 외국의 동정은 동학군에게 쏠렸다.

그러나 단지 게으른 관심만으로 원산에서 이 문제들이 토론되고 있던 그 때, 기

성의 질서에 대한 무시무시한 협박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면

동학도들은 탄압의 어둠 속으로 내던져질 것이고 세계의 관심이 이 작은 반도

에 집중될 운명이었다.

##

한국 남쪽에서의 반란은 수도 서울이 격동할 만한, 심각한 경악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사건들은 한반도에서는 비록 보다 적은 규모이긴 하지만 검의 매년 일

어났다. 하나 혹은 둘 이상의 지방에서 관리들의 약탈에 의해 격앙된 소작농들

이 들고 일어나 약간의 물리력으로(종종 사람을 죽이고) 저항하는 관리를 몰아

낸다. 그리고 그 또한 견딜 만한, 적당한 정부의 탄압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

면 관리는 쫒겨나고 만사가 다시 한번 해결되는 것이다. 이 동양적이고 자연발

생적인 봉기들은 좀 더 중요한 문제들 앞에서 간과되었지만 이제는 매우 중요

해졌다. 그것이 종교라는 보다 큰 토대 위에서 조직되었고 많은 수의 신자들을

서울과 그 밖의 도시들에서 장악하고 있으니 말이다.

동학군은 너무나 확고하고 이성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그들의 지도자

들을 '반란자들'이라기보다 차라리 '무장한 개혁자들'이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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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선언문은 왕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존경하는 언어로 알리면서 시작했

고, 매우 온순한 용어들로 불만을 이야기하면서 계속되었다. 동학교도들은, 한

국의 관료들이 자기 자신만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그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잘못에 대한 모든 정보와 소식에 관해 왕의 두 눈과 두 귀를 막아왔다고,

외국인인 내가 봐도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을 주장했다. 그들은 국가의 장관들,

통치계급들, 그리고 지방관료들이 모두 국민들이 복지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스

스로의 배를 불리는 일에만 열중했고 강탈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고

말했따. 또 관료 생활을 향한 유일한 통로인 과거제도는 뇌물과 물물교환, 관직

매매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며 더 이상 공무원 임명을 위한 인격과 능력의 적합

성을 판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관리들은 나라를 거의 말아먹을 판인 엄청난

외채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잘난 체하고, 허영심이 강하고, 불륜

을 행하고, 탐욕스럽다'고 말했다. 또 국가에서 임명 받은 많은 지방관리들이

자신의 임지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도 모른 채 그냥 서울에서 살고 있다고 말

했다. '그들은 평화시에는 아첨하고 아양을 떨지만 고통의 시기에는 전하를 배

반하고 떠날 것'이라고 말했따. 내가 보기에 그 모든 것이 구구절절 옳은 말들

이었다.

개혁에 대한 필요성이 강력히 주장되었다. 거기에는 외국인들에 대한 적대의

표현은 없었고, 그 선언은 외국인들을 하등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따. 동학

의 지도자는 그의 개성이 결코 분명히 얘기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사람

들에 의해 일본어와 중국어 둘 다 이야기하는 능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신출

귀몰과 초자연적 힘을 가졌따고 믿어졌다. 그리고 그의 수단과 통찰력, 군대의

조직, 몇몇 서구적 군사 전략 등을 볼 때 그가 근대적 전쟁기술을 약간이나마

알고 있다는 것이 명백했다.

처음에는 오직 낡은 칼과 도끼, 죽창으로 무장했던 그의 추종자들은 관청의 병

기고와 패배한 중앙군대로부터 뺏어낸 총을 소유하게 되었따. 떠다니는 수천의

거친 소문들 중에서 다음과 같은 것은 확실하게 보였다. 즉 한국 국왕이 동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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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 8.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ㅡ 영국 지리학자의 구한말 조선에 대한 종합적 보고서

https://sheshe.tistory.com/993 10/30

들을 진압하기 위해 몇백의 군사들을 한 장교 아래에 보냈는데, 그 장교는 3백

명의 병사로 동학군 진영을 공격, 교전하던 중에 별안간 '반란군'에게 투항하여

국와으이 군대를 향해 맞섰다는 것이다. 그 후 그 군대의 3백명 병사들은 모두

전투 중에 죽었고, 그 장교는 행방불명이라는 것이다. 다른 승전보가 잇따르면

서, 이런 몇몇 중요한 관리들의 이탈과 동학군의 서울을 향한 행진은 거대한 놀

라움을 빚어내었다. 모두들 국왕이 도망갈 준비를 한다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제물포에 상륙하기 전에 발생한 2~3일 사이의 사건들은 이 모든

지역적 동요를 덮어버렸다. 내가 지금은 과거가 되어버린 이 기간에 대해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다 회상하는 것은, 동학군이 한반도 군사개입의 빌미를 제공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보여주었던 일본의 야심 때문이다. pp211-213

##

일본 육군성 참모본부는 정확한 한국 지도를 그려 왔고, 미초와 양식에 대한 보

고서와 강의 폭과 깊이에 대한 측량을 확보했고, 사전에 석 달 동안 한국의 쌀

을 매점해 오고 있었다. 한편으론 변장한 일본군 정보요원들이 중국 본토는 물

론 티벳 국경에까지 침투하여 중국의 강약을 가늠해왔다. 그들의 보고서는 문

서상의 중국 군대와 실제 중국 군대를 비교, 무기 현황, 구시대의 구멍숭숭난

함포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따. 또 그들은 각 지방에서 얼마

나 많은 사람들이 전쟁터로 나갈 수 있는지, 중국 사병들이 얼마나 훈련을 받았

고 어느 정도 무장을 했는지를 중국인들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들은 중국군 병참 설비의 곳곳이 그저 문서상으로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며, 중

국군 내부의 비효율적인 명령체계가 전쟁터에서 기동성 있는 임무 수행을 전적

으로 불가능하게 하며, 군 고위층의 무한한 퇴폐와 부정이 야전기간 동안 거의

매번 입증되다시피 한 애국심의 완전한 결여를 초래하고 있음을 꿰뚫고 있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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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모로 보나 일본은 한국에서 중국에 대해 완전히 선수를 치고 있었다. 돌연

한 공포가 중국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중국의 총리교섭사의와 외교관들이

거느린 30여 명의 가족들은 일본인이 서울에 나타나자 중국을 향해 배를 탔고,

800명의 중국인들은 내가 도착한 날 제물포를 떠났다. 중국조계 내에서의 당

황은 아주 심대해서 심지어 가장 번영하는 장사를 독점하고 있던 과수원 경영

인조차도 모든 것을 버리고 달아났다.

##

나는 그 곳에서 남쪽으로의 여행을 위한 준비를 하며 3일 동안 체류했다. 그 시

간 동안 프랑스어를 하는 경찰서장이 나를 몇몇 한국인의 마을로 데려다 주었

다. 그 마을의 모든 농업 인구는 한국인이며 이들은 매우 번영하고 있따. 거기

서 한국의 국경 쪽으로 내려가면서 나는 대다수의 한국인 개척자가 일을 잘하

고 있으며 그들 중의 몇몇은 러시아 군대에 육류를 계약판매함으로서 부를 키

워나가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인은 중국인들을 능가하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능동적으로 중국령 만주로 가서 여읜 동물들을 싼 값에 매

입해서 살이 찌도록 키워 비싼 값에 되판다.

한국에서 한국인들만을 보아온 사람들에게 그러한 주장은 거의 믿을 수 없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위의 사실에 대한 근거로서 들 수 있는 예가 또

있다. 하바로프스크 근처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농산물 유통업에서 중국인들

과 경쟁하여 완승을 거두었다. 현재 하바로스크스의 야채 공급은 거의 한국인

들의 손에 있다. pp264-265

##

나는 여행자들이 내가 이곳의 한국 가정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온화한 친절과

더 깨끗하고 더 안락한 편의시설을 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의미심장한 것이 있다. 한국 남자들의 기풍이 미묘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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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heshe.tistory.com/993 12/30

실제적인 변화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곳의 한국 남자들에게는 고국의 남자들

이 갖고 있는 그 특유의 풀죽은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토착 한국인들의 특징인

의심과 나태한 자부심,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노예근성이, 주체성과 독립

심, 아시아인의 것이라기보다는 영국인의 것에 가까운 터프한 남자다움으로 변

했다. 활발한 움직임이 우쭐대는 양반의 거만함과 농부의 낙담한 빈둥거림을

대체했다. 돈을 벌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고 만다린이나 양반의 착취는 없었

다. 안락과 어떤 형태의 부도 더 이상 관리들의 수탈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것은 불안함의 원천인 부보다는 명예였다. 이곳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은 평온할 수 있었다. 농부들 대다수는 부자였고 무역에 종사

하며 광대한 계약을 만들어가고 있었따. 중국 국경지역에 있는 땅에 정착하지

못한 한국인들과 그곳에서 나무를 자르고 목재를 운반하는 일로 살아가는 사람

들은 부유하지 못했고 그들의 움막도 더러웠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한국인들

을 세계에서 가장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고 그들의 상황을 가망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곳 프리모르스크에서 내 견해를 수정할 상당한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한국인들은 번창하는 부농이 되었고 근면하고 훌륭한 행실을 하고 우

수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로 변해갔다. 이들 역시 한국에 있었으면 똑같이 근면

하지 않고 절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만 했다. 이들은 대부분 기

근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배고픈 난민들에 불과했었다. 이들의 번영과 보편적인

행동은 한국에 남아있는 민중들이 정직한 정부 밑에서 그들의 생계를 보호받을

수만 있다면 천천히 진정한 의미에서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을 나에게 주었다. pp276-277

##

한국 국왕이 선의에서 외국의 관리들을 초대하면 그들은 종종 돌아와서 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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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 8.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ㅡ 영국 지리학자의 구한말 조선에 대한 종합적 보고서

https://sheshe.tistory.com/993 13/30

도, 경관도, 궁궐도 조롱하곤 했다. 나는 한국 민족의 전통과 예법이 우리와 다

르다는 것을 빼고는 조롱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거기

에는 단조로움과 점잖음, 상냥함과 정중함, 내게는 무척이나 호감이 가던 예법

이 있었다. 궁궐에서 가졌던 이 네 번의 알현은 두번째 한국 방문의 대단한 수

확이었다.

##

그러나 이러한 철저한 주의로도 왕과 왕비가 바라는 만큼 완전히 사적인 비밀

을 지켜낼 수는 없었다. 다는 알현실에 한 사나이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을 문틈

으로 확실히 보았다. 뒤이어 통역관이 "오늘은 전하의 말씀을 통역해 내기가 퍽

어렵나이다"라고 말한 것은 재치있는 것이었다. 나중에 그 '그림자'가 바로 왕

이 특별히 불신하는 6부 대신 중 한 사람의 측근이라고 들었다. 이 사람은 왕과

왕비가 외국인 공사에게 뭐라고 했는가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들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왕이 어떤 문제에 대해 말했는지는 언급할 수 없지만

한 시간 정도 지속된 알현이 상당히 흥미로왔다는 점을 밝혀둔다. 어떤 면에서

왕은 그 언제보다도 자신을 강하게 나타냈다.

##

일본 학교에서는 나라가 국민이 가진 모든 것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며 생명조

차도 국가의 제단에 바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러한 교육

의 결과는 틀림없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오사카로 가기 며칠 전에 나는 군대를

위해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보내온 의연품들이 부두에 잔뜩 쌓여 있는 것을 보

았다. 제국의 군대는 내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의 광적인 환송을 받

으면서 그 도시를 떠났다. 대부분의 수송 인부들은 새 옷을 지급받으면 더욱 더

충성할 것을 자칭하여 맹세한다고 하며, 전장이나 병원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조

차 '다이 닛뽄 반자이(대일본 만세)'를 외치면서 마지막 숨을 거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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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heshe.tistory.com/993 14/30

내가 한국을 떠날 즈음의 상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한국인을 통한 한국 정부의 개혁에 관한 한 철저할 정도로 성실하엿으며, 수많

은 개혁 조처가 포고되거나 계획 중에 있는 동안 몇몇 악슴과 폐해가 일소되기

도 하였다. 절대 군주권을 박탈당한 임금은 사실상 봉급을 받아가며 포고문에

서명을 해주는 사람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노우에 백작은 계속 상주대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정부는 임금의 이름만 내걸어 놓고 실제로는 얼마간

은 상주대표가 지명한 10개 부서(아문)의 대신들로 구성되었다.

##

미우라의 후임으로 유능한 외교관인 고무라씨가 부임하고, 조금 후에 일본 천

황의 조의를 표하기 위하여 이노우에 백작이 내한하였다. 동아시아의 지도격으

로서의 지위와 위신에 중대한 타격을 입은 일본은,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동정

(공감, 찬성)을 사려고 꾸준히 노력하였따.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범행 사실을

부인하려고 노력해도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노력이 잊혀질 만하면

곧, 그 살해 계획은 일본 공사관에서 꾸며진 것이고, 궁중에서 살인에 직접적으

로 연루된 민간 복장을 한 일본인과 무장한 일본인들은 모두 합해 60명이었고,

여기에는 '쏘시'라는 사람들은 포함되지만 일본 군대는 포함되지 않았고, 또 누

구는 한국 정부의 고문관이었고 또 누구는 일본 공사관 측의 경찰관이었고 하

는 말들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일본을 제외한 외국 대사들은 한국 정부에 다음과 같이 알렸다. "자객들을 재판

에 회부할 조치가 내려지고, 훈련대가 왕궁에서 물러나며, 최근에 임명된 정부

요인 중에서 그 음모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심리하거나 최소한 공직에서 물

러나게 할 때까지, 우리는 정부가 취하는 어떤 사항에도 승인하기를 거부할 것

이며 국왕의 명이라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의 빈틈없

는 신중함은 나중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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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heshe.tistory.com/993 15/30

10월 15일 관보의 호외에서, 왕비의 자리는 하루라도 비워 두어서는 안 되므

로 왕비 간택의 절차를 곧 진행시킬 것이라는 것이 발표되었다! 이것도 이 국

가의 군주인 임금에게 가해진 많은 모욕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었다.

10월과 11월의 남은 날 동안에도 사태에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왕의 슬픔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왕가의 행사나 주연은 할 생각도 못한 채,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독약과 암살에의 공포감으로 심하게 동요된 임금은 그 자신의 빈약

한 공간만을 지키고 있는 한갖 수인 신세가 되어버렸다. 자기를 감시하는 간수

들인 내각 요인들은 실제로는 그때의 폭도, 군인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그

들의 손아귀에서 서명을 하도록 강요받는 것이 진저리가 쳐질 지경이었다. 세

상에 이 당시의 한국 국왕과 왕세자의 신세보다 더 처량한 것은 없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 눈앞에서 죽임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 궁중에서 요리된

음식이라면 먹을 엄두조차 내지도 못했으며, 한시라도 서로에게서 떨어지면 어

쩌나 근심만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믿을 만한 지지자 하나 없이 그들은 최근에

일어난 사건의 후유증과 독극물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미국인 군사 고문관인 다이 장군은 늙고 허약했던 인물로, 궁중 도서관 가까이

에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미국인 선교사들이 2교대로 번갈아가며 그를 간

호하였다. 이 노인이 이 불운한 왕조의 임금이 가졌던 유일한 호위병이었다. 외

국 대사들은 임금이 아직 살아 있는지를 알아 보고 또한 그에게 공감과 관심을

표한다는 두 가지 목적을 위하여 국왕을 거의 매일 방문하였따. 음식은 러시아

나 미국 공사관에서 준비한 것을 자물쇠로 잠근 상자에 넣어서 공급이 되었으

나 어찌나 감시가 엄중했던지 임금 손에까지 열쇠가 도달되기조차 어려웠다.

매우 다급하고 아주 가끔씩 들려오는 소문만이 그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이들

외국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대화의 전부였다. 분명히 그는 처음부터 영국이나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기를 희망하였다. 때때로 그는 외국인들의 손을 잡

고 측은하게 흐느꼈고, 대사들 또한 언제나 점잖고 친절한 국왕에 대하여 느끼

는 동정심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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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 8.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ㅡ 영국 지리학자의 구한말 조선에 대한 종합적 보고서

https://sheshe.tistory.com/993 16/30

##

왕비 시해 이후 근 한 달이 지나서야 그녀가 피신했을 것이라는 믿음은 거의 사

라지게 되었다. 사태는 새 내각의 법률 아래 엄중해졌다. 각국의 대사들은 이노

우에 백작에게 압력을 넣어, 훈련대를 무장해제시키고 임금의 개인적인 안위를

위해 믿을 만하게 훈련된 충직한 병사들로 채워질 때까지는 일본 군대로 하여

금 왕궁에 주둔시키게 함으로써, 이 엄중한 사태를 타개해 보려고 했다. 우리는

여기서 일본 정부가 얼마나 완벽하게 다른 열강의 외교관들로부터 그들의 책임

을 면제 받았는지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노우에 백작은 충심으로부터 우러나온 민첩성을 가지고 이와 같은 제

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일본에 의한 왕궁의 군사적 재점령을 허용하는

그러한 조치는 그것이 아무리 임금의 안위를 보장할 목적을 지난다고 할지라

도, 중대한 곡해의 여지가 있으며 크나큰 혼란을 야기시킬지도 모른다는 것이

다. 그러한 생각은 단지 열강으로부터 일본이 명백한 위임권을 받을 경우에라

야만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었다. pp325-236

##

11월 한 달 동안 그 조치에 대해 한국 전역에서 불만의 소리가 드높아졌다. 10

월 8일 사건의 전모를 밝히고 왕비의 생사여부를 확인해야 한다는 백성들의 요

구 때문에, 내각은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마지못해 인정하기에 이르렀

다. 11월 26일, 각국 대사들이 왕의 초청을 받아 왕궁에 당도하니, 총리 대신

이 잔뜩 흥분한 임금의 면전에서 왕의 서명이 날조된 포고문 하나를 꾸미고 있

었다. 그것은 폭도 중에서 특별히 군부 대신과 경무청 경찰사를 지목하여 면직

시키고, 왕비를 강등시켰던 칙령을 철회하여 처음부터 무효로 취급하며,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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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 8.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ㅡ 영국 지리학자의 구한말 조선에 대한 종합적 보고서

https://sheshe.tistory.com/993 17/30

를 원래 위치로 복권시킨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그 사건을 법부 아문에서 조사

할 것이며 죄인들을 재판에 회부하여 처벌할 것이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

는 포고문이었던 것이다.

##

한국의 장례 예법은 어떠한 성직자도 죽음과 장례에 관련된 식에 관여하지 않

는다는 것, 죽은 이후의 생이 염라대왕의 심판과 산신령의 보살핌, 이 두 가지

세계에 배분되어 있다는 관념 등 매우 독창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고인의 위

패가 모셔진 의자가 밙드시 장ㅎ례 행렬에 운반되는데 이 위패는 흰 나무조각

으로, 성이 쓰여져 있다. 이 위패의 비문의 일부는 집에서 쓰여지고 무덤에서

완전히 채워진다. 그것은 다시 똑같은 방식으로 운반되어 돌아오는데[반곡] 세

번째 영혼이 조문객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위패에

주소를 적어넣고 그것을 빈 방에 안치시킨다[합문과 계문]. 방에는 그것을 올

려 놓는 검은 옻칠을 한 의자가 있고 그 앞에 검은 옻칠을 한 상이 있다. 그 상

위에는 다시 떡, 술, 구운 고기, 국수 같은 제물이 다시 차려진다. 조문객들은

다시 다섯 번 절한 후 차려진 음식을 먹는다. pp335

##

한국 관리들은 살아있는 민중의 피를 빠는 흡혈귀다. 우리는 경기 지방과 황해

도 지방의 경계인 예성강 줄기를 거슬러서 황해도로 왔다. 임지에 관계없이 이

지역의 대부분 관리들은 안락과 사교를 위해서 서울에 살았고 거기에는 하급관

리만 남겨놓았다. 그리고 그들의 재직기간이 매우 짧았기 때문에 그들은 관할

지역의 사람들의 생활을 어떻게 개선시킬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갈취할 것인가

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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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 8.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ㅡ 영국 지리학자의 구한말 조선에 대한 종합적 보고서

https://sheshe.tistory.com/993 18/30

쓰러지기 직전의 관청 건물내에서 마흔 명의 일본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특파

부대의 방공호를 발견했다. 내가 거리를 걸어내려갈 때 그 군인들 중 하나가 내

어깨를 치면서 국적과 행선지를 물었다. 나는 그들이 불손하다고 생각했따. 숙

소에 도착했을 때 열두 명의 군인이 와서 슬그머니 문으 을 둘러쌌고 나는 문을

닫지 못한 채로 서성대고 있었따. 깔끔한 상사 한 명이 내게 인사를 하더니 나

를 지나쳐 이씨의 방으로 가서 그에게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지

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대답을 들은 후 철수했다. 이것은 몇 번 있었떤 가택 수

색 중 하나에 불과했고 그들은 대체로 공손했지만, 나로 하여금 대체 그들이 그

렇게 할 권리가 있는지, 그리고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하는 의문을 갖도록

만들었다. pp349-350

##

한국의 공산품 중 최고인 종이는 전라도에서 최상의 제품이 생산되었고 노점

진열대에서 인기가 좋았다. 모든 종류의 종이를 시장에서 살 수 있는데 모두가

최상의 품짉을 자랑하고 있다. 그 모양과 질긴 면에서 소가죽과 거의 빗긋하여

중상류계층의 집안에서 장판으로 사용되는 아름답고 반투명하며 담황색인 기

름종이와 벽지로 쓰이는 단단한 종이에서부터 글씨를 쓰는 데 사용되는 얇고

강한 종이와 무거운 짐을 싸는 데 사용되느 조잡한 섬유질 종이, 섬세한 천을

싸기 위한 짜임새가 화려하고 천박해 보이는 종이, 그리고 뽕나무로 만들어지

는, 끈처럼 여러가지 용도에 사용되는 중간 등급의 종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

다. pp352-3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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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 8.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ㅡ 영국 지리학자의 구한말 조선에 대한 종합적 보고서

https://sheshe.tistory.com/993 19/30

그 날 오후의 여행은 아주 매혹적인 시골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계곡 인근의 자

갈이 없는 비옥한 농토, 조용히 그것을 둘러싼 초가지붕, 언덕의 아름드리 소나

무들, 이 모든 것들이 저무는 태양의 진홍빛 햇살을 받아 신비스런 영기를 발산

하고 있었따. 계곡이 끝나는 곳에 대동상이 마치 호수처럼 넓게 퍼져 흐르는 무

진대라는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었다. 이 조용한 강변에서 바라본 대동강

은 달빛을 받아 온통 금빛에 물든 밤물결이 일렁이는 별천지였다. 천국의 밤이

이런 것이리라.

근사한 기후, 풍부하지만 혹독하지는 않은 강우량, 기름진 농토, 내란과 도적질

이 일어나기 힘든 훌륭한 교육, 한국인은 길이 행복하고 번영할 민족임에 틀림

이 없다. '협잡'을 업으로 삼는 관아의 심부름꾼과 그들의 횡포, 관리들의 악행

이 강력한 정부에 의해 줄어들고 소작료가 적정히 책정되고 수납된다면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나는 한국의 농부들이 일본 농부처럼 행복하고 근면하지 못할

이유를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여기에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그것은 내가 누

누이 강조했듯이 '생업에서 생기는 이익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

이 어떤 나라, 어떤 제도로부터 온 것이든 한국에서 행해지는 모든 개혁은 한국

인들의 이 절박하고 자연스러운 갈망에 촛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행해진 많은 개혁들은 일본의 영향을 받았지만, 한국은 그

것을 받아들일 여유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개혁을 수행하고 변화를 위

한 조화로운 계획으 ㄹ실천하기에는 너무도 경험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그 계

획을 수행해야 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전통과 인습에 의해 타락해 있다. 모든

개혁의 시도들은 너무 조급하게 시작되어 너무 빨리 조각나 버린다. 일본이 지

도한 개혁은 국가적인 관례에 끼어들고 작은 문제에 간섭하기를 좋아함으로써

한국인들을 분노하게 했을 뿐이다. 곳곳에 드러나는 사건들을 보고 내가 판단

하건대 일본이 한국의 개혁을 부르짖는 목적은 한국을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

한 명분을 축적하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여행자들은 한국인의 게으름에 많은 느낌을 가진다. 그러나 러시아령 만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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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 8.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ㅡ 영국 지리학자의 구한말 조선에 대한 종합적 보고서

https://sheshe.tistory.com/993 20/30

의 한국인들의 에너지와 근면함, 그리고 그들의 검소하고 유족하고 안락한 집

의 가구들을 보고 난 후에 나는 그것이 기질의 문제로 오해되고 있는 것이 아닌

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한국 사람들은 가난이 그들의 최고의 방어막이며,

그와 그의 가족에게 음식과 옷을 주는 것 이외에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은, 탐욕

스럽고 부정한 관리들에 의해 빼앗길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관리들의 수탈이

아주 견딜 수 없게 되고,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입마저도 빼앗겼을 때에만

한국의 농민들은 폭력을 통한 절망적인 방법에 의지하게 된다. 그것은 역겹고

견딜 수 없게 하는 지방 수령을 축출하고 때로는 죽이는 것, 또는 수령이 제일

좋아하는 심복을 장작더미 위에서 태우는 것이었다. 그 대중적인 격발은, 비록

정상적인 자극에 의해 유감스런 폭력의 행위로 끝나지만 때때로 효과있는 해결

책이 되기도 한다.

억압의 유형은 합법적 세금의 두세 배인 부역, 소송의 경우에 강요되는 뇌물,

강제되는 대부 등이다. 만일 한 사람이 얼마의 돈을 모은 것으로 열려지만 관리

는 그것을 빌려달라고 요구한다. 그것을 들어주면 빌려준 사람은 원금 또는 이

자를 결코 받지 못한다. 만일 상환을 요구하면 그는 체포되어 조작된 죄목에 의

해 부과된 벌금 때문에 투옥되고 자신이나 친척이 관리들이 요구하는 금액을

낼 때까지 매를 맞는다. 그런 정도로 요구가 이루어지므로 겨울이 아주 추운 한

국의 북부에서 농부들은 수확으로 얼마간의 현금으 ㄹ가지게 될 때, 그것을 땅

속의 구멍에다 넣고 거기에다 물을 뿌리는데, 관리와 도적들로부터 안전해질

때까지 돈꾸러미는 그렇게 얼려진 땅 속에 묻힌다. pp389-390

##

모든 시냇가에는 평평한 돌에 웅크리고 앉아서 더러운 옷을 물속에 담그고 꽉

비틀어짜서 돌판에다 올려놓고 반반한 방망이로 두드리며 빨래하는 여자들이

가득하다. 한국의 전통적인 빨래 방법은 극히 뛰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식

빨래의 첫 공정은 나무나 짚을 태운 재를 물에 풀어 빨래감을 적시는 것이다.

그렇게 잿물에 담가둔 빨랫감을 두드려 빤 다음, 다시 잿물에 넣고 삶는다. 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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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heshe.tistory.com/993 21/30

펄 끓는 물에 푹 삶은 빨래를 다시 두드려 빤 다음 맑은 물에 헹구고 짜서 빨랫

줄에 넌다. 밝은 햇빛 아래에서 하얗게 마른 후 밥풀로 아주 엷게 풀 먹여지고,

곤봉처럼 생긴 '다듬이 방망이'로 나무 롤러 위에서 짧고 빠르게 얼마동안 두드

려진 흰 무명은 그 깨끗함이 막 뽑아낸 흰 새턴과 같다. pp392-393

##

농촌 여성에겐 기쁨이 없다고 말해도 될지 모른다. 그녀들은 자신의 며느리에

게 고된 일의 일부를 물려줄 때까지 단지 막일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고된

노동 때문에 한국의 농촌 여성들은 삼십대에 이미 오십대로 보이고, 사십이면

종종 이가 없어진다. 개인적인 몸치장조차도 인생의 아주 이른 시절에 그녀의

삶에서 사라진다. 매일매일의 일상적인 삶 이외에 그녀의 생각은 땅과 공기 중

에 거주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여러 초자연적인 존재(신령)들을 생각하고 원화

소복을 비는 일 외에 다른 곳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pp393

##

여성의 권리는 적고, 그나마의 권리도 법보다는 관습에 의존한다. 지금은 재혼

과 16세까지 결혼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고, 남편이 같은 집에서

첩과 본처를 함께 살도록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여성은 남편과의 이혼에서 무력하며 결혼에서의 상징적인 조각품인 원앙새로

표현되는 부부간의 정절은 절대적으로 여성만의 미덕이 된다. 남편은 아내를

부모와의 불화, 질투, 그리고 잘 싸우는 기질 등 온갖 이유로 쫓아낼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여자를 버리는 경우가 이혼하는 경우보다 더 잦다고 믿

는다. 법보다는 관습에 의해 여자들은 자식들의 통제, 손해에 있어서의 배상 등

등에 어떤 공인된 권리를 가진다. 가정의 행복은 아내가 돌보는 어떤 것이 아니

다. 한국인에게 집은 있으나 가정은 없다. 남편은 대부분 아내와 떨어져 생활한

다. 부부 사이의 친밀함을 맺어주는 어떤 공통된 유대나 외적인 이해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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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heshe.tistory.com/993 22/30

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에 있어서의 결혼 관계란 그 주제에 관해 나와 대화

한 한 한국 선비의 언급에서 잘 요약된다. "우리는 아내와 결혼하고 첩과 사랑

을 나눕니다." pp396-397

##

현 국왕의 통치 기간 중 왕비의 힘있고 야심많은 사촌인 민영환의 통솔하에 모

든 실무 권한은 내무부로 집중되었다. 그 동안 왕비와 그녀의 친척들은 전 나라

에 걸쳐 요직을 점거하고서 아무런 제재 없이 국민들을 착취하였다.

서울에 위치해 있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부서들 중 제일 중요한 것은, 모든 공

무원의 인사와 시내의 모든 문제를 처결할 권한을 가진 서울 시장(당시 한국 직

책으로는 '한성부윤'이라 함)과 제도에 대한 심리 ,재판권을 가지고 있는 서울

재판소 재판장이다.

전국은 8도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각 도는 관찰사라는 행정 지도자의 통치하에

있었고 관찰사 밑에는 민정과 군무 양 보자관이 있었다.

기본세와 토지세가 각각 부과되었으며 지방관청에는 지방세입에 대해 상당한

재량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각 도의 육군과 해군은 엄청난 수의 참모 장교들, 평의회, 사무관들, 그리고 부

서가 딸려 있었고, 그 각각은 많은 수의 관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상의 설명

에서 짐작되듯이 이 나라는 관료주의에 의해 완전히 젓갈 담구어진 형편이었

다.

엄청난 권력 남용, 공금 낭비가 성행할 뿐만 아니라 통치체제 자체가 이미 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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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heshe.tistory.com/993 23/30

한 권력의 남용, 국익의 낭비였다. 현재 한국의 통치 체제는 모든 인생을 근면

과 생업으로부터 파산시키고 강탈해가면서 바닥도 끝도 보이지 않는 몰락과 부

패, 타락으로 출렁이는 거대한 바다에 비유할 수 있다.

관직과 재판 판결이 다른 상품과 다름없이 사고 팔렸으며, 정부는 급속히 기을

어가고 있었다. 정부의 단 하나 남은 권한은 피지배자들을 먹이로 삼을 수 있는

권리뿐이었다. pp426-427

##

한국 관료들의 구상력과 재치는 주로 공공재정에서 사적인 이익을 빼돌리기 위

한 기교와 장치를 고안하는 데 발휘되고 있다. 어떤 한국 관리의 부정직한 수입

원이 발견되어 그것을 근절시키고 나면 더 근절시키기 어려운 교묘한 방법이

즉시 고안된다. 부정한 행위를 외국 자문관이 봉쇄하자마자 그 즉시로 새로운

형태의 부정이 나타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

나 무위도식하는 군대의 경우, 현명한 예산 삭감에 의해 그들의 '주어진 관심

사'에서 추방되었다. 수천의 부정축재자들은 온갖 천재적인 장치들을 동원하여

재정개혁을 반대했다. pp450

##

귀신들은 수백 종으로 추정된다. 귀신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도처에 현존함은

곧 신의 동시 현존이 신성하지 않은 희극으로서 각색되었다는 하나의 사실로서

잘 알려져 있다. 이같은 다신관은 자연의 냉혹함이 비교적 적어 자연에 거리를

두고 대상화하기보다 정서적, 감정적으로 동화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환경의 영향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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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heshe.tistory.com/993 24/30

한국인들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믿음은 그들을 소심한 불안에서 영구히 벗어나

지 못하게 만든다. 이 믿음은 그들에게 끝이 없는 공포를 야기시켜서 그들에 대

해서는 확실히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을 듯하다. "한국인은 현재의 시간을

항상 공포에 떨면서 보낸다." 한국의 가택 어디에서건간에 귀신의 영향력이 미

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귀신은 삶의 모든 면에서 한국인들에게 영향을 끼쳐서 그

들이 부귀를 유지하기 위해서 귀신을 달래는 행위를 계속하도록 만든다. 그리

고 귀신은 그들에 대한 숭배가 소홀할 때는 가차없는 재난으로 보복하기 때문

에 한국인들은 결국 평생 동안 귀신에 대한 노예적인 복종 밑에 있게 될 수밖에

없다. pp458

##

한국인들은 그들이 불행히지는 것이 악귀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어떤 직무에서 오는 불운, 공직에서의 불신, 질병, 일시적이든 지속적이든 간에

금전을 잃는 따위의 모든 불행이 다 악귀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판수나

무당이 그들의 힘으로써 재앙들을 종결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의

근거는 무당은 어떤 막강한 귀신을 지배하고 있어서 그 귀신의 힘을 그가 대신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pp459

##

왕의 환심을 사서 왕이 지니고 있는 두려움과 부귀에 대한 욕구를 통해 그를 이

용할 줄 아는 교활한 이들이나, 그의 도피에 큰 역할을 했던 궁중여인인 박씨와

엄씨, 그리고 왕의 나긋나긋한 성품을 이용해서 그다지 어렵지 않게 얻어낸 관

직을 자신의 친인척들에게 주거나 파는 총신들이나 아첨꾼들의 처분에 따라 왕

의 의지는 결정되었다. 아무리 국가관료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절대적이라

고 할지라도, 그리고 그것이 아무리 많은 특권을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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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 8.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ㅡ 영국 지리학자의 구한말 조선에 대한 종합적 보고서

https://sheshe.tistory.com/993 25/30

로 왕은 그의 왕국에서 가장 권력이 없었다. 왕은 계속해서 '주십시오'만을 요

구하는 측근자와 탐욕스러운 기생충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점점 이성이 상실된 감옥 속으로 던져진 듯한 혼란을 느꼈다. 관료들

중 가장 악명 높은 악당이 총리 대신이 되었으며 김옥균의 암살을 사주한 살인

자가 탁지부 대신이 되었고, 뇌물 수수로 고발된 바 있는, 오직으로 악명 높은

전과자가 법부 대신이 되었다. 관직의 공공연한 매매가 줄을 이었고 국정을 악

용하여 이권을 거머쥐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단 며칠 동안이라도 고위 공직

에 임명된다는 것은 그에게 평생을 두고 우려먹을 지위를 주는 것이며, 유력한

친구들과 끈끈한 유대를 맺을 수 있게 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미구에 중요한 이

권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게 하는 것이었다. pp493

##

한국은 가난한 국가가 아니다. 자원은 고갈되지 않은 채로 미개발되어 있다. 성

공적인 농업을 위한 능력도 거의 이용되지 않고 있다. 기후는 최상이며, 강우량

도 풍부하고, 토질도 생산적이다. 구릉과 계곡에는 철, 구리, 납, 금이 있다. 2

천8백킬로미터의 해안선을 따라 있는 어장은 밝혀지지 않은 부의 원천일지도

모른다. 간난에 견딜 줄 아는 강인하고 공손한 민족이 살고 있고, 거지 같은 극

빈 계층도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 국민의 잠재된 에너지가 사용되지 않고 있다. 중산층이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지 않다. 중산층이 그들의 에너지를 쏟을 숙련된

직업이 없다. 매우 충분한 이유로 인해서 하층 계급들은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아사를 면하는 것이 더 절실하다. 심지어 서울에서도, 가장 큰 가게조차도 일정

한 상점의 수준까지 올라가지 못했다. 한국의 모든 것은 낮고, 가난하고, 천한

수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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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heshe.tistory.com/993 26/30

한국은 특권계급의 착취, 관공서의 가혹한 세금, 총체적인 정의의 부재, 모든

벌이의 불안정, 대부분의 동양 정부가 기반하고 있는 가장 나쁜 전통인 비개혁

적인 정책수행, 음모로 물든 고위 공직자의 약탈 행위, 하찮은 후궁들과 궁전에

한거하면서 쇠약해진 군주, 가장 타락한 제국 중의 한 국가와의 가까운 동맹,

흥미있는 외국인들의 서로의 질투, 그리고 널리 퍼져 있으며 민중을 공포의 도

가니로 몰아넣는 미신, 자원없고 음울한 더러움의 사태에 처해 있다.

그 속에서 나는 한국의 첫인상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한국의 바

다에, 땅에, 간난에 견딜 수 있는 국민 속에 있음을 보았다. 한국에서 아주 심각

하고 보편적으로 저주스러운 관습은, 수천의 능력있는 신체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보다 부유한 친척 또는 친구들에 매달려 호소하려는 악습이다. 이같은

노골적인 의존에는 치욕도 없고 그것을 비난하려는 여론도 없다. 아무리 작더

라도 어떤 수입이 있는 사람은, 많은 그의 자식들, 부인의 친척, 많은 자신의 친

구들, 자신의 친척 친구들을 부양해야만 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

은 관청과 관직으로 몰려드는 현상이다.

한 무리의 식객의 부담을 진 사람에게, 하나의 탈출구는 관직 생활이다. 지위가

높든 낮든, 관직 생활은 그로 하여금 국구로 그의 식객들을 부양할 수 있는 길

을 열어준다. 이 사실로부터 계속적인 관직의 창설을 설명할 수 있다. 대부분의

새로운 관직은 한국을 지배하는 사람들의 친척과 친구들을 부양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목적도 없다. 무엇보다도 이것으로부터 한국에서 생기는 작은 혁명

과 빈번한 공모를 설명할 수 있다. 원칙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고, 한국의 혁명

가는 어떤 신념을 지지해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려고 하지 않는다.

강인하고 평균적인 지능을 가진 수백의 사람들이 이 순간에도 모든 것에 빌붙

어 살고 있다. 명예로운 독립심을 모르고 있다. 식객이 벗어나는 것이 바람직하

거나, 더 이상 식객 노릇을 유지할 수 없을 때, 그들을 위하여 관직이 마련된다.

그러므로 정부 고용은 이 쓰레기 계급을 위한 자선사업과 거의 다름이 없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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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heshe.tistory.com/993 27/30

랜 세월 동안 한국을 불명예스럽게 했던 것이 바로 이 매관매직이었다. 그와 같

은 암투 때문에 고위 관리들은 함께 일하지 못했고, 부분적으로는 왕에게 더 영

향력을 얻어 친척과 친구들의 지위를 확보하려는 욕망으로 뒤덮였다. 한국어

사전을 기획하고 있는 한 연구자는, 한국에서 일이란 단어는 '손해', '악', '불

행'의 의미를 지닌다고 진술한다. 나태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곧 상류사회에

서의 지위권을 입증하고 있다. 관리가 피보호자를 관청에 내밀면서 하는 가장

강력한 주장은 그가 생계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관직에 임명받으면, 나라의 월급을 축내고 수뢰를 받는 일 외

에는 할 일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 나는 실제로 노동하는 당의 경작자가 이

모든 기생충들의 부양자라는 것을 거의 싫증이 나도록 반복했다. 한국에서 농

부들은 가장 열심히 일하는 계급이며, 비록 다소 원시적이지만, 땅과 기후에 잘

적응함으로써 자기 노동의 생산량을 쉽게 배가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익이 안

전하게 보호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가족을 먹여 살리고 옷

을 입힐 정도로만 생산하는 데 만족해하고, 더 좋은 집을 세우거나 품위 있게

옷을 입으려고 하지 않는다. 수많은 소작농들이 행정장관들의 가혹한 세금과

강제적인 대부금 때문에, 해마다 경작 평수를 계속해서 줄이고 있으며, 하루 세

끼를 마련할 수 있을 정도로만 경작한다.

명백한 절망으로 죄어진 계급들이 무관심, 타성, 냉담, 생기없음의 마비상태로

가라앉아 있따는 것은 놀랍지 않다. 개혁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아직도 단지 두

계급, 약탈자와 피약탈자로 구성되어 있다. 면허 받은 흡혈귀인 양반 계급으로

부터 끊임없이 보충되는 관료 계급, 그리고 인구의 나머지 4/5인, 문자 그대로

의 '하층민'인 평민 계급이 그것이다. 후자의 존재 이유는 피를 빨아먹는 흡혈

귀에게 피를 공급하는 것이다.

한국은 이런 전망없는 상황 속에서, 교육으로써, 생산계급들을 보호함으로써,

부정직한 관리들을 처벌함으로써, 그리고 모든 관직에 실무적인 테스트를 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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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 8.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ㅡ 영국 지리학자의 구한말 조선에 대한 종합적 보고서

https://sheshe.tistory.com/993 28/30

함으로써, 즉 실제로 일한 것에 대해서만 지불함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

야만 한다. pp509-512

##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의 운명을 놓고 서로 대결한 상태에, 내가 한국을 떠나게

된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내가 처음에 한국에 대해서 느꼈던 혐오감은 이젠 거

의 애정이랄 수 있는 관심으로 바뀌었다. 이전의 어떤 여행에서도 나는 한국에

서보다 더 섭섭하게 헤어진 사랑스럽고 친절한 친구들을 사귀어보지 못했다.

나는 가장 사랑스러운 한국의 겨울 아침을 감싸는 푸른 벨벳과 같은 부드러운

공기 속에서 눈덮인 서울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다음 날 영국 정부의 작은

기선인 상하이행 헨릭호를 타고 무자비하고 엄혹한 북풍에 실려 제물포를 떠났

다. 그리고 헨릭호가 강 위로 천천히 증기를 발산하며 움직일 때, 옛스러워 흥

취있는 한국의 국기는 나에게 말할 수 없는 감회와 의문들을 자아내었다. pp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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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894년 여름 | 에른스트 헤세-바르텍 ㅡ 격변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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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세계 정세 판단을 못하는 것은 현재와 비슷하고 부정 부패는 그 때 보

다 줄었지만 지금도 있네요

답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점이 많은 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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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도사 2020.08.26 16:19

sheshetistorycom 릴 라 2020.08.28 13:39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