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4

알라딘: 일상을 철학한다 - 세계와 의식 세계와 나 바로보기 오모리 쇼조

알라딘: 일상을 철학한다

일상을 철학한다 - 세계와 의식 세계와 나 바로보기 
오모리 쇼조 (지은이),이경덕 (엮은이)가인비엘2009-11-20

오모리 쇼조
1921년에 태어나 동경대학을 졸업하였다. 동경대학에서 교양학부 교수, 명예 교수를 역임하고 1996년에 작고하였다.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심리학자, 생리학자, 언어학자, 작가로서도 활동하였으며, 존재와 의식, 신체와 마음이라는 철학의 근본 테마를 둘러싼 이원론의 허구를 무너뜨리는 등 항상 새로운 논리를 펼쳐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지은 책으로 『사물과 마음』, 『언어, 지각, 세계』, 『신시각신론』 외 다수가 있다.
































책소개
'세계와 의식', '세계와 나'라는 기본적인 구도를 해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책. 저자는 오랫동안 스며들어온 세계와 의식의 구도가 착각이며 오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기의 믿음과 달리 이 구도 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 의식의 스크린 너머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세계 속에서 직접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구도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책의 주요 견해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서 견고하게 다져진 이 홀림을 벗어던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더해 이 이원론적 구도를 엄청난 자료로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현대 뇌생리학이다. 우리는 자기의 뇌를 통해 본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생각은 이 세계가 환상이 아닐까 하는 데카르트의 회의를 허용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 약점을 실마리로 해서 이러한 구도가 과학의 전제와 모순된다는 것을 밝히려고 한다.


목차


글을 시작하며
1장 꿈과 환상
2장 확률과 인생
3장 기억에 대해
4장 진실의 다양한 모습
5장 밀린다 왕의 차
6장 ‘논리적’이라는 것
7장 소리가 들린다
8장 본다─생각한다
9장 로봇이 인간이 될 때
10장 동일한 것
11장 몸짓, 목소리
12장 거꾸로 안경과 가랑이 밑으로 보기
13장 오래되고 새로운 심리학
14장 시간을 잘게 잘라내다
15장 마음속
16장 환멸논법
17장 로봇의 변명
18장 세계의 조망
19장 꿈꾸는 뇌, 꿈꾸어지는 뇌
20장 심신문제, 그 한 가지 답안
21장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지나갈 뿐


접기


책속에서


남자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여자에 대해 말하면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실제로 악을 말할 때 선을 말해야 하고 광기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제정신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삶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꿈과 환상에 대해 말하는 것은 현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꿈과 환상은 현실을 ... 더보기
우리는 무엇을 ‘현실’이라고 부를까? 현실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 이와 함께 우리가 살고 있는 상태라고 부를 수 있는 고통, 쾌락, 기분이나 감정 등이 연관되어 있다. 우리의 생명과 삶이 현실의 핵심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1장 꿈과 환상
꿈과 꿈에서 깨어난 세계와의 대비는 현실과 환상의 대비와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대비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동물적인 조건에 뿌리를 둔 존재의 분류다. 꿈이나 환상과 현실의 대비에서 기준이 되는 것은 동물적인 현실이다. 꿈과 환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현재 당장 먹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때때로 먹을 수 없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 1장 꿈과 환상 접기
인생에 거는 것은 단순히 예측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자기의 생활을 거는 것이다. 단지 미래를 방관자처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예측된 미래로 향하는 각오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 예측에 부가된 확률은 그 마음 자세의 표현이며 각오의 표현이다. 거의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마음으로 수술을 하는 외과의사와 반반이라고 생각하며 수술을 하는 외과의사의 각오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수술의 결과가 좋든 나쁘든 두 외과의사는 서로 다른 안도와 서로 다른 변명을 할 것이다.
─ 2장 확률과 인생 접기
이미 죽은 친구를 떠올릴 때 그 사람을 직접 떠올리는 것일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살아 있을 때 그대로 직접 떠올린다고 생각한다. 그 친구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전의 친구는 지금 직접 내 기억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 친구를 지금 내 눈이나 피부로 직접 ‘지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를 직접 ‘떠올리는’ 것이다. 그때 그의 그림자와 같은 ‘사진’이라든가 ‘흔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생전의 그가 그대로 직접 떠오르는 것이다. ‘그의 기억’이 억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 그 친구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과거는 지나간 것이 아니다. 따라서 ‘흔적’ 등을 남길 필요가 없다.
─ 3장 기억에 대해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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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오모리 쇼조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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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에 태어나 동경대학을 졸업하였다. 동경대학에서 교양학부 교수, 명예 교수를 역임하고 1996년에 작고하였다.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심리학자, 생리학자, 언어학자, 작가로서도 활동하였으며, 존재와 의식, 신체와 마음이라는 철학의 근본 테마를 둘러싼 이원론의 허구를 무너뜨리는 등 항상 새로운 논리를 펼쳐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지은 책으로 『사물과 마음』, 『언어, 지각, 세계』, 『신시각신론』 외 다수가 있다.


최근작 : <일상을 철학한다>

이경덕 (엮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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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서 인류의 신화와 의례를 연구하며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연구교수로서 의례와 축제, 신화, 미디어 인류학 등을 강의하며 학생들과 만나고, 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쓴 책으로 『우리 곁에서 만나는 동서양 신화』, 『신화, 우리 시대의 거울』, 『어느 외계인의 인류학 보고서』, 『이야기로 읽는 세계의 신화(12권) 』, 『처음 만나는 북유럽 신화』 등이 있다.

최근작 : <[큰글자책] 새롭게 만나는 한국신화>,<[큰글자책] 처음 만나는 북유럽 신화>,<생각이 크는 인문학 20 : 신화> … 총 125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상생활에서 인간을 끊임없이 현혹시키는
이원론적 구도를 철저히 파헤친다.

저자가 원한 것은 세계와 의식, 세계와 나라는 기본적인 구도를 해체하는 것이다. 그 구도는 오래 전부터 철학에 내려진 주문일 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의 구석까지 스며들어 있다. 일상의 지식을 자기 존재의 발상지로 삼고 있는 과학 또한 이 구도 속에서 성장해 왔다. 따라서 현대의 과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당연하다는 듯이 이 구도 속에서 생각하고 실험하며 살아 왔다.
저자는 이 구도, 그러니까 터부로 되어 있는 세계와 의식이라는 구도가 착각이며 오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과거 천동설天動說처럼 오랫동안 비바람을 견디고 생활 속에 살아남은 유서 깊은 것이지만 역시 일종의 홀림이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기의 믿음과 달리 이 구도 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 의식의 스크린 너머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세계 속에서 직접 살아가고 있다. 세계의 에어포켓air pocket처럼 ‘마음속’에서 즐거워하거나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때 세계 그 자체가 기뻐하거나 고민하는 것이다. 세계에는 기쁨이나 고민의 씨앗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과 고민 그 자체가 세계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다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서 견고하게 다져진 홀림을 벗어던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이 구도 속에서 단련된 언어, 그 언어에 의한 사고의 습관이나 개념의 표백, 비난이나 칭찬과 같은 것으로부터 몸을 벗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이 시도가 극복해야 하는 어려운 관문도 있다. 그것은 이 이원론적 구도를 엄청난 자료로 뒷받침하고 있는 현대 뇌생리학腦生理學이다. 우리는 자기의 뇌를 통해 본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 생각은 이 세계가 환상이 아닐까 하는 데카르트의 회의를 허용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 약점을 실마리로 해서 과학의 전제와 모순된다는 것을 밝히려고 한다.




    


초반까지 새로운 느낌으로 읽다가 어느 순간 산으로 가는 느낌이... 
madwife 2023-01-15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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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불어 넣기-It이 아닌 You를 위해서 



대학교 1학년 때로 기억된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읽었던 책이 있다. 마틴 부버의 “나와 너”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데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가장 근본적인 관계이며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나와 너의 관계로 만들어 주는 힘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나와 너 관계여야 하는데 자주 나와 그것(it)의 관계로 변질되어 버린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쉽게 발견되는 비인간화 현상이 여기에 이유를 두고 있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도 나와 너의 관계이지만 너무나 자주 나와 그것의 관계로 변질되어 버린다. 나와 너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결국 잃어버린 인간성의 회복이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관계이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상을 철학한다”는 책의 서평을 기록하면서 그 첫머리에 뜬금없이 마틴 부버의 “나와 너”를 언급하고 있냐면, 나는 이 책이 같은 맥락에서 쓰여진 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들이 독일과 일본, 20세기와 21세기, 신학과 철학이라는 너무나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 “일상을 철학한다”는 제목을 통해서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것들을 철학적으로 설명하고 분석하는 것이라 착각하면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나도 같은 오해를 했었기 때문에 부담없이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내용이 매우 까다롭고 복잡하고 추상적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되었다. 저자가 얼마나 심하게 말장난하고 있는지, 철학자병이 또 도졌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될 즈음이면 “내가 읽는 게 읽는 게 아니야.”라는 노래가 내 입에 나도 모르게 나오고, “내가 난독증이 있는가?”라는 자괴감에 빠질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지금 다시 읽으라고 한다면 웬만하면 선택하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어느 정도 높게 평가한다. 위에서도 이야기한 나와 너의 관계, 그리고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 때문이다.



인생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주고 있는 부분을 인용해 보겠다.

인생을 거는 것은 단순히 예측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자기의 생활을 거는 것이다. 단지 미래를 방관자처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예측된 미래로 향하는 각오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 예측에 부가된 확률은 그 마음 자세의 표현이며 각오의 표현이다.(P.23)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예측을 한다. 아침에 텔레비전에서는 오늘의 날씨 혹은 내일의 날씨를 예측해주고, 많은 책들은 한국의 경제상황에 대해서 주가에 대해서 예측해 준다. 많은 자기 계발서들이 인생의 어려움을 미리미리 준비하라면서 많은 조언들을 해준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가? 왜 그리 쉽게 목숨을 포기하는가? 그것은 예측이 부족했기 때문도 아니고 빗나갔기 때문도 아니다. 예측에 대한 잘못된 정의 때문이다. 저자는 예측이란 방관자처럼 가만히 다가올 일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향하겠다는 굳은 각오라 정의한다. 그렇다. 예측은 위험의 확률을 따져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딛고 앞으로 나가려는 각오요, 의지의 표현이다. 지금 나는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가? 나의 인생의 자세에 대해서 진지하게 묻게 만들어 주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 인간관계에 대하여 저자의 통찰을 살펴보려고 한다. 가끔 텔레비전을 보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나영이 사건이고, 얼마전에 일어났던 10대 소년이 보험금을 노리고 자기 가족을 살해한 사건이 아닐까? 왜 천륜을 어기는 이런 사건이 발생하는가? You를 It으로 보는 사고 때문이 아니겠는가? 상대방을 있는 내가 말을 하고 존중해야하는 인격체가 아니라 나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서 사용해도 되는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즉 상대방을 인간이 아닌 사물로 여기는 마음 자세가 문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음 불어 넣기를 멈추었기 때문에 상대방을 사물화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마음을 불어 넣기 시작한다면 로봇도 인간처럼 존중할 수 있겠지만 마음 불어 넣기를 멈추어 버린다면 아무리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대해도 되는 로봇처럼 사물화 되어 버린다고 주장하면서 과거보다 오늘날 물질적으로 더 풍요롭지만 인간성은 더 메말라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You를 It으로 바라보는 것은 존재의 유무가, 과학적인 증명이, 물질의 빈곤과 풍요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에 그 원인이 있다.

목석이 되었든 인간이 되었든 또는 로봇이 되었든 그 자체는 마음이 있는 것도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내가 그것들과 얼마나 교제하며 살았는가에 따라 마음이 있는 것이 되기도 하고 마음이 없는 것이 도기도 한다. 거기에 따라 나 또한 인간이 된다.(P.73)

그러니까 당신이 인간인 이상, 제정신을 가진 인간인 이상, 타인의 마음을 불어넣는 일을 그만 두어서는 안됩니다. 이 불어 넣기는 인간성의 핵심이다 때문입니다. 서로 불어넣기를 하기 때문에 인간의 생활이 시작되고 인간의 역사가 존재합니다. 그에 따라 서로의 인간이 서로를 인간으로 만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들끼리 서로 마음이 있는 존재로 보는 태도는 애니미즘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관용적임 태도로 애니미즘을 수용하였습니다. 짐승, 물고기, 곤충 뿐만 아니라 산천초목 모두 마음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매우 인색한 애니미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고나 혈연관계를 주축으로 한 애니미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배타성이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내가 곤혹스럽습니다. 어째서 내게 마음을 불어 넣어 주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 이미 불어 넣어 주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까? 당신들의 마음을 조금 열고 당신들 사이의 애니미즘 속에 나를 넣어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당신들의 인간성도 보다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 17장 로봇의 변명 중에서(P.132)

인간성을 풍요롭게 하는 것,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결국 상대방을 It이 아니라 You로 바라볼 수 있는 사고의 전환이 아니겠는가? 더더군다나 상대방을 생사대적으로 바라보면서 찍어 누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대한민국의 비정한 현실에서는, 점점 더 세련되어 가는 무한 경쟁의 체제에서는 이것 외에는 대안이 없지 않겠는가? 이 사실을 깨닫게 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다. 나와 그것이 아닌 나와 너의 관계가 다시 정립되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고민하던 나에게 이 책은 사막 한 복판에서 만난 오아시스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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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0-01-28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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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나.. 매트릭스와 네오의 철학 

점점 살아가면서 인문학적인 지식과 자극의 필요함을 부인할 수 없다. 늘 눈에 보이는 것, 손으로 만져지고,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것들 속에서 살면서 내 지식, 사고의 허기를 느끼게 되었다. 나를 배부르게 해 줄 책을 찾기 시작했다.

음.. 나는 한번도 철학을 철학으로 받아 들여 본적이 없는 것 같다. 내가 만난 철학은 과목이었고, 리포트 였으며, 그냥 의미도 모르고 일상적으로 쓰이는 어슴프레한 단어 였다. 그런데, <일상을 철학한다>는 제목에서 나의 삶 속에 있던 ‘철학’이 의문부호를 던졌다.
일상과 철학이 연결이 되나? ‘철학한다’ 라는 동사는 뭘 한다는 의미지?

내가 만난 책 <일상을 철학한다>는 한 마디로 어렵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가 아닌,그 동안의 나의 사고 방식에 계속 의문을 던지며, 나 스스로 ‘진짜 그런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저자는 세계와 의식으로 나뉘어 생각하는 구도가 허구라고 주장한다. 스크린 너머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스크린의 존재 없이 바로 그 세계 속에서 직접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일상을 바라보는 그 모든 것에 대한 철학적 의미가 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책을 다 읽고 난 느낌은 조금 과장해서 매트릭스의 실체를 안 네오의 느낌이랄까? 나와 내 주위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말이다. 네오는 매트릭스의 존재를 알고 자신이 세상의 구원자로 살아가야 함을 인정했다. 하지만, 내가 인정하는 것은, 내가 이 <일상을 철학한다>의 리뷰를 좀 철학적인 어투로 쓰고 있다는 것을 아는 정도..?

나의 사고방식에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가져다 주진 않지만, 다른 관점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원한다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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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 ‘협동 사회운동이 왜 필요한가?

(3) Namgok Lee | Facebook

Namgok Lee
12 h  · 

오후에는 ‘익산 시민으로서 나의 희망’이라는 주제로 시민들과 강의 형식으로 대화를 했다.
익산이 ‘도농복합의 행복 도시’가  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경쟁 사회’에 살고 있다. ‘개인의 해방’과 ‘경쟁 사회’는 서로 맞물려 있다.
‘경쟁 사회’는 지금의 물질적 풍요와 개인의 권리 신장에 기여했고, 지금도 여전히 또 상당 기간 지배적 형태로 존속할 것이다. 
 그러나 만족을 모르는 극심한 소비주의와 각자도생의 차가운 이기주의 문화  때문에 행복도(幸福度)가 오히려 낮아지고, 양극화가 심해져 합법적 불공정이 커지면(흙수저 금수저 등)  ‘갈등 사회’로 되고, 성장과 소비 위주의 문명이  생태적 재앙을 일으키는 등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경쟁 사회’ 속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협동 사회’를 키우고 넓혀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를 위한 시민운동, 정치운동, 교육 운동 등이 ‘행복 도시’를 위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몇 가지 제안을 했다.

그런데 참가한 한 청년이 ‘협동 사회운동이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했다.
아마도 ‘협동’이라는 말 속에서 어떤 ‘부자유’ 즉 집단이나 전체 또는 도덕이나 윤리 등에 의한 ‘개인의 억압’을 느끼는 듯 했다.
짧은 시간이라 충분히 대화를 나누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나는 우리의 청년 세대가 ‘경쟁 사회’ 이외의 다른 사회 특히 ‘자유로운 협동 사회’에  대한 상상 자체가 어렵지 않나 하는, 뭔가  벽을 만나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의 해방, 프라이버시의 존중, 자유로운 경쟁을 통과하여 그것을 포월하는 협동 사회에 대한 상상력이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

‘경쟁’과 ‘협동’은 좋고 나쁨의 선택이 아니다. 어차피 공존하면서 사회의 건강과 행복을 높여가야하는 쌍두(雙頭)마차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협동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가 사라지는 것이다.
어제 좀 착잡했지만, 협동 운동을 비롯한 문명 전환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청년들과의 대화나 교육환경의 개선에 좀 더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진다.
===


Namgok Lee
1 d
  · 
논어 가운데 가장 많이 회자(膾炙)되는 문장이다. 이 문장을 처음 읽으면서 썼던 글인데, 요즘 이수태의 공자의 발견을 읽고 그 내용을 덧붙힌다.
 “군자는 화(和)하되 동(同)하지 아니하고, 소인은 동(同)하되 화(和)하지 아니한다.” 
子曰 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 (13/23)
 “군자는 섬기기는 쉬어도 기쁘게 하기는 어려우니,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도로써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군자는 사람을 부릴 때 그릇에 맞게 쓴다. 소인은 섬기기는 어려우나 기쁘게 하기는 쉽다. 이를 기쁘게 하는 데는 비록 도로써 하지 않아도 된다. 소인은 사람을 부리는데 모든 것을 다 갖추기를 바란다.” 

子曰 君子 易事而難說也 說之不以道 不說也 及其使人也 器之 小人 難事而易說也 說之雖不以道 說也 及其使人也 求備焉 (13/25)


<화이부동(和而不同)은 요즘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말의 하나이다. 

군자와 소인을 나누는 말 중에 대표적인 말이라고 생각된다. 군자는 사람의 본성에 조응하는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이고, 소인은 아집에 바탕을 두고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다르다. 성격, 지능 , 취향, 환경 등이 모두 다르다. 따라서 이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특성을 존중하여 자기중심적으로 같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실상에 맞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경우는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기 쉽다. 자기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대를 자기의 생각이나 행동양식에 일치시키려고 한다. 
자기와 다르면 틀렸다고 생각한다. 자기 생각과 다른 생각을 말하면 자기를 반대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미워한다. 
이것은 인간의 실상에 거스르는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말하는 소인의 전형적인 행동양식이다. 
이런 소인을 기쁘게 하는 것은 그의 생각이나 취향에 맞추면 된다. 그런데 그것은 진실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같지 않은 것을 같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마음에 부자유나 허위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소인은 섬기기가 어렵다고 한 것 같다. 항상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관계는 얼마나 힘든 것인가? 
군자는 사람의 다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입장이나 적성, 기량에서 대한다. 그래서 섬기기가 쉽다. 그러나 군자를 기쁘게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군자의 기쁨은 그 행위가 진리에 부합할 때이기 때문이다. 소인이 군자를 기쁘게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부동(不同)을 머리로는 이해하는 것 같아도 막상 그런 경우를 당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도 머리로라도 이해하는 것은 좀 나은 편이다. 머리로라도 이해하면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소인으로부터 군자로의 이행이 조금씩이라도 일어나는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아 생각과 마음이 일치하지 않거나 말과 행동이 다르게 되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부끄러움이야말로 소인으로부터 군자로 이행하게 하는 나침반인 것이다. 
이 부동(不同)을 마음속으로부터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면(억지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넘어서서) 진정으로 다른 사람과 화(和)하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사이좋아지는 것이다. 따라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화(和)와 부동(不同)은 동전의 안팎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脫朱子 論語學으로 스스로를 밝힌 이수태의 ‘공자의 발견’에서 이 문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지지 받고 있는 해석은 “군자는 융화하되 뇌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뇌동할 뿐 융화하지 못한다.”이다.
 주자는 동(同)을 아비(阿比;아첨하고 빌붙는다)는 뜻으로 보았고, 정약용은 ‘춘추좌씨전’의 화동(和同)의 논리를 극찬하였다.
이 문장을 신영복은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고 해석하면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지배하려 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자본주의를 들고 극좌와 극우도 모두 그런 논리에 빠져들고 있다고 경고한다.
문제는 공자의 진의眞意인데, 나는 “군자는 서로 융화하나 같지는 않고, 소인은 같으면서도 서로 융화하지 못한다”가 맞다고 본다.
이 해석은 주자의 論語集註보다 1000년전에 나온 정현 마융 등 한 대와 삼국 시대 학자들의 해석을 모아 놓은  <논어 집해集解>의 주석과 같다.
‘군자는 마음이 화목하나 그들이 보는 견해는 각각 다른 고로 같지 않다고 하였다. 소인은 즐기고 좋아하는 바가 같으나 제가끔의 이익을 다투는 고로 화목하지 못하다.’
주자朱子는 좌전의 특수성에 근거하여 공자의 보편성 있는 발언을 해석한 것이 무리이고(동을 뇌동으로),
신영복은 동同의 의미를 관념적으로 확장(同을 획일화로)한데 문제가 있다고 본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 후반이 다양성과 획일성이 문제가 되는 시대였겠는가?
다양성과 획일성, 공존과 지배는 춘추후반의 문제를 인식하는 프레임으로서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신 영복의 해석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있고 음미할만한 주제지만, 그것이 공자의 발언 의도였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공자는 단지 세속적 가치에 얽매인 ‘한 통속’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갈등하고 싸우는 소인들의 모습과 그런 잇속을 떠나 생각은 다르지만 예를 잃지 않고 화목하는 군자의 모습을 대비적으로 언급했을 뿐이 아닐까.>
참고로 말하면 나는 신영복 선생을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일 때 만나 ‘감옥에서의 교류’를 했던 인연으로 출옥 후에 일정한 교류가 있었다. 탁월한 사상적 능력을 가진 분이지만, 내가 가졌던 선생에 대한 기억은 졸저 ‘진보를 연찬하다’에서 ‘극좌나 극우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마르크스의 잔영殘影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 그의 사상적 천재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것 같다’로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