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7

15 비교종교학자 오강남의 한국종교 비판 “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 신동아

“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 신동아


Interview
“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비교종교학자 오강남의 한국종교 비판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5-07-21 15:21:00



2015년 08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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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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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 믿는 것보다 안 믿는 게 낫다
● 경탄하고 감격하라, awesome!
● ‘참나’ 찾아 ‘자유’ 얻는 게 심층종교
● 행복의 원천은 성찰이 주는 ‘아하!’의 삶
우리 사회에서 종교의 권위가 전만 못하다. 존경할 만한 종교 지도자도 찾기 어렵다. 오강남(74)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는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종교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 된 한국 사회를 걱정하는 비교종교학자다. 그는 1971년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받고 줄곧 그곳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동아일보’ 2001년 10월 11일자는 그를 이렇게 소개한다.

“오강남 교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처음 교회 문턱을 넘었다. 스스로 선택해서 미션계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종교학과에 진학해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의 믿음은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이슬람이 모두 지옥으로 간다는데…. 어떻게 하겠어. 그게 사실인 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캐나다 유학을 한 후 그곳에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워 ‘바가바드 기타’를 읽고 한문을 다시 공부해 노장사상과 불교의 가르침을 공부하며 그는 자기 안에서 ‘기독교와 타 종교가 대화하는’ 핵융합의 과정을 겪게 된다. 예수님의 성령체험이 ‘성불(成佛)’과 무엇이 다를 것이며, 노장에서 말하는 ‘붕새처럼 변화와 초월의 체험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것’이 아니겠냐는 인식이었다.”

오 교수가 2001년 한국에서 출간한 ‘예수는 없다’라는 도발적 제목의 책은 파문을 일으켰다. 요지는 “역사적 예수는 있었으되 오늘날의 교회가 가르치는 그런 예수님은 없으셨다”는 것이다. 그의 저술을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한 이는 소설가이자 번역가 이윤기(1947~2010)다. 가수 조영남(70)은 다음과 같이 그를 기억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오강남 교수는 글로 먼저 만났다. 목사가 되겠다며 미국에서 신학대학을 다니던 시절, 미주지역 순회공연을 하던 1980년으로 기억한다. 공연을 마치고 우연히 누군가가 소일거리로 읽으라며 던져준 교포신문에서 그의 칼럼을 읽고는 섬뜩해졌다. 당장 이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나섰다. 그는 내게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한국인의 생각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준 특별한 사람이다.”

오 교수는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캐나다 맥매스터대 대학원에서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비교종교학이라는 말조차 생소할 때 동서 종교와 철학에 몰두하면서 종교에 대한 관점에 획기적 변화를 경험했다. 서울대 규장각과 서강대 종교학과에서 객원교수로 강단에 섰고,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가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14년 전보다 지금 한국 종교의 위상은 더 후퇴한 듯 보인다. 기독교 신자가 감소한다. 기독교와 불교 공히 사회적 소통이나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2012년 출간한 저서 ‘종교란 무엇인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영혼을 구원하는 종교는 때로 집단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국가 간 전쟁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개인의 번영만을 위한 종교, 권력에 기생하거나 스스로 권력화한 종교, 양적 대형화에만 골몰하는 종교. 과연 종교란 무엇이기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7월 2일, 그에게 물었다.

▼ 종교란 무엇입니까.

“수없이 많은 답이 있겠으나, 간단히 대답하라고 한다면 ‘우리가 통속적 안목으로 볼 수 없는 실체의 더 깊은 차원을 발견해 더 큰 자유를 누리도록 해주는 수단’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불교로 말하면 부처님이 4가지 진리(四聖諦)를 깨침으로써 고통에서 자유스러워지라고 한 것, 그리스도교로 말하면 예수님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한 것을 떠올려 보세요. 욕심과 미망으로 가려진 눈을 떠 사물을 더욱 명확히 보면서 그만큼 자유스러워져야 합니다.”

자본주의와 ‘종교기업’

▼ 한국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압도적 크기의 교회 간판이 보입니다. 어둠이 깔리면 십자가들이 하늘의 별처럼 반짝입니다.

“교회도 이 시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흐름에 영합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밤하늘을 수놓은 십자가 물결이 웅변적으로 말해준다고 봐요. ‘종교기업’이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좀 다행인 것은 요즘에는 붉은 십자가 대신 흰색, 노란색 십자가가 이따금 눈에 띈다는 거.(웃음) 십자가를 보면 그것이 예수가 달려 죽은 로마의 형틀이라는 생각 대신, 다석 류영모(1890~1981·교육자 겸 종교인) 선생이 말씀한 것처럼 ‘인간이 대지를 뚫고 하늘과 하나 되고자 위로 솟남을 뜻하는 것’이라고 여기면 의미가 더욱 깊어지지 않을까요.”

다석이 설파한 ‘솟남’은 기독교의 부활, 불교의 해탈에 비견되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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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은 기독교도입니까. 한국의 일부 개신교도는 교수님을 배교자(背敎者)로 여기기도 합니다. 박사학위 논문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는 불교 및 노장사상을 넘나들었고요.


“어머니가 아주 보수적인 기독교 교회에 다니셨는데, 덕분에 저도 그 교회에 다녔습니다. 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공부할 때도 기독교 극보수주의 교수님의 강의를 많이 들었고요. 머리가 커지면서 어머니가 다닌 교회에서 가르친 것, 그 교수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서양사상에 몰두했으니 캐나다에서는 동양 종교를 전공으로 택하기로 하고 불교, 힌두교, 노장사상을 본격적으로 접했어요. 그러면서 종교에 대한 생각이 확 달라졌습니다. 불교를 전공 분야로 삼았고, 말씀한 대로 화엄의 법계연기를 학위논문 주제로 택했지요.


캐나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한국에서 다닌 교회의 가르침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말하고 글로도 써야 했기에 형식적으로나마 갖고 있던 교적(敎籍)을 철회해달라고 교회에 요청했습니다. 이런 걸 두고 ‘배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느 특정 종교나 교파를 헐뜯는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은 교적이 없어 어느 종교에도 정식으로 속하지 않은 셈입니다.


현재는 캐나다 연합교회와 퀘이커 모임에 참석합니다. 한국에 머무를 때는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에서 주관하는 ‘일요 경 모임’에서 종교 경전을 읽습니다. 이곳저곳의 교회나 교역자 수양회, 사찰에서 초대받으면 가서 강연합니다. 개인적 이력을 물은 것 같아 사적인 이야기를 했는데 겸연쩍습니다.”


▼ 한국 불교의 상황도 신자 수가 줄어드는 기독교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기복(祈福)적 성향도 강하고요. 사업 잘되게 해달라, 자녀가 대학에 합격하게 해달라며 시주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찰(大刹)을 유지하지 못한다고 해요.








“그렇지요. 뜻있는 스님들이 직접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 불교계가 부처님의 ‘정법’을 따르지 않는 건 알지만, 정법대로 해서는 사찰을 운영하지 못 하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 속의 佛性, 神性


▼ 나와 내 가족의 복을 바라는 신앙이 나쁜 것은 아니겠지요. 가족의 평안을 간구(懇求)하는 행위는 인간의 본성 아닐까요. 종교는 나와 내 가족이 잘살고 싶다는 소망을 심리적으로 충족시켜줘야 하고요.


“물론 종교에 그런 면이 있어요. 종교가 인간의 필요를 충족해주는 수단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생래적으로 가진 물질적, 심리적 욕구를 채워주는 역할을 해야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종교가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능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 예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했는데, 한국 교회는 다른 종교를 가진 이웃에 배타적입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 같은 어구(語句) 탓에 비(非)종교인이 기독교를 삐딱하게 바라봅니다.


“영적 눈을 떠서 사물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중 하나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내 속에 신성이나 불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네 자신을 알라’고 한 말의 근본은 우리가 이런 존귀한 존재임을 깨달으라는 뜻이라고 하겠지요. 불교에서는 우리 속에 불성이 있다고 하고, 그리스도교에서는 우리 속에 신성, 혹은 그리스도가 있다고 하고, 천도교에서는 시천주(侍天主)라고 해서 우리가 ‘한울님’을 모신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을 때 내가 하늘과 하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고, 나아가 천도교에서 말하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가르침처럼 남을 하늘 섬기듯 대하게 됩니다.


여러 종교에서 가르치는 이런 기본 가르침을 무시한 채 자기들만 진리를 가졌다, 자기들만 하느님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자기들만 천국에 간다는 등의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곤란합니다. 봉은사역 역명 논란, 탱화에 낙서하기, 땅 밟기 기도 등 일부 기독교도의 행동은 기독교와 기타 종교들의 기본 진리와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땅 밟기 기도는 일부 기독교인이 다른 종교의 성소에서 예배를 올리는 의식이다. 또한 기독교 목사가 대구 동화사 탱화에 낙서해 논란이 인 적이 있으며 서울 지하철 9호선 봉은사역 명명을 두고 불교계와 기독교계가 갈등을 빚었다.


“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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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여하는 神’ 관념 수정돼야”

▼ 지난해 6월 문창극 당시 국무총리 후보자가 “일본의 식민지배와 남북분단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발언 등으로 인해 낙마했습니다. 종교인으로서 교회에서 할 만한 발언이라고 여겨지지만, 비(非)기독교인은 이러한 견해를 부담스러워했습니다.

“비(非)그리스도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도 부담스러운 발언일 수 있습니다. 일본의 무자비한 식민지 지배나 미국·소련의 분단 정책으로 인해 발생한 6·25전쟁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 내지 미화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역사관을 가졌다면 독립을 위해 식민지 정책에 대항해 싸운 운동가나 남북분단 상태를 극복하고자 애쓰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이가 되는 셈입니다.

덧붙여 말하면, 문창극 후보자의 역사관은 함석헌 선생이 한국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본 것과 판이합니다. 함 선생은 하느님이 우리 민족이 겪은 고난의 역사와 함께해서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니 이제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저항하면서 이 고난의 역사를 바꿔나가야 한다고 역설한 반면, 문 후보자는 우리 민족은 나태하고 무기력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며 오로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나 미국의 개입 등 외세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도움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 같았어요. 저항과 자존의 역사냐, 숙명적 외세 의존의 역사냐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뭔가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앞에서 언급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와 바울이 말씀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 6:15)를 꼽고 싶습니다. 종교에서 중요한 대목은 할례나 기타 외적인 요인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 변화(transformation)를 받아 자유롭게 되는 것이라 봅니다. ‘장자’ 첫머리에 물고기가 변해 붕(鵬)이라는 큰 새가 되어 구만장천을 날아간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종교가 줄 수 있는 초월과 자유를 상징합니다.”

▼ ‘닫힌 종교’가 아닌 ‘열린 종교’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어느 특정 시대, 어느 특정 사회를 배경으로 생겨난 종교관을 비롯해 세계관, 인생관, 역사관 등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새롭게 이해돼야 합니다. 하나의 종교에서 가르치는 특수 교리는 진리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특별한 해석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돼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 혹은 절대자에 대한 생각도 바뀌어야 해요. 옛날 패러다임에 입각해 신이 인간사 하나하나에 직접 관여한다는 ‘관여하는 신(Interventionist God)’ 같은 신관(神觀)은 수정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열어놓음’이 중요합니다.”

표층종교와 심층종교

▼ 종교에는 표층(表層)과 심층(深層)이 병존하게 마련입니다.

“표층종교가 지금의 내가 잘되기를 바라고 이를 위해 힘쓰는 자기중심적 종교라면, 심층종교는 나의 ‘참나’를 찾아 지금의 나로부터 자유를 얻고 나아가 이웃을 위해 힘쓰는 타인 중심적 종교라고 하겠습니다. 표층종교가 신과 나를 분리해 생각하고 나와 나의 집단이 잘되게 해달라고 신에게 비는 것과 대조적으로 심층종교는 신과 나,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며 다른 이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는 사랑과 자비를 중요시합니다. 표층종교가 경전의 문자에 매달려 나와 다른 해석을 하는 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과 달리 심층종교는 문자 너머의 속내를 발견하려 노력하고 나와 다른 해석에 열린 태도를 가집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표층종교로서 종교생활을 시작하는 게 보통이지만, 거의 모든 종교는 우리가 표층에 안주하지 말고 계속해서 심화 과정을 거쳐 종교가 줄 수 있는 시원함을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대표적인 예로 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고 했습니다.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어느 종교에나 존재하는 ‘근본주의’는 기본적으로 표층종교의 특성을 반영한다는 겁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근 ‘종교적 근본주의는 폭력’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근본주의 그룹은 실제로 살인을 하지 않고, 실제로 누군가를 치지도 않지만 그 자체로 폭력이다” “근본주의자가 가진 정신적 구조는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이라는 게 교황의 설명인데요. 한국 가톨릭의 현재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요.

“가톨릭 지도자들이 가진 의식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나 신학자 한스 큉처럼 근본주의에서 벗어난 진보적 가톨릭 지도자가 있는가 하면,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처럼 비교적 보수주의 내지 근본주의 성향을 보이는 지도자도 있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도 사정이 비슷한 것으로 압니다. 정의구현사제단 같은 진보적인 신부들이 있지요. 말씀드리기 매우 조심스럽지만, 현재 한국 가톨릭교회는 보수 경향이 강한 분들이 이끈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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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 성장률 1600%의 배경


▼ 한국 기독교는 교수님이 비판하는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듯합니다.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고 가르치곤 합니다. 기독교는 20세기 초 한국이 개명(開明)에 나섰을 때 도움을 줬습니다.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웠고, 독립운동과 기독교가 연결됐습니다. 1970~80년대에는 그리스도교인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1970년대 10년 동안 교인 성장률이 1600%가 넘은 교회도 있습니다. 근본주의 신앙 덕분에 공격적 선교가 가능한 측면도 있었던 듯합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여러 면으로 공헌한 바가 컸습니다. 교육, 의료, 독립운동, 계몽…. 그러다 1970~80년대 들어 한국 사회가 산업화, 도시화하면서 전통적으로 친숙하던 농촌 공동체 생활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새롭게 시작한 도시생활에서 소속감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는데, 교회에서 새롭게 소속감을 얻었다고 볼 수 있어요. 더욱이 사람들 사이에 자본주의 가치관이 팽배하면서 부유해지려는 마음이 더 뜨거워졌는데, 교회에서는 (교회에) 열심히 나오면 물질적 축복이 보장된다는 식으로 부채질을 한 셈이지요. 이것이 교회가 기복적으로 경도된 주원인이면서 교인 수 증가의 동력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경제적 필요나 사회적, 심리적, 건강상의 소망을 교회가 아니더라도 채워줄 수 있는 환경이 되면서, 그런 필요에 의해 교회에 다니는 일이 줄어들었습니다. 문자주의에 입각한 공격적 선교에도 한계가 오지 않았나 생각되고요.”

▼ 성경의 문자는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보는 대로’가 아니라 ‘읽고 이해하는 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이든 불경이든 경전을 읽는 것은 그것을 해석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가 아니라 ‘나는 성경을 이렇게 읽었다’고 해야 합니다. 경전이란 문자적으로 객관적 진리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내 눈높이에서 읽고 이해하도록 구성됐어요. 이해의 깊이를 점점 더 깊게 해야 하고요. 한국 교회의 큰 문제점이 성경을 문자주의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 미국도 사정은 비슷하지 않나요. 미국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먼의 책 ‘신 없는 사회’를 보면 라디오, 텔레비전에 나온 목사들이 죄악에 물든 이교도를 저주합니다.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말라고 주장하고요. 경찰서장이 범죄율 증가가 사탄 때문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어느 주지사는 자연재해에 기도로 대처하라고 호소하더군요.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공격 시작을 알리면서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신께서 미국을 변함없이 축복하시길”이라는 말로 연설을 마친 것도 떠오릅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사회입니다. 유럽에서 근본주의가 거의 사라진 것과 대조적으로 미국에는 아직도 기독교 근본주의가 살아 있지요. 주커먼 교수가 지적했듯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는 실질적으로 ‘신이 없는 사회’입니다. ‘기독교 근본주의에서 주장하는 신’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북유럽 사회가 범죄율, 문맹률, 행복지수, 복지수준 등 모든 면에서 미국을 앞섭니다. 교회 출석률이 높은 미국 남부 ‘바이블 벨트’ 지역 주들의 범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근본주의에서 말하는 신들을 앞세우면 결국 ‘신들의 전쟁’ 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가난해지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면 사회제도를 개선하거나 복지제도를 확장하려는 의지가 생겨나지 않을 수도 있고요.”

‘그들만의 신’ ‘만들어진 신’

주커먼에 따르면, 북유럽에선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이들도 성서가 하나님의 말을 그대로 적었다거나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고 죽은 후 부활했다든지 하는 기독교 핵심 교리를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다. 가난한 자와 병자를 돌보고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게 그들이 말하는 종교의 핵심이다. 그들에게 성경은 품위 있는 도덕과 가치관이 담긴 책이다. 문자 그대로 성경을 믿는 소수의 북유럽 사람들도 대체로 합리성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은 생전에 “모든 이교(異敎)의 군대가 무함마드의 땅을 떠나기 전까지는 미국이 결코 평화로울 수 없을 것을 신께 맹세한다”고 다짐하면서 “신은 위대하다. 영광이 이슬람에 있기를”이라고 말했습니다. 시리아·이라크 영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이슬람국가(IS)는 형제 격인 시아파마저 ‘불순한 이교도’라고 여깁니다. 불교나 힌두교와 다르게 유일신교인 크리스천과 무슬림은 ‘신은 오직 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내 종교만이 진리를 독점한다고 여기는 건데요. 그렇다면 ‘오직 한 분’인 하나님, 다시 말해 ‘신’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요.

“그들이 말하는 신들이란 대부분 ‘만들어진 신’이라고 하겠습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아전인수 격으로 받드는 신들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신 자체가 아니라 신에 대한 각자의 견해일 뿐이지요. 그들만의 신관(神觀)입니다. 궁극실재로서의 신, 존재의 바탕으로서의 신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사고를 초월합니다. 노자는 ‘도덕경’ 첫머리에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고 밝힙니다. 말로 표현된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각자가 가진 신관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것처럼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기가 만진 것만을 절대화하는 대신 서로 둘러앉아 각자 만진 것을 이야기하면서 실물 코끼리에 근접한 상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대화를 통해 종교 간의 화해를 이뤄내지 못한다면 세계 평화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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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wesome!’을 외치는 삶

▼ ‘그들만의 신관’은 ‘부족신관(部族神觀)’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성경의 구약 출애굽기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직접 전투지휘관이 돼 다른 민족을 정벌합니다만….

“그렇지요. 자기 민족만을 위한 신, 자기 집단만을 위한 신을 받드는 게 부족신관입니다. 지금도 가령 운동경기를 하면서 자기 팀이 이기기를 신께 비는 것, 자기 종교만을 사랑하는 신을 받드는 것은 부족신관의 잔재라고 할 수 있지요. ‘도덕경’에서 노자는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했습니다. 하늘과 땅은 편애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예수님도 하느님은 의인의 밭이나 악인의 밭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신이 무조건 내 편,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결국은 망상인 셈이지요.”

▼ ‘신 없는 사회’가 오히려 평화롭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자기나 자기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표층종교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형태의 표층종교는 사라져야 한다고 봐요. 잘못 믿는 것은 안 믿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진실일 수 있습니다. 주커먼 교수가 지난해 ‘Living the Secular Life(종교 없는 삶을 살다)’를 썼습니다. 이 책은 경탄하고 감격하는 삶, ‘awesome(기막히게 좋은)!’을 외칠 수 있는 삶이 권위에 의존적인 종교적 삶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로 바꾸면 성찰과 깨달음에서 나오는 ‘아하!’ 하는 삶이 그것입니다. 달라이 라마도 2012년 출간한 ‘종교를 넘어’에서 종교적 계율에 따라 강제되는 삶보다 선한 일을 할 때 더 행복하다는 기본 원리에 입각한 삶이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합니다. 한물간 패러다임에 입각한 옛 신관이나 세계관, 가치관에서 벗어나 생명, 평화를 기본으로 여기고 삶을 사는 세계시민이 더 많아지면 좋겠어요.”


▼ 앞서 ‘장자’의 붕(鵬)과 ‘도덕경’의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천지불인(天地不仁)을 언급했는데, 노장사상이 21세기 한국과 세계에 도움을 줄 것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요.

“노장뿐 아니라 여러 종교의 심층이 활성화해야 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지만, 노장이 오늘날의 한국과 세계에 기여할 대목을 간단히 말씀드린다면 첫째, 도(道)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노장의 실재관은 오늘날의 세계관과 부합하는 점이 많습니다. 둘째, 도를 어머니나 여성이라는 상징으로 표현하는 등 여성성을 강조합니다. 셋째, 자연은 신비스러운 기물이므로 함부로 다루지 말라고 하는 환경보호 내지 생태적 관심을 가졌습니다. 넷째,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면서 폭력, 전쟁을 반대합니다. 다섯째, 꾸미지 않은 통나무처럼 욕심을 줄이고 순리대로 살라고 가르칩니다. 여섯째,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면서 진리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합니다.”



종교 같은, 종교 아닌 종교

▼ 한국 사회는 이념, 정치 성향에 따라 편갈림이 심합니다. 원효 스님의 화쟁(和諍)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화쟁은 요즘 말로 고치면 다원주의(pluralism) 혹은 시각주의(perspec tivalism) 사고라고 하겠습니다. 동일한 사물이 시각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자는 뜻이에요. 똑같은 컵을 위에서 보면 동그랗고 옆에서 보면 모양이 다릅니다. 둘 중 하나만을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하면 싸움이 날 수밖에 없지만, 둘을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인식하면 싸움이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화쟁은 모든 논쟁을 화합으로 바꾸려는 불교 사상이다. 대립과 모순·쟁론을 조화·극복해 하나의 세계를 지향한다. 원효는 저서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서 화쟁 이론을 전개했다. 원융회통사상(圓融會通思想)이라고도 한다.

▼ 스님이 중생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중생이 중을 걱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계종 승려들의 도박 파문 탓에 시끄러웠습니다. 기독교 교단에서 대표를 뽑는 선거는 금품 살포, 상호 비방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종교가 ‘소금’ 구실, ‘목탁’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세태를 어떻게 봅니까.

“어느 스님이 그러시더군요. 지금 한국 종교는 기업만도 못하다고. 기업은 돈을 번다는 것을 떳떳이 밝히고 돈을 버는데, 종교는 거룩함이라는 간판을 앞세우고 뒤에서는 오히려 기업보다 돈 벌기에 더 혈안이 된 상태라고. 종교가 물질만능주의로 변질되거나 권력화해 생기는 부작용이겠지요. ‘종교 같은 종교가 아닌 종교’를 보고 있다고나 할까요”.

▼ 우리는 종교를 통해 무엇을 얻어야 할까요.

“실재의 더 깊은 차원을 들여다보는 훈련을 통해 더 큰 자유를 누리는 특권을 얻어야 할 것 같습니다. 형이상학적, 심리적 차원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도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말고 현상 너머에 있는 실상을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난과 불의의 원인을 꿰뚫어 살펴보고 이런 현상을 타파하는 것도 종교가 할 일이라 봅니다.

인간의 근본적 사명을 무시하거나 방해하는 종교라면 존재할 이유도 없고, 더 이상 존재해서도 안 됩니다. 선불교에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말이 있습니다. 깨침으로 나가는 데 방해가 된다면 부처도 조상도 죽이라는 뜻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달을 보지 못하게 한다면 잘라버리라는 말이지요.”

▼ ‘종교는 궁극실재와의 관계 속에서 내가 변화하는 체험’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쉬운 말로 설명한다면.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변화된 개구리, 속박에서 자유를 얻은 개구리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바다에 끝이 있다고 생각하고 멀리 항해하지 못하다가 바다의 실재, 곧 바다에 끝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멀리까지 항해할 자유를 누리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생각하는 백성’

▼ 한국 종교가 어떻게 나아가기를 바랍니까.

“지금까지 이렇게저렇게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요약하면 표층에서 심층으로 심화돼야 하겠지요. 독일 신학자 카를 라너 같은 이는 그리스도교가 심층적이 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한국 남양주시의 어느 큰 스님도 기복 일변도 종교로서의 불교는 역할이 끝났다고 말씀하더군요. 생각 있는 사람들 거의 모두가 종교의 심화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 개인은 종교와 관련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요. 영성을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히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과정신학의 대가로 손꼽히는 존 캅 교수는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생각이란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사물의 실상을 깨닫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중세 그리스도교에서 강조한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 동방정교에서 행하던 예수기도(Jesus prayer), 선불교에서 말하는 참선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지요.”




과정신학(process theology, 過程神學)은 196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사조다. 인간과 세계의 진화론적 성격을 강조한다. 신도 변화해가는 세계와의 영적인 교류를 통해 발전해가는 과정에 있다고 주장한다.

헌금은 ‘욕심 줄이기’ 연습

▼ 헌금은 왜 하는 겁니까. 십일조는….

“히브리 성서(구약) 마지막 책 말라기 3장 10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쌓을 곳이 없을 만큼 되돌려 받는다는 생각에서 십일조를 내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1000만 원이 필요하면 미리 100만 원을 바치고 1000만 원이 들어올 것을 기다리는 겁니다.

그러나 헌금은 이처럼 내가 얼마를 내고 신의 축복으로 그 몇 배로 튀겨서 받는 투자나 투기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나의 욕심을 줄이는 연습이고, 내가 가진 것을 남과 나누겠다는 인류 공동체 의식의 함양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다만 종교기관에 바치는 것이 그것을 정말로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돌아가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겠지요.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이 12지파로 나뉘어 있을 때 각 지파가 수입의 10분의 1을 제사장 족인 레위지파에 바치는 제도에서 비롯했습니다. 레위족은 그것을 받아 가난한 사람들을 돕거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했습니다. 당대에는 일종의 세금이었던 셈이지요. 오늘날 십일조를 강제로 바치게 한다면 이중과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지만, 수입 일부를 진정으로 선하고 의로운 일을 위해 사용하도록 적절한 곳에 바치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2001 'Persecuted even after death': China bans Christians from holding religious funerals

CP CURRENT PAGE:WORLD | WEDNESDAY, JANUARY 29, 2020
'Persecuted even after death': China bans Christians from holding religious funerals

'Persecuted even after death': China bans Christians from holding religious funerals
By Leah MarieAnn Klett, Christian Post Reporter| Wednesday, January 29, 2020

Chinese Catholic worshippers kneel and pray during Palm Sunday Mass during the Easter Holy Week at an "underground" or "unofficial" church on April 9, 2017 near Shijiazhuang, Hebei Province, China. | Getty Images/Kevin Fr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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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s across China are prohibited from holding religious funerals for their deceased loved ones as the Communist Party continues to tighten its grip on the regulation of religion and religious activity.

Bitter Winter, a magazine documenting human rights and religious freedom abuses in China, reported that authorities throughout the country are enforcing policies that prohibit religious customs and rituals to be used during funerals.


In December, the government of Wenzhou city’s Pingyang county in the eastern province of Zhejiang adopted the Regulations on Centralized Funeral Arrangement.

Under the new rules, “clerical personnel are not allowed to participate in funerals,” and “no more than ten family members of the deceased are allowed to read scriptures or sing hymns in a low voice.”

The new rules aim to “get rid of bad funeral customs and establish a scientific, civilized, and economical way of funerals.”

Similarly, a village official from the central province of Henan told Bitter Winter that the local government convened a meeting for religious work assistants in April, informing them that all religious funerals are restricted.

Soon after, officials issued a document stipulating that clerical personnel should be “timely stopped from using religion to intervene in citizens’ weddings and funerals or other activities in their lives.”

In Wuhan, police stormed the funeral of a Christian member of a government-regulated Three-Self Church and arrested her daughter, who was praying for her mother at the time. The daughter was only released after the deceased was buried without Christian rituals two days later.

Last April, officials broke up an 11-person Christian funeral in the province of Henan that was honoring a deceased member of the congregation. Officials accused attendees of “hiding” their actions in the countryside and threatened them with jail time. The police registered the personal contact information of the attendees and told them that they could be investigated at any time.

“When my father died, village officials threatened to arrest us if we didn’t conduct a secular funeral. We did not dare to go against them,” a villager from Gucheng town in Henan’s county-level city of Yuzhou told Bitter Winter.

“My father had been a believer for several decades. He is persecuted even after death.”

The crackdowns on religious funerals are part of the government’s campaign to “sinicize” religion, or bring it into unity with Communist Chinese culture.
In recent years, China has destroyed churches, burned down crosses, restricted religious expression online, and have attempted to rewrite the Bible and hymns so that the message reflects the Communist Party's ideology.

Beginning in February, the government plans to implement harsh new measures requiring all religious personnel to support and implement total submission to the CCP.

The “Administrative Measures for Religious Groups,” which consists of six sections and 41 articles, will control every aspect of religious activity within China and will complete the "Regulations on religious affairs" revised two years ago and implemented on Feb. 1, 2018.

“Religious organizations must adhere to the leadership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observe the constitution, laws, regulations, ordinances and policies, adhere to the principle of independence and self-government, adhere to the directives on religions in China, implementing the values of socialism,” says Article 5 of the new policies.

Persecution watchdog group International Christian Concern warns that the latest measures will be used by the Communist regime as a ”legal tool to further tighten space for religious groups.”

At a press conference earlier this month, David Curry, CEO of persecution watchdog group Open Doors USA, warned that the “greatest threat,” in his opinion, to human rights worldwide is China, which rose in the rankings from No. 27 to No. 23 in the 2020 report.

Curry stressed that the implications lie in China’s development of surveillance to control its people.

“Its implications are not just for Christians within China but for every country and for religious freedom generally,” Curry said. “Let me put it together. It is like a puzzle. The pieces are there but it is not until you put it together that you see it clearly. When you see it clearly, it is frightening.”

“I saw with my own eyes the surveillance on the street but also in the churches, watching their congregation,” he added. “Facial scans when you come in and then tracking you and generating reports [with] assumptions built into their artificial intelligence system that is tracking Christian behavior.”

Curry said that the more often a person is seen going to church, the more often they are to be labeled a “radical.”

“They are shutting down house churches at a massive rate — 5,596 churches shut down, many because they refuse to put surveillance cameras up to watch their congreg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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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eying Across Divides Toward Reconciliation


“In Christ, God was reconciling the world to himself … and entrusting the message of reconciliation to us” 2 Corinthians 5:19

Facing current conflicts and divisions and historical wounds, the annual Christian Forum for Reconciliation in Northeast Asia provides a multi-national platform for Christian leaders from diverse stakeholder groups – university, seminary, civil society, church, and younger leaders – to come together to pursue a common mission:

To forward 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 in Northeast Asia by inspiring and educating Christian leadership, fostering community and healing across divides, bearing prophetic witness, and being a catalyst for collaboration and new initiatives.

The Forum is the core program of the Northeast Asia Reconciliation Initiative (NARI). The geographic focus is currently China mainland, Hong Kong, Japan, Korea, Taiwan, and the United States.
Founded in 2012, NARI is grounded in mutually transformative relationships between the following partner organizations: the Duke Divinity School Center for Reconciliation, the Mennonite Central Committee, and institutions and leaders in Northeast Asia.The 88 participants of the 2018 Forum in Kyoto gather at Doshisha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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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4

13 Korean government honours Quaker | The Friend

Korean government honours Quaker | The Friend



Korean government honours Quaker

Posthumous award for John Cornes
Jean Cornes, ambassador Suk-hwan Park and Ruth Homer at the Embassy of the Republic of Korea | Photo: Photo courtesy of the Embassy of the Republic of Korea.
A Quaker who worked for the Friends Service Unit after the Korean War has been honoured by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Floyd Schmoe Quakers in Korea



Floyd Schm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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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kers in Korea

Floyd Schmoe

1895 - 2001

A sixth generation Quaker, Floyd Schmoe was born in Kansas but lived most of his life in the Pacific Northwest of the USA. He was both a forest ecologist and a marine biologist. In the course of relief work carried out in six separate wars, he was shot at, but never carried a gun.

In 1917, he was studying forestry at Seattle University when the US entered the First World War. Schmoe applied to the newly formed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AFSC) for alternative service in Europe. He briefly joined a Red Cross ambulance unit as a stretcher bearer, then spent fourteen months building pre-fab homes and converting army barracks to house war refugees.

Returning to the US, he completed his studies and was hired as a park ranger at Mount Rainier in Washington State. He wrote a regular newsletter describing the wildlife and flora, and in 1924 became the park’s first full time naturalist.

In 1928, he joined the University of Washington as an instructor in forest biology, while at the same time pursuing a master’s degree in marine biology.

At the outbreak of the Second World War, he organised demonstrations against American involvement in the war and worked with the AFSC to help Jewish refugees fleeing Nazi occupied Europe. After 1942, he became particularly concerned with the plight of Japanese Americans interned following the attack on Pearl Harbor. He gave up his academic career to head a new regional office of the AFSC. 

 One of his first projects was to help Japanese American students to transfer to schools further east where they were allowed to continue their education. He and his staff worked alongside other church leaders inside the internment camps and also acted to protect the property of those interned. His work led to an FBI investigation, which labelled Schmoe a ‘rabid pacifist.’

Schmoe particularly abhorred the dropping of the first atomic bomb on Hiroshima, calling it "an atrocity, even in warfare." Believing that building new houses for those whose homes had been bombed was a more meaningful response than any apology, he tried to persuade the AFSC to sponsor a house-building project. When that failed, he set about organising his own project, Houses for Hiroshima.

Finding it difficult to get permission to work in Japan, he moved initially to Hawaii, where he ran an AFSC programme to provide food and clothing to Japan. In 1948, he visited Japan for the first time, reviewing the devastation in Hiroshima and bringing with him 250 goats to provide milk for hospitals and orphanages.

Having raised several thousand dollars from friends and family, Schmoe and his wife brought building materials, food and medical supplies to Hiroshima in 1948, and with the help of local volunteers and craftsmen, built houses for four homeless families. Over the next four years, Schmoe helped build twenty houses in Hiroshima and a further twelve in Nagasaki, housing almost a hundred families.

In 1953, Schmoe heard about the refugee crisis in Korea resulting from the war there. He sailed from Japan, bringing building materials and building expertise, and set up Houses for Korea. Between 1953 and 1956, Houses for Korea worked with local people to build homes, secure water supplies, repair roads, and build and run a free medical clinic in Kyonggi Province.

In 1956, following the nationalisation of the Suez Canal, 4000 families from Port Said in Egypt were displaced, some of whom were resettled in the Sinai Desert. Schmoe organised Wells for Egypt, raising money for plants and a pump for a well, and helping to plant an orchard.

After 17 years working largely as an unpaid volunteer, Schmoe retired in 1959 to write. In 1987, at the age of 92, he began work with colleagues, clearing land at the University of Seattle to create a Peace Park. The next year, he travelled to Tashkent in Uzbekistan to help build a peace park there, before going on to Japan to receive a Peace Award from the Hiroshima Peace Centre. Schmoe used his award money to fund the completion of Seattle Peace Park, which opened on Hiroshima Day, 6th August 1990.

Schmoe died in 2001, aged 105.
Print this article




Further Reading and Credits
EXTERNAL LINKS

1997 Seattle Times article about Floyd Schmoe, then aged 101
Essay by Kit Oldham, on HistoryLink.org, including audio interview with Floyd Schmoe

Image reproduced by kind permission of the copyright holders Washington State Historical Society. It can be found at http://columbia.washingtonhistory.org/magazine/articles/2009/0209/0209-a4.aspx For non commercial use only

Friends Service Unit in Korea: 1952-57

Friends Service Unit in Korea: 1952-57



Friends Service Unit in Korea: 1952-57

In the aftermath of the Korean War (1950-53), The Friends Service Unit (FSU) – a joint arm of the British Friends Service Council (FSC) and th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AFSC) – provided humanitarian and medical aid to refugees and others affected by the war.
War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broke out in 1950.  By January 1951, six million people (one third of the Korean population) had become refugees.  Thirty thousand children were in orphanages and as many again were without shelter.  The UN was providing food relief and carrying out mass inoculations against diseases such as smallpox and typhoid.  Nevertheless, tuberculosis was rife.
In October 1952, the UN invited civilian organisations, including the Quakers, to help with relief efforts. Jonathan Rhodes from the AFSC and Lewis Waddilove from FSC visited South Korea, and identified Cholla Pukto, where there were two hundred thousand mainly North Korean refugees, and Kunsan, where there were thirty three thousand, as areas where Friends could be of most use.
In July 1953, a ceasefire was signed, and Frank and Patricia Hunt arrived to set up the Friends Service Unit, setting up base in Kunsan.  In October, an international team of doctors, nurses and a physiotherapist arrived from England, Ireland, Scotland, Sweden, Norway and the USA. They lived in a Korean house and operated out of the provincial hospital.
Kunsan Hospital had been left unfinished after the Japanese withdrawal from Korea and had then been bombed by the Americans.  There was little equipment, no heating, no running water and only intermittent electricity. The AFSC shipped relief supplies of food, medicine and bedding. Social workers from the USA and Norway began to assess welfare needs. Warm clothing and bedding were distributed by local volunteers.  Milk stations were set up serving hot milk and vitamins to children and pregnant women.
Over the winter, the priority lay in dealing with malnutrition.  However, plans were being drawn up for the rehabilitation of refugees.  American Quaker Floyd Schmoe, who had been helping with reconstruction work following the bombing of Hiroshima in Japan, set up Houses For Korea - a building project that provided refugees with the materials and training to construct their own houses.  Schools were started in the camps, with Korean teachers paid for by the FSU.  Adult literacy classes were started for war widows, and games of volleyball and basketball were organised.
Sewing machines were brought, and the war widows opened tailoring shops, a dry cleaners, and a business making soya bean curd.  Goats, bees and seeds for planting allowed the refugees to supply some of their own food.
In cooperation with the UN, Friends ran a training school for Nurse Aides.  They restored the Pathology lab at the hospital and trained lab technicians. David Ward, the physiotherapist, helped to fit prosthetics, made by local craftsmen, to those who had lost limbs in the war. A nurse, Ann Sealey, and a doctor, Jean Sullivan, started an antenatal and midwifery service.
The FSU started an outpatients’ service for sick children and opened a children’s ward in the hospital, where the children were looked after by a House Mother.  In some cases, children had been abandoned by their families and Friends arranged adoption with families in America.
The Korean authorities had little money to pay hospital staff and locals’ salaries were often paid in part by the FSU.  Throughout the time the FSU operated, the AFSC continued to provide vital medical supplies.
The FSU continued to operate until 1957, under the leadership first of Geoff Hemingway (1953-56) and then under Robert Grey.

Quakers in Korea



Quakers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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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m Sok-Hon

Quakers in Korea

The Quaker presence in Korea dates from the end of the Korean War (1950-53). In the aftermath of the war, The Friends Service Unit (FSU) – a joint arm of the British Friends Service Council and th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 provided humanitarian and medical aid to refugees and others affected by the war.

From their base in Kunsan, the FSU initially tackled problems of severe malnutrition. Later Houses for Korea was set up by AFSC’s Floyd Schmoe, providing refugees with the materials and training to construct their own houses. Schools were started in the camps, with Korean teachers paid for by the FSU. Adult literacy classes were started for war widows, and games of volleyball and basketball were organised.

The FSU was heavily involved with training local Korean doctors and nurses. They set up a physiotherapy unit to help war amputees, and ante-natal and midwifery service and both out-patient and in-patient services for sick children.

When the FSU was wound up, at the end of 1957, local Koreans who had been working with the Quakers wanted to continue their connection with Quakerism. With the help of American Quaker families living in Seoul (in particular, Reginald Price and Arthur Mitchell), a group began to meet regularly for silent, unprogrammed worship, and for study and discussion.

The first Quaker text to be translated into Korean was Rufus Jones' Quaker's Faith in 1960. It watranslated by Yoon Gu Lee and printed for distribution among members.

Seoul meeting was eventually recognized as a monthly meeting in 1964 under the care of the Friends World Committee for Consultation (FWCC), and in 1967 moved into its own Meeting House. As one member of the meeting was blind, the meeting became involved in the welfare of the blind. Some members gathered periodically to transcribe religious articles into Braille and a work camp was organized to repair a road near one of the homes for the bl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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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Ko
rean who had first encountered Quakers through their work in Kunsan was the human rights activist, Ham Sok Hon. Ham was impressed by the Quakers’ pacifism, egalitarianism and their active participation in questions of social justice. Ham started to attend Seoul Quaker meeting and became a member of the Society of Friends in 1967, after attending the Friends World Conference in North Carolina.

“You were already a Quaker before you became one,” an American Friend, Arthur Mitchell, told him.

Ham spoke out against dictatorship and injustice in South Korea. He carried out a hunger strike in 1965, was imprisoned in 1976 and 1979, and was placed under house arrest in 1980. South Korea finally achieved full democracy in 1987. The following year, when the Seoul Olympics were held, Ham was selected to be the head of the Peace Olympiad, which drew up a declaration calling for world peace.

Under Ham’s leadership, and with the support of Mary and Lloyd Bailey, who stayed in Korea during 1983/4 under the auspices of the Friend in the Orient Committee of Pacific Yearly Meeting and continued to correspond with the meeting for many years after, Seoul Meeting flourished. Although membership declined after Ham’s death in 1989, it has revived again since 1998.

Conscientious objection has been a key issue for Quakers in South Korea. In a country still technically at war with North Korea, compulsory military service is considered essential and for many years COs had no option but to serve or to go prison. QUNO (Quaker United Nations Office) and FWCC were among those who campaigned for some form of alternative service to be offered, and this was finally implemented in 2007.

Th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has maintained a presence in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North Korea). They currently run an agriculture programme, helping farmers introduce techniques of rice cultivation adapted to the short growing season in DPRK.

AFSC continues to campaign against North Korean nuclear tests, while warning that isolating or ignoring North Korea is not only unrealistic but dangerous.

08 자서전 ‘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해라’ 펴낸 가천길재단 이길여 회장 : 여성동아

자서전 ‘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해라’ 펴낸 가천길재단 이길여 회장 : 여성동아

자서전 ‘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해라’ 펴낸 가천길재단 이길여 회장
사진·조영철 기자, 가천길재단 제공


입력 2008.12.22




직원 5천여 명이 일하는 가천길재단을 이끌고 있는 이길여 회장. 깡촌에서 여자로 태어난 설움을 톡톡히 맛보며 자란 그의 성장과정과 남다른 도전, 성공의 기록은 한편의 영화같이 흥미진진하다. 그의 성공신화는 쉼없이 계속되고 있기에 더욱 세인의 관심을 끈다. 환한 웃음과 생동감으로 주위 사람까지 밝게 만드는 그를 만났다.

진회색 줄무늬 수트에 와인빛깔 블라우스, 하이힐을 신은 모습이 경쾌하고 화사하다. 인천 가천의과학대 집무실에서 만난 가천길재단의 이길여 회장(76). 한창때의 젊은이 같은 생동감, 환한 웃음이 곁에 있는 사람까지 활기차게 만든다.
먼저 집무실 밖의 탁 트인 공간에서 인터뷰 사진을 찍자는 제안을 했다. 사진 촬영 도중 캠퍼스 이곳저곳을 걷는 사이 자연스럽게 인터뷰를 시작했다.
“운동이요? 전엔 매일 걷기를 했는데, 요즘엔 계단 오르듯 한 발씩 밟아 오르내리는 스테퍼(stepper)를 해요. 한 시간씩. 스테퍼가 운동량이 많아 좋더라고. 자리도 덜 차지하고.”
그는 하이힐을 신고 잘 걷는다. 사진기자가 요구하는 대로 포즈도 잘 취해준다. 웃으라고 주문하지 않아도 내내 웃고 있다. “활짝 웃어주셔서 좋아요” 하자, “기분이 아주 좋아서 그래요. 사진기자가 즐겁게 촬영하게 해주네요” 한다.
이 회장을 보고 간호복 차림의 꽃다발을 든 학생 여럿이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고 몰려든다. 그는 흔쾌히 응해준다. 옆에 있던 학교 관계자가 “좀 전에 나이팅게일 선서식을 한 간호학과 2학년생들”이라고 설명했다.
새로 지은 건물들이 많지만 널찍한 공간에 나무들이 곳곳에 자리해 캠퍼스는 차분하면서 편안한 분위기다. 작은 조롱박들이 지붕에 달린 오두막에서 포즈를 취한 이 회장은 둘러선 나무들을 정겹게 바라보았다.
“조그마할 때 양재동 화훼시장에서 사서 집에서 3~4년간 키워 이곳에 옮겨 심은 것들이죠.”

건강 비결은 매사에 좋게 생각하는 습관
가천의과학대 이사장실인 집무실에서 이 회장과 마주 앉았다. 가천길재단은 산하에 길병원과 가천의과학대, 경원대, 가천문화재단, 경인일보 등을 두고 있는데, 그는 경원대에서 총장으로 재직하고 다른 곳에서는 모두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야채 주스를 한 잔 마시고, 우유와 토마토 주스를 마시죠. 점심 저녁은 밖에서 먹는데, 가리는 거 없어요. 개하고 뱀만 빼고(웃음). 저 대식가예요. 지난번에 골프 치는데 혼자만 빵하고 두유를 먹으니까 같이 간 사람들이 젊은 사람 같이 먹는다고 하더라고.”
그는 최근 2년 반 만에 길병원에서 위 내시경 검사를 했는데 “장기가 청년 같다”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활짝 웃는다. 아침 7시50분쯤 보고서를 검토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이 회장은 빽빽한 스케줄로 인해 밤 10~11시에 일을 끝내는 날이 적지 않다고 한다. 늘 바쁜 생활을 하면서도 지치지 않는 그가 첫손에 꼽는 건강비결은 뭘까.
“매사에 좋게 생각하는 습관이죠. 왜 그런 얘기 있잖아요. 우산장수, 짚신장수 아들 둘을 둔 엄마가 날마다 걱정만 한다고. 비가 오면 짚신 안 팔릴까 걱정, 날이 개면 우산장사 망할까봐 걱정한다고요. 그런데 저는 정반대예요. 비가 오면 우산장수 아들 좋겠다고 하고, 맑으면 짚신장수 아들 좋겠다는 식이죠.”
이런 성격은 최근 그가 펴낸 자전 에세이 ‘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해라’에서도 엿볼 수 있다. 삶의 긍정적인 면에 시선을 고정시켜 열정을 쏟아붓고 꿈을 이룬 모습이 잔잔한 에피소드 속에 그려져 감동을 전한다. 특히 ‘깡촌 소녀 이길여’의 성장기와 ‘젊은 산부인과 의사 이길여’의 도전기 등은 마치 한편의 동화처럼 가슴 뭉클하게 아름답다.



1 2 미국 유학 후 한국으로 돌아와 병원을 열고 한창 환자를 돌보던 젊은 시절의 이 회장.
3 이 회장이 ‘이길여 산부인과’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4 마흔이 넘은 나이에 떠난 일본 유학 당시 니혼대 연구실 앞에서 동료들과 함께한 이 회장(오른쪽).
5 ‘촌구석’에서 태어나 여자의 몸으로 서울대 의대에 당당히 합격했을 때의 모습(가운데).
6 이리여고 시절 친구와 함께한 이 회장(왼쪽).
7 군산도립병원 근무 당시 만난 퀘이커의료봉사단의 영국인 의사 골든은 진정한 봉사가 무엇인지 행동으로 가르쳐줘 훗날 이 회장이 의사 생활을 하는 데 이정표가 됐다.

‘여자의 설움’ 맛본 어린 시절,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 되리라” 결심
전북 옥구군 대야면 죽산리. 이른바 ‘깡촌’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여자의 설움’을 톡톡히 맛봤다. 첫딸에 이은 둘째는 꼭 아들이기를 바라던 집안 어른들은 그가 딸이라는 사실에 너무나 실망했고, 그의 어머니는 ‘딸 낳은 죄인’이 됐다. 더욱이 자궁외임신으로 수술을 해 더 이상 아이를 못 낳게 되면서 시어머니에게 모질게 구박당하는 며느리가 됐다. 어머니의 눈물을 보며 어린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아서인지 그는 여섯 살이 될 때까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날 말문이 터지자 ‘마을에서 가장 말 잘하는 아이’로 통할 만큼 활달한 모습으로 변했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그를 껴안고 ‘두고 봐. 이 아이를 어느 아들 못지않게 훌륭한 딸로 키우고 말 거야’라고 다짐, 또 다짐했다고 한다. 그 영향인지 그 또한 ‘내가 남자였으면…’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그래, 딸이 아들보다 낫다는 걸 보여주고 말 테다.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돼 세상 남자들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줄 거야.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이 될 거야!’ 이를 악물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스스로 최면을 걸듯 되새겼다.
그는 악착같이 공부했다. 초등학교 1학년 첫 시험에서 1등을 하자 주위 사람 모두 눈을 비비며 놀라워했다. 줄곧 1등을 달렸다. 여자라고 해서 못하는 것도 없었다. 반장을 도맡았고 말 타기 대장도 했다. 여학교에 다닐 때도 그는 수석을 놓치지 않으며 공부에 매달렸다. 집집마다 호롱불을 쓰던 시절, 마을에서 전깃불이 들어오는 곳은 방앗간뿐이었다. 그는 저녁상을 물리기 무섭게 책 보따리를 들고 방앗간에 달려가 공부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 밖에 나와 서 있던 어머니가 “무섭지 않냐? 귀신 나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하면 그는 “그까짓 게 뭐 무서워? 아까 공부한 거 큰 소리로 외우면서 오면 금세 오는데 뭘!” 모녀는 늘 똑같은 말을 주고받으며 마주보고 웃었다.
“나중에 어머니가 말씀하시데요. 다른 아이 같으면 밤길이 무서워 돈을 줘도 가지 않았을 텐데, 어린 것이 공부하겠다고 방앗간까지 매일 오가는 것이 기특하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했다고.”

천덕꾸러기 딸이 꿈을 이루도록 뒷바라지해준 어머니
그는 초등학생 시절 이미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소꿉친구가 전염병으로 죽었는데, 그땐 아이가 죽으면 가마니에 말아 지게에 지고 가서 논두렁에 묻었죠. 지금은 나와 죽음이 얼마 멀지 않다고 느끼지만 고만할 땐 상상도 못할 일이잖아요? 어린 가슴에 충격을 받았고,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죠.”
그의 나이 열다섯 살 때 아버지가 급성폐렴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자 의사가 되겠다는 꿈은 확고부동한 목표로 자리 잡았다.
“아버지는 평소 감기 한번 걸리는 일 없이 건강하셨죠. 그런데 서른다섯밖에 안 된 젊은 아버지가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다며 몸져 누운 지 닷새 만에 돌아가셨어요. ‘일본에서 병이 났더라면 병원 치료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아버지 시신 앞에서 목 놓아 울던 삼촌의 말이 오래도록 귀에 울렸죠.”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가세가 기울자 친할머니는 “길여의 학업을 그만두게 하자”고 나섰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전교 1등하는 아이에게 그렇게 할 수는 없다”며 끝까지 막아섰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6·25가 터졌을 때도 그는 방공호에 들어가 촛불을 켜놓고 공부했고, 1951년 치열한 전쟁 와중에 서울대 의대에 합격했다.


“당시엔 여자가 의대에 진학하는 게 오히려 흉이 됐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아무 걱정 말고 공부하라’며 다독여주셨죠. 의대에 다닐 때는 편지에 늘 ‘엄마 사는 재미는 너 공부하는 거 보는 거다’라고 써보내주셨어요. 또 아직 괜찮으니까 편안하게 하숙하면서 공부하라고 돈을 보내주시고, 힘든 내색 한번 안 하셨죠.”
그는 대학 졸업 후 인천에 자성의원을 열었다. 환자들을 보느라 바쁜 와중에 여기저기서 맞선자리가 들어왔다. 딸에게 간섭하는 일 없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던 어머니가 그때부터는 틈만 나면 “선 봐서 결혼하라”며 성화였다. 하지만 “선 볼 시간 있으면 환자 한명 더 볼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던 그는 선진 의료기술을 배우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서른두 살 때였다. 처음에 유학을 만류하던 어머니는 섭섭한 마음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딸에게 “내 걱정 하지 마라. 네가 훌륭한 의사가 돼 잘 살면 바랄 게 없으니 돌아오지 마라”는 말을 했다.






1 총장으로 있는 경원대 학생들과 함께한 이 회장.
2 백령도와 대청도 등 서해 섬지역 주민들의 진료를 담당한 백령길병원 앞에서 직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3 이 회장은 해마다 가천의대 졸업생들의 목에 직접 청진기를 걸어준다.


4 길병원의 무의촌 무료 진료 모습. 그가 무의촌을 찾으면 평생 병원 한 번 가본 적 없고 의사 얼굴 처음 본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5 자유롭고 활기 넘쳤던 미국 유학시절. 당시 이 회장은 동료들과 함께 종종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6 지난 89년 길병원에서 인천의 첫 네 쌍둥이로 태어난 슬·설·솔·밀 자매와 함께.
7 이 회장은 백령길병원을 운영하면서 ‘심청효행상’을 제정해 전국 초중고 여학생 가운데 효성이 지극한 이들을 뽑아 시상했다.

“제가 떠난 날 어머니가 고향마을 나무 밑에서 주저앉아 홀로 우셨다는 얘기를 나중에 전해들었어요. 주위 사람들에게 딸이 원하는 일이 있는데 내가 방해하면 되겠느냐고 하셨대요.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아프죠.”
그는 유학생활 5년 만에 어머니의 나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온 날 속시원하게 눈물보따리를 풀어놓은 그의 어머니는 평생을 딸 걱정, 딸 뒷바라지에 매달려 살았다.
“유학 후 밀려드는 환자들 돌보느라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하고 잠도 편히 못 자는 저 때문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으셨죠. 자리에 누우셨을 때도 어머니는 ‘나는 네가 있어 죽을 때가 돼도 이리 호강하는데 너는 어떻게 하냐. 누가 있어 훗날 널 거둘까’ 하며 제 걱정을 하셨어요. 평생 아낌없이 베풀기만 하고 가신 어머니는 지금도 제 인생 최고의 스승이죠.”
이 회장은 미국 뉴욕 메리 이머큘리트 병원(Mary Immaculate Hospital)에서 인턴 과정을, 퀸스종합병원(Queen’s Hospital Center)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마쳤다. 그는 “뉴욕은 엄격한 유교 집안에서 자란 나에게 무한한 자유를 안겨준 동시에 두꺼운 껍질을 벗게 해준 도시였다”고 회고한다. 뉴욕 생활 5년 간을 그는 ‘인생의 황금기’로 꼽는다. 선진 의료시스템과 의료기술을 배운 것은 물론 세상을 크고 넓게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웠다는 것이다. 또한 “이때 무슨 일이든 거침없이 실행하는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했다”고 덧붙인다.

유학시절 청혼 거절하고 귀국해 ‘환자들과 결혼’


이 회장은 처음으로 뉴욕에서의 짧은 로맨스도 공개했다. 퀸스종합병원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마칠 무렵, 어느 날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한국 남자가 꽃을 들고 찾아왔다. 식료품점에서 그를 보고 점원에게 근무지를 물었다고 했다. 두 살 많은 교포 사업가였다. 그는 예쁜 원피스에 브로치를 다는 등 한껏 멋을 내고 차문을 열고 닫아주는 매너를 지닌 그 남자와 로맨틱한 데이트를 즐겼다고 한다. 주말엔 뉴욕 외곽의 공원으로 피크닉을 가기도 했다. 그곳에서 나란히 누워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고 새벽 이슬을 맞을 때까지 춤도 췄다.
그 남자의 청혼을 거절한 날 그는 밤새 울었다고 한다. 이미 그는 귀국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제 머릿속엔 가난하고 못 배우고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수많은 환자들이 절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는 “내가 의사가 된 것과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게 된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단언한다. 때문에 “혼자 살아온 삶에 한 점의 아쉬움도 후회도 없다”고.
귀국 후 그는 처음 병원 문을 열었던 그 자리에 ‘이길여 산부인과’를 차렸다.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의사가 거의 없을 때여서 소문이 퍼지자 병원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산부인과 의사가 여자라는 점도 환자를 몰리게 하는 데 한몫했다.
밤낮없이 밀려드는 환자를 보기 위해 그는 근 10년 동안 하루를 한 끼 식사로 때웠다. 병실이 부족할 때는 병원 꼭대기에 있는 자신의 방에도 환자를 들였다. 당시만 해도 병원비를 안 내고 도망가는 환자들 때문에 병원들은 반드시 보증금을 받아야 수술을 해주고 입원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그는 보증금 없이도 수술을 해주었고 무료진료권을 나눠주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내성 있는 균이 드물어서 페니실린이나 마이신 주사만 놓아줘도 병이 낫는 경우가 많았어요. 하지만 의식주 해결이 안 될 때니 병원비가 없어 그냥 집에서 죽을 날 기다리는 경우도 허다했죠. 자궁외임신은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몰라 생명을 잃는 사람도 많았어요.”
그는 ‘의사 얼굴을 하느님 보듯 하는’ 환자들을 한시라도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2층 수술실로 올라갈 때 그의 언니는 그 순간을 포착해 달걀노른자를 넣은 우유를 마시게 하려고 쫓아왔다. 하지만 우유 한 잔 먹을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다. 심지어 좀 더 많은 환자를 보기 위해 진찰실에서 바퀴 달린 의자를 사용했다. 시간을 절약하려고 침대 3개를 놓고 의자를 밀면서 다녔는데, 방향이 조금 엇나가면 벽에 부딪히거나 침대 모서리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지만 순간순간이 행복했어요. 이제 다 나았다는 소리를 매일같이 수백명에게 듣는 게 얼마나 신나고 즐거운 일이었겠어요.”




이길여 회장은 사업가로서 아무리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도 꼭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망설임없이 결정하는 ‘배포’를 보여 주위에서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이렇게 환자들과 더불어 지내면서 그의 ‘젊은 날’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 시절을 떠올리며 이 회장은 핑크빛 잠옷 얘기를 들려줬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 사왔는데, 한 번도 입지 못했다고. 잠옷을 갖춰 입고 침대에서 제대로 잘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사온 지 10년쯤 지나니 살이 쪄서 어깨 부분이 껴 그만 입을 수 없게 됐다고 한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서인지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고.
“지금 봐도 예뻐요. 소매 없는 원피스에 가운을 걸치게 돼 있는데, 한동안 벽에 걸어놨다가 지금은 장롱에 넣어두었죠.”
이 회장은 ‘핑크빛’을 가장 좋아하는 색상으로 꼽는다.
병원일에만 파묻혀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르고 지내던 그는 두 번째 도전을 감행했다. 마흔세 살의 나이로 일본 유학을 떠난 것이다. 그는 2년 만에 박사학위를 따왔다. 특히 그는 일본에서 인생의 전기가 될 만한 세 가지 중요한 결심을 했고, 귀국해 차근차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첫째 결심은 종합병원을 만들겠다는 것, 둘째는 의료 취약지역에 병원을 세우겠다는 것, 마지막으로 좋은 의사를 많이 기르기 위해 교육에 힘쓰겠다는 것이었다.
78년 먼저 그는 그간 모은 돈으로 대사업을 벌였다. 의료법인 길병원을 만들어 종합병원을 설립한 것. 민간으로서는 최초 의료법인으로, 개인 소유의 것을 사회에 내놓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병원이 완공되기까지 무수한 소문이 나돌았다. “이길여가 병원을 짓느라 부도를 냈다” “완전히 망했다”에서 “이길여가 빚에 몰려 자살했다”는 소문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정작 그는 실패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직 경인지역 최대 병원으로 길병원을 키우겠다는 의지밖에 없었다.

큰 ‘배포’로 사업 펼쳐 주위에서 혀 내두르게 만들어


이길여 회장의 병원 운영방식은 그야말로 저돌적이다. 병원을 확장해나갈 때 그는 매번 5년을 승부를 내는 기간으로 삼았다고 한다. 새로 일을 벌일 때 그는 5년짜리 부금을 들고 수지타산을 맞춰보아 적자를 감당해낼 수 있다는 판단이 서면 곧바로 뛰어드는 방법을 취해왔다. 길병원(동인천) 설립을 시작으로 82년 양평 길병원, 87년 중앙 길병원, 88년 철원 길병원, 93년 남동 길병원 등을 차례로 열어 거대한 ‘의료왕국’을 이룩했다.
그는 아무리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도 꼭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망설임 없이 바로 결정하는 ‘배포’를 보여 주위에서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최근 6백40억원을 들여 뇌과학연구소를 건립하는가 하면 6백70억원을 투자한 암·당뇨연구원도 개원했다. 내년엔 22층 규모의 최첨단 의료장비를 갖춘 암센터를 완공해 길병원이 ‘동북아 허브 병원’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든다는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한편 그는 ‘의료사업’이 ‘봉사’를 겸해야 한다는 뜻이 굳다. 적자를 감수할 생각으로 양평·철원 등 의료 취약지역의 병원을 인수했을 때는 직원들의 반대를 단호히 물리치기도 했다. 학비가 전액 무료인 가천의과학대를 설립할 때도 마찬가지.
“어릴 때 어머니께서 ‘다른 사람에게 덕을 베풀면 후대에 받는다’고 하셨죠. 걸인에게 좋은 옷을 주셔서 제가 불평을 하면 너희대에 다 잘살 거라고 하셨던 말씀이 안 잊혀요. 그래서 직원들에게 그랬죠. 좋은 일 하면 후대에 그대로 받는다는데 나는 자식이 없으니, 여러분의 자녀가 나중에 다 복받을 거 아니냐고요.”
이 회장에게 직원 5천여 명의 대한민국 대표 공익법인인 가천길재단을 이끌어온 리더십은 어떤 것인지 물었다. 그는 “한마디로 사랑”이라고 답한다. 사랑을 바탕으로 한 헌신이 사람을 끌어당긴다는 것. 자신의 성공비결로 첫손에 꼽는 게 ‘열정’이라고 밝히는 이 회장은 70여년간 살아온 인생에 대한 정의도 명쾌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살다 가는 것은 정말 복받은 거예요. 정자 몇십만 개의 경쟁을 뚫고 엄마 배 속에서부터 혜택을 받아 태어나는 것이거든. 큰 축복을 받았으니 꽃을 피우고 받은 것을 갚고 가야죠. 전 젊은 시절부터 인생이 짧은 거라 생각했어요. 너무나 짧은 인생길, 주어진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해 살아야지요.”
이 회장의 취미는 무얼까. 그는 얼마 전 글씨공부를 하려다 그만뒀다고 한다.
“글씨를 쓰려면 명상을 오래 해야 하는데 도무지 시간을 낼 수가 없어요. 열심히 일하는 게 취미라고 할까. 일에 몰두하는 게 행복하고 즐거워요.”




가천의과학대 교정에서 나이팅게일 선서식을 하고 나오는 간호학과 학생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이 회장.
그는 잠자리에 들면서도, 잠에서 깨어나서도 할 일을 계획하고 떠올리면 의욕이 넘친다고 한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좋은 아이디어를 메모지에 적어놓기도 한다는 그는 “좋은 아이디어는 순간 왔다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귤을 크기에 따라 뚝뚝 떨어뜨리는 컨베이어 벨트를 생각해보면 돼요. 줍지 않으면 떨어져 흘러가는 거죠. 그 시간, 그 순간에 줍지 않으면 계속 못 주워요.”
그는 막 일을 시작한 신입사원처럼 의욕에 넘치는 모습이다.
이 회장의 애창곡은 신나는 리듬의 ‘여행을 떠나요.’
“우리 학생들이 무대를 꾸밀 땐 언제나 그 음악을 틀어요(웃음).”
“아까 보니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 같다”고 하자 “내가 나타나면 특히 신명여고(94년 신명학원 인수) 학생들은 연예인 대하듯 열광한다”고 웃으며 답한다. 인터뷰를 지켜보던 학교 관계자가 한마디 거들었다. 이 회장에게 좋은 기(氣)를 받아 좋은 대학에 가겠다고 하면서 그의 손을 잡으려는 쟁탈전도 치열하다고.
인터뷰를 마치며 기자도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저도 좋은 기를 좀 받을게요.”



▼ 이길여 회장은…
1932년 전북 옥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미국 메리 이머큘리트 병원과 퀸스종합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마쳤으며, 일본 니혼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 후 이길여 산부인과를 개원했으며 의료혜택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무료 진료를 실시하고 병원 보증금을 없애는 등의 노력으로 병원 문턱을 낮췄다. 78년 전 재산을 털어 의료법인을 설립했고 여러 전문 병원을 열었다.
현재 직원 5천여 명의 대한민국 대표 공익법인 가천길재단의 회장으로 의료와 교육·문화·언론을 아우르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 길병원·경원대·가천의과학대·경인일보 등을 직접 운영하고 있으며, 가천문화재단·가천박물관·새생명찾아주기운동본부·가천미추홀봉사단 등의 문화 및 봉사 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200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여성동아 2008년 12월 5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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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 함석헌 무교회에서 퀘이커교로



함석헌기념사업회



신천 함석헌 / 오강남
작성자 바보새 16-07-19 10:54 조회1,039회 댓글0건


신천 함석헌
민주화에 앞장섰던 행동하는 신비주의자 법보신문 2011.03.26 11:42 입력 발행호수 : 1089 호 / 발행일 : 2011년 3월 23일


한국역사를 고난의 견지에서 재해석
종교개혁은 동양고전을 통해서 가능
‘씨알의 소리’창간 군부 독재에 맞서




▲함석헌은 1974년 윤보선(왼쪽에서 세번째), 김대중(왼쪽에서 네번째) 전 대통령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운동본부 고문을 맡아 민주화운동에 앞장 섰다.






다석 류영모가 가장 아꼈던 제자가 함석헌(咸錫憲, 1901~1989)이고 함석헌이 가장 존경했던 스승 또한 류영모였다. 두 사람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흰 두루마기를 즐겨 입었고 수염을 길렀다. 근본 사상도 여러 면에서 비슷했다. 그러나 함석헌은 스승 류영모에 비해 키도 크고 외모가 출중했다. 류영모는 삶이 은둔적이고 금욕적이라면 함석헌은 사회개혁에 적극적이었다. 신비주의 전통의 용어를 빌리자면 함석헌은 ‘행동하는 신비주의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함석헌은 평안북도 황해 바다가 용천에서 3남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6세 때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사립학교 덕일 소학교에 입학하면서 댕기머리를 잘랐다. 그는 사립초등학교에서 ‘하느님과 민족’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16세에는 양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의사가 될 목적이었다. 학교에서 과학을 배우면서 성경에 대한 의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1901년 평북에서 출생

함석헌은 평양고보 3학년 때인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결국 학업을 중단하고 수리조합 사무원, 소학교 선생으로 일해야 했다. 21세가 되던 해 다시 학업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지만 어디에도 받아주는 데가 없었다. 그러다가 집안의 형님 되는 함석규 목사를 만나, 정주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 할 수 있었다. 그는 그해 늦여름 류영모가 오산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평생의 스승을 만나게 됐다. 그는 이때 류영모를 통해 기독교뿐만 아니라 노자와 같은 동양 사상을 접하게 된다. 그러면서 마음으로부터의 믿음을 생각하게 되고 또한 교조주의로 흘러가는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가지게 됐다.

그는 1924년 지금의 교육대학에 해당하는 도쿄 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우치무라의 무교회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스승 류영모에 의해 익히 들었던 인물이었다. 그 모임은 별도의 예배 없이 성경을 읽고 십자가에 의한 속죄를 강조했다. 함석헌은 이곳에서 사회주의와 기독교 사이에서 머뭇거리던 번민에서 벗어나 크리스챤으로 나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

1928년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오산학교로 돌아와 역사를 가르쳤다. 그러나 이내 후회가 밀려들었다. 역사란 것이 온통 거짓말투성이일 뿐 아니라 한국 역사가 비참과 부끄럼의 연속이어서 학생들에게 그대로 가르치자니 어린 마음에 자멸감과 낙심만 심어줄 것 같아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고난의 메시아가 영광의 메시아라면, 고난의 역사는 영광의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다시 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국 역사의 기조(keynote)를 고난(suffering)으로 보고 이런 역사관에 입각해서 한국 역사를 재해석해 낸 것이다. 후에 우치무라의 성서연구모임에 참석했던 유학생들이 귀국해 성서연구모임을 만들고 ‘성서조선(聖書朝鮮)’이라는 동인지를 발간했는데, 함석헌은 고난의 견지에서 한국 역사를 새로 조명하는 글을 연재했다. 이것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라는 명작이다. 이 책은 나중 ‘뜻으로 본 한국 역사’라는 이름의 개정판으로 나왔고 영문판이 출간되기도 했다.

그는 오산학교에 10년간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무교회 신자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무교회도 하나의 교파로 굳어갔다. 또 우치무라에 대해서도 개인숭배 현상마저 일어나자 반감이 일기 시작했다. 특히 예수가 내 죄를 대신해서 죽었음을 강조하는 우치무라의 십자가 대속 신앙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오산학교에 있으면서 한국의 구원은 ‘믿음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을 통해 농촌을 살려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1936~1937년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정점에 달하면서 오산학교 관계자들도 점차 총독부와 타협하기 시작했다. 그는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송산농사학교로 옮겨갔으나 설립자가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검거됨에 따라 덩달아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는 해방 전에 4차례, 그 이후로도 3차례 옥고를 치렀다. 비록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그에게는 사상적으로 심화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는 감옥에서 불교 경전을 읽었고 노장 사상을 숙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신비적인 체험’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경험을 통해 그는 모든 종교는 궁극에 있어서는 하나라는 확신에 이를 수도 있었다.

함석헌은 감옥에서 깨달은 바를 스스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장차 오는 시대의 말씀은 무엇이며, 누가 받을까. 새 종교개혁이 있기 위해 이번도 새 학문의 풍(風)이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역시 과거의 새로운 해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고전(古典) 연구가 필요하다. 그 고전은 어떤 것일까. 서양 고전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다 써먹었다. 그럼 동양 고전을 다시 음미하는 수밖에 없을 거다. 막다른 골목에 든 서양문명을 건지는 길은 동양을 새로 맛보는 데서 나올 것이다.”

함석헌은 “기성 종교는 국가주의와 너무 깊이 관련되었기에 낡은 문명과 함께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종교 없는 그리스도교를 말한 디트리히 본회퍼나 예수 탄생 때 동방에서 선물이 온 것처럼 지금도 동방에서 새로운 정신적 선물이 와야 한다고 한 토마스 머튼의 이야기와 닮아있다.

무교회에서 퀘이커교로

함석헌은 해방 후 강권에 의해 임시자취위원회 회장이 되고, 이어서 평안북도 임시정부 교육부장의 책임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반공 시위인 신의주 학생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소련군 감옥에 두 번이나 투옥되는 수난을 겪었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남한으로 넘어왔다. 그는 월남 이후 무교회 친구들의 협력으로 일요 종교 강좌를 열어 1960년까지 자신의 생각을 펼쳤다. 젊은이들 사이에 그의 사상에 공명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그의 생각이 일반에게 알려지면서 한국 교회는 그를 이단으로 낙인찍고, 그의 무교회 친구들도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세 가지 주된 이유는 그가 십자가를 부정하고, 기도하지 않고, 너무 동양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함석헌은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십자가에서 몸소 지는 십자가를 강조한 것이고, 기도도 형식과 인간끼리의 아첨에 지나지 않는 공중기도를 삼갈 뿐이라고 했다. 또 동양 종교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그저 교파적인 좁은 생각에 동양적인 것을 배척하는 것에는 결코 동조할 수 없었다. 결국 표층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심층 종교로 들어가는 함석헌을 이해할 수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런 일로 구태여 무교회와 결별할 생각은 없었다. 무교회를 떠난 결정적 계기는 ‘중대한 사건’ 때문이었다. 그가 오산 시절부터 간디를 좋아해 간디 연구회를 만들 정도였는데, 동지들 사이에서 간디의 아슈람 비슷한 것을 만들자는 제안에 따라 1957년 천안에 ‘씨알농장’을 만들고 젊은 몇 사람과 같이 지내게 되었다. 이 때 ‘도저히 변명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형세는 돌변했다. 친구들이 모두 외면하고 떠나버린 것이다. 견딜 수 없이 외로웠다. 그러면서 관념적으로 믿고 있고 감정적으로 감격하던 십자가가 본인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스승 류영모마저도 그를 공개적으로 질책하고 끝내 그를 내쳤다. 그러나 물론 그에 대한 사랑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석일지’에 보면 “함은 이제 안 오려는가. 영이별인가.”하며 탄식하는 등 7~8회에 걸쳐 제자 함석헌을 그리는 글이 나온다. 류영모는 “내게 두 벽이 있다. 동쪽 벽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고 서쪽 벽은 함석헌이다.”고 할 정도였다.

심정적으로는 아닐지라도 겉으로는 스승으로부터도 버림받아 홀로 된 그에게 퀘이커교가 나타났다. 퀘이커교에 대해서는 오산 시절부터 들었지만 ‘좀 별난 사람들’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한국 전쟁 후 구호사업으로 한국을 찾은 퀘이커교도들을 만나 처음으로 퀘이커교 신도가 된 이윤구를 통해 퀘이커교를 접하게 되었다. 그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퀘이커교 모임에 나갔다. 

1961년 겨울이었다. 그리고 196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퀘이커교 훈련 센터인 펜들힐(Pendle Hill)에 가서 열 달 동안, 비슷한 성격의 영국 버밍엄에 있는 우드브루크(Woodbrooke)에 가서 석 달 동안 지내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특별히 퀘이커교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가 1967년 미국 북 캐롤라이나에서 열렸던 퀘이커교 세계 대회에서 결국 퀘이커교 정회원이 되었다.

간디 존경…씨알농장 열어

함석헌은 류영모와 달리 현실참여에 적극적이었다. 1961년 장면 정권 때 국토 건설단에 초빙되어 5·16 군사 정권이 들어오기 전까지 정신교육 담당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0년에는 잡지 ‘씨의 소리’를 창간했다. 그의 ‘씨 사상’을 널리 펼치고 동시에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대변하기도 했는데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 의해 폐간되었다가 1988년 8년 만에 복간되었다. 군사 정권에서는 군사 독재에 맞서서 1974년 윤보선, 김대중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운동본부의 고문역을 맡아 시국선언에 동참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느라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다. 이런 민주화 운동을 인정받아 1979년과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 퀘이커교 봉사회의 추천으로 노벨 평화상 후보자로 추천되기도 했다. 그는 1989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산학교장으로 치러진 그의 몸은 경기도 연천읍 간파리 마차산에 묻혔다. 그러다가 2002년 8월15일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이 추서되면서 대전 국립 현충원에 이장됐다.




함석헌은 동서고금의 정신적 전통에서 낚아낸 깊은 사상을 바탕으로 일생을 통해 일관되게 생명, 평화, 민주, 비폭력 등을 위해 힘쓴 행동하는 신비주의자였으며 한국의 간디라 할 수 있다. 그는 류영모의 제자이지만, 어느 면에서 스승이 이루지 못한 부분을 보충했다는 의미에서 ‘청출어남이청어남(靑出於藍而靑於藍)’의 경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함석헌 오모여인과 동침…자신의 죄 고백 - 뉴시안



함석헌 오모여인과 동침…자신의 죄 고백 - 뉴시안
<함석헌과 한국교회> 함석헌 오모여인과 동침…자신의 죄 고백

박신애 기자
승인 2012.08.17



(19)젖을 내라는데 어미가 썩었소!-1

죄는 참말로는 없다던 함석헌이 이제는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어떻게 된 일인가? 우선 그가 1960년 9월 30일에 독일에 있는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18-23)를 읽어보자.

“안 형, 편지 받았습니다. 멀리 계신 형께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느 때 가서는 해야 하지만, 그래도 본국에 돌아오시기나 한 다음 하려고 했는데, 사실은 그래서 지난 봄 이래 편지 아니 드렸었는데, 이렇게 자꾸 형께로부터 글을 받으니 회답은 해야 하고, 회답을 하게 되니 이 이상 더 속이고 있을 수가 없어졌습니다.
내가 분명 죄 되는 일을 한 게 있습니다. 벌써 전부터 있던 일이지만 그것이 금년 1월에 와서 가까운 친구들에게 알려져 문제가 되었습니다. 단식도 그래 했고, 글과 말을 그만두고 모임을 중지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금 할 수 없고, 한 마디만 들어두십시오. 여성문제에서 잘못한 것입니다. 놀라고 슬퍼하실 줄 압니다마는 사실입니다. 친구들 다 소식 끊어졌고, 유(영모) 선생도 매우 섭섭하게 여기시는 중입니다.”

여성문제에서 잘못을 했다니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인가? 이 사람은 이말 하고 저 사람은 저말 하지마는 김용준 교수가 <내가 본 함석헌>에서 말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내용일 것이다.

함석헌은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천안에서 ‘씨알의 농장’을 경영한 일이 있는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나온 오모 여인이 자진하여 이 농장에 와서 취사와 살림살이를 돕고 있다가 함석헌과 동침을 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 이 여인에게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서 자기의 은사인 김석묵 교수에게 이 사실을 고백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60년 초부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함석헌은 고난의 세월을 지나가게 된다. 앞에서 인용한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의 당시 심정을 잘 읽을 수 있다.

“미국을 간다 한 것도 이래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낡은 나를 완전히 장사지내고 새로 나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내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외롭습니다. 그래서 퀘이커 교도한테 가, 그들을 거쳐 인도로 가서 내 마음의 정화를 힘써볼까 합니다. 그러니 외국 간다 하여도 신이 나는 것도 아니요 한낱 연옥(煉獄)걸음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선 형이 나를 친구로 계속 대해주겠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나로서는 그럴 염치(가) 없고, 형의 넓은 생각에 달렸습니다. 지금까지는 잘못했으나 이 이상 더는 할 수 없으니 안면으로 친구 노릇을 할 수는 없고, 정말 용서를 하신다면 친구관계를 계속하지만 만일 형의 마음에 그리 못된다면 차라리 교통 아니 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를 버리지 않거든 또 소식 주시오. 아아!”

이 편지에서 “내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외롭습니다. 그래서 퀘이커 교도한테 가, 그들을 거쳐 인도로 가서 내 마음의 정화를 힘써볼까 합니다”라는 구절은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함석헌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으로부터 절교를 당하고 외로움을 견디기 어려웠을 때 그를 찾아온 이윤구 박사의 권유를 받아드려 퀘이커가 된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그는 세계적인 퀘이커 지도자가 된다. 1979년에는 미국 퀘이커봉사회에서, 그리고 1985년에는 세계 퀘이커회에서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받는다.

이 편지뿐만 아니고 1960년대 초에 쓴 그의 글들은 이 용서받지 못할 범죄로 인하여 일어난 그의 처절한 회한과 새로운 다짐으로 가득 차있다. 일례로 1960년 겨울에 그는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16-211)를 번역했는데, 그 서문에서 이 사건에 대하여 울부짖으면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한 많은 이 1960년이 오자마자 아직도 채 녹지 않은 눈 위에 새 꿈을 그리는 하룻날, 내 60년 쌓아온 모래 탑은 와르르 무너졌다.

나와 같이 그 모래 탑을 쌓던 바로 그 사람들이 무너뜨렸다. 모래 탑을 가지고 진짜나 되는 양 체하고 뽐내는 내 꼴이 미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당연하였다.

내 눈에 모래를 뿌리고 내 얼굴에 거품을 끼얹고 발길로 차 던지고 저희도 울고 갔는지 손뼉 치며 갔는지 나 몰라.
나는 영원의 밀물 드나드는 바닷가에 그 영원의 음악 못들은 척 뒹굴고 울부짖고, 모래에 얼굴을 파묻고 죽었었다.

그동안 왔대야, 무한의 장변을 헤매어 다니는 거지들이 세상모르고 와서 저희보다 더한 나보고 도와 달라 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거기서도 도둑질을 해먹는 것들이 와서 그나마 같은 내 누더기 속에서 뽑아간 것이 있고, 그 남은 모래탑 자국을 다시 한 번 더 짓밟고 거들떠보지도 못하는 낯에 또 한 번 침을 뱉고 간 것뿐이었다.

꽃이 피었다 지고, 장마가 졌다가 개고, 시든 열매가 다 익어 떨어지는 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다.

누가 꼭 일으켜주어야만 될 것 같은데, 조금 부축만 해주면 꼭 일어날 것 같은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따금 저 멀리서 귓결에, 어서 일어나라는 소리가 들려는 왔지만,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원망은 아니 하기로 힘썼다.

십자가도 거짓말이더라.

아미타불도 빈말이더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도 공연한 말뿐이더라.”
그러다가 그는 7년 전에 읽었던 <예언자>를 다시 읽고 그 안에서 그를 일으켜 세워주는 시를 만난다. 지브란은 이 시에서 “악인이란 뭐냐? 스스로 주리고 목말라하는 선일뿐이니라”고 노래한다. 드디어 그는 친구를 만난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노래한다.

“‘모래와 거품’을 노래하는 지브란은 자기도 그 거품을 마시고 그 모래를 뒤집어쓰는 사람이 되어서 나를 일으켜 주었다.

그의 심장의 뛰놂이 내 가슴에 있었고, 그의 숨이 내 얼굴에 와 닿았고, 그리고 그는 나를 안아주었다.
죄인의 친구를 처음으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