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08

간디 날마다 한생각-마음을 씻는 생각 > 번역물 | 바보새함석헌

날마다 한생각-마음을 씻는 생각 > 번역물 | 바보새함석헌




간디 | 날마다 한생각-마음을 씻는 생각
작성자 바보새 14-05-27 11:18 조회8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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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씻는 생각
 
 
말씀이 있기를 이렇다. “맨 처음에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생각이 하나님과 더불어 있었다. 하나님이 그 생각이었다. 그이가 맨 처음에 하나님과 더불어 있었다. 모든 것이 그이로 말미암아 지어졌고, 그이 아니고는 지어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지어진 것이 그이 안에서 생명이었고, 그리고 그 생명이 사람의 빛이었다.” (로고스를 이렇게 생각이라고 하면 알기가 쉽지 않을까? 노자의 도도 마찬가지다.)
생각은 스스로 하는 것이요 영원무한하다.
그러나 사람은 지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하자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공자(孔子) 가운데[中]를 말했고 고르게 함[和]을 말했다. 가운데란 여기나 저기가 아니다. 여기면서 저기요 저기면서 여기인 곳이다. 고르게 함이란 함이나 아니함이 아 니라, 하면서 아니하고 아니하면서 하는 지경이다.
그래서 노자가 빔[虚]을 말했고 됨[化]을 말했다. 빔이란 있음이나 없음이 아니다.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음이다. 됨이란 달라짐이나 그대로 있음이 아니다. 달라지면서 그대 로 있고 그대로 있으면서 달라짐이다.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를 졌고 새로 남을 보여주었다. 십자가란 죽음이나 삶이 아니다. 죽음으로 살고 삶으로 죽음이다. 새로 남이란 육이나 영이 아니다. 육이면서 영이요 영이면서 육이다.
그래서 석가가 반야[智慧]를 말했고 해탈을 말했다. 지혜란 안다 모른다가 아니다. 앎으로 모르고 모름으로 아는 지리다. 해탈이란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 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이면서 저 세상이요 저 세상이면서 이 세상인 삶이다.
그래서 가장 정확하노라 자랑하던 물리학이 불확실론에 이르게 되고, 물질과 운동이 따로 있는 것 아니라 하나라고 하게 되었다.
 
생각하는 사람이 첨으로 일어났을 때 하나님과 우주가 따로 있지 않았고, 우주와 만물, 만물과 사람, 인생과 종교, 종교와 정치, 나라와 씨알, 나와 너가 따로 있지 않았다. 그저 산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하나 둘의 하나가 아니다. 그저 두루뭉수리지, 그러므로 살았고, 빛 속에 사는 줄도 모르리만큼 살았다. 사는 줄을 몰랐으니 죽는 줄을 알았을 리가 없다. 생 각은 생각하는 줄 모르게 하였고, 말은 나오는 줄 모르게 나왔으며, 행동은 하는 줄 모르게 했다. 그러니 안다 모른다,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화다 복이다, 선이다 악이다가 있었 을 리 없다. 그래서 후에 와서 어렴풋이 그 광경을 상상해 보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했다. 어느 눈이 본 것 아니요, 어느 입이 말한 것 아니다. 그러므로 그 ‘좋아’ 는, 좋다 나쁘다 하는 사람의 ‘좋아’가 아니고, 하나님의 ‘좋아’이다.
그렇지만 이 세계에서는, 사림이 아는(만든) 이 세계에서는. 한정이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은 가다가(절대의) 벽에 부딪치게 마련이고, 일단 부딪치고 나면 반드시 부서져 갈라지고 제게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란 것이 나오고. 하나님이란 우상이 생기고, ‘이럴까 저럴까’가 일어나 생각이 많아지게 되었다. 창세기의 인간 타락의 신화는 그 어간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벽에 부딪쳤다고 했지만 그 벽이 무슨 벽일까? 하나님 밖에 다른 무엇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인데, 생각하는 마음이 그만 우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벽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믿을 이일 따름이지. 다시 말하면 받아들일 하나 됨이지. 뜯어보고 알 물건이 아니다. 믿으면 아는 데에 이르지만, 감히 알기부터 먼저 하려 하면 뒤집힌다. 하나님을 정면으로 보면 죽는다고 했다. 그는 그 앞에 우리가 보일 이이지 우리가 볼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앞에 나아갈 때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야 한다. 다시 말해 자기를 전적으로 부정해야 한다. 자기를 부정하면 입으로 불러 우상화한 하나님도 사라지고 영이 된다.
 
그런데 생각하는 인간이 그만 잘못 생각하여 자기를 절대 자유인 양 착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등을 돌리신 것이다. 하나님이 그럴 리가 없지만 사람이 스스로 그렇게 어두워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변해 사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알게 되었다”고 하지만, 참으로 밝아진 것이 아니라 사실은 어두워진 것이다. 살리는, 참인 선을 잃었으므로, 갈라진, 죽이는 선악이 보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탄에게 속았다는 것이다. 여인이 그 유혹에 넘어갔다지만, 그 ‘여인’이 누군가? 사람의 자아의식 곧 “나는 나다” 하는 생각이다. 그 생각이 하나님의 형상대로인 나를 속였다. 이로 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그 “나다” 히는 나는 참 나가 아니다. 참 나는 아들로 표시되는 지경이다. 둘이면서 하나란 뜻이다. 대립이 없다는 말이다. 예수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 다” 하신 지경이다. 그것은 창조의 뜻을 참으로 깨달은 말이다. 생각에서 지어져 나온 만물을 맨 첨같이 다시 살리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 아버지가 또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말로 표시했다. 생각에서 만물이 나왔지만, 생각하는 사람이 그것이 깨달으면서도, “나다” 하는 생각 때문에 잘못된 것을 그 맨 첨[元初的]의 생명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생각하는 인간은 절대의 하나님의 압도 속에서 평안을 얻을 길이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 생각하는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을 문명이요 발달이라 하지만 그것은 참말이 아니다. 모두 거짓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첨으로 아들 됨을 자각하여 다시 산 생명의 하 나됨에 돌아간 예수는 인간들을 향해 “당신들은 악마의 아들입니다. 그는 정녕 거짓말쟁이며 거짓말의 아비입니다” 했다.
이제 그 거짓말의 문명과 그 철학이 절정에 이르렀다. 첫 바벨탑의 운명이 그랬던 것같이 둘째 바벨탑의 운명도 멸망일 것이다. 기술은 행동으로 하는 거짓말이다. 기술이 절정에 오른 오늘의 철학이 거의 죽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제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참말이다.
참말은 참 생각에서 나온다. 그 참 생각은 어디 있을까? 모든 교리와 의식, 제도를 가득히 갖춘 여러 종교들은 금으로 테를 두른 그 경전을 들고 나올 것이다. 옳은 일이다. 그렇지만 되돌려 묻고 싶은 것은, 그러면 왜 그 경전을 가지고도 이 기울어지는 담 같은 문명을 건지지 못하는가? 그러면 아마 또 대답하기를, 우리가 하고 있지 않으냐, 시대가 달라졌다, 시간이 든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거짓말인 것은 이 인간주의 문명의 필연적인 산물인 농촌과 공장과 전쟁터와 유흥가에 우글거리는 인간 아닌 인간의 무리가 잘 말해 줄 것이다. 그런 거짓말을 예수 시대의 바리사이파들이 했고, 춘추 전국 시대의 제자백가가 했으며, 중세기의 성직자가 했고, 석가모니 전과 후의 모든 철학자・종교가가 해 왔다. 말의 살리는 힘이 어찌 그 글자에 있을까? 그 입에 있다. 일러 말하기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이라 하지 않았나? 하나님이 어찌 입이 있을까? 그의 생각으로 뚫린 사람의 입이 곧 그것 아닌가?
 
아주 중요한 핵심을 말하면 지금 종교에 하나님의 사람이 없다. 그것은 종교까지도 현대 문명의 물결에 휩쓸려 거기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오늘의 종교 중에 국가주의에 야합하지 않은 종교가 어디 있나? 하늘나라, 혹은 하나님 나라, 부처님 나라는 사실 없지 않은가? 그 나라가 없는데 그 사람이 어찌 있으며, 그 하나님의 사람이 없는데 하나님의 말을 어찌 전할 수 있을까? 진리는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한 점이 이지러져도 죽은 것이 되어 버린다. 이것이 현대 사람이 학문주의에 기울어 잘못된 아주 치명적인 점이다. 마음을 다, 뜻을 다, 영혼을 다…하던 것을 다 잊어버리고 이 세상주의에 떨어져 버렸다. 그러므로 그들의 최고는 크고 작고를 서로 다투는 이 정치적인 나라지 결코 하늘나라, 진리의 나라가 아니다.
 
이런 때에 진영상 님과 함께 간디의 「날마다 한 생각」을 우리말로 옮긴 것은 크게 뜻있는 일이다. 이야말로 “죽을 병에 청심환”이다. 간디처럼 제 나라를 사랑하고 제 종교에 충실한 사림이 어디 있을까? 옛날은 또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 우리에게 그 숨결이 와 닿을 만치 가까운 사람은 간디뿐이다. 그런데 그 간디는 결코 정치의 사람이 아니라 생각의 사람이었다. 그는 참이 하나님이라 하리만큼 철저하고 거짓이 없었다. 그러므로 참에 반대된다면 인도(印度)를 버리기도 주저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인도를 건질 수가 있었다. 더구나 여기 내는 글은 무슨 논문도 아니요 전략도 아니요, 순수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알기를 자기 신발의 티끌처럼 겸손히 여기는 마음의 사색에서 나온 생각이다. 그것은 모든 허깨비를 쫓아내고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자기를 잊고 살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솟아나온 말이다. 그것은 생명의 숨쉼이다.
 
그는 인류의 살 길을 보여주는 것이 없으면 인도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고, 인도를 살리는 길은 촌락을 생각하는 생명체로 만드는 데 있다고 했으며, 촌락을 살리는 길은 봉사 생활에 있고. 봉사는 참을 지켜서만 가능하고, 참은 아힘사[不殺生]를 지켜서만 기를 수 있고, 아힘사는 부라마챠랴 곧 감각주의를 극복함으로써만 가능하고, 감성의 극복은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돌아가야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마하트마’란 존칭을 받았다. 마하트마는 성인(聖人)이란 뜻이다. 돌아가신 유영모(柳永模) 선생님은 성인을 우리말로 ‘씻어 난 이’라 했다. 무엇을 씻는단 말인가? 생각을 씻음이다. 그릇된 생각으로 더러워진 생각을 씻고 씻어 영의 빛에 이름이다. 그래서 물과 영으로 다시 난다 하지 않았던가?
생각은 생각으로만 씻을 수 있다. 나라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인류의 장래를 마음 아프게 걱정하며 나 자신을 참으로 하나님께 바치고자 애쓰는 혼들에게 한번 씻음의 생명물을 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1981년 9월 15일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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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 날마다 한생각-책을 엮으면서
작성자 바보새 14-05-27 11:20 조회7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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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엮으면서
 
 
내 생애에 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바푸여(Bapu, ‘아버지’ 라는 뜻의 인도 말. 글쓴이는 마하트마 간디를 ‘바푸’ 라고 부른다ᅳ옮긴이)께서 도움의 손길을 뻗어 나를 위기에서 건져 주고, 나를 내리막길에서 보호해 주셨다. 1943년 7월 20일에 내 아내 비댜(Vidya)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로서는 가장 힘든 위기를 맞았다. 나에게는 내 아내가 바푸 다음으로 큰 영감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바푸께서는 내 아내를 딸처럼 여기면서 진정으로 사랑해 주셨다.
그 무렵 바푸께서는 푸나의 아가칸 궁전에 억류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분이 1944년 5월 6일에 석방되실 때까지 나는 혼자 슬픔을 견뎌야만 했다. 1944년 6월 2일자 편지에서 바푸께서는 이렇게 밀씀하셨다.
“이젠 슬퍼하지 말아라. 네가 배워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야 한다. 여기 어느 여인이 내게 보내준 진실한 생각을 전한다. 속으로 깨달아라. 비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머물던 육체를 떠나서 자기 때에 맞는 다른 새로운 몸을 가지려고 딴 곳으로 떠났을 뿐이다.”
그러면서 존경하는 카스투르바(Kasturba,간디의 부인ᅳ 옮긴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미국의 글렌 스나이더(Glen E. Snyder) 여사가 바푸를 위로하려고 그분에게 보냈던 아름다 운 글귀를 함께 적어 보내 주셨다.
 
당신은 말할 수도 없거니와 말해서도 안 되오,
그녀가 죽었다고.
그녀는 떠나갔을 뿐.
쾌활한 미소를 머금고
손을 흔들며
그녀는 미지의 땅으로 걸어 들어갔소.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를 꿈꾸게 하면서.
 
그녀는 그곳에 머무니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래서 그녀가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시오.
그곳도 이곳처럼 사랑하면서.
그녀를 그 전처럼 똑같이 생각하시오.
그리고 말하시오,
“그녀는 죽지 않고 그저 떠났을 뿐”이라고.
 
그러나 아무리 “그녀가 죽지 않고 떠났을 뿐”이라고 믿으려 해도 아내를 여읜 슬픔을 달랠 수가 없었고, 내 마음은 계속 서글펐다. 1944년 6월 20일자로 보낸 또 하나의 기쁨의 편지에서 바푸께서는 이렇게 쓰셨다.
“비댜의 죽음을 너무 골똘히 생각하지도 말고 마음 산란해 하지도 말이라. 그가 육체로 살아 있을 때 네 삶의 영감이었다면. 그가 쉴 곳으로 간 지금은 더 큰 삶의 영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진정한 영혼의 결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수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고, 가깝게는 라마크리슈나 (Ramakrishna)의 경우가 그렇다. 그들은 죽고 난 뒤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정신이 죽지 않았듯이 비댜의 혼 또한 죽지 않았다. 그러니 슬퍼하지 말고 네 앞의 의무에 대해 생각해라.”
 
1944년 7월 17일자 편지에서는 또 이렇게 쓰셨다.
 
“비댜는 위대한 성인이었어. 그의 마음은 금(金)같은 마음이었지. 자기 부정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고, 그의 사랑은 바다 같았지. 너는 그러한 비댜에 걸맞는 사람이 되어야 해.”
 
바푸께서 1944년 9월 30일에 세바그람(Sevagram)으로 떠나신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서둘러 세바그람으로 떠났다. 아슈람(Ashram)에서 바푸와 함께 보낸 여덟 주일과 그때 그 분이 내게 보여주신 사랑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매일 아침 기도가 끝난 뒤 내가 그분의 축복을 받으러 발밑에 엎드리면 동정과 위로의 말씀을 들려주었을 뿐더러, 그날 내가 명상할 말씀을 종이에 적어 주기도 하셨다. 1944년 10월 13일부터 두 주일 동안은 날마다 써 주었고, 그 뒤로도 이따금씩 써 주셨다. 그분이 그렇게 슬픔에 잠긴 내 마음을 달래려고 적어 주신 명상의 글을 몇 개만 소개해 본다.
 
“하나님만 바라보려는 사람은 죽은 사림이든 산 사림이든 사람을 바라보는 일은 그만두어야 하네. 자네가 이것을 이해하면 이제 더 이상 슬퍼하지 않겠지.”(1944년10월13일)
 
“「다시 한 번」(Try Again)이란 시를 아는가? 포기하지 말게. 다른 믿음은 모두 허사라네. 오직 하나님만 믿게. 그것이 비댜의 죽음에서 배워야 할 것이지. 자네 사랑이 지금 시련을 겪고 있는 거네.”(1944년 10월 14일)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만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네. 물레질은 하고 있는가? 물레질은 모든 희생 중에서 가장 위대한 희생이지. 울면서도 물레질을 해 야 하네.”(1944년 10월 15일)
 
“모든 일은 평화와 안정 속에서 가능하다. 물레질은 배고프고 괴로운 사람들의 위안이요 또한 밥과 의복이지 슬픔 가운데서도 물레질을 포기해서는 안 되네.”(1944년 10월 16일)
 
“한 순간도 헛되지 않게 그날 그날의 일을 배정해야 한다. 이것이 떠난 사람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다. 영국 사람들을 보게. 그들도 그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만 그들은 그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오히려 더욱 더 봉사하는 데 자기를 바친다네.”(1944년 10월 17일)
 
“죽은 사림이 산 사람과 의사소통을 한다고 분명히 말할 수는 없지만,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니 우리는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울어서는 결코 안 된다.”(1944년 10월 18일)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일은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으로 봉사함으로써 할 수 있다.”(1944년 10월 18일)
 
“가난한 사람이 자네의 처지라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보게. 그가 만일 아내를 잃었다면 전보다 두 곱절이나 일해야 하네. 가난한 사람도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가. 내면의 기쁨은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써 얻는다네. 늘 가난한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네. 그리고 자네의 귀먹음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겨야 해. 한 순간이라도 게으르게 지내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일이지. 나는 이밖에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행복에 이르는 다른 어떤 길도 모르네.”(1944년 10월 19일)
 
“오늘은 자네에게 경사스런 날이다. 나는 자주 비댜를 울렸네. 비댜는 자네처럼 울곤 했지. 자기에게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조르면서 말이야. 그러면 나는 그를 꾸짖으며, 물레바퀴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지 내 곁에 앉아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말해 주었네. 마침내 그는 그 진리를 깨달았어.”(1944 년 10월 20일)
 
“우리는 기계를 운전하는 사람인 동시에 기계이기도 하다. 우리의 몸은 하나의 기계이고 영혼은 그 기계를 움직이는 사람이다. 오늘 자네는 기계 같은 일을 자네 몸으로 택해서 나 에게 보고해야 한다.”(1944년 10월 20일)
 
“사람이 무슨 대상을 놓고 명상하든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된다. 물레바퀴는 그 중 가장 좋은 매개체이고 그 결과 또한 분명 그렇다.” (1944년 10월 21일)
 
“아슈람 같은 단체가 존재하는 것은 사람이 그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서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편지 왕래나 명상을 통해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날마다 툴시다스(Tulsidas, 간디가 영향을 많이 받은 라마야나의 작자)에 의지하여 살아가듯이, 돌아간 이들의 성스러운 말씀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다.”(1944년 10월 21일)
 
“희망은 영원하다. 그에 대한 예배는 결코 헛되지 않다.” (1944년 10월 22일)
 
“자네가 나와 함께 있을 때 이무런 해도 없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을 때는 마하데브(Mahaderv, 간디의 제자)나 크리파라니 (Kripalani, 간디의 제자)처럼 타그리(Takli)를 열심히 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시간을 도둑질하지 않게 된다. 타그리는 우리의 침묵의 벗이다. 이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도 않고 세상에 필요한 실(絲)을 제공해 준다. 타그리를 열심히 하는 동안은 모든 것을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다. 이런 방법으로 일에 몰두한다면 하나님의 은총으로 자네 귀가 밝아질 수도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카르마 요기 (Karma Yogi)가 될 때면 지네는 자네의 귀에 대해서는 거의 상관하지 않게 될 것이다. 나의 바나르선생(Vanar-Guru)은 일부러 귀를 막았다. 주위의 시끄러운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말이야.” (1944년 10월 23일)
 
“나의 침착함과 나의 기쁨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데서 비롯한 것이다. 다시 말해 진리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안다. 니는 하나님 안에 있고, 내가 하는 것은 무엇 이든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불행해질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모두 나의 선(善)이 된다는 것도 안다. 이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행복을 지킬 수가 있다. 하나님이 내 아내 카스툴바를 데려가신 것은 카스툴바의 선을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와 헤어진 것이 나에게는 슬픔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네도 비댜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죄가 됨을 알아야 한다.”(1944년 10월 24일)
 
이와 길이 바푸께서는 내 어지러운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려고 마음의 양식을 계속 주셨다. 그뿐만 아니라 내 몸의 건강에도 관심을 기울여, 내가 안드라 프라대쉬(Andhra Pradesh)의 비마바람(Bhimavaram)에서 자연 요법 과정을 이수하도록 해 주셨다. 그 과정을 밟기 위해 나는 1944년 11월 28일 그분 곁을 떠나야 했다. 내가 그 동안 바푸와 친밀한 동무가 되어 그분과 영감 넘치는 대화를 나눌 만큼 자랐다고는 해도, 바푸와 헤어지는 것은, 그분의 뜻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 하다가 한 가지 묘안을 떠올렸다. 날마다 좋은 글을 써서 보내 달라고 바푸께 부탁드릴 수 있지 않을까? 다음날 아침 일찍 그분께 이 생각을 밝혔다.
바푸께서는 아버지처럼 내 말을 귀기울여 듣고는 “참 좋은 제안이다” 하며 생각해 보겠노라고 하셨다. 바푸의 호의적인 대답에 비로소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다시 부탁 드렸더니 여전히 생각중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셋째날에 가서는, 언제나 생각이 떠오르면 곧바로 쓰실 수 있도록 적당한 종이 한 첩을 마련해서 바푸 옆에 갖다 놓겠다고 말씀 드렸다. 마침내 바푸께서는 그러겠노라고 하셨고, 나는 종이첩을 마련하여 1944년 11월 16일에 바푸께 갖다 드렸다. 그 다음 며칠 동안 잠잠히 있으면서 모든 일을 바푸가 뜻대로 하시도록 맡겨 두었다. 1944년 11월 22일 아침 바푸가 밝게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 때 내가 느낀 희열은 무엇이라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아난드, 자네를 위해 쓰기 시작했어. 20일부터 써 오고 있네.”
 
그날부터 바푸는 나에게 ‘한 생각’을 계속 글로 써 주셨다.
1946년 6월 나는 푸나에서 다시 바푸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때 나는 바푸께서 그 동안 나에게 써 보내 주신 ‘한 생각’을 출판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졸랐다. 그러자 바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것이 출판할 만한 값어치가 있을까? 만일 꼭 출판하고 싶으면 나 죽은 다음에나 하게. 내가 과연 내가 쓴 생각대로 살 수 있을는지 누가 알겠는가? 마지막 숨을 넘길 때까지 내 가 실제로 그 생각대로 산다면 혹시 출판할 만할지도 모르겠네.”
 
바푸께서는 계속해서 날마다 한 생각을 글로 쓰시다가 1946년 말경에 그 일을 멈추었다. 뒤에 1947년 3월에 한 보름 동안 뉴델리에서 바푸와 함께 지내게 되어 그 까닭을 여쭈었다.
 
“내 나오카리(Naokhali) 일을 (일을 을 모아 수행하기 위해 나는 모든 일을 접었다네. 아슈람도, 친구들도. 그리고「하리잔(Harijan)」지에 기고하던 일도. 모두 그만두었네. 그래서 자네에게 써 주던 매일 매일의 생각도 그만두게 되었네."
 
바푸께서는 2년 동안 ‘날마다 한 생각’을 써 주셨다. 이 생각들은 그분의 지혜와 성스러움의 알짬을 담고 있다. 마치 우유의 바다에서 버터를 짜내듯이 그의 마음의 바다에서 정수를 짜 내셨다. 나에게는 이 명상록이 무엇보다 큰 축복이여 유산이다.
내가 그분의 깊은 사랑을 받을 자격은 없지만. 이 말씀들은 바푸께서 내게 보여주신 사랑을 영원히 기억하게 해 줄 것이다. 내가 이 귀중한 사랑을 값있게 하고 또 항상 올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기를 기도할 뿐이다.
이『날마다 한 생각』의 영문 번역본을 한 줄 한 줄 교정해 준, 존경하는 스리 바리바이 데사이(Shri Valjibhai Desai, 간디의 측근으로서 구자라드 비쟈피스Gujarat Vidyapith의 전교수이자 유명한 학자)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정말 소중한 그의 도움에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1968년 10월 2일 아라하바드에서
                                                    아난드 힝고라니(Anand T. Hingor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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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 날마다 한생각- 날마다 한생각 1-42
작성자 바보새 14-05-27 11:22 조회7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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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한생각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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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부르는 이름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꼭 하나만 들라고 하면 사트(Sat)또는 사챠(Satya)라고 할 터이니, 다시 말해 참(진리)이다. 그러므로 참은 하나님이다.
1944. 11. 20
2
참의 실현은 아힘사(Ahimsa, 비폭력)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아힘사가 최고의 다르마(Dharma, 법)라고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1944. 11. 21
3
참을 추구하고 비폭력을 지키는 길에는 꼭 필요한 것들이 있다. 곧 브라마차랴(Brahmacharya, 금욕)를 지키고, 도둑질 하지 않고.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살고, 두려움을 모르고, 모든 종교를 똑같이 존중하고, 불가촉민(不可觸民) 제도를 없애는 것과 같은 실천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1944. 11. 22
4
여기에서 브라마차랴는 생각과 말과 행동의 감각기관을 제어하는 것을 의미한다. 몸은 비록 순결하더라도 마음이 순결하지 못하면 브라마차랴를 온전히 지켰다고 할 수 없다.
1944. 12. 23
5
“도둑질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훔치지 않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필요없는 것을 가지고 있거나 가지려고 하는 것 또한 도둑질이다. 그리고 도둑질에는 어김없이 폭력이 따른다. 1944. 11. 24
6
‘무소유’란 오늘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은 지니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1944. 11. 25
7
“두려움을 모른다”함은 어떠한 두려움도 없음을 말한다. 이를테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배고픔에 대한 두려움, 사람들에게 모욕 받거나 거부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귀신이나 악령에 대한 두려움, 몸이 다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다른 사람의 분노를 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등 모든 종류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1944. 11. 27
8
우리의 종교를 존중하는 것과 똑같이 다른 종교도 존중하자. 다른 종교를 그저 관용(tolerance)으로 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1944. 11. 27
9
불가촉민 제도를 없애자 함은 단순히 그들을 차별하는 제도만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우리의 일가 친척처럼 여기고 우리의 형제 자매 대하듯이 대하자는 것이다. 세상에는 높은 사람도 따로 없고 낮은 사람도 따로 없다. 1944. 11. 28
10
“Yogash Chitta Vritti Norodhah.” 이는 파탄자리(Patanjali)의 요가 다르산(Darshan, 요가의 철학)의 첫 번째 경구이다. 요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것이다. 용솟음 치는 정욕을 억제하고 진정시키는 것이 곧 요가이다. 1944. 11. 29
11
마음에 정욕이 용솟음 치는 사람이 어떻게 진리를 실현할 수 있겠는가? 마음에서 정욕이 일어나는 것은 마치 바다에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과 같다. 폭풍우가 몰아쳐도 배의 키를 단단 히 붙들고 있으면 배를 안전하게 구할 수 있듯이, 마찬가지로 마음이 불안할 때에 라마나마(Ramanama, 하나님의 이름)에게 의지하는 사람은 승리할 것이다. 1944. 11. 30
12
“나무에게서 배우자”라는 찬송은 우리 마음속에 새겨 둘 만하다. 나무를 보라. 스스로는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을 온몸으로 견디면서, 우리에게는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 주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1944. 12. 1
13
거짓된 지식을 늘 경계하자. 우리를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바로 거짓된 지식이다. 1944. 12. 2
14
진리를 실현하려면 성인들의 삶에 대해 많이 읽고 또 마음에 새겨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다. 1944.12.3
15
하나님은 살아 있는 모든 존재 안에 머무신다고 하나님 스스로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누구에게 적의를 가진단 말인가? 1944. 12. 4
16
미라바이(Mirabai)의 삶에서 배울 수 있는 위대한 교훈은 그녀가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는 남편까지도 버렸다는 것이다. 1944. 12. 5
17
사람이 믿음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1944. 12. 6
18
사람은 믿음으로 산도 옮길 수 있다. 1944. 12. 7
19
한 가지 일에 한 가지 목적으로 전념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것이다. 1944. 12. 8
20
참된 행복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오는 것이다. 1944. 12. 9
21
자신의 개성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1944. 12. 10
22
곧은 길은 단순한 만큼 어려움도 많다. 그렇지 않다면 누구든지 곧은 길을 쫓았을 것이다. 1944. 12. 11
23
“동정심이야말로 종교의 알짬이다.” 툴시다스가 말했다. 덧붙이기를 “살아 있는 동안은 결코 동정심을 버리지 말라”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동정심을 가지며 또 누구에게 동 정심을 베풀어야 하는가? 1944. 12. 12
24
어느 자매가 말했다. “저는 늘 기도를 해 왔지만 이제는 포기 했습니다.” 나는 물었다. “왜요?” 그 자매가 대답했다. “자꾸 제 자신을 속이게 되어서요.” 물론 그 대답은 옳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속이기를 포기하지 왜 기도하기를 포기하는가. 1944. 12. 13
25
어제 들은 찬송가는 곡조도 매우 이름답고 가사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 가사의 요점은, 하나님은 교회에도 절에도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안에도 없고 밖에도 없다. 계신다면, 겸손한 씨알들 가운데에, 배고프고 목마른 민중 속에 계신다. 그들의 배고픔을 채워 주고 목마름을 씻어 주기 위해 날마다 물레를 돌리자. 입으로 라마나마를 외우며 그들을 위 해 그와 같은 노동을 하자. 1944. 12. 14
26
우리가 평상시에도 참이 아닌 것을 피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에서인가? 두려워서인가, 부끄러워서인가? 그렇게 살기 보다는 차라리 침묵하거나, 아니면 서로에 대한 두려움을 떨 쳐 내고 마음속에 있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1944. 12. 15
27
한 방울의 독이 우유를 먹을 수 없게 만들듯이, 아무리 작은 거짓도 사람을 못쓰게 만든다. 1944. 12. 16
28
우리는 중요한 일에 시간 바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면서도 가치 없는 것을 동경하고 그 속에서 쾌락을 찾고 있으니! 1944. 12. 17
29
“인간은 신이 아니다. 인간을 신이라 부르지 말라. 그러나 인간은 신의 성스러운 광휘를 얼마쯤은 지니고 있다.” 1944. 12. 18
30
성현(聖賢)의 가르침에 귀기울이고 경전을 연구하고 학식을 넓혀라.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받들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리라. 1944. 12. 19
31
사람들은 모두 묵티(Mukti, 구원)를 바라지만,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는 듯하다.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도 구원의 여러 의미 가운데 하나이다.
1944. 12. 20
32
시성(詩聖) 나르신하(Narsinha)는 "하나님의 사람은 생사의 윤희에서 벗어나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해서 다시 태어나기를 구한다”고 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구원(Mukti)의 의미는 또 조금 달라진다. 1944. 12. 21
33
『기타』(Gita) 따르면 철저한 무집착(無執着)이 곧 구원이다.『이소파니샤드』(Ishopanishad)의 첫구절에서도 같은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1944. 12. 22
34
어떻게 하면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는 기쁨과 슬픔, 친구와 적, 내 것과 남의 것을 모두 똑같이 여기는 데에 있다. 무집착의 다른 이름은 마음의 평정이라 할 수 있다.
1944. 12. 23
35
물방울이 모여서 바다를 이루듯이, 작은 친절이 모여 우정의 바다를 이룰 수 있다. 온 세상 사람이 서로 우애와 화합의 정신으로 살기만 한다면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1944. 12. 24
36
오늘은 크리스마스 날이다. 모든 종교가 동등하다고 믿는 우리는 리마(Rama), 크리쉬나(Krishna) 같은 분들의 탄생을 경배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배해야 한다.
1944. 12. 25
37
질병은 그 자체가 부끄러워할 일이다. 질병은 잘못이나 타락의 증표이다. 몸과 마음이 모두 건전한 사람은 질병이 감히 넘보지 못한다. 1944. 12. 26
38
악한 생각도 질병의 한 표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생각은 멀리해야 한다.
1944. 12. 27
39
악한 생각을 피하는 확실한 길은 라마나마(Ramanama)이다. 그 이름이 입술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우러 나와야한다. 1944. 12. 28
40
병도 수없이 많고, 의사와 처방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병을 하나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라마를 병을 완전히 고칠 수 있는 오직 한 분뿐인 의사로 여긴다면 많은 괴로움을 덜 수 있을 것이다. 1944. 12. 29
41
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언젠가는 죽고야 말 의사는 그토록 부지런히 쫓아다니면서, 죽지 않고 영원하며 한 점 실수도 없는 의사인 하나님 라마는 잊고 있다니! 1944. 12. 30
42
더더욱 이상한 일은, 우리 또한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고, 의사의 치료라 해봐야 우리 목숨을 기껏 며칠 더 부지해 줄 뿐인 걸 알면서도, 며칠 더 살아 보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이다. 1944.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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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 날마다 한생각- 날마다 한생각 43-223
작성자 바보새 14-05-27 11:28 조회7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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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한생각 43-223
 
 
43
그와 같이 젊은이나 늙은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우리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는 조용한 가운데 가만히 있으려 하지 않는다. 며칠 더 살겠다고 온갖 짓을 다 하면서도 하나님 라마는 의지하지 않는구나. 1945. 1. 2
 
44
우리가 만일 이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 라마를 의지하고, 어떠한 우환이 닥쳐도 잘 참으며 평화로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1945. 1. 2
 
45
우리는 마하데브(Mahadev)의 몸과 글에서 육신의 마하데브를 보았다. 그것은 하나였다. 그러나 마침내 육신과 분리된 그의 정신은 이제 가지 못할 곳 없이 널리 퍼져 있으니, 그의 정신은 그 덕의 힘으로 우리에게 인식될 수 있고, 우리가 다 같이 나누어 기질 수 있다. 그것은 누구라 해서 더 많이 가질 수도 또 더 적게 가질 수도 없다. 1945. 1. 3
 
46
태어남과 죽음은 어쩌면 동전의 양면과도 같지 않을까? 한 면에서는 죽음을, 다른 한 면에서는 탄생을 보곤 한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는 슬픔을 주고, 다른 하나는 기쁨을 줄까?
1945. 1. 4
 
47
태어남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보는 견해가 옳다면, 어찌하여 죽음은 슬퍼하고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생명의 태어남은 즐거워하는가? 모든 사람은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 져 보아야 한다. 1945. 1. 5
 
48
세상은 서로 반대되는 것들로 가득하다. 행복 뒤에는 슬픔이 있고, 슬픔 뒤에는 행복이 있다. 햇빛이 비치는 곳이면 어디든 그늘이 있고, 빛이 있는 곳이면 어두움이 있게 마련이다. 태어남이 있는 곳에는 또 죽음이 있다. 무집착은 이러한 상반된 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들을 이겨 내는 길은 이들을 없애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뛰어넘고 일어나 집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데 있다. 1945. 1. 6
 
49
앞에 말한 것에서, 행복의 열쇠는 진리를 받드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진리를 받드는 것은 모든 것을 베푸는 것이다. 1945. 1. 7
 
50
그러면 진리는 어떻게 받들어야 할까? 누구라서 진리를 알까?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상대적인 것, 우리에게 진리로 드러나 보이는 진리이다. 그러나 그 의미를 이렇게 제한된 의미에서일지라도 진리란 알아채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걸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1945. 1. 8
 
51
무엇이 진리인지 알면서도 왜 그것을 말하기를 주저하는가? 부끄러워서인가? 대체 누구를 부끄러워함인가? 지위가 높든 낮든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우리 몸에 밴 습관이 우리 모두를 망치고 있다. 돌이켜 반성하여 그 같은 나쁜 습관을 내버려야 한다. 1945. 1. 9
 
52
이 같은 습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진리의 길을 밟을 수가 없다. 진정으로 진리의 제단 앞에 모든 것을 희생시켜야 한다. 우리는 흔히 제 생긴 모습보다 더 나아 보이고 싶어한다. 낮으면 낮은 대로 자기를 보여주고, 거꾸로 높아지기를 원한다면 그 수준에 걸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면 된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 없다면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보이도록 하자.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가 바리는 그 높은 경지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1945. 1. 10
 
53
경험을 쌓으면 쌓을수록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은,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바로 그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1945. 1. 11
 
54
그런데 왜 인간은 행복하다고 하고 불행하다고 하는가? 1945. 1. 12
 
55
사실을 말한다면 인간은 그런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고 스스로 믿어 버리려 한다. 1945. 1. 13
 
56
우리가 진정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정신적 게으름을 버리고 좀더 기본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삶은 아주 단순해질 수 있다. 1945. 1. 14
 
57
어떤 예언자는 우리 인간을 나그네라고 불렀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에 잠깐 동안 존재할 뿐이다. 그 후는 죽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갈 따름이다. 얼마나 이름답고 진실된 생각인가! 1945.1.15
 
58
다이아몬드 하나를 캐내려면 힘든 노동으로 수천 톤의 흙과 돌을 파내야 한다. 우리는 거짓의 자갈을 헤치고 진리의 다이아몬드를 찾기 위해 그러한 노력의 몇 분의 일이라도 기울이
고 있을까? 1945. 1. 16
 
59
노고(勞苦) 없이는, 즉 타파(Tapa)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그런데 그것 없이 자기 정화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1945. 1. 17
 
60
우리의 모든 시간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면 어떻게 한 순간이라도 허비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면 어떻게 삶의 헛된 쾌락을 추구하는데 우리 삶의 일부분인들 바칠 수 있겠는가? 1945. 1. 18
 
61
사심 없는 행동은 힘의 원천이다. 그런 행동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동등하기 때문이다. 1945. 1. 19
 
62
잼세드 메타(Jamshed Mehta)는 나에게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의 기도 하나를 보내 주었다. 그 기도 중에 이런 부분이 있다. “오, 주 하나님이시여.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죽음으로써 영생으로 태어납니다.” 1945. 1. 20
 
63
신실로 땅은 땅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1945. 1. 21
 
64
속이 참으로 깨끗한 사람은 밖에 불결한 것이 남아 있을 수 없다. 1945. 1. 22
 
65
동기가 옳다면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참된 말은 결국에 가서 결코 남을 해치는 법이 없다. 1945. 1. 23
 
66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말은 결코 헛되지 않다. 1945. 1. 24
 
67
게으름이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면 우리는 게으르게 살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순함이 우리에게 불행을 가져온다면 우리는 불순하거나 불순에 머무르지 않으리라. 1945. 1. 25
 
68
노동부터 먼저 하고, 그런 다음 가능하면 그 노동한 분량에 비례하는 삯이 있어야 한다. 이런 정신으로 노동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다. 그러나 만일 삯을 먼저 요구한다면 이 는 사탄을 섬기는 일이 될 것이다. 1945. 1. 26
 
69
욕망은 만족시키려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일단 욕망을 만족시키려 했다가는 그것을 억제하기가 매우 어렵게 된다.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1945. 1. 27
 
70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남을 다스릴 수 없다. 1945. 1. 28
 
71
사람이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자기를 둘러싼 껍질 속에서 나와서 자기 자신을 냉정히 볼 줄 알아야 한다. 1945. 1. 29
 
72
대체 남의 짐을 가볍게 해 주는 사람 치고 가치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45. 1. 30
 
73
우리의 행복과 마음의 평화는 우리가 옳고 알맞다고 여기는 일을 하는 데 있지. 다른 사람이 무엇을 말하거나 무엇을 하는데 있지 않다. 1945. 1. 31
 
74
도덕적인 힘이 종교 경전을 읽고서 얻어지는 것은 사실이나, 진정한 자유는 크게 깨치고 남이 없이는 얻어질 수 없다. 1945. 2. 1
 
75
도움을 바라는 것은 자신의 자유를 값싸게 팔아 버리는 것이다. 1945. 2. 2
 
76
사람의 위대함은 그의 머리, 곧 지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혼에 달려 있다. 1945. 2. 3
 
77
종교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종교란 삶을 어떠한 형태, 어떠한 때에 있어서도 꿰뚫는 것이다. 1945. 2. 4
 
78
종교는 삶과 유리된 어떤 것이 아니다. 삶 자체를 종교로 보아야 한다. 종교로부터 유리된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동물의 삶이다. 1945. 2. 5
 
79
극기(克己)를 많이 하거나일에 몰두한 사람은 말이 적다. 말과 행동은 서로 잘 맞지 않는다. 자연을 보라.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일한다. 그런데도 말이 없다. 1945. 2. 6
 
80
고난받고 있는 인류를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생각하지 않으리라. 사실, 그렇게 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1945. 2. 7
 
81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된다. 정원사는 정원의 꽃만 볼 터이나, 철학자는 그 꽃들을 잊어버릴 것이다. 아마 철학자는 자기가 정원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하리라! 1945. 2. 8
 
82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의 단점을 알 수 있고 고칠 수도 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순수성을 최고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봉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1945. 2. 9
 
83
진리를 맹세하는 사람은 침묵 지키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진리를 탐구한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너무 말을 많이하는 것을 본다. 이런 습관을 버리자. 1945. 2. 10
 
84
사랑하는 이들이 우리를 떠나갔을 때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기억할까? 나는 그들이 결코 죽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죽은 것은 그들의 육체일 뿐이다. 할 수 있는 한 그들의 덕행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선행을 계승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그들의 기억을 되살려야 한다. 화환은 그런 기억을 강화하는 것일 때에만 기념물(Samadhis) 위에 놓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꽃다발을 바치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우상숭배가 될 것이다. 1945. 2. 11
 
85
우리 자신은 더러운 채로 있으면서 다른 사람이 깨끗하기를 바란다면 이 얼마나 그릇된 일인가! 1945. 2. 12
 
86
온 세상의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보이는 차이점은 오직 정도의 차이이지 종류의 차이가 아니다. 마치 종류가 같은 나무들이라도 서로 다른 것처럼. 그런데 왜 분노하고 시기하고 차별하는가? 1945. 2. 13
 
87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쉽게 결심하지 말자. 그러나 깊이 생각하여 한 결심이라면 결코 그 결심을 포기하지 말자. 1945. 2. 14
 
88
자신을 속이는 능력은 다른 사람을 속이는 능력보다 엄청나게 크다.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 사실을 인정하리라. 1945. 2. 15
 
89
가까운 친족에게 화내지 않는 사람은 믿을 만하다. 낯모르는 사람에게 자기 성미를 억제하는 것은 누구나 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장점이랄 수 있겠는가? 1945. 2. 16
 
90
삶은 환락이 아니다. 다시 말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다. 삶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즉 인류에게 참되게 봉사하는 것이다. 1945. 2. 17
 
91
인간과 동물은 무엇으로 구별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남김없이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1945. 2. 18
 
92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능력 밖의 일을 하거나 생각을 하면 병이 엄습하거나 화가 돋기 쉽다. 서두르면 낭비가 따르고, 더하여 해를 입을 수도 있다. 1945. 2. 19
 
93
오늘 아침 찬송에 이런 말이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시는데,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바로 우리이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1945. 2. 20
 
94
하나님이 원하지 않을 때에는 재산도 부모도, 제아무리 용하다는 의사도 우리를 구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1945. 2. 21
 
95
우리의 더러움을 깨끗이 하지 못하고서도 기도할 자격이 있을까? 1945. 1. 22
 
96
사람들이 묵주를 사용하는데, 그것이 어떤 성인(聖人)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거나. 혹은 성스러운 툴시(Tulsi; 향미료)나 백단목 또는 루드락(Rudraksha) 구슬로 만들어졌다 해서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용자가 묵주를 그저 그런 것이라 여긴다면 차라리 버리는 편이 더 낫다. 그렇지만 묵주가 그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끌어 준다거나, 자기의 의무를 행하는 데 더 힘이 되어 준다면, 규칙적으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확실히 좋다. 1945. 2. 23
 
97
하나님이 존재하니까 우리도 존재한다. 이로써 인간이나 어떤 생물체나 다 거룩하신 이의 한 부분임을 알 수 있다. 1945. 2. 24
 
98
신약성경에 이런 말이 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며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위한 말씀이다. 1945. 2. 25
 
99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또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유혹에 들게도 하시고 또한 우리를 악에서 건져 주시기도 한다고. 그러나 이는 자진해서 유혹에 굴복하는 사람들에 게는 적용되지 않는 말이다. 1945. 2. 26
 
100
주의 이름의 영광을 노래한 사람은 툴시다스만은 아닌 것 같다. 성경에서도 같은 것을 볼 수 있다.「로마서」10장 13절에 이르기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다. 1945. 2. 27
101
죄는 숨겨진 채 있지 못한다. 죄는 사람의 얼굴에 큰 글자로 씌어져 있다. 우리가 그 책을 완전히는 알지 못하지만 그 사실은 명백하다. 1945. 2. 28
 
102
요즈음 성경 구절들을 읽는다. 오늘은 이런 구절을 보았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1945. 3. 1
 
103
“하나님은 힘없는 자를 도우시는 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시편」34장 18절에도 나타나 있다. “주님은 마음이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고 회개하는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 1945. 3. 2
 
104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이사야」41장10절) 1945. 3. 3
 
105
“영원히 야훼(하나님)를 믿고 의지하여라. 야훼는 영원한 바위시다.”(「이사야」26장4절) 1945. 3. 4
 
106
물의 본성이 낮은 곳을 찾는 것처럼, 죄악도 사람을 낮은 곳으로 이끈다. 따라서 악을 행하기란 쉽다. 반면에 덕은 인간을 위로 이끄는 것이므로 힘들게 보인다. 1945. 3. 5
 
107
“내 은혜가 네게 충분하다. 내 권능이 약한 데서 완전해진다.” (「고린도후서」12장9절) 1945. 3. 6
 
108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다.”(「시편」46장1절) 1945. 3. 7
 
109
하나님의 말씀이다. “나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나는 어느 곳에나 있고 어느 것에나 있다.” 이런 앎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오히려 유한하고 불안전한 것을 피난처로 삼아 우리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다. 이보다 더 놀랄 일이 있을 수 있을까? 1945. 3. 8
 
110
우리는 동서양간에 어떤 차이를 두어서도 안 된다. 동양적이든 서양적이든 모든 것은 그 장점을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정당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1945. 3. 9
 
111
이 세상에는 왜 선도 있고 악도 있으며 행복도 있고 불행도 있는가? 하나님은 존재하시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법(Law)을 주시는 분일 뿐 아니라 법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자신의 행동에 따라 어떤 인간인지가 결정된다. 선한 행동을 하면 흥하고, 악한 행동을 하면 망한다. 1945. 3. 10
 
112
사회에 대한 참된 봉사란 사회 그 자체, 즉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특정한 사회를 연구함으로써만 그 사회를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을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45. 3. 11
 
113
가까워졌을 때 인간은 하나님말고는 위안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주저한다. 왜 그럴까? 1945. 3. 12
 
114
비폭력만이 독립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즉 죽음으로써만 산다. 죽이는 것으로는 결코 살지 못한다. 1945. 3. 13
 
115
어떻게 죽을까? 자살을 할까? 그래서는 결코 안 된다. 죽을 준비를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필요할 경우라면, 그것은 오로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죽을 때뿐이다. 1945. 3. 14
 
116
인내와 침착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은 없다. 이런 진리는 매일 매일의 체험을 통해 증명될 수 있다. 1945. 3. 15
 
117
운명과 노력 사이에는 끝없는 싸움이 있다. 그 싸움 가운데서 우리는 계속해서 노력할 뿐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1945. 3. 16
 
118
모든 걸 운명에 맡기지도 말고. 우리가 들이는 노력을 경시하지도 말라. 운명은 제 갈길을 간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끼어 들 수 있는 곳을 보아야 한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것은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1945. 3. 17
 
119
비통한 것은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에게 대답하게 하자. 1945. 3. 18
 
120
내 생의 순간마다 나는 침묵이 최대의 웅변임을 깨닫게 된다. 말해야 한다면 가능한 적게 말하라. 한 마디로 충분할 때 두 마디를 하지 않도록 하라. 1945. 3. 19
 
121
사소한 일에 당황한다면 우리 안에 어딘가 몰래 집착하는 바가 있기 때문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그 집착을 찾아 없애야 한다. 큰일을 당했을 때에도 꼿꼿이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다. 우리는 그저 억지로 버티고 있을 따름이다. 절대로 그것을 꼿꼿함이라 부를 수는 없다. 1945. 3. 20
 
122
그런 경우 기억해야 할 구절이 있다. “감각과 그 대상의 접촉은 오고 가는 것이니, 그것들을 참아 견뎌라.” 1945. 3. 21
 
123
무슨 일을 하든지 잘해야 하고 참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하지 말라. 매일매일 느끼는 진리이지만 오늘은 특히 그 말이 내 마음에 와 닿는다. 바(Ba)가 죽은 날이어서 늘 그랬듯이『바가바드 기타」를 외웠다. 그러나 거기에는 혼이 없었다. 1945. 3. 22
 
124
잘못은 그 잘못을 바로 잡았을 때에만 잘못이 아니게 된다. 만일 억누르면 종기처럼 솟아올라 악화되고 만다. 1945. 3. 23
 
125
인간은 자아의 진면목을 인식하고 그에 대해 명상하며 그 덕을 따를 때 향상해 간다. 그 반대로 행동하면 몰락으로 치닫게 된다. 1945. 3. 24
 
126
무엇이 인내인가? 산카라차랴(Shankaracharya)는 이렇게 말한다. “바닷가에 앉아 풀잎새로 물 한 방울을 찍어 내 봐라. 네게 참을성이 있고 근처에 그 물방울을 받아 둘 곳이 있기만 하다면. 어느 때에 가서는 바다의 물을 모두 비워 낼 수 있으리라.” 이것은 거의 완전한 인내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는 말이다. 1945. 3. 25
 
127
속에 무한한 인내력을 품지 않은 사람은 비폭력을 지켜 낼 수 없다. 1945. 3. 26
 
128
뱀과 인간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분명히 뱀은 배로 기고, 인간은 발로 똑바로 서서 걷는다. 그러나 만사가 겉으로 보이는 대로만은 아니다. 왜냐? 정신적으로는 배를 땅에 대고 기는 인간이 있지 않은가? 1945. 3. 27
 
129
나는 날마다 침묵의 중요성을 보게 된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좋지만. 일에 깊이 골몰히는 사람에게 침묵은 참으로 귀중하다. 1945. 3. 28
 
130
“서두르는 사람은 초조해 하고, 천천히 꾸준히 히는 사람은 침착하다.” 매순간마다 이 진리를 알게 된다. 1945. 3. 29
 
131
일상적으로 늘 하던 일에서 벗어나는 것은 매우 위험스럽구나! 봄베이에 온 뒤 나는 매일매일 글을 쓰지 못했다. 1945. 3. 30
 
132
어느 것도 법칙 없이 되는 것은 없다. 전 태양계를 지배하는 법칙이 아무리 짧은 순간이나마 깨지는 경우에는 태양계는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1945년 4월 3일에 씀) 1945. 3. 31
 
133
이 교훈은 크건 작건 모든 것에 적용된다. 우리는 이를 알고 이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 있으면서 죽은 것이 될 것이다.(1945년 4월 3일에 씀) 1945. 4. 1
 
134
자기의 욕망을 불필요하게 확대시키는 것은 죄다.(1945년 4월 3일에 씀) 1945. 4. 2
 
135
오늘 지키기로 한 하르탈(Hartal, 총파업)은 교수형 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 행사가 진정 이해 속에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비폭력의 길에서 한 걸음을 내디디는 것이다. 1945. 4. 3
 
136
인간은 자기의 의무가 무엇인지 안다. 그러면서도 제가 해야 할 것으로 알고 있는 바를 행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1945. 4. 4
 
137
우리가 만일 우리 주위의 심리적 환경에 굴복한다면 정말 끝장이다. 치무르(Chimur) 교도소 수감자들의 상황은 날로 날로 변하고 있다. 우리 의무를 다하면서 냉정을 지켜야 한다. 1945. 4. 5
 
138
이주 단순한 것까지도 잘못 이해하려는 사람을 참고 견디려면 얼마나 높은 차원의 비폭력이 필요한지 몰라! 1945. 4. 6
 
139
내 육체를 보전키 위해서 나는 분투 노력한다. 내 영혼을 알기 위해서도 정말 그 같은 노력을 하고 있을까? 1945. 4. 7
 
140
오해가 있을 경우 나는 노하고, 울고, 웃고, 동정을 느낀다. 그러나 그보다도 침착하게 오해를 없애려 애쓰는 것이 내 의무가 아닐까? 1945. 4. 8
 
141
우리는 무엇을 믿을까? 우리를 칭찬해야 할까, 꾸짖어야 할까? 둘 다 부당한 일이다. 그러면 우리가 자신을 판단하는 주체가 되어야 할까? 여기에도 잘못의 여지는 많다. 하나님만 이 우리가 어떤 사림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에게 말해 주시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대해 알려 하거나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이 제일 좋다. 우리는 우리대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거나 믿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얻어지는 것은 없다. 의무의 이행만이 진정 중요한 일이다. 1945. 4. 9
 
142
눈먼 사람이란 눈을 잃은 사람이 아니다. 제 단점을 숨기는 사람이다. 1945.4.10
 
143
인간의 정신의 평화는 인간 세계 속에서만 증험될 수 있는 것이지 히말라야의 산정(山頂)에 홀로 있으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945. 4. 11
 
144
이상(理想)과 그 이상에 따라 사는 것은 서로 다르다.(1945년 4월15일에 씀) 1945. 4. 12
 
145
이상 없는 사람은 키 없는 배와 같다.(1945년 4월15일에 씀) 1945. 4. 13
 
146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할 때에만 이상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1945년 4월15일에 씀) 1945. 4. 14
 
147
우리가 올바른 노력을 기울였고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했다면 해본 것만으로 만족하고 쉬어도 좋다. 결과는 노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다른 요인들 이 있는 것이다. 1945. 4. 15
 
148
무엇이 올바른 노력일까? 한 가지 증거는 원하던 결과를 노력해서 이루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옳은 것은 결과로 판단된다. 올바른 노력이란 사용한 수단이 옳다는 깊은 확 신이 있어서, 설혹 바라지 않은 결과에 이른 경우에도 그 수단을 바꾼다든지 그 노력이 변하거나 약해진다든지 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1945. 4. 16
 
149
우리 능력의 최대란 무엇일까? 자기의 에너지를 아낌없이 다 쏟아붓는 노력이다. 성공은 일반적으로 이런 순수한 노력에 따라온다. 1945. 4. 17
 
150
사람은 무가치한 데이타에 근거해서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라 행동을 해 나아간다. 그러한 경우 가능하다면 결정을 내리지 않는 것이 낫고, 결과에 무관심한 편이 낫다. 그러나 결정 을 지어야 할 의무가 있을 경우에는 가능한 최대의 주의를 기울여 결정하고 두려움 없이 그 결정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1945. 4. 18
 
151
합당치 못한 일이라면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그 중요성을 잃고 만다. 합당한 일이라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최고의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 1945. 4. 19
 
152
인간의 탐욕은 가장 깊은 밑바닥까지도 내려가고 하늘 꼭대기까지도 오를 수 있다. 그러므로 탐욕은 억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1945. 4. 20
 
153
인간의 기쁨이 끝간 데를 모를 때란 바로 자신이 바라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을 얻었을 때이다. 1945. 4. 21
 
154
매우 정신적인 사람인 듯하면서 육체적으로 늘 병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딘가 잘못이 있는 것이다. 1945. 4. 22
 
155
우리 앞에 산적한 일들을 끌어안고 골몰해 있다면 정신을 차릴 수 없어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반면 일을 냉정히 파악하고 있다면 산처럼 쌓인 일도 매일매일 줄어들어 어느 날 마침내 시라지게 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1945. 4. 23
 
156
내 잘못을 알기는 원치 않아도 남의 잘못을 보고는 즐거워한다. 이런 버릇 때문에 숱한 불행이 발생한다. 1945. 4. 24
 
157
사챠그라히 행세를 한다 해서 누구나 사챠그라히(Satyagrahi, 眞理把持者)가 되는 것은 아니다. 순수한 진리를 지킴으로써만 사챠그라히가 될 수 있다. 1945. 4. 25
 
158
눈에 보이는 더러운 것만 더러운 것일까? 우리는 하얀 것 위에는 조그만 티끌만 있어도 보기 싫어하지만, 검은 것 위에는 얼마나 많은 티끌이 있을지 모르는데도 전연 개의치 않는다. 1945. 4. 26
 
159
우리는 검은 것은 깨끗지 않고 흰 것은 깨끗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검은 것도 자연의 배치 속에서는 흰 것이나 다름없이 덕이 되고. 제자리를 잃을 때 악이 된다. 1945. 4. 27
 
160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죽음을 제일 두려워하며, 죽지 않으려 온갖 수단을 다 쓰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1945.4.28
 
161
자식이 부모를 경배하는 것이 기도의 한 형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의 영원한 아버지이신 분에게는 어떤 경배를 드려야 할까? 기도를 좁게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1945. 4. 29
 
162
오늘 날짜『타임즈 오브 인디아』(Times of India)지에 실린 ‘오늘의 명상’ 은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 거기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진리를 믿고, 진리를 생각하고, 진리를 살아라. 비진리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결코 진리를 압도할 수 없는 것이니.” 1945. 4. 30
 
163
비록 선함이 함께 있더라도 위선이 있는 곳에는, 아무리 선만을 취하기 위해서라 할망정 가서는 안 된다. 간다면 이미 해서는 안될 협력을 하게 되는 것이다. 1945 .5. 1
 
164
독이 든 우유를 버리는 것과 같이, 위선의 독과 섞여 있는 선이라면 그 선 또한 거부해야 한다. 1945. 5. 2
 
165
공자(孔子)는 말한다. “질서가 잡힌 나라에서는 그 발전을 부(富)로 측정하지 않는다.” 국민(people)과 지도자의 순결만이 국가의 진정한 재산이다. 1945. 5. 3
 
166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위로 올라가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이래로 떨어지는 마음이다. 이 점을 언제나 잘 생각해서 이 두 가지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1945. 5. 4
 
167
자신은 자기의 등을 볼 수 없는데 다른 사람은 자기의 등을 볼 수 있듯이,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의 잘못을 볼 수 없다. 1945. 5. 5
 
168
죽음이란 늘 고통과 고난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왜 죽음이 닥쳐 온다고 슬퍼해야 하는가? 1645. 5. 6
 
169
삶은 장미와 같다. 삶 또한 가시로 기득 차 있기 때문이다. 1945. 5. 7
 
170
진정 두려움이 있다면 오직 한 가지다. 비루하고 참되지 않은 짓을 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1945. 5. 8
 
171
정당하지 않게 이룬일은 설익은 빵과 같아 내다 버릴 수밖에 없다. 1945. 5. 9
 
172
사람들이 진리를 밀하고 실천하기는 두려워하면서 거짓을 말하고 행하기는 왜 두려워하지 않을까? 1945. 5. 10
 
173
“겁쟁이는 죽기 전에 여러 번 죽는다”는 영국 속담은 진실이다. 때가 늘 말하지만, 죽음이란 정말 고통과 고뇌에서 건져지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고통을 더해 주며 상황을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1945. 5. 11
 
174
어떤1 이름으로 신을 부르든지 간에 어디나 신과 같은 성격을 가진 이가 있다면 우리는 그분을 공경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45.5.12
 
175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셔야 할까? 욕정도 없고 형태도 없는 그분은 모든 속성의 저장소이시면서도 악은 전혀 없는 분이어야 한다. 이것은 순전히 문법상의 문제이다. 우리가 개념상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은 형태가 없는 분이시니, 그분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1945. 5. 13
 
176
하나의 규칙을 어기면 반드시 다른 규칙도 어기게 된다. 1945. 5. 14
 
177
행복 속에 기뻐하면 불행이 찾아오게 된다. 참된 행복이란 슬픔과 고통에서 솟아오른다. 1945. 5. 15
 
178
억지로 지어 낸 것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은 진정한 웅변이며 어떤 말보다 더 효과가 있다. 1945. 5. 16
 
179
규칙적인 생활은 만족감을 낳고, 만족감은 건강을 증진시켜 오래 살게 해 준다. 1945. 5. 17
 
180
자만(自慢)은 인간을 완전히 삼켜 버린다. 이 진리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실현될 수 있다. 1945. 5. 18
 
181
반대로 겸손과 조심은 사람을 키우고 자라게 한다. 1945.5.19
 
182
일 분이라도 허비한 다음에는 되돌릴 수 없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얼마나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가! 1945. 5. 20
 
183
필요없이 내뱉는 말은 진리를 위배하는 것이다 진리의 실현이 침묵을 지킴으로써 더 쉽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1945. 5. 21
 
184
이상이 없는 노동은 방향도 목표도 없는 배처럼 아무 결실이 없다. 1945. 5. 22
 
185
기차를 움직이고 비행기룰 날게 하고,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그 이름을 무엇이라 하든 신의 힘이다. 기차는 증기 기관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비행기는 모터로 움직이는 것 이 아니며, 사람은 심장의 기계적인 작동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1945. 5. 23
 
186
“침착의 열매는달다” 이 진리를 매순간 체험한다. 1945. 5. 24
 
187
고집과 확고부동(確固不動)은 큰 차이가 있다. 자신의 의견을 남에게 억지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고집이지만, 확고부동은 스스로 어떤 일을 짊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이 자유의사에 의해 우리의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1945. 5. 25
 
188
일은 많고 시간은 없는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는 유익 하다고 믿는 것을 참을성 있게 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하나님께서 생을 허락하신다면 언젠가 나머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945. 5. 26
 
189
세수를 하려고 안경을 벗었다 나중에 안경 쓰는 것을 잊어버렸다. 왜 그런가? 다른 일에 정신을 빼앗겨 부주의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분열이라 부르는데, 위험한 일이다. 1945. 5. 27
 
190
나쁜 일을 하면 부끄러워한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하면 알려졌으면 한다. 왜 그런가? 1945. 5. 28
 
191
시기심을 품은사람은 그 시기심 때문에 망친다. 그러나 시기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아마 그 사실을 알지도 못할 것이다. 1945. 5. 29
 
192
시기의 반대는 관대이다. 관대는 다른 사람을 시기하지 못하도록 한다. 오히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덕(德)을 보면 그 덕의 진가를 인정하고 그 덕으로 해서 이로움을 얻게 된다. 1945. 5. 30
 
193
매순간 나는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속이고 있는지 주목한다. 1945. 5. 31
 
194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하려고 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즐겁게 해 주지 못한다. 1945. 6. 1
 
195
우리가 즐겁게 해 드릴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우리가 찬양 하려면 하나님만을 찬양해야 한다. 그러면 걱정하거나 속상해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1945. 6. 2
 
196
어떻게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리고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할까? 그의 창조물인 인간에게 봉사함으로써. 1945. 6. 3
 
197
습관적으로, 사람이 말을 할 때는 모르고 있는 것이므로, 수건으로 입을 싸매거나 혹은 입술을 아주 봉해버리고라도 그 습관을 아주 깨쳐 버린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최고의 시간이
다. 1945. 6. 4
 
198
욕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좋은 욕망, 나쁜 욕망. 실현하기 쉬운 욕망이 있다. 우리의 마음은 좋고 실현될 수 있는 욕망에만 머물러야 한다. 1945. 6. 5
 
199
샤스트라(Shastras, 종교 경전)의 해석은 사람마다 가지가지다. 올바른 길은 우리 마음에 근본적으로 올바른 해석이라고 믿어지는 것을, 설혹 문법적으로는 미흡한 점이 있더라도. 실천으로써 따르는 것이다. 다만 그 해석이 도덕에 위반되지 않으며, 자기를 다스려 가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1945. 6. 6
 
200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위해 도망 갈 많은 길을 남겨 둔다. 그리고 이 길 저 길 도망 쳤을 때 자기가 매우 영리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것은 자신의 함정을 파는 것이 될 뿐이다. 1945. 6. 7
 
201
반면에 진실한 사람은 자신이 도망 갈 모든 구멍을 막아 버린다. 그보다도 그에게는 벽도 구멍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진실한 사람은 눈을 가리고도 옳은 길을 걸어갈 수 있고 결코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1945. 6. 8
 
202
어떤 사람은 무집착에 도달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나 얻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얻기 어려운 것을 쉽게 얻는 방법은 오직 지속 적으로 결의에 찬 노력을 행하는 일뿐이다. 1945. 6. 9
 
203
물방울이 바다를 만든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물방울 속에 온전한 응집력과 서로간의 협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원리는 인간에게도 적용된다. 1945. 6. 10
 
204
무지를 숨기는 것은 오히려 무지를 늘리는 일이다. 그러나 무지를 정직하게 고백하면 무지가 줄어들 수 있는 희망의 기반이 마련되는 법이다. 1945. 6. 11
 
205
기계적인 암기로 배운 것은 앵무새가 라마나마(Ramanama)를 암송하는 것과 같이 가치가 없다. 1945. 6. 12
 
206
앞서 한 말이 옳다는 것은 체험으로 증명된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즉 사람의 마음속 깊이 들어가 자아의 한 부분이 되는 지식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 다 만 그런 지식은 자아를 아는 지식이어야 한다. 1945. 6. 13
 
207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나서 또다시 후회한다면 이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강제로 시켜서 한일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1945. 6. 14
 
208
무집착은 우리가 어떤 일에 집착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가 있을 때에만 진정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 1945. 6. 15
 
209
사람은 자신의 잘못은 잊어버리고 남의 잘못만 보는 버릇이 있다. 이는 자연히 마지막에 그 자신에게 실망을 안겨준다. 1945. 6. 16
 
210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 되어야 하는데, 얼핏 보기에는 제일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1945. 6. 17
 
211
오해의 근원은 불신이고, 불신의 뿌리에는 대개 두려움이 있다. 1945. 6. 18
 
212
두려움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사실 두려움이 있으면 진정한 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 1945. 6. 19
 
213
내게는 침묵을 통해서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체험이 매일매일 자라고 있다. 1945. 6. 20
 
214
불필요한 것을 말하지 않고 기능한 몇 마디로 필요한 것만 이야기한다면 우리의 시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간도 건질 수 있으리라. 1945. 6. 21
 
215
앞서 한 말을 따르면 우리는 일생 동안 많은 시간을 건질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1945. 6. 22
 
216
같은 시물을 보더라도 어떤 각도에서 보면 마음의 평정을 잃게 되고, 다른 각도에서 보면 웃게 된다. 분노하지도 웃지도 않으면 더 좋을 것 아닌가? 1945. 6. 23
 
217
우리는 진리를 말하고 그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의 실천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는지 그 증거를 거의 매일같이 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의 행동과 말의 모범을 따르려고는 결 코 생각하지 않는다. 1945. 6. 24
 
218
후회하면서 바치는 희생은 희생이 아니다. 참된 희생은 기쁨을 주고 정신을 드높여 준다. 1945. 6. 25
 
219
신정한 도움은 하나님의 도움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매개를 통해서만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부러진 갈대의 도움을 알면서도 청하지 말도록하라. 1945. 6. 26
 
220
테 바하두르(Tegh Bahadur)스승은 이렇게 말한다. “가장 작은 상처를 주는 삶은 간소한 살림(Simple Life)이다. 어떤 사람에게도 지극히 작은 고통도 주지 않는 살림만이 순수하다.” 그러므로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만이 참된 종교 생활을 수행하고 있다. 1945. 6. 27
 
221
“이 길로 똑바로 가시오”라고 들은 대로 주어진 방향을 따라 가면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 틀림없다. 그런 길이 진리다. 그런 길을 따라가면 가장 짧은 시간내에 목적지에 도척하게 된다. 1945. 6. 28
 
222
내 삶의 순간마다 나는 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왜 내가 다른 사람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1945. 6. 29
 
223
오늘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와서 말했다. “참된 봉사를 하지 못하면 나는 삶에 대한 모든 흥미를 잃어버린다”고. 1945.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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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 날마다 한생각- 날마다 한생각 224-407
작성자 바보새 14-05-27 11:32 조회779회 댓글0건
검색목록
날마다 한생각 224-407
 
224
어떤 사람이 너를 거짓말쟁이라고 부르거나 반대하더라도 자제(自制)를 잃어서는 안 된다. 무엇인가 말하고 싶으면 조용히 말하라. 네가 진정으로 참되다면 남이 그렇게 부른다고 해 서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1945. 7. 1
 
225
진리는 영혼을 살찌운다. 비진리는 영혼을 좀먹는다. 1645. 7. 2
 
226
먹는 것보다 먹지 않는데 더 큰 즐거움이 있다. 이 진리를 체험하지 않은 자가 누구인가? 1945. 7. 3
 
227
소문에 귀기울이지 말라. 그러나 소문을 들었다고 해도 믿지는 말라. 1945. 7. 4
 
228
우리는 우리를 칭찬하는 소리에 귀기울이지 말고, 우리의 잘못과 실패를 비판하는 소리를 잘들어야 한다. 1945. 7. 5
 
2
언제가 나이고, 언제가 하나님인가? 이것을 결정하는 데 우리의 지혜의 증험(纖)이 있다. 1945. 7. 6
 
230
신은 하나(One)이시다. 그분은 항상 변하지 않으시고 형태도 없으시다. 우리는 그의 거울이다. 우리가 곧고 순수하면 신은 그렇게 우리 속에 비치신다. 만일 우리가 삐뚤어지고 타락하면 그분의 모습도 그와 같이 왜곡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면에서 항상 깨끗하고 순수해야 한다. 1945. 7. 7
 
231
충성을 맹세하는 것과 충성을 바치는 것은 다른 일이다. 1945.7.8
 
232
고독을 자발적으로 찾는 사람만이 고독의 매력을 안다. 1945. 7. 9
 
233
모든 사람의 발의 먼지와 같은 사람이 신과 가까운 사람이다. 1945. 7. 10
 
234
반성 없이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쓰지 말라. 그렇게 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아낄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 1945. 7. 11
 
235
우주가 자아 속에 있는 것과 같이 인도도 마을(Village) 속에 있다. 1945. 7. 12
 
236
인도가 한 마을 속에 살아 있다면 하나의 이상(理想) 마을을 만들자. 그러면 그것이 전국의 모범이 될 수 있다. 1945. 7. 13
 
 
237
인도를 마을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대부분 소용없는 것처럼 보인다. 1945. 7. 14
 
238
삶은 즐기고 놀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실현하고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이다. 1945. 7. 15
 
239
삶이 진정 인간에게 봉사하고 하나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삶을 순수하고 절제 있게 지키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1945. 7. 16
 
240
세속적인 사람은 우주를 거의 이해할 수 없다. 그 이해란 기껏 바다 속 물고기가 바다의 깊이를 잴 수 있는 정도일 뿐이다. 1945.7.17
 
241
테 바하두르(Tegh Bahadur) 스승은 말씀하신다.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삶의 유일한 참 법칙이다.” 1945. 7. 18
 
242
삶은 불확실하지만, 죽음은 확실하고 분명하다.(나낙, Nanak) 1945. 7. 19
 
243
진리는 마음속에서 찾음으로써 발견될 수 있는 것이지 논쟁이나 토론으로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 대신 ‘하나님’ 이라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1945.7.20
 
244
나낙은 “하나님은 모든 이의 마음속에 있고 각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성전이다’라고 말한다. 1945. 7. 21
 
245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계신다면 감히 누가 누구를 미워한단 말인가? 1945. 7. 22
 
246
나낙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면 사람이 만든 법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 1945. 7. 23
 
247
나낙은 “이 세상에 사는 우리 모두는 한 가족이며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살이야 한다고 하나님은 명령했다”고 말한다. 1945. 7. 24
 
248
에고이즘(egoism)이 가지고 있는 어두움은, 어둠 자체보다 더 꿰뚫을 수 없다. 1945. 7. 25
 
249
이 에고이즘의 어두움을 어떻게 걷히게 할 수 있을까? 철저한 겸손의 빛으로써. 1945.7.26
 
250
슬픔은 기쁨의 다른 한 면일 뿐이다. 따라서 슬픔 다음에는 반드시 기쁨이 따른다. 1945. 7. 27
 
251
기쁨과 슬픔이 서로 연속해서 교차하는 한 쌍인 것처럼 인생의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그러니까 마음의 진정한 평화를 얻으려면 상대되는 쌍을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45. 7. 28
 
252
자아(Self)의 참된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또 그것을 보호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삶의 다른 것을 보호할 수 있을까? 1945. 7. 29
 
253
참되다면 한 마디 말로 충분하다. 그러나 참되지 못한 말은 아무리 많아도 아무 가치가 없다. 1945. 7. 30
 
254
참된 말의 힘은 사람을 이기적인 면에서 무사한 면으로 바꾸는 것이다. 1945. 7. 31
 
255
자신의 마음속에 라마(Rama)가 머물고, 그 라마가 머물러 있음을 늘 알고 있는 사람만이 살아 있는 사람이다. 1945. 8. 1
 
256
참된 지식은 단순히 경전을 읽기만 해서는 얻을 수 없다. 진정한 덕의 실천 없이 얻기 어렵다. 1945. 8. 2
 
257
삶의 모든 순간에 번쩍 깨어 있지 않으면 결코 진리를 얻을 수 없다. 1945. 8. 3
 
258
사챠그라히(Satyagrahi)에게는 권리와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의 권리 ―봉사의 권리가 있을 뿐이다. 1945. 8. 4
 
259
그러므로 사챠그라히는 결코 권리를 찾지 않는다. 그에게 권리란 찾음 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1945. 8. 5
 
260
비진리의 독(毒) 한 방울이 진리의 우유 바다를 통째로 못 먹게 만든다. 1946. 8. 6
 
261
“여자가 남자에게서 태어나듯이 남자는 여자에게서 태어난다’고 나낙은 말한다. 그런데 왜 이 세상에서 성적(性的) 타락을 보아야하나? 1945. 8. 7
 
262
나낙이 차가운 곳〔野外〕에 누워 있었다. 친절한 집주인이 그에게 “아름다운 달마샤라(Dharmashala, 쉬는 집)가 있는데 왜 거기로 가지 않습니까?”라며 청했다. 나낙이 대답했다. “전 지구가 내 쉬는 집이고 하늘이 그 지붕입니다.” 1945. 8. 8
 
263
나낙은 말한다. “행복에 대한 갈망은 정말 병이다. 슬픔, 고통이 그 병을 고치는 약이다.” 1945. 8. 9
 
264
나낙은 다시 말한다. “네가 남에게 무엇을 주든지 그것은 다 네 것이며,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네 것이 아니다.” 1945. 8. 10
 
265
우리가 무엇을 먹든지 우리는 남의 입에서 뺏아 먹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손에 넣을 때는 그것이 참으로 필요한 것인지 깊이 생각하고, 필수품은 될수록 적게 하자. 1945. 8. 11
 
266
나낙은 말한다. “이마의 땀을 흘려 자기 밥을 벌고 그렇게 얻은 것을 남과 나누어 먹는 사람은 참으로 정직하다고 불러 줄 수 있다.” 1945. 8. 12
 
267
나낙은 말한다. “자신에게 탐닉하면 할수록 더 불행해진다.” 1945. 8. 13
 
268
성 캐서린(St. Catherine)은 돈이 없었다. 입고 있는 외투뿐이었는데 가난한 사람이 달라고 해서 주어 버렸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성 캐서린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돌아다니시렵니까?” 그녀는 대답했다. “사랑의 옷이 그 외투보다 더 안전하게 나를 덮어줄 것입니다.” 1945. 8. 14
 
269
돈만이 기념관을 세울 수 있다 ⎯ 이 그릇된 생각이 얼마나 큰 손해를 끼쳐 왔는가! 오늘, 마하데브 데 사이의 주기(週忌)를 닥쳐 이 생각이 떠오른다. 1945. 8. 15
 
270
나낙은 말한다. “꿈은 영혼(Atma)이 감각을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의 증거이다. 그러나 감각이 영혼의 도구가 되는 것은 영혼이 감각을 관리하고 있을 때뿐이며, 그러고 나면 영혼은 파라마트마(Paramatma, 절대혼)와 하나가 되리만큼 성숙해진다.” 1945. 8. 16
 
271
배고픔의 고통은 위를 채워서 덜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아픔은 약처럼 약간의 음식을 먹은 다음 그것으로 만족할 때 극복될 수 있다. 1945. 8. 17
 
272
두려움은 에고(ego)를 전멸시킴으로써만 사라진다. 1945. 8. 18
 
273
오늘날 신문 읽기란 고역(苦役)이다. 신문은 옳은 뉴스를 전하지 못하고 있다 신문을 읽지 않는다고 잃을 것은 하나도 없다. 1945. 8. 19
 
274
가능한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쉽지만,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어렵다. 1945. 8. 20
 
275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정말 늘 그런 것만은 아니다. 1945. 8. 21
 
276
한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삼고 있는데 다른 수백만의 사람들은 사탄을 그들의 편으로 하고 있다고 하자. 그렇다고 그 한 사람이 수백만의 사람을 무서워해야 할까? 1945. 8. 22
 
277
하나님이 양쪽 모두의 편이라면 누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가? 1945. 8. 23
 
278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의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다. 1945. 8. 24
 
279
하나님은 잊어버리면서 그 외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1945. 8. 25
 
280
하나님을 잊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잊은 사람이다. 1945. 8. 26
 
281
영혼이 있으면 분명히 절대의 혼(하나님)도 있다. 1945. 8. 27
 
282
우리는 육체적인 존재이므로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어떤 개념도 가질 수 없다. 1945. 8. 28
 
283
비폭력에 대한 신념 없이 어떻게 진리를 믿을 수 있을까? 비폭력을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진리도 존재할 수 없다. 1945. 8. 29
 
284
목적을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말이나 행동에 거짓을 행하는데 주저할리 있겠는가? 1945. 8. 30
 
285
사람에게는 입의 말로 행하는 것이 있고, 침묵을 지킴으로써, 또 행동으로 해야 할 것이 있다.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이 지식으로 확인된다면 그것이 정말 행동이다. 1945. 8. 31
 
286
죄를 ‘크다’, ‘작다’로 구분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1945. 9. 1
 
287
도둑질을 하는 사람, 도둑을 돕거나 교사하는 사람, 단지 도둑질을 할 의도만이라도 가진 사람, 이 세 사람은 모두 도둑이다. 1945. 9. 2
 
288
내가 한 것은 작은 잘못이고 남이 한 것은 큰 잘못이다 ⎯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깊은 무지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1945. 9. 3
 
289
‘부끄럽다’는 그릇된 감정을 가지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이중의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에 신 앞에 설 수 없을 것이다. 1945. 9. 4
 
290
하나님을 그 증인으로 삼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옳은 일을 하면서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1945. 9. 5
 
291
비록 어떤 일이 전적으로 적절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그 일이 옳고 적절한 것이 되는 것이다. 1945. 9. 6
 
292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은 망한다. 1945. 9. 7
 
293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다. 1945. 9. 8
 
294
짐승과 같이 행동하는 사람은 짐승보다 더 나쁘다. 짐승 같은 행위는 짐승에게는 자연스럽겠지만 인간에게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1945. 9. 9
 
295
여자라고 어쩔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약하다고 여겨서는 절대 안 된다. 그러므로 여자가 남자의 자비를 구해서도 안 되고 남자에게 의지해서도 안 된다. 1945. 9. 10
 
296
왕자나 거지나 모든 사람은 자신의 양심을 지키고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이들 안에 슬픔과 기쁨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1945. 9. 11
 
297
사람들은 흔히 친구가 누구이며 적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수가 많다. 이것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1945. 9. 12
 
298
모국어를 얕잡아 보는 것은 어머니를 업신여기는 것과 같다. 1945. 9. 13
 
299
땅에 앉은 사람을 누가 더 낮은 자리에 앉히려 할까? 그와 같이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 사람을 누가 자신의 종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1945. 9. 14
 
300
사람이 자신을 분노에 맡긴다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 진리는 일상의 경험으로 알 수 있다. 1945. 9. 15
 
301
매일매일이 새로운 삶이다. 이 지식은 우리 자신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1945. 9. 16
 
302
우리가 행복을 쫓아가면 행복은 우리를 피해 간다. 사실 행복은 내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행복은 밖에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1945. 9. 17
 
303
친구가 나와 정신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만큼이나 그 친구와 행동을 같이 해야 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1945. 9. 18
 
304
화나는 일이 있는데도 화내지 않는 사람만이 분노를 이겼다고 말할 수 있다. 1945. 9. 19
 
305
마음속에는 분노가 차 있는데 밖으로 나타내지 않았다고 분노를 정복한 것이 아니다. 침착하게 분노의 뿌리와 가지를 모두 뽑아버리는 것이 진정한 정복이다. 1945. 9. 20
 
306
소화불량 같은 것만이 열이 나게 하는 원인은 아니다. 분노하는 것도 열이 나게 할 수 있다. 1945. 9. 21
 
307
다른 사람을 정복하는 것이 자신을 정복하는 것보다 더 쉽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정복하는 것은 외적인 방법으로도 가능하지만, 자기를 정복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정신을 통해서 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1945. 9. 22
 
308
종교가 기계적으로 되면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1945. 9. 23
 
309
종교는 생활 속에 젖어들었을 때에만 종교라 부를 수 있다. 종교가 옷과 같아서는 안 된다. 1945. 9. 24
 
310
돈이 신이다 ⎯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이 잘못이라는 것은 증명되어 왔다. 1945. 9. 25
 
311
하나의 규칙을 업신여기면 모든 규칙을 업신여기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규칙은 하나의 기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규칙을 어기는 것은 자기 억제를 깨뜨리는 것이다. 1945. 9. 26
 
312
모든 인간 활동은 ‘자아의 실현’ 에 초점이 맞춰지며 또 그래야만 된다. 그래서 이 자아실현 속에 하나님의 실현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1945. 9. 27
 
313
사람이 하나님을 받들면서 동시에 그분의 동료인 인간을 경멸할 수는 없다. 1945. 9. 28
 
314
인간의 됨됨이는 진정 마음의 겸손함을 통해 알 수 있다. 1945. 9. 29
 
315
어떤 시인이 말하기를 지식이 없는 인간은 동물과 같다고 했다. 그 지식이란 무엇인가? 1945. 9. 30
 
316
지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아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다른말로 하면 지식은 자아실현을 뜻한다. 1945. 10. 1
 
317
“하나님의 사람은 슬픔에 잠긴 사람에게 친절하고 관대하지만, 그 마음이 자만심에 젖어 있지는 않다.” 우리의 모든 행위를 격려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면 어디에 자만이 있겠는가? 1945. 10. 2
 
318
믿음에는 절망할 여지가 없다. 1945. 10. 3
 
319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종교일 수 있겠는가? 1945. 10. 4
 
320
종교의 옷을 입는다고 악덕이 덕이 되는 것이 아니며 옳지 않은 일이 옳은 일이 될 수도 없다. 1945. 10. 5
 
321
서약한 말을 깨는 것보다는 망하는 것이 낫다.(툴시다스) 1945. 10. 6
 
322
딸기가 수백만 개 쌓여 있다 하더라도 산과 같을 수 없는 것처럼 진실하지 않은 것이 죄가 아닐 수는 없다.(툴시다스) 1945. 10. 7
 
323
구루(Guru, 스승)는 완전해야 한다. 하나님만이 완전한 구루다. 1945. 10. 8
 
324
교육받지 못한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을 이해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1945. 10. 9
 
325
규칙을 모르고 그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민중의 충복이 될 수 없다. 1945. 10. 10
 
326
사람이 하나님(Ramanama)을 입으로 부르다가 침대에 들자마자 곧 잠들어 버리는 것은 무집착의 증거이다. 1945. 10. 11
 
327
나르신하 메타(Narsinha Mehta)는 말한다. “나는 이런 일을 했고 또 저런 일도 했다고 말하는 것은 가장 무지한 일이다. 무집착의 열쇠는 이러한 진리를 묵상하는데서 얻어진다. 1945. 10 12
 
328
병든 몸은 견뎌낼 수 있지만 병든 마음은 견딜 수 없다. 1945. 10. 13
 
329
자신의 좋은 점을 찾아 남에게 자랑하는 것보다 더 졸렬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1945. 10. 14
 
330
남의 잘못만 보는 것은 자신의 좋은 점을 칭찬하는 것보다 더욱더 졸렬한 일이다. 1945. 10. 15
 
331
감각의 대상은 오고 간다.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대상이 우리를 떠나면 비참해지지만 우리 스스로 그 대상을 버리면 행복하고 즐거워진다는 점이다. 196. 10. 16
 
332
이기(利己)를 무사(無私)로 잘못 보는 것은 재칼(jackal, 여우와 늑대의 중간형)을 사자로 잘못 보는 것과 같다. 1945. 10. 17
 
333
“거리를 두고 보면 매력이 있다”는 말은 산의 경우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것에 있어서도 실제로 그럴 듯한 말이다. 1945. 10. 18
 
334
순결은 불결과 맞붙었을 때에만 그 진위가 판명된다. 1945. 10. 19
 
335
순결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다른 모든 덕에 대해서도 사실이다. 비폭력은 폭력에 직면했을 때 그 진위가 판명된다. 1945. 10. 21
 
336
악은 어둠 속에서 번식한다. 그것은 대낮의 환한 빛 속에서는 사라진다. 1945. 10. 21
 
337
비폭력, 진리 등은 자명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일 수가 없다. 1945. 10. 22
 
338
관용이 반드시 정의로 조화를 이루는 만큼, 정의는 반드시 관용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1945. 10. 23
 
339
자신의 판단이 틀림없는 분만이 벌을 줄 수 있다. 하나님 이외에 누가 그럴 수 있는가? 1945. 10. 24
 
340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된다면 말 대신 침묵을 택해야 한다. 1945. 10. 25
 
341
종교는 이 음식은 먹고 저 음식은 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서 하나님을 실현하는데 있다. 1945. 10. 26
 
342
다른 사람이 내가 하는 대로 똑같이 따라 하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다. 예를 들어 아힘사야(Ahimsa, 비폭력)의 종교는 반대로 힘사(Himsa, 폭력)에 직면했을 때에만 증명될 수 있다. 1945. 10. 27
 
343
“인간의 삶은 물 위에 쓴 말처럼 덧없다”고 타밀(Tamil) 시인이 말했다. 이 말은 거듭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945. 10. 28
 
344
술은 사람을 순간적으로 미치게 하지만, 자만은 인간을 완전히 좀먹는다. 자신은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하도록. 1945. 10. 29
 
345
덕이란 혼자 하는 싸움 속에 있다. 적대자가 하나이든지 많든지 간에. 1945. 10. 30
 
346
삶의 기술을 모르는 사람은 죽음의 기술도 알 수 없다. 1945. 10. 31
 
347
삶의 기쁨은 삶의 걱정거리를 벗어 던지는데 있다. 1945. 11. 1
 
348
과거는 우리에게 속해 있지만, 우리는 과거에 속해 있지 않다. 우리는 현재에 속해 있다. 우리는 미래를 창조하는 사람이지만, 미래에 속해 있지는 않다. 1945. 11. 2
 
349
진정으로 봉사하는 사람만이 훌륭한 가장(家長)이다. 그런 사람은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계속 줄뿐이다. 1945. 11. 3
 
350
겨자씨만큼의 작은 잘못도 숨기려 할 때는 산만큼 커진다. 그러나 솔직하게 고백하면 그 잘못은 없어진다. 1945. 11. 4
 
351
신앙은 이성(理性)을 초월하지만 이성에 반대되지는 않는다. 1945. 11. 5
 
352
개개인들 사이 혹은 민족들 사이의 만(灣)에 다리를 놓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라와 나라 사이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것이 더 쉽다. 1945. 11. 6
 
353
사람이 쾌락에 빠지면 그 방종이 사람을 깎아먹는다. 1945. 11. 7
 
354
시간이 가면 누구나 늙는다. 그러나 욕망만은 젊은 그대로 있다. 1945. 11. 8
 
355
불규칙은 무집착과 결코 사이가 좋을 수 없다. 1945. 11. 9
 
356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은 결코 올바르게 행동하지 못한다. 1945. 11. 10
 
357
욕심 많은 사람, 음탕한 사람, 화내는 사람, 술고래는 비두라(Vidura)가 종교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꼽은 열 가지 부류의 사람 속에 든다. 1945. 11. 11
 
358
포기해야 할 것은 거져 준다고 해도 하나의 의무로 생각하고 받아들이기를 거절해야한다. 1945 11. 12
 
359
다른 사람이 전혀 모르는 죄라도 자기 의지로 털어놓고 정말 그 죄를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은 이무도 그를 부끄럽게 만들 수 없다. 1945. 11 13
 
360
순수하고 꿈 없는 잠은 사마디(Samadhi, 명상)요, 요가(Yoga, 마음의 집중)이며, 무사(無私)한 행동이다. 1945. 11. 14
 
361
진심으로 열심히 믿는 신앙인에게는 아무것도 불가능한 것이 없다. 1945. 11. 15
 
362
진실한 신앙인은 늘 하나님 안에 빨려 들어가 있다. 1945. 11. 16
 
363
하나님께 빨려 들어가는 사람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에 빨려 들어갈 수 없다. 1945. 11. 17
 
364
순례는 가정을 버리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대로 말하자면 순례는 가정을 완전히 포기한 뒤에만 가능한 것이다. 1945. 11. 18
 
365
총을 맞고 나면 총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진다. 사랑의 굴레도 점점 무거워지지만 굴레로 느껴지지 않는다. 1945. 11. 19
 
366
사람의 진정한 적은 여섯이다. 색욕, 분노, 집착, 술취함, 자만, 비탄. 이 적들을 이겨 내면 다른 것을 정복하기란 더 쉬워진다. 1945. 11. 20
 
367
악을 행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데는 누구나 동의한다. 그러나 값진 결과를 얻기 위해서 악한 수단을 써도 좋다는 생각은 더 어리석은 생각이다. 1945. 11. 21
 
368
사람이 자기 능력 밖의 일을 손대지 않는다면 조금도 근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1945. 11. 22
 
369
남에게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혹독한 형벌보다도 더 심한 일이다. 1945. 11.23
 
370
내가 어떤 사람을 형제로 여기고 형제로서 사랑했다. 그 후 그는 내 형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는 변함없이 그 사람인데 내가 그를 포기한 것이다. 이를 비난할 자는 누구인가? 1945. 11. 24
 
371
상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논하는 것이 쓸데없는 일이 아니라면, 그럼 어떤 일인가? 1945. 11. 25
 
372
미친 사람이 우리 앞에 나타나 식사와 잠자리를 뺏아가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비폭력의 구제책은 무엇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사랑의 마음으로 그를 먹고 자게 하는 것이다. 1945. 11. 26
 
373
일하지 않고 먹는 사람은 훔친 음식을 먹는 것이다. 1945. 11. 27
 
374
할 일이 없어 굶고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누가 편안한 마음으로 먹을 수 있을까? 1945. 11. 28
 
375
주머니 속에 한 푼이 있다. 어디서 어떻게 얻었는지 자신에게 물어 보라. 그 과정은 너에게 가르쳐 주는 바가 많으리라. 1945. 11. 29
 
376
배고픈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빵의 형태로만 나타날 것이다. 1945. 11. 30
 
377
벌거벗은 사람에게 왜 옷을 주어 굴욕을 느끼게 하는가? 자신의 노동으로 옷 살 돈을 벌도록 그들에게 일을 주어라. 1945. 12. 1
 
378
육체적으로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는 것은 죄다. 하지만 그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ㄹ은 칭찬할 만하다. 1945. 12. 2
 
379
결코 끊어지지 않고 점점 더 밝아지는 믿음은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고 말 것이다. 1945. 12. 3
 
380
아름다움은 외관에 있지 않고 진리 안에만 있다. 1945. 12. 4
 
381
사람이 권력의 힘에 복종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다. 1945. 12. 5
 
382
권력의 힘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악해지면, 우리는 그 악에 비폭력적 저항을 하기 위해 개인적 자유까지도 희생해야 한다. 1945. 12. 6
 
383
사람의 수만큼 많은 종교가 있다. 그러나 종교의 근원으로 가면 진정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1945. 12. 7
 
384
어떤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지를 주의하면 목적은 저절로 옳은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수단과 목적에는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1945. 12. 8
 
385
잘못을 고백하는 것은 비와 같은 역할을 한다. 비는 더러움을 쓸어 내는데, 고백도 이에 못지않다. 1945. 12. 9
 
386
완전한 사람 한 사람은, 진실되지 못한 사람이 다수라 하더라도 그 진실하지 못함을 몰아낼 수 있다. 1945. 12. 10
 
387
폭력적인 행동에는 한계가 있고 실패하게 마련이다. 비폭력은 한계가 없고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1945. 12. 11
 
388
믿음은 상황이 가장 어려울 때 증명된다. 1945. 12. 12
 
389
폭력은 약자의 무기지만, 비폭력은 참는 자의 무기이다. 1945. 12. 13
 
390
고결함을 유지하고자 히는 사람은 모든 물질적인 소유를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1945. 12. 14
 
391
이 세상의 일에 아무 관심도 없이 오로지 피안의 세계에 잠겨 악기나 연주하면서 지내는 종교는 종교라는 이름을 가질 만한 가치가 없다. 1945. 12. 15
 
392
강제로 가난하게 된 사람은 그 가난을 스스로의 선택으로 받아들여 즐거워할 수가 없다. 1945. 12. 16
 
393
순결은 푸르다(purdah, 여자를 숨겨 두는 제도)가 필요 없다. 순결은 오직 하나님의 보호만을 필요로 한다. 1945. 12. 17
 
394
의무의 이행을 통해 얻은 권리는 오래 간다. 1945. 12. 18
 
395
금과 다이아몬드는 땅 속에 묻혀 있는 한 아무에게도 소용이 없다. 인간의 노동으로 그 귀금속을 피내야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 귀금속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바로 노동자이다. 1945. 12. 19
 
396
먹고 마실 권리가 내게 있는 것과 똑같이 나는 내 식대로 내일을 할권리가 있다. 이것이 스와라지(Swaraj, 자치)이다. 1945. 12. 20
 
397
다른 사람의 견해를 알려고도 하지 말고, 그 사람의 의견을 내 의견의 기초로 삼으려고도 하지 말라. 독립적으로 혼자서 생각하는 것은 두려움이 없다는 표시이다. 1945. 12. 21
 
398
하나님이 우리의 보호자시며 동반자시라면, 폭풍우가 아무리 무섭고 어둠이 아무리 깊더라도 무엇 때문에 누구를 두려워하겠는가? 1945. 12. 22
 
399
완전한 비폭력에는 미움도 완전히 없다. 1945. 12. 23
 
400
비폭력은 다수의 선(善)이 아니라 전체의 선을 위해 일한다. 비폭력을 따르는 사람들은 전체의 선을 얻기 위해 필요하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1945. 12. 24
 
401
기도에는 목소리가 아니라 진심이 필요하다. 진심이 없는 말은 의미가 없다. 1945. 12. 25
 
402
순결은 어떤 외부의 보호도 요구하지 않는다. 1945. 12. 26
 
403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외국이 아니며, 그렇다고 다른 누군가도 아니다. 우리의 적은 우리 자신, 즉 우리의 욕망이다. 1945. 12. 27
 
404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 1945. 12. 28
 
405
폭력은 결단코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폭력이 성취하는 듯 보이는 선은 오직 외적인 선일뿐이요, 폭력이 가져오는 해로움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1945. 12. 29
 
406
인간은 그의 사상의 화신이다. 1945. 12. 30
 
407
진실한 종교는 지역적인 한계가 없다. 1945.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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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 날마다 한생각- 날마다 한생각 408-586
작성자 바보새 14-05-27 11:36 조회7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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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한생각 408-586
 
 
408
백지 한 장을 보면서 어느 면이 정면이고 어느 면이 뒷면인지 말할 수 없다. 이는 비폭력과 진리의 관계와 같다. 진리는 비폭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1946. 1. 1
 
409
죽은 사람의 시체를 동물시체와 함께 무덤에 묻는다면 비탄스런 일로 여기리라.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런 비탄스런 행동으로부터 행복한 상태, 즉 모든 생명의 하나됨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1946. 1. 2
 
410
신체적인 약함은 진정한 허약이다. 정신의 허약만이 진정한 허약이다. 1946. 1. 3
 
411
씨알은 헌신적인 일꾼들을 지키는 참된 둑이다. 이 둑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1946. 1. 4
 
412
진심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포기는 오래갈 리 없다. 1946. 1. 5
 
413
어려울 때 하나님께 가는 사람은 어떤 두려움으로도 고통받지 않는다. 1946. 1. 6
 
414
성격 형성에 목적을 두지 않는 교육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1946. 1. 7
 
415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모두 깨끗할 때만 신성(神性)에 접근할 수 있다. 1946. 1. 8
 
416
마음의 평정 혹은 무집착은 욕설과 모욕, 심지어 폭행조차도 참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1946. 1. 9
 
417
세상 사람의 칭찬이나 비난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너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해라. 1946. 1. 10
 
418
용감한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다. 약한 사람은 벌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용서는 약한 사람한테는 일어나지도 않는다. 1946. 1. 11
 
419
윤리학과 분리되거나 반대되는 경제학은 금지해야 한다. 1946. 1. 12
 
420
인간은 육체가 있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있는 곳에 존재한다. 1946. 1. 13
 
421
적대자에게 자비를 구하는 것은 비폭력이 아니다. 1946. 1. 14
 
422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 하는 일은 세상이 끝나는 날에도 결코 뒤져 있지 않다. 이것이 무집착의 한 특징이다. 1946. 1. 15
 
423
집착이 없는 사람은 끝없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다. 1946. 1. 16
 
424
집착에서 떠난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도 분노하는 법이 없다. 1946. 1. 17
 
425
내 것과 네 것을 나누어 생각하는 사람은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1946. 1. 18
 
426
무집착의 사람은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다. 1946. 1. 19
 
427
가능한 최대한의 무집착이 없이는, 어떤 사람이 125세까지 살수 있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1946. 1. 20
 
428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불결해지는 사람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라마나마(Ramanama)이다. 1946. 1. 21
 
429
분노가 가라앉은 다음에 한 일만이 그 열매를 맺을 수 있다. 1946. 1. 22
 
430
우유에 설탕이 섞이는 것처럼 외국인이 원주민과 서로 섞일 때에만 환영받을 자격이 생긴다. 1946. 1. 23
 
431
단순히 잘못을 고백한다고 해서 그 잘못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잘못을 지우기 위해 가능한 무엇이든지 해야 한다. 1946. 1. 25
 
432
참됨은 반드시 확고한 목적을 동반해야 한다. 1946. 1. 26
 
433
미신과 진리는 함께 갈 수 없다. 1946. 1. 27
 
434
마음의 확고부동함 없이는 지각이 생길 리 없다. 1946. 1. 28
 
435
하나님을 자기의 지주로 삼는 사람을 희망이 없다고 보는 것은 죄다. 1946. 1. 29
 
436
포기(renunciation)는 참된 기쁨이다. 1946. 1. 30
 
437
진정한 허약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다. 1946. 1. 31
 
438
한 성자는 말했다. 우리가 자아실현에 적합해지고 우리의 외적인 생활을 내적인 생활과 일치시키려면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1946. 2. 1
 
439
또 그 성자는 마음의 평화가 있는 곳에 끊임없는 내적인 힘이 있다고 하였다. 1946. 2. 2
 
440
인간은 지성과 그 지성을 넘어서는 내적인 목소리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자기 영역에서는 이 둘 다 필요한 것이다. 1946. 2. 3
 
441
인생에 있어 성공의 참된 표시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부드러움과 성숙함이 성장하는 것이다. 1946. 2. 4
 
442
사람은 침묵보다 말로써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더 많다. 1946. 2. 5
 
443
두려움에 의해 지키게 되는 침묵은 침묵이 아니다. 1946. 2. 6
 
444
세상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배척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친구로 삼으신다. 1946. 2. 7
 
445
세상은 우리를 약하다고 부를지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의 이상을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 1946. 2. 8
 
446
외적인 평화는 내적인 평화 없이는 소용없다. 1946. 2. 9
 
447
슬픔을 노래하는 사람은 그 슬픔을 가지각색으로 몇 갑절 늘린다. 1946. 2. 10
 
448
우리는 내적인 빛에 축복을 받지 않는 한 옳은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1946. 2. 11
 
449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 자만이 지도자가 될 수 있다. 1946. 2. 12
 
450
이상에 대한 명상은 이상의 범위를 넓혀 주지는 않지만 그 깊이를 깊게 해 주는 것은 분명하다. 1946. 2. 13
 
451
자아에 대한 지식은 값을 매길 수 없는 자산인데. 우리는 이를 노력 없이 얻으려고 한다. 반대로 부나 명성 등은 가치가 없는데도 이를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주려고 한다. 1946. 2. 14
 
452
평화도 결심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큰 깨우침을 얻을 수 있을까? 1946. 2. 15
 
453
무사(無私)가 없이 어떻게 두려움이 사라질 수 있겠는가? 1946. 2. 16
 
454
우리는 좋은 동료를 찾는다. 그 까닭은 그가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되기 때문이다. 1946. 2. 17
 
455
겸손이 단순한 가식일 뿐이라면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간소한 살림도 마찬가지다 1946. 2. 18
 
456
행동도 씨앗처럼 열매를 맺으려면 시간이 걸린다. 1946. 2. 19
 
457
환경의 노예가 되면 인간의 마음이 무뎌진다. 1946. 2. 20
 
458
어떠한 경우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평온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겉으론 평온한 척하더라도 분명 평화롭지 못할 것이다. 1946. 2. 21
 
459
음악은 목구멍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머리의 음악, 마음의 음악, 감각의 음악 그리고 혼의 음악도 있다. 1946. 2. 22
 
460
실제로 생활에는 조화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멜로디가 모든 활동과 행동에 가득 찰것이다. 1946. 2. 23
 
461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이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돌과 나무와 벌레와 새와 짐승 등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1946. 2. 24
 
462
너의 속에 있는 것을 왜 밖에서 찾는가? 1946. 2. 25
 
463
하나님을 떠나면, 그분 밖에서 우리의 존재는 없다. 1946. 2. 26
 
464
하나님의 무릎을 빼놓고는 우리에게 안전이란 있을 수 없다. 1946. 2. 27
 
465
천성이 겸허한 사람의 겸손은 물이 이래로 흐르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물과 같은 축복이 된다. 1946. 2. 28
 
466
현재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 온 것이다. 1946. 3. 1
 
467
우리의 믿음은 우리에게 빛을 줄 뿐만 아니라 주위를 환하게 밝혀 주는, 늘 타는 램프와 같아야 한다. 1946. 3. 2
 
468
이기주의는 항상 우리를 걱정하게 만든다. 1946. 3. 3
 
469
강가(Ganga) 강은 언제 마를까? 그 근원이 되는 원천에서 잘렸을 때이다. 이와 같이 영혼은 생명의 영원한 원천이신 하나님에게서 잘렸을 때 말라버릴 것이다. 1946. 3. 4
 
470
한 마일을 가든 천 마일을 가든 첫 발걸음은 항상 첫 걸음이다. 왜냐하면 첫 걸음을 내딛지 않고는 둘째 걸음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1946. 3. 5
 
471
별빛 찬란한 하늘과 그만큼 아름다운 마음의 하늘이 있다면 그보다 더 위대한 경이로움을 어떻게 바랄 수 있을까? 1946. 3. 6
 
472
묵상해 보면 천국은 이 땅에 있지 저 하늘 위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946. 3. 7
 
473
생명의 리듬에 맞추어 걷는 사람은 결코 지치지 않는다. 1946. 3. 8
 
474
항상 진리의 길만 밟는 사람은 비틀거리지 않는다. 1946. 3. 9
 
475
이기적인 발언은 늘 거짓으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1946. 3. 10
 
476
작건 크건 실수로 죄를 짓는 것은 분명히 나쁘지만, 그 실수를 숨기는 것은 더욱 나쁘다. 1946. 3. 11
 
477
진리를 철저히 따르려는 사람은 진리를 위해 늘 죽을 준비를 해야 하고 그 때가 오면 생명을 내놔야 한다. 1946. 3 12
 
478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스스로 했노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잘못을 반복하는 일이요, 그 잘못에 숨기는 죄를 더하는 일이다. 1946. 3. 13
 
479
살 줄도 알고 죽을 줄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사챠그라히(Satyagrahi)가 될수 있다. 1946. 3. 14
 
480
라마나마의 잠재 능력에도 한계가 있다. 예를 들면 도둑놈이 라마나마를 외운다고 그의 목적이 달성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1946. 3. 15
 
481
진정한 행복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얻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도록 훈련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1946. 3. 16
 
482
눈으로는 이것을 보고, 혀로는 저것을 이야기하며, 마음은 또 다른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가치 없는 사람이다. 1946. 3. 17
 
483
죽음이 언제나 우리를 붙잡아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오늘 할 수 있는 것을 내일로 미룰 권리가 우리에게 있을까? 1946. 3. 18
 
484
좋은 행동은 지금 당장 하고, 나쁜 행동은 항상 미루도록 해라. 1946. 3. 19
 
485
하나님을 동반자로 삼은 사람이라면 슬퍼하거나 걱정하거나 애써 다른 동반자를 찾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 1946. 3. 20
 
486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다른 사람을 잊어버리는 것은 다른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보기 때문이다. 1946. 3. 21
 
487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욱더 확신하게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깨달음을 가지고 외우는 라마나마가 우리 모든 병의 만병통치약이라는 것이다. 1946. 3. 22
 
488
사랑이나 미움 등도 병이다. 이는 육체적인 병보다 더 나쁜 병이다. 이 병을 라마나마를 빼놓고 어떻게 없엘 수 있을까? 1946. 3. 23
 
489
마음의 불결은 육체의 불결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그러나 육체의 불결은 마음이 불결하다는 표시이다. 1946. 3. 24
 
490
하나님에게서 피난처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을 누가 묘사할 수 있을까? 1946. 3. 25
 
491
좋은 생각은 향기와 같다. 1946. 3. 26
 
492
같은 씨앗에서 나온 행동은 모두서로 하나가 된다. 1946. 3. 27
 
493
에고(ego)가 죽었을 때 영혼은 깨어난다. 1946. 3. 29
 
494
영혼이 깨었을 때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1946. 3. 30
 
495
두려워하는 사람은 진다. 1946. 3. 31
 
496
사람은 미소 지음으로써 슬픔을 몰아낼 수 있지, 울면 슬픔이 더해질 뿐이다. 1946. 4. 1
 
497
하늘 아래 잠들었을 때 누가 그 사람을 도둑질해 갈 수 있는가? 1946. 4. 2
 
498
사람이 봉사할 수 없는 경우는 삶속에 한순간도 없다. 1946. 4. 3
 
499
반대가 사람을 만든다. 1946. 4. 4
 
500
속이 깨끗하면 밖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1946. 4. 5
 
501
오늘은 금으로 된 글자로 적어 둘 만한 날이다. 왜냐하면 1919년 4월 6일 인도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1946. 4. 6
 
502
사람이 가슴을 헤쳐 놓아야 하나님께서 들어오신다. 1946. 4. 7
 
503
라마나마는 라마나마를 낭송할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만 돕는다. 1946. 4. 8
 
504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삼은사람은 모든 것을 갖게 된다. 1946. 4. 9
 
505
모든 것을 다 가졌다 해도 하나님을 빼놓은 사람은 아무것도 갖지 못하게 된다. 1946. 4. 10
 
506
하나님과 함께 살면 어려움이 없다. 1946. 4. 11
 
507
하나님은 우리의 키요 또 키잡이시다. 1946. 4. 12
 
508
모든 사람이 선생이 되면 누가 제자가 되겠는가? 그러니 우리 모두 제자가 되자. 1946. 4. 13
 
509
하나님이 걱정해 주시는데 우리에게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1946. 4. 14
 
510
자연적으로 죽는 사람보다 걱정 때문에 죽는 사람이 더 많다. 1946. 4. 15
 
511
매일 죽는 것보다 한 번 죽는 것이 낫다. 1946. 4. 16
 
512
인내심을 잃었을 때는 침묵해야 하고, 진정되고 난 후에 말해야 한다. 1946. 4. 17
 
513
사람이 자기 자신을 깨달았을 때, 그는 구원을 얻은 것이다. 1946. 4. 18
 
514
겉 살림이 속 살림을 능가할 때 결과는 나빠진다. 1946. 4. 19
 
515
한 사람의 잔인함은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하지 않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 1946. 4. 20
 
516
라마(Rama)를 합당한 태도로 대하지 않으면서 라마나마를 외우기만 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1946. 4. 21
 
517
완전은 인간의 이상일 뿐 달성될 수 없다. 그 까닭은 인간이 불완전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1946. 4. 22
 
518
후회하면서 바치는 희생은 희생이 아니다. 1946. 4. 23
 
519
내면에서 타오르는 촛불은 온 세상을 환하게 한다. 1946. 4. 24
 
520
다른 사람들은 마땅히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교훈이 자신에게 똑같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1946. 4. 25
 
521
모든 사람이 너를 버릴 때에도 하나님은 너와 함께 계실 것이다. 1946. 4. 26
 
522
천국이 너희 안에 있고 또 하나님이 너희 안에 계시는데 너희가 무엇을 더 원하는가? 1946. 4. 27
 
523
인내의 열매는 달다. 1946. 4. 28
 
524
왜 내 자신의 일을 다른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는가? 1946. 4. 29
 
525
누구에게 화를 내겠는가? 너희 자신에게 내겠는가? 매일 그렇게 해 보아라. 그럼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겠는가? 그렇게 할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1946. 4. 30
 
526
상반되는 두 가지는 함께 가지고 있을 수도 없고 또 함께 생각할 수도 없다. 1946. 5. 1
 
527
이상에 접근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진실해진다. 1946. 5. 2
 
528
좋은 생각을 하는 것과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1946. 5. 3
 
529
고독이 유익하다는 것은 직접 체험해 봐야 깨달을 수 있다. 1946. 5. 4
 
530
신앙이란 정반대되는 것이 나타난다 해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버티는 것이다. 1946. 5. 5
 
531
소란은 소란을 몰아낼 수 없다 침묵만이 할 수 있다. 1946. 5. 6
 
532
질병 자체보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다. 1946. 5. 7
 
533
자기 안에 거룩한 불꽃(spark)을 지닌 사람은 그로 인해 불멸에 이른다. 1946. 5. 8
 
534
신의 은총으로 불멸을 얻었다는 것은 큰 일이 아니다. 매일매일 살면서 그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더 큰일이다. 1946. 5. 9
 
535
나쁜 소식에 당황하지 않는 사람은 좋은 소식이라고 의기충천하지도 않을 것이다. 1946. 5. 10
 
536
호의를 가지고 만사를 견딜 용기가 없다면, 호의는 절름발이 신세가 될 것이다. 1946. 5. 11
 
537
우리는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나을 것이 없다 — 이 생각은 참됨과 겸손으로 가득 차 있다. 1946. 5. 12
 
538
사기의 잘못을 고백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악을 추방할 길이 없다. 1946. 5. 13
 
539
기차를 움직이는 것은 기적 소리가 아니라, 증기 속에서 동력화된 힘이다. 1946. 5. 14
 
540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이 계심을 진정으로 깨닫기 바란다면 우리 안에서 에고(ego)를 쫓아내고 그분을 위한 자리(room)를 만들어야 한다. 1946. 5. 15
 
541
자아가 죽을 때 하나님이 그 빈 지리를 채워 주신다. 1946. 5. 16
 
542
다른 사람의 잘못을 발견하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볼 수 없다. 1946. 5. 17
 
543
한쪽에는 진리가, 다른 한쪽에는 땅의 지배가 있다면. 마음은 진리를 택하고 땅의 지배를 거절할 것이다. 1946. 5. 18
 
544
두려움과 이기심의 노예가 되는 것은 사람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 더 나쁘다. 1946. 5. 19
 
545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그분께 무엇을 드릴 수 있겠는가? 1946. 5. 20
 
546
하나님을 ‘우리의 구주’ 라 부르면서 게으름이 늘어간다면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1946. 5. 21
 
547
빚은 행동으로 갚는 것이지 말로 갚는 것이 아니다. 1946. 5. 22
 
548
마음속에 있는 것은 조만간 밖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1946. 5. 23
 
549
라마나마만이 인간의 세 겹의 병(육체적, 정신적. 영적)에 대한 치료제이다. 1946. 5. 24
 
550
라마나마는 라마나마에 충실한 사림에게 머물며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열매를 맺는다. 1946. 5. 25
 
551
순수한 생각은 연설보다 더 큰 영향력이 있다. 1946.5. 26
 
552
불안함과 조급함, 이 두 가지는 병이다. 이 두 병은 생명을 단축한다. 1946. 5. 27
 
553
화평함과 견고함이 부족한 사람은 하나님을 실감할 수 없다. 1946. 5. 28
 
554
우리가 우리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이상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 1946. 5. 29
 
555
우리가 육체적인 것에 얽매여 있으면서 자아실현을 바란다면 그것은 마치 달을 구하는 것과 같다. 1946. 5. 30
 
556
영혼은 선한 이와 짝을 맺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 1946. 5. 31
 
557
우리의 이웃이 깨끗하지 않다면 개인적으로 깨끗하다 해도 별 게 못된다. 1946. 6. 1
 
558
바깥의 깨끗함이 참인 것은 안의 깨끗함도 참이다. 우리의 이웃이 내적으로 불결하면 이는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1946. 6. 2
 
559
용기는 어떤 특정한 사람의 독점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안에 갖춰져 있다. 다만 모든 사람들이 그 용기를 알지 못할 뿐이다 1946. 6. 3
 
560
참을 말하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심사숙고해야 한다. 1946. 6. 4
 
561
지식인은 오로지 포기함으로써만 평화를 얻을 수 있다. 1946. 6. 5
 
562
기차시간에 늦으면 기차를 놓친다. 우리가 기도시간에 늦으면 어떻게 될까? 1946. 6. 6
 
563
하나님을 우리 마음속에 모시면 악한 생각을 할 수도, 악한 행동을 할 수도 없게 된다. 1946. 6. 7
 
564
사람의 마음이 하늘의 빛으로 채워지면 그가 가는 길에 모든 장애물이 사라진다. 1946. 6. 8
 
565
삶은 장미꽃밭이 아니다. 온통 가시밭이다. 1946. 6. 9
 
566
자신의 의무를 조용히 실천하는 기쁨에 비교할 만한 기쁨은 없다. 1916. 6. 10
 
567
확고부동한 태도로 명상하면 깊이 있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또 순수하고 성숙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 1946. 6. 11
 
568
계산하는 마음으로 자아실현을 이룰 수 없다. 1946. 6 12
 
569
라마의 이름으로 라바나(Ravana, 자이나교의 악신)처럼 행동하는 사람을 무엇이라 부를까? 1946. 6. 13
 
570
네가 그를 위해 일할 때 그를 섬긴다 할 수 있지, 입으로만 부른다고 그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1946. 6. 14
 
571
무엇을 줄 때는 자신의 가장 진실한 부분을 주어야 한다. 1946. 6. 15
 
572
매사에 양면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오직 밝은 면만을 보도록 하자. 1946 .6. 16
 
573
집착은 순수한 행동까지도 헝클어지게 한다. 1946. 6. 17
 
574
사람이 우리를 멸망시키려 할 때, 구하러 오시는 이는 하나님이다. 1946. 6. 18
 
575
낮을 밤으로 바꾸는 사람이 어떻게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1946. 6. 19
 
576
라마나마의 넥타(nectar, 神酒)를 마시고 싶은 사람은 마음속에서 색욕, 분노 같은 것을 몰아내야 한다. 1946. 6. 20
 
577
비록 너의 친척이라 하더라도 그 친척의 잘못을 숨기려 하지 말라. 1946. 6. 21
 
578
마음의 평정은 모든 지식의 으뜸이다. 1946. 6. 22
 
579
그 속에 독을 타면, 넥타라도 독으로 변한다. 1946. 6. 23
 
580
비록 홀로 서 있다 해도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억제해서는 안 된다. 1946. 6. 24
 
581
이성의 뒷받침이 없는 직관은 절름발이다. 1946. 6. 25
 
582
강물이 원류(源流)에서 떨어져 나오면 말라 버린다. 우리도 우리의 원류이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오면 그와 같이 된다. 1946. 6. 26
 
583
순수한 생각은 매우 미묘하면서도 힘이 있어 만물에 퍼지게 마련이다. 1946. 6. 27
 
584
진리를 믿는 사람은 분별력과 시간에 대한 감각을 갖추어야 한다. 또한 반대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어야 한다. 1946. 6. 28
 
585
인간은 죽음의 입 안에 있다. 죽음이 입을 다물면 죽는 것이다. 1946. 6. 29
 
586
그렇다면 즐거워하고 오만을 부릴 때. 지각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1946.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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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 날마다 한생각- 날마다 한생각 587-688
작성자 바보새 14-05-27 11:39 조회8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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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한생각 587-688
 
587
진리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면 세상 사람이 우리 편이든 아니든 또 우리가 살든 죽든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1946. 7. 1
 
588
네가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면 먼저 이기주의(egoism)의 옷을 벗고 그분의 면전에 서야 한다. 1946. 7. 2
 
589
네가 진실로 겸손하다면, 너희처럼 그런 고행을 닦지 않는 사람을 꿈에서라도 결코 깔보아서는 안 된다. 1946. 7. 3
 
590
모든 물건을 제자리에 놓지 않는 버릇이 있는 사람은 바보다. 물건을 찾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기 때문이다. 1946. 7. 4
 
591
신의 힘이란 어떤 것도 그 힘에 대항할 수 없는 그런 힘이다. 1946. 7. 5
 
592
우리는 모든 일이 우리에게 좋을 때만 하나님을 찬송한다. 그러나 진정한 신자는 일이 잘못될 때도 하나님을 찬송한다. 1946. 7. 6
 
593
인간은 자아를 읽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1946. 7. 7
 
594
가지는 자세히 살피면서 뿌리는 보지 못하는 사람은 길을 잃은 사람이다. 1946. 7. 8
 
595
라마나마의 넥타는 영혼에 기쁨을 주고 몸에서 질병을 없애준다. 1946. 7. 9
 
596
사람은 자기 존재의 근원에서 자신을 잘라 버릴 때 죽는 것이지, 몸에서 영혼이 떠날 때 죽는 것이 아니다. 1946. 7. 10
 
597
끊임없이 명상한다면 둔해지지 않는다. 1946. 7. 11
 
598
끈질기게 명상하는 사람은 견실하고 분명해진다. 1946. 7. 12
 
599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 연못을 채우듯이, 매 순간의 진지한 기도가 영혼을 살찌운다. 1946. 7. 13
 
600
인간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자신을 내맡기면 인간은 모든 것이 된다. 1946. 7. 14
 
601
하나님이 우리의 안내자가 되었을 때는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다. 1946. 7. 15
 
602
사람이 참을성을 잃어버리면 비폭력뿐만이 아니라 진리도 잃어버리게 된다. 1946. 7. 16
 
603
진리와 같은 행복이 없고, 비진리와 같은 불행이 없다. 1946. 7. 17
 
604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알면서도 일생을 진리가 아닌 것을 찾는 데 허비하다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1946. 7. 18
 
605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간에 어떤 사람을 즐겁게 하거나 불쾌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한다. 1946. 7. 19
 
606
어떤 사림에게 백 번 말해서 귀기울이지 않는다 해도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인내이다. 1946. 7. 20
 
607
마음에 없이 마지못해 하는 봉사를 받는 것은 고통스런 짐이다. 1946. 7. 21
 
608
자기 천성을 억누를 때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1946. 7. 22
 
609
악한 본성은 억누르지 말고 몰이내야 한다. 1946. 7. 23
 
610
시간을 절약하려는 사람은 불필요한 일은 하나도 해서는 안 된다. 1946. 7. 24
 
611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과 반대되는 어떤 법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1946. 7. 25
 
612
자기가 바라서가 아니라 벗을 위해 좋은 일을 포기하는 것은 참으로 옳은 일 아닌가? 1946. 7. 26
 
613
제일의 봉사는 화장실 청소다. 1946. 7. 27
 
614
누군가에게 진리를 절실하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지칠 줄 모르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1946. 7. 28
 
615
폭풍우가 아무리 거세다 해도 바다는 그 잔잔함을 포기하지 않는다. 1946. 7. 29
 
616
사람이 자기 일을 할 수 없을 때 왜 불안해 하는가? 1946. 7. 30
 
617
간소한 살림에는 위대함과 선함이 있지만, 부유한 살림은 그렇지 못하다. 1946. 7. 31
 
618
어떤 위기가 닥쳐도 사랑의 불은 그 위기를 녹일 것이다. 1946. 8. 1
 
619
몸과 마음과 영혼이 조화되지 않는 한 아무것도 올바로 될 수 없다. 1946. 8. 2
 
620
진리의 신봉자에게는 칭찬이나 비난이나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신봉자는 칭찬에 솔깃해 하지도 않고 비난에 화내지도 않는다. 1946. 8. 3
 
621
하나님과 얼굴을 맞댄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정말로 말할 수 없다. 1946. 8. 4
 
622
사람은 두 눈과 두 귀가 있지만 혀는 하나뿐이다. 그러므로 본 것의 반만 말하고 들은 것의 반만 말해야 한다. 1946. 8. 5
 
623
인간이 자기를 기만하는 능력은 묘하다. 1946. 8. 6
 
624
모두 주고 모두 받아라. 1946. 8. 7
 
625
모두 지키고 모두 잃어버려라. 1946. 8. 8
 
626
죄에 크고 작음이 어디 있는가? 죄는 죄이지, 달리 생각하는 것은 자기 속임이다. 1946. 8. 9
 
627
파괴하는 것은 쉽지만 건설하려면 큰 기술과 애쓰는 마음이 필요하다. 1946. 8. 10
 
 
628
자기만을 생각하게 될 때는, 다른 사람을 생각해 봄으로써 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1946. 8. 11
 
629
많은 일이 인내로 이루어진다. 비록 그 일들이 조급함으로 망쳐진다 해도. 1946. 8. 12
 
630
간소함은 어떤 것에 영향을 받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간소함이 사람의 바탕 속에 깊이 스며들어야 한다. 1946. 8. 13
 
631
밖에서 뭔가를 찾는다고 자신을 향상시킬 수 없다. 성장의 영역은 안에 있다. 1946. 8. 14
 
632
순수한 사랑은 모든 권태를 일소시킨다. 1946. 8. 15
 
633
동물처럼 행동하면서 어떻게 사람답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1946. 8. 16
 
634
이성과 믿음이 서로 충돌할 때는 믿음을 택하는 편이 낫다. 1946. 8. 17
 
635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결코 값진 일을 하지 못한다. 1946. 8. 18
 
636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으면 옳고 적당하나, 제자리에서 벗어나면 부적당해진다. 1946. 8. 19
 
637
사람은 과장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같다. 1946. 8. 20
 
638
주장(도그마)은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거짓이 도그마를 흔들지(감소시키지) 못한다. 진리는 그 도그마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1946. 8. 21
 
639
이해하지 못했다면 어떤 것도 하지 말고 읽지도 말라. 1946. 8. 22
 
640
강가(Ganga) 강은 사람의 마음속에 흐르고 있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 속에 몸을 씻지도 못하고 그 효력을 받지도 못한 채로 남아 있다. 1946. 8. 23
 
641
순수하며 두려움 없고 덕망이 있는 사람만이 희생을 바칠 수 있다. 1946. 8. 24
 
642
절망은 사람을 좀먹는다. 1946 8. 25
 
643
사람이 하나님을 깨달으려면 이기심과 두려움을 없애야 한다. 1946. 8. 26
 
644
힘에 굴복하는 것은 남자답지 못한 표시이다. 1940. 8. 27
 
645
빌스(Bhils)에 대한 진정한 봉사만이 그들의 두려움과 절망을 없애 줄 것이다. 1946. 8. 28
 
646
무엇보다 침묵하라. 1946. 8. 29
 
647
지식의 빛은 자만하는 사람에게는 절대 비추지 않는다. 1946. 8. 30
 
648
강가(Ganga) 강의 물 없이 갈증을 해소하거나, 하나님 없이 영혼을 만족시키는 일은 모두 불가능한 일이다. 1946. 8. 31
 
649
반대 없이 어떤 사람도 진보하지 않는다. 1946. 9. 1
 
650
모든 사람은 자기 존재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 1946. 9. 2
 
651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잃어버린 자이다. 1946. 9. 3
 
652
인간의 몸은 악기와 같다. 원하는 악보는 무엇이든 칠 수 있다. 1946. 9. 4
 
653
생각은 강철로 된 벽도 뚫는다. 1946. 9. 5
 
654
죽음 안에 승리가 있다. 1946. 9. 6
 
655
신념이 배를 저어간다. 1946. 9. 7
 
656
죽음의 위협은 늘 있게 마련인데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1946. 9. 8
 
657
우리 모두가 미쳤다. 그런데 우리 중 누가 누구를 미쳤다고 할 수 있는가? 1946. 9. 9
 
658
석판을 깨끗이 닦으면 하나님이 그 위에 손수 깨끗이 써 주신 표식을 보게 된다. 1946. 9. 10
 
659
야심이 아무리 높더라도 가장 비천하다고 여겨지는 생물까지도 그 야심의 범위 안에 있게 마련이다. 1946. 9. 11
 
660
하나님과 사탄이 우리 마음속에서 함께 왕위를 차지할 수는 없다. 1946. 9. 12
 
661
종교를 위한 죽음은 좋은 일이나 광신을 위해서는 죽거나 살아도 좋지 못하다. 1946. 9. 13
 
662
내적인 힘은 기도로써 자란다. 1946. 9. 14
 
663
내적인 미를 보게 되면 외적인 미는 무의미해질 것이다. 1946. 9. 15
 
664
오직봉사를 위해 보낸 삶만이 열매를 맺는다. 1946. 9. 16
 
665
내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외적인 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1946. 9. 17
 
666
진통을 겪고 있더라도 우리 속에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알고 있다면, 모든 것이 우리와 함께 무사할 것이다. 1946. 9. 18
 
667
대자아(Self)를 더 많이 실현하면 할수록 더 발전하게 된다. 1946. 9. 19
 
668
괴로운 마음은 궤양보다 더 큰 고통을 가져온다. 1946. 9. 20
 
669
배고픔의 고통은 지독하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답게 살기 원하면 이 고통까지도 넘어서야 한다. 1946. 9. 21
 
670
무집착의 경지에 이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오직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 1946. 9. 22
 
671
이기주의 속에 모든 문제가 있다. 1946. 9. 23
 
672
생각 없는 생활은 동물의 생활과 같다. 1946. 9. 24
 
673
우리는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그분처럼 우리 자신을 만들어 가야 한다. 1946. 9. 25
 
674
화를 내고서 그것을 왜 자기 실수라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실수라고 하는가? 1946. 9. 26
 
675
산 믿음과 단순히 믿고자 하는 욕심은 큰 차이가 있다. 사람은 이를 몰라서 속는다. 1946. 9. 27
 
676
모든 사람이 물질적인 지식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영적 지식을 얻을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의무이기도 하다. 1946. 9. 28
 
677
하나님은 네 개의 팔을 가졌다고도 하고 천 개의 팔을 가졌다고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상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1946. 9. 29
 
678
우리가 나쁜 생각에 빠지면 그 생각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동반자가 될 가능성도 있다. “다야야토 비샨”(Dhyayato Vishyan). 1946. 9. 30
 
679
라마나마만을 생각하고 살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자동적으로 옳게 된다는 것은 단순한, 백 퍼센트 진리이다. 1946. 10. 1
 
680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일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1946. 10. 2
 
681
진심 어린 기도와 그에 따른 행동은 무엇이 하나님의 일인지를 아는 방법이다. 1946. 10. 3
 
682
신앙만이 생활의 태양이다. 1946. 10. 4
 
683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한다면 사람들이 너희를 배척한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1946. 10. 5
 
684
한 사람이 완전해질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공평하다. 1946. 10. 6
 
685
멸망이 어떤 일인지 일면서도 멸망을 좋아하는 사람은 정말 가여운 사람이다! 1946. 10. 7
 
686
우리는 큰일을 생각하지 말고, 선한 일을 생각해야 한다. 1946. 10. 8
 
687
사람들이 우리를 몽상가라 여긴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는가? 1946. 10. 9
 
688
125세까지 살 가능성은 희박해져 간다. 분노와 집착을 완전히 이길 수 없는 사람이 무슨 권한으로 그렇게 살 수 있겠는가? 1946.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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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 간디 자서전- 간디 자서전을 옮기면서
작성자 바보새 16-01-17 06:51 조회5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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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자서전을 옮기면서
 
 
나는 내가 하지는 못하면서도 남을 나무라기는 잘한다. 칼릴 지브란의『예언자』를 읽고는 왜 이날껏 이『예언자』를 번역한 사람도 하나 없었느냐 하고,『바가바드 기타』를 얻어 들고는, 이런 보배를 어째서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알려주지 않았을까 했다. 내가 나무라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재지(才智)가 없으니 나은 선배들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다. 이 간디의 자서전도 그렇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외국 인물로서 일반 사람에게 가장 존경받는 것은 간디 아닐까? 그런데 3.1운동 이후 그렇게 좋아하는 간디인데 어째서 그 전기는 해방될 때까지 하나도 번역된 것이 없었는지 모른다. 나라가 씨알에게 있는 줄 알고, 씨알을 깨워주고 길러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요, 무엇보다 먼저 할 일이라면, 글을 배운 책임을 하기 위해서라도 씨알들에게 간디를 스승으로, 친구로 소개해 주었어야 할 것인데 아니했다. 생각해보자, 해방 전에 공산주의자들이 방방곡곡을 파고들어 쑤셨듯이, 간디의 사상과 투쟁 방법을 그만큼 씨알에게 알려주었더라면 일이 어떻게 됐겠나? 붉은 군대가 북한 사람을 속이려고 할 때에 가장 먼저 한 일이 조만식 선생을 내세우며 ‘조선의 간디’ 라고 했던 것을 생각해보자. 그것이 무슨 뜻인가? 자기네와는 180도 반대 방향의 간디인데 왜 그 이름으로 조선생을 내세웠을까?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 조선놈을 잡으려면 조선놈의 심정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우리는 도리어 그렇게 못했는데 우리 대적은 간디주의를 내세우면 조선놈은 다 속일 수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간디의 길은 그만큼 우리에게 들어맞는 길이었다. 그런데 아까울 손, 그것을 우리가 못했다는 말이다.
 
안타깝고 부끄러워하는 소리지, 남을 나무랄 것 있겠는가, 나를 채찍질해야지.
겨우 1958년에 와서야 ‘간디 연구회’란 것을 몇이서 시작했는데, 시작 하자마자 7월 서리를 맞았다. 그러나 이상기후를 탓해도 소용없고, 생명은 제 책임을 제가 만들어 지는 거다. 내가 했어야 할 것인데 약했다. 지금 와서야 솔직히 하는 고백이지만 모든 책임은 내게 있었다.
 
이번에 삼성출판사에서『간디 자서전』과 도로우의『시민의 불복종』을 한 권으로 만들어낼 것을 계획하면서 그 번역을 부탁해왔기 때문에 첫 마디에 응했다. 이제는 간디가 유명은커녕 잊혀지려 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 사양할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책상 앞에 앉아 번역에 몰두할 수 없었다. 그때 다른 것은 별로 없으나 걱정되는 것이 둘이 있었다. 하나는 병석에 누워 7년 동안 몸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언제나 한 사람이 옆에 있어야 하는 늙은 아내요, 그 다음은 약속해 놓은 간디의 자서전이었다. 다행히 일을 잘 풀려 일을 할 수는 있었으나 너무 늦어서 삼성출판사에 대해 미안하기 짝이 없다. 본래 6월 말까지 약속한 것인데 9월 15일로, 또 10월 15일로 연기를 하다가 이제 11월 15일이 됐으니 사과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지연은 됐지만 그 대신 얻은 것이 많다. 병석에 있던 아내는 그 고통의 부르짖음으로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악의 뿌리를 들추어내고, 그것을 청소하고 책상에 앉아 간디를 대하면 폭풍 속을 가르고 나가는 사공의 모습이 보였다. 이리하여서 나는 지난 70여 년보다 이한 해에 배운 것이 더 많다.
이번은 정말 한 자 한 자, 내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할 수 있는 힘을 다하여서 하노라고 했고, 첫 번 번역에서 잘못이 있던 것도 더러 발견한 것이 있다. 그래서 스스로 전보다는 간디에 조금 더 가까이 선 것 같은 느낌이다.
 
독자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될 수록이면 주를 많이 달려했으나 그래도 출처를 알 수 없어 못한 것이 많고, 혹시 잘못된 것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고유명사의 발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도저히 인도인들이 하는 대로는 할 수가 없고 부득이 보통 하는 로마자 발음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독자들의 양해를 빈다.
여러 군데서 눈시울이 뜨거워 그냥은 써 내려갈 수가 없어서 손수건을 찾곤 했다. 특히 말하고 싶은 것은 간디의 인격적 매력이라 할까, 영어로 한다면 참말 스위트한 점이 있다. 선배의 존경을 어쩌면 그렇게 하는지 자기의 위대함은 전연 잊고 그저 어린애처럼 선배를 위한다. 자기의 위대함을 잊으니 정말 위대하지 않겠는가?
 
끝으로 부질없는 내 탄식이나 적자. 내가 10년 전에 이 태도로 간디를 읽었다면 내가 조금 다른 사람이 됐을 것이요, 우리나라 역사도 조금 달라진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 그러나 지나간 것이 문제랴, 앞이 문제지. 간디는 간디고 나는 나야 하지.        
 
                                                                                                                            함석헌
 
 
 
 
영문 번역자의 머리말
 
 
간디의 자서전 초판 두 권으로 출판이 됐었다. 1권은 1927년에, 2권은 1929년이다. 정권 1루피의 구자라트어 원판은 5판을 거듭하는 동안 근 5만 부나 나갔다. 영문 번역판(문고판으로 나온)의 값은 인도인으로서는 너무 비싸기 때문에 염가판의 필요를 느낀 지 오래다. 이제 이것을 단권으로 낸다.
번역을 『영 인디아』에 연재로 낼 때는 다행히 구자라트어 판을 수정을 해가면서 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전체에 걸쳐 다시 자세한 수정을 했다. 또 언어면에서 특히 영문학에 소양이 깊은 친구가 세밀히 수정을 해주어서 다행으로 여긴다. 그는 그 일을 맡으려 할 때 자기의 이름은 발표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승낙을 했고 나도 그 조건을 능낙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나는 그럴수록 더욱 고맙게 생각한다. 제5편의 29장부터 43장까지는 내가 1928-29년 브룸필드 위원회에서 주최한 바르돌리 농업연구회에 나가 있는 동안 나의 친구요 동업자인 파렐랄이 번역한 것이다.
 
                                                                                                      1940년 마하데브 데자이
 
 
 
머리말
 
 
나와 일을 같이 하는 몇몇 분의 권고에 따라 나는 자서전을 쓰기로 했는데, 쓰기 시작하여 첫 장을 넘기자마자 봄베이에 폭동이 일어나 일은 중단되어버렸다. 그 후 연달아서 사건들이 계속 일어났고 나는 결국 예라브다(Yeravda) 감옥에 투옥되고 말았다. 나와 함께 감옥에 들어갔던 사람 중의 하나인 제람다스(Jeramdas)씨는 나더러 만사를 젖혀놓고 그 자서전을 완성하도록 하라고 권하였다. 나는 이미 내 공부를 위하여 순서를 짜놓았었기 때문에 그 과정을 다 마칠 때까지는 다른 일은 생각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내가 만일 예라브다에서 내 형기를 다 치렀더라면 나는 자서전을 정말 끝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직 한 해가 남아 있어서 내 일을 마치려면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에 나는 석방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스와미 아난드(Swami Anand)가 다시 그 제안을 해왔는데, 나는 남아프리카에서의 진리파지운동(眞理把持運動)의 역사를 쓰던 것도 다 마쳤으므로, 자서전에 손을 대서『나바지반』(Navajivan) 지(誌)에다 내자는 생각이 들었다. 스와미는 따로 단행본으로 내자고 하지만 내게 그럴 시간의 여유가 없다. 나는 매주 계속해서 한 장씩밖에 쓸 수가 없다.『나바지반』에는 어차피 매주 무엇을 써야 하니, 그러면 자서전이라고 해서 안될 것이 없지 않은가? 스와미도 나의 제안에 동의하여 지금 나는 이것을 부지런히 쓰고 있다.
 
그런데 한 경건한 친구가 그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나의 침묵일(沈默曰)에 내게 이렇게 말하였다. “무엇 때문에 그런 모험을 할 생각이 들었습니까?” 하고 그는 물었다.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서양 사람만이 하는 짓입니다. 내가 알기로는 동양에서는 서양식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자서전을 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 쓴다 합시다, 무엇을 쓰시렵니까? 생각해봅시다. 오늘 당신이 주의 주장으로 내세우시던 것을 내일 가서 버리시게 될 때 오늘 당신이 세웠던 계획을 장차 고치시게 될 경우에 입으로거나 글로거나 당신의 하신 말씀을 표준으로 삼고 행동해오던 사람들이 방황할 것 같지 않습니까? 자서전 같은 것은 그만두시는 것이, 적어도 아직은 쓰시지 않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그 주장을 듣고 나니 어느 정도 그렇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뜻하는 것은 정말 자서전을 쓰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나의 수많은 진리 실험의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뿐이다. 그런데 내 생애는 그러한 실험들만으로 되어 있으니, 이야기는 자연히 자서전의 형태를 가지게 될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정말 매 페이지마다 나의 실험 이야기밖에 쓴 것이 없다 하더라도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이 모든 실험을 앞뒤를 가려서 관련된 이야기로 하기만 한다면 나는 그것이 읽는 이에게 유익함이 없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적어도 그렇게 스스로 믿는다고 자위하고 싶다. 정치적 분야에서의 나의 실험은 인도뿐 아니라 어느 정도는 온 ‘문명 된’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내게는 그 일들은 큰 가치가 없다. 그 일들 때문에 내게 주어진 마하트마의 칭호는 더군다나 가치가 없다. 그 칭호는 내게 깊은 고통을 준 일이 많다. 그것이 내 마음을 흐뭇하게 해 주었다고 생각되는 때는 한 번도 없다. 내가 정말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나만이 알 수 있는 정신적 분야에서의 나의 실험이요, 실상 내가 정치적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그 힘은 여기서 얻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실험들이 참으로 정신적인 것일진대 제 자랑의 여지는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은 다만 나의 겸손을 더할 뿐이다. 나의 지난날들을 돌아보아 반성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 나의 부족을 느낄 뿐이다.
 
내가 성취하려고 원하는 것, 지금껏 30년 동안 성취하려고 싸우고 애써온 것은 자아(自我)의 실현이다. 하나님의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고 봄이다. ‘모크샤’에 도달함이다. 나는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살며 움직이며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말로나 글로나 행하는 모든 것, 그리고 내가 정치적 분야에서 한 모든 모험은 다 이 한 목표를 지향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믿어온 사람이기 때문에 나의 실험은 골방에서 되어진 것이 아니고 드러내놓고 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사실이 그 정신적 가치를 손상시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의 일에는 자기와 자기의 창조주만이 아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꼬집어 말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말하려는 실험들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적인 것들이다. 혹은 그 보다도 도덕적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종교의 알짬은 도덕이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일 중에서도 나이든 사람뿐 아니라 어린이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여기서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내가 그 이야기를 냉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할 수 있다면 많은 실험자들이 정진(精進)하는 데 필요한 양식을 거기서 발견할 것이다. 나는 절대로 이 실험에 있어서 다소라도 완전했다는 생각을 할 수는 없다. 과학자가 자기의 실험을 더할 수 없는 정확과 신중과 정밀을 가지고 행하면서도 자기가 얻은 결론에 대해서 결코 완전을 주장함이 없이 언제나 융통성 있는 태도를 가지는 것처럼 나도 내 실험에 대해 과학자 이상의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나는 엄밀한 자기성찰을 했고, 나 자신을 샅샅이 뒤졌으며 모든 심리적 상태를 조사하고 분석했다. 그렇지만 나는 결코 내 결론이 완전하다든지, 잘못이 없다든지 하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한 가지만은 내가 분명히 주장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즉 내게는 그것이 절대로 옳다고 생각 됐으며, 그때 현재로는 그것이 완전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그것을 내 행동의 기초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매 걸음마다 취사선택의 순서를 밟았고 그 결과에 따라서 행동하였다. 그러므로 내 행동이 내 이성과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한 나는 내 당초의 결론을 굳게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만일 학문적 원리를 토론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자서전은 아예 쓰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내 목적은 이 원리들을 실제에 적용했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자는 데 있었으므로 내가 쓰고자 하는 이 글의 제목을『나의 진리실험의 이야기』(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th Truth)라고 정했다. 이 안에는 물론 비폭력의 실험, 독신생활의 실험 등, 진리와는 다르다고 생각되는 그밖의 여러 가지 행동의 원리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는 진리는 최고의 원리요, 다른 여러 가지 원리는 그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이 진리는 말의 진실뿐만 아니라 또 행동의 진실이기도하다. 또 우리의 생각으로 하는 상대적인 진리만이 아니라 절대적인 진리, 영원한 진리 곧 하나님 자신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정의는 무수하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압도되어 대번에 어리둥절해 버린다. 그러나 그를 진리로 대할 때만 나는 그를 예배할 수 있다,나는 아직 그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를 찾고 있다. 그를 찾기 위해서라면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라도 즐겨 희생할 것이다. 바쳐야 하는 그 희생이 비록 나의 생명이라 할지라도 나는 즐겨 바쳤으면 한다. 그러나 내가 절대의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하는 한 내가 이해하고 있는 이 상대적 진리를 굳게 잡는 수밖에 없다. 이 상대적 진리 가 그때까지는 나의 등대요, 나의 작은 방패요, 나의 큰 방패다. 이 길이 비록 험하고, 좁고, 면도날같이 날카로울지라도, 그것이 내게는 가장 가깝고 가장 쉬운 길이다. 나의 히말라야 산맥 같은 실책조차도 내게 대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은 내가 이 길을 엄격하게 지켜왔기 때문이었다. 그 길은 나를 실패에 빠지지 않게 건져주었고, 나는 내 빛을 따라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나는 종종 ‘절대진리’, 곧 하나님의 희미한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따라서 그이만이 참이요, 다른 모든 것은 다 참이 아니라는 확신이 날마다 자라났다. 누구나 원하거든 내게서 이 확신이 어떻게 자라났는가를 알아보기 바란다. 할 수 있거든 나의 실험에도 참여하고 나의 확신에도 참여하기 바란다. 내게 가능한 것이면 어린아이들에게도 가능하다는 확신이 가면 갈수록 내 속에서 자라났고, 또 내가 그렇게 말하는 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진리탐구의 방법은 어렵다면 어렵지만 또 쉽다면 쉽다. 교만한 어른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순진한 어린이에게는 온전히 가능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진리를 찾아가는 자는 티끌보다도 겸손해져야 한다. 세상은 티끌을 그 발밑에 짓밟지만 진리를 찾는 사람은 티끌에게 조차도 짓밟힐 수 있으리만큼 겸손해져야 한 다. 그런 다음에야만 비로소, 진리의 한 별견(瞥見)을 얻을 수 있을 것이요, 그렇지 않는 한 아니 될 것이다. 바시슈다(Vasishtha)와 바슈바미트라(Vashvamitra)의 대화는 이것을 명백히 밝혀주고, 기독교와 회교도 역시 이것을 충분히 증거하고 있다.
 
이 글 중에 조금이라도 내 자랑을 했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면 나의 진리탐구에 뭔가 잘못된 점이 있다고 생각하여야 할 것이고 내가 어렴풋이 봤다는 것도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나 같은 것은 천백이 망하더라도 진리는 왕성해야 한다. 나 같은 잘못 많은 인간들을 심판함에 있어서 티끌만큼이라도 진리의 표준을 낮추어서는 아니 된다.
아무도 이 자서전 속에 여기저기 들어있는 권고의 말을 명령하는 것으로 알지 않기를 믿고 또 바란다. 이 실험담은 하나의 실례로 알아야 할 것이요, 각자는 자기의 의향과 능력에 따라 자기의 실험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한정된 범위 안에서 하면 이 실험담은 정말로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꼭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면 나는 아무리 창피스러운 일이라도 숨기지도 줄여서 말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모든 실수와 잘못을 독자들에게 충분히 알리고 싶다. 내 목적은 내 실험을 진리파지의 과학에 의해 서술하자는 것이지 내가 어떻게 잘했느냐를 말하잔 것이 아니다. 내 자신을 판단함에 있어서 나 는 진리 자체같이 엄격해야 하는 것이며, 또 다른 사람들도 그렇기를 바란다. 이 표준에 의하여 나를 저울질할 때 나는 수르다스(Surdas)와 함께 이렇게 부르짖지 않을 수 없다.
 
나같이 불쌍한 그렇게 악하고 못난 것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 수 있느냐?
내 창조주를 내버렸었구나.
그토록 나는 믿음이 없었구나.
 
왜냐하면, 그분께서 내 생명의 숨의 마디마디를 다 주장하고 계시며, 나를 낳으신 것이 그분임을 내가 분명히 알고 있는데, 그분에게서 내가 아직도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내게는 끊임없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나를 붙들어 그분에게 못 가게하고 그분으로부터 멀리 있게 하는 것이 내 속에 있는 저 나쁜 정욕인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것을 떼어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이만 그칠 수밖에 없고, 나는 다음 장에서부터 사실 이야기를 시작하여야 한다.
 
 
                                                                                                              1925년 11월 26일
                                                                                                              사바르마티 아슈람
                                                                                                              M.K.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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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 사람의 아들-옮긴이의 말
작성자 바보새 14-02-07 16:38 조회1,2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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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지브란이『예언자』를 낼 때는 본래 3부작으로 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래서『예언자』를 출판하자마자 곧 둘째 것에 착수했습니다. 그 제목은 『예언자의 동산』(The Garden of Prophet)이었습니다. 지브란의 말대로 하면 첫째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다룬 것이고,『예언자의 동산』에서는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다루자는 것이고, 마지막『예언자의 죽음』(The Death of Prophet)에서는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다루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예언자의 동산』은 이 부분 저 부분 써놓고, 아직 그것을 정리하지 못한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 후 1933년에 그의 일을 돕던 바바라 영이 그것을 정리해서 출판했고, 마지막『예언자의 죽음』은 아직 초안도 아니 됐고 다만 마지막 끝절 하나를 미리 말한 것이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이렇습니다. “그는 오르팔리스 성에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장터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 숨지게 할 것이요, 그는 그 돌 하나하나를 축복하는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그런데『사람의 아들 예수』는 그가『예언자의 동산』을 쓰고 있는 동안에 또 한편으로 그것을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사람의 아들 예수』도『예언자』도 마찬가지로 그의 마음속에 있은 지가 오래 됐습니다. 그런 것을『예언자의 동산』을 쓰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시작해서 옆의 사람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때 모양을 영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아무 예고도 없이 1926년 11월 12일 밤 그 순간이 왔습니다. 내 기억력이 있는 한 영 잊지 못할 순간입니다. 지브란은 그때 전력을 기울이고 있던『예언자의 동산』을 쓰느라고 방안을 가만히 못 있고 왔다갔다하며 불러주다가는 또 멈추어서고 섰다가는 또 불러주고 하며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멈칫 서더니 얼굴에 이상한 어둠이 끼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한 무슨 덮개가 얼굴을 덮어씌우는 듯한 갑작 변동이지만 나는 지난 경험에 의해서 그것이 무슨 갑작스런 놀라운 말을 하려는 전조(前兆)인 것을 알았습니다.
방안은 고도로 긴장된 분위기로 가득 찼습니다. 그것도 나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 옆에 누런 노트를 펴놓았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얼굴은 찡그리고 늙은 것 같았습니다. 전에 있던 광채나 아름다움은 어디로 가고 날카롭고 슬픈 빛을 띠었고, 나이 많고 실의에 빠진 사람처럼 머리를 내저었습니다. 그러자 한 목소리가, 지브란의 목소리는 아닌, 한 떨리고 생기 없고 더듬더듬 하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 고통과 절망이 내 가슴을 칼처럼 뚫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50년 전 이 밤이었다. 그 기억이 도사린 전갈처럼 내 가슴에 서리어 있다. 이것은 쑥보다도 쓴 잔 같다. 이것이 내 모든 낮들을 어둡게 했고 내 모든 새벽들을 망그러뜨려 버렸다. 그놈의 밤이 천 번도 더 나를 찾아오곤 했다.”
그리고는 잠잠해졌습니다. 그는 다시 왔다갔다하며 그 말을 되뇌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받아썼습니다. 그런데 그는 또다시 그것을 반복했습니다.
나는 그 말이 계속되는 동안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그 이상하고 비통한 음성은 애절하고 무서워 듣기에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내 가슴은 누군지 알 수 없는 그 인간 때문에 찢어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고민은 내게 이상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나는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갑자기 딴 사람이 됐던 것같이 또 갑자기 지브란 제 자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의자로 가서 주저앉아 말없이 눈을 감았습니다. 그가 눈을 다시 떴을 때 그는 완전히 천연스런 태도로 나를 보면서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알아……내가 누구였었는지?”
나는 ‘몰라요’ 했습니다.
그는 웃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먼 거리가 있는 듯한 말로.
“나 유다였어, 가엾은 유다. 생각해봐, 그가 만일 자살을 아니했담 어떠했을까? 그가 오십년을 계속 살았다고 해봐, 백년을 살았다 해봐, 그 살림이 어떠했겠나?”
그는 오랫동안 잠잠히 곳곳이 서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고통 받는 천사의 얼굴 같았습니다. 거기에는 고뇌와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거의 눈이 캄캄해지는 빛을 띤 얼굴로 소리를 쳤습니다.
“나 이제 그 책을 쓰기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밤에 그 책, 자기 가슴 속에 몇 해를 두고 품고 있었던『사람의아들 예수』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가 대개 어떤 심경을 가지고 얼마만한 노력을 가지고 이것을 썼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읽으시는 이들이 물론 생각이 있을 줄 알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술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직접 신앙과 관련 시켜서 교리나 신학의 토론을 일으켜서는 아니됩니다. 앞으로 읽어가시노라면 알겠지만, 지브란이 그리는 예수에는 성경 중에 나오는 말과 물론 대체로는 그것을 따르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상당히 예술가의 특권에 의하여 맘대로 자유로이 상상하는 것이 있으므로 성경과 맞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보다는 그것을 통해서 자기의 체험을 보여주려는, 그 말과 붓으로는 그릴 수 없는 모습에 접하도록 해야 할 것 입니다.
 
한마디로 한다면, 그는 형식화한 신앙 속에서 거의 죽어버린 예수를 살려내보려고 애썼습니다. 그것을 위해 그는 날카롭고 풍부한 상상력으로 예수 당시의 77인의 사람을 동원시켜서 그들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전해주게 했습니다.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상당히 성공했습니다. 보는 우리 가슴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감동을 받는 대목이 많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성경의 말과 반대되는 듯한 한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는 예수님을 아주 온유 겸손한 인격으로 말했는데 지브란은 그 말들을 좋아 아니합니다. 그것도 참으로 이해하고 보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글자에만 잡힌다면 상당히 문제를 일으킬만한 것입니다. 지브란도 예수의 온유 겸손하신 것을 반대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소위 믿고 공경한다는 사람들의 무기력한 것을 못 견디어 하는 지브란의 강한 성격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미카일 나임시가 전해주는 그의 말을 들어보기로 합시다.
 
얼마 전부터 내 마음과 상상 속에는 예수의 모습이 붙어 떨어지지 않고 있어, 나는 이젠 그를 믿노라고 자칭하는 사람들, 믿기는 하노라면서 언제나 예수라면 예쁜 여자 모습에 수염만 난 것같이 그리는 그 사람들에게 싫증이 나고 진력이 났어. 그들에게는 예수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또 낮고 천하고 약하고 가난한 것이야. 나는 또 그를 부정하려는 사람들도 싫어. 그러면서도 그들은 또 예수를 요술쟁이나 협잡꾼이 되는 것처럼 말을 해. 그보다도 더 구역질나는 것은 저 학자라는 사람들이야. 그들은 예수가 역사적으로 있었나 없었나를 증거하기 위한 길다랗고 재미도 없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옛날 일만 파고들지만, 예수라는 그 인격처럼 위대하고 가장 실재적인 인격이 또 어디 있겠는가? 예수를 반은 하나님 반은 사람이라는 튀기로 만들어버리는 저 신학자라는 늙은 요술쟁이들 이야기야 할 것도 없지. 내 예수는 너나 나와 마찬가지로 사람이다…….
 
과학은 모르겠습니다마는 시는 토론하는 심정을 가지고는 못 읽습니다. 이것은 시입니다. 글을 읽을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읽어야합니다. 내 마음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을 가지고 읽어야 그 시인과 시를 알 수 있습니다. 작자를 작자의 마음으로 읽어주는 사람만이 또 자기는 자기로서의 시를 지을 수 있습니다. 지브란의 예수를 지브란의 심정으로 읽는 동안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보고 우리 손으로 만지는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지브란은 바로 레바논 산록에서 났고, 예수가 생전에 쓰셨던, 혹은 쓰셨던 것과 가까운 말을 하면서 자랐고 어려서부터 아주 특색 있는 메노나이트파 교회에서 자랐으므로 살아 움직이는 예수를 그리는데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유다의 심정을 체험해 보려고 노력했던 그 한 사실만을 가지고도 그의 태도가 얼마나 진지했음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 친구를 보아서도 알지만 또 그에 못지않게 그의 대적을 보아서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유다를 체험한 후 “자, 이제부터 나는 그 책을 쓸 수 있다” 한 것은 옳은 말입니다.
 
 

예언자- 머리말 > 번역물 | 바보새함석헌

예언자- 머리말 > 번역물 | 바보새함석헌

예언자 | 예언자- 머리말
작성자 바보새 14-01-27 16:36 조회1,9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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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영어를 말하는 나라에 한번 가본일도 없이, 영어로 자기를 발표하는 사람들과 한마디 말도 하여 본 일 없이 영어로 된 글을 번역하는 것은 영어에 대한 모욕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이 글을 우리말로 옮겨보고 싶었다.
문학을 모르고, 더구나 시인이 아닌 사람이 시를 번역하는 것은 시와 시인에 대한 업신여김일 수밖에 없다.
 
그런 줄을 알면서도 이 글을 꼭 우리 귀에 들려주고 싶었다.
나 아니라도 다른 사람이 할 사람이 있고, 또 이미 먼저 번역한 이가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내가 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그만두고 나 자신에 대한 잘못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내가 꼭 한번 내 말로 해보고 싶었다.
어떤 이들, 나를 아노라 하는 이들은, 내가 말을 또 하고 글을 또 쓰는 것을 보면 “저 거짓말쟁이가 또 말을 해?” 할 것이다. 사실 분명히 죄를 지은 것이 있는데 얘기를 하는 것은 미운 일이요 어리석은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천도 알고 만도 알면서도 이것만은 기어이 말하고 싶었다. 말하면 꼭 들을 귀가 있을 것 같고,들으면 틀림없이 혼의 피어남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이 나만 같이 생각되었다.
이것은 남의 글 옮김이 아니라 내 혼의 마주하는 얘기다.
나의 칼릴 지브란 알아들음이요, 거기 대한 고개 끄덕임이다.
따라서 ‘그이’ 알아들음이요. ‘그이’ 눈동자 보고 내 눈동자 반짝임이다.
정말『예언자』쓴 이는 ‘그이’이기 때문이다.
또 내 영원의 뱃길 뱃동무 보고 하는 나의 손시늉이요 몸짓이다.
따라서 ‘그이’에게 드리는 내 손모음(合掌)이요 내 반벙어리 노래다.
 
그것은, 정말 내 말을 들어주고, 나와 함께 고생하고, 아파하고, 싸우고, 한끝까지 같이 가서 하나 되는 이는 ‘그이’이기 때문이다.
문법적으로 바로 풀었나 잘못 풀었나가 문제 아니다. 어느 나라 말도 어떤 문장도 하늘나라 말에는 다 서투른 사람들이다.
그보다도, 하늘나라에 문법 있을까?
말을 아름답게 다듬었나 못 다듬었나가 문제 아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과 짐승과 꽃과 똥덩이와, 만물을 다 불러 넣어 가지고 하는 생명의 노래에 곱고 미운 것이 어디 따로 있을 리가 없다.
살았노라, 내가 죽었다 다시 살았노라, 죽음이 곧 삶이더라, 지옥 밑에 천당이 뚫렸더라 하는 말밖에 더 아름다운 시가 어디 있을까?
죄를 지었으면 죽은 체하고 가만 있거라, 그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반밖에 못되는 진리다. 죄인이야말로 말할 자격이 있더라. 그것은 죄인이 되어보니 알겠더라.
 
‘빛이 있을지어다.’는 캄캄한 혼돈(渾池)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왔고 말씀이 생명의 빛을 낸 것은 살(肉)속에 갇혀서야 했다.
꿀 먹은 사람은 벙어리가 되어도 좋아도, 독을 삼킨 사람은 큰 소리로 토하여야 할 것이다. 그 소리를 듣기 싫다는 사람이 참 시, 참 음악을 알까?
방안에 단정히 옷을 입고 앉은 사람은 돌부처와 다름이 없을 수 있어도 똥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 거기서 뛰어올라오는 사람의 팔다리는 그것이 정말 생명의 춤일 것이다.
물이 완전히 맑아진 다음에 마시려다가는 목이 먼저 타 죽겠더라. 맘이 다 깨끗해진 다음에 말하려다가는 혼이 질러 말라 버리겠더라.
죄는 무섭지만 삶은 죄보다 더 무섭더라.
벙어리는 남의 귀를 아프게 해서야만 남의 귀를 즐겁게 하는 데 이를 수 있고, 천성이 까마귀인 줄 안 다음에는 창파에 씻자던 생각은 어서 그만두고 해가 아주 지평선 아래 떨어지기 전 사뭇 서편 하늘로 날아드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겠더라.
또 해가 져도 괜찮아, 맨 처음의 어둠속에 학이 어디 따로 있고 까마귀 어디 따로 있다더냐?
어둠 속을 노래로 밝히자!
혼의 노래에는 웃음, 울음이 따로 있지 않더니라. 잘잘못도 없느니라.
그리하여 내 소리는 못되더라도 내가 하고 싶으면서 못하는 말 대신 해 주는 입을 빌리기로 하였다.
 
칼릴 지브란은 나를 똥간에 빠진 데서 이끌어냈다, 제 손에도 똥을 쥐면서…….
그럼 내가 부끄러울 것이 없다. 그의 꾸부림이 나의 일어섬이요, 그의 더러워짐이 나의 깨끗해짐이라면, 내가 이 손으로 그를 부쩍 쥠이 그에 대한 고맙담 아니겠나?
나는 그의 말을 내 말이나 되는 양, 그이 보고, 또 그의 사랑이요 내 사랑인 저 오르팔리스 사람들보고 하리라.
한 많은 이 1960년이 오자마자 아직도 채 녹지 않은 눈 위에 새 꿈을 그리는 하룻날, 내 60년 쌓아온 모래 탑은 와르르하고 무너졌다.
나와 같이 그 모래 탑을 쌓던 바로 그 사람들이 무너뜨렸다. 모래 탑을 가지고 진짜나 되는 양 체하고 뽐내는 내 꼴이 미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당연하였다.
내 눈에 모래를 뿌리고 내 얼굴에 거품을 끼어 얹고 발길로 차 던지고 저희도 울며 갔는지 손뼉 치며 갔는지 나 몰라.
나는 영원의 밀물 드나드는 바닷가에 그 영원의 음악 못들은 척 뒹굴고 울부짖고, 모래에 얼굴을 파묻고 죽었었다.
그동안 왔대야, 무한의 장변을 헤매어 다니는 거지들이 세상모르고 와서 저희보다 더한 나보고 도와 달라 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거기서도 도둑질을 해먹는 것들이 와서 그나마 깉은 내 누더기 속에서 뽑아간 것이 있고, 그 남은 모래탑 자국을 다시 한 번 더 짓밟고 거들떠보지도 못하는 낯에 또 한 번 침을 뱉고 간 것뿐이었다.
꽃이 피었다 지고, 장마가 졌다가 개고, 시든 열매가 다 익어 떨어지는 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다.
누가 꼭 일으켜 주어야만 될 것 같은데,조금 부축만 해주면 꼭 일어 설 것 같은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따금 저 멀리서 귓결에, 어서 일어나라는 소리가 들려는 왔건만,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원망은 아니 하기로 힘썼다.
 
십자가도 거짓말이더라.
아미타불도 빈말이더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도 공연한 말뿐이더라.
내가 장 발장이 되어보고자 기를 바득바득 쓰건만 나타나는 건 밀리에르가 아니고 자베르 뿐인 듯이만 보이더라.
무너진 내 탑은 인제 아까운 생각이 없건만, 저 언덕 높이 우뚝우뚝 서는 돌탑들이 저물어가는 햇빛을 가리워 무서운 생각만이 들었다.
누구 원망이 아니라 내 생각에 그러했단 말이다.
멍청히 서울과 천안을 왔다 갔다 하는 동안 한가하여 물에 산에 놀기나 하는 듯, 동해로 남해로 싸다니는 동안 내 혼은 이렇게까지 맥빠지고, 비뚤어지고, 떨어져 영원의 바닷가에 죽은 솔피처럼 밀려 들어왔다 밀려 나갔다 하는 줄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 동안에 내가 그 물결과 싸우며 기도를 했다면 어느 누가 곧이 들을까?
누구 들으라고 한 기도야 아니지만……
그런데 가을도 깊어 사나운 서풍이 또 불기 시작하여,
“나는 인생의 가시밭에 엎드렸노라, 피 흘리노라.
오, 바람아, 나를 일으키려마, 잎새처럼 물결처럼 구름처럼.”
하는 셸리의 노래만이 생각나는 날, 문득 한 소리가 날아왔다.
그것은 레바논의 백향목 가지 꼭대기에서 일어나 지중해를 건너 대서양을 건너 로키 산맥을 넘고 태평양을 건너 뛰어오는 소리였다.
 
나는 한번 듣고 일곱 해 동안을 잊었던 칼릴 지브란의『예언자』를 다시 읽게 되었다. 그것은 내 속에서 자고 있지 않았었다.
그 부르는 소리가 이러했다.
“너희가 너희 모래 탑을 쌓는 동안 바다는 더 많은 모래를 가 쪽으로 가져왔고
또 너희가 그것을 무너뜨릴 때는 바다도 또 너희와 한가지 웃더라. 진실로 바다는 언제나 단순한 것들과 함께 웃더라.”
“너희 영그러운 몸은 바다 같으니라.
영원히 더럽히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해를 향해 걸어가는 자들아, 땅 위에 그려진 어떤 그림자가 너희를 능히 붙잡을 거냐?”
“너희 고통은 너희 깨달음을 둘러싸는 껍질를 깨침이니라.”
“악이란 뭐냐? 스스로 주리고 목말라하는 선일뿐이니라.”
“모래와 거품”을 노래하는 지브란은 자기도 그 거품을 마시고 그 모래를 뒤집어쓰는 사람이 되어서 나를 일으켜주었다.
그의 “심장의 뛰놂이 내 가슴에 있었고”, 그의 “숨이 내 얼굴에 와 닿았고”, 그리고 그는 나를 알아주었다.
죄인의 친구를 처음으로 만났다.
 
나는 내 어릴 적에 똥간에 빠졌던 일을 돌이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날 학교에서 변소에 갔다가 그만 발을 잘못 디디어 가느다란 둥글나무 둘을 건너 놓은 데서 반 길이나 되는 밑엘 떨어져 옷이며 얼굴이며 왼통 똥칠을 했던 일이 있었다.
그렇게 가는 나무를 놓은 다음에는 어느 놈이 빠져도 빠지게만 되어 있었고 또 그렇지 않더라도 사람이 밥을 먹는 이상 똥은 누게만 생겼고, 변소가 있는 이상은 어느 때 어느 누가 똥을 묻히는 일이 있어도 있게 마련이건만, 아무도 그렇게 된 나를 보고 제 일로 아는 사람은 없었고 “그거 어째 그랬느냐?” 하는 얼굴들뿐이었다.
나는 선생님도 동무들도 흉을 볼까봐 두려운 생각뿐이요,
때 마침 여름이 되어 강냉이가 길 넘게 자란 때라, 그 강냉이는 아무 시비도 흉도 아니 볼 듯해, 그 푸른 터널 속을 혼자 걸어 집으로 어머니에게로 갔다.
어머니는 잠깐 놀래는 듯했으나, 욕도, 때리지도 않고 곧 옷을 벗기고 씻어주었다.
평소에는 새 옷을 줄 때면, 더럽히지 말라 신신당부하던 어머니요, 그래서 사실은 맘도 별로 놓지 못하고 놀군한 어머니건만…….
그렇지, 어머니밖에 없지.
 
글을 읽다 말고 나는 책머리에 있는 초상을 다시 보았다.
보나마나 이 책을 쓴 것은 우리 어머니다. 지브란이 뭐라 했나?
“또 너 망망한 바다여, 잠잘 줄 모르는 엄마야
너 만이 강물과 시내에겐 평화요 자유더라.”
나는 내 옷을 들여다보고 내 손을 맡아보았다.
지금은 아무 얼룩이도 아무 냄새도 없다.
또 다시 보았다. 이 옷이 왼통 똥이요, 이 주름진 살이 왼통 똥이다.
그 순간 억만 화살이 몸에 와 박힌다.
마른 기억아 물러가라, 나는 지브란과 함께 노래하련다.
“우리 옛 어머니의 아들들이여, 그대들 물결 위에 타는 자들이여,
너희는 내 꿈속에 얼마나 자주 찾아 왔었느냐? 인제 너희는 내가 깨는 때에 왔구나. 그 깸은 나의 한층 더 깊은 꿈이니라.
가야지, 어서 가야지, 순풍에 돛을 잔뜩 달고 어서 가야지.”
우리 엄마는 바다요, 나도 바다다.
 
칼릴 지브란을 내가 첨으로 만난 것은 일곱 해 전이다.
전쟁 후 잿더미가 된 서울에 와서 우리가 불사조(不死鳥)라면 이 속에서 살아나련만 하고 있던 때이다.
그 잿더미를 들추적거려 보느라고 구약의 인물들을 고쳐 읽고 있는 때에 미국에 가 있는 신영일 님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보내준 것이 이 『예언자』였다.
듣는바 첨인 이름이요, 보내는 이도 지브란에 대해 아무 소개도 없었다.
한 번 읽고 곧 이것은 한때 유행하고 지나갈 글이 아님을 알았다.
혼자 읽기는 아까운 마음에 타자를 해서 몇 사람이 몇 차례 모여 읽은 일이 있었고 우리말로 옮겼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으나, 내 영어에 감히 엄두가 아니 났다.
그 후『사람의 아들 예수』(Jesus the Son of Man)를 얻어 읽게 되자 지브란을 알고 싶은 생각은 더 간절했으나 이날껏 그리 되지 못하였다.
그렇게 높고, 그렇게 넓고, 그렇게 아름다운 혼인데, 차차 알고 보니 벌써 몇십 년 전에 세계적으로 이름났던 글이요 마흔 가까운 말로 번역이 되어 있었다는데, 어째 우리나라에선 이리도 모를까?
미국 갔다 온 사람들, 문학 한다는 사람들이 미웠다.
아니다, 내가 듣고 봄이 좁아서 그렇겠지.
남을 나무랄 것이 없지, 나 자신 일곱 해를 두고 때때로 읽는다 하면서도 지브란을 참 알지는 못하였다.
인제 내 모래 탑이 무너져 보고, 똥간에 빠져 강낭밭 고랑밖엔 몸을 둘 곳이 없어진 다음에야 그의 말이 새삼스레 생각이 났고, 다시 읽어 그의 입을 통해 오는 어머니 음성을 들었다.
인제 생각해보니, 지브란이라는 말의 뜻이 ‘영혼의 위로자’ 혹은 ‘고치는 자’ 아닌가?
나도 몇 십 년 전부터 그리 생각했고 그도 그러지만 ‘우연’은 없다.
그럼 그는 저 자신이 이때에 넘어진 나를 일으켜주려 뽑힘을 입고 고임을 받은 예언자신지도 모르지.
 
사상으로 하면 지브란은 반드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저는 소위 새 것을 내두르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맨 처음의 호수에서 흘러나는 한 줄기 흐름이다.
처음부터 있는 말씀을 새 옷을 입혀 내놓은 사람이다.
옛 곡조를 새 마음으로 새 소리갈로 노래한 사람이다.
그는 ‘한삶(大生命)의 깊은 마음의 한 가닥’ 이로라 한다.
그는 사상가가 아니요, 무슨 주의자가 아니요, 종교가도 아니었다.
시를 지었으나 그 시는 미장원에서 나온 미인 같은 시가 아니요, 그림을 그렇게 많이 그렸으나 그의 그림을 본 사람은 말하기를 “그저 그림만은 아니다”고 하였다.
그는 그저 산 사람이요 살잔 사람이었다. 너희가 나를 구태여 이름을 짓는다면 “나는 살기주의자(Life-ist)다” 했다.
그는 단순을 좋아하고 위선(偽善)을 미워했다.
그는 시꺼먼 좋은 흙(Black good earth)을 사랑하여 자기가 내는 책도 시꺼먼 책이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을 “우리의 날개 돋쳐 올라간 자아(自我)”라 하고, 우리 혼을 허공의 에델 속에 펼칠 것이라 하면서도, 겸손한 마음에 사람은 어디까지 땅의 아들이라 하여, 현대 문명이 정신의 자람은 없이 몸부터 난다 하여 비행기를 싫어하였다.
나무를 좋아하여 나무가 만일 한 그루만이었더라면 사람들이 엎드려 예배를 했을 것이라 하며,
뉴욕 시의 가로등이 없어지고 달빛, 별빛에 본다면 참 좋을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양과 서양이 한데 녹아든 점이다.
그는 그 난 곳이 저 유명한 레바논의 백향목이 서 있는 브샤리의 산촌인 것같이 그의 사상도 한편에는 기독교적인 것이 있으면서 또 한편은 매우 인도적이다.
그의 예언자 알무스타파는 결코 셈 인종식의 예언자가 아니요, 차라리 인도의 성자 같은 성격이다.
 
지브란 저 자신이 어릴 적에 ‘작은 화산’이로라고 자칭했듯이 맹렬한 점이 있었고, 한번 노하여「반항정신」이란 시를 쓰면 그것이 젊은 아라비아 혼을 온통 불붙여 그때의 터어키 제국으로 하여금 벌벌 떨게 하고 그 자라났던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파문령을 내리게까지 되었지만 후일에 그 혼이 훨씬 자라고 나면 그 모습은 차라리 ‘녹아서 흘러 밤을 향해 노래불러주며, 조용히 흘러가는 시내’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글 이름이 세계적으로 높아지자 본국의 유지들이 돌아 와서 지도자가 되어 달라 했을 때, 그는 자기가 그들의 정치적인 기대를 맞추어주지 못할 것을 알고 욕을 먹으면서도 거절했었다.
그는 평화주의자였다. 제국주의적인 물질문명이 한참 맹렬히 일어나던 20세기 첨에 있어서 그는 그 운명을 벌써 예언하였고, 괴물 같은 소위 진보라는 것이 아직도 동트기 전의 동틈이라고 했다.
그는 그것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름다움을 주장하였다. “아름다움을 창작하고 그 밖의 모든 것은 지옥으로 가라 하라” 하였다.
“내가 저 바닷가에 도시를 하나 세운다면, 나는 바닷가 한 섬에다가 자유의 신상(神像)을 세우지 않고 아름다움의 신상을 세울 것이다. 그 이유는 자유의 발밑에서는 사람들은 항상 싸울 것 밖에 없지만, 아름다움의 얼굴 앞에서는 모든 사람은 서로서로 형제같이 손을 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는 긴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가지면서도 생존경쟁의 사나운 물결에 휩쓸려 자포자기의 지경에 이르렀던 아라비아에 났다.
그는 그렇게 된 민족에게 굳어진 도덕 교훈과 말라빠진 종교 교리가 아무 산 기운을 소생시키는 힘이 될 수 없고 그저 몰아치고 비판하는 책망만으로는 죽은 시체에 채찍을 더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는 영원을 가졌다” 하는 그는 또 한편으로는 다 썩은 듯한 그 살 속에 불에도 타지 않고 물에도 빠지지 않고, 바람에도 마르지도 않는 혼이 살아있는 것을, 구름바다 속에서 반짝이는 별을 보듯이 보아냈다.
그는 꽉 믿었다.
따뜻한 햇볕만 쬐면 씨는 곧 굳은 껍질을 터치고 나올 힘을 그 속에 가진 것을 꽉 믿었다.
필요한 것은 짐승 잡아 피 흘려 하는 제사도 아니요,
화 있을진저 하는 책망도 아니요,
칼날 같은 비판도 아니요,
두더지같이 하는 지하운동도 아니요, 타락한 중에도 믿어주고, 무지한 중에도 알아주고, 넘어진 중에서도 같이 붙들어 일으켜주고, 같이 흙이 묻은 손으로나마 서로 떨어주는 혼의 아름다운 빛뿐이다.
구약의 예언자가 늦은 가을 몰아치는 서풍 같다면, 지브란의 예언자는 이른 봄에 얼음을 녹이는 봄바람이다.
그리고 거기 예수의 어느 면목이 있지 않나? 사람들이 지브란의 예수전을 지브란 복음이라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지브란의『예언자』는 그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그것을 쓴 것은 열다섯의 소년 때였다.
파리에 가서 화가로 이름을 날리던 때도 그는『알무스타파』는 늘 끼고 다녔다.
몇 번을 고쳐 써 스물다섯 살 때에 어머니께 보였을 때, 세상에서 자기를 가장 잘 이해하였다는 그 어머니는 “좋다, 그러나 아직 때가 멀었다” 했다.
그것은 아직 ‘푸른 과일’이어서 그 빛과 향기와 맛이 무르익지 못했었다.
그가 서른다섯 살에 미국에서 그것을 영문으로 발표한 때는, 발표하기까지 다섯 해 동안에 다섯 번을 고쳐 썼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누가 봐도 그의 글이 결코 미문은 아니다. 오히려 평범하고 수수한 말이다.
그는 글을 다듬은 것이 아니라 제 혼을 다듬은 것이다.
그 따뜻한 빛이 아라비아의, 또는 세계 허다한 지친 혼에 소생하는 힘을 주었다.
지브란이 곧 민족의 위인이 되고 그의 글이 아라비아 문학에 새로운 문제를 일으키게 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나는 지브란에게서 한 친구를 발견하였다.
그는 말했다. “벗을 사귀는 데 정신을 깊이 하는 밖에 아무 목적도 주지 말라.”
그는 내가 빠진 밑바닥, 지옥바닥, 멸망할 자만이 있다는 그 바닥에 내려와서 따뜻한 손으로 일으켜 거기서도 오히려 일어설 수 있게 함으로 내 정신을 한층 깊게 하여 주었다. 지옥 밑바닥에서 보는 하늘은 유난히 높았다.
 
내게 스승이 없지 않고 친구도 없지 않았으나 아무도 그 이름들을 가지고 나를 찾아주는 이는 없었다.
그리하여 석가도, 예수도, 공자도, 맹자도, 노자도, 장자도, 톨스토이도, 간디도, 남강도, 내촌도, 다 내가 이름도 부를 수없이 되었다.
인젠 나는 무슨 교도도, 누구의 제자도, 누구의 친구도 될 자격이 없고 다만 한개 배 깨어진 자다.
다만 칼릴 지브란만은 들의 한 송이 작은 풀꽃같이 이름이 없었으므로 아무도 독점하려 하지 않았고 자유로 그 의로운 나그네의 옆에 올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말하기를, “알아줌에는 구속함이 들어 있다”고 한다.
혹은 지브란은 그렇기 때문에 정말 영혼의 위로자요 의사이신 ‘그이’가 그 의인의 구속을 면하고 몰래 나 같은 것에게 오시려고 허술한 옷을 갈아입으신 것인지도 모르지.
어느 의미로는 내가 이 나라의 대표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의인보다는 죄인이 많지 않을까?
제 잘못으로거나 남의 잘못으로거나 세계의 큰길 위에 앉은 늙은 갈보요, 수난의 여왕이지.
또 어느 의미로는 우리나라는 세계의 대표 아닐까?
이리하여 나는 이 글을 우리말로 옮겼다. 군인에게도, 학생에게도, 농사꾼에게도, 엉터리 장사꾼에게도, 깡패에게도, 사창굴의 짓밟힌 꽃에게도, 철창 밑에 매어 논 승냥이에게도 다 한  권씩 주고 싶어서…… 그들도 다 내 마음일 것만 같아서…….
인제 보니 미운 사람, 몹쓸 사람은 하나도 없더라. 
 
옮기자니 부족한 내 영어에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 일찍이 이것을『여원』(女苑)지에 발표했던 윤정은 님께로 갔더니, 다 번역해 놓은 원고를 아낌없이 빌려주고 또 같이 읽으며 고쳐주어서 많이 도움이 되었고, 칼릴 지브란의 짤막한 전기를 부탁하여 실리게 되었으므로 그 고맙단 말을 여기 붙여둔다.
1960년 겨울 함석헌
 
 
 
 
새 판에 붙이는 말

내가 예언자를 처음으로 읽은 것은 이십여년 전 일인데 오늘까지도 이 책을 놓지 않고 다시 맛보고 다시 맛봅니다. 이것은 씹을수록 맛나는 영을 살찌워 주는 글입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옮길 때 나는 될 수 있으면 번역 냄새가 아니나도록 하고자 노력도 했습니다만, 그보다도 어떻게 하면 그 글 뒤에 숨은 지브란의 정신과 그 혼의 입김을 붙잡아 전할 수 있을까 해서 내 딴으로는 애를 쓰노라 했습니다. 어떤 때는 다 아는 단어인데도 붓대를 놓고 몇 시간 며칠도 있어야 했고, 심하면 원고를 인쇄에 넘기는 날까지 의문표를 질러 놓고 지브란과 계속 문답을 한 것도 있습니다.
 
그 덕택에 좋은 친구를 많이 얻었고, 요새는 지브란 붐까지 일어난다니 어쨌거나 고마운 일입니다.
‘씨알의 소리’에 특집으로 낼 때 부수도 넉넉히 하노라 했는데 다 나가고 없습니다. 이번에 내는 것은 거기 조금 수정을 했고 또 원판에 있는 그림이 좋기 때문에 분발해서 그것을 다 넣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지브란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좋겠기에 거기 도움이 될까 해서 생전에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미카엘 나이미의 ‘칼릴 지브란’에서와 그의 일생의 협조자였던 바바라 영의 「레바논에서 온 이사람」에서 한 절씩을 옮겨 넣어습니다. 나이미는 유명한 아랍 문학가요, 영은 당시 미국의 젊은 여류 시인으로서 지브란이 처음으로 예언자의 낭독회를 열었을 때 그 매력에 사로잡혀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 원고를 받아쓰며 정리하며 충실한 협력자 노릇을 했던 친구입니다.
 
지브란은 자기가 만일 이상향을 건설한다면 그 입구에는 정의 신상을 세우지 않고 아름다움의 신상을 세우겠다 했습니다. 그 이유는 정의의 신 앞에서는 항상 싸움이 끊이지 않지만 아름다움의 신 앞에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오늘의 아랍, 오늘의 레바논을 지브란이 와 본다면 그 마음이 어떠할까요? 아랍은 그만두고, 나는 이 살벌해지고 썩어지고 매정해진 이 우리나라에 지브란을 읽음으로 인해서 다 죽어 없어져 가는 이성과 인정과 혼에 얼마쯤이라도 소생하는 기운이 돌아왔으면 합니다.
 
1976. 2. 22.  함석헌

[낡은책]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사벨라 버드비숍, 이인화 역, 살림, 1994, 603쪽)

참세상 기사게시판 :: 낡은책 :: “멍한 상태로 세상에 걸어나온 한국” - [낡은책]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사벨라 버드비숍, 이인화 역, 살림, 1994, 603쪽)

“멍한 상태로 세상에 걸어나온 한국”
[낡은책]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사벨라 버드비숍, 이인화 역, 살림, 1994, 603쪽)
이정호(민주노총 미비실장) 2010.10.10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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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양반은 민중의 피를 빠는 흡혈귀

1895년 청일전쟁으로 폐허가 된 평양을 본적이 있는가. 1895년 1월 패배한 동학혁명의 주인공 김개남의 목을 끌고 다니며 시체의 입에 흙을 집어넣는 서울 시민들의 꼴을 본적이 있는가. 지독한 근시에 병약했던 순종의 세자 때 얼굴을 본적이 있는가.

이 책은 115년이나 된 낡은 책이다. 영국 여성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898년 이 방대한 책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을 두 권으로 냈다. 정확히 90년 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낸 선물도 이 책의 1898년도 판이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831년 영국 요크샤 주 보르브릿지 홀에서 태어나 이 책을 쓸 때 이미 60대 중반의 할머니였다. 왕립 지리학회에 들어간 최초의 여성이던 비숍은 1894년 2월말 한국에 도착해 이후 4년 동안 4번이나 한국을 드나들면서 고종과 명성왕후, 왕세자 등을 4번이나 알현하고 1897년 1월 서울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갔다.

뗏목으로 한강을 거슬러 올라 고담삼봉이 화려한 단양까지 갔고, 다시 여주에서 동북으로 말을 타고 금강산을 둘러봤다. 다시 일산을 넘어 평양을 넘어 북쪽으로 여행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선 북으로 연해주까지 조선인들을 만나러 다녔고, 다시 두만강 국경을 넘어 원산까지 내려왔다. 중국과 만주의 조선인도 봤다.

잘 생기고 똑똑한 한국인

이 책은 지리학 지식을 활용한 전문여행기다. 비숍 스스로의 표현대로 “미약한 독립 왕국(조선)이 멍한 상태로 세상을 향해 걸어 나오는” 구한말의 우리의 모습이 생생하다. “공격적인데다가 서로 담합한 서구 열강들은 이 유서 깊은 왕국의 전통에 조종을 울리며 시끄럽게 특권을 요구하고 있다”(서론)는 비숍의 표현은 너무도 적절하다.

비숍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비숍은 나름 객관적으로 한국을 보려고 했지만 결국엔 서구 제국주의의 눈으로 한국을 볼 수밖에 없었다. 비숍은 동학혁명군을 반란군이 아니라 ‘무장한 개혁자’로 봤다. 조선 백성은 일본, 중국보다 키도 크고 잘 생기기까지 한데다가 활기차고 영민하다고 봤다. 군사정권 시절 내내 자원빈국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게도 비숍은 금광이 많고 석탄의 품질은 최상급이라고 소개했다. 비숍의 눈엔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문자를 갖고 있고 문자해독률도 상당히 높았다. 도덕적 우월성과 치안 등 사회제도도 높이 평가했다. 반면 금강산에서 본 한국의 불교를 우상숭배로 여기는가 하면, 원산에서 본 천일염을 아주 지저분하고 순도가 떨어진다고 기록한 부분에선 우습기까지 하다. 한국의 감옥제도를 일본식으로 민주개혁했다고 기록한 부분도 코미디 수준이다.

이 책을 번역한 이인화는 80-90년대 운동권 뒷이야기를 그린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와 정조와 정약용을 다룬 <영원한 제국>, ‘박정희 평전’으로 시작해 미처 끝내지 못한 <인간의 길>을 쓴 소설가다. 지금은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다. 대학원 때 제 스승을 주제로 학위논문을 써 유명세를 치렀다. <인간의 길> 서문엔 “내가 죽어 저승사자가 ‘당신은 뭐하던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소설 인간의 길을 쓴 소설가’라고 답하겠노라”라고 박정희 숭배론 수준의 기염을 토했다.

소설가 이인화가 100년만에 첫 번역

이인화는 이 책을 1994년에 처음으로 번역했다. 이인화는 이 명저가 아직도 번역되지 않은 이유를 “영어를 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을 몰라서 번역하지 못했다”고 토로하면서 7장에 나오는 ‘벽절’이란 절이 신륵사의 다른 이름이란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일전에 내가 죽산 조봉암을 [낡은책]에 소개하면서 자유시참변을 조봉암의 표현대로 조선의 공산주의 세력간의 파벌싸움으로 기록하자 독자 한명이 덧글로 “내 다른 건 몰라도 자유시참변을 공산당 파벌간의 책임으로 말하는 건 너무 심하지 않소! 그건 소련공산당이 이르쿠츠파를 앞세워 독립군을 살상한 사건이오. 님 말씀대로라면 명성황후도 일본이 아니라 대원군이 죽인게 맞소!!!”라고 항변했다. 자유시참변은 70년대부터 지금까지 중고등학교 반공교과서인 도덕과 국민윤리 시간에 같은 이름으로 등장한다.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다. 덧글의 독자에겐 죄송하지만 비숍의 눈엔 명성황후를 죽인 게 일본이기도 하고 대원군이기도 하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3시 명성왕후를 시해하러 들어온 일본인들은 용산의 대원군 집에서 대원군과 함께 대궐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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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흥미로운 나라 한국

나는 1894년 겨울(2월)과 1897년 봄 사이 4번 한국을 답사했다. 처음 한국은 가장 재미없는 나라였다. 그러나 곧 청일전쟁 동안 불안 속에 알 수 없는 한국의 운명을 깨달으면서 강렬한 흥미를 가졌다. 내가 믿을 만한 한국 관련 자료는 미션스쿨을 운영하는 외국인 교사들의 것이었다.

한국의 영국 총영사 힐리어, 한국정부의 재정고문 브라운, 러시아 공사 베베르, 존스 목사와 게일 목사에게 관대한 도움을 받았다. 제물포 영국 영사 윌킨슨이 쓴 <한국 정부>가 있다. 이 책에 나온 동판화들은 셋만 빼고는 내가 직접 찍은 사진을 토대로 직접 그렸다. 이 책이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 1897년 11월 이사벨라 버드 비숍

멍한 상태로 세상으로 걸어나온 한국

1894년 겨울 내가 한국으로 떠나려 할 때 유럽 사람들은 한국이 그리스 연안 어디쯤 있다고 했다. 서구에 한국을 처음 소개한 문헌은 리쇼펜 남작의 중국에 관한 책의 575면에서다.(9세기경 아라비아 지리학자 코르다베의 책 <제국지>)

한국인들은 중국인, 일본인과 매우 다르다. 한국인들의 일상적 표현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활기차다. 체격도 좋은 편이다. 성인 남자의 평균 신장은 163.4cm다. 이는 A. B. 스트리플링이 1897년 1월 서울지역에서 1060명의 성인 남자를 대상으로 재어본 값이다. 한국인들은 도덕적으로 지극히 건전하다. 인구는 1천2백만~1천3백만명이다. 한국인들은 대단히 명민하고 똑똑한 민족이다. 여자들은 격리돼 열등한 지위다. 한국은 남북으로 965.6km 동서로 217.2km다. 면적은 영국보다 조금 작다.

한강은 273.5km 이상이 상업상의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된다. 모든 항구가 겨울에 얼지 않는다. 좋은 항구는 부산과 원산이다. 실용적인 식물은 거의 없다. 인삼은 예외다. 한국 세관에 따르면 1896년 총 1,360,279달러 어치의 사금을 수출했다. 밀수출 역시 비슷했을 것이다. 석탄의 품질은 최상급이다.

한국 왕의 권력은 여전히 절대적이다. 한국은 13개 지방구역과 360개의 단위 행정구역이 있다. 1897년 1월 현재 부산 원산 제물포의 항구엔 11,318명의 외국인 거주자와 266개의 외국 사업체가 있다. 이 가운데 일본인이 10,711명(230개 회사)이다. 영국인은 65명이다. 중국인은 2500여명이다. 도로의 불편함은 악명 높다. 한국 민족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자신들의 알파벳, ‘언문’을 갖고 있다. 한국인의 문자해독률은 상당히 높다. 한국에는 국민 종교가 존해하지 않는다. 이 미약한 독립 왕국은 멍한 상태로 세상을 향해 걸어 나오고 있다. 공격적인데다가 서로 담합한 서구 열강들은 이 유서 깊은 왕국의 전통에 조종을 울리며 시끄럽게 특권을 요구하고 있다.

왜색 도시 부산

나가사키항에서 부산항까지는 증기선으로 15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동강난 그림자 섬이라는 뜻의 절영도(사슴섬)는 부산항을 보위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영도에 석탄 공급지와 검역병원을 세웠다. 1883년 부산항 개방 때 거주 외국인 수는 1500명에서 1897년엔 5564명으로 늘었다.

낙동강은 80.5km를 증기선으로 항해할 수 있고 정크선으론 사문까지 160km를 더 간다. 가벼운 보트로는 연안에서 274km 상류의 상진까지 올라갈 수 있다. 부산의 거주지는 일본풍이다. 한국인은 중국인 일본인과 닮지 않았고 두 민족보다 훨씬 잘 생겼다. 나는 부산 구 시가지를 조사하려고 영국 여인 우나(Una)와 동행했다. 우나는 한국어를 거의 토착인처럼 구사했다.

제물포에서 마포 가는 길

제물포의 현직 영국 부영사 윌킨슨이 나를 마중나와 지극한 호의로 환대해 주었다. 무역은 중국인들이 일본인들을 훨씬 앞지르고 있었다. 제물포 주민들은 6천7백명이다. 나는 제물포에서 마포까지 6명의 가마꾼이 드는 교자에 앉아 7시간을 갔다.

1883년의 통상조약들 이후 외국인들은 도시의 곳곳에 자기들의 거주지를 마련하고 한국의 수도에서 한국적인 것들을 서서히 훼손시켜가고 있었다. 서울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변화는 건설중인 명동성당이다. 인구 25만명으로 추산되는 서울은 세계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수도 가운데 하나다. 이만큼 좋은 입지조건을 가진 수도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유럽에는 서울처럼 치안이 잘 유지돼 여자들이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지 않고도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는 도시가 전혀 없다. 그러나 서울의 불결함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남산 기슭엔 5천명에 육박하는 일본 조계가 있는데 대조적으로 매우 청결하다. 한국의 남편들이 계속 흰 옷을 고집하는 한 빨래는 한국 여인들의 신산한 운명과도 같다. 한국의 여인들은 빨래의 노예다.

서울과 한강의 나룻배 여행

1884년 개항되자 ‘미국 감리교회’와 ‘북 장로교회’가 서울에 왔다. 한국의 개신교 기독교인 수는 777명이다. 로마 카톨릭 교도는 28,802명이다. 젊은 선교사인 밀러씨가 나의 나룻배 여행을 도와 주었다. ‘왕’이란 이름의 중국인 하인을 통역 보조로 제공해 주었다. 1894년 4월 14일 밀러씨의 하인인 이체온 씨를 만났다. 우리의 배는 하루 16km 이상은 결코 가지 않았다.

남한강 상류로 가는 배 위에서 5주 동안을 보냈다. 사방엔 많은 나무들이 있었다. 한강은 강원도 금강산에서 발원한다. 나는 한강에서 하루 평균 75개의 정크가 물길을 오르내리는 걸 봤다. 한강과 영원 사이 강변에만 176개의 마을이 있었다.

여주에서 본 한국의 기생충들

나는 배 안에서 버로즈나 웰컴즈 등 타블로이드판 신문을 읽으며 마시는 오후 차시간은 결코 빠뜨리지 않았다. 여주에 도착한 건 4월19일이었다. 여주는 한국 군중이란 비록 적대적이지 않더라도 다루기 어렵고 몹시 불쾌하다는 걸 느끼게 한 첫번째 마을이었다.

주인집 부인은 매우 예쁘고 더할 나위 없이 고운 피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내 옷을 이리저리 조사하거나 날 이리저리 끌고 다니거나 모자를 벗겨 써 보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잡아 펴 보기도 하며 내 머리핀에 정신이 팔리기도 하고, 비명 같은 웃음소리를 지르며 내 장갑을 끌어내리기도 했다. 14개나 이어지는 방들을 보여 주었다. 번쩍이는 야한 금박 속의 큰 거울이나 프랑스식 시계가 있었다. 돈으로 처바른 저속함을 보여줬다.

집주인은 18살의 젊은이다. 프랑스식 시게, 독일식 거울, 미국산 담배, 벨벳 덮개를 깐 의자 등 값비싸고 번지르한 외제품에 대한 열광이 돈 있는 젊은 멋쟁이들에게 번져가고 있다. 이런 것은 한국인의 소박한 근면성을 저속하게 타락시키고 있다. 난 내 배의 검소한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여주에 단양까지

한국 사람들은 과음하는 관습이 유난스럽다. 주정뱅이를 보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 한국의 발효된 술은 건강에 좋은 것은 아니었다. 강한 냄새와 토할 것 같은 맛을 내는 흰색 술까지 다양하다. 뀰껍질을 말리는 것은 한국 주부들의 큰 일 중의 하나다. 모든 초가집 지붕에는 말린 뀰껍질들이 고드름처럼 매달려 있다. (곶감 말리는 걸 보고, 잘못 이해한 듯하다.)

서울에서 떠난지 13일만에 단양에 도착했다. 원주라는 중요한 도시까지 약 60리 정도 되는 운항로가 있다. 남한강은 단양에서 북쪽으로 길고 거센 급류를 형성한다. 우리를 보러 먼 길을 걸어와 한번도 외국인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며 그 댓가로 달걀을 내 놓았다. 한강의 미는 가장 아름다운 강 마을인 도담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한국의 악담 중에는 기득권 계급인 양반이나 귀족들에 대한 것이 아주 많다.

가평에서 다시 춘천으로

마재로 가는 분기점에 왔을 때 뱃사람들은 되돌아 가고 싶어했다. 한참 동안의 언쟁 끝에 결국 계약을 완료하기로 합의하고 서늘하고 화창한 오후에 북한강으로 들어섰다.

이틀을 혹독하게 작업한 후 우리는 아름답게 자리잡은 ‘가평’ 읍에 도착했다. 춘천은 요새였다. 약 3백명의 주둔군이 있었다. 인구는 3천명에 달했다. 춘천에 와서는 원산으로 가는 역참에서 멈춰 육상 여행을 하려고 말을 높은 값을 치르고 세내었으나 말과 마부가 모두 괜찮아 보였다. 정식으로 서명하고 우리는 배여행을 계속했다. 인구 4백명의 조그만 가평에 다시 도착했다. 낭촌에서부터 한강 아래로 내려가 뱃기미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거룻배에서 마지막 날인 일요일을 보내려고 멈추었다. 거룻배에서 5주 반 동안 보낸 뒤였다.

영국에 비해 한국의 결혼은 지극히 건전하고 도덕적이다. 신랑이 신부 아버지에게 돈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부도 아버지에게 지참금을 받지 않는다.

말을 타고 금강산으로

뱃기미에서 우리는 배를 버리고 북한강 상류를 따라 금강산으로 향했다. 한국의 조랑말은 체격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강인해 73~91km까지의 짐을 운반하는데 형편없는 사료를 먹고도 날마다 하루에 48km씩을 간다. 주인이 대충 먼지를 치우고 나면 왕씨가 기름을 먹인 두 장의 두꺼운 종이와 함께 아마인유를 입힌 커다란 양털 요를 바닥에 깔아주는데 이것은 여행 동안 나의 야전 침대로, 의자로, 보자기로, 아주 유용했다.

한국 여관의 숙박 요금은 터무니없이 싸다. 등잔과 따뜻한 구들이 있는 방에는 요금이 없다. 그러나 나는 하루 밤에 1냥씩 숙박요금을 치렀다. 한국 여관에 느낀 나쁜 기억은 버릇없고 어떻게 감당해 볼 도리가 없는 사람들의 호기심, 특히 여자들의 호기심이었다. 나의 마부들은 다시 이성을 잃었다. 싸움이 벌어졌다. 마부들은 그들의 굵은 몽둥이로 횃불 든 농부들을 때렸다. 나는 나의 마부들에게 욕을 퍼부어대며 말채찍으로 마을 사람들은 두들겨팼다.

단발령을 넘어 장안사로, 유점사로

금강산의 서쪽 경계선인 해발 402미터의 단발령을 넘었다. 그 뒤로 해발 1638미터가 넘는 금강산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가 솟아 있었다. 장안사의 첫 인상은 숲속에 자리한 규모의 엄청남이었다. 표훈사의 승려들은 친절했다. 엄격한 채식주의였다. 나는 주인들의 편견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차나 밥, 꿀물, 잣으로 식사를 때웠다.

불교는 중국 불교가 도교의 반신(半神)적 영웅들 밑에서 질식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마숭배로 얼룩져 있었다. 문도와 같은 일본의 거대한 종교개혁을 특징지우는 현세의 정의실현에 대한 높은 포부와 열망 같은 것은 알려진 바가 없었다. 한국의 승려들은 무척 무식하고 미신적이었다.

정중하고 후한 대접을 받았다. 장안사에서 유점사로 가는 17.7km 길에는 세 개의 큰 사찰인 표훈사와 마하연, 유점사가 나온다. 나의 하인은 두 개의 긴 막대기 사이에 가벼운 자리를 깔고 동아줄을 매듭지어 발 둘 데를 만들고 등나무 줄기로 등받이를 해서 남여를 만들었다. 삭발하지 않은 한 아이에게 우리 통역인 이체온씨가 닭고기 한 조각을 주었다. 그러나 먹지 않았다.

금강산을 넘어 원산 앞바다까지

장안사를 떠나 원산으로 가기 위해 마패령을 지났다. 나는 (강원도 통천군 벽양면) 중대리와 다른 여러 곳에서 한국인들의 대단한 식탐을 목격했다. 한국인은 매일 1.8kg의 밥을 먹는 게 그다지 위에 부담이 되지 않는다. 통천이라는 마을은 동해 바다에서 3.2km 정도 떨어졌다. 한국 어부들은 기업적 조직화가 긴급하게 요구된다. 오이센 씨는 1891년 원산의 과세 보고서에서 ‘해안을 따라 쳐 놓은 조잡하고 대충 만든 그물에서 고기들이 빠져나가 버리는 한국의 어업을 개탄했다. 계획적으로 만든 염전도 있는데 소금 만드는 공정은 완전히 원시적이다. 이렇게 만든 소금은 울퉁불퉁하고 지저분해서 순도가 매우 떨어진다.

여관 주인은 특히 외국인을 재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우리 친절한 마부를 성나세 했다. 그는 쥐어짜는 듯한 큰 목소리로 ‘우리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모두 지불했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오백나한상이 있는 대찰 석왕사는 이성계가 수련한 곳이다.

동학군 - 무장한 개혁자들

원산을 따라 동해안 오지를 오래 여행하는 동안 나는 정치적 사건들을 전혀 몰랐다. 단지 반란을 일으킨 동학군과 정부군 사이의 충돌의 소문을 약간 들었을 뿐이다. 동학군의 봉기는 과격한 충돌이나 쓸데없는 피흘림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6월17일 증기선으로 원산을 떠나 6월19일 부산에 도착했을 때 나는 항구에 있는 일본 포함을 발견하고도 놀라지 않았다. 220명의 일본군이 그 날 아침 히고마루호에서 내려 언덕에 있는 절에 숙영중이란 사실과 동학군이 부산과 서울 사이의 전신을 끊어버렸다는 걸 알았다.

부산에서 장사하는 거류민들을 많이 가진 일본은 보호를 위해 상당한 조치를 취하는 게 당연하지 않는가. 일본이 취한 조치는 유럽인들 사이에 지극히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6월21일 아침 일찍 배로 제물포에 도착하자 매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일본 해군의 큰 함대 하나, 작은 군함 여섯 척, 미국 기함 한 척, 프랑스 배 두 척, 러시아 배 한 척, 중국배 두 척이 항구 밖에 있었다.

제물포 항구가 외국 군대의 캠프로

따분하기 그지없던 제물포 항구가 완전히 바뀌었다. 숱한 행진 대열 속에서 일본군의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제물포의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서울을 향해 탄환과 포탄을 수송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캠프는 질서정연했고 조용했다. 시내엔 일본군 초병들이 통행인을 검문했다.

얼떨떨한 한국 군중들은 흐느적거리며 그들의 제물포 항구가 외국 군대의 캠프로 변하는 걸 멍하니 바라보면서 길거리에서 어슬렁거리거나 언덕에 앉아 있었다. 일본은 그들이 성취하려는 목표를 위해 한국에 왔다. 그 목표는 동학군의 승리로 인해 위험에 봉착했다고 선전하는 한국 내의 일본인의 효과적 보호라는 미명 아래 잘 은폐돼 있었다. 이날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은 오시마 오시마사 소장의 혼성여단으로 보병 5800명, 하사관 584명, 위관 187명, 좌관 16명, 기병 300명이었다.

동학군은 너무나 확고하고 이성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어 나는 그들의 지도자들을 ‘반란자’라기 보다 차라리 ‘무장한 개혁자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동학군이 한반도 군사개입의 빌미를 제공하자마자 일본은 가다렸다는 듯이 여심을 드러냈다.

일본군은 수도 서울의 강나루 마포를 점유하고 막강한 군사력으로 서울의 남산에 눌러앉았다. 내가 제물포에 막 도착한 바로 그 날 오후 영국 부영사가 나를 방문해 그 날 밤 안으로 한국을 꼭 떠나주기를 당부했다. 그 날 밤 나는 두 명의 영국인 환자와 함께 항구에 매어 있던 일본의 기선 히고마루호를 타고 제물포를 떠났다.

청일전쟁을 피해 만주로 가다

일본 체푸에 도착한 나는 영국 공사관까지 경사가 급한 언덕을 걸어서 올라가야만 했다. 나는 히고마루호를 타고 다시 만주의 잉쿠로 갔다. 라오허(요하) 하구 잉쿠에 도착했다. 만주 여인들은 보통 한족보다 더 키가 크고 더 건장하다. 만주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중국 본토의 여성들보다 훨씬 높다. 열병에 걸려 홍수가 난 랴오허를 떠돌다가 나는 뉴창을 7월3일에 떠났다. 8일 뒤 펭티엔에 도착했다.

펭티엔은 만주의 오랜 수도로 1644년 중국의 황위에 올랐던 황가의 선조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특별한 혜택을 누린다. 기독교에 주어지는 우호적인 분위기는 펭티엔의 특징이다. 한국 국왕은 많은 망설임 끝에 중국의 도움을 요청했다. 중국의 장군 위여귀는 3천명을 이끌고 아산만에 상륙했고 일본의 장군 오시마 요시마사는 제물포와 서울을 강점했다.

1894년 8월 1일 청일전쟁이 선포된 뒤 정세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일본이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군은 만주를 통해 육로로 행군해야 했다. 중국군은 하루에 1천명 꼴로 펭티엔을 지나갔다. 이들은 남쪽으로 행진하는 걸 자랑스러워하며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그러나 신식 무기로 무장한 병사는 거의 없었다. 얼마 뒤 평양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그들 중국군은 모두 우산이나 부채를 지니고 있었다. 막강한 화력의 무라다 연발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이들 수 천의 병사를 맞닥뜨리게 한 건 자살행위였다.

번창하는 동방의 보물 블라디보스토크의 한국인

나는 베이징에서 엔타이로 돌아가 사태를 지켜봤다. 나는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증기선을 끈기있게 기다렸다. 나가사키는 따뜻한 가을 날씨였다. 그러나 내가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니 항구로 둘러싸인 언덕은 겨울의 첫눈으로 덮여 있었다. 웃고 떠드는 한국 소년 4~5명이 나를 잡아당겼다. 부두에는 수백 명의 한국인이 있었다. 나는 마차에 타자 ‘골든 흘 호텔’이라고 말했다.

이 도시의 발전은 괄목했다. 예전엔 삼림지역이었다. 1863년 많은 나무를 베었다. 1872년 60명의 해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1878년 블라디보스톡 인구는 1400명이었다. 1897년엔 2만5천명으로 늘었다. 짐마차꾼이나 짐꾼을 하면서 살아가는 3천명의 한국인과 2천명의 중국인이 있다.

시베리아의 한국인 정착민들

러시아령 만주엔 약 2만명의 한국인이 산다. 시베리아 통신청의 총책임자 아이드만 청장은 나와 동행하려고 휴가까지 냈다. 하이드만은 발칸 출신의 독일인으로 러시아 고위 관료가 됐다.

해가 뜨자마자 증기선을 타고 블리디보스톡을 떠났다. 7시간 뒤 포시만으로 97km를 달렸다. 포시만은 크고 멋진 막사와 창고가 있는 하나의 큰 군사 역사였다. 한국인 정착민도 있었다. 우리는 우편마차에 자리를 잡았다. 마차는 전속력으로 달려서 2시간만에 노보키예프에 도착했다. 우리는 ‘쿤츠 앤 알레르스’ 상사의 지점장에게 친절한 대접을 받았다.

노보키예프는 거대한 군사도시다. 한국인들은 수송을 맡았다. ‘쿤츠 앤 발에르스’ 상사의 직원 중에서 유럽 복장을 한 젊은 한국인 하나가 그의 신사다움과 바지런함 때문에 알아보기 쉬웠다. 한국인들은 능동적으로 중국령 만주로 가서 여윈 동물을 싼 값에 사서 살이 찌도록 키워 비싼 값에 되판다.

하바로프스크 근처의 한국인들은 농산물 유통업에서 중국인들과 경쟁해 완승을 거두었다. 현재 하바로프스크의 야채 공급은 거의 한국인들의 손에 있다. 한국인 촌락은 주위에 산재했다. 마을 농장은 깨끗하고 잘 청소돼 있었다. 러시아와 한국의 아이들은 서로서로 섞여 앉아서 수업을 들었다. 얀칠레는 매우 부유한 마을이다. 깨끗한 경찰서에서 한국인 중사는 내 요구사항을 받아적고는 통역자의 역할을 하는 똑똑한 한국인 경찰관을 찾으러 밖에 나갔다. 이 마을에 거주하는 4백여 한국인 경찰관들은 그리스 정교를 믿고 있었다.

두만강 국경 경흥까지

한국의 국경으로 여행과 한국을 향한 경흥까지 여행. 경흥은 1888년의 무역 협정으로 키차의 모델에 따라 하나의 시장을 개척하려는 희망에서 러시아 국민의 거주지로 개방된 도시다. 한국인 마부와 한국인 길잡이가 있었다. 이 모든 멋진 지역은 한국인들이 개척한 것이다.

농장 경영자로, 노장의 소유자로 한국인들은 자신의 토지를 최고의 것을 만든다. 나는 120여 세대가 사는 사레치예 마을에서 잠시 머물렀는데 그 저택들은 아주 멋졌다. 그리고 그 곳의 한국인들은 다양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러시아와 한국의 국경은 17.7km에 불과하다. 우리는 사요니의 부유한 한국인 마을을 지나갔다.

시베리아 정착민의 성공

1863년 이전 13가구가 함경도에서 국경을 건너 포시만 북쪽에서 조금 떨어진 티젠호 주변에 정착했다. 1866년에 와선 1백여 가구가 정착했다. 한국인 이주민 전체는 1만6천~1만8천명이었다. 1884년 이전 시베리아에 정착한 한국인들은 이제 러시아 국민으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지금까지 10년 동안 그들이 구매한 땅에서 정착해 왔음을 증명하는 사람도 역시 똑같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크라스노예와 노보키예프 사이의 촌민들은 러시아 이주 한국인들의 표본이다. 이 곳의 한국 남자들에게는 고국의 남자들이 갖고 있는 그 특유의 풀죽은 모습은 없다. 이 곳에서 한국인들은 번창하는 부농이 됐고 근면하고 훌륭한 행실을 하고 우수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로 변했다. 나는 서 아시아 정복지에서 거둔 러시아 정부의 성공을 주목했는데 유랑적이고 공격적인 투르크 부족을 질시정연하고 평화롭고 정착된 농업민으로 정착시켰다.

며칠 뒤 나는 중국령 만주지역에 있는 훈춘에 갔다. 훈춘은 군사요충지다. 산악지역 한 가운데인 훈춘은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인들이 개간해 기름지고 관개가 잘 된 계곡으로 넘쳐났다. 1500명의 코사크인으로 구성된 러시아 군대는 훈춘에서 흑룡강까지 30개 초소에 나뉘어 배치됐다. 한국인 마을을 약탈하려고 넘어오는 중국 마적들을 체포해 중국 관리에게 넘겨주지만 즉시 방면돼 다시 약탈을 반복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

내가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온 후 ‘쿤츠 앤 발에르스’ 상사가 젊은 덴마크인 통역자를 소개해 주었다. 나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동부 구간을 조사하며 한 주일을 보냈다. 철도는 우수리 강 위에 놓여진 우수리 대교 옆의 작은 마을까지 이르렀다. 평균 속도는 고작 시속 19.3km 정도였다. 현재의 짜르는 이 철도에 열광적 관심을 보인다. 현 짜르가 황태자 시절 1891년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할 때 이 사업을 시작했다. 우수리 구간 철도는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112km 구간의 철도다. 현재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일당 80센트를 받는 중국인 인부들이 건설중이다.

나는 니콜스코예에서 즐거운 이틀을 보냈다. 나는 이 정착촌 주변 32km를 마차로 드라이브하면서 어디에서나 번창한 농장과 초원 위에서 농사 짓는 마을, 러시아인, 한국인을 보았다. 네콜스코예는 거대한 군사도시이기도 했다. 9천명에 달하는 보병과 포병이 상주하고 있다.

청일전쟁 직후 고종 면담

겨울의 마지막에 나는 일본 증기여객선으로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원산에 도착했다. 원산은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청일전쟁 중 일본 노무자들에게 과다한 임금이 나간 탓에 원산의 한국 사람들은 부유해져 있었다. 1만2천명 정도의 일본군이 평양으로 향해 가는 도중에 이곳 원산을 거쳐 갔다.

나는 원산에서 배로 부산을 거쳐 1895년 1월 5일 제물포에 닿았다. 일본 점령기의 중국 거리는 궤멸적 모습이었다. 일본 거리는 어디나 최상의 활기가 넘쳤다. 말에 올라타 서울로 가는 동안 내내 눈이 내렸다. 무척 치안이 안정된 나라여서 보호를 받을 필요도 없이 나는 마부도 없이 오리골까지 혼자 갔다. 서울서 나는 영국 총영사인 힐리어의 집에서 5주간 머물렀다. 나는 조랑말 한 필과 병사 한 명을 얻어 시내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중국으로부터의 독립 = 일본에 종속

일본은 해가 치솟는 기세로 일어섰다. 일본은 서울에 대단위 군대를 주둔시키고 내각의 지도급 인사 몇 명도 지명했으며 일본 장교가 한국군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명목상의 왕권만 남은 왕은 이런 상황을 참고 수긍했으나 명민하고 자존심이 강한 왕비는 일본에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이노우에 백작이 일본 공사로 활약하면서 그의 강경하고 능란한 술책으로 인해 겉으로는 모든 것이 평탄했다.

1895년 1월 8일 일본은 왕에게 공식적으로 중국의 종주권을 폐기하는 동시에 불쾌하기 짝이 없는 조공을 일소할 것을 요구했다. 한국 국왕이 엄숙하게 종묘 사직 앞에 나아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개혁을 단행할 것을 맹세하라고 강요했다. 왕은 계속 미루고 있었다.

늙고 진중한 사람들은 이틀 전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탄식했다. 많은 군중들이 언덕 위에서 덕수궁의 마당에서 벌어지는 이충격적인 광경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군중들은 한 점 미소도, 한 마디 말도 없었다. 하늘은 어둡고 흐렸고 차가운 겨울 바람이 불었다. 마치 한국의 미래에 불길한 징조를 알리는 듯 불었다.

부마 박영효는 국왕보다 더 큰 권력

단정하고 깔끔한 푸른 울스터 외투를 차려 입은 일본 경찰들의 행렬 속에 있었다. 일본 경찰은 1884년 정변의 주역이었던 내부 대신 박영효의 특별 경호대였다. 일본 경찰대를 거느린 박영효의 위풍당당함은 국왕의 위엄을 능가했다. 박영효는 죽어 마땅한 반역자였다. 그러나 일본의 협박을 받은 왕은 그를 용서해 격하된 그의 조상들의 지위를 복권시키고 해외 추방된 그를 다시 불러 고위 공직에 임명해야만 했다.

도로에는 한국의 기마병이 어설프게 서 있었다. 양쪽에 유리창을 낸 평범한 목재 가마를 타고 단 네 명의 수행원의 보좌를 받으며 낙담한 통치자가 나타났다. 외제 안장과 외국인 경호원들로 돋보이는 내부 대신 박영효가 탄 검은 당나귀가 있었다. 이 모든 행보가 일본이 마련해 놓은 일이었다.

한국의 왕비 명성왕후

왕비가 나를 사적으로 초대했다. 미국인 의료 선교사이자 왕비의 주치의인 언더우드 여사를 따라서 갔다. 일본 경관 한 명이 큰 문 앞에 서 있었다. 여섯 명의 한국인 보초병들이 빈둥거리고 있었다. 중년의 상궁이 우리를 맞았다. 저녁 식사는 놀랍게도 서양식으로 차려졌다. 왕세자와 왕비는 세 개의 진홍빛 벨벳 의자 앞에 서 있었다.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했고 퍽 우아한 자태에 늘씬했다. 윤 나는 칠흑 같은 흑발에 피부는 너무도 투명해 꼭 진주빛 가루를 뿌린 듯했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었다.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면 그녀의 얼굴을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왕은 작은 키에 병약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왕은 천성이 온화했다. 대화 동안 왕비는 왕을 몹시 채근했다. 왕세자는 통통했으나 병약해 보였다. 불행히 심각한 근시였다. 알현하는 동안 왕비와 왕세자는 줄곧 손을 꼭 잡고 앉아 있었다. 왕은 마흔 셋이고 왕비는 마흔 넷이었다. 나는 궁궐에서 딱 한 번 대원군을 본 적이 있는데 날카로운 눈빛과 위엄이 넘치고 원기왕성한 제스츄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영국의 관리 등용제도와 ‘귀족 이 아닌’ 사람이 정부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는지 둗도 답했고 영국 귀족들은 어느 정도의 권리를 가지는지, 귀족은 하층민을 어떻게 대하는지 물었다. 탁지부 대신(재무장관)이 왕비의 개인 경비에 제재를 가할 수 있는지도 물었다. 수상의 위치를 점하는 내부 장관의 임무에 관해서도 많은 질문을 던졌다. 장관이 명령에 따르지 않을 때 왕비가 장관을 해임할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알현실에 한 사나이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을 문 틈으로 확실히 보았다. 뒤이어 통역관이 “오늘은 전하의 말씀을 통역해 내기가 퍽 어렵나이다”라고 말한 점은 재치있었다. 그 ‘그림자’는 바로 왕이 특별히 불신하는 6부 대신 중 한 사람의 측근이었다. 9개월 뒤 내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왕비는 이미 야만적으로 시해된 뒤였고 왕은 사실상 궁궐에 갇힌 죄수였다. 궁궐에서 가진 4번의 알현은 두번째 한국 방문의 대단한 수확이었다.

단발령 등 을미개혁의 파란과 이노우에

1895년 1월 서울은 이상 기류에 휩싸였다. ‘낡은 질서’는 변해가지만 새 것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 왕은 1894년 6월 일본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한 이래로 ‘봉급받는 자동인형’과 다름없이 되었다. 한때 막강한 세도를 자랑하던 민씨 일파는 더 이상 공무에 간섭할 수 없도록 축출됐다.

1894년 9월 17일 평양에서 중국군을 격파한 일본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았다. 일본 근대화의 기수인 이노우에 백작은 1894년 10월 20일 조선공사로 부임해와 실제 한국 정부를 통치했다. 일본인들은 과거에 영국이 이집트에서 그랬듯이 그들의 목적은 한국 정부를 개혁시켜 주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이노우에 백작은 한국 상류층의 젊은이를 뽑아 2년간 일본에 보냈다. 한국의 일반 백성들은 임금이 당하는 수모에 치를 떨며 분노했다.

한국 관료제도라는 아우게아스왕의 외양간을 청소하는 일을 일본이 수행하고 있었다. 헤라클레스가 수십 년간 한 번도 청소하지 않은 아우게아스왕의 외양간을 강물을 끌어들여 말끔히 치웠다는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

무력 도발은 일본이 행한 전략상의 실수 중 가장 큰 것이었다. 즉 1894년 6월 왕궁을 침입해 임금을 포획한 행위는 물론 이전의 모반자들에게 높은 관직을 준 것도 중대한 실수였다. 동학은 1895년 1월 초 전멸해 한국의 관리들이 교주 김개남과 성재식의 머리를 서울로 압송하고 있었다. 고장난 회중시계가 길에 떨어져 있었다. 어린 아이들이 시계를 분해해 개에게 물어뜯긴 시체의 입 속에 장난으로 처넣었다. 이런 끔찍한 광경이 1주일 동안이나 계속됐다. 1895년 2월 5일 나는 대단히 아쉬워하며 서울을 떠났다.

왕비의 최후 - 을미사변의 전말

1895년 5월 청일전쟁은 공식 종결됐다. 중국과 일본은 시모노세키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막대한 배상금과 타이완섬을 얻었다. 내가 여러 달 중국의 남부와 중부를 여행하고 난 뒤 일본에서 여름을 보내다가 나가사키에 간 것은 1895년 10월이었다. 왕비가 피살됐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문을 들었다. 나는 즉시 제물포로 갔다가 바로 서울로 가 힐리어 공사와 함께 숨막히는 두 달을 보냈다.

이노우에 백작은 한 달 전에 이임했고 서울엔 후임으로 외교 경험이라고는 없지만 군인으로 유능한 미우라 자작이 와 있었다. 한국의 왕비가 저명한 일본 정치인 이노우에의 간곡한 약속에 기댔던 것도 그다지 무리는 아닐 성 싶다. 이노우에 백작은 이임 직전 왕비를 알현한 자리에서 1895년 6월 오토리가 왕궁에 침입한 이후 수립된 대원군 정권을 얘기했다. 왕비는 이노우에 백작에게 “내가 귀국에 건의한 여러 제안이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게 유감이에요. 그런데 귀국에 별로 호의적이지도 않았던 대원군에게는 여러 도움을 주더군요”라고 말했다. 이노우에 백작은 “왕비의 의혹을 누그러뜨린 뒤 한국의 독립을 확고한 기반위에 놓는 것과 한국의 왕가를 강화시키는 것이 우리 일본정부의 진정한 소망임을 힘주어 말씀드리고 왕족이라도 모반을 일으키면 우리 일본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왕가를 꼭 지킬 것이라고 확신을 드렸습니다. 근심이 해소된 듯이 보였습니다”라고 알현 내용을 본국에 급송했다.

미우라 자작과 대원군 사이에 잘 알려진 합의가 그 실행을 향해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미우라는 먼저 일본군 사령관에게 왕국 문 바로 앞에 병영을 주둔케 하고 거기에 일본인이 훈련시킨 한국군대인 훈련대를 배치했다. 일본군을 동원해 대원군이 입궐하도록 도와 주었다. 미우라는 일본인 두 사람 산성신보 사장 아다치와 군부와 궁내부 고문인 오카모토에게 대원군이 사는 용산부터 대원군의 왕궁 행차에 경호를 맡겼다. 미우라는 암살 성공에 따라 20년간 일본을 괴롭히던 해악을 근절할 수 있음도 주지시켰다. 왕궁에 들어가자마자 왕비를 처치하라고 지시한 것도 미우라 공사였다. 미우라의 첩자 중 한 사람은 마침 비번이던 일본인 경찰관에게 민간인 복장을 하라고 명하고 그들에게 칼을 줘 대원군의 집으로 보냈다.

1895년 10월 8일 오전 3시 일본인들은 대원군을 호위하고 용산을 출발했다. 도중에 10명은 한국인 경찰관을 붙잡아 정복을 벗겨 입었다. 대원군 일행은 서대문 밖 입구에서 훈련대를 만나 일본 군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궁을 향해 들어갔다. 왕궁 문 앞 호위병을 죽인 뒤 조금 더 들어가 왕과 왕비의 처소에 도착했다.

나는 이 내용을 히로시마 법정의 판결문에 따라 서술한다. 나는 그 재판을 시종일관 지켜보았다. 판사는 검사와 변호사를 작은 내실로 안내하더니 잠시 뒤 나와 불시에 모든 피고인에게 ‘증거 불충분’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야만의 1895년 10월 8일 새벽

왕비 피살에 앞선 여러 사건을 살펴보자. 10월 경 훈련대와 서울 경찰국 사이에 말썽이 났는데 서울 경찰국이 완패했다. 1천 명 정도의 장병을 거느린 훈련대는 홍계훈 연대장의 지휘를 받았다. 홍계훈(?~1895)은 1882년 왕비를 위험에서 구출한 훌륭한 군인으로 왕가의 신임을 받았다. 홍계훈은 1882년 임오군란 때 민비를 궁궐에서 탈출시킨 공로로 중용됐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양호초토사로 출병해 전봉준의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이고 전주화약을 맺고 유혈충돌 없이 철군했다. 1895년 을미사변 때 훈련대장으로 광화문을 수비하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왕국을 지키던 구식 군대의 ‘현’이라는 연대장도 1884년 왕비의 생명을 구했다.

10월 첫째 주 이 구식군대의 병력을 크게 줄였다. 1895년 10월 7일 밤 일본인 교관이 인솔하는 훈련대는 작은 소란을 일으키며 궁 안에서 전진과 후퇴를 계속했다. 벽 아래 2백명이 넘는 훈련대 병사가 잠복했다. 출입구 쪽에서 난타하는 소리와 사격소리가 뒤를 이었다. 훈련대 지휘관인 홍 연대장은 대문 앞에서 일본인 관리에 의해 단칼에 쓰러졌고 8발의 총격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훈련대원들은 일본인들을 따라 궁내 모든 방향에서 떼지어 몰려 들었고 민간 복장으로 칼로 무장한 일본인들은 왕비의 소재를 미친 듯이 따져 물으며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 끌었다. 2.1m의 베란다에서 대기하던 궁녀들을 내던지기도 했고 칼로 베고 발로 차고 심지어 궁녀들을 무자비하게 죽여버리기조차 했다. 일본인들이 초소 안으로 들어왔을 때 불운한 임금은 그들의 주의를 분산시켜 왕비에게 피신할 시간을 주기 위해 그가 똑똑하게 보일 수 있는 방 앞에 섰다. 그러나 일본인 자객들은 대검을 휘두르며 임금을 밀어내고 그의 면전에서 궁녀들을 데려다가 머리채를 질질 끌고 다녔다. 내실에 있었던 왕세자도 끌려나와 그의 모자를 찢기고 머리채를 끌리웠다.

궁녀들과 함께 발견된 공주는 머리를 맞고 칼로 베어져 아래로 내던져졌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경보를 울렸다. 암살자들이 몰려 들어 왔을 때 그는 왕비 앞에 두 팔을 쳘쳐 그녀를 보호하고자 애썼다. 여기 저기 상처를 입었는데도 이경직(1841~1895)은 있는 힘을 다해 임금이 계신 베란다 앞까지 자기 몸을 끌고 가서 그 곳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갔다. 자객들을 피해 도주한 왕비는 곧 그들에게 잡혀서 칼에 찔렸다. 왕비가 죽은 듯이 쓰러져 있을 때 약간 정신을 차려 왕세자는 안전하냐고 물었다. 그 순간 한 일본인이 그녀의 가슴 위로 덮쳐 대검으로 그녀를 베어 버렸다. 일본인들은 그녀를 비단으로 된 누비이불로 꽁꽁 묶어 널판 위에 누인 뒤 사슴공원 부근의 작은 소나무 숲으로 운반해갔다. 그 곳에서 등유를 몸 위에 붓고 장작을 둘러치고 불태웠으니, 남은 것은 단지 몇 개의 뼈 조각 뿐.

민비를 암살한 을미사변의 정치적 동기는 암살에 참여했던 고바야가와 히데오의 회고록에 잘 요약됐다. 회고록은 “민비는 간섭을 싫어했다. 조선인들은 일본을 혐오하고 러시아에는 그러지 않았다. 민비는 러시아에 더 의지하고 싶어했다. 오직 비상한 수단으로 조선과 러시아의 관계를 단절시킬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왕실의 중심 인물인 민비를 제거해 러시아와 조선의 결탁을 근본적으로 파괴할 수밖에 다른 좋은 방법이 없었다”.

왕비 시해 이후의 정국

미우라 자작은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인 스기무라와 자객들을 이끌고 입궐했다. 임금의 개인적 수행원들까지도 침입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명령 아래 놓이게 되었다. 사흘 뒤 관보에 왕비에게 파렴치한 모욕을 주는 국왕의 칙령이 공표됐다. 칙령은 국왕의 것으로 둔갑돼 발표했다. 다른 여섯 대신의 서명도 있었다. 궁내 대신 이재면, 총리 김홍집, 외부 김윤식, 내부 박정양, 탁지 심상훈, 군부 조희연, 법부 서광범, 학부 서광범, 농상부 정병하.

열흘 뒤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음을 즉각 증명했던 일본 정부는 미우라 자작과 스기무라, 군무아문의 고문관이었던 오카모토를 소환해 체포했다. 단 두 사람 미우라와 스기무라만 판결을 내렸다. “미우라의 선동으로 왕비 시해결정이 내려지고 공범자를 모으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다른 10여 명은 위의 두 사람에 의하여 왕비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미우라의 후임으로 유능한 외교관인 노무라가 부임했다. 이노우에 백작이 내한해 일본 천황의 조의도 표했다. 일본은 아무리 범행사실을 부인해도 소용이 없었다. 왕은 독극물의 공포에 시달렸다. 미국인 군사 고문관인 다이 장군은 늙고 허약했던 인물로 궁중 도서관 가까이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북부 여행을 위해 11월 7일 서울을 떠났다. 훈련대는 여전히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고 임금은 갇힌 수인으로 계속 남았다. 임금은 암살의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서울에서 고양까지

통역자의 훌륭한 역할. 그는 영어를 상당히 잘했고 항상 밝고 예의바르고 영리하고 천성이 착했다. 힐리어 공사관 호위병인 임씨를 나의 하인으로 동반하게 해 주었다. 임은 유능하고 충실하고 민첩하고 원기 왕성했다. 1895년 11월 7일 서울을 출발했다. 정오에 우리는 고양에 도착했다. 20~30명의 일본군이 숙영하고 있었다.

파주를 거쳐 개성으로

개성의 여인숙은 형편없지만 이씨의 친구 한 사람이 친절했다. 나는 그 집에서 이틀 동안 기분좋게 묵었다. 생각해 보면 외국의 연약한 여인이 혼자 커다란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작은 골목에 붙어있는 거처에서 수행원도 없이 영어를 단 한 마디도 모르지만 내 돈이 어디에 있는지는 훤히 알기 때문에 마음만 먹는다면 내 목을 찌르고 돈을 털어 갈 수도 있는 병사와 함께 대문도 잠기지 않고 자물쇠도 없는 방에서 아무런 불안감 없이 네 활개를 뻗고 누워 있었다. 나의 이런 저런 천역덕스런 설명들에는 한국의 민심을 알게 하는 뭔가가 있을 것이다.

청일전쟁 직후의 평양

황해도 서흥군. 한국 관리들은 살아있는 민중의 피를 빠는 흡혈귀다. 경기지방과 황해지방의 경계인 예성강 줄기의 대부분 관리들은 안락과 사교를 위해서 서울에 살았고 거기에는 하급관리만 남겨 놓았다. 관청 건물에는 40명의 일본군인이 주둔했다. 깔끔한 상사 한 명이 내게 인사를 하더니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지 물었다. 그들이 그렇게 물을 권리가 있는지 그리고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일본의 영향 아래에서 은으로 만들어진 엔화는 서서히 한국 경제의 내부로 침투하고 있었다. 평양을 처음 보고 나는 무척 기뻤다. 평양은 주위 경관이 훌륭했고 능숙한 솜씨로 가꾸어져 멀리서 봐도 아름다웠다.

일본군 철수를 무서워하는 평양 사람들

8만의 인구를 가진 번창하던 평양은 쇠락해 1만5천 주민만 남았다. 가옥의 4/5가 부서졌고 거리와 골목은 쓰레기로 꽉 차 있었고 언덕은 무너지고 한때 집들로 붐볐던 골짜기엔 기분 나쁜 잔해만 있었다. 초기에 여기선 실제 전투도, 약탈도 없었다.

일본군들은 기둥과 목조물을 부수고 지붕을 땔감으로 사용했다. 마루 위에 불을 피우고 그대로 방치해 집이 타버리기도 했다. 일본군들은 전쟁 후 3주일 동안 피난민들이 남겨둔 재산을 약탈했다. 뒤 이은 점령기 동안 일본 군대는 정당하게 행동했고 마을과 이웃에서 거둬온 전리품을 꼼꼼하게 배상했다. 사람들은 일본군을 아무 미워했지만 일본군 때문에 평화로운 질서가 유지되는 걸 인정했다.

평양전투의 실상

청국 파견군의 총사령관이던 위여귀 장군은 1894년 9월 15일 평양 칠성문 전투에서 전사했다. 일본군은 세 개의 산꼭대기에 있는 세 개의 중국 진지를 점령했다. 전투라기보다 대량학살이었다. 2~4천명의 중국군인과 사람들이 학살됐다. 일본군은 고전한 끝에 오시마 장군의 용감한 돌격으로 그곳을 탈환했다. 아마도 평양 전투는 청일전쟁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평양 북쪽의 부촌(富村)들

우리는 먼저 안주대로를 따라 걸었다. 중국 기병대가 방어하는 참호를 향해 일본군이 소총돌격을 감했던 언덕이 보였다. 평양 북방의 마을들은 한국의 다른 시골마을보다 훨씬 더 반듯하고 청결했다. 우리는 자산과 은산 지역을 통과했다. 가창에서 덕천까지 여행길은 큰 산의 아무 재혹적인 경치를 감상했다. 유능한 통역자 이체온은 멀지 않은 곳에서 계속 담배를 피며 앉았다. 평양을 지나 북쪽으로 알일령을 통과하는 험로를 걸었다. 알일령은 높이가 해발 1020m의 교역로였다.

평양의 무당과 기생

주민들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파렴치하게 약탈하고 여자들을 강간하는 중국 병사로부터 시달린 일을 고통스럽게 호소했다. 평양은 오래전부터 기생과 고급 창녀, 요설가로 우글거렸고 부와 파렴치한 비행으로 악명 높았다. 전쟁 이후 그 곳에는 매우 큰 변화가 있었다. 140명의 기독교 신자가 있었다. 임시교회는 너무 붐벼 많은 예배자들이 밖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헌금도 풍족했다.

단발령과 아관파천

1896년 한국에서 구시대가 막을 내리고 개화의 여명이 열렸다. 지방마다 분쟁이 잦았고 많은 관료들이 죽임을 당했고 일부 반란군들은 서울을 함락시키려고 위협했다. 일본의 영향력은 쇠퇴하고 있었다. 친일 정권은 전국에 걸쳐 붕괴되고 있었다.

상투 폐지는 1895년 12월 30일 법령을 제정했는데 청천벽력이었다. 훈련대의 3명의 사령관은 무기를 빼들고 궁성에 들어가 즉시 정부에 고용된 사람들에 대해 단발 법률의 제정을 요구했다. 다음 날 관보에 왕이 머리를 잘랐다는 기사와 함께 왕명에 의한 법령이 공포됐다. - 1894년 음력 11월 15일 내부 대신 유길준

단발령은 일본에 의해 한국인이 일본인과 똑같이 보이게 하려는 수작으로 믿어졌고 일본식 관습에 맞추려는 것으로 생각됐다.

1896년 2월 2일 아침 국왕과 왕세자는 동이 틀 무렵 궁녀들이 타는 가마를 타고 보초들의 의심을 조금도 받지 않고 경복궁의 성문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했다. 왕은 이후 1년 이상 그의 비밀수용소로 대여될 공사관의 커다란 방에 들어서면서 두려움에 떨었다. - 1896년 2월 11일 내부 및 총리 대신 박정양

같은 날 수천 명의 백성들이 단발령을 취소하는 명령을 읽었고 체포가 가능했던 관료들, 관청의 집무실을 지키다 체포된 총리대신을 비롯해 농부 대신, 탁지부 대신은 붙잡혀 거리에서 참수 당했다. 격분한 군중들은 상투를 자르게 한 장본인이 총리 대신이라고 여겨 정말 잔인하게 시체를 모독하고 손발을 잘라내는 등 극도의 야만성을 보였다. 왕의 탈출을 도운 엄씨와 박씨라는 궁정의 상궁들이 항상 왕의 곁에 보였다. 영국와 미국 대사관과 인접했고, 정동에 죽은 왕비를 위한 비각을 속히 짓게 했다. 손가락 하나의 뼈, 왕비의 잔유물을 옮겼다.

근대교육의 도입

쓸모 있는 사람을 기르는 대학이란 뜻의 배재대학은 1887년 왕이 이름 지은 학교다. 미국 침례교 기독교회에 속하는 이 학교는 개교 후 11년간 목사인 아펜절러 교장이 봉사했다. 1897년 5월 유능하고 박식한 학자 헐버트 박사의 열정적 지도 하에 국립영어학교와 일반대학들이 세워졌다.

한국 시장에서 영국의 큰 경쟁자는 일본이다. 일본은 한국 해안에 20시간 내에 접근할 수 잇는 강력한 라이벌일 뿐 아니라 현재 한국의 무역을 거의 독점하는 무서운 상대다.

1897년 다시 고종 접견

나는 1895년 12월 25일 한국을 떠나 중국으로 갔다. 중국에서 6개월 보내며 중국의 서쪽을 여행했다. 석 달 동안 일본 난태산 주위에 체류했다. 내가 서울에 돌아온 것은 1896년 10월 중순으로 이 때부터 1897년 겨울까지 서울에 머물렀다.

나는 1896년 10월 보름달을 보며 제물포에 도착했다. 나의 심복 임씨와 서울에 들어왔다. 성문을 열어주라는 명령은 똑똑한 우두머리인 예차윤이 했다. 그는 서울 서쪽 쓰레기 더미와 악취를 제거한 장본인이었다. 국왕은 일본의 왕자를 접견하기 위해서 경운궁에 갔다. 왕은 나를 정식 면담에 초청했다. 일본 군복을 입은 한국인 파수병들이 경운궁의 입구를 어슬렁거리며 지켰다.

나는 왕과 세자에게 세 번의 절을 올렸다. 왕의 처소에서 왕과 두 차례 비공식 접견했다. 일본이 한국에서 행한 정치는 야만적이고 잔인했지만 거시적으로는 한국의 진보와 정의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서울은 현재 지나치게 많은 경찰력으로 무장했다. 3백명이면 충분함에도 서울의 경찰력은 4배인 1천200명이 넘었다. 군인들은 한 달에 5달러50센트를 받는데 이는 세계에서 급료를 제일 많이 받는 군대다.

지저분한 도시였던 서울이 이제는 극동의 제일 깨끗한 도시로 변했다. 넉 달 동안 일어난 일이다. 현 중앙관세청장이며 미구에 서울시장이 될 유능하고 지성적인 관리인 예차윤의 정열과 능력 때문이었다. 예차윤은 일찍 워싱턴을 시찰했다.

1897년 서울서 가장 놀랄 변화는 감옥제도의 개선이다. 이는 스트리플링 때문이다. 그는 상해 경찰이었는데 한국 경찰의 고문관이 된 이후 일본인이 주장한 감옥제도의 개혁을 인간적이고 계몽방식으로 수행했다.

한국에 부치는 마지막 말

한국은 가난한 국가가 아니다. 미개발 자원은 많고 기후는 최상이다. 한국의 관청도 많이 나아졌다. 재정고문 맥레비 브라운의 재정 수행능력으로 한국의 재정 개혁은 상당한 결실을 거두었다. 브라운이 부임한 몇 달 뒤 탁지부라는 아우게네스의 외양간이 청소되었다. 타락한 군대는 해산시켰다. 1896년 재정에서 150만달러가 남아 3백만달러의 일본 대부금 중 1백만달러를 상환했다.

1896년과 1897년 동안 일본의 근신을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외교가 은밀하고 과묵하다는 것 뿐만 아니라 꾸준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일본 외교의 기틀은 지금까지 한국의 어떤 정치적 변동에도 영향 받지 않았다. 러시아는 한국에서 패권을 획득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동시에 일본의 영향력은 조용하고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었다. 영국이 한국에서 소유한 것은 이전에 여왕 폐하의 중국 영사였고 현재 관세청장인 맥레비 브라운의 수완, 관록, 외교적 재주 뿐이다.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의 운명을 놓고 서로 대결한 상태에, 내가 한국을 떠나게 된 것은 매우 유감이다. 내가 처음에 한국에 대해서 느꼈던 혐오는 이제 거의 애정으로 바뀌었다.

겨울 아침의 부드러운 공기 속에서 눈덮인 서울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영국 정부의 작은 기선인 상해행 헨릭호를 타고 제물포를 떠났다.

역자해제 :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생애

이 책은 1898년 1월 런던 세인트 제임스 신문사가 두 권으로 출판했다. 같은 해 뉴욕에서 출판됐다. 88 서울 올림픽 당시 엘리자베스 여왕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낸 선물도 이 책 한 권이었다. 여사가 죽은 직후에 안나 M. 스토우다트가 쓴 <이사벨라 버드의 생애>(1907)과 66년 뒤 간행된 패트 바아의 <이사벨라 버드 이야기>(1970)이 있다.

1831년 10월 15일 영국 요크샤 주 보르브릿지 홀에서 태어났다. 친정은 캔터베리 대주교인 섬너 경의 가문으로 유서 깊은 성직자 집안이었다. 병약했던 이사벨라는 신경통으로 몹시 고생했다. 키는 160cm로 크지 않았지만 얼굴과 몸매는 아름답고 우아했따. 1854년 23살 때 캐나다와 미국을 여행했다. 헬리팩스에서 보스턴, 신시내티, 시카고, 디트로이트, 캐나다 터론토, 퀘벡, 몬드리올을 7개월간 돌았다. 1856년 1월 런던의 유명 출판사 머레이에서 <미국의 영국 여인>이란 여행기를 내 베스트셀러가 됐다. 책에서 이사벨라는 미국 남부의 노예제를 비판하고 흑인과 인디언에 강한 애정을 보였다. 1857년 이사벨라는 다시 미국으로 가 노예주인 버지니아, 사우스 케롤라이나, 조지아를 돌며 교회를 통한 흑인과 인디언의 인권운동에 헌신한다.

20대 이사벨라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린다. 29살에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로 이사해 철학적 내용의 시를 발표했다. 빅토리아 시대가 여성에게 강요하던 사회적 문화적 차별이 우울증 원인이었다.

제국의 어둠 속에는 마르크스가 <자본론>(1867)에서 증언한 비참한 영국의 노동계급과 위선적인 가족 윤리에 옭죄인 여성들. 다윈이즘의 충격에 허우적거리는 지식인들이 있었다.

1866년 어머니가 죽자 우울증은 더 심했다. 이 때 의사 존 비숍을 만났다. 41살이던 1872년 이사벨라는 홀로 하와이로 여행가 건강 회복을 시도했다. 미국 록키산맥의 요양소에서 몇 달 보냈다. 거기서 그녀가 “내 깡패 같은 남자”로 부르며 평생 잊지 못한 연인 ‘짐 뉴젠트’를 만났다.

40이 넘어 대학 강의를 청강하며 지리학 공부를 시작했다. <알려지지 않는 일본>(1880)을 썼다. 이사베랄는 1881년 3월 8일 존 비숍과 51살의 나이에 결혼했다. 비숍은 원래 죽은 동생 헨리에타의 연인이었다. 존은 빈혈에 시달리다가 1886년 3월 6일 죽었다.

1889년 58살에 중동 여행에 나서 이슬람 세계를 보고 인도까지 간다. 뉴욕의 프레임 H 레벨사에서 <티베트 미니중들>(1894)로 냈다. 1893년 비숍은 한국 여행을 계획한다. 류머티즘이 악화됐고 폐도 안좋았다. 1894년 2월말 한국에 도착해 이후 4년 동안 4번 한국을 드나들었다.

1901년 71살에 다시 아프리카 여행을 결행한다. 모로코를 출발해 1천마일 이상을 말로 달린 대장정 끝에 사하라 사막을 횡단해 아틀라스 산맥에 오른다. 6개월간의 강행군으로 모로코로 돌아온 여사는 패혈증으로 3주 동안 앓았다. 1904년 10월 10일 에딘버러 자택에서 74살에 죽었다.

마포에서 배로 한강 상류를 오르는 여행은 비숍 여사와 젊은 미국인 선교사 밀러, 밀러의 한국인 하인 이체온, 왕씨라는 중국인 통역자, 뱃사공 김씨와 그의 조수 등 모두 6명이었다. 먼저 남한강 상류를 보고, 북한강 상류를 답사한다.

이 책에 필적하는 한국의 구한말을 다룬 명저는 두 권 더 있다. 월리엄 엘리어트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1882)과 프레드릭 아서 매켄지의 <한국의 비극>(1908)이 그것이다. 그리피스의 책은 한국 고대 중세사까지 다뤄 구한말은 조금 밖에 없다. 한국의 정파를 다룬 25장은 당쟁을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게 취재했다. 노론과 남인 사이에 초미의 쟁점을 설득력있게 묘사했다. 그러나 그리피스의 책 마지막의 서구중심주의적 한계는 저서의 곳곳에서 서구와 한국의 비교를 문명과 야만이라는 무지한 도식으로 몰고가 비숍 여사의 저서가 갖는 미덕과 여러모로 대조가 된다.

매켄지의 <한국의 비극>은 일본의 야심과 제국주의 본질을 날카롭게 통찰하고 일본의 죄악을 고발한다. 의병종군기는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인류의 양심을 증언한다. 그러나 저자가 데일리 메일지의 신문기자라는 한계 때문에 충격적 사건의 전달에 집중하는 아쉬움이 있다.

비숍의 책도 미덕만 있는 게 아니다. 일본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태도를 보인다. 영국이 일본을 도와 러시아 남진을 저지하려 했던 당시 영국 사회의 분위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빅토리아 시대를 살았던 영국인의 심정적인 편향과 선입견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이 명저가 아직도 번역되지 않은 이유. 영어를 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을 몰라서 번역하지 못했다고 본다. 7장의 ‘벽절’이란 이름의 절이 신륵사의 다른 이름이란 사실을 이대 정재서 교수님에게 확인했다.

시간순서로 본 비숍의 한국여행

11개월 동안 한국을 현지답사. 지리학자로 명망과 친정인 영국 왕실의 지친이란 신분 때문에 여사는 남자옷을 입고 궁궐을 자유롭게 출입했다.

* 1894년
2월23일 부산에 도착 하루 체류
2월27일 부산을 출발 3일 항해 제물포 도착
3월 1일 서울 도착해 50일간 체류
4월14일 한강을 거슬러 나룻배 여행 시작
5월21일 나룻배 버리고 육로로 금강산 향해 떠남
6월14일 금강산을 떠나 육로로 북상해 원산 도착
6월19일 원산을 떠나 증기선으로 부산 도착
6월21일 새벽 부산을 떠나 증기선으로 제물포 도착
6월21일 밤 제물포 탈출, 만주로 감
6월23일 중국 체푸 도착, 청일전쟁 발발
6월26일 잉쿠 도착
7월 3일 잉쿠 출발. 나룻배러 랴오허강 거슬러 올라감
7월13일 펭티엔 도착.
8월25일 펭티엔 출방, 잉쿠로 귀한
8월 말 베이찡 거쳐 엔타이 도착
9월 초 엔타이 출발. 배로 5일만에 나가사키 도착
9월 중순 나가사키 출발, 블라디보스톡 도착
9월 말 프리모르스크, 노보키에프, 포시만 거쳐 두만강까지 여행. 러시아령의 한국인 취재
10월 초 시베리아 횡단 철도 따라 니콜스코예, 스파스코예 거쳐 우수리강까지 답사
10월 말 블라디보스톡에서 원산, 부산 거처 나가사키로 감

* 1895년
1월 5일 나가사키에서 제물포 도착 혼자 말 타고 서울 입경
2월 5일 서울을 떠나 4개월 동안 중국 중부와 남부 답사
6~10월 일본 답사
10월15일 민비시해 소식 듣고 제물포로 돌아옴. 고종 알련
11월 7일 서울 떠남 고양 파주 개성 서흥 봉산 황주 평양, 자산, 가창, 덕천, 안주, 알일령, 무진대, 순천 거쳐 다시 평양옴
12월 중순 포산에서 증기선으로 제물포 귀환
12월25일 한국 떠나 6개월간 중국 서부 답사
12월30일 단발령 발표

* 1896년
2월 2일 아관파천
6월 말 중국을 떠나 일본으로 감
10월20일 제물포에 도착. 서울에서 고종 알현

* 1897년
1월25일경 서울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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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숍 , 이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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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향원익청] 연해주의 별, 최재형

[곽병찬의 향원익청] 연해주의 별, 최재형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연해주의 별, 최재형
등록 :2017-02-28


그는 저의 재산과 능력과 기회를 공동체에 바쳤다. 내륙의 한인들에겐 소, 돼지, 닭 등을 길러 군납할 수 있도록 했고, 슬라뱐카 등 해안가 한인들에게는 연어를 잡아 살과 알을 납품하도록 했다. 마을에는 학교와 공원을 세웠다. 한인들이 그를 어찌나 존경하고 따랐는지, 1907년 연해주로 건너온 안중근은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기억했다.
1909년 최재형은 주 2회 발행하는 <대동공보>를 인수해 운영했다. <대동공보> 주필은 ‘시일야방성대곡’으로 투옥됐던 장지연이었다. 안중근도 여기에서 근무하며 때를 기다리도록 했다. 1909년 10월26일 하얼빈 역에서 7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토 히로부미와 그 수행원들이 쓰러졌다. 안중근의 권총은 최재형이 건넨 8연발 브라우닝식 권총이었다.

19세기 말 연해주 한인 마을을 방문한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은 여행기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조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약하고 의심 많으며 위축된 특징이 이곳에서는 솔직함과 독립심을 가진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었다.”
비숍이 여행했던 1890년 중후반은 러시아 귀화인 최재형(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이 도헌(읍장)으로 있을 때였다. 러시아어를 자유자재 구사했던 최재형의 성실성과 능력을 높이 산 러시아인들은 그에게 통역, 도로 및 막사 공사 하청, 식료품 등의 군납을 맡겼다. 그는 서른이 되기 전에 연해주 굴지의 거부가 되었다. 도올 김용옥이 ‘동양의 카네기’에 비유할 정도였다.

 하지만 카네기처럼 돈벌이에 중독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저의 재산과 능력과 기회를 공동체에 바쳤다. 내륙의 한인들에겐 소, 돼지, 닭 등을 길러 군납할 수 있도록 했고, 슬라뱐카 등 해안가 한인들에게는 연어를 잡아 살과 알을 납품하도록 했다. 마을에는 학교와 공원을 세웠다. 그런 최재형을 러시아 정부는 도헌으로 추천했고, 연추 읍민들은 쌍수로 환영했다. 한인들이 그를 어찌나 존경하고 따랐는지, 1907년 연해주로 건너온 안중근은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런 최재형에겐 천형과도 같은 낙인이 있었다. 그의 아비는 함경북도 경흥 송 진사 댁 노비였고, 어미는 빚에 팔려 간 기생이었다. 러시아로 귀화했지만, 조선 양반들에게 그의 가족은 여전히 종놈의 집안이었고, 그는 노비였다. 그는 9살 되던 1869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할아버지, 형 부부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땅 지신허에 정착했다.
지신허엔 착취와 억압은 없었다. 그러나 헐벗고 굶주림은 여전했다. 최재형은 11살 때 무작정 가출했다. 항구도시 포시예트 부둣가에 쓰러져 있던 그는 천우신조로 무역선 빅토리아호 선장 부부의 눈에 띄었다. 이들의 배려로 최재형은 무역선에 올라 7년 동안 포시예트에서 일본, 중국,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 탄자니아, 남아프리카공화국, 포르투갈, 프랑스, 네덜란드를 거쳐 네바강을 거슬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두 차례 왕복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선장으로부터 비즈니스를 배우고, 선장 부인으로부터 러시아어와 문학 역사를 배웠다. 선장 부부가 무역을 청산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면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모르스키 무역상사에서 3년간 근무했다.
1881년 가족을 찾아 연추로 갔다. 한인들은 여전히 궁핍했다. 그는 기회가 보장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지 않았다. 연추에 남아, 한인들과 함께 일하고, 함께 벌고, 함께 마을을 가꾸고, 함께 아이들을 가르쳤다. 도헌이 되기 전 니콜라옙스코예소학교를 사재로 지었고, 도헌이 된 이후 한인마을마다 32개의 소학교를 세웠다. 도헌 월급은 모두 장학금으로 출연했다. 1899년 중국에서 의화단 사건이 일어났다. 북경의 외국 공관들까지 공격당하자, 러시아는 이를 핑계로 만주에 20만 대군을 진주시켰다. 최재형의 군납사업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 무렵 간도관찰사 이범윤이 찾아왔다. 그는 최재형을 보자마자 자신이 왕실의 일족임을 내세우며, 고종이 내린 마패를 꺼내 보였다. “이 마패를 지닌 사람은 황제 폐하를 대신한다는 걸 명심하시오. 당신도 나를 무조건 도와야 하오.” 고압적이었다. 최재형이 노비 출신인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조선은 양반의 나라였다. 그 조선을 망친 것은 다름 아닌 그 부패하고 무능하고 무책임한 양반들이었다. 그런 양반 가운데 한 사람이 러시아에선 개뼈다귀만도 못한 마패를 들고 위세를 떨고 있다. 돈 내놓으라고 호령한다. 최재형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두말 않고 자금을 건넸다. ‘간도의 호랑이’ 이범윤의 사포대는 그렇게 창설됐다. 그런 이범윤이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자 사포대와 함께 연추로 이주했다. 정부의 소환령을 거부하고 러시아 편에서 일본과 싸우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을 보살피고 지원하는 건 최재형의 몫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러시아의 허무한 패배로 끝났다.
이범윤 부대에는 양반 출신이 많았다. 그들은 ‘노비 출신 최재형’을 얕잡아 보았다. 툭하면 명령하듯 다그쳤다. 무기를 사와라, 의병을 모아라, 군자금을 모아라 지시만 하려 했다. 그들은 양반의 나라를 되찾기 위해 초조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다른 ‘양반’도 있었다. 안중근 신채호 이상설 등은 특별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최재형은 1908년 5월 해외 최대의 독립운동 단체인 동의회(총장 최재형)를 창립했다. 동의회는 최재형이 내놓은 1만3천루블, 이위종의 부친(이범진 전 러시아 공사)이 전해온 1만루블, 최재형과 안중근이 모금한 6천루블을 기금으로, 6월 이범윤 총대장에 안중근을 참모중장으로 한 연추의병을 창설했다. 연추의병은 7월부터 국내의 홍범도 부대 등과 연합작전을 펼쳐 접경지역의 일본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나 9월 안중근의 실수로 영산전투에서 대패했다.
연추의병이 해체되자 1909년 최재형은 주 2회 발행하는 <대동공보>를 인수해 운영했다. <대동공보> 주필은 ‘시일야방성대곡’으로 투옥됐던 장지연이었다. 안중근도 여기에서 근무하며 때를 기다리도록 했다. 1909년 10월26일 하얼빈 역에서 7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토 히로부미와 그 수행원들이 쓰러졌다. 안중근의 권총은 최재형이 건넨 8연발 브라우닝식 권총이었다. 각종 정보는 <대동공보> 편집장 이강이 제공했다. 당시 안중근의 신분은 <대동공보> 특파기자였다.
일제는 집요하게 ‘배후’를 캤다. 안중근은 한사코 자신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며 총독은 김두성이라고 우겼다. 의병장 유인석이니, 고종이니 혹은 최재형이니 구구했지만 ‘김두성’을 앞세워 안중근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를 보호할 수 있었다. 순국 후 최재형은 그의 가족을 보살폈다. 최재형은 또 <대동공보>에 400루블을 따로 보내, 안중근 순국에 관한 특별판을 제작하도록 했다.
조선의 병탄 뒤 연해주 상황은 바뀌었다. 러시아는 일제의 압력에 따라 항일 독립운동지사들을 혹심하게 탄압했다. 유인석 등이 추진하던 13도의군이 좌절됐으며, 지휘부 40여명이 체포돼 8명이 추방됐다. <대동공보>도 폐간됐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최재형이 아니었다. 당시 연해주는 망명한 독립지사의 집결지였다. 최재형은 이들과 연해주 한인을 망라한 단체를 조직했다. 한인 동포에게 실업을 권장하고 일자리를 소개하며 교육을 보급하는 것을 표방한 권업회였다. 회장 최재형, 부회장 홍범도 체제로 출범한 권업회는 1914년 강제로 해산당할 때 회원이 무려 8579명에 이르렀다. 기관지 <권업신문>의 주필은 신채호였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최재형은 또 선택해야 했다. 그에겐 이념이 없었다. 조국만 있을 뿐! 어느 쪽이 일본에 맞서 싸울 것인가? 혁명군인가 반혁명군인가. 일본은 반혁명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최재형은 환갑의 나이에 항일 빨치산 전선으로 나갔다. 큰아들은 이르쿠츠크 전선에서 전사했다. 둘째 아들은 연해주 빨치산 참모장으로 싸우고 있었다.
1920년 4월4일 밤 일본군이 전면적인 빨치산 토벌에 나섰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이 불탔고, 한인 300여명이 학살당했다(4월참변). 그날 밤 최재형은 가족을 지키려 우수리스크 자택으로 돌아왔다. “엄마와 누나들은 아버지에게 빨치산 부대로 도망가라고 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내가 도망치면 너희 모두 일본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할 것이다. 나는 살아갈 날이 조금 남았으니 죽어도 좋다. 너희들은 더 살아야 한다.’ … 다음날 새벽 열린 창문으로 일본군에 끌려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다섯째 딸 올가의 회상) 최재형은 왕바실재 산기슭에서 동지 김이직과 엄인섭 등과 함께 학살당했다.
매년 4월5일이면 우수리스크의 ‘영원한 불꽃 추모광장’에서는 지방정부 주관으로 4월참변 추모제가 열린다. 왼쪽엔 한인 희생자, 오른쪽엔 러시아인 희생자의 위패가 놓이고, 중앙엔 최재형 초상화가 놓인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784592.html#csidx3ab04903d458a8b9a8358230e10d949 

IsabellaBishop on Tong-hak in

Korea and her neighbors; a narrative of travel, with an account of the recent vicissitudes and present position of the country

by Bird, Isabella L. (Isabella Lucy), 1831-1904

Publication date 1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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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서평

목차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1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2

본문내용

비숍은 제3자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더욱 동학농민혁명운동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묘사했다고 생각을 한다. 이런 사실들로 보아 그 동안 우리들이 알고 있었던 동학혁명운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우리들은 그 운동이 자랑스러운 아래로부터의 개혁운동이라고 알려져 있기는 했지만 매우 난폭하고 정부를 엎기 위한 운동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즉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혁명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왕에 대한 충성심은 유지한 채 지방관들의 부패를 근절시키기 위한 운동이었다는 점은 내게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또한 이들의 선언문은 그들의 이익을 전혀 표방하지도 않았으며 외국인들에 대한 적개심도 없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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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visiting them a year later I found them still well and happy. The excitement among the Koreans consequent on the Tong-hak rebellion and the war had left them unmolested. A Japanese regiment had encamped close to them, and, by permission, had drawn water from the well in their compound, and had shown them nothing but courtesy. Having in two years gained general confidence and good-will, they built a small bungalow just above the old native house, which has been turned into a very primitive orphan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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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newspapers. The Tong-haks (rebels, or armed reformers) were strong in a region immediately to the south of the great bend, which showed some dissatisfaction with things as they were, and a desire for reform in some mi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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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VING heard nothing at all of public events during my long inland journey, and only a few rumors of unlocalized collisions between the Tong-haks (rebels) and the Royal troops, the atmosphere of canards at Won-san was somewhat stimulating, though I had already been long enough in Korea not to attach much importance to the stories with which the air was thick. One day it was said that the Tong-haks had gained great successes and had taken Gatling guns from the Royal army, another that they had been crushed and their mysterious and ubiquitous leader beheaded, while the latest rumor before my departure was that they were marching in great force on Fusan. Judging from the proclamation which they circulated, and which, while stating that they rose against corrupt officials and traitorous advisers, professed unswerving loyalty to the throne, it seemed credible that, if there were a throb of patriotism anywhere in Korea, it was in the breasts of these peasants. Their risings appeared to be free from excesses and useless bloodshed, and they confined themselves to the attempt to carry out their programme of reform. Some foreign sympathy was bestowed upon them, because it was thought that the iniquities of misrule could go no further, and that the time was ripe for an armed protest on a larger scale than the ordinary peasant risings against intolerable exactions. But at the very moment when these matters were being discussed in Won-san with not more than a languid interest, a formidable menace to the established order of things was taking shape, destined in a few days to cast the Tong-haks in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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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bellion in southern Korea was exciting much alarm in the capital. Such movements, though on a smaller scale, are annual spring events in the peninsula, when in one or other of the provinces the peasantry, driven to exasperation by official extortions, rise, and, with more or less violence (occasionally, fatal), drive out the off'ending mandarin. Punishment rarely ensues. The King sends a new official, who squeezes and extorts in his turn with more or less vigor, until, if he also passes bearable limits, he is forcibly expelled, and things settle down once more. This Tong-hak (*'Oriental " or ''National") movement, though lost sight of in presence of more important issues, was of greater moment, as being organized on a broader basis, so as to include a great number of adherents in Seoul and the other cities, and with such definite and reasonable objects that at first I was inclined to call its leaders " armed reformers " rather than '* rebels." At that time there was no question as to the Royal autho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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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ong-hak proclamation began by declaring in respectful language loyal allegiance to the King, and went on to state the grievances in very moderate terms. The Tong-haks asserted, and with undoubted truth, that officials in Korea, for their own purposes, closed the eyes and ears of the King to all news and reports of the wrongs inflicted on his people. That ministers of State, governors, and magistrates were all indifferent to the welfare of their country, and were bent only on enriching themselves, and that there were no checks on their rapacity. That examinations (the only avenues to official life) were nothing more than scenes of bribery, barter, and sale, and were no longer tests of fitness for civil appointment. That officials cared not for the debt into which the country was fast sinking. That " they were proud, vainglorious, adulterous, avaricious." That many officials receiving appointments in the country lived in Seoul. That " they flatter and fawn in peace, and desert and betray in times of trou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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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the events of the two or three days before I landed at Chemulpo threw the local disturbance into the shade, and it is only with the object of showing with what an excellent pretext for interference the Tong-haks had furnished the Japanese, that I recall this petty chapter of what is now ancient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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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ong-haks, as was mentioned in chapter xiii., had on several occasions defeated the Royal Korean troops, and after much hesitation the Korean King invoked the help of China. China replied promptly by giving Japan notice of her intention to send troops to Korea on 7th June, 1894, both countries, under the treaty of Tientsin, having equal rights to do so under such circumstances as had then arisen. On the same day Japan announced to China a similar intention. The Chinese General, Yi, landed at A-san with 3,000 men, and the Japanese occupied Chemulpo and Seoul in fo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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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ong-haks, who had respectfully thrown off allegiance to the King on the ground that he was in the hands of foreigners, and had appointed another sovereign, had been vanquished early in January, and their king's head had been sent to Seoul by a loyal governor. There I saw it in the busiest part of the Peking Road, a bustling market outside the *' little West Gate," hanging from a rude arrangement of three sticks like a camp-kettle stand, with another head below it. Both faces wore a calm, almost dignified, expression. Not far off two more heads had been exposed in a similar frame, but it had given way, and they lay in the dust of the roadway, much gnawed by dogs at the back. The last agony was stiffened on their features. A turnip lay beside them, and some small children cut pieces from it and presented them mockingly to the blackened mouths. This brutalizing spectacle had existed for a w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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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 345Tol Maru, 302. Tomak-na-dali, 85. Tombs, 77. Tong-haks, the, 29, 80, 177,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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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206, 264, 370. Tong-ku, 131. Top-knot, the, 359, 360, 361,

264 Korea and Her Neighbors

to which the sovereign was exposed. The forcing of former conspirators into high office was a grave error, and tactless proceedings, such as the abolition of long pipes, alterations in Court and other dress, many interferences with social customs, and petty and harassing restrictions and regulations, embit- tered the people against the new regime.

The Tong-haks, who had respectfully thrown off allegiance to the King on the ground that he was in the hands of for- eigners, and had appointed another sovereign, had been van- quished early in January, and their king's head had been sent to Seoul by a loyal governor. There I saw it in the busiest part of the Peking Road, a bustling market outside the *' little West Gate," hanging from a rude arrangement of three sticks like a camp-kettle stand, with another head below it. Both faces wore a calm, almost dignified, expression. Not far off two more heads had been exposed in a similar frame, but it had given way, and they lay in the dust of the roadway, much gnawed by dogs at the back. The last agony was stiffened on their features. A turnip lay beside them, and some small chil- dren cut pieces from it and presented them mockingly to the blackened mouths. This brutalizing spectacle had existed for a week.

Three days later, in the stillness of the Korean New Year's Day, I rode with a friend along a lonely road passing through a fair agricultural valley among pine-clothed knolls outside the South and East Gates of Seoul. Snow lay on the ground and the grim sky threatened a further storm. It was cold, and we observed with surprise three coolies in summer cotton clothing lying by the roadside asleep; but it was the last sleep, for on approaching them we found that, though their attitudes were those of easy repose, the bodies were without heads, nor had the headsman's axe been merciful or sharp. In the middle of the road were great, frozen, crimson splashes where the Tong- hak leaders had expiated their treason, criminals in Korea, as in old Jerusalem, suffering "without the gate."


A Transition Stage 265

A few days later an order appeared in the Gazette abolish- ing beheading and ''slicing to death," and substituting death by strangulation for civil, and by sliooting for military capital crimes. This order practically made an end of the prerogative of life and death heretofore possessed by the Korean sovereigns.

So the '' old order " was daily changing under the pressure of the Japanese advisers, and on the whole changing most de- cidedly for the better, though, owing to the number of reforms decreed and in contemplation, everything was in a tentative and chaotic state. Korea was " swithering " between China and Japan, afraid to go in heartily for the reforms initiated by Japan lest China should regain position and be ''down" upon her, and afraid to oppose them actively lest Japan should be permanently successful.

On that same New Year's Day there was more to be seen than headless trunks. Through the length of Seoul, towards twilight, an odor of burning hair overpowered the aromatic scent of the pine brush, and all down every street, outside every door, there were red glimmers of light. It is the custom in every family on that day to carry out the carefully preserved clippings and combings of the family hair and burn them in potsherds, a practice which it is hoped will prevent the entrance of certain daemons into the house during the year. Rude straw dolls stuffed with a few cash were also thrown into the street. This effigy is believed to take away troubles and foist them on whoever picks it up. To prevent such a vicarious calamity, more than one mother on that evening pounced upon a child who childlike had picked up the doll and threw it far from him.

On that night round pieces of red or white paper placed in cleft sticks are put upon the roofs of houses, and those persons who have been warned by the sorcerers of troubles to cdtne, pray (?) to the moon to remove them.

A common Korean custom on the same day is for people to paint images on paper, and to write against them their troub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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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nd her neighbors; a narrative of travel, with an account of the recent vicissitudes and present position of the country

by Bird, Isabella L. (Isabella Lucy), 1831-1904


Publication date 1898-

Korea and her neighbors; a narrative of travel

by bird, isabella l. (isabella lucy), 1831-1904

tex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