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26

Ludrup Yongsoo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고 하는 대신에 자비심을 연습하세요.

(1) Facebook

이 글을 보시고 용수님에게 "너나 잘 하세요"라고 말해주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용수스님의 말도 다 자기집착이라고 하셨다. 나는 이 말이 듣기가 좋던데...

용수스님같은 분도 지적을 받으시는구나. 그러니 용기를 내자. 지적을 받으면 어때. 지적을 하고 비난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럼에도 자비심을 연습하자. 순수한 동기로 타인의 행복과 깨달음을 응원하자. 다른 사람의 입장을 더 많이 생각하자. 비난하고 지적하는 마음에 담긴 분노와 억울함을 이해하는 더 넓은 마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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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와 이야기했다.
엄마의 말이 나에게도 상처가 됐다. 아들은 어떨까?
"엄마가 나만큼 힘들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걔가 힘들긴 뭐가 힘들어요?" 엄마도 아들만큼 힘들다.
듣는 나도 힘들만큼 힘듦이 흘러넘친다.

그래도 그 힘듦을 삶의 모습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이 실존이다.
힘을 주고 참지 말고 너그럽게 받아들이자.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너그럽지 못함도 받아들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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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소녀의 선생님과 면담했다.
나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몇 번이고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데 참았다.
"애들이 힘들어하나요? 화학이 어려워서 힘들어하겠죠."
아이들이 어려워서 힘들어하면 선생도 속상하고 힘들지 않나?
화학이 폐강되어 통합과학만 가르치니 서운하시겠다는 말에,
"아니요. 저는 재밌어요. 가르치는 것 말고 연구도 하고 재밌는 일이 많거든요."
굳이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하려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중학 3년부터 고등과정까지 좋은 과학선생님을 만나지 못한 소녀가 가여웠다.
모의고사에서 과탐을 다 맞았다는데, 배우지 않은 진도까지도 기가막히게 찍었다고 신났다는데, 선생님은 자기가 잘 가르쳐서 그런 거라고 자찬했다. 행복하시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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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희사는 사무량심이라고 한다.
  • 자는 남에게 즐거움을 주려는 마음,
  • 비는 남의 괴로움을 덜어주려는 마음,
  • 희는 남이 괴로움을 떠나 즐거움을 얻으면 기뻐하려는 마음,
  • 사는 남을 평등하게 대하려는 마음이다.

남을 평등하게 대하려는 마음이란 호오,
미추를 떠나 "자,비,희"라는 의도를 넘어, 있는 그대로 대하는 것이다.
옳고 그름의 구분이 없어지는 지평이다.
그리스도교의 구원도 그러하지 않은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고 해서, 우리를 좋아하게 하려고 해서 한 생을 허비합니다. 결국 스스로 괴롭고 억울합니다.
남을 위한 마음과 남을 행복하게 하려고 하는 마음은 반대입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과 나를 좋아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반대입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고 하는 마음도, 나를 좋아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자기집착 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과 사랑을 바라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미움을 받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고 하는 대신에 자비심을 연습하세요.
순수한 동기로 다른 사람의 행복과 깨달음을 응원하세요.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진정 도움이 되는 벗이 되어 주세요.
崔明淑 and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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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comments

  • 希修
    '자비희사'의 '사'는 '자기중심주의 (즉 나의 감정, 신념, 이익 등)에 의해 분별력과 마음챙김이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이라고 저는 알고 있는데, 한국에선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이라는 해석이 더 보편적인 것 같아요. 둘이 완전히 다르진 않지만 완전히 같지도 않은데, 어떤 배경에서 이렇게 갈라진 것일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Upekṣā - Wikipedia
    EN.WIKIPEDIA.ORG
    Upekṣā - Wikipedia
    Upekṣā - Wikipedia
    • Hyun Ju Kim
      希修 배울 때 적어놓은 노트를 찾지 못해서요. 평정심이라고 하는데 잘 모르지만. 죄가 있거나 없거나 착하거나 나쁘거나가 구원받는 데는 상관이 없다는 기독교 원리와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 希修
      Hyun Ju Kim 아, 기독교 얘기를 하셔서 갑자기 생각났는데.. 불교에서는 聖者를 네 단계로 나눕니다: 수다원 - 수다함 - 아나함 - 아라한. 그런데 링크하는 경전에서는, 높은 단계의 성자 한 명에게 보시하는 공덕이 똑같은 보시를 낮은 단계의 성자 100명에게 하는 공덕보다 더 크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의 귀천은 타고나는 신분이 아닌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씀을 하셨기에 부처님을 평등주의자라 부르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선천적인 신분에 의한 귀천 구분에 반대하신 것일 뿐 행동에 의한 귀천 구분까지 반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언급하신 기독교의 평등사상과는 약간 다른 것 같아요. ^^
      Velāma Sutta: About Velā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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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elāma Sutta: About Velāma
      Velāma Sutta: About Velā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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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yun Ju Kim
      希修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아직 기독교도 다 모르겠어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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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ekṣ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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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ions of
Upekkha
EnglishEquanimity
Sanskritउपेक्षा
(IASTupekṣā)
Paliupekkhā
Burmeseဥပေက္ခာ
(MLCTSʔṵ pjɪʔ kʰà)
Chinese
(Pinyinshě)
Japanese
(Rōmajisha)
Khmerឧបេក្ខា
(UNGEGNŭbékkha)
Sinhalaඋපේක්ෂාව
(upēkṣāva)
Thaiอุเบกขา
(RTGSupekkhaa)
Vietnamesexả
Glossary of Buddhism

Upekṣā (Sanskrit: उपेक्षा; PaliUpekkhā ) is the Buddhist concept of equanimity. As one of the Brahma-viharas, virtues of the "Brahma realm" (Pāli: Brahmaloka), it is one of the wholesome (kuśalamental factors (cetasika) cultivated on the Buddhist path to nirvāna through the practice of jhāna.

Pali literature[edit]

Many passages in the Pali Canon and post-canonical commentary identify upekkha as an important aspect of spiritual development. It is one of the Four Sublime States (brahmavihara), which are purifying mental states capable of counteracting the defilements of lust, aversion and ignorance. As a brahmavihara, it is also one of the forty traditionally identified subjects of Buddhist meditation (kammatthana). In the Theravada list of ten pāramī (perfections), upekkha is the last-identified bodhisatta practice, and in the Seven Factors of Enlightenment (bojjhanga), it is the ultimate characteristic to develop.

To practice upekkha is to be unwavering or to stay neutral in the face of the eight vicissitudes of life—which are otherwise known as the eight worldly winds or eight worldly conditions: loss and gain, good-repute and ill-repute, praise and censure, and sorrow and happiness (the Attha Loka Dhamma).[1]

The "far enemy" of Upekkha is greed and resentment, or mind-states in obvious opposition. The "near enemy" (the quality which superficially resembles upekkha but which subtly opposes it), is indifference or apathy.[2]

In the development of meditative concentrationupekkha arises as the quintessential factor of material absorption, present in the third and fourth jhana states:

Table: Rūpa jhāna

Contemporary exposition[edit]

American Buddhist monk Bhikkhu Bodhi wrote:

"The real meaning of upekkha is equanimity, not indifference in the sense of unconcern for others. As a spiritual virtue, upekkha means stability in the face of the fluctuations of worldly fortune. It is evenness of mind, unshakeable freedom of mind, a state of inner equipoise that cannot be upset by gain and loss, honor and dishonor, praise and blame, pleasure and pain. Upekkha is freedom from all points of self-reference; it is indifference only to the demands of the ego-self with its craving for pleasure and position, not to the well-being of one's fellow human beings. True equanimity is the pinnacle of the four social attitudes that the Buddhist texts call the 'divine abodes': boundless loving-kindnesscompassionaltruistic joy, and equanimity. The last does not override and negate the preceding three, but perfects and consummates them."[6]

See also[edit]

References[edit]

  1. ^ Thera, Piyadassi (30 November 2013) [2005]. "The Seven Factors of Enlightenment"Access to Insight. Barre Center for Buddhist Studies. Retrieved 2013-10-07.
  2. ^ Buddhaghosa, Bhadantácariya (2010) [1956]. Vishudimagga: The Path of Purification (PDF). Translated by Bhikkhu Ñãṇamoli (4th ed.). Section 2.101.[pages needed]
  3. ^ Bodhi, Bhikku (2005). In the Buddha's Words. Somerville: Wisdom Publications. pp. 296–8 (SN 28:1-9). ISBN 978-0-86171-491-9.
  4. ^ "Suttantapiñake Aïguttaranikàyo § 5.1.3.8"MettaNet-Lanka (in Pali).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07-11-05. Retrieved 2007-06-06.
  5. ^ Bhikku, Thanissaro (1997). "Samadhanga Sutta: The Factors of Concentration (AN 5.28)"Access to Insight. Retrieved 2007-06-06.
  6. ^ Bodhi, Bhikkhu (5 June 2010) [1998]. "Toward a Threshold of Understanding"Access to Insight. Barre Center for Buddhist Studies. Retrieved 2013-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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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 (불교)

출처: 무료 백과사전 '위키피디아(Wikipedia)'
네비게이션으로 이동검색으로 이동
불교 용어집
, 우페커
파리어उपेक्खा
(upekkhā)
산스크리트어उपेक्षा
(upekṣā)
일본어버림
로마자 : Sha )
영어Equanimity
크메르어ឧបេក្ខា
(Upekkha)
템플릿 보기
불교
파라 꿀
 
토파라 꿀
지계
탈출
정진
닌교
진실
소원
버림
  
롯바라 꿀
지계
닌교
정진
선정
 
동색은 양자에 존재하는 항목

불교 용어 의 버림은 파리어 우페커(巴: upekkhā , 뱃 : upekṣā : 우페 크셔 , 영국 : equanimity ) 에서 유래 하며 편하고  괴롭지 않은 불고 불락  감각상태( 베다나 ) [1 ] ] . 마음의 평화. 방법이 없다 [2] . 마음이 평등하고 고락에 기울지 않는다 [3] .

자애의 명상 편집 ]

상좌부 불교 ( 테라워다 불교 )권에서는 위패서너 의 기초로서 자애의 명상 (mettā bhāvanā, 자비의 명상이라고도 함)이라 불리는 명상이 이루어진다 [4] . 이것은 명칭으로서는 「자」(자애, 미터)만이 전면에 나오지만, 내용적으로는 4무량심의 「자・비・희・버림」모든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 [5] , "버리기" 요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테일러 와다 불교 협회 의 알보 무레 수마나 사라 장로에 따르면, "버리기"는 "감정의 파도가 서 있지 않는다"평온한 마음이지만, 그것은 "둔감하고, 아무것도 관심이 없다, 신경 쓰지 않는, 무관심, 폐쇄적 로 자신의 세계에만 갇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생명을, (직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문제 해결할 수 있는(할 수 있었는)지 지혜를 지켜보는 마음으로 본다" 일이라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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捨 (仏教)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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仏教用語
捨, ウペッカー
パーリ語उपेक्खा
(upekkhā)
サンスクリット語उपेक्षा
(upekṣā)
日本語
(ローマ字Sha)
英語Equanimity
クメール語ឧបេក្ខា
(Upekkha)
テンプレートを表示
仏教
波羅蜜
 
十波羅蜜
布施
持戒
出離
精進
忍辱
真諦
  
六波羅蜜
布施
持戒
忍辱
精進
禅定
 
同色は両者に存在する項目

仏教用語(しゃ)とは、パーリ語ウペッカーupekkhā、 upekṣā: ウペークシャーequanimity)に由来し、でもでもない不苦不楽の感覚状態(ヴェダナー[1]心の平静。かたよりのないこと[2]心が平等で苦楽に傾かないこと[3]

慈愛の瞑想[編集]

上座部仏教テーラワーダ仏教)圏では、ウィパッサナーの基礎として、慈愛の瞑想(mettā bhāvanā, 慈悲の瞑想とも)と呼ばれる瞑想が行われる[4]。これは名称としては「慈」(慈愛,メッター)のみが前面に出て来るが、内容的には四無量心の「慈・悲・喜・捨」全ての要素が含まれており[5]、「捨」の要素も含まれている。

日本テーラワーダ仏教協会アルボムッレ・スマナサーラ長老によると、「捨」は「感情の波が立たない」平静な心であるが、それは「鈍感で、何も興味がない、気にしない、無関心、閉鎖的で自分の世界にだけ閉じこも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はなく、「人々・生命のことを、(直情的に反応するのではなく)どうすれば問題解決できる(できた)かを智慧を以て見守る気持ちで観る」ことだという[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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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9.20 
PTS: A iv 392
Velāma Sutta: About Velāma
translated from the Pali by
Thanissaro Bhikkhu
X

The updated version is freely available at

This version of the text might be out of date. Please click here for more information

On one occasion the Blessed One was staying near Sāvatthī in Jeta's Grove, Anāthapiṇḍika's monastery. Then Anāthapiṇḍika the householder went to the Blessed One and, on arrival, bowed down to him and sat to one side. As he was sitting there, the Blessed One said to him, "Householder, are gifts still given in your family?"

"Gifts are still given in my family, lord, but they are coarse: broken rice cooked with bran, accompanied by pickle brine."[1]

"Householder, regardless of whether a gift is coarse or refined, if it is given inattentively, disrespectfully, not with one's own hand, as if throwing it away, with the view that nothing will come of it: Wherever the result of that gift comes to fruition, one's mind will not incline to the enjoyment of splendid food, will not incline to the enjoyment of splendid clothing, will not incline to the enjoyment of splendid vehicles, will not incline to the enjoyment of the splendid five strings of sensuality. And one's sons & daughters, slaves, servants, & workers will not listen to one, will not lend ear, will not make their minds attend for the sake of knowledge. Why is that? Because that is the result of inattentive actions.

"Householder, regardless of whether a gift is coarse or refined, if it is given attentively, respectfully, with one's own hand, not as if throwing it away, with the view that something will come of it: Wherever the result of that gift comes to fruition, one's mind will incline to the enjoyment of splendid food, will incline to the enjoyment of splendid clothing, will incline to the enjoyment of splendid vehicles, will incline to the enjoyment of the splendid five strings of sensuality. And one's sons & daughters, slaves, servants, & workers will listen to one, will lend ear, will make their minds attend for the sake of knowledge. Why is that? Because that is the result of attentive actions.

"Once, householder, there was a brahman named Velāma. And this was the nature of the gift, the great gift, he gave: He gave 84,000 gold trays filled with silver, 84,000 silver trays filled with gold, 84,000 copper trays filled with gems. He gave 84,000 elephants with gold ornaments, gold banners, covered with nets of gold thread. He gave 84,000 chariots spread with lion skins, tiger skins, leopard skins, saffron-colored blankets, with gold ornaments, gold banners, covered with nets of gold thread. He gave 84,000 milk cows with tethers of fine jute and copper milk pails. He gave 84,000 maidens adorned with jeweled earrings. He gave 84,000 couches spread with long-fleeced coverlets, white wool coverlets, embroidered coverlets, rugs of kadali-deer hide, each with a canopy above & red cushions on either side. He gave 84,000 lengths of cloth — of finest linen, of finest cotton, of finest silk.[2] To say nothing of the food & drink, staple & non-staple food, lotions & beddings: They flowed, as it were, like rivers.

"Now, householder, if the thought should occur to you, 'Perhaps it was someone else who at that time was Velāma the brahman, who gave that gift, that great gift,' that's not how it should be seen. I was Velāma the brahman at that time. I gave that gift, that great gift. But in that gift there was no one worthy of offerings; no one purified that gift.

"If one were to feed one person consummate in view, that would be more fruitful than the gift, the great gift, that Velāma the brahman gave.

"If one were to feed one once-returner, that would be more fruitful than the gift, the great gift, that Velāma the brahman gave, and if [in addition to that] one were to feed one person consummate in view, and to feed 100 people consummate in view.

 "If one were to feed one non-returner, that would be more fruitful than... if one were to feed 100 once-returners.

"If one were to feed one arahant, that would be more fruitful than... if one were to feed 100 non-returners.

"If one were to feed one Private Buddha, that would be more fruitful than... if one were to feed 100 arahants.

"If one were to feed one Tathagata — a worthy one, rightly self-awakened — that would be more fruitful than... if one were to feed 100 Private Buddhas.

"If one were to feed a community of monks headed by the Buddha, that would be more fruitful than... if one were to feed a Tathagata — a worthy one, rightly self-awakened.

"If one were to have a dwelling built and dedicated to the Community of the four directions, that would be more fruitful than... if one were to feed a community of monks headed by the Buddha.

"If one with a confident mind were to go to the Buddha, Dhamma, & Sangha for refuge, that would be more fruitful than... if one were to have a dwelling built and dedicated to the Community of the four directions.

"If one with a confident mind were to undertake the training rules — refraining from taking life, refraining from taking what is not given, refraining from illicit sex, refraining from lying, refraining from distilled & fermented drinks that cause heedlessness — that would be more fruitful than... if one with a confident mind were to go to the Buddha, Dhamma, & Sangha for refuge.

"If one were to develop even just one whiff of a heart of good will, that would be more fruitful than... if one with a confident mind were to undertake the training rules...

"If one were to develop even for just a finger-snap the perception of inconstancy, that would be more fruitful than the gift, the great gift, that Velāma the brahman gave, and [in addition to that] if one were to feed one person... 100 people consummate in view, and were to feed one once-returner... 100 once-returners, and were to feed one non-returner... 100 non-returners, and were to feed one arahant... 100 arahants, and were to feed one Private Buddha... 100 Private Buddhas, and were to feed a Tathagata — a worthy one, rightly self-awakened — and were to feed a community of monks headed by the Buddha, and were to have a dwelling built and dedicated to the Community of the four directions, and with a confident mind were to go to the Buddha, Dhamma, & Sangha for refuge, and with a confident mind were to undertake the training rules — refraining from taking life, refraining from taking what is not given, refraining from illicit sex, refraining from lying, refraining from distilled & fermented drinks that cause heedlessness — and were to develop even just one whiff of a heart of good will."

Notes

1.
The Commentary states that Anāthapiṇḍika is here referring to alms that he gives to the poor; his alms to the Sangha remained of high quality. However, it might have been that this discourse took place during a time of famine, when even Anāthapiṇḍika was reduced to giving only the coarse food both to the Sangha and to the poor. If that is the case, then we can read the Buddha's remarks to Anāthapiṇḍika as reassuring him that in straitened circumstances it is still fruitful to give, even when one can only give coarse things. The merit of the gift is determined more by the state of mind with which it is given than by the external quality of the gift.
2.
This translation follows the Thai edition of the Pali Canon. The Burmese and Sri Lankan editions list four kinds of cloth — rather than just the three listed here — adding wool as the third of the f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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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house Lecture 2022 - Working for Justice in a Warming World | Australia Yearly Meeting

Backhouse Lecture 2022 - Working for Justice in a Warming World | Australia Yearly Meeting

Backhouse Lecture 2022 - Working for Justice in a Warming World

Backhouse Lecture 2022 Working for Justice in a Warming World

Delivered by Yarrow Goodley

Tuesday 5 July 7:00pm AEST 

The 2022 Backhouse lecture looks at the critical issue of climate justice – at how our responses to the climate emergency have the potential for great suffering, as well as great redemption. In a world where the rich pollute, and the poor suffer, we do not just need to address our rapidly-warming planet, but also the injustices which drive this environmental catastrophe.

Yarrow, in conversation with Quaker and non-Quaker activists, explores the history of this crisis, and the despair and hope we must negotiate in coming to grips with a problem of planetary proportions. This crisis offers us an unparalleled opportunity to remake our political, economic and social systems, in ways that support a liveable planet, while addressing the profound injustices of our age, especially racial inequality. Yarrow asks us ‘what can we do?’ and seeks to offer ways forward that create hope not just for all people, but for all the living creatures on our small blue-green planet.

Bio: Yarrow was nineteen years old in 1988, when the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was founded, and the IPCC’s five-yearly reports have sounded ever more dire warnings throughout their adulthood. Having worked all their life as an early childhood educator, Yarrow is reminded every day of the uncertain future that awaits their young students. These children will be Yarrow’s current age in 2070 – a future that may be either apocalyptic or utopian, depending on our actions now. As a Quaker, an activist, and a gardener, Yarrow aims for that utopian future, even when the path to that place is murky.

Join us via zoom: https://us06web.zoom.us/j/5968713127?pwd=dlJvVGdHeWxScm1XRFJqbC9VSE9tdz09
Meeting ID: 596 871 3127
Passcode: 6477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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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reg Rolles
    What better way to enjoy watching someone talk about climate activism than just after coming and actually doing some too. Come to Sydney June 27th and take part in nonviolent civil disobedience. They're jailing young climate activists. 2 We're refused bail and are being held in remand until the 12th of July. Come on Friends, walk the talk.
  • Helen Bayes
    Yes, let’s share about the activism we do too, wherever we live.
  • Greg Rolles
    No. Let's share about effective climate activism that sees us being raided day after day. Our first nations elder was taken away by cops today. Get real, get active.







Last modified: 
Thursday, 19 May 2022 - 2:32pm

Hyun Ju Kim Ludrup Yongsoo "저는 ING,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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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 Ju Kim
42 m ·



"저는 ING, 중입니다"
.

  • 수행이란 말을 할 수도 없고 아니 할 수도 없는 것이다. 
  • 그래서 무분절의 경지로, 아무것도 분별이 없는 무와 공의 처지로 가야 한다. 
  • 간다는 생각조차 버려야 간다. 
  • 산은 산이 아니고 산은 그저 산이다. 산은 본질이고 본질이 산이라서 산이 걷고 산이 흐르고 산이 사라져도 산은 있고 그러나 없다.
  • .
  • 그러니 누가 스님일까. 
  • 그저 공간을 차지하고 시간을 지나가는 행위에 지나지 않으니, 중. ING라는 말씀이다. 
  • 기독교식으로는 already, not yet 이라는 상태를 연상하게 하지만. 또 용수스님은 약간 그런 의도로 쓰신 것도 같지만. 
  • 나는 이 <중>이라는 말이 공. 무. 라는 개념을 표현하는 말이라는 생각도 한다. 
  • 원래 무리를 뜻하는 말이라지만 그 무리들이 다 ING 상태이지 않나.
  • .
  • 임윤찬인가. 다 단절하고 싶지만 너무 가난해지니까 할 수 없이 연주한다던가. 
  • 좋은 곡이 너무 많아서 이번 생에서는 가장 좋은 몇 곡만 골라서 친다던가. 그런 표현에서 나는 우주가 전부 사라지고 소리만 남는, 그나마도 시간의 함수에 걸려서 매 순간 소멸하는 상상을 한다. 
  • 소멸하는 빛을 바라보는 순간을 영원으로 체험하는 몸을 상상한다. 
  • 죽은 리스트와 악보로 소통하며, 사라질, 죽어버릴 소리를 허공에 날려버리며 교감하는 그를 생각한다.
.
"경험은 해도 이해는 못하는 미묘한 실재"
.
  •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거울 밖의 세계.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 
  •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 고 할 때 말씀은 법. 이라는 말과 비슷한 느낌이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역사적 예수로 오셨지만 시간이 짧았다. 
  • 그분의 행위와 말씀을 문서로 기록하였지만 턱없이 동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 실제로 본 사람들이 경험한 압도적인 신적 슈퍼파월을 기록되어 번역된 사복음서로 상상하기란 공룡피 한방울로 쥐라기공원을 만드는 것보다 터무니없다. 
  • 인간으로 온 신의 모습을 어떻게 양피지 몇 두루마리에 적을까. 
  • 그래서 요한은 그 기록한 책을 다 담기에 이 세상이라도 부족하다고 썼다. 
  • 물론 USB가 나오기 전 이야기다. 
  • 그럼에도 예수는 <내가 가는 것이 낫다. 그래야 보혜사가 오신다.>며 자신을 지나가는 존재라고 한다. 
  • ING. 잠시 머물다 간다. 
  • 너희들도 잠시 머물다 오렴. 
  • 내가 너희들 있을 곳을 마련해 두겠다. 기다릴게. 
  • 그래서 우리들도 ING.


Ludrup Yongsoo

사람들이 자꾸 스님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서 특별한 존재처럼 행해야 하는 집착이 생겼어요. 항상 평화롭고 지혜롭고, 기분 나쁘면 안 되고 약한 모습, 못난 모습 보여 주면 안 되는 집착이 생겼어요.
그래서 부인 성명을 하고 싶어요. 저는 이기적이고 인색하고 산만해요. 기복도 집착도 많고 수행력과 자비심이 부족해요. 기분 나쁠 때가 많고 대체로 부정적이에요. 일반인 보다 못 하는 게 너무 많아요.
그래도 스님상을 알아봐서 약한 모습을 보여줘도 되겠네요. 척 하는 게 힘들어요.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하는 게 힘들어요. 자신의 기대가 힘들어요.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게 힘들어요. 못난 중, 이대로 있을게요. 진정한 법의 벗이 되어 주고 싶어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저는 ING, 중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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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타계 조순 증손자 대학생기자가 쓴 증조부 부고기사 - 오마이뉴스

23일 타계 조순 증손자 대학생기자가 쓴 증조부 부고기사 - 오마이뉴스
한림랩 뉴스룸 | 49화

23일 타계 조순 증손자 대학생기자가 쓴 증조부 부고기사[증조부 조순, 당신의 가르침을 기립니다] "영어사전 씹어먹던 학구파"
22.06.24 18:40l최종 업데이트 22.06.24 20:34l
한림미디어랩 조중만(hmltheh)



▲ 지난 23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고 조순 전 경제부총리의 빈소가 마련돼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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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전 한국 정치, 경제계의 큰 별이었던 조순 증조부님이 노환으로 작고했다. 향년 94세. 서울 아산병원에서 노환으로 치료를 받던 조순 증조부님은 가족들이 임종을 지킨 가운데 생을 마감했다.

조순 할아버지는 나의 9촌 증조부이시다. 고인이 된 할아버지의 명복을 빌며 할머니·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시중 언론에 나와 있지 않는 내용을 독자들에게 전해보고자 한다.

1928년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풍양조씨 평장사공파 집성촌)에서 태어난 조순 증조부님은 학창 시절부터 영단어를 외우기 위해 영어사전 속 단어를 외운 후 해당 페이지를 찢어 삼켜 드실 정도로 학구열이 남달랐다.

증조부님의 아버지인 조정재 고조부님은 한학자셨다. 중학 시절, 조순 증조부님은 어려운 집안 환경 탓에 당신의 숙부님께 유학을 갔었다. 고조부님은 자식의 공부가 얼마나 무르익었는지를 보기 위해 한문 편지를 보냈다. 이를 잘 해석해야 집으로 올 수 있다는 엄명에 보낸 편지를 해독하기가 어려웠던 증조부님은 수많은 한학자들을 백방으로 찾아다녀 겨우 그 뜻을 해석하고 나서야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교육열이 남달랐던 가정환경의 영향을 받아 경기고, 서울대를 졸업한 증조부님은 한국전쟁 당시 육군 통역 장교와 육군사관학교 교관 등으로 군에 복무했다. 전역 후 30세의 나이로 미국으로 유학,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박사를 마친 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부임해 1988년까지 재직했다.


▲ 이 시대의 희망과 현실, 조순 문집
ⓒ 조중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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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 학파'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경제학계의 유명한 제자들이 수두룩하다. 1974년, 제자 정운찬과 공저로 쓴 <경제학원론>은 경제학과 최고 인기 교과서로 '경제학계의 바이블'로 불린다.


육군사관학교 영어 교관 시절 노태우 대통령을 가르친 인연으로 1988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지냈다. 1992년에는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했다.

대한민국 사상 두 번째 민선 서울특별시장을 지냈고, 1995년 헌법 개정 후 첫 민선 시장을 지냈다. 1997년에는 제15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서울 시장직을 물러났다. 필자의 아버지는 서울시장직을 계속하셨으면 오히려 국민으로부터 더 사랑받아 자연스레 대권주자로 추대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갖고 계신다.


1998년 강원도 강릉시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민주국민당을 창당했으나, 당이 실패하면서 정계를 은퇴했다. 이후, 특별한 건강 이상 없이 지내오셨고, 23일 오전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한 시대를 풍미하시며, 많은 후학을 길러내시고, 모든 이의 귀감이 되셨던 증조부님께서 영면하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살아생전 쓰신 문집을 어루만져 봅니다. 앞으로 제가 살아가는 인생길에 길잡이가 되어줄 것입니다. 늘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통해 더 나은 사회인으로 거듭나도록 정진하겠습니다. 세상사 많은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으시고 편히 잠드십시오."


덧붙이는 글 | 조중만 대학생기자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는 한림대학교 미디어스쿨 대학생기자가 취재한 것으로, 스쿨 뉴스플랫폼 한림미디어랩 The H(www.hallymmedialab.com)에도 게재됩니다.

[임진택 특별기고] 위악자 김지하를 위한 변명 | 중앙일보

[임진택 특별기고] 위악자 김지하를 위한 변명 | 중앙일보
Opinion :임진택 특별기고
위악자 김지하를 위한 변명
중앙일보
업데이트 2022.06.24

생명사상의 선구자 김지하를 추도하며


임진택 마당극 연출가, 창작판소리 명창

2022년 5월 8일 김지하 시인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49일이 되는 6월 25일, 가까운 지인들이 서울 천도교 대교당에서 김지하 시인을 추모하는 문화제를 만들어 고인의 혼백을 저 세상으로 보내드리는 마지막 재(齋)를 마련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김지하만큼 극과 극의 평가를 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 1970년대 김지하는 빼어난 서정시인이자 파격적인 풍자시인으로,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서있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그는 배신자 혹은 변절자라는 낙인이 찍힌 대표적 인물로 오인되었다. 김지하처럼 영광과 오욕을 동시에 받은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김지하 시인이 세상을 떠난 마당에, 이제 그동안 말할 수 없었던 불편한 진실을 털어놓아야 할 것 같다. 그것도 파격적으로….

김지하 시인은 위악자(僞惡者)였다. 위악자는 내가 만들어낸 신조어(新造語)다. 위선자(僞善者)의 반대말이다. 위선자가 비난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위악자가 비난받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지하가 왜 위악자인지, 왜 더 이상 비난받아서는 안 되는지, 변명해보고자 한다.
선한 사람이면서 ‘목숨 걸고’ 악한 역할 자처했던 위악자
49재 맞아 시인을 기리는 추모 문화제 25일 서울서 열려
40년 전 기후위기·팬데믹 등 대전환 예견한 생명사상가
시인의 인간 변혁에 대한 고뇌와 구도적 일생 경외해야

민청학련 사건으로 첫 옥고


저항시인과 생명운동가. 지난 5월 타계한 김지하 시인은 한국 현대사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25일 49재를 맞아 그의 고단했던 여정을 기리는 문화제가 열린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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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4호 위반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유신독재 정권은 이 사건에 터무니없는 용공조작을 시도했다. 김지하는 사건에 자신이 연루되자 직감적으로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그것은 자신이 빠져나가려고 하면 할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할 것이며, 무엇보다 남은 학생들이 위험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이 사건에 자신은 물론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심지어는 윤보선 전 대통령까지 끌어들인다. 도저히 빨갱이일 수 없는 저명인사들이 등장함으로써 공안당국의 용공조작은 민망 무색한 꼴이 된다. 그리하여 독재정권은 다음 해 2월 민청학련 사건 구속자들 대부분을 가석방한다. 김지하의 ‘목숨을 건’ 위악적(僞惡的) 지략이 일단 성공한 것이다.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풀려난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중하고 근신했을 법한데, 김지하는 그렇지 않았다. 장모인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정릉 집에 머물고 있던 김지하는 거기에 찾아온 동아일보 이부영 기자(전 국회의원)의 요청으로 옥중수기를 써 내놓은바, 3회에 걸쳐 연재된 ‘고행-1974’의 핵심 내용은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며, 인혁당의 실체는 없다”는 것이었다.

유신 독재자는 노발대발했다. 민청학련을 용공으로 만들기 위해 인혁당 사건을 갖다 붙여놓은 것인데, 인혁당이 조작이면 민청학련도 당연히 조작 아닌가? 하여 유신 독재자는 유언비어(?)의 발설자 김지하를 다시 감옥에 가두었다. 오호, 그로 인해 김지하의 6년 독방 수형 생활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사형선고까지 받고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 사람이면 당연히 ‘착하게’ 살아야 함에도 김지하는 ‘착하게’ 살지 않았다. 지배자의 입장에서 볼 때 김지하는 ‘악한 사람’이었다. 김지하는 선한 사람이면서 악한 역할을 자처한 위악자(僞惡者)였다. ‘목숨을 건’ 위악자였다.

박근혜 지지로 진보로부터 배척


김지하가 민주 진보진영의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판 혹은 비난을 받게 된 계기가 두 번 있었다. 하나가 1991년에 벌어진 소위 ‘죽음의 굿판’ 필화사건이다. 당시 과도한 공안 탄압과 경찰 진압으로 시위 대학생이 맞아 죽거나 자결을 택하던 상황에서 김지하가 “죽음의 굿판” 운운하고 나섬으로써 민주화 운동이 타격을 입게 된 사건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중대한 오해가 개재되어 있다.

먼저 그 칼럼이 실린 조선일보 지면을 제대로 한번 살펴보라. 그 칼럼의 원제목은 분명히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이다. ‘죽음의 굿판 걷어치워라’는 중간 크기의 글자로 된 또 다른 소제목일 뿐, (물론 그같은 내용이 글 안에 들어있다 하더라도) 필자가 원래 정해놓은 그 칼럼의 방향이자 주제는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였다. 그런데 자극적인 소제목이 갑자기 부각되면서 필자의 언설(言說)이 침소봉대(針小棒大)되어 만파(萬波)를 일으킨 것이 바로 ‘죽음의 굿판’ 사건인 것이다. 이 사건은 굳이 그러한 발언을 하지 않아도 충분한 명예를 누리고 있던 김지하가 섬망(譫妄) 중에 저지른 위악적 행위의 자해적 결과였다.

김지하가 민주 진보진영의 사람들로부터 결정적인 비난을 받게 된 또 하나의 빌미가 ‘박근혜 지지’ 사건이다. 당시의 정치평론 중에는 “김지하가 박근혜의 품에 안겼다”는 식의 비유적 표현까지도 떠돌고 있었다. 여기에도 중대한 오해가 개재되어 있다.

김지하는 박근혜의 아버지인 박정희와는 철천지 원수지간이다. 박정희 폭압정권은 김지하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고문했다. 김지하 자신이 황량한 독감방에서 일체의 면회와 운동마저 금지된 상태로 6년을 보냈다. 그러한 김지하가 대선 당시 박근혜의 방문을 받아들인 데는 이유와 조건이 있었다. 하나는 박정희와의 악연을 끊고 국민통합의 길을 모색하자는 것, 또 하나는 생명사상을 정치적으로 실현하자면 여성이(혹은 여성적인 것이) 앞장서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기를 만나려면 배론성지 지학순 주교 묘소를 먼저 참배하고 지난 일을 참회하고 오라는 것 등이었다. 이는 ‘박근혜의 품에 안기는’ 것이 아니라박근혜까지 품에 안으려는’ 행동이었다고 봄이 옳다. 아마 상대 후보인 문재인이 찾아왔더라도 김지하는 당연히 방식을 달리하여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 사건은 김지하 스스로 후에 자신의 위악적 행동이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술회했으므로 일단락되는 것이 필요하다.

김지하가 세상을 떠나자 대다수의 언론이 그를 ‘저항시인’으로 부각했다. 작품 중에서는 정치풍자 담시(譚詩) ‘오적(五賊)’과, 민주화를 염원한 서정시의 걸작 ‘타는 목마름으로’를 대표작으로 꼽았다. 그 시들이 김 시인의 대표작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김지하를 저항시인으로만 칭하는 것은 그의 세수(歲數) 여든 가운데 전반부 반절에만 해당하는 내용이다. 감옥에서 나온 1980년 이후 김지하는 시인과 더불어 사상가로, 생명운동가로 거듭났다. 그것도 아주 탁월한, 기실 전무후무한 사상가로.

1982년 김지하는 생명사상과 생명운동에 관련한 최초의 보고서를 초안하였다. 이 보고서를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비롯하여 원주캠프의 활동가들이 함께 읽고 토론하여 완성한 것이 바로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라는 문건이다.

‘지하 형님’은 그 문건이 완성되자마자 어느 날 조용히 나에게 그 문건을 보여주었다. “죽음의 먹구름이 온 세계를 뒤덮고 있다”로 시작되는 첫 대목부터 나는 그 문건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앉은 자리에서 바로 탐독(耽讀)했는데, 한참을 기다려주던 지하 형님이 평가(?)를 구하는 것 아닌가?

나는 글의 내용에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급하게 이렇게 말을 지어냈다. “형님, ‘공산당 선언’ 이후 최고의 선언이 나왔습니다.” “그래?” 지하 형님이 뜻밖이라는 듯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기분은 좋으신 것 같았다. 나는 지하 형님이 더 물어보면 어쩌나 좀 걱정이 되었는데, 사실은 내가 ‘공산당 선언’을 읽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항시인에서 생명운동가로

그 문건은 후에 주요 내용이 재정리되어 김지하의 산문집 『남녘땅 뱃노래』(두레출판사)에 ‘삶의 새로운 이해와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는 바, 기실 오늘날 우리와 전 세계가 겪고 있는 기후위기와 팬데믹을 40년 전에 벌써 예견한 내용이었다.

‘생명의 세계관’의 핵심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부정·극복한 일원론적 세계관을 설파한 것으로, 이는 천동설을 부정한 지동설에 비견할 만한 엄청난 사고의 전환, 문명의 대전환을 예고하는 것임에도 아직 일반화(보편화)되고 있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

이제 충격적인 ‘불편한 진실’을 털어놓아야 할 것 같다.

김지하 시인은 밀폐된 독감방의 외로운 면벽 생활에서 깊은 병을 얻었다. 그것은 정신적인 증상으로, 인간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불치의 천형(天刑)이었다. 감옥에서의 고통스러운 인내와 사유는 한편으로는 섬광(閃光)처럼 생명에 대한 깨달음으로 왔고, 한편으로는 섬망(譫妄)이라는 어두운 그물이 그를 감아 죄었다. 그가 불시에 저지른, 정상을 벗어난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은 대체로 그 섬망 속에서 일어난 일시적 정신 착란과 연관이 있다.

우리는 오히려, 그러한 육체적 고통과 한계 속에서도 처절하리 만큼 치열하게 인간과 사회의 변혁과 완성을 고뇌하고, 지구와 우주 생명에 대한 전 일체적 깨달음에 다다른 김지하의 구도(求道)적 일생을 경외해야 마땅하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남은 우리는 그가 그토록 애타게 알려주고 싶었던 생명의 길, 평화의 길로 이 세상을 지키고 가꾸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임진택 마당극 연출가, 창작판소리 명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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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on****
8시간 전
네, 선생님 말씀대로 안타까운 분이죠, 생각할수록 눈에 눈물이 고이네요, 김지하선생님, 이제는 편히 영면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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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
23시간 전
지금 김지하를 되돌아볼때 그는 대한민국을 지짜로 사랑하는 애국자요 참 민주화 운동가였다 그는 사면복권후 당시 야당에서 금뺏지를 달아주려 고 러브콜했지만 거절했었다 한세상보람있고 멋지게 살다가 가셨다 머리좋고 인물좋고 이런인물은 한세기에 하나가 나올뚱 말뚱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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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ha****
2022.06.24  16:29
그대가 무슨 자격으로 고인의 판단을 일방적으로 섬망에 의한 정신착란의 결과라고 정의하는가? 이땅의 의식있다는 일부 지식인들은 여전히 종북 얼치기 좌파들의 논리에 사고의 틀이 정지해 있다. 북한정권의 인류사 최악의 인권유린과 독재에는 철저히 눈감고 그에 맞서 나라를 지키고 선진국으로 도약시킨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는 부정하려고만 한다. 그대는 도대체 어느 땅에서 교육받고 입에 풀 칠하며 자식들 키워 성장시켰으며 나름 명성도 얻었는지 그리고 그게 북한 땅에서는 가능하기나 했을지 진중하게 생각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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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ch****
2022.06.24  13:31
김지하 선생을 위악자로 묘사한것에 분노를 느낀다. 선생의 부친은 북괴의 조종을 받지 않는 대한민국 자생 좌파투사였다. 선생은 "국내의 모든 좌익을 북괴노동당과 연계하여 종북 뺠.갱.이로 일반화 시키는것" 에 반대 하셨다. 김지하 선생이 박근혜를 지지했기 때문에 좌파에게 배척당했다고? 공부좀 다시하고 이런 헛소리 그만 하기 바란다. 유감스럽게도 김지하 선생은 좌익이 아니고 사시는 동안 좌익였던적이 단 한번도 없다. 선생의 투쟁 대상은 민중의 권리를 짓누르는 독재였다. 종북, 좌익 세력들은 김지하 선생이 자기들 편을 들어 종북질에도도 앞장서 주길 원했겠지만 김지하 선생은 종북질을 칼같이 거부하신 분이다. 이런 선생의 바탕심성을 알아챈 종북좌익세력들은 선생을 철저히 외면했다. 특히, 김대중 정부때 눈에 띄게 선생을 헌작대기 취급하고 무시했고 노무현, 문재인도 마찬가지였다. 자유와 인권을 압살당한 인간의 분노와 서러움을 토로한 시인이자 순수한 민주화 운동가 선생을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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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aw****
2022.06.24  12:05
김지하의 문화산업이 앞으로 먹거리사업이라고 대통령 박근혜에게 부탁하여 그리하여 케이 미르재단을 만들어 예체능에 종사할 인재들 보살펴 주려고 시작했는디 촛불부역자 조중동놈들과 촛불수괴 문제인에게 뒤치기 당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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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oongAng
[최진석 칼럼] 야망과 필요와 감동
[최진석 칼럼] 야망과 필요와 감동
rmaw****
2022.06.24  11:59
김일성 주사파 좌익 문화예술인놈들 림을 위한 행진곡이나 떼창 나팔불다가 디져라 니놈들은 국가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개 쓰레기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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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in****
2022.06.24  11:00
70년대 반미 아프리카국에 서 바람 불었던 Yankee go home을 답습하여 대가리엔 붉은띠 묶고 주접의 향연을 펼쳤던 86그룹. 낭만적이고 감성에 찌들은체 저쪽 뒷산 돼지혈통가의 주체사상을 꺼집어 들고 독제타도니 하며 미군철수. 양키 고 홈 하며 가짜 민주주의 외쳤던 86그룹, 최악의 위선자들로 똘똘 뭉쳤던 86그룹, 위선의 꼭지점을 형성해 세력화 하며 대한민국 온갖 권력의 헤게모니를 꿰찼고 꿰차고 있는 86그룹과는 김지하는 전혀 달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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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yc****
2022.06.24  10:41
운동권은 '두 부류'로 나눠진다.하나는, '주체사상으로 무장'하고독재반대 했던 자들.나머지는, '순수히 독재반대'를주장했던 자들.'김지하'는 후자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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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
2022.06.24  10:24
잘디졌다는 우좀 글을 보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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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
2022.06.24  08:34
소위 민주화운동을 하는 인간들의 실체를 보고 뭔가 크게 깨달은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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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oongAng
15세 간 빼고 눈 뽑힐 뻔했다…英데려간 의원 부부의 두 얼굴
15세 간 빼고 눈 뽑힐 뻔했다…英데려간 의원 부부의 두 얼굴
bsks****
2022.06.24  08:10
이런 놈들 잘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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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n****
2022.06.24  06:56
무위당, 조한알 장일순 선생을 만나 오랜동안 극심하게 상처받았던 마음을 위로받고, 난치기를 배우고 무수히 반복하며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른 고인을 존경합니다. 모지란 후학들이 이러쿵저러쿵해도 다 받아주실 분입니다. 큰 사랑은 분별없이 모두를 품어주는 것이겠지요. 내일이 49재군요. 선생의 명복을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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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ye****
2022.06.24  05:28
말씀을 묘하게 하시네요. 김지하씨를 초기 저항시인으로서만 존경하고 , 그의 후기의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우는 삶은 섬망 속에서 일어난 일시적 청신 착란으로 치부해 버리는 듯 여겨집니다. 처음에는 알지 못해 이 쪽 길을 택했으나 후에 제대로 알아 보고 저 쪽 길로 나갔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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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쓰 도시히코의 동양 철학이란 무엇인가 No.4 : 모리시타 나오키 | 노성학 연구소

이즈쓰 도시히코의 동양 철학이란 무엇인가 No.4 : 모리시타 나오키 | 노성학 연구소

이즈쓰 도시히코의 동양 철학이란 무엇인가 No.4 : 모리시타 나오키
 2020.12.04


이츠키 슌히코의 「도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일본 형이상학과 21세기 리얼리티
노화 연구소 대표 모리시타 나오키

제4회 21세기의 일본 형이상학


이즈쓰 도시히코의 동양 철학의 핵심은 익숙하지 않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일본 형이상학이다. 그렇다면 이즈쓰 도시히코의 동양철학은 일본의 형이상학 속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그리고 또 21세기의 리얼리티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이 마지막 회의 고려 사항의 초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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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이 리얼리티의 근거를 둘러싼 지적인 탐구라고 하면, 여기서 말하는 일본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일본어로 쓰여진 형이상학일까. 아니면 일본인이 쓴 형이상학일까. 그 중 어느 것도 아니다. 일본 열도의 풍토 속에서 길러진 형이상학적인 전통을 적극적으로 계승해 이를 발전시킨 형이상학을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특정 시대와 사회 속에서 태어나 성장하는 이상 해당 문화(의미 해석의 연관)를 계승하게 되지만, 이것은 당연하다. 그 이외의 방식으로 사는 것도,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러나 보통 자신의 생활과 사고 뒤에 있는 문화를 자각하는 것은 어렵다. 특히 문화의 근간에 있는 리얼리티의 근거를 둘러싼 전통에 관해서는 더욱더 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각을 가능하게 하는 기연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외부 타인(의 형이상학)과의 만남이다. 일본 사상에 그런 자각은 지금까지 세 번 있었다. 
  1. 헤이안 시대 초기부터 가마쿠라 시대에 걸쳐 형성된 일본 불교, 
  2. 도쿠가와 시대에 퍼진 일본 유교와 국학, 
  3. 그리고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에 걸쳐 모색된 일본 철학이다. 
그 모두 핵심에는 형이상학이 있다.

일본철학에 이야기를 짜면 그 전개는 3단계가 된다. 왜 3단계라고 하냐하면 근대화 그 자체가 3단계로 구분되어 그에 따라 자각의 내용이 변용되기 때문이다.

근대화란, 제 생각으로는, 사회 집단에 포괄되어 있던 여러 기능이 기능 시스템으로서 분립해, 상호 연관하는 경향을 말한다. 그리고 그 경향은 19세기의 <전통적 근대>에서 20세기의 <현대적 근대>21세기의 <오늘적 근대>로 이어지고 있다. 덧붙여 시대 구분의 상세에 대해서는 별서에 양도한다(『〈쇼와 사상〉신론』).

〈전통적 근대〉란 서양의 전통과 근대화(예를 들면 증기기관과 가스등)가 충돌한 서양 근대의 시대이다. 이 충돌 속에서 19세기 서양철학이 태어났다.

다음 <현대적 근대>서양 근대를 벗어 순화된 근대(자동차와 전기)의 시대다. 근대의 자립과 순화를 받아 20세기 세계철학이 태어났다.

그리고 <오늘적 근대>자립한 근대를 더욱 벗어난 초근대(글로벌화와 디지털화)의 시대다. 사견에서는 이 초근대의 과제에 부응하는 21세기 철학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일본철학의 행보는 서양화=근대화 뒤에 있는 형이상학과의 격투의 궤적이다.

우선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에 걸쳐 사람들이 만난 것은 제1단계 서양 근대이다. 이때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된 것이 '서양(근대) 대 동양(일본)'이라는 틀이다. 다만 '서양근대'를 파악하는 방법의 심도에 따라 '동양(일본)'을 파악하는 방법도 변화했기 때문에 이 시대는 4기로 나뉜다.

(1) 막부 말기에 주창된 것이 「서양 예술 대 동양 도덕」(사쿠마 상산)이다. 거기서 대립하는 것은 이차원의 물질과 정신이다.

(2) 메이지 초기에는 「서양 문명 대 문명」이 내세워졌다. 여기에서는 문명화라고 하는 공통의 토우쿠 위에서, 서양 문명을 넘는 문명이 목표로 되었다(후쿠자와 유키치). 철학자의 서주의 경우, 그것은 콩트의 학문체계를 넘는 학문체계의 구축이라는 지향이 되었다.

(3) 메이지 중기, 「서양 철학 대 동양 철학」이 합언이 되었다. 여기에서는 철학=형이상학을 공통의 토대로 하면서 서양철학과 늘어선 동양철학의 확립이 지향되었다. 대표자 이노우에 엔료와 이노우에 테츠지로는 동양철학의 핵심을 '현상 즉실재론'으로 파악했지만, 그 '실재'는 전통적인 진여와 이치였다.

(4) 메이지 후기부터 다이쇼기에 이르는 시기, 전통적인 실재를 경험의 근저로 탐구한 형이상학이 등장했다. 그것이 니시다 철학이다. 여기에 이르러 ‘동서문화의 종합으로서의 일본’이라는 틀이 명확해졌다.

다음으로, 다이쇼 후기부터 쇼와기에 걸쳐 사람들이 만난 것은, 제2단계의, 서양을 벗은 순수 근대이다. 이때 지배적인 패러다임은 '근대대동양(일본)'이다. 일본철학의 계승자들은 근대를 넘는 원리를 탐구했다.

와쓰지 테츠로는 자본주의=개인주의=이기주의의 근대에 대항하여 간접 관계주의와 풍토에 근거한 공동체를 거점으로 삼았다.

타나베 모토는, 신체에 뿌리를 둔 공동체(종)를 기반으로 하면서, 이것과 특수끼리의 이해 대립을 부정적으로 매개하는 보편=국가를 이상으로 했다.

미키 키요시는 고대의 실체주의(수공예)와 근대의 기능주의(기계기술)를 변증법적으로 통일하는 사회기술에 주목하여 이에 따른 사회변혁에 베팅했다.

고산암남高山 岩男(こうやま いわお)은 유럽중심주의=백인지상주의=합리주의=인간중심주의의 근대에 대항하기 위해 천인합일의 경지와 동아시아 공동체에 일본국가의 활로를 요구했다.


그러면, 제일의 질문, 이즈쓰 도시히코의 동양철학=일본형이상학은 일본철학의 전개 속 어디에 위치할 수 있을까.

이즈쓰가 자른 '동양'은 '정신적 동양', 즉 의식의 심층 차원이다. 그것은 신체 경험에 의해 공개되는 세계이다. 그리고 신체=자연 현실은 20세기 세계철학의 기반이었다. 
  • 일본 츠지의 풍토, 
  • 타나베의 종의 논리, 
  • 미키의 기술, 
  • 다카야마의 천인 합일은 
모두 신체=자연 리얼리티를 지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즈쓰의 동양 철학의 위치는, 근대화의 제2 단계, 즉 20세기의 현대적 근대에 대항하는 패러다임의 내부에 위치할 수 있다.

이즈쓰의 동양철학=일본형이상학은 신체=자연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한 한 
20세기 세계에 대해 일정한 실천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의식의 심층 차원에서 표층 의식의 세계를 바라보고 기성의 규범적·가치적인 리얼리티를 유동화한다

구체적으로는 
  • 욕망에서 나오는 대립이나 다툼에 대해 관용과 평화를 밀어내고, 
  • 죽음의 공포나 사랑하는 것과의 별리에 대해서는 진혼과 위령을 준비하고 
  • 자연환경에 대해서는 공생을 추진한다. . 
이렇게 행복의 의미를 재검토하고 마음의 평화를 가져온다. 그것은 20세기 후반을 사는 사람들의 소원이었다.

그런데 21세기 글로벌화와 디지털화로 리얼리티가 변용한다. 
이 때 철학에 요구되는 것은 무엇보다 신체=자연 현실과 디지털 현실을 통합하는 새로운 틀이다. 
이 틀 안에서 AI 로봇과 동물과 인간과의 경쟁적인 공생이나 사후의 영혼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재검토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제2의 질문, 이즈쓰의 동양철학=일본형이상학은 21세기의 리얼리티 속에서 어떠한 의의를 가지는가. 더 이상 역할을 완수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즈쓰의 심층 의식의 차원을 한층 더 철저히 하면, 21세기의 리얼리티에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즈쓰가 잘라낸 심층의식은 의식=말의 차원과는 다른 코토바=구별의 차원이다. 
이 차원은 
  • 공해Kukai와 도모토의 일본 불교에서 
  • 인사이와 소후의 일본 유학을 거쳐 
  • 이노우에 테츠지로와 니시다의 일본 철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본 사상을 관철하고 있는 형이상 학적 전통이다. 

이즈쓰은 그러한 전통을 널리 동양철학 전체 안에 자리매김하고 구조화하고 논리화해 보여줬다. 이것은 이즈쓰의 공적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거기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코토바=구별의 차원이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끼리의 커뮤니케이션중에서 교환되고 있다고 하는 지점까지 가지 않았다.

커뮤니케이션 일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생물끼리의 커뮤니케이션, 물체끼리의 커뮤니케이션, 장기끼리의 커뮤니케이션(인체), 세포끼리의 커뮤니케이션, 물질끼리의 커뮤니케이션과 나란히, 의식도 또 커뮤니케이션으로서 보이고 있다. 

의식=말의 세계의 토대는 단순한 신체=자연의 리얼리티가 아니다. 것끼리가 코토바를 주고받는 커뮤니케이션의 리얼리티인 것이다.

「물건끼리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견지는, 물리학의 초현 이론으로 말하는 멤브레인(막)이든, 니시다 철학의 말하는 것끼리가 일하는 장소이든, 그들을 <물끼리의 커뮤니케이션의 네트워크>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내측으로부터 시스템이 형성된다고 생각할 때, 거기에 문계리계의 학문을 포괄하는 플랫폼이 부상한다. 21세기의 철학은 그 커뮤니케이션의 시스템 이론을 전개하는 방향으로 보인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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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의 이즈쓰론은 구상 중인 '근대 '일본형 이이상학'이란 무엇인가--니시즈미·이노우에 테츠지로·니시다 기타로·이즈쓰 도시히코' 에 들어갈 예정이다.


(편집:마에자와 유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