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06

1. 나는 어떻게 퀘이커가 됐나

1. 나는 어떻게 퀘이커가 됐나



함석헌 선생의 생애

정리 : 김정연(adorno27@hanmail.net) 
"그의 하는 바를 보고, 그의 의도를 살피고, 그의 습관을 관찰한다면 사람이 어찌 자기를 숨길 수 있겠는가? 사람이 어찌 자기를 숨길 수 있겠는가?" - 논어(論語) 위정(爲政) 편에서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龍川)서 2남 4녀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의 함석헌은 겁 많고 부끄럼을 타는 내성적인 아이였다고 전해진다. 1916년 함석헌은 기독교계 덕일 소학교를 거쳐 양시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관립 평양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재학 중 육촌형인 함석은의 영향으로 3.1일 운동(1919)에 참가한다. 3.1일 운동은 젊은 함석헌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데, 종교인으로서의 사회 참여 의식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함석헌은 함석은의 지도하에 3.1운동에 직접 관여하게 되는데 손수 태극기를 찍어내고 독립선언서의 사본을 만들어 동포들에게 나누어 주며 시위를 독려하였다. 만일 3.1일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저 "의사가 됐던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무슨 공부를 하여 일본 사람 밑에 있어 그 심부름을 하는 한편 나보다 못한 동포를 짜먹는 구차한 지식 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이후 2년간 학업을 중단 사촌형인 함석규의 권유로 한국 민족주의 운동의 지성소로 알려진 오산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1921)한다. 오산학교에서 함석헌은 그의 장래에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남강 이승훈과 다석 유영모를 만나게 된다. 함석헌은 남강에게서 한국 독립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고, 다석에게서는 노장공맹(老莊孔孟)을 비롯한 다양한 고전철학을 배우게 된다. 이후 회고하기를 "다석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1923년 오산(五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일본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에 재학 중 오산학교 동창생인 김교신의 권유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를 알게 되어 무교회 주의에 영향을 받는데 성서의 진리를 무조건적이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탐구하려는 우치무라의 노력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함석헌은 우치무라에게 세례를 받는 동시에 그의 퀘이커 친구인 니토베 이나조(新戶部稻造)와 함께 퀘이커 모임에도 출석하게 된다. 이때 문하생 6명이 '조선성서연구회'를 결성 (김교신,함석헌,송두용,정상훈,양인성,류석동) 성서를 공부하며 종교적 신앙과 민족애를 접합시키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참 신앙인은 한 쪽을 버리는 대신 그 둘을 함께, 그리고 동시에 끌어안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1928년 동경사범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모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 역사와 지리학을 가르쳤다. 이듬해에 귀국한 오랜 친구인 김교신과 함께 《성서조선》(聖書朝鮮)을 편집하고 글을 실었으며 오산에서 시작한 무교회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함석헌은 특히 1933년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이 잡지에 장문의 글을 연재하는데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글을 통하여 함석헌은 식민사관의 왜곡된 논리에서 벗어나 조선사의 진정한 모습에 다가서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면서 발견한 것은 영광된 민족사가 아니라 굴욕과 시련으로 점철된 참담한 역사였다. 이 발견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함석헌 자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관이 일제의 식민사관이 주장하는 대로 패배주의나 숙명론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함석헌은 조선의 역사가 '고난의 여왕' 또는 '세계사의 하수구'라는 다만 굴욕의 처소일 뿐 아니라 세계의 불의를 정화시킬 희망의 거처라고 본 것이다. 예수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 고난을 당하였기에 비로소 인류의 해방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 뜻에서 성경 속의 예수가 '고난의 아들'로서 인류해방자의 몫을 떠맡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그것을 짐으로써 우리 자신을 건지고 또 억압에 신음하는 모든 약자와 씨알을 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의 역사 해석은 핍박과 억압, 어둠과 그늘 속에서 묵묵히 역사를 만들어온 약자와 패배자들의 삶에 정당한 가치와 의미를 되돌려 주는 작업이었다.

1937년 만주를 침략한 일제는 이후 '충성스런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황국서사' 암송이나 신사참배 또는 징용이나 징병, 위안부 등 일본 제국주의에 팽창을 위한 조선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위기는 함석헌을 비켜가지 않았는데 학생들에게 조선어와 조선역사 대신 일본어로 된 일본 역사를 가르쳐야할 처지에 놓인다. 1938년 봄, 함석헌은 교사자리를 사임 영원히 오산학교 교정을 떠난다.

1940년 평양 근교의 송산 농사학원(松山農士學院)을 인수, 원장에 취임 학생들에게 성경, 역사, 조선어를 가르치고 오후에는 모두 농사를 지었으나, 곧 계우회 사건(1940.8)으로 1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다시 《성서조선》(聖書朝鮮) 사건(1942.5)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미결수로 1년간 복역하였다. 2년 동안의 감방 생활을 견디며 함석헌은 러스킨의 예술관과 공리적인 사회 경제관에 깊은 공감을 느꼈으며, 톨스토이의 저서를 읽고 그의 인도주의적 신앙과 거기에서 바탕을 둔 무정부주의적 사상에 감동을 받았다. 또한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 무량수경(無量壽經), 금강경(金剛經) 등 다양한 불경을 섭렵하였다. 그는 감옥을 '인생의 대학'으로 여겼다.

이후 8.15광복 때까지 함석헌은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그 기간동안 함석헌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독서에 열중하였다. 그는 노장(老莊)을 읽는 동안 종교(특히 무교회 운동)의 역할과 불의한 정치권력(특히 일본 제국주의)과의 관계를 천착하기 시작하였는데, 점차 자기 중심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던 무교회 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안목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치무라의 사상적 그늘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우치무라의 관점과 세 가지 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자각하였는데 우선 그는 무교회 모임의 회원들이 '세속인'과 일반 정치 문제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에게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웃의 친구가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교회 운동은 회원들 간에 서로 수평적이고 동등한 인간관계를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나 이웃과의 관계도 소홀했다. 두 번째로, 함석헌의 예수관과 속죄론에 대한 이해가 우치무라의 시각과는 달랐다. 속죄란,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하느님과 죄에 빠진 인류 사이에서 중개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치무라 또한 이러한 대속관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러한 대속관에 동의하지 않았고, 자유인으로서 사람들이 각자의 죄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함석헌에게 예수의 속죄는 주체적 개인과 하느님 사이의 하나됨이었고, 이 하나됨은 각자가 예수의 일치됨을 체험할 때 일어나는 것이었다. 세 번째로, 함석헌은 식민지 민중이 된 조선 민족과 식민 지배 세력으로서 일본인이 처한 역사적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우치무라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화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관동 대지진 때 일어난 조선인 학살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였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함석헌은 그 자신의 종교, 조선인의 종교, 조선인을 위한 종교를 발견하고자 힘을 기울였다.

함석헌은 일제에 의해 모두 네 번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 시기의 삶에 대해 그는 "나의 유일한 범죄는 내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식민지 백성의 근본적인 곤경을 이처럼 절실하게 표현한 말도 흔치 않을 것이다.

광복(1945. 8)이 되자, 평북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이 되었으나 같은 해 11월에 발생한 신의주학생의거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 비록 학생 봉기의 직접적인 주동자나 배후 조종자는 아니었지만, 공산당원이 아닌데다 기독교인이었던 그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불편한 존재로 여겨졌음은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1947년 단신으로 월남, 1948년에는 각 학교·단체에서 성경강론을 하였다. 이 종교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남한의 총체적 부패와 혼란에 실망한 한편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냉담한 보수적 교회에 대해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대부분을 이루었다. 강의를 통해 함석헌은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고, 이러한 생각을 글로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열린 마음으로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도 받아들였다. 함석헌이 말하는 종교는 제도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삶으로 체현되는 종교였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레 조직과 외양을 불리고 가꾸는 데 치중하는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갔다. 이때의 공개강의를 통해 안병무, 김용준, 김동길 등의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성경 공부 모임은 한국전쟁(1950-1953)중에도 계속 되었다.

1953년 《사상계(思想界)》가 창간된 이후 함석헌은 주로 《사상계》를 통하여 한국 교회와 사회 비판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예컨데 그는 "종교로써 구원을 얻는 것은 신자가 아니요 그 전체요, 종교로써 망하는 것도 교회가 아니요. 그 전체다." 라며 한국교회와 이승만 정권의 어리석음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질책했다. 사회가 처한 어려움이나 문제점에는 냉담하고 교회의 일과 이익에만 관심을 쏟는 '복음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한국 교회에 대해 그가 강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마침내 1956년 7월 4일 함석헌은 시 <대선언>을 통하여 한국 교회에 대해 기꺼이 이단자가 될 것을 선언했다.

"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 끝이 있으리요. ....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더 위대하다. ...."

이후 기형화되고 교조적으로 변질된 교회에 대한 비판은 1953년 풍자적인 비평의 글 〈한국 기독교에 할말이 있다〉라는 글로 신부 윤형중(尹亨重)과 신랄한 지상논쟁을 펴기도 해 큰 화제를 일으켰다. 함석헌은 이 글을 통해 한국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기독교가 '마술적'인 면에서 벗어나 사회의 도덕과 정의를 위해서 앞장서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기독교인들에게도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인이 될 것을 권고했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여 투옥되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라고 말하는 글을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함석헌은 57세의 나이로 해방된 나라의 감방에 다시 투옥되어 고문을 견뎌야 했다.

함석헌은 현실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으면서 한편으로 종교적 사유를 정련하는 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함석헌에게는 이제 기독교만이 유일한 참 신앙이 아니요, 성경만이 진리를 대표하는 유일한 경전이 아니었다. 이러한 변모는 1961년에 제목부터 개정한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머리말에서 함석헌은 이렇게 밝혔다.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이 변할 리가 없지만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결국 따지고 들어가면 하나요, 역사 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 모든 교파적인 것, 독단적인 것을 없애 버리고 책 이름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고쳤다."

1960년 이후 함석헌은 퀘이커교 모임에 참석하여 종교활동을 하였다. 기존의 교회 조직이나 제도에 회의적이던 그가 300년이 넘는 또 다른 종교 조직인 퀘이커교의 신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우선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관심이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 세상의 평화와 사회 정의를 이루는 일에 모아지고 있는 데 공감하였으며, 절대계의 진리와 상대계의 진리를 함께 추구하려는 퀘이커들의 열정에 동의하였다. 성속의 구별이 없이 "모든 삶은 신성하다"는 신앙관과 '속 생명'(Inward Life)과 '속의 빛'(Inner Light)이라는 개념도 함석헌이 주장하는 '속알 밝힘'(낱낱의 개인이 인격을 이루고 혼을 기른다.)이라는 말과도 동의를 이룬다. 특히 함석헌은 퀘이커 예배 형식인 침묵과 불교의 참선을, 그리고 노자가 강조한 명상을 모두 본질에서 비슷한 종교적 행위로 보았다. '궁극적으로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종교적 보편주의는 함석헌에게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1961년 5·16쿠데타 직후 7월 《사상계》에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기고 집권군부세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사실 1960년 이전부터 함석헌은 한국 사회 현실에 대해 줄기차게 발언해 왔고 그 때문에 권력의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그런 의미로의 행동가로 나선 것은 1961년 5.16쿠데타 이후였다. 1962∼1963년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각지를 시찰(이때 10개월동안 펜들힐에서 수학하였다.)하고 돌아온 후, 귀국하여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절박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일은 드디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 나는 이제 결심했습니다. 극한 투쟁을 하기로, 비폭력의 국민 운동을 일으켜 민정을 수립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짐에 따라 5.16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의 부당함을 정면에서 지적하는 대중 강연회를 잇달아 열었다. 동시에 함석헌은 신문과 잡지등에 부지런히 글을 썼는데 대표적으로 《사상계》 1963년 8월호에 기고한 <3천만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등이 있다. 이후 언론수호대책위원회·3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민주수호국민협의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70년 《씨알의 소리》를 발간하여 한국의 민주화와 언론의 자유를 증진하는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이후 《씨알의 소리》는 정권의 탄압으로 폐간과 복간을 되풀이 한다.) 윤보선, 김대중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에 동참하여 공동의장으로 활동하며, 시국 선언을 발표하여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는데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비폭력 저항, 둘째 시민 불복종 운동, 셋째 민주 세력간의 총 단결을 역설하였다. 뒤이어 1976년의 3. 1사건을 통해 유신 헌법 철폐, 박정희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 불구속 기소되고, 1979년의 YM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등 많은 탄압을 받았다. 1970년대 함석헌의 행동이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정치적 투쟁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도 함석헌의 눈과 귀는 열려 있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과 1977년 8월 '방림방직 대책위' 창립, 같은 해 10월 재야 인사들과 함께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한 협의회'를 만들며 사회적 약자를 위해 투쟁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즉사함으로써 유신체제는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다. 동시에 그것은 더욱 포악한 군사 독재의 시작이었다. 게엄령의 해제를 요구하고 대통령 간접선거를 반대하는 평화시위에 참여한 함석헌 등 120여 명을 투옥하여 고문을 가한 보안사의 우두머리가 바로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이어 12.12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하고 권력을 찬탈한다. 1980년 7월 집행유예로 풀려난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가 강제폐간 되어 문필생활을 중단하였으며, 잔인 무도한 전두환 정권에 맞서는 민주화 세력도 1970년대의 민주화 인사들보다 젊고 더욱 조직적인 세대가 사회의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급진적인 주장들이 힘을 얻어 감에 함석헌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힘을 잃어 가는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함석헌은 다시 한번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예언자'의 처지가 된 셈이었다. 1984년에는 민주통일국민회의 고문을 지냈고, 1988년에는 서울평화올림픽의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노태우 정권에 협조하는 행위'로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의인은 그 시대에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속담은 사실일 것이다. 그의 이 마지막 봉사 후 넉 달 뒤인 1989년 2월 4일 함석헌은 그의 고난에 찼던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영원한 외사랑이었던 나라와 민족의 고난은 오늘도 계속 되고 있다. 일평생을 '폭력에 대한 거부', '권위에 대한 저항', '그칠 줄 모르는 진리의 탐구' 등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교조적 종교의 개혁·항일·반독재에 앞장섰다. 저서로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 《수평선 너머》 등 함석헌 전집 20권 등이 있다.



후기

시경(時經) 소아(小雅)편에 '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 길은 따라간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비록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선생님에 대한 동경은 항상 마음 한 편에 있어 왔기에 이 숙제를 못이기는 척 맡았습니다만 결과는 부끄럽기만 합니다. 함선생님의 생애를 짧게 요약 정리한다는 것은 저에겐 분에 넘치는 일이었습니다. 애초에 능력이 안 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긴 분들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간단한 글이라기에 어설프게 끝을 냈습니다. 제가 한 일이라곤 그저 여러분들의 글들을 인용하고 덧붙이는 정도의 수고로움이었습니다. 부실하다 탓하지 마시고 읽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글은 함석헌 이라는 인물의 객관적인 기록이 아닌 제 사적인 감상입니다. 많은 부분 김성수 박사의 "함석헌 평전"과  "www.ssialsori.net"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 한국문화교류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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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일본의 팽창주의 정책은 단순히 일본의 정치적 책략이나 미국의 정치적 지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큰공을 들여 추진되어 온 문화적 전략의 산물이기도 하다. 문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자 생각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문화적 변화는 곧 삶의 변화이자 사람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일본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문화적 전략이야말로 우리가 일본의 팽창주의에 맞서기 위해 주목해야 할 중요한 대상이다. 

다시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조선이 을사늑약을 강요받고 있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테어도르 루즈벨트는 일본에 관한 한 권의 책을 읽고 일본을 사랑하게 되었다.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가 1899년에 영어로 쓴 ‘무사도’라는 책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홋카이도대학 출신의 농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학을 세운 인물이고, 일본에서는 드문 기독교도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천황신도를 합리화한 제국주의자였다. 그가 쓴 ‘무사도’는 서구 사회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이로써 일본은 서구 사회에서 신비롭고 우아한 나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50년대 초에 라이샤워는 ‘일본의 근대화’라는 논문을 써서 일본을 동양에서 가장 훌륭한 국가로 설명했다. 이런 논문의 바탕에도 역시 니토베 이나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일본의 ‘무사도’는 서구 대중문화에서 서구의 ‘기사도’에 필적하는 동양의 문화유산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로버트 드니로가 주연한 ‘로닌’이라는 제목의 영화에서 ‘로닌’이란 사실 ‘낭인’의 일본 발음이다. 대륙침략의 첨병이자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인 승냥이 무리들이 서구에서는 ‘고독한 영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역사 속의 인물] 거짓의 무사도, 니토베 이나조 - 매일신문

[역사 속의 인물] 거짓의 무사도, 니토베 이나조 - 매일신문



거짓의 무사도, 니토베 이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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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3 07:55:05크게보기작게보기프린트이메일 보내기목록
 
 
 
'서양에는 기사도가 있 듯, 일본에는 무사도(武士道)가 있다.' 니토베 이나조(1862~1933)의 '일본의 정신, 무사도'의 서문은 우스꽝스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1900년 미국에서 출간되자 단번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무사도는 '충성과 명예를 가다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다"는 숭고한 개념인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국제연합 사무차장 시절 '일본인은 청소년 교육을 어떻게 하나'라는 질문을 받고 고심 끝에 서양의 기사도에 빗대 일본에는 없던 '무사도' 개념을 만들었다. 1862년 오늘, 무사 집안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공부한 엘리트에 퀘이커 교도인데도 엉뚱하게도 '무사'를 '칼로 수양하는 계급'으로 미화한 것이다.

원래 사무라이는 전쟁 전문가였지, 충성, 명예같은 유교적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메이지유신 전만 해도 봉록을 주는 영주에게만 충성했을뿐, 왕(덴노)이 있는지도 몰랐다.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정적을 암살하거나 등 뒤에 칼 꽃기를 선호하는 집단이었다. 그 '자랑스런' 무사도가 예전에는 힘없는 나라를 침략해 양민을 학살하고, 최근에는 과거에 대한 반성없이 남의 땅을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논리로 쓰이니 웃기는 노릇이다. 무사도는 말장난이다.

박병선(편집부국장)

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 - 유영모.김교신.함석헌을 중심으로

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 - 유영모.김교신.함석헌을 중심으로





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 - 유영모.김교신.함석헌을 중심으로

양현혜 | 김성수 | 이동철 | 박경미 | 서현선 | 김진희 (지은이)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6-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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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기독교 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했던 유영모, 김교신, 함석헌의 삶과 사상을 탐구했다. 자신들의 삶을 통해 식민지 조선인으로서의 민족과 민중의 뼈아픈 경험을 성서와 기독교 신앙에 근거를 두고 해석,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한국적 기독교 사상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세 사상가의 역동적인 삶과 창조적인 사고를 보여준다.



책을 통해 독자들은 이 시대, 이 자리의 한국적 기독교의 의미와 실천이 무엇인가에 대한 통찰과 그 해석의 깊이를 그들의 삶을 통해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머리말



1부 기독교 수용의 한국적 맥락



동아시아의 종교 전통과 한국의 주체적 기독교 수용

- 유영모, 김교신, 함석헌과 유불도 삼교 … 이동철

1. 들어가는 말

2. 동아시아 종교의 기본 성격

3. 유교의 기본 교의와 그 특성

4. 불교의 기본 교의와 그 특성

5. 도교의 기본 교의와 그 특성

6. 맺음말



한국의 '근대성'에 대한 비판과 종교적 대안들에 관한 연구 … 서현선

1. 들어가는 말

2. 유영모: 전통에 대한 주체적 수용과 배타적 진리관의 극복 모델

3. 김교신: 기독교적 권위주의 극복의 모델 - 도덕주의를 바탕으로 한 주체성 확립

4. 함석헌: 식민사관과 민족주의 사관의 극복 모델 - 근대적 주체성을 지닌 씨알 사상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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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한국적 기독교의 형성



동양사상의 우주론에 입각한 유영모의 신학 … 김진희

1. 유영모는 누구인가?

2. 유영모의 동양적 우주관

3. 유영모의 인간론

4. 맺음말: 기독교와 동양사상의 접목



김교신, 함석헌 그리고 우치무라 간조 … 양현혜

1. 문제제기

2. 우치무라의 두 개의 'J'

3. 김교신과 함석헌의 우치무라 사상 이해

4.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교'의 논리 구조

5. 함석헌의 역사 철학: 창조적 수고자로서의 조선의 사명

6.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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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 김성수

1. 들어가는 말

2. 사상사적 입장에서 본 퀘이커 주의

3. 함석헌과 퀘이커주의

4. 맺음말: 한국 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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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론과 관련해서 본 함석헌의 예수 이해

1. 들어가는 말

2. 종교와 신앙을 말하는 태도

3. 하나님 이해

4. 현대 역사적 예수 연구와 관련해서 본 함석헌의 예수 이해 … 박경미

5. 속죄론에 대한 재해석

6. 맺음말: 그리스도와 하나인 인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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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교회는 대부분 자본주의적 물질 문명에 포섭당했으며, 그 노예가 되었다. 물질주의라는 괴수에 사로잡힌 교회 마케팅의 현장으로서 한국 교회는 기독교의 본질 자체에 대한 배반이다. 그리고 물질이건 권력이건 외부로부터 침입하는 어떠한 힘에도 굴하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성에 대한 추구는 위의 세 사람의 사상과 실천의 근저에 흐르는 동력이었다.



오늘날 대다수 한국 교회의 모습에서 예수의 생명과 신앙의 자유를 느끼기 어렵다면, 이 세사람의 삶과 사상, 실천에서는 깊은 믿음과 정신적 자유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언어로 말하자면, 자본주의 물질문명에 의한 인간의 노예화야말로 그들이 온몸으로 저항해서 막아내고자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사상과 실천이 지니는 울림은 우리 시대에 더욱 크게 다가온다. - 머리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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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양현혜

 최근작 : <김교신의 철학 : 사랑과 여흥>,<윤치호와 김교신>,<근대 한·일 관계사 속의 기독교> … 총 20종 (모두보기)

 소개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도쿄 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사학으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윤치호와 김교신》, 《빛과 소망의 숨결을 찾아》, 《근대 한일 관계사 속의 기독교》, 《김교신의 철학: 사랑과 여흥》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일본 사회의 인간관계》, 《기류민의 신학》, 《야스쿠니 신사》, 《동화의 숲에서 절대자를 만나다》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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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성수

 최근작 : <함석헌 평전>,<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 총 5종 (모두보기)

 소개 :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신진공고, 한국철도대, 방송대 영어과를 다녔다. 졸업 후 철도청에서 일을 하고 있던 그는 1989년 2월 4일 서울대학병원 영안실에 누워 있는 함석헌의 시신을 본 후 공무원 생활을 마감했다. 함석헌에 대한 연구를 하기를 결심한 그는 1990년에 영국으로 떠났다. 1990년에서 1994년까지 영국 에섹스대학(University of Essex) 역사학과에서 공부하였으며,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셰필드대학(University of Sheffield) 동아시아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 이 책은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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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동철

 최근작 : <사물의 분류와 지식의 탄생>,<중국철학>,<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 … 총 19종 (모두보기)

 소개 :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으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을 연수하였다. 한국사상사연구소 연구원을 역임하고 1997년부터 용인대학교 중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전과 미래연구소 소장으로서 문헌학, 번역학, 정보학에 근거를 둔 동아시아 고전학을 구상 중이며, 사전학, 도상학, 술수학, 박물학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주요 저서로 『지식인과 인문학』(공저), 『인간 동물 문화』(공저), 『한국학 사전 편찬의 현황』(공저)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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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경미

 최근작 : <행복하여라! 하느님 나라의 사람들>,<신약 성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전하다>,<기독교와 세계> … 총 17종 (모두보기)

 소개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독교학과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신약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신학대학원장, 이화여성신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 요한공동체의 문학과 신학』, 『행복하여라! 하느님나라의 사람들』, 『신약성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전하다』, 『마몬의 시대, 생명의 논리』, 『새 하늘, 새 땅, 새 여성』, 역서로는 『갈릴리: 예수와 랍비들의 사회적 맥락』, 『생태학적 치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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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서현선

 최근작 : <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

 소개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종교학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6년 현재 이화여대 강사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여성신학의 새로운 지평>(공저), <디지털 세대를 위한 기독교>(공저), <여성과 초대 기독교>(공동편역), <여성과 영성 신학>(공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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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진희

 최근작 : <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

 소개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Drew University Graduate School에서 조직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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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의 효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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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의 효능
쑥은 현대인에게 있어 만병통치약이다.
현대인이 가진 질병의 원인 대부분이 환경오염과 잘못된 식습관으로 인한 독소의 발생 그리고 스트레스에 있기 때문에 독소를 배출하고 몸을 따뜻하게 하며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고 신경을 안정시키는 쑥은 현대인의 거의 모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
특히, 현대여성은 노출이 많은 옷차림으로 인해 몸이 차가워지며 혈액순환이 느리고 장기가 냉해져서 불임을 비롯한 여성 질환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여성에게 쑥은 너무도 필요한 식품이자 피를 맑게 하고 몸을 따뜻하게 하는 선약이다. 더구나 쑥은 상식하여도 아무런 부작용이 없기에 누구나 즐겨 먹어도 부담이 없으며 봄철 입맛을 돋우는 데에도 쑥 향기는 그만이다.
가끔 인터넷 상에 쑥은 독이 있어서 하루정도 물에 우려서 먹어야 한다는 말이 돌기도 하는데 이는 약쑥을 불리는 토종참쑥의 효능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말로써, 다른 음식을 섭취하지 않고 쑥만을 계속 섭취하거나 지나치게 많은 량을 섭취하는 것이 아니라면 참쑥은 부작용이 없다.
호(蒿)라고 불리는 인진쑥에 약간의 독성이 들어있어 장기복용이나 다량 섭취할 경우 약간의 부작용이 있다고는 하나 미미한 정도이다.
참쑥은 아무런 독이 없어서 그 자리에서 새순을 따먹거나 겉절이를 해 먹어도 해가 없으며, 임산부에게도 아무런 해가 없다. 단 공해에 오염된 곳이 아니어야 한다.
쑥이 우리 민족과 함께한 역사는 너무도 오래여서 그 기원을 알 수가 없다.
중국의 진시황이 찾으려 했다는 불로초(봉래초)가 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아마도 우리 쑥의 효능은 동아시아 전체에 명성이 자자했던 모양이다.
쑥은 국화과의 다년생풀이다.
세계적으로는 250여 종이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약 200여종이 자생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형태적인 특성에 따라 약 40여종이 보고되었으나, 일반인이 이것을 구분하기는 대단히 어려우며, 흔히 참쑥, 물쑥, 인진쑥 등의 몇 가지가 알려져 있으며, 이밖에도 물쑥, 제비쑥, 뺑쑥 등이 있다.
쑥은 애와 호와 봉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애(艾)는 의학서(醫學書)에서 애엽(艾葉)이라고 하는 것으로 참쑥을 말한다. 약쑥이라는 뜻으로 의초(醫草)라고도 하는데, 민간에서는 애쑥이라고도 한다. 식용과 약용에 모두 좋은 효과가 있다.
호(蒿)는 인진쑥을 말한다. 식용은 불가하고 약용으로만 쓰이는데 흔히 즙을 내거나 환을 지어 먹는다.
봉(蓬)은 싸주아리쑥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의 백령도나 강화도에서 자라는 것이 품질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시 식용은 불가하고 약용으로만 쓰인다.
쑥은 칼륨, 칼슘, 철분, 등의 무기질이 풍부하고 비타민 A. B. C. D 등의 비타민류, 섬유질, 효소 등의 여러 가지 유익한 영양소를 가지고 있으며, 방향성의 정유는 여러 가지 약리작용이 있다. 특히 정유의 주성분인 시네올(Cineol)은 해열, 진정, 소화액 분비 작용이 있으며, 정신을 맑게 하고 뇌파를 안정시키고, 쑥의 엽록소는 암을 예방하고, 피를 정화하며, 살균, 신진대사 촉진, 항알레르기 작용을 한다. 특히 노화방지, 면역기능 강화, 호르몬 조절 작용을 하는 비타민 A의 경우는 같은 봄나물과 비교해 달래의 2배, 냉이의 3배에 가까운 양을 함유하고 있으며, 해독, 피로회복, 알레르기 예방에 효과가 있는 비타민 C는 같은 중량의 귤과 함량이 비슷하다.
또한 쑥은 체내의 불필요한 나트륨을 배출하는 효과가 있어 염분을 과도하게 섭취하는 사람이나 음식을 싱겁게 먹어야 하는 고혈압환자에게는 더욱 필요한 음식이다. 최근에는 쑥 성분이 말라리아 충을 죽이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하였다.
쑥의 효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첫째, 해독과 살균작용을 한다. 쑥은 농약과 화학비료, 기타 약품의 독을 해독하고 분해하여 체외로 배출하고, 간기능을 활성화시켜 피를 맑게 하고 살균과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한다.
둘째, 노화를 방지한다. 쑥에 다량 함유되어 있는 비타민 A와C는 활성산소의 활동을 억제하고, 타닌 성분은 인체의 불포화지방산이 산소와 결합하는 것을 억제하여 세포의 노화를 방지한다.
셋째, 간 기능을 개선한다. 현대인은 스트레스, 흡연, 음주 등으로 인하여 간 기능이 급격히 저하되고 만성피로로 인한 활력저하, 지방간 등이 발생하기 쉽다. 쑥은 간과 신장을 보하여 생활의 활력을 찾아주며 신허로 인한 요통이나 정력약화를 개선한다.
넷째, 정혈작용과 비만해소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쑥은 몸속의 더러운 피를 걸러주고 맑은 피를 보충한다. 또한 혈액속의 콜레스테롤을 제거하여 혈압을 낮추고 체내의 노폐물을 제거하여 혈액을 맑게 하고, 다량의 섬유질로써 대장을 청소하여 비만과 내장비만을 해소한다.
다섯째, 쑥은 모든 현대여성에게 꼭 필요한 식품이자 선약이다. 쑥은 모든 여성 질환에 효과가 있다. 현대 여성은 노출이 심한 옷차림으로 인하여 몸이 냉해지며 특히 하체가 차가워져 냉, 대하, 생리불순, 자궁출혈, 불임 등의 질병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쑥은 몸을 따뜻하게 하고 피를 맑게 하여 불임을 비롯한 기타의 여성 질환을 치유한다. 특히 산모가 저체온일 경우 신생아가 아토피에 걸리는 확률이 아주 높은 것으로 밝혀졌는데 쑥은 산모의 체온을 상승시켜 태아의 아토피를 예방하며 동시에 태를 안정시켜 더욱 건강한 아이가 출산되도록 도와준다.
여섯째, 항암효과가 있다. 쑥의 인터페론에듀사 성분은 항암작용이 있으며, 쑥 잎에 다량 함유된 비타민A는 발암촉진물질의 기능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또한 쑥뜸은 백혈구의 수를 2~3배로 증가시켜 면역력을 향상시킨다.
일곱째, 위장기능을 강화한다. 쑥은 위장의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여 소화흡수를 돕고 건위작용을 하며 산성음식을 중화하며, 산성체질을 알칼리체질로 바꾸어 준다.
이밖에도 쑥은 손발 저림, 경련, 하열, 자궁출혈, 치질, 신경통, 류머티즘, 고혈압 등에 효과가 있다.
쑥은 단군신화에 등장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쑥을 식, 약용으로 사용한 역사가 아주 길고 쑥이 약효가 우수한 신초로 여겨졌었던 것을 증명한다. 또한 일본의 원폭지역에서 쑥이 가장 먼저 나왔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쑥의 생명력이 다른 어떤 식물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쑥이 공해나 기타 오염물질을 해독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것도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쑥이 오염물질을 해소한다는 것은 오염물질을 그만큼 잘 흡수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쑥을 채취하여 식용이나 약용으로 쓰고자 한다면 반드시 공해나 농약 등의 피해가 없는 곳이어야 한다. 농민들이 사용하는 제초제 중에는 지상부(地上部)만을 죽이는 농약이 있는데, 바로 고엽제의 원료로 만들어진 제초제이다. 이 농약을 사용하면 모든 풀들의 지상부가 죽고 뿌리만 남게 되는데, 생명력이 강한 쑥은 그 후에 다른 풀들에 비하여 급속도로 빠르게 다시 순이 나오게 된다. 만약 쑥을 채취하고자 할 때 주변에 다른 풀이 없고 쑥만 파랗게 돋아 있다면 한번쯤 의심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오염의 피해만 없다면 쑥은 현대인 모두를 건강하게 할 만한 완전한 식품이자 약용식물인 것이다.

니토베 이나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니토베 이나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니토베 이나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니토베 이나조(1862-1933)
니토베 이나조(일본어: 新渡戸 稲造にとべ いなぞう, 1862년 9월 1일 ~ 1933년 10월 15일)는 일본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시대에 걸쳐 활동했던 사상가이자 기독교인, 농업 경제학자, 작가, 교육가, 외교가, 정치가이다.

경력[원본 편집]

그는 국제연맹의 사무차장을 역임하였고 삿포로 농업대학교, 교토 제국대학교, 도쿄 제국대학교, 다쿠쇼쿠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또한와세다 대학교버클리 대학교스탠포드 대학교컬럼비아 대학교, 미네소타 대학교, 해버포드 대학교, 브라운 대학교, 버지니아 대학교, 일리노이 대학교, 제네바 대학교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객원교수 및 명예교수를 지냈다.
그는 도쿄 여자대학교를 창립한 초대 학장이기도 하다.

학문과 사상[원본 편집]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로는 《무사도》가 있으며 일본 화폐 5000엔(円)권에는 한때 그의 초상이 실려 있었다. 그는 당시에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국제주의자였고, 오늘날까지도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1880년대 중반 존스 홉킨스 대학원에서 허버트 백스터 애덤스(Herbert Baxter Adams)에게 국제정치학을 배우며 스스로 계몽된 사회라고 자부하던 나라들이 내세우던 야만인을 문명화해야한다는 사명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일본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문명국 대열에 합류하도록 만들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1885년 삿포로에 사는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이를 밝혔다. 그는 토마스 아놀드(Thomas Anold)가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삿포로의 아놀드 박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포부를 전했다.
그는 일본의 식민정책연구를 통해서 당시 일본인들에게 식민지 정책과 제국에 관한 지식을 가르쳤다. 니토베가 일본에서 개척한 이 학문분야는 일본이 시행하고자하는 국제 정책에 대해서 일반 국민들과 공직에 진출하려는 젊은 관료들이 꼭 공부해야할 분야였다. 그의 연구를 통해서 일본에서 '보호국'이나 '병합'과 같이 일본제국을 규정한 국제용어들이 학문적으로 설명되고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1910년 한국 병합무렵 도쿄의 대학과 직업학교 그리고 고등학교에서는 모두 식민 정책 분야를 가르쳤고 이를 통해 일본인들은 한일병합이 제국주의 정치라는 보다 넓은 국제적 문맥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배웠다. 이렇게 함으로 일본은 미국이 필리핀을 통치하고 프랑스가 베트남을 통치하는 방식과 유사하게 일본제국도 식민지를 통치한다는 상식을 전파했다. 그는 1910년 도쿄대학에서 식민정책과목을 가르칠 때 항상 칠판에 "식민지화는 문명을 전파하는 일이다"라는 글귀를 써넣고 강의를 시작했다. 니토베는 한국인들이 일본 식민주의자들이 자신을 개화시켜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1932년 일본의 만주침략을 논리적으로 옹호했으며, 여름 동안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일본의 행동을 설명했고 미국 CBS 라디오 방송에서 많은 미국 청중을 대상으로 일본의 행동을 정당화했다.[1]

일본의 무사도 - 개정판

알라딘: 일본의 무사도 - 개정판





일본의 무사도 - 개정판 l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8

니토베 이나조 (지은이) | 양경미 | 권만규 (옮긴이) | 생각의나무 | 2006-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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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에 출간된 <사무라이>의 개정판. 이 책은 2004년 10월까지 일본 5,000엔 권 지폐 속의 인물이었던 니토베 이나조가 1899년 서양인들에게 일본 고유의 정신인 '무사도'를 통해 일본 문화, 일본인, 일본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지 널리 알리려는 목적으로 영어로 쓴 것이다.



이후 17개국에 번역 소개되었으며, 100년이 넘도록 '신비롭고 매혹적인 나라 일본'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공을 세운, 일본 근대의 대표적 저작물이다.



저자는 사무라이 정신을 대변하는 덕목, 즉 의(義), 용기(勇氣), 인(仁), 예(禮儀), 명예(名譽), 극기(克己), 그리고 비장한 죽음 할복(割腹) 등을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해박한 지식과 정연한 논리로 설명한다. 책에는 사무라이 계급의 흥망과 관련된 주요 전쟁, 사무라이의 복장과 전설적 영웅의 모습 등을 담은 희귀한 원색 도판 자료가 풍부하게 실려 있다. 개정판.



서문



제1장 존재를 위한 명분 - 무사의 도덕체계

제2장 무사와 무사도의 성립 - 무사도의 연원

제3장 물질을 초월한 이상 - 의 또는 정의

제4장 무사의 정신이 다다르는 곳 - 용기, 감위견인의 정신

제5장 다스림의 최고덕목 - 인, 측은지심

제6장 다른 이의 마음을 헤아림 - 예의

제7장 참된 마음 - 진실과 성실

제8장 이름에 대한 의무 - 명예

제9장 국가와 주군에 대한 복종 - 충의

제10장 영혼과 품성의 정화 - 무사의 교육과 훈련

제11장 육체를 뛰어넘는 정신 - 극기

제12장 영혼을 내놓는 죽음 - 할복과 복수

제13장 칼 끝에 놓인 정신 - 칼, 무사의 혼

제14장 안쪽에서 주는 도움 - 여성의 지위와 역할

제15장 무사도의 감화 - 야마토 정신

제16장 일본을 움직이는 힘 - 무사도는 여전히 살아있는가?

제17장 불멸의 정신 - 무사도의 미래



역자의 말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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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니토베 이나조 (新渡? ?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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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 :

1862년 일본 모리오카 번 하급무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동경대학교를 중퇴하고,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3년간 경제학·문학·역사학을 공부한 뒤 다시 독일로 건너가 본 대학에서 농정 경제학·농학·통계학 등을 전공했다. 귀국 후 삿포로 농학교 교수, 경도제국대학교 교수, 제일고등학교 교장, 동경제국대학교 법학부 주임교수, 동경여자대학교 초대학장, 국제연맹 사무차장을 역임했다. 1899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사무라이>를 출판하고, 1933년 캐나다 태평양 조사회에 참석 중 사망했다. 일본의 5,000엔 권 화폐에 그의 초상이...



역자 : 양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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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 : 1955년 서울 출생. 전문번역가이자 ‘됴한글 번역연구회’ 리더로 활동 중이며, 일본어 번역연구회 ‘아지사이(Ajisaii)’ 대표로 있다. 옮긴 책으로는 《라블레의 아이들》 《사무라이》 《태공망 1, 2, 3》 《진주부인 1, 2》 《우리의 타자가 되는 한국》 《천축으로 가는 좁은 길》 《하루가 떠나면》 《심리 경영》 《보딩 스쿨》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라》, 아동문학으로 《노란 코끼리》 《열한 살 인생수업》 《한 송이 꽃》 《내일의 바람》 외 다수가 있다.

역자 : 권만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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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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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정도 책이 고전이라고?  새창으로 보기

심술보 ㅣ 2008-05-29 ㅣ 공감(2) ㅣ 댓글 (0)

 솔직히 부럽습니다. 이 정도 수준의 책이 서양에서는 고전으로 읽힌다니 말입니다. 이 책은 일본의 5000엔 권 화폐에 그의 초상이 그려져 있을 정도로 일본 근대 최고의 교양인이자 지식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니토베 이나조라는 사람이 미국에서 1899년 출간한 책입니다. 일본의 문화를 궁금해하거나 이질적인 문명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서양인들을 위해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인 무사도를 영어로 설명한 책입니다.

 미국과 독일에서 다양한 학문을 익힌 저자는 서양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일본의 정신인 무사도를 서양의 기독교나 기사도에 못지 않은 고귀한 정신이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종횡무진 서양의 석학들과 바이블을 인용하며 미사여구로 포장한 무사도에 대한 설명이 실로 정교합니다. 그 내용이 간결하면서도 설득력 있어 오랜 시간 서구인들에게 일본을 알리는 교과서 역할을 해 온 책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 왜 서양인들이 일본문화 그 중에서도 사무라이 문화에 그렇게 열광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한데 이 책 내용을 유심히 파고들면 사실 별 게 없습니다. 저자는 마치 무사도가 일본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사상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동아시아 사람이라면 누구나 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조상대대의 전통사상과 그다지 다를 게 없는 것들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선비정신"과 비교하면 지성과 철학이 결여된 조악한 사상일 뿐입니다. 물론 어느 나라나 각자 고유의 문화가 있고 다른 나라의 문화와 비교해 더 낫거나 낮게 평가되어선 안 된다는 점은 전적으로 동의합니다만 무사도가 아시아에서도 특별한 독창적인 문화.사상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점은 분명 왜곡에 가깝다 할 것입니다. 그 증거로 무사도가 표방하는 좋은 덕목들은 모두 우리의 "선비정신"으로 대체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습니다. 오히려 "선비정신"이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맹목적인 무사도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한다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저는 이 별 볼 일 없는 책이 한없이 부럽습니다. 우리는 이런 책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들보다 더 뛰어난 문화를 갖고도 그것을 세계에 알리려는 노력을 게을리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온 세계가 일본문화에 열광하는데 반해 우리나라는 중국이나 일본의 아류국 정도로 인식되는 게 엄연한 현실입니다. 최근 많은 노력이 일어나고 있지만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문화를 제대로 알릴 수 있는 이런 책들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그 전에 우리 스스로 우리 것을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는 마음부터 갖춰야겠습니다. 남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질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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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초반 일본 지식인의 무사도 예찬  새창으로 보기

popy1 ㅣ 2007-04-17 ㅣ 공감(1) ㅣ 댓글 (0)

소설, 영화나 만화 등에서 막연하게 보던 일본 무사도에 대해 좀 정리된 시각을 갖고 싶던 차라 받자 마자 읽기 시작했는데 중간에 잠시 딴짓하고 어쩌고 하다보니 끝내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저자는 일본의 5000엔권 지폐 도안으로 남아 있는다 니토베 이나조.  좀 고액권이다보니 한번도 구경하지 못했는데 다음에 일본 갈 때는 이 아저씨 얼굴을 구경하기 위해서라도 꼭 5000엔짜리를 한 장 바꿔봐야겠다.



20세기 초반에 서구인들에게 일본의 정신이자 기조인 무사도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주기 위해 영어로 쓴 텍스트라고 한다.  그런 목적이 있는 만큼 내용이 상당히 쉽다.  더불어 적절하게 사용된 예와 그림 자료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가치가 있다.



무사도가 갖고 있는 문제와 부정적인 부분들을 지적하고 인정하긴 하지만 전체적인 기조는 무사도에 대한 담담한 예찬이다.  그러나 눈쌀을 찌푸르게 할 정도로 국수주의적이거나 눈을 가리고 무조건 내가 제일 잘 났어~라고 외치는 그런 무식함은 배제된 긍정적인 면의 부각.  만약 내가 서구인들을 대상으로 조선의 양반사회와 정신에 대한 글을 쓴다면 -내가 후기 양반 사회의 경직성을 엄청나게 싫어함에도- 이 정도의 기조는 나올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욕은 못한다.  이건 자기가 속한 문화와 사회에 대한 평균적인 애착을 가진 사람이 쓰는 자기 소개서의 한계이자 장점일 것 같다.



전체적으로 일본에 대해 외부인들이 갖고 있는 오해와 환상, 그리고 무사도에 대한 잘못된 정보들을 바로잡기 위한 일본 지식인의 노력이라고 평가해야할 것이다.  소위 사무라이 정신이 일본 사회와 역사에 미친 영향과 소소한 일화들을 알고 이해하는 첫걸음으로는 더없는 선택인 것 같다.



그러나... 이 무사도의 단점이랄까... 극단적인 부분의 피해를 고스란히 몇번이고 맛봐야했던 바로 옆 국가.  반경 밖에서 방관자인 서구인들과 달리 그 미친 칼날에 맞아 피를 흘린 한국인의 입장에서 불편함을 가지는 게 지나친 민족주의나 피해의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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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사도 그림책이 맞긴 한데....  새창으로 보기

joorang ㅣ 2007-04-05 ㅣ 공감(1) ㅣ 댓글 (0)

처음엔 이름에서 또 표지에서 느낌이 그림책인 줄 알았다.

물론 책 내용 중에 그림이 많기도 하지만....

막상 읽기 시작한 책 내용은 생각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1899년 발간된 책을 번역한 것이라는 데 놀랐고 끄 내용에 놀랐다.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사무라이(무사)에 대한 생각이 우리랑 다른 것에 대하여.

뭐 구구절절이 얘기할 필요는 없지만 한 번쯤 읽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서 좀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기에.

"무사도는 글자 그대로 무인 혹은 기사가 지켜야 할 도리로서 무사가 직분을 이행할 때 나아가 생활 속의

언행에서도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도리"라고 말 하면서 나름대로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부여 해 놓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본다면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늘어 놓고 있다.

그것이 일본 사람들의 생각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해설에 적힌 이 수정 교수의 말

" 일본은 강하다. 그것은 적어도 일본에게 있어서는 '선'이다. 숨겨져 있지만 일본인에게는 그러한 의식이, 아니 무의식이 있다. '강함은 선이다.' . '승리는 선이다.' 일본에게 있어 이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때문에 " 한국인이 일본의 '무사도'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는 원칙적으로 '이해와 경계와 대비'이어야 한다."

라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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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협한 일본주의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항변  새창으로 보기

dalpan ㅣ 2007-03-12 ㅣ 공감(2) ㅣ 댓글 (0)

벌써 10년이 흘러버렸다. 처음 일본땅에 여행을 가고 나름대로 소중한 경험들을 들고 왔지만, 더 자세히 일본을 들여다 보려해도 마땅한 서적들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기껏 서점에서 구할 수 있었던 책이라야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 영화감독 이규형의 일본문화 소개책자 정도랄까. 이제는 일본문화의 개방으로 영화에서부터 음악, 서적까지 넘쳐나지만 불과 얼마전까지는 상당히 피상적이었다 싶다. 가깝고도 멀다는 말이 실감난다.

이 책은 출간한지 100년이 넘은 책이다. 작가인 니토베 이나조는 그 옛날에 존스 홉킨스에서 공부했고, 귀국해서는 교육자로서 그리고 국제연맹 사무차장까지 역임했으니 꽤 유명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우연찮게도 얼마전에 읽은 책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의 저자는 1만엔 일본지폐, 이 책은 5천엔 일본지폐의 주인공이니 일본은 이미 과거 봉건시대를 접고 근대화 이후 시대에서 그들의 미래를 보고 싶은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국사책에서 보아오던 일본(왜)은 설사 36년간 한반도를 침탈했던 과거를 애써 부인하지 않아도, 백제에게 문화를 전수받고, 조선시대 통신사절을 받아들이던 왠지 왜소해 보이던 국가가 아니었던가 싶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우리가 그런 관념적 과거형 속에 묻혀있을 때, 그들도 놀라듯 그들의 근대화는 말그대로 일사천리였다. 우리에게 일본의 근대화는 무서운 일이었고, 불행한 역사로의 귀결이었다.

이 책은 100여년 전 니토베 이나조가 미국에서 출간한 책으로 물론 영어로 먼저 발간된 책이다. 일본에 대한 외국인의 관심에, 일본의 근원이라고 작가가 판단한 '무사도'의 연원, 덕목, 정신, 의무를 비롯해 무사도의 현재, 미래를 서양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 책이다. 서문에도 나와 있듯이 '왜 일본에는 종교교육을 시키지 않느냐?'는 외국인 교수의 질문에 말문이 막혀 고심한 끝에 그 종교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왔고 일본정신의 근원이라 할 만한 '무사도'에 대한 글을 쓰기로 한 것이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기본적인 정신은 동양에서 살고있는 우리들에게는 그렇게 낯선 것들이 아닌 유교적 가치의 발견이다. 다만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인 인(仁), 예(禮), 용(勇), 충(忠)등의 덕목에 일본 봉건주의의 특수한 계급, 바로 사무라이에게 요구되던 사회적, 역사적 책무와 그들의 의식에 관한 접목들을 시도한다. 어쩌면 오랜 세월 가마쿠라, 무로마치, 전국시대를 거쳐 에도막부에 이르기까지 군사정권으로 유지되어온 일본의 봉건역사에서 사무라이와 무사도 정신은 특수계급의 정신적 지향점을 넘어 일본전역에 뿌리내려 온, 작가의 생각대로 하나의 종교적 의식으로 받아들여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더욱이 이 책을 텍스트로만 접한다면 따분하기 그지없는 책일 수도 있는데, 거의 책의 1/3을 사무라이와 전쟁에 관한 옛 그림 및 도판으로 가득 채우고 있어 내용의 이해도를 높이는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그러나 누차 일본인들이 직접 쓴 책들, 특히 근대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바이지만 인류보편의 가치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글은 실종되고, 대부분이 일본적 가치의 절대화, 이를 통한 편협한 일본주의의 실상을 드러내는 듯해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책의 전반부, 무사도의 기본 정신을 설명하면서 동양사상에서 아주 익숙한 유교적 가치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유사한 내용을 끌어들여 이를 전부 일본화하는데, 동양사상에서 말하는 인류보편의 가치를 마치 일본고유의 것으로 둔갑시키고 이를 찬미한다. 심지어는 서양의 유사 내용도 일본화하는데 여념이 없다.

"일본 속담에 "길 잃은 새가 품속으로 날아들면 사냥꾼이라도 새를 죽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기독교적인 적십자운동의 정신이 이미 일본에 그 뿌리가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듯하다. 일본 국민들은 제네바의 만국적십자조약보다 몇 십 년 앞서, 일본 최고의 소설가 타키자와 바킨의 작품을 통하여 적군의 부상병을 치료해 주는 이야기에 친숙해져 있다." (72p)

이는 어찌보면 편협한 일본주의의 서양인의 전통적 동양무시-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항변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근대화를 이룬 일본이 다른 아시아 국가를 무시하고 제국주의 침탈로 달려간 역사적 사실을 볼 때 결국 이러한 무사도 정신은 일본의 가치이지 인류보편의 가치는 아님이 명징하다.

작가는 칼로 대변되는 무사도 정신에 전통적 유교적 가치로 덧칠을 하고, 절대 등 뒤에서 칼을 꽂지않는, 온화하고 평정심을 가진,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할복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무사들을 그려내나, 칼에 그 마음을 덧씌운다고 칼이 붓이 되지는 않는다. 그저 칼의 가치는 힘(무력)의 가치일 뿐이라는 생각이 갈수록 오히려 강하게 든다. 세계 어디에서도 칼을 쓰던 무인이 지닌 덕목에 충성과 명예를 빼고, 인명살상만 강조하는 민족은 없다. 무사도정신이 일본의 종교적 가치를 능가하는 일본정신의 뿌리라 함은, 결국 힘의 가치를 절대화한다는 편협한 일본을 일본인 스스로 시인한 것에 다름아니다. 100년이 넘게 지난 지금, 다시 우경화되는 일본의 상황에 곱지않은 시선이 가는 것도 이 때문인가 싶다.


Alternate day fasting (AFD) diet and fasting health implications

Alternate day fasting (AFD) diet and fasting health implications







Diet health centre

Is alternate day fasting good for your health?

By 
WebMD Feature
Medically Reviewed by Dr Rob Hicks
Fasting doesn't seem like fun. It conjures up images of supermodels who exist on salad and diet drinks just to keep their size zero figures or maybe those drastic dieters who leave it to the last minute and need to lose half a stone before a wedding in a week's time!
It seems pretty extreme and there's always the concern you'll just put the weight back on when you stop, that's if you have the will-power to start in the first place!
The recent buzz has been alternate day fasting or intermittent fasting. There's some evidence that short periods of fasting could not only be a way to lose weight but also be potentially good for your health.

Do you lose weight fasting?

The simple answer is yes. It may not be the most practical - or safest - diet, though. Some people also use fasting as a way to cleanse the body of toxins, although experts say our bodies are perfectly equipped with organs that already do the job.

When you fast, your body is forced to dip into energy stores to get the fuel it needs to keep going, so you will definitely lose weight.

The big question is how long you will keep that weight off. Because food was often scarce for our ancestors, our bodies have been genetically programmed to combat the effects of fasting.

When you eat less food, your metabolism slows down to conserve energy. Then, when you go back to your usual diet, your lowered metabolism may cause you to store more energy, meaning that you will probably gain back the weight you lost and possibly even put on more weight when eating the same calories you did before the fast.

As you fast, your body will adjust by reducing your appetite, so you will initially feel less hungry. However, once you have stopped fasting your appetite hormones will return full force and you may actually feel hungrier and be more likely tobinge.

Alternative day fasting

Alternative day fasting (ADF) is a bit different. It involves eating what you want one day, then a very restricted diet (fewer than 600 calories for men 500 for women) the next, and most surprisingly, it does not seem to matter that much what you eat on non-fast days.

Dr Krista Varady of the University of Illinois at Chicago carried out a 10-week trial comparing two groups of overweight patients on ADF.

Her findings concluded that ADF is a viable diet option to help obese people lose weight and to decrease their coronary artery disease risk.

"If you were sticking to your fast days, then in terms of cardiovascular disease risk, it didn't seem to matter if you were eating a high-fat or low-fat diet on your feed (non-fast) days," she said.

Dr Michael Mosley, who looked into the science, couldn't manage alternate day fasting but did a five:two ratio, five days normal eating and two days of under 600 calories.

He stuck to this diet for five weeks, during which time he lost nearly a stone and his blood markers, like IGF-1, glucose and cholesterol, improved.

He said: "If I can sustain that, it will greatly reduce my risk of contracting age-related diseases like cancer and diabetes."
(continued)

Alternative day fasting continued...

"Alternate day fasting is another way of reducing the overall amount of calories eaten to help with weight loss," according to Emer Delaney from theBritish Dietetic Association.

"There has been some debate recently that this 'new' way of eating can offer major health benefits, however there simply isn't the evidence to back this up."
He says unsurprisingly, reducing the overall intake of calories, whether it's every day or on alternate days, will result in weight loss.

"Whilst it may work for some people, they need to ensure their diet on 'non-fast' days is packed with fruit and vegetables, wholegrains, lean protein rich foods such as chicken, fish, turkey and low fat dairy products."

Do you live longer fasting?

Studies of fasting in both rodents and humans appear to indicate a connection between calorie restriction and longevity. In one study of overweight men and women, a calorie-restricted diet improved markers of ageing such as insulin level and body temperature.

Fasting might also improve longevity by delaying the onset of age-related diseases including Alzheimer'sheart disease and diabetes.

One study showed that missing meals once a month, as members of the Mormon religious group do, reduces the risk of clogged arteries (the build-up of plaque that can lead to heart attacks and strokes). However, it is not clear from this research whether fasting alone or the Mormons' generally healthier lifestyle (they also abstain from coffee, alcohol and smoking) is responsible for the improved hearthealth.

A study which examined 100 overweight women from Greater Manchester found that women who followed a strict 650 calories-a-day diet for just two days a week (and ate what they wanted on the other days) lowered their risk of breast cancerby 40%. Researchers found the calorie-controlled regime almost halved cancer-causing hormones in women at high risk of the disease.

Researchers do not yet know whether the effects of fasting translate into an actual increase in lifespan, because they have not followed people for long enough periods of time.

Registered dietitian and food coach Sasha Watkins says: "Caloric restriction does seem to have some link with living longer. The population of Okinawa in Japan eat 20% less than the Japanese national average and have many more centenarians in their midst. However, the research is not conclusive. A recent study found that monkeys eating 30% less calories did not live any longer than the control monkeys but they did have lower cholesterol levels."
She says more studies are definitely needed in this area to understand if and how fasting may be good for our health.

Current medical advice

As it stands medical opinion at the moment is that the benefits of fasting are unproven and until there are more human studies it's better to eat around 2000 calories a day.

If you really want to fast then you should do it in a proper clinic or under medical supervision, because there are many people, such as pregnant women or diabetics on medication, for whom it could be dangerous.

The British Dietetic Association says that rapid weight loss occurs when fasting or severely restricting dietary intake, but this weight loss is mainly water, glycogen (the body's carbohydrate stores) and muscle, rather than body fat.
"Routine fasting is practised successfully by many cultures for religious purposes and may have some health benefits, says BDA spokesperson Rick Miller, "However, the clinical evidence for fasting as a treatment in healthcare is not clear.
"Fasting could potentially be unsafe in some individuals without medical supervision or lead to the development of poor eating patterns. Dietitians would always recommend a well-planned, healthy diet in the first instance for health andlongevity."

Dietitian Sian Porter says: "A lot of people have a five days and two days eating pattern.

"Make sure you eat foods that make you feel full and keep your fluid intake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