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08

우공이산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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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공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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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공이산(愚公移山, 영어The Foolish Old Man Removes the Mountains)은 오랜 시간이 걸려도 꾸준히 노력해 나간다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의 한자성어로서, 열자(列子) 탕문편(湯

이야기[편집]

중국의 태행(太行)과 왕옥(王屋) 두 산맥은 오래전엔 북산(北山)을 사이에 두고 지금과는 다른 곳에 있었다.
북산에 살고있던 우공(愚公)이라는 노인이 높은 산에 가로막혀 왕래하는 데 겪는 불편을 해소하고자 두 산을 옮기기로 하였다.
둘레가 700리에 달하는 큰 산맥의 흙을 퍼담아서 왕복하는 데 1년이 걸리는 발해만(渤海灣)까지 운반하는 작업을 하는 우공(愚公)의 모습을 보고,친구 지수(智叟)가 그만둘 것을 권유하자 우공(愚公)이 말했다.

"나는 늙었지만 나에게는 자식과 손자가 있고, 그들이 자자손손 대를 이어나갈 것이다. 하지만 산은 불어나지 않을 것이니, 대를 이어 일을 해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산이 깎여 평평하게 될 날이 오겠지."

산신령에게 이 말을 전해들은 옥황상제가 두 산을 멀리 옮겨주어 노인의 뜻은 성취되었다.

1년 동안 묵묵히 산을 옮긴 우공의 노력과 믿음, 끊임없는 열정이 옥황상제를 감응시켜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성취시킨 것이다.

해설[편집]

도가적 사상서인 열자(列子)에서 우공(愚公)과 지수(智叟)라는 두 인물의 이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세상이 말하는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기준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고 하는 것으로서, 우공(愚公)은 '어리석은 노인'이란 뜻이 아니라, 역설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인용된 사례[편집]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 7차당대회 (1945.4.23~6.11)의 폐회사에서 이 전승을 인용했다.

중국인민의 머리를 짓누르는 두 거대한 산이 있습니다. 하나는 제국주의 이고, 다른 하나는 봉건주의입니다.
중국공산당은 일찍이 이 둘을 파 내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를 계속해야만 하고, 반드시 계속 일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하느님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그 하느님은 바로 다른 것이 아니라 모든 중국의 인민대중입니다.[1]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9년 5월 20일경 자서전 <<성공과 좌절>>을 정리할 때까지, 서재에 '우공이산'을 표구하여 붙여놓음으로써 주변인들의 성급함을 나무랐다.[2]

실천된 사례[편집]

중국에서 쓰얀(十堰) 시의 한 공무원이 중장비 등의 도움없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5년에 걸쳐 400m에 이르는 터널을 뚫었다. 거듭되는 민원에도 불구하고 빈약한 시재정으로는 공사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을 주민에 대한 모금활동을 통해 노임을 마련하여, 중장비 대신 폭약과 삽으로 공사를 완수했다.[3]

인도의 다슈라트 만지(Dashrath Manjhi)는 열악한 교통환경 탓에 제때 치료받지 못한 부인을 추모하기 위해 22년에 걸쳐 망치와 정으로 산을 깎아 길을 만들었다. [4]

일본 조동종의 한 스님은 아오노도몬이라는 터널을 뚫었다.

반대되는 말[편집]

운칠기삼(運七技三) : 중국의 괴담문학인 요재지이(聊齋志異)에서 유래된 말로써 세상 일은 사람의 노력만 가지고는 이룰수 없다는 뜻

현대적인 의미[편집]

오늘날에는 화약과 중장비를 이용하는 토목기술의 발달로 산을 깎아 지반을 평탄화 시키는 절토공사가 국책사업으로서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광주의 태봉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산도 많이 있다.

이에 따른 환경파괴와 재난의 발생이 사회이슈가 되고 있다.

각주[편집]

[인문의 길] 인문학공동체에서 불교학교를 연 까닭은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2209

[인문의 길] 인문학공동체에서 불교학교를 연 까닭은



[인문의 길] 인문학공동체에서 불교학교를 연 까닭은
입력2022.09.01.

인문학 공동체에서 하는 공부는 이른바 문사철과 외국어가 주류입니다. 그러나 막상 공동체를 시작하고 보니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졌습니다. 피아노 연주, 작곡, 드로잉, 연극, 집짓기, 풀과 나무, 목공, 심지어 수학이나 과학 공부 모임도 꾸리고 싶었습니다. 한 지붕 아래에서 그리스도교와 불교를 깊이 공부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결국 신학자를 모셔 희랍어 히브리어 성서 읽기를 하는 한편 스님을 모셔 도심 속의 불교강원을 개설했지요. 성직자나 수행자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것들을 우리도 공부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불교강원에는 당시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이던 원철 스님을 비롯해 화엄학림 학장을 지냈던 법인 스님 등 쟁쟁한 스님들이 참여하면서 적잖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큰 꿈을 안고 닻을 올렸으나 문제가 없지 않았습니다. 지속성이었습니다. 유명 스님들은 생각보다 바빴고 직장인이 긴 공부를 이어가는 것 또한 예상외로 어려웠습니다. 처음 강의를 맡았던 스님들이 종단의 주요 소임을 맡으면서 교수진이 바뀌자 참여자들도 빠른 속도로 흩어졌습니다.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만난 분이 명법 스님이었습니다. 해인사 국일암에서 출가한 수행자이자 운문승가대학 명성 스님에게 전강을 받은 학승, 서울대에서 학위를 받은 학자였지요. 서울대, 홍익대, 동국대에서 미학과 불교를 강의하며 전통과 현대의 소통을 꾀하고 21세기 불교의 새 역할을 모색하고 있었으니 공동체 선생으로 더할 나위 없었습니다. <유마경>을 시작으로 <미란다왕문경> <중론> <금강경> <능엄경> 등의 경전 강의를 이어갔습니다. 스님 강의의 특징은 수행을 병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며 토론하는 공부가 머리를 채우는 것이었다면 수행은 삶을 변화시키는 공부였습니다.

그래도 아쉬움은 있었습니다. 경전 공부에 매달리다 보니 나무는 보되 숲을 보기가 어려웠지요. 고심 끝에 현대어로 쓰이거나 번역된 책으로 불교 전반을 빠르고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2년 과정의 ‘명법 스님 불교학교’를 열었습니다.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로 이어지는 불교사를 통사적으로 공부하면서 불교의 다양한 수행과 실천, 이론의 발달 과정을 읽고 사유하고 토론하는 학교였습니다.

이 학교에서 중요한 것은 책상머리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국내외에서 생성된 다양한 텍스트를 접하며 스스로 사유하고 토론하고 실천하는 노력이었습니다. 목적이 이렇다 보니 스님 한 분이 강의와 학문 지도, 수행 모두를 담당하는 융합적·통전적·전인격적 공부 방식이 큰 장점으로 부각되었습니다. 1인 학교는 또한 초기불교, 중관, 유식, 천태, 화엄, 선, 티베트 불교 등등을 각각의 전통이나 이론에 따라 분리시켜 이해하는, 불교학의 분과성을 극복하기에 좋은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그사이, 서울에 머물던 스님은 화엄탑사 구미 불교대학으로, 해인사 국일암으로 수행처를 옮겼지요. 하지만 강의는 놓지 않았습니다. 매주 금요일 상경해 밤늦게까지 강의한 뒤 이튿날 산사로 복귀하는 강행군을 이어갔습니다. 이 와중에 닥친 코로나19는 큰 위기였지만 또한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일반화한 온라인 강의 덕에 스님은 산사에서, 참여자는 집에서 공부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국내외 각지의 사람들이 매일 새벽 온라인으로 만나 동안거, 하안거를 진행한 것은 이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었습니다.

공동체의 공부가 대개 그렇듯이 이 학교의 목적은 단순히 더 많은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은 삶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방법들을 읽고 토론하고 성찰하는 것입니다. 성찰은 실천까지 포함합니다. 결국 이 학교의 목적은 ‘지금, 여기’ 우리의 마음과 몸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더 나은 삶, 더 좋은 세계를 만드는 일에 나서는 겁니다.

여름이 지나고 있습니다. 명법 스님과 몇몇 분들에게 이번 가을은 제2기 불교학교를 새로 시작하며 마음을 다지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인문의 길] 공부 늦깎이들 삶의 무늬 -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2107

[인문의 길] 공부 늦깎이들 삶의 무늬 - 경향신문



공부 늦깎이들 삶의 무늬
입력 : 2021.07.08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저는 인문학 공부 공동체의 잡부입니다. 청소, 복사, 줌 강의나 세미나를 위한 온라인 접속, 회원 관리 등이 주로 하는 일입니다. 회원이 2~3명인 세미나 스터디에서 20명이 넘는 강의까지 매주 공부 모임이 80~90개에 이르는데 일할 사람은 없습니다. 잡부의 일이 적진 않습니다. 강의, 세미나, 스터디를 기획하고 선생님을 모셔오는 일도 제 몫입니다. 인문학으로 삶과 사회를 분석·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한다며 책도 몇 권 만들었지요.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여기 오는 분들이 하는 공부는 제가 하는 일보다 더 다양합니다. 10여년 전 공동체를 개설하며 철학과 문학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과 함께 프랑스어, 독일어, 희랍어 등 외국어로 시작했으나 해가 거듭될수록 공부 종류가 늘었습니다. 문학, 철학 고전을 비롯한 책 읽기 모임은 여럿이고 영어 원서 읽기 모임도 많습니다. 불교 경전을 공부하는 모임도 있고 희랍어·히브리어 성서 읽기 모임도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글쓰기, 영화감상, 미술사, 연극 비평, 풀과 나무를 공부하는 모임도 생겼습니다.


이 일을 하기 전 저는 신문기자였습니다. ‘수유너머’ ‘철학아카데미’ 같은 인문학 공동체 사람들과 가벼운 인연은 있었으나 이 일을 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신문사에서 나와 인생 2막을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마음이 이쪽으로 향했겠지요. 우리의 몸과 머리는 늘 가슴이 향하는 곳에 머문다고 하잖아요. 수유너머나 철학아카데미가 그랬듯이 이곳에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인문학이 돈과는 좀 거리가 있었던 탓입니다. 문을 닫을 뻔한 고비도 몇 차례 있었습니다. 개설 이래 지금까지 직면한 여러 어려움을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여기 오는 분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운 덕분입니다.


가장 심각했던 위기는 지난해 봄에 만났습니다. 코로나19가 번진 겁니다. 두 달 동안이나 문을 닫고 사람들의 출입을 금했지요. 그래도 꼬박꼬박 내야 하는 건물 월세 등을 마련할 길이 없었습니다. 산사인 듯 인적이 끊긴 곳에 홀로 앉아 조용히 문 닫는 것을 준비했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어느 날 확인해 본 통장에 적잖은 돈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여기서 공부하는 분들이 저 몰래 공동체 살리기를 위한 모금을 시작한 겁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서도 마음대로 문을 닫을 수는 없었습니다.


대학이나 도서관에 앞서 온라인 강의를 시작한 데 이어 방역수칙을 지키며 수시로 오프라인 모임도 재개했지요. 사람들은 출입을 시작하자마자 공동체 살리기를 위한 상설 벼룩시장을 열었습니다. 장신구 등 소품을 만들어 이곳에 내다 파는 분이 있는가 하면 소장했던 책이나 물건을 가져다 파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강의를 하는 학자도 있었고 역시 대가 없이 영어책 읽기 모임을 지도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문을 닫으면 안 된다고요.


저는 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문을 닫으면 안 되는가, 도대체 공부는 왜 하는가? 이들의 대답은 제각각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공부를 뒤늦게 하며 행복하다는 분, 생각의 지평이 넓어지며 삶이 달라졌다는 분, 공부야말로 가장 재미있는 놀이라는 분, 철학 공부만큼 삶에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 없다는 분…. 이곳에서의 공부를 계기로 책을 쓴 분도 있고 작가나 화가가 된 분도 있습니다. 박사가 된 분도 있고 유학을 떠난 분도 있습니다.




어느 40대 여성은 “이곳에서 공부하고 집에 갈 때마다 행복감에 가슴이 벅차 오른다”고 하더군요. 그는 얼마 전, 결혼한 지 15년 만에 거실 창가에 자신만의 책상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이름하여 엄마의 책상. 때마침 시작하는 이 칼럼에 이들의 이야기를 쓰기로 했습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인문의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뒤늦게 인문학과 문화예술을 공부하며 길을 묻는 사람들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인문의 길늦깎이

이찬수 - 한국에서 '철학'은 으레 '서양철학'이고 우리의 사상은 '한국철학', '동양철학' 등

(1) 이찬수 - 한국에서 '철학'은 으레 '서양철학'이고 우리의 사상은 '한국철학', '동양철학' 등 '한국'이라는 수식어를... | Facebook

이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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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철학'은 으레 '서양철학'이고 우리의 사상은 '한국철학', '동양철학' 등 '한국'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서야 그 자리가 확보된다.
음악도 으레 서양음악이 기준이고, 우리의 음악은 '국악'이다.
미술도 뭐도 다 그렇다.
기준이 서양이고, 한국의 것은 그에 종속적이다.
일본에서의 상황도 대체로 비슷하다.
그런데 니시다 철학, 그에게서 비롯된 교토학파 철학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일본에서 비롯된 철학이지만 그것도 대승불교적 세계관과 통하는 사유체계이지만, 대부분 서양철학적 언어로 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그 지시하는 세계는 서양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넘어선다.
그런 철학을 이미 100년전에 확립했다.


원효나 지눌, 퇴계나 율곡, 최한기, 최시형이나 유영모, 함석헌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하이데거,  제임스, 프로이트, 기독교 신학 등 전형적인 서양의 언어로 재해석하며 재구성할 수 있을까.
부지하세월이다.
대안연구공동체를 이끄는 김종락 선생님께서 내일부터 시작되는 강의 "니시다 철학 깊이 읽기'를 아래와 같이 소개해주셨다.
일본에 대해 감정만 앞세우거나 임기응변식 대응요법 말고, 무언가 그 심층적 세계를 차근차근 알아가야 하지 않을까.

Jongrak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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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자 시절, 관심을 가졌던 해직 교수 몇 분이 계신다. 한 분은 도울 김용옥 선생, 또 한 분은 김민수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 또 한 분은 이찬수 강남대 교수다. 

어쩌다 도올 선생과 논쟁을 벌이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당시 내가 일하던 신문의 기자로 모시게까지 된 이야기는 접어두자. 그 인연으로 그가 대안연 특강을 하게 된 사연도....

김민수 교수는 서울대 미대 초대 학장이었던 장발의 친일 이력을 거론하며 기존 권력의 역린을 건드리다 재임용에서 탈락한 케이스다. 6년에 걸친 복직 투쟁 끝에 대법원에서 승소해 복직에 성공했다. 

그가 해직 당시 나는 수시로 복직 투쟁 기사를 쓰는 한편, 그를 객원기자로 모셔 <김민수의 한국 도시문화 탐험기>라는 문패로 격주 전면 기사를 연재했다. 그리고 이때 그가 밤을 새워가며 쓴 글은 훗날 무게있는 단행본으로 묶여 나왔다.

이찬수 교수는 2003년 EBS 교양프로그램 ‘톨레랑스’에서 종교간 조화와 관용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법당에서 절했다는 이유로 2006년 강남대 교수재임용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당시 내가 재직하던 신문은 더 이상 해직 교수의 복직 기사를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교수와의 인연은 그가 복직소송에서 승리한 뒤, 내가 대안연을 개설한 뒤 시작되었다. 그를 모셔 동양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불교철학의 핵심을 기독교 신학의 중심 개념과 비교하는 강좌를 열었던 것이다. 

이 강좌는 백성호 기자가 취재해 중앙일보 문화면 톱으로 썼는데, 이것이 포털사이트 ‘다음’의 메인 화면에 올랐다. 덕분에 기사가 나온 날 나는 하루 종일 울려대는 수십 통의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뒤 강남대를 떠나 서울대 평화통일연구원, 성공회대, (일본)코세이가쿠린, 중앙학술연구소 난잔대학 등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던 그는 한동안 보훈교육연구원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글쓰고 강의하는 학자의 본업으로 돌아온 그가 오는 수요일(9일) 오랜만에 대안연에서 강의한다. 이번 강의 주제는 일본 최초의 근대 철학자이자 대표적인 철학자인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의 사유다. 

알려지다시피 니시다는 저 유명한 교토학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메이지 유신 이후 세계적 철학자의 반열에 오른 최초의 일본인. 니시다의 철학으로 박사논문을 쓰기도 했던 이찬수 교수는 “일본적 사유의 정수는 무엇인지, 구미에서 왜 교토학파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지, 왜 일본은 제국주의적 침략의 길로 나섰는지, 왜 여전히 사과를 하지 못하는지 등이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니시다의 철학은 “오늘의 일본과 동아시아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는 열쇠”로 오늘의 일본 문제를 풀기 위해서라도 니시다와 교토학파가 더 연구되어야 한다는 거다.

오랜만에 여는 이찬수 교수의 강좌에 선생도 아닌 내가 긴장된다. 단순한 학자를 넘어 존경하는 분의 강의인 만큼 좋은 분들이 왔으면 좋으련만~~

대해 스님이 감독한 기독교 영화 ‘산상수훈’ 2022

산상수훈 영화 스트리밍으로 볼 수 있는 곳

산상수훈 (2017)

 산상수훈 is not available for strea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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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이 정말 존재 하는 걸까? 착하게 살면, 나는 정말 천국에 갈 수 있을까? 하나님은 선악과를 왜 만들어 우리를 시험에 빠트렸을까? 하나님은 왜 나의 고통은 돌봐 주시지 않는 걸까? 누구도 속 시원히 말해준 적 없었던 신과 인간과의 관계 감히 말할 수 없어 묻어뒀었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떠올렸던 궁금증들. 무조건적인 믿음만으로 강요될 수 없는 난해하고 철학적인 질문들이 점차 논리적으로 증명되어 가는데....

JustWatch는 항상 최신 영화 및 TV 프로그램 정보를 수집하여 제공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아쉽게도 현재 산상수훈의 영상을 찾을 수 없습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검색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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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JustWatch Rating 40%
IMDB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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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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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 스님이 감독한 기독교 영화 ‘산상수훈’ 20관왕 쾌거
백서빈 배우 ‘셉티미우스 어워즈’에서 ‘최고의 아시아 배우상’ 수상


기자명이창윤
수정 2022.06.14 

영화 ‘산상수훈’의 주연배우 백서빈 씨와 감독 대해 스님. 사진 제공 김상철.

대해 스님이 각본을 쓰고 감독한 영화 <산상수훈(Sermon on the Mount)>의 주연배우 백서빈 씨가 6월 7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셉티미우스 어워즈(Septimius Awards)에서 ‘최고의 아시아 배우상(Best Asian Actor)’을 수상했다.

백서빈 씨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이란 배우 바바크 카리미(Babak Karimi), 카를로비바리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이란 배우 아미드 파론네자드(Hamid Farokhnejad) 등 세계적인 배우들을 물리치고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백서빈 씨는 2017년 소치영화제에서도 <산상수훈>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다.

영화배우 백윤식 씨의 둘재 아들이기도 한 백서빈 씨는 수상 소감에서 “배우 집안에서 자라서 좋은 연기를 보여줘야 한다는 깊은 고민이 있었다.”며, “이 상으로 좋은 연기에 대한 부담을 떨치고 연기의 본질에 한 발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셉티미우스 어워즈는 훌륭하고 탄탄한 스토리를 가진 영화를 발굴해 시상하는 영화상이다.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각 대륙별로 최고의 배우와 작품을 선정해 시상한다. 영화 <산상수훈>은 ‘최고의 아시아 배우상’ 수상자인 백서빈 씨와 함께 ‘최고의 아시아 영화상(Best Asian Film)’ 후보에 올랐다.

2017년 제작된 영화 <산상수훈>은 스님이 감독한 기독교 영화로 주목을 받았다. 세계 4대 영화제 중 하나인 모스크바 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여러 국제영화제의 초청을 받은 <산상수훈>은 감독상, 남우주연상, 촬영상 등 19관왕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번 수상으로 <산상수훈>은 20관왕의 고지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
저작권자 © 불교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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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감독 대해스님 인터뷰 [선물]

Philo Kalia 토마스 베리의 [우주이야기] 그 심오한 느낌 - 서로를 불러낸 것(mutual evo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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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왕(水王): 동학과 화엄의 아우라지 기행(9)
-모악산 수왕사를 오르면서 만난 자연의 수왕들
나비, 달팽이, 개구리와 두꺼비, 그리고 토끼

다음은 토마스 베리의 <우주이야기>에서 요약 발췌:

우리가 산이나 바다나 들판이나 동식물을 보고 생기는 느낌이 
그것들 안에 그러한 형태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런 느낌이 주관적인 것만도 아니다. 

토마스 베리의 설명이다.

그 심오한 느낌은 심지어 인간의 위대함과 운명의 암시처럼 느껴지는 그런 감정은 산과 동물과 세상이 서로를 불러낸 것(mutual evocation)이다. 태초의 존재(양성자, 중성자, 원자)가 가졌던 깊은 친교가 모든 존재의 근원에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이 가장 숭고한 놀라운 느낌을 표현하는 것은 그들이 이런 경외의 실재들로 가득 찬 우주에 침잠해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우주 안에 있는 각자의 존재들이 가진 내적 깊이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우주에 의해 활성화된다.”

그래서 우주는 동물들과 식물들에게 소리들의 합창이다.

바람이 나비에게 말하고, 물맛이 나비에게 말하고, 나뭇잎의 모양이 나비에게 말하며 나비 안에 유전 암호로 들어 있는 지혜와 공명하면서 안내를 해준다. 이런 친교는 언어 이전의 여러 차원에서 진행된다. 우주의 자기 조직화의 자발성(혹은 자연지능)을 감촉하고 이에 응답하는 자연적 인간지능을 모든 대륙의 원시 부족들은 다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인간지능이 목하 인간을 위해 만든 인공지능뿐 아니라 인간지능이 久遠(구원)한 세월 거기서 자라고 성장한 자연지능의 유효성을 받아들이고 교감하게 될 것이다.

원시 부족들의 목적은 실재가 지니는 리듬에 공명하며 참여하는 삶이었다. 그래서 북은 모든 원시인들에게 기본 악기이며 이 리듬에 맞춰 소리를 내고 몸을 움직이면 노래와 춤이 된다. 이 세계는 우주의 야생적 차원인 물질계와 통합되어 있다.

2023/08/07

Sacred Texts of the World Ch 22, 23 Daoism

[Did not like too m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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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a second look at Confucianism, investigate the renowned Yijing and how its system of divination has actual practical applications. Then delve into Neo-Confucianism, its principles of self-cultivation and harmony with humanity and the cosmos, and its embodiment in the texts of the Analects, the Mencius, the Great Learning, and the Constant Mean.


Balance of the Five Elements

Balance of the Five Elements
Balance of the Five Elements
2020
100min
Feature
Synopsis: 
The genesis of the universe and everything in it is described by the ancient Chinese philosophy of the Five Elements: known as Wu Xing.  Change is the only constant. Balance and harmony are the objectives. On a cinematic journey throughout China, traversing seasons and geographical touch points, we discover how the Five Elements, remain vibrant and relevant in contemporary times.

Show less
Everything in the universe is in a state of constant change; dynamic and infinite. Time, the seasons, nature itself; all are part of an eternal cycle. This is the basis of the ancient Chinese teachings of the Five Elements or “Wu Xing”; a holistic philosophy, closely linked to Daoism, thousands of years old but relevant as ever and perhaps even more so in the turbulent times of today. And not only in China. Studying and applying the Five Elements philosophy to daily life has become immensely popular throughout the world. But what is behind this eternal circle?  How and where can Wu Xing be found and experienced in contemporary China? German director, Jan Hinrik Drevs and New Zealand Field Director & DOP, Mike Single embark on an extensive journey throughout China, searching for evidence of this millennia old system. An observational and experiential journey captured in stunning cinematic imagery. Two hundred shoot days traversing seasons and geographical touch points, passing through desert vastness, ice and snow, remote rural villages and populous megacities on a quest to understand an alternative approach to life; how we might achieve balance and harmony amidst the complexities and challenges of modernity.  Balance of the Five Elements offers insight and fresh understanding of an ancient philosophy, culture, and society while pointing to an alternative approach to life and our place within the universe.

Status: 
Complete, DCP available
Genre: 
Documentary
Distributor: 
Rialto Distribution
Co-Production: 
New Zealand/China/Germany

레온하르트 라가츠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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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하르트 라가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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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하르트 라가츠, 1914

레온하르트 라가츠(독일어Leonhard Ragaz1868년 7월 28일-1945년 12월 6일)는 스위스의 개혁교회(Refomred)신학자이다. 종교 사회주의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경력[편집]

신학공부[편집]

1868년 7월 28일에 스위스의 산간 마을 타민스(Tamins)에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한 살림살이라 어릴적부터 노동을 해야 했으며,농민들의 협동조합운동에서 사회주의를 찾았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신학공부를 하였으며 바젤예나베를린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개신교 목사가 되었다.

목회와 신학교육[편집]

하이젠베르크에서의 처음 목회는 잘 되지 않았다. 라가츠는 헤겔철학과 성서를 공부하여 진지하고 실천적인 신학자였다. 하지만 교회와 친구 목사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실천적 신앙에 관심이 없었고 천박하였다. 우울증에 시달릴만큼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던 라가츠는 김나지움에서 언어와 종교를 가르쳤다. 1895년부터 1902년까지 쿠르시 교회에서 목회했고,1902년부터 바젤대성당에서 목회하였다. 1908년부터 1921년까지 취리히 대학교에서 조직신학과 실천신학을 가르쳤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와의 만남[편집]

라가츠는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인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와 만났다. 라가츠는 블룸하르트와의 만남을 마치 예수와의 만남이라고 불렀다.자본가와 결탁한 독일제국 정부의 탄압으로 권리를 억압받는 노동자와의 연대로써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고자 한 블룸하르트의 영성은 라가츠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라가츠는 1921년 가르텐호프(Gartenhof)를 설립하여 노동자 교육에 힘썼으며,저술활동,사회운동(노동운동, 반 나치운동평화운동)을 실천했다.1945년 별세. 저서로는 《하느님 나라의 비유들 - 예수의 사회적 복음》이 있다.

출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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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igious socialism and pacifism
For Ragaz, the Early Church was based on a spirit of cooperation and collectivity. As a consequence, the socialist ideal of self-administered cooperatives owned by the workers themselves was a postulate directly derived from the gospel and the promise of justice in God's kingdom.

Also as a consequence of his Christian belief in justice and peace, Ragaz staunchly opposed the First World War, from a stance of active pacifism: he called for all religious socialists to unite in protesting the war.[2] He taught that if capitalism resorted to force and violence, that was a true reflection of its nature, but that if socialism did the same, it was a treason to its ideals.

Ragaz' main work is Die Bibel – eine Deutung ("The Bible - An Interpretation"), written during the Second World War and published in seven volumes in 1947–1950.

Works
Du sollst. Grundzüge einer sittlichen Weltanschauung, Waetzel, Freiburg im Breisgau 1904
Dein Reich komme. Predigten, Helbing & Lichtenhahn, Basel 1909
Religionsphilosophie, 2 vols., Zürich 1909
Die neue Schweiz. Ein Programm für Schweizer und solche, die es werden wollen,
Weltreich, Religion und Gottesherrschaft, 2 vols., Rotapfel, Zürich/Leipzig 1922
Der Kampf um das Reich Gottes in Blumhardt, Vater und Sohn – und weiter!, Rotapfel, Zürich/Leipzig 1922
Von Christus zu Marx – von Marx zu Christus. Ein Beitrag, Harder, Wernigerode 1929
Das Reich und die Nachfolge. Andachten, Herbert Lang, Bern 1937
Gedanken. Aus vierzig Jahren geistigen Kampfes (anthology), Herbert Lang, Bern 1938
Die Botschaft vom Reiche Gottes. Ein Katechismus für Erwachsene, Herbert Lang, Bern 1942
Die Gleichnisse Jesu, Herbert Lang, Bern 1944
Die Bergpredigt Jesu, Herbert Lang, Bern 1945
Die Geschichte der Sache Christi. Ein Versuch, Herbert Lang, Bern 1945
Die Bibel. Eine Deutung, 7 vols., Diana, Zürich 1947–50
Mein Weg. Eine Autobiographie, autobiography, 2 vols., Diana, Zürich 1952
Eingriffe ins Zeitgeschehen. Reich Gottes und Politik. Texte von 1900 bis 1945, eds. Ruedi Brassel and Willy Spieler, Exodus, Luzern 1995, ISBN 978-3-905575-56-9
Leonhard Ragaz in seinen Briefen, eds. Christine Ragaz et al. (letters):
vol. 1: 1887–1914, Zürich 1966, ISBN 978-3-290-11187-8
vol. 2: 1914–1932, Zürich 1982, ISBN 978-3-290-11469-5
vol. 3: 1933–1945, Zürich 1992, ISBN 978-3-290-108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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