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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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기운)

최근 수정 시각: 
1. 개요2. 동양철학에서
2.1한의학에서
3. 창작물에서
3.1. 관련 캐릭터 및 작품
4무선충전 단위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 Qi[1], Ki [2]
무선충전
동아시아 철학의 핵심적인 개념 중 하나.

2. 동양철학에서[편집]

원래 의미는 숨, 바람, 증기였지만,[3] 대략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면서 우주를 이루는 원질과 같은 의미가 되었다. 당시 기술로는 공기의 분자를 눈으로 볼 방법이 없었고, 호흡에 대한 근대적인 이해도 확립되기 한참 전의 시절이었기 때문에, '공기 = 들이쉬면 생명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 =  그 자체'라는 경험에 기반한 추론으로 이어진 것이다. 참고로 기의 다섯 가지 패턴이 오행(화수목금토). 그러니까 사람을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기로 이루어져 있고 그 조합 방식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의 기는 서양의 4원소설과 비견된다.

서양철학과 차이점을 비교하면, 수천 년간 서양철학은 정신과 물질영혼과 육체이념(이데아)와 현상... 등의 이원론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면서, 대체로 이들 중에서 후자에 속하는 물질, 육체, 현상, 질료(material) 등을 열등하고 오염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으로 자리잡아 왔다. 그러다가 철학사적으로는 극히 최근이라 할 만한 근대철학 중~후기 무렵부터 "정신 vs 물질"의 이분법을 회의하는 시각이 제기되었고, 이 둘이 실은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으며 하나의 원리로 이 둘 모두를 설명할 수 있다는 일원론, 그 중에서도 특히 물질 쪽에 우위를 두며 정신이 물질에서 파생되어 나왔다고 주장하는 유물론이 급격히 설득력을 얻어 현대 서양철학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동양철학의 경우는 서양 고전철학의 패러다임인 "정신 vs 물질의 이원론" 자체를 상정한 적이 없다. 고대의 동양철학은 정신과 물질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이 나타난 적이 없으며, 굳이 정신과 물질이라는 표현을 쓰자면, 이 둘을 모두를 아우르는 기(氣)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도올 김용옥이 강의한 내용에 따르면 도가 내부의 기 개념도 형성 초기에는 "단련이 가능하다"는 식의 초능력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여느 제자백가에서 논하는 기 개념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 그러다가 남북조시대를 거쳐 불교가 융성하여 기존의 도교와 애증 비슷한 관계가 되고 인도의 차크라 개념이 수입되면서 이런 형태의 왜곡이 발생했다고 본다. 불교 안에 이원론적인 인도철학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4] 인도철학에서도 정신과 물질, 본체와 현상 등의 이원론이 나타난다. 불교경전을 보면 진여문과 생멸문, 이(理)와 사(事)가 대립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데, 나중에 불교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성리학이 불교의 이(理)라는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주자의 글을 보면 이(理)가 기(氣)의 내부에 내재하는 법칙일 뿐이라고 논할 때도 있고, 이(理)가 기(氣)를 초월하는 불변의 원리인 것처럼 논할 때가 있다.

기가 센 성격이라 하면 대체적으로 괄괄하고 자존심이 센 성격을 떠올리나 무속인들의 입장에서 본 기가 센 성격은 보편적으로 알려진 기가 센 성격하고는 다르다고 한다. 유순하고 잘 져주지만, 통찰력이 있고 속세일에 관심이 크게 없는 사람을 기가 센 사람으로 본다고.

2.1. 한의학에서[편집]

한의학에서 치료하는 하는 방식은 사람 몸의 다섯가지 기(화수목금토)의 밸런스를 조절하는 방식이며, 침이나 뜸 같은 것도 기의 밸런스를 조절하기 위한 것이다. 이미 말했지만, 사람 몸에 기가 따로 들어있는 게 아니라, 사람 몸이 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거다. 쉽게 말해서 사람 몸을 이루고 있는 기의 밸런스가 깨지면 병에 걸리는 거고, 그걸 바로잡는 게 치료라는 것.

일부 학자들은 혈관과 림프관 외에도 제3의 물리적 순환체계(일명 봉한관)가 생명체 내에 존재하고 있다 주장하며, 이것이 경락과 기공의 실체를 밝힐 단서일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봉한관의 존재 가능성을 처음 제시한 장소가 북한이었던 데다가, 북한에서의 학문이 항상 그렇듯 실험 내역을 국가 보안을 지켜야 한다는 전혀 쌩뚱맞는 이유로 상세하게 밝히질 않아 다른 대다수의 학자들은 그냥 아예 무가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2018년 현재, 북한에서는 이것도 일단 자기들이 실컷 싸지르기만 하고 후속 연구는 전부 남한과 일본 학계의 몫으로 떠밀어내고 있다. 중화권에서도 초기에는 관심을 가졌으나 2010년대 이후로는 "현대에 문제가 되고 있는 대부분의 질병은 이미 과거에도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훈고학적인 접근에 집중하고 있어 봉한학설은 관심사에서 밀려났다.

3. 창작물에서[편집]


오늘날의 창작물에서 기라고 하면 드래곤볼이나 타이의 대모험 같은 만화나 여러 소설 등의 볼 수 있듯이, 인체에서 나오는 에너지나 마나 같은 것으로 표현될 때가 많다. 차크라영력패기투기포스파문 등과 별 차이가 없게 표현된다. 도가 계열 도사들이 비밀스러운 수련방식을 통해서 기를 단련한다는 둥 하는 행위에서 비롯된 변용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다 나중에는 단(丹), 한의학 따위도 모두 섞여서 무협소설에 나오는 기공(氣功) 같은 이야기가 생긴 것. 기(氣)의 정의를 왜곡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바로 무협지. 보통 현대물 장르에서는 기가 희박해졌다거나 천문이 닫혔다거나 하는 식으로 현대에 기공을 쓰지 못하는 식으로 둘러댄다.

판타지 소설 등에서는 예전에는 기와 마나를 별개의 개념으로 놓는 경우가 자주 있었지만 요즈음에는 뭉뚱그리는 경우도 많다. 무협에서 판타지로 넘어온 주인공이 마법과 검 양쪽을 모두 사용하는 퓨전계열 먼치킨 작품이 늘어나면서 자연의 기운이라는 비슷한 개념을 가졌던 마나와 기를 통합시키는 현상이 대세가 된 것으로 보인다.[5] 사실 오늘날 서양 판타지에서 당연히 등장하는 '마나'의 경우에는 아예 서양 기원도 아니고 태평양의 폴리네시아에서 쓰이던 개념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기'의 이러한 변용은 어딘가 틀리긴 했지만 원 개념과 아예 동떨어진 것은 아닌 셈.

가면라이더 키바에서 마황력이라는 힘을 사용한다. 사용하기에 따라서 핵무기 이상의 힘을 낼 수 있다나 보다.

대전액션게임에서는 초필살기를 쓰기 위해 필요한 게이지를 통칭 "기"라고도 일컫는다. KOF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를 모으는 것이다

슈퍼전대 시리즈에서는 기를 사용해 메카도 만들어낼 수도 있다.(!)[6]

영기(靈氣; reiki)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고.

마법선생 네기마!를 비롯한 아카마츠 월드에서는 인간의 내측의 생명력을 태워 만들어지는 힘으로, 엄밀히 따지면 인체 외부의 힘인 제1원질을 변환시켜 받아들이는 마력과 동질이지만 방향성이 반대인 힘이다.

3.1. 관련 캐릭터 및 작품[편집]

4. 무선충전 단위[편집]

근래에는 무선충전의 원리가 마치 기와 같다고 비유해서 국제 표준 방식의 이름을 '(Qi)'라고 부른다.

5. 관련 문서[편집]


[1] 중국어를 영어로 음차해서 사용한다. 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Qi energy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2] 던전 & 드래곤[3] 그래서 공기, 기체의 '기' 자가 바로 이것이다.[4] 물론 불교의 불성이나 법신불 사상, 인도 우파니샤드 철학의 아트만-브라만(둘은 궁극적으로는 하나이다) 개념은 일원론적인 측면도 있다.[5] 물론 같은 개념으로 설정하더라도 사용 방식이나 운용 방식을 다르게 놓는 경우가 많다. 한 예로 기는 단전에 저장하고 마나는 심장에 저장한다는 것으로 운용 방식이 다르거나, 또 다른 예로는 기는 신체에 저장을 하고, 마법은 마법 연산이나 술식에 저장한다는 식으로 사용 방식을 다르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무림인은 마법을 못쓰고 마법사는 기공을 사용할 수가 없다는 식으로 묘사한다.[6] 게키렌쟈 이전 작품인 광전대 마스크맨과 오성전대 다이렌쟈 역시 기의 비중이 큰 편이다.

기치료, 기공치료에 속지 말라.

[스크랩] 기치료, 기공치료에 속지 말라.

[스크랩] 기치료, 기공치료에 속지 말라.
수선님 2018. 11. 18. 12:04


기치료는 효과가 없는가?

기치료는 당연히 효과가 있다.
당연히 기도 있다. 그러므로 기를 느낄 수 있다.

상대방에게 주거나 뺄 수도 있다.
원격으로도 주고 받을 수도 있다. 인터넷 채팅이나 전화상으로도 당연히 가능하다.

과거에 어릴 적에 기를 가지고 이런 장난도 많이 해봤다.
마음과 기는 시공을 초월해서 그게 가능하다.

예민한 사람들에게 쉽게 기를 느끼게 해줄 수도 있다.
기치료, 기공치료를 하면 초기에 좋아지고 몸이 가뿐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기라는게 본래 그런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기치료, 기공치료를 해서 완치 가능한가?

기치료, 기공치료를 해서 완치되게 해주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면 기라는 것은 마음을 따르기 때문이다.

기가 위주가 아니고, 마음이 핵심이라는 뜻이다.
병의 근원은 마음에 있지, 기에 있지 않다.

병자를 완치 시키려면, 즉 병을 완치시키려면 병자의 마음을 뜯어고쳐줘야 한다.
이게 핵심이다.



마음은 그대로인데, 기로써 치료한들 뭔 소용이 있는가?

마음이 병의 근원인데 기만 가지고 넣었다 뺏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기치료, 기공치료를 해서 초기엔 좋아지지만 일정 기간 지나면 도로 예전 상태로 돌아간다.
왜냐면 환자의 마음은 예전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멍청이들은 환자를 치료할 때 마음을 고쳐줄 생각을 안하고,
그저 돈벌이에 눈이 멀어서 기를 넣어서 조금 좋아지게 하고 환자는 거기에 혹해서 현혹되어
온갖 희망에 부풀어서 돈을 가져다 바치는 바보짓을 해댄다.

진짜 고수라면, 진짜 능력자라면 돈을 일체 받지 않고 환자가 눈치채지도 못하게 한채 완치시켜준다.

돈벌기 위해 기치료, 기공치료하는 곳은 사이비에 지나지 않는다.

수많은 기공치료사들이 돈에 눈이 멀어서 죄를 짓는다.
이런게 사이비들의 특징이다.

사이비 종교에서도 기와 기공, 기치료 등을 많이 해댄다.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온갖 사이비종교 단체에서도 당연히 기를 알고 기를 주고 받을 수 있다.

올바른 종교, 올바른 구도 단체에서만이 기를 잘 다루는게 아니다. 사이비 종교에서도 당연히 가능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환자 스스로 기, 기공을 배워서 스스로 치료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것보다 선행되어져야 할 것은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일이다.

마음을 바꿔먹어야, 즉 사고방식이 바뀌어야 병이 낫는다.
물론 식생활을 잘못하거나 늙어서일 경우라면 그건 또 다른 측면이다.

병을 치료하려면 마음과 기 둘다 신경써야 한다.

우선 마음에서 집착을 모두 내려놓아야 몸의 긴장이 다 풀려서 기치료도 수월하다.



자기가 자신을 치료하는게 가장 빠르다.
그러니 남에게 치료해달라고 하고 거기에 돈 가져다 바치는 바보짓은 하지 말고 자기가 자기를 치료하라.

집중하는 곳에는 기가 모여든다.
그러므로 환부에 오랫동안 집중하게 되면 자연치유력이 작동하게 되고 저절로 호전된다.

그런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니까, 온갖 망상이 생기고 잡념이 생겨서 집중을 못한다.
그러니 마음이 우선이지 기가 우선이 아니다.

마음은 기수이고, 기는 말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기를 이끈다.

그래서 기만 가지고 치료해서는 환자를 완치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마음이 병의 근원이지, 환부의 삿된 기가 병의 원인은 아닌 것이다.

세상의 수많은 사이비들, 기공/기치료/신유
사이비 종교나 사이비 단체에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있다.
그런 사이비에서도 온갖 영적인 체험을 하기 때문이다.
보통 기라는 걸 모를 땐 그저 소설에 나오는 얘기인줄 안다.

그러나 자기가 직접 사이비 단체나 사이비 종교에서 하는 수행법으로 기를 느끼고
또한 기를 남에게 보내고 주고 받는 일을 직접 체험하고 그런 능력을 갖게 될 때
그 사람은 그 사이비 종교나 단체가 가장 최고인줄 알고 거기에 푹 빠져 버린다.

그래서 사이비종교단체가 명맥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이비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돈이다.

돈!
이걸 밝히는지 아닌지만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조상이니 사주팔자니, 운명이니 핑게를 대고 둘러대지만, 결론은 돈이다.

기치료, 기공치료, 신유
돈 받고 하는 곳은 다 사이비라고 보면 된다. 왜냐면 사업이니까...

어떻게 하면 병이 가장 빨리 나을까?

참회하는 것이다.
참회를 하면 마음의 때가 벗겨져서 마음이 쉽게 안정된다.
중생들은 자기가 뭔 죄를 지었는지도차 모른다. 뭐가 죄인지도 잘 모른다.
그래서 참회를 하라고 해도 난 죄 지은게 없어서 참회 할게 없다고 한다. 이런게 멍청함이다.

자비도량참법이란 책을 보면 참회에 대해서 가장 잘 나와 있다.
절하면서 참회하는게 가장 좋다.

절하면서 참회하면 기가 엄청나게 강하게 차오른다.
마음이 정화되면 자연히 그렇게 된다.
참회하면서 절하고, 그리고 자기 스스로 자기 몸을 기로 치료하는 것....이게 가장 빠르다.

또한 마음의 집착을 없애는 경전을 보는게 중요하다.

집착을 없애야 한다. 욕망을 없애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고요해지니까.
마음이 고요해져야만 몸도 안정이 되고 그로 인해 기가 원활하게 작동된다.

기치료의 관건은 환부에 집중하는 것이다.
마음이 딴데로 가지 않게 하고 오로지 환부에만 집중한다.
단지 집중만 해야지, 생각을 일으키면 안된다.

흡혈귀 같은 기공사들

불교를 시작하기 전 아주 오래전에 채팅을 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 몇몇이 채팅으로도 상대방의 기를 빨아들이는 애가 있었다.

그래서 내 기를 빨아들인적이 있는데, 이런 자들은 참으로 멍청하고, 또 악독한 자들이다.
흡혈귀에 지나지 않는다.

중생들은 정말 알고 보면 사악하다. 기본 성품이 이기적이다보니 사악해져가기 쉽다.
그래서 양심도 없이 남의 기를 막 빨아들이기 까지 한다.

또 하나 멍청한 부류가 나무에서 기를 빨아들이는 자들이다.
그걸 빨아들여서 뭐하잔 얘긴가

여기서 이런 자들의 멍청함이 잘 드러난다.
기는 외부에서 빨아들이는게 아니고, 내 마음에 집착을 다 버리고 텅비우면 저절로 차오르게 되어 있다.

이걸 알아야 하는데, 마냥 흡혈귀처럼 다른 사물에서 뽑아들이려고만 하니...참 바보짓이다.

기는 그저 기일 뿐이다.
기보다 더 중요한게 마음이다.

마음을 다스리는게 가장 중요하다.
그걸 놓치고 기만 죽어라고 다뤄봐야 완전 허당이다. 결국 기는 마음이 다스리는 거니까.

나 역시 과거에 기만 다루고 마음을 전혀 다루지 않아서 주화입마에 빠진 적이 있다.
이것 때문에 엄청나게 고생했다.

주화입마의 원인이 뭔가?
바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함에 있다. 물론 그땐 그걸 전혀 몰랐다. 오로지 기에만 관심있었으니까.

불교는 마음을 다스리는게 핵심이다.
마음을 다스리면 기는 자연스레 마음의 통제를 따른다.

기, 기공 백날 그거 가지고 놀아봐야 뭐하나?
마음은 예전 그대로 이고, 여전히 욕심에 찌들어 있는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한,
이 마음을 그냥 내버려두면 중생의 마음은 악쪽으로 치닫게 되어 있다.

욕망을 향해 치달으니까....


 

기치료, 기공치료에 속지 말라.

출처 : 출리심 보리심 공
글쓴이 : - 반야바라밀 - 원글보기
메모 :

기치료 한계는 어디까지 인가?

기치료 한계는 어디까지 인가?

기치료 한계는 어디까지 인가?

입력 2011.04.15. 


[건강 칼럼]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기, 기수련, 기치료를 에너지 의학으로 인정하여 많은 연구비를 투자하여 새로운 대체보완의학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미국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는 기치료(에너지 요법)를 원하는 환자에게 양의학적 치료와 기치료를 병행하여 치료받을 수 있도록 제도화시켰으며 중국과 일본 역시 “기”와 관련된 의학적 연구와 실험들이 많이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기치료를 통해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난치성 질환들은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기는 인간의 근본적인 에너지이다. 우리 몸은 에너지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으며 오장육부를 움직이는 것 역시 바로 이 기(에너지)다. 기는 공기를 통해 얻는 천기(天氣)와 음식을 통해 얻는 지기(地氣)의 결합니다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키는 기는 냉기(차가운 기운), 탁기(탁한 기운), 화기(뜨거운 기운) 등이 있으며 기운의 순환장애로 여러 가지 질환이 발생한다. 예를 들면 산후풍(냉기. 차가운 바람의 침입이 원인)에는 외기발공법을 통한 냉기의 직접적인 배출이 효과적이며, 암(탁기,냉기,화기의 결합체)환자의 경우 항암기공(곽림 신기공)수련을 통해 많은 산소를 흡입하고, 심부온도를 올리며 마음을 안정시켜 면역력을 증강시키고 암세포를 억제, 사멸시킬 수 있으며 마비질환(안면신경마비, 중풍, 교통사고 후유증 등)에는 자율기공법을 통하여 마비된 근육과 관절을 운동을 통해 풀어줄 수 있다.

물론 기치료와 기수련이 모든 질병에 탁월한 것은 아니다. 기본적인 한의학적 치료법들(침, 뜸, 한약, 약침, 추나요법 등)과 병행하였을 때 더욱 효과적이며 난치성 질환들(암,산후풍,중풍,안면신경마비,소뇌위축증,루게릭 병, 뇌종양, 백혈병 등)치료에 기 치료방법(외기발공법, 점혈기공법, 자율기공법, 기 수련 지도)이 우수한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중국의 경우 의료법에 의거하여 인정받은 한의사만이 환자를 대상으로 기치료를 시행할 수 있으나 한국의 경우엔 오히려 한의사의 기치료 영역은 좁은 반면 무면허의료업자들의 기치료 시행은 광범위하여 안타깝다.

기치료를 의료의 영역으로 제도화시키고 새로운 의학적 치료법으로 인정하여 많은 연구와 실험이 필요하며 일반인들과 환자들에게 좋은 기 수련법을 가르치고 제도권 밖의 기공사들에게도 일정정도 영역을 인정해주는 법률적인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청담인 한의원 안상원 원장(대전대학교 한의과대학 강사)

관리 사각 지대 ‘모호한 氣 치료’ | KBS 뉴스

관리 사각 지대 ‘모호한 氣 치료’ | KBS 뉴스

관리 사각 지대 ‘모호한 氣 치료’
입력 2007.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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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기 치료는 과연 얼마나 효능이 있고 또 믿을 수 있을까요?

애매모호한 정보 홍수속에 사이비 기치료만 양산되지 않을까 우려되고 있습니다.

이광열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지난 2003년 5월, 한 60대 남자가 기치료를 받던 도중 숨졌습니다.

당뇨병을 낫게 해주겠다며 나선 기치료사들이 몸을 심하게 주무르고 밟아 죽음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처럼 검증되지 않은 기치료는 환자의 상태를 악화시키고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기공 전문가들은 치료보다 치유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적극적인 의료 행위라기 보다는 누구나 갖고 있는 자연 발생적 치유 효과를 기로 촉진시켜 주는 개념이라는 설명입니다.

<인터뷰> 윤한흥(회장/한국 기치유 연구회) : "기치료 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의 치유 에너지를 상대편에게 넣어줌으로 인해서 그것이 부족한 에너지를 채워주게 되고 병이 스스로 회복되게 하는 방법이라고 보시면..."

따라서 기로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며 과대광고를 하거나 종교나 신비주의를 조장하는 경우는 믿지 않는 편이 좋다고 조언합니다.

하지만 기치유에 대한 검증 기준 자체가 없다 보니 엉터리 기치유를 솎아내기는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른바 기 치유소도 유명세를 타는 곳만 전국적으로 30군데가 넘지만 지금껏 이를 담당하고 관리하는 관공서는 없는 실정입니다.

<녹취> 보건복지부 관계자 : "처음 들어보는 얘기입니다. 기나 명상 치료 이런 건... 그거를 어디서 다룰지 잘 모르겠는데요.."

미국에선 이미 기공 요법의 효능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지난 99년 슬랜 캐터링 기념 암 센터를 시작으로 기치유를 의학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의료행위의 모자란 부분을 보완하겠다며 기치유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추세인 반면, 우리나라에선 아직 논의도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인터뷰> 최준영(교수/포천 중문의과대학 대체의학 대학원) : "보완 요법 전문가들과 의사들이 함께 환자들을 다룬다면 좋은 치료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점점 높은 관심을 받고 있는 기치유.

제도적인 뒷받침과 체계적인 관리가 자리잡지 못한 사이 엉뚱한 피해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KBS 뉴스 이광열입니다.




뉴스 9 전체보기

이광열 기자 the12th@kbs.co.kr이광열 기자의 기사 모음

한의사들은 '기 치료'를 어떻게 생각할까?

과학중심의학연구원



한의사들은 '기 치료'를 어떻게 생각할까?
강석하|2017.07.30



어렸을 적 즐겨보던 중국 무협영화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이 있었다. 심각한 부상을 당하거나 중독된 주인공에게 내공이 강한 고수가 뒤에 앉아서 등에 손바닥을 대고 기를 불어넣어 치료하는 장면이다. 어떤 때에는 기차놀이를 하듯이 주인공 뒤로 조연들이 줄줄이 앉아서 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했다.






당시에는 기치료가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한 TV 프로그램에서는 기로 장풍을 쏜다는 사람이 나와서 세워둔 사람들을 쓰러트리기도 했다. 장풍을 맞는 사람들에게 눈을 가리고 뒤쪽에 매트를 깔아두어서 넘어져도 충격을 받지 않도록 했다. 장풍을 쏘는 사람이 열심히 시늉을 하면 수십 초에서 수 분 정도 지나서 사람들이 매트 위로 쓰러졌다. 심지어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건너편의 피험자들까지 쓰러트렸다.




당시에는 TV에서 실험을 해서 검증을 해주니 순진하게 믿었지만, 지금은 장풍을 쏘는 사람 백 명을 가져다 놓고 나에게 장풍을 쏘아대도 넘어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 방송에서 사람들이 넘어졌던 이유는 눈을 가린채 오래 서있으면 어질어질하기도 하고, 장풍이 자신을 밀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뒤에는 매트가 있어서 넘어져도 아프지 않으니 넘어졌던 것이다.




중학교 때 나를 예뻐해 주시던 한 수학선생님은 축농증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이 다니는 기치료원에 데리고 가셨다. 한의원은 아니고 상가 건물이었는데 치료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항상 여러명 씩 있었다. 기치료사는 자신이 기를 세게 불어넣으면 기절할 수도 있다고 우쭐대며 몇 번 치료를 받으면 축농증이 싹 나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한 번에 3만원(20여년 전이라는 점까지 감안하면 꽤 큰 돈이다) 씩 주고서 여러 번 갔지만 효과는 없었다. 그 선생님은 사고로 다리를 저는 40세 정도의 여선생님이셨는데 안타깝게도 다리를 절지 않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당시만 해도 먼 세상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몇 개의 공중파 방송사, 신문, 책 밖에 없었다. 방송, 기사, 책에서 어느 먼 곳의 헛소문을 전달하면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가려낼 방법이 없었던 때다. 내 주변에는 장풍을 쏘고 날아다니는 사람이 없지만 중국 어딘가에는, 현재가 아니라면 옛날이라도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현재는 세계 어느 곳이라도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이나 다녀온 사람의 이야기를 인터넷을 통해서 알 수 있고, 신체 능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스포츠 경기에 불려나오고, 중국의 격투기 선수들이 맥을 못 추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상식적인 자연법칙을 넘어서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대부분 알고 있다.




반면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신비로운 기적적 치료법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흔한 것 같다. 세계 각지에 빽빽하게 있는 의사와 과학자들,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서 천문학적인 비용을 투자하는 제약회사들도 찾지 못한 비법을 옛날 책, 어느 노인, 무면허 돌팔이, 한의사 같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8

심지어 무협영화처럼 기를 불어넣어 치료한다는 한의원들도 있다. 한 한의원의 블로그를 보면 전화통화를 하면서 기를 넣어줄 수 있다며 ‘원격진료’도 가능하다고 소개한다.











경락을 통해 기가 순환한다는 가정은 한의학의 침, 뜸 치료의 핵심 이론이다. 하지만 기의 존재에 대한 어떤 증거도 없다. 원자를 쪼갠 아주 작은 입자들의 힘까지도 측정하고, 수억 광년 떨어진 별도 관찰하는 과학기술을 가지고도 기를 발견해내지 못했다면 아직 못 찾은 것이 아니고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옛날 사람들의 환상에 불과했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보건복지부에서는 기치료가 한방 원리에 의한 치료이기 때문에 기의 존재가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는지, 효과가 있는지 여부와는 관계없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일 것이 뻔하다.




한의사들은 어떤 입장일지 궁금하다.




이런 식의 기치료를 믿지 않는다는 한의사들도 많을 텐데, 그렇다면 자신들이 하는 침, 뜸 치료의 원리가 되는 기는 믿으면서 기치료 한의사의 주장은 믿지 않는 이유를 댈 수 있을까?




인체에 침을 찔렀을 때 발생하는 생리적인 반응에 대한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고, 한의사들은 이것을 효과의 근거로 내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에른스트 교수는 임상시험에서 침이 플라시보 이상의 효과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침을 찔렀을 때 일어나는 생리적 반응은 효과를 논하는 데에 의미가 없다고 설명했다.)




한의사들이 침술로 인한 생리적 반응에 대한 과학적 연구결과들을 홍보하지만, 경락을 순환하는 기의 존재라는 한의학의 근본은 틀렸으며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인정하는 한의사는 보지 못했다.




한의사들이 한방 원리가 틀렸다고 인정하는 순간, 과학적 근거 없이 단지 한방 원리에 따라 행해지고 있는 대부분의 한방 치료의 정당성이 무너진다.




기치료를 한다는 한의사를 보는 다른 한의사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강석하 kang@i-sbm.org한의학 기치료

대체요법으로 다시 주목받는 기치료 모든 것 | 일요신문

대체요법으로 다시 주목받는 기치료 모든 것 | 일요신문

대체요법으로 다시 주목받는 기치료 모든 것


[제996호] 2011.06.13 19:23공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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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에도 효과”



▲ 홍익기수련회를 만든 김형동 교수(뒤)가 기치료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전영기 기자 yk000@ilyo.co.kr
현대의학이 발달된 미국 등 선진국에서 기(氣)치료가 보완대체의학으로 인기를 끌고, 병원에도 기치료가 활발하게 도입되고 있다. 이와 달리 국내에서는 원래 한방의 한 영역이던 기치료가 현재는 제도권 밖으로 밀려난 상태이고 기, 기치료 등에 대해 이야기하면 사이비 취급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기치료와 수련을 통해 두통이나 알레르기, 우울증 등을 이겨내는 이들도 의외로 많다. 최근 일부에서 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기치료에 대해 자세히 알아봤다.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는 정민혁 씨(32)는 업무가 많을 때면 잦은 두통에 시달렸다. 이런 그를 보다 못한 동료가 권한 방법은 기치료. 이미 기치료와 수련을 통해 효과를 체험하고 있던 동료는 그에게 기치료를 한번 받아보라고 했다. 하지만 이를 흘려듣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한 달이 넘어서야 한 기수련회를 찾았다. 처음에는 치유 효과에 반신반의하던 그였지만 3번의 기치료와 수련 후에는 두통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오래된 알레르기성 비염으로 고생하던 이주희 씨(27)도 기수련으로 효과를 본 케이스다. 그는 기수련을 시작한 후에 약을 끊고도 잘 지내고 있다고 전했다.

이처럼 주변에서 기수련을 통해 건강을 지키는 이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을 수 있다. 연예인들을 비롯한 유명인들이 이를 통해 건강을 회복하고, 다이어트에 성공한 체험 등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한다.

한의학에서는 기를 ‘만물이 생기는 근원적인 힘’으로 본다. 인간의 근본적인 에너지가 바로 기다. 우리 몸은 에너지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으며 오장육부를 움직이는 것 역시 기다.

하지만 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니 기, 기치료에 대해 이야기하면 자칫 ‘사이비’ 취급을 하기도 한다.

#기치료도 한방의 한 영역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기, 기수련, 기치료를 에너지 의학으로 인정하고 많은 연구비를 투자해 새로운 보완대체의학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뉴욕대학에서는 이미 1974년 석사학 과정에 기치료가 포함됐다. 이미 수천 건의 논문도 나와 있을 정도다.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는 기치료(에너지 요법)를 원하는 환자에게 양의학적 치료와 기치료를 병행하여 치료받을 수 있도록 제도화시켰고, 중국과 일본 역시 기와 관련된 의학적인 연구와 실험이 많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기치료 하면 원래 한방의 한 영역이었지만 교육이나 수련과정 등의 어려움 때문에 점차 단절돼, 현재는 제도권 밖으로 밀려난 상태다.

다만 제도권 의학에서 기치료를 하는 일부 한의사들이 있다. 청담인한의원(안상원 원장)의 경우 침, 뜸, 한약, 약침, 추나요법 등 기존의 한방치료법에 기치료, 기수련을 병행해 환자 스스로의 에너지를 활성화시키고 치유능력을 높여 환자를 치료한다.

이곳에서는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키는 기는 냉기(차가운 기운), 탁기(탁한 기운), 화기(뜨거운 기운) 등이 있고 기운의 순환장애로 여러 가지 질환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 질환에 따라 여러 가지 기치료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산후풍(냉기)에는 외기발공법으로 냉기를 직접 배출하도록 돕고, 뇌졸중이나 안면신경마비 등 마비질환에는 자율기공법으로 마비된 근육과 관절을 풀어준다고 한다. 암(탁기·냉기·화기)환자의 경우에는 항암기공(곽림 신기공) 수련을 통해 많은 산소를 흡입하고, 심부온도를 올리며 마음을 안정시켜 면역력을 높여준다.

#씨앗건강법 개발한 김형동 교수, 기수련가로 변신

흔히 기치료원, 기공연구소 등으로 부르는 곳에서는 기치료, 기수련 등의 방법만을 이용한다.

홍익기수련회(대체의학연구원)는 씨앗건강법으로 유명한 김형동 교수가 만든 ‘홍익공’이라는 기공으로 기수련을 하는 곳이다. 중부대학교 국문과 교수였던 그는 대체의학에 매료돼 씨앗건강법을 개발한 기인이다. 또한 올해로 55년 가까이 기수련을 해온 전문가이이기도 하다. 씨앗건강법과 기를 알리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대체의학 분야에서는 가장 많은 금액인, 80만 달러라는 연구비를 지원받으며 관련 연구를 계속했다. 6년간 한인건강정보센터 부속의료원에서 기닥터로 활동하기도 했다.
홍익공은 오랫동안 기수련을 해온 이가 기가 통하도록 도와주면 뇌파가 낮아진 상태에서, 스스로 여러 가지 동작을 취해 몸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자발공’이 나오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자발공을 하는 동안 몸의 균형이 깨진 곳을 자연스럽게 바로잡을 수 있고, 몸의 유연성이 좋아지면서 면역력이 높아진다”는 것이 김형동 교수의 설명이다.
이때 자발공이 나오는 시기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처음 기수련을 할 때부터 자발공이 나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 번 수련을 거쳐야 자발공이 나오는 사람도 있다.

전자파, 자기파 등 많은 파동이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는데, 우리 몸의 파동에 따라 어느 파동과 공명하게 된다는 슈만공명이라는 이론이 있다. 뇌파를 낮추면 이 중에서 좋은 에너지의 파동과 우리 몸의 파동이 공명하게 된다는 것이 홍익공의 원리다.

반대로 뇌파를 높이면 나쁜 에너지의 파동과 공명하게 된다. 쉽게 말해서 화를 내거나 불평, 욕을 할 때는 뇌파가 높아져서 나쁜 에너지와 공명한다는 뜻이다.

이곳에서는 직접 자발공으로 스스로 치유효과를 높이는 방법, 오랫동안 기수련을 해온 이가 기치료를 해주는 방법과 함께 기가 강하게 나오는 기그림의 치유효과를 함께 이용한다.

홍익기수련회 이완선 원장(전 기업은행 지점장) 역시 30년 넘게 기치료를 해온 것으로 널리 이름이 나 있다. 이 원장은 “요즘 문제가 되는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에도 기수련이 많은 도움이 된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일수록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키려면 기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밝혔다.

#누구나 꾸준히 기수련하면 건강해져

그렇다면 기치료, 기수련은 어느 정도까지 하는 것이 좋을까. 기치료에만 계속 의존하기보다는, 기가 약해져 다시 증상이 나타나지 않도록 수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김형동 교수는 “일부에서는 기치료를 특수한 초능력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수련을 꾸준히 하면 누구나 쉽게 배워 활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기”라고 말했다.

그는 또 “기치료, 기수련으로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관련 제도의 보완도 논의가 되어야 할 부분”이라며 “기치료를 새로운 치료법으로 인정해 많은 연구와 실험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기수련법을 쉽게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기수련을 할 때는 운동, 식사를 했을 때는 30분 정도 지나서 하는 것이 좋다. 또한 마음이 상하거나 감정이 격한 상태라면 진정된 후에 수련을 해야 한다.

또한 기치료의 효과를 너무 맹신하기보다는 병을 예방, 회복하고 면역력을 높이는 방법으로 활용하는 것이 안전하다. 바이러스성 질환이나 상처, 수술, 응급질환 등은 병원을 찾는다. 기치료를 하기 전에 믿을 만한 곳인지 신중하게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다.

송은숙 건강전문 프리랜서
도움말=홍익기수련회(대체의학연구원) 김형동 교수


 사례

“무기력한 근육에 기운이 돌더라”

50대 중반의 P 씨는 목뼈와 신경 사이에 석회화가 진행돼 통증으로 고생하다가 기치료에 관심을 가진 경우다. 오래전부터 뒷목이 뻐근한 느낌이었지만, 스트레스 때문이려니 생각하다 병원을 찾았다가 X-ray 촬영 후에 진단을 받았다. 증상이 심해지면 나중에는 신경이 눌려 마비가 오고 소화마저 안 된다고 했다.

진단을 받고서는 통증이 심할 때면 근육이완제를 처방받고 침, 뜨거운 찜질 등을 해주면 증상이 나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좋아진 것일 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통증에 시달려왔다.

주변에서 같은 증상으로 수술을 받는 후배를 봤지만 선뜻 수술 결심이 서지 않았다. 수술을 해도 몇 년이 지나면 재발이 잘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부터는 더 수술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역시 석회화 증상으로 고생하던 이가 2개월의 기치료로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홍익기수련회를 찾았다. 3주 정도 기치료와 수련을 한 지금은 통증이 완화돼 훨씬 견디기가 쉬워졌다. P 씨는 밤에 잠을 못 잘 정도의 통증이 완화되니, 앞으로 꾸준히 기치료와 수련을 해볼 생각이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유명시인의 딸인 K 씨는 근육염으로 홍익기수련회를 찾게 되었다. 올해 초부터 팔다리에 힘이 없고 무기력한 증상 때문에 병원에 갔던 그녀는 얼마 전 병원에서 근육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치료 중이다. 하지만 스테로이드 성분이 들어있는 약물치료의 부작용이 걱정돼 보완대체의학적인 방법을 병행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기치료와 기수련을 시작했다.

여섯 번 정도 기치료를 받은 K 씨는 현재, 예전보다 몸에 기운이 생기고 피로가 적어져 기수련을 계속하고 있다.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8/10/23, 9:29 PM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https://raven-deadwire.tistory.com/88 2/17

안녕하세요 레이븐입니다
해당 포스트는 제가 2018년 무렵까지 운영했던 네이버 블
로그의 포스트들을 아카이빙 하기 위해 옮겨온 글입니다
당시 네이버 블로그에서 사용하던 문체는 티스토리와는 달
리 존대 없는 문어체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아카이빙 과정
에서 별도의 수정 과정은 거치고 있지 않습니다
참고하시고 읽어주시길 바라며 혹여 네이버 블로그를 방
문하실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 네이버 블로그는 더 이상 운영하고 있지는 않으며 아카
이빙 된 글은 네이버 블로그에서 차례로 삭제할 예정입니

1 중국 신선설의 등장과 발전
신선설의 발상지는 중국의 산동성으로 알려져 있다
BLACKEST BLACKIST : VI VERI…
blog.naver.com
8/10/23, 9:29 PM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https://raven-deadwire.tistory.com/88 3/17

기원전 3세기 무렵 중국에서는 신선설이 생겨났다 이 신
선설은 중국 고대에 있었던 산악신앙山嶽信仰과 깊은
관계가 있다 여기에 중국 종교의 원초적 형태인 무술巫
術자연숭배 등이 혼합되어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방술方術이 생겨났다 이 방술
은 전국시대에 이미 성립되어 민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
다 방술을 행사하는 사람을 방사方士라고 하는데 방사
가 제왕과 밀접하게 된 것은 진시황秦始皇 때부터였
고 한무제漢武渧 때에는 제왕 측근에서 거의 떠나지 않
을 정도였으므로 방술은 상층사회에 굳게 뿌리 내리게 되
었다
한편 신선설이나 방술은 호소할 곳 없는 일반 백성들의 마
음까지 사로잡기에 이르러 종교적인 힘을 발휘하는 방향으
로 변천하였다 전한 말부터 전설의 임금인 황제黃帝와
노자老子가 초인적인 존재로 여겨지고 신선으로 꼽혀 황
로신앙黃老信仰이 대두하였다 방사들의 조작적인 선전
과 참위설讖緯說의 유행이 황로신앙을 가열시켰다 이러
한 황로신앙을 가미시킨 신선방술의 내용이 조정 확대되
고 신흥종교였던 불교의 영향을 받아 도교로 개괄되는 한
종교로 형태를 갖추어 나가게 되었다
2 도가사상과 도교의 구분
도교가 종교의 형태로 형성되기 이전에 이미 노자의 ≪도
덕경道德經≫과 ≪장자莊子≫≪열자列子≫ 등에
드러나 있는 도가사상은 존재하고 있었다 동서고금에 도
교와 도가사상을 혼동하는 예가 많다 도교와 도가사상은
초기 방술과 신선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갑골문 사진 제공 한국
경제신문
8/10/23, 9:29 PM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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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도교는 어디까지나 종교이므로 근
본적으로는 도가사상과 뚜렷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도교는 본래 피안彼岸의 관념이 의외로 희박하고 현세의
길복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기 때문에 종교로서의 이론을
보강할 필요가 생겼다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편으
로 도가의 사상이나 그 논리를 받아들이게 되어 도교와 도
가사상은 그 관계가 밀접해졌다 도가사상은 도교가 흡수
조절한 주요한 사상의 하나이며 본래부터 도교가 곧 도가
사상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도가사상은 도교가 그 사상
과 논리를 흡수한 이후에도 사상문학예술 등 각 방면에
작용하면서 독자적으로 전개되었다
3 종교로서 갖는 도교의 특징
도교는 4세기 이후 비로소 불교의 체제와 조직을 모방하
고 불법佛法의 전개방식 등을 받아 들여 교리의 체계화
와 종교체제의 정비를 꾀하였다 도교는 본래 자연발생적
인 종교였기 때문에 엄밀하게 따질 경우 교조敎祖라든
가 개산조開山祖라든가 하는 것을 밝혀낼 수는 없다 노
자를 교조로 내세우기도 하나 그것 역시 종교의 체제를 갖
추게 하려는 의식이 생겨난 뒤의 일이다
노장으로 대표되는 도가 사상과 구복적 성격의 도교는 구별되어야
한다
8/10/23, 9:29 PM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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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라는 종교의 성립과정과 그것이 목적하는 바를 요약해
보면 도교는 고대의 민간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신선설을
중심에 두고 거기에다 도가(道家)역리(易理)음양(陰陽)
오행(五行)참위(讖緯)의술(醫術)점성(占星) 등의 법술
과 무술적인 신앙을 보태어 그것을 불교의 체제와 조직을
본받아 뭉뚱그린 종교이다 도교는 불로장생을 주요 목적
으로 삼고 현세의 길복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도교는 유교와 불교는 물론 다른 신앙까지 큰 마찰없이 받
아 들여서 포괄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도교라는 명목으로 포괄되는 신앙이나 행사의 내
용이 매우 복잡해졌다 도교는 신선설과 연결되어 불로장
생을 이룩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게 됨에 따라 건강관리
를 중시하여 심리적으로는 사과신적신앙(司過神的信仰)
과 주술적인 방법이 도입되었고 물리적으로는 조식(調
息) 벽곡(辟穀) 도인(導引) 방중(房中) 등의 방법이 채
택되었다
여기서 질병치료에서 불로장생까지 연결되는 도교의학의
성립을 보게 되는데 그 극치가 금단(金丹)이다 그러나 금
단은 현실적으로는 생명을 잃게 하는 독극물일 경우가 대
부분이어서 그러한 위험을 극복하기 위하여 금단의 연조
(煉造)를 연금술 같은 물리화학적인 방술에서 끌어 내면서
수련적인 단학(丹學)으로 전개하여 도법을 닦는 의의와
결합시키는 데로 기울어졌다 이렇게 하여 도교의 금단도
(金丹道)는 연금술적인 외단(外丹)과 수련적인 내단(內
도교라는 종교는 결국 도가와 신선설 태극도설 등의 다양한 학풍에
온갖 구복적 요소들이 뭉탱이로있다가유링게슝된 형태라고 정의할
수 있다
8/10/23, 9:29 PM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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丹으로 크게 나누어졌고 결국은 내외단의 통섭統攝이
라는 방향으로 이론체계를 정립시켰다
4 도교의 세계관
도교는 신선설을 기조로 하고 있으므로 불로장생과 연결되
는 선단仙丹 불로초 영약靈藥 각 계층의 신선 초능
력이 따르는 각종 도술 천상과 지상의 다양한 선계 등 환
상적인 경지를 크게 개척해 놓았다
건강하게 장수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공통된 욕구이므
로 도교에서 개척한 불로장생과 연결되는 환상의 세계
가 허황되기는 하나 그 나름대로 위안과 희열을 가져다 주
었으므로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 있었다
도교에서는 천계가 욕계육천欲界六天 색계십팔천色界
十八天 무색계사천無色界四天 상사천上四天 또
는 사범천四梵天 삼청경三淸境 대라천大羅天 도
합 36천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최하위의 욕계육천
에 사는 사람도 수명이 1만 년이고 그 위의 색계 십팔천
의 사람은 수명이 1억만 년이며 무색계 사천에 사는 사람
은 수명이 억겁 년이다 상사천부터는 사람을 죽게 하는 삼
재三災가 없어서 죽음이 취소되고 그야말로 장생불사하
여 무량수를 누리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득도하여 신선이 되어 천계에 오르면 수명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라천에는 도교의 최고신인 원시천존元始天尊
이 있고 그 아래의 옥청玉淸청미천淸微天 원시천존元
始天尊 상청上淸우여천禹餘天 영보천존靈寶天尊 태
청太淸대적천大赤天 도덕천존道德天尊 세 군데로 이
루어진 삼청경에는 각각 중앙과 좌우의 세 궁전이 있으며
그 궁전에는 선왕仙王선공仙公선경仙卿선백仙
伯선대부仙大夫가 있어 현세의 궁정조직 같이 되어 있
한편 도교에서는 또 십주十洲 삼도三島 십대동천十
득도하여 선인신선이 되면 인간의 수명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
을 정도로 장수한다고 한다
8/10/23, 9:29 PM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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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洞天 삼십육동천三十六洞天 칠십이복지七十二福
地 등 지상에도 선진인仙眞人이 사는 동천복지로 불리
는 각종의 낙원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선진인이 사는 천지
간의 선계와 그 밖에 있는 속계가 있는데 선계와 속계 사
이에는 내왕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밖에 도교에서는 성수신앙星宿信仰을 받아 들여 북
극성北極星현천상제玄天上帝 북두성北斗星북두신
군北斗神君 남두성南斗星남극장생대제南極長生大
帝 문창성文昌星문창제군文昌帝君 삼태성三台星
등을 경배한다 한편 도교에서 받드는 신은 성황신城隍
神토지신삼관三官사어四御재신財神문신門
神조신竈神왕령관王靈官관제關帝낭낭娘娘용
왕팔선八仙여조呂祖마조媽祖 등 그 수효가 적지
않다
5 중국 도교 교단의 성립과 변천
1 원시 도교 교단
후한後漢 말년2세기에서 3세기 초에 걸친 시기에는 정
치의 난맥으로 혼란이 극심해지고 환관宦官의 횡포와 부
호들의 방종이 심해서 일반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허덕이
고 의지할 곳을 찾지 못했다 이러한 시대상을 배경으로
도교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태평도太平道와 오두미도
五斗米道라는 종교 집단이 생겨났다
kaka
NICE신용점수 나이스지키미
마음이 놓이는 마이데이터, 더 든든해진 신용점수 케어로
https://www.credit.co.kr
우길의 태평청령도를 이어받은 장각은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다 창
천이사 황천당립은 당연히 황사를 예견한 말은 아니다 
8/10/23, 9:29 PM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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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순제順帝 때 우길于吉이 ≪태평청령서太平淸領
書≫를 감득感得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종교집단을 만
들고 그 도서명道書名을 따서 태평도를 표방했다 우길
의 뒤를 이어 장각張角이 교주가 되어 태평도의 조직을
굳히고 도서道書부적符籍참회懺悔 등을 사용하여
시행한 질병치료의 방법이 주효해서 많은 도당을 얻어 왕
실을 타도하고 자기가 천하를 잡을 욕심으로 무장 봉기했
다 이른바 황건적黃巾賊의 난亂이다 장각이 전사한
후 태평도는 몰락해 버렸다
태평도보다는 좀 늦게 장릉張陵이 후한 영제靈帝 때에
오두미도를 시작했다 장릉은 만년에 유학을 버리고 장생
법을 배워 황제黃帝의 구정단법九鼎丹法을 터득했고
또 사천四川 학명산鶴鳴山에서 도서道書의 저술과
수도에 전념한 끝에 수많은 신이 강림해서 신출정일맹위법
新出正一盟威法을 그에게 전수했다는 것이다 장릉은
이 법으로 질병을 고쳐 주어 수많은 신도를 얻어 쌀과 비단
을 바치는 법을 정하고 신도를 통할하는 직책을 만들어 종
교집단을 이루었다
장릉의 손자 장노張魯가 오두미도를 계승하여 그 교법
과 조직을 완성시켜 한 왕국을 방불케 하는 조직화된 종교
집단을 성립시켰다 장노가 조부 장릉을 천사天師라 칭
해 오두미도를 천사도天師道라고도 불렀다 부父 장형
張衡을 사사嗣師 자신을 계사系師라 하여 조부손
이 법계法系를 계승한 것같이 말해 삼장三張으로 합칭
하기도 한다
장노가 조조曹操에게 굴복해 죽으면서 교세가 약해졌으
나 천사도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정일교正一敎의 전신으
로 도교 정통의 자리를 차지해 내려왔다 태평도와 오두미
태평청령도의 몰락하고 이후 촉한이 되는 한중 지역에서 장릉의 오
두미도가 성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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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내지 천사도는 부적과 도록道籙을 존중한다 하여 부
록파符籙派로 불리기도 한다
2 단정파
복용하면 불로장생하는 신선이 된다는 선단仙丹 또는 금
단金丹으로 불리는 영약靈藥의 연조煉造는 선진先
秦시대부터 전해지지만 후한 말기 오吳의 위백양魏伯
陽이 저술한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참동계는 금
단도金丹道:금단을 연조하는 방법를 천명한 대표적
인 도서道書로 받들어진다 위백양은 자기가 저술한 ≪
주역참동계≫의 방법에 따라 연조한 금단을 먹고 일단
은 죽었다가 되살아나 다시 약을 먹고 진인眞人이 된 것
으로 전해진다
금단 연조에 주력하는 이 계열의 도인道人들을 단정파
丹鼎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진晉의 갈홍葛洪이 저술
한 ≪포박자抱朴子≫ <금단>편에는 금단도가 구체적
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는 후한 말기의 좌원방左元放으
로부터 그의 종조從祖 갈선공葛仙公과 갈선공의 제
자 정군鄭君을 통해 전해진 ≪태청단경太淸丹經≫ 3
권 ≪구정단경九鼎丹經≫ 1권 ≪금액단경金液丹
經≫ 1권 및 구결口訣을 전수해서 금단도에 달통
할 수 있었다고 자술하였다
북송 초기의 장군방張君房의 ≪운급칠첨雲笈七籤≫
에도 금단의 연조 방법 등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
다 금단은 외물外物의 도움을 받아 불로장생을 기하는
것으로 곧 외단外丹인데 독성이 심한 광물의 합금으로
연조된 것이므로 복용하면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다 금단
단정파에서는 중국의 연금술이라 할 수 있는 연단술의 연구가 활
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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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후세의 도사들에게 전하여져 금단이 연조되기도 하였
으나 그 금단으로 황제들까지 목숨을 잃고는 하였다
3 도교 교학敎學의 개발
서진西晉과 동진東晉을 거쳐 남북조시대로 내려오
는 동안 천사도는 변화를 거듭해 가며 상층사회와 민간
에 두루 전파되어 신봉되었다 천사도에서는 진나라 때 ≪
상청경上淸經≫을 받드는 상청파上淸派가 생겨 전승
되어 내려와 남조송南朝宋의 도사인 육수정陸修靜
에 이르러 대량의 도경道經을 수집 정리하였고 배례拜
禮송경誦經사신思神의 세 가지 방법으로 수도하
여 마음을 닦고 행실을 깨끗이 하기를 강조하여 도교의 신
학적인 수준이 제고되기 시작하였다
상청파의 도법은 양대梁代로 내려와 도교학자이며 연단
과 의약에도 조예가 깊었던 도홍경陶弘景에게 전수되었
다 도교의 신학은 도홍경에 이르러 집대성되었고 그는 강
소江蘇의 모산茅山에 은거하여 육수정의 도경정리사
업을 크게 진전시키고 도교의 교학 체계와 금단도까지 정
비해서 모산종茅山宗 또는 모산파茅山派의 창시자가 되
었다
4 신천사도新天師道
한편 북조에서는 북위北魏의 도사인 구겸지寇謙之
가 신천사도를 내세워 도교를 철저하게 개혁하고 나섰
다 그는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부터 운중음송신과지계
雲中音誦新科之誡를 받았고 천사도 개혁의 사명이 부
여되었으며 거기다 천사의 지위가 수여되었다고 한다 신
천사도에서는 신선 설을 중심으로 불로장생을 목적으로 삼
고 복이服餌복기服氣도인벽곡 등 양생법을 채택하
였다 불교의 체제의식조직 등을 모방하고 유교의 예도
禮度를 강조했으며 청허淸虛 등을 높여 도가사상을 끌
어 들였고 노자를 도교의 시조 자리에 확고하게 앉혀 놓았
다 조미租米 전세錢稅와 방중술 같은 오두미도의 폐
단을 배제하여 청정한 도교를 확립하려고 했다 말하자
면 신천사도는 부록파와 단정파의 교법을 조정 융합하기
에 이른 것이다
구겸지는 최호崔浩의 힘을 얻어 북위 태무제太武帝의
귀의를 받고 도교를 국가적인 종교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신천사도의 단계에 와서 처음으로 조건을 갖춘 도교가 정
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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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수당隋唐 시대의 도교
수隋의 왕조도 도교 교학을 연구하는 현도관玄都觀
을 설치하고 ≪현도관일체경玄都觀一切經≫을 완성시
키는 등 도교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도교는 수를 거
쳐 당唐에 내려와 북조의 신천사도와 남조의 교학 체계
의 종합을 보게 되었다 이 때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도
사 왕원지王遠知와 반사정潘師正이 국가의 도교정책
을 그러한 방향으로 유도해 나갔다
당대에는 도교를 중요시하는 정책을 썼는데 그 밑바탕에
는 도교교단을 국가의 행정지배하에 예속시키기 위한 엄격
한 정책이 깔려 있었다 도교교단이 국가에 예속되어 1
만 5천이 넘는 도사가 양성되었으며 2천이 넘는 전국의 도
관道觀에 배속되어 주로 국가를 위해 양재기복禳災祈
福하는 재초齋醮를 거행하게 하였고 기타 도교의 행사
와 습속을 관장케 했다 또한 당실唐室의 조상으로 받드
는 노자老子에게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의 존호
를 올리고 노자의 ≪도덕경≫을 민가에 두루 비치시키
고 과거의 과목으로 넣었다
당대에는 도교를 연구하는 기관인 숭현학崇玄學을 설치
하여 도력道曆을 제정하기까지 하였다 민간에서 자연발
생적으로 생겨난 도교는 이렇게 해서 민간을 대상으로 하
는 종교적이며 사회적인 사명은 퇴색해 버리고 국가가 관
장하는 관방 도교官方道敎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당대
라고 해서 국가에 예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하는 도사
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안사란安史亂을 경계
로 해서 도교교단에 대한 당 왕조의 규제가 약화되면서 도
교는 다시 서민화의 현상을 다소간 드러낸다
중국 허난성의 형산 현도관 수 왕조 때는 도교의 교학 연구를 위한
기관으로서 현도관을 설치 운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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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말기에 국가 통제하의 도사가 아니고 도교에 지대
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종리권鍾離權과 여암呂嵒 두
사람이 있다 종리권의 자는 운방雲房으로 그에 관해서
는 한대漢代 이래로 생존했던 인물로 보는 전설까지 있
는데 그는 여러 가지 진결眞訣과 도법道法을 얻고 마
지막에는 공동산崆峒山에서 옥갑비결玉匣秘訣을 얻
어 진선眞仙이 되었다고 한다 종리권은 여암을 계도하
여 그를 도인道人으로 도화度化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
다 종리권은 신라의 유당학인留唐學人 승자혜僧慈
惠최승우崔承祐김가기金可記 세 사람을 종남산 광
법사終南山廣法寺에서 만나 많은 도서道書와 비결을
주고 내단수련을 위한 도법을 전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교에서는 종리권이 정양제군正陽帝君으로 받들어진
여암의 자는 동빈洞賓으로 종리권에 의해 도화되기는 하
였으나 다시 여러 가지 도법과 비결을 얻어 초능력을 행사
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특히 민간에서 많이 받들어졌
다 그는 순양연정경화부우제군純陽演正警化孚佑帝君
으로 받들어진다 이들은 수련적인 도교를 개발하여 전진
교全眞敎 등 후대에 생겨난 도교 유파의 북오조北五祖
로 추앙받으면서 조사祖師로 받들어지기까지 하였다 오
대五代의 도교는 서민화의 경향이 더욱 뚜렷해졌다
6 송원宋元의 도교
당대의 종리권과 여동빈은 팔선의 일원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특
히 여동빈은 상제와 미륵이 하나임을 주창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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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에도 진종眞宗과 휘종徽宗 등 도교를 좋아하는 임
금이 있어 도교는 국가의 비호를 받아 관방 도교의 색채
를 다분히 드러내기는 하였으나 당대唐代와는 상황이 달
라졌다 당실에서 노자를 숭상한 것과는 달리 송실에서
는 조신祖神 내지 수호신인 조현랑趙玄朗에게 호천옥
황대제昊天玉皇大帝로 존호를 올려 최고신의 호칭으
로 천존天尊 대신 옥황玉皇이 정착하게 된다
진종 때부터 전국 각지에 만수궁관萬壽宮觀을 설치시
켜 천자의 무병장수를 기원케 하고 각지의 도관에는 국가
에서 제거提擧를 파견하여 보호와 관리를 담당케 했
다 또한 ≪대송천궁보장大宋天宮寶藏≫과 ≪만수도장
萬壽道藏≫같은 대규모의 도교 일체경一切經의 편찬
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전해지지 않으나 대체의 내용은 장
군방의 ≪운급칠첨雲笈七簽≫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
북송의 진종과 휘종은 도교의 마니아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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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은 금金에 멸망하고 남송으로 들어가 국가는 극도로
쇠미해졌는데 이 시기에 정명도淨明道 태일교太一敎
진대도교眞大道敎 전진교全眞敎 무당도武堂道 등
새로운 도교 교파가 무성하게 생겨난다 이들 새로운 교파
들의 공통된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삼교혼합三敎混
合의 방향이다 원대元代에는 세조世祖가 천사도를
정일교正一敎로 개칭하면서 보호해 주었고 전진교도 번
성하기는 하였으나 그보다 앞서 원의 태종 10년1238에
태종太宗 어전에서 불교와의 교리 논쟁이 있은 뒤부터는
도교는 대체로 퇴색의 길을 걸었다
7 명청明淸의 도교
명태조明太祖는 즉위 후 곧 도교교단을 통제하는 현교원
玄敎院을 설치하여 도교를 엄격하게 통제하였고 다시
도록사道錄司로 개편하여 통제를 강화하였으며 각 지방
에 도기사道紀司를 두어 도교교단의 행정을 관할하게 하
였다 또한 도사의 최고 칭호인 천사天師라는 호를 천자
의 권위를 침범한다 하여 사용을 폐지하고 진인眞人으로
고쳐 쓰게 하였다 헌종憲宗 때에는 국가에서 공공연하
게 도사와 불승의 도첩度牒을 팔기 시작하여 도사와 불
승의 질적 저하를 초래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북송오자라 불리는 성리학의 대부들은 태극도설에
대한 정리로 정명도를 비롯한 원명청대의 도교에도 큰 영향을 주
게 되었다
좌 베이징에 위치한 백운관 우 타이완 먀오리 위치한 영동궁 각
각 전진교와 정일교의 대표 사찰이다 명대에는 도교를 전진교와 정
일교의 두 종파로 통합하였는데 전진교는 명조에서 쇠퇴하고 정일
교가 자리하였으나 청대에는 정일교마저 쇠퇴하고 도교는 민간 신
앙으로 전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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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편으로는 명조에서 정명도와 정일교의 지도자들
을 도교교단의 최고 행정관직인 우정일右正一이나 좌정
일左正一에 임명하는 등 도교교단의 세력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명실에서는 화북華北 지방의 도교를 전진교가
강남 지방을 정일교가 각각 나눠 맡게 하는 것을 기본 방침
으로 세웠으나 실제로 전진교의 세력은 극히 약화되고 정
일교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정통正統 10년1445에 ≪정통도장正統道藏≫
5305권과 만력萬曆 35년1601에 ≪속장 續藏≫
180권을 편찬 간행하여 유일한 도교 일체경一切經으로
오늘날까지 남게 되었다 청대에 내려와서는 정일교에 대
한 청실의 태도도 냉각되고 전진교도 금단도에 기울어지는
등 도교 교학의 지도적인 지위를 잃게 되었다 청대의 도교
는 대체로 삼교 혼합의 방향이 현저해지고 서민화의 경향
이 실질적으로 뚜렷해진 점을 특색으로 들 수 있다
8 근현대의 도교
근현대에 들어 공산당共産黨과 국민당國民黨의 내전
으로 도교의 역사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 대륙을 차
지한 공산당은 공산주의 이념에 기초해 종교를 인정하
지 않았으며 문화대혁명을 통한 종교 탄압을 자행했
다 이 와중에 도사들은 승려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수가 강
제 환속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고 많은 도관과 절이 문을 닫
았다 가까스로 연명한 사람들은 대만 동남아 등지의 화
교 거주 지역으로 도망치거나 산 속으로 숨어들어 간신
히 명맥만을 유지하였다 때문에 지금도 대만이나 화교 거
주 지역들에서는 이때 도망친 사람들을 통해 도교를 계승
하며 민간 신앙을 발전시켜왔다
이후 공산당이 전통 문화에 대한 연구 발전 및 지원 정책
을 펴면서 문화대혁명 시기 사라진 도관들을 재건되었
고 도피했던 도사들이 돌아왔다 하지만 중국은 공산당
이 종교의 통제와 관리를 하는 나라이기에 중국의 도교
는 학술적인 부분이나 양생養生과 관련된 기氣 수
련 무술만이 발전하였다
대만 및 동남아로 도망친 쪽도 그다지 상황이 좋지는 않았
다 자체적인 교단 교리 경전을 갖추고는 있으나 원시 도
교 시절의 무축적巫祝的 기복신앙적祈福信仰的 성격
이 다시 대두되면서 주술적인 민간 신앙 정도로 취급당하
였다 특히 동남아의 경우 상좌부上座部 불교가 발달
한 지역이다 보니 도교도 화교 거주지 중심으로 퍼지게 되
었다 
8/10/23, 9:29 PM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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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구보 노리따다, 최준식 옮김, 『도교사』, 분도출판
사, 201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집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1991

한국종교학회 학술회의 < 교화 < 뉴스 < 기사본문 - 원불교신문

한국종교학회 학술회의 < 교화 < 뉴스 < 기사본문 - 원불교신문



한국종교학회 학술회의
기자명 원불교신문
입력 1988.05.26


원광대서 열려 금년도 한국종교학회(회장 유병덕) 춘계학술발표회가 14일 원광대 대학법당에서 종교학자 종교학도 등 1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동서종교사상의 교섭과 현대문화」를 주제로 열렷다.
양현수 교무(원광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학술발표회에는 유병덕(기현ㆍ원광대 대학원장)회장의 인사말과 기정용 원광대 총장의 환영사에 이어 
김영호 교수(인하대)의 「서양인들의 불교에의 접근, 그 방법과 내용」, 
이은선 교수(세종대)의「왕양명과 페스탈로치의 인식론적 존
김기원 교무(원광대 교수)의 「권극중 내단학의 사상사적 의의」등의 주제 발표가 있었다.
주제발표를 마친 후에는 윤이흡 교수 (서울대)의 사회로 종합질의토론을 가졌으며, 이어 김정용 총장의 초청만찬이 있었다.
한편 15일에는 미륵사지 (익산군 소재) 탐방과 동학 혁명기념관 및 전봉준 동상(정읍 황토현 소재) 참배에 이어 신영길 원광대 총동창회장의 초청오찬이 정주시내에서 있었다.

왜 종교인가? / 최준식 < 종교학 다시보기 2008 불교평론

왜 종교인가? / 최준식 < 종교학 다시보기 < 기획시리즈 < 기사본문 - 불교평론

왜 종교인가? / 최준식
기자명 최준식   입력 2008.11.20 


1. 왜 종교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종교의 정의와 특질에 대해 보아왔다. 이것은 이른바 종교학이라는 학문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종교학은 주로 위에서 본 종교적 현상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공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종교적인 현상이 이렇다면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하는 외침이 들려오는 것 같다. 종교에는 인간의 다른 부분의 삶 속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종교가 대관절 무엇이기에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면서 신앙을 지키고, 동북아의 불교도들은 목숨을 내놓고 인도 순례길을 갔던 것일까와 같은 질문에 선뜻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다. 또 다른 질문들도 이어진다. 지구상에는 실로 다양한 종교 혹은 종교적 현상이 있는데 이들 현상들은 전부 다른 것일까? 아니면 그 다양함을 꿰뚫을 수 있는 어떤 원리나 공통점 같은 것은 없는 것일까? 도대체 그 수많은 종교들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등등의 질문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더 구체적으로 질문을 던지면 이렇다. 나는 종교를 처음 공부할 때 기독교와 같은 유일신론 종교와 불교와 같은 비유일신론 종교에서 주장하는 것 때문에 작지 않은 혼란에 빠졌었다. 그 이유야 자명하다. 기독교에서는 신이 있다고 주장하고 불교에서는 대체로 그런 신은 없다고 주장하니 말이다. 상식적으로 말하면 이 두 주장은 전혀 상반된 것이 되니 하나가 맞으면 다른 하나는 틀린 게 된다. 따라서 신은 있든지 없든지 둘 중에 한 가지 경우에만 해당될 수 있다.

이런 정황이 나에게는 여간 큰 일이 아니었다. 불교나 기독교(그리고 이슬람 등)가 생긴 이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두 종교를 신봉했을 터인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반은 거짓을 믿어왔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붓다나 예수 같은 성자들이 전혀 다른 말을 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성현들에게는 일호의 거짓도 있을 수 없는 법인데 이 두 분이 상반된 주장을 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런 데도 그 종교 안에서 별 생각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대다수의 신자들이 이상하게 보였다. 이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교리만이 확실한 진리라고 믿고 다른 사람들의 믿음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예를 들면 기독교 신자들은 하느(나)님의 존재에 대해 전혀 의심을 하지 않는 반면 불교도들은 기독교의 신은 육도 윤회에서 천신 급에 해당하는, 다시 말해 윤회의 굴레를 아직 벗어나지 못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했다.

그런가 하면 지구상에는 종교가 부지기수로 많다. 따라서 교리도 무척 다양하다. 기독교에만 해도 교파가 2만 개는 더 된다고 하니 그 다양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 수많은 종교들은 도대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 것일까? 전부 나름대로의 교리만 주장하는 것이고 거기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것일까? 그러나 그런 종교를 만든 우리들은 다 같은 인간이다.

우리가 모두 인간이라면 우리에게는 어떤 공통된 특질 혹은 조건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공통된 특질 때문에 종교라는 매우 독특한 현상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런데 종교적 현상이 이같이 다양한 것은 그 종교가 생겨난 각 지역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일 것이다. 모든 표현은 문화적인 것이고, 문화적이라는 것은 특수한 것이기 때문에 다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런 다양한 종교적 현상 밑에 흐르고 있는 원리에 대해서 보기로 한다. 다시 말해 인류에게 종교라는 현상이 왜 생긴 것인지, 혹은 인간의 어떤 조건 때문에 종교가 생겨난 것인지와 같은 문제에 대해 보기로 하자.

1) 인류에게 종교는 무엇일까

-왜 인류 역사에는 종교가 없었던 적이 없었을까?

확실하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인류에게는 종교나 그와 비슷한 현상이 없었던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선사 시대는 기록이 없어서 자세한 정황을 알 길이 없다. 다만 남아있는 유물을 통해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종교 의례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보고된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아마 네안데르탈인과 관계된 것일 것이다. 현재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네안데르탈인은 현생 인류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에게서도 종교의례가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유적 중에 어린 아이의 시신을 놓은 자리가 있고 그 시신을 중심으로 돌을 원이 되게끔 둥글게 나열해 놓은 것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꽃가루 같은 것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아마 그곳에는 꽃을 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추단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아마 죽은 아이에 대한 일종의 사령제(死靈祭)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 인류도 죽음에 대해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세계관 속에서 죽은 이에 대해 애도하고 장례를 치러준 것으로 보인다. 죽음에 대해 일정한 의식을 행하는 것은 인간 고유의 독특한 행위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번도 어떤 동물이 동료의 시체 앞에서 어떤 식으로든 의례를 행했다는 보고를 들은 적이 없다. 죽음이라는 것은 종교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심도있게 논의하겠지만 여기서는 그 많은 동물 가운데 인간만이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사실만 밝히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비슷한 정황은 우리나라에서도 발견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시대가 다소 밑으로 내려와 청동기 시대의 유적 가운데 종교와 관련된 것들이 꽤 보인다. 지척에 널려 있는 고인돌{{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고 전 세계 고인돌의 40%에 달하고 있다.}}은 말할 것도 없고 울주에서 발견된 반구대 유적도 종교·주술적인 사고를 보여준다.

이 유적에는 고래나 사슴, 물고기, 호랑이 등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 조각이라는 행위를 통해 이런 동물들이 많이 잡혔으면 하는 바람을 표시한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중론이다. 이른바 풍요주술이라고도 하고 종교인류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방 주술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이와 같은 자연에 대한 주술적 행위는 전형적인 종교적 행위이다. 유례를 다른 동물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 청동기 시대는 제정일치의 사회이다. 이것은 이미 종교가 일상 속에 깊숙이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당시에는 아마도 꽤나 주술적이었을 샤머니즘이 주된 종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류의 다양한 종교 행태는 대체로 이 '원시적인' 샤머니즘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 다음을 보면 어떤 인류 사회이든 종교적인 요소들이 없는 때가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 대종교 전통이라 할 수 있는 불교(힌두교), 유대·기독(이슬람)교, 유교 등이 나타나면서부터는 체제 종교 시대를 맞이한다. 불교나 기독교 혹은 이슬람교가 이 세계를 재패한 뒤에는 전 세계적으로 명멸했던 수많은 국가 가운데 국교로서 종교를 표방하지 않은 나라를 발견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 되었다. 굳이 예외를 찾아본다면 현대에 들어와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소련이나 동구 같은 나라들밖에 없을지 모른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어느 정도 보았으니 여기서는 약술(略述)하도록 하자. 공산주의를 신봉하던 나라에서 종교가 없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마르크스가 종교에 대해 말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주장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이 말 때문에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사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세속적인 시각에서는 맑시즘과 종교가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앞에서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그 내부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종교, 특히 기독교와 맑시즘은 서로가 그렇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 중에서도 가장 닮은 점은 교조적인 면이다.

기독교가 약 이천 년 동안 '기독교 외에는 진리가 없다'고 주장했듯이 맑시즘에서도 '맑시즘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배교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이 두 집단에서는 아주 강한 태도로 응징하곤 했다. 엄청난 용기가 없다면 기독교 집단이나 맑시스트들에게서 이탈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또 기독교에서 최후의 심판이 끝나고 천년왕국이 도래하는 것처럼 맑시즘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끝나고 유토피아가 오는 것도 구조 상 너무 닮았다. 그래서 맑시즘이나 공산주의를 은밀한(covert) 종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공산주의가 종교화 되는 가장 적나라한 예를 우리는 북한의 김일성 우상 숭배에서 찾을 수 있다. 북한은 다른 공산주의 국가와 달리 종교에 대해서 철저한 탄압으로 일관한 것으로 유명하다. 샤머니즘은 거의 궤멸되었고 교회나 절들도 과시용으로 한두 개 남아 있을 뿐이지 실제로 신앙에 사용되는 종교시설은 하나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런 북한이 사실은 김일성에 대한 숭배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국가라고 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한참 앞에서 이미 자세하게 보았는데, 이 관점에서 보면 북한은 김일성 유일신 숭배 국가 이외에 다르게 보일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죽은 김일성이 부활해 달에서 유훈통치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종교이지 세속적인 정치 형태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학자들이 북한 정치를 이해하려고 할 때 그들의 이론으로 잘 설명되지 않는 것은 북한이 종교국가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슷한 맥락에서 북한을 신흥종교 집단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볼 때 벌써 망했어야 할 국가가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은 북한이 종교 집단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괴이한 신흥종교 집단이 그 어불성설의 교리나 마수적인 행태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유지되는 것을 보고 기이해 하는데 북한도 꼭 그런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를 가장 억압했으면서 사실은 종교국가 그 자체가 된 북한의 현실은 아이러니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보면 인류사에는 종교가 없었던 때가 한 번도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인류사에는 종교나 혹은 그 유사 현상이 없는 때가 없었던 것일까? 인간의 어떤 조건이 종교적인 행위를 하게 만들었을까? 또 동물에게서는 왜 종교와 비슷한 현상이나 행태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일까? 동물학자들은 동물도 마음이 있고 지능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런 동물들이 왜 종교적인 행위는 전혀 하지 않는 것일까? 동물과 인간 사이에 있는 어떤 차이점이 인간으로 하여금 종교 현상을 만들게 했을까?

아니, 동물과 인간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기나 하는 걸까? 만일 있다면 그것은 질적인 차이일까(different in kind) 아니면 정도의 차이(different in degree)에 불과한 것일까? 이런 여러 질문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한꺼번에 다 답할 수는 없다. 우선 도대체 종교는 인간의 어떤 부분을 다루기에 인류와 역사를 같이 했을까 하는 질문부터 접근해보자.

2) 종교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분석과 그 해결책을 제시

앞에서 우리는 종교의 정의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지만 한 마디로 종교를 표현한다면 어떤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릴까? 인간이 만들어낸 단어 가운데 종교와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는 아마도 '궁극적(ultimate)'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총체적인 삶 가운데 종교가 담당하는 부분은 인간이 지닌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는 여러 국면이 있다. 먹고 배설하고 성관계를 하는 일차적인 것부터 예술과 같은 고도의 추상적인 행위까지 수많은 국면이 우리의 삶에는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이 먹고 자고 옷을 입고 운동을 하는 따위의 일상적인 행위를 놓고 궁극적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 것들은 일차적인 것이라 다른 동물들의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런 기초적인 조건이 충족되면 삶에서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인간의 죽음과 죽음에 대해 갖는 공포
이와 같이 의미를 찾기 시작하다 인간들은 어떤 한계점에 다다른 자신을 발견한다. 인간의 유한성을 여실히 느끼는 국면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이 국면이 과연 무엇일까? 여기에서 인간은 자신의 궁극적인 한계에 다다른다. 이것은 바로 어느 인간이든 자신이 죽는다는 절대적 명제에 다다른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죽어야 한다는 것은 새삼스런 명제는 아니지만 어떤 인간이든 죽음 앞에서는 절대적인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권세가 높은들, 또 아무리 돈이 많은들, 아무리 명예가 많은들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의미를 잃어버린다. 돈이 아무리 많은들 죽은 뒤에 십 원 한 장 갖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땅이 아무리 많은들 자기 땅 가운데 한 평이라도 짊어지고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죽음과 관련해서 인간이 부닥쳐야 하는 가장 큰 문제점은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불안과 공포에 직면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에 비하면 그 어떤 것도 별 것 아닐 수 있다. 아니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간이 겪는 모든 공포의 밑바닥에서 근본 공포로서 도사리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아무리 담대한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줄 몰라 한다. 밤길에 산에서 호랑이를 만난 사람은 저도 모르게 오줌을 싸고 다리에 힘이 풀린 채로 공포에 질려 주저앉아 버린다고 한다. 자율 신경에 대한 통제를 잃어버린 것인데 인간이 이렇게까지 되는 것은 자기 제어능력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직접 체험할 수는 없지만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소설가였던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보면 전쟁터에는 신병들만 걸리는 정신병이 있다고 한다. 신병들은 치열한 격전상황에 겁에 질린 나머지 그 공포를 참지 못하고 안전한 참호에서 뛰쳐나간다는 것이다. 레마르크는 그 다음의 처절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뛰쳐나가자마자 날아오는 포탄에 맞은 신병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서 뒤에 있는 큰 바위에 흩뿌려졌다. 바위 위에는 신병의 몸에서 나온 피와 살과 뼈가 뒤섞여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신병들에게 죽음의 공포는 그렇게도 컸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최근의 영화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그것인데, 이 영화는 다른 것은 몰라도 앞부분에서 묘사하고 있는 상륙작전의 극사실성 때문에 지금까지 나온 전쟁 영화 가운데서 아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모선에서 수륙 양용선으로 갈아탄 병사들은 1-2분 뒤면 해안에 도착해 적군의 기관단총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

병사들은 '1-2분 뒤면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다. 실제로 해안에 도착해 배의 문이 열리자마자 병사들은 총탄에 픽픽 쓰러져 간다. 이때부터 스필버그의 생생한 촬영이 시작되는데 정작 우리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배안에서의 병사들의 태도이다.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병사 가운데 어떤 이는 자기도 모르게 오줌을 싸고 어떤 이는 심한 구토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연신 뭔가를 외우면서 기도를 한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이다지도 막대한 것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왜 그리도 클까?
기독교의 《신약》에서는 "욕심이 죄를 낳고 죄는 다시 사망을 낳는다"고 말하면서 죽음이 인간의 부정적인 성향 때문에 초래되는 두려운 결과처럼 묘사하고 있다(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죽음이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라고 하면서 즐겁게 받아들이자고 한다). 죽음은 이같이 대부분의 종교전통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인간이 죽음을 소스라치게 두려워하는 이유는 대체로 세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이유가 인간을 가장 두렵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죽은 후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멀쩡하게 여기 있는 내가 (조금 있으면) 더 이상 여기에 없을 것이라는 데에 대한 두려움은 상상을 절한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죽을 것이라는 확실한 생각을 죽을 때까지도 하지 않는다. 머리로는 우리가 모두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나만은 죽지 않고 오래 살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더 이상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관성처럼 나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가볍게 믿어버리고 만다. 그런 까닭에 내 존재가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절박한 심정이 없다. 그러나 실제로 죽음에 맞부딪치면 어마어마한 공포에 어쩔 줄 몰라 한다. 내가 없어지는 게 너무나 두렵고 허망하다. 내가 없으니 이 세상도 아무 의미가 없다. 또 이 세상은 내가 없어도 아무 문제없이 잘 굴러갈 것을 생각하면 나라는 존재에 대한 허탈감도 든다. 어찌 됐든 이와 같이 내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공포를 가져온다.

두 번째는 죽을 때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을 해야 되기 때문에 고통스럽고 두렵다. 가족처럼 항상 함께 지내왔던 중요한 타자들과 헤어져 나 혼자만 떠나니 그 슬픔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이별은 나중에 다시 만날 기약이 있어도 슬픈 것인데 죽음으로 갈라지는 이별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사지(死地)로 가는 것이니 그 공포와 비통함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나의 쉼터가 되고 의지처가 됐던 가족이나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자신의 기반이 없어지는 것이 되니 얼마나 두려운 체험이겠는가.

이러한 고통은 바로 세 번째 이유로 연결된다. 세 번째 두려움은 죽은 다음의 세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상황에서 공포를 느낀다. 그런 것 가운데 자기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이나 사물에 대해 갖는 공포는 대단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본성상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신의 인식 체계에 구분 배치해놓는데, 그 체계 안에 들어있지 않은 것을 발견하면 매우 큰 공포를 느낀다. 우리가 UFO나 귀신과 같은 것에 공포를 느끼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런 사물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은 뒤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에 죽은 뒤의 세계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니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가 체험한 것이지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기 곤란하다.

따라서 죽은 뒤의 세계는 우리에게는 완전히 미지이자 무지의 세계이다. 혼자 길을 떠나는 것도 고통스럽고 무서운데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니 그 고통과 공포는 몇 배에 이르게 될 것이다. 미지의 세계로 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울 것인가 하는 것은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전 정보도 없이 아마존의 정글 한 가운데에 떨어졌다고 생각해보자.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어디인지도 전혀 모른다. 그때 느끼는 공포는 굳이 말로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바다에서 표류되어 혼자만 남은 사람은 굶주림보다는 외롭고 두려운 것 때문에 빨리 죽는다고 한다. 그만큼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가 큰 것이다.

죽음은 일단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문제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인간들에게 죽음이 얼마나 큰 문제인가를 보았다. 너무 큰 문제이기 때문에 '죽음은 인간의 궁극적 문제'라는 명제가 가능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소제목을 '일단은' 죽음이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라고 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물론 죽음이 인간의 절체절명의 한계 상황인 것은 분명하지만 죽음이 그렇게 인식되게 되는 배경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정말 궁극적인 문제는 인간만이 죽음을 인식할 수 있는 사고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종교를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나중에 상세하게 다루게 된다.

죽음이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라는 것은 여러 종교가들의 체험담에서 귀동냥할 수 있다. 나는 그 대표적인 예로 구한말의 거승이자 괴승이었던 경허의 경우를 들고 싶다. 경허는 본격적으로 참선을 수련하기 전에는 유명한 강사였다고 한다. 《화엄경》 같은 경만을 강의하던 강사였던 것이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역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나간 어떤 마을에 들르게 되었다. 그때 그는 죽음의 그림자가 휩쓸고 간 적막한 마을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죽음이라는 절박한 명제에 부딪히게 된다. 죽음이라는 절대 허무와 상봉한 것이다. 그는 이 죽음이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삶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그때까지 가르치던 경전을 다 버린다. 그리고 용맹정진을 하는 맹렬한 참선 수행으로 들어가게 된다. 물론 그 다음 이야기야 깨닫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우리의 관심은 경허가 부딪힌 문제에 있다. 종교학에서는 이런 상황에 대해 '경허가 궁극적 관심에 걸렸다'라고 표현한다. 이때 말하는 궁극적 관심이란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를 뜻한다.

궁극적 관심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말 그대로 그야말로 인생에서 궁극적인 문제로 '사람은 왜 살아야 하나?', 혹은 비슷한 질문이지만 '삶의 궁극적 의미는 무엇인가?', 혹은 '나는 누구인가?', '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등등의 문제를 말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평소에는 이런 문제에 잘 부딪히지 않는다.

내면적으로는 무의식중에 인지하고 있을지 몰라도 대부분은 일상생활 속에서 바쁘게 움직이면서 애써 이런 궁극적인 문제를 외면한다. 이렇게 외면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보통 사람들이 성정적(性情的)으로 별로 예민하지 않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삶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은 감성이나 이성이 매우 예민한 사람들만이 던질 수 있다. 하루하루를 대충 사는 사람들에게는 들지 않는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이 이와 같은 질문을 외면하는 그 다음 이유는 이런 질문이란 결코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침잠하지 않는 것이다. 대부분의 세속적인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몰두하는 것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태도를 보인다. 풀리지 않는 문제에 천착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 문제가 갖고 있는 심각성도 사람들로 하여금 이 문제를 외면하게 만든다.

이런 문제는 일단 봉착하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너무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출가라도 단행해야 한다. 그런데 일상적인 삶을 살다가 출가하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정리하고 처리할 게 너무 많다. 이런 귀찮은 일을 하느니 차라리 이 문제를 외면하고 모르는 체 하면서 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다. 대강 이런 이유로 인해 사람들은 대부분 궁극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극소수의 인류만이 이 문제를 천착한다.

이런 상황에 대해 절묘하게 묘사해 놓은 주장이 있다. 그런데 그 주장자는 동양종교 전공자가 아니라 서양 기독교 신학 전공자라 관심을 끈다. 주인공은 20 세기 최고의 신학자인 폴 틸리히. 틸리히는 그의 저서 『신앙의 역학(Dynamics of Faith)』에서 믿음에 대해 대단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보통 기독교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신의 아들인 예수가 구세주임을 믿고 그가 우리 죄를 대속했다는 것을 믿으며 그 때문에 죄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틸리히는 이런 신앙의 정의를 깨끗이 날려 보낸다. 그에 의하면 믿음이란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궁극적인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이다.{{ 생생함을 살리기 위해 원문을 그대로 옮겨보자. "Faith is not a belief in something, but a kind of state, being grasped by an ultimate concern."}}

그러니까 예수가 구세주라느니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에 사로잡힌 상태가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 정의는 불교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 붓다가 출가를 단행한 것도 바로 이 궁극적인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죽음과 더불어 궁극적인 문제가 되는 삶-악과 고통의 문제와 함께
죽음과 삶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관계이다. 따라서 죽음이 문제가 된다면 삶도 당연히 문제가 된다. 죽음의 문제는 앞에서 본 것처럼 죽음 뒤의 세계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공포에서 비롯된다. 한 마디로 얘기해서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관심이다.

그런데 우리의 오감이나 이성의 범위 내에서는 죽은 뒤의 세계에 대해 알 수 없다. 그래서 그 문제를 일단 접어둘 수밖에 없다. 그 다음 문제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삶은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와 같은 문제이다. 내가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데, 이 내가 대관절 어디서 왔는가 하는 문제 역시 매우 궁극적인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질문들이 궁극적이기는 하지만 도저히 답을 구할 수가 없는 문제들이라는 것이다. 죽음 뒤의 삶에 대해서 모르듯 삶 이전의 삶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다. 결국 우리는 생전(生前)과 생후(生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이제 남은 것은 '사는 동안'에 관한 것이다.

사는 동안에도 우리는 궁극적인 문제를 지나칠 수 없다. 사는 동안에 우리에게 계속해서 던져지는 질문은 '왜 사는가?'와 같은 의문일 것이다. 내가 살긴 살고 있는데 우연히 부모들의 성관계로 인해 내가 태어난 것인지 등부터 내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또 나는 왜 금생에 이런 부모 밑에 태어났는지{{ 어떤 부모 밑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그 개인의 행불행이 결정되기 때문에 부모와의 인연 문제는 개인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등등 자신의 삶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즉 삶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선불교에서 유명한 화두인 '부모에게서 나기 전의 나의 참모습이 무엇인가'와 같은 것도 사실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묻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의문도 죽음과 삶의 문제처럼 답을 얻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와락 달려들어서 모든 것을 걸고 진력(盡力)을 해도 답을 얻을까 말까 하는 그런 난해한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는 또 유예적인 태도가 된다. 종교적인 문제는 이래서 힘들다.

그런데 삶에는 종교가 아니면 어느 정도라도 설명을 해줄 수 없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바로 악과 고통의 문제이다. 우리의 삶에서 악과 고통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이다. 우선 이 세계에는 어찌 됐든 악이라 부를 수 있는 부정적인 힘이나 사건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악으로서, 서로 간에 미움이나 탐욕으로 점철되다 급기야는 서로를 살육하고 가진 것을 뺏고 뺏기는 전쟁을 들 수 있겠다.

이런 악의 문제에 대해 근원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 역시 종교의 할 일이다. 악은 시초에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에 대한 의문이야말로 종교가 아니면 대답을 시도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 모든 종교들이 설명을 시도하지만 그리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가장 문제가 많은 종교는 기독교 같은 유신론적인 종교들일 것이다. 이들의 교리에 의하면 이 세상은 절대적 선의 입장에 선 신이 창조주로서 창조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튀어나온다. 절대적으로 선한 신이 창조한 이 세상은 왜 이리도 철저한 악이 만연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유대·기독교 전통에서는 에덴동산의 신화로 설명하려 한다.

이 신화에서는 세상에 악이 생기게 된 원인을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이브가 신에게 불복종한 데에서 찾는다. 원래는 신과 함께 최고의 상태에 있었지만 인간이 자유의지로 신께 불충해 유토피아에서 쫓겨나서 고통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른바 원죄론이다. 이 신화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통찰력이 넘치는 신화인데 보다 확실한 분석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다만 여기서는 이런 신화 역시 종교가 아니고서는 발견할 수 없다는 점만 지적하자. 이런 설명은 종교에서만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실 불교도 이 문제에서는 그리 자유롭지는 않다. 불교(그리고 힌두교)에서는 악의 근원을 보통 무명으로 돌린다. 우리 중생들은 이 무명만 제거하면 바로 성불이다. 우리가 부처가 못되는 것은 이 무명 때문이다. 이 무명 때문에 욕심이 생기고 착심이 생긴다. 장애가 생기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설명은 좋은데 설명이 잘 안 되는 부분은 이 악과 고통의 근원인 무명이 어떻게 생겨났느냐이다. 불교의 근본적인 교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우리 중생들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불성에는 무명이 있을 수 없다. 무명이 있으면 불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무명에 휩싸여 있다. 그렇다면 이 무명은 어디서 온 것일까? 불성에는 무명이 없다고 했는데 이 무명이 생긴 것이다. 이것을 선불교에서는 한 생각이 홀연히 생겼다고 표현하는데 그 다음 질문은 그럼 그 한 생각은 어디서 생겨났느냐는 것이다. 결국 이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된다.

유교의 경우는 더 열악하다. 유교-공맹이 중심이 된 '원시' 유교-에서는 그다지 악이나 고통의 문제에 관심을 둔 것 같지 않다. 인간이 왜 악해지느냐에 대해 공자는 별 언급이 없었고 맹자에 와서야 인간은 처해진 환경 때문에 악해진다고 주장한다. 이런 설명은 너무나 일차원적이라 깊이를 별로 느낄 수 없다. 한 마디로 인간의 악이나 고통의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책에서 언급했지만 중국인들은 인간의 깊은 심성이나 내세 같은 종교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게 천착하지 못하다가 불교가 들어온 다음에야 궁구(窮究)하기 시작한다. 사정이 어찌됐든 악의 문제는 종교에서 최고의 난제임에 틀림없다.

이 악의 문제와 더불어 난제 중에 난제로 꼽히는 것은 인간이 겪는 고통에 대한 문제이다. 우리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에 예기치 않게 많은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런데 어떤 고통은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반면 어떤 고통은 너무 우연적이라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예기치 않은 사건은 이런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다. 어떤 남자 대학생이 지방 도시로 답사를 갔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려고 다방에 갔다 마침 탈영병이 들어와 인질로 잡혀있다 피살되었다. 이 사건은 우연의 연속이라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가 그 다방에 들어가서 인질범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는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매일 다니던 다방도 아니고 답사 갔다 우연히 들렀던 다방인데, 왜 하필이면 그때 탈영병이 그 다방에 들어왔느냐는 것이다. 또 들어와도 잘 해결될 수도 있었는데 돌발적으로 죽게 되었다. 이런 사건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부모는 이 고통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다.

이럴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생기는가?' 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은 아들이 예기치 않게 일찍 죽어서 큰 고통을 받을 정도로 죄를 많이 지은 것 같지 않은데 왜 이런 일이 생겼냐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사건을 어떤 식으로든 합리화시키고 슬픔에 싸인 당사자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것은 종교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 사회의 다른 부문, 즉 정치나 경제 등으로는 결코 위안을 주지 못한다. 슬픔에 싸인 부모에게 군대 체제가 잘못 됐다든가 경찰의 테러 대응 태세가 잘못됐다고 말한들 통할 리가 없다.

이런 경우에 종교에서는 그들의 종교 전통에 맞는 설명을 제시한다. 가령 기독교 같은 유신론적인 종교에서는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 우리들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든가, 신께서 그 아들을 더 중한 데에 쓰실 일이 있어 일찍 불러갔다느니 하는 설명을 제시한다. 불교 같은 종교에서는 업보설의 챔피언답게 업보이니 받아들이고 망자의 극락 천도를 빌자고 위로할 것이다. 그런데 각 종교가 제시하는 이런 설명들은 상식적으로는 전혀 검증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종교의 신자들은 그런 설명을 받아들이는 데에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1980년대 초반에 유대교의 랍비였던 해롤드 쿠스너가 쓴 『착한 사람이 왜 고통을 받습니까(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라는 책을 거론할 만하다. 쿠스너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이 아들이 조로증(早老症)에 걸리게 된다. 조로증은 말 그대로 남들보다 나이를 훨씬 일찍 먹는 병이라 쿠스너의 아들은 16세 때 70세 노인이 되어 죽는다. 이 아들을 보면서 쿠스너는 처음에는 아주 괴로워하면서 "왜 나한테 이런 고통이 생기는가?"라고 자문했다.

자신이 그때까지 살면서 유대교를 통해-직접적으로는 경전이나 선현들을 통해- 그에게 계시됐던 신의 말씀을 어긴 적이 없고 항상 윤리적으로 살았는데 왜 이런 참아내기 힘든 고통이 자기에게 생겼는가 하고 되물었다. 한동안 괴로워하던 그는 결국 자신의 질문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왜 내가(Why me)'라는 질문은 사건의 해결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대신 그가 해결책으로 생각해낸 것은 우선은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신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도 이 경우에는 무력하다. 그러나 그 다음에 우리는 신께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다. "하느님, 저에게는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너무 괴롭기 때문에 이제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이것은 이미 일어난, 다시 말해 바꿀 수 없는 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신과의 대화를 통해 시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정리한다면, 이런 불가항력적인 고통스러운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는 아마도 종교만이 그 해결을 담당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종교가 제시하는 해결책 1-영혼과 내세의 긍정

위에서 우리는 종교가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것을 보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종교가 분석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 즉 죽음에 대해서 보았다. 이제 다음 단계는 종교가 제시하는 해결책에 대해 볼 차례이다. 죽음이 가장 큰 문제였으니 이것만 극복하면 되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해결책은 사람은 안 죽는다고 하면 된다. 어떻게 안 죽을 수 있을까? 이때 등장하는 것이 내세이다. 인간이 죽을 때 사라지는 것은 육신일 뿐이고 또 다른 몸의 형태인 영혼은 계속해서 살아남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계의 종교들은 내세와 영혼의 존재를 긍정한다는 면에서 대체로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부 사항으로 가면 꽤 달라진다. 뿐만 아니라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영혼의 상태를 획득하려면 각 종교에서 제시하는 일정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 예를 들어보자. 내세와 영혼의 존재를 긍정한다는 면에서-용어도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기독교와 불교는 의견을 같이 한다. 그러나 같은 점은 그뿐이고 그 다음부터는 별로 비슷하지 않다. 기독교의 경우에는 죽은 뒤 이른바 '영생'을 얻고 행복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천당으로 가려면 충족시켜야 할 조건이 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가 제시하는 어떤 신조를 마음속으로 깊이 받아들인다고 고백해야 한다. 아주 간단하게 이 신조를 요약해보면, 하느(나)님{{ 사실 한국어 문법으로 하면 하느님이 맞는 철자이고 하나님은 틀린다. 하느님은 아마도 하늘님에서 ㄹ이 탈락한 것일 것이다. 반면 하나님은 신은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용어로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하나'가 아니라 '한'이 되어야 한다.

한국어에서는 '한 사람'의 경우처럼 '하나'가 관용어가 될 때에는 '한'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으로 써왔기 때문에 관례를 따른다.

}}이 존재하고 그분의 아드님이 인간으로 내려와 인간의 죄를 자신의 죽음으로 대속한 다음 다시 부활해서 승천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이 교리를 추호도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평생 동안 교회도 열심히 출석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구세주인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 선행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은 이런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에만 지락의 근원인 천당에 갈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하면 이른바 '영생'을 얻어 천당에 갈 수 있게 되며 그곳에서는 한없는 행복을 누리면서 살게 된다.

이에 비해 불교는 죽음 뒤에 인간이 다른 몸(이른바 중음신)의 형태로 계속 존재한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죽은 다음 영혼의 상태로 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거의 없다. 또 불교에서는 어떤 교리를 특별히 신실하게 믿을 것도 없다. 절에 다니는 여부 역시 영혼의 진급을 결정하는 변수는 아니다. 불교 종파 가운데 기독교와 가장 비슷하다는 정토종에서는 염불을 하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하지만 이를 위해 반드시 불교도가 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극락 가는 것이 불교의 마지막 목표도 아니다. 불교의 최종 목표는 다시 태어나지 않기 위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대체로 이러한 교리들이 전통 불교에서 보편적으로 제시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다(그런데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불교도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종교가 제시하는 해결책 2 -- 궁극적인 행복의 획득

세속적인 해결법의 문제점 그런데 죽어서 영생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살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다.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사느냐고 할 때 많은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는 답처럼 평범하면서도 적절한 답은 없을 것이다. 인간이 생을 살면서 하는 모든 일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한다고 할 수 있을 게다. 행복을 얻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가령 나를 위해 돈이나 권력 등과 같이 세속적인 것들을 가능한 한 많이 획득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소유물을 더 많이 만들수록 행복해지리라는 것이다. 가장 비근한 예를 들어보자.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제일 조건은 돈이 아닐까? 사람들은 보통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 점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자명한 사실이다.

누구든지 일을 해서 돈을 벌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돈을 주는 직장으로 가려고 탐색을 거듭한다. 돈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은 지옥에라도 갈 태세다. 그러다 돈을 버는 것이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돈 버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끝없는 욕심의 대열 속으로 들어간다. 욕망은 끝이 없다. 백만 원을 벌던 사람이 자신은 앞으로 천만 원만 벌면 더 이상이 원이 없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어렵게 노력해서 천만 원을 벌면 기쁜 것은 잠시뿐이고 이제는 1억을 벌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끝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흡사 목마를 때 짠물을 들이키는 것과 같다. 가령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어서 목이 굉장히 마르다고 하자. 그런데 이때 마실 물이 없다고 짠 바닷물을 들이키면 심각한 사태가 벌어진다. 바닷물도 물이니까 아주 잠시는 시원할지 모르지만 곧 더 많은 물이 먹히기 때문이다. 욕망이 바로 이런 식이다. 욕망을 채울수록 더 많은 욕망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은 다른 욕망에도 적용된다. 사람들이 더 많이 하면 할수록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 성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성교에서 겪을 수 있는 오르가즘 체험은 워낙 강렬해-인간이 약과 같은 외부적인 것의 도움 없이 경험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강렬할 체험일 것이다!- 인간은 계속적으로 그 체험을 찾게 된다. 그런데 이때 사람들은 흔히들 더 많은 이성과 관계를 가지면 가질수록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갖게 된다. 이것은 특히 남자들의 경우가 더 그렇다고 여겨진다.

남자들은 더 많은 여자들과 성관계를 하면 더 많은 쾌락을 얻게 되고 그래서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아내가 될 여자와 그렇게 환장하도록 좋아해서 결혼을 했건만 몇 개월 만에 싫증을 느끼고 다른 여자를 찾는다. 이런 대표적인 예로 희대(稀代)의 바람둥이였던 카사노바를 들 수 있다. 이 사람은 1700명인가 하는 여자들과 관계를 가졌다는데 상대가 어떤 여성이든 항상 곧 싫증을 느끼고 다른 여자를 찾다 이렇게 많은 여자들을 상대하게 된 것이란다. 그런데 그렇게 상대를 자주 바꿨건만 그는 외려 애정의 고갈 상태에 빠져 나중에는 인생에 대한 큰 회한을 갖게 된다. 가까이 했던 여자의 수가 다른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많았건만 질적인 면에서는 바닥이었던 것이다.

다른 욕망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권력이나 명예와 같이 극히 세속적인 욕망들을 추구하는 것도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어떤 사람이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해서 자기가 목표로 삼았던 자리에 올라갔다고 하자. 사람들은 그럴 때 만족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구청장이 되면 서울 시장이 되고 싶고 서울 시장이 되면 대통령이 되고 싶은 법이다. 그러다 진짜 대통령이 되면 성취했다는 만족감은 잠시뿐이고 곧 허탈감이 강하게 밀려온다. 정상에 서면 내려올 일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욕망에는 끝이 없고 적당하게 만족하는 일이란 결코 없다. 거꾸로 말하면 욕망의 추구는 막다른 골목과 같다고도 할 수 있다. 탈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욕망에서 얻을 수 있는 만족은 한시적이다. 욕망을 추구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찰나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붓다도 깨친 후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자신이 출가하기 전 궁궐에서 온갖 감각적인 쾌락을 즐길 때 만약 그 세속적인 쾌락이 영원히 지속되었다면 자기는 출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쾌락의 속성이 이런 데도 우리는 더 많은 쾌락을 얻기 위해, 또 더 자주 같은 쾌락을 얻기 위해 맹목적으로 욕망을 추구한다. 불경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온 우주가 보석으로 되어 있고 그것을 전부 소유하고 있어도 사람들은 결코 만족해하지 않는다고. 그 모든 것이 자기 것이라고 해도 그 갈증, 공허함은 채울 수 없다는 것이다. 희랍 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밀랍으로 만들어진 이카루스가 결국 자기 몸이 다 녹아 없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작정 태양을 향해 돌진하는 게 우리 인생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세속적인 쾌락 혹은 권력, 돈, 명예 등을 획득하려고 추구하는 것이 사실은 아무 결실이 없는 허망한 것임을 알려주는 좋은 책이 있다. 이 책은 종교적으로 무거운 책이 아니라 뜻밖에도 그림책이다. 트리나 포올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이 그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애벌레인데 그의 앞에는 높은 기둥이 있고 기둥의 꼭대기는 구름 같은 것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다른 애벌레들이 보이지 않는 기둥 꼭대기에 무엇인가 좋은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기둥을 올라간다. 이 애벌레들은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밑에 있는 애벌레를 떨어뜨리기도 하면서 악착같이 저마다 기둥에 붙어 올라가고 있었다.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우리의 주인공도 베일에 싸인 기둥 위가 궁금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천신만고 끝에 구름을 뚫고 나무 끝에 올라가보니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책의 저자는 이 우화를 통해 세속적인 욕망이나 쾌락에 대한 추구는 아무 끝도 없을 뿐만 아니라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교훈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종교에서 제시하는 (궁극적인) 행복 획득법 이렇게 보면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은 세속적인 욕망의 추구를 통해서는 획득할 수 없다는 게 자명해진다. 다시 말해서 세속에서는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는 방법으로 행복을 획득하라고 권유하는데 이 시도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에서는 같은 목적을 위해 정반대의 시도를 권한다.

세계의 종교들은 이 면에서 대부분 일치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진실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은 물론 자신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속에서 제시하는 것과는 완전 반대가 되는 것이다. 자신을 비운다는 것은 남을 먼저-혹은 다른 사람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세간 사람들이 모두 다 자기(혹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만을 생각하면 결국 전 세계가 싸움터가 될 것이라는 것은 금세 알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이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대신에 세계인들이 모두 남을 먼저 생각한다면 세상은 자연스럽게 유토피아가 될 것이 그리고 이것이 세계의 모든 '고등 종교'들이 제시하는 행복의 진정한 완성이다.

이런 삶의 국면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이야기가 불교에서 발견된다. 불교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를 보면, 지옥과 천당의 차이에 대해서 비유를 통해 이렇게 적고 있다. 지옥과 천당에서는 젓가락이 사람들의 팔보다 길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의 젓가락을 가지고는 음식을 자기 입속에 넣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지옥에 사는 사람들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 젓가락을 가지고 자기 입속에 음식물을 넣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이 아무 것도 먹을 수 없다. 반면에 천당에 사는 사람들은 애초부터 자신만이 먹겠다는 생각이 없다. 대신 그 긴 젓가락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입에 음식을 넣어준다. 그리고 자기도 남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는다.

서로를 위해서 좋고 배부르게 먹어서 좋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세계이다. 자기만 위하면 다 망하고 남부터 위하면 다 살 수 있다.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도 이와 비슷한 말을 남겼다. 중생은 자기만 위하면서 사는데 결국은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한다. 그 반면에 보살은 남만 위해 살려고 하는데 남도 좋게 될 뿐 아니라 결국은 자기도 이롭게 된다고 말이다.

이러한 상황은 각 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유대·기독 전통에서 말하는 사랑이나 불교가 주장하는 자비, 또 유교에서 가르치는 인 등은 모두 진정한 행복이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살 때만이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종교의 가르침은 이렇듯 역설적이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에 다른 사람이 '오 리(五里)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어라'는 가르침이 있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에 바로 제기되는 반론은 '그렇게 다 주고 나면 난 어쩌란 말이냐'는 것과 같은 질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건 나중에 걱정할 일이고 지금은 왜 내가 바로 여기서 남을 위해 살지 못하는지를 걱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을 다 주면 예수가 역설하는 사랑이 완성된다. 사랑에는 자신이 남아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교훈이 있는 것인데 진정한 사랑이 되려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해야 될 것이다.

이 점은 불교에서도 비슷하게 주장하고 있다. 가령 진정한 보시가 되려면 주는 사람도 없고 받는 사람도 없이 주는 행위만 있어야 한다는 게 그것이다. 남에게 자기의 것을 몽땅 주는 것으로 하면 붓다를 능가할 사람도 많지 않다. 붓다의 전생록인 『본생담(자타카)』을 보면 붓다는 깨치기 위해 수많은 전생에서 상상을 절할 엄청난 수행을 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 인구(人口)에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은 매를 피해 전생의 붓다 품으로 들어온 작은 새(비둘기?)의 이야기일 것이다. 매가 그 작은 새를 달라고 하자 붓다는 대신 작은 새와 같은 무게의 자신의 살을 도려내 매에게 주었다는 것이 이야기의 전모이다. 이런 사랑의 실천 없이는 깨달을 수 없다는 게 이 가르침의 교훈이다.

그럼 종교에서는 왜 사람은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남에게 주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일까? 앞에서도 계속 이야기된 것이지만 종교에서는 최고의 행복은 역설적으로 자신을 잃어버렸을 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간의 행복은 강도나 순도 면에서 이 종교적인 행복을 능가할 수가 없다. 세속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강도가 그리 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순식간에 바꿀(transform) 수 없다.

그러나 종교 체험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람을 한 순간에 탕아에서 성자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순도 역시 매우 높다. 세속의 행복은 지순한 종교적인 행복에 비해 탁할 수밖에 없다. 자기(의 만족)라는 개념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라는 의식이 들어가면 언제나 욕심이 앞서고 따라서 탁할 수밖에 없다. 그럼 대관절 종교 체험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감은 어떤 것일까? 어떻기에 그렇게 강렬하고 지순하다고 하는 것일까? 우리 범인들은 이렇게 수준이 높은 종교 체험을 할 길이 없다. 대신에 우리는 생활하면서 겪은 일들로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 종교 체험보다는 여러 가지 면에서 떨어지지만 비교가 가능한 그런 일상적인 체험이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종교 체험과 관련해서 일상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 가운데 성격이 다소 비슷해 비교가 가능한 것은 연애(戀愛) 체험이라고 늘상 말한다. 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연애는 많은 연애 가운데에서도 초기의 연애를 말한다. 초기 연애 체험이란 게 무엇일까? 내가 어떤 여자를 너무나도 좋아했다고 치자.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여자도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두 사람의 눈에서는 그때부터 불꽃이 튀기 시작하고 엄청난 열애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매일 같이 있는 것도 부족하고 뭐든지 그와 함께 나누고 싶어진다. 좋은 것을 보아도 그와 함께, 좋은 음악을 들어도 그와 함께 하고 싶은 등등 낮은 수준에서 상대방과 하나 되는 체험이 시작된다. 이때의 체험은 매우 강렬해서 공중에 붕 뜬 느낌을 받는다.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종교 체험과 비교된다고 하는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인 애브라함 매슬로우(Abraham Maslow)의 『절정 체험(The Peak Experience)』을 보면 미국 대학생들은 절정 체험의 전형(典型)으로서 이 연애 체험을 든다고 한다. 이것은 미국 대학생들이 평소에 가질 수 있는 체험 가운데-마약류를 하는 것은 제외하고- 이성과 연애하는 것이 가장 강렬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때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연애 초기에 격렬한 사랑이 시작되면 자신 주위의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생해진다. 이 체험은 겪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일상적인 체험과는 많이 다르다. 노래 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사랑하기 전에는 달이 저렇게 밝은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고 나뭇잎이 저렇게 푸른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또 하늘은 왜 저리도 푸른지. 게다가 한 사람을 사랑하니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스럽다. 자신이란 아무 것도 아닌 존재 같고 한없이 겸손하고 싶어진다.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너무나 좋고 감사하다.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내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내 목숨까지 줄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내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데 왜 환희와 기쁨은 쉴 새 없이 밀려올까? 나를 위해 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데 왜 그리 좋을까? 이게 바로 종교적인 체험에 가까운 면이다. 역설적이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체험도 나를 신이나 붓다 혹은 이웃에게 온전히 바치는 것이다. 내 자신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하지 않는다. 이 수행이 올바르게 되면 우리는 연애할 때와 비슷한-아니 훨씬 상하고 깨끗한- 환희 체험을 한다. 이상스레 자신을 포기하면 할수록 기쁨은 배가된다. 세속적인 행복은 나를 위해 무엇을 할수록 행복진다고 하는데 종교 체험은 정 반대이다.

그런데 연애 체험은 아무리 강렬해도 세속적인 체험이다. 세속적인 체험의 가장 큰 특징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데 있다. 연애 초기에 느꼈던 그 강렬한 체험이 스러지고 상대방에 대해서도 익숙해져 신선도가 떨어지면 밑에 숨었던 자아가 서서히 밀고 올라온다. 사랑하기 전에 항시적으로 작동 중에 있었던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사랑에 눈 뜨면서 잠깐 동안 한정적으로 기운을 잃는다. 그러나 사랑이 일상화 되면서 다시 이 자아 개념이 치밀고 올라오는 것이다. 다시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시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왜 나를 더 사랑하지 않는가?' 혹은 '나를 정말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따위의 불만들이 서서히 생기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연애 초기의 그 생생했던 체험들은 사라져 가고 둘 사이에는 갈등이나 다툼이 생겨난다. 이제부터는 달콤한 사랑 이야기가 더 이상 없다. 그 다음부터는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기술한 것처럼 감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로 사랑해야 하는 단계가 된다.

위의 설명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이란 자기 자신을 위할 때보다 자신을 내놓을 때 더 큰 행복을 갖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가장 큰 행복 혹은 궁극적인 행복은 자신을 완전히 포기했을 때나 가능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 궁극의 경지가 바로 종교에서 말하는 절정의 종교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온전한 자기 포기의 정신을 온 몸으로 보여준 사람들은 다름 아닌 붓다나 예수 같은 성인들이었다.

그러면 이것으로 종교가 말하는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문제의 분석이나 그 해결책에 대해 다 언급한 것일까? 이것으로는 좀 미진하지 않은가?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가 이렇게 쉽게 분석될까? 이렇게 쉬운 문제를 가지고 인류 최고의 천재였던 붓다나 예수가 목숨까지 내놓고 다년간 수련하고 그 법을 설교하고 다녔을까? 사실 우리는 이제 대강만 본 셈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의 분석은 이제 시작이다. 지금까지 분석한 대로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라고 하는 죽음, 혹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가를 면밀하게 궁구해야 한다. 왜 인간만 죽음을 인식하는 것일까 하는 등등의 문제가 우리가 다음에서 분석할 주제가 된다.

최준식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템플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한국학과 교수, 국제한국학회장, 한국문화표현단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콜라독립을 넘어서》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가 있다.

 최준식 cjskor@ewh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