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3

니야야 학파 - 위키백과 Ny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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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야야 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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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야야 학파(Nyāya)는 힌두교의 정통 육파철학 중의 하나로, 정리론(正理論) 또는 정리학파(正理學派)라고도 한다.

"니야야"란 법칙 · 규범 등을 뜻한다.[1] 《베다》 연구를 할 때의 여러 가지 변론이나 사고(思考)에 있어서 논증상의 법칙이나 규약이 설정되고 이러한 것에 관한 연구와 교의가 이윽고 한 학파를 이루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1] 그 성격상 "(윤회의) 원인을 밝히는 논리"라는 의미에서 인명(因明) 혹은 인론(因論)이라고도 부르지만 논리학적 연구는 힌두교의 다른 철학 학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1]

창시자는 고타마(가우타마 · 아구바다 · 足目)라고도 하나 분명치 않다.[1] 근본경전으로서는 《니야야 수트라》가 있으며 《정리경(正理經)》이라고 번역된다.[1] 《니야야 수트라》는 250~350년경에 편찬되었다.[2]

니야야 학파의 성립은 약 1세기경으로 추정된다.[1] 니야야 학파의 자연철학과 형이상학은 거의 바이셰시카 학파의 철학을 계승한 것으로 대체로 바이셰시카 학파와 유사하다.[1][2] 해탈론은 불교와 삼키아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1] 다른 힌두교 철학 학파들과 마찬가지로 해탈을 인생의 궁극적 목표로 삼았으며, 《니야야 수트라》에 정해진 참된 지식(眞知)의 대상인 16제(十六諦)를 바르게 알게 됨으로써 해탈이 달성된다고 주장하였다.[1]

니야야 학파의 사상에는 불교의 영향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논증 중심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인해 《베다》 신학의 주류들로부터는 냉담시되었다.[1] 10세기 이후에는 바이셰시카 학파와 융합되었다.[1] 13세기에 미티라에 강게샤(12세기?)가 나타나서 신니야야 학파를 창설하였다.[2]

어원[편집]

인도에서 논리학 연구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불교에서는 논리학을 인명(因明)이라고 부른다.[2] 그러나 그것을 조직적으로 대성한 것은 니야야 학파이다.[2] "니야야"라는 낱말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이론(理論) 또는 정리(正理)이다.[2] 그것이 후에는 논리학적 연구 전반의 의미가 되었고 다시 학파명으로 되었다.[2]

기본 교의[편집]

니야야 학파는 약 1세기경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1] 니야야 학파의 우주발생론이나 극미론(極微論) 등의 자연철학과 형이상학은 거의 바이셰시카 학파의 철학을 계승하여 대체로 바이셰시카파와 유사하다.[1][2] 해탈론에 있어서는 불교와 삼키아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1] 다른 철학 학파와 마찬가지로 해탈을 인생의 궁극적 목표로 삼았으며 그것은 《니야야 수트라》에 정해진 참된 지식의 참된 지식(眞知)의 대상인 16제(十六諦)를 올바르게 알게 됨으로써 달성되고, 또한 고(苦) · 생(生) · 동작 · 과실 · 사지(邪知)를 마지막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순차적으로 없애 나가면 연쇄적으로 앞의 것이 소멸되어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도 주장했다.[1]

해탈론[편집]

니야야 학파의 교의에 따르면, 인생은 (苦)에 번뇌하고 있는데, 그 원인은 인간이 생존(生存)하고 있기 때문이다.[2] 인간이 생존(生存)은 인간이 활동(活動)을 하는 데 근거한다.[2] 그런데 인간의 활동은 여러 가지 결점, 즉 탐욕 · 미워함 등에 근본하여 일어나는 것이며, 이런 결점은 "오류(誤謬)의 지(知)"에서 비롯된 것이다.[2]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苦)의 근원을 추구해 들어가면, 결국 "오류의 지(知)"가 (苦)가 일어나는 궁극적 근원임을 알 수 있다.[2] 따라서 이 근본적인 오류의 인식(認識)을 제거하여 만유의 진실상을 인식할 것 같으면 자연히 고뇌를 이탈하게 된다.[2] 이것이 모크샤(해탈)이다.[2] 모크샤(해탈)에 이른 사람은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는다.[2]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계율을 준수하고 요가수행을 해아만 한다.[2]

니야야 학파는 바이셰시카 학파와 같이 한없이 많은 원자가 오랜 옛적부터 존재하여 불변불멸(不變不滅)이며 그것들이 합하여 자연 세계를 성립시키고 있다고 한다.[2] 또 아트만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논증하고 있다.[2]

인식론[편집]

니야야 학파에서는 정당한 지식을 얻기 위한 인식방법으로 다음 네 가지를 주장한다.[2]

  1. 직접지각(直接知覺)
  2. 추론(推論)
  3. 유비(類比)
  4. 신뢰할 만한 사람의 언어

이들 중 두 번째의 추론(推論)은 다음의 예와 같은 5분작법(五分作法)이라고 일컬어지는 논증 형식으로 이루어진다.[2]

  1. 주장(主張: 宗 · 종): 저 산(山)은 불을 가지고 있다.
  2. 이유(理由: 因 · 인): 그것은 연기가 있기 때문이다.
  3. 실례(實例: 喩 · 유): 어떤 것이든지 연기가 일어나는 곳에는 불이 있다. 비유컨대 아궁이와 같다.
  4. 적용(適用: 合 · 합): 연기가 일어나는 아궁이와 같이 저 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5. 결론(結論: 結 · 결): 따라서 저 산은 불을 가지고 있다.

네 가지 인식방법 중 세 번째의 유비는, 예를 들어, 물소(水牛)는 소와 같은 것이라고 가르쳐지고 후에 실물(實物)인 물소를 보고서 이것이 물소라고 아는 경우이다.[2]

네 가지 인식방법 중 네 번째의 신뢰할 만한 사람의 언어에는 《베다》가 포함된다.[2] 이 네 번째 항목과 관련하여 니야야 학파에서는 미맘사 학파 등의 어상주론(語常住論)에 반대하였는데, 니야야 학파의 이러한 반대 의견은 바이셰시카파와 그 입장이 동일하다.[2]

각주[편집]

참고 문헌[편집]

분류: 고대 인도 철학 학파
힌두 철학
논리학
원자주의

인과율 (철학) - 위키백과, 인중유과론, 인중무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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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율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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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율(因果律, 영어Causality)이란 어떤 상태(원인)에서 다른 상태(결과)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경우의 법칙성을 일컫는다. 인과 혹은 인과성(因果性)이라고도 한다.

인과의 개념에서 원인이란 용어는 결과라는 용어를 떼놓을 수 없다. 원인은 시간적으로 결과에 선행하고 이를 발생시키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현상이 그것에 뒤이어 일어나는 현상과 인과적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밤은 아침에 선행하기는 하지만 아침의 원인은 아니다. 원인과 결과라는 개념 자체가 사회적 실천과정과 세계에의 인식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모든 현상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세계의 모든 현상이 인과적으로 제약당하고 있다는 명제는 인과관계를 표현하는 명제 그 자체이다.[1]

보통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사건을 야기시킨 조건이 인정된다면 그 조건은 원인으로 간주된다. 인과 조건에서 'A가 B의 원인이다'라는 문장은 두 사건이 각각 독립적이라는 것과 두 사건이 모두 실재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인과적 필요 조건이란 결과의 발생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조건이다. 곧 인과적 필요 조건은 그 조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때, 그에 따른 결과 역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2]

동양에서의 인과율[편집]

인과율이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론 중 가장 보편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측면에서, 인과율은 동양에도 물론 존재한다. 동양에서 흔히 다루어질 때는 원인 때문에 결과가 발생한다는 일종의 동기론적 관점에서 부각되었다. 보통 불교의 연기설이 가장 유명하고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그러나 불교의 독창적 개념은 아니며 고대 인도의 사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고대 인도의 인과응보와 같은 인과율의 개념을 불교가 이어받아, 그것을 모든 세상만사로 적용시킨 것이다. 종교로서 인과율에 영향을 받은 동양 사람들은 인간 개개인이 상호 교섭되어 있음을 명심하여 개인이 전체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불교[편집]

불교에서 인과란 원인과 결과를 합쳐 말하며, 그 둘을 별개로 보지 않는다. 또한 그 사이에 존재할 조건들 역시 배제하지 않는다. 그 사이의 조건들을 불교에서는 연이라고 부른다. 원인은 연을 사이에 두고 결과를 맺고, 모든 결과는 다시 원인과 연결된다. 이러한 시각을 통해, 불교는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이 서로 상호관계를 맺고 있다고 본다. 또한 모든 원인과 결과를 유동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 두 시점을 합쳐 보면 이 세상에 우연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가 곧 원인이고, 원인이 곧 결과이다. 불교에서는 이 인과율의 적용을 현재의 삶에만 적용하지 않고 내세로까지 확장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번 삶에서 나쁜 일을 하면 다음 생에 좋지 못한 존재로 태어난다고 설파하는 것이다. 이 원리는 단순히 세상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이 원리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될 때,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 역시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이고, 우연히 변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불교의 입장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변화에 집착하는 것은, 근본을 보지 않고 형상에 집착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러므로 연기론을 통한 이 인과율을 통해 자신이 없다는 무아를 알게 되면 자신만을 아는 집착하는 삶이 아닌 그 이상의 삶을 보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색계와 무색계 속에 '나'를 비롯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고 바로 여기에 관련된 법칙이 연기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선악의 행위가 주는 결과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며 곧 이를 통해 인과응보의 정당성을 설명한다. 한마디로, 불교에서는 인과율이라는 개념을 '이 세상 어떠한 것도 단일로 독립되어 있는 것은 없다'라는 연기의 원리로 승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 다가가기 어려우며 특유의 추상성을 없애지 못했기 때문에 불교에서 관련 가르침을 설파할 때 여러 어려움이 존재하였다. 그렇기에 불교는 내적으로 교리를 발전해나가 인을 여섯 개로, 연을 네 개의 연으로, 과를 다섯 개의 과로 구분하여 인과관계의 복잡성을 풀어내려 시도했다. 후의 대승불교에서는 이를 받아 더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삼보라 하여,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를 세 개로 나누어 설명했다. 즉시로 나타나는 순현보, 다음 시기에 나타나는 순생보, 나타나기는 하지만 언제인지는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가 그것이다. 한국에서는 불교 윤리 중 인과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이 들어와 나름의 독자성을 띠며 발전하였다. 삼국 초전기 불교의 중심사상은 업설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이유는 윤리보다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이 사상들의 도입은 발전되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보시나, 보은 같은 개념들도 여기에서 나왔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