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1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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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15장 滅不滅을 초월하는 至上 자아
작성자 바보새 16-01-29 02:13 조회9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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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滅不滅을 초월하는 至上 자아
 
 
 
 
13장에서 크리슈나는 몸과 영혼(아트만)에 대한 이치와, 겸하여 삼캬론에서 말하는 그와 비슷한 프라크리티와 푸루샤의 차이를 설명했고, 14장에서는 세 가지 구나(性)의 결과로 인하여 각 개인의 천성에는 서로 차이가 생긴다는 것을 말하고 난 다음, 그러므로 선성의 사람, 동성의 사람, 암성의 사람이 각각 종국에 가서 어떤 지경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말했다. 그는 3 성초월(三性超越, trigunatita)이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삼캬론에 의한 브라마의 경지는 어떤 것이며, 그리고 그러한 경지에는 어떤 방법에 의해서 도달되는 것이냐 하는 것을 설명했다. 그 모든 설명이 다 삼캬론의 말로 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것은 삼캬론의 이원론을 받아들이면서 한 것은 아니다. 프라크리티와 푸루샤가 다 그이의 나타남인, 유일의 파라메슈바라의 영적, 또는 경험적 지식으로 그것을 한다. 이러한 파라메슈바라의 형상에 대한 설명뿐 아니라 거기 더하여서 그는 또 제 8장에서 아지 야즈나(adhiyajna)와 아쟈트마(akhyatma)와 아지다이바타(adhidaivata) 등의 차이를 말씀했고, 또 만유를 꿰뚫는 유일의 파라 메슈바라가 계신다는 것, 그러면서도 그는 또 몸 안에 와 계시는 아트만이시기도 하다는 것을 말했다. 이제 여기서 크리슈나는 왜 어찌해서 파라에슈바라로부터 우주적 전개가 창조되었느냐, 혹은 다른 말로 한다면 이름과 형상에 의한 파라메슈바라의 흩어짐(擴散)은 왜 있게 됐느냐 하는 것을 한참동안 하나의 나무, 혹은 숲에 비하면서 그려내고는, 나중에 그들 절대의 나(絕對我, Purushottama)로 그린다. 그것이 곧 파라메슈바라의 최고의 형상이다. ―틸라크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1. 불멸의 보리수는 그 뿌리를 위에 두고 그 가지를 아래 두고 있다고 한다. 그 잎은 베다의 노래요, 그것을 아는 이는 베다를 아는 이니라.
“뿌리를 위에 두고 가지를 아래에 두는 이 세계의 나무는 영원한 것이다.”(「Katha UP.」) 산사라브리크샤(sansaravriksha), 곧 우주의 나무다. 「마하바라타」는 우주진화를 하나의 나무에 비하면서 그것은 위대한 지식의 검(jnanena paramasina)으로만 찍어낼 수 있다고 한다. 그 나무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 뿌리를 위에다 두었다 한 것이고, 그것이 세계로 뻗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가지를 아래로 두었다고 한다. 이 세계는 초월해 있는 이와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생명체다. 옛날의 신앙에 의하면, 이 세계는 베다에서 하는 희생의 바침으로 유지되어간다. 그래서 그 잎을 베다의 노래라고 했다. 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살려가는 것은 잎이기 때문이다.「리그베다」1,2,4, 7을 보라.
그리고 다른 데에는 “이 우주의 나무를 만든 것은 나다”(「Taittiriya UP.」1, 10)라고 했으며, 또 다른 데에서는 우리 몸은 흙에서 난 것이고 혼은 하늘에서 왔다고 했다. “나는 땅과 별이 돋는 하늘의 아들이지만, 내 종족은 하늘에서만 온 것이다.”(Petelia orphic tablet)
플라톤(「Timaios」)을 보면, “우리 영혼의 가장 존귀한 부분에 대하여 말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는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귀한 영혼을 넣어주셨다. 그것이 우리 몸의 가장 위인 정수리에 있어서 우리를 땅에서 들어 올려 하늘에 있는 우리 동족에게로 향하게 한다. 우리는 땅에 속한 것이 아니요 하늘에 속한 나무이기 때문이다. ―라다크리슈난
보리수 즉 아슈바타(ashvatta), 슈바타는 내일이라는 뜻, 아슈바타라면 내일까지 가지도 못한다는 말. 이 감각의 세계는 아주 덧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언제나 흔들리는 덧없는 것이지만, 그 뿌리는 브라만이기 때문에 불멸이다. 그것을 보호하고 지지해주는 것이 베다의 잎, 곧 다르마다. 감각의 세계는 그런 것인 줄을 알고 또 다르마를 아는 사람이 참으로 아는 이, 곧 베다를 아는 사람이다. ―간디
이 아슈바타를 대개는 인도 말로 피팔(peepal) 나무로 해석하는데 또 어떤 책에는 반얀(banyan) 나무라고 한 데도 있다. 반얀나무란 가지가 어느 정도 자라면 그 가지에서 뿌리가 내려서 하나의 나무가 되고 또 뿌리가 내리고 해서 나중에는 숲이 되고 마는데, 아마 이렇게 뿌리가 위에서 아래로 내리기 때문에 이것으로 번역한 듯하지만, 그 비유하는 전체의 의도로 보나, 또 그 나무의 생긴 당당한 모습으로 보나 피팔나무로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피팔은 한문으로 된 문헌에도 필발나수(畢鉢羅樹)라고 음으로 번역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석가모니가 그 밑에서 도를 깨달았다고 해서 각수(覺樹) 혹은 도수(道樹)라고도 번역되는데. 불교가 퍼진 이후부터 흔히 보리수(菩提樹)로 불린다. 보리는 옳게 발음하면 ‘보디’ 라 해야 할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보리로 발음해온다.
피팔나무는 우리나라에서 한다면 느티나무와 성질이 비슷해서 크게 자라고 가지가 넓게 퍼져 그 밑에서 쉬고 명상하기에 좋다. 간디가 가장 오래 있었던 세바그람 아슈람에 가면 그 뜰에 간디가 손수 심었다는 피팔나무가 한 그루 있다. 1971년 내가 가봤을 때 이미 아름이 넘었다. 저녁 다섯시가 되면 그 아슈람에 있는 수도자들이 간디의 생시에 하던 대로 나와 맨땅에 모여 앉아 예배를 드리는데 맨 앞에 전에 간디가 앉던 자리에는 방석을 하나 놓아서 보이지는 않으나 그가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자리 뒤에는 조그만 칠판 같은 것을 세워놓았는데, 거기에는 “예배하기에 가장 적당한곳은 큰 성당이나 절 같은 데가 아니라, 활짝 열린 바깥, 그중에서도 특히 큰 나무 밑이다. 그래야 가난하고 낮은 사람들이라도 다 마음 놓고 올 수가 있다”는 간디의 말이 씌어 있었다.
장자가 슬슬 거닒(道遙遊)을 했다고 하는 큰 저(樗)라는 나무도 그런 나무였을까? 아담 부부가 낙제를 했던 그 나무도 역시 그 우주의 나무가 아닐까? ―함석헌
 
2. 아래로 위로 그 가지는 벋고, 바탈에 의해 그 진액을 받고 감각의 대상에 의해 그 순을 내며, 그 뿌리가 아래로 서리어 인간 세상의 짓에 얽힌다.
바탈 구나, 3성.
순 잔가지, 싹(芽)
짓 카르마, 업. 작위(作爲).
샹카라의 주석에는 아래로 서리는 뿌리는 전생의 행동의 결과로서 혼이 가지고 있는 바사나(vasana,욕망)라고 했다. —라다크리슈난
이것은 깨닫지 못한 마음들이 보는 감각세계의 나무의 모양을 그린 것이다. 그들은 위로 브라만 속에 있는 그 뿌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감각의 대상에 애착하게 된다. 그리고 세 구나로 그 나무에 물을 주며 속세의 카르마에 얽매어 있게 된다. ―간디
아슈바타 나무의 뿌리가 위에 있고 가지가 아래 있다는 것이「카다 우파니샤드」에 나와 있는데, 그것을 ‘영원한 불멸의 브라만’ 이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언제나 덧없는(可滅) 그러면서도 그 덧없음에서 영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아슈바타는 틸라크가 결정적으로 단정한 대로 피쿠스 텔리지오나(ficus religiona), 혹은 피팔나무다. 그 뿌리, 즉, 원초적인 씨는 브라만인데, 시적으로 표현해서 ‘위’ 라 했고, 그 무성하게 퍼진 가지는 환하게 우리 눈앞에, 아랫세상에 있다. 그러나 2절에서 그 뿌리가 아래 있다고 한 것은 이 죽을 인생들은 언제나 그 정말 뿌리는 잊어버리고 세상적인 뿌리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한 말이다. 가지가 위로 아래로 퍼졌다고 한 것은, 행동은 과거 행동의 결과로 되는 것인데 그것이 또 행동으로 나타나서, 나서는 죽고, 죽어서는 또 나는 끊임없는 반복을 보여 주고 있다. 힐(Hill)이 “피팔나무는 새 뿌리를 박기 위해 기근(氣根)을 내지는 않는다”고 한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것도 자라서 노목이 되면 한다. 라나데(Ranade) 교수는 그의 우파니샤드 철학 연구에서 칼라일의「영웅숭배론」속의 명문을 빌어서 아슈바타 나무를 스칸디나비아 신화의 익드라실나무(tree igdrasil)에 비교하고 있다. “그 가지는 그 움틈과 잎 떨어짐으로—사건들, 겪었던 일들, 이루어진 일들, 재난들—모든 나라와 시대로 뻗어나가고 있다. 그 한 잎새마다가 한 인물의 전기 아닌 것이 있으며, 그 한 엽맥에 한 행동이나 말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있는가? 그 가지는 민족들의 역사요, 그 설렁거리는 잎소리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는 인간 생존의 소리다. 인간 심정의 숨소리가 설렁거리며 자라고 있다. 이것은 익드라실, 존재의 나무다. 이것은 과거요, 현재요, 미래다. 된 것이요, 되고 있는 것이요 될 것이다. 한다는 동사(do)의 무한한 연결이다.” 라나데 교수는 한 가지 중요한 반대되는 점에 주의를 하고 있다. 즉, 익드라실은 그 뿌리를 헬라(Hela) 곧 죽음의 나라에 깊이 박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는 2절의 말씀을 잊고 있는 듯하다. 거기서는 뿌리들이—1절에서와 같이 그 뿌리가 아니고—아래로 서리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비교는 학식 많은 교수가 했던 것보다 도리어 더 가깝게, 더 교훈적이 된다. 한다는 동사의 연결이란 것은 영원한 카르마(業)의 얽어맴이다. 혹은 다른 말로 한다면 끝없이 되풀이되는 죽음이다. 간디가 15장 2절에서 설명한 것같이, 사람이 만일 눈을 떠서 위에 있는 불멸의 뿌리를, 그것이 곧 죽음 없는 지경인데, 그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12장 7절을 보라. 거기는 산사라(sansara, 나고 죽음을 되풀이하는 세상)가 곧 죽음이라고 되어 있다. ―마하데브 데자이
모든 주석가들의 말이 아슈바타나무가 ‘산사라’ 곧 감각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데서는 일치하나, 그 자세한 해석에서는 제각기 다르다. 샹카라는 뿌리는 브라만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위에’ 있다고 했고, 가지는 삼캬론의 타트바(tattva, 25개의 원리)들이므로 현실세계에서 보는 대로 ‘아래’에 있다고 하고, 더 나가서 이 가지들은 “아래에도 위에도” 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산사라’ 안에서는 인간이 중간에 있고 위에는 브라마와 데바(deva)가 있고 아래는 낮은 단계의 생물들이 있기 때문 이다. 그는 또 1절의 물라(mula, 뿌리)와 2절의 물라니(mulani, 뿌리들)를 구별해 말했다. 둘째 것은 제2의 뿌리, 곧 인간세상에서 선악의 행동을 하게 하는 바사나(vasana,욕망)들이기 때문이다. 라마누쟈는 위에 있는 뿌리를 일곱 세계 위에 앉아 계시는 브라마라고 생각하는 이 외에는 샹카라와 한 가지 의견이다. 샹카라는「베다」는, 옳고 끓고를 다루는 의미에 있어서는, 이 세계를 보호하기를 마치 잎이 나무를 보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찬도가 우파니샤드」참조) 그는 마드바(madhva), 슈리다라(Sridhara) 또 그외의 사람들과 한가지로 아슈바타(ashvattha)를 아슈바스타(a-shvah-stha, svo pisthata)에서 끌어내온다. 그 이유는 이 세계는, 비록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 불멸이기는 하지만, 변전무상(變轉無常)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주석가의 해석을 다 보자면 한이 없는 일이다. 톰슨(J.C. Thomson)이 아슈바타를 반얀나무(banyan tree)라고 믿고 그 가지가 아래로 내려와서 새 뿌리가 된다고 한 것은 잘못 알고 한 말이다. 이것은 잘못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왜 특별히 아슈바타나무가 뿌리를 위에 두고 가지를 아래로 뻗는다고 했느냐 하는 것을 설명해보자는 하나의 시험이라고는 할 수 있다. 주석가들이 이 점을 전연 무시하고 있는 것은 주의할 만한 일이다. 다음에서 하려는 말은 완전치는 못하지만 이 나무를 왜 골랐느냐 하는 것을 설명해보려고 하는 말이다.
아슈바타여(ashvattha, 아마도 ashvah-stha, 즉 그 밑에 말들이 서 있는 나무라는 데서 끌어내온 것인 듯한데)는 피쿠스 렐리지오나 혹은 피팔나무인데 인도에서는 누구나 잘 아는 나무요, 힌두교도들이 매우 존경하는 나무다. 이것은 그와 비슷한 나무인 반얀나무처럼 가지에서 기근(氣根)을 내어 땅에 가 닿아 새 뿌리를 박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왜 뿌리를 위에 두고 가지를 아래로 뻗는다고 했을까? 이 나무는 그 자라는 법이 독특해서 뿌리가 다른 나무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무통이 굵게 자람에 따라 그 모양을 전연 볼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그 일부분이 땅 위로 쑥 삐져올라와서 여러 개의 가지를 내어 얼크러지게 되고, 그 여러 개의 뿌리가 제각기 가지와 뿌리를 낸다. 그래서 뿌리와 가지가 서로 구별을 할 수없이 하나로 된다. 그래서 가지가 땅으로 내려왔다고도 할 수 있고, 뿌리가 위로 올라 왔다고도 할 수 있게 된다. 그 구절을 그렇게 해석하면 왜 상징으로 아슈바타를 택했느냐 하는 설명이 될 뿐 아니라 그 비유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럴 때는 ‘위’는 눈에 보이는 이 세계 땅 위란 뜻이고, ‘아래’는 땅밑의 보이지 않는 밑이란 뜻이다. 뿌리와 가지를 하나로 하면 프라크리티이고, 땅 밑은 아뱍타(avyakta) 곧 감각할 수 없는 것. 땅 위는 뱍타(vyakta) 곧 감각할 수 있는 것. 1절의 뿌리와 2절의 뿌리들은 구별할 필요도 없다.—힐
 
3. 여기서는 그 실상을, 그 끝도 시작도 뿌리도 알지 못한다. 먼저 이 꽉 뿌리박힌 아슈바타나무를 날카로운 무집착의 칼로 찍어라.
 
4. 그런 다음 사람이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지경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오직 이 태고 이래의 모든 세계가 그리로 좇아 나오는 그 맨첨의 영이신 분에게만 귀의하기를 원하노라 하면서.
맨첨의 영이신 분 최초의 인간(primal person, primal being, original personality of godhead), 원인 (原人). 원아(原我).
 
5. 오만함이 없고, 헤매임이 없는 사람, 집착에서 오는 사악을 이기고 항상 참 자아에 머물러있어 애욕을 가라앉히고 고락의 상대에서 해방되어 현혹당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불멸의 지경에 이르느니라.
 
6. 해도 달도 불도 비치는 일이 없으며, 한번 들어가면 다시 돌아옴이 없는 곳, 거기가 나의 머무는 가장 높은 곳이다.
 
7. 내 몸의 한 가는 부스러기조차도 생명계에서 한 산 혼이 되어 영원히 있으면서 자연계에 있는 마음까지를 합한 육감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고 있느니라.
가는 부스러기 미립자(particle), 미분(微分), 미진(微塵).
생명 지바(jiva). 유한한 생명.
자연계 자성, 프라크리티.
마음 의식.
육감 빛, 소리, 냄새, 맛, 감촉의 오감과 의식.
이것은 최고의 주재자가 사실로 자기 몸을 가는 티끌로 갈라놓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개인은 최고 주재의 한 운동이요 한 삶(大生命)의 한 초점이다. 자아는 하나의 핵심이어서 자신을 확대하여 온 세계를 안을 수 있고, 마음과 혼을 긴밀하게 통일한다. 실지로 나타나는 그 모양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으나, 개인 영혼의 실상은 거룩하신 이 그대로다. 그러나 인간적인 나타냄은 그것을 온전히 할 수는 없다.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하늘 땅을 연결하는 다리다. 각 개인은 우주 안에서 영원한 의미를 가진다. 그가 자기의 한계성을 벗어날 때 그는 초개인적 절대 속에 녹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이 속에 살게 되는 것이고 우주적인 활동 속에서 하나님의 동참자가 되는 것이다.
샹카라는, 자아는 최고 주재의 한 부분인 것이 마치 항아리 속이나 방 속에 있는 공간이 대우주 공간의 한 부분인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라마누쟈에게서 영혼은 사실로 하나님의 한 부분이다(amsha).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개인 영혼의 실체가 되는 것이고 감관의 종살이를 하게 됨으로 인해 얽어매임을 당한다. ―라다크리슈난
 
8. 몸의 주인이 어떤 몸을 가질 때나 또 그것을 떠날 때는 그것들을 가지고 간다. 마치 바람이 향기를 그 있던 곳에서 걷어 가지고 가듯이.
몸의 주인 이슈바라(Ishvara).
그것들 감각과 의식.
 
9. 그는 귀와 눈과 촉감과 미감과 냄새맡음과 의식에 붙어 있으면서 감각의 대상을 즐긴다.
 
10. 그가 3성(三性)과 짝이 되어 떠나고, 머물고, 즐기고 할 때에 미혹한 자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오직 지혜의 눈을 가진 자만이 그것을 본다.
 
11. 요가를 닦는 사람은 힘쓰면 그가 자기 속에 머물러 계시는 것을 볼 것이니라. 그러나 생각 없고 자아훈련이 되지 못한 사람은 비록 힘쓴다 해도 그를 볼 수 없느니라.
 
12. 저 태양에서 나와 은세계를 비치는 광명, 달에도 있고 불에도 있는 그 광명, 알지어다, 그것은 다 내게서 나온 것이니라.
 
13. 땅에 들어가서는 내 힘으로 만유를 지지하고, 또 감로의 진액이 되어 모든 초목을 내가 기른다.
 
14. 나는 일체몸불이 되어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들 몸속에 있으며, 또 오를숨 내릴숨에 짝해 다니며, 네 가지 식물을 소화시킨다.
일체몸불(ᅳ切人火) 바이슈바나라(vaishvanara), 체온, 생명체의 몸속에 와있는 아그니(Ahni, 火神).
네가지 식물 끽(喫, 마심), 담(噉, 씹어먹음), 지(舐, 할아먹음), 철(啜, 빨아먹음) 곧 모든 음식물.
 
15. 나는 모든 사람의 심장 속에 들어가 있으며 기억과 지식과 잊어버림은(혹은 의심을 쫓아냄, 혹은 결핍은) 내게서 나간다. 또 모든「베다」에서 알려졌어야 할 것은 나요, 실로「베다」의 종국을 지은 것은 나다. 또「베다」를 아는 것도 나다.
 
16. 이 세계에는 두 사람이 있다. 멸과 불열이다. 모든 존재는 멸이요, 변함없는 것이 불멸이다.
 
17. 그러나 그것들 말고 가장 높으신 분이 계신다. 이를 지상의 자아라고 부른다. 그 불멸의 주는 삼계에 들어가 그것을 지지 하신다.
지상(至上)의 자아 파라마트마(paramatma).
 
18. 나는 멸을 초월하며 또 불멸보다 높으므로, 세계에 있어서도「베다」에 있어서도 지상의 자아로 존경을 받는다.
 
19. 바라타의 아들아, 미혹하지 않는 자는 그와 같이 나를 지상의 자아로 앎으로 하여 그는 일체를 아는 사람이요 전존재로써 나를 신봉하는 사람이니라.
 
20. 오, 죄없는 자야, 신비 중에 가장 신비인 이 성전이 나에 의하여 가르쳐졌으니, 바라타의 아들아, 이것을 아는 자는 깨달은 자가 될 것이요, 사람으로서의 의무를 다 완성한 것이 될 것이니라.
깨달은 사람 부디만(buddhiman)이란 말은 여기서는 혹은 부다(buddha), 즈나나(jnana), 인식아(認識我, knower)의 뜻이다.「바라타」(Bharata)에서는 부다라는 단어와 크리타크리차(kritakritya)라는 단어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으로 쓰는 부다라는 말, 즉 “화신으로 태어난 부처님”이라는 의미의 말은「마하바라타」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이 「바가바드기타」라는「우파니샤드」의 제15장 멸(滅) 불멸(不滅)을 초월하는 지상(至上)의 자아의 끝이니 이는 브라만의 지식에서 요가를 가르쳐주는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의 문답이니라.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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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14장 3성분별
작성자 바보새 16-01-29 02:09 조회9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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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3성분별
 
 
 
 
13장에서 몸과 아트만에 대한 설명을 했는데, 먼저는 베단타의 입장 에서 했고, 다음은 다시 삼캬론의 입장에서 했다. 그런데 그러는 가운 데 모든 작용은 프라크리티에서 나오는 것이고, 푸루샤, 즉 크쉐트라즈나(밭알이)는 아무런 감동도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프라크리티의 작용이 어떤 방법으로 계속되어간다는 것은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주는 이 장에서 같은 한 프라크리티에서 어떻게 각종 창조물, 특히 산 피조물들이 창조되었는가를 설명한다. 우리가 만일 인간의 창조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쉐트라, 즉 몸에 관한 문제이므로, 그것은 자연 몸과 아트만에 대한 문제 속에 포함되어버린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세계도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는 프라크리티의 한 발전이기 때문에 프라크리티의 구성요소들간의 서로 다른 차이에 대한 설명은 또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설명의 한 부분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거룩하신 주는, 몸과 아트만에 대한 설명이라는 국한된 논술을 버리고, 아르쥬나에게, 나아가서 즈나나(영적 지식)와 비즈나나(경험적 지식)에 대한 설명을 해 주겠다는 말로 이 장을 시작한다. 즈나나 비즈나나의 문제는 그가 이미 제7장에서 시작한 것이다. 이 프라크리티의 세 요소의 전개에 대한 설명은「아누기타」(anugita)와「마누 스므리티」(Manu-smriti) 제 12장에도 나와 있다. —틸라크
이 14장과 자연의 성격에 대한 세 가지 등분의 설명을 보면 30년 전에 내가 읽었던 헨리 드럼먼드(Heny Drummond)의 저작물(The Natural Law in the Spiritual World) 생각이 난다. 원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세 제목으로 갈라놓았다. 14 장은 인간이 속해 있는 원리를 설명해주는 것이고 15장은 푸루쇼타마(purushottama) 즉 완전한 인간에 대한 설명이다.
인간의 향상이란 것이 이 장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제목이다. 이 사트바(善性), 라쟈스(動性), 타마스(暗性)의 세 성 중에 어떤 사람도 그중 하나만이 독점적으로 주장함을 받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누구나 다 힘써서 주로 선성의 원리가 주장하고 있는 지경에 올라가도록 하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 셋을 초월하여 완전한 인간에 이르러야 한다. 물질계에서 한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 가령 말한다면, 물이다. 물이 고체로 있을 때에는 땅 위에서 공중으로 올라갈 수가 없다. 그러나 증기가 되어 희박해지면 올라간다. 마침내 공중에 올라가면 구름으로 변하고 비로 되어 땅에 떨어진다. 그러면 열매를 맺게 하여 땅에 복을 준다. 사람은 모두 물과 같다. 우리는 다 노력하여 우리 자신을 증발시킴으로써 우리 속에 있는 사사로운 나를 없애버리고 무한에 들어 모든 것에 대한 영원한 선(善)이 되어야 한다. —간디(「청년 인도」12~1,1928)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1. 내가 다시 지식 중의 지식인 최고 지상의 지식을 말하리라. 그것을 앎으로써 모든 성인들이 이 세상으로부터 최고의 완전에 이르렀느니라.
 
2. 이 지식에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나와 같은 성격에 이르러, 창조 때에도 다시 나는 일이 없고 풀어져 꺼지는 때에도 흔들림이 없느니라.
의지 우파슈리챠(upashritya), 의지(依止), 은신함(take shelter)
힌두교의 신앙에서는 우주 만물이 제 때가 오면 창조되었다가 또 제때가 오면 풀어져 없어져서, 그것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인생에 고뇌가 있는 것은 전생의 업(業) 때문이므로 이 생에서 해탈을 얻어 다시 이 고뇌의 생사유전의 길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인생의 이상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형언할 수 없는 절대 속에 녹아버리는 일이 아니라, 경험적인 활동을 초월한 정신의 보편성과 자유에 도달하는 일이다. 그 자격은 창조와 소멸의 윤희과정의 영향을 조금도 받는 일이 없다. 모든 형상의 지경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영혼은 점점 자라 거룩하신 이를 닮아 영원불변의 성격을 갖게 되고, 가지가지의 우주적 형태를 스스로 취하는 최고의 주재자에 대한 영원한 의식을 가진다. 그것은 수바루파타(svarupata) 즉 동일성이 아니고 사마나쟈르마타(samanadharmata) 즉 평등의 상사성(相似性)이다. 그는 자기가 찾는 이와 같은 성격이 되어 사드리샤묵티(sadrisyamukti)에 이른다. 그는 자기의 외적 의식과 생활에 신성(神性)을 실현한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완전하심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마태복음」4: 48)를 보라. 샴카라의 견해는 이와는 다르다. 그는 사쟈르먀(sadharmya)는 성격의 동일을 의미하는 것이지 속성의 동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라다크리슈난
이것은 하나의 서론이다. 이제 크리슈나는 우선 첫째로 프라크리티는 자기의 여러 가지 형상 중의 오직 한 나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함으로써 삼캬론의 이원론을 제쳐 버리고, 그리고는(베단타와 충돌됨이 없이) 이 세계의 모든 인식할 수 있는 물체가 이 프라크리티의 요소로 인해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틸라크
 
3. 바라타의 왕자야, 저 큰 브라마는 나를 위한 탯집이다. 내가 그 속에 종자를 넣어주면 그로부터 모든 산 것들이 나오느니라.
브라마(brahma) 프라크리티.
우리가 만일 단순한 자연의 산물만이라면 영원한 생명에 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절은 이 세상 모든 존재가 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란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 는 우주의 씨다. 이 세계에 대해서는 그는 히라냐가르바(hiranyagarbha) 곧 우주의 혼이다. 샹카라는 말하기를 “내가 밭(크쉐트라)과 밭알이(크쉐트라즈나)를 결합시켜 히라냐가르바를 낳게 하고, 그로부터 모든 만물이 나온다. 주께서 ‘아버지’시고, 그가 자아 아닌 탯집 속에 생명의 짬인 종자를 넣어서, 모든 개체의 출생을 일으키신다. 이 세계는 무한이 유한 위에 노시는 놀음이다. (11장 12절에 대한 주석 참조) 저자는 여기서 창조를 안 있음, 곧 혼돈, 혹은 밤으로부터 형상이 전개되어 나오는 것으로 보는 설명을 채용하고 있다. 캄캄한 깊음 속에서 일어나 나오는 만물의 형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뽑아낸 것이다. 그것들은 ‘그’가 안 있음 속에 던진 종자들이다. —라다크리슈난
맨첨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었는데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지어졌고. 지어진 것 중에 그가 없이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는데,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복음」(1:1)
그러므로 도(道)가 내고, 치고, 키우고, 기르고, 튼튼케 하고, 여물게 하고, 먹이고, 덮어준다. 내고도 가지지 않고, 하고도 믿지 않고, 어른 되고도 쥐고 놀려 않으니, 이를 일러 까만 속이라 한다. (道生之畜之長 之育之 亭之毒之養之覆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노자
 
4. 쿤티의 아들아, 어떤 탯집에서 어떤 형상이 되어나왔든간, 그 ‘큰 브라마’가 그것들의 탯집이요, 내가 그 씨를 넣어 주는 ‘아버지’이니라.
모든 산 것들의 어머니는 프라크리티요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또 프라크리티는 하나님의 본성이므로, 하나님은 우주의 아버지요 또 어머니다. ‘그’는 우주의 씨요 또 탯집이다. 이런 관념이 어떤 예배형식에 이용 되는 일이 있으므로 근대의 어떤 청교도들은 그것을 음탕한 생식기 숭배라고 비웃는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 생명에 수정(受精)을 시켜서 그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되게 한다.
‘지극히 높으신 이’ 는 세계의 ‘생식적인 이유’ (seminal reason)이시다. 모든 존재는 물질이 말씀의 정자(logoi spermatikoi) 즉, 생명 주시는 영으로 수정됨에 의하여 임신된 결과로 인하여 나온다. 그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 세계에서 자기의 일을 이룬다. 이 말씀의 씨는 거친 물질세계를 형성시키는 이상적인 형상이다. 이 이상, 즉 장차 있게 될 것들의 모형은 다 하나님 안에 있다. 온갖 나타남의 가능성은 그 근거를 거기 대응하는 안 나타남의 가능성 속에 둔다. 그 안에서 그것은 자체의 영원한 원인으로 존재해 있고, 거기 대하여서 나타남은 하나의 탄력성 있는 확증이 된다. 하나님은 창조의 세세한 것까지를 포함한 영원한 전망을 가지신다. 그런데 대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게서는 이상과 물질은 이원론적으로 생각되고 있어서 오묘한 이상의 세계와 조잡한 물질세계와의 두 관계에 대한 이해가 곤란한 반면,「기타」에서는 그 둘이 다 같이 ‘거룩하신 이’ 밑에 속해 있다고 한다. 하나님 자신이 그 이상의 정자를 이 거친 세계 속에 화신(化身)으로 나타내신다. 이 하나님께로 조차 나오는 이상의 정자들은 모든 것의 근원되는 ‘말씀’ (logos)에 속하는 것들인데, 그것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설명이 된다.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우리 인간성에 대하여 초월적이나, 또 다른 한편 영혼 속에서는 거룩하신 이의 직접적인 표현이 된다. 우주의 흘러감은 기원인 알파와 종국의 완성인 오메가가 일치하게 되는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건의 길이 사내 되고 곤의 길이 계집 되니 건이 큰 비롯을 알고 곤이 몬을 지어 이루느니라(乾道成男 坤道成女 乾知大始 坤作成物). —「주역」
건을 아비라 일컫고 곤을 어미라 일컫는다. 내 이에 아득한 것으로 왼통 섞이어 그 가운데 있으니, 그러므로 하늘 땅에 찬 것이 내 그 몸이요, 하늘 땅의 머리 된 것이 내 그 바탈이라, 씨은 내 한배요, 몬은 내 더불어다. 임금은 내 부모의 맏아들이요, 그 대신은 맏아들의 가상(家相)이다. 나 많은 이를 높임은 그 어른을 어른으로 하는 바요, 어린이를 헤가림(慈)은 내 어린이를 어린이로 함이다. 거룩한 이는 그 덕을 합한 이요 어진 이는 그 빼어난 이며, 무릇 천하의 지치고 병들고 불구 되고 시름에 빠지고 의롭고 홀아비 되고 과부 된 것들은 다 내 형제의 엎어져 일어나지 못하며 어디 말할 데도 없는 것들이다.(乾稱父 坤稱母 予兹藐焉 乃混然中處 故天地之塞吾其體 天地之帥吾其性 民吾同胞物吾與也 大君者吾父母宗子 其大臣宗子之家相也 尊高年所以長其長 慈孤弱所以幼吾幼 聖其合德 賢其秀也 凡天下疫癃殘疾 惸獨鰥寡 皆吾兄弟顚連而無告也) ᅳ장재 (西銘)
 
5. 억센 팔을 가진 자야, 사트바, 라쟈스, 타마스는 프라크리티에서 나오는 특성으로서, 그것이 그 불멸의 거주자를 이 몸 속에 묶어두느니라.
불멸의 거주자 아바야(avyaya), 우리의 자아. 아트만이 몸을 집으로 삼고 있다는 뜻에서 하는 말.
불멸의 영혼을 이끌어 생사의 돌아가는 바퀴에 나타나게 하는 것은 구나(gunas), 혹은 무드(mood)의 힘이다. 그것은 “자연의 원초적인 구성 요소요, 모든 물질의 기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물질 속에 내재하는 성격이라고 할 수는 없다(아난다기리의 말). 그것을 구나라 부르는 것은 그 나타나는 것이 언제나 삼캬론의 푸루샤 혹은「기타」의 크쉐트라즈나(밭알이) 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구나는 프라크리티의 세 경향 혹은 성질의 꾀어 있는 삼겹노끈의 세 가다리다. 사트바(sattva)는 의식의 빛을 반사하는 것으로서 그것의 비쳐줌을 받고 있고, 그러기 때문에 방사(prakasa)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라쟈스(rajas)는 밖으로 향한 운동(pravrtti)을 가지고 있고, 타마스(tamas)는 타성(inertiaapravrtti)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부주의, 무관심(pramada)하다. 사트바, 라쟈스, 타마스를 영어로 꼭 맞게 옮기기는 어렵다. 사트바는 완전한 정결(淨潔)과 광휘 (光輝)요, 라쟈스는 불순(impurity)이므로 활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고, 타마스는 어둠이요 게으름이다.「기타」에서는 구나들을 주로 도덕적으로 적용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사트바를 선성(善性)이라 하고, 라쟈스를 열성(熱性)이라 하고, 타마스를 둔성(鈍性) 이라 한다.
우주의 삼위일체는 이 세 성의 어느 하나가 주장이 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보존자인 비슈누에는 선성이, 창조자인 브라마에는 열성(혹은 동성)이, 파괴자인 시바에는 둔성(혹은 암성)이 주장이 된다. 선성은 우주의 안고(安固)를 차지하고 동성은 그 창조적 운동을 돕고, 타마스는 모든 것의 무너지고 죽는 경향을 나타낸다. 그것들은 각각 이 세계의 계속과 기원과 분해의 이유가 된다. 구나들을 인격적인 하나님의 세 면에 적용해 본다면 그 세면은 객관적 혹은 현상의 세계에 속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 속에서 분투하시고 있고, 하나님 닮은 영혼들은 이 구속사업에 ‘그’ 와 협력하고 있다.
영혼이 자신을 자연의 성격과 한가지인 것으로 알 때 그 자신의 영원성을 잊고 마음과 생명과 몸을 다 이기적인 자기만족을 위해 써버리고 만다. 그 얽매임을 벗어버리려면, 자연의 성격을 초월하여 트리구나티타(trigunatita, 三性초월)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자유롭고 썩지 않는 영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사트바는 승화되어 의식의 빛, 즉 죠티(jyotih,直觀)에 들어가게 되고, 라쟈스는 고행, 즉 타파스(tapas)에, 그리고 타마스는 평정 혹은 안식, 즉 샨티(shanti)에 들어가게 된다. —라다크리슈난
 
6. 그중에 선성은 청정함으로 하여 광명을 주고 건강을 준다. 오, 흠없는 자야, 이것은 즐거움의 집착과 지식의 집착으로 얽어매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낮은 지적인 지식이다.
선성이 사람의 이기적인 자아의식을 제거해주지는 못한다. 그리고, 비록 고상한 것에 대한 것이기는 하지만, 욕망을 일으켜준다. 모든 것에 대해 애착이 없는 자아도 여기서는 즐거움과 지식에 애착한다. 이기적인 자아의식을 가지고 생각하고 의지하기를 그치지 않는 한, 우리는 해탈된 것이 아니다. 즈나나 혹은 지식은 부디에 관계되어 있는데 그 부디는 프라크리티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트만의 본질인 순수의식과는 구별 되어야 한다. —라다크리슈난
사람을 아는 이는 슬기롭고, 스스로를 아는 이는 밝으니라(知人者智 自知自明). —노자
 
7. 동성은, 너 알라, 달라붙는 성질이니라. 애욕과 애착에서 나오느니라. 쿤티의 아들아, 이것은 활동의 집착으로 몸에 머무는 이를 얽어매느니라.
몸에 머무는 이 데히나(dehina), 주신자(住身者),몸의 거주자(body's tenant), 자아, 아트만.
아난다기리는, “자아가 그 대행자는 아니지만, 라쟈스는 ‘내가 그 하는 이다’ 하는 생각으로 그를 움직여 활동하게 한다”고 한다. —라다크리슈난
 
8. 그러나 암성은, 너 알라, 무지에서 나와, 몸에 머문 모든 이를 매혹시키느니라. 바라타족의 아들아, 이것은 멍청함과 게으름과, 잠으로 얽어매느니라.
멍청 프라마다(pramada), 태만.
게으름 알라샤(alasya), 유타(遊惰)
 
9. 선성은 행복에 집착하고, 동성은 활동에 집착한다. 그러나 바라타족의 아들아, 암성은 지식을 가려 멍청에 매이게 하느니라.
 
10. 바라타족의 아들아, 선성이, 동성과 암성을 압도하면, 그것이 우세해지고 동성이, 선성 암성을 압도하면, 그것이 우세해지고, 또 그와 마찬가지로 암성이 선성 동성을 압도하고 우세해지기도 한다.
3성은 어떤 사람 속에도 다 있다. 다만 그 정도가 서로 다를 뿐이다. 어떤 사람도 그것이 전연 없을 수는 없고, 사람마다 다 이것이거나 저것이거나 그 어느 하나가 우세하다. 그 우세하는 성에 따라, 선성적인 사람, 동성적인 사람, 암성적인 사람이 된다. 생리학에서 체액설(體液說)이 한창 지배적이었을 때, 사람을 다혈질, 담즙질, 지둔질(遲鈍質), 신경질로 나누었다. 체액 중 어느 것이 우세하냐 하는 것에 따라서 한 구분이었다. 힌두교의 배열은 정신적 특징을 보아서 한 것이다. 선성적인 성격은 빛과 지식을 목적하고, 동성적인 성격은 불안정적이어서 외적인 것에 대한 욕망이 강하다. 선성적 성격자의 활동은 자유롭고 고요하고 무사(無私)한데 반해 동성적인 성격자는 줄곧 활동하며 가만 앉아 있지 못하며, 그 활동은 이기적 욕망에 물이 들어 있다. 암성적 성격은 우둔하고 게으르다. 그 마음은 어둡고 어지러우며 그 생애 전체가 환경에 대한 하나의 계속적인 굴복이다. —라다크리슈난
 
11. 광명이 (지식이) 이 몸의 모든 문으로부터 발사되어나올 때는 선성이 더해진 줄로 알 것이니라.
지식의 빛은 완전히 생리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의식의 참은 물질적 표현에 반대되는 것 아니다. 신성(神性)은 육체적인 분야에서 실현될 수 있다. 인간의 의식을 성화(聖化)하는 것, 빛을 신체 속에 끌어들이는 것, 우리의 생활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요가의 목적이다. 우리 마음이 빛을 발하고 감각이 민첩해지면, 그때는 선성이 우세한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꼴과 빛은 하늘 바탈이다. 성인인 다음에야 제 꼴을 밟을 수 있느니라. (形色天性也 聖人然後可以踐形) —맹자
 
12. 바라타족 중의 으뜸가는 자야, 탐욕과 활동과 사업의 계획과 불안정과 애욕, 이것은 다 동성이 늘어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니라.
생활과 그 쾌락을 열심으로 추구하는 것은 동성이 왕성한 데서 오는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니라. —예수
그 즐기는 욕심이 깊은 사람은 하늘이 준 영적 힘이 옅으니라(其嗜欲深者 其天機淺). —장자
 
13. 쿠루족의 아들아, 밝지 못하고, 활동도 없고, 게으르고, 헤매이고, 이것은 암성이 늘어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니라.
 
14. 몸에 머무는 이가 선성이 왕성할 때에 환멸을 당하면, 그는 ‘가장 높은 것’을 아는 성자들이 도달하는 세계에 갈 것이니라.
환멸(還滅) 프랄라야(pralaya), 죽는 순간.
그들은 해탈을 얻은 것이 아니고 다만 브라마로카(brahmaloka)에 태어난 것이다. 해탈되는 조건은 니슈트라이구냐(nishtraigunya) 즉 3 성의 초월이다. —라다크리슈난
“ ‘가장 높은 것’ 을 아는 사람들이 도달하는 정결한 세계.” 이 뜻이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다. 지극히 높은 것을 아는 사람은 자아를 깨달은 사람 혹은 즈나니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시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시 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지극히 높은 것은 마하트(mahat)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 설명이 필요한 말이다! 틸라크는 ‘신들의 세계’ 라 했고, 비데 샤스트리(Bhide Shastri)는 “사차로카(), 박쿤다(), 카일라사()......”라 했고 비노바()는 전혀 새로운 말을 끄집어냈는데 그것이 본문에 들어맞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무후(無垢)한 세계에 나서 즈나니(jnani)들과 같이 있다” 한다. 이에 대한 해설은 아마도 다음 절에 있는 카르마상기슈(karmasangishu)라는 단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만일 동성의 사람들이 카르마에 집착하는 사람들 속에 난다면, 선성의 사람들은 즈나나에 집착하는 사람 즉 지식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 속에 날것이다. 내 생각에는 아마 그러한 논법이 비노바로 하여금 그 절을 그렇게 번역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므로 그의 번역을 취한다. —마하데브 데자이
 
15. 동성이 성할 때에 환멸을 당하면 그는 활동에 집착하는 자들 속에 날 것이고, 마찬가지로 암성이 성할 때에 환멸을 당하면 미혹의 태속에 날 것이니라.
 
16. 선행의 열매는 선성적이어서 정결하나, 동성의 열매는 괴롬이요, 암성의 열매는 무지니라.
 
17. 선성에서는 지식이 나오고, 동성에서는 욕심이 나오고, 암성에서는 게으름, 헤매임이 나오고 또한 무지가 나오느니라.
 
18. 선성에 머무는 이는 위로 올라가고, 동성적인 이는 중간에 머물고, 암성적인 이는 가장 낮은 특성의 영향을 입어 아래 로 내려가느니라.
최고의 이상은 도덕의 지경을 초월해 영계에 올라가는 일이다. 선한사람(satvika)은 반드시 성자(trigunatita)에 이르러야 한다. 이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우리는 아직도 되어가는 도중이다. 우리의 진화는 아직 미완성이다. —라다크리슈난
높은 선비는 도를 듣고 부지런히 행하고, 가운데 선비는 도를 듣고 있는 듯 없는 듯하고, 낮은 선비는 도를 듣고 크게 웃는다. 웃지 않으면 족히 도로 삼을 수 없다.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 不足以爲道) —노자
 
19. 보는 이가 구나(性)밖에 다른 작용자가 없음을 알고, 또 구나를 초월하는 자를 알면, 그는 나의 바탈에 이르느니라.
보는 이 식자(識者, seer).
사람이 자기는 하는 자(doer)가 아니고 구나가 있어서 모든 것을 하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자아는 없어진다. 그리고 그는 자기 하는 모든 행동을 자발적으로 통과하여, 단순히 제 몸을 지지하게 된다. 그리고 몸은 가장 고귀한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모든 행동은 떠나 있어 애착이 없음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한 보는 자는 구나를 초월하는 ‘그이’ 의 모습에 능히 눈을 떠 그를 믿게 된다. —간디
안회(顔回)가 “감히 묻잡니다. 마음씻기(心齋)란 무엇입니까” 한다. 중니(仲尼)가 “네 뜻을 하나로 하여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으며,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운으로 들어라. 들음은 귀에 그치는 것이고, 마음은 가져다 맞추는 쪽(符)에 그치느니라. 기운이란 비어가지고 물건을 대하는 것이다. 도는 오직 비임에 모인다. 비게 함이 마음씻음이니라”고 답한다. 안회가 “제가 처음에 그렇게 시켜주심을 얻지 못했을 때 정말 스스로 회(回)이옵더니, 시켜주심을 얻고 나니 비로소 회란 것이 있지 않습니다. 이러면 비임이라 할 만하옵니까.” 스승이 됐다” 하였다. — 장자
그럴 때 자기와 브라만이 하나인 것이 환해진다. —아난다가리
 
20. 몸에 머무는 이가 몸이 거기서부터 일어나는 그 세 구나를 초월할 때, 그는 남, 늙음,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에 이르느니라.
간디는 데하사무드바반(dehasamudbhavan)을 “그것은 몸과의 접촉에서 나온 것”이라고 번역했다. 힐도 이 합성된 낱말을 같은 식으로 설명하면서, “그것은 자아와 관련하여서 존재한다. 몸 속에 태어나 있기 때문이다” 했다. 여러 주석가들이 샹카라를 따르고 있는데 그는 “그것은 몸이 거기로 쫓아 나오는 씨다” 했다. 나는 이렇게 번역하고 싶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 자아를 몸과 하나로 보게 되는 근본이다.—마하데브 데자이
데하사무드바반은 구나는 몸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뜻이다. 샹카라는 “그것은 몸이 거기로 쫓아 나오게 되는 씨다”라고 했다. 선성의 사람의 선성조차도 불완전한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선성은 반대자와 싸우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싸움이 끝나고 절대의 선성이 될 때 그것은 선성이기를 그치고 모든 윤리적 강요를 초월한다. 선성을 발달시킴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것을 초월해 초월적 지혜에 도달한다. 마치 가시로 가시를 뽑는 모양으로, 우리는 세속을 내버림에 의하여 내버림을 내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사트바에 의하여서 우리는 라쟈스와 타마스를 이기고, 그다음 사트바까지도 초월한다. —라다크리슈난
 
아르쥬나 말하기를
 
21. 오, 주여, 3성을 초월하는 이는 어떤 모양을 함으로 인하여 되는 것이옵니까? 그는 어떻게 행동을 하며 또 어떻게 이 3성을 초월하옵니까?
지반묵타(살아 있는 現身으로 해탈을 얻은 사람)의 특별한 상(相)은 무엇 인가? 그 특징은 2장 55절 이하에 있는 스티다프라즈나(지혜가 부동의 자리에 간 사람). 12장 13절 이하에 있는 박티마(정성으로 믿는 마음이 완전한 사람)와 비슷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분명한 것은 어떤 길로 도달했든간 완전에 이른 사람의 모습은 같다는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22. 오, 판두의 아들아, 그는 광명과 활동과 미혹을 그것이 일어날 때에 싫어하지 않으며, 그것이 일어나기를 그쳤을 때 원하지 않는 사람이니라.
 
23. 그는 가만 앉아, 구나에 관심도 아니하고, 흔들리지도 않으며, 홀로 서서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니, 그건 그가 작용하는 것은 오직 구나임을 알기 때문이니라.
 
24. 그는 고락을 평등으로 보고, 자기의 자아 속에 거하며, 흙과 돌과 금을 한가지로 알고, 쾌불쾌를 같이 보며, 마음이 견고하여 비난과 칭찬을 한가지로 여기느니라.
 
25. 그는 명예와 불명예를 상관 않으며 벗과 대적에 대해 같이하고, 모든 활동의 경영을 내버린 사람이니, 그를 가리켜 구나티타라 하느니라.
구나티타(gunatita) 구나를 초월한 사람.
22절부터 25절까지는 하나로 읽고 생각하여야한다. 광명, 활동, 미혹은 앞절에서 본 것같이, 사트바, 라쟈스, 타마스가 낳은 산물이다. 이 절들의 속뜻은, 구나를 초월한 사람은 그런 것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돌은 빛을 바라지도 않고, 활동, 게으름을 싫어할 리도 없다. 그것은 잠잠해, 그런 의지도 없다. 누가 흔들어도 까딱없고, 다시 흔들면 그대로 누워 게으름이나 미혹이 저를 붙잡았다는 감각도 없다. 돌과 구나티타가 서로 다른 것은 구나티타는 완전한 의식을 가지고 자기가 죽을 인간을 얽매는 얽맴을 떨어버렸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지식의 결과로 돌의 안식을 성취하고 있다. 돌과 한가지로 증거하지만, 그것 구나나 프라크리티의 작용을 행하는 자는 아니다. 즈나니(아는 이)는 정좌하여 작용하는 것은 구나임을 알면서도 흔들림이 없다. 어느 순간에도 우리가 그 행하는 자인 듯이 행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다만 그 지경을 상상만 할 수 있을 뿐, 도저히 그것을 체험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수레를 그 별에다 붙들어 맬 수는 있고, 그리하여 모든 활동에서 자신을 물러나게 함으로써 점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구나티타는 자신으로서의 지경의 체험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그 지경을 떠난 것이다. 그러려고 하는 순간, ‘자기’가 벌써 참견을 한다. 우리 평상시의 살림에서 하는 평화, 광명, 소란, 게으름의 체험은 환상이다.「기타」는 여러 가지 말로써 신성의 지경은 구나티타에서 가장 가깝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다 나도 어떤 때에 가서는 구나티타의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믿고 힘써서 자신 속에 더욱 선성을 발전시키도록 해야 한다. —간디
 
26. 흔들림 없는 박티 요가로써 나를 섬기는 사람은 이 3성을 초월함으로써 브라만이 되기에 합당하니라.
 
27. 나는 불사 불멸의 브라만의 기초로, 영원한 법, 절대 복락의 기초이기 때문이니라.
여기서 인격적인 크리슈나가 자기는 절대의 브라만의 기초라고 한다. 샹카라는 설명하기를 지극히 높으신 주는 그가 브라만의 나타남이라는 의미에서 브라만이라고 한다. 브라만은 자기를 믿는 자에게 이슈바라삭티(Isvarasakti)를 통해서 은총을 보여주는데, 그는 그 능력의 나타남이므로, 브라만 자신이다. 샹카라는 또 다른 하나의 설명을 한다. 브라만은 인격 적인 주다. 그러므로 이 절의의미는 “나, 무한정, 불가형언의 내가 한정 속에 있어서 불멸괴(不滅壞)하는 브라만의 기초다” 하는 뜻이다. 닐라칸다(Nilakantha)는 브라마를「베다」가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라마누쟈는 이것을 해탈된 영혼으로 해석하고 마드바(Medhva)는 마야(maya)로 본다. 마두수다나는 이것을 인격적인 주로 본다. 크리슈나는 자신을 절대 무제한의 브라만이라고 한다. —라다크리슈난
구나티타는 모든 구나를 뛰어넘었다. 사트바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모든 정진자가 그렇게 하려고 하겠지만) 그보다도 순결 무염(無染)한 사트바여서 라쟈스나 타마스의 한 부스러기도 들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 완전은 사트치트아난다(sat-chit-ananda)인 ‘그이’다. 브라만의 모습 그대로다. 그는 사트(sat), 곧 참, 혹은 실재며, 자신 속에 영원한 법(dharma) 즉 우주 진화의 영원한 원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치트(chit)다. 그는 완전한 복이 있는 곳이므로 아난다(ananda)다. —마하데브 데자이
이 절의 뜻은 삼캬론의 이원론을 버리고 나기만 하면 남는 것은 오직 하나 파라메슈바라뿐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트리구나티타(trigunatita)의 경지는 파라메슈바라를 믿어서만 된다. 그러나 오직 한분 최고 주재자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기타」는 ‘그이’ 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 독단적으로 강요하지는 않는다.「기타」가 신앙이 가장 쉬운 길이라 하고,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가장 받아들일 만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서도 다른 길은 따르지 말라고 하지는 않는다.「기타」는 오직 신앙의 길만을 지지한다. 혹은 지식의 길만을 혹은 요가의 길만을 지지한다 하는 것은 각각 그 주장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붙인 의견일 뿐이다. —틸라크
 
이것은「바가바드기타」라는「우파니샤드」의 제14장 3성분별의 끝이니 이는 브라만의 지식에서 요가를 가르쳐주는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의 문답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