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25

노정태 신비주의의 해로움 조선일보에 실린 최승자 인터뷰(2010년)를 읽었다.


신비주의의 해로움
조선일보에 실린 최승자 인터뷰(2010년)를 읽었다.

> ―우리 시대와 사회가 시인에게 상처를 준 것일까요? 오늘 찾아온 것은 사실 이 때문입니다.
> "그건 틀린 말입니다. 자기 삶을 사회나 남에게 전가할 수는 없어요. 괜히 '우리 시대가 저 친구를 버려놓은 것이 아닌가' 말하는데, 이는 내가 선택한 삶이었어요. 나 혼자 겉돌았고 그런 공부를 했고 병원에 들어가 있었을 뿐입니다."
이렇게나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사람이,
> ―가장 궁금한 대목은 시를 쓰던 당신이 폐인(廢人)처럼 됐다는 점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 "언제부터인가 노장(老莊)·명리학·사상의학·점성술 등과 같은 신비주의 공부에 빠졌던 겁니다. 있는 대로 보이는 대로의 세계가 아닌, 현상을 뛰어넘는 세계로 좇아갔어요. 답이 있을 듯하면서 손에는 답을 쥐기 어려운 공부였어요. 그 공부에 빠지면서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이런 이유로 망가지고 말았던 것이다.
신비주의(로 통칭될 수 있는 것 모두)가 이렇게 해롭다. 적당히 세속적이고 상스러워서 자기 몸에 득 될 만큼만 먹어도 유해한데, 최승자처럼 모 아니면 도, 이런 강단 있는 사람이 탐닉하면 스스로를 망가뜨릴 수밖에 없음.
있는 그대로 보이는 세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너머의 초월을 사유하는 방법. 로마 몰락과 기독교의 홀로서기 당시 교부들이 목숨 걸고 연구한 주제. 그게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철학은 미사여구 음풍농월이 아님. 잘못된 철학은 사람, 사회, 국가, 문명을 망가뜨린다.
You and 71 others
13 comments
5 shares
Like
Comment
Share

13 comments

  • 이동진
    조선일보의 기민함에 늘 경탄..다만 쫌 망가져도 되지 않을까요
  • 노정태
    이동진 1) 2010년 인터뷰입니다. 2) '쫌 망가져도 되는' 게 대부분의 사람들이죠. 최승자 같은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들은 그 '쫌'이 안 됩니다.
     · Reply · 9 h
    이동진
    역시 ^^ 다만 최승자는 쫌 내버려두면 안될까요?싶은데
     · Reply · 9 h
    노정태
    이동진 제가 관심을 갖건 말건, 최승자는 최승자를 '쫌 내버려두'지 않을 겁니다. 이동진 님의 수동공격적인 화법이 쫌 거슬리네요.
     · Reply · 9 h
    이동진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그런 뜻으로 받아 들이니 아쉽습니다.
     · Reply · 9 h
    이동진
    아, 저어기 반말은 그냥 문어체로서... 아무튼 미안합니다.
     · Reply · 9 h
    노정태
    이동진 본인 스스로 명료하게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버리지 않는 자기 파괴. 그것을 이야기하는 다른 이에게 '쫌 내버려두라'고 하는 건, 뭐랄까, 시인 최승자를 아낀다고 하지만 실은 모종의 enabling을 하는 것 아닐까 합니다. 이건 가치관의 문제일 수 있으니 더 논쟁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 Reply · 9 h
    이동진
    ^^:::::::



  • 이동진
    미안해요. 그런 의도 아니었습니다.
    • Like
    • Reply
    • 8 h
  • 유성호
    원래 현대시 오래쓰면 폐인되기 쉬워요 저걸 폐인이라 불러야하는지는 또 의문잊만유
    작법이 정신세계를 이상한 곳으로 유도하쥬 실제로 한국의 걸출한 현대시 시인들 중에 일반인 기준으로 건전하고 건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몇 안될겁니다
    2
    • Like
    • Reply
    • 3 h
  • Jounbo Shim
    공자도 극기(克己)와 함께 복례(復禮)를 언급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세계와 이어지는 한 가닥의 가는 끈, 그것이 유가에서는 예(禮)였습니다.
    초월적인 것을 초월적으로 추구하면 끝내는 건너서는 안 될 강(江)을 넘어가 버립니다. 그리스 신화의 알레고리에서 보듯이, 신(神)의 민낯을 보는 자는 온몸이 불타버리는 것입니다. 금기나 결계(結界)는 자기를 구속하는 것만이 아니고 보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4
    • Like
    • Reply
    • 2 h
  • Jonguk Park
    그나 저나 자신의 곤경을 사회의 탓으로 돌리려는 기자의 말을 끊고 자신의 책임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 최승자 시인도 보통은 아니군요.
    2
    • Like
    • Reply
    • 2 h
  • Bum Choi
    뭐랄까 광기(?)가 다른 방향으로 분출된 최욱경 화가가 생각나네요. https://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
    최욱경, 앨리스의 고양이
    MMCA.GO.KR
    최욱경, 앨리스의 고양이
    최욱경, 앨리스의 고양이

===

[최보식이 만난 사람] 정신분열증… 11년 만에 시집을 낸 시인 최승자 - 조선일보


오피니언최보식이 만난 사람

[최보식이 만난 사람] 정신분열증… 11년 만에 시집을 낸 시인 최승자

"내가 살아있다는 건 '루머'… 3평짜리 고시원을 전전해"
밥 안먹지만 취미는 요리,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아… 난 기초생활수급 대상자
흘러가지 않는 저 세월은 내게 똥이나 먹이면서 나를 무자비하게 살려둬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10.11.22 03:04


"어떤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귀에서 환청(幻聽)이 들리고 내가 헛소리를 마구 내뱉고 있었지요."

시인 최승자(58)의 음성에서 쇳소리가 났다. 살가죽이 겨우 붙은 얼굴과 그 속의 쑥 파인 눈, 마른 막대기 같은 몸피를 숫자로 환산하면 키 149cm 체중 34kg이 된다.



시인 최승자는“시를 계속 쓸 것이고, 밥만 잘 먹으면 된다”고 말했다.

시인의 외양이 따로 있을 순 없다. 하지만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며 80년대를 사로잡았던 시인의 몰골이 지금 이렇다는 것은 섭섭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말이다.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일상임에도, 그녀에게는 '사건'이 됐다. 얼마 전 그녀는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을 냈다. 그동안 다섯 편의 시집을 내고서 11년 만이다. 시인이라고 늘 시를 쓰라는 법이 없고 다른 삶을 살 수도 있다. 한때 그녀의 시에 매료됐던 사람들도 그냥 그런가 싶었다. 그녀는 잊혔다. 마치 그녀가 등단 초기에 썼던 시 구절처럼.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그 공백의 시기에 그녀는 심신쇠약과 정신분열 증세를 앓고 있었다. 여전히 입원 중이다. 이날 입원해 있던 포항의료원에서 그녀는 잠시 나왔다. 허름한 청색의 외투가 몸을 감싸고 있었다. 외삼촌 신갑식씨가 보호자로 따라 나왔다.

포항으로 내려가는 열차 속에서, 그녀를 만나야 할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나는 '인터뷰 일'에 대해 생각했다. 과연 제대로 될까. 내가 낯선 존재 앞에서 질문을 잊었을 때, 그녀는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느 해에는 여섯 달쯤 잠을 못 잤어요. 아무런 음식도 먹지 못했고. 잠을 못 자면 소주를 마시고 쓰러져 잤는데, 나중에 심해지면서 술을 마시는 것조차 생각나지 않았어요. 정신이 휑했지요."

이번 시집 안에 그런 '사람들은 잠든 적도 없이'라는 시가 들어 있다.

'삼천갑자동방삭이/ 내 아비가 누군고/ 내 어미가 누군고/ 묻고 또 물었던 대답 없는 세계/ 외침조차 흔적 없었던 세계/ 사람들은 잠든 적도 없이/ 잠들어 살고/ 제 집도 아닌 줄 모르면서/ 제 집처럼 산다/ 오늘도 사람들은 죽은 神을/ 어영차 끌고 가서/ 황무지에 버린다'

그녀는 가족이 없었다. 서울의 세 평짜리 고시원과 여관방에서 밥 대신 소주로, 정신분열증으로, 불면의 시간으로, 죽음의 직전 단계까지 간 그녀를 찾아내 포항으로 데려온 이가 외삼촌이었다.





―선생의 격정적인 시들은 숱한 청춘(靑春)들을 감염시켰습니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같은 구절은 여전히 인용됩니다. 시집들도 베스트셀러였는데 어떻게 3평짜리 고시원을 전전할 수 있습니까?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는데 라디오에서 시가 낭송되고 있었어요. '참 좋다, 누구 시인가' 혼자 이런 생각을 했는데 내 시였습니다. 한때 매스컴이나 문단에서 자주 내 이름이 거론됐어요. 하지만 실제로 시집이 많이 팔린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내 시가 인용된다고 해서 시집이 많이 팔렸다는 것은 아니지요. 시를 쓰는 것으론 전혀 생활이 안 됐어요. 나는 번역을 해서 먹고 살았어요. 영어 원서는 지금도 읽어내요. 그러다가 내가 지금의 이상한 병에 걸렸어요. 내게는 모아놓은 돈도 없었어요. 내 시와 번역서를 냈던 출판사 두 곳에서 내 사정을 알고 있었지요. 매달 25만원씩 부쳐줬습니다. 하지만 몇 해쯤 지나 내가 다시 번역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이젠 안 도와줘도 될 것 같다'고 내가 전화했어요. 출판사에서는 내 자존심을 헤아려줬습니다. 하지만 내 병은 깊었어요."

―자신이 병에 걸렸음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습니까?

"언제부터인가 귀에 환청이 들리고 나도 모르게 헛소리를 하고 있었어요. 소주 말고는 전혀 음식물을 몸속에 넣을 수 없었어요. 그때만 해도 나는 서울의 한 친척집에서 지내고 있었지요. 그런 나의 이상한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기 싫었습니다. 99년부터 친척집을 나와 고시원과 여관방을 떠돌았지요."

―그걸 의식했다면 스스로 극복할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지인들도 '마음만 먹으면 고칠 수 있지 않으냐'고 했어요. 모 출판사에서는 내가 나와서 작품을 쓸 수 있도록 사무실 안에 공간을 마련해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내 몸과 정신이 무너진 뒤였어요. 자신을 어떻게 통제할 수 없었지요."

―가장 궁금한 대목은 시를 쓰던 당신이 폐인(廢人)처럼 됐다는 점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언제부터인가 노장(老莊)·명리학·사상의학·점성술 등과 같은 신비주의 공부에 빠졌던 겁니다. 있는 대로 보이는 대로의 세계가 아닌, 현상을 뛰어넘는 세계로 좇아갔어요. 답이 있을 듯하면서 손에는 답을 쥐기 어려운 공부였어요. 그 공부에 빠지면서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다시 묻지만, 왜 자신의 모든 것을 놓아버릴 정도로 신비주의에 빠지게 됐습니까?

"한때 문학은 대단하게 보였으나…, 시를 쓰는 일이 시시해졌어요. 시를 쓸수록 동어반복이 됐습니다. 다섯 권의 시집을 내면서 난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봤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 것도 허무하고, 내가 묶여 있는 사회와 체제, 문명도 허망하기는 마찬가지였어요. 이를 초월하는 어떤 세계로 끌려들어간 것이지요. 1994년 아이오와대학 초청으로 넉달간 미국서 지내면서 점성술을 접한 것도 계기가 됐어요. 구어체 영어를 익히려고 하다가 그래 됐지요. 선정적인 잡지를 뒤적거리다가 '오늘의 운세' 같은 '별자리점'을 보게 됐고, '나는 쌍둥이좌인데…' 이렇게 시작됐어요. 물론 그전부터 준비된 것이었어요."

―준비돼 있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문단(文壇)에 나오기 전부터 삶의 허무를 알았어요. 세계문학전집을 독파하면서 거기에 나오는 숱한 인물의 삶과 죽음들이 내게 모두 내면화된 것입니다. 누구나 다 살아가고 저마다 운명이 있지만, 결국은 허무했어요. 그때 이미 나는 세상과 운명의 본질을 다 봤는지 모릅니다."

―신비주의로 가면 '나서 죽는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영생(永生)을 원했던 겁니까?

"내가 그렇게 살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세계가 매력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쪽은 차원이 달라요. 아직도 내가 풀 수가 없어요. 그걸 추구하면서 병들어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이번 시집의 제목처럼 '쓸쓸해서 머나먼' 것이었지요."

―젊었을 때는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느꼈지만, 이제 50대 후반까지 살아보니 다르게 보이지는 않는가요?

"내가 본 세상은 절망스럽고 허무한 것이었어요. 절망의 끝, 허무의 끝, 죽음의 끝까지 가봤던 셈이지요. 그 끝은 삶의 긍정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 무덤, 푸르고/ 푸르러져/ 푸르름 속에 함몰되어/ 아득히 그 흔적조차 없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개울돌 늘 이쁜 물소리로 가득하고…'라고 썼어요. 내가 머문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는 아기가 방긋 웃기만 해도 즐겁고 이쁜 개울물이 흘러간다는 걸 알아요. 다른 사람들이 아름답게 살고 있다는 걸 나도 압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 수가…."

―이왕이면 '낙관'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은가요?

"허무와 절망은 내 운명이었어요. 문학은 슬픔의 축적이지, 즐거움의 축적은 아니거든요. 젊은 날 나는 무의식적으로, 충동적으로, 비명(悲鳴)처럼 시를 써왔어요. 세상이 따뜻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면 시를 못 쓰게 되지요. 그건 보통 사람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니까요. 이제는 시를 의식적으로 씁니다. 그럴 나이가 됐어요. 나도 살아가야 하니까요."

―선생의 시 중에는 '저 불변의 세월은/ 흘러가지도 못하는 저 세월은/ 내게 똥이나 먹이면서/ 나를 무자비하게 그냥 살려두면서…'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자신을 폐인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았나요?

"죽으면 죽겠다 싶었어요. 내가 썼던 시집 다섯 권만 둥둥 떠다니겠지 했어요. 2년 전 막내 외삼촌이 나를 찾아내 병원에 입원시킨 것입니다. 병원에서 규칙적으로 내게 밥 세 끼를 먹이고 약 먹이니 살겠더라고요. 당초에는 '이 정신의 병에 약을 먹은들 되겠나' 생각했어요. 이건 정신의 문제인데도…. 밥을 먹으니 괜찮아졌어요. 병원만 나오면 먹는 것을 잊어버려요. 그래서 다시 입원하게 됩니다."

―우리 시대와 사회가 시인에게 상처를 준 것일까요? 오늘 찾아온 것은 사실 이 때문입니다.

"그건 틀린 말입니다. 자기 삶을 사회나 남에게 전가할 수는 없어요. 괜히 '우리 시대가 저 친구를 버려놓은 것이 아닌가' 말하는데, 이는 내가 선택한 삶이었어요. 나 혼자 겉돌았고 그런 공부를 했고 병원에 들어가 있었을 뿐입니다."

―선생의 문제는 몸을 저버린 정신의 '과잉(過剩)'에 있는 것 같군요.

"정확한 지적입니다. 이제는 젊은 날처럼 정신이 전부라고 여기진 않아요. 하지만 정신적으로 추구한 삶은 내가 선택한 것입니다.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선생은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고 병들어 있습니다. 다른 여성들처럼 가정을 꾸렸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없나요?

"전혀 없어요. 결혼해 가정을 꾸린 당신들이 잘사는 것을 알지만, 나는 그렇게 못해요.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은 좋아요. 하지만 그 아이들을 내가 직접 키우면서 사는 것은 싫어요. 이기적이라고요? 그건 맞아요. 젊은 날 그런 제의가 있으면 먼저 내가 떠났어요. 나는 홀로였고 그렇게 살아갈 겁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대신, 시장통을 한 바퀴 돌며 감자 고구마 고추 생선들을 구경하고, 가로수 길을 걷고, 이쁜 아이들을 쳐다보고, 간혹 버스를 타고서 산을 쳐다보는 것, 그걸로도 만족합니다."

―무엇을 하면 가장 즐거운가요?

"요리할 때입니다. 나 스스로는 밥 먹기가 힘들지만, 과거에는 요리 대장이었어요. 이제 같이 먹을 사람도 없고, 병원 들어가면 밥 주니까, 음식을 만들 기회가 없을 뿐이지요. 사실 병원 밥도 맛있어요."

―본인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요?

"시를 계속 쓸 것이고, 밥만 잘 먹으면 돼요."

나도 그녀에게 삼시 세끼 잘 먹기를 당부했다. 정신이란 몸이 있어야 유효하다는 생물학을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뭔가 '열띠지만 모호한' 인터뷰를 끝내고 병원으로 돌아갔다. 현실에서 시인은 5년 전부터 '기초생활수급대상자'였다.

☞최승자 시인은…

고려대 독문과 수학. 1979년 등단. 도발적 감각과 자유분방한 언어로 여성성을 탈피했다는 평가. 시집으로는 '이 시대의 사랑' '즐거운 일기' '기억의 집' '내 무덤, 푸르고' '연인들' '쓸쓸해서 머나먼'. 대산문학상을 수상(2010)


Tigers' significance in Korean Buddhism

Tigers' significance in Korean Buddhism
Tigers' significance in Korean Buddhism
Posted : 2022-01-25 00:33
Updated : 2022-01-25 09:12



A tiger pictured in temple art at Juwol Temple in Uiseong, North Gyeongsang Province. / Courtesy of Dale Quarrington

By Dale Quarrington

The Lunar New Year is upon us, and for 2022 ― and according to the Chinese zodiac ― it's the Year of the Tiger. In Korea, the tiger is a symbol of bravery and fearlessness, and has numerous symbolic and foundational meanings in Korean Buddhism, too. There are various ways in which tigers manifest themselves at Korean Buddhist temples such as in creation myths and legends, the Sanshin (Mountain Spirit), "Tiger and Magpie" painting motifs and other ways as well.

Just like a tiger is integral to the Dangun myth that's central to Korea's creation story, so too do many Korean Buddhist temples have tigers that are central to their creation myths and legends, as well.



A tiger pictured at Gyemyeong Hermitage in Busan / Courtesy of Dale Quarrington

One of the more interesting tiger foundation legends can be found at Bulhoe Temple in Naju, South Jeolla Province. According to this legend, a monk named Seyeom (? ― 1415), who was living at Bulhoe Temple, encountered a tiger and saved its life by pulling out an ornamental hairpin that was stuck in the tiger's neck. To express its gratitude, the tiger presented the monk with a maiden. However, the monk knew that this maiden was from the Andong Kim in modern-day North Gyeongsang Province, so he brought her back to her home. In gratitude, the Kim clan repaid the monk by providing him the funds he needed to expand the temple.



A tiger brings a maiden to a monk at Bulhoe Temple in Naju, South Gyeongsang Province. / Courtesy of Dale Quarrington

Another manifestation of a tiger that you can see at a Korean Buddhist temple, and perhaps the most common in temple artwork, is in imagery of the Sanshin. Historically, Koreans prayed to mountains and Sanshin for good weather, a bountiful harvest, good health and good fortune.

When Buddhism finally entered the Korean Peninsula in the late 4th century, it showed deference to the native shaman deities, who were the original figures of veneration and worship throughout the land. Buddhism absorbed shamanic beliefs not only out of respect, but also to gain favor with the locals who continued to worship such shaman deities like Sanshin. To this day, you can find these shaman shrine halls, like the Samseonggak and the Sanshingak, at Korean Buddhist temples.



A depiction of the Sanshin at Seonam Temple in Busan / Courtesy of Dale Quarrington

Predominantly, Sanshin appears as a man, but sometimes Sanshin can also appear as a woman (though rarely). There are thousands of different images and incarnations of Sanshin, but with that being said, Sanshin does tend to exhibit certain characteristics. Usually, Sanshin is depicted as a seated figure. Just as typically, he's an old man with long flowing white hair and a flowing white beard. And even though he's old, he still looks strong and healthy. The clothes that he wears are regal in appearance. Almost always, Sanshin will hold something in one or both of his hands, like a fan or a walking stick which symbolizes health, longevity, virility or spiritual attainment. But perhaps the easiest way to identify this shaman deity is that Sanshin is always joined by at least one tiger. Just like Sanshin is the king of the Korean mountains, so too is the tiger. And the tiger acts as Sanshin's enforcer to do his bidding.

Yet another place where you can see tigers at Korean Buddhist temples is in "Tiger and Magpie" artwork. This is a popular theme in Korean folk art, especially pieces made between 1400 and 1800 during the Joseon Kingdom. The magpie in this painting symbolizes good luck, while the tiger is meant to symbolize the expelling of evil spirits. So it's most common to see this style of painting in the Myeongbujeon (Judgment Hall) at temples.



A painting of a tiger and magpies in the Myeongbujeon of Tongdo Temple in Yangsan, South Gyeongsang Province / Courtesy of Dale Quarrington

Another incarnation of this style of painting finds a tiger looking up at a magpie. There is an especially famous painting of this motif on the exterior wall of the Haejangbogak at Tongdo Temple in Yangsan, South Gyeongsang Province. According to the folk tale associated with the painting, a tiger is wandering in the forest when it gets stuck in a big puddle. Unable to free itself from the puddle, the tiger waits for three days to be rescued. On the third day, a man cutting wood happens to encounter the tiger by accident. The tiger begs the man to save his life. The good-natured man helps the tiger out of the puddle, but the tiger ― finally freed, and perhaps hungry from his three days of confinement ― attempts to eat the man. The man turns to a nearby ox and pine tree and asks them to judge the situation and hopefully dissuade the tiger from eating him. However, the ox and the pine tree side with the tiger. In desperation, the man turns to a magpie for its opinion. The magpie asks both the man and tiger to reenact what has already transpired, so it can better judge the situation. Foolishly, the tiger goes back into the puddle and gets stuck once again, which helps free the man from its jaws. As a result, this image and story are meant to represent the magpie as being a friend to humans.



A painting of a tiger and a magipe on the wall of the Haejangbogak at Tongdo Temple in Yangsan, South Gyeongsang Province / Courtesy of Dale Quarrington

These are but a few examples of the tigers you can find in and around Korean Buddhist temples. However, this list certainly isn't exhausted, as you can also find the tiger in the form of the Twelve Spirit Generals, the smoking tiger and even in temple wall art, to name but a few.

So the next time you're at a Korean Buddhist temple, have a closer look at some of the intricate artwork that adorns all of these holy sites. With that being said, here's to a happy and prosperous 2022, the Year of the Tiger!


Dale Quarrington has visited over 500 temples throughout the Korean Peninsula and published three?books on Korean Buddhism. He runs the popular website, "Dale's Korean Temple Adventures."

『毎日クスリを飲むあなたへ 週刊現代別冊 おとなの週刊現代 2020 Vol.1 クスリの危ない飲み方、選び方』(週刊現代)|講談社BOOK倶楽部




『毎日クスリを飲むあなたへ 週刊現代別冊 おとなの週刊現代 2020 Vol.1 クスリの危ない飲み方、選び方』(週刊現代)|講談社BOOK倶楽部



毎日クスリを飲むあなたへ 週刊現代別冊 おとなの週刊現代 2020 Vol.1 クスリの危ない飲み方、選び方

毎日クスリを飲むあなたへ 週刊現代別冊 おとなの週刊現代 2020 Vol.1 クスリの危ない飲み方、選び方
マイニチクスリヲノムアナタヘシュウカンゲンダイベッサツオトナノシュウカンゲンダイ2020Vol1クスリノアブナイノミカタエラビカタ
編:週刊現代
電子あり

書店在庫を見る
オンライン書店で見る
自分メモ


内容紹介


病院で処方されるクスリ、お医者さんに言われるまま飲んでいませんか?
正しく使えば効果のあるクスリも、ほかの持病や飲み合わせによっては毒になる。
クスリの飲み方、止め方、減らし方から、最新研究で判明した新たな副作用など、
手放せなくなったクスリとの健康的な付き合い方をお教えします。

主な内容

第1部 クスリと上手く付き合う方法

・日本医師会と日本老年学会が作成した、65・70・75歳以上には「効きすぎて」危ないクスリ
・私はクスリと病院をかえて元気になった
・死ぬ瞬間に「こんなにつらいなら飲むんじゃなかった」と後悔するクスリ
・特別インタビュー矢作直樹・東大名誉教授「クスリを飲むか、飲まないか その数値は人によって違う」
・原因不明の咳が止まらない/おしっこが出にくい/手足がむくむ/食事の味がおかしい……
 あなたの症状からわかる「クスリの副作用」逆引きリスト


第2部 クスリを毎日飲んでいる、あなたのための「新常識」

・東大教授も警告 死にます! 病院のクスリはやっぱり危ない
 医者から処方されたクスリとサプリメントは一緒に飲んではいけない
 絶対飲み合わせてはいけないクスリとサプリメント一覧
 いちばん怖いのは「睡眠薬と鎮痛剤」
 クスリをやめて認知症から復活
 いまさらですが「クスリは5種類まで」、それ以上は命の保証ができません
・日本では処方するけど、欧州の先進国では「使ってはいけないクスリ」


第3部 生活習慣病とクスリ 本当の話

・慈恵医大・横山啓太郎教授 高血圧・高コレステロール・高血糖「人生100年時代の新しい治療法」
・生活習慣病「治るクスリ」「治らないクスリ」あなたはどちらを飲んでいますか
・高血圧「なってから」生活術
・降圧剤とEDの密接な関係


第4部 自宅のクスリ箱をチェック! 市販薬の正しい飲み方、選び方

・商品名を大公開! 名医に聞いた「わが家の『常備薬』」 この組み合わせが最強です
・イギリスの論文に医学界が激震 市販の「かぜ薬」で認知症になる
・くしゃみ・鼻水は止まるが、心臓も止まる 花粉症のクスリで心筋梗塞になる人
・名医はこんな「健康食品」「サプリ」を使っている


【特別付録】
いま、病院でよく使われている「100のクスリ」とその副作用 令和2年最新保存版

製品情報


====
薬の9割はやめられる|日本初「薬やめる科」の医師が提唱する「減薬・断薬のすすめ」
健康
健康法

2018/12/26

文/鈴木拓也

病院に行くことが、「薬をもらう」こととほぼ同義になっている、現代医療の趨勢に異を唱える医師がいる。その人の名は、松田医院和漢堂の松田史彦院長。

松田院長は、6年ほど前に世界で初めて「薬やめる科」を開設。減薬・断薬によって健康を回復させる診療を行っている。

投薬治療を完全否定しているわけではないが、「コレステロールが少し高い。じゃあ、お薬飲みましょう」などと、ポンポンと薬を出す風潮は問題あり、としている。

そして、著書の『日本初「薬やめる科」の医師が教える 薬の9割はやめられる』(SBクリエイティブ)の中で、持論の根拠として「薬が不要な3つの理由」を挙げている。

理由の1つめは、「明らかに病気ではないのに、病気と診断され薬を飲んでいるケースがよくある」こと。

2つめは、ほとんどの薬には副作用があり、このせいで新たな不調が発生すること。

3つめは、「なぜか突然、〇〇症候群、〇〇病といった新しい病気が提唱され、テレビで宣伝され、まるでそれに合わせたかのように、新しい薬が準備されている」という、ウラのありそうな社会現象の多さ。

こうした理由から、「薬が病気をつくる」ことが多々あると論じている。
■高血圧の薬は必要か?

例えば、高血圧。厚労省の調査(2015年)では、高血圧の患者は約1千万人。高血圧に相当する人は4300万人と推計されている。こんなに患者が多いのは、WHOと国際高血圧学会が定める適正な血圧の基準値が、時代とともに厳しくなっているというのが背景にある。

他方、日本人間ドック学会が提示した緩やかな基準だと、高血圧の人の推計は4300万人から一気に860万人に減る。

松田院長は、「基準を少し変えるだけで、高血圧とされる人が一気に増えたり、減ったりする。基準とはその程度のもの」とし、「そもそも高血圧は病気なのか」と指摘する。

本書では、慶大医学部による百寿者(100~108歳)を対象にした調査では、食事やトイレなどの自立度が高いのは、収縮期血圧が156~220のグループであったという。また、認知症の程度も「血圧の高い人のほうが軽かった」と報告されている。

中年期以降の年齢層の人たちが血圧が高いのは、動脈硬化で狭くなった血管で血流をスムーズに流すための適応であり病気ではない。よほど高い血圧でない限り、「医師から処方された降圧剤を、ありがたがって無理に服用することもない」と、松井院長は述べている。

同様のことは、血糖値やコレステロール値についても言えるそうで、少々数値が高くても問題ないとしている。
■薬をたくさん飲むほど不調が増える

松田院長は、「副作用のない薬はない」と言う。とりわけ問題なのは、「抗〇〇薬」や「〇〇拮抗剤」といった名前のついた薬剤。体内の酵素や神経伝達物質などの働きを部分的にブロックして、症状を抑える作用がある。こうした薬について、松田院長はこう警告する。


「何か体に不具合があって出る症状は、だいたいがそこを自然治癒させようとして生じるもの。健康になるために必要な体内システムの働きです。それを薬でムリヤリ止めるのは、自然な治癒力を奪うことにもなります。また、体に悪さをする物質を『選択的に』ブロックするとはうたっていますが、そう都合よくいくものではありません。人体はたった一つの細胞が繰り返し分裂してできたものですから、薬として内服した化学物質は胃腸で吸収され、全身に行き渡ります。結果、悪くない臓器まで傷めてしまう場合もあります」(本書54pより)

薬がはらむ別の問題は、シニア層に多い多剤併用。何種類もの薬を飲んで、かえって身体を悪くしている患者がたくさんいるという。さらに、他の医師が出した薬の副作用を病気の症状と勘違いして、新たな薬が出されるといったこともまかり通っているとも。
■市販薬は一時的な使用と心得る

ドラッグストアで気軽に買える風邪薬や胃腸薬などは、どうなのだろうか?

これらについては、松田院長は「緊急対応として、短期間服用する」のが原則だとしている。例えば、頭痛や咳など風邪の諸症状がひどくて、とにかく緩和したいときに風邪薬を服用するのはいいが、「大した症状も出ていないのに予防を兼ねて飲むとか、もう症状がおさまっているのに飲み続ける」のはNG。やがて薬が効かなくなるリスクもあるという。
■薬を減らす・やめるで健康に

本書で薬の問題を切々と訴えている松田院長が創設した「薬やめる科」は、その名のとおり、薬をやめる、もしくは減らすことに軸足を置き、健康を取り戻すことをねらう。そして、できるだけ安全な薬(漢方薬が主)や代替療法に切り替えてゆくのが方針だという。
方針でキーとなるのは、「腸内フローラの改善」、「化学物質、有害金属などのデトックス」、「体温の維持と免疫力の向上」など9つの治療ポイント。また、気功のような他の医師が踏み込まない手法も否定せず、積極的に取り込んでいる。

具体的な施療については、通院する必要があるが、エッセンスについては本書からでも得るものは多い。「自分は薬を飲み過ぎている」と自覚している方は、読んでみることをお勧めしたい。

【今日の健康に良い1冊】
『日本初「薬やめる科」の医師が教える 薬の9割はやめられる』

https://www.sbcr.jp/products/4797395570.html

(松田史彦著、本体1,300円+税、SBクリエイティブ)



文/鈴木拓也
老舗翻訳会社役員を退任後、フリーライター兼ボードゲーム制作者となる。趣味は散歩で、関西の神社仏閣を巡り歩いたり、南国の海辺をひたすら散策するなど、方々に出没している。
==



건강한
건강법

2018/12/26



문/스즈키 타쿠야

병원에 가는 것이, 「약을 받는다」 것과 거의 동의가 되고 있는, 현대 의료의 추세에 차이를 주창하는 의사가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마츠다 의원 와한도의 마츠다 사히코 원장.

마츠다 원장은, 6년 정도 전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약 그리기과」를 개설. 감약·단약에 의해 건강을 회복시키는 진료를 실시하고 있다.

투약 치료를 완전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콜레스테롤이 조금 높다. 그럼, 약 마시자」등과, 퐁퐁과 약을 내는 풍조는 문제 있어, 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저서의 '일본 최초 '약 그리기과'의 의사가 가르치는 약의 9할은 그만둔다'(SB 크리에이티브) 중 지론의 근거로 '약이 불필요한 3가지 이유'를 꼽고 있다.

이유 중 하나는 "분명히 아프지 않지만 질병으로 진단되어 약을 마시는 경우가 자주 있다"는 것.

둘째, 대부분의 약에는 부작용이 있으며, 이 때문에 새로운 부조가 발생하는 것.

셋째는, 「왠지 갑자기, 〇〇증후군, 〇〇병이라고 하는 새로운 병이 제창되어, 텔레비전에서 선전되고, 마치 그것에 맞춘 것처럼, 새로운 약이 준비되고 있다」라고 하는, 우라의 있을 것 같은 사회 현상의 많음.

이런 이유로 '약이 병을 만든다'가 많이 있다고 논하고 있다.
■ 고혈압 약은 필요합니까?

예를 들어, 고혈압. 후로성 조사(2015년)에서는 고혈압 환자는 약 1천만 명. 고혈압에 해당하는 사람은 4300만명으로 추계되고 있다. 이렇게 환자가 많은 것은 WHO와 국제고혈압학회가 정하는 적정한 혈압의 기준치가 시대와 함께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 배경에 있다.

한편, 일본인간독 학회가 제시한 완만한 기준이라면 고혈압 사람의 추계는 4300만명에서 단번에 860만명으로 줄어든다.

마츠다 원장은 “기준을 조금 바꾸는 것만으로 고혈압이 되는 사람이 단번에 늘어나거나 줄이거나 한다. 기준과는 그 정도의 것”이라며 “원래 고혈압은 병인가”라고 지적한다.

본서에서는 경대의학부에 의한 백수자(100~108세)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식사나 화장실 등 자립도가 높은 것은 수축기 혈압이 156~220인 그룹이었다고 한다. 또, 치매의 정도도 「혈압이 높은 사람이 가벼웠다」라고 보고되고 있다.

중년기 이후의 연령층의 사람들이 혈압이 높은 것은, 동맥 경화로 좁아진 혈관으로 혈류를 원활하게 흘리기 위한 적응이며 병이 아니다. 그렇게 높은 혈압이 아닌 한 “의사로부터 처방된 강압제를 고맙게 무리하게 복용하지도 않는다”고 마쓰이 원장은 말했다.

같은 것은 혈당치나 콜레스테롤치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고 하고, 조금 수치가 높아도 문제 없다고 하고 있다.
■약을 많이 마실수록 부조가 늘어난다

마츠다 원장은 "부작용이 없는 약은 없다"고 말한다. 특히 문제인 것은, 「항〇〇약」이나 「〇〇길항제」라는 이름이 붙은 약제. 체내의 효소나 신경전달물질 등의 작용을 부분적으로 차단하여 증상을 억제하는 작용이 있다. 이러한 약에 대해 마츠다 원장은 이렇게 경고한다.


“무언가 몸에 결함이 있어 나오는 증상은 대체로 거기를 자연치유시키려고 생기는 것. 건강하게 되기 위해 필요한 체내 시스템의 작용입니다. 힘을 빼앗는 것도 됩니다.또, 몸에 나쁨을 하는 물질을 '선택적으로' 차단하면 좋지만, 그렇게 편리하게 가는 것은 아닙니다.인체는 단 하나의 세포가 반복 분열해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약으로서 내복한 화학물질은 위장에서 흡수되어 전신에 건너갑니다.결과, 나쁘지 않은 장기까지 손상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본서 54p보다)

약이 받는 또 다른 문제는 수석층에 많은 다제 병용. 여러 종류의 약을 마시고 오히려 신체를 나쁘게 하는 환자가 많이 있다고 한다. 게다가, 다른 의사가 낸 약의 부작용을 병의 증상과 착각해, 새로운 약이 나온다고 하는 것도 확실히 다루고 있다고도.
■시판약은 일시적인 사용으로 마음을 얻는다

약국에서 부담없이 살 수 있는 감기약이나 위장약 등은, 어떠한 것일까?

이들에 대해서는, 마츠다 원장은 「긴급 대응으로서, 단기간 복용한다」가 원칙이라고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두통이나 기침 등 감기의 여러 증상이 심해서, 어쨌든 완화하고 싶을 때 감기약을 복용하는 것은 좋지만, 「대단한 증상도 나오지 않는데 예방을 겸해 마시거나, 이미 증상이 멈추어 하고 있는데 계속 마셔"는 NG. 이윽고 약이 효과가 없을 위험도 있다고 한다.
■ 약을 줄이고 · 그만두고 건강하게

본서에서 약의 문제를 절대로 호소하고 있는 마츠다 원장이 창설한 「약 그만두는 과」는, 그 이름대로, 약을 그만두거나 혹은 줄이는 것에 축족을 두고, 건강을 되찾는 것을 겨냥한다. 그리고 가능한 한 안전한 약(한약이 주)이나 대체요법으로 전환해 가는 것이 방침이라고 한다.
방침에서 키가 되는 것은, 「장내 플로라의 개선」, 「화학물질, 유해 금속 등의 디톡스」, 「체온의 유지와 면역력의 향상」등 9개의 치료 포인트. 또 기공과 같은 다른 의사가 짓밟지 않는 수법도 부정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캡처하고 있다.

구체적인 시료에 대해서는, 통원할 필요가 있지만, 에센스에 대해서는 본서로부터도 얻을 수 있는 것은 많다. 「자신은 약을 너무 많이 마시고 있다」라고 자각하고 있는 분은, 읽어 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오늘의 건강에 좋은 1권】
『일본 최초 「약 그리기과」의 의사가 가르치는 약의 9할은 그만둔다』

https://www.sbcr.jp/products/4797395570.html

(마츠다 사히코 저, 본체 1,300엔+세금, SB 크리에이티브)



文/鈴木拓也
老舗翻訳会社役員を退任後、フリーライター兼ボードゲーム制作者となる。趣味は散歩で、関西の神社仏閣を巡り歩いたり、南国の海辺をひたすら散策するなど、方々に出没している。


==

주간 현대 2020 Vol. 1 쿠스리의 위험한 마시는 방법, 선택하는 방법

매일 쿠스리를 마시는 당신에게 주간 현대 별책 어른의 주간 현대 2020 Vol. 1 쿠스리의 위험한 마시는 방법, 선택하는 방법
마이니틱스 리오놈 아나타 헤슈우칸겐다이베사츠오토나노슈우칸겐다이 2020 Vol1 쿠스리노아브나이노미카타에라비카타
편 : 주간 현대
전자 있음

서점 재고 보기
온라인 서점에서 보기
자신 메모


내용 소개


병원에서 처방되는 쿠스리, 의사에게 말하는대로 마시지 않습니까?
바르게 사용하면 효과가 있는 쿠슬리도, 다른 지병이나 삼켜에 따라서는 독이 된다.
쿠스리의 마시는 방법, 멈추는 방법, 줄이는 방법으로부터, 최신 연구로 판명된 새로운 부작용 등,
놓을 수 없게 된 쿠스리와의 건강한 사귀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주요 내용 제1부 쿠스리 와

능숙하게 사귀는 방법 죽은 순간에 「이렇게 힘들다면 마시지 않았어」라고 후회하는 쿠스 리・특별 인터뷰 야작 나오키・히가시다이메 명예 교수 / 오줌이 나오기 어려운 / 사지 발가락 / 식사의 맛이 이상하다 ...... 당신의 증상에서 알 수있는 " 쿠스  리의 부작용"역할 목록 교수도 경고 죽습니다! 병원의 쿠슬리는 역시 위험한  의사로부터 처방된 쿠스리와 보충제는 함께 마시지 말아야 한다  절대  마셔서는 안 되는 쿠스리  와  보충제 「쿠스리는 5 종류까지」, 그 이상은 생명의 보증을 할 수 없습니다

















・일본에서는 처방하지만, 유럽의 선진국에서는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쿠스리」


제3부 생활 습관병과 쿠스리 진짜

이야기 새로운 치료법」 ・생활 습관병 「치유하는 쿠스
리」 「치유되지 않는 쿠스리」 당신은 어느 쪽을 마시고 있습니까? 확인! 시판약의 올바른 마시는 방법, 선택 방법 ·상품명을 대공개! 명의에 들은 「우리 집의 『상비약』」 이 조합이 최강입니다 ・영국의 논문에 의학계가 격진 쿠스리로 심근 경색이 되는 사람 ·명의는 이런 “건강 식품” “사프리”를 사용하고 있다 【특별 부록】 지금, 병원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는 “100의 쿠스리”와 그 부작용

















상품명 매일 쿠스리를 마시는 당신에게 주간 현대 별책 어른의 주간 현대 2020 Vol. 1 쿠스리의 위험한 마시는 방법, 선택하는 방법
저자 이름 편 : 주간 현대
발매일 2019년 12월 9일
가격 정가:1,000엔(본체 909엔)
ISBN 978-4-06-518644-2
심판 B5
페이지 수 116화
시리즈 코단샤 MOOK


저자 소개
편: 주간 현대(슈우칸겐다이)

관상기도, 성경적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 - 아이굿뉴스

관상기도, 성경적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 - 아이굿뉴스

관상기도, 성경적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

표성중 기자
승인 2010.09.07 



■ 기독교학술원, 개혁주의 측면에서 관상기도 조명


말씀보다 인간의 전통이나 개인적 경험 지나치게 강조
올바른 관상은 상상력 동원이 아닌 성령님이 주시는 생각

최근 한국 교회 안에 널리 퍼져 있는 ‘관상기도’에 대한 부정적 시각 및 비판에 관한 신학적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관상기도는 동양적 신비주의 사상과 가톨릭 신비주의를 물려받았고, 불교와 힌두교의 영향도 받으며 이교적이고 혼합종교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교단적으로 실시하는 이번 가을 정기총회에는 관상기도가 성경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이교도들이 시행하고 있는 명상 형태를 개신교가 도입한 것인지 등에 대해 검증하려는 교단도 있을 정도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기독교학술원(원장:김영한 박사)도 지난 7일 오전 7시 반도중앙교회(이영엽 목사)에서 ‘영성과 기도-관상기도에 대한 대안’을 주제로 월례발표회를 진행하며, 관상기도에 대한 성찰 및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인 기도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 종교개혁적 전통에 충실하지 않아
‘관상기도 성찰과 올바른 기도’를 주제로 발표한 신현수 교수(평택대)는 “관상기도는 세상적 가치에 바탕을 둔 한국 교회의 기복적 기도 행태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기도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며 “관상기도는 사람의 세속적 필요를 채우거나 외형적이고 시끄러운 기도가 아닌 조용히 기도자의 내면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신비적 합일을 강조하는 기도”라고 설명했다.

이날 신 교수는 세상적 복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드리는 기도 형태에 경종을 울린 점, 기도의 본질 가운데 중요한 요소인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성을 강조한 점, 인격의 중심인 마음에서 하나님과의 지속적 사귐을 강조한 점, 기도는 내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게 하는 통로라고 본 점 등 관상기도의 긍정적 측면을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관상기도가 갖고 있는 신학적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째, 관상기도는 오직 말씀의 종교개혁적 전통에 충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 곧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성령의 사역이다. 그러나 관상기도의 방식에 대한 강조는 성령의 감동으로 된 성경 말씀의 충족성을 약화시키며 새로운 영지주의에 빠질 위험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둘째, ‘오직 성경’의 관점에서 관상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은혜이지 인간이 인위적으로 하는 어떤 행위에 바탕을 둔 신비적 체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관상기도를 주창하는 사람들은 이를 인정하지만 습득적이고 능동적이며 통상적인 관상인 지기 비움이 이를 조건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 성경적 가르침에 어긋난다
신 교수는 “관상기도는 인간의 종교적 필요, 즉 하나님과의 합일을 인위적으로 충족시켜 보려는 인본주의적 발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셋째, 성경적 세계관, 성경의 가르침과도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사물의 본질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사물의 현상과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말이다. 결국 영의 세계는 선하고, 육의 세계는 악하다고 보는 영지주의적 사고의 혼합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기도의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하지만 성경은 결코 어떤 기도의 방식이나 특히 그 방식을 통해 관상에 이룰 수 있음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피력했다.

특히 “예수님이 관상기도의 본을 보이셨다는 주장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증거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며 “신약성경의 사도들이나 예수님은 기도를 할 때 촛불을 켜거나 종을 치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성경의 가르침을 넘어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방식에 따라 영적 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전통이나 경험을 위에 두는 잘못을 저지르는 행위라 말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비판적 입장과 달리 ‘관상기도와 개혁주의적인 기도’를 주제로 발표한 오방식 교수(장신대)는 관상기도의 현대적인 지평과 자세를 소개하며 관상기도가 현대인의 기도생활에 기여하는 점을 강조했다.

# 하나님의 뜻 이루는 하나의 깊은 기도로 이해해야
오 교수는 “기독교적인 관상이해를 위해서는 관상이 신구약 성경의 가르침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 위에 발전된 개념이며, 기독교 관상은 개혁주의 전통에 충실한 기도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 피조물의 질적인 차이를 부인하지 않고, 나아가 하나님을 아는 관상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며 성령의 조명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라는 신학적인 전제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상의 어원, 기독교 전통에서의 관상의 의미, 관상의 성경적 기초 등을 설명한 오 교수는 “기독교 관상은성경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라며 “관상을 추구하는 삶은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만남이나 개인의 내면적인 변화만을 소극적으로 추구하지 않고, 행동과 관상의 조화로운 일치를 강조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관상기도는 현대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철저하게 순수하게 추구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온전히 이루어 하나님께만 영광돌리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나가는 하나의 길, 깊은 기도로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어 “칼빈의 영성의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에 있듯이 관상기도를 포함한 영성훈련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합일을 완성해 나가고자 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날 기독교학술원 원장 김영한 박사는 “개혁주의 전통에 충실한 기도는 말씀에 따른 기도이며, 말씀에 대한 묵상”이라며 “관상이란 상상력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자연스레 성령이 주시는 생각을 보는 것이므로 주관적으로 투사하거나 전위하거나 동일시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개혁주의 전통은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다. 관상이란 오로지 말씀을 보는 것이며, 주님을 보는 것이다. 주관적 감정을 인위적으로 도입할 필요는 없다”며 개인의 상상력을 지나치게 활용하는 능동적인 관상은 주관주의에 빠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한편, 이날 발표회에는 이주연 목사(산마루교회)도 발제자로 참여해 '한국적 영성에 적합한 기도'를 주제로 발표했으며, 발표회 전 가진 기도회에는 박봉배 박사(전 감신대 총장)가 메시지를 전하고, 장현승 목사(과천소망교회), 이준일 목사(예장합동 전 인천노회장), 배본철 박사(성결대 교수) 등이 한국 교회 및 사회, 한반도 통일과 아시아 세계의 영성을 위해 각각 기도했다.


저작권자 © 아이굿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표성중 기자다른기사 보기

관상 기도에 대하여 < 신학 오디세이아 < 신학과 영성 < 기사본문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관상 기도에 대하여 < 신학 오디세이아 < 신학과 영성 < 기사본문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관상 기도에 대하여

기자명 박정은
입력 2013.02.12 

[신학 오디세이아]

토마스 머튼의 책 <명상의 씨>를 처음 읽은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였는데, 그때 나는 정말 한 줄도 이해할 수 없었다. 명상이란 그저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수사님들만 하는 걸로 알았다. 당시 나에게 하느님 나라는 내가 가르치는 주일학교 어린이들과 주고받는 웃음이었고, 저녁 무렵 창밖으로 들려오는 새 소리였고, 모든 사물을 아름답게 비추는 햇살이었기에, 명상이란 거창한 말은 내게 조금도 의미 있게 다가오지 않았었다.

어느 5월의 저녁이었다. 교사회의에서 내가 느끼는 하느님과 그 나라에 대해 기도했었는데 그때 지도 수녀님이 "소피아는 나중에 영성작가가 되면 좋겠어"라고 하셨다. 영성작가! 그 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지만, 그때는 그게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묻지도 못했다. 그 당시로는 너무 엄청난 말, 가령 “수녀원에 가야 해”라든가 “평생 기도만 해야 해”라는 말이 나올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박홍기



관상기도, 세상의 아픔과 결코 괴리될 수 없는 것

결국, 나는 수녀원에 들어갔고, 영성서적을 혼자 읽고 공부도 했는데, 사실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닥치는 대로 읽어 댔었다. 그때 다시 <명상의 씨>를 만났다. 이번에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그러나 당시 나를 매료시켰던 것은 토마스 머튼이라는 사람과 그의 삶이었다. 세상에서의 삶을 접고 수도원에 들어가서도 세상의 움직임과 고통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이 영성가가 수도원의 규칙을 깨고 침대 매트리스 밑에 뉴욕 타임즈를 숨겨 놓고 읽었다는 이야기가 마음 깊은 곳을 울렸다. 진정한 명상이란, 진정한 관상기도란, 세상의 아픔과 결코 괴리될 수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배웠다. 세상을 떠나 수도 생활을 하기에 세상은 너무 아름답다고 느꼈던, 그래서 늘 세속적인 수녀일 수밖에 없었던 나는 관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관상이란 무엇일까? 깊은 내면의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라는 일반적인 이 정의에 반대할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면 침묵은 무엇인지 또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관상을 뜻하는 영어 ‘Contemplation’은 12세기 불어 ‘contemplatio’에서 온 말로, ‘무엇을 깊이 주목하여 바라보다’, ‘깊이 생각하다’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한자로는 ‘볼 관(觀)’ 자에 ‘서로 상(相)’ 자를 쓰는데, 여기서 相자는 木(나무 목)과 目(눈 목) 두 요소로 구성되어 묘목이 자라는 것을 관찰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눈여겨 잘 본다’는 뜻이다. 그런데, 웹스터사전을 보면 관상에는 그 관찰에 따른 행위라는 부분이 있다. 그러니까 관상은 무엇보다 잘 보는 마음가짐과 그 행위라고 하겠다.

관상, 실재를 바라보는 길고 느린, 그리고 사랑스러운 시선


▲ 산타크루즈의 어떤 골목길 ⓒ박정은일상생활에서 내가 관상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 정의는 예수회원 월터 벌가르트(Walter Burghardt)의 정의다. 그는 관상을 ‘실재를 바라보는 길고 사랑스런 시선(A Long, Loving Look at the Real)’이라고 하였다. 첫 번째로 ‘긴 시선’을 한번 생각해 보자.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모든 것이 참 빠르다. 그러다 보니, 긴 시선을 가지기가 쉽지 않다. 어떤 정보나 글도, 인터넷 공간에서는 쉽게 지나쳐 버린다. 순간의 이미지가 많은 것을 좌우한다. 긴 시선이란 마치 잘 준비된 만남처럼, 오랜 기다림 후의 해후처럼, 오래오래 천천히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대학원 수업을 하면서, 진지하고 조용한 수업을 살짝 빠져나와 화장실에 다녀온 적이 있다. 친구들에게 방해되지 않으려고 발끝을 들고 가능한 빨리 소리 내지 않고 자리에 앉으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빨리 가서 앉고 싶었지만,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하기 위해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천천히 슬로우 모션으로 걸어야 했다. 그러니까 조용하려면, 우선 걸음을 천천히 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바쁘면 모든 것이 빨라진다. 그러면, 사물과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잘리고 부서진다. 그러니까 긴 시선이란 고요한 응시, 천천한 마음의 움직임, 그리고 한결같은 관계들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둘째, 사랑의 응시를 생각해 보자. 내가 혹은 나의 내면이 고요해 지면,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있는 그대로 참 아름답다. 발렌타인데이 카드를 사려고 카드 가게를 기웃거리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이 아름답고, 시들어 죽어가는 나뭇잎들이 아름답고, 꼬질꼬질한 동네 꼬맹이가 아름답다. 살면서 우리가 만난 사랑의 응시는 얼마나 될까? 나는 어릴 때 몸이 자주 아팠다. 몸이 아파 괴로울 때마다 무릎을 꿇으신 채 내 머리맡을 지키며 간호해 주시며 내게 보내시던 아버지의 시선도 떠오르고, 길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의 정겨운 시선도 마음에 떠오른다. 성서에서도 하느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보시니 참 좋더라’ 하셨다. 사랑의 응시는 아마도 거기로부터 시작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응시는 무엇에 대한 응시인가? 앞서, 관상은 실재에 관한 아주 길고 사랑스런 응시라고 했다. 어떤 착각이나 환상이 아니라 우리 앞에 펼쳐지는, 우리 안에 놓인 실재를 그렇게 응시하라는 것이다. 이 말은 분명히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아름답고 긴 시선으로 응시하라는 것인데, 그렇다고 또 있는 그대로의 현실만을 보라는 것은 아니다. 그 너머로 존재하는 의미, 희망, 그리고 비전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즉 실재를 본다는 것은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바라봄’을 말한다.


▲ 영화 <천국의 빛깔>가끔, 관상은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는 그런 절대 침묵을 연상하는 것 같은데, 사실 관상을 산다는 것은 그 반대이다. 사랑으로 보는 데 눈물이 없을 수 있을까? 가난한 자의 아픔을 보는데 슬픔이 없을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무능한 나를 보는데 좌절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관상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관상이 결국 기쁨인 것은 내 안에 주어진 실재에는 나의 한계 또한 고스란히 담기는데, 그런 나의 찌질한 실재에 보내는 하느님의 그 길고 느린, 그리고 자비로운 응시를 만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가장 아름답게 관상하는 영혼을 그린 영화는 이란의 마지드 마지디 감독이 만든 <천국의 빛깔 (The Color of Paradise)>인 것 같다. 아름다운 이란 북부의 자연이 특히 돋보였던 이 영화의 주인공 소년 무하마드는 맹인이다. 그러나 그는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또 행동한다. 어느 날, 이 소년은 작은 새가 둥지에서 떨어진 것을 ‘느낀다’. 그는 고양이를 따라가 떨어진 새를 주워 나무 위 둥지에 다시 올려 놓아준다. 그는 또 바람이 불면 고향의 들판이 얼마나 아름답게 흔들리는지, 하늘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 되는지, 자신이 사랑하는 여동생들의 얼굴이 어떻게 반짝이든지 너무나 잘 ‘바라본다’.

캄보디아의 아이들을 느리고 깊은 시선으로 '관상'했던 조카

지난여름 조카와 캄보디아 여행을 다녀왔다. 나는 앙코르와트 사원이 중요 목표였고 내 조카는 젊은이답게 같이 가자는 나의 말에 순순히 콜을 했었다. 압도적이고 아름다운 사원도 사원이지만 거기서 본 캄보디아 어린이들의 가난이 무척 마음이 아팠었다. 그러나 어린이들의 가난을 그냥 본 나와 달리, 조카는 그들을 느리고 사랑스런 시선으로 바라본 듯 하다. 여행 후 조카는 “어린이들이 너무 사랑스러웠고 자꾸 떠오른다”며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년간 르완다의 양호 선생님으로 떠났다. “아이들 너무 예쁘지?” 하고 물으니, “그럼요” 하고 답한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인다. “이모, 여기는 지난 내전으로 한 마을이 다 엄마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엄마란 말 하면 안된대...” 같은 시간과 공간에 있었어도 체험이 마음을 울리는 깊이는 다른 듯 하다. 내 사랑스런 조카는 캄보디아에서 ‘관상’을 했고, 그 관상의 연장으로 아프리카 르완다에 사는 꼬마 친구들을 또 천천히 그리고 사랑스런 응시로 만나고 있는 것이리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되리니!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