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14

4차원 영성 |순복음교회

4차원 영성 |순복음교회




4차원 영성

3차원의 인생을 지배하는 4차원의 영성

사람은 입체적인 존재입니다. 사람은 3차원의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3차원이 생기자마자 운명적으로 4차원에 속하고 4차원의 지배를 받는 존재로 지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입체적인 존재인 우리들은 3차원이라는 공간이 생기면서 무한이 우리에게 들어와 있고 시간이 생기면서 영원이 우리에게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에게 다 포함되는 원리입니다. 4차원은 영적인 세계입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진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3차원의 세계에 있으면서 4차원에 속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의 영은 하나님의 존재에는 비길 바 못되지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영원과 무한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반적으로 사람은 시간의 영원성을 느끼기도 하고 우주의 무한성의 생각을 품기도 하고、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생각도 품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4차원의 세계에 속하고 있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면 3차원의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과 동일하게 4차원의 세계에서도 활동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영적 세계에서의 활동이기 때문에 그 활동을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눈여겨보면 결국 이들의 활동은 사람이 모든 일상에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사람의 「4차원의 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4차원의 영성의 4가지 요소

4차원의 영성에는「생각、믿음、꿈、말」이라고 하는 4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이것들이3차원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잘못 인식하여 사용하면 바라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 때에는 헤매는 인생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것들은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3차원에서는 잡을 수 없고 4차원의 세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바르게 인식하여 사용할 때에 우리들의 인생이 변합니다.
즉、4차원(생각、믿음、꿈、말)을 바꾸면 3차원이 바뀌는 것입니다.
생각

4차원의 세계에서 어떻게 생각하는냐에 따라서 3차원에 결과가 반영됩니다. 생각이 부정적인 사람에게는 3차원에서 부정적인 것이 발생합니다. 머리속에서 「나는 이제 안된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불행하며 슬프다」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결과적으로 3차원에 있는 신체, 생활, 사업에 그대로 나타나도록 되는 것입니다.
한편、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3차원에서 긍정적인 것이 일어납니다.「나는 건강하다. 나는 잘 된다. 나는 행복하다.」라고 하는 생각이 3차원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4차원의 세계에서는 「나」와「너」의 구별이 없습니다. 영의 세계이기 때문에 오직 메시지만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미워하기로 마음먹거나 복수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바로 자신의 인생에 미움과 복수의 영향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 먼저 내가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4차원의 세계에 「망했으면 좋겠다」라는 메세지가 내 3차원에 그 메시지가 기록되어 내가 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게 있어서나 자신에게 있어서나 그 어떤 무엇에 있어서도 부정적인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도록 합시다.
믿음

믿음은 4차원의 세계를 통해 3차원을 바꾸는 강력한 힘입니다. 성경에도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마8:13).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내일도 살아있다”라고 믿고 있는 것도 일종의 신념입니다.그러나、신념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지금까지도 그랬었으니까라고 하는 정도의 이유밖에 찾을 수 없고 이 근거는 3차원에 입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한자대로 「믿고 바라보다」라는 것입니다.
3차원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4차원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근거하여 믿고 바라보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예수그리도에 의해 구원을 부여해 주셨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새롭게 다시 거듭나도록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오중복음』을 참조해 주세요.)성령님에 의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야말로 3차원의 세계를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믿음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없어서는 안되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나는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믿습니다.”“예수님의 보혈로 죄가 용서받았음을 믿습니다.”“성령님이 오셔서 나를 거룩하게 하심을 믿습니다.” “병이 나음을 믿습니다.”“복 받은 것을 믿습니다.”라고 믿고 고백하면 우리들의 인생이 믿음으로 프로그래밍합니다.믿음의 프로그래밍을 하는 당신의 삶은 반드시 변화될 것입니다.


꿈은 3차원의 세계에서 희망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도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세계를 변화시켜 가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막연하게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자유로이 구체적으로 그려 나가는 꿈이야말로 그 사람의 인생을 프로그래밍하여 인도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인생은 4차원의 꿈으로 프로그래밍되지 않으면 3차원의 세계에서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꿈은 꿈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개인적인 욕망이나 잘못된 음욕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사탄의 영향을 받은 꿈이 되어 버립니다.그리고、이러한 꿈은 일시적으로는 좋게 여겨지지만 최종적으로는 파멸에 이르게 하는 인생으로 프로그래밍 되어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꿈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님을 통해 내 마음을 거룩한 꿈으로 프로그래밍해야 합니다.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그 마음 속에 꿈이 있다면 그 꿈은 3차원을 점령하고 변화시킵니다. 4차원의 꿈은 3차원의 세계를 부화시킵니다. 올바른 꿈으로 프로그래밍하면 죽음은 생명으로、무질서는 질서로、흑암은 광명으로、가난은 부유로 변화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변화는 4차원의 세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을 통해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4차원적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말을 하기 때문에 문명을 만들고 발전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이 세고 사나운 동물이라도 문명을 만들고, 계획하고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3차원이 어떤지를 알게 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이미 소망하는 것이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패하는 사람은 말에서부터 이미 실패를 말합니다. 4차원에서는 「안된다」라고 말해 놓고 3차원에서 성공을 기대하는 것은 헛수고입니다. 부정적인 말은、자신의 4차원의 세계에서 자신을 부정적으로 프로그래밍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욕하는 사람은 자신의 4차원을 그렇게 프로그래밍하기 때문에 다시 자기의 3차원인 욕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말을 하느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변화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성경 말씀을 암송하고 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4차원에 굉장한 프로그램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삶 전체가 송두리째 변하는 기적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목사님들이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4차원을 뒤 흔드는 강력한 힘입니다.
당신도 이 기적의 역사를 일으키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조용기 목사의 4차원의 영성은 다른 종교 사상 - 바른믿음

조용기 목사의 4차원의 영성은 다른 종교 사상 - 바른믿음

조용기 목사의 4차원의 영성은 다른 종교 사상
정이철

승인 2014.09.24




조용기 목사의 또 다른 심각한 문제점은 인간이 말과 생각으로 자기의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조용기 목사는 설교 등을 통해 자주 이런 내용을 강조하였고, 특히 자신의 책 <4차원의 영성>을 통해 이런 사상을 '4차원의 영성'이라는 명칭으로 더욱 강력하게 전파하였다. 조용기 목사의 '4차원의 영성'을 요약하자면, 우리가 적극적인 말과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때, 우리의 영적인 세계가 변화되어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조용기 목사는 3차원 세계를 살고 있는 인간은 4차원 영적세계로부터 필연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고, 인간은 언어와 생각으로 영적세계를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인간이 긍적적인 말과 극적적인 생각으로 4차원의 영적세계를 프로그래밍하면 그 결과가 3차원의 세계, 즉 인간의 삶의 현실에 변화가 일어난다고 한다. 조용기 목사는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그런데 믿음 안에 있으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4차원을 프로그램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대로 생각하고 믿고 꿈꾸고 말하며 행하는 4차원의 프로그램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라는 것은 새롭게 프로그래밍 된 4차원의 요소를 하나님께 올리는 작업입니다. 즉 4차원의 세계를 프로그래밍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우리의 믿은대로 이루어주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그것대로가 아니라 '네 생각대로, 네 믿음대로, 네 꿈대로, 네 입의 말대로'라고 하시며 우리에게 책임을 지우십니다. 이는 우리의 4차원을 우리가 프로그래밍해야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조용기 목사)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감추지 못합니다. 4차원의 하나님 앞에 벌거벗긴 채로 점령당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4차원의 세계를 제대로 잘 프로그래밍하면 축복이 쏟아집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순간부터 새롭게 프로그래밍하십시오. 새사람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의 프로그램을 말씀을 통하여 받아들이면 청조적인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는 깊고 심오한 절대 진리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4차원의 생각, 믿음, 꿈, 말을 기도와 말씀과 성령으로 훈련시키십시오. 당신의 삶은 이미 변하고 있습니다."(조용기 목사)

조용기 목사의 책에서 발췌한 위 내용에 의하면 우리의 미래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꿈, 말, 생각에 달려있다. 인간이 적극적인 생각과 말을 통하여 현실을 지배하는 4차원 영적세계에 영향을 미치면, 말과 생각에 맞는 성공하고 번영하는 현실이 따라오게 된다는 것이다. 3차원의 인간 세계가 4차원의 영적세계에 의해 지배됨으로, 언어와 생각으로 4차원의 세계에 영향을 영향을 미치면 결국 인생이 변한다는 조용기 목사의 사상은 과연 성경적일까?



4차원의 영성의 배경은 뉴 에이지(New Age)

조용기 목사 등의 유명한 오순절 운동 성령사역자들에게서 더 많이 발견되는 이런 이론은 매우 비성경적이다. 인간의 말과 생각에 영적인 세계를 변화시키는 기운와 힘이 있다는 이런 이론은 인간에게 처음부터 내재적인 신성이 있다고 보는 그릇된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불행히도 이런 심각한 사상이 그릇된 성경해석과 함께 복음의 일부가 되어 이미 교회 속으로 깊이 들어왔다. 이제는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포장되어 우리의 신앙의 일부가 되었다.

조용기 목사 등이 강조하는 인간의 말과 생각에 힘이 있다는 이런 이론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뉴에이지(New Age) 철학과 뉴 에이지의 핵심 요소를 처음부터 간직하고 있었던 다양한 우상종교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 뉴 에이지 철학은 인간을 타락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 보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과 같은 신성을 가진 존재로 본다. 뉴 에지 철학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으나 타락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직면하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성경적 진리를 전적으로 배격한다. 뉴 에이지 사상의 인간은 처음부터 창조주 하나님과 신성을 공유하는 하나님과 같은 인간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구상)과 말씀은 헛되이 사라지는 법이 없고 반드시 그 내용을 스스로 성취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 내용이 성취시키는 '창조적 능력'(Creative Power)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피조 세계에 대해 품으시는 모든 구상과 그 입으로 내 보내시는 모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은 헛되이 사라지는 법이 없다.

뉴 에이지 사상은 인간에게도 하나님과 같은 신성의 일부가 공유되어 있으므로 인간의 생각과 말 속에도 하나님의 말과 생각과 같은 힘과 능력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인간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언어, 그리고 믿음과 꿈(생각)을 품으면 장차 현실이 그대로 변한다고 한다. 예를들자면, 병든 사람이 "내 병은 떠나간다!"라고 믿음을 가지고 말하고, 가난에 시달이는 사람이 "나는 이제 가난에서 벗어나 돈을 소유하고 지배하게 된다!"라고 믿음으로 말하면, 그 말들이 영적세계를 움직여서 장래의 현실을 그렇게 만들어 놓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말과 생각에 이러한 기운과 힘이 있다는 사상이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매력적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말과 생각을 바꾸어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발상은 타락한 죄인을 창조주 하나님과 비슷한 반열에 세우는 망령된 사상이다. 인간의 교만과 욕망을 부채질하는 이런 요설이 성경의 몇 구절들과 결합되어 정말로 그럴싸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버렸다.

성경은 인간의 미래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렸다고 말씀하신다. 인간이 복을 누리는 조건은 오직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먼저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 받아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시고 본을 보이신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구현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한다.

말과 생각으로 인간이 스스로 4차원의 세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성하여 내일의 성공과 번영이 실현되는 3차원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조용기 목사의 주장은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다. 그는 기독교의 기도도 4차원의 세계를 조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도하여 성령충만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즐거이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더 하여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에 힘쓰는 것이지, 4차원의 영적세계를 우리 스스로 바꾸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믿음'도 성경적인 정의와 이해에서 벗어났다. 우리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4차원의 영적세계를 우리에게 복이 되도록 프로그래밍하는 것이 기독교의 믿음이라는 그의 가르침은 비성경적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구원과 영생의 도리(십자가 복음)를 전적으로 수용하여, 그 안에서 우리 자신들의 생각, 목표, 가치관을 바르게 정립하여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의 믿음이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고,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과 은혜를 주신다.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믿음', '기도'는 인간이 도를 닦아 자신의 신성을 계발하여 궁극적으로 피조물의 수준에서 도약하여 스스로 운명을 바꾸는 도교나 다른 이방종교의 개념을 매우 교묘하게 표현하는 말들이다.


하나님이 조용기 목사에게 4차원의 영성을 계시?

조용기 목사의 '4차원의 영성'을 소개하는 어떤 신문의 기사를 보니 조용기 목사는 기자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4차원의 영성' 계시하여 주셨다고 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계는 3차원의 세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 시간, 공간이 3차원의 세계 속에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손으로 느낄 수 있는 세계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히브리서 11장에 말씀을 하고 있는 것처럼, 이 3차원의 세계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무엇이 3차원의 세계를 창조하고 변화시키는지 그 원리를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아 쓴 책이 바로 『4차원의 영적세계』입니다."(조용기 목사)

조용기 목사가 쓴 책에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4차원의 영성을 계시하여 주셨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저에게 '4차원의 영적 세계'에 대해 계시하셨고, 저는 그것을 책으로 엮었습니다. 먼저 영어로 썼습니다. 그 내용을 책으로 접한 미국, 남미, 유럽, 아프리카 등지의 사람들이 엄청난 변화를 겪었습니다."(조용기 목사)

"성령님의 프로그램을 말씀을 통하여 받아들이면 청조적인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는 깊고 심오한 절대 진리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4차원의 생각, 믿음, 꿈, 말을 기도와 말씀과 성령으로 훈련시키십시오. 당신의 삶은 이미 변하고 있습니다."(조용기 목사)

만일 조용기 목사의 말대로 하나님의 계시가 조용기 목사에게 직접임하였다면, 조용기 목사는 이 시대의 직통계시자, 즉 선지자이거나 사도라는 것이다. 조용기 목사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것에 대해서 깨달음을 주시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자신에게는 하나님(?)이 자주 직통으로 교통하여 주시고, 성경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주시는 직통의 말씀을 받는다고 여기며 살았던 사람인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 직통계시자 조용기 목사의 신앙의 결과는 무엇일까?

조용기 목사의 인생과 신앙의 열매가 나타나고 있는 요즘 과연 조용기 목사의 모습을 보면 아무리 보아도 그는 하나님이 직통으로 계시를 주시는 사도나 선지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 성경을 초월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직통의 계시현상은 그에게 일상이었던 모양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방언이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직통계시는 전하는 모습이 예전에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는 매우 흔한일이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직통의 방언이라며 수 많은 신자들 앞에서 저런 거짓을 태연하게 행하는 조용기 목사의 이 모습을 보니 "과연 그는 희대의 종교 사기꾼이었구나!" ...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아직도 조욕기 목사를 '하나님이 크게 쓰신 사람'이었다고면서 미련과 망설임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도 바른 길로 인도해 줄 수가 없을 것이다. 조용기 목사가 저런 사기적인 행동을 다 마치고 "이와 같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라고 하자, 우렁차게 '아멘'을 외치는 저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과연 하나님께서 받으셨을까?

분명한 사실은 조용기 목사가 자신을 직통계시를 쉽게 받아내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여기고 행동하였다는 것은 그가 거짓 선지자였다는 확실한 증거라는 것이다. '4차원의 영성'이라는 것도 바로 저런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라면서 유포되었다.


생각과 말이 신령하면 복을 받는 성경적 이유

조용기 목사의 말은 성경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경의 가르침을 크게 왜곡한다. 당연히 우리는 말과 생각을 바르게, 건전하게, 긍정적으로, 신령하게 간수하고 구사해야 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인격과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성도가 부정적이고, 파괴적이고, 냉소적이고, 몰인정하고, 탐욕적이고, 폭력적인 생각과 말을 일삼으면 어찌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어찌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신령한 복과 은혜를 주시겠는가? 사도 바울은 성령을 모시고 사는 성도가 내주하시는 성령을 근심하지 않도록 신령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으니라."(엡 4:30)

우리들이 긍정적으로 말하고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이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이 거하시는데, 인격적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그런 것을 좋아하시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이 바르게 말하고, 신령한 생각을 품고 살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처럼 적극적으로 말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여 4차원의 영계를 프로그래밍함으로 내일의 번영과 성공을 창조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무관하다. 여의도순복음교회 같은 대한민국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소문난 최대 규모의 교회의 목사가 그 동안 이런 그릇된 것을 그렇게 강조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찔하다. 왜 그 동안 이 사실을 한국교회는 바로 잡지 못했을까?

조용기 목사가 강조한 것과 달리, 성경은 이 땅에서의 성도의 삶이 반드시 형통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았다. 더욱이 인간의 사고, 말, 믿음, 꿈 등의 기술에 의해 영적인 세계가 원하는 대로 조성되어 행복과 건강, 번영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가르치는 내용은 더욱 찾을 수 없다. 조용기 목사의 인간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말, 믿음, 생각, 꿈을 내 뿜어서 4차원의 영계를 우리에게 유리하게 프로그래밍하여 내일의 번영과 성공을 창조하여 낸다는 주장은 전혀 기독교와는 관련이 없는 잡소리이다. 이런 거짓된 사상을 가진 사람에게서 성령이 역사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성령은 문제많은 사람을 더 크게 쓰시나?

조용기 목사는 국내외에서 많은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다수의 불치병자들을 고쳤다고 알려져 있다. 성령사역자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임으로써 그에게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기, 명성, 부가 따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도 해 보지 못했던 엄청난 사역이었다. 예수님의 사도들도 꿈꾸지 못했던 대형교회를 만들었고, 그로 인하여 인간의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부와 인기를 누렸다. 그가 목회 전성기를 구가할 당시에 그의 안수기도 받기를 받고자 원하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의 이름은 몰라도 조용기라는 이름은 아는 외국인들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 그 자신과 가족들이 저지른 엄청난 금액의 재정 부정과 개인적인 범죄 의혹들이 드러나고 있다. 한국교회의 황제의 자리에서 추락하여 한국교회의 수치가 되었다. 성령의 이적을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일으켰던 사람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성령이 크게 쓰신 사람이 그렇게 많은 비윤리적인 일들을 많이 자행했다는 것은 납득되지 않는다. 성경 어디에도 비윤리적인 사람이 성령의 큰 일꾼이 된다는 말씀은 없다. 성령은 거룩하신 분이고,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하여 하나님을 삶으로 행동으로 경외하게 만드시는 분이다. 그런데 조용기 목사에게서는 이러한 성령의 성품이 발견되지 않는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성령사역자인 조용기 목사는 왜 지금 대한민국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만드는 수단으로 추락하였을까? 그를 부렸던 영이 성령이 아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 외에 다른 결론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는 건전한 신앙

이미 구원받은(성령을 받은) 신자들을 대상으로 '성령세례'(기름부음) 운동을 전개하는 유명한 성령운동가들의 인생에서 왜 이런 패턴이 나타나는 것일까? 그 근본적인 이유는 성령을 사람이 부리는 성령운동이 기독교와 관련 없는 사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본인도 몰락하고, 그 사람에게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신앙도 변질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히 성령을 부리려는 성령운동이라는 것에 더 이상 현혹되지 말고, 말씀 배우기를 사모하고, 말씀 안에서 힘써 기도하는 성경적인 신앙생활에 힘써야 한다.

정이철 목사는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

氣사상 어떻게 볼 것인가 (목회와 신학, 1995년 11월호)

섭리와 경륜 : 氣사상 어떻게 볼 것인가

氣사상 어떻게 볼 것인가

기 사상의 열풍

기 사상은 1980년대에 들어서서 서서히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는데 90년대 이후 최근에는 이에 대한 관심의 증가와 대중화가 더욱 주목되고 있다. 그러한 징후로서 단전호흡이나 기공(氣功)에 대한 책들이 '쏟아진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많이 출판되고 있다. 서점에서 '기(氣)', '단(丹)', '선(仙)', '기공(氣功)'이라는 개념이 들어가 있는 책들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옛날의 도교(道敎) 고전들이 새롭게 번역, 조명되어 출판된 것도 많다. 기 사상과 연관된 풍수지리설 등의 운명술에 관한 책들, 한의학과 관련된 건강비법에 관한 책들이 이전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출판되었다. 기 사상 혹은 소위 '선도(仙道)'와 관련된 민족사학(史學)을 통해서 한민족의 우월성과 밝은 미래를 제시하는 책들도 유래없이 많이 보이고 있다.
길거리에서도 기 사상에 대한 관심의 열기를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전호흡이나 기공을 수련하는 도장(道場)임을 나타내는 '기공', '단전호흡'이라는 문구를 건물들의 창문에서 발견되는 것은 예사 일이 되었다. '선(仙)', '기공(氣功)', '단(丹)'에 대한 강좌 개설을 알리는 광고 포스터를 길거리에서도 여기저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번화한 거리에 서있거나 걸어가노라면 금방 사람이 와서 "도(道)에 대해서 들어보셨냐"고 물어본다. 회사나 관공서에서도 건강에 좋다는 명목으로 단전호흡을 수행하게 하는 곳이 있으며 그리스도인들도 아무런 의식없이 이러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기 사상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으며, '목회와 신학'이 기 사상에 대한 특집을 다루게 되었다는 사실도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기 사상에 관심이 고조되어가는가를 보여주는 단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데에는 몇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로는 뉴에이지 운동의 확산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서구에서 기독교의 쇠퇴와 전통적 가치관의 상실 등은 동양의 "신비로운" 사상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고, 뉴에이지 운동이라는 형태로 다시 동양으로 역수입되고 있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또 뉴에이지 운동의 과학적 분야인 신과학운동(New Scientist Movement)의 확산도 주목할만한 원인이다.
현대철학의 사조 중에 두드러진 현상이 현대물리학과 분석철학의 성과에 힘입어 형이상학이 붕괴되었다는 것이다. 즉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을 골자로 하는 현대물리학은 고전물리학에 상응하는 데카르트 식의 기계론적 우주관을 오래 전에 폐기처분하였고, 분석철학은 고전물리학적 세계관에 근거한 형이상학의 논리들을 분해시켜서 무의미한 명제들의 무더기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신과학 운동 측의 과학자들은 현대물리학에 상응하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건설하기 위해서 동양의 사상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80년대 초반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신과학 운동의 서적들이 출판되기 시작하였으며 대학교수들 중에서도 이러한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빛의 입자-파동설에 고무되어서 정신과 물질의 영역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사용되고 있는 '기' 개념에 대하여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엄밀성을 자랑하는 과학자들이 '기' 개념 앞에서는 그 개념에 대한 엄밀한 고찰도 없이, 비과학적 비약의 시도를 주저하지 않는 것은 신기할 정도이다.
둘째, 한국에서의 경제적인 성공은 단지 먹고사는 것을 넘어서 질높은 건강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성장지향적이고 경쟁적인 한국 사회에서 스트레스 관리의 문제가 심각해진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80년대에 들어와 경제 개발의 가시적 성과로서 이전에 비해서 윤택한 삶이 제공되었다. 이에 따라 건강에 대한 텔레비젼 프로그램이 매우 두드러지게 증가하고, 건강에 대한 사회적 프로그램이나 시설물들, 그리고 건강에 대한 서적류 들이 폭발적으로 쏟아지고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바탕으로 기 사상에 근거한 전통적인 '양생술(養生術)'인 '기공', 혹은 '단전호흡'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또 한의학에 대한 관심이 증대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서양의학이 들어올 때 그 효능이 과장된 것처럼 한의학에 대한 효능이 과장되는 현상들도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 급속히 변화되어가고 경쟁적인 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불안은 자신의 미래와 운명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켰다. 그 결과 기(氣)와 주역(周易) 사상에 입각한 여러가지 운명술들, 이를테면 풍수지리설, 사주, 관상, 작명, 궁합 등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를 반영하는듯 이러한 운명술에 관한 서적들도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다.
셋째로는 한국 민족주의와 결부되어 있다. 경제 개발의 성과로 인하여 민족적 자존감이 높아졌고 한민족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높아진 민족적 자존감으로 인하여 민족 전통의 사상과 종교 등에 대한 관심과 연구의 열기가 높아지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책들이 80년대 이후에 들어와서 유래없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책들은 주로 새롭게 조명된 한민족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한민족 전래의 "심오한" 사상을 알리는 "새롭게 발굴된 비전(秘傳)"에 관한 것들이다. 이러한 책들은 주로 단군(檀君)과 그에 관계된 고대사 및 고대 사상에 관한 것들로서, 이러한 "비전(秘傳)"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미래를 낙관하고 우리나라를 세계사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진 나라로 부각시키려는 예언서들도 많이 나와있다. 이러한 "고대의 비전(秘傳)"들은 '선(仙)'이나 '기(氣)'의 개념들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 많다.
민족의 자존감을 고양하고 민족 웅비의 꿈을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용기와 포부를 심어주어서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우려되는 것은 이러한 책들은 거의 모두가 한국 민족에게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하는 선민의식 위에 서 있다는 점이다. 사실 세계의 무대에서 활개치는 민족 중에 그러한 선민의식이 없는 민족은 없다. 자기 민족의 국민성과 자랑스러운 역사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개인에서와 마찬가지로 정당한 민족적 자존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전(秘傳)"의 예언이나 인종적 우월성을 토대로 선민주의에 빠지는 데에는 반인류적 국수주의의 위험이 있다.


한국에서의 기(氣) 사상의 전개

원래 '기'(氣)라는 개념은 중국에서 발생한 개념이다. 중국 사상사에서 '기' 개념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범주 개념이라고 하는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중국사상사에서 '기' 개념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중국사상과 중국인의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에서 '기' 개념은 자연과 사람, 사회, 도덕정신의 모든 영역에서 그 기초를 제공하여 주는 매우 포괄적이고도 보편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氣'자가 가장 처음 나타나는 것은 중국의 은(殷), 주(周)(B.C.1200-1000)의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에서 이다. 이 글자는 구름의 모습을 본뜬 상형문자로서 ' '로 표기되었고 ' '를 거쳐서 '氣'자로 정착되었다. 중국의 [설문해자](說文解字)라고 하는 고대 사전에서는 '氣'의 원래 의미를 '운기'(雲氣)로 규정하고 있다. 사람들은 '운기'가 순환하여 바람도 일으키고(風氣), 비도 뿌려서(水氣), 초목과 곡식도 자라는 것을 관찰하였고, 이로써 '기'가 하늘과 땅, 사람과 사물을 구성하는 정미한 물질을 나타낸다는 관념이 생기게 되었다. 또 사람의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과 사람의 몸 안에 유통순환하는 혈기도 '기'라고 생각이 덧붙여졌다. 나아가서 사람의 도덕, 정신이나 자연의 기상도 '기'의 범주 안에서 설명해보려는 발전이 있었다. 중국에서 '기' 개념은 각 시대를 거쳐가면서 더욱 풍부해지고 포괄적이 되어갔으며, 모든 존재와 현상의 기초가 되는 보편적인 개념이 되어갔다. '기' 개념의 보편화로 인하여 '기' 개념은 유교와 도교 등의 거의 모든 중국 전통 사상들에 공유되는 개념이 되었으며 외래 종교인 불교도 기 개념을 수용하고 활용해야할 정도였다.
우리나라에 '기' 개념이 유입된 것은 유교, 도교 등의 전래와 흐름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원시유교가 전해진 것은 위만조선(衛滿朝鮮 B.C.194-108)시대까지 소급될 수 있으며, 한사군(漢四郡)의 영향으로 고구려는 한대(漢代)의 유교를 수용했다고 하겠다. 소수림왕 2년, 372년에 고구려가 국립대학격인 태학(太學)을 설치하기 이전에도 유교는 사설 서당에서 널리 교육되었다. 백제의 경우도 오경박사(五經博士) 등의 제도를 통해서 유교가 널리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경우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문물에 있어서 다소간 후발국이었으나 통일신라의 초기에만 해도 최치원(崔致遠857-?) 등의 뛰어난 유학자들을 두고 있었다.
도교 사상은 유교보다 훨씬 늦게 유입되었다. 유교 사상에도 '기' 개념이 나타나지만 노장(老莊) 사상이나 도교 사상에서 '기'의 개념은 더욱 유력한 개념으로서 사용되었으므로 한국에서의 기 사상은 도교의 유입과 함께 대중화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도교가 공식적으로 들어온 것은 영류왕 7년, 624년에 당고조(唐高祖)가 도사(道士)를 보내어 도덕경(道德經)을 강론한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인 도교였으며 노장 사상이 전래된 것은 훨씬 이전이었다고 추측된다. 백제의 경우에 노장 사상이 근초고왕(近肖古王) 이전에 이미 유입되어 있었다. 신라의 경우도 최치원의 난랑비(鸞郞碑) 서문(序文)에서 신라의 풍류도가 삼교(三敎)를 포함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휠씬 이전에 도가 사상이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풍수지리설의 경우도 신라 말에 선사(禪師)인 도선(道詵)에 의해서 들어왔다고 하나 사실은 훨씬 이전인 삼국시대에 들어와 있었다고 추측된다. 풍수지리설은 도교에 속한다고 할 수 없으나 기 사상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기' 개념이 우리나라 대중의 생활에 깊이 침투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불교가 매우 흥왕했으나 유교나 도교도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고려조의 왕건 뿐 아니라 조선조의 이성계도 그들 왕조의 도읍을 정하는데 있어서 풍수지리설에 의존하고 있었다. 즉 불교가 성행했던 시기에도 기 사상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고려말에 성리학이 유입되고 조선 조에 이르기까지 기 개념은 철학적인 이기(理氣)논쟁으로 더욱 세련화되고 정교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유리론(唯理論)과 유기론(唯氣論)이 발생했으며 최한기(崔漢綺)와 같은 경험주의적 기론(氣論)도 생겨났다. 조선 조의 국시는 성리학이었기 때문에 도교 계통의 사상들은 외적으로는 위축되었으나 여전히 민중의 저변에서 깊은 영향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영향력은 동학(東學)이나 증산교(甑山敎) 등으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의식에 내재된 기 개념

20세기에 들어와서 기 개념은 '개화'나 '근대화'에 밀려서 대중의 주된 관심에서 벗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와서 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것은 단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중국에서도 사회주의적 '양생'(養生)의 개념에 연관되어서 기공(氣功)과 주역(周易)에 대한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기에 대한 이러한 관심의 유무(有無) 이전에 '기'(氣)라는 개념은 매우 일상적인 용어를 통해서 한국인의 의식에 깊이 침투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신적인 의욕이나 정신적인 상태를 묘사하는 말로 많이 사용되고, 또 몸이나 건강의 상태, 정신적이면서 동시에 신체적인 측면을 포함한 전인(全人)에서 느껴지는 상태를 나타내는 데도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게다가 '기세(氣勢)를 올리다' 등 어떤 힘이나 활동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서나 '소금기', '기름기' 등과 같이 어떤 느낌이나, 감지되는 상태를 나타내는 데도, '공기(空氣)', '대기(大氣)' 등과 같은 물질적인 기체와 연관되어서도 사용된다. '곡기(穀氣)' 등의 개념은 신진대사의 물질로서 기 개념을 보여주고 있으며, '자기(磁氣)', '전기(電氣)' 등은 물리적인 힘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개념들을 통해서 볼 때 기(氣)는 정신적, 생물적, 물질적인 모든 영역에서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는 그 개념적 성격으로 볼 때 정신도 물질도 아니다. 근세 서양철학의 이원론적 개념에 익숙한 서양의 동양 사상 연구자들은 '기'라는 개념을 번역함에 있어서, 처음에는 서양의 이원론적 개념들에 입각해서 물질, 질료, 에테르 등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결국 기는 정신도 물질도 아닌 무엇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고 기의 중국 발음 그대로 '치'(ch'i)라고 사용하였다. 최근에 기를 번역한 용어 중 가장 유력한 것은 '에너지'라는 개념이다. 많은 학자들은 '에너지'라는 개념이 기를 설명하는데 매우 유용하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사실 우리 말에 나타나는 기 개념들의 용법은 에너지나, 에너지의 상태, 그리고 에너지의 감지 상태를 나타낸다 해도 무난하다. 그러나 기의 사상은 아직까지는 물질적 에너지에서 생체적 에너지로 그리고 정신적 에너지로 상호 변환되는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못하는 치명적 단점을 가지고 있다. 신과학 운동(New Scientist Movement) 측의 과학자들이 이러한 에너지의 변환 과정에 대해 설명해보려고 노력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아직은 과학적 체계라기 보다는 정신 에너지와 생체 에너지, 그리고 물질 에너지 사이에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다는 가설에 입각한 하나의 형이상학적 체계에 불과하다.
기는 하나의 단순한 개념이지만, 그 적용의 영역이 넓으며 포괄적으로 많은 사실들을 설명해주기 때문에 매우 매력적인 개념이다. 뿐만 아니라 단지 이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경험을 동반하기 때문에 더욱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물론 어떤 사상의 포괄성, 단순성, 경험성이 곧 그 사상의 진리성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사실 모든 사상은 논리적 합리성과 포괄성을 추구한다. 그리고 어떤 사상이 결정적으로 한 사람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세계관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사상이 그 사람의 실존적 경험들을 얼마나 잘 설명해주느냐에 달려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경험들을 만족스럽게 설명해주는 사상 체계가 가장 확실한 진리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동일한 현상을 다르게 설명하는 다양한 사상 체계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상의 합리성과 포괄성, 경험성 만으로는 그 사상이 진리라고 단정할 수 없다.


기 사상은 신인(神人) 동일철학

우주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에 대해서는 고대 희랍의 자연철학자들도 논의해 온 것이다. 희랍 철학자들은 우주의 본질을 '아르케'( )라고 불렀다. 우리가 기를 우주의 아르케로 간주한다고 해서 안될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몇가지 경험적 사실 만으로 단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동일한 경험적 사실에 대하여 다른 이론적 틀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한의학의 효능은 곧 '기'의 실재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서양의학도 마찬가지지만 한의학도 과학이기 전에 임상경험에 입각한 기술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의학의 임상경험적 효능이 곧 기의 존재 입증이나 음양오행론의 과학성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기의 실재성에 대한 증명은 좀 더 자연과학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기의 개념을 바탕으로 형성된 기 사상이 어떠한 논리 구조를 가지며 궁극적으로 어떤 결론을 유도하는가 하는 것이다.

기를 에너지로 규정하는 것은 일종의 무신론적 사고를 밑바탕에 깔고 있다. 기 사상에서는 무(無)로 부터 유(有)가 창조된다고 하는 식의 유신론적 사고는 있을 수가 없다. 사실 우주에 존재하는 것 중에 에너지체가 아닌 것은 없다. 에너지, 곧 질량 보존의 법칙에 의하면 에너지체는 에너지가 아닌 것에서 나올 수가 없다. 에너지는 오직 에너지에서만 나오며, 물질의 생성이나 소멸 등은 단지 에너지의 변환에 의한 에너지 형태의 차이일 뿐이다.

기 사상에서 이러한 에너지의 법칙을 벗어나는 초월적인 존재를 가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기 사상에서 모든 존재는 에너지의 연속체로서 일자(一者)이며, 이 연속된 일자(一者)를 벗어난 초월적인 비에너지체는 가정되지 않는다. 만일 신(神)이 일종의 에너지체로서 존재한다면, 그 신도 에너지의 연속체인 '전체적 일자'(全體的 一者) 안에 속하며, 우주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실재들과 본질적으로 대등한 존재 중 하나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神)은 이미 창조주로서의 유일신이 아니다. 그는 시공의 제한에 묶여 있는 여러가지 잡다한 신(神)들 중 하나일 뿐이다.

기 사상은 기본적으로 범신론적인 사고 체계이다. 기 사상에 의하면 기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이며 모든 사물에 내포되어 있다. 우주의 모든 것이 기로 되어 있으며, 기를 떠나서는 어떤 존재도 실재할 수 없다. 물론 기로 되어 있지 않은 초월적 신이 있어서, 무(無)로 부터 기(氣)를 창조하고 그 기로써 만물을 창조했다고 말한다면, 유신론과 기 사상은 반드시 배치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기 사상들 가운데서 이러한 종류의 생각은 발견되지 않는다.
기 사상에 있어서 기는 유기체적이며 전체적 일자(全體的 一者)인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궁극적인 실재이다. 결국 기 사상에서는 우주 자체가 신적(神的) 궁극자이며 따라서 기 사상은 범신론적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기 사상에 의하면 인간은 우주의 일부분으로서 유기체의 유지에 역행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인간은 우주의 궁극자인 기의 질서, 즉 우주 에너지의 질서에 자기 자신을 동일화시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에 내재한 궁극자인 기가 우주의 궁극자인 기와 동일화될 때 인간은 완성되며 궁극적인 존재로서의 자각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 사상이 '인간이 곧 하나님'(창3:5)임을 주장하는 신인(神人) 동일(同一)철학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기와 음양 오행
기 사상은 음양(陰陽)이나 오행(五行)의 개념을 수용하여 더욱 정교한 이론을 전개한다. 음양은 원래 주역(周易)에 나타나는 개념이고 오행은 상서(尙書)의 홍범(洪範)에 나타나는 개념으로서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농경 사회의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있다. 즉 농경사회에서는 해와 달의 변화가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사람들은 해가 뜨면 활동을 시작했으며 해가 지면 활동을 마치고 쉬었을 것이다. 밤은 낮보다 더욱 위험하고 무섭게 보였을 것이다. 음(陰)보다 양(陽)에 가치적 우위를 두는 사고 방식은 이러한 원초적 생각으로 부터 출발했을 것이다.
또 인간은 물, 나무, 쇠, 불, 흙의 다섯 가지 물질이 인간의 삶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동시에 필수불가결한 물질임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이 다섯가지 물질이 만물을 이루는 기본적인 원소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위력을 실감했으며 해와 달의 순환을 아는 사람이 더욱 안전하며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늘을 살펴 그 변화를 알고 인간에 미치는 영향력을 알아내는 것은 부귀와 영화를 이루는 길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국가와 개인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점성술이 발달하게 되었다. 하늘을 관찰하던 인간은 다섯 개의 중요한 별을 발견하고 다섯가지 물질의 이름을 그 별들에게 붙였을 것이다. 그리고 다섯가지 별들은 다섯가지 물질이 가지는 속성을 가지며, 지상의 물질들과 어떠한 연관성을 가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아가서 인간은 스스로를 자연계의 다른 존재와 구별하여 "소우주"로 간주하고, 인간의 구조와 대우주의 구조가 상응한다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오행의 개념은 인간과 연관하여 더욱 발전하였고, 그 결과 오장(五臟), 오관(五管), 오색(五色), 오미(五味), 오음(五音), 오상(五常), 오륜(五倫) 등의 개념이 생겨났다.
음양과 오행은 기의 성질을 나누는 일종의 범주(範疇 category)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기의 개념만으로는 기의 여러가지 다양한 변화를 설명하고, 각각 다른 성질의 기 상호간의 작용과 현상을 설명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기의 성질을 좀 더 세분화하는 범주 개념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 범주 개념에 입각하여 기의 변화와 운동 법칙을 세우고자 했을 것이다.
음양은 천지(天地), 부모(父母), 열한(熱寒), 청탁(淸濁), 장부(臟腑), 수화(水火), 주야(晝夜) 등 대립적인 사물, 성질, 경향, 특성을 의미한다. 즉, 모든 사물의 변화와 운동을 음양이라는 두가지 기(氣)의 대립과 통합에 근거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오행은 수, 목, 화, 금, 토의 상극(相克)과 상생(相生)을 통해서 사물의 변화와 운동을 설명한다. 상생은 사물을 변화 발생시키는 것이고 상극은 사물의 변화와 발생을 제약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상극은 목극토(木克土), 토극금(土克水), 수극화(水克火), 화극금(火克金), 금극목(金克木) 등의 서로 거스르는 관계를 나타내며, 상생은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 수생목(水生木) 등 서로 도움을 주는 관계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기(氣)나 음양, 오행 등의 개념을 우리의 세계관 안에 받아들일 수 있는가? 단지 이러한 개념들을 사용하여 세계관을 전개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이 비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문제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을 사용해서 형성된 사상 체계가 성경적 권위와 세계관에 도전한다는데 있다. 우리는 기 사상이 전개되면서 풍수지리, 점성술, 운명술, 신선술 등 성경이 금하는 것을 배태시킨 것을 본다. 그러므로 혹시 기, 음양, 오행 등의 개념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검으로써 잘못된 사상들과 이 개념들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려야 한다. 만일 기의 개념적 성격상, 성경이 금하는 이러한 술수들(術數)과 불가피하게 연결될 수 밖에 없다면 차라리 기 개념을 수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기공과 초능력
기공은 원래 도교(道敎)에서 사용하는 수련법의 일종으로서 도인(導引), 토납(吐納), 행기(行氣), 포기(布氣), 내단(內丹)이라고도 한다. 기공이라는 말은 청대 말(淸代末) 무도가(武道家)의 일부에서 사용하였는데, 1956년 하북성 북대하(北戴河)에 기공요양원을 연 유귀진(劉貴珍)이 고전(古典)에 나와 있는 많은 용어를 조사한 뒤 새로이 학술용어로 정한 것이라 한다.
기공은 크게 경기공(硬氣功)과 연기공(軟氣功)으로 나눈다. 경기공은 무술기공으로서 기를 단련하여 초인적인 힘을 기르는 것이다. 연기공은 의료적인 기공으로서 기를 가다듬어 병을 고치거나 건강을 촉진시키고, 기억력, 집중력, 판단력을 기르는 것이다. 연기공은 내기공(內氣功)과 외기공(外氣功)으로 나누어지는데 내기공은 자기 내부에서 기를 돌리는 것이고 외기공은 자신의 기를 몸 밖으로 방사하여 타인을 치료하는 것이다. 경기공이 생체 에너지로써 물질 에너지를 지배하는 것이라면, 연기공은 정신 에너지로써 생체 에너지를 지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공은 초능력 현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중국에서는 이러한 초능력을 특이공능(特異功能)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우리는 초능력에 대한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같다. 과연 사람들은 무엇을 위하여, 왜 초능력을 개발하고 활용하고자 하는가의 문제이다.

초능력 신봉자들은 모든 인간에게 신적(神的)인 능력이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나는 기적도 모든 사람에게 잠재된 신적 능력의 발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설사 초능력이 모든 인간에게 잠재되어 있다손 치더라도 그 초능력이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 여부조차 논란이 될 정도로 은폐되어 있다면, 거기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실 기공 외에도 선이나 요가를 하는 사람들 중에는 초능력자가 많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수행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귀신들림이나 환각, 망상, 자살, 불안, 의심, 수면장애, 우울, 공포, 주의불능 등 정신질환에 걸리는 사람이 많은데, 거기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소위 "초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아담은 모든 다른 피조물을 관찰하고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적으로도 하나님과 직통으로 교통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이러한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타락한 죄인이 초능력을 가지고 영원히 산다고 가정해보라.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아마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초능력을 갖는 것은 마치 극악무도한 범법자가 핵폭탄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연약하고 타락한 인간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강하게 되기를 갈망한다. 초능력은 강해지기를 원하고 세상의 고통을 부정하기 원하는 인간에게 매우 매력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초능력을 신봉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간이 곧 신적 존재"라는 생각에 젖어있음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잠재된 초능력을 개발한 초인(超人)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물론 성경은 예수가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와 같이 육신을 가지고 있었고 감정도 가지고 있었다. 예수는 죄가 없는 분이셨으므로 어쩌면 타락하기 전의 인간이 가졌던 모든 능력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세와 대결했던 애굽 술객들의 능력이 하나님으로 부터 온 능력을 능가할 수 없었던 것처럼(출8:18,19), 예수의 기적에는 초능력자들이 흉내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 즉 하나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초능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제한해 놓으신 것을 인간적인 노력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상 사단에게 속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사단의 힘을 빌어서 초능력을 구하는 것이 된다. 사단은 호기심 많고 연약한 인간에게 초능력을 경험케 하는 미끼를 던지면서 서서히 자신의 올무 안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실제로 초능력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초혼(招魂)과 같은 심령술이나 점성술 등을 지지하고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초혼, 점성술 등을 하나님이 어떻게 엄격히 금하였는지를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신18:10-11, 17:3, 4:19, 사47:13-14)

물론 초능력을 현상을 소위 과학적으로 탐구하려는 사람들 중에는 초능력이 반드시 심령술 등과 연관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기(氣) 사상의 체계에 따른다 해도 초능력과 심령술은 서로 연관되지 않을 수 없다. 즉 기의 사상 체계에 있어서는 귀신도 일종의 기로 된 존재이며, 따라서 기를 흡입하는 기공이나 단전호흡의 수행 과정 중에 귀신이 들락거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공의 수행을 통한 초능력 현상에는 신접, 혹은 귀신들림의 현상이 수반되지 않을 수 없다.

우주에는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천사인 사단과 귀신들이 있다. 사단은 인간이 성공하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사단은 결코 아무런 댓가 없이 우리가 초능력을 갖도록 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사단의 잔당까지 완전히 결박하고, 우리의 육신이 영광스럽게 변하여(빌3:21) 영생을 누리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마 그 때에 우리는 에덴 동산에서 잃어버렸을지도 모르는 그 능력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광화된 육신과 소위 "초능력"을 갖게 된다고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과 같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초능력의 추구는 '인간은 모두 죄인'(롬3:23)이라는 사실로 부터 '인간은 모두 신적 존재'(창3:5)라고 하는 거짓된 가르침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돌린다. 초능력의 체험은 사람들을 교만과 죄악에 붙잡아 놓고, 결국은 죄사함과 구원을 얻지 못하는 길로 인도한다. 우리는 다음의 성경 구절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2:9,10)


단(丹)과 선(仙)
단전호흡은 원래 도교(道敎)의 단정파(丹鼎派)에서 말하는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양생술(養生術)의 하나였다. 단정파는 한나라 초기에 형성된 것으로 유황, 수은, 등 약물을 화롯불에 주련하여 만든 단사(丹砂)를 복용함으로써 장생하고 나아가서 신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 외편(外篇)에는 단(丹)을 만드는 법을 기록하고 있다. 포박자에서는 구전금단(九轉金丹)이라는 단약을 먹으면 하늘을 날으는 신선(神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주장은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금을 체내에서 축적함으로써, 몸의 노화를 막아 장수하고 나아가서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수은 중독과 같은 부작용을 낳았기 때문에 점차 잘 쓰이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체내의 단전(丹田)이라는 곳에 외부에서 끌어당긴 기를 쌓고 정(精), 기(氣), 신(神)을 길러서 장생 불사의 신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더욱 보편화되었다. 한말(漢末)의 위백양(魏伯陽)은 전자를 외단법(外丹法), 후자를 내단법(內丹法)이라고 구분하였다. 이 내단법은 태식(胎息), 토납(吐納), 도인(導引) 등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식물(食物)을 주셨으며(창1:30, 2:16, 3:19, 9:3),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생명체를 유지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체를 유지하거나 연장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음식물 외에 다른 생체 에너지를 흡입할 필요가 없다. 죄로 인하여 죽게 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다시 영생을 약속받았다. 그러므로 인간이 욕심을 내어 스스로 영원히 살기 위해서 우주의 기, 즉 소위 "생체 에너지"를 흡입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이 사단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여,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3:24) 성경은 이처럼 인간적 방법으로 영생하는 길을 하나님이 막으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신 것은 원죄를 가지고 영생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지 단순히 인간이 영원히 사는 것에 배가 아파서 그러셨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가 먼저 처리되지 않고 영생하는 것은 영원한 재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영생할 수도 없고 영생해서도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영생의 길이 되는 것은 그가 먼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만일 죄 문제의 해결 없이 영생을 추구한다면 사단의 올무에 걸리게 될 것이며, 결국은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중국의 많은 황제들이 영원히 살기 위하여 단약(丹藥)을 복용하다가 오히려 수은 중독으로 단명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한의학이 나갈 방향
기 사상들 가운데 가장 경험적이고 실제적으로 인간의 생활에 도움을 주어왔던 것이 바로 한의학이다. 한의학은 인간을 대우주에 상응하는 소우주로 간주하는 유기체론에 입각해 있으며 국부(局部)적 해부학의 발전에 바탕을 둔 서양의학과는 다른 발달의 경로를 거쳐왔다. 물론 한의학도 수많은 임상(臨床)경험을 통해서 형성되었겠지만 이론적으로는 기와 그 범주 개념인 음양, 오행의 사상에 뿌리박고 있다. 따라서 한의학은 단지 인간의 신체를 대상으로 하는 의학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기의 세계관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한의학은 경험과학으로서의 성격을 넘어서 형이상학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서양의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한의학의 형이상학적 특성으로 인하여 한의학이 자연과학적 실증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이 저해되어 왔고, 따라서 과학성을 결여하게 되었다는 비판을 한다. 그러나 서양의학자들의 이러한 비판은 치우친 감이 있다. 사실 한의학은 서양의학에 못지 않은 풍부한 임상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나름대로의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한의학에서는 인체 내에 기가 흐르는 통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곧 경락이라는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경락의 이상을 질병의 본질로 보며 경락의 이상 상태를 개선하는 것을 치료로 간주한다. 경락은 침구의학의 토대이며, 침과 뜸은 경락의 이상 상태를 개선하는 방법이다. 한의학에서는 내장의 생리와 병리는 항상 경락에 반영되어 나타나고, 외부의 변화와 영향은 항상 경락을 통하여 내장에 전달된다고 본다.
한의학에서는 병의 원인이 신체 외부의 기와 신체 내부의 기가 감응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외부의 나쁜 기(氣), 즉 외사(外邪)가 몸 속에 침입하여 음양이 평형된 올바른 기의 운행을 저해함으로써 병이 발생한다고 본다. 내부의 원인으로 인하여 올바른 기가 결핍된 상태를 '허'(虛)라고 하는데 이때 외사가 침범하면 병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허할 때에는 기를 보강해 주는데 이를 '보'(補)라고 한다. 또 몸 안에서 올바른 기가 외사(外邪)와 저항하는 것을 '실'(實)이라 한다. 이 때에는 외사를 쫓아내는데 이것을 '사'(瀉)라고 한다. 그러나 내부에 허사(虛邪)가 없으면 외사(外邪)와 감응하지 않아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의학의 의서(醫書)이면서 도교의 고전인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는 기(氣)가 막히는 것이 병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모든 악의 근원으로서 간주된다. 그리하여 양생(養生)의 방법으로서 호흡법, 즉 정기(精氣)를 몸 안으로 모아들여 몸 속에서 빠짐없이 돌리는 "도인행기"(導引行氣)의 방법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한의학은 단순히 의학에 머물지 않고 도교류의 단전호흡술 및 신선술 등과 연결된다. 그러나 설령 기(氣)가 실재하고 체내에 기의 통로인 경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우주의 기를 끌어당겨(導引) 신선(神仙)을 추구해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의학은 기 사상과 연관되어 있는 신비주의와의 연결 고리를 끊지 않으면 안된다. 한의학은 결단코 경험의학으로 남아야지 소위 "도"(道)나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신비술로 나아가서는 안된다.


생명의 길은
우리는 어떠한 인간적 노력이나 도(道) 닦는 수련을 통해서도 영생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인생의 궁극적 목표로 삼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죄인의 상태로 영생하지 못하도록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셨다는(창3:24)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한다.
 

한국 퀘이커- 함석헌과 종교다원주의

섭리와 경륜

퀘이커 관련 글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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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Quaker)교파에 대하여


전통적인 퀘이커 예배의 신학의 뿌리는 죠지 폭스(George Fox)의 내적 체험에서부터 그 출발을 찾을 수 있다. 죠지 폭스는 그의 마음속에서 강하게 역사하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계시를 통해 중생을 체험했다. 그리고 이윽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체험과 변화를 간증하면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이들 예배의 목적은 침묵 속에서 기다리다가 하나님의 권능과 임재하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퀘이커 교도의 예배 신학은 종교개혁의 미온적 개혁의지에 대한 깊은 불만족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영국의 지배적인 세력으로 성장한 청교도들에게 깊은 반감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퀘이커 교도들은 그들이 성령님의 자유로운 역사하심과 예배시 성령에 사로잡힌 회중의 자율성을 무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또한 예배의 현장에서 만인 제사장론을 부인하거나 무시하고 사제에게만 그 중심적 역할을 제한하는 국교회를 비난했다.



1887년 「리치몬드 신앙선언」(The Richmond Declaration of Faith)은 퀘이커의 전통적인 예배 신학을 담고 있는데, 이 선언문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의 감동하심에 마음과 정성을 다해 경배의 응답을 드리는 것이다. 형식을 갖춘 예배를 인정하지는 않으나 또한 전적으로 무형식의 예배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심지어 말씀도 필요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성령안에서 진정된 준비가 있어야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들에게 진정한 예배는 오직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께서 예배를 위해 모인 회중의 마음속에 역사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계획되지 않은 침묵은 성령님께서 자유로운 역사를 가능케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성령님의 강권하시는 신비적인 역사를 통한 하나님과 예배자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강조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적으로든, 개별적으로든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자의 입을 통해 공동체에게 말씀하신다.



다음은 전통적인 퀘이커의 예배 신학을 개괄적으로 살펴본 내용이다.



1. 그리스도는 믿음의 공동체의 모든 회중에게 그의 영을 주신다.



2.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을 통한 그리스도의 임재에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자신을 개방하기 위한 것이다.



3. 예배행위는 훈련된 방법에 따라 침묵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이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위한 기다림이며, 그에 따른 내적인 응답을 드림과 성령님의 지시하심대로 말씀의 선포와 기도를 하기 위함이다.



4. 성령님에 의한 그리스도의 임재를 위해 어떤 중개물도 필요치 않다. 그렇기에 말씀과 형식과 같은 모든 외적인 수단과 인간적인 행위들은 부차한 것이다.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하심에 달린 것이다. 그렇기에 예배에서 인간적인 준비들은 필요치 않는 것이다. 심지어 예배를 위한 인도자도 필요치 않다.



5. 성령님은 모인 전체 회중이나 어떤 특정인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회중과 사제, 남자와 여자, 종이나 자유자나 구분해서는 안된다.



6. 하나님은 모인 전체 회중이나 어떤 특정인에게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모든 신자는 제사장으로서 서로를 위한 목회자이며 그렇기에 구별된 사제가 필요치 않는 것이다.



7. 세례에 있어서의 한 가지 유일한 요소는 성령님에 의한 내적인 세례이다. 주님의 만찬도 역시 영적인 주님의 만찬만이 유일한 요소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약성경에서 발견되는 성례전이 그의 죽으심 이후에도 계속되리라 의도하지 않으셨다.



8. 예배 음악에 있어서도 오직 자발적인 음악만이 허용되었다. 퀘이커들은 신약성경 어디에도 인위적인 음악에 대한 가르침이나 예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퀘이커의 예배는 다양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들중 대부분은 전통적인 퀘이커 신학의 한 변화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프란시스 홀(Francis Hall)은 진정한 퀘이커의 예배는 그의 특정한 형태에 관계없이 다음 아래의 통일된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1. 회중들은 신령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다.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의 역사하심에 응답하고 그분의 임재를 체험키 위해 모이는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예배를 통해 영광 받으신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은총과 하나님의 성품의 최고의 계시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과 성령의 전달자로서의 역할에 의해 발생한다.



3.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께서 예배자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실 때 가능하다.



4. 퀘이커의 예배는 인간에 의해 짜여진 순서에 의해 구속받지 않는다. 성령님은 자유로우신 분이시기에 예배시 성령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또한 성령님의 자유로운 역사에 민감하게 된다.



5. 침묵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며 중요한 수단이다. 그리고 성령님의 자유로운 활동을 가능케하는 가장 확실한 통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침묵은 퀘이커 예배의 특징적인 요소로서 모든 퀘이커 예배에 있어서 절대적이며 중심적인 부분이다.



* the Quaker : 퀘이커 교도. 주의 말씀에 떨다 는 말에서 붙인 속칭으로 퀘이커교도 자신들은 이 말을 쓰지 않는다. 퀘이커 교도들은 빨간색은 잘 입지 않으며 폭력을 반대하는 입장이다..



퀘이커교도들은 모임에서 자기를 소개할 때 다음의 4가지를 가지고 말한다고 한다. 첫째는 내가 어렸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 둘째는 내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시절, 셋째는 내 인생에서 가장 추웠던 시절, 넷째는 내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던 때이다. 이러한 방식의 자기 소개에는 독특한 면이 있다. 이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적나라하면서도 깊이 있게 드러내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좀처럼 자기 표현을 잘하지 않는다.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이러한 자기 드러냄은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관계가 깊어지려면 이런 나눔의 시간이 필요해진다. 이러한 나눔이 주는 유익은 서로를 깊이 있게 알게 해준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성격이나 태도, 말이나 행동 스타일로서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나눔은 사람들의 기질이 어떤 배경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나는 선교회원들간에 인간관계 갈등이 생기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간의 교제와 친교가 수박겉핡기 식으로 된 것은 아니었는지 물은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새사람선교회 내의 모임들이 성숙해지기 위해서 이러한 자기 소개 시간을 가지면 어떨가 한다. 특히 소규모로 가지는 그룹 모임 (예로서 마리아, 마르다, 베드로, 바울 모임 등)에서는 이런 시간들이 있었으면 한다.


일례로 지난 마리아 모임에서 Quaker's Question 시간을 나누었다. 참가자들은 서로의 얘기를 듣느라고 예정된 모임 시간을 1시간이나 넘기고 배고픈 것을 참으면서 감동의 시간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어떤 이들은 자기 고백을 할 때 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을 참지 못해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속에 있는 프라이버시 얘기까지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치유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겪으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긍휼히 여기며 중보기도할 수 있는 사랑의 관계가 깊어졌으리라고 믿는다.


이러한 시간이 주는 개인적 유익은 나눔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과거의 사건들이란 계속적으로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태도를 지배한다. 특히 어렸을 때 받은 강렬한 경험은 일생을 통해 개인의 기질을 형성한다. 폭력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은 내면에 숨겨진 분노를 가지게 된다. 형제들과 비교 받으며 자란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쉽게 열등감에 젖거나 우월의식에 빠지게 된다. 특별히 아픈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습관적인 불안이나 두려움으로 영향을 미친다.


사랑의 기초로서 A, B, C, D가 있다. A는 Accept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의 첫 걸음이다. B는 Believe이다. 상대를 일단 믿어주는 것이 사랑이다. C는 Care이다. 상대를 돌봐주는 것이다. D는 Desire이다. 상대에 대해 기대를 가지고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나눔이 좋은 방향으로 열매맺는 것은 상대의 약점이나 부족한 점을 놓고 중보기도자로 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타인의 약함과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 나의 약함이나 문제까지도 함께 해결해주시는 분임을 종종 체험한다. 하나님은 자기 짐만이 무겁다고 발버둥치는 것을 받으시기 보다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는 것을 원하신다. 서로의 짐을 져줄 때 나의 짐마저 가볍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렇게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겠다고 중보기도하면 내가 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보다 하나님의 손길을 더 깊이 체험하리라 믿는다.

- 미니홈피에서

[퀘이커]

출처: 퀘이커 서울 모임(http://www.quakersmm.org/)

- "퀘이커"란 어떤 사람들인가?

"퀘이커"란 명칭은 처음에는 자기네 스스로를 "친우들(Friends)"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해서 썼던 말입니다. 오늘날 친우들은 퀘이커라 불리는 것을 별로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좀더 특색 있는 이름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일반 세상이 그렇게 부를 때는 자선사업단체, 혹은 평화운동조직, 그런 것들과 결부시켜서 생각합니다. 그러한 일반의 생각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니지만, 둘 다 퀘이커들의 활동의 어느 특수한 것에만 붙잡혀서 도리어 근본적으로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종교친우회(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Quaker)의 생활과 사업의 한 특수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들입니다.

퀘이커들은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기독교의 한 갈래입니다. 그리 오랜 것도 아니고(1650년경에 와서 겨우 창설됐습니다) 또 그리 큰 교파도 아닙니다. 전세계의 회원을 다 합한대야 20만 명이 될까말까합니다. 이들의 신앙과 실천은 독특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증거하는 데서도, 인류의 정신적 전통에서도 큰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 오늘날의 친우회(퀘이커)

신교 자유령이 선포되고, 퀘이커들의 첫 번째 세대가 지나간 후에, 친우회는 "퀘이커 그레이(Quaker-gray)"라는 검소한 복장, "당신(thee와 thou)"이라는 호칭사용, 음악과 미술을 신용하지 않는 일, 경건하고 엄숙하다는 것 등으로 인해서 세속의 사람들과 외따로 떨어진 사람들의 그룹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지방에서는 이 전형적인 퀘이커의 이미지를 보존하고 있는데, 잘 알려진 귀리죽의 상표 도안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퀘이커가 아닌 사람들인데도 자기들 상품인 귀리죽 통조림통의 겉면에, 품질과 신용을 보장하는 표시로 "퀘이커 그레이"라는 복장을 한 초기 퀘이커의 모습을 그려 넣어, 자기들 상표로 사용하는 곳이 아직도 있다고 함 - 역자 주). 그러나, 지금은 세계 어디에서도 그와 같은 퀘이커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퀘이커들을 찾아 볼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퀘이커의 전통적인 복장은 폐지되었고, "당신"이란 호칭의 사용도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고, 음악과 미술도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친우들도 진지하다고는 볼 수 있지만 별로 엄숙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친우들은 매우 다양한 실천 방식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각 지역에 있는 모든 친우들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용어로 오늘날의 퀘이커주의를 간결하게 기술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다음에 나오는 것은 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와 북아메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실천되고 있는 퀘이커주의에 관한 설명입니다.

- 예배 모임(Meeting for Worship)

- 종교적 실천과 원리 -

친우회(퀘이커)의 본질적 특징은 예배하는 공동체라는 점입니다. 작은 모임이나 새로 생긴 모임은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개인 집에서 모입니다. 대부분의 모임은 그들의 모임집(Meeting House)을 갖고 있는데, 그 모임집은 종교적인 장식이 전혀 없이 간단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모임집은 신성스러운 건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령으로 예배하기 위하여 모인 곳이면 어디든지 나타나셔서 거룩하게 해주실 것이라고 친우들이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임집은 평일에 비종교적인 목적을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일요일(오래된 퀘이커들이 사용한 용어로는 "첫 번째 날(First-days)"), 좌석은 정방형이나 원형으로 배치되는데, 테이블이 있고 보통 그 중앙에 꽃병이 놓여 있습니다. 친우들은 자리에 들어와서 침묵에 들어갑니다. 그들은 단순히 침묵의 명상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함께 추구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의 발언도 없이 전체의 예배 시간이 지나가 버리는 적도 가끔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전해야 할 메시지를 받았다고 느끼는 친우는 침묵을 깨뜨립니다. 그러면 또 다른 메시지들이 아마 소리내서 하는 기도의 형태로 뒤따르게 되는데, 각각의 메시지들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완전하지만, 참석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일체감 및 다른 사람들과의 일체감으로 이끌어 갑니다.

퀘이커의 첫 번째 세대에 속하는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퀘이커인 로버트 버클리는 예배모임의 특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 "내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침묵의 집회에 갔을 때, 나는 그들 가운데서 신비한 힘을 느꼈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내가 그 힘에 푹 빠져들자, 나는 내 속에 있는 악이 쓰러지고 선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버클리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이 "침묵의 집회"는 친우회의 회원들만으로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친우들은 성령께서는 우연한 방문자를 먼저 규칙적이고 익숙한 참석자(attender)나 동조자로 이끌어 주시고 나아가 정식회원이 되게도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진지한 찾는 자들(seekers)이 그들의 모임에 오는 것을 환영합니다.

예배 모임은 두 명의 장로가 손을 흔들면서 끝나게 됩니다. 장로는 또한 예배모임이 단순한 토론으로 타락하거나, 매주일 마다 미리 준비된 설교를 하는 자칭(a self-appointed) 설교가에게 청중을 동원시켜 주게 된다든지 하는 위험에서 예배모임을 지켜주는 까다로운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출석한 사람들이 모임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신비한 힘 앞에 겸허한 마음을 지니지 않을 때 일어나곤 합니다. 확실히 그것은 항상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퀘이커의 예배방법은 세속적인 관심을 멀리하고 성령에 자기 자신을 열어 놓으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퀘이커 예배에는 찬송가나 기도나 성례 의식과 같은 외면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친우들은 예배모임에서 눈에 보이는 외면적인 징표의 도움 없이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내면의 영적인 은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을 뿐입니다. 기록된 교리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친우들은 종교적 깨달음이란 정해진 어떤 한 순간에 포착될 수도 없고 항상 말로 옮겨질 수도 없는 지속적인 과정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퀘이커 교리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것은 "권면과 신앙반성질문서(Advices and Queries)"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권면과 신앙반성질문서 중에서 몇몇 짤막한 구절들이 한 해 내내 모임에서 가끔씩 읽혀집니다 : 그것은 친우들이 영적인 생활과 사회적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 하는 것을 간략하게 가장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친우들이 참고하는 외면적인 보조자료 중의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 대한 위대한 기록인 성경인데, 성경은 항상 모임집 책상에 놓여 있습니다. 많은 연회(Yearly Meetings)는 퀘이커 경험(Quaker Experience)에 대한 그들 자신의 기록을 기독교인들의 신앙훈련서(Book of Christian Discipline)에 모아 놓고 있는데, 그 책에는 초기부터 최근까지의 퀘이커 저술에서 발췌한 것이 실려 있습니다. 친우들은 또한 개별적으로 자신들의 영적인 순례의 기록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즉, 죠지 폭스와 죤 울만(John Woolman)의 "일기(Journals)", 우리와 동시대인인 토마스 켈리(Thomas Kelly)의 "헌신의 약속(Testament of Devotion )" 등이 그것입니다. 이 책들은 모두 성령의 실재하심을 증거하고 있지만, 로버트 버클리가 "변호(Apology)"라는 그의 저서에서 시도했던 것 같은 체계적인 퀘이커 신학에 해당되지는 않습니다. 현대에는 이것에 상응할 만한 책이 없습니다. 오늘날 친우회는 많은 유명한 성서신학자들과 몇 개의 퀘이커 연구센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통합하기 힘들 정도로 풍부하고 다양한 경험을 3세기 동안 물려받았습니다. 어떤 친우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통합이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기독교인들이 교리적으로 그들에게 대답해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질문들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답변에 이를 수 있는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퀘이커 봉사활동

월회는 또한 친우들이 "관심사"라고 부르는 일들을 추진시킬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초창기부터, 친우들은 민감한 사회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윌리암 펜이 이야기했듯이, "진정한 신성스러움은 사람들을 이 세상 바깥으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보다 더 잘 살 수 있게 해 주고, 이 세계를 개선하는 데 힘쓰도록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윌리암 펜의 시대 이래로, 친우들의 활동은, 기독교인의 양심에 도전하는 일련의 사회적인 문제들과 인간의 비극에 자극 받아 왔습니다. 이 도전에 대한 퀘이커의 응답은 종종 행동하라는 부름을 받았다고 느끼는 한 사람의 친우들에게서 비롯되기도 합니다. 그 친우는 월회(나아가 더 큰 기구에)에 그의 관심을 표명합니다. 월회는 그의 관심이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낼 수 있는 일과 정말로 관계가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일을 맡습니다. 월회가 다함께 일할 관심사를 결정하게 되면, 친우회는 새로운 봉사활동에 착수하게 됩니다. 어떤 친우들은 확고한 신념을 갖고 거의 혼자서 친우회를 새로운 길로 이끌어 나갔습니다.

18세기 미국의 성자다운 퀘이커인 죤 울만(John Woolman)이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노예를 해방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 문제를 다루어 나가는데 있어, 목청을 높여서 하는 선전으로써가 아니라, 아직 노예제도의 사악함을 깨닫지 못한 그 시대의 친우들에게 "사랑으로 진리를 말함"으로써 친우회가 노예해방에 관심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노예제도의 폐지가 깊은 종교적인 관심사가 되었기 때문에, 친우들은 3세대에 걸쳐 노예제도 반대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19세기 초엽 영국의 퀘이커였던 엘리자베스 플라이(Elizabeth Fry)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복지문제에 대한 관심을 실행에 옮겼고, 퀘이커로 하여금 (범죄자들의 인간적 존엄성과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진시켜 줄 수 있는) 형벌제도에 대한 조사·연구 작업을 시작하도록 했습니다.

친우회는 중대한 관심사가 있으면, 그것에 관련된 기관들을 설립하곤 합니다. 교육의 증진이 전반적인 관심사로 대두됨에 따라, 영국과 아일랜드 친우들은 기숙사를 둔 12개의 고등학교를 설립했으며, 북아메리카의 친우회는 학교뿐만 아니라 상급교육기관인 대학까지도 갖게 되었습니다. 전문적인 상무직원을 두고 있으면서, 친우들이 그들의 종교적인 통찰력을 실제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영구위원회의 연회에서는 또 다른 관심사를 위해서도 새로운 기구를 설립합니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유럽대륙 등에 있는 친우들은 런던에 있는 "친우봉사협의회(the Friends Service Council)"와 필라델피아에 있는 "미국친우봉사위원회(th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등과 같은 봉사위원회를 설립했습니다. 이 두 단체 곧 "친우봉사협의회"와 "미국친우봉사위원회"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도와 준 활동에 대한 감사와 그들을 고취시켰던 평화주의자 신념에 대한 인정의 표시로 194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친우봉사위원회는 빨간 별과 검정별이 겹친 모양의 마크를 그들의 상징으로 채택했는데, 이 마크는 1870년도의 전쟁 직후 불란서에서 활동했던 퀘이커 구호사업 담당자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으며, 지금은 퀘이커 전통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봉사 활동은 그 시대의 도전에 대한 새로운 관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이 도전은 다음과 같은 많은 상이한 형태를 취해왔습니다.

1845년 에이레의 기근으로 인한 극심한 곤궁, 이와 비슷하게 1970년 Sahel(사엘)가뭄에 따른 지독한 궁핍: 실업자들, 경제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 소수인종 전쟁시 적국에서 거주하던 사람 등이 겪는 곤경: 무엇보다도 나치즘이나 공산주의 또는 제국주의나 인종차별을 피해 온 사람들과 인간에 대한 잔학 행위에 희생당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 등.

- http://www.clm.or.kr/technote/readr.cgi?board=simple&nnew=2&y_number=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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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퀘이커교를 진단한다 / 교리와 현황

“나는 갈수록 퀘이커가 좋습니다. 좋은 이유는 그들은 형식을 차리지 않기 때문이요, 교리나 신학 토론에 열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없고 신부도 없고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겠다는 것도, 누가 뉘게 배우겠다는 것도 없이, 그저 살림을 통해서 하는 전도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종교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고, 속이 넓으면서도 정성스럽습니다. 누가 와도, 불교도가 오거나, 유니테리언이 오거나, 무신론자가 온다 해도, 찾는 마음에서 오기만 하면 환영입니다. 그러니 참 좋지 않습니까?”

한국의 대표적 퀘이커교도였던 함석헌의 ‘퀘이커 예찬’이다. 퀘이커교가 한국에 들어온 지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이들은 일정한 교회 제도를 택하지 않았기에 큰 조직체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반면 그들은 개인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어가서 많은 동조자를 얻어 현재까지 그들 특유의 방법으로 모임을 가지며 교세를 확산시키고 있다. 동시에 한국교회 종교다원주의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해왔다. 

이에 퀘이커교의 발생배경과 근본사상 그리고 한국전래와 현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역사적 배경

16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종교개혁 운동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켰다. 영국 교회가 로마 천주교회와 큰 차이가 없다고 본 많은 신도들이 자기들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개혁운동을 일으켜 17세기에는 영국교회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었다. 그들을 분리주의자(The separatists)라고 부른다. 그 중에는 장로교회, 침례교회, 회중교회 등이 있었다. 이들 분리주의자들은 후에 주로 미국을 발판으로 큰 교파로 발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분리주의자들 중에 특이한 그룹이 있었는데 그것이 1647년 영국인 죠지 폭스가 창시한 ‘친우회(Friends)’ 또는 ‘퀘이커단(Quakers)’이다.

이들은 신조, 성직자, 또는 기성교회가 지니고 있는 그 밖의 다른 형식 없이도 하나님을 직접 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집회를 가질 때 ‘내면의 빛’ 또는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신성’을 조용히 기다리며, 특히 사회 개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크롬웰에 따르면 퀘이커교도들은 난잡하고 무질서한 예배의식 때문에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았다. 450명 이상이 퀘이커 조례(1662)와 그와 유사한 규제법으로 영국 감옥에서 죽었다. 그러나 1681년 영국의 왕 찰스 2세는 퀘이커교 지도자 윌리엄 펜에게 있었던 빚 대신 그에게 웨스트뉴저지 개발권을 주었고, 새로운 식민지 펜실베니아(펜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지음)는 동료 퀘이커교도들의 신앙의 자유를 위한 안식처가 되었다.

2. 퀘이커교의 교리

첫째, 퀘이커교는 그들 특유의 예배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예배라고 할 수 있는지도 논의의 대상이 되어 있다. 그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무언(無言)을 지킨다. 침묵(명상)을 계속하는 동안 그들은 성령의 내림을 기다린다.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나 누구든지 그 자리에서 성령의 내림과 사역이 있으면 받은 영감을 말한다. 17세기에 이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영감을 받을 때 전신이 떨었다 해서 ‘진동자(Quaker)’라는 별명을 얻었다. 만약 영감을 받은 사람이 없으면 무언으로 그 모임은 끝난다. 그들은 직접적 영감을 중시하여 언제든지 새 계시를 받는다고 한다. 함석헌은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이다. 퀘이커들은 단체로 명상할 때 하나님이 임재한다고 믿는다”고 설명한 바 있다.

둘째, 퀘이커교는 성서가 모든 종교체험에 관한 가장 우수한 문학적 표현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안에 불변의 진리가 있거나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퀘이커에 따르면 “성서는 원천에 관한 방향 제시는 되나 원천 자체는 아니다. 그 원천은 오히려 성령 또는 각자의 내부에 있는 ‘영적 빛’이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내적으로, 직접적으로 자기 안에 내주하는 성령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고 한다.

셋째, 퀘이커교는 내적 계시를 중시하고 성서를 격하시키기 때문에 어떤 교리나 신앙고백서를 만들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모든 신학적 사변의 무거운 짐을 바닷가에 다 버렸다고 자랑한다. 퀘이커호주연회에서 펴낸 <청소년을 위한 퀘이커 신앙 안내서>의 교리적인 부분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모든 외적인 전쟁과 싸움을 무조건 반대한다. 따라서 군대에 들어간다거나 전쟁준비 작업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한다(양심적 병역거부).”

“우리는 노예제도, 인종차별을 반대한다.”

“우리는 모든 어린이는 태어나는 순간 하나님의 권속의 일원이 된다고 믿기 때문에 세례를 받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되는 일은 외적인 성례전 없이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례전을 갖지 않는다.”

“우리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부분이 있다. 그것은 ‘씨’, ‘속의 빛’, ‘사람의 영’ 등으로 불려왔다. 그것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어떤 인종이나 종교에도 상관없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 속에 있는 영을 계발하고 진리를 더 열렬하게 추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매우 가까이 나아갔다. 이들 중에는 이집트인 악나톤, 인도 왕자 석가모니, 중국 신비주의자 노자, 유대인 이사야 등이 있다.”

“우리는 비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배척하지 않는다. 우리는 힌두교나 유교 또는 그밖의 다른 종교나 철학이 하나님께 향하는 또 다른 길을 보여 주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과 실천을 존중한다.”

주로 Joseph John Gurney(1788~1847)의 영향 하에서 나타난 복음주의적 퀘이커는 성경의 무오성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으며, 그것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계속적인 계시와 철저한 평화주의(doctrinal pacifism), 그리고 내면의 빛을 통한 구속과 조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퀘이커들은 목사를 임직시키지는 않지만, 목사를 청빙하기는 한다. 또한 순서를 따라 드리는 예배를 하기도 하는데, 이런 복음주의적 퀘이커의 표준적 진술은 ‘리치몬드 선언’(1887)이다.

현대 비복음주의적 퀘이커주의는 부분적으로는 18세기 정적주의적 퀘이커 사상(quietist Quakerism)에서 연원한 것으로 합리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것과 신비적인 것을 결합시킨 사상이다. 보편적 내면의 빛 교리를 확장시켜 모든 종교에 그 빛이 작용하고 있다고 하며 모든 종교들은 다 조화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류는 다 하나라고 믿기에 이런 분파의 퀘이커는 평화 운동과 사회봉사 활동에서 매우 활동적이다.”

넷째, 퀘이커교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두 가지 종자가 있다고 믿는다. 이는 죄의 종자와 신적 종자다. 죄의 종자는 인간 자신으로부터 싹이 트나, 신적 종자는 신으로부터의 개입이 필요하다. 이것을 ‘하나님의 심방’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심방의 하루 또는 한 때를 주어 그가 구원을 얻어 그리스도의 죽음의 열매에 동참하게 한다. 이 하나님의 심방의 때를 가지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 마음속에 비치는 빛에 항거하는 사람은 멸망받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은 아직 미완성이다.

또, 퀘이커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아담의 죄값이 전가되어 있지 않다. 사람이 다 같은 불복종의 죄를 범하고부터 비로소 죄책이 생기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까지 원죄의 책임을 지우는 교리는 잔인하고 자연과 하나님의 자비와 의에 어긋나는 견해다.

이승구 교수는 이에 대해 “이와 같이 아담의 죄의 전가를 거부하는 퀘이커교는 결국 펠라기우스적인 구원론을 주장하게 되고, 그 구원의 방도는 내면의 빛에 순종하는가의 여부가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섯째, 퀘이커교의 교회는 ‘거룩한 빛,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증거를 순종하는’ 모든 사람으로 구성한다. 그 안에는 이미 죽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교도(異敎徒)와 터키 사람과 유대 사람도 다 포함되어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눈을 뜨고 은혜의 선물의 정도에 따라 서로 가르치고 교육하고 배려한다. 이것이 교회다. 그런데 외적 신앙고백과 외적 의식이 없으면 교회가 아니라는 사람들이 있다면(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지목) 그들은 악마의 꼬임에 빠져 있다.

여섯째, 퀘이커교는 자타가 공인하는 평화주의자이다. 따라서 퀘이커교가 병역과 선서를 거절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상과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봉사적 사랑으로써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이 점이 다른 기독교신비주의자들과 다른 점이다.

3. 퀘이커교의 한국 전래와 현황

처음 퀘이커가 한국에 전해진 것은 6.25전쟁 직후다. 1953년 전북 군산의 도립병원에서 구제활동을 폈던 미국과 영국의 퀘이커 의사들을 통해 처음 퀘이커를 접한 군산 사람들이 그들의 침묵예배에 참석하면서 한국 퀘이커가 탄생했다. 퀘이커 봉사자들이 떠난 이후에도 한국인들끼리 자체 모임을 계속해 한국 퀘이커 1세대가 출현했으며 최초의 한국인 퀘이커는 이윤구였다.

1960년대 ‘사람이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보다 세상의 평화와 사회정의를 이루는 일에 힘이 모아져야 한다는 데 공감한 함석헌의 가담으로 퀘이커는 한때 크게 부흥했다. 함석헌은 본래 장로교 신자였으나 일본에 건너가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자가 되었다가 사회에 대한 그들의 소극적 신앙태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퀘이커교로 옮기게 되었다. 그 후 퀘이커 지도자였던 브린튼의 영향을 직접 받아 그것을 생활화하는 가운데 한국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 퀘이커교는 1989년 함석헌 타계 후 내부 혼란과 갈등을 빚으며 10년이 넘도록 예배모임조차 없었다.

2000년대에 들어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가 미국 펜들힐에서 정식 퀘이커교도가 되어 귀국한 이후 한국퀘이커에도 활기가 생겼다. 옛 퀘이커 멤버들을 중심으로 원상 복귀를 위해 노력해 다시 모임을 갖게 된 것이다. 현재 서울 신촌의 모임에는 약 50여명의 교도들이 있고, 곧 대전에 모임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박성준 교수는 “21세기의 문턱에서 민중신학을 다시 생각한다”는 글을 통해 퀘이커교와 민중신학의 연합을 시도한다. 그는 죠지 폭스는 ‘예수가 이미 재림한 사실을 알리려 했던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죠지 폭스는 거듭 거듭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들을 몸소 가르치시기 위해 오셨다(Jesus Christ is come to teach his people himself)’라고 외쳤다. 이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이 ‘the Second Coming of Christ’를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가 하시 하처에 육신적으로 재림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민중의 마음속에 이미 ‘내면의 빛’, ‘씨앗’, ‘하나님의 영’이 들어 있음으로 이미 ‘그리스도’가 와 계신다는 것을 알리려 했던 것이다.”

박 교수는 계속해서 “죠지 폭스의 새 진리를 따라 새 사람으로 변화된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는 것, 그리스도가 그 시대와 사회의 불의와 폭력에 도전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며 “그러므로 내면의 빛과 씨앗, 영을 통한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단지 사적인 경험에 그치는 것이 아닌, 변화된 남녀들이 새 삶의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따를 때, 밖으로 사회와 역사 속으로 나아가는 종말론적 운동을 뜻했다”고 해석한다.

이승구 교수는 박성준 교수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결국 그리스도의 가시적 인격적 재림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다”며,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살고 이 세상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강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갈 2:20), 바울을 따라 우리가 이렇게 말할 때에도 바울은 그리스도 자신과 성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인의 질적인 차이를 분명히 했으며, 우리는 그 점을 매우 강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또 “함석헌은 1970년대 초 퀘이커의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씨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전개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지만, 그의 씨알 사상의 핵심 내용은 퀘이커 사상과 흡사하다”며 “민중신학의 창시자 격인 서남동과 안병무에게 미친 씨알 사상의 영향을 생각할 때, 민중신학과 퀘이커 사상의 만남은 일찍이 이뤄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이승구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함석헌 선생님은 무교회주의사상과도 오랫동안 관련을 갖고 계셨고, 1970년대에 퀘이커 회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종교적으로 자기 나름의 길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퀘이커 사상을 항상 변해 가는 것으로 정의하지 않는다면 그를 충실한 퀘이커라고 하기는 어렵다. ‘씨알’ 사상은 퀘이커 사상 보다 더 오래 전부터 영글어진 것이 분명하며, 퀘이커 사상과 민중 신학을 연관시키는 것은 흥미롭기는 하나(따라서 학자들이 그런 논구를 할 수는 있으나) 그리 공정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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