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 시리즈 3권. 휴거와 내세 중심의 현실도피적 종말론 대신에 현실 변혁과 치유 중심의 예언자적 종말론을 보여준다. 계속되는 팬데믹 사태뿐 아니라 전대미문의 기후재앙들이 더욱 악화되어 지구가 점차 생명이 살 수 없게 바뀌고 있는 암울한 현실 앞에서, 요한계시록을 치열하게 재해석함으로써 인류의 희망을 모색한다.
저자는 계시록이 ‘세계 종말에 대한 예고’가 아니라 오늘날 더욱 절박해진 ‘하느님의 역사 변혁의 꿈들’로 풀어낸다.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당한 소종파들뿐 아니라 대다수 신자들이 묵시록을 ‘세계 종말에 대한 예고’로 믿고, 기후붕괴와 대멸종 사태를 ‘휴거와 천년왕국의 선행조건’으로 믿기 때문이다.
목차
두루마리를 펼치기 전에 __ 11
요한의 묵시록 요약 __ 25
1장. 오, 구름들아 펼쳐져라
요한의 묵시록을 꿈으로 읽어내기 / 29
2장. 슬피 우는 새들
불타는 나무들, 독소로 물든 바다들 / 75
3장. 땅의 아픔들
마지막 기회들의 어머니 / 107
4장. 포도주로 복수하기
거룩하고 치명적인 포도들 / 137
5장. 묵시록의 포르노 여왕
전 지구적 경제의 지금과 그때 / 173
6장. 말씀으로 무기 삼기
두 차례 만찬 이야기 / 203
7장. 땅에 내려와서
도시, 나무, 물 / 243
두루마리를 닫고 / 285
감사의 말씀 /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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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12~13 이제 우리 시대에도 독특한 “묵시 종말적(apocalyptic)” 클라이맥스로 위협당하고 있다. 기후 대파국이라는 클라이맥스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세계의 종말(the End of the World)”이란 말은 대체로 근본주의자들이나 공상과학 소설의 환상 속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지난 세기의 핵무기 경고들을 제외하고는, “픽션”이란 딱지를 붙이지 않은 “현재의 묵시종말”은 단지 히스테리에 걸린 것으로 그냥 무시된다. 그러나 모든 신뢰할 만한 자료들은 현재진행형 시제로 “곤충들의 최후(the Insect Armageddon),” “거주 불능 지구(the Uninhabitable Earth),” “기후 파멸(Climate Doom)”―그리고 물론 “인류세의 종말(Anthropocene Apocalypse)”―을 선포한다. 접기
P. 15 많은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생태학적 붕괴는 아직 멈출 수는 있지만, 뭔가 되돌릴 수 없는 것이 결국 이 세계에 진입하고 말았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서서히 온도가 올라가는 것을 측정할 수 있는데, 그 과정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그게 바로 “세계의 종말”을 가져올 뚜렷한 요소인가? 아니다. 그러나 아마도 “인간 세계의 종말”을 가져올 요소일 수는 있다. 그리고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뛰어 들어왔다. 접기
P. 18 묵시적 종말에 대해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런 대응을 개인적 절망이나 집단적 불가피성 속에서 하지 않도록 막아주며, 무의식적으로 그런 대응이 우리의 경제적 관습들, 민주주의적 혼란과 생태학적 자살로 내닫지 않도록 지켜줄 수 있다. 그처럼 파멸을 향해 스스로 성취하는 예언(the self-fulfilling prophecy of doom)을 멈추도록 할 기회가 우리에게는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멈춤, 곧 그 예언의 자체 실현을 중단시키는 행동을 계속하는 것이 단순한 멸절(annihilation)보다 요한계시록의 본래 의미에 더욱 충실한 것이라고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접기
P. 34 연평균 온도를 파멸적으로 몇 도씩 올리는 지구온난화는 이제 미래를 (비소설적으로 말해서) 최후의 파멸로 확인 도장을 찍는 길에 상당히 올라있다: 홍수, 가뭄, 산불로, 동료 생물종들을 끝없이 멸종시킴으로, 백인우월주의로 증폭되는 인간 대 인간의 조직적 폭력으로, 치솟고 있는 기후에 의한 거주지 이동으로, 그리고 계급적 불의로 치닫고 있다. 환경 대재앙들에 대한 경제적 원인들을 두고서, 그 시민은 이렇게 지적한다: “그토록 적은 수에 의해서 그토록 많은 수에게 그토록 많은 양이 저질러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가 의미한 바는 불과 몇 도의 온도 상승이 아니라, 탄소로 추진되는 고소득을 위해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데 가차 없이 돈을 대고 강요하는 1%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접기
P. 70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인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도록 늘 읽혀질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이 문서에 마음을 집중해야 하는 강력한 이유다. 묵시록은 복음이 아니다. 그러나 묵시록은 그 자체가 불러일으키는 공포를 축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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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심층 해석과 ‘꿈 읽기’를 통해 캐서린 켈러는 우리 시대 최후의 파괴력에 맞서서 요한계시록의 신비하며 무서운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묵시종말이라는 단어가 지닌 계시와 종말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놀라운 발견들로 가득한 탁월한 작품이다.”
- J¨urgen Moltmann
“고대의 묵시종말론과 현대의 묵시종말론이 서로 만나는 역작이다. 켈러는 아무나 흉내낼 수 없으며 절묘한 단어 조립과 ‘꿈 읽기’를 통해서, 점차 짙어지는 암울함을 배경으로 고대의 묵시록을 지렛대로 활용함으로써, 희망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우리들로 하여금 예언자적인 희망을 갖도록 설득시킨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가장 창조적인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쓴 필수적인 책이다.”
- John J. Thatamanil
“묵시란 ‘드러내는 것’이라는 명석하고 넓은 관점에서, 켈러는 오늘날 허무주의, 승리주의, 확실성을 찬양하는 종말론 담론들에 개입한다. 풍부한 상상력과 냉철함, 윤리적 긴박감이 빛나는 이 책은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반드시 읽어야 할 필수 도서이다.”
- Carol Wayne White
“우리 시대의 ‘지나치게 과장된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놀랍게 연주하는 이 책은 요한의 묵시적 세계와 우리의 묵시적 세계 사이의 깊은 패턴들을 드러냄으로써, 점차 거주 불가능한 행성이 되어가고 있는 우리의 지구를 위한 마지막 기회의 가능성으로 우리를 소환한다.”
- 캐스린 태너
“오늘날 생태 파멸적이며 민주주의가 해체되는 시대를 위한 예고 이후의 예언이다. … 켈러는 매우 낯설지만 어느 때보다 더 상관성이 있는 계시록, 즉 우리가 바꾸지 않으면 끝장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책에 대해 섬뜩하게 만들고, 때로 전율시키며 항상 우리의 정신을 사로잡는 예리함을 전해준다.”
- Stephen D. Moore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들 중 한 사람인 캐서린 켈러는 흔히 간과된 계시록의 표징들을 열어젖힌다. 본문과 시대의 표징들을 계시적 긴장관계 속에서 파악함으로써 우리의 현재 순간을 뒤흔든다.”
- Tripp Fuller
종말이 오면 지구는 잔혹하게 파멸되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일까? 기독교인들은 죽은 자는 천국으로 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의 재림을 믿으면서 예수는 이 땅으로 다시 온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 세상을 떠나가고 예수는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켈러에 따르면, 구원받은 자들이 이 땅을 벗어나 위로 들려 빨려 올라감을 뜻하는 “휴거”는 요한계시록에 없다. 세계는 파멸되고 사람이 하나님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계로 내려오셔서 이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신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계 21:5). 켈러는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대체(replacement)하지 않고 갱신(renewal)하시는 것으로 읽는다. 이것은 자연세계를 철저히 회복하는 것이지, 초자연적인 대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녀에 따르면, 요한계시록은 새로운 것들(things)을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롭게(new) 하는 것에 관한 기록이다. 신적인 공간은 탈우주적 공간이 아니라 우주적 공간이며, 새 예루살렘이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 이찬석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이 책은 경이로운 책이다. 감동과 놀라움의 연속을 경험하게 한다. 단순히 요한계시록을 생태-정치적으로 읽고 오늘의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기후위기에 대응하라는 교훈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저자는 ‘묵시종말론을 지워버릴 수 없다면, 그것에 대해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음 집중을 통해 묵시적 종말론의 은유들의 의미가 되살아나온다. 은유와 상징들은 파멸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 세계를 향하는 멈춤의 기회로 받아들여진다. 생태학적 자살을 넘어 새 하늘과 새 땅, 공생공락(共生共樂)의 삶의 축제성을 향하는 미래를 꿈꾸게 한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이해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 홍인식 (한국기독교연구소)
극심한 빈부격차와 젠더차별 구조 속에서 생존하는 것은 이미 많은 이들에게 너무 참혹하다. 기후위기는 생존을 더욱 참혹하게 만들고 있다. 인간이 멸종위기종이 된 비상사태 앞에서, 희망을 말하는 것 자체가 기득권자들의 자기 합리화이며 집단적 저항을 차단하는 수단처럼 보인다. 기독교가 착취와 파괴의 구조악에 편승한 채, 자신들만 초자연적으로 구원받는다는 거짓 희망과 탈정치적 평안을 불어넣는 혹세무민의 종교인지 아닌지 판가름할 기준은 특히 계시록 해석에 달려 있다. 동방교회에서 아직도 예배 중에 계시록을 읽지 않는 이유는 ‘하느님의 어린 양’의 잔인성(계 19장)이 예수와 바울의 ‘자기비움(kenosis)을 뒤엎기’ 때문이다(Karen Armstrong 2019: 228-9). ‘로마제국의 잔인성과 영원함에 대한 정반대와 대안적 미래’로 고백된 ‘처형된 어린 양’이 이처럼 정복자와 대량학살자가 된 것은 초대교회가 너무 처절하게 박해받은 결과일 게다. 이처럼 학살당한 공동체가 꿈꾸었던 최후승리를 문자적으로 읽는 제국주의적 기독교는 심판과 폭력의 종교가 되기 마련이다. 이 책은 계시록에 대한 전통적 해석이 초래한 근본주의자들의 승리주의와 폭력,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의 절망과 체념에 맞서, 인류의 마지막 희망의 신학적 돌파구를 여는 책이다. 한강의 소설들처럼, 아이들까지 학살당한 극한적 고통을 견디며 해산하는 저자의 몸부림이 절절히 느껴지는 책이다.
- 김준우 (무지개신학연구소)
저자가 포착한 요한계시록의 일곱 장면 가운데 하나는 해산의 진통을 하는 여인이다. 이 여인의 진통에서 기후위기 시대의 아픔을 보고, 그녀의 투쟁에서 묵시적 현실의 마지막 기회를 찾는다. 가부장적 힘의 문명이 간과해 온 요한의 비전, 로마제국의 잔인한 어둠 속에서 그가 본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열두 개의 별이 박힌 월계관을 쓴 여인의 우주적 산고’는 이 책에서 시적인 언어를 입고 오늘의 위기와 모험으로 재연된다. 잡힐 듯 말 듯 이어지는 리듬을 타고 증폭된 상상력은 놀랍게도 현실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용을 피해 달아나는 이 여인의 몸부림치는 가능성을 광야에서 그녀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살려낼 수 있을까? 저자는 묻는다. 이 묵시종말적 현실에서 과연 어떤 새로운 백성이 태어나며, 어떤 투쟁이 이어질 것인지.
- 김희헌 (향린교회 담임목사)
“도대체 왜 기독교 역사의 대부분을 통해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믿었던 신앙이 단순히 삶 자체(life itself)에 대한 희망이라기보다는 내세(afterlife)에 대한 희망인가?”(1994: 331). 몰트만이 <희망의 신학>에서 주장한 현실변혁적 종말론을 구체화한 켈러의 이 질문은, “마지막 또는 궁극”을 뜻하는 종말(eschatos)에 관한 신학적 논의를 획기적으로 바꾸어놓은 질문이었다. 이 질문을 통해 켈러는 휴거와 영혼 부활과 천국 같은 내세 중심의 종말론에서부터, 현재의 생명 중심의 종말론으로 그 방향을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인류가 집단적으로 당면한 핵전쟁과 기후위기 때문이다. 켈러에게 신앙과 신학은 불의한 현실을 포기하고 내세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찾기 어려운 현실을 마지막 순간까지 치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켈러가 특히 계시록의 묵시종말론과 계속 씨름하는 이유는 그 묵시종말론 담론이 매 시대마다 다른 모습으로, 즉 도착적으로 혹은 퇴행적으로 정치적 남용을 겪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말이다. 그 와중에 망각되는 것은 우리가 매 순간 종말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시작을 개시하고 있다는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순수한 진실이다. 계속되는 팬데믹 사태와 기후변화, 그리고 생태 위기가 가중되는 시대, 여섯 번째 대멸종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시대에 ‘종말’이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고, 또 교회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 책을 통해 정독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그 종말의 기호들은 모든 것이 멸망하고 파괴될 것을 예언하는 대신, 자본주의의 폐허 아래서 피어나는 버섯의 생명력(안나 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실패해왔던 문명의 노력들을 가리키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이 종말론적 언어로 위기를 강조하며, 생태운동을 촉진하려 해왔던 우리들에게 새로운 언어의 가능성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 박일준 (감리교신학대학교 연구교수)
저자 및 역자소개
캐서린 켈러 (Catherine Keller) (지은이)
드류대학교의 구성신학 교수로서, 요한계시록 해석의 세계적인 전문가이다. 하이델베르크대학교, 에덴신학교, 클레어몬트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동서냉전 체제의 핵무기 경쟁과 함께 세계경제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인류세(Anthropocene)가 본격화되었고, 결국 인류는 두 가지 절박한 위기들에 직면하게 되었다. 핵전쟁 위기와 생태계 파괴와 기후변화로 인한 대멸종 위기다. 켈러는 휴거와 내세 중심의 현실도피적 종말론이 아니라 현실 변혁과 치유의 예언자적 종말론을 제시한다. 또한 성차별, 인종차별, 경제적 불의, 민주주의의 해체 위기 등 긴급한 문제들에 대해 과정신학, 여성신학, 생태신학, 정치신학의 관점에서 치열하게 접근하여 오늘날 가장 창조적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발표한 저서들은 From a Broken Web: Separation, Sexism and Self(1988), Apocalypse Now & Then: A Feminist Guide to the End of the World(1996), Face of the Deep: A Theology of Becoming(2003), God and Power: Counter- Apocalyptic Journeys(2005), On the Mystery: Discerning God in Process(2007, 박일준 역, 『길 위의 신학』, 동연, 2020), Cloud of the Impossible: Negative Theology and Planetary Entanglement(2015), Incarnations: Exercises in Theological Possibility(2017), Facing Apocalypse: Climate, Democracy, and Other Last Chances(『묵시적 종말에 맞서서』, 한국기독교연구소, 2021), 그리고 이책 Political Theology of the Earth: Our Planetary Emergency and the Struggle for a New Public(2018, 박일준 역, 『지구정치신학』, 대장간, 2022)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지구정치신학>,
<묵시적 종말에 맞서서>,
<길 위의 신학> … 총 45종
(모두보기)한성수 (옮긴이)
서울문리대 물리학과, 감신대, 예일대, 뉴욕 유니온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미국 연합감리교회에서 은퇴했다.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참사람: 예수와 사람의 아들 수수께끼』, 『무신론자들의 망상』, 『내 몸과 영혼의 지혜』, 『지구를 공경하는 신앙』 등 10여 권을 번역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