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31

김남수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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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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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9년생 독립운동가에 대한 내용은 김남수(1899)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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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南洙
1915년 5월 12일 ~ 2020년 12월 27일(향년 105세)

1. 개요2. 상세3한의사와 침구사의 역사, 그리고 김남수4. 한의사와의 마찰5. 한국 침술에 대한 왜곡6. 기타7. 판결8. 의혹
8.1. 유명인 시술 의혹8.2. 허위 자격증 의혹

1. 개요[편집]

1915년 전라남도 광주군[1]에서 태어났다. 남수침술원 원장이자 정통침뜸연구소 소장이었다.

2. 상세[편집]

호는 구당(灸堂). 한의사는 아니고, 침사(鍼士)로서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논란의 인물.

본인은 1915년에 태어나 아버지한테 한학과 침구학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부친 김서중은 1915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아버지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지 여부와 나아가 실제 나이에 대해 논란이 있다. 그의 인터뷰와 자서전에 따르면 11세부터 동네에서 침을 놓기 시작하고, 전라북도 도지사가 추천해서 구사 자격증을 하사받았으며, 1943년 서울에 남수침술원을 개원하였다고 하지만, 확실하지가 않다. 관련기사

2008년 KBS 추석 특집 프로그램 <구당 김남수 선생의 침뜸 이야기> 방송출연을 기점으로 유명세를 탔다. 당시 방송은 1,2편으로 추석 연휴의 황금시간대에 편성되어 종합 시청률 20%를 돌파하는 대박을 터트렸다. 그 해 국민적 자가 뜸 시술 열풍이 확산되었으며, 일각에서는 "구당의 손만 거치면 모든 질병이 낫는다"는 소문까지 퍼졌고, '현대판 화타', '뜸 전도사'로 불리게 되었다.[2][3]

또한 무명에 가깝던 김남수가 유명해진 것은 정치, 연예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유명인사들을 치료한 사람이라 알려진 점도 한 몫 하였다. 그는 그의 인터뷰[4]나 자서전을 통해 김영삼 전 대통령,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한국광복군 출신 재야 정치인 장준하, 수영 국가대표 선수 박태환, 영화배우 장진영[5], 등 대한민국의 여러 유명 인사들을 치료하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진위에 논란이 있다.[6]

특히 2008년 9월 17일 진행성 위암 판정을 받고 2009년 9월 1일 사망한 영화배우 장진영을 2008년 9월 29일부터 약 3개월 동안 침뜸치료를 했다는 사실은, 당시 침뜸치료 당시 지상파 방송에 보도될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당시 MBC기자이던 이상호가 2004년부터 김남수의 침뜸 시술을 취재해 정리한 저서인 <구당 김남수, 침뜸과의 대화>를 2009년 11월에 출간하였는데, 그 책에 따르면 장진영에게 "82회에 걸쳐 자침 2,500회 이상, 뜸 시술 1만회 이상이 이뤄졌고, 그 결과 치료 시작 3개월 만에 장씨는 위장 일부를 제외하고는 몸 속 암세포가 모두 사라지는 극적인 효과를 보았다. 하지만 침뜸 치료 사실을 뒤늦게 안 병원 측이 시술을 중단시킨 이후 장씨는 병원 치료에만 의존하게 됐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126~130 p.)고 적혀 있다. 이와 관련해 논란이 일었다.[7][8][9]

3. 한의사와 침구사의 역사, 그리고 김남수[편집]

국가에 의한 의사 면허 제도가 실시되기 전에는, 사실상 ‘누구든지’ 의사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그리 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한국 최초의 의사 면허 제도가 도입된 때는 1900년인데, 1874년 ‘의제(醫制)’를 제정하면서부터 국가가 의사의 자격을 관장한, 일본에 비해 4반세기 뒤진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의사 면허 제도를 실시한 나라는 영국으로, 1858년부터이다. 즉, 조선시대에는 의과시험에 합격하여 의관이 되지 않더라도 민간에서 도제식 공부[10]를 통하여 의원이 되거나, 유교 공부를 통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의학을 호구지책으로 삼지는 않으나 의술활동을 하였던 유의(儒醫)들도 의사 역할을 할 수 있있다.

유의란 유학자이면서 의학을 공부한 사람들인데, 이들이 의술을 공부한 것도 순전히 주변인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됐다. 우리가 잘 아는 다산 정약용도 유의였고, 우암 송시열은 의서인 <삼방촬요(三方撮要)>를 쓸 정도로 학문적 수준이 뛰어났다. 또 김육최명길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재상들은 하나같이 도제조(都提調)라고 불리는 내의원[11] 수장 출신이었다.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데 일등공신이었던 서애 유성룡 선생도 <침구요결(鍼灸要訣)>, <의학변증지남(醫學辨證指南)>이라는 의서를 펴낸 유의였다.[12]

1900년 1월2일 대한제국 내부[13]는 내부령 제27호로 ‘의사 규칙(醫士規則)’을 제정했다. 이 법령에는 의사한의사가 구분되어 있지 않으며 정부(=내부)가 자격 있다고 인정한 사람에게 똑같이 ‘의사(醫士) 인허장’을 부여했다. 외국인 의사의 자격도 이 법령으로 규제했다.[14]

조선시대 내내 서민, 빈민을 치료한 당시의 혜민서, 활인서와 같은 전통적인 국립의료기구들이 구한말 개화파의 건의로 1882년에 폐지되고 1885년에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이자 양의사인 호러스 뉴턴 알렌[15]이 진료하는 한국 최초의 근대 서양식 국립병원이라 할 수 있는 제중원[16]이 설치되었다. 제중원은 일반 서민과 양반들을 진료했는데, 당시 기록에 따르면 학질(말라리아) 환자가 가장 많았다고 하며 최초로 키니네를 통해 치료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중원은 1894년에 미국 북장로교회로 운영권이 넘어가게 되면서 국립병원의 지위를 내려놓게 되고, 이후 오늘날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다[17].

그 뒤 대한제국은 1899년에 국립병원인 내부병원[18]을 설치하였다. 이 내부병원은 1906년 일제가 한국인 한의사들을 축출하고 일본인 서양 의사들로 충원해 놓기 전까지 한방병원으로 기능하였으며, 양약과 한약을 병용한 곳이었다. 이들 한의사들은 서양의료시술권을 가지고 있었다. 내부병원 의사들 대부분은 한의학을 배운 사람이거나 한의학을 배경으로 종두법을 배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즉 대방의(大方醫) 2명과 침의(鍼醫) 1인이 있었으며, 광제원으로 개칭한 후인 1900년에는 대방의 3인(향약의사 1인 포함)과 침의 1인이 있었고, 1901년 직제에도 한약소(漢藥所) 4인이 있었다.[19]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내부병원에서 근무하던 한의사들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이어서 1907년에는 이토 히로부미에 의한 통감부 통치 아래에서 일본인 양의사들로만 채워지면서 모두 쫓겨나게 되었고, 내부병원의 이름도 대한의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로써 일제에 의한 대한의원관제 개편으로 전통의사 직제는 국립병원에서 모두 강제 폐지되었다. 대한의원은 이후 조선총독부병원,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해방 후 서울대학교병원이 되었다.[20]

대한제국 시기(1897년~1910년) 정부로부터 면허를 받은 의사는 얼마나 되었을까? <조선총독부 통계요람>[21]에 의하면 일제강점 직전인 1909년 12월말 현재 등록된 한국인 의사 수는 2,659명이다. 이 가운데 대부분은 요즈음 식의 한의사였을 것이다. 그런데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근대 서양식 의사와 전통 의료인을 구분하고 차별하게 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예전 대한제국에서 1900년에 제정한 '의사규칙'을 없애고 1913년 11월 15일 ‘의사 규칙’과 '의생 규칙’을 제정하고 1914년 1월 1일부터 시행했다. 이로써 전통 의료인은 의사(醫師)가 아닌 의생(醫生)으로 격하되었다. 즉 기존의, 한의학을 배우는 학생을 의미하는 의생이라는 이름으로 격하시키는 등 한의학의 지위를 서양의학보다 저열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의생 제도는 일본 본토에는 없는 것으로, 1901년부터 일제 식민지인 대만에서 실시된 제도이다.

더욱이 일제는 위의 법적 근거도 마련되기 전에 이미 조선인 전통의사들의 면허를 박탈하고 대신 ‘의업자(醫業者)’로 등록시켰다. 그 결과 1909년 말까지도 2,659명이던 조선인 면허 의사 수는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에 479명, 1912년에는 72명으로 급감했다. 전통의사들은 나라와 면허를 함께 빼앗기게 된 것. 곧이어 의생규칙 시행 직후인 1914년 10월에 조선총독부는 <안마술, 침술, 구술 영업취체규칙 (다이쇼 3년 10월)>을 제정 공표하여 일본에서 실시되던 보조의료인 격인 침구사 제도를 식민지 조선에도 도입해 침사와 구사가 배출되도록 하였다.

이로써 전통의학을 의학이 아닌 각각의 침사, 구사, 안마사 등이 행하는 부분적 기술로 격하시키는 효과를 내게 하였고, 한편으로는 일본인이 주류를 이루는 침사, 구사, 안마사에게 식민지 조선에서의 영업을 허용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시작된 침구사제도가 도입되어 침사와 구사가 배출되면서 의생과 침사 및 구사라는 이원적인 한의학 체계가 성립됐다. 침, 뜸, 한약 등 한의학 전반을 다루는 의생과 침과 뜸에 대해 각각의 기능만을 담당하는 침사 및 구사가 공존한 것이다. 의생은 조선인들이었으며 침사, 구사의 대부분은 일본인들이었다.

실제 1922년 당시 대도시 부산의 통계자료를 보면 침술업자 중에서 일본인이 45명이었고 조선인이 3명이었으며 구술업자 중에서 일본인은 50명, 조선인은 1명으로 대부분이 일본인이었다. 해방 후 침사 이우관의 저서인 <수난의 역정>에도 침사, 구사의 일제강점기 단체의 장은 일본인들이 독식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의생 규칙이 시행된 지 1년 뒤인 1914년 말 당국에 등록된 의생 수는 5,827명이었는데, 해방 직전인 1943년에는 3,337명으로 30년 사이에 40% 이상 감소했다. 1914년 이후로는 새로운 의생 면허를 거의 발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일본 본토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1874년 ‘의제’ 제정 이후 전통 의료인들을 차별하지는 않았지만 재생산은 철저히 억제했는데, 세월이 흘러 자연적으로 소멸되기를 기다렸던 것. 이에 따라 1875년 전체 의사의 80%가 넘었던 일본의 전통 의료인은 1902년이 되면 50% 이하로 떨어지고, 1916년에 이르면 15%로 급감하여, 결국 사라지고 만다.

1921년에는 【총독부령 154호】에 의해 의생(한의사)들을 산간벽지에 한정하여 의료행위를 하게 하였다. 실제 일제치하에서 도서벽지 의료를 의생(한의사)들에게 맡기면서 한편으로는 자연도태를 유도하였다[22] 일제강점기가 더 지속되었다면 한국에서도 전통 의료인이 완전히 없어졌을 것이다.

해방이 되고서도 여전히 의생으로 불리던 전통 의료인은 1951년 ‘국민의료법’이 제정되면서 40년 만에 (한)의사 호칭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1년 법 제정 당시 한의사(漢醫師)이던 호칭이 1986년 ‘의료법’이 개정되면서 한의사(韓醫師)로 바뀌었다. 중국으로부터 독립과 자주를 강조하던 대한제국 시기인 1900년대초 잠시 韓醫師라는 용어가 쓰인 적이 있다. 1980년대의 개칭도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23]신규 침사, 구사 자격증 발급을 위한 국가시험은 더 이상 치뤄지지 않게 되어 한의사제도로 다시 일원화되었다. 다만 일종의 경과조치로서 일제시대에 취득한 침구사 자격을 가진 자들은 사망할 때까지 침구의료행위를 할 수 있었다. 현재 생존해 있는 침구사는 2009년 1월 기준으로 39명만이 존재한다.

정리하면, 2017년 현재 한국에서 현행법상 한방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는 한의사, 침사, 구사뿐이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침사는 침치료만을, 구사[24]는 뜸치료만을 할 자격이 있으며, 한의사는 침, 뜸, 한약 등 모든 한방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면허를 가지고 있다. 현재 정식 한의사가 되려면 한의대를 가면 되나, 정식 침구사가 되기 위한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국가에서 자격을 주는 교육기관이나 국가시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히 침구사가 되고 싶으면 아직 침구사 면허가 남아 있는 일본에 가서 일본에서 활동해야 한다. 보통 침사와 구사를 합쳐 침구사라고 부르며, 침사와 구사 자격증을 다 가지고 있으면 침구사이다. 그리고 김남수는 그 중 침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래 침구사는 침사 과정과 구사 과정을 함께 배우면서 자격을 발급받기 때문에, 김남수처럼 한쪽 자격만 가진 경우는 거의 없다. 이는 불법으로 취득한 면허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으며, 실제로 2012년 1월 19일, 김남수 본인이 제기한 소송에 대해서 법원은 그의 침사 자격증이 과거 허위로 취득되었다고 판시하였다. 이건 아래 판결 항목 참조.

4. 한의사와의 마찰[편집]

문제는 일제강점기에 발급받았다는 침사 자격증으로 한의사들과 꾸준히 마찰을 빚고 있다는 것이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극한 법적 소송을 하고 있다.

현행법상 침뜸 시술은 한방의료행위로서 면허를 취득한 한의사나 해방 이전 일제강점기 때 자격을 부여받은 침사, 구사 외에는 합법적으로 시술할 수 없다. 하지만 전국 각지의 김남수의 사설단체인 뜸사랑 지부 시설에서, 한의사 면허나 침구사 자격이 없는 뜸사랑 회원들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침뜸 시술을 하는 경우가 끊임없어, 무면허불법시술 고발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김남수와 그가 이끄는 한국정통침구학회와 '뜸사랑'은 "모든 무면허 의료행위를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과잉규제로, 환자의 생명권과 치료받을 권리를 침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한의사 면허와는 별개로 침구사 자격증 제도의 부활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로 "단시간의 수련으로 누구나 쉽게 시술할 수 있으며, 부작용도 거의 없고, 치료 효과도 매우 뛰어나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한의사들은 '뜸사랑'에 소속된 수많은 회원들의 무면허 시술에 대해 "국민의 생명과 건강이 직결되는 문제인 만큼, 의료인만이 의료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한 현행 의료법의 규정이 철저히 준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의사를 사칭하거나 흉내 낸 무면허, 무자격자들에 의해 지압원, 침술원, 건강관리센터, 목욕탕, 찜질방, 쑥뜸방 등에서 침, 뜸, 부항 등의 시술 행위, 진맥 및 한약 투약의 불법 한방의료행위는 심각한 수준으로 최근 불법 무면허 한방의료행위 사건을 보면 아래와 같다.
▲2006년 9월 중국 명의 행세한 무면허 침 시술 및 마약 처방 사건
▲2009년 2월 부산광역시 쑥뜸방 여고생 사망 사건
▲2010년 2월 당나라 침, 뜸 명의 행세하며 20여년간 6,500여 명을 불법진료한 사건링크
▲2011년 3월 암 환자 상대 불법 한방진료 사건
▲2011년 4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생명을 위협했던 기관지 내 침 발견 사건
▲2011년 7월 대전광역시 피부 관리실에서의 유아 부항 사망 사건링크

무면허 의료행위는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심각한 위해를 가할 뿐만 아니라 국가 보건의료 체계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는 점에서 척결되어야 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무면허 의료행위를 하는 사례가 전국 도처에 깔려 있어 신고 건수도 늘고 있다. 게다가 부작용이 생겼더라도 보상받기가 쉽지 않아 한마디로 간접적인 살인행위나 다름없다. 한의사들은 김남수의 뜸사랑이 저지르는 무면허 의료행위도 이와 같은 범주의 행위이기에 철저히 근절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뜸 시술은 환자에게 2도 이상의 화상과 감염, 염증의 가능성이 있으며, 면역력이 저하된 환자에게 함부로 시술하면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어, 일반인 시술은 위험하다는 입장이다.

또한 '한의사들은 한의대에서 한약 공부만 하지 침과 뜸을 배우지 않는다'는 뜸사랑 측의 주장은 터무니없으며, 이미 한의대에서 6년간 인체생리병리와 해부학실습 등의 습득을 기본으로 침, 뜸, 한약을 배운 약 2만여 명의 한의사들이[25] 전국 각지에서 보험적용을 통해 저렴하고도 질 좋은 침구의료 서비스를 국민들에게 행하고 있는 현재,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의 유물인 침구사 제도 부활 주장은 일제강점기로의 회귀를 바라는 시대퇴행적인 시도인 동시에 침, 뜸, 한약의 전문가로서의 한의사의 전문성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뜸사랑에서 하는 주장을 뜯어보면 어이가 승천하게 된다. 특히 심심하면 "한의사가 침구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한의대생은 최소 6년간 유급의 압박을 받으면서 침구에 대해 꾸준히 배운다. 단순 교육시간만 따져도 뜸사랑에서 일반인들을 상대로 돈을 240만원이나 주고 받는[26] 불법적인 교육 시간의 30배 이상이다. 그리고 이렇게 배운 걸 바탕으로 경혈과 침구 시험을 6년 동안 계속해서 친다. 중간기말은 당연하고, 수시로 퀴즈까지 본다. W대학은 침구 실습시험 문제 중 칠판에 아무 경혈이나 10군데쯤 조교가 적고 바로 다 놓아보라고 하며, D대학은 상자에서 특정한 혈 자리의 이름 혹은 특정할 수 있는 설명을 뽑아서 40초 내에 놓는 시험도 있다.

여기에 전국의 한의사들 중 침술의 스페셜리스트들인 침구과 전공 전문의 자격(상술한 10년 이상의 경력 보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뜸사랑은 "한의사는 침을 1년도 배우지 않는다"는 허위 주장을 펼치고 있다. 한의대를 다니는 본과 2학년 교과서에도 다 있는 시술과 치료들을 자신이 개발한 것처럼 무극 보양'뜸' 이라고만 적고 가르치면서 다 자신의 의술인 양 거짓말을 한다. 이부프로펜, 아스피린 사용할 줄 알고 베아제 처방할 줄 알면 내과 전문의라는 소리나 마찬가지.

5. 한국 침술에 대한 왜곡[편집]

'뜸사랑 침뜸의학 교수 전상희'라는 사람이 김남수의 구술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논문의 내용에 따르면, 구당 김남수는 일제강점기에 면사무소의 후생 담당으로 일했다고 한다. 당시 면사무소 후생 담당이란, 일제 때 노동·보건을 담당했던 직책이다. 일제 말기에는 징용자, 정신대를 송출하는 업무를 맡았다.
선생은 자신의 지난 체험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씀하지만, 해방 이전까지의 행적에 대한 언급은 좀처럼 없다. 그것은 자신이 일제강점기에 공직을 맡아서 일했다는 수치심 때문이다. 선생은 징용을 피해 면사무소의 후생담당으로 일했다고 하는데, 침쟁이 소리가 듣기 싫어서 약을 공부했고, 가장 종류가 많았던 4,000여 가지나 되는 위장약을 모두 암기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의 공직을 맡았다는 것은 선생에게 평생의 콤플렉스로 작용하여, 많은 동시대 사람들이나 해방 이후 사람들이 일본의 장점을 공식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말할 때에도 선생은 최소한의 언급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본어에 능통한 선생이 절대로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선생의 태도는 침뜸에 관한 경우에만은 예외이다. 일본인이 침술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호침(毫鍼)의 자침에 사용하는 「관(管)」을 개발하여 자침을 용이하게 하였다는 점과 침뜸의사를 민간에서 선발하여 지방자치단체에서 인정하였다는 점이다. 또 다른 것이 있다면 다행히도 일제 때 조선총독부에서 자신에게 침뜸의사 면허를 얻게 하였다는 점이다. 선생은 자신을 비롯한 침뜸의사들이 일제 때 면허를 얻어서 침뜸의 맥을 잇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해방에 대한 선생의 인식은 분명하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해방의 기쁨을 누리는 것만큼은 자신도 기뻤으나 실제로는 많은 걱정을 하였고 그 걱정이 해방 이후 정치적 혼란과 남북전쟁으로 이어지면서 현실화되자 선생의 실망은 커져 갔다.

- "무극보양(無極保養)뜸을 통해 본 구당 김남수의 의학사상", 전상희 중에서-

위 인용구에서 밑줄 친 부분과 같은 식의 그의 주장은, 엄연히 일본의 침술을 한국의 전통침술이라고 왜곡하는 소리이며, 국제적 망신을 당할수 있는 날조된 행위이다. 관을 사용하여 침을 자입하는 방법은 일본 에도 시대 스기야마 와이치(衫山和一)에 의해 개발된 것이다. 또한 김남수가 쓰는 구법 역시 일본의 구법이다. 김남수가 구사하는 침뜸술의 수기 모두가 현재 일본 침구대학에서 수업하고 있는 것들이다. 김남수의 침뜸술은 우리의 전통 침뜸술과는 거리가 확연히 멀다.

한국의 침
과거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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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호침
과거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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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에서 쓰이는 관침들은 모두 일제강점기에 유입된 것으로, 이것들이 전통침의 명맥을 끊어버렸다. 한국의 전통침은 황두침, 사공침을 구사하는 연침법이고 염전위주의 수기가 쓰이는 침법이며 사혈을 과감히 하며 유침을 길게 하지 않고 침을 많이 놓지 않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변증론치를 하면서 주로 원리주의적으로 이론임상의 일치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 오행침 부류들[27]이 그 주종을 이룬다.

중국의 침은 현재 남경 쳥딴안(承淡安) 선생이 개발한 침을 사용 중이다. 역시 연침법을 쓰나, 기교 위주이며 기혈을 즐겨 쓰며 변증론치를 하면서도 임상에서는 음양오행을 무시하고 침구이론을 벗어나 시술하는 경향이 있어 이론과 임상의 괴리가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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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침

이에 반해 일본의 침법은 대부분 변증론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며 많이 놓고 유침을 주로하고 제삽을 주로 쓴다. 자입은 관을 써서 한다. 임기응변을 중시하여 변증론치를 무시하다시피 한다. 사혈은 금지되어 있다. 또한 침은 지극히 가는 것을 써서 통증이 없이 찌르는 침법이 일본침법의 추세다.

김남수가 자신의 방법을 전통 침법이라고 내세워 활보하는 것은, 진실된 우리 전통의 맥이 잘리고 부러지는 것과 같다. 이것도 모자라 일부 한의사들은 이 관침을 전통침이라 착각하고 세계 각지에서 활용하고 있다. 중국 중의대와 일본 침구대학에서도 자신의 전통 자법수기를 정리하여 책으로 편찬해놓고 있다. 한국만 유일하게 자신의 자법을 방폐하고 정리하지 않고 책으로 편찬한 것이 없으며 잡법 수기 교과서마져 없다. 한국의 침술협회와 한의사협회는 왜곡과 날조를 바로잡아 전통침법 수기를 정리하고 정돈할 의무가 있다.

6. 기타[편집]

침사 자격증은 있으나 2012년 서울지법은 그 자격증이 과거 허위로 취득되었다고 판시하였다. 하지만 2012년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인 임채민(1958)이나 당시 서울시장인 박원순은 그의 침사 자격을 취소시키지 않았다.[28]

과학적 검증이 된 게 없기 때문에 돌팔이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돌팔이라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지만 언론에서 김남수에 대한 보도는 호의적인 편. 그의 넓은 정재계 인맥으로 인한 비호가 아닌가 의심받고 있다. 실제로 국회, KBS, 감사원, 정부과천청사에 침뜸 봉사실이 있다. 사실상의 탈법로비인 셈.

한의사들의 침술이 형편없다며 도발하며, 자신과 침술대결 한번 해보자고 나섰었다. 그리고 진짜 일침학회의 창시자인 김광호 씨가 대결을 제안하자 "그런 적 없다"며 꼬리를 내렸다. 그리고 몇년 뒤 "한의사들이 나와의 침대결을 피했다"고 주장한다. 링크

"침술을 저렴하게 널리 보급하기 위해 침구사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껄이는데, 정작 김남수의 침술은 회당 20만원에 육박한다.(…)링크 1번 침 맞는 것이 웬만한 한약보다 비싸며, 2회를 맞으면 그 비싸다는 녹용 넣은 한약과 가격이 동등한 수준이다. 한의사들이 1회 진료시 받는 침구수가 총액의 20배에 가까운 수치를 받아먹으면서도 자기 자신은 "국민건강을 위해 저렴한 가격" 드립 치는 것이 뻔뻔하기 그지없을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의 부고 소식을알리는 기사에는 참된 의사 같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이 줄을 잇고 있으며 정식으로 면허를 따고 활동하는 한의사,의사 들에 대한 욕설들이 가득하다. 언론을 등에 업은 사기꾼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7. 판결[편집]

"오프라인 침 뜸 교육 평생교육시설 설치 판결(1심) (2013.11. 21.)"

2012년 12월 27일 정통침구학회는 서울특별시동부교육지원청에 오프라인 평생교육시설 설치 신청을 하였으나, 서울시동부교육지원청에서는 무면허 의료행위를 조장한다고 판단하여 의료법위반을 근거로 신청을 반려하였다. 이에 정통침구학회는 서울행정법원에 평생교육시설 설치 반려 처분 취소 소송을 걸었다.

1심 재판부는 해당 시설의 교육과정은 한방의료행위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평생교육시설의 교습과정으로 적절하지 않고 의료인 양성을 위한 수업연한, 학위 등에 관한 제한 규정을 잠탈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의료 관계 법령은 의료인이 아닌 자에 의한 의료행위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데, 이 사건 교육과정은 수강생으로 하여금 침뜸, 경혈학 등 실기과목은 물론 임상과목까지 이수하도록 되어 있어서 무면허 의료행위를 전제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원격평생교육(온라인교육)과는 달리 평생교육시설은 직접적인 임상교육이나 실습과목을 전제로 하고, 교육과정 자체에서 무면허 의료행위가 명백하게 예상되는 이상 이 사건 교육과정은 관계 법령을 위반할 가능성이 명백하므로 이를 이유로 반려한 조치를 정당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2016년 8월 10일, 대법원은 "오프라인 교육원을 설립하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며 원심을 뒤집고 김남수의 손을 들어줬다. JTBC 한겨레 대법원은 “임상·실습이 적법하게 이뤄질 가능성이 있음에도 막연한 우려만으로 침과 뜸 교육 기회를 차단하는 것은 과도한 공권력 행사”라며 “설립 신고 단계에서부터 무면허 의료행위가 예정돼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기타 내용은 한국어 위키백과 참조

8. 의혹[편집]

8.1. 유명인 시술 의혹[편집]

김영삼과 김재규, 그리고 장준하를 치료했다고 주장했지만 증언들이 엇갈리고 있다. 엇갈리는 증언에 대해선 만화와 만화2 여기서 볼 수 있다.

저서에 의하면 노태우에게도 침을 놔줬다고 하는데, 이건 진짜일 가능성이 높다. 노태우가 어느 돌팔이에 의해 에 침이 박혔기 때문이다. 그것도 손가락 하나 반 정도의 침이다.[31] 이 정도면 실수라고 하기 어렵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김남수의 여제자가 노태우에게 침을 놓았다는 것이다.

8.2. 허위 자격증 의혹[편집]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유서 깊은 전통 한방비법을 전수받아, 11살부터 친형 김기수와 함께 한학과 침구학을 전수받고 침을 놔, 자신의 경력이 70년에 달한다고 한다. 만약 아버지에게 배운 게 사실이면, 김남수의 아버지는 1915년에 작고하셨으니, 1915년생이라고 주장하는 김남수는 태어나기도 전에, 혹은 갓난아기일 때 가전으로 전수되는 전통 한방 비법을 전수받은 것이다. 기사

하지만 고향 사람들 증언에 의하면, 실제로 김남수는 1922년에 태어났고 형과 고물장사를 하다가 노년인 1980년대에야 비로소 서울역에 있는 대한침구학원에서 청소 일을 했다고 한다. 결국 정식으로 한의학을 배운 것은, 대한침구학원장인 이병국 씨에게 5~6개월 배운 것이 전부다. 김남수는 경위야 어찌됐건 정식으로 침술을 배웠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논리대로라면 두 학기 청강을 했으면 대학 학사 학위를 받은 것이나 다름 없다는 말이ek.

이런 허위경력 논란은 제쳐두고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받은 자격증은 침사 자격증이라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 의해 현대 의학이 도입되면서 일제는 한의학을 없애려 노력했는데[32], 이 당시 일부에게 발급한 자격증이 바로 침사, 구사 자격증이다[33]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침사는 침만, 구사는 뜸만 시술할 수 있으며[34] 이를 통틀어 침구사라고 부르도록 정해졌다. 따라서 침사 자격증만 소지한 김남수가 뜸을 시술하는 것은 엄연한 의료법 위반이다. 그가 2011년 기소된 것도 구사 자격을 소지하지 않은 김남수 씨가 뜸시술행위를 한 것은 의료법 제27조 제1항의 '자격된 것 이외의 의료행위'를 한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논란이 점점 커지자 중국으로 가려다가 2011년 6월 14일 불구속 기소되었고, 결국 그나마 갖고있는 침사면허도 허위로 발급받은 것으로 판결받았다.

이 사람의 의술이 진짜 실력인지, 아니면 그냥 플라시보 효과(돌팔이)인지는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은 아닌지라 정확히 뭐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김남수의 증언은 신빙성이 의심되는데다, 이 사람의 언론 플레이는 한국 사회에 큰 논란을 일으켰던 황우석이나, 심형래와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김남수가 별 볼일없는 인물인 건 맞아도, 그가 쓰는 침법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일본 침법을 적절히 베껴와 변형한 것이다. 다만 그 개인이 장사꾼에 사기꾼 기질이 다분한 것이 문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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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2] <구당 김남수가 직접 알려주는 ‘무극보양뜸’ 화제 - 한국경제>[3] <구당 김남수를 알고싶다 - 주간동아>[4] <한겨레가 만난 사람 ‘침구사 부활운동’ 펴는 구당 김남수 선생>[5] <구당 김남수 "장진영 치료효과 사실…침뜸 자율화 돼야">[6] <YS,장준하,박태환도 다 고쳤다? -주간동아>[7] <"한의학 기본원리"VS"악의적인 구당 죽이기": 김남수 옹 고 장진영 침뜸 시술 놓고 "전문의영역 vs 전통의학" 논란 가열 - 주간동아>[8] <뉴스추적 '현대판 화타' 과대포장됐다 주장 - 중앙일보>[9] <고 장진영 - 구당 김남수 '침뜸 미스터리' 그 진실은? - 중앙일보[10] 스승과 수제자가 숙식을 함께 하며 배우는 방식[11] 조선시대 궁중 의약 총괄 부서[12] https://economyplus.chosun.com/special/special_view.php?boardName=C03&t_num=7760 참조[13] 內部, 지금의 행정안전부[14] 황상익의 의학파노라마:근대식 의사의 역사[15] 세브란스 병원의 원조 '알렌' 다시보기[16] 처음에는 광혜원이라 명명되었으나 곧 제중원으로 바뀜[17]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초기의 제중원은 국립병원이었으므로, 오늘날 국립병원인 서울대학교병원의 전신은 제중원이라 볼 수 있다."라고 주장하여 세브란스 병원과 서울대학교병원이 누가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의 계승자인지에 대해 날 선 신경전을 벌인 바 있다.[18] 1년 3개월 후에 광제원으로 개칭[19] 링크[20] 알렌은 순수 의료 선교사가 아니었다[21] 1911년 11월 발행[22] 1921년 12월 『동아일보』에는 “금후의 의생의 출원자는 부칙 제2항에 의해 개업지역을 정하여 신청할 수 있는데 의료기관이 토지 인구에 비해 부족하여 총독부 당국에서 점차 충실히 하고 과도기에 ‘한방의’이란 것을 의생으로 인정하여 산간벽지에 의료기관이 없는 지방에 개업도록 함……”이라고 하여 의생이 양의사들의 도시집중화에 따른 의료 사각지를 메우는 형태의 의료구조로 되었다.[23] 출처:의료인의 명칭에 관한 용어,황상익(의학용어 원탁토론회 발표자료집),192쪽,대한민국의학한림원 2007 http://www.namok.or.kr/bbs/skin/book/download.php?code=book&number=5[24] 灸士, '구'는 뜸의 한자어다.[25] 한방전문의의 경우 인턴 1년, 레지던트 3년의 과정을 추가로 이수[26] 말은 무료봉사라면서 매년 200명 이상에게 교육을 하고 돈을 꼬박꼬박 받는다. 이것만 해도 수억원이다![27] 사암침, 격팔상생침, 체질침 등등.[28] 침구사 같은 의료유사업자의 자격을 발급하거나 취소할 수 있는 자는 보건복지부장관이나 해당 시장이나 도지사이다. 반면 의사한의사치과의사간호사 같은 의료인의 면허를 발급하거나 취소할 수 있는 자는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법률 개정으로 간호조무사 또한 자격 인정 주체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변경되었다.[29] 6.25 전쟁 시절에 입학했다. 입학 시험의 난이도를 생각해보시라.[30] 인터뷰에서 김현철 본인도 김남수에 대해 알아봤다고 밝혔다.[31] 일반적으로 한의사들이 쓰고 있는 침은 30~40mm 정도의 길이로, 노태우 전 대통령의 기관지에서 발견된 침은 7.5cm 이다. 한의사 협회에서도 이를 지적하며 "일반적인 한의사가 시술한 것이라 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한의사들이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규격은 넓게 잡아도 1.5cm~5cm 정도이며, 특수부위에는 아예 환도침이란 장침을 따로 쓰는데, 이건 적어도 10cm는 넘는다. 7.5cm 라고 하면 "그런 것도 파나??" 싶을 정도로 어중간한 사이즈.[32] 이 점에 있어서는 평가나 분석이 엇갈린다. 단순한 근대화라는 주장도 있고, 당대 한의학이 유학자들(선비들)에게서 전해진 점을 노려 고의로 탄압했다는 주장도 있다. 메이지 유신을 겪었던 일본이지만 아직도 전통의학이 황한의학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접골사와 침구사가 유지되는 것을 보면, 왜 한국에서만 이러한 정리사업을 벌였는지는 조금 의문이 남는다. 일각에서는 일본이 현대의학을 보급하고 한의학을 탄압하면서 일종의 의료독점을 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제기한다. 일본이 한국인이 현대의학을 공부하는 것도 집요하게 방해하려 들었던 것을 보면, 일리 있는 주장.[33] 당연히 한의학을 공부한 식자층에서는, 일본의 공공기관이 발급하는 면허증 따위 관심도 없었다.[34] 이는 일제 치하에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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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수

작가 정보
출생 1915년 5월 12일
일제 강점기 조선 전라남도 광주군 하남면 안청리
대한민국 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동)
사망 2020년 12월 27일 (105세)
대한민국 전라남도 장성군
직업 침사
언어 한국어
종교 유교(성리학)
필명 호(號)는 구당(灸堂)
활동기간 1943년~2020년
장르 저술
부모 김서중(부), 최임곡(모)
형제 김기수(형)
웹사이트 뜸사랑


김남수(1915년 5월 12일 ~ 2020년 12월 27일)는 대한민국의 침술사, 기업인이다.


목차
1생애
2약력
3저서
4각주
생애[편집]

1915년 5월 전남 광산군 하남면(지금의 장성군)에서 태어난 김남수 옹의 아호 구당은 말 그대로 ‘뜸(灸)을 뜨는 집(堂)’이라는 뜻이다. 부친 김서중씨로부터 11세부터 뜸과 침을 배웠다는 구당은 대가 없이 주민들에게 무료 시술을 했다. 그때 비롯된 아호가 구당이다. 일제시대 1943년 침사(鍼士·침을 놓는 사람) 자격증을 딴 구당은 구사(灸士·뜸 놓는 사람) 자격 없이 침과 뜸 시술을 병행했다. 구당은 28세 나이인 1943년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에서 남수침술원을 열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구당이 한의학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로 떠오른 것은 침술원을 연 지 65년 만인 93세에 이르러서였다. 2008년 방영된 공중파의 추석 특집프로그램이 계기가 된 것이다. ‘구당 김남수 선생의 침뜸 이야기’가 두 편을 거쳐 방송됐고, 시청률은 20%가 넘었다. 해박한 뜸과 침 이론으로 중국 베이징 침구골상학원 객좌교수와 녹색대학대학원 석좌교수, 경희대 체육대학원 강사 등을 지내며 후학을 양성했다. 침뜸 보급을 위해 정통침뜸연구소 원장과 남수침술원 원장, 대한침구사협회 입법추진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침뜸으로 승부한다>를 비롯해 <뜸의 이론과 실제> <침뜸 이야기> <침사랑 뜸사랑> <침뜸의학개론> <경락경혈학> 등 저서를 다수 남겼다. 최근 저서 <무극보양뜸>에서는 “뜸은 최고의 건강 장수 비법이자 의료비 대란을 잠재울 최고의 의술”이라며 “조상 대대로 전해온 뜸을 누구나 쉽고 자유롭게 뜰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http://www.hani.co.kr/arti/area/honam/976263.html#csidxe25845be4819cb38e651322952bc6b1 ). 그는 일제강점기에 침사 자격증을 땄지만 한의사들이 ‘무자격 의료 행위’라고 제소하면서 위기를 맞기도 했다. 헌법재판소는 2011년 11월 “침사 자격만으로 뜸 시술을 하는 것은 사회통념상 용인할 수 있다”며 그의 손을 들어줬다. 그는 꾸준한 뜸 교육으로 제자 5천여명을 배출했고, 그들과 함께 국내외에서 150만여명한테 무료 시술을 했다. 국민 건강에 공헌한 이런 공로로 대통령 표창(2002년), 국민훈장 동백장(2008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자원봉사상 금상(2012년) 등을 받기도 했다. 100세 되던 해인 2015년부터 고향 장성으로 내려와 서삼면 금계리에 '구당뜸집' 내 '구당침술원'을 열고 팔, 다리가 불편한 환자를 대상으로 무료 진료를 펼쳤다. 김 옹이 만든 무극보양뜸은 기혈과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남자의 경우 기해·관원 등 12개 혈자리에, 여자는 수도(좌우), 중극 등 13개 혈자리에 뜨는 뜸법이다. 향년 105세 나이로 2020년 12월 27일 오후에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약력[편집]
전라남도 광산군 하남면 출생
부친 김서중(金瑞中)으로부터 형님 김기수(金己洙)와 함께 한학 및 침구학 전수[1][2]
1983년 남수침술원 개설(신고번호 제92호)
서울맹학교 교과서 제정위원 및 심의위원
중국 북경 침구골상학원(현 북경중의약대학) 객좌교수
녹색대학원 자연의학과 석좌교수
미국 사우스베일로대학교 명예 동양의학 박사(2009)
미국 로드랜드대학교 명예 자연치유학 박사(2012)
세계침구학회연합회(WFAS) 각주단 집행위원, 교육위원, 침구의사고시위원
세계중의약학회연합회(WFCMS) 각주단 집행위원, 국제침구의사고시 한국 대표
사단법인 대한침구사협회 입법추진위원장, 봉사단장
사단법인 허임기념사업회 설립 이사장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2002)
국민훈장 동백장 서훈(2008)
미국 애틀랜타 리버데일 호스피탈 암센터, 암환자 침뜸시술 임상연구 (2009~2010)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 ‘자원봉사상’ 금상 수상(2012)
중국 UN MDGs 새천년개발목표 특별공로상 수상(2013)
現 구당침술원 원장(2013)
現 한국정통침구학회 회장, 정통침뜸교육원 원장
現 뜸사랑 봉사단 단장
現 정통침뜸연구소 소장
現 사단법인 효행봉사단 단장
現 계간 구당 발행인
現 한국정통침구학회 원격평생교육원장
現 세중연(WFCMS) 무극보양뜸 국제연맹 총재
저서[편집]
《무극보양뜸》구당 김남수 선생이 창안한 무병장수 의학, 정통침뜸연구소
《나는 침과 뜸으로 승부한다》, 정통침뜸연구소
평생 건강을 위한 침뜸 이야기,정통침뜸연구소
『뜸의 이론과 실제』,정통침뜸연구소
『침구사의 맥이 끊어지면 안 된다』,1998.12.15
『침구사를 키워 인류를 구해야』,1999.10.15
『생활침뜸의학』,1999.11.30
『침사랑 뜸사랑, 아∼ 내사랑』,정통침뜸연구소, 2002.9.7
『침뜸의학개론』, 『경락경혈학』, 『장상학』, 『병인병기학』,
『침뜸술』, 『취혈자침실기』, 『침뜸진단학』, 『경락학』 등
각주[편집]

 보도 자료 리스트
 김남수는 1915년 5월 12일 전라남도 광산군 안청리에서 김해김씨 문경공파 7세손인 부친 김서중과 모친 최임곡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무극보양뜸을 통해 본 구당 김남수의 의학사상’, 뜸사랑 침뜸의학 전상희 교수 지음). 그는 2008년 KBS 추석특집으로 방영된 ‘구당 김남수의 침뜸 이야기’에서 사회자가 “94세가 맞느냐”고 묻자 “나이는 많지만 몸이 건강해서 충분히 일할 수 있다. 6시에 기상해 오후 5시까지 11시간을 서 있다. 이는 침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해김씨 문경공파 대동보에 나타난 그의 출생일은 1922년 5월 12일로, 그가 말하는 나이와 차이가 난다. 그는 ‘주간동아’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1915년생이 맞다. 무슨 이익이 있다고 나이를 속이겠는가. 족보는 본인이 만든 것이 아니므로 거기에 대해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의 설명대로 1915년생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해도 “열한 살 때 선친에게서 침술을 배웠다”는 그의 말은 오류에 빠진다. 그동안 김남수는 “처음에는 침을 어깨 너머로 배웠지만 어느 정도 눈이 트인 뒤엔 정식으로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의 침술교육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교육이었다”고 밝혀왔다(‘침사랑 뜸사랑 아~내사랑’).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열한 살 때부터 의원인 부친에게서 한학과 침구학을 전수받았다”고 거듭 주장했다(서울신문 2008년 9월 29일자 등). 하지만 제적등본에 나타난 구당의 선친인 김서중 씨의 사망 시기는 1915년 2월 28일. 두 기록을 비교하면 그가 태어나기 3개월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에게 침뜸을 가르친 셈이 된다. 이에 김남수는 “호적 기록이 잘못된 것이다. 본인이 선친에게서 배운 것이 분명한데 부친의 사망신고일까지 파헤쳐서 말한다면 답변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고향에 가서 알아보기 바란다”고 반박했다. 1910년생인 김기수 씨가 다섯 살이 된 해는 1915년이다.


고대문명연구소 정기포럼 (2021.08.28) - 힌두교사 깊이 읽기, 종교학이 아닌 역사학으로 (이광수)

우리나라 농업은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 농촌&농업 < 무안오늘 < 기사본문 - 무안타임스

우리나라 농업은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 농촌&농업 < 무안오늘 < 기사본문 - 무안타임스

우리나라 농업은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글 / 금창영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입력 2021.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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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답은 자연의 치유와 균형...생물다양성 높이는 순환농법으로 바꿔야
기후위기 시대에 맞는 전문가는 연구실 박사들이 아니라 현장의 농민
2016년부터 6년째 경운하지 않고, 기계를 쓰지 않는 논농사를 짓고 있다.

나는 농부다. 50대의 나이지만 마을에는 어렸을 때부터 농사경력을 쌓은 어르신들이 넘쳐나니 비교하면 보잘 게 없다. 하루하루 어떻게 버티고 있지만, 농사는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곡예하듯 피해나가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농부는 어떤 존재일까? 귀농을 준비하는 이들의 부러워하는 눈빛과, 자식들이 도시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음을 자랑으로 여기는 동네 어르신들이 생각하는 농부, 그 사이에 어중간하게 있지 않을까?

농부라는 직업이 기술이나 능력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것은 아닐테지만, 그렇다고 경제적 이득을 생각하지 않고 묵묵히 공생의 삶을 살아가지도 않는다. 돈이 안되거나 육체적 한계상황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대부분 즐겁고 흥미로우며 보람도 있으니 그저 이어갈 뿐이다.

기후위기? 아무리 우리나라 농업이 국제경쟁력이 없고, 소득이 낮으며, 농민들 간의 소득격차가 벌어진다고 해도, 큰 욕심 부리지 않으면 그런대로 살만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사회에 기후위기나 기후재앙이라는 말이 떠돌기 시작했다. 날씨나 기후라면 농사짓는 우리가 가장 신경써야 할 분야 아닌가?

사실 날씨가 예전같지 않다는 말은 농민들에게 너무도 익숙하다. 농사라는 것이 50일 이상 비가 내리고, 20일 이상 폭염이 이어져도 그것을 극복하는 일 아니겠는가? 그리고 정말 기후위기가 왔다고 해도 농민에게 이렇다 할 대책이 없다. 그저 봄이 되면 밭 갈고 씨 뿌리고, 가을에 수확하는 것이다. 더불어 농사란 자고로 경험에 기반하기에 변화를 주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1년에 벼농사 한 번 짓는데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라고 한다면 무책임한 것이다.

하지만 그냥 모른척하기에는 온통 난리들이다. 세계 곳곳에서 산불이 이어지고, 이상기온이 일반적인 상황이란다. 지구가 불타고 있고, 인류는 생존을 걱정해야 한단다.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민으로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지금 생활에서 변화를 줘야한다는 생각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생겨난다.

IPCC나 1.5도, 해수면 상승 등 이런저런 어려운 이야기는 모르겠고, 온실가스 때문에 지구가 더워진다는 것은 알겠다. 그렇다면 온실가스를 줄이는 것이 중요한데 뭔가 이상하다. 우리나라는 공식적으로 농업에서 나오는 온실가스가 전체 온실가스의 3%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유럽은 25%라고 하고, 미국은 30%라고 말한다. 차이가 나도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이것이 첫 번째 의문이다.

두 번째는 탄소이야기이다.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하겠단다. 탄소배출을 줄이는 저탄소 농법이라는 것이 자주 거론된다. 농사에서 배출하는 온실가스와 관련해서 우리나라는 2010년을 전후해서 연구와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다. 그중에는 ‘농업부문 온실가스 감축사업’ 이라는 것이 있다. 이름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증도 주고, 감축량을 판매하여 수익을 올리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은 그 분야가 고효율 보온자재, 순환식 수막재배, LED조명 교체, 지열히트펌프 이용 등이다. 당연히 이런 사업은 시설재배에 적용된다. 그렇다면 그 시설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기는 온실가스에 대한 지적은 왜 없는 것일까?

세 번째는 농촌진흥청에서 탄소중립을 위해 농민들에게 권장하는 일이다. 토양개량제를 뿌리고, 퇴비는 부숙해서 사용하며, 벼 중간 물떼기 기간을 늘리고, 플라스틱과 비닐을 수거하고, 농기계를 주기적으로 점검하란다. 한쪽에서는 인류멸종을 이야기하는데, 정말 이렇게만 해도 탄소중립이 가능한 걸까?

네 번째는 기후위기에 이어 나오는 말이 식량위기다. 이해할 수 있다. 가뭄이나 장마가 이어지면 식량생산량이 줄어들테고, 그렇다면 불안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는 지금까지 악착같이 생산량을 늘리는 농사를 지어왔다. 그것은 친환경농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얼마나 생산량을 늘려왔으면 산지에서 폐기하는 일이 일어나겠는가? 어쩌면 지금의 농사방식이 기후위기와 관련이 있을텐데, 그럼에도 농사에서는 식량위기만 생각하며 지금처럼 생산량을 늘리는 농사를 지으면 되는 것인가?

여기저기서 기후위기와 관련한 세미나에서부터 간담회나 시위가 이어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기후위기 시대에 어떤 농사를 지을 것인가와 관련한 전문가에 정작 농민은 포함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농촌현장에서 버티고 있는 당사자가 전문가이지 이런저런 사례를 책이나 이야기를 통해 알고 있는 이가 어찌 전문가일 수 있는가?
식물은 기후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는 존재이다. 그러니 최소한으로 작물이 자라는 주변만 풀을 정리하고, 나머지 부분은 그냥 둔다.

아! 그들은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구나.
나는 앞에서 말한 몇 가지 의문을 푸는 것이 기후위기 시대에 어떤 농사를 지을 것인가와 관련한 답을 찾는 기본이며, 핵심이라 생각한다. 우선 정부나 농업연구기관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살펴보자. 왜 그들은 3%를 이야기하고, 온실가스 감축사업을 시설 중심으로 고민하며,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농업으로 스마트팜을 1순위로 이야기할까?

한마디로 농업의 역할은 국민들에게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후위기에 이어 식량위기가 올 것이니 안정적인 식량생산방식은 무엇일까? 답은 스마트팜이다. 간단하다. 노지농사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토마토를 한평에서 190kg씩 생산할 수 없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30억에서 60억, 많게는 300억씩 스마트팜을 지원하는 것이다. 물론 스마트팜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더워지는 날씨에 적응이 가능한 새로운 작물을 개발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병충해에 대해 연구하며, 이모작이 가능해지는 지역이 늘어날테니 그에 대한 연구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이 모두 생산성 향상과 관련한 것들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날씨가 따듯해지면 오히려 기회일 수 있다고 인식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중부지방에서 감귤을 생산하면 되고, 사과는 북부지방으로 올라가고, 남부지방에서는 열대과일을 생산하면 된다. 염려할 것이 없다.
그렇다면 왜 시설을 중심으로 온실가스 감축사업을 지원할까? 간단하다. 데이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업은 데이터에 근거해서 만들어진다. 새로운 사업을 하기 위해 필요한 근거는 대부분 데이터라는 이름을 가진 통계이다. 사업의 지속여부도 데이터를 통해서 판단된다. 그러니 지열히트펌프를 노지농사에 지원할 수 없다. 설치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노지에서는 순도가 보장되는 데이터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래서 스마트팜에 더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설을 만드느라 여러 가지 자재들이 들 것인데, 그것으로 인해 늘어나는 온실가스는 생각하지 않는가? 또한 농민들은 말할 것이다. 농사의 결과가 어찌 지열히트펌프를 설치한 결과라고만 볼 수 있는가? 농사는 자고로 해와 비, 땅의 상태, 병해충 등 다양한 조건의 결과이지 않는가? 물론 그들도 이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애써 무시한다. 왜냐하면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통제되지 않거나 연구를 시도하기에는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300평에 감자농사를 짓는다면 그저 감자를 심고, 수확하는 것과 관련한 통계만 내는 것이다. 그러니 3%이다. 하지만 농사는 그렇지 않다. 어떤 거름을 넣을까에서부터 경운은 어떻게 하고, 씨감자는 어떤 것을 쓰고, 멀칭은 어떤 것으로 하며, 관수는 어떻게 하고, 어떤 방법으로 수확하고, 얼마가 나왔으며, 도시민의 식탁으로는 어떻게 이동하는지도 다 다르다. 더불어 얼마만큼 버려지는지도 알 수 없다. 이 많은 경우의 수를 어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3%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것을 의미 있는 데이터라고 할 수 있기는 한 걸까? 하지만 세상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들에게 전문가라는 칭호를 준다. 변수가 워낙 많아 정확하게 수치를 계산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에게는 주목하지 않는다.
정리하면 이렇다. 소위 농업관련 전문가들은 농업부문에서 나오는 온실가스가 전체 온실가스의 3%라고 생각한다. 에너지부문이나 일상생활에 비해 적은 수치다. 그러니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유럽은 농업의 과정뿐만 아니라 유통과 소비까지 분석해보니 25%라고 하는 것이고, 미국은 축산과 관련한 온실가스가 더 많으니 30%라고 하는 것이다. 3%밖에 되지 않으니 나오는 대책이라는 것이 퇴비를 부숙해서 사용하고, 농기계 점검을 자주 하라는 것이다.
만약 연구가 계속되어 우리나라도 유럽이나 미국처럼 농업과 관련한 온실가스 배출이 전체의 20%가 넘는다는 결과가 나온다면 이건 그들에게 큰일이다. 그들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생산성과 효율성만을 생각하는 농업을 전파하고, 생물다양성이나 생태계보호는 생산량이 줄어들지 않는 선에서만 염두에 두도록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제 농업은 꽤나 진입장벽이 높은 직업이 되었다. 처음 농사를 시작하는 이들의 대부분이 시설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미 우리나라 하우스 면적은 세계 3위이다. 156,655,675평. 하지만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다. 일본이 10,890,000평이니 우리가 14배나 많다. 시설은 극도의 생산성을 추구하는 농사방식이다. 더불어 시장이 요구하는 상품성에 대응하기 적절한 방식이다. 하지만 열악한 노동조건을 전제로 한다. 그럼에도 시설이 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농민의 처지가 일본보다 열악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농민들은 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노지농사도 마찬가지다. 언젠가부터 당근이나 양파, 배추, 감자, 콩 등 대부분의 작물에 물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연히 수확량과 상품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까지 농민들은 품질이 좋으며 안정적으로 공급가능하고 가격도 저렴한 농산물을 생산하기 위해 다양한 위험과 싸워왔다면, 이제부터는 일상적인 기후위기와도 싸워야 한다. 밭농사는 외국인노동자가 없이는 어렵다고 말하고, 논농사는 모든 기계를 가지고 5만평은 넘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이 나오는 시절이 된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농업은 누가 보아도 불붙은 기관차가 전속력으로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미 그 해답은 우리가 알고 있다.
 
그것은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농사현장에서 계속해서 그 해답을 접하면서 살고 있다. 해답은 바로 자연이다. 자연은 지금까지 스스로 치유해왔고, 스스로 균형을 유지해왔다. 자연이야말로 우리가 모범으로 삼아야 할 지속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을 근거로 회자되는 농사법 몇 가지만 거론하면 다음과 같다. 자연농법, 자연재배, 예술자연재배, 보존농업, 재생농업, 공생농법, Zero budget natural farming, 농생태학, 퍼머컬쳐 등이다.

이름은 다양하지만 사실 들여다보면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생물다양성을 높여야 한다. 섞어짓기, 돌려짓기, 사이짓기, 소량다품종농사. 농기계사용을 최소한으로 한다. 외부에서 사오는 것을 줄이고 내부의 순환체계를 강화한다. 비닐멀칭을 줄인다. 씨앗을 받아서 농사짓는다. 녹비작물을 심어야 한다. 땅을 건강하게 만든다. 경운하지 않는다. 토양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표토가 드러나지 않게 한다.
그렇게 농사가 되겠는가? 그렇게 해서 먹고 살 수 있겠는가? 생각이야 좋지만 현실성이 너무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만. 모두 좋다. 그럴 수 있다. 어찌 모든 사람의 생각이 같겠는가?

생각이나 처지가 다르니 각자 실천의 모습도 다를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농민에 대해 말로는 국민들의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공익적인 일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개별사업자다. 본인이 판단해서 그 결과를 본인이 책임질 수밖에 없다. 더불어 농민들의 생각과 처한 상황이 제각각이다. 그러니 군대나 학교처럼 통일되고 단일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결국 농민들은 생존과 관련한 문제이니 항상 새로운 것보다는 익숙하거나 검증된 것을 선택하는 보수적 존재가 된다.
 
하지만 정책입안자들의 의식부족, 농민들의 의지부족, 소비자들의 인식부족을 탓하면 우리의 역할이 끝난 것인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고 전 사회적으로 이 문제와 관련한 이야기가 난무하지만, 실제 움직임이 없음에 한탄하거나 원망한다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니 각자가 본인의 논과 밭에서 본인이 납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갈 뿐이다. 기후위기 시대에 어떠한 농사를 지어야 할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전문가는 연구실에 있는 박사들이 아니고, 현장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농민이다.

글 / 금창영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2021/08/30

선교의사 알렌(Horace N. Allen)의 의료 활동과 조선인의 몸에 대한 인식 고찰* 이영아**

kjmh-20-2-291.pdf

291
의사학제20권제2호(통권제39호)2011년12월 KoreanJMedHist20ː291-326Dec.2011
ⓒ대한의사학회 pISSN1225-505X,eISSN2093-5609 

선교의사 알렌(Horace N. Allen)의 
의료 활동과 조선인의 몸에 대한 인식 고찰*
이영아**
1. 머리말
2. 선교의사들의 조선 전통 의학과의 접촉
3. 알렌의 의료 행위
4. 알렌의 조선(의학)과 조선인의 몸에 대한 인식
5.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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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2010년 TV드라마 <제중원>과 이것의 원작이 된 소설 『제중원』(이기원, 2009)이 발표되면서, 개화기 조선에 유입된 서양근대의학에 대한 사회적 관 심이 커졌다. 제중원은 고종에 의해 한국에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 이며, 이를 설립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 선교의사였던 알렌(Horace 
N. Allen)이다.
그는 한국에 체류하거나 한국 관련 일을 수행한 약 20년(1884~1905)의 시
간 동안 꾸준히 작성한 일기와 편지글을 통해 그 시기의 한국의 정치, 외교, 사회, 문화, 의학에 대한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므로 그의 일기와 선교
1) 
 
 *  이 논문은 2009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09-351-A00276]
**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인문교양학부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거북골로 34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120-728) 
전화: 02-300-0878 / 이메일: coolya112@naver.com
활동, 외교활동을 하면서 작성한 방대한 양 )의 공적·사적 편지의 내용, 그 리고 그가 미국으로 돌아간 뒤 조선에서 지냈던 시간들을 회고한 기록들은 특히 정치·외교나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조선의 공식 문서나 기록의 빈틈 을 메워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 사료이다.
특히 본 논문에서는 알렌이 조선 입국 초 의사로서 활동했던 시기의 조선인 의 몸, 위생, 질병 등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알렌은 1884 년 9월 조선에 입국했을 때 선교사이기 이전에 먼저 ‘의사’로서 정의되어 미국 공사관의 부속의사 및 유럽, 일본의 공사관 공의(公醫)로 임명되었다(민경배, 1991: 95). 그리고 1884년 12월 갑신정변 당시 민영익을 치료해 준 인연으로 1885년 4월 설립된 제중원에서 의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주위의 다른 선교 사 및 의사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 선교사직을 그만두고 1887년 8월 주미 한 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되면서 외교관으로 변신하게 된다. )
1884년부터 1887년까지의 알렌의 선교 및 의료 사업 기간은 한국사적으 로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 있는 시기이다. 조선 정부가 서양식 근대병원을 처 음 세운 시기이며, 이와 함께 서양의 문물과 기독교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가 생겨가기 시작한 시기이다. 알렌은 이 기간 의료 활동을 통해 조선인의 몸을 직접적으로 대면하였다. 개화기에 조선을 찾았던 많은 서양인들처럼 동양의 한 인종으로서 조선인을 바라보기도 하였고, 환자로서 조선인의 몸을 관찰하 고 치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을 일기, 편지, 그리고 회고록 등을 통 해 기록으로 남겼다.
그런데 알렌은 의사로서, 선교사로서뿐 아니라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 으로 주미 한국공사관 서기관직을 역임했으며, 훗날에는 주한 미국공사관 공 사로도 활동했다. ) 그만큼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중요한 가교 역할을 했던 존 재이다. 이처럼 알렌은 제중원의 설립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자, 구한말의 한 미외교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기 때문에, 기존 연구에서는 그의 치적사 업들에 대한 관심에 집중되어 왔다. ) 알렌을 연구하는 것은 단순히 개화기에 한국을 방문했던 선교의사 중 한 명을 살펴보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한국사 에서 개화기라는 격동의 시기의 중심부를 이해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역으로 알렌이라는 역사적 인물과 그의 기록들에 대한 섬
세한 텍스트 분석을 방해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즉, 그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생각과 태도로 일상에서 조선인들을 보고, 대하고, 치료해왔는지에 대한 관 심은 극히 적었던 것이다. 김윤성이 「개화기 개신교 의료선교와 몸에 대한 인 식틀의 ‘근대적’ 전환」에서 여러 선교의사들의 몸에 대한 인식을 다루는 가운 데 알렌의 논의가 포함된 경우를 제외하고는(김윤성, 1994), 알렌은 정치사 적ㆍ외교사적ㆍ의료사적 ‘행위’를 한 인물일 뿐 어떤 조선(인의 몸)에 대한 ‘ 시선’을 가진 인물로서 연구되지 못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알렌을 ‘대문자 의 역사’라는 ‘거시적’ 담론 속 존재가 아닌 조선이라는 동양을 방문하여 생활 한 한 명의 서양인으로서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가 가진 선교 사, 의사, 그리고 외교ㆍ정치가로서의 위치가 참조될 것이다. 하지만 더 중점 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그가 남긴 기록들이다. 그가 ‘글’을 통해 조선과 조선인, 특히 조선인의 몸을 어떻게 대하고 바라보았는지를 ‘미시적’으로 분 석하고자 한다. 
‘몸’의 문제에 집중하여 본 논문을 전개하려는 데에는 이 시기의 ‘몸’에 대 한 담론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한 확신에 근거를 두고 있다. 몸은 인간과 세계 를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몸 안에서, 몸을 통하여 세계를 경험한다. 몸은 문화에 의해 정교화되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전개되는 하나의 가능성이
다. ) 따라서 몸은 언제나 특정한 사회적ㆍ환경적 맥락 속에서 존재하는데, 그 안에서 몸은 능동적인 행위자이면서 또한 모든 사회적 계기와 그 역사에 의해 서 형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1900년을 전후한 시기 조선인의 몸에 대한 인식은 서구의 문물이나 서양인의 방문 등을 통해 전면적으로 바뀌게 된다. 이 시기 조선의 ‘근대화’는 여러 방면,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격변을 보인 부분이 몸에 관한 인식 부분이다. 의학, 위생, 체육교육, 섹 슈얼리티, 인종, 우생 등의 근대화 문제는 근대적인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선결되어야 할 요소였다.7)
따라서 이 시기 조선 땅에서 마주친 조선인과 서양인이 각기 바라 본 ‘우리’
와 ‘그들’의 몸에 대한 인식이 어떠하였는가를 고찰함으로써 ‘몸의 근대화’의 과정을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몸을 묘사하는 과정은 어떤 경우에서건 온전 히 객관성을 띨 수는 없다. 여기에는 대상을 보는 주체의 시선이 언제나 개입 될 수밖에 없으며, 서술을 하는 목적과 주체가 처한 상황에 따라 주관적 평가 가 포함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담론을 대할 때에는 ‘누가’, ‘무엇을’ 그리고 ‘왜’ 묘사하는지 항상 질문해야 한다(존 퓰츠, 2000: 21). 이들의 ‘충돌’과 ‘융 합’, 혹은 ‘경쟁’과 ‘승/패’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근대적인 몸’이 오늘날의 한국 사회의 몸에 대한 강박에까지 많은 부분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러 한 연구는 시의적 가치를 지닌다. 
먼저 조선인 쪽에서의 몸에 대한 인식은 선행 연구인 「1910년대 조선인의 타자의 몸에 대한 시선 고찰」을 통해 기왕에 살펴본 바 있다(이영아, 2010a). 따라서 이번에는 서양인 쪽에서의 당시 조선인의 몸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기 위해, 조선과 매우 오랜 기간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서양인이자 몸에 대한 감 각이 가장 예민할 수밖에 없는 직업인 의사로서 알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 다. ) 제국주의의 열풍이 불었던 당대에, 선교를 목적으로 내한한 서양인·백 인이자 의사로서의 알렌이 보고, 진료한 조선인의 몸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 리고 그 몸을 대하는 알렌의 태도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었을까?
2. 선교의사들의 조선 전통 의학과의 접촉
비서구사회에 서구 근대의학을 이식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자가 되었던 것 은 의료선교사들이었다. ) 1876년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고 일본에 의해 부 산, 원산, 인천 등이 개항된 이래로 1877년 제생의원이 부산에 설립되면서부 터 서양식 병원들이 조선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미 미국공사를 통해 알렌 에게 이듬해 봄부터 의료사업을 허락할 뜻을 비쳤던 고종은 갑신정변 때 알렌 이 민영익을 치료한 것을 계기로 1885년 봄 광혜원(제중원)을 설립하게 되면 서 본격적인 서양 선교의사들의 조선인을 상대로 한 진료활동이 시작되었다.
조선정부는 1885년 4월 재동의 고 홍영식의 옛집에 근대적인 서양식 의술 을 시행하는 병원 제중원을 세우고, 알렌에게 진료를 맡겼다. 제중원의 설립 에는 조선시대 일반 백성들에게 국가가 의료를 베풀던 기관인 혜민서의 역할 과 함께 서양 의술의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도 수행할 목적이 있었다. 1885 년 5월부터 6월까지 한 달간 스크랜턴이 알렌을 도왔으며 6월에는 헤론이 합류하여 알렌과 같이 진료를 맡았다. 이들은 개원 이후 1년 동안 1만460명 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진료한 실적을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로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은 서양인이 조선인을 진료한 결과를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서 그들 이 파악한 조선인의 몸과 질병이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 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스크랜턴은 보다 자유로운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1885년 민간진 료소인 시병원(施病院, Universal Relief Hospital)을 설립하여 진료를 하였 는데, 역시 『연차 보고서(Annual Report of Methodist Episcopal Church for 
1886 )』를 통해 조선인에게 흔한 질병이 무엇인가 등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또한 1887년에는 여성 환자들을 위해 보구여관(保救女館)을 세워 여의사 하 워드(Meta Howard)를 통해 진료하도록 했다. 그후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 커틀러(Mary M. Cutler) 등도 여의사로서 보구여관에서 활동했 다(조이제, 2007).
그런데 서양의 선교의사들이 조선인을 진료하면서 남긴 기록 및 의학행 위들에는 조선의 몸 문화 및 의학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두 시각이 모두 드 러난다. 예를 들어, 1890년에 내한한 영국성공회 소속의 의료선교사 랜디스 (Eli Barr Landis)는 조선 전통의료에서 사용하는 치료약재들을 긍정하는 모 습을 보였다. ) 그는 당시 한국에 있던 서양인들 중에 가장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 받을 정도로 한국어에 능통했으며 한문에도 밝아 조선의 다양 한 문화, 풍속에 대한 소개 글을 발표하고 동의보감의 영역(英譯)을 시도하기 도 하였다. 33세의 나이에 요절하면서 동의보감을 완역하진 못하였으나 그 가 제일 먼저 번역하여 중국학 잡지 The China Review에 소개한 부분이 「탕 액편(湯液篇)」이라는 사실(여인석, 2007: 10-1)은 그가 조선의 전통의학 중에 서 가장 인상 깊게 생각했던 부분이 조선의 전통적 치료약재에 관한 것이었 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보구여관의 의사였던 로제타 셔우드는 온돌형식의 병실이 당시 한
국 환자를 위해서는 가장 좋은 병실이라고 생각하였다(이방원, 2008: 39). 그 이유를 “첫째, 온돌방은 따뜻하고 잠자기에 편안하다. 둘째, 방 전체가 하나 의 침대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환자가 침대 밖으로 나올 염려가 없다. 셋째, 온돌방은 청결하여 소독하기 쉽고, 요를 쉽게 살균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선 교병원에서 사용하기에 경제적이다” )라고 하였다. 반면, 조선의 전통 의료방식에 대해 불신하거나 폄하하는 경우도 많았다. 서양인 의사들은 한국인들이 질병에 대해 무지하며 비(서양근대)과학적인 치 료방식을 채택하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죽거나 고통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 신들의 서양근대의학 대신 뜸, 침 )의 치료나 비위생적인 환경, 콜레라의 유 행에 고양이 그림으로의 퇴치, ) 부적, ) 굿 등의 미신에 의존하는 조선인들에 대해 서양 선교의사들은 동의하지 못했다. ) 그들에게는 한국인이 사용하던  
민간요법과 미신은 이해하기 힘든 치료방법이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을 ‘계몽’ 하면서 치료하려 했다(이방원, 2008: 48).
이처럼 서양의 선교의사들은 어떤 면에서는 조선의 전통의학과 생활환경 에 대해 인정하려는 태도가 있었던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침, 뜸과 같은 전통 적 치료법이나 위생불량 등을 비판하는 모습도 보였다. 알렌의 경우도 조선 의학에 대해 이러한 양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래 인용문에서와 같이 조선의 전통의학에 ‘좋은 아이디어들’이 있다는 점을 언급하기도 하고, 조선인들은 쌀밥을 주식으로 해서 치아의 성장이 좋은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 으며, 인삼의 발한(發汗)을 유도하는 작용에 대해 흥미를 보이기도 하였다.
토착 의료진들은 치료법에 대해 몇몇 좋은 아이디어들을 가지
고 있다.(The native faculty have some good ideas in regard to treatment.)16)
쌀밥 식사는 이의 성장에 좋은 것 같다. 한국인은 거의 누구나 
훌륭하고 진주와 같이 흰 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아침에 조심 스럽게 이를 닦는데 청정제나 솔 대신 손가락 위에 소금을 놓고 이 에 비벼댄다.17)
조선의 약전(藥典)은 주로 인삼으로 알려진 식물의 뿌리에 의존 한다. 인삼은 발한을 필요로 하는 조선 사람의 모든 병에 만병통치 약이다. 조선은 뛰어난 인삼으로 유명하며 최근 일본이 조선을 점 령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삼은 왕실의 부수입의 하나였다. … 미국 산 인삼은 활성이 없는 데 반해 조선의 인삼은 탁월한 발한성 때문 에 귀중하게 여겨진다. 나는 인삼을 먹고 발진한 외국인과 조선 사 람들을 본 적이 있다. 중국인들은 이 약초의 위대한 가치를 최음제 로 이용하는 것 같다. 내가 민영익을 치료할 때 체온이 올라가자 부 상한 부분이 붉게 타오르는 것 같이 보였기 때문에 특히 유의해서 
 
린이에게도 예방접종을 하지 못했다”며 화를 냈음을 언급하고 있다.
16) H. N. Allen and J. W. Heron,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Seoul, 1886), p.7.
17) H. N. 알렌, 신복룡 역, 『조선견문기』 (서울: 집문당, 1999), 181쪽.
살펴보았지만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많은 질문을 한 끝 에 그의 가족이 빨리 낫게 하기 위해 당치도 않은 인삼을 복용시켰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해 나는 나의 말에 분명히 복종하 지 않는 한 치료를 전부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나의 말이 너무도 강경했기 때문에 그 후부터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나쁜 징 후가 없어진 후 나는 전보다도 더 인삼에 대해 탄복하게 되었다. )
그러나 알렌 역시 전통의학의 치료법에 대해 부정하거나 우려를 나타내기
도 하였다. 그는 침을 놓는 것의 비위생성, 고약을 바르는 것의 무의미함 등을 언급하며 전통의학은 그가 보기에 효능이 없거나 오히려 환자에게 해로운 것 으로 여겼다. 그래서 다음의 인용문에서와 같이 무면허 의료행위로 침을 놓 다가 환자가 즉사를 한 경우, 민영익을 치료할 때 자신의 외과수술과 달리 전 통의사들은 고약을 바르려 했던 것 등에 대해서는 매우 위험한 치료방식이라 며 거부감을 드러냈다. 
조선의 의학 체계는 주로 중국의 의학 체계이며 중국에서 들어 온 것이다. 뜸을 자주 놓기 때문에 조선 사람을 벗겨 보면 어떠한 통증을 고치기 위해 뜨거운 뜸을 놓은 자리가 없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침도 뜸만큼 자주 놓는데 때로는 침이 더러워 원래의 병보다 더 심한 병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 언젠가 나는 침을 사용하여 매 우 슬픈 결과가 일어난 경우를 본 적이 있다. … 한의사를 높이 평 가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는 교육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의료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 잘못되어 침이 골수 를 꿰뚫어 젊은이는 입에서 거품을 뿜으며 쓰러져 죽고 말았고, 몇 시간 내에 그의 어머니도 충격으로 죽고 말았다. )
제가 몇 차례에 걸쳐 수술을 한 것이 이곳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
을 주었습니다. 제가 처음 부름 받고 왕자(민영익)를 치료할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약 13명의 현지 의료인들이 특히 영향을 받았습니 다. 저는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상처 안에 그들의 검정 왁스( 고약-역자 주)로 채우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동맥을 묶고 상처를 꿰매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1885년 2월 4일 자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3. 알렌의 의료 행위
이처럼 조선의 전통적인 의료 방식과 관념에 대해 한편으로는 그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려를 나타냈던 알렌은, 조선인을 어떠한 의료방 식과 관념으로 치료하였을까? 글의 서두에서 언급하였듯 알렌은 조선에 서 양의 근대의학을 도입시키는 데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 조선 최초의 근 대식 정부 병원을 설립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그의 존재가 이를 추진하는 데에 큰 동력이 되었다. 즉 그는 개별적인 치료행위 외에도 조선의 서양 근 대 의학 시스템, 지식, 기술을 수용할 기틀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 할을 담당하였다. 그렇다면 서양의 근대적 의사로서 그의 구체적, 개별적 의 료행위는 어떠했을까?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환자가 불치 환자일 때 무척 슬퍼하였으며, 완치되 기를 바라며 간절히 기도까지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치료할 수 없는 환 자를 보며 안타까워하고, 자신의 극진한 치료를 통해 환자의 회복을 기원하 고 성취해내는 그의 모습은 여느 의사들과 다를 바 없는 숭고한 것이었다.  
이곳에서 우리가 일을 하는 가운데 가장 슬픈 것 중 하나는 우
리에게 계속 오는 많은 수의 불치 환자였는데, 눈병의 상당수가 이 부류에 속했다. 두 눈이 완전히 손상된 남자가 외국인 의사가 그 를 완치시킬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찾아 왔을 때 “우리가 당신 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라고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
나는 어제 밤에 다 죽어가는 김판서의 아들을 진료하기 위하여 
불려갔다. 나는 그가 3일간 소변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약 3 시간 진료끝에 드디어 나는 소(小)카테테르(도뇨관)를 통해 소변 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나는 몇 방울의 오줌을 빼내었고, 그리고 이에 관련된 약을 조제해 주었다. 나는 그가 오늘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 같아서 아주 정성껏 그를 위해 기도했다. 초조와 불안의 아 침나절을 지난 후 내 기도는 감응을 받아, 정오 경 환자의 형이 내 게 와서 하는 말이 환자는 차도가 좋아져서 소변도 잘 나온다는 것 이다.(1885년 3월 22일자 일기) )
그러나 그는 때로는 조선인 환자들에게 오늘날의 의료윤리에 대한 ‘상식’ 과는 다른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는 점 역시 주목을 요한다. 이를테면 그는 일 종의 ‘의료사고’를 낸 뒤에도 환자가 그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하면 자신의 과 오를 시인하며 사죄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환자들의 무지와 맹목에 편승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나는 의과 대학에 다닐 때 이 빼는 방법을 배우려고 했다. 그러 나 내가 얻은 유일한 방법은 적합한 집게를 골라 이를 깊게 꼭 집 어 비틀면서 ‘귀중한 생명을 위해 잡아 뽑는’ 것이었다. 하루는 어 떤 사람이 이가 몹시 아프다고 불평을 하면서 찾아 왔다. 그 사람 을 빨리 돌려보내기 위해 아픈 이를 뽑아 버리자고 권했다. 그렇게 권하면 환자들은 곧 가 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놀랍게도 당장에 동의하는 것이었다. 처방을 수 행하기 위해 나는 능력을 다해 한 번에 이 두 개를 뽑아 버렸다. 그 날 늦게 내가 병원 문을 닫기 전에 그 사람이 온 것을 보고 나는 기 가 꺾이고 말았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이 하나를 썩은 이와 같 이 뽑아 버리고서는 호되게 욕을 먹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처의 이 몇 개를 뽑아 달라고 처 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때까지 한국인으로 그 렇게 아프지 않게 한꺼번에 이를 두 개씩이나 뽑는 사람을 보지 못 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많은 이를 뽑게 되어 오히려 이 뽑 는 일을 점점 좋아하게 되었다. )
위의 인용문은 알렌이 제대로 된 치과치료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서 한 환 자의 건강한 생니를 뽑아 놓고도 환자가 그 사실을 개의치 않자 오히려 자신 감을 갖고 발치(拔齒)하는 일을 즐기게 되었다는 일화이다. 그는 자신이 했던 의료 실수에 대한 정보를 환자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으며, 그런 채로 지속했던 의료행위에 대해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다음 인용문은 알렌이 제중원에서 1년간 근무한 뒤 작성한 『조선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의 ‘입원 환자에 대한 기록’에 나오는 구절인데, 여기 에는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큰 사지 절단 수술은 환자의 거부로 하지 못했고, 그 대신 손가락, 발가락, 그리고 음경을 환자에게 충분한 상의 없이 절단했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의 의료윤리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쉽게 납득 하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수술 후 “환자들은 항상 그 결 과에 만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큰 사지 절단 수술을 하지 못한 것을 무척 유감스럽게 생 각한다. 절단이 필요한 환자가 여러 명 왔지만, 다리를 잃을 것이 라는 말을 듣고는 더 이상 듣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죽어서 고통 에서 해방되지 않았다면 아마 아직도 앓고 있을 것이다. 손가락, 발가락 및 음경을 절단한 경우 우리는 환자와 길게 상담하지 않고, 그들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진정으로 알아차리기 전에 절 단했다. 환자들은 항상 그 결과에 만족했다. )
알렌의 1885년 4월 10일자 일기에 따르면, 제중원에서 자신이 환자를 처 음 진료한 첫날 환자 총 20명 중 절단수술을 해야 할 환자가 3명이었으나, 그 들은 모두 절단수술 받기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효경』에는 “우리의 몸, 머리 카락, 피부 등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감히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또 『소학』에는 “증자가 말하기를 신체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으로 행하면서 감히 공 경하지 않을 것인가?” )라는 가르침이 들어있다. 이처럼 전통적인 유교 사회 에서 몸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체(遺體)이기 때문에, 자식은 몸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 즉 “전신(全身)”의 개념을 효의 근본으로 실천한다. ) 근 500 년간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서는 몸의 털끝 하나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된다 고 믿었던 조선인들에게 몸에 칼을 대는 일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 을 것이다(이영아, 2008: 25-8). 물론 살기 위해서였지만, 때론 신체부위를 절 단하거나 큰 흉터를 남겨야 하는 외과수술을 받는 일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서 입원환자 분류표에는 45세 의 남성으로 음경상피종양(epithelioma penis)을 앓고 있던 환자가 음경절단 술(amputation)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음경절단술을 알렌과 헤론 에게서 받고 24일간의 입원기간을 거쳐 ‘good’이라는 치료결과로 퇴원했다. 본 논문에서 이에 대해 현대의 관점으로 윤리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가능 하지도 않거니와 논점에도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중요하고 흥미로운 지점은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었던 알렌의 사유구조이다. 그는 어떻게 그러한 행위를 감행할 수 있었을까? 
4. 알렌의 조선(의학)과 조선인의 몸에 대한 인식
알렌이 기본적으로는 환자를 극진히 치료하고 그것을 통해 서양의학과 기
독교의 힘을 증명하고자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의 의료행적들에는 몇몇 실수나 과잉진료 등의 흔적도 남아있다. 특히 조 선인의 몸에 대한 관념의 중심을 차지하는 효(孝)의식과 전신(全身) 개념(최 근덕, 1992: 171)에 배치되는 절단술 등의 의료행위도 감행했던 사실들에 대 해서는 보다 면밀한 해석이 필요하다.
1)조선및유교문화권의‘전신(全身)’개념에대한알렌의이해 그가 절단술을 행할 때 조선인에게 있어서 신체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것이 
가지는 치명적인 의미를 의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겠다.
어떤 사람은 파상풍으로 팔이 엉망이 되었는데도 그것을 절단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었다. 그 중국인 장군은 외 팔이 군인으로서는 아무 쓸모가 없었고 불구의 몸으로 고통을 받 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는 이유로 권하는 수술을 받지 않았다. 앞서 말한 대로 그는 파상풍에 걸려 자기 고집대로 죽고 말았다. )
위의 인용문은 조선 내에서 있었던 청일간의 무력충돌 때 생긴 중국인 부 상환자가 절단술을 거부했던 것에 대한 회고이다. 알렌은 전쟁에서 파상풍 을 입은 환자에게 절단술을 권유했으나 환자는 ‘외팔이 군인’으로 사느니 죽 겠다며 거절했었다는 것이다. 중국인 군인 역시 서양의학의 절단수술에 대한 믿음보다는 자신의 군인으로서의 사명감 혹은 신체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것 에 대한 공포가 더 컸기 때문에 절단수술을 거부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런데 그의 이러한 선택에 대해 알렌은 “자기 고집대로 죽고 말았다”며 비판적 인 어조로 서술하고 있다. 
서양의 근대의학은 몸을 하나의 기계로 여기면서 유기체로서의 몸, 하나의 
완결된 몸보다는 각 부분들의 해부학적 기능성을 더 중요시한 것이 사실이 다. 근대에 들어 등장한 실증적인 해부생리학의 지식은 인간을 신체와 정신 으로 구분하고, 실증적인 인체 내부의 관찰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직 접 ‘관찰’해 보니, 인간의 몸이란 하나의 ‘잘 만들어진 기계’와도 같다는 생각 에 미치게 된다(다비드 르 브르통, 2003: 29).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몸은 하나 의 완결되고 유기적인 총체가 아니라, 분할되고 파편화된 부분들로 인식되게 되었다. 이처럼 몸을 계속해서 분할할 수 있는 ‘기계’로 생각한 사상가가 바로 데카르트이다. 신체의 절단이 가능한 이유도 몸이 하나의 기계이자 물질이기 때문이다. 몸은 한꺼번에 하나로서 주어진 총체가 아니라 분해되고 재결합될 수 있는 부분들의 결합체이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부분을 떼어내거 나 수정, 조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에 따르면 몸의 한 부분을 없앤다거나 조금 고친다고 해서 전체의 통일성이 깨진다거나 존재 자체가 바뀌어버리지 는 않는 것이다(김종갑, 2008: 132-6).
이러한 맥락에서 알렌이 환자의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가는 것이 가지는 (동 양 혹은 조선의) 한 인간 존재에게 있어서의 의미를 간과했을 수 있다. 그러 나 다음과 같은 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몸의 일부가 사라지는 것이 큰 의미 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내가 조선에서 제일 처음 집도한 수술은 호랑이의 공격을 받은 
어떤 조선 사람의 팔을 잘라 내는 꼭 필요한 절단 수술이었다. 팔꿈 치 바로 위에 있는 뼈가 호랑이에게 물려 살이 썩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의 회복이 잘 되어 그의 친구들도 의아할 정도였다. 호랑이의 상처는 의사의 치료로 나을 수 있었지만 그는 (훗날 죽어서-인용 자 주) 그의 팔이 없는 채로 조상들에게 가게 될 것이다. )
그가 처음으로 절단수술을 한 환자가 상처는 회복되었으나 “팔 없는 채로 
조상들에게 가게 되었다”라고 언급한 것은 곧 그것이 조선인 환자에게 얼마 나 큰 타격이라는 사실을 그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을 수 있었지 만’, 즉 ‘생명은 건졌지만’ 팔을 잃는 ‘장애’가 생긴 것이며, 전통적인 유교윤리 를 따르는 조선인의 입장에선 그것이 조상에게 엄청난 불효를 저지르는 일임 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가 신체의 절단이 조선인 개인의 삶에 아무런 지 장도 끼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 앞서 인용한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의 ‘입원 환자에 대한 기 록’에서 ‘큰 사지 절단’은 할 수 없었으나, ‘손가락, 발가락, 음경’의 절단 수술 을 환자의 동의 없이 행했다고 말한 사실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즉 그가 ‘ 큰 사지’에 대비되는 ‘신체의 작은 일부’로서 손가락, 발가락과 음경을 동위에 놓는 신체관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경우, 그가 조선인들에게 단발(斷髮)을 요구하였듯,30) 신체의 부위에 따라 훼손되 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이 있다고 여겼고, 손가락, 발가락, 음경 등은 전자 에 속한다고 여겼던 것이라 판단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알렌의 의료행위들을 모두 해명할 수는 없다. 절단술
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큰 사지 절단 수술을 하지 못한 것을 무척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비록 신체의 ‘작은 부분’이나마 환자에게 충 분한 설명을 하거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절단수술을 감행할 때에는 이 수 술방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즉 ‘성공’에 대한 확 신이 없다면,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수술을 했을 리 없는 것이다. 그 런데 사실 알렌은 의과대학을 나왔으나 1년제를 졸업하였기 때문에(민경배, 
1991: 82) 일기나 선교본부의 엘린우드(F. F. Ellinwood)에게 보내는 편지에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30)  “조선어 교사가 오늘 오후에 나의 한문본 성서를 빌렸을 때 … 성서를 읽으려면 먼저 상투 를 자르라고 경고했더니 그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마침내 상투를 자르는 모험을 강행했다. 성서가 그로 하여금 단발의 결심을 굳히게 했던 것이다.”(1885년 1월 29 일자 일기)
서 자신의 의학에 대해 자신감 없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제중원이 설 립된 뒤 스크랜턴이나 헤론이 제중원 진료를 도와주길 바랐던 이유도 그 때 문이었을 것이다.
박사님이 나중에 저를 다시 조선으로 파송하게 된다면, 저는 외 과분야에서 졸업 후 과정을 밟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 저 는 조선에 오기 전에 경험이 전혀 없었고, 순전히 독학으로 공부했 기 때문에 이 제중원과 같이 전국적인 영향력이 있는 병원에서 시 술해야 할 큰 수술을 다룰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을 회피하고 있습니다.(1887년 1 월 3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
스스로 고백하고 우려하였듯, 알렌은 외과분야에 대한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순전히 독학으로 공부(self-taught)하였기 때문에 오히 려 큰 수술은 ‘회피하고’ 있는 정도였다. 
2)알렌의서양의학및외과수술에대한확신 그럼에도 그가 환자를 대상으로 과감한 절단 수술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 은 이것이 19세기, 즉 서양의 근대의학이 ‘과학성’, ‘객관성’으로 이해되고, 이 러한 서양 근대의학의 새로운 ‘성격’에 외과수술이 가장 크게 기여를 했던 시 대였기 때문이었다.
묄렌도로프 집에 당도해 보니 환자가 이미 출혈이 심했고 계속 
피를 흘리고 있어서 심각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는 나의 과감한 치 료방식에 크게 반대하는 14명의 조선인 의사들에게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1884년 12월 5일자 일기) )
제가 몇 차례에 걸쳐 수술을 한 것이 이곳 사람들에게 좋은 인
상을 주었습니다. 제가 처음 부름 받고 왕자(민영익)를 치료할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약 13명의 현지 의료인들이 특히 영향을 받았습 니다. 저는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상처 안에 그들의 검정 왁스 (고약-역자 주)로 채우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동맥을 묶고 상처를 꿰매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그들은 병원 계획 에 관심을 갖고 병원에 수용이 되는 숫자만큼 와서 교육을 받으려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민영익은 저에게 이렇게 말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신이 위대한 의사라고 생각합니
다. 그들은 당신이 미국에서 왔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 하죠. 이번 일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1885년 2 월 4일자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33)
꽤 많은 한의사가 병원을 이용했는데, 모두 치료 결과에 만족 해하는 것 같았다. 그중 몇 명은 서양의술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
했다.34)
알렌의 서양의학에 대한 자부심은 그가 갑신정변 당시 자상을 입은 민영익 을 치료하면서부터 확보된 것이었다. 민영익을 살려 낸 ‘외과수술’이라는 새 로운 의료방식은 조선 사람들로서는 매우 경이적인 것이었다. 알렌은 “피가 흐르고 있는 측두골 동맥을 관자놀이로 이어 명주실로 봉합하였고, 귀 뒤 연 골과 목 부분, 그리고 척추도 모두 봉합”했으며, “팔꿈치에서 팔뚝까지 약 8인 치의 깊은 상처도 명주실로 네 바늘 꿰매었다.” 이것은 조선에는 없는 치료법 이었다. 이 수술로 민영익이 회복되자 조선인들은 알렌을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measures”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번역이 더 적절하나, 김원모의 번역본에는 “이곳에 치료 하기 위하여 모인 조선인 의사들은 나의 뛰어난 치료 솜씨를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오역을 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여인석, 「한말과 일제시기 선교의사들의 전통의학 인식과 연 구」, 『의사학』 16-2, 2007에서도 지적된 바 있다.
33) H. N. 알렌 저, 김인수 역, 『알렌의 선교 외교편지(1884-1905)』 (서울: 장로회 신학대학교 부 설 한국교회사연구원, 2007) 38-9쪽.
34) H. N. Allen and J. W. Heron,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Seoul, 1886), pp.7-8.
오늘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약간의 생리학 지식을 민영익에게 설 명함으로써 그의 관심을 끌었다. … 그는 인체해부도를 보고는 경 탄의 소리를 연발하면서, 이들 기관이 인체 내의 어떤 부위인가를 확실히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외국의 의사들은 적어도 세 사람 의 죽은 시체를 직접 해부실험을 거친 후에라야 개업의의 면허를 받게 되며, 내 자신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고 그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생리학 책을 털썩 떨어뜨리고는 마치 내 눈에서 망령이 기어 나오지 않나 해서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 게 아닌가. 그는 인체 내부에 생긴 혹을 어떻게 치료하는가에 대해 물었다. 이에 나는 물 통 크기의 복부종양도 제거 수술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인공항문을 만들어 끼어줌으로써 장의 수축을 없앨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 은 문답은 그에게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 관심은 너무나 심대해 서 … (1885년 2월 21일자 일기) )
위 인용문에서 민영익에게 자신이 인체를 해부해서 본 경험이 있다는 사
실, 그리고 그 경험이 있어야만 의사 면허를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알렌의 모습에서 서양의 근대 의학교육 체계에 대한 자부심이 엿보인다. 또 한 서양의사들은 종양 제거, 인공항문 조성 등의 외과수술이 가능하다는 이 야기를 통해 알렌은 서양의학기술의 우월성을 확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알렌 등 서양의사들이 자신들의 의학에 대해 이와 같은 자부심을 가
질 수 있었던 것은 해부학과 외과수술 방식 때문이었다. 알렌은 자기 개인의 의사로서의 숙련도나 지식보다 서양 근대의학의 특성 자체에 대한 신뢰를 바 탕으로 이러한 수술을 감행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당대 서양 근대 의학의 자기 확신은 압도적인 힘이 있었다. 
미셸 푸코가 말한 바와 같이 19세기 중엽 이후 서양에서는 외과 수술이 의 학의 객관성과 과학성을 대표하게 되었다. 질병의 내적/외적 원인을 밝히려 는 의학적 지식은, ‘객관성’이라는 이름 아래 질병의 원인에 대한 ‘실증적 시 선’을 요구하게 되었고, 질병은 인간 몸과 의학적 시선이 마주치는 곳으로 끌 려나와 재편성되기 시작하였다(미셸 푸코, 2006: 32-3). 질병은, 해부대 위에 서, 현미경 속에서, 인간 몸의 안팎에 자리잡는 것으로 공간화되기 시작했으 며, 의학적 지식으로 분류되고 정복될 수 있는 물질적 대상으로 사물화, 실체 화되기 시작한 것이다(김윤성, 1994: 19). 서양의 근대의학은 질병을 ‘보고’ ‘ 말하려’ 했고(병리학), 이를 통해 기왕에 존재해 온 ‘보임’과 ‘보이지 않음’을 나누던 지식의 경계가 변화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몸의 내부를 들여다보 기 위한 기술(해부학)이 발달하고, 정교한 수술 솜씨를 갖추게 되면서 서양의 학이 ‘과학적’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것이 근대의학이 말하는 객관성이다. 외 과수술과 같은 구체적 행위만이 객관성을 보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하고, 의학적 시선은 객관성이라는 조건 안에서 형성되는 진리를 담는 저장고이자 명증성의 근원이 되었다(미셸 푸코, 2006: 17-9).
3)알렌의조선인의몸에대한‘오리엔탈리즘’적시선 그런데 이처럼 서양의학이 그 가치와 우월성을 인정받을수록 서양의 근대 의학 지식을 지닌 알렌과 조선인 환자 사이에는 수직적인 관계가 성립될 수밖 에 없다. 지식은 곧 권력이기 때문이다(콜린고든, 1995). 자신들의 치료법을 아직 모르는 조선인들과 이를 익힌 서양인 의사는 권력관계에 있어서 평등할 수가 없었다. 나아가 이러한 수직적 관계는 그가 조선을 미개한 나라로, 조선 인을 무지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알렌은 특히 조선인의 몸과 위생에 대해서는 인색한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굉장히 게으르고 더럽습니다. 중상류층이 흰 도포 와 큰 챙이 있는 작업모를 쓰고 여유 있게 활보하는 것을 보면 그 들이 깨끗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말입니다. 조선인들은 할 수만 있 다면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해서 그들이 일을 끝마칠 때까지 계속 일 을 하도록 시키자면 이곳 외국인들이 보통 애를 먹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조선산 막걸리에 취해 있고 외국 술도 매우 좋아해서 20% 의 관세에도 아랑곳없이 많은 양의 술이 조선에 들어와 있습니
다.(1884년 10월 1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
이곳은 인건비는 싸지만 일꾼들이 매우 느리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듭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의 일을 하는 데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인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다른 외국인들은 급사들을 고용해 식탁 시중을 들게 했는데 그들이 차차 하인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그들은 너무나 더럽고 게으르고 확실한 도둑들이라 결코 큰 기대는 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1884년 10월 8일 엘린우드에 게 보낸 편지) )
그들의 몸에서 계속 고리타분한 똥냄새가 풍기고 있었고, 그들
은 선실에서 끊임없이 줄담배를 피우고 있어서, 이 담배냄새에다, 목욕하지 않은 고린 체취, 똥냄새, 오줌 지린 내, 고약한 냄새가 나 는 조선 음식 등이 뒤섞여 온통 선실 안은 악취로 가득했다.(1887 년 12월 26일 일기) )
위와 같이 알렌은 조선인은 더럽고 게으르며 행동이 느리고 무절제한 생 활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이드(Edward W. Said)의 ‘오리 엔탈리즘’론에 따르면 서양은 자신들 이외 지역(특히 동양)을 ‘여성적=감성 적=수동적’인 존재로 여겨왔으며, 이와 동시에 ‘미개척지=야만적=정체적’인 문명으로 간주해왔다(에드워드 W. 사이드, 2000). 그는 푸코의 ‘지식/권력의 연계관계’의 개념틀을 차용하여, 서구 제국주의의 지배 담론을 통하여 구성된 오리엔탈리즘의 허상을 폭로하고, 이러한 담론 뒤편에 도사리고 있는 권력의 지를 파헤치려고 하였는데, 육체/정신, 여성/남성, 처녀지/개발, 빈곤/자본, 야만/문명 등의 이분법적 대비를 통하여 타자와 나를 구분 짓는 일은 오리엔 탈리즘적 사고의 변종이라고 하였다(이승환, 2004: 21). 4)당대몸에대한‘오리엔탈리즘’적시선의보편성
알렌 뿐 아니라 언더우드(H.G. Underwood), 게일(J.S. Gale), 비숍(I.B. Bishop), 에비슨(O.R. Avison) 등 조선을 방문한 대다수의 선교사들이 알 렌과 비슷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 그것이 조선인들의 실제 모습 일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조선을 낙후된, 미개한 국가라고 생각하 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알렌 개인만의 문제는 아니 었다. 이처럼 미개한 인종을 동일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차등을 두어 대하 려 한 태도는 알렌뿐 아니라 문명화된 국가에서 온 대부분의 서양인들, 심지 어는 서양인들의 눈에 ‘비문명국’일 뿐인 조선의 지식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청결의 문제에서는 많은 비난을 받을 것이다. 한 
영국인은 조선에서는 가장 깨끗하다는 사람이 그가 본 가장 더러 운 사람이었다는 말을 하였다. 그가 뜻하고자 한 것은 조선 사람들 이 지구상에서 가장 더러운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
미국인은 제아무리 게으름을 피우게 되더라도 노동은 고귀하다 는 것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다. … 그러나 조선에서는 그와 정반 대되는 견해가 존재하고 있다. … 일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양심 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
평균 이상의 신장과 힘든 일에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체력을 지닌 한국인들은 우수한 종족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신면으로 시선을 돌리면 우리는 다른 면을 보게 된다. 우수한 체력에 비해 정신력은 그에 못 미치는데, 그들은 분명 최상의 자질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마치 너울처럼 심한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 동방인 몽고계와 남방 인들의 교접에 의해 생겨난 탓으로 한국 민족 또한 너무나 다른 두 개체간의 잡종 혈통에 가해지는 조기 절멸의 생물학적 법칙의 가 혹한 운명을 피할 길이 없는 것 같다. 육체적으로는 아닐지 모르나 지금 한국인들은 정신적으로 쇠잔한 상태이다. )
사람으로 생겨나기는 다 마찬가지언마는 현금 지구상 인류간에
는 온갖점에 비상한 층등이 잇슴을 보겟도다. 구주각국의 인류가 긔 만 더할수업는 인지와 천혜의 결과로 「문명」이라는 맛조흔 술에 취흥이 잠잠하야 좁은 세계를 넓게 헵쓸고 단이는가하면 아 불리가 아미리가내지며 남양군도의 토인중에는 우리가 수백년 좀 더드리켜 수천년이전에 경험이 잇는 극히 유치(幼稺)한 극히 참혹 한 금수나 얼마틀리지안이한 상태가 지금 지도 온젼히 남어 잇 스니43)
조선인들은 『독립신문』의 1899년 2월 23일자 논설에서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을 문명국으로, 일본, 이탈리아, 러시아 등을 개화국으로, 중국, 페르 시아, 터키와 함께 조선 스스로를 반개화국으로,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일대 를 야만국으로 구분하였다(박승희, 2008: 77). ‘반개화국’의 국민인 조선인들 은 위의 글에서와 같이 인간에게 종족, 인종 등에 따라 ‘층등’이 있다는 점을 인정했으며 아프리카, 아메리카, 남양군도, 호주 등의 ‘야만인’들은 ‘금수(禽獸)’와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그만큼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오리엔탈리즘 이나 인종주의는 단순히 서양만의 인식 태도라기보다는 심지어 동양인들에 게까지 내면화되었던 세계의 사상적 조류였다고 할 수 있다(이영아, 2010a). 따라서 동양을 방문한 미국의 선교의사인 알렌 역시 이러한 사유틀로부터 자 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생각이 의료행위를 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데에 있 을 것이다. 문명화되지 않았다는 것이 곧 그들의 생명이나 몸이 문명국 사람 의 그것보다 하찮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에도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사 알렌 은 그 사실을 종종 간과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의료행위를 하는 데 있 어서 미개한 동양인에게 시혜를 베풀러 온 문명화된 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 적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사고에 의해 알렌은 자신들보다 ‘낮은’ 등급 인 조선인 환자의 몸을 대할 때 과감하고 위험한 치료마저도 감행하였던 것 이라 판단된다.
5)알렌의선교사업외의성취욕망-보론
마지막으로, 알렌이 선교사로서가 아닌 정치가, 외교가, 사업가로서 가졌 던 야망도 그의 행적을 설명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알렌은 1887년 한 국의 외교관리로서 주미 한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제중원을 떠난다. 1889년 9월 알렌은 다시 한국 선교사로 나왔으나, 1890년 7, 8월경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이 되면서 선교사직은 사임하였다. ) 한국 최초의 외국인 선교 사 알렌은 한국 사정에 밝았기 때문에 세관이나 미국 회사에서 함께 일하자 는 제의를 계속 받고 있었다. 1885년 7월 19일자 편지에 의하면, 묄렌도르프 는 그에게 세관병원 설립과 좋은 집과 연봉 5000달러를 제의했다. 1886년 5월 
13일자에도 미국 무역회사로부터 좋은 직위를 제의받았다. ) 그런데 사실 당시미국 선교사들에게는 조선의 정치문제에 개입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주재국 국내 문제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 것이 본국 정부 에 대한 국민의 의무로 되어 있다. …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는 일도 없어야 한 다”는 것이 당시 주한미국 공사로부터 선교사들에게 내려온 지침이었다(백낙 준, 1979: 255). 선교사들도 당시 미국 신학계의 주류였던 경건주의ㆍ복음주 의적 신학교육을 받았고, ‘사회부재의 영혼구제, 정치무관의 정숙주의’를 노 선으로 삼았다(조영렬, 1990: 4).
그런데 알렌은 조선 정부의 사업과 정치에 매우 깊숙하게 연관을 맺고 있 었다. 그는 자신의 일기 서두에 “본 일기에는 공식적이고도 정치적인 성격을 띤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고 스스로 밝히고 있듯, 알렌의 조선에서의 생활은 공식적, 정치적인 것이 많았다. 예를 들면, 1884년 12월 26일 일기에 는 갑신정변의 전개과정, 당시 발표된 황제의 포고령, 정변 직후의 내각 개편 등에 대해, ) 1885년 2월 16일자 일기는 조선 정부의 권력구조에 대해48) 매 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한 앞서 언급한 바, 그가 일기를 통해 조선 정 부나 외국 공사의 세관, 미국의 회사 등으로부터 받고 있는 여러 제의들을 기 록해 둔 것도 그만큼 그가 선교사직 외의 사업이나 관직 등에 관심이 컸음을 의미한다. 
그가 헤론이나 스크랜턴 등과 불화를 겪은 것도 그의 이와 같은 외부 활동 과 연관이 있다. 알렌은 자신의 일기와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크랜 턴이나 헤론에 대한 험담, 혹은 그들과의 불화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알 렌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기 때문에 객관성을 띠기는 어려우나 그 갈등의 주 된 양상이 선교행위에 대한 ‘진정성’, ‘순수성’과 관련된 문제였던 것으로 판단 된다. 예를 들어, 1885년 6월 28일자 일기에서 알렌은 “스크랜턴은 심술궂은 인간이고 병원 일을 너무나 소홀히 했기 때문에 나는 그가 병원사업에 적임자 가 아니라고 판단, 그 대신 다른 사람을 임명해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라고 말하고, 1885년 9월 1일 일기에서는 “우리는 헤론 박사와 아주 놀랄만하고도 짜증나는 의견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 이러한 감정적 대립은 헤론의 가 장 완고한 행동을 촉발시키고 말았다. 이로 인해 나는 드디어 선교부를 떠나 겠다고 사임 의사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 헤론부인은 이 기회를 놓칠세 라, 내가 선교사업을 맡을 적임자가 아니라고 비난하면서, 다만 이를 선교부 사임의 구실로 이용, 돈벌이에 나서려 한다고 통박했다. 이같은 모욕적인 발 언은 정말로 그리고 당연히 나를 격분시켰고. … 이리하여 나는 마침내 뉴욕 의 선교본부에 부산에서 새 선교사업을 개척해 보겠으니 부산 전근을 요청했 다.”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부분들은 선교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알렌의 행위 들이 동료 선교의사들 사이에서도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선교사 외의 외부적인 사업들에 관심을 둔 그의 행동이나 생각은 
그의 강한 ‘인정욕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에서의 생활에 적 응하지 못한 알렌은 조선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데(민 경배, 1991: 93) 그가 중국에 비해 조선을 좋아한 이유가 다음과 같은 부분에 서 드러난다.
조선 사람들은 매우 친절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한국에서 받은 환영에 매우 기뻤다. 우리가 중국에서 사는 동안 그들은 외국 사람 들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 그 반대로 조선에서는 외국인 들이 양반과 마찬가지로 존경을 받았다. 중국에서는 우리를 감시 할 개를 배치하곤 했지만, 조선에서는 개가 뛰어나와 우리에게 짖 으면 반드시 개를 꾸짖고 짖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어떤 때 혹 시 군중 속에 휩쓸리게 되어도 떠민다든지 거칠게 대하지 않고 반 드시 지나갈 통로를 비켜주곤 한다. )
즉 조선 사람들이 자신들을 ‘환영’해 주었고, ‘존경’해주었다는 점이 그로 하여금 조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게 만들었으며, 조선과 깊은 인연을 맺을 결심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알렌의 ‘인정 욕망’의 한 모습을 보여주 는 예이다. 알렌은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인정과 존경을 받는 것에서 자신의 성취동기를 찾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앞서 인용한 민영익과 관련된 일기들 에서도 항상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조선인들이 어떻게 놀라고, 감탄하였 는가에 대한 서술을 빼놓지 않고 있다. ) 덧붙여 다음과 같은 그의 생각은 그 가 의사로서보다 제중원의 설립과 운영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 여주는 예이다. 
 
특수한 사례 한 가지를 언급한다. 증례 1은 첫 번째 입원환자이 자 최초의 수술환자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위험한 경우였다. 훈 련받지 않은 조수들에 의해 클로로포름 마취가 행해져야 했으며, 그래서 생긴 나쁜 결과는 새로 세워진 병원에 타격을 줄 수 있었 기 때문이다.51)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 적힌 위의 수술은 다행히 사고 없이 성 공했고, 환자는 빠르게 회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훈련받지 않 은 조수”들이 마취를 했다는 것은 의료사고 위험성이 높았음을 의미한다. 충 분한 임상 훈련이 되지 않은 자들에 의해 마취를 행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 이다. 알렌 역시 ‘그것은 위험한 경우였다’고 서술하였듯 이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 “그래서 생긴 나쁜 결과는 새로 세워진 병원에 타격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위험했다는 것은 그의 관심이 어디에 먼 저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즉, 알렌이 일차적으로 걱정한 것은 ‘환자의 생명’이 아니라 ‘병원의 존립’이었던 것이다. 
그가 병원 설립 사업이 더뎌지자 “나는 하루 속히 병원 건물이 마련되길 바 라는 마음에 병원 건물이 준공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말하면서, 매일 찾아 오는 환자들을 돌려보냈다”(1885년 3월 18일 일기)는 것도 그의 그러한 의중
 
관이 인체 내의 어떤 부위인가를 확실히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외국의 의사들은 적어도 세 사람의 죽은 시체를 직접 해부실험을 거친 후에라야 개업의의 면허를 받게 되며, 내 자 신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고 그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생리학 책을 털썩 떨어뜨리고는 마 치 내 눈에서 망령이 기어 나오지 않나 해서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 게 아닌가.”(1885년 2월 21일자 일기); “오늘 아침 민영익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 신이 위대한 의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당신이 미국에서 왔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 하 죠. 이번 일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1885년 2월 4일자 엘린 우드에게 보낸 편지) 등.  
51)  H. N. Allen and J. W. Heron,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Seoul, 1886), pp.30-1; H. N. 알렌 저, 신복룡 역, 『조선견문기』 (서울: 집문당, 1999), 182 쪽.
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는 병원의 설립이라는 가시적 성과를 위해 조선인 환자들의 건강상태에 대한 걱정은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했다. 
결국 그는 길지 않은 선교의료 활동을 마친 뒤 미국과 조선 사이에서 경 제ㆍ외교적 이권을 획득하는 데에 더 열중했다. 그만큼 알렌은 권력 지향적 이고 상승욕망이 강한 야심가였다. 그런 그에게 조선인을 치료하는 일은 조선 정부와 친분을 쌓고, 병원을 설립하고, 조선과 미국 간의 외교 관계 수립의 주 도세력이 되는 등의 자신의 야망을 위한 한 ‘과정’이었을 수도 있다.
5. 결론
 본 논문에서는 알렌이 조선에 입국하여 초기 제중원 등에서 의료 활동을 
했던 1884~1887년을 중심으로 그가 남긴 일기, 편지, 그리고 정부병원 보고 서, 회고록 등을 살펴보았다. 알렌은 조선에 서양의 근대문명이 수용될 수 있 는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그는 조선 정부가 근대식 병원을 설립하는 데에 많은 동력을 제공하였고, 선교사들의 입국과 정착 등을 도우면서 조선에 기독 교가 수용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제중원 설립 후 1 년 동안 그는 헤론 등의 의료진과 함께 1만460명의 환자를 진료하였다. 뿐만 아니라 1900년대 초 세브란스 병원이 설립될 때에도 그는 주한 미국공사 자 격으로 미국선교부 측과 한국정부 사이에서 조율하는 데에 많은 역할을 담당 했다. 따라서 그가 개화기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으며 한국 개화기 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의 의사로서의 태도에 있어서는 그를 무조건적으로 옹호하기 힘 든 부분들이 존재한다. 그는 사실 충분히 숙련된 의학기술을 지닌 의사가 아 니었다. 단지 1년의 약식 교육과정을 마쳤을 뿐 제대로 된 임상 수술 경험도 없는 초보적인 의사였다. 그럼에도 그는 의료행위를 행할 때 거침이 없었다. 그는 조선인의 손가락, 발가락, 음경 등에 대한 신체 절단술을 행하면서 환자 에게 충분히 설명하는 과정이나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생략해 버렸다. 그리고 생니를 뽑는 등의 의료적 과실을 저질렀을 때에도 이를 은폐했다.
그의 이러한 행적들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는 서양근대의학의 
객관성, 과학성이라는 권위에 대한 알렌의 굳건한 믿음에 일차적으로 근거하 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알렌에게는 19세기 중엽 이후 해부학, 외과수술 등에 의해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 서양근대의학의 지식과 기술, 그리고 시스템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비록 개별 의사로서 본인의 의술에 대한 확신은 부족 했지만, 집합적 의미의 ‘서양의사’로서의 조선의 전통 의학에 대한 우월감은 강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의사-환자 사이의 관계를 수직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것은 더 근본적으로는 조선의 전통 의학뿐 아니라 조선인 전체에 
대한 우월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불결하고 무지하며 게으른’ 조선인들 에게 한편으로는 동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비하하는 태도를 보였다. 대부 분의 비서구지역을 방문한 서양인들이 지닌 오리엔탈리즘적 태도를 알렌 역 시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의사-환자로서뿐 아니라 서구인-비서구 인, 혹은 문명인-야만인으로서의 수직적 관계에 대해서도 당연하게 여겼다. 때문에 그는 조선인 환자들에게는 의사로서 친절하고 정직한 태도를 취해야 할 필요성을 그다지 강하게 느끼지 못했다. 문명인으로서 야만인들에게 ‘시 혜’를 베푼다는 입장에서, 의학지식 독점자로서의 권력을 행사할 뿐이었다.  
더불어 알렌은 사실상 선교사ㆍ의사로서의 활동기간보다 정치가ㆍ외교관 으로서의 활동기간이 훨씬 더 길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는 길지 않 은 선교의료 활동을 마친 뒤 미국과 조선 사이에서 경제ㆍ외교적 이권을 획 득하는 데에 더 열중했던 권력지향적이고 상승욕망이 강한 야심가였다. 그런 그에게 조선인을 치료하는 일은 조선 정부와 친분을 쌓고, 병원을 설립하고, 조선과 미국 간의 외교 관계 수립의 주도세력이 되는 등의 자신의 야망을 위 한 한 ‘과정’의 의미가 더 강했던 듯하다. 그래서 숙련되지 않은 조수들에게 마취를 맡겨 ‘위험’한 경우에 처했을 때에도 환자의 생명보다 병원에 대한 존 립을 먼저 걱정했고, 조선 정부에게 병원 설립의 재촉을 요구하며 진료를 거 부하기도 했다. 알렌에게 있어서 의료행위는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목표를 위한 수단의 의미가 더 강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색인어: 알렌, 선교의사, 의료 활동, 신체인식, 개화기, 조선, 오리엔탈리 즘, 서양근대의학
투고일 2011. 11. 1.         심사일 2011. 11. 3.       게재확정일 2011. 12. 6.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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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StudyonHoraceN.Allen'sMedicine andRecognitionofKoreanBody
LEE Young Ah*


Je Jung Won(濟衆院) was the first modern-style Government hospital built by the Korean King Ko-Jong(高宗) in April 1885, and it was the medical missionary Horace Newton Allen(1858~1932) who made one of the greatest contributions to the establishment of the hospital. 
Allen was an American missionary. He graduated from Ohio Wesleyan University with a degree in theology in 1881, and completed one-yearcourse at Miami Medical College. In Korea and America he worked as a physician, a missionary, an American diplomatic minister to Korea and a Korean minister's secretary to America. While acting as a mediator between Korea and America, he knew and recorded the domestic and foreign situation of Korea during Gaehwagi(開化期 : the civilized and enlightened age). Thus to study him is to understand Korea's Gaehwagi as well as to research American medical missionaries.
During his stay in Korea(1884~1905), Allen steadily wrote diaries and letters about Korean politics, diplomacy, society, culture, and medicine. Thus his public/private record through diaries and letters(the quantity of these materials amounts to several thousands) supplements the Korean 
 
*  Bangmok College of General studies in Myongji Univ., Namgajwa 2-dong, Seodaemungu, Seoul, Korea, (120-728) 
Tel: 82-2-300-0878 / E-mail: coolya112@naver.com
early modern era's historical record. However, until now these materials have received little scholarly attention from researchers except for a few historians of missionary work between Korea and America, or of Korean modern medicine. I intended to use these materials to suggest a new perspective on the study of Korean Gaehwagi.
Allen, along with John W. Heron, who came to Seoul on June 21st 1885, treated about 10,460 Korean patients in the first year of the opening of JeJungWon. They made "the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This report explained how Allen and Heron regarded and treated Korean patients.
Allen's diaries, letters and other writings offer a realistic view of how the western people actually recognized the Korean people at that time. As a western doctor, Allen had an ambivalent attitude toward Korean medical concepts and systems. On the one hand, he thought that medical idea, some food and drug of Korean is valuable.
He said that the native Korea faculty had some good ideas with regards to treatment. And he held Korean rice, ginseng, and so on in high regard. However, he did not rate Korean acupuncture and Korean traditional ointment at all.
In addition, he sometimes cured Korean patients dangerously and with imprudence. The amputation of patients' body, no matter how little, must ask the permission of the patients themselves. Especially, the sense of Korean filial duty(孝) couldn't accept amputation of body at those times. The artificial change of body meant to hurt parents' body, because at those times Korean people thought that my body was my parent's possession. But Allen did it without enough explanation or persuasion. Moreover he didn't feel guilty for the behavior at all. Besides, he seemed to be proud of it in the above mention. Such careless or unethical behavior cannot be excused. 
On the other hand, he had made mistakes in treatment according to his record. He pulled out some healthy teeth of patients who had a bad toothache. But he didn't explain nor apologize the mistake. Besides, he refused treatment of patients until the hospital would be opened in order to push Korean government to prepare hospital quickly.
Why or how did he do that? The first answer available to the question, he might be so confident of his medical knowledge and skill that he didn't feel the need to ask the patients' thought and will. However, as stated above, his medical study was just one year. And he worried about his inexperience of surgery.
Thus the first assumption seems to be false. He wasn't confident of his medical knowledge. The fact that nevertheless Allen treated Korean patients at his will, is still blamable. 
The second assumption is that he regarded western modern medicine as the only correct and proper approach. He didn't have many experiences, but his west modern medicine made him proud of its achievement. After middle 19th century of modern times, Micheal Foucault said at The Birth of Clinics, western modern medicine believed itself scientific on the ground that west modern medicine could have pathology and surgery. Allen might also trust the scientific ability of western modern medicine. So he might think that he didn't need to explain 'modern and scientific' medicine of West to people in 'premodern and non-scientific' medicine of Korea. 
The third answer is his 'Orientalism'. He thought that Koreans were dirty, lazy, and barbarous and, therefore, he made a clear distinction between Caucasian and Korean. He set his affection on 'Cho-Seon(朝鮮)' and made efforts to cure Korean patients and establish the first western Government hospital in Korea. However he, as a westerner, could not free himself from ‘Orientalism’ and ‘Imperialism’. Thus, he might ride so roughshod Korean patients. 
In fact the ‘Orientalism’ was not only Allen’s thought. Many western visitors thought Korean as an ‘Orient’. The West regarded themselves as civilized and the East as uncivilized or barbarous, therefore the West thought that the East should be modernized with the help of the West. This thought rationalized their imperialism and colonialism toward the East. 
In addition, he seemed to have some ambition in politics and diplomatics. He wanted to be a high-ranking official, so his goal of his life was political or economical power rather than medical missionary.
Keywords :  Horace N. Allen, medicine, missionary, body, Cho-Seon(朝鮮: Korea), Gaehwagi(開化期 : about the year 1876-1910, that is the civilized and enlightened age), Orientalism, western modern medicine
 

한국학중앙연구원, 구한말 선교사 알렌이 남긴 문서 3천 8백여건 대공개 - 교수신문



한국학중앙연구원, 구한말 선교사 알렌이 남긴 문서 3천 8백여건 대공개 - 교수신문

한국학중앙연구원, 구한말 선교사 알렌이 남긴 문서 3천 8백여건 대공개

이승주
승인 2021.08.10

- 1884년부터 21년간 조선에서 활동한 미국인 알렌이 남긴 방대하고 세세한 자료
- 세로로 쌓았을 경우 2.7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분량 3,869건, DB화 및 공개
- 동시대 서양인이 남긴 자료 중 가장 우수한 컬렉션, 한국 근대사 사료로 중요도 高
- 건양대 김현숙 교수 연구팀에 3년간 연구비 지원한 한국학진흥사업의 결실
-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누리집 통해 누구나 무료로 자료 열람 가능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안병우)은 구한말 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이 조선에서 활동하면서 기록한 3,869여건의 문서를 DB로 구축하여 연구자 및 일반국민에게 공개한다고 밝혔다.
이 자료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건양대학교 김현숙 교수 연구팀에 3년간 연구비를 지원하여 정리한 것으로, 의료 선교사로 알려진 알렌의 활동이 의료분야를 넘어 문학, 경제, 외교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이루어졌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

미국인 의료 선교사 알렌은 개항 초기인 1884년 9월부터 1905년 6월 까지 약 21년 간 조선에 체류했다. 그는 조선에서 의사, 선교사, 경제인, 외교관, 정부 고용인, 고종의 참모, 번역가, 작가 등 여러 직업을 섭렵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다양한 분야에 관여하였다. 이때 생성된 다수의 문서들을 ‘알렌 문서’라고 부른다.

알렌 문서 생산자인 알렌은 주한 미국공사관의 전권공사라는 직위를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고종의 최측근으로 정권핵심에 있으면서 주미한국공사관 설치, 춘생문 사건, 아관파천, 독립협회, 하와이 이민 등 한국 근대사의 핵심적인 사건들에 관여하고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 점에서 그가 남긴 방대하고 세세한 자료는 한국 근대사의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1884년 상하이의 상하이 머큐리(Shanghai Mercury)사에서 간행된 『한국에 대한 기록(Notes on Korea)』라는 제목의 책

금번 공개하는 3천6백여 건의 알렌 문서는 알렌이 1924년 뉴욕공립도서관에 기증한 자료를 전량 수집하여 일반 대중과 연구자가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화한 것이다.
해당 문서를 세로로 쌓으면 2.7m에 달할 정도의 방대한 양이며, 여기에는 주한미국공사관 서류를 비롯한 각종 공문서와 지도, 사진, 신문 기사 등을 비롯해 알렌의 일기와 서신, 메모, 원고 등의 개인 문서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동시대 서양인들이 남긴 자료 중에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또한 주제의 다양성 측면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우수한 컬렉션이다.

알렌이 조선에 들어온 직후 갑신정변이 일어났는데, 정변 세력에 의해 죽을 뻔한 민영익(명성황후의 조카)을 치료하여 조선 조정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경인철도 부설권 및 평안도 운상광산 채굴권을 미국에 주도록 주선하였고, 심지어 직접 광산용 목재 조달에 관여하는 등 경제인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 DB에서 “금광”, “광산”을 검색하면 300건이 넘는 문서들이 검색된다. 당시 열강이 금광 채굴에 많은 관심이 쏠려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자료들이다.
1889년에는 영어권 독자들에게 「흥부전」 등의 한국 문학을 알리고, 1893년 시카고만국박람회에 조선 악공들을 데려가 한국 음악을 소개하였으며,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하여 논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심은 그의 컬렉션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음악에 대한 글, 도자기의 목록, 한국과 세계의 고지도, 미술과 문학에 대한 미발간 저술 등이 그것이다.

알렌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조선에 체류한 서양인 중 TV 드라마 등을 통하여 일반에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컬렉션은 연구자 뿐 아니라 일반 대중의 관심을 유도할 수도 하다.
백두산 천지의 모습을 담은 촬영일자 미상의 사진

알렌 문서에 포함된 애국가 악보와 각종 초대장, 여권, 사진, 고지도와 고서, 미국공사관의 회계 장부, 알렌 개인의 가계부 등은 소설과 드라마, 연극, 영화 등 새롭고 유익한 문화 콘텐츠를 기획하고 생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안병우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은 “서양인들이 남긴 한국 관계 문헌들은 한국학 연구에 있어 조선인이 아닌 외국인의 시선으로, 다양한 정보와 통찰을 제공해 왔다. 알렌 문서는 역사학, 정치외교학, 의학, 민속학, 문학, 신학, 미술사, 음악사 등 제반 분야에서 근대 전환기 한국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라고 이 자료의 의의를 강조하였다.

자료들은 영어 원문과 내용 요약문으로 서비스 되고 있으나 향후 번역하여 이용의 편의를 도모할 예정이다. 해당 자료는“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누리집(waks.aks.ac.kr)”에서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 검색방법 :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누리집 검색창에서 ‘알렌’ 입력 → 하단 ‘연구과제(1)’ 클릭 → ‘홈페이지’ 클릭 → ‘자료보기’ 클릭 → 좌측 ‘문서분류’에 따라 검색하거나 검색창에 직접 입력하여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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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race Newton Allen papers1883-1923 [bulk 1883-1905]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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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ction Overview
Biographical/historical information
Scope and arrangement
Administrative information
Key terms
Using the collecti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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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ction are digitized.

CreatorAllen, Horace Newton, 1858-1932Call numberMssCol 49Physical description9 linear feet (7 boxes, 20 v.); 10 microfilm reelsLanguageMaterials in EnglishPreferred Citation

Horace Newton Allen papers, Manuscripts and Archives Division, The New York Public LibraryRepositoryManuscripts and Archives DivisionAccess to materialsRequest access to this collection.Portions of this collection have been digitized and are available online.

Horace Newton Allen (1858-1932) was an American missionary, diplomat and physician. Collection consists of correspondence, diaries for 1883 to 1903, writings, speeches, and other papers reflecting Allen's career as a clergyman, medical missionary in Korea, secretary of the Korean Legation in Washington and of the American Legation in Korea, and United States Minister to Korea. Includes papers relating to foreign commercial concessions in Korea, the attempt of the Korean emperor to enlist American aid against Japan, and the Russo-Japanese War. Also, miscellaneous papers relating mainly to Korea including photographs, clippings, copies of Korean and Japanese newspapers, and other printed matter. Correspondents include Samuel L. Clemens, John Hay, and Horace Porter.



BIOGRAPHICAL/HISTORICAL INFORMATION


In 1883 Allen, who was born in Ohio, went to China as a medical missionary for the Presbyterian Church. In 1884 he went to Korea, where he remained until 1905. In Korea he served as medical officer to the U. S., British, Japanese, and Chinese legations in Seoul; medical advisor to the Korean royal family; Secretary of the American Embassy in Seoul; Minister Plenipotentiary and Envoy Extraordinary to Korea. He also served as Secretary of the Korean Legation in Washington. Allen was the author of several books about Korea.

SCOPE AND ARRANGEMENT


The papers cover Allen's career in Korea during the periods of Chinese-Japanese conflict in Korea, the Russo-Japanese War, the winning of foreign concessions in Korea,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Japanese protectorate over Korea in 1905. Included are: Allen's correspondence (largely outgoing), and copybooks, 1884-1916 (the bulk covering his Korean period); manuscripts of speeches, articles, and other writings by Allen largely on Korean topics; a few manuscripts on Korea by others, including Rear Admiral S. B. Luce, Ellen C. Parsons, and unknown authors; reports, letters, and legal and other documents, 1895-1906, relating to foreign commercial concessions in Korea; clippings of newspaper articles by or about Allen and Korean topics; letters and other documents relating to the Russo-Japanese War; photographs of the American and British legations in Seoul, circa 1899, five views of the ceremonies opening the Japanese railway connecting Seoul and Fusan, 1905, fifteen views of the American gold mines in Korea, four views and a plan of Allen's summer house in Chemulpo, 1899, the Japanese Peace Commission on its way to Portsmouth, New Hampshire, 1905, and other Korean views; four diaries, 1883-1903; copies of books about Korea by Allen and others; issues of Korean (or relating to Korea) newspapers and periodicals, 1892-1923; miscellaneous documents, including accounts of Allen's household and of the legation, invitations, Korean poetry and artwork, passports, a copy of the Korean national hymn, and a volume containing records of dispatches to the U. S. State Department.

The Horace Newton Allen papers are arranged in fourteen series:
Incoming Correspondence
Outgoing Correspondence - Letters by Allen
Documents relating to foreign commercial concessions in Korea
Letterpress Copybooks


(on spine "Press Copy Books").
Writings and Speeches by Allen
Writings by Others
Press clippings
Photographs
Memorabilia
Account Books
Books
Newspapers and Periodicals
Diaries
Diaries  4 volumes in slipcases
r. 10
#1  1883-1887
r. 11
#2  1887
r. 11
#3  1897-1898
r. 11
#4  1903



Manuscripts/Maps (not microfilmed)

ADMINISTRATIVE INFORMATION

SOURCE OF ACQUISITION

Gift of Horace N. Allen, 1924

PROCESSING INFORMATION

Compiled by Richard Salvato, April 1974; Revised by Julie Miller, August 1987; 2000

KEY TERMS
NAMES
Allen, Horace Newton, 1858-1932
Hay, John, 1838-1905
Porter, Horace, 1837-1921
Twain, Mark, 1835-1910
Korea. Legation (United States)
United States. Legation (Korea)
SUBJECTS
Diplomatic and consular service, American -- Korea
Missions, Medical -- Korea
Russo-Japanese War, 1904-1905
PLACES
Korea -- Commerce
Korea -- Diplomatic and consular service -- United States
Korea -- Foreign relations -- Japan
Korea -- Foreign relations -- United States
Korea -- Pictorial works
Korea -- Religious life and customs
United States -- Foreign relations -- Korea
OCCUPATIONS
Clergy
Diplomats
MATERIAL TYPES
Diaries
Photographs

USING THE COLLECTION

LOCATIONManuscripts and Archives Division
Stephen A. Schwarzman Building
Fifth Avenue at 42nd Street, New York, NY 10018-2788
Brooke Russell Astor Reading Room, Third Floor, Room 328

ACCESS TO MATERIALSRequest access to this collection.

ALTERNATIVE FORM AVAILABLE

Entire collection available on microfilm; New York Public Library; *ZL-309

Horace Newton Allen - Wikipedia

Horace Newton Allen - Wikipedia



Horace Newton Allen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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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rticle is about the Protestant missionary. For the 1919 Brooklyn Robins baseball player, see Horace Allen (baseball).

Horace Newton Allen

2nd United States Minister to Korea
In office
October 1, 1901 – June 9, 1905
President William McKinley
Theodore Roosevelt
Preceded by Himself (as Consul)
Succeeded by Edwin Vernon Morgan
United States Consul General to Korea
In office
September 13, 1897 – October 1, 1901
President William McKinley
Preceded by John Mahelm Berry Sill
Succeeded by Himself (as Minister)
Personal details
Born April 23, 1858
Delaware, Ohio
Died December 11, 1932 (aged 74)
Toledo, Ohio
Political party Republican
Spouse(s) Frances Ann
Children 2
Education Ohio Wesleyan University (B.S.)
Miami Medical School
Profession Physician, diplomat


Horace Newton Allen (April 23, 1858 – December 11, 1932) was a missionary, physician, and American ambassador to Korea. He was the first Protestant missionary in Korea, arriving there on September 15, 1884.[1]

After treating Min Young-ik, a royal relative injured during the Gapsin Coup, Allen became close to the king of Joseon, Gojong. At his suggestion, Gojong founded the first western hospital, Chejungwon (now known as Severance Hospital). Allen was in charge of the core function of the hospital. A year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hospital, Allen started a medical school, which was the first formal medical education in Korea.[2]

Due to Allen's relationship with the emperor and other officials, Allen became part of the United States Legation to Korea. He was appointed as secretary in 1890 and was promoted to US minister and consul general in 1897. However, Allen was recalled in 1905, over disagreements with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regarding the Taft-Katsura Agreement.[2]


Contents
1Biography
2Legacy and honors
3Publication
4Popular culture
5References
6External links
Biography[edit source]

Horace Newton Allen was born in Delaware, Ohio on April 23, 1858. He received his Bachelor of Science at Ohio Wesleyan University in 1881. He studied medicine at the Miami Medical School in Cincinnati, Ohio, graduating in 1883.

Allen was appointed a medical missionary and sent to China by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Northern Presbyterian Church and arrived in Shanghai on October 11, 1883. After a while, he decided to serve in Korea, which had just opened its doors to the western world. After obtaining the mission board's permission, he went to Korea on September 20, 1884 to explore. As government law prohibited foreign religion at the time, he was appointed medical officer of the United States Legation to Korea in Seoul, thus hiding his true identity. He went back to Shanghai to bring back his wife Francis "Fannie" and their son, Harry to Korea on October 26.

On December 4, 1884 the Gapsin Coup, a coup d'état staged with the help of the Japanese army by a handful of elite progressive officials,.took place, The progressive government collapsed in 3 days as the Chinese army entered Seoul and defeated the Japanese army. This event started with the assassination attempt on the life of the queens nephew, Min Young Ik, who was hosting a banquet to celebrate the opening of the nation's first postal office with dignitaries including foreign diplomats and he was inflicted with 7 severe sword wounds. Dr. Allen was summoned and treated Min's near mortal wounds, applying western medical methods against the objection of 14 of the court's medicine men. It is noted that wounds soon became infected and Dr. Allen treated the infected wounds with "baked mud" to absorb pus and wash away with water and it took 3 months before Dr. Allen's treatment on him was completed.[3]

Upon hearing the wide spread rumor that a foreigner with bushy red beard revived a dead prince, many people flocked to his house. He seized this opportunity to serve Korean people and submitted to the Foreign Ministry "A proposal of founding a hospital for the government of His Majesty in Seoul Corea" with an introductory letter by J. C. Foulk, charge de' affair of the U.S. Legation. The king Gojong granted his proposal readily and a western hospital named Gwang hye Won (廣惠院, House of Extended Grace) was opened in a traditional Korean estate on April 10, 1885. The name quickly was changed to Chejungwon 제중원 the 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 The hospital had 5 separate in-patient rooms, eye treatment room for extraction of cataracts, vaccination room for smallpox, etc. A year later, Dr. Allen, John William Heron and Horace Underwood opened a medical school "Medical and Scientific School of Royal Corean Hospital and admitted 16 medical students.[3] The adjoining school building had a large class room, a chemistry lab and 2 dormitory rooms.

It is noteworthy that since September 1894 the Board of Foreign Mission started to operate the nation's first western hospital and medical school in Korea and in September 1904 Chejungwon built a new ultra modern brick building outside the South Gate with help from Louis Severance, a philanthropist in Cleveland Ohio, moving patients from "the old to new buildings" on September 23. The invitation to the dedication of the building read "the New Chejungwon/Severance Hospital". For a while after the transition the popular daily newspaper Donga Ilbo called the new hospital "New Chejungwon" and government official document also referred the new hospital as Shin Chejungwon (New Chejungwon). The newly renamed Severance Hospital was the direct descendant of Chejungwon.[4]

The Severance Hospital and Medical school on June 5, 1962 moved to a new location in Sinchon after building a huge medical complex which included the Eighth U.S. Army Memorial Chest Hospital as an integral part and a separate unit ($400,000 worth of building material and $70,000 for medical equipment as American Forces Aids to Korea Program 1955). This institution now is called Yonsei Health System, part of Yonsei University after union with Yonsei University on Jan 5, 1957.[5]

Allen's post Chejungwon activities related to Korea are; King Gojong of Korea asked Allen to help open the Korea Legation in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Allen led a 12-man delegation to Washington D. C. in November 1887 and established the Korean Legation in January 1888 when Minister Park J. Y presented appointment letter to President Cleveland. Allen helped operate the Korean Legation and carried out diplomatic activities (his position was "foreign secretary" "참찬관" ).

Upon his return from America he started working in July, 1890 as Secretary at the United States Legation in Seoul and left 15 years later in June 1905 as the Envoy Extraordinaire and the Minister Plenipotential before his successor Morgan closed the United States legation in November 1905.

Allen was decorated 3 times by King Gojong and the last one, the highest Tae Guk Order was donated to Yonsei Health System in 2015 by his great granddaughter Lydia Allen.

He died in Toledo, Ohio on December 11, 1932. He was buried in Woodlawn Cemetery in Toledo. Allen and his wife, Francis Ann "Fannie", had two sons, Horace Ethan "Harry" who in turn had 3 sons and Maurice who left no children. There are 5 surviving great grandchildren.

Dr. Allen's contribution to Korea:[6] 1. Introduction of western medicine to Korea. 2. Opening the door to the proselytization of Christianity to Korea 3. Industrialization of Korea; arranging building a railroad system, trolley, electric company, etc. by American companies. 4. Faithful supporter of King Gojong and Korea.
Legacy and honors[edit source]
Gojong awarded him the highest decoration, Taeguk.


Publication[edit source]

Allen's writings introduced Korean literature to the English-speaking world. His publications include:
Korean Tales, (1889)
A Chronological Index of the Foreign Relations of Korea from the Beginning of the Christian Era to the Twentieth Century, (1901)
Supplement, (1903)
Things Korean, (Seoul, 1908)

Popular culture[edit source]
Portrayed by Sean Richard in the 2010 SBS TV series Jejungwon.
Portrayed by Lorne Oliver in the 2018 tvN and Netflix TV series Mr. Sunshine.
References[edit source]

  1. ^ Kang, Wi Jo (2016-09-13). "The Legacy of Horace Newton Allen".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20 (3): 125–128. doi:10.1177/239693939602000308. S2CID 171878262.
  2. ^ Jump up to:a b Yeo, In-Sok; Yoon, Do Heum (2017). "Allen (Horace N. Allen, 安連, 1858–1932)". Yonsei Medical Journal. 58 (4): 685–688. doi:10.3349/ymj.2017.58.4.685. ISSN 0513-5796. PMC 5447096. PMID 28540978.
  3. ^ Jump up to:a b Allen's Diary
  4. ^ letter by Dr. Jesse Hurst and 이하영 서신 규장각
  5. ^ documents from letters to Dr. Ernest Weiss from U. S. Eighth Army
  6. ^ Allen, Horace Newton (1908). Things Korean: A Collection of Sketches and Anecdotes, Missionary and Diplomatic. F. H. Revell Company.
External links[edit source]


show

v
t
e
Christianity in Korea


show

v
t
e
United States ambassadors to Korea and South Korea


show
Authority control

Categories:
1858 births
1932 deaths
People from Delaware, Ohio
American Presbyterian missionaries
Presbyterian missionaries in Korea
Ambassadors of the United States to Korea
19th-century American physicians
American political writers
American male non-fiction writers
Christian medical missionaries
Ohio Wesleyan University alumni

이만열 장로/교수 대담 - "관악교회" 총 18회

이만열 장로/교수 대담 - "관악교회"
대담 이만열 교수/장로의 삶,신앙,학문 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