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4

알라딘: 퀘이커 350년 하워드 브린튼,마가렛 베이컨 (지은이),함석헌,퀘이커 서울모임

알라딘: 퀘이커 350년

퀘이커 350년   
하워드 브린튼,마가렛 베이컨 (지은이),함석헌,퀘이커 서울모임 (옮긴이)퀘이커서울출판부2018-03-01원제 : Friends for 300 years
359쪽

책소개

퀘이커는 전 세계적으로 평화와 화해를 위한 활동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기독교 소수 종파로서, 300여 년의 역사를 통해 전쟁에 반대하고 폭력에 저항하는 사회활동으로 미국과 영국의 퀘이커 친우봉사회가 노벨평화상(1947)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책의 구성은 크게 17세기 중엽 이후 300년 동안 친우회(퀘이커)의 역사를 담은 ‘퀘이커 300년’과 20세기 중.후반부터 21세기 초엽까지를 기록한 ‘그 후 50년’으로 나뉜다.
목차
「퀘이커 350년」 한국판 서문 5
「퀘이커 300년」 한국판 서문 8

퀘이커 300년
1. 주님을 우러러보기 위해 12
2. 속의 빛의 체험 33
3. 사상으로서 속의 빛 56
4. 예배 모임 96
5. 감화 130
6. 결의에 이르기까지 152
7. 모임 공동체 178
8. 모임과 세계 214
9. 퀘이커 역사와 종교형식 256
10. 퀘이커 사상과 현대 291

그 후 50년
그 후 50년 317

부 록
「퀘이커 300년」을 지은이의 말 336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하워드 브린튼 (Howard Haines Brinton) (지은이) 
미국 물리학자이면서 역사학자, 퀘이 커 사상가. 『퀘이커 300년』은 그가 남긴 많은 저서 가운데 가장 명저로 꼽히고 있다. 부인인 안나 브린 튼(Anna Brinton)과 퀘이커 명상기관인 <펜들 힐> 의 초석을 다지는 데 공헌한다.
최근작 : <퀘이커 350년>

마가렛 베이컨 (Margaret Hope Bacon) (지은이) 
미국 작가, 퀘이커 역사학자. 평생 여성과 소수자를 위한 인권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필라델피아 인권상’ 등을 수상한다.
최근작 : <퀘이커 350년>


함석헌 (옮긴이) 

일제하의 민족 운동가, 그리고 이후 민주주의 인권 운동가이자 종교·평화 사상가로서 끝없는 실천의 인생을 산 함석헌(咸錫憲)은 아버지 함형택(咸亨澤)과 어머니 김형도(金亨道) 사이에서 5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16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의사로서의 진로를 결정, 경성의학전문학교를 갈 생각으로 평양의 관립인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다. 2학년이던 1917년 8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이웃 마을에 살던 황득순(黃得順)과 결혼을 한다(슬하에 2남 5녀). 3학년이 되던 1919년에 당시 숭실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친척 형 함석은이 찾아와 평안남북도 학생 운동의 책임을 그에게 맡기고 역사적인 3·1 운동을 직접 경험하게 되면서 의사를 꿈꾸던 함석헌의 생애는 크게 바뀌게 된다.
3·1 운동 참여 이후 학교를 자퇴하게 된 함석헌은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거나 수리조합에서 조합원 일을 하며 2년 간 방황하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일단 학업을 이어 나가기 위해 경성으로 가게 된다. 신학기 시작을 놓쳐 입학할 학교를 찾지 못했던 그는 함석규 목사의 추천을 받아 1921년 정주의 오산중학교 3학년으로 입학한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유학길에 오른 함석헌은 고심 끝에 교육자로서의 진로를 정하고 이듬해 도쿄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甲組)에 입학하게 되었으나, 당시 일본식 국가주의로 무장된 직업 교사 양성을 목표로 하는 학교의 수업 과정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평생 친구가 되는 김교신(金敎臣)과 친분을 가지게 되고 이어 그가 나가고 있던 우치무라 간조의 성경 연구 모임에 같이 참여하게 되면서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김교신을 포함해 여기서 만난 조선인 친구들(유석동, 송두용, 정상훈, 양인성) 6명은 별도의 모임을 만들어 성서 연구를 지속하면서 1927년 7월 동인지 성격의 ≪성서조선(聖書朝鮮)≫을 도쿄에서 창간한다. 창간호(국판 44쪽)에 발표된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활자화된 함석헌의 첫 번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1928년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함석헌은 귀국 후 오산학교에 부임해 역사와 수신(修身)을 가르친다. 한편으로는 ≪성서조선≫을 발행하면서 ‘성서조선 독자회’를 열고 다수의 글을 발표하는 등 사회적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지만 그의 무교회주의 방식의 신앙 운동은 기존 기독교인들에게 배척을 받기도 한다.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종교 사상을 개척해 나가던 함석헌은 1933년 12월 30일부터 이듬해 1월 5일까지 송두용의 집(서울 오류동)에서 가진 성서 모임에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 초고를 발표하고 토론을 거친 뒤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성서조선≫에 연재한다. 일제에 의한 조선의 역사 왜곡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우리의 역사를 바로 보고자 하는 이 글은 그의 대표작으로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해방 이후 이 글은 일제 당시 검열로 삭제되었던 부분을 포함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1950. 3. 28), 이후에는 ‘성서적 입장’을 빼고 대폭 수정해 ≪뜻으로 본 한국 역사≫(1962)로 제목을 변경·출간했는데 민중의 고난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씨? 사관’을 보여 주는 그의 중요한 저술이다.
일제 말기 점점 노골화되던 식민지 교육 정책 속에서 창씨개명과 일본어 교육이 강조되자 더 이상 선생직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함석헌은 1938년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과수원을 경영하기도 했는데 이해에 자식 둘을 홍역으로 잃는다. 1940년 평양 송산리의 송산(松山)농사학원을 인수해 거처를 옮긴다. 하지만 전 주인이었던 김두혁(金斗赫)이 도쿄로 유학 가서 도쿄농과대학 조선인 졸업생들과 만든 소위 ‘계우회(鷄友會)’ 모임 사건으로 구속되었는데, 함석헌도 연루자로 검거되어 1년 여 동안 평양의 대동경찰서에 수감되었다. 결국 농사학원은 폐원되었고, 아버지는 옥살이 중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1942년 3월 ≪성서조선≫에 김교신이 쓴 권두언을 문제 삼은 일제의 폐간 조치와 더불어 함석헌 역시 연루자로 지목되면서 다시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한다. 출소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중 오랜 벗이자 스승의 관계였던 김교신의 사망으로 인한 큰 충격과 슬픔 속에서 해방을 맞게 된다.
해방 공간에서 여러 자리에 불려 다니며 평안북도 임시 자치 위원회 문교부장을 맡기도 하였으나, 반소(反蘇)?반공(反共) 시위인 ‘신의주 학생 사건’에 연루되어 소련군 사령부에 의해 체포되어 평안북도 경찰부 유치장에 또다시 50여 일을 감금당하고 만다.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산학교에 뿌려진 반정부 전단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또다시 투옥된다. 별다른 용의점이 없어 한 달 만에 석방되었으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땅 때문에 당시 내려진 ‘지주 숙청령’의 대상이 되었고 이를 피하기 위해 결국 1947년 월남을 감행한다. 1년여 후 아내와 자식 일부도 월남했으나, 어머니는 내려오지 못하고 이산가족이 된다.
월남 직후 오류동 노연태의 집에서 지내면서 YMCA 강당에서 일요 종교 집회를 시작하고, 유영모 선생 등과 함께 모임을 가지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대구, 김해 등지로 피난을 가게 되는데 이때 가진 한 성서집회에서 그간의 무교회주의와 결별하는 신앙적 변화를 겪게 된다. 퀘이커(Quaker)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즈음으로 여긴다. 휴전 이후 다시 서울에 올라와 강연 활동과 양계장을 하며 어렵게 삶에 정착해 나가는 가운데 ≪말씀≫, ≪편지≫ 등의 신앙 잡지에 여러 글을 발표한다. 그중 1956년 ≪사상계≫ 1월호에 발표한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글에서 그는 기독교의 타락상과 계급화를 비판했는데, 이 글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후에도 함석헌은 ≪사상계≫에 영향력이 큰 글들을 발표하면서 장준하와 함께 군사 독재와 치열하게 싸우는 길을 걷게 된다. 한편으로는 언제나 꿈꾸어 왔던 ‘이상촌’을 위해 기증(정만수 장로)받은 천안(봉명동)의 땅에서 교육과 농사를 함께하는 공동체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곳의 이름을 ‘씨?농장’이라고 했는데, 후일에 직접 번역해 책으로 출간한 간디의 자서전을 읽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1958년 8월호 ≪사상계≫에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20여 일간 구금되는, 이승만 정권 시기 대표적인 필화 사건을 겪는다. 함석헌의 첫 번째 정치 평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글로 인한 필화 사건 이후 함석헌은 오히려 왕성하게 글들을 발표하면서, ‘씨?농장’에서 시국을 참회하는 단식 투쟁을 전개하는 등 사회적인 목소리를 높여 간다. 1961년 ≪사상계≫ 7월호에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게 된 당시 군부 정권을 비판하는 글 <5·16을 어떻게 볼까>로 인해 사장이었던 장준하와 취재부장이 중앙정보부에 체포되기도 했으나 당시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력 때문이었는지 정작 함석헌을 체포하지는 못했다.
1962년 2월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3개월 예정 방미 길에 오른다. 귀국한 직후 7월에 오산학교 강당에서 귀국 강연회(오산학교 동창 주최)를, 이어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서 ≪사상계≫주최의 시국 강연회를 연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미처 입장하지 못한 시민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기마 경관대까지 출동한 이 강연회를 함석헌은 스스로 ‘사회 참여의 시작’으로 보았는데, 이후 장준하와 더불어 활발한 강연을 통해 군사 정권의 잘못을 꾸짖는 한편 굴욕적인 한일 협정의 비준을 반대하는 활동을 한다. 1965년에는 이를 위해 각 분야 인사 30여 명이 결성한 조국 수호 국민 협의회의 상임 대표로 선출되기도 한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을 위한 개헌을 앞두고 반대 시위에 앞장서는 한편, 1970년에는 4·19혁명 10주년에 맞추어 개인 잡지 성격의 월간지 ≪씨의 소리≫를 창간하지만 두 달 만에 폐간 조치를 당하게 된다. 이후 법정 투쟁 끝에 승소해 이듬해 8월에야 복간호로 3호를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71년에는 이후 1988년까지 지속된 ≪노자≫와 ≪장자≫ 접기
최근작 : <함석헌 수필선집 (큰글씨책)>,<함석헌 수필선집>,<들사람 얼> … 총 57종 (모두보기)

퀘이커 서울모임 (옮긴이)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책의 구성은 크게 17세기 중엽 이후 300년 동안 친우회(퀘이커)의 역사를 담은 ‘퀘이커 300년’과 20세기 중.후반부터 21세기 초엽까지를 기록한 ‘그 후 50년’으로 나뉜다. 전반부를 저술한 하워드 브린튼(Howard Haines Brinton, 1884∼1973)과 후반부를 쓴 마가렛 베이컨(Margaret Hope Bacon, 1921∼2011)은 모두 퀘이커리즘(Quakerism)에 정통한 역사학자로서 그 자신들 역시 퀘이커였다. 특히 브린튼 선생은 1950년대 후반 방한 등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분이었다.
『퀘이커 300년(원제, ‘Friends for 300 years’)』은 1960년대 초반 함석헌(咸錫憲, 1901~1989) 선생이 이미 한국어로 번역을 마쳤으나 출간하는 데 어려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500권을 내는 데 500불이 필요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브린튼 선생은 <필라델피아 연회의 체이스 펀드(Chase Fund of Philadelphia Yearly Meeting)>에 요청하여 500불의 출판기금을 주선해주었다. 이와 함께 미국에 거주하던 이행우 친우에게 당신의 사진과 서문, 서명을 건네주시며 한국판 출간의 권한을 서울모임에 맡겼다. 저자 서명은 모두 세 개를 주셨는데 이행우 친우로 하여금 “가장 보기 좋은 것으로 골라 쓰라”는 당부가 있었다. 그것은 당시 “너무 연로하여 점자를 쓰면 안 될 정도로 선생의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퀘이커 300년』 한국판이 우여곡절 끝에 빛을 본 지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지나갔다. 서울모임은 2014년 12월 28일 ‘퀘이커 신앙을 한국 사회에 올바로 알리고 친우회의 내적 성숙’을 기하기 위한 목적으로 『퀘이커 350년』 출간 계획을 수립했다. 이 날은 친우회가 한국 땅에서 공식적인 첫 예배모임을 가진 지 1만 9천 7백 34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이는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진작부터 계획한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역사의 필연성 위에 이미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1953년 6.25전쟁의 폐허 위에 미국과 영국의 친우들이 도착했던 때, 그때부터였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친우회는 일찍이 노예제도, 아동에 의한 노동과 착취, 소수자에 대한 차별, 전쟁과 테러, 총포와 화약을 비롯한 무기사업 등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폭력에 저항해오면서 사회책임을 실현해왔다. 21세기에 들어 친우회는 자연과 환경, 특히 핵 문제에 대한 깊은 우려 속에서 이를 새로운 실천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이들에 대한 어떠한 임무도, 지침도, 교리도 명시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이 책에 기록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비추고 계시는 빛 즉, 우리 안에서 발현하고 있는 ‘속 빛(inner light)’이다. 우리 친우회에는 수세기가 넘는 고요예배와 집단명상 가운데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의제가 있다. 그것은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후세에 전승시켜 왔던 퀘이커들의 방향성이었다. 그리고 그 방향성은 다름 아닌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해왔던 ‘평화’라는 진리로 향하는 길이었다.
평화! 그것은 우리 퀘이커들에게 가능해도 가야 할 길이었지만 불가능해도 가야만 하는 길이었다. 특히 한반도와 같이 좌.우로 갈라진 이념과 남.북으로 분단된 특수한 현실 속에서도, 평화! 그것은 한국 퀘이커가 지향하는 가장 높은 이상이었다. 우리는 세상에 우리가 하는 일을 어떠한 경우에도 내세우지 않고 가장 고요하고, 가장 평화로운 방법을 찾아 실천해왔다. 이러한 취지를 확산시키는 데 이 책을 출간하는 목적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 분께서 주관하시는 일이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어나니(요한복음 1장 9절)”....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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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는 전 세계적으로 평화와 화해를 위한 활동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기독교 소수 종파로서, 300여 년의 역사를 통해 전쟁에 반대하고 폭력에 저항하는 사회활동으로 미국과 영국의 퀘이커 친우봉사회가 노벨평화상(1947)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에는 서울과 대전 두 곳에 모임이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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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ght and Silence: Friends for 350 Years Posted by Simon St.Laurent on August 10, 2006

Light and Silence: Friends for 350 Years



Light and Silence
Reflections on Quaker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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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ends for 350 Years


Howard Brinton's Friends for 300 Years, published in 1952, is a Quaker classic, and pretty much the only book on Quakerism I find regularly in used bookstores. Pendle Hill Publications reissued it in 2002 with a foreword, update, and notes by Margaret Hope Bacon as Friends for 350 Years.

Like The Rich Heritage of Quakerism, the author's voice is pretty clear, though in this case the voice is closer to my own. Unlike that book, however, the notes provide a second voice (Bacon) critiquing and sometimes correcting Brinton. Flipping back and forth between the notes and the main body of the book, you can hear a conversation going on disputing things like the influence of European mystics on Quakerism, questions of race in John Greenleaf Whittier's poetry, the optimism of the New Testament, and the behavior of various groups of Friends.

Unlike Walter Williams in The Rich Heritage of Quakerism, Brinton writes from a Wilburite perspective (see comments), giving them the benefit of the doubt for adherence to the original religion:


Among the Wilburites there was more opportunity than in either of the other two [Hicksite or Gurneyite Orthodox] for a genuine synthesis of the mystical and evangelical elements in Quakerism. It was they who could most clearly lay claim to be the heirs of the original Society of Friends. But there was an important difference. The code of behavior which the first Friends arrived at through immediate experience of the Inward Light, the Wilburites, with many exceptions, tend to accept in large measure on the basis of tradition.

While Brinton's claim that the Wilburites were the true heirs may raise some eyebrows, Brinton is constantly looking for a balance of the mystical element he sees Hicksites focusing on and the evangelical element that Evangelical Friends proclaim. The result is a book, that while still focused mostly on unprogrammed meetings, tries to reflect the understandings of a fairly wide swath of Quakerism.

It's an excellent book for newcomers to Quakerism to start with, as it focuses on what Quakers do and how they reached those conclusions rather than starting with the story of George Fox roaming England. Every section includes historical material, but it's not until near the end that Brinton assembles "The Four Periods of Quaker History". He's constantly telling stories, but his main narratives are built on Quaker practice. The outline itself is telling:


I. "To Wait upon the Lord"


II. The Light Within as Experienced


III. The Light Within as Thought About


IV. The Meeting for Worship


V. Vocal Ministry


VI. Reaching Decisions


VII. The Meeting Community


VIII. The Meeting and the World


IX. The Four Periods of Quaker History


X. Quaker Thought and the Present


An Historical Update by Margaret Hope Bacon


Page and Line Notes by Bacon


Appendix I: The Philadelphia Queries of 1946


Appendix II: The Philadelphia Queries of 2000

I strongly recommend Brinton's book, both for the content broadly - I'm sure I'll be citing it regularly - and as a chance to explore his perspective.

Now, does anyone know of a general history of Quakerism written explicitly from a Hicksite (or modern explicitly liberal) position?


Posted by Simon St.Laurent on August 10, 2006 4:31 PM | Permalink

COMMENTS


Hi, Simon!

I'm a bit surprised to see you say that Brinton wrote from a Wilburite perspective. As I myself read him, I see his strongest influences as coming from:

-- Robert Barclay (some of Brinton's writing is an almost straight re-writing of Barclay's Apology),

-- Rufus Jones (e.g. in Brinton's treatment of Friends' religion as a form of mysticism, which is definitely not Wilburite),

-- the early twentieth century liberal Quaker reformers generally (thus Brinton's simplified list of testimonies, which again is definitely not Wilburite),

-- the Beanite movement in unprogrammed Quakerism (e.g. Brinton's simplified approach to Quaker discipline, again definitely not Wilburite), and

-- Philadelphia Yearly Meeting (Brinton's seeming center of geographic perspective).


Posted by: Marshall Massey (Iowa YM [C]) | August 11, 2006 8:21 AM


In looking through the book again, it's clear that Brinton doesn't identify himself precisely as Wilburite.

Margaret Hope Bacon's introduction does make that connection explicitly, though not as strongly as I'd remembered:

It is no longer acceptable, as it perhaps was fifty years ago, to write the history of the Society of Friends exclusively from the point of view of one's own affiliation, as Brinton did from the viewpoint of a member of the Wilburite-leaning Philadelphia Yearly Meeting.

So his "seeming center of geographic perspective" - from Bacon's perspective at least - comes with a perspective of its own.

The extended quote above blends with related quotes about proper balance to make me reasonably convinced that while Brinton may not have been a Wilburite himself specifically, that was the 19th century group he clearly identifies with most strongly, and he seems quite pleased to be in the middle between those overly mystical and overly evangelical writers.

One very odd thing - he draws a line in his divisions diagram (on page 238) from the Orthodox Gurneyite over to Wilburite (which is right next to Philadelphia (Orthodox)) in the late 1800's, well after the Wilburites had left. He doesn't mention Bean, but maybe that's him connecting the Beanites and Wilburites, and placing himself at what he sees as a centrist position.

Posted by: Simon St.Laurent | August 11, 2006 4:21 PM


It's good to have your explanation of the Wilburite tag!

But I still don't really buy it. I think the fact that Brinton married the granddaughter of Joel and Hannah Bean (the Beans for whom "Beanite" is named) and became one of the co-founders of Pacific Yearly Meeting (the first yearly meeting to arise entirely out of the Beanite movement) must surely be as significant as his birthright membership in Philadelphia Yearly Meeting.

I think the fact that when Brinton was a young man, Rufus Jones was his beloved mentor, figures in as well; Jones was anything but a Wilburite. And Brinton's teaching positions at Earlham, Guilford and Haverford exposed him to the liberal tides then washing across the Quaker world, and further dissolved his attachment to the traditional "Wilburite-leaning" interpretation of Quakerism in which he'd been raised.

As for that "very odd .... line in his divisions diagram ... from the Orthodox Gurneyite over to Wilburite ... in the late 1800s", that line has nothing to do with the Beans. There were four yearly meetings formed by separations in the Gurneyite Quaker world beginning in 1877, in reaction against the widespread Gurneyite enthusiasm for Holiness theology and Holiness revivals. My own yearly meeting, Iowa (Conservative), is the last survivor of those four, the others being Western (Conservative), Kansas (Conservative) and Canada (Conservative).

All four of those Conservative yearly meetings subsequently allied themselves with the Wilburites of New England, Ohio and Iowa, as well as with North Carolina (Conservative) when it was formed a generation later. But none of them represented Friends who had sided with Wilbur in the original Wilbur-versus-Gurney dispute. And that is the reason for that "very odd line", which in fact maps the journey of those four yearly meetings from the Gurneyite to the Wilburite position.

Posted by: Marshall Massey | August 11, 2006 6:23 PM


Fair enough - Brinton didn't explain the diagram, or who he was speaking about in it. He doesn't mention Bean, Beanites, or Pacific Yearly Meeting and its predecessors at all that I can find. (He does mention Jones a few times, and "owes him a deep and permanent debt.")

He seems more interested in a continuum from mystical to evangelical, though later he adds a few more dimensions.

It's interesting to me that he shows Philadelphia (O) as slightly more evangelical (and less mystical) than the Wilburites. Five Years Meeting and Fundamentalists are both well to the evangelical side, while "General Conference Hicksites" are well to the mystical side. Early Quakers are in the center of this, though that leaves them more mystical than the Wilburites.

Without reproducing the diagram itself, I think the generally safe point is that Brinton sees himself - and the most complete forms of Quakerism - as balancing the mystical and evangelical. He shows the Wilburites closer than anyone else to that on the chart and speaks of them approvingly for similar reasons in the text.

You're correct that this doesn't make him a Wilburite historically. Bacon argues, and I think the text supports, that he was more sympathetic to Wilburite and Philadelphia perspectives than anyone else he actually names.

So I suspect that you're right in many ways, and that Margaret Hope Bacon is right in others.

I'm still looking for a broad perspective on Quakerism that's from the severely liberal side, perhaps Hicksite or latter-day Hicksite, just to find more substantial contrast. Perhaps they're too polite to write such things?

Posted by: Simon St.Laurent | August 11, 2006 9:52 PM


I just found this from Chuck Fager as well, in his "Liberal Friends (Re)discover Fox", from the recent George Fox's Legacy: Friends for 350 Years.

"With mixed Hicksite-Orthodox parentage, and a deep affinity for the Wilburite Quietists of his native Chester County, Pennsylvania, his career took him across the country, from Canada to Carolina to California and back. He likewise moved across the Quaker landscape of his time, from Quietist to liberal to evangelical, touching all the bases and seeing clearly what was going on in each quarter." (47)

That seems to be another source for this claim, and I think it may in fact be what started the blog entry.

Again, that doesn't mean that Brinton was himself Wilburite, so I've struck that (visibly) from the post.


Friends for 350 years by Howard Brinton | Goodreads

Friends for 350 years by Howard Brinton | Goodreads
Friends for 350 years

 3.50  ·   Rating details ·  8 ratings  ·  2 reviews


Apr 02, 2018rated it liked it
Shelves: religion
This is an old book in scholarly terms, as it was published more than sixty years ago. I read Margaret Bacon's revised version from 2002. She noted the dated racial and gender language in Brinton's text and Brinton's Cold War-era thoughts about religion versus authoritarianism. As Bacon explains in her postlude, Brinton's argument suffers from imprecision and factual inaccuracies. Brinton omits major incidents in Quaker history, preferring to discuss a singular Quaker mentality in often ahistorical terms. I found this approach flawed, too, albeit typical of some religious histories from the first half of the 1950s (Perry Miller's "The New England Mind, Vol. 1" is the most famous book that claims a religious group, the Puritans, spoke in a unified voice).

So, what does Brinton get right? His thesis — Quakerism is a religion founded on group mysticism — is sound. There is a good amount of history in the book, even if Brinton's chronology and methods are flawed. 
He shows real knowledge of the Quaker literary canon, particular the works of eighteenth-century mystic and abolitionist John Woolman. Brinton's analysis of Woolman's anxieties, desire to reduce oppression, and commitment to pacifism are useful as I research my own essay on Woolman and his brother Abner. 
Additionally, while Brinton is sometimes fuzzy about historical specifics, the book does show how a white, middle-aged, Cold War Quaker interpreted history to fit his religious beliefs. [?] 
Approach this book as a primary source — one man's testimony — rather than a proper secondary source. (less)

Jul 29, 2020rated it it was amazing
Quaker writers are a prolific bunch, but Howard Brinton's Friends for 300 Years (and the updated Friends for 350 Years) stands out from the crowd thanks to its deep but concise overview of Quakerism.

In 266 pages, Brinton shows us three centuries of Quaker history, the spiritual nature and evolution of Quakerism, and the procedural side of sustaining an organized body of people who have existed without rule by hierarchy for over 350 years.

Along the way, we can see Quakerism compared to Protestantism and Catholicism, the play of Greek and Hebrew influences on religion, Quaker life in different periods of Quaker history, and Quakers in the world.

One of the main benefits of this book is that the wealth of information is presented in under 300 pages. It’s accessible to those who are unfamiliar with Quakerism and still offers something more for those who are more familiar.

I found the line notes and historical update provided by Margaret Hope Bacon useful, but Brinton’s original writing holds its own.

This is now among my top favorite books on Quakerism.

For anyone wanting to dive deeper, I also recommend:

• Essays on the Quaker Vision of Gospel Order by Lloyd Lee Wilson for more on the spiritual and religious nature of Quakerism.

 Beyond Majority Rule: Voteless Decisions in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by Michael J. Sheeran for more on the procedural nature of Quakerism (i.e., how a body without hierarchic rule operates without falling into anarchy).

• The Journal Of John Woolman by John Woolman – for a moving first person account of an early American Quaker thinker and abolitionist.
 (less)

Friends for 350 Years: The History and Beliefs of the Society of Friends Since George Fox Started the Quaker Movement: Brinton, Howard H., Bacon, Margaret Hope: 9780875749037: Amazon.com: Kindle Store

Friends for 350 Years: The History and Beliefs of the Society of Friends Since George Fox Started the Quaker Movement: 
Brinton, Howard H., Bacon, Margaret Hope
Friends for 350 Years: The History and Beliefs of the Society of Friends Since George Fox Started the Quaker Movement Paperback – June 1, 1965
by Howard H. Brinton  (Author), Margaret Hope Bacon (Author)
4.5 out of 5 stars    15 ra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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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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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stomer reviews
4.5 out of 5 stars

Top reviews
Top reviews from the United States
Sven
4.0 out of 5 stars A great introduction to Quakerism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January 29, 2014
Verified Purchase
Intellectually sound but also very moving and affecting. It conveys a "felt sense" of the faith as well as information about it. This was my first book on Quakerism and appears to be a standard. The original version was "Friends for 300 Years." 
This version has a disappointing and downbeat addendum for the additional "50" which is not worthy of the original.
7 people found this help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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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r
5.0 out of 5 stars My first Quaker red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June 8, 2013
Verified Purchase
This is an excellent introduction to Quakerism. It gives a brief and understandable history of the Quaker belief system. Highly recommended.
5 people found this help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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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quelyn D. O'Neill
5.0 out of 5 stars Understand What You Believe and Why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April 29, 2016
Verified Purchase
As a practicing Quaker, I feel it is important to know what it is Society of Friends believe and why. This book has filled in gaps in my understanding and knowledge.
2 people found this help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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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zon Customer
5.0 out of 5 stars Five Stars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May 4, 2016
Verified Purchase
Great book.
One person found this help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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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ter L.
3.0 out of 5 stars fair quality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August 15, 2013
Verified Purchase
this book has been read by many readers! It is well used but adequate for my use. We're happy with it.
One person found this help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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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MacLeod
5.0 out of 5 stars Quaker 'Classic'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April 16, 2003
Quaker 'classic.' Brinton, who helped start Pacific Yearly Meeting (in California, Mexico, Hawaii) of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unprogrammed) and Pendle Hill (Quaker Center for Study and Contemplation near Philadelphia), describes the development of Quakerism since its beginnings with George Fox, Margaret Fell and others in the mid-1650s in England. He highlights the unique (mystical) form of Quaker Worship (in silence) as a third form of Christianity. Pendle Hill Publications used to title this book "Friends for 300 Years."
21 people found this help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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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nymous Customer
5.0 out of 5 stars Excellent, comprehensive, interesting "textbook" on Quakers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June 17, 2014
Excellent. So far, the best comprehensive, clear and interesting introduction to Quakerism I've bumped into. Not dry at all. Fun to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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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양심 '함석헌' 연구, 왜 필요한가? - 오마이뉴스

한국의 양심 '함석헌' 연구, 왜 필요한가? - 오마이뉴스


한국의 양심 '함석헌' 연구, 왜 필요한가?함석헌 사후 23주년에 스승을 생각하며...
12.02.11 15:42l최종 업데이트 12.02.11 15:43l
김성수(wad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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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석헌 생전의 함석헌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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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은 '한국의 양심'이라고 불리던 함석헌(1901~1989) 선생이 돌아가신지 23년이 되는 날이다. 그날 나는 두문불출하고 집안에서 하루 종일 그의 삶과 죽음을 생각하고 지냈다. 그에 대해 무엇인가를 쓰고 싶었지만 몸살로 건강이 안 좋았고 생각이 정리가 안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23년 전인 1989년 2월 4일 새벽 5시 40분, 어둠을 가르고 전화벨이 요란히 울렸다. 전화를 한 지인은 "함선생님 돌아가셨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즉시 택시를 타고 서울대학병원으로 향했다. 택시안의 라디오뉴스에선 벌써 "함석헌의 죽음"을 보도하고 있었다. 비록 이른 새벽이었지만, 서울대병원 영안실엔 벌써 몇 사람의 조문객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의 관을 보고, 그의 시신을 보고 나는 마치 나 자신이 그 관속에 누워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시신 앞에 예를 올린 후,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의 삶, 그의 죽음, 그리고 나의 인생…. 3시간 후, 나는 8년간 공무원으로 일하던 철도청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로부터 3년 반 후인 1992년, 역사학도로서, 나는 영국 에섹스대학교에서 학사논문으로 <함석헌과 한국의 민주주의>를 썼다. 5년 반 후인 1994년, 동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논문으로 나는 <함석헌의 노장사상과 퀘이커리즘 이해>를 제출했다. 9년 반 후인 1998년, 나는 영국 쉐필드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으로 <한국인 퀘이커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연구>를 집필했다.

10년간의 영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2000년 귀국 한 나는 2001년 국문판과 영문판으로 <함석헌평전>을 냈고, 지난해 원고를 보완, 수정하여 개정판을 냈다. 1980년 봄 그를 만난 이래 하루도 그를 생각 안 할 수가 없었고, 그는 나를 매순간 '지상에서 영원으로' 이끄는 나의 베아트리체가 되었다.

어려운 함석헌?



▲ 함석헌 함석헌과 필자. 1988년 1월 1일 함석헌 쌍문동 자택에서
ⓒ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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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여 년 동안 함석헌과 관련한 세미나나 학회를 수도 없이 다녔고 많은 분들을 만났다. 때로는 내가 직접 발표할 기회도 있었고, 때로는 다른 이들의 발표를 들을 기회도 있었다. 함석헌에 관한 강연을 들으며 말 못할 감동을 받은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어떤 강연에서는 강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경우도 많았다. 마치 군대시절의 풀리지 않는 암호 같은 이야기와 이상한 이론을 동원해서 '열심히' 함석헌 사상을 설명하고 있는 그 강사의 얼굴을 보면서 "저이가 제정신인가? 정신병자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든 적도 많았다. 강연을 들으러 온 것을 시간이 아까워서 후회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함석헌연구'는 물론 절대 필요한 일이다. 영국유학시절 간디에 대한 연구물이 수만 수십만 권이 있는 것을 보고 경탄을 금치 못한 적이 있다. 그에 비해 함석헌에 대한 연구물은 국내외에 너무도 열악한 실정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이나 함석헌에 대해서 몇십 년 연구한 연구자들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이론과 표현을 통해서야만 함석헌에 대해 설명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함석헌에 대한 연구가 아니다. 발표하는 사람의 자기만족일 뿐이고 함석헌에 대한 추상화, 우상화작업일 뿐이다. 함석헌 말대로 "진리는 독점되어선 안 되고 독점 될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혼자만 이해 할 수 있는 사상, 몇 사람만 아는 사상은, 적어도 내겐 아무의미가 없는 공허한 궤변과 소음에 불과하다.

'초월자' 함석헌?

함석헌에 대한 존경심이 지나쳐서 어떤 이들은 함석헌을 좌우에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인 사상가로 또 심한 경우는 그를 좌우를 초월한 '초월자'로 묘사한다. 그러나 인간은 로봇이 아니고 신도 아니다. '중립' 혹은 '초월'적인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만 있지, 모두 편향되어있다. 특별히 우리나라처럼 국가폭력이 만연했고(용산참사의 경우는 현재진행형이다), 정경유착과 그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양극화가 극심한 나라에서 '중립'을 내세우는 학자들의 대부분은 약삭빠른 '기회주의자' 이거나 현실에 안주하고픈 자기의 비겁함을 합리화하는 '겁쟁이 지식인'들이 라고 단언한다.

독재자 박정희-전두환과 함석헌 둘 다를 좋아하는 변태적 지식인들도 만나볼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한국현대사 속에서 국가폭력으로 인해서 발생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화해, 박정희-전두환과 함석헌 사이의 화해를 주장한다. 그러나 내 상식은 가해자는 화해를 논할 자격이 없다. 이근안이 김근태에게 화해하자고 할 수 있는가? 화해는 피해자만이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피해자에게 가해를 요구하거나 강요할 수 없다. 화해는 신의영역이다. 나는 화해보다는 사회정의가, 특별히 우리나라처럼 불의와 부조리가 강물처럼 넘치는 나라에서는, 선행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함석헌에 대한 경애심이 도를 넘어서 그를 좌우논쟁을 넘어선 '초월자' 로 묘사하는 추종자들 있다. 나는 어느 한 인간을 '초월자'로 만들고 떠받드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경우 그 '초월자'는 범인들이 접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탈역사화'한 존재로 박제화 된다. 그런 우상화된 인간들을 우리는 많은 독재국가나 전체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다. 결국 함석헌을 '초월자'로 대우하는 것은 그를 스탈린이나 김일성처럼 우상화하는 것이고 독재자로 만드는 것이다.

극좌파 함석헌

함석헌은 개신교의 한 부류인 퀘이커교도로 그 삶을 마감했다. 함석헌의 지인이기도 했던 미국의 퀘이커 역사가 하워드 브린톤(1884-1973)은 그의 저서 <퀘이커 300년>에서 "퀘이커 신앙은 영국 종교개혁의 극좌익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 말은 퀘이커교도는 최소한 "파이 키우기"를 옹호하는 우파보다는 "부의 재분배"를 강조하는 좌파에 가깝다는 말이다. 이 말은 또한 퀘이커교도는 천박한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적 가치를 내세우는 이명박 정권이나 일방주의를 내세우던 미국의 부시 정권보다는 평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힘쓰던 노무현 정부나 미국의 오바마 정부에 가까워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 퀘이커 모임에 종종 나오는 사람들이나 함석헌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 중엔 함석헌은 좌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았고 중립적 인물이었거나 차라리 우파에 가까웠다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함석헌에 대한 평가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약자가 강자의 폭압에 의해 수탈당하고 고통을 겪고 있는데 '중립'은 곧 강자에 기생한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는 비겁한 기회주의적 변명에 불과하다.

예수도 "네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저희 것이다",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나가기보다 어렵다"고 목숨을 걸고 가르쳤고 결국 정치권력의 손에 생명을 잃었다. 이런 예수의 삶과 말도 좌파의 전형이었고 그런 예수와 퀘이커신앙을 따르던 함석헌도 당연히 좌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일찍이 오산학교 시절인 1936년 함석헌은 이렇게 역설한 바 있다."우리가 정치가를 생각한다면 어떤 것을 참말 위대한 정치가라 하겠나? 내 생각으로는 사회의 억눌린 계급의 민중을 살길로 지도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상류사회를 위한 시설을 아무리 잘하고라도 하층에 짓밟히고 억눌린 민중이 있으면 국가는 위협을 느낀다. 국가의 운명은 하층민의 손에 달린 것이지 결코 상층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위정자의 재능의 척도는 하층사회에 대한 시설에 있다." 이런 함석헌의 글은 마치 내가 <자본론>을 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연구는 행동이 아니다? '함석헌연구' 더 필요하다!



▲ 김성수 최근의 필자(왼쪽)
ⓒ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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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추종자 중엔 집필이나 연구는 행동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 이들 중엔 '함석헌연구'보다는 함석헌처럼 행동하며 살자고 강변하는 이들도 있다. 중국의 사마천은 궁형(거세형)을 당하면서도 <사기>를 썼다. 그의 <사기>가 동아시아 역사에 미친 영향과 공헌을 필설로 다 기술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럼 사마천의 집필행위는 '행동'이 아닌가? 독일 종교개혁의 불씨를 담긴 마틴 루터는 <기독자의 자유>라는 짧은글을 써서 유럽에 종교개혁의 불길을 지폈다. 토마스 페인은 <상식>이라는 짧은 글을 써서 대영제국에 대항한 미국독립전쟁의 이론적 정당성을 마련해 주었다.

사람은 다 자기 그릇이 있다. 안창호에게 안중근 같이 이등박문을 향하여 총을 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튼에게 셰익스피어처럼 <로미오와 줄리엣>을 쓰라고 주문하는 것은 무리다. 인간은 한계를 지닌 존재라는 말이다. 내가 함석헌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는 누구에게 '무엇을 하시오'라고 권유하거나 지시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떤 일이 옳다고 믿으면, 그는 누구에게 그 일을 하라고 강변하기보다는,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혼자서 그 일을 했다. 그리고 기꺼이 그로인해 오는 고난을 받아들였고 희생을 당했다. 그가 받은 고난과 희생의 결과로 오늘 한국인들이, 이나마 부족하지만, 민주주의를 이루었고 자유를 쟁취했다.

돌이켜보면 내 삶 자체는 함석헌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를 처음 만난 지가 어느덧 32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23년이 넘었다. 삶을 살아 갈수록 나는 내 자신이 얼마나 함석헌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는지 의식하게 된다. 특별히 그의 영향으로 나는 철도공무원에서 역사가, 근본주의자에서 보편주의자, 복음주의자에서 인본주의자, 교조주의자에서 낭만주의자가 되었다.

내게 역사와 철학의 '맛'을 알게 해 준분도 함석헌이고, 무엇이 인생과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인가를 깨우쳐준 분도 함석헌이다. 내게 함석헌은 진리, 도(道), 하느님을 보여준 마음의 창문과 같은 존재다. 그가 살아서 그의 가르침과 영감(inspiration)이 내 인생에 어떤 열매를 거두게 했나 보셨으면 하는 염원도 감히 해본다. 그가 남겨준 따스한 사랑과 들사람얼(野人精神)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항상 나와 함께 하리라 확신한다.

돌아가신지 23주년에 스승 함석헌을 생각하며......


덧붙이는 글 | * 김성수 기자는 <함석헌평전> 저자입니다.

퀘이커 영성 연구 :: 정지석, 기초학문자료센터

퀘이커 영성 연구 :: 기초학문자료센터
퀘이커 영성 연구  정지석
Researchers have entered the information directly to the NRF of Korea research support system

Program 학문후속세대양성_시간강사(인문사회)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
Project Number 2011-35C-A00282
Year(selected) 2011 Year
Research period 1 Year (2011년 09월 01일 ~ 2012년 08월 31일)
chief of research 정지석 [ NRF 인문사회 연구책임 1회 수행 / 학술논문 2편 게재 / 총 피인용 2회 ]
Executing Organization 성공회대학교
the present condition of Project 종료

Research Summary
Goal
1. 연구의 주제 및 내용
이 연구는 서구 기독교 신앙 전통 안에서 독특한 영성을 발전시켜 온 퀘이커 영성에 관한 것이다. 퀘이커 운동은 영국의 종교 개혁 운동으로 평가되는 청교도 혁명 진영 안에서 종교적 좌파라고 불릴만큼 급진적인 영적 개혁을 추구했다. 퀘이커는 사회개혁 운동에도 적극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서 급진적인 영적 체험 신앙에 기반한 사회 개혁 운동이라는 독특한 종교적 영성을 형성했다.

이렇게 개인적 영적 체험과 사회적 책임 윤리가 일치된 영성은 서구 기독교의 이원론적 신앙과는 상당히 구별되는 것이다. 서구 기독교의 전래를 받은 한국 기독교는 몸과 영, 세속과 성스러움, 정치와 신앙, 국가와 교회라는 이원론적 신앙에 익숙해 짐으로서 사회적 책임윤리를 동반하는 성숙한 신앙 형성에서 실패했다. 반면에 퀘이커 영성은 개인의 영적 체험과 사회적 실천을 반드시 일치하여 본다. 퀘이커는 사회적 실천을 결여한 영적 체험의 신앙은 미신적 신앙이라고 단언한다. 신적 존재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추구하는 신비주의 신앙 체험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책임 윤리를 실천하는 퀘이커 영성은 '윤리적 신비주의(Ethical Mysticism)'으로 표현된다. 이 연구는 퀘이커의 윤리적 신비주의 영성을 밝히는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럼으로서 현대 사회 속에서 종교의 본질적 역할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퀘이커리즘은 영국과 미국에서는 종교학과 신학뿐 아니라 영문학, 역사학, 정치학, 종교사회학 분야에서 많이 연구되고 있는 반면에 한국 종교학계에서는 잘 다뤄지지 않은 분야이다. 최근에 신학 분야에서도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등과 같은 신비주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늘어가고 있다. 이것은 신비주의 영성과 사회 정의와 평화 운동과의 관계성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다. 한국 종교 사상가로서 유영모, 함석헌의 사상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것도 이런 문제의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나는 본다. 특히 함석헌은 서구 기독교 가운데 퀘이커리즘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공부했다. 20세기 미국의 대표적 퀘이커 학자인 하워드 브린톤(Howard Brinton)의 “퀘이커 300년”를 번역하여 소개했으며, 미국과 영국의 퀘이커 교육기관인 펜들힐과 우드부룩에서 몇 학기 동안 머물면서 퀘이커리즘을 공부했다. 그러므로 퀘이커 영성을 연구하는 일은 함석헌의 사상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학문적 기초를 제공하는 일이 될 것이다.

퀘이커리즘은 서구 기독교 전통 중에서는 소종파로 분류된다. 소종파 운동은 제도권 종교, 특히 기독교가 영적 위기에 직면해 있는 상황에서는 다시 연구되고 깊이 이해되어야 할 분야이다. 독일의 종교 사학자인 트렐취(Ernst Troeltsch)는 그의 교회사 연구를 통해 카토릭 교회와 개신 교회가 제도화 형식화에 따른 신앙의 위기를 겪을 때, 영적 개혁의 원천으로서 소 종파 교회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나는 트렐취의 관찰이 오늘 한국교회 상황에서도 타당성을 갖는 것이라 본다. 그러므로 퀘이커리즘의 연구는 한국 교회의 영적 개혁에 기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연구는 퀘이커 영성을 침묵 예배에 초점을 맞춰 다룬다. 침묵 예배는 기독교 전통 안에서 매우 독특한 예배이다. 일반 종교와 교회가 점차 세속화되고 제도화 되면서 종교적 영성 또한 제도화의 길을 걸은 것과는 달리 퀘이커리즘은 영적 체험의 원초성을 보존하고자 노력했다. 제도를 최소화시키는 노력이 침묵 예배의 형태이며, 이런 관점에서 이 연구는 침묵 예배의 영적 차원과 의미를 밝혀보고자 할 것이다.

퀘이커 영성 가운데 특별한 것은 평화의 영성이다. 퀘이커는 영미권에서 평화의 대명사로서 일컬어진다. 세계 분쟁과 갈등이 일어난 곳에는 퀘이커들이 거의 들어가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퀘이커들은 평화 운동에 깊이 투신하고 있다. 왜 퀘이커들은 평화 운동에 헌신적으로 투신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퀘이커 평화 영성이란 관점에서 찾아질 것이다.

요약하면, 이 연구는 퀘이커 영성을 개인적 체험 신앙과 사회 개혁적 실천의 종합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하며, 그 주요 연구 내용은 퀘이커 침묵 예배와 평화의 영성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Expectation Effectiveness
연구결과의 교육적 기대 효과

1. 교육적 가치
퀘이커 영성 연구는 종교에 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성찰을 할 수 있는 교육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 교육적 가치는 다음 세가지로 설명된다.

(1) 이 연구는 종교의 평화적 기능을 교육할 수 있는 가치를 갖는다.
종교는 평화를 전파하지만, 인간 역사 속에서 종교간에 갈등과 분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21세기에 들어선 세계는 종교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에 들어와 있다. 9.11 테러 사건은 서구 기독교 진영과 이슬람 진영의 종교 갈등으로 설명된다. 우리 한국 사회는 다종교 사회이다. 종교간의 갈등의 가능성은 잠복해 있다. 그러므로 종교의 평화 영성을 강조하고 교육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인문학적 교육의 과제이다. 퀘이커 평화 영성은 이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모델을 제시한다.

(2) 이 연구는 종교적 신앙에 대한 합리적 사유 능력을 증진 시키는데 기여한다.
인간은 종교적 존재이다. 신앙은 인간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도 하지만, 맹목적인 열광주의 신앙은 개인의 삶 뿐 만 아니라 사회 공동체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주관적인 종교적 체험에 대한 객관적 사유 능력을 증진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퀘이커 영성 연구는 종교 신앙에 대한 합리적이고 성찰적인 길을 교육하는데 좋은 모델을 제시해 준다.

(3) 사회 행동에 윤리적 기초를 제공한다.
종교는 개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일 뿐 아니라, 사회 윤리적 행동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교육과정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종교는 과연 어떤 모습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비판적 판단력을 길러주는 것은 종교 교육의 중요한 목적이다. 퀘이커 영성 연구는 이 점에서 하나의 준거점을 제시한다. 퀘이커들은 사회 윤리적 태도를 중시한다. 그 기본 정신은 사회적 선을 추구하며, 공동체의 평화를 지향한다. 이런 점에서 이 연구 결과는 내적 성찰에 근거한 사회적 행동을 증진시키는 사회 교육의 좋은 자료를 제공한다.

2. 연구 결과의 교육 커리큘럼의 가능성과 적용 영역
퀘이커 영성 연구의 결과는 종교와 사회 교육, 신학 교육 그리고 교양 과정 교육 영역에서 활용될 수 있다. 최근 전문 과정으로서 새로이 부각되는 영성교육과 평화교육의 자료가 될 수 있다.

(1) 종교와 사회 교육 커리큘럼으로서의 의미
종교 교육은 사회 교육의 관점에서 시도되어야 한다. 퀘이커 영성 연구 자료는 종교의 사회적 역할에서, 그리고 사회의 종교적 성찰 능력을 키움에 있어서 매우 적절한 사례를 제공한다. 종교는 사회와 건강한 긴장 관계를 가짐으로서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있다. 사회 교육은 종교의 초월적 영성에 기반할 때 국가주의로 빠지는 일방적 이데올로기 교육에서 탈피할 수 있다. 이것이 종교 교육과 사회 교육이 함께 가야하는 이유이다. 퀘이커 영성은 이 점에서 좋은 교육적 사례를 제공한다.

(2) 신학교육 커리큘럼으로서의 의미
한국의 신학교육 커리큘럼은 교회 성직자로서 전문인은 양성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회와 소통하는 능력 양성은 빈곤하다. 한국 개신교의 종교적 배타성의 문제는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이것은 교리 중심의 배타적인 신학교육의 산물이다. 신학 교육은 영성적 접근을 강조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퀘이커 영성은 기독교 본질적 신앙을 추구하는 영성이므로 진보, 보수 신학을 막론하고 수용될수 있다. 이 점에서 퀘이커의 영성은 신학 교육 커리큘럼에서 매우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있다.

(3) 교양 과정 커리큘럼으로서의 의미
퀘이커 영성은 종교적 영성과 함께 평화적 영성을 깊이 간직한 것이므로 대학생들의 교양 과정으로 교육하기에 매우 적절한 것이다. 나는 대학생 교양 교육의 필수 커리큘럼으로서 평화교육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중고등 학생 시절 치열한 경쟁 교육의 억압적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인성과 사회적 태도에서 매우 거칠고 폭력에 민감하다. 그러므로 대학의 교양과정에서 평화교육은 해독제 역할을 할 수 있다. 평화 교육은 유네스코(UNESCO)에서도 권장하듯이 인간의 마음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 점에서 퀘이커 평화 영성은 평화 교육의 핵심적 내용이 될 수 있다.
Summary
이 연구는 다음과 같은 목차와 내용으로 수행된다.

<목차>
I. 서론
II. 침묵의 영성
II.1. 침묵 예배
II.2. 침묵의 성례전
III.3. 침묵의 영성과 문화

III. 퀘이커 평화 영성
III.1. 신앙과 실천
III.2. 윤리적 신비주의
III.3. 화해자와 예언자

IV. 결론

====

I. 서론
서론에서는 퀘이커리즘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간략하게 소개될 것이다.

II. 침묵의 영성
퀘이커리즘을 특징짓는 것은 침묵의 영성이다. 퀘이커 침묵 영성은 침묵 예배, 침묵의 성례전, 침묵 영성과 문화라는 세 소주제로 다뤄진다.

II.1. 침묵 예배
퀘이커 침묵 예배는 예전과 설교자를 갖지 않는 비형식의 독특한 예배양식으로 정통 퀘이커리즘의 주요 특징이다. 침묵 예배는 경험적 자료를 요청한다. 나는 퀘이커 침묵 예배에 참석한 경험을 토대로 저술 할 계획이다. 영성 신학자인 바클레이는 이 침묵 속의 기다림을 외적 예식과 종교 의식에서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이 주로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퀘이커들의 침묵 예배는 초기 퀘이커리즘부터 취해 온 것으로서 씨커들의 영적 체험 방식에서 온 것이다.

퀘이커 침묵 영성은 제도와 교리같은 외적 신앙 체제보다 내적 영성 체험을 중시하는 태도이다. 이것은 교회의 외적 성장이나 교리의 신봉같은 가시적인 모습에서 신앙의 척도를 재려하는 한국교회 신앙 문화에 새로운 성찰점을 준다는 관점에서 연구되고 저술 될 것이다.

II.2. 침묵의 성례전
퀘이커는 기존 교회가 하는 세례와 성만찬을 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퀘이커리즘이 정통 기독교에 속하는가 하는 의문을 불러 일으키는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퀘이커는 성례전을 부인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성례전의 본질을 구현한다고 주장한다. 성례전에 대한 태도에서 우리는 퀘이커의 종말론 신앙과 일반 정통 교회의 종말론 신앙의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퀘이커리즘의 현재적 종말론 신앙은 퀘이커 영성의 주요한 차원을 밝혀준다.

II.3. 침묵 영성과 문화
퀘이커의 삶의 문화는 침묵의 영성이 낳은 삶의 결실이다. 침묵의 삶의 문화는 조용한 삶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모든 개인을 존중하는 문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퀘이커 공동체의 만장일치제 문화에서 잘 설명된다.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 삶의 문화는 개인 상호간의 존중, 소수자의 의견 중시라는 공동체 생활 문화를 낳았다. 침묵의 영성이 낳은 퀘이커리즘의 문화는 오늘 우리 사회 현실에서 매우 유용한 공동체 문화의 모델이 된다.

III. 퀘이커 평화 영성
퀘이커 평화 영성은 신앙과 실천, 윤리적 신비주의, 화해자와 예언자의 관점에서 탐구된다.

III.1. 신앙과 실천
퀘이커리즘의 평화 신학은 20세기 이래 평화주의 신앙을 역사적 상황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대안적 평화주의(Alternative Pacifism) 사상을 발전시켰고, 부정적 반대의 입장이 아닌 적극적 참여를 통한 건설적 평화주의(Constructive Pacifism) 입장을 발전시켜 왔다. 퀘이커리즘의 역사 참여적 실천적 평화주의는 기독교 평화주의(Christian Pacifism)의 새로운 논의의 장을 열어준다. 나는 퀘이커의 실천적 평화주의의 사회 평화운동에서의 적용 가능성을 주목하며 저술할 계획이며, 이 연구는 교조주의와 탈사회, 비역사주의로 평화주의를 이해해 온 고정관념을 교정할 것이다.

III.2. 윤리적 신비주의
퀘이커의 평화 영성은 그들의 영적 체험에 기반한 평화적 실천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 영성은 기본적으로 윤리적 신비주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퀘이커들은 사회적 책임 윤리의 핵심 사상으로서 평화를 강조해 왔다. 이들은 어떤 조건과 목적을 위해서도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평화주의 영성을 초기 퀘이커리즘에서부터 선언하고 지켜왔다. 20세기 와서 퀘이커들은 사회 정의를 실현함에 있어 비폭력 저항의 영성을 발전시켜왔다. 간디의 비폭력주의는 퀘이커 평화주의 영성의 현대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III.3. 화해자와 예언자
퀘이커의 평화 운동은 갈등을 중재하는 화해자의 역할과 사회 개혁을 추진하고 전쟁에 반대하여 권력에 진리를 증언하는 에언자적 면모를 갖는다. 퀘이커들은 갈등의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길로서 갈등 해결 방법론을 발전시켜 왔다. 또한 국가 권력의 전쟁 행위에 맞서 양심적 병역거부, 구호봉사 활동, 비폭력 저항 행동, 군사비 납세 거부운동, 평화로비 활동, UN 설립운동과 개혁운동등을 수행해 왔다.

Korean Keyword
퀘이커 평화 영성,개인 존중의 공동체 문화,평화주의 신앙,비폭력주의,간디,화해자와 예언자,마에스트 엑카르트,유영모,사회 개혁,종교개혁,급진적 영성주의,침묵의 문화,현재적 종말론,침묵의 성례전,퀘이커 침묵과 불교 선,조지 폭스,루퍼스 존스,신앙과 실천,보편주의 빛,속의 빛과 소리,하나님과의 직접 만남의 경험,침묵 예배,침묵의 영성,씨커,퀘이커,퀘이커리즘,함석헌,양심,초기 퀘이커리즘,인도주의 정신,윤리적 신비주의,기독교 평화주의

English Keyword
Radical Spiritualism,Seeker,Rufus Jones,Ham Sokhon,Quaker,Quakerism,Humanitarianism,Reconciler and Prophet,Religious Reformation,Social Reform,Spirituality of Silence,Silent Worship,Direct Experience of God,Inner Light and Voice,Universal Light,Quaker Silence and Buddhist Zen,Silent Sacrament,Realized Eschatology,Silent Culture,Respect of Individual and Community Culture,Quaker Pacifism,Faith and Practice,Ethical Mysticism,Nonviolence,Early Quakerism,Conscience

Research Summary
Korean
이 연구는 내적 영적 체험과 사회개혁 실천이 하나로 통전된 영성이란 관점에서 퀘이커 영성을 탐구한다. 통전의 영성이란 신앙과 실천이 하나로 일치된 영성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통전의 영성은 초기 퀘이커리즘부터 현대 퀘이커리즘까지 이어진다.
퀘이커 영성의 종교적 배경을 살펴보면, 초기 기독교의 신비주의 신앙전통, 재세례파 신앙, 존 캘빈의 신앙, 퓨리턴 신앙등과 같은 종교 개혁파 신앙이 주요하게 영향을 끼친 요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퀘이커 영성의 독특성은 침묵 예배와 침묵의 성례전에서 잘 나타난다. 퀘이커들은 침묵 예배를 드린다. 침묵 예배 속에서 퀘이커들은 하나님과 직접 만남의 영적 체험을 한다. 이것은 퀘이커 영성의 원천이다. 성례전도 아무런 형식없이 침묵 가운데 한다. 침묵 예배와 침묵의 성례전은 초기 퀘이커리즘 부터 현대 퀘이커리즘까지 이어져오는 매우 퀘이커적인 예전으로서, 다른 기독교 신앙 전통과 구별되는 독특한 점이다. 퀘이커들은 ‘속의 빛’과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그것’이 있다고 믿는다. 이 영적 실체들은 퀘이커 침묵의 영성의 내적 체험의 기반이며 퀘이커 신비주의란 내재하는 신성에 관한 것임을 드러낸다.
퀘이커 영성은 사회개혁, 정의와 평화를 향한 실천적 영성이다. 내적인 신비 체험은 사회개혁의 실천으로 표현될 때 참된 영성이 된다. 이와 같은 실천적 영성을 퀘이커리즘은 윤리적 신비주의라고 말한다. 이 윤리적 신비주의는 오늘날 이기적, 자기 만족적 신앙이 만연한 종교들 안에서 비판적 성찰 자료를 제공하다. 같은 의미에서 영적 체험에 기반한 사회 개혁 실천은 맹목적이고 집단 이기주의적 행동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하게한다.
퀘이커 실천 영성은 평화, 평등, 단순성으로 나타난다. 퀘이커들은 전쟁을 거부하며, 어떤 이유에서든 폭력 사용을 반대한다. 이들에게 평화의 영성은 이 세상 속에서 평화의 이상을 실천하는 소수자가 되려는 용기의 원천이다. 퀘이커들은 인간 차별을 철폐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실천적 삶을 살고자한다. 평등은 영성은 고난에 처한 모든 사람들을 돕고 연대하려는 퀘이커들의 사회적 행동의 정신적 원천이다. 퀘이커들은 자발적으로 단순 소박한 삶을 살고자 한다. 물질적으로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단순함을 추구한다. 퀘이커 단순성의 영성은 오늘날 종교적 경제적 삶에서 소비주의와 외적 성장주의를 극복하는 매우 가치있는 영성이며, 삶의 길을 제시해 준다.




English
This essay explores Quaker spirituality from the viewpoint of the integrated spirituality between the inner spiritual experience and the practice for social reform. The integrated spirituality indicating the unity between faith and practice has been continued to modern Quakerism from early Quakerism.
The religious sources of Quaker spirituality are grounded on the reformative faiths such as primitive Christian faith, Anabaptism, John Calvin and Puritanism.
Quaker spirituality expresses the spirituality of silence being characterized by a silent worship and a sacrament of silence in which they experience a direct meeting with God. Since early Quakerism, Quakers have been keeping the silent worship and the sacrament of silence which the Quaker liturgies are distinguished from mainstream Christian liturgies. Quakers believe that there is ‘Light within’ and ‘that of God in everyone’. These spiritual entities are basic grounds for Quakers making spiritual experience internally in silence possible, and reveal what Quaker mysticism is about immanence of divinity.
Quaker spirituality indicates a spirituality of practice for social reform towards justice and peace. Inner mystic experience becomes authentic as it is practically expressed to social reform. This type of social activism-oriented spirituality is referred to ‘ethical mysticism’ which it provides a critical reflection on selfish and complacent faith prevailing in religions today. By the same token, spirituality-based social activism stimulates a critical reflection on blind and group egoism-centered activism.
Quaker integrated spirituality is characterized in terms of peace, equality and simplicity. Quakers opposes warfare unconditionally and rejects to use carnal weapons. It is a spirituality of peace that inspires courage to be a minority to practice the ideal of peace in the world. Quakers tend to live with a spirituality of equality to respect human dignity and to eliminate all the conditions of social discrimination from the human community. Quakers seek voluntarily a simple life spiritually as well as materially. Quaker spirituality of simplicity is a core value and a way of life overcoming consumerism and growth-centerism in religious as well as economic life today.
Research result report
Abstract
이 연구는 서구 기독교 신앙 전통 안에서 독특한 영성을 발전시켜 온 퀘이커 영성에 관한 것이다. 퀘이커 운동은 영국의 종교 개혁 운동으로 평가되는 청교도 혁명 진영 안에서 종교적 좌파로서 급진적인 종교 개혁과 사회 개혁을 동시에 추구했다. 이런 바탕에서 퀘이커는 영적 체험 신앙에 기반한 사회 개혁 실천이라는 독특한 종교적 영성을 형성했다.
개인의 영적 체험과 사회적 실천성이 통전된 퀘이커 영성은 서구 기독교의 이원론적 신앙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서구 기독교의 전래를 받은 한국 기독교는 몸과 영, 세속과 성스러움, 정치와 신앙, 국가와 교회라는 이원론적 신앙에 익숙해 짐으로서 사회적 책임윤리를 동반하는 성숙한 신앙 형성에서 실패했다. 이 점에서 개인의 영성과 사회적 실천성의 일치를 추구하는 퀘이커 영성은 한국교회와 종교에 좋은 성찰 자료를 제시한다.
퀘이커리즘은 영국과 미국에서 종교학과 신학뿐 아니라 영문학, 역사학, 정치학, 종교사회학 분야에서 많이 연구되고 있는 반면에 한국 종교학계에서는 잘 다뤄지지 않은 분야이다. 퀘이커 영성에 대한 연구는 이 논문이 처음이다. 독일의 종교 사학자인 트렐취(Ernst Troeltsch)는 기독교 사회사상사(The Social Teaching of the Christian Churches) 연구를 통해 퀘이커리즘을 신비주의 소종파(Sect -Type Mysticism)로 분류하면서, 카토릭 교회와 개신 교회가 제도화 형식화에 따른 신앙의 위기를 겪을 때, 영적 개혁의 원천으로서 소종파 신앙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나는 트렐취의 관찰이 오늘 한국 종교 특별히 기독교의 심각한 문제 상황에서 타당성을 갖는다고 본다. 퀘이커 영성 같은 소종파 종교 영성에 대한 연구는 제도권 종교, 특히 영적 위기에 직면해 있는 한국 기독교 상황에서는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최근 기독교 신학 분야에서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같은 서구 기독교 신비주의 영성 전통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고 있는 경향도 나는 같은 맥락에서 보는데, 이런 경향은 교리 중심의 신학과 교회의 영적 기갈 현상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보여준다. 이런 관점에서 퀘이커 영성 연구는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영적 개혁에 기여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 연구는 퀘이커 영성을 침묵의 영성과 실천 영성의 관점에서 고찰한다. 퀘이커 침묵의 영성은 침묵 예배, 침묵의 성례전에서 다른 기독교 전통과 확연히 다른 영성의 면모를 보여준다. 아울러 퀘이커 침묵은 불교의 선 명상과 비교적 관점에서 다뤄진다. 침묵의 영성을 가진 퀘이커리즘은 불교와 비슷하여 '동양적 기독교'라고 불리기도 한다. 퀘이커 침묵과 불교의 명상은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고 유사점이 있는지 밝혀질 것이다.
현대 퀘이커리즘은 침묵의 영성을 간직하면서 동시에 강한 사회적 실천성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 연구는 퀘이커 영성의 주요한 특징인 실천적 면모를 실천 영성의 관점에서 다룬다. 실천의 영성은 평화(Peace), 평등(Equality), 단순성(Simplicity)의 주제로서 고찰된다. 이 세가지 실천 영성은 초기 퀘이커리즘에서부터 현대 퀘이커리즘에 이르기까지 매우 뚜렷한 퀘이커 영성으로 계승되어 왔다. 평화의 영성은 전쟁반대에서부터 사회정의의 실현을 추구한다. 평등의 영성은 남녀평등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차별없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인권사상의 기초가 된다. 단순성의 영성은 물질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단순 소박한 삶을 추구하는 영성으로서 물질소비 문명이 낳은 생태계 위기에 대한 대안적 종교적 영성으로 제시된다.
침묵의 영성은 체험 영성으로, 실천의 영성은 사회적 실천의 영성으로 다뤄지며 이 둘을 통전하는 개념으로서 퀘이커리즘은 ‘윤리적 신비주의’로서 조명된다. 퀘이커 영성은 단순히 신비주의 신앙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성을 갖는 영성이다. 이 글에서 윤리적 신비주의는 영성에 기반한 사회실천이란 관점에서 다뤄진다.
이 글에서는 퀘이커 영성을 다룰 때, 그것의 원초적 배경인 초기 퀘이커리즘을 다루면서, 동시에 현대적 상황에서 여전히 살아있는 현대 퀘이커리즘에 초점을 맞춘다. 초기 퀘이커리즘의 창도자인 조지 폭스(George Fox)와 초기 퀘이커리즘을 신학화시킨 바클래이(Barclay)의 퀘이커리즘 이해가 소개될 것이며, 20세기 이후 현대 퀘이커 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비판적으로 탐구된다. 특별히 퀘이커 영성을 기독교 복음주의 영성의 빛에서 고찰함으로서 퀘이커리즘의 기독교적 영성의 뿌리를 탐색한 루퍼스 존스의 입장이 다뤄진다.
퀘이커 영성은 이론적, 신학적이기보다는 체험적 영성이다. 나는 퀘이커 예배 모임에 참석하면서 참여 관찰과 체험을 통해 퀘이커 영성을 깊게 파악하고 이해하려고 했다. 이 글은 퀘이커 학자들과 영성가들의 저술들에 대한 문서 비평 연구와 나의 개인적 참여와 체험 연구로서 이뤄진 것이다.
Research result and Utilization method
연구 결과는 논문으로뿐만 아니라 좀더 많은 일반 사람들이 읽기 쉬운 내용의 책으로 출판되어 대중의 종교적 교양을 넓히고, 신학교육 커리큘럼의 자료로서 뿐만 아니라, 시민단체의 사회적 행동에 대한 자기 성찰, 기성종교의 영적 갱신의 자료로서 활용된다.
1. 교육적 활용 - 신학, 종교학, 교양과목 커리큘럼으로 활용
퀘이커 영성 연구는 종교에 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성찰을 할 수 있는 교육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신학교육과 종교학 분야, 그리고 인접 인문학 분야에서 교양 과정으로 활용될 수 있다.
첫째, 기독교 신학교의 신학교육 커리큘럼에 소종파 영성 연구 주제로 포함되어 교리신학 중심의 신학교육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최근 영성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퀘이커 영성은 신학교육의 주제로 좋은 자극과 도전이 될 것이다. 한국의 신학교육 커리큘럼은 교회 성직자로서 전문인은 양성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회와 소통하는 능력 양성은 빈곤하다. 한국 개신교의 종교적 배타성의 문제는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이것은 교리 중심의 배타적인 신학교육의 산물이다. 신학 교육은 영성적 접근을 강조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퀘이커 영성은 기독교 본질적 신앙을 추구하는 영성이므로 진보, 보수 신학을 막론하고 수용될수 있다. 이 점에서 퀘이커의 영성은 신학 교육 커리큘럼에서 매우 유용한 자료로서 활용될 수 있다.
둘째, 종교학 분야에서 활용될 수 있다. 최근 종교학은 기존의 종교 제도와 형식 연구로부터 내적 영성에 대한 연구로 그 방향과 관심을 돌리고 있다. 영성은 종교의 내적 구성요소이다. 퀘이커 영성은 종교 신앙에 대한 합리적 사유 능력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개인의 내밀한 신앙이 객관적인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인간은 종교적 존재이다. 신앙은 인간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도 하지만, 맹목적인 열광주의 신앙은 개인의 삶 뿐 만 아니라 사회 공동체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주관적인 종교적 체험에 대한 객관적 사유 능력을 증진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퀘이커 영성 연구는 종교 신앙에 대한 합리적이고 성찰적인 길을 교육하는데 좋은 모델로서 종교학 연구와 교육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셋째, 인문학적 교양을 넓혀줄 수 있는 교양과정 교육 커리큘럼으로 활용될 수 있다. 퀘이커 영성은 종교적 영성과 함께 평화적 영성을 깊이 간직한 것이므로 대학생들의 인문학적 교양을 교육하기에 매우 적절한 것이다. 나는 대학생 교양 교육의 필수 커리큘럼으로서 평화교육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중고등 학생 시절 치열한 경쟁 교육의 억압적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인성과 사회적 태도에서 매우 거칠고 폭력에 민감하다. 그러므로 대학의 교양과정에서 평화교육은 해독제 역할을 할 수 있다. 평화 교육은 유네스코(UNESCO)에서도 권장하듯이 인간의 마음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 점에서 퀘이커 영성이 핵심으로 삼고 있는 평화는 평화 인문학 교육의 핵심적 내용이 될 수 있다. 우리 한국 사회는 다종교 사회이다. 종교간의 갈등의 가능성은 잠복해 있다. 그러므로 종교의 평화 영성을 강조하고 교육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인문학적 교육의 과제이다. 퀘이커 평화 영성은 이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모델로서 활용될 수 있다.

2. 시민단체(NGO) 사회 행동에 윤리적 기초를 제공하는 자료로서 활용될 수 있다.
종교는 개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일 뿐 아니라, 사회 윤리적 행동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교육과정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종교는 과연 어떤 모습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비판적 판단력을 길러주는 것은 종교 교육의 중요한 목적이다. 퀘이커 영성 연구는 이 점에서 하나의 준거점을 제시한다. 퀘이커들은 사회 윤리적 태도를 중시한다. 그 기본 정신은 사회적 선을 추구하며, 공동체의 평화를 지향한다. 이런 점에서 이 연구 결과는 내적 성찰에 근거한 사회적 행동을 증진시키는 사회 교육의 좋은 자료를 제공한다.
퀘이커 영성 연구 자료는 종교의 사회적 역할에서, 그리고 사회의 종교적 성찰 능력을 키움에 있어서 매우 적절한 사례를 제공한다. 종교는 사회와 건강한 긴장 관계를 가짐으로서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있다. 이것이 종교 교육과 사회 교육이 함께 가야하는 이유이다. 퀘이커 영성은 이 점에서 좋은 교육적 사례를 제공한다.

3. 종교의 영적 갱신의 자료로서 활용될 수 있다.
퀘이커 영성 연구의 결과는 종교인들에게 소개됨으로서 종교적 자기 성찰의 자료로서 활용될 수 있다. 오늘날의 종교는 물질주의 오염으로 종교 본연의 자리에서 이탈하고 있다. 제 3의 종교개혁이 요청되는 시대이다. 퀘이커 영성은 한국종교의 영성 갱신의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Index terms
퀘이커리즘, 영성, 침묵, 윤리적 신비주의, 종교개혁, 사회개혁, 청교도혁명, 이원론적 신앙, 서구 기독교, 한국 기독교, 세속과 성스러움, 정치와 신앙, 국가와 교회, 영적 체험, 트렐취, 신비주의, 소종파, 카톨릭교회, 개신교회, 마이스터 엑카르트, 침묵 예배, 성례전, 선, 평화, 평등, 단순성, 조지폭스, 초기 퀘이커리즘, 바클래이, 현대 퀘이커리즘, 존 캘빈, 재세례파, 루퍼스 존스, 원시 기독교, 구원론, 무신론, 비신론, 범신론, 후기기독교영성, 단데리온, 씨커, 버켈, 내적 빛, 내재하는 그리스도, 동양적 기독교, 하워드 브린톤, 일본 선불교, 함석헌, 진리, 공동체, 펜들힐, 선명상, 다원주의, 숭산, 틱 낫한, 과격파, 비적응자, 반도, 지성주의, 사회복음, 프렌드 저널, 울만, 퀘이커 친우 봉사회, 행동주의, 선, 정의, 하나님, 소수자, 전쟁, 전쟁의 부재, 정의를 가진 평화, 사회개혁적 평화, 제자도, ‘모든 사람 안에는 있는 하나님의 그것’ 퀘이커의 지하철도, 엠네스티 인터네셔날 운동, 사형제 폐지 운동, 보편적 인간 평등 정신, 탐욕, 사치한 삶, 빈곤과 억압, 지구 온난화, 지구적 생태계 위기, 퀘이커 생명 영성 윤리, 하나님과 직접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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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Achievements List




1. Reports





(결과보고)퀘이커 영성 연구


정지석 | 2013-02-15 | 신비주의
Source research tasks : 퀘이커 영성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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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Articles





A Study of Quaker Spirituality

정지석 | Institute of Theological Studies in Hanshin University | 신학연구 | 5권(1호) | pp.98~135 | 2013-06-01 | 기독교신학

Source research tasks : 퀘이커 영성 연구





地中有山 | 최시형의 '이천식천'과 윤리적 채식주의_박현지(서강대 철학과 3학년) - Daum 카페

地中有山 | 최시형의 '이천식천'과 윤리적 채식주의_박현지(서강대 철학과 3학년) - Daum 카페

최시형의 '이천식천'과 윤리적 채식주의_박현지(서강대 철학과 3학년)

혼돈나라추천 0조회 920.12.24 1

최시형의 '이천식천'과 윤리적 채식주의

서강대 18학번 철학전공 박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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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관심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대부분의 현대인이 동물을 비윤리적으로 대우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대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동의하고 있는 듯하다. 오늘날의 채식주의는 종교적 이유로 고기의 종류를 제한하는 등의 풍경과는 다르다. 이는 단지 고기를 섭취하지 않는 일에 달린 것이 아니다. 공장식 축사 등의 보편화에 따른 동물의 삶의 파괴 문제는 채식주의 지지자들의 가장 강력한 근거 중 하나이다. 이에 착안하여 이 보고서에서는 해월 최시형(1828~1898)이 제시한 ‘이천식천(以天食天)’ 개념이 채식주의의 사상적 근거를 어떻게 뒷받침할 수 있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최시형에게 하늘은 만물과 이원론적으로 구분되는 절대적 지위를 가지는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생동하는 것이다. 하늘, 즉 천지나 자연은 만물의 생성·변화 그 자체이자 그것의 원동력이다. 따라서 생명은 하늘의 이러한 특성이 형체를 갖고 표현된 것이며, 모든 생명 속에 하늘이 있다. 이러한 바탕이 녹아 있는 ‘이천식천’ 개념은 우리가 음식을 먹는 행위가 ‘하늘이 하늘을 먹는 것’과 같음을 의미한다. 한 동물이 다른 동물을 먹는 일은 단지 약육강식의, 포식자-피식자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는 상생이며, 자연 전체의 성장이다. 최제우의 인간 평등은 최시형에게로 나아가 생물의 평등까지 엿볼 수 있도록 확장된다.



이는 얼핏 보아 다른 생물을 먹는 것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음을 주장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서론에서도 지적하였듯, 문제는 육류 섭취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산업화 이후의 인간은 육류를 비롯한 다양한 식용 생물의 양식 방법에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우리는 점차 생산성의 관점에서 동물을 다루게 되었으며, 동물을 마치 인간을 위해 작동되는 살아 있는 기계와 같이 취급하게 되었다. 최시형이 ‘이천식천’ 개념에서 주장한 바는 또한 먹는 행위의 신성성이다. 마치 우리 안에 하늘이 있는 것과 같이 만물 속에도 하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만물의 귀함을 깨닫고 공경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오직 우리의 만족과 이익만을 위해 마구잡이로 다른 종들을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동물이 동물을 먹는 일은 상호적이다. 서로가 평등한 위치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착취이다. 우리는 우리를 살게 해주는 식량에 감사하거나 그것을 존중하기는커녕 더욱 빠르고 많은 생산만을 위해 동물의 존엄을 해치고 있다.



‘이천식천’은 최종적으로 나의 희생까지도 포함하게 된다. 우리가 자연을 누리고 그로 인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나 또한 내려놓아 자연과 만물에 보탤 줄 알아야 한다. 최시형의 이 독특한 세계이해 방식은 만물의 상호성을 성찰하는 법을 잊은 현대에 비로소 큰 의의를 준다. 지금까지 다양한 학자들이 동물권에 관심을 가지고 그 대안으로 윤리적 채식주의를 제안해 왔다. 그러나 대부분은 법과 과학을 동원한 윤리학적 논증들을 근거로 삼고 있다. 최시형의 사상은 자연 속에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위치와 책임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시야를 조금 더 넓게 가지고 우리의 식생활, 그리고 구조적 문제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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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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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의 화합!을 원한다면 비판!을 잘 하고 또 잘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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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합'을 위해서는 '비판'을 잘 하고 또 잘 받아 들여야 한다고 초기경전은 가르침. 심지어, 비판을 하거나 받는 데에 미숙한 사람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며 (비판을 하거나 받는 데에 미숙하다는 건, 상황 개선을 위해 뭐가 필요한가?라는 판단이 당장의 사적 감정에 의해 휘둘리는 사람이라는 얘기. 그러니 그의 판단은 신뢰 불가하다는 얘기로 나는 이해), 타인이 나에 대해 부당한 비판을 한다면 제3자들을 동석시켜 자신을 변호하고 함께 토론하라고까지 부처님은 말씀하셨음. 논쟁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공부를 부처님은 경계하셨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특별히 위험하다 생각되는 견해들 (영혼이 있다, 인과가 없다 등)을 가르치는 이들을 부처님은 몸소 찾아다니면서 논파하셨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비판과 논쟁을 무조건 금기시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비판과 논쟁의 금기시가 누구의 이익과 편리에 복무하는지를 살펴 보면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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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집착하는 '겸손'/'현명'/'자비' 등에 대한 오해들과는 전혀 딴판인 내용이라 한편으론 놀랍지만 생각해 보면 정말 현실적인 가르침이다 싶은 것이, 서로의 부족함으로 인해 부정적인 영향을 늘상 주고받는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이고 (그 어떤 바이러스보다도 훨씬 더 지독한 것이 바로 인간의 탐진치), 서로의 체면과 당장의 감정 때문에 이런 문제들을 그때 그때 바로잡지 않고 방치하면 그 공동체는 속으로 점점 불만과 스트레스가 쌓여 곪아 가다가 하향평준화를 거쳐 결국 와해될 수밖에. 그러므로 차라리 합리적이고 공정한 토론을 거쳐 그때 그때 갈등을 해소하고 합의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현실적. 마치 아이들이 싸울 때 민주시민답게 생각, 토론, 논쟁하는 법을 가르쳐 줘야지, "친구끼리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이 좋게 지내야 돼!"라고 야단만 치는 건 "부처님이 되라니까!"라는, 아무 도움 안 되는 주문일 뿐인 것처럼 - 그렇게 말하는 어른 자신도 실천 못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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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나이만 먹었지 여전히 오류와 실수 투성이라는 점에서 아이들보다 크게 낫지도 않으면서 자존심과 체면만 중시하지 말고, Right Speech의 기준 (1)에 맞추어 잘 비판하고 또 잘 받아들이는 훈련이 중요하다는 얘기. (표면적인 화합만 강조하면서 얼렁뚱땅 억지로 갈등을 봉합하는 것은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 한다고 초기불교는 가르침.) '나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self-image/자만에 붙들려 있지 않다면 자신의 지식/지혜를 나눠 주는 일에 인색할 필요가 없고 (유교도 겸손만 강조했을 것 같지만 "군자는 배우는 일뿐 아니라 가르치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게 순자의 말씀), '나는 고매한 사람'이라는 망상과 쓸데 없는 자존심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인간인 이상 누구나 늘상 저지르는 실수를 인정 못 할 이유가 없음. 이런 소통도 불가능하다면 공동체를 이룬다는 건 애초부터 어차피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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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Majjhima Nikaya (MN 15: part 1, 2010.1.16) Bhikkhu Bodhi"라는 제목의 유툽 동영상 내용을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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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ight Speech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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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true / factual.
b. beneficial / necessary.
c. timely.
d. affectionate / endearing / agreeable.
이 언급이 초기경전에 여러 번 나오는데, 어떤 곳에서는 a~c만 언급되고, 어떤 곳에서는 a~d가 모두 언급됨. 즉, 표현 자체의 부드러움은 중요도가 떨어진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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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말하는 의도/동기'는 최고로 중요함. 상대방을 굴복시키거나 상대방의 명예를 실추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라, "잘못된 견해로부터 마음을 해방시킨다"라는 compassion/goodwill이어야만 함. 이런 의도에서 하는 얘기라면, 그리고 위의 조건들을 모두 충족시킨다면, 결과적으로는 상대방이 당장 마음에 '상처'를 입더라도 right speech인 것. 다음은 초기경전에 나오는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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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날카로운 물건을 입에 넣고 입을 열려고 하지 않을 때, 완력을 써서라도, 그러다 아기 입에서 약간의 피가 흐르는 한이 있더라도 그 날카로운 물건을 아기 입에서 꺼내는 것이 최우선이다. 이것이 진정한 compassion이다. -- Majjhima Nikaya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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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날카로운 물건은 잘못된 견해를 상징하고, 피는 감정적 상처를 가리킴. 날카로운 물건을 삼켜서 아기가 죽는 것은 잘못된 견해로 인해 악처로 윤회함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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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Wrong Speech의 4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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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lying: 사실/진실을 구부려서 오해를 유도하는 행위, 거짓말을 용인하는 행위 포함.
ㄴ. divisive tale-bearing: 이간질을 목적으로 하는 고자질/말옮김.
ㄷ. abusive speech: 타인을 조롱하거나 짓밟기 위한 목적!에서 하는 말.
ㄹ. idle chatter: 꼭 필요한 내용이 아닌 모든 종류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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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이 당장 약간의 감정적 상처를 입더라도 상대방의 잘못된 견해/행동을 바로잡아 주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고 적절한 시점에 적절하게 표현된 합리적 비판은 compassion이요 right speech라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 A라는 사람을 '해치는' 것은 A를 대상으로 하는 모욕적인 언어가 아니라 A 자신의 잘못된 견해/언행일 뿐이라는 것이 초기불교의 관점. 상대방 기분 좋게/편하게 해 주는 것은 부처님이 초기경전에서 말씀하시는 자비의 본질과 전혀 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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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롭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은 먼 훗날에 도달할 지 모르는 텔로스가 아닙니다. 정의와 평등과 자유는 이미 그 세상을 만드는 '과정' 속에 구현되어야 하는 겁니다. 허위와 날조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대의라면, 그 대의는 처음부터 그릇된 대의인 것입니다." -- 진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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