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2

성덕대왕신종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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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대왕신종

최근 수정 시각: 

에밀레종에서 넘어옴
성덕대왕신종
聖德大王神鐘
소재지
분류
유물 / 불교공예 / 의식법구 / 의식법구
수량/면적
1구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1. 개요2. 역사3. 전설
3.1. 내용3.2. 역사학적 검토
4. 특징
4.1. 종 고리가 로스트 테크놀로지라는 주장
5. 당대 다른 종(鐘)과의 비교6. 기타7. 국보 제29호8.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신라시대 771년 12월 14일에 만들어진 이다. 국보 29호로 1962년 12월 20일에 지정되었다. 통일신라 때 만들었는데, 전근대에 만들어 국내에 실물이 현존하는 범종 중 가장 커서 높이 3.75 m, 지름 2.27 m, 두께 11∼25 cm이다.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20세기 전까지는 한국 최대의 종이었지만, 2008년에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 평화의 댐에 위치한 세계평화의종공원의 '세계평화의 종'[1]에 밀렸다.[2] 하지만 여전히 성덕대왕신종이 한국을 대표하는 범종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2021년 2월 8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성덕대왕신종을 타종하여 녹음한 종소리를 박물관 홈페이지에 공개하였다. #

2. 역사[편집]

신라 전제왕권의 전성기를 이룩한 아버지 성덕왕의 공을 기리고자(그래서 성덕대왕) 경덕왕이 왕권강화정책의 일환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즉, 용비어천가와 비슷한 목적. 종에 씐 명문 1037자에는 한림랑(翰林郞) 김필중(金弼重)이 왕명을 받들어 지었다고 시작해서 제작 시기, 제작 동기, 범종의 의미, 종을 만드는 데 참여한 사람 8명의 이름과 관직, 기술자 4명의 직책과 이름을 설명하고, 성덕대왕의 덕은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었고 어진 사람을 발탁해 백성들을 편하게 해 태평성대를 열었다고 성덕대왕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글씨는 대나마 한단이 쓰고 시명은 김백완이 지었으며 감독관은 대각간 김옹과 각간 김양상이었다고 한다.[3]

하지만 이 종이 완성되기 이전에 경덕왕은 세상을 떠났고 결국 경덕왕의 아들, 즉 성덕왕의 손자인 혜공왕이 재위하던 771년에야 주조를 끝마쳤다. 그리하여 현재의 경주세무서 자리에 있었던,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 봉덕사에 걸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성덕대왕신종 표면에 새겨진 명문 덕에 알 수 있다. 조선 초 숭유억불 정책이 시행될 때는 많은 불교 범종을 녹여서 무기 같은 것을 만들었는데, 봉덕사의 성덕대왕신종도 녹여 없애버리자는 여론이 있었으나 이는 세종이 따로 지시해서 막았다.

봉덕사는 이후 조선시대에 북천에 큰 홍수가 나면서 절은 없어지고[4] 종은 조선시대 한동안 빈 들판 풀 속에 덩그러니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1460년 영묘사(靈妙寺)[5]에 옮겨서 걸었다가, 이후 1506년에 경주읍성 남문 밖 봉황대 밑에 종각을 짓고 거기에 걸어서 성문의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했다. 현대에는 1915년 옛 경주박물관[6] 자리로 옮긴 후 경주고적보존회를 거쳐 1975년에 새로 지은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당시 이 거대한 종을 옮기는데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이 종을 트레일러에 실으니 무게는 50톤이 넘어서 최단거리인 월성로를 통과하면 중간에 있는 작은 다리가 50톤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경주 시내를 관통해서 멀리 있는 다리를 타야 했는데, 그러면 트레일러에 실린 종의 높이가 6미터가 넘어서 경주시내 전깃줄이 모두 걸리는 것이었다. 결국 한국전력공사에서 전공들이 다수 동원되어 에밀레종을 실은 트레일러가 지나갈 때마다 전깃줄을 끊어주고 지나간 다음에 다시 이어주는 식으로 했고, 성덕대왕신종이 경주 시내를 지나가는 동안 10만 시민들이 종이 옮겨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모여서 천천히 가는 트레일러를 따라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3. 전설[편집]

현존하는 종들 중 가장 유명한 전설은 인신공양 전설이다.

3.1. 내용[편집]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고 '에밀레'하고 울린다고 해서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성덕대왕신종에 대한 전설은 매우 유명하다.
혜공왕이 자신의 할아버지인 성덕대왕신종을 만들 때 종을 만들기 위한 돈을 시주받았는데, 시주하러 다니던 스님이 들른 어떤 한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 집에서는 과부 아낙이 아기와 같이 있었는데 '마음 같아서는 시주하고 싶지만 있는 건 갓난아기뿐이네요'라고 아기라도 시주받아 가겠냐는 투로 말했다.[7]스님은 이 말을 듣고 다른 곳으로 떠나 열심히 시주를 받아 종 주조에 보탰다.

그런데 종이 도무지 완성되질 않아 점을 쳐 보니 '받아올 시주를 받아오지 않았다'라는 게 아닌가? 살펴보니 저 아기를 시주하겠다던 집밖에 안 남기에 그 아이를 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8] 그래서 스님은 아이를 시주한다던 그 집을 찾아가 여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움속에 결국 아이를 빼앗듯이 강제로 데려왔고[9] 울음을 삼키며 아이를 쇳물에 던진 뒤[10] 종은 무사히 완성되었다. 이후 종은 어미를 그리워하는 아이의 소리처럼 에미일레라('어미의 탓이다'라고 원망한다는 해석도 있다.)하고 울렸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의 말실수로 인해 아이가 시주로 바쳐졌다는 이 이야기가 제일 잘 알려져 있으며 다른 내용의 전설도 존재한다.
봉덕사에서 성덕대왕신종을 만들었으나 실패를 거듭했다. 일전(一典)이라는 이름의 종장이 이 때문에 주위의 비난을 엄청 받았고 고심에 빠져 있었다. 당시 일전에게는 과부의 몸으로 그 집에 얹혀살던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녀가 오빠의 실패를 자신의 실덕으로 여겨서 고뇌 끝에 자신의 아이를 바쳐서 종의 제조를 완성하기로 결심하고 일전에게 이를 알린다. 일전은 처음에는 이를 망설였지만 결국 부처의 뜻으로 여겨 그 청을 받아들인다. 결국 아이는 도가니에 던져지고 종이 완성되었고, 종소리는 아이가 어미를 원망하는 '에밀레'로 들린다고 한다. (최상수, <경주의 고적전설>에서 발췌)
성덕대왕신종을 만들던 당시, 계속해서 종이 망가지자 책임자였던 대장장이는 머리를 썩혔다. 여태껏 열심히 만들었는데도 계속해서 실패만 하니 골치가 아픈 상황이었다. 그에게는 과부 여동생이 어린 아이와 같이 살고 있었는데 오빠의 고민을 눈치채고 자신의 아이를 대신 바치겠다고 얘기했다. 여동생의 대답에 오빠는 깜짝 놀라 절대 하지 말라고 말렸고 사찰로 가서 부처님에게 조카의 목숨을 살릴 방도를 알려달라고 기도했다. 그날 저녁 대장장이의 꿈에 부처가 보살들과 나타나 아이의 목숨을 살릴 방도를 알려주었다. 바로 목침을 용광로에 넣으란 것이었다. 자신들이 이적을 일으켜서 목침을 아이의 모습으로 보이게 할 것이라고 당부하면서 말이다. 대장장이는 꿈에 깨서 서둘러 목침을 용광로에 넣었다. 부처의 이적으로 아이의 모습을 한 목침이었지만 그는 아이가 떨어지는 것 같아 슬피 울었다. 너무 울어서 눈이 멀 정도였지만 그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무사했고 이 아이는 훗날 명승이 되었다고 한다.

3.2. 역사학적 검토[편집]

이 이야기에 대한 기록은 놀랍게도 20세기가 되어서야 처음 등장했다.

여기서 종을 주조할 당시 아이를 넣었다는 인신 공양 설화는 간장과 막야부터 시작해서 중국에서 이미 있었다. 그렇기에 이 설화가 보신각종에서 성덕대왕신종으로 넘어간 것일 뿐이란 주장도 나온다. 선교사 알렌과 헐버트 등은 1900년을 전후해 에밀레가 보신각 종이라고 기록한 것이 대표적이다.

1927년 성덕대왕신종에 대해서도 유아공양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는 글이 동아일보에 실렸음이 밝혀지면서 에밀레종이 성덕대왕신종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고 보기도 힘들게 되었다. 또한 조선 중기 평양 연광정 옆의 평양 종에도 비슷한 설화가 있음을 해당 기사에서 전하고 있다.# 고로 더 자세한 고증이 요구된다.

종이 운다는 이야기는 오호십육국시대 전량 때 세워진 중국 간쑤성 무위(武威)시 대운사(大雲寺)에 있는 종이 대표적. 여기는 '낭아娘呀, 낭娘'(여자 혹은 어머니) 또는 '응당應當, 응당應當' 하고 운다고 한다(황인덕의 연구). 당나라~오대십국시대 만들어진 종으로 추정되므로 이런 이야기가 번역되어 같은 시기 한반도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일각에서는 이 전설이 혜공왕대의 상황에 대한 은유라고 해석한다. 어린 아들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고 전횡을 일삼던 혜공왕의 어머니 만월부인과, 혜공왕의 고종사촌이자 나이 어린 왕을 배반하고 왕위를 찬탈한[11] 상대등 김양상을 비꼬기 위해서 만들어낸 전설이라는 것. 이 견해에 따르면 어떤 유형의 전설에서든 아이의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는데, 이것은 혜공왕의 아버지인 죽은 경덕왕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런 게 사실이라면 왜 기록이 없느냐는 의문점이 있다. 물론 기록이 없어지는 경우가 있지만, 그렇다면 그 사실은 어떻게 전해졌으며, 전해졌다고 하더라도 사실이라고 믿을 근거가 무엇인지 의뭄을 갖게 된다.

역사학과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 중 하나가 사료가 언제 작성되었가 하는 문제다. 몽골 제국의 침입과 14세기 왜구의 습격으로 구전 전승을 이어나갔을 지역 사회가 철저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초기 작성된 자료만 되어도 이 기록의 신뢰성을 높게 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역사학계에서 이 에밀레종 설화를 신라 당대의 일로 보는 학자는 없다. 종합 자료집 같은 경우에야 '이런 얘기도 있긴 한데...' 하는 식으로, 하도 유명하니까 언급이야 해 주겠지만 학술 논문에서 이런 소리하면 역사 자료 방법론을 무엇으로 배웠냐면서 게재를 거부당할 것이 뻔하다. 다만 국문학과나 민속학과라면 자료의 신뢰성 문제보다 내러티브의 문제를 중시하고 구전 자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때문에, 아주 가끔 이런 논문이 통과된다. 물론 앞서 말한 자료 방법론의 문제를 전혀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학계에서는 언급할 가치도 없는 논문으로 취급받는다.

당연히 진짜로 아이가 들어간 게 아니다. 성분 분석에 따르면 인간을 넣었을 경우 당연히 있어야 할 성분(뼈의 칼슘, 인 등)이 없으므로 그냥 전설일 뿐이다. 또한 주조 과정에서 종의 균열을 막기 위해서는 신속한 공정이 요구되기 때문에 신종을 만들 때는 소형 도가니들로부터 동시에 주물을 붓는 방법을 사용했다. 여기에 아이를 넣으려면 아이를 균등하게 갈아 도가니별로 넣어줘야 하는데 잔혹성은 둘째치고서라도 제대로 된 종이 나올 리가 없다. 살생을 금기시하는 불교에서 종을 만들기 위해 생명을 희생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인신공양 전설은 워낙 흔하지만..

4. 특징[편집]

현 소재지는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번지에 위치한 국립경주박물관문화재청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한국의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천 3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는 문화재.

이 종이 내는 음색의 특성으로, 밖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종의 안쪽을 대칭형 구조 속에 숨어 있는 미세한 비대칭성이 나타나도록 울퉁불퉁하게 만들어, 종을 치면 일정하지 않은 두께로 서로 다른 주파수의 소리가 주거니 받거니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반복되는 '맥놀이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성덕대왕신종의 아래에는 땅을 파놓은 울림통이 있는데, 종 위의 음관과 함께 한국 종의 고유한 특징이다. 울림통은 종이 울릴 때 나오는 간섭파를 효과적으로 유지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지금 설치된 울림통은 그 크기가 너무 작아 종의 진동수와 약 3Hz정도 오차가 있다고 한다. 크기를 키워야 된다는 이야긴데, 연구된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울릴 일이 없다 보니 아직까지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종 위의 음관은 찢는 듯한 고주파음을 재빨리 밖으로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 성덕대왕신종은 종소리를 녹음해서 매시 정각, 20분, 40분에 틀고 있다. 1992년 제야(除夜)에 서른세 번 종을 친 뒤 한동안 타종을 중단했다가, 1996년 학술조사를 위해 시험으로 타종했다. 그 뒤 2001년 10월 9일, 2002년과 2003년 개천절(10월 3일)에 타종행사를 열었으나, 2004년 말에는 보존에 문제를 일으키는 금속 스트레스 누적을 억제하기 위해 더 이상 타종을 금하고 있다. 금지 이후로도 관광객들이 종을 살짝이나마 쳐보는 일이 빈번해 당목도 떼서 바닥에 둔 상태다. 주기적으로 쳐 주는 것과 안 치는 것 어느 쪽이 보존에 유리한지는 전문가만이 알 것이다. 다만 한국의 보존기술은 반쯤 망가진 종을 완전복원해 칠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정도라는 사실은 알아두자. 아침저녁으로 종치면서도 천년이 넘도록 멀쩡했건만 나름대로 보존을 한답시고 최첨단 기술로 개발된 보존액을 발랐다가 되레 부식해서 이젠 치지도 못한다는 말도 있으나 녹슬지도 않은 쇠에 보존액을 굳이 바를 리가 없으므로 이건 그냥 진짜 종소리를 듣지 못하는 데 대한 악담이나 억측이다. 이후 2021년에 종 완성 1250주년을 기념하며 입체음향을 채록하기 위해 수 차례 타종하였다. #

종 표면의 명문(銘文)이나 그림 등을 자세하게 보고 싶다면 국립중앙박물관 2층 서화 코너에 가자, 탁본이 전시되어 있다.

4.1. 종 고리가 로스트 테크놀로지라는 주장[편집]

예전에 유명했던 이야기로는, 종을 매달고 있는 고리는 현대 문명의 기술로도 재현하기 힘든 오파츠 수준의 강도를 자랑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의하면, 경주박물관 신관으로 옮겨 달면서 새로 종고리를 만들었는데, 종고리의 강도를 실험해보기 위해 강괴를 달아놓고 변화를 관찰해보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종의 하중보다 더 가벼운 강괴를 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만든 종고리가 늘어져버렸다고 하며, 이에 신품 제작을 시도했지만 종고리를 넣는 구멍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여기에 들어갈 만한 고리로는 종의 무게를 지탱할 강도를 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직경 15cm면 버텨낼 수 있는데 구멍의 직경이 9cm가 안 되었기 때문에, 와이어로 칭칭 감아버리면 무게가 분산되는 효과 때문에 버틸 수 있지만 그래서는 종을 달아둔 게 아니게 되므로 포기했다."고 하며, "결국에는 본래 쓰던 고리를 찾아서 다시 끼워넣었다."는 것이 해당 서적의 진술이다. 혹은 모 TV 프로그램에서 시험해 본답시고 원래 고리를 떼고 최첨단 합금으로 만든 고리로 실제 바꿔달자 하루도 채 안 돼서 엿가락처럼 늘어져서 도로 갈아끼워야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에 대한 정확한 출처는 알 수 없다.

이 고리 오파츠설에 대해선 부정적인 의견이 많은데, 일단 산업현장에서 사용하는 50톤의 중량을 버티는 샤클의 지름이 2인치(5.08 cm)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을 달로 보내는 현대 공학 수준은 절대 만만한 레벨이 아니다. 다음의 반박글도 참고해보자. 고로 유추해 보건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교과서에 실리기도 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이 베스트셀러에 실린 내용을 많은 사람들이 믿어버려서 만들어진 도시전설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당장 고리만 해도 위의 링크에 실린 것처럼 얇은 합금을 대장장이가 말아서 만들 필요조차 없이 그냥 적당한 철을 가져다가 쓰면 충분히 해결 가능한데다가, 그냥 사진만 확인해봐도 고리보다 더 공학적인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은 그 고리를 끼우는 틀 자체가 근대에 복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해당 전문가들의 검증이 필요한 부분일듯.

5. 당대 다른 종(鐘)과의 비교[편집]

동북아시아의 대종들은 대개 맑고 높은 소리보다는 진중하고 길게 울리는 소리를 내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그 기술의 정점에 있는 것이 성덕대왕신종이다. 앞서 말한 음통(음관)과 울림통도 그렇지만.

다만 에밀레종도 대단한 물건이나 역사상으로 보면 신라 최대의 종은 아니다. 신라 최대의 종은 경덕왕 때 만들어진 황룡사의 황룡사 대종으로, 그 규모가 성덕대왕신종의 무려 4배에 달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몽전쟁으로 황룡사가 파괴될 때 소실되었다.

또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도 아니다. 에밀레종보다 46년 빨리 만든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 725년 주조, 1.7 m)이 가장 오래된 종이다. 이 종은 성덕왕 때 만들었고 성덕대왕신종은 성덕왕이 죽은 뒤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6. 기타[편집]

  • 특유의 인신공양 전설이 가히 충격적이어서, 최근 국내에선 '에밀레'가 사람을 인신공양급으로 부려먹는 행위를 의미하는 은어로도 쓰인다. 예를 들면 공밀레와 번밀레가 있으며, 애니메이션 작화가 매번 극강이면 작화진을 갈았다면서 작밀레라 하기도 한다.
  • 한편으로는 신라의 쇠락을 잘 나타내는 전설이기도 한 게, 혜공왕 이전까지 강력한 국력을 가졌던 신라가 종을 만드는 데 어린아이를 바치는 일이 있을 정도로 매우 몰락해가던 상태였음을 잘 묘사해 준다.
  •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마련된 종각에 전시되어 있다. 가까이 가서 보면 종 표면을 긁어낸 흔적들을 볼 수 있는데, 이 종의 가루를 달여 마시면 낙태에 도움이 된다는 기이한 미신이 1930~40년대에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12] 물론 실제로는 녹물이나 다름없어 건강에는 아주 해롭다. 현재는 박물관 내에서 전시 중이라 함부로 만지는 것도 불가능하다.
  • 워낙 오래된 유물이다보니 최근엔 보존을 위해 종을 직접적으로 울리는 일은 없다. 앞으로도 마찬가지. 그 대신에 녹음한 종소리를 주변 음향기기를 통해 들려주고 있어 감상은 가능하다. 종을 함부로 울리는 막장 관람객이 있을지 몰라 종을 칠 때 쓰는 나무 기둥은 쇠줄로 단단히 고정해 장식용으로 방치해뒀는데, 이게 부식된터라 2021년 현재는 떼어버리고 주변 울타리를 투명 강화유리로 교체한 상태다. 또한 종 하단에 갈색 받침대로 보이는 물체 3개를 괴어놓았다. 실제로 보면 다 썩어서 모양만 겨우 남은 상태여서 정상적인 사용도 불가능하다.
  • 서울의 보신각종이 원래 있던 종이 1985년에 본래의 보신각종이 노후화되어 이 종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옮기고 보신각에 걸 종을 새로 만들었는데 이때 성덕대왕신종을 복제했다. 그러나 이 역시 종소리가 진품에 한참 못미쳤다고 하는데, 해마다 12월 31일에 제야의 종이 울리는데 옛날에는 성덕대왕신종도 자정에 쳤고, 그걸 새 보신각종(에밀레종 복제품) 치는 것과 교차해 TV에 생중계했다고 한다. 그런데 두 종의 소리가 아무리 소리에 둔한 사람이라도 진짜와 가짜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쉽게 알아차릴 만큼 수준 차이가 났다고 한다.
  • 전통무용가 이애주가 이 종소리에 맞춘 춤을 만든 적이 있다. 춤 이름은 후천개벽무(後天開闢舞)로 본래는 1986년 개천절에 초연할 예정이었으나 여러가지 사정이 겹쳐서 같은 해 10월 9일 한글날에 공연을 했다고 한다. 장선우 감독이 영상 촬영을 할 예정이었으나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미처 촬영을 하지 못했다. 이후에도 이애주는 성덕대왕신종 타종행사 때 종에 대한 의미를 담은 춤을 추는 공연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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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에서 보이듯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인근 샌페드로(San pedro)에는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 에밀레종을 본따 만든 우정의 종각(Korean Bell of Friendship)이 있다. 태평양을 바라보고 있는 아름다운 경치와 종각의 모습이 어우러져, 근처에서 이 종을 배경으로 결혼사진을 찍기도 하는 일이 종종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에서도 잠깐 나온다. 다만 형태는 흉내만 냈지 제대로 복제한 것은 아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의하면 이 종처럼 맑은 소리가 아니라 깡통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못 들어줄 수준은 아니다.

7. 국보 제29호[편집]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 청주 운천동 출토 동종(보물 제1167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다. 높이 3.66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설화로 인해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리운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연꽃봉우리를 사각형의 연곽(蓮廓)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앞,뒷면 두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꽃모양으로 굴곡진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당시의 종교와 사상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 자료로 평가된다.

8. 같이 보기[편집]

[1] 1만 관(37.5톤), 높이 4.67 m, 지름 2.76 m[2] 이전까지는 한국 범종 제작 기술이 실전되어 새로운 전통 대종이 나기 힘들었지만 현대에는 기술이 복원되어 새로운 종이 나온다. 대부분 진천군 덕산읍 성종사에서 제작한다.[3] 아이러니하게도 김양상은 혜공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선덕왕이 된다. 종의 주인공인 성덕왕 입장에서는 손자를 죽인 원수의 이름이 자신을 칭송하는 종에 씐 셈이다.[4] 당연히 숭유억불의 조선이라 복구는 꿈도 꿀 수가 없었다. 이후 김시습이 폐허가 된 봉덕사지를 보고 지은 시가 있는걸로 봐선, 이때까지는 봉덕사 폐허가 어디 있었는지는 알았던 모양이다. 역덕들의 추측으로는 북천 서쪽 성동동 1사지로 추측하지만 일부는 북천의 물길이 여러차례 바뀌면서 수몰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내놓기도 한다.[5] 출토된 기와에 적혀있는 명문을 근거로 현재의 흥륜사지로 추측한다. 이 절도 당연히 조선조에 숭유억불 기조로 타격을 받아서 현대에야 절터 옆에 새 절을 만들었다.[6] 경주문화원에 있는 종각[7] 다른 판본에는 정말로 미안해하는 이야기도 있다.[8] 이 부분은 여러 이본이 있다. 처음부터 아이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점괘가 나왔다든가, 어미가 아이 운운하며 시주를 거절함으로써 스님을 모욕했기에 부정 타서 종 완성이 안 되는 거였다든가.[9] 판본에 따라 여인이 결국 어쩔 수 없이 승려에게 아이를 전해주는 이야기도 있다.[10] 전설에는 스님과 대장장이들이 어린 아이가 안타까워 정말 울면서 던졌다고 한다.[11] 삼국사기에서는 주어 없이 김지정의 난이 일어난 직후 왕이 시해되었다고 전하지만, 삼국유사에서는 김양상과 김경신이 왕을 시해했다고 보다 명확하게 나온다. 실제로는 김경신이 반란을 주도하여 혜공왕을 시해하고 명분을 위해 김양상을 강제로 즉위시켰다는 학설이 있기는 하나, 어떤 경우든 당대 사람들에게 김양상은 반란의 주도자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12] 하마다 고사쿠(濱田耕策),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과 중대의 왕실」, 『신라국사의 연구[新羅國史の硏究]』, 요시카와 고분칸[吉川弘文館], 2002, 175쪽

자료실 - 예수, 그는 우리에게 대속자인가 선생인가 / 홍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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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는 우리에게 대속자인가 선생인가 / 홍정수
한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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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0.10.10 16:58
감리교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을 쫒아내야 한다는데 그러면 그 사람 자기가 나가야한다. 감리교 교리적 선언 자체가 1930년 자유주의 신학의 산물이다. 족보도 없는 사람들이 설치는데 나는 감리교인이 아니니까 다행이다.

감리교가 1930년 교리적 선언을 하면서 예수와 우리의 관계를 ‘대속자가 되시며 스승이 되시는’ 이라는 두 가지를 정리를 했다. 전통적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큰 두 개의 흐름은 진보적인 성향, 실천가들의 성향에서는 선생님이고 가르침을 받아서 내가 실천하는 것이다. 불교 용어가 더 쉽다고 생각된다. 불교는 자력구원이라고 한다. 대속론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타력구원이다. 비유로 말하자면 예수님은 특공대이고 우리는 인질이다. 인질은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 바깥에서 구조대가 와야 한다.

예수님이 희생제물이 돼서 돌아가셨다. 우리를 대신해서 이것이 대속론인데, 먼저 말할 것은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구원이 무엇인지 토의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다행히도 그래서 우리가 아무 이야기라도 해도 된다. 반센 노블스라는 체인점 책방이 책은 매상의 30%이고 다른 것을 판다.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상징적으로 묶으면 그것이 곧 구원이라고 이해를 한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냐 메시아냐는 전통적으로는 대속자가 된다는 타력구원 쪽이 있고 선생이다 그래서 우리가 따라가야 된다는 자력구원 쪽이 있다. 한국 감리교는 두 가지를 다 표방했지만 그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장로교에서는 전통적으로 대속의 교리를 믿지 않으면 안 된다.

대속의 교리가 왜 문제냐, 인간을 무책임하게 만들고 하나님은 살인자고 아들을 죽이는, 목적이 있다면 자신의 외아들도 죽이는 입장에서 본다면 대속의 교리는 말도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속의 교리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준다. 저도 할아버지나 할머니나 장애인을 만나면 대속론을 이야기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희망이 없다. 죽을 사람에게 네 인생 책임져 라고 한다면 너무 잔인하다. 청년들에게는 네 인생 네가 책임져야 한다는 스승의 입장, 예수를 추종해야 되는 모델로 보는 것이 마땅히 우리가 가르쳐야 될 일이지만 힘들고 지치면 대속론 이야기해야 한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해줄 것이다. 기도 좀 하면 하나님께서 갑절로 갚아주실 것이다.

내가 클레어몬트 옆에 사는데 성서학자들의 이야기를 흘려듣는다. 나는 조직신학이 전공이기에 성서는 몰라도 불편은 없는데 최근에는 기독교에 대해서 너무 잘못 알았다는 부분이 바울에 대한 이해이다. 예수님에 대해서 성서학자들이 해놓은 것이 내가 평소에 한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아서 별문제가 없다. 바울 이야기는 지금 한창 진행 중인데 옆에서 들어보면 바울 이야기는 제가 알고 있는 것과 엄청나게 다르더라. 많은 사람들의 대속론 입장이 바울에게서 나왔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바울은 그런 말을 쓰지만 문맥으로 보면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고 예수의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그래서 바울은 만약에 우리가 따진다면 자력구원 쪽에 훨씬 더 가깝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졌고 그래서 나도 지고 내 육체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 세상과 더불어 싸우는데서 내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하여 라는 말을 쓴다. 거기서부터 대속이란 말이 나왔는데 우리를 위하여, 사랑의 수양관 이거 지으려면 돈이 얼마나 많이 들겠는가. 우리가 푼돈 좀 내고 우리가 쓰니까 이거 우리를 위해서 지어주었다.

교회에서는 교리문제를 아무도 질문하지 않지만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는, LA를 관통하고 있는 고속도로 누가 만들었나? 내가 잘 엔조이하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만들었다. 우리는 그런 말을 쓴다. 얼마나 좋으냐. 대속의 교리의 바탕에 있는 종교적인 체험은 내가 수고하지 않았는데 내가 누리는 것이 있다. 이것이 선물이다. 이것이 있으면 대속의 교리는 늘 유효한 거라 본다. 그러나 아까 말한 노인네들, 한계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할 때는 체험이 바탕이 되는 대속론이 아니라 종교적인, 언어적인 트릭을 쓰는 것이다. 희망을 가져라. 그래서 대속의 교리는 종교적인 체험으로 본다면 그 바탕에 내 삶이 내가 수고하지 않은 그 누군가로부터 오는 은총이다. 이것이 가장 기본이고 기독교인이 이 경험이 없이는 기독교인일 수가 없다고 본다. 그렇지만 노인네들,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너는 너 자신을 구원하려 애쓰지 마라’왜냐면 너무 희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를 책임진다.’ 어거스틴 말로 믿음은 뭐냐? 은총을 받아들이는 거다. 하나님이 너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네가 받아들이는 거다. 폴 틸리히가 설명했다.

대속의 교리는 바울의 언어에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성경에 ‘대속’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그것도 비유적으로 나온다. 마가복음의 11장인가 12장인가에 나오는데, 문맥으로 보면 섬김을 위한 일반적인 것이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희생 제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성서에서 직접적으로 대속의 교리를 찾으려면 히브리서에 있는 정도다. 교리사적으로는 언제부터 자리 잡았느냐면 어거스틴에게 책임을 돌려야 되는데 그의 잘못은 아니다. 기원후 400년 전후에서 살았는데 예수 믿은 지 6년 만에 비숍이 되었다. 갑자기 교회의 수호자가 되었고 그가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 쓴 도구가 바로 ‘원죄’라는 것인데, 그가 당면하고 있던 문제가 왜 아이들까지 세례를 주냐, 어른은 죄가 많으니까 세례를 받아야 천당 간다는 것은 말이 되는데 100일도 안되어 죽은 아이가 왜 지옥을 가야하냐, 거기에서 나온 것이 ‘원죄’이다. 물론 13살밖에 안된 자신의 사생아가 죽은 것도 관련이 된다. 그래서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서 ‘명부’를 만든다. 어머니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지옥에 간 건 아니다. 천당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중간, 연옥에 가서 잠시만 기다리면 천국에 간다. 우리가 죽어 뜨거우면 천당일 가능성이 많다. 연옥은 불로 연단하는 곳이니까. 그런데 희미하면 지옥에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거스틴이 유아세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원죄’라는 가상적인 논리이고, 유대인들은 원죄를 믿지 않는다. 인간의 타락도 믿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그렇게 넘어갔다. 중세가 되면서 안셀름이 왜 예수가 세상에 왔느냐, 라틴교부들이 법적인 면을 생각하면서 점차적으로 대속의 교리가 고정되었다.

성서는 예수가 우리의 메시아 다 라는 것을 매우 다양하게 설명한다. 어느 것 하나에 메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큰 유형으로 보면 불교용어로 자력구원과 타력구원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두 개의 유형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체험을 설명하는 두 가지 언어, 그렇게 보고 목회를 한다.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주워졌으며 선물이니까, 그러나 은총이, 장로교에서는 ‘시너지’를 최악의 죄악이라고 가르치는데 장로교인들 중에 운동권이 많다. 운동권은 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기에 신학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인간이 구원을 공동으로 이루어나가는 시너지즘이지, 소위 단독, 하나님이 혼자서 역사한다 그런 것은 이미 아니다. 감리교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장로교에서도 옳다고 본다. 은총은 책임을 면제해주는 것이 아니라 은총 때문에 인간의 책임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다. 이거냐 저거냐 일수가 없는데, 장로교 같은 경우, 도르트문트 회의에서 high Calvinism이 선택되고 그것이 교리화 되면서 인간이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은 겁을 냈다. 그래서 철저하게 대속론으로 갔다.

어거스틴이 비즈니스를 위해서 원죄교리를 만들었고 장로교가 알비니아니즘과 싸우다보니까 철저하게 대속론으로 나갔고, 이건 모두가 교회의 장사꾼들이 비즈니스를 위해 만든 것이다. 교단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대속의 교리를 철저하게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타력적인 구원이 내 삶을 은총으로 경험하는 것이 밑바탕에 있는거다 라고, 그 점을 안다면 대속의 교리 때문에 불편함이 없을 거다.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할 이유가 없기에.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책임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지 면제해야할 이유는 전혀 없다. 사람이 자기가 할 만큼 책임을 져야 자존심이 산다. 볼테르가 천당가기 싫은 이유는 내가 내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았기에 죽은 다음에 예수만나면 내가 기죽어서 못살텐데, 그곳은 천당이 아니다. 나는 그 곳에 가고 싶지 않다. 인간의 자존심을 깡그리 무너뜨리면 그건 구원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력구원과 타력구원을 갈등관계로 본 것은 교회가 교단을 만드는 과정에서 정치적인 이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라고 본다.

가톨릭의 역사를 보아도 자력구원 쪽을 굉장히 강조를 많이 한다. 불교의 자력구원은 아니다. 한스 큉이 칼 바르트 밑에서 쓴 논문이 장로교 칼 바르트가 말하는 ‘이신득의’와 가톨릭의 교리는 같은 거다 고 하여 절반의 파문을 받았다. 너는 신부이기는 하지만 가짜 교수다. 그래서 한스 큉 밑에서 배운 학자는 가톨릭에서는 인정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일리가 있다. 가톨릭에서는 은총을 말하고 그 은총이 우리를 성화시키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구원을 위하여 할 수 있게 해준다. 가톨릭에서는 ‘칭의’라고 하지 않고 ‘의화’라고 번역을 한다. justify가 justification, 실제로 우리를 의인으로 만든다. 그래서 가톨릭 신학은 옳다고 본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으면 내가 의로운 사람이 돼야지 하나님이 나를 봐줘서 의로운 사람이 아닌데도 의로운 사람으로 봐준다. 이것이 내가 배운 감리교나 장로교 개신교 전통에서 배운 ‘칭의’인데, 거기서부터 기독교들이 봐주는 것 사기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에 들어와 있다고 본다. 가톨릭 쪽의 글을 보고서야 개신교가 가톨릭과 차별화하려고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얽혔을 때 너무 극단으로 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언어와 언어를 담고 있는 밑바닥의 종교체험 그것이 뭘까를 생각해 보면 교리에 대해서 자유할 수 있다. 예수님 덕분에 내가 사는 것이 내 노력이 아니고 이 삶이 위로부터 오는 선물이다는 것은 기본이다. 이를 경험했으면 이것이 대속의 교리이다. 앞서 가신 예수님이 나의 삶, 영생인지 뭐든지 간에 삶의 길을 열어놓았다. 그건 내가 닦은 것이 아니다. 선물이다. 그러니까 대속이다. 그러나 서양에서 말하는 ‘내 죄를 졌다’ 그렇게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건 어거스틴의 신학에서 나오는 잘못된 것이다. 아담이 실제 인물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초등학교에만 다녀도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실제 인물이 아닌 사람이 만들어놓은 죄 때문에 우리가 죽고 그 문제를 예수님이 해결했다는 것이 전통적인 대속의 교리의 핵심인데 그런 이야기 자꾸만 하면 사람들 교회 안다닌다. 그렇지만 대속이 가르치려고 했던 ‘경험’ 그것은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건 우리가 간직하고 잘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력구원’ ‘타력구원’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다.


▲ 홍정수 박사
자력구원과 타력구원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며 한국교회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 안명준 겨자씨와누룩


2009-02-16 오전 00:27:28 © seednyea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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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3.12.27 22:18


나의 예수 목회세미나



홍정수목사> 2013.02.18.



저는 질문이 있으면 잘 떠드는데 질문이 없으면 할 말이 없어요.



복음서나 신학에 대해서 혹시 질문 있으세요? (강의를 듣고 질문하십시다.)



성경 요한복음 3장16절 뭔지 다 아시죠? 그거 하고 마가복음 1장을 지금 읽어보세요. 저는 구약성서도 신약성경도 다 안 필요하고 마가복음 1장만 있으면 제가 목회하고 제 영혼이 구원받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마가복음 1장을 한번 읽어보세요. 거기에 예수님이 뭘 하셨나? activity의 종류를 한번 적당히 적어보세요. 오늘 저녁에 여러분이 할 숙제 이야기는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 그건 잊어버리세요. 십자가? 그건 없으면 좋은 거니까 잊어버리고. 여러분 죽지 않을 거잖아요. 우리끼리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하지요.



십자가는 없으면 좋은 거니까 때려 치우고.



부활? 죽은 사람이 살아나면 그거 징그럽지요. 산 사람들은 재혼해서 아들 딸 낳고 잘 사는 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면 우리에게 덕이 안 되니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지금 여기서 서울에서 아산에서 혹은 포항에서 일어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 기독교의 핵심을 풀자구요. 넌센스 퀴즈 그만하고.



여러분에게 나눠드린 유인물을 보면 예수! 하나님도 돈도 권력도 없이 어떻게 나에게 메시야가 될 수 있느냐? 이게 숙제입니다.





저는 예수 믿어서 기적을 경험한 적이 없어요.



제가 반지하에 개척교회를 만들어 놓고 거기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동안에 아버님이 중풍으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마가복음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마가복음을 읽으면 읽을수록 은혜가 되지요.



성경에는 계속 기적이 일어나지만 저에게는 기적이 안 일어나지요. 그래서 성경을 깨닫게 되지요. 여러분이 비극을 경험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여러분이 비극을 당할 때 예수님이 많은 환자에게 기적을 행하였듯이 나에게 기적을 베풀 거라는 착각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복음서를 읽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가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마가복음을 읽으면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나의 신앙 나의 하나님 나의 예수. 불만이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조직신학을 했으므로 성서신학은 잘 모르지만 그것이 나의 신앙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본 훼퍼가 히틀러를 죽이려고 하는 일에 가담을 했고 감옥에 2년 있었는데 감옥에 있는 처음 1년 동안에도 본 훼퍼는 희망을 가졌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조직들이 계속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베르넨교수가 독일에서 공부했는데 독일에서 공부한 그 분의 말이 사실이라면, 예를 들면 6월21일날 장교회의가 있었고 그 자리에서 계획대로 본 훼퍼 일당이 한 계획한 대로 장교가 가지고 간 수류탄은 터졌습니다. 그랬데요. 본 훼퍼는 그것이 성공하면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한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감옥에 있는 동안 쓴 초기 자료들은 희망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지요. 그러나 그 시각이 되어서 폭탄은 터졌는데, 연합군이 쳐들어오고 독일군은 교착 상태에 빠져서 아무리 참모회의를 해도 희망이 없어서 히틀러는 창밖을 내다보고 한숨을 쉬고 있었는데 은행나무로 된 원탁 테이블이 터진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그때부터 본 훼퍼는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지요. 본 훼퍼는 몸으로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경험했지요. 여러분은 목회현장에서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경험했나요? 저는 하나님 이야기가 예수 이야기를 하는 데는 하나님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고 그거는 필요없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저만의 문제가 아니고 본 훼퍼가 몸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란 용어를 쓰는 거를 반대를 안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란 단어를 쓰는 게 커뮤니케이션이 빨리 됩니다. 우리의 인연은 전생의 인연입니다. 우리는 전생에 형제였습니다 그러면 빨리 알아듣잖아요. 뭐 족보 따져보자 그럴 필요는 없어요. 부부는 전생에 악연이다. 자식은 전생에 빚쟁이다 그거 무슨 말인지 빨리 알아듣는다. 말은 통하면 됐지 이 말이 사실일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성서언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이야기를 하는 데는 신은 전혀 해당이 없고 써도 좋지만 그거는 중요한 변수가 아니라는 거 본 훼퍼가 몸으로 경험해서 알고 이야기했는데 학자들이 공부를 안 해서 빨리 잊어버린 거지요. 저는 늘 마음속에 본 훼퍼를 생각하고 본 훼퍼의 숙제, 본 훼퍼는 뭔 말인지도 모르고 떠들었지요.



기독교의 비종교적 해석. 그것은 신없는 기독교의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겠느냐? 저는 그렇게 풉니다. 물론 본 훼퍼가 그렇게 해석했다는 건 아니에요. 본 훼퍼는 감옥에서 낙서만 몇 장하고 죽었지요.





그 다음, 조용기는 예수 믿으면 돈 번다고 자꾸 그러는데...



하버드 mba(경영학) 74학번 졸업생들 조사해보니까 MBA니까 아침마다 돈벌려고 하는 사람들이고, 경영학, 하버드생이니까 세계에 겁나는 게 없지요. 하버드 74 학번 입학생들 미국에서는 졸업으로 치겠지요. 졸업생들을 조사를 했어요. 아침마다 구체적으로 목표를 생각하고 교회로 말하면 새벽기도하고 나가는 사람들이 돈 벌어야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나가는 사람보다 능률이 8배나 낫다는 사회학적인 보고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돈돈돈돈 하는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은 확실하지요.



장로교에서는 돈 많이 버는 것이 구원의 확실한 징표라고 그러니까 장로교 장로가 돈 더 많이 벌고 제대로 된 감리교에서는 돈은 써야 된다고 가르치고 배우니까 감리교 장로들이 가난하지요. 돈독이 든 사람이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은 당연해요.



그건 기도의 응답이 아니라 세상적으로 봐도 욕심은 좋은 결과를 가져 오지요. 좋든 싫든.



따라서 기도해서 돈이 생긴다? 조용기목사와 맥을 같이 하는 로버트 슐러가 무너졌으므로 이젠 기도하면 된다는 그런 개소리는 미국에서는 못 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하면 된다? 박정희 복음하고 예수 복음하고는 같았는데 이젠 하면 된다는 말을 하면 안 되니까 이젠 뭐 하지? LA 에서는 젊은이들이 고민을 한다. 뭐 하지?



예수 이야기하면 되지. 그런데 예수 이야기는 끝이 십자가잖아요?



그거는 기독교가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거지요. 예수의 십자가는 비극이다는 말은 완전히 넌센스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날마다 십자가를 진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는 십자가는 상징이라는 겁니다. 날마다 어떻게 죽어요? 한번 지고 부활한다면 질 만한데 날마다 진다면 재미있겠네? 예수의 이야기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그런 이야기는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마가복음 1장만 읽고 나머지는 사고로 불타서 없어졌거나 물어 떠내려갔다고 생각하고 2박3일동안 여러분이 뭐하는지를 생각하라.



돈 번 사람도 여기 안 왔을 것이고 기도 응답받은 사람도 여기 안 왔을 것이고.



예수 이야기를 하는데 신이라는 단어를 쓰면 안 되고 하나님이란 단어가 불필요하지만 교회가서 써도 좋지만 여기서는 불필요하고. 이거해서 돈 번다? 이거 해서 출세한다? 성공한다? 그런 말도 쓰지 마시고 그런 제자들은 예수가 십자가를 지려는 그 당시도 쌈박질하고 있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 이름을 초대교회라고 그러는데 정말로 무식한 거지요. 초대교회가 지금과 똑같습니다. 예수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권력투쟁하고 서로 분쟁하고 예수에 대해서는 관심이 전혀 없고.... 지금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초대교회라고 특별히 사랑하고 지금은 안 사랑했다?



무식한 요한 웨슬레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건 넌센스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부흥사지 신학자는 아니니깐요.





따라서 예수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이거 해 가지고 돈도 못 벌고 출세도 못한다. 이게 백날 해 봐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처럼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대전제로 예수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예수가 저의 영혼을 살렸고 저에게 복음이 되고 사는데 문제가 없다고 봐요. 저는 속된 말로 구원받은 사람은 죽어도 좋다 그렇게 된다고 봐요.



여러분 자녀들이 컴퓨터에 빠져 있으면 엄마 아빠 말이 하나도 안 들려요. 너 내일 학교 못간다. 집에 가서 텔레비전 못 본다. 상관없어요. 그게 딱 예수라고요. 부모가 뭐라 그래, 하나님이 뭐라 그래, 제자들이 뭐라 그래, 저기가면 죽는다. 못 말려요. 못 말려. 오늘도 그런 일은 주변에서 날마다 일어나고 있고 사춘기 아이들에게서 부터도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도처에서 우리는 예수 현상을 볼 수 있는 거라고요. 이 예수 이야기를 통하여 어린이가 컴퓨터 중독에 빠진 것처럼 우리도 빠질 수 있는데 컴퓨터에 빠져서는 패가망신이고 인생을 낭비하지만 예수에 빠져 중독돼서 재미를 보면 그게 거창한 말로 하면 하나님 나라가 오는 거고 작게 말하면 주변에 물든 사람들이 함께 재미있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거라고 봅니다.





그게 마가복음 1장의 언어로 보면 복음이고 복음이란 단어는 바울이 퍼뜨린 단어일텐데 왜냐하면 이게 로마지배권 문화권에서만 선포되는 건데 황제만 선포하는 거니까.



요한복음에는 복음이란 단어가 안 나옵니다. 희랍문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요한복음에도 복음이란 단어는 안 나오는데 요한복음이 왜 복음인지 모르겠어요.



신약성서의 대부분의 말은 바울이 만들어 냈을 거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불평불만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기라성같은 예루살렘의 기둥들이 유대화하려고 했기 때문에 예수가 복음 전달자라는 것은 황제에게만 할 수 있는 건데 예수를 황제와 같은 위치에 놓고 복음전달자라는 이상한 착상은, 율법교사라는 말이라면 모를까 그건 바울에서나 나올만한 말이지 예수의 동생 야고보나 예수의 직계제자 베드로에게서는 나와야할 이유가 없는 말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가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중요한 개념은 바울의 사전에서 나온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지금은 논쟁이 많이 있지만 나의 견해로는 그래요. 바울의 문서가 복음서의 문서보다 15년 20년 30년 앞섰기 때문에 바울을 몰랐을 리 없다고요. 사도행전만 봐도 바울을 알고 있었고 바울을 욕하고 변질시키잖아요.





베드로 전서인가 후서에 베드로가 쓴 거는 아니지만 바울이 너무 어렵고 바울을 따라가다가 패가망신한 사람이 영적으로 많다라는 대목이 나오는 것은 초대교회에서는 바울이 문제의 인물이였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거는 두 개의 노선, 예루살렘 기독교와 바울의 기독교는 노선이 개념이 너무 달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노선이 달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는 족보상으로는 아니지만 예루살렘 기독교이다. 이건 제도적인 기독교이고 순 엉터리 기독교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경상도도 아니고 전라도도 아닌 강원도 촌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다. 경상도 사람은 지배권자이기 때문에 이 지배세력 속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이명박처럼 축복받은 거에요. 저의 어머니는 강원도 계시지만 사상적으로는 소망교회 교인이지요. 엄마가 기도를 열심히 잘 해서 대통령이 됐다는데 나는 기도를 못해서 내 아들은 쫓겨다니고 그래서 내 어머니는 더 많이 기도하려고 노력하지요, 사고방식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잘못됐다는 데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이 없고 출세만 하려고 하는 것이 경상도 신학이지요. 가치관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배 아프다 뒤집어엎자는 것이 전라도신학이고 민중신학입니다. 이게 해방신학이다. 저기 강원도 사람이 볼 때는 잘 해 봐라. 그게 그거지요. 요한계시록은 뒤집어엎자는 것이잖아요. 자기네들이 한번 다스려 보자. 그렇지만 어디도 못 끼는 강원도 사람은 갈아봤자 별 수 없다. 아이 우리는 관심없어.



강원도에서는 서울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미국에 갔을 때는 충격을 안 받았어요. 왜냐하면 공부를 하고 갔기 때문에. 그런데 시골에서 서울 왔을 때는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서울 한 복판을 다닐 수 있어? 그 충격이 얼마나 큰지 모르지요? 머리 속에서 없었던 나라에요, 강원도에서는 불필요한 나라엿어요, 중학교때 처음으로 서울놈을 만났는데 얼굴이 하애요. 수돗물 먹어서 하얀가 보다. 처음 서울 오자마자 깜짝 놀랐는데 저처럼 얼굴이 시커먼 사람들이 너무 많아 가지고. 서울놈을 한 놈 봤는데 얼굴이 하얘. 너 왜 그러냐? 수돗물 먹어서 그렇대. 그래서 수돗물 먹으면 다 하얘지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서울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강원도에서는 경상도나 전라도처럼 권력을 차지할 생각이나 뒤집어엎을 생각도 안 해요. 비정치적이고 탈정치적인 거에요.



몰트만이 탈 어쩌구저쩌구 하는데 그건 다 가진 자들의 장난이에요.



저는 저 자신의 이야기만 하려고 합니다, 저의 간증만.



오늘 저녁에도 자신의 이야기만 하면 됩니다. 너 틀렸다가 없다. 정죄하러 온 거 아니잖아요. 나는 예수 때문에 이렇게 재미있다는 말을 하면 됩니다.





마가복음1장을 보면 예수님이 하신 말이 다 들어있습니다. 동어반복입니다. 같은 비디오 또 보는 거예요. 그건 아무 필요 없습니다. 신학자들은 전부다 예수의 핵심이 십자가라고 그러고 부활은 나중에 붙여진 거라고 그러는데 신학자들은 돈주는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거지요.



저는 그렇게 안 봐요. 신학자로 온 게 아니고 20년간 목회한 목회자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성공할 수도 없고 서울 가서 한판 할 수도 없고 미국 유배지에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정치신학은 저에게 의미가 없는 거에요. 처음에는 저도 민중신학 해방신학의 분위기였기에 LA에 가 가지고 지역사회를 민주화하자. 지역사회를 하나님 나라 만들자고 많이 해 봤는데 저보다 이민 연령이 높으신 분들은 저의 잠꼬대를 귀엽게 봐 줬지요. 관심이 전혀 없는 거예요. LA에서 한국사람 데리고 하나님 나라 만들자고 그러면 미국을 개혁하는 건데 미국 사람들이 우리를 뭘로 보겠어요. 저거 미친 놈 아냐? 여기서 월남사람이나 태국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하나님 나라 만들자고 그러면 뭐라고 그러겠는가? 연극 무대에 올려 연출을 할 수 있으려는지는 모르지만 게네들이 귀담아 듣겠어요? 전혀 아니예요. 똑같은 거에요.





어?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그 다음부터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 줘야 하나? 고민이 되는 겁니다. 아는 거는 예수 이야기밖에 없고 돈 벌어 보려고 저도 경영학책을 좀 봤어요. 피터 트루커의 책을 좀 봤는데 1번 아는 걸로 돈 벌어라. 다른 일을 알고 싶으면 그 분야의 전문가를 고용하라. 전문가를 고용할 길은 없고 아는 이야기는 예수밖에 없고... 예수 이야기로 어떻게 먹고 사느냐? 예수 이야기가 아무 생각없이 써버이벌, 신분 해결, 취업, 애들 대학 보내는 거, 노후대책, 이런 짐승같은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는 이 사람에게 예수이야기를 어떻게 하냐? 이건 정말로 어려운 숙제예요. 이건 책에도 없는거에요. 고민을 좀 했지요. 내가 이 사람들에게 뭘 해 줄까? 그 사람들은 내가 서울에서 쫓겨왔다는 거는 다 알아서 불쌍히 여겨 밥은 먹여 주는데 밥값을 해야지. 곰이 거저 얻어먹으려면 재주를 부려야 할 것 아닌가. 사실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 사람들에게 어떤 예수를 어떻게 전할까? 그러다가 그 사람들이 앓고 있는 문제가 뭔가를 생각했어요. 이 사람들이 앓고 있는 문제가 뭐냐? 여자들은 잘 모르겠고 흑인신학의 언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민사회에 있는 남자들은 nobody. 정체성이 없는 거예요, 막말로 아무 것도 아닌 거예요. 그래서 마가복음 1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개같은 놈들에게 너도 사람이다. 사람 취급을 느낌으로 줬다고 생각합니다.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예수가 신학교 다니지요. 선생님 만나서 공부해서 졸업장 받고 대학원까지 가지요. 광야생활 40년 40일. 다 같은 거지요. 성령께서 스카웃해서 사단이라는 특수훈련을 통해서 짐승들도 같이 있었고 천사들도 도왔다고 그러는데 예수님이 신학교 안 나왔다는 건 거짓말이예요. 예수님은 두 개나 학교를 나왔지요. 세례요한에게서 배웠고 광야 대학을 나왔고. 거기서 합격해서 목회를 했지요.



예수님은 저보다 똑똑해서 목회를 시작하자마자 처음부터 자기가 죽을 줄 알고 계승자 후계자를 세웠어요. 저는 그걸 배운 적이 없어요, 신학교에서. 왜 예수가 제자들을 키웠는지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어요. 20년 목회하다가 문 닫으려고 보니 재미보다가 사생아를 낳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이제 어떻게 하나? 어디 가서 입양을 시켜야 하는데 입양할 교단이 없는 거예요. 교단을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가 없는 교단은 교회를 만드는 것도 어렵지만 뒷감당이 대책이 없는 거예요. 아직도 고민 중에 있어요. 목사 없는 교회를 해야 하나? 맨날 고민하고 있고, 몰몬교도 알아보려고 했고 일본의 무교회주의도 알아보려고 그러는데 아직은 대안이 없어요.



목회를 직업적으로 생각하고 목회로 돈 벌려고 하는 사람이 아닌 순수한 신앙공동체이면서 성경해석에 대해서 유지되는 저질교회가 아닌 교회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까? 노하우가 있으면 가르쳐 주세요. 저는 고민 중에 있어요. 그 사람들이 nobody에서 나도 잘 했다! 로. 그걸 열심히 잘 했고 그래서 교인들이 나를 짓밟고 넘어가더라. 가슴은 아프지만 잘 됐어요. 자식이 크면 아버지를 밟고 시집 가고 장가가지요. 그런 것처럼 그들은 저를 잔인하게 짓밟고 갔지만 따지고 보면 그건 수준에 있어서 그럴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자식이 성공하면 떠나야 되고 독자적인 노선을 가야됩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이 고마운 거는 나가서 한기연 책을 보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습니다. 망하려고 작정한 사람 아니고는 한기연 책을 자주 안 봅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에 성공했다고 봅니다, 저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니 잘났다는 소리를 계속 했고, 기죽어 지내던 그 사람들이 어 우리도 해야지. 그런데 유감스러운 거는 저랑 같이 끝까지 목회를 했으면 좋은데 제가 교회를 하다가 사임을 하고 거기 목사들이 많았어요. 평신도보다 목사 가족이 더 많았는데 왜냐하면 신학공부를 자꾸 하니깐. 너희들끼리 하라고 하니까 니가 있으면 우리가 불편하다고 해서 니가 나갈래 우리가 나갈까? 그 당시는 정치적인 감각이 없어서 몰랐어요. 그 사람들이 나가고 저만 남아서 뒷감당을 해야 하는데 이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한 이야기는 너 잘났다는 것 그래서 저는 설교준비 하나도 안 합니다. 그거 외에는 그 사람들에게 해 줄 말이 없어요.





바울은 예수를 그렇게 봤잖아요.



예수를 믿으면 마가복음 1장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원래는 거기 없었던 거라고 그래요. 예수는 메시야다. 희랍 컨셉. 단어는 희랍 컨셉이지만 그리스 히브리 컨셉. 예수는 메시야다. 못 알아들으니까 나중에 마가는 첨가를 했어요.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바울에 보면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딸이다. 강원도 사람들에게는 그런 정치적인 의미는 하나도 없어요. 나라는 세금만 거둬가는 나쁜 단어다. 세금은 안 거둬가는 게 좋아요. 하나님나라라도 나라라는 개념은 저에게는 아니예요. 여러분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저에게는 이게 강원도 사람들의 특징이예요. 나라? 그건 서울 사람이나 하는 거지요. 저 태백산맥 너머에 있는 사람들에게나 중요한 거고 필요한 거지 강원도 사는 사람은 바다와 하늘만 있으면 됐지 그거 뭐하는 거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나라는. 하나님 나라든지 임금님 나라든지 저는 안 좋아해요.





예수이야기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전개하려고 노력을 했고 그 사람들에게 바울의 이야기,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고, 요한복음은 아니예요. 예수가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전했지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다라는 것은 해석입니다. 저는 바울에게서 왔다고 봅니다.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민중신학이나 흑인신학이나 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다. 예수의 설교의 핵심이 하나님 나라다. 그거는 우리가 학자들에 의해 속는 거예요.





요한복음은 아니에요. 예수님의 진리를 가르친 거예요. 물론 하나님 나라이야기도 물론 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설교의 핵심은 진리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에이 이건 3대1이잖아 뭐 그럴텐데 3복음서는 예수님이 목회 1년 했어요. 유대인 학자 말에 의하면 6개월밖에 안 했다고 그래요. 가서 금방 죽은 거예요. 3년 못 끌어요. 그렇게 지독하게 살려면. 그런데 요한복음에만 예루살렘에 서너 번 갔다고요. 그럴 때는 3대1인데도 지가 유리한대로 예수님이 3년 목회했다고 믿어요. 근거가 하나도 없는데. 목사님들이 전문가인데도 근거없는 짓을 막 한다고요. 근거 따지지 않고 나한테 좋으면 좋은 거에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다 예수님이. 강원도 사람들에게는 안 통해요. 강원도 사람들더러 서울에 쳐들어가서 한양 수도권을 장악하자. 잘 먹고 잘 살아라. 저는 예수님이 그런 말은 안 했다고 봐요. 아마 했더라도 다른 말을 했을 거라고 봐요. 그건 중요하지 않고.



바울의 단어가 매우 정치적인데 하나님나라라는 말도 그렇고 복음이란 단어도 그렇고. 그것이 강원도나 한인 촌놈들이 백악관에 쳐들어가서 놓은 사람 될 생각은 안 해요. 그런 변두리에 있는, 구조적으로 변두리에 있는 이런 사람들에게도 예수가 복음이 되려면 바울의 이야기, 복음이라는 단어, 하나님 나라, 하나님 백성이란 단어를 바꾸면 뭐가 되겠느냐? 너 잘났다 이거지요. 그런데 감정적으로 너 잘났다는 하루 이틀이면 되는데 근거가 없으면 무너져요.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약간의 우울증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신학교 교수들이 하는 말이 너무 맘에 안 드는데 교수들 붙잡고 물어보면 답이 없어요. 그래서 교수들 실력이 없는 줄 알았지요. 그 사람들 괴롭힐 수는 없고 수요일 저녁에 조용기목사 교회가서 위로 받고 온 적도 있지만 그때는 그런 분위기에서 살아서 코드가 조금 맞았어요. 그러나 신학교에서 배우고 나니까 이건 순 장난하는 거였어요. 갈 데가 없어서 우울증에 걸리면 명동에 나가서 별 볼 일없는 처녀 총각들이 희희덕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에이! 저 놈들도 잘 낫는데 나도 잘났다고 그러고 오곤 했는데 정말로 나도 잘났다고 말하고 싶은데 근거가 없으면 쉽게 무너지더라고요. 친구가 있어 서로 자화자찬을 하면 괜찮은데 시골에서 온 놈이. 친구가 없어 굉장히 힘들더라. 사람들이 못 말리도록 나는 잘났다 너는 잘났다 그럴 수 있으면 구원받은 상태라고 봅니다. 하나님이 필요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할 게 없어요.



구약성서에는 충분히 나와 있습니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이 70이었어요. 세계나라가 70이었기 때문에 그 중에 하나가 야훼 하나님이지요. 야훼 하나님 나라. 야훼 하나님은 아직 나라를 형성하지 않아서 밑에 부하가 없었고 아브라함에게 와서 야 나도 하나님 노릇 좀 해 봐야 하는데 백성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아브라함은 그 주변 나라의 신을 만드는 사람이었어요. 신 같은 거는 내가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이삭의 부인이 신을 엉덩이에 깔고 앉아 가지고 와요. 거기 보면 똑같은 단어지요. 드라빔이라는데 원어로 보면 하나님이다. 하나님 그런 거다 별 거 아니예요. 아브라함이 하나님 내가 집안에서 만들 수도 있는데 니가 뭐야?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다는데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아브라함이 그래요. 너 뭐 줄 거야? 딜합니다. 이 하나님이 신 노릇 처음 해 보니까 뭘 모르는 거다. 뭐뭐뭐뭐 준다. 엑스. 또 하나님이 공부 좀 해 가지고 와서 또 나타나서 뭐뭐뭐뭐 준다 또 엑스. 세 번째로 와서 요즘 말로 고종명, 잘 죽게 해 줄께.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은 내일이 불안했고 죽는 거는 더 불안했던 것 같아요. 빵도 자식도 당연한 거고 그건 신 도움 없이도 되는 거예요. 이제 나이가 들어보니까 잘 죽는 거가 최고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잘 죽게 해 줄게. 그러니까 당첨! 그런데 뭐 아브라함이 한 두 살 먹은 앤가요? 하나님 말 안 듣지요. 하나님이 뭐 준다 줘 준다 했어도 기근이 들고 어려우니까 애굽으로 내려가고 아내도 팔아버리고 이삭도 똑같은 짓 하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자기를 안 믿는다는 걸 안 거예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아니면 백성이 없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끝까지 쫓아가고 마지막에 하나님이 아브라함하고 딜하지요. 그게 시험입니다. 성경에 그대로 되어 있어요. 이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이번에는 시험해 봅니다. 그 전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시험해 보고요. 그렇게 해야 할 거 아닌가요? 딜하려면 검증을 해 봐야 할 거 아니예요. 그래서 나중에 하나님은 당첨이 됐고 이제 아브라함하고 딜해야겠다고 동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못 믿는 거에요. 그래서 니 아들 바쳐라. 여러분, 자녀가 있으면 이 성경으로 설교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요. 믿음이 좋다구요? 자식한테 맞아 죽지요.



거기서는 완전히 하나님이 아브라함하고 딜하는 거거든요. 하나님이 오케이. 그래, 니 마음만 읽었으면 됐다. 이렇게 해서 일이 시작되는 거거든요.



거기에 하나님이 등장하지만 이건 완전히 세속적인 거라구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뭔가를 해 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 준 거예요.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와 성경이야기는 엄청나게 많이 달라요. 신학자들이 신학을 많이 만들어낸 거지요. 거짓말로. 저는 어떤 신학책보다는 성경이 훨씬 보다 정직하고 우리들에게 주는 영감이 많다고 봐요. 그래서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말로 대등해지는 거지요. 성경은 참 멋있는 이야기라고 봐요.





신약으로 넘어오면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뭘 했는가?



신학교 대학원까지 나오고 자기가 언제가는 끝났 줄 알고 제자들을 빨리 양성했고요 제자들하고 귀신 쫓아내고 베드로 장모 병 고치고 문둥병 고치고 그게 다예요. 완전히 무당하는 거 다 한 거지요.



그래서 질문한 거는 예수 목회한다는 것은 이거 하는 거예요. 자기 준비 잘하고 자기가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것을 잘 생각하고 후임 잘 결정하고 역사를 잘 이어갈 수 있게 준비하고 귀신 쫓아내고 병고치고. 어느 정도로 하느냐? 법의 한계를 잔인하게 넘어서. 이건데 아브라함이야기를 왜 했냐면 유대인들의 시각은 뭔가? 한인타운과 유대인 타운이 붙어있어서 유대인들을 자주 보는데 저 사람들은 뭐야? 이런 생각 자주 듭니다. 그래서 미워하지만 그 사람들 책을 보고 엄청나게 많은 거를 깨달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전지전능한 하나님 안 믿어요.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믿으면 히틀러에게 진 하나님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히틀러에게 떼죽음을 당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을 전지전능하다고 믿겠어요? 전지전능했기에 여러분의 자녀를 천국으로 데려갔다면 여러분 자살해야지요. 교인들이 멍청해서 질문 안 하니까 다행이지만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뼈아픈 아픔이기에 질문 안 할 수 없지요. 저는 호기심이 많아서 유대인들 불러다 물어봤어요. 미워하지만 배우려고 진짜로 물어봤어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문신이 있는 유대인 부부 데려다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어보고 너 하나님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어요. 아픈 거 건드리면 안 되는데 물어봤어요. 그 사람이 저를 한참을 쳐다보더라고요. 어이가 없는가 봐요. 신학자이며 목사인 사람이 너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니 어이가 없나 봐요. 성경이 책상에 놓여 있었는데.... 이게 하나님 이래. 율법주의. 율법은 토라라는 건데. 이게 하나님이래. 그래서 또 가만 있었지요. 이거대로 살면 되는 거래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질문하는 게 아니래요. 이거대로 살면 된다고. 싫으면 관두는 거래요. 그런데 새로운 하나님 만나려고 뜻을 알려고 기도하는 사람 많지요. 이런 도둑놈들 어디 있어요? 재림예수 왜 기다려요? 예수님 여기다 할 말은 다 했는데! 그거 보면 수상한 거예요. 성경 안 믿는 사람들이예요. 보수주의자들 기도 더 많이 하지요? 기도는 왜 해? 여기 다 있는데? action 은 필요할지 모르지만 왜 방황해요? 여기 다 있는데! 유대인들 만나서 저는 충격받았어요. 그러면서 유대인들 책을 보기 시작했는데 도대체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긴 사람들이냐? 그들은 자기네들의 하나님이 절대로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해요. 그러면 히틀러에게 진 하나님을 인정할 수가 없는 거에요. 어떻게 설명해요?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 세상의 하나님은 둘이다. 강한 하나님과 연약한 하나님, 강한 하나님은 나쁜 새끼야. 인간을 잔인하게 짓밟아. 꼭 누구 누구 같애. 죄를 더 많이 짓고도 시람을 더 많이 죽이고도 노벨 평화상을 받는 누구같애!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은 안 믿어. 없어서도 아니야. 약해서도 아니야. 그거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성이 없기 때문에 그 신은 안 믿어. 그러면 우리 하나님? 비실비실하고 약하지만 인간을 사랑하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래서 나는 그 신을 오늘도 예배하기로 결심한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글을 쓰는 거예요. 저는 설교할 거리가 없으면 유대인들의 설교집을 봅니다. 기독교인들의 설교집은 하면 된다는 거예요. 다.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너무 가벼운 거예요. 유대인들의 설교를 보면서 아 정말 이렇게 하는 거구나. 고난이 인간의 영혼의 깊이에 들어가는구나. 감동받고 유대인들의 책을 꽤 많이 봤어요.





여기 혹시 목회하는 사람들 교회에서 기도 가르치나요? 저는 교회에서 기도하지 말라고 그래요. 그래도 기도하고 싶으면 유대인들처럼 하라고 하지요.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기 전에는 절대로 기도하지 말라고 그래요. 성경을 읽고 그 성경과 가까이 가려고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 거예요. 그리고 기도는 안 하면 좋고 하나님의 도움을 청했으면 고거만큼, 우리 아들 공부 좀 잘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으면, 기도가 응답이 되느냐 안 되느냐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신학책에 많이 나오는데 이건 신학자들이 기도 안 하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뭐 기도를 심심해서 해요? 아프니깐, 다른 길이 없으니까 하는 거지. 기도가 응답이 되고 안 되고가 어디 있어요? 지금 내 아들이 울고 있는데 죽어가고 있는데... 기도 응답? 그건 날라리 신학이다. 혼동하지 마세요.



유대인들은 내가 하나님 말씀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청했으면 그만큼 나와 같은 아픔을 세상에서 누군가가 당하고 있다는 거예요. 사이즈는 작을지 몰라요. 나한테는 만원이 필요한데 내 옆에는 100원이 없어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다고 보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그렇게 봐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창조과정 속에 있는 아직도 혼돈과 흑암속에 있는 세상이라고 봐요. 이직도 메시야가 안 왔기 때문에. 이 세상이 하나님의 고통이 해석되고 그게 나의 기도거리가 되고 나에게도 하나님의 고통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고통을 치료하기 위해 기도했으면 나도 하나님을 돕는 거예요. 이 세상에 고통받고 있는 생명을 치료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뭐 히브리 단어가 있어요. REPAIR THE WORLD, HEALING THE WORLD 같은 단어예요. 이 세상을 치료하는데 하나님하고 동업자가 되어 참여하는 거예요. 이게 삼박자 영성이예요. 성경 읽고 기도하고 기도한 만큼 액션하고. 다시 성경읽고. 이게 삼박자의 영성생활이예요.



야, 이렇게 한다면 한국 사람들은 기도를 좋아하는데 이런 기도라면 괜찮겠다 싶어요. 그런데 이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글을 써요. 참 무서운 사람들이예요.



그들은 타락 안 믿고 천당도 안 믿어요. 사람들이 너무 천당을 좋아하니까 랍비가 믿고 싶으면 믿어라 그렇지만 오리지널은 아니다. 그냥 요 정도 이거든요. 유대인들 이야기를 왜 하냐면 유대인들은 오늘 마가복음 1장의 이야기를 알고 뭐라 그러냐 면 예수가 병을 고쳤어? 병을 안 고치면 오늘 죽을 건데 고쳤기 때문에 10년 후에 죽어. 그럼 말짱 도로묵이야? 기독교인들 너희들 그런 거야? 예수라는 선생이 메시야라는 예수가 고작 그런 거 하는 거야? 그런 거지요.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그럴 거예요? 병 낫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은 멍청한 거라고 해요. 언젠가는 하나님한테 배신을 당한다는 거지요. 유대인들은 그렇게 써요. 여기 신유의 은사받은 목사님들 설명해 보세요.





그러면 유대인들은 뭘 기도하냐? DIVAIN PRESENCE. 내가 병에 걸렸어. 영적인 문제는 뭐냐? 아픔이 문제가 아니고 죽음이 문제가 아니예요. 사람은 죽게 되어 있고 아플 수도 있는 거라고요. 문제는 내 영혼이 아픈데 하나님이 나를 버린 건지 안 버린 건지 세상에 히틀러가 있기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거다. 피할 수 없다. 고통은 OK 그런데 하나님이 날 버렸느냐? 안 버렸느냐? 유대인들은 그거다. 하나님이 날 버렸는가? 마사다 항쟁때도 70년에 예루살렘이 무너질 때도, 드라마에도 나오는데 마사다항쟁때 마지막 순간에 투사들이 마지막 드리고 기도하는 말이 우리 후손들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도록 해 달라.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가 아직도 크기 때문에 우리가 용서받지 못하고 가는 것이고 우리가 패한 것이 아니다.



열왕기 상하도 정신맥락에서 보면 똑같은 거다. 아들 6명이 즉시 처형되지요. 어머니가 똑같은 기도를 하는 거예요. 다 같은 겁니다. 이기고 지는 게 문제가 아니예요. 그 깊은 곳에서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내 심정으로부터 이 고난속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확신만 선다면 그 다음에는 죽어도 좋다는 거지요. 죽어도 좋다.





기독교인들 돈을 그렇게 많이 벌고도 김영주! 김동환이 똘만이처럼 열심히 따라다니다가 뭘 배웠는지 모르겠다. 돈 주니까 이상한 짓하고 wcc가 뭔지 알게 뭐에요? 그가 공부 안 했는데 뭘 하는지 모르지요. 개인을 욕할 게 아니예요. 목회자들이 공부를 안 했으니 wcc가 뭔지 모르는 거다. 거기 가 있어도 뭐가 뭔지 모른다. 저는 개인을 비방하는 게 아니예요. 큰 교회가 무너진다. 김영주가 무너진다.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에로 생각하면 안 되요. 목사들이 공부를 안 해서 문제라고요. 개인의 문제는 그의 임기가 끝나면 끝나는 거예요. 이건 그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라고요. 기독교 역사를 배우지 않은 사람이 돈 주고 이거 도장 찍자 그러면 그냥 찍는 거에요. 10년도 더 됐지요? 조용기 목사 그룹을 ncc로 받아들였을 때 이미 다 죄를 진 거고 김영주는 죄가 없는 거예요. 이미 오래 전에 선배들이 했는데 왜 김영주가 욕을 먹어야 되는 거예요? 그때 여러분은 가만있다가 이제 싹이 자라 열매를 맺으니까 으으! 깜짝 놀라가지고 지금 그러는데. ncc 계통의 진보세력들은 난리가 났는데 그거는 잘못이지요. 지금 와 가지고. 그래서 지도자들은 공부를 해야 되는데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정체성 예수의 복음의 핵심을 충분히 모르는 거예요. 신학자들은 계급적으로 보면 배부르고 한가한 사람들이예요. 여기 두 사람이 신학자라고 그래요. 신학자들은 한 박사가 뭐라 그랬냐? 김박사가 뭐라 그랬냐? 이건 짜고 치는 고스톱이에요. Real 피플들이 리얼 스토리 리얼 아픔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은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고 문제를 알아도 풀 수가 없어요.





78년 미국에 처음 가서 교수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어요. 그때는 인권운둥이 아직도 있었던 때고 혁명이 일어나고 있던 때거든요. 혁명에 대해서는 이야기하는데 혁명의 반대세력인 tv 에반젤리스트들이 TV 에 나와서 종말이 온다고 엄청나게 있었어요. 그래서 교수들 만나 물어봤어요. 나는 한국 같은 촌동네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 문명국가 미국에서 인권운동의 본산지같은 미국에서 저녁마다 tv에 나와서 이상한 사람들이 나와서 설치는데 신학자인 너희들 뭐하는 거냐고 물어봤어요. 교수들의 답변이 뭔 줄 아느냐? 우리들은 진흙탕에 들어갈 장화가 없어. 그거 안 들어가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어. 여러분, 신학자 무시하진 마세요. 그러나 존중할 이유는 전혀 없는 거예요. 신학자들에게 신학을 배우는 시대는 지나갔어요 그건 아니예요.





여러분의 문제는 여러분이 풀어야 해요. 대학원까지 나오셨잖아요. 여러분이 문제를 내놓고 공동으로 풀어가면 풀린다고요. 신학은 지네들끼리 하는 거예요. 다른 신학자가 뭐라고 그랬느냐 그거예요. 지금 최첨단의 신학성서학이 뭔지 아세요? 클레아몬트나 하버드에서 마가복음은 호우머와 일리야드와 플라톤을 베꼈다. 사실이라고 쳐요. 국제무대에서 우리가 신학을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여기 희랍에서 온 사람이 있다고 쳐요. 기독교로 개종하려고 마음먹고 여기 왔다고 쳐요. 클레아몬트와 하버드에서 이 신약성경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희랍의 원조 상 호우머와 플라톤을 베낀 겁니다라고 하면 기독교로 개종하겠어요? 우리는 지금 예수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최첨단의 신약학자들이 이거한단 말이예요. 이게 틀렸다는 게 아니예요. 그것만 해서는, 거기서 졸업해서는 목회자가 죽었다 깨나도 못 하는 거고 그래서 클레아몬트신학교가 이슬람대학으로 넘어간 거예요. 이건 장난이 아닌 거예요. 기독교는 몰락해 가고 있고 이 몰락은 피할 수 없는 거라고요.





여러분이 오늘 저녁에 풀어야 됩니다. 그게 뭐냐?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 마가복음 1장에 있는 이 일이 요한복음 3장16절로 말하면 수혜자 입장에서 이게 영생이다. 그런 고백이 나올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냐는 거에요.



영생은 시간적인 영생이 아니지요. full life 영생이다. fulling fumain fuman life 내가 정말로 인간대접을 받는구나. 정말로 내가 사람 취급을 받는구나. 그러면 죽어도 되는 거 아니에요? 뭘 더 바랄 게 있나요?



예수는 모든 사람에게 희망은 아닙니다. 대중들에게 예수는 희망이 아니었어요. 안병무선생님은 다 좋은데 저는 개인적으로 친하고 존경해요. 군중이 민중이다. no way. 군중은 이거예요. 쓰레기들이예요. 단물만 빼먹고 다 도망갔습니다. 제가 읽은 성경은 그래요. 또 다른 성경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대중은 역사창조에서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이 대중이 아니고.





수혜자들 중에 예수의 일을 계승한 사람들이 있지요. 그 사람들은 따로 있는 거예요. 이 수혜자 입장에서 보면 예수 이야기가 복음이고 정치적으로 보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고 그 수혜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 자녀가 된다는 거는 황제처럼 되는 거고 그거는 다른 말로 하면 자존감의 회복이지요. 나도 인간이구나! 그걸 회복하는 것이고 속된 말로 하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못 말리는 거지요. 그런 경험을 한 거라고 봐요. 예수가 병을 고쳤느냐? 그거는 하나의 툴이라고요. 조용기 목사의 수요 집회를 가면 광고를 해요. 내일은 앉은뱅이 그 다음 주는 호흡기 질환..... 그 사람들이 딱 오면 방언으로 막 기도하지요, 저도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고 방언으로 기도해서 병도 낫고 귀신도 좇아낸 경험도 있어요. 그거 없었으면 아직도 제가 감신대 있었을 거예요. 곽전태 똘만이가 와서 신앙고백서를 쓰면 살려준다고 그러더라고요. 우리 선생들이 그거 많이 했는데 고생 많이 했지만 나는 그거 못한다. 내가 신학적인 글을 쓰는 거는 신앙 고백의 행위다. 너희들이 한강을 넘을 수 있냐? 나도 한다. 니네들이 죽은 자를 살리냐? 나도 한다 나도 경험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치사하게는 못 살아남는다. 그런 거는 못한다. 그러니까 곧바로 가서 일러서 곽전태가 일을 저지른 거지요. 무식한 놈에게 성경을 읽어줬더니 감독실에서 성경이 틀렸느냐고 그러더라고요. 어느 대목이냐 하면 부활, 여러분 부활을 믿어요? 아니 믿어져요 머리로? 죽은 파리가 살아나면 그게 부활이예요? 하나님의 행위가 읽혀지는 사건이 부활입니다. 사람이 죽었다 살아나는 게 부활이 아니예요. 부활은 바울이 만든 거예요. 바울은 졸업장이 없거든요. 졸업장을 받아야 사도인데 졸업장을 못 받았어요. 그런데 바울은 부활한 예수를 봤다는 거예요. 언제 봤냐? 부활한 예수 봤다. 그래서 부활 부활 그러는 거지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바울이 쫙 줄 세우지요. 베드로 인정해 주고 야고보도 인정해주고 그 똑같은 경험을 자기도 했다는 거예요. 질적으로 똑같은 거고 시간 차이는 최소한 3년이 되요 길게는 5년. 며칠이라도 상관없어요. 누가복음에는 예수는 40일 후에 올라갔어요. 그래서 40일 지나면 예수를 경험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40일이 지났는데 바울이 예수를 만난 거예요. 영적인 예수지요. 뭐라든 예수를 만났는데 바울의 고집은 베드로가 본 부활한 예수나 자기가 본 부활한 예수나 동질이라는 것이 고린도전서 15장의 핵심이예요. 읽어줬더니 성경이 틀렸다고 해요. 박준태 지가 성경 위에 있는 거예요. 지가 틀렸지 성경이 틀렸나? 무식한 것들이 감리교 감독한다고!





예수의 이야기는 수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병고침 받은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들이 비난하듯이 병을 고친 게 아니예요. 조금 있으면 병에 또 걸리고 그러다 죽어요. 그게 아니라고요. 예수님이 고친 사람들은 다 천벌을 받은 사람들이예요. 하나님이 버린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회복된 거에요. 그러니까 이건 하나님의 임재를 그 사람들이 자타가 공인하도록 체험한 거예요. 그런데 조용기목사는 신학교 안 나왔으니까 할 말이 없어요. 어느 신학교 나왔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무면허 의료 행위를 했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환자는 세브란스로 오라고 하면 되지.... 조용기 목사는 집단으로 고친다. 이걸 보고선 이건 아니다. 예수님은 집단으로 고친 적이 없는 거예요. 한 사람씩 고쳤는데...문둥이는 10명 고쳤지만 그 중에서 한 사람만 고쳤다. 문둥이 10명 고친 것이 집단으로 고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지 모른다. 제일 약오르는 것은 베데스타 연못가에 사람들이 쫙 있는데 온천이 부글부글 끓을 때 들어가야 하는데 기회를 놓쳐서 못 들어간 사람들이 쭉 있는데 일요일날 무슨 예수님이 뭐 할 일이 있겠어요? 거기 와 가지고 몇 사람 고쳤어요? 성경 잘 아시는 분 말해 보세요. 한 사람 고치고 가셨어요. 여러분은 거기서 고침 받은 사람이라고 자꾸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는 선천적으로 비관적이에요. 저는 거기서 고침을 못 받았지만 거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 성경을 보는 거에요. 예수 개새끼다. 그렇잖아요. 만일 이게 의료행위였다면, 예수님이 설교하는 거였다면 그 설교를 다 들었을 거 아닌가요? 병이 낫고 안 낫고가 핵심이 아니지요. 이게. 이 병을 고쳤느냐 안 고쳤느냐 이렇게 묻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정신 나간 놈들이지요. 지네들이 목회 안 해 봐서 모르는 거라고요. 성경을 진지하게 안 읽어봐서 모르는 거에요. 목회를 진지하게 안 해 봐서 모르는 거다. 왜 거기에 그런 질문이 들어가요? 그게 아니고 버림받은 사람, 천벌을 받은 사람에게 나아가서 상징적인 설교를 하는 거잖아요. 너도 사람이야.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박수갈채를 쳤을 거라고 봐요. 아니면 조용기처럼 의료행위를 한 거라면 예수님이 몰매 맞아 죽지요. 안식일날 뭐 할 일이 있다고? 그건 넌센스에요. 안식일날. 많은 성경학자들은 성경을 충분히 진지하게 안 봐요. 왜냐하면 이건 서양 사람들이 하는 신학이기 때문에.





제가 미국에 공부하러 간 거는 처음부터 예수가 누구인지 알려고 갔어요. 처음부터. 신학 공부하러 간 게 아니에요. 내 문제를 풀기 위해 유학을 간 거에요. 슈버트 오그덴하고 대형 교실에서는 못 싸우고 페이퍼로 싸웠어요. 내가 중학생때까지 잘 살다가 어느날 예수한테 꼬여가지고 예수 믿으려고 왔고 예수가 누구인지 잘 몰라서 예수 찾으러 왔는데 슈버트 오그덴이 불트만 제자라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고. 자료가 많아서 아리까리하고. 이미 지네들은 신앙이 있잖아요. 지네들은. 서양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신앙이 있는 거다 조상 대대로. 루터대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믿음만 있으면 됐지 알 필요가 없다. 이런 거거든요.



지난 주에도 갈릴리 박사원 과정의 학생들하고도 사용했던 거지만 이정배교수도 번역한 밀리오레의 책에 보면 딱 그런 거에요. 예수는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다. 미친 새끼들이에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믿어. 모르는 사람에게 우리의 일생을 투자하라는 얘긴데 제가 슈버트 오그덴에게 우리는 그럴 수는 없다. 너나 잘 해라. 고딕체로 JESUS QUESTION. 니가 해라.



하버드 대학 카프만하고도 제가 똑같은 질문을 했지요.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해서 예수를 믿으려고 그러는데 너는 예수의 독특한 메시지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잘 모르겠다고 해서 열받아 다시 질문, 너 왜 기독교인이 됐냐? 아니? 그냥 됐어. 말하자면 미국 사람에게 너 왜 미국인이냐? 묻는 거나 똑같은 거지. 그냥 태어난거지. 뻔한 거다. It just happen to me? 어 이게 아니네? 하버드대학 교수한테 뭐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라서 그 사람에게서 내가 뭘 배운다? no way. 꿈 깨어야 되요. 지금. 세계가 우리에게서 배워야 된다구요.



제가 감신에 있을 때 제가 박사학위를 못 주니까 디민 프로그램한다고 여기저기 다니다가 오스틴장로교신학교에서 우리하고 디민하자고 하니까 그쪽 선생들이 뭐라고 그러는 줄 아세요? 우리가 너희들에게 한수 배우러 가야지. 당신들이 왜 우리한테서 배우냐? 서양의 기독교는 몰락해 가고 있고 한국의 기독교는 아직도 번창하고 있는데 왜 너희가 우리한테 배우냐? 우리가 너희한테 배우러 가야지. 어 우리는 문교부에서 학위를 못 준다고 그러니까 이상하다고 그러는 거에요. 세계는 달라지고 있어요. 급변하는 한국에 열정도 있고 재정도 있고 머리도 있어요. 정신차려야 되는 거예요. 서양 신학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건 어림도 없어요.



이제 25일에 서대문에서 갈릴리 학교 박사원 입학식을 기념해서 지금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WCC 종교다원주의 신학에 대해서 처음으로 입을 열려고 그럽니다. 저의 스승인 변선환선생님이 계속 종교다원주의를 이야기했고 그것 때문에 수난을 당했기 때문에 제가 학문적으로 종교다원주의나 변선환선생님을 비판을 하면 한국에서는 제자가 스승을 비난하는 풍토가 되기 때문에 제가 이제까지는 침묵을 했는데 이제는 끝났기 때문에 변선환 선생이 소개하는 서양의 종교다원주의 신학?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그런 거 배우면 안 되요. 저는 오직 예수라구요. 그래야 비즈니스가 되지요. 안 그래요? 다른 걸로도 구원받으면 거기로 갔지 미쳤다고 여기와 있어요? 기독교에서 제가 한 푼도 얻는 게 없는데?



그거와, 내가 남들에게서 끊임없이 배운다는 것은 그게 예수 정신이예요.





지금까지 종교다원주의는 남들 하고도 문제없이 우리가 잘 사는데 얘네들이 옆집에 왔어. 야금야금 왔어. 얘네들 봐줄까 말까? 어떻게 할까? 그건 개떡같은 신학이예요. 우리는 종교다원주의 상황 속에서 태어났고 다른 종교인이 우리의 가족이예요. 우리가 대답을 해야지 게네들이 뭘 알아요? 게네들이 서양 사람들이 다 똑똑한 줄 아세요? 미국에서 대학원 나오면 미니멈 6만불 받아요. 그런데 신학교 나오면 3만불도 못 받아요. 그래도 오겠다는 사람들은 쓰레기라고요. 지금 남아있는 사람들. 1980년이후 전세계적으로 조직신학자 글이 한 편도 안 나와요. 똑똑한 사람들은 신학 공부 안 해요. 조직신학이 죽으면 성서신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성서를 해석할 툴이 없는 거에요. 개념이. 따라서 조직신학이 죽는다는 것은 기독교가 끝났다는 걸 의미해요. 그래서 미주오리가 아직도 프린스턴의 신학교의 교수인데 그 친구의 글을 보면 한심스럽기 짝이 없어요. 예수는 몰라도 좋다? 지네들끼리는 그래도 되요. 그렇지만 우리는 왜 예수를 믿느냐? 다른 방법으로 살지?





예수가 뭘 했냐? 문자 그대로 보면 병을 고친 사람이예요. 귀신을 좇아낸 사람이예요. 그거밖에 한 게 없어요. 그러나 이게 뭘 의미하느냐? 우리가 조용기처럼 병을 고칠 거냐? 문자적으로 보면 조용기신학에 비하면 민중신학이 뒤떨어진다. 문자적으로 보면 민중신학은 할 말이 별로 없어요. 가난한 자에게 뭘 줬다고 그러는데 예수님은 그런 거 한 적이 없거든요. 가난한 자는 언제나 있을 것이니 나를 위해 화병을 깬, 보물을 깬 이 여인이 잘한 거라는 이 따위 소리나 하고 가난한 자를 위해서 예언서는 읽었지만 실제로 한 게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장만 넘기면 병 고치고 병 고치고....신학을 문자적으로만 보면 조용기가 훨씬 난 거예요. 제가 민중신학 하는 사람들 보고 이건 정말 유치하다. 조용기가 들었으면 내가 훨씬 더 성서적이다 이렇게 말할 것 같더라고요. 신학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예요. 문자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병을 고친 거지만 병을 고친 거는 아니라고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알기 때문에 조금 있으면 또 죽을 건데...또 병 날 건데 병 고친 게 그게 뭐 메시야거리가 되냐?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있는 대로 그게 뭐 영생씩이나 되냐? 바울의 말대로 그게 무슨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는 거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거냐? 적들의 비판, 예수를 죽인 당국자들과 유대인들의 비판, 예수에게 흥미를 안 가졌던 대중들의 비판은 중요한 거라고요. 왜냐하면 우리의 가족들, 예수 바깥의 사람들은 예수는 흥미없다고 보고 예수의 일이 겨우 고작 그거냐고 비난하는 사람도 우리 주변에 있고 분명히 성경에도 써 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의 수혜자이고 예수에게서 영생, 충분히 인간대접 받는 삶, 죽는 것을 겁내지 않는 삶을 체험했으니까 지금도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겠느냐? 저는 그런 거예요.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해 보면 먹혀들어가요. 그 사람들이 제한테 돈은 내지는 않지만 저는 LA에서 20년동안 그 이야기한 거다. 그래서 저는 설교준비 하나도 안 하고 맨날 똑같은 설교한다. 저만 그런 게 아니고 로버트 슐러도 어느 날 고백을 하더라고요. 18년동안 설교 한 편 밖에 안 했다고. 여러분, 설교 이것저것 하지 마세요. 어떤 사람은 렉셔너리보고 한다는데 학자들이 쓴 거 따라가지 마세요. 교인들이 아픈 거 여러분이 알지 렉셔너리가 뭘 아느냐? 학자들은 돈 받고 3년치 뺑뺑이 돌리는 거 하는 거에요. 한 가지 설교를 하세요. 그 교회에서는. 교회가 달라지만 아픔이 달라져요. 그 아픔이 치료되면 다른 거 해도 되지만 교인들의 아픔의 focus에 맞는 그 이야기만 하세요. 로버트 술려도 그렇게 하더라. 저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이것저것 하면 헷갈릴 수 있어요. 조용기는 삼박자 축복 그것만 한다. 조용기는 신학이 있는데 여러분은 건강한 목회 한다고 이것저것 찝쩍거리면 여러분의 아이덴티티가 없어지는 거예요. 한 가지만 열심히 이야기 하십시요. 그러면 여러분에게도 희망이 있을 거라고 봐요. 질문있으면 하세요.





하나님 없이 돈없이 성공없이 예수는 사람들에게 줄 것이 있다. I am somebody. 저는 예수 때문에 정말 그렇게 살았어요. 미안하지만 유교문화에서는 선생에게 도전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저는 선생을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제 개인적인 신념 때문에 도전을 했던 것이고 제가 학교에 있을 때 제 제자들이 제가 삐딱하니까 역적모의하러 와요. 물으러 오면 저는 언제나 그럽니다. 너 혼자 결단해라. 학원사태던지 크리스천 투쟁이던지 대장부 투쟁이던지 너 혼자 결단해라. 크리스천 양심으로, 개강 예배때 목사님이 좋은 말씀 하셨어요. 너 혼자서도 이 일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면 당연히 해라.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학우들이 도와줄 거라고 생각해서 하냐? 그것 때문에 하냐? 그건 크리스천이 아니다. 내가 크리스천으로서 대답해 줄 수 있는 거는 크리스천 양심으로서 데모를 어떻게 할 거냐는 것 밖에 충고해 줄 게 없다. 저는 선생님들에게 대든 게 아니예요. 그거는 유교질서에 어긋나는 거지요. 그런데 학자로서 후학들을 기르는 양심으로서 어느 게 옳으냐 그르냐? 그거에 대해서는 제가 타협하고 어물쩡거린다면 내가 내가 아니잖아요? 사람이....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저는 예수를 믿는 게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돈 받으면 좋지요. 돈 얼마나 좋아요? 그거 싫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뭐에요? 종교적인 언어로 말하면 그게 영혼이에요. 영혼이 뭔가? 보수적인 말로 하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고 세속적인 철학으로 말하면 내 삶의 패턴이다. 목회는 삶의 무늬, 패턴, 혹은 심리적인 언어로 성격이 반복되는 거다. 반복되는 내 행위의 동기와 목표, 목적, 그게 늘 무늬처럼 패턴이 되어 크리스천이 되는 거고 그것이 황제가 하듯이 당당하게 세상 죽는 거 겁 안 나고. 저는 그거를 예수님한테서 배웠어요. 그게 군대가서도 도움이 됐고 해외 유학가서도 도움이 됐고 사실은 저한테는 도움이 됐는데 학교에는 혼란만 주어서 사실은 미안해요. 감신을 제대로 갔는데 얼마 후에 후퇴해 가지고 한쪽은 비판 정신이 있고 한쪽은 교회가 엉뚱하게 물량주의로 가는 거는 신학교가 무너졌기 때문에 양쪽이 동시에 무너지는 건데 이건 변선환선생님과 저하고 죽어서라도 굿을 해서라도 갚아야 될 문제입니다. 언젠가는 회복되어야 될 문제에요. 이건 잘못입니다. 그러나 아까도 박종천 총장한테도 이야기했는데 그 당시에 사건을 저지른 한 사람으로서 참회의 글을 쓴다면 물론 소망은 비판적인 정신이 살아나는 건 좋지만 교회에 대한 애정은 엄청나게 부족했다. 그건 제가 20년동안 목회자의 자리에 서 봐서 알아요.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이 목회현장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요.





이 목회자의 심정을 단적으로 설명해 줄께요.



목회를 하고 싶지 않았는데 신학공부만 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가만히 보니까 저 놈이 밥벌이할 출처가 없으니까 역적모의를 해 가지고 헌금이 오고가는 모양새가 제일 좋은 게 예배예요. 그거 모르셨죠? 알고 있었나요? 성경공부는 백날 해 봐야 돈이 안 생겨요. 예배를 드려서 돈이 오가면 근사해져요. 사랑도 돈이 오가면, 여성신학자 또 난리나겠다 구식 언어니까 양해해요. 똑같은 성경공부라도 돈이 창녀처럼 되요. 성경공부도 돈이 오가면 예배가 돼서 고상해진다. 똑같은 건데도 돈이 오가면. 그래서 성경공부하던 사람들이 역적모의해 가지고 교회를 차린 거예요. 저는 목회에 흥미가 없어 도망가려는데 나뭇꾼과 선녀처럼 어떻게 잡혔지요. 목회를 시작하고 보니까 제일 중요한 게 예배인데 예배에 대해서 공부한 적이 없어요. 우리 실천신학이 바닥이었기 때문에. 마침 GTU에서 세계적인 대가가 예배에 대해서 3일동안 세미나를 한다고 해서 배웠어요. 역사적으로 화려한 옷을 입고 성찬식은 어떻게 하고 예배는 어떻게 하고 쫙 배웠어요. 다 끝났어요. 목회자에게 예배는 돈 걷는 거예요. 그런 생각은 죽어도 안 해 봤지요? 엉터리 신학자는 그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목회자에게 예배는 돈 걷는 시간이예요. 목사님 제가 너무 죄송합니다. 돈 내는 즐거움을 가르쳐주는 거라고 그러면 되는가요? 내가 안 걷으면 딴 놈이 가져가요. 애쓰고 번 돈 내가 안 거둬가면 딴 놈이 다 거둬가요. 중독에 쓰고 도박하고 다른 데 다 써요. 거룩한 사람들도. 돈 때문에 살인사건이 나고요. 그래서 돈은 소중한 거예요. 목숨처럼. 돈을 잘 쓰도록 가르치고 옳은 명분에다가 쓰도록 가르치는 것이 목사예요. 그런데 제가 그 돈을 받는 동안에는 못 가르치겠더라고요. 그래서 예배학의 도사들은 어떻게 하는가 가서 배웠는데 화려한 예배의식과 세계적인 성찬의식 다 배웠는데 오고가는 헌금 속에 싹트는 신앙이라고 돈 이야기는 싹 빠진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은 평신도이지요. 예배가 뭔지 모르는 거에요. 예배가 뭔지... 예배는 구약식으로 말하면 눈에 보여야지요.

no charge는 없지요. 가난하면 비둘기라도 들고와야지요. 그게 예배 아니예요? 제가 틀렸나요? 그래서 한 수 더 떴죠. 이 사람 평신도냐고 물었지요. 그렇대요. 그 사람 교회 가냐? 안 간대. 지금 미국에서 신학자들이 교회에 안 가요. 신학하기 때문에. 이게 미국의 현주소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화가 나냐구요? 예배는 돈이예요. 돈을 어떻게 잘 관리하느냐? 돈을 어떻게 아름답게 쓰느냐? 돈을 내면서도 어떻게 즐거워하느냐? 그거 관리 잘 하는 게 목사가 예배 보는 시간이예요. 다음 주부터 헌금이 더 나올라나? 아니면 쫓겨날라나? 구약시대부터 예배는 다 no charge가 없는 거잖아요? 제가 목사가 되어보니까 예배가 뭔지 비로서 알겠더라구요. 저도 옛날에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이따위 신학책에 있는 헛소리도 하고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라고도 하고 이런 거 했는데 그게 아니에요. 예배는 돈이에요. 너무 솔직했나요?





여러분의 신학이 서구 학자들에 의해서 배부른 학자들에 의해서 경멸된 거예요. 신학은 재건되어야 합니다. 한국에서 안 하면 세계 기독교는 망해요. 아니면 빨리 몰락합니다. 개신교 중에서 가장 래디컬한 그룹이 성공회입니다. 거기에 미국과 영국에서는 성공회 사람들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아프리카에서만 성공회가 급격하게 늘어나는데 성공회측에서 나온 글에 보면 아프리카 사람들의 교육 수준이 너무 낮은 거에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목회를 한다는데 조용기목사처럼 신유 팬타코스타 이쪽으로 가고 있는 건데 이건 아니에요. 조용기목사 교회라면 몰라도 영국 성공회 의 후손으로서는 역사를 이어가는데는 문제가 되는 거에요. 전세계의 기독교는 빠른 속도로 몰락하고 있다고요. 저는 기독교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가 몰락하는 거는 관심이 없어요. 그러나 제가 공부한 바에 의하면 기독교처럼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고 기독교처럼 내부의 비판이 왕성한 집단은 없어요. 개신교의 전통이지요. 내부의 비판. 그래서 이 내부의 비판이 없으면 리더십이 망하잖아요. 이런 내부의 비판정신과, 저는 예수님을 비판가라고 보는 거거든요. 이런 비판정신과 인간에 대한 무한한 연민,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있는 거는 기독교 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 지구촌에서 기독교가 살아남기를 바라는 거에요. 저는 기독교와 이해관계는 하나도 없어요. 저는 어떨 때 기도는 안 하지만 기도할 때 저는 지쳤습니다. 기독교 당신 몫입니다. 알아서 하십시오.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런 투정을 많이 부립니다. 그러나 여기 감신대 총장님도 계시니 다행인데 여기서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 장로교인들도 많으니 미안한데 샌프란시스코에서 10여년간 가르쳤어요. 거기 장로교인이지만 문희석박사가 에모리대학 나왔고 여기 박종천총장도 에모리대학 나왔는데 그런 인연으로 제가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 여러 해 가르쳤어요. 장로교 목사님들이 뭐라는 줄 아세요? 왜 장로교에는 저런 학자가 없어요? 감리교 신학자가 똑똑하다는 게 아니예요. 질문을 던지고 학생들에게 질문을 통하여 학생들의 신앙의 성숙에 이르려고 하는 교육의 기본적인 자세는 변선환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장로교에는 그런 미친 학자가 없었던 것 같아요. 믿으면 된다는 거는 잘 배워서 교회는 성장하는데 그래도 목회자도 자기 영혼은 구원해야 할 거 아니예요? 목사가 되려는 신학생들에게 묻지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특징이 뭐가 다르냐?





네 생활속에서 검증될 수 있는 기독교인 특징 세 가지만 대보라고 그러면 장로교 목사님들은 대체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그래요. 저는 비기독교인인데 저는 만나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고요. 장로교가 위험합니다. 언어가 안 통하는 거예요. 장로교인의 언어가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안 통한다고요. 미국에서도 미국 목회자들 절반이 그들의 자녀들이 교회에 안 나간다고 그러는데 한국에도 곧 그런 일이 일어날는지 몰라요. 생각하지 않는 설득력이 없는 신앙은 자녀들에게 계승되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저는 우리들의 신앙이 내부의 비판이 가능하고 생명에 대한 무한한 애정 열정이 있는 이 정신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가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러나 신화적이고 거짓에 가득 찬 그런 이야기에 포장되어있는 예수 이야기는 전달이 안 될 거라고 봅니다. 우리 자녀들은 굉장히 똑똑합니다. 영주권 때문에 중학생이 우리 교회를 몇 년 다녔는데 성경공부시간에 그 학생이 제일 똑똑한 거에요. 뒤에 얘기 들어보면 홍해 이야기 사사기 이야기 들으면서 하나님 나쁘다는 거예요. 너무 나쁘다는 거예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옳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지만 게는 영주권 때문에 와 있는 거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아니라서 빨리 영주권받고 가라고 그랬지요. 선수들끼리는 서로 속이면 안 되잖아요. 영주권 해 주는 거는 예수님이 안식일날 병 고치는 거와 똑같다고 봐요. 살기 위해서는 법을 조금 어겨도 된다고 보고 미국 이민국에서는 우리가 법을 어기는 줄 다 알아요. 그래서 괜찮은 거예요. 영주권을 받자마자 그에게 평안히 가라고 그랬는데 그 학생이 있는 동안 우리는 배운 거에요. 우리의 언어가 그 중학생에게 이렇게 보이는구나. 어떻게 자기 백성을 구한다고 해서 이집트 사람들을 그렇게 떼죽음을 시켜도 되는 거냐? 어떻게 하나님이 줬다고 해서 남의 땅을 쳐들어가면서 아이들까지 싸그리 죽여도 되는 거냐? 이게 찬양거리냐? 아이가 너무 끔찍하게 질문을 ㄹ하는 거예요. 이게 기독교냐? 선생들도 당황하는 거예요. 이런 기독교가 우리의 후손들에게 똑똑한 우리의 자녀들에게 계승될 거라고요? 어림도 없어요. 이건 기독교가 아니에요. 예수가 중요한 거는 이런 기독교가 아닌, 전혀 다른, 비폭력적이고 생명을 품는 비판적인 그런 기독교잖아요? 저는 예수님 그러면 마가복음 7장 13절 14절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전통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거, 뒤집어엎고 그것에 도전하고 인간을 편든 예수, 저는 비판적인 예수로서의 예수가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그러나 그건 마가복음 7장으로 가기 전에 마가복음 1장만 읽어도 다 나오는 거잖아요. 저는 마가복음을 너무너무 좋아해요. 너무나 인간적이고. 그 뒤에 읽어보면 이 예수는, 우리가 목회자이니까 본인이야기하지요. 성경에는 없는 거예요.



예수 본인. 성경에는 없지만 이게 되게 재미있었을 거라고 봐요. 저는 역적모의할 때가 제일 재미있거든요. 진짜! 성공하면 더 재미있지만 도적질도 그렇다고 그래요. 모의할 때 재미있고 담 넘을 때 재미있고 전리품 나눌 때 재미있고...제일 위험한 거는 전리품 나눌 때지만. 목회도 마찬가지다. 예수님 만났을 때 흥분하고 혼자서는 힘든데 이렇게 역적모의할 때 가슴이 떨리고 실패할지라도 예수님도 실패했는데, 바울도 실패했는데, 바울도 마이너리티 콤플렉스 때문에 욕욕하면서 바울이 소수그룹의 대표자거든요. 바울이. 지금은 바울이 문헌을 많이 남겨서 지금은 주류가 되지만 바울은 콤플렉스가 많았어요. 갈라디아서 보세요. 저 기라성같은 저놈들 저주 받아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저 놈들 저주 받아라. 그 사람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사랑하는데 착각하지 마세요. 두 얼굴의 사나이입니다. 저는 그런 예수와 그런 바울을 보면서 너무나 저와 닮았어요. 미안하지만 지랄스러워요. 성격 나쁘다고 그러는데 예수가 무슨 성격이 좋아요? 바울이 뭐 성격이 좋아요? 좋다 나쁘다는 가진 사람들이 권위주의자들이 아랫사람들에게 도전자들에게 할 때 쓰는 거예요.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거는 그걸 이야기해야 하는데 성격 나쁘다고 그러면 도매금로 다 넘어가는 거예요. 박정희때 일부 소수의 몰지각한 사람들. 박근혜가 다시 쓸 지 모른다. 늘 단골메뉴다. 일부 소수의 몰지각한 사람들. 일부 소수의 깨어난 용기있는 사람들이지 어떻게 일부 소수의 몰지각한 사람들이예요?



예수 이야기에서 본인은 뭘 했겠느냐? 하나님? no way. 예수가 하나님 때문에 이런 일을 했다면 저는 예수 안 믿어요. 저는 하나님 안 믿어요. 예수는 이 일을 하면서 인간으로서의 긍지,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맛볼 수 있는 가장 큰 희열을 맛봤을 거라고 봐요. 생명을 볼보는 거. 단 큐핏이라는 신학자를 제일 존경하는데 80점쯤만. 그 사람이 환갑 이전에는 철이 덜나서 자기 손자손녀들을 보면서 그렇게 즐거웠다고 해요. 생명의 신비를. 그런데 말년에 철이 들어 가지고는 지금 80다 되어 가는데 철이 들어서 이제 사람이 된 거에요. 온 세상 생명들이 다 자기를 향하여 웃어주고 거기서 미래를 본다는 거예요. 철이 안 났을 때는 지 새끼들만 좋은 거예요. 지 새끼들 하고만 즐거운 거예요. 예수님은 자기 새끼는 없었지만 짓밟힌 생명들을 보고 거기서 웃음꽃이 피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죽어도 좋아 그 말을 했을 거라고 봐요. 가까이 가서 안 봤으니까 그렇지. 늙은이들이 sex를 하면서 죽어도 좋다고 그러는데 sex는 즐거움이 모르긴 몰라도 3초밖에 안 갈 거에요. 짓밟힌 한 생명이 웃음으로 꽃피어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무한히 기뻤을 거라고 봐요 저는. 안 그랬으면 어떻게 예수가 그런 일을 계속 했었을까? 안 그랬으면 바울이 감옥에 갇혔어도 밖에 있는 사람들더러 기뻐하라고 그랬을까? 바울이 정신병자가 아니라고요. 바울의 글에 보면 나는 죽을 뻔 했다고 그래요. 이 사람은 죽고싶은 사람이 아니예요. 죽을 뻔 했다. 매맞아 죽을 뻔 했다. 고생이 심했다. 끝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일이라는 자각, 확신이 있었어요. 그걸 유교적으로 말하면 천명을 알고 그게 자기와 인카네이션해서 일치한 거지요. 공자가 뭐 50에 천명을 알았다고 그러는데 바울은 그 경지를 산 거지요. 외부의 음성이 아니라 자기가 그 일을 살면서 안으로 넘치는 희열을 맛 본 거에요. 저는 찌그러진 생명이 피 흘리던 생명이 박수를 치고 웃는 걸 보면 모든 사람들이 웃을 거라고 봐요. 아주 유치한 이야기를 비유로 들면 저는 성악설은 안 믿어요. 사람이 독하다는 거는 믿지만. 아주 아주 옛날에는 영화를 보러 가서 보면 쫓기던 사람이 가까스로 철장문을 넘어서 자유를 얻게 되면 영화 보던 사람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믿어지십니까? 아멘 안 하시네요. 비행기를 처음 타던 사람이 무사히 착륙하면 옛날에는 박수를 쳤답니다. 비행기를 처음 타 봤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 박수칠 때에 가서는 다 같이 박수를 쳤어요 옛날에는. 그러면 저는 그러지요. 분명히 저기 나쁜 놈들 강패들도 있을 텐데 깡패들이 망가지고 간신히 쫓기는 그 사람이 자유를 얻었을 때 어떻게 똑같은 장면에서 어떻게 똑같이 박수를 칠까? 너무너무 신기하지 않아요? 인간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이야기를 하겠다고 나서는 여러분들이 예수하고 친해져서 예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기쁨을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체험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체험했어요. 저는 아무것도 안 부러워요. 이기철이라고 김홍도를 멸망시킨 사람이 이메일로 컨텍트되어 또 한 번 뒤엎자고 자기가 옛날 자료 다 가지고 있다고. 그래서 저는 살만큼 살았는데 그거 다 우스운 일이야 너나 잘 살아라. 그건 아무 것도 아니고 공자님처럼 이야기하면 웃길 것 같고, 공자님도 그런 억울한 일 당했는데 나중에 높은 사람 되어 가지고 뭐 좀 하자고 그랬는데 야 그건 사람이 한 일이 아니야. 하늘이 한 일이야 그러고 넘어 가더라고요. 저도 나이가 드니 조금은 그래 져요. 옛날에는 그게 힘들더라고요. 욥기처럼 나는 왜 이래? 별 볼 일없는 애들은 잘 먹고 잘 사는데 나는 왜 이래? 그랬는데 이제는 그런 거는 아무 것도 아니예요. 그 아픔을 통해서 유배생활을 통해서 제가 발견한 거는 처참하게 신분없이 짓밟히는 한국 사람들과 그들에게도 여전히 의미를 줄 수 있는 예수의 복음, 예수의 이야기를 확실하게 발견했기 때문에 신학교에 있을 때에는 관념적으로만 알았는데 여기서 피부로 몸으로 느꼈기 때문에 저는 저 나름대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자료실 - 사영리와 사생리 / 나는 왜 역사적 예수에 관심하는가? / 그분을 찾습니다 / 한인철

자료실 - 사영리와 사생리 / 나는 왜 역사적 예수에 관심하는가? / 그분을 찾습니다 / 한인철




역사적 예수
2010.02.24 17:02
사영리와 사생리 / 나는 왜 역사적 예수에 관심하는가? / 그분을 찾습니다 / 한인철
한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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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기사: 예수학당 이끄는 한인철 목사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586539.html



한인철 교수 Real Jesus 강의 10회 (2015년) 동영상

https://vimeo.com/121112841

https://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aIgIfE0gc_w



삶을 중심으로 다시 생각해보는 기독교 사영리(四靈理)

한 인 철 박사 연세대학교 교목실


들어가는 말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삶의 부재’에 있다고 본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기독교는 본래 예수의 가르침과 삶으로부터 발생되었지만,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더 이상 예수의 가르침이나 삶에 관심하지도 않고, 더욱이 이를 계승하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그 동안 한국 기독교의 신앙체계를 대변해 온 사영리가 그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이번 강의는, 기독교가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기 위한 한 방편으로, ‘삶을 중심으로 다시 생각해보는 기독교 사영리’라는 주제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앞으로 다루고자 하는 사영리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참 삶의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길치 인간
2. 하나님은 우리가 가야할 참 삶의 길을 가리켜주시는 분이시다: 길잡이 하나님
3. 예수는 우리가 가야할 참 삶의 길을 앞 서 가신 분이시다: 선생 예수
4. 기독교인은 예수를 벗 삼아 예수와 같은 길 가는 사람들이다: 길벗 기독교인


I. 우리는 참 삶의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길치 인간

1. 사람들은, 그 차이를 무론하고, 어느 정도 공통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산다.

2.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대체로 재물, 권력, 명예로 대변되는 세상적인 가치이다.

3. 사람들은 이러한 세상적인 가치를 소유하게 되었을 때 성공했다고 하고, 또한 행복하다고 한다. 최근 한국인의 최고의 덕담은 ‘부자되세요’라는 말인데, 이 말 속에는 한국 사람들 누구나가 추구하는 세속적인 가치 전체가 용해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4. 사람들이 재물, 권력, 명예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한, 그것들은 필요하고 그것 없이 살기는 어렵다.

5. 그러나 재물, 권력, 명예에 집착하여,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이웃을 짓밟고, 자연을 파괴하게 되면, 재물, 권력, 명예는 우리에게 우상이 될 수 있고, 참 삶의 길에서 멀어지게 하는 사탄이 될 수 있다.

6.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결국은 어느 하나를 더 사랑하게 되고, 다른 하나는 포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사람들은 대개 재물을 택하고, 하나님은 포기한다.

7. 두 주인을 섬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한국의 기독교인들 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한국의 상당수 기독교인들은 세상적인 가치에 대한 욕망을 그대로 간직한 채, 예수를 믿으려는 경향이 있고, 한국의 교회는 이러한 교인들의 요구를 예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에 대한 우리들의 지금까지의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자각 속에서, 새로운 가치관에 입각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II. 하나님은 우리가 가야 할 참 삶의 길을 가리켜주시는 분이시다--길잡이 하나님

1. 하나님은 우리가 가야 할 참 삶의 길,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길을 가리켜주시는 분이다.

2. 그런데 사람들의 눈에는 이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눈에 이상한 비늘이 덮혀 있기 때문이다.

3. 사람들의 눈에 덮혀 있는 비늘은 다름 아닌, 재물과 권력과 명예에 대한 집착이다.

4.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참 삶의 길을 발견하려면, 먼저 재물과 권력과 명예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5. 그런데 재물과 권력과 명예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는, 혹은 그와 유사한 어떤 경험이 있고나서야, 비로소 재물과 권력과 명예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게 되고, 이를 지푸라기처럼 여기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6. 그러나 세상적인 가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참 삶의 길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저절로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 사이에는 또 한 번 건너야 하는 큰 강이 있기 때문이다.

7.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참 삶의 길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이미 가지고 있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조차도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생명조차 포기할 수 있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궁극에 가서는 재물과 하나님은 동시에 섬길 수 없고, 결국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8.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지금까지 재물과 권력과 명예에 궁극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이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도 인간도 자연도 모두 저버렸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궁극적인 가치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포기할 수 있는,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생명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으로 철저히 변화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전적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III. 예수는 우리가 가야 할 참 삶의 길을 앞 서 가신 분이시다--선생 예수

1. 예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길이 참으로 사는 길이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의 요체라고 말할 수 있다.

2.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길이 참으로 사는 길이라고 가르치신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길을 따라 앞 서 사신 분이다. 예수는 다른 사람에게 가르친 대로, 자신이 앞장서서 그렇게 살았다. 특별히 생명의 위협이 있는 순간에도, 예수는 자신의 삶을 굽히지 않고, 자신이 가르친 그대로 살았다. 예수는 참다운 의미에서 선생(先生)이었다.

3. 그러면 예수는 하나님과 같다는 삼위일체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예수는 최소한 하나님의 아들, 더 나아가면 하나님 자신이라는 이 고백은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만약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라면, 예수가 선생이라는 말과는 모순이 되지 않겠는가?

4. 예수를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삼위일체의 성서적 근거는 오직 요한복음의 두 구절, 즉 10장 30절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는 말과, 14장 9절의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라는 구절뿐이다.

5. 이 두 구절이 예수를 하나님과 동일시할 수 있는 근거이면서, 동시에 예수를 선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을까? 그래서 예수를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과 예수를 선생으로 이해하는 것이 같은 고백이 될 수는 없을까?

6. 예수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었다. 예수에게 하나님은 매순간 그의 삶을 결정하는 궁극적인 근원이었다. 예수와 하나님은 예수의 삶 속에서 하나가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삶을 깊이 들여다 본 사람은, 예수의 삶 속에서 예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그래서 예수를 본 사람은 이미 하나님을 본 것과 다름없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삼위일체적 고백은, 예수는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참 삶의 길을 걸어가신 분이라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의미에서 이 고백은 예수가 참 삶의 길을 앞 서 살아내셨다는 고백과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고백과 예수는 선생이라는 고백은 동일한 고백의 서로 다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IV. 기독교인은 예수를 벗 삼아 예수와 같은 길 가는 사람들이다--길벗 기독교인

1.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앞 서 살아낸 삶을 우리도 살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기독교인의 대답은 항상 부정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이고, 우리는 죄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와 우리 사이에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2. 기독교인은 ‘예수는 하나님이고 우리는 죄인’이라는 교리적 이유를 갖고, 우리가 예수의 삶을 살아낼 수 없는 이유를 대고 있지만, 사실 그 저변에는 보다 근원적인 인간적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는 예수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올바른 삶이었고, 또 그러한 예수의 삶을 우리가 살아낼 수 있다손 치더라도, 나는 솔직히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뜻을 포기하고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갖고 사는 것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3. 이제 우리는 안다. 예수가 앞서 살아낸 삶은 우리도 충분히 살아낼 수 있는 삶이지만, 우리는 솔직히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딜렘마가 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예수와 우리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4. 그렇다면 기독교인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한마디로, 기독교인은 예수를 평생의 벗으로 삼아, 예수와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다. 달리 말하면, 기독교인은 근본적으로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얻는 것에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사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위배될 때에는 언제든지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

5. 이러한 기독교인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대개 이 질문은 기독교인으로서 제 길을 가고 있지 못한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묻는다. 그런데 이 질문이 예측하는 대답과는 달리, 세상에는 이미 예수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예수의 길벗으로 살지 못할 때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지만, 우리가 예수의 길벗으로 사는 순간, 그 사람들은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과연 예수의 길벗으로, 평생 예수와 같은 길 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여기에 기꺼이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가히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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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2.02.17 21:00


http://www.historicaljesus.co.kr/xe/media/111590

사영리와 사생리 / 한인철 교수 강연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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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2.03.07 11:21


http://idlseminary.com/moodle/mod/richmedia/view.php?id=35

캠퍼스의 예수 / 한인철 교수 갈릴리신학대학원 강의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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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2.05.28 07:24


Top Ten Signs
You're a Fundamentalist Christian
당신이 근본주의 기독교인이라는 10가지 증거(펌)


10. 그는 다른 종교의 신들을 결코 인정하지 않지만,
누가 야훼를 부정하면 맹렬한 분노를 느낀다.

9. 그는, ‘/유/인/원으로부터 인류가 진화하였다’고 과학자들이 말하면
인간성에 대한 철저한 모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흙/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성경에 대해선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않는다.

8. 그는, 범신론자나 다신론자를 보면 조롱하고 비웃지만,
자신이 삼위일체의 신을 믿는 것은 문제없다 생각한다.

7. 그는, 알라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테러행위에 대하여 분노한다.
그러나 야훼가 이집트 탈출 때 모든 아기들을 학살하게 명령한 것이나,
여호수아가 여자, 어린이, 심지어 나무까지를 포함해
인종청소를 명령한 것에 대해선 문제없다고 생각한다.

6. 그는, 인격신을 믿는 힌두교를 비웃고,
여자와 동침하는 그리스 신들을 비웃지만,
성령이 마리아를 임신시켜 출산한 인간이자 신이
죽임을 당해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했다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믿는다.

5. 그는, 지구나이가 수십억년이라고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을 믿지 못하지만,
청동기시대 사람이 천막에 앉아 기록한 것에 따라,
지구나이가 6000년쯤이라고 믿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4. 그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을 빼고선(어쩔땐, 다른 종파도 뺀다.)
모든 사람들이 죽어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기독교가 가장 관용적이고
자비롭고 사랑으로 가득차있다고 생각한다.

3. 그는, 현대 과학, 역사, 지질학, 생물학, 그리고 물리학으론
결코 설득당하지 않지만,
마루에 뒹굴며 방언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2. 그는, 기도해서
0.01%정도 응답을 받았으면 높은 성공률이라고 인정하고,
기도가 아주 효험이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머지 99.99%의 응답없는 기도는 단지 신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1. 그는,
성서(Bible)나 기독교,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
많은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들이 아는 것보다
적게 알지만,
그래도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한다.
댓글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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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2.10.13 10:02




나는 지금 왜 역사적 예수에 관심하는가?





한 인 철











1. 나는 현상적으로는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이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실질적으로는 ‘못해신앙’을 가진 사람이다. 왜냐하면 신앙이 무엇인지 알고 보니, 그렇게는 못살고 있다는 것이 정직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에서 내가 역사적 예수에 관심을 집중하게 된 과정과, ‘못해신앙’을 가졌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2. 중학교 3학년 때, 조금 철이 들자, 나의 사는 것이 ‘먹고 자고 싸고’의 삼박자 물레방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이 삶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길이 보이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이제는 탈출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분명해졌다. 어느 날 느닷없이 성경책을 펴들고, 3개월 동안 침묵 속에 신구약 성경을 3번 통독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가지 화두를 얻게 되었다. “여러분 각자가 지니고 있는 신념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간직하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를 정죄하지 않는 이는 복이 있습니다.”(롬 14:22)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철학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입학금 낼 형편도 못되고, 가고 싶은 대학을 갈 성적도 못되었다. 대학을 포기해야겠다고 할 즈음, 다니던 장로교회(금호중앙교회)의 교육목사님(백승진 목사님)이 신학교를 가면 납부금도 적고, 입학하기도 쉽고, 거기에 철학도 공부할 수 있다며, 감리교신학대학을 추천해주셨다. 대학가고 싶은 욕심에 불순한 동기로 감리교신학대학에 들어갔다. 대학 다니는 첫 3년 동안은 언제 이 신학교를 그만 두고 내 길을 찾을까 고민하다가, 대학 4학년이 되면서 이것도 나의 길일지 모르겠다 싶어 일단 신학에 정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3. 신학대학 4학년 때, 나는 신약학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일단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신약학 교수이신 김용옥 선생님과 한참 열심히 희랍어도 익히고 신약학 공부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4학년 2학기 때 변선환 선생님이 스위스 바젤에서 공부를 마치시고 교수로 오셨다. 유효사거리 5미터에 족히 달하는 침을 튀기며 열강하시는 선생님에 반해, 갑자기 조직신학으로 전공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불트만을 신약학으로 다루어 졸업논문을 준비하려던 나는 불트만을 조직신학 입장에서 다루게 되었다. 죽도 밥도 아닌 논문을 쓰게 되었다.



변선환 선생님의 열기에 휩싸인 나는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원에 입학하여, 조직신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당시 내가 배운 조직신학은 일종의 케리그마(Kerygma)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거의 대부분의 조직신학이,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신학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희랍어 케리그마는 ‘선포’라는 뜻이다)한 초기 기독교의 고백을 오늘날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어떻게 재해석하느냐 하는 것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조직신학을 배우기 위해 세미나를 통해 많은 학자들의 글을 읽고 토론했다. 읽어도 쉽게 이해되지가 않았지만, 이 관문을 통과해야만 조직신학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도 1980년 대 초), 내가 알고 있던 조직신학의 기초가 흔들리는 대지진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다가와 겐조라는 일본 학자가 쓴 『예수라는 사나이―역설적 반항아의 생과 사』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예수라는 한 인간을 마르크스적인 사관에 입각하여 역사적으로 접근한 책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사 들었던 이 책이 나의 신학적 관심을 완전히 바꾸어놓는 시발점이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를 역사적으로 접근할 경우, 그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크고 감동적인가 하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 읽은 조직신학 책은 읽으면 머리에 쥐가 났고, 머리를 하얗게 쉬게 만들었고, 또 조금 읽다 보면 잠이 왔다. 그런데 그 책을 읽던 날 밤, 나는 그 책이 너무 재미있어, 손에서 잠시도 놓지 못하고 밤을 새워 한 숨에 다 읽었다. 이게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어느 날 대학원 세미나 시간에 주책없이 이 경험을 토로하게 되었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선생님은 내가 이 책을 읽고 역사적 예수 연구에 경도되는 것을 경계하셨던 것 같다. 당시 실존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은 조직신학의 분위기 속에서는, 역사적 예수를 발견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신학적 정당성도 없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왜냐하면 해석되지 않은 역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의 재발견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하고, 게다가 그리스도로 선포된 예수 말고 역사적 예수 그 자체에 기초를 둔 신학은 신학적으로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당시 조직신학의 무언의 전제였기 때문이다. 다가와 겐조의 책은 분명 나의 마음속에 대지진을 일으켰지만, 나는 이것을 마음 속 깊이 잠 재워 둔 채 그냥 지나가게 되었다.



그 후 나는 미국 동부에 있는 드류대학에 유학을 가서 과정신학자 존 캅(John B. Cobb, Jr.)의 기독론을 공부하게 되었다. 유학 공부의 결산이라 할 수 있는 학위 논문에서는 변선환 선생님의 또 다른 관심사인 종교다원주의에 영향을 받아, 기독론을 종교다원주의적 시각에서 다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나는 다가와 겐조의 책을 읽었을 때의 충격을 학위 논문에 반영하지는 못했다. 여전히 케리그마 신학의 큰 틀 속에 머물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4. 내게 신학적 대전환의 시기가 찾아온 것은 1995년의 여름이었다. 그 해 홍정수 교수가 창립한 세계신학연구원을 ‘한국기독교연구소’로 이름을 바꾸고, 김준우 교수가 소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나는 김준우 소장과 함께 홍정수 교수가 머물고 있는 미국 엘에이를 방문하여, 클레어몬트대학교 책방을 들르게 되었다. 이미 1982년부터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가 창립되어, 역사적 예수 연구가 시작되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 결과물들은 아니 나오지 않은 때였다. 그런데 그 해 여름 ‘예수 세미나’의 연구 결과들이 한꺼번에 봇물 터진 듯 쏟아져 나왔다. 나는 금괴를 발견하기나 한 듯, 수십 만원어치의 책을 사들고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때부터 한국기독교연구소 김준우 소장은 ‘예수 세미나’의 연구 결과물들을 미친 듯이(?) 번역해내기 시작했다. 나 역시도 몇 권의 책을 번역하며,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한국에 소개하는 일을 거들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는 당시 조직신학의 일반적 흐름을 감히 거스르지 못해 시도하지 못했던 일, 즉 역사적 예수 연구의 빛에서 조직신학을 재조명하는 일을 조심스럽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신학의 무게중심이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에서 역사적 예수에로 옮겨지게 되었다.



‘예수 세미나’가 내게 준 가장 큰 영향은 나의 신학적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조직신학의 기본적인 패러다임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가 항상 상수(常數)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은 변수(變數)라고 생각을 했다. 그에 따라 변하지 않는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를 오늘의 한국 사람들에게 어떻게 여전히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신학의 근본 과제였다.

그러나 ‘예수 세미나’의 결과물들을 읽으면서, 나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바뀌게 되었다. 신학에 있어 변하지 않는 상수는 역사적 예수이고,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 말은 역사적 예수 연구 결과가 하나의 동일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 연구 결과는 다양할 수 있지만, 역사적 예수라는 인물 자체는 항상 기독교 신학의 변하지 않는 상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예수를 오늘의 시대 속에서 어떻게 소개하고 선포하고 고백하느냐 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달라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이른바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과거 한 때에 유의미했던 하나의 소개, 하나의 선포, 하나의 고백일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또 다른 케리그마 형태로 예수를 달리 선포할 수 있을 것이고, 이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 바로 신학의 새로운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5. 나는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에 기초를 둔 이른바 케리그마 신학은 니케아 신조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한국에서는 사영리(四靈理)라는 형태로 열매를 맺었다고 생각한다. 니케아 신조(기원후 327년)는 예수를 하나님으로까지 높였고, 사영리는 하나님인 예수가 어떻게 인간을 구원했는지를 교리적으로 설명한다. 사영리는 원래 CCC에서 만들었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 대부분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사영리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인간은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라는 인간이 되어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한국에서 사영리로 구체화된 케리그마 신학은 나름대로 한국에서 공헌을 했다고 본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인간을 죄의식으로부터 해방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했다는 것이다. 사영리는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죄의식 때문에 생긴 불안에서 해방시켜주고, 죽어서는 내세신앙을 통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게 해준다. 실제로 한국갤럽조사연구소에서 1997년에 조사하고 1998년에 펴낸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이라는 보고서에 보면, 한국 개신교인의 66.7%는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교회에 나간다고 대답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사영리 중심의 케리그마 신학은 위의 큰 공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교회 안팎으로 심각한 문제점들을 노출시키고 있다. 나는 ‘기독교의 이해’라는 이름으로 매학기 열리는 연세대학교 기독교개론 과목에서 학생들에게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크게 두 가지를 지적했다. 하나는 배타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결핍이다. 나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사영리 중심의 케리그마 신학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믿고 있다. 배타주의의 근원은 이 우주 안에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한 분뿐이라는 신앙에서 비롯되지만, 이러한 배타주의는 기독교인의 삶 전반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한국의 수많은 기독교인은 자기와 다른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틀렸다고 생각하고, 틀린 것은 자기와 동일하게 만들거나, 여의치 않으면 배척하려 한다.



다른 하나는 삶의 결핍의 문제인데, 이는 보다 정확히 말하면,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예수를 살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기독교인에게 삶이 결핍된 가장 근원적인 이유이고, 이것이 바로 내가 역사적 예수에 관심을 기울이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달리 말하면, 사영리의 틀 속에 들어있는 예수를 믿게 되면, 예수가 살았던 것처럼 그렇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막힌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어폐가 있는 듯 들리지만, 이것이 사영리 기독교의 비밀이다.



왜 사영리의 틀 속에 있는 예수를 믿게 되면 예수가 살았던 것처럼 그렇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막힌다는 것인가?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교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예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인간은 완전히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가 예수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본질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원죄를 가진 죄인이라, 예수처럼 못 사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가 그렇게 못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라는 인간이 되어 우리를 구원해 주려고 십자가를 지고 죽었고, 그 예수를 믿어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데, 왜 이미 구원을 얻은 마당에 우리가 굳이 예수처럼 살아야 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죽하면 예수를 믿겠느냐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죄인인 우리가 예수처럼 살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될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믿는 교만한 생각이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처럼 우리가 살려고 하는 것은 율법신앙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특히 바울은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예수처럼 살려는 것은 바로 행함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예수처럼 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일반 기독교인이 지금 말한 이러한 세 가지 이유를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신학교에 들어간 1973년 이후 기독교 안에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한국 안에 사영리를 따르는 대부분의 교인들은 바로 이러한 세 가지 이유에 근거해서, 예수는 믿되 예수를 살지는 않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예수처럼 살지 않는 데에는 이러한 세 가지 교리적인 이유 말고도 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매우 인간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설사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믿고 그분이 가르치시고 앞서 살아내셨던 그 삶을 따라 사는 것이라는 점을 내가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솔직히 예수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처럼 살지 않고 세상의 생존 논리를 좇아 살아도 살아남기가 힘들고, 인생이 충분히 피곤하고 힘든데, 이 시대에 예수처럼 살라고 하는 말은 저주나 악담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다. 더러 거짓말도 하고 사기도 치고 부정부패도 저지르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도 생존하기가 힘든 판국에, 이 세상에 예수처럼 살라! 이것은 너무 힘들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 솔직히 그것이 길이라 하더라도, 그 길은 가고 싶지 않은 길이다. 나는 이러한 인간적인 이유가 예수를 믿되 예수처럼 살지 않으려는 기독교인들의 근원적인 이유이고, 앞서 말한 세 가지 교리적인 이유들은 바로 이러한 인간적인 이유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교리적인 빌미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6. 그런데 나는 지금 왜 역사적 예수에 관심하는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인간 예수가 이 세상에서 살아내고자 했던 그 삶, 인간 예수가 가고자 했던 그 길을 가지 않고 기독교인일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의 길을 따라 예수가 살아내고자 했던 그 삶을 살아낸다고 하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나 역시도 예수의 길을 피하고 싶고, 나 역시도 예수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나도 교리적인 이유들을 핑계 삼아 예수를 우회하고 싶다. 그러나 예수가 갔던 그 길을 가지 않으면서, 어찌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것이며,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이것이 내가 역사적 예수에 관심하는 첫 번째 이유이다.



내가 역사적 예수에 관심하는 두 번째 이유는, 기독교가 역사적 예수에 뿌리를 두어야, 예수를 믿는 것이 예수를 사는 것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가 살았던 그 삶이 올바른 삶이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이러한 믿음은 예수의 삶을 나도 살아보겠다는 결의를 내포한다. 케리그마 신학은 이 점에서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다. 인간 예수가 동시대를 살면서 어떤 꿈과 비전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가르쳤고, 그리고 그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내었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의 죽음이 그러한 삶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아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초와 근거를 마련한다.



혹자는 학문적인 이유로 역사적 예수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쉽게 결론을 내린다. 이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어떤 인간에 대해서도 역사적인 연구를 통해 그 인간의 역사적 실체를 모두 알아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한 인간의 역사적 실체를 알고자 하는 노력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한 인간의 전기를 쓰는 일이 항상 한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인간의 실체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끊임없이, 때로는 2,000년의 긴 세월을 두고, 노력하고 있고, 이러한 노력은 항상 정당성을 갖는다. 이 때문에 어쩌면 이러한 한계를 이유로 역사적 예수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래서 역사적 예수 연구를 포기하거나 그 결과물들을 부정하는 것은, 예수의 삶과 그의 길을 가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내려는 일종의 신학적 제스처는 아닐지 생각해보게 된다.





7. 나 역시도 역사적 예수 연구가 인간 예수의 전기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19세기의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이 결론 내렸던 것처럼, 그것은 분명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최소한 인간 예수가 가지고 있던 꿈과 비전, 그리고 그 꿈과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인간 예수가 어떻게 살았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그의 삶이 왜 십자가 처형으로 종결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그림은 그려줄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 정도만 밝혀줄 수 있어도, 역사적 예수 연구는 충분한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그러면 나는 그 동안의 역사적 예수 연구의 결과물들을 통해 역사적 예수에 대해 무엇을 배웠나? 예수가 가르치고 스스로 살아내었던 예수의 길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 길게 말할 수 있겠지만 압축하자면,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예수는 매순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깊이 성찰하고, 그 뜻에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다. 둘째, 예수는 그렇게 살 때에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 지를 걱정하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철저히 하나님에게 내어맡겼다. 셋째, 예수는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가 어떠한 것이든, 그것을 자신의 삶에 대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 알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넷째, 예수는 이러한 자신의 삶이 새로운 세상을 여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이 내가 이해한 예수의 길이다.



나는 예수의 이 길이 올바른 삶의 길이라고 믿는다.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의 길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가야 할 제 길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기독교인인 나도 힘닿는 데까지 그렇게 살고 싶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8. 그러나 예수의 길을 간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길인가? 나는 매학기 역사적 예수가 걸어간 삶의 길에 대해 학생들에게 강의한다. 강의가 끝나면, 마지막에 학생들이 자주 하는 질문이 있다. ‘그래서 선생님은 지금 어떻게 사세요?’ 예수의 길이 자신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는 것을, 선생님은 지금 그 길을 가고 있느냐는 질문으로 우회적으로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예수의 길은 말하는 선생에게나 듣는 학생에게나 부담이 되기는 매한가지이다.



예수의 길을 가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길을 과연 포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면,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 이외에 나의 삶을 결정해온 다른 뜻들, 특별히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길로 안내하는 다른 뜻들을 버려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기 위한 기본 전제인데, 이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다. 내가 한껏 용기를 낸다면, 어느 정도 선에서 포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재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해야 한다! 그것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권력에 대한 집착도 포기해야 한다! 그것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분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명예에 대한 집착도 포기해야 한다! 그것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점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그렇게 살아보려고 노력해왔다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 것 때문에, 그것이 문제가 되어, 거대한 권력이 나를 죽이겠다고 할 경우,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밖에 없는 목숨조차 포기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이것은 최악의 경우이다. 그러나 이 최악의 경우는 항상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현존한다. 나는 살해의 위협 앞에서도 과연 하나님의 뜻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이 물음은 예수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던져지는 궁극적인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 앞에서도 ‘예’라고 대답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 나머지 다른 문제들에서 예수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닐 것이다.



어느 날 홍정수 교수가 감신 재직 시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셨지만, 한 가지만은 예외이다. 그것은 고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고문을 견딜 수 있는 힘은 주시지 않았다.” 예수의 길을 가고자 할 때, 마지막 최고의 난코스는 고문일 수 있다. 왜냐하면 고문은 곧 죽음에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의 길을 생각할 때마다, 늘 이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만약 예수의 길을 선택한 것 때문에, 죽음에로 이어질 수 있는 고문을 받게 될 때, 나는 과연 이 마지막 관문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인가?



3.1운동 당시 독립선언문 서명자 33명 중, 온갖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사람은 불교계의 한용운 선생이라고 한다. 이 판단이 정확히 맞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맞는다고 치고, 이 이야기에 함축된 것은 서명자 33명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고, 그 중 10명이 목사였는데, 그 열 명이 모두 고문을 이기지 못했다는 말이다. 내가 만약 그 자리에 서명자 중 하나였다면, 나는 어땠을까? 이것이 나를 힘들게 한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이 문제로 고민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 때 가서 생각하지... 지금은 그럴 수 있는 목사가 되도록,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나를 버리는 훈련을 하자, 그러다 보면 더 큰 일에서 나를 버릴 수도 있겠지....





5. 이제 나의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나는 교회를 다닌다고 다 기독교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면, 목사라고 해서 모두가 기독교인인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숨길 수 없는 진실이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신한국 건설’이 시작되고, 이른바 ‘중단 없는 사정’이 시작되었을 때, 그 때 사정에 걸린 기독교인이 전체 대상자 중 60%쯤 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 대한민국 안의 수많은 목사들의 삶이 예수의 길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나는, 기독교인은 예수의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예수의 길을 가는 사람은 예수가 앞서 간 그 길이 인생의 올바른 길이라는 것을 믿고, 예수와 같은 길을 가는 예수의 길벗을 가리킨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 나는 기독교인인가? 솔직히 나는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단정지어 말할 자신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예수의 길을 제대로 가고 있다고 확신 있게 말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신학대학을 나온 김규항 씨가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자신은 기독교인이 아니고, 그래서 기독교를 떠난다고 했는데, 나는 그분에게서 동병상련을 느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용기를 내어 말한다면,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예수의 길이 올바른 인생의 길이라고 믿고, 그래서 예수와 같은 길을 가려고 애써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기독교인일 수 있다면, 또 그렇게 말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다면, 나는 작은 목소리로 저도 기독교인입니다 하고 말하고 싶다. 엄밀하게 말하면, 누가 과연 나는 예수의 길을 완벽하게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변명이지만,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닌가! 내가 별로 좋아하는 말은 아니지만, 기독교에는 용서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애써 노력하지만, 가다가 첨벙거리더라도, 그러한 나를 용서해주고, 다음에는 제 길을 잘 가보라고 누가 격려해준다면, 나는 그 격려에 힘입어 기독교인이고 싶다. 그 격려에 힘입어 남은 인생 예수의 길을 잘 가보고 싶다. 적어도 예수는 그러한 나를 보고, ‘그래 다음에는 잘 해봐’라고 말할 것으로 믿는다. 이러한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놓고, 더 이상 내게 다른 질문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준다면, 나는 앞으로도 계속 기독교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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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8.10.30 09:49


한국기독교연구소 30주년 감사예배 설교
2018. 10. 14. 일. 순천중앙교회


제목: 그 분을 찾습니다
본문: 요 21:4-13

I. 들어가는 말
오늘 순천중앙교회 교우 여러분, 그리고 청년 여러분과 함께 예배드리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한국기독교연구소 30주년을 기념하여, 신임 소장 홍인식 목사님의 취임을 축하하는 매우 기쁜 날입니다.
먼저 신임 소장으로 취임하시는 홍인식 목사님께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아울러 교우 여러분에게도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기독교인에게 복된 일이 몇 가지 있는 데, 그 중 가장 큰 복은 좋은 목회자를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여러분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 축하는 한국기독교연구소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기독교연구소가 30주년을 맞아 홍인식 목사님을 새로운 소장으로 모시게 된 것은 이 또한 아주 큰 축복입니다.
저는 오늘 이 복된 날 ‘그 분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으로 간단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연세대에서 학생들에게 기독교 개론을 가르치던 중,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두 가지 점을 지적했습니다. 하나는 배타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결핍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 생각과 다르면 틀렸다고 생각한다는 것이고,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예수가 가르친대로 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지적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두 가지 문제의 저변에는 보다 근본적인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 개인에게 있어서나 교회 공동체에 있어서나/ 많은 경우 예수가 그 중심에서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배타주의나 삶의 결핍 현상도 궁극적으로 그 뿌리를 찾아보면, 기독교인들의 삶이 예수에게 기초를 두지 않기 때문에 생긴/ 부수적 현상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설교 제목으로 다소 생소한 표현을 사용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과 관계가 있습니다. 기독교인과 교회가 잃어버린 예수, 바로 그 분을 다시 찾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지난 23년 김준우 소장께서 한국기독교연구소를 통해 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잃어버린 예수를 다시 찾는 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2. 통계로 본 한국 개신교의 현실
1998년 한국갤럽조사연구소가 발표한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에 관한 통계는 우리에게 매우 놀라운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당시 한국의 개신교인은 전체 인구 중 20.3%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거에 개신교인이었다가 개신교를 떠난 사람이 21.9%에 이른다고 합니다. 개신교를 떠난 사람이 남아있는 개신교인 숫자보다 1.6%나 많다는 뜻입니다. 만약 개신교를 떠난 사람들이 개신교를 떠나지 않고 그냥 남아 있었다면, 산술적으로는 42.2%가 개신교인이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계산은 지나치게 문제를 단순화한 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 수치가 우리에게 주는 함의는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갤럽조사연구소는 계속해서 비종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종교를 선택한다면, 어느 종교를 선택할 것인가? 불행하게도 선호도 1위는 불교, 2위는 가톨릭, 3위는 개신교였습니다. 최근에는 불교와 가톨릭의 순위가 바뀐 적도 있지만, 개신교는 여전히 부동의 3위입니다. 앞의 통계와 이 통계를 합하면, 우리는 매우 슬픈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한국의 개신교는 개신교인들도 싫어하고, 비종교인들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궁금증은 이것입니다. 개신교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것은 아마도 개신교의 종교적 정체성과 어느 정도 상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 번 더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통계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개신교인들에게 왜 기독교를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전체 개신교인 중 66.8%가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12%가 복을 받기 위해, 또 다른 12%가 죽은 다음 천당 가기 위해, 그리고 6.9%의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기독교인이 됨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얻고, 복을 받고, 또 천당을 가고자 하는 기대가 크게 잘못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에 비해, 삶의 의미를 찾고, 그래서 올바른 삶을 살고자 하는 개신교인들이 전체 교인의 6.9%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오늘날 한국 개신교인들의 정체성에 뭔가 중대한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는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이러한 통계 역시, 기독교인들의 삶이 예수에게 기초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3. 예수의 길, 피하고 싶은 길
예수에게 삶의 중심을 둔 기독교인, 이것은 상당히 바람직한 기독교인의 정체성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길을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이러한 점을 암시하는 한 가지 실례를 들고자 합니다.
교회에 아주 열심히 다니는, 누가 보아도 신앙심 깊어 보이는 권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자식 농사를 잘 지어서, 그 아들이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가장 높은 점수가 아니면 선택하기 어려운 의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졸업 후 높은 연봉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졸업을 하자, 어머니의 기대와는 달리, 시골 오지에 가서 가난한 환자들을 돕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몹시 당황하여 자식을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남을 돕는 일은 네가 돈을 많이 번 후에 해도 늦지 않고, 돈을 많이 번 후에 도와야 더 많이 도울 수 있지 않겠니? 그러니 지금은 아무 생각 말고, 돈을 많이 벌도록 해라.”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같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아들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그러나 그것은 예수의 길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나름대로 예수처럼 살고 싶습니다.” 이 말에 어머니는 그만 화가 나서, 이렇게 말하고 말았습니다. “야! 내가 너보고 예수 믿으라고 그랬지, 예수처럼 살라고 그랬냐?”
만약 이 아들이 텔레비전의 어떤 드라마에 나오는 남의 집 아들 이야기였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 권사님은 그 아들의 말과 행동에 감동을 받고, 참 좋은 아들이라고 칭찬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막상 자기 아들이고 보면, 자기도 모르게 태도가 달라지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가 가신 길, 그 길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올바른 길이지만, 만약 내 배우자나 내 자식이 그 길을 가겠다고 한다면, 극구 말리고 싶은 것이 바로 예수의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굳이 따지고 본다면, 그 길을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니겠습니까?

4. 성서의 이야기
오늘 성서 본문인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자, 절망한 제자들이 각기 본업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어부였던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로 돌아가 밤새 그물질을 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채, 날이 밝습니다. 새벽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무엇을 잡았느냐고 묻습니다. 한 마리도 못 잡았다고 하니, 배 오른쪽에 던져보라고 했고, 말한 대로 해보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게 됩니다. 이 때 비로소 베드로는 이 낯선 사람이 예수인 줄 감을 잡게 됩니다. 그리고 육지로 올라와/ 빵을 쪼개고 생선을 나누는 모습을 보자, 그 낯선 사람이 예수인 줄 확신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낯선 사람이 예수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얼굴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 동이 텄지만, 베드로는 그가 예수인 줄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이 예수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것은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깊은 곳에 던지라고 했던 이 낯선 이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전의 예수처럼 빵과 생선을 나누며 했던 그 말과 행동이/ 그 분이 예수였음을 알게 하는 단서였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물이나 빵과 생선은 살아 생전 예수의 말과 행동을 기억나게 하는 상징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예수의 얼굴이 아니라, 예수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베드로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얼굴은 예수의 얼굴과 다르다 하더라도,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가 가르친 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그가 바로 다시 살아난 예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이 본문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덤을 박차고 다시 사신 그 분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와 같은 길을 가는 바로 그 사람, 바로 그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오늘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5. 나가는 말
사실 그렇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은 많지만, 어떤 기독교인에게서는, 아무리 그가 기독교인임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예수의 모습을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생각과 말과 행동, 그 어느 곳에서도 예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는 그러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기독교인에게서는, 그가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자처하지 않더라도, 그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 그리고 그 행동하는 것이 마치 이 시대에 다시 살아난 예수를 본 듯한 그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그 분을 찾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에게서 사라진, 그리고 교회에서 사라진 그 예수를 찾고 있습니다. 저는 수많은 교회에서 사라졌던 그 예수를 우리 순천중앙교회 안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기독교인에게서 실종되었던 그 예수를 우리 순천중앙교회 교우들 속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비기독교인들이, 그리고 수많은 순천 주민들이 그 분을 만나기 위해, 아니 그 분이 되기 위해 이 순천중앙교회 안으로 모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모쪼록 예수와 같은 길을 가고자 하는 순천중앙교회와 교우들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