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06

Hyun Ju Kim 나는 내가 쓴 글이 무섭다.두려움은 탐욕에서 온다는 것을 안다. 이런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복음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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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쓴 글이 무섭다. 하지만 어느 교수님과 한 약속 때문에 펼쳐 놓는다. 두려움은 탐욕에서 온다는 것을 안다. 이런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복음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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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부스러기(마가 7:24-30) : 비평연습 4회차 글쓰기

어린 시절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오다가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에 닿으면 더는 가지 않고 친구들에게 안녕! 했다. 이상하지. 길은 이어져 있고 경계는 없었지만 더 나아가서는 안 될 것 같은 심정의 벽을 느꼈다. 그 골목에 닿기 전에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친구들은 학교가 너무 가까워서 부러웠고, 그 골목에서 더 걸어가야 하는 친구들의 집들은 먼발치에서 아득했다. 기억 속의 나는 그 경계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막상 가보면 고갯마루가 이어져 있지마는 왜인지 무섭고 신비로운 세계가 숨겨져 있을 것처럼 느껴지는 산 너머처럼, 어린 시절 집으로 오는 길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들이 첩첩이 드리워져 있었다.
본문에서 예수는 두로 지역으로 간다. 다른 사본에는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 게네사렛까지 찾아온 바리새인들 및 율법학자들과 율법을 어떻게 해석할까 한바탕 논쟁을 마친 후였다. 구약 역사서는 가나안을 점령한 이스라엘의 국경을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로 요약한다. 브엘세바는 남쪽 경계고 단은 북쪽 경계다. 두로는 단과 위도가 거의 비슷하고 시돈은 조금 더 북쪽으로 떨어져 있다. 제국의 땅이라 쉽게 넘을 수 있는 경계였지만 유대인의 심정에서 두로는 이방 땅이었다. 예수는 이 경계를 방금 넘은 것이다.
사실 이 경계를 넘을만한 상황이었다. 당시 갈릴리 바다 북안 게네사렛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논쟁하러 예수를 찾아 왔고, 오병이어를 얻어먹은 군중들은 오늘은 또 무슨 먹거리를 줄까 궁금하여 몰려들었다. 아픈 사람들은 병을 고치려 보호자와 함께 몰려들었다. 제자들은 밤새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넌 참이었다. 그리고 예수는 한밤중에 물 위를 걸어서 바다를 건넜다. 배가 없었던 거다. 그 시끌벅적한 가운데 논쟁이 벌어졌으니 말 그대로 야단법석(惹端法席)이었다. 그 전에도 예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제자들을 배에 태워 보내버린 적이 있다(마가 6:45-46). 그러다 이제 더는 안 되겠다, 바리새인들이 쫒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자, 고 이방 땅으로 넘어가신 것 같다.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는 아무도 모르게 숨으려고 했다고 기록한다(마가 7:24).
예수의 은신처에 그리스 여인이 찾아온다. 논쟁하러 온 것도 아니고 빵을 얻어먹으러 온 것도 아니었다. 대화 가운데 빵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여인의 관심사는 빵이 아니었다. 어미는 자기 입에 들어가는 빵보다 자식이 삼키는 빵이 더 배부른 법이다. 이 여인의 소원은 자기 딸이 낫는 것이었다. 아람어로 말하는 예수와 헬라어를 쓰는 여인이 어떤 언어로 대화하였을지 궁금하다. 적어도 이 여인은 예수 앞에 저자세로 엎드려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예수는 거절한다. 자식에게 줄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고, 아마도 단호히 말한다. 민중신학자 김진호는 이 장면에서 예수가 귀족 여인을 개 취급함으로써 두로에서 이주노동자로 살아가던 갈릴리 민중들의 현실을 거꾸로 적용하였다고 해석한다(https://owal.tistory.com/624). 이렇게 해석한다면 예수의 말은 통쾌하도록 매섭고 차가웠을 것이다. 또 다른 이는 이 여인이 “하느님의 잔치상이 넘쳐흐른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인정하도록” 한 수 가르쳤다고 평가한다(https://url.kr/ca6ups). 이런 장면에서라면 예수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을지 모른다.
마가복음은 로마 군단이 예루살렘 성전을 산산이 부수고 메시야공동체와 예루살렘 교회를 파괴하며 유대 전역을 쓸어버린 정복전쟁(AD 63-70)을 겪으며 이것이 마지막이 아님을 깨달은 마가공동체가 신앙의 고백을 남긴 구전이다. 공동체는 사라졌고 말씀만 남았다. 그런 시각에서 마가 문헌에 기록된 수로보니게 여인은 새끼를 품고 불에 끄슬린 암탉의 품에서 생존하여 기어 나오는 병아리와 같은 느낌을 준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게 보낸 예언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마태 23:37, 누가 13:34)” 하나님도[?]자식에게 빵을 주고 싶지만 먹지를 않아 고통스러운 어미였다. 고통에서라면 지지 않을 이 여인은 자식의 병을 고치기 위해 개라도 되겠다고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품어 구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그러면 나를 구해 주십시오. 그 품에 나라도 품어 살리십시오. 여인은 이렇게 애원하고 있다.
경계 안쪽에서 군중들은 요구한 것은 입으로 먹을 빵이었다. 예수는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생명의 빵을 주겠다 하여도 군중들은 됐다고, 빵이나 달라고 요구했다. 모세의 히브리인들이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먹고도 생명의 양식을 먹지 못하여 가나안에 닿기 전에 죽어버린 이야기를 하여도 그들은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이 소위 메시야공동체의 정체였다. 예수가 그토록 주고 싶었던 빵에 군침을 흘리는 여인을 경계를 넘어 이방 땅에서 만나다니 얼마나 역설적인가.
예수는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서 헬라 여인을 만났고, 말마따나 자식에게 줄 빵을 개에게 주었다. 사실 먹겠다는 자식이 없어 남은 빵이 바닥을 굴러다니다가 개의 입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사건이 예표라도 된 것처럼, 복음은 이스라엘 경계를 넘어 마케도니아를 거쳐 고린도를 지나 로마로 흘러들어갔고 예수의 복음은 바울의 입을 빌려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그 부스러기를 먹고 있다.
덧붙여, 지금 교회가 가진 진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빵은 자식의 입으로 들어가 살찌우고 있는가. 여전히 입맛없는 자식들 앞에서 천덕꾸러기처럼 굴러다니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면 이 식탁 앞에서 군침을 흘리는 이방인은 누구일까. 우리 시대에 복음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구현될까. 우리는 예수처럼 우리 앞에 보이지 않는 막막한 경계를 넘어 낯선 땅으로 들어가 지낼 수 있다. 거기서 우리를 찾아오는 낯선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을 들을 수도 있다. 새로움에 마음을 열고 복음의 새로운 맛을 느끼는 소망의 식탁에 어색하게나마 앉게 된다면 얼마나 큰 영광일까.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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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여는 말] 웹진 <제3시대> 180호 : ‘말 걸기’의 기술, 말 건넴-받음의 순간들 :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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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여는 말] 웹진 <제3시대> 180호 : ‘말 걸기’의 기술, 말 건넴-받음의 순간들 : 제3시대
웹진 <제3시대> 180호 : ‘말 걸기’의 기술, 말 건넴-받음의 순간들 웹진 <제3시대> 180호는 연구소에서 진행한 강좌 '비평연습02. 성서를 읽고 성서와 함께 말 걸기'의 특집을 겸하여, <'말 걸기'의 기술, 말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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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eewon Jung
    사랑하는 우리 현주언니의 글을 제3시대 웹진에서 보게 되다니!!!! 언니의 묵상은 여전히 힘이 있고 따뜻하고, 소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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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여는 말] 웹진 <제3시대> 180호 : ‘말 걸기’의 기술, 말 건넴-받음의 순간들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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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제3시대> 180호 : ‘말 걸기’의 기술, 말 건넴-받음의 순간들

웹진 <제3시대> 180호는 연구소에서 진행한 강좌 '비평연습02. 성서를 읽고 성서와 함께 말 걸기'의 특집을 겸하여, <'말 걸기'의 기술, 말 건넴-받음의 순간들>이라는 주제로 구성하였습니다. 타인에게 말을 건네는 저마다의 기술을 들여다보고, 누군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 오는 특별한 장면에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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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걸기", 사실은 이랬답니다」(황용연)는 지난 7~8월에 진행된 <비평연습02. 성서를 읽고 성서와 함께 말 걸기> 강사였던 필자가 강좌의 취지와 소회를 밝히면서, '말 걸기'의 의미를 전해줍니다. 성서에 대한 접근을 일방적 전달이 아닌 ‘나눔의 과정’으로 만드는 ‘말 걸기’의 특징이 ‘예측불가능성’임을 이야기해줍니다.

「말 걸기 방식, 내가 오롯이 있기 위하여」(홍성훈)는 필자가 타인에게 ‘관조’의 대상이 되곤 했던 “상냥하고도 쓸쓸한 예의”를 넘어, 자신을 설명하는 언어와 소통방식을 만들어내고 타인을 그곳으로 초대하는 과정이 어떻게 ‘무대’에서 이루어졌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충만감”을 ‘일상’에서도 오롯이 잇기 위해 자신의 언어와 방식을 찾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음을 전해줍니다.

「우리가 아끼는 것들」(이성철)은 아끼는 마음에 함부로 쓰지/하지 않았던 어떤 '조심성'에 대해, 그리고 “밥값보다 가성비가 좋”은 식욕억제제를 둘러싼 일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끼는 것과 연결되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눠줍니다. 점차 무언가를 ‘하지 않음’을 선택하며 살아가게 되는 현실 너머 “서로가 아끼는 것들에 조금씩 가까워”지기 바라는 마음을 전합니다.

「감별사들을 위한 대답은 없다」(김윤동)는 ‘말문 막히는 순간’의 경험을 나눠주면서 어떤 말의 대답은 그 말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특히 ‘진위’를 묻는 말에 담긴 “서열을 나누고 차별을 행하는 습속”을 비판하며, 진짜/가짜의 구분이 아닌 저마다의 질서와 이름에 주목하자고 말합니다.

이번 호에는 지난 7~8월에 진행된 <비평연습02. 성서를 읽고 성서와 함께 말 걸기> 강좌를 수강하신 김현주 선생님의 글쓰기를 담아보았습니다. 열성적으로 강좌에 참여하고 글쓰기와 피드백을 진행해주신 강사 및 수강생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글들을 통해 ‘비평연습’의 시간을 되감아 봅니다.

「그의 이름은(창세기 2:4-3:24) : 비평연습 1회차 글쓰기」(김현주)

「빵 부스러기(마가 7:24-30) : 비평연습 4회차 글쓰기」(김현주)


이번 호 ‘특별 연재’ 코너에는 「인터뷰 : 그대를 찾아서 11」(강윤아)를 싣습니다.

‘프로그램 리뷰’에는 지난 8월에 진행된 강좌 <안병무학교 여름 학기 : 여성의 눈으로 그리는 마가복음>에 대한 리뷰 「한 여름 밤의 강의」(이현지)를 싣습니다.

‘민중신학 다시 읽기’에서는 안병무, 「나의 삶의 자세」(『현존』, 1976.5.)를 소개합니다.

앞으로도 웹진 <제3시대>에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리며, 웹진에 글을 기고하기 원하시는 분은 언제든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공식 메일 3era@daum.net으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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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기획 기사] "말 걸기", 사실은 이랬답니다(황용연)
웹진 제3시대
조회수 59

"말 걸기", 사실은 이랬답니다


황용연(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장)

1.

강사 노릇을 적지만 안 해 본 것도 아닌데 [비평연습]이라는 강좌 이름을 듣고 나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란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강사로서 내용을 전달하라면 하겠고 주장을 하라면 하겠는데 이건 내용 전달이나 주장 전달이 문제가 아니라 강좌에 참여해서 저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결국 스스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야 성공한 강좌일 터이니 말입니다. 그게 참 막막하더군요.

기획안을 내기 직전까지도 뭘 해야 하나 고민만 거듭하다가 결국 든 생각이 에라 인터넷 필명을 쓰는 대로 삐딱선이나 타 보자 일단 이끔이인 내가 재미있어야 뭘 해도 하지였지요. 그래서 과거에 설교를 했거나 글을 썼던 주제들 중에서 삐딱선을 재미있게 탈 만하다 싶은 걸 골라서 가안을 제출했는데, 조정을 거치니까 창조, 여성, 성탄, 고난, 부활, 신-인간 이런 식으로 뭔가 신학적 체계가 잡힌 듯한 개별 강의 제목이 나오는 걸 보고 어라 이런 걸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란 생각이 들기도 했었네요.

2.

위에 적은 것과 같이 일단 강좌하는 내가 재밌자 컨셉이었는데 강좌 전체 컨셉을 이걸로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떤 컨셉을 내세워야 할까 하다가 문득 든 생각이 '성서와 함께 말 걸기'라는 말이었습니다. 강좌 소개 영상에서도 한 이야기인데, 제가 지금 출석하는 교회에서는 설교 대신에 하늘뜻나누기라는 용어를 씁니다. 하늘뜻은 설교자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에 청중으로 참여한 모든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라는 이야기죠. 좀 더 나가면 하늘뜻을 찾을 수 있는 자리는 바로 그 나눔의 과정이라는 말도 됩니다. 그래서 이 교회의 하늘뜻나누기는 교회의 역사가 길어지면서 설교+토론 형식으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그 하늘뜻나누기의 컨셉을 이 강좌에 적용한다면 어떤 컨셉이 될까 생각해 본 것이 '성서와 함께 말 걸기'였던 셈입니다.

설교의 자리를 하늘뜻나누기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늘뜻이라는 것은 사실은 누구나 찾을 수 있는 것이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일 터입니다. 평소에 자신에게는 별로 할 이야기가 없다는 사람이라도 사실은 할 이야기가 없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계기가 있으면 말할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란 말도 되겠지요. 그렇다면 한 사람이 그런 계기를 거쳐서 말을 누군가에 걸게 되면 말 걸기의 대상이 된 그 사람도 자기 말을 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 다시 말 걸기를 할 수 있게 되기도 하겠고요. 이왕 성서라는 것을 같이 읽을 바에야 그런 말 걸기의 계기가 될 수 있게 읽으면 되는 것 아니겠냐는 생각을 덧붙이면서 탄생한 말이 이 강좌의 전체 제목이었던 [성서를 읽고 성서와 함께 말 걸기]였습니다.

3.

강좌를 진행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이 있다면 "성서를 읽고 성서와 함께 말 걸기"는 역시 예측불허의 과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제가 강의를 준비하면서도 강의 준비를 위해 여러 자료를 보면서 새로운 자극을 많이 받았고 몇몇 강의는 처음 생각했던 것과 상당히 다른 내용으로 준비를 하게 되더군요. 앞에서 썼던 대로 무엇보다도 내가 재미있어야 뭘 해도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그런 과정이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재미있게 강의를 준비하고 나면, 저는 저 나름대로 중심과 강조점을 형성하기 마련이고 그에 따라서 강의를 이끌어 나가기 마련인데요. 수강생 여러분들도 재미있게 들어 주신 것 같은데 정작 쓰시는 글들의 착안점은 제가 생각했던 중심과 강조점과는 조금 다른 지점이 되더라고요. 그리고 한 번 착안점이 생기면 거기서 시작되는 글쓰기가 굉장하게들 진행되었습니다. 명색이 이끔이라서 쓰신 글들에 대해서 피드백을 해야 하는데 글 한 편이 나올 때마다 뭘 어떻게 피드백을 해야 하나 머리를 참 많이 싸맸었죠.

하긴 생각해 보면 "말 걸기"라는 게 이런 예측불허의 과정일 수밖에 없기도 하겠더라고요. 각자가 주목하는 지점은 다양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어쨌든 제 강의의 어느 부분에서 수강생분들이 자극을 받아서 훌륭한 글들을 쓰셨다는 것이 오히려 더 바람직한 "말 걸기"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고요. 물론 제 생각엔 이끔이가 잘 했다기보다 수강생분들이 워낙 훌륭하셨다라는 쪽에 한 표입니다.

4.

이 칼럼에서 야구 이야기를 가끔씩 했었는데, 응원팀 야구 선수 중에 타격폼이 정말 독특한 선수가 있습니다. 스윙하면서 몸을 거의 뒤집어버리다시피 타격을 하는데, 신기한 건 완전히 뒤집어졌다 싶으면 홈런이 나온다는 겁니다.

최근에 야구 중계를 보면서 이 선수의 타격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해설자가 타격폼이 독특하지만 저건 자기 스스로에게 맞는 최선의 타격폼을 찾아낸 것이라 코멘트를 하니까 캐스터가 그 말을 받아서 역시 타격폼에 정답이란 없는 거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해설자가 다시 받기를 정답이 없는 게 아니라 정답을 찾은 거라고 하더군요. 타자들에게 다 통하는 정답은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답이란 건 각자 찾아야 하는 거란 이야기겠죠.

종교인이란 명칭을 가지고 살다 보니 어떤 단일한 정답, 흔히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단일한 정답이 존재하고 그 정답을 실현 혹은 실천하면 되는 것인 양 이어지는 말들을 너무 많이 접하게 됩니다. 따지고 보면 이런 말들이 꼭 종교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예를 들어 지금 막 시작된 대통령 선거 경쟁에서 유력한 양 진영 모두 "XXX만은 안 된다"라는 단일한 정답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양 밀어붙이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으니 말입니다.

앞에서 "말 걸기"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했었는데, 이 "말 걸기"라는 건 단일한 정답이라는 것과는 좀 거리가 멀어 보이죠, 확실히? 누군가 자기는 이 말이 하고 싶어서 말을 건네면, 그 말을 받는 사람은 그 말에서 또 다른 지점에서 자극을 받아 다른 말을 건네는 과정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말 걸기가 이어지는 과정이 순탄한 과정이지만은 않겠죠. 이곳저곳에서 불협화음이 발생할 텐데요. 아마도 그 불협화음의 순간에 필요한 말이 어쩌면 어디선가 들었던 이런 말일 지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이 각자 타당한 요구를 하고 있는데 충돌이 생긴다면,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충분하게 요구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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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기획 기사] 말 걸기 방식, 내가 오롯이 있기 위하여(홍성훈)
웹진 제3시대
조회수 120

말 걸기 방식, 내가 오롯이 있기 위하여




홍성훈(작가)

한때 어머니와 다니는 일이 안심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어디를 가든,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과 마주할 때면 이렇게 운을 뗐다.

“얘가 지금 대학원에서 공부중인데요. 제가 얘 낳을 때 난산을 해서 장애로 만들었어요. 아이고, 그때 조금이라도 힘을 줘서 쑥 낳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래도 머리는 좋아서 대학원까지 갔고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어머니의 타임라인에서 나의 시간은 늘 같은 방향으로 흘렀다. 본인이 심한 난산을 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 이야기의 종착점은 내가 어느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는가, 였고 한 손가락으로 글을 써서 그 자리까지 갔다는 게 핵심 포인트였다. 어머니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어서 어느 순간 사람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듣곤 했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빠르게 나타났다. 나를 보는 시선이 45도에서 40도로 약간 이동했는데 그 각도는 휠체어가 아닌 그 위에 앉은 나를 조금 더 들여다 볼 수 있는 시야를 틔워 주었다. 곁에 있는 나는 뭘 그런 얘기까지 하냐는 식으로 어머니의 팔을 툭 쳤지만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극대화하기 위한 연출 기법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나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어머니와 같이 있으면 사람들에게 굳이 나를 애써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특히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라는 말은 꽤 효과가 있었다. 몇몇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나에게 의사를 물어보기 시작했으니까. 바로 직전까지 아무리 나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어머니나 활동지원사 선생님과만 시선을 맞추고 나와 관련된 의사결정을 두 사람에게 물어본 이들이었다. 말하자면 어머니는 기가 막힌 솜씨로 타인과 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숙련공인 셈이었다. 아들을 장애인으로 만들었다는 죄책감과 그럼에도 이렇게 잘 키워냈다는 자부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어머니의 이야기가 자주 반복될수록 내가 나를 설명하는 언어들이 점차 줄어만 갔다. 어느 순간 어머니와 비슷한 방식으로 나를 설명하고 있는 모습을 스스로 발견할 때면 하던 말을 뚝, 멈출 때가 많았다. 어머니의 죄책감을 이용하는 비열한 짓이었다. 또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사람들과 나 사이에 어떤 경계선이 생겨났다. 견고하게 그어진 경계선 속에서 사람들에게 나는 ‘관조’의 대상이었지, ‘비평’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더 이상 사람들은 나의 일상을 뒤흔들 만한 말을 하지 못했고 나도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상냥하고도 쓸쓸한 예의였다.

‘전환’의 순간이 찾아온 건 공연 무대에 섰을 때였다. 아주 우연한 연결로 기회가 찾아왔다.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공연 팀에 합류했다. 사실 무대에 서는 일은 전부터 꿈꿨던 일이었는데, 무대만이 주는 긴장감을 느끼고 싶었고 관객들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무대 위에서는 내가 어떤 ‘역경’을 딛고 왔는지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나를 드러내고 관객들과 함께 있을 것인지가 중요했다. 그것은 서로의 삶의 맥락을 잇거나 다시 만들어내는 일이었으며 서로의 말을 잘 듣고 응답을 주고받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나의 소통방식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아야 했다. 나는 말을 하기 위해 어깨 근육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음성언어가 아닌 문자언어, 즉 타이핑으로 말을 만듦으로써 사람들과 소통을 해오고 있다. 의학적 관점에서는 이런 나를 일컬어 ‘언어장애인’이라고 정의한다. 내가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 이들이었는데 각자의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반드시 침묵이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나의 타자 속도가 빠르다면 어느 정도 침묵의 시간을 줄일 수 있을 텐데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다. 침묵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어떻게든 한 손가락을 재게 놀리려고 애쓰지만 그럴수록 오타가 발생하는 빈도가 더 늘어나기만 했다. 나는 느린 타자 속도와 종종 발생하는 오타를 부끄러워했다.

그런데 무대에서만큼은 다르게 접근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상대방의 소통방식에 나를 맞추려 하기보다는 나의 소통방식으로 초대하고 싶었다. 무대는 얼마든지 삶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확장성을 가지고 있는 공간인 만큼 한번 시도해보고 싶었다. 나는 무대에 설치된 스크린에 문자를 찍고, 하고 싶은 말을 관객들에게 전했다. 그 순간만큼은 나의 속도나 오타에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하면서 한 글자씩 나의 말을 완성해나갔다. 관객들은 나의 말이 완성되기까지 기다려주었고 그 말에 대한 응답을 그들의 방식으로 들려주었다. 그렇게 나와 관객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삶의 어떤 부분을 이어나갔다. 일상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충만감이 느껴졌고 삶의 지지대 하나가 세워진 느낌이었다.

공연이 끝난 이후로도 나는 나를 설명하기 위한 언어와 방식들을 찾아나가고 있다. 무대가 아닌 일상에서도 내가 오롯이 있기 위해 나는 누군가에게 말을 건넨다.







사진 : 정택용 X 0set 프로젝트




ⓒ 웹진 <제3시대>






정연선22시간전
나무가 있습니다
감나무인 지
사과나무 인 지
은행나무 인 지
사람들은 그 열매나
더 자세히 보는 사람은
잎이나 색을 보고
감나무라 믾말하고
은행이라고 합니다

나무는 어머니 입니다
열매는 자식입니다
어머닌 잘생긴 열매도
좀 이그러진 열매도
맛이 들고 성숙하여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훌륭한 나무이고
열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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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기획 기사] 우리가 아끼는 것들(이성철)
웹진 제3시대
조회수 155

우리가 아끼는 것들



이성철(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원)

아끼다보면 더 애틋해 지는 것들이 있다. 돈, 새로 산 옷, 시간, 읽고 싶던 책, 사랑, 먹고 싶은 음식, 용서, 친구. 느린 나는 이런 것들을 아주 소중히 또 천천히 묵혀둔다. 언제 샀는지 기억나지 않는 책을 어느 날 꺼내 읽으면 위로를 주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난 용서와 냉장고 안의 음식은 입에 담지 못하고 버려진다. 아마 내게 아끼는 마음은 소중하게 여기는 것보다는 함부로 쓰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밖에 나가 밥 먹을 시간을 아껴 책상에 앉아 회의를 하며 밥을 먹고, 만나지 못해 더 이상 취향을 모르는 친구에겐 선물목록 베스트 선물을 카톡으로 보낸다.

어떤 것을 마주해야할 때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미루고 미루다, 아끼다 똥이 되는 그 직전의 순간을 사랑하며 쓸모 있음과 없음, 그 사이를 기다린다. 친구에게 잘 지내냐는 연락을 지금 하느냐, 할 이야기가 있을 때 하느냐. 이 안주를 지금 이 술과 함께 먹느냐, 나중에 다른 술과 함께 먹느냐 같은 것들 말이다. 그날도 배달 어플로 어렵게 저녁메뉴를 고르고 배달 도착 전, 기숙사 앞으로 나가는 길에 Y를 만났다.

몇 년 전에 알고 지내던 Y는 3년 만에 만나 복도를 마주하고 서로의 앞방에 살고 있다. 마주보며 산 지 반년이 지나가지만 배달음식을 받으러 방을 나오다 마주칠 뿐이었다. 우리는 종종 서로의 방 앞에서 마주치면 안부와 손에 든 배달음식 메뉴를 물었다. 그날 친구는 메뉴가 아니라 본인이 요새 살이 빠진 것 같지 않냐고 물었다. 원래 마른 체형의 친구였는데 정말 살이 더 빠져보였다. “야 임마 우리 지금껏 헛살았어, 살을 빼는데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어”라며 배달 음식 봉지를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친구는 책상에서 약봉투를 가져와서 알록달록한 약들을 보여줬다.

이야기인즉슨, 살 빼는 약을 처방받아 먹는 친구가 추천해줘 약을 먹으니 3주 만에 5키로가 빠졌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계속 식욕억제제를 먹고 있다고. 정상체중이지만 직장생활로 살을 뺄 시간이 없어 스트레스라고 말하니 체중도 BMI도 재보지 않고 약을 처방해줬다는 것이다. 처방받은 약은 탄수화물 흡수를 방해하는 마약류인데, 하루에 6개의 알약이 들어있는 약 한 봉지와 근육을 유지하기 위한 닭가슴살 하나, 치즈 한 장 정도를 먹으면 문제없이 살이 빠진다고 했다. Y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약의 효과를 설명해줬다. 전엔 식욕억제제나 다이어트 약을 먹는 사람들은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다이어트 한다고 굶은 뒤 늦은 밤 폭식하고 오는 자괴감이 없어져서 좋고 무엇보다 약 한 봉지가 밥값보다 가성비가 좋아 매끼 먹을 메뉴 고르지 않아도 된다, 싸고 배고프지 않으니 약을 먹지 않는 게 바보 같다고 느껴질 정도다, 등등. 그래도 같이 나가서 삼겹살은 한번 먹자고 약속을 하고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Y는 약을 먹은 후로 밥을 먹지 않아도 힘이 난다고 했다. 그리고 약을 먹지 않아도 먹는 양이 줄었다고. 같이 먹는 밥의 의미를 잃은 사람들은 밥을 먹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서로의 안부 묻기를 주저하고, ‘조만간 밥 한번 먹자’라는 인사를 아끼며 살아간다. 약속이 없으니 머리를 자르는 기간이 미뤄지고 계절이 지나도 새 옷 사기를 주저한다. 연결되려던 노력이 줄어들고 우리는 이제 무언가를 하지 않음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배달 어플에 1인분 주문이 있지만 가격과 양은 1인분스럽지 않아 1인 가구의 식사는 대단하거나 초라하다. 돈을 아끼거나 건강을 아낀다지만 사실 둘 다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더 많은 것을 잃기 전에, 서로가 아끼는 것들에 조금씩 가까워져 서로를 아끼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좋겠다. 오늘 저녁엔 뭐가 먹고 싶은지 묻는다면, 한 끼 밥이 처리하고 때워야 하는 일에서 조금은 의미 있는 일로 변하지 않을까. 이제 우리가 상하기 전에 나는 내 방문을 열고 너의 문을 두드려 우리 같이 밥 한 끼를 먹자. 시간이 늦었으면 조금 식상하지만 치킨도 좋아. 맥주는 내가 가져갈게. 그렇게 조금씩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아끼지 말고 서로를 아끼자.

Y와 인사를 하고 들어와 배달 봉투를 풀고 조금 식은 삼겹살을 먹었다. 1인 세트였으니까, 그뿐이다. 우리는 아직 서로를 포기하거나 방치하지 않았다. 삶과 힘을 아끼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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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기획 기사] 감별사들을 위한 대답은 없다(김윤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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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별사들을 위한 대답은 없다



김윤동(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기획실장)

주얼리/액세서리 숍을 운영하다 보면,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다.

이거 ‘가짜’죠? 또는 ‘가짜라 변하죠?’라고 묻는 질문들이다. 숍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말문이 턱하고 막혀 버린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줄 몰라서가 아니다. 어디서부터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다.

이런 진짜와 가짜를 묻는 질문들 아래에는 주얼리/액세서리 중에 시간이 지나면 변하는 것은 가짜이고, 고가의 보석은 변하지 않는다는 선입견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우주 속 광물 중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귀금속이라고 불리는 순도가 높은 금, 은, 다이아몬드라도 변한다. 공기에 노출되고, 사람 피부에 닿으면 변한다.

변하는 것은 색 뿐만이 아니다. 색이 변하지 않더라도 보석은 잘 긁히고 깨진다. 무른 광석은 말할 것도 없고, ‘모스 경도’로 따졌을 때 가장 단단한 광석이 다이아몬드는 어떠한가? 어떤 것으로 긁어도 긁히지 않아서 변하지 않는 귀금속의 대명사가 바로 이 다이아몬드인데, 이 다이아몬드는 잘 긁히지는 않는 광물이지만, 결이 일정하게 나 있기 때문에 자신보다 잘 긁히는 금속과 부딪히게 되면 쉽게 쪼개지고 깨져버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값어치도 당연히 변한다. 동네 금은방만 가도 알 수 있듯이 금을 사는 가격과 파는 가격이 다르다. 물론, 세계의 금 ‘시세’라는 게 변동하면서 가지고 있는 금값이 오르락내리락하지만, 수천만 원~수억 원을 주고 산 주얼리도 구입한 그 순간부터 값어치는 떨어진다. 시장의 원리에 의해서 값어치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 자체가 값어치가 변한다는 의미다.

조금 덜 변하고, 느리게 변할 뿐 모든 귀금속, 광석은 변한다. 다른 것보다 빨리 변하고 무르고 잘 깨진다고 해서 ‘가짜’라 불리는 것이 온당한가? 모든 금속이나 광물은 각자의 이름이 있다. 백금, 금, 은, 황동, 청동, 다이아 등. 이런 이름이 있는 모든 광물들도 변하는데, 상대적으로 지구에 매장량이 많고 색이 변하고 그로 인해 가격이 저렴한 광물이라는 이유로 이름이 아니라 ‘가짜’라고 불리는 것은 온당치 않다.

‘가짜냐’, ‘가짜라 변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긴 설명을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간단히 대답한다. “금도 변해요. 조금 늦게 변하는 것뿐이죠.”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도쿄 올림픽 이후, 전과는 달라진 장면들이 보이곤 한다. 과거에는 메달 자체가 당연시되는 종목이나 선수가 메달을 따지 못 하거나 높은 순위를 얻지 못하면 대중들은 비난 일색이 되고 선수들은 귀국을 할 때면 고개를 숙여 석고대죄를 하는 모습이 일반적이었다. 최근에는 이와 달리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가 경기 자체를 즐기고, 관람하는 이들도 선수들의 최선을 다 하는 모습에 매력을 느끼는 경우가 훨씬 많아졌다. 인기종목, 대중적인 프로 스포츠가 아니더라도 아주 다양한 종목에서 각자의 최선을 다하는 아마추어 스포츠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국위선양’을 따지며 대한민국의 메달 순위가 올라가면 국격이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경향은 적어지고, 선수 개개인이 최선을 다해 경연과 경쟁 자체를 즐기는 모습에서 스포츠의 본 취지를 찾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는 이야기다. 개인과 팀의 목표에 비해 성과를 내지 못한 사람들이 탄식하고 애석해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저 메달을, 나아가 금메달을 딴 사람만이 ‘진짜’ 스포츠 선수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선수 대우도 받지 못하던 시절은 이제 간 것 같다.

이제 차별 그 자체에 관심을 두는 감별사들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디에든, 무엇이든 고유의 질서와 이름이 있다. 다짜고짜 ‘진짜예요? 가짜예요?’라고 물으면서 서열을 나누는 습속을 들키지 말아야 한다.

누가 진정한 페미냐, 누가 진정한 진보냐, 누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냐, 누가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고 정의를 실현하고 있는가 등과 같은 소위 ‘진정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 보아야 한다. ‘진정성’의 문제를 개인과 특정 팀이 자발적으로, 내부적으로 묻는 것에는 의의가 있을 수 있으나, 그 질문이 바깥을 향할 때는 분명 차별의 칼이 되어 있을 것이다.

서열을 나누고 차별을 행하는 습속을 드러내기 전에 한 숨을 쉬고 자신을 객관화해볼 수 있는, 성찰적이고 겸손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게 ‘진위’의 경계를 끝없이 허물고자 하는 이 시대의 요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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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비평연습 특집] 그의 이름은(창세기 2:4-3:24) : 비평연습 1회차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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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창세기 2:4-3:24) : 비평연습 1회차 글쓰기

김현주(대전보건대 식품영양학과 교수)


첫 사람의 이름은 사람일까, 아담일까, 남자일까? 그대와 함께 사는 강아지의 이름은 개인가, 댕댕이인가? 시츄일수도 있고 푸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가 애완하는 강아지를 개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아이는 여느 강아지와 다른 내 아이이며 내가 이름을 부를 때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 안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청소노동자들의 몸짓을 춤으로 담은 과정을 영상으로 보았다. 동대입구역에서 야간노동을 하는 그분의 이름은 배남이였다. “내가 배남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았어요.”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이제껏 누가 볼까 창피하던 청소하는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발견당하는 경험을 그분은 눈물로 감격했다.

성경의 첫 사람은 아담이다. 창조설화에는 개체의 이름과 종의 이름이 섞여 있다. 그래서 이 첫 사람을 좀 알아보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읽어야 한다. 한글 성경에서는 아담을 사람이라고도 번역했고 남자라고도 번역했다. 어느 쪽이든 사람의 이름은 아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첫 사람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첫 사람은 이름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고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지어 불러줄 이가 아무도 없는 아담에게서 절대 고독의 무게가 느껴진다.

흥미롭게도, 이름이 없던 첫 사람의 직업은 작명가였다. 그는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하며 살았다. 짐승을 보고 그가 이르는 것이 그 이름이 되었다. 허나 그가 지어준 이름은 상대와 관계를 구성하는 애칭이 아니라 공식적인 명칭이었다. 아담은 여러 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으나 무엇과도 벗 삼지는 않은 것 같다(창 2:18-20). 첫 사람이 하나님이 데려온 강아지에게 ‘개’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을까, 아니면 ‘댕댕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을까? 전자였다. 만일 후자였다면 하나님이 추가로 여자를 만들 필요가 없었을 테다. 사람이 혼자라서 좋지 않으니 짝을 지어 주자던 하나님의 첫 시도는 뜻을 이루지 못하여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여기서 창조자가 첫 사람의 이름을 지어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나는 하나님이 첫 사람의 짝(돕는 베필)이 되어줄 수는 없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마치 첫 사람이 어떤 짐승도 짝으로 삼을 수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도 사람의 짝으로는 맞지 않았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비유하였다. 이 편지는 성경에 새겨져 기독교 세계에서 가부장을 지지하는 메시지로 기능해 왔다. 성인지 감수성이 좀 생기고 나서는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에서 아내의 복종은 수월하고 남성의 사랑은 엄청 힘들다는 식으로 양보하기도 하지만 그런 시각으로 남편과 아내의 위계를 해체하지는 못한다. 비록 바울이 윤리적인 설교의 형식을 빌리기는 하였으나 이 비유를 부부관계의 첫 모형인 창조 설화의 첫 남자와 아내의 관계에 비추어 보면, 바울의 비유는 그리스도와 교회가 동등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예수는 생전에 딱 한 번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미래형으로 말한 것 외에 교회라는 것을 시도한 적이 없다. 베드로와 긴장 관계에서 정통성이 간절했던 바울이 본격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관리하면서 자신이 세운 교회의 권위를 그리스도와 동등한 수준으로 주장하고 싶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그 동등함은 동일함이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다르고 사람과 짐승이 다른 것처럼 존재는 구별이 되지만 남자와 여자는 그런 구별이 없다는 정도로만 이해하여도 교회의 위상은 상당히 올라간다.

이 동등한 여자와 남자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하나님은 첫 사람의 갈빗대를 뽑아 여자를 만들어 데려왔다. 이제 첫 사람 아담은 더 이상 아담이 아니다. 계산을 해 보면, 갈빗대를 잃은 아담은 당연히 원래 아담보다 모자란다.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었다. 아담에게서 떼어낸 갈빗대는 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창 2:23). 여기서 여자를 만들었다는 표현에 NASB는 fashion이라는 동사를 썼다. 상당히 모양을 낸 것 같은 느낌이다. 들짐승도 날짐승도 움직이지 못한 아담의 굳은 마음을 흔들어보겠다는 창조자의 의지겠다. 갈빗대를 잃어 아담보다 조금 모자라게 된 (첫 사람이 아닌) 첫 남자는 이제 여자에게서 자신의 모자람을 채워 줄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른다(창 2:24). 합본 편집된 성경에서 가장 앞자락에 기록된 노래다.

사람이라는 보통명사로 불리던 이름 없고 외로운 작명가에게 이제 재미라는 것이 생겨났다. 그동안은 갈빗대가 있어서 외롭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갈빗대를 잃고 부족함이 생기자 관계에 대한 갈망도 생긴 것이 우연일까? 처음 만들어진 완벽했던 첫 사람은 여러 짐승과 심지어 창조주에게도 무심했다. 세상에는 동식물이 가득하고 성부, 성자, 성령이 역동하고 있었음에도 하나님은 그가 ‘홀로’라서 좋지 않다고 하였다. 복잡한 놀이공원에서 홀로인 사람을 상상해 보자.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거나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는 것이다. 창조자가 그의 벗이 되어주는 대신 그에게 벗을 만들어 준 이유는 아무래도 그에게 부족했던 것이 바로 ‘부족함’ 그 자체였기 때문일 것 같다. 갈빗대라는 것이 신체 기관인지 마음의 조각인지 영혼의 부스러기인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빠져 나간 ‘빈자리’가 없는 첫 사람은 완벽하지만 무언가 모자랐던 것이다. 이름이 없어도 부족함이 없던 그에게 결핍이 없어서 부족했다는 역설이 흥미롭다.

이어서 선악과를 먹는 장면에서 우리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분명히 첫 사람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말했다는데, 여자의 말에서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고, 어기면 우리가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고 묘하게 달라져 있다. 남자가 들은 말을 여자에게 정확히 전달했다면 여자가 열매를 가져와도 바로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마디는 했겠지. 사실 남자도 헷갈렸을까? 여자가 열매를 먹었다는데 죽지 않고 와서 열매를 주니까 아마 괜찮은가보다 믿었을지도 모른다. 이 중요한 장면에서 아담은 망설이지를 않는다. 하나님의 명령은 막연하지만 그걸 어기고도 생존한 아내가 와서 하는 말은 구체적이다. 그래 너만 먹을 순 없지. 나도 먹어보자.

그런데 여자만 열매를 먹어서는 나타나지 않던 열매의 효과가 남편도 먹고 나서야 나타난다. 그들은 눈이 밝아졌다. 이름이나 짓던 한량이 노동으로 옷을 지어 벗은 몸을 가린다. 벗은 몸이 부끄러울 수 있는 여건은 누군가가 쳐다볼 때다. 길고양이는 옷을 입는 법이 없다. 그래도 전혀 부끄럽지 않다. 고양이는 인간의 몸을 쳐다보지 않는다. 관심이 없으므로. 마치 백인 여성이 흑인 남성 노예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갈아입었다던 상황처럼 상대의 시선이 나에게 의미가 없다가, 눈이 밝아지고 나서야 비로소 상대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선악과를 먹은 효과는 일차적으로 개인이 아니라 관계에서 나타났다. 만일 첫 사람이 홀로일 때 선악과를 먹었다면 도대체 무엇이 부끄러웠을까? 여자가 뱀을 만나 열매를 따 먹은 후 남편 것도 따서 가져올 때 옷을 입었을 리가 없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상대를 바라보는 눈이 밝아져서 관계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된 동산의 파국이자 인간이 만드는 새로운 관계, 사회의 시작이었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몬스터’의 몬스터는 괴롭힐 대상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모두 찾아서 죽임으로써 피해자가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세상을 외롭게 살아가게 한다. 이 만화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는 사람은 존재도 없는 것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성경은 끝내 가인과 아벨과 셋의 아버지인 첫 남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마치 절대적인 존재인 양 내내 아담이었다. 그러나 첫 여자의 이름은 ‘생명’이었다. 하와라는 이 이름은 창조된 동산을 떠나 인간의 사회로 가면서 죽음과 고통을 경험하게 될 아내에게 선물처럼 남편이 지어준다. 첫 남자가 죽을 때까지 아내를 ‘생명’이라고 불렀다니, 애절하지 않은가! 그는 죽을 운명이었지만 그의 입으로는 생명이라는 단어를 끊임없이 말했을 것이다. ‘생명’이라고 불리는 그의 아내는 세 아들을 낳았고 가인과 셋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창 4:1, 15). 아벨의 이름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하다. 이 ‘부족함’이 완벽함이 지닌 모자람을 채워줄 수 있다는 것을 앞에서 말했다.

첫 사람이자 첫 남자인 이름 없는 사나이는 바울이 로마 신도들에게 보낸 편지에 ‘장차 오실 분,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언급된다(롬 5:14). 죄를 지은 첫 사람이라는 멸칭을 장차 오실 분의 모형으로 역전시키는 바울의 논리가 흥미롭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아담은 갈빗대를 지녔던 첫 사람일까, 아니면 갈빗대를 잃고 여자의 짝이 된 첫 남자일까? 다시 묻자. 예수는 남자였을까? 요셉의 정자 없이 마리아의 태에서 성령으로 발생되었다면 일단 Y 염색체를 인간에게서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굳이 남성일 필요가 없지.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성이든 굳이 공개할 필요도 없었다. 분명히 예수는 남성이 아니라 인간으로 성육신하였고 인간으로 살았고 인간으로 부활하였다. 예수는 혼인하지 않았고 자녀를 낳지 않았다. 남성으로서 생식능력을 확인한 바 없으니 남성이었다고 주장할 생물학적 근거도 없다. 그러니 예수의 모형으로 언급되는 아담은 갈빗대를 지닌 첫 사람이라고 하자. 그 사람 안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었고 그들의 관계도 들어있었다. 선악과를 먹고 죽음을 맛본 이는 개별적인 여자,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와 그 여자가 연합하여 한 몸이 된 인간(人間)이었다. 이 비밀을 자기 몸에 간직한 아담은 누군가의 남편이기 전에 온전한 원형적 인간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누가 지어 준 이름으로 불리며 개인적인 관계 속에 머물 수가 없었다. 그는 모든 인간의 대표가 되어야 했고 모든 인간관계를 구성하는 초주체(hypersubject)여야 했으니까. 그리고 신이면서 인간인 예수는 아담의 이름으로 인류와 만났다. 첫 사람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자 비로소 모든 관계를 왜곡시킨 초주체로 이름을 얻는다. 이것은 공자가 논어에서 답한 세상을 바로 세우는 정명(正名)이다. 이제 나는 초주체라는 괴물이 해소된 새로운 세상에서는 hyposubjects가 이름을 얻을 수 있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Hyposubjects are necessarily feminist, colorful, queer, ecological, transhuman, and intrahuman. Hyposubjects make revolutions where technomodern radar can’t glimpse them. They patiently ignore expert advice that they do not or cannot exist. They are skeptical of efforts to summarize them, including everything we have just said. Timothy Mo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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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비평연습 특집] 빵 부스러기(마가 7:24-30) : 비평연습 4회차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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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부스러기(마가 7:24-30)
: 비평연습 4회차 글쓰기




김현주(대전보건대 식품영양학과 교수)

어린 시절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오다가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에 닿으면 더는 가지 않고 친구들에게 안녕! 했다. 이상하지. 길은 이어져 있고 경계는 없었지만 더 나아가서는 안 될 것 같은 심정의 벽을 느꼈다. 그 골목에 닿기 전에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친구들은 학교가 너무 가까워서 부러웠고, 그 골목에서 더 걸어가야 하는 친구들의 집들은 먼발치에서 아득했다. 기억 속의 나는 그 경계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막상 가보면 고갯마루가 이어져 있지마는 왜인지 무섭고 신비로운 세계가 숨겨져 있을 것처럼 느껴지는 산 너머처럼, 어린 시절 집으로 오는 길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들이 첩첩이 드리워져 있었다.

본문에서 예수는 두로 지역으로 간다. 다른 사본에는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 게네사렛까지 찾아온 바리새인들 및 율법학자들과 율법을 어떻게 해석할까 한바탕 논쟁을 마친 후였다. 구약 역사서는 가나안을 점령한 이스라엘의 국경을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로 요약한다. 브엘세바는 남쪽 경계고 단은 북쪽 경계다. 두로는 단과 위도가 거의 비슷하고 시돈은 조금 더 북쪽으로 떨어져 있다. 제국의 땅이라 쉽게 넘을 수 있는 경계였지만 유대인의 심정에서 두로는 이방 땅이었다. 예수는 이 경계를 방금 넘은 것이다.

사실 이 경계를 넘을만한 상황이었다. 당시 갈릴리 바다 북안 게네사렛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논쟁하러 예수를 찾아 왔고, 오병이어를 얻어먹은 군중들은 오늘은 또 무슨 먹거리를 줄까 궁금하여 몰려들었다. 아픈 사람들은 병을 고치려 보호자와 함께 몰려들었다. 제자들은 밤새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넌 참이었다. 그리고 예수는 한밤중에 물 위를 걸어서 바다를 건넜다. 배가 없었던 거다. 그 시끌벅적한 가운데 논쟁이 벌어졌으니 말 그대로 야단법석(惹端法席)이었다. 그 전에도 예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제자들을 배에 태워 보내버린 적이 있다(마가 6:45-46). 그러다 이제 더는 안 되겠다, 바리새인들이 쫒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자, 고 이방 땅으로 넘어가신 것 같다.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는 아무도 모르게 숨으려고 했다고 기록한다(마가 7:24).

예수의 은신처에 그리스 여인이 찾아온다. 논쟁하러 온 것도 아니고 빵을 얻어먹으러 온 것도 아니었다. 대화 가운데 빵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여인의 관심사는 빵이 아니었다. 어미는 자기 입에 들어가는 빵보다 자식이 삼키는 빵이 더 배부른 법이다. 이 여인의 소원은 자기 딸이 낫는 것이었다. 아람어로 말하는 예수와 헬라어를 쓰는 여인이 어떤 언어로 대화하였을지 궁금하다. 적어도 이 여인은 예수 앞에 저자세로 엎드려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예수는 거절한다. 자식에게 줄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고, 아마도 단호히 말한다. 민중신학자 김진호는 이 장면에서 예수가 귀족 여인을 개 취급함으로써 두로에서 이주노동자로 살아가던 갈릴리 민중들의 현실을 거꾸로 적용하였다고 해석한다(https://owal.tistory.com/624). 이렇게 해석한다면 예수의 말은 통쾌하도록 매섭고 차가웠을 것이다. 또 다른 이는 이 여인이 “하느님의 잔치상이 넘쳐흐른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인정하도록” 한 수 가르쳤다고 평가한다(https://url.kr/ca6ups). 이런 장면에서라면 예수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을지 모른다.

마가복음은 로마 군단이 예루살렘 성전을 산산이 부수고 메시야공동체와 예루살렘 교회를 파괴하며 유대 전역을 쓸어버린 정복전쟁(AD 63-70)을 겪으며 이것이 마지막이 아님을 깨달은 마가공동체가 신앙의 고백을 남긴 구전이다. 공동체는 사라졌고 말씀만 남았다. 그런 시각에서 마가 문헌에 기록된 수로보니게 여인은 새끼를 품고 불에 끄슬린 암탉의 품에서 생존하여 기어 나오는 병아리와 같은 느낌을 준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게 보낸 예언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마태 23:37, 누가 13:34)” 하나님도 자식에게 빵을 주고 싶지만 먹지를 않아 고통스러운 어미였다. 고통에서라면 지지 않을 이 여인은 자식의 병을 고치기 위해 개라도 되겠다고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품어 구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그러면 나를 구해 주십시오. 그 품에 나라도 품어 살리십시오. 여인은 이렇게 애원하고 있다.

경계 안쪽에서 군중들은 요구한 것은 입으로 먹을 빵이었다. 예수는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생명의 빵을 주겠다 하여도 군중들은 됐다고, 빵이나 달라고 요구했다. 모세의 히브리인들이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먹고도 생명의 양식을 먹지 못하여 가나안에 닿기 전에 죽어버린 이야기를 하여도 그들은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이 소위 메시야공동체의 정체였다. 예수가 그토록 주고 싶었던 빵에 군침을 흘리는 여인을 경계를 넘어 이방 땅에서 만나다니 얼마나 역설적인가.

예수는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서 헬라 여인을 만났고, 말마따나 자식에게 줄 빵을 개에게 주었다. 사실 먹겠다는 자식이 없어 남은 빵이 바닥을 굴러다니다가 개의 입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사건이 예표라도 된 것처럼, 복음은 이스라엘 경계를 넘어 마케도니아를 거쳐 고린도를 지나 로마로 흘러들어갔고 예수의 복음은 바울의 입을 빌려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그 부스러기를 먹고 있다.

덧붙여, 지금 교회가 가진 진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빵은 자식의 입으로 들어가 살찌우고 있는가. 여전히 입맛없는 자식들 앞에서 천덕꾸러기처럼 굴러다니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면 이 식탁 앞에서 군침을 흘리는 이방인은 누구일까. 우리 시대에 복음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구현될까. 우리는 예수처럼 우리 앞에 보이지 않는 막막한 경계를 넘어 낯선 땅으로 들어가 지낼 수 있다. 거기서 우리를 찾아오는 낯선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을 들을 수도 있다. 새로움에 마음을 열고 복음의 새로운 맛을 느끼는 소망의 식탁에 어색하게나마 앉게 된다면 얼마나 큰 영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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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특별 연재] 인터뷰 : 그대를 찾아서(강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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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그대를 찾아서 11



강윤아(청소년극 연구자)


이 연재는 서울 장충동 경동교회 중고등부의 91년 예술제인 뮤지컬 <그대 버려졌나>의 참가자들을 만나서 인터뷰하는 프로젝트이다.

9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이 당시 공연 체험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고 그것이 40대가 된 현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탐색하는 작업이다. [경동 예술제, “그대 버려졌나”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배경에 대해서는 본 연재의 초반에 소개한 바 있다.]

*이전 연재 보기 _ 클릭


H는 “그대” 당시 고1이었고 극중 탕자 아버지 역할을 맡았다. 현재 우리나라 어느 치과대학병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인터뷰는 2020년 여름 전화로 실시하였다. 아래 대화에서 K는 나다. H와의 어린 시절 친분으로 서로 격식을 차리지 않았다.


K: 공연 영상을 보니 어땠어요?

H: 다시 보면서 짠 하더라고. 진짜 그럴 때가 있었구나 생각도 들고. 어렸을 때 신우회 멤버들 모습을 보니까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뭉클하더라고 […] 당시에 강남의 D 학교를 다녔는데 입시가 굉장히 중요했기 때문에 이런 교회 예술제 공연 활동을 한다는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니까 부모님이 걱정을 하셨던거 같아. 성적이 굉장히 중요한 때였던거 같은데… 예술제 연습도 굉장히 열심히 하고 학교 공부도 열심히 했던거 같아. 그래서 오히려 성적이 오르는 기현상이 있었는데 (웃음) 농구하고 교회 다니고 예술제 준비하고 공부하고 그렇게 세 가지 밖에 없었던거 같아 그 때는. 옛날이다 옛날. 내가 그 때 왜 그렇게 열심히 치열하게 했냐 하면 그 때 내가 고1이었고 고2, 고 3 때는 대입 준비를 더 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고1때 내가 열심히 좀 잘해보자. 고2 누나들도 친하고 그러니까 열심히 도와보자. 고2 누나들이랑 친했어. 내가 좋아하는 누나들이었어.

K: 친하니까 열심히 해보자는게 어떤 마음이지?

H: 우리가 교회 다니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부모님이 다니셨던 교회라서 어려서부터 친했던 친구들이랑 다니는 교회이기 때문에. 흔히 친구 때문에 교회 다닌다는 얘기가 있잖아. 그런 의미지. 친한 누나들 그리고 어려서부터 잘 알던 동생들이랑 함께 한다는. 동고동락. 라면 끓여먹고 밤 늦게까지 하는게… 좋잖아.

K: 그 자체가 재미있는거지.

H: 그지. 그 자체가 재미있지. 어려서부터 친하고 잘 알던 신우회 친구들이고 선후배니까… 그냥 학교 선후배랑은 다른 개념이지. 가족 같은 개념이지 어떻게 보면.

K: 대학 이후에도 어른이 되어서도 좋은 모임들이 있는데 신우회 때처럼 가족 같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해.

H: 맞아. 그런 어렸을 때 추억들을 찾아서 되새기면서 살아가는데 […] 대학 때는 신우회 랑은 느낌이 다른게 확실했고 대학 들어가고 다 자기 길을 가게 된거지. 그때부터는 가족 같은 코이노니아는 쉽지 않은거였지요.

[…]

K: 그런데 강남 D고의 문화에서는 사실 그냥 공부만 잘 하면 되는거잖아.

H: 그렇지. 공부만 하면 되는 분위기지.

K: 그래도 오빠는 교회 활동을 하는 것도 중요했던거지?

H: 그렇지. 참고로 D고에서 서클 그러니까 동아리 활동이 되게 활발했었는데, 나는 그걸 하지는 않았으니까. 대신 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신우회 참가하고 예술제 준비하는게 나한테는 어떻게 보면 과외 활동이었던거지.

[…]

K: 중고등부의 일들이 신앙 활동이었다고 기억해요 아니면 과외 활동이었다고 느껴져요?

H: 신앙 활동과 과외 활동을 떨어뜨려 생각할 수는 없는거거든. 왜냐하면 코이노니아도 몸으로 드리는 예배에 포함되니까. 기도하고 말씀 읽고 그거만 신앙 활동이라고 얘기하기는 힘든거지. 두 가지를 분리하기는 어려운거 같아.

[…]

K: 공연이나 공연할 당시 생활에 대해서 더 기억나는 점이 있다면?

H: 그 때 추억들이 인생을 살아갈 때 도움이 많이 되었던 것 같아.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살잖아. 어렸을 때 좋았던 기억과 분위기와 환경. 그런 향수를 감사하고 있어. 경동교회만의 자유스러움과 문화 활동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교제… 함께함의 풍성함이라고 얘기해야 되나? 그 세 가지 정도가 [대학 졸업 후 유학생활 할 당시] 미국에서 다녔던 교회를 선택할 때 도움이 되었던거 같아. 그런 분위기가 있는 공동체나 교회를 정말 찾고 싶었던 것 같아. […] 찾기가 쉽지는 않은데, 지금은 찾은 것 같아. 그런 면에서 나는 되게 복 받은 것 같아.

K: 추억을 크게 자유로움, 문화적 즐거움, 풍성한 교제 이렇게 표현을 했는데 […] 그러한 것들이 묘하게 섞여 있었지.

H: 맞아. 이게 한 데 어우러지지 않으면 그렇게 좋은 추억들이 쉽지 않지요. […] 아무튼 그런 것이 나는 좋아 보였고 늘 그런 교회와 공동체를 찾아다녔었거든.



H가 현재 다니는 교회와 옛날 경동교회 중고등부의 공통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K: 오빠가 계속 교회 얘기를 하는 것이 재미있는데… 뭔가 신우회나 “그대”가 결국은 오빠가 일관되게 추구하거나 찾아온 교회 내지는 예배의 모델? 이런 거였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

H: 음… 그치… 교회의 원래 모습… 그런 거를 찾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신우회랑 예술제 때문이라기 보다는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 같아. 인과관계는 아니지만 상관관계는 있는거지.

K: 교회를 찾는 과정에서 영향을 제일 많이 받은 것 같은데… 그럼 혹시 교회 밖의 삶에 있어서 그 사건이 영향을 준 바가 있는지?

H: 아까 얘기 했던 것들이 학교 공부, 교회, 운동인데… 사람이 사는데 전인격적으로 성장하는거. 호울 맨(whole man)이라고 말하는데, 누가복음 2장 52절 말씀처럼 학문적, 신체적, 영적, 사회적 영역 네 가지가 균형있게 성장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 지혜가 자라는거는 학문적인 영역에서 중요한 거고 키가 자란다는거는 신체적인 거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신앙적인 거고 사람과의 관계는 사회 생활이지요. 축은 항상 영적인거지요. 예를 들어 대학교수인 내가 학문적으로도 발전해야 되고 사회적으로 사람들과의 관계성도 중요하잖아. 그리고, 삶을 좀 다양한 면에서 누리는 데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된 거 중에 하나가 운동이거든. 운동이라는거는 사실 하나의 방편 중 하나인데. 그 때 내가 농구를 좋아했는데 지금도 농구를 하고 있거든. 내 나이 때 농구하는 사람 없거든. 골프 치거나 아니면 운동 안 하거나. 나이가 들었는데도 꾸준히 즐겁게 한다는거지. 물론 내가 좋아하는거니까 하는거긴 한데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중요하거든. 학생들이랑 젊은 사람들이랑 친해지고 싶으면 농구나 요즘 학생들이 좋아하는걸 하는 개념이지.

K: 그러니까 사회적인거랑 체력적인게 둘 다 중요한데 농구에서는 두 가지가 분리가 안 된다는거지.

H: 그렇지. 영적인 것 외에도 그런 문화 생활… 내가 하고 싶은걸 꾸준히 할 수 있다는게 감사해. 어떻게 보면 당시 교회 생활도 취미 생활로 했을 수 있잖아.

K: 그러니까 신우회 예술제 등의 활동에 영적인 부분은 당연히 있는거지만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부분도 있고 그게 오빠가 계속해서 중요하게 생각해온 영역들에 포함이 된다는거지.

H: 그렇지.

K: 재미있네.

H: 근데 그게 어느 쪽에 너무 치우치지 않게 균형있게 발전을 해야되고. 그런걸 나는 좀 중요하게 생각해. 가정적인 면도 되게 중요하거든. 요즘 삶의 질 워라벨이라고 강조 많이 하잖아. 그게` 중요한거같아 점점.

K: 맞아. 재미있다. 마침 가족 얘기가 나왔는데… 사실은 지난 주 통화에서 오빠가 그랬잖아. 신우회나 예술제 같은 경험이 중요하다고 느껴져서 오빠네 애기들도 그런 체험을 하게 해주고 싶다고. 그게 어떤거지?

H: 응. 그런 곳을 계속 찾고 있는데… 예를 들면 대안학교 같은… 애들 계속 공부만 시킬거면 강남에 보내거나 유학을 보내야 할 것 같은데 그러기는 싫고… 한국에서 그런 자유롭고 인성과 지성과 체력적인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어… 애들 막 계속 공부만 시키는게 아니라 전인(全人)이 될 수 있는… 전인격적인 그런 데를 계속 찾고 있어.

K: 그런 데가 잘 없어.

H: 찾기 어렵지. 그런 곳이 있다고 해도 우리 사회에서는 잘 용납을 안 하는 것 같아. 이렇게 좀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그래서 좀 아쉽긴 하지요. 그래도 부모로써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은 해야지. 그런 분위기에서 자랄 수 있도록. 계속 고민하고 찾아보는거지.

K: 그러면 신우회가 우리에게 있어서 뭔가 대안적인 교육이기도 했던걸까?

H: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아. 우리 때는 실질적인 대안학교들이 거의 없었고 그런 면에서 신우회나 예술제가 공부나 입시 위주의 분위기에서 대안을 제시해줄 수 있는 또 하나의 학교 역할을 해 줬던 거 같아. 감사하게도 돌아보니까 그렇다는거지요. (웃음) 지금도 그런 부분… 진정한 대안 교육을 찾고, 계속 고민하고 있고 기도하고 있어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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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민중신학 다시 읽기] 나의 삶의 자세(안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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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나의 삶의 자세」, 『현존』 제71호, 현존사, 1976.5.





삶에는 연습이 없다


흔히 듣는 말이지만 나도 인생의 지각생이다. 무슨 일에 있어서든지 형광등처럼 스위치를 눌러도 불이 켜지는 동작이 늦다. 그래서 삶에 연습이 없다는 것도 늦게야 깨달았다.

사람들 중에는 학구심이 왕성하다는 표시로서 나는 학생 기분에 산다는 말을 곧잘 한다. 겸손한 말도 되고 구도자적 자세라는 말도 된다. 또는 몸은 늙었어도 언제나 어린애 마음이라는 말도 곧잘 한다. <다 됐다> <다 안다>라는 자세는 확실히 성장의 정지를 말하는 것이다. 언제나 배우고 알겠다는 노력이 왕성한 만큼 젊은 자세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거기 속임수가 있다. 그것은 그러는 동안 언제나 삶의 전선에서 책임을 도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도 만년 학생 기분이었다. 그래서 남의 말을 경청하고 되도록 결론은 짓지 않고 계속 넓게 그리고 많이 흡수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 어느듯 50의 고개를 넘었다.

오래도록 무슨 일이나 다음을 위한 경험을 쌓기 위한 연습처럼 생각했는데, 하다가 잘못되면 시정하면 될게 아니냐는 마음에서 였다. 그러나 살아온 과정을 보면 연습이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비록 연습이라고 했어도 그것은 모두 현실이 되어 밖으로부터 나를 규정하는 척도가 됐고 나 자신은 내가 한 <연습>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했다. 당장에는 몰랐다. 그러나 그런 것이 모두 전과범의 신상 카아드서 반영되듯 내 생에 씻을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버렸다. 내가 연습이라고 생각한 일들이 나를 몰고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서게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젊은이들에게 <삶에는 연습이 없다>라는 말을 반복한다. 고등학교 생활은 대학생을 위한 연습기로 알거나, 처녀시절은 결혼생활을 위한 연습기로 안다. 또 어떤 직장을 가진 이는 그 자리를 어떤 목표를 위해서 길가는 나그네가 잠간 거쳐 갈 나무 그늘 만큼이나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의 삶 자체에는 의미가 없고 자기가 내세운 다른 목표의 그림자에 눌린 ?지적 삶이 된다.



아니! 삶에는 연습도 없고, 삶은 잠간 거칠 수단이 될 수 없다.

생활은 차야 한다. 공백을 두면 곰팡이가 낀다. 삶을 채우기 위해서는 여기 지금의 내가 하는 일, 내가 가진 관계에서 충실히 해야 한다. 다음의 일을 위해 지금의 나의 최선을 보류해도 좋다는 법은 없다. 그럴 때 그 다음의 길은 막혀 버린다.

삶에는 연습이 없다. 내일 하늘에 오를 입장권을 손에 쥐었드라도 오늘은 내 선 자리가 내 현실의 전부다. 이것이 늦게 배운 내 삶의 지혜 중 하나다.


공성이불거

공을 들였으면 거기 머물지 말라. 이것은 노자에게서 배운 말이다. 나는 이것을 일찍부터 내 삶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내가 애써 이루어 놓은 일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런데 내가 만든 것이고 내 공이 든 일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런데 내가 만든 것이고 내 공이 든 일이니 나는 그것에 붙어 덕을 보겠다는 생각은 제가 이룩한 일을 제가 다 뽑아 먹어야 하겠다는 심보다. 그런 모습은 그물을 쳐놓고 거기 걸리는 벌레들을 잡아 먹기 위해 기다리는 거미를 보는 느낌이다.

공든 탑이 무너진다는 말이 있지만 무너뜨리는 것은 바로 공 세운 자신일 경우가 많다. 생애를 바쳐서 애써 길러 놓은 자식을 잃은 부모, 피땀 흘려 만들어 놓은 사업을 무너뜨리는 일군 중 많은 경우는 제 세운 공에 집착하여 나 아니면 안되다는 자부심이 행패로 변하기 때문이다. 이미 그럴만한 능력이 없는데도 한사코 제가 드린 공에대한 권리를 주장하다가 안되면 원망과 독기로 세운 것을 헐어버린다.

나는 다알리아와 같은 꽃을 싫어한다. 꽃이 흉해서가 아니다. 다 시든 뒤에도 떨어지지 않고 축 늘어 붙어 있는 꼴이 보기 싫기 때문이다. 필 때는 활짝 피고 질 때는 미련없이 깨끗이 지는 꽃이 좋다. 그렇지 않은 것은 새 순을 방해한다.

우리는 다알리아 같은 인간을 얼마나 많이 보고 있나! 이미 기력도 없고 아무 것도 감당하지 못하면서도 제 공이 든 일이라고 해서 죽는 날까지 터주대감 노릇 할려는 통에 새 사람의 등장을 가로 막고, 새로운 길은 막아 버리므로 자기와 더부러 만들어진 일 자체도 망치는 것이다.

나는 볼품없는 꽃으로 있을 망정 져야 할 때는 깨끗이 지는 꽃이기를 원한다. 그래서 아무리 정성을 바친 일이라도 남이 무어라고 하기 전에 내 할 일이 끝났다고 보여졌을 때는 홀홀히 미련없이 거기를 떠나버리는 <용기>를 기르고 있다. 그래서 큰 일도 못하고 출세도 못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더러운 출세보다 이름없이 개끗히 살다 지는 삶이기를 바란다.


더불어 잘 사는 일

<잘 살아 보자>, <잘 산다>는 우리나라의 말처럼 모호한 것은 없다. 외국어로는 도저히 번역될 수 없다. <그 사람 잘 살아> 할 때 무얼 말하는가? 대체로 돈도 잘 벌고 세력도 갖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처럼 이기적인 말도 없을 것이다. 거기 윤리적인 고려는 깡그리 빠져 있다.

요새는 잘 산다면 거의 돈이 많다는 뜻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돈벌기 위해 수단벙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래서 우리 현실은 잘살겠다는 욕심의 각추전장이 된 인상이다. 잘 사는 사람들은 점점 더 그 터전을 늘리는데 혈안이 되고, 못사는 사람은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격의 원망과 증오심으로 찬다. 잘 사는 경쟁 때문에 이웃집의 가구를 보면 빚을 내서라도 보다 좋은 것 아니면 적어도 그와 같은 것을 장만해야 한다.

눈 앞에 게딱지 같은 오막집들이 옹기종기 한데 자기만은 고래같은 집을 짓고 굽어 볼 수 있는 것에서 삶을 즐기고, 주위는 그날 그날의 끼니에 떨고 있는데 그걸 굽어보면서 진수성찬이 맛있게 목구멍에 넘어 가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그것으로 잘 사는 것을 시위할 수 있는 그 심보가 잘 사는 표상이라면 분명히 새로운 <인간족>의 탄생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가끔 <잘 사는 족속>의 집에 가면 큰 집이 텅 비었음에 놀라곤 한다. 삶이 팽창해서 집이 커진 게 아니라, 큰 집을 짓고 그걸 채울만한 삶이 없어 쓸모없는 가구, 안보는 호화판 전집, 어울리지 않는 그림들을 마구 진열했다. 그런 것들은 삶과는 유리된 악세사리라는 것은 얼른 보아 알 수 있다. 이게 다 <잘 산다>는 것을 돈 많다는 것과 직결시키는데서 온 희비극이다.

잘 산다는 것은 <더불어 잘 사는 일>이어야 한다. 집 식구가 더불어 하나처럼 같은 호흡을 해야하고 가진 물건과 내 취미가 조화돼야 한다. 그러나 내 주변이 못사는데 나만 잘 살 수는 없다. 주변이 굶주림에 아우성치는데 내 앞의 갑진 음식이 그렇게 소화가 잘 되며 내 눈 앞에 한 장의 연탄이 없어 오들오들 떠는 것을 보면서 <우리 집은 너무 더워서> 자주 문을 열어 찬 공기로 배기하는 것을 자랑으로 하는 따위를 잘 사는 사람이라고 하면 어딘가 잘못되게 하닌가!

어떤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 집안을 두리번거리다 하는 말이 <안박사님 처지에 이건 너무합니다>라고 한다. 그 말에 나는 얼른 찌그러진 몇 점의 골동품을 생각하고, “미안합니다. 사실은 저것들은 산 것이 아니라 어떤 제자가 갖다 준 것입니다”고 했드니 그건 동문서답이었다. 그는 우리집이 너무 초라하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내가 그에게는 못사는 것으로 보인 것이다.

나는 잘 살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까닭은 나보다 못 사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나는 지금보다 더 좋은 집을 쓰고 더 잘 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면 그만큼 못사는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 풀이 죽을 것만 같다. 내가 부자가 되어 소유가 많아지드라도 겉은 초라하게 하고 값진 것은 숨기지 모른다. 까닭은 못사는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나는 잘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두 더불어 잘 살기를 원한다. 너를 잘 살게 하는데 내 삶의 행복을 느끼고 그러므로 거기서 내 동일성(identity)을 찾겠다.

우리의 문제는 국민소득이 낮은 데 있는게 아니다. 아니! 더불어 사는 풍토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신앙

나는 부끄러움 없이 살지 못한다. 까닭은 이기성에서 탈피못했기에! 나는 그리스도교도다. 그러므로 예수의 교훈이나 그의 삶이 나의 생각이나 삶의 기준이 돼 있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 중에 무엇보다도 나를 사로잡는 것은 예수가 가난한 자, 눌린 자의 친구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가 그러한 소의자들을 위한 사랑을 설교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입장에 자기를 두고 거기서 자신의 동일성을 찾았다. 그는 주린자,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그리고 감옥에 갇힌 자를 자신과 일치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으나, 자신은 머리 둘 곳이 없는 길을 택했으며 그런 행위가 마침내 집권자들의 비위를 상하게 해 정치범의 누명을 써서 처형당하기에 이른 것이다.

나는 도저히 그를 모방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나의 부끄러움이며 잘 못 산다는 콤플렉스의 근거다. 그러나 그에게서 나는 사람답게끔 잘 사는 윤리의 근거를 찾았다. 그 제1장은 눌린 자, 가난한 자, 억울한 자의 편에 선다는 것이다. 이것이 더불어 잘 살기 위한 요소다.

ㅇ세력들이 횡포를 부린다. 약한자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바로 약하기 때문에 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속출한다. 부한 기업주들의 횡포에서 서민들은 생존의 위협을 당한다. 공장에서는 품팔이 노동자들이 일한 만큼의 보수를 받지 못하고도 해고가 무서워 손발이 묶여 있다. 웃음을 팔고 몸을 판돈을 포주들이 가로채어도 침묵해야 한다. 불우한 가정에서 났기에 남의 집 식모로 있어야 하는 소녀들이 주부들의 횡포에 받을 돈도 제대로 못 받고 오히려 매질을 당한다. 부모없는 어린 것들에게 돌아갈 양육비를 가로채는 악덕 (자선) 사업가들 때문에 고아들은 배를 주린다. 당하는 자들은 이미 결박된 상태이기에 권리를 찾을 길이 없다. 이런 사실들을 외면하고 종교니 사상이니 떠드는 것은 거짓말이다. 정말 인류의 사랑을 그 중심으로 하는 종교라면 바로 저런 이들의 대변자가 되고 저들의 인권을 찾아주어야 한다. 고발운동, 악덕상품의 불매운동, 억울하게 투옥된 자들을 위한 해방운동은 비록 종교라는 이름을 내세우지 않아도 종교의 본뜻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간은 설득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존중하며 그렇기 때문 폭력으로 하는 싸움은 반대한다. 인권운동은 폭력적 혁명을 사전에 저지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아무리 화급해도 해방운동은 이성에 호소해야 한다. 그 때문에 수난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이 호소는 중단할 수 없다. 일의 성패는 내가 결정할 수는 없다. 나는 그저 심으련다. 내가 거두기까지 하겠다고 서두를 때 사랑의 운동은 폭력운동으로 둔갑된다.

예수는 바로 가난하고 눌린자와 자기를 일치시키는데 삶의 뜻을 제시했다. 그러므로 나도 나의 생의 의미를 이런 데서 찾으려고 한다. 눈 앞에 있는 형제의 수난을 외면하고 천국으로 향하는 직통로는 없다. 남이야 어떻든 내 영혼의 구원만을 위해 발버둥치는 자들이 만일 종교인이라면 그건 종교적 이기주의자다. 이런 이기적인 자들이 수용되는 곳이 천국일진대 나는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겠다. 그런 곳에 예수가 있지는 않을 터이니까.

출처 : 심원 안병무 아키브

Daughters fulfill King’s dream too | Anabaptist World

Daughters fulfill King’s dream too | Anabaptist World


Daughters fulfill King’s dream too
Cousins: Connected Through Slavery, a Black Woman and a White Woman Discover Their Past — and Each Other, by Betty Kilby Baldwin and Phoebe Kilby.


In Cousins, Betty Kilby Baldwin and Phoebe Kilby take readers on a transformative journey through truth, mercy, justice and peace. Revealing their families’ connections through slavery, their stories intertwine historical trauma and current race relations with courageous acts of grace.

On Martin Luther King Jr. Day in 2007, Phoebe Kilby, a white woman, sent an email to Betty Kilby Baldwin, a Black woman, noting that King had “a dream that the sons of former slaves and slave owners will sit down together at the table of brotherhood. Perhaps we, as daughters, can contribute to fulfilling that dream.”

Phoebe — who worked in development for Eastern Mennonite University’s Center for Justice and Peacebuilding — had reached out to Betty after discovering through research that her father’s ancestors had been ­enslavers. Knowing there were Black Kilbys in Virginia, she read a book Betty wrote, Wit, Will and Walls, and suspected her own family had enslaved Betty’s.

Phoebe was encouraged to contact Betty through her involvement with Coming to the Table, an organization that seeks to heal the wounds of slavery and the racism it spawned. She believes truth-telling “requires that descendants of enslavers own up to the fact that their family committed atrocities.”

Historical records confirmed the connection: Not only had Phoebe’s family enslaved Betty’s, DNA analysis showed the women were cousins.

Profoundly affected by the wounds of slavery, Betty’s family was involved in the civil rights movement, particularly as it related to the landmark 1954 Brown v. Board of Education case. Her father took the lead in a 1958 lawsuit that desegregated a Virginia high school, opening it to his children.


While research verified that Betty and Phoebe were related, it was Betty’s response to Phoebe’s invitation that would make them family. Betty would, in return, invite Phoebe to the family table for dinner.

Could these women from profoundly different backgrounds come to the table of sisterhood? Is the “beloved community” a realistic vision? How would they face their inherited experiences and overcome the conflicts that placed them on opposite sides of race relations in the U.S.? What actions would be needed for these cousins to overcome the legacy of slavery within their families and propose a new vision for society?

To answer these questions, ­Cousins implements a pattern of call and response, an oral tradition in the Black church, which gives voice to both women and creates an atmosphere of equity. Mutual appreciation is evident as the story flows from one woman’s voice to the other.

Cousins personalizes the impact of systemic oppression’s components: privileged land ownership, unequal access to education, race-based economic instability. The stories nested within historical narratives are painful and enlightening. Betty gives a glimpse of the sacrifices made by the children of the civil rights movement, who were referred to as “soldiers without uniforms.”

As a child, Betty received nonviolence training and became a warrior for justice. Her raw account of growing up in Warren County, Va., is reminiscent of Harriet Jacobs’ Incidents in the Life of a Slave Girl and gives testimony to Joy DeGruy’s Post-Traumatic Slave Syndrome: America’s Legacy of Enduring Injury and Healing.

Through training at EMU’s Center for Justice and Peacebuilding, ­Phoebe learned “to look at conflict as an indicator that something is amiss and that change is needed.” She wanted to explore her role in the oppression of African Americans and how she had benefited from being white.

Even as Betty and Phoebe revisited the past, they believed that together they could be part of positive change. Their dedication to the journey of reconciliation, combined with their commitment to getting to know one another, offers readers a practical model of peacebuilding methods that are usually only discussed as noble ideas. Now this model of reconciliation is being passed down to the next generation and shared with those who read Cousins.

Betty and Phoebe found that “God has given us both grace to forgive the past . . . to replace hate and all of our emotional hurt with love.” It is their hope that Cousins will extend the invitation to each of us to contribute to the dream of racial justice and peace.

Melody Pannell is the founder and CEO of Destiny’s Daughters Inc. and Embodied Equity Leadership Institute. A member of Immanuel Mennonite Church in Harrisonburg, Va., she chairs the Anabaptist World Inc. Board of Directors.

2021/10/05

<오징어 게임> 기독교 악질적 묘사, 대응책은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오징어 게임> 기독교 악질적 묘사, 대응책은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오징어 게임> 기독교 악질적 묘사, 대응책은
| 입력 : 2021.10.03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넷플릭스 세계 1위 오른 <오징어 게임> (中)

근래 콘텐츠, 교회가 악인들만 있는 듯 현실 왜곡
기독교 신앙 근본적 가치 알아보려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조롱과 비난만 자행, 무지와 적개심 소치

기독교계, 교회 바깥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교회의 선한 면 납득되게 소개할 콘텐츠 제작을
비판적 논평만으로 왜곡 메시지 차단·교정 못해




▲목숨을 건 잔혹한 데스 게임을 소재로 삼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대중문화 속 기독교 비하: 교회를 악인들의 집합소로 묘사한 <오징어 게임>


최근 많은 국가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는 노골적인 기독교 비하 내용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에 반응해 여러 목회자들과 기독교 평론가들이 유감과 우려, 그리고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작품 속 기독교 비하 내용 대부분은 작품 중반부에 등장하는 줄다리기와 구슬치기, 그리고 유리 징검다리 건너기 게임에 집중되어 있다.



먼저는 자기 합리화를 위해 사사건건 하나님의 뜻을 들먹이며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논리를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데 앞장서는 태도를 보이는 한 사이비 교인이 등장한다.


다음으로 지영(이유미 분)이라는 인물이 등장해 기독교 교역자와 얽힌 자신의 지옥 같은 과거를 이야기한다. 자신의 아버지는 목사였는데, 딸인 자신에게 성범죄를 저지르다가 만류하는 아내를 살해하였고, 이에 지영은 인면수심의 아버지를 칼로 살해했다는 암울한 이야기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오로지 기독교 비하를 위한 목적으로 소비되는 캐릭터 지영(왼쪽, 이유미 분).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 두 가지 악질적인 묘사는 두 가지 함의를 지닌다. 첫째,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은 이들, 성경의 가르침을 심각하게 왜곡해 받아들이는 이들의 비위와 몰상식한 행태가 교회에 대한 세간의 인식에 얼마나 심각한 악영향을 주는지 보여준다.




둘째, 교회가 이런 거짓된 기독교인들을 공동체의 울타리 안에 방치해 둠으로써 감내해야 할 해악에 대해 되새기게 해준다.


일단 <오징어 게임> 내에서 기독교를 비하하는 방식은 분명 크게 잘못되어 있다.



자극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가장 극단적이고 극악한 예를 든 다음, 마치 그것이 기독교 신앙 본연의 한계인 것처럼 묘사하는 처사는 신앙의 본모습에 대한 심각한 편견과 무지의 소치다. 이에 대한 목회자들과 기독교 평론가들의 비판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다만 <오징어 게임>에 묘사된 거짓된 기독교인들의 저열한 행태가 전적으로 비현실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되새겨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자신의 실책과 이기적인 모습을 신앙과 하나님을 뜻을 들먹이며 합리화하는 행태를 자주 목격한다. 또한 일부 부적격 목회자들이 성범죄를 저질러 교회의 성결함을 위협해 왔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다.


오죽 하면 목회자의 성범죄를 중심 소재로 담은 영화가 개봉되겠는가. 4년 전 논평한 영화 《로마서 8:37》은 한 중대형 교회 중년 담임목회자가 교회 봉사에 열심인 대학부 자매에게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여전히 교회의 중책을 맡는 한국교회의 비정상적 행태를 비판한다.



그나마 이 영화는 신앙의 순전함을 바라는 반대편 교역자와 성도들이 성범죄 문제 해결과 피해자 보호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도 함께 담아내면서 한국교회의 신앙과 정서 전반을 두루 살피려 한다.


반면 <오징어 게임>은 온전히 거듭나지 않은 채 교인 혹은 교역자 신분을 자처하며 어둡고 부정적인 행위들을 자행하는 이들을 마치 한국교회 교인들과 교역자들의 정형인 것처럼 소개한다. 오로지 악하고 위선적인 측면만을 부각시켜 그것이 핵심이자 본질인 것처럼 매도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교회의 책임도 존재한다. 한국교회는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회심을 촉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남의 노력이 보이지 않을 경우 “이방인과 같이 여기거나(마 18:17)” 혹은 “교회로부터 물리쳐야 할(고전 5:2)” 책임을 오랜 시간 회피한 채 교회의 양적 팽창에 치중해 왔다.


그 결과 교회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급격하게 나빠졌고, 대중문화 콘텐츠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기독교 신앙 자체가 거짓과 위선의 산물이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데 열심을 내고 있다.





▲지영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기독교 비하를 위한 목적으로 소비되는 캐릭터, 244번 기독교인 참가자.
◈대중문화를 통한 기독교 변증: 선악의 공존 속에 신앙의 숭고함과 순전함을 추구하는 교회




그러므로 일단 한국교회 일부 교인들과 교역자들 사이에 잔존하는 성경에 대한 오해와 무지, 그리고 죄악된 습성과 미혹을 파하고, 온전한 신앙의 갱신을 이루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모습에 대한 세간의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는 첫 번째 방법이다.


다음으로는 기독교에 대한 극단적 비하가 일상화된 대중문화 콘텐츠 조류에 대응하기 위해 역량을 지닌 교회 및 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올바르게 소개하는 영향력 있는 콘텐츠 제작에 힘써야 한다.


일단 기독교 신앙을 제법 설득력 있게 격하시키는 콘텐츠가 한번 대중에게 공개되면 그 파급력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


특히 <오징어 게임>처럼 여러 국가에서 인기를 얻어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작품의 경우에는 더 그러하다.


이런 콘텐츠가 공개되면 목회자들이나 기독교 문화 평론가들이 아무리 그 문제점을 면밀하게 밝혀 제시해도, 대중에게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애초 강력한 영상미와 스토리를 지닌 콘텐츠 앞에서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비판들은 사후약방문 수준으로 취급될 뿐이다.


그래서 기독교계는 대중문화의 기독교 비하 행태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바로 기독교 신앙의 선하고 공의로운 본모습, 그리고 그 신앙을 추구하는 이들의 약점과 고충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흡입력 있는 대중문화 콘텐츠 제작에 힘써야 한다.


이와 관련해, 가톨릭 교회는 좋은 모범을 보여준다. 2019년 개봉한 영화 <두 교황>(The Two Popes, 2019)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2013년 전임 가톨릭 교회의 수장 베네딕토 16세(요제프 라칭거)가 퇴위하고, 현재의 수장 프란치스코(호르헤 베르고글리오)가 후임으로 들어온 이야기를 상당히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의 전임 수장과 현 수장의 만남과 대화를 담은 영화 ‘두 교황’(2019).
베네딕토 16세의 퇴위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크게는 로마 교황청 내부의 각종 비리 및 부정부패, 그리고 동성애 범죄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자정과 개혁을 시도하던 베네딕토 16세가 조직 내 파워게임에서 밀려난 것이라는 의견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편, 프란시스코의 가톨릭 교회 수장 취임 역시 뒷말이 많았는데, 이는 그가 과거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시절 독재정권에 협력했던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민주화 저항운동을 주도했던 가톨릭 사제들을 만류하는 한편, 젊은 사제들이 해방신학에 물들지 않도록 단속하면서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에 가담하지 못하게 적극적으로 차단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결국 <두 교황>의 서사는 두 사람의 가톨릭 교회 수장이 각각 겪고 있는 개인적 차원의, 혹은 교회 차원의 부조리와 불의를 조명하면서, 이런 한계와 실책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앙의 순전함은 여전히 숭고하며(가톨릭 교인들 입장에서), 이 숭고한 이상을 위해 많은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여전히 싸워나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두 교황>의 예를 차치하고서라도, 가톨릭 교회는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 일하는 성직자들이 참되고 순전한 신앙을 가졌다는 점을 대중문화 콘텐츠를 통해 지속적으로 어필해 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엑소시즘 영화들이다. <엑소시스트> 시리즈로 대표되는 엑소시즘 영화들은 귀신에게 붙들린 자들에 대한 연민과 영적 싸움 가운데 겪는 고뇌를 회피하지 않는 헌신적인 구마사제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톨릭 교회 신앙의 변증 방편으로 활용되고 있다. 일전에 한국에서 개봉한 <검은 사제들>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가톨릭 교회 구마사제들의 고군분투를 다룬 영화 ‘검은 사제들’(2015).
가톨릭 교회의 대중문화 활용 방식은 한국교회가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가톨릭 교회를 변호하는 대중문화 콘텐츠들은 가톨릭 공동체가 무조건 선하고 신실한 이들로만 채워져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 안에 거짓되고 악질적인 이들이 상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면서도, 그런 이들이 가톨릭 신앙의 본모습에서 한참 먼 이들이며, 상당수의 진정한 신앙인들이 그런 위선과 죄악에 대항해 싸우고 경계하면서 교회를 세워나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전략은 외부인들로 하여금 교회의 상황 전반을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교회 안에는 분명 거짓되고 불의한 거짓 신자들, 거짓 교역자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근래 제작되는 많은 기독교 비하 콘텐츠들은 그런 어둡고 부정적인 측면만 조명해서 마치 교회가 순전히 악인들로 구성된 것처럼 현실을 왜곡한다.

기독교회가 말하는 거듭남과 구원이란 죄와 허물로 가득한 인간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고상하게 포장하기 위한 가상적 이론이라는 생각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조롱과 비난만을 자행하는 무지와 적개심의 소치다.



그래서 기독교계도 교회 바깥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교회의 선한 면과 부족한 면을 납득되도록 소개해 줄 수 있는 대중문화 콘텐츠 제작에 나서야 한다.


물밀듯이 쏟아지는 기독교 비하 콘텐츠들에 대해 단지 소극적으로 비판적 논평만 덧붙이는 것으로는, 이런 대중문화 작품들이 행사하는 왜곡된 영향력과 메시지를 차단하고 교정할 수가 없다.





▲편파적이고 무책임한 기독교 비하 내용을 담은 ‘오징어 게임’.
<오징어 게임>은 이러한 어려움을 재차 상기시켜 준다. 이 작품에 소개된 기독교인과 목회자의 부정적이고 죄악된 모습은 분명 한국교회 내부의 거짓 신자들, 거짓 교역자들 사이에서 간간이 확인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이비 신앙인을 마치 전체 교회 교인들의 본모습처럼 매도하는 드라마의 묘사는 극도로 악의적인 일반화로서, 신실한 신앙을 추구하는 기독교인들의 현실을 심각하게 왜곡한다.

이런 행태는 교회에 대해서만 아니라 교회 바깥의 이들에 대해서도 일종의 기만이다. 이 기만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에 대한 근거 없는 적개심과 조롱의 정서를 심어주기 위한 목적을 갖는다.

이런 부당한 문화적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그리고 교회 바깥의 이들이 기독교인 개개인과 교회에 대해 보다 온전하고 균형잡힌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작품성 있는 대중문화 콘텐츠 제작 노력이 한국교회에 절실히 요구된다고 믿는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



기독교적 관점으로 바라본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반기독교 코드, 병적 수준으로 악의적”
“한국교회여, 오징어 게임을 멈추게 해 주세요”
김학중 목사 “‘오징어 게임’ 같은 이 시대 속, 교회의 역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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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관점으로 바라본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넷플릭스 세계 1위 오른 <오징어 게임>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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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데스 게임 콘텐츠에 깃든, 종교성과 미신적 요소
귀신이 인간 농락하는 힘 가진 상위 존재로 설정돼 있어
신-인간 관계, 불안정하고 두렵고 위협적으로만 묘사해
이 두 가지 그릇된 방식, 초월적 실재 성경 가르침 왜곡





▲목숨을 건 잔혹한 데스 게임을 소재로 삼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데스 게임 콘텐츠: 일본식 데스 게임 콘텐츠의 지배적 영향력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미국 내 넷플릭스 TV 시리즈 부문 시청 순위 1위를 기록하면서 큰 관심을 불러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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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과중한 채무에 시달리는 이들이 수백억 원에 이르는 막대한 상금을 두고 서로 죽고 죽이는 생존 게임에 돌입하는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일전에 <머니게임>에 대한 논평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에서 제작되는 데스 게임 콘텐츠 대부분은 망가(漫画, まんが), 즉 일본 만화에 지배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데스 게임 콘텐츠의 원조는 미국이다. 통상 1979년 스티븐 킹이 발표한 소설 <롱 워크>(The Long Walk)를 데스 게임 장르의 출발점으로 지목한다.


하지만 이 데스 게임 장르를 서브컬처에 편입해 본격적으로 대중화한 것은 일본의 소설가와 만화가들이다. 1998년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만화 <도박묵시록 카이지>, 1999년 타카미 코슌의 소설 <배틀 로얄>, 이 두 작품은 일본식 데스 게임의 전형을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후 일본식 데스 게임 콘텐츠는 카이타니 시노부의 <라이어 게임>(2005-2015), 카네시로 무네유키, 후지무라 아케지의 <신이 말하는대로>(2011-2017) 등을 통해 명맥을 이어 왔다.


이 작품들은 일본 문화 특유의 폐쇄성과 호전성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일본은 섬나라로서 고립된 지형적 특성, 그리고 초대형 재난이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위협적인 자연환경을 가진 나라다.


이로 인해 일본의 고대 및 중세 역사는 거의 항상 다이묘(大名)로 대표되는 군벌들의 군사적 연합과 경쟁으로 점철되곤 했다.


군벌들이 군사력을 바다 너머 외부까지 펼치기 어려웠고, 백성들 대다수가 사람의 목숨이 자연재해 앞에서 별 가치가 없는 허망한 것임을 일상적으로 목격해온 탓에 내부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혈전에 자주 돌입했던 것이다.


일본식 데스 게임 콘텐츠의 설정 역시 이러한 일본 역사를 그대로 반영한다. 폐쇄된 공간에 갇힌 게임 참여자들이 정해진 룰에 따라 서로 목숨을 내건 경쟁에 돌입한다.


패자는 죽고, 승자는 막대한 보상을 획득한다. 참가자들이 각자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고 경쟁하는 상황은 독자들에게 상당한 긴장감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일본의 대표적 데스 게임 콘텐츠, <배틀 로얄>의 한 장면.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한국이 큰 강점을 보이는 산업 및 문화 발전 방식인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 등 외교적으로 긴밀한 관계에 있는 국가들의 선진 기술이나 콘텐츠를 힘써 모방한 뒤, 한국의 기술 및 문화요소를 약간 가미함으로써 차별화를 꾀하는 것, 이 전략이 <오징어 게임>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된다.


막대한 채무에 짓눌린 인간 말종들을 상금을 미끼로 꾀어내는 것은 <도박묵시록 카이지>의 설정을 빌려온 것이다.


게임이 진행됨에 따라 서로 죽고 죽여 최후의 1인이 모든 보상을 가져가는 것은 <배틀 로얄>과 <신이 말하는대로>의 설정을 차용한 것이다.


각 참가자에게 1억원씩 상금을 배정하여 서로 목숨을 걸고 빼앗도록 하는 것은 <라이어 게임>의 설정을 가져온 것이다.


게임의 내용 역시 일본 데스 게임 만화에 등장한 게임들을 비슷하게 모방했다.


1단계에 등장하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분명 한국의 놀이이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룰은 일반적인 룰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기괴한 인형이 술래로 등장하고 제한 시간 안에 특정 라인에 도달해야 하는 규칙은 <신이 말하는대로>의 첫 번째 게임인 ‘다루마’ 놀이의 룰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오징어 게임> 3단계에 등장한 서바이벌 줄다리기 역시 <신이 말하는대로>에 등장한다.


5단계의 징검다리 게임은 <도박묵시록 카이지>에 등장하는 ‘인간 경마’ 게임을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높은 곳에서 다리를 건너다가 떨어져 죽는 설정, 다리를 건너는 순번을 놓고 눈치싸움을 하거나 앞의 경쟁자를 밀어 떨어뜨리는 설정, 그리고 강화유리로 만든 다리라는 설정을 차용했다.


이렇듯 <오징어 게임>은 일본의 데스 게임 콘텐츠 설정 및 요소들을 이리저리 모방해 한국식으로 절묘하게 가다듬었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오징어 게임>의 표절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데스 게임과 종교: 오니(鬼, おに)로 구체화된 일본식 종교성과 미신의 유입


일본의 대표적인 데스 게임 소설, 만화, 드라마, 영화 가운데 가장 최근에 발표된 작품은 <신이 말하는대로>이다.


이 만화는 데스 게임 특유의 잔혹성과 고어한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한 작품으로, 일본의 다신교 신들이 등장해 서로 죽고 죽이는 게임을 주관한다.


게임 참가자들은 고등학교 학생들이며, 매 단계마다 위험한 생존 게임이 전개된다. 게임에서 생존한다고 해서 특별한 보상은 없다. 참가자들의 목표는 오로지 신들의 잔혹한 놀이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다.


다루마(달마, 선불교의 시조) 인형, 거대 마네키네코(돈을 벌게 해주는 고양이 모양의 장식물), 인간 크기의 코케시(머리와 몸통만 있는 인형) 등 일본의 토속 종교와 미신을 반영하는 형상들이 등장해 게임을 주관하는 동시에, 패배한 인간들을 잔혹하게 처형하는 관리자 역할을 맡는다.



▲실사 영화 <신이 말하는대로>에 등장하는 마네키네코.


신이나 요괴, 오니 등에 농락당하고 살해당하는 인간이라는 주제는 일본의 신화 및 민담에 흔하게 등장한다.


앞서 말했듯 일본은 태풍, 지진, 쓰나미, 화산폭발 등 각종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곳이다. 게다가 지형 또한 한국과 마찬가지로 산악 지형이 많아, 과거에는 산마다 도적이 들끓기도 했다. 여러 모로 인간의 삶에 두려움을 선사하는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근대 이전까지 이런 불가해한 자연현상과 위협적인 환경은 일본인들 특유의 정령신앙(animism)에 의거해 각종 신들의 현현으로 해석되었다.


특히 괴팍한 성격에 우락부락한 체격, 무서운 얼굴을 가진 악귀 오니는 일본인들이 산적, 범죄자, 혹은 일본 홋카이도 원주민 아이누 족을 보고 창안해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오니들은 인간과 내기를 즐기며 비위를 거스리는 자를 잔혹하게 살해하는 특성을 가졌다. <귀멸의 칼날>은 이런 오니의 특성을 잘 살린 작품으로 손꼽힌다.


<신이 말하는대로>는 이런 오니에 대한 일본의 전통 민간 신앙이 데스 게임에 접목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더해 일본에서 꽤 가까운 시기까지 지속되었던 인신공양 풍습도 모티프로 삼는다.


<신이 말하는대로>에 등장하는 악신들은 기괴한 게임을 통해 인간들을 학살하는 것을 즐기고 그것을 그들의 존재 이유로 삼는다.



▲<오징어 게임> 1단계에 등장하는 거대 소녀 인형.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주관한다.


<오징어 게임>은 일본의 데스 게임 콘텐츠, 특히 <신이 말하는대로>의 설정과 분위기 일부를 그대로 채용해 서사를 진행한다.


무엇보다 1단계에 등장하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장면은 <신이 말하는대로>의 설정 요소뿐 아니라, 무서운 분위기의 초월적 인형이 자아내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마저 그대로 모방했다.


이런 일본식 종교성과 미신적 요소는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오니, 즉 귀신을 인간보다 상위의 존재자로 설정하고 인간을 능히 농락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신-인 관계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불안정하고 두렵고 위협적인 것으로만 묘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초월적인 영역에 대한 이 두 가지 그릇된 묘사 방식은 영적 실상, 초월적 실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크게 벗어나는 왜곡 행위로 간주된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반기독교 코드, 병적 수준으로 악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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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징어게임> 반기독교 코드, 병적 수준으로 악의적”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입력 : 2021.09.25 14:36




기독 유튜버 ‘책읽는사자’, 반기독교·반서구문명 코드 분석

악행 저지른 종교인 설정, ‘회개’ 확대 왜곡 및 일반화
사람 죽이고 감사 기도하는 캐릭터, 기독교 이해 부족
마지막 게임, 굳이 크리스마스 이브로 설정한 이유는





▲ⓒ책읽는사자
기독교 유튜버 ‘책읽는사자(이하 책사)’가 넷플릭스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는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반기독교 코드를 지적했다.

책사는 “매우 아쉽게도, 총 9편으로 제작된 드라마 <오징어게임> 전반에 짙게 스며든 반기독교·반서구문명 코드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정도를 넘어 거의 병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볼 정도로 악의적”이라며 “대부분 대중예술가가 반미, 반기독교, 반자본주의 사상에 경도된 것은 사실이지만, <오징어 게임>은 (특히 반기독교 코드는) ‘한두 번 하고 마는’ 보편적(?) 수준을 뛰어넘어 매우 일괄적이고 집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물론 과대해석이자 의미 부여라 비판할 수도 있겠으나, 만약 이 작품에서 풍자하고 혐오하는 종교가 기독교가 아닌 ‘이슬람’이었다면, 주님과 하나님이 아닌 ‘알라’였더라면 어땠을까”라며 “애초에 감독이 그런 시나리오를 쓸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선택적 분노’는 이미 유명하다”고 지적했다.


책읽는사자는 작품 속 ‘반기독교 코드’에 대해 먼저 “‘구슬치기 신’에서 여성 출소자 ‘지영’은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는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엄마가 바닥에 죽어 있었고, 옆에는 아빠가 칼을 들고 서 있었고, 조금 후 ‘지영’은 그런 아빠를 자신이 죽였다고 이야기한 뒤 아빠의 직업을 ‘목사’라고 특정한다”며 “그녀는 ‘엄마를 때리고 나한테 그 짓을 하던 인간’이라며, 그런 악행을 저지른 후에는 꼭 ‘기도’를 했다고 이야기한다”고 전했다.

책사는 “실제로 말도 안 되는 악행을 저지른 종교인은 ‘당연히’ 있다. 천주교 신부들의 광범위한 아동 성폭행과 조직적 은폐를 다룬 실화 영화 <스포트라이트>도 있지 않은가”라며 “그러나 이것은 ‘종교의 패악’보다 ‘인간의 죄성’으로 다가가는 게 보다 ‘사실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물론 종교인에게 기대하는 일종의 군중심리가 있는 것도, 기대감이 큰 만큼 실망감이 큰 것도 사실이다. 얼마 전 ‘혜민 스님 풀 소유 논란’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며 “‘지영’의 입을 빌려 굳이 끔찍한 악행을 저지른 아빠의 직업을 특정하는 것 역시, 작가가 가진 (일종의) 배신감일 수도 있다”고 했다.





▲탈북민 여성과 대화하는 출소자 여성 ‘지영(왼쪽)’. ⓒ책읽는사자
그러나 “작가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인 ‘회개’를 확대 왜곡하고, 섣불리 일반화했다. 후에 설명할 극 중 캐릭터 ‘244번 참가자’가 이기적인 행동이나, 하물며 살인을 한 후에도 감사 기도를 드리는 ‘종교적 자기합리화’ 역시 같은 선상에서 악의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며 “작가는 극단적인 이슬람 원리주의 무슬림들의 악행과 그들의 종교심 역시 같은 선상에서 비판하고 풍자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작가의 세계관 형성에 있어 ‘기독교의 사회적 패악’이 얼마나 큰 인상을 남겼는지 모르겠다”며 “부디 눈을 들어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그 죽은 사람의 친척들까지 정치범수용소로 보내버리는 곳을 바라보고, 그곳을 향한 슬픔과 의분도 균형 있게 자리잡길 바란다”고 했다.


‘244번 참가자’에 대해선 “유독 이 작품에 몰입을 방해하는 캐릭터다. 전 직업은 모르겠으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왜곡된 기독교 사상을 보여주는 인물”이라며 “예를 들어 목숨을 건 줄다리기 게임을 한 뒤, 게임 참가자들은 목숨을 부지했다는 감사함과 동시에 남의 목숨을 빼앗아갔다는 죄책감과 절망감에 빠져있을 때, 그는 혼자 감사 기도를 올린다. 목숨을 건 ‘징검다리 게임’에서는 다른 사람을 죽이고 본인이 살았다는 감사 기도를 하기도 한다. 매사에 그런 식”이라고 설명했다.


책사는 “물론 이런 서바이벌 영화나 자연재해 영화에서 단골로 나오는 캐릭터가 ‘맹목적 종교인’이다. 시종일관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캐릭터로 묘사되는 게 다반사이고, 나아가 자신의 이기심을 종교로 합리화하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며 “특히 반기독교 정서가 팽배한 현대 사회에서는 관객들에게 묘한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한다. 세속화된 종교와 그에 따른 부작용은 분명 비판받을 지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그러나 <오징어게임> 작가는 두 가지 어설픈 실수를 저질렀다. 첫째, 본인이 비판하려는 ‘기독교’에 대한 무지다. 작가가 비판하려 한 대상에 대한 이해가 빈약하다 보니, 작가의 풍자가 풍자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이라며 “둘째, 244번 캐릭터의 당위성 부족이다. 상황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한다. 이것을 캐릭터 연기 톤의 문제라 지적할 수도 있겠으나, 시나리오 자체가 작위적이라는 게 1차 원인이라 보는 게 보다 자연스럽다”고 분석했다.


이에 대해 “아무리 극적 묘사라지만, (244번) 혼자 너무 ‘정극’을 하고 있다”며 “작가 개인이 무엇을 비판하고 싶은 줄은 알겠으나, (적어도 이 부분에서만큼은) 실력이 부족했다(참고로 나는 영화 <남한산성>을 매우 재밌게 봤다. 한국도 이런 영화가 나왔구나 하며)”고 비판했다.





▲주인공과 ‘참가자 1번’의 마지막 게임 모습. ⓒ책읽는사자
끝으로 마지막 회 ‘참가자 1번’과의 마지막 게임 신에 대해 “작가(겸 연출 겸 제작자)는 둘이 만나는 날짜와 시간을 굳이 보여준다. 그날은 ‘크리스마스 이브’, 곧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는 바로 전 날”이라며 “장소 역시 자본주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여의도 금융가 건물”이라고 했다.




책사는 “이 마지막 게임에서 12시 직전 극적으로 주인공이 승리한다. 이는 작가가 갖고 있는 반기독교·반서구문명적 코드가 절정을 이루는 순간”이라며 “작가가 주장하는 선이 악을 이겼다는 것이다. 작가(이자 연출자이자 제작자인 그)는 그 이후 12월 25일, 즉 성탄절을 알리는 자명종 소리가 울리게 연출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그 종소리가 의미하는 바는 해석하기 나름일 것이다. 기독교와 서구 문명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일 수도 있고, 마지막 게임을 이긴 주인공을 축하하는 의미의 종소리일 수도 있다”며 “매우 신성모독적인 일이긴 하다. 마호메트 성일로 동일하게 설정했다고 생각해 보라.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 결코 ‘친기독교적’이거나 ‘친서구문명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작가의 명징한 정체성”이라고 했다.


책읽는사자는 작품의 반미, 반서구문명, 반자본주의 성향에 대해서도 설명한 뒤 “현재 작가는 ‘여성혐오’와 ‘외국인 노동자 비하’ 논란에 서 있다(표절 논란은 논외로 한다). 둘 다 ‘PC주의’의 정치적 맥락 안에 있는 주제들”이라며 “PC주의의 핵심 정치기조인 반기독교·반서구문명 코드가 분명한 작품인데도, 그들에게 혐오와 차별을 조장한다 비판받는 모습이 참으로 코미디”라고 밝혔다.





▲목숨을 건 잔혹한 데스 게임을 소재로 삼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그러면서 “좌파 언론사들이 쏟아내는 비판에 뚜렷한 찬반이 갈리면서도(개인적으로 난 PC주의를 분명히 반대한다), 더 짙은 혐오와 차별이 철철 흘러넘치는 반기독교·반서구문명 코드에는 이리도 조용한 것 역시 코미디”라고 했다.




그는 “결국 작가이자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건 ‘자본주의’ 사회 속 경쟁에 대한 문제의식이라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런 ‘부정적인’ 경쟁을 부추기는 ‘악의 축’으로 기독교를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며 “(어떤 의미에서) 아주 정확하다. 기독교가 아니었다면 미국식 서구 문명은 생기지도 않았을테니”라고 말했다.


책사는 “하지만 작가는 알까. 자신이 이렇게 작품 활동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자신이 비판하는 기독교와 서구 문명의 산실인 ‘자유민주주의’라는 시스템에서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이라며 “역사와 사상을 어설프게 아는 ‘순박한’ 이들은 썩은 열매가 있다고 나무 그 자체를 썰어버리는 우를 범한다. 작가는 미국식 자본주의(기독교+서구 문명의 산실)의 가장 달콤하고 맛있는 열매인 영화문화산업 군에서 큰 부와 명예와 권력을 획득한 ‘자본가들 중의 자본가’이다. 싫든 좋든 이게 팩트”라고 강조했다.


끝으로 “자본주의가 조장하는 과도한 경쟁으로 우리 삶이 피폐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근 100년 동안 1억 명 가까운 대학살을 자행한 소련과 중국, 북한 사회보다는 분명 옳다. 자정 능력이 있는 시스템과, 눈에 거슬리면 죽여버리고 가둬버리는 독재는 근본이 다르다. 비교가 불가하다”며 “<오징어게임>의 잔혹함은 대한민국이 아닌, 북한과 중국에서 자행되고 있다. ‘인민’의 생명을 짓밟는 ‘참가자 1호’는 아직 저 북한에서 돼지처럼 먹고 논다. 실로 이 작가를 포함해 좌경도된 많은 예술계 종사자들의 근시안적 관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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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여, 오징어 게임을 멈추게 해 주세요”
| 입력 : 2021.10.03 08:16

10월 첫째 주일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총회장 이취임 감사예배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 소강석 목사.
“한국교회여, 오징어 게임을 멈추게 해 주세요.”


최근 넷플릭스의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대한 관심이 가히 폭발적입니다. 오죽하면 추석 연휴에 ‘오징어 게임’을 본 사람과 안 본 사람으로 나뉜다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국내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넷플릭스 TV 부문 시청률 1위에 오를 정도로 글로벌한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의 감독은 10년 전부터 준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방송사나 영화사에서도 관심을 갖지 않아, 제작을 하지 못하고 있던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넷플릭스에서 이 작품을 받아준 것입니다. 왜냐면 넷플릭스 회사의 모토는 ‘창작의 자유 보장’이기 때문에, 어떤 주제나 소재의 제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는 실업자, 신용불량자, 소매치기, 조직폭력배, 외국인 노동자, 탈북자, 여성 출소자, 시한부 환자 등 돈에 쫓겨 더 이상 물러날 길이 없는 절박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총 456억 원의 상금이 걸린 서바이벌 게임에 참가하게 되면서 시작합니다.



1번부터 456번까지 참가자들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뽑기’, ‘줄다리기’, ‘구슬치기’, ‘징검다리 건너기’, ‘오징어 게임’ 등 총 6개의 게임을 통과해야 합니다. 최후의 승자만이 456억 원을 받게 되고, 게임에서 탈락한 사람은 총에 맞아 죽습니다.


영화는 너무나 잔인하고 선정적이며 엽기적인 장면들로 가득합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이 영화는 자본이라고 하는 맘몬의 신에 영혼마저 빼앗겨 버린 채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적 생존게임을 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일그러진 욕망을 보여주는 메타포라고 할 수 있지요.


솔직히 저는 이 드라마를 다 보지는 못했습니다. 저 같이 바쁜 일정을 보내는 사람이 어떻게 총 9편으로 구성된 드라마를 다 볼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현 시대의 사회현상과 문화적 흐름은 알아야 하기에, 비서실에서 다운 받아준 영상을 부분적으로 보고 총체적인 이야기는 몇 부교역자들과 제 아들이 정리해 준 자료와 크리스천투데이 이대웅 기자가 쓴 기사로도 읽었습니다.


드라마를 본 기독교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너무 기독교를 노골적으로 폄하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설정하여 보기 불편하더라는 것입니다.





▲지영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기독교 비하를 위한 목적으로 소비되는 캐릭터, 244번 기독교인 참가자.
데스 게임에 참가한 244번 참가자는 위기를 당할 때마다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며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혼자 살려고 발버둥 칩니다. 그러다가 징검다리 건너기 게임을 할 때는 길을 건너지 못하고 주저하는 앞 사람을 뒤에서 밀어 죽인 후,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합니다.




240번 참가자 지영은 자신의 상처를 고백하면서, 어머니를 칼로 찔러 죽인 아버지를 자신이 칼로 찔러 죽였는데, 그 아버지가 목사였다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기독교에 대해 혐오적인 이미지를 조장하고 부정적으로 묘사하는지 분하기도 하고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오징어 게임’이 인간 내면에 잠재된 욕망과 탐심, 생존 본능을 들추어내고자하는 의도라면, 왜 굳이 기독교인만을 특정하여 부정적인 모습으로 묘사하였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최근 국내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시청한 드라마라고 하는데, 그들의 눈에 기독교의 모습이 어떻게 이미지화 되었을지를 생각하면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지금 현대 사회는 극한의 생존 서바이벌 게임에 함몰되어, 영혼마저 빼앗긴 채 서로 죽고 죽이는 오징어 게임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 비극의 데스 게임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요? 오징어 게임은 참가자 중 과반수만 반대를 해도 언제든지 게임을 멈추고 자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참가자들은 거액의 상금에 눈이 멀어 끝까지 멈추지 못하고 죽음의 질주를 합니다.


그 죽음의 질주 끝에 최후 승자는 고향 후배 상우(박해수 분)를 제친 성기훈(이정재 분)이었습니다. 그는 456억의 우승 상금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돈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지 못하고 노숙자가 되어 이곳저곳을 떠돌던 중, 오징어 게임의 설계자를 만납니다. 그 설계자 역시 죽음을 앞둔 시한부 환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오징어 게임을 만든 이유는 오로지 심심해서, 재미삼아였다고 말합니다. 또한 성기훈에게 인간을 신뢰하느냐고 물으며 또 다른 노숙자 게임을 제안하더니, 갑자기 병상에서 죽고 맙니다. 아무리 창작의 자유를 존중한다 하더라도, 이 드라마는 반인간적이고 패륜적인 모습을 지나치게 표출시키고 말았습니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소개 화면.
저는 목회자로서 오징어 게임에 나타나는 탐심과 증오, 분노의 표출들이야말로 오히려, 인간 세계의 유일한 희망의 출구는 사랑과 희생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자의 의도가 아닐지는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잃어버린 채, 이기적인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 한국교회에 그래도 다시 한 번 구조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평론적 해석도 해 보았습니다.


이 오징어 게임을 본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제발, 오징어 게임을 멈추게 해 달라고, 부디 데스 게임에 몸을 맡긴 채 아무런 희망 없이 살아가고 있는 상처 입은 영혼들을 사랑으로 안아주고 손을 잡아 구원해 달라고 말이죠.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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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중 목사 “‘오징어 게임’ 같은 이 시대 속, 교회의 역할은…”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입력 : 2021.10.01




▲목숨을 건 잔혹한 데스 게임을 소재로 삼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김학중 목사(안산 꿈의교회)가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이정재·박해수 주연의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대해 SNS에서 언급했다.

바빠서 프로그램 전체를 보지 못하고 요약해 놓은 짧은 클립만 봤다는 그는 “한 사람이 죽어야 내 앞에 쌓이는 1억,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보다 저 돈이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더 커지는 순간은 언제일까”라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두려움’으로 게임을 그만두고 싶은 순간. ‘기대감’으로 게임에 몰입하게 되는 순간”이라며 “이 게임에서 지는 순간은, 어쩌면 육신의 죽음보다 ‘두려움’보다 ‘기대감’이 더 커지는 바로 그 전환점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김 목사는 “‘인간성’의 함몰과 ‘진실한 관계’의 상실. 과연, 그 게임장 안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에, 진실한 우정과 사랑은 가능할까”라며 “헛된 ‘기대감’은 훌훌 털고, 옥죄는 ‘두려움’은 극복하고…, 그 진실한 우정과 사랑의 단초를 보여주는 등장인물들이 스친다”고 말했다.


끝으로 “오징어 게임장과 같은 이 시대 속 복음과 교회, 그리고 크리스천의 역할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고 단상을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