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5

Kyusik Ahn - 이번 학기에는 [한국문화신학사>를 강의한다.

Kyusik Ahn - 이번 학기 강의계획서들을 모두 올렸다. 특히 이번 학기에는 대학원에서 <한국문화신학사>를... | Facebook


이번 학기 강의계획서들을 모두 올렸다.
특히 이번 학기에는 대학원에서 <한국문화신학사>를 강의한다.
한국신학자 라인업은 다음과 같다.
1. 서양과 동양의 철학과 종교를 창조적으로 종합하여 ‘하나’(一)를 추구한 통전적 그리스도교 사상가 다석 류영모.
2. ‘역사적 실재’라는 신학적 물음을 안고 국가 폭력의 시대에 그리스도교는 ‘한(恨)의 사제’가 되어야 함을 주창한 민중신학자 죽재 서남동.
3. 변방(marginality)의 신학자로서 기독교 삼위일체를 동아시아의 주역(周易)을 통해 전개한 민들레 이정용.
4. 풍류(風流)를 통해 아름다움과 초월을 담아내어 한국기독교 신학을 풍류신학으로 정초한 소금 유동식.
학부 강의에서는 이 2배가 되는 신학자들(길선주, 김재준, 박형룡, 안병무, 이용도, 정경옥 등을 더 포함)을 한꺼번에 다루었지만,
대학원 수업인지라 각 신학자들에 대한 깊이 있는 발제와 강독과 토론이 필요하기에 4명으로 줄였다.
특히 이번 학기 한국문화신학사 강의에는 우리 학교에서 전에는 다루지 않았던 신학자가 포함되었는데, 바로 이정용(1935∼1996)이다.
우리 나라에는 <마지널리티>(포이에마)라는 책으로 소개가 되었고, 가장 최근에는 그의 The Trinity in Asian Perspective(Abingdon Press, 1996)를 번역한 <삼위일체의 동양적 사유>(동연), <易과 모퉁이의 신학>(동연)이 소개되었다.
한국에서는 잘 안알려져 있지만 미국에서 종교학과 조직신학 분야에서 그의 학문적 업적과 인지도는 높다.
그리고 이정용은 이 네 사람 중 나에게 가장 인간적으로 끌리는 사람이다.
그는 정말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교회로부터 가장 많은 상처를 받았다.늘 신학자가 아닌 목사가 되고자 했던 그는 성품이 순진해서 목회 도중 많이 속고 배신도 당하는 아픔을 겪지만, 미국에서 교포들과 이주민 여성들을 섬기는 여러 교회를 개척하면서 동시에 신학자로도 왕성한 활동을 한다.
그에 대한 한 재미있는 예화가 있다. 그가 무속 연구를 위해 한국에 방문했을 때, 무당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의 개인사를 모르는 그 무당이 그에게 한국에 오지 말고 미국에 그냥 있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그는 마치 개울가에 있는 고래와 같다며 태평양처럼 넓은 바다로 가라 했다는 것이다. 당시 그는 귀국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는데, 결론적으로는 그는 미국에 남았고 지금처럼 세계적인 한국인 신학자로 남아있다.
그 외에 서남동, 유동식, 그리고 류영모도 그 생애와 사상이 매우 독특해서 한 학기 동안 푹 빠져볼 생각이다. 이들의 사유가 한국교회와 한국신학에 소중한 얼줄로 깨닫게 되는 때가 오길 기대해 본다.
*사진은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정용, 서남동, 류영모, 유동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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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Taechang Kim, Philo Kalia and 81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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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멋진 강의 듣고싶네요
응원합니다.
Kyusik Ahn
심광섭 늘 응원하고 지지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교수님!!
Taechang Kim
즘으로 들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언제일지 모르지만 형편이닿으면 강의실에 가서라도 말씀을 듣게될 기회를 찾아보아야겠습니다.
Kyusik Ahn
Taechang Kim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수업은 아니더라도 다른 기회에 줌에서 꼭 뵙길 기대해 봅니다. 교수님!
Bang Joo Chin
참으로 귀하고 꼭 필요한 강의를 맡으셨네요. 건강하세요. 샬롬
Kyusik Ahn
진방주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창훈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연세대 조직문화신학 석사 졸업생입니다. 다석 유영모와 이정용 교수님의 신학으로부터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영향을 받은 한 사람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데 그 분들의 신학을 가르쳐주신다니 너무 귀한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청강하고 싶습니다. 너무 멋진 강의를 해주셔서 감사드리고 기도하겠습니다!
3
Kyusik Ahn
이창훈 네 선생님~!! 응원 감사합니다~ 저도 촤선을 다하겠습니다!

안규식, 비움과 숨 - 한국적 영성을 위한 다석 류영모 신학 연구

Taechang Kim

얼숨을 체감 체득하게 되는 것은 나 자신의 경우에는 80대에 들어 서면서 체감하게 된 새로운 체험이었다. (자기)비움이란 (자기)가 쌓어온 앎과 젖어온 감과 길러온 뜻을 공으로 돌리고 몸맘얼숨의 상통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우주적 숨힘이 개체적 숨힘을 가온찍기-가온뚫기-가온열기하는 작동실상에 눈뜨게되고 알아 깨닫게되어 생명개신의 맛과 멋과 흥이 체화(=육화)되어감이라고 여겨지는데 다석신학은 어떻게 전개되고 발전되고 정리되는지 궁금하다.
우선 비움과 숨쉼의 동태와 정태를 다석에 따라 나름으로 새겨 밝히려는 안규식교수님의 앎과 감과 뜻의 삶길을 살펴보자.
===

Taechang Kim
4 h ·
이른 새벽 눈뜨자 홀연히 생명감각에 공명파동으로 울려온 안규식
철벗의 글귀 한 마디:
다석의 수행에서 더욱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아름다움의 차원이다. 다석의 수행은 몸의 근원적 욕망과의 대결이면서, 동시에 이 세상이 추구하는 망상과 허구인 탐욕, 싸움, 어리석음과의 대결이었다. 다석은 이 망상과 허구의 아름다움을 좇는 거짓 주체를 제나
혹은 몸나라 불렀으며,
무와 공의 수행적 삶을
통해 형성되는 참 주체를 참나로 표현했다.
이로써 다석은 세상의
'허구적'(pseudo)아름다움과 대결하는 수행을 통해서 얼의 아름다움을 들어낸다. 다석은
이 아름다움을 간절히
사모했고 그 것을 공이라 불렀다. 다석이 사랑한 공은 '아름다움 그 자체' 였으며, 이 것은 이 세계의 상대적인
'아름다운 것들' 을 궁극으로 부정해 나가면서 드러나는, 하지만 그 자체에는 결코 완전히 도달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다산은 자신이 사모한 절대적인 공을 하느님이라 불렀다. 따라서 다석의 수행과 삶은 공의 '아름다움 그 자체와 하나 되기 위한 그리고 하나됨을 통한 얼
(혹은 霊)의 예술 행위라 말할 수 있다.
(《비움과 숨》13쪽 )
얼이란, 저 자신의 삶살이를 통해서 체감 체험 체득한 바로는 뿌리바탕(바탈)되는 숨힘이다(한자어로는 生만이 아닌 生命 生霊 生気). '얼의 아름다움' 이란 바로 "숨힘의 아름다움" 이요 "숨힘의
아름다움은 사람과 모든 산몬(생명체.)들의
숨힘을 새롭게 열어
그 어느 것에나, 그리고 그 어느 곳에나 묶여지고 닫혀져 낡게 되지 않고 늘 싱싱하게 새로움을 견지해 갈 수 있게 해주는 바탈힘이다. 이 것이 나 자신이 말해온 "生命開新美学- 美覚- 美活"
(숨힘의 새밝힘 새엶 새돋움)의 속알이다.
안규식 철벗의 다석
미해석이 나 자신의
숨힘의 새엶의 아름다움해석과 상통하는 것이라면 새로운 사람삶모습(인간상)으로서의
"함께 공공하는 미학-
미각-미활인"의 한국인의 한분으로 다석 유영모를 내세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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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비움과 숨
비움과 숨 - 한국적 영성을 위한 다석 류영모 신학 연구

안규식 (지은이)동연출판사2024-01-16







576쪽


책소개
‘비움’과 ‘숨’으로 하나님과 ‘하나’(一)가 되고자 했던 다석 류영모의 사상을 그리스도교 신학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우리 시대를 위한 한국적 영성을 담은 신학으로 구성하기를 시도한다. 한국인의 영성은 무엇이며, 한국 신학이란 무엇일까? 오늘날 다석 류영모의 신학은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으로, 이 책은 다석 류영모의 신학 사상을 신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삼위일체론, 인간론의 그리스도교 신학 범주에서 체계화하여 종합적인 다석 신학(多夕 神學, Daseok theology)으로 제시한다.


목차


추천의 글
머리글

1장│한국 신학과 다석 류영모
I. 신학이 태동하는 자리
1. 신학의 구성 요건
2. 한국 신학의 특징
II. 한국 신학으로서 다석신학의 적합성과 가능성
1. 한국 신학의 과제와 다석신학
2. 후기-그리스도교 신학의 구성 ― 한국 신학, 변증 신학, 통전 신학
3. 한국적, 변증적, 통전적 신학으로서 다석신학
4. 다석신학의 구성
III. 다석신학의 연구 자료와 동향
1. 연구 자료
2. 연구 동향
IV. 다석신학의 연구 방법
1. 문헌 연구 방법론
2. 비교 융합 방법론
3. 지혜 신학 방법론
4. 통전적 구성 방법론

2장│세계와 합일하는 하나(一)의 신
I. 다석 신론의 형성 배경
II. 다석 신론의 쟁점: 신과 인간의 관계성 그리고 수행
III. 고난을 통한 초월적 내재로서의 한웋님
1. 일반적 의미
2. 부자유친의 효신학 ─ 신의 초월성에 기초한 수신적 신론
3. 머리골에 나려 계신 하나님 ― 신의 내재성에 기초한 수행적 신론
IV. 없이 계신 님: 자기 부정적 해체를 통한 신의 비실체론적 자기 계시
1. 없이 계신 하나님의 실체론적 이해와 비실체론적 이해
2. 더 큰 있음이 아닌 한없이 큰 것으로서의 ‘없음’
3. 개방성과 무규정성으로서의 없이 계신 하나님
4. 생성과 비시원성의 없이 계신 하나님
V. 절대공(絶大空)과 븬탕
1. 빔의 역설적 충만
2. 주체의 변형으로서 수행
VI. 하나(一): 신과 세계의 합일과 양방향성의 역동
1. 무극이태극의 신
2. 귀일과 유출
3. 가온찍기()와 수축
VII. 신비주의적 신론
1. 다석과 에크하르트
2. 신비주의적 언어관
3. 무로서의 신과 여공배향
VIII. 의 신론
1. 한아
2. 한늘
3. 한
4. 한님
IX. 은유 신학으로서 어머니 신론: 없이 계신 엄

3장│‘그리스도록’, 믿는 자들의 정체로서 그리스도
I. 다석 그리스도론의 형성 배경
1. 망국의 현실과 새로운 주체성의 요청
2. 견성과 부자유친
3. 에크하르트와 톨스토이
II. 다석의 그리스도교 신앙 정체성 문제
1. 다석과 종교다원주의
2. 다석의 그리스도교 신앙 정체성
III. 얼 그리스도론
1. 얼
2. 얼에서 그리스도로
IV. 효 그리스도론: 관계론적 구원의 한국적 이해
1. 효의 대속적 이해
2. 뫼신아달 예수의 효
3. 양언선 양아의
4. 천직과 고디의 대속론
V. 사람됨으로 태어나는 그리스도: 다석과 에크하르트의 독생자론 비교
1. 그이의 독생자론
2. 하나님 아들의 탄생과 한 나신 아들
3. 초탈과 ‘그리스도록’

4장│ ‧ 숨 ‧ 김
I. 다석 성령론의 구성 배경 ― 유교, 도교, 동학을 중심으로
II. 다석 성령론의 쟁점: 영(靈)의 포괄적 활동으로서 성령의 현존
III.  성령론
1. ‘깨끗’의 성령, 
2. 인간 바탈로서의 性靈
IV. 숨 성령론
1. 포괄적 생명의 숨님
2. 상징과 은총을 통해 현존하는 진리의 숨님
3. 격물치지성령지 그리고 모름지기
4. 궁신지화
5. 수믄 님: 감춤으로 드러나는 신비의 영
V. 김 성령론
1. 기(氣)로서의 성령
2. 수심정기(守心正氣)와 지기(至氣)
3. 영의 비인격성과 인격성의 역설적 통합

5장│다석의 삼재론적 삼위일체론
I. 다석 삼위일체론의 구성 배경과 체계
1. 삼위일체론과 3수 분화의 삼재론적 세계관
2. 다석 삼위일체론의 구성 체계
: 구원의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내면성과 정체성
II. 다석의 삼재론적 삼위일체론의 내용
1. 참, 빛, 나: 지성적 삼위일체론
2. 터 ‧ 때 ‧ 삶: 의 삼위일체론
3. 양언선 양아의: 비움의 삼위일체론
4. 성언: 사랑의 삼위일체
5. 통전적 구원의 삼재론적 삼위일체론

6장│다석의 수행-미학적 인간론
I. 다석 인간론의 수행-미학적 구성
II. 다석의 수행적 인간론의 토대: 참나
1. 초월적 만남의 주체로서 참나
2. 유교 수행 맥락에서의 참나
3. 불교 수행 맥락에서의 참나
III. 다석의 수행적 인간론의 특징
1. 초월적 내재
2. 성례
3. 금욕
4. 생각
5. 씨알
IV. 비움과 영의 아름다움

7장│후기-그리스도교 시대의 다석신학
I. 세속화와 탈서구화 시대
II. 후기-그리스도교 신학으로서의 다석신학
: 한국 신학, 변증 신학, 통전 신학
1. 한국 신학으로서 다석신학
2. 변증 신학으로서 다석신학
3. 통전 신학으로서 다석신학

8장│결론: 다석신학 연구에 대한 평가와 전망
다석신학, 한국적 영성에 나타난 하나님의 얼굴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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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차례>
표 1: ‘쇠북소리와  울림’의 『주역』을 통한 삼위일체론적 구성
표 2: 다석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성적 삼위일체론 비교
표 3: 삼위일체론 비교

<그림 차례>
그림 1: 1971년 12월 9일 다석일지 106
그림 2: 1956년 11월 18일 다석일지 160
그림 3: 1960년 6월 14일 다석일지 172
그림 4: 1959년 5월 22일 다석일지 182
그림 5: 1959년 6월 25일 다석일지 217
그림 6: 1955년 12월 11일 다석일지 295
그림 7: 1955년 5월 22일 다석일지 471
접기


책속에서


이 책은 다석 류영모의 신학을 한국의 얼 생명, 곧 ‘한국적 영성’을 표출하는 한국 신학으로, 역사의식을 갖춘 변증 신학으로 그리고 동양 종교 사상들과 서구 신학들과의 ‘비교’와 ‘대화’를 통하여 다양성 속에서 역동성을 가진 일치를 위한 통전 신학으로 규정하고, 다석신학의 내용들을 그리스도교 조직신학의 체계를 따라 신론, 그리스도... 더보기
김흡영은 다석이 허상인 현상세계인 ‘있음’보다 “더 큰 실재”라 할 ‘없음’의 신학을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김흡영은 다석의 ‘없음’은 ‘있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있음’ 그 자체에 대한 더욱 폭넓은 이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없이 계신 님’이라는 신명칭은 ‘있음’(有)과 ‘없음’(無)을 초월한 맨 ... 더보기
하나님의 자기 양여로 인해 인간은 자신을 초월적 존재에 근거한 ‘참나’로, 그러나 동시에 절대자와 무한한 질적 차이를 가진 ‘제나’로 경험한다. 결국 귀일신학의 핵심은 하나님의 자기 양여로 인한 인간의 초월적 근거와 더불어 인간과 하나님의 질적 차이에서 오는 귀일의 추동, 다석의 용어로는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으로서 이를 통한 ... 더보기
은유의 변화를 통한 신론의 재구성, 곧 전통적인 남성 중심적 은유의 한계를 보완하는 여성적이고 몸적인 은유를 제공한다는 맥락에서 다석의 신론 중 눈여겨 볼 수 있는 내용은 바로 어머니 신론이다. 샐리 맥페이그의 주장처럼, 하나님을 어머니로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을 어머니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성과 결합된 어떤 특성... 더보기
동양적 사유에서는 영과 물질을 분리할 수 없다. 영과 물질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면서 동일한 존재의 다른 두 양태라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으로서 기는 만물을 창조적이면서 살아 있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질은 영 안에 존재하고 영은 물질 안에 존재한다.” 또한 보편적이면서 생명의 본질이 되는 기...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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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서양 그리스도교 너머의 신학, ‘다음의’(post) 신학이 필요한 것이 우리의 종교적 실존의 자리이다. ‘다음의’ 신학을 하기 위해서 저자는 다석 ‘이전에’ 놓였던 사상의 전통과 지극히 충실하고도 깊은 대화를 시도한다.
저자의 다석 신학 연구는 이전의 김흥호, 박영호, 이기상, 박재순, 이정배, 김흡영 등이 이룩한 선행 연구의 비옥한 결과물에 충실하게 뿌리 내리고 있다. 그는 편벽함 없이 경청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 깊은 자리에서 생각해 내고 길어 올린 사유의 창조성 곧 ‘제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렇기에 저자가 그려낸 다석 신학의 고아(古雅)한 풍경은 류영모의 사유이며, 류영모의 제자들의 사유이며, 또한 안규식 자신의 사유이다. 한국적 영성(韓國的 靈性)을 탐구하고자 하는 모든 이 땅의 학인(學人)들에게 그의 저서는 본격적인 다석 신학의 연구서로서 앞으로 오랫동안 길잡이 역할을 할 것이다.
- 손호현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




저자 및 역자소개
안규식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충남대학교 사학과(B.A.)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종교사회학(M.A.)을 전공했다. 연세대학교에서 한국의 그리스도교 사상가인 다석 류영모의 신학을 주제로 조직·문화신학 박사학위(Ph.D.)를 받았으며,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한국신학과 조직신학 그리고 기독교의 이해를 가르치고 있다. 연세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전문연구원,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비움과 숨 - 한국적 영성을 위한 다석 류영모 신학 연구』,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들 Ⅱ』(공저), 번역서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다: 고린도전서』, 『바울이라는 세계』, 『어둠을 끊어 내다: 고린도후서』, 『신학의 역동성』(공역)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비움과 숨>,<우리 시대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들 2> … 총 1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2008년 “제22차 세계철학자대회”가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서울에서 열렸다. 이때 주최 측은 한국 사상가와 철학자로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다산 정약용, 다석 유영모와 씨ᄋᆞᆯ 함석헌을 선정하였다. 세계철학자대회(World Congress of Philosophy)는 1900년부터 개최된 명망 있는 국제적인 철학 학술대회이다.
다석 류영모의 사상이 이제는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K-문화가 세계적 각광을 받으면서 외국인들은 물론이고 한국인들도 “한국 사상이란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한편, 과연 그 사상의 근저에 어떤 사상의 전통과 인물은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일었다. 그 흐름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다석 류영모 사상’이다.
한국의 고유 사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많았다. 더구나 중국을 통해 영향받은 바가 많은 지리적 특성상, 불교, 유교, 도교를 포함한 사상과 문화도 중국의 영향이 지대하였다. 또 우리의 일상 언어는 고유어로 쓰면서도 공식 문서나 사상을 담은 글은 모두 한자어로 사용함으로써 우리 고유의 사상을 변별해 내기가 수월하지 않았고, 심지어 일부에서는 우리 고유 사상이란 게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미국, 독일, 영국 등 서구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될 때, 특히 박사과정에서 이제 서구에서 생각하고 바라보는 신학이 아닌 자체의 사고와 문화의 틀로 신학적 해석을 해보라고 할 때면, 문득 우리 고유의 생각이나 신학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한국적인 유-불-선과 민간 신앙을 찾기도 하고, 민중신학적 틀을 다시 꺼내게 되고, 또 다석을 찾아내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다시 묻게 된다. 한국적 신학이란 무엇인가?

무한한 허공에 비해 찬란한 이 세상은 무(無)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았던 사람. 치열하게 자기 내면을 뚫고 뚫어 ‘비움’의 자리에서 ‘없이 계신’ 하나님과 간절히 ‘하나’(一)가 되고자 했던 사람. 앎의 ‘빛’이 아닌 모름의 ‘어둠’에서, 의식의 ‘낯’이 아닌 무의식의 ‘저녁’에서 숨어있는 진리의 숨소리를 들었던 사람. 이 사람이 한국의 그리스도교 사상가 다석 류영모(多夕 柳永模, 1890-1981)이다.
이 책은 ‘비움’과 ‘숨’으로 하나님과 ‘하나’(一)가 되고자 했던 다석 류영모의 사상을 그리스도교 신학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우리 시대를 위한 한국적 영성을 담은 신학으로 구성하기를 시도한다. 한국인의 영성은 무엇이며, 한국 신학이란 무엇일까? 오늘날 다석 류영모의 신학은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으로, 이 책은 다석 류영모의 신학 사상을 신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삼위일체론, 인간론의 그리스도교 신학 범주에서 체계화하여 종합적인 다석 신학(多夕 神學, Daseok theology)으로 제시한다. 더 나아가 이 책은 ‘호모데우스(Homo Deus)’의 초월적 인간을 꿈꾸면서도 초월 그 자체는 부정하여 존재의 의미와 근거를 상실해 가는 세속화의 시대이자 탈 서구와 탈 그리스도교 시대라는 상황 속에서, 새롭고 통전적인 신학적 담론을 요청하는 이른바 ‘후기-그리스도교 시대’(post-Christian era)를 위한 신학으로 다석 신학을 내세운다.
이 책이 보여주는 후기-그리스도교 신학으로서 다석 신학은 그동안 주류 담론이 배제해 온 ‘변방의 목소리’들을 되살려내어 더욱 개방적이고 계시적인 궁극적 실재를 그려내는 통전적 신학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땅’을 신학의 근원으로 삼고 자기 비움의 고난을 매개로 천-지-인 합일을 추구하는 한국적 신학, 허무주의와 분열이라는 인간 실존과 세계의 부정적 경험들에 신학적 진술로 대답하는 변증적 신학, 무엇보다 다양성 속의 일치를 추구하며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의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신(天)-세계(地)-인간(人)을 통전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이루어진다.
이 책은 한국적 영성과 한국 신학의 가능성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 다양한 종교 전통과 그리스도교 신학 사이의 대화를 통해 주어지는 개방적이고 통전적인 신학을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들, 다석 류영모의 종교적 사유가 지닌 깊이와 풍부함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저자가 내놓는 다석 신학에 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서이다. 접기






이 책은 기존 다석 연구자인 박재순과 이정배, 김흡영과 윤정현, 최인식의 책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다석을 이해하는데 있어 저자 안규식만의 참신한 생각과 주장이 포함된 것이 매력이다. 목차의 글자가 작고, 인명색인이 없는 부분이 아쉽지만, 다석에 대한 명저 중 한 권으로 남을 것이다.
아하브 2024-01-28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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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신학을 삶으로 보여준 다석을 연구한 학술서이며 조직신학, 특히 구성신학적 측면에서 다석의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입니다. “한국인들이 고백하고 이해하는 신앙이 문화-이식적이지 않고 자생적일 수는 없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하나의 명쾌한 대답이 될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감자오빠 2024-01-23 공감 (1) 댓글 (0)
몸숨과 맘숨보다 더 깊고 진한

오강남 교수의 종교다원주의적 기독교를 평가한다 < 설교마당 < 연재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오강남 교수의 종교다원주의적 기독교를 평가한다 < 설교마당 < 연재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오강남 교수의 종교다원주의적 기독교를 평가한다
오강남 교수의 논리적 허구를 밝힌다
기자명 성기문
승인 2001.08.24 


(저자주: 오강남 교수의 책에 대한 평가를 준비하다보니, 어느 덧 한 달이 다 지나갔다. 그 와중에 이 작업을 빨리 마무리지을 수 없는 상황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오강남 교수의 '종교다원주의' 신드롬이 잠잠해질 무렵에 이 글을 내놓는다는 것이 다소 신선감(?)은 떨어지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반드시 다루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늦게나마 이 글을 독자들에게 내어 놓는다.)

서론
知己知彼면 百戰百勝!?

우선적으로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염두에 두면서 본인의 서평을 읽어주길 바란다.
1) 우선 나의 입장이다. 서평자는 성경신학을 10여년 연구한 복음주의적 구약학도로서, 기독교의 절대적 진리를 믿는 입장에서 오강남 교수의 글을 읽고 평했다.
2) 서평자를 포함해서, 하늘 아래 그 어떤 사람도 그 논리가 철저하게 완벽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저자가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스스로 완벽한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 속에 다소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논리적 진리와 허위가 항상 함께 한다는 점을 모든 독자들은 인정하길 바란다. 누구의 논리든지 독자는 항상 저자와 함께 대상을 읽고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멀리 서서 그 이론을 객관적으로 이성적으로 사고하려고 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가 진리의 잣대로 상대방을 전면부정하든지, 자신의 잣대로 자신을 완전히 긍정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서평자는 그러한 입장과 기준과 전제하에서 오강남 교수의 글을 읽고 거기에 나타나는 장단점들을 찾아보려고 했다는 점을 밝힌다. 결론적인 이야기지만, 오강남 교수의 성경해석에는 문제점이 있으며 비논리적인 부분이 많이 드러나기 때문에,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오히려 실망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서평자의 결론적 판단을 가능한 한 오강남 교수의 글에서 세부적으로 독자들과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한다. 본 서평은 전반적으로 주제별로 다시 재배열 정리하기보다는, 대부분 순차적으로 논의하려고 한다.

진실을 찾아서...
필자가 보기에, 오강남 교수의 주장들 중에 다음의 몇가지는 매우 정확하고 정당한 평가라고 본다:
첫째로, 소위 보수적 신학대학원과 교회들에 신앙적 자유가 허용되지 않고 교권주의의 자의적 잣대로 내려지는, 출교(黜敎)나 이단, 자유주의의 정죄선언이 넘쳐난다는 저자의 주장(p. 34)은 사실이다. 물론 사람들마다 동의할 수도 있고 동의할 수 없을 수도 있는 일이긴 하지만.
둘째로, 저자가 인정하듯이, 성경의 자귀(字句)에 연연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자들이나 근본주의자들 모두 문자주의적 오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다(p. 29). 그러나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들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문자주의가 아니다. 인간의 모든 말과 문헌들이 그렇듯이, 성경의 자구도 100%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아이러니하게도, 근본주의 기독교를 비판하기 위해서, 오강남 교수 자신도 스스로가 '문자주의의 오류에 빠져 있다고' 비판한 자유주의적 신학의 결과물들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혹은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이 점은 차차 논하기로 한다.
셋째로, 저자가 주장하듯이, 하나님의 <창조론>을 믿는 자들이 환경오염의 주범 내지는 공범(지난날 소위 보수적 교회들이 앞 다투어 행했던, 그린벨트의 훼손, 땅투기 등)이라는 점은 보수적 기독교의 추한 진실을 말해주는 일면이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p. 78). 마치 한때 목회자들의 사모들이나 기독교인들이 낙태가 피임의 한 종류로 여겨 낙태시술을 이용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무신론자들이나 타종교인들이 오히려 지구를 사랑하고 기독교인들이 지구를 미워(?)한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또한 정통기독교인들이 섹스와 돈과 물질과 명예라는 잡신들을 섬기면서 말로는 유일신론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모순이다(pp. 131ff.). 그 점에서 오강남 교수의 지적은 정당하다. 마치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배금주의와 기복주의로 교회가 물드는 것과 비슷한 경우다.
마지막으로, 결과적으로 그 의도야 어쨋든, 오강남 교수의 도전은 한국교회의 "근본주의적" 신앙관에 "신선한 그리고 치명적인" 충격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반성과 개혁의 정당한 몫은 오강남 교수보다는 기독교의 <절대적 진리>를 믿는 우리에게 있다고 서평자는 믿는다.

오강남 교수의 '종교다원주의의 기독교'관의 대해부(大解剖)!

상업주의는 못말려!
물론 오강남 교수의 종교다원주의적 기독교론을 이해하는데 중요하지 않은 요소이긴 하지만, 특유의 판촉용(?) 과장적 표현이 우선 눈에 거슬린다. 겉표지의 문구에 따르면, 본서가 수십년 혹은 심지어 수백년된 여러 가지 학설들과 이론들을 개괄적으로 정리한 책으로, 마치 "필생의 연구 끝에 찍은 마침표"라고 규정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독자들은 서평자의 이야기를 인내를 갖고 더 살펴보아야 본서에 장식되어 있는 <상업적 문구>의 진위를 정당하게 평가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1. 일반적 방법론의 오류
세부적으로 언급하기에 앞서서, 오강남 교수의 논의방법론상에 문제점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개괄하고자 한다.

그는 논증에 있어서, 이성의 종교와 체험의 종교를 오고간다. 즉 서로 부합하지 않으며, 피상적인 유사상만 존재할 뿐인, 이성적 종교(서양의 합리주의적 기독교)의 방법론과 체험적 종교(동양의 신비주의적 종교)의 방법론과 목표를 혼용하기도 하고 번갈아가면서 사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법론상의 혼돈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이 타력구원적인 기독교와 자력구원적인 동양의 종교들간의 작위적인 유사점 찾기와 기독교에 대한 비판에만 몰두한다는 비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문제점들이다. 모든 종교는 혼합되어야 한다거나 기존의 기독교는 타종교에 비해서 열등(劣等)하고 모순(矛盾)된 것이라는 전제를 갖고 접근하는 것 같은 인상을 남긴다. 즉 서양의 합리주의의 산물(특히 역사비평적 방법론)로 전통기독교의 경전의 허구와 모순성을 비판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성경과 기독교를 재구성하고, <종교다원주의적 해석>을 시도할 때는 동양의 체험주의의 산물로 관찰하며, 기독교와 동양종교를 선택적으로 통합시키려 한다. 서평자가 보기에, 저자의 책은 차라리 두 권으로 나눠서, <종교다원주의 개론>과 <서구합리주의적 입장에서 본, 근본주의적 기독교의 성경의 해석학적 모순>을 다루는 책들로 출판하였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문화사대주의(文化思大主義)?
이 말은 독자들로 하여금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종교다원주의는 문화상대주의 아닌가? 그러나 서평자가 보기에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저자의 글에서 서평자는 그 자신도 <서구문화사대주의> 혹은 <절대주의>의 잣대에서 한국의 ‘근본주의’적 기독교를 평가하는 버릇을 발견한다. 마치 한국교회의 부흥사들이나 일부 목사들이 미국을 유토피아시(視)하는 것이나 복음화가 마치 서구적 문명화의 척도인 것처럼 말하는 것과는 반대로, 오강남 교수는 합리주의에 근거한, 현재 서구문명이 갖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혐오 혹은 냉소주의, 혹은 무관심을 '성숙한' 믿음으로, 그와는 반대로,‘미국 선교사의 영향을 받은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나라’의 근본주의적 믿음을 '미숙한' 믿음으로 나누는 양극화하는 기계적 도식화를 전제로 하여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다(p. 28, 313).

현재 '꽉 막힌 기독교'는 유럽이나 미국동부에서는 보기 드물고, 오로지 미국에서도 교육수준이나 경제상태가 지극히 저급한 남부일부 지역, 그리고 이 지역출신의 꽉 막힌 선교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한국,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일부 피선교지에서나 서식하는 기형적 현상이다(p. 298).

물론 서구에 살든지, 아프리카에 살든지, 교육과 문화적 성취와는 무관하게 근본주의적 믿음을 고수하는 자들의 경우도 많이 나타난다는 점(이것은 필자의 경험이다)은 믿음의 내용에 대한 다른 평가와는 무관하게 오강남 교수의 전제와 평가가 과연 옳은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성경은 오히려 율법주의적인 신앙(십일조나 안식일, 의식을 절대시하는 신앙적 경향성)을 믿음의 초보로 여기며 스스로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자유함을 택한 믿음을 어른의 믿음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도 인정하듯이, 근본주의나 자유주의나 심지어 종교다원주의적 믿음도 신앙체계이며 철학적 세계관이라는 점이 자주 간과되고 있다는 점도 밝혀야 한다. 종교가 말하는 바는 역사적 실체보다는 경험과 지향하는 목표라고 한다면, 기독교뿐만 아니라, 종교다원주의 자체도 상대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같고 각 종교의 독특성은 지엽적인 것이며 상대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종교다원주의의 믿음이지, 그것이 보편 타당한 진리로 입증되었거나 사회의 구성원들이 아무런 반대없이 받아들여야 할 사회규범으로 인정된 적이 없다. 그렇지도 않은 상태에서, (우스운 논리지만) 절대적인 것을 배격하는 종교다원주의자가 소위 '절대적' 믿음을 신봉하는 신앙인을 열등한 자나 독선적인 자로 여기는 것도 타종교인들에 대한 종교다원적인 태도는 아닌 것이다.

스스로는 종교다원주의적 신앙관을 전파하면서 타종교인들, 특별히 기독교인들을 비하(卑下)하는 강압적이거나 독선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잘못인 것이다. 또한 보편적인 사랑과 관용과 자비의 가치를 세상의 문화와 체계 중에서 굳이 종교에서 구태여 찾으려는 태도도 편견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서양적 세계관이나 가치관에서 볼 때, 종교적 신념이나 인정된 가치관 자체는 무시되거나 부차적인 가치로 여겨지고 도전받으며, 소위 미신적인 요소들이나 기술이나 과학신봉주의나 물신주의 등 다원화된 가치관과 체계 속에서 다원화되고 비신화화되고 있는 와중 속에서 종교의 다원화를 통한 세계전복(?)의 시도는 무의미해 보인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저자의 이분법적 논리의 비판(pp. 55ff.)은 결국 종교다원주의만이 참 진리라는 비논리적인 설법(說法)의 모순에 빠지지 않는가가 서평자의 생각이다.

성경은 不法複製의 産物이다!?
오강남 교수가 성경의 절대적 가치를 도전하고 허물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론에 문제가 있다.
범.....주의(pan....ism)은 단지 가설일 뿐이다. '성경이 주위의 많은 고등문명들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었다'는 주장은 수백년된 학적 전통이다. 그러나 검증되거나 학계에서 일치된 이론은 아니다. 19세기에 바벨론 문명이 발견되기 시작하자, 일부학자들은 구약성경의 모든 사상들과 종교체계가 바벨론 문명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이것을 범바빌론주의, pan-Babylonianism라고 부른다). 그러다가 수메르 문명이 발견되자, 범수메르주의(크래머 책을 읽어보면 그러한 주장을 찾아볼 수 있다)가, 우가릿 문헌들이 발견되자 범우가릿주의가, 쿰란 문헌들이 발견되자, 범쿰란주의가 절대적으로 인기리에 주장되고 연구되었다.

오랫동안 고대근동의 비교연구는 이웃하는 고대문명의 도움으로 혹은 전적인 의존으로 히브리종교가 뒤늦게 유아기적 종교에서 고등종교로 발전했다고 보는 문명진화론적 개념에 압도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가설(假說)일뿐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들은 구약이 상당히 이른 시대에 저술되었다는 견해를 갖게 하지만, 또한 문제는 인접문명의 문화를 그대로 베꼈다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건전한 고대근동의 문명과 경전간의 비교연구는 일방적으로 서구합리주의에 의해서 진행되던 히브리종교의 폄하태도를 불식시킬 뿐만 아니라, 고대근동문화와 문헌들간의 비교연구를 통한 문명간의 상호침투적 요소나 우열의 문제로 접근하였던 과거의 방식들을 재고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하자면, 과거에 유사성에 대한 과도한 열정은 차이점과 연관시켜서 이해하는 태도들 갖게 하였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문화절대주의를 상대화시켜 준다.
문화절대주의는 과거 고대제국들과 서구 열강들의 사고논리였다는 점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지속적으로 히브리종교가 문화적 열등하에서 존재했다는 사실이 망각되었다. 히브리인들은 오랫동안 법이 없이 지냈으며, 오랫동안 종교제도 없이 지냈으며, 오랫동안 왕정제도 없이 지냈다. 극단적인 반형상주의(aniconism) 때문에, 발전된 문화의 꽃을 피워본 적이 없는 국가였다. 심지어 히브리인들이 선택된 이유는 인종적 우월성이나 숫적, 권력적 강함이나 도덕적 고결함 때문도 아니었다. 그들이 갖고 있었던 야웨신앙은 그러한 점에서 이해하기가 어렵다.

단군이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면, 예수도 마찬가지다!
단군의 역사적 실존인물이냐의 문제와는 별도로, 단군이 한민족(韓民族)의 단일한 조상(single ancestor)이라는 신화(神話)를 우리는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그가 한민족의 단일한 조상이었다는 주장이 신화임을 안다. 어떻게? 기존의 잔존자료들을 통해서. 삼국시대의 다양한 시조신화들은 단군 자신의 역사성 여부를 떠나서 고대 한국인들의 마음 속에 단군을 통한 한민족의 단일국가기원설이나 단군국조설을 믿지 않았음을 반증해준다. 또 역사적으로 고려시대에야 비로소 단군에 대한 그러한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점을 증거해 준다. 즉 단군신화는 정치적 이유로 해서 한민족의 단일한 조상으로 믿어지게 된 것이라는 점을 오강남 교수는 간과하고 있다.

이것은 반(反)단군적 믿음의 결과라거나 기독교도의 광란적 반대논리의 도구가 아니라, 학문적 연구의 결과에 대한 인용일뿐이다. 단군의 존재와 단군에 대한 믿음은 별개일 수 있다는 점이다. 단군이 실재했느냐의 논의보다는, 단군의 정신을 통하여 한국인다운 한국인을 키워내는데 주력해야 한다(p. 98)는 오강남 교수의 믿음은 실제 한국적 컨텍스트를 도외시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오강남 교수가 근본주의적 기독교인들에게 행하도록 권면되는 "실존적 결단"의 각성은 오히려 그들보다는, "역사성과 의의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우(愚)를 범하는 근본주의적 단군지지자들에게 더 설파(說破)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나를 뺀 모든 사람들은 왜곡된 성경관을 갖고 있다구?
모든 사람들이 선이해(先理解)를 갖고 성경을 읽는다는 점과 항상 왜곡될 수 있다는 오강남 교수의 주장은 사실이다(p. 102). 이 문제는 항상 서평자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종교다원주의자들을 뺀, 근본주의자들에게만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의 문제점은 그들이 항상 상대적이려고 하는 것 같지만, 항상 자신들을 제외하는 이중적인 잣대와 항상 상대방보다 더 우월적인 위치에서 가르치려 한다는 것이다. 항상 자신들과 다르면, 자신들의 <절대적인 잣대>로,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잘못된 성경이해와 오해라고 여기며, 다른 사람들의 신앙은 <유아기적 미신>이나 신념으로, 자신들의 것은 "과학"적인 태도로 "대다수의 건전한 의견"으로,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서 가르치고 교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우리에 대한 교훈'은 곧바로 그 자신에 대한 교훈으로 전환된다.

무엇보다 '나를' 교훈하지 않고, '나를' 책망하려 하지 않고 오로지 '남을' 교훈하고 '남을' 책망하고, '남을' 바르게 하고 '남을' 의로 교육하려 하고 남과 싸워 이기려 하는데 문제가 생긴다. 이렇게 하면 상대방도 똑같이 성경으로 나를 훈계하고 책망할 것이다. 내가 인간인 이상 성경을 아무리 객관적으로 읽으려 하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나의 구체적인 상황과 이해정도에서 보는 나의 '해석'일 수밖에 없다. 결국 나는 내가 이해한 대로의 성경, 내가 받아들인 대로의 성경을 절대화하게 되고 만다. 따라서 스스로 '성경대로'에 충실하다고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남의 말에 귀기울일 수가 없게 된다. 남이 성경을 가지고 하는 말도 내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모두 성경대로가 아니기 때문이다(p. 103).

끝없는 온정주의
오강남 교수의 글을 읽다보면, 어린이들을 깨우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는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것이 서평자가 발견한 오강남 교수의 온정주의적 태도다. 훈계와 관심이 지나쳐 교정하고 강요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항상 그는 우화(寓話)와 어릴 적 어린이들의 시각과 마음자세에서 교훈거리와 진리를 발견하려고 한다. 마치 그는 비유(比喩)로만 말씀하셨다던 예수의 태도를 갖는 것 같다. <비유는 비유일뿐, 그 역사적 정황에 대해서는 믿음을 갖지도 묻지 말라>고 어리석은 학동(學童)들을 준엄하게 꾸짖는 랍비 같아 보이기도 한다. 동생과 싸운 철수가 엄마 앞에서 갖게 되는 마음의 변화나 산타 클로스의 정체에 대한 철수의 인식의 변화. 산타 클로스가 부모였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결국 부모가 되어 산타 클로스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산타 클로스의 역사적 허구성에도 불구하고 실존적 의미의 전통을 이어나가려는 애틋한 사랑의 메신저가 되는 것일까?

그러나 그의 이러한 사랑의 메신저의 역할이 오강남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오히려 그가 '여러가지 이유나 이해관계에 따라 의식적으로 억누르는 태도'(p. 111)를 갖고 독자들을 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무조건 산타 클로스로부터 선물을 받아야만 한다는 아이들의 암묵적 기대감이나 산타 클로스가 되어 자녀들에게 선물을 전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과 권리가 산타 클로스와 선물이라는 유대성(solidarity)을 오랫동안 지켜주는 억압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설령 거룩하고 고상한 애정표현의 발로(發露)든, 상업주의에 물든, 부모 자식 양자 모두의 희생(犧牲)의 결과든, 우리는 산타 클로스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인가? 그리고 산타 클로스의 선물이 도대체 성경에 대한 이해와 예수에 대한 이해에 대한 진전된 바른 이해를 갖게 만드는데 유용한 비유인가를 고민해보아야 한다.

역사비평적 연구를 언급하면서, 그는 서양신학계와 교회들의 대다수의 논리와 훌륭한 학문적 업적에 의존하여 문자주의의 폐해(弊害)에 대해서 언급한다(pp. 113ff.). 자주 그러하듯이, 마찬가지로 문자주의에 의해 희생된 사람과 문자주의에 맹신했던 사람들의 예를 곁들인다. 또한 그는 이러한 문자주의를 유아기적 신앙이라거나 철이 덜 든 사람으로 범주화한다.

구약의 하나님은 누구인가?(pp. 119ff.)
저자는 바벨론 포로기를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야웨신앙의 변천사의 한획을 그었다는 관점으로 구약의 신관(神觀)을 논한다. 그에 따르면, 그렇게 의기양양하던 승리의 신은 바빌론의 신들에게 어처구니없이 패배하여 자기 백성들을 포로로 잡혀가게 했던가?

이에 대한 반성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관이 부족신에서 우주적 신으로 전환되었다고 오강남 교수는 주장한다. 오강남 교수의 이러한 사건이 우리에게도 또 다시 발생해야 한다고 본다. 설령 이런 기회를 통하여 부족신 야웨가 우주적 신으로 승격했다손 치더라도, 이러한 사고방식의 전환은 오강남 교수의 논증과는 거리가 멀다. 이 우주적 신은 야웨의 특정 지역적(팔레스타인), 특정 종족적(이스라엘) 장벽을 넘어서는 우주적 유일신으로 탈바꿈하게 한 계기가 된 것으로 종교다원주의가 지독하게도 반대하는 주장을 더 강화시키게 된 것일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우주적인 신에서 부족신으로?" 종교다원주의에 따르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기독교인들만의 하나님(물론 "배타적인" 의미로는 말고!)이어야지, 우주적으로 온 세상을 지배하는 유일신, 혹은 적어도 최고신이어서는 안된다고 보는 것 같다. 궁극적으로 평화와 환경보호를 위한 범신전(凡神殿)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무신론자들은 "신은 없다!"고 말하고 극단적인 범종교주의자들은 "모든 종교는 하나다"라고 말하지만,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궁극적으로 하나지만, 하나로 합칠 필요는 없으되, 모든 종교는 싸우지 말고 화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대 범신전의 현대판이 현대의 종교다원주의가 있다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 주장일까!

몇가지 차이점들은 고대의 군주적 수직체계가 수평적 민주체계로 바뀌었다는 점과 고대의 신들이 길흉화복과 우주질서를 각각 분담해서 맡았던 것을, 현대는 각각의 종교지도자들과 구성원들이 지구의 평화와 환경파괴를 위해서 각각 분담해서, 혹은 한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는데 있다.

하나님은 남자인가?
종교다원주의자들이나 여성신학자들은 주기도문을 "하늘에 계신 우리 부모님"이라고 외운단다. 이 얼마나 민주적인가?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문법적으로 남성 3인칭 단수다. 가끔 아버지(father)라고 불린다는 점에 동의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야웨가 남자의 1, 2차 성징(性徵)을 공유하고 있는 신적 존재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신화적인 세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신(들)을 번식과 성적 쾌락을 탐닉하는 남성신과 여성신으로, 혹은 동물이나 식물들로도 묘사했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달랐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관용적인 표현이지만, 오히려 그를 성경에서는 야웨나 하나님, 혹은 여러 가지 부수적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더 일반화된 것처럼 보인다. 물론 문화에 따라서 구별하기는 하지만, 남성성과 여성성, 이것은 그 누구도 쉽게 구별해 낼 수 없는 것이다.

폭력적이면 남성, 비폭력적이면 여성인가? 적극적이면 남성, 소극적이면 여성? 폭력적인 남성신에 대한 해결책은 여성신인가? 요약해보자. 인간이 그러하듯이, 모든 인간은 그 내면에 여성성과 남성성을 공유하고 있다. 호르몬도 그렇고 내면세계도 그렇다. 물론 외모도 혼동스러울 수 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에 대한 신인동형론적 표현들을 곰곰히 살펴보면, 그 속에도 여성성과 남성성이 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형상이 없으시고 인간이 아니신 하나님을 여성의 1, 2차 성징을 갖고 있는 여자로 보거나, 남자로 보거나 아니면 남녀의 혼합적 존재로 보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남성성과 여성성 모두를 가진 아버지로 나타나지만, 궁극적으로는 야웨다. 그는 인간이 아니다. 그것이 남성우월주의의 산물이든, 그에 대한 반작용에 의한 것이든, 하나님이 남자냐, 여자냐의 논란은 무의미한 것이다. 오히려 오강남 교수의 주장을 따른다면, 인간은 양성성징(兩性性徵)을 가진 존재로 태어났어야 한다.

주전 7-6세기의 고고학적 발굴을 보면, 야웨 하나님과 아쉐라 여성 하나님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야웨 하나님은 남성의 2차 성징을, 아쉐라 하나님은 여성의 2차 성징을 갖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아마도 가나안 문화 자체가 신들이 부부로 존재하거나 성생활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 수염나고 남성기(男性器)가 달린 야웨를 묘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정통적 야웨신앙에서는 그 자신이 아비로 불릴 뿐, 아무런 형상이나 남성숭배의 징후들이 없는데, 혼합종교에서는 남성적 형상과 남성숭배의 징후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증거들이나 교회사적 측면에서 살펴보아도 하나님을 인간의 성적 기준에 따라서 구별하는 것은 잘못임이 확실하다.

게다가 학자들 사이에 여전히 논란이 있는 몇몇 단어들의 어원적 추론을 갖고 여성 하나님을 주장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엘'과 '엘로아', '엘 샤다이'가 그런 경우다). 어원학(etymology)을 구약이나 신약연구에 사용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은 해석자의 선입관이나 주관이 너무 많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는 점과 어원과 실제의 본문에서의 단어가 그 정황이나 용례, 혹은 문법적으로 전혀 다른 의도와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엘 샤다이의 경우에 산의 하나님, 혹은 들의 하나님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바알신화에 근거하여 젖가슴의 하나님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확증될 수 없는 추론일 뿐이다(p. 123). 결과적으로 오강남 교수도 인정하듯이, 하나님은 하나님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젖가슴이 달린 어머니 하나님일 수는 없다(p. 125).

그런데 더 심한 논리적 모순은 지속된다(p. 125). 그의 논리를 정리해보자: "남성과 여성은 다르다. 구약에서 영(혹은 신)이나 지혜(잠언)는 모두 문법적으로 여성이다. 그러므로 그 존재 자체는 여성이다." 오강남 교수는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인도 유럽어도 마찬가지로 셈족어에는 문법성이 있다. 심지어 나라들마다 한 단어에 대한 문법성이 교차되어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문법적 성은 문화적이며 관습적이다. 또한 문법성은 문법성일뿐, 성징(性徵)과 100% 동일하다고 말할 수 없다. 시대별로 문법성이 바뀌었다고 남성적 억압으로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신자의 아버지로, 교회를 신자의 어머니로 보았던 교회전통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실제적 다신론을 주장한다
오강남 교수는 성경상의 절대적 유일신론보다는 실제적 다신론을 주장한다(pp. 128ff.). 모든 신들은 하나이거나 같은 존재들이다. 또한 그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일종의 다신론적 표현으로 이해한다. persona라는 말은 가면놀이에서 나왔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이 말이 여전히 가면, 허식의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영어로 person, 혹은 personal이 의미하듯이, 하나의 다른 객체, 혹은 인격 자체를 의미하는 말로 그 의미가 변화되었고 삼위일체에서 사용되는 person(위격)이라는 말은 하나의 신이 여러 개의 가면을 쓴다는 식(양태론)으로 이해해서는 안되고 전통적인 개념의 측면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이것도 또한 오강남 교수가 어원론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부분이다.

예수는 있다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를 읽고

예수는 있다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를 읽고

그래도 예수는 있다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를 읽고

 

허호익 교수(대전신대 교수, 한국기독교학회 총무)

 

 오강남 교수가 지은 「예수는 없다」를 읽은 이들이 더러 있어, 얼마 전 사석에서 이 책에 대한 얘기를 처음 듣게 되었다. 한 분의 얘기로는 그 책을 읽은 자기 교회의 평신도들의 반응이 찬반 양론으로 상반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종교적인 입장에서 기독교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의 폭을 넓혀 주고 문자주의적 해석의 한계를 잘 지적하였다는 쪽이고, 다른 한편은 예수에 대한 이해가 편협 되였으며 상술에 편승한 교묘한 반기독교적인 책이라는 주장이었다고 전해 주었다.

오강남 교수를 만난 적도 있고 이름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도대체 어떤 내용을 쓰셨을까 궁금하던 차에, 책방에 가서 그 자리에 서서 대충 읽어보았다. 이 십 년 가까이 기독론을 연구하고 가르쳐 온 필자로서는 이것이 전부가 아닌데 하는 강력한 충동을 느꼈다. 그러던 차에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부탁 받고 망설이든 끝에, 신학의 일차적인 임무가 변증(Apology)이라는 평소의 신념에 따라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이 서평이 도발적이라고 느껴지더라도 이 책제목 자체가 도발적인 데서 유발된 것임을 독자들이 널리 양해 주시길 바란다.

오강남 교수를 진지한 학자로서 존경하여 왔다. 그의 글을 더러 읽은 기억이 있다. 그의 어떤 글에서 읽은 "빈 배 이야기"는 큰 깨달음이 되었다. 캄캄한 밤중에 나룻배를 저어 가던 사공이 마주 오는 배와 충돌하는 순간 큰 소리로 화를 내며 삿대질을 하고 보니, 그 배는 사공이 없는 빈 배(empty boat)였다는 그런 얘기이다.

빈배에 부딪치고 나서 화를 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오강남 교수는 "예수는 없다"라는 도발적이고 상업적인 표제의 깃발을 앞세우고 좌충우돌로 돌진하는 것이니, 그래서 점잖게 따지려는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이 책을 다시 꼼꼼히 정독하였다. 그런데 처음 읽을 때는 눈에 들어 오지 않았던 표지의 그림과 글자들이 시야에 몰려오면서 어떤 전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우선 표지의 그림은 하늘을 향해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을 땅으로 향하게 뒤집어 놓은 것이었다. [예수는 없다]는 제목 아래에 "기독교 뒤집어 읽기"라는 부제를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제목 위에는 "원로 종교학자가 필생의 연구 끝에 찍은 마침표"라는 설명을 달았다. "원로 종교학자가 평생을 연구해 보니 예수는 없다"는 이미지가 한 눈에 들어오도록 교묘히 만들어 놓은 듯한 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나 기독론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신학자가 이 책을 꼼꼼히 읽어보고, 참고문헌을 따져 본다면, "예수"에 대한 오 교수의 연구는 원로 교수의 필생의 연구치고는 너무 피상적이고 편협되어 있으며 주제를 포괄적으로 다루지도 못했고, 이미 20세기 학자들 사이에는 반론을 통해 극복된 19세기의 낡은 주장들을 나열하고 있다는 점을 금방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판이 심하다고 느껴지는 분이 있으면, 연륜이 짧은 젊은 학도가 학문을 길에 접어들면서 습작으로 쓴, 예수는 누구며, 어떻게 사셨는가를 다룬 책([그리스도의 삼직무론], 한국장로교출판사, 1999)과 비교하여 보길 바란다. 그래도 믿어지지 않으면 시카고 트리분 지의 신문기자였던 리 스토로벨(Lee Strobel)이 쓴 [예수 사건](두란노, 2000)을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를 재확인하고 싶으면, 아주 최근의 예수 연구의 결정판인 타이센과 메르츠의 공저 [역사적 예수](다산글방, 2001)도 정독하길 바란다.

원로교수의 필생의 역작인 [예수는 없다]와 일개의 저널리스트가 21개월 동안 13명의 각 분야의 최고의 학자를 직접 인터뷰하면서 [예수 사건]의 역사적 과학적 객관성을 포괄적으로 진지하게 추구한 것을 비교해 본다면, 누구라도 이러한 비판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 책 1장에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라는 제목으로 믿음도 유아적인 문자주의의 유치한 상태에서 벗어나 성숙하여야 한다는 것을 그토록 강조하였는데, 앞서 소개한 책을 한 권만이라도 읽어본다면, 오 교수 자신의 예수 이해가 얼마나 제한적이며, 유치하고 미숙한 것인지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문제점은 목차에 그대로 드러난다. 예수를 표제로 다룬 책에서 실제로 예수에 관한 부분은 전체의 5분의 1 밖에 되지 않는다. 전체 335쪽 중 67 쪽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예수에 관해 다룬 작은 부분마저도 낡은 자료에 근거하여 편협하게 다루어졌다. 예수에 관한 논의 중에서 최근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서 활발하게 진행되어 온 중요한 주제들, 즉 예수의 생애와 교훈의 특징, 하나님 나라의 선포, 예수의 율법에 대한 전향적인 가르침, 병자와 약자를 치유하고 죄인과 더불어 먹고 마신 삶의 행태(life style), 성전정화 및 십자가 사건과 그 의미, 그리고 부활의 역사성에 관한 논쟁과 부활 신앙 같은 주제들은 전혀 다루지 않았다. 성실한 학자라면 무시해 버리는 '예수의 성생활', '예수는 동성애자인가?' 하는 진지한 결론도 없는 주제를 다루느라 아까운 지면을 할애하였다. 그리고 "예수는 없다"는 명제가 지닌 의미도 전체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간단하고 피상적으로 설명되었다.

한마디로 예수를 학문적으로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원로 종교학자의 필생의 연구라는 표제만 없었더라도 필자의 이 같은 비판은 면할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이런 생각을 했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듯이 [예수는 없다]라는 책에도 제대론 된 예수 이해는 없는 것이 아닌가? 어느 코미디언이 한 손으로 눈만 가리고 "영구 없다"고 외치는 우스개가 연상되었다.

예수에 대한 곡해와 왜곡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세기에 셀수스라는 희랍철학자는 예수의 처녀 탄생을 부정하고 예수는 로마 군인 판테라(Pantera)의 사생아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은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친 것이라는 주장은 이미 마태복음(27:64)에도 기록되어 있다.

오 교수가 예수에 관해 그나마 다룬 것이 있다면 동정녀 탄생에 관한 것인데, 이 역시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동정녀 탄생은 종교사적으로 보편적으로 등장하는 비보통의 탄생 이야기에 속하는 영웅신화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이미 18세기 서양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리고 그 동안 예수 연구를 통해 이미 비판적으로 극복된 내용들이 대부분이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역사적 예수 이해는 "역사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해석 방법에 따라 적어도 4-5단계에 걸쳐 발전하여 왔다. 그러나 오 교수는 2-3단계에 즉 슈바이처나 불트만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회의론에 멈추어 있는 것 같다([역사적 예수], 44쪽). 불트만의 제자들이 스승을 비판하고 역사적 예수에 관한 새로운 질문을 제기했고, 최근에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제3의 방식과 고고학적 성과로 역사적 예수의 관한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예수 연구의 상식이라는 점을 모르는 것 같다.

그 단적인 예가 예수를 여전히 신과 인간 사이에 테어난 영웅신화의 일례로 본다는 점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제우스 신과 모친 사이의 성관계를 통해 태어난 영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전기는 그가 죽은지 400년 이상이 지나서 플루타크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역사적 신빙성이 결여된 전설일 가능성이 크다. 오 교수가 사례로 들지 않은 것으로 제우스가 알렉산더 뿐만 아니라 헤라클레스, 페르세우스를 낳은 이야기와 아폴로가 아스크레피우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를 낳은 이야기 등은 모두 영웅적인 인물의 출생의 특수성을 신과 인간의 성관계를 통해 이뤄진 것으로 주장하는 다신론적 혼음신화 사례이다. 그러나 성서에는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다신론적 혼음신화는 철저히 거부되었다.

그리고 예수의 탄생 설화를 모친의 오른 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부처의 신묘한 탄생신화와 유사한 것으로 보았지만, 부처의 경우 출생 년도조차 기원전 563?-483?년경 사이의 여러 설이 존재할 정도로 그 역사적 정확성이 떨어지며, 그러나 그에 관한 최초의 전기는 700년이 지난 주후 1세기에 기록된 것이므로 꾸며낸 전설일 가능성이 많다.

또한 예수의 탄생을 박혁거세의 난생설화와 유사한 특별한 출생의 영웅신화라 했지만, BC 69년에 태어난 박혁거세에 대한 역사적 기록도 역시 11세기가 지나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칼 바르트 이후 동정녀 탄생은 성령의 잉태에 의한 것이며,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령의 능력으로 인한 처녀 잉태는 예수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유일무이한 사례라는 것은 이미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예수의 경우 처녀탄생이라는 표현보다는 성령에 의한 잉태라는 것이 초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에 관한 최초의 전기는 그가 죽은 지 30년쯤 되어서 마가복음으로 기록되었다. 예수의 성령의 잉태에 관해서는 예수가 죽은지 50년도 못되어 마태와 누가에 의해 공개적인 공식 문서로 기록되었다. 그것보다 더 논쟁이 된 예수의 부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예수가 죽은 지 24년만에 기록된 것(고전 15장)이므로 그 속보성과 정확성은 다른 고대 문서와 비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13세기가 지난 다음에 기록한 것과 30-50년이 못되어서 기록한 것 사이의 역사적 진정성을 질문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부활 사건이 있은 지 24년만에 이를 공식적인 문서로 작성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 때에는 예수에 대해 들었거나 친히 만난 많은 사람들이 생존해 있었을 시기이므로, 적대적 목격자의 반론이 가능한 시기에 이런 기록을 공개한 것 그 자체가 예수 부활의 역사적 검증이 되기에 충분한 요소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최근의 역사가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오 교수는 예수의 십자가나 부활 사건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상 부활의 역사성에 관한 문제(부활에 관한 다섯 가지 역사적 정황 증거에 관한 최근의 연구는 [예수 사건] 326-341 쪽 참고 바람)가 동정녀 탄생의 역사성보다 더 큰 문제로 다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처형한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행 2:36)고 믿는다면, 그 하나님께서 성령의 잉태로 처녀의 몸에서 그 아들을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오 교수의 동정녀 탄생과 관련하여 제기한 문제들이 지니고 있는 방법론적 약점을 지적하려고 한다.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과 베들레헴 아이들의 학살과 나사렛에서의 성장을 구약성서(렘 23:5, 미 5:2, 호 11:1, 렘 31:15, 삿 13:5)에 근거한 전설로 보느냐 아니면 구약성서의 성취로 보느냐는 문제이다. 1835년 쉬트라우스가 [예수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를 구분하고, 마태 2장의 이 구절은 제자들이 예수의 생애를 전설로 꾸며내기 위해 구약에서 그 근거를 찾아낸 역사적 신화의 사례들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반대로 생각한다. 타이센과 메르츠도 이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에 비추어 예수에 대한 기억을 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근거로 그 기억을 만든 것"(171 쪽)이라는 19세기 이래의 주장을 반박한다. 아주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의 경향인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제3의 탐구 방법론에 의하면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서를 창조적으로 활용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존의 (불유쾌한) 사실들 - 예수의 처형, 제자의 도주, 성전정화 사건, 예수의 갈릴리 출신 - 에 어떤 의미를 부여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구약 성서적 해석은 그 해석의 대상이 될만한 사건을 전제로 한다."(172쪽)는 것이다.

꾸며낸 전설의 경우에는 과장과 미화가 따르고 불리하고 불유쾌하고 상호모순되는 내용은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것이 통례이다. 많은 성서역사학자들의 주장처럼 이 점에 있어서 성서는 예외에 속한다는 것이다. 오 교수가 제기한 동정녀 탄생의 문제도 여기에 해당한다. 예수가 처녀 잉태하여 베들레헴에서 탄생했고, 나사렛에서 자랐으며, 그의 출생으로 인해 베들레헴 동년배 아이들이 무참히 죽는 등, 이 비상식적이고 불유쾌하고 모순적인 사실이 역사적 실체적 진실이지만, 이 모든 사건을 복음서의 독자들로서는 다 이해하기 어렵다고 여겼기에 구약성서를 인용하고 기록된 약속의 성취라고 주장함으로써 역사적 검정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역사적 사건을 검증하는 방법과 2000년 전 성서기자가 역사적 사건을 검증하는 방식이 달랐다는 것을 비판적인 서양 역사학자나 성서학자들이 이해하는 데에도 거의 20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을 상기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18세기 이후로 성서의 상호모순된 기록을 역사적 비진정성의 근거로 주장하였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성서의 경우처럼 그 세부적인 모순이야말로 그 사건 자체를 여러 사람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술한 것이므로 그 역사적 진정성이 더욱 확실한 근거로 해석하게 되었다. 날조된 역사일수록 그 내용이 일사불란하다는 문서비평의 결과인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 오 교수는 처녀 잉태는 이사야 7:14의 알마(almah, 젊은 여자)라는 히브리어가 70인역 희랍어 파르테노스(parthenos, 처녀)로 오역된 것에 근거하여 꾸며낸 전설이라는 주장을 폈는데, 사실 이 역시 1835년 쉬트라우스라는 독일 학자에 의해 처음으로 제시된 낡은 주장이다. 쉬트라우스 주장에 따라 남자를 경험하지 못한 동정녀(virgin)를 뜻하는 희랍어 '파르테노스(parthenos)'는 히브리어 '베툴라(betulah)'에 해당하고, 아이를 낳은 여자도 포함하는 '젊은 여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알마(almah)는 희랍어 '베아니스(veanis)'에 해당한다는 후속적인 비판이 이어졌다.

그러나 19세기의 하르낙(A. Harnack)에 이어 20세기의 바르트(K. Barth)도 이에 대해 반박하였다. '알마'의 경우 '젊은 여자(young girl)'를 의미하지만, 그 사용 문맥에서는 분명히 결혼하지 아니한 여자를 가르키는 사례가 아주 많다(창 24:43, 출 2:8, 시 68:25, 잠 30:19, 아 1:3, 6:8)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베툴라' 역시 '처녀'를 의미하지만 때로는 남편 없는 과부(욜 1:8)를 의미하기도 한다. 고대어, 특히 히브어의 경우 각 단어의 의미는 단정적이기보다는 문맥에 따라서 다분히 포용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 7:14절의 '알마'를 '파르테노스'라 번역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며 동시에 마태가 인용한 단어는 전후 문맥에 비추어 '처녀'의 뜻임이 분명해진다(마 1:18, 25, 눅 1:34)." 따라서 저 쉬트라우스의 오역설 역시 이미 반박된 낡은 주장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마태가 이사야를 인용하였지만, 누가의 기록에 보면 이 인용도 없으며 이 인용과 상관없이 처녀 탄생을 당황스러운 현실로 기록하고 있다. 처녀로서 아이를 잉태한 마리아 자신이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눅 1:34)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엄청난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가장 어려웠던 이는 당사자 마리아였다는 점을 누가는 놓치지 않았다. 남자를 받아들인 적인 없는데 배가 점점 불러오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이 현실을 수용하고 믿음으로 순종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기록한 누가는 직업이 의사였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합리적인 의사로서 동정녀 탄생과 같은 상식적으로 도전 받을 이야기를 생략하고도 얼마든지 유리하게 예수를 증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공식적인 문서로 기록하는 모험을 강행했다는 사실이 그 역사성의 한 증거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언급한 32개 나라, 54개 도시, 9개 섬을 면밀히 조사한 고고학적 연구 결과, 하나도 틀림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예수사건], 125-127 쪽). 반면에 몰몬경의 경우 그 책에 나오는 어떤 인명, 국가명, 지명도 밝혀지지 않았다. 따라서 성령의 잉태와 동정녀 탄생을 기록한 누가는 당대의 지성인이요 합리적 의사이면서 사실을 정확한 다룬 역사가였음으로 그 진술의 신뢰도를 더욱 높이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칼 바르트와 같은 지성적이고 비판적인 신학자도 동정녀 탄생은 생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유일회적이고 비연속적이고 돌발적인 궁극적으로 새로운 사건이므로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로만 믿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그 역사적 신앙적 의미를 자세히 제시하였다. 적어도 현대에 와서 동정녀 탄생의 문제를 거론하려면 칼 바르트의 견해(Church Dogmatics, I-2권 15항) 정도는 언급하여야 하는 것이 신학계의 상식임을 종교학자들은 모르는 것 같다.

오 교수는 서론에서 '21세기의 역사적 과학적 문헌학적 정보 시대의 새로운 예수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려고'(20 쪽) 이 책을 쓴다고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오 교수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해가 19세기의 낡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스스로 드러내 보인 셈이 되고 말았다. 그 구체적인 증거를 더 알고 싶으면, 인구조사와 베들레헴 탄생, 베들레헴 영아 학살과 나사렛의 존재에 대한 오강남 교수에 낡은 견해 대한 최근의 역사적 연구의 통쾌한 반박이 [예수 사건] 130-136 쪽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지면 관계상 이 책에서 다룬 구약과 관련된 창세기 이야기, 부족신관, 율법주의 신관 등에 관한 문제를 일일이 다 비판할 수 없지만, 이에 관해서는 [성서의 앞선 생각 I](한국장로출판사, 1998년)의 창조의 하나님, 조상들의 하나님, 히브리의 하나님, 계약의 하나님을 주제로 다룬 최근의 신학적 연구 결과들을 참고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없다]는 표제 아래에 "예수를 안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문제인 것이 그릇 믿는 것이다. 예수를 바로 믿지 않는다면 차라리 믿지 않는 게 낫다."라는 김진홍 목사의 글을 구호처럼 내걸었다. 표지만 보면 의도적으로 "예수는 없으니, 차라리 믿지 않는 게 낫다"라는 무의식적인 암시를 주는 듯하다. 정말 오랫동안 필자는 곰곰이 이 말의 숨은 뜻을 생각했다. "예수를 바로 믿지 않는다면 차라리 믿지 않는 게 낫는가?" "정말 그런가?" 엄격하게 따지면 그 누가 "나는 예수를 제대로 바로 믿는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런 말은 한 김진홍 목사도 그렇게는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이 주장을 일반 명제로 환원하면 "바로 하지 않을 바에는 안 하는 게 낫다"는 논리가 되는데, 정말로 타당한 논리인가? 전부 아니면 전무의 미숙한 논리가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흑백논리의 선봉이요, 궤변의 극치요, 오만과 편견의 발로가 아닌가? 적어도 불교에 심취한 바 있으며,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종교학자가 내세울 논리인가?

이는 기독교들에게 신앙의 성숙을 질타하는 오 교수의 자신의 논리와도 배치된다. 교육학적으로도 맞지 않는 말이다. 처음부터 누가 바르게 잘할 수 있는가? 고쳐가면서 잘해지는 것이고, 그 누구도 절대 완벽하게 잘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점수(漸修)와 성화(聖化)의 과정이 필요하지 않는가?

오 교수가 책 앞면과 뒷면의 표지에 인용한 김진홍 목사의 논리가 맞는 말이라면, 그 논리대로 이렇게 말하는 것도 맞는 말이 될 것이다.

"책을 안 쓰는 것보다 훨씬 더 문제인 것이 그릇 쓰는 것이다. 책을 바로 쓰지 않는다면 차라리 쓰지 않는 게 낫다.

출처: 허호익 교수의 [신학 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