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5

알라딘: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 - 삶의 모순과 철학의 위안 김시천

알라딘: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 - 삶의 모순과 철학의 위안   
김시천 (지은이)책세상2013-11-05
368쪽

책소개

노자와 장자를 전공한 동양철학자가 그간의 노장 공부의 결과들을 모아 엮은 책으로, 텍스트의 문맥을 놓치지 않는 전공자의 시선을 통해 노장에 대한 통념이 실제의《노자》,《장자》와 얼마나 거리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는《노자》를 정치적 권력을 차지하려는 자들을 위한 기술적 지침서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며 반대로《장자》는 정치적 권력을 차지하지 못한 지식인들을 위해 세상과의 불화를 해소하는 법을 이야기하는 책으로 이해한다.

두 문헌이 이렇게 이질적임에도《노자》와《장자》는 ‘노장’이라는 말로 한데 묶여 실제와는 동떨어진 고정관념을 낳아왔으며, 이러한 고정관념에 일조한 주제들 중 대표적인 것이 노장을 대변하는 개념이 ‘무위無爲’라는 것,《노자》가 페미니즘의 시각을 보여준다는 것,《장자》가 기술 문명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이해에 따르면 무위는 노장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간주될 만큼 노장의 독보적인 개념도 아니고 자연스러운 삶과 연관되는 개념도 아니다.

목차
책을 펴내며 / 9

서장 _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 / 15

제1부 《노자》, 칼의 노래

1장 노자와 《노자》
-‘전설’을 해체하고 ‘인간’을 보다 / 31
1. 누구의, 누구를 위한 《노자》인가 / 31
2. 하나이면서 여럿인 《노자》, ‘노자열전’ / 34
3. 성인과 제왕, 그리고 범인 -《노자》 속의 인간들 / 55
4. 호모 임페리알리스의 《노자》 / 63

2장 《노자》의 두 전통
-통치술에서 철학의 지혜를 찾다 / 67
1. 하상공과 왕필, 두 밀레니엄 두 가지 해석 / 67
2. 논리와 해석 방법의 차이 -훈고와 의리 / 70
3. 우주와 인간, 기와 도 / 82
4. 우주론에서 심성론으로 /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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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시천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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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상지대학교 교양대학에서 공부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14년부터 인문학 전문 팟캐스트 〈학자들의 수다〉를 제작, 진행해 왔고, 2020년부터는 유튜브에서 새로운 인문학을 소개하는 방송 〈휴프렌즈〉와, 인간과 동물이 함께 사는 지혜를 모색하는 방송 〈휴애니프렌즈〉에 출연하고 있다. 그동안 쓰고 옮긴 책으로, 『철학에서 이야기로』,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 『논어, 학자들의 수다 : 사람을 읽다』, 『무하유지향에서 들려오는 메아리, 장자』, 『죽은 철학자의... 더보기
최근작 : <동양철학산책>,<똥에도 도가 있다고?>,<근대 사상의 수용과 변용 1> … 총 44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무위자연의 신화를 넘어 치열한 삶의 이야기로
- 우리 시대 노장을 읽는 아주 특별한 방법
《노자》와《장자》는 유교 중심의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공맹과 대등한 사상적 지위를 누려보지 못한 채 늘 이단으로 여겨졌으나 오늘날 한국에서는 동아시아 고전 중 대중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는 책이 되었다. 특히 1999년에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라는 강연은 노자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다양한 대중 강연이 노자와 장자를 다루어왔다. 한때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한 서구 이론의 영향을 받은 해체론적 노자 해석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대중에게《노자》와《장자》에 대한 어떤 고정된 인상이 각인되었다. 탈속, 자연, 유유자적, 현자, 탈정치, 반문명 같은 개념을 떠올리게 하는 이런 인상은 과연 올바른 이해의 결과일까?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는 노자와 장자를 전공한 동양철학자가 그간의 노장 공부의 결실을 모아 엮은 책으로, 텍스트의 문맥을 놓치지 않는 전공자의 시선을 통해 노장에 대한 통념이 실제의《노자》,《장자》와 얼마나 거리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즉 이 책은 두 문헌의 내부에 있는 ‘사상’을 체계적으로 해명하기보다는 기존의 연구 성과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통해, 상식으로 굳어진 노장 철학의 주제들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오늘’의 시각으로 재검토함으로써 기존의 논의와 다른 해석의 지평을 열어 보이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노자》는 천하의 정치적/ 사상적/ 사회적 패권을 놓고 다투었던 사람들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문헌으로서 정치권력을 차지하려는 자들을 위한 기술적 지침서와 같은 책이며, 반면《장자》는 권력을 차지하지 못한 지식인들을 위해 세상과의 불화를 해소하는 법을 이야기하는 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두 문헌이 이렇게 이질적임에도《노자》와《장자》는 ‘노장’이라는 말로 한데 묶여 실제와는 동떨어진 고정관념을 낳아왔으며, 이러한 고정관념에 일조한 주제들 중 대표적인 것이 노장을 대변하는 개념이 ‘무위無爲’라는 것,《노자》가 페미니즘의 시각을 보여준다는 것,《장자》가 기술 문명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이해에 따르면 무위는 노장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간주될 만큼 노장의 독보적인 개념도 아니고 탈속적/ 반문명적인 삶과 연관되는 개념도 아니다. 또《노자》와 페미니즘,《장자》와 기술 문명 비판을 연결 짓는 것은 문맥을 간과한 채 원문을 선별적으로 인용하거나 잘못 이해한 것으로, 전통과 탈근대적인 것을 잘못 연결한 결과이다.
저자는《노자》와《장자》를 이렇게 읽어내는 것에서 나아가, 오늘날 우리가 노장을 어떻게 삶에 유의미한 것으로 지속시킬 수 있을지를 모색한다. 그리하여 노장을 도가나 도교라는 이름의 철학이나 종교로 받아들이지 말고,《장자》의 ‘유遊’(노님) 개념에 입각해 ‘도술道術Tao-techniques’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이자고 제안한다. 여기서 도술이란 신비한 초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부정하거나 삶에 종속되지 않고 삶을 누리는 기술, 정치와 문명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누리는 기술을 말하며, 이러한 시각은 철학과 종교의 이분법, 이론과 실천의 괴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다. 결국 이 책은《노자》와《장자》에서 삶의 기술과 위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국내 학자의 독창적인 노장 연구서가 드문데다, ‘무위자연’이라는 표현이 대변하듯 탈속적/ 탈정치적/ 반문명적 사상이라는 노장 사상에 대한 일면적 통념이 지배하는 현실에서,《노자》와《장자》에 대한 역사적 해석과 쟁점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삶의 양식으로서의 ‘도술’이라는 21세기 노장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하는 이 책은 저자가 줄곧 견지해온 ‘전통의 현대적 해석’에 대한 학문적/ 실천적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노래하는 노자의 칼, 춤추는 장자의 방패 - 노장과 ‘모순’
이 책의 제목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는《노자》와《장자》를 둘러싼 여러 차원의 모순을 환기한다. 우선 글자 그대로 ‘창(칼)과 방패’로서의 ‘모순’이다. 저자의 이해에 따르면《노자》는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는 데 필요한 자질이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칼과 같은’ 책이고,《장자》는 권력의 중심부로 나아가지 못한 자가 다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방패와 같은’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성격이 다른 두 책이 마치 동질적인 것인 양 ‘노장’이라는 말로 함께 묶여 거론되니 이 또한 모순이다.
한편,《노자》와《장자》는 유교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조선 사회에서 이단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지만, 모순되게도 이이, 박세당, 홍석주, 서명응, 한원진 같은 정통 유학자들에 의해 주석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시대에 박세당의《신주도덕경》과《남화경주해산보》, 이이의《순언》, 홍석주의《정노》, 한원진의《장자변해》같은 노장 주석서가 쓰이고 읽혔다. 요컨대 조선 시대에《노자》와《장자》는 이단이면서도 ‘바깥’에 있지 않고 ‘안’에 있었던 셈이며, 저자는 이러한 모순을, 성리학이라는 정치적 교조를 고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금단의 노장을 읽으며 자유를 꿈꾸었던 조선 시대 유학자들의 분열된 내면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저자는《노자》와《장자》에서 이런 중층의 ‘모순’을 읽어내며, 결국 삶 자체가 그렇게 모순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게다가《노자》와《장자》모두 단일 저자에 의해 쓰인 책이 아니어서 여러 목소리를 내는데다 모호한 언어로 되어 있어 해석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니, 노장 읽기는 모순으로 가득해 종종 길을 잃게 만드는 우리의 삶과 닮았다. 저자는 노장의 모순이 삶의 모순과 유비를 이루기에 오히려 삶에 위로를 준다고 말하며, 나아가 도가나 도교 대신 ‘도술’이라는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철학이나 종교 아닌 삶의 기술로 받아들여 현실적 동반자로 삼을 방법까지 모색한다.

《노자》- 패권 지망자들의 책, 권모술수의 책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노자》는 전국 시대 말기에서 한나라 초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완성된 책이다. 그리고《노자》의 저자는 노자라는 한 사람의 역사적 실존 인물이 아니라 신원을 알 수 없는 여러 사람이다. 이 복수의 저자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었는지는《노자》텍스트에서 어떤 사람들이 주역으로 등장하는지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통념과 달리《노자》에는 “정치적 세계의 비정함에 냉소를 보내고 문명을 비판하고 유가와 같은 도덕적 엄격주의에 식상한 인간, 환경과 자연의 가치를 긍정하고 페미니즘적 세계관을 지향하는 인간”은 등장하지 않는다.《노자》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상은 오히려 성인聖人, 후왕侯王, 사士 같은 권력자들이다. 이는《노자》의 저자나 독자가 패권 지망자들이었음을 짐작게 하고, 실제로《노자》는 내용상 권모술수를 포함한 “권력의 기술”에 대한 책이나 다름없다.
《노자》에 대해서는 수많은 주석자들에 의해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졌고 그러한 해석들에서 공통의 기반과 의미를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가장 대표적인《노자》해석으로는 한나라 하상공과 위나라 왕필의 해석이 꼽힌다. 두 사람의 주석서는 똑같이《노자》를 다루면서도 아주 다른 해석으로 나아간다. 하상공이《노자》자구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데 치중함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 충실한 편이라면 왕필은 유가의 입장에서《노자》를 해석한다. 그리하여 하상공의 해석은 도교의 차원과 연결되고 왕필의 해석은 유학자들의 해석의 토대가 되면서 다양한 조류를 만들어나가게 되었다. 그런 만큼 어떤 주석서를 통해《노자》를 읽는가에 따라《노자》의 얼굴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조선 사회에서는《노자》가 어떻게 수용되었을까? 유학 아닌 것은 이단으로서 철저히 배척했던 조선조에서 뜻밖에도 이이의《순언》, 박세당의《신주도덕경》, 홍석주의《정노》, 서명응의《도덕지귀》등 모두 다섯 권의《노자》주석서가 쓰였으며,《선조실록》에는 과거시험 답안지에 노장의 문장이 인용된 것을 놓고 임금과 신하가 왈가왈부하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이는 모두 임금과 신하들, 그리고 과거에 응시한 선비가《노자》와《장자》를 읽어 알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이단의 문제점을 알기 위해서라도 철저히 읽어야 한다는 논리를 앞세우긴 했지만, 어쨌든 이는 조선 사회에서 정통인 유가와 이단인 도가 사이의 소통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장자》- 출사하지 못한 비운의 지식인의 책, 세속에서 노니는 기술을 이야기하는 책
《장자》는 긴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문헌으로 추측되지만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장자》는 진晉나라의 곽상이 틀을 갖춘 것으로 33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장자가 지은 것은 ‘내편’ 7편뿐이고 나머지는 후학들의 글이라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따라서《장자》에는 서너 갈래의 다른 목소리가 뒤섞여 있으며, 이는《장자》해석의 어려움을 낳는다.《장자》의 어느 편에 초점을 두는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중국 철학계에서《장자》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렸다. 중국인의 패배주의와 노예근성의 정신적 근원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있는 반면에 중국 고유 종교인 도교의 사상적 원류, 유가를 계승한 사상, 중국 예술 정신의 원류라는 등등의 긍정적 평가도 있었다. 한국 학계에서도 이런 식의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저자 김시천은《장자》의 이야기들에서 얻을 수 있는 장자에 대한 정보를 통해서 “뜻을 품었으되 가난해 벼슬에 나아갈 기회를 얻지 못한 지식인”을 장자의 일관된 모습으로 포착해내고,《장자》를 “비운의 지식인”의 책으로 본다. 치자의 영광과 명예로 나아가지 못하고 불행과 억압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의 삶의 기술을 이야기한 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가《장자》에서 가장 주목하는 개념은 ‘유遊’이다. ‘유’는 ‘노닐다’에 가까운 개념으로, 잠정적 ‘떠남’과 떠났다가 ‘돌아옴’을 전제한다. 떠남이 정치적 야망이나 사회적 관계를 포함하는 세속의 삶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거리를 두는 것이라면, 돌아옴은 그렇게 거리를 둔 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에서의 깨달음을 안고 세속의 삶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거쳐 돌아왔을 때는 삶의 태도가 바뀌어 다툼과 경쟁과 갈등에서 벗어나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삶의 태도가 “탈속적 태도”도 아니고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거나 변화시키려는 변혁적 실천”도 아니며, 다만 “한 개체가 겪는 갈등과 억압을 승화시킨 태도”라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유’는 삶의 보전이라는 ‘양생’의 논리와 이어지며, 또한 문화와 예술에 영감과 창조적 활력을 준다고 본다.
《장자》역시 조선 시대에 유학자들 사이에서 읽혔고 박세당, 한원진에 의해 주석되었다. 다만《장자》는 대체로 유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져, ‘이단’이라기보다는 ‘사이비’에 가까운 존재였다.

《노자》와《장자》에 대한 통념은 올바른가
두 문헌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인위나 억압을 거부하고 자연 속에서 초탈한 태도로 살아가는 현자의 격언쯤으로《노자》와《장자》를 떠올리는 통념과 거리가 있다. 저자는 노장에 대한 잘못된 통념이 많다고 보고 이를 점검한다. 여기서의 논점은 ‘무위자연’이 노장을 대변하는 개념인가,《노자》가 페미니즘과 닿아 있는가,《장자》가 기술 문명에 반대하는가 하는 것이다.
유가는 ‘유위有爲’를 주창했고 노장은 ‘무위’를 주창해 유가를 비판했으며, 유위는 인위에 상응하고 무위는 자연에 상응한다는 것이 통념상의 도식이다. 하지만 저자는《논어》,《맹자》,《순자》,《묵자》등 여러 고전 문헌들의 ‘무위’ - ‘유위’ 용례를 분석해, 무위와 유위가 대립되는 개념이고 무위와 자연이 상응하는 개념이라는 상식은 틀린 것임을, 그리고 무위란 “제자백가의 공통 개념으로서 어느 특정 학파가 전유한 것이 아니며, 기본적으로 정치 행위 이론”임을 밝힌다. 따라서 무위자연을 도시와 문명을 떠나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삶과 연관 짓고, 무위자연이 노장이 추구하는 삶의 대명사라고 이해하는 것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럼《노자》와 페미니즘의 관계는 어떠한가? 저자는《노자》가 여타 문헌에 비해 여성성을 중시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으나 그것이 여성의 자유와 해방을 이야기하는 페미니즘의 차원은 아니라고 말한다.《노자》의 몇몇 표현들을 들어《노자》를 페미니즘과 연결시키는 것은, 유가는 뭔가 부정적인 사상 체계이고 도가는 뭔가 긍정적인 사상 체계라는 도식적 선입견 때문에《노자》에 나오는 여성성 강조의 표현 하나도 과도한 의미를 담아 해석한 결과라는 것이다. 더욱이 역사적으로 노자의 시대는 가부장제 완성의 정점이었는데 그러한 시대에 노자가 여성을 찬양하고 페미니즘 철학을 전개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는 일이냐고 저자는 반문한다.《노자》에서 볼 수 있는 여성성의 강조는 여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성적 강함에만 의지하는 정치는 온전하지 못하니 군왕은 여성의 유약함을 가장하는 교묘한 ‘술수’ 또한 겸비해야 한다고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장자》가 기술 문명을 비판했다는 상식 또한 잘못된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상식이〈천지〉편에 나오는 ‘기심機心’이란 말을 “편리를 추구하는 마음”으로 해석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원문의 맥락을 따른다면 ‘기심’을 “최소 투자 최대 효과의 심리”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그렇다면〈천지〉편의 이야기에서 기심을 비판하는 것은 “기회주의적 심리를 비판한 것이지 고도의 기술적 성취 그 자체를 비판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양생주〉편에 나오는 포정?丁의 이야기에서는 기술에 대한 긍정을 읽을 수 있다. 소를 잡는 데 있어서 기술을 넘어 도의 경지에 오른 포정의 칼놀림을 보고 문혜군이 ‘양생의 도’를 터득했다는 이 이야기로 미루어,《장자》에서는 기술이 비판되는 것이 아니라 도에 이를 수 있는 방법으로서 긍정됨을 알 수 있다.

지속 가능한 노장, 삶의 기술로서의 ‘도술’을 위하여
-21세기에《노자》와《장자》를 어떻게 향유할 것인가
오늘날 한국 학계에서 ‘노장’은 “《노자》와《장자》라는 텍스트에 담긴 내용 혹은 그와 관련된 문헌에 담긴 철학적, 사상적, 종교적 전통”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노장이 유가 전통에 포섭된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노자》와《장자》가 한대漢代 이래 제자백가의 하나인 ‘도가’로 분류되고 20세기에 ‘도교’의 기초 경전으로 이해되면서 노장은 철학적, 종교학적으로 언제나 도가와 도교라는 더 큰 범주와 철저하게 관련돼왔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벗어나 노장을 철학이나 종교로서 대하지 말고 우리의 삶에서 유의미한 것으로 지속시키며 향유할 방법을 모색하자고 말한다. 저자가 제안하는 방법은 노장을 도가/도교 아닌 ‘도술’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며 이를 위해 저자는 다시 ‘유遊’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저자는 ‘유’ 개념을 현대라는 패러다임으로 가져와 ‘유’를 정치를 부정하기보다 정치를 누리고, 문명에 종속되지 않으면서 문명을 누리는 태도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러한 ‘유’에 이르도록 해주는 것이 양생養生nourishing-life의 기술(자의적 권력에 맞서 자신의 생명과 삶을 보전하는 기술)과 달생達生mastering-life의 기술(양생의 기술을 삶의 다양한 영역에 적용하는 기술)이며, ‘도술’이란 이러한 삶의 기술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라고 정의한다.
우리 시대라는 틀 안에서의 고전 읽기를 고민해온 저자는 이처럼 노장 전공자로서의 진지한 노장 읽기를 통해 통념에 가려져 있었던《노자》와《장자》의 실제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는 동시에 이러한 고전을 삶 속에 어떻게 녹여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해준다. 그리하여 이 책은 저자 자신의 바람처럼 학술적 연구서이면서 작은 이야기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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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장자를 알고 싶다면 꼭 봐야 할 책! 뒤섞이고 엉클어져 길을 헤매는 동양철학을 구원할 진리.  구매
서재필 2013-12-10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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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7책] #15 - 노장을 해체하라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 새창으로 보기 구매
《노자》를 읽는다고 하니 반가워하며 이렇게 말한다. '노자를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지죠.' 기본적으로 나는 마음의 위안 따위를 경계하는 입장이라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불편하다. 편안하다는 것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읽었다는 뜻이다. 이런 식의 태도는 성서를 읽는다는 평범한 교인에게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마음의 안정과 위안을 위해 성서를 읽는다. 문제는 그런 독해가 심각한 오독의 가능성을 다분히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욕망을 확인하기 위해 읽기. 그런 읽기는 특정 부분만 닳고 닳도록 주무른다. 마치 관광지에서 특정 부위로 유명한 동상을 만지는 것처럼. 복을 바라는 저 손길!

 

흥미롭게도 그런 신앙인들은 교회 밖에서도 발견된다. 동양철학이라는 분야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조금 차이가 있다면 '유가'에 경도된 사람들은 주희의 주석을 보석처럼 받드는 반면, '도가'에 경도된 이들은 주석 따위는 별로 상관치도 않고 생태니 자유니 하는 말을 멋대로 갖다 붙인다는 점이다. 공통점은 자구 해석에 집착한다는 점인데 이는 마치 성서에 한 점 오류가 없음을 주장하는 저 신앙인들에 비견할만하다. 그러니 역사니, 해석이니, 문헌 비평이니 하는 문제는 전혀 고려할만한 게 아니다.

 

《노자》를 좀 공부하면서 발견한 흥미로운 점은 대중들이 그토록 《노자》를 사랑하면서도 그에 관한 이론적 연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삼키기 쉬운 유동식 마냥 잘 가공된 《노자》에 젖었기 때문이며, 그것만이 《노자》의 본 모습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이야기하는 노자와 장자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책의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노자》가 사실은 권력을 취득하기 위한 방편을 제공하는 책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벽창호가 되어 버리곤 한다.

 

대체 왜 이런 것일까? 그것은 이른바 '동양 철학'을 소비하는 특정한 버릇 때문이라 생각한다. 자연, 자유, 평등, 생태... 이런 개념을 버리고 다른 식으로 읽을 길은 없을까? 나에게는 저 말들이 내용없는 껍질처럼 느껴진다. 마치 십자가 아래 부르짖는 공허한 소리들 처럼. 그런면에서 이른바 노장철학이라는 것을 대중적으로 소비하는 데 기독교적 관점이 크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은 숙고해볼 만한 부분이다. 

 

여러 곳에서 발표한 논문을 묶어서 한 권의 책이라기 보다는 논문집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나름 한 권의 책 구색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이나 아쉬운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래도 장점이 많은 책이다. 《노자》와 《장자》를 공부한다는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조심스럽게 한 가지를 이야기하면, 이 책을 읽은 뒤 《노자》나 《장자》를 읽을 욕망이 사라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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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취두부 2015-11-08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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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물러나 노자와 장자 보기 새창으로 보기 구매
노자와 장자에 관심을 가지고 읽는 분들중에 한권의 주석서나 해설서만

보신 분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면 좋을 책이다.

 

한 걸음 물러나 노자와 장자라는 책을 좀 더 크고 다양한 시각에서

볼 수 있게 만드는 책이다.

 

제목의

노자의 칼에서 칼은 가지기 위한 행위이고,

장자의 방패에서 방패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행위이다.

삶은 가지기 위해 그리고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분주한 모순이라는 얘기다.

 

 

지금 우리는 이런 모순속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나에 대한

해결책을 노자와 장자의 도가적 전통을 통해 찾아보자고 말한다.

 

쉽게 읽히는 듯 하지만

쉽게 읽히지 않는 책이다.

다음에는 좀 더 깔금하게 정돈된 글쓰기 김시천 선생이 도가사상에 대한

책을 내주시기를 기대한다.

 

이 책과 철학에서 이야기로라는 책 모두 읽이보면,

김시천 선생은 노자와 장자를 읽는 행위를

우리 삶의 현실과 연결시키는 것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노자와 장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물론 우선 그 내용을 알아야하지만),

그래서 노자와 장자를 통해서 우리 삶이 어떻게 윤택해질 것인가야말로

시간들여 노자와 장자의 지혜를 빌리는 이유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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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휴암주 2016-06-03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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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시대에 따라 달리해석된다! 새창으로 보기
  이책을 처음 알게된 것은 팟캐스트 '학자들의 수다'에서였다 김시천, 오상현!! 이두분이 진행하는 팟캐스트는 논어 한구절을 중심으로 주제를 잡아 이야기를 풀어간다. 기존에 논어에 대해서 갖고 있었던 오해를 이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많이 걷어냈다. 그리고 도올김용옥 선생의 '논어 한글역주'를 사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던중!! 김시천 쌤이 자신의 전공인 '노자'에 대해서 강의를 하시기 시작했다. 그의 책!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를 읽겠다는 생각도 이때부터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번 무더운 여름을 이책을 읽으며 지내보기로 결심하고 책을 빼들었다.

 

1. 천의 얼굴을 하고 있는 노자!!

  김시천 쌤이 가장 난감해하는 질문이 '좋은 도덕경 해설서 있으면 추천해달라'라는 말이라한다. 천의 얼굴을 하고 있는 노자! 그런데,어떤 책을 추천해주어야할까? 막막하기만 하단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도올의 도덕경 강의에서 알고있는 노자에 관한 상식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노자의 여러얼굴중 하나였다. 도덕경이 병법서로도 읽힌다는 사실을 아는가? 호모 임페리얼리스인 노자가 군주들을 위해서 쓴책을 우리는 패미니즘적 시작에서 생태환경적 시각에서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통쾌하게 깨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도덕경에 대한 상식들은 유학자들에 의해서 해석된 도덕경이라는 사실도 아울러 지적해준다.

  이책을 쉽게 읽으려면 팟캐스트 '학자들의 수다' - 노자 편들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팟캐스트를 듣고 혹은 같이 듣고 읽는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 유학자들이 종하한 장자!!

  이 책은 장자라는 책을 과연 노자와 같은 부류의 책으로 읽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유학자들이 왜? 장자라는 책을 좋아하는지, 특히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이에 대해서 설명해준다. 그리고 장자에게 갖고 있었던 갖가지 오해들을 말끔히 설명해준다. 그런데, 이 부분을 쉽게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아마도 '장자'라는 책을 읽어 봐야겠다. 읽지 않고 이책을 읽다보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물론, 팟캐스트 '학자들의 수다' -노자편에서 장자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기는 하지만, 설명이 안된 부분을 읽다보면, 쉽게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3. 평범한 상식에 도전하라!!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평범한 상식에 도전하라는 말이었다. 우리가 당연시하며 알고있었던 상식들을 이책은 통쾌하게 반박한다. 과연 그것이 맞을까? 어떤 일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갖고 있었던 오해! 그 오해를 걷어내려면 상식에 도전해야한다.

  또한가지, 평범한 진리이지만, 고전이란, 천의얼굴을 하고 있다. 고전을 읽으면서도 과거의 책 속에서 현재의 지혜를 얻으려 하기에, 자연스럽게 과거의 책은 오늘의 문제에 답을 해주도록 읽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얼굴을 바꿔가며 지혜를 주는 책이 바로 '도덕경'이다. 그래서 도덕경을 논어 다음으로 읽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평범한 상식에 도전하고, 이시대의 도덕경과 장자 읽기에 대해서 고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천의 얼굴을 하고 있는 고전의 재미에 빠져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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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나루 2016-08-02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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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철학에서 이야기로 - 우리 시대의 노장 읽기 김시천 ebook

알라딘: 철학에서 이야기로



철학에서 이야기로 - 우리 시대의 노장 읽기  |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84 
김시천 (지은이)책세상200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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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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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노자>와 <장자>를 통해 오늘날 한국에서 철학하기의 의미를 되짚어봄으로써 서구의 방식에 따른 철학'만들기' 가 아닌, 우리 시대의 철학'하기' 를 제안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진리' 를 담고 있는 닫힌 경전이나 체계적인 철학서라는 이름을 버리고, 역사와 함께 전해진 '삶의 이야기' 로서 <노자>와 <장자>를 보자고 제안한다.

1장은 근대화, 서구화, 보편화를 지향했던 20세기 한국의 역사 과정이 동양철학의 영역에 남긴 자취를 탐색한다. 
2장은 서구인의 <노자>읽기를 검토하고, '열린 텍스트' 로서의 가능성을 따져 본다. 
3장에서는 <장자>의 이상사회론의 다양한 갈래를 다루고, 그 안의 유토피아의 비전을 생각한다. 
4장은 기존의 <노자>와 <장자>의 해석이 지닌 문제를 살펴보고, 지금-여기를 통해 <노자>와 <장자>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다.

무엇보다 저자는 <노자>와 <장자>를 우리의 것으로 해석하면서, 고전을 통해 우리의 현실, 사회의 문제를 담아내자고 제안한다.


목차
들어가는 말 - <노자>와 <장자>의 한국적 읽기를 꿈꾸며

제1장 철학만들기에서 철학하기까지 - 우리시대 전통 도가 철학담론의 양면성
1. 김치-햄버거 철학을 위한 변명
2. 서양 철학의 그늘
3. 도가의 철학 만들기 - 근대화 혹은 자생적 오리엔탈리즘
4. 철학하기의 어려움 - 우리에게 과연 철학은 있는가

제2장 닫힌 경전에서 열린 텍스트로 - 서구인의 <노자>읽기를 돌아보며
1. 노자, 서방으로 가다
2. 서구 세계의 노자 번역
3. 노자 번역의 유행과 그 이유
4. 두 개의 거울
5. 프리즘 - 동양 문명의 분석 혹은 새로운 사유를 찾아서
6. 우리들의 노자읽기 - 경전에서 텍스트로

제3장 <장자> 텍스트 해체의 가능성 - 이상사회론을 통해 본 <장자>사상의 다양성
1. 도가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2. 이상사회론의 유형학
3. 도가적 아르카디아
4. 도가적 유토피아
5. 아르카디아에서 유토피아까지

제4장 역사에서 이야기로
1. <노자>와 <장자> 역사에서 이야기로
2. 도가 혹은 노장을 넘어
3. <사기>의 중국 혹은 역사를 넘어
4. 역사의 그늘 아래에서
5. 이제 우리의 이야기로

맺는 말 - 우리 사회의 삶 속에서 <노자>, <장자> 이야기하기
부록- 1980년대 이후 서구-영미권의 도가 연구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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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요컨대 동아시아 철학이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행복한 삶이 가능한, 살기 좋은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다만 우리가 아는 수많은 철학자들이 서로 다른 말을 했던 것은 그러한 사회를 실현하는 방법에 대한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가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온 동아시아의 위대한 스승들과 사상들은 그런 살기 좋은 사회를 수립하기 위한 사색과 논쟁의 산물들이라 할 수 있다. 
무위와 자연을 노래했던 도가든, 객관적으로 합리적인 법과 제도를 통해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던 법가든, 가족간의 끈끈한 사랑의 행위를 확장하여 이를 전체 사회 속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유가든, 그들의 목적은 모두 살기 좋은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색과 논쟁이 담긴 그릇이 동아시아의 고전들이다. 
(본문 158쪽 중에서)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김시천 (지은이) 

동양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상지대학교 교양대학에서 공부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14년부터 인문학 전문 팟캐스트 〈학자들의 수다〉를 제작, 진행해 왔고, 2020년부터는 유튜브에서 새로운 인문학을 소개하는 방송 〈휴프렌즈〉와, 인간과 동물이 함께 사는 지혜를 모색하는 방송 〈휴애니프렌즈〉에 출연하고 있다. 그동안 쓰고 옮긴 책으로,
 『철학에서 이야기로』,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 
『논어, 학자들의 수다 : 사람을 읽다』, 
『무하유지향에서 들려오는 메아리, 장자』, 
『죽은 철학자의... 더보기
최근작 : <동양철학산책>,<똥에도 도가 있다고?>,<근대 사상의 수용과 변용 1> … 총 44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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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몸인가 옷인가?

버스는 너무 흔들려서 책보기가 좋질 않다. 버스에선 바깥구경 아니면 잠이다. 근자 기차를 이용할 일이 많아져서 덕분에 책볼 일이 한결 많아졌다. 그동안 사모아놓기만 하고 읽기를 게을리했던 <책세상문고-우리시대>는 상하행 왕복이면 한 권씩이 떼져나간다. <책세상문고>는 알차고, 개성 넘친다. 그래서 풍성하고 신선하다. 

막 떼넘긴 30대의 동양철학자 김시천이 지은 <철학에서 이야기로-우리시대의 노장읽기> 역시 그러하거니와, 개인적으로는 '철학' 일반의 정체 하나를 확연히 밝혀주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동안 내게 있어서 철학은 그 자체로 근원적·본질적·일반적인 무엇이었다. 말하자면 '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철학은 또한 그 개적(皆的)들의 몸에 걸쳐진 '옷'일 수 있다는 사실, 혹은 가능성을 나는 이 책에서 읽었다. '철학이고 싶어하는' 무엇이 '철학'을 만드는 것이라는 얘기다. 요컨대, <도덕경>과 <장자>가 철학에 못박혀 읽히지 않고 다르게, 가령 정치학적으로 읽히는 건 훼손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스로의 무게를 벗어나면 자유는 코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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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먹는하마 2005-08-31 공감(0)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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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청3 [반론] '나무를 베면 안된다'는 함정을 넘어 - 오마이뉴스

[반론] '나무를 베면 안된다'는 함정을 넘어 - 오마이뉴스

김성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최병성 기자의 <산림청이 저지른 엄청난 사건, 국민 생명 위험하다> 기사에 대한 반론을 보내와 가감 없이 싣습니다. 최병성 기자의 후속기사도 준비중입니다. 이와 관련한 또다른 의견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강원도 홍천군의 또 다른 벌목 현장. 도로를 따라 양쪽의 숲이 사라졌다.
▲  강원도 홍천군의 또 다른 벌목 현장. 도로를 따라 양쪽의 숲이 사라졌다.
ⓒ 최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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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산림청이 추진하는 '2050 탄소중립 산림 부문 추진방안'을 둘러싼 말들이 많다. 환경운동가로 명성을 얻은 최병성 목사는 <산림청이 저지른 엄청난 사건, 국민 생명 위험하다>(http://omn.kr/1t88z) 제하의 오마이뉴스 기고를 통해 산림청의 숲 가꾸기 사업이 '기후재앙'을 불러올 '제2의 4대강 사업'이라 경고하며 논란에 불을 지폈다. 홍천 산야가 헐벗은 사진에 충격을 받은 것은 비단 오마이뉴스 독자들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마치 준비된 것처럼 불과 하루 뒤 <조선일보>는 1면 기사로 공세를 이어받았다.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탄소 저감 목표가 차질을 빚자 멀쩡한 나무를 베어 가며 무리하게 새 나무를 심는 계획이라는 비판이다. 과연 정부는 탄소중립이라는 핑계로 멀쩡한 산림을 밀어내고 나무 심기 개수 채우기에 급급한 책상물림 사업을 만들어낸 것일까?

<오마이뉴스> 기사처럼 숲을 가만히 놔두면 탄소흡수량은 알아서 증가하는데 산림청은 멀쩡한 숲을 뒤엎고 탄소시계를 앞당기는 재앙을 초래하려는 것인가? 건강한 산림정책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려하는 목소리들에 관한 몇 가지 사실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30억 그루 나무 심기로 온 산이 뒤엎어질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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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환경단체는 산림청이 '전체 산림의 72%를 모두 엎어버릴 것'이라느니, '경기도 면적의 숲이 사라질 위기'니 하며 산림청 전략의 전면 백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산림청의 계획을 뜯어보면 환경단체들의 목소리는 기우에 가까워 보인다. 산림청에 따르면 '탄소중립 추진방안'에서 발표된 수확량은 1년에 3만ha 규모로, 탄소중립 추진방안 수립 이전인 '20년도에만 이미 2.4만ha를 수확하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약 25% 규모 증가에 불과하다.

30년간 총 26억 그루(연간 8700만 그루꼴)의 새 나무를 국내에 심는 데 필요한 면적은 연간 약 2.9만ha로 추산되는데, 2.9만 ha는 우리나라 전체 산림면적인 634만ha의 불과 0.4%에 해당할 뿐이다. 1년에 0.4%씩 3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총 산림면적의 14%의 나무를 새로 심는 것이 과도한 목표라는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다.

홍천 벌채사업은 산림청 사업이 아닌 민간사업

앞선 기사들에서 모두의 이목을 끈 문제 사례인 강원도 홍천군의 나무 베기 현장은 산림청이 관리하는 국유림이 아니라 사유림으로, 산림자원법에 따르면 사유림 산주의 입목 벌채 허가는 관할 기초지자체가 허가권을 갖고 있다. 올해부터 산림청이 준비 중인 '산림청 탄소중립 전략'과는 전혀 무관한 민간 경제림의 벌목사업이라는 얘기다. 

물론 사유림에서도 설령 규정에 어긋난 나무베기가 이루어졌다든지, 규정이 미비하여 생태계 교란의 가능성이 높다면 지적해 마땅한 일이다. 당국은 최근 3년간 벌채지역 전수 조사에 돌입하겠다고 발표했으니 그 결과를 지켜볼 일이다.

하지만 사유지에서의 민간 벌채사업 사례를 가져다 산림청 숲 가꾸기 사업이나 탄소중립 전략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사실 호도이자 논리 비약이다. 위 기사가 주장하려는 바는 결국 '(어떤 상황에서도) 산림은 경영의 대상이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 아닐까 의심된다. 과연 그러한가?

산림의 탄소 흡수능력 –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자

최병성 목사는 벌채된 나무의 나이테 간격을 살피며 30년 이상 산림이 더 높은 탄소 흡수능력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국내외 연구 결과를 인용하며 30년 이후 나이 든 나무가 탄소를 더 흡수하기 때문에 탄소흡수량 증가를 위해서는 벌채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는 과학적인 분석이라 보기 어렵다.

가장 큰 오류는 단일 개체의 탄소흡수량이 늘어나면 숲 전체의 탄소흡수량이 당연히 늘어난다는 논리의 함정이다. 그야말로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오류다. 나무가 청년기를 지나 큰 나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수많은 나무와의 경쟁을 이겨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주변 나무들의 개체 수는 감소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숲의 탄소 흡수능력을 판단할 때는 큰 나무 한 그루의 흡수능력 증감이 아니라 숲의 단위 면적당 탄소흡수량이 지표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나무가 아니라 전체 숲의 단위로 시야를 넓혀 볼 때, 숲의 나이가 들면 전체적인 생장률이 떨어지고 탄소흡수기능이 저하된다는 사실은 아직 흔들리지 않은 학계의 정설이다.

국내 주요 수종의 탄소흡수량을 직접 계측한 결과도 숲과 개별 나무의 탄소흡수량이 일치하지 않음을 뒷받침한다. 산림청과 국립산림과학원의 산정 결과, 나무 한 그루당 탄소흡수량은 수종에 따라 침엽수는 대개 수령 30년~50년 사이에 절정에 다다르고 이후 감소하며, 활엽수는 수령 70년까지 지속해서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전체 숲 단위의 흡수량을 보면 수종과 관계없이 임령 20~25년이 절정이며 이후 완만하게 하락하여 50년 이후에는 수령 10년 수준과 같거나 낮은 결과를 보여준다.
 
[표1] 나무 한 그루 당 연간 CO2 흡수량  *임분수확표에 없는 자료로 추정치를 적용한 값임.
 **임분수확표의 임분단위 자료를 본수로 나누었기 때문에 수령(개체목) 기준의 흡수량을 제시함.
출처 : 국립산림과학원. 2019. 주요 산림수종의 표준 탄소흡수량 (ver. 1.2). NIFoS 산림정책이슈 14쪽.
▲ [표1] 나무 한 그루 당 연간 CO2 흡수량  *임분수확표에 없는 자료로 추정치를 적용한 값임. **임분수확표의 임분단위 자료를 본수로 나누었기 때문에 수령(개체목) 기준의 흡수량을 제시함. 출처 : 국립산림과학원. 2019. 주요 산림수종의 표준 탄소흡수량 (ver. 1.2). NIFoS 산림정책이슈 14쪽.
ⓒ 국립산림과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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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2] 주요 수종별 연간 CO2 흡수량  *임분수확표에 없는 자료로 추정치를 적용한 값임.
 **임분수확표의 임분단위 자료를 활용하였기 때문에 임령기준의 흡수량을 제시함.
출처 : 국립산림과학원. 2019. 주요 산림수종의 표준 탄소흡수량 (ver. 1.2). NIFoS 산림정책이슈 13쪽.
▲ [표2] 주요 수종별 연간 CO2 흡수량  *임분수확표에 없는 자료로 추정치를 적용한 값임. **임분수확표의 임분단위 자료를 활용하였기 때문에 임령기준의 흡수량을 제시함. 출처 : 국립산림과학원. 2019. 주요 산림수종의 표준 탄소흡수량 (ver. 1.2). NIFoS 산림정책이슈 13쪽.
ⓒ 국립산림과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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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채는 금기?

늙고 큰 아름드리나무가 젊고 작은 나무에 비해 많은 탄소를 흡수한다는 최병성 목사의 주장을 굳이 반박할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가설이 '숲은 인위적 경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절대적인 보호만이 능사'라는 극단적인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어서는 곤란하다. 아름드리나무를 더 많이 키워내고 숲의 생태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숲 가꾸기와 산림경영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산림 문제에 대해 주지하고 있으면서도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 있다. 우리나라 산림의 대부분은 애초에 자연림이 아닌 70~80년대 치산녹화 사업을 통해 조성된 인공림이라는 점이다. 박정희 정권의 산림녹화사업은 '2차대전 이후 황폐산림 녹화에 성공한 유일한 국가'로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UNFAO)에서 모범사례로 삼을 정도로 단시간 내에 헐벗은 국토를 재조림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단시일 내에 조성한 국내 산림은 현재 수종과 연령구조 불균형 문제로 지속 가능한 산림경영 구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국내 산림 중 약 72%의 나무는 3~4령에 속하는 나이가 거의 같은 나무로 구성되어, 단층의 과밀화된 숲을 이룬다. 이로 인해 큰 나무로 성장하기도 어렵다.

속성수 위주의 식재로 인해 목재의 자원화 가치가 낮으며, 병충해에 취약하고 숲 생태계의 다양성도 떨어진다. 이러한 인공림을 단순히 방치하며 울창한 원시림이 되길 기다리는 것은 나무를 쳐다보며 물고기 떨어지길 기다리는 셈이다.
  
산림녹화 시즌 2 – 지속 가능한 산림경영을 위한 산림뉴딜

탄소중립을 위한 산림뉴딜은 지속 가능한 산림경영을 위한 산림관리의 시작이다. 30년 넘는 나무는 모두 베어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백 년 이후에도 계속 자라는 건강한 나무들을 기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관리하려는 대책이다.

앞서 말했듯, 50년 전 심은 아까시나무·리기다소나무 등 속성 연료림에 편중된 수종을 교체하고 재구성해야 한다. 국립산림과학원의 연구에 따르면 기후 위기가 불러온 평균온도 상승으로 2060년에는 강원도 고산지역과 전북·충북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인위적 관리 없이는 남한지역에서 소나무 군락의 자생이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기후 위기에 탄력성 있고 목재로의 이용 가치가 높은 수종으로의 전환이 필요한 이유다.

 
[그림1] 국내 소나무 군락지의 변화 2060년경 강원도 고산지역, 전북·충북 일부 지역 제외하고 남한지역에서는 소나무 군락이 고사 / 2090년경 자강도, 양강도, 함경도, 강원 일부 지역 제외하고는 소나무 군락 고사할 것이 예상(국립산림과학원)
▲ [그림1] 국내 소나무 군락지의 변화 2060년경 강원도 고산지역, 전북·충북 일부 지역 제외하고 남한지역에서는 소나무 군락이 고사 / 2090년경 자강도, 양강도, 함경도, 강원 일부 지역 제외하고는 소나무 군락 고사할 것이 예상(국립산림과학원)
ⓒ 국립산림과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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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로 제기되는 모두베기 방식의 벌채 방식의 전환 또한 산림 뉴딜의 핵심 내용에 포함된다. 임도를 더 많이 설치하면 모두베기(개벌)가 아닌 솎아베기(간벌)가 가능한 접근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임업의 기계화가 가능하여 국산 목재가 외산 대비 경제성을 달성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목재가 플라스틱과 콘크리트의 자리를 대체하는 '탄소통조림'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국산 목재를 키우고 수확하고 이용하는 탄소 사이클을 촉진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나오는 잔가지·그루터기 등 임업 부산물은 열에너지에 쓰이는 화석연료를 대체하는 바이오매스로 활용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림2] 목재 이용과 탄소순환 대기 중 탄소흡수원으로서 산림의 역할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벌채와 목재이용, 재조림의 순환체계 형성이 필요
▲ [그림2] 목재 이용과 탄소순환 대기 중 탄소흡수원으로서 산림의 역할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벌채와 목재이용, 재조림의 순환체계 형성이 필요
ⓒ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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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경영의 모범국가인 스웨덴의 경우를 보자. 20세기 초부터 2010년까지 총 산림면적은 2300만 ha로 크게 늘어나지 않은 가운데, 임목 축적량은 매년 거의 1%씩 늘며 183% 성장해 왔다. 산림 총면적이 포화에 가까운 우리나라가 주시할 만한 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스웨덴 정부와 임업계의 지속적인 산림경영 결과물이다. 스웨덴은 생태 보호구역과 국립공원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산림을 '경영림'으로 관리하며, 축적된 임업 노하우를 동원하여 산림자원을 적극적으로 일구어내고 있다.

나무를 수확하여 이용해야 산주들이 건강한 나무를 심고 가꿀 경제적 유인이 생긴다. 스웨덴뿐만 아니라 임업 선진국인 핀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등에선 총 입목축적량의 2~3%를 벌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벌채율 0.5%로 OECD 29개국 중 27위에 불과하다.
  
지속 가능한 산림전략 논의할 때

우리 산림의 영급·수종 개선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탄소중립 선언에 발맞춘 산림 뉴딜은 숲을 탄소흡수원으로만 바라보고 숲을 망가뜨리는 정책이 아니라, 숲을 건강하게 가꾸고 나무를 크게 키우는, 산림의 가치를 높이는 전환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고민은, 우리 산림을 기후 위기에 탄력적인 수종으로 전환하는 동시에, 산림자원을 육성 이용하는 방법에 대한 생산적 토론이 아닐까?

이번 논쟁을 통해 숲 생태계 훼손을 최소화하고 종 다양성에 도움이 되는 방식의 지속 가능한 삼림 경영의 방향에 대해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할 기회가 되길 바란다.

산림청2 [산림청 반론] 30년 지나면 숲의 탄소 흡수량은 감소한다 - 오마이뉴스

[산림청 반론] 30년 지나면 숲의 탄소 흡수량은 감소한다 - 오마이뉴스


[산림청 반론] 30년 지나면 숲의 탄소 흡수량은 감소한다최병성 기자의 '산림청이 저지른 엄청난 사건, 국민 생명 위험하다' 보도에 대하여
21.05.17 
이미라(WR20210516193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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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라 산림청 산림산업정책국장이 최병성 기자의 <산림청이 저지른 엄청난 사건, 국민 생명 위험하다> 기사에 대한 반론을 보내와 가감 없이 싣습니다. 최병성 기자의 후속기사도 준비중입니다.[편집자말]
최근 언론에서 탄소중립 이행을 위한 무분별한 벌목이 발생한다는 기사와 사진으로 많은 국민들이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심지어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탄소중립에 차질이 생겨 멀쩡한 산을 밀어버린다는 기사까지 등장하고 있다. ( [관련기사] 산림청이 저지른 엄청난 사건, 국민 생명 위험하다 http://omn.kr/1t88z )


▲ 강원도 홍천군의 또 다른 벌목 현장. 도로를 따라 양쪽의 숲이 사라졌다.
ⓒ 최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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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 수확, 문재인 정부 때 오히려 감소

목재수확은 산림순환경영(조림-풀베기-가지치기-솎아베기-수확-조림)의 한 과정으로, 우리나라 전체 산림 630만ha 중 234만ha의 경제림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경제림은 국산목재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2005년부터 시행해온 정책이다. 이번 정부 들어 탄소중립을 위해 대규모 벌목이 발생한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고, 오히려 지난 정부에 비해 벌채면적과 목재수확량은 감소했다.

* 연평균 벌채(모두베기) 면적(ha) : 박근혜 정부 25,787 → 문재인 정부 24,863
* 연평균 벌채량(천㎥) : 박근혜 정부 8,055 → 문재인 정부 5,713
(단위 : ha, 천㎥)
우리나라는 국내에서 소비하는 목재수요량의 84%를 해외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반면, 매년 자라나는 나무의 양, 즉 연간 임목축적량 대비 약 20% 수준만 목재로 수확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전 세계는 산림관리에 있어 지속가능한 산림경영(SFM)을 가장 기본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독일 등 선진국에서는 매년 자라나는 임목축적량을 고려해 지속가능한 범위의 목재수확량을 정하여 그 수준 안에서 목재를 수확하고 있다.

세계 주요국의 목재수확 비율은 독일 2.6%, 스위스 2.4%, 오스트리아 2.0%다. 한국의 경우 0.5%로 29개국 중 27위다. OECD 국가들을 비교해도 우리나라의 목재수확(벌채) 비율이 높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국산목재 사용 비율을 높이는 것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탄소발자국을 줄이는 기후위기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일부 환경단체에서 우려하는 것처럼 탄소중립 이행을 위한 대규모 벌채는 없을 것이다. '30년까지 탄소중립 이행을 위해 임도, 임업기계 등 경영기반 확충에 집중하고, 현재 약 2.4만ha인 목재수확 사업을 점진적으로 늘려 '50년까지 3만ha 수준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이번에 보도된 벌채현장 사진은 개인 소유 산림으로, 「산림자원법」 제36조에 따라 합법적으로 허가를 받아 목재를 수확한 곳이다. 경제림육성단지로서 인공조림한 잣나무림 50년생 이상 산림에 대하여 3년간 240ha에 벌채를 하였고, 그 중 65ha에 대해서는 조림을 실행하였다. 벌채 후 산림이 전용되는 것을 걱정하는 국민들이 있는데 「산림자원법」 제10조는 벌채지에 대해서 의무적으로 조림사업을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어려운 일이다.

산림청은 이번 보도 대상지 외에 최근 3년간 5ha 이상 벌채 허가지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하고, 임업인과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현행 벌채제도를 개선해 나갈 계획이다.

30년 지나면 숲 전체의 탄소 흡수량은 감소한다

최근 보도는 나무 한 그루의 생장량을 측정하여 흡수능력이 급격히 증가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은 1ha 단위의 산림에서 주요수종의 표준 탄소흡수량을 산정하였고 20년 또는 25년에서 가장 높은 순흡수량을 보여준 이후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산림 1ha와 나무 한 그루가 흡수하는 이산화탄소 양이 최대가 되는 시점이 다른 이유는 단위면적 당 남아 있는 나무 그루 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산림의 나이가 많아질수록 남아 있는 나무 그루 수가 적어지기 때문에 산림 1ha가 흡수하는 이산화탄소 양은 줄어들더라도 나무 한 그루가 흡수하는 이산화탄소 양은 많아질 수 있는 것이다.

(예)
강원지방소나무숲 20년생 : 5.0kgCO2/그루 × 2,030그루/ha = 10.1톤/ha
강원지방소나무숲 50년생 : 9.2kgCO2/그루 × 732그루/ha = 6.7톤/ha
기사에서 인용한 2014년 <네이처>의 연구는 세계 열대‧온대 지방에 서식하는 403종을 조사한 결과 나이가 많아질수록 성장속도가 더욱 빨라진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이는 윈시림의 거대 개체목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으로, 나무는 나이가 들수록 생장률이 떨어져 이산화탄소 흡수기능도 줄어든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결국 나무를 보느냐 숲을 보느냐의 문제이다. 2030년 온실가스 감축목표 달성과 2050 탄소중립 이행을 위해서는 우리나라 산림 전체의 흡수량을 측정하고 전망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토의정서에서도 목재수확을 산림경영으로 인정

'산림전용(deforestation)'은 교토의정서 3.3조에서 제시되었으며 마라퀘시합의에서 "직접적이고 인위적으로 산림지를 산림지 이외의 용도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산림전용이란 산림지를 농지, 초지, 주택지와 같은 다른 토지이용 형태로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목재수확은 교토의정서 3.4조에서 규정한 산림경영(forest management)의 경제적 활동의 하나이다. "조림 → 가지치기 → 솎아베기 → 수확(harvest) → 조림"으로 연결된 지속가능한 산림경영의 한 활동으로, 영구히 산림으로 존재하며 다른 토지이용으로 전환되는 교토의정서 3.3조의 '산림전용'에 해당하지 않는다.

산림사업으로 토양 파괴? 토양 소실 최소화를 위해 노력할 것

산림에서의 모든 작업은 토양 등 환경의 부분적 훼손은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벌목 과정에서 토양 등 산림생태환경의 교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선(케이블)을 공중에 설치하여 원목을 매달아 운반하는 가선계 집재기계를 개발하여 이용 중이다.

일본의 경우 20년 전부터 임업기계 분야를 집중 지원하여, 작업환경을 개선하고 목재자급률을 '00년 18.9%에서 '17년 30%로 대폭 끌어올렸다. 우리나라는 높은 인건비와 임업의 낮은 채산성으로 인해 산림토양을 보전하면서 목재를 수확하는 것이 어려운 현실이다.

국립산림과학원은 각종 산림사업 시 토양소실 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임목수확시스템을 개발하는 연구를 강화할 계획이다. 아울러, 산림청은 개발된 임업기계를 보급하고 영세한 산림소유자가 임업기계를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제도를 보완하는 등 친환경적인 산림작업 환경을 구축하도록 노력할 계획이다.

숲가꾸기는 산사태를 예방한다

오마이뉴스에서 충주호 인근 지난해 발생한 산사태(피해면적 0.73ha, 복구금액 1억1100만원)의 주된 원인이 숲가꾸기 사업이라고 보도한 내용에 대해 파악한 결과 숲가꾸기가 아닌 수확벌채 후 조림을 한 지역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지난해 여름 제천지역은 1972년 이래 가장 많은 비가 단기간 집중되었으며, 이로 인해 산사태가 발생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다.(제천지역은 '20.7.29.~8.6.까지 553.4㎜의 기록적인 폭우가 내려 인명ㆍ재산피해가 매우 커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음. 제천시 산사태 피해 면적 89ha.)

숲가꾸기 사업은 나무의 뿌리 발달을 촉진시켜 주변 토양을 지탱하는 말뚝효과와 그물효과가 발휘되어 재해에 강한 건전한 산림을 만든다. 또한, 하층식생을 증가시켜 생물다양성을 증진하고, 나무의 질적 개선과 생장량 증가로 탄소흡수원 확충과 고부가가치 목재생산에 기여한다.

산림청은 앞으로 국민 여러분이 걱정하시는 일이 없도록 목재수확 벌채를 포함한 모든 산림사업과 산림정책의 추진에 있어 임업인과 국민 여러분의 눈높이에 맞추도록 노력할 것이다. 아울러, 다양한 분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핵심 이해관계자 협의체를 구성하여, 상반된 입장을 가진 전문가, 이해관계자들이 마음껏 소통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여 의견을 듣고 산림부문 탄소중립 전략을 9월까지 확정할 계획이다.


산림청1 산림청이 저지른 엄청난 사건, 국민 생명 위험하다 - 오마이뉴스



산림청이 저지른 엄청난 사건, 국민 생명 위험하다 - 오마이뉴스

산림청이 저지른 엄청난 사건, 국민 생명 위험하다
[최병성 리포트] 기후 재난 부추기는 정부의 30억 그루 나무심기

사회
최병성(cbs5012)

21.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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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고속도로 신림IC 인근, 울창하던 숲이 사라지고 붉은 민둥산이 되었다. ⓒ 최병성
중앙고속도로 충북 제천 부근, 울창하던 숲이 사라지고 붉은 민둥산이 되었다. 금방이라도 저 아래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량 위로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롭다.



▲ 강원도 홍천군의 또 다른 벌목 현장. 도로를 따라 양쪽의 숲이 사라졌다. ⓒ 최병성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도로를 따라 양쪽의 숲이 사라졌다. 벌목된 숲의 면적이 어마어마하다. 현장을 보는 순간, 마치 중국의 사막지형인가 싶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동안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왔던 대한민국의 숲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큰 규모의 처참한 벌목 현장을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 90만평에 이르는 숲이 초토화되었다. ⓒ 최병성
도로에서 조금 안쪽 골짜기로 들어가자 더 흉물스런 벌목 현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로변 숲은 사람들의 이목이 있으니 조금이라도 남겨 놓은 나무들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골짜기 숲은 사정이 달랐다. 한마디로 숲을 전멸시켰다.

산림청은 건강한 산림을 유지하기 위해 벌목 면적이 5ha 이상일 경우 일부 산림을 존치하고, 또 벌목되는 구역과 구역 사이에는 20m 정도의 숲을 남겨두는 친환경 벌목을 한다고 주장한다.



▲ 드론으로 촬영한 벌목 현장 벌목 현장이 도로를 따라 죽 이어진다. ⓒ 최병성
지난 11일 현장을 돌아보며 벌목 관계자에게 사업면적을 물었다. 30ha 약 9만평에 이른다고 했다. 그러나 산림청이 주장한 5ha마다 20m의 수림대를 존치하는 친환경 벌채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장 낮은 하천부에서 능선부에 이르기 까지, 길이 약 1.5km에 이르는 30ha의 숲을 싹쓸이했다.

현장엔 포클레인들이 급경사 진 산비탈에 올라가 베어낸 나무들을 끌어내리는 작업 중이었다. 단순히 나무만 베어내는 벌목이 아니었다. 포클레인이 마음대로 산을 휘젓고 다니고 있었다. 나무를 실어내기 위해 아무 곳이나 숲을 파헤치며 길을 냈다.



▲ 울창하던 숲을 베어내고, 포클레인이 베어진 나무들을 끌어내리고 있다. ⓒ 최병성
대체 왜?... 산림청의 거짓말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도 숲가꾸기라는 이름으로 벌목이 이뤄져 왔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다. 문재인 정부는 30억 그루를 심기 위해 전국 산림의 1/3의 베어낸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숲은 30년 이상의 늙은 나무들이 대부분이라 탄소 흡수 능력이 떨어진다는 게 이유다. 소나무와 잣나무 같은 침엽수는 30살, 참나무 같은 활엽수는 20살이 넘으면 탄소 흡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늙은 나무라고 주장한다.



▲ 문재인 정부는 2050 탄소중립을 위해 산림을 중요한 탄소흡수원으로 끌어들였다. ⓒ 산림청


▲ 2050년까지 30억 그루 나무를 심기 위해 침엽수 30년, 활엽수 20년이라는 벌기령을 축소해가며 무리한 벌목을 강행하고 있다. ⓒ 산림청
과연 침엽수는 30살, 활엽수는 20살이 지나면 탄소 흡수 능력이 떨어지는 늙은 나무일까? 절대 아니다. 정부의 주장과는 달리 나무는 30년이 지나면 오히려 탄소흡수 능력이 급격히 증가한다.

설사 30살이 넘어 탄소 흡수 능력이 떨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이 숲의 나무들을 베어낼 명분은 되지 못한다. 탄소 흡수는 숲의 많은 역할 중 일부분일 뿐이다.

숲 가꾸기로 잣나무를 베어낸 현장에 올랐다. 지름 50~60cm에 이르는 아름드리 잣나무들을 베어내고 낙엽송이라 부르는 일본잎갈나무를 심었다. 낙엽송은 속성수로 과거 우리 숲이 헐벗었을 때 심던 나무였다.



▲ 베어진 잣나무 주변에 낙엽송이 심어져 있다. 산림청의 주장과는 달리 침엽수인 잣나무는 30살이 넘어서자 나이테 간격이 30살 이전보다 더 넓어지는 등 폭발적인 탄소흡수력을 보였다. ⓒ 최병성
잘려나간 지름 50~60cm의 잣나무 나이테를 세 보았다. 보통 50살 정도가 되었다. 30살이 넘으면 나무가 늙어 탄소 흡수 능력이 떨어진다는 산림청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30살까지는 나이를 세기 어려울 만큼 나이테 간격이 아주 촘촘했다. 그런데 30살이 넘어가자 나이테 간격이 폭발적으로 넓어졌다. 산림청의 주장과는 달리 30살이 넘으면 탄소흡수 능력이 왕성하게 증가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베어진 숲의 소나무 나이테를 세어보니 30살이 넘어서자 더 왕성한 탄소 흡수 능력을 보여주며 30살 이전보다 폭발적인 성장을 했다. ⓒ 최병성
또 다른 벌목현장으로 이동했다. 지름 50cm의 소나무 나이테를 만났다. 나이를 세 보았다. 잣나무처럼 30살까지는 나이테 간격이 아주 촘촘했다. 그러나 30살이 넘어가자 오히려 나이테 간격이 넓어졌다. 침엽수는 30살이 넘으면 탄소흡수 능력이 떨어진다는 산림청의 주장과 상반된 결과다.



▲ 활엽수인 참나무는 산림청 주장대로라면 20살부터는 나이테가 줄어들어야 한다. 그러나 20살이 넘어서자 오히려 나이테 간격이 더 넓어졌다. ⓒ 최병성
또 다른 곳에서 만난 참나무 나이테를 살펴보자. 두 개의 기둥이 같이 자란 독특한 형태의 나무였다. 산림청은 활엽수는 20살이 넘으면 탄소 흡수 능력이 떨어진다고 했다. 그런데 참나무 역시 20살까지는 나이테 간격이 아주 좁았지만, 20살을 넘어 40살에 이르기 까지는 나이테 간격이 더 넓어졌다.

나무는 여름과 겨울의 성장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1년에 한 줄씩 나이테가 만들어진다. 뿌리에서 빨아올린 물을 잎사귀에서 수소와 산소로 분리하여 산소를 밖으로 내보내고, 대기 중의 탄소를 흡수하여 수소와 함께 버무려 영양분을 만들어 꽃과 열매와 성장에 필요한 에너지로 사용한다. 나무가 성장한다는 것은 탄소를 흡수하는 과정이기에, 나이테가 더 넓다는 것은 그 만큼 더 많은 탄소를 흡수하여 몸에 고정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30살(침엽수 30살, 활엽수 20살)이 넘으면 탄소 흡수 능력이 떨어지는 늙은 나무라는 정부의 주장이 맞다면, 30살까지의 나이테 간격이 더 넓고, 30살부터는 나이테 간격이 더 좁아져야 한다. 그러나 30살이 넘어서자 나이테 간격이 이전에 비해 몇 배나 증가했다.



▲ 탄소흡수 능력이 왕성한 나무들을 늙은나무라며 무참히 베어내 실어가고 있다. 기후위기를 재촉하는 재난의 현장이다. ⓒ 최병성
30살이 넘은 늙은 나무는 탄소 흡수 능력이 떨어진다며 새로 30억 그루를 심는다는 정부의 탄소 제로 정책은, 오히려 30살이 넘어 가장 왕성하게 탄소를 흡수하는 숲을 파괴하여 기후재난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큰 나무의 탄소 흡수력, 산림청도 세계도 다 알고 있다

국내 뿐 아니라 세계 많은 과학자들이 큰 나무들의 탄소 흡수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조사 결과들을 이미 발표한 바 있고, 관련 자료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산림청 산하 국립수목원은 지난 2018년 5월 24일, 우리 산림 지역에서 크고 오래된 나무 73종 308개체의 생육분포도와 그 생태적 기능에 대한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국립수목원은 "최근 30년을 10년 간격으로 나누어 분석한 결과, '큰나무' 개체는 직경이 15~25cm 정도인 나무와 비교했을 때 연간 탄소흡수량이 13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강조했다.

이보다 앞선 2014년 1월, 과학지 <네이처>는 미국 서부생태연구센터 네이트 스티븐슨 박사팀의 6개 대륙 나무를 조사한 결과를 인용해, '대형 고목 한그루가 중형 숲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한다고 발표했다.

연구팀이 세계 열대·온대 지방에 서식하는 나무 403종 각각의 성장속도를 조사한 결과, 나무는 나이를 먹고 커다랗게 자랄수록 성장속도가 더욱 빨라진다는 것이다. 특히 큰 나무일수록 탄소를 더 많이 고정한다고 강조했다. 큰 나무 한 그루가 1년간 흡수 고정하는 탄소의 양이 중간크기 나무 수백 그루의 숲과 같다는 것이다.

특히 연구팀은 "큰 나무가 대기 중 탄소를 줄이는 데 큰 영향력을 미치는 만큼 지구온난화를 예방을 위해 거목들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 큰 나무가 오히려 작은 나무들보다 탄소 흡수 능력이 뛰어나다는 2014년 네이처지 보도 ⓒ nature
교토의정서 때문? 3조3항을 보라

정부가 숲을 탄소 흡수원으로 한다며 30억 그루 심기 위해 전국 산림을 벌목하는 이유는 숲을 탄소 흡수원(carbon sink)으로 인정한 교토의정서 때문이다. 기후변화협약 제3차 당사국총회(1997년)에서 채택된 교토의정서는 온실가스 저감의무 달성을 위해 배출권 거래제도, 공동이행제도, 청정개발체제를 비롯해 대체 에너지 개발, 산림을 비롯한 탄소흡수원(carbon sink)의 관리 등을 구체적인 온실가스 저감 수단으로 명시하고 있다.

교토의정서 제3조 3항을 자세히 살펴보자.

직접적인 인간 활동에 기인한 토지이용변화 및 임업(1990년 이후 신규조림, 재조림, 산림전용에 국한하는)의 결과로 나타난 온실가스 배출과 흡수의 순 변화는 부속서 I 국가들이 의무감축량을 준수하는데 활용될 수 있다.


▲ 신규조림, 재조림, 산림전용으로 나눠 산림의 탄소흡수원을 구분한 쿄토의정서 ⓒ 교토의정서
위에서 말하는 '신규조림, 재조림, 산림전용'이란 이런 내용이다. (a) '신규조림'은 최소한 50년 동안 산림이 아니었던 지역(Non-Forest)에 새로이 산림을 조성하는 것이고, (b) '재조림'은 원래 산림이었던 지역이 일정기간 다른 용도로 전용되었다가 다시 산림으로 재조성되는 것이고, (c)는 산림이었던 지역을 산림이외의 다른 용도로 바뀌는 '산림전용'이다.

산림전용은 오히려 숲을 훼손하는 개발이므로 탄소를 배출이 증가하는 것이고, (a) '신규조림'과 (b) '재조림'에도 정부의 30억 그루 심기처럼 울창한 숲을 베고 어린 나무를 심는 어리석은 사업은 없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7월 '2030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 달성을 위한 기본 로드맵 수정안'을 발표했다. '2030년까지 감축목표 37% 중 기존 국내감축 수단으로 해소하기 어려운 38.3백만 톤은 산림흡수원 활용 등을 통해 해소 추진'한다며 '경제림단지 조성, 조림수종의 탄소 흡수력 증진, 숲가꾸기 등의 산림정책을 강화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과연 이게 맞는 말일까?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지구의 기후재난을 막기 위해 지금 당장 탄소 저감이 필요하다. 탄소흡수 능력이 뛰어난 큰 나무를 베어내고 새로 심은 어린나무가 언제 자라 큰 나무만큼의 탄소를 흡수할 수 있을까? 나무기둥은 나무가 대기 중의 탄소를 흡수하여 자기 몸에 저장한 것이다. 나무는 탄소 덩어리 자체다. 이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며 탄소를 바로 내뿜는 것은 불난 집에 부채질 하듯, 기후위기를 재촉하는 것에 불과하다.

숲의 토양도 중요한 탄소흡수원이건만

정부의 30억 그루 심기가 기후재난을 촉진하는 재앙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또 있다. 숲의 나무에만 탄소가 저장되는 게 아니다. 산림 내 토양은 더 많은 탄소 저장고다. 그동안 우리는 토양의 탄소 저장 능력을 간과해왔다. 강원대 양재의 교수와 충남대 임경재 교수 등은 2017년 발표한 '표토유실 보전을 통한 온실가스배출 저감과 수자원 보전 기능의 산출 및 정책 제안'에서 탄소 저장고인 토양 보전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2015년 11월 파리에서 열린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에서 기후변화 해결을 위해 '4per mille Soils for Food Security and Climate'라는 의제를 출범했다. 인류의 화석연료 사용으로 연간 8.9Gt의 탄소가 배출되는데, 이는 토양 2m 깊이 내에 저장되어 있는 탄소량 2400Gt의 0.4%에 해당되므로, 매년 토양보전을 위해 탄소저장량을 0.4% 증가시키면 화석연료에 의한 탄소배출량을 상쇄할 수 있다. 전 세계 토양 2m 깊이에 저장된 탄소량 (2400Gt) 중 30%(700Gt)는 표토층 30cm에 존재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1m 깊이에 존재하는 토양 탄소량(0.45Gt) 중 절반이 표토 층에 저장되어 있어 토양의 최상부와 표토만 잘 관리해도 기후변화 완화에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다.
특히 이 보고서는 '표토에만 저장된 탄소량은 700Gt로 대기(780Gt)와 식물(550Gt)에 존재하는 탄소량과 비슷하거나 많은 양이므로 기후 변화 완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국제연합 식량기구(UN FAO) 등은 토양 유실을 탄소 배출원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 탄소저장고인 표토뿐만 아니라 나무 뿌리까지 마구 파헤쳐 숲을 초토화시켰다. 산림 토양에 저장되어 있던 탄소를 대기 중으로 폭발시켜 기후위기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 최병성
탄소 흡수원을 만든다는 정부의 30억 그루 심기가 오히려 탄소 폭발로 기후 재앙이 될 것임은 벌목 현장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30억 그루를 심기 위해서는 먼저 산림에 울창한 나무를 베어내야 한다. 급경사 진 산림의 나무를 실어 나르기 위해 포클레인이 온 산을 헤집고 다니며 탄소 저장고인 표토층을 파괴하고 있다. 심지어 나무뿌리까지 마구 파내고, 중장비가 다니기 위해 산림에 마구잡이로 임도를 내며 산림을 초토화 시키고 있다.



▲ 베어낸 숲의 나무들을 끌어내리기 위해 포클레인이 숲의 토양까지 초토화시키고 있다. ⓒ 최병성
더 큰 재앙 막으려면 당장 멈춰야 한다

숲 가꾸기가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흉기로 전락한 현장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충주호 인근의 숲 가꾸기 현장이다. 산사태가 발생하여 도로를 덮쳤다. 차량의 안전을 위해 공사장의 커다란 철제 빔이 세워졌다. 이곳은 숲 가꾸기로 일본잎갈나무 묘목을 심은 곳이다. 그런데 숲을 잡아주는 큰 나무들이 베어지자 지난해 집중호우에 그대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 숲가꾸기로 큰나무를 베어내고 일본잎갈나무를 심자, 집중호우에 무너져 내려 도로를 덮쳤다. ⓒ 최병성


▲ 산림경영 이름하에 낙엽송이라는 일본잎갈나무 심었는데, 산사태가 발생해 도로를 덮쳤다. 임시방편으로 세워둔 철제빔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 최병성
맞은편 도로에서도 10여 곳이 넘는 산사태가 발생한 흔적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숲가꾸기로 수종 갱신한다며 급경사지의 나무들을 마구 베어낸 결과다. 지금처럼 전국 숲의 큰나무들을 마구 베어낸다면, 어느 날 갑자기 도로를 달리다 쓸려 내려온 산사태에 누구든지 파묻히는 사고를 당할 수 있다.



▲ 숲가꾸기로 큰 나무 베어내고 어린 낙엽송을 심은 현장. 줄줄이 산사태가 발생했다. 저 뒷편 화살표의 숲도 숲가꾸기로 베어진 현장들이다. ⓒ 최병성
정부의 30억 그루 나무 심기는 결코 기후위기 대응이 아니다. 오히려 급격한 탄소 배출을 초래하여 기후재난을 촉진하는 환경 대재앙이다. 산사태를 일으켜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고, 집중호우에 홍수 위험을 증가시키고, 벌목된 숲의 낙엽과 부엽토가 하천으로 유입되어 수질악화는 물론 가뭄과 물 부족 사태를 일으키고, 생태계 다양성의 심각한 훼손을 초래하는 등의 많은 환경문제를 촉발시킨다.

더 큰 환경 재앙이 발생하기 전에 여기서 멈춰야 한다.
덧붙이는 글 30억 그루심기가 초래하는 홍수와 가뭄과 산사태와 생태 다양성 파괴 등에 대해 다음 기사에 밝혀나가겠습니다.
#문재인 #환경부 #산림청 #숲가꾸기 #탄소제로

산림청4 [재반론] 어린 나무 베어버린, 산림청이 말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 - 오마이뉴스

4] [재반론] 어린 나무 베어버린, 산림청이 말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 - 오마이뉴스


[재반론] 어린 나무 베어버린, 산림청이 말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산림청 주장에 대한 반론] 그린뉴딜의 허상과 거짓말
21.05.25 07:25l최종 업데이트 21.05.25 07:25l
홍석환(WR20210524095208)

최병성 기자의 '산림청이 저지른 엄청난 사건, 국민 생명 위험하다' 기사에 대해 산림청에서 반론('30년 지나면 숲의 탄소 흡수량은 감소한다')을 보내온 데 이어, 이번에는 홍석환 부산대학교 조경학과 교수가 산림청의 주장에 대해 재반론을 보내왔습니다. [편집자말]
"올해 여름은 사상 최악으로 뜨거운 여름이 될 것이다"라 예상하면 열에 여덟은 맞는 기후위기 시대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니 늘 환경은 뒷전인 우리나라에서도 갑작스레 기후위기의 심각성이 퍼지기 시작했고 정부는 체계적 대안을 마련하지도 않은 채 '그린뉴딜'을 선언했다.

그린뉴딜은 사실상 녹색성장 아닌가? 정부는 이를 두고 다시 뭔가 혁신이 될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가 그 일환으로 계획한 사업 중 하나가 최근 논란이 가속화되는 산림청의 '30억 그루 나무심기'다. 어려운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지극히 '상식'에서 살펴보자.

[관련기사]
1] - 산림청이 저지른 엄청난 사건, 국민 생명 위험하다 (최병성, http://omn.kr/1t88z)
2] - [산림청 반론] 30년 지나면 숲의 탄소 흡수량은 감소한다 (이미라, http://omn.kr/1t9j7)
3] - [반론] '나무를 베면 안된다'는 함정을 넘어 (김성환, http://omn.kr/1tbnw)



▲ 강원도 홍천군의 벌목 현장. 도로를 따라 양쪽의 숲이 사라졌다.
ⓒ 최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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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경영이 친환경이 되기 위한 두 가지 조건


왜 우리는 기후위기 시대를 맞았는가에 대한 물음에, 이제는 초등학생도 답을 한다. 화석에너지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한 온실가스 농도 증가라고 말이다. 그리고 온실가스의 대표가 이산화탄소임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그럼 이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온실가스 배출 자체를 줄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다. 화석에너지의 도움으로 편리함을 맛본 인간이 불편함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두 번째이자 마지막 방법인, 배출된 온실가스를 흡수하여 저장하는 것이다.

둘째 방법을 인간이 실현시킬 수 있는 길은 안타깝지만 현재로서는 나무를 심는 일밖에 없다. 지금까지 쓰던 에너지를 그대로 쓰면서 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 신박한 방법이 있다니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30억 그루 나무심기'가 친환경이라는 위장막으로, 그린워싱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되는 이유이다.

이제 온난화를 막을 나무와 숲으로 가보자. 나무는 탄소를 흡수해서 저장한다. 역시 '상식'이다. 과도하게 배출된 탄소를 최대한 고정시키려면 나무가 흡수를 많이 해야 한다. 그래서 산림청은 연간 흡수량이 떨어지는 오래된 나무를 베어내고 어린나무를 심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흡수량이 아니라 저장량(고정량)임을 절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숲의 경영이 친환경이려면 이산화탄소를 흡수한 오래된 나무의 탄소를 도시로 옮겨와 저장하고, 그 숲에서 다시 나무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두 가지가 맞물려야만 한다. 그럴까?

지난 5월 16일 산림청이 배포한 설명 자료를 보자. 산림청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나무의 이산화탄소 흡수량이 줄어드는 시기는 침엽수는 약 50년 정도이며 활엽수는 알 수 없다. 70년까지만 조사됐는데, 우리나라에는 그 이상 나이가 든 숲이 거의 없으니 확인하지 못한 것 같다. 산림청이 주장하는 것과 반대의 연구결과가 차고 넘치지만 넘어가자.


▲ 나무 한 그루당 연간 CO2 흡수량(kgCO2/그루/년) (산림청 5월 16일 설명자료)
ⓒ 산림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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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청이 자신들의 사업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또 하나의 근거자료를 보자. 아래 표는 나무는 나이가 들수록 생장률이 떨어져 이산화탄소 흡수도 적게 한다며 제시한 한 연구결과다. 여기서 연간 바이오매스(생물량) 증가량은 약 60년 정도에 피크가 되며 그 이후 완만하게 줄어든다. 이 표와 그림을 보면 얼핏 흡수량이 줄어드니 베어내고 새로 심는 것이 탄소흡수 측면에서 매우 효과적이라는 산림청의 논리가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 산림청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려 제시한 Bowman et al.(2013)의 연구결과 그래프 (산림청 5월 16일 설명자료)
ⓒ 산림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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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벌채하면 저장된 탄소는 어떻게 될까?

이제부터 불편한 진실이 시작된다.

나무를 벌채하면 나무에 저장된 탄소는 어떻게 될까? 아니 먼저, 나무를 벌채하면 나무가 자란 수십 년의 시간 동안 흡수한 탄소를 어느 정도 가져올 수 있을까를 물어보자. 지극히 상식적으로 안타깝게도 나무는 전체를 수확하지 못한다. 벌목 과정에서 큰나무의 뿌리와 잔가지, 잎이 고스란히 산에 버려진다. 이렇게 버려지는 양이 오랜 기간 나무가 흡수한 탄소의 약 절반 이상에 달한다. 나머지는 빠르게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 크기가 작은 나무들 또한 모두 잘려 그대로 버려진다.

그리고 제재소로 옮긴 원목을 자르고 켜는 과정에서 약 50%가 버려진다. 이것도 빠르게 하늘로 날아간다. 제재한 목재는 가구 등 다시 최종 상품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또 손실이 발생, 결국 제품으로 남는 탄소는 생산한 원목의 20% 정도이다. 결국 벌목을 통해 숲에서 저장한 탄소를 옮겨와 저장하는 비율은 10% 이내에 불과하다. 일부가 대체연료로 사용되지만 결국 나무가 오랜 시간 저장한 탄소의 90%는 빠르게 다시 하늘로 날아가는 것이다. 이는 관련 분야에서 대략적으로 인정하는 정도의 일반적인 수치다.


▲ 숲을 벌채하면 수확한 나무의 뿌리와 잔가지, 수많은 작은 나무는 산에 버려지게 된다. 오랜 시간 뿌리와 가지에 저장되었던 탄소가 다시 빠르게 하늘로 날아가게 된다. (사진 오른쪽 중앙부에 보이는 막대 아래에 새롭게 조림한 나무가 보인다. 이 작은 나무가 탄소를 흡수하여 방출된 양만큼 흡수하는 데에만 수 십년은 걸릴 것이다)
ⓒ 최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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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최근 논란이 되는, 30년 전후에 베어지는 어린나무는 신재생에너지로 인증되는 탓에 제재(베어 낸 나무로 재목을 만듦)도 하지 않고 펠렛이나 우드칩으로 잘게 분쇄되어 태워진다. 많은 석탄발전회사들이 신재생에너지 의무 발전비율을 채우기 위해 석탄과 나무를 함께 태우는 혼소발전의 형태로 태우거나 나무를 때서 발전하는 발전소에서 신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를 구매하고 있다. 결국 최근 30년 동안 애써 숲이 저장한 탄소가 100% 고스란히 빠르게 하늘로 날아가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오래된 큰나무를 수확하는 유럽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생산한 임목 중 5%정도만이 저장된다고 한다. 이렇게 저장된 나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버려지거나 태워지게 된다. 이케아 가구의 수명은 어느 정도일까를 생각하면 된다. 실제 숲에서 자라던 나무를 벌목하면 장시간 저장되는 탄소는 거의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숲이 오랫동안 저장한 탄소를 한꺼번에 폭발적으로 날려버리고 여기에 더해 탄소를 잘 흡수하는 나무를 죽이는 최악의 결과만을 만들어낼 뿐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지속가능경영림 시스템을 연구발전시켜 임업선진국으로 알려진 스웨덴에서 바이오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2016년 기준 37%나 된다. 언뜻 친환경에너지 비율이 매우 높아 탄소를 적게 배출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최근 관련 연구자들에 따르면 산림분야에서 배출되는 탄소량이 국가의 다른 모든 분야에서 배출되는 탄소량보다 높다는 주장도 나왔다. 연간 총 임목축적량의 2.4%를 벌채한 결과이다.

그런데 이렇게 산림벌목을 많이 하는 스웨덴도 벌목 연령은 남부 70~90년, 북부 120~150년으로 우리나라처럼 30년 정도의 어린 나무를 자르지는 않는다. 스웨덴 벌목연령 기준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벌목할 숲이 아예 없다. 스웨덴을 사례로 들려면 앞으로 50년 후에나 벌목을 시작해야 한다.


▲ 1990~2005년 동안 유럽에서는 매년 임업을 통해 92Tg의 탄소를 수확하지만 87Tg이 한꺼번에 다시 하늘로 날아가고 단지 5Tg의 탄소만이 남는다. (Luyssaert 등의 연구결과)
ⓒ americanfore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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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세계 친환경 임업을 선도하는 스웨덴의 임업은 스웨덴의 다른 모든 분야에서 배출하는 탄소보다 더 많은 탄소를 배출한다.
ⓒ moreofever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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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잘 보호한 숲이 34배 많은 탄소 저장한다

다시 돌아와서 산림청이 탄소흡수를 위해 나무를 베어내야 한다는 근거를 들고자 제시한 위의 그래프(보우먼)를 자세히 보자. 연간 탄소흡수를 보여주는 바이오매스그래프의 면적을 산정하면 해당 기간 동안 탄소를 흡수하여 저장한 총량이 된다. 해당 자료의 바이오매스 그래프를 기준으로 50년 기간별로 면적을 산정해 봤다.

초기 50년 동안 급격히 증가하는 생장률은 언뜻 탄소를 많이 저장한다는 착시를 불러일으키지만 면적, 즉 떠도는 탄소를 고정하는 저장량으로 따지면 전혀 그렇지 않다. 초기 50년 동안 저장한 탄소량을 100으로 기준했을 때, 다음 50년 동안에는 무려 230을 저장하고 그 다음 50년 동안에는 190을 저장한다. 산림청 말대로라면 이미 오래전에 쇠퇴했을 150년~200년의 50년 동안에도 무려 160을 저장한다.


▲ 산림청이 제시한 연간 바이오매스 증가량 그래프에 50년 간격으로 면적을 계산해봤다. 흡수율이 급격히 높아지는 초기 50년 축적량을 1로 기준했을 때, 50~100년은 2.3이 되며 150~200년 동안에도 초기보다 많은 1.6이 축적된다.
ⓒ 산림청/홍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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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청 주장대로 하여 50년에 한 번씩 베고 심고를 반복하면 숲이 50년 동안 저장한 탄소의 5%씩을 저장할 수 있으니 200년 동안 저장할 수 있는 양은 20이 된다. 반면 200년 동안 세금을 들이지 않고 잘 보호한 숲은 무려 680만큼의 탄소를 저장할 수 있다. 잘 보호한 숲이 무려 34배 많은 탄소를 저장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거짓말로 들릴 것이다. 심지어 산림청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에게도 어딘가 어처구니없는 비과학적 추론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데 2019년 <네이처(Nature)>지에 '탄소 저장을 위해 자연 숲은 되살린다'는 제목으로 실린 루이스(Lewis) 교수 등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자연림은 산림경영의 산물인 인공림에 비해 무려 40배 이상의 탄소를 더 저장한다. 벌채과정에서 파헤쳐지는 토양에서 방출된 탄소를 감안했을 때 두 연구결과는 대동소이한 수치로 보인다. 그럼에도 한 연구결과는 빠른 벌목을 주장하는 측에서, 다른 연구결과는 벌목을 반대하는 측에서 제시하고 있다. 산림청이 빠른 벌목의 당위성을 주장하면서 내어놓은 자료도 결국 경영림의 탄소저장능력이 자연림에 비해 매우 낮음을 인정하는 자료일 뿐이다.

결국 기후위기 주범인 대기 중 탄소를 다시 흡수하여 고정할 수 있는 가장 혁신적인 방법은 나무를 베고 심는 산림경영이 아니라 자연이 스스로 숲을 풍요롭게 하도록 놓아두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나무가 자랄 수 없는 곳에 새롭게 숲을 만들어 주면 된다. 버려진 밭이나 폐공장부지 등에 말이다.


▲ 인공조림지보다 자연림이 무려 42배나 많은 탄소를 저장한다는 Lewis 등의 연구결과. 대기중에 확산된 탄소를 저장(고정)하는 최고의 방법은 자연림으로 복원하는 것이다.
ⓒ 네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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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지 벌목은 산림청과 관계없다?... 사실일까

다음으로 사유지 논란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벌목지는 산림청장이 말했듯이 사유지이기 때문에 산림청과는 관계가 없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사유지인데 나무를 심고 가꾸는데 드는 돈은 거의 모두 우리가 낸 세금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산림청이 자신들이 주도하는 사업을 위해 책정한 세금이 사유지에 쓰이는 것이다. 심지어 산림청 예산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100% 가까이가 정부 예산으로 진행된 사업이 산림청과 관계없다? 산림청장의 말처럼 관계없는 곳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 산림청장의 답변과는 달리 산림소유자가 숲가꾸기를 원하면 모든 사업비는 세금으로 지불된다. 산림청과 관계없다는 산림청장의 국회의원 질의에 대한 답변은 거짓이다.
ⓒ 산림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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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막대한 세금이 투입됨에도 불구하고 산 주인이 얻는 소득은 없다. 지난 5월 21일 한겨레21이 산주를 취재하여 쓴 기사(나무 모두 베서 민둥산 만드는 산림정책 왜?)에서 해당 산주는 2만 평이 넘는 산을 벌목하여 나무를 팔고, 그곳에 다시 어린나무 2만 2천여 그루를 심었는데 오히려 손해를 봤다고 한다. 묘목식재 비용의 90%를 우리가 낸 세금으로 지불해 주었는데도 말이다. 이후 모든 관리비용(숲가꾸기)은 또 100% 세금이다.

정부가 모든 비용을 지불해도 산주는 손해를 보는 게 산림청의 핵심 사업인 산림경영의 허울이다. 탄소저장량은 세금을 쓰지 않은 숲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으로 낮아지게 된다. 그럼 이렇게 매년 투입한 세금은 과연 누구에게 돌아갔을까? 산림청이 산주에게는 이익도 없는 산림경영 면적을 늘리려는 핵심 이유가 여기 있다.

마지막으로 공정이라는 측면에서 '상식'을 생각해 보자.

숲은 목재 외에도 우리에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를 제공한다. 그런데, 우리는 숲이 주는 가치를 지불하지 않는다. 사유재산에 의해 얻는 혜택에 대한 대가는 소유주에 지불하는 것이 상식 아닐까? 모든 국민이 골고루 받았으니 세금으로 지불해줌이 맞다. 기후위기시대 그린뉴딜을 위한 산림경영은 산을 마구잡이로 베어내어 세금을 누군가에게 옮겨주는 것이 아니라 산을 아끼고 보호한 산주에게 되돌려주는 데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또 하나, 나무는 현재진행형 화석에너지다. 절대 친환경에너지가 아니며 석탄과 같이 어쩔 수 없이 쓰는 것으로 인식해야만 한다. 탄소를 적게 배출하는 에너지가 아니라는 말이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숲관리 전략은 나무 소비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 즉 경영림을 최소화하는 방안이 첫 전략이 되어야만 한다. 미국 정부정책을 위한 연구에서도 첫 번째로 제시하는 내용이다. 산림청이 완전히 새로운 조직으로 탈바꿈해야만 하는 이유로 충분하다.


▲ 미국 정부 각 부처에서 요구하는 과학이나 기술 문제를 연구하여 올바른 대안을 제시하는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에 실린 기후변화 완화를 위한 토지이용 전략. 목재생산을 줄이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나라 정부가 제시한 산림 그린뉴딜 전략은 정확히 이 내용과 반대된다.
ⓒ pnas.org

"동학이 의병으로 이어졌다는 단선적 시각 재고해야"

"동학이 의병으로 이어졌다는 단선적 시각 재고해야"

"동학이 의병으로 이어졌다는 단선적 시각 재고해야"
박상현 입력 2021. 05. 23. 07:00 댓글 12개

김헌주 연구교수, 한국역사연구회 학술대회서 주장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문화재청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한국 근대 민족운동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언급되는 동학농민혁명과 의병운동의 인적 구성과 사상적 지향점을 비교하면 둘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는 도식적 시각을 긍정하기 어렵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23일 학계에 따르면 김헌주 연세대 근대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는 한국역사연구회가 지난 20일 개최한 '동학농민전쟁의 민족운동사적 성격 검토' 학술대회에서 "근현대 사회운동사의 계보도 설정을 동학→의병으로 연결하는 도식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자료집에서 "동학과 의병운동의 발전적 계승과 단절이라는 이분법은 극복될 필요가 있다"며 "당대 현실은 단순히 발전적 단계론에 의한 계승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분절도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구한말 학자인 황현이 쓴 '매천야록'이 동학농민혁명과 의병운동 계승 시각의 중요한 근거가 됐다고 했다. 매천야록에는 "불량한 백성 수천 수백 명이 무리를 이루어 저마다 의병이라고 일컬었고, 심지어는 동비(東匪)의 잔당이 얼굴을 바꾸고 끼어들어 쫓아다니는 자들이 반이나 되었다"는 대목이 있다.

이후 동학농민혁명과 의병운동 간 연결성에 주목하는 연구가 주를 이루면서도 반동학 세력이 의병에 참여했다는 비판적 주장이 나왔다고 김 교수는 밝혔다.

김 교수는 이번 연구에서 학계 쟁점이 된 동학과 의병의 인적 관계와 가치관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그는 각종 사료를 살핀 뒤 "매천야록, '백범일지'에 나온 김구 사례, 제천의병에 동학농민군 출신이 참여한 사례 등을 참작하면 의병에 합류한 동학농민군은 분명히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면서도 "그것이 전반적으로 어느 정도 범위였는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고찰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반동학과 동학이 밀약을 맺었다거나, 김구가 동학에서 의병으로 전환한 사례, 반동학 세력 출신과 동학농민군 출신이 모두 합류했던 제천의병 사례 등은 동학과 반동학, 의병 세력이 얽혀 있던 당대 현실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동학과 의병 간 사상적 연결성에 대해서도 '반일'과 '반청의식 부재'라는 점은 공유했지만, 중화주의적 인식을 보여주지 않은 동학과 달리 의병은 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중국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을 내세웠기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동학과 의병이 발생한 시기에 각 세력의 경계가 고정적이지 않고 가변적이었다면서 '동학→의병'이라는 사회운동의 단계적 발전론은 한계가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은 토론문에서 "동학농민혁명에서 의병운동으로의 계승 문제보다는 둘 사이의 반일 항쟁 성격을 비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실질적인 전투가 이뤄졌는가'를 기준으로 동학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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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건축시행본부2021. 05. 23. 14:11

한국도 좋은말만 써놓은 조작사를 이제그만 신봉하고 가짜역사교과서로 가르치는 일을 그만둬야 미래로 갈 수 있다
답글 작성댓글 찬성하기1댓글 비추천하기2
저스티스2021. 05. 23. 11:49

토착왜구는 동학과 의병을 분리하고 싶겠지
답글 작성댓글 찬성하기8댓글 비추천하기5
Sakartvelo2021. 05. 23. 11:41

⟨매천야록⟩은 황현이 구례에 은거하여 소문으로 듣거나 뇌피셜, 가짜뉴스가 많아 사료적 가치가 낮다. 친대원군파의 시각이다.

===
Vladimir Tikhonov
YtSemspodtnesrrroedanyr tat 0uselfcenr9:3d0orcd  · 
구한말에 어떤 단일적인, 동질적인 '애국'이 존재하지 않고 정치세력마다 '애국'을 달리, 서로 다른 방법으로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교과서들도 감안하고 반영을 해야죠. 동학도 의병도 이념적으로 '보국안민', '충효'의 가치를 공유하고 '척왜척양' 의식이 강했지만, '차이'도 만만치 않았죠. 전봉준의 공초를 보면 '대원군 옹립' 등 현실적으로는 민씨 세력을 적대하고 대원군을 '보필'하려 했던 점이 보입니다. 반대로는 초기의 의병들은 전형적인 '근왕병'에 더 가까웠습니다. '근왕'이라면 민씨 세력 주도의 국정 운영 등도 일단 받아들인다는 이야기가 되죠. 동학 후계 세력들이 나중에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그 중의 하나가 일진회에 들어갔다는 점도 교과서들이 보통 놓치죠. '좋은' 동학과 '악질' 일진회를 연결시킨다는 것은 자칫하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의 역사는 흑백 도식보다 훨씬 훨씬 복잡했습니다....
https://news.v.daum.net/v/20210523070017593...
"동학이 의병으로 이어졌다는 단선적 시각 재고해야"
NEWS.V.DAUM.NET
"동학이 의병으로 이어졌다는 단선적 시각 재고해야"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한국 근대 민족운동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언급되는 동학농민혁명과 의병운동의 인적 구성과 사상적 지향점을 비교하면 둘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는 도식적 시각을 긍정하기 어렵다는 연구 결과...
6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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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Joo Kim
동의합니다. 저도 그런 문제의식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고 동학-일진회의 관계는 이미 많이 연구된 부분인데 관제서사에선 금기처럼 통용되는데 이것도 극복될 필요가 있겠죠. 갈길이 머네요.
 · Reply · 1 d

Author
Vladimir Tikhonov
Hun-Joo Kim 네, 정말 그렇습니다. 동학-일진회 연결에 관해서는 김종준 선생님, 문유미 선생님 등 여러 선생님들이 쓰신 부분도 있는데, 관제서술은 거의 반영 안되지요...
 · Reply · 1 d
Yong-Seok Won
Vladimir Tikhonov 처음에 저도 그 부분 뉴라이트의 주장이라 생각하고 일축했었는데, 김종준 교수 등은 뉴라이트와는 거리가 멀더군요.
동학 전부가 일진회에들어갔다는건 아니라고해도(동학의 교주 손병희부터가 일진회와 손절했으니까요) 최소 이용구의 분파쪽이 들어간건 사실이니




2021/05/24

기독교경제윤리 연재기획(4) 희년의 토지정의, 한국교회와 사회를 살린다. | 크리스천 라이프 - 에듀 라이프

기독교경제윤리 연재기획(4) 희년의 토지정의, 한국교회와 사회를 살린다. | 크리스천 라이프 - 에듀 라이프

기독교경제윤리 연재기획(4) 희년의 토지정의, 한국교회와 사회를 살린다.
– POSTED ON 02/21
POSTED IN: 신앙칼럼, 신학논단, 전체기사, 크리스천라이프
기독교경제윤리 연재기획4 토지/주택(부동산)에 관한 기독교경제윤리   희년의 토지정의, 한국교회와 사회를 살린다.   […]
기독교경제윤리 연재기획4
토지/주택(부동산)에 관한 기독교경제윤리
 

희년의 토지정의, 한국교회와 사회를 살린다.
 

이번 글에서는 토지에 관한 여러 성경 말씀과 희년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원칙, 원리를 오늘날의 현실에 맞게 창조적이고도 신중히 적용하려는 개혁주의적인 입장을 따라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에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토지에 관한 여러 성경 말씀과 희년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원리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토지권과 노동권을 보장하라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 노동과 자본에 관한 하나님의 뜻과 원리는 모든 사람이 자기 땅에서 땀 흘려 일하여 만든 자기 노동의 열매를 누리게 하라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토지권과 노동권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구약이 말하는 정의의 기초는 땅을 경작하는 사람이 땅을 가져야 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상태라고 에밀 브루너(Emil Brunner)는 <정의와 사회질서>(대한기독교서회)에서 말한다.

이러한 경자유전의 상태를 현대사회에서는 ‘토지 가치 공유’라는 방법을 통해 적용할 수 있다. 또한 희년 말씀에 담긴 노동과 자본에 관한 하나님의 뜻과 원리는 노동의 결과를 최대한 보장해 주는 것, 즉 노동의 결과에 대한 감세 및 면세나 노동 장려, 노동권 보장 등으로 적용할 수 있다.

토지 가치 공유를 통한 공평한 토지권 보장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토지권과 노동권을 보장한다고 구약 이스라엘처럼 모든 사람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방법은 사실상 실현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 우리는 구약의 말씀을 현대 사회에 문자 그대로 무리하게 적용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현대사회는 과거 농경 시대처럼 토지의 비옥도가 중요한 것이 아닌 위치가 더 중요하고 농경을 위해 모두가 땅을 많이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사회가 만들어 낸 토지 가치(Rent, 지대)를 거두어서 모든 국민을 위해 쓰면 실질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토지권을 보장하는 효과가 나타난다. 지금 가지고 있는 땅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토지 가치에 따라 토지가치세를 사회가 거두어 사회 공동체를 위해 쓰면 되는 것이다.

이런 간단하고도 창조적인 방법이 바로 희년 말씀을 현대적으로 적용한 미국의 사상가 헨리 조지(Henry George)가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비봉출판사)에서 제시한 아이디어다. 1879년에 나온 진보와 빈곤은 당시 영어로 쓰인 논픽션 분야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고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지난 20세기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양극단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면서 희년의 지공주의(地公主義) 사상이 역사 속으로 묻혀 버리고 말았다.

토지가치세는 공평하고 효율적이다

이렇게 토지 가치를 사회가 거두어서 모든 국민을 위해 쓰는 것은 신학적으로는 희년 말씀의 현대적 적용이 될 뿐만 아니라 경제학적으로도 공평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매우 좋은 정책이다. 거의 모든 경제학자가 인정하듯이 사회가 만들어 낸 토지 가치를 사회가 거두어서 모든 국민을 위해 쓰는 토지가치세는 가장 공평하고 효율적인 세금이다. 토지가치세는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지지한 가장 좋은 세금이다.

에밀 브루너는 <정의와 사회질서>(대한기독교서회)에서 “토지 소유자가 아무런 노력도 없이 사회 발전과 사회 공동체 덕분에 얻은 토지 가치는 사회가 세금으로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의 대부 격에 해당하는 경제학자이자 세금 혐오론자인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조차도 토지가치세가 가장 나은 세금이라며 그 우수성을 인정한 바 있다.

토지 가치는 대부분의 경우 토지를 소유한 개인이 노력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인구 증가와 사회 발전, 정부의 개발 정책, 사회 인프라 설치 등으로 인해 발생하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 소득이 아닌 사회 공동체가 만들어 낸 사회 공동체의 것이다. 토지/주택(부동산)불로소득은 토지/주택(부동산) 투기를 유발하여 심각한 부동산, 경제문제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사회가 환수하여 사회를 위해 쓰는 것은 경제 정의에도 정확히 부합한다.

희년 말씀에 순종하면 한국교회와 우리나라가 복을 받는다

사회가 만들어 낸 토지 가치는 거두어서 모든 국민을 위해 쓰고 개인이 땀 흘려 노동하여 만든 노동의 열매는 최대한 보장해 주면 우리나라의 심각한 부동산 문제는 줄어든다. 토지 가치를 사회가 거두어서 모든 국민을 위해 쓰면 기업의 투자와 일자리는 늘어나는 동시에 가정의 소득과 소비가 많아져 경제도 자연스럽게 살아난다. 하나님의 희년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나라와 모든 국민이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희년 말씀은 지금도 변함없는 약속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만들어 낸 토지 가치는 사회가 거두어서 모든 국민이 공유하고 노동의 열매는 노동한 사람에게 최대한 보장해 주는 희년의 지공주의 사상은 남한의 자본주의(토지와 자본 모두 사유)와 북한의 공산주의(토지와 자본 모두 공유)를 성경 말씀으로 통일할 수 있는 평화의 대안이기도 하다.

토지/주택(부동산) 불로소득을 토지가치세로 사회가 환수하여 모든 국민을 위해 쓰면 사용할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토지/주택(부동산)을 소유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부동산 투기와 부동산 소유의 양극화, 이로 인한 빈부 격차가 줄어든다.

토지/주택(부동산) 불로소득을 환수하여 사회를 위해 쓰고 땀 흘려 일하여 만든 노동의 임금과 자본의 이자는 최대한 보장해 주면 비율적으로 임금과 이자는 상승한다. 이렇게 하면 빈부 격차가 완화되고 소비와 생산이 늘어나 경제는 살아나고 일자리는 많이 생기면서 실업은 줄어든다.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의 모델

토지 가치를 사회가 환수하면 땅값이 낮아져 창업 및 사업에 드는 비용이 줄어들고 사업 수익도 많아진다. 토지나 건물을 임대하여 사업을 하는 기업들과 상가 세입자들은 쫓겨날 걱정 없이 안심하고 사업을 경영할 수 있다. 자기 땅에서 자기 노동의 열매를 누리는 자영 노동의 원리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경제가 살아나 고용을 하려는 사람이 많아지고 자영 노동이 늘어나면 노동자가 부족해져서 노동자의 임금은 상승한다. 일하려는 사람은 넘쳐나는데 일자리는 별로 없는 지금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실업과 비정규직이 줄어들고 소득 격차에 따른 빈부 격차와 노동 착취, 노사 갈등도 줄어든다. 즉 토지 정의는 노동 정의와 연결되어 있다.

또한 내 집 마련이 쉬워져 결혼과 출산이 많아진다. 집을 사는 데 드는 막대한 비용 부담이 사라져 가계의 소비 여력이 생기면 기업이 투자와 생산을 늘리고 일자리가 늘어나 경제는 더욱 좋아진다.

게다가 토지 불로소득으로 인해 발생하는 뇌물과 향응, 퇴폐 향락 산업, 공무원의 부정부패, 강제 철거, 부동산 관련 각종 불법 및 탈법 같은 사회악도 줄어든다. 아울러 불필요한 개발과 도시가 무질서하게 확대되는 스프롤 현상, 자원 낭비, 환경 파괴도 개선된다.

정신적인 면에서는 불로소득을 얻으려는 한탕주의와 기회주의가 사라지고 근로 의욕과 도덕성, 국민 의식, 준법정신 등 국민의 정신적인 수준이 높아진다. 먹고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무한 경쟁과 탐욕도 줄어들다.

또 자신의 은사와 소명에 맞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살 수 있게 되면 치열한 입시 경쟁과 사교육 비용도 줄어들어 가정 살림살이는 좋아지고 아이들도 행복해진다. 교육 문제 해결의 실마리도 풀리게 되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집안의 경제문제로 인한 부부 싸움과 가정 폭력, 이혼, 낙태, 가정 파괴와 같은 가정 문제도 줄어든다. 하나님의 희년 말씀에 순종하면 이 세상이 점점 더 하나님나라의 모습에 가깝게 된다.

토지 가치 나눔을 통한 희년 말씀 실천

우리 그리스도인은 토지/주택(부동산) 불로소득을 사회가 토지가치세로 환수하여 모든 사람이 누리는 정책들을 정부가 법과 제도로 만들 수 있도록 기도하고 행동해야 한다. 또한 희년 말씀에 가까운 법과 제도가 국가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이라도 개인과 공동체, 교회가 희년 말씀의 원리와 정신이 담긴 실천 사항을 직접 실천할 수 있다.

교회는 먼저 희년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면서 희년을 자발적으로 실천한다. 신도는 희년 말씀과 희년 실천 사례를 다른 사람에게도 전파한다. 또 교회와 신도는 희년 말씀이 이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면서 희년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매 순간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구하고 따른다. 두려움과 탐욕의 죄를 인간의 자유의지로만 이겨 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교회와 신도들은 교회 건물이 소유가 아닌 사용하는 것이라는 인식 전환을 하고 남는 교회 건물과 공간에 대해서는 선교와 지역사회를 위한 섬김의 공간으로 사용한다. 공간 나눔과 공간 기부를 하는 것이다. 좋은 예로 서부제일교회는 지역 주민에게 교회 주차장과 어린이 도서관, 북 카페를 개방하여 함께 사용한다. 교회 교육관을 필요한 단체에게 무료로 대관해주는 높은뜻숭의교회 청어람도 좋은 사례다.

한편 교회는 무작정 교회 건물을 확장하지 않고 꼭 필요한 공간만을 건축하고 거주할 곳이 없는 가난한 이웃과 대학생이 살 수 있는 전월세 주택과 학사관을 마련하도록 노력한다. 또한 다주택을 보유한 신도들이 있다면 이웃 사랑 차원에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전월세 값을 무작정 올려 받지 않고 동결해 준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과 새벽이슬, 희년함께가 함께 했던 전월세 동결 운동 캠페인을 예로 들 수 있다. 교회는 전월세를 동결해 주겠다는 신도를 무주택 이웃과 연결시켜 줄 수도 있다.

희년 운동 동참을 통한 희년 말씀 실천

교회와 신도들은 투기 목적이 아닌 실제로 필요한 부동산만을 구입하도록 노력한다. 교회와 신도들은 필요 없이 가지고 있는 땅의 임대 가치(임대료)를 지역사회와 가난한 이웃에게 기쁜 마음으로 나눔으로써 희년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

교회나 개인이 교회 건물과 집을 이전할 때 생기는 시세 차익을 지역사회에 환원하거나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눌 수도 있다. 교회를 이전하면서 생긴 60억 원의 시세 차익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당회에서 결정한 용인 향상교회가 좋은 사례다.

신도들은 토지가치세가 도입되기 전에는 지금 현실에서 토지/주택(부동산) 불로소득을 어느 정도 환수할 수 있는 부동산 관련 세금(개발부담금, 종합부동산세, 재산세, 양도소득세 등)에 찬성하면서 기꺼이 납부한다.

또 토지가치세를 정책으로 내거는 정당과 정치인에게 투표하여 정치적인 실천을 할 수도 있다. 아울러 대만처럼 모든 사람이 땅에 대한 권리를 골고루 누리는 토지 공개념의 정신을 헌법에 구체적으로 기록하도록 노력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희년 운동을 하는 여러 단체(희년함께, 희년사회, 토지정의시민연대, 토지+자유 연구소 등)에 참여하면서 희년을 실천하는 데 앞장설 수도 있다. 희년함께에서는 매년 추석 전 주일을 희년실천주일로 정해 교회가 희년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며 실천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매년 희년실천주일에 희년실천주일 참여 교회들이 함께 모여 고난 받는 사람들과 함께 드리는 희년실천주일 연합 예배에 동참할 수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방법을 통해 희년 말씀을 우리가 사는 사회와 교회, 공동체, 가정에서 적용하고 실천할 수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희년 실천은 사회 개혁으로 이어져 우리 사회가 하나님나라에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살 길이다. 이어지는 다음 글에서는 토지/주택(부동산)문제만큼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인 노동문제에 관한 성경 말씀과 기독교경제윤리를 살펴볼 것이다.

고영근 / 희년함께 사무처장

칼럼 - [희년책읽기] 「토지와 경제정의」(대천덕) 서평 - 알게 되면 모른 체할 수 없는 그 무언가

칼럼 - [희년책읽기] 「토지와 경제정의」(대천덕) 서평 - 알게 되면 모른 체할 수 없는 그 무언가

[희년책읽기] 「토지와 경제정의」(대천덕) 서평 - 알게 되면 모른 체할 수 없는 그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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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게 되면 모른 체할 수 없는 그 무언가
[희년책읽기] 「토지와 경제정의」(대천덕) 서평






이철빈 / 희년함께 회원


「토지과 경제정의」, 이 책은 예수원의 설립자이자 토지정의 운동의 선각자이신 故 대천덕 신부님의 유고집이라 불리는 책이다. 이 책은 토지와 경제에 대한 명백한 성경의 가르침이 있으며, 그 정신이 어떻게 이어져왔으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실천해나갈 것인지 그 방향을 제시하는 책이다.


이 책은 먼저, 성경에 제시된 안식년, 희년법 등을 통해서 본 토지법, 그리고 그 법 위에 기반해서 어떻게 사회가 운영되어야 하는지 등을 제시한다. 토지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므로,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고 인간은 그저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선물 받은 토지를 기반으로 노동을 해서 생산활동을 해야 하며, 그것을 향유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본뜻임을 천명한다. 그러나 토지를 인간 임의대로 사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기본권까지 침해하는 중대한 범죄인 것이다.



토지와경제정의.jpg이 책은 ‘하나님 나라와 토지법’이라는 안경을 끼고서 구약성경의 초반부에서 시작해서 신약의 초대교회 공동체에 이르기까지를 개괄한다. 사실, 이전까지는 성경을 영적인 구원의 역사로 해석하는 관점만 접하다보니, 이 책의 관점은 무척 생소하게 다가왔다. 특히, 구약의 왕국 분열~왕국 멸망 그리고 예언서의 저술 등의 배경에 토지 문제가 깔려있다는 해석은 무척이나 새롭게 다가왔다. 대표적인 예가 나봇의 포도원 사건인데, 이전에는 그저 하나의 해프닝이나 악한 왕의 악행이라고만 치부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의 토지법을 지키기 위해 토지 매매를 거부한 나봇과 이방의 토지법을 들여와 사회경제적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한 아합과 이세벨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 바알의 대결 구도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바알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즉, 페니키아인들의 신인 바알을 숭배하고, 온갖 음행과 부도덕을 행할 뿐만 아니라, 토지를 사유하고 빈부격차를 조장하는 사회문화를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의 율법을 받았고, 그 율법을 지키며 사는 공동체 사회였지만, 오므리와 바알 그리고 이세벨에 의해 하나님의 토지법이 폐기되고, 이방의 토지법과 문화가 이식된다. 그 후로는, 바알주의가 스며드는 가운데 여호와주의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과의 영적, 실제적 대결이 계속 이어진다.


故 대천덕 신부님의 문제의식은, 이 끊임없는 긴장과 대결을 제대로 인식하고 대처하는 사람들이 적다는 점이다. 책의 서두에서 이런 구절을 써놓으신 것이 정말 인상 깊었다.


“한국에는 경제 문제와 영적인 문제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른바 ‘영적’인 문제만 다루는 사람들과 ‘실제적’인 문제만 다루는 사람들은 진실(또는 현실)을 다루지 못하고 있습니다.”(6p,한국어판 출간에 부쳐 中)



즉, 이 문제는 결코 영적이기만 하거나, 실제적이기만 한 문제가 아니라, 영적이면서도 실제적인 문제임을 인식해야함을 상기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이 문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과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들의 대결이고, 동시에 부와 가난의 문제에 관해 정반대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대결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교회의 역할이 막중함을 지적하고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가치를 지속적으로 추구해야하며, 실제적인 사회 변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하는 것이다. 숱한 방해가 있겠지만, 이 모든 일을 성령과 함께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한다. 교회의 타락을 회개하며, 교회갱신 운동, 새로운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회개하자고, 기도하자고 외치는 소리는 많지만 공허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회개해야할 수많은 문제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토지문제, 부와 빈곤의 문제와 관련해서 교회가 책임을 통감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 책에서 지적하듯, 교회가 로마 제국에 예속되고 세속 체제로 편입된 이래로, 교회는 언제나 지주이자 권력층이었고, 토지와 가난의 문제에 대해서는 눈감아왔다. 토지는 인간의 생활 터전이자 근원이기에 부와 가난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에도 교회는 외면했고, 성경을 입맛대로 번역하면서 기독교를 그저 영적이고 내세적인 종교로만 국한시켜버렸다. 성속이원론을 신봉하고,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개인의 영혼 구원 의미로만 격하시켜버리면서 하나님을 모독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희년, 토지문제, 예수원 정신 등에 대해 우리가 그동안 너무 몰랐거나 편협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 정말 안타깝다. 희년은 그저 하나의 이상적인 율법으로만 이해하고, 토지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예수원은 그저 자연 속에서 기도하기 좋은 기도원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참 씁쓸하다. 교회가 초대교회의 삶,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잊고 산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고, 누군가 내게 이런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말해준 사람도 없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종 율법을 주셨고, 선지자들을 통해, 마침내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알려주셨다. 그 중, 희년은 하나님 나라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개념이며, 이 세상이 어떻게 변화해야할지 알려주는 방향타와 같다. 희년의 개념에 비추어보며 우리 사회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등을 늘 점검해야한다.


희년학교에서 강의를 들었을 때, 故 대천덕 신부님의 마지막 유지는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다! 지붕에 올라가서 외쳐시오!”였다는 것이 기억난다. 평생을 하나님과 함께하며, 하나님 나라를 공부한 영적 지도자의 결론은 ‘토지’였다. 뭣이 중헌지도 모르고, 부차적인 것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우리 시대의 예언자는 마지막까지 토지와 경제정의를 부르짖었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로는 절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을 흔히 하곤 한다. 희년은 복음의 정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알게 되면 모른 체할 수 없는 그런 무언가. 세상을 바라는 관점,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는 방식, 내가 살아내야 할 삶 등, 하나님은 내게 희년을 통해, 이 책을 통해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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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희년책읽기] 「토지와 경제정의」(대천덕) 서평 - 알게 되면 모른 체할 수 없는 그 무언가

칼럼 - [희년책읽기] 「토지와 경제정의」(대천덕) 서평 - 알게 되면 모른 체할 수 없는 그 무언가:





알게 되면 모른 체할 수 없는 그 무언가
[희년책읽기] 「토지와 경제정의」(대천덕) 서평

이철빈 / 희년함께 회원


「토지과 경제정의」, 이 책은 예수원의 설립자이자 토지정의 운동의 선각자이신 故 대천덕 신부님의 유고집이라 불리는 책이다.
이 책은 토지와 경제에 대한 명백한 성경의 가르침이 있으며, 그 정신이 어떻게 이어져왔으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실천해나갈 것인지 그 방향을 제시하는 책이다.


이 책은 먼저, 성경에 제시된 안식년, 희년법 등을 통해서 본 토지법, 그리고 그 법 위에 기반해서 어떻게 사회가 운영되어야 하는지 등을 제시한다. 토지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므로,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고 인간은 그저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선물 받은 토지를 기반으로 노동을 해서 생산활동을 해야 하며, 그것을 향유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본뜻임을 천명한다. 그러나 토지를 인간 임의대로 사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기본권까지 침해하는 중대한 범죄인 것이다.

이 책은 ‘하나님 나라와 토지법’이라는 안경을 끼고서 구약성경의 초반부에서 시작해서 신약의 초대교회 공동체에 이르기까지를 개괄한다. 사실, 이전까지는 성경을 영적인 구원의 역사로 해석하는 관점만 접하다보니, 이 책의 관점은 무척 생소하게 다가왔다. 특히, 구약의 왕국 분열~왕국 멸망 그리고 예언서의 저술 등의 배경에 토지 문제가 깔려있다는 해석은 무척이나 새롭게 다가왔다. 대표적인 예가 나봇의 포도원 사건인데, 이전에는 그저 하나의 해프닝이나 악한 왕의 악행이라고만 치부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의 토지법을 지키기 위해 토지 매매를 거부한 나봇과 이방의 토지법을 들여와 사회경제적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한 아합과 이세벨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 바알의 대결 구도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바알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즉, 페니키아인들의 신인 바알을 숭배하고, 온갖 음행과 부도덕을 행할 뿐만 아니라, 토지를 사유하고 빈부격차를 조장하는 사회문화를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의 율법을 받았고, 그 율법을 지키며 사는 공동체 사회였지만, 오므리와 바알 그리고 이세벨에 의해 하나님의 토지법이 폐기되고, 이방의 토지법과 문화가 이식된다. 그 후로는, 바알주의가 스며드는 가운데 여호와주의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과의 영적, 실제적 대결이 계속 이어진다.

故 대천덕 신부님의 문제의식은, 이 끊임없는 긴장과 대결을 제대로 인식하고 대처하는 사람들이 적다는 점이다. 책의 서두에서 이런 구절을 써놓으신 것이 정말 인상 깊었다.

“한국에는 경제 문제와 영적인 문제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른바 ‘영적’인 문제만 다루는 사람들과 ‘실제적’인 문제만 다루는 사람들은 진실(또는 현실)을 다루지 못하고 있습니다.”(6p,한국어판 출간에 부쳐 中)

즉, 이 문제는 결코 영적이기만 하거나, 실제적이기만 한 문제가 아니라, 영적이면서도 실제적인 문제임을 인식해야함을 상기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이 문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과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들의 대결이고, 동시에 부와 가난의 문제에 관해 정반대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대결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교회의 역할이 막중함을 지적하고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가치를 지속적으로 추구해야하며, 실제적인 사회 변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하는 것이다. 숱한 방해가 있겠지만, 이 모든 일을 성령과 함께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한다. 교회의 타락을 회개하며, 교회갱신 운동, 새로운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회개하자고, 기도하자고 외치는 소리는 많지만 공허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회개해야할 수많은 문제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토지문제, 부와 빈곤의 문제와 관련해서 교회가 책임을 통감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 책에서 지적하듯, 교회가 로마 제국에 예속되고 세속 체제로 편입된 이래로, 교회는 언제나 지주이자 권력층이었고, 토지와 가난의 문제에 대해서는 눈감아왔다. 토지는 인간의 생활 터전이자 근원이기에 부와 가난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에도 교회는 외면했고, 성경을 입맛대로 번역하면서 기독교를 그저 영적이고 내세적인 종교로만 국한시켜버렸다. 성속이원론을 신봉하고,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개인의 영혼 구원 의미로만 격하시켜버리면서 하나님을 모독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희년, 토지문제, 예수원 정신 등에 대해 우리가 그동안 너무 몰랐거나 편협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 정말 안타깝다. 희년은 그저 하나의 이상적인 율법으로만 이해하고, 토지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예수원은 그저 자연 속에서 기도하기 좋은 기도원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참 씁쓸하다. 교회가 초대교회의 삶,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잊고 산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고, 누군가 내게 이런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말해준 사람도 없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종 율법을 주셨고, 선지자들을 통해, 마침내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알려주셨다. 그 중, 희년은 하나님 나라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개념이며, 이 세상이 어떻게 변화해야할지 알려주는 방향타와 같다. 희년의 개념에 비추어보며 우리 사회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등을 늘 점검해야한다.


희년학교에서 강의를 들었을 때, 故 대천덕 신부님의 마지막 유지는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다! 지붕에 올라가서 외쳐시오!”였다는 것이 기억난다. 평생을 하나님과 함께하며, 하나님 나라를 공부한 영적 지도자의 결론은 ‘토지’였다. 뭣이 중헌지도 모르고, 부차적인 것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우리 시대의 예언자는 마지막까지 토지와 경제정의를 부르짖었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로는 절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을 흔히 하곤 한다. 희년은 복음의 정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알게 되면 모른 체할 수 없는 그런 무언가. 세상을 바라는 관점,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는 방식, 내가 살아내야 할 삶 등, 하나님은 내게 희년을 통해, 이 책을 통해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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