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1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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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7장 즈나나 비즈나나 요가
작성자 바보새 16-01-23 07:47 조회2,7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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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즈나나 비즈나나 요가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1. 프리다의 아들아, 마음을 오로지하여 내게 매달리고 나를 의지하여 요가를 닦으면 네가 어떻게 철저하게 의심없이 나를 깨닫게 되는가를 들을지어다.
 
2. 내가 이 지혜와 아울러 지식을 남김없이 네게 이르리니, 네가 그것을 알면 이 세상에서 다시 더 알 것이 없으리라.
지혜 즈나나(jnana), 정신적 지식.
지식 비즈나나(vijnana), 분별적 지식.
즈나나, 비즈나나 하는 낱말은「기타」의 가르침 속에 다섯 번 여섯 번 나오는데 샹카라(Shankara)는 언제나 그것을 지식(knowledge)과 체험(experience)(자아실현의 의미로)으로 번역한다. 그렇지만 즈나나도 다름 아닌 자아의 실현이다. 그러고 보면 즈나나와 비즈나나라고 하면 같은 말의 중복이 돼버린다. 다른 번역자들, 예를 든다면 틸라크(Tilak) 같은 이는 비즈나나는 물질세계에 대한지식이라 한다. 라다크리슈난 박사는 그것을 존재의 세세한 면을 지적(知的)으로 이해하는 것이라 하고, 즈나나는 존재의 공통적인 밑바닥을 옹근 채로 아는 것이라 한다. 내 생각에는 그 설명은 삼캬(samkhya, 理論派)에서 쓰는 관례에 따라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거기서는 즈나나는 자아의 체험이고, 비즈나나는 자아를 자아 아닌 모든 것에서 구별해서 보는 분별적인 지식이다. 삼캬파의 카리카(Gaudapada Karika)는 “모든 고통에서 해방이 되려면 오직 나타나 뵈지 않는 것과, 나타나 뵈는 것과, 그것을 아는 이와를 분별할 줄 아는 지식이 있어야만 될 수 있다”고 했다.「우파니샤드」에서 “아트만을 보고 듣고 생각하여서, 자아 아닌 모든 것과 구별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을 때는 이 분별적인 지식을 두고 한 말이다. —마하데브 데자이
즈나나는 지혜로 번역되는 것으로 직접적인 영적 광명을 말하는 것이고, 비즈나나는 존재의 원리에 대한 자세하고 합리적인 지식을 말한다. 우리는 상대를 초월한 절대를 알아서만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의 가지가지 나타남도 또한 알아야 한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사람 안에도, 자연 안에도 계신다. 그것들이 그이를 한정지울 수는 없지만. —라다크리슈난
크리슈나는 이미 제3장에서 아르쥬나에 대해 욕망이니 노염이니 하는 우리의 대적은 우리의 감각 속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우리의 영적 지식(즈나나)과 개별적인 지식(비즈나나)을 다 망쳐버린다는 것, 그러기 때문에 우선 감각을 제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와 같이 감각의 제어가 필요함을 말해주는 동시에, 그는 또 앞장에서 요가를 성취한 사람은 감각을 제어하고 난 후 즈나나와 비즈나나로 만족함을 얻어(6:8), 모든 피조물 속에서 최고의 자아(parameshvara)를 보며, 최고의 자아 속에서 모든 피조물을 본다는 것을 말해주었다(6:29). 그러므로…… 그는 아르쥬나에게 즈나나는 무엇이며 비즈나나는 무엇임을 설명해줄 필요가 있게 되었고, 또 최고의 자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얻게 하는 카르마 요가의 방법을 그에게 설명해줄 필요가 있게 되었다. (틸라크는「기타」의 목적을 카르마 요가를 가르쳐주는 데 있다고 아주 잘라서 강조한다). 만물을 뒤덮는 그 유일 불멸의 최고의 자아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즈나나요, 그 영원한 최고의 자아에서 어떠한 길을 밟아서 억만 가지의 유한한 만물이 나와서 존재하게 되느냐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비즈나나다.(13:30)
……그러나 최고의 자아는 비록 하나라 하더라도, 예배의 자리에서 볼 때는 두 가지 모습을 가진다. 느껴 알 수 없는 것 즉 오직 이성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것과, 느껴 알 수 있는 것 즉 경험적인 것이며 실지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최고의 자아를 이성에 의해서는 어떻게 깨달을 수 있으며, 그 느껴 알 수 없는 것을 느껴 알 수 있는 형상을 예배함에 의해서는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게 되느냐 그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이 문제가 열한 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뿐 아니라 이 두 길이 자동적으로 동시에 감각의 억제와 최고의 자아에 대한 깨달음의 두 가지 결과에 이르기 때문에 이 두길, 즉 지식의 길과 신앙의 길은 해탈의 공부에 있어서 파탄잘리 요가보다 더 우승한 것이 된다. 그렇지만 주의할 것은, 이 모든 설명들은 카르마 요가를 설명하기 위한 한 부분이지 그 자체로 독립한 것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기타」를 세 편으로 나누어서 처음 여섯 장을 카르마에 관한 것으로(倫理品), 다음 여섯 장을 신앙에 관한 것으로(神理品), 그리고 나중 여섯 장을 지식에 관한 것으로(心理品) 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온당한 것이 되지 못한다. —틸라크
 
3. 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겨우 완전(成滿位)에 이르기 위해 노력할 줄을 알며 그 노력하여서 완전에 이른 천 사람 중에서도 나를 참으로 아는 자는 겨우 하나뿐이다.
천 사람 중에 다른 번역에는 ‘천 명의 노력하는 사람 중에서’로 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완전에 이르고 싶어하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전통이나 권위의 명령에 따라 더듬을 뿐이다. 진리를 발견하고 그 목적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자 중에서 오직 극소수의 사람만이 성공하는 것이고, 발견한 자 중에서도 그 본대로 움직이며 사는 것은 하나도 이루기 어렵다. —라다크리슈난
사람으로 태어나기는 어려우며, 그대로 살기도 어렵고, 정법(正法)을 얻어듣기도 마찬가지로 어려우며, 깨닫는 자로 태어나기는 더욱 희귀한 일이다. —「법구경」(182)
싹이 나고도 이삭이 패지 못하는 것이 있고, 이삭이 패고도 알이 들지 못하는 것이 있다(苗而不秀者 有矣夫 秀而不實者 有矣夫). —「논어」
나서 살고, 들어서 죽는데, 사는 것들이 열에 셋이고, 죽는 것들이 열에 셋이고, 사람이라고 나서 움직이다 죽을 데로 가는 것들이 또 열에 셋이다. 왜 그러냐, 그저 삶을 살기를 두텁게만 하겠다고 하기 때문이다. (出生入死 生之徒十有三 死之徒十有三 人之生動之死地者亦十有三 夫何故 以其生生之厚) —노자
 
4. 흙(地), 물(水), 불(火), 바람(風), 에테르(空), 마음(識), 이성, 나(我執, 自我意識), 이것이 내 바탈의 여덟 갈래다.
바탈 프라크리티(prakriti), 자성(自性).
이것들은 나타나 뵈지 않는 바탈, 곧, 프라크리티가 나타나 뵈게 될 때 가지는 모양들이다. 이것은 초기의 분류이고, 후에는 더 자세하게 되어 스물네 가지로 분류된다. 13장 5절을 보라. 감각(色, 聲, 香. 味. 觸)과 마음(識)과 이성과, 5근(indriyas, 眼, 耳, 鼻, 舌. 身)과 마음(manas)과 부디(buddhi, 感覺分別力)는 낮은 것, 곧 물질적 바탈이다. 왜냐하면 삼캬 심리학에 의하면, 그것들은 다만 감각의 대상과의 접촉을 할 수 있게 해줄 뿐이요, 의식이 성립되는 것은 정신적인 주체, 곧 푸루샤가 그것을 비쳐주어서만 되는 것이기 때문인데, 베단타에서는 그 설명을 받아들인다. 자아가 비쳐줄 때에야 감각과 마음과 이성의 활동은 지식의 과정으로 변하여 대상물이 지식의 대상이 된다. 아함카라 혹은 자아의식은 대상(境) 쪽에 붙어 있다. 그것은 나(ego)가 대상을 제 자신에다 가져다 붙이는 법칙이다. 그 결과 몸과 정신적 주체를 하나로 보게 하는 잘못이 생기고 거기 따라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이 일어나게 된다. ⎯라다크리슈난
 
5. 그렇지만 마하바후야, 그것은 나의 낮은 바탈일 뿐이니라. 너는 나의 다른 더 높은 바탈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얼이라고 하니 이 세계가 그것으로 버티어 있느니라.
얼 지바(jiva), 생명의 정수(vital essence).
이 우주의 인격적인 주재자를 이슈바라(Ishvara)라고 한다. 그는 의식적인 얼(ksetrajna)과 무의식적인 성격(ksetra) 둘을 다 포함하고 있다. 그 들을 그의 높은 모습과 낮은 모습이라고 부른다. 그는 만물의 생명이요 또 형식이다. 하나님의 보편성은 그 낮은 천성 속에 무의식적인 것의 전부를, 그 높은 천성 속에 의식적인 것의 전부를 포함하고 있다. 얼이 우리 몸, 목숨, 감각, 마음, 이성 속에 들어 있어 우리에게 나(ego)라는 생각을 주고, 그 나가 저 물질적인 배포를 그 활동의 무대로 쓴다. 모든 개인은 다 얼과 모습, 즉 크세트라즈나와 크세트라의 두 면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이슈바라의 두 바탈이요, 그는 이 둘을 다 초월하고 있다. 구약은 창조가 없음 속에서 나왔다고 가르쳐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시적인 물질이 있었다고 가정하고 하나님이 거기 형식을 주었다고 한다. 하나님을 창조자이기보다는 제작자 혹은 건축가라고 생각했다. 원시적인 소질은 영원한 것이고 지어진 것이 아니며 오직 그 형식만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크리스찬의 사색가들에게는 하나님은 미리부터 있던 물질을 가지고서가 아니라, 없는 가운데서 창조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물질과 형식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그와 비슷한 견해가 이 절 속에 나타나 있다. 지바(영혼, 얼)는 최고자의 한 부분적인 나타남밖에 되지 않는다. 지극히 높은 이의 옹글고 갈라지지 않은 참이 다수한 얼의 갈라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된 것이 참이고 다수는 그것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낮은 참이지, 환상이 아니다. ⎯라다크리슈난
 
6. 알지어다. 모든 만물이 이 둘에서 나왔느니라. 나는 이 세계의 근원이요 또 그 풀어짐이니라.
길 길이라 할 수 있으면 떳떳한 길 아니, 이름 이름할 수 있으면 떳떳한 이름 아니, 이름 없음이 누리의 비롯이요 이름 있음이 모든 것의 어미(母)다. 그러므로 늘 하고자 함 없어 그 묘(妙)를 보고 늘 하고자 함 있어 그 교(徼)를 본다. 이 둘은 같이 나와 이름이 다르니, 다 까맣다 할 것이다. 까맒의 또 까맒이 뭇 묘의 오래니라.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徼 常有欲以概其徼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노자
 
7. 오, 다난자야야, 나보다 높은 이는 아무도 없느니라. 이 모든 것들이 마치 구슬꿰미가 실에 꿰여 달려 있듯이 내게 달려 있느니라.
다난챠야(Dhananjaya) 가멸음(富)의 정복자, 아르쥬나를 가리킴.
위의 네 절 속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결론적인 설명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 다음 절들에서는 그 같은 것을 더 자세히 설명한다. 삼캬 철학의 설명은 이렇다. ① 이 우주에는 서로 독립된 두 개의 원소가 있다. 즉 첫째, 무생(無生) 혹은 거친 물질(prakriti)과 둘째, 생각하는 정신(puru놈)이다. ② 모든 것은 이 원소로써 만들어졌다. 그러나 「기타」는 이원론은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프라크리티와 푸루샤를 같은 파라메슈바라의 두 나타남으로 보는데, 그중에 프라크리티, 곧 물질은 낮은 나타남이고 푸루샤, 곧, 정신은 높은 나타남이라고 한다. 그중에서 정신의 형태를 갖는 가장 높은 프라크리티가 곧 아트만이라는 것을 13장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남는 거친 물질에 관해서는,「기타」는 그것을 독립한 것으로 보지는 않으나 모든 창조물이 다 파라메슈바라의 감찰 아래 거기서 지어져아트워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기타」는 프라크리티 거친와 같이 독립한 것으로 보지는 않으면서, 삼캬론의 프라크리티의 분류를 다소 차이를 두고서는 그대로 다 받아들인다. 그리고「기타」는 물질이 생긴 이후 무명(無明) 곧 마야(maya)로 인해 파라메슈바라에서 만물이 나오게 됐다는 삼캬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삼캬론에 의하면, 프라크리티와 푸루샤로 되는 원소가 합해 스물다섯인데, 그중 프라크리티에서 나오는 것이 스물셋이고, 그 스물셋 중 5대(五大. 地 水 火 風 空)와 열 감각과 마음, 합하여서 열여섯은 나머지 일곱 원소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원소를 말할 때는 그 열여섯은 고려 속에 두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기본적인 원소는 일곱뿐이다. 즉 마하트(mahat, 知性의 근본)와 아함카라(ahamkara, 個性의 근본)와 다섯 탄마트라(tanmatra, 色 聲 香 味 觸의 본질)다. 이 일곱을 삼캬론에서는 프라크리티 비크리티(prakriti-vikriti)라고 부르는데,「마하바라타」에서 이 일곱 프라크리티 비크리티와 기본적 프라크리티를 합해서 여덟 가지 프라크리티라고 부른다. 그러나「기타」는 기본적인 프라크리티를 일곱 프라크리티 비크리티와 한 열에 놓은 것은 마땅치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기본적인 프라크리티가 있고 거기서 변화하여서 일곱이 나온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류에 대하여서는「마하바라타」와「기타」사이에 견해의 차이가 있다.「기타」는 일곱 프라크리티 비크리티와 마음을 합해서 프라크리티(自性)의 여덟 갈래라고 한다. 간단한 말로,「기타」는 삼캬론의 독립된 프라크리티는 받아들이지 않지만, 그후 프라크리티의 성장에 대한 설명은 양쪽 다 근본에서 같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틸라크
 
8. 쿤티의 아들아, 나는 물에 있어서 그 맛이요, 해와 달에 있어서 그 빛이며, 모든「베다」에 있어서 그 ‘아옴’이니라. 나는 공중에 있어서 그 소리요, 또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그 바탈이니라.
‘아옴’(aum)이란 힌두교나 그밖의 종교에 있어서 신성한 낱말이요, 진언(眞言)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으로 생각되는 말이다. 이것은 ㅏ,ㅜ,ㅁ 세 음이 한데 합해져 있다. 산스크리트말에서 모음 ㅏ와 ㅜ는 마지막에 ㅗ와 합해져버리고 만다. 그래서 이 아옴(aum)이라는 말은 (혹은 om으로 쓰기도 한다) 여러 가지 세트리를 대표하는 말이 된다. 가령 예한다면, 하늘, 땅, 허공의 삼계, 브라마, 비슈누, 시바의 삼신,「리그」「야쥬르」「사마」의 베다 3경 같은 것이다. 이리해서 ‘아옴’은 온 우주의 짬을 포함하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기도나 찬송이나 명상의 시작과 끝에 이것을 외고, 불교나 쟈이나교의 의식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6세기 이후로는 어떤 경문의 시작의 표시로 이것을 사용하게 됐다.⎯「대영백과 사전」
 
9. 나는 흙에 있어서 그 맑은 향기요, 또 불에 있어서 그 불꽃이니라. 나는 모든 생기 있는 것들에 있어서 그 목숨이요, 또 고행자에게 있어서 그 고행이니라.
 
10. 오, 프리다 부인의 아들아, 나는 모든 산 물건의 ‘영원 한씨’임을 알라. 나는 지성(知性) 있는 자의 지성이요, 광명 있는 자의 광명 이니라.
 
11. 바라타족의 임금아, 나는 힘센 자의 힘이지만 욕망과 애착은 없으며, 산 물건 속에 있어서의 욕망이지만 올바름에 거슬린 것은 아니니라.
 
12. 또 모든 착한 성질과 사나운 성질과 게으른 성질의 물건들은 다른 것 아니고 오직 내게서 나가는 것임을 알라. 내가 그것들 안에 있지는 않으나, 그것들은 내 안에 있느니라.
욕망, 애착(kama-raga)에 대해 샹카라는 카마(kama)와 라가(raga)를 구별하여서, 카마는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이고, 라가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애욕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의 욕망은 죄악은 아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욕망은 뿌리뽑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과 하나 되기를 바라는 욕망은 죄가 아니다.「찬도갸 우파니샤드」는 근본적으로 참되면서(satya) 참되지 못한 것(anrita)에 가리워져 있는 욕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의 욕망이나 행동은, 우리 안에 있는 영(靈)의 발표이기만 하면, 그리고 참된 영적인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기만 하면 거룩한 뜻의 순수한 넘쳐흐름이 될 수 있다. ⎯라다크리슈난
동곽자(東郭子)가 장자에게 묻는다. “이른바 도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장자가 대답한다. “없는 데 없지.” 동곽자 말한다. “어디라고 딱 집어서 말씀을 해야지요.” 장자 말한다. “도르래, 개미에 있지.” “왜 그렇게 아래로 내려갑니까?” “가라지, 피에 있지.” “왜 점점 더 그렇게 내려가십니까?” “개와장 조박에 있지.” “거 왜 그렇게 점점 더 내려가십니까?” “오줌, 똥에 있다.” 동곽자가 아무 소리도 아니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장자가 말한다. “당신의 묻는 것이 어찌 그리 알맹이가 없는가? 정획(正獲,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의 일을 맡아 하는 벼슬아치)이 제사에 쓸 돼지에 대해 감시(監市, 돼지 사는 것을 맡아보는 사람)에게 돼지 밟아보는 것을 물을 때에 그 밟는 것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짐작이 가는 법이다. (살이 얼마큼 졌는가 알려면 될수록 발끝 같은 아랫부분을 밟아보는 것이 쉽다. 발쪽 같은 아랫부분에 살이 있으면 등심이나 엉덩이에 살이 많을 것은 정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절대로(도를) 어디라고 한정해놓고 말할 생각을 해서는 아니된다. 어떤 물건이라도 없는 데는 없다. 지극한 도란 그런 것이다.⎯장자(知北遊)
‘그들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그들 안에 있지 않다’는 말의 뜻은 매우 깊다. 첫째로는 즉 가장 넓은 의미로는, 만물이 지극히 높은 자아(parameshvara)에서 나왔으므로 지극히 높은 자아는, 마치 모든 구슬이 실에 매달려 있듯이, 바탕의 형식으로 모든 것의 기초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그것으로 지극히 높은 자아의 널리 퍼지고 스며드는 성격은 그것으로만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높은 자아는 그 모든 것을 뒤덮고도 남는다. 그래서 그 의미가 후에는 “나는 다만 내 자신의 한 부분을 가지고 전우주를 점령했다” 하는 말로 나타나게 된다.(10:42) 그러나 그밖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삼계로 구성되는 이 우주의 여러 모양의 성격이 내게서 나온 듯이 뵈지만, 그렇지만 그 여러 모양의 성격은 바탈 없음(nirguna)의 ‘나’의 형상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는 뜻을 언제나 가지고 있다. 그래서 후에 가서는(13:14~16) 지극히 높은 자아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한 여러 가지 서술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둘째 의미의 기초가 된다. 말하자면 9장 4절, 5절은 같은 말이다. 그와 같이 만일 지극히 높은 자아의 편만성(遍滿性)이 우주보다도 큰 것이라면. 우리가 지극히 높은 자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마야의 우주를 뛰어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러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 13절 이하다. ⎯틸라크
‘착한 성질, 사나운 성질, 게으른 성질’ 등 힌두교 철학에서는 만물과 사람이 가지가지의 성질을 가지는 것은 구나(gunas)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구나를 한자로는 성(性), 영어로는 네이처(nature 혹은 mood)로 번역한다. 그러나 그 성은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의 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중용」의 이 성은 차라리 성경의 “하나님이 자기 모습대로 사람을 지으셨다” 혹은 “코에다 숨을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했다” 혹은 “말씀으로 모든 것이 지어졌다.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으니, 생명이 사람에게 있어서 빛이러라” 하는 것과 같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구나는 순전히 자연적인 것이다. 그것은 프라크리티에서 나온다. 구나를 셋으로 나눠 사트바(sattva), 라자스(rajas), 타마스(tamas)라 하는데 그것을 각각 선성 (善性, goodness-mood 혹은 harmonious mood), 동성(動性, 혹은 riery-mood 혹은 passionate mood), 암성(閣性, gloom-mood 혹은 slothful-mood)이라 번역하고 있다. 어떤 물건도, 어떤 사람도 그 세 가지 성질을 다 가지지 많은 이는 없다. 그러나 그 비례는 천차만별이다. 거기 따라 제각기 특성이 생긴다. 그러므로 이것은 참 자아 곧 영혼은 아니다. 이를 나의 참 바탈이 아닌 줄을 깨달아 거기서 해방이 되는데 참 자아 곧 아트만이 있다.
힌두교에서 프라크리티니, 마야니, 구나니 하는 것에 해당하는 것을 기독교 신학에서 찾아본다면, 사탄이니, 타락이니, 원죄니 하는 것들을 들 수 있을 것인데, 그 둘의 설명 방법에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런 설명이나 체험 혹은 계시가 나오는 경로는 비록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그런 설명의 근본이 되는 사실에서 서로 다른 둘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한 가지 사실에 대한 설명 방법의 차이라고 알고 그것을 이해하여서 하나로 통하게 하는 자리를 찾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행동을 주로 하는 셈적인 자리에서 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고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고, 사탄이 유혹을 했고, 아담이 범죄해서 그것이 세상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되는 원죄가 됐다. 그러나 명상을 주로 하고 이론적으로 이해하기를 목적하는 인도식으로 하면 맨 첨은 첨 없는 첨에서 누구라고 이름할 수도 없는 영원의 진화하는 과정을 따라 물질이 나오고 생명이 나오고 사람이 나오고 선악이 나왔다. 거기 어떤 법칙이 있는 것은 사실인데 그것을 일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는 논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 카르마라 했을 것이고, 그것을 이기는 방법은 높은 차원의 정신으로 초월하는 것으로 없다 하여서 모크샤니 니르바나니 했을 것이다. 이 우주는 복잡하다. 우주 자체가 그런지는 알 수 없어도 적어도 이 생각하는 인간의 마음이나 정신은 그렇다. 그러므로 진리는 하나라지만,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배타적으로 내쫓아가지고는 성질상 도저히 불가능하고 다만 분별없이 옹근 채로 하는, 혼연일체하는, 통전하는 태도로만가능하다. 그렇게 생각할 때는 큰 것보다 뵈지 않는 작은 것, 유익한 것보다 아무 소용없는 것, 나와 가까운 것보다 먼 것, 정반대에 선 듯이 피는 것이 더 중요하고 고마운 것이다. 무한 작은 것을 받아들이는 데 무한 큼이 있고 지극히 미운 것을 이해하는 데 지극히 어짊이 있다.
사탄이다 타락이다 원죄다 용서다 할 수 있다면, 또 프라크리티다 자연이다 법칙이다 이해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농사꾼이 반드시 먹어봄으로써만 이해하는 능금이지만 그가 시인이라면 왜 나무에 달린 채 두고 무한히 바라봄으로써 못하겠는가. 만물을 엿새 동안 다 창조하시고 이레 되는 날 안식에 드셨다는 하나님이 왜 “그 착한 것, 사나운 것, 게으른 것이 다 내게서 나갔느니라. 그러나 그들은 내 안에 있어도 나는 그들 안에 있지 않으니라” 하지 못하겠는가. ⎯함석헌
이 말의 저자는 프라크리티는 독립자존 한다는 삼캬의 주장을 반대해서 하는 말이다. 그는, 모든 만물이 세 구나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독립해서 자존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고 홀로 ‘그’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는 만물을 포괄하고 포함하지만, 만물은 ‘그’를 포함 포괄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의 차이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그들이 어떤 변동을 일으켜도 거룩한 이의 항구한 모습을 건드리지는 못한다. 모든 것이 다 그의 밑에 속해 있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다. ⎯라다크리슈난
 
13. 이 세 가지 구나의 나타나는 꼴에 매혹되어서 온 세계가 저희들을 초월하고 불멸인 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나타나는 현상이 ‘그’ 때문인 것은 우리가 12절에서 본 대로다. 그러나 사람은 ‘그’ 와 현상 두 사이에 서는데 그 현상이 사람의 눈을 안개로 가리고 빛으로 어지럽게 한다. 그리하여 미혹된 사람은 ‘그’를 등지고 서게 된다. 성 어거스틴이 말한 그대로다. “나는 빛을 등지고 빛에 비쳐진 물체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빛에 비쳐진 그 물체를 보고 분별하고 있는 내 얼굴 자체는 빛에 비쳐짐을 받지 못했다.”⎯마하데브데자이
우리는 변하는 현상을 볼 뿐이요 그 영원한 실체를 보지 못한다. 플라톤의 동굴 속에 있는 사람이 벽 위의 그림자를 보고 있듯이, 우리는 흔들리는 형상을 볼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그림자들을 생겨나오게 하는 그 빛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라다크리슈난
보아도 뵈지 않으니 그것을 이(夷)라 할까, 들어도 들리지 않으니 그것을 희(希)라 할까, 잡아도 잡히지 않으니 그것을 미(微)라 할까. 이 셋은 따져 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왼통으로 하나로 할 것이다. 그 위라야 환한 것도 아니요 그 아래라야 껌껌한 것도 아니어서 줄줄이 잇닿았건만 이름 할 수도 없어, 다시 몬 없음으로 돌아간다. 이것을 일러 꼴 없는 꼴 그림 없는 그림이라는 것이요, 이것을 일러 얼떨이라는 것이다. 마주 가도 그 머리를 못보고 따라가도 그 뒤를 못 보는데, 옛 길을 잡아 이젯 있음을 이끌어가니 능히 옛 비롯을 아는 이다. 이를 일러 길날이라 하느니라. (視之 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ᅳ 其上不皦 其下不昧 繩繩兮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象之象 是謂惚恍 迎之不見 其首 隨之不見其後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노자
 
14. 이 구나로 이루어지는 나의 거룩한 마야는 뚫기 참 어렵다. 그러므로 내게 온전히 돌아오는 자만이 이 마야의 건너편으로 뚫고 건너갈 수 있느니라.
마야(maya) 곧 무명(無明)은 힌두교 철학에 있어서 하나의 기본적 낱말이다. 특히 정통적인 베단타(Vedanta) 교리의 비이원론(非二元論, advaita) 파에 있어서 그렇다. 마야는 본래는 신이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환상을 믿게 만드는 그 마술적 능력을 가리키는 말인데 나중에는 그렇게 해서 가지게 된 거짓 실재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비이원론자들에게 있어서 ‘마야’는 무한한 브라만을 유한한 현상의 세계로 나타나 보이게 하는 우주적인 힘이다. ‘마야’는 개인적인 지경에 있어서는 참 자아의 성격에 대한 무지(ajnana, ignorance)에 의해서 반영된다. 그러나 참 자아는 사실로는 브라만과 한가지인데 사람은 그것을 자기의 경험적인 자기(ego)로 오해한다. ⎯「대영백과사전」
이러한 빛이니, 더우니, 추우니 하는 경험들은 다 ‘구나’에 의한다. ‘구나’는 전에도 말한 대로, 어원적으로는 “밑에 들어 있는 것”(subordinate), 혹은 “(죽을) 인간적인 기구(mortal instrument)라는 뜻이다. 우리의 감각은 몬일(事物)의 낮은 부분을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는 그 근본적인 것은 우리에게 뵈지 않도록 해버린다. 즉 참은 숨기고 참 아닌 것을 보여준다. 피히테가 말했듯이, “우리의 봄 그자체가 물체를 우리에게서 숨겨버린다. 우리 눈 그자체가 우리 눈을 가린다”이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뵈는 것은 실체는 아니고 그 실체의 그림자뿐인데, 그 뒤에 숨어 있는 것, 즉 실재는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고 오직 정신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자아 속에 앉아 계시는 ‘그’를 보는 것은 도를 닦아 능히 자기를 억제할 줄 아는 수도자(yogi)뿐이다. 자기통제를 못하는 사람은 ‘그’를 보지 못한다.
「기타」가 그 말썽 많은 ‘마야’ 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마야는 우리들 실재에 대하여 미혹케 하고 속게 한다. ‘마야’ 는 환상이나 신기루가 아니요, 실재를 가리는 장막 혹은 장애물이다. 우리 속에 있는 ‘거룩하신 이’를 둘러싸는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두꺼운 층이다. 우리 속의 태양을 가리는 구름이요, ‘진리’의 얼굴을 가리는 황금 덮개다. 우리의 안, 우리의 밖에 있는 ‘구나’ 혹은 ‘프라크리티’ 가 우리 눈을 부시게 하고 캄캄케 하여 우리로 하여금 두루 헤매게 하는 것이 마야다. 겉에 두루 휘감음과, 서로 떨어지게 함은 이 ‘마야’ 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 다. ⎯마하데브 데자이
브라우닝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떤 이들은 생각하기를 창조는 ‘그이’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 하지만,
나는 말하거니와, 그것은 될수록이면 ‘그이’를 감추기 위한 것이다.
(Some think Creation's meant to show Him fouth
I say it is meant to hide Him all it can.)
 
괴테는 파우스트의 입을 빌어서 바로「기타」의 말 그대로로 ‘마야’를 그려내고 있다.
 
대낮에도 신비는 있어
자연은 그 너울을 벗지 않는다.
우리가 아우성을 치건만,
그가 좋아 자진 보여주지 않는걸
지렛대로, 나사로. 망치로
억지로 뺏을 수는 없지 않으냐.
(Mysterious even in open day
Nature retains her veil, despite our clamours;
That which she doth not willingly desplay
Cannot be wrenched from her with leavers, screms and hammers.)
⎯마하데브 데자이
 
15. 어리석어 악을 행하는 자들은, 인간 중에서도 최하에 속하는지라, 그 지각은 ‘마야’로 망가져버리고, 악귀는 버릇에 빠져 내게로 돌아올 줄을 아지 못하느니라.
악을 행하는 자가 지극히 높은 지경에 이르지 못하고 마는 것은 그 마음과 의지가 영의 기구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작은 나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친 본능을 길들일 생각을 하지 않고 라쟈스 즉 암성의 하자는 대로 돼버리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 있는 착한 성질(사트바)을 활동시켜 그것을 억제하면, 우리 행동은 올바르게 되고 깨달음을 얻어 애욕과 무지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된다. 3성을 초월하려면 우선 선성을 닦아야 한다. 우리는 영적이 되기 전 먼저 도덕적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영적 단계에서 우리는 이원(二元)의 세계를 지나 ‘영’의 빛과 능력 속에서 행동하게 된다. 그때에 가서 우리는 나의 좋고 언짢고에 따라 행동치 않고, 오직 ‘거룩한 이’의 기계로만 행하게 된다. ⎯라다크리슈난
지극한 사람은 저란 것이 없고 검스러운 사람은 제 힘이란 것이 없으며 거룩한 이는 이름이 없느니라(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 ⎯장자(逍遙遊)
 
16. 오, 바라타족의 으뜸가는 자 아르쥬나야, 경건하여 나를 믿는 자 중에는 네 가지 사람이 있으니, 고통하는 사람, 지혜를 찾는 사람, 물질적 복을 찾는 사람, 그리고 지혜를 가진 사람이 그것이다.
고통하는 사람 아르다(artha).
지혜를 찾는 사람 지즈나슈르(jijnasur).
물질적 복을 찾는 사람 아르다아르디(artha-arthi).
지혜를 가진 사람 즈나니(janani)
 
17. 그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지혜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내 안에 있어 외곬으로 믿는다. 참으로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나요,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다.
스스로 찾는 자일 때까지는 아무래도 이원(二元)의 세계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지혜에 도달하면 이미 둘이 아니다. 깨달은 자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자신이 ‘홀로 하나이신 자아’(The One Self)와 하나된 가운데 있다. ⎯라다크리슈난
 
18. 이들은 물론 다 고귀한 사람들이지만, 그 지혜를 깨달은 사람을 나는 정말 바로 나 자신같이 생각한다. 참으로, 온전히 요가를 닦는 그는 나만을 가장 높은 구경의 지경으로 알아 그 안에 머무른다.
우리가 설혹 물질적인 것을 얻기 위해 기도한다든지 기도를 날마다 하는 하나의 형식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든지, 복을 받기 위한 부적 같은 것으로 알고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거기서 종교적 신념이란 참으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께 가자는 노력이다. 그것은 이 세계에는 우리에게 응답해주시는 어떤 이가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가 구하기만 한다면 얻어진다. 기도를 늘 끊지 않고 함으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 의식 속에 어떤 광명을 얻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어리석은 교만과 이기적인 탐욕과 두려움과 희망을 알게 된다. 그것은 하나의 통일된 인격, 즉 몸과 마음과 정신의 조화를 이루어가는 방법이다. 기도는 하나의 생활방식이다. 차차 해가는 동안에 하나님을 만나는 하나의 길이 된다. 이것이 곧 즈나나, 곧 통전(統全)된 지혜, 곧 거룩한 생명이다. 즈나니(지혜를 얻은 이)는 하나님을 그의 계신 모습대로 아는 이이므로 그는 하나님을 그의 계신대로 사랑한다. 그는 그 거룩하신 이 속에서 산다. 그가 하나님에게 소중하듯 하나님은 그에게 소중하다. 처음 세 종류의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나름의 이상대로 이용해보려고 하지만, 깨달은 자는 하나님이 그 뜻대로 자기를 이용하시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그가 그 넷 중에 가장 훌륭한 것이다. 우리가 심한 고통 속에 있을 때 우리는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 온전히 외곬이 된 마음으로 열심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그럴 경우 그 기도가 들어주심을 얻는다면 그것은 우리 어두운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목적을 작게 만들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지혜에 도달한 이는 그 심정이 정결하고 그 의지가 통일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의 경륜을 능히 알 수 있고 그것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간구할 수 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 뜻대로 되어지이다.” ⎯라다크리슈난
 
19. 지혜를 가진 자는 허다한 나고 죽음을 거친 후에, 바수데바는 모든 것이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게로 돌아오느니라. 그러한 위대한 혼은 매우 드무니라.
바수데바(Vasudeva) 모든 근원의 근원, 바수천왕(婆蔽天王), 지극히 높으신 이, 그의 다시 태어난 몸(後身)이 곧 이 말을 하는 크리슈나다.
모든 것 일체(一切)의 존재.
돌아온다 귀의(歸依), 피난하다, 항복하다.
위대한 혼 마하트마(mahatma)
‘허다한 나고 죽음을 거친 후’ 라고 한 것은, 진리의 실현은 세월이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한 경험의 깊은 밑을 충분히 살펴보기 전에는 그 결과를 얻을 수 없다. 그러려면 시간이 든다. 하나님은 어떤 식물도 제 나름대로의 걸음으로 자라게 두신다. 태아가 완전히 자라려 해도 아홉 달이 드는데 정신으로까지 자라려면 더 많은 시간이 들 것은 물론이다. 자연 전체가 변화하려면 길고 긴 과정이 필요하다.
‘바수데바는 모든 것이다’라고 한 것은 바수데바는 모든 것 속에 들어 있는 생명의 주임을 뜻한다. 하나님은 그의 두 성격의 힘으로 모은 것이다. 라마누쟈(Ramanuja)는 이 귀절의 뜻을 이렇게 본다. 즉 “바수데바는 나의 전부다.”(Vasudeva is my all.) 이것은 겸손하게 신뢰하는 신자의 마음에 느껴진 하나님의 불멸의 장엄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부이시고 우리는 없음이다. 모든 만물이 다 그런 것처럼 사람은, 또한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의지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그의 손에 바치며 그가 전부이시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겸허한 의식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시며, 하나님은 참으로 계신다.
마드바()는 말하기를 “바수데바는 만물의 근원이다”(Vasudeva is the cause of all) 라고 했다.
그밖의 다른 여러 가지 설명, 기도도 다 의미가 없지 않다. 그것들은 제 나름의 상급이 있다. ⎯라다크리슈난
 
20. 그 마음이 가지가지 물욕으로 인해 비틀린 것들은 각각 제 성질에 이끌려 제각기 제나름의 의식을 지키며, 다른 신들을 섬기느니라.
마음 즈나나(jnana), 지식(knowledge). 지(智).
의식 니야맘(niyamam), 계행(戒行)
신들 데바타(devatah), 천신(天神)들.
바가바타 신앙(비수뉴를 최고의 주재자로 믿는 종파)에서는 지성(知性)의 정도가 낮아 영적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물질적 욕망의 만족을 위해서 다른 신들에게 귀의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그런 사람들이 절대 높으신 주재자한테로 가지 못하는 것은 그들은 무지, 애욕 같은 어떤 특정한 경향을 가지고 있어서 거기 따라 가지가지의 신들을 공경하기 때문이다. 여러 신들의 공경자들은 낮고 작은 욕망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구경의 지경을 지향할 줄을 모른다. 다만 최고의 주재자를 믿는 자만이 길을 잘못 드는 일이 없다.「베다」경전 안에는 가지가지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가지가지의 신을 믿을 것을 권하는 말들이 있기 때문에 최고의 주재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최고의 주재자보다 다른 여러 신들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순수한 신봉자는 지극히 높으신 주 크리슈나야말로 만유의 주인임을 안다.「차이타냐 차리타므리타」(Caitanya-caritamrita)에는 오직 지극히 높으신 신, 크리슈나만이 주시요 그 나머지는 다 그의 종이라 했다. 그러므로 순수한 신앙자는 절대로 물질적인 것의 만족을 위해 천신(天神)들한테로 가지 않는다. 순수한 신자는 무엇이나 ‘그이’ 가 주시는 것으로 만족한다. ⎯스와미 프라부파다
 
21. 어떠한 신자가 신앙을 가지고 어떤 형태의 신을 예배하기를 원하더라도 나는 그의 신앙을 튼튼케 해준다.
지극히 높으신 주는 각 사람의 신앙을 알아주시고 각 사람이 원하는 대로 거기 응답해주신다. 그 영혼이 어느만큼 분투해서 일어섰느냐 하는데 따라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허리를 구부려 그와 만나신다. 가오타마 부다나 샹카라같이 명상력이 그렇게 풍부한 이들도 여러 신들을 믿는 통속적 신앙을 물리치지 않았다. 그들은 초월적 신성(神性)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것이고, 동시에 무한 가지의 나타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표면의 모든 흙은 지심(地心)에서 나오는 것이고, 모든 그림자는 그 물체의 성질을 드러낸다. 그럴 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은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 존경하는 것이 무엇이었든간, 그 존경이 진지한 것이기만 하다면, 그로 인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라다크리슈난
“나밖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기독교 신관(神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아마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점일 것이다. 또 반대로 인도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유일신의 배타적인 생각이 가장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러니 만큼 정말 긴요한 것은 그 사이에 이해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데 있다. 기독교도는 사랑의 복음을 선포하는 자신들이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들을 일으켰으며 가장 악랄한 제국주의를 행했다는 것을 반성해볼 필요가 있고. 아트만이 곧 브라만이란 것을 믿는 인도 종교는 자기네가 세계에서 가장 부끄러운 계급주의를 유지해 왔으며 가장 비겁한 식민지 백성 노릇을 최근까지 했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대립은 사색과 행동이라는 두 쌍동이 때문에 나오는 피치 못할 문제다. 그러나 그러기 때문에 서로 부족을 보완해줌으로써만 온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여기서 장자의 말을 빌어보자.
소지 (小知. 적은 앎)가 대공조(大公調, 큰 하나됨)에게 물었다. “마을의 말씀(丘里之言)이란 무엇입니까?” 큰 하나됨이 대답한다. “마을이란 것은 열 가지 성 백 가지 사람이 모여 한 풍속을 이룬 것이다. 다른 것을 모으면 한 가지가 되고, 한 가지를 흩으면 다른 것이 된다. 이제 말〔馬〕의 각 부분을 보면 말이란 것은 없어지지만, 그래도 내 앞에 선 것을 보고 말이라 할 때는 그 여러 부분을 하나로 세워놓고 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산이란 낮은 것이 쌓여서 높아진 것이고 강이란 작은 물방울이 모여서 커진 것이다. 큰 사람은 모두 한데 어울러서 하나됨(公)을 하는 이”(大人合 併而爲公, 장자, 則陽)다. ⎯함석헌
 
22. 그러한 신앙이 주어짐을 얻어 그는 특정한 신을 예배하기를 원하고, 그리 함으로 말미암아 제 원하는 바를 성취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이득은 나만이 주는 것이니라.
스스로 하는 법칙으로 움직이는 현상계의 자리에서 보면 모든 것은 원 인과 결과의 관계고, 뜻의 세계에서 보면 하나도 하나님의 주시는 것 아닌 것 없고, 토론의 지경을 벗어나면 일신(ᅳ神)도 다신(多神)도 범신(汎神)도 없는, 오직 믿음이 있을 뿐이다. ⎯함석헌
 
23. 그러나 그러한 직은 지혜의 사람들이 얻은 결과는 유한하고 잠깐인 것이니라. 천신들을 공경하는 자들은 천신의 하늘로 갈 것이지만 나의 신자는 내게로 온다.
오이 심으면 오이 얻고 콩 심으면 콩 얻는다. 하늘 그물 넓고 넓어 성기면서도 빠져나가는 것 없다. (種瓜得瓜 種豆得豆 天網恢恢 疎而不漏)
초월적인 신성을 쉽게 알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초월자의 가지가지 모습에 의해서 그를 예배한다. 우리가 우리의 찾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초월자가 우리 이상의 불안전한 것을 아시고 길이 참아주시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기도를 받으시고, 우리가 ‘그’에게 어느 만큼 가까이 갔나 그 정도에 따라 그것을 들어주신다. 어떤 정성도 보람 없지는 않다. 비록 무식한 신자라도 차차 자라 거룩하신 이 안에서의 자기의 최고의 선을 구하여 자라게 될 것이다. 모든 점을 다 포섭하고 초월하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예배하는 지경에 올라간 이는 최고의 지경, 곧 원만한 생명, 완전한 지식, 절대적인 사랑, 부족이 없는 의지를 실현 성취한다. 그밖의 모든 선은 부분적이요 유한한 것이요 발전의 낮은 지경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라다크리슈난
이런 설명은 반드시 오해되게 마련이다. 말하는 사람은, 그 말은 세상 말을 쓰지만 그 뜻은 자기가 체험한 정신세계의 것인데, 듣는 사람은 보통의 의식을 가지고 듣기 때문이다. 의식구조가 달라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때문에 니고데모가 와서 말을 걸었을 때 예수께서는 그 벽두에 “새로 나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여러 신이요, 천신이요, 천신의 하늘이요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있는 우주의 어느 구석 어떤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해 자라는 정신세계의 어느 지경을 말하는 것이다. 영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는 영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반드시 제 나름의 해석을 한다. 그렇게 해서 미신이 생긴다. 그러나 그럼 영은 어떻게 받나? 영의 말을 듣지 않고는 아니된다. 그래서는 순환론에만 빠질 것 같다. 거기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위에서 한 말에 “진지한 태도로 하기만 하면”이란 말이 있었다. 진지란 참인데, 참은 다른 것 아니고 자기와 자기의 모든 욕망을 전적으로 부정함이다. 그러면 지식이나 경험이 모자라 혹 마음에 가리워진 것이 있어 잘못 알았던 것이 있다 해도 반드시 깨달아지는 날이 오고야 만다. 그것이 ₘ“내가 그 믿음을 튼튼케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것이 참 예배냐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그 무식한 인간의 찌꺼기인 사마리아 윤락 여성보고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과 참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했다. 거기 참이란 말을 더 넣은 것이 중요하다. ⎯함석헌
 
24. 깨달을성 없는 사람들은 나의 불멸, 무상(無上)인 최고의 지경을 알지도 못하고 나타남이 없는 나를 인격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하느니라.
형상 없는 이에다가 여러 가지 형상을 가져다 씌우는 것은 우리의 부족 때문에 되는 일이다. 우리는 궁극의 실재에 대해서 하던 명상을 내던지고 상상으로써 재구성해낸 것들에 정신이 쏠리고 만다. 나타나 뵈지 않는 유일 영원하신 이를 제외하고는 모든 신들이란 것은 다 우리가 ‘그이’ 위에 가져다 씌운 형상들이다. 하나님은 여럿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는 항상 변하는 무수한 것들 뒤에 계시는 ‘하나이신 분’이요 변동의 불변의 중심, 모든 형상 너머에 서 계시어 끝없는 변동에서 부동의 중심이 되시는 이다. ⎯라다크리슈난
이 절의 번역에 대하여는 여러 주석가들의 의견이 구구하다. 샹카라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지극한 자아로서의 최고의 지경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은 나를 이때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가 지금 바로 나타난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광명의 주재자다.” 힐(Hill)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전수히 프라크리티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기가 동조하고 있는 바네트(Barnett)의 말을 인용하여 아래와 같이 말한다. “오해하는 사람들은 우주의 밑바닥이 되는 저 지극히 높으신 이를, 본질적으로 물질적인 것이어서 가능적(可能的)으로 결정할 수 있는 아박타(avyakta)도 존재할 수 있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실지로 결정적인 아뱍타의 상태로도 존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는 근본적으로 절대요 비물질적이다.
간디의 번역은 틸라크의 것과도 라다크리슈난 박사의 것과도 서로 합한다. 나는 그 편이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한다. 여기 말하는 것은 프라크리티에 관한 것이 아니고 6장, 7장, 8장이 다 같이 나타나지 않으신 형태로서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대해 말하고 있듯이, 이것은 하나님의 나타나 뵈지 않는 형태에 대한 것이다. 이 절은 그릇된 길에 빠져 여러 가지 신들을 정말 있는 것처럼 믿고 예배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 절은 9장 10절과 같이 읽어야 한다. 여기서나 거기서나 강조하고 있는 것은 유일신관이다. 10장에서 12장에 이르는 부분은 일반으로 하나님의 나타나신 형태에 대해 예배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타났거나 아니 나타났거나 ‘그’는 최고 불멸의 하나이신 존재다. 즉, 나타나지 않는 혹은 비인격적인 존재로는 초월적인 브라만이시고, 나타나신 혹은 인격적인 존재로는 주요, 지지자시요, 통치자시요, 아버지요, 어머니요, 창조주시다. 그렇지만 하나이신 하나님과 예배를 같이 나눠 받을 여러 신 들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신이 여럿이 있는 줄로 믿는 사람들은 잘못 안 것이고 미혹된 것이다. 그것은 앞에 있는 절들에서 이미 말한 것이다. 한 편에는 이슬람같이 그것을 미혹이라 할 뿐만 아니라 불신앙이라고 저주하는 종교도 있지만,「기타」는 그들에게도 한 자리를 허락하고 다만 “그들이 얻는 보응은 한정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들의 예배와 그 목적이 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마하데브 데자이
 
25. 나는 내 요가마야에 의하여 가려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뵈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 미혹된 세계는 나를 알지 못한다. 이 불생불멸의 나를.
요가마야(yogamaya) 유가(瑜咖)의 환력(幻力)
 
26. 아르쥬나야, 나는 과거에 있었던 모든 생명과 현재에 있는 것과 또 장차 올 모든 것을 다 알건만 아무도 나를 아는 이는 없느니라.
생명 부타(bhuta), 생류(生類), 피조물.
 
27. 바라타의 아들아, 오 대적을 정복하는 자야, 일체의 산 것들이 좋다 언짢다의 두 갈라짐에 이끌려 나면서부터 미망에 빠졌느니라.
샹카라에 의하면 ‘나면서’(sarge)부터 좋다 언짢다의 애욕이 모든 생류속에 미혹을 일으킨다. 그렇게 미혹된 것에게는 현세의 참도 불가능하다. 하물며 참 자아에 대한 참에 대하여는 말할 것도 없다. 모든 생기 있는 것이 나면서부터 이 마당에 잡혀 있고 그것이 그 심정을 아트만 곧 참 나에게서 떠나 속세로 기울어지게 한다. ⎯마하데브 데자이
 
28. 그러나 모든 죄를 벗어버린 경건한 사람은 상대의 미망에서 벗어나 굳게 맹세를 지켜 나를 믿느니라.
죄란 것은 법을 범하는 일이 아니라, 모든 부족, 즉, 무지와 자기주장의 중심적 근원을 말하는 것이다. 이기적인 자아는 남을 해하면서라도 자기의 이익을 취하려고 한다. 이 죄를 벗을 때, 이 무지를 극복했을 때 우리 생활은 하나이신 이를 섬기는 데 쓰인다. 그러는 동안에 신앙은 더 깊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올라간다. 그리하여 나중에 십방(十方)에 두루 계시는 ‘하나이신 자아’를 보는 데 이른다. 그것이 영원한,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생명이다. 투카람(Tukaram)은 이렇게 부른다.
 
내 속에 있는 나는 죽고
그 대신 당신이 그 자리에 앉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나, 투카는 증거합니다.
이제 이미 ‘나’ 도 ‘내 것’ 도 없습니다.
(The self within me now is dead
And thou enthroned in stead
Yea, This I, Tuka, testify,
No longer now is ‘me’ or ‘my’)
⎯라다크리슈난
 
29. 늙음, 죽음의 해탈을 얻으려고 내게 귀의하여 힘쓰는 사람은 누구나 다 저 브라만을 바로 그대로 알고 자아의 바탈 전체와 또한 카르마의 모든 것을 아느니라.
늙음, 죽음의 해탈(jaramaranamokshaya), 늙음(jara), 죽음(marana), 해탈의 목적(mokshaya) 즉 다시 나고 다시 죽는 생사의 바퀴를 벗어나려는 목적.
자아의 바탈(adhyatmam) 개개 자아의 밑바닥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동양의 말로 하면 성(性), 곧 바탈, 그 바탈의 전체라고 하면「역」(易)에서 말하는 “이치를 다하고 바탈까지껏 하여 그로써 말씀에 이른다”(窮理盡性 以至於命)에 해당할 것이다.
 
30. 나를 모든 물질적 나타남의 속, 모든 신적 존재의 속, 또한 모든 희생의 속인 자로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통일 된 정신을 가지고 비록 떠나는 순간에도 나를 알 수 있느니라.
우주의 모든 물질적 정신적 현상의 갈피갈피 속에 들어 있어 그 근본 원리가 되는 힘. 노자의 도(道), 덕(德)의 덕에 해당한다 해야 할 것이다. 유교에서 한다면 도라 할 것이다. 노자는 도에서 덕이 나온다 했고, 유교에서는 하늘의 말씀하신 것이 바탈(性)이요, 바탈대로 하는 것이 길(道)이요, 길 닦음이 가르침(敎)이라고 했다.
희생은 물론 신에게 바치는 제물을 가리키는 말이지만「기타」에서는 그것을 굉장히 넓게 해석하여 우주의 근본원리라고 하니 차라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아가페라 하면 어떨까? ⎯함석헌
이 절은 우리더러 임종하는 순간에 어떤 생각에서 만든 특정한 교리를 기억해야만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도 모든 면에서 ‘그’를 알고, ‘그’를 신뢰하고, ‘그’를 예배하라는 말이다. 여기에 더러 새 말들을 썼기 때문에 다음 장에서 아르쥬나가 거기 대한 설명을 묻는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그 본체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또 자연 속에 있어서의, 객관적 또는 주관적 현상 속에 있어서의, 행동과 희생의 원리 속과 속에 있어서의 ‘그’의 나타남에 있어서도 이해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스승은 그것을 다음 장에서 모두 간단히 설명해준다. ⎯라다크리슈난
 
이것이「바가바드기타」라는「우파니샤드」의 제7장 즈나나 비즈나나
요가의 끝이니 이는 브라만의 지식에서 요가를 가르치는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의 문답이니라.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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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6장 진정한 요가(2)
작성자 바보새 16-01-22 01:50 조회9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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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바람 없는 곳에 있는 등불은 펄럭거림이 없나니, 생각을 정복하고 자아의 통일을 닦고 있는 수도자를 비하여 말한다면 그와도 같으니라.
어떤 객관적 경험도 마음이 감각을 통하여 그대상과 연결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예를 든다면 어떤 생각에 대해 명상을 할 때 그 생각에 대한 조잡 또는 오묘한 경험은 마음이 말의 감각과 접촉하는 데 달려있다.
명상하는 동안 경험의 대상은 점점 줄어드는 상태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그 경험의 가장 오묘한 상태가 초월될 때, 그때 마음은 이때껏 그것을 통해서 경험하던 대상과 감각을 벗어나게 된다. 마음이 감각과대상의 영향을 받고 있는 때까지는 마치 바람에 펄럭이는 등불과 같다. 그러나 그 영향을 한번 벗어나게 될 때 바람 없는 곳에 있는 등불같이 부동하는 것이 돼버린다.
마음이 대상과 연결되는 한은, 그것은 아직 경험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경험의 대상이 줄어들다가 나중 아주 없어지는 지경에 이를 때, 마음은 경험하는 마음이기를 그만둔다. 의식하는 마음이 의식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이 변화의 과정 동안에 그것은 우선 첫째로 개성의 가장순수한 상태를 얻게 된다. 이 절의 말이 마음의 부동을 말하지 않고, ‘생각’의 부동을 말하는 것이 재미있는 점이다. 거기에 쓰인 산스크리트 말은 ‘칫타’ (chitta)다.
그것은 고요하고 잠잠한 인상의 집합이라 할까, 혹은 욕망의 씨라고 할까 마음의 그러한 상태를 나타내는 뜻이다. 칫타는 물결이 일지 않는 물 같은 것이다. 그것이 물결이 되어 일 때 그것을 ‘마나스’ (manas) 곧 마음이라고 한다.
마음이 그러한 칫타의 상태, 즉, ‘생각’ 의 상태를 가졌을 때, 그때에 부동으로 선다. ‘바람 없는 곳에 있는 등불’과 같다는 것은 그 개성을 빔(그 주위에 가지는 추상적인 풍성) 속에 가진다. 그 이유는 그것을 경험해줄 아무것도 거기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방해도 받음이 없이 자신 속에 깨어 있다.
어느 순간에라도 곧 잠잠한 깊음 속으로 번져 빠져들어가려는 잠잠한 바다의 한 잠잠한 물결을 상상해보라. 이 절이 나타내는 마음의 순수한 개성의 상태, ‘나’의 순수한 개성의 상태는 곧 즉시로 초월적인 자아의식 속으로 빠져든다. 크리슈나가 ‘자아의 통일’ (자아와 하나됨)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상태를 말한 것이다. 마음이 거룩한 본체와 연합한 것이다. 이 거룩한 하나됨, 곧 요가를 그 양상에 따라 각각 다르게 설명하는 것이 이어지는 네 절이요, 그 다음의 여섯 절에서는 초월적 의식에서 우주의식으로 변해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다음 세 절에서 우주의식에서 신의식으로 들어가는 길의 요점을 설명한다. 그 신의식이 곧 요가의 절정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20. 요가를 닦음으로써 다스림을 받아 생각이 안정에 이른 곳에, 또 자아만에 의하여 자아를 보아 자아에 만족하고 앉아 있는 곳에,
 
21. 또 감각을 초월하여야, 깨달은 마음에 의하여서만 알 수 있는 한없는 즐거움이 그 안에만 있는 줄을 알아, 진리에서 흔들림이 없이, 그 안에 굳건히 서있는 곳에,
 
22. 그것을 한번 얻고만 나면 그것을 다시 없는 이익으로 알아, 그 안에 굳게 서서, 어떤 큰 고난에도 흔들림이 없는 거기,
 
23. 그것을 가리켜 요가라고 하나니, 그것은 고통의 얽어맴을 벗어난 것이니라. 그 요가를 마땅히 결정 불변의 마음으로 닦을 것이니라.
위 19절까지에서 생각, 즉, 결정적인 지성이 확고부동한 자리에 이른 마음의 지경을 말했다. 그리고 20절 이하에서는 그러한 결정적인 지성이 계속 훈련에 의하여 자기 개성을 분명히 파악한 다음, 물러나기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그 물러남은 개성의 확대로 시작된다. 그렇게 될 때 지성은 제 개성을 잃고 보편성을 갖기 시작한다. 즉 무한한 본체(Being)의 지위를 얻게 된다. 본체 속에 빠져들 때 그것은 본체를 곧 자아로 인식하게 되고 마침내는 복된 의식에 이른다. 요가 수행자는 자기 자아 속에서 만족을 발견한다.
마음이 모든 경험을 초월하기 전까지는 자아를 깨닫지 못한다.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과정에서 마음은 다수의 경험에서 물러나 자기 개체의 바탈 속에서 통일(하나됨)을 체험하게 된다. 그런 다음 자기 개성을 초월함에 의하여 우주적인 존재로 확대된다. 이러한 바탈의 상태, 즉 초월적인 의식의 상태를 말해서 자아에 의하여 자아를 본다고 했다. 그 ‘만’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초월적 자아 자체가 바탈의 내용을 이루고 있으므로 어떠한 상대적 존재도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 순수성은 영원하고 지극히 높은 것이기 때문에 개인생활의 최고의 모습, 결정적인 지성을 가지고도 거기서는 먼 것이요 그 속에 들어감을 거부당한다. 지성이 자아의 바탈 속에 자기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그 존재를 버리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것이 자아의 성격의 영광이다. 집에 돌아오면 길손은 평화를 얻는다.
감각으로는 왜 무한한 즐거움을 경험할 수 없느냐 하는 것을 알기 위하여는 감각의 기원과 목적을 알아야 한다. 창조는 프라크리티(prakriti) 곧 자연으로 시작되는데, 그것은 세 성으로 나타난다. 즉, 선성(善性, 사트바), 동성(動性, 라쟈스),암성(暗性, 타마스)이다. 창조가 진행됨에 따라 3성은 마하트 타트바(mahat tattva) 곧 지성의 원리로 나타난다. 그것은 또다시 아함 타트바(aham tattva) 곧 마음의 원리로 나타나고, 그것은 또 그담 다섯 가지 탄마트라(tanmatra)로 나타나는데, 거기서 다섯 감각이 나온다. 그 다음 나타냄이 계속됨에 따라 다섯 탄마트라에서 다섯 원소(地, 水, 火, 風, 空)가 나오고, 그것들이 결합하면 만물이 된다.
감성의 경험 범역은 이 다섯 원소에서 나오는 창조물에 한정되어 있다.
이들 감각은 우리로 하여금 다만 객관세계의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줄 뿐이다. 영원한 생명의 복된 것은 감각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고, 지성으로부터는 가까와 곧 바로 다음에 있다. 지성으로는 그것을 맛볼 수 있지만 감성으로는 불가능하다.
20 절에서 23절까지의 목적은 요가를 네 가지로 정의하여서, 그것을 가지고서 힌두 경전이 가르치는 인생의 네 가지 목적을 달성하는 데 부족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의 목적을 ① 다르마, ② 아르다, ③ 카마, ④ 모크샤를 달성하는 데 있다고 한다.
① 다르마(dharma)는 사람의 자연적인 의무다. 그 안에는 선과, 올바른 행동, 자유, 정의, 법을 지킴 등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원리가 다 포함되어 있다. 사람이 자기를 깨닫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은 단 번에 다 지켜진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아를 알고 체험하면 모든 도덕과 덕행과 올바른 행동의 기본이 되는 정도에 서기 때문에 거기서 자연의 모든 법을 준행하고 만물에 대해 정의를 행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② 아르다(artha)는 부(富), 사업, 유리, 유효, 보수, 이익의 뜻이다. 영원한 복의 체험으로 인하여 그런 모든 목적이 완전히 충족됨을 얻는다. 가지가지 행복의 수단을 모으고 또 모은다는 것은 결국 아르다를 얻자는 것이다.
③ 카마(kama)는 욕망으로 즐거움을 얻고 고통을 쫓아버리자는 것을 목적하게 된다. 이것은 자아의 영원한 복을 깨달을 때 이루어진다. 찾는 것도 없고 욕망하는 것도 없어질 때 카마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④ 모크샤(moksha)는 해방이다. 23절에 모든 슬픔, 고통에서 해방됨을 말했다. 요가, 즉 지극히 높으신 이와 하나됨으로 인하여 그것은 이루어진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타울레르(Johann Tauler)는 말하기를 이렇게 했다. “그의 영혼은, 말하자면 신성(神性)의 깊은 소속에 빠져 잃어지고 말아서, 모든 피조물적 차별의 의식도 따라서 잃어버렸다. 사람의 영혼이 거룩한 합일로 하여 하나님 안에 아주 완전히 잃어버려졌기 때문에 그는 모든 피조물적 차별감을 잃어버리고……구름도 빛도 없는 신비의 고적한 하나됨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마하데브 데자이
 
24. 하고자 하는 뜻을 일으키는 모든 욕망을 남김없이 내버리고 마음만으로 모든 감각의 무리를 샅샅이 정복하며,
‘뜻을 일으키는’을 간디나 라다크리슈난, 또 그 밖의 번역들은 다 “이기적인 뜻(혹은 목적)에서 일어나는 욕망을”이라고 하는데, 마하리쉬의 번역만이 “하고자 하는 뜻을 일으키는 욕망을”이라고 한다. 그 어느 편으로 하여도 근본에서 다를 것은 없으나, 마하리쉬의 번역이 더 나을 듯하다. 욕망은 자연적인 것이고, 그 욕망의 자극으로 행동의 동기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욕망의 뒤에 있는 뜻은 절대적인 것이므로 그것은 감히 우리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고, 문제되는 것은 그 욕망으로 인하여 우리가 의식적으로 일으켜 행동하고자 하는 뜻이다. —함석헌
‘마음만으로’를 간디(with the mind itself)와 마하리쉬(by the mind alone)가 번역한 것을 보면, 그 뜻은 극기나 고행으로 감각을 억지로 눌러버리거나 없애버리려 해서는 안된다는 데 있다. 내 마음을 참으로 높은 데 두면 감각은 쉽게 이겨진다는 말이다. 마음이 몸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악이 감각 그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 나를 찾으려 하지 않는 마음에 있다. 그러므로 헤매는 마음을 그대로 두고 선을 행하려고 감각을 억지로 구속하고 강제하여도 소용이 없고, 반대로 마음을 올바른 길(道)에 놓기만 하면 감각은 자동적으로 거기 따라 참(眞理)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그것이 곧 생명이다. 그러기 때문에 믿으라는 것이다. 브라만 혹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또 내 속에 근본적으로 선의 씨가 있음을 믿는 것이다. 지극히 선하신 이를 믿기를 결심할 때 마음속에 기쁨이 일어나는 것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인자가 천하에 대적이 없다는 것은, 인자는 아무리 악한 자라도 대적으로 알아 정복하려 하지 않고 그에게 스스로 선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올바르게 된 환경 속에 자라는 어린이를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사랑과 평등과 평화를 살고 있는 부모와 어른들 사이에서 사는 동안 그 어린이의 자아는 올바르게 자람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 어린이의 도덕적 활동능력은 자동적으로 높아간다. 그러나 반대로 불우한 환경에서 사랑, 평등, 평화를 맛볼 수 없이 삐뚤어진 자람을 한 아이는 벌써 그 마음이 스스로 하는 능력을 잃었기 때문에 아무리 훈계를 하여도 벌을 주어도 소용이 없다. 개인이 그렇다면 인간의 공동체 살림은 더욱 그렇다. 그러기 때문에 선한 목적을 위해 강제와 폭력의 방법을 써서는 아니된다. 종교는 고등한 종교활동에 의해서만 향상 되고, 악한 풍속은 선한 풍속을 길러줌에 의해서만 제거되며, 저속한 풍조는 고상한 예술에 의해서만 배제될 수 있다. 그것은 결코 규칙과 단속과 형무소 등으로, 정치적 조직적으로 되지는 않는다. ‘마음만으로’ 혹은 ‘마음 자체로’라는 건 깊이 생각할 만한 말이다. 정치가 종교나 교육이나 예술을 직접 간섭해서는 아니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함석헌
‘감각의 무리’, 혹은 감각의 마음 즉 감각들이 들어 있는 장소 이것은 신경조직의 구조를 가리키는 말이다. 전체 신경조직이 마을이라면 개개의 신경은 마을사람인 셈이고, 마음은 그것을 차지하는 영주(領主)이다. 크리슈나가 “마음만으로 감각의 마을을 샅샅이 정복하며” 했을 때는 무슨 이치를 밝히고자 한 것일까? 그것은 즉 영주를 감독하여서 그로 하여금 마을사람들을 시켜서 마을을 새로 나게 하여, 그 활동 즉 신경조직의 활동이 자연법칙에 따라 진행되도록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는 한편 참으로 깨닫고 새로 난 자아는 영원한 본체 안에서 그 깬 의식을 자연상태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절대의 본성과 상대적인 활동의 분야가 서로 따로따로 갈라져 있으면서도, 또 개인생활 속에서 우주의식의 상태 안에서 하나로 통전(統全)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 수련은 완전히 정신적인 것이지만 그러면서도 감각의 기능을 가능케 하는 전신경조직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우주의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을 가르치는 그 첫머리에서 크리슈나가 신경조직, 즉 생활의 생리적 면을 먼저 말하여 그 개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인간의 신경조직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어서 그것을 개조하는 것은 생리적 방법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 어려움이 이 ‘마음만으로’라는 말의 강조에 의하여서 풀린다. 그는 수도자에게 감각을 직접 통제하려고 하든가 혹은 신경조직을 어떤 생리적 방법으로 건드려서는 안된다고 엄중한 경고를 한다. 초월의식이 부동의 것이 되려면 신경조직이 개조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정신적인 방법으로 되어야만 한다. 만일 수도자가 감각을 그 정도대로 두고 개조해보려고 한다거나 혹은 그것을 통제하되 자기의 타고난 천성을 어기고서 해보려고 한다면 결과는 잘못될 것이다. 이 절에서 가르치는 방법에는 그런 것은 조금도 없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25. 꾸준한 인내로써 버티는 이성에 의하여 한걸음 한 걸음 안정에 들어갈지어다. 마음을 자아에 박아놓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
25절은 20절에서 ‘물러간다’고 했던 것, 그리고 24절에서 ‘내버린다’ 고 했던 것을 더욱 자세히 밝혀준다. 그것은 물러가는 과정은 점진적으로 되어야 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나 갑자기 하려 하거나 또 그 나가는 길을 변경하거나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인내로써 버틴다”는 말을 덧붙인다. 한번 시작한 다음에는 스스로 진행 되도록 내맡겨두어야 한다.
꾸준히라는 말과 점진적이란 말이 매우 중요하다. 만일 조급해져가지고 그 초월 속에다가 내 마음을 몰아넣으려 하다가는 여러 가지 잘못이 일어남을 보게 된다. 마음이 생각함에서 빠져나와서 상대계의 경험을 잃어버리려고 하는 이 생각함의 오묘한 단계에 있어서는 생각의 강도(強度)가 굉장히 높은 법이다. 나가는 과정이 방해를 받음 없이 스스로 순순한 상태로 나가게 된다면 마음은 슬쩍 자아(self)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만일 그렇지 않고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혹은 그 나가는 길을 이리저리 지시하기 위해 압력을 가하거나 강요하거나 하게 되면 그만 마음이 자연스럽게 가던 길에서 떨어져나가서 동요되고 불쾌를 느끼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그 나가는 길은 조바심이나 서두름이 없이 조용히 참는 마음으로 할 수 있도록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내로써 버티는 이성”이라는 말에는 겉으로 보아 알 수 있는 대로, 이성편에서 참음을 지켜간다는 것밖에 또 속뜻이 있다. 그것은 그 나가는 과정 동안에는 이성은 작용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이성을 가지고 그 돼가는 일들을 지켜보거나, 분석하러 들거나 꼬치꼬치 캐려 하거나 해서는 아니된다. 그 과정을 비판적 태도로 캘 필요가 없다. 이성은 다만 받아들이고 음미할 뿐이어야지 어떤 방식으로라도 조사하거나 감시하거나 해서는 아니된다.
‘한 걸음 한 걸음 안정에 들어갈지어다’ 함은 그래야, 마음이 사색과정의 보다 깊은 지경을 헤아려보는 동안 또 동시에 스스로 정련(精煉)됨을 얻어 보다 더 오묘한 지경을 체험할 수 있게 되고, 앞으로 순순히 제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람이 밝은 데 있다가 갑자기 깜깜한 굴속에 들어갈 때는 그 굴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 수가 없지만, 천천히 들어가면 그 눈이 엷은 광선에 맞추어지기 때문에 볼 수가 있다. 마음이 깊은 속으로 물러갈 때는 거친 경험에서부터 오묘한 경험의 지경으로 들어간다. 그러기 때문에 갑자기 달리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차분히 들어가는 것이 마음에 대해 절대로 필요하다.
그리고 또 이성의 개인적인 성격에서부터 바탈(本性)의 지경으로 옮겨 가기 시작할 때는 그 과정이 서서히 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만 복된 것을 체험하는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는 말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크리슈나가 마음을 자아에 박아놓은 다음에는 무엇을 생각하려고 해서는 아니된다고 한 것은, 초월적인 의식의 지경은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지경 저 쪽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 지경을 생각해보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 거기는 다만 거기 있음을 즐길 수 있을 뿐인 지경이다. 거기는 생각이 제 자리를 가질 수 있는 정도의 지경이 아니다. 거기 어떤 좋은 생각이 들어 올 수 있으려니 기대하지 않도록 해주기 위해 크리슈나는 수도자에게 이 말을 해준 것이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 생각하지 않는 지경은 마음이 자아 속에 확정됨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오는 결과다. 그러나 이것은 명상하는 동안에만 그런 것이다. 명상에서 나온 다음에도 그러라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생각을 아니하는 것이 버릇이 되면 생활은 침체되고 무의미한 것이 돼버린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는 말은 우주의식의 본질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말이다. 첫째로, 이 지경의 생활은 사색이나 감정의 기반 위에서 되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본성의 지경 위에서 자연스럽게 살게 되는 생활이다. 둘째로, 이 지경에서 자아는 행동의 세계에서는 완전히 떠나 있는 것이므로, 마음이 생각을 하고 있는 때 비로소 자아는 그 사색과정에 머무르지 않고 완전히 자유롭게 있을 수 있다. 이것이 3절에서 말한 “요가에 도달한 사람은, 그리고 그 사람에게만, 고요히 함이 그 방법이다” 한 지경의 생활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26. 무엇이거나 가만 있지 못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헤매어 나가게 하는 것이 있거든, 즉시로 이끌어들여 자아의 지배 밑에만 있게 하라.
 
27. 그 마음이 깊은 화평 속에 있고, 모든 애욕이 잠잠히 가라앉았으며, 모든 죄와 허물을 벗어 브라만과 하나됨을 얻은 요기는 무상의 복락에 이르느니라.
브라만과 하나됨 브라마부탐(brahmabhutam), 하나님과 하나됨.
요기 요가를 닦는 사람, 행자.
 
28. 요가를 닦는 자는 그와 같이 언제나 자기를 통일하여 죄를 벗어버렸으므로 쉬이 브라만과 접촉하는 영원한 복을 얻을 수 있느니라.
그 닦음이 쉽고, 그 가르치는 생활방식이 쉽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 닦음이 쉬운 것은 마음의 움직여가는 것이 거의 자동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즉 복이 있는 곳으로 가기 때문이다. 그 닦음은 바로 마음의 천성에 따라서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브라만과 접촉하기도 쉽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길은 가까운 데 있다(道在邇).
인(仁)이 멀리 있는 줄 아느냐? 내가 인을 하고자 하기만 한다면 그 인이 내게로 온다. (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 ⎯공자
어려운 일을 하고 무거운 짐에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시오. 내가 여러분을 편히 쉬게 하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 제자가 되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 ⎯「마태」(11: 28∼30)
무슨 짐이 가장 무거우냐? 내 양심이 가책으로 내게 지운 짐이 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더 무겁다. —함석헌
‘브라만과 접촉’(brahmasamsparsam)함을 말함은 하나님은 하나의 풍설만이 아니요, 걷잡을 수 없는 것을 향해 바라보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한 실재요 우리는 그것과 실지로 접촉할 수 있다. 종교는 입씨름이 아니요 체험되는 사실이다. 이성은 거기 입을 내밀어 사실에 대한 하나의 논리적인 설명을 해줄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 사실이 굳건한 기반 위에 서지 않는 이상 설명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뿐 아니라, 종교적 체험의 사실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보편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세계의 각각 다른 곳과 역사의 각각 다른 시대에 발견된 것으로서 인간정신이 하나인 것과 시간을 꿰뚫고 존재하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다. 힌두교와 불교의 선견자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필론과 플로티노스, 기독교와 회교의 모든 신비가들이 밝혀준 것은, 그것을 설명하려고 한 그 신학적 시도에는 비록 민족과 시대의 특성의 차이는 있어도 다 한 근본에서 나온 것임을 보여준다. —라다크리슈난
 
29. 요가로 자기를 통일한 사람은 모든 곳에 평등관을 가져 일체 산 것 속에서 자아를 보고, 자아 속에서 일체 산 것을 보느니라.
자아를 깨닫게 되는 과정에서는 외계에서 물러나와 자아와 세계를 구별하여야 하지만, 일단 깨닫고 난 다음에는 세계가 자아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것을 도덕의 세계에서 말한다면, 처음에는 세계 속에서 떠나기를 힘쓰다가, 일단 거기 도달하면 다시 사랑과 수난과 희생으로써 속세로 돌아오게 된다.
희망과 공포와 좋아함과 싫어함을 갖는 서로 대립하는 유한한 자기가 완전히 정복된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명상하는 동안 본성(Being)의 지경이 마음의 천성 속으로 스며들어오게 되면 그 스며듦이 마음을 거룩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스며듦이 흔들림이 없이 확고한 것이 될 때 마음이 이 잡다한 만상 속에서 통일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그 잡다한 만상의 세계가 속에 있는 거룩한 통일에 의해 해석된다. 마음이 거룩한 본성으로 충만될 때 그 뚫어봄은 자연 충만하고 평등한 것이 된다. 이 세계 생명의 복잡한속에 있으면서도 그 뚫어봄은 확고한 것이요 흔들림이 없다. 이것이 브라만과 접촉한 사람의 뚫어봄이다.
평등관은 브라만과의 접촉의 결과인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그것을 브라만을 깨닫는 방법으로 생각해서는 아니된다. 깨닫지 못한 사람이 만일 평등관을 얻어보려고 한다면 그는 자기에게도 남에게도 혼란을 일으키고 말 것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30. 사람이 만일 나를 모든 곳에서 보고 모든 것을 내 안에서 본다면 내가 그에게서 잃어짐도 없고 그가 내게서 잃어짐도 없을 것이니라.
사람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관계는 우선은 본성의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는 감정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거기서부터 사색의 세계로 들어가고 그담에 감각적인 경험의 세계에 들어간다. 하나님은 그와 같이 사람의 삶 속에서 모든 분야를 정복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제단 안에 산다. 그의 생활은 사랑 안에, 복 안에, 지혜 안에, 신의식 안에 있다. 그는 보편적인 존재의 지경 안에 산다. 그는 땅 위에서 움직이면서 하나님의 땅에서 살며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생각으로 도달할 수 없는 본체의 땅에서 산다.
이 복된 지경을 개척하는 일은 사색을 초월한다. 이것을 계속 생각하는 것은 그대로 값어치가 있다. 그것은 마음을 즐거운 생각으로 가득 채워준다. 그러나 바라는 지경을 창조하게는 못한다. 그러므로 초월적인 생각은 생각하는 것보다 무한히 귀하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으로 하여금 생각을 초월하여 절대 정결의 지경에 들어가게 하여야 한다. 거기가 하나님의 계신 곳이다. 거기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삶의 표면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다. 생각은 마음이 그 복된 지경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을 뿐이다. 빵을 생각하는 것은 빵맛을 주지도 못하고 배를 부르게도 못한다. 빵이 먹고 싶거든 밖에 앉아 그것을 생각하고 있지만 말고 부엌으로 들어가 그것을 먹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한은, 어떻게 이 현상적인 경험의 세계를 뚫고 초월적인 축복의 세계, 전능자의 순수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 한은,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요, 혹은 그를 느껴보려고 애를 쓰고만 있는 것이다.
역사가 보여주는 성인 성자들의 하나님과의 직접 연합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들의 생활은 복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지만, 그들의 그러한 생활의 성공의 비밀은 그들의 사상, 감정, 경험의 지경을 초월하는 데 있다. 하나님 실현의 비밀은 하나님 생각을 초월하는 데 있다. 사상대로 남는 사상은 하나님 의식을 가리고 있다. 감정도 마찬가지로 복스러운 복을 가리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상은 그것이 사라져 없어지는 데 가서야 그 이루어짐을 본다. 감정도 가슴속을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주기 위해서는 사라져버려야 한다.
만유의 주의 영광을 아는 의식의 지경은 거룩한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지려면 계속 규칙적으로 하는 명상의 실천과 초월적인 본성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만 우주의식에 이르러 혼과 마음이 완전히 성숙될 수 있다. 이렇게 혼과 마음의 역량이 충분히 발달되어야 거룩한 본체를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을 생활할 수 있다. 나타나 뵈지 않는 절대와 나타나 뵈는 바 본체(Being) 사이에 있는 관계가 그 자체를 드러내게 된다. 인격신을 감각적인 단계에서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그가 일상생활의 산 실재가 된다. 창조의 개개 물체가 내 자아의 방식이므로 하나님의 빛을 드러낸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31. 요기가 만일 하나됨에 굳게 서서 만유 안에 들어 있는 나를 공경한다면, 그는 어떠한 방식의 살림을 살더라도 나를 사는 것이니라.
작은 내가 살아 있는 한 지극히 높은 대아는 없다. 작은 내가 없어질 때에 지극히 높은 대아는 간 데마다에서 보인다. —간디
 
32. 오, 아르쥬나야, 자아로써 봄으로 인하여 일체를 즐겁거나 괴롭거나, 평등으로 보는 이를 최고의 요기라 이르느니라.
자아로써 봄 아트마아우파마(atma-aupamya), 모든 것을 나와 같이 봄, 모든 것 속에서 나를 봄, 나로 여김.
아트마아우파마는 나와 다른 사람을 평등으로 본다는 뜻이다. 내게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듯 모든 것에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란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감싸고, 사람들을 거룩한 살림으로 인도하며, 세상 속에서 성령과 빛나는 의식을 가지고 행동한다. 그는 자기에게 즐거운 것은 모든 피조물에게 즐겁고, 자기에게 괴로운 것은 모든 산 것들에게 괴로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해하지 않는다. 그는 쾌락이 오거나 고통이 오거나 이미 겁내는 일이 없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세계를 보기 때문에 아무것도 두려워하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을 자아와 평등관을 가지고 감싸안는다. —라다크리슈난
이 절은 요기가 지녀야 할 비전의 결과를 구체적으로 말해준다. 샹카라가 설명했듯이, “세상 만물이 자기가 고락을 느끼듯이 마찬가지로 고락을 느낀다고 깨닫기 때문에 어떤 생명도 해하지 않는다”는 지경이다. 여기서 성경의 유명한 구절을 참조하라. “여러분이 남에게서 바라는 그대로 여러분도 남에게 그대로 해주시오. 이것이 율법과 예언자의 정신입니다.” (「마태복음」7:12) —마하데브 데자이
‘자아로써 봄으로 인하여’, 즉 자기 자아의 심정으로써 보라는 것이다.
앞절에서 보면 헌신자가 하나님과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심정으로 본다고 했다. 이 절에서 말하는 것은 더욱더 영광스러운 상태다. 곧 자아로써 미루어봄으로 인한 평등관이라고 한다. 앞 절에서는 볼 수 있었던 헌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차이가 여기서는 없어진다.
이제 그의 하나님은 그와 하나다. 거룩한 하나됨이 그를 압도해 버렸다. 그의 개성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영광이 비쳐나오고, 그것이 다시 없이 충만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본성 정도에서뿐 아니라 그의 감정, 사색, 환상, 체험의 전분야에까지 나타나게 된다. 전에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헌신의 색채를 면치 못하던 것이 이제는 영원하신 본체의 꿰뚫음을 입은 그의 자아의 심정으로 분명히 나타난다. 그 본체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그것을 붙드시고, 헌신자가 하나님께로부터 얻는 영원한 자유를 지지해주신다.
‘즐겁거나 괴롭거나’ 라는 말을 한 것은 상대되는 쌍이 되는 생각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개성이 가져다주는 피조물의 여러 가지 성격은 요기의 비전에서는 이미 없어졌다. 그것을 보통의식에 좀더 이해하기 쉽게 하려면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가지가지의 장난감을 사다주는 아버지 눈에는 그것이 다 하나지만 받는 어린 아들의 발달되지 못한 의식으로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게 보인다. ᅳ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장자의「제물론」(齊物論)은 바로 이 뜻을 가르치자는 것이다. 제물론이라, 물론(物論)을 가까이 한다, 하나로 한다는 말이다. 천차만별의 상대 세계에 붙잡히기 때문에 시비를 따지려 하지만 시비를 따짐으로써는 도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평등관이란 시비를 초월한자리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얻은 사람은 최고의 요기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상대계를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시비를 초월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또 현실로 있는 시비를 인정한다. 그래서 “성인이 고르게 하기를 시비로써 하고 하늘의 고름에 쉬게 하니, 이를 일러 두길로 한다고 한다”(聖人和之以足非 而休乎天均 是之謂兩行)라고 했다. 정말 초월은 상대를 부정하면서도 실려두는 것이다. 그것이 참 초월이다.「기타」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절대에 서지만 또 상대를 인정한다. 그래서 일단 버리고는 또다시 속세로 돌아오려고 한다. —함석헌
 
 
아르쥬나 말하기를
 
33. 마두 귀신을 죽이시는 이여, 당신께서 말씀하여주신 그 평등관의 요가는 어떻게 하면 영구부동일 수 있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34. 마음이야말로 흔들리는 것입니다. 오 크리슈나시여, 걷잡을 수 없고 억세고 완고하여, 그것을 억제하기란 바람을 잡으려 함같이 어렵습니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잡으면 있고 버리면 없어져서, 나고 듦이 때가 없어 그 일정하게 있는 곳을 알 수 없다 하셨으니, 그 마음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孔子曰 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惟心之謂歟) —맹자(吿子上)
산속의 도둑을 깨치기는 쉬우나 마음속의 도둑을 깨치기는 어렵다. (破山中賊易 破心中賊難) —왕양명
이것은 많은 선견자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흔히 있는 이야기다. 순간적으로 거룩한 빛을 반짝하는 것을 경험하면서도, 그것이 늘 그렇지 못하고 곧 꺼져버리는 데 안타까운 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집중됐던 마음이 왜 풀어지느냐를 모르는 데서 온다. 그것을 마음의 집중 정도에서만 했기 때문인 것을 모르는 데서 오는 것이다. 흔들림 없는 거룩한 신의식을 마음의 집중으로만 되는 줄로 아는 것이 잘못이다. 흔들리는 것은 그것이 바탈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두절에서 하는 아르쥬나의 질문을 흔히들 신의식에 이르기 어려운 것은 마음의 흔들림 때문이라는 의미로 풀어 생각하지만, 그것은 모르는 말이다. 그것은 신의식에 이르는 근본적인 원리를 모르는 테서 오는 잘못이다. 우리가 목적하는 신의식은 바탈의 지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색이니, 이해니, 혹은 마음의 집중을 계속하는 정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기독교에서 말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얻었다, 거듭 났다,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자리, 불교에서 말한다면 깨달았다는 자리, 유교에서 말한다면 불역(不易)의 자리다. —함석헌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35. 마하바후야, 물론 마음은 흔들리는 것이요 억제하기 어려운 것이니라. 그러나 오, 쿤티의 아들아(아르쥬나),그것은 끊임없는 닦음과 집착 없이 함으로써 능히 붙잡을 수 있느니라.
마하바후(Mahabahu) 큰 팔을 가진 자, 곧 아르쥬나를 가리킴.
여기 나온 크리슈나의 대답은「요가수트라」(Yoga sutra)에 있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끊임없는 닦음은 마음을 굳게 하기 위해 힘들여 노력함이요, 집착없이 함’ 이란 자연적인 육신에 대한 모든 애탐을 영적인 것에 대한 뜨거운 불길로 변화시켜버림을 가르치는 것이다. ⎯마하데브 데자이
사람의 마음은 그저 위태로운 것이요, 도의 마음은 그저 아득한 것이니, 오직 알뜰히 오직 하나로 그 가운데를 잘 잡을지어다.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ᅳ 允執厥中) —「중용」
요가를 닦고 집착이 없이 함으로써 마음을 붙잡을 수 있다 할 때에 크리슈나가 뜻한 것은 다시는 마음이 헤매임이 없이 가만히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래 가지고는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의 뜻은 다만 닦음과 집착 없이 함으로써 무소부재한 바탈의 지경으로 들어 갈 수 있게 해줌을 얻어 마음이 언제나 자체 근본의 복된 지경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이른바 선비란 것은 마음에 잡힌 데가 있고 일하는 데 지키는 것이 있어서, 비록 도를 완전히 다 닦았다 하지는 못하더라도 반드시 그 지켜가는 것이 있고, 비록 온가지 아름다운 선을 다 행하지는 못하더라도 반드시 그 자리잡고 있는 곳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알기를 많이 하려고 힘쓰기보다는 아는 것인 담에는 반드시 분명히 하려 하고, 말하기를 많이 하려고 힘쓰기보다는 그 말을 하는 바에는 반드시 무엇을 말하는지 그것을 자세히 하려고 하며, 행하기를 많이 하려고 힘쓰기보다는 행하는 바에 는 어떻게 하게 되는지 그 말미암는 바를 분명히 하려고 한다. 그렇게 하여서 알기를 이미 슬기 있게 하고 말하기를 이미 분명히 하고 행하기를 이미 똑똑히 하면 우리 바탈이 그렇고 우리 몸이 그렇듯이 흔들림 없는 자리에 가게 된다. 그러면 부하고 귀해진다 해도 더해지는 것이 없다. 가난하고 천해진다 해도 덜해질 것이 없다. 이것이 곧 선비라는 것이다. (所謂士人者 心有所定 計有所守 雖不能盡道術之本 必有率也 雖不能備百善之美 必有處也 是故知不務多 必審其所知 言不務多 必審其所謂 行不務多 必審其所由 智旣知之 言旣道之 行旣由之 則若性命之形 骸之下可易也 富貴不足以益 貧賤不能以損 此則士人也) —공자(家語)
 
36. 자기를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요가를 성취하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스스로 자기를 다스리는 사람에게는, 적당한 법에 따라 힘쓰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라.
 
아르쥬나 말하기를
 
37. 믿음은 있으나 스스로 자기를 제어하지 못하므로 마음이 요가에서 멀어져, 완전한 요가의 성취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은 오, 크리슈나여, 그 사람은 어떤 지경에 이르게 되옵니까?
아르쥬나의 이 질문은, 죽을 때에 영원한 복락의 세계에 반대되는 길에 선 것은 아니다. 영원한 청정세계를 깨달아 알이만큼 완전한 수양을 하지 못한 사람에 대하여 묻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이 믿는 것같이 영원한 천당 아니면 영원한 지옥중의 어느 하나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런 사람들도 죽은 후에까지 더 자라서 완전에 이를 수 있는 어떤 길이 있는가 하는 말이다. —라다크리슈난
그는 아마 신앙이 사람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나 알고 싶어서 이 질문을 했을 것이다. 아르쥬나같이 실제적인 사람으로서는 신앙만으로 하나님을 깨닫게 되는 쉬운 길이 혹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38. 오, 큰 팔을 가지신 이여, 브라만의 길에서 헤매어나와 발을 붙일 곳도 없는 자는 둘에서 다 떨어져나와 끊어진 구름 조각같이 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브라만의 길 브라만에 이르는 길, 끊임 없이 요가를 닦아나가는 길.
아르쥬나는 의식에 여러 층이 있고 거기 대응하는 여러 정도의 생활이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 의식이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자라 올라가면 전단계의 생활은 그에게는 쓸데없어지는 것임도 알고 있다. 그가 묻는 것은, 사람이 어느 정도의 수양을 쌓아 보통 인간의식의 정도를 벗어나기는 하면서도, 해탈을 얻어 신의식에 이르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우주의식에는 아직 들어가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이다. 그런 사람은 이미 인간의 정도에서는 자리를 잃어버렸고, 거룩한 지경에는 아직 발을 붙이지 못했다. 그는 ‘둘에서 다 떨어져나와’ 여기 있을 수도 저기 있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끊어진 구름조각같이 망해버린다”는 무서운 표현을 한 것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선물이 주는 기쁨을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은 사람들이, 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앞으로 올 세상의 권세의 맛을 본 사람들이 배반하고 떨어져나간다면 그들을 회개시켜 다시 새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히브리」(6: 4~6)
지극히 어려운 이 요가의 길을 그 끝까지 성취하지 못한 사람은 허다한 데, 그들의 말로는 어떻게 되는가, 그들의 노력은 전연 쓸데없는가, 완성 할 수 없는 길을 시작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다크리슈난
 
39. 크리슈나여, 저의 이 의심을 온전히 몰아내주시옵소서. 이 의심을 끊어버리실 분은 참으로 당신밖에 없사옵니다.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40. 프리다의 아들아,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그에게는 멸망하는 일이 있을 수 없느니라. 사랑하는 벗이여, 선을 행하는 자에게 어찌 궂은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사랑하는 벗 아르쥬나를 가리킴.
플라톤도 같은 말을 했다. “선한 사람에게는, 생전에나 사후에나 궂은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라.”「코란경」에도 있다. “누구나 선을 행하고 믿음을 가진 사람이면, 그 공로로 내침을 받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보라, 그를 위하여 우리가 이를 기록한다.” —마하데브 데자이
 
41. 요가를 하다가 떨어진 사람이면 선을 행한 사람들이 가 있는 세계에 가서 오랜 세월을 지내다가 청정하고 길상(吉祥)스러운 집에 다시 태어나느니라.
내가 비노바 바베이를 방문했을 때 그의 첫마디로 묻는 말이 “당신은 다시 태어나는 것을 믿소?”였다. 그래 나는 서슴지 않고 “그렇습니다, 나는 기독교 신자지만 다시 태어나는 것을 믿습니다” 했다. 그 점에 관해서는 나는 미리부터 해결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글자 그대로 하나님이라는 할아버지가 하늘 위에 앉았는 것을 믿는 것이 반드시 인격신을 믿는 것이 아닌 것같이, 반드시 소로 나고 버러지로 나는 것을 믿어서만 윤회전생(輪廻轉生)을 믿는 것 아니다. 궁극에 있어 생명은 한 생명이요 그 생명이 무한히 진화하는 생명임을 알면 그것 때문에 싸울 필요는 없다. 그렇게 조급하게 생각할 게 아니라 곰곰이 오묘한 지경을 생각해보면 나는 결코 한번만 나고 한번만 죽는 내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자기를 조금 들여다보는 사람이면 ‘나’ 라는 것은 연속이 아니고 불연속인 것을 알지 않나? 지금 일념(一念) 사이에, 믿으면 영으로 태어났다가, 금새 또 믿음을 잃고 구렁이로 여우로 승냥이로 태어나지 않는 사람이 누구일까? 그래서 “천하 만물의 이치가 내 마음속에 갖추어 있다”(萬物皆備於我)라 하는 것이며, 그러기 때문에 “돌이켜보아 정성되면 즐거움이 이에서 더 한 것이 없다”(反身而誠樂莫大焉) 하는 것 아닌가? 성(誠)하는 데, 생명의 근본이신 하나님께 전부를 온전히 돌릴 때,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는 것은 그때 내가 낮은 것을 벗어버리고 좀더 하나님에 가까운 모습으로 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를 한번만 하는 줄 아는 사람은 그 궁극의 마지막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다시 태어나고 다시 태어난다는 사람은 보통의 거친 마음보다는 좀더 오묘한 현미경식의 마음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오묘는 갈수록 그 도가 깊어가고 높아가다 못해 말과 생각이 끊어지는 지경에 이른다. “내가 아브라함 있기 전부터 있었다” 한 것은 그것을 체험해보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예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 그 오묘한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려고 일부러 “사람의 아들이다” 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을 모욕하는 것 같아 충성스런 분노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금덩어리보다 더한 그가 사람의 아들이라는 저울 판을 타고 스스로 땅에 내리지 않았더라면 쭉정이도 못되는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자녀’ 라는 말을 하며 하늘을 향해 곤두서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억억만만 번 억억만만 가지 생으로 태어났던 우리요, 우리의 희망은 이제 이 순간에라도 은혜와 노력의 한 데 합함으로써 단번에 생사도(生死道)의 연옥을 탈출해 영원한 아버지 속으로 뛰어들 자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하나도 빠짐이 없이 이 만유를 완성하기 위해서라면 또 몇 억억만만 번을 다시 여기로 내보내신다 해도 한마디 투정도 앙탈도 말고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하며 고맙게 받아들일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마 어서 최후심판이 와서 하나님 우편에 가 앉자는 생각보다는 헤매이는 마음 하나를 건지기 위해서라면 보살의 지위를 내버리고라도 야차로 태어나기를 사양 않는다는 마음이 훨씬 더 하나님 뜻에 가까울 것이다. —함석헌
 
42. 혹은 어느 어진 요기의 집안에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참으로 그러한 탄생은 이 현세에서는 아주 드문 것이기 때문이다.
 
43. 오, 쿠루족의 귀염둥아, 거기서 그는 전생의 몸에서 길렀던 정신의 결합을 다시 찾아, 거기서부터 다시 완전한 성취의 지경을 향해 힘써 나아갈 것이다.
정신 혹은 이성, 혹은 이상.
결합 전생에 얻었던 이성과 다시 연락이 된다는 의미로도 취하고, 그렇지 않고 그 결합을 브라만과 하나됨이라는 뜻으로 취하기도 한다.
거기서부터 그것을 출발점으로 한다는 것으로 전생에 이루었던 공덕이 무효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이 거기 있다.
완전을 향해 나가는 길은 천천히 되는 것이기 때문에 목적에 이르자면 아마 여러 날을 거쳐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노력도 헛되게 되는 일은 없다. 우리가 맺었던 관계, 우리가 얻었던 힘은 죽음과 함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마 다음 생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44. 전생에 닦았던 힘으로 그는 몰려나가게 된다. 요가를 알려고 찾았던 것만으로도 그는 베다를 뛰어넘는다.
몰려나간다 원하거나 아니하거나, 혹은 의식적으로 노력하거나 아니하거나 간에 전생에 닦았던 그 힘에 몰려 요가를 계속하게 된다는 말이다.
베다 「삽다브라마」(sabdabrahma)를 번역한 말이다(Veda 혹은 Vedic rule). 어떤 이는 프라크리티의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문으로는 삽다브라마를 성범(聲梵)이라 번역한다. 즉 소리로 하는 베다, 글자로 하는 경전이란 말이다. 정신적 베다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넘어선다 상대계를 넘어 초월적인 의식에 들어감을 말한다. 크리슈나는 요가의 초심자조차도 이미 상대적인 생활의 지경은 넘어섰다고 했다.
이것은「베다」와 그 사이에 써넣은 글들을 의미한다. 베다의 교리를 실천함에 의하여 우리는 베다를 뛰어넘게 된다. 브라만에는 두 가지가 있다. 삽다브라마와 그 지경을 넘어선 것과. 삽다브라마를 잘 외어 통하게 되면 그것을 넘어서게 된다. 그러면 신앙은 체험이 되어버리고, 혀는 가만있게 되고, 교리는 퇴색되어버리고 만다. 신앙을 일깨우는 것은 보통 경전의 공부나 예배의식에 참여함으로써 되는데, 그 도움을 받아서 하다가 완전히 스스로 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면 그때에 간접적인 도움은 필요가 없어진다. 보통으로는「베다」공부가 도움이 되지만, 한번 마음이 스스로 눈이 뜨여 그것으로 넉넉하게 되면 그런 외적 도움은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에「삽다브라마」나 그 밖의 어떤 제도적인 가르침이건 다 넘어서게 된다. 강을 건너려는 사람에게는 배가 필요하지만, “이미 피안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법이 다시 소용이 없다.” —라다크리슈난
 
45. 그러나 견디고 참음으로써 힘쓰는 요기는, 모든 죄의 소멸됨을 얻어, 많은 생을 거친 후 성취됨에 이르러 가장 높은 지경에 들어가느니라.
사람은 연약한 것이기 때문에 이 생에서는 비록 완전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그의 노력의 교훈은 그 죽은 후에도 영원히 남아 있으며 그를 도와 그로 하여금 전진케 하여 마침내 목적에 이르게 하고야 말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용서와 회개와 고쳐줌과 회복으로 모든 인간이 다 속죄됨을 입어 최고의 지경에 하나됨을 이루기 전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영혼이 다 자기를 그 자신의 모습대로 지은 하나님께로 도로 찾아옴을 입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에 대해 지극히 반역적인 요소까지도 마침내 다 찾아 자기와 화(和)를 이루도록 하고야 말 것이다.「기타」는 우리에게 만유 구속의 희망을 준다. —라다크리슈난
이 절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용기를 잃는다. 완전에 가려면 여러 날이 필요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이라는 말을 오해 하는 데서 나온다. 생이란 새 몸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만일 사람이 초월적인 의식 속에서 우주적인 신분을 가지게 될 때에 일어나는 일을 분석해본다면, 그때는 개인은 존재하기를 그치는 것, 그는 순수한 ‘존재’ 그것이 되고 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초월에서 나오면 다시 개인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생이란 개인생활을 하는 것이다. 생이란 이 개인 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요가 경전의 말을 오해하는 것은 요가 상태에 대한 체험이 없는 것과 요가를 닦는 데 대한 자세한 지식이 없는 데서 온다. 이 상태에서는 오해는 불가피한 것이다.
‘많은 생’이란 말을, 피상적인 견지에서 한다면, 여러 번 태어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아직 요가를 성취하지 못한 사람에게만 적용될 것이 분명하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46. 요기는 고행자보다도 위대하다. 그는 지식 있는 자보다도, 행동하는 자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존경을 받는다. 그러므로 아르쥬나야, 너는 요기가 될지어다.
여기서 크리슈나는 요기는 숲 사이에 물러가 있어서 극도의 단식과 고행을 하는 고행자 타파스빈(tapasvin)보다도, 해탈을 얻기 위해 행함을 내버리고 지식의 길을 취하는 즈나닌(jnanin)보다도, 복락을 얻기 위해 베다의 의식을 행하는 카르민(karmin)보다도 위대하다는 것을 설명한다. 타파스보다도, 즈나니보다도, 카르마보다도 더 귀하다는 이 요가는 그 셋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것들 위에 또 헌신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요가를 요기는 모든 사람의 심령 속에 자리 잡고 계시는 신 앞에 자기를 부어 지극한 예배를 드리고, 그의 생활은 거룩한 빛의 인도에 따라서 하는 자기를 잊어버린 봉사로 된다.
요가, 다른 말로 해서, 박티(bhakti) 곧 실수(賞修)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하나됨이 최고의 목적이다. 다음 절에서는 모든 요기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것이 박타(bhakta)의 신봉자라고 한다. 여기서 즈나나는 정신적인 실현이란 뜻이 아니고, 정신적 지식이란 뜻으로 쓰인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고행자란 말은 결과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행하고 있는 자를 말하는 것이고, 지식의 사람이란 진리를 깨달았다는 의미로서의 즈나니가 아니라 단순히 학식이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간디
 
47. 그리고 모든 요기 중에서도 나를 믿음으로 예배하고, 그의 가장 깊은 속의 자아로 내 속에 빠져들어 있는 사람, 그 사람을 나는 가장 완전히 하나됨을 얻은 자라고 하느니라.
여기 진화의 최고 상태에 대한 설명이 있다. 크리슈나는 “모든 요기 중에서”라고 했다. 그것으로 가지가지의 요기가 있을 것을 알 수 있다. 하다(hatha) 요기, 쟈나(dhyana) 요기, 카르마(karma) 요기 등등이다. 이 모든 요기가 도달하는 네 가지의 단계가 있다. 그 첫째는 대아의식의 실현(10∼18절), 둘째는 우주의식의 실현(24∼29절), 셋째는 신의식의 실현(30∼32절), 넷째는 신의 식 안에서의 만유의 실현(32절), 크리슈나가 “모든 요기 중……그의 가장 깊은 속의 자아가 내 속에 빠져들어 있는” 했을 때 그는 자기 안에 만유의 주와 또 만유와 자연적 또는 항구적인 화합이 되어 있는 사람을 가리킨 것이다. 그것은 신앙이 완전히 이루어졌을 때에 나타난다.
본체(Being)의 상태가 심성 속에 충만히 또 항구적으로 스며들어서 상대적인 경험이 아무리 들어와도 그것을 깨치지 못하는 것이 우주의식의 특징이다. 이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언제나 자신 속에 자적(自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적이 아무리 적극적이고 현실적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그 본질적인 성격에 있어서는 전혀 추상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래도 초월적인 본체가 심성 속에 스며들어왔다는 표적이기 때문이다. 이 스며들어옴이 감각의 상태에서 본체를 경험하게는 못해준다. 눈이 본체를 볼 수는 없고, 혀가 그것을 맛볼 수 없으며. 귀가 그것을 듣거나 손이 그것을 만질 수 없다. 이것을 가져오는 것은 신앙 안에서 되는 신심의 과정이다. 신심은 언제나 개인적인 단계에 있다. 그러기 때문에 크리슈나가 “모든 요기 중에서 나를 신앙으로 예배하는 그를” 하고 말했을 때 그는, 우주의식 속에 확호히 서서, 신심과 예배를 위해, 자기를 우주존재의 나타나 뵈는 표현에다, 하나님 안에서 개체로 화한 우주 존재에다 가져다 접착시키는 사람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럴 때 눈은 나타나 뵈는 추상적 영원의 본체를 보고 있고, 모든 감각기관이 그것을 경험의 대상으로 감각하고 있다. 이것이 신심이 어떻게 우주의식을 얻은 한 사람을 영광화하고 그로 하여금 어떻게 초월자, 곧 지극히 높은 자를 감각의 분야에서 맛볼 수 있게 하느냐 하는 방식이다. 종교의 역사는 슈카데바(Shukadeva)나 자나카(Janaka) 왕이나 또 그 밖의 개인들이 부동의 상태로 실재 속에서 주에게 진심으로 귀의함으로 말미암아, 그를 가지가지의 체험, 즉, 감각으로, 마음으로, 이성으로, 혼으로 맛보고 있는 것을 기록해주고 있다. 그러한 행복스러운 사람들을 가리켜 크리슈나는 “가장 완전히 하나됨을 얻은 자”라고 했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이것이「바가바드기타」라는「우파니샤드」의 제6장 진정한 요가의 끝이니 이는 브라만의 지식 속에서 요가를 가르치는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의 문답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