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1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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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2)
작성자 바보새 16-01-21 00:14 조회1,1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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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아무 바람 없이 자아와 마음을 제어하고, 모든 소유를 내버리고, 다만 몸으로만 행동하는 자는 죄를 범함이 없느니라.
바람 기대(expecting), 욕망(desire).
형상을 깎아 껍데기를 버리고 마음을 씻어 욕심을 버리고 사람 없는 들에서 노닌다(刳形去皮 洒心去欲 而遊於無人之野). — 장자
‘모든 소유를 내버리고’ 이것은 앞절에서 말한 “아무것도 의뢰하지 않는다”는 것과 평행되는 말이다. ‘소유’ 란 사람이 자기 주위에 모아놓은 모든 것을 의미한다. 자기의 자아(아트만)를 내놓은 그 밖의 일체의 것이다. 자아 밖의 모든 것을 내버린다는 것은 상대적 존재의 세계 전부를 내버리는 일이다. 3성이 없어지는 일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샹카라나 마두수다나(Madhusudana)는 육체를 지지해가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해석했고, 베단타 데시카(Vedanta Desika)에 의하면 몸으로만 하는 행동이다. 덕행이나 죄악은 바깥 행동에는 달려 있지 않다. 사람이 애욕과 자기 의지를 떠날 때 그는 하나님의 뜻을 반사하는 거울일 뿐이다. 인간의 혼이 거룩한 의지의 순수한 통로가 돼버린다.—라다크리슈난
가장 순결한 행위도 ‘자기’ 에 의해 물이 들 때 얽어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온전히 비치는 정신으로 이루어질 때 그 얽어매는 힘이 없어진다. 자기가 완전히 가라앉을 때 일하는 것은 오직 몸일 뿐이다. 예를 든다면 사람이 잘 때는 몸만이 일을 한다. 죄수가 징역을 살 때는 자기 몸을 형무관에게 아주 내맡긴 것이므로 그의 몸만이 일을 한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자기를 하나님의 죄수로 내맡긴 사람은 자기가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의 몸은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고 행동자는 하나님이지 그 자신이 아니다. 그는 자기를 무(無)에까지 낮춘 것이다. — 간디
 
22. 우연히 오는 것으로 만족하고, 상대로 보기를 넘어서서, 미워하는 마음이 없이, 성공 실패를 하나로 보는 사람은 아무리 행동하여도 얽매임이 없느니라.
우연히 내가 찾음 없이. 이 우주는 자연, 스스로 그런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우연은 있을 수 없다. 우연히 오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자기중심의 사고방식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는 우주적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자연에 따라 지도된다. 그것이 그에게 근심 걱정이 없는 이유다. 그의 필요는 우주의 필요다. 우주는 스스로 그것을 하고 있으므로 그 자신이 하나님의 기구일 뿐이다.—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상대로 보기를 넘어서서’란 상대세계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상대 없이는 감각하고 인식하고 생각할 수가 없다. 서로 반대되는 것이 서로 저쪽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참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노자가 “천하가 다 아름다움의 아름다움됨을 아나 그것은 미운 것뿐, 다 착함의 착함됨을 아나 그것은 착하지 않은 것뿐”(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 之爲善 斯不善已)이라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장자는 “지극한 즐거움은 즐거움 없음”(至樂無樂)이라고 한다.
이 우주는 지고자의 나타냄이다. 그러므로 얽매는 것은 행위가 아니고 행위에 대하는 마음의 태도다. 그것은 무지에서 나온다. 그 무지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제각기 좋고 언짢고를 가리고 택하는 서로 떨어진 개인들로 망상하고 있다. 스승은 여기서 행하는 자와 일과 행동이 어떻게 한 지고자의 서로 다른 나타냄인 것과 지고자에게 희생으로 바쳐진 행위는 얽어맴이 없다는 것을 지적해준다. —라다크리슈난
 
23. 집착을 떠나 해탈하여, 그 마음은 지혜 위에 굳게 서고, 그 행동, 희생을 위하는 사람의 행위(業)는 온전히 소멸되어버리느니라.
19절에서부터 23절까지는 자유로운 행위의 모든 조건을 묶어서 설명하는 말이다. 3장 9절에서는 희생을 위한 행위는 얽어맴이 없다고 했는데 이 절에서는 희생은 카르마, 곧 업까지도 소멸시킨다고 한다. 업이란 이제 앞으로 열매를 맺을 행위다. 희생은 그와 같이 얽어맴을 예방도 하고 고칠 수도 있는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구자라트의 신비가 나라신하 메다(Narasinha Mehta)는 무지한 사람을, “굴러가는 차 밑을 걸어가면서 자기가 그 차를 끌고 가거니 하고 믿는 개와 같다”고 말하였다. 판디트 살타발레카르(Saltavalekar)는 지혜 있는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 아름다운 비유를 했다. “차를 타고 앉아 있는 사람이 차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지만, 정말 움직이는 것은 차뿐이 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진 사람은 지극히 높으신 이를 찾아 제 몸이라는 차를 타고 나가는데, 그 몸은 움직이나 자신은 가만히 앉아 있다.” — 간디
이 절의 네 가지 표현은 앞의 다섯 절에서 각각 설명하고 있는 네 가지 표현의 발전을 결론짓는 것이다. 이 발전을 아래와 같이 표할 수 있다.
1. 행위에서 무행위를 보는 사람(18)
그 모든 경영이 욕심을 떠난 사람(19)
행위의 결과에 집착함이 없이(20)
아무 바람 없이(21)
우연히 오는 것으로 만족하고(22)
집착을 떠난 사람(23)
2. 무행위 속에 행위를 보고(18)
(그의 모든 경영은) 야욕을 떠나(19)
언제나 족한 줄을 알고(20)
자아와 마음을 제어하고(21)
상대로 보기를 넘어서서, 미워하는 마음이 없이(22)
해탈하여(23)
3. 사람 중에서 깨달은 이요, 요가를 닦은 이(18)
그 모든 행위는 지혜의 불로 살라져버린 바 되고(19)
어떤 것에도 의뢰하지 않고(20)
모든 소유를 내버리고(21)
성공 실패를 하나로 보는(22)
그 마음은 지혜 위에 굳게 서고(23)
4. 모든 행위를 완성하였느니라. (18)
그 사람을 지혜있는 자들은 어진이라 불렀느니라.(19)
아무리 행위 속에 빠져 있어도 그는 아무것도하는 것이 없느니라.(20)
다만 몸으로만 행동하는 자는 죄를 범함이 없느니라. (21)
아무리 행동하여도 얽매임이 없느니라. (22)
희생을 위하여 하는 사람의 행동은 온전히 소멸되어버리느니라.(23)
 
24. 희생을 바치는 행동도 브라만이요, 바치는 물건도 브라만이다. 브라만에 의하여 브라만이 불 속에 바치어진다. 그와 같이 브라만에 바쳐진 행위에 마음을 집중하고 있는 이는 결단코 브라만에 도달하고야 말 것이니라.
희생(yajna) 공희(供犧) 불교에서 공양(供養)이라고 하는데 해당한다. 베다 종교에서는 짐승을 잡아 제물로 바쳤는데 불교에서는 불살생(不殺生)을 강조하기 때문에 동물을 바치는 것을 폐지하고 그 대신 의복, 음식, 눕는 기구, 탕 약 같은 것을 바치게 됐다. 그것은 원주민들이 하는 기름 바르기, 향 피우기, 꽃이나 물을 드리는 것, 등불을 켜는 것 등을 채용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베다의 야즈나를 더 넓게, 정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야즈나를 바치는 자는 행동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거기 얽매이지는 않는다. 그는 땅 위의 생활을 영원의 입장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망티크 테르」 (Mantiqu't Tair)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네가 이때껏 살아오고, 보고, 하고, 생각했지만
네가 아니고 나다, 내가 보고, 살고, 했다.
순례자도, 순례도, 길도,
나 자신이 나 자신에게 한 것이요,
내 문간에서 나를 만난 것일 뿐이니라.
오라, 너 잃어진 분자야, 네 중심으로 오라.
먼 곳을 헤매었던 광선아
돌아오라. 넘어간 네 태양으로 다시 돌아오라.
(All you have been, and seen, and done and thought,
Not you but I, have seen and been and wrough.........
Pilgrim, pilgrimage and Roda,
Was but Myself toward Myself; and your
Arrival but Myself at my own door...........
Come, you lost Atoms, to your centre draw...........
Rays that have wandered into Darkness wide,
Return, and back into your Sun subside.) —라다크리슈난
 
25. 어떤 수행자들은 다만 신들을 예배함으로써 희생을 바치고 또 다른 이들은 희생 그것을 희생으로 브라만 불 속에 바친다.
샹카라는 후 반절의 야즈나를 아트만의 의미로 해석해서 “다른 이들은 자아를 자아로 브라만 불 속에 바친다”라고 한다. — 라다크리슈난
24절의 수행자는 그 행동이 무한과 서로 가락이 맞는 사람이다. 그것은 성 어거스틴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이 행복한 생활이다. 즉, 당신에 대해 기뻐하고 당신을 기뻐하고 당신을 위해 기뻐함이다. 여기 보여주는 수행자는 희생을 그에게 바치고, 그를 희생으로 바치고, 그를 위해 바친다(Makes a sacrifice to Him, for Him).
25절의 후반은「베다경」의 말을 본따서 한 것이다. “신들은 희생의 희생을 바쳤다.”(The gods offered sacrifice of sacrifice) 또 샹카라(Shankara)는 야즈나를 자아로 해석해서 “제한된 자아가 그 자신이 곧 무제한의 자아(unconditioned)와 하나인 것을 깨닫는 것이 곧 이 희생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그것만이 지식 희생 곧 즈나나 야즈나(jnanayajna) 라는 뜻은 아니다. 자아가 지고자에 도달하여 그와 하나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든 과정이 하나의 희생이다. 혹은 무수한 지식의 희생이다.
다른 주석자는 이런 의견을 말하는 이도 있다. 즉 25절 후반에서 말하는 희생은 곧 자기가 희생을 바친다는 그 생각을 희생으로 바치는 희생이다. 즉 자기를 궁극의 무로 축소시킴이다. — 마하데브 데자이
크리슈나의 말은 신들을 예배하는 일을 브라만에게 희생으로 바친다면 그러한 바침도 또한 하나의 희생이라는 뜻이다. 신들을 예배하는 일을 어떻게 브라만에게 바치느냐, 또 브라만에게 바치는 것이 어떻게 야즈나가 되느냐 그것을 분석해보면 뜻이 자연 분명해진다.
우주의식이 브라만의 상태다. 우주의식으로 발전하는 것은 초월적인 자아의식이기 때문에 예배에 의하여 우주의 식을 성취하려면,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초월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예배의 행동이 오묘한 지경에 이르기를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조직적인 방법으로만 가장 성공적으로 할 수 있다. 즉 신의 이름이나 형상을 취하여 그것을 오묘한 지경에서 체험하면 마침내 그 지경을 초월하여 초월적인 의식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아주 강하게 감정적으로 된 사람은 신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올림에 의하여 희생을 바치는 과정에서도 초월을 이룰 수 있다.
예배의 행동을 초월하는 것을 예배를 브라만에게 희생으로 바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신의 축복을 받는 동시에 또 우주의식의 발전을 돕게 되는 이로운 점이 있다. 초월에 의하여서 예배자는 야즈나의 궁극의 완성에 이를 수 있고 우주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 그 지경에 가면 모든 행동이 다 야즈나가 된다. —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26. 어떤 이는 들음 또는 그 밖의 감각들을 제어의 불들로 바치고, 또 다른 이는 소리 또는 그 밖의 감각의 대상들을 감각의 불들로 바친다.
감각 감각을 일으키는 다섯 기관, 즉 안(眼), 이(耳) 비(爲), 설(舌), 신(身)을 오관(五官)이라 혹은 오근(五根)이라 한다. 오근은 인도 말의 판차 인드리야(panca indriya)의 번역이다. 그래서 안근(眼根, caksur-i), 이근(耳根, srotra-i) 비근(鼻根, ghrana-i), 설근(舌根, jhva-i), 신근(身根, kaya-i)이라 부르고. 또 오근에 대하여 오경(五境)이 있다. 경(境)이란 대상이란 뜻이다. 오경은 또 오욕(五欲)이라 하기도 한다. 욕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오경(pancavisaya)은, 색(色, rupa), 성(聲, sabda), 향(香, gandha), 미(味, rasa), 촉(獨, sprastavya)이다.
불들 불들이라고 복수를 쓴 것은 감각을 제어하는 요가의 방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즉, 다라나(dharana, 집중, 통일), 쟈나(dhyana, 명상, 참선), 사마디(samadhi,삼매, 몰입), 이 모든 것을 다 합해서 자제(自制, sanyama)라고 한다. — 마하데브 데자이
세상에는 두 가지 형의 사람이 있다. 감각을 자꾸 활동시켜 대상을 즐기는 사람과, 가지가지 방법을 써서 그것을 억제하는 사람과. 크리슈나가 감각을 제어의 불로 바친다 할 때는 바로 이 둘째 형의 사람을 말한 것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27. 또 어떤 이는 모든 감각 작용과 생기의 활동을 지식으로 살라 일으키는 자제의 요가 불로 바친다.
생기(生氣) 숨쉼, 호홉.
이것은 다시 말하면 지고자를 명상하는 가운데 자기를 잃어버린다는 말이다. — 간디
일반이 알기로는, 깨달음에 이르려면 반드시 자제(혹은 克己)를 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분명히 크리슈나가 여기서 말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그는 특별히 자제는 깨달음에 이른 결과라고 하고 있다.
초월적인 명상 중에 마음이 체험의 오묘한 지경에 이르면 모든 감각의 활동이 점점 약화되어 나중에는 멎게 되고, 호흡도 점점 고르게 되어 결국에 가서는 멎는 상태에 간다. 이것이 “모든 감각 작용과 생기의 숨쉼을 요가의 불로 바치”는 일이다.
자제는 자아가 바깥으로 헤매나감 없이 자기 안에 안주함을 의미한다. 마음의 통제를 완전히 한다는 것은 마음이 바깥으로 헤매나가지 않고 제 속에 가만히 있다는 뜻이다. 마음의 통제가 덜 되면 바깥 어디 지시하는 데로 나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감각의 제어도 완전히 하면 감각의 밖 헤매임 없이 제 안에 가만있을 것이고, 통제가 덜 되면 바깥 어디나 원하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깨달음(지식)에 의하여 불살라진 자제란 자아를 즉 마음과 감각을 완전히 통제하는 상태다. 그 의미는 즉 깨달음의 지경, 혹은 순수한 의식의 지경, 본체의 지경에서는 마음과 감각은 제 속으로 향해 밖으로 헤매나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아무 활동도 없는 초월적인 상태에서 일어난다. 그렇지만 이 초월적인 의식상태가 부동지경에 들어가서 우주의식으로 변형하게 되면 그때는 마음이 본체 속에 닻을 내리고 가만있으면서 밖의 세계에 대해 제 원하는 방향으로 활동을 하게 된다.
이것이, 어떻게 해서 마음이 활동을 하면서도 자제의 범위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감각은 언제나 마음의 구조에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이 자체의 이러한 자제 상태에 있을 때는 감각의 활동도 자제의 지경 안에 자동적으로 남아 있게 된다. 그것은 곧 감각이 자동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어떻게 해서 깨달음의 지경에 이름으로 인하여서 감각의 활동과 호흡작용을 요가의 불로 바치게 되느냐 하는 경로다. 그러기 때문에 요가의 불이 먼저 켜져야, 그런 다음에야 통제가 따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이 자제를 우주적인 수준에서 성취함으로 인해서 우주적 생활의 창조와 진화의 활동이 우주의 본체 곧 하나님은 활동에 버물리움 없이 가만히 있는데도, 3성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우주적 생활의 내면적 활동양상이다. 그것을 보면 자제에 기초를 두는 자발성과 정밀성에 의하여 이 우주적 생활활동은 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요가는 깨달음에 의하여 초월적 의식 안에서, 그러기 때문에 또 우주적인 의식상태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아의 실현에 의하여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자제의 상태라고 설명되었다. 신의식은 깨달음의 최고의 지경이다. 이 지경이 얻어짐에 따라 개인 생명의 수준에서 하던 자제도 우주적 생명의 수준에서 하는 자제로 올라가게 된다. —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28. 어떤 이는 재산을 희생으로 바치고, 어떤 이는 고행을 바치고, 어떤 이는 요가를 바치고, 또 맹세를 굳게 지키는 다른 수행자들은 경문 읽기와 지식을 희생으로 바치기도 한다.
 
29. 또 다른 이들은 숨쉬기를 희생으로 바치어서 날숨을 들숨에 바치기도 하고, 들숨을 날숨에 바치기도 하며, 날숨 들숨을 다 막아버리기도 한다.
날숨 프라나(prana).
들숨 아파나(apana).
 
30. 또 다른 이들은 음식을 억제하기도 하고, 숨을 숨에 바치기도 하나니, 이들은 다 희생을 아는 이들이요, 그로써 그 죄는 소멸되느니라.
신체의 기능은 호흡을 통하여서 되는 것으로 믿었는데 거기는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 29절에서는 그 두 가지를 말했고 30절에서는 그 전부를 다 말했다.
푸라카(puraka)는 숨을 들여쉰 다음 내쉬기를 그치는 것인데, 29절에서 날숨(prana)을 들숨(apana)에 바친다 한 것이다. 레차카(rechaka)는 숨을 내쉰 다음 들이쉬기를 그치는 것인데, 29절에서 들숨을 날숨에 바친다 한 것이다. 쿰바카(kumbhaka)는 날숨, 들숨을 다 내쉬고 들이쉰 다음 한참씩 그치고 있는 것이다.
이름이 서로 다른 것은 그것으로 이루어지는 생리적 기능이 서로 다른 데서 오는 것이다. 그 작용이 호흡인 경우는 그것을 프라나(날숨)라 하고 결장(結膓)이나 방광(膀胱)에 있을 때는 아파나(들숨)라 하고, 그것이 소화와 하나로 될 때는 사마나(samana)라 하고 그것이 피의 순환으로 나타나 모든 기계적인 힘을 다스릴 때는 브야나(vyana)라 하고, 그것이 후두(喉頭)를 통해서 작용할 때는 우다나(udana)라 한다.
프라나와 아파나가 아닌 다른 세 가지 숨, 브야나는 전신에 퍼져서 모든 기계적인 작용을 통제한다고 생각됐고, 우다나는 죽을 때에 빠져나간다 했고, 사마나는 음식의 정수(精粹)를 전신에 돌려서 소화를 돕는다고 생각됐다. 一마하데브 데자이
사람이 음식을 억제하면 신진대사(新陳代謝)를 위한 산소의 필요량이 적어지기 때문에, 따라서 호흡도 옅어진다.
음식을 절제한다는 것은 대상을 가지고 감각을 길러주지 않는다는 뜻이 되며, 행동이나 생각함에 관계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활동에 관계 아니하려면 신진대사를 줄여야 하며, 그것을 위하여는 또다시 호흡을 줄여야 한다. 이 앞의 절에서 크리슈나가 호흡을 호흡에 바친다고 한 이유다.
위에 든 것은 모두 다 몸을 정결케 하는 방법이다. 그러기 때문에 야즈나라고 한다. 그것을 통해서 죄가 소멸된다. 「브라마빈두 우파니샤드」 (Brahmabindu Upanishad)에는 죄의 태산이 초월적인 명상에 의하여 도달 되는 하나됨(union)에 의하여 부스러져 없어진다고 했다. 그것 아니고는 길이 없다. ᅳ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모든 희생의 짬은 억제다. 그러므로 모든 희생은 영적(靈的) 성장의 방법이다. — 라다크리슈난
 
31. 희생에 바치고 남은 음식은 감로니, 그것을 받아먹는 자는 영원한 브라만에 이르느니라. 쿠루사타마야, 이 세상도 희생을 바치지 않는 자를 위하여는 있지 않거든, 하물며 이 다음의 세계겠느냐.
감로 아므리타(amrita).
쿠루사타마(Kuru-sattama) 쿠루족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자, 곧 아르쥬나를 가리킴.
희생은 정화(淨化)의 길이다. 그것은 한 걸음 한 걸음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마침내 초월에까지 이르게 한다. 희생이 바쳐지면 마음이 정화되어 일단 높은 의식에 들어간다. 그것이 결국은 복된 의식에 이르게 하는데 그것을 크리슈나는 ‘감로’ 라 했다. 그 복스러움은 희생이 지나간 후에도 남아 있을 수 있다. 그것을 누리는 사람을 크리슈나는 “영원한 브라만에 이른다”고 했다. 그 이유는 희생을 끊지 않음으로써 이 초월적인 복된 의식이 차차 자라 우주의식에 이르고, 마침내는 신의식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리슈나는 희생을 바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도, 장차 오는 세상에서도 성공할 수 없다고 했다. 활을 양껏 당기지 않고는 살이 힘있게 나갈 수 없고, 마음을 속으로 당기어 그 밑바닥에까지 이르게 하지 않고는 힘이 날수 없다. 그리고 마음이 활발하며 강하지 않고는 세상에서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크리슈나는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성공하려면 정화, 즉, 희생을 계속함이 필요한 것을 말해준다.
모든 희생 중 가장 힘있는 것은 초월적인 명상이다. 그 이유는 이것은 직접 마음을 절대적 정결에 이르게 하여 무진장의 생명력과 지혜에 접촉 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32. 그렇듯 가지가지의 희생이「베다경」속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 모든 것이 다 행위에서 나온 것을 알지어다. 이것을 아는 자는 해탈하리라.
「베다경」속에 이 말은 다른 곳에서는 “브라만의 얼굴 앞에 벌여놓여 있다” 로 번역되어 있기도 하다.
희생을 바치기 위하여는 행동이 필요하다. 희생을 실지로 바치지 않으면 결과가 나올 수 없다. 이론도 필요하지만, 이론이 직접 결과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행동을 강조하는 것이다. —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여기서 행위라 한 것은 정신적 신체적 영적 활동을 의미한다. 이 세 겹의 행위 아니고는 희생은 있을 수 없고, 희생 없이는 구원은 없다. 이것을 알고, 그 앎을 실행하는 것이 희생의 비밀을 아는 일이다. 사람이 제 신체적 정신적 영적의 모든 선물을 인류를 위한 봉사에 바치지 않는다면 그는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는 도둑일 뿐이다. 지능만을 쓰고 육체를 아끼는 사람은 완전히 희생을 바친 것이 못된다. 마음과 몸과 영혼을 합해서 쓰지 않으면 그것들은 인류를 위해 옳게 봉사할 수가 없다. 그런 조화된 활동을 하려면 신체적 정신적 영적 정결은 필요불가결하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제 모든 기능을 발달시키고, 정화하고, 최선으로 이용하기 위해 전심하여야 한다. — 간디
 
33. 재물의 희생보다 지식의 희생이 더 낫다. 대적을 뇌쇄시키는 자야, 오, 프리다의 아들아, 모든 행위는 예외 없이 지식에서야만 그 절정에 이른다.
무식하게 하는 사랑이 도리어 큰 해가 되는 일이 많음을 모를 사람이 누구일까? — 간디
 
31. 겸손한 공경으로, 거듭하는 질문으로, 받들어 섬김으로써 스승에게서 그것을 배울지어다. 참을 본 지혜자는 네게 지식을 주리라.
참을 본 지혜자 성인.
지식을 위한 이 세 가지 조건을 명심하라. — 간디
이 절은 정신생활에서 믿음이 먼저고 그담 지식, 그담 체험이 오는 것을 보여준다. -라다크리슈난
 
35. 판두의 아들아, 이것을 앎으로써 너는 다시 미혹에 떨어짐이 없으리라. 또한 이로 인하여 너는 만유를 남김없이 자아 안에 볼 것이요, 또 내게서 볼 것이니라.
 
36. 설혹 네가 모든 악인 중에서 극악의 죄인이라 할지라도 너는 다만 이 지식의 배에 의하여 모든 죄악을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니라.
 
37. 마치 타는 불길이 그 연료를 재로 만들어버리듯이, 오, 아르쥬나야, 지식은 모든 행위를 재로 만드느니라.
 
38. 이 세상에 지식처럼 정결케 하는 힘이 있는 것은 없느니라. 요가에 의하여 완전한 지경에 이른 이는 때가 이르면 스스로 자아 안에서 이것을 발견하리라.
 
39. 믿음이 있고, 감각을 제어하여 전심으로 구하는 자는 지식을 얻을 것이니, 지식이 있으면 멀지 않아 최고의 평화에 도달할 것이니라.
 
40. 그러나 지식이 없고, 믿음이 없고, 의심하는 성질의 사람은 망하느니라. 의심하는 자에게는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안락도 있을 수 없느니라.
 
41. 부를 차지하는 자야, 요가에 의하여 모든 행위를 내버리고 지식에 의하여 의혹을 헤쳐버리고, 제 자아를 소유하고 있는 자는 행위가 얽어매지 못하느니라.
 
42. 그러므로 지혜의 검으로 무지로부터 나와 네 가슴속에 박혀 있는 의혹을 잘라버리고, 요가에 머물라. 일어나라, 오. 바라타의 아들아.
 
이것이「바가바드기타」라 일컫는「우파니샤드」안에 있는 절대의 학문, 요가의 경전, 크리슈나와 아르쥬나 사이의 대화 제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의 끝이니라.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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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1)
작성자 바보새 16-01-21 00:12 조회1,1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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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
 
 
 
 
제2장은 해탈에 대한 가르침을 말해준다. 그것을 하기 위하여 거기서는 생활을 상대와 절대의 두 모습으로 분석했고,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지식으로 인하여 해탈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다.
지식은 그 완전한 지경에서는 이해와 체험의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완전한 지경에 이르려면, 그 가는 길이 세속생활이거나 출가생활이거나를 말할 것 없이, 상대계와 절대계 둘 다에 대한 이해와 체험이 있지 않아서는 아니된다. 따라서, 상대계와 절대계에 대한 깨달음으로 해탈을 얻게 하는 삼캬의 지혜나, 존재의 그 두 영역에 대한 체험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해탈을 얻게 하는 요가의 실천은 도(道)를 통달하는 두 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가르침을 말해주는 것이 제 2장이다.
제3장은 2장 45절에서 처음으로 말해주는 절대에 대한체험을 항구 불변한 것이 될 수 있도록 해주는 행동의 방법을 가르쳐준다.
이 절대에 대한 체험이 항구 불변하는 지경에 이르면 참 나(self)를 아는 앎이 자연히 깰 때, 꿈꿀 때, 꿈없이 잘 때의 의식 전체를 통해서 그대로 계속해 있을 수 있다. 자아를 자아의 행동을 떠나서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이 이러한 얽혀듦 없는(non-involvement) 즉 자연적인 무집착의 생활을 하게 될 때 사람의 지성(知性)은 묻게 된다. “이것이 인생의 진리 인가? 이 분리감 혹은 무집착은 참 생활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인생에서의 하나의 도피일까? 삶의 실재는 이원적, 체(體)와 용(用)의 이원(duality of being and activity)적인 것일까? 그러한 의문이 이 4장에서 주는 지식에 의해 풀어지게 된다.
이 장은 내버림(renunciation)을 목적하는 것이므로 행동의 성격과 행동자의 성격을 개인적과 우주적 두 한계, 즉, 인간적인 한계와 신적인 한계에서 우선 분석하고, 그런 다음 이 조직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의 결과를 선포한다. 즉, 행동과 행동자는 서로 독립한 것이다. 그 둘 사이에는 그 한계에 있어서 하나의 자연적인 분리 상태가 존재한다고 한다. 이 무집착의 상태, 혹은 내버림은 한편으로는 행동자를 위해 영원한 자유의 확고한 기반을 마련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행동에 있어 최대한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하여 지극한 영광의 열매를 안겨준다. 이 내버림의 상태야말로 거룩한 자와 인간을 위해 영원한 놀이터를 마련해주는 자리다. 이러한 삶의 자연적인 기초에 대한 무지가 얽매임과 모든 고통의 원인이다. 이것을 아는 지식의 결과는 영원한 자유다. 이 지식을 펴 보여주자는 것이 바로 이 4장의 목적이다.
이 장의 가장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은 그 행동 내버림의 지식을 밝히려 하는 과정에 있어서 그것이 행동의 전범역을 설명해주는 모습이다. 거기서 그것은 생명의 흐름이 어떻게 존재의 보다 높은 지역을 향해(10절). 또는 자연 속에서 보다 강한 힘을 향해(12절) 치달아서, 마침내는 신의식(神意識) 안에 있는 영원한 자유의 큰 바다에 한통쳐 이르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9절).
이 지식의 장은 구도자에게는 그 이상 없이 요긴한 것이다. 그 이유는 도를 깨닫는 데 이르자는 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체험, 곧 참 나와 행동은 서로 별개의 것이라는 체험을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구도자는 누구나 실천을 닦아나감에 따라 필연적으로 이 체험에 이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리고 의심으로 인하여 장애를 받음 없이 무사히 나가기만 한다면, 그는 반드시 이 지식을 얻고야 말 것이다.
이 멀리함의 완전한 지식, 혹은 참 자아와 행동 사이에 있는 내버림의 지경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이 장에서는 삶의 상대와 절대의 두 범역을 설명해준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서, 그것은「우파니샤드」속에 나오는 두 개의 충만의 철학을 선포한다. 즉, ‘이것’도 충만하고 ‘저것’도 충만하다. ‘푸르나마다 푸르나미담’(purnamadah purnamidam) 즉, 저 초월적인 나타나 뵈지 않는 절대적인 영원의 본체(being)가 충만하니, 또 이 나타나 뵈는 상대적이고 그래서 늘 변하는 현상적 존재의 세계도 충만하다. 저 절대는 언제나 변함없는 그 성격 안에서 영원하고, 이 상대는 언제나 변하는 그 성격 안에서 영원하다.
이 우주적 의식 안에서의 두 개의 충만한 살아 있는 실재는 신의식의 엄청난 하나됨(grand unity) 속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 이 두 개의 충만의 하나 되는 철학을 설명하는 데서 이 장은 요가 경전 속에 담겨 있는 지혜의 짬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이유로 인해서 주님은 아르쥬나에게 요가의 전승(傳承)을 말해줌으로써 말씀을 시작한다. —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1. 나는 이 불멸의 요가를 비바스바트에게 펴 보여주었고, 비바스바트는 그것을 마누에게 전해주었고, 마누는 또 그것을 이 크쉬바쿠에게 말하여주었느니라.
비바스바트(Vivasvat) 어떤 책에는 비바스반(ivasvan)으로 나오기도 한다. 일신(日神).
마누(Manu) 비바스바트의 아들, 인왕(人王), 그는 맨 처음으로 인간에게 법을 주었다. 그것을 마누 법전이라 한다.
이크쉬바쿠(Ikshvaku) 마누의 아들, 감자왕(甘蔗王).
 
2. 그렇듯이 차례차례로 서로 이어주며 거룩한 족속의 왕들은 이것을 배웠느니라.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 요가는 마침내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더니라, 오, 파란타파야.
파란타파(Parantapa) 대적을 괴롭히는 용사라는 뜻, 아르쥬나의 칭호.
1,2절의 말은「마하바라타」의 나라야니야(Narayaniya) 부분에 나오는 카르마 요가에 대한 긴 정신적 계보를 간단히 요약한 것이다. 그 원전은 주의할 만한 기록이다. 거기는 카르마 요가가 브라만과 크샤트리야의 성자들에 의하여 대대로 전하여내려왔다고 한다. 거기 의하면 카르마 요가를 맨 처음에 나라야나(Narayana)가 브라만의 조상에게 가르쳐주었고, 그담 여러 대를 거쳐 다크샤 왕 때 이르러 비바스바트에게 전해졌고, 비바스바트는 그 아들 마누에게 전했고, 마누는 또 그 아들 이크쉬바쿠에게, “백성들의 행복을 위해” 그것을 전해주었다고 되어 있다.
그 뜻은 이런 것이다. 즉 이 가르침은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아르쥬나에게 새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행복을 위해” 아득한 옛날부터 있어온 널리 알려져 있는 법이라는 것이다. — 마하데브 데자이
이 앞에 있는 장들에서 요가를 말해왔다. 삼캬 요가 또 카르마 요가, 그런데 크리슈나는 그것을 하나로 말하고 있다. 그 의미는 아르쥬나에게 그 요가들이 서로 다르게 선포되었지만 그 근본은 하나요 또 그 결과도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그 근본은 “세 구나(gunas)가 없이”라는 데 있다. 그러므로 삼캬의 지혜도 얻을 수 있고 카르마 요가의 결과도 얻을 수 있다.
그 요가가 불멸인 까닭은 그것이 절대의 지혜도 상대의 지혜도 다 밝혀 주기 때문이다. 그 둘 다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그 요가도 영원할 수밖에 없다……「바가바드기타」의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려면 인도의 역사관과 시간관을 알아야 한다. 역사 교육의 목적은 사건의 연대순으로 된 지식을 주는 데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건의 의미다……시간은 무한을 헤아리는 사고방식이다. 인도 역사가의 시간관념은 무한한 존재자 위에 놓여 있다.
영원이라는 관념에 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창조의 상대적 분야에서 가장 오랜 수명을 가졌던 어떤 물건의 생애를 생각해보는 일이다. 그것을 브야사(Vyasa)는 거룩한 어머니(The divine mother) 혹은 우주적 어머니(The universal mother)라고 했다.
절대적인 존재자의 영원한 생명의 영원성을 거룩한 어머니의 이루 헬 수 없는 생명의 길이로써 헤아려본다. 그런데 그 거룩한 어머니의 단 한 생애의 길이는 시바(Shiva) 신의 수명의 천 배요, 시바 신의 한 생애의 길이는 비슈누(Vishnu) 신의 수명의 천 배요, 비슈누 신의 한 생애의 길이는 브라마 창조주의 수명의 천 배다. 그런데 브라마의 한 생애의 길이는 100브라마 년(年)에 해당하고 1브라마 년은 12브라마 월(月)을 포함하고, 1브라마 월은 30브라마 일(日)을 포함한다. 그런데 1브라마 일을 1칼파(kalpa)라 하고 1칼파는 14마누의 시간에 해당하고, 1마누의 시를 만반트라(manvantra)라 하는데, 1만반트라는 71 차투르유기(chaturyugi)와 같고 1 차투르유기는 4 유가, 즉, 사트 유가(sat yuga), 트레타 유가(treta yuga), 드바파라 유가(dvapara yuga), 그리고 칼리 유가(kali yuga)의 총 연한과 같다. 유가의 길이는 사트 유가의 길이로 헤아리게 되는데, 트래타 유가는 사트 유가의 4분의 3이고, 드바파라 유가는 사트 유가의 반 이고, 칼리 유가는 사트 유가의 4분의 1이다. 그리고 칼리 유가의 길이는 사람의 생애의 43만 2천년에 해당한다.
현대의 역사가는 이 모든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어떤 계열들의 사건도 거기 대한 연대순을 밝힐 수가 없으면 곧 역사가 아니라고 내버리고 만다. 고대 인도의 지극히 높은 정도의 인간들의 이야기를 모두 신화라고 해서 내버리는 것은 실로 기막힌 일이다. 그것은 도리어 일찍이 지상에 있었던 어떤 문명보다도 높았던 가장 존귀한 역사로 인정을 받아야 할 것이다. —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남백자규(南伯子葵)가 여우(女偶)에게 묻기를 “그대 나이 많은데 살갗이 어린이 같음은 웬 까닭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내가 도(道)를 들었다” 했다. 남백자규가 ‘도’를 배울 수 있는가?”하고 묻자 여우가 대답한다. “아이구, 아니 될 말이다. 그대는 그럴 만한 사람이 못된다. 보라, 복양기(卜梁倚)란 사람은 성인의 재주는 있으나 성인의 도는 없고, 나는 성인의 도는 있으나 성인의 재주는 없다. 내가 가르쳐주고 싶은데 그러면 그가 성인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성인의 도를 가지고 성인의 재주에 말해주는 것은 또 쉬운 일이다. 그보다는 내가 오히려 지켜가며 일러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3일이 지나면 능히 천하를 잊을 것이고, 이미 천하를 잊었거든 내가 또한 지키기를 7일을 한 후면 능히 물건을 잊을 것이고, 이미 물건을 잊었거든 내가 또 지키기를 9일을 한 후면 능히 삶을 잊을 것이다. 이미 삶을 잊으면 능히 아침같이 환해질 것이고, 아침같이 환한 후면 능히 홀로를 볼 것이고, 홀로를 본 후면 능히 예와 이제가 없을 것이고, 예와 이제가 없은 후면 능히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는 데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삶을 죽이는 자는 죽지 않을 것이고, 삶을 낳는 자는 나지 않을 것이니, 그 됨됨이 보내지 않는 것이 없고, 맞지 않는 것이 없으며, 헐지 않는 것이 없고, 이루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 이름을 영녕(攖寧)이라 한다. 영녕이란 끌어당긴 후에 이룬다는 말이다.” 남백자규가 “그대는 홀로 어디서 들었는가?” 묻자 여우는 대답한다. “부묵(副墨)의 아들에게서 들었는데, 부묵의 아들은 낙송(洛誦)의 손자에게서 들었고, 낙송의 손자는 첨명(瞻明)에게서 들었고, 첨명은 섭허(攝許)에게서 들었고, 섭허는 수역(需役)에게서 들었고, 수역은 오구(於謳)에게서 들었고, 오구는 현명(玄冥)에게서 들었고 현명은 참요(參寥)에게서 들었으며 참요는 의시(疑始)에게서 들었다.”(南伯子葵問乎女偶曰 子之年長矣 而色若孺子何也 曰吾聞道矣 南伯子葵曰 道可得學邪 曰惡惡可 子非其人也 夫卜梁倚有聖人之才 而無聖人之道 我有聖人之道 而無聖人之才吾欲以敎之 庶幾其果爲聖人乎 不然以聖 人之道告聖人之才 赤易矣 吾猶守而告之參日 而後能外天下 已外天下矣 吾又守之七日 而後能外物 已外物矣 吾又守之九日 而後能外生 已外生矣 而後能朝徹 朝徹而後 能見獨 見獨而後能無古今 無古今而後能入於不死不生 殺生者不死 生生者不生 其爲 物無不將也 無不迎也 無不毀也 無不成也 其名爲攖寧 攖寧也者 攖而後成者也 南伯子葵曰 子獨惡乎聞之 曰聞諸副墨之子 副墨之子聞諸洛誦之孫 洛誦之孫聞之瞻明 瞻明聞之攝許 攝許聞之需役 需役聞之於謳 於謳聞之玄冥 玄冥聞之參寥 參寥聞之疑始) — 장자(大宗師)
 
3. 이 태고의 요가를 내 오늘 네게 전하노니 너는 나의 신자요 친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장 지극한 비밀이니라.
스승은 자기가 어떤 새 가르침을 준다 하지 않고 옛날로부터 있어서 스승에게 제자로 전해 내려오는 오랜 전통, 곧 영원한 진리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고 한다. 가르침이란 오랫동안 잊어버려진 지식을 다시 새롭게 함이요, 재발견함이요, 다시 찾음이다. 고타마부다, 마하비라, 샹카라, 라마누쟈 같은 모든 위대한 스승들은 다 자기네는 다만 자기 전의 스승들이 가르친 것을 다시 선포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만족하였다.「밀린다」(王問經, Milindapanha)에는 불타가 다시 열어준 길은 예로부터 있는 것이 잃어졌던 것이라고 적혀 있다. 부처님이 고행자의 옷을 입고 손에 밥을 비 는 바리를 들고 그 아버지 왕의 도성에 돌아온 것을 보고 그의 아버지가 “이것이 어찐 일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대답하기를 “아버지시여, 이것이 우리 족속의 습관입니다” 했다. 왕이 깜짝 놀라 “어떤 족속말이냐?” 하니 부처는 대답하기를 이렇게 했다.
 
과거에 계셨던 모든 부처들 또 미래에 있을 모든 부처들
거기서 저는 왔사옵고, 그들의 한 바를 저도 또한 합니다.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이 일은 전에도 그렇게 있었사오니
한 왕이 갑옷을 입고 자기 문에서
은자의 풀옷을 두른 태자 곧 자기 아들을 보옵니다.
 
위대한 스승들은 자기가 창시자라는 주장을 하는 일이 없이 자기네는 모든 가르침들을 판단하는 구경의 표준이 되는 태고의 진리를 조술(祖述)할 뿐이노라고 했다. 그 태고의 진리가 곧 모든 종교와 철학의 영원한 근원인 불멸의 철학(philosophia perennis, sanatana dharma)이다. 그것을 어거스틴은 불러서, “만든 것이 아닌 지혜, 이 현재에 있으며 과거에 언제나 있었던 것같이 미래에도 언제나 있을 지혜”(wisdom that was not made; but is a this present, as it hath ever been and so shall ever be) 라고 이름 지었다. — 라다크리슈난
공자는 “조술할 뿐이지 짓지 않는다”(述而不作) 했고, “대학(大學)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씨알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극한 선에 머무는 데 있다”고 했다. 예수도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그러나 그것은 또 예로부터 있는 계명이라 했고, 율법은 한 점 한 획도 없어 지지 않을 것이라 했으며 자기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라 했다.
스승은 아르쥬나를 보고 이 ‘지극한 비밀’ 을 전해받을 수 있는 자격을 두 가지로 말했다. “신자요 내 친구”라고 했다. 또 요가도 두 가지 성격으로 설명했다. “지극하고 비밀인 것”, 비밀인 것은 친구에게만 줄 수 있다. 그러나 지극한 것은 오직 신자에게만 줄 수 있다. 신자는 스승에게 묻는 법이 없다. 크리슈나는 아르쥬나에게 물을 수 있는 자격을 주기 위해 자기의 친구라고 불렀다. —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보고 자기 친구라 했고, 예수가 마지막이 가까왔을 때 제자들을 보고 “너희가 나를 주(主)요 스승이라 하지만 이제부터 내가 너희를 친구라 한다” 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르쥬나 말하기를
 
4. 당신께서 나신 것은 후요 비바스바트가 난 것은 전입니다. 그러면 당신께서 이것을 태초에 그에게 전하셨다는 것을 제가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 것이옵니까?
부처는 자기가 전생에 무수한 보살들의 스승이었다고 했고, 예수는 “내가 아브라함 있기 전에 있었다” 했다.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5. 아르쥬나야, 나도 너도 무수한 생을 거쳐서 왔느니라. 나는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나, 너는 그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오, 파란타파야.
“나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나 너는 그것을 모른다”는 말은 인간의 생명과 신의 화신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과거 행동의 결과, 즉 선과 악의 결과로 난 것이므로 그 보는 힘이 그런 것들의 영향으로 물이 들어 있다. 혹은 장애를 받고 있다. 그러나 거룩한 화신의 성격은 지성(知性)에 의해 얽매임 없이 언제나 정결한 대로 있다. 그러므로 그의 보는 힘은 절대로 분명하다. 그것이 그의 앎은 시간의 요소에 의해 어두워짐 없이 영원히 밝은 그대로 있는 이유다. —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6. 나는 비록 불생(不生)이요 또 불멸의 성(性)을 가지고 있으며, 또 만유의 주재로되, 나 자신의 바탈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나의 신비로운 능력으로 이 생 속에 나타난다.
사람이 몸으로 태어나는 것은 제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무지로 인해 프라크리티에 몰려 다시 나고 다시 나는 것이다. 크리슈나는 프라크리티를 제어하고 자기의 자유 의지에 의하여 몸을 가지고 나타난다. 보통의 생은 프라크리티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인데, 크리슈나는 자기의 힘으로 나온다.
“나 자신의 바탈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remaining in my own nature) 라는 구절은 카르마 곧 업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기의 성격을 잃음 없이(establishing in my own nature) 라고 풀 수 있다.
 
7. 오, 바라타야, 언제나 올바른 것이 무너지고 그릇된 것이 성하는 때면, 나는 곧 내 자신을 나타내느니라.
올바른 것(dharma) 법 (法).
그릇된 것(adharma) 비법(非法)
언제나 올바름이 기울어지고 올바르지 못함이 일어나는 때면 전능하신 주 하리(the almighty Lord Hari)는 자기를 만들어내신다. — 「바가바타」
다르마(dharma)는 드리(dhri)라는 어원에서 나온 말인데, 드리는 지지 하는 것(that which upholds)이라는 뜻이다. 다르마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붙드는 혹은 지지하는 건강법을 가르치는 인도 고대의「아유르베다」(Ayurveda)의 주석자 차라카(Charaka)와 수슈르타(Sushrta)는 만물을 지지 하는 힘은 3 성(三性) 즉, 사트바, 라쟈스, 타마스의 균형된 조화에 있다고 했다. 마치 정부가 있으면 법과 질서가 자동적으로 유지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떤 위기가 올 때는 나라의 원수가 비상권을 사용한다. 언제나 다르마가 무너지면 3성의 균형은 깨진다. 그러면 조화를 잃는다. 그리하면 진화의 길이 어지러워지고 혼란이 뒤덮인다. 그런 비상한 때면 크리슈나는 화신을 이루어 나타난다. 크리슈나의 화신은 곧 영원 무결(無缺)의 본체인 브라만의 특별한 나타남이다.
생명에는 상대와 절대의 두 범역이 있다. 둘 다 충만하다. 절대는 그 영원불변의 성격으로 충만하고 상대는 그 부단히 변하는 성격으로 충만하다. 상대의 이 부단한 변화의 성격은 창조와 진화의 갖가지 모습에서 다르마라 불리는 자연의 거대한 힘에 의하여 지지되고 있다. 그것이 3성의 평화로운 작용의 근거이다. 마치 큰 흐름이 그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운반해감과 같다.
다르마가 진화를 지지해가지만 땅 위 인간의 다수의 잘못으로 인하여 그 다르마의 힘이 크게 어두워지는 때면 자연의 진화의 힘은 약화된다. 그렇게 되면 상대적인 존재 속에 있는 자연의 질서가 깨진다. 그러면 상대계의 충만을 해하게 된다. 그리하면 상대와 절대를 다 같이 충만하게 다스리는 권능의 힘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그 전능의 힘이 화신으로 나타난다. —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아바타라(化身)라는 낱말의 뜻은 내려왔다는 의미다. 즉 강림하신 이라는 뜻이다. 거룩하신 이가 땅을 높은 지위로 올리기 위해 거기 내려오신 것이다. 사람이 올라갈 때는 하나님은 내려오신다. 아바타라의 목적은 하나의 새 세계 새 다르마를 일으키는 데 있다. 이 가르침과 모범으로 인간이 어떻게 자기를 생명의 보다 높은 단계로 올릴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시(是)냐 비(非)냐 하는 문제는 결정적인 의미의 것이다. 하나님은 선한 자 편에서 일하신다. 사랑과 자비는 궁극에 있어서 미워함과 잔혹함보다 강하다. 다르마는 아다르마를 정복하고야 말 것이요, 참은 거짓을 정복하고야 말 것이다. 죽음과 병과 죄 뒤에 숨어 있는 힘은 삶과 앎과 복됨인 실재에 의하여 부스러지고야 말 것이다.
다르마는 글자대로 한다면 존재의 방식을 의미한다. 그것은 존재의 본질적인 성격이다. 그것이 행동의 방식을 결정한다. 우리 행동이 우리의 본질적인 성격과 일치하는 한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된다. 아다르마는 우리 천성에 배치되는 것이다. 만일 이 세계의 조화가 모든 생명체가 스스로의 천성과 일치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라면 세계의 부조화는 그 본성과 일치하이 우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유를 잘못 써서 부조화를 일으킬 때 하나님은 멍청히 서 계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그저 단순히 이 세계를 틀어놓기만 서 계이 아니라, 그것을 바른 궤도에 올려놓아 스스로 그것을 따라가게 한다. 그의 사랑의 손은 끊임없이 노를 젓고 있다. — 라다크리슈난
 
8. 선한 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악한 자를 멸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정의를 다시 세우기 위하여, 나는 시대에서 시대로 태어난다.
여기 믿는 자의 위로가 있고 옳은 것이 이기고야 만다는 확증이 있다. 정의와 사악 사이의 싸움은 영원히 계속된다. 어떤 때는 후자가 전자를 덮어누르는 듯이 뵈는 때도 있으나 결국 이기는 것은 정의다. 선은 절대로 망하는 법이 없다. 올바른 것은 곧 참이므로 그것은 절대로 망해버릴 수 없다. 악한 자는 멸망하고야 만다. 그릇된 것은 독립된 존재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알아서 참람하게 마음대로 하며 비진리와 폭력과 사악 편에 서는 일이 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측량 할 수 없는 섭리, 곧 하나님의 특별하신 능력은 언제나 일하고 계시다. 이것이 사실 아바타라, 곧 화신이다. 엄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에게는 출생이 있을 수 없다. —간디
어떤 질문자가 간디에게 묻기를 만일 크리슈나가 악한 자를 멸망시키기 위해 세상에 오시는 것을 믿는다면, 유럽인으로 나타났으리라고 생각하느냐 한 데 대하여 간디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크리슈나를 믿는 데 있어서 아마 당신보다도 더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크리슈나는 우리 모두를 위해 창조하시고, 보호하시고, 멸망시키는 우주의 주이십니다. 그는 창조하시기 때문에 멸망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도 말했다. “나는 이 구절을 전쟁을 찬성하는 것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이 절의 말씀에 의하면 악한 자를 위해 벌하러 세상에 내려오시는 것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모든 혁명가가 다 전능한 하나님 혹은 그의 화신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해도 용서하실 줄 압니다.”
 
9. 오, 아르쥬나야, 그와 같이 나의 신적으로 탄생함과 일함을 진정한 뜻으로 깨달아 아는 자는 이 몸을 떠날 때에도 다시 태어남이 없이 내게로 오느니라.
크리슈나를 하나의 화신으로, 혹은 신이 인간의 세상에 오신 것으로 믿는 것은 사람의 영혼이 구경에 도달하여야 하는 그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불생(不生)이신 이가 생 속에 난다는 것은 인간 영혼 속에 신비가 계시되는 것을 의미한다.
화신이란 생각은 영적 생활과 현세 속의 생활과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 세상이 아무리 불완전하고 육과 악의 지배 밑에 있다 하더라도, 영을 위해 그것을 건져내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화신은 사람이 동물적인 살림에서 나와서 영적인 존재에까지 이를 수 있는 길을 실지 정신적 생활의 모범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신성이 화신 속에 육안으로 볼 수 있도록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적인 것을 기구로 삼아 소개되어 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그러한 개인 속에 또는 그들을 통해서 나타나 있다. 그들의 생애는 우리 인간이 구경에 도달하여야 하는 목적을 위해 우리 속에 본질적으로 들어 있는 요소를 극적으로 만들어서 보여주고 있다.
크리슈나 그는 주리고 목마름을 알고, 슬픔 괴로움을 알고, 외롭고 버림당함을 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이기고 우리더러 용기를 가지고 자기의 모범을 따르라고 한다. 그는 우리에게 이 분리되고 일시적인 이기주의를 버리고 시간을 초월한 영적 생활에 들어갈 수 있는 진리의 가르침을 줄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을 우리게 내주어 은총의 길이 되시기까지 한다. 영혼을 불러 자기를 신뢰하고 사랑하게 함으로써 그는 우리를 이끌어 저 절대자를 아는 데까지 이르게 할 것을 약속해주신다. 역사의 사실은 인간의 심정 속에서 언제나 전개되고 있는 것의 실증이다. 화신은 우리가 가능성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한다. —라다크리슈난
 
10. 애욕과 공포와 분노를 떠나 나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나를 의지함으로써, 많은 사람이 지혜의 극기로 정결해짐을 얻어 나의 진성(眞性)에 이르렀느니라.
나의 진성(madbhavam) 내가 가지고 있는 초월적인 바탈.
 
11. 사람이 어떻게 오든지 내가 거기 응하여 받아준다. 오, 파르다야, 사람은 일체의 방면에서 내 길을 따르고 있는 것이니라.
‘어떻게 오든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희망도 꺾어버리지 않고 그것을 제 성격에 따라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형이상적(paramarth)인 견지에서 한다면 어떤 나타남도 그것을 절대적으로 참이라 할 것은 하나도 없고, 반대로 체험적(vyavahara) 견지에서 한다면 그 모든 것이 다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예배하는 그 형상은 우리를 도와서 우리 속 깊이 있는 자아를 깨닫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 형상의 중요성은그것이 나타내는 구경의 의미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기타」는 종교의 이 형태 저 형태로 나타나는 요구, 즉 하나님을 발견하고 우리가 그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알자는 그 요구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 그 생각과 태도의 다름은 그 지역의 특색, 그 사회의 적응에 따라 결정된다. 모든 나타남은 다 그 같은 지고자에 속한 것이다. “비슈누가 시바고, 시바가 비슈누다. 그것을 서로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자는 다 지옥으로 간다. 비슈누로 알려진 이가 사실은 루드라(Rudra)고, 루드라이신 이가 브라마다. 세 신으로 작용. 하는 그 하나인 참이 곧 루드라요, 비슈누요, 브라마다.” 이렇게 말하는 그가 오늘에 있었다면 거기다가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라 믿고 회교도들이 알라라고 믿는 그이”라고 덧붙였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 대한 관(觀)이야 어떤 것을 가졌거나간, 열심으로 찾는 자에 대한 갚아주심이다.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제 신이 아닌 다른 신을 거부한다. 저들의 자기 신에 집착하는 마음이 눈을 어둡게 하여 신성(神性)의 보다 큰 통일성을 못 보게 한다. 이것은 종교적인 생각 속에 남아 있는 이기주의의 결과로 오는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그것은 온 세계가 다 하나님의 경륜 속에 있다는 뜻이다. 아무도 벌을 받음 없이 하나님의 법을 깨뜨릴 수는 없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이다. 그 법은 미워함 고와함 없이 냉철히 실현된다. — 간디
 
12. 제 하는 일의 결과를 보기 원하는 사람들이 현세에서 여러 신들 앞에 희생을 바친다. 왜냐하면 현세에서는 일의 결과가 속히 오기 때문이다.
신이란 일반에서 옛날부터 생각하듯이 하늘 위에 있는 분이 아니다. 무엇이나 거룩한 신성을 나타내는 것이면 다 그것이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도 하나의 신이다. 증기도, 전기도, 그 밖의 여러 가지 자연계의 위대한 힘도 다 신이다. 그런 힘에 구하면, 우리가 잘 아듯이, 곧 이루어진다. 그러나 잠깐뿐이다. 그것은 영혼을 즐겁게는 못한다. 구원에 대하여는 한 발짝도 나가게 하는 것이 없다. — 간디
 
13. 네 가지 계급은 특성과 업(業)에 의하여 내가 만들어낸 것이니라. 그러나 알지어다, 나는 비록 그 창조자라도 무위요 불열이니라.
네가지 계급(caturvarnyam) 4종성(四種性), 혹은 4계급(四階級)이라 번역되는 것.
아리안(Aryan) 인종이 인도대륙에 들어와 선주 민족을 정복하고 베다 문화를 건설했을 때 사회를 네 바르나(varna)로 나누었다 바르나란 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즉 사회적인 계급이다. 그 네 계급은 ①브라만(brahmans), ②크샤트리야(kshatriyas),③바이샤(vaisyas), ④수드라(sudras)다. 브라만이 가장 높은 계급으로서 종교와 모든 신성한 전통을 지켜가는 것이 그 책임이므로 혹 승족(僧族)이라고도 번역된다. 크샤트리야는 왕족 혹은 무사족. 바이샤는 평민, 농사, 장사. 여러 가지 바치들.
위의 세 계급은 다 아리안이지만 넷째의 수드라는 아리안이 오기 전부터 살던 사람들로서 아리안에게 정복된 인종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심한 차별 밑에 있었다. 아주 오래 된 경전 속에는 이 수드라가 어떻게 되어서 베다의 거룩한 노래를 들었을 경우는 그 귀에 어떻게 납을 녹여 부어서 죽이라는 말이 있다. 아리안들은 자기네가 선주민과 싸워 이기고 인도에 왕국을 세울 수 있는 것은 자기네가 가지고 있는 그 거룩한 종교의 힘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것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피정복자에게는 그들이 들음으로씨 이것을 더럽히게 해서는 아니된다고 믿었다.
이 네 계급의 제도는 여러 가지 변천은 있었지만 사실상 현재까지 내려왔다. 인도의 새로운 헌법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이것을 철폐하였다. 그러나 인도 사회에는 아직도 그 습관이 많이 남아있다. 인도 특유의 종교, 철학, 사상. 문화를 보존해오는 데 이 계급제도의 공헌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여러 가지 해를 끼친 것은 가릴 수 없는 사실이다.
특성 3성, 곧 구나, 혹은 덕이라고 번역된다.
업 카르마, 전생(前生)에 행동했던 결과가 인과법칙에 의해 오늘에 오는 것.
「기타」는 바르나가 구나와 업에 의해 오는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구나와 업은 출생에 의해서 유전된다. 출생이 아니라면 바르나의 법칙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출생 안에 어떤 우월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브라만은 4계급 중 최고지만 그것은 마치 머리가 몸에서 최고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 의미는 봉사할 수 있는 역량에 있는 것이지, 신분에 있지 않다. 최고의 신분에 있노라고 교만해지는 순간 그것은 발밑에 밟혀 마땅한 것이 되어버린다. — 간디
여기 구나와 카르마가 강조되고 있다. 출생(jati)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속해 있는 바르나, 곧, 질서는 남녀 성이나 출생이나 양육과는 상관이 없다. 그 특성이나 직업에 의해 결정되는 계급은 출생이나 유전에 의해 되는 계급은 아니다.「마하바라타」에 의하면 이 세계는 본래는 한 계급뿐이었는데 후에 와서 넷으로 갈렸다. 이유는 각각 해야 하는 의무 때문이었다. 계급과 계급 외의 구별조차도 인위적으로 된 것이요 비정신적인 것이다. 어떤 옛날의 경전 구절은 브라만과 계급 외의 것들은 본래 한 형제라고 한다.「마하바라타」안에서 유디슈트라는 말하기를 “계급이 서로 혼동되어서 구별할 수가 없다”고 했다. 남자는 어떤 여자와도 교접하여 자손을 낳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옛날의 성현들은 행동만이 오직 계급을 결정한다고 했다.
4종계급은 인간의 진화를 위해 고안해낸 제도였다. 계급제도는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고 시대에 따라 늘 변하였다. 오늘에 와서 그것은 사회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취하는 가지가지의 길이라고밖에 생각할 것이 없다. ……계급 밑에 또 계급으로 갈라져 있는 오늘의 인도의 불건전한 현상은「기타」의 정신에 반대되는 것이다.「기타」의 정신은 사회를 원자식으로 생각하는 데 반대하여 유기적인 통일을 갖게 하자는 데 있었다. — 라다크리슈난
 
무위(akartaram) 무작(無作). 사실에 있어서 그는 모든 작위(作爲)의 뵈지 않는 근본이지만 그는 아무런 집착도 없이 하기 때문에 함이 없다고 한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란 작위가 없는 경지”(無爲而無不爲)이다.「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영원한 안식에 드셨다고 되어 있는데. 예수는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신다고 했다.
무위를 하나의 실례를 들어서 증명할 수 있다. 산소와 수소 이온이 결합하면 물의 특성을 드러내게 된다. 물이 얼면 얼음의 특성을 일으킨다. 이러한 기체, 액체, 고체의 세 가지 서로 다른 상태에 있어서도 그 근본적인 요소인 산소 수소는 여전히 그대로 있다. 수증기도 물도 얼음도 다 근본에 있어서는 산소와 수소로 된 것이니, 그런 의미에서는 산소 수소가 이 세 형태의 물질을 만들어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느 상태에 있어서도 산소 수소는 그대로 있었으니 그 의미에서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할 수 있다. 궁극의 실재자의 모양도 그런 것 아닐까? 모든 창조의 밑바닥에 있으니 그것을 창조주라 할 것이고, 변함없이 남아 있으니 그것을 무위자(無爲者)요 불변자(不變者)라 할 것이다.
크리슈나가 아르쥬나보고 “알지어다, 나는 무위자다” 할 때에 그는 아르쥬나로 하여금 초월적인 의식의 자리에 서서, 3성의 세계를 떠나 창조의 근원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얻게 하기 위하여서 한 것이었다. 절대 침묵이야말로 영원한 실재자의 창조적인 능력이며 지혜인 것, 즉, 상대계에 있어서의 모든 창조적 능력과 지혜의 원천인 것을 직관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14. 유위(有爲)가 나를 더럽히지 못하고, 그 결과를 원하는 마음도 내게는 있지 않다. 나를 그와 같이 아는 자는 유위에 얽매임이 없느니라.
 
15. 그러한 깨달음을 가지고 해탈을 찾는 옛 사람들도 일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옛 사람이 옛날에 일하였듯이 너도 또한 일할지어다.
 
16. 무엇이 유위요, 무엇이 무위냐? 여기서는 지혜 있는 자도 미혹하였느니라. 내 이제 유위가 무엇임을 너에게 일러주리라. 그것을 앎으로써 네가 악한 것에서 건져짐을 얻으리라.
이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2장 38절에서 크리슈나는 아르쥬나에게 가르쳐주면서 “쾌락 고통을, 이득 손실을, 승리 패배를 하나로 보고 싸울 태세를 갖추어라. 그러면 죄를 범함이 없을 것이다”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절에서는 “내 이제 유위가 무엇임을 너에게 일러주리라. 그것을 앎으로써 네가 악한 것에서 건져짐을 얻으리라”한다.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 크리슈나의 가르침 속에 하나의 올라가는 순서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해력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가르침은 한층 더 오묘하면서도 한층 더 단순한 형식으로 주어진다. 먼저 말한 절들에서는 죄에서 해방됨을 얻게 하는 평등관(하나로 봄)에 도달하려면 어떤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이 들어 있는데 지금 이 절에서는 크리슈나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다만 유위(행함)가 무엇임을 앎으로써 아르쥬나는 악한 것에서 건져짐을 얻는다고 한다. 가르침은 행동의 정도에서 지식의 정도로 옮겨졌다. 그러고 보면, 가르침이 나아감에 따라서는, 지식조차도 아니고 보다 더 단순한, 보통의 감각적인 듣고 봄으로 바뀔 것이다. 이것이 삼캬의 교육방식이다. 즉, 여러 가지로 하는 토론은 결국 최종 절정에서는 간단한 한마디 말로 돼버리고 마는데, 그 말 한마디가 인생 이해의 전부를 뒤집어엎어서 사람을 단번에, 아주 완전히, 모든 얽매임을 다 벗은 영원한 해탈의 지경에 올라가게 한다.
그리고 이것을 또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절보다 앞에 있는 두 절에 서는 초월적인 주님의 말려들지 않는 성격을 앎으로써 해탈이 된다고 했는데, 이 절에서는 상대적인 세계에 대한 지식 즉, 유위 무위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조차도 해탈을 얻는다고 한다. 그 지식을 다음의 다섯 절에서 말해준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17. 행위가 무엇임을 반드시 이해하여야 하며, 비행위가 무엇인지도 이해하여야 하고, 또 무행위가 무엇임도 이해하여야 한다. 업의 길은 참으로 헤아릴 수 없다.
행위(karma) 행함(action 혹은 work),특히 전세(前世)에 행한 행위가 인과 관계(因果關係)로 후세에 작용한다는 뜻으로 강조될 때는 이를 업(業)이라고 번역한다.
비행위(vikarma) 해서는 아니되는 행위(wrong action, ill-work). 그 자체의 성질상 집착 없이는 할 수 없는 행위. 예를 든다면 사람을 죽임, 도둑질, 음행 같은 것.
무행위(akarma) 집착 없이 하는 행위(inaction, no-work).
행위를 이해하려면 행위 하는 사람의 가지가지의 의식 상태를 알지 않으면 아니된다. 행위의 가치는 주로 행위자의 의식 정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의식의 상태는 대략 이렇게 구별할 수 있다.
깨어 있는 의식(waking consciousness), 꿈꾸는 의식(dreaming consciousness), 꿈없이 자는 의식(sleeping consciousness), 초월적 의식(transcendental consciousness) 우주 의식(cosmic consciousness), 신의식(god-consciousness).
여기서 행위라 할 때는 행위자 자신과 전창조물을 위해 생명을 지지해 주는 진과를 낼 수 있는 행위, 즉 개인의 진화를 돕고 우주 목적에 공헌 할 수 있는 정당한 행위를 뜻한다. 그런 행위는 개인의 마음이 모든 존재의 밑바닥에서 모든 생명과 자연법칙의 기초가 되는 초월적인 존재와 온전히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것이 우주의식의 상태다. 신의식이라는 것은 그러한 행위가 자동적으로 되는 또 다른 상태의 의식이다. 우주의식에 있어서는 인간은 우주적인 생활 속에 있으면서 하나의 개인으로 행동한다. 신의식 상태에 있어서는 개인의 행동은, 신의 빛 속에 있으면서 우주적인 행동 정도의 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모든 행동에 있어서 영원한 통일의 생활을 살고 있다.
그 길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사람의 세 가지 의식 상태, 즉 깰 때, 꿈꿀 때, 잘 때의 의식 속에서 하는 자연적인 행위는 그 사람의 진화정도에 해당하는 다르마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그 다르마는 진화의 계층에 따라 서로 다르다. 그뿐 아니라 같은 계층에서도 또 서로 다른 사정과 생활범역에 따라 다르마는 서로 다르다. 그리고 그런 차이 속에서도 다르마는 또 그 개인만이 아니라, 가정, 사회, 민족, 세계에 상응해서 또 다르므로 그 복잡이 더해진다. 개개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대기 속에 영향의 파동을 일으킨다. 그 파동이 허공을 타고 번져나가서 창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흔든다. 흔들면서 영향을 미친다. 어떤 생각이 어떤 물체에 가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다. 그것은 너무도 여러 가지고 창조물은 너무도 광막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다.—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18. 행위 속에 무행위를 보며 무행위 속에 행위를 보는 자는 사람 중에서 깨달음을 얻는 자니라. 그러한 사람이 요가를 닦는 사람이요 모든 행위를 완성하였느니라.
일을 하되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하면 조금도 정신의 평형을 잃지 않는다. 욕심에서 나오는 행동을 피하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혼으로 제 할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하는 무행위는 속의 평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집착되는 일이 없다. 아카르마 곧 무행위란 행위의 결과로 오는 얽매임이 없다는 뜻인데 어째서 그럴 수 있느냐 하면 집착함이 없이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밖으로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때도 우리는 행동하고 있다. 어리석은 사람이 행위를 피하고 있는 것은 억지와 무지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행위다. 어진 자의 행위, 즉 욕심 없이 하는 행위는 내버림(抛棄, renunciation)과 같은 결과를 얻는다.
샹카라는 설명하기를 아트만(참 자아, 혼) 안에는 행위가 없다고 했고, 몸 안에는, 외양으로 가만있는 듯한 때에도, 평안이 없다고 했다.
라마누쟈는 무행위, 아카르마는 곧 혼의 지식(atmajnana)이라고 했다. 깨달은 사람이란 참 의미의 행동을 하는 가운데서 지식을 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즈나나와 카르마가 함께 하고 있다.
마드바(Madhva)에 의하면 무행위는 자아에는 행위 아니함이요 비슈누 신에게는 행동함이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는, 개인은 행동을 하거나 아니 하거나간에 하나님의 활동을 보고 있는 사람이다. —라다크리슈난
항상 일하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일하는 자라는 주장을 아니하는 사람의 ‘행위’는 무행위요, 외양으로는 행동을 피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천만 간 기와집을 짓고 있는 사람의 무행위는 행위다. 행위의 비밀을 파악한 깨달은 자는 어떤 행위도 제게서 나가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나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무사(無私)한 마음으로 행위 속에 몰두하고 있다. 그가 참 요가 닦는 자다. 자기주장 속에 행동하는 사람은 행위의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못한다. 혼의 천성대로 하는 발달은 무사와 정결을 향하므로, 정결을 잃은 사람은 무사도 잃었다고 할 수 있다. 무사한 사람의 모든 행위는 자연히 정결하다. — 간디
‘행위 속에 무행위를 본다’ 는 것은 마음이 감각과 관계하여 행동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속의 바탈의 침묵(The silence of the inner Being)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는 뜻이다. 이 뿌리박음(닻줌)이 한창 행동하고 있는 동안에도 침묵을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게 “행위 속에 무행위를 보고” 있는 사람에게는 행동의 전분야가 그 무행위로 언제나 잠잠하신 분(non-active ever-silent Being)의 스며들어 오심(permeation)을 입는다는 것이 살아 있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행위가 감히 무행위의 지경, 혹은 그 밑에 있는 그 본체를 가려 덮지 못한다.
여기에 “성(性)이 성에 대해 작용한다”(3:28)는 지식으로 얻은 해방을 더 분명케 해주는 가르침이 있다. 그것은 이 3 성(三性)의 활동세계와 본체의 잠잠함과를 연결하여서 그침의 지대 위에 무상과 영원을 공존할 수 있게 세워준다. 그것은「우파니샤드」의 궁극의 가르침을 확실케 해준다. 즉 푸르나마다 푸르나마담(purnamadah purnamadam), 이 행위의 나타나 뵈는 세계도 완전하다. 저 절대 본체의 사심도 완전하시다.
‘그는 모든 행위를 완성하였다’ 는 것은 그는 행동의 전범역, 즉 극대와 극소를 다했다는 뜻도 되고, 또 그 생활을 우주적인 단계에서 한다는 뜻도 된다. 개인적 행위 안에는 평상의 정신적 육체적 활동만이 아니라 가장 미묘한 초월적인 행동, 신인(神人) 합일의 행동도 포함된다. 우주적인 정도의 활동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주적 의식에서 하는 활동, 즉 진화의 과정에 온전히 일치되는 활동이고, 또 하나는 신의식에서 하는 활동, 그것은 궁극의 통일된 하나 됨의 살림이다.
또 모든 행위를 완성했다는 것은 완전에 도달했다는 뜻도 있다. 행위는 욕망 실현의 수단이다. 행동을 완성했다는 말은 모든 욕망을 완성했다는 말이다. 즉 완전히 실현했다는 말이다. 행동을 완성하는 것은 행동의 결과를 얻을 뿐만 아니라, 행동과 행동의 결과로 오는 얽맴에서도 완전히 벗어남도 포함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一마하리쉬 마레슈 요기
요가를 닦는 자 요기(yogi), 뜻을 말한다면 통일된 사람, 정신 통일을 이룬 사람, 혹은 하나된 사람, 하나님과 하나된 사람(He is united).
큰 사람은 저를 바르게 하여 일이 바르게 된다(大人者 正己而 物正). — 맹자
도는 늘 함이 없이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제후니 임금이니 하는 사람들이 만일 잘 지키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저절로 될 것이다. 되어 일어나려고 한다면 나는 장차 이름 없는 등걸로써 눌러줄 것이다. 이름 없는 등걸조차도 또한 하고자 아니한다. 하고자 하지 않아 고요히 한다면 천하는 저절로 바르게 될 것이다. (道常無爲 而無不爲 侯王若能守 萬物將自化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撲 無名之撲 亦將不欲 不欲以靜 天下將自正) —노자
 
19. 그 모든 경영은 욕망과 야욕을 떠났으며, 그 모든 행위는 지혜의 불로 살라져버린 바 된 그 사람을 지혜 있는 자들은 어진이라 불렀느니라.
어진 이 곧 판디타(pandita)는 어원적으로는 자아실현에 이른 사람, 그러나 지금은 그 본래의 높은 뜻을 잃고 있다. — 마하데브 데자이
 
20. 행위의 결과에 집착함이 없이 언제나 족한 줄을 알고, 어떤 것에도 의뢰하지 않으면, 아무리 행위 속에 빠져 있어도 그는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느니라.
진짜 꿀이 혀에 와닿으면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단맛이 이때까지 맛봤던 모든 단맛을 다 이기게 된다. 혀가 만일 그 참 꿀맛을 잊지 않고 가지고 있다면 전에 먹었던 단 것들의 생각이 일어날 기회가 없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우주의식 속에서 체험했던 초월적인 축복의 맛을 언제나 마음속에 가지고 살아간다면 마찬가지 결과가 일어날 것이다. 지나간 날에 얻었던 기억이 다시 작용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도를 깨달은 이들이 과거에 했던 행동의 결과에 집착하는 버릇을 벗어버리기 위해 취한 길이었다.—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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