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18

생명나무 쉼터 스크랩 자료 용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119:105)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블로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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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소개 | 
한아름 2018. 2. 20. 23:31http://blog.daum.net/7gnak/pages/hello
소개 ( 난, 이런 사람이에요.)
 

서울 토박이 이면서 줄곳 서울에 살고 있는 일반 신도입니다.

(IBM 컴퓨터 회사에 있었을 때 대전에 6년간 전근한 경험은 있습니다) 

저의 신앙은 30세에 시작하여, 바르지 못한 교회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러한 과정도 저에게 필요하시기에 여러 과정을 거쳐 

바른 이 자리까지 저를 인도해 주신 주님께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바른 신앙인으로 이끌어 주시길 소원하고 있습니다. 

영적 선진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귀한 정통 개혁주의 신앙을 사랑하면서, 

개혁주의의 교리와 신학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저는 개혁주의 신앙고백인 사도신조(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다나시우스 신경),
벨직신앙고백 신조, 하이델베르크 신조, 제네바 요리문답, 도르트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믿고 있으며 정통 개혁주의신학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 블로그를 만들 2008년 당시에는 복음주의의 일부도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더 엄선하여 아주 필요한 부분만 참고하고 있습니다.

제 블로그에 많은 국내외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회자분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존경하는 분들입니다. 
그중 국외에선 존 칼빈, 존 오웬, 프란시스 튜레틴,

존 플라벨, 조나단 에드워즈, 호라티우스 보나르,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찰스 스펄전,

헤르만 바빙크, 게르할더스 보스, 그레삼 메이첸, 아더 핑크, 코넬리우스 빈틸,

존 머레이, 로이드 존스, 안토니 후크마, 제임스 보이스, R.C. 스프롤, 리차드 멀러,

싱클레어 퍼거슨, 그레엄 골즈워디...

국내에선 박윤선, 김홍전, 박영선 목사님을 멘토로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공부를 하면서 많은 도움이 되고 은혜가 되었던 자료들을 이 블로그에 

모으고 있습니다. 방문하신 분들과도 이 자료들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니 

필요한 자료가 있으시면 최대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자료들 거의 모두 스크랩 하시거나 복사하실 수 있도록 열어 놓았습니다.
 
이곳에 오신 것을 환영하며 이곳이 생명나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과 같은 

영적 쉼터가 되시길 바라며, 주 안에서 항상 승리하는 삶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한아름 드림.



혹시 궁굼한 사항이 있으시면 아래로 연락주세요.
연락처: 010-5229-1414,   이메일: 7gnak@hanmail.net


2011년 2월23일 저의 닉네임을 '생명나무'에서 '둥지'로 바꾸었습니다. 
(생명나무가 너무 귀한 단어라 생각되어서요..)
2012년 8월15일 저의 닉네임을 '둥지'에서 '한아름'으로 바꾸었습니다. 
(블로그 밖에서 한아름으로 사용하기에 하나로 통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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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자유의지 (47)
속성·본성 (18)
죄·선,악·선행·용서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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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속죄·보혈 (34)
성탄·임마누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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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의 확신 (46)
- 구원의 서정 (24)
은혜·은총·인도 (92)
그리스도와 연합 (71)
부르심·중생 (111)
- 연속적 중생론에 대한 반론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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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세례·충만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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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질병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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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론·성전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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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신학] - (1)`본질 및 학문적 영역`

에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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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2008. 1. 23. 18:56

http://blog.daum.net/eden-in/5910521







*영성신학의 본질 및 학문적 영역*




1. 영성이란 ?







1) 구약성서에 나타난 ‘영’이란 무엇인가 ?

구약성서에서 ‘靈’은 히브리어로 ‘ruach'로 나타난다(희랍어로는 ονευμα, 라틴어로는 anima). 이는 숨, 바람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생명의 원리를 상징하고 있다(히브 1,7; 요한 3,8). 창세기에서 ‘ruach’는 하느님께서 진흙을 빚어 인간을 만드신 후 입김을 불어 넣어 주었다는 데서 나오며, 이는 인간 생명의 근원임을 드러내 준다. 또 이 입김은 인간의 감정, 의식, 정신, 마음을 지배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입김이 없다면 인간은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다.

인간의 마음을 영혼의 기능들의 집합이라 할 때 마음은 자연 생명이 갖는 자연적 조건이다. 그런데 그 마음이 무엇에 의해 지배받느냐야 따라 그 표출 방식이 달라진다. 즉 마음이 欲情에 의해 지배를 받느냐, 아니면 하느님의 靈에 의해 지배를 받느냐 하는 문제이다.

인간에게 입김을 불어넣는다 함은 자연적 인간 안에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생명을 불어 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초자연적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2,7에서는 ‘입김’을 하느님의 현존, 창조의 기원으로 제시하고 있다(창세 6,17; 숨).

이스라엘 백성은 가난안 땅에 정착하여 이민족과 많은 전쟁을 치루게 되는데, 이 때 백성의 지도자로 나타나 민족을 구한 판관들은 일시적으로 야훼의 靈을 받아 초인적인 지혜와 힘을 발휘한다. 이렇게 볼 때 靈이란 인간 안에 들어가서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의 뜻에 따라 살도록 해주는 야훼의 靈이다.

또 야훼의 靈을 받은 사람은 도유의식을 통해 신성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기름을 바르는 순간 그는 자신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라 야훼 하느님의 삶을 산다는 정신을 갖게 된다. 즉 야훼의 靈이 그 사람을 완전히 사로 잡고 온 존재를 감싸주는 것이다.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이 靈은 충격적인 예언활동을 가능케하는 힘으로 등장한다. 또 야훼의 靈은 이스라엘을 윤리적으로 형성시킨다. 야훼의 靈은 참회와 겸손과 덕성과 평화를 주고,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는 지혜를 준다(지혜 9,17). 야훼의 靈은 이스라엘을 淨化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며(에제 36,26-27), 백성 전체에게 야훼의 靈이 주어진다. 또 구약성서에서 야훼의 靈은 하느님의 힘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볼 때 구약성서에서는 야훼의 靈에 따라 사는 삶을 靈性生活이라 할 수 있다.




2) 신약성서에 나타난 ‘영’이란 무엇인가 ?

신약성서에 의하면 하느님의 靈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관계하고(루가 1,5-25), 마리아의 예수 잉태 사건에도 관계된다(루가 1,35). 또 세례자 요한은 靈의 도우심으로 예수가 메시아임을 인지하게 된다(요한 1,32-34).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의하면 메시아는 聖靈과 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며(마태 3,11), 예수의 세례 때에도 靈이 비둘기의 형상으로 나타났다(마태 3,13-17). 즉 예수의 세례는 그가 성령으로 충만한 메시아임을 선언하는 행위였다(루가 4,14). 또 예수는 靈의 힘으로 당신을 유혹하는 마귀를 쫓으셨다(마태 4,11). 이는 곧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내는 외적 표징으로 이해된다. 즉 惡의 세력이 물러나고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하느님의 靈이 작용하고 계심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의 모든 말씀은 창조적 능력을 갖고 있으며, 그 능력은 야훼의 靈에서 나온다.

이러한 靈은 지금 우리 안에서도 現存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과 함께 있는 협조자 성령을 제자들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 靈이 제자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한 14,16). 부활한 예수는 인간성의 나약함을 초월하여 성령으로 사는 靈이 되셨다. 예수의 부활은 바로 時空의 제한에서 초월함을 의미한다. 예를들면 겁에 질러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가 나타나신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요한 20,19-23). 이는 곧 육체적 제한을 벗어남을 의미하며, 동시에 시간적 제약을 초월해 지금 여기에 현존하고 계심을 뜻한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힘에 의해 부활하신 후 이제는 당신 자신이 그 靈을 주는 자로 변신하신다. 승천과 함께 빠라끌리또 성령을 약속하신다. 이는 지상적 現存樣式을 바꾸심을 의미한다. 회개하고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통해 그 인간 안에 그리스도께서 居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즉 예수는 생명을 주는 자로서 성령의 부여자가 되신다(1고린 15,45).

우리가 하느님의 靈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 자연적 생명안에 靈의 부여로 말미암아 자연적 조건들이 완성되기 시작됨을 의미한다. 스콜라 철학에서는 은총이 인간을 완성한다고 표현하였다. 세례로 그리스도의 靈을 받아 사는 사람을 신앙인이라 한다.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와 일치하려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靈(그리스도의 뜻)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3) 그리스도교적 영성이란 ?

요한 복음 3장 6절에 보면 “肉으로부터 난 것은 肉이고 靈으로부터 난 것은 靈입니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肉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본능적인 행위로 이기적이다. 그리고 肉의 원천은 원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肉의 열매(행실)로는 “음행, 부정,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원한, 싸움, 시새움, 분노, 모략, 불목, 분열, 질투, 술주정, 폭음 폭식”(갈라 5,19-21) 등이 있고, 靈의 열매로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착함, 신용, 온유, 절제”(갈라 5,22-23) 등이 있다. 肉을 따라 사는 데는 충만성과 여유가 없는 반면, 靈을 따라 사는 사람은 충만함과 여유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영성, 즉 靈을 따라 사는 삶은 신앙인의 본질적 요소이다. 일반적 영성이란 인간 행위를 유발하는 어떤 태도나 정신을 뜻하지만, 가톨릭적 영성 개념은 인간을 신앙인으로 살게 하는 정신, 즉 하느님의 계시와 구원신비 전체(하느님의 靈)를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교적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서 聖三位에 이르는 것이다. 聖三位의 삶에 일치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 안에서 완성된 생명의 원리인 성령이 우리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리고 이 靈은 씨앗의 형태로 우리 안에 풍성하게 존재하게 되며 그럴 때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우리 마음 안에 뿌려진 이 靈의 씨앗은 구체적으로 信望愛를 통해 배양된다. 이는 하느님만을 믿고, 그분에게만 희망을 두며, 그분만을 사랑하는 생활을 통해 가능하게 된다. 참고로 聖化恩寵에는 주부덕과 성령의 은사가 포함되고, 주부덕에는 向主三德과 윤리덕이 포함된다.




2. 영성신학이란 ?


1) 영성신학의 발전과 용어적 의미

영성신학이란 신앙인들의 초자연적 생명이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도록 그 원리 원칙과 방향을 제시해 주는 학문이다. 처음에는 客觀的 靈性과 主觀的 靈性으로 구분되었다. 객관적 영성이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믿음과 인식의 측면에서 다룸을 말한다. 여기에는 하느님의 계시, 구원론, 그리스도론, 교회론, 성서학, 성사론 등의 학문이 포함되며 모두 하느님께 대한 이해 인식에서 비롯된다. 이에 비해 주관적 영성은 하느님의 계시를 인간이 받아들이는 측면에서 다룬다. 즉 삶을 통해 신앙 안에서 키워나가며,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다룬다.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인식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가치관으로서 삼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실천이 따라야 한다. 또 한 영혼이 정상적 발전을 위해서는 이 두 영역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의신학에서 배우는 모든 것을 습득했다고 해서 조화로운 영혼이라 볼 수 없고, 반대로 이것을 모르고 봉사만 한다면 이는 인간적 봉사의 차원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과 삶은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는 안된다.

12,3세기까지는 객관적인 영성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교의신학으로 발전하였다. 주관적 영성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응답할 수 있는 인간?? 내면적 정신에 의해 처음에는 심리학적 영역에 치중했다. 그러다가 트렌트 공의회 이후 이단설에 대항하여 진리의 깊은 연구 필요성에 따라 전문영역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18세기에 와서 주관적 영성은 修德神學과 神秘神學으로 구분되었다.

여기서 수덕신학이란 개인적 노력을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해 完德을 추구하는 삶을 의미한다. 신비신학은 은총의 작용하에 영혼이 수동적으로 하느님과 일치되어 가는 삶을 말한다. 이 둘의 관계에 있어서 시간적으로 前後를 구별할 수 없는데 이는 끊임없이 교차되는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수덕 차원의 과정 안에서 하느님의 도우심과 은총이 함께 할 때만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용어상으로 수덕적이란 말은 그리스어의 ‘askeein’에서 유래한다. 이는 어떤 기술, 특히 운동 기술을 숙달하기 위하여 연습하고 훈련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후에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 용어를 철학연구나 덕행실천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사도 바울로는 크리스찬 생활의 덕행을 위한 노력에 이 용어를 사용한다. 아울러 그리스도인의 덕행실천과 운동연습을 자주 비교하며 설명하였다(1고린 9,24-27; 필립 3,13-14; 2디모 4,7).

신비적이란 용어 역시 그리스어의 ‘mystikos’에서 유래된 것으로, 오직 신입 신자들에게만 알려지는 은밀한, 혹은 감추어진 전례를 가리킨다. 신약성서에서 사도 바울로는 인류 구원에 대한 하느님의 비밀 - 어떤 이야기 속의 숨겨진 상징적 의미, 혹은 그 작용이나 능력이 알려지지 않은 그 무엇 - 을 의미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신비신학이란 용어는 6세기 초 「신비신학에 관하여」의 저자인 僞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에 의해 서방신학에 소개되었는데, 여기서 그 개념이 神에 관한 체험적이고, 직관적인 지식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 후 이 단어는 점차로 관상이라는 뜻과 동일시되었다. 현대에 와서 도미니꼬회 회원인 레지날드 가리구-라그랑즈(Garigou Lagrange)는 크리스찬 完德이 수덕과 신비의 단계를 포함하지만, 完德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이며, 신비적 생활은 비상한 은총의 결과가 아니라 세례 때 모든 크리스찬이 받게 되는 은총의 정상적인 발전과 완성이라고 정리하였다.

결국 수덕신학과 신비신학 모두를 영성신학이라고 말한다. 구분을 하자면, 수덕은 입문에서 관상 전까지, 신비는 주입적 관상에서 수동적 정화, 일치까지를 취급한다. 이는 실존적인 차원에서 영성생활이 어느 순간에든 수덕적인 면이나 또는 신비적인 면이 우세하기 때문에 둘의 구분이 합리적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영성신학에서는 이 수덕과 신비 둘을 구별없이 포함한다. 왜냐하면 신비현상은 수덕현상 없이 이해될 수 없고,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수덕현상은 그 자체 안에 신비 체험의 씨앗을 이미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영성과 신학

신학은 하느님에 관한 학문이다. 그리고 신학은 자연신학과 초자연적 신학으로 구분된다. 자연신학이란 인간의 이성으로만 하느님을 깨닫고 탐구하는 신학을 의미하고, 초자연적 신학이란 하느님의 계시에서 출발해서 그 내용을 고찰하고 신앙의 진리에 대한 결과를 연역하는 신학이다. 초자연적 신학은 흔히 교의신학과 윤리신학으로 구분된다. 교의신학은 계시된 신비들, 특히 삼위일체, 말씀의 강생, 구속, 성체성사와 다른 여러가지 성사들, 그리고 미래의 삶 등을 취급한다. 윤리신학은 인간의 행위, 계시된 교훈과 권고들, 은총, 신학적 및 윤리적인 크리스찬의 덕행들, 계시로써 알려진 초자연적 목적을 지향하는 행동원리인 성령의 은사들을 취급한다.

이와같이 이해된 윤리신학은 분명히 인간을 최상의 성덕으로 인도하는 데 필요한 원칙들을 포함한다. 영성신학은 이렇게 광범위한 윤리신학을, 인간이 하느님과 더욱 밀접하게 일치할 수 있도록 지도하기 위해 응용한 것에 불과하다. 수덕신비신학은 그리스도교 교리가 크리스찬 덕행 및 성령의 은사의 본질과 특성에 관해 가르치는 바를 전제하고, 完德의 견지에서 그리스도적 덕행의 발전법칙과 조건을 연구한다.

수덕신비신학은 최고의 덕행실천과 성령께 대한 완벽한 순종을 가르치고 하느님과의 일치생활로 인도하기 위해 교의신학과 윤리신학의 모든 지식을 총망라한다. 이리하여 전자는 후자를 최대한으로 응용하고 후자의 왕관이 된다.

영성신학이 포함하고 있는 요소로는 첫째 영성체험의 심리학적 자료, 둘째 신학원리의 적용, 셋째 크리스찬 完德의 관점에서 본 영성생활의 진보에 관한 실천적 지침 등이다. 이러한 자료가 신학원리와 통합될 때 영성생활의 보편성을 발견할 수 있고, 이것은 동시에 그리스도교 完德의 실천적 지침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즉 종말론적 영성과 육화적 영성이 그것이다. 종말론적 영성이란 이 세상을 죄와 고통으로 보고 여기서 구원될 방법으로 언제 도래할지 누구도 모르는 종말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신자들의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기에 합당한 준비를 늘 갖추도록 강조한다. 다분히 현세 이탈적이기에 침묵과 관상을 강조하고 자기성화와 完德을 강조한다. 또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와 죽음에 동참하도록 권고한다. 이는 교회의 전통적 영성으로 수도회의 경우 관상수도회가 포함된다. 여기서는 특히 하느님의 사랑이 강조되고 있다.

다음으로 육화적 영성이란 그리스도께서 육화하신 것은 죄와 고통, 죽음의 세계에 오셔서 이것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세상을 피할 것이 아니라 신적 질서로 바로 잡아 구원시킬 대상으로서 세상을 바라본다. 따라서 세상을 올바르게 인도하여 성화시키고 구원시키도록 촉구한다. 결국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육화적 영성은 그리스도의 육화의 완성인 부활에 참여하는 영성이다. 따라서 사랑과 봉사활동, 노동의 가치, 사회생활 등을 강조하고, 신앙 안에서 행동하는 실천적 특성을 지닌다. 그리고 여기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강조된다.

이 두 측면은 다 나름대로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종말론적 영성만을 강조한다면 현세를 부정하게 되고, 육화적 영성만을 강조하게 되면 하느님과 자신의 뜻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이둘을 조화시킬 필요가 있다.




3) 영성신학의 정의

용어적인 측면에서 영성신학은 내적 생활, 초자연적 생활, 수덕신비신학, 完德 신학 등 다양한 말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지향점은 동일하다. 내용적 측면에서 영성신학은, 신적인 계시진리와 개개인의 종교체험에서 시작하여, 초자연적 생활의 본질을 밝히고, 그 성장과 발전을 위한 지침을 규정하며, 영성생활의 시초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영혼들의 진보과정을 설명하는 신학의 한 영역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와같이 신학의 한 분야로서의 영성신학은 그 방법에 있어서 순수 이론신학과는 다른 실천 혹은 응용신학을 택하고, 주제에 있어서는 크리스찬의 完德과 기본 원리들을 대상으로 한다.

신학은 초자연적 신앙의 눈을 통해 계시진리를 이성적인 추리과정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다. 이렇게 탐구한 신학의 내용은 심리학적 자료들이 계시진리의 영역을 언급할 때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보편적으로 인정될 때는 실천적 지침이 될 수 있다.

영성신학은 개개인의 종교체험에서 시작한다. 왜냐하면 영성신학이 실천적 응용신학이기에 영성신학의 법칙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경험을 이용하게 된다. 따라서 영성생활을 다루는 신학자는 특히 심리학을 비롯해서 자연과학의 많은 자료들을 직접 취급해야 하기 때문에 종교체험의 본질과 현상을 연구할 때에는 신학의 교도적 기능을 강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영성신학을 초자연적 생활의 본질을 밝히는 신학이라 정의하는데, 여기서 신학자는 계시진리와 교회의 가르침 및 조직신학의 결론들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한다. 따라서 크리스찬 完德의 본질과 은총생활, 주입덕행 및 성령의 은사의 작용 등과 같은 문제에 초점을 두고 탐구해야 한다.

영성신학은 영성생활의 성장과 발전을 다루는 법칙과 지침을 규정하기도 한다. 영성신학은 경험적 자료보다는 계시진리 및 신학적 결론과 밀접하게 관련된만큼 그 연구방법이 경험적이고 서술적이기보다는 오히려 학문적이고 사변적이다. 이렇게 해서 보편적인 법칙들이 밝혀지고 설명될 때 비로소 평신도의 영성과 사제의 영성, 수도생활의 영성, 혹은 전례적 영성 같은 특수형태의 영성을 논하고 평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영성신학의 분야(지침)는 죄악과 유혹, 능동적 및 수동적 정화, 성사, 선행 및 기도의 단계 등의 내용을 취급한다.

또 영성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의 시초부터 그 完德에 이르기까지 정상적으로 거쳐 가는 과정을 서술한다. 이렇게 영성생활의 진보 과정을 설명해 줄 때 구도자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분별력을 터득하게 된다.




최민순 신부님에 의하면, 영성신학은 영성생활을 다루는 신학의 한 부분으로서 성세 때 받은 하느님의 생명, 즉 사랑을 가꾸어 완전하게 만드는 학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끝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으며, 창조되지 않은 은총의 선물을 받았다. 이 초자연적 덕인 생명의 덕은 영혼의 능력인 지성과 의지, 기억에 가해져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도록 빛을 준다. 이 하느님의 생명은 만약에 우리가 죄를 범하게 되면 상실하게 되며 그 때 인간에게 남는 것은 본성뿐이다. 즉 하느님의 사랑이 미칠 수 없는 자연인으로서 남게 되는 것이다. 범죄함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을 상실한 인간은 자연법에 따라 덕은 행할 수 있지만 초자연적 덕행을 실천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두번째 창조를,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역사를 시작하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구원은 인류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객관적인 구원이 나의 구원, 즉 주관적인 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세례를 통해 가능하다. 그러므로 아담이 잃은 은혜가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초자연적 삶에로의 성장이 가능해졌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아 하?윱纛? 생명을 가꾸고 완전케할 능력을 받았다. 여기서 열매를 맺도록 해 주는 것이 바로 영성신학이다.

자연인은 영혼의 능력들이 성장하여 성인이 되지만, 초자연인은 영혼의 능력에 가해진 은총에 의해 성장하고 영혼의 능력을 완성시킨다. 따라서 자신 안에서 성장하는 信望愛를 따라, 은총도 성장한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덕에는 자연덕과 초자연적인 덕이 있다. 자연덕이란 단순한 자연적 습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자연덕은 영혼의 여러 기능에 편이함을 줄 뿐이다. 그러나 초자연적 덕은 영혼의 능력에 가해진 습성이요 주입된 덕이다. 이러한 초자연적덕(信望愛)이 주입되어 영혼의 기능들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며, 영혼의 기능을 보완하고 완성시켜 준다.



[주님 저 하늘 펼치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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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다시래기(Hodie Mihi Cras Tibi)
글쓴이 : FireBal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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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修德神學
라틴어 theologia ascetica
영어 ascetical theology
[관련단어] 영성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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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절제,영성

수덕신학, 신비신학이라는 용어

이인철

2006. 7. 3.

영성 또는 영성신학이라는 용어의 유래는 캐톨릭의 수덕신학,신비신학이라는 용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카톨릭 전통에서 수덕적 또는 신비적이라는 용어의 개념을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1. 개념들

수덕적; 숙달을 위한 연습과 훈련의 의미, 덕행의 실천

신비적; 신자들에게만 알려진 전례. 위 디오니시우스 이후 초자연적인 체험적 지식, 관상의 의미. 신비신학은 비상한 은총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받는 은총의 정상적 발전과 완성.




2. 수덕적과 신비적의 의미와 사용례

- 용어를 바꾸어 사용할 수 있다.

- 수덕신학은 입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주입적 관상의 문턱에 이르기까지의 영성생활을 말하고, 신비신학은 주입적 관상과 수동적 정화 및 변형일치의 단계를 취급한다.

- 수덕신학은 정화,조명,일치의 길을 다룬다. 신비신학은 초자연적 은총의 결과인 주입적 관상과 주입적 관상에 따르는 수반현상을 다룬다.

- 수덕신학은 정화기,조명기를 다룬다. 신비신학은 일치기를 다룬다.

- 수덕신학은 습득덕행과 주입덕행이 우세하나, 신비신학은 성령의 은사가 우세하다.

- 개신교신학에서 수덕주의는 금욕의 의미. 신비주의는 초감각적 체험적 지식을 의미





결론; 영성신학은 수덕적 면과 신비적 면 양자를 다룬다.




출처; 조던 오먼, 영성신학, 제1장에서 발췌 정리

수덕신비신학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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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신비신학
최근 수정 시각: 2021-01-01 01:37:51


분류 기독교신학
라틴어 : Theologia Mystica, Theologia Ascetica
영어 : Mystical Theology, Ascetical Theology
한자 : 神秘神學, 修德神學
한국어 : 신비신학, 수덕신학

1. 개요[편집]
2. 사상적 발전[편집]
* 이 항목은 서강대학교 교수 김산춘의 <감각과 초월>, 논문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신비 사상-에펙타시스와 에클레시아-" 을 토대로 기록하였습니다.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신학자로 오리게네스와 닛사의 성 그레고리우스가 있다.

오리게네스는 에페소서 4장 17-24절[2]을 토대로 사막교부들에 의해 처음 논의되어 전해져오던 "영적 감각"론을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새 피조물이라 부름받은 새 육신을 입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보고(시각), 듣고(청각), 냄새를 맡고(후각), 맛을 보며(미각), 피부로 느끼는( 촉각) 오감을 통해 하느님을 느끼려고 노력하며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존재, 즉 신화(新化)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특히 구약의 「아가」해석을 통해 영혼과 초월적인 신성과의 만남을 신랑을 그리워하며 찾아가는 신부의 모습, 사랑의 화살로 중상을 입은 신부의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비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 다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탈자적 사랑의 지향을 의미하는 ‘에펙타시스’의 개념인데, 이는 신 인식이 정적인 그리스적 본질인식이 아니라, 역동적인 히브리 그리스도교적 청종(聽從) 즉 타자 관계적 인식임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에펙타시스는 신비가들의 하느님과의 순간적 합일일 수는 없고,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적 삶의 방식으로서 끊임없는 전진이라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하느님은 무한하시므로 전진 또한 무한한 것이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에게 있어서 이러한 에펙타시스의 모범은 다름 아닌 모세의 생애였다. 마지막으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에게 있어서, 에펙타시스라고 하는 초월에로 열린 역동성은 에클레시아라고 하는 다(多)이면서도 전체로서는 일(一)인 영적인 공동체의 형태로 이 유한한 세계에 구체화하며 생기한다. 즉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신비사상에서, 초월ㆍ개인ㆍ자기의 에펙타시스는 그 날줄이, 내재ㆍ보편ㆍ타자의 에클레시아는 그 씨줄이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연상시킨다. 산의 정상에 그대로 머물려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세상으로 내려가길 권하는 것이다. 이 ‘세계와 타자에로의 귀환’이야말로 구체적 역사적 인간 안에서의 ‘존재의 현성(現成)’인바, 이로써 인간의 참다운 자기 성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위의 주장들은 오리게네스와 그레고리우스만의 독창적인 사상이 아니라 이전의 사막교부들의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특히 사막교부들은 육체의 정욕과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는 삶을 당장 실천할 것을 강조했다. <성 안토니오의 생애>만 읽더라도 당시 사막교부들이 악과 정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수도운동의 정신은 상당한 시간이 지나면서 거대한 신학으로 형성되었고 비잔틴 신학의 거대한 뿌리가 되었다. 그러나 서방교회에는 이것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서방 가톨릭에서 영성신학으로 불릴 만한 것은 아일랜드의 성 파트리치오의 수도원이 그나마 켈트 신앙과 결합된 영성신학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후의 라틴지역은 동방교회에서 수입된 영성신학이 주이며, 성 베네딕토 또한 동방교회의 영성을 연구한 교부 존 카시안의 제자였기에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3. 신비신학 (Theologia Mystica)[편집]

그리스도교에서 인간의 영혼과 하느님과의 사이에 이루어지는 숨은 교류 현상을 연구하는 신학의 한 부문.

이 개념은 중세 가톨릭에 자리잡은 것으로, 4세기에 마르첼루스 안치라누스에 의해서 사용되어, 5~6세기의 위 디오니시오 문서에서는 이성을 초월하는 하느님에 대한 체험적 지식을 가리켰다.

후에 실천적 신비신학과 사변적 신비신학으로 나뉘어 지고, 15세기의 제르송의 저작에서는 이 구별이 확실히 나타났다.

실천적 신비신학의 근거는 신약성경 중 예수의 삶의 방식에 이미 나타나며, 바오로의 서간 중에 전개되고 있다. 3번 항목 참고.

중세를 통해서 실천적 신비신학이 항상 교의신학에 생명을 주었던 것은 성 보나벤투라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신학자의 깊은 기도와 신비체험이 수반된 사실에 의해서 알 수 있다. 중세 말기에는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지방에서 신비가가 배출되었다고 알려져있다.

신비신학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예수회 개혁의 시대를 통해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성행하여서 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교의신학과 실천적 신비신학은 분리되는데 후자의 근대의 본격적인 창설자로서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나 십자가의 요한을 들 수 있다.

오늘날 신비신학은 의화된 영혼 중에서의 하느님의 은총의 작용과 현현의 최고도의 단계를 취급하는 분야로 생각되며, 관상기도, 성령의 끊임없는 은총, 그에 따른 초자연적인 신비적 현상 등이 연구된다. 그러나 신비적 상태와 그 작용에 관해서는 학자 사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신학처럼 안 보이는 주제에 대놓고 완벽히 신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았는데, 대개는 수덕의 3단계인 정화·조명·일치를 거쳐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른다고 본다.

20세기의 사제이자 신학자인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은 그의 책 <주님의 영광> 에서 신비신학의 궁극적인 토대가 되는 역사적 접근로로서 12가지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리옹의 이레네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테스, 켄터베리의 안셀모, 보나벤투라, 단테, 십자가의 요한, 블레즈 파스칼, 하만, 솔로비에프, 홉킨스, 페귀이다.


4. 수덕신학 (Theologia Ascetica)[편집]

수덕의 이론과 그 실천방안 등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

영성신학이라고도 한다. 17∼18세기에 신학의 각 분과가 독립될 때 분류되었다. 이 학문의 주 목표는 완덕, 즉 자유의지에 의한 하느님과의 일치를 도모하는 수단으로서의 개개인의 구체적·능동적인 행위를 분석하는 데 있다.

실천적이기는 하나 원리적인 고찰에만 그치는 윤리신학과, 구체적이기는 하나 하느님의 작용에 완전히 수동적으로 응하는 신비적 일치를 도모하는 신비신학과의 중간에 위치한다.

윤리신학은 하느님의 법을 연구하고 행위의 선악 가치를 판단하는 신학이며, 신비신학은 위에 나와있듯이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려는 신학이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길은 자기 극복의 훈련부터 시작하여, 기도, 성사생활 등으로 하느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려 노력하여 자기 구원으로 전진하는 중간 단계가 수덕학이며, 성인학, 영성학, 완덕학이라고도 한다.

수덕신학은 그리스도교적 수덕의 실행을 최초의 단계에서 능동적인 관상생활의 문턱까지 논리적으로 가르치는 학문이다. 그래서 수덕신학은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을 받아서 덕을 쌓아 거룩한 경지에 도달하는 수덕을 연구하는 영성신학의 학문 분야라고 정의할 수 있다.

수덕신학은 다른 신학과 마찬가지로 성서와 성전(Sancta Traditio)을 학문 원칙으로 한다.

에스파냐 출신의 D.알바레스와 A.로드리게스가 대표적인 수덕신학자이다.

5. 성서적 근거[편집]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요한 복음서 1장 14절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요한의 첫째 서간 제 1장 1-3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부르신 분을 알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둘째 서간 제 1장 3-4절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코린토 1서 13장 12절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코린토 2서 3장 18절
[1] 사실 필로칼리아만 읽어도 충분하긴 하다
[2] 그러므로 나는 주님 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민족들처럼 살아가지 마십시오. 그들 안에 자리 잡은 무지와 완고한 마음 때문에, 그들은 정신이 어두워져 있고 하느님의 생명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감각이 없어진 그들은 자신을 방탕에 내맡겨 온갖 더러운 일을 탐욕스럽게 해 댑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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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  | 이화학술총서  
박경미 (지은이)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2013-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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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6쪽152*223mm (A5신)610gISBN : 9788973009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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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신약성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요한복음서에 나타난 신학과 문학적 특징을 분석하고 있는 연구서이다. 요한복음서는 흔히 ‘영적인 복음서’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요한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모습이 신적이고 천상적인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서 이것은 아주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이런 생각과 확신을 최초로 복음서의 형태로 기술하고 있는 문헌이 요한복음서이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이고 인간적인 차원을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신약성서의 어떤 저자보다도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영적이고 내면적으로 깊이 있게 해석해냈다. 이러한 요한복음서의 영적 경향은 예수의 삶을 역사적으로 서술한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와 대조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예수의 부활 이후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지속적으로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파할 수 있도록 곁에서 힘이 되어준 예수의 영(靈), 즉 ‘파라클레토스’로 이어진다.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목차
머리말

제1부 요한복음서의 특징과 역사적 배경
Ⅰ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의 차이
Ⅱ 요한공동체와 유대교
Ⅲ 요한복음서의 구조

제2부 요한복음서의 문학적 특징과 아이러니
Ⅰ 아이러니와 요한복음서의 문학적 도구들
Ⅱ 요한복음 2:23-3:21(니고데모와의 대화)에 나타나는 아이러니
Ⅲ 요한복음서의 재판설화(18:28-19:16, 19-22)와 아이러니
Ⅳ 아이러니와 요한공동체

제3부 요한공동체의 사회적 경험과 자기의식
Ⅰ 요한복음 9:1-41에 나타나는 요한공동체의 사회적 경험
Ⅱ 요한복음 15:1-16:4a에 나타나는 요한공동체의 자의식

제4부 요한복음서의 신학적 아이러니와 영이해
Ⅰ 요한복음 4:4-42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자기계시와 아이러니
Ⅱ 요한복음서의 아이러니와 요한의 이원론
Ⅲ 요한공동체의 영체험과 파라클레토스
Ⅳ 요한복음서의 종말기대와 영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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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박경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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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성서신학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신약성서학 교수이다.

저서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 요한공동체의 문학과 신학』(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행복하여라 하느님 나라의 사람들』(한울)
『신약성서, 새로운 삶이 희망을 전하다』(사계절)
『시대의 끝에서』(한티재)
『마몬의 시대, 생명이 논리』(녹색평론사)

역서
『요한복음 요한서신』(대한기독교서회)
『말씀을 믿다: 요한복음서 1-4장을 읽다』(대한기독교서회)
『서기관들의 반란... 더보기
최근작 : <성서, 퀴어를 옹호하다>,<행복하여라! 하느님 나라의 사람들>,<시대의 끝에서> … 총 29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책은 신약성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요한복음서에 나타난 신학과 문학적 특징을 분석하고 있는 연구서이다. 요한복음서는 흔히 ‘영적인 복음서’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요한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모습이 신적이고 천상적인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서 이것은 아주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이런 생각과 확신을 최초로 복음서의 형태로 기술하고 있는 문헌이 요한복음서이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이고 인간적인 차원을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신약성서의 어떤 저자보다도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영적이고 내면적으로 깊이 있게 해석해냈다. 이러한 요한복음서의 영적 경향은 예수의 삶을 역사적으로 서술한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와 대조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예수의 부활 이후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지속적으로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파할 수 있도록 곁에서 힘이 되어준 예수의 영(靈), 즉 ‘파라클레토스’로 이어진다.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영성을 중심으로 요한복음서에 나타나고 있는 요한공동체의 역사적 정황과 요한의 신학이 어떻게 상응하는지를 고찰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요한공동체 구성원들의 경험을 신학적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요한이 사용한 문학적 기법을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또한 요한공동체가 당시 유대교와 겪었던 갈등과 고통스런 사건들이 요한복음서의 예수 이야기에 어떤 식으로 반영되어 있는지를 살펴보고 그 의미를 생각해본다. 이러한 시도는 요한복음서가 쓰여진 사회적 · 역사적 상황, 그리고 요한공동체가 연루되었던 당시의 갈등들을 밝힘으로써 요한복음서 해석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는 오늘날의 복음서 연구 동향과 맥을 같이한다. 이것은 영적인 복음서로서의 요한복음서에 대한 기존의 이해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요한복음서 독자들이자 요한적 사유의 주체들이었을 요한공동체의 치열한 영적 경험과 고백의 과정을 보다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함으로써 본문에 대한 통전적 이해를 돕고 요한복음서의 영적인 특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연구서는 날이 갈수록 성서가 추상적 교리나 관념으로 굳어지고 있는 요즘의 세태에 우려를 표하고 요한복음서의 생동하는 영적 특징을 재포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저자의 노력이 잘 드러나 있는 책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부분을 담고 있는 요한복음서를 제대로 이해하고 본격적으로 연구해보고자 하는 신학생들과 교회 목회자들, 그리고 성서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에게 좋은 안내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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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생태학적 치유

알라딘: 생태학적 치유

생태학적 치유 - 기독교적 전망   
낸시 라이트,도날드 킬 (지은이),박경미 (옮긴이)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2003-12-05원제 : Ecological Healing : A Christian Vision



생태학적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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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쪽126*207mm328gISBN : 9788973005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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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오늘날의 심각한 환경 위기를 기독교 신앙적 관점에서 성찰하고 해결책을 모색한 책이다. 생태 위기의 문제를 세계 도처의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생존 문제와 결부시켜 '지속 가능한 발전'을 통해 풀어보고자 했으며, 이를 종교적 개념인 '치유'로 설명하고 있다.
목차
옮긴이의 말
머리말
들어가는 말

1장 가난한 사람들의 외침을 들으며
그리스도인들은 반성해야 한다
가난의 증대
'가진 사람들'과 '못 가진 사람들'의 간격
결론
개인의 성찰과 그룹 토론을 위한 제안

2장 환경 위기
생명 세계에 대한 인간의 영향
환경 문제들
전쟁과 환경
사실들에 대한 '감각'
개인의 성찰과 그룹 토론을 위한 제언

3장 토착민과 지구
토착민과 기독교 신앙
어떻게, 그리고 왜 토찰민들은 지속가능하게 사는가?
토착민들과 '개발' 사이의 갈등
개인의 성찰과 그룹 토론을 위한 제안

4장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계몽 운동과 산업화의 진전
계몽주의 시대
계몽주의적 가치들과 현대적 세계
식민주의
산업화
결론
개인의 성찰과 그룹 토론을 위한 제안

5장 지구와 그 주민에 대한 성서의 견해
창조자와 지탱자로서의 하느님
인간은 모든 피조물에게 하느님의 모습을 그려 주라
거룩한 땅의 거룩한 백성
오염에 대한 성서적 이해 : 예언자들
하느님의 나라 : 이 세상을 끌어안은 예수
기독교 공동체와 지구
중요한 성서 구절들
개인의 성찰과 그룹 토론을 위한 제안

6장 생태학적 치유: 기독교적 응답
현대적인 신학적 응답
계시의 매체인 지구 - 토마스 베리
하느님의 새 모델들 - 샐리 맥패그
지구의 청지기인 인간 - 로렌 윌킨슨
주요 교단의 성명서들
로마 가톨릭의 응답
개신교와 정교회의 응답
결론
개인의 성찰과 그룹 토론을 위한 제안

7장 지속가능한 세상을 위한 생태학적 치유
해결책
지속가능하게 개발하기
결론
개인의 성찰과 그룹 토론을 위한 제안

부록 1 생태계 위기에 대한 기독교 신앙 전통의 선언서들
부록 2 생태계 위기에 대한 세계 4대 종교인들의 선언서들
부록 3 새로운 십계명
부록 4 지구 계약 생태계 공동 안보를 위한 시민 조약
부록 5 신앙과 생태계 개발에 대한 참고 자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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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낸시 라이트 (Nancy G. Wright)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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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학적 치유>
최근작 : <생태학적 치유> … 총 3종 (모두보기)
도날드 킬 (Donald Kill)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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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학적 치유>
최근작 : <생태학적 치유>

알라딘: 삶은 기적이다 현대의 미신에 대한 반박 웬델 베리 (지은이),박경미 (옮긴이)

알라딘: 삶은 기적이다

삶은 기적이다 - 현대의 미신에 대한 반박  
웬델 베리 (지은이),박경미 (옮긴이)녹색평론사2006-02-15원제 : Life Is A Miracle (2000년)



삶은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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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쪽156*188mm452gISBN : 9788990274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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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 인문학 > 교양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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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서평 형식을 통해 현대 과학문명 전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보여주는 책이다.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의 <통섭(Consilence)>이 주장하는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통합이라는 개념을 면밀히 분석하고 비판했다.

저자는 삶의 신비로움과 알 수 없음, 기적적인 성격을 회복하고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면에서 <통섭>이 말하는 환원주의 과학은 그 기적을 해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블레이크의 시를 수차례 인용하여 진정한 통섭/통합은 "한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듯이" 모래알과 들꽃이 세계와 천국의 수준으로 도약하여 '고양'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현대과학과 문명의 기계론적 사고, 산업주의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 등에 관한 포괄적인 성찰과 비판을 가했다. 또한 인간을 물화(物化)하는 현대의 한탕주의적인 예술과 과학에 대한 대안으로 "붙박이로서의 삶"을 제시했다.
목차
Ⅰ 알지 못함

Ⅱ 타당성

Ⅲ 에드워드 윌슨의《통합》에 대하여
1. 물질주의
2. 물질주의와 신비
3. 제국주의
4. 환원주의
5. 기계로서의 피조물
6. 독창성과 “두개의 문화”
7. 뺄셈 없는 진보

Ⅳ 환원주의와 종교

Ⅴ 환원주의와 예술

Ⅵ 학교 밖에서의 대화

Ⅶ 기준 바꾸기

Ⅷ 결론을 대신하여

역자 해설 “살아 있음”의 신비,
“알지 못함”의 인식론

접기
책속에서
붙박이로서의 삶은 지금까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존경과 충성스러움, 이웃간의 정, 충직함 같은 고대 인간이 지녔던 미덕으로 우리의 기억과 실천 속에 간신히 보존되었다. 그러나 현대사를 지배한 것이 한탕주의 뜨내기였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현대의 지배적인 예술과 과학이 한탕주의 뜨내기 예술과 과학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한탕주의 과학과 한탕주의 기업정신이 협력한 결과 이제 지구상의 모든 피조물은(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팔려갈 물건처럼 제 몸에 가격이 매겨지는 신세로 전락했고, 사실상 경제 전체주의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경제 전체주의에서는 모든 물질과 피조물, 생각들이 상품화되어 교환 가능하고 써서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이 된다. 사람들도 다른 것들과 함께 상품이 된다. 오직 그러한 경제만이 풍요로움과 피조물의 다양성으로 가득 찬 세계에 기술주의적 독재와 유전학적 획일 문화를 덮어씌우려 한다. 그러한 경제 전체주의 체제에서만 '삶의 형태들'이 특허대상이 되고, 자연과 문화의 재생가능성이 파괴된다. - 본문 192쪽에서  접기
현대과학의 가장 일차적인 환원주의는 인간 경험, 혹은 인간적 의미를 인간의 언어에 의해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가정은 잘못된 가정이다.-219쪽 -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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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델 베리 (Wendell Berry)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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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이자 철학자이며, 시인이자 소설가. 켄터키 주 농부의 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전통 방식의 농사를 배우며 자랐다. 켄터키대학교에서 문학 교수로 일하다가 마흔네 살에 교수직을 그만두고 농부로 살기 시작했다. 농사짓는 작가, 글 쓰는 농부로 40여 년을 살아오면서 현대 문명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땅과 사람의 관계를 고찰해 왔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문제들로부터 출발해 지구의 문제로 확장해 가는 근본주의적 시선은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많은 성찰과 고민을 던져 주고 있다.
『생활의 조건』, 『희망의 뿌리』, 『포트윌리엄의 이발사』, 『삶은 기적이다』, 『지식의 역습』, 『온 삶을 먹다』 등 마흔 권이 넘는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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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오직 하나뿐>,<소농, 문명의 뿌리>,<온 삶을 먹다> … 총 254종 (모두보기)
박경미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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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성서신학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신약성서학 교수이다.

저서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 요한공동체의 문학과 신학』(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행복하여라 하느님 나라의 사람들』(한울)
『신약성서, 새로운 삶이 희망을 전하다』(사계절)
『시대의 끝에서』(한티재)
『마몬의 시대, 생명이 논리』(녹색평론사)

역서
『요한복음 요한서신』(대한기독교서회)
『말씀을 믿다: 요한복음서 1-4장을 읽다』(대한기독교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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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소개
녹색평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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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녹색평론 통권 178호>,<농본주의를 말한다>,<녹색평론 통권 177호>등 총 78종
대표분야 : 환경/생태문제 2위 (브랜드 지수 79,816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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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살 2009-01-09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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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울좋은 껍데기를 벗고 참삶을 찾자 새창으로 보기

- 책이름 : 삶은 기적이다
- 글쓴이 : 웬델 베리
- 옮긴이 : 박경미
- 펴낸곳 : 녹색평론사(2006.2.15)
- 책값 : 7000원


 우리 나라에 참된 과학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과학뿐 아닙니다. 문학도 사상도 철학도 역사도 참답게 자리잡고 있을는지요? 글쎄. 그러면 책은 어떻습니까? 그림이나 사진은? 교육이나 사회는? 정치나 경제는? 노동은? 운동경기는 어떨까요? 올바르게 나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 즐겁게 맞이하면서 너나없이 고르게 함께할 수 있는가요?


.. 과학은 인간적 한계를 지니며, 늘 인간의 무지와 오류를 포함한다. 과학이 발명해내거나 발견해낸 해결책들이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고, 또 그 자체가 새로운 문젯거리가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과학자들은 특정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핵에너지를 사용하는 방법을 발견해냈지만, 핵의 사용은 우리 모두에게 대단히 위험하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핵폐기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까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폐타이어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지 못한다) 항생제의 사용은 항생제의 남용을 가져왔고, 계속 이런 식이다. 우스꽝스럽게도 우리는 일상적 삶 속에서 황당한 과학지식에 매달린다. 가령 우리는 유전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지만, 우리 가운데 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식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 ..  〈53∼54쪽〉


 한 달쯤 앞서, 서울역에서 전철을 탈 때입니다. 저는 멀리 가는 길이라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전철을 탔는데 마침 유모차를 끌고 계단 앞에서 허둥지둥하는 젊은 어머니 한 분을 만났습니다. 한쪽 어깨에는 자전거를 메고 있었지만 한쪽 손은 자유로워서, “아주머니, 같이 들어 드릴게요” 하고는 꽤나 긴 계단을 타고 내려왔습니다. 저는 표를 끊고 안으로 들어갔고, 아이 어머니는 표를 사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유모차를 어떻게 개찰구를 넘어 나오는가로 힘들어합니다. 아마, 전철역까지 오는 동안 꽤나 애먹고 힘들었는가 보군요. 그런데 서울역 개찰구에는 휠체어나 유모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뚫려 있는 다른 문’이 없습니다. 표를 끊고 지나가는 자리도 대단히 좁습니다. 그래, 하는 수 없이 유모차를 들어서 안쪽으로 옮겨야 했고, 아이도 누군가 들어 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까 계단에서도 그랬으나, 이 개찰구 앞에도 사람들로 북적거리기는 했어도 누구 하나 손을 거들거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마침 이날만 이렇게 돕는 손길이 없는지도 몰랐겠지만요.


.. 다행스러운 것은 과학자들조차도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말할 때에는 “한 여성”, “한 남성”, “한 아이”, “한 사례”와 같은 범주의 언어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애정을 느낄 때 우리는 추상과 추상화의 범주들을 깨부수고, 고유한 생명과 장소를 지닌 피조물 그 자체와 대면하고 싶어한다 ..  〈65쪽〉


 아기를 제가 안고 있는 동안 젊은 어머니는 유모차를 낑낑거리며 개찰구 아래로 밀어서 가까스로 빼냅니다. 겨울이지만 얼굴엔 땀이 줄줄 흐릅니다. “아유, 서울 한번 나오면 힘들어서 못 다니겠어요. 다니기 너무 불편해요!” 하는 아이 어머니. 저는 4호선을 타고 아이 어머니는 1호선을 탑니다. 길이 엇갈려서 걱정스러운데, 저 어머니가 가는 길에 도와줄 사람이 있을는지…


.. 삶을 경험한다는 것은 뭔가를 “알아내거나”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고통받는 것이며, 동시에 있는 그대로 삶을 기뻐하는 것이다. 고통받으면서, 또 있는 그대로 기뻐하면서 우리는 삶을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아가서 우리는 생명을 이해했다는 누군가의 주장에 의해 생명이 소유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생명은 우리가 향유하는 것이지만, 우리 너머에 있다 ..  〈18쪽〉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양문), 《생활의 조건》(산해) 같은 책에 이어 우리 말로 번역된 ‘웬델 베리’ 님 책 《삶은 기적이다》입니다. 과학기술이라는, 또 물질문명이라는 허울좋은 껍데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제정신을 잃어버린 우리들한테 참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즐거운가를 자기 경험을 밑바탕 삼아서 들려주는 이야기책입니다. 소중한 나를 찾고, 내 삶터를 찾을 때는 우리 삶을 ‘기적’이라 할 만하지만, 나 자신을 소중히 느끼지 못하고 내 삶터를 소중히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를 억누르는 권력자들 배만 불려 주는 ‘기적’을 낳는다는 이야기도 담아요. (4339.3.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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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번역은... 다른 녹색평론사 책과 마찬가지로 엉망입니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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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06-03-09 공감(1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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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기적으로 본다는 것은 새창으로 보기
 
삶은 기적이다. "Life is a miracle." 삶 중에서 기이한 일, 특별한 일, 초자연적인 일이 아니고 '그냥 삶'이 기적이다. 먹고 자고 씻고, 출근하거나 등교하거나 집안일하거나 공부하거나 일터에서 일하거나 놀거나 하는 것, 그런 일상이 바로 기적이다. 그럴 만도 하다. 자동차는 쌩쌩 달리지, 범죄자들은 수두룩하지….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이 풍진 세상, 별 탈 없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 아니면 달리 무엇이 기적이랴.



그런데, 그런 것 모두를 기적이라고 부르자니, (솔직히 말해) 기적이 좀 시시해지는 느낌도 없지 않다. '까'놓고 말해, 일상사를 기적이라고 부르면 '기적'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신비스러움이 어쩐지 반감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어째서 그럴까?



우리는 일상의 삶을 '다 안다'고 생각하고, 또 일상사를 신비롭다고 여기지 않는다. 먹고 마시고 울고 웃고 다투고…, 이런 일들이 신비롭다? 어떻든지 간에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게 사실이다.



헌데, 지금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한 번 깊이 생각해보자. '과연 나는 일상의 삶에 대해 다 알고 있는가?' 웬델 베리는 우리가 삶에 대해 '안다'고 착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기적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리하여 그의 책 <삶은 기적이다>는 '알지 못함(1장의 제목)'으로 시작한다.



삶을 경험한다는 것은 뭔가를 "알아내거나"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고통 받는 것이며, 동시에 있는 그대로 삶을 기뻐하는 것이다. 고통 받으면서, 또 있는 그대로 기뻐하면서 우리는 삶을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18쪽



베리의 책 <삶은 기적이다>는 에드워드 윌슨의 책 <통섭>이 바탕하고 있는 환원주의적 세계관에 대항한다. <통섭>을 다 읽어보지 못한 내가 이해하기로 환원주의적 세계관은, 모든 것을 기계로 보고 이해가능·설명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일컫는다고 할 수 있다. 베리는 <통섭>의 저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물론 나는 윌슨의 과학적 지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아마도 그의 지식은 인간이 알아낸 지식으로서 위대하고 경탄할 만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그가 보여주는 태도이다. - 42쪽







우리는 삶을 알려고 하고 그 알아낸 지식으로 기대하고 예측하며 유형화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해서 삶을 더 쉽게 살고자 하고 덜 힘들게 살고자 한다. 그런데 삶을 대상화하여 알아내도 우리의 투덜거림은 변함이 없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든 거야!"



우리는 신비 안에서, 기적에 의해 살아있다. 에르빈 샤르가프는 "삶은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71쪽



삶을 기적으로 보면 우리는 죽음도 기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죽음은 단지 건강함의 종착역이자 불건강함의 표지가 아닌 것이다. 암환자가 건강하지 않아서(암세포 때문에) 죽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죽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베리는, 죽음을 건강의 일부분으로만이 아니라 '신비'로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212쪽)고 역설한다. 베리의 말처럼, 죽음에 대한 과학적 영웅주의의 표현으로 의료산업이 발달했겠지만,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삶은 기적이다. 그리고 죽음도 기적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맛보는 삶과 죽음 안에 있는 우리는 기적 안에 있다. 그런데 이 말, 가만히 묵상해보니, 참 신비롭다. 기적은 인간이 아닌 신의 작용이므로 '우리가 신 안에서 살고 있다'는 고백을 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 월간<새가정>, 오마이뉴스, 에큐메니안 등에도 같은 글이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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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 2007-03-12 공감(1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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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새창으로 보기
  대부분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이제는 도시생활이 대부분이다. 농촌에는 60대 노인이 청년 회장을 한다는 말이 사실이 되었다. 농촌은 도시에 비해 낙후되고 삶의 질이 결여되어 있다는 인식과 태도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농촌으로 갈 수 있을까? 과학의 시대가 열리면서 가능한 모든 발전들은 우리 삶의 목표가 되었다. 세상은 진보와 발전의 수레바퀴 속에서 영속적인 진화가 가능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인류는 이제 그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맹목적인 과학에 대한 믿음은 인류의 삶에 반성적 태도를 박탈했다. 현대의 미신에 가까운 과학에 대한 맹신은 인간의 가치 판단과 무관하게 발전되어 왔다.

  과학은 결국 가치 판단과는 무관한 기능만을 제공해왔다. 물론, 인문학과 예술과 종교는 과학기술의 시대에 적절한 가치관을 제공했는가 하는 비판과 반성도 아울러야 한다. 이러한 판단과 논의는 인류에게 영원한 숙제로 남아 있고 여전히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웬델 베리의 <삶은 기적이다>는 이러한 논쟁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저자의 생각과 주장은 분명하다. 과학기술의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과 삶의 경이로움에 대한 숭고함이다.

  현대과학의 방법론은 근본적으로 물질주의와 환원주의, 기계론적 사고와 산업주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론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과 비판이 이 책의 핵심이다. 그래서 저자가 택한 방법은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유오성이 선택한 ‘한 놈만 팬다’는 전략이다. 그 한 놈으로 선택된 것이 에드워드 윌슨이다. 최재천과 장대익이 옮긴 <통섭>으로 번역한 책이다. 이 책을 읽지 않아 웬델 베리의 의견에 전반적으로 동의하거나 조목조목 반대의견을 비판하며 읽을 수가 없어 아쉬웠지만 전반적인 그의 견해와 논의의 초점은 특별하지 않다. 물론 저자의 주장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일반론 수준에 머물러 있지는 않다.

  윌슨의 통섭은 한자로 ‘統攝’이다. 큰 줄기로 끌어 당긴다는 한자 그대로의 의미보다는 전제주의적 지배적 성격이 강하다. 문제는 통섭의 주체가 과학이라는 데 있다. 웬델 베리가 윌슨에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이유도 과학적 환원주의의 입장에서 모든 학문과 인접 분야의 통합을 시도한다는 데 있다. 알 수 없는 세계는 없고 과학으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을 웬델 베리는 수용하지 못한다. 살아 있음의 신비와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인식은 과학의 잣대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삶은 그 자체로 기적이라는 인식이 기독교적 관점과 일치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 구체적으로 과학적 방법론이 왜 타당한지 조목조목 따져 밝히고 있고 나름의 주장을 펼치고 있지만 저자가 내세우는 대안은 없다. 오히려 신비주의와 모호한 태도로 보일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다만 과학적 환원주의에 대한 맹신을 돌아보고 경계해야할 전제임을 반성하는 정도로 읽는다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과학과 인문학의 통합을 시도한다는 것은 분명 무리한 시도로 보인다. 그것은 학문간의 교류를 넘어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철학적 문제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단순하게 발전의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는 진보와 발전의 개념과는 다른 문제다. 이 책의 저자가 현대 문명 전반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삶의 방향과 목적도 없이 맹목적인 속도전을 치르고 있는 현대인을 위한 반성적 태도를 요구하는 내용으로 받아들인다면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저자는 책 첫머리에 라이오넬 베스니(1946-1999)의 “우리는 아무 대가 없이 무언가를 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걸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있다”는 말로 자신의 주장을 선언적으로 요약하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이 말은 윌리엄 브레이크의 시

당신이 보는 대로 세상은 당신에게 현실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보는 당신에게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다.
(Blake, Complete Writings, Oxford, 1966, 663쪽) - P. 16

를 인용하며 삶의 예측 가능성과 기계적인 방법론을 철저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이 비판이 비판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아전인수식 해석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성찰적 비판의 대안이 모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종교와 양립할 수 없는 과학의 대립이라는 관점은 아니지만 저자의 태도는 신비주의에 가깝다. 브레이크의 위대한 시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하다. 많은 책에서 인용되어 식상하기까지 한 이 시의 의미를 다시 한번 곰곰이 음미해 보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해 준다. 그래도 ‘삶은 기적이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는 없다.

한알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Complete Writings, 431쪽) - P. 168

알라딘: [전자책] 시대의 끝에서

알라딘: [전자책] 시대의 끝에서

시대의 끝에서  | 한티재 교양문고 2 epub 
박경미 (지은이)한티재2020-08-03 


시대의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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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90178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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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신약성서학자인 박경미 교수가 ‘시대의 끝’에 대한 성찰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제국의 침략과 거기 결탁한 가신통치자들의 수탈, 그로 인해 하느님의 통치가 끊어지는 데 대한 예언자들의 분노와 심판의 선언. 이러한 것들이 성서의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처럼 삶을 파괴하는 것들에 맞서 환상가들은 옛 세계의 종말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선언했다. 신구약 중간시대와 초기 기독교시대에 융성했던 묵시문학의 근저에 깔린 생각은 이러한 의미에서 ‘시대의 끝’에 대한 의식이었다.”

이 책 『시대의 끝에서』는 성서와 역사, 그리고 현재의 깊은 대화이며, 시대의 운명을 염려해 온 실천적인 학자의 이야기이다. 이 책에서 독자들이 다시 만나는 구약과 신약의 시대, 인물과 사건들은 박경미 교수의 탁월한 이야기를 통해 바로 지금 이 시대 우리의 모습,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과제들로 되살아난다. 그 과제들은 비단 당면한 정치적·경제적 위기만이 아니다.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사실은 근본적으로 우리 삶의 토대를 위협하고 있는 문명의 위기, 인류 생존의 위기로 나아간다. 위기에 대한 직시와 성찰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저자가 성서와 역사의 대화로 독자들을 초대하여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이 용기와 희망에 관한 것이다.

“세계의 파멸을 선포했던 환상가들을 사로잡았던 것은 종말에 대한 어두운 환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로 생각했던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악마적인 제국의 붕괴와 함께 도래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이었다. 구약성서와 유대교 문헌에서 종말론적 사고의 핵심은 하느님 없는 세상에 하느님이 오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약성서 복음서들에서 예수는 임마누엘, 곧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심’, 하느님의 현존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예수 자신은 삶과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 오심의 현실을 보여주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저자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논문’을 발표하는 학자의 음성이 아니라, 마치 유장한 서사시를 읊는 시인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주제의 장중함과 어우러지는 문학적인 문체가 이 책의 매력을 드높인다.
목차
들어가며 | 나와 성서

하느님의 나라, 동무들의 나라
농부/장인 그리스도
헤롯의 나라, 민중의 꿈
요한의 성령 이야기, 하느님의 사랑 이야기
로마제국과 바울의 평등사상
전승, 살아 있는 삶의 역사
네로의 세상, 지식인의 초상
시대의 끝에서
책속에서
어릴 적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 어린아이다운 의문을 품었던 기억이 새롭다. 한글을 깨치기 전 어른들이 방바닥에 신문을 펼쳐 놓고 읽는 것을 옆에서 보면서 나도 ‘읽는 것’을 해 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낀 이래, 성서는 내 문자생활의 가장 이른 시기에 자리잡은 책이다. 주일학교에서는 성서 구절을 암송했고,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릴 때에는 복음서를 소리내어 읽었다. 구약성서의 예언서나 욥기, 시편의 소박하면서도 시적 은유가 풍부한 언어들은 문득문득 그 표현들이 혀끝에서 맴돌곤 했다. 자라면서 문학의 세계에 눈뜨고 그쪽에 빠진 시절도 있지만, 결국 성서를 공부하는 것을 업으로 삼게 되었으니, 싫으나 좋으나 평생 성서를 끼고 살아온 셈이다. 생각해 보면 개념적이고 분석적인 언어보다는 언제나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언어에 마음이 끌렸고, 수학이나 철학보다는 역사와 문학에 끌렸던 것도 성서의 언어와 닮은 쪽에 은연중 끌렸던 탓이 아니었나 싶다.


오래전 문학비평가 머레이 크리거는 비평가가 마주한 세 가지 본문의 세계를 구분했다. 그 세 가지 세계란 ‘본문 배후의 세계’, ‘본문 안의 세계’, ‘본문 앞의 세계’이다. (중략) 실제로 성서 해석을 할 때에는 이 세 가지 세계에 모두 관여하게 된다. 이 세 가지 세계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모든 반성적인 독서행위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본문이 독자에게 제기하는 해석학적인 물음들은 이 세계들 사이의 충돌로부터 생긴다. 해석자는 이 세계들, 즉 본문 배후의 세계, 본문 안의 세계, 본문 앞의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아 그것들이 수렴하는 지평을 발견해야 한다. 물론 이 세 가지 세계들 사이에는 긴장과 갈등도 존재하므로 종종 잘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해석은 이들 사이의 수렴과 일치를 지향해야 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처음부터 어떤 체계를 가지고 쓴 글들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필요와 절박함에서 쓴 글들이다. 성서 본문을 탄생시킨 삶의 세계와 내가 속한 이 시대의 삶의 세계가 그때그때 조응하는 방식들을 따라갔다. 그 글들을 나중에 성서 순서대로, 그러니까 구약과 성서 전반에 대한 글에서부터 복음서, 바울, 요한묵시록 순으로 실었다. 모아 놓고 보니 그 글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은 ‘끝’에 대한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에서 종말론적이라고 부르는 어떤 의식의 흐름이 글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말하자면 ‘끝’에 대한 성서의 생각과 나의 경험이 만났다고 할 수 있겠다.


현대 세계는 본질적으로 인간만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전제하고 다른 어떤 중심을 상정하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그 안에서 우리는 중심으로부터 밀려났다고 느낀다.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중요하지 않은 존재임을 일깨워주는 사실들과 반복해서 마주한다. 반면 종교적 인식을 가진 사람들은 우주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까지도 포괄하는 보다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그 무엇이라고 본다. 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그러한 중심적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보고, 자기 존재의 의미와 중요성도 그 관계 속에서 보기 때문에 자신이 왜소하다고 느끼지도 않고, 열등감이나 우월감에 빠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 중심적 존재와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는 흔히 자연과의 경험이 큰 영향을 끼친다. 내 경우 어린 시절 식구들과 함께 평상에 앉아 여름 하늘을 우러러보았을 때 그 많던 별들, 언젠가 풀밭에 앉아 풀대를 엮어 조리를 만들 때 땀에 젖은 얼굴을 부드럽게 간지럽히던 바람, 봄나물을 캘 때 맡았던 향긋한 봄내음과 흐르는 냇물, 어느 하나 고맙고 감격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런 경험들은 내가 나 자신보다 훨씬 더 큰 무언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게 했고, 그 무언가는 일차적으로는 자연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힘이었다. 그리고 성서는 이 모든 것들 뒤에 하느님이 계시다고 가르쳐주었다. 내 인생의 배후에 하느님이 계신다. 나는 이런 경험 속에서 실제의 나보다 더 깊이 있고 더 크게 만들어주는 매우 중요한 무엇인가가 내 속에 있다고 느꼈고, 그것은 결국 영혼이라는 말 외에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오늘날 자연의 파괴는 결국 근원적 존재와의 단절로 이어지고, 인간 영혼의 파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나의 존재의 끝, 이 끝에서 나는 모든 존재의 근원, 중심과 만난다. 개체의 경계를 넘어서서 보다 큰 전체와 하나가 되는 경험, 그리고 그러한 경험이 가능하게 되는 근거로서의 존재 자체, 무엇보다도 모든 생명은 관계성 속에서 존재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되는 자연과 인간, 온 우주의 일치 경험. 아마도 이런 것들이 종교적 사유의 본질적 내용일 것이고, 분리된 개체적 생명의 차원이나 물질의 수준에서 생명현상과 인간현상을 파악하려는 현대의 정신이 본질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부분일 것이다. 성서는 하느님이 우리 존재의 일차적 근원이자 창조의 근원이며, 전면에 드러나지 않으면서 자연과 인간 삶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분이라고 알려준다. 아마도 이 하느님은 다른 이름으로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근원이라는 의미에서 ‘끝’만이 아니라, 다른 ‘끝’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은 앞서 말한 ‘끝’, 즉 근원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파괴될 위협 속에서 경험되는 ‘끝’이다. 이 두 번째 의미의 ‘끝’이 성서 세계의 특징과 더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제국의 침략과 거기 결탁한 가신통치자들의 수탈, 그로 인해 하느님의 통치가 끊어지는 데 대한 예언자들의 분노와 심판의 선언. 이러한 것들이 성서의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처럼 삶을 파괴하는 것들에 맞서 환상가들은 옛 세계의 종말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선언했다. 신구약 중간시대와 초기 기독교시대에 융성했던 묵시문학의 근저에 깔린 생각은 이러한 의미에서 ‘시대의 끝’에 대한 의식이었다. 세계의 파멸을 선포했던 환상가들을 사로잡았던 것은 종말에 대한 어두운 환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로 생각했던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악마적인 제국의 붕괴와 함께 도래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이었다. 구약성서와 유대교 문헌에서 종말론적 사고의 핵심은 하느님 없는 세상에 하느님이 오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약성서 복음서들에서 예수는 임마누엘, 곧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심”, 하느님의 현존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예수 자신은 삶과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 오심의 현실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결국 이 두 번째 ‘끝’에 대한 이야기는 ‘희망’에 관한 것이다.

_ 「들어가며 : 나와 성서」 중에서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박경미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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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성서신학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신약성서학 교수이다.

저서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 요한공동체의 문학과 신학』(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행복하여라 하느님 나라의 사람들』(한울)
『신약성서, 새로운 삶이 희망을 전하다』(사계절)
『시대의 끝에서』(한티재)
『마몬의 시대, 생명이 논리』(녹색평론사)

역서
『요한복음 요한서신』(대한기독교서회)
『말씀을 믿다: 요한복음서 1-4장을 읽다』(대한기독교서회)
『서기관들의 반란』(한국기독교연구소)
『갈릴리: 예수와 랍비들의 사회적 맥락』(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생태학적 치유』(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접기
최근작 : <성서, 퀴어를 옹호하다>,<행복하여라! 하느님 나라의 사람들>,<시대의 끝에서> … 총 29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성서와 역사, 현재의 대화
시대의 끝,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

2016년 10월 19일, 이화여대 본관 앞에서는 이 학교 교수들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학생과 교수들이 요구해 왔던 대로 최경희 전 총장이 마침내 사퇴를 선언함에 따라, 80일 넘게 농성을 이어 온 학생들의 노고를 격려하면서, 학생들의 안위 보장과 비리 규명 등 후속 과제 해결을 촉구하고 다짐하는 자리였다. ‘이대 개교 이래 최초의 교수 시위’라고 언론에서 보도했지만, 여러모로 이날 기자회견은 뜻깊은 장면이었다.

이 기자회견에서 박경미 기독교학과 교수는 “박근혜 정권의 가장 추악한 부분과 추잡하게 결탁한 최경희 총장이 사퇴 의사를 밝혔지만 여전히 비리 의혹들이 남아 있다”고 규탄했다. 박 교수는 “교수들이 눈을 똑바로 뜨고 박근혜 정권과 최경희 총장,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해왔는지 볼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박 교수의 발언 내용처럼, 그 후로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왔는지를 밝히고, 정의와 민주주의를 바로세우기 위한 역사의 물결에 합류하게 되었다. 천만 명이 넘게 참여한 ‘촛불 시민혁명’과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 국정농단 헌정유린 세력에 대한 심판으로 이어진 거대한 물결, 그리고 대통령 선거와 정권교체를 거치며 그 물결은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자는 열망으로 우리 사회를 출렁이게 하고 있다.

그 격랑 앞에서, 신약성서학자인 박경미 교수는 오랫동안 자신이 연구해 온 성서를 역사의 물결에 비추어 다시 읽고, ‘시대의 끝’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이 책 『시대의 끝에서』는 성서와 역사, 그리고 현재의 깊은 대화이며, 시대의 운명을 염려해 온 실천적인 학자의 이야기이다.

이 책에서 독자들이 다시 만나는 구약과 신약의 시대, 인물과 사건들은 박경미 교수의 탁월한 이야기를 통해 바로 지금 이 시대 우리의 모습,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과제들로 되살아난다. 그 과제들은 비단 당면한 정치적·경제적 위기만이 아니다.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사실은 근본적으로 우리 삶의 토대를 위협하고 있는 문명의 위기, 인류 생존의 위기에 대한 성찰과 극복으로 나아간다. 위기에 대한 직시와 성찰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저자가 성서와 역사의 대화로 독자들을 초대하여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이 용기와 희망에 관한 것이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저자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논문’을 발표하는 학자의 음성이 아니라, 마치 유장한 서사시를 읊는 시인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주제의 장중함과 어우러지는 문학적인 문체가 이 책의 매력을 드높인다.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