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3

Sang-woo Son '그린뉴딜'이란 새 박스 안에 #핵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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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뉴딜'이란 새 박스 안에 버린다던 쓰레기를 도로 주워담고 있다. #핵발전은_저효율_고소비_초고위험
'그린뉴딜 거점' 에너지 융복합단지 추가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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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시는 원전해체산업을 중심이라고 이야기하던데, 혹시 다른 소스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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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ng-woo Son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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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린뉴딜 거점에 원자력이 웬말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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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와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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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니 원자력이 왜 다시 등장하는거죠? 이게 그린이라고????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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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ng-woo Son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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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실 압도적인 의미로
    핵 xx하다 라는 표현이 이미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그만큼 핵의 영향력이 상당하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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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경제를 함께, 그린뉴딜(Green Ne.. : 네이버블로그

환경과 경제를 함께, 그린뉴딜(Green Ne.. : 네이버블로그
환경과 경제를 함께, 그린뉴딜(Green New Deal)

환경부와 친해지구 ・ 2020.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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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환경부 소셜기자단 이석희 입니다!

최근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침체된 경제를 활성화시킬 핵심방안으로 주목받는 것이 바로 ‘그린뉴딜’인데요, 그린뉴딜이라는 개념이 생소한 분들을 위해 이번 카드뉴스를 통해서 자세히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그린뉴딜이란 “환경과 사람이 중심이 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뜻하는 말로, 화석에너지 중심 에너지 정책에서 신재생에너지 중심의 정책으로 전환하는 등 저탄소 경제구조로 전환하면서 고용과 투자를 늘리는 정책“입니다.

그린뉴딜의 개념은 토머스 프리드먼의 「Code Green」에서 처음 등장했는데요. 프리드먼은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화석연료 기반 질서에서 신재생에너지로의 지형변화를 추구하는 녹색 버전의 뉴딜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린뉴딜의 중요성은 기후변화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후변화는 기상이변을 초래하고, 농작물 생산에 영향을 미쳐 식량 안보 문제와도 직결됩니다. 뿐만 아니라 기후변화로 인한 생태변화로 코로나19와 같은 신종 바이러스가 발생하기도 하는데요, 바이러스는 공중보건의 문제를 넘어 경제활동 중단에 이르기 까지 각종 사회적 비용을 초래합니다.

그린뉴딜의 핵심은 화석에너지 생산에서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기존 에너지 관련 직종 쇠퇴는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2050년에는 전 세계가 재생에너지로 100% 전환한다는 가정 하에 그린뉴딜 일자리 창출효과를 시뮬레이션한 결과, 총 144만 2060개의 일자리가 순증가할 것으로 분석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탠포드와 UC버클리 대학 공동연구팀이 발표한 「한국에서 그린뉴딜 에너지 정책이 전력공급 안정화와 비용, 일자리, 건강, 기후에 미칠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대중교통 전기차 전환 시 화석에너지 사용량이 감소했고, 대기오염으로 인한 조기사망자 9천명이 감소하여 보건비용이 감소하였으며, 민간 에너지 지출 금액 41%가 감소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난 5월 20일, 정부는 그린뉴딜을 한국판 뉴딜 사업에 포함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5월 29일 기획재정부에서 발표한 3차 추경안에 따르면 한국형 그린뉴딜은 다음과 같이 계획을 잡고 있습니다.

1. 도시 · 공간 · 생활 인프라 녹색전환
2. 녹색산업 혁신 생태계 구축
3. 저탄소 · 분산형 에너지 확산

이렇게 3가지 항목으로 추진 계획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그린뉴딜은 이제 시작 단계로 추진 계획의 경우 변하는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대응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협의와 개선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주 큰 카테고리이고, 이제 시작하는 만큼 앞으로도 많은 토론과 협의가 필요하겠죠!

환경부의 추경 예산 편성 보도자료에 따르면 4,781억 원의 추경을 편성했고, 그린뉴딜에는 4,617억 원의 예산이 투입됩니다. 스마트 상하수도 구축사업, 전기 화물차, 이륜차, 굴착기 보급 사업, 미래환경산업 육성융자, 환경 기초시설 재생에너지 생산 등에 사용될 예정입니다.

이런 그린뉴딜을 통해 우리날 경제, 사회의 전반이 저탄소 구조로 바뀌는 ‘녹색전환의 견인차’ 역할을 하기를 기대해봅니다!

코로나19로 경제가 위축되면서 국내에서 재조명된 그린뉴딜은 미국, 유럽 등 해외에서는 이미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의 민주당은 트럼프 정부와 차별화한 그린뉴딜 정책을 내세웠습니다. 2019년 2월 민주당 상·하원 의원들은 ‘그린뉴딜 결의안’을 제출했는데, 이는 향후 10년간 온실가스 순 배출 제로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인프라 개선과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투자, 일자리 창출과 경제 번영이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9년 12월, 유럽연합은 유럽을 탄소중립대륙으로 만들겠다는 유럽 그린 딜에 합의했습니다. 2050년까지 온실가스 순배출량 제로를 목표로 한 그린 딜은 2030년까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1990년대 수준의 50%로 상향하고, 탄소 저감 노력이 미진한 회원국에 탄소관세를 부과하는 등의 정책을 추진합니다. 뿐만 아니라 경제활동에 투입되는 물질이 폐기되지 않고 유용한 자원으로 반복 사용되는 경제 시스템인 ‘순환경제’에 기반한 새로운 산업정책도 추진합니다.

이처럼 그린뉴딜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환경 에너지 정책으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각국의 그린뉴딜은 각자의 다른 방식으로 저탄소 사회로 나아가고 있지만, 결국 모두가 온실가스를 감축하고 환경을 보호하는 친환경의 흐름에 함께하고 있는 것입니다.

카드뉴스를 통해 알아본 ‘그린뉴딜(Green New Deal)’은 환경과 경제성장이 양립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깼습니다. 환경과 경제성장은 양립할 수 있습니다. 환경과 사람, 경제가 모두 중심이 되는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점에서 그린뉴딜이 더욱 흥미로웠는데요. 그린뉴딜 정책 도입으로 한국을 비롯한 세계가 환경보호를 적극 실천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상 환경부 소셜기자단 이석희 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그린뉴딜/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한국에서 그린뉴딜 에너지 정책이 전력공급 안정화와 비용, 일자리, 건강, 기후에 미칠 영향/ 스탠포드·UC버클리 대학 공동연구팀」, 「기획재정부 보도자료」

[출처] 환경과 경제를 함께, 그린뉴딜(Green New Deal)|작성자 환경부와 친해지구

그린뉴딜

그린뉴딜
시사상식사전
그린뉴딜

환경과 사람이 중심이 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뜻하는 말로, 현재 화석에너지 중심의 에너지 정책을 신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등 저탄소 경제구조로 전환하면서 고용과 투자를 늘리는 정책을 말한다.

외국어 표기
Green New Deal(영어)

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그린뉴딜은 '그린(green)'과 '뉴딜(New Deal,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1930년대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추진한 일련의 경제정책)'의 합성어로,
 환경과 사람이 중심이 되는 지속 가능한 발전 정책을 뜻하는 말이다. 
즉, 기후변화 대응·에너지 전환 등 환경에 대한 투자를 통해 경기부양과 고용 촉진을 끌어내는 정책을 말한다. 
이는 기존 경제·산업 시스템에 대한 대변혁으로, 저탄소 경제구조로 전환하면서 기후위기와 환경문제에 대응하는 것이다.

특히 그린뉴딜은 코로나19 극복 이후 다가올 새로운 시대·상황, 이른바 ‘포스트 코로나’의 핵심 과제로 꼽히고 있다. 
202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코로나19의 팬데믹 상황은 결국 인류의 자연 파괴와 이로 인해 발생한 기후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21세기에 들어서 잦아지고 있는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은 인간의 무차별적 환경 파괴로 동물 서식지가 감소하고 이에 바이러스를 보유한 동물이 인간과 자주 접촉한 결과 때문이라는 지적이 높은데, 이에 따라 코로나19 이후 환경과 공존하는 인류의 삶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한편, 2013년 《21세기 자본》을 펴내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던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 파리경제대 교수는 2020년 5월 9일 일간 《르몽드》에 ‘위기 이후 녹색 기금의 시대’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경제적 충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환경 분야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는 ‘그린 뉴딜’이 필요하다고 제안한 바 있다.

마지막 수정일
2020. 11. 02.

출처


시사상식사전



저자 pmg 지식엔진연구소


제공처 박문각 http://www.pmg.co.kr 제공처의 다른 책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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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산업 지원을 통한 일자리 및 시장창출계획을 말한다. 한국의 녹색성장과 같은 개념이다. 유엔환경계획(UNEP)도 2008년 10월 영국 런던에서 '친환경 뉴딜(Green New Deal)정책'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제시하고 환경 분야에 대한 투자를 활성화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1930년대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한 뉴딜정책으로 대공황을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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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도 못 건드린 함석헌인데... '무식한' 전두환 - 오마이뉴스

박정희도 못 건드린 함석헌인데... '무식한' 전두환 - 오마이뉴스



김성수의 한국 현대사 | 42화

박정희도 못 건드린 함석헌인데... '무식한' 전두환[
김성수의 한국현대사] YWCA 위장 결혼 사건
20.08.26 08:52l최종 업데이트 20.09.17 09:01l
김성수(wad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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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WCA 위장결혼식에 참석한 함석헌 (우측)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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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1901-1989)은 1979년 11월 24일 토요일 오후 5시 30분 서울 명동 YWCA 강당에서 열리는 결혼식에 주례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YWCA 강당에 도착해서야 그 날의 행사는 사실 위장 결혼식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한 달 전인 10.26 사건 이후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려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발표에 반발해 재야인사들이 결혼식을 가장해 대통령 직선제 요구 시위를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함석헌은 현장에서 들었다. 그래도 함석헌은 "옳은 일을 위해서는 이용당해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날 YWCA 강당에 모인 함석헌을 비롯한 전 대통령 윤보선과 해직교수 김병걸, 그리고 백기완, 임채정, 양순직 등은 박정희 유신 독재 체제의 청산과 군의 정치적 중립 등을 요구하는 성명을 낭독했다. 하지만 성명 낭독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찰들이 강당에 난입했다. 강당은 금방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곳에 모인 140여 명은 불구속 입건되었고, 함석헌 등 주동자 14명은 용산구의 보안사령부(아래 보안사)로 끌려갔다. 함석헌은 이곳에서 15일간 구속되어 조사를 받았다.

당시 보안사에서 "함석헌이 젊은 군인들에게 매를 맞았다. 수염이 다 뽑혔다" 등의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함석헌의 자녀들은 면회도 안 되던 터라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없어 애가 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이 박정희보다 훨씬 악독'

보름 후에 나온 아버지를 보고 함석헌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몸에 온통 푸른 멍이 든 것을 보고 경악했다. 함석헌의 3녀 함은자(1929-2017)는 당시를 회상하며 '전두환이 박정희보다 훨씬 악독했다'며 필자에게 한탄하기도 했다.

친일 콤플렉스가 있는 박정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종교사상가 함석헌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1970년 함석헌이 창간한 월간지 <씨알의 소리>는 2호를 내고 폐간됐다가 국가를 상대로 소송해 승소하고는 유신정권 하에서도 계속 발간됐다.

하지만 전두환은 달랐다. 1980년 전두환은 무슨 이유로 폐간한다는 공문 한 장도 없이 <씨알의 소리>는 물론 민중신학자 안병무가 발간한 <현존>, 서울대 교수 백낙청의 <창작과 비평> 등 170여 개의 잡지를 하루아침에 강제 폐간했다. 언론대학살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행한 것이다. 그래서 함은자의 말처럼 (무식한) 전두환이 박정희보다 훨씬 악독했다는 말이 나왔다.

YWCA 위장 결혼 사건 후 보안사로 끌려간 함석헌 등 재야 인사들은 불법 구금상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함석헌은 자신이 보안사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생전에 이야기한 적이 없고 글로 남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몇몇 인사들은 당시 보안사에서 겪은 가혹한 고문 경험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그 중의 일부를 살펴보자. 아래는 지난 1987년 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간한 <고문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의 내용을 참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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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WCA 위장결혼식 사건 후 연행되는 함석헌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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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명의 군인들이 머리 수술한 부위 일부러 걷어차

이철용은 당시 한국특수지역선교위원회의 실무자였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1979년 11월 24일 YWCA 강당 현장에서 중부경찰서로 연행되어 다음날 오전 11시경 서빙고동에 있는 보안사로 이송되었다. 계엄사에 도착한 후 지하실로 끌려가 군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사진을 찍은 후 곧바로 방으로 데려 가더니 5-6명의 군인들이 군홧발로 온몸을 가리지 않고 걷어차는데, 그들의 표정을 기억해보면 죽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과 사랑으로 가득 찼던 그들이기에 우리를 원수 잡듯, 개 패듯 달려들어 짓이기는 것이 마치 나라를 위하는 행동인 양 도도하고 원한에 찬 얼굴들이었다.

그런 후 2층 취조실로 데려갔다. 거기서도 검은 테이프를 감은 야구 방망이 같은 것으로 온몸을 얻어맞고 발길질을 실컷 당한 후 조사가 시작되었다. 조사받기 전에 당한 매질로 머리가 찢어져 조사실 옆에 있는 간이병원에 가서 일곱 바늘을 꿰매었다. 그때 그곳에는 김용복 선생(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신학박사)이 기절하여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퉁퉁 부어 있었으며 눈 밑이 찢어져 다섯 바늘가량 꿰매었다. 조사를 받은 후에는 지하 감방으로 다시 끌려와 무릎을 꿇고 앉아 있게 했는데 2분 간격으로 군인들이 들어와서 구둣발로 걷어찼으며 특히 머리의 수술한 부분을 일부러 걷어찼다.

이런 고문을 하면서 도중에 "내가 각하를 모시고 있던 경호원인데 각하가 돌아가신 지 한 달도 안 되었는데 지랄이냐" "너는 빨갱이보다 더한 놈이다" "각하가 나라를 위해 얼마나 애쓰신 줄 아느냐" "함석헌도 빨갱이다" "유신이 죽은 줄 아느냐" 등의 위압적이며 모욕적인 말로써 기를 죽였으며, 거기서 풀려날 때 "나가서 맞았다는 얘길 하면 다시 와서 죽을 줄 알아라"는 협박을 받았다.

김병걸(1924-2000)은 문학평론가다. 그는 1974년 박정희 유신체제를 비판하다가 서울산업대학교 (구 경기공전) 교수직에서 해직되었다.

나는 1979년 11월 25일 오후 포승줄에 묶여 서빙고동 보안사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지하 감방에서 "옷 다 벗어!"하면서 얄팍한 군작업복을 던져 주었다. 속옷을 다 벗고 군작업복으로 갈아입자 내 방으로 5명의 군인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나를 둘러싸고 군화 발길질, 몽둥이질, 고무신으로 얼굴후려치기 등 1시간 정도 사정 볼 것 없이 고문했는데, 엎어지고 나뒹굴고 쓰러져서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을 당했다. 그런 다음 정신 차릴 겨를도 없이 빨간색 카펫이 깔린 조사실로 끌려갔다.

수사관들은 조서를 받기 전에 내 머리채를 휘어잡아, 뒤로 휙 젖히며 본 사건의 자금 출처부터 캐었다. 자금 출처가 '이북이냐, 조총련이냐'하는 것이었다. 내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감아쥔 내 머리채를 벽에다 몇 번 박아치기하며 "'나는 혁명가입니다'라고 말해봐!" 해서 내가 "아닙니다" 하니 벽에 나를 기대어 세워놓고 군홧발로 짓이기기 시작했다. 얼굴, 가슴, 다리, 옆구리 등을 사정없이 갈겨대었다. 쓰러지면 바로 서게 해서 갈기고 또 쓰러지면 다시 세워 깔아뭉갰다.

그들은 겁에 질린 나에게 "'나는 애국자입니다'라고 말해봐, '나는 민주인사입니다'라고 말해봐, 이 새끼야!"하며 강요했다. 나는 도저히 고통을 이겨낼 수 없어 "아닙니다"해도 군홧발 짓이기기는 사정없이 가해졌다. 2시간 정도를 그렇게 당했던 것 같다.

이렇게 한 후 다음 고문이 계속되었다. 그것은 양 무릎을 꿇어 앉혀 놓고 허벅지와 정강이 사이에 굵은 몽둥이를 끼워 넣고 그 상태에서 허벅지를 군홧발로 지근지근 살이 뭉개지도록 짓밟는 것이었는데, 내가 고통을 못 이겨 비명을 지르며 나가자빠지거나 엎어지면 몽둥이로 등, 어깨, 허리 할 것 없이 마구 내리쳤다. 그리고는 "다시 xxx 라고 말해봐!"하는 말에 "아닙니다"라고 대답하면 고무신짝으로 얼굴을 내리갈겼다. 이렇게 해서 두 번 기절했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먼저 고문을 가한 후 비로소 조사를 시작했으며, 조사가 끝난 후에는 스스로 걸어갈 수가 없어서 두 명의 군인이 나를 끌어다 내 감방에 데려다주었다.

둘째 날도 첫날과 같은 고문을 한 후에야 조사를 하곤 했는데 조사 과정에서 받은 몽둥이질, 군화 발길질, 고무신짝으로 얼굴 후려치기 등은 이루 다 기억할 수가 없다.

3일간을 이렇게 계속해서 고문조사를 받았다. 그 후 수사 윤곽이 잡히면서 좀 나아졌는데, 그러나 조사를 끝내고 내 지하 감방에 오면 우리를 감시하는 헌병들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 감방 앞을 지나칠 때마다 마침 심심한데 잘 되었다는 듯 시비를 걸거나 별 이유도 없이 군홧발로 공차 듯 걷어찼다. 하루 5, 6회 가량 그 짓을 당했다.

이런 치욕과 울분의 일주일 동안은 팔을 마음대로 들어 올릴 수도 없고 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서 화장실 갈 때도 부축 받아 간신히 기다시피 다녔으며, 용변 보기도 큰일을 치르듯이 해야 할 만큼 힘에 겨웠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석방된 후 자신들이 당한 고문을 들으니 대부분 내가 당한 이상의 모진 고문을 당했다. 같은 건물 안에서 조사를 받으면서도 밀폐된 방에서 각기 다루어졌기 때문에 서로의 형편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열흘을 지내고 나서부터는 고문을 따로 하지는 않았으나 아침 6시에 기상해서부터 오후 10시 취침할 때까지 식사 시간과 화장실을 가는 외에는 방 안에 바른 자세로 정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금만 눈이 옆으로 돌아간다거나 허리가 약간만 굽어져도 참을 수 없는 욕을 당하면서 군홧발로, 몽둥이로 맞아야만 했다.

이때의 나는 손발은 군홧발에 밟혀 시꺼멓게 멍이 들었고 다리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 그 자리에 피가 엉겨 붙어 있었으며 온몸에 피멍이 들어 신음과 공포 속에서 지내었다.

나는 17일 만에 보안사에서 석방되었는데 그 후 시내 백병원 원장에게 진찰을 받으러 갔는데 "지금의 이 상태로는 진찰조차 어려우니, 3-4일 집에서 목욕을 하면서 안정하면 가라앉을 부분과 그렇지 않은 문제의 부분이 나타날 터이니 그때 가서 치료해 보도록 합시다"하였다.

1980년 1월 8일 현재에도 30분도 안 되는 시간을 걷거나 버스를 타고 나면 주저앉고 싶을 만큼 괴롭다. X-레이에 나타난 바로는 명치뼈가 회복하기 어려운 절단 상태에 있는 것이라 한다. 다른 동지들의 상태에 비하면 나는 고문 당했다는 소리를 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이다. 그들이 감옥에서나마 건강만이라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보안사에서 풀려나올 때 "이 안에서 지냈던 일이나 건물 위치, 얻어터진 사실 등은 국가 기밀에 속하느니만큼 밖에 알리면 이적행위가 되니 엄벌에 처해질 것이다"라고 하면서 침묵하겠다는 각서를 요구했다.

앉아, 일어서를 수천 번 계속했다

박철수는 당시 한신대학교 2학년생이었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1979년 11월 24일 YWCA 강당에서 중부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다음날 오전 8시경 보안사로 넘겨졌다. 거기서 이틀 동안 조사를 받았는데 그때 고문당한 사실은 이렇다.

1. '앉아, 일어서'를 수천 번 계속했고,
2. 나로선 제일 고통스러웠던 것으로 '무릎 끓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무릎을 꿇되 앞정강이를 붙인 채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발목을 안쪽 복숭아 뼈가 밖으로 향하게 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었고,
3. 꼬라박기(일명 원산폭격)를 시켜 장시간 견디지 못하고 자세가 흐트러지면 몽둥이로 내리쳤고,
4. 무릎 사이에 알루미늄으로 된 침대 각목을 끼우고 한쪽을 스팀파이프에 고정시켜 꿇어앉은 자세에서 밑으로 누르는 것이었으며,
5. 엎드려 뻗친 자세를 시킨 다음 엉덩이를 몽둥이로 지칠 때까지 후려치고,
6. 고무신으로 얼굴을 후려치거나,
7. 철창에 매달리기를 수십 번 시키는데 만약 힘에 부쳐 땅으로 떨어지면 그 벌로 창살 밖으로 다리를 내밀게 한 후 여러 차례 군화로 발길질을 하였고,
8. '빈대 붙어있기'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벽에 다리와 팔을 최대한 확 벌려 밀착시키고 목은 바짝 뒤로 젖히는 동작을 시켜 기진맥진하게 만들었고,
9. 손바닥 그리고 손등을 몽둥이로 수 십 번씩 내려치거나,
10. 조사받는 이틀 동안 꿇어 앉혀 놓고 눈을 감지 못하게 하거나 다른 고문을 가해 잠을 전혀 못 자도록 했으며,
11. 벽에 등을 붙인 자세에서 양팔을 똑바로 위로 올려서 손바닥을 벽에 붙이게 한 후 한 걸음 한걸음 앞으로 걸어 나오는 동작을 시키고
12. 이외에도 '빨갱이 새끼', '간첩 새끼' 등의 욕설을 퍼부어 됐고, 내가 있는 지하실에서 한강 하수구로 곧바로 통한다는 등으로 겁을 주었으며 또한 지하 감방에서 계속 '으악!', '어머니!', '아버지 !' 등의 고문으로 인한 비명이 들려와 정말 죽어나가는 게 아닌가 하여 극도의 불안 속에서 지내야만 했다. 이틀 동안을 이렇게 지내고 유치장으로 넘겨질 때 위와 같은 고문 사실을 외부에 알리는 경우엔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각서에 날인하도록 강요했다.

YWCA 위장결혼 관련자들은 이런 가혹한 고문을 받고 풀려난 후에도 고문 후유증과 트라우마로 정상적인 사회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가혹한 고문과 5.18 헬기 사격

지난 24일 광주지법 201호 형사대법정에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씨의 16차 공판기일이 열렸다. 이날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김성 전 '5·18민주화운동 헬기 사격 및 전투기 출격 대기 관련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 부위원장은 특조위 조사 결과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전씨 측 변호인은 이 증언에 의구심을 표했지만 김성 부위원장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 군 기록, 목격자 조사 등을 통해 5월 27일 전일빌딩을 비롯해 이전에도 송암동, 광주천, 조선대 절개지(뒷산) 등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고 진술했다.

YWCA 위장결혼 사건으로부터 약 6개월 지난 1980년 광주에서 5.18 광주학살이 일어났다. 함석헌을 비롯한 민주화운동가에게 가혹한 고문을 하고, 광주 거리 곳곳에서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인 만큼 헬기로도 시민을 사격했을 것이다. 그의 만행은 언제쯤 단죄받을 것인가.


▲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19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를 당 관계자들과 함께 참배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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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 김종인은 지난 19일 5.18 국립묘지를 찾아 "권력자의 진심 어린 성찰을 마냥 기대할 수는 없는 형편에서 그 시대를 대표하여 제가 이렇게 무릎을 꿇습니다"라고 사죄했다.

그가 '그 시대를 대표'한다고 한 데는 이유가 있다. 김종인은 1980년 전두환이 위원장으로 있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재정분과 위원으로 활동했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하수인으로서 자금과 실무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그 공로로 전두환에게서 보국훈장을 받았다.

김종인은 이 자리에서 "저는 신군부가 만든 국보위에 재무분과위원으로 참여했다. 여러 기회를 통해 과정과 배경을 말하며 용서를 구했지만 결과적으로 상심에 빠진 광주시민들과 군사정권에 반대한 국민에겐 쉽게 용납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라며 "다시 한 번 이에 대해 사죄 말씀을 드린다"라고 말했다.

배다리모임 이야기 김기근 - 함석헌 선생님께서 걸어가신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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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on Pil Ch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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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모임 이야기
김기근
함석헌 선생님께서 걸어가신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선생님께서 저의 고향마을(평북 박천)에 가끔 오셔서 성경말씀을 해주셨던 짤막한 이야기를 몇자 적어보고자 합니다.
함선생님께서는 1938년에 오산학교를 사임하시고 오산학교 부근에서 사과과수원을 경영하고 계셨는데 주일 날에는 댁에서 여러분을 모아놓고 주일예배를 같이 드리기도 하면서 바쁘게 지내시던 때였습니다. 그런 바쁜 와중에도 약 2년동안을 한달에 한두 번 정도 저의 마을에까지 오셔서 성서모임을 위해 수고해 주셨습니다.
이 모임에 오시게 된 동기는 1920년초 저의 마을에 같이 살던 윤기안(서울 정의여자고등학교 창설자)씨가 내촌감삼(內村鑑三)전집, 성서조선(聖書朝鮮)지 및 가신지(嘉信誌, 矢內原忠雄 - 시내원충웅 저)등을 구독하면서 그 잡지에 기고하고 있던 함선생님을 모셔다가 성경말씀을 들어보자고 하여 모시게 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산근처에서 사셨던 선생님께서 저의 마을까지 오려면 댁에서 경의선 고읍역까지 약 5리(2Km)를 걸어 나와 기차를 타고 운전역, 영미역을 지나 맹중리역에서 내려 서남쪽으로 약15리(6Km)남짓한 농로를 걸어와야 덕안면 남오동 배다리마을에 닿게 됩니다. 배다리 모임은 농가집 방에서 모이곤 했는데 당시 평안도의 가옥형태가 방과 방사이에 판자문으로 칸막이가 되어 있으므로 여럿이 모일 때는 그 판자문을 터놓아 한칸으로 통하게 해놓곤 했습니다.
당시 함선생님 나이 40을 바라보는 성숙한 장년으로 키도 훤칠하시고 재덕을 겸비하셨으므로 선망의 대상이였는데 평범한 복장을 하시고 빡빡머리를 한채 성경책을 보자기에 싸들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외진 시골의 대여섯가정 10-15명의 적은 사람들을 위해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함선생님께서는 스스로 사명감을 가지고 신앙간증과 믿음의 권고와 형제사랑을 함께 묶어서 하나님께 산제사를 드리는 희생봉사의 현장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하고 생각하시며 오곤 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이 모임이야말로 아무런 격식이나 순서에 구애될 것도 없고, 장로교나 감리교등의 교파의식도 없이 오로지 성경말씀의 참뜻만을 알기 쉽게 그리고 폭 넓게 여러 종교경전을 대조해 가면서 설명을 하셔서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지루한 생각도, 피곤함도 없이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말씀에 끌려 좌중은 뜨거운 열의에 차곤 하였습니다. 무엇을 하던지 인격적으로 단단히 결합될 수 있다면 많은 무리가 모이는 것보다 적은 수라도 알차게 합심하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함선생님께서는 그 당시에 성서조선지에 히브리어 강의를 연재하고 계셨으므로 저희 모임에 오셔서 목사님이나 전도사들도 난해하여 탐구하지 않던 히브리서를 강해하곤 하셨습니다. 성경지식이 깊지 못했던 초신자들에게는 어려운 강의였지만 함선생님이 그 믿음의 열기에 감동되어 그 모임에 모두들 열심히 참여하곤 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익히 아시겠지만 선생님께서는 항상 편안하게 사랑방이야기처럼 말씀을 풀어나가시곤 하셨기 때문에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경청하게 됩니다.
1937 -1940년 당시에는 우리민족이 아주 깊은 함정으로 빠져들어가던 때였습니다. 주일전쟁이 시작되어 일본군벌주의자들이 동양천지를 전쟁으로 몰아 넣으려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고 우리민족에게 언어말살을 강요하고 창씨개명으로 모두 일본식 성명으로 바꾸고 종교자유도 박탈하여 일본신사를 신봉하라고 강제로 참배시키고, 농산물과 일반경제는 통제경제로 묶어놓고 수탈을 당하고 젊은청년들은 지원병으로 강제징집하여 전쟁터로 몰아내는등 가히 민족생존이 존망지추에 임해 있던 때였습니다. 이런 때에 민족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함선생님께서 배다리모임에 오셔서 뜻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보니 밤늦도록 진지하게 많은 말씀을 나누곤 하였습니다.
특히 함선생님의 가르침은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물리적인 힘이나 폭력을 써서는 않되고 오직 정신력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하셨고 그것은 선생님이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주장하셨던 선생님의 높은 사상입니다. 함선생님은 늘 걸을 때에 똑바로 앞을 바라보고 걸으라고 가르치셨고, 맹자를 소리내어 읊으시며 걸으셨습니다. 잠시도 방심을 하시거나 잡념으로 마음이 흐트러짐 없이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디면서도 언제나 깬 마음으로 참을 놓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올바른 정신으로 우리가 몸은 죽어도 영원히 사는 예수를 믿는 신앙, 바로 그것을 말씀해 주시려고 그 외진 배다리마을까지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셨고 나아가 4천만 온 국민에게 보내는 절규요, 민족을 위한 살아있는 메시지였습니다.
제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일 중의 하나로 1938년 중추절을 맞아 오산 함선생님댁에 모임식구들과 우리지역 배다리모임 식구가 칠악산 산정에서 함께 모여 합동야외예배를 드리고 교제하는 시간을 갖다가 박천에 있는 원수봉이 홍경래 난의 유적지로 알려져 있으므로 그곳도 답사해보자고 하여 일행이 모두 그곳을 향하여 도보로 걸었는데 약 30리(12Km)길이었지만 좁은 길을 구비수비 걷다가 시간이 늦어져 산정까지 오르지 못하고 산기슭을 돌아 내려와 나룻배로 대령강을 건너서 헤어졌습니다. 그때에는 이런 기회를 또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후 여러 가지 주변상황이 급격히 바뀌어 유일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가까이서 뵈었던 함선생님의 소박한 면을 제나름대로 표현한 이 글이 누를 끼치지는 않을까 걱정됩니다.
2000년 11 월14일 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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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의 글 올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페북으로 퍼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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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ㅇㄹㄱ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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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 선생님의 “배다리 모임” 이란 이야기는 귀에 익은 이름인데 이제 그 출처를 알겠네요.
    바로 그 말씀이 김기근 선생 입에서 자주 나왔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의 아버님, 김봉국 선생에게서 들은 고장이름 일지도 모르고, 또 선생님 말씀에서 익힌 이름알 수 도 있을법 하네요.
    40대 젊은 시절 내가 가지던미국생활을 기어 해 봅니다. 정신과 수련과정과 정신분석과정도 끝내고 뉴욕시외에서 병원을 반 개인사업 반으로 하든 정신치료를 바쁘게 하며 딸 둘 아들하나를 키우던 시절입니다. 무교회신앙과 함 선생님의 가르침을 정신치료에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추심하는 생각이 떠올음니다.
    선생님의 인류학적이고 역사적 풀이 방법은 인간의 참 과 지혜와 믿음을 탐구하는데 불가결 한 방법이었다. 당시 세계적으로 문화성과 역사성을 강조하든 정신분석의 방법이 함 선생의 사상과 소통하는 바 있었기에 함 선생의 학문에 대한 존엄성과 인간성을 성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