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강 『노자』와 무위 2 |
◆ 장자의 무위 인간다움에 관하여 그런데 이렇게 본다고 하면 이 무위라고 하는 개념은 사실 끔찍하죠. 별로 좋은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장자가 상당히 장자라고 하는 사람은 특히 내편에 드러나 있는 것만 보더라도 약간 이중적인 사람이에요. 이중적인 사람. 왜 이중적이냐 하면 정신분열적이다 이렇게 표현하기 보다는 장자가 저는 삐꾸라고 보는데, 약간 어긋났다 이것이죠. 장자 내편을 잘 보면 이 사람도 분명히 정권에 참여해서 무언가를 이루어내려고 하는 의식이 굉장히 강했던 사람이에요. 그것은 분명해요. 그런데 특히 이 사람이 大用대용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소요유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얘기가 대붕이 바다 밑에 있다가 구만리 하늘까지 올라가서 좍 날아가서 6개월을 날아가서 쉰다. 그 얘기가 엄청나게 크죠. 그런데 크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기본적으로 1인자에 관한 칭호에요, 1인자에 관한 칭호. 고대 중국에서. 대, 무 이런 것들은 모두 동격이에요. 도하고 같이. 그러니까 이것은 기본적으로 황제, 즉 왕에 관한 이야기에요. 王 그런데 장자의 뒤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는 무엇이냐면 특히 손 트는 약 하고 박이었죠. 커다란 박나무가 혜시하고 나오는 대화에서 두 번 등장하죠. 그럼 혜시를 보고 너는 작게 쓰는 법만 (小用) 알지 크게 쓰는 법 (大用)은 모른다 라고 하면서 대용을 이야기하는데 이 대용이라고 하는 것 이 글자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세요. 쓴다라고 하는 것은 쓰는 사람이 있다면 쓰임을 당하는 두 가지가 구분되어 있죠. 이 때 대용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크게 쓰이는 것도 있지만 쓸 줄 아는 사람 그것과 관한 얘기가 주인 것이에요. 그런데 대大자가 붙어 있다. 작은 것과 큰 것을 구분한다 는 얘기는 기본적으로 누구를 지향하나, 달리 말하면 유세와 관련된 논의라는 것이죠. 즉 치자에게 유세하는 방식에 가까운 논의는 분명해요. 다만 이 사람이 말하는 치의 방식이 당시에 법가적인 것과는 조금 방향이 달랐다 라고 하는 부분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죠. 그 중요한 구절을 한 번 읽어보시죠. 이 구절을 이해하면 장자가 말했던 그 무위, 다는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가 오늘날 가장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커다란 나무를 갖고 있으면서 그것이 쓸모없다고 걱정하고 있는데, 어째서 그것을 무하유(無何有)의 마을 밖 드넓은 들판에 심어놓고서 그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며 무위하며 지내고 그 밑에 누워서 소요하면서 누워 자지는 못하는가】 그런데 이 구절을 한 번 해석할 때 철학적으로 분석을 하면 대개 틀려요. 이런 것은 역사적으로 분석해야 맞는데. 일단 용을 가지고 얘기를 했으니까 용에 관한 얘기를 해보죠. 用. 저는 장자 철학의 기본은 바로 이 용의 문제를 둘러싸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용은 기본적으로 소유관계에 따라 달라집니다. 천하를 소유한 자에게 있어서는 자기는 전부 다 쓰기만 하는 위치에 있어요. 다만 주권을 제대로 갖고 있을 때. 내가 어떤 신하에 의해서 휘둘리지 않는 경우에서 나는 쓰기만 하는 사람이에요. 그럼 나머지 모든 사람은 쓰임을 당하는 사람이에요. 쓰임을 당한다고 하는 차원에서 보면 자기는 임용되어야 될 사람이죠. 그것이 仕(사) 이지 않습니까. 즉 사라고 하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자기가 잘나봤자 쓰임당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납니다. 황제가 아닌 한. 그런데 장자가 살았던 당시는 70몇 제국이 일곱 개로 줄어들었고 특히 장자 철학 속에는 대란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정치적, 군사적 각축이 무척 심했던 시대를 살았어요. 그러니까 춘추 시대만 하더라도 전쟁의 참상이 그렇데 대단하지 않았어요. <영웅> 영화를 다시 한 걸 보면 <영웅>에서 볼만한 것은, 볼만하긴 하지만 참 더러운 장면이지만, 활 쏠 때 발 이렇게 해서 엄청난 화살을 좍 쏘면 양조위랑 몇 명이 다 막고 나오잖아요. 그거 다 뻥인 것 아시죠. 거기에 맞는 것 중에 하나, 더 살렸어야 되는 것은 뭐냐하면 진나라가 제나라를 급습할 때 이길 수 있었던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기마 전술이 뛰어났어요. 진나라가 서역 쪽에 가깝잖아요. 그래서 제나라에서 준비를 할 수가 없는거에요. 그리고 말종류도 원래 동아시아 쪽은 말이 작아요. 작고, 그런데 저쪽 서역으로부터 빌어온 말들 같은 경우는 이쪽이 나중에 중동에서도 스키타이족이 그 쪽을 쓸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기마전술 때문이잖아요. 그 다음에 몽고가 저 쪽을 강타할 수 있었던 것도 고기 말린 것과 같은 식량, 휴대하기 간편하고 그 다음에 기마술의 뛰어남. 요즘에도 몽고 문화기행 같은걸 보면 쪼그만 애들이 타고 내리고 그런걸 보이지 않습니까. 지금도 그러한 데 과거에는 어땠겠어요. 아예 말 위에서 살지. 적이 쳐들어와요. 그럼 전보가 딱 와서 말을 달려서 준비를 하면 되는데 ‘적이 쳐들어옵니다’ 하니까 앞에 와있어요. 그럼 끝나는거에요. 지금처럼 상비군, 직업군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징발하고 모아서 나갔다가 하는건데 그게 과연 가능하겠느냐 이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속보하고 같이 가요. 그러면 이미 전쟁이 끝나는거죠. 그리고 제나라 같은 경우도 김용옥 선생이 처음에 논어 얘기할 때 산동, 대인이라고 해서 크잖아요. 보통 180 이 정도의 장신이 꽤 많았다고 해요. 진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쪽도 키가 크고 굉장히 커요. 서역 쪽 사람에 가깝기 때문에.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순신 장군의 칼 옆에 제가 어렸을 때 서보니까 키랑 똑같아요. 그것을 한 손으로 휘둘렀다고 하는데 어떻겠어요. 저랑 최홍만하고 싸운다고 생각해보세요. 군사력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할 때는 첨단무기라든가 인간의 신체에 의지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이런 것들 때문에 자꾸 우리가 상상력이 빈곤해지는데 몸의 논리는 적나라한 것이잖아요. 최홍만하고 저하고 싸워서 제가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누가 봐도 뻔한거죠. 그렇죠. 그렇지만 토론하면 제가 이길 수 있어요. 이게 바로 문치죠. 문치가 무치보다 경쟁이 더 공정할 수 있다는 얘기에요. 그리고 입으로 암만 싸워봤자 피 안흘려요. 그렇죠. 그런데 몸으로 싸우면 유혈이 낭자하잖아요. 그렇죠. 무엇이 좋은가가 분명하게 구분되는 거죠. 그러니까 흔히들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영어 성문에 나오는 첫 번째 문장이죠. 그것은 인류사의 비전이고 그것이기 때문에 인간답다고 하는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무력적인 경쟁의 논리를 즉 몸으로 경쟁하는 방식으로 문화가 나아간다고 한다는 것은 곤란한 거예요. 인간은 곧 정신인데. 제가 종교 지지자도 아니지만. 다시 돌아가서 용用이 참 곤란한 것이 장자에 들어가면 공자라든가 이런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자기가 임용되어야 한다는 정치적 딜레마가 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당시는 귀족제가 무너져 있지 않았었고 여러 가지 설들이 난무하지만 나중에 후대에 실제로 공자가 대사구라고 하는 높은 벼슬을 했다 뭐 조작이다 아니다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벼슬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죠. 특히 공자 문하에 있던 많은 문하생들이 벼슬살이를 했잖아요. 위나라의 자로같은 경우에도 출사해서 죽으면서 갓끈을 묶는 비장한 죽음을 보여줬던 것처럼. 공자 문하에 있던 사람들이 실제로 벼슬생활을 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장자는 어디에도 벼슬 했다는 이야기가 없이 칠원리 옻나무 동산 관리하는 것 했다고 하는데 그게 관리 입니까 그게. 한번 실제로 가보세요. 거의 일반 백성들하고 별다를 바가 없는 벼슬이라면 그것을 벼슬이라고 말할 수 없는거죠.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생각하는 임용에 대한 것 하고는 다른거에요. 듣는 분들이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행정고시나 사법고시 패스한 공무원하고 9급 공무원 시험 패스한 공무원하고 느낌이 다르잖아요. 그렇잖아요. 이게 약간 서로 불편한 얘기인데. 말하자면 장자는 9급 공무원 패스도 아니고 제대로 간게 아니라 그 9급 공무원한테 잘 보여서 ‘내가 주는 찌꺼기 받아먹어’ 이렇게 된 걸 수도 있어요. 그러면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패스한 사람들은 노는 물이 다른 거죠. 그런데 그 배경이 과거에는 이른 바 귀족제는 세습의 원리에 의해서 좌우되죠. 이 세습의 원리가 전국시대에 들어오면서 깨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용用이라고 하는 담론이 무척 중요해요. 특히 70여 제국이 7개 정도로 줄어들었다고 하는 것은 무슨 얘기에요. 지금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70여개의 한국에 있는 대기업이 망하고 M&A 등등 해서 일곱 개로 통폐합된 거예요. 그러면 회사가 인수 합병되고 할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살아 남는자가 생기고 잘리는 구조조정이라는 것이 생기죠. 그 구조조정 당한 화이트칼라들 그 사람들을 고대 당시에서 유사라고 얘기하는 거죠. 유사儒士 떠돌이 지식인이고 벼슬길에 나아갈 준비가 되있소 하되 갈 데가 없소. 이 사람들 가운데서 얼마나 뛰어난 인재들을 내가 흡수하느냐 이것이 바로 관건이에요. 부국강병의. 왜 인치의 시대였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당시의 유명한 사람들을 잘 알아요. 예를 들면 제나라 환공, 최초의 패자覇者죠. 그 다음에 맹자에 처음 나오는 양혜왕 그 다음에 제나라 선왕. 이런 사람들 다 무슨 사람들이냐 그 밑에 엄청난 떠돌이 지식인들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에요. 이런 사람들이 이제는 이 문화가 대부 벼슬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산이 돼서 춘신군과 같은 사람은 그 안에 식객을 3,000명을 거스렸다라고 해요. 식객이 뭐냐 하면 다 유사들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들을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이 사람들은 뭘 보고 하는 거냐. 용用 때문에. 자기가 쓰임을 당하고 싶은 거예요. 달리 말하면 취직하고 싶은 거죠. 그것도 비정규직이 아니라 정규직. 그런데 희한한 것이 당시에는 정규직, 비정규직이라고 하는 개념이 없죠. 정규직, 비정규직의 개념에 가까운 것이 뭐냐 하면 우리는 정년을 하는 것이 정규직이죠. 그렇죠. 그러면 당시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개념은 뭐냐 하면 식읍을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자가 고민했던 머리나 내가 고민하는 머리나 현실의 방식, 용어가 다를 뿐이지 사실 그게 그거인거에요. 인생살이 새옹지마라고 하는 표현은 바로 일ㄴ 데서 해야 되는데. 그런데 공자의 논어하고 장자라고 하는 텍스트를 가만히 비교하면서 읽어보세요. 읽어보면 큰 얘기만 해요. 큰 얘기만. 그런데 공자처럼 적어도 제후에 해당되는 사람들하고 거의 동격으로, 더군다나 맹자는 센 사람들만 만났잖아요. 양혜왕 하고 제선왕은 당시에 가장 센 대표적인 군주였어요. 두 사람 만나서 ‘야 니들 똑바로 해’ 이렇게 얘기했잖아요. 그러면 누가 더 훌륭한 거예요. 그것을 들어준 사람도 대단한 거예요. 그럼 왜 들어줬느냐. ‘나는 맹자처럼 까탈스러운 애도 까칠한 애도 잘 들어줘 그러니까 많이들 와.’ 이거에요. 놀러와예요 놀러와. 그러다보면 눈에 띄는 인재들이 들어오죠. 발탁해서 쓰는 거예요. 맹자 같은 사람은 그런 걸 통해서 자기의 어떤걸 펴려고 하는 거고. 그런데 장자는 어때요. 장자가 관련된 일화들은 다 좀 삐질삐질 해요. 어디 뭐 쌀 꾸러 왔더니 이 인간이 ‘야 내가 조금 있으면 세금을 걷어서 어떻게 하면 줄 테니까 그 때 와라’ 에서부터, 누가 와서 진나라 왕의 사신으로 갔다가 수레 다섯 대 어떻게 해서는 큰 뭘 받아왔다 라고 하니까 야 너 같은 놈 때문에- 진나라 왕은 뒤에 빨아주는 인간들이 가장 큰 벼슬을 받는다 그걸 빨고 왔느냐. 치질. 그런 얘기 하면서 별에 별 거 다 하잖아요. 그게 되게 멋있어 보이죠. 마누라한테 욕 먹기 딱 좋은 얘기죠. 그렇잖아요. 누구는 잘 나가는데 너는 왜 이모양 하면서 말만 세다 이거에요. 그렇잖아요. 어디서? 동네 선술집에서. 동네 포장마차에서. 그러니까 장자라고 하는 사람의 삶의 흔적을 보면 분명히 그와 같은 냄새들이 풍겨요. 그래서 전 이런 말을 좋아하는데 공자가 벌떡 일어서면 맹자가 되는 거고 공자가 푹 주저앉으면 장자가 되는 거예요. 이런 게 천고의 명언이고 동아시아 고전을 읽을 때 우리가 속으로 말하면 안 돼요 원래는. 그렇게 그런 정신으로 읽으면 장자나 나나 비슷해요. 그렇잖아요. 저도 실제로 여기에서는 우주가 어떻고 도가 어떻고 노자 별거 아니라고 얘기하지만. 그렇잖아요. 다 노자가 훌륭하다고 하는데 나는 노자가 싫어. 센 얘기잖아요. 집에 가서 노자 얘기하면 졸려 자 이래요. 웃으라고 한 얘기인데 안 웃으시네. 아직 훈련이 덜 돼 있어요.
그런데 장자는 이 얘기를 하는데 이 배경은 뭐냐 물론 여기에는 상당한 추정이 들어갑니다. 보통 전 세계적으로 남자가 남자로써 대접받는 나이는 40이에요 40. 로마에서 집정관이 될 수 있는 나이가 40이었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게 싫어서 서른도 될 수 있는 호민관을 통해서 들어갔다가 집정관으로 올라가잖아요. 대단한 사람이에요. 카이사르라는 사람이. 40이라고 하는 나이는 군대 편제에서도 중요해요. 아까 이 당시에 군대 편제가 직업군인이 아니라 국민들, 일반 백성들 가운데 차출을 해서 징용을 해서 군대 차출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농사짓던 사람을 군대에서 써먹으려면 되겠습니까. 안되죠. 6 ?25 때만 하더라도 흔히 우리가 영화를 보면 두 가지 영화를 얘기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참상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다고 얘길 하죠. <씬 레드라인> 하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 <씬 레드라인>에서는 돌격 앞으로 하는데 안 가잖아요. 그렇죠. 날아오는 데 죽을라고. 미쳤어요 가게. 그런데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막- 특히 6?25라든가 2차대전 해서 나온 영화 보세요. 특공대를 가서 포탄이 날아오고 뭐가 날아오든 나가요.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모든 전쟁을 보면 군장교들이 했던 가장 첫 번째 역할이 뭐냐. 전진 앞으로 할 때. 뒤로 돌아가는 뒤에서 사람들을 죽이는 거예요. 이것은 전쟁문화에서 일반적으로 공통적인 겁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회군을 해서 로마군을 쉽게 격파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도 관리하에서 8년 동안 자신이랑 같이 있었던 휘하군들하고 정서적 유대 엄청나죠. 계속 전쟁을 했던 사람들이니까 베테랑 아닙니까. 영화 <공동경비구역JSA>에서도 그런 대화가 오가는 게 나와요. 한 사람은 아프리카 이런 데 파견 돼서 훈련시키고 이런 역할을 했던 송강호가 둘이 막 하다가 전쟁 때에는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누가 빨리 총을 뽑느냐가 아니라 누가 정신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기는데 있다. 이 얘기가 무슨 얘기냐면 정말 가슴 아픈 얘기지만 경주 울산 지역에서 학도병들을 대거 모아서 총을 쏘게 했잖아요. 특히 북한쪽에서도 다리를 나무에다 묶어 놓고서는 총을 쏘도록 만들기도 했고. 영화에서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런 장면도 나오고. 그럼 남쪽은 다르겠어요. 방아쇠 당기는 법만 가르치고 사격 몇 번 해보고 가서 전쟁에 들어간 사람들이. 총소리 들어보셨죠. 실제로 사격장에 가서 총을 쏘다 보면 연습한 사람들은 다른데 실제로 빵 쏘면 귀가 멍해서 거의 끔찍해요. 그런데 빵 쏘는데 앞에 사람이 선혈이 낭자해서 죽어간다. 이건 끔찍한 거 거든요. 그런데 전쟁 당시에, 총알이 날아오는데 돌격 앞으로 한다고 나가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래서 계산에 의하면, 통계자료에 의하면 6?25당시에 한국 내전 당시에 소요된 총알의 숫자가 실제로 발사가 돼서 상대방에게 부상을 입히거나 죽음으로 몰아간 총알이 10만발 당 한 발이래요. 그럼 무슨 얘기가 되겠어요. 기관총 갖다 놓고 허공에다가 막 갈겼을 때 지나가던 참새가 총 맞아 떨어질 정도의 확률과 가까운 것이란 얘기죠. 이게 무슨 얘기냐면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보여주는 사실이에요. 제대로 못 쐈다 이렇게 우길 것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똑같다는 거죠. 그런데 장자는 여기에서 지금 뭐라고 얘길 하냐면. 장자가 아마 자기의 원숙한 사상적 체계를 세웠을 때가 30대에서 40대를 지나면서였을 거예요. 40이 되면, 요즘에는 남자들이 서른즈음에라고 하는 노래 있죠. 스물아홉에서 서른 살 넘어갈 때 참 마음이 그런데. 저는 그 때 별 느낌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서른아홉에서 마흔 넘어갈 때 비정규직도 아닌 매 년 4개월 계약직 강사. 학위는 박사인데. 그것도 우주를 얘기하고 도를 얘기하고 이런데 그러니까 매일 떠드는게 갓 들어온 신입생들 앞에서 무슨 얘기인지도 몰라요. 한자 써도 알지도 못해. 듣기 싫어하죠. 졸지 말라고 하면서 강의 하는 이 처량 맞은 내 신세. 이게 젊었을 때는 괜찮았는데 나이가 먹으니까 강의도 힘들어요. 예전에는 진리에 대해 밤새서 논문도 쓰고 무언가 해낸 것처럼 했는데 지금은 의무 방어전 밖에 안 해요. 학회지에 실어야 되니까. 돈 받은 게 있으니까 논문 내야지. 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신체적인 것도 저하되고 삶의 조건도 각박하고 말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돼있다는 것. 그러니까 여기처럼. 여기는 조는 분 하나도 없죠. 더군다나 탁 얘기하면 웃을 준비가 돼 있죠. 학생들은 강의를 들을 준비는 안 되어있고 웃을 준비만 되어있어요. 강의의 반을 웃기기 위해서 준비해간다는 거죠. 여기랑 분위기가 다르다는 거죠. 그런 강의를 하다보면 특히 심한 경우 학생들과 안맞는 경우 벽에다 대고 염불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사실 인문학이 사회에 대해서 발언하는 거지 염불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잖아요. 염불하는 상황이에요. 책 내봤자 읽지도 않고. 그런 상황에서 딱 마흔이 되니까 아.. 누구네 집에는 차가 뭐였다가 얼마 전에는 체어맨으로 바꿨다더라, 누구는 아파트가 몇 평이래드라, 심지어 얘기 들어보니까 제가 초등학교 학생들을 과외를 한 적이 있었는데 요즘은 애들도, 그게 벌써 7,8년 전 일이에요, 아파트 평수가 같은 애들끼리 몰려다닌다면서요. 강남에서는. 그런 얘기가 돌고 그랬잖아요. 그럼 전 뭐냐 이거죠. 자괴감? 그런데 저는 성격이 낙천적이라서 별로 그런 것 가지고 고민 안하는데 어쨌든 공부는 하고 싶고 하는데 자꾸 다른 일들을 해야지만 할 수 있다는 사실 그런 것들이 참 힘들다는 거예요. 몸으로 움직이는 것도 한계가 있고 그런데. 그러다보니까 자괴감이 들고 서른 즈음에가 아니라 요즘엔 마흔 즈음에. 여자 분들은 그렇죠. 일찍 결혼하신 분들 같은 경우에 애들이 중학교 입학하고. 초등학교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중학교 입학하면서부터 혼자고 아침에 애들 보내고 남편 보내고 나면 갈 데도 없고. 수다 떠는 것도 잠시지. 무언가 자기 만족감을 행 할 수 있는게 없으니까 우울증에 빠지기 쉽고. 남자들은. 직장인들은 똑같죠. 새벽같이 출근해서. 일곱시까지 출근해서 네시이후에 퇴근하자 라고 얘기했더니 일곱시까지 출근해서 밤 열시에 퇴근하고. 한국 사회의 구조가 그렇고 시스템 자체를 그렇게 만들다 보니까 그럼 남는게 무엇입니까. 단순하죠. 뭐죠? 심근경색 아닙니까 남자는. 여자는 우울증이고. 그런데 장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울증이 날아가는 것 같아요. 달리 말하면 이 사람도 우울증 환자인거에요. 스트레스고. 자기도 하고 싶은 게 있고. 천하를 이야기해요. 천하도 아니라 천지를 이야기한다 말이에요. 자기는 그러니까 이 우주의 비밀을 깨우친 사람이고 크게 쓰는 법을 알고 있어요. 그런데 크게 쓰는 법을 아는데 나를 크게 안써줘. 그러니까 이제 그런 표현들은 거기에 관한 원숙한 경지에 올랐을 때 쓰는 표현일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나름대로. 그런데 문장을 보시면 여기에는. 오히려 이 그림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회화적 이미지로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 그림을 잘 그리면 좋은데 잘 못 그리니까 대충 그릴게요. 아름드리 나무가 있어요. 옹이도 많고 가지도 삐뚤삐둘 한 나무에요. 그러니까 쓸모가 없어요. 장자에 보면 나무를 비유해서 이것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서너차례 나오죠. 그래서 어떤 산에 있는 커다란 나무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베어지지 않아서 오래 살았고. 어떤 거위는 잘 울어서 아니 울지 못하는 거위이기 때문에 빨리 죽기도 했고. 그런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래서 장자 얘기는 용用 쓰임을 당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굉장히 절박한 문제에요. 그런데 사실 이 당시에 용이라고 하는 문제가 뒤틀려 있다는 게 무엇이냐면 달리 말하면 정규직에 있던 사람이 전부 비정규직으로 바뀐 거예요. 쉽게 잘릴 수 있다는 말이죠. 잘린다는 것은 목숨도 관련되어 있고 내 집안 자체의 안위가 관련되어 있어요.
그럼 내 능력이 탁월하다고 해서 다 발휘하면 되느냐. 내가 조그만 일개 군소국가의 장군이에요. 적이 쳐들어왔어요. 내가 워낙 지모가 탁월하고 무용이 탁월해서 작은 3,000의 군사로 20,000명의 군대를 제압해서 물리쳤어요. 개선장군으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환영 받겠죠. 그 다음 부터는 군주의 질시를 받아요. 그 조그만 나라에서 당신이 이제 우리의 희망이요라고 하기 시작하면 저 용렬한 군주는. 그럼 그 다음 번에 흔히 사기에 보면 그런 식의 일들이 무척 많습니다. 다시 저 쪽에서 전열을 가다듬어서 들어와요. 그러면 딱 일으킨다고 선전을 내고 나서 먼저 사신을 보내죠. 작년에 우리 둘째 왕자가 그 전쟁에 나왔다가 죽었다. 그 놈을 보내라. 그러면 퇴각하겠다. 그리고 조공을 해라. 그러면 이 군주는 이 장군을 버리면 나라의 안위가 장기적으로 위험하다는 걸 알지만 지금 쟤는 눈엣가시야. 나보다 더 인기가 있어. 언제 쟤가, 뭉친 군부세력들이 쿠데타를 해서 나를 물리칠지 몰라. 그러니까 주변에서 ‘보냅시다 그리고 또 방법을 찾으면 되지 않겠냐.’ 보내요. 이 사람은 죽어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로 많이 일어나는 세상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뛰어나지도 말고 너무 못나서도 안 돼 요. 이런 정서는 사실 중국 지식인들이 계속 이어지거든요. 그래서 특히 혼란 시에 난세에는. <안씨가훈> 이라는 책을 보면 그런 얘기가 나와요. 네 앞에 열 다섯 명 정도의 상사가 있고 네 밑에 열다섯명 정도의 쫄다구가 있는 중간 정도의 직책을 하라. 재산도 어느 정도만 갖고 많이 갖지 마라. 이런 식의 얘기들이 나와요. 구조조정을 할 때 어떻게 하는지 눈으로 보셨죠. 그래서 요즘에는 많이 바뀌어서 전반적으로 숫자를 맞춰서 한다면서요. 그런데 그간 대한민국에서 했던 구조조정의 방식은 꼭대기 몇 개. 아래에서 좌라락. 하는 방식으로 구조조정을 하죠. 이게 당연한 거에요. 중간에는 워낙 다양한 방식의 이해관계로 똘똘 뭉쳐 있기 때문에 자른다 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챙겨줄 수 있는 뭐가 있으니까. 위에는 나가잖아요. 그래서 공직자들 나가면 다른 데 가 있잖아요. 밑에 사람들은 정말 힘들죠. 그러니까 밑에 있어도 안되고 맨 위에 있어도 안되고 중간만 하라. 이런 방식의 난세에는 모름지기 중간만 하라고 하는 식은 바로 살아남기 위한 논리이고 바로 장자식의 논리하고 가까운 거에요. 그러니까 장자가 자기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사이에 처하겠다. 有用無用之間 라고 대답을 해요. 산에서 커다란 나무가 있는데 나무꾼이 그걸 베지 않으니까 ‘왜 이 큰 나무를 베지 않으냐’ 그러니까 ‘쭉정이도 많고 옹이도 많고 가지도 삐뚤빼뚤해서 재목으로 쓸모가 없다.’ ‘아 이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저렇게 수를 늘릴 수 있었다.’ 내려와서 장자가 친구 집에 묵었는데 주인이 장자를 대접하기 위해서 거위를 잡으려고 시종이 와서 묻죠. ‘주인 나리 한 놈은 잘 울고 한 놈은 울지 못하는데 어느 놈을 잡을까요.’ 그랬더니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라.’ 그러니까 제자 한 명이 밤새도록 고민을 하죠. 그 다음 날 아침에 ‘스승님 어저께 나무는 쓸모없기 때문에 오래 살아남았지만 어젯밤 거위는 쓸모없기 때문에 죽지 않았습니까.’ 선생님은 유용과 무용 중에 어느 쪽 입장이십니까. 그러니까 장자가 그래요.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 사이에 처하겠다.’ 그 다음에 도가 어쩌구 저쩌구 어려운 얘기가 나와요. 그러면 그건 딱 접고 빼는 거에요. 거기에서 도가 왜 나옵니까. 달리 말하면 그걸 물어본 애가 바보라는 얘기에요.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는 걸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판단해야할 문제를 논리적 일관성을 요구한다는 것은 바보라는 식의 얘기니까 도로 튀는거에요. 그러니까 고전문헌에 나오는 도를 가지고. 도는 뭐에요.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라는 글자를 암만 얘기해봤자 어차피 전달이 안돼. 그러면 무슨 뜻입니까. 안읽어도 된다는 얘기에요. 그럼 앞 뒤 맥락을 보면 그 얘기가 무엇인지 정황 파악이 되요. 정황파악. 그러니까 통찰이 필요한 얘기라는 거죠. 그리고 달리 말하면 처세의 문제에서는 내가 능력이 엄청나게 뛰어나다 하더라도 군주가 나를 얼마만큼 인정해줄 수 있느냐 한도 내에서 움직여야 된다는 거예요. 뒤편으로 가면 사신 갈 때 어떻게 하면 저 사람 성격이 상당히 괴팍하고 성질이 더럽고 그런 사람을 모시고 사신을 수행해야 되는데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라고 하는 질문들이 계속 이어지잖아요. 그러면서 그런 맥락에서 조삼모사 얘기도 나오고. 그게 뭡니까. 바로 용의 관계에서 내가 신하 노릇할 때 살아남기 위한 방법의 고민이 굉장히 많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와 같은 목소리와 동일하게 장자가 지금처럼 저런 얘기를 해요. 당신은 지금 저 커다란 나무가 쓸모없다고 하는데 나는 저 나무를 무하유 들판에다가 심어놓고 그 주위를 하는 일없이 어슬렁거리겠다. 일단 이 얘기를 생각해보시란 겁니다. 이 속에는 특정한 문학적 장치이기도 한데 장자가 일정한 나이가 됐고 나름대로의 성숙한 비전을 얻었어요. 그러면 사회적으로 가장 가치가 있을 때의 나이에요. 장정이에요. 이런 사람이 낮에 농사짓다가 해가 뜨니까 그 주변에 어슬렁거리면서. 그게 무슨 이야기냐면 그림을 멋있게 그리면. 이 당시에 밭이 중심이었으니까 밭이 펼쳐져 있어요. 그리고 저 밑에 초가집이 있고 여기에 와이프가 열심히 밥을 짓고 있는 거겠죠. 그 다음에 아침에 일어나서 일을 했어요. 해가 너무 쨍쨍하니까 잠시 쉬어야 돼. 올라가서 나무 주변을 어슬렁 어슬렁거리는 거예요. 조금 있으면 집사람이 밥을 가져오겠죠. 우리 농촌하고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상황은 첫 번째. 남자가 집에 있어야 된다. 전쟁에 끌려 나가지 않았다는 얘기고. 부역에 동원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이 사실은 아주 일상적인 얘기가 아니라 환상적인 삶이에요. 달리 말하면. 오늘 날의 조건에 따진다면 연봉이 꽤 괜찮은 확실한 정규직 그 다음에 국민연금까지 안정적으로 수급되어 있는 상황의 삶의 모습과 같다는 얘기에요. 여기에서 무위한다는 것은 어슬렁거릴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뜻이지만 다시 말하면 이 때 이 나무는 나의 생명을 상징하는 거거든, 나의 생명. 내가 用 이라고 하는 것을 볼 때 군주가 나를 쓰는 것은 나의 재주를 쓰는 것이지 나의 생명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생명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그리고 나의 생명을 지켜줄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그런데 나는 나의 재주로 인해서 잘 살기도 하고 못 살기도 하지만 그것이 가끔씩 나의 생명을 해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차원인데 사회적 생명과 생물학적 생명이 있죠. 특히 이런 식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생물학적인 생명이 일차적이죠. 전쟁에 동원되지 않는다. 부역에 나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가장 일차적인 나의 삶의 조건. 생활 조건이 안정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삶의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안정적인 삶에. 거기에다 여유를 부려요. 농사를 짓다가. 그리고 ‘그 밑에 누워서 소요하면서 누워 잠을 자지는 못하는가.’ 나의 생명을 나의 신체적 생명이 요구하는 노동을 하면 쉬어야 되고 다시 또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먹어야 되고 그 속에 어떤 걷힐 것이 없이 여유로움이 있고 뭔가 느긋함이 들어 있어요. 여기에서는 단순한 얘기가 아니라 전쟁시대라는 특수한 조건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국가 질서 속에 이른 바 명의 체계로 흡수되어가는 중앙 집권화 되어가는 세상 속에서, 자기 삶의 생명의 온전함 자체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닌다는 뜻이 마구 여기저기를 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 나오는 소요라는 말은 이 주변을 빙빙 도는 거예요. 즉 자기 생명의 중심, 삶의 중심으로부터 떠나지 않고 거기서 여유롭게 자신의 삶을 구가하는 것. 이것은 달리 말하면 이러기 위해서는 부여에 동원되지 않아야 해요. 여기에서 말하는 무위는 그와 같은 나의 삶에 대한 간섭에 대한 거부의 정신이 들어있는 것이죠. 그리고 나의 삶에 대한 지킴, 보전이라고 하는 정신이 들어 있는 것이고. 따라서 소요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오늘날에도 상당히 의미가 있고 여기에는 저항의 정신이 들어있고 다원적인 삶에 대한 가치에 대한 긍정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삶, 내 생명에 대한 긍정의 의식이 있고. 그래서 짧은 구절이지만 용 用 의 굴레 속에 휘둘리는 부분도 있지만 장자 속에는 이와 같이 가장 일차적인 인간다움의 삶의 근거에 관한 이야기가 무위 속에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이 무위는 상당히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방식의 얘기라고 할 수 있어요. --- ◆ 양생과 덕화로서의 무위 그 다음에 양생과 덕화라고 하는 차원인데요. 박스 부분은 지난번에 읽었던 부분입니다. 당시에는 이 두 가지 입장이 다 있었던 모양인데. 장자에서도 形은 곤란하고 神을 긍정하는 방식의 논의를 기본적으로 하죠. 이렇게 결정되어 버리는데. 신을 이해할 때, 정신을 기른다. 자꾸 신비주의로 가는데. 신비주의로 가는 것은 곤란하고. 신은 무정無情이에요, 무정. 제물론에 보면 장자와 혜시가 하는 대화가 나옵니다. 사람에게 정이 없다면 어찌 그 사람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라고 얘기하니까 장자는 그럴 수 있다 라고 얘기를하죠. 그 정을 갖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매이지 않고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장자의 철학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무정無情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이 무엇인가 이해해야 되고 정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가 무엇인가 이해해야 해요.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 자체를 이해하는 방식이 무정에 근원적으로 응축되어 있기 때문에요. 정 情 이라는 글자를 파자하면. 파자가 반드시 좋은 방식은 아닌데 어떤 경우에는 파자를 할 때 상당히 재미나요. 그리고 이 파자는 클로우드 라 라고 하는 프랑스 신부에요. 그 신부가 파자하면서 해석한 내용인데 너무 멋있어서 제가 그대로 갖다 씁니다. 정 情 자를 파자 하면 마음 심 心. 생 生. 생 자는 어떻게 만들어진 글자냐 하면. 대지가 있어요. 뿌리가 있습니다. 봄이 돼서 햇빛이 비치고 눈이 녹아서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싹을 틔우죠. 점점 자라납니다. 열매까지 내리고. 이것이 생 자에요. 생 자라고 하면 보통 낳다라고 얘기하지만 식물적인 이미지에서 추출된 글자라는 걸 알 수 있죠. 생 자가 그리스의 phsis 라는 말과 상당히 어원이 유사해요. 생이라고 하는 것은 살아 있다 뿐만 아니라 식물적 생장이라는 의미가 그대로 개입되어 있는거에요. 더군다나 식물을 보세요. 봄이 되면 푸른색, 여름 되면 꽃이 피고, 가을 되면 누런색으로 바뀌고. 푸릇하죠. 특히 단풍이 들었을 때를 우리가 뭐라고 하죠. 울긋불긋 하지 않습니까. 생명의 색깔은 총천연색이에요. 진화론으로 들이대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보이는 자연의 색깔은 그야말로 총천연색이지 않습니까. 인간이 아무리 만들려고 한다고 하더라도 자연색의 아름다움 자체. 그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는 과정에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느냐 좋은 느낌을 주느냐 하는 차원에서 보면 자연적인 것을 따라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단丹입니다. 단은 당시에 수은, 광물을 얻기 위해서 땅을 파고 들어갔더니 그 안에서 붉게 번쩍 번쩍이는 광물을 찾아낸 거에요. 그러면 단은 광물적인 이미지이지만 다시 말해 인간의 것으로 생각한다면 피의 색깔, 붉은 색이죠. 생은 식물이니까 푸른색이란 말이에요. 울긋불긋한 생명력이 발현되는 것 아닙니까. 나무가 자라고 생장하고 하듯이.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공간이 천지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세계에서. 즉 감정이라고 하면 무엇이냐면 내 몸 속에 들어 있는 생명력이 내 마음이라고 하는 공간, 신체 전체를 얘기합니다. 손으로 물리적으로 만져지지 않는 속의 범위죠. 몸속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약동이고 발동이고 생명의 움직임이에요.
이 정은 어떻게 움직이느냐. 구멍을 통해서 움직입니다. 혼돈이라고 하는 설화를 얘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해석을 합니다. 특히 원가가 대표적으로 의미를 망쳐 놓은 사람인데. 혼돈설화같은 경우에 제가 원가의 해석을 거부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보통 그렇게 얘기하죠. 토마스 불핀치가 그리스신화를 체계화하기 전까지 그리스신화는 단편적으로 떨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불핀치가 체계화했어요. 물론 그리스에서도 신통기 등 계보를 그리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굉장히 다양한 이론들이 있지 않습니까. 원가가 했던 역할도 그와 같이 중국 신화라고 하는 책을 쓰면서 계통이 없는 것들을 하나로 모았습니다. 더더군다나 문제가 되는 것은 특히 중국에서 신화와 관련된 많은 내용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거의 사실은 후안시대 이후에요. 회남자라든가 산해경등에서 그런 요소들이 있지만. 그 작은 요소들이 훨씬 다양한 이야기로 살이 붙어서 커다란 네거티브를 형성하게 된 과정은 다 후안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개화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앞에 고전적인 신화를 원가는 당시의 소수민족들의 무속적인 창가라든가, 민요라든가 이런 것들을 채취해서 살을 붙여서 재구성한 것이 중국신화전설이라고 하는 책의 기본적인 틀이에요. 굉장히 오래 전으로 끌고 갔다고 하는 거죠. 그런 얘기들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요즘에 그와 같은 방식, 그 책속에 들어 있는 얘기들을 비판하는 식의 얘기들도 우리나라에서 실제적으로 나오고 있죠. 단군신화가 성립되었을 때 고구려, 백제, 신라로 갈라져있던 세 다양한 것이 하나로 뭉뚱그려졌고. 마찬가지로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면서 이른바 한민족, 이런 것들이 성립된 것처럼 지금 원가의 작업은 본인이 의도했든 안했든지 중화민족의 뿌리를 만들어내는 신화작업이에요. 본인이 의도했든 안했든. 철학의 책에서 그와 같은 중국은 없다라고 했던 이유가 거기서 오는건데. 이 사람은 혼돈설화를 거인사체신화겸 천지창조신화로 해석을 해요. 원가는. 거인사체신화는 전 세계 다른 문명권에서도 보이는 거죠. 커다란 최초의 거인이 죽어서 눈은 해와 달이 되고. 이것이 반고신화에도 그대로 들어있지 않습니까. 원가는 혼돈이 죽은 이후의 과정을 거인사체신화로 해석을 하고 그 앞에 과정은 반고신화와 연결해서 천지창조설화와 연결시켜요. 반쯤은 사기라고 봅니다. 왜 사기이냐. 신화학적으로 무의미하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다원적인 해석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을 하나의 맥락에 고정시킴으로써 이른바 근대민족국가의 기제와 맞닿는 방식으로 썼다는 것이죠. 글들 보면 굉장히 그런 냄새들이 많이 나거든요. 물론 원가라는 사람 개인이 나쁘다는 차원이 아니라 근원적인 작업의 한계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혼돈신화를 보면 거기에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냐면. 혼돈이 신이었다 이것이 아니라 혼돈과 관련된 다른 문헌에서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얼굴이 없다는 것이에요. 얼굴이 없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칠규. 일곱 개의 구멍이 없다는겁니다. 그래서 신화가 그렇죠. 숙과 홀이 있는데 남쪽과 북쪽의 신이죠. 이 사람이 중앙의 제인 혼돈에게 놀러가요. 너무 융숭하게 잘 대접을 해주니까 둘이 고마워서 우리가 한 번 뭔가 보답해야 되지 않겠냐 하면서 둘이 상의를 해서 만날 때마다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어주었더니 7일이 되는 날 죽었다. 무엇이 완성된 겁니까. 얼굴이 완성된 거예요. 우리가 얼굴이라는 말을 쓰는데 실제로 그 기원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얼골이라면서요. 얼골. 얼은 영혼이라는 뜻이고 골은 뼈대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영혼의 형상이고, 영혼의 뼈대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것이 무엇이냐. 사실은 얼굴은 표정이에요. 이 때 표정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 표정의 말이 무엇인가보세요. 내 얼굴에서 비쳐지는 표정이라는 것은 희노애락을 드러내는 것. 감정적 표현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명의 움직임이 얼굴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에요. 내 생명의 움직임이. 아까 지나가는 사람이 쳤다라고 하는 예를 들었죠. 산길을 가는데 갑자기 집채 만한 호랑이가 나타나요. 거의 공포에 질린 얼굴이 나오죠. 그 다음에 결혼 했는데 아기를 낳았어요. 보는 순간 얼굴이 펴지죠. 그와 같은 상황에서 인간의 표정은 거의 똑같죠. 문화를 초월해서 인종을 초월해서 똑같지 않습니까. 그것은 우리 몸 자체가 동일한 프로그램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건데. 문제는 왜 하필이면 얼굴 없는 혼돈이 얼굴을 갖게 되는 순간 죽었느냐. 그럼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가 뭐냐. 그것은 결국 무정이라는 얘기입니다. 표정이 없는 사람이에요. 혼돈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럼 정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설명을 했죠. 그럼 그때 일곱 개의 구멍이 무엇이냐. 그것은 기가 드나드는 통로입니다. 집사람이랑 한참동안 싸웠어요 제가. 그런데 술먹 고 들어가서 집사람한테 뭐라고 얘기를 해도 들은 체 만 체 안 해요. 그럴 때 귀에다 대고 ‘여보야 사랑해’ 하면 잠깐 씨익 웃고 자요. 이 때 들어오는 이것이 뭐입니까. 언어도 기입니다. 언어도 기에요. 아무리 옆에서 빌고 화해하자고 해도 반응이 없어요. 기분 나쁘고 계속 화를 내. 옆에서 ‘우리 그만 헤어지자’. 그 얘기를 들었다고 생각해보세요. 10년 동안 사귀었는데 애인이. 여자 친구가 남자친구가 ‘우리 안 맞는 것 같애. 헤어져’ 하면 어디로 들어옵니까. 끔찍하죠. 사랑해, 하고 헤어져라고 하는 물리적으로 따지면 어차피 파장이 다른 방식의 떨림이 들어오는 식인데. 그 기가 나를 죽이고 살려요. 그러니까 심한 경우에는 베르테르는 빵.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입으로 뭐가 들어가요. 오늘 먹은 것은 너무 맛있어. 그런데 이것은 너무 맛없어. 이건 먹으면 죽어. 어떤 건 달고 어떤 건 쓰고. 똑같이 뭐가 드나드는 겁니까. 기가 드나는 거예요. 눈으로 드나드는 것도 마찬가지. 제가 한 번 남산 쪽에 집사람이랑 같이 가끔씩 데이트를 하러가고 그랬는데. 한 칠순에 가까운 노인네 두 분이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까 그렇게 보기 좋아요. 괜히 마음이 푸근해진다는 말이죠. 그리고 제가 아기를 안 가졌을 때는, 아기가 없을 때는 몰랐는데 집사람이 임신하니까 왜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 가운데 임산부가 이렇게 많은지. 그 전에는 하나도 몰랐는데 그렇게 눈에 많이 띄더란 말이에요. 그다음에 주변에 아는 사람 가운데 어떤 분들이 이혼을 했어. 가만히 보니까 주변에 이혼 하고 혼자 사는 분들이 많아요. 그러니까 보거나 마음속에 공감되는 게 없으면 안보인다는 말이죠. 이미 우리 삶 자체가 가족 구조도 다양해졌고 삶의 구조가 다양해졌지만 그래도 변치 않는게 하나 있습니다. 귀도 그렇고 눈도 그렇고 어떤 기제에 따라 움직이느냐 호오의 기제에 따라 움직입니다. 호오 기제는 생물학적인 선택만을 받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선택도 받아요. 훈육의 과정을 통해서. 달리 말하면 호오라고 하는 것은 문명과 자연의 구분도 없고 단순히 좋으냐 싫으냐는 차원의 두 가지 양가적인 기제만 있는거에요. 이 속에는 문명과 자연을 구분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기계에서 만들어진 알약같은 것을 먹어서 내 신체가 유지되는건 어떻건 똑같지만.
문제는 무엇이냐. 기라고 하는 것은 좀 다르죠. 기계에서 만들어진 것 하고 인간이 느끼는 기라고 다르거든요. 예를 들면 이런 차원이 있어요. 기라고 하는 것이 국내 과학적 개념으로 특정의 대상으로 할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이것은 기본적으로 상대적이어서입니다. 무엇에 상대적이냐. 바깥의 것으로 잴 수 없다는 것이에요. 내 몸으로 잴 수 있습니다. 내가 감기에 걸렸을 때, 손을 넣었을 때의 느낌이 다르죠. 감기 걸렸을 때는 미지근한 물에 손을 넣어도 차갑고 떨려요. 건강할 때는 시원하죠. 그렇잖아요. 동일한 기운을 내가 지금 느끼는 건데. 그래서 기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주변 환경, 사회 환경 인간관계까지 포함해서 내 생명이 반응성을 주고받는 매개가 되는 것이 기에요. 가장 빠른 용례가 무엇이냐면 혈기입니다. <논어>에도 나오는 말이죠. 혈기 血氣. 그래서 이 기의 원초적 모델이 사실은 인간의 몸을 순환하는 피가 아니었겠는가. 이것이 보다 추상화되고 다양한 경험적 내용들이 되면서. 기라고 하는 보다 추상적인. 그리고 이 기의 본래의 출신은 무엇과 관련이 되냐면 호흡이랑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기는 고전 글자에서는 숨쉬다고 하는 용례로 쓰이는 경우도 꽤 있어요. 그러니까 리듬이죠. 달리 말하면. 그런데 이것은 무엇을 통해서 왔다갔다 하느냐. 숨 쉬는 것 코로 하죠. 음식물을 먹고 마시는 것. 우리는 음식물을 먹는다 그 다음에 배설한다. 이렇게 얘기하지만 사실은 천지의 기운과 소통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거예요. 내 몸은 고립된 하나의 폐쇄계가 아니라 천지와 소통하는 체계에요. 그리고 이 소통하는 체계가 무엇을 통해서 소통하느냐. 내 몸속에 있는 아홉 개의 구멍을 통해서. 눈, 코, 귀, 입 그리고 배설구까지. 천지의 기운을 들어오고 나가는 거예요. 이것이 원활하지 않을 때 내 몸의 화는 깨지는 거죠. 이 때 기가 천지의 기운과 내 몸이 기운이 서로 소통 왕래할 때 내 몸 속에서 움직이는 현상 전체가 정에 해당합니다. 특히 힘을 중심으로. 호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예를 들면 <춘추>라든가 이런데서 감정 같은 것들을 오미 같은 것들을 설명할 때 나오는 것을 보면 내 몸의 기운이 쭉쭉 위로 올라가는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까. 내 몸 자체의 기의 배치구조가 어떻게 들어오고 나가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고 감정상태의 변이에 따라서 내 몸속의 기의 배치가 달라지는 거예요. 감정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감성내지 감정이 아니라 내 몸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신체적 현상 자체가 어느 정도 표현이 됐을 때 감정이 되는 것이죠. 특히 얼굴을 통해서 읽을 수가 있는 거고. 그러니까 얼굴이 굉장히 짜증난 얼굴인데 앞에 가서 아무리 얘기해봤자 안되지 않습니까. 지금 얼굴에 짜증나고 그렇다는 것은 지금 내 신체 상태가 좋은 때가 아니니까 되도록 말걸지마라. 귀찮게 하지 마라. 이 얘기잖아요. 그것은 엄청난 언어에요. 그런데 지금 근대사회라고 하는 것은 그런 표정을 무시하고 살라는 것이거든요. ‘법대로 해’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장자가 말하는 무정이라고 하는 건. 달리 말하면 인간이다라고 하는 존재는 감정적인 동물이다. 이 표현은 아니죠. 내 몸속에 움직일 수 있는 내 기의 배치가 엄청나게 소용돌이처럼 휘돌고 있는데 좋을 때가 있고 나쁠 때가 있고 다양한 방식의 것들이 있고. 그리고 서로 우리는 그것을 읽을 수가 있어요. 저 사람의 마음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표정이고 정인거에요. 정이 얼굴에 드러나 있는 것이 표정이니까. 그런데 군주는 그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감추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無情. 마음을 들키지 말라는 얘기에요. 이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하는 훈련, 가장 커다란 것이 바로 神 이에요. 정신, 정신을 길러야 되요. 이것은 사실 끔찍해요. 저 같은 경우는 좋으면 얼굴이 펴져서 숨기지를 못해요. 싫으면 싫은 감정을 별로 숨기지 못해요. 일단 얼굴이 딱 굳어지고. 그것이 굉장히 심한 편이거든요. 나이를 먹어가니까 조금은 달라지긴 하는데. 체질적인 차이도 있어요. 한 번 잘 보세요. 사회적으로, 특히 화면에 노출되는 사람들. 연극 배우나 탤런트들을 보면 신기한 것이. 감정조절 하는게 쉽지 않다는 얘기죠. 본인이 직접 체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나리오를 보고 그런 것들을 표현해낸다고 하는 것이. 특히 제가 그런 전율을 별로 못 느꼈었는데 피아노라고 하는 영화를 보고나서 연기라고 하는 것이 저렇게 위대한 거구나 하면서 절감했던 적이 있어요. 벙어리로 나오지 않습니까. 주인공이 말을 못하는 데도 불구하고. 표정과 몸짓 이외에는 기댈 것이 없는데 그 모든 것이 다 읽히는 거에요. 연기자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저는 처음 알았어요. 그런데 오히려 정치에서는 거꾸로죠. 감정이나 내면의 생각 같은 것들을 일체 드러내지 않고 숨겨야지만 된다고 하는 논리에 들어 있는 거예요. 큰 일을 해야될 사람은. 그런 사람을 뭐라고 하죠. 후안무치라고 하고 조금 정서적으로 표현하면 무정하다고 하는 거예요. 양신론이라는 것이 반드시 그런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판단을 할 때 감정적인 것에 내가 휘둘리기 시작하는 순간 들리지 않아요. 아무리 좋은 얘기를 하고 바른 얘기를 하더라도. 그래서 어떻게 본다면 저 무정하다, 혹은 정신을 기른다라고 할 때 조금 좋은 말로 표현할 때 냉철한 이성을 항상 유지할 수 있는 마음 상태를 말하는거에요. 그래서 아까도 거울에 비유하죠. 내가 냉철한 이성적 상태를 잃어버리면, 저 사람이 정말 옳은 얘기 하는지 바른 얘기인지 판단이 안됩니다. 하지만 내 마음이 거울처럼. 이것을 표현하는 말이 허정虛靜이에요. 허정. 내 마음 속에 걱정이나 근심같은 것들이 싹 비워진 상태고 그 다음에 감정적인 것들이 일어나지 않고 마치 수면이 고요한 평정한 상태를 이루고 있는 상태가 정이고. 그래서 허虛는 비운다라는 뜻에 가깝다면 靜정은 수평을 유지하고 있는. 그래서 거울 같은 마음을 뜻해요. 허정한 정신이라는 말은 오늘날로 한다면 냉철한 이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특히 정치적인 아웅다웅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이니까요. 그래서 그 속에 담아내는 기와 관련한 다양한 논의들이 붙어있기 때문에 훨씬 더 복잡한 데 이것은 나중에 조금 더 보완하기로 하고요. --- ◆ 왕필의 무위, 이상적인 통치자의 덕목 마지막으로 이 부분도 상당히 바람직한 얘기기도 한데, 무위하면은 유가에서는 근데 기이하게도 공자의 말 속에 요임금을 얘기하면서 무위를 얘기합니다. 그 다음에 맹자는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대유위(大有爲)라고 얘기합니다. 도대체 이 관계가 뭐냐, 알기가 쉽지 않죠. 흔히 얘기할 때 군주가 모범을 보여서 하는 것이라고 얘기하는데 요임금이 남쪽을 바라보고서 가만히 공손히 하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하면서 무위라는 말이 나오죠. 거기에 관한 왕필의 주석입니다. 16쪽을 보죠. 커다란 박스가 있죠. 여기를 조금 길게 읽어볼게요. 이 속에는 왕필이 노자라는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가. 무명도 도가도비상도 무위 이런 식의 얘기들이 농축되어 있어요. 오로지 성인(聖人)만이 하늘과 같은 덕이 있도다. 성인이라는 것은 이 때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고대의 군주이자, 공자. 이 때문에 공자께서 “오로지 요 임금만이 하늘을 본받았구나”라고 칭탄한 것이니, 이는 당시에 요 임금만이 하늘에 필적할 만한 도를 온전히 실현하였다는 뜻이다. 또 공자께서 “높고 높아라”라고 한 것은, 형체가 없고 이름이 없는 것에 대한 칭탄한 것이다. 자 잘 보세요. 형체가 없고 무형, 이름이 없는 것, 무명. 누구에 대한 얘기에요? 요임금에 대한 얘기에요. 그러니까 이게 뭐 형이상학적이니 하는 실체니 뭐니 하는 이런 식의 아니란 얘기에요, 왕필의 논의를 읽을 때는. 그 다음에. 대저 어떤 이름을 이름짓는다 하는 것은, 밝게 드러낼 만한 훌륭한 것이 있거나 또는 길이 보존할 만한 은혜로운 것이 있을 때이다. 그런데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서로가 따르기 마련이고, 명분(名分)이란 바로 거기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사랑에는 전혀 사사로움이 없으니 거기에 어떤 은혜로움이 개입되겠는가? 또 지극한 아름다움이란 본래 치우침이 없으니 도대체 어디에서 이름이 생겨나겠는가? 이렇게 본다면 하늘과 같은 덕으로 교화를 완성한 저 요 임금의 도는 본래 그러함의 경지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제 자식만을 사사로이 하지 않고 자신의 신하였던 순을 임금으로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흉포한 자는 스스로 벌을 자초할 것이요, 훌륭한 자는 스스로가 공을 세울 것이다. 따라서 공적이 이루어졌다해도 그 명예를 세우지 아니하고, 벌이 가할 때에도 형벌에 맡기지 않는 법이다. 백성들은 날마다 쓰면서도 그 까닭을 알지 못하니 어찌 또한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 이 부분의 맥락을 가만히 보면, 무명, 무위, 무형. 노자를 주석하면서 왕필이 썼던 많은 용어들이 여기에 요임금의 덕을 형용하는 말로 나와요. 따라서 왕필에게 있어서 무위라는 것은 무명 이런 것들은 가장 이상적인 통치자의 모델을 형용하는 용어들이에요. 하늘을 얘기하더라도 하늘과 같은 덕의 의미고, 도를 얘기하더라도 도와 같은 덕, 최후의 경지, 바람직한 이상향을 대표하는 용어일 뿐이에요. 그것을 담지한 요?순 임금들을 포장하는 용어들이라는 거죠. 그런데 그가 하는 방식은 무사하고 무위해요. 그럼 무사하고 무위하다는 말은 왕필은 당시 어떻게 받아들였느냐. 이게 또 앞의 것과 똑같지 않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얘기할 것이 있는데요. 왕필은 맹자와 같은 텍스트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무위(無爲)에서 군자가 유위라는 말과 대치됩니다. 특히 한나라 초기에 군주는 무위하고 신하는 유위하다. 이거는 장자 『천도』편에 나오는 얘기에요. 군주의 행동방식을 무위라고 하고, 신하의 행동방식을 유위라고 얘기해요. 그러면 그 신하하고 신하를 다스리고 통제해야할 일을 군주가 하는 거죠. 그럼 이 맥락에서 가장 두드러진 이야기는 몇 가지가 있는데, 백성들의 안정에 보탬이 되는 바람직한 정책들을 수립하고 시행하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끌어안지 않고 이름도 남기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무사하고 무형하다고 얘기하는 거죠. 그런데 또 한 가지 굉장히 강조되는 게 있어요. 바로 선양이죠. 유학의 정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자상속이 아니에요. 유학은 기본적으로 선양의 정신이에요. 즉 아버지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덕 있는 사람이 덕 있는 사람에게 정권을 물려주는 거예요. 흔적을 자꾸 남기는 것, 유업을 쌓는 다는 것은 나의 무언가를 승계시킨다는 정치의 수단이 되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이 속에서는 그게 가장 중요하게 들어가 있어요. 그런데 이 말이 왜 무지하게 중요하냐. 왕필에게 있어서는 무위가, 논어에 나오는 말입니다. ‘名得其所’ 공자가 악곡을 정리하면서 어디 갔다가 온 뒤에 각각의 음악들이 제 자리를 잡았다는 표현으로 쓰는 말인데 왕필은 이것을 무위에 대한 말로 해석해요. 그리고 주석서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나오는데. 조씨의 위나라 정권이 등장하면서, 특히 조비에 이어서 황제가 되고 나서 관리임용정책을 바꿔 버립니다. 우리는 그것을 구품중정법, 구품관인법이라고 해요. 이 앞에는 거한량이에요. 거한량이라는 말하고 이거 하고는 다른데 사실 내용은 비슷한 거예요. 사실은 지방이나 중앙에서 이제 덕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추천해서 관직에 임명하는 것이 거한량이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이거는 중정이라고 하는 관리를 따로 둬요. 그래서 중정관이 사람을 추천을 하는데, 구품으로 추천을 해요. 그래서 처음에 출발이 몇 품에서 시작하는 사람은 나중에 시중까지 올라가더라도 한계가 있어요. 처음에 오품에서 시작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그런데 그 사람은 1품까지 올라갈 수 있고. 그럼 뭐랑 비교가 되겠습니까. 집안의 배경과 관련이 있겠죠. 나중에 그렇게 변질이 돼요. 이 제도를 도입한 이유는 앞에 이미 그런 인사권, 그 추천권을 장악하고 있던 사람들이 한의 유신들이에요. 그러니까 조씨 정권의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만들어내기가 힘들죠. 따라서 이 법을 받아들임으로 해가지고 한나라에 충성하려는 마음이 적고 새로운 정권에 참여할 의지가 강한 사람들을 관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만든 제도가 바로 이거예요. 달리 말하면 한의 유신들과 신흥세력들의 틀을 열어준 것이 이 제도예요. 그러고 나서 시간이 지나가니까 그 내부에서도 이미 그 귀족사회에서도 다 정해져 있어요. 왕필 같은 경우는 뭐라고 하냐면 제 능력에 따라서 임용된다면 사람들이 다투는 일이 없을 거다라는 얘기를 해요. 사실 제대로 된다면 똑같이 상관이 없는 건데 힘 센 자가 장군으로 임용하면 좋고, 문사에 뛰어난 사람을 행정관리로 임용하면 딱 좋을 텐데, 인사가 공정하지 않으니까 능력과 재능에 따라 사람들을 임용한다면 다툼이나 숭상이 있을 수가 없다. 그게 바로 ‘부상현’이라고 하는 노자 구절에 대한 왕필의 주석이에요. 즉 이거는 인사문제와 관련된 얘기에요. 다시 말하면 무위에 관련된 것은 관리 임용권이에요. 관리의 선발, 임용, 두 번째는 인사관리, 고과를 통해서 관리를 통제하고 조정하는 것들. 무위라는 것이 중요하죠. 능력 있는 사람에게 알맞은 자리를 주는 것, 그래서 왕필에게 있어서는 자기의 가문적 배경에 따라서 벼슬이 주어지는 것, 예를 들어 원소 같은 사람에게 당시에 득세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원래 대귀족이지 않았습니까. 조조는 막강한 배경이 있었지만, 환관의 아들이라는 핸디캡이 있었죠. 귀족세계에서 동등하게 대우 받기에는 핸디캡이 있었죠. 하지만 이 사람은 나중에 황건적의 병력을 진압하고 나서 남은 병사들을 자신의 병력으로 끌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득세한 사람이잖아요. 왕필은 후한에 굉장히 유력한 가문이었다가 후한 말기에 무너지고 조위 정권에 참여했지만 나중에 반역죄에 연루되어 커다란 처벌을 받았죠. 왕필은 그 반역자의 이름으로 죽었던 사람으로 죽은 사람의 후사로 들어간 자의 아들이기 때문에, 유력한 가문 출신이지만 뒤가 그런 사람인거에요. 말하자면 현대 사회에서 비교할 사람은 마땅치 않네, 얘기 안 해도 아시겠죠. 대단한 배경이 있는 것 같지만 애매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왕필은 자기가 대단한 재주가 있다고 했던 사람이고, 기록을 보면 굉장히 잘난 척을 많이 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젊은 나이에 고관대작들하고 청담을 하면서 추상적인 담화를 하면서 왕필을 당해낸 사람이 없었다는 일화가 무지하게 나오니까요. 그만큼 쎘다는 말발이 쎘다는 얘기죠. 근데 역시, 정치적으로 득세하지는 못했어요. 정시영간에 잠깐 참여하기는 했지만 결국 다른 개파에 밀려 제대로 힘을 받지도 못했고. 그런 사람들이 무엇을 얘기합니까. 합리적이고 투명한 인사를 하라고 얘기하죠. 그러니까 제대로 된 훌륭한 사람을 재상에 앉힐 때만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모든 인사가 합리적이고 투명할 때, 적재적소에 쓰이게 되는 것이다. 무위라는 것이 대단히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란 얘기죠. 하지만 이 속에는 무위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훌륭한 황제, 성인 같은 황제를 전제하고 하는 얘기에요. 성인이란 말을 당연히 sage라는 말로 번역하니까 그렇지 않은데 성인이란 말이 문인에 나온다면 그것은 당?금 황제와 동격입니다. 무조건 그렇게 읽어야 되는 거예요. 만약에 성인에 대해 비난 섞인 얘기를 하는 것은 황제를 욕하는 거예요. 그렇게 읽어야만 글이 쉽게 읽힌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속에는 도가와는 다른, 한?진 시대 노자적인 방식의 술수가 아니라 그것이 가능하게 전제가 군주가 가진 적이에요. 즉 도덕적 카리스마라고 번역하면 딱 좋을 거 같아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얘기하겠지만 이것도 역시 우주론적인 차원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를 보시면 되요. 제가 어떤 나이든 분을 알고 있는데, 대학 교수시지만 굉장히 험난하게 사신 분이에요.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운데도, 웃는 얼굴이 굉장히 선하신 분이에요. 그 웃는 얼굴을 보면, 저도 그렇게 마음이 여유로워 져요. 그런 사람을 우리는 보통 쉽게 덕이 있다고 얘기할 수 있죠. 그런 분이 뭐 좀 해달라고 부탁해달라고 하면 왜 안 해주겠어요. 그리고 그런 분들은 저에게 도움 되는 일 아니면 부탁 하지도 않아요. 바로 그와 같은,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는 ‘내가 인덕이 부족하다’는 표현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그 때가 바로 주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그러지 못할 때 사용하잖아요. 그것을 사회적으로 요즘 정량화하는 추세가 돼서 관혼상제 때 누가 많이 오느냐, 얼마를 내고 가느냐를 비교하잖아요. 그런데 그거가지고 덕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리를 측정하는 거죠. 덕을 측정한다는 것은 아무런 대가가 없는 거죠. 그래서 왕필이 말하는 덕화의 무위라는 것은 다음 공자를 얘기하면서 더 하겠지만 완전히 다른 얘깁니다.
그리고 이 무위가 가능할 수 있던 중요한 기제는 왕필은 왕충 이후의 사람이에요. 따라서 이 속엔 자연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어요. 왕필은 무위자연이란 말 자체가 가능한 사람이거든요. 그건 무슨 얘기냐. 거기 15페이지에 인에 관한 얘기가 나오죠. 노자가 인의를 공격했다. 텍스트 상으로 분명하죠. 왕필의 주석은 어떠냐. 인(仁)이란 것은 만들어 세우고 베풀어 변화시키니, 은혜가 있고 억지로 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만들어 세우고 베풀어 변화시키면 사물들은 제 참된 본성을 잃게 된다... 저절로 그렇게 부모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효라면, 바로 그 자연스럽게 되는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확장하는 것이 인이다. 정통적인 유가의 발언입니다. 인이라는 감정의 모델을 효로부터 끌고 왔죠. 왜 이 말이 당시에 발언하기 쉽지 않았느냐. 또 질곡이 있고, 딜레마가 있어요. 왕필이 살았던 당시의 100년 동안의 정치사를 생각 해 보세요. 조조는 한 시대에 충 했죠. 농간은 했지만 자신이 황제를 뒤엎지 않았단 말이에요. 그런데 조비는 황제를 뒤엎었죠. 충을 말할 수 없어요. 여기서부터 효가 들어옵니다. 그래서 중림칠현가운데 불효라는 이유로 완적은 죽을 뻔 했고, 해강은 죽는 단 말이에요. 불충이라는 말을 안 써요. 조위라는 정권 자체가 군주에게 ‘충’하지 못했기 때문에 ‘효’를 얘기하는 거예요. 말하자면 나한테 충성하지 않으면 부모한테 효하지 않는다는 말이야 하면서 죽여버린다는 말이에요. 이 표현을 오늘날에 대입해서 해석하면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담론하고 똑같은 거예요. 다 민주주의를 얘기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공격할 때, “반민주적”이다 라고 하면 상대방을 모욕주고 공격하기에 딱 딱 좋은 방식의 표어란 말이에요. 그만큼 혼탁하다는 얘기에요. 오늘날이 민주주의를 많이 얘기했던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라는 말이 무의미한 것처럼, 왕필은 그 당시에 인이니 얘기했던 것들이 실질적인 내용이 빠져버린 정치적 구호에 지나지 않으니까 무의미한 담론으로 남은 거예요. 그래서 왕필은 효를 복권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영역이 저절로 우러나는 감정, 자연에 속해있다고 얘기하는 거죠. 즉 이거는 무슨 규범을 세우고 표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박고 있는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무언가, 가장 바람직한 특히 엄마가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고 길러주는 마음에 대한 보답의 마음으로 움직이는 것. 그게 뒤바뀌어 있는 거죠. 사실은 효가 아니라 자가 모델이에요. 그런데 왜 이렇게 바뀌었느냐. 유학의 한계죠. 권위주의가 들어있기 때문이죠. 기제가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내리사랑이지만, 자식이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은 질서유지의 수단이란 말이죠. 효는 분명히 자연적인 거지만, 노력이 필요한 감정이라면 자의 감정은 노력하지 않아도 흐르지 않습니까. 사회적 현상에서 보면 효를 거래관계로 본다는 사회적 경고가 나오기도 해요. 사실은 부모와 자식이 어떤 성장과정을 겪었느냐 라는 설명이 필요한 건데, 사실 요새는유치원, 유아원에서 대리양육 하잖아요. 그러니까 자연적 정을 제대로 반향시킬 수 있는 조건을 우리가 못 만들고 있잖아요. 효가 자연적 감정이 아니다. 엄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감정에 비해서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감정에 대한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다고 진화론에서 얘기하는 것 같은데 저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한 가정 속에서 살을 부딪치고 같이 살아왔던 가정의 정도가 그것을 결정하는 거고 실제로 사회적 삶을 영유하는 과정을 통해서 부모자식간의 관계는 평생 동안 유지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다 달라요. 따라서 그런 관계가 옅어지고 희미해지는 것뿐이라는 거예요. 제대로 물을 주는 여건이 못 되기 때문에 더 시들해 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무위라는 것은 자연에 바탕을 두는 겁니다. 그리고 황제가 무위할 때 자연적인 것이 막히지 않고 제대로 소통되는 거예요. 그것을 근거로 해서, 바로 똑같습니다. 요임금 순임금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처럼 사랑하는 것이 인(仁)이 되는 거고, 정치적 방식으로 하면 무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속으로 가면 능력 있는 사람을 제대로 써라.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 가지 장치들이 기제 되어 있는데 순자에 의해서 예치라는 것으로 대표됐던 한나라의 유학이 맹자의 심성론 적인 기반으로 전회하는 틀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왕필이 최초의 신유학자라고 생각을 해요. 현학이 아니라, 신유학의 전조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현학은, 달리 말하면 노자에 대한 해석은 당시의 정권에서 권장했던 텍스트를 통해서 유가의 담론으로 전환시킨 의미가 있고, 예치적인 입장에 있던 현학을 맹자의 심성론적인 학문으로 전향시킨 데 굉장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타고난, 정확한 노자의 주석서이기 때문에 훌륭한 것이 아니라, 당제의 사상계 자체에 단면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문헌이라고 하는 거죠. 유가도 아니고, 단순히 도가도 아니고 당시의 시대의 정신을 어느 정도 담고 있는 텍스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무위가 하나의 단일한 개념이 아니에요. 그리고 단일한 개념이 아니고 네 가지 정도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내부의 지칭들도 당시의 제도나 다양한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요. 따라서 추상적이고 논리적으로 무위가 어떻다하고 해석하는 것은 사실 하나 마나한 방식인 경우가 많습니다. -- |
2021/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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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천 제3강 『노자』와 무위 1
제3강 『노자』와 무위 1 | ||
◆ 『노자』와 무위 원래 처음에 예고했던 것과는 조금 순서가 바뀌었죠. 바뀐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 개념에 대한 의미, 맥락을 짚어보는 작업을 하고 나면 뒤에 것을 얘기하기가 더 편할 것 같고, 여기에 대한 이해가 사실은 노자 철학의 이해 전반과 완전히 엇갈리는 부분이기 때문에 좀 바꿨습니다. 그래서 이 얘기를 먼저 하고 나면, 나중에 원래 하려고 했던 부분을 이야기하려고 할 때 훨씬 더 많은 다른 얘기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목이 좀 특이하죠. 마키아벨리즘인가, 아나키즘인가? 제목을 잘 뽑아요 원래 제가. 그런데 좀 낯설죠. 예를 들면 동아시아 사상에서 마키아벨리라고 이른 바 별칭으로 불리는 사람은 노자가 아니라 한비자죠. 그런데 잘 알려져 있지만 우리가 흔히 무시하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한비자의 정치술적인 사상이 도가의 형이상학적인 배경을 깔고 나왔다라는 식의 얘기는 철학사에서 흔히 하는 얘기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자의 무위를 해석할 때와 한비자의 무위를 이야기할 때는 전혀 달리 해석해요. 바로 그 부분에 관한 고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 그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테고요. 또 하나는 아나키즘이라는 용어인데요. 아나키즘이라는 말은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사람들에 의해서 무정부주의라고 번역되어 들어오는 바람에, 상당히 논의에 대한 헌탁이 큰 데요. 원래는 희랍어에서 온거죠. 권위의 중심이 되는, 권력의 중심이 되는 것이 없다는 뜻인데요. 정부가 없다라고 하는 것과 꼭 일치하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이 아나키즘이 최근에 부활하고 있죠. 동아시아 근대 사상을 이야기할 때도 아나키즘에 대한 이야기는 빼놓을 수가 없고요. 특히 노자와 관련해서 아나키즘은 중국 공산당 초기 멤버였던 진독수(천두슈 , 陳獨秀)가 노자 사상을 지칭하면서 노자에 들어있는 아나키즘 요소 때문에 젊은이들을 혁명의 대열에 참여시키는 것이 무척 힘들다고 비판하는 글이 「신청년」에 개재되기도 했다고 해요. 제가 원 텍스트를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지만요. 크릴이라는 사람이 바로 그런 얘기를 하는데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노자 무위에 대한 해석의 기조는 20세기 초반 거휘로부터 오는 것에 가까울 거예요. 아니면 그와 같은 해석이 가능하게 했던 어떤 주석적인 근거가 그 이전 문헌들 속에 있던가. 분명히 그런 방식의 해석의 기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생각하려고 하는 고대 텍스트로서의 노자, 그것만 갖고 애기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누가적 해석을 하든 도가적 해석을 하든 전혀 불가능해요.
자 그러면 아주 쉬운 얘기부터 시작을 해보죠. 보통 무위라고 하는 말을 無爲, 쉬우니까 한자로 써볼게요. 그냥 풀면 함이 없다인데요. 그런데 실제 위라고 하는 말은 두가지의 뜻을 갖고 있죠. 하다, 그리고 되다. 문제는 무엇이냐면 무위란 말을 그대로 텍스트의 맥락속에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면 좋은데 우리의 뇌리 속에는 두 글자가 첨가되어 반드시 같이 들어와요. 自然 이 말이 들어오지 않아도 이 말을 끼고 해석을 하는거죠. 이것이 우리의 착각입니다. 무위자연이란 말이 같이 나오는 텍스트는 후안시대 철학자 왕충의 책에서 비로소 나오고 한 대, 전한 시대 문헌 어디에도 이 두 가지가 같이 등장하는 바가 없다는 사실이 무척 중요해요. 그런데 더 재미난 것은, 사실 이 두 가지가 붙기 쉬워요. 과거 전통 속에서 무위자연이란 말이 붙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은데 지금 우리들이 자연이라는 말에 부여하는 의미를 생각하면서 두 가지를 붙여 읽으면 완전히 다르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自然 이 말이 서양의 nature의 번역어로 쓰이게 되면서 비롯되는 문제에요. 自然이라는 말이 무엇과 대립되느냐 文明. 이것과 대립되는 방식으로 생각을 하죠. 그래서 무위자연을 이야기하는 노자는 문명비판, 누가로 대변되는 이른 바 예교주의자들 혹은 문명론자들에 대해서 자연을 옹호하는 자연주의자라고 거의 도식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이것은 완전히 족보가 없는 해석이에요. 오늘 이런 개념에 대한 의미 맥락들을 자연스럽게 따져보게 될텐데요. 自然과 文明 이 말은 기본적으로 연속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아주 쉽게 알고 있는 맹자의 사단설을 생각해보세요. 왕필이 노자를 해석하면서 그와 같은 기조가 그대로 들어와요. 사단설이라고 하는 것을 쉽게 풀이하면 단초라고 하는데요. 본래 맹자가 그런 말을 쓸 때의 용어 방식은 뿌리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좋아요. 식물적인 은유로 하는거에요. 말하자면 인간을 한 그루의 나무, 혹은 식물에 비유한다면 내 씨앗 속에 도덕적인 마음이 활성화 된다거나, 보통 발한다고 하죠. 그렇게 될 수 있는 장치가 내 몸속에 유전자처럼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거에요. 그것이 적절한 상황, 환경, 체험에 의해서 적절하게 물이 들어가고 햇빛을 받고 할 때 싹이 점점 커 나가는 것처럼 자라나는 것이에요. 사단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당위에 의해서 혹은 억지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식물이 발화하듯이 내 몸속에 드리워져 있는 도덕적인 프로그램이 주변 환경에 따라서 적절하게 발화한다,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아요. 그렇게 이루어진 인륜적 질서가 바로 문명이에요. 그러면 그것이 자연에 반하는 것입니까 자연에 순하는 것입니까. 유가학자들이 꿈꾸었던 세계라는 것은, 어떤 인력질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장된 프로그램을 그대로 사회적 질서에 구현하려고 했던 곳 바로 공맹유학전통이에요. 무위라고 하는 말은 노자에서 두 가지 용어를 생각하시면 되는데요. 도와 관련해 서술할 때의 무위를 빼놓고 인간과 사회와 관련해서 무위가 두드러지게 쓰이는 경우는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 이 의미를 잘 곱씹어 보세요. 과연 이런 요소가 있는지. 無爲而無不爲 무위하면 하지 못할 것이 없다. 달리 말하면 무언가를 억지로 하지 않는다라고 해석해도 결국 무위는 자기가 하고자 했던 것을 못하는 바가 없다는 뜻이에요. 그럼 그 의미의 무게가 어디에 있는지 바로 생각이 될겁니다. 爲 ― 則無不治 무위를 실천하면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없다. 이것은 효과 중심으로 생각하는 건데요. 다른 아주 비견한 예를 들어볼게요. 제가 와이프랑 자주 싸워요. 결국 싸움의 끝은 화해잖아요. 부부간에 힘든 것이 아침에 싸워도 저녁에 꼭 얼굴을 봐야 해요. 그러니까 어떻게든 화해를 해요. 저희 집 사람도 철학과 출신입니다. 그래서 한 번 싸우기 시작하면 누가 잘못을 했는지 따져보자 하면서 그 날 일부터 십년 전 결혼하기 전에, 연애할 때 얘기까지 다 나와요. 그러니까 부부간 싸움에서 합리적으로 따진다는 것은 오히려 마이너스인 경우가 많죠. 그래서 방법을 바꿨어요 한동안. 막 뭐라고 하면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미안한 표정만 지으면서 가만히 있는 거예요. 화해를 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되는 거죠. 그게 한동안은 써먹혔죠. 그런데 조금 지나고 나니까 말을 안 하면 ‘너 불만 있냐?’ 그러죠. 이제 약발이 안되는 거죠. 여기에서 무위라는 것이, 계속 말을 통해서 누가 잘못했는지 따져보자. 그 origin을 따져봐서 니 잘못이면 니가 미안하다고 하면 되고, 내가 받아주면 되고 그렇게 해서 해소되던 것이 조금 시간이 지나니까 안되요. 사실 연애할 때는 됐는데 결혼하니까 바로 안 되더라구요. 이 말은 무위라는 글자가 황제가 정무를 보는 용상, 의자 뒤에 금박으로 붙어 있다고 했죠. 누구의 행위인가를 바로 직결해 해석할 때, 그 이후에 사대부들이 쓰는 해석이라든가 다양한 해석을 통해서 예를 들면 불교의 열반을 해석할 때 무위라는 용어를 쓰면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가죠. 하지만 선진 텍스트에서 무위는 특히 노자에서 무위는 이것이 대표적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연이라는 글자를 붙여서 해석하기 때문에 이것이 마치 반문명의 대명사가 되고요. 따라서 노자는 자연주의자이고 문명대신에 환경을 인위대신에 자연을 이런 방식으로 도식적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바로 20세기 동양철학 해석의 가장 커다란 문제가 서구철학의 반대급부로 도식적으로 해석해온데 있어요. 저쪽은 악이고 우리는 선이에요. 이와 같은 사고를 조장했던 대표적인 논리가 바로 중체서용론이고 동도서기론이에요. 그러니까 기술문명, 과학문명이 결국 1, 2차 대전 혹은 식민지 지배와 같은 폭력을 낳았다면 한국에서 말하는 도 중국에서 말하는 체 이런 것들은 우위의 것이다. 따라서 중체서용론, 동도서기론에서 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근대 철학적 용어로 따진다면 주체성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당해요. 거기에 온갖 것을 더하면 내용물이 공허합니다 사실. 추상적이잖아요. 이 사람들이 정치적인 용어로 특화시켰을 때는 그것이 주권이고 주체고, 민족이 되는거죠. 나중에 그걸로 엮어내려고 했던 것이요. 그걸 뒤집었던 이택후가 서체중용론이라는 말을 쓰는데 그 사람만 독특해요. 그런데 서체중용론이라고 하는 이택후의 말은 일반적인 중체서용론의 논리와 거꾸로인 것 같지만 사실은 내용이 똑같아요. 왜냐하면 이택후라는 사람이 중국 정신 혹은 중국 문명의 핵심이 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용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이 얘기는 다음 기회에 또 하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다 끝난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선진시대의 무위라는 말이 <노자>에만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노자>하면 무위, 무위자연이 너무 특화되다 보니까 마치 노자이외에는 무위를 이야기 하지 않은 것처럼, 분명히 텍스트 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배제하고 삭제시키는데 문제가 있죠. 오늘의 주제는 바로 그와 같은 커다란 지형도를 살펴봄으로써 <노자>의 무위가 상대적으로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가 확인하는 것입니다.
1페이지를 보시면 거기 유가문헌에서도 몇 번씩 나와요. 하지만 특별히 대단한 의미가 들어있지 않다고 생각들을 해왔죠. 그런데 현대 무위 연구에서 독특한 분수령을 이룬 사람이 H.G. 크릴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시카고 대학에 있던 사람인데요. 우리말로 번역되어있지 않은 <What is Taoism>라는 책에 논문들을 묶어서 냈는데요. 이 사람에 의하면 거기 한 번 보세요. 글 가운데 무위의 기원에 관하여 라는 글을 썼어요. 이것이 중국이 아닌 외국에서 나온 황로학과 관련한 최초의 논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무위가 <노자>에는 12번 <장자>에는 56번이 나오는데요. <노자>는 50%, <장자>는 32%가 통치와 관련한 맥락에서 쓰입니다. <장자>도 그렇다고 하는 것은 특이합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장자 네 편에는 무위라는 말이 세 번 밖에 안나와요. 그래서 <장자>의 무위 개념이 아주 독특하고 장자가 말하는 무위개념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아주 유의미합니다. 이런 부분들은 충분히 현대사회에서도 계승할 수 있는 개념내용들을 갖고 있다면 노자의 무위 개념은 우리가 비판적으로 저항해야할 형식에 가까운 내용입니다. 크릴은 이와 같은 빈도수를 통해서 유학 쪽에서는 무위와 관한 관심이나 활용이 적었던 반면 오히려 노장 쪽에 자주 빈출하는 것을 보죠. 크릴이 이 논문을 쓸 당시의 일반적인 인식구조가 본래 노자가 공자와 동시대라고 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던 말이죠. 그런데 크릴은 그 설을 따지지 않고 고사변파의 목소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노자>가 기원전 3세기경에 편집돼 문헌이라는 것 것을 지지해요. 따라서 이 사람 성격에 의하면 <장자>가 <노자>보다 앞선 책이에요. 그 논리에 따르면 장자 속에는 굉장히 관조적인 내용들이 풍부하죠. 분명히 엄존합니다. 따라서 훨씬 관조적인 지형도에서 <노자>는 특별한 어떤 관점을 특화시켜서 나온 도가라고 하는 해석을 이 사람은 지지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위라고 하는 개념의 기원은 <노자>나 <장자>로부터 기원한 것이 아니라 신불해(申不害) 라고 하는 이른바 형명법술(刑名法術) 혹은 형명지술(形名之術). 형명법술은 조금 있다가 구체적으로 다루어 보기로 하고요. 형명지술을 달리 말하자면 신하를 다스리기 위한 방법이에요. 형명지술은 통치술이면서 요즘 식으로 하면 부하직원을 관리하는 방식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형명지술을 이야기했던 신불해로부터 그 이후에 이른바 주술적 무위라고 할 수 있는, 통치술로서의 무위라는 개념이 발화합니다. 이러한 사상적 지형도 속에서 한나라 무제 때 이른바 과거제도의 사상적 기반을 이룬다는 것이 크릴이란 사람의 주된 논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과거제도라는 것이 유학에서 주장하는 제도처럼 알고 있죠.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로써. 하지만 유학이 주장했던 선발제도는 천거제에요. 유학은 천거제죠. 그것을 나쁜 식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굉장히 부정적으로 얘길 하는데요. 달리 말하면 아는 사람을 추천해서 쓰는거에요. 그럼 뭡니까. 끈이론이죠. 끈을 통해서 정계에 입문하는거에요.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는 끈을 통해서 정계에 입문한다는 것이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에요. 왜냐하면 모르는 사람을 쓸 수가 없죠. 모르는 사람을 썼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압니까. 거혈량이라고 하잖아요. 거혈량. 지혜롭고 도덕적인 사람. 그리고 충분히 그 위인됨을 확인해봤기 때문에 따라서 저 사람을 공직에 앉혀놓아도 딴짓할 리가 없다. 이것이 기본적인 기반이에요. 그리고 자기와의 관계. 따라서 조절할 수도 있고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죠. 모르는 사람은 통제 못하죠. 법관은 모르는 사람을 통제해야 한다에 기초해 있어요. 그러니까 선발하는 거죠. 그리고 상호경쟁과 감시, 이것이 한비자의 신하통치술의 핵심입니다. 요즘에 그런 책이 많이 나오잖아요. 처세에 관한 것. 처세에 관한 것이 한편으로는 필요성 자체를 완강하게 부인할 수 없어요. 그런데 갈수록 처세의 문제가 도덕적인 처세에 관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처세와 관한 것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무한경쟁의 틀 속에서 처세로 귀결되다 보니까, 사실 전통사회와 우리의 문화적인 풍토와 윤리적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다보니까 그것이 완전히 나쁜 말로 들리는데요. 전통사회에서는 문화적인 기제가 상당히 달랐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다 나빴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물론 중국 역대, 조선조 역대 관료들의 부패라고 하는 문제는 있죠. 하지만 그것은 베버가 이야기했듯이 오히려 과거보다 지금이 훨씬 더 심각한 문제지 않습니까. 전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똑같은 것처럼. 그래서 유학이라는 학문의 진정한 정신은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일반 시민윤리 차원이라고 하기보다는 공직자 윤리에요. 부패방지를 위한 심신수양이지, 우리는 심신수양할 기회가 없어요. 시키는 대로 하기도 버겁단 말이죠. 심지어. 그래도 술 마실 때는 즐거워야하는데 그래서 폭탄주라는 문화 웬만하면 익숙하시죠. 요즘은 기업에서들 잘 안마시고 그러는데요. 폭탄주 문화를 퍼뜨린 것이 군인집단하고 법조계 그것이 경제계까지 왔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한동안 폭탄주를 즐겨하는 사람이 있어서 먹어봤는데 소맥은 괜찮더라구요. 제일 많이 먹었던 것이 열다섯 잔까지 먹어봤는데 아침에 부담이 적어요. 양주랑 먹을 때 비해서. 저는 독주가 맞는 것 같아요. 술 그렇게 많이 하지 못했는데.. 그런데 문제는 닭갈비나 꼼장어 놓고서 맥주 마시고 소주 마실 때는 친구랑 편한 사람들이랑 매일 공자왈 맹자왈 이야기하니까 즐겁단 말이에요. 그런데 폭탄주 마시고 좋은 술 마시는 자리는 그 술자리는 거의 정치이거나 아부해야하고 잘 보여야 하고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하는 자리죠. 사실은 잠자는 시간 빼놓고는, 결혼하면 잠자는 자리도 힘들죠.. 잠자는 시간까지 합쳐서 스트레스 속에서 사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면 심신수양? 불가능하죠. 주어진 일이나 어떻게 편하게 하지 않을까. 그래서 저같은 사람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것이 있죠. 땡땡이. 땡땡이가 좀 있어야 하는데. 장자가 말하는 소요라는 것이 당시 서민들에게 적용된다면 요즘말로 땡땡이에요. 너무 비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땡땡이라는 말에 대해서 의미부여를 해야 해요. 우리의 삶의 입장에서 고전을 읽어야지요.. 조금 나아간 얘기네요.
3페이지 보면 에임스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선진 제자백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던 용어가 무위이고 특히 순자와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 무위는 군주의 덕이 드러나는 행위방식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나중에 또 확인해 볼 겁니다. 더군다나 슬린저랜드라는 사람은 무위를 주제로 해서 책 한권을 썼어요. 이 사람이 뭐라고 평가를 하냐면 자기수양과 관련되는 공통의 개념적 은유이자 정신적 이상을 표현하는 용어라고 상당히 기존의 해석과 가까운 방식으로 이야기하는데 여기에서 눈여겨 볼 것은 공통의 용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논어에서부터 모든 텍스트들에는 거의 다 무위가 들어 있고 예를 들면 <여씨춘추전>에는 무위가 안 나와요. 이렇게 한 두 문헌을 빼놓고는 대개 다 무위라는 말이 나와요. 그러면 무위가 같은 뜻이겠느냐 다르다는 것이죠. 노자의 무위말고 훨씬 다양한 무위의 세계가 있는데 선진시대로부터 한 대까지만 제한하더라도 대략 네 가지 정도 의미의 무위를 추출할 수 있어요. 물론 이것은 천이라든가 도와 같은 우주론이라든가 형이상학을 제외하고 인간과 관련한 분야에서 얘기할 때만 네 가지라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네 가지로 나눴습니다. 첫 번째는 주술, 두 번째는 소요, 세 번째는 양신, 네 번째는 덕화입니다. 대략 출전이 어디인지 짐작이 되죠. 주술이라는 표현은 회남자의 한 편명입니다. 이것은 에임스라는 사람이 그 편을 번역을 하고 논문을 쓰면서 사용했던 학위 논문 주제이기도 해요. 이것은 뭐라고 번역했냐면 Art of Rulership. 군주 노릇하는 예술, 총체적이라는 것이죠. 주술은 굉장히 폭넓습니다. 이 논의 속에서 크게 보면 양신이 주술에도 포함이 되죠. 하지만 양신이 반드시 주술에 포함되는 방식으로 움직이지는 않기 때문에 빼긴 했습니다. 노자에서는 주술과 양신이 대표적입니다. 천과 도에 관한 서술적 용법 빼놓고는 주술과 양신이 가장 기조적으로 커요. 하지만 본 텍스트에서는 주술쪽이라면, 하상공 주석에서 두 가지를 긴밀하게 결합시키는 부분은 양신과 주술입니다. 그리고 소요는 <장자> 소요에 나오는 포현입니다. 그래서 소요 방식의 무위개념이 다른 것과 차별되고 독특합니다. 그리고 양신은 나중에 도교 계열로 이어져서 굉장히 신비주의화 되고 다양한 방식의 갈래들이 나옵니다. 요즘말로 쉽게 말하자면 명상술이에요. 다만 우주론 혹은 기론 그 다음에 당시의 의학사상 등과 긴밀한 연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만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양신이라는 용어를 쓴 겁니다. 즉 정신을 기르는 것과 관련된 것이죠. 그래서 무위가 정신을 기르는 행태를 표현하는 말 혹은 그 경지를 의미하는 말로도 나옵니다. 장자에서도. 그다음에 덕화는 보시면 아시겠지만 유가적인 개념입니다. 유가적인 개념에서 본다면 군주의 덕이 온 천하에 실현되는 것 그것은 곧 치의 상태를, 치천하를 이룬 거죠. 그것이 곧 덕화고 그와 관련된 것을 무위라고 표현합니다. 논어에도 나오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고, 왕필이 <노자>를 해석할 때 무위 개념은 바로 그것과 연결하는데 있어요.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오늘의 또 한 가지 주제이기도 합니다. 4페이지를 보시면 먼저 두 가지를 묶었는데요. 제가 원래대로 하면 주술과 양신을 묶는 것이 훨씬 좋아요. 그런데 왜 주술과 소요를 묶었느냐 하면 대비를 위해서입니다. 어떤 분은 모든 문명적 요소의 부정과 자유방임이라고 무위를 해석해요. 이것이 바로 기조입니다. 이 기조를 우리나라에 퍼뜨린 것은 함석헌 선생님의 해석이 가장 큰 역할을 했는데요. 함석헌 선생님도 본인이 독창적으로 했다기 보다 톨스토이가 노자를 번역까지 하려 했었고 꽤 많은 글을 썼어요. 그런데 함석헌 선생님이 톨스토이 평화사상에 심취했었죠. 톨스토이마저도 노자의 무위를 극찬하는 것을 보면서 그 쪽을 연결시켰고 특히 함석헌 선생님이 그런 예를 들었죠. 50년대 초반, 일제 때 동원전쟁 때문에 민둥산이 된 우리나라 산에 조림사업을 하기 위해서 영국의 유명한 산림전문가를 초빙을 했대요. 그런데 이 사람이 공항에서 출국하기 직전에 기자회견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한국의 자연을, 생태계를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에 let it be 라고 답했다고 하죠. 그래서 도올 선생님은 노자와 20세기 강의할 때 let it be 음악 틀면서 노래까지 했잖아요. let it be 우리말로 하면 뭡니까. 냅둬유. 간섭하지 마라, 건드리지마라 라고 하는. 그래서 그것 때문에 우리사회에서는 노장사상하면 자연주의, 환경, 생태 쪽으로 연결하는 교두보를 만들었던 거예요. 그런 것들이 우리사회의 중요한 계기였던 거죠. 노자나 장자라는 텍스트 속에 환경에 관한 고민 전혀 없는데 말이에요. 우리에게 소중한 노자나 장자는 함석헌 선생이라는 얘기에요. 얼마나 파급력있습니까. 제가 책 몇 권 쓰는 것보다 함석헌 선생이 한 번 얘기한 것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해석하잖아요. 그것이 바로 살아있는 힘을 가진 담론이라고 하는 거죠. 노자의 원래 텍스트가 이렇고 저렇다는 학적인 것보다 실제로 우리 삶속에서 노자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노자가 무슨 진리를 갖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자에 빙자해서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그것이 중요한 거죠. 그 이야기가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논리가 아니라 인간 누구나 같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하는데, 노자를 통해서 환경을 아껴야되고 그것은 간섭하지 않는 데 있고, 또 마찬가지로 독재가 국민의 삶에 간섭하지 않을 때 그들의 삶이 풍성해질 수 있다. 바로 함석헌 선생의 무위 개념 해석이 두 가지입니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불간섭과 그리고 치자, 정권의 국민에 대한 불간섭. 즉 자유와 민주죠. 달리 말하면 우파담론입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그것이 진보적이고 좌파적인 담론의 대명사 속에서 역할을 해온거죠. 오늘날에 그 지형도가 깨지고 나니까 약간 복잡해졌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보수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홍세화 선생님의 해석입니다. 대한민국의 보수는 오히려 다석 유영모, 함석헌, 그리고 문익환 선생님 같은 이런 분들이야말로 한국에서 계승할만한 의미가 있는 중요한 보수주의자들이다. 참 맞는 것 같아요. 그럼 요즘 말하는 보수는 뭘까요. 참 알쏭달쏭하죠. ---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03_0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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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천 제2강 『노자』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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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천 노자 강의 제1강 『노자』제대로 읽기
제1강 『노자』제대로 읽기
제2강 『노자』에 관하여
제3강 『노자』와 무위 1
제4강 『노자』와 무위 2
제5강 『노자』와 페미니즘 1
제6강 『노자』와 페미니즘 2
제7강 『노자』의 소국과민
제8강 『노자』에 대한 다양한 해석
제9강 상상력과 과학
제10강 『노자』와 자연
제11강 『노자』와 성인 1
제12강 『노자』와 성인 2
제13강 함석헌과 『노자』
제14강 함석헌 노장 해석의 특징
제1강 『노자』제대로 읽기 |
◆ 『노자』를 대하는 잘못된 독법 반갑습니다. 앞으로 8주에 걸쳐서 제목이? 안 적혀 있어요. 혼돈으로부터의 탈주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노자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될텐데, 먼저 노자하면 저는 사실 시중에서는 철학자로 떠오르기 쉽지만 저는 노자하면 놀자로 떠올라요. 노자를 자꾸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ㄹ을 붙여서 ‘놀자’ 대신에 몸으로 노는 게 아니라 머리로 노는 거지요. 단어를 가지고, 개념을 가지고. 노자라고 하는 책은 지금부터 대력 2300년 이전에 태어난 책이죠. 워낙 오래된 책이다 보니까 또 우리말로 돼 있지 않고 한자로 돼 있죠. 그러다보니까 번역의 곡절도 있고 시대마다 노자를 읽던 방식도 다르고 눈이 달랐고. 특히 20세기에 들어와서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유교담론이 커다란 상처를 입고, 거기에 대한 대안적 담론으로써 19세기 말부터 노자가 주목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이후에 도올 선생님이 워낙 독특한 강의와 어법과 그리고 상당히 세련된 해석을 통해서 노자를 많이 소개했고. 그리고 도올 선생님 강의 속에서는 서양 철학적인 문제의식과 동양 철학적인 문제의식이 같이 만나는 지점에서 많이 이루어지다보니까 굉장히 철학적으로 읽혀 왔어요. 그런데 오히려 한국 사회에서는 1990년대를 거치면서 그 방향이 역전됩니다. 달리 말하면, 80년대 90년대 초반까지 노자를 읽었던 시각은 이른바 서양에서 말하는 철학 학문 분야 혹은 그 방식에 맞춘 노자 해석이 주류를 이루었어요. 그랬다가 90년대 들어오면서, 한국 담론계에서는 이른바 진보주의 담론이 방향을 잡지 못 하고 상당히 수그러들고 미국을 거쳐서 들어온, 이른바 프랑스 철학이지만 사실은 미국의 여과를 거친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하는 사상이 거의 전 담론 분야를 장악했다고 표현했던 건 애매하고 유행하다시피 상당히 많은 호응을 받았는데. 오히려 거꾸로 노자의 경우는 그 해석이, 역사적인 시각을 통해서 노자의 본 텍스트의 의미 그리고 시대마다 달리 해석되었던 주석서를 통해서 어떻게 읽혀졌나를 보는 관점으로 이동했습니다. 특히, 90년대 중반에 우리가 흔히 노자의 가장 뛰어난 주석서라고 하는 왕필의 현학, 그 당시에 노자를 해석했던 철학 사조를 현학이라고 하는데, 현학적인 사조마저도 상대화시켜서 봐야 한다는 담론이 뜨면서 저도 마찬가지로 그런 분위기에 있어 학위 논문을 「노자」와 「하상공」이라고 하는, 가장 이른 두 주석서죠, 두 주석서를 비교하는 주제로 학위를 땄습니다. 저 때에 그와 같은 방식의 연구가 상당히 유행할 때였고요. 주석사가 다시 부흥하게 된 계기는 90년대 초반까지, 특히 70,80년대를 거치면서 노자를 만든 시각은 노자라고 하는 텍스트 속에서 보편적인 논리나 가치와 담론을 철학적인 언어로 잘 발견하는 것이 목표였어요.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이제는 90년대 들어서면서 많이 달라졌죠. 사실 IMF가 터지면서 많이 어렵긴 했지만, 그 이전 과거에 비하면 경제적으로 굉장히 풍요로워졌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신감이 생겼고, 그리고 구태여 서양적인 방식이라는 것과는 다른 우리 동아시아 문화의 고유한 무엇. 혹은 역사적인 그 무엇을 단순히 서양의 보편과 대립시키거나 비교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자체가 무슨 내용을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목소리가 처음 일어난 시기가 그때였습니다.
7,80년대에 일으킴 담론이 사실 국가 주도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시각이 강했다면 90년대 일어난 고전의 재해석은 상당히 다원적인 경향이 많았고 반드시 보편적인 논리에만 매몰돼 있지 않았어요. 그러다보니까 훨씬 더 본래 텍스트의 목소리를 살리는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텍스트들에 비해서 노자나 장자의 텍스트는 연구자 숫자가 굉장히 적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의 경우는 조선조에 유학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경우는 땅덩어리가 워낙 넓다보니까 유학이 주류담론이었다 할지라도 지역별 특색이 많았다면 조선반도는 상대적으로 작죠. 정치적으로도 통합돼 있었고. 그래서 주류사상과 다른 방식의 논의를 한다는 것이 상대적으로 훨씬 어려운 조건에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오히려 유학에 대한 철저한 반성은 하지 못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전통을 해석하는 방식이 서구와는 또 다른 중국과는 또 다른 방식이 많이 나왔고요. 노장을 해석하는 해석이 실제 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논의를 따져 보면 굉장히 다양해요. 하지만 조금 나아가서 보면 한국사회처럼 노자를 해석하는 시각이 상당히 균질적인 데도 드뭅니다.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서 노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한국에서 훨씬 균일하다고 할까요. 그런데 조금 차이가 있다면, 서양철학을 하신 분들이 노자를 보는 것과 동양철학을 하신 분들이 노자를 보는 시각과 상당히 선을 긋기 시작한 때도 90년대 중반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걸 민족주의라고 말할 수도 없고, 객관적인 동양 담론이라고도 표현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지점에서 시작했는데, 다행인 것은 최근에 그와 같은 시각이 세계적으로 상당히 붐을 이루고 있고. 그 전에는 많이 소개되지 않았던 영미권과 프랑스 쪽 연구 성과도 많이 번역이 되어서 소개되고 그래서 최근에 학자 충원은 적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더 풍부한 논의 속에서 노자가 들어와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 아쉬운 건, 동양철학이 현실의 문제와 씨름하는 고리를 상실하게 됨에 따라 동양철학 담론이 많은 부분에서 공허함을 벗어나지 못 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저는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아주 좋게 표현하면, 노자는 천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고 해요. 왜냐하면 노자로 학위하는 사람마다 말하는 노자가 달라요. 다양하다는 얘기죠.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어떤 모양새를 갖고 있냐면, 노자가 만병통치약입니다. 이게 가장 적당한 표현이에요. 페미니즘에 관심있는 분들은 노자를 읽으면서, 인류최초의 페미니즘 사상가라고 선언해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환경 문제가 뜨면, 노자가 최초의 환경 철학자래요. 그 다음에 어떤 문명, 제도, 규범의 문제가 서두화되면 노자는 애초부터 유가의 도덕적 전제주의, 엄격주의를 비판하면서 나온 사상이기 때문에 ‘굉장히 다원적이다’ 말하자면 한국 사회 혹은 동아시아 사회의 어떤 문제가 되는 현실이 있다고 하면 노자는 거기에 대한 反. 그래서 나름의 대안이 있는 것처럼 얘기되는 게 한국에서 노자 담론의 모습니다. 그런데 만병통치약은 어디서 파는지 아시죠? 약국에서 안 팔죠. 시장통에서 이른바 검증되지 않은 이상한 물질이 들어있어서 쇼를 보여준 다음에 잘 팔리는 것처럼, 달리 말하면 실제로 현실의 문제와 토론하고 대화하는 위치에서 사상이 팔리는 것이 아니라 만병통치약이 시장에서 팔리는 것처럼 유가도 마찬가지지만, 노장 철학이 실제 현실의 담론에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면서 논의된 적이 있습니다. 다만 오로지 그냥 안티, 반. 따라서 “뭔가가 있을 거다”에서 끝나냐. 왜 그러하냐.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물론 우리나라 학자의 수준이 낮다. 그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최근 번역서 나온 걸 보시겠지만, 과거에 고전번역이다, 혹은 최근에 번역이 나오더라도 20년, 30년 전에 텍스트들이 번역돼서 나오지만, 요즘에는 6개월 전에 나온 책들 2,3개월 후에 바로 나오기도 하고. 지금쯤 출간되는 책들이 올 가을이나 겨울이 되면 번역돼서 출간된다는 거죠. 달리 말하면 서구사상을 수집하는 방식으로 학문하는 분야가 있다 하더라도 동시적인 사유를 우리가 펼치고 있다는 겁니다. 단순한 수입이 아니라 뭔가 필요성에 의해서. 저들이 부딪치는 현실과 우리가 부딪치는 현실이 문화적, 역사적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수위는 똑같다는 거죠. 그런데 바로 이러한 배경이 오늘 첫 번째 강의 제목, 제목이 어디서 들어본 것 같죠? 소설 제목이에요. 이청준 선생님의 소설이죠. 단편 소설 제목인데, 소문의 벽. 달리 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노자에 대한 이야기, 특히 예전에 강의를 나가면 두 가지 질문을 많이 들어요. 첫 번째는 그 당시에 유행하고 있던 담론들을 노자 텍스트를 통해서 읽어낼 수 있느냐라고 하는 진지한 얘기가 있다면, 어떤 구절을 읽었는데 이렇게 생각이 되는데 맞느냐고 질문을 해요. 이상한 방식의 질문이죠. 맞느냐 틀리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느냐가 관건임에도 불구하고 텍스트를 올바로 봤느냐 안 봤느냐의 물음으로 바뀐단 말이에요, 왜? 한문이라는 것 때문에. 여러분들이 가진 교재는 한문이 되도록 없고 나와 있는 번역문들을 그대로 실었어요. 제가 구태여 번역을 안 하고.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확인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특별히 오역이다 싶지 않은 부분들은 번역서를 활용하는 게 좋죠. 그래야만 서로 대화를 할 수 있으니까. 한문을 놓고서 서로 틀리니 맞니 하는 것은 전문적 학자가 하면 되는 거고, 같이 공유할 수 있는 텍스트가 있다고 한다면 번역서를 놓고서, 어떤 번역어가 더 좋다, 아니다 하는 방식으로 토론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해요.
부제가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누구의 노자인가’라고 돼 있죠. 많이 들어본 방식의 어법이죠? 제가 센스가 많다 보니까 그런 방식의 언어에 강해요. 그 내용이 뭐냐면,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노자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 다 소문으로 들은 거예요. 왜, 한문 원전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적다. 그리고 한문 원전을 볼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도 노자는 역사적으로도 합의된 바가 없고, 현재적으로도 합의된 해석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노자는 천 개의 얼굴을 가졌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한 번 읽어 보세요. 그런 책 중에서 가장 좋게 볼 수 있는 것이 다양한 주석서들을 동반하고 있는 좋은 번역서들이 많이 나왔어요, 지금은. 왕필본만 하더라도 여러 개가 있고 관점본도 최근에 두 세 가지 나왔고. 그 다음에 가장 빠른 노자라고 하는 박정본 노자도 아주 꼼꼼한 번역이 얼마 전에 출간됐습니다. 번역이 상당히 좋아요. 그러다보니까 여러 가지 텍스트들을 같이 비교하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수준까지 와 있다는 거죠. 그런데 주석서에 의존하지 않고 그냥 노자라고 하는 말을 곱씹으면서 스스로 생각을 할 때 아주 좋은 번역본이 이 김영옥 선생님이 번역했던 노자와 21세기 보다는 이 책이 훨씬 더 일대일과 책과 대응하기엔 좋습니다. 어디를 펴든 거의 순 우리말로 돼 있기 때문에, 물론 한자로 돼 있는 부분은 넘어가고 한글로 돼 있는 부분만 딱 봐도 대체적으로 고등학교 졸업한 분들이라면 다 읽을 수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번역문은 굉장히 쉬운데 “노자가 철학자래, 그러니까 뭔가 센 게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거꾸로 잘못 생각한다는 거죠. 저는 책을 읽을 때 나쁜 습성을 갖고 있는데, 그래도 제가 철학 박사를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 머리로 잘 안 읽히는 책은 나쁜 책이라고 생각해요. 저자가 표현을 못 했거나 그걸 안 봐요. 제가 서양현대철학을 읽을 때, 제 머리로 다 이해된다는 건 쉽지 않죠. 나름대로 연구를 해 가지면서 읽어야죠. 그런데 동양철학을 읽을 때 제 머리로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할 때 그 사람이 제가 알지 못하는 굉장히 독창적인 사고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 분의 표현이 상당히 아직 나에게 익숙하지 않거나, 아니면 별 볼일 없는 얘기일 수도 있죠. 어느 쪽이냐는 건 좀 더 생각을 하고 반성을 해 봐야 하는 문제니까 그건 판단을 못 하겠어요. 그런데 일단 같은 한글로 쓰는데, 내 머리로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면 의심해볼 필요가 있어요. 저는 학자로서 토론해야 하지만 여러분은 “아 내 머리가 나빠서” 이렇게 하시면 안 되고 “나를 이해시켜줘”라고 요구를 하셔야 합니다. 그게 바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학문하는 방법이 되겠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도올 선생님이 번역한 「길과 어둠」. 제목까지도 풀었잖아요. 이 책이 아주 좋아요. 저도 이 책을 세 권 째 사는 거예요. 첫 번 째 것은 하도 많이 낙서를 해서 안 보다가, 이사 가는 와중에 잃어버렸고. 얼마 전에 책을 사서 옆에다 필기도 안 하고 그냥 내용만 읽으면서 우리말식으로 어떻게 하면 이걸 생각해 볼 수 있을까? 라는 소재로 가끔씩 이용하기도 합니다. 자, 그런데 부제가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누구의 노자인가” 라고 한 이유는, 노자 시대에는 환경문제라는 게 없었어요. 당연히 환경 철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환경문제에 대한 처방으로써 혹은 철학적 사유로서 재해석할 수 있는 뭔가가 있다는 건 맞죠. 하지만 노자가 환경 철학자나 혹은 페미니스트다 혹은 반문명론자다 라고 표현하는 방식은 일단 부적절합니다. 왜? 다 현대어거든요. 그렇게 보는 순간 우리는 이미 우리 시각의 혹은 우리 현실 문제를 가지고 텍스트를 보고 있는 거예요. 따라서 그 당시의 노자가 그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봐야 하는가? 돌아가야죠. 250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야 하고 그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역사학계에 계신 분들이 많이 연구를 해놨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곤란하다는 걸 우린 대충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일단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거의 문맹률 제로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아주 나이가 많으신 90에 가까운 분들도 60,70,80살이 되어서 한글 공부하셔서 글 읽는 분들이 많아요. 특히 인터넷 때문에. 여러분들 많이 보셨죠? 이건 전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일이지만 역사적으로도 희귀한 일이에요. 한 언어공동체에 있는 사람들 태반이 책을 읽고 대화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은 엄청난 겁니다. 고대 중국으로 가면 몇 사람이나 책을 볼 수 있었을까? 확인이 안 되죠. 문자를 읽고 쓰는 인간은 무지무지하게 적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노자」라고 하는 책이 지금처럼 기계로 찍어 나와서 서점만 가면 살 수 있고, 서점도 갈 필요가 없죠. 인터넷 들어가서 신청하면 책이 온단 말이에요. 그것도 나갈 때보다 더 싼 값으로. 우린 굉장히 신기한 세상에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다보니까 기본적인 사실만도 다른데 우리는 우리가 독서하는 행태, 공부하는 행태, 생각하고 토론하는 방식을 거기다 나도 모르게 대입시켜서 마치 동시대처럼 사유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우리는 장점이라고 20세기 내내 칭찬받아 왔죠. 하지만 결론은 뭐냐? 별 얘기 없더라. 공허하더라. 왜? 워낙 문제가 다르니까. 그래서 오늘 강의의 제목이 “소문의 벽”인 까닭은 일단 노자와 관련된 기존의 상식을 걷어내고 내 눈 속에 혹은 내가 낀 색안경을 벗고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기 위해서 어떤 자세로 읽어야 할까를 조율하는 것이 오늘 강의의 목표입니다. ---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01_02.htm ◆ 노자의 기본적인 사상 처음부터 원문을 읽어나가면 어려우니까 에피소드 세 가지를 가지고 얘기해보죠. 이 세 가지가 2500년 동안 논란이 많았던 문장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이 오늘 듣게 될 내용은 상당히 독특한 해석입니다. 제 해석이 아니라 2000년 전의 해석입니다. 노자 22장을 보면 哭則全, 枉則直 곡즉전, 왕즉직이라는 짧은 구절이 나와요. 번역이 도올 선생을 번역을 따 왔어요. “꼬부라지면 온전하여지고, 구부리면 펴진다.” 무슨 얘기에요? 알 수가 없죠. 그럼 가장 똑똑한 천재 주석가라고 했던 왕필 주석서를 읽어보죠. 이 책은 노자가 기원전 4,3세기쯤에 만들어졌다고 가정하면, 이 사람이 249년에 죽었으니까 기원후 3세기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럼 600년 차이가 나죠. 지금부터 600년 전이라고 하면 언제예요? 1400년, 임진왜란 즈음이 되겠네요. 그 때랑 지금과 엄청 다르죠. 천재 왕필이라고 해서 노자의 뜻을 정확히 읽었을까? 지금 여러분들이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 선생의 책을 보면서 한학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양반들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동시대인이 사유하는 것처럼 이해하기가 쉽지 않죠. 마찬가지의 생각 정도를 갖고 보셔야 해요. 자, 한번 읽어 볼까요.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면 그 밝음이 완전해진다. 스스로 옳다고 하지 않으면 그 옳음이 드러난다.” 원문보다 더 어려워요. 어려우면 일단 다시 그 보다 조금 더 앞에 나온 하상공이라는 책에서 주석한 내용을 보죠. “자신을 굽히고 대중을 따르며 제멋대로 하지 않으면 온전해진다. ‘왕(枉)’이라고 하는 글자는 구부린다, 굽힌다는 뜻이다. 자신을 구부리고 남을 펴주면 서서히 자기 자신이 저절로 곧아지게 된다.” 조금 더 이해가 쉽죠? 쉽게 말하면, 아주 쉬운 표현으로 하면 자기 스스로를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고 낮출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늘 그런 문장을 생각할 때는 거꾸로 생각하게 됩니다. 왜? 이런 방식의 표현을 듣는 사람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올라갈 때까지 내내 꼴등만 했어요. 간신히 중학교 졸업할 때 인문계 고등학교에 턱걸이로 미달로 입학했단 말이에요. 대학도 미달로 합격해서 간신히 졸업한 사람. 만약에 그런 사람인 경우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 잘났다, 잘난 체 하는 사람 아마 드물 겁니다. 그런데 전통 사회에서는 지금처럼 평등한 개인들의 사회가 아니라 신분적 굴레가 막혀 있는 사람들이에요. 제가 대학교 1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엠티를 갔었어요. 강원도 어딘가에 굉장히 오래된 고택이 있었는데 어떤 집인지는 모르겠지만 종갓집인 것 같아요. 아 제가 본 게 아니라 텔레비전에서 본 거네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현실이 왔다갔다 해요. 비슷한 걸 본 것 같은데 드라마에서 본 것 같네요. 웃기려고 한 거, 더 웃으실 줄 알았는데 안 웃으시네. 그 드라마에서 본 장면이, 어떤 사람이 저처럼 엠티를 가서 잘못 들어가서, 정원이 너무 고풍스러우니까 신기한데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가니까 6,7살 갓 초등학교 들어갈 때쯤 나이의 조그만 애가 한복을 입고 뒷짐을 지고 왔다갔다 하는 거예요. 동시에 눈이 마주쳤더니, 이 사람이 쭈뼛하잖아요. 일단 남의 집인 것 같은데 들어갔으니까. 그 순간 꼬마는 당당하게, “웬 놈이냐!” 종갓집 양반의 모습인 거죠. 우리가 볼 때는 그게 코믹하고 우스운 장면처럼, 옛날에는 저랬나봐 정도이겠지만 만약 당시 조선사회에 그랬다고 하면, 상민이 남의 집에 들어갔다가 양반인 대갓집 도령한테 한 소리를 들었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바로 땅에 엎드렸을 가능성이 높지 않겠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몸감이 다르다는 거죠. 이 시대에 낮춰야 한다, 그 꼬맹이가 낮추는 법을 배우겠습니까? 그런 미덕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하는 조언이에요. 그런데 그런 걸 아주 리얼하게 보여주는 해석이 있습니다. 보통 노자 해석서에서는 이 텍스트를 제외시켜요. 너무 리얼하니까. 저는 당연히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회남자」라고 하는 책인데, 한 무제의 삼촌뻘 되죠. 유안이라고 하는 사람. 나중에 반역으로 몰려서 죽게 되는데 그 사람이 회남지역의 왕을 했었어요. 그래서 회남자 혹은 회남왕이라고 불리는데 이 사람이 남긴 책이라고 해서 회남자라고 불립니다. 춘추전국시대의 도가, 혹은 황로학계열을 집대성한 책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 중에 ?도응훈? 편이 있는데, 맨 마지막에 세 개 에피소드만 빼놓고 나머지 전체가 하나의 역사적 일화를 제시하고 그 제시를 통해서 노자가 이런 말을 하려고 한 것이라는 방식으로 끝나요. 달리 말하면, 이야기 보전의 노자 주석서라고 볼 수 있죠. 왕필이나 하상공보다 훨씬 더 실제 대화에서 예를 들면서 적은 주석서라고 볼 수 있어요. 하나를 읽어보죠. 【진(晉)의 공자(公子) 중이(重耳)가 망명 생활을 하던 중 조(曹) 나라에 들렀는데 조 나라 군주가 무례하게 행동했다. 조군의 대부였던 이부기의 아내가 그에게 말했다. “우리 주군께서 진의 공자에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보니 모두 뛰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중이를 옹립하여 진 나라에 복귀하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조 나라를 칠 것입니다. 당신께서 사전에 덕을 베푸는 게 좋을 것입니다.”】 친절을 베풀라는 거죠. 【그래서 이부기는 중이에게 항아리에 음식을 담아 보내고 또 벽옥을 바쳤다. 중이는 그 음식은 받았으나 벽은 돌려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이가 진 나라로 돌아가자 군사를 일으켜 조 나라를 쳐서 승리하였다. 중이는 삼군(三軍)에게 명하여 이부기가 사는 동네에는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曲則全, 枉則直.”】 이러면 훨씬 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사람이라고 하는 게 우리 일상인의 삶은 다르죠. 일상인의 삶 중에 가장 힘든 건 매일 똑같은 삶이 반복된다는 것. 지겹잖아요. 일도 똑같이 해야 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돈도 안 벌리고. 뭔가 미동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거죠. 그리고 노력하는 것에 비해서 자신이 향유하는 게 적고. 지금도 그럴진대, 과거에는 신분의 굴레에 갇혀서 아버지가 노비면 나도 노비고. 끔찍하죠. 그런데 정치인들은 우리와는 사는 방식이 다르죠. 물론 이때 정치인이라는 게 지금처럼 나름대로 정치판에 들어가서 정치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타고나면서부터 신분이 그러하니까 정치를 하는 사람이에요. 지금은 그렇게 번역을 안 하지만, 이 사람을 표현하는 말이, 좋게 번역해서 선비(士)라고 하죠. 사(士)라고 하는 말은 2500년 동안 시대마다 의미가 굉장히 다릅니다. 그런데 공자도 사(士)출신이고, 조선사회를 지배했던 사람들도 사대부, 선비들이었죠. 그 의미는 상당히 다르긴 하지만. 仕 이게 무슨 뜻이죠? 벼슬살이하다. 관직에 나아가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이 사람들의 신분이자 직업이에요.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은 士계급 이상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처럼 일반인들의 얘기라고는 보기 힘들다는 거죠. “꼬부라지면 온전하여지고, 구부리면 펴진다.” 이 말은 나중에 주희가 권모술수의 대명사라고 엄청나게 비판했던 부분이에요. 왕필이 해석했던 부분은 조금은 누그러뜨린 해석이에요. 처세술적인 얘기로 다가가는 중간쯤에서 멈추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상공의 주석에서는, 훨씬 구체적으로 니 스스로를 굽힐 줄 알아야 니가 대접받을 수 있다, 살아남을 수 있다. 라는 얘길 하는데. 회남자 ?도응훈?에 나오는 얘기는 철저하게 그런 사례를 들고 있죠. 달리 말하면, 니 자신 스스로가 정치적으로 굽힐 때는 굽혀야 하고, 나갈 때는 나가야 하고. 하지만 노자는 기본적으로 굽히고 겸손하고 자기를 아래에 두면서 더 나아가고 더 뻗는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정치이론을 갖고 있는 것이 노자라는 책입니다. 이런 논리는 음울한 얘기죠. 사실 우리 사회에서도 많이 일어나요. 현대 사회에서도. 요란한 사람치고 실수가 잦아요. 누가 잘나간다고 하면, 시기하고 질투하지 말고 옆에서 잘한다, 잘한다 하면 실수한단 말이죠. 그때 달라들어서 개떼같이. 바로 이런 논리라고 하는 겁니다. 많은 분들이 노자라는 텍스트를 얘기하면서, 정말로 아름다운 책. 고도로 신비주의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면서 사변적이면서 아름다운 책이라고 많이 얘기해요. 그런데 주희는 유가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언설을 보면서 이런 방식의 언설을 하는 책을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권모술수라고 단칼에. 장자는 그나마 괜찮은데 노자는 위험하다고 표현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 피곤하겠죠.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또 한 가지 예를 보죠. 에피소드 두 번째입니다. 28장. 이것도 엄청나게 최근 특히 4,5년 동안 유명한 구절입니다.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지기웅, 수기자, 위천하계) 그 숫컷됨을 알면서도 그 암컷됨을 지키면 하늘 아래 계곡이 된다. 여기서 계곡이라고 하는 것은 작은 시냇물이 모여서 큰 강물로 변하고 바다로 나가는 것처럼, 작은 지류들이 모여서 그 물들이 이루어낸 커다란 물을 뜻합니다. 밑에 많은 걸 거느리고 있는 걸 말하는 거죠. 그런데 이 구절에 대한 최근의 해석은 여성주의 담론이 뜨기 시작하면서, 페미니즘 담론과 많이 시켜서 노자는 양을 중시하는 유가와 달리 음을 중심으로 하는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졌고 여성적 가치 즉 낮출 줄 알고 겸손하고 부드럽고 포용적이어서 노자철학은 페미니즘적이거나 혹은 여성적 가치를 선향한다고 막 칭찬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냥 읽어 보세요. 그냥 읽으면 모르는 게 정답 아닙니까? 어떻게 압니까? 주석서를 보죠. 왕필은 어떻게 주석하느냐. “수컷은 앞서는 부류이고 암컷은 뒤처지는 붙이이다. 천하에서 가장 앞서는 것들은 반드시 뒤처지게 됨을 알기 때문에 성인은 자신을 뒤에 두지만 앞서고, 계곡은 사물을 구하지 않지만 사물이 스스로 돌아가고, 어린아이는 꾀를 쓰지 않지만 스스로 그러한 지혜에 합치한다.” 일단 왕필의 주석을 보면, 여기에는 여성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여성적 가치라고 말할 수 있는 자(雌)가 나오지만 남성적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옹(雄)도 나오고. 그런데 두 가치에 대해서 태도를 취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성인과 어린아이예요. 계곡이고. 따라서 이건 여성적이냐, 페미니즘적이냐 하는 맥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잘난 줄 알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혹은 자기를 낮추고 절제하고 뒤로 물러서는 태도를 비유적으로 웅과 자에 대비시킨 것 뿐입니다. 그런데 저 혼자 쭉쭉 잘나가는 사람일수록 망하기 쉽고 오히려 자기를 뒤에 둠으로써 앞에 나가는 전략을 말하고 있죠. 하상공 것은 더 구체적입니다. “‘수컷’은 존귀함을, 암컷은 비천함을 비유한다. 사람은 비록 자신의 ‘존귀함’과 ‘드러남’을 안다 할지라도,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감추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즉 수컷의 ‘강함’을 버리고 암컷의 ‘부드러움’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하면 마치 물이 깊은 계곡으로 흘러들 듯이 세상 사람들이 몰려들게 된다.” 자, 훨씬 더 구체적이죠. 여기에 나온 얘기는 여성적 가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로 이런 것을 바탕으로 해서 처신하고 행동의 원칙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남자냐 여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통치집단에 속한 것이고 오히려 잘난 척하는 것보다 겸양할 줄 알고 상당히 탄력적으로 처신할 수 있는 사람이 실질적인 효과를 본다는 뜻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도응훈?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 조간자(趙簡子)라고 해서 원래는 진나라인데 나중에 진나라가 조위, 한이라고 하는 세 나라로 분리되죠. 그걸 삼진이라고 하는데 이게 403년에 일어났고 이때부터 전국시대가 시작되죠. 이때는 당시의 진나라를 지배하고 있었던 여섯 개의 유력한 가문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조 집안의 간자라고 하는 사람이 양자라고 하는 사람을 자신의 계승자로 지목하는 일화가 나옵니다. 【조간자(趙簡子)가 양자(襄子)를 후계자로 정했을 때 동알우(董閼于)가 “무휼(無?)은 출신이 미천한데 후계자로 정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조간자가 대답했다. “양자는 나라를 위해 부끄러움을 참아 낼 수 있는 사람이네.”
끔찍하죠?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얘기가 아니라 한나라 때 이 텍스트를 읽었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떤 집단의 지식인들은 우리가 페미니즘적이다, 여성적 가치라고 했던 그 부분이 그런 게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 라고 하는 상황 속에서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겁니다. 노자가 멋있게 보이나요? 멋있는 해석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노자라고 하는 책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문제는 도덕이죠. 예로부터 많은 학자들이 노자에 대해서 이런 비유를 많이 썼어요. 長生久視之道(장생구시지도) 장생구시, 장생이라고 하는 말이 지금처럼 웰빙시대를 맞아서 평균연령이 높아지니까 90까지 100까지가 아니라 정치인들은 우리와 사는 방식과 달라요. 웬만큼 담배 안 피고, 술 적게 마시고, 운동 잘 하고, 하더라도 오래 못 살 가능성이 높아요. 왜, 과로사. 교통사고, 일반인들이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은 그거예요. 안 그러면 웬만하면 갑니다. 영양실조로 죽는 사람은 드물잖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 정치인은, 못 먹어서 죽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칼 맞아 죽는 거죠. 장생이라고 하는 말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웰빙이 아니라 칼 맞아 죽을 수 있는 사람의 상황을 염두해 둬야 한다는 겁니다. 중국 황제의 평균 수명이 12,13살이에요. 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아시겠죠? 두 세 살일 때 황제로 등극해서 채 걸어 다니지도 못 하는 나이 대에 황제가 바뀌는 바람에 죽은 황제들이 무지하게 많다는 겁니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세 사람을 합쳐서 120년 인가? 청나라가 지배했던 전체 기간 가운데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세 사람이 지배했던 기간이 반이라고 하더라고요. 옹정제는 십 몇 년 한 것 같은데, 강희제, 건륭제는 둘 다 육십 년이죠? 둘 백 이십년. 엄청나죠? 그런 사람들을 다 합쳐서 계산하더라도 12,3살 밖에 나온다고 하는 건 나머지 황제들이 얼만큼씩 재위했다는 얘기예요? 그리고 스무 살 넘어서 황제가 돼도 온갖 세력 때문에 제대로 못 하는데 열 살도 안 된 황제가 황제이겠습니까? 그냥 이름이지. 장난감일 뿐이죠. 그런 상황에서 장생, 평균 수명이 12,3인 나라에서 장생을 얘기한다는 건 절박한 얘기죠. 같은 얘깁니다. 오랫동안 눈 부릅뜨고 세상을 봐야한다는 뜻이니까 살아있다는 얘기예요. 이게 오늘처럼 웰빙시대를 맞아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산다는 해피의 문제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라는 거죠. 노자라고 하는 책은 아름다운 책이기 보다는 끔찍한 책, 참혹한 책,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들어있는 책이라고 먼저 읽으셔야 해요. 물론 그것만 있는 건 아니죠. 우주론이나 다양한 얘기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단면적으로 한 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인 사상의 출발은 바로 이 논리에 입각해 있습니다. ---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01_03.htm ◆ 『노자』를 제대로 읽는 법 다음에 읽을 부분이 가장 유명한 구절이죠. 에피소드 세 번째입니다. 이 구절은 노자를 읽어보지 않았던 분들도 한번 쯤 지나가는 말로 들어봤을. 여기쯤 오신 분들은 한번 쯤 들어보셨을 구절이죠. 알 수 없는 기호처럼,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이 문장을 읽고 나서 무슨 뜻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도, 명과 같은 용어들이 당시에 문화적 지층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또 철학사적으로. 그런 게 있으니까 수정하는 거고 후대에 주석서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거죠. 그런데 기이하게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왕필의 해석입니다. 그런데 왕필의 해석은 본래의 맥락과 전혀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실 이 구절 속에는 왕필 당시 철학적 논쟁이 그대로 들어가 있어요. 맥락이 상관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한 번 볼까요. ‘왕필’ : “말할 수 있는 도와 이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사事나 형形 같은 구체적인 사물을 가리키니 항상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도는 말할 수 없고 이름 붙일 수 없다.” 보통 이렇게 해석하고 20세기 해석은 이렇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누구 말이죠? 비트겐슈타인의 말입니다. 서양에서 20세기에 와서 발견된 진리가 2500년 전에 관문을 타고 넘어간 한 노인네가 발설하고 갔다는 것 자체를 부각시키면서 대단한 철학자로. 노자가 서구 사회에서 대접받게 된 중요한 표현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언어철학에 관한 얘기가 아닙니다. 물론 언어에 관한 문제의식이 있긴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언어 철학적인 언어와 실재의 관계를 따지는 게 아니에요. 그럼 무슨 얘기냐? 먼저 이 해석을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혹시 여러분들 후안 때 나온 허신이 편찬한 『설문해자』를 들어보셨죠? 『설문해자』는 한자사전입니다. 『설문해자』가 나오게 된 배경은 잘 아시죠? 진시황이 무너지고 유방과 항우가 투쟁하던 때에 유방이 먼저 하명성에 입성할까 하다가 후환이 두려워서 근처에 진을 치고 남아요. 항우가 온 다음에 폼을 잡으면서 들어갔어요. 그리고나서 거기에 불을 질렀죠. 영화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그때 엄청나게 많은 문헌이 사라졌다고 해요. 오히려 진시황 분서갱유 때문에 문헌들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보다도 항우가 지른 불 때문에 더 많이 사라졌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책을 소유하는 걸 금지하고 없애버렸다. 하지만 중앙에 모읍니다.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드는 거죠. 그때 모아둔 상당히 많은 문헌들이 불타버린 걸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그걸 분서갱유라고 하는 네 글자로만 딱 표현하진 않는데. 그런데 그러다보니까 그 이후의 한대, 문자 없이 행정과 통치가 불가능하죠. 그러다보니까 당연히 그 당시 머릿속에 외우고 있던 것을 다시 만든 텍스트가 금문 텍스트예요. 그런데 그 이후에 일군의 학자들, 예를 들면 공자가 살던 집에 공사를 하다가 벽에서 무너져서 보니까 고문서가 발견됐다고 해서 예서체가 아닌 그 이전의 글자체로 돼 있는 고대 문헌들이 발굴이 돼요. 상서도 고문 상서가 발견되고. 당시에 이걸 가지고 이념적 정치적 기반이 달랐던 두 학자 집단의 논쟁을 금고문 논쟁이라고 하는데, 선문해자라고 하는 책은 기본적으로 고문파에 속하는 작품인데 왜 사전으로 만들었느냐? 옛날 한자잖아요. 그래서 그게 어떤 의미라고 사전적인 방식으로 추정을 한 거예요. 그래서 만든 한자 사전이 설문해자인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서 한자를 분류하는 육서라는 원칙이 나오죠. 왕필이 말하고 있는 주석 문장 속에는 바로 육서를 구성하고 있는 용어가 들어왔다는 사실이 무지무지 중요한 거예요. 지사, 조형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사事나 형形 같은 구체적인 사물을 가리키니 항상된 것이 아니다.” 라고 할 때, 상형, 조형이라고 돼 있지만, 지사가 들어와 있어요. 달리 말하면, 이 속에는 문자학적인 언어학적인 고민이 들어 있습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라는 말을 해석하는 틀의 원맥락에 닿아 있으면서도 사실은 당시의 논쟁이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걸 언의(言意)지병이라고 하는데 보통 언어철학하면 언어와 실재를 다룬다고 해서 특히 박이문 선생님이 『노장사상』이라고 하는 책 속에서 비중 있게 다뤘죠. 노자가 철학적인 사유가 굉장히 풍부하다고 칭찬까지 했었는데. 이때 말하는 언의라고 하는 것이, 말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뜻. 이렇게 해석하면 안 돼요. 이걸(意) 영어로 쓰면 meaning, 단어의 뜻이 아닙니다. 의도, 의향이라는 intent의 뜻이에요. 이건 공인된 언어가 아니지만 지금 많은 학자들이 그 쪽으로 가고 있는데 왕필이라고 하는 사람이 노자의 주석서를 썼으니까 도가적인 철학자다? 전혀 아닙니다. 왕필은 본래 역학을 과학전통으로 이어받았던 집안 학문의 계승자고, 삼국시대 당시에 조조 정권과 굉장히 가까운 인척관계였다. 왕천이 왕필의 할아버지뻘이 되는데, 그 가문의 후학을 이룬 사람이에요. 역학 중심이었고. 그리고 240년부터 249년에, 조 씨의 위나라에서 일군의 유학자들이 나름대로 뭔가 개혁적인 정치를 펼치려고 모종의 운동을 하는데, 이 시기를 정시(正始)라고 합니다. 정시는 주역 용어입니다. 이 글자를 그대로 보세요. 이게 연호인데, 처음을 바로잡는다. 즉, 한나라가 망했죠. 한나라가 망했다는 사실은 공자의 가르침, 오경을 통해서 문명을 실현하려고 했던 유학자 지식인들의 세계관이 몰락했다는 것을 의미해요. 따라서 당연히 고민을 하죠. 우리가 알고 있었던 진리가 잘못 된 거냐? 아니다. 우리가 공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공자라고 하는 말은 오경의 저자로서, 이 문명의 토대를 만든 사람으로서 인식됐어요. 오경 속에 담긴 말이 있고 그 말을 통해서 성인이 전달하고자 했던 뜻이 있었던 거예요. 한대문명이 망한 것은 그 뜻을 우리가 제대로 못 이뤘기 때문에. 그래서 이걸 빙자해서 논쟁이 붙어요. 여러 가지 파가 있죠. 언부진이론이라고 해서 ‘말은 뜻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라는 방식의 해석을 고수하는 사람. 이건 새로운 방식의 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죠. 하지만 말이 의도를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입장의 사람들은 유가문을 통해서 새로운 방식의 유교문명을 건설하자고 하는 이른바 정치적 표어가 되는 거예요. 이 속에 들어있는 이야기는 뭐냐? 거꾸로 있는 것 같죠. 왕필의 전체 저작 순서에 의하면 처음에 노자를 하고 그 다음 주역을 하고 그 다음 논어를 합니다. 그걸 삼현경(三玄經)이라고 해요. 사실 나중의 삼경에서는 노자, 장자, 주역이라고 하지만 왕필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삼현경은 노자, 주역, 논어가 삼현경이에요. 그래서 왕필시대를 현학이라고 하는 거고. 이런 식의 말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렇다면 왕필이 이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사실 여기서는 미완이에요. 나중에 주역에 들어가서, 왜냐하면 왕필은 주역이 가학인 사람이고 따라서 노자는 당시에 유행했던 텍스트예요. 왜 유행했냐. 지방의 호족세력들을 누르기 위해서 조조의 아들이었던 조비가 도덕경을 열심히 읽으라고 선전을 했어요. 이른바 이교주의자를 누르기 위해서 노자를 많이 읽을 것을 권장했고. 말하자면 노자라고 하는 텍스트 자체의 철학적 의미가 뭐냐가 아니라 노자를 통해서 말을 건네는 수단이에요. 예를 들면, 도올 선생이 노자를 강의하면서 ‘인간과 지식의 화해’ ‘인간과 자연의 화해’라는 얘기를 하잖습니까? 목적은 노자에 있는 게 아니라 거기에 있는 거죠. 노자를 빙자해서 현실의 문제를 이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풀어나가야 한다는 데에 목적이 있잖습니까. 도올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방식으로 구성되는 거죠.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노자의 주석을 했으니까 노자의 사상적인 실체가 있고, 그걸 통해서 왕필이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노자가 당시에 지식인들 사이에 토론하고 대화하는 매개가 되는 텍스트였다는 거죠. 그런데 정작 마음에 안 드는 구절에는 주석을 안 해요. 하상공과 비교해보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주석을 안 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죠. 어떤 짧은 구절에는 길게 주석을 해요. 무슨 말이냐? 원래 텍스트에 없던 이야기들, 왕필의 이야기가 엄청 들어간다는 거죠. 주석이 노자라고 하는 텍스트의 본래적 의미를 그대로 재현하거나 보관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노자를 빙자해서 말하는 거예요. 더구나 이런 방식의 전통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게, 노자는 한 무제 이후에는 특정 시대 도교 집단 이외에는 이단입니다. 이단.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 혹시 교회 다니시는 분이 있고 절에 다니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 불교를 자기 신앙으로 가진 분들에게 불교 경전은 진리의 말씀이죠. 이런 분들에게 성서를 열심히 읽으라고 하면 대충대충 읽죠. 그냥 재미삼아 본다거나 무슨 말을 하고 있나 보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한 무제 이후에 도가라고 하는 쪽은 도가라고 하는 학술적 연구조직이 있어본 적이 없어요. 전부 유가 지식인들이 심심풀이 삼아 주석을 했거나 혹은 개인적 취향으로 했거나 혹은 도교적인 뭔가에 의해서 주석을 하는 부류이지, 논어나 맹자 부류의 책들 즉 공자의 진정한 뜻을 우리가 체득해야 한다는 방식으로 주석서를 다룬 바가 없어요. 마치 논리학 연습 교재와 같습니다. 특히 청대에 노자 주석서가 나온 걸 보면 전혀 상관이 없는 여러 주석서를 한꺼번에 짬뽕해서 노자집회라는 책을 만들어요. 논어집주라는 책을 굉장히 체계적인 작품입니다. 당시까지 있어왔던 주석서를 다 갈라서 나름대로 분명한 체계와 의도 속에서 편찬한 책이 사서집주라면, 노자집회라는 책은 그냥 여러 가지 주석서를 모아둔 거예요. 그리고 ‘도가도 비상도’를 이렇게도 해석해보고 저렇게도 해석해보고. 굉장히 다양한. 유교경전이라는 틀 속에서 공부하는 사람들, 비교하자면 내년, 후년에 사법고시나 행정고시를 보는 사람들은 만날 밤새서 책을 보니까 머리 아프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소설 책 보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여기 오신 분들도 마찬가지예요. 처음 얘기 들어보니까 삶의 변화를 위해서, 일 년 열두 달 계속 이 강의 들으라고 하면 들으시겠어요? 여기서는 그렇다고 대답하겠지만, 아마 석달 만 지나면 지겨워서. 쉽지가 않습니다. 떠드는 저도 지겨워요. 해마다 이 강의를 계속한다? 지겨워서 못할 거예요. 저도 몇 년 동안 쉬었다 하니까 조금. 얘기가 바깥으로 샜는데. 왕필이라고 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내용은, 본래의 구절에 맞는 방식으로 가지만 사실 말로 할 수 있는 것, 언표될 수 있는 것은 지사조형과 같이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태에 관해서만 해당되니까, 이건 무형의 보이지 않는 것이란 말이죠. 意는 뭘로 얻어야 해요? 마음으로 얻는 거예요. 따라서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죠. 말은 수단적인 의미예요. 그래서 나중에 왕필의 자신의 언어이론을 설명하면서 得意忘象(득의망상), 뜻을 얻었으면 주역의 상을 잊어라. 이 표현을 그대로 가면, 앞에 주석한 거랑 다른 얘기가 나옵니다. 즉, 언어라고 하는 것은 공자의 진정한 의도를 간취하는데 있는 거지 문자 그 자체에 매일 이유가 없다는 거죠. 달리 말하면, 해석학적 모험에 대한 천명이기도 하면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겠다는 표어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그렇게 대단한 얘기가 아니라는 거죠.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를 그대로 보관하고 밝히는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왕필의 언어관이 드러날 뿐이에요. 공자의 말씀을 담은 텍스트를 새롭게 즉 과거에 어떻게 해석했다고 해서 그게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공자의 진정한 뜻을 얻어야 해요. 하지만 공자의 말이라는 것이 오경 속에 논어 속에 들어있으니까. 논어는 공자의 뜻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거죠. 뜻을 얻기 위해서 주석의 상을 입히고, 말을 입히는 것처럼. 결국 득의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 문명질서의 비전이 되는 공자의 비전을 잡아낼 수 있다는 겁니다. 왕필은 언어와 의미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하상공은 굉장히 다르게 해석합니다. “경술經術과 정교政敎의 도를 말한다.” 즉,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경전을 연구하고 경전의 의미를 토론하고 그 속의 내용을 사회적으로 제도화하는 과정. 이건 당연히 문서나 언어로 하죠. 그리고 정교, 정교는 정치와 가르침이 아니라 지금 식으로 얘기한다면 정치와 행정을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건 교령이고. 즉, 황제는 말하지 않습니다. 황제는 문서를 통해서 옥쇄를 꽝 찍잖아요. 그럼, 온 지방에 문서가 파급돼서 사회 시스템이 움직여지는 거죠. 이건 뭐에 의존합니까? 글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거기 나와 있는 것처럼, “무위無爲로 정신을 기르고 무사無事로 백성을 안정시키며,” 이게 하상공 텍스트의 기본 의도인데. 무위는, 마음의 평정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건 제왕학의 경전입니다. 하상공의 책은 제왕을 위한 책이에요. 수많은 신하를 다스려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감정에 휩쓸리거나 쉽게 흥분하면 안 되니까. 신을 기른다고 하는 것은 아주 투명한, 냉철한 판단력. 현대어로 말하면 이성을 언제든 잃지 않아야 하는 상태예요. 나중에 한의학과 연결되면 오늘날 기공의 원리가 되는 내용까지 들어 있습니다. 그 다음, “무사無事로 백성을 안정시킨다” 사(事)에 대한 오해가 많은데, 보통 일이 없다고 번역하죠. 특히 맹자에서는 사(事)라는 글자가 유사(有司), 일이 있으면 담당 관리가 있다고 번역되거든요. 사가 그냥 일로 번역하면 안 돼요. 이건 국가에서 벌이는 사업이에요. 반드시 백성이 동원됩니다. 그냥 일 하는 게 없다는 게 아니라, 무사하면 백성들이 안정돼요. 백성들이 안정된다는 건 뭡니까? 단순해요. 당시의 백성의 삶은 겨울에 군사훈련받고 여름엔 농자 짓는 거예요. 농자 지을 때 부역 나가면 안 되는 거죠. 그게 바로 유사한 겁니다. 이 의미를 우리처럼, 이라, 사태 보편적으로 넓게 해석하면 안 되면, 일을 벌인다는 건 백성들에게 짜증난다는 거예요. 내 고향 땅을 떠나 먼 데까지 가서 고생하면서 돌 나르고 목숨 걸고 싸워야 하죠. 이런 일을 왜 합니까? 엄청난 인센티브가 주어질 때가 아니면 안 하죠. 바로 거기로 넘어가는 것이 법가의 해석방식입니다. 백성들을 통제하는 방식은 인센티브다. 현대어죠, 당근과 채찍. 이게 바로 상벌론이고, 노자는 거기까지는 표현하지 않아요. 굉장히 에센스라고 할까요? 그런 말들만 표현합니다. 여기 나온 내용은 그런 말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 정치의 비법은 말로 전달해줄 수 없다는 거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법이 말로 전달됩니까? 상대방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치적으로 처세하는 것들은 말로 가르쳐줄 수 없다는 거죠. 『회남자』(淮南子) 「도응훈」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느냐? 다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장자에 나오는 얘기가 그대로 들어와 있어요. 이 순서가 여러분에게는 이상하게 생각될 수도 있는데, 전국시대의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라는 말과 장자에 나오는 윤편과 환공의 고사. 이런 얘기입니다. 왜 환공이 등장하느냐? 환공은 춘추업대가운데 천 번째 패자입니다. 성공한 정치인이란 말이죠. 왕은 아니지만 왕을 대리해서 천하를 다스렸던 사람이 패자죠. 그 사람이 어쨌길래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느냐? 그 배경에 대한 얘기로 권위가 있는 거예요. 중국 문장을 읽을 때 제일 눈여겨 봐야하는 게, 문장이 대단하냐 아니냐가 아니라 나와 있는 인물이 대단하냐 아니냐가 더 중요해요. 왜. 센 놈이 나올수록 그 이야기가 센 얘기가 되는 거고, 저 같은 사람이 출현해봤자 아무도 안 봐요. 예를 들어, 제가 성공시대를 써봤자 누가 사보기나 하겠습니까? 똑같은 거예요. 제가 IT벤처해서 일본에 1억 달러를 수출한다, 책 쓰면 쫙 팔리죠. 제가 아무리 노자에 대해 번역본 잘해봤자 천 권 팔리면 많이 팔릴 거예요. 값어치를 그렇게 비교하면 곤란하지만, 사회적 관심사로서는 비교가 안 된다는 거죠. 마찬가지 잣대를 써야 해요. 환공이 한번은 처마루에서 책을 읽고 있어요. 상황 자체가 기이한 설정이에요. 만날 수가 없죠, 왜 거기 가서 책을 읽습니까. 화가의 의도가 들어가 있는 거죠. 장자 속에서 그런 기이한 만남이 많이 연출돼요. 그게 장자의 탁월성이죠. 책을 읽고 있으니까, “전하 무엇을 읽고 있습니까?” “성인의 말씀을 읽고 있다.” 그랬더니, “성인이 어디 있습니까?” “죽었다.” “그럼 성인의 찌꺼기를 읽고 계시군요.” “니 말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하니까 수레바퀴 깎는 얘기를 하면서, 이때 수레바퀴라고 하는 건 여기가 꽂는 부분을 얘기하는 거예요. 가운데 축을 꽂아야지만 잘 굴러가지 않습니까? 수레받기에 관한 비유는 ‘하나가 서른 몇 개를 통솔한다.’ 군주와 신하의 관계를 상징하는 당시의 기본적인 비유입니다. 이걸로 복잡하게 해석하는 건 곤란해요. 『사기』를 보면 학자가 이걸로 대화를 하면서 새롭게 오게 된 재상이 자기 아래쪽의 부하를 얼마나 잘 관리를 하는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니까 이 사람이 바로 캐치를 하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와요. 이건 군과 신하를 관계를 표현하는 기본적인 은유예요. 그게 여기 나오는 거예요. 윤편이라고 하는 사람이 수레바퀴 깎는 장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군주의 치술수에 관한 묘리를 뭔가 알고 있는 사람으로 등장시키는 거고 수레바퀴라는 은유를 통해서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치술의 묘리라고 하는 것이 자기의 경험으로, 자기는 수레바퀴를 깎았으니까 그걸 통해서 얘기하겠다. 오래도록 정교하게 깎으려고 하면 너무 많이 깎아서 달리다가 빠지고, 빨리 깎으려고 하면 뻑뻑해서 끼어지지 않아. 이걸 어떻게 깎아야 하는지 자식 놈한테 말로 전달이 됩니까? 안 되죠. 그건 자기가 자득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이 나이까지 제가 깎고 있습니다. 아마도 성인이 남긴 말도 찌꺼기에 지나지 않고 성인이 전달하려고 하는 진정한 뜻은 거기에 없을 거다. 살았잖습니까? 말이 되잖아요. 요즘말로 하면, know-how죠. 포정의 고사에서도, 포정이 하는 말을 듣고 위의 문후가 “내 너의 말을 듣고 양생의 도를 깨달았다.” 양생의 도가 나오니까 웰빙?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장생. 당시 위나라가 진나라가 팽창정책을 쓰면서 고립돼 있었어요. 영토가 자꾸 줄어들고. 그래서 수도를 옮기고 부흥정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성공한 군주가 바로 문후인데, 맹자가 만나는 왕이잖습니까? 바로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거기에 등장하는 거예요. 괜히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부흥에 성공했던 독특한 군주죠. 그 성공의 비법을, 그 책에서는 포정에게 배웠다고 외치는 거예요, 나중에. 그러니까 말이 되는 거죠. 양생이 장생이라는 말과 똑같은 거고, 당시 양생은 웰빙이 아니라 내 몸을 지키는 건 곧 국가를 지키는 거고 부국강병하는 요체를 말하는 거죠.
가장 유명했던 노자의 구절이, 이건 저의 해석이 아니라 다 있는 해석이죠. 읽고 나니까 이렇게 된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반전, 평화, 형이상학, 신비주의 용어 하나 없이 그냥 읽으니까 쉽죠? 쉬운 게 맞는 거예요. 고전을 읽을 땐. 20세기 우리가 해석한 건 의미가 없느냐? 없다고 말하면 곤란하죠. 당시의 문제가 이런 문제였다면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읽어야 해요. 문제는, 그와 같은 해석의 역사적 반성의 과정을 거치진 않고선 노자가 페미니스트다, 환경주의자라고 하면 공허한 담론이 돼요. 그런 게 뭘로 가느냐? 우리는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분도 책에서 그런 얘기를 쓰기 시작하는데. 적어도 서구과학의 끝까지, 꼭 상 받는 걸로 기준을 삼을 수는 없지만, 대한민국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열댓 명 나왔다, 그 다음에 신과학을 얘기한다는 건 말이 되는데 아직까지 우리가 수입한 서구과학이라는 것이 많은 부분 미흡하잖습니까? 그런데 저쪽에서 ‘서구과학이 한계에 다다랐다. 이제는 동양으로’ 하니까 가보지도 않고서 ‘동양 뭐?’하면 공허한 얘기가 되는 거예요. 노는 마당이 같은 차원에서 얘기돼야지만, 즉 문제 자체, 현실 자체가 다른 상황에서 내 현실이 아닌데 아무리 고민해봤자 영양가가 없다는 거죠. 따라서 지금 여기서 하는 얘기는 그동안 해석한 노자가 틀렸다는 게 아니라, 잘못됐다가 아니라, 제대로 그런 문제를 사유하기 위해서. 단순하게 얘기하면 우리가 어떤 텍스트를 가지고서 연구를 할 때, 예를 들면 칸트를 통해 개발 받을 수 있는 분야가 강점이라고 하면 칸트를 파야죠, 그런데 칸트가 전혀 고민하지 않았던 문제를 백 년이고 이백 년 파봐야 나올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까? 철학자마다 시대마다 자기가 실험했던 대상과 문제가 다른데, 노자가 만병통치약으로 회자되는 한 노자에서 얻을 건 아무것도 없어요. 노자가 주로 고민했지만, 지금까지도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커다란 부분을 제대로 확인하고 끌어와야죠. 노자를 하기로 했지만, 노자라는 텍스트를 별로 안 좋아해요. 제가 공부한 과정에 의하면, 오늘날 우리가 읽는 노자는 얼마나 노자가 안 좋은 책이었길래 수많은 유학자들이 좋은 책으로 만들기 위한 발버둥의 역사를 갖고 있는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