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6

Philo Kalia - 『혁명의 기원』(斗升 황치연의 5번째 시집) 박인환 시인을 영원한 댄디보이 시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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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기원』(斗升 황치연의 5번째 시집)
박인환 시인을 영원한 댄디보이 시인이라 말하는데, 나는 두승 시인을 볼 때마다 풍요롭고 멋스러운 신사의 댄디함을 느낀다. 그는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으로서 법 중에서도 헌법, 헌법학 박사, 헌법학자이다. 그의 현실인식과 분석은 헌법학자답게 늘 예리하고 원칙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이번에(2021년 12월 1일) 시집 3권을 한꺼번에 상재했다. 『혁명의 기원』과 『아름다운 산행』은 시인의 자작 시집이고, 『겸허한 사랑』은 시인이 번역한 동서양의 명시 모음집이다. 시인의 감성은 “법학도였던 차이코프스키”(98)를 닮은 것 같다. 그래서 시인에게 헌법과 시집은 전혀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이 결코 아니다. “헌법은 하얀 종이와 검은 글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시집도 하얀 종이와 검은 글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105) 그러나 하얀 종이와 글자로 이루어진 헌법과 시집에는 공히 “아름다운 영혼”이 담겨 있어야 하며 “세상을 바꾸는 거룩함을 전”해야 한다.
두승 시인의 전 시집을 일관하는 화두는 ‘혁명’이다. 2005년 『혁명가들에게 고함』을 시작으로 2010년 『나의 기도문 – 진화와 혁명에 대한 성찰』, 2015년에 『고상한 혁명』과 시선집으로 『혁명시학』을, 그리고 이번에 『혁명의 기원』이다. 시인은 이번에 상재한 시집을 혁명시학의 완결판이라고 말한다. 어찌하여 시인의 핵심적 시어가 ‘혁명’일까?
‘혁명’하면 정치사회적이고 역사적 개념으로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을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시인과 대략 2년 전 여주의 최시형 선생 묘소를 탐방했었는데 그때 시인은 동학혁명 혹은 동학농민혁명을 갑오 혁명이라 불러야 정명(正名)이라 역설했다. 공주 우금치 전적비를 탐방했을 때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詩 「내장 호숫가를 거닐며」(130-131)에 “갑오혁명군의 함성소리 호수에 울려 퍼진다./갑오혁명의 장군은 청동인(靑銅人)들로 석대 위에 서서/제폭구민(除暴救民)을 외치고,/호숫가를 거니는 혁명시인은/보국안민(輔國安民)으로 화답하노라.” 시인에게 내장 호수는 갑오혁명의 동학 정신과 혁명운동의 기운이 지금도 살아 숨쉬는 곳이다.그러므로 “‘한국의 시인’들은/내장호숫가를 거닐었던 시인과,/그렇지 않은 시인만이 있으리라.” 시인에게 혁명은 사회정치적 의미만이 아니라 원초적으로 정신적이고 영적인 의미이다. 그래서 시인은 끊임없이 혁명의 뿌리를 찾아 노래한다.
두승 시인은 갑오혁명의 본거지 전북 정읍 고부 출신이다. 시인은 「고부의 어느 여름 날」(43)이란 시에서 두 갑자가 훨씬 지났지만 혁명의 미완성인 이 시점에서 혁명의 기운이 사그라졌음을 한탄한다.
“갑오혁명의 땅!
두 갑자, 세 해가 지나
쇠락할 대로 쇠락한 고부에는
오일장도 서지 않는다
어느 초인이 나타나
줄포만 갯벌생태공원이 아닌 고부에서
소주 한 잔 마시게 하리!
어느 무상함이
팽나무 당산 신단(神壇) 아래 노란 팽 열매를 따먹던,
고부천에서 난 말조개 매운탕을 함께하던
옛 친구 설움만 하리!”
하여 시인은 “백마 탄 초인을 맞으려고 천계산(天界山)에”(64) 오른다.
그러니까 시인에게 혁명은 정치사회적 개념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그러면 혁명을 너무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혁명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먼저 근원적으로 “혁명의 기원”을 묻는다. “혁명의 뿌리는 양심”(52)으로서 “오로지 인간의 존엄과 생명과 자유를”(132) 혁명의 원리로 생각하며 “사랑과 평화”(137)를 지향점으로 삼는다. 다시 말해 혁명은 “인간에 대한 예의와 신에 대한 기도”(73)에서 비롯된다. 혁명의 화산은 자유에 대한 집적된 열망에서 타오른다. 그래서 혁명가의 절규는 “‘나는 자유다!’”(96)이다. 진정한 혁명인은 사랑함으로써 자유를 실현하고, 자유 속에서 사랑한다. 자유 없는 사랑은 속박이 될 수 있고, 사랑 없는 자유는 이기적 욕망으로 떨어질 수 있다. 자유는 허허(虛虛)이며 사랑은 실실(實實)이다. 그래서 자유와 사랑은 “허허실실”(58)이다. 자유한 사랑만이 “겸허한 사랑”이 될 수 있다. 2005년 교황 베네딕토(Benedikt XVI)께서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하나님의 혁명(Gottes Revolution - Die Botschaft des Papstes an die Jugend der Welt)을 말한 바 있다. 가톨릭 신앙인인 시인의 2005년 첫 시집의 제목이 교황의 말씀과 서로 닮아 있어, 시인의 혁명 이해에는 가톨릭 신앙과 복음의 이해가 깊게 깔려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래서 시인의 혁명가는 때로 “절대고독의 모서리에”(99) 서기도 하지만 고독하지 않다.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7월 7일 발표된 김수영의 시 「푸른 하늘을」에는 ‘혁명은 고독한 것이자 고독해야 하는 것’이라는 유명한 명제가 나온다. 그러나 두승 시인에게 혁명가는 고독하지 않다. 동서의 위대한 종교 사상이 혁명 속에 도도히 합류하기 때문이다.
혁명가의 고독은 시인의 미소와 같습니다.
혁명가는 홀로 걷지 않습니다.
모세의 바닷길을
웅녀의 후예들이 걷습니다.
......
홍익인간의 유전형질을 가진 혁명가는
홀로 걸어도 고독하지 않습니다.
혁명가의 고독은 수도사의 기도와 같습니다.
-「혁명가의 고독」(부분)
혁명가가 고독하지 않은 두 번째 이유는 혁명을 위해 순교의 길을 걸었던 순교자들이 동행하기 때문이다.
혁명가는 고독하지 않다.
첫눈이 내리는 날,
그대와 함께 황새바위 언덕에서 만나고 싶다.
그대와 함께 황새바위 언덕을 걷고 싶다.
그대와 함께 황새바위 언덕에서 기도하고 싶다.
목숨의 핏값은 훌쩍임과 흐느낌도 없이
영원의 빛으로 맺은 언약이리니
성령이여, 임하소서!
사랑과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혁명가는 고독하지 않다.
-「혁명가는 고독하지 않다」(전문)
혁명가가 고독하지 않은 세 번째 이유는 시인의 혁명은 “초록 혁명”(22)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초록 혁명은 마침 부활절과 만난다.
연둣빛 숨결은 레퀴엠requiem으로 번지고
오늘은 성삼일 전 수요일!
초록혁명으로 부활을 기다리고
봄을 입는 바스락 소리!
그대 그 향기를 듣는가
「초록 혁명 Green revolution」(부분)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봄을 맞아 하느님의 창조인 자연의 초록 혁명과 구원과 새창조의 사건인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느님의 혁명이 자연과 역사 속에서 유유히 전개된다. 그래서 시인은 봄에 핀 “그대의 사랑을 가장 푸르게 전하고”(23) “하얀 모란꽃이 내 가슴에 핀다”(37) “연꽃은 태양을 향하여,/박꽃은 달빛을 받으며/너무나 다르게 아름답다”(39) 시인의 「춘정(春情)」(79)은 혁명의 에너지원이다. 시인은 봄(혁명)을 몸으로 느낀다(「봄은 그리움입니다」, 82). 봄은 그리움이고, 그리움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봄이 오기 때문이다. 봄기운을 입은 시인은 생명의 기운이 움트고 있는 버드나무가 늘어진 강변만이 아니라 “날숨을 내쉬며 터널 속”으로 걸어가기도 한다.(「봄길」, 114) 시인에게 걷는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며, 만난다는 것이며, 깨닫는다는 것이며, 그리고 살아 있음을 잊는다는 것이다(「반구정에서 화석정까지」, 90-91). 가톨릭 수사 안셀름 그륀은 『길 위에서』에서 걷기의 신학을 그린다. “걷기는 육과 영을 아우른 인간을 만든다. 걷기는 온 감각을 건드린다. 전인(全人)은 통합되어 있으며, 길 위에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더 변화할 수 있음을 체험한다. 전인은 자신을 전체로서 체험하고, 전체로서 변화한다.” 혁명의 또 다른 설명이다.
두승 시인에게 걷기는 산을 걸음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래서 시인은 ‘등산’이나 ‘입산’이란 말 대신 ‘산행(山行)’이란 용어를 선호한다. 산을 걷는 것이다. 시인은 “산행을 통하여 태초에 생명을 잉태한 영원한 시공(時空)의 자연 속으로 돌아가는 귀환 여행을 예행 연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아름다운 산행』,6)고 산행의 의미를 부여한다. 山을 주제로 한 시인의 시는 이성부 시인에 버금가지 않나 생각한다.
동서양의 명시 모음집인 『겸허한 사랑』에는 시인이 직접 번역한 한시 91편과 서양의 명시 41편이 실렸다. 마지막에 혁명 시 세 편을 올렸다. 그중 둘째 시다.
혁명을 하려면 재미있게 하라
무섭게 시리 심각하게 하지마라
너무 진지하게 하지마라
재미있게 혁명하라
사람들을 증오하여 혁명하지 마라
그들의 눈에 단지 침을 뱉기 위해 혁명을 하라
돈 때문에 혁명하지는 마라
혁명을 새거 돈을 지옥에 떨어뜨려라
평등을 위해서 혁명하지마라
이미 우리가 너무 많은 평등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혁명하라
그러면 사과 수레를 뒤엎어 어느 쪽으로 사과들이 굴러가는지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오
근로자 계급을 위해 혁명하지 마라
우리 모두 스스로 작은 귀족들이 될 수 있도록 혁명을 해치우고,
즐겁게 달아나는 당나귀처럼 그런 혁명을 하라
어쨌든 세계 노동자들을 위해 혁명하지 마라
노동은 인간이 너무 흔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노동을 철폐하자, 노동하는 것을 ㄹ없애자
일은 재미일 수 있고, 그러면 사람들은 일을 즐길 수 있다
일을 즐길 때 이미 그것은 노동이 아니다
그러한 일을 하자! 혁명을 재미있게 하자!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건전한 혁명」(전문)
시인의 길은 혁명의 길이다. 시인이 말하는 혁명의 길은 『베네딕도 수도 규칙』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순례로 말하듯이 삶을 넓은 마음과 사랑의 감미로써 걸어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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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혜륜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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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ee Youn Hwang
    Herzlichen D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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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y
    Philo Kalia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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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aechang Kim
    感動振響 身震心覚 霊通革人
    嗚呼 生命開新 生動在近!!!
    감사합니다. 아주아주 감동적인 말씀글에 힘을 얻었
    습니다. 좋은 철벗이 계시군요.
  • Taechang Kim
    저 자신은 혁명의 명을 생명으
    로 해석하고 혁을 혁신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결국 혁명은
    생명개신이라 생각하고 저 보
    다 훨씬 한국인의 감정에 맞게
    표현한 것에 경의를 드립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에는 상대가
    일본인들이라 혁명이라는 말
    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 달라서
    개신이라는 말로 같은 뜻을 고
    감가능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을 뿐 선생님과 그 분의 뜻에
    100%공감합니다.
  • Panim Kim
    표현력이 대단하세요. 소재도 다양하고...

Philo Kalia - <아~! 派>를 아는가? 통영 윤이상 기념관 자료보관실에서 선생의 특이한 자필 글을 읽게...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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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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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派>를 아는가?
통영 윤이상 기념관 자료보관실에서 선생의 특이한 자필 글을 읽게 되었다. 4쪽이나 되는 선생의 수필인데, 가난과 일제 치하의 억압 속에서도 민족적 긍지와 자유로운 예술혼을 불태운 사람들을 「아 - 派」라는 흥미로운 말로 서술한다. <예술목회연구원>은 「아 - 派」의 정신(혼)에 심히 공감하여 감히 그 계보를 이을 엉뚱한 꿈을 꾸며 폭소를 세차게 터뜨리다.
「아 - 派」 / 尹伊桑(윤이상) 음악가
나의 고향 통영에(지금은 충무시) 일제 때에는 민족 사회에 두 파(派)가 있었다. 하나는 「현실파」요, 하나는 「아~ 파」였다. 인구가 4만여, 항구도시로 시가의 중심지는 모두 일본사람이 차지하고, 우리 민족들은 변두리에 살고 있었다. 여기서 三一운동 때 격렬한 만세운동이 터졌고,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예수교가 일찍 들어왔고(호주선교 구역) 그를 따라서 서양문화가 들어와, 민족정신도 일찍 깨었다.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이기 때문에 민족의 피에 줄기차게 깨끗한 정렬이 생동하고 있었다.
三一만세 때의 참패를 겪고, 젊은 층에는 차츰 두 갈래의 생활철학이 대두되었다. 하나는, 민족의 역량을 실력으로 길러야 하며, 무엇보다도 돈을 벌어야 한다. 그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제쳐두고, 입을 악물고 일본사람 밑에 들어가서 종이 되더라도 우선 경제와 기술의 실력을 기르자 -, 그래서 기초교육을 받고, 고장에서 실력 있다고 간주되던 사람들 중에도, 주유선(注油船)을 타고, 짐차 바퀴를 끌고, 화물차를 몰거나 일본인의 점원이 되어 끼니를 걱정하지 않고, 더러는 점포를 내던지 논마지기를 사는 사람들이 불었다. 이들은 독서를 하지 않고, 철학하는 것을 경멸하고, 사상경찰에 걸려서 유치장에 끌려가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비웃었다. 이런 사람들을 「현실파」로 불렀다.
이와 정 반대로, 민족의 설움을 제 설움처럼, 민족의 운명이 제 혼자의 양심에 달려있는 것처럼, 민족의 원수는 일인(日人)이기에, 모든 일인과의 타협을 절단하고, 오로지 청렴한 양심에서 살자-. 이런 사람들은 더러는 양복을 입지 않고,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바닷가에 나가 항상 한탄한다. 겨드랑이에 대개 책 한두 권을 끼고 다닌다. 일본 강담사에서 발행한 세계문학전집-, 워즈워즈나 브라우닝의 시의 구절을 암송하고, 슈니츨러의 희곡을 탐독한다. 집에는 끼니를 굶고, 동생들을 학교 보낼 형편이 못되어도 그들은 결코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 호수같이 맑은 바다 위에 뜬 달을 보고 「아~」하고, 봄날 아지랑이 이는 전원에서도 「아~」하고, 가을 낙엽을 밟으면서도 「아~」한다고 해서 소위 「현실파」들은 이들을 비꼬아서 「아~ 파」라고 불렀다.
이 「아~ 파」의 선배들은 일찍 동경으로 건너가 우선 공부하기 시작했다. 돈 없이 갔으니 납일(納日) 장사(신문배달)를 하며, 학교에 적은 두었으나 대부분 공부가 되지 않는다. 고생의 과정에서 권력자에 대한 반항의 철학을 배운다. 그래서 일본의 그때 유행하던 아나키스트들의 영향 속에서 일부는 과격한 무정부주의자가 된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사람이 집을 한 채 빌린다. 그다음 줄을 이어 고향 사람이 따라 들어온다. 집세는 반년이고 일 년 분이 밀린다. 그중에 부잣집 아들이 있어 다 달 송금이 오면 7-8인이 그것으로 산다. 때마다 수제비를 쑤어 먹어야 한다. 겨울이 오면 땔감이 없어, 울타리를 뜯어 땐다. 그다음에 집을 이은 판자를, 심지어 천정의 널빤지 까지도--.
일본사람 집주인이 집세를 받으러오면, 피한다. 집세는 2년, 3년이 밀렸다. 어쩌다가 주인이 대표자가 집에 있는 것을 발견하면, 그는 빨가벗고 긴 일본도(日本刀)를 옆에 놓고, 정좌를 하고 있다. 그래서 번번이 집주인은 질겁을 하고 도망을 한다. 이 무정부주의자들에게는 「죄없는 개인의 사유재산」이란 도덕이 통용하지 않는다. 「네놈들이 조선의 식민착취로 얻은 재산의 일부가 아니냐. 조선 총독부가 우리 민족으로부터 착취한 금액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러한 이치다. 이때를 전후하여 동경에서 공부하던 통영 출신의 명사들 중에 유치진(柳致眞), 유치환(柳致環) 형제와 김용식(金容植) 전 외무부 장관이 있다. 유씨 형제는 이 무정부주의자들과 정신적으로, 또는 적어도 분위기적으로는 친분관계를 가지고, 또 그 영역에서 살았다. 이때 여기 속하는 사람 중에 예술 계통의 사람들이 꽤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분들이 고향에 돌아와 「아~ 파」를 형성하였거나, 그런 분위기를 조성 하였다는 것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아~ 파」로 불리우는 사람들은 비단 비생산적인 생활만 한 것은 아니다. 돈은 없어도 모여서 어두운 불빛 아래 시를 낭독하고 철학을 논의하였다. 때로는 스스로 각본(脚本)을 써서 엷은 반일적 연극(反日的 演劇)을 공연하였다. 이러다가 좌익운동으로 지하로 들어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중 「순수성」을 고집하던 사람들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여 사설도서실을 꾸몄다. 이때 나의 어린 시절 여기서 동화집을 얻어다가 탐독하였다. 이런 시절의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나에게는 어떤 예술적이 소양이 형성되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짐작한다. 물론 이 「아~ 파」의 후배들이 일제 전쟁 말기에 고등경찰의 지목을 받다가 검거되어 옥고를 치른 예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럼 八一五해방 직후에는 이 두 파가 어떻게 되었는가? 소위 「현실파」에 속하던 사람들은 재빨리 일본사람들이 던지고 간 상점을 점령하고 경제권을 잡는 데 급급하였다. 이른바 敵産적산) 처리의 소용돌이 속에 헤엄쳐 다녔다. 그러나 「아~ 파」의 후예들은 먼저 잃었던 민족의식을, 우리말과 우리글을 찾아주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었다. 이들은 정치를 하는 것을 대개 더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중에 많은 사람들이 교육계에 들어갔다. 여기 병행하여 문화협회를 조직하고, 음악회를 열고 야학을 열어 무산 아동을 교육하고, 연극을 하고 한글 강습회를 하고 ---, 이를테면 계몽운동에 중점을 두었다.
오늘 한국에는 “통영에서 많은 예술가가 낳다~~”고 하는 말이 정평이 되어 있다. 이 말은, 통영에서 「아~ 파」가 닦아 놓은 길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말이리라. 그리고 전 한반도를 돌아봐도 통영처럼 “민족의 양심”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많지 않으리라.
나는 고향을 떠난지 30여년! 고향에 누가 살고 있는지, 어떻게 변하였는지 지금의 젊은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는 진리의 표준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나는 꿈에도 잊지 않는 나의 고향에 아직도 갈 수가 없다. 그러나 나의 환상(幻想) 같아서는 옛날 희랍의 철인(哲人)처럼, 눈에 돋보기를 쓰고 통영의 거리거리를 찾아다니며 소리를 외치며 물어보고 싶다, 「여기 어디에 아직은 양심이 살고 있는가 ?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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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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