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7

Philo Kalia - *현영학의 탈춤 미학 야곱은 밤새 하느님과 악을 쓰면서 씨름하다가 축복을 받았지만 이제 저도... | Facebook

Philo Kalia - *현영학의 탈춤 미학 야곱은 밤새 하느님과 악을 쓰면서 씨름하다가 축복을 받았지만 이제 저도... | Facebook


야곱은 밤새 하느님과 악을 쓰면서 씨름하다가 축복을 받았지만 이제 저도 하느님하고 어떤 씨름을 해볼까 하는데, 이제 늙어 기운이 없어서 할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서 우리 조상들이 가르친 민중들의 춤! 우리 학생들이 즐겨 추는 탈춤, 이제 그거나 배워야지 그런 생각입니다. 
- 1985년 11월, 이화여대 교수 정년 퇴임 강연에서 하신 말씀이다. 하느님과 탈춤 추기를 소망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

1921년 생이신 현영학 교수


학부 2-3학년(1977-78년) 무렵, 목요강좌에 강사로 오셔서 봉산탈춤의 신학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하셨다. 매우 특별한 강연이어서 지금까지 인상에 남는다. 그동안 예술신학, 기독교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면서 두어 번 언급한 바 있지만, 짧은 글이었고 성서에서 언급된 춤의 사례에서 출발하여 서양적 관점에서 성찰했을뿐, 한국의 민족-민중 미학의 연구를 공부하지 못한 상태였다. 성서, 신학 사전에 '춤'(dance, Tanz) 항목을 찾을 수 없다. 성서와 신학 연구자들이 얼마나 춤에 대해 인색한가. 이제 채희완, 조동일, 김지하 등의 연구를 읽고 현영학의 탈춤 신학을 한국의 민족-민중미학사에서 자리매김하고 싶은 생각이다. 최근 도올 김용옥 교수께서 안병무의 신학을 조선사상사에 좌정시키지 않았던가.

현영학 교수의 경험을 나 자신도 공감한다.

이분이 음악을 좋아해서 음악회를 다닐 정도였지만, 우리나라 음악은 지금도 잘 모른다고 말씀한다. 이유인즉 자랄 때 그렇게 자랐으니까, 라고 말한다. 이중 차단을 당한 셈이다. 하나는 일본 사람들이 그런 것을 배우면 민족의식이 계속된다고 못 배우게 했고, 둘은 기독교의 영향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민요라든지 타령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배우면 나쁜 걸로 알아서 그건 저속한 것, 술하고 여자하고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못 배우게 했습니다. 협소한 교리와 청교도적 도덕관이 전통 종교 및 문화와 예술에 접근할 수 있는 길 자체를 차단하는 경우가 많다. 

장신대 박사학위 논문 심사를 갔을 때, 학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신 모교수도 고등학교 때까지 청교도를 그리 중하게 생각하면서 자랐는데, 대학 1년 한 교수가 청교도 때문에 영문학이 발전, 성장하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현영학은 동시대 민중 신학자인 안병무와 서남동에 비해 연구가 적다. 그의 저술 활동이 이 책 한 권 분량이니 그럴 것이라고도 생각되지만, 서남동의 저술도 많지 않다, 다작은 아니다. 그리고 사상의 고유성과 우수성은 양(量)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알아주는 후학들과 영향력이 관건이다. 이 책 안에서도 탈춤과 직간접 연결된 글은 서너 개뿐이지만, 제목은 유일무이한 의미 주름으로 다가오는 『예수의 탈춤』이고 전공 분야는 그리스도교 사회윤리다. 접음과 펼침의 운동을 할 때다.

현영학이 한국인의 몸을 깨우친 경험.

“하루는 우리 대강당에서 학생들이 한국 무용을 하는 걸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제 어깨하고 엉덩이 근육이 움직거리는 거였지요. 그때 제가 느낀 게 ‘아! 내 머리는 서양 머리이고 내 몸은 한국 몸이구나! 였습니다.” 서양과 한국, 한국과 서양의 구분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서양 것들이 더 친숙하고 한국 것이라는 것들이 더 낯설다는 것이다. 事情이 그렇다는데 어쩌랴, 무가내(無可奈)다. 그래도 살과 피와 땅이 그리운 사람들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탈근대적 상황과 지구적 실정(實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한국조직신학회에서 1년 세 차례 학술발표회를 하는데 20여 편의 논문 중, 한국이나 동양 관련 논문은 두세 편에 지나지 않는다. 사정은 여전히 짜다.

현영학은 당대 신학자들의 어휘에 등장하지 않는 말을 한다. 민중의 恨만이 아니라 민중적인 삶의 ’힘과 아름다움‘, “삶과 예술”, 몸, 구체적으로 오장육부의 신학, 몸과 노래와 춤으로 경축할 수 있는 종교 그리고 “믿음과 웃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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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임
현영학 교수야말로 제가 이대기독교학과에서 만난 교수 중에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
좋은 글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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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김판임 아 그러시군요. 가까이에서 만난 현영학 선생님에 관한 얘기를 듣고 싶어요.
정인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몸이 먼저 말을 하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언젠가 명동성당 바로 밑 어느 교회의 국악 예배를 참여한 적이 있는데요, 몸이 씰룩씰룩거렸습니다.
Philo Kalia
정인현 몸살이, 몸신앙, 修, 守身이 참 중요합니다.
Nambutas Kim
”내 머리는 서양 머리고 내 몸은 한국 몸이구나!“
심플하면서 탁월한 말씀이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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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를 관상(觀想)하는 법 — Study Buddhism

부처를 관상(觀想)하는 법 — Study Buddhism



불교를 공부하는 방법 : 듣고, 사유하고, 명상하기
부품 6 / 6

부처를 관상(觀想)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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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부처를 집중의 대상으로
실제 수행
관상의 두 가지 측면
너무 애쓰지 말라
관상하기
알아차림을 확대하는 도구로서 관상
요약


많은 명상 수행에 관상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관상법”을 영어로 “visualization”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관상법은 우리의 눈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영어로 번역한 “시각화”는 조금 잘못된 번역일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관상하는 것이 아닌 소리, 향, 맛, 육체적 감각도 관상해야 합니다. 의식으로 다양한 공양물을 관상하여 공양을 올리고, 이와 같은 행위로 통해 행복함을 느끼고 충만함을 느낀다고 관상합니다. 관상을 할 때 2차원적으로 하지 않고 3차원적으로 합니다. 평면적인 그림이나 만화처럼 대상을 2차원적으로 관상하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빛처럼 3차원적으로 관상해야 합니다.

부처를 집중의 대상으로

실제 수행

관상의 두 가지 측면

너무 애쓰지 말라

관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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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림을 확대하는 도구로서 관상

요약
명상 관상

관상학 - 위키백과, physiognomy

관상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관상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관상학(觀相學, physiognomy)은 인간의 외양(특히 얼굴)을 가지고 그 사람의 성격 등을 파악하는 유사과학의 일종으로서, 과거에는 원형과학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었다.

관상(觀想)의 원어 테오리아에는 관조(觀照), 관찰, 사자(使者) 파견, 제례(祭禮)와 구경이라는 뜻이 있다.

 무엇인가를 '보는 것'으로서, 신이나 신상(神像)을 보는 종교적인 것에서 플라톤의 이데아의 미의 관조로 바뀌어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사물의 원리·원인을 본다――즉 안다는 것, 이론적 지식이 된다. 이것은 제작이나 행위와는 달라 그 자체가 목적이므로 상위(上位)에 속한다. 관상생활(학자의 연구생활 같은 것)은 신의 자기사유(自己思惟)와 흡사하여 행복이며 최고선이라고 한다.

2009년 New Scientist에 의하면 관상과 사람의 성격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점을 밝히며.[1] 관상학은 유사과학이라는 점을 밝혔다.[2]

역사[편집]

이는 본래 중국에서 발생하였다.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진(晋)나라의 고포자경(姑布子卿)이 공자(孔子)의 상을 보고 장차 대성인(大聖人)이 될 것을 예언하였으며,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위(魏)나라 사람 당거(唐擧)도 상술(相術)로 이름이 높았으나 상법(相法)을 후세에 남긴 것은 없다.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남인도에서 달마(達磨)가 중국으로 들어와 선불교를 일으키는 동시에 '달마상법'을 후세에 전하였다. 그 후 송(宋)나라 초기에 마의도사(麻衣道士)가 '마의상법'을 남겼는데, 관상학의 체계가 이때에 비로소 확립되었다.[출처 필요] '달마상법'과 '마의상법'은 관상학의 쌍벽을 이룬다. 관상학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신라시대이며, 고려시대에는 혜징(惠澄)이 상술로 유명하였다.[출처 필요] 조선시대에도 끊임없이 유행하여 오늘에 이른다.

같이 보기[편집]

참조[편집]

  1.  “How your looks betray your personality”. 《New Scientist》 (2695). 2009년 2월 11일.
  2.  ^ a b c d e f Roy Porter (2003). "Marginalized practices". The Cambridge History of Science: Eighteenth-century science. The Cambridge History of Science 4 (illustrated ed.).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495–497. ISBN 978-0-521-57243-9. "Although we may now bracket physiognomy with Mesmerism as discredited or even laughable belief, many eighteenth-century writers referred to it in all seriousness as a useful science with a long history(...) Although many modern historians belittle physiognomy as a pseudoscience, at the end of the eighteenth century it was not merely a popular fad but also the subject of intense academic debate about the promises it held for future prog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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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ysiognomy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Lithographic drawing illustrative of the relation between the human physiognomy and that of the brute creation, by Charles Le Brun (1619–1690).
Illustration in a 19th-century book about physiognomy

Physiognomy (from the Greek φύσις'physis', meaning "nature", and 'gnomon', meaning "judge" or "interpreter") or Face Reading is the practice of assessing a person's character or personality from their outer appearance—especially the face. The term can also refer to the general appearance of a person, object, or terrain without reference to its implied characteristics—as in the physiognomy of an individual plant (see plant life-form) or of a plant community (see vegetation).

Physiognomy as a practice meets the contemporary definition of pseudoscience[1][2][3] and it is so regarded among academic circles because of its unsupported claims; popular belief in the practice of physiognomy is nonetheless still widespread and modern advances in artificial intelligence have sparked renewed interest in the field of study. The practice was well-accepted by ancient Greek philosophers, but fell into disrepute in the Middle Ages while practised by vagabonds and mountebanks. It revived and was popularised by Johann Kaspar Lavater, before falling from favour in the late 19th century.[4] Physiognomy in the 19th century is particularly noted as a basis for scientific racism.[5] Physiognomy as it is understood today is a subject of renewed scientific interest, especially as it relates to machine learning and facial recognition technology.[6][7][8] The main interest for scientists today are the risks, including privacy concerns, of physiognomy in the context of facial recognition algorithms.

Physiognomy is sometimes referred to as 'anthroposcopy', a term originating in the 19th century.[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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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觀想, Contemplation)이란 무엇인가?

 [영성] 현대 영성: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 

- 관상(觀想, Contemplation)이란 무엇인가?
1741주호식 [jpatrick]스크랩202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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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기도, 묵상기도, 관상기도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관상기도는 가르멜회 수녀님들 같은 관상생활을 하시는 분들의 기도가 아닌가요?

관상기도는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어떻게 기도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기도를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누어 설명을 한다. 
첫째, 소리기도는 묵주기도와 같이 입으로 소리를 내어 바치는 다양한 기도를 말한다. 
둘째, 묵상기도는 인간의 사고력, 상상력, 감정과 의욕 등을 사용하여 복음 말씀이나 영적 서적 등을 자기 자신에게 비추어 성찰하고 새로운 결심에 이르는 기도이다. 
셋째, 관상기도는 하느님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기도이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하는 능동적인 기도가 아니라, 성령께서 활동하실 수 있도록 수동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는 기도이다.

그런데 관상기도와 관상은 다르다. 모든 기도의 형태는 관상의 은총을 받기 위한 도구이다. 관상은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된 상태를 말하며 관상기도는 특별히 이것을 지향하는 기도의 형태이다. 이러한 차이에 대한 이해가 없을 때 관상기도는 관상 생활을 하는 이들의 고차원적인 기도이고 묵주기도는 일반 평신도들이 하는 기도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필자도 수도원에 입회한 지 2년째 되던 청원자 시절 이런 오류를 범한 적이 있다. 수도원에는 매일 오전, 오후 30분씩 묵상이나 관상기도를 하는 시간이 있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나이 많은 지원자가 글쎄 묵상시간에 묵상을 하지 않고 묵주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수도자가 되었으니 묵상 시간에는 묵상기도나 관상기도를 바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라고 권고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 지원자는 “그냥 나는 묵주기도가 좋아요”라고 단순하게 대답을 할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뭘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한 말이었던 것 같다. 사실 묵주기도는 관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매우 훌륭한 기도이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생애의 신비를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관상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기도의 형태이든 상관없이, 심지어 기도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관상의 선물을 하느님께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이제 관상이란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사실 ‘관상’(觀想, Contemplation)이란 단어는 한국인들에게 ‘사람의 얼굴을 통해 운명을 예견’하는 단어, 관상觀相과 그 소리가 같아 혼동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관상이란 단어를 살펴보면, 한자어 자체가 주는 특별한 숨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관觀은 ‘볼 견見’자에 ‘황새 관雚’이 더해져 그 의미는 ‘자세히 본다’는 뜻이다. 상想은 ‘서로 상相’과 ‘마음 심心’이 더해져 ‘생각, 사색, 그리움, 닮음’ 등의 뜻을 지닌다. 그래서 관觀과 상想, 둘을 합치면, ‘서로 마음으로 자세히 바라본다’는 의미가 된다. 

실제로 그리스도교의 관상기도는 ‘사랑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기에 관상을 뜻하는 희랍어 θεωρία(theoria, 눈 혹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를 한자 觀想(관상)으로 묘사한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고 활동을 통한 기도인 묵상(默想, 잠잠히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능동적인 기도라면, ‘사랑으로 바라본다’는 의미의 관상은 수동적이고 하느님 중심적임을 잘 묘사하고 있다. 
희랍어 θεωρία는 라틴어 Contemplatio(콘템플라시오)로 번역되는데 이 단어 역시 관상의 의미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Contemplatio는 con-(함께)과 templum(성전)의 합성어이다. 즉,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에 함께 머무는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가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라고 한 말씀에 적용해 본다면, 관상은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관상이란 용어의 의미에서도 드러나듯이, 관상은 사랑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며 동시에 이미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과 일치하여 함께 사는 것이다. 그분이 거하시는 내 마음을 비우고 정화하여 예수님의 사랑으로 깨어나 그분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 바로 관상적인 삶이다.



[2022년 1월 23일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 가톨릭마산 3면, 박재찬 안셀모 신부(분도 명상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