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6

알라딘: 숫타니파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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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타니파타 - 불교 최초의 경전 

법정 (옮긴이)이레1999-11-20







숫타니파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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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양장본411쪽112*152mm (A6)230gISBN : 9788985599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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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숫타니파타>는 수많은 불교 경전 중에서도 가장 초기에 이루어진 경전이다. 이 책은 법정 스님이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붓다와 초기 불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인 <숫타니파타>를 우리말로 쉽게 옮기고 해설과 주를 달아 붙인 것이다. 원래 샘터사에서 나왔던 책이었지만 거의 절판된 터, 이번에 법정 스님이 경전 계통의 옮긴책들을 정리하면서 새롭게 손보아 다시 엮은 책.

목차

1. 뱀의 비유

뱀의 비유 / 소 치는 사람 / 무소의 뿔 / 밭 가는 사람 / 대장장이 춘다 / 파멸 / 천한 사람 / 자비 / 설산에 사는 자 / 알라바카 야차 / 극복 / 성인



2. 작은 장

보배 / 비린 것 / 부끄러움 / 더없는 행복 / 수칠로마 야차 / 이치에 맞는 행동 / 바라문에게 어울리는 일 / 배 / 어떠한 도덕을 가질까 / 배움 / 라훌라 / 수행자 방기사 / 올바른 수행 / 제자 담미카의 물음



3. 큰 장

출가 / 정진 / 훌륭하게 말해진 것 / 불을 섬기는 사람 순다리카 / 젊은 마가의 물음 / 방랑하는 수행자 사비야 / 바라문 세라 / 화살 / 젊은이 바셋타 / 비난하는 사람 코칼리야 / 홀로 가는 수행자 나라카 / 두 가지 관찰



4. 여덟 편의 시

욕망 / 동굴 / 분노 / 청정 / 으뜸가는 것 / 늙음 / 구도자 팃사 마이트레야 / 파수라 / 마간디야 / 죽음이 오기 전에 / 투쟁 / 문답 - 첫째 / 문답 - 둘째 / 빠름 / 무기를 드는 일 / 제자 사리풋타



5. 피안에 이르는 길

서 / 아지타의 질문 / 팃사 멧티야의 질문 / 푼나카의 질문 / 멧타구의 질문 / 도타카의 질문 / 우파시바의 질문 / 난다의 질문 / 헤마카의 질문 / 토디야의 질문 / 캅파의 질문 / 자투칸닌의 질문 / 바드라우다의 질문 / 우다야의 질문 / 포사라의 질문 / 모가라자의 질문 / 핑기야의 질문 / 열여섯 바라문들의 질문에 대한 결론



저자 및 역자소개

법정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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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경험한 후 인간의 선의지를 고뇌하다가 대학 3학년 1학기 때 중퇴하고 진리의 길을 찾아 나섰다. 1956년 당대 고승인 효봉선사를 은사로 출가했다. 같은 해 7월 사미계를 받은 뒤, 1959년 3월 통도사에서 승려 자운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이어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승려 명봉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그 뒤 지리산 쌍계사,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여러 선원에서 수선안거했고, 〈불교신문〉 편집국장과 역경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및 보조사상연구... 더보기

최근작 : <스스로 행복하라(큰글씨책)>,<법정스님이 세상에 남긴 맑고 향기로운 이야기>,<좋은 말씀> … 총 104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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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서의 발견이 신학계에 일으킨 가장 커다란 파문은 뭐니뭐니 해도 Q복음서를 가설 아닌 실체로서 등장시킨 사건이다.... 마태, 누가 복음서 중에서 복음서원형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마가자료를 제외한 부분 중에서, 마태와 누가에 공통된 부분을 그냥 자료(Quelle)라는 의미로 Q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 가설적 문헌을 치밀하게 연구해본 결과, 그것은 단지 ... 더보기

겨울호랑이 2018-09-14 공감 (39)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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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만남과 헤어짐의 시간을 마주한다. 그 기간이 길든 짧든, 누구나 한 번쯤은 환희와 고통을 경험하곤 한다. 우리는 누구나 남에게는 평범하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연애이야기 하나씩을 간직한다. 어떠한 경험이었든 간에, 시간이 지난 후에 바라보는 자신의 연애담은 액자 속 빛바랜 사진처럼 아름답게 남는다. 이별을 대하는 방식은 각자가 다 다르다. ... 더보기

cyrus 2014-12-26 공감 (15)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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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를 하다보면 숨이 턱턱 막힐 때가 있다. 저마다 위로가 되는 것들이 따로 있겠지만 경전의 좋은 구절도 그 중의 하나이다. 법정 스님이 옮긴 『숫타니파타』는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대로 읽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읽다보면 주옥같은 문장들을 만날 수 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 더보기

cyrus 2014-10-01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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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의 수필집이 더 나을듯...  구매

마그리트 2010-06-22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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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한 관념으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경전, 모든 종교가 초기에는 매우 담백함에서 출발  구매

정직판매 2011-12-18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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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구했는데.. 읽을 생각에 완전 기대되요~  구매

도로시 2010-03-27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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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일단 법정스님이라니까 그러네.  구매

시시프 2010-05-23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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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대해 알기 쉽게 풀이 해 둔 책!  구매

gohappy7 2010-07-17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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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최초의 경전 새창으로 보기

도올 김용옥이 <도올, 인도를 가다>에서 불교 강의를 하면서 소개, 인용한 책이라 덥석 구입한 책이다. 또한 법정이 옮긴 것도 그러하거니와 불교 최초의 경전이라는 점도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책의 구성은 짧은 글들의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짧은 글들은 다시 전부 합쳐 1149개의 구절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굳이 예를 들자면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같이 산문과 운문이 혼합된듯한 느낌을 준다. 각각의 구절들은 대부분이 5줄이 되지 않는 짧은 문장(들)으로 되어있으서 쉽게 읽히는 장점이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고 하는 구절을 들은 적이 있을텐데, 그 구절이 바로 이 경전에 등장하며, "뱀이 허물을 벗듯"과 같은 익숙한 비유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 경전이 시와 같은 느낌을 준는 것은 비유와 은유, 반복과 대구와 같은 수사법이 빈번히 사용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시적인 표현법을 사용한 것은 아마도 초기 불교 수도자들이 경전 전체를 암송하기 쉽게 운문 형태로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책은 독송하거나 외우면 또 다른 맛이 살아난다.



내용을 살펴보면 싯다르타가 여러 사람을 만나 나눈 대화와 교훈들로 이루어져 있다. 기성 종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신화적인 표현이나 신격화, 이해할 수 없는 선문답은 거의 없다. 우리가 살면서 주의하고 배워야할 교훈들이 싯다르타와의 대화를 통해 쉬운 언어로 등장하고 있을뿐이다. 마지막에는 주석도 있어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있다.



적지 않은 독자들이 어려운 불교 해설서를 사놓고 조금 읽다 포기했으리라 믿는다. 어려운 내용 때문에 가슴에 와닿는 바도 적었을 뿐더러, 불교에 관한 흥미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르다. 대단히 쉬운 내용과 선명한 표현들, 아름다운 운문형식의 교훈들이 우리의 가슴을 충분히 물들일 것이다. 불교 초기의 순수하고 사변적이지 않은 모습들을 보고 싶다면, 그리고 거기서 영혼의 아름다운 양식을 얻고 싶다면 이책을 읽어야 할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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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자 2004-06-01 공감(2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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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새창으로 보기

우선 앞표지에 불교 최초의 경전이라 써 있느데 최초보다는 최고(最古)라고 표기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우선 책의 방식은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로 시작해서 붓다와 제자들의 선문답 식으로 되어있다.초기 경전은 암송 되었던 것을 글로 옮기는 것 이여서 마치 오늘의 노래처럼 반복된느 부분이 많다 그러면서 리듬감이 있고 글이 살아있느것 같다.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비난과 칭찬에도 흘들리지 말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처럼 내마음을 뒤 흔드는 구절이 많다.우리는 꽈선배 꽈후배 꽈친구 계 내가 알아 핸드폰 주소록을 보면 100명이 넘는다며 자랑 처럼 말을 하는 것을 흔히 볼수있다.그런데 여기서 말하지 않는가 붓다께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깨달음은 혼자 얻는 것이지 같이 얻는것이 아니다. 학벌주의 인맥주의가 만연한 우리나라 실정에 정말로 필요한게 아닌가 하여튼 내용이 다른대로 빠졌는데



이 책은 우선 특히 한점은 종교의 창시자로써 붓다 부천님 세존 이런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다.그져 깨닫을신 분, 눈뜬사람,싯달타(붓다의 출가전 이름)이렇게 부르다.그만큼 이 책은 실달타의 고뇌와 인간적인 모습을 볼수있다.암송 되었된거라 읽기에도 편하다.주석은 그리 많치는 않지만 법정스님께서 노력하시 흔적이 많이 보인다.더 많은 글을 쓰고 싶지만 그러면 이책에 의미를 잃어 버리는것 같아서 그만 줄이려 한다 하지만 불교인(맘에 않드는 호칭이지만)이라면 꼭 읽어야할 책일 것이다.공양만 하지말고 붓다 말씀도 귀좀 open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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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석 2002-11-14 공감(1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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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현대인 모두가 읽어야 할 책.. 새창으로 보기

숫타니파타...!! 불교 최초의 경전이라는 말때문에 조금은 딱딱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것 같았다. 아니 사실... 불교 경전을 읽고 싶은 맘은 없었다. 하지만, 이책은 경전이라는 느낌보다, 바쁘게 살아 가는, 탐욕에 넘치는 현대인들 모두가 보아야 할 책인 것 같다. 짧막한 글들... 마치 한편의 시라고 느껴지는 책.. 그리고 잠시 생각하게 하는 책, 바로 이 책이 그런 책이다.



우리가 그동안 생각하고 있던 불교의 딱딱한 느낌을 한번에 날려 버리는 그러책.. 바로 `숫타니파타`다. 쉽게 생각하고 읽으면 하루면 읽을 책, 하지만 다시 생각하고 읽으면 평생을 읽을 책... 이 책을 모든이게게 추천하고 싶다. 법정이라는 스님이 우리에게 보시하기 위해 우리에게 선물한 책이 바로 이 책인 것 같다. 이 책을 번역해 주신 법정 스님께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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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om 2003-06-03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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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을 비춰주는 삶의 거울 새창으로 보기









세상살이를 하다보면 숨이 턱턱 막힐 때가 있다. 저마다 위로가 되는 것들이 따로 있겠지만 경전의 좋은 구절도 그 중의 하나이다. 법정 스님이 옮긴 『숫타니파타』는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대로 읽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읽다보면 주옥같은 문장들을 만날 수 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4쪽)







사자처럼 칭찬이나 비난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바람처럼 인연 따라 오고 가는 사람이나 물질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순수한 마음으로 본래의 마음자리를 찾아, 무소처럼 오직 집중된 마음으로, 당당하게 나아가기. 이 게송은 삶의 거울로 삼을 만하다.







부처의 일대기 가운데 악마와의 한판 승부 장면을 읽을 때면 머릿속에 멋진 무대가 만들어진다. 악마 나무치가 수행중인 부처 앞에 등장한다. 그는 수행을 완성하려고 정진하는 자를 방해해서, 쾌락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무시무시한 존재이다. 악마는 부처에게 다가가 위로의 말을 건네는 척하면서 어른다.







"당신은 여위었고 안색이 나쁩니다. 당신은 죽음에 임박해 있습니다. 공덕을 쌓는다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힘써 정진하는 길은 가기 힘들고 행하기 힘들며 도달하기도 어렵습니다." (151~152쪽)







악마는 좋은 말로 해서는 먹혀들지 않으니 겁을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무리들을 부른다. 대도(大道)를 걷는 부처는 홀로이지만, 소인배 악마는 늘 무리를 거느리고 다닌다. 악마의 공격 속에서 부처는 차분하게 저들의 정체를 밝혀낸다.







"너의 첫째 군대는 욕망이고, 둘째 군대는 혐오이며, 셋째 군대는 굶주림, 넷째 군대는 집착이다. 다섯째 군대는 권태와 수면, 여섯째 군대는 공포, 일곱째 군대는 의혹, 여덟째 군대는 겉치레와 고집이다. 그릇된 방법으로 얻은 이득과 명성과 존경의 명예와, 또한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경멸하는 것. 나무치여, 이것들이 바로 너의 군대이다." (153~154쪽)







그런데 수행중인 부처를 공격한 악마의 군대치곤 그 이름이 흥미롭다. 이것은 바로 홀로 결가부좌한 부처가 내면의 마지막 청소를 하고 있는 중이다. 수행을 방해하는 온갖 번뇌들을 말끔히 털어내 보니 바로 저런 번뇌들이었음을 은유로 밝혀낸 것이다.







부처가 털어낸 이들 번뇌는 우리의 일상에서 자주 나타나 평온한 마음을 뒤흔드는 번뇌들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저 열 가지 몹쓸 녀석들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며 하루하루를 근심에 떨며 살아간다. 그리고 저들 때문에 어떤 일을 완성하려 해도 도중에 주저앉는다. 저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괴로울 일을 반복하고, 다시 아등바등 살아가게 된다.







근심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근심을 없앤다면 삶이 더 풍성해질 것이다. 우리는 뭔가를 버릴 때 과연 그 물건이 쓸모가 없는지 따진다. 근심의 원인인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근심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걱정한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마침내는 근심이 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근심할 것도 없다. (25쪽)







부처가 살던 시대가 오늘과 너무 다르다는 게 주저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집착을 끊어 근심을 없애려면 사랑과 우정의 행복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부처는 사랑과 같은 인간의 기쁨과 행복에 반대하는 게 아니다. 그가 우려하는 것은 '집착'이라는 불순물이 끼어 사랑의 본질이 훼손되는 것이다. 물론 부처는 출가한 수행자들이 세상이 주는 기쁨과 행복을 초월해 보다 큰 진리를 지향하기를 바랐다. 출가자의 길과 재가 신자의 길에는 차이가 있었다. 출가자들이 지향해야 하는 것은 해탈이다. 해탈을 위해서는 모든 인간적인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번뇌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듯 밀려들어와도 담담하게 물리친 부처처럼, 휘말리지 말고 어떤 번뇌인지 잘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번뇌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







우리들을 생존에 얽어매는 것은 집착이다. 그 집착을 조금도 갖지 않은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버리듯이. (19쪽)







그러나 부처의 설법을 향해 마음을 열면 오늘의 문제에도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이 모든 애착과 잡념과 집착을 놓아버린다면 삶이 아름다워지고 행복해진다.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내 안의 아집과 탐욕, 기만과 이중성을 마주할 때 나는 『숫타니파타』를 다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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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4-10-01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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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새창으로 보기 구매

1.

오래전에 준영이 책꽂이에서 이 책을 보았을때, 그때는 

뭐이런 해도되고 안해도 되는말들이 경전이람, 한가한 사람들이 보는 책이네

그때는 그랬다. 내가 아직 젊었다. ^^





2.

마음수련은 한 깨달음이다.

숫타니파나, 이 경전도 그렇다. 



운문으로 된 시들이 편안해서 좋다.

욕망과 고통은 한쌍이다.

수행하는 스님들처럼 비우지는 못해도

내 하루하루 조금더 편해지도록





3.

용산학살로 시작해서 화물연대 박종태열사를 거쳐 쌍용자동차에 이른 2009년 7월

불교경전이라도 읽지 않으면

내 삶이 너무 가파르고 건조하여 숨차다.



다 비우면, 이세상도 저세상도 버리는 수행자가 되면

나는 더 의연하게 살수 있을까. 마음아프지 않고



동지들이 죽고, 공장안에서 경찰에게 전자총을 맞으며 물도없이 싸우는데

어떻게 비워,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을까.



다만 천년이 넘게 불교가 때로는 욕심도 내고 때로는 권력도 탐하면서 그러나 왜, 어떻게

중생들의 마음을 움직여 살아남았는지 알것같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비바람부는 속세를 떠나 홀로 수련하며 청정하면 진정 마음이 편한가. 

여기 세속은 지옥인데.





4.

한번 본 책을 다시 보는 일은 거의 없다.

거듭보는 일은 없다.



숫타니파타, 이 경전은 시작도 끝도 없다.

읽다가 멈추었다가 다시 읽다가 멈춘다. 그리고 다시 읽는다.

세상을 떠나 홀로 수행정진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같은 세상을 지옥으로 알고

겸손하고 의연하게 부지런히 투쟁하고 싶다. 두려움없이.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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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쥐만세 2009-07-31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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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타니파타 : 집착을 버린 자의 자유로운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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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굿 201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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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종교-진보운동-사회주의' 새창으로 보기

노르웨이의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러시아계 한국인) 박노자 교수가 지난달 18일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정교-진보운동-사회주의'라는 주제의 초청강연을 가졌다(이날 강연에는 학생들과 시민 1700여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그 녹취록이 있기에 옮겨온다. 많은 분들이 일독해 보시도록 권유하기 위해서이다(종교에 관한 우리의 '상식'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녹취록은 '푸하'님의 서재에서, 그리고 강연회 사진은 '데일리서프라이즈'에서 갖고 온 것이다. 군데군데 굵은 글씨로 표시한 강조와 간혹 덧붙여진 군말은 나의 것이다. 







-하필이면 왜 이 주제를 선택했는지에 대해서 먼저 일종의 변명 같은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1∼2년 전에 민중 신학과 가까운 한 기독교 계통의 잡지로부터 현대 한국 기독교를 비판하는 글을 청탁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하다가 결국엔 '죄송합니다. 못쓰겠습니다' 그렇게 넘어갔습니다. 제 학술 분야가 원래 기독교보다 고대사였기 때문에 불교 공부를 좀더 많이 한 부분도 있었고, 또 신자가 아닌 신분으로 비판하기에는 뭔가가 쉽게 내키지 않은 부분이 있었던 것도 같지만, 사실 그때 제가 거절의 말씀을 드렸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하면   이건 굳이 기독교뿐만 아니라 결국 불교에도 그대로 해당됩니다만   '기업 활동에 대해서 이념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기업 활동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얼핏 보면 신을 모독하는 발언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실은 신에 대한 발언이 아니라 현존하는 종교 조직에 대한 발언입니다.(*종교사회학에서는 상식적인 얘기이다. 교회 성장의 중요한 요건 중 하나가 '자리' 곧 '좋은 목'이라는 사실을 목사님들의 상식이듯이. 이미지는 김종서 교수의 <종교사회학>(서울대출판부, 2005)을 가져왔는데, 내가 오래전에 종교학 과목을 수강하며 읽었던 책은 오경환의 <종교사회학>(서광사, 1990)이다.) 그리고 사실은 외국의 사회인류학이라든가 사회학 같은 부문에서는, 특히 종교사회학에서는 요즘  '종교 시장'이라는 용어를 거의 별 거부감 없이 쓰다 보니까 저도 약간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어쨌든 한국의 경우 사찰이든 교회든 예외적인 소수를 제외하면, 일종의 기업 활동으로 보이는 신앙 활동의 형태가 많이 보이기 때문에 이것을 어떤 이념적 입장에서 비판하기가 왠지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여기서 기업 활동이란 우리가 경험적으로 잘 아는 소위 기복 장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꼭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사찰이나 교회를 찾을 때는 마음 속에 일종의 거래를 하는 듯한 마음으로 찾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는 말씀이지요. 예컨대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기도하면 내 아들이 서울대에 입학하겠지" 하고 생각할 때 여기서 신의 축복이란 게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물질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신앙 생활 잘 하고 기도를 잘 하면, 대학교 입학뿐 아니라 예컨대 직장에서도 인간 관계가 원만해져서 안 짤리겠죠. 그러니까, 난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결국에는 여유있는 생활하고 잘 살 수 있겠지" 하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일종의 "신통력이 있다, 신이나 어떤 초자연적인 힘과 거래할 수 있다"는 조직에 가입해서, 헌금이라는 이름이든 성금이란 이름이든 불전이란 이름이든, 어떤 명목으로 거기에다 일종의 물질적 대가를 바치고 그 대신에 상당히 현실적인 성격의 축복을 돌려 받는, 성격의 신앙 생활이 우리한테는 아주 익숙해진 것이고, 넓은 의미에서 그것은 기복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기복 신앙은 꼭 구체적으로 '자녀 입학하게 해 달라', 아니면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극락왕생하게 해 달라' 하는 것뿐만 아니고 넓은 의미에서 현실 생활이 원만하고, '현실적인 잣대'로 봤을 때 행복한 생활을 초자연적 힘에 의해서 돌려받으려는 것이 기복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찰이든 교회든 수많은 종교단체에서 이와 같은 넓은 의미의 기복을 제공함으로써 상당한 대가를 받고, 또 그 대가로 사찰의 경우엔 동양에서 가장 크다는 대형 불상을 짓고, 교회 같으면 단일 교회로선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짓고, 말하자면 기복 장사를 잘 한다는 것을 건물이나 여러 가지 종교적 상징물로 나타내기도 하는데, 결국 그런 거래나 장사에 대해서 이념적 입장에서 뭐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런 기복 장사, 종교를 신통력이 있는 개인이나 단체와 거래하는 곳으로 이해한다는 것, 또는 종교의 대상으로 신이나 초자연적 힘, 또는 그 힘을 빌려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제그제 생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더 비판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혹시 고등학교 때 역사 교과서에서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신라의 이차돈이 누군지 기억하십니까? 신라 법흥왕 때의 순교자 이차돈을 잘 기억하시겠지만, 왕이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교를 도입했는데, 그 과정에서 법흥왕이 이차돈을 희생시킨 거죠. 대신들하고 화해하기 위해서 이차돈을 죽였는데, 결국 대신들의 반대가 무로 돌아가고 불교가 받아들여졌다는 게 우리가 알고 있는 공식적인 이야기인데, 혹시 여러분은 이차돈이 순교했을 때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삼국유사를 그대로 믿는다면 그것이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동기가 됐는데, 이차돈이 참수당하기 직전에 '만약 부처님에게 신통력이 있다면, 부처님에게 기적을 일으킬 권세가 있다면, 내가 죽고 나서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예언하고 참수당한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피 대신에 하얀 물, 그러니까 우유와 같은 색깔의 하얀 물이 갑자기 목에서 솟아 나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대신들이 부처가 대단한 신통력을 가진 무서운 신인 줄 알고 거기에 감복하고 불교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다분히 설화적인 이야기이고, 불교를 믿는 수행자의 목을 칠 때 하얀색의 액체가 나온다는 이야기는 붓다의 본생담(本生譚), '자타카'에서 많이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불교의 설화로서는 유래가 깊은 설화입니다. 그러니까 특별히 신라에서 생긴 설화도 전혀 아닙니다. 어쨌든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신라 사람들한테 초기의 붓다, 초기의 부처가 바로 기적을 일으킬 만한 힘을 가진 그런 신통한 존재였고, 불교를 믿는 사람들, 승려나 순교자 이차돈 같은 사람들이 기적을 일으킬 만한 신통력의 소유자로 보인 것입니다.



-우리는 백제가 불교를 일본에 전달했다는 것을 상당한 민족적 긍지로 삼는데, 만약  일본서기 , 일본의 공식 역사를 그대로 믿는다면, 백제 성왕이 일본에 불교를 전수했을 때, '부처를 믿으면 나라 안이 태평할 것이고 붓다가 나라를 지켜줄 수 있다'는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백제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일본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붓다라는 신이 힘이 세고 무서운 신통력을 갖고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그런 초자연적 존재였던 것이죠. 그런 면에서 종교에다 초자연적 힘을 부여하고, 종교 전문가들, 성직자들을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무섭고도 신비한 도사로 생각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만이 아니고 우리 역사 속에 상당히 깊이 내재돼 있기 때문에 이것을 건드리기가 상당히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과거의 기복과 오늘날의 기복은 상당히 다릅니다. 기복은 복을 빈다는 이야기인데, 복을 누구를 위해서 비는가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예컨대, 자녀가 수능시험을 볼 때 어머님이 사찰에 가서 대입 기도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입 기도라는 게 결국 내 옆에서 기도를 하는 다른 아줌마의 아들보다 내 아들을 먼저 입학시켜 달라는 이야기가 들어 있는데(청중 웃음), 기도는 같이 하지만 결국 그 속에는 상당한 경쟁 관념이 내재해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현대의 기복은 완전히 장삿속이 되기도 하지만, 아주 원자화된 개인, 말하자면 옆의 아줌마 아들이 아니라 내 아들만을 입학시켜 달라는, 개인·개체 위주의 장사인데, 전통적인 기복이 이것보다는 약간 차원이 높았습니다.























-예를 들어 신라 시대 때 미륵상이나 아미타상을 만들고 거기에다 어떤 명을 새겼는가 하면, 나의 부모를 비롯한 칠세(七世) 친척들을 극락왕생하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 국토가 태평하고 모든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게끔 하소서 하는 명을 새겼습니다. 결국 나뿐만 아니고 국가 전체가 그리고 모든 중생들이 뭔가를 받도록 비는 그런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만, 그래도 근본적으로 기복 신앙이라는 것이 아주 오랜 역사를 갖고 있고, 이미 문화 속에 얽히고설킨 부분이 있기 때문에 제가 그때는 그것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하기가 왠지 참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그때 제게 어떤 생각이 들었냐하면, 기복 장사 자체를 문제 삼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기복 장사에는 사찰이나 교회라는 공급자가 있는가 하면, 그 장사를 제발 해 달라고 하는 수요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와 사찰들이 갑자기 없어지고 수요만 그대로 남는다면, 예를 들어 무당이나 점쟁이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수요자로 하여금 이런 기복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상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뀌지 않는다면 공급자나 수요자만을 인격적으로 탓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기복 장사 자체를 문제삼을 순 없다 하더라도 소위 '상도덕'은 문제삼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상도덕' 아시죠? 장사할 때 그래도 어기면 안 되는 일종의 '상도'가 있는데, 기복 장사하는 과정에선 이것이 너무도 많이 어겨지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일반 재벌들끼리 장사를 해도, 만약 LG 휴대폰 쪽에서 '삼성 휴대폰이 곧 고장날 것이니 삼성 휴대폰을 사는 사람은 그것을 행복하게 쓸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악성 흑색 광고를 낸다면 이것은 아마 당장 재판을 받아 상당한 돈을 물을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나왔다는 사람이 '불신지옥'이라고 외친다면 이건 사실 LG 휴대폰만이 진리고 삼성 휴대폰이 거짓이라는 말과 전혀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같은 시장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인데. 그걸 또 '불신지옥'이라고 외칠 때에는 꼭 '불신(佛信)지옥', 그러니까 '불교를 믿는다면 지옥이다' 라고 들리기 때문에... (청중 웃음) 이것은 상도덕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장사를 열심히 하겠다고 발벗고 나서도 장사를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청중 웃음)



-이런 부분도 있습니다. 기업체에서는 고용자를 막 다루면 안 되지 않습니까? 삼성이 무노조 경영을 한다고 해서 삼성을 대단히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삼성말고 무노조 경영하는 곳이 '종교 재벌'들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혹시 대형 교회나 대형 사찰에서 노조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없죠?(청중 웃음)



-사실은, 삼성보다 대형 교회에서 주인이 아닌 '밑에 사람'으로 일하기가 훨씬 불안합니다. 대형 교회의 부목이나 전도사, 운전사 정도면   뭐 월급이 박한 건 그렇다 치고 언제 짤릴지 모르는 상황이죠. 주목의 마음에 안 들고 노선을 달리 하면 자르는 데 별 절차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노조를 만드는 시도를 2년 전부터 한 것 같은데, 아직 대다수 대형 교회들에 노조가 없습니다. 고용된 사람들이 많은데도 말입니다.



-대형 교회도 그렇지만 최근 부산의 삼광사라는 대형 사찰에서 노조 탄압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비정규직 사찰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려다 사태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매일노동뉴스>에서 알게 됐습니다. 결국 장사를 한다 하더라도 이렇게 장사를 해서는 무노조 삼성보다 더 못된 장사가 될 것 같아서 좀 문제가 있습니다.



-또, 예를 들어, 아무리 장사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기업체가 정치에 부당하게 압박을 주면 안 된다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지금 한국 노무현 정부가 미국과 FTA 투자 협정을 맺고자 하는데 실제로는 이 협정이 체결되면 가장 혜택을 볼 기업체가 어느 기업체인지 뻔하거든요. 삼성입니다. 삼성에서는 아마도 FTA가 맺어지기를 대단히 바라고 있겠지만, 만약에 삼성이 이를 위해 정치권에 상당히 노골적인 로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형 교회들이 성조기를 들고 나와서 미군을 찬양한다든가 'We Love America!'를 부른다면 이것도 결국엔 일종의 기업체의 정치적 압박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대형 교회의 경우에는 미국과의 역사적 관계도 있고 이해관계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많은데, 그렇다 하더라도 나라 전체의 정치를 한 집단 위주로 하려고 한다는 건 문제입니다.























-또, [그들이] 성조기를 들고 나올 때 드는 생각은, 미국의 정치인들이나 주류 지식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비유 중 하나, 즉 미국을 '새로운 로마제국'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로마제국'처럼 미국이 전 세계를 다스리면서 사람들한테 라틴어 대신 영어를 가르쳐 주고 공동 문화를 만들어 주고 문명의 공간을 확보해 준다." 이것은 미 제국의 주류 지식인들이 제국을 옹호하는 입장의 골자 중 하나인데, 그러면 미 제국의 성조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결국에는 새로운 로마제국의 깃발을 들고 다니는 꼴이 되는데, 예수를 못 박아 죽인 것은 바로 로마제국이 아닙니까?(청중 웃음) 그러니까, 그런 역사적 관계까지 생각하면 이것은 상당히 기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실제로는 로마제국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숭배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종의 무한의 힘의 상징인 성조기를 숭배하는 것인지 좀 분간하기 어려운 지경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업체에 대해서 한 가지 문제 삼는 부분이 '탈세'인데, 종교단체 같은 경우엔 탈세도 아니고 '무세'입니다. 세금을 아예 안 냅니다(청중 웃음). 만약, 주요 종교단체들의 수익이 웬만한 중소기업보다 많다는 사실까지 감안한다면, 예컨대 대형 교회에서 세금을 내서 그 세금 전액이 무상 의료나 무상 교육의 실천에 쓰인다든가, 아니면 단순히 이런저런 방법으로 자선에 쓰인다든가 이런 조건을 내세워 세금을 낸다면 이것은 교리에 반대되는 부분이 전혀 없을 텐데, 어쨌든 탈세도 아닌 '무세'라니 이건 참 '상도덕'상 문제가 있지 않나 그런 생각도 있습니다(청중웃음).







-또, 제가 늘 한국 종교에 관해 문제 삼고자 하는 또 하나의 부분은 '상품 강매'입니다. 일반 회사가 그렇게 하면 당장 걸리겠지만, 예를 들어 종교 재단이 세운 학교에서 학생들한테 예배시키는 것은 결국 '상품 강매'와 다른 게 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인들이 신앙 시장에서 본인들의 상품을 열심히 마케팅하고 추진하는 것까진 좋은데, 본인들의 회사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학생들한테까지 그 상품을 사게끔 강제한다면 이건 헌법상의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상도덕'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국이나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주류 종교를 얘기할 때, 이것은 단순히 기복 장사로만 얘기할 수 없는 성질의 훨씬 더 복합적인 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를 들어, 외국의 한인 사회에 왜 하필이면 교회가 그렇게 많은가 물어보면 그것은 신앙이 강해서라기보다는 교회가 일종의 네트워크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미국의 한인 사회나 유럽의 한인 사회에서는 '왕따'를 당하게 돼 있습니다. 교회들이 일부러 왕따 시키지 않더라도 저절로 당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바깥에서는 그것이 좀더 극명하게 나타날 뿐이지만, 한국 안에서도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교연, 즉 교회와 교맥을 통해서 맺어지는 것까지 포함하면, 한국에서 흔히 '관계 자본'이라고 말하는 3연, 즉 학연·혈연·지연말고도 '교연'을 분명히 더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나 사찰의 경우에는 또 한 가지 대단히 중요한 기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존 사회나 기존 질서에 뭔가 신성한 듯한 외피를 덮어 주고 기존 질서를 합리화하는 데 신의 도움을 받는 그런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일반적인 한국 사람이 평생 살면서 진심으로 존경할 만한 공인(public figure)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주 일찍 초·중·고등학교에서 국가주의적인 주입을 받아 국가를 대단한 숭배 대상으로 삼을 수 있지만, 국가를 존경하기가 좀 힘들어요.



-국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되는지 다들 체험적으로 알기 때문에 '추상적인 국가'를 숭배해도 '구체적인 국가'를 존경하기란 좀 힘듭니다. 존경하고 싶어도 곧잘 무슨 최연희 의원의 성파문이든 무슨 파문이든 (청중 웃음)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꼭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추상적으로 운동 경기에서 우리 팀이 꼭 이겨야 한다든가 태극기로 상징되는 추상적인 대한민국이 숭배 대상이 돼도 구체적인 대통령, 국회의원, 고급관료들이 존경 대상이 되기는 아무래도 조금 힘들어요.



-그런데 그런 것도 그렇지만, 예를 들어서 어떤 학교 의식이라든가 어떤 공적인 의식에 대통령을 모신다고 하면 아마 참석자들이 대단히 좋아할 것입니다. 근데 그것은 노무현 씨라는 한 개인이 좋아서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아직 대통령직에 추상적으로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이죠. "대통령도 왔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위계 서열에서는 대단히 높은 사람이 온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아마도 노사모 빼고는 인격적으로 노무현 씨를 아주 진심으로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을 겁니다.(청중 웃음)



-그러니까, '추상적인 권위 인정'과 '구체적인 인격적 존경,' 이 두 가지는 조금 다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우리가 제도적으로도 존경하게끔 돼 있지만, 좀 신비한 옷을 입고 신비한 말씀을 하고 뭔가 신성한 듯한 아우라(청중 웃음), [즉] 후광을 갖고 나타날 추기경님이나 큰스님이다 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제도적인 인정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존경까지도 하게 돼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런 공인된 종교 지도자들이 이 체제가 나쁘다든가, 이 체제를 우리가 빨리 바꿔야 한다든가, 이 체제의 문제점이 무엇이라는 말씀을 잘 안 하시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청중 웃음), 사실 맞다고 할 수도 없고 틀리다고 할 수도 없는 말씀을 하도 잘하시기 때문에, 이 분들의 존재 자체는 체제를 상당 부분 합리화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높으신 스님이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나 <중앙일보>에 인터뷰하시고 법문다운 좋은 말씀을 하시는데, 그 말씀에는 별 문제가 없어도   어차피 그 말씀 상당 부분이 당나라 후기나 송나라 때 선사들의 책에서 다 베낀, 이미 역사적으로 검증된 말씀이라 별 문제는 없는데   주류 언론에다가 인터뷰한다는 것 자체는 대한민국 제도권의 권위를 높여주는 부분이 있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는 이 체제가 인간이 살 만하고 이 체제가 인간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체제라는 환상을 피지배자들한테 상당히 효과적으로 덮어씌우는 면이 있는 건데 이것은 굳이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작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실, 요한 바오로 2세라는 사람이 여러 가지 주장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피임을 종교적 죄악으로 본 겁니다. 그것이 종교적으로 맞다 틀리다 하는 건 제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서 뭐라 할 수는 없는데, 어쨌든 아프리카, 특히 남부 아프리카의 경우에는 에이즈가 지금 대단히 치성(熾盛)을 부리고 있어서 예컨대 잠비아나 나미비아의 경우에는 에이즈에 전염된 사람이 이미 15퍼센트에서 20퍼센트까지입니다. 이미 나라가 멸종으로 치닫고 있는 거죠.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보호 없는 섹스를 한다는 것은 목숨을 대단히 위협할 만한 부분이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성교시에 피임하지 않을 경우 곧잘 에이즈가 전염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교황의 말씀을 듣고 피임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에이즈에 걸려 죽은 사람이 과연 몇 만 명이 되는지 대단히 궁금할 따름입니다.



-낙태 수술에 대한 교황의 입장도 아주 단호하셨는데, 현실적으로 가난한 나라에서는 어차피 키울 수 없는 아이를 낳았다가는 결국 사회적 살인처럼 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낙태를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종교 입장을 따라서 많은 여인들이 결국 낙태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는데, 결국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빠뜨렸는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런데 요한 바오로 2세가 죽었을 적에 한국 언론들도 그렇지만 외국 언론에서도 그것을 언급하는 언론이 몇 군데밖에 안 됐고, 대다수는 요한 바오로를 거의 새로운 성인으로 모시고 그랬습니다. 요한 바오로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을 여러 언론 중에서도 한두 군데밖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종교 지도자의 권위는 세계 지배계급에게 그만큼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굳이 한국만의 사정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러한 신성하다 싶은 지도자로 상징되는 종교가 원자화·개체화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결국 '여러분이 불행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신앙생활이나 인격의 문제가 되는 것이고, 여러분의 불행은 여러분이 종교적인 생활을 하고 인격을 수양해서 언제든지 행복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행복하지 않은 사회에서, 그리고 구조적으로 행복할 수 없는 사회에서 개인이 신과 종교라는 매개체를 통해 거래하면 일단 개인적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죠.



-그런데, 이 메시지는 이 종교를 창시한 사람들, 예수님이나 부처님하고는 별 관계가 없고 바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비자이자 노동자들한테 모든 사회적 문제를 인격이나 수양 문제로 돌리기를 원하는 게 아마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기복 장사하는 기업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 기업체의 정체는 체제 전체를 합리화하고 공고화하고 아주 당연할 뿐만 아니라 거의 신성하다 싶은 것으로 만드는 기능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맑스가 종교에 대해서 한 말을 혹시 기억하십니까?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이 제일 유명해졌는데, 그 문장에서는 그 이야기뿐만 아니라 다른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짓밟힌 존재의 신음소리'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종교는 맑스가 보기에는 '짓밟힌 존재의 신음소리이자 민중을 위한 아편'이라고 이야기한 건데, 그런 면에서 맑스는 신음할 수밖에 없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종교를 찾게 돼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맑스는 종교가 단순히 위에서 강요하는 '아편'이라기보다는 이 상황을, 행복할 수 없는 상황을 사람들이 바꾸지 않는 한은  결국 민중이 저절로 찾게 돼 있는 불가피한 것, 또는 일부분이나마 민중의 현실적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특히 전근대 사회에서는 수많은 종교 이단들이 바로 민중의 반항 의지, 저항 의지를 대변했고, 말 그대로 민중의 신음소리를 담았다는 것이 맑스의 종교론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지금의 한국 현실을 중심으로 본다면 종교는 과연 '짓밟힌 존재의 신음 소리'에 더 가깝습니까, 아니면 '민중을 위한 아편'에 더 가깝습니까? 둘 다 종교의 기능을 묘사하는 얘기인데 저는 잘 모르겠지만 얼핏 보기에는 '짓밟힌 존재의 신음 소리'보다 그 신음 소리를 진통시켜 주고 침묵을 강요하고, 그래서 결국에는 상처가 아프지 않게 진통시키는 일종의 마취제에 더 가까운 것 같은 느낌입니다. 물론 아주 아플 때 마취제를 먹게 돼 있지만, 마취제·진통제를 먹는다고 해서 상처가 아물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당분간 아프지는 않겠지만 상처는 그래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무엇이냐면, 지금의 종교가 기존 체제를 옹립하고 합리화하고 체제로 인한 개인의 불행을 개인적인, 상당히 자기 기만적인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들의 원래 모습이 과연 맞는가 하는 점입니다. 종교가 정말 민중을 위한 아편 정도라면 하필이면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이 왜 그렇게 오래도록 존재해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거든요. 기만이라면 상당히 빨리 깨우칠 수 있는 부분인데, 또 실제로는 신음하는 소리, 짓밟힌 사람이 신음하는 소리를 담지 않은 종교는 지금 봤을 때는 그렇게 오래 안 가요.



-예컨대, 최근에 만들어진 소위 신흥종교들 중에는 상당히 빨리 쇠퇴하는 종교들이 꽤 있는데, 통일교만 해도 1960∼70년대에 특히, 미국이나 일본에서 교세 확장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실제로 교세가 상당히 쇠미해졌습니다. 기존의 신자도 많이 탈락하고 새로운 신자 확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됐는데,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만, 그 중 하나는 실제 통일교 교리에서는 이 "짓밟힌 사람의 신음소리"를 거의 들어볼 수 없다는 부분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문선명한테 카리스마가 있지만 문선명이 미국의 지도층·지배층하고 너무 가깝기 때문에 아무래도 "짓밟힌 사람의 신음소리" 듣기에는 조금 어려운 종교입니다.



-그러니까, 신흥종교를 봐도 알 수 있지만 대개 아픈 사람의 신음 소리를 담아 주지 않는 종교는 장수하지는 못합니다.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이 이 때까지 장수해 온 비밀이 있다면, 그것이 만들어졌을 때 그 종교를 만든 사람들이 분명히 민중 편에 섰던 것이고, 민중의 그 신음 소리를 많이 담고 민중이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 쪽으로 나아가자고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예수나 붓다, 무하마드의 카리스마를 이용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용하려면 일단 카리스마가 있어야 하는데 결국 붓다나 예수님, 무하마드에게 그 카리스마를 만들어 준 것이 아마도 종교 속에 담겨 있는, 그러니까 초기 불교나 초기 기독교, 초기 이슬람에 담겨 있는 상당히 강력한 평등 정신이나 저항 정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불교에 대해서 저항 정신이란 말이 아마 지금의 불교를 보면 어울리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제도 불교는 저항과 전혀 어울리는 모습은 아닌데, 실제로 붓다라는 사람 - 원래 상류계급에 속했다가 진리를 찾겠다고 혼자 뛰쳐나와 6년 동안 고생해 결국 뭔가를 깨달았다는 그 붓다 - 은 그 깨달은 것이 공(空)과 연기(緣起)라는 진리였는데, 이 진리대로라면 당시 인도 계급 제도인 카스트 제도나 남녀차별이 사실 존재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부처님이 실제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불경을 통해서는 읽어내기가 대단히 힘듭니다. 대다수 불경들이 붓다가 죽은 뒤 4∼5백 년 뒤에 만들어진 글들입니다. 거기에 붓다가 그렇게 말했다고 돼 있지만, 그건 사실과 전혀 관계 없습니다. 실제 붓다의 육성에 가장 가까운 초기 경전들 중에서도 붓다의 말씀을 거의 그대로 담았다고 믿어지는 것은 아마 <숫타니파타> 라든가 그 정도 경전 몇 개이고요, <니카야>, <아함경(阿含經)> 이라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초기 경전도 붓다가 죽은 지 훨씬 뒤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붓다가 실제로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아마  숫타니파타 를 보면 대충 알 수가 있겠지만   윤색된 부분도 있고 가미된 부분도 있습니다만   붓다는 처음에 깨닫고 나서는 무엇보다 인간의 평등을 많이 얘기했습니다.



-진정한 바라문이 무엇이냐? 바라문은 인도의 성직자 계급입니다. 당시에는 계급 질서 맨 위에 있었다는 성직자 계급인데, 이 바라문에게 붓다가 얘기한 것은 사람 귀하다는 것이 결국에는 남에게 자비를 베풀고 탐욕을 내지 않는 것이고, 사람들 사이에 절대 차별을 두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동물들 사이에서는 '내 종이다, 내 종이 아니다. 동류다, 이류다' 이렇게 서로 차별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모두 다 똑같다 이런 얘기를 한 것입니다. 붓다가 깨달은 이치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공허하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는 여러 가지 요인들로 만들어지는 이유와 결과의 순환이다" 이런 것이었는데, 거기에서는 영구한 계급 차별이라는 부분이 개입될 수 없는 그런 가르침을 만든 것입니다.



-붓다는 만인 평등을 외치기도 하고, 동물 죽여서 제사 지내는 것을 반대하기도 하고, 남자와 여자가 원칙적으로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죠. 또, 붓다의 생활 방식은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탁발 아니었습니까? 탁발이라 하면 동냥을 구하는 것인데, 실제 붓다가 탁발하면서 뭘 했었냐면 요즘 말로 아마 심리정신과의 상담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민중이 밥을 줄 때는 뭘 물어보지 않습니까? 붓다가 그 대답을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생활 문제 풀어 주고 어떻게 바르게 살아야 하는지 얘기해 주고, 말하자면 상담을 해 주고 식량을 받는 그런 거래를 하는 것인데, 그것은 민중과 아주 가까운 생활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붓다는 기적을 절대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신통력이나 기적이라는 부분은 붓다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아들을 부활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한 여자한테 붓다는 '그래요? 한 번 부활시켜 보겠습니다. 그런데 당신 마을에서 친척 중에 죽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런 사람을 한 번 찾아 주면 제가 당신 아들도 부활시켜 보겠습니다' 하고 말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무슨 얘기냐면, 붓다의 원래 가르침은 신통력, 초자연적 힘, 신이라는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겁니다. 붓다는 대단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던 거죠. 민중한테 붓다는 존경받는 스승이었습니다.



-그런데 붓다에게 한 가지 좀 아쉬운 점은, 붓다는 일종의 초기 공산주의적인 공동체인 승가를 만들기 위해 국가 권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해 자기 제자, 수행자들과 함께 숲 속에서 살기로 한 것인데요. 그것은 어찌 보면 민중과도 가까운 거리에서 사는 효과가 있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그런 저항의 태도, 아주 소극적인 저항의 태도에는 문제점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한테는 처자를 버리고 수행자가 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붓다는 자기 부인 야쇼타라와 아들 라후라를 내버려두어도 그들을 먹여 살릴 만한 사람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처자를 버리고 수행자가 된다는 게 훨씬 더 부담이 큽니다. 그래서 붓다의 제자들 중에는 대개 수행 생활을 해도 되는 상당한 재력과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결국 그 사람들이 붓다가 죽자마자 붓다의 가르침을 자기 편한 대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붓다의 제자 중에는 노예 출신들도 있었는데, 붓다가 죽고 나서는 노비는 스님이 될 수 없다는 계율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노비나 왕의 고용자한테는 스님이 되는 기회를 막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붓다가 했는지 아니면 그 제자가 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초기 불교의 주류 승단에서 한 것 같은데, 처음부터 여성이 승려가 되는 데 대단히 까다로운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소위 '팔경법'[尼八敬戒]이라는 건데, 여덟 가지로 여승이 남자 승려를 공경해야 한다, 아무리 나이 어린 남자스님이라 하더라도 나이 많은 여자 스님이 먼저 꼭 절해야 한다든가 하는 법들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붓다에게 가탁(假託)돼 있지만 실제로는 그 제자들이 만든 것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불교는 상당 부분 아주 초기부터 왜곡되기 시작했고 체제에 편입되기 시작했는데, 인도를 통일했다는 아쇼카왕 때는 불교가 왕의 국교가 돼서 거의 원래 정신을 이미 잃어버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중국이나 한국으로 유입된 불교는 이미 절대평등주의적이고 남녀평등주의적인 붓다의 가르침과는 거의 관계 없다 싶은, 이미 체제에 완전히 편입된 종교였습니다. 그런데 붓다라는 스승의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후기의 승단, 후기의 승려들이 그것을 계속 이용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싶고, 바로 그런 붓다의 카리스마는 불교가 그래도 죽지 않고 계속 민중들한테 인기가 있는 비결이 아닌가 싶습니다.



























-불교에 대한 묘사는 기독교에 대한 묘사와 놀랍게도 비슷합니다. 아마도 복음서를 읽으신 분은 다 아시겠지만, 특히 누가복음에는 계급투쟁적이라 할까요. 상류 계급에 대한 상당한 혐오감이 담겨 있습니다. '배부른 사람들이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배고픈 사람들이 배부르게 되리라' 하고 돼 있고, '부자가 하늘나라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도 어렵다'는 말은 체제에 편입된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도 그렇지만 그런 체제 반대적인 발언들이 가장 많은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올 것으로 기술을 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 로마제국이 망할 것이고, 로마제국에 협력했던 부자들이 결국 벌을 받을 것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복음서들이 최종 편집되는 것은 180년대라고들 추정하고 있습니다. 180년대에 이미 기독교는 거의 체제에 편입된 종교였습니다. 그럼에도 이미 체제에 협력하고 있던 교단 지도자들이 '부자들이 복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 나라 갈 수 없다'는 예수의 진짜 말씀을 남겨 놓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프롤레타리아로서의 예수의 카리스마가 그 사람들한테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만약에 부자들이 하늘나라로 갈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과연 기독교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확산될 수 있었겠습니까? 이미 2세기의 기독교는 상당히 보수화됐는데, 그래도 예수의 원래 정신은 상징적으로라도 복음서에 담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던 것이고, 그런 예수의 정신이 있었기에 기독교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짓밟힌 사람들한테 영감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편집 과정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게 4복음서 - 마태·마가·누가·요한 복음 - 에는 재미있게도 노예의 존재나 노예제에 대해 아무 언급이 없는 겁니다. 예수가 살았다고 믿어지는 1세기 초반에는 노예제가 경제의 주춧돌이었습니다. 노예들이 대단히 많았고, 예수가 부자 보고 하늘나라 못 간다고 했다면 분명히 노예 문제에 대해 발언을 안 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노예에 대한 얘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하면, 사도 바울 그러니까 기독교 보수화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이 나중에 '종들이여, 주인들에게 복종하라' 하고 말한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그대로 신약에 담겨져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결국 그 편집 과정에서는 말하자면 대중한테 어필할 수 있는 미끼 밥을 남겨 두기는 했는데, 상당 부분은 바울 사도와 그 제자들의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로 메워진 것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기독교도 그렇지만 또 아주 재미있는 예가 이슬람입니다. 이슬람을 창시한 무하마드라는 사람은 메카라는 상업 도시에서 '거지가 왜 이렇게 많은가. 왜 부자들은 이렇게 잘 살고 못사는 사람은 왜 이렇게 못사는가' 이런 불만이 출발점이 돼서 새로운 종교를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무하마드와 그 공동체가 메디나에서 망명중이었을 때, 당시에 예배할 수 있는 장소가 무하마드의 집뿐이었는데, 그 집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예배를 봤습니다.



-그런데 무하마드가 죽고 나서 무하마드의 계승자 우마르가 거의 맨 먼저 개악을 한 것 중의 하나가 '남자와 여자는 예배를 따로 봐야 한다'는 법률을 정한 겁니다. 무하마드의 원래 육성을 담은 코란의 기록을 보면 여성의 권리를 상당 부분 주장했습니다. 이혼권이나 피임권리나 유산상속권이나, 여자와 남자는 원래 알라신에 의해서 평등한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등 여성 권리에 대한 주장들이 상당히 많은데, 나중의 이슬람 율법을 보면 이게 상당 부분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슬람권의 페미니스트들을 보면, 상당 부분 서구의 페미니즘에서도 영감을 받지만, '무하마드의 진짜 정신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슬람을 페미니즘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슬람을 보든, 기독교를 보든, 불교를 보든 우리가 살고 있는 계급 사회에서 고등 종교의 스토리는 놀라울 만큼 비슷합니다. 제가 뭔가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기존 종교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는 게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제 그것을 결론 삼아 끝내겠습니다.























-결국 지금 성직자 집단이 대표하는 기존의 제도권 종교를 그대로 인정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그 종교를 만들었다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사실, 옛날에 한용운 스님이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만약 붓다의 가르침이 맞다면 나도 붓다가 될 수 있는 존재인데 왜 사찰에 가서 불상 앞에 절해야 하는가. 나 자신에게 절해도 되는데" 하고 말했습니다. 또는 "명부전에 가서 부모님들이나 내 자신이 극락왕생하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이 재판관한테 뇌물 주는 것하고 무엇이 다르냐. 결국에는 내가 죄가 없으면 왕생할 거고 죄가 있다면 아무리 빌어도 안 될 텐데, 뇌물 주듯이 비는 게 다 뭐냐" 하고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 만해 한용운의 정신을 살려서 우리가 기존 종교가 분명히 그 원래 정신과 다른 부분을 당연히 비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대신 우리가 맑스주의자가 된다 하더라도 속류 맑시스트나 스탈린주의자들처럼 '종교, 그 정체는 무용지물이다. 마약이다' 하고 버리기보다는 그 종교를 만든 사람들의 진짜 의지가 무엇이었는지, 왜 그 사람들한테 그렇게 많은 민중이 모였는지, 왜 그 사람들이 지금도 민중한테 이렇게 귀중한 이름들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베네수엘라의 수많은 빈민들의 집에 딱 두 개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차베스 대통령이죠. 그러니까 양쪽을 상당히 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하여튼 왜 하필이면 수많은 빈민들한테 예수는 지금도 이렇게 영감을 주는지, 우리가 진정한 맑시스트라면 스탈린주의 식으로 종교를 무조건 팽개치기보다는 종교를 비판함과 동시에 종교에 대한, 원래 종교의 모습에 대해 나름으로 애착을 가지는 것도 좋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사실 이 문제는 러시아의 볼셰비키들에게도 고전적인 문제였다. '건신론(God-building)'을 둘러싼 논쟁이 대표적이다. 고리키의 <어머니>나 <고백> 같은 작품에는 그런 문제의식이 많이 반영돼 있다. '오래된 미래'는 '종교-진보운동-사회주의'의 문제에도 예외가 아니다. 역사적 예수의 삶으로부터 진보운동의 영감을 얻고자 하는 김규항의 경우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06. 04.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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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4-21 공감 (84)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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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타니파타> <도마복음> : 홀로 서서 진리를 구할 때까지 나아감을 그치지 말라 새창으로 보기









 도마복음서의 발견이 신학계에 일으킨 가장 커다란 파문은 뭐니뭐니 해도 Q복음서를 가설 아닌 실체로서 등장시킨 사건이다.... 마태, 누가 복음서 중에서 복음서원형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마가자료를 제외한 부분 중에서, 마태와 누가에 공통된 부분을 그냥 자료(Quelle)라는 의미로 Q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 가설적 문헌을 치밀하게 연구해본 결과, 그것은 단지 어록(로기온 자료) 형식의 모음집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던 것이다. 즉 예수의 말씀(가라사대 파편)만으로 구성된 자료라는 것이다.(p349)... 도마복음서는 꿈에 그리던 어록복음서(saying gospel)이었던 것이다.(p350)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1> 中







 이 <숫타니파타>는 수많은 불교 경전 중에서도 가장 초기에 이루어진 경전이다... 불교 경전은 원래 눈으로 읽는 문자로 쓰여지지 않고 부처의 가르침을 들은 제자들이 그 내용을 함께 암송해오다가 후기에 문자로 정착된 것이다... 부처에게는 자기 자신이 어떤 종교의 창시자라는 의식이 전혀 없었다. 단지 눈 뜬 사람으로서 그 역할을 다했을 뿐이다.... <숫타니파타>를 보면 부처가 말한 그 가르침의 원형이 어떤 것인가를 자세히 알 수 있다.(p12) <숫타니파타 - 서문(법정)> 中











[사진] 피할수 없는 죽음(출처 : http://aristeinhk.blogspot.com/2015/04/inevitable-death-sutta-nipata-574-581.html)









 <숫타니파타>와 <도마복음>. 별로 관련없어 보이는 두 문헌의 공통점이 있다면  아마도 불교와 기독교 가르침의 원형(原形)을 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길(道)은 통해서일까. <숫타니파타>와 <도마복음>를 비교해서 읽다보면 다른 듯 같은, 같은 듯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도마복음한글역주>의 저자 도올 김용옥 교수는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숫타니파타>를 통해 <도마복음>을 풀이하고 있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숫타니파타>와 <도마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가르침의 원형을 거칠게나마 느껴보고자 한다.











[사진] 도마복음서( 출처 : https://www.alphawiki.org/w/%ED%86%A0%EB%A7%88%EC%8A%A4%20%EB%B3%B5%EC%9D%8C%EC%84%9C)







 <도마복음한글역주>의 저자는 복음서 속의 방랑하는 자의 모습 속에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숫타니파타>의 말씀을 떠올리고 있다. 모든 것에 미련을 갖지말고 나가라는 두 말씀 사이에서 우리는 '고독함'이라는 공통된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버리고 떠나야 하는가? <숫타니파타>는 그 이유를 '집착'이라고 말한다.







제42장 1 예수께서 가라사대, "방랑하는 자들이 되어라."(p104) <도마복음한글역주 3> 中











 52 추위와 더위, 굶주림, 갈증, 바람, 그리고 뜨거운 햇볕과 쇠파리와 뱀. 이러한 모든 것을 이겨내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p30)... 16 우리들을 생존에 얽어매는 것은 집착이다. 그 집착을 조금도 갖지 않은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p19) <숫타니파타> 中







 <숫타니파타>에서는 집착을 버리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 것을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도마복음>에서 방랑하는 자는 구하는 것을 찾을 때까지 그치지말고, 나아갈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을 찾기 위해서 이처럼 나가야 하는가?







 61 '이것은 집착이구나. 이곳에는 즐거움도 상쾌함도 적고 괴로움뿐이다. 이것은 고기를 낚는 낚시이구나.' 이와 같이 깨닫고, 지혜로운 자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68 최고의 목표에 이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마음의 안일함을 물리치고 수행에 게으르지 말며, 부지런히 정진하여 몸의 힘과 지혜의 힘을 갖추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p33) <숫타니파타> 中











 제2장 예수께서 가라사대,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찾았을 때 그는 고통스러우리라. 고통스러울 때 그는 경이로우리라. 그리하면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p133) <도마복음한글역주2> 中







 <숫타니파타>에서는 '마음의 통일'이라는 경지를 얻기 위한 정진을, 그리고 <도마복음>에서는 '(아버지의)나라가 너희 안과 밖에 있음'을 발견할 것을 강조한다.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음'에서 '마음의 통일'의 의미를 찾는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224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그 어떤 부라 할지라도, 천상의 뛰어난 보배라 할지라도, 우리들의 완전한 스승에게 견줄만한 것은 없다. 이 뛰어난 보배는 눈 뜬 사람 안에 있다. 이 진리에 의해서 행복하라.(p86)... 225 마음의 통일을 얻은 스승은 번뇌와 욕망과 죽음이 없는 경지에 도달한다. 그 이치와 견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뛰어난 보배는 그 이치 속에 있다. 이 진리에 의해서 행복하라.(p87) <숫타니파타> 中







 제3장 진실로,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다.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희는 알려질 수 있으리라. 그리하면 너희는 너희가 곧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그러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빈곤 속에 살게 되리라. 그리하면 너희 존재는 빈곤 그 자체이니라."(p157) <도마복음한글역주2> 中







 <숫타니파타>에서 '마음의 통일'을 강조하는 이유는 아마도 다음의 구절이 잘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피아(彼我)의 구별이 없는 통일된 상태에 이르렀을 때 모든 괴로움(苦)는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마음의 통일 상태에서 무상(無常), 무아(無我)임을 깨닫는다면, 일체개고(一切皆苦)에서 벗어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도마복음>에서의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음'도 이러한 의미는 아닐런지.







734 "모든 괴로움은 식별 작용으로 인해 일어난다. 식별 작용이 없어지면 괴로움은 생길 수 없다. 735 괴로움은 식별 작용에 의해 생긴다는 것을 알아 식별 작용을 고요히 가라앉힌 수행자는, 쾌락에서 벗어나 평안에 이르게 된다.(p255) <숫타니파타> 中







 그렇다면, 이러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숫타니파타>에서는 이를 윤회를 넘어선 자, '바라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하였고, <도마복음>에서는 이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순환적인 불교의 시간관과 직선적인 기독교의 시간관은 비록 다르지만, 끝까지 나아감을 통해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한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여겨진다.







 519 "사비야여, 모든 악을 물리치고 때묻지 않고, 마음을 잘 가라앉혀 스스로 안정시키며, 윤회를 넘어서 완전한 자가 되어 걸림이 없는 사람, 그를 '바라문'이라 합니다. 520 절대 평화의 세계에 들어가 선과 악을 버리고 때묻지 않으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알고 생과 사를 초월한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사문'입니다.(p184) <숫타니파타> 中











 제70장 1 예수께서 가라사대, "만약 너희가 너희 내면에 있는 것을 끊임없이 산출해낸다면, 너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이 너희를 구원하리라. 2 만약 너희가 그것을 너희 내면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너희가 너희 내면에 가지고 있지 못한 그 상태가 너희를 죽이리라."(p214) <도마복음한글역주 3> 中







 <숫타니파타>와 <도마복음> 속의 말씀을 이처럼 조합하다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분별이 없는 상태에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중단없이 용맹정진하며, 미련을 가지지말고 혼자서 방랑하는 고독한 삶을 살아야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분명 놓친 부분이 있을 것이고 비약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가장 큰 종교의 가르침 속에서 공통 분모(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있다는 사실은, 종교간 대립이 심해지고 있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연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된다. <숫타니파타>와 <도마복음> 속에서 옛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확인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PS. <도마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비어있는 동이를 이고 간 여인'은 자신의 동이가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제97장 1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의 나라는 밀가루를 가득 채운 동이를 이고 가는 한 여인과도 같다. 2 그녀가 먼 길을 걸어가는 동안, 이고 가는 동이의 손잡이가 깨져서, 밀가루가 새어나와 그녀가 가는 길가에 흩날려 뿌려졌다. 3 그러나 그녀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는 문제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4 그 여인이 집에 당도했을 때, 그녀는 그 동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것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p302) <도마복음한글역주 3> 中







766 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 욕망을 이루면, 그는 얻고자 하는 것을 얻었기 때문에 기뻐한다. 767 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 욕망을 이루지 못하게 되면, 그는 화살에 맞은 사람처럼 괴로워하고 번민한다. 771 그래서 사람은 항상 바른 생각을 지키고 모든 욕망을 피해야 한다. 배에 스며든 물을 퍼내듯이, 욕망을 버리고 거센 강을 건너 피안에 도달한 사람이 되라.(p271) <숫타니파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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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9-14 공감 (39)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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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소유'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새창으로 보기

법정스님의 ‘마지막 소유’를 만나다

서울신문 | 입력 2010.03.13 04:06 







[서울신문]11일 세상과 인연을 다하고 열반에 든 법정 스님은 수필집 '무소유'에 수록돼 있는 '미리 쓰는 유서'라는 글에서 이런 유언을 남긴 적이 있다. "내 머리맡에 놓여 있는 책들을 매일 아침 신문을 배달하러 오는 사람에게 주어라."라고. 그말은 달리 생각해보면 "내가 죽는 순간까지 이 책들만은 내 머리맡에 두어라."는 의미와 같다.















불교계 최고의 문필가이자 '무소유'의 가르침을 설파한 시대의 스승 법정 스님도 마지막 순간까지 소유하고 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책이었다. 법회에서 빠지지 않은 주제 중 하나가 책이었고, '맑고 향기롭게' 회보를 통해서 매달 읽을 책을 선정해 주기도 했다. 스님은 깊은 사유를 가진 문필가이자 폭넓은 독서가였고, 무엇보다 지독한 애서가였다. 























●현대문명 사고방식 비판 책 많아



그런 그가 강원도 오두막에서 밤을 새우며 읽었던 책들은 무엇이고,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었던 책은 어떤 것일까. 또 그토록 맑고 향기로웠던 스님의 사유를 키워낸 책들은 뭘까.



스님의 입적 직전에 나온 책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문학의숲 펴냄)은 그런 의문에서 출발한 책이다. 스님이 평소 법문이나 수필집을 통해서 언급했던 책 중 50권을 가려 뽑아 책의 주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다 스님이 언급 또는 인용한 대목들도 자세하게 전하며, 이를 통해 법정 스님의 독서편력를 전하고, 그것이 그의 지성과 가치관을 어떻게 구성해 놓았는가에 대한 지도를 그려준다.



'무소유'를 통해 물질문명에 치우친 사람들의 가슴에 큰 파문을 일으켰던 스님은 배타적·공격적이며 경쟁적인 현대 문명의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책을 많이 읽어왔다. 특히 격월간지인 '녹색평론'은 스님이 창간호부터 빠짐 없이 읽은 책이라고 한다. 소비적인 현대 사회를 비판적 시각으로 보고 사람과 자연의 공생적 문화 재건을 목표로 간행되는 이 책을 두고 스님은 "이런 잡지가 널리 읽힌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이외에도 스님은 '성장을 멈춰라', '슬로 라이프',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나무를 심은 사람', '육식의 종말' 등 문명 비판적인 책을 자주 언급했다.



















이런 비판 정신은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세상, 새로운 삶의 방식을 다룬 책들로 스님의 손이 가게 했다. 대표적으로 자연주의 운동가 스콧 니어링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 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가 그렇고,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위기'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 '펀드혼 농장 이야기'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등도 모두 새로운 삶과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해 다룬 것이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꼼꼼히 문장 수정



스님은 또 '월든' '여기에 사는 즐거움' '걷기 예찬' '그리스인 조르바' '죽음의 수용소에서' 등을 읽으며 본질적인 삶에 대해 고민했고, '꾸뻬 씨의 행복 여행' '행복의 정복' '풍요로운 가난' 등에서는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가를 타진했다. 소유에 대한 개념은 '톨스토이 민화집'에서 배우고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읽고는 직접 현장까지 찾기도 했다고 한다. 



































책은 부록으로 스님이 언급한 책 300여권을 가나다 순으로 정리했다. 여기에는 스님이 한 법문에서 "늘 곁에 두고 읽으며 의지하는 스승"이라고 한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도 눈에 띄고, 스님이 직접 번역까지 했던 서산대사의 '선가귀감(禪家鑑)'이나 초기불교의 경전인 '숫타니파타', 수행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장로게' '정법안장' 등도 자리하고 있다. 



















이들 경전 외에도 '어린 왕자' '꽃씨와 태양' '구멍가겟집 세 남매' 같은 동화들도 목록에 포함돼 있다. 스님은 '나의 과외 독서'라는 글에서 '어린 왕자'를 두고 "누워서 부담 없이 읽히는 동화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앞뒤가 툭 트이는 그런 책"이라면서 "내 나날의 생활에서 시들지 않은 싱싱한 초원"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책은 문장가로서의 스님의 손길이 묻어 있는 마지막 책이기도 하다. 출판사 측은 처음에 스님이 언급한 책 300권 목록을 뽑았고, 이를 다시 2년여에 걸친 스님과의 대화를 통해 50권으로 추렸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법정 스님은 병마와 싸우면서도 원고를 꼼꼼히 읽고 문장을 바로 잡아 주었다고 한다. 1만 8500원.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법정 스님의 입적 소식에, 스님의 행적과 말씀들이 다시금 회자되면서 가슴을 여미게 합니다. 한편으로는 평소 스님께서 유언 삼아 남기신 말씀들 몇 가지가 화제가 되었는데... 저 역시 서울신문 강 기자님처럼 머리맡에 남은 책을 신문 배달하시는 분께 드리라는 유언이 기억에 남더군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두고두고 보신 책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호사가로서의 생각도 들고... 



나도 언젠가는 애지중지 모아놓았던 수많은 책들을 '버리고 떠나기' 해야 할텐데, 이것들을 과연 어떻게 잘 나눠주고 가야 할까 싶기도 하고요. (감히 법정 스님처럼 끊임없이 버리고 버리고 하는 무애행은 속세에 얽혀 사는 범부로서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지요. 한때나마 법정 스님의 글들을 읽으며 그분같은 삶을 꿈꾸던 어린 소년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깜빡깜빡 하곤 합니다. 서고에 재어 놓은 저 책들의 물성이 결국 내 것은 아님을, 책을 다 읽어서 그 속의 사유를 내 것으로 만들었다 한들 그 사유조차 내 것이라 말할 수는 없음을, 내 것... 나...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음을. 어서 훌훌 다 버리고 떠나기 해야 할텐데...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동안 펴내었던 책들은 다 절판시켜 버리라고도 하셨는데... 정말로 그리 될까요?



설마 그걸 실행에 옮길 출판사들이 아니지만... 행여나 만약에 하나(!) 예컨대 "법정대종사저작권관리위원회" 같은 곳이 꾸려져서 스님의 유지를 받들겠노라고 한다면? 



진정 이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일단은 법정 스님의 맑고 향기로운 글들을 못 보게 된다는 점에서 한국 문화계의 큰 손실이 되겠지만, 한편으론 우리 문화계에 자그마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듯 합니다. 문자문명, 언어라는 현상에 던지는 또 하나의 화두가 되겠지요. '不立文字'를 외쳐온 선불교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런 일은 종종 있어 왔습니다. [벽암록] 같은 화두집은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물론 절에서!) 불태워지기도 했습니다. 



왠 선불교? 왠 불립문자? 잊으면 안 될 것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종단이자 법정 스님이 속해 있던 조계종이 불교 중에서도 선불교, 혹은 선종의 한 종파였다, 아니 현재형으로 "라는" 사실입니다. 맨날 지들끼리 치고받고 싸워대고, 대웅전에 불상 모셔놓고 복전이나 받아먹는 퇴영된 기복신앙으로서의 모습과 얼른 들어맞지는 않습니다만, 일단 그 연원에 있어서는 "살불살조(殺佛殺祖-부처를 죽이고 할애비를 죽여라!)"를 외치고... 스승에게 호기롭게 팔뚝 하나쯤은 뚝 잘라 내던졌던 맹렬 수행자들의 혁명적 집단, 선종 말입니다. 그냥 그렇다고요... 



선불교 종단 조계종에서는 과연, 불교를 가장 대중들에게 널리 알렸던 불세출의 베스트셀러 작가의 작품들의 운명을 어떻게 결정할까요. 







(일단 당장은 현재 나와 있는 책들에 대한 사재기 열풍이 잠깐 불 수도 있을 것이고, 사재기를 통해 재고가 다 소진된 시점부터 사후 저작권이 종료되는 향후 오십 년 뒤까지 법정 스님 책은 헌책방 내지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서 높은 가격에 겨우겨우 구매해야 하는 사태가 올 수도 있겠군요. 물론 이런 정도는 '자그마한 파장' 축에도 못 끼는 소소한 에피소드이지요. ^^)



(벌써 법정 스님의 일부 도서들은 품절 상태로군요. 생각보다 아주 빠르네요. 위에 있는 책들 중에서 법정 스님이 직접 번역하신 [깨달음의 거울(선가귀감)], [숫타니파타] 등은 현재 구매가 불가능하고, 샘터에서 나온 [법정 스님 전집]의 모든 책들은 '판매 중단'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안내문구가 붙어 있습니다. 할!)



 













아래는 이번 책에 언급된 책들입니다. 저랑은 취향이 거진 겹치는군요. ^^



새로운 형식의 삶에 대한 실험 _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월든>

인간과 땅의 아름다움에 바침 _ 장 피에르와 라셀 카르티에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모든 사람이 우리처럼 행복하지 않다는 건가요 _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그곳에선 나 혼자만 이상한 사람이었다 _ 말로 모건 <무탄트 메시지>

포기하는 즐거움을 누리라 _ 이반 일리히 <성장을 멈춰라>

모든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행복 _ 프랑수아 를로르 <꾸뻬 씨의 행복 여행>

자신과 나무와 신을 만나게 해 준 고독 _ 장 지오노 <나무를 심은 사람>

한 걸음씩 천천히 소박하게 꿀을 모으듯 _ 사티쉬 쿠마르 <끝없는 여정>

행복이 당신 곁을 떠난 이유 _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나무늘보에게서 배워야 할 몇 가지 것들 _ 쓰지 신이치 <슬로 라이프>

기억하라, 이 세상에 있는 신성한 것들을 _ 류시화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신은 인간을 가꾸고, 인간은 농장을 가꾼다 _ 핀드혼 공동체 <핀드혼 농장 이야기>

모든 사람은 베풀 것을 가지고 있다 _ 칼린디 <비노바 바베>

이대로 더 바랄 것이 없는 삶 _ 야마오 산세이 <여기에 사는 즐거움>

나는 걷고 싶다 _ 다비드 르 브르통 <걷기 예찬>

아프더라도 한데 어울려서 _ 윤구병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신에게로 가는 길 춤추며 가라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한쪽의 여유는 다른 한쪽의 궁핍을 채울 수 없는가 _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마른 강에 그물을 던지지 마라 _ 장 프랑수아 르벨·마티유 리카르 <승려와 철학자>

당신은 내일로부터 몇 킬로미터인가? _ 이레이그루크 <내일로부터 80킬로미터>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_ 후쿠오카 마사노부 <짚 한 오라기의 혁명>

큰의사 노먼 베쑨 _ 테드 알렌·시드니 고든 <닥터 노먼 베쑨>

풀 한 포기, 나락 한 알, 돌멩이 한 개의 우주 _ 장일순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삶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 _ 아베 피에르 <단순한 기쁨>

두 발에 자연을 담아, 침묵 속에 인간을 담아 _ 존 프란시스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

가을매의 눈으로 살아가라 _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생명의 문을 여는 열쇠, 식물의 비밀 _ 피터 톰킨스·크리스토퍼 버드 <식물의 정신세계>

우리 두 사람이 함께 _ 헬렌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축복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_ 레이첼 나오미 레멘 <할아버지의 기도>

인간의 얼굴을 가진 경제 _ E.F.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바람과 모래와 별 그리고 인간 _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_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 _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무는 자연이 쓰는 시 _ 조안 말루프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

용서는 가장 큰 수행 _ 달라이 라마·빅터 챈 <용서>

테제베와 단봉낙타 _ 무사 앗사리드 <사막별 여행자>

꽃에게서 들으라 _ 김태정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꽃 백 가지>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_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우리에게 주어진 이 행성은 유한하다 _ 개릿 하딘 <공유지의 비극>

세상을 등져 세상을 사랑하다 _ 허균 <숨어 사는 즐거움>

지구에서 가장 뜨거운 심장 _ 디완 챤드 아히르 <암베드카르>

바깥의 가난보다 안의 빈곤을 경계하라 _ 엠마뉘엘 수녀 <풍요로운 가난>

내 안에 잠든 부처를 깨우라 _ 와타나베 쇼코 <불타 석가모니>

자연으로 일구어 낸 상상력의 토피아 _ 앨런 와이즈먼 <가비오따쓰>

작은 행성을 위한 식사법 _ 제레미 리프킨 <육식의 종말>

결론을 내렸다, 나를 지배하는 열정에 따라 살기로 _ 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성장이 멈췄다, 우리 모두 춤을 추자 _ 격월간지 <녹색평론>

내일의 세계를 구하는 것은 바로 당신과 나 _ 제인 구달 <희망의 이유>

내 안의 ‘인류’로부터의 자유 _ 에크하르트 톨레

어디를 펼쳐도 열정이 넘치는 책 _ 다치바나 다카시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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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 Seongmuk 48세부터 감옥에서 영어공부를 시작한 김대중 전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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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 Seongmuk
18 June 2013 · ·


오늘 가르치는 아이들이 영어를 공부하는 이유를 물어봐서 다음주에 아래 김대중 전대통령의 영어공부이야기를 프린트해서 나누어 줄려고 합니다. 좀 길지만 페친분들과도 공유합니다.

<48세부터 감옥에서 영어공부를 시작한 김대중 전대통령>

나는 마흔 여덟살 때부터 영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1972년 유신이 선포되기까지 10년 동안 국회의원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는 영어를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외국의 공관 사람들이나 외신 기자들을 만나는 일이 참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피하기까지 했습니다. 영어를 배워야하겠다고 다짐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또 실천에 옮겨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의지는 있었는데, 끈기 있는 노력이 부족한 탓이었던 것 같습니다. 번번히 실패했습니다. 1972년까지 그런 꼴이었습니다.

76년과 80년에, 두번에 걸쳐서 있었던 5년 간의 옥중 생활은 영어 실력을 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는 옥중에서 많은 책을 읽었고, 또 본격적인 영어 공부를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영어책을 비롯하여 여러 권의 영문법 책을 되풀이해서 읽었습니다. 그 결과 상당한 문법 실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흑자들은 문법을 아무리 잘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합니다. 물론 회화를 못 하는 문법이라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회화를 유창하게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문법에 맞는 영어를 구사한다면 금상첨화입니다.

나 의 경우 회화는 그렇게 유창하지 못 하지만, 문법 공부를 제대로 한 결과 외국인들도 나의 영어를 높이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문법에 약합니다. 뒤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그들 앞에서 문법에 맞는 영어를 구사하면 그 사람의 `품위'까지 올라간다는 겁니다. 나는 우리 나라의 역대 정권으로부터 죽을 위협을 당하는 등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신세도 많이 졌습니다.

나를 두번이나 감옥에 가두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책을 읽지도 못 했을 것이고, 영어 공부도 잘 하지 못했 것입니다. 밖에 있었다면 너무 바빠서 학문이나 영어 공부를 제대로 못 했을 텐데, 그들이 나에게 그런 기회를 제공해 준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을 생각할 때, 사람에게는 모두가 나쁜 일도 없고, 좋은 일도 없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절실해집니다.

1982년 12월부터 85년 2월까지 미국에 머무는 동안 나는 미국의 ABC, NBC, 퍼블릭 라디오를 위시한 각 지방의 TV와 라디오에 자주 출연하였습니다. 그때는 어느 정도 영어로 말하고 듣는 일이 가능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방송에서 직접 영어를 사용했습니다

방송 출연과 관련하여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는 사건입니다.

1983 년 10월,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할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한국은 인권 문제가 심각한데 어떻게 미국 대통령이 방한할 수 있느냐는 비판 여론이 상당히 고조되어 있었고, 상당수의 의원들도 레이건 대통령의 한국 방문을 반대하는 서명을 하여 이를 백악관에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에게 레이건의 방한 문제를 토론하기 위한 ABC Nightline 프로그램에 출연해달라는 교섭이 들어왔습니다. 나는 매우 주저하였습니다. 나이트라인은 관심 사가 방영될 경우, 수천만명의 미국인들이 시청한다는 프로그램이었고, 그 프로의 진행자인 테드 카플은 미국인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미국과 전 세계의 지도자들을 이 프로그램에 등장시켜 놓고 종횡무진으로 질문들을 퍼붓고 허점을 찌르고 하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든 이 프로그램에 나가게 되면 긴장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니 영어가 짧은 나로서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하는 내용이 중요한 것이라는 주위의 사람들의 강권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 민주화를 위해서 미국의 여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내 특유의 위기 관리 능력을 믿고 한번 모험을 시도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참 용감하게도 출연을 수락했습니다.

나는 그 순간 같은 방송에서 얼마 전에 필리핀의 마르코스가 행했던 장면을 떠 올렸습니다. 마르코스는 그 해의 여름에 아키노 상원의원이 필리핀 공항에서 살해당한 일과 관련해 나이트라인에 불려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그의 태도가 얼마나 당당하고 조리정연했던지 독재자라고 미워하던 사람들까지도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매우 인상적이었던 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대화 도중 테드 카플이 그의 말을 중단시키려고 할 때 그가 취한 태도였습니다. 그는 단호한 태도로 "Wait ! Wait!" 하면서 자기가 할 말을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를 미워했지만, 역시 `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도 기회가 있으면 저렇게 한번 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기회가 온 것이었습니다. 나는 손을 내밀며 "미스터 카플, Wait! Wait!"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카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고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말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토 론은 시종 내게 유리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거의 토론이 종료되어 갈 무렵에 이르자 여당(민정당)대표가 거짓말이지만 매우 효과적인 말을 던졌습니다. "지금까지 김대중 씨가 말한 인권 유린은 박정희 때의 일이다. 전두환 정권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전두환 정권은 모든 인권을 보장하고 있다. 어떤 형태의 인권 유린도 없다."

나는 그의 말을 반박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진행자인 테드 카플이 거기서 토론을 끝내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의 시청자들은 그 여당 간부가 한 말만 믿고 텔레비전 앞을 떠날 것이고, 결국 이제까지 내가 해온 말들은 허사가 되어 버립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미스터 카플!"을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간에 쫓기는 듯 나의 요청을 듣지 않고 프로를 마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미스터 카플!"

그러자 그는 간단히 하라고 주문하며 기회를 주었습니다. 물론 길게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나는 아주 간단히 말했습니다.

" 지금까지 한국 정부의 인권 유린에 관해 내가 한 말들은 나의 개인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국제사면위의 82년도 보고서에 있는 것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정부의 미국 국무성 82년도 인권 보고서에도 그대로 적혀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당신네 정부가 보증합니다."

집에 돌아오자 미국 전역에서 전화가 빗발쳤습니다. 모두들 축하를 하며, 영어로 하는 나의 토론 능력에 놀랐다는 의견을 피력해 왔습니다. 사실은 그날 밤에 미국 내에 있는 한국의 각 공관에서 교민들에게 나이트라인을 꼭 보라고 권유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영어도 잘 하지 못 하는 내가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는 두 사람에게 묵사발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로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전화를 건 사람들은 모두들 한결같이 "Wait! Wait!"하는 장면이 좋았다고 하면서 테드 카플을 그렇게 눌러 버리다니 놀랍다,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왔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실을 말하면서 마르코스에게서 배웠다고 하자 그들은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나와 가장 절친했던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을 살해한 독재자에게 배웠다니 웃음을 터뜨릴 만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친구들은 한결같이 어떻게 그렇게 영어로 말을 잘 하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하지만 나는 영어를 잘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어를 잘 한 것은 상대방이었습니다. 나의 발언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면, 그것은 내가 영어를 잘 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영어를 잘 한 상대방이었습니다. 나의 발언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면, 그것은 내가 영어를 잘 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진실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언제나 최고의 웅변입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한 가지 뒷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ABC 나이트라인 프로그램을 방영해 온 한국의 AFKN이 그날 프로그램만 방영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미 국방부의 성명이 "우방국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프로그램은 방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내가 실패했다면 그 프로그램은 그대로 방영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부 미국 하원의원들이 이에 항의하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는 이런 식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영어를 익혀 왔습니다. 나는 미국에 있는 2년여 동안 약 100회 정도의 강연을 미국 사람들 앞에서 했습니다. 영어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친근해졌습니다. 나의 인생이 그러한 것처럼 나의 영어도 이렇게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나의 영어는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80년대에 미국에 있을 때는 미리 작성한 연설문을 낭독하고, 답변은 통역과 내가 번갈아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미국에 갔을 때는 카터 대통령, 키신저 씨 등 많은 지도자들을 만났고, 미국인들 앞에서 연설을 약 10여 차례 했는데,이제는 연설문을 낭독하는 대신 연설문의 요지를 영문으로 만들어서 배부해 준 뒤, 내가 직접 말하고 또 질문에 답변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영어는 아직도 부족합니다. 특히 듣기에 약합니다. 나는 이것을 극복하려고 지금도 계속노력하고 있습니다. 지난 봄, 영국에 있을 때도 양복 윗주머니에 항상 얇은 라디오를 꽂아 두고 틈나는 대로 들었습니다. TV도 매일 2시간씩 시청을 했습니다. 듣기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노력을 계속하면 듣기의 문제도 극복할 날이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영어 공부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체계적으로 배우고, 끊임없이 연습하는 것만이 영어, 특히 회화를 극복하는 길입니다. 영어는 한국어 다음으로 중요합니다. 그것은 영어가 세계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계 속에서 당당하게 살아 나가려면 모두 영어를 배워야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반드시 이 일을 해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많은 불편과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크게 후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대학 공부도 못 했고, 또 50살이 다 되도록 전혀 영어를 할 줄 모르던 사람도 열심히 노력했더니 어느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고, 여러분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심을 내자면, 일어, 중국어, 독어, 불어 등 제 2외국어를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국제화 시대에 외국어는 가장 큰 재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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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철환 저 | 불광출판사 | 2014년 0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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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출간일 2014년 05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89쪽 | 280g | 200*141*20mm

ISBN13 9788974790615

ISBN10 8974790610

관련분류

카테고리 분류

  국내도서 > 종교 > 불교 > 불교 명상/수행

책소개

불교 길라잡이,

시공 불교사전의 저자 곽철환이 원고지 500매로 압축한 붓다의 가르침!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불교의 가르침이 방대함을 흔히 8만 4천 가지 경문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한국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인 고려대장경만 해도 그 양이 엄청나다. 거기에 남방에서 보존해온 초기경전과 다양한 논서까지 더하면 가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르친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어떤 경전을 보더라도 그 대의를 알기란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불교의 근본 가르침일까? 그 핵심이 무엇일까? 석가모니 부처님은 무엇을 가르치셨을까? 불교 관련 서적이 많지 않던 때에 가뭄에 단비와 같았던 불교 길라잡이(1995년)를 필두로 오랫동안 불서를 기획, 집필해온 저자 곽철환 선생이 평생 마음에 품어온 의문이 그것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일까?”

 책의 일부 내용을 미리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미리보기

목차

머리글



왜 고(苦)인가?

생각과 에고의 그림자

고에서 열반으로 가는 4제(諦)

고가 일어나고 소멸하는 열두 과정, 12연기(緣起)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해간다, 무상(無常)

에고와 경계가 소멸된 무아(無我)

온갖 분별이 끊어진 공(空)

열반으로 가는 세 가지 수행, 3학(學)

네 가지 알아차리기의 확립, 4염처(念處)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위팟사나(vipassan?)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소멸된 열반(涅槃)

선(禪)

중생을 위한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 자비희사(慈悲喜捨)

지금 이 순간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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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저 : 곽철환 관심작가 알림신청 작가 파일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를 졸업했다. 붓다의 가르침을 문자로 대중에게 소개한 지 20여 년, 지금은 북한산 자락에 터를 잡고서 책 읽고 글 쓰고 산에 오르며 생의 후반기를 다듬고 있다. 지은 책에 『불교 길라잡이』, 『시공 불교사전』, 『불교공부사전』, 『불교의 모든 것』,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한 권으로 읽는 불교 고전』이 있고, 옮긴 책에 『핵심 아함경』, 『금강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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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부족감’은 에고(ego)의 속성이어서 결코 만족을 모른다. 채우면 채울수록 모자라고 채우는 순간 결핍이 나타난다. 삶이 늘 갈등에 휘둘리는 이유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아무리 많이 가지고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그 생각은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끝없이 긴장하고, 불안하고, 계속 움직인다. 중생의 욕망이 끝없는 건 아무리 많이 가지더라도 그것으로 생존의 불안감과 괴로움이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이젠 됐다.’ 하고 느긋해진다 해도 그 다음에 더 큰 괴로움이 기다리고 있다.

- 왜 고인가?



중생의 마음은 ‘좋다/싫다’, ‘즐겁다/괴롭다’, ‘아름답다/추하다’ 등, 그 2분의 한쪽에 집착하고 다른 한쪽을 회피하며 마치 시계의 추처럼 끊임없이 왕복한다. 집착과 회피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그 왕복 운동의 진폭이 커져 더 큰 불안정에 휘둘린다. 집착한다고 해서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회피한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디에 집착한다거나 회피한다는 건 거기에 속박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늘 불안정하고, 얽매이고, 불안하다. 이러한 마음 상태가 곧 고(苦)이다.

따라서 일체행고(一切行苦)이다.

이게 바로 고타마 붓다가 간파한 근원적 통찰이다.

- 왜 고인가?



생각을 정리하려거나 줄이려면 생각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자신의 감정이 어떠한지를 관조(觀照)해서 그 감정의 2분법에 둔해져야 한다. 그러니까 어떤 현상을 대하더라도 너무 민감하게 분별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는 거다. 이게 단순하고 편하게 사는 길이다.

따라서 복잡한 불교 교리 따위는 필요 없다. 다만 부질없는 생각과 감정을 청소할 줄만 알면 된다.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은 생존의 유지와 안전에 지나치게 민감해서 일어나는 불안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되고, ‘몸-마음’에 집착하고 애착하면 할수록 그 생각과 감정이 자주 찾아온다.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의 내용은 대부분 저항이다. 저항이 곧 분노이고 스트레스다.

--- 생각과 에고의 그림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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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불교 길라잡이, 시공 불교사전의 저자 곽철환이

원고지 500매로 압축한 붓다의 가르침!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불교의 가르침이 방대함을 흔히 8만 4천 가지 경문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한국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인 고려대장경만 해도 그 양이 엄청나다. 거기에 남방에서 보존해온 초기경전과 다양한 논서까지 더하면 가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르친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어떤 경전을 보더라도 그 대의를 알기란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불교의 근본 가르침일까? 그 핵심이 무엇일까? 석가모니 부처님은 무엇을 가르치셨을까?

불교 관련 서적이 많지 않던 때에 가뭄에 단비와 같았던 불교 길라잡이(1995년)를 필두로 오랫동안 불서를 기획, 집필해온 저자 곽철환 선생이 평생 마음에 품어온 의문이 그것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일까?”



한 구절 한 구절을 모아 단락을 만들고, 단락과 단락을 모아 한 편의 글이 되기까지 쓰고 읽고 다시 쓰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당신이 배우고 익히며 실천해온 부처님 가르침의 고갱이를 정리했다. 그렇게 원고지 500매로 압축되어 나온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해 저자가 세상에 내놓은 답변이다. 저자는 말한다. 불교는 자연과학처럼 바깥 대상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는 내관(內觀)으로, 고(苦)에서 열반(涅槃)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가르치고 있다. 마음에서 떠오르는 지각, 생각, 영상(映像, image), 감정 등이 어떻게 고(苦)를 일으키는지를 통찰하여 평온한 열반(涅槃)을 얻는 길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불교이다.



우리는 바깥 대상을 지각할 때,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지 않고 온갖 생각과 감정, 선입관 등으로 덕지덕지 채색하여 지각한다. 우리의 마음은 ‘지금 여기’에 머물지 않고 지나간 과거나 오지 않은 미래의 일로 갖가지 상상을 떠올려 얽매이고 집착한다. 에고(ego)를 바탕으로 한 우리의 마음은 ‘나 / 나 아닌 것’으로 갈라지고, 생존에 ‘유리하다 / 불리하다’로 갈라지고, ‘기분 좋다 / 기분 나쁘다’로 갈라지면서 둘로 나뉜 온갖 생각과 감정이 잇달아 일어나 그 양쪽을 끊임없이 오락가락하므로 온갖 불안과 갈등과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



불교는 무엇을 ‘아는’ 공부가 아니라 무엇이 ‘되는’ 공부

부질없는 마음의 소음을 버리고 청소하면 될 뿐!



우리가 궁극에 도달해야 하는 열반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소멸된 상태이다. 중생의 탐욕이 끝없는 건, 에고의 속성이 ‘부족감’이어서 결코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분노는 ‘저항’이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서 일어나는 저항이고, 오고 가는 인연을 거스르는 저항이고, 허망한 에고에 상처를 받아서 치솟는 저항이다. 어리석음은 자신이 얼마나 탐욕스럽고 매사에 얼마나 잘 분노하는지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열반으로 가는 길에 복잡한 교리 따위는 필요 없다. 에고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면,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은 자연히 사라진다.



그러나 조금만 방심하면 우리의 마음에는 온갖 헛된 생각과 불안이 엄습해온다. 모두 에고에 대한 집착이 불러일으키는 망상일 뿐이다. 이미 알고 있지만, 마음은 결코 내 뜻대로 쉬이 평안해지지 않는다. 끊임없는 마음의 재잘거림은 불교에 대해 많이 안다고 해서 잦아드는 게 아니다. ‘앎’이 곧 ‘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앎’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다만, 마음 가득한 부질없는 생각과 감정을 청소할 줄 알면 될 뿐이다.



‘이 책은 어떻게 마음을 청소할 것인가에 대한 글’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불교를 배우는 목적은 단지 이런저런 지식을 쌓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함이라는 뜻이다. 마음의 작용을 파헤치는 복잡한 교리에 몰두하기보다 고(苦)의 원인을 바로 살펴서 고(苦)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고 실천하여 안심(安心)을 자주 누리며 살기를 바라는 기원을 담아 저자는 이 책을 썼다. ‘에고(ego)’가 어떻게 고통을 일으키는지, 먼저 고(苦)의 정체를 바로 알면 고에서 벗어나는 길도 보이는 법이다. 불교는 결코 삶에서 유리된 것이 아니다. 고통을 인내하며 살아야 하는 사바세계의 뭇 존재에게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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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곽철환, 불광출판사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life7joy | 2014-07-08

원문주소 : http://blog.yes24.com/document/7736978



어설픈 나의 지식으로, 불교는 어떤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수행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방대한 불교의 경문을 다 볼 수는 없지만, 이 책을 통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제대로 배워, 부질없는 마음과 감정을 청소하고 싶었다.







저자 곽철한은 “불교는 고(苦)에서 시작해서 열반(涅槃, nirvana)으로 마친다”(p. 6)고 말한다. 나/나 아닌 것, 좋다/싫다, 등과 같이 이분법적 생각과 마음의 상태가 고(苦)이고, 따라서 일체행고(一切行苦)인 것이다. 따라서 부질없는 생각과 감정을 청소할 줄 알면 열반(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에 이른다. 수행의 시작은 순간순간 일어나는 생각이나 감정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잠시 멈추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수행법은 사마타(samatha, 고요함)와 위팟사나(vipassana, 꿰뚫어보는 통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나뉜다. 결국 이 두 수행법은 모두 사티(sati,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여 지켜보는 것)를 바탕으로 한다. 결국, 마음 수행이 부처의 길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쉬운 말로 마음 수행을 설명한다. “불교는 손을 움켜쥠이 아니라 폄이다. … 불교는 패션쇼가 아니라 스트립쇼이고, 덧셈이아니라 뺄셈이고, 상승이 아니라 하강이고,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의 회귀이다.”(p. 60).







불교 용어를 전혀 모르는 독자에게 이 책은 불교 용어를 차근차근 설명한다. 고에서 열반으로 가는 4제(고제, 집제, 멸제, 도제), 고가 일어나고 소멸되는 열두 과정인 12연기(緣起), 열반으로 가는 세 가지 수행인 3학(學), 네 가지 알아차리기의 확립인 4염처(念處),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통한 7각지(覺支,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 등등. 저자는 불교적 용어를 아주 쉽게 설명하는 재주가 있다. 책 제목처럼, ‘불교의 핵심’을 명쾌하게 설명했다.







불교의 용어들을 이해하고 정리하면서, 내 마음에 드는 의문은 스님들처럼 출가(出家)하지 않고 일상의 삶을 살면서 이런 마음수행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것에 관해, 부처는 이미 네 가지 마음, ‘자비희사(慈悲喜捨)를 설파했다.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慈), 모든 존재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悲), 남이 즐거우면 함께 기뻐하는 마음(喜), 남을 평등하게 대하려는 마음(捨)을 닦는 것이다. 이를 위해 들숨과 날숨을 의식하며,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지금 만나는 사람과 지금 하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 불교에서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온갖 감정을 떠나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과 감정도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듯하다. 불교의 가르침은 지금 현재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순간 일어나는 일이나 만나는 사람, 혹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참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불교식 마음수행은 불교의 핵심을 이해했다고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비희사‘(慈悲喜捨)의 마음은 가지려고 노력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불자(佛子)는 아니지만, 마음공부에 관해서만큼은 불교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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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 라리루

내용 평점1점   편집/디자인 평점1점 |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lalilu | 2014-07-08

원문주소 : http://blog.yes24.com/document/7735752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 라리루











대한민국의 3대 종교를 언급하면 기독교, 천주교, 불교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바로 명상과 수행이다. 명상을 통해서는 우리 안에 부정적인 마음들을 흘러가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어느 한 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비어있는 상태로 끊임없이 명상하는 것과 수행을 통해서도 잡념을 제거하고 무념무상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가 21세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유독 인기를 끌었던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욕심을 버리고 있는 것에 자족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스트레스가 많고 과잉 경쟁으로 심신이 지친 이들로부터 힐링을 얻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한다.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는 어떤 시벌을 함으로 몸과 마음이 무거운 짐에 눌려있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강박적인 정신적인 고통이 겹겹이 쌓여있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내면의 자아와 서로 무엇이 진정으로 참된 것이고 바른 것인지 찾고 구하는 것이 불교의 또 다른 매력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불교는 우리 안에 욕심과 분노 그리고 어리석음을 흘려보냄으로 때로는 태워버림으로 열반으로 나아가는 길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한다. 그래서 깨달음의 종교요 삶의 종교인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해탈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중요한 불교의 가르침 또한 없을 것이다. 무엇을 원할수록 우리의 마음의 번민은 점점 더 커져간다. 그러므로 원함이 없이 이루어진 것에 족할 수 있다면 그것이 해탈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우리가 사는 수많은 만남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에 족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불교의 가르침은 읽으면 읽을수록 가능성이 커져가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것이 점점 더 확실해 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큰 명상과 수행을 통해서 과정 해탈을 이룰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개인의 경험이고 판단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우리 내부에 있기 보다는 외부에 있다는 것이 이 책을 읽은 소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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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YES마니아 : 로얄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뜨거운커피우유 | 2014-07-01

원문주소 : http://blog.yes24.com/document/7728858



    절에 다니신 분들도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간혹 있다.



따로 공부를 하지않으면 불교에 대해 알 수 없는 것이다.

불교신자인 나역시 불교에 입문한지는 한참되었으나 본격적으로 불교에 대해 공부한지는 불과 몇 년이다.

알수록 어렵다고 느껴지는 면도 있고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불교인 것도 같다.

불교의 교리 기초 수업도 듣고 불교 tv를 보고 법문도 자주 듣지만 불교를 체계적으로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동국역경원에서 10년동안 일하셨다는 경력 때문인지 잘 정리되어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간결하고 핵심적인 내용만을 뽑아서 저자의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는 점이 나에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단순히 핵심전달에 그치지 않고 불교의 이해를 넘어서 행동 추구,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태워버리는 수행으로 열반으로 나아가는 길을 알려준 것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불교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해탈이 아니겠는가.

'생각과 에고의 그림자'에서 생각은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불안 걱정 두려움 등의 덧씌워서 더욱 복잡한 생각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우리의 모습을 콕 짚어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실 이걸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굳이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이 책을 유심히 읽어봤으면 싶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생각은 파도와 같아서 시도 때도 없이 오고 가기 때문에 생각이 떠오르면 그냥 사라지게 내버려두고 '바로 여기'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게 생각을 돌보는 수행이다.과거와 미래에 집착해서 '지금 이 순간'을 놓치기 때문에 생각에서 생각으로 이어진다. (p.17)

생각이 요동치는 순간에 제대로 알아차릴 수만 있어도 한 순간에 마음을 돌릴 수만 있어도 큰 일인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그 생각 속에 빠져들지 않는가.

저자는 복잡한 불교교리를 잘 아는 것보다 부질없는 생각과 감정을 청소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임을 말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 특히 공감이 간다. 우선 나부터도 실천은 잘 안되는 일이지만 내마음 잘 단속하는 일을 수행삼아 해 나감은 어떨까.

깨닫고자 하면 점점 멀어지고

편안하려 하면 더욱 불안해지니

편안을 잊어야 편안하고

깨달음을 잊어야 깨닫게 되나니

이 도리는 원래 복잡하지 않네.

-원감국사가송

이 책에 인용되어 있는 이 글이 특히 내마음에 와 닿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의 삶이 무언가를 너무도 추구하고 갈망하고

갖지 못하면 힘들어하기 때문인 것 같다. 마음을 놓아버린 삶의 모습

위 시는 그런 느낌이어서 너무 많은 욕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건 아닌가 반성해보게 된다.

내가 더욱 놀란 것은 괴로움의 발생은 부정적 생각이 아니라 그 생각에 대한 '집착' 이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놓치고 있던 이야기들을 저자는 콕콕 짚어준다.

사실 이 책은 학문적인 부분을 넘어서서 전체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며 그리 길지 않은 분량에 압축시킨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어서 생에 대한 많은 의문들과 어떻게 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불교신자 뿐 아니라 정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무엇을 추구해야할지 마음공부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봤으면 좋겠고 요즘들어 이렇게 불교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깊이있게 다룬 책은 처음이란 생각에 이 책을 읽은 내가 괜히 뿌듯했다.

책의 내용을 단박에 이해한 사람은 평소에 이런 문제를 많이 고민하거나 불교를 깊이있게 공부한 사람일테고

이 책은 난이도가 있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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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불교의 죽음관

티베트불교의 죽음관



티베트불교의 죽음관

 2018. 1. 10

초암의 건강세월

초암은 아호이며 나뭇꾼이 사는 작은 초가집이라는

뜻입니다

10/16/2020 티베트불교의 죽음관

blog.daum.net/074098/11966 2/29



티베트불교의 죽음관



티베트의 밀교승들은 죽음의 세계까지도 분석하였다. 그것은 이집트 사람을 제외하면 유일한 본격적인 분석이었다.

인간이란 살아가며 죽어가고, 죽어가며 살아가는 이중적 존재이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 존재로만 본다면 우리는 자칫 쾌락주의에 빠지기 쉬울 것이며, 죽어가는 존재로만 본다면 우리는 염세주의로 빠지기 쉬울 것이다. 쾌락주의도 염세주의도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손등과 손바닥을 함께 볼 때 손의 본질을 보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삶과 죽음을 함께 생각하고 볼 때 우리의 인생의 본질을 알게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엠페도클레스가 시실리섬 시민들의 생활을 비판한,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내일 죽을 것처럼 사치스럽게 생활하고 있다. 또한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집을 짓고 있다.”라는 것에 우리는 귀기울여야 한다. 우리 주위에 넘치는 저 사치 풍조는 우리가 어떻게 잘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만 집착했기에 전개되는 문제가 아닌가.



티베트밀교는 우리에게 “죽음을 배워라. 그러면 삶까지도 배우게 될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티베트밀교에 의한 죽음의 세계를 탐구한 《사자(死者)의 서(書)(Book of Dead)》29)는 수천 년 동안 티베트에 비밀로 전해오다가 서양의 학계에 소개되어 커다란 충격을 주었는데, 그 충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29) 티베트의 《사자의 서》는 불교적 시간관에 기초를 둔 것이지만, 사람이 죽은 후 49일 동안의 의례(儀禮)를 통하여 처음에는 사자(死者)가 생(生)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열반에 들도록 도와주고, 후에는 좋은 곳에 태어나도록 돕는 책이다. 파드마삼바바가 지었으며, 1927년 에반스 웬즈에 의하여 옥스포드대학 출판부에서 출판되어 서구에 큰 충격을 주었다. 국내에서는 두 가지 번역본이 있다.백봉호 <티베트 사자의 서>경서원 1984. 류시화<티베트 사자

의 서>정신세계사 《티베트 사자의 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중음천도밀법〉은 일천 수백 년 동안 전해져 온 진언밀교의 성전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임종, 그리고 재탄생까지 49일간의 모습이 선명한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다.



영혼이 육체의 모습을 가지고 태어나고, 영혼이 육체의 모습을 갖지 않은 상태인 죽음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닌 하나의 것이고 다만 영혼의 무한한 여행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갓난아기가 이 세상에 눈을 떠서 이 세계를 배우지 않으면 안되듯 죽은 자는 사후세계에 눈을 떠서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W·Y·웬즈 박사는 다음과 같이 격찬하고 있다.



참다운 과학적, 요가적 방법에 의한 인간이라고 하는 그 알지 못할 존재에 대한 탐구야말로, 지구 밖의 세계를 탐험한다고 자랑스러워하는 그런 차원과는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중요한 것이라 하겠다. 인간의 육체가 달 또는 금성 그리고 그 어떤 천체 위에 서 본 다는 것은 아마 인간의 지식에 보탬이야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수롭지 못한 지식을 좀더 걷는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궁극적 목표는 이 책에서의 현인(guru)의 가르침처럼 사물을 넘어선 초월, 바로 그것이다.



《티베트 사자의 서》에는 인간이 사후 다른 생을 얻기까지 49일 동안 흔히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상징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요한 부분을 현대적 언어로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너희 인간들에게 가르친다. 모든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임종 때, 호흡이 끊어지면 영혼은 육체의 중추에서 떠나가는 것이다.



육체로부터 떠나간 영혼은 처음에 희미한 어둠 속에 떠 있는 것 같이 생각한다. 그러나 대개는 곧 밝고 맑은 빛을 느끼게 된다. 이로 인하여 영혼은 아픔으로부터 해방된 매우 평온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 굉장한 소리가 들린다.

많은 영혼은 그것을 겁낼 것이다. 즉, 영혼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육체는 죽었지만 새로운 몸이 생겼다고 많은 영혼은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몸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투명하게 무게가 없으며 공중에 떠서 날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 중에는 육체의 죽음을 알고 절망하거나, 혹은 육체가 죽은 것을 잘 모르고 죽은 곳에서 헤매고 있는 영혼도 있다.

그러나 많은 영혼은 빛 속을 더욱 날아가서 전에 죽은 육친과 친구들의 영혼을 만나는 것이다. 그들은 말없이 의사를 소통하는 것이다.



그 후 영혼은 이상한 거울도 보게 될 것이다. 이 거울에는 생전에 그 사람이 행한 행위와 생각의 모든 것이 비쳐진다. 좋은 행위와 좋은 생각이 비쳐질 때 영혼은 편안해진다. 그러나 나쁜 행위와 나쁜 생각이 비쳐질 때 영혼은 고통을 받을 것이다.

이 시련을 불에 데는 것처럼 느끼는 영혼도 있다. 견딜 수 없는 목마름과 무서운 한랭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또한 더욱 밝은 빛 속으로 날아가는 영혼도 있다.



이 여행은 길다. 혹은 짧다. 도중에 암흑과 빛이 번갈아 나타난다. 그리고 조만간 많은 영혼이 무한한 하늘을 빠져나가 마지막 어두운 길에 들어가게 된다. 그 길은 좁고, 괴롭고, 길고, 혹은 짧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둡고 좁은 그 길의 저 쪽에 다시금 빛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영혼의 세계의 빛이 아니라 다시금 이 세상의 빛이다. 많은 영혼은 이렇게 하여 다시금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나 전에 살고 있었던 것과 같은 곳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많은 영혼이 아주 다른곳에 닿는다. 그리고 다시금 어둡거나 혹은 밝고, 길거나 혹은 짧은 육체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에 표현된 밝음·어둠·길·거울·번갯불 등은 모두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데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한 생을마치고 다음 생을 받기 위하여 생전에 자기 자신이 지은 업(業, Karma), 즉 카르마의 환각을 체험하며 49일간의 중음계를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49일간의 하루하루는 자기 자신의 의식구조 속에 고여 있던 이 세상에서의 업이 가시적 환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인에게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살아서 이웃에게 베풀고 착하게 산 사람은 역시 죽어서도 고통을 당하지 않고, 악하게 산

사람은 그 업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 자기심판의 세계가 전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자의 서》에 있어서는 궁극적인 목적은 중음계를 여행하는 사자에게 일어나는 현상들이 모두 환각임을 자각시키는 일이다. 더불어 그 어느 환각에도 휩쓸리지 않는 생명의 비밀을 깨달아서 지혜를 얻자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서구에서는 인간의 초심리 현상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 그러한 작업의 결과로 나온 보고서를 보면 《사자의 서》와 통하는 부분이 많은 것이다. 이 점이 서구인들을 경탄케 하고 있다.



아래와 같은 구절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풍요 속에서 살면서도 빈곤을 느끼는 현대인에게 어머니의 자장가와 같은 것이 될 것이 다.

다시 태어날 자여, 연속되는 환각으로 하여 슬픔과 기쁨의 소용돌이에서 너는 길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감정에도 물들게 하지 말자. 네가 보다 높은 세계에 태어날 운명이라면 그 세계의 ‘비전’이 네 앞에 나타날 것이다.



다시 태어날 자여, 네가 이 세상에 남기고 온 재물들과 소지품들이 타인의 손에 넘어감을 보고 너는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분노는 너를 어둠과 괴로움의 세계로 끌고 갈 뿐이다. 설령 너에게 속계의 재물을 준다 해도 너는 가질 수 없다. 집착을 버려라.

……

결론적으로 여러 불교의 죽음관을 검토해 본 결과 정확하게 판결된 뇌사상태는 죽음으로 보아야만 한다. 이런 뜻에서 불교의 죽음관은 뇌사를 죽음으로 봄으로써 장기이식의 길을 열게 될 것이다. 불교에서의 죽음은 뇌사를 인정하는 데도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뇌가 죽은 상태가 되었을 때, 우리 존재는 이생을 위해서도 다음 생을 위해서도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게 된다. 인위적으로 호흡을 시키면서 심장의 박동을 작동시킨다 해도 그것은 아무 쓸모없는 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그 육체’와 ‘우리’는 이제 더이상 관계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뇌가 더 이상 기능을 할 수 없을 때 우리들의 식을 발생시키는 기관의 기능은 마비되어 버리고, 식이 발생할 수 없게 되면 행, 즉 의지작용도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의지작용이 발생되지 않으면 업은 만들어지지 않게 된다. 업이 만들어지지 않게 될 때 우리는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경전의 표현대로 ‘무덤에 버려진 나무토막’과 같은 것이다. 의지작용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을 때는 이미 만들어 놓은 자신의 업에도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없지만, 미래의 생존을 위한 여하한 업도 더 이상 만들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장기가 누구에게 주어 져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에게는 공덕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의식이 있었을 때 자의에 의해서 사후에 자신의 장기를 다른 사람에게 기증하겠다는 마음을 내었을 경우여야만이 선업이 만들어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뇌사가 된 상태의 우리의 장기를 누가 잘라 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음 생의 우리의 운명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된다.



사자의서와 불교에서의죽음



죽음은 우주적 소멸의 과정을 구성하는데, 이는 육신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주적 원소들이 점진적으로 서로에게 녹아든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원소인 흙은 원소인 물에 ‘흘러’ 들어가고, 물은 불에 흘러들어가는 식으로, 한 우주적 원소의 각 융합은 명백히 새로운 퇴행이며, 이 과정의 끝에서 살아있는 사람을 형성하고 있던 우주는 소멸한다―마치 대순환

(mahā-yuga)의 끝에 우주가 소멸하듯이, 각 퇴행은 죽어가는 사람에 의해 생리적으로 느껴진다. 예를 들어 원소인 흙이 원소인 물에 녹아들면, 육체는 그 지주(문자 그대로는 그의 ‘받침목’), 즉 그 결집력을 잃는다. 그는 마치 꼭두각시처럼 해체된다.



소멸의 과정이 완결되면, 죽어가는 자는 달빛과 같은 빛을 인지하게 되고, 이어서 햇빛과 같은 빛을 본 뒤 어둠 속으로 빠져든다.



이것이 자신의 고유 자아와의 만남으로, 이는 범인도적인 교의에 따라, 궁극적인 실재이며 절대존재이다.『티베트 사자의 서』(중음천도밀법, 中陰遷度密法)는 이 빛을 ‘순수한 진리’라 명명하고, “섬세하고 찬란하고 빛나며, 눈부시고 영광스러우며, 휘황함속에 공포심을 주는” 것으로 묘사한다. 책은 망자에게 명한다. “주눅 들거나 두려워 마라. 이는 그대 참된 본성의 광휘이니 이를 올바로 인식하라!” 순간 이 빛의 중심으로부터 수천 개의 천둥소리를 합친 듯한 굉음이 울려나온다. “이는 그대의 실재 자아의 본성의 소리다”라고 책은 명시한다. “두려워하지 마라!…그대는 이미 혈육으로 된 육신을 갖고 있지 않다. 어떠한 소리나 빛이나 광선도 그대에게 해를 입힐 수 없나니, 그대는 죽을 수 없다. 이 환각들이 그대 자신의 사고형태라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되느니라. 이모든 것이 중음(中陰, bardo)임을 인식하라.”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들이 그러하듯이, 망자는 이 충고를 실천하지 못한다. 업력(業力)에 묶인 그는 중음의 특징적인 발현들의 순환과정 속에 힘없이 이끌려든다.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 망자는 여러 광선과 신을 보리라는 통지를 받는다. “하늘은 온통 짙은 푸른색으로 보일 것이오.” 망자는 흰색의 비로자나(Bhagavān Vairocana)를 보게 되고 곧 그 중심으로부터 법계의 지혜(법계체 성지, 法界體性智)가 나타나는데, 이 역시 흰색이며, 빛나고 투명하며 폭발적인, 너무나 강렬하여 마주 볼 수 없는 빛이다. “동시에, 신들에게서 나오는 우중충한 백색광이 그대의 이마를 때릴 것이오.” 악업의 힘으로 인해 망자는 찬란한 법계의 빛을 두려워하고 우중충한 신들의 백색광에 애착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책은, 망자가 신들의 광선에 집착하여 결국 윤회육도(輪廻六道)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말고 생각을 비로자나불에 몰두하라고 격려한다. 이리하여 망자는 마침내―무지갯빛 후광(halo) 속에서―비로자나의 품속으로 녹아들고, 삼보가카야(Sambhoga-kāva, 報身)의 중심에서 부처의 상태를 얻는다.



망자는 이후로도 엿새 동안―해탈과 부처의 본질로의 동화를 의미하는―순수한 빛들과, 어떤 형태로든 내생(來生), 즉 지상으로 의 귀환을 상징하는 불순한 빛들 사이에서 선택의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그는 청백색 빛들 다음으로 노란빛, 붉은빛, 초록빛을 보게 되고, 마지막으로 모든 빛을 함께 보게 된다.



이 극히 중요한 책을 그에 걸맞게 논평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연구에 직접 관련된 몇 가지 고찰로 한정할 수밖에 없다. 방금 전에 보았듯이 모든 인간은 죽음의 순간에 해탈에 이를 수 있는 기회를 맞는다. 해탈을 위해서는 그가 이 순간에 체험하는 청정한 빛 속에서 자신을 알아보기만 하면 된다. 인도의 모든 사상에서―모든 사람이 그 행위의 과실을 수확하리라는―업이 지닌 중요성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이는 언뜻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무명 속에 사는 인간의 행위들은 업을 이루는데, 이를 죽음의 순간에 소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일은 업의 법칙에 따라 진행된다. 무지한 혼은 순수한 빛의 부름을 외면하고, 하등한 존재양식을 뜻하는 오염된 빛에 이끌리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전에 요가를 수행한 사람들은 청정한 빛 속에서 자신을 인식할 수 있으며, 따라서 부처의 본질로 녹아든다.



그러므로 죽음의 순간에 대면하는 빛은 여러 우파니샤드에서 아트만과 동일시되는 바로 그 내면의 빛이다. 생전에 이 빛에 접근하는 것은, 요가 수련이나 영지에 의해 정신적으로 준비된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 자세히 살펴보면 죽음의 순간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빛은 모두에게 드러나지만, 입문자들만이 이를 수락하고 받아들인다. 사실 이 『사자의 서』는 임종 시와 그 후의 며칠 동안 라마승이 망자에게 읽어주는 책으로, 이 높은 목소리의 낭송은 마지막 호소가 된다. 그러나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망자 자신이다. 바로 그가 청정한 빛을 선택할 의지와 내생의 유혹에 저항할 힘을 지녀야 한다. 다시 말해서, 죽음은 새로운 입문의 기회를 주미만, 이 입문 역시 다른입문들과 마찬가지로 대결하고 극복해야 할 일련의 시련을 포함하고 있다. 사후의 빛의 경험은 최후의, 그리고 아마도 가장 어려운 입문적인 시련일 것이다.


〈74〉번뇌에는 ‘애착’과 ‘성냄’두 종류 있다 - 불교신문

〈74〉번뇌에는 ‘애착’과 ‘성냄’두 종류 있다 - 불교신문




〈74〉번뇌에는 ‘애착’과 ‘성냄’두 종류 있다

이미령
승인 2013.08.13 15:54

인욕바라밀①-나를 찾아오는 두 사람


信者 공양은 대중 인기보다 무서워

인기와 칭송도 비난만큼 잘 견뎌야

강의를 마치면 수강생들이 박수를 쳐줍니다. 재미있게 잘 들었다, 유익했다, 덕분에 고민거리가 좀 줄어드는 것 같다… 이런 칭찬도 이따금 받습니다. 그런데, 백 사람의 청중이 내게 박수를 보내면 마음이 하늘로 훨훨 날아오르다가 강의실 저 끝 어딘가에서 “흥, 뭐 별로…. 들을 것도 없네”라는 작은 소리에 기분이 착 가라앉고 맙니다.

백 명의 칭찬도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고 단 한 사람의 비난이 몇 날 며칠 나를 지배합니다. 온 세상이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아서 견디기가 힘듭니다.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백 명의 칭찬은 당연히 제 것인 양 받아들이면서도 단 한 사람의 비난에는 마음이 바늘귀보다도 더 좁아지니 말입니다. 이런 나 같은 사람 때문에 <대지도론>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두 종류의 사람이 찾아온다. 첫째는 나를 칭찬하고 좋아하고 존경하고 공양하려고 찾아오는 사람, 둘째는 나를 비난하고 꾸짖고 화내고 욕하고 심지어 때리려고 찾아오는 사람이다.”

<대지도론> 제14권의 이 말보다 더 정확하게 우리 살아가는 세상의 인간관계를 규정한 게 또 있을까 싶습니다. 물론 세상일이란 게 꼭 내 좋은 방향으로만 흘러가란 법은 없지요. 그건 압니다. 문제는 일희일비, 즉 한 번 기쁘면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기분 나쁘고 울화통 터지는 일이 꼭 한 번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좋은 일이 생겨도 맘껏 행복해하되 그 행복에 도취되어 너무 휘둘리지도 말아야 할 것이요, 분한 일이 생겨도 ‘이 또한 흘러가겠지. 좋은 일도 금방 끝났잖아’ 하면서 눈 질끈 감고 버텨볼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이 비난이나 매도, 욕설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인기와 칭송도 너끈하게 견뎌야 합니다. 세상이란 건 양면의 날과도 같아서 채찍과 당근은 항상 한 조를 이루어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인기와 칭찬만 덥석 품고, 비난과 욕설을 외면할 수 없는 게 세상입니다.

특히 대중들의 인기로 살아가는 연예인은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대중은 연예인을 보통 사람이 아닌 저 하늘의 별처럼 아득히 먼 존재로 여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연예인을 ‘스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대중들의 인기가 높아질 수록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는 비방도 동시에 커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연예인뿐만이 아닙니다. 재가자의 존경과 공양으로 살아가는 출가자에게도 이 말은 매우 유효합니다. 특히 수행자에게 신자의 공양은 연예인에게 쏟아지는 대중의 인기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고 <대지도론>에서는 말합니다. <대지도론>제14권에서는 번뇌에 두 종류로서, ‘애착에 속하는 번뇌’와 ‘성냄에 속하는 번뇌’를 말합니다. 이 가운데 앞의 것 즉 공경과 공양은 화를 일으키지는 않지만 마음이 애착하게 하니 이것을 일러 부드러운 도둑(軟賊)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공경과 공양까지도 잘 참아서 집착하거나 애착하지 말아야 한다고 일러줍니다.

이 부드러운 도둑에게 덜컥 멱살을 잡힌 사람이 바로 데바닷타입니다. 그는 수행을 통해 자신을 계속 연마하지 않고, 어중간한 경지를 권력가에게 내보이고 자랑하여 왕자의 공양물을 탐하고 자기 세력을 규합하려고 한 사람입니다. 결국 그토록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자타삿투 왕자에게 배척당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승가공동체에서 자기 추종자를 거느리고 나왔다가 실패로 돌아갔으며, 끝내는 수행을 충실하게 해낸 아라한과 붓다에게 해를 입히려는 마음까지 먹은 인물입니다. 물론 데바닷타의 행적에 관해 학계의 반론도 있지만, <대지도론>에서는 전통적인 입장에서 데바닷타를 사람들의 인기와 존경에 눈이 멀어 자신을 해친 인물, 그러니까 인기와 존경, 공양을 견디는 데 실패한 대표적 사례로 들고 있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불교신문2936호/2013년8월14일자]

불교

불교









불교 (1) 불교란 무엇인가







무신론 바탕한 불교 이념은 '참 자아' 찾는 것

샤머니즘·무속 결합되며 변질, 귀신세력에 미혹 돼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우리 나라에 처음 들어온 이후 우리의 삶과 문화와 정서 속에 깊이 뿌리내린 '종교'라 할 수 있다. 지금도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나 생활 양식 속에는 불교 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것들이 많다. 흔히들 어떤 안 좋은 일을 당하면, "아이구 내 팔자야 전생에 무슨 죄가 그리도 많았는고"라고 한탄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전생'이나 '업보'에 대한 불교 사상이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잘 알려진 것처럼 죽은 사람의 영혼이 다시 다른 육체로 전화하여 환생하게 된다는 생각은 불교의 영향을 반영해준다. 또한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하였으면 그 공적으로 환생해서 복을 받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화를 당하게 된다는 생각 역시 불교에서 유래한다.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른 후 지내는 삼우제나 49제 역시 불교에서 온 풍습으로 기독교인들도 그대로 따를 정도로 토착화되어 있다.



무엇보다 문제는 불교가 전통의 샤머니즘과 결탁하여 생활 깊숙이 침투하면서 사람들을 귀신의 세력에 잡히도록 미혹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절에서 승려들이 무당들처럼 굿을 하고 점을 치며, 또 달마대사나 용의 형상을 그린 부적을 파는 일을 보게 된다.



사실 절에서 승려들이 굿을 하는 풍습은 고려 왕조의 숭불 정책 속에서 타락해버린 불교가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배척을 당할 때 생활에 곤경을 느낀 승려들이 호구지책과 위정자들에게 바칠 뇌물을 마련하기 위한 돈벌이 수단으로 당시 무당들이 하던 굿을 흉내 내어 징과 장구와 꽹과리를 치면서 춤을 춘 것에서 기원한다. 중들이 추고 있는 바라춤이란 바로 무당의 춤인 것이다.



요즘에는 기독교의 의식을 모방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래서 절에서도 찬불가를 부르고, 하기불교학교를 개최하며, 수요법회, 금요 철야법회, 조찬기도회 등을 열기도 함으로써 매우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원래 석가모니가 의도했던 것은 지금과 같은 종교의 형태가 아니라 일종의 철학이요 의식 자각 운동이었다. 그것이 역사적인 실천의 과정 속에서 종교로 변질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불교 자체에 수양의 방편으로서 종교적인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불교란, 그 본래의 이념을 가지고 말하면, 지혜를 얻어 헛된 망상을 떨쳐버리고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참 자아를 찾자는 운동이다. 불상을 세워 그 앞에 절하면서 복을 빌고 화를 면하자는 운동이 결코 아니다. 절에 가서 시주 돈을 바치고 불상 앞에서 지극 정성으로 절하면, 사업이 번창하고 못 낳는 아이도 낳게 되며,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는 식의 그런 기복적인 미신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식의 부질없는 탐욕과 애착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니, 그렇게만 보면 불교 역시 유교와 함께 일종의 고차적인 윤리 운동으로서의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세상살이에서 탐욕에 찌들어 살다가 어쩌다 절에 가서 종교 행사를 치르는 것으로 불교도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석가모니가 보아도 민망한 일이다.



석가모니 스스로도 죽으면서 그의 제자 아난에게 "더 이상 나를 의지하지 말고 너희 스스로의 마음을 스승으로 삼아 내가 가르쳐준 법과 계율에 의지하여 깨달음에 이르도록" 당부했지 자신을 우상화하여 신으로 경배하고 복을 빌라고 말한 적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본래 '부처'라는 말도 인도 고어인 싼스크리트어로 '붓다'(Buddha)를 한문으로 음역한 '불타'(佛陀)를 다시 한글로 표기한 것인데, 이는 "깨달은 자", "눈을 뜬 자"를 의미하는 일반 명칭이다. 누구나 마음을 닦아 깨달음에 이르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 부처가 인간을 심판하고 구원하는 신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불교는 절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의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인간은 결코 신에게 예속된 존재가 아니며, 인생의 모든 문제는 인간 스스로가 깨달아서 해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철저한 인본주의적인 성향을 띤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점차로 추종자들에 의해 신으로 추앙되면서 부처는 화를 면케 해주고 복을 부어주는 우상 존재가 된 것이다. 인류의 사상사나 문화사를 볼 때, 시작 단계에서 아무리 고차적인 윤리 운동이나 문화 운동이라 해도 결국 저급한 미신 종교로 변질되고 마는 것이 역사적인 필연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사탄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고차적인 윤리나 문화 운동을 통해 인간 스스로가 죄와 죽음과 고통의 인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거짓된 신념에 빠지는 일 자체가 이미 사탄의 역사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어쨌든 우리는 원래 석가모니에 의해 주창된 이념으로서의 불교와 역사적인 실천 속에 나타난 불교를 동시에 보면서 불교를 평가할 필요가 있다.



불교 철학은 기본적으로 고대 인도의 힌두교의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을 그 근저에 깔고 있다. 범(梵)은 우주의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근원인 '브라만'(Brahman)을 한문으로 음역한 것이다. 브라만은 세계의 근원이요 변화지 않으면서 참되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져서 아는 세계는 마치 다양한 이름과 특성을 지닌 개체들로 이루어진 세계로 보이는데, 그러나 실상은 브라만 외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我)는 '나'라는 주관적인 존재의 궁극적 실재를 뜻하는 '아트만'(Atman)을 음역한 것이다. 아트만은 인간 속에 내재하는 브라만으로서 그런 점에서 각 개인들은 참 '나'가 아니다. 참된 '나'인 아트만은 너와 나의 차별이 없으며, 모두에게 평등하며 하나인 그런 주체라 할 수 있다. 이를 학자들은 영어로 "the universal self"라고 부른다.



"범아일여"는 "브라만이 곧 아트만"이라는 뜻으로, '나'라는 주체의 궁극적 실재와 우주의 궁극적 실재가 서로 동일하며, 따라서 나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곧 신"이라는 일원론적인 범신론을 의미한다. 이런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을 우리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의 공 사상(空 思想)을 통하여 발견할 수가 있다. 공 사상(空 思想)이란, 우리가 경험하는 일체의 사물과 현상이 서로 인과의 사슬로 연결되어 흘러가는 무상한 흐름(緣起)에 의존하며, 따라서 실체를 갖지 못하는 공(空)이라는 사상을 말한다.











불교 (2) 공(空) 사상 뒷받침하는 연기설(緣起說)







우주의 모든 사물 · 사건들은 인과적 관계로 진행

인생의 총체적 고통 근본원인에 대해서는 무지





공(空) 사상과 함께 불교 철학의 근본 토대를 형성하는 것이 연기설(緣起說)이다. 모든 사물과 사태가 서로 직·간접으로 관계하여 성립하기 때문에 불변하는 고정적 실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공(空) 사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연기설이다.



'연기(緣起)'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로서 석가가 설법한 대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우주의 모든 사물이나 사건이 단독의 힘으로 생겨나고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른 사물이나 사건들과의 인과적인 관계를 통해 생겨나고 진행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그의 부인 힐러리와의 만남이 있기까지 수많은 인연의 사슬이 작용하였을 것이고, 또 그 만남은 결과적으로 미국 사회와 전 세계의 수많은 변화에 대하여 중요한 인연의 사슬을 형성해나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내가 여기서 기침을 하니 온 우주가 뒤흔들린다는 식이다. 우주 삼라만상이 이런 식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총체적인 유기적 관계를 형성한다고 보는 점에서 연기설은 개체중심의 분석적 관점이 아니라 전체중심의 종합적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연기설을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풀이해보면 윤회사상이 나오고, 윤회에서 다시 전생의 개념이 나오게 된다. 환생이라는 개념은 전생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된다.



공 사상과 연기설을 바탕으로 이른 바 불교적인 인생관과 세계관의 보다 구체적 특징을 형성하는 세 가지 내지 네 가지 징표라는 의미에서 삼법인(三法印) 내지 사법인(四法印)의 사상이 등장한다. 그 첫 번 째 징표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인데, 이는 인연의 결합으로 생성되는 자연과 인생의 모든 과정들은 본질도 실체도 없이 흘러가는 강의 물결과도 같이 끊임없이 돌고 도는 무상한 변화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석가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강의 물결과도 같은 것이요, 아지랑이나 파초와 같은 것이니 헛되고 헛되다 아니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두 번 째 징표가 제법무아(諸法無我)로서 세상의 모든 각각의 현상은 서로 인연의 사슬로 연결되어 흘러가는 무상한 흐름에 의존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진정한 실체성을 띠거나 독자적인 존재 근거를 가질 수 없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우리의 자아를 보라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나'의 여러 모습 중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세월이 흘러가면서 용모도 변하는 것이요, 성격이나 기질도 변하는 것이다. 사상도 변하며 사회적 관계도 변한다. 우리의 마음은 또 얼마나 더 변화무쌍한가? 잠시잠깐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니 무엇이 진정한 '내 것'이고 무엇이 '나의 실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 같을 뿐이라는 것이다.



세 번 째 징표는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것인데, 이는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회상하면서 겪는 모든 일들이 다 괴로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이 그 하나요, 원수를 만나는 괴로움이 그 하나다. 본질도 실체도 없는 무상한 것을 잡으려니 이것이 괴로움이다. 한 때 즐거움을 누린다 해도 그것은 한껏 피다 이내 시들어 버리는 꽃과도 같은 것이니 이 허망함이 또한 괴로움이다. 이 집착이 강할수록 잡히지 않는 괴로움이 더 크며, 누린 즐거움이 클수록 그것이 깨어지고 사라지는 데서 느끼게 되는 괴로움이 더 크다. 부자로 살든 거지로 살든, 어떻게 살든 상관없이 도대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괴로움일 뿐이라는 것이다.



위의 세 가지 징표를 사실적으로 관찰하고 받아들이면서 인생의 헛됨을 통찰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깨달음의 이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결단과 실천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데, 그러한 결단과 실천의 방향을 결정해주는 이상의 징표가 열반적정(涅槃寂靜)이다. 고통과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 하고, 그 해탈로 인해 마음에 불안, 격정 등의 번뇌의 불이 없어져 마음이 지극히 순수하고 청정하고 편안하게 된 경지를 열반이라고 한다.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우리를 참되고 영원토록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해줄 것을 찾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을 깨닫고 그러한 욕망이나 집착을 버리는 데서 오는 경지를 말한다.



불교적 인생관과 세계관의 이상과 같은 네 가지 징표를 살펴보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내용이 전도서에서 표현된 인생 관찰, 세상 관찰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전도서 1:3을 보면, 해 아래서 수고하는 인생의 모든 수고가 헛되다고 말씀하고 있고, 1:6에는 우리의 인생이 바람과도 같으며 1:7절에는 우리 인생이 죽음이라는 바다를 향해 가는 강물과도 같다고 말씀하고 있다. 5:10-17에서는 인간의 욕망이란 만족함이 없기에 육신의 소욕을 구하면 구할수록 번뇌와 심신이 피곤함과 분노만 더할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석가모니도 무언가 인생이 근본적으로 총체적인 고통과 저주 가운데 있다는 것, 성경적으로 말하면 창세기 3장의 문제요 불신자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사실적으로 통찰한 셈이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그 근본 원인을 알지 못했던 것이고, 따라서 그러한 인생 문제로부터 빠져 나오는 길을 알지 못했던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사탄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나 죄와 저주 가운데 빠진 원죄의 문제를 모르고, 또 그 원죄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는 완전하고 유일한 길인 그리스도를 모르면, 아무리 똑똑하고 의식이 예리하다 해도 오히려 그럴수록 엉뚱한 열심 속에서 더 깊은 미궁과 착각의 길로 빠져들게 된다는 점을 우리는 불교를 통해 또한 발견하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덧없이 돌고 도는 세상으로부터의 출구를 그러한 세상에 대한 체념과 달관에서 찾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본질상 덧없고 무상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의미와 목적과 희망으로 충만한 세상으로 바꿀 수 있는 길이 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석가모니가 최소한 전도서만이라도 제대로 읽었더라면 그토록 원인 모르게 고통과 저주 가운데 던져진 인생의 근본 문제 때문에 고민이 되어 집 나가 돌아다니면서 고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불교 (3) 사성제(四聖諦)







인간문제 관찰한 '사성제', 그리스도 구원 역사 이해하는데 실패





  불교에도 기독교의 사영리와 유사한 구조의 기초적인 교리 체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성제(四聖諦)이다. 사성제란 '네 가지 거룩한 진리'라는 뜻으로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한 깨달음을 통하여 부처가 되기 위한 길을 말해준다. 연기론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이 교리 체계는 석가모니가 부처가 되고 난 직후 녹야원에서 처음 다섯 명의 비구에게 설법한 법문에 나타난다. 그만큼 불교의 다른 모든 가르침들을 포괄하는 근본 가르침이 되는 셈이다. 여기서 '제(諦)'라는 말은 변함없는 진실을 뜻하는 '삿트아(satya)'를 번역한 말로서 그래서 '체'가 아니라 '제'라고 읽는다.



  사성제의 첫 번째 원리는 고제(苦諦)로서 인생의 근본 현상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인생이란 고통의 바다 위를 끝없이 돌고 도는 항해와 같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인과의 사슬로 연결되어 흘러가는 무상한 흐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회상하면서 겪는 모든 일들이 다 괴로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근본적인 괴로움은 생(生), 노(老), 병(病), 사(死)의 네 가지인데, 이를 인생사고(人生四苦)라 한다. 이 네 가지에다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괴로움(怨憎會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愛別離苦), 얻고자 하되 얻지 못하는 괴로움( 求不得苦), 생명의 다섯 가지 작용인 오온(五蘊)이 서로 맞지 않거나 생각의 발로가 맞지 않아 느끼는 괴로움(五陰盛苦)를 더한 것이 인생 팔고(人生八苦)다.



  석가모니가 왕자의 신분으로 큰 궁전에서 맛있는 음식과 온갖 화려한 것에 둘러싸여 누릴 수 있던 편안한 삶을 버리고 힘들고 어려운 고행의 길로 접어들게 만든 것이 바로 이러한 총체적인 고통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씨를 뿌리고 있는 농부의 모습과 조그마한 미물이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면서 산다는 것 자체가 괴로움일 뿐임을 관찰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는 인생의 이 근본 문제에 대한 번민을 해결해보려고 집을 나가서 보리수나무 밑에서 주전 531년에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하기까지 거의 육 년 동안을 처절한 고통을 맛보게 된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 분리된 인생이란 아무리 화려해도 한 낮의 꿈이요 나타났다 이내 사라질 안개와 같은 덧없는 것일 수밖에 없고, 결국 여러 가지 영적, 정신적, 육체적 문제 속에 시달리다가 후손에게 저주의 유산을 물려줄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석가모니는 그래도 어느 정도 인생의 근본 문제를 사실적으로 관찰한 셈이다.



  사성제의 두 번 째 원리는 집제(集諦)로서 이는 인생의 근본 문제의 원인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인생이 총체적인 고통 가운데 있는 원인을 본질도 실체도 없는 무상한 것들을 향한 우리의 끝없는 갈망과 애착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갈망과 애착은 기본적으로 착각과 망상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 석가모니의 진단이다. 사람들이 흔히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생각하는 돈이나 명예나 건강과 같은 것들은 강의 물결이나 아지랑이나 안개와도 같이 덧없는 것들인데, 마치 그것들이 확고부동한 것이며 우리를 영원히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괴로움이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착각은 곧바로 부질없는 갈망과 애착으로 연결된다. 본질도 실체도 없는 무상한 것들인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애타게 찾고 얻으려 하며, 뿐만 아니라 영원히 누리려 하니 이로써 괴로움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잡으려 하나 잡히지 않으며, 잡은 것 같은데 이내 사라지고 마는 것이 세상의 이치요 욕망의 실상인데, 이를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은 결코 만족될 수 없는 끝없는 갈망과 애착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며, 이 때문에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집제의 원리다.



  분명한 사실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생기를 통해 생령이 된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파스칼이 말했듯이 인간에게는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만족될 수 있는 결핍과 공허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 어떤 것으로도 결코 만족함을 얻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석가모니가 세상의 덧없는 것들로 만족함을 얻으려는 것에 대하여 이를 괴로움의 원인으로 본 것은 부분적으로는 맞다고 할 수 있으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깨닫는 데에는 실패한 셈이다. 왜 세상이 덧없고 괴롭게 되었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석가모니는 그저 덧없고 괴로운 세상의 것들에 매달려 사는 것 자체만을 고통의 원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실상 고통의 근본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아담의 실패로부터 시작된 영적인 문제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난(창3:1-6) 데서 시작된 문제요, 그 결과 우리에게 죄가 들어오고(롬3:23), 사단에게 사로잡히게 된(요8:44) 문제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 참된 안식과 평안을 상실하고 죽음의 저주와 온갖 재앙의 고통에 빠지게 된 인생 문제의 원인을 깨달았다고 할 수 없다. 석가모니의 한계는 석가모니 자신도 결국 이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재였다는 사실에서 찾아진다. 이러한 한계는 곧 불교가 왜 답이 될 수 없는지를 밝혀준다.



  사성제의 세 번째 원리는 멸제(滅諦)로서 이는 인생의 원래 상태나 모습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무언가를 향한 감각의 집착, 의식의 집착, 욕망의 집착 등 일체의 집착과 갈망에서 벗어나 고요하고 청정하며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마음의 자리에 놓이는 것이 인간 실존의 본래 모습이라는 것이 멸제의 원리다. 다분히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의 영역에서 원래의 상태나 모습을 찾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불교의 독특한 인식론적 원리 때문이다.



  그러나 멸제의 원리도 성경적으로 볼 때 분명하게 풀어진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된 존재라는 점(창1:27)과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권세를 부여받은 존재라는 점(창1:28)에서 설명이 된다. 마치 물고기가 물에서 살아야 하듯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근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를 통해 회복될 인간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실패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존재 차원에서 살펴보아야지 단지 주관적인 의식 체험의 영역에서만 보면 안 된다.



  사상제의 마지막 원리는 도제(道諦)로서 이는 인생의 원래 상태나 모습에 도달하는 길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석가모니가 오랜 고행 끝에 보리수나무 밑에서 깨달은 진리란 우리가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육체의 요구대로 자신을 맡기는 쾌락의 길과 육체를 지나치게 학대하는 고행의 길, 이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따라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 중도를 따르는 것이 우리의 관찰, 사유, 견해, 언어, 행동, 마음가짐, 수행 노력 등을 바르게 하는 일로서 이를 팔정도(八正道)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것은 철학적인 정신 수양(골2:8)이나 종교적인 열심(행4:12), 또는 선행을 쌓는 것(사64:4)으로는 결코 인생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받는 길(요14:6, 행4:12)이 되기 때문에 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영접함으로써(요5:24; 롬10:9-10)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도제의 원리에 대한 기독교적 해답이다.











불교 (4·끝)







한국에 영향 미친 대승불교, 무신론 대신 여래불 등 신적 존재 등장

한국 불교 특징은 기도불교, 귀신에게 절하며 소원 성취 기원





중국, 한국, 일본 등에 전파된 불교를 보통 대승불교라고 부른다. 대승불교는 일반 대중들을 계도하고 구제하는 자비의 실천을 통해 함께 열반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세간적이고 적극적인 경향을 띤다. 이에 반해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등에서 볼 수 있는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하는데, 주로 개인의 해탈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은둔적이고 소극적인 경향을 띤다.



그런데 대승불교에는 원시 불교에는 없는 여러 가지 초월적인 종교적 요소가 혼합되어 나타난다. 원래 불교는 무신론인데 대승불교로 오면서 여래불이나 아미타불과 같은 신적인 존재가 등장한다. 부처가 석가 하나만이 아니라 다수이며 이들이 모두 현존하는 신적인 존재요 구세주라는 것이다. 정토사상이나 미륵 신앙 역시 원래의 석가의 가르침에는 없는 것이었다. '정토(淨土)'란 기독교로 말하면 천국과 같은 곳으로 말하자면 끝없이 변하는 무상의 세계 속에서 영원불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세상 모든 것이 공(空)이요 무상(無常)이라는 원래 석가의 가르침에는 어긋난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석가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많다.



우리나라의 사찰에 가보면 대승불교의 이러한 특징들을 살펴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사찰에는 대소를 막론하고 대웅전과 명부전, 그리고 삼성각이 있다. 대웅전은 부처와 보살을 모신 본당으로 보통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등 세 부처가 놓여있고 그밖에 미륵불, 비로자나불, 관세음보살 등이 놓이게 된다. 여기서는 예불과 법회 등의 주요 종교 행사가 이루어진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제(齊)를 올리는 기능을 하는 전각이다. 지장전이라고도 하고 지옥의 심판관 시왕을 모시 곳이므로 시왕전(十王殿), 저승과 이승을 연결하는 전각이므로 쌍세전(雙世殿)이라고도 한다. 죽은 자를 위한 사십구제나 백일제 등의 각종 제가 여기서 이루어진다.



삼성각은 칠성(七星), 산신(山神), 독성(獨聖)의 세 신령과 그 밖의 여러 신령(神靈)을 모시는 전각이다. 이 전각은 그야말로 한국의 사찰에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현상이다. 칠성은 생남 연명을 관장하는 신령으로 세 신령 가운데 언제나 중앙에 모셔진다. 산신과 독성은 기도자의 소원성취를 관장하는 신령이다. 이곳에는 입체 조각으로 표현한 불상과는 달리 세 신령을 평면으로 표현한 탱화가 걸려 있다. 명부전이 없는 사찰이라 해도 반드시 삼성각은 있기 마련이다. 또 산중에 삼성각만 따로 있어 독립적인 사찰을 이루는 곳도 많다. 그만큼 삼성각은 사찰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삼성각은 각종 병마와 재앙을 퇴치하는 신령한 능력이 있는 곳으로 믿어지고 있다. 그래서 자손 번창, 건강과 수명 연장, 사업 번성 등의 현세적인 복을 놓고 소원 성취를 비는 각종 기도회가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칠성신에게 드리는 칠성기도가 무속에 있어서는 제석거리 굿과 같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산신기도는 주로 사업 성공과 번창에 집중되고, 독성기도는 입학성공과 같은 그냥 일반적인 소원 성취에 집중된다. 그런데 말이 기도회지 거의 굿이나 다를 바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한국의 재래적인 무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아 주술적이고 밀교적인 요소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이다. 한국 불교의 특징을 보통 기도불교라고 말하는데, 그만큼 한국 불교 신도들의 종교 행사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기도이고 그 기도가 주로 이 삼성각에서 이루어진다.



승려나 불교학자들은 어떨지 몰라도 일반 불교 신자들에게는 각종 부처와 보살 역시 신령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믿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불교의 현실이다. 그래서 그 신령들을 놓고 현세의 복락(福樂)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사찰이란 한 마디로 '귀신 충만, 사탄 충만한 곳'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대중적인 형태에서 보자면, 불교 본래의 철학적 정신 수련보다는 귀신에게 절하면서 각종 소원 성취를 기원하는 것이 우리가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불교의 실상이다. 불교라는 종교 형태를 취하고 있기는 해도 실상은 재래의 신령을 절 안에 모시고 있는 것이요, 또는 부처를 기도의 대상인 신령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기도의 내용이라는 것이 토착 종교의 내용과도 전혀 다를 바 없이 현세의 복락에 집중되어 있다. 무교의 가치 체계와 차별화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실상을 잘 알지 못한 채 불교를 단순히 수준 높은 정신적 종교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주로 식자층에서 너무나 많다. 영적인 실상에 무지한 결과다. 역사가에 따르면, 고려 시대에 국가적 규모로 실행된 팔관회와 연등회도 외형상은 불교 법회이지만 몽고의 토착종교행사를 수용한 기복제요 위령제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가 분명하게 깨달아야 할 것은 창세기 3장의 사건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인류를 멸망과 타락으로 이끌어온 영적인 문제가 정신 수련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는 그런 수준의 문제가 절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식으로 열심을 낼수록 오히려 더 굉장한 착각과 미궁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비록 현세적인 복을 비는 일보다는 마음을 정결하게 다지는 일에 관심을 두고 진지하고 성실하게 수련에 임하는 불교 신자라고 해도 실상 그런 종교적인 노력이란 지극히 인간적인 몸부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해서 마음을 깨끗하게 비울수록 오히려 더 악한 영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또 실제로 마음을 비우는 일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는 불교 신자들이 얼마나 될 것이며, 그렇게 해서 마음을 비우는 일에 성공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무엇보다 그냥 비운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비워진 마음의 자리에 성령으로 채워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영, 미혹의 영으로 채워짐으로써 오히려 더 악화되고 더 교묘한 형편과 처지에 빠질 수 있다. 이러한 영적인 원리와 실상을 정확하게 일깨워주는 일이야말로 전도자가 현장에서 감당해야 할 중요한 임무가 아닌가 한다.





/양승렬 교수


애착과 집착 벗어나면 슬픔도 없다 - 불교신문

애착과 집착 벗어나면 슬픔도 없다 - 불교신문



애착과 집착 벗어나면 슬픔도 없다

 일아스님 승인 2012.01.17 18:59 댓글 0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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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기뻐할 것도 없다

행복과 불행은 돌고 돌기 때문

게송 213) 애착에서 슬픔이 생긴다. 애착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애착에서 벗어난 사람에게는 슬픔이 없는데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새김 : ‘애착’은 뻬마(pema)의 번역인데 뻬마는 ‘사랑, 애정, 애착’의 뜻이 있다. ‘사랑’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앞의 게송의 ‘사랑하는(piya:삐야)’이라는 말과는 다른 느낌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애착’으로 번역하였다. 애착은 애정을 갖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사람이든, 개든, 화초든, 물건이든 애착이 강하면 집착하게 되고 거기에 묶이게 된다. 그래서 강한 애착의 관계는 이별이나 배신, 죽음 등의 여러 상황에 부딪쳤을 때 극도의 슬픔을 느낀다.



또한 지나치게 애착하여 집착할 때 애착하는 것과의 이별이 두렵고, 돌아서서 남에게로 갈까 두렵고 마침내는 다시는 보지 못할까 두려워진다. 그러므로 애착의 강한 집착을 놓아버린 사람에게는 슬퍼할 것이 없고,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감정을 가진 인간인 이상 애정을 갖게 되고 애착이 가고 호의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의 가르침은 끈질긴 집착을 동반한 자신을 옭아매는 강한 애착을 경계한 것이다. 이것은 걸림 없이 훨훨 나는 자유로움을 묶기 때문이다.



게송 214) 집착에서 슬픔이 생긴다. 집착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집착에서 벗어난 사람에게는 슬픔이 없는데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새김 : ‘집착’은 라띠(rati)의 번역으로 ‘사랑, 집착, 쾌락, 좋아함’의 뜻이 있는데 ‘쾌락’이라 할 수도 있지만 ‘집착’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일반적인 것 같다.



집착은 번뇌의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집착은 무조건 맹목적인 눈먼 사랑의 결과로 나타난다. 그래서 틀림없이 강한 집착의 결과는 괴로움과 슬픔으로 이어지고 집착하는 대상이 떠날까 두렵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강한 집착이 없는 사람은 슬퍼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는 가르침이다.



오늘 게송은 애착과 집착에서 슬픔과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착과 집착이 없으면 슬픔이나 두려움이 없다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집착을 떠났기 때문에 기쁨도 슬픔도 없다는 가르침을 보자.<상윳따 니까야> 2:2.8.



까꾸다가 부처님께 이렇게 말하였다.



“사문이여, 당신은 기쁘십니까?”



“그대는 내가 무엇을 얻었기 때문에 기쁘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면 당신은 슬프십니까?”



“그대는 내가 무엇을 잃었기 때문에 슬프다고 생각하는가?”



“사문이여, 그러면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습니까?”



“벗이여, 그렇다네.”



“오, 수행자여 그대는 어떻게 기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습니까?”



“진정으로 나에게는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네. 슬픔은 기뻐하는 사람에게 따라오네. 수행자는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다네.”



“오랜 세월 후 나는 드디어 만났네. 온전히 해탈한 성인, 세상의 집착을 멀리 떠난 분, 기쁨도 슬픔도 없는 수행자.”



이처럼 부처님은 기쁨과 슬픔의 파도 그 너머의 부동의 경지에 이른 분이었다. 기쁨도, 슬픔도, 얻음도, 잃음도 부처님을 흔들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애착과 집착의 그 너머 평온의 경지에 이른 분, 무한한 자유의 영역에 머무는 분이었다.



사실 인생은 그렇게 기뻐할 것도, 그렇게 슬퍼할 것도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행복이 오면 다시 불행이 오고, 행복과 불행은 돌고 돌기 때문이다. 그러니 애착과 집착을 멀리 떠난 사람 그에게는 슬퍼할 것이 없음에 틀림없다.



[불교신문 2784호/ 1월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