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6

Philo Kalia | [Paul Tillich 신학 연습11](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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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Tillich 신학 연습11](후기)
16인이 참석한 폴 틸리히 공부 열기가 봄기운으로 임신한 대지 같다. 그 열기에 힘입어 오늘 공부 내용과 토론을 섞어 요약한다.
1.계시의 매개물
모든 하나님의 계시는 매개를 통해 나타나며 전달된다. 틸리히는 계시의 매개물을 ‘하나님 말씀’이나 ‘성경’에 제한하지 않고, 먼저 '자연'에서부터 시작하여 '역사와 집단 및 개인', 그리고 '말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매개물을 챙긴다.
그간의 신학이 서양의 역사와 언어 및 사유 방식을 통해 전개되어온 신학이기에 틸리히가 가르쳐준 방법대로 서양만이 아니라 한국의 자연인 금수강산, 한국의 근대 역사(동학, 일제, 삼일운동, 해방, 6.25 전쟁, 반독재와 4.19 이후 민주화, 산업화)와 역동적인 사회 개혁, 이웃 나라 중국 및 일본과도 다른 한국인의 심성과 사유를 매개로 수용되는 계시의 특성은 무엇일까?
틸리히는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일단의 사건들이 기적으로 황홀경적으로 경험될 때만 역사 자체는 계시가 된다”고 말하면서, 이런 경험은 어떤 민족의 역사에서 일어난 창조적 사건만이 아니라 파괴적 사건과도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한국 역사의 파괴적 사건(4.3사건, 광주 사건, 세월호 사건, 노동자 산재 사건 등) 속에 담긴 역사적 계시의 의미는 무엇인가, 현안으로 떠오른다.
2.매개물의 투명성(transparency)
매개물의 특수한 성질이나 속성 안에 계시의 매개물로서의 자격이 들어 있는 게 아니다. 모든 매개물은 계시가 발생하는 자리(位相, constellation)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매개물은 a와 b를 연결하는 길이고, c와 d가 서로 통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매개물은 스스로 비어 있어야 한다, 투명(transparent)해야 한다. 투명한 매개란 자연이나 역사나 집단이나 한 개인을 막론하고 스스로 자신을 절대화는 우상의 오류에 빠지지 않아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계시는 매개물을 통해 전달되지만 동시에 매개물 중 그 어떤 것도 그 자체로 계시의 힘을 소유하지 않는다. “계시의 전달자는 자신을 위해 그 어떤 것도 주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3.계시의 매개자로서의 성인(saints): 성도들의 교통(성인의 통공, Sanctorum Communio)
성인됨이란 인격의 완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인들이란 자신들울 통해 존재의 근거이신 하느님이 투명하게 계시될 수 있도록 하며 투명한 매개물로서 존재의 자리에 돌아가 지킬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들의 존재는 다른 이들을 위한 표적 사건이 될 수 있으며, 가톨릭 교회는 시성식을 통해 성인으로 추앙된다. 가톨릭과 정교회는 수많은 성인 공경 축일이 있고 모든 성인들의 대축일인 만성절(Allerheiligen)을 지킨다.
개신교는 성인과 평범한 신자의 차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신자가 성도의 공동체, 곧 새로운 실재에 소속되어 있는 한 성인이다. 그리고 모든 성인은 죄의 용서가 필요한 이들에게 속해 있는 한, 평범한 신자다. 가톨릭 신자가 Sanctorum Communio를 고백하면서 성인들의 통공을 고백할 때, 개신교 신자는 동일한 Sanctorum Communio를 고백하면서 모든 신자(성도)의 교통(사귐, 교제)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그 결과 가톨릭과 정교회에는 성인들이 매우 많아 차고 넘치는 반면 개신교에는 성인의 실재가 평범하게 되면서 결국 제거된 셈이다.
틸리히는 성인이란 주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계시의 매개물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성인이란 점을 강조한다. 성인의 믿음과 성인의 사랑은 믿음과 사랑의 능력과 창조성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위해 표적 사건(sign-event)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계시의 지식을 위한 성인의 투명성이다.
4.자연의 요소들
계시의 매개물로서의 ‘돌’이나 ‘반석’은 매개물로서의 ‘인간’과 큰 차이가 있지만 동시에 인간이 분명하게 보여주지 못하는 특성을 지닌다. 자연적 매개물은 성례전적 요소가 될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말씀과 성례전은 불일불이(不一不二)적 관계이다. 말씀은 보이지 않는 성례전이며 성례전은 보이는 말씀이다. 여기서 신의 임재 경험을 묘사하는데 청각뿐 아니라 시각과 촉각 그리고 미각도 사용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 교리는 말씀이 시각과 촉각의 대상이 되었다는 역설을 포함한다. 말씀과 성찬의 예배는 계시 사건의 감각화를 통해 믿음의 ‘격발’이 가능해지도록 불을 지핀다.
5.자연과 역사로서의 계시
역사적 계시는 자연을 통해 이루어지는 계시가 동반되고, 그것에 의해 지지받을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그렇게 된다. 자연은 역사가 움직이는 기초이며, 역사는 자연 없이는 어떤 실재도 가질 수 없다.
6.근원적 계시와 의존적 계시
'근원적 계시'란 최초의 계시 사건이며, '의존적 계시'란 교회의 역사 속에서 계속되는 근원적 계시의 창조적 변주들이다.
7.계시의 지식
계시란 존재의 신비가 현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현현을 인간 이성의 인식적 기능을 통해 파악할 수 있음으로써 계시에 대한 지식이 가능해진다. 그렇지만 “계시의 지식(knowledge of revelation)은 존재들의 본성과 그것들 간의 관계를 전해주는 정보가 아니라, 우리에게 드러난 존재의 신비를 알려주는 지식이다.” 그러므로 자연에 대한 자연과학의 지식, 성서에 대한 문헌비평과 역사비평, 인간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 등은 계시의 지식에 지장을 줄 수 없다.
어떤 과학적, 인문학적 이론이나 지식이 신학에 우호적이라 해서 계시된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신학자들은 신학적 근거들에 기반하여 다른 견해들보다 하나의 과학적 견해를 선호해서도 안 되며, 종교적인 이유로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해서도 안 된다. 이 모두는 신학을 위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계시된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일상적 지식의 기준으로 삼거나 지장을 준다면, 그것은 과학의 정직성과 방법론적 겸손함을 파괴하는 것이며, 그것은 신적인 계시가 아니라 사탄의 접신(demonic posession)에 불과한 것이다.
8.유비와 상징(analogy and symbol)
계시의 지식은 집적적이든 간접적이든 하느님의 지식으로서 유비적이며 상징적이다.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 사이에 논쟁점이었던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는 신에 관한 진리(신존재 증명이나 신의 인식)를 발견하는 방법이 아니라, 계시에 대한 모든 지식을 표현하는 형식이다. 틸리히는 ‘상징’이라는 용어를 더 좋아한다. 일상어를 매개로 한 모든 종교적 언어는 상징이기 때문에 그것은 ‘단지 상징일 뿐이야’(only a symbol)라는 자기 모순적 표현을 삼가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비유비적 지식이나 비상징적 지식은 유비적 지식이나 상징적 지식보다 진리를 적게(elss truth) 담고 있다. 계시의 지식을 이해하기 위해 유한한 자료를 일상적 의미에서 사용할 때 계시의 의미는 파괴되고 하느님의 신성은 박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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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chang Kim and 11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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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용현
    틸리히의 열기가 여기까지 전해져오네요🍒
  • Michael Choi
    틸리히 - 철학자가 되다 만 신학자 또는 신학자가 되고 싶은 철학자.
    2
    • Philo Kalia
      최무길 그의 청소년기의 꿈은 건축가가 되는 것이었죠
    • Michael Choi
      Philo Kalia 다재다능한
      학자 또한 소문난 우머나이져 !
    • Philo Kalia
      최무길 그 꿈이 벽돌 대신 개념을 가지고 생각을 짓는 사상가가 되었다고 생각되네요.
    • Michael Choi
      Philo Kalia 엄밀하게 말해서 실존주의 철학자죠. 미국 버젼으로.
    • Philo Kalia
      최무길 실존주의 영향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그의 사상형성에는 서양 철학의 존재론, 생의 철학, 셸링-마르크스주의, 프로이트와 융, 종교문화사, 불교에 대한 이해 등이 종합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 Michael Choi
      Philo Kalia 그렇죠. 하이데거의 제자이면서 백과사전적으로 나가신 분. 불교에 대한 이해는 어디까지 갔는 지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서구인들의 불교지식이 피상적인 수준이라서.
    • Philo Kalia
      최무길 엄밀히 틸리히(1886-1965)가 하이데거(1889-1976)의 제자는 아닙니다. 20년대 마부르크 당시 불트만과 같은 교수로 있었죠. 하이데거는 불트만과 공동 세미나를 진행하기고 했습니다. 서구인들의 불교 이해가 피상적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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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y
      • Edited
    • Michael Choi
      Philo Kalia 직계제자란 뜻이 아니도 사상적 맥을 잇고 있다는 점에서죠. 존재의 신비에대한 탐구 영역이 같습니다.
      틸리히의 불교는 영어를 하는 일본 선승에게서 배운 수준인 것 같네요. 그 정도도 대단한 것이긴 하지만 불교가 워낙 방대하고 포괄적이라 ...
      2
    • Philo Kalia
      최무길 "존재의 신비"에 대한 물음이 같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틸리히의 불교에 대한 이해를 언급한 것은 말년에 일본에서 1년 정도 지내면서 다른 사상과의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는 생각때문이었습니다. 자서전(Auf der Grenze)을 말년에 썼더라면 '東과 西의 사이'를 추가했으리라 생각합니다.
      2
  • 영국이
    파괴적 사건 또한 계시의 매개물이 될 수 있다는 말씀에 공감이 많이 가네요.
    카톨릭에서는 계시의 매개자로 성인들을 추앙했지만 개신교는 성인이나 평신도를 차별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좀 더 나아가 우리민족의 '반면교사' 개념이 떠오릅니다.
    엎친데 덮친다고 코로나 사태가 가시기도 전에 윤석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교수님의 강의에 위로를 받습니다.
    좀 웃기기는 하지만 교수님 말씀에 의지하여 앞으로 한 5년 동안은 대통령을 반면성인(?)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ㅎㅎ
    2
    • Philo Kalia
      이영국 우리는 오늘날 권력이 어떻게 강해지고 타락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 수 있는지 잘 압니다. 미래는 알 수 없기에 하나님의 영역이라고 말하지만, 좋은 미래는 좋은 뜻을 품은 인간이 만들어 나간다고 믿습니다.
  • 박성만
    16은 4의 배수로 아주 좋습니다. 줌 화면에 열이 많이 났을 거 같습니다. 가만히 보니 심박사님과 틸리히는 닮았습니다.
  • Steve Soonkil Hong
    성인(Saints)에 대해 부정적 인상이 있었는데, 성인이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고 보고, 복음전도의 매개가 될 수도 있는 긍정적인 면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성당의 베드로상의 발이 하도 손으로 만져 광이 날정도로 닳았는데 그것이 선교의 접촉점이 될 수 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가복음 4:35-41 광풍을 잔잔케 하심 을 공동묵상하면서 한분이 39절의 바람/바다에 이르셨으니 이는 자연을 사람 취급을 하였다고 하여서, 제가 말하길 예수님이 기적의 매개물로 바람/바다를 사용하였고, 매개물로 돌(자연)과 사람은 계시의 전달자로 차이가 없지만 계시의 의의와 진리의 관점에서 큰 차이가 존재한다고 아는체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 Taechang Kim
    어제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오늘 아침 선생님의 말씀글을
    일고 되새겨 생각한 바를 솔직
    히 적어 보겠습니다.
    1. 啓示라는 말=단어자체의
    뜻풀이입니다. 啓라는 한자는
    닫혀서 감추어져 있는 것을 열
    어서 보여준다는 이미지의 글
    자이고 示는 神霊이 강림하시
    는 제단을 나타내며 神意가 거
    기서 현시된다는 이미지의 글자를 포개놓은 말글이어서
    보통의 지식만으로는 알 수 없는 하(느-늘-나)님을 알 수 있
    도록 배려해주시는 사랑이 담긴 수단-방편-통로라는 이해
    가 가능합니다.
    2. 그 중에서도 남달리 고통과
    인내, 위기와 생존, 시련과 극복
    의 역사를 걲고온 우리 한겨레
    그리고 다른 어느 세대보다 빈 곤과 억압과 전쟁과 분열의 고
    난을 벗어 나려 전신투입 몸부
    림해온 8090세대의 일원으로
    지녀온 생명감각=공감각으로
    는 역사를 통해서 계시되는
    하느님의 참뜻이 무엇인가를
    묻고 또 물을 수 밖에 없었습
    니다. 일반계시나 자연계시는
    그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고
    우리 한겨레 그리고 저의 세대
    가 살아온 생명-생존-생활의 역
    사를 통해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참뜻을 알고 깨닫고
    삶속에 익히는 일이 가장 긴급
    한 과제였습니다. 기성교회의
    목사님들의 설교말씀이 너무
    생명감각에 와닿음이없는, 그래서 몸도 맘도 얼도 울림이
    없이 허전한 좌절을 더 해가는
    빈말의 되풀이에 과연 하느님
    이 현현하실까? 라는 물음을
    안고 살아 가고 있음을 다시 돌
    아 보게 됩니다. 인간의 주체적
    인 탐구만으로는 닿지 못하는
    인식의 피안에서 가리워져있는
    덥개를 걷어내고 환하고 밝게
    보여주시는 (희랍어의
    apocalypsis나 라틴어의
    revelatio의 뿌리뜻이 그렇듯
    이) 하느님의 생생동동하심에
    귀가 여리고(耳) 입도 여리고
    (口) 생명의 공감각이 響鳴互動하는 (막힘없이 거침없이 똑
    바로 울리는 (呈에서 口를 뺀 남어지 글자)聖(耳+口+呈빼기
    口)人이 특정인이라고 규정할
    필요가 없이 누구나 공감각이
    제대로 작동하는 사람이면 성
    인이 되소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함께 사귀고 격려
    하고 위로하는 벗사귐이 성도
    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거라 생
    각됩니다.
    3. 독일어의 Offenbarung이
    뜻하듯 활짝 밝게 열어 알고 볼
    수 있게 되는 것의 알매기가
    무어냐라는 것이 중요한데 그
    것이 저의 경우에는 저 자신의
    개체생명이 하느님의 영원히
    생생동동하시는 생명과 함께
    아우러져 울리는데서 늘 새롭
    게 태어남을 체감 체험 체득한
    다는 황홀한 기적적인 사건입
    니다. 불치의 중병이라 의사의
    선고를 받고도 깨끗이 나음을
    걲었을 때나 거기까지는 안가도 괴롭고 아픈 병치레를
    겪고나서 마침내 쾌차했을 때
    마다 느꼈던 쾌복의 솟구치는
    환희와 감사가 바로 삶과 죽음
    을 왕래하는 실존의 심연에서
    계시되는 하느님의 생생화화
    의 역사이십니다. 그럴 때 마다
    생명개신의 기쁨이 삶의 새로
    운 차원을 열어 주시는 하느님
    을 만나게 되아 저의 삶이 변하
    고 제가 만나는 모든 것이 새롭게 살아나는 것을 실감하
    게 되는 接化群生의 체감 체험
    체득이야말로 한겨레신학에의
    길엶이 되지 않을까라고도 생
    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 Sun-joong Kim
    서로에게서 성인을 발견하고 존중하고 배울 수 있다면 신나는 세상이 될텐데요...
  • 성금란
    성인, 투명한 거울!
    쟁기질 된 이랑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
    • Philo Kalia
      성금란 이랑에 봄비가 보슬보슬 내리내요
    • 성금란
      심광섭 십자가의 길, 기 길로 행하신 성인들의 자기포기가 우리의 것이 되게 은총을 베푸시니 행복합니다!
    • Philo Kalia
      성금란 자기 포기, 참 어려운 과제입니다. 부단히 자기 성취, 자기 정립을 위해 살아온 일생이네요
  • 한양국
    폴틸리히에 대한 교수님의 글들을 보면서 학부시절 폴 틸리히에 미쳐서 그의 책들을 모조리 탐독하고자 했던 열젱적인 청춘의 날들에 대한 기억이 소환되네요 오랫동안 별명이 폴 틸리히라고 불릴 정도엸으니 ~~ ^^
    틸리히는 내게 처음으로 신학 세계의 방대한 아니 무한한 지평을 보여준 최초의 스승이었습니다
    돌아보면 그 시간들이 제게는 쉐이킹파운이션이라는 계시의 순간들이었고,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라는 깨달음의순간들이었습니 다.
    성경과 교회로만 게토화된
    당시 근본주의적 신앙에 길들여진
    내 신학적 인식의 한계를 모든 학문과 모든 종교 그리고 보편역사와 세계로 확장해 주었던 분입니다
    그리고 한동안 왜 우리에게는 이런 교수가 없는가, 라는 교만과 아쉬움을 가지게 했던 분이셨네요
    교수님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틸리히
    강독이 신학도들엑게 새로운 신학적 사유와 신학적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는 큰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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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ply
    • 1 y
    • Edited
    • Philo Kalia
      한양국 목사님! 틸리히에 대한 오랜 애틋한 애정을 표현해 주시니 참 좋습니다. 학생하고 공부를 시작하다가, 줌으로도 열었더니 참석하시는 성인이 15분이나 됐습니다. 비신학도도 1/3입니다. 어려운 틸리히 신학에 대한 열의를 보고 저도 깜짝 놀랍니다. 그러나 참 즐겁습니다. 틸리히의 이름으로 철학적 신학(생각하는 신앙), 문화예술신학(행동하고 즐기는 신앙)에 작은 꽃자리가 생기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목사님의 애정과 응원 감사합니다. 기회되면 들어오셔서 틸리히 특강 한번 해주시면 어떨까요,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 한양국
      심광섭 네 ~~~^^
      교수님이 계신대 특강은 그렇고
      기회가 되면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 Like
      • Reply
      • 1 y
      • Edited
    • Philo Kalia
      한양국 여기서는 조직신학 1권을 강독, 해석하는 수준입니다. 연구하신 주제로 특강 해주시면 좋다고 생각됩니다.
  • 朴忠良
    틸리히의 진수를 뽑는 선생님의 신학이 진국처럼 느껴집니다..

우리 안의 친일을 어찌할까? 이찬구 종교와 평화 2023년 4월 3일 손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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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친일을 어찌할까?

이찬구 (한국민족종교협의회 이사)

특별기고 종교와 평화 2023년 4월 3일












귀일사상으로 보는 금강경 공부 - 예수영성 수련회 - 기독교 수도회 동광원

귀일사상으로 보는 금강경 공부 - 예수영성 수련회 - 기독교 수도회 동광원

예수영성 수련회

귀일사상으로 보는 금강경 
공부작성자joong|
작성시간22.07.22|
조회수33



독일 신학자 한스 큉은 “종교 간의 평화가 없이는 세계평화도 없다.”고 주장하여 많은 공감을 얻었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양대 종교로 기독교와 불교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두 종교 간의 불화나 갈등이 거의 없다는 것이 우리 사회문화의 자랑이다. 물론 일부 광적인 신도가 불상이나 사찰을 훼손하는 불미스런 행동이 간혹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여론의 뭇매로 수그러드는 것을 볼 때 종교 지도자들과 우리 사회의 문화적 성숙도는 매우 높은 편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역사를 통해 볼 때 문화의 성숙도가 계속 올라가는 것만은 아니다. 사회 풍조가 정의의 가치를 높이고 진리를 추구하는 참 신앙인들이 많아질 때는 시민의식도 높아지겠지만 모두가 세속적 욕망으로 떨어지면 시민의식은 퇴락하고 사회는 여러 갈등과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종교학자 오강남 교수는 참 진리를 추구하는 영성의 신앙을 심층종교라 하고 형식적 종교생활을 하면서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기복신앙의 종교는 표층종교라 하였다. 우리 신앙이 외형적으로 종교인의 열성을 보인다고 해도 세속적 가치에 매몰된 표층종교로 떨어지면 사회적 역기능을 초래하여 갈등을 해결하여 통합하고 치유하기보다는 오히려 갈등의 요인이 되어 다툼과 분열을 심화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층종교로 올라가 영성이 높아져야 하고 영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서로 이해와 소통의 폭이 그만큼 깊어지고 넓어져서 화평의 세계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21세기 현대를 탈종교시대 또는 무종교의 시대라고 한다. 지난해인 2021년 어떤 통계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인구의 약 60%는 무종교라 한다. 불교가 16%, 개신교가 17%, 천주교가 6% 기타 1~2%라고 한다. 30년 전에만 해도 종교인이 절반이 넘었는데 이제는 40%로 줄어든 것이다.

이런 통계가 보여주는 의미를 여러 각도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우선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다. 첫째는 외형적인 건물과 조직 교리 등 제도적 종교인의 숫자는 계속 줄어들 것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대표적 종교로서 여전히 개신교와 불교가 살아있다는 점이다. 종교인의 숫자가 줄어든다는 자체가 중요할까 싶겠지만, 고등종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표징이란 점에서 염려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고등종교가 쇠락하면 유사종교나 기복신앙의 표층종교가 기승을 부리게 되고 그렇게 종교가 타락하면 문화적 수준도 떨어진다는 점을 우려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적 성숙과 평화를 위해서는 기독교와 불교가 기복적 표층종교에서 벗어나 심층종교로 올라가야 하는데 자꾸 표층종교로 떨어지기 때문에 제도권의 숫자도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싶어 우리 사회의 장래에 대하여 우려하는 것이다.

장차 우리나라의 사회적 화합과 평화를 위해서 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할 때 무엇보다 우리 시대 종교인이나 신앙인들이 더욱 분발하여 참을 찾고 진리를 추구하여 높은 영성과 정신의 빛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종교의 경전들에 나타난 성인들의 참뜻을 밝혀서 기복신앙이 아닌 참 신앙의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참 길을 닦아 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와 문화는 그만큼 성숙되고 밝아질 것이다. 불교인이건 기독교인이건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형제자매로서 이 땅과 환경을 아름답게 가꾸고 사회를 화평케 하고 문화를 높이며 모든 생명을 아끼자는데 뜻이 같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먼저 불교인은 참 불자가 되고 기독교인들은 참 그리스도인이 되어 서로가 일상의 삶에서 소통하고 화합하는 일이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종교인의 소통과 화합을 위해서는 또 각 종교의 고유한 특징과 역할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 필요할 것이다. 화합과 일치를 위한 노력은 구심력이 되고 각자 고유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힘은 원심력이 되는데 상생의 문화를 고양하기 위해서는 이 두 힘이 다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다양성의 원심력과 하나됨의 구심력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중용 또는 중도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래서 각자 자기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 서로를 돌보며 제 역할을 바르게 수행할 때, 우리 사회는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개성을 존중하는 화합의 정신으로 하나가 될 것이고 상생의 문화가 발전할 것이다.

공자는 말하길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이면 남도 당하지 않게 하라.”고 했고 예수도 “남이 그대에게 해주길 바라는 대로 그대도 남을 그렇게 대접하라.”고 했는데 의미는 같은 것이다. 이런 황금률을 가지고 서로 상대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배려하는 역지사지의 태도로써 깊이 공감하면 자기의 입장을 존중하는 만큼 타인의 입장과 인격을 존중하는 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때라야 서로 화합할 수 있고 협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대동의 정신을 다석은 한 마디로 귀일歸一이라 하였다. 서로 하나가 되는 방법에는 통일이 있고 귀일이 있는데 통일은 인간의 욕심으로 하는 일이지만 귀일은 인간의 양심과 도심道心을 통해서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귀일이지 통일이 아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귀일의 뜻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활동 가운데 하나가 경전을 읽고 나누는 것이다. 먼저 그리스도인으로서 불교를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한 목적으로 금강경을 읽어보았다. 우리가 타 종교의 경전을 읽고 서로 나누게 되면 종교인 사이의 소통과 화합에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경전을 그저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불교의 경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속을 보여줌으로써 심층적 소통을 하고자 했다. 표층인 겉모습이나 표현에서는 서로 다를지라도 속뜻은 서로 통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모든 종교는 인간을 위한 것이고 인간의 참된 모습과 참삶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신앙일진대 같은 인간으로서 그 뜻이 어찌 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소통하자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 사람과 우주, 사람과 만물 사이에도 서로 통하자는 것이 종교 아닌가.

다석은 종교의 핵심을 마루뜻이라 했다. 마루는 산마루, 지붕마루처럼 가장 꼭대기를 나타내는 말이요 모든 일의 근원과 기준이 되는 것을 말한다. 마루 종宗, 그래서 가장 꼭대기의 높은 뜻을 알려주는 것이 종교라는 것이다. 가장 높은 뜻은 형이상의 궁극적 실재를 만나서 얻게 되는 한 말씀인데 그것이 결국 하늘과 땅, 사람과 만물의 평화와 화합, 그리고 자유와 생명을 아끼자는 것이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공자는 평천하平天下를 말하고 석가모니는 정토淨土를 말하고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 그 마루뜻을 위해서 더욱 불자답게 되려고 힘쓰는 사람이 불교인이고 더욱 그리스도인답게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기독교인이라 하겠다. 그러니까 모두가 불교인이 되라거나 모두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주에 별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각자 고유한 스펙트럼으로 빛나는 것처럼 각자 고유의 자리에서 고유의 빛을 발하면 된다. 이처럼 세상의 종교인들이 각자 순수한 고유의 빛을 발할 때 세상은 그만큼 더 아름답고 밝아지게 될 것이다.

모쪼록 이 책을 통하여 불교인들은 기독교를 좀 더 이해하게 되고 그리스도인들은 불교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남의 언행이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듯이 타종교의 경전이나 말씀은 내 신앙의 거울이 될 수 있는 법이다. 그래서 각자의 영성이 더욱 깊어지고 모두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는 그런 작은 계기라도 될 수 있다면 더없는 보람과 기쁨이 될 것이다.

2022. 6. 25.

평산 심중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