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18

The Mennonite Drug Connection - the fifth estate







John Doe
My drug dealer takes long enough, I couldn't imagine if he drove a horse and buggy. I'd never get my weed!
1.7K
Bob Gillis
Fifth Estate should publish the CIA drug smuggling operations.
Former LAPD drug cop Michael Ruppert outed them and was eventually suicided.
Don McCready
I assure you the CIA, DEA and FBI knew all about it.
Vapletrichs Gne
Just in: Any group of people can commit crime.
Gorlox
After seeing this, I wouldn't be surprised if the Vatican was dealing in dope and other cardinal sins.
Dawn Nicolas
Just because a person belongs to a religious sect doesn't make them a Christian or above criminality. The love of money is the root of all evil! This really isn't that hard to believe.
Ratacatavious Brown
I live in Kentucky and at the peak of our "down home meth cooking" epidemic, now our meth comes from Mexico after 30 year prison sentences for cooks and stricter Sudafed purchase laws, I noticed a strange phenomenon. What I noticed was Amish buggies out on the road at 2 or 3 in the morning. Me and my husband used to laugh and say those must be the Meth Amish. There was definitely something strange about them out late like that. This was like 2007, 2009. We haven't seen them out like that in a long time. Being farmers, they would have easy access to anhydrous ammonia, a key ingredient in meth cooking. I don't know if they were cooking themselves or just selling anhydrous to others. I never knew any to be charged. It's been years since I saw them out like that at night. After seeing this, it really makes me think it wasn't just a joke.
Sarah Smart
Wow dude sold them out over a drunk driving charge?! That is crazy!
Cam
The US government will not tolerate private entrepreneur drug competition.
12345grov
I'm picturing the Mennonite kingpin in his bed at night when he hears "clomp ...clomp.....clomp.... NEEEIIIGH" and yells to his wife: "hit the floor - it's a drive-by!!!!"
M Lee
Pretty ballsy Hannah Gartner to go to Mexico out in middle of no where and accuse drug smugglers...love her reporting.
LoveHope &Charity
Evil knows no bounds! It is represented in Every race, religion and country! " The heart of man is desperately wicked"
Sallie Gallegos
12:00 We don't drink. I live in Eastern New Mexico, and I've see the Mennonite ladies here stocking up on hard liquor. I'm sure it's for the fruitcakes.
trehugr4life
Now it's time to do a docu on drug running and the Bush's and Clintons... way bigger story.. and way more serious drugs and amount of drugs.
Dj Logikal
If I was the son, I'd be pissed off with that bowl cut more than anything
Rich Monk
The CIA, Mossad, MI6, does not like competition!
James Derr
The one thing that pisses the US government off the most, is when you cut in on their source of income.

1901 아나뱁티스트 컨퍼런스 “공동체를 말하다: 그 이론과 실제”


회복적 정의 (Restorative Justice Korea)
17 January 2019 at 11:41 ·


KOPI의 모단체인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KAC)에서 진행하는 공동체 관련 세미나가 있어 소개드립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부탁드립니다.

———————————————————

2019년 1월 19일 아나뱁티스트 컨퍼런스를 개최합니다.
아나뱁티스트의 중요한 3가지 비전 제자도, 평화, 공동체 중에서 이번에는 "공동체"에 대한 주제로 다음과 같은 내용과 일정으로 진행됩니다.
우리가 다 속해 있는 공동체에 대한 진실한 토론의 장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많은 참여 독려해 주세요
--------------------------------------------------------------------------------------
프로그램 일정 및 내용


주제: “공동체를 말하다: 그 이론과 실제”

일정: 2019년 1월 19일 (토) 2:00~6:00시

행사장: 종로 5가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실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연지동)]

연락처: 033-242-9615

참가신청: 이메일 kac@kac.or.kr

등록비: 20,000원 (1월 17일까지) sc제일은행 425-20-403665
30,000원 (당일등록)

발표 순서

– 2:00~2:10 환영의 말

– 2:10~4:00 발표 및 질의응답

아나뱁티스트 공동체 ( 메노나이트 선교사 김복기 목사)

아나뱁티스트 공동체와 평화의 삶 (침례신학대학 김난예 교수)

세계의 예수공동체를 찾아서 (하늘숲좋은나무 공동체 설은주 목사)

-4:00~6:00 휴식, 발표 및 질의응답

휴식시간

화해의 관점에서 보는 공동체의 실제 (동북아 MCC Chris Rice)

한국형 공동체의 삶! 그 실제! (밝은누리 공동체 최철호 목사)

질의응답






+3

회복적 정의 (Restorative Justice Korea)
18 January 2019 at 12:04 ·


2019 회복적 정의 해외연수 일지(1)

캐나다에 도착하여 첫 일정으로 CJI (Community Justice Initiatives) 를 방문했습니다. CJI 는 1974 엘마이라 사건 이후, 지역사회에 설립된 회복적 정의 교육훈련 기관입니다. 초기에는 메노나이트 중앙위원회 (Mennonite Central Committee) 산하에서 시작되었고, 현재는 20명이 넘는 스텝들과 240여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지역 내 다양한 개인, 조직, 사법기관 등에게 회복적 정의 프로그램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키치너 시내 중심가 한 건물의 3층에 위치하고 있는 CJI (Community Justice Initiatives) 를 방문하니 10년 가까이 CJI대표로 일하고 계신Chris Cowie 선생님이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인사 이후에 사무실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보니 예전 YTN 다큐멘터리 ‘나쁜 아이들’ 영상에서 우리가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인듯하여 낯설지 않았습니다. 먼저 Chris 선생님께서 CJI 의 역사와 CJI 가 지역사회에서 하고 있는 일들과 일하는 방식을 설명해주었습니다. 키치너 워털루 (Kitchener Waterloo) 지역사회 내에 회복적 정의가 필요한 다양한 공동체와 조직이 있지만, 모든 영역에서 CJI 가 책임지기 보다는 각 영역별 전문기관이 지역 내에 활동하고 있기에 이들과 함께 협력하는 방식으로 회복적 실천을 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지역사회의 단체들을 CJI가 서로 연결시키고 각 단체들에게는 회복적 관점을 제공함으로써, 각 단체가 자신들의 전문영역에서 회복적 관점으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지지하고 돕는 방식은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지역사회에서 갖는 CJI의 이러한 포지셔닝은 가장 보수적인 기관 중의 하나인 지역 법원이 CJI를 강하게 신뢰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CJI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법원(Waterloo Region Courthouse)에서는 일년 평균 140건 정도의 피해자 가해자 대화모임을 CJI에게 의뢰하고 있는데, 지역법원으로부터 피해자 가해자 대화모임 의뢰를 받는 기관은 CJI가 유일합니다.

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여자교도소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CJI는 Stride 라는 프로그램을 이 교도소와 진행하고 있는데, 이 프로그램은 재소자들이 가석방이나 출소 후 지역사회에 잘 복귀할 수 있도록 (reintegration) 돕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들도 역시 회복의 대상으로 이들을 위한 지역사회의 역할이 있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안전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역 내 자원봉사자들을 모아서 교도소 안에서 재소자들과 함께 대화하고 함께 운동하는 등 다양한 활동들을 통해 출소 후에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과 미리 관계를 맺게 도와주고 더 나아가서는 메토-멘티 형식의 파트너를 맺어 주어 출소 이후에 이들이 심리적, 감정적 도움이 필요한때 지역사회의 자원을 통해 건강한 방식으로 그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사회적 관계 인프라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외에 성범죄자들과 성범죄 피해자, 가해자을 위한 프로그램, 노인들을 위한 프로그램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CJI 를 중심으로 지역사회에서 실천하고 있습니다.

내일은 CJI 사무실에서 1974년 엘마이라 사건의 주인공인 마크 얀치 Mark Yantzi 와 러스 켈리 Russell Kelly 를 만나서 당시 엘마이라 사건에 대해 깊이 들어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후에 엘마이라 마을을 방문할 계획입니다. 모레는 CJI 가 협력하고 있는 지역법원 (Waterloo Region Courthouse) 을 방문하여 사법 시스템 안에서 회복적 정의가 어떻게 실천되고 있는지 배워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1901 또 다시 개벽 – 조성환/이병한의 [개벽파 선언]



또 다시 개벽 – 다른백년

조성환/이병한의 [개벽파 선언]
종료된 기획칼럼
또 다시 개벽

인류세의 시대정신이병한(다른백년 이사) 2019.01.18 1 COMMENT


1. 자생과 자각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연신 끄덕거리다 말미에 갸우뚱 물음표가 돋았습니다. 저 또한 메이지유신 150주년(2018)을 기해 일본에서 나온 서적들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문명개화’, 그간의 개화사 150년과는 다른 결의 서사가 가능할지, 그 가능성을 탐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8세기 동북지방의 안도 쇼에키까지 거슬러 올라 개벽의 단서를 찾는 것은 쉬이 수긍하기 힘듭니다.

‘당시의 사무라이 지배층을 “성인의 이름을 빌려 무위도식하는 도둑놈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하셨죠. ‘성인 중심의 지배질서를 정면으로 비판한 동아시아 최초의 사상가’라고 추키셨습니다. 글쎄요. 저로서는 문장의 들머리 ‘당시의 사무라이 지배층’이 더 도드라집니다. 18세기에도 여전히 일본은 무인이 다스리는 나라였던 것입니다. 유학적 소양으로 단련된 사대부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조선, 월남이 구현했던 문치주의 유교국가와는 일선을 긋는 동아시아 문명의 주변부였죠. 최근에는 메이지유신이야말로 그 기저에 유교화=중국화=근대화의 동력이 작동했다는 독법마저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무라이에서 사대부로, 무사에서 문인관료로 지배층의 세련화(=文化)가 천년이나 가로 늦게 진행되었다는 것입니다.

왕후장상의 씨를 따지지 않는 전통은 동아시아에서 제법 오랩니다. 씨갈이, 역성혁명이 거듭되어 천자를 갈아치웠습니다. 그럼에도 만세일계 천황이 존재한다는 점이야말로 일본의 예외성입니다. 즉슨 성인 중심의 유교문명을 비판했다 하여 ‘개벽파’로 자리매김할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유학국가를 온전히 구현해본 적이 없는 일본서는 자칫 허수아비를 때리는 꼴입니다. 물론 중국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거리에 가득한 사람 모두가 성인이다.’ 하였던 15세기의 왕양명을 개벽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수운 최제우

개화파와 척사파의 갈림길, 그리고 개벽파의 새길 내기는 적어도 동아시아의 맥락에서는 19세기 이후의 사태입니다. 이른바 ‘서구의 충격’, 자본주의 세계체제와의 조우라는 역사적 맥락을 소거하면 개벽파의 독창성과 독보성을 도리어 제거해버리고 맙니다. 자칫 여기저기서 시시때때로 개벽파가 출몰할 수도 있습니다. 영성이 충만했던 서구의 중세가 개벽기도 아니며,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의 범신론적 사유를 개벽과 직접 결부시킬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동학혁명이 그 이전의 숱한 민란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 또한 지배층에 대한 민중 반란이라는 흔하고 빤한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서구의 충격’이 촉발한 전대미문의 천하대란에 임하여 문명적 각성을 예리하게 품어내었던 것입니다. 개벽을 개벽답게 만드는 티핑포인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개벽파의 역사성에 대한 적확한 인식은 엄밀한 용어 사용과도 직결됩니다. ‘토착적 근대’라는 말이 저는 여전히 말끔하지 않습니다. 내재적, 내발적, 자생적 이라는 수사 또한 깔끔치가 않습니다. 죄다 자족적인 개념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타를 나누고, 내/외를 가르는 발상입니다. 세계사 다시 쓰기, 소위 글로벌 히스토리는 서구적 근대조차 내발적이고 자생적이고 토착적이지 않았음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 계몽주의에도 아랍과의 교류, 아시아와의 교섭, 아프리카-아메리카와의 교역이 중요했음이 나날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서구의 계몽주의에 ‘몽골의 충격’과 한문으로 쓰인 동방경전의 알파벳 번역이 있다하여 그 가치를 폄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동학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토착적이고 내재적이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세계적이어서 소중한 것입니다. 내발론의 강박이 18세기 조선에서 서구적 근대의 맹아를 억지로 추출해내는 실학 담론의 패착을 낳았음을 통렬하게 비판한 점이 <한국 근대의 탄생>의 백미라고 생각합니다. 자폐적인 내발론과 자멸적인 외발론을 동시에 극복합시다. 선후(先後)를 따지기보다는 박후(薄厚)를 살펴봅시다.

13세기 몽골이 유라시아의 대일통을 이루었던 것처럼, 19세기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지구를 석권했습니다. 다만 그 편입과정에서 문명마다 나라마다 여러 갈래의 대응이 등장합니다. 한사코 거부했던 세력이 척사파입니다. 척사파의 양태는 중국에도, 인도에도, 심지어 서유럽에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편적인 개념입니다. 반대편에서 무조건 수용코자 했던 세력이 개화파입니다. 이 또한 여러 나라 여러 문명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옛 것을 고수한 척사파와 새 것을 추수한 개화파의 충돌이 보/혁 갈등으로 치달았습니다.

‘제3의 길’도 있었습니다. 낯익은 전통을 타파하면서도 낯선 현실의 혁파 또한 겸장했던 개벽파입니다. 자기 고집도 자기 상실도 아닌 자기 혁신을 도모했습니다. 척사파가 무책임하고 개화파가 무절제했다면, 개벽파는 응시하고 응수하고 응전했습니다. 척사파가 시대의 물결에 조응하지 못하고 조선의 적자에서 적폐로 떠밀려갔다면, 개화파는 서세동점의 파고에 휘말리고 휩쓸려서 조선을 배반하고 매국의 독배를 들이키고 말았습니다. 척사파가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면, 개화파는 깜빡 눈이 멀어버린 것입니다. 반면 개벽파는 반짝반짝 눈을 부릅떴습니다. 서늘한 눈으로 천하대세를 직시하고 빛나는 눈으로 나라다운 새 나라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각적 근대’라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즉 근대 세계체제는 단일합니다. 다만 그 근대세계에 임하는 태도와 자세의 차이로부터 학파와 정파가 분기합니다. ‘서구적 근대’라 해서 개화파 일색이 아닙니다. 그렇게 쓰인 서구사=개화사조차도 다시 쓰이고 있습니다. 서구에도 척사파와 개화파와 개벽파가 길항하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 이치로 ‘비서구적 근대’라고 하여 개벽파가 돌출했던 것도 아닙니다. 작위적인 지리적 구획을 복제하기보다는 사상적 지향에 방점을 두는 편이 이롭습니다. 제가 동학을 높이 치는 이유 또한 묵은 유학을 맹신하지도, 설은 서학을 맹목하지도 않은 탁월한 균형 감각 때문입니다. 구학을 답습하지도, 신학에 매몰되지도 않았습니다. 서구의 충격에 대한 가장 창발적이고 주체적인 응답(Response+Ability)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고로 동학은 ‘자각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여 개벽은 ‘자각의 탄성’이었습니다. 깨어나고 깨우치고 깨달아서 19세기의 유레카, ‘다시 개벽’을 외친 것입니다.

그래서 ‘개벽을 모르고서 한국의 근대를 논하는 것은 넌센스.’라는 말에 십분 공감합니다. ‘개벽을 누락한 한국의 근대에 관한 모든 논의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통쾌하기까지 합니다. 넌센스, 비상식과 몰상식이 판을 쳤습니다. 무식하고 무지했습니다. 그리고 근저에서 무심했습니다. 그 무심과 무지와 무식의 소산으로 쌓아올린 탑이 ‘실학’ 연구였습니다. 실학에서 동학으로의 회향, 개화에서 개벽으로의 회심을 두 팔 벌려 환영합니다. 헌판을 갈고 엎어 새판을 짭시다.인류세 전시작품(세계적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카라라의 대리석 채석장)



2. 서세동점에서 인류세로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애써 이틀을 썼던 문장을 싹둑 지워버렸습니다. “실학과 동학”으로 써내려갔던 내용을 통째로 덜어냈습니다. 지금 이곳은 수운회관 15층입니다. 1월 15일 오전 9시 반을 지나고 있습니다. 어제부터 부쩍 창밖이 뿌옇습니다. 희뿌연 미세먼지가 시야를 온통 가립니다. 인왕산은 희미하고 청와대는 흐릿합니다. 왜 한국의 근대를 실학이 아니라 동학에서 구해야 하는지를 논하는 글이 어쩐지 한가해 보입니다. 갓 50일이 된 아들래미 얼굴이 떠올라 더더욱 답답해집니다. 개벽사 쓰기 또한 자칫 먹물의 고질병, 책상물림의 직업병일지 모른다는 노파심이 입니다. 현장감이 덜한 것입니다. 이번만큼은 에둘러 가지 않기로 합니다. 고준담론은 잠시 미루어두고 왜 또 다시 개벽인가, 돌직구를 던지기로 했습니다. 절박하고 절실하고 절절한 제 마음을 고스란히 옮겨봅니다.

거듭 강조컨대 더 이상 서구와 비서구를 나누기 힘듭니다. 20세기형 인문학의 낡은 관습일 뿐입니다. 북반구(선진국)과 남반구(후진국)를 쪼개기도 여의치 않습니다. 20세기형 사회과학의 후진 습관일 따름입니다. 저는 이제 20세기 후반을 풍미했던 제3세계론이나 세계체제론에서도 별다른 자극과 영감을 받지 못합니다. 동도와 서도를 견주고 서세에 동세를 맞세우는 것 또한 철지난 발상이라고 여깁니다. 목하 한치 앞도 가리어버린 저 기후변화는 동/서와 남/북을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의 지구가 있을 뿐입니다. 그 둥근 지구, 하나의 하늘 아래 동서남북은 갈리지 않습니다. 오로지 온누리와 온생명과 한살림이 있을 뿐입니다. 동도(東道)와 서도(西道)의 소모적인 논쟁을 뒤로하고 천도(天道)와 대도(大道)와 일도(一道)를 탐구합니다. 세계체제론(World System)의 국가간 경쟁을 훌쩍 뛰어넘는 인류와 지구의 공진화, 지구체제론(Earth System)을 모색합니다.

한살림 선언(1989)과 <녹색평론>(1991)도 이제는 어쩐지 미진한 감이 듭니다. 언젠가부터 동어반복의 식상함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생태학은 여전히 지상(地上)과 천하(天下) 사이에 주력합니다. 하늘과 땅 사이 사람의 길, 천지인의 근대화, 천인합일의 현대화를 천착합니다. 지하(지질학)와 천상(천문학)까지는 아우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활동이 지구의 물질대사는 물론이요 우주의 물질대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인류세’(Anthropocene)에 당도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온 지 이미 오래인데도 혁신과 갱신에 게으릅니다. 인류사와 지구사가 합류하여 도달한 인류세(人類世)에 부합하는 새로운 사상, ‘다시 개벽 2.0’을 갈구합니다.

생태적 사유는 한사코 인간의 능력을 축소시키려 듭니다. 포스트휴먼, 만물 가운데 하나로 강등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지구 위에 등장한 그 어떠한 생명도 지구와 우주의 행방에 영향을 미칠 만큼 능력을 확보하지는 못했습니다. 실로 획기적인 사태입니다. 가히 유례없는 사건입니다. 선천개벽 창세기(홀로세, Holocene)와 후천개벽 인류세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신의 뜻이나 자연의 법칙에 버금갈 만큼 인간의 역량이 증대된 것입니다. 45억년 지구사에서 처음으로 인류의 의지가 깃든 행동이 지구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의지는 자연의 힘(force)과는 달리 억제되고 절제될 수도 있는 힘(power)이라는 점에서 절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즉 서구의 휴머니즘은 인간중심주의여서 문제인 것이 아니라, 충분히 인간 중심적이지 않아서 문제인 것입니다.

지구는 갈수록 인류의 이 집합적 의지에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이 엄청난 힘의 행사 여부를 선택하는 인간의 마음가짐(=정신개벽)이야말로 인류를 고유한 생명체로 우뚝 서게 합니다. 지구를 변화시키는 인간의 고유한 힘이 절정에 치달은 바로 이 순간에 인류의 고유한 특성을 외면하는 생태론이 갑갑하고 어색한 까닭입니다. 포스트휴먼을 궁리할 것이 아니라 네오휴먼을 연마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신인간(新人間)=신인간(神人間)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경쾌한 유발 하라리를 따라 라틴어로는 호모 데우스(Homo Deus)라 하겠습니다. 묵직한 의암 손병희에 기대어 한자로 풀면 인내천(人乃天)이 가장 적절합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며, 사람이 즉 한울인 것입니다.

160년 전 노이무공(勞而無功), 아무리 노력해도 헛되었노라, 하늘의 탄식을 들은 이가 최제우입니다. 유학의 천인합일에서 동학의 천인합작으로 도약하는 비상한 순간이었습니다. 하늘과 인간이 합작하는 인류세의 비전을 이미 내장하고 있던 것입니다. 제가 1848년 <공산당선언>이 20세기를 추동했다면, 1860년 <동경대전>은 21세기를 격동시킬 것이라고 호언하고 다니는 연유입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턱없이 모자란 발상입니다. 만인과 만물이 얽히고 섥히는 21세기, 경천(敬天)과 경물(敬物)과 경인(敬人)의 삼경사상야말로 자유-평등-형제애를 능가하는 시대정신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고작 ‘자유-평등-형제애’라고 해보았자 ‘경인’ 단 두 글자로 족합니다.토론토 세계종교의회

그러함에도 동학과 개벽은 여태 수줍습니다. 지난해 11월 토론토에 다녀왔습니다. 세계종교의회의 말석을 지켰습니다. 겨우 한국과 한반도 평화를 논의하는 자리에서만 동학과 개벽 얘기가 나지막이 오고갔습니다. 한국 연구자와 한국의 종교인들만 단출하게 모여 있었습니다. 크게 안타까웠습니다. 깊이 아쉬웠습니다. 딱하다는 생각마저 일어났습니다. 애가 탔습니다. 속이 쓰렸습니다. 입맛이 쓰디썼습니다. 세계종교의회 행사를 맞춤하여 토론토 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던 전시회 주제가 바로 ‘인류세’였기 때문입니다. 전시장을 가득 메운 다인종, 다종교, 다국적 인류를 지그시 바라보며 “신동학이 인류세의 학문이요, 또 다시 개벽이 인류세의 시대정신이라”, 전도하고 싶었습니다.

온타리오 호수를 산책하다 곰곰 궁리하노라니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 또한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퍼뜩 일어났습니다. 서세동점, 20세기의 수세적 입장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인류세에 맞춤하여 문장의 앞뒤 순서를 바꾸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정신을 개벽하야 물질을 개벽하자’고 말입니다. 자각하여 구세하자고도 고쳐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나를 갈고 닦아 인물부터 사물까지 만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 편이 인류세에 임하는 인류의 태도에 한층 더 부합하지 싶습니다. ‘다시 개벽’이 19세기의 자각이었다면, 21세기는 ‘또 다시 개벽’의 유레카를 외칠 만 한 것입니다. 고로 개벽파는 코즈모폴리턴, 세련된 세계시민마저 돌파합니다. 국경을 가로지르는 글로벌 엘리트들의 허위의식을 넘어섭니다. 개벽인이야말로 진정한 지구인이며, 하늘과 더불어 지구의 운명을 개척하는 개벽꾼이야말로 참말로 하늘사람입니다. 국민(國民)에서 천민(天民)으로, 국가에서 천국으로. 그런 기상과 기개가 있어야 기미년 100주년을 맞이하는 기해년의 ‘선언’(Manifesto)에 값할 것입니다.온타리오 호수에서 본 토론토 시내



그래야 개벽파를 한낱 학술 유행의 신종 아이템으로 회수하려는 각종 유혹과 회유를 떨쳐낼 수도 있습니다. 부디 동학을 연구하기보다는 신동학을 합시다. 신동학을 살기로 합시다. 앎의 전환에 그치는 탁상공론이 아니라 삶의 전환을 수반하는 수련과 수행을 수반합시다. 그래야만 민심의 감화를 이루고 천심의 감동을 일으켜 포교와 포덕 또한 가능해질 것입니다. 일파만파 지구에 파동을 일으키고 우주까지 파장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야 이 탁한 세상에 맑은 하늘을 되돌려줄 수 있습니다. 21세기에 태어난 후세들에게도 푸른 하늘 은하수를 되물려줄 수 있습니다. 꼬장꼬장, 깨작깨작, 자꾸 논문과 비슷해지려던 문장을 몽땅 지워버린 까닭입니다. 후련해졌습니다. 속이 다 시원합니다.

FEATURED
개벽
서세동점
인류세
자각적 근대
한국 근대의 탄생

글 탐색
PREVIOUSPREVIOUS POST:

주거권을 위해 투쟁해야만 하는 영국의 밀레니얼 세대

NEXTNEXT POST:

두 도시 이야기: 뉴욕 vs 서울 (3)

이병한(다른백년 이사)


다른백년 이사, 원광대 동북아연구소 교수, 유라시아 문명사학자. 저서로 『반전의 시대』, 『유라시아 견문』3부작이 있다.

12 일본 스즈카의 도시공동체를 방문한 강화의 딸들 - 인터넷 강화뉴스



일본 스즈카의 도시공동체를 방문한 강화의 딸들 - 인터넷 강화뉴스
일본 스즈카의 도시공동체를 방문한 강화의 딸들

유상용
승인 2012.03.20
---


* 공동체 실현을 위해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야마기시 농장에서 18년을 살았다. 2009년 강화로 이주해 현재는 양도면 삼흥리에서 펜션을 하면서 지역 사회를 위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2월,

20살 전후의 강화의 딸들 4명이 약 2주간 일본 미에(三重)현의 스즈카(鈴鹿) 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지역 공동체인 'AS ONE COMMUNITY'를 다녀왔다. 내가 ‘강화의 딸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친구들이 강화에서 나고 자라거나 20년 가까운 강화 지역사회 만들기의 혜택을 받고 자라난 첫 세대로서 ‘강화의 딸들’이라고 불릴만한 대표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윤여군 목사의 딸 승민이, 밝은마을 이광구 이사장의 딸 나리, 산마을 고등학교 노광훈선생의 딸 해원이, 장진영 화백의 딸 해인이, 네 명은 스즈카에서의 체험을 강화에서도 살려가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고 일본으로 출발했다.

스즈카 시의 AS ONE COMMUNITY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사람을 위한 경영을 지향하는 회사, 생활과 가계 등 인간생활 전반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창조하는 지역 사회, 개인의 지적 정서적 건강을 지원하는 심리센타 등이 네트워킹된 ‘도시 공동체’이며 사회활동체이다. AS ONE COMMUNITY는 성인들을 위한 인생탐구학교인 ‘사이엔즈 스쿨’과 인간-사회 연구를 위한 ‘사이엔즈 연구소’와 연결되어 PIESS 란 NPO단체의 한 구성 요소이기도 하다.

내가 이곳을 오랜 친구인 이광구 군과 지역 분들께 청년들의 체험의 장으로 소개한 것은, 이 공동체를 시작한 분들이 내가 20년 가까이 몸담고 있던 곳과 이어진 일본공동체 출신들이고, 생활공동체의 한계를 넘어 본질을 사회 전반에 보편화해갈 수 있는 길을 찾아 10년을 모색해 온 결과 이제 그 성과를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로서는, 인간사회 전반을 향한 거대 담론이 사라진(?) 요즘, 사람과 사회의 이상적인 존재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이켜보고 한국의 (지역)사회운동의 방향을 찾는데도 조금의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특히 다음을 준비해갈 청년들이 미리 맛보기를 바라며 제안을 했던 것이다.

이번 교류는 작은 일이지만 가기까지의 과정과 의미에 대해 나대로 생각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써본다. 앞부분은 나의 사적인 과정인데 ‘강화를 공동체’로 생각하고 살아가려는 나의 생각을 적어보았고, 뒷부분은 애즈원 공동체를 체험했던 청년들의 교류체험기를 싣는다.



작년 4월초였다

나는 밝은마을의 황선진 선배 덕분으로 양사면에 있는 빈집을 빌려 우선 필요한 짐만을 옮겨놓고 강화 생활의 첫발을 내딛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내가 자리를 잡는 대로 여름까지는 다 같이 이사를 올 생각을 하고 아직은 꽃샘추위가 남아있는 봄 4월의 강화에 선발대로서 왔던 것이다.

내가 그때까지 몸담고 있던 곳은 야마기시즘 실현지(일명 산안마을)라고 하는 곳으로 7가족 30여명이 함께 사는 공동체이다. 일본에서 시작되었고 일본 각지에는 30 군데 정도의 공동체가 산재하여 서로 연결되어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는 60년대 후반에 농촌운동의 하나로 소개되어 유정란 양계의 보급을 위주로 활동하다가 80년대 중반에 공동체를 결성하여 부침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시기가 지나갈 무렵 그간의 10년을 돌아보며 나는, “사람과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삶의 방식’이 뿌리에서부터 바뀌어야 하겠다. 나 스스로가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고 그 바탕에서 새로운 사회를 구성해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생태주의, 공동체, 자연농업 등의 관련 책을 읽고, 실천하는 곳을 찾아다니며 탐구의 시간을 보내던 중에 경기도 발안에 위치한 산안마을을 만나게 되었고 28살의 청년으로 마을에 합류하여 결혼하고 아이 기르고 여러 활동들을 해오다 18년간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작년에 이사를 나오게 되었다. 초기에 시작한 분의 생각과 변화를 필요로 하는 세대들의 뜻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반 이상의 식구들이 1년 사이에 나오게 된 것이었다.

누구의 생각을 옳다하고 맹신하여 따르거나, 자신의 생각도 고정하여 굳어지지 않고 ‘무고정 전진’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물심양면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자고 한 야마기시즘도 다시금 고정의 길로 접어 들어가 더 이상 변화의 힘을 상실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다.

원인은 역시 그 것을 구성하는 사람의 ‘질’을 높이는데 실패한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생각이 옳고 그것이 야마기시즘이다.’라고 하는, 고정관념이라는 해묵은 인간문제에 당면하여 우리들 역시 좌초한 것이다.

산안마을을 나오기 전까지의 5~6년간 나는 새로운 세대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청년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것은 몇 가지 목적을 가지고 한 것인데 하나는 물론 청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적 성장과 차세대의 육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 당시 산안마을에서 해오던 방식이 아니더라도 더욱 유연하면서도 목적에 맞는 방식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또 하나 개인적인 관심으로서 한일-아시아 교류라는 것이 있는데 그 것은 앞으로의 시대를 염두에 두고 아이들의 관점이 국경의 울을 넘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기를 바라면서 시작한 것이었다. 일본과의 교류가 많은 산안마을의 장점을 활용하려 한 것이기도 하였다.

5년 정도 지속된 활동이 본 괘도에 오르자 나는 야마기시 씨가 생각한 이상사회를 구성하는 방법에 대해 몇 가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의지를 가장 소중히 한다.’ ‘기구와 제도를 잘 정비해 놓고 그 다음은 사람의 성장에만 힘을 쏟으면 사람의 성장에 따라 사회의 성장은 자동적으로 따르게 된다.’ ‘ 어떠한 속박도 규제도 없이 무수히 이합집산하고 무한히 성장하도록 장치한다.’ 등이다. 야마기시가 본 세계는 개인과 사회, 정신과 물질 등이 대립이 아닌 조화 - 합일된 세계이고, 마음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가 분리되지 않고 함께 해결될 수 있는 길을 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마기시즘’이란

‘야마기시즘’이란 일본인 야마기시 미요조(1900~1963) 씨의 사상으로서 한국에서는 산안마을이라는 공동체의 정신이나 유정란 양계의 생산방식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인간의 지적, 정신적 각성을 바탕으로 인간사회를 근저에서부터 변혁하여 이상사회를 이루어 가려는 혁명사상이다. 60년대 후반부터 40년 정도 한국사회에 알려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과 가치에 대해서 공개적이고 명확하게 일반에 알려져 있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나에게도 일부 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동안은 자신도 그 사상에 대한 이해가 얕고 체험으로 터득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정도가 못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면이 있고, 앞으로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나의 표현방식으로 하자면 야마기시즘이란 ‘후천개벽을 과학적, 합리적으로 인류사회에 실현하기 위한 진리적 사회구성방식’ 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근대 종교사상의 가장 큰 주제인 후천개벽이란, 지구와 인류가 일정단계의 성숙기에 이르렀기에 지금까지 발달시켜온 물질문명을 바탕으로 정신의 계발이 더욱 진전되어 물질과 정신이 고루 발달한 참된 문명사회가 이룩된다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국 사상들은 그 ‘실현방법’이 구체적이지 않아 종교로 되었으나 야마기시 씨는 “이상은 방법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는 데 주목하여 ‘사회실천 사상이며 활동’임을 분명히 하게 된다.



2000년 일본에서는

최근 한국의 산안마을에서 40대 남자들과 그 가족들이 나오게 된 과정과 비슷하게, 2000년도 일본에서도 ‘실현지’ ‘야마기시즘’ 등에 대한 고정된 생각에 의문을 가진 40대들이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몇 차례의 시도와 실험을 하였다가 그 제안들이 당시의 리더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자 결국 대거 실현지를 나오는 일이 발생하였다. 가족을 포함하여 약 200명 가량 되는 많은 인원이 실현지 주변이나 대도시 토쿄에 살면서 사람과 사회에 관한 실험들을 지속해 왔었고, 그 중에서도 ‘스즈카’라고 하는 인구 20만 정도의 도시에 집중적으로 모여서 활동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스즈카 시는 일본에서는 F1 자동차 경기장이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고, 혼다자동차의 부품공장이나 근처에 파나소닉 TV 액정공장이 있다. 농업도 발달하였고 북쪽으로는 스즈카 산맥이 자리를 잡고 동남으로는 일본 동해안이 인접해있다. 그래서 일자리 등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도시이고 자연조건도 좋아서 최근에는 시정의 방향이 지속가능한 생태친화형 복합도시를 지향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스즈카에 모인 일단의 사람들은 ‘야마기시 공동체’가 굳어지고 변화의 힘을 상실하게 된 근본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함께 모여 연구-연찬하는 기회를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초기 5년간은 여러가지로 연구하고 시도해보았지만 제대로 줄기를 잡지 못하고 있다가 2005년 즈음이 되어서 ‘고정’의 원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 내용에 대해서 여기에서 다루기는 힘들지만 그런 정신적인 진척을 바탕으로, 본질적인 주제를 탐구하는 연구소, 성인들의 의식계발 역할을 하는 교육센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사회실험의 장이 되는 몇 개의 회사, 그리고 스즈카 지역에 점재해 있으면서 서로 네트워킹하여 이루어가는 가정과 개인들이 모인 커뮤니티 등으로 점차적으로 활동을 넓히게 되었고 2008년 겨울 즈음부터는 이것을 사회에다 내놓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내가 스즈카 지역의 지인들과 다시 연락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 2008년의 12월이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스즈카의 사람들이 “한국 실현지의 40대들은 요즈음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한 번 연락을 해볼까?” 하던 그 무렵에 전화를 했다. “모시 모시! 오노 상?”



다시 강화의 이야기로 돌아와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강화도로 이사를 온 것은 작년 6월 24일이었다. 이삿날 기억에 남는 것은, 며칠 전부터 이사올 집 2층 처마에 제비가 집을 짓고 있었는데 그 날에 제비집도 완성이 되어서 함께 입주를 하게 된 것이었다. 전 주인도 전셋집 때문에 아직 이사를 못가서 전 주인, 새 주인, 제비부부 세 식구가 함께 생활을 시작하였다. “공동체 생활의 꼬리가 길구나.” 하고 웃었다.

4월부터 석 달간, 새로운 생활을 준비하는 데는 강화지역에 오래 전부터 정착하여 살고 있는 여러 선배, 친구들의 도움이 컸다. 우선의 거처를 마련해준 황선진 님은 마침 마리학교의 새로운 정착지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살 곳을 찾아야하는 내 상황과도 맞아서 여러 곳을 함께 다니며 돌아보고 그 과정에서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도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또 10여 년 전부터 강화에 자리잡은 친구 이광구 군과도 많은 부분에서 공감이 있어서 내가 강화생활을 시작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그 때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산안마을이라는 작은 공동체에서 나왔으니 강화지역 전체를 나의 공동체로 삼아 오랜 시간을 두고 지역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가자.”는 것과 “지역에서 자라고 배출된 청년들이 지역에서 자신의 삶을 실현해갈 수 있도록 경제적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가자.”는 것이었다.

‘무소유 일체생활’을 지향하여 소유도 분배도 따로 없이 모든 물자와 생활을 공용으로 해가는 산안마을의 생활을 20년 가까이 해오면서 나는 생활비와 돈 계산도 해보지 않았고, 은행통장이나 카드도 사용해본 적이 없고, 더구나 몇 억이 넘는 집에 대한 감각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느끼는 문제들을 더욱 민감하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몇 개월간의 새로운 생활에서 가장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집 문제였다. 사는 데도 거액이 들지만 전세를 얻는 데도 만만치 않은 금액이 든다는 게 새롭고 놀라웠다.

더욱이 새 출발을 하는 청년들이 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 이상으로 많은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하는 것이 내 눈에는 헛된 일로 보였다. 그래서 장기적인 일이긴 하지만 저렴하고 안정적인 주택을 공급하는 것이, 청년들이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출발하려 할 때 최소한의 바탕이 되고 사회 전체의 안정을 위해서도 중요한 과제로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거기에 이어지는 큰 주제로 “대안교육은 있어도 대안사회는 없다.”는 것이다. 지역의 대안학교를 출발하여 그 지역에 살려고 하거나 뜻을 가지고 지역에 정착하려는 젊은이들이 ‘기존의 사회에 적응하여 사는 것만이 현실적이라는, 자포자기에 빠지지 않도록’ 다음 세대들이 능력을 기르고 마음을 바쳐 살만한 지역사회의 대안을 마련하여야 하는 것이다.

하루는 이광구 군과 이야기를 나누다 “나리를 스즈카에 보내보면 어떨까? 강화지역 단체에서 일을 하고 있기도 하고 지역사회 만들기에도 뜻이 있으니…,” 하고 서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고, 얘기가 진척되는 중에 “강화에서 함께 자라온 아이들을 같이 보내서 함께 체험하도록 하면 더욱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고 전개되어 방학기간을 이용한 2주간의 교류체험을 4명이 함께 가는 것으로 정하게 되었다. 일본의 지역공동체를 체험하고 지속적인 교류의 물꼬를 틈으로서, 강화에서 자란 우리의 아이들이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다시 강화를 선택하고 자신과 모두를 위해 마음도 물질도 풍성한 사회 만들기를 해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또 그 과정에서 부모들도 다시금 자신의 삶의 터전을 아름답게 가꾸고 참된 사회의 모습을 정립하는데 작은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AS ONE COMMUNITY'는

몇 개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처음 시작한 사업들은 이사, 리모델링, 설비 등을 하는 ‘ 애즈원 홈’, 지역의 안전 식자재를 사용하여 만들고 배달하는 도시락 가게인 ‘오후쿠로상 벤토(어머니도시락)’, 도시락 자재 공급을 위한 농장인 ‘애즈원 팜’ 등이었고, 점차 인재파견사업, 부동산업과 소규모 건축업 등으로 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그 사업들은 어느 것도 기존의 이미지와는 다른 내용을 지향하여 전개되고 있는데, 목적은 일하는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적성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풍성하고 쾌적한 지역사회 만들기에 집중되어 있다.

사람을 회사에 맞추지 않고 사람의 성장을 최우선으로 위하고 사람의 심리, 생활적 필요에 사회가 맞추어가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그 실태는 이상과 차이가 있겠지만 개인과 전체,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간사회의 과제에 어느 정도 해결점을 제시하고 있는지 주목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딸들은 2주일간의 교류기간 동안, 때론 도시락 가게에서 반찬을 담으며 때론 농장에서 채소 가꾸기를 하며 일에도 참가하고, 주말에는 지역의 청년들과 관광을 가거나 가정에 초대받아 저녁식사를 함께 하며 지역 사람들을 느끼고 공동체의 의미도 배우는 시간을 보냈다. 이번에 뿌려진 씨앗들이 아이들 각자의 생활에서도 예쁜 싹을 틔우기를 바라고, 강화지역의 풍성한 삶으로 꽃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2주간 본 일본 - 이나리



처음 간 곳은 이곳의 시작점이었다. 안 되는 일본어로 이것저것 얘기 들어보니 음식물 쓰레기 관련된 회사였다. 이 회사가 가장 궁금했지만, 일본어로 물어볼 용기도 없었고 대답을 해석할 용기도 없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 회사를 만들고 여는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을 것이고, 거기서 많이 얻었을 것 같다. 처음이란 것은 피곤함과 해냈다는 뿌듯함, 그리고 실패와 재도전,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이 섞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엔 제대로 된 얘기를 들어보고 싶다.

그 다음은 미유키 상이 일하는 회사. 이곳의 중심인 것 같은데, 이때만 해도 일본 초창기여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고 가까운 곳의 ‘오후쿠로상 벤또’! 이름 뜻을 듣고선 할머니들이 만들어 보자기로 싸주는, 그런 소박한 느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일하러 가서, 그리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소박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다. 요리를 하고, 음식을 담고, 그것을 배달하고, 그릇을 닦고, 다음 식사를 준비하고. 하루 종일 일하지도, 일주일 내내 일하는 것도 아니다. ‘요리는 역시 즐거운 것이고, 노동이란 건 정말 즐거운 것이고, 그 중에 최고는 역시 이렇게 살아간다는 거 아니겠어?’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욕심이 났다. 내 비록 요리는 못하지만 강화에 돌아가서, 농번기 때 바쁜 농민들과 독거노인을 위한 도시락 배달을 하는 건 어떨까? 예전에 엄마를 따라 독거노인 도시락 배달을 간 적이 있다. 아주 작은 거지만, 그리고 잠시지만 안부를 묻고 얘기를 나누는데 마음이 따뜻했다. 그 후에 도시락 싸는 걸 도와주러 갔는데, 그 넓은 강화의 독거노인 도시락을 단 두 분이서 만들고 있었다. 그 분들과 함께, 독거노인들과 농민들을 위해 도시락을 배달하는 것은? 가끔 마을회관이나 넓은 들에 배달을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 아이들과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 쌀도, 야채도, 고기도, 모두 다 강화 것으로! 아아- 그래도 역시 문제는 요리구나.

그리고 ‘농장’. 커다란 토마토 하우스, 아직은 잠자고 있던 넓은 밭, 그리고 마트. 농장은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정겨웠다. 우리 집 사랑방은 아궁이에 불을 붙인다. 처음에 불을 붙이기 위해 나무와 종이를 공기가 통하도록 쌓는다. 이것도 나름의 노하우가 필요하다. 그리고 꾸깃꾸깃 구긴 종이에 불을 붙여 부채질도 하고 나무를 다시 쌓아주기도 하고, 실패하면 다시 도전한다, 불이 붙을 때까지.

이름에 ‘코’가 들어가는 농장팀은 나무와 종이를 적절히 쌓고 있었다. 지금은 겨울, 봄이 오고 있다. 이곳에 불이 붙고 공기가 드나들기 시작하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 언젠가 다시 오게 되거나 유상용 아저씨를 통해 듣게 될 땐, 지금의 인원보다 몇 배는 불어 있겠지. 코니시 상 공책은 빼곡할 테고, 코스케 상은 앨범을 하나 더 냈을까? 어쩌면 사랑스러운 채소들의 노래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갯벌의 생물들을 보면 흥얼흥얼거리게 되는 걸.

농장과 도시락가게, 이 두 커다란 바람을 타는 중간에도 바람은 계속 우리를 이곳저곳에 데려다 주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여기저기서 초대해 주셨고, 그리고 우리의 식성도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널리 퍼졌다. 하하하. 그리고 이 바람은 내게 물을 듬뿍, 햇살도 듬뿍 주었다. 바람은 우리에게 마을 사람들과 만남의 자리를 주었다.

내게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미유키 상이 첫 날 우리에게 이것저것 보여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곳에 와보지 않고 말로만 들었더라면, 갸우뚱 했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노동으로? 공동체를 중요시 하는 곳에서 개인을?

하지만 얘기를 듣다보니 한국의 공동체들이 왜 망한지 알 것 같았다. 마을 공동체든, 학교든, 무조건 ‘공동체’만 외쳤다. 그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세계보다, 공동체란 산을 가꾸는데 온 힘을 다한 것 같다. 산의 생태계보다 산의 땅을 전부 모으기에 급급했던 사람처럼. 공동체란 이름 아래 독재정치도 있었을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넓다. 식물도 동물도, 플랑크톤도 같은 류라고 해도 전부 다르고 각기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그들의 삶도 서식지도 먹이도 전부 다르고, 그들이 모여 생태계를 만든다. 그 중 한 가지가 빠져도 혼란이 찾아온다. 왜 이렇게 간단한 걸. 그래서 연구를 하고 공부를 한다는 건 내 마음에 콕 박혔다. 얘기를 듣고 슬프기도 했다. 이렇게 당연한 걸, 왜. 이곳처럼 이렇게 모여서 함께 하고 공부하려면 우린 얼마나 걸릴까.

괜찮아. 내 주위엔 이렇게 친구들이 있고, 좋은 분들이 많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가진 씨를 아끼고, 거름을 주고, 키워 나가야지! ‘무엇보다 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자, 진심으로.’라고 하던 테루코 상의 말처럼.

그래서 나와 같은 아이들을 위한 라이프 센터가 생긴다고 해서 반가웠다. 건물도 새로 짓고! 알면 알수록 부러워진다. 아이들도 부모도 전부. 다음 번에는 제대로 공부하러 와야지.

그 동안 내 안의 씨는 빗물을 따라 지하에도 가보고 논과 밭도, 바다에도 가보았다. 지금도 여전히 바람에 흔들린다. 하지만 언젠가 커다란 느티나무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될 거다. 난 그렇게 믿고 내 씨를 심을 것이다. 이게 내가 바람을 타고 일본에서 배워 온 이야기다.



스즈카에서 보낸 2주 - 윤승민



지난 2월에 나는 내 스무 살의 가장 특별한 기억 중 하나가 된 여행을 다녀왔다. 일본의 스즈카 시로 다녀온 교류 여행. 태어나서 처음 가 본 해외여행도 중학교 1학년 때 일본으로 간 것이었고, 그 이후로도 한 번 더 다녀온 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영 아니었고 두 번째로 갔을 때는 처음과 달리 정말 기억에 남는 경험도 많이 하고 배운 것도 많았지만 세 번째의 일본은 아예 출발 목적부터 돌아온 후의 느낌까지 그 전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 글에서는 인상 깊었던 것들을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써 보고 싶다.

첫 번째, 우리가 만난 사람들이다. 이것은 가장 첫 번째로 생각해야 하고, 가장 깊이 되돌아봐야 할 주제다. 이번 교류에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나라 사람이 적은 상태에서 외국에 머무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드문드문 함께 했던 유상용 아저씨를 제외하면 근처에 한국인이라고는 늘 우리 네 명뿐이었으니까.

그 때문인지 스즈카 공동체의 여러 사람들과 더 직접적으로 만나고 대화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의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초청을 받아 일본에 방문하는 내용을 보았다.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도 일본 사람들과 교류를 해 본 경험이 몇 번 있었고 특히 스즈카에 다녀온 일이 있어서 참 인상 깊게 보았는데, 제일 아련하게 떠오르는 것이 바로 스즈카 공동체 사람들과의 기억이었다. 가족처럼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신경 써주신 모든 분들이 사진과 함께 기억에 남아있다.

함께 공동체에 대한 질문과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삶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또 그 분들의 모습에 깊은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유카짱이나 히로토 군 등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과도 친해질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 이번 교류 여행에서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지낸 것은 다른 어디에 가서도 쉬이 얻지 못할 귀한 보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우리가 했던 일들이다. 우리는 정말, 도와드렸다는 말도 민망할 정도로 도움이 되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하여튼 오후쿠로상 도시락 가게와 농장에서 며칠 간 일을 했다. 도시락 가게에서 반찬을 담거나 설거지를 하고, 농장에서는 식물에 물을 주고 죽순을 캐는 등 정말 지루할 틈 없이 다양한 일들을 했다. 아마도 도와드린 것보다는 우리가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 같기도 하다.

도시락 가게와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 일본 사람들이 일을 할 때 얼마나 위생에 신경을 쓰고 일하는 태도가 좋은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또 한국에서 식품 가공업을 하는 우리 집이나 전에 다녔던 학교에서 농사일을 했던 것을 떠올리면서 이리저리 비슷한 점들을 보기도 했다. 다른 것도 있었지만 배울 점은 역시나 많았다. 몇 번 말한 적이 있지만, 일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뒤처지는 일 없이 함께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세 번째, 우리가 갔던 곳들. 일정 속에 틈틈이 여러 곳에 갈 기회가 많았다. 자전거를 타고 다녀왔던 일본의 길거리들, 또 무언가를 사러 갔던 가게들(환상적인 북오프!), 게스트하우스 식구들과 함께 갔던 온천! 모두 즐거웠다. 또 교토라던가 나고야 등등, 평소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친절한 분들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다녀올 수 있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언니들과 달리 체력이 약해서 막바지에는 조금 힘들기도 했지만, 금각사나 일본 전통 정원 등 정말 잊지 못할 곳들을 눈에 담고 올 수 있어서 기뻤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초대를 받아 갔던 스즈카 공동체 사람들의 집이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기도 하고 하루 신세를 지기도 했는데, 정말 한 군데도 빠짐없이 감동을 받을 만큼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일본에서는 집에 초대하는 게 한국에서보다 드물고 가볍지 않은 일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귀한 기회를 많이 갖게 되어서 좋았다. 지금도 우리를 초대해 주시고 대접해 주셨던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이렇게 여러 곳을 다니면서 그만큼 많은 음식을 먹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먹었던 정말 한 끼도 빠짐없이 맛있었던 덕에 배 터지게 먹었던 음식들부터 초대받아 간 집에서 먹었던 음식, 또 교토와 나고야에서 사먹었던 음식들까지 어쩜 그렇게 맛있는 것만 2주간 주구장창 먹을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다. 한국에 와서 아직도 살 빼느라 고생하고 있다.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뒤늦게 이렇게 글을 쓰면서 되돌아보니 아직도 농장의 비닐하우스와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길거리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침에 일어나 마주하던 이요다상과 세츠코상의 모습부터 노에짱과 줄넘기를 하던 것, 유카짱에게 장난을 치던 때의 기억까지 어제 일 같다. 한국에 돌아와 첫 대학생활을 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스즈카 공동체 분들과 메일도 주고받을 생각을 못하고 그저 시간을 흘려보낸 것 같아 죄송한 마음도 크고 나 자신도 아쉽다. 이제부터라도 좀 노력해 봐야겠다. 어렵게 맺은 좋은 인연은 계속 이어가야 하니까.

스즈카 공동체 마을에서 2주를 보내면서 정말 그 곳에 사는 것처럼 여유로운 마음이 들 때가 있어서 좋았고, 일본어 실력이 좋아진 것도 큰 수확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또 가고 싶다. 스즈카 공동체 사람들이 보고 싶고, 그곳만의 분위기를 다시 한 번 느끼고 싶다. 아, 그 전에 꼭 강화에 오셨으면 좋겠다. 산책하기 좋은 해안도로변의 예쁜 나들길도 걷고 우리 집에 초대도 하고 싶다. 어디에서든,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사람과 사람의 이어짐 - 노해원







처음 유상룡 아저씨한테 나리, 혜인이와 일본에 갈 생각이 있느냐는 제안을 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일본에 다녀온 지 벌써 6개월이 다 되어간다. 지금 생각 해 보면 일본에 가기 전부터 별에 별 우여곡절이 많았다. 출발하자마자 공항에서 지갑을 잃어버리고, 승민이와 도시락공장으로 출발 하는 첫날 늦잠을 자고, 돈이 모자라 미유끼상한테 돈을 빌리고, 집으로 돌아오기 전날 서로에게 그동안의 서운함을 이야기하며 울고…. 하지만 그보다 더한 따뜻함과 즐거움과 추억, 그리고 배움이 있었으니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경험이었다.

우리가 일본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유상룡 아저씨의 권유 덕분이었다. 나리네 아저씨와 우리 부모님과 유상룡 아저씨가 함께 있는 자리였다. 우연히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우리들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강화에서 만나 함께 자라고 앞으로도 함께 공동체를 꾸려가려는 생각이 있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다 기회가 되면 유상룡 아저씨가 계시던 일본 공동체에도 가면 좋겠다는 부모님들의 바람이 생겨났다. 그리고 마침 아저씨도 일본의 공동체와 강화 공동체의 교류를 계획하고 있던 차에 우리가 가게 된 것이다.

외국에 다녀 온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일본에 가기로 정해졌을 때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간다는 설렘이 제일 컸다. 하지만 유상룡 아저씨와 미팅을 통해 우리가 가는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 새로운 사람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설렘에 마음이 부풀었다. 일본에 가기 직전까지 설을 쇠러 강원도에 가랴, 가방 한가득 짐 챙기랴 새벽까지 짐 싸랴 분주했지만 항상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 우리가 가서 하는 일은 어떤 걸까? 어떤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늘 마음속에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지내는 동안 어려움은 없을지,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이 들거나 우리들 사이에서의 문제는 없을지 걱정도 됐다.

그렇게 설렘 반 걱정 반 떠난 일본에서 밤늦게 도착한 우리들을 미리 연습 해 둔 한국말로 밝게 맞아 주시던 오노상 부부와 앞으로 우리와 게스트하우스에서 함께 지낼 이요다상 부부를 만나니 왠지 마음이 놓였다. 무엇보다 처음 도착해서 가장 기뻤던 것은 방안에 고타츠가 놓여 있고 목욕탕에서 온천식 욕조를 발견했을 때다. ‘만화에서만 보던 그 고타츠를 앞으로 계속 쓸 수 있다니! 매일 온천 같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글 수 있다니!' 감격 그 자체였다. 아울러 세쯔꼬상의 엄청난 요리솜씨, 그리고 우리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고타츠와 욕조만큼 스즈까시 사람들이 새롭고 따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무척이나 행복 했다.

우리가 간 곳은 야마기시즘에 한계를 느끼고 스즈까시에 모인 사람들이 에즈원 컴퍼니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그 속에서 도시락공장, 펜션, 농장, 리모델링 등의 일을 나누어 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도시락 만드는 일과 농장 일을 하게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도시락 공장에 가서 일을 돕고 아침에 코우타 아저씨의 차를 타고 농장에 가서 일을 도왔다. 네 명이 한꺼번에 이동하기는 힘들어 둘씩 짝을 지어 2주 동안 1주일 씩 도시락공장과 농장을 번갈아 가면서 다녔다. 그 외에 저녁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세쯔꼬상이 만들어주신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를 초대해 주신 분들의 집에 찾아가 상상도 못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온천도 가고, 쇼핑도 하고, 주말에는 교토와 나고야에서 관광도 하며 하루하루 즐거운 생활을 했다.

일본에 있는 동안 출퇴근 시간을 비롯해 중간에 쉬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까지 10분 이상 늦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우리도 아침 일찍 하루를 시작하고 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돌아와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면서 부지런하고 꽉 찬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꽉 찬 하루를 보내면서도 전혀 서두름이나 분주함 없는 여유 있는 생활에 기분이 좋았다. 아침, 저녁 자전거를 타고 돌아올 때, 대나무 숲에서 타케노코(죽순)를 찾던 그 상쾌함, 늘 그런 기분 이었다.

도시락공장과 농장에는 우리 또래 고등학생, 아줌마, 아저씨, 동네 할아버지, 뮤지션,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아주머니 등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후에 이야기를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일 하는 사람들은 에즈원 컴퍼니를 함께 만들어 온 사람들, 혹은 공동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 모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나 아는 사람의 소개를 받고 오게 된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후에 이곳 이야기를 더 깊이 나누면서 ‘따로 하는 모임도 없고, 경계도 없으며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시 전체가 공동체 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공동체라는 경계를 두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사는 모습이 대단하달까? 앞으로 지역운동, 혹은 공동체 운동을 하기위해 꼭 배워야 할 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도시락 공장의 일회용 용기들이었다. 도시락 통을 사용하기에는 정기적으로 사 먹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비싸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하지만 좀 더 환경을 배려해서 잘 썩는 용기나 재활용 용기를 사용 하면 더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음식 재료도 그 지역에서 재배되는 음식이나 유기농 음식을 사용하면 더 없이 좋지 않을까.

일본어를 미리 공부 해 온 혜인이와 열심히 일본 만화를 봐왔던 승민이 말고는 대화의 절반은 정상적으로 오갈 수 없었다. 짧은 단어들의 조합이나 영어, 한국어, 일본어, 몸어를 모조리 섞어 쓰거나 혜인이의 도움을 열심히 받았다. 하지만 생활에 필요한 대화는 적당히 이루어 졌다. 그리고 오히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단점 덕분에 말이라는 것에 휘둘리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야 할 때가 많았다. 때문에 여러 가지 일들을 말이 아닌 실천으로 해결해야 했고 평소 말에 비해 실천이 부족했던 나에게는 큰 자극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장점은 둘째 치고 생활 대화만 하다 보니 좀 더 전문적인 단어가 필요한 궁금증이나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속에만 담아 두었던 이야기 들은 유상룡 아저씨가 오신 뒤부터 해결 됐다.

이곳 공동체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연구, 그 중에서도 인간 성장에 대한 것을 중심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사람과 사람의 이어짐, 무엇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성찰을 중요시 한다. 이곳에서도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면 서로가 각자의 의견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모으는 것이 가장 힘들었지만, 결국엔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장에 힘을 쏟으니 좋아졌다고 한다. 스스로의 깊어짐이 중요하다는 생각과 자신의 행복, 자신과의 소통, 즉 본심으로서의 생활과 소통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알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 하고 있었다. 진실에 대한 탐구, 자신의 실체, 한 사람 한 사람으로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이 공동체가 가장 중요 하게 생각 하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며 후에 있을 결과에 있어서도 하나의 결과가 아닌 그 때 그 때에 대한 결과가 중요하다. 이를 통해 일과 삶에 대한 탐구를 하면서 직장을 위한 삶이 아닌 삶을 위한 직장을 만들어 가는 것이 이곳의 목표다. 이런 목표와 서로에 대한 이해를 엿볼 수 있는 간단한 예로, 도시락 공장의 월급이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가족상담(예를 들어 가족 수나 개인 사정)을 통해 맞춰준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며 ‘자기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며 사니 재밌다.’고 말하는 이분들을 보면서 ‘투쟁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이런 공동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 )상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한국에서 보았던 공동체는 전체 이념이나 사상에 개인들이 맞추어 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스즈까시에서 만들어 가고 있는 공동체는 공동체를 위한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공동체라는 점이 그동안 내가 보아오고 생각했던 한국의 공동체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우리가 일본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우고(채소 자르기, 다케노코 캐기, 세쯔꼬상께 배운 음식, 좋은 생각 등) 얻어 가는 것들에 비해 한 일이 너무 적어 죄송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한 가득이다. 늦게까지 잠도 잘 안자는 데다, 엄청나게 먹어대는 우리들을 늘 즐겁게 보살펴 주던 이요다상 부부와 오노상 부부, 코우타 아저씨, 오벤또야 사람들, 농장 사람들… 그분들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따뜻해진다. 내가 그 곳에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바로 이런 분들과의 따뜻한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따뜻한 관계야 말로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제일 첫 번째가 아닐까.

---

도시락 가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