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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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곡 | Re:왜 원효와 켄 윌버를 이야기하는가? - Daum 카페


장수좋은마을 | Re:왜 원효와 켄 윌버를 이야기하는가? - Daum 카페

Re:왜 원효와 켄 윌버를 이야기하는가?| 자유게시판
이남곡|조회 868|추천 1|2012.10.15. 13:24

조효남 교수의 저서 <상보적 통합>에서 발췌

1. 21세기 디지털 정보화 시대, 즉 디지털 융합의 통합 미디어⁄인터넷 시대가 도래했지만, 종교•정치•경제•문화•사회 등 각 분야의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지역 대 지역, 국가 대 국가, 민족 대 민족, 계층 대 계층 간에 분열되어 있어 그 대립 갈등이 심화되어가고 있고, 이런 문제해결을 선도해 나가야할 철학, 심리학, 정치학, 사회학, 종교, 예술 분야도 과학기술의 지배하에 전근대•근대•탈근대 사조가 혼재한 가운데 극단적 포스트모던 사조가 모든 것을 ‘해체’하면서 ‘평원화flatland'되어 깊이가 없는 사상과 이념들이 백가쟁명하고 있다.

또한 그러다보니 다양한 색깔들을 접어 단색으로 만드는 것 같은 오용되고 왜곡되기 쉬운 통합담론이 나오고 있는 것도 오늘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볼 때, 오늘 날 그리고 앞으로 올 ‘새 시대new age’ 즉 ‘통합시대integral age'를 위하여 7세기와 현대의 대사상가인 원효와 켄윌버의 시대를 초월한 만남, 즉 그 상보적 통합이 요청된다.


2. 원효의 화쟁적 언어관; “이치(理)는 말을 끊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말을 끊는 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이런 까닭에 이치는 또한 말을 끊는 것이기도 하고 끊지 아니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하여 이언(離言;말을 떠남)⁄의언(依言;말에 의존함)을 말한다.

언어가 참뜻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또한 말을 떠나서는 어떤 이치도 존재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승의 체는 … 현묘하고 현묘하나 어찌 만상의 밖에 있으랴. 고요하고 또 고요하나 오히려 백가의 언설 안에 있다”고 하여 백가의 제반 학설들이 비록 부분적이나마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를 다 갖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장님이 부분적인 코끼리를 말할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지만, 장님이 코끼리를 말하는 것도 그런대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켄 윌버의 ‘모든 진리 주장은 비록 부분적이지만 옳다’는 관점과 맥락이 같은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화쟁은 언어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태도로 어떤 표현 방식으로 말해야 의견이 같거나 다른 사람들을 리(理)를 잃지도 않고 정(情)을 잃지도 않으며 화해시킬 수 있는가?’일 것이다.

이에 대해 원효는 ‘동의하지도 않고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으며 말한다(非同非異而說)’는 자세와 방식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3. 원효의 화쟁논리; 원효의 화쟁을 하는 논리는 ‘극단(極端)을 떠남’과 ‘긍정과 부정의 자재(自在)’의 두가지 논법으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극단을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극단적인 말이나 표현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원효가 보기에 모든 다툼은 사람들이 집착에 빠져 있어 단정을 하고 자기 주장만을 하기 때문에 집착을 없애는 것이 화쟁의 근본해결방법이라는 것이다.


우선 일차적으로 언어의 한계를 이해시켜 어떤 말이나 개념들이 다 상대적으로 성립함을 지적해서 한 쪽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하면서 또 다른 극단도 버리도록 하고 있다.


예컨대 유(有)•무(無)의 쟁론에 대해 ‘유무의 관계는 유가 아니면 무인 관계가 아닌, 유가 없으면 무도 없는 상호의존적이고 상대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중도(中道)도 유무와 상대적으로 성립하는 것이므로 그것도 불변의 실재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즉 ‘이변비중(離邊非中)’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논리는 양 쪽을 다 긍정하는 단초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이중부정(二重否定)⁄이중긍정(二重肯定)이라는 ‘긍정과 부정의 자재’의 논리 구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둘째로 원효는 모든 이쟁(異諍)의 화쟁에서 긍정과 부정이 자재해야함을 보여 주고 있다.


언어적 차원에서 보면 언어로 표현되는 모든 차별상은 상대적으로 성립함으로 긍정과 부정이 자재로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부정을 하는 이유가 집착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이지만 아니라는 것에 대한 집착도 또 다른 집착이기 때문에, 즉 극단을 떠나라고만 강조한다면 그것도 또 다른 극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연비불연(非然非不然;그렇지 아니하고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님)이라는 것도 아니라고 하면 아니라고 하는 것에 또 집착을 하므로 그것을 부수기 위해 아닌 것도 아니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긍정과 부정의 자재의 논법이야말로 대긍정의 태도를 이끌어내는 방법이 아닐까!

4. 화쟁방법; 원효의 화쟁방법은 ‘동의도 않고 동의하지 않지도 않으며 말함(非同非異而說)’과 ‘경전 내용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만일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엇갈려 쟁론하고 있는 때에 유견(有見)에 의해 설한다면 공견(空見)과 다를 것이요, 또 만일 공집(空執)에 동의하여 설한다면 유집(有執)과 다른 것이다...이런 까닭에 동의도 하지 않고 이의도 제기하지 않으면서 설한다. 동의하지 않는다함은 말 그대로 모두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고, 동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함은 그 뜻을 살펴서 들이면 허용되지 않는바가 없기 때문이다. 동의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情)에 어긋나지 않고,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리(理)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렇게 함으로서 리(理)와 정(情)에 어긋나지 않게 되고 그래서 화쟁의 논리가 설득력이 있으면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기 때문에 화쟁의 방법으로서 화쟁하는 사람의 언어적 표현의 태도가 중요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동의하고 동의하지 않음의 둘 모두를 떠나서 자유로운 입장에서 화쟁을 해야 화쟁하는 사람이 집착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고 이것이 화쟁의 전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동의하지도 동의하지 않지도 않는게 아니라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一心之源) 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두 번 째로 원효는 ‘경전 내용에 대한 폭 넓은 이해’를 화쟁의 방법으로 강조하고 있다.


쟁론을 일삼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아는 일부 (경전) 내용에 대한 낮은 소견을 갖고 그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진리에 대한 낮고 부분적인 소견에서 벗어나 보다 넓고 깊은 전체적인 이해를 하도록 고쳐주고 인도하는 것이 화쟁의 방법이다.


(사실 이 점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화쟁하는 사람이 가져야할 태도와 배치될 가능성이 클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원효와 켄 윌버의 동일성과 상이성 그리고 상보성에 대하여


5. 화쟁적 통합철학의 전망

앞으로 모든 분야에서 화쟁적 통합철학을 열린 의식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게 되면, 그래서 ‘지도와 영토’<윌버>를 혼동하지 않고, ‘달’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원효>을 혼동하지 않게 되고 궁극의 진리와 관계되는 모든 언어적 표현들을 일심(一心)의 근원으로 돌아가서, 일미(一味)의 법해(法海)로 돌아가서 보게 된다면, 또한 인지(人知)에서 나온 모든 ‘상대적 진리’들을 언어적 집착에서 벗어나 비전논리적으로 보게 된다면, 자연히 서로 저만 옳다고 다툴 필요가 없어지게 되면서 21세기에 신인류는 진정한 화해와 통합의 새 시대를 열어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과학과 인지가 더욱 발달하고 인류의 평균의식이 제 2층 ‘밈'의식인 비전논리수준으로 더 진화되고 제3층 '밈’의 자아초월선단의식 수준의 신인류가 더 많이 출현하게 되면 앞으로 모든 분야에서 보다 온전한 ‘통합지도’가 나오게 되고 그럴수록 ‘지도’의 내용은 보다 더 다양한 스펙트럼의 색깔과 목소리를 내면서도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면서 상생적으로 공존하게 되는 진정한 화회적 통합의 시대가 도래하게 될 것이다.

실로 이 길만이 21세기에 평원화된 과학기술문명의 초고도화로 인하여 영성을 상실한 사이보그로 진화하여 결국 디스토피아적 멸망을 초래하지 않고, 깊이를 회복한 신영성의 시대로 진화하여 유토피아적 고도의 과학 기술문명을 누리는 의식이 진화된 인류로 진화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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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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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곡 12.10.15. 13:47

초록색으로 쓴 것은 제 생각인데, 화쟁하는 사람이 어떤 견해에도 집착함이 없는 가운데, '무엇이 옳은 견해인가?'를 단정에서 벗어나 당사자들이 스스로 찾아가도록 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이해관계나 견해가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신뢰가 어떻게 이루어질까 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된다.


이남곡 12.10.15. 17:02

리(理)와 정(情)을 함께 생각하는 것이 화쟁의 묘라고 생각된다. 이중부정, 이중긍정, 비연비불연 등이 제삼자적 입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진리추구와 결합할 때 생명력을 갖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정(情)을 잃지 않아야 화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원효는 누누히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매봉 12.10.17. 23:02

100번은 읽고나서 다시 돌아온 외팔이처럼 질문을 삼가 드리...어안이 벙벙,놀람,흥분 입이 꽉 막혀 벙어리-묵언 2년 수행을 할까? 말을 하다보면 시행착오를 거듭 거듭 할 수록 달인의 경지의 문턱...건강!!!!!

매봉 12.11.01. 00:18

소통과 연대/암환자들을 치료하는 묘방으로 ....스크랩해갑니다.사내 대장부 하늘이 무 너져도 청산이 靑靑(Ever-Gree...n) 박영석(히말라야 14좌 등반 성공후 그곳에 묻힘 즐겁게 갔으리라 민습니다 영원한 미이라 아니 無無.武舞務務!!!!!!!!!

2019/06/13

6/27 오후4시, 다른백년 창립 3주년 기념회 – 다른백년



6/27 오후4시, 다른백년 창립 3주년 기념회 – 다른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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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7 오후4시, 다른백년 창립 3주년 기념회
작성자
thetomorrow
작성일
2019-06-13 14:43
조회
49
오는 27일 오후 4시, 하자센터 다목적홀 999클럽(영등포구 영신로 200,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에서 사단법인 다른백년 창립 3주년을 맞이하여 기념회가 열립니다.

이번 행사는 다른백년 기획칼럼 중 5명의 필진이 참여하여 TED형식의 발표를 하며, 이어 조성환/이병한의 개벽이야기, "왜 다시 개벽인가?"란 주제로 토크쇼가 진행됩니다. 마지막으로 10여명의 젊은 청년들이 브라질 삼바리듬에 맞춰 큰북, 작은북 등 여러가지 악기를 사용하는 "브라질 바투카다 공연"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래 이미지에서는 행사 식순과 세부 프로그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행사 이후 뒷풀이도 예정되어 있습니다.

꼭 참석하셔서 축하해주시고 앞으로 다른 백년을 위해 걸어갈 다른백년에 격려와 응원 부탁드립니다.

곡물자급률은 ‘세계 최하위’…농약 사용량은 ‘선진국의 10배’ - 농민신문



곡물자급률은 ‘세계 최하위’…농약 사용량은 ‘선진국의 10배’ - 농민신문




곡물자급률은 ‘세계 최하위’…농약 사용량은 ‘선진국의 10배’
입력 : 2019-06-12




통계로 본 세계 속 한국 농업의 현주소

최근 3개년 곡물자급률 23% 식량안보 여전히 ‘빨간불’

비료 사용량도 세계 최고 수준 국민의 농업가치 기대 무색

농축산물 무역적자규모 181억달러로 세계 6위에

농업보조금 비율 6.7%로 OECD 평균보다도 낮아



‘곡물자급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 ‘농약을 선진국보다 10배 가까이 많이 쓰는 나라’ ‘농축산물 무역수지 적자규모가 세계에서 여섯번째로 큰 나라’….

통계로 본 세계 속 한국 농업의 현주소는 암울하다. 곡물자급률은 세계 최하위 수준으로 식량안보에 빨간불이 켜진 지 오래다. 농업의 공익적 기능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높아지고 있지만, 농약과 비료 사용량은 주요 선진국보다 월등히 많다. 또 우리나라는 만성적인 농축산물 무역적자국으로 집계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2004년 칠레와 처음으로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고 나서 15년간 57개국과 FTA를 체결하며 농축산물시장의 빗장을 열어젖힌 한국 농업의 우울한 성적표다.



◆곡물자급률=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산하 농산물시장정보시스템(AMIS)의 데이터베이스 자료를 토대로 산출한 우리나라의 곡물자급률은 최근 3개년(2015~2017년) 평균 23%에 그쳤다. 세계 꼴찌 수준이다. 가축이 먹는 사료용 곡물을 포함해 우리나라에서 소비되는 곡물의 77%가 외국산이라는 뜻이다.

반면 대부분의 국가들은 자국에서 소비되는 곡물을 자국에서 생산하며 식량안보를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 전세계 평균 곡물자급률은 101.5%에 이르렀다. 특히 호주의 곡물자급률이 289.6%로 가장 높았다. 캐나다는 177.8%, 미국은 125.2%로 북미지역에서도 높은 수준의 곡물자급률을 기록했다.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의 곡물자급률은 27.2%로 세계 평균에 훨씬 미치지 못했지만 우리나라보다는 높았다.

◆농약·비료 사용량=농경연이 FAO 자료를 바탕으로 분석한 우리나라의 1㏊당 농약 사용량은 2016년 기준 11.8㎏에 달했다. 호주(1.1㎏)·캐나다(1.6㎏)와 비교하면 농약을 10배 가까이 더 쓰는 것이다. 세계 최대의 농업생산국으로 꼽히는 미국은 2.6㎏에 그쳤다. 영국(3.2㎏)·프랑스(3.7kg) 등도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중시하는 나라답게 우리보다 농약을 훨씬 덜 쓰고 있다.

비료 사용량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1㏊당 비료 사용량은 268㎏으로 나타났다. 캐나다(79.2㎏)의 3.4배, 미국(136.3㎏)의 2배에 달하는 수치다. 자연경관 보전이나 생태계 보전 등 농업이 창출하는 공익적 가치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한국 농업의 실상은 국민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농축산물 무역수지=우리나라는 농축산물 무역적자가 세계에서 여섯번째 로 컸다. 농경연이 유엔(UN·국제연합)의 세관통계 자료인 유엔 컴트레이드(UN Comtrade)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 2017년 기준 우리나라의 농축산물 무역수지 적자규모는 181억300만달러로 집계됐다. 동시다발적인 FTA 체결에 따라 농축산물 수입액이 매년 최고치를 경신하면서 만성적인 농축산물 무역적자국이 된 것이다.

세계적인 무역적자국으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중국 등 동아시아 3개국이 모두 이름을 올렸다. 일본의 농축산물 무역적자는 532억6900만달러, 중국은 468억9200만달러로 각각 1·2위를 차지했다. 이어 3위는 오랜 내전과 전쟁에 시달려온 레바논(417억5200만달러), 4위는 영국(332억5500만달러), 5위는 사막지대에 있는 사우디아라비아(191억5000만달러)였다.

반면 농축산물 무역으로 가장 많은 흑자를 본 나라는 브라질(691억4100만달러)이었다. 다음으로 네덜란드(314억7100만달러)·아르헨티나(301억5700만달러)·태국(182억6800만달러)·뉴질랜드(176억8000만달러)가 뒤를 이었다.

◆농업보조금=농업총생산액 대비 농업보조금 비율도 선진국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농업보조금은 2017년 기준 28억9800만달러로 농업총생산액 429억8800만달러 대비 6.7%에 불과했다.

농업보조금을 산정하는 방식은 나라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농경연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데이터베이스 자료를 바탕으로 산출한 통계에 따르면 대다수 선진국은 우리보다 정부가 지출하는 농업보조금 비중이 컸다. OECD 평균은 10.6%였고, 유럽연합(EU)은 이보다 더 높은 17.1%에 달했다. EU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강화된 농업 지원정책을 펼치는 스위스는 41.3%로 우리보다 6배 이상 높았다.

임정빈 서울대학교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선진국에선 농업보조금을 단순히 농가소득 보전이라는 측면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면서 “우리나라에서도 공익형 직불제로의 개편이 한창 진행 중인만큼 농업보조금을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확산해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할 수 있는 중요한 정책 수단’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함규원 기자 one@nongmin.com


함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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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장기전… 현재를 충실하게 살수록 기억은 오래 간다”



“기억은 장기전… 현재를 충실하게 살수록 기억은 오래 간다”
“기억은 장기전… 현재를 충실하게 살수록 기억은 오래 간다”


강윤주 기자

2019.06.12 17:38


 세계적 구술사가인 이탈리아 알렉산드로 포르텔리 교수 인터뷰

이탈리아의 세계적 구술사가인 알렉산드로 포르텔리 교수를 지난 3일 서울 중앙대 근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박제된 기록보다 살아 있는 기억이 더 진실에 다가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홍윤기 인턴기자

기록은 힘 있는 자들의 것이다. 역사는 기층 민중의 이야기를 제대로 조명하지 않는다. 그 빈자리를 메우는 것이 구술사(口述史)의 역할이다. 구술사를 쓴다는 것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아서, 혹은 주류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해서 버려지거나 사라진 기억을 역사 담론의 장으로 끄집어내는 작업이다. 한국에선 1980년대 구술사 연구가 본격화한 덕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와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 제주 4ㆍ3 항쟁 같은 과거사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알렉산드로 포르텔리(77) 이탈리아 로마 라 사피엔자대 교수는 세계적 구술사가다. 그는 노동자 계층의 말과 노래에서 터져 나오는 진실의 힘을 믿었다. 1940년대 이탈리아 공권력에 의한 노동자 사망 사건, 독일 나치군의 학살 등을 구술사 연구로 재조명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묻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과거의 사건이 지금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를 해석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내러티브 연구로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한국구술사학회 창립 10주년을 맞아 중앙대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참석 차 방한한 포르텔리 교수를 만났다. -구술사 연구에선 ‘사실 그 자체’보다 ‘해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무슨 의미인가.


“1930년 구술사 연구가 미국에서 처음 시작된 이후 구술은 역사 기록의 빈틈을 채워주는 보완재로 인식됐다. 구술하는 사람의 기억은 늘 역사 기록과 비교됐다. 기록된 사실과 부합하지 않으면 기억의 오류라고 단정하고 폐기해 버렸다. 기억을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진실과 멀어지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왜 다르게 기억하는지를 알아내야 진실의 퍼즐을 맞춰 나갈 수 있다. 1910년 미국 앨라배마주 농장 노동자로 혹사당한 90세의 흑인여성을 1990년대에 인터뷰했는데, 그는 2시간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80년의 세월이 흐르고도 백인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기억은 사건 자체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세계적 구술사가인 알렉산드로 포르텔리 교수가 지난 3일 서울 중앙대 근처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는 박제된 기록보다 살아 있는 기억이 더 진실에 다가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홍윤기 인턴기자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은 기억은 불완전하다고 배척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을 일본 정부가 폄하하는 논리다.


“기억은 대부분 사실과 근접하다. 그런데도 기억을 못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연도나 지명 같은 사소한 오류를 문제 삼는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기억이 아닌 문헌이나 사료는 과연 100% 믿을 수 있는 것이냐고 말이다. 기록 역시 당대의 정치 상황과 개인의 자의적 해석이 곁들여진 결과물이다. 동유럽의 구술사 연구자들은 “부르주아 관점에서 작성된 과거 기록은 신뢰할 수 없다”며 인정하지 않기도 했다. 독일 나치 시대나 제국주의 식민지 시절 작성된 경찰 보고서는 누가 기록했는지조차 불분명하다. 반면 구술은 한 개인의 경험 그 자체다. 누가 말했는지 화자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더 신뢰할 수 있다.”

-한국에선 5ㆍ18 민주화 운동을 비롯한 공인된 역사를 부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도 비슷한 일이 수십 년째 벌어지고 있다. 이탈리아의 현 체제는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에 대항하면서 출범했다. ‘반파시스트’는 건국 이념이고 공식 역사다. 그런데도 25년째 집권하고 있는 우익 정권은 반파시스트 운동을 이끈 좌파 성향의 저항군을 끊임없이 흠집 내는 등 역사 흔들기를 멈추지 않는다. 정치인들의 발언에 대중매체의 보도가 합세해 ‘저항 서사’의 신뢰성을 떨어트리고 있다. 잠깐 들여다 봐도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지 알 수 있지만, 비공식 서사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타고 급속도로 퍼진다. 정공법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역사 교육을 강화하는 동시에 공식 서사에 대해 지속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결국 기억은 장기전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경험한 사건의 당사자들은 세월과 함께 사라진다.


“당사자는 사라질지 모르지만 기억은 세대를 통해 계승된다. 남은 자들이 할 일은 생존자들을 만나고 역사를 겪은 사람들을 찾아내 ‘기억에 대한 기억’을 발굴해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선 나치 시절을 겪은 생존자들의 손자, 손녀를 인터뷰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트라우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조부모들, 그들로 인해 힘들어한 부모들을 지켜 본 3세대에도 기억과 상처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사실’을 캐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왜 우리가 지금까지 그 사건을 묻고 있는지’ ‘누가 그 기억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지’에 대해 더 풍부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털고 미래로 가자는 사람들도 있다.



“기억은 숨쉬는 것과 같다. 내가 숨을 쉴지 말지를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기억을 할지 말지도 선택할 수 없다. 아픈 기억을 잊으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기억은 선별할 수 없다. 공기를 깨끗하게 만들면 숨을 조금 더 잘 쉴 수 있는 것처럼 기억을 더 잘 기억하는 방법도 있다. ‘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50년 뒤에 2019년의 기억을 묻는다고 치자. 별 생각 없이 수동적으로 살았다면 기억할 게 없을 것이다. 반면 나와 가족,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참여한다면, 훗날 당신의 기억은 훨씬 더욱 풍부하고 생생해질 것이다. 기억은 과거에 대한 지속적인 재해석이다. 오래도록 기억하거나 기억되고 싶다면 현재의 세계를 외면하지 말라.”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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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쿠르 (Parkour)는 야마카시의 멤버 다비드 벨 (David Belle)에 의해 창시된 이동 기술로 프랑스의 남부 도시 리스(Lisses)가 발생지다. A지점에서 B지점까지 맨몸으로 자연(산 등), 도시나 시골의 건물이나 다리, 벽 등의 지형 및 사물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여 이동하는 것을 일컫는다. 모든 동작은 효율성에 집중하여야 하며, 경쟁 반대와 영속성에 초점을 맞춘다. 영어권 명칭으로 프리러닝이 있다.

기존의 스포츠가 기준, 규칙, 점수, 경쟁, 대회, 형식에 의해 비교, 평가, 판단의 결과중심적 활동이라면 파쿠르는 기준, 규칙, 형태를 거부한다. 오히려 무형식을 띔으로써 그 어떤 운동보다도 자유롭고, 수련자 모두가 각자 고유한 자기자신의 길을 추구할 수 있는 확장성을 지니고 있다. 파쿠르는 주변환경과 몸, 정신 사이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유로운 움직임을 수련하며, 이를 통해서 '몸', '정신', '환경'에 대해 구분 짓고 그 사이에 기능, 역할, 경계를 만들었던 근대성을 극복하고 하나로 일치시키는 경험을 중시한다.


목차
1어원
2역사
2.1프랑스와의 관계
2.2쇼타임(Showtime)
2.3도약!
2.4한국의 파쿠르
3파쿠르의 모험놀이 및 위험감수 교육으로서 가치
3.1파쿠르의 움직임
4파쿠르가 등장하는 작품
4.1영화
4.2게임
5함께 보기
어원[편집]

파쿠르(Parkour)는 불어 일반명사 ‘Parcours’에서 파생되었으며 길, 코스, 여정이라는 뜻이다. 동양의 한자권으로 표현하자면 ‘도(道)’와 일맥상통하는 의미. 1998년, 데이비드 벨의 친구 휴버트 쿤드(Hubert kounde)는 가운데 'c'를 'k'로 대체하고 뒤에 's' 묵음을 삭제하여 Parkour라는 명칭을 데이비드 벨에게 제안했다.

실제로 파쿠르는 수련자들이 주변환경, 지형지물들과 자유롭게 상호작용하면서 자기 자신의 고유한 길을 개척하는 움직임의 예술(L’art du deplacement)이다. 그 과정에서 자유, 강인함, 도전, 모험, 용기, 이타심, 한계극복, 불굴의 의지, 자존감, 두려움, 확신, 위험감수, 겸손, 놀이, 행복, 상상력, 창조, 자유의지, 공감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삶으로 구체화된다. 즉, 파쿠르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기 자신만의 길을 만드는 삶의 태도이자 철저한 실천에 기반한 움직임 훈련이다.
역사[편집]

파쿠르가 시작된 정확한 시점을 찾아내는 것을 쉽지 않다. 사실상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연습하는 파쿠르와 같이 애매모호하고 정의하기 힘든 것들은 분류하기가 거의 불가능 하다. 파쿠르는 명칭만해도 여러 언어로 여러가지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몇 개의 예를 들자면 '파쿠르(Le Parkour)', '움직임의 기예(the Art of Movement, L’Art du Deplacement)' 그리고 '프리러닝(Freerunning)'이 있다. 만약 이 중 한 가지로 명칭을 정한다 해도, 그 명칭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말하기 어려워진다 – 이 것은 운동인가? 예술인가? 혹은 철학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또는 수련법이라고 말하는 게 나을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

솔직히, 파쿠르의 역사는 의견이 분분하고 정말 많은 작업이 요구된다 - 그냥 창시자에게 가서 물어볼 수도 없다. 파쿠르라는 이 대단한 움직임은 2세대 밖에 없는 소가족의 족보와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파쿠르는 수 년간, 수 세기, 심지어 수 천년 동안 자신의 성장에 영향을 주며 키워준 양부모님들이 있다. 파쿠르는 여러 근원에서 나왔고, 모든 곳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수백 개의 다른 방식으로 진화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파쿠르의 시초는 오로지 신만이 알기 때문에 파쿠르의 시초부터 시작하지는 않겠다. 파쿠르의 끝에서 시작할 수도 없다, 파쿠르가 끝나기까지 아직 멀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작할 수 있는 최선은 시초와 끝 사이 중간의 어느 지점, 프랑스의 어느 작은 동네인 것 같다.


프랑스와의 관계[편집]

파리의 북쪽에는 사르셀(Sarcelles), 남쪽에는 에브리(Evry)와 리스(Lisses)라는 조용한 근교도시들이 있다. 파리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수백 개의 도시들과 별다르지 않은 곳이겠지만, 이 도시들을 특별하게 만드는 작은 사실이 있다: 이 곳은 1980년대 말, 움직임의 예술(l’Art du Deplacement)라고 불리는 것을 창시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들로 알려져 있는 아홉 명의 청년들의 고향이다. 이 청년들 사이에는, 트레이닝을 초기에 시작하여 파쿠르의 창시자로 알려진 얀 노트라(Yann Hnautra)와 데이비드 벨(David Belle)이 있었다. 1997년, 이 죽마고우들은 ‘야마카시(Yamakasi)’라고불리는 그룹은 만들었으며, 야마카시는 아프리카 링갈라어로 ‘강한 사람, 강한 정신’을 뜻한다. 야마카시 그룹이 도시 농촌 환경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볼 수 있게 영감을 준 사람들 중 한 명은 데이비드 벨의 아버지, 레이몽 벨(Raymond Belle)이다. 사실상 ‘파쿠르’라는 용어는 레이몽 벨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레이몽 벨은 아들에게 장애물 코스(the parcours du combattant)를 창시해 프랑스의 체육 교육 개발, 특히 군인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조르쥬 에베르(Georges Hebert)의 군사 훈련 방식을알려주었다. Parcours는 ‘길, 여정, 코스(course)’를 뜻하며 데이비드와 친구 휴버트 콘드(Hubert Kounde)는 ‘파쿠르(Parkour)’이라는 어구로 변경하여사용하기로 한다.

레이몽 벨은 에베르의 자연적 방법으로 프랑스 군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에베르의 방법은 자연. 특히 아프리카 원시인들이 사용하는 체력 훈련 방법에서 영감을 받았고, 이런 점들은 현시대 파쿠르 훈련에서도 아직 발견할 수 있다. 파쿠르 훈련자들은 몸을 기계적으로 접근하여 분절시키는 피트니스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일부의 근육만 인식하여 사용하는 게 아닌, 온 몸을 전체적으로 사용하는 타고난 자연스러운 움직임의 방법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달성하기 어려운 ‘움직임의 흐름의 상태(flow state)’를 말한다.

레이몽 벨은 9명의 야마카시 그룹에게 조르쥬 에베르의 자연훈련법을 소개해준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아들 데이비드 벨에게 파쿠르의 철학이 되는 근원을 심어주었다. 파쿠르가 창시되는 시기에 데이비드 벨과 함께 훈련한 세바스티앙 푸캉(Sebastien Foucan)은 레이몽 벨이 그 둘에게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전념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격려해주었다고 한다.

데이비드 벨이 파쿠르의 지속적인 발전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긴 했지만, 세바스티앙 푸캉(Sebastian Foucan), 스테판 비그록스(Stephane Vigroux), 얀 노트라(Yann Hnautra), 데이비드 말고뉴(David Malgogne), 차우 벨 딘(Chau Belle-Dinh) 그리고 프레드릭 노트라(Frederic Hnautra)를 포함한 움직임의 예술을 구체화시켜 발전시켰던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모든 사람들은 움직임의 예술 초기단계에 많은 기여를 했다. 예를 들어 스테판 비그록스는 Saut de Chat(영어로는 Kong Vault, 콩볼트로 알려져 있다)를개발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얀 노트라는 훈련 방법론과 엄격한 규율을 그룹에 가져오는 것을 거의 도맡았다.

20년 사이에 세계적인 움직임이 된 파쿠르는 야마카시 그룹이 어린 시절에 하던 놀이들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기술을 개발하는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이들이 무료함을 해소하기 위한 놀이들이 그들이 십대 청소년들이 되었을 때 그들의 목표로 자리잡게 된다. 이소룡의 도가 사상, 성룡 영화에서 나오는 곡예, 혹은 심지어 파리 야만인의 샤머니즘(Don Jean Haberey) 등 다양한 정보원에서 목표와 영감을 얻게 된다. 하지만 핵심은, 파쿠르는 어린 시절에 하는 게임이 간단하게 창시자들과 같이 ‘성숙’해진 것이 아니다. 파쿠르는 고대문화와 오래된 분야에 있던 신체학과 기능에 관련되어있다.

야마카시 그룹 중 한 명의 말에 의하면, ‘큰 점프’는 15살 때 시작되었다. 그들은 뛰어넘기, 도약하기, 올라가기, 구르기와 같은 기본적인 움직임들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도시 환경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방식으로 주변 장애물들을 극복하여 움직이면서 그들은 스스로 운동 전문가가 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확실히 이런 ‘큰 점프’들이 세계의 미디어와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경험 많은 훈련자들이 곧 파쿠르의 화려한 부분을 보여주는 쪽으로 진로를 설계했다. 특히 데이비드 벨, 스테판비그록스와 얀 노트라 같은 사람들의 능력과 힘을 봤을 때, 파쿠르는 시각적으로 매우 탁월한 운동이다. 사람들이 파쿠르의 겉모습만 보고 흥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파쿠르의 창시자들이 명성을 얻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파쿠르에가담하고 배우기 시작했고,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파쿠르를 돈을 만드는 기계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쇼타임(Showtime)[편집]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어 파쿠르의 첫 번째 분열이 발생하게 되었다 : 이런 기회를 받아들인 사람들과 데이비드 벨 같이 스스로의 길을 계속걸어나가기로 결정한 사람들 – 참고할 수 있는 이 분열의 유명한 예시는 야마카시 그룹 이름을 사용한 뤽 베송(Luc Besson)의 영화 야마카시(Yamakasi: Les samouraïs des temps modernes ,2001)가 있다. 뤽 베송(Luc Besson)의 영화가 얻은 관심은 올바른 파쿠르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다: 프랑스에서 2명이 영화를 모방하다 죽었고, 대중들의 커지는 관심은 파쿠르의 참된 예술성과 달랐다. 세바스티앙 푸캉은 이 영화가 개봉 후 많은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의 태도를 이렇게표현했다: "야마카시를 본 후엔 (파쿠르를 하는 게 아닌) 다른 부류의 사람 생긴다. 그 사람들은 그냥 '영화에서 한 것처럼 난 뛰고, 뛰고, 또뛴다.' 영화에서처럼 난 지붕 위에 올라간다.”

분열이 일어난 이후, 데이비드 벨(David Belle), 스테판 비그록스(Stephane Vigroux), 카즈마(Kazuma), 요한 비그록스(Johann Vigroux)를 포함한초기 훈련자들은 스스로를 칭하는 용어로 트레이서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트레이서(Traceur)는 ‘총알’을 뜻하고, 당시 벨이 어느 환경에서도 정확하고, 효율적이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달성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이 단어를 고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파쿠르를 새로시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회의감을 느꼈다. 진실된 관심을 가지고 온 사람들은 당연히 지속적으로 환영하였지만, 스펙타클한 것을 찾아자극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겐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 야마카시가 미친 부정적인 영향이 무엇이었던 간에, 이 영화는 움직임의 예술(l’art du deplacement)이 대중의 관심을 받게해 주었다. 움직임의 예술은 같은 해에 BBC 광고를 통해 영국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데이비드 벨이 ‘러시 아워(Rush Hour)’ 에서 런던의 인파로 꽉 차있는 길들을 피해 지붕 위를 통해 집으로 가는 길을 찾아가는 혁신적인 회사원 역할을 맡았다. 물론 그 이후로 데이비드 벨은 다수의 상업적인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그의 굉장한 실력을 바탕으로 뤽 베송(Luc Besson)의 영화 13구역(District 13)에서 첫 주연을맡는 것으로 시작해, 세계적인 블록버스터 영화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파쿠르는 세계를 무대로 삼게 되었고, 성장이 시작되었다.
도약![편집]

파쿠르는 대중매체에 보여졌지만, 파쿠르는 아직도 설명되지 못하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사람들은 계속 파쿠르를 ‘야마카시’라고 부르고 있었고 잘못된 이해로 가득 차있었다. 하지만 파쿠르는 흥분되는 일이라는 이미지는 벌써 만들어졌었고, 몇몇 사람들은 움직임의 예술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로 조용히 훈련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2003년에 영국 방송 채널4 (Channel 4)에서 상을 받은 획기적인 다큐멘터리 점프 런던(Jump London)는 파쿠르에 대한 정확하고 심도있는 이해를 대중들에게 안겨주게 된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세바스티앙 푸캉과 비그록스 형제가 참여하였으며, 런던의 도시풍경을 배경으로 파쿠르 기술을 보여준다. 요한 비그록스(Johann Vigroux), 제롬 벤 아우즈(Jerome Ben-Aoues), 스테판 비그록스(Stephane Vigroux)와 세바스티앙 푸캉(Seb Foucan)이 파쿠르의 철학적인 면들을 훌륭한 신체적 움직임과 함께 전달하게 되면서 파쿠르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 주는시점이 된다. 마침내 더 많은 대중들에게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이 수련법을 알게 해주는 기회가 온 것이다.

반응은 좋았다. ‘집단(Clans)’나 ‘무리(Crews)’로도 알려져 있는 여러 훈련자들이 많은 곳에서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했고 ‘프리러닝’이란 용어는 천천히 많이 쓰이는 어휘가 되기 시작했다. 점프런던의 촬영지라는 점이 상당한 역할을 발휘해 영국의 수도는 빠르고 활발하게 프리러닝 집단이 시작되는 지역이 된다. 큰 성공을 가져다 준 다큐멘터리의 후속작으로, 점프 브리튼(Jump Britain)는 2005년 1월에 방영되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파쿠르와 세상 사이에있는 경계를 허무는 계기가 되어 파쿠르는 위치를 확고하게 잡게 되었고, 현대를 대표하는 새로운 스포츠/예술로 인정받게 되었다. 파쿠르는 정말 말그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다.


움직임의 재탄생

우리가 본대로 파쿠르는 쉽게 분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가피한 것일 수도 있지만, 커뮤니티가 커지고 파쿠르 훈련자수가 증가하기시작하면서, 파쿠르를 정의하고 분류하기를 시도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움직임과 개개인 표현의 자유로움을 격려하는 예술로써 당연히 어려운 일이다. 훈련자들이 주관적으로 파쿠르를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는 동시에 파쿠르를 구조가 있는 표준화, 시스템으로 공식화하는 것 말이다. 파쿠르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데이비드 벨이 간단하고 명확한 정의를 하지 않겠다고 한 사실 때문에 이 문제는 더욱더 복잡해졌다. 논쟁은 불타올랐고 다른 관점을 가진 분쟁이 뒤따랐다.

무엇이 파쿠르를 만들고, 또 무엇이 파쿠르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지가 이런 논쟁의 중심이다. 공중기는 파쿠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데이비드 벨이 옹호하는 효율성에 관련된 핵심철학에 반대되는 것일까? 파쿠르는 종합격투기를 배우는 것처럼 순수하게 실용적인 수련법일까, 아니면 단순히 파쿠르를 하면 생길 수 밖에 없는 재미와 해방감을 느끼기 위해서만 해도 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공중기를 포함시켜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오늘날 파쿠르는 사람들을 한계와 틀에 박힌 사고방식에서부터 해방 시켜주는 용어라고 강조하고 싶다. 이것은 그냥 용어일 뿐이다. 의사소통을 할 때 전문용어의 사용이 요구될 때가 있지만, 어떤것을 실제로 전달하는 것이 이름이나 라벨보다 훨씬 중요하다. 언어는 언어일 뿐이다. 한 사람이 스스로의 움직임을 숙달하는 것, 그리고 파쿠르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한 사람 신체와 정신의 지속적인 성장이 언어보다 중요하다.

2017년, 영국은 파쿠르를 세계 최초로 국가 공식 스포츠로 지정하면서 파쿠르는 리스(Lisses)에서 뿌리를 내렸을 때보다 훨씬 더 성장했고, 올림픽의 국제 체조 연맹(FIG)이 8번째 기계체조 종목으로 공식 채택하면서 진정한 세계적인 스포츠가 되었다. 파쿠르는 새로운 세대가 파쿠르를 익히고 실천해 나가면서 지속적으로 재탄생되고 있다. 실제로 새로운 개개인이 파쿠르를 시작하면 이 수련법을 완전히 새롭고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파쿠르는 원래 예측불가하고, 모호하고, 정확히 정의하기 어려우며,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극도로 어렵다. 파쿠르는 줄곧 발전하고 있고, 파쿠르는 항상 건강하고 자연적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하길 바란다.

파쿠르 그 자체는 태연하게 아무 말 없이 있는 그대로 있을 뿐이다. 단지 찾아오는 손님들에 의해, 인간이 그리는 무늬에 의해 덧대여질 뿐이다. 교육으로서의 파쿠르, 동호인들의 파쿠르, 스포츠로서의 파쿠르, 예술로서의 파쿠르, 미디어로서의 파쿠르는 각각의 붓을 들어 파쿠르에 색깔을 칠한다. 그만큼 파쿠르에는 무한한 잠재성과 자유로움이 있다. 이것이 바로 파쿠르가 세상에 빠르게 전파된 원동력이다.

한국의 파쿠르[편집]

국내에는 2003년 리플리의 '믿거나 말거나' 방송과 영화 '야마카시'를 통해 처음 소개되었다. 이와 동시에 청소년 및 젊은 세대층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Daum카페 야마카시 코리아(前 한국 야마카시 동호회)를 중심으로 서울, 인천, 대전, 대구, 부산 등 전국 각지의 대도시에서 동호회(커뮤니티) 활동 및 길거리 모임이 이루어지다가 2010년, 국내 파쿠르 1세대이자 아시아 최초, 국제공인 파쿠르 코치 김지호에 의해 네이버 카페 '한국 파쿠르 연맹' 동호회로 통합된다. 이어서 그는 2013년, 동호회 기반의 파쿠르를 국내 최초로 사업화했으며, 파쿠르 제너레이션즈 코리아 설립과 동시에 영국의 선진 파쿠르 교육 시스템을 처음 도입하고, 지도자를 양성한다. 현재 국내에는 김지호 코치를 비롯한 3명의 ADAPT Level 2 정식 코치가 파쿠르 발전과 보급을 위해 활동 중이다.
파쿠르의 모험놀이 및 위험감수 교육으로서 가치[편집]

파쿠르는 현재 대한민국 교육이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놀이와 체육 수업의 부재, 신체활동 감소, 건강 및 비만 문제, 안전과 위험 문제, 자존감 감소 및 우울증 증가, 스마트폰 및 게임 중독 등)을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움직임의 예술(L'art du deplacement)로서 유럽,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대안적 생활체육 및 스포츠(Alternative physical education)로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안전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인하여 학교 운동장이 폐쇄될 정도로 안전 근본주의가 만연한 대한민국의 교육 현장에서 어린이 및 청소년들이 경험해야할 최소한의 위험마저 부정하고, 제거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사실 헬렌켈러(Helen Keller)의 명언처럼, 안전은 인간의 관념 속에 존재할 뿐, 환상이다. 실제 세상(자연)은 위험의 연속이다. 위험은 피하면 피할수록 위험해진다. 실제로 안전 관련 제도와 규제가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안전사고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자기 스스로 제어해야할 최소한의 위험조차 제도와 시스템에 맡기는 타율적인 태도는 결국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온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이 말하는 '위험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자라나는 다음 세대의 아이들이 위험을 스스로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의 '에밀(Emile)'에서 강조하는 자연주의, 위험 감수(Risk-taking) 교육은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 아이들의 생존의 질(Quality)과 양(Quantity)을 증가시키는데 중요한 원리가 될 것이다.

파쿠르는 위험을 크게 두가지로 분류하는데 인간이 통제하고 예측할 수 있는 영역의 위험을 'Risk', 반대로 인간이 통제 및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의 영역을 'Danger'로 구분한다. 많은 사람들이 파쿠르를 무모한 행위(Danger-taking)로 생각하지만 실제 파쿠르 교육은 수용할 수 있는 위험 감수(Risk-taking)이다. 파쿠르는 수용할 수 있는 위험감수를 통해서 실제 위험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스스로 극복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신체적, 정신적 훈련이다.
파쿠르의 움직임[편집]

파쿠르는 기능적인 힘과 체력, 균형감각, 공간인식, 민첩성, 협응력, 정밀함, 통제와 창의적인 상상력 등 움직임에 필요한 근본적인 속성들을 개발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파쿠르는 연령, 성별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열려있으며, 자기수양을 통해서 용기를 얻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육체와 정신의 한계를 극복해낼 수 있게 도와준다. 또한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자신의 신체와 마음이 완벽하게 기능적으로, 효과적으로 자유롭게 해방될 수 있도록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파쿠르 훈련의 목표는 자기수양을 통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 자존감, 확신, 결단력을 얻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훈련자는 주변환경과 타인에 대한 존중, 겸손, 자기 표현, 공동체 의식, 놀이의 중요성, 탐구와 안전을 배울 수 있다.

파쿠르는 인간의 고유한 움직임 - ‘달리기, 뛰어넘기, 매달리기, 통과하기, 올라가기, 기어가기, 균형잡기, 구르기’ 등을 바탕으로 주변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수백가지 기술 및 동작들이 파생된다.

고유한 움직임이란, 인위적으로 학습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수행할 수 있는 풀뿌리 움직임을 말한다. 예를 들어 어린시절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던 기억들을 되살려 보면 특별한 체육 프로그램, 교사가 없어도 주변 지형 지물들을 극복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진화와 함께 생존의 과정 속에서 얻어진 고유한 인간의 움직임이다. 파쿠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하여 지식과 이론으로 구체화된 움직임 수련이다.

파쿠르의 풀뿌리 움직임은 다음 8가지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어가기(Crawling) : 다양한 네발 움직임과 기어가는 동작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난 30년 동안 파쿠르 수련자들의 근력, 지구력, 가동성과 탄력 개발에 많은 영향을 준 조르쥬 에베르(Georges Hébert)의 자연훈련법(Methode Naturelle)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뛰어넘기/통과하기(Vaulting/Passing) : 볼트는 올림픽 장애물 경기 ‘허들넘기’ 처럼 허리 높이의 장애물을 빠르게 통과하는 이동기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르기(Rolling) : 낙법은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 같은 야외환경에서 안전하게 충격을 통제할 수 있는 파쿠르 스타일의 실용적인 낙법 및 구르기 기술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도약하기(Jumping) : 충격을 안정적으로 분산시킬 수 있는 착지 기술(Landing), 좁고 얇은 장애물에 정교하게 점프할 수 있는 프리시전 점프(Precision Jump) 등 장애물과 공간 사이를 도약하는 기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올라가기(Climbing) : 키 높이 이상의 높은 벽이나 장애물을 올라가는 기술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매달리기(Swinging) : 철봉과 바(Bar)를 매달리는 기술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균형잡기Balancing) : 얇고 좁은 레일(rail), 난간, 팬스 위에 서서 정확하게 균형 잡는 기술을 배울 수 있습니다.

•기타/창작 움직임(Creative movement) : 장애물을 극복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춤을 추고 표현할 대상으로 접근합니다. 움직임의 예술성과 표현적인 기술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체조, 카포에라, 트릭킹, 아크로바틱 등 다양한 영역에서 영감을 얻어 구성된 동작들입니다.

파쿠르가 등장하는 작품[편집]
영화[편집]
13구역 (en:District 13)
007 카지노 로얄 (2006년 영화) (en:Casino Royale (2006 film))
트레이서(2014년 영화)
13구역:얼티메이텀
브릭 맨션: 통제불능 범죄구역
게임[편집]
미러스 엣지
페르시아의 왕자
어쌔신 크리드
와치 독스 (일부 벽타기 )
다잉 라이트
함께 보기[편집]
프리러닝
야마카시

2019/06/10

Karen Armstrong will make the ‘Case for God’ in Noble Lectures – Harvard Gazette



Karen Armstrong will make the ‘Case for God’ in Noble Lectures – Harvard Gazette

Karen Armstrong will make the ‘Case for God’ in Noble Lectures

DATENovember 8, 2007

Acclaimed author and religious historian Karen Armstrong will present “The Case for God” during the three-day William Belden Noble Lectures at the Memorial Church Nov. 13-15 at 8 p.m. 

Armstrong, the author of some 20 books, including the best-selling “A History of God” and “The Battle for God,” is renowned for her ideas about the similarities between Islam, Judaism, and Christianity, and what unites the three monotheist faiths. She points out that each has in common the image of a single supreme being who was revealed to the Prophet Abraham, each is historically linked to Jerusalem, and each, during the past few years, has seen within it the rise of a rigid and conservative group within their faith that has formed in reaction to the changing modern world.

On Nov. 13, Armstrong will begin the series with her examination of “What Is Truth?”; the following evening (Nov. 14), she will discuss “How Do We Know the Unknowable God?”; and her final lecture (Nov. 15) confronts “God’s Future.” An eminent religious scholar will present a response to each of the lectures.

Among Armstrong’s recent work is a re-writing of her biography of the Prophet Muhammad, newly titled “Muhammad: A Prophet for Our Time.” She said on New York public radio in 2006, that “I have rewritten my biography of the Prophet Muhammad, based on the latest research — he was not a warrior, but he found himself, like many of the Axial Age sages, in a violent society and he eventually brought peace to the region by practicing a daring policy of nonviolence worthy of Gandhi. He stopped the violence and went into Mecca unarmed and forced the Meccans to negotiate with him, accepting terms that his followers thought were disgraceful.” She has just completed work on her latest book, “The Bible: A Biography,” due out in November.

The Noble Lectures were established at Harvard in 1898 and claim an impressive roster of past lecturers including Theodore Roosevelt, Sen. Eugene McCarthy, and Archbishop of Canterbury Robert Runcie. The lectures are free and open to the public. For more information, contact the Memorial Church at (617) 495-5508 or e-mail memorial_church@harvard.edu.

Review: The Bible by Karen Armstrong | Books | The Guardian



Review: The Bible by Karen Armstrong | Books | The Guardian

People of the book
Richard Harries praises Karen Armstrong's study of the origins of Jewish and Christian scriptures, The Bible


Richard Harries

Sun 14 Oct 2007 08.57 AESTFirst published on Sun 14 Oct 2007 08.57 A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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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ible: The Biography
by Karen Armstrong
302pp, Atlantic Books, £14.99

What on earth are we to make of the Bible? Literally a closed book to so many now, and when opened found to be an amazing mixture of the obscure, the horrendous and the sublime. A book that is still used by millions for daily reflection and misused by a good number for political purposes. Karen Armstrong's study, which appears in the series "Books That Shook the World", manages to organise a large amount of complex material in a clear and orderly way. She shows how the highly disparate writings that now compose the Jewish and Christian scriptures came together and examines the very different methods of interpretation used over the centuries. Her book's great strength is the way she unfolds the Jewish and Christian histories of formation and interpretation in parallel with one another.

The two pivotal points for her are the destruction of the temple in the 6th century BCE and the even more devastating destruction of Herod's great temple in 70 CE, followed, some decades later, by the flattening of the whole of Jerusalem. 

These traumatic events resulted in the formation of religious communities no longer so dependent on a physical building but on words written down on scrolls and later collected together in books. The destruction of the second temple resulted not only in the young Christian church, which saw itself as a temple of the Holy Spirit, the locus of the divine presence in the world, but in the gathering of a small group of rabbis in Yavneh, a coastal city southwest of Jerusalem, and later in Galilee. Indeed you feel that Armstrong's heart is with this group of heroic rabbis trying to recreate Judaism after their terrible loss and urging that scripture should always be interpreted as encouraging compassion even when it is against the surface meaning of a particular text.

The stories continue, showing the continuing tension between those who wished to see a historical truth in a text and those who sought what they thought of as its real ethical and mystical meaning through allegory. But as Armstrong shows, an exclusively literal interpretation of the Bible is a recent development. I particularly liked the statement by Calvin, who is so often appealed to by fundamentalists, that the story of creation in Genesis is God adapting a complex, profound truth to our very limited minds and is therefore to be seen as balbative or "baby talk". All interpretations are in any case inseparable from the ideology that is brought to bear, whether it is the conviction that all scripture is about Christ, or the one behind certain forms of the Kabbalah, with its mysterious idea of a divine spark now scattered and implanted in each one of us which has to be reunited with its source.

One of the book's underlying themes is that there is no definitive meaning of a text. Each has been and will be endlessly disputed. William Blake summed it up succinctly: "Both read the Bible day and night, / But thou read'st black where I read white." This has been a great source of embarrassment to Christians but is regarded as something of a strength in Judaism. Indeed there is a wonderful story, which Armstrong cites, of some early rabbis trying to find the true meaning of a text. One of them appeals to heaven for a miracle or divine voice to show them what it is, and the answer comes back that the responsibility for interpretation now lies with them. This cannot be overridden by anything from heaven. As a later rabbi said: "We pay no attention to a heavenly voice." On hearing that he had been overruled, God had the decency to laugh and say: "My children have conquered me."

The second theme is well put, not only by the rabbis of Yavneh but Augustine: "Whoever, therefore, thinks that he understands the divine scriptures or any part of them so that it does not build the double love of God and of our neighbour does not understand it at all. Whoever finds a lesson there useful to the building of charity, even though he has not said what the author may be shown to have intended in that place, has not been deceived."

In the light of that it is strange that space is given to Rabbi Meir Kahane - whose biblical justification of ethnic cleansing led Baruch Goldstein to shoot 29 worshipping Palestinians dead - but not to any of the heroic figures, some of them martyrs, such as Archbishop Oscar Romero, who have been inspired by the Bible to struggle for the most marginalised against the forces of oppression.

Armstrong takes a tough-minded approach to alleged facts, observing for example that "the scholarly consensus is that the story of the exodus is not historical". She doubts whether we can get beyond what the Gospels give us to assemble a historic life of Jesus. Yet sceptical scholars, whether Jewish like Geza Vermes or Christian like JN Sanders, have come up with outlines of Jesus's life and teaching that are very similar.

The book has a helpful glossary, footnotes and index. But I would have liked to see a final chapter that considered how feminists, liberation theologians and literary critics are looking at scripture with new enthusiasm and insights. Also there is the Orthodox Christian east, as well as western Europe and America, to take into account in any full story; and, not least, the way the Bible is now being interpreted and used in a host of developing coun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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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rd Harries of Pentregarth is honorary professor of theology at King's College London. His book The Re-enchantment of Morality: Wisdom for a Troubled World is due to be published by SPCK.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 평화·인권운동가의 내면 평화는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 평화·인권운동가의 내면 평화는

평화·인권운동가의 내면 평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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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철호 2018. 11. 16

평화·인권운동가의 평화와 인권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많이 힘들고 지쳐 보였다. 평화와 인권운동을 오랫동안 했던 친구다. 가족, 일하는 관계, 친구관계, 어느 하나 평화와 먼 상태였다. 간혹 힘들어 보인다고 염려하면, 애써 부인하고 더 열정을 보이던 친구였는데, 이제 ‘자기현실’을 마냥 외면하고 부정할 수 없었다. “너는 평화와 인권 감수성은 큰데, 마주해야 하는 일상은 늘 갈등과 싸움 현장이니 내면은 더 힘들지 않겠냐”고 했더니, 눈물을 쏟았다. ‘평화운동’의 눈물이 아니라, 운동으로 고단해진 ‘자기현실’을 바라보는 눈물이었다.


 누구보다 평화와 인권문제에 예민한 친구라 그냥 넘어갈 일도 늘 그 친구 눈에는 거슬렸고, 가만히 있지 못했다. 연약한 이들이 억울한 아픔을 겪는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던 친구다. 불의가 만들어 내는 복잡한 갈등 실상을 냉철하게 읽어내고 몸을 던지던 친구인데, 정작 자기 삶의 일상에서는 평화를 누리지 못했던 거다. 운동을 위해 절에도 가고 교회도 가지만, 운동을 돕고 지원해주는 고마운 승려와 목사, 신부들이 많지만, 그의 내면, 그의 파괴된 일상에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고 한다.


 소위 평화운동 전문가인 그 친구에게서 사람들은 평화운동 얘기를 들으려 하지, 그것을 일상으로 사는 이의 내면은 오히려 더 깊은 갈등 속에 있을 수 있다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평화와 인권 감수성이 큰 이들은 불의와 소외가 더 예민하게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자주 갈등과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된다. 운동현장에서 만난 많은 이들이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졸업 후, 도시빈민운동에 투신했던 후배가 10년 후 우연히 만난 지하철에서, 그 쪽 일은 말도 꺼내지 말라며 병들고 지쳐있던 모습도 떠올랐다.



» 밝은누리공동체 마을밥상에서 함께 식사를 하는 공동체 사람들.


 <밝은누리>에도 평화와 인권운동을 하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내면이 다른 이들보다 더 큰 갈등 상황에 놓여있었다. 다루는 관념과 운동 의제는 평화와 인권이지만, 일상은 늘 투쟁이기에 그 간극이 만들어 내는 내면의 위기는 스스로도 감지하기 어렵게 깊어진다. <밝은누리>는 그 친구들이 우리 안에서 그런 말과 운동을 반복하지 않고 쉬도록 돕는다. 이들이 애써 억누르고 외면하는 ‘갈등에 빠진 자기내면’을 바라보게 돕는다. 침묵과 쉼이 지속가능한 운동의 토대가 된다. 성찰 없는 운동은 위험하다.
 

놀라운 사실은, 평화와 인권을 위하지만, 정작 현실은 늘 싸움이다 보니, 싸움 없는 평화로운 일상을 오히려 불안해하기도 한다. 정작 관계 속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갈 감수성, 평화롭게 관계 맺을 지혜를 몸이 잃어버린 거다. 평화운동 현장에 함께 하는 것 뿐 아니라, 이들이 겪는 내면의 어려움에도 함께 하는 게 필요하다. 먹고 입고 자고 일하고 노는 더불어 사는 일상생활 속에서 서로 평화를 누리고 증언할 수 있을 때, 생명평화는 더욱 든든히 세워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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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최철호, 밝은누리, 공동체, 평화운동가, 인권운동가, 인권운동, 평화운동, 가족, 친구관계, 열정, 인권감수성, 갈등, 싸움, 현장, 힐링, 도시빈민운동, 온동가, 불안고, 고통, 생명평화, 일상

최철호1991년 생명평화를 증언하는 삶을 살고자 ´밝은누리´ 공동체를 세웠다· 서울 인수동과 강원도 홍천에 마을공동체를 세워 농촌과 도시가 서로 살리는 삶을 산다· 남과 북이 더불어 사는 동북아 생명평화공동체를 앞당겨 살며 기도한다· 청소년 청년 젊은 목사들을 교육하고 함께 동지로 세워져 가는 일을 즐기며 힘쓴다.이메일 : suyuh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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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온 모바일 사이트, 생명모성의 출현



한겨레:온 모바일 사이트, 생명모성의 출현



생명모성의 출현

작성 김반아 시민통신원 | 승인 2019.05.09 14:38:55

생명모성이란 무엇인가?

기도하는 마음 / 거름 되어서 살리고 꽃피우는 마음 / 기다리는 마음 /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유일한 것 / 소통하는 것 / 깊게 느끼는 것 / 모든 것을 품고 키우는 마음 / 편안하고 고요한 근본 생명 그 자체 / 누구나 다 푹 빠지고 싶은 것 / 가슴과 가슴이 만나는 마음 / 눈물 / 판단 없는 사랑 / 기쁨의 물질 / 지극한 정성 / 고통과 아픔의 고향 / 솟아오르는 새싹 / 조화와 조율 / 시인의 마음 / 활짝 열린 가슴 / 근원적인 삶 / 희생 / 쉴 수 있는 곳 / 마음의 고향 / 영원한 만남 / 모든 이의 쉼터 / 건강을 주고 생명을 살리는 것 / 텅 빈 자리 / 나와 네가 함께하는 곳 / 한솥밥 / 내가 먼저 안는 것 / 당신이 나임을 아는 것 / 새롭게 깨어남 / 우주의 동력 / 천국 / 시작과 마침 / 조율 / 내재되어 있는 근원 / 모든 것이 하나임을 아는 것 / 우리가 가고 있는 길 / 다 주고도 또 주고 싶은 마음 / 생명수 / 성소 / 우주의 젖줄기 / 조건 없는 사랑 / 그대 앞에 떨림 / 가장 멀리 가장 가까이 / 대지의 어머니 / 태초의 자궁 / 나의 본적지 / 나의 바탕
--------------


위에 나열된 내용들은 2013년 8월 26, 27일 이틀 동안 제주 조천읍 와산리 조이빌 리조트에서 있었던 생명모성 초동 워크숍에서 20여 명이 모여 생명모성과 관련된 자장을 생성하고 개념을 정리해본 결실이다. 이 워크숍은 ‘생명모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집중적으로 다룬 자리였다.

다시 정리하자면, 생명모성이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존재의 근원성이고, 여성-남성으로 이분화 되기 이전의 성품으로 인간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동물계에서도 볼 수 있는, 잉태해서 보살피고 키우려는 생명의 충동이고 본능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생명모성은 선한 본능으로, 양심 본심의 자태로 드러나며, 정의롭고 진실하고 하늘을 공경하고 대의가 이 땅에 이루기를 염원하는 고차원적인 심성의 기도를 내포하고 있다.

인간의 생명모성은 존재적 기본 성품으로써 생명세계 전체와 조율하고 조화하고 통합을 이루기를 염원하는 최고의 영성이다. 병을 치유하는 힐링의 힘이고, 죽어가는 생명을 되살려내는 기적의 힘이고, 충동적 욕구와 욕망을 자제하고 만사를 함부로 하지 않으며 삼가는 마음, 자식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조국을 위해 나를 바칠 수 있는 부모-열녀-열사의 마음이다. '여성은 약하나 모성은 강하다'라는 말처럼, 생명모성은 미처 자기 안에 있는지 몰랐던 초인적인 힘과 능력을 불러일으키는 마법의 열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이나 사회 곳곳을 살펴보면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는 생명모성의 결핍으로 메마른 속에서 시간과 노력과 인적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리고 생명모성이 무엇이기에 크게 존재하면서 한편으로는 그토록 궁한 것일까?



신기루 같은 생명모성

우리 주위로 눈을 돌려 보자. 생명모성은 우리 가정을 이루는 근본 바탕인데, 한동안 보이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없어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긴 세월 동안 꾸준히 삶 속에 있어 주어야 사랑의 밭이 생기고 그 토양에서 새 생명이 싹트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데,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그 자태가 사라져 버린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점차 삶의 건조함과 무의미함을 느끼면서 시들시들해지는 증상을 보이고, 절망감에 빠져들고 심할 경우는 자살에까지 치닫게 된다. 현재 한국 사회 자살률이 세계 1위라 하니 사회가 이런 병을 앓고 있음이다. 이것의 원인은 무엇이고, 해결책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필자는 생명모성 결핍의 원인을 뿌리영성의 단절에서 찾는다. 뿌리영성과의 단절은 어머니와의 관계 고갈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 개인적으로 어머니와의 관계 회복에서 그 해결책을 찾아왔다.

나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자면, 아들을 기다리는 독자의 가정에 둘째 딸로 태어난 나는 남동생에게 쏠린 어른들의 관심 밖에서 자랐다. 엄마는 직장 때문에 항상 집을 비워 우리 삼남매는 할머니와 식모 손에서 키워졌고, 이런 속에서 나 자신의 존재성과 자존감을 모르고 커 갔다. 엄마는 분명 나를 사랑했겠지만 나는 그 사실을 느끼지 못했고, 나의 감성세계는 닫혀 있었다.

그런 내가 지금 생명모성 일, 인간의 막힌 가슴을 녹이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일이 나 개인의 성장 과정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어린 시절에 어머니는 나를 나무랄 때 종종 "너는 영리한 애가 왜 그러지?"라고 얘기하시곤 했다. 저능아는 아닌데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지를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외부와 통하는 문이 닫힌 채 고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셨던 것이다. 그럴 때 내 가슴은 마비되고 머리 작동은 느려지고 주의는 고착되고 저능아같이 행동했다. 그러다 누군가 관심을 가져주고 대화를 해주면 상황이 나아지기도 했는데, 그런 경우는 별로 없었다.

내 증상은 ‘약 자폐증’(mild autism) 같았다. 나는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에 거리감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그 현상을 이해하고 원인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오랜 세월이 걸린 후에 비로소 약 자폐증에 대해, 그리고 ASD (autistic spetrum disorder)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비슷한 증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러한 발견을 하면서, 그리고 교육철학-감성치유-감성교육-영성교육 분야를 접목하면서 나는 획기적인 접근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개인들이 자신의 약 자폐증을 알아차리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므로, 사회적인 차원에서 그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의식의 전환이 일어날 수 있게 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모성의 배경 이야기이다.

나에게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것은 네 살 때 6.25전쟁 피난 중 일어난 드라마틱한 전인적 체험이었다. 포성이 터지고 한강 다리가 무너지는 난리 속에 우리 식구도 피난길에 올라 충청북도 어느 산골로 들어갔다. 빈 오두막집 한 칸을 발견하고 여섯 식구가 얼마간 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샹그릴라를 만났다. 포성은 더 이상 안 들리고 평화로운 기운이 그득한 고요한 산골짝 안에서 모처럼 어머니는 매일 우리와 함께하셨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집 앞 개천에서 세수를 하고, 물을 길어다 밥을 하고, 낮에는 들에서 나물을 캐고, 밤에는 반짝이는 검은 하늘에서 쏟아질 것같이 많은 별들을 바라보면서 생전 처음으로 나의 고립된 속에서 완전히 나오는 체험을 했다. 땅과 하늘, 산과 들, 그 기운이 나의 기운이고 나를 움직이는 체험이었는데 그러한 체험을 하도록 해준 링크가 엄마의 존재이었다. (엄마가 완전히 내 곁에 있을 때 아버지가 미국가고 안 계신 것은 문제가 안 되었다.)

그때의 생생했던 경험은 나의 몸과 마음을 진동시키면서 깊숙이 파고들어갔고, 나의 감성을 활짝 열어 처음으로 외부세계와 온전히 하나 되는 강렬한 느낌을 갖게 해주었다. 이 체험은 나의 잠재의식 속에 각인되었고, 어린 마음속에 의식의 전환을 일으켰다. 이 세상이 무엇이 가능한 곳인지를 체득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훗날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마다 절대로 좌절하지 않게 해 주었다. 존재의 신비를 체험함으로써 그 느낌을 알 수 있었고, 그 체험을 또 다시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고, 그것을 내 삶 속에 재창조하도록 정진하게 했다.



생명모성의 길

그러한 전인적 체험의 결과로 나는 평생에 걸쳐 '통합된 진리'를 탐구하게 되었다. 이 세상이란 어떤 곳인가? 여기서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학문 속에서 이런저런 분야를 답사하며 동양철학, 서양철학, 영성학 등을 공부하고 교육철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기존의 학문 안에서는 내가 찾고 있는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가르치는 길로 들어서는 대신, 방향을 돌려 내면치유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나’라는 도구를 잘 갖추고 잘 쓰도록 하자. 분절되고 막혀 있고 성장이 중단된 내 내면의 상처 입은 부분들을 찾아서 치유하자. 그리고 통합하자. 평화를 이루자. 나 자신과 주위의 평화 통일, 이것이 곧 나의 사명이 되었다.

감성이란 것은 대단히 광범위하고 강력하고 정밀한 컴퓨터와 같아서 그것을 스스로 파악하지 못하면 문제가 있어도 알지 못한다. 제대로 작동이 안 되는 나를 사용해 살아가려 한다면 어떤 인생을 살게 되겠는가? 주어진 능력이 다 발휘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세상과의 관계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앞에 놓인 여러 가능성들을 뒤로 하고 감성치유와 자기계발의 길로 들어섰다.

내 자신의 감성치유를 거치고 어머니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일이었다. 그 관계를 소아와 엄마의 관계에서 성인 대 성인의 관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앞서 이런 분야가 없었고 길을 닦아 놓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이 길을 만들며 가야 한다는 데서 막연하고 무모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고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온전한 관계를 원하는 절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가기로 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나면서 우리 모녀는 갈등과 통증으로 가득 찬 관계에서 평정이 깃든 도반의 관계로, 그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인류 의식의 진화에 기여하는 동지 관계로, 전환에 전환을 거듭해 왔다.

이 길은 나의 금광을 발견하는 과정이었고, 이 과정에서 터득한 원리를 자녀들을 대하는 데에도 적용해 왔다. 자녀들과도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한 창의적인 관계를 이루고, 각자의 상황 속에서 어려움을 잘 극복해 가며 충실한 삶을 살아냄으로써 이 세상에 기여하는 동지적 구심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내가 사용해 온 방법은, 그들에게 문제가 발생할 때 마다 그들의 문제 요인을 내게 미약했던 부분으로 받아 들이고 고치는 내 자신의 내면 작업으로 들어가고, 그럴 때 나오는 새로운 통찰의 힘으로 그들과 나누는 것이었다. 항상 그들보다 반 보 앞서 갔다. 그렇게 가족 구성원들과의 관계에서 생명모성을 발휘하고 그 차원에서 서로를 지원하며 살기 위하여 항상 가슴을 통해 울려 나오는 사회의식을 공유해 왔다. 예전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또는 (유교식으로) 남성이 권위적인 심리와 관점에서 시작해 조직적으로 이끌어가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



어둠의 생명모성 / 빛의 생명모성

생명모성을 실천하는 과정에서는 삶의 복잡하고 어두운 상황 속에서 예지와 인내심과 결단력과 추진력을 발휘하는 전사 에너지를 요구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 글의 첫머리에 서술해 놓은 말들이 제시하는 밝고 따뜻하고 여린 에너지는 완성의 단계에서 느낄 수 있다.)

넬슨 만델라의 27년에 걸친 감방 투쟁은 어둠 속에서 생명모성이 발현하는 좋은 예이다. 특히 그가 감방생활을 하는 동안 보여준 올곧고 고귀하기까지 한 모습에 그를 지키던 백인 교도관이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는 예화는 모델 사례라 할 만하다. 만델라는 그의 승리를 통해 우리 모두는 증오에서 자신을 해방해야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입증해주었다.

생명모성은 그저 독립투사의 정신이 아니라 증오심, 두려움, 수치심, 열등감, 화, 슬픔, 고독, 절망감 등 모든 부정적인 요소를 다 품고 녹여내는 거대한 생명의 장 안에서 그 힘을 드러내면서 장애를 뚫고 나오는 생명의 근원적인 힘이다. 증오에서 자신을 해방하지 않으면, 증오의 기운이 자신을 사로잡고 족쇄를 채워 버린다. 이것이 지금 많은 한국의 여성주의자들이 직면한 문제가 아닌지 냉철하게 직시해야 할 것이다.

다른 예를 보자: 정복당한 모든 지구촌 원주민들 중에서 자신의 운명을 가장 혁신적으로 개척해 나가고 있는 부족은 뉴질랜드의 마오리 족인데, 그들은 십여 년 전에 자기들 내에서 만든 뉴질랜드 정부를 포함해 다른 어느 나라도 인정하지 않는 ‘Maori Government of Aoetearoa’라는 이름의 마오리 정부를 만들고, 쑤 니코라Sue Wyliam Wiremu Nikora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그녀는 부족 주신(Great Spirit)으로부터 받았다는 특유의 강력한 비전과 확신을 가지고 마오리 족의 주권과 소유권을 살려 내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이 여성을 올해 뉴질랜드 기스번에서 있었던 ‘13 grandmothers 회의’에서 대면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는 마오리 사람들의 대모 역할을 하고 있었다. 상담을 하며 그들을 돌봐주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에게서 발산되는 소중한 생명모성의 힘을 보았다.

생명모성은 적시에 사람을 구제하고 사회를 구제하고 필요할 때 대전환을 일으키는 생명과 창조의 원동력이다.

생명모성의 실체: 진실, 정직

생명모성의 힘이 발휘되기 위한 필수 조건은 자기 내면에 있는 생명모성의 원천을 확립하는 것이다. 그것 없이 상대를 위하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행동할 때 나오는 힘은 상대를 무시하고 개인의 영역을 침범하고 들어가 억압하는 등 음성·양성적 폭력을 범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한국의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지금도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생명모성이 힘을 발휘하려면 자기 자신이 먼저 충만해 있어야 한다. 남을 위해 무엇을 하고자 할 경우에는 우선 자기 내면의 치유와 정화 과정을 충분히 거쳐야 한다. 혼자 하는 명상과 수행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문제는 관계성 속에서 일어나고, 따라서 필요한 것은 관계성의 치유이며 정화이기 때문이다. 자라는 과정에서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자기의 결핍의 정체를 자각하지 못할 때는 자기 자신에게 진실할 수 없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정직할 수 없다. 대인관계는 자신에게의 진실함, 즉 내면의 정화와 정비례한다.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하면 면밀한 차원에서 자기가 어떤 식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 되고 있는지를 자각하지 못한다. 때문에 그 정도와 비례하여 생명모성을 짓밟는 행위들을 자신도 모르게 하고, 그 범위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가족적 비극으로부터 조직적·사회적 비리, 지구환경 파괴 등 범지구적으로 확장된다. 생명모성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양심과 관련되고, 생명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와 관련되고,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지구 환경과 관련되고, 우리의 뿌리와 관련된다.



생명모성의 실체: 공감(empathy)

과학, 물질, 경쟁과 소유를 중요시하는 현대문명은 지구상의 생명모성 에너지를 고갈시켰고, 현대인들의 의식은 인간 중심, 이성 중심, 물질문명 중심으로 옮겨갔다. 문명의 이름 아래, 자연과 생태계와 일체되어 조화를 이루며 살던 토착민들을 미개하다고 생각해 정복했고, 그들의 우주관과 지혜와 영적 능력을 말살해 뿌리를 말려 버렸다. 그 결과는 지금 우리 앞에 닥쳐 있는 환경 파괴와 자원 고갈, 지구촌 전반의 생명 위기이다.

토착민들은 주위 환경과 일체되어 살면서 바람과 땅과 천체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야생 동물들과 소통하는 능력이 있었다. 동물계뿐 아니라 생태계 전체와 연결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자기의 위치를 적절하게 지켜나갔고, 전체를 성소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북미 인디언들이, 또 수만 년간 호주 대륙에 살아오면서 그 땅을 망가뜨리지 않고 살아 온 호주 원주민 (Australian Aborigines) 들이 전하고 있는 말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인간이 야생동물과 소통하게 되면 어떤 장면들이 벌어지는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남아프리카 여성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안나 브리튼바흐 Anna Breytenbach로, 동물과 의사소통하는 동물교감사(Animal Communicator)다. 안나는 인간이 야생동물과 소통하는 것을 생명과의 연결(connection with life)이라 부르고, 그러한 연결이 생겨나는 순간부터 그들과의 공명이 일어나고 자비심이 살아난다고 말한다. 생명모성은 종국적으로 생명과의 연결이고, 생명에 대한 경외심의 발동이고, 상대 생명체에 대한 자비심이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공감 (감정 이입) 이라고 부를 수 있다. 상대의 입장이 되어 상대가 느끼는 것을 선명하게 느끼게 되면 상대를 위하고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하고 원치 않는 것을 하지 않게 된다.



생명모성의 전망: 왜 한국에서?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생명모성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모성과는 그 범위가 다르다. 후자는 주로 자기 자식에 대한 애착의 감정이며, 자기 자식이 안전하고 잘되기만을 바라는 데 국한되는 것이다. 반면 생명모성은 생명 전반에 관련된 것이고 생태계 전반에 대한 의식의 열림이다. 그렇다면 지구상에 하고많은 나라 중 하필이면 왜 한국에서 생명모성의 불꽃이 언급되고 있는가?

한국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모성의 힘이 막강한 나라였다. 이는 여성의 힘을 말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유교적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는 변두리로 밀려났고, 여성의 몸이 갖는 역할은 가문의 혈통을 잇는 수단으로 좁혀졌다. 여성의 힘이 한 집안의 모성 영역으로 집중되었다는 말이다. 그런 전통과 역사 속에서 여성의 자아의식은 "착한 여자"의 테두리 안에 갇히고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전통이 강요하는 인의예지의 틀 속에서 자기를 규정해야 했고 희로애락의 감정은 건강하게 표현될 수 없었다. 이러한 속에서 꿈틀거리며 살아나온 모성은 왜곡되고 협소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강하게 불고 있는 치맛바람의 유래가 그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에너지는 대단히 강하지만 건전하지 않은 면이 많고, 자녀를 키우는 데 있어서도 자식의 성공에서 대리 만족을 기대하는 심적 요소가 무겁게 작용하고 있다. 사회 전반에 긍정적이고 성숙한 여인의 기운을 퍼뜨리기보다는 눌려 있는 전통의 무게에 저항하면서 자기 위치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기존의 여성 역할에 회의를 갖게 된 많은 여성들이 독신의 삶을 선호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풍토적 환경은 좁기 때문에 이런 속에서 독신주의를 선택하는 여성들은 여성의 힘의 원천인 자신 속에 내재해 있는 생명모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아 정체감을 상실한 체 헤맬 수 있다. 한편 자연적으로 강한 모성성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은 자기중심적 모성의 그물을 던져 다른 사람들을 자기 방식 속에 가두려 하고, 상대가 반기를 들면 마음에 불만이나 한스러움이 생겨나 부정적인 기운을 표출한다. 그런 가운데 한국 사회에서 의식이 깨어난 사람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돌파구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다시 필자의 이야기로 풀어내자면, 십여 년 간의 감성치유 작업을 거치면서 정신적으로 아주 밀접해진 어머니의 개인사가 나의 역사가 되는 과정을 통해 나의 뿌리를 그 속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강한 생명모성의 소유자인 내 어머니의 한국식 모성에 반발하며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노력했고, 네 번의 이민을 하는 동안 한국식 어머니의 강력한 힘과 약점을 동시에 직시할 수 있었다. 서양의 열린 자연과 환경 속에서 생명모성에 대한 상을 정립하고 탐사한 후에 한국에 돌아와 모성이 결핍된 한국의 여성성을 보게 되었고, 또 한 발 물러서 있는 주권 잃은 한국의 남성성을 보게 되었다. 현재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점과 특성이 나 자신의 영적 여정, 그리고 생명모성과 연결되는 지점을 발견하고 생명모성이 한국에 출현하도록 하는 일을 착수하게 된 것이 여기까지의 경로이다.

맺으며

생명모성은 한국이 이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독특한 성품을 키워낼 수 있게 하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개념이다. (대장금이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 말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1)한국 사회의 깨어있는 사람들, 사회의 문제를 절감하는 사람들이 생명모성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2)권위주의 틀 속에 갇혀서 혹독히 단련 받아 온 한국의 여성들과 남성들이 자신 속에 내재된 모성적 근원성, 뿌리영성을 자각하고 키워내는 것,

(3)하느님에 매달리던 것에서 어머니 땅과 생태계 전반을 보호하는 모성적 영성을 키워내는 관점으로 의식을 확장하는 것이다.

생명모성의 결핍으로 구성된 인류 역사의 정복자들. 그들에 의해 말살된 지구촌 토착민들의 광대한 생명모성. 지구 어머니를 구심점으로 하는 생명 인생관을 새로이 적립할 시기가 왔다.

민족주의 대신에 인류적 생태영성 주의. 이 길의 안내자는 내 안에 내재해 있는 생명모성. 지금까지 나를 옭아매 왔던 감성 탯줄을 자르고 나의 주체인 생명모성 안에서 새로운 방향을 찾는다.

편집자 주 : 이 글은 [모심과 살림]에 실린 글입니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김반아 시민통신원 vanakim77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