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15

4] 조성환 - 이종만 선생의 개벽사상과 이상국가

이종만 선생의 개벽사상과 이상국가

조성환 박사 원광대(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1. 들어가며 – 대동과 개벽


이 글은 일제강점기에 ‘금광왕’으로 알려진 그러나, 지금은 거의 잊혀진 남호, 이종만 (李鍾萬, 1885~1977)을 사상사적 관점에서 조망하고자 하는 시론이다 지금까지의 이 종만에 관한 학계의 연구는 서너 편에 불과하고 분, 야도 경제나 산업에 한정되어 있 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방기중, 「일제말기 대동사업체의 경제자립운동과 이념」, 󰡔한국사연구󰡕 95, 1996: 139-178.

2). 전봉관, 「금광왕 이종만의 ‘아름다운 실패’ -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힌 유일한 ‘자 본가 의’ 31전 32기」, 󰡔럭키경성 – 근대 조선을 들썩인 투기 열풍과 노블레스 오 블리주󰡕, 살림출판사, 2007: 145-179.

3). 최윤경, 「일제강점기 이종만의 대동콘체른 운영에 대한 소고」, 󰡔울산문화연구󰡕 2 집, 2010: 103-118.

4). 이준열 글・이달호 편저, 「대동사회를 꿈꾼 ‘대동콘체른’ , 」 󰡔선각자 송강 이준열의 삶 – 3・1운동, 고학당 교육, 광주학생운동, 대동사업의 증언 혜안󰡕, , 2012: 177-234.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대부분 이종만이 설립한 ‘대동콘체른’에 관한 연구가 대부 분이다. ‘대동콘체른(大同Konzern)’은 이종만이 ‘대동 의’ 이념을 바탕으로 결성한 ‘기 업결합체’를 말한다 방기중은. 이것을 ‘대동사업체’로 번역하고 있고 이종만은, ‘대동 체계’ )라는 개념도 쓰고 있다.

그런데 이종만은 경영자나 자본가일 뿐만 아니라 교육자이자 운동가이기도 했다. 자신의 뚜렷한 ‘사상 을’ 가지고 학교를 설립하고 노동자를 대우했기 때문이다 그. 사상 이 바로 ‘대동(大同)’이다. ‘대동 은’ “크게 하나 된다 는” 뜻으로 고대, 중국의 유교 문 헌인 󰡔예기(禮記)󰡕「예운(禮運)」에 나오는 말이다. 그 출전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공자가 말하였다: “대도(大道)가 행해지면 천하를 공(公)으로 여겨(天下爲公) 어질고 유능한 인물을 선택하고 (…) 남의 부모나 자식도 자기 부모나 자식처럼 여긴다. 노인 은 생을 편안히 마치게 하고, 청년은 쓰일 곳이 있게 하며, 어린이는 길러지는 곳이 있게 하고 환과고, 독과 병자들은 부양받는 곳이 있게 하였다 남자는. (사농공상의) 직 분이 있고 여자는, 시집갈 곳이 있다 재화는. (…) 자기에게만 감추어 두지 않았고, 힘 은 (…) 자기를 위해서만 쓰지 않았다. (…) 그래서 도적이 일어나지 않았고 문을, 닫 고 지내는 일이 없었다 지. 금의 세상은 대도는 이미 감추어지고 천하를, 일가(一家)로 여기고 자기, 어버이만을 친애하며 (…).

이에 의하면 ‘대동사회’란 남도 자기처럼 여겨서 자기가 가진 것을 남들과 공유하며, 그로 인해 사회적 약자들이 살아가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는 사회를 말한다. 간단히 말하면 ‘己’(자기 의) 영역을 넘어서 ‘公’이 실현된 평등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예운 의」 이 글이 나온 이후에 동아시아에서 ‘대동 은’ 하나의 이상 사회를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가령 조선후기에 농민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시행된 재정제도의 명칭은 ‘대동법(大同法)’이었다. 19세기말에 중국사상가 캉유웨이(康有爲)도 󰡔대동서 (大同書)󰡕를 저술하여 자신이, 꿈꾸는 이상사회를 ‘대동 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냈다. 총 10장으로 이루어진 목차의 제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국경 없이 세계를 하나로”, “계급 차별 없는 평등한 민족으로”, “인종 차별 없는 하나의 인류로”, “남녀 차별 없 는 평등의 보장”, “가족 관계가 없는 천민(天民)으로”, “산업 간의 경계를 없애 생업 을 공평하게 한다”, “인간과 짐승의 구별을 없애 모든 생명체를 사랑한다.” 「예운 과」 의 차이는 계급이나 인종 또는 남녀 간의 ‘차별 을’ 없앨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 다 심지어는. 인간과 짐승 간의 구별도 뛰어 넘은 무차별적 사랑을 말하고 있다. 특히 본 발표의 주제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점은 그와 같이 가족제도가 사라진 상태의 사람들을 ‘천민(天民)’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61) ‘천민 은’ 20세기 초에 천도교에 서도 사용된 개념으로 그, 기원은 19세기 말의 동학지도자 해월 최시형에게까지 거슬 러 올라간다. 먼저 천도교에서 사용된 용례를 하나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입도만 하면 ‘사인여천 이라는’ 주의 하에서 상하귀천 남녀존비 할 것 없이 꼭 꼭 맞절을 하며, 경어를 쓰며, 서로 존중하는 데서 모두 다 심열성복(心悅性服)이 되 었고, 둘째, 죽이고 밥이고 아침이고 저녁이고 도인이면 서로 도와주고 서로 나눠 먹 으라는 데서 모두다 집안 식구같이 일심단결이 되었습니다. 그때야말로 천국천민(天國天民)들이었지요.”62) 이것은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충남 서산에서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홍종식(洪鐘植)의 강연의 일부이다. ) 
---
61) 󰡔맹자의󰡕 「만장하 에도( )」 ‘천민 개념이’ 나오지만 이, 개념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고 문, 맥상 차 별이 없어진 상태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天生之民”, 즉 “하늘이 낳은 백성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伊尹曰: “天之生斯民也, 使先知覺後知, 使先覺覺後覺 予. , 天民之先覺者也 予將以此. 道覺此民也.”

62) 홍종식 강연·춘파 기록 년, 70「 사상 최대 활극 동학란실화 신인간」 『, 』 34, 1929.04. 박맹수 공공하, 「 는 철학에서 본 동학의 공공성 생, 『 명의 눈으로 보는 동학 서울 모시는』, : 사람들, 2014, 175쪽에서 재인용강조는( 인용자의 것).

---

여기에서 홍종식은 차별이나 구별 없이 서로 나누고 돕는 동학 도인들을 ‘천민 이라고’ , 그리고 그런 사회를 ‘천국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천국 은’ 󰡔예기 나󰡕 캉유웨이 식으로 말하면, ‘대동 이’ 실현된 사회에 해당한다. 한편 홍종식이 말하는 천민 개념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해월 최시형이 말한 ‘천인(天人)’ 개념에 다다르게 된다. 해월은 “사람은 하늘사람이다(人是天人)”고 했는 데 이, 본래의 천인(天人)이 실현된 상태를 ‘천민 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학과 천도교에서는 이와 같이 천민이 사는 천국을 만드는 사상운동을 ‘개벽 이라고’ 했다 개벽은. 원래 “하늘과 땅이 열린다 는” 뜻으로 쓰이던 개념인데, 1860년에 동학 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가 “새로운 세상을 연다 는” ‘사상용어’ )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개벽 은’ 중국적으로 말하면 대동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나 행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동이 실현된 이상사회도 ‘개벽 이라고’ 지 칭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에는 “개벽한다 는” 동사로 쓰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개벽 세상 는” 명사로 주로 쓰인다.

이처럼 중국의 ‘대동 과’ 한국의 ‘개벽 은’ 하나같이 이상사회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서 로 상통하고 있다. ‘대동 을’ 말한 이종만을 ‘개벽 의’ 관점에서 고찰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종만은. ‘대동콘체른’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대동사회 를’ 꿈꾸었다. 동시대의 천도교에서는, 1920년에 창간한 󰡔개벽 이라는󰡕 잡지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개벽세상 을’ 지향하였다 마찬가지로. 1919년에 ‘불법연구회기성조합으로’ 시작한 원불교에서도 ‘정신개벽을’ 통해 모두가 하나되는 ‘일원(一圓)’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문에서는 먼저 이종만의 대동사상을 소개하고, 그가 지향한 이상 사회가 어떤 사회였는지를 살펴본 뒤에 그것을, 동시대의 개벽사상과 비교하고자 한다. 다만 이 글의 제목을 「이종만의 대동사상과 개벽종교의 개벽사상의 비교라고」 하지 않고, 「이종만의 개벽사상 이라고」 한 이유는 앞 발표자의 제목에 ‘대동사상이’ 들어 있어서 대동사상에, 대한 내용은 어느 정도 소개되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복을 피하기 위해 ‘개벽사상 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보았다.
 
2. 이종만의 대동사상

이종만은 자신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저서를 남기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그가 󰡔광업조선 과󰡕 󰡔농업조선 에󰡕 쓴 권두언이나 「대동일람 서문 이나」 「대동교학 서 취지서」 그리고 당시의 신문에 실린 그의 인터뷰 등을 통해 재구성해야 한다. )

1) 도덕지향과 정신수양

이종만은 1939년 6월 1일에 󰡔삼천리 와󰡕 가진 대담에서66) “선생의 인생의 락(樂)은 어 디에 있습니까?”라는 대담자의 질문에 “나의 락(樂)은 도(道)를 닦는데 있다 고” 답하였다. 이어서 ‘도’란 “옛 성현의 교훈”을 말하고 그, 도를 만분의 일이라도 닦고자 한다고 부연하였다. 여기에서. “옛 성현의 교훈”은 동양고전 개념으로 말하면 ‘교(敎)’에 해당하고, “도를 닦는다"는 것은 ‘수도(修道)’를 말한다.

이로부터 이종만이 옛 성현의 ‘가르침’을 인생의 ‘길 로’ 삼아서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옛 성현의 가르침에 ‘부자 가’ 되 어야 한다는 말은 없다. 단지 “사람들을 구제하라 는” 메시지가 있을 뿐이다. 이종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호의호식하지 않았다.”67) 그래서 대담자가 “그렇다면 당신의 인생의 즐거움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그런데 이종만은 옛 성현의 가르침을 어느 하나로 한정시키지 않았다 석가든 공자든 예수든 “성인은 모두 숭배한다 고” 하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중생 구제를 위한 석가의 구도 원수를 용서하라고 한 예수의 가르침, 도를 실현하기 위해 천하를 주유한 공자의 노력을 본받고자 애쓴다고 하였다.68) 이것은 마치 신라의 최치원이 화랑의 풍류도를 설명하면서 “포함삼교(包含三敎)”라고 말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풍류도가 여 러 성인들의 가르침 중에서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지 않고 두루 수용하였듯이 이종만 역시 동서양의 성인들의 가르침을 두루 실천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대담자는 이와 같은 이종만의 구도의 노력을 ‘정신수양 이라고’ 표현하였고 이, 에 대해 이종만은 정신수양 이외에도 “다 같이 잘 사는 길 을” 찾고 있다고 대답하였다.69) 이로부터 이종만의 궁극적 목적이 “다 같이 잘 사는 사회 를” 만드는 것이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의 정신을 수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대동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정신개벽을 하고 있는 것이다.

---

66) 창랑객(滄浪客), 「사장 방문기 이종만(1) : 씨 사업관, 씨는 대동광업사장 대동, 농촌사장 대동공전교주, (大同工專校主)」, 󰡔삼천리󰡕 11권 7호, 1939년 6월 1일 이 기사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한국- 근현대 잡지자료 <삼천리 에서>” 열람이 가능하다(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ma).

67) “실례지만 長安 부자 처노코 妻妾 거느리지 않은 이 드물고 또 부자 소리 듯는 이면 의례 阿房宮 같은 호화로운 저택을 짓고 그리고는 美衣美食하는 것이 통례인데 선생만은 불과 수천원되는 조고만 한 집에 게시고 寵妾햇단 말 못들었고 남들처럼 美酒美衣하시지도 않으니 선생의 인생의 樂은 어데 에 있음니까.”

68) 李: “나의 書架에는 經書가 노여있어요 그것은. 녯 성현의 이것을, 기회있는 대로 보면서 吾日三省吾身 하는 부즈런으로 이 세상에 아못조록 도음되는 몸으로서 지내려 생각하여요.”

기자: “釋迦서요.”

李: “녜. 釋迦께서는 환락의 王城과 고귀한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人世의 번뇌를 해결코저 중생을 구 제하시려 몸소 그 艱難의 修道를 하시지 안엇슴니까. 저도 이 세상의 슲음과 쓰라림을 다만 조곰이라 도 구하는 몸이 되어지이다 하고 염원하는 길에 섯슴니다.”

기자: “釋迦牟尼뿐이심니까?”

李: “성인은 다 숭배 함니다 기. 독께서는 제 손소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까지 저의 원수까지 용서하실 것을 말슴하였서요 나도. 내 몸이 낫즌 것을 常時 생각하여 아모조록 또 어떠한 경우에든지 남을 용서하고 같이 잘 사라갈 길을 찻는 使徒가 되려해요.”

기자 선생은: “ 漢學의 素養이 깊으시다니 그리면 孔夫子께도.”

李: “네. 論語도 깊이 읽슴니다. 孔夫子께서 늙으실 때까지 轍環天下하시며 세상에 道를 펴시기에 애쓰신 그 정신과 노력을 본받으려고 애씀니다.”

69) 기자 그러한: “ 정신수양 하시는 길 이외에 또 다른 일이 없음니까.” 李: “다 같이 잘살 길을 찻자는 일이외에는 없오이다.”


---

이러한 지향은 1945년에 나온 「대동교학회 취지서 에도」 이어지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해방을 맞은 직후에 쓰여진 이 취지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불타의 자비, 공자의 인의, 예수의 박애는 시(時)와 인(人)은 다를지언정 인류평화의 유일무이한 새생활 원리이니 오직 이 원리의 실천만이 세계평화의 요체이다.

여기에서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불교와 유교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들이 설파한 핵심 윤리가 열거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윤리가 장차 인류평화와 세계평화를 실현시키기 위한 생활 원리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종만이 ‘평화 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전통사상 그중, 에서도 특히 종교사상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가 전통 도덕이나 정신수양에 관심이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것이 ‘평화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종만은 어떤 평화사상을 말했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금광왕’이라는 이미지는 ‘도덕’은 물론이고 ‘평화와도’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2) 산업평화와 인류공영 

이종만의 평화지향성은 그가 ‘금광왕’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1930년대 말부터 이미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1938년 8월에 나온 󰡔광업조선󰡕 2권 6호에 실린 「북지사변(北支事變)과 시국인식 이라는」 글의 첫머리에서 이종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세계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희구하고 애호해 마지않는 한사람입니다. 이 생각은 먼저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희구하고 애호해 마지않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70)

70) 이 발표문에서 인용하는 이종만의글은 가독성을 위해 현대어로 약간 바꿔서 인용하였다.

‘북지사변’은 1937년 7월에 루거우차오(盧溝橋, 노구교) 근처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 린 것을 계기로 일본이, 선전포고도 없이 만주와 조선에 대규모 군대를 파병한 사건 을 말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과 일본 간의 전면 전쟁인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런 사건이 일어난 직후이어서인지 이, 글에서 이종만은 동양평화는 물론이고 세계 평화에 대한 염원을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세계평화의 당위성은 이후에는 “인류동포 나” “만물일체”와 같은 사상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예를 들면 1945년에 나온 「대동교학회 취지서」나 「대동주의 강령」에는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교육에 있어서는 좁고 답답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적 편견을 버리고 보편타당성을 가 진 진리를 지초로 하되, “인류동포 세계일체”의 정신으로써 국민정신의 기조를 삼고...

(「대동교학회 취지서」)

원융화합의 정신으로 세계평화 인, 류일가(人類一家)를 이상으로 한다.

만물일체, 인류평등을 믿는다.


(「대동주의 강령」)


여기에서는 편협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더 나아가서는 인간중심주의까지 탈피해서 인류와 만물을 동등하게 여기는 화합의 정신이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세계평화를 실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종만이 말하는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이 없는 상태도 평화라고 말하고 있다 더. 흥미로운 것 은 이것을 ‘산업평화 라고’ 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 자본주의의 결점을 말하는데 노동과 자본의 대립 현상을 든다. 그리고 사실에 있어서도 과거 어느 한 시기는 노동과 자본이 극도로 대립되어 반목과 불평의 정도를 넘어 심각한 정치투쟁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한다면 일가(一家)의 생활 도 가족끼리 불평이 있으면 행복한 가정을 건설할 수 없는데 하물, 며 전 사회적인 산 업체계에 있어서 서로 반목하고 불평하고 투쟁하고서야 어찌 완전한 산업발달을 도모 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이종만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으로 노동과 자본의 불화(不和)를 지적하면서, 이러한 불화로 인해 산업발달이 저해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산업발달 을 중시 여기는 까닭은 그것이 “잘 사는 길 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937년 12월에 나온 󰡔광업조선󰡕 2권 10호에 쓴 권두언 「대관(大觀)하자 에서」 이종만 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무슨 사업을 하든지 무슨 활동을 하는 것은 궁극에 있어서는 “잘 살아 보자” 는 것이다. 농장・광산 등의 영리사업이든지 교육・문화 등의 사회사업이든지를 불문 하고 모두 자기를 위하고 자기의 잘 살 길을 찾으려는 것이다.

이 글은 1970년대에 우리에게 익숙했던 “잘 살아 보세 라는” 표어가 나오고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흥미롭다 여기에서. 이종만은 산업이나 교육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잘 산다 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잘 살기 위해서는 산업이 발달해야 하는데, 노사 간의 불화가 지속되면 산업의 발달을 저해하므로 노사 간의 평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는 논리이다 이. 점은 위에서 인용한 「산업평화론 의」 글에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말 로부터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비로소 우리의 ‘산업평화 를’ 제창하는 이유가 있지만, 우리 산업이 완전한 발 달을 하자면 첫째 그 기관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일상의 사소한 일이라도 서로 화합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서로, 화합하기 위해서는 어떤 공통된 정신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 므로 우리는 산업평화의 길을 오직 공존공영의 협조정신에 있다는 것 을 여러 번 제창해 온 바인데, 만약 우리 산업체계 안에서 생산의 분배가 균등하지 않거나, 작업상 대우에 차별이 있다거나 하면 이것은 결코 참된 공존공영의 협조정신 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능률 향상에 나태하다든지 소비절약을 잊어버린다면 이것 또한 공존공영의 협조정신은 아닌 것이다.

여기에서 이종만은 노사 간의 관계가 갈등에서 화합으로, 불화에서 협조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를 산업의 발달을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산업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상호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 를 들면 자본가는 분배의 공정과 차별의 철폐를 실천해야 하고, 노동자는 근면 성실 과 근검 절약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산업평화는 노사 간의 상호행복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자본가뿐만 아니 라 노동자까지 포함해서 “모두가 잘 사는” 공존공영의 대동세상을 만들기 위한 길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산업평화는 인류평화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제시되고 있 다고 볼 수 있다. 

3) 실심실학과 평생교육

이종만이 산업의 발달을 중시하고 있는 점은 동아시아사상사의 개념으로 말하면 ‘실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교육에 있어서도 실물을 가르치는 실물 교육을 중시하였다. 1941년 4월에 󰡔광업조선󰡕 권두언에 쓴 「실물 교육의 의의 에서」 이 종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교육이라고 하면 옛날에는 경서 배우는 것으로 알았고 지금은 학교 교육이라 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물론. 우리 생활에 있어서 이러한 기본 교육이 필요하 다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습니다. (…) 그렇다면 우리의 참다운 교육은 어디서 어떻 게 받아야 할 것인가? (…) 어떠한 사물에서든지 우리는 힘써 배우고 힘써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직장에서나 길거리에서나 사교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우리는 끊 임없이 배우고 또 끊임없이 가르칩시다 이것만이. 우리 개인을 완성시키고 사회를 발 달시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이종만은 교육과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개인 완성과 사회 발 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교육중에서도 특히 ‘실물 교육’을 강조하 고 있는데 실물, 교육은 달리 말하면 실학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실물. 교육에 대한 강조는 그가 인류 공영의 길로서 산업 발달을 중시한 점과도 상통하고 있다.


이종만이 실물 교육을 강조하는 이유는 교육이 실생활과 결부되어야 한다는 실학적 태도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대동교학서 취지서」(194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종래의 교육은 실생활에서 유리된 이른바 학원 교육이었고 종래의 산업은 교학을 떠 난 고역이었다 이리하여. 교학과 근로가 서로 분리될뿐더러 교학하는 자는 교학만 전 하고, 근로하는 자는 근로에만 몰두하여, 교학 없는 자와 근로 없는 자가 생겨나게 되니 이는, 국민을 기형화하는 것이다 인생은. 모름지기 평생 교학 평생 근로로 수련 과 보은에 끊임이 없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문화가 뒤떨어지고 산업이 초창기에 있 는 우리 조선 민족으로서는 교학과 근로의 일체화, 보편화, 평생화는 절대로 긴요한 것이다 이것이. ‘직장 즉 교학’, ‘교학 즉 직장 을’ 제창하는 까닭이다.

여기에서 이종만은 교육과 생활의 분리 교육과 노동의 분리를 지적하고 있다. 즉 배움과 생활, 배움과 노동이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노동이나 직장을 하나의 인격 완성을 위한 활동이자 마당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 래서 그는 ‘평생 교학’ 과 ‘교학의 평생화 를’ 주창한다 지. 금으로 말하면 ‘평생 교육’에 해당한다 이미 이 당시에 현대적인 평생 교육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놀랍다. 이 또한 우리가 아는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근대적 실학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근대적이라기보다는 ‘현대적 이라는’ 편이 어울릴 것 같다.

한편 이종만의 실학관의 또 다른 특징은 단지 ‘실용실학 이나’ ‘산업실학 만을’ 주창한 것이 아니라 도덕성까지 겸비한 ‘실심실학 을’ 지향했다는 점이다.71) 그리고 이런 태도 는 앞에서 살펴본 옛 성인을 흠모하는 종교적 지향성과도 상통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45년에 나온 「대동교학회 취지서 에는」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우리는 마땅히 장차 도래하는 세계의 선구가 되기를 기약할 것이요 이러함으로, 써 우 리 민족의 천품(天稟)을 발휘하여 인류의 진운(進運)에 기여함이 될 것이다 이에. 기 초가 되는 것은 교육과 산업의 개조다 교. 육에 있어서는 편협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적 편견을 버리고 보, 편타당성을 지닌 진리를 기초로 하되 인류동포 세계일체의 정신 을 국민정신의 기조로 삼고, 종교와 과학의 조화, 교장(敎長)과 직장(職場)의 합일로 양익(兩翼)을 삼을 것이다. 종교를 떠난 과학은 항상 개인에 있어서는 물욕의 도구, 국가에 있어서는 침략의 폭력을 이루기 쉬우니 자비와, 인애의 근본정신 위에 선 과 학이야말로 능히 이용후생의 본연한 성능을 발휘할 것이다 산업도. 종교를 떠날 때에 개인에 있어서는 물욕의 추구가 되고, 국가에 있어서는 침략의 동기가 되는 것이니, 세계가 최근에 경험한 양대 전후의 참화는 실로 종교를 떠난 과학과 산업에서 온 것 이다.

--
71) 일본의 유학연구자인 오가와 하루히사는 근대 일본의 실학은 실리와 실용만을 추구한 실용실학이자 실업실학이었다고 비판하면서 실심 도, (= 덕심)까지 같이 추구한 조선후기의 홍대용과 같은 실심실학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오가와. 하루히사 실심실학, 「 개념의 역사적 사명」, 󰡔한국실학연구󰡕 18, 2009.
--

여기에서 이종만의 세계 대전의 원인을 과학과 산업이 ‘종교를’ 떠난 데에 있다고 진단하고서 종교와, 과학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양자가 겸비된 상 태야말로 ‘이용후생 이’ 실현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용후생 은’ 조선의 실학자들 이 사용한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홍대용과 정제두는 도덕과 양심 이 바탕이 된 실학을 ‘실심실학 이라고’ 하였다 이종만도. 도덕과 종교에 바탕을 둔 과 학과 산업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실심실학자 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다른 곳에서는 이와 같은 실심실학적 태도를 “물질과 정신의 통일 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1940년 3월에 󰡔광업조선󰡕 제5권 3호에 쓴 권두언 「물질과 정신의 통일이」 그것이다.

우리는 왜 물질적 생활이 윤택하지 못하며 정신적 활동이 풍부하지 못한 것은 한탄하 는가? 이 결함은 오로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이 물질과 정신을 따로 떼여서 어느 한 편만을 편협하게 생각하는 데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 령 우리가 물질적 생 활에 탐닉해서 불의와 부덕을 감행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반면에 정신적인, 유지에만 골몰해서 현실을 떠난 고담준론만 일삼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이런 폐해의 적절한 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이종만은 정신과 물질, 물질과 정신의 어느 한 쪽에만 치우치는 폐단을 지 적하면서 양자를 균형있게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정신이 실심이라 고 한다면 물, 질은 실학에 해당한다 이종만이. 보기에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정 신과 물질, 실심과 실학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원불교. 식으로 말하 면 물질개벽과 정신개벽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으로 이종만의 사상을 ‘도덕’, ‘평화’, ‘실학 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 펴보았다 이. 세 가지 키워드는 그가 대동세계를 건설하는데 핵심이 되는 가치들이다. 그런데 이 세 가치들은 동시대의 개벽종교에서도 강조되고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으 로 이종만이 지향한 가치와 사상을 개벽종교의 그것들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3. 개벽종교와의 비교

지금까지 살펴본 이종만의 사상은 동학 천도교나/ 원불교와 같은 개벽종교에서도 대부 분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하에서는. 하나씩 차례대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먼저 <도덕지향과 정신수양 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 덕지향과 정신수양은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이다 다만. 19세기말~20세기초는 서세동점의 영향으로 이런 전 통이 흔들리고 있던 시기였다 이에. 대해서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는 󰡔동경대전󰡕 과 󰡔용담유사 에서󰡕 “도성립덕(道成立德)”이라고 하여 새로운 “도덕수립 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인의예지는 앞선 성인의 가르침이지만 수심정기는, 내가 다시 정한 것이 다”(「수덕문 고」) 하면서 과거의, 구도덕이 아닌 새로운 신도덕을 제창한 것이다 나아. 가서 그 신도덕을 몸소 실천했는데 가령 자신이 거느리던 두 노비를 해방시키고 수, 양딸과 며느리로 삼은 것이 그러한 사례이다.

최제우를 이은 해월 최시형도 “반상(班常)의 구별은 사람이 정한 것이다 하늘은. 반상 을 구별하지 않는다”(󰡔해월신사법설󰡕「대인접물 고」) 하면서, 천민 출신인 남계천을 전 라도의 통학을 통솔하는 ‘편의장 이라는’ 높은 직책에 임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만물 도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 고” 하는 만물시천주(萬物侍天主) 사상까지 설파하면서 인간, 이외의 존재까지도 인간과 같은 하늘님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존엄과 평등사상은 캉유웨이가 󰡔대동서 에서󰡕 말한 “인종과 계급의 차별이 없 고” “인간과 짐승의 구별이 없이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는” 대동세상 그리고, 이종만 이 「대동교학회 취지서 와」 「대동주의 강령」에서 말한 “인류동포, 세계일체” “만물일 체, 인류평등 의” 대동세계와 상통한다. 특히 이종만이 「대동주의 강령」에서 말한 “인 (人)과 물(物)의 신화(新化)와 신화(神化)”는 사람과 사물을 새롭게 하고 신성화한다는 점에서, 해월이 󰡔해월신사법설󰡕「개벽운수 에서」 “인과 물이 새롭다(人與物亦新乎)”고 한 말이나, 천도교를 창시한 의암 손병희가 󰡔의암성사법설󰡕에서 설파한 “인여물개벽 설(人與物開闢說)”과 상통한다. 이렇게 보면 캉유웨이, 동학 천도교/ , 이종만이 하나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서양 과학의 위력 앞에서 도덕을 강조했지만 그, 도덕은 전통 도덕에만 머물지 않았고,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보다 확장된 새로운 도덕이었다.

두 번째로 <평화사상과 인류공영 에> 대해서도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해. 월 최시형 은 “천지가 만물을 낳은 부모 라고” 하는 ‘천지부모설’을 제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울러 그 결과로서 만물은 천지라는 부모에게서 나온 동포라고 하는 ‘만물동포설 또’ 한 설파하였다 동학을. 이은 천도교에서도 이돈화의 ‘한울’(󰡔신인철학󰡕, 1931)이나 ‘세계일가’(󰡔당지󰡕, 1946) 개념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세계주의 를’ 표방하였다. ) 뿐만 아니라 원불교의 제 대2 지도자였던 정산 송규도 원불교는 ‘세계일가 와’ ‘세계주의 를’ 표방한다고 말하였다. ) 이러한 사상들은 앞에서 살펴본 이종만의 “인류동포 세계일, 체, 일류일가” 사상과 상통하는 것이다.

평화사상 역시 개벽종교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특히 동학은 생명사상 에 바탕을 둔 평화사상을 말하였다 가. 령 최시형은 “어린 아이도 하늘님을 모시고 있 기 때문에 함부로 때리지 말라 는” 설법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사상이 동학농민 군의 규율에도 반영되어, 「사대명의(四大名義)」에 “절대로 생명을 해치지 않는다(切勿傷命)”는 조항이 들어가 있다.74) 1919년의 삼일독립운동 때 비폭력 평화운동의 형태 를 취한 것도 이러한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다만 이종만과 같은 ‘산업평화 사상은’ 개벽종교에서는 직접적으로 찾아보기 어렵다. 그 이유는 개벽종교는 원불교식으로, 말하면 도학과 과학 중에서 ‘도학 에’ 중점을 두 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종만은 과학 쪽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종만이든 원불교든 도학과 과학 정신개벽과, 물질개벽 중에서 어느 하나만 중시한 것은 아니다 양자. 모 두 ‘겸전(兼全)’해야 한다고 했지만 구, 체적인 실천 상에서는 상대적으로 각각 도학 수( 양 과) 과학 산업 을( ) 중시하는 방향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실심실학과 평생교육>을 보면, 이종만과 마찬가지로 개벽종교에서도 종 교와 과학의 조화를 지향하고 물, 질과 정신을 분리시키지 않으며 직, 장과 교육을 병행 하고자 했다. 이런 측면은 특히 원불교에서 두드러진데, “도학과 과학의 병행 이나”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는” 슬로건 또, 는 생활 속에서 불법을 찾는 ”생활 불교 를” 정체성으로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이종만이 1940년 8월에 쓴 󰡔광업조선 의󰡕 권두언 「보은의 생활 에서」 “사회 에 대한 감사의 마음 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러한, 점도 원불교의 은사상(恩思想)과 상 통한다. 먼저 이종만의 말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의 신명(身命)은 실로 사회 각층의 무수한 인간의 협력의 소산으로 길러진 것임 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을 누리고 있는 동안 언제나 사회에 대한 은공 (恩功)을 깊이 느끼지 않을 수 없는데 (…) 이 세상에서 삶을 누리고 있는 이상, 그 삶이 존재하고 길러지는 근본을 생각하여 불평을 바꾸어 감은(感恩)의 길을 택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오직 보은(報恩)의 생활을 함으로써 이 사회를 더욱 유복 하게 하고 그, 결과는 우리 일대의 행복을 증진함에 그칠 뿐 아니라 대대, 손손 그 그 늘을 두텁게 할 수 있을 것이다.

1939년 2월에 나온 󰡔광업조선󰡕 4권 2호에 쓴 「공존공영(共存共榮)」에서도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이 세상은 나 혼자만 사는 세상이 아니다. 또 나 혼자만 살 수 없는 세상이다 남과. 내가 서로 얽히어 비로소 삶을 얻게 된 세상이다.

여기에서 이종만은 세상은 나 혼자서는 살 수 없고, 나 이외의 것들의 도움 덕분에 살아가고 있으며 따, 라서 그들의 도움을 ‘은혜’로 느끼면서[感恩], 그 은혜에 보답하는 보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원불교의. 교리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상이 원불교의 ‘은(恩)’ 사상과 유사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원불교에서도. 내가 나 일 수 있는 까닭은 나 아닌 것들의 도움이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는 ‘지은(知恩)’과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보은(報恩)’ 사상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

74) 동학농민군의 「사대명의에」 대해서는 박맹수 전봉준의, 「 평화사상 통일과」, 󰡔 평화 호󰡕 9-1 , 2017, 84-85쪽 참조.

4. 맺으며

지금까지 이종만의 대동사상을 “도덕, 평화 실학 이라는, ” 키워드로 살펴보고 그것과, 개벽사상과의 공통점을 고찰하였다 물론. 이종만과 개벽종교 사이에는 유사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과학과 산업에 대한 강조의 정도도 다르고 조, 직 의 형태도 종교단체와 산업단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즉 최제우나 최시형, 또는 박중빈이나 송규가 한 종교의 창시자나 리더들이었다고 한다면, 이종만은 한 기업의 창업자나 경영자였다. 뿐만 아니라 이종만이 개벽종교에서와 같은 ‘선천 후천 의- ’ 운도 설(運度說)을 믿었다는 흔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모든 차별이 사라진 대동세계를 꿈꾸었다는 점에서 같다. 특히 이종만은 광부나 농민과 같은 노동자들의 행복과 복지 실현에 남다른 관심을 가 지고 있었고, 이러한 점은 당시에 농민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한 천도교도 공유 하고 있었다 이종만이. 창간한 󰡔농업조선 에󰡕 천도교와도 관련이 깊은 이성환(李晟煥) 의 글이 실려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이성환은 동경유학생으로, 1925년에 천도 교에서 조선농민사를 창립하고 󰡔조선농업 을󰡕 창간할 당시의 주역이었다 이종만. 식으 로 말하면, 당시의 천도교와 이종만은 ‘농업평화 라는’ 이상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 다.

이러한 점에서 이종만은 넓은 의미에서 근대 한국의 개벽사상 내지는 개벽운동의 한 흐름에 넣어도 큰 무리가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참고문헌>

󰡔광업조선󰡕, 1936~1940. 이종만, 「대동일람 서문」, 1941.

「대동교학서 취지서」, 1945.

창랑객(滄浪客), 「사장 방문기(1) : 이종만씨 사업관, 씨는 대동광업사장, 대동농촌사 장 대동공전교주, (大同工專校主)」, 󰡔삼천리󰡕 11권 7호, 1939년 6월 1일

박맹수, 「공공하는 철학에서 본 동학의 공공성, 『생명의 눈으로 보는 동학』, 서울 모시는 사람들, 2014.

박맹수, 「전봉준의 평화사상」, 󰡔통일과 평화󰡕 9-1호, 2017.

방기중, 「일제말기 대동사업체의 경제자립운동과 이념」, 󰡔한국사연구󰡕 95, 1996. 유병덕, 󰡔원불교와 한국사회󰡕, 시인사, 1986(개정증보판).

이준열 글・이달호 편저, 「대동사회를 꿈꾼 ‘대동콘체른’ , 」 󰡔선각자 송강 이준열의 삶 – 3・1운동 고학, 당 교육, 광주학생운동 대동사업의, 증언 혜안󰡕, , 2012. 전봉관, 「금광왕 이종만의 ‘아름다운 실패’ -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힌 유일한 ‘자본 가 의’ 31전 32기」, 󰡔럭키경성 – 근대 조선을 들썩인 투기 열풍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살림출판사, 2007.

조성환, 「현대적 관점에서 본 천도교의 세계주의 : 이돈화의 지구주의와 지구적 인간 관을 중심으로」,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84, 2020.

최윤경, 「일제강점기 이종만의 대동콘체른 운영에 대한 소고」, 󰡔울산문화연구󰡕 2집, 2010.





<조성환 박사 프로필>

서강대학교에서 수학과 철학 전공. 와세다대학에서 중국사상사 연구.연구 분야는 한국근대사상사. 저서로 <한국 근대의 탄생 – 개화에서 개벽으로>.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 – 퇴계・다산・동학의 하늘철학>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와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지금은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 교수로 일하고 있다. <발제문>
=====

이종만 선생의 개벽사상과 이상국가에 대한 논평
임형진 교수(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우선 조성환 박사님의 연구를 통해서 많이 배웠음을 고백합니다. 솔직히 이종만 선 생에 대해서 아주 작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저는 조 박사님의 원고를 읽으면서 그 분의 경제적 철학과 사상적 배경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 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조 박사님은 일제하 조선 최고의 부자였던 남호 이종만 선생의 경제 사회적 실천을 민족종교에서 사용하는 용어인 개벽사상과 이상국가와 연결시켜서 풀어주고 계십니
다. 특히 이종만 선생의 대동세계관을 도덕 지향과 정신수양, 산업평화와 인류공영, 실심실학과 평생교육이라는 세 개의 주제로 구분하여 일목요연하게 제시하면서 이것 들의 사례를 들고 한편 민족종교의 개벽사상과 비교하면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아주 훌륭한 비교법이자 분석기법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이종만 선생의 사회 적 활동 등을 조금만 보완하고 양을 늘리면 경제적 실천과 종교적 이상사회가 결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주는 새로운 연구 영역이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조. 박사님의 치 열함을 기대합니다.
구체적으로 이종만 선생의 대동사상을 첫째, 도덕지향과 정신수양은 동학 천도교의 도성립덕과 반상을 구별하지 않은 사례와 인여물개벽설 등과 연결해서 그 합일점을 제시합니다. 두 번째 산업평화와 인류공영은 동학 천도교의 천지부모설과 만물동포설, 세계일가 사상과 생명사상으로 연계시킴으로써 이종만 선생의 대동세계관에 종교의 심오함을 연계시켰습니다 세. 번째의 실심실학과 평생교육은 원불교의 도학과 과학의 병행,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라는” 슬로건, 생활불교와 은사상(恩思想)과 상통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논평자의 입장에서 조 박사님의 주장에 대부분 동의합 니다.
다만 큰 틀에서 과연 이종만 선생의 대동적 입장이 개벽이라는 차원이 다른 종교성 과 연계시키기에는 좀 더 보완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종교는. 아무래도 개인 의 신앙심을 기초로 마음과 정신을 정화하여 이상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믿음 체계인 데 이종만 선생의 입장이 이러한 종교적 신앙, 믿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실생활에서 의 실천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별 인간의 최종 목표인 이상 국가를 달성하는 노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종교의 영역과 실생활의 영역이 구분되어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입니다 오. 히려 저는 이종만 선생의 경제적 노력이 그가 생각하는 실제 생활 속에서의 이상촌을 행한 실천 적 노력이었다고 하고 다만 그것이 민족종교가 이야기하는 개벽세상을 향하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일제하에는. 그런 사례가 백산 안희제 선생이 중국 만주의 동경성 인근에서 건립했던 발해농장의 경우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 다.
발해농장의 경우 백산 선생은 대종교인으로 만주에 흩어져 살고 있던 한민족을 한 군데로 모아서 노동과 교육을 동시에 달성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설치 운영하였던 것 이지 대종교의 교리에 입각한 이상세계를 이루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는 이종만 선생의 업적을 더욱 드러내고자 한다면 그의 생애에서 민족종교 가 영향을 미친 바가 무엇이었으며 그 결과 그의 경제적 행위들이 개벽적 이상국가와 이렇게 맞닿아 있다고 함이 어떨까 싶습니다 예를. 들면 조 박사님도 언급하신 천도 교인 이성환과의 관계가 조금 더 부각시켜서 이종만 선생의 경제 사회적 실천에 천도 교가 그리는 이상사회와 이렇게 연계되었다 하는 것으로 분석해 보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 좋은 글이 더욱 훌륭한 완성을 위해서 몇 가지만 질문 및 코멘트를 드리 고자 합니다. 우선 캉유웨이(康有爲)의 󰡔대동서(大同書)󰡕를 소개하면서 ‘차별없는 사 랑’이 󰡔예기(禮記)󰡕「예운(禮運)」과의 차이라고 하셨는데 흔히 차별없는 사랑하면은 겸 애설을 들고 있습니다. 겸애설과 대동사상의 같은 점과 차이가 있는지요 있다면. 어떤 것이 그러한지요?
정제두는 실학자라기보다는 양명학자로 알려진 인물인데 그분도 실학을 ‘실심실학’ 이라고 하였는지요?
그리고 9쪽에 “천도교를 창시한 의임 손병희 라고” 쓰셨는데 의암은 동학을 천도교 로 개칭한 분입니다 동학과. 천도교 모두 창도자는 수운 최제우입니다. 또한 동학 천 도교에서도 실제 생활세계에서의 학문을 중시 여겼습니다 도가. 일반 백성에 도움이 되지 못하다면 의미가 없다고 한 것이지요 그. 래서 동학 천도교를 하는 사람들은 전 염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실생활에서 적용되는 개인위생을 철저하게 하라고 교육시켰습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보성전문을 비롯한 많은 교육기관을 운영 또는 지원해 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한번 오늘 이종만 선생에 대해 깊이 있는 공부를 하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임형진 교수 프로필>
경희대 정치학 박사 성균관대 정치학 석사 현 동학학회 회장 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전 삼균학회 회장 전 천도교종학대학원 원장


==

조성환 - <이종만 선생의 개벽사상과 이상국가>
로 부터의 인용

[대담자는 이와 같은 이종만의 구도의 노력을 <정신수양> 이라고’ 표현하였고 이, 에 대해 이종만은 정신수양 이외에도 “다 같이 잘 사는 길 을” 찾고 있다고 대답하였다.69) 이로부터 이종만의 궁극적 목적이 “다 같이 잘 사는 사회 를” 만드는 것이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의 정신을 수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대동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정신개벽을 하고 있는 것이다.]
...

[그가 전통 도덕이나 정신수양에 관심이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것이 ‘평화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종만은 어떤 평화사상을 말했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금광왕’이라는 이미지는 ‘도덕’은 물론이고 ‘평화 와도’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
...

[교육에 있어서는 좁고 답답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적 편견을 버리고 보편타당성을 가진 진리를 지초로 하되, “인류동포 세계일체”의 정신으로써 국민정신의 기조를 삼고...] (「대동교학회 취지서」)

[원융화합의 정신으로 세계평화 인류일가(人類一家)를 이상으로 한다.]

만물일체, 인류평등을 믿는다.]  
(「대동주의 강령」)
...



[이종만이 <실물 교육을 강조>하는 이유는 교육이 실생활과 결부되어야 한다는 실학적 태도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대동교학서 취지서」(194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종래의 교육은 실생활에서 유리된 이른바 학원 교육이었고 종래의 산업은 교학을 떠 난 고역이었다 이리하여. 교학과 근로가 서로 분리될뿐더러 교학하는 자는 교학만 전 하고, 근로하는 자는 근로에만 몰두하여, 교학 없는 자와 근로 없는 자가 생겨나게 되니 이는, 국민을 기형화하는 것이다 인생은 모름지기 평생 교학 평생 근로로 수련과 보은에 끊임이 없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문화가 뒤떨어지고 산업이 초창기에 있 는 우리 조선 민족으로서는 교학과 근로의 일체화, 보편화, 평생화는 절대로 긴요한 것이다 이것이. ‘직장 즉 교학’, ‘교학 즉 직장 을’ 제창하는 까닭이다.]

...
[한편 이종만의 실학관의 또 다른 특징은 단지 ‘실용실학 이나’ ‘산업실학 만을’ 주창한 것이 아니라 도덕성까지 겸비한 <실심실학 을’ 지향>했다는 점이다.71) 그리고 이런 태도 는 앞에서 살펴본 옛 성인을 흠모하는 종교적 지향성과도 상통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45년에 나온 「대동교학회 취지서 에는」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우리는 마땅히 장차 도래하는 세계의 선구가 되기를 기약할 것이요 이러함으로, 써 우 리 민족의 천품(天稟)을 발휘하여 인류의 진운(進運)에 기여함이 될 것이다 이에. 기 초가 되는 것은 교육과 산업의 개조다 교. 육에 있어서는 편협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적 편견을 버리고 보, 편타당성을 지닌 진리를 기초로 하되 인류동포 세계일체의 정신 을 국민정신의 기조로 삼고, 종교와 과학의 조화, 교장(敎長)과 직장(職場)의 합일로 양익(兩翼)을 삼을 것이다. 종교를 떠난 과학은 항상 개인에 있어서는 물욕의 도구, 국가에 있어서는 침략의 폭력을 이루기 쉬우니 자비와, 인애의 근본정신 위에 선 과 학이야말로 능히 이용후생의 본연한 성능을 발휘할 것이다 산업도. 종교를 떠날 때에 개인에 있어서는 물욕의 추구가 되고, 국가에 있어서는 침략의 동기가 되는 것이니, 세계가 최근에 경험한 양대 전후의 참화는 실로 종교를 떠난 과학과 산업에서 온 것 이다.]



3] 이달호- 민족자본가 이종만 선생의 대동사상 실천운동

 민족자본가 이종만 선생의 대동사상 실천운동

이달호 소장 수원화성연구소(

Ⅰ 서언

Ⅱ ‘대동(大同)’의 의미와 인간 이종만

1. ‘대동 의’ 의미    2. 인간 이종만 Ⅲ ‘대동공동체’의 창설    1. 대동광업주식회사의 설립

2. 대동광산중앙조합    3. ‘대동공동체’의 해체

Ⅳ 이종만선생의 농촌이상향 건설과 계몽운동

   1. 농촌이상향 건설    2. 민족교육운동과 출판활동

Ⅴ 이종만선생의 교유관계

1. 허헌

2. 이준열

3. 김창준

4. 대동과 함께한 사람들 


Ⅵ 북에서의 활동

1. 조국통일운동

2. 지하자원개발의 선구적 역할 


Ⅶ 결언


===


I. 서 언

남호(南湖) 이종만(李鍾萬,1885.1.14.­1977.1.17, 월성 선생에)) 대한 지칭은 광산왕, 기부왕, 자선사업가 사회활동가 평양, ,  애국열사릉에 묻힌 유일한 민족자본가 등 실로 다양하다 그를.  단순히 친일파로 규정지을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남쪽에서는 일제 말 기의 ‘친일 행적 이’ 문제되기도 하였다. ) 

 

 한 인물을 평가할 때 그의 생애의 일부분만 떼어내 그 부분만 초점을 맞춰 강조하거 나 미화한다면 이는 매우 일면적이고 편파적 평가에 빠지기 쉽다. 따라서 인물에 대 한 평가는 전 생애를 대상으로 해야 하며 특히 인생 말년 삶의 궤적, 즉 관 뚜껑을 덮는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본고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지점은 대동사상과 이를 바탕으로 한 농촌이상향 건설과 민족교육운동 그리고 민족자본가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그가 말년에 선택한 북행과 관련하여 이 행위가 결코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그동안 쌓아왔던 교유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종만선생의 인생을 크게 세시기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태어나 1932年 이전까지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는 시기 즉 28전 29기의 시기, 둘째 영평광산을 매각하면서 1937년 새롭게 대동광업 주 을( ) 설립하고 그가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대동사회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던 시기 세,  번째는 1945년 이후 활동과 북으로 올라가 새사회 건설과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한 시기이다. 

  

이종만선생의 대동사상에 기반한 자주적 실천 활동에 대한 조명은 방기중교수에 의해 연구된 바 있다. ) 

 

이종만선생의 일제시기의 여러 사업체 대동광업 주( ), 대동광산중앙조합 주식회사대동, 출판사 대동, 농촌사 대동공전,  등을 통칭 ‘대동콘체른’, ‘대동사업체’로 부르고 있으나 본고에서는 ‘대동공동체’라고 칭하겠다. 왜냐하면 위 사업체와 기관 중 이익을 창출하 는 곳은 오직 대동광업 주( )뿐이었다 이종만선생이.  언급한대로 돈을 벌기위해 대동광 업 주 을( ) 창설한 것이 아니라 광업에서의 공동체 건설과 자영광의 창설, 농촌에서의 자작농 실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학교 건립과 출판활동 등이 최종 목적이었기 때 문이다. 

  

그리하여 본고에서는 일제시기 대동광업 주 을( ) 근간으로 벌인 광산조합 설립, 농촌이 상향 건설, 공업과 농업발전을 위한 청년교육운동 공업과,  농업발전을 위한 출판운동 을 벌이다가 북으로 올라가 조국통일운동과 지하자원개발과 채취공업에 초석을 놓은 민족자본가 이종만선생의 일생을 살펴보고자 한다. 

  

주요자료는 일제시기에 신문 전면에 ‘대동공동체’에 대해 기사화한 『매일신보』 1937 년 6월 12일자, 19일자 자료와 1939년도 6월 1일에 발행한 잡지 『삼천리 의』 「이종만 씨 사업관 에서」 그의 사상 사업관 계, , 획 등을 참고하였다 그리고.  ‘대동공동체’의 설 립 과정에 대해서는 전무이사 이준열의 자서전 『송강소사 가』 있고 당시 신문 『동아일 보』 『, 조선일보』 등이 참고가 된다. 

 

북에서의 활동은 이종만선생이 서거한지 7년이 지난 후인 1984년 『로동신문』 전면에 그의 일생이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그를 소재로 한 백보흠의 소설「천암산 이」 참고 된다 다만.  90세인 1974년 본인이 쓴 수기는 찾지 못하였다.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일제 강점기는 물론 해방이후의 활동과 입북 후 조국통일운 동과 자주적 새사회 건설에 이바지한 행적까지 조명해야 인간 이종만선생의 대동사상 과 그의 실천운동에 대한 온전한 연구의 완결성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Ⅱ. ‘대동(大同)’의 의미와 인간 이종만

  

 1. ‘대동 의’ 의미

  

대동(大同)이라는 것은 『서경(書經)』 「홍범」(洪範)에 "네 의견을 경사가 따르고 서민이 따르면 이를 대동이라고 하니 자신은 안락해지고 자손은 좋은 일을 만날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禹) 임금이 천하를 아홉 가지 원칙으로 다스린 결과 온 나라가 화합하게 되는 것을 가르킨다.3)

  

공자는 예(禮)를 잘 운용하면 대동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즉, 천하 사람들이 자 기 집안만을 위하므로 각자 자기 친족만을 친하게 대하고, 자기 자식만을 사랑하며, 재화는 자신의 소유로 삼고, 역역(力役)은 남의 힘을 빌리며, 성곽과 해자로 견고하게 지키고 있는 사회보다는 대문을 열고 놓고 닫지 않는 사회를 ‘대동사회 라고’ 한 것이 다. 

 

공자는 주역의 13번째에 ‘천화동인(天火同人)괘를, 14번째에 ‘화천대유(火天大有)’괘를 놓았다. 이는 새로운 역사를 여는 것이 동인(同人)이요, 대유(大有)로서 대동(大同)하 는 것이라고 하였다 대유. , 즉 내 소유가 사회의 소유이며 화합과 평등을 이루는 공 동의 대유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선한.  사람이 모여 안심하고 고루 잘 사는 사회를 대 동사회(大同社會)라고 한 것이다.4) 그리하여 조선시대 ‘대동법’(大同法)도 ‘모두 고르게 하려는 뜻“이라는 의미에서 붙인 

 

3) 『정조실록 정조』 즉위년 5월 24일 ; 24년 1월 1일.

4) 대산 김석진 대산주역강의, 『 』1, 한길사, 1999.

명칭이다. 1,000여 명이 숙청된 1589년 선조( 22) 기축옥사에서 역적으로 죽임을 당한 정여립도 그가 조직한 단체를 ’대동계‘(大同契)라 했는데 따라서 ”대동 이’ 란 의미는 불온한 생각을 가진 불, 온한 단체라는 의미로 전화되었다. 

1945년 8.15 이후에 발표된 것으로 보이는 「대동교학회 취지서 에서」 대동사상의 전 모를 살필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대동주의 표어 

1. ‘나 라고’ 말자 오직 ‘우리 라고’ 하자 1. 일하면서 가르치고 배우면서 일하자. 

1. 사람이 되면서 일을 하고 일을 하면서 사람이 되자,

1. 내가 만든 물건은 동포가 쓸 물건.

1. 살고자 하는 일인가 일하고자. 사는 목숨이지.

대동교학회 세령

1. 원융화합한 인류사회의 건설을 기함.

2. 교육제도 산업제도를 혁신하여 교장 즉 직장, 직장 즉 교장으로 하야  실물교육의 실현.   

3. 종교와 과학을 조화하여 과학으로 하여금 인류의 진보와 원융화합을 해하는 일이 없게 하기. 

4. 인류의 생활을 극치로 향상시켜 평등해지게 하기를 기함.

여기서 주목할 단어들은 1. ‘원융화합한 인류사회의 건설’, 3. ‘종교와 과학을 조화하 여 과학으로 인류의 진보’, 4. ‘인류의 생활을 극치로 향상시켜 평등해지게’ 등이다. 

 

이는 이종만선생이 추구했던 불타의 자비(慈悲), 공자의 인의(仁義), 야소 기( 독교 의) 박애(博愛), 이 셋을 인류평화의 요체로 보고 오직 이 원리의 실천만이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고 본 것이다.       

2. 인간 이종만 

“제 고향은 울산군 대현면 용잠리라는 반농반어의 포구입니다.”

“옛날 병사가 있어 그들의 전횡이란 실로 언어도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그 저 그들은 특수한 소위 양반이라는 초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억울한 삶을 계속하고 있 었습니다.”

“매일같이 무도한 행동과 언사를 보고 들으며 서당에서 공자왈 맹자왈을 찾던 저의 가슴에는 차츰 어떻게 하면 고향 식구들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게 할까 하는 분 노와 이상이 싹트고 용솟음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위에 비극 참극한 농촌생활에서 그 저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철없는 젊은 심장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서울 에 가자 거기에 가면 훌륭한 삶이 될 수 있다는 막연한 동경이 싹트기 시작하여 가산 

일부를 팔아 여비를 겨우 장만 목선을 타고 상경한 것이 스무살 되던 겨울이었습니 다.”5)

 

20세의 나이에 고향 울산을 떠나게 된 계기는 해안지방의 수병사로 추정되는 관리의 가렴주구에 대한 분노로 시작된다 그의.  언급대로 ‘언어도단’의 학정에 분개하고 어떻 게 하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인가가 서울로 오게 된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그는 1912년 일제가 ‘토지조사령’을 공포한 직후에 ‘농림주식회사 라는’ 것을 세웠고 1919년 3.1운동에도 참가하였다. 

 

경남 울산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나 그 후 가세는 영락하여 그가 경험한 직업 은 어업, 농업 무, 역상 학교,  교원 등 “세상 각양(各樣) 직업은 아니한 것이 별로 없 다 고” 회고하고 있다. 즉 7전 8기 또는 28전 29기의 인생 등이 이종만 선생 앞에 붙 는 상징어인 것이다.   

 

1923년에 세운 중등과정 비인가 고학생을 위한 ‘고학당’을 운영할 때 고학생들과 함 께 석탄을 배달하고 석탄 값을 지불치 못하면 부인의 패물을 차압당하는 일이 비일비 재하였는데 부인은 이를 참고 내조하였다는 일화 광부에, 게 임금을 주려고 꾼 돈으로 50원에 팔려가는 15세 소녀를 70원을 주고 구출한 일화 등 몸소 실천하고 불의를 보 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광산을 운영할 때 광부를 만나면 먼저 “안녕하십니까 얼마나 수고하십니까”라고 정중 히 인사하고 항상, “갱도에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까, 갱부 자신에게 어떤 괴로움이나 생기지 아니 하였나”, “종업원 전체의 가정에 무슨 불만 불화나,  있지 아니한가 하는” 것 등에 노심초사하였다.  

  

경성부 누하정 17번지 집은 대광주의 집 같지 않아 두옥문전이고 기차를 탈 때 2등 표를 사주면 부인이나 소아나 노인 또는 병자를 자기 자리에 앉히는 일6) 등 질소검 박한 생활과 약한자를 위한 실천활동이 비일비재하였다. 

 

5) 『동아일보』 1940년 4월 3일.  

6) 『매일신보』 1937년 6월 19일. 

“일하는 사람이 많아야 세상은 발달된다 일하는.  사람에게는 일하는 만큼 보수가 있 어야 한다 그. 래서 각인의 능률을 있는 대로 발휘하여야 한다 는.” 신념을 갖고 있었

다. 당시 신문에 기사화된 이종만선생의 성격은 중후인자(重厚仁慈)로 표현되고 있다. ‘중 은’ 담력과 신념을 말하고, ‘후’란 인고포용의 덕을 지닌 인자한 성격이라는 것이 다.7)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불경과 성경을 탐독하여 감화 받았다고 하며 “농촌의 무지와 

빈곤”을 타파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기로 하였다고 한다.8)   

 

다음은 대동광업 주( ), 대동농촌사장, 대동공전교주인 이종만의 사업관과 인생철학에 대해 『삼천리 에서』 인터뷰한 1939년 장문의 자료기사이다.

 

“남들은 李鍾萬씨를 마치 朝鮮의 로스차일드요, 카-네기라고 부르며 엇든 이는 천만 장자의 몸이면서 다 찌저진 양복에 각반을 치고 손소 굴속에 드러가 坑夫들과 괭이 잡고 일도 하며 어떤 때는 5전 짜리 전차를 타고 동대문 밧 貧民窟에 나타나 100원 도 주고 1,000원도 주고 도라온다 하여 「海王星」에 나타나는 몬테 크리스트 백작 모 양으로 상상하는 이도 있다.”

백만장자 천만장자인,  그의 소박한 성격을 표현하고 있다 그의.  인상은 “관후유복(寬厚裕福)한 장자풍(長者風)의 거인(巨人)”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실제.  체격도 장대하고 생김새도 후덕한 인상이었던 것이다.  기자가 광업을 택한 이유를 묻자 

“지하에 뭇긴 보물을 즉 하느님이 주신 보물을 그렇게 악착한 수단, 말하자면 제도만 잘 꾸민다면 광부를 착취(搾取)하지 않고라도 악을 쓰지 않고라도 파내일 수 있으며 그 파내인 것은 국가 사회에 둘도 없는 보물이 되어 선용(善用)만 한다면 온 인류의 행복에 바칠 수 있는 것이니까 나의 이상과 성격에 가장 마저요.……나는 단언(斷言) 합니다. 돈을 위하여 이 이상 더 추구하지 않겠어요 나의.  염원(念願)은 「로스차일드」 나 카네기 되는 데에 있지 않어요.” 그의 이상은 돈을 위하여 백만장자 되는데 있지 않다고 단언하고 있다.  

기자가 

“장안(長安) 부자 처노코 처첩(妻妾) 거느리지 않은 이 드물고 또 부자 소리 듯는 이 면 의례 阿房宮 같은 호화로운 저택을 짓고 그리고는 美衣美食하는 것이 통례인데 

 

7) 『매일신보』1940년 6월 25일. 

8) 『매일신보』1940년 6월 25일.

선생만은 불과 수천원 되는 조고만한 집에 게시고 寵妾햇단 말 못 들었고 남들처럼 

美酒美衣하시지도 않으니 선생의 인생의 樂은 어데에 있음니까.” 라고 질문하자

 

“나의 樂 道은 를 닥는 데 있소이다 라고.” 답하며 “좋은 經典을 十讀 百讀 하는 사이 에 옛 성현의 교훈이 저절로 알려저요 그분들의.  하신 자최의 萬分一이라도 닥거볼려 고 생각하는 점이외다 나의.  書架에는 經書가 노여있어요 그것은.  녯 성현의 이것을,  기회있는 대로 보면서 吾日三省吾身 하는 부즈런으로 이 세상에 아못조록 도음되는 몸으로서 지내려 생각하여요.……釋迦께서는 환락의 王城과 고귀한 왕자의 지위를 버 리고 人世의 번뇌를 해결코저 중생을 구제하시려 몸소 그 艱難의 修道를 하시지 안 엇슴니까. 저도 이 세상의 슲음과 쓰라림을 다만 조곰이라도 구하는 몸이 되어지이다 하고 염원하는 길에 섯슴니다.……성인은 다 숭배 함니다 기. 독께서는 제 손소 십자가 에 못 박히시면서까지 저의 원수까지 용서하실 것을 말슴하였서요 나도.  내 몸이 낫 즌 것을 常時 생각하여 아모조록 또 어떠한 경우에든지 남을 용서하고 같이 잘 사라 갈 길을 찻는 使徒가 되려해요.……論語도 깊이 읽슴니다. 孔夫子께서 늙으실 때까지 

轍環天下하시며 세상에 道를 펴시기에 애쓰신 그 정신과 노력을 본받으려고 애씀니

다 라.” 며 

 다 같이 잘 살 길을 찾자는 일 이외에는 없다고 마무리 한다. 즉 불교 기, 독교 유교, 등을 모두 아우르는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더나아가 장래 철같은 조직체가 완성되면 “돈 버는 일에서 아주 떠나서 교육사업같은 人世의 英材를 양육하는 일에 일생의 힘을 다 바치려 한다”며 미래의 꿈은 공과대학, 농과대학 광산과대학, 등 종합대학을 설립하겠다는 포부를 말하고 있다. 9)

이종만선생은 1945년 8.15 후에는 조선산업건설협의회 위원장으로 있었으며 『독립신 보 를』 운영하다가 강제 폐간된 후 강원도 일대의 지하자원 개발을 권고하는 이승만의 권고를 거절하였다. 

 

더 나아가 미군이 실시한 ‘적산불하 는’ 산업파괴라며 “독립정부수립이 되지 못하여 산 업보호정책이 확립되지 못한 것이 중대 원인이다 라” 며 8.15 후 직장을 사수하여온 종 업원 근로자 대중의 복리를 위한 시책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며 협동조합 국가를 지향‘10)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9) 『삼천리 제 권』 1 제 호7 「이종만씨 사업관」, 1939년 6월 1일.

10) 『공업신문』 1947년 5월 6일자.

Ⅲ. ‘대동공동체 의’ 창설

 1. 대동광업주식회사의 설립

1934년 영평광산을 본격적으로 개발하면서 1936년에 이르러 상당한 영업이익을 올리 고 그해에 조선 최고의 장진광산 개발권을 확보했다 영평광산에는.  광부가 650명 직, 원은 경성고공 출신 7명을 포함하여 모두 62명이었으며 광구면적은 5백만 평이었다. 이 영평광산을 일본인이 경영하고 있는 동조선광업주식회사에 155만원을 받고 매각했 다.  

 

마침 전무 송강 이준열도 7년의 형기를 마치고 1937년 3월에 만기 출소한 시점이었 다 송강은.  대동광업 주 에( ) 참여하게 된 사연을 그의 자전적 글 『송강소사 에서』 다음 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당시 중외일보 사장이었던 몽양 여운형 선생이 경영난을 겪고 있으니 신문사 이사로 취임해 함께 어려움을 이겨나가자고 하였다. 그렇지만 정중히 거절하였다. ……며칠 

뒤 남호 이종만 선생이 찾아와 영평광산에서 요양할 것을 권하며 함께 일할 것을 제

안하였다.”11)

이종만 자신이 도장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동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대동광업 주 는( ) 1937년 6월 6일 천향원 별장에서 창립총회를 완료하고 장진광산개발 을 주목적으로 기타 일반 광업관계 업무 경영을 목적으로 자본금 300만원으로 창립 되었다.

 

장진광산은 구한국 당시 보성학교 창립자인 이용익 등이 경영하던 국영광산이었는데 등록 출원구는 400여개, 4억여평에 달하였다. 특히 종업원에게도 공로에 의해 주식을 분양할 계획이었다.

 

사장은 이종만 전무,  이준열 상무,  겸 장진사업소장 이영조 상무, 겸 경리과장 정현모, 총무과정 이성환 광무과장,  민정기 상임,  감사역 허헌, 이훈구 등이었다.12)

 

본점 주소는 경성부 견지정 111이고 주식수 60,000, 주주수 114명, 대주주는 이종만

(48,371), 이영조(5,000) 이준열(1,000) 등이었다.13) 

  

 

11) 『송강소사』 59쪽.

12) 『매일신보』1937년 6월 9일.

13)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1939년판 동아경제시보사), .

이후 자료에는 광무과장에 김용암과 검사역에 김진우가 보이는데 김용암은 당시 사회 주의자로 이준열전무의 경성고공 후배였다. 

 

한편 평북 자성군 이평면 장토면 자성면, ,  소재 850,700평에 광업권을 설정하였고 ) 금광은 전 조선에 수십 처에 있었고 철광 매장량 1억만 톤짜리가 평안북도에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년산 1억 원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 

2. 대동광산중앙조합

대동광업 주 가( ) 여타 다른 기업체와는 전혀 다른 점은 광주와 광산노동자가 이익을 공 동으로 분배한다는 목표였다. 또한 일하는 사람에게는 보수를 풍부하게 할 계획이었 다.   

 

이러한 정신에 기초하여 노자협조의 표본이 될 만한 이익공동분배의 기관을 조직하였 으니 이것이 대동광산중앙조합과 그 하부조직인 지방조합이다 지방조합은.  함평조합, 초산조합, 태천조합 등이었고 계획 중인 조합으로는 자성조합 의성조합 동, , 흥조합 등 이었다. 즉 대동광산중앙조합이 그 산하에 각 지방 조합을 나누어 조직한다는 방침이 었다. 이 조합에서 군소광산에 대한 융자를 행하여 이로부터 수입의 일부를 기금에 충당하여 다시 조합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대동광산중앙조합의 이사진은 이사장 이종만 상무이사,  이준열 이성환 이사, ,  정현모, 이영조 민정기 이종찬 상무감사, , ,  허헌, 감사 이훈구 등이었다. 

 

조합원은 광주와 일반종업원, 노동자가 모두 포함된 것이 특징이고 이익분배도 자본 가와 노동자가 고루 한다는 것이 특색이었다 자영광.  창설정신은 노동자 종업원,  자체 가 직접 광산의 경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근본정신은 

1. 인간은 자주적 정신에 의하여 각자가 서로 모범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1. 사업과 일체가 되어 일하면 인간 이상의 최고 능률을 발휘할 수 있다.

1.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자에게는 하늘이 보수를 준 것이니 어떤 개인이 사취할 것 이 아니라……실제에 형성하고 조직하고 실천하는데 있다. 

특히 중요한 점은 1.종업원이 주식을 가질 수 있고 2. 종업원간 이외에는 매매 양도 입질을 못하고 3. 공로 있는 자에게는 퇴직 후에도 주식을 소지할 수 있으며 4. 특별 한 공로 종업원의 상속인이 아니면 상속 증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16) 정리하면 광 주와 광부들이 모두 조합원이 될 수 있다는 획기적 사회주의적 ‘공동체’실험이라고 보 여 지는 것이다.  

 

3. ‘대동공동체 의’ 해체

대동공동체가 해체될 시점의 상황을 보면 조선을,  강점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우리나 라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군대, 헌병 경, 찰, 감옥과 같은 폭압기구들을 대대적으로 증 강하여 우리 인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으며 조선을 자기들의 식량과 원료 공급지 로 대, 륙침략을 위한 군사기지로 전변시켰다. 

민족자본가란 외래독점자본과 결탁하지 않고 그와 모순관계에 있으며 자기 경리의 자 유로운 발전을 지향하는 토착자본가 식민지,  및 반식민지 나라들에서 민족자본가들은 자본가의 절대다수를 이룬다. 

 

식민지예속국가들에서 민족 자본가들은 외래제국주의자들의 억제정책이 여러 가지 형 태로 감행되는 조건에서 자기 자본에 기초한 경리의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특성은 그들의 사회경제적 처지와 관련된다. 민족자본가들은 외래독점자본가 들 때문에 우선 경제의 중요부문에 자본을 투자하지 못하며 원료원천과 상품판매시장 을 빼앗긴다 그들은.  예속자본가들과는 달리 식민지통치당국이 강요하는 무거운 세금 부담을 져야 하며 여러 가지 경제적 압력과 통제를 받게 된다 경영. 규모로 보아도 그 절대다수는 중소기업을 대표하며 부차적인 경제분야에서 밖에 활동하지 못하고 언제 나 파산 당할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종만 선생이 본격적으로 기업 활동을 시작한 1930년대 일제침략자들은 1920년대 말~1930년대 초에 이르러 이른바 ‘문화통치 의’ 간판마저 던져버리고 공공연한 파쇼적 폭압을 감행하는 데로 넘어갔다 그것은.  이 시기 일제가 동아시아의 ‘맹주 가’ 되려는 야망 밑에 대륙침략계획을 추진하게 된 것과 직접 관련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가 심각한 경제공황의 늪으로 빠져든 시기였다. 특히 일본군 국주의 세력은 1931년 9월에 무력으로 중국 동북지방을 강점했다 심각한.  농업공황을 동반한 1929~1933년 세계경제공황은 식민지 조선에도 대지주로의 토지집중과 농민 몰락이 급속히 진행되었다. 

이로부터 1930년대 전반기 조선에서 일제의 군수산업정책은 기본적으로 군수산업의 기초를 닦는 데로 집중되었다 조선에서.  일제의 군수산업정책 실시의 두 번째 단계는 1937년 7월 중일전쟁 도발 후부터 태평양전쟁을 거쳐 1945년 8월 패망까지이다. 일제는 이 시기 조선에서 산업부문을 중요성에 따라 1, 2, 3부류로 나누고 설비와 자 금을 투자하도록 하였다.

 

1940년에 조선에서 새로 설립된 회사의 총수는 253개였는데 그중 조선인회사는 102 개(40.3%), 일본인회사는 125개(49.4%)였다. ‘기업허가령’이 적용된 이후인 1942년에 설립된 회사의 총수는 213개였는데 그중 조선인회사는 75개(35.2%), 일본인회사는 

131개(61.5%)였다. 

 

같은 기간에 새로 설립된 회사들의 자본금 규모를 보면 1940년에 전체 량 3,699만 8,000원 중 조선인회사의 자본금이 566만 1,000원(15.3%), 일본인회사의 자본금이 2,930만 6,000원(79.2%)이었다. 그러나 1942년에 새로 설립된 회사들의 총자본금 8,181만 8,000원 중 조선인회사의 자본금은 606만 7,000원(7.4%), 일본인회사의 자 본금 7,209만원(88.1%)이었다.

  

그러니까 300만원의 자본금으로 설립된 대동광업 주 은( ) 조선인회사와 비교해서는 큰 규모였지만 일본인회사와 비교하면 소규모에 불과하였다.   

 

1939년 말에 겸이포제철소에서 일본인 노동자에게는 하루 2원 13전의 임금을 주었다 면 조선인 노동자에게는 65전을 지불하였다. 이것은 6명의 식구가 좁쌀죽을 먹으며 겨우 목숨을 유지할 정도의 것이었다.

 

더군다나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확대되면서 산금정책이 종언을 고했고 산금정책 폐지는 ‘대동공동체’의 해체로 귀결되었다. 해체 시기는 1942년 9월경으로 추정한

다. ) 따라서 ‘대동공동체’는 식민지상황, 군국주의 일제에 대한 국제정세나 본질에 대한 과학적 분석의 미흡 등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대동공동체’는 자본과 노동자의 노자협조적 관점이 아니라 기업단위의 대동사회를 위 한 협동 공동체 실현을 위한 실험이었으며 북에서의 활동 역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 기 위한 연장선으로 이해해야 하며 특히,  식민지라는 특수성 속에서 애국적 민족자본 가라는 관점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Ⅳ. 이종만선생의 농촌이상향 건설과 계몽운동 1. 농촌이상향 건설 재단법인 대동농촌사의 사업계획 발표식이 1937년 6월 16일 부민관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발표된 계획을 보면 

이종만씨 기부에 의한 50만원으로 재단법인 대동농촌사 설립 남중북서,  각지에 적당 한 장소를 선택하여 집단농지를 구입하여 본 재단의 기본재산을 구성함. 2. 본 재단 법인이 소유하는 집단농지는 그 경작자에게 영구히 경작케 함 

3. 본 재단법인은 경작자로부터 년 수익의 3할에 당하는 대동농촌건설 의무금을 납입 시켜서 순차적으로 집단농지를 구입하고 자급 및 기타 대동농촌건설에 필요한 자금에 충당함. 단 의무금 부담은 30개년 이내로 하고 완전한 자작농이 되게 함과 동시에 본 재단법인의 조직체에 참여케 함 그리하여. 경직지의 소유 명의는 영구히 본 재단법인 이 보유하여 매매 저당 등에 인한 토지겸병의 폐해를 방지하여 자작농의 생활 안정을 영구히 보장함.

당시 임원은 이사장 이종만 전무이사,  이훈구 상무이사,  정현모 이사,  이성환 이영조, , 감사 허헌, 김창준, 김여식 등이었다. 또한 산하 농촌으로 대동울산농촌, 대동문산농

촌, 대동평원농촌, 대동영흥농촌, 대동농사원 등을 계획하고 있었다. (매일신보 

37.06.19) 

 

집단농장 내에는 자치적 조직을 통하여 식량의 충실 부, 채의 정리 가계의,  합리화 자, 작자급, 협동공조 문화진, 흥, 위생교통의 시설 조성정비 등으로 모범농촌의 구체적 현 실화를 기하고자 하였다.18)

 

또한 이종만 개인 소유 토지 157만평에 대해서도 당년부터 단연 소작료를 3할씩만 증수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  자세한 내용은 연천에 25만평으로 53호 평남,  평원군에 

24만평 소작인수 41호 함남,   영흥군에 108만평, 153호 합계 157만평에 254인 이었

다. 매명(賣名)적 동기가 아니라 이론적 근거는 “최근 조선농촌의 우울상은  소작료의 과중한 부담에 있다. 따라서 소작인들은 자기의 경작지에 애착을 갖지 못하고 생산활 동을 저하시켜 토지가 피폐해 진 것 다는” 것이다.  

토지의 피폐는 소작인의 피폐로 될 뿐만 아니라 지주의 손실로 더 나아가 사회의 중 대손실로 보아야 한다 토. 질을 향상하는 의미에서도 소작료를 내릴 필요가 있다 소. 작 료를 3할 받는 것은 수지상으로 보아서도 지주에게 손실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대부분은 5할이 기준이다. 조선인끼리 서로 돕고 살아가지 못할 것이 있는가. 나는 30년 동안 3할 씩 소작료를 징수하다가 30년 후에는 토지를 소작인에게 전부 돌려주

기로 결심하였다 소유. 권도 양여할 예정이다.”19)

 

그는 3 7․ 제 실행 후 30년 후 무상분배를 확언하고 있다.    

 

18) 『매일신보』 1937년 6월 12일.

19) 『동아일보』 1937년 8월 16일.

일제강점기에서도 농민들은 봉건적 착취구조에 얽매어 있었다. 이 ‘병작반수 제도의’ 타파는 지식인나 일반 농민들이 엄두도 내지 못할 ‘불문율’이었다. 

지주와 소작농간의 생산량 분배방식 봉건조선에서도 병작반수 제도가 일반적이었고 세금문제까지 논구해 보면 6:4까지 올라가는 열악한 구조였다 대동. 농촌사의 3 7․ 제의 시행은 해방 후 북에서의 1945년 가을에 전국적으로 벌인 3 7․ 제 투쟁보다 시기적으 로도 앞서고 지주가 앞장섰다는 데서 매우 선진적이고 혁명적 실천이었다는데 그 의 미가 크다 더.  나아가 30년 후 농토를 농민들에게 무상분배 하겠다는 구상은 북에서 

1946년 3월에 이루어진 ‘무상몰수 무상분배’ 토지개혁과 같은 수준의 획기적인 조치 였다.    

   

더 나아가 3할의 소작료로 타 지방의 땅을 매입하여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여 제2, 제 3의 낙원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는 농토의 집단농지화와 30년 후에는 경작자에게 경작권을 부여하려는 이상농촌건설이라는 사회주의적 실험이었다고 보여 진다.   

 

2. 민족교육운동과 출판활동 1) 민족교육운동

이종만선생의 기본 방침은 교육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농촌의 중견청년을 양 성하기 위한 대동농사원의 설립, 광산에는 광부 자제를 위한 교육시설을 세워 ‘직장 

즉 교실 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20) 

 

소작인의 소작료 30%를 기금으로 농장 교장 시험장을 가진 대동농사원을 설립하고 

청년들을 선발하여 농도의 수련과 기술교육을 실시하여 농촌지도자로 양성한다는 것 이다.21)

이종만선생은 고향을 위하여 1만 5천원으로 보통학교설립, 1만원으로 울산갑종농업학

교 설립, 2천원을 대현면에 기부하였다.22)

 

함남 정평군 문산읍 문흥리에 있던 영평금광을 매각한 이후에도 이 지역에 노동야학 교를  설치하고 평강에는 사설학교를 문산면에,  또다시 영평학교를 설치하여 지난 26 일 낙성식을 거행하였는데 동 면민일동의 발기로 이종만선생의 송덕비를 세우고 제막

식에는 1만 명이 참가하였다고 한다.23) 

 

 

20) 『매일신보』1940년 6월 25일.

21) 『조선일보』1937년 6월 17일. 22) 『동아일보』1937년 7월 25일. 23) 『매일신보』1937년 10월 3일.

이러한 미담이 세상에 전해지자 진주의 하영진씨가 20만원의 토지권리증을 갖고 찾아 와 적당한 교육기관을 만들 것을 이종만에게 위촉, ‘남우학원 을’ 설립하고 하영진씨가 의뢰한 소학교 6학년 정도의 2년제 직업학교를 설립해 목공, 이발, 기계 등에 관한 

기술과목과 실습을 위한 수업을 진행하기로 하고 동 학원 전속으로 위생기관을 만들 기도 하였다. ) 

 

이외에도 장진의 삼포(三浦)의 인구가 약 5천명인데 아동교육기관이 없어 대지 3,000 여 평과 현금 1만원으로 소학교를 설립하였으며   ) 남우학원 재단 10만원을 경성 광 희문 배화여학교에 기부하였다.26)

 제대로 된 학교 건립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된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인수였다. 

 

평양 숭실학교 인수에 120만원을 출자하여 교명을 대동공업전문학교로 바꾸고 학과, 는 문과와 농과를 폐지하고 광산과와,  기계과 2과를 설치하고, 3년제로 학생을 모집 하여 1938년 4월 1일 각과 40명 합 80명을 모집하여 7월 초에 개교했다.27)

 

평남 성천군 사가면 장림리 이면균씨는 대동공업전문학교를 만든 이종만씨의 여러 가 지 사회사업에 감동되어 그의 소유 금은광 대덕광산 경영을 이종만선생에게 증여하였 다 이종만선생은.  이를 경영해 25만원을 마련, 그 반을 성천중학교기성회에 이면균씨 명의로 기부하였다. ) 2) 출판활동

이종만선생은 대동출판사를 설립하여 월간 『농업조선 과』 『광업조선 의』 2대 잡지를 간 행하였다 광산과.  농촌에 배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여기에는.  이원조 주간과 홍기무 등 유능한 사람들이 모였고 한, 편으로는 인쇄소를 설립하여 각종 인쇄물 신문 서적, ,  등 수 만권을 매입 출판하였다.     

 

대동출판사 주 는( ) 1937년 9월 15일 대표자 이종만으로 도서의 출판 및 판매, 기타 도 서 인쇄에 관련된 모든 사업을 위해 자본금 10만원으로 본점은 경성부 종로 3정목 47-1에서 설립되었다. 

 

중역 이사로는 이성환 이준열 정현모 이관구, , , 감사 임영호 한 장경 등이었다. ) 대 동출판사 1대 사장에는 이종만, 2대에 송강 이준열 감사는, 허헌 등이었다.

 

관련 인물도 시기별로 변화를 보이는데 주식회사 대동출판사의 취체역으로 이관구, 주간대리 이원조, 출판부장 김용규 등이 관여하였으며 이원조(1909-1955) )는 경북 안동 출신으로 이육사의 동생이다. 

 

『농업조선 은』 월간지로 1938년 1월 1일에 창간호를 발간하였으며   ) 주간은 이성환, 편집은 장원준이었으며 1942년 등기에는 이준렬, 정현모 이관구 이성환 김, , , 창하 김, 창준 등이 이사로 관여하였다.32)

Ⅴ. 이종만 선생의 교유관계

  

1. 허헌(1885.7.6-1951.8.17)

허헌선생은 이종만선생과의 교유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종만 선생과 나이도 같을 뿐만 아니라 대동광업주식회사 상근 감사로 대동공공체의 경영을 위해 동고동락한 동지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이종만 선생이 일제시기 민족적 양심과 애국 적 지조를 지킨 업적에 대하여 김일성주석에게 소개한 바 있었던 것이다. 

 

이종만선생이 허헌선생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가족과 함께 사글셋방을 전전하던 시기 우연히 허헌 변호사 집 사랑채에 사글세로 들어간 것이다. 당시 허헌선생은 중 견변호사 겸 보성전문학교 교장이었다. 집세가 밀려도 독촉하거나 나가라거나 불쾌한 기색도 않았다고 하며 오히려 이종만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고 한다.33)

허헌선생은 정치활동가, 법률가 교, 육자로서 동경 명치대학에 입학하여 고학으로 변호 사 공부를 마치고 서울에서 보성학교 교원, 변호사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있었다. 

3.1운동 지도자들의 변호사로 나섰으며, 그때부터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27년 일 본에 의하여 이른바 ‘제1차 공산당사건’에 기소된 공산당원들을 변호하였으며 이때부 터 그는 조선에서 진보적인 민주주의자로 명망이 높아졌다. 

김책(1903-1951) )을 비롯한 조선의 혁명가들과 애국적 인민들을 자진하여 무료로 변호하면서 일제의 조선강점을 단죄하고 우리 인민의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법정투쟁을 벌렸다.

 

1927년 《신간회》 조직사업에 참가하였으며 그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되어   조선의 혁명가들과 민족주의자들의  통일전선을 이룩하고 반일애국역량을 단합시키기 위해 노 력하였다.

 

1937년 6월 4일 김일성 주석이 직접 지도한 항일무장투쟁 세력의 보천보전투에서 커 다란 고무를 받고 김일성주석이  조직 영도한 항일무장투쟁 자료들을 수 집하여 인민들 에게 소개 선전하였으며 국내 여러 지역에서 애국적인 지하운동을 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에게 여러 번 체포 투옥되었으며 변호사자격을 박탈당했다. 

 

8.15후 김일성주석의  친서와 접견을 받은 후 남조선신민당,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등의 직책을 지니고 조국통일방 침을 관철하기 위하여 투쟁했다. 

1948년 9월부터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의 장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단 성원의 중임을 맡고 새 조국 건설과 조국의 자주적통일, 민족의 융성번영과 후대교육을 위하여 헌신분투하였다. 1990년 8월 15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으로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묘는 애국렬사릉에 있다.

그의 딸 허정숙(1908.7.16.-1991.6.5.)은 1927년 일본에 유학 후 『동아일보 기자로』 일한 1929년부터 반일지하투쟁에 참가한 후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해방 후 1948년 9월 문화선전상, 1957년 1월 사법상, 1946년 8월부터 당 중앙위원, 1948 년 9월부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1978.8-1991.6)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이종만선생의 북행과 김일성주석과의 만남은 허헌선생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2. 송강 이준열(1896∼1982) 1) 남호 이종만선생과의 인연 

남호 이종만선생과의 인연은 1923년 개교한 고학당(苦學堂) 시절부터 시작된다 고학. 당은 교명에 명시되어 있듯이 고학생들을 위한 배움의 전당이라는 의미에서 지은 명 칭이다. 고학당의 교장은 송강 이준열이었고 이종만선생은 고학당의 후원회 간사로 

 

재을 주도하였고 김일성을 항일 빨치산 지도자로 추대하였다 조선. 인민군의 최고 지휘관의 한사람이 었고 내각 산업상 민족보위성,  부상 외무성,  부상 등을 역임하였다. 혁명열사릉에 묻혀있다.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송강 이준열은 소위 ‘조선공산당 5차사건 당’ 수로 1929년 6월 체포되어 1936 년 12월 출옥했다. 근 7년 6개월의 만기 출옥이었다. 몸은 엉망이 되었고 집에서 쉬 고 있을 때 남호 이종만선생과 고학당 1회 졸업생 이학종(李學鐘)35)이 찾아와 송강에 게 함께 일할 것을 권유하였다.   

“며칠 후 남호선생이 와서 영평행 영평광산 을( ) 또 말하고 양복을 사주며……그분 애정 과 성의에 탄복하여 금산으로 같이 갔다. 금광 구경은 나로서는 처음이었다. 건강이 많이 나아져 오후에 서로 술도 들고 낮에는 산보도 하면서 10일간 있는 동안에 남호 선생과 같이 한방을 쓰면서 지냈다 남호선생은.  진정으로 광산을 팔어 돈이 입수되면 내가 혼자 쓰지 않고 생활비 제하고는 사업기금 전부를 송강선생에게 드릴테니 무슨 사업이든지 생각대로 하자고 아침저녁으로 되풀이 말하였다. 10일 후에 서울 집에 가 서 좀 생각하여 보고 대답하기로 하였다. ……총독부에서 못하는 민족적 사업을 하자 고 남호 선생의 승낙을 얻어 정현모씨와 동반하여 어느 회사 상무와 연락이 되어 일 사분란하게 매도가 완결되었다.”36)

150만원의 매도금액을 종자로 대동광업주식회사 설립이 급속히 추진되면서 남호 이종 만선생과 송강 이준열은 의기투합하여 구상하였던 ‘대동공동체’사업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1937년 5월 12일 경성 남산정 남산동( ) 천진루 여관에서 열린 대동광업 주( ) 창립기자 회견 후 신문에 실린 송강 이준열에 대한 기사는 다음과 같다. 

“‘전문고문단’ 이준열은 전무요 광산조합의 상무이사이다 사실에.  있어서 모든 계획의 종합정리와 모든 기능의 유도향상을 도모하는 기술적 존재, 각종사업의 이상과 실제 를 잘 조화시키는 지도자이다 경성공업학교에서.  배우고 이종만씨와 함께 경성 동대 문 밖에서 고학생을 위하여 고학당을 경영 중국으로,  도망, 영어의 몸으로 활동 중지. 그가 활동의 무대로 다시 등장.”37)

위 글은 대동광업주식회사가 설립되는 날 『매일신보 에』 난 이준열 전무에 대한 인물 평이다 모. 든 계획의 종합 정리와 구상의 실제 기획자라는 내용이다. 

2) 3 1․ 운동 주도

 

35) 1928년 고학당을 우등으로 졸업 고학당. 학생 정관진 김태, 래 등과 1928년 (조선학생) 혁명당을 조직, 후에 학생전위동맹으로 개칭, 1931년에 징역 4년 언도 동아일보. ( , 1931.5.12.) 36) 『송강소사』 60쪽. 

37) 『매일신보』 1937.06.12.

이준열의 원적은 충남 아산군 탕정면 갈산리 157번지로 서울에서 독립운동 당시 주 소는 경성부 숭인동 176번지였다 마을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온양보통학교를 거쳐 서울로 와 관립 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경성고등보통학교 후에( 경기고 등학교 로) 개명하였는데 1914년 10회로 졸업하였다 그.  후 1916년 경성공업전문학교 (후에 서울공대) 응용화학과에 입학하였다.

  

이준열은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 시 경성공업전문학교 응용화학과 3학년생으 로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준열은.  2월 28일 공업전문학교 실습실에서 경성공업전문학 교,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전수학교, 보성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 학교 등 6개 학교가 동시에 동맹휴학하기로 하였다는 것과 3 1․ 운동 거사 계획을 후배 들에게 알리고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 1, 2학년 학생들을 비밀리에 조직 동원하였다.

  

이후 이준열은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해 중국으로 도피하여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중국에서의.  활동에 대해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1921 년 9월 텐진(天津)총영사대리가 외무대신에게 보낸 ‘불령선인의 행동에 관한 건 2’에 의하면 잡지 발간과 독립운동자금 모집 등에 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3) 5년제 중학교 과정 ‘고학당 설립’ 

고학당은 이준열에 의해서 1923년 5월 1일 설립되어 1931년 7월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될 때가지 8년간 존속하였다 교. 명 ‘고학당(苦學堂)’은 고학생을 위한 배움의 전 당이라는 뜻이다 고학. 당은 당시 학비가 없어 진학을 못하는 고학생들을 위한 비인가 5년제 중등학교였다 학비는.  무료였으며 남녀공학제를 실시하고 학생자치체에 의해서 재학생들이 서무 교무 이발소 기, , , 숙사 식, 당, 인쇄소 등 제반 업무를 관장하였다 이. 준열은 교장으로 학교를 총괄하였고 선생으로서 동경유학생과 공전 동창생들이 결합 하였으며 무보수로 봉사하였다. 교과목으로는 우리역사를 가르치고 독립운동의 필요 성을 고취시키는 내용이었다. 파격적인 ‘대안학교 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천도교의 권동진 )선생의 배려로 천도교당 구내에 있는 사무실에서 시작하 였지만 1925년에는 숭인동에 약 300평 규모의 학교부지도 마련하였다 이.  당시 이종 만 선생 김, 창준 목사 등이 함께 난관을 풀어나갔고 이들은 후에 ‘대동공동체’의 구성 으로 함께 일하게 된 것이다. 착공한지 1년 만에 완성된 교사에는 4개의 교실, 3개의 기숙사 이발소 사무실 인, , , 쇄소 취사장,  등이 완비되었으며 약 300명의 학생이 재학 하였다.

 

이 학교 학생들은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 시위가 서울지역으로 확산하는 과정에 서 가교역할을 하였다 고학. 당 내에 결성된 ‘학생전위동맹’ 구성원들이 그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이다.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면서 고학당을 중심으로 한 조선학생전위동맹 의 실체가 폭로되고 고학당의 재학생들이 대거 구속되었다. 이후 고학당을 중심으로 ‘제2차 전위동맹’을 결성하여 일제로부터 해방을 목표로 투쟁하였으나 이들도 1930년 3월에 검거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고학당’은 일제에 의해 1931년 7월 강제 폐쇄 당했다. 

4) 신간회 활동 및  서울파 ‘조선공산당 후계조직’ 사건으로 8년간 투옥  

  

이준열은 1924년 조선노동교육회 집행위원을 역임하였고 조선을 일제로부터 독립시 키고자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27년 우리나라 최초의 좌우합작 단체 인 ‘신간회 경성지회’  활동을 계속하면서 민족해방 투쟁에 헌신하였다. 

 

서울파‘ 조선공산당’후계조직을 1919년 1월 결성하여 책임비서가 되고 1929년 6월 12일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1931년 징역 7년이 확정 판결되어 대전감옥으 로 이송되어 1936년 12월 만기 출소하였다. 

5) 해방 후  활동

이준열은 1936년 대전감옥을 출소하면서 ‘고학당’에서 함께 활동했던 광산업에 종사 하던 이종만선생의 보살핌으로 함경도 영평에서 요양한 후, 이종만선생의 권유로 대 동광업주식회사 전무, 대동출판사 이사 등으로 활약하면서 당시 독립운동과 관련된 인물들에게 자금 제공은 물론 학비 및 생활비 등을 제공하였다. 

  

이후 1945년 8 15․ 해방 후인 8월 25일에는 당시 공업기술 관계 단체를 총망라하여 공업기술연맹 이사장직을 역임하여 해방된 조국의 공업기술 발전에 매진하게 되었다. 계속해서 10월 결성된 조선전재기술자협회의 고문, 10월 5일 결성된 조선광업회 위원 장, 1946년 10월 19일 건국공업박람회 회장, 1947년 3월 15일 조선문화협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새 조국의 공업기술 발전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8.15 후 그가 바라본 국내 정세는 첫 번째 “자주독립국가의 득”에 있다고 보고 급한 것은 “공장 광산,  등 중요한 기관을 자주 경영하는 것” )이었다.  그는 조선공업기술 연맹 이사장으로 공업신문사,  주필은 김용암이었다 모. 두 ‘대동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이준열과 가장 가까운 인물은 이영(1889.4.1.-1960.8.13)으로 서울파의 영수였다 일. 제시기 속칭 서울공산당 사건으로 4년간 투옥 후 1932년 출옥하였다.40) 역시 북으로 올라가 1953년 12월부터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  사업하였으며 1957년 9월부터는 조 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단성원으로 사업하였다. 묘는 애국렬사릉에 있다.

3. 김창준(1890∼1959)

 

‘대동공동체’의 하나인 대동출판사 주 에( ) 이영조 등과 함께 이사로 이름이 올라있다. 대동출판사 주 는( ) 사장이 이종만선생으로 자본금 10만원을 출자하여 출판업을 전문으 로 하는 인쇄업종으로 경성부 서울( ) 견지정(견지동) 111번지에 소재하고 있었다.     

김창준은 평양부 대찰리 106번지가 본적지이고 평양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를 졸 업하고 중국 상해에 있는 그리스도교 아시아총회의 조선그리스도교감리회 대표 서울,  종로중앙교회 목사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3 1․ 운동 때에는 독립선언서를 발기한 33 인중 한사람으로서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간 감옥 생활을 하였 다. 

1924년 5월 미국 일리노이주 에반스톤가렛트 선교학원에 유학하였다. 

 

8. 15후 서울장안의 종교인들로 국제교화협회를 조직하고 민주세력을 규합하는 운동 에 나섰다. 1947년 2월 그리스도교내 애국적 양심을 가진 600여명의 교인들과 함께 

서울의 천도교당에서 남조선그리스도교민주동맹을 결성하고 그 위원장으로 선출되었 다. 

 

1948년 4월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초청장을 받고 평양에 도착했으 며 김일성위원장과 상봉하였다. 그 후 평안남북도 일대의 그리스도 교인들을 그리스 도교도 연맹에 묶어세우는 사업을 잘하여 그 80%이상의 교인들을 동맹에 망라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49년 2월 내각직속 간부학교를 졸업한 후 남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협의회 부서기장으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초대 서기국장으로 의장으로,  사업하였으며 전쟁시기와 전후시기에는 세계평화대회에 조선대표로 참가하였다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었으며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상임위원회 위원이었다 그는.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위한 사업에 기여한 공로로 조국통일상을 수 여받았다. 묘는 애국열사릉에 있다. 

 

4. 대동과 함께한 사람들

       

대동광업 주 상무 대동( ) , 농촌사 상무이사 대동, 출판사 이사였던 정현모는 경북안동 지 주의 아들로  일찍이 조대 법과에서 배우고, 각종 회사를 조직 운영, 언론기관에도 종사, 신간회안동지회 부회장 )을 역임하였으며 귀공자 타입으로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1948년 10월에 이승만 정권에서 경북도지사에 임명되었 다.42) 

 

이훈구 박사는 동경에서 다년간 농학을 전공 농학사로 아메리카로 건너가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미군정기인 1946년 1월 농무국장에 취임하였다. ) 

이관구(李寬求)는 대동광업 주 감사 대동( ) , 농촌사 전무이사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일. 제시기 상공업과 협동조합운동의 저명 인사였다. 그가 강연한 내용들은 “빈농본위의 협동조합운동과 지도자 훈련기관의 설치” ), “신간회의 역사적 사명” ), “조선상공업 의 추세” ), “미곡경제와 농촌경제”  ) 등이었고 해방 후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지냈 다. 

대동광업 주( ) 광무과장이었던 민정기(閔正基)는 공학을 전공하고 총독부에 기사로 다 년간 활약하다가 관계에서 나와 한때 평북 신연금산을 통해 능률을 발휘하여 자영광 산도 경영하였다 그는.  대동광업 주 에서( ) 유일한 기술적 최고 기획가였다.48)

대동광업 주( )  총무과장 주식회사,  대동출판사 이사였던 이성환은 『농업조선 의』 주간 이었다 대동. 농촌사에도 관여했다. 1920년대에는 조선농촌문제의 태두라고 불렸고 전 국을 돌며 순회강연을 했다. ) 이성환은 1930년대 초반에는 조선농민사 중앙이사장으 로 활동하면서 농촌문제의 대가였다. 

 1940년대에 적극적 친일 행위를 벌여 “지원병일색-청년아 분기하라” 등의 글이 있 으며 조선임전보국단에 가입하였다. ) 해방 후 반민특위에 친일파로 체포되었으나 4 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  

Ⅵ. 북에서의 활동52) 1. 조국통일운동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는 조국의 해방과 사회주의건설, 나라의 통일위업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생된 열사들과 당 및 국가 무, 력부문의 일꾼들과 과학 교, 육, 보건, 문 학예술, 출판보도부문 등 여러 부문의 공로 있는 일꾼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애국렬사릉 입구에는 ‘애국렬사릉’이라고 쓴 현판이 있는 대문이 웅장하게 세워져있으 며 대문을 지나서 묘비구역 안에는 추모비가 있다.

추모비에는 “조국의 해방과 사회주의건설, 나라의 통일위업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 생된 애국렬사들의 위훈은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1986년 9월 17일 이라는” 글발이 부각되어 있다.

묘비구역 안에는 애국렬사별로 묘비를 세웠으며 묘비에는 돌사진을 새겨 붙였다.

남쪽 민족문제연구소에서 2000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에 올라있는 이종만(1885∼ 1977) 선생은 1885년생으로 해방 후 1949년 6월에 북으로 올라가 활동하다 지금 현 재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이종만 선생의 묘비에 적힌 대로 ‘조국전 선 의장 에’ 극명하게 나타난다고 보여 진다.  

 

북행 후 그의 행적 중 동판에 새겨진 ‘사회주의 건설’과 ‘나라의 통일위업 을’ 위해 투 쟁한 것이 바로 애국렬사릉에 안장된 가장 큰 이유인 것이다. 이종만 선생이 북으로 올라간 날짜는 1949년 6월이었다. 64세의 노구의 몸이었다.  

남북조선 71개 정당 사회단체 참석 하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가 1949년 6 월 25일 평양 모란봉극장 회의실에서 개막되었다. 704명이 참석한 대회에서는 정각 오후 3시 시작된 대회는 김일성 김, 두봉, 허헌, 박헌영 김, 책, 홍명희 최용, 건, 김달현 등을 비롯하여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이 입장하였다 다음은.  당시의 일 화이다.

그런데 갑자기 김일성주석은 참가자들을 살피면서 이종만 선생을 주석단으로 올라 올 것을 요청하였다. 누구도 일어서는 사람이 없자 김일성주석은 큰소리로 “남조선에서 들어온 대표들 가운데 이종만 선생이 왔으면 주석단으로 올라오십시오 라고” 말했다. 순간 얼결에 몸을 일으킨 이종만 선생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러다가 옆 사람의 재촉을 받고서야 그는 주석단으로 나오게 되었다. 

김일성주석은 회의참가자들에게 이종만 선생을 소개하고 자신의 곁에 앉도록 배려하 였다. 결성 준비위원장 김두봉의 사회로 주석단으로 41명이 선출되었다. 

그 중에는 남조선노동당을 대표하여 허헌, 조선산업 건설협의회 위원장 이종만 남조, 선기독교도련맹 위원장 김창준도 선출되었는데 이들은 일제시기 대동광업주식회사 시 기의 동료였다.

이종만 선생은 27명의 중앙 상무위원회 위원으로도 선거되었다.54) 뿐만 아니라 김일 성주석은 이종만선생과 특별히 개별 면담을 하고 담화하였다 그.  내용은 살펴보면,

“남조선실업계에서 명망 있는 이종만 선생을 이렇게 만나니 대단히 반갑습니다 연로. 한 몸으로 38선을 넘어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선생이 남조선의 산업 건설협의회 대표로 평양에 와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참가한 데 대하여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선생이.  이번에 ‘미제와 이승만 괴뢰 도당’의 온갖 방해 책동 을 물리치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참가한 것은 훌륭한 애국적 거사입니 다. 

나는 오늘 선생을 처음 만나지만 허헌 선생을 통해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지난. 날 선생은 많은 재산을 가진 기업가였지만 일제와, 담을 쌓고 민족적 양심과 애국적 지조를 지켜왔습니다. 선생은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나라의 지하자원 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거액의 자금을 투자하여 후대 교육사업과 계몽사업에 기 여해왔습니다.

오늘 공화국 북반부에는 수많은 애국적 기업가들이 우리의 건국노선을 적극 받들고 민족 산업의 발전과 나라의 완전 자주독립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 사업에 적극 참여하기 바라며 앞으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서 책임적인 임무를 맡아주었으면 합니다. ……55)

이종만 선생은 통일애국의 기치아래 민족대단결을 실현한 역사적인 민족적 회합이었 던 1948년 4월에 열린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대표자들의 연석회의에 참가하라고 보 낸 초청장을 받고도 평양으로 걸음을 옮기지 못했었다. 4월 남북 연석회의에는 자주 통일을 지향하는 북과 남의 56개 정당, 사회단체(북 15개 남,  40개 해외,  1개) 1,000 여만 명의 성원을 대표하는 695명의 대표들이 참가하였다 그런데.  이 연석회의에 참 가하였던 김구 선생의 간곡한 권유로 북행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북행뿐만 아니라 북에 그대로 남아 활동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는 북에서 

 

54) 『로동신문』, 1949. 6.29.

55) 1949년 6월 25일 「이종만과 한 담화」 『, 김일성 전집 권』9 .

강조하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라는” 구호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가족들을.  남에 두고 단신으로 북행한 것은 “가족의 행복이나 안위의 소아보다 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라는 대아 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해방 후 북에서는 일부 일꾼들은 해방 전에 공부한 기술자들을 새조국건설에 적극 참 가시킬 대신 유산계급이라느니 일제에, 게 복무하였다느니 하면서 그들을 친일파, 민족 반역자와 같이 취급하였다. 그리고 어떤 지방에서는 국영공장, 기업소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는 기술자들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내보내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이에 대하여 김일성 위원장은 서울에 있던 자연과학부문의 지식인들과 사회과학부문 의 지식인 수십 명에게 위촉장을 보내어 북으로 들어오게 한 바 있었다.

1957년 8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제 기대의원선거가2 있었다. 여기에서 그는 최고인민 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때 그는 73살이었다 지난. 날 백만장자이던 남조선 출 신의 민족자본가가 대의원이 된 것은 김일성 주석의 특별한 배려였으며 신임이었다. 그는 90세인 1974 봄에 쓴 「수기 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가슴속에 조선민족의 더운 피가 맥박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민족의 태야이시 며 전설적 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을 따라야한다 나는.  이 길이야말로 나라의 통일독 립을 위한 길이고 민족의 번영을 위한 길이며 또 이 길에 개인의 행복도 영예도 있다 는 가장 고귀한 진리를 깨달았다 이것이.  나의 어제와 오늘이 그것을 실증해주고 있 다.”56)

그는 조국전선 의장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해방 45돌을 기념하는 1990년에 조국통일 상을 수상하였다. 

2. 지하자원 개발의 선구적 역할

1977년 1월 18일 이종만 선생의 서거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리종만선생은 참 좋은 분이었습니다 그는. 애국적 지조가 매우 높았습니다 해방. 전 리종만선생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큰 기업가였으나 일본놈과는 담을 쌓고 있었 으며 민족과 량심과 지조를 지켜왔습니다 해방. 직후에도 리종만선생은 남조선에서 미 제의 식민지예속화정책과 민족분열책동을 반대하는 투쟁에 헌신하였습니다 리종만선. 생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나라의 지하자원개발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라고 평가하고 장례는 사회장으로 정무원에서 맡아하도록 하고 모든 장례비용은 국가비용으로 하였다. 

 

56) 『노동신문 민족대』, 단합의 길에서, 1984. 12.10.      

그는 1949년 6월에 북으로 온 뒤 김일성 위원장과도 만나 지하자원 개발에 대한 간 곡한 기여를 부탁받았다. 

“…… 선생은 민족경제를 부흥 발전시키는 사업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은 우리나라 지하자원에 대한 조예가 깊고 광산을 운영해본 경험도 있는 만큼 우 리나라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은.  새로운 광맥을 찾아 내고 광산들을 개발하는 사업에 힘써주어야 하겠습니다. “57)

그렇지만 1950년 전쟁으로 사업에 매진하지는 못하였다. 3년 전쟁은 1953년 7월 27 일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중단됐다 전. 쟁 과정에서 모든 공업시설과 농지가 폐허가 되었다 정전협정.  체결 다음날인 7월 28일 김일성 수상은 라디오 연설에서 “모든 것 을 민주기지 강화를 위한 전후 인민경제 복구 발전에로!”란 구호를 전후복구의 원칙 으로 제시하였다. 

전쟁 시기 김일석 주석의 특별한 배려로 중국 길림성에 피해있던 이종만 선생은 1954년 정초에 평양으로 복귀하였다. 1954년 2월 중순 어느 날 김일성주석은 승용차 를 보내어 그를 초대하였다. 책상위에 지도를 펼쳐놓고 

“전후복구건설과 관련하여 의논할 것이 있어서 오시라고 하였습니다 전후. 복구건설을 하자니 동이 많이 요구됩니다 일본. 놈들이 도망가면서 좀 있던 공장과 광산을 다 마 사버렸습니다 해방.  후 우리 로동계급이 건설해 놓은 것도 미국놈들이 또 마사버렸습 니다 자재와.  원료가 필요합니다 그중에서.  동이 필요합니다.”

이종만 선생은 “장군님 문제없습니다 동도.  많고 금도 많습니다 라고” 답하고 해방 전 대동광업주식회사를 경영할 때 북부일대의 정형과 학성산 일대에 20만 톤의 동광석이 매장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김일성주석은 중공업성 지질탐사관리국의 한 일 군을 불러 오늘부터 리종만선생을 중공업성 고문으로 임명하니 주택과 의복 그리고 보살필 식모, 승용차 등을 잘 준비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4월에 일이 벌어졌다 학성산.  조사결과 거의 가망이 없었다 이종만선생은.  뜻 밖의 결과에 번민하기 시작했다 함께.  갔던 기술자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정부 에서는 나를 과연 어떻게 보겠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4월 중순 어느 날이었다 김일성주석은.  이종만선생과 같이 학성산에 갔다온 지질탐사 관리국의 책임일군으로부터 학성산 조사결과를 받았다. 김일성주석은 방안을 거닐면

 

57) 「이종만과 한 담화」 『, 김일성 전집 권』9 , 1949년 6월 25일.

서 “학성산에 동광석이 20만 톤이 없다. …없단 말이지…”하고 되뇌었다 그리고는.  

“학성산에 동광석이 20만 톤이 없다고 해도 동무들이 리종만 선생에 대하여 절대로 다르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리종만.  선생은 학성산의 20만 톤을 위해서 필요한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리종만 선생을 믿은 것은 학성산의 동광석 때문이 아니라 그 선 생의 애국적인 지조와 민족적인 양심입니다. …그 선생을 적극 도와주어야 하겠습니 다. … 우리나라의 광산과 유용광물의 분포상태를 다 찾아내겠다고 하는데  그 선생 에게 젊은 기술자들을 붙여서 그 사업을 추진시켜야 하겠습니다.”

위와 같은 실화에 바탕하여 북에서는 2009년 ‘김일성동지’탄생 100돌을 기념하는 단 편소설집 『거창한 흐름 을』 발간하였는데 그 중 이종만선생을 실제 소재로 한 단편이 백보흠 )의 「천암산 이다」 . 이종만선생의 오류와 실패,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김 일성 수상의 믿음 김일성수상의,  마음은 이득이 있으면 사람을 써먹고 이득이 없으면 버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적 양심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건 손잡고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신념에 바탕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종만 선생이 지목했던 학성산에서는 구리 광맥을 찾지 못하고 우여곡절 끝 에 그 주변 지역에서 결국 구리광맥을 찾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3월 5일 청년광산’ 이다 이곳에서는.  구리, 금뿐만 아니라 스테인리스나 베어링 등 특수강을 만들 때 쓰 이는 몰리브덴도 많이 매장되어 있었다 대부분.  노천광 형태여서 이용가치가 아주 높 았다. 2010년 9월 초 김정일 위원장은 이 광산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여기는 선군시

대에 태어난 인민의 무릉도원이고 공산주의 선경이며 리상촌”이라고 최상의 만족을 

표하였다. )  

이러한 그는 어느 날 내각청사에 찾아가 한 책임일군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품속에 깊이 간수했던 한 장의 문서를 내놓았다 그것은.  그가 지난날에 경영하던 대 동광업주식회사 청사를 공화국정부에 넘겨준다는 ‘양도증서’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이종만 선생은 몸과 마음이 한결 젊어진 듯 열정에 넘쳐 사업 에 더욱 힘썼다 그는.  젊은 기술자들을 이끌고 북방의 추위와 눈길도 헤치고 비바람 과 무더위도 이겨가며 답사의 길을 이어갔다 그리하여.  이종만선생은 해방 전에 탐사 한 흔적을 남겨둔 곳을 죄다 답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 그는 여러 전망성 있는 유 용광물매장지들을 찾아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개발이 되고 채굴이 되는 경우에 투 자를 적게 하고 수송을 헐하게 할 수 있는 조사 자료까지 만들어냈다. 그는 광업성 고문으로 계속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Ⅶ. 결언

1937년에 설립한 대동공동체는 대동광업 주( ), 대동광산조합, 대동농촌사, 대동출판사 (주), 대동공전 등이었다 여기에서.  이익을 지속적으로 창출하는 기업은 대동광업 주( ) 뿐이었다. 물론 대동광업조합은 지금까지의 자본과 노동이 만난 자본주의적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 즉 조합방식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역사 이래 식민지 조선에서 처 음으로 실험해 본 방식이었다. 

또한 대동농촌사 역시 유상으로 매입한 농토를 소작인에게 분배하여 3 7․ 제로 소작료 를 받고 30년 후에는 무상 분배계획을 갖고 있었다 물론.  소유는 30년 동안 개인소유 로 돌리지 않고 대동농촌사에 두었다 이러한.  3 7․ 제의 시행은 5천 년 역사에서 처음 시행해 본 실험으로 이 방식이 오히려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고취시켜 생산력을 증대 시킨다는 취지였다. 이러한 실험은 3할의 소작료만으로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이종 만선생과 간부들의 새로운 방식의 농촌이상향 건설을 위한 사업이었다.  

조합 내에 조합원들과 자제를 위한 교육시설을 둔 것은 민족교육운동 역시 새로운 인 재를 키우고 새로운 과학적 지식을 배우고 동고동락의 기풍 속에서 기업을 키우겠다 는 ‘대동사상 의’ 발현이었다. 숭실전문을 인수하여 대동공전을 설립한 것 역시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새로운 젊은 인재들을 육성하겠다는 원대한 꿈의 발로였다. 

그렇지만 ‘대동공동체’의 실험은 5-6년에 그쳤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이 차별 하에 있 는 일제의 식민지라는 특수한 조건과 새로운 침략과 전쟁이라는 국제정세 속에서 산 금정책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특수한 조건이 아니라도 일제는 이러한 이 상적 기업과 농촌이상향 건설을 그대로 수수방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와 같은 활동과 운동이 가능했던 조건은 이종만 선생이 평소 지니고 있던 애국적이 고 민족적 사고에도 기인하고 있지만 함께한 대동사람들에 의한 것이다 이종만.  선생 이 교유한 인물의 주요한 특징은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기, , 독교계 과학기술자, 까지 아우르는 특별한 것이었다 그의.  사상은 유교 불교 기, , 독교를 아우르는 이타적 삶을 지향하였다. 

특히 이종만 선생을 비롯해서 허헌, 김창준 등 그와 ‘대동공동체’를 이끌었던 인물들 은 해방 후 북으로 가서 북의 새 사회 건설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당시 남쪽의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우리민족이 살길은 미군정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반민족적 적산불하 등이 아니며 이승만 정권의 ‘단독정 부 수립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토론문>

“민족자본가 이종만 선생의 대동사상 실천운동에” 대한 토론문

신수식 남( 북경협국민운동본부 사무처장) 

안녕하십니까? 남호 이종만 선생 기념사업회 추모포럼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 드리 며 포럼 토론자로 초청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남호(南湖) 이종만(李鍾萬,1885.1.14.­1977.1.17., 월성 선생은)) 발제문에서 기술하고 있듯이 엄혹한 일제 강점기에 광산왕, 기부왕, 자선사업가 사회활동가, , 평양 애국열 사릉에 묻힌 유일한 민족자본가, 친일파 등 보는 관점에 따라 실로 다양하게 평가받 고 있는 인물입니다 물론.  어떤 한 인물을 평가할 때 그의 생애 전부를 대상으로 해 야 하며 어느 특정한 일부분만을 떼어내 그 부분만 초점을 맞춰 강조하거나 미화해서 는 매우 일면적이고 편파적인 평가에 빠져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합니 다. 

본 발제문은 대동사상과 이를 바탕으로 한 농촌이상향 건설, 민족교육운동 그리고,  민 족자본가로서 이종만 선생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특히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는 점은 이종만 선생이 말년에 선택한 월북행위와 이와 관련하여 이 행위가 결코 우연의 결과 가 아니라 그동안 쌓아왔던 교유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종만 선생의 인생을 크게 세시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태어나 1932年 이전까지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는 시기, 즉 28전 29기의 시기, 둘째, 영평광산을 매각하면서 1937년 새롭게 대동광업 주 을( ) 설립하고 그가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대동사회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던 시기, 셋째, 1945년 이후 활동과 북으 로 올라가 새로운 사회 건설과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한 시기 등입니다. 

본문에서 이종만 선생의 대동사상에 기반한 자주적 실천 활동에 대한 조명은 연세대 학교 방기중 교수의 연구, 즉 1937년 6월 창립되어 1943년경까지 합법적 공간에서 전개된 대동사업체의 경제자립운동과 사상을 검토하면서 이 운동이 1920, 30년대 비타협적 민중적 성향의 사회교육운동이나 농민적 입장의 경제자립운동을 주도한 경험이 있는 진보적 민족주의 자와 일부 사회주의자가 결집하여 전개한 목적의식적 실천 활동이며 또한 해방 후 좌우합작과 통일 민주국가 건설을 지향한 사회민주주의 내지 수정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지향한 중간파 경제사상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종만 선생의 일제강점기 여러 사업체인 대동광업 (주), 대동광산중앙조합, 주식회사 대동출판사, 대동농촌사, 대동공전 등은 ‘대동공동 체’이며 그 이유는 이 사업체와 기관 가운데 이익을 창출하는 곳은 오직 대동광업 주( ) 뿐이었고 이종만 선생이 언급한대로 돈을 벌기위해 대동광업 주 을( ) 창설한 것이 아니 라 광업에서의 공동체 건설과 자영광의 창설, 농촌에서의 자작농 실현 이를,  뒷받침하 기 위한 학교 건립과 출판활동 등이 최종 목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발제자가 강조하고 있는 이종만 선생의 민족자본가로서 가졌던 대동사상과 그 실천을 위한 대동공동체 실현에 대한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본 토 론자는 역사적 사실을 통한 이종만 선생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 대해 일부 동의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자본가 남호 이종만 선생이라는 관점에서 그의 일생을 통한 평가에 대해서는 다음 몇 가지에 대해 보다 분명한 정의가 필요하 다고 생각됩니다.

첫째, 본 발제문에서 주요 자료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 친일잡지 삼천리 동아일보 조선일보, , 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 토론자는 이러한 자료들이 과연 객관적인 관점에서 민족자본가로서 이종만 선생에 대한 평가로 강조한다고 해서 의혹과 비판적인 관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둘째, 민족자본가로서 평가하는 부분입니다.

민족자본은 민족경제, 즉 민족주의의 기초이자 민족적 생활을 위한 경제적 기초에 자 신의 기반을 갖는 자본이다. 따라서 민족경제를 파괴하려는 제국주의 자본이나 그 대 행자인 매판자본과 이해가 대립되는 자본으로 규정되며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 자본의 정치적 자세에 따라 민족자본, 예속자본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제는 당시 일제 강점기에 강력하게 조선의 민족자본 생성 성장을,  방해하고 저지했습니다 조선. 에 민족자본이 진보성과 독립성을 유지하려면 독자적인 경제영역(원료조달 제, 품판매, 금융 등 을) 확보하고 경제적 자유를 지향하는 경쟁적 산업자본이어야 하며 소규모 이 하의 자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큰 규모의 대동광업 주 가( ) 과연 일제의 비호 없이 성장할 수 있었으며 민족자본으로서의 이러한 조건에 부합했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대동공동체와 내선일체 이종만 선생에 대한 평가는 크게 민족자본가의 긍정적 인 측면과 친일반민족 행위자의 측면으로 나뉩니다 물론.  인간의 세상사에서는 악과 선의 양분으로 분리해서 전적으로 어느 한쪽 편의 평가를 하기는 사실상 어렵다고 할 것입니다. 1930년대 이후 일제 강점기 당시 일제가 조선을 식민통치하기 위해 내놓은 민족말살정책 중 하나이자 일제 강점기의 표어인 내선일체와 연관성입니다. 즉, 이종 만 선생이 일제 강점기 때에 친일행위를 여러 영역에서 했다는 사실에서 그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이종만 선생의 친일행위 관련 주요 내용입니다.

1) 친일단체활동에 대한 기록들로 ①1939년 4월 '조선산금협의회 위원이'  된다 조선. 총독부가 전시 총동원 체제를 위해 만든 단체다. ②1939년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으로 임명됐다. 총독부가 친일 유( 림) 인사들을 동원해 만든 단체다. ③1940년에 는 '대화숙야'( 마토주쿠)이라는 친일교화책에 가입했다. 대화숙은 내선일체를 강화하 고 사상과,  사건 관계자를 선도한다는 취지로 운영됐다. ④1941년 9월엔 조선임전보 국단 발기인, 10월에는 이 단체의 이사가 됐다 조선인을.  수탈해 전쟁을 지원하는 데 힘을 보탰다.

2) 친일언론활동에 대한 기록들로 ①1939년 1월 1일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 보 에> '축전첩신년, 기무운장구' 시국 광고에 참여했다. '기무운장구 는' "무운이 오래 되기를 기원한다 는" 의미다 일제의.  승전을 축원하는 것이다. ②1940년 7월에는 잡지 <삼천리 에> 지원병 격려 글 지원병과- 혈한애의 인 을- 기고했다. 조선인들에게 '천황 을 위해 전장으로 나가 싸울 것 을' 독려했다. "지금 대아시아의 신질서건설의 성업에 조선 청소년이 참가하는 것을 참으로 높게 평가한다 이.  거룩한 사업에 우리 조선 청 소년이 진심으로 지원병을 희망하여 몸을 위에 바치는 모양에 감사를 금할 길이 없

다 조선. 청소년 제군은 혈과 한과 애의 인이 되라."  

3)창시개명, 月城鍾萬(츠키시로 쇼마)

4)일본군의 전쟁을 위해 헌금지원 ①1930년대 중반부터 일본군에 위문품 등을 보냈 다. ②1937년 7월 북지 황( 군) 위문품대로 1,000원을 기탁했다. ③1938년 10월 정주경 찰서에 황군위문금 1,000원 기부했다. ④1939년 7월 위문대에 1,000원을 기부했다. 이에 대해 이종만 선생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담보적 개념이며 농업발전을 위한 출 판운동, 청년교육운동 등에 훨씬 더 많은 돈을 지출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본.  토론자 는 자료를 분석하면서 이종만 선생께서 진정으로 대동사상의 대동공동체를 실천해 보 겠다는 것이었는지 그렇지 않은 것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넷째, 북한에서의 활동에 대한 평가의 문제입니다 북한에서.  이종만 선생의 활동에 대 해서도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해방 이후 북한에서 선생의 주요활동을 조국통일운동, 지하자원개발의 선구적 역할에서 대동사상과 그의 실천운 동에 대한 온전한 연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북한 정권은 항일영웅, 광산 기술자 필요성이 있었고 또 해방 이후 북한의 주요 인물들과 과거 교유관계가 강했다 는 사실에서 북한에서의 입지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발제자의 보는 시각이 북한에서 인정받았기에 우리도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는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모. 든 것이 차별하에 있는 일제의 식민지라는 특수한 조건과 새로 운 침략, 전쟁이라는 국제정세 속에서 일제의 이상적 기업과 농촌이상향 건설을 방해 하고 저지하는 상황에서 대동사람들과 함께 이종만 선생의 애국적이고 민족적 사고에 기인한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종만.  사상을 유교 기, 독교 불교를,  아우르는 이타 적 삶에서 찾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렇다면 민족주의자로서 북한 사회주의사회 건 설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는 점을 어떻게 평가해야 합니까 특히?  이종만 선생은 1974년 수기에서 북한의 독재자며 신적 존재인 영도자 김일성을 극찬했다는 사실에 서 민족주의자 대동사상 대동공동, , 체 구성 그,  실천자로서 진정한 의미를 의심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토론자는 이종만 선생에 대한 연구는 위에서 제기한 문제들에 대 해 정의될 수 있도록 보다 더 많은 시간과 자료를 바탕으로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 한다. 감사합니다.

<신수식 박사 프로필>

모스크바대학교 정치학 박사 전 경희대학교) 외래교수     전주대학교 객원교수     광주여자대학교 외래교수     KC대학교 외래교수 등 현 남북경협국민운동본부) 사무처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리스트     해외동포언론사협회 사무총장 

<발제문>


1] 송순현 - 대동교학회 취지서 에 따른 대동교학회 발족의 시대적 요청

 <발제문> <대동교학회 취지서 에 따른 대동교학회 발족의 시대적 요청>

송순현 원장 정신세계원( )

1945년 해방 직후 환, 갑의 나이에 이종만 선생이 작성한 <대동교학회 취지서 에> 담 긴 선생의 사상과 이상은 오늘날 인류가 봉착한 여러 위기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 는 지혜와 비전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사상과 이상을 바탕으로 무엇보다도 남북 분 단의 갈등을 극복하고 남북의 평화 나아가,  평화통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갈 수 있 다고 믿는다.

핵심은 물론 대동(大同)이다 선생이.  말하는 대동주의 대동사회 그리고, ,  대동인(大同人)은 과연 어떤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이상과 비전을 오늘날의 현실에 구 현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답을 모색하는 것을 본 발표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

취지서만 남기고 북으로 가셨기 때문에 그 실현을 위해 실제로 노력하신 흔적은 찾을 수 없으나 <대동교학회 는> 당시 그가 꿈꾸었던 대동사회를 건설해나가기 위해 전 국 민을 대상으로 대동정신을 일깨우고 계도하는 교육기관이었을 것이다. 77년 전의 그 의 대동의 사상과 이상과 구상을 조명해보는 목적은 <대동교학회 의> 실제적인 발족이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밝혀보고자 하는데 있다.

개개인의 인격의 성숙과 영성(靈性)의 개화(開花)를 토대로 하는 이종만의 대동주의는 인류가 꿈꾸어온 이상사회 건설의 근본정신으로서 그리고 생활철학으로서 작용할 것 이다. ‘세계의 평화는 결코 신통변화로 될 것이 아니요 진리의 일상실행이라는 평범한 경로로 실현될 것 이라는’ 그의 이 한마디 말 속에 대동교학회의 핵심이 들어있다.

‘진리의 일상실행이라는 평범한 경로 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가.  특히 강조한 것 은 ‘교장즉직장 직장즉교장 제도의’  확립이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교육장은 즉 산업 의 직장이요 모든 직장은 즉 교육의 장소가 되게 하는 것이다. 삶의 터전인 직장이 인격도야와 영성 개화의 교육장이 되는 것 그리고,  지식과 기술을 익히고 인격 성숙 과 영성 계발을 함양하는 교육장은 바로 삶의 터전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근간이 되 게 한다는 것이 대동사회를 건설하는 그의 실천적 방안이었다.

그의 노동관은 종교적 차원에까지 닿아있다. 노동이 인생으로서 네 가지 은혜에 보답 하고 자신과 처자를 보살피는 신성하고 유쾌하고 자유로운 일이 되게 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생은.  모름지기 평생교학 평생, 근로로써 수련과 보은(報恩)이 멈춤이 없어 야 한다는 것이 또한 그의 인생관이었다.

근로와 배움의 목적에 대해 그는 <대동교학회 취지서 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것은 사람을 신성하게 하고 사물을 신성하게 하는 일이다 평생.  끊임없이 배우고 수 련함으로써 인류를 신(神)의 영역에 끌어올리는 동시에 그의 근로에서 산출된 물자로 하여금 신의 물건, 하늘의 물건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  근로에 희열이 있고 이 희열 은 작품을 통하여 그 작품을 쓰는 사람에게 통한다 여기.  미묘하고 신비한 영혼의 길 이 열리는 것이다. 노예적 근로에서 생산된 상품과는 판이한 것이다 이러한.  산업이야 말로 인류를 신격화 하고 한 집안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니, ‘교장즉직장 은’ 이 정신의 도장(道場)이 될 것이다.“

이렇듯 이종만 선생의 인생관 기업관 사회관, , , 노동관은 종교적 차원에 기반을 두고 있다. 

취지서 말미에 제시되어 있는 <대동주의 요령> 7개 항목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 되어 있다.

사람이 새로워져서 신격화 되고 사물이,  새로워져서 신격화 되는 것을 목표로 삼 아 사람도 사물도 하늘의 뜻에 따라 존재하는 것을 지극히 한다.

우주를 대도장(大道場)으로 만물을,  경전으로 생활을,  수행으로 하여 인생의 일생 을 배움의 연속으로 한다.

대동조선 대동세계를,  건설하여 모든 사람이 다 즐거움을 누리는 지상천국을 실현 한다.

1941년에 발표된 <대동일람> 서문에서 이종만 선생은 대동사상의 핵심을 이렇게 밝 혀놓고 있다.                       

“사심을 버리고 대자아(大自我)의 활연한 심경에 이르면 우리 눈앞에는 어느 것이나 차이나 구분이 없이 모든 것이 다 같은 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 므로 개 인과 사회가 이해화복을 같이 하는 동시에 우리는 비로소 노동과 자본의 조화로운 협 조 속에서 공존공영의 이상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이 곧 불초의 가슴에 품어온 대동사상(大同思想)의 핵심인 것입니다.”

사심을 버리고 대자아의 활연한 심경에 이른 사람 그가,  곧 대동인(大同人)임을 밝히 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인류가 대동인이 될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대동사회, 지상낙원이 이루어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인류가 진화해가는 방향일 것이다.

<대동교학회 취지서 의> 결어(結語)에서는 지상천국 건설에 앞장서는 우리 민족이 되 자고 외치고 있다.

“조선의 동포여 세계의, 동포여 자, 손만대의 행복과 즐거움을 위하여 인, 류의 명예를 위하여, 크게 새로워지는 새 세상의 건설을 위하여, 떨치고 일어나지 아니하려는가. 생존경쟁의 국제생활의 옛 습관을 깨뜨리고 서로 사랑하고 돕는 신세계 질서를 건설 하지 아니하려는가. 이기적이고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힌 지옥과 같은 세상에서 벗어 나서 남을 사랑하고 도덕이 빛나는 천국을 건설하지 아니하려는가 하늘이.  진실로 바 라는 바가 바로 이것임을 우리는 확신한다.”

남을 사랑하고 도덕이 빛나는 천국 건설에 앞장서는 한민족의 미래, 실로 가슴 벅찬 비전이 아닐 수 없다 한. 류 열풍이 이렇게 승화되어나갈 수 있다면 그야말로 우리 민 족은 도덕 선진국으로, 영성문화 선도국으로 인류화합과 세계평화에 크게 기여하는 보람과 영광을 얻을 것이다.

대동인 양성 교육기관인 <대동교학회 는> 이종만 선생의 끊임없는 인격수양과 깨달음 과 영성에서 우러나온 지상낙원 건설의 교두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 류가 당면 한 여러 난제들을 풀어가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진리의 일상실행이 바탕이 되지 않고 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신성한 근로와 대동정신을 바탕으로 다 같이 잘 사는 세상 대동사회로,  나아가는 길 이 <대동교학회 취지서 에> 충분히 밝혀져 있다고 본다 이제.  <대동교학회 의> 발족하 여 그 이상을 실현시켜나가는 활동을 전개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것은.  이종만 선생의 숭고한 뜻과 업적을 기리는 최상의 길이며 총체적인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 개개인의 행복과 세상의 진보에 크게 기여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대동사회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핵심적 과제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심을 버리고 대자 아의 활연한 심경에 이를 수 있는가?”일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이 <광업조선> 1939년 7월호에 실린 이종만 선생 인터뷰 기사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선생의 인생의 낙(樂)은 어디에 있습니까? 

▶ 나의 낙은 도(道)를 닦는데 있소이다.

도(道)라 하시면?

▶ 좋은 경전을 십 독(十讀) 백 독(百讀)하는 사이에 옛 성현의 교훈이 절로 알려져 요 그.  분들의 하신 자취의 만분(萬分)의 일이라도 닦아보려고 하는 점이외다.

좀 더 깊이 말씀하여 주시면 .…...

▶ 나의 서가에는 경서가 놓여있어요 그것은.  옛 성현의 이것을,  기회 있는 대로 보 면서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吾身)하는 부지런함으로 이 세상에 아무쪼록 도움 되는 몸으로 지내려 생각하여요.

석가서(釋迦書)요?

▶ 네, 석가께서는 환락의 왕성과 고귀한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인세의 번뇌를 해결 코자 중생을 구제하시려 몸소 그 간난(艱難)의 수도를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도 ‘이 세상의 슬픔과 쓰라림을 다만 조금이라도 구하는 몸이 되어 지이다 라고’ 염원하는 길 에 섰습니다.

석가모니뿐이십니까?

▶ 성인(聖人)은 다 숭배합니다 기. 독(基督)께서는 제 손수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까 지 저의 원수마저 용서하실 것을 말씀하셨어요 나도.  내 몸이 낮은 것을 상시 생각하 여 아무쪼록 또 어떠한 경우에든지 남을 용서하고 같이 잘 살아 갈 길을 찾는 사도 (使徒)가 되려고 해요.

선생은 한학(漢學)의 소양이 깊으시다니 그러면 공자께도…..

▶ 네, 논어도 깊이 읽습니다. 공 부자께서 늙으실 때까지 주유천하 하시며 세상에 도를 펴시기에 애쓰신 그 정신과 노력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그러한 정신수양하시는 길 이외에 또 다른 일이 없습니까? ▶ 다 같이 잘 살 길을 찾자는 일 이외에는 없소이다.

그러면 이미 거만의 황금을 더 추구하지 않는다 하시고 또 인세의 향락을 필요 이 상으로 찾지 않는다 하시고 성현의 뒤를 따르신다 하시면 현재의 사업과 선생의 앞에 차려지신 그 수억의 돈과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 언제든지 현재의 여러 회사와 학교를 잘 맡아주실 분이 나선다면 나는 언제든지 물러나 앉겠습니다.

한 두 개인의 인격자를 찾습니까?

▶ 그보다도 철과 같이 다져진 조직체를 갖고 싶소이다 그러기에.  내가 관계하는 온 갖 사업기관은 뒷날 내가 없어도 아무 거리낌 없이 잘 돌아가도록 모두 다 조직체를 완성하려고 생각하고 있소이다.

그 조직체가 완성되는 날이면?

▶ 나는 돈 관리라든가 돈 버는 일에서 아주 떠나서 교육사업 같은 인세의 영재를 양 육(育)하는 일에 일생의 힘을 다 바치려 합니다.

-

이상으로 <대동교학회> 발족의 필요성에 대한 필자의 소견 피력을 마치고 이제 이종 만 선생의 외손녀 김반아 박사께서 <한겨레온>에 기고한 <대동교학회 취지서> 전문 (全文)에 대한 논평의 글을 그대로 전재하여 이종만 선생의 대동사상과 대동사회 건 설에 대해 심층 이해를 돕고자 한다. 

(*아홉 개 단락으로 나누어 소제목을 붙인 것은 원문에는 없는 것임)

1. 인류사회에서 전쟁을 완전히 없애는 하나의 일만이 오직 정(正)이요 의(義)요 인류 의 몸과 마음 모든 노력의 둘도 없는 유일한 목표이다.

유사이래의 비참하기 그지없는 대 전쟁은 8월 14일 일본의 굴복으로써 막을 내렸다. 전 세계가 온통 전장이 되었고 전 인류가 모두 피해자였다 소모된.  물자는 억조(億兆) 에 달하고 살상된 인명은 수십만에 이른다 아비를.  잃고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고 집 을 잃고 서로 떨어져 울부짖는 자로 말하면 억(億)으로 헤아릴 것이다 아 전. , 쟁의 처 참한 해독이여 전, 쟁의 죄악이여.

이제 전쟁의 승부는 판명이 났다. 패자는 조국과 모든 자유를 잃었거니와 승자는 대 체 무엇을 얻었는가. 영토냐, 배상이냐, 승리의 기쁨이냐. 그런 것이 전쟁의 손실을 보상 할 수 있으랴. 전쟁으로 하여 상실된 인명과 생존자의 비통을 대신 보상할 것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으니, 그것은 이 세상에서 전쟁이 완전히 사라지도록 하는 한 가지 일이다. 이번 전쟁 후 처리에 있어서 이 한 가지 일을 이루지 못하여서 지구상에 다시 원자폭 탄이 사용되게 된다 하면 그것은 이번 승전자의 책임이다 인. 류사회에서 전쟁을 완전 히 없애는 하나의 일만이 오직 정(正)이요 의(義)요 인류의 몸과 마음 모든 노력의 둘 도 없는 유일한 목표이다.

<논평>

“아 전, 쟁의 처참한 해독이여 전, 쟁의 죄악이여!” 이 글을 읽으면서 이종만의 절규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류사회에서 전쟁을 완전히 없애는 하나의 일만 이 오직 정(正)이요 의(義)요 인류의 몸과 마음 모든 노력의 둘도 없는 유일한 목표’ 라고 이종만은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 또한 없을 것이

다.

그런데 왜 인류 역사상 한시라도 지구상에 전쟁이 없었던 시기는 없었던 것일까? 약 육강식의 동물적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강자가 약자를 정복하고 침탈하는 그 무 수한 전쟁을 끊임없이 겪어온 인류는 인명을 살상하고 문명을 파괴하는 전쟁의 해악 과 참혹함에 대해서 이제는 그렇게도 무감각해진 것인가. 수천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UN이 창설되어 세계 평화유 지를 위한 역할을 해왔지만 과연 지구상에 얼마나 전쟁의 위험이 사라진 것일까. 전 쟁에 대비해서 가공할 살상무기들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그 군사력으로 강대국의 지위 를 유지하며 세계의 패권을 쥐려고 하는 치열한 경쟁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것은 통탄할 인류의 비극이 아니겠는가.

정의구현이나 조국수호, 동맹국 보호 등의 명분으로 전쟁을 정당화하고 전쟁의 영웅 을 숭앙하는 인류의 의식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어. 떤 이유로든 사람이 사람을 죽이 는 일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 사람됨의 첫 번째 규범으로 자리 잡고 누구나 자발적으로 이를 준수하는 세상은 언제 이루어질까.

마하트마 간디가 실천한 비폭력주의가 평화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의.  구현을 위해서 악의 집단을 없애야 한다는 식으로는 결코 평화가 오지 않을 것이다 진정으로.  평화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력(武力)이 아닌 다른 차원 의 해법이 강구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인류사회에서 전쟁을 완전히 없애는 일 이를,  위해서는 깨달아야 하고 절감해야 하고 결심해야 하고 실행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이종만은 이어서 말하고 있다.

2. 전쟁의 원인은 이기적인 탐욕 승전국도, 자기반성을 해야만 한다.

대체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쟁에 참여한 각 나라가 서로 상대 나라의 죄 를 따지는 곳에 다 표시되었다. 전쟁에 참여했던 나라들은 이기적인 탐욕이 전쟁의 원인이요 이,  탐욕을 실현하기 위하여 국가가 영위하는 왜곡된 국민교육과 과도한 군 비와 군비 중심의 산업이 전쟁을 도발하는 마력인 줄을 다 안다 그러. 므로 패전국에 임할 때에 반드시 그 군비를 파괴금지하고 교육, 산업을 비경쟁적으로 개조함으로써 근본정책을 삼는다.

이것은 모두 지당한 일이거니와 승전자가 자기 자신을 반성하여 패배한 나라들에게 가하는 문책과 처벌과 개조를 자신에게 가할 때에 오, 직 그때에만 전쟁은 완전히 사 라지고 인류사회에 영원한 평화가 올 것이다.

전쟁에 참여한 나라들은 전쟁의 원인의 소재를 분명히 아는 동시에 전쟁을 완전히 사 라지게 하는 이념도 분명히 알고 있다 그것은.  자기의 전쟁을 변호하는 전쟁 이유를 선전하는 가운데 밖으로 알려지게 된다. 즉 민족과 민족이 서로 자기의 정의를 앞장 세우고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여서 강제로 빼앗거나 기만하고 속이는 죄를 범하지 말 고 서로 도우며 공존하는 국제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는 것이니 실로,  세계평화의 핵 심이 여기에 다 있는 것이요 더 덧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논평> 정의, 자유, 평화수호, 인권보호...이런 명분들을 내세우지 않는 전쟁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이기적인 탐욕이 전쟁의 원인인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 을까. 일본 제국주의도 대동아 평화공영을 내세우며 타 민족을 침탈하고 핍박했고 제 국주의 미국의 베트남 전쟁, 아프가니스탄 침공도 그러하지 않았는가 그.  탐욕은 누구 의 탐욕이며 그 탐욕의 뿌리는 무엇인가?

전쟁을 일으키는 이기적인 탐욕은 정치 권력자에게만 있었을까? 이 탐욕을 실현하기 위하여 국가가 영위하는 왜곡된 국민교육과 과도한 군비와 군비 중심의 산업이 전쟁 을 도발하는 마력이라고 이종만은 말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 되는 말이다 이기적인.  탐욕과의 전쟁, 이것이 진정한 정의와 평화를 위한 전쟁일 것 이다.

“지구상에 다시 원자 폭탄이 사용되게 된다 하면 그것은 이번 승전자의 책임이다 라.” 는 준엄한 경고의 메시지와 함께 미국 중국 러시아, ,  등 2차 대전의 승전국의  자기 반성을 촉구하는 이종만의 목소리가 지금 지구상에 메아리치고 있는 듯하다.

북조선의 비핵화 한반도의,  비핵화가 전 세계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있는 이 때에 강대국들의 핵폭탄 보유의 정당성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물어야하지 않을까. 그들도 핵을 포기하고 전 세계가 핵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시대는 언제 올 것인가 그것은.  아 마도 인류의 의식이 이기적이 탐욕에서 벗어나는 그날일 것이며 이는 곧 대동의 시대 가 열리는 그날일 것이다.

3. 정의와 평화를 위한 진짜 전쟁 사상전, (思想戰)에서 승리해야 한다.

대개 사람마다 하늘이 부여한 양심이 있듯이 민족마다 천명(天命)을 전하는 성현이 있어 인생 생활의 옳고 그르고 선하고 악하고를 아는 자가 적은 것이 아니요 도리어 모르는 자가 드물다 하물. 며 오늘날과 같이 인쇄, 통신 교통 교, , 육기관이 발달한 현 상에 있어서는 국가가 진실로 그 국민사상과 생활을 정의와 평화를 하나의 목표로 삼 아 집중적으로 노력하려 하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번의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나라들이 인류 구제 전, 쟁 종말의 큰 목표를 세우 고 현대문명의 모든 결함에 대하여 일대 수술을 감행하여 국가관과 인생관에 대 수정 을 실시하여서 종래의 제국주의적 상업주의적인,  이기주의 물, 욕주의를 제거하고 진정 한 진리주의 인도주의로서,  각자 국내의 정치 산업 교, , 육을 개혁하고 나아가서 전쟁 에서 패배한 나라들을 지도하기를 바라는 바이니, 이번 연합국의 전쟁 이유가 정의 옹호에 있다 하면 지금 승리를 얻은 것은 오직 무력전(武力戰에 서요 그) ,  제2 계단이 며 최후적 승패가 될 사상전(思想戰)은 이로부터 개시될 것이라고 믿는다.

<논평>

지금 세계 어느 국가가 진실로 그 국민사상과 생활을 정의와 평화를 하나의 목표로 삼아 집중적으로 노력하고 있고 제국주의적 상업주의적인, ,  이기주의 물, 욕주의를 제 거하고 진정한 진리주의 인도주의로서,  국내의 정치 산업 교, , 육을 개혁하고 있는가? 천명(天命)을 전하는 성현들의 말씀을 거울삼아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려고 진실로 노력하는 사람이 이 시대에 얼마나 있을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 엇이 선하 고 악한지를 모르는 사람이 드문데도 정의로운 세상이 구현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 일까? 이념과 이상을 있되 실천이 따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이종만의 답은 뒤에서 밝혀진다.

최후의 승패는 사상전에서 판가름 날 것이라고 한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이 것은 정의와 평화가 구현된 나라가 진정한 승리자가 된다는 뜻일 것이며, 이를 구현 할 수 있는 사상이 인류가 모색하고 정립해야할 과제라는 것을 또한 말하고 있다 이. 는 자본주의나 공산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경제 체제를 강구하는 것이 아 니고 국민사상과 생활의 중심을 오직 정의와 평화의 구현에 두는 인간사회의 근본을 정립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4. 부강이 아니고 청빈을 이상으로 삼는 도덕국가를 건설해서 공존공영의 미래세계를 선도하자

돌이켜 우리나라로 보면 36년간의 이민족의 굴레를 시원하게 벗어나서 이제 역사를 새로 바꾸는 때라 모름지기,  전 인류를 구제하리라는 큰 소망을 바탕으로 하여 독창 적이고 남다른 국가를 건설할 것이요, 결코 옛것만을 답습하는 안일함에 빠지지 말 것이다.

대개 우리 민족이 혈통적으로 심히 우수하고 문화가 오래 되고 고상하여 능히 중국에 못 미칠 바 없으며, 신라시대에 이미 동아시아 사상을 모두 모으는 업적을 이루었고, 또 우리 민족의 지리적 조건이 동아시아 여러 민족의 문화산업 교류의 중심자리에 처 하여 있으니 이 혈통과 이 역사와 이 지리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요, 겸하여 세계 의 대 반성 대 개조의 이 시기에 다시 건국을 한다는 것에 깊은 하늘의 뜻이 담겨져 있음을 자각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국토가 넓지 않고 인구가 많지 않다고 해서 스스로 위축되지 말아야 하며 우, 리가 목적하는 바는 부강(富强)이 아니고 차라리 청빈(淸貧)이어니와 오직 도덕, 문화 에 있어서는 단연히 모든 나라의 모범이 될 것을 스스로 기약해야 할 것이다.

힘이 의(義)’리고 하는 군국주의와 ‘부(富)가 의(義)라 하는’ 착취적 상업주의는 앞으로 는 하늘과 아울러 인류의 양심이 용허하지 아니할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돕는 원리에 서서 공존공영의 인류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앞으로의 인 류의 이상이요 또 실천일 것이니 그러, 므로 바야흐로 새로운 역사를 시도하려는 우리 는 마땅히 미래의 세계를 앞서서 이끌어 나갈 것을 기약할 것이요 이러함으로, 써 우 리 민족이 하늘에서 부여받은 품성을 발휘하여 인류가 발전해 나아감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논평>

“우리가 목적하는 바는 부강이 아니고 차라리 청빈(淸貧)이어니와 오직 도덕, 문화에 있어서는 단연히 모든 나라의 모범이 될 것을 스스로 기약해야 할 것이다 바. 야흐로 새로운 역사를 시도하려는 우리는 마땅히 미래의 세계를 앞서서 이끌어 나갈 것을 기 약할 것이요, 이러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하늘에서 부여받은 품성을 발휘하여 인류가 발전해 나아감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심장이 세차게 고동치는 것을 금할 수 없다. 이것은 해방 직후의 건국에 대한 얘기일 뿐만 아니라 오랜 분단에서 통일로 나아가는 길목에 서있는 지금 의 우리가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참으로 중대한 방향제시가 아닌가!

여기에서 말하는 “부강이 아니고 차라리 청빈이어니...”라는 말은 자본주의 진원으로 최강대국의 위치를 자랑하던 미국이 오늘날 도달한 도덕적으로 천박한 입장을 보면 그 길이 하늘의 품성을 들어내는 길이 아님을 절감한다.

부강한 나라가 아니고 청빈한 나라 도, 덕의 나라 문화의,  나라를 세움으로써 군사 강 국이나 경제 강국이 아닌 도덕 강국으로서 세계에 우뚝 설 수 있다면, 이것을 남과 북이 공동의 목표로 삼아 정의와 평화의 시대로 나아가는 큰 길을 함께 열어나갈 수 있다면 그럼으로, 써 ‘힘이 의(義)’라고 하는 군국주의와 ‘부(富)가 의(義)라 하는’  착취 적 상업주의에서 벗어나 서로 사랑하고 돕는 원리에 서서 공존공영의 인류세계 건설 에 앞장서게 된다면 그리고,  이 길을 통해서 남북의 평화통일이 저절로 이루어져나간 다면, 이는 우리 민족이 하늘에서 부여받은 순박한 품성을 빛내고 홍익인간 이념을 실현하면서 인류발전에 기여하는 천시(天時)를 맞은 것이리라,

우리 국민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이 길을 선택하려면 필히 대동사상의 함양과 생활의 실천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 이종만은 이어서 말하고 있다. 5. 종교적 진리를 일상 실행하는 것이 세계평화의 핵심

이에 기초가 되는 것은 교육과 산업의 개조이다 교. 육에 있어서는 좁고 답답한 민족 주의와 국가주의적 편견을 버리고 보편타당성을 가진 진리를 기초로 하되 종교를 떠 난 과학은 항상 개인에 있어서는 물욕의 도구 국가에,  있어서는 침략의 폭력을 이루 기 쉬우니 자비 인, 애의 근본정신 위에 선 과학이야말로 능히 인간생활을 이롭게 하 는 본래의 성능을 발휘할 것이다. 산업도 종교를 떠날 때에 개인에 있어서는 물욕의 추구가 되고 국가에,  있어서는 침 략의 동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니 세계가 최근에 경험한 전쟁의 비극은 실로 종교를 떠난 과학과 산업에서 온 것이다.

부처님의 자비 공자의,  인의 예수의,  박애는 시대와 사람이 다를지언정 인류평화의 둘 도 없이 유일한 새 생활원리이니 오직 이 원리의 실천만이 세계평화의 핵심이다 세. 계의 평화는 결코 신통변화로 될 것이 아니요 진리의 일상실행이라는 평범한 경로로 실현될 것이다.

과학도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서 있고 산업도 그러한 세계야말로 정당한 질서의 세계 일 것이다 그. 렇다고 끼리끼리 모여 증오와 비방과 투쟁을 일삼는 종파 종교를 시인 함이 아니요 순수한 종교의 출현을 희망하거니와 아무리,  퇴화한 종파라도 아주 없는 것 보다는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도움이 되는 것이다.

<논평>

“인류동포 세계일가 의’ 정신으로써 국민정신의 기조를 삼자!” 이 얼마나 차원 높고 혁 명적인 주장인가! 편협한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벗어나서 세계를 한 가정으로 삼고 세 계인을 모두 한 가족처럼 받아들이자는 이 이념은 궁극적으로 인류가 지향해 나가야 할 대동평화의 길이지 않겠는가.

자기나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을 정당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겠으나, 이것을 넘어 상대와 전체의 이익을 함께 도모해나가는 길이 정의와 평화의 길임은 영 성이 깨어있는 사람들에게는 자명한 일이다 공. 존공영의 정신의 뿌리는 바로 대동의 사상과 깨달음에 있다.

종교적 신조와 진리를 떠난 과학과 산업이 결국은 인간을 물질의 노예로 만들고 전쟁 의 원인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도. 덕과 종교적 진리의 일상생활 속에서의 실천만이 세계평화의 핵심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짚어주고 있다.

이것이 이종만의 평화론이며 이를 위해 직장이 그 교육장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의 평화론이 말로만 그치는 공허한 주장이 아니고 세상에 실현시키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류 역사에 평화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에 따르는 실천이 없었기 때문에 평화가 이 루어지지 않았고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 아니겠는가 평화의.  길을 알면서 왜 그 길을 가지 않았을까? 아니, 왜 가지 못했을까? 그 길을 가로막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6. 올바른 산업은 신성하고 유쾌한 근로를 바탕으로 한다.

산업은 원래 인생의 의식주를 풍족하게 하고 안락하게 함이 목적이요 업자의 돈벌이 가 목적이 아니다. 근대의 산업이 병적으로 발달하여 인생생활을 위하여 있을 산업이 인생생활의 고통과 불행의 원인이 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 빈부의 차이 황, 금을 우상으로 섬기는 혐오할 모든 사상과 행위가 국내의 정치적 투 쟁과 국제의 갈등의 주요 원인이 되어서 인류 행복의 방편일 산업이 도리어 일대 혁 명을 치르고서야 올바로 잡을 수 있는 문제점을 만들어 놓았다.

세계의 산업은 모름지기 본래의 올바른 자리로 돌아갈 것이니 토지를,  경작하고 광물 을 채굴하고 기계를 돌리는 노동이 인생으로서 네 가지 은혜에 보답하고 자신과 처자 를 보살피는 신성하고 유쾌하고 자유로운 일이 되게 하여야 할 것이다.

수요를 예측해서 생산을 하고 생산한 후에는 수요에 맞게 공급하는 것은 당연히 국가 의 정치가 조절할 일이나, 농업 어업 광업 공업, , ,  등 모든 근로가 종교적 자유와 기 쁨에서 나오도록 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노예처럼 일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하는 것 이 또한 국가의 중대한 임무일 것이다.

<논평>

70여 년 전에 작성한 이 글의 내용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실정을 그대로 말하고 있으 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내의 정치적 투쟁과 국제의 갈등의 주요 요인이 노사의 대립, 빈부의 차이 황, 금을 우상으로 섬기는 모든 사상과 행위에 있다고 밝히고 있고 산업이 본래의 올바른 자리 로 돌아가려면 일대 혁명을 치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대동사상의 실천으로 노사화합과 공동번영의 성과를 이루었던 이종만의 대동콘체른 경영철학과 시스템 바로 오늘날의 산업의 일대혁명의 표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의 방편으로서의 산업의 목적과 노동(근로 의) 본질을 말하면서 “모든 근로가 종교 적 자유와 기쁨에서 나와야 한다 고.” 주장하고 있는 이종만의 대동사상은 종교적 차 원에 노동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업과 노동을 이렇게 꽃피워가는 것이 국가의 중대한 임무라고 한다면 이종만이 생 각하는 정치적 이념은 또한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앞서 언급한 도덕국가의 이념이 아 닐까 싶다 여기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은 뒤에 다시 펼쳐질 것이다.

7. 일터와 배움터가 하나 됨에서 수련과 보은의 인생이 이루어진다.

근로의 자유화 행, 복화를 위하여는 ‘교장즉직장 직장즉교장 의’ 제도를 확립할 것이니, 다시 말하면 모든 교육장은 즉 산업의 직장이요 모든 직장은 즉 교육의 장소가 되게 하는 것이다 종. 래의 교육은 실생활에서 멀리 떨어진 이른바 학원 교육이었고 종래의 산업은 전연 배움을 떠난 힘든 일일 뿐이었다 이리하여서.  배움과 일이 서로 분리할 뿐더러 학습하는 자는 학습에만 전념하고 일하는 자는 일에만 빠져서 학습이 없는 자 와 일이 없는 자를 생기게 하니 이는 국민을 기형화 하는 것이다.

인생은 모름지기 평생교학 평생, 근로로써 수련과 보은(報恩)이 멈춤이 없어야 할 것이 다 더구나.  문화가 뒤떨어지고 산업이 초창기에 있는 우리 조선 민족으로서는 교학과 근로의 일체화 보, 편화 평생화는,  절대로 긴요한 것이다 이것이.  ‘직장즉교장 교장, 즉 직장 을’ 주장하는 이유이다.

<논평> 일과 학습이 같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제도를 말하고 있다 평생교. 육과 평생근로는 오 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끊임없이 배우며 유쾌하고 신성한 일과 평생을 같이 한다는 것 이것이,  개개인과 사회가 올바로 성장하는 길이라는 것 을 이종만은 말하면서 또한 수련의 중요성을 논하고 있다.

수련과 보은(報恩)이 멈춤이 없는 인생 이것은, 이종만의 일생의 실천이었고 기업경영 의 기본이었고 이상사회 건설의 토대로 삼은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일이,  곧 수행이고 수행하는 것이 곧 일을 잘 하는 길이라는 것을 말하 고 있는 것이다 일상의.  삶과 진리의 수행이 유리되지 않고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가 장 이상적인 인생의 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종만은.  그 수행의 의미와 본질에 대해 이어서 말한다.

8. 정성을 다하는 신성한 근로는 자기완성과 인류 신격화의 길

그러나 근로가 배움과 하나 되게 하는 데에는 위에 말한 것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 다 그것은.  사람을 신성하게 하고 사물을 신성하게 하는 일이다 평생.  끊임없이 배우 고 수련함으로써 인류를 신(神)의 영역에 끌어올리는 동시에 그의 근로에서 산출된 물자로 하여금 신의 물건, 하늘의 물건이 되게 하는 것이다.

부모나 자녀를 위하여 짚신을 만들 때에 사람은 정성과 공경을 다하는 것이니 그 짚 신은 이득을 위한 상품이 아니고 진실로 마음과 영혼을 지닌 신성한 물건이요 하늘의 물건이 되는 것이다.

이 근로에 희열이 있고 이 희열은 작품을 통하여 그 작품을 쓰는 사람에게 통한다. 여기 미묘하고 신비한 영혼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노예적 근로에서 생산된 상품과는 판이한 것이다.

이러한 산업이야말로 인류를 신격화 하고 한 집안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니, ‘교장즉직장 은’ 이 정신의 도장(道場)이 될 것이다.

<논평> 여기에서 이종만은 상식을 뛰어넘는 고차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평생 끊임없이 배우고 수련함으로써 인류를 신(神)의 영역에 끌어올리는 동시에 그의 노동에서 산출 된 물자로 하여금 신의 물건, 하늘의 물건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발상이고 사상인가 이종만은!  이상주의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그 분의 이 숭고 한 이상과 이를 세상에 밝히는 용기와 소신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영혼을 지닌 신성한 물건, 하늘의 물건을 생산해 해는 신성한 노동‘, 이것의 실현이 과연 가능할까? 이종만은 특정 종교를 신봉하지 않았다. (그가 살던 방에는 4대 성인 - 예수 석가 공자 간, , , 디- 의 사진이 걸려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종교의 본질 을 깨달은 종교인이고 사상가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이를 그의 대동사업체와 세상에 실현하고자 했던 사회혁명가 였다.

“이 근로에 희열이 있고 이 희열은 작품을 통하여 그 작품을 쓰는 사람에게 통한다. 여기에 미묘하고 신비한 영혼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나의 영혼은 또다 시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지성이면 감천 인간의,  지극한 정성이 하늘도 감동시 킨다고 하했다. 그 정성이 물건에도 담겨 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전달된다고 하는 것을 그는 직관과 체험으로 알았던 것이다.

사랑과 평화의 기운이 담긴 지극한 정성 여기에,  세상을 구원하는 핵심이 있다는 이 말씀이 나에게 큰 깨달음으로 다가오고 가슴 속에 깊은 감동을 일으킨다 나는.  여기 에서 세상의,  구원은 양심이 빛나는 순수정신 지, 극한 정성 그리고,  모두가 다 같다는 대동사상의 발현이 인류에게 보편화되는 길에 있다는 결론을 얻는다. 이것은 이미 인류의 모든 성현 모, 든 동서의 전통종교의 가르침과 다름이 없다 길은.  있으나 가지 않고, 앎은 있으나 행하지 않은 것뿐이다 다.  같이 잘 사는 길 다,  같이 행복과 평화의 길을 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종만은 이에 대한 답을 취지서 마지막에 남기고 있다.

“여기에 미묘하고 신비한 영혼의 길이 열린다 고.” 했으니 영, 혼은 하늘과 닿아있는 신 성한 인간의 본질이라는 깨달음을 이종만은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손녀인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일 년 전에 써진 대동교학회 취지서의 이 핵심이 오늘날 나에게는 생명모성의 개념으로 자리 잡고 체화되는 과정에 있으니 이것은 DNA로 전해진 신비 한 영혼의 길의 연결이 아닐까 싶다.

9.  조선의 동포여 떨치고, 일어나 서로 사랑하고 돕는 신세계 건설에 앞장서자

인류는 지금 슬픔에 빠져 있다 고통과.  어려움의 불안 가운데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이치를 믿고 인류의 양심(良心)과 능력(能力)을 믿는다. 역사는 진전(進展)이 요 반. 복(反復)이 아님을 믿는다 상. 항(桑港) 회의에서 여러 나라가 전쟁을 완전히 없 애기로 확실히 약속하였으니, 우리는 그것이 반드시 실현될 것을 믿는다 그러나.  전쟁 의 종결과 세계의 평화가 다만 국제적 회의와 조약만으로 되지 아니하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경험하였다 이것은.  오직 각국 각 민족이 교육과 산업의 일체(一體), 종교와 과학의 일체(一體)를 통해서 인간성을 바르게 하는 수련을 통하여서만 실현될 것이요. 그 밖에 길이 없음을 우리는 확신한다.

조선의 동포여, 세계의 동포여, 자손만대의 행복과 즐거움을 위하여, 인류의 명예를 위하여, 크게 새로워지는 새 세상의 건설을 위하여, 떨치고 일어나지 아니하려는가. 생존경쟁의 국제생활의 옛 습관을 깨뜨리고 서로 사랑하고 돕는 신세계 질서를 건설 하지 아니하려는가. 이기적이고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힌 지옥과 같은 세상에서 벗어 나서 남을 사랑하고 도덕이 빛나는 천국을 건설하지 아니하려는가 하늘이.  진실로 바 라는 바가 바로 이것임을 우리는 확신한다.

<논평>

“조선의 동포여 세계의,  동포여 이기적이고,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힌 지옥과 같은 세 상에서 벗어나서 남을 사랑하고 도덕이 빛나는 천국을 건설하지 아니하려는가!” 이종 만의 영령은 70여 년 전의 이 말을 지금도 똑같이 이 시대 조선의 동포에게, 세계의 동포에게 눈물로 호소하고 있을 것이다.

이종만의 이 눈물이 신비하고 미묘한 영혼의 길을 통해 어머니의 눈물이 되었고 나의 눈물이 되었다 이.  눈물이 만인의 눈물이 되어 평화의 강물을 이룰 때 이 애타는 호 소의 눈물은 우리 모두의 환희의 눈물로 바뀔 것을 나는 확신한다.

<대동교학회 취지서> 말미에는 다음과 같이 대동인의 실천 강령을 제시하고 있다.

<대동주의 요령>

1. 원만하게 모두 화합하는 정신으로 세계평화 인, 류 한 가정을 이상으로 한다.

2. 만물일체, 인류평등을 믿는다.

3. 교육과 산업을 혁신하여 ‘교장즉직장 직장즉교장 제도를’  확립한다 이리하여.  사람 이 새로워져서 신격화 되고 사물이,  새로워져서 신격화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사 람도 사물도 하늘의 뜻에 따라 존재하는 것을 지극히 한다.

4. 종교와 과학을 조화하여 종교를 정신으로 하는 과학을 발전한다 이러하. 므로 물질 과 정신 양면의 인생 생활의 조화통일을 추구한다.

5. 우주를 대도장(大道場)으로, 만물을 경전으로, 생활을 수행으로 하여 인생의 일생 을 배움의 연속으로 한다.

6. 서로 사랑하고 도우며 함께 번영해 나감을 개인생활 국가생활의, 기본원리로 삼는

다.

7. 대동조선 대동세계를,  건설하여 모든 사람이 다 즐거움을 누리는 지상천국을 실현 한다.

<대동주의 표어>

1. ‘나 라고’ 말자 오직 ‘우리 라고’ 하자.

2. 일하면서 가르치고 배우면서 일하자.

3. 사람이 되면서 일을 하고 일을, 하면서 사람이 되자.

4. 내가 만드는 물건은 동포가 쓸 물건.

5. 살자고 하는 일인가 일하고자 사는 목숨이지.

<대동교학회 세부 요령>

1. 원만하게 모두 화합하는 정신으로 평화로운 인류사회의 건설을 기약함.

2. 교육제도 산업제도를,  혁신하여 ‘교장즉직장 직장즉교장 으로’ 써 실물교육의 실현을 기약함.

3. 종교와 과학을 조화하여 과학으로 하여금 인류의 진보와 원만하게 모두 화합함을 방해하는 일이 없게 하기를 기약함.

4. 인류의 생활을 최고 수준으로 향상시키고 평등에 이르게 하기를 기약함.

이상으로 대동교학회 취지서의 해설을 마치며 대동의 나라 건국의 주역이고 주인 인 대동인 국민에 대한 생각을 다듬어 본다.

   ‘다 같이 잘 사는 세상’. 대동의 나라는 다 같이 대동인이 되어야 이루어진다. 잘 산다는 것은 대동의 정신과 사상으로 산다는 것이다. 때 묻지 않은 양심과 훼손되 지 않은 인간성을 바탕으로 서로 사랑하고 도우며 기쁨으로 임하는 근로와 문화 창조로써 자기완성을 이루어나감으로써 저마다의 삶과 세상에 신성(神性)을 꽃피워 가는 것이다 이것이.  대동주의이다.

<송순현 원장 프로필>

1951년생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정신세계사>(1983)와 <정신세계원>(1990) 설립, 명상 영성· 분야의 출판과 교육 사업 에 종사. 현재 제주도에 거주하며 <저절로춤 일시무 를> 연마하면서 온라인 공부모임 <JN클럽> 운영. 



2] 이병철 - ‘대동교학회 취지서에' 담긴 ‘이종만의 사상과 이상에’ 대한 토론문

대동교학회 취지서에'담긴이종만의 사상과 이상에’ 대한 토론문

                                                                            이병철 교장 생태귀농학교

대동인 이종만과 대동사상에 대한 소회

나는 지금대동(大同)’이라는 이름의 하늘 아래에 서 있습니다 한.  생을 오롯이 사심 (私心)을 버린 대동인으로 살아오고자 전념한 실천수행인이자 자신이 품어온 대동사 회 그,  새로운 세상의 실현에 혼신을 바쳤던 한 사람 사회, 혁명가이자 이상주의자였던 이종만 선생이 펼쳐놓은 대동의 하늘입니다.

대동(大同)’ 또는 대동사상(大同思想)은 모두가 한 가족으로 되어 계급적 차별과 착취 가 없는, 고루 평등한 세상, 사람이 사람과 서로 어울려 함께 살맛나는 이상세계를 향한 아주 오래고 늘 새로운 꿈의 이름이자 그 지향이라 싶습니다. 

그러기에 이 대동사상은 공자 시대부터 줄곧 추구하여온 이른바 유교식 또는 중국식 이상사회를 일컫는 정신이자 근대 중국 변혁기 강유위(康有爲 1858~1927)의 대동서 (大同書)에 바탕한 세계개혁 이론과 손문, 모택동 등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중화민국 건설에 투신했던 이들에게, 그리고 지금도 우리 안에 이어져 오고 있는 새로운 세상 을 향한 지향이라 생각합니다.

나 역시 대동이라는 이 단어와 개념을 즐겨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로 이 단 어를생명평화 대동세상’, 또는호혜상생의 대동세계 라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 태까지 내가 써온대동 이란 하나의 관념에 불과한 말이라는 사실을 이종만 선생이 펼쳐놓은 대동의 하늘 이,  대동교학회 취지서와 대동인으로 살아오신 선생의 삶을 돌 아보며 새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대동교학회 취지서 에' 담긴 <이종만의 사상과 이상> 이란 이 주제에 대한 발제에 내가 따로 언급할 의견이 없습니다 이.  취지서를 해설하신 김반아님이나 이 해설서를 토대로 이종만 선생의 사상과 이상에 대해 발제하신 송순현님의 견해에 특별히 다른 의견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어라고,  더 보태는 것은 내 주제를 넘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발제문에 대한 토론자의 의견보다는 대동 교학회의 취지서를 읽고 떠오른 짧은 소회를 몇 마디 나누고자 합니다.

대동사상을 종교로 신앙으로 대동조선의 건국이념으로 삼아 아시는 것처럼 이 ‘대동교학회 취지서 는’ 일제의 패전에 의해 조선이 식민지로부터 해 방되어 ‘해방 조선을’ 어떤 나라로 세울 것인가에 대한 첨예한 논의 가운데서 이종만 선생이 자신의 구상을 대동사상의 이름으로 천명한 글입니다. 해방 정국에서 새로운 조선에 대한 건국 논의는 당시 각 정파의 노선에 따라 현저한 차이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선생은 새로운 조선의 건국이념으로 대동사상에 바탕을 둔 나라를 주창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취지서에는 건국이념이나 구상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 만 전체 내용을 보면 그렇게 판단됩니다.)

이 취지서에 천명된 내용을 보면 이러한 사상과 입장은 당시 좌우로 대립하던 정치적 노선과는 상당히 다르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대체로 사회주의 노선을 지향하면서도 자본주의 자체를 전면으로 부정하지는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이종만선생의 정치적 입장 을 중간파 노선이었던 사회민주주의 노선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더 뚜렷하 고 본질적인 차이는 <새로운 나라 건설의 핵심을 체제나 노선이 아니라 그 체제나 노선의 주인인 사람에게 두고 있다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 사심(私心) 없는 사람, 곧 너나없이 모든 사람이 대동인 사심을( 버리고 대자아의 활연 한 심경에 이른 사람 이) 되어 함께 대동사회를 이루어 평화롭게 사는 것이 새로운 나 라대동조선건설의 핵심은 (“실상 이 사회의 모든 불평과 불행의 그 근원을 살펴보 면 모두가 사심(私心)에서 시작된 것이니 가, 령 사람을 해치고 물건을 상하게 하는 것 도 사심 때문인 것이며 약육강식도 결국은 사심의 소치인 것입니다 그러. 므로 우리가 한번 사심을 버리고 대자아(大自我)의 활연한 심경에 이르면 우리 눈앞에는 어느 것 이나 차이나 구분이 없이 모든 것이 다 같은 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 므 로 개인과 사회가 이해화복을 같이 하는 동시에 우리는 비로소 노동과 자본의 조화로 운 협조 속에서 공존공영의 이상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이 곧 불초의 가 슴에 품어온 대동사상(大同思想)의 핵심인 것입니다.”1941년 대동일람大同一覽 서문)

어떻게 하는 것이 대동인으로 일하고 사는 길인가를 천명한 것이 대동교학회 취 지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선생은 사회주의자이면서도 동시에 도덕적 이 상사회를 꿈꾸는 종교적(?) 이상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먼저 체제를 세운 뒤에 이를 통해 그 체제에 걸맞은 인간을 길러낸다는 기존의 체제변혁 이론과는 반대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선생은 현실 세계 변혁을 위해 헌신한 사회주의자이면서도 동시에 사람이 중심인 도덕적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수행 자이자 종교인이었다고 해도 좋겠습니다 그러나 선생이 새로운 조선, 새로운 나라의 건국이념 정신 으로( ) 제시하고 있는 대동교학회 취지서의 정신과 그 실천 강령(대동주의 요령, 대동주의 표어 대동교학회,  세부요령)은 단순히 관념적인 구상이 아니라 이미 선생이 일제하 식민지 조선에서 고통 받던 농민들의 자작농 육성과 이상적 농촌건 설 목적으로 1937, 당시 50만원 현( 500억원 이) 란 큰돈의 사재를 출연하여 세웠던 대동농촌사를 시작으로 다 함께 잘사는 세상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설립했던 대동공업 전문학교 현( 김책공업대의 전신), 대동광산조합, 대동출판사 등대동콘체른(1938)’ 을 건설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실행하여 온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선생이 대동교학회 취지서에 천명한 내용은 식민지하의 그 어려운 상황 속에 서도 이미 이루어져 왔거나 그 가능성이 상당 부분 검증된 것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이상주의자의 구상이 아니라 선생의 확고한 신념으로 제시된 해방 조선이 나아갈 길 이라 하겠습니다 지금도 이 취지서를 읽을 때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 싶습니다.

이 대동교학회 취지서가 첫머리를전쟁 없는 인류사회 의실현에 두고인류사회에서 전쟁을 완전히 없애는 하나의 일만이 오직 정()이요 의, ()요 인, 류의 몸과 마음 모 든 노력의 둘도 없는 유일한 목표이다 라고.’ 시작하며 이에 대해 특별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은 당시 2차 대전으로 인한 전쟁의 참상을 목도하면서 인류에게 전 쟁보다 더 큰 불행과 비극이 없다는 절실한 깨달음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전쟁에 대한 이러한 선생의 지적과 천명은 지금도 여전히 전쟁이 인류사회의 가장 큰 재앙이라는 점에서 십분 공감됩니다 이처럼  전쟁 문제를 포함하여 이 취지서에 천명된 내용 가운데 80여 년이 가까이 흐른 지금도 우리에게 절실히 와 닿지 않는 내용은 없다는 것에 새삼 우리 자신과 이 나라의 처지를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이 취지서에 천명된 모든 내용에 공감하면서도 지금 이 시점에서 특별히 더욱 관심이 가는 것은 취지서 

  • ‘6. 올바른 산업은 신성하고 유쾌한 근로를 바탕으로 한다
  • 7. 일터 와 배움터가 하나 됨에서 수련과 보은의 인생이 이루어진다
  • 8. 정성을 다하는 신성 한 근로는 자기완성과 인류 신격화의 길 

김반아님의’( 해설에서 항으로 나눈 부분 참)

그리고 

  • 대동주의 요령 ‘3. 교육과 산업을 혁신하여교장즉직장 직장즉교장제도를 확립한다 이리하여.  사람이 새로워져서 신격화 되고 사물이,  새로워져서 신격화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사람도 사물도 하늘의 뜻에 따라 존재하는 것을 지극히 한다.
  • 5. 우주를 대도장(大道場)으로, 만물을 경전으로, 생활을 수행으로 하여 인생의 일생 을 배움의 연속으로 한다. 
  • 대동주의  표어 3. 사람이 되면서 일을 하고, 일을 하면서 사람이 되자" 

라는 부분입니다.

취지서 내용 6, 7항과 대동주의 요령 3항은 요즘의 창조경제론에 맞닿아있고 취지서 8항의 내용인 

  • 평생 끊임없이 배우고 수련함으로써 인류를 신()의 영역에 끌어올리 는 동시에 그의 노동에서 산출된 물자로 하여금 신의 물건, 하늘의 물건이 되게 하는 것이다.” 
  • 영혼을 지닌 신성한 물건, 하늘의 물건을 생산해 해는 신성한 노동‘, 
  • 이 근 로에 희열이 있고 이 희열은 작품을 통하여 그 작품을 쓰는 사람에게 통한다 여기에.  미묘하고 신비한 영혼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대동주의 요령 2항의 만물일체와 5항 은 해월선사의 경물(敬物)사상과도 맞닿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래서인지 이 대동 교학회 취지서와 실천강령(요령)을 접하며 이것은 새로운 사회건설(해방조선 을) 위한 실천적 제안이면서 동시에 이 한반도에대동세상 대동조선 이라는( )‘ 지상천국 건설을 선포하는 종교적 교지와도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대동교학회 취지서에 담긴 이러한 생각과 사상이 새삼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지금 지구촌의 인류공동체가 처 한 문명 대전환기에서 새로운 인류의식 전환의 절실성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대동인으로 살기와 대동세상 만들기

지금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그.  한 사람과 그의 생각 그리고 그가 이루고자 한 세계 를 생각합니다 어느 글에선가 일제 말기 대동사업체 경제자립운동의 이념에 대한 결론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이종만이 자신의 전 재산과 기업을 바쳐 세운 대동기업체 의 이념과 경영철학은 식민체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모색하던 진보적 민족주의 계열이 도달한 사상적 모색의 한 전형이자 실천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와는 별도로 대동교학서 취지서를 통해 내게 다가온 선생은 일제 식민치하의 참담한 현실 속에서 조선의 민중들이 억압과 수탈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찾아 치열하게 고민했던 한 사람 그  길을 사심을 버린 대동인이 되어 차별과 착취가 없이 고루 잘 사는 대동세상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사람, 숱한 실패와 좌절을 딛고 마침내 이룬 부를 자신의 신념과 이상인 대동사상과 대동세계 실현을 위해 쏟았던 사람. 그렇게 해방조선을 대동조선으로 일으켜 세우고자 했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선생에게 대동사상은 그의 신념이었고 신앙이었으며사심을 버리고 대자아의 활연한 심경에 이른 대동인(大同人)’은 자신이 추구하며 닦아간 사람됨의 참모습이며 대동세상을 이루는 핵심이었습니다 그. 래서 선생은 해방조선을 국가주의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것으로 구상했습니다 사적.  욕망을 넘어서기는 동시에 집단으로서의 국가주 의 민족주의도,  넘어서는 것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 므로 대동조선은인류동포 세계일가 인인류공동체를 지향하는 나라였습니다.

조선의 동포여 세계의,  동포여 이기적이고,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힌 지옥과 같은 세 상에서 벗어나서 남을 사랑하고 도덕이 빛나는 천국을 건설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선생을 그리면서 선생과 겹쳐 떠오르는 또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선생보다.  한 세대 를 앞서 살면서 선생과 같은 생각으로 그 길을 걸었던 사람 사회주의,  아버지 사회, 적 협동조합주의의 대부라고도 불렸던 로버트 오웬 (Robert Owen1771~1858)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두 사람 모두 자본가가 아닌 기업가를 자처하며 사적 이익 추구를 목 적으로 하는 착취적 상업주의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사업으로 이룬 부를 모두 고르게 함께 잘사는 새로운 사회의 실현을 위해 바치고 그 길에 헌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종만 선생은 이 땅의 대동사회주의 대부 또는 대동조선의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겠다 싶습니다.


그렇게 선생은 대동을 생의 목적으로 삼고 그 대동세상의 실현에 헌신하신 분이었습 니다 그.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한 세계다.
그 한 사람이 있어 그 한 세계가 또한 있다.
세계는 그 한 사람으로부터 비롯되고 
마침내 그 한 사람에게서 끝난다. 
그러므로 그 한 사람이 평화로우면 그 세계 또한 평화롭다.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당신이 먼저 평화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당신이 바로 그 한 사람인 까닭이다.

<이병철 교장 프로필>

여류(如流) 시인, 생태귀농학교장. (전 전국) 귀농운동본부 이사장, 녹색연합 공동대표.

<발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