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9

조선불교유신론의 21세기적 의미

불교평론





조선불교유신론의 소회(塑繪)1) 폐지론과 선종의 정체성
[특집] 조선불교유신론의 21세기적 의미
[16호] 2003년 09월 10일 (수)서재영  buruna@buruna.org
1. 머리말

조선조에 의해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으로 통폐합되어 다양한 종파적 특성들이 혼재되어 오던 한국불교는 시간이 지날수록 쇠퇴를 거듭한 끝에 구한말에 이르면 은둔적 승가와 기층민중들의 기복 신앙이라는 형태로 변모해 간다.1) 소회(塑繪)란 입체적 형태를 가진 소상(塑像)과 회화(繪畵)를 통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만해가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회는 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불상과 탱화를 비롯해 각종 조각이나 그림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 정화(淨化)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한국불교는 그 모습을 일신해 오늘날 조계종이라는 선종(禪宗)으로 다시 자리 매김하면서 종단의 체계를 잡아가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근래로 오면서 수행승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선법이 융성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2)2) 1976년과 1982년에 집계된 ‘전국선원현황’에 따르면 전국 선원에서 수행 정진하는 수행승은 950여 명이었다. 그러나 1999년에 집계된 통계를 보면 무려 1,640명으로 대폭 늘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편찬, 〈선원의 운영 현황과 문제점〉, 《禪院總覽》(서울: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2000), p.99.

따라서 근대 한국불교사는 조계(曹溪) 선종의 정체성을 회복해 가는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한 구한말은 한국불교가 혼돈과 무질서를 극복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변화를 모색하던 시기로 볼 수 있다. 이런 계기를 가져 온 것은 개항 이후 새롭게 전개되는 역사적 흐름과 기독교를 비롯한 외래 종교와 서구 신문물의 전래였다.3) 3) 김경집, 《한국근대불교사》(서울: 경서원, 2000), p.19.


오랜 침체를 거듭해 온 불교계로서는 당시의 급격한 사회적 변화는 감당하기 벅찬 것이었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불교가 살아남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이 나타났고 그와 함께 각종 개혁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4)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은 바로 이 같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탄생했다. 4) 권상로는 1913년 간행한 〈朝鮮佛敎革新論〉에서 당시의 불교계에서는 ‘개량(改良)’, ‘발달(發達)’, ‘확장(擴張)’, ‘유신(維新)’이라는 기치를 내건 각종 개혁론이 활발하다고 기술하고 있다.(權相老,<朝鮮佛敎革新論>,<退耕堂全書8冊>,P51)

이렇게 근대 한국불교사를 불교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선종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조선불교유신론》의 개혁론은 현재적 의미로 되살아난다. 달리 말해 《조선불교유신론》은 과거 어느 시점의 개혁론이 아니라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과제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은 한국불교에서 여전히 유효한 개혁론이며, 한국 선(禪)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고민해 보아야 할 여러 과제들을 던져주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 같은 문제의식을 기초로 만해가 주창한 소회(塑繪) 폐지론이 선종에서 말하는 믿음의 문제와 어떤 논리적 당위성을 갖는지, 또 한국 선종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문제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소회 폐지론을 주창할 당시의 신행 양상을 살펴보고 소회 폐지론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규명해 보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믿음에 대한 선종의 입장을 통해 만해의 소회 폐지론을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2. 구한말 불교계의 신행(信行) 양상

1) 은둔적 승가와 기복적 대중

1876년 강화도 조약의 체결과 함께 개항이 단행되면서 한반도에는 서구 사조와 외래 종교를 비롯해 소위 신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한반도는 격동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개항을 전후한 불교계의 상황은 오랜 탄압과 침체로 피폐해져 있었고, 종단과 승려 등 제반 여건은 국가로부터 용인되지 못한 상태였다.5)5)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조계종사(曹溪宗史): 근현대편》(서울: 조계종 출판사, 2001), p.21.

사찰은 경제적으로 곤궁했으며, 승려들은 하천한 신분으로 천대받아 도성출입마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교는 사회의 주류층과 접촉할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있었다.6)6) 바로 이 시기에 천주교와 개신교는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영토분할이라는 국제적 질서와 궤를 같이하면서 한반도 곳곳에 성당과 교회를 설립하고 점차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승려들은 자연히 깊은 산중에 은거하면서 선(禪)과 교(敎)의 겸수를 통해 어렵게 불교의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무종산승(無宗山僧) 불교시대를 보내고 있었다.7) 이처럼 지배층으로부터 멀어지고 국가로부터 공인받지 못한 불교계의 상황은 자연히 승려들의 자질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만해는 당시 출가하는 승려들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7) 김영태, 〈근대불교의 종통 종맥〉, 《한국근대종교사상사》(이리: 원광대 출판국, 1984), p.186.

빈천에 시달리지 않으면 미신에 혹한 무리들이어서, 게으른데다가 어리석고 나약해서 흩어진 정신을 집중할 줄 몰라서 처음부터 불교의 진상(眞相)이 무엇인지 깜깜한 형편이다.8)8) 한용운, 이원섭 역, 《조선불교유신론》(서울: 운주사, 1992), p.70.

인용문에서도 나타나고 있지만 가장 하등한 사람들만을 모아놓은 집단이 불교계라는 것이 당시 승려의 자질에 대한 만해의 평가다. 출가자의 자질에 대한 탄식은 만해뿐 아니라 1913년 《조선불교월보》를 통해 〈조선불교혁신론(朝鮮佛敎革新論)〉을 발표했던 권상로(權相老)나 대각교 운동을 펼쳤던 용성(龍城)의 글을 통해서도 한결같은 입장을 엿볼 수 있다. 권상로는 승려들이 학식이 미천해서 시세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명리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현실의 모순을 개혁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9) 9) 권상로, 〈조선불교혁신론〉, 《조선불교월보》 18호(1913년 7월), pp.47∼49.

또 용성은 “청정한 도량이 음탕한 소굴로 변하였으며 술과 고기와 오신(五辛)이 낭자하고 또 개인의 이익에만 몰두하니 악마가 사문이 되어 불도(佛道)를 스스로 멸망케 하는 것이다.”10)라고 탄식했다.10) 용성, 한종만 편, 〈중앙행정에 대한 희망〉, 《한국근대민중불교의 이념》(서울: 한길사, 1982), p.141.

이렇게 불교가 외적으로 핍박받고 내적으로 사원 경제의 빈곤과 승려 자질의 저하는 불교를 믿는 신도들의 구성을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즉 이 시기 불자들의 특징은 권력에서 멀어진 일부 유생들과 기층민중들이 주축을 이루게 된다. 특히 이들을 성별로 분류해 보면 여성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만해는 불자들의 구성에 대해 “신도로 말하면 소수의 여인뿐이며, 남자는 봉황의 털이나 기린의 뿔같이 아주 드물다.”11)라고 표현하고 있어 당시 불교 신자들의 구성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11)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70.

물론 이보다 약간 앞선 시기에 불교를 믿는 거사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8∼1856)를 비롯해 월창(月窓) 김대현(金大鉉, ?∼1852) 등은 당대의 뛰어난 거사들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월창 거사는 천태지의의 《선바라밀차제법문》을 토대로 참선 입문서에 해당하는 《선학입문》이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12) 12)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위의 책, pp.24∼26.

또 1872년에는 거사들이 묘련사(妙蓮寺)에서 관음신앙을 중심으로 한 신앙결사를 조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몇몇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상황은 조직적 신행으로 확장되지 못하고 개인적 차원의 학문 탐구나 신앙활동에 그치는 양상을 벗어나지 못했다.13)13) 김경집, 《한국불교 개혁론 연구》(서울: 도서출판 진각종 해인행, 2001),p.15.



2) 염불결사와 정토신앙 중심의 신행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당시 불교계의 상황은 교단 내적으로 사원 경제가 피폐하고 승려들의 자질은 시대에 뒤떨어졌으며, 불자들의 구성은 기층민중들을 주축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이 같은 불교계의 전반적인 상황은 자연히 신앙적 측면과도 상호 인과적 관계성으로 작용하게 된다.

즉 교학적 체계에 근거해서 신행을 지도할 만한 승려의 부재와 기층민을 중심으로 한 신도 구성은 자연히 기복적 신앙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외연(外緣)이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행해진 대부분의 신앙활동은 미타신앙(彌陀信仰)을 중심으로 한 정토신앙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14)14) 김경집, 위의 책, p.16.

이 같은 신행적 특징은 19세기부터 본격화된 염불결사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때 종합적 고찰이 가능하다.

만일염불회(萬一念佛會)로 불려지는 염불계(念佛契)는 19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전국 각지에서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범어사·유점사·건봉사 등에서 결성된 이런 염불계는 승려의 도성출입이 허용되기 이전 시기, 즉 1895년까지만 해도 무려 21건이나 결성되고 있다.15)  15) 19세기 불교계에 나타난 염불계의 급증은 시대적 상황과도 무관치 않다. 즉 일반적 계는 1800년부터 1910년까지 모두 82건의 계가 성립되고 있다. 김필동, 《한국사회조직사연구: 계조직의구조적 특성과 역사적 변동》(서울: 일조각, 1992), p.247.

전국의 대소사찰에서 결성됐던 이 같은 염불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염불계, 미타계, 관음계, 지장계 등이 중심을 이룬다.16)16)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위의 책, pp.21∼22.

이름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염불계의 주된 흐름은 극락왕생을 기원하거나 또는 현세적 복을 비는 기복신앙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염불결사의 확산은 침체한 불교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피폐한 사원경제를 되살리는 한편 일반 대중들에게는 신앙심을 심어준다는 점에서는 긍정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17) 17)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위의 책,p.21.

그러나 당시의 신행 풍토는 불교의 사상적 전통의 계승이나 자력적 수행 전통의 상승(相承)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일정 정도 거리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렇게 만일염불회가 전국 도처에서 결성되는 데는 불교 내적 상황과 신도들의 기복성이 상호 일치점을 찾는 데서 기인한다. 즉 교단 내적으로는 어려워진 사원경제를 되살리고 사찰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적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 조직적 신행결사가 필요했다. 그 예로 신앙적 내용을 중심으로 하던 염불결사가 18세기 중엽을 거치면서 점차 사찰의 유지와 보수 등 이른바 ‘보사(補寺)’를 중심 내용으로 하는 경향이 짙어간다는 점이 이를 반증해 준다. 즉 이 시기의 염불계는 주로 계금(契金)에 대한 적립과 운영 등 신앙적 측면보다 경제적 활동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18)18) 한상길, 〈조선후기 사찰계 연구〉(동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0), pp.40∼41.

반면에 불자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기층민중들의 입장에서는 외세의 침투와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19) 등으로 전통적 가치관이 흔들리고 삶의 터전이 위협받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는 곧 내세적 구원과 현실적 안녕이라는 기복신앙을 강하게 요구하게 된다. 이 같은 이해관계로 인해 도처에서 만일염불결사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19) 1876년 강화도 조약과 개항,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 1905년 노일전쟁 등 당시 한반도의 상황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격변의 연속이었다.

19세기말의 시대적 위기상황과 맞물려 본격화된 이 같은 염불결사 운동은 1900년대로 접어들면서 점차 수도권으로도 확장되기 시작했다. 즉 1904년의 흥국사, 1910년 화계사, 1912년 봉원사와 개운사를 비롯해 1900년대에 결성된 염불결사도 확인된 것만 13개에 달하고 있다.20) 20) 한보광, 〈최근세의 만일염불결사〉, 《신앙결사연구》(성남: 여래장, ,2000),pp.272~296

이렇게 볼 때 19세기에 본격화된 염불결사와 정토신앙은 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할 시점인 1910년대에 이르면 수도권 등지로 확장되면서 불교의 보편적 신앙형태로 자리잡게 된다.21)21) 이 같은 통계는 결사문을 비롯한 결사와 관련한 자료를 토대로 산출된 것이다. 그러나 결사문이 없는 결사 등을 감안한다면 실제로 진행된 염불결사 운동의 양상은 통계 수치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보편적 신앙형식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만해는 당시 신행의 중심이 되었던 염불신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동일한 불성(佛性)을 지닌 엄연한 7척의 몸으로 대낮이나 맑은 밤에 모여 앉아 찢어진 북을 치고 곧은 쇳조각을 두들겨 가며 의미 없는 소리로 대답도 없는 이름을 졸음 오는 속에서 부르고 있으니, 이는 과연 무슨 짓일까. 이를 가리켜 염불이라 하다니, 어찌도 그리 어두운 것이랴.22)22)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64.

인용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만해는 당시의 신앙적 흐름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한다. 그것은 스스로가 불성을 지니고 있어서 부족함이 없는 존재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북을 두드리며 밖을 향해 구원을 비는 것은 선적(禪的) 관점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문제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이런 신행에 대한 보편적 평가는 북을 치며 염불하는 것이 곧 연화장 세계라고 생각할 만큼 불교신행 그 자체로 이해되고 있었다.23)23) 당시 염불하는 의식은 “맑은 밤에 모여 앉아 찢어진 북을 치고 곧은 쇳조각을 두들겨 가며 의미 없는 소리로 대답도 없는 이름을 졸음 오는 속에서 부르고”라는 만해의 인용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성염불(高聲念佛)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고성염불은 《아미타경통찬소(阿彌陀經通贊疏)》(大正藏 37)에서 고성염불의 열 가지 공덕(十種功德)을 말하고 있는데 이같은 근거에 따라 정토종에서는 고성염불을 수행법으로 택하고 있다.(이태원,<염불의 원류와 전개사>(서울:운주사 998),pp.525~529

이번 사월 보름, 금강산을 유람하다가 보광암에 이르렀는데 수십 명의 스님들이 향을 사르고 예불을 드리면서 북을 두드리고 경을 염송하였다. 이것이 바로 아미타정토의 연화법계이리라.24)24) 《유점사본말사지(楡岾寺本末寺誌)》, p.267. “是歲巳月之望 余遊覽金剛 轉到普光庵 十數僧道 燒香禮佛 擊鼓念經 正是彌陀淨土蓮花法界.”

앞에 인용한 만해의 글과 위의 인용문은 모두 북을 치며 소리 높여 염불하는 동일한 의례를 두고 밝힌 소감이지만 두 인용문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이를 미루어 볼 때 만해와 당시의 보편적 신행관과는 상당한 인식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만해가 당대를 풍미하던 신앙적 흐름에 대해 강하게 부정하는 데서 기인한다.

결국 당시의 신앙적 흐름은 교리와 경전에 근거한 체계적 신행과 수행보다는 염불과 기도라는 대중적 신앙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해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같은 현실은 불교의 본래성과는 거리가 먼 왜곡된 현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3) 쇠잔한 선풍과 경허의 선풍진작



말세사상이 만연하고 기복적 신앙과 극락왕생을 위한 염불결사가 대중적 신행운동으로 풍미할 때 조선의 선풍(禪風)은 극도로 쇠잔해 있었다. 제방에는 깨침을 인가할 스승도 없었으며 법맥을 물려받을 제자도 없었다. 경허는 “정법 보기를 흙덩어리와 같이 하며, 불조(佛祖)의 혜명(慧命) 계승하기를 아이 장난과 같이 여기고……”25)라며 당시의 분위기를 한탄하고 있다. 북소리와 염불소리는 요란했지만 선맥(禪脈)을 지켜온 선승들은 자신의 법통을 전승하지 못하고 스스로 법맥을 단절해야 하는 것이 당시 불교계의 현실이었다.26)25)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 《경허법어(鏡虛法語)》(서울: 인물연구소, 1981), p.250. 26)한암문도회 편,<한암일발록(漢巖一鉢錄)(서울,민족사,1995),pp.293~294.

그러나 꺼져 가는 선풍을 되살리고자 하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시기에 경허(鏡虛)는 1899년 무너진 선풍을 회복하고자 해인사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조직한다. 경허의 이 같은 수행결사는 염불신앙이 중심을 이루고 있던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본다면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반문과 함께 역사적 자각이 담겨진 운동으로 바라볼 수 있다.

경허의 눈에 비친 당시 불교의 모습은 정법이 침체되고 쇠미하여 삿된 도가 치성한 상황이었다. 염불결사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들의 가치관은 자성자도(自性自度)라는 선의 본래 정신이 없었다. 대신 스스로 자신의 근기를 낮추고 구원을 빌기에 바빴던 것이다. 경허는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여러 대승경전과 선문어록을 모두 살펴보아도 말세중생이 진정한 도를 구할 수 없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며 당시의 신행풍토와 가치관에 대해 강한 반문을 제기한다.

모든 도사들이 마음을 밝혀 견성(見性)을 하라는 말은 들었지만 말세 사람은 정(定)과 혜(慧)를 익혀 배우지 말라는 것은 보지 못했도다. …… 말세 중생이 진정한 도를 참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문구가 있었던가.27)27) 경허(鏡虛), 〈결동수정혜동생도솔동성불과결사문(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쫶社文)〉, 《경허집》(양산: 극락선원, 1990), p.80.

경허는 꺼져 가는 전등의 불빛을 되살리기 위해 선지식을 찾아 바른 법을 배우고 도업(道業)을 함께 닦을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결사를 추진하고 전국을 두루 편력하면서 선을 실천하고 도반을 규합했다. 이를 위해 경허는 해인사의 정혜결사 이후에도 통도사·범어사·화엄사·송광사 등을 순력하며 선원을 복원하고 선실을 개설하는 등 영남과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결사운동을 확장하면서 근대 한국불교의 중흥조로 평가받고 있다.28)28) 권상로, 백성욱 박사 송수기념 《불교학논문집》(서울: 동국대학교, 1959), p.293.

경허에 의해 진행된 이 같은 선풍진작 운동에 대해 한암은 “사방에서 선원을 다투어 차리고 발심한 납자들이 구름 일듯하니 마치 부처님의 광명이 다시 빛나 사람의 안목을 열게 하는 것 같았다.”29)고 술회하고 있다. 이처럼 경허의 선풍진작 운동이 근대 한국불교사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갖는 것은 분명하지만 오랜 침체 속에 끊어졌던 법맥이 하루아침에 복원될 수는 없는 문제였다.29)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위의 책, p.33.

경허의 선풍진작 이후 전국 곳곳에 선방이 유행처럼 생겨나고 수행자들이 몰려들고 있었지만 그 내막을 살펴보면 결코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만해는 선실(禪室)을 사찰의 명예나 이익을 낚는 도구로 삼는 곳도 있었기 때문에 선방은 많아지지만 진정한 선객은 봉황의 털이나 기린의 뿔처럼 귀하다고 당시의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30) 30)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55.

이를 미루어 볼 때 오랜 침체를 겪은 당시 불교계는 비록 경허와 같은 선지식에 의해 선풍진작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수행자의 자질 면에서 보면 외형적 선방의 증가만큼이나 실질적인 효과가 곧바로 나타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할 시기의 상황은 승려와 불교 대중들의 인식은 말세관에 빠져 있었으며, 신행의 주된 흐름은 자력적 신행보다는 타력적 신행에 의존하고 있었다. 선풍은 침체되어 있었지만 활발한 염불결사 운동으로 곳곳에 염불당이 세워지고 밤 세워 고성염불을 하며 극락왕생을 비는 것이 당시 불교계의 전반적인 상황이었다.

따라서 선적 견지에 입각해 본다면 당시의 불교 현실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만해는 이상과 같은 시대적 문제를 해소하고 불교의 참다운 본래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내놓고 있다.

3. 선종의 사상적 맥락에서 살펴본 믿음의 문제

1) 한국불교의 통불교성(通佛敎性)

한국불교는 유구한 역사를 통해 형성된 모든 불교적 전통들을 계승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오랜 역사적 과정에서 나타난 다양한 종파불교의 흐름과 민간 신앙과의 섭합을 통해 불교는 하나의 줄기가 아니라 다양한 신앙적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 이 같은 교리적 내용과 신앙의 대상에 대한 혼란은 종파불교라는 형태로써 극복되고 있다. 선종은 선종의 전통에 입각하고, 화엄종은 비로자나불을, 정토종은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해당 종파의 소의경전에 따라 믿음과 신행을 규정함으로써 다양한 전통은 나름대로의 질서와 통일성을 확립하게 된다.

그러나 국가권력에 의해 교리와 믿음의 대상이 서로 다른 종파를 강제로 통폐합당한 조선시대의 불교사는 한국불교를 소위 말하는 통불교(通佛敎)라는 형태로 만들어 놓았다. 태조의 창업을 도왔던 태종은 억불정책의 일환으로 당시 11개였던 종파를 7개로 통폐합했다.31)  31) 우정상·김영태, 《한국불교사》(서울: 신흥출판사, 1968), pp.134∼135.

국가권력에 의한 불교탄압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세종대에 이르면 7개의 종파를 통폐합하기 시작한다. 즉 조계종(曹溪宗)·천태종(天台宗)·총남종(摠南宗)의 3종을 합쳐서 선종(禪宗)으로 삼고, 화엄종(華嚴宗)·자은종(慈恩宗)·중신종(中神宗)·시흥종(始興宗)의 4종을 합쳐서 교종(敎宗)으로 통폐합하면서 선교양종(禪敎兩宗)이라는 체제가 만들어진다.32)32) 우정상·김영태, 위의 책, p.136.

결국 이 같은 과정을 거친 한국불교의 모습은 상이한 종파적 전통이 서로 혼재하게 되면서 다양한 사상적 체계와 신앙적 양식들이 뒤섞이게 되었다. 따라서 종파불교의 단순하고 명확한 교리와 의례 체계는 조선시대의 불교에는 찾아볼 수 없다. 선종과 정토종의 교리가 뒤섞이고, 화엄과 정토의 가르침들이 서로의 개념적 영역을 넘나들 수밖에 없는 필연적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불교의 믿음과 신행체계에 아주 복잡한 모자이크 문양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상근기 중생에게는 통합과 융섭으로 이해될 수 있을지 몰라도 중·하근기 중생에게는 혼란과 충돌로 이해되기에 충분했다.33)33) 이 같은 상황은 현재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다. 어느 정도 사세가 갖추어진 사찰에는 다양한 경전에 출현하는 부처님을 봉안하기 위한 여러 전각들이 건립되고 다양한 불상들이 봉안되어 있다. 이는 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할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만해는 “조선 불가에서 숭배하는 소회(塑繪)가 매우 많아서 아마 백 가지도 넘을 것”34)이라고 분석한다. 그 수많은 소회의 내용은 각기 다른 종파불교에서 성립된 것에서부터 심지어는 출가 수행자를 외호해야 하는 신중은 물론이요, 불교적 신앙과 아무 상관없는 칠성과 산신령 등 민간신앙의 소회까지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35)34)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89. 35) 이 문제는 한국불교의 관용성·융통성·통합성이라는 긍정적 측면에서 읽을 수 있으며, 불교 사상의 포용성으로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교리적근거의 혼란은 부정할수 없는 문제다.

결국 이 같은 상황은 오랜 탄압을 거쳐 불교가 민간신앙으로 변모해 가던 구한말에는 상황이 극한에까지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시의 논객들은 이렇게 혼란스러운 소상과 탱화 등은 미신에서 나온 거짓된 모습인 만큼 전부 소각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미신적 요소를 일소하고 신앙의 본질적 모습부터 뜯어고칠 때 비로소 암흑 시대의 전통을 일소하고 참다운 불교를 만들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36)36)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89.

서산 대사는 “공부하는 사람은 먼저 불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종파의 가풍(家風)부터 자세히 알아야 한다.”37)고 했다. 이는 복잡한 종파적 전통이 혼재된 한국불교와 같은 상황 속에서는 더욱 절실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11개의 종파가 하나로 뭉뚱그려져 빚어낸 한국불교의 문양은 ‘불교는 비체계적이고 상호 모순적’이라는 인식을 낳기에 충분하다.37) 《선가귀감(禪家龜鑑)》, 韓佛全 7책, p.644 上. “大抵學者 先須詳辨宗途.”

따라서 한국불교를 바라볼 때 나름대로 정리된 교판적(敎判的) 판단 기준이 없다면 혼란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왜냐하면 교학적, 실천적 가치관의 부재는 존재하는 것은 모두 합리적이라는 미명 아래 미신과 비불교적 요소마저도 불교라는 면죄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선종을 표방하는 조계종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문제는 보다 구체적인 고민들이 필요한 대목이다. 이렇게 볼 때 만해의 소회 폐지론은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기반해서 올바른 신앙적 체계를 정립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2) 선종사(禪宗史)를 통해본 믿음의 대상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될 때 불법의 진리성은 경전으로 대표되는 철학적 내용으로 증명되었다. 그리고 문화적이거나 신앙적인 증거는 경전에 근거한 불상을 통해 제시되었다. 그래서 중국에서 최초로 불교가 전래되는 모습은 곧 불상과 경전을 통해 이루어졌다.38)  38) 권기종 역, 《중국불교사》(서울: 동국역경원, 1985), p.21.

이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이들 나라에서 경전과 불상은 새로운 사상체계와 문화로 받아들여지면서 불교는 국가적 차원에서 수용된다. 그러나 선종의 경우는 상황이 좀 달랐다.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시작되는 선종사를 살펴보면 믿음의 대상에 대한 선의 입장이 드러난다.

달마가 처음 중국으로 왔을 때 그는 불상도 경전도 없이 홀홀 단신으로 선법을 전하러 왔다. 금빛 찬란한 부처님에게 예배하는 것이 불교라고 알고 있던 사람들은 불상도 경전도 없이 불법을 전한다는 달마를 기이하게 생각했다.39) 소문은 황제에게까지 미쳤고 마침내 달마는 양무제와 만나게 되지만 서로의 인연이 맞지 않아 소림사로 들어가 면벽하게 된다.40) 39) 阿部肇一, 최현각 역, 《인도의 선 중국의 선》(서울: 민족사, 1990), p.116.40) 《전등록》(서울: 동국역경원, 1986), p.98.

고승이라면 국가적 차원에서 맞이하던 중국에서 달마는 예외적으로 은둔의 길을 택하게 된다. 이는 진리에 대한 경전적 근거나 불상으로 대표되는 신앙적 근거에 의지하지 않는 달마의 선법을 당시 불교계나 중국사회가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에 선법이 처음 전래될 때도 이 같은 상황은 재연되었다. 가지산문의 개산조로 서당지장(西堂智藏)의 선법을 전래한 도의 국사에 대한 세간의 평가도 달마에게 가해졌던 것처럼 마설(魔說)이라는 비방이었다. 결국 도의국사도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강원도 오지의 진전사(陳田寺)로 들어가 달마처럼 시절인연을 기다리며 은둔해야 했다.41)41)최현각,<선학의 이해>(서울,여시아문,2002)pp.162~163.

이상의 두 사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은 선(禪)은 그 전래 초기부터 일반적 불교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불상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거나 전법의 증명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같은 전통은 선종이 율종 사찰에서 독립해서 자체적인 전통을 수립하는 청규(淸規)가 제정되면서 더욱 뚜렷해진다.

즉 선림(禪林)의 가람, 직위, 수행 등의 항목을 담고 있는 청규에는 법당(法堂), 승당(僧堂), 방장(方丈), 요사(寮舍) 등만 기록되어 있고 부처님을 모시는 불전은 아예 기록조차 되어 있지 않다.42)42) 최법혜, 《고려판 선원청규 역주》(서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출판부, 2001), p.37.

불전을 건립하지 않는 것에 대해 《선문규식(禪門規式)》에서는 “불전을 세우지 않고 법당(法堂)만을 두는 것은 불조(佛祖)께 친히 전해 받은 이로서 당대의 존중할 곳임을 표시하는 것이다.”43)라고 기록하고 있다.43) 《전등록》(서울: 동국역경원, 1986), p.244.

이처럼 선종이 독자적 사원을 짓고 선종만의 전통을 형성할 수 있게 되자 아예 부처님을 모시는 불당을 짓지 않고 그 자리에 법을 설하는 법당을 지었다. 그리고 부처님이 봉안되어야 할 설법전의 법상(法床)에는 부처님 대신 조사가 올라가 상당설법(上堂說法)하는 장소로 대체되었다.

이에 대해 백장은 “일산(一山)의 주지는 부처님을 대신하여 설법하는 것”이라고 할 만큼 선종은 믿음의 대상에 대해 기존의 불교 종파와는 철저히 독자적 입장을 견지한다.44) 물론 만해가 이 같은 선종의 역사를 예로 들어 소회폐지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불교유신론》이 담고 있는 내용을 분석해 보면 결국 선사상과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다.44) 불전을 짓거나 불상을 모시지 않는 당대(唐代) 선종 사찰의 구조와 정신과는 달리 신라 선종사찰에서는 불전(佛殿)을 세우고 주존불로서 비로자나 불상을 봉안한다. 이는 신라의 선종이 화엄교학을 기초로 발전한 것에서 기인하는 부분이다. (이기선, 〈고려시대 선종가람과 불교미술(1)〉, 《韓國禪學》 4호(서울: 韓國禪學會, 2003), p.166) 특히 긍양(兢讓)이 중창한 선종 사찰 봉암사의 전각을 보여주는 자료에 따르면 ‘대웅광명보전’, ‘약사전’, ‘설법전’, ‘관음전’, ‘응진전’, ‘금색전’, ‘지장전’, ‘시왕전’, ‘극락전’ 등의 전각이 보이고 있다.(한기문, 〈新羅末 禪宗 寺院의 形成과 構造><韓國禪學>2호(서울,한국선학회,2001)p287)이상의 내용을 미루어 볼때 신라시대의 선종사찰에서는 불전을 비롯해 시왕전까지 대부분의 전각을 두루 갖추고 있음을 확인할수 있다.



3) 선(禪)에서 믿음의 의미

선종의 역사에서 볼 때 부처님이나 보살상 등을 향한 신앙행위는 앞서 살펴본 대로 불교의 일반적 전통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종 역시 불교 테두리 내에 있는 만큼 불상이나 보살상을 향한 믿음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부처님이 《불설선생자경》45)에서 전의설법(轉意說法)을 통해 기존의 종교 의례를 부정하지 않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새롭게 규정했던 것처럼 선종에서도 믿음의 대상에 대해 선종의 시각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45) 《불설선생자경(佛說先生子經)》, 大正藏 1, p.252下.

적어도 초기 선종이나 당대(唐代)의 선종에서 믿음이란 절대자를 향한 경배를 인정치 않으며 그 같은 믿음의 대상도 인정하지 않는다. 선에서 믿음의 대상은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육조단경》에서는 참다운 귀의란 “스스로 깨쳐 스스로 닦음이 곧 돌아가 의지하는 것”46)이라고 정의하고 만약 “자기의 성품에 귀의하지 않으면 돌아갈 바가 없다.”47)고 못박고 있다. 46) 성철 편역,<돈황본단경>(서울,장경각,1988),p.145."自悟自修 卽名歸依也“ 47) 성철 편역,위의 책,p.157."自性不歸 無所歸處“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귀의(歸依)는 눈앞에 있는 대상화된 불상이 아니라 바로 불상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에게로 방향이 전환된다. 《육조단경》에서는 이 같은 믿음의 방향전환을 ‘스스로에게 귀의함’이라는 ‘자귀의(自歸依)’48)로 규정한다. 따라서 선종에서 믿는 삼보란 내면의 삼보를 의미하는 자성삼보(自性三寶)가 된다.48) 성철 편역, 위의 책, p.142. “스스로 돌아가 의지함이란 착하지 못한 행동을 없애는 것이며, 이것을 이름하여 돌아가 의지함이라 하느니라.(自歸依者 除不善行 是名歸依)”

선지식들아, 혜능이 선지식들에게 권하여 자성(自性)의 삼보(三寶)에게 귀의하게 하나니, 부처란 깨달음(覺)이요 법이란 바름(正)이며 승이란 깨끗함(淨)이니라.49)49) 성철 편역, 위의 책, p.155. “善知識 歸依自性三寶 佛者 覺也 法者 正也 僧者 淨也.”

믿음이라는 행위가 스스로에게 돌아가 의지하는 ‘자귀의(自歸依)’이며 그 믿음의 대상이 스스로의 성품에 내재된 ‘자성삼보’로 규정된다면 전통적 불교에서 해왔던 것처럼 믿음의 대상을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과 같이 밖을 향해 찾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임제는 스스로 믿는 것이 요체인 만큼 밖을 향해 의지할 대상을 찾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설사 밖을 향해 찾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참다운 의지처가 아니라 육진 경계를 반연(攀緣)한 삿된 길이기 때문이다.

도를 배우는 이들은 이제 스스로를 믿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밖으로 찾지 말라. 모두가 저 부질없는 육진 경계를 반연(攀緣)하여 도무지 삿되고 바른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50)50)<임제록臨濟錄>,大正藏47,p.499上합. “如今學道人 且要自信 莫向外 總上他閑 塵境 都不辯邪正”

이처럼 밖을 향해 찾는 것이 삿된 도라면 우리가 의지해야 할 믿음의 대상은 어디에 있는가? 물론 그것은 ‘스스로 돌아가 의지함’이기 때문에 그 대상은 바로 우리의 내면에 있다. 혜능(慧能)은 우리 내면 속에 있는 그 믿음의 대상을 ‘자성(自性)’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다. 부처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성이 드러난 바이기 때문에 그 자성이 미혹하면 중생이 되고 자성을 깨달으면 부처님이 된다고 가르친다.51)51) 성철 편역, 위의 책, pp.200∼201. “부처는 자기의 성품이 지은 것이니, 몸 밖에서 구하지 말라. 자기의 성품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기의 성품이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이니라(佛是自性作 莫向外求 自性迷 佛卽衆生 自性悟 衆生卽是佛).”

따라서 혜능도 밖을 향해 찾지 말 것을 강조한다. 임제는 이 부분에 대해 더욱 분명한 입장을 취한다. 즉 우리들이 “조사나 부처와 다름이 없고자 한다면 밖으로 구하지 않기만 하면 된다.”52)는 것이다. 이것을 깨우치기 위해 임제는 우리가 방황하며 찾는 그 믿음의 대상을 부정하기에 앞서 그 대상을 찾아 질주하는 바로 ‘나’의 정체를 반문한다. ‘나’의 정체, 즉 스스로의 자성을 밝히는 것이 곧 부처님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52) 《임제록》, 大正藏 47, p.497中. “횝要與祖佛不別 但莫外求.”

대덕들이여! 그대들은 똥자루를 짊어지고 바깥으로 달음질치며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데, 이렇게 내달려 구하는 바로 그놈을 그대들은 아느냐?53)53) 《임제록》, 大正藏 47, p.501中. “大德 횝擔鉢囊屎擔子 傍家走 求佛求法 卽今與? 求底 彌還識渠?.”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육조단경》과 《임제록》을 비롯해 수많은 어록(語錄)과 선전(禪典)에서 말하는 믿음의 대상은 밖을 향한 귀의가 해체되고 내면으로 돌아오는 회광반조(廻光返照)라는 특징을 보여준다. 결국 선에서 바른 믿음은 밖을 향해 내달리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바른 믿음이란 밖에서 구하지 않고 자성을 바로 믿은 것을 말한다.

바르다 삿되다 한 것은 무슨 차이인가? 마음이 곧 부처라고 믿는 것을 ‘바른 믿음’이라고 하고, 마음 밖에서 법을 얻으려는 것을 ‘삿된 믿음’이라 한다.54)54) 박산화상(博山和尙), 《참선경어(參禪警語)》(합천: 장경각, 1988), p.35. “邪正者自心卽佛名正信 心外取法名邪信.”

이렇게 밖에서 찾지 않고 자성을 바로 보아서 부처님을 찾고 그 주인공이 그대로 부처임을 철저히 밝혀서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 ‘바른 믿음’55)이라는 믿음에 대한 선의 일관된 가르침이다.55) 박산화상, 《참선경어》(합천: 장경각, 1988), p.35. “卽佛要究明 自心親履實踐 到不疑之地 始名正信.”

이상과 같이 믿음과 믿음의 대상에 대한 선(禪)의 입장을 통해 만해의 소회 폐지론을 바라보면 만해의 주장이 개인적 주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조사가 정전(正傳)해 준 가르침에 따라 선종의 본래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개혁론임을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왜곡된 시대적 상황이 극복해야 할 현실이라면 선사상에 입각한 종풍(宗風)은 만해가 지향해야 할 이상이라는 관계성을 이루게 된다.



4. 소회 폐지론과 선종의 정체성 회복

1) 소회의 기능과 선별적 폐지



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선종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수많은 소상을 모셔놓고 밤낮으로 기도하는 것을 불법의 대의로 생각하는 것은 왜곡된 불교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선종으로 보는 만해56)가 복잡한 소회(塑繪)의 정리를 통해 신행을 개혁하고자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처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해는 당시 논객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소회를 일거에 소각해야 한다는 입장에는 반대한다. 만해는 우리가 신앙의 대상으로 신봉해야 할 믿음의 대상이 교리적 근거가 있는지를 따져서 폐지해야 할 것과 보존해야 할 것을 구별하고 있다.56) 만해는 임제종 운동에 대해 “조선(朝鮮) 고유(固有)의 임제종(臨濟宗)을 창종하여……”(韓龍雲, 〈佛敎靑年同盟에 대하야〉, 《佛敎》 86호)라고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한 뒤 곧바로 임제종 운동에 뛰어들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만해가 선별적으로 소회를 폐지하자는 이유는 소회가 갖는 신앙적 기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만해는 자신이 어린 시절 공자묘에서 만난 석상이나 관공묘에서 관우의 그림을 보고 받은 정신적 감동을 회상하면서 소회가 갖는 신앙적 기능을 인정한다.57) 57)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1.

따라서 소회 그 자체는 비록 ‘거짓 모양’이지만 중생들의 모범이 되고 부처님을 본받고 실천하고자 하는 정신적 구심점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회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소회에 대한 신앙이 본래적 의미에서 벗어나 마치 불교의 본질처럼 본말이 전도된 상황 때문이었다. 따라서 만해는 소회를 폐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민지(民智)가 미개해서 자기가 받들 신이 아닌데도 상(相)을 만들고 그림을 그려 공연히 모셔 놓고 아첨해 제사를 드려 화복(禍福)을 빌고 망령되이 길흉(吉凶)을 물으니, 이에 있어서 폐단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58)58)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2.

중생의 사표로서 소회의 기능이 큰 역할을 담당하지만 그것이 길흉화복을 비는 대상이 되고 그와 같은 의례가 불법의 본질로 인식될 때 소회의 기능은 불교의 본래성을 전복하는 미신이 되고 만다는 것이 만해의 생각이다. 따라서 폐단을 낳는 소회를 일제히 폐지하지 않으면 그로 인해 더 많은 왜곡과 사법(邪法)이 뒤따르기 때문에 모두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소회폐지론의 표면적 이유는 미신적 내용을 폐지하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소회 폐지론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그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2) 미신적 소회의 폐지

첫째, 불교적 교리에 맞지 않는 비불교적인 소상과 탱화 등은 모두 폐지하자는 것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소상들은 소승(小乘)의 소견으로 적멸(寂滅)의 즐거움을 탐닉하는 나한독성, 자연의 일부인 별을 신봉하는 칠성(七星), 망자의 죄를 심판하는 시왕(十王)을 비롯해 천왕(天王), 신중(神衆), 조왕(?王), 산신(山神), 국사(國師) 등을 꼽고 있다.59) 59)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7.



만해는 이런 소상들은 정법을 받드는 출가자가 믿음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는 것들로써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난신(亂信)’이라고 한다. 종교는 믿음을 필요로 하지만 그 믿음의 대상이 미신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미신을 받드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라면 수많은 난신을 받드는 조선불교가 가장 발전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반문한다.60)60)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8.



만해가 난신으로 분류한 각종 미신적 소회를 폐지하자는 본뜻은 각종 민간신앙이나 미신적 요소가 담긴 비불교적 요소를 배제하고 불교가 가진 본래의 정체성을 회복하자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해는 불교의 본질은 “허황하고 신통치도 않은 신들 앞에 종처럼 무릎 꿇어 아첨하는”61) 미신이 아니라 깨달음을 준칙으로 삼는 종교이며, 부처님은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이끄시는 분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61)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6.

불교는 그렇지 않다. 중생이 미신에서 헤어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까닭에, 경에 “깨달음으로 준칙을 삼는다.” 하셨고, 또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의 바다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라 하셨으며, 정각(正覺)·정변지(正遍知)의 주장이 모두 그런 취지였으니, 이 점에서 부처님이야말로 철저하였다.62)62)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18.



만해는 문명한 새 시대는 진보의 이상을 완전히 실현하지 않고는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한다. 따라서 이 같은 시대적 변화 앞에서 낡은 미신을 불법(佛法)이라고 믿는 것은 마치 옷 속에 보화를 감춘 사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거지노릇 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불교의 소회를 정리하자는 것은 단지 시대적 변화에 발맞추자는 것이 아니라 불교가 가진 본래적 위대성을 되찾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될 때 시대적 변화를 넘어 불교가 살아남는 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문명의 정도가 날로 향상되면 종교와 철학이 점차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며, 그 때에는 그릇된 철학적 견해나 그릇된 신앙 같은 것이야 어찌 다시 눈에 띌 까닭이 있겠는가. 종교요 철학인 불교는 미래의 도덕·문명의 원료품 구실을 착실히 하게 될 것이다.63)63)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29.

문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잘못된 철학과 미신적 종교는 살아 남을 수 없기 때문에 불교는 본래의 위대한 종교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이 만해의 입장이다. 따라서 참다운 진리의 종교를 미신의 종교로 전락시킨 미신적 “소상들을 불살라 날려 보내고, 물에 던져 가라앉혀서 다시는 세상에 머물지 못하게 하여 우리 종교의 진리를 되살려서 흠이 없게 해야 한다.”64)는 것이다.
64)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7.


불교에 대한 만해의 기본적인 관점은 불교는 철학적 종교이며 미래 사회의 도덕과 문명의 원천이 될 위대한 종교라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질곡과 내적 빈곤이 만들어 낸 불교의 왜곡된 모습을 정리하고 본래의 정체성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것이 만해의 개혁론에 담긴 인식이다.



3) 교학적 내용에 맞지 않는 소회의 폐지

둘째, 비록 불교적 요소를 담고 있는 소상일지라도 교학적 내용에 비춰볼 때 경배의 대상으로 적절치 못한 소회도 폐지할 것을 주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신중(神衆)이다. 이런 소상들은 비록 불교 경전에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본래 의미는 불법과 수행자를 외호(外護)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소상들이다. 그럼에도 신중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전후 본말이 전도된 상황에서 비롯되는 문제라고 지적한다.

비유컨대 승려는 상관과 같고 신중은 호위 순경과 같다 하겠다. 이제 여기에 한 상관이 있어서 손을 맞잡고 꿇어앉아 도리어 호위 순경에게 머리를 조아려 애걸한다면 약자에게 쩔쩔매는 그 꼴을 웃지 않는 자가 드물 것이니, 우리 승려들은 어찌 이것만을 보고 자기를 보지 않는 것이랴. 지금 남에게 뒤질세라 신중에게 몸을 굽혀 복을 비는 사람들이 있거니와, 나는 그 가치의 전도(顚倒)를 견디기 어려운 바이다.65)65)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6.

신중이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출가자와 불법을 외호(外護)하는 의미는 띠고 있다. 그런데도 신중을 향해 기도하고 공양 올리는 것은 무엇이 참다운 믿음의 대상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문제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만해는 신중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소상을 모시고 공양하는 기본 취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본말이 전도된 것으로써 정사(正邪)에 대한 기본적 가치관의 빈곤을 드러내는 문제로 바라본다.

자신들이 받들 대상인지 자신들을 외호하는 하인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며 경배하는 것에 대한 만해의 질책은 주인과 나그네를 구분하지 못하고 대상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무리를 경책하는 임제의 주장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마치 양(羊)이 코를 들이대어 닿는 대로 입안으로 집어넣는 것처럼, 머슴인지 주인인지 가리지 못하고 나그네인지 주인인지 구분치 못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삿된 마음으로 도에 들어왔으므로 번잡스런 곳에는 들어가지 못하니, 어찌 진정한 출가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66)66) 《임제록》, 大正藏 47, p.498上. “今時學者 總不識法 猶如觸鼻羊 逢著物蘗在口裏 奴郞 不辯 賓主 不分 如是之流 邪心入道 鬧處卽入不得 名爲眞出家人.”

참다운 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집착하고 물들기 때문에 번잡한 곳에 갈 수 없다. 그들은 입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염소처럼 주인과 머슴을 구분하지 못하고 대상을 향해 집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참다운 출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임제의 가르침이다.

만해는 소상이 갖는 기능에 대해 “한 거짓 모습으로 된 대상을 만들어 중생들의 모범이 되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소회가 발생한 원인이다.”67)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소회는 복을 비는 기복의 대상이 아니라 소회가 나타내는 참다운 지혜와 덕상을 배우기 위한 표상이라는 의미를 띤다. 67)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0.

그러므로 불교의 소상은 중생들의 사표가 되는 것이어야 하며 그 소상을 보고 ‘우리들도 저렇게 되겠다’는 서원을 세울 수 있는 대상이어야 한다. 이처럼 소회가 중생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닮아가야 할 대상이라면 잘못된 믿음의 대상은 우리의 서원을 왜곡하고 불교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임제가 말하는 것처럼 주인인지 나그네인지 모르고 밖을 향해 치달리는 믿음은 불교의 본래성과는 거리가 먼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중을 경배의 대상으로 받드는 것은 소상을 모시는 근본적인 취지를 왜곡하고 소상을 복 비는 대상으로 전락시킨 데서 비롯된 문제다. 따라서 이런 류의 소상을 없애자는 주장에 담긴 만해의 취지는 불교 신행에 담겨진 기복적 요소를 일소하고 불교의 본래적 성격을 회복하자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4) 석가모니 한 분으로 충분하다

셋째, 비록 미신적 대상도 아니고, 교리적 내용으로 보아도 전도됨이 없는 불·보살의 소상일지라도 수많은 소상을 다 모실 필요가 없으므로 석가모니 한 분만 모시자고 주장한다. ‘종교는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라는 반문에 대해 만해는 설사 종교가 미신을 믿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믿음의 대상이란 부처님 한 분을 믿는 것으로 족하다고 답한다.68)68)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7.

그러나 대승불교에는 수많은 부처님과 보살들이 등장한다. 일례로 《화엄경》에서는 우리가 신앙할 믿음의 대상인 부처님이 무수히 많다고 한다. 따라서 대승보살의 서원을 담고 있는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에서는 그 수많은 부처님께 모두 예배, 공경하는 것이 보살의 큰 행원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한다는 것은 진법계, 허공계, 시방삼세, 일체 불찰, 극미진수, 모든 부처님을 내가 보현행원의 원력으로 눈앞에 대하듯이 깊은 믿음을 내어서 청정한 몸과 말과 뜻을 다하여 항상 예배하고 공경하되…….69)69) 《보현행원품》(서울: 보련각, 1991), p.7. “言禮敬諸佛者 所有 盡法界虛空界 十方三世一切佛刹極微盡數 諸佛世尊 我以普賢行願力故 深心信解如對目前 悉以淸淨身語意業 常修禮敬.”

인용문에서 보듯 대승불교의 부처님은 불찰 극미진수로 많고 대승행자는 그 모든 부처님께 지극한 정성으로 공양을 드려야 한다. 그러나 만해는 이 같은 경전적 근거에 따라 모셔진 수많은 불·보살상일지라도 다 모실 필요는 없다고 한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이름이 다양할지라도 그 본질은 한 부처님의 본성이 드러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만해는 “불·보살로 말하자면 이름은 달라도 이치에 있어서는 하나이다. 그러기에 어느 한 분을 들어 다른 여러 불·보살을 통합함이 좋다.”70)라고 주장한다.70)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8.
여기서 만해의 소회 폐지론은 단순히 미신적 대상을 일소하자는 의미를 넘어서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러 대승경전에 등장하는 불 보살상은 미신적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만해가 주창하는 소회 폐지론의 논거가 미신(迷信)과 정신(正信)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을 향한 믿음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는 선적(禪的) 입장에 근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주장은 만해만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 선사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임제는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이 모두 한 생각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대들 한 생각 마음 위의 청정한 빛은 그대 집 속의 법신불(法身佛)이며, 그대들 한 생각 마음 위의 분별 없는 빛은 그대 집 속의 보신불(報身佛)이며, 그대들 한 생각 마음 위의 차별 없는 빛은 그대 집 속의 화신불(化身佛)이다. 이 세 가지 부처는 지금 눈앞에서 법을 듣는 그 사람인데, 그것은 다만 밖으로 치달려 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는 것이다.71)71) 《임제록》, 大正藏 47, p.497中. “횝一念心上 淸淨光 是횝屋裏法身佛 횝一念心上 無分別光 是횝屋裏報身佛 횝一念心上 無差別光 是횝屋裏化身佛 此三種身 是횝卽今目前聽法底人 祇爲不向外馳求 有此功用.”



이처럼 법신불인 비로자나불과 보신불인 노사나불, 그리고 화신불인 석가모니불이 모두 한 마음에 계신다는 것이 선의 기본적인 입장이다.72)  72) 삼신(三身)에 대한 《육조단경》의 가르침도 이와 다르지 않다. 즉 《육조단경》에서는 삼신을 ‘자삼신불(自三身佛)’이라고 하여 삼신이 스스로에게 구족되어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귀의도 이 자삼신불을 향해 하는 것이다. (성철 편역, 《돈환본 단경》(합천: 장경각, 1988), ),p.139

이는 참다운 믿음의 대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내면에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밖을 향해 치달려 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선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믿음이 부족한 데서 비롯되는 문제다. 즉 자신의 자성이 참다운 삼신불(三身佛)이라는 믿음의 부족은 결국 본래의 불성을 버리고 밖을 향해 치달리며 모양을 추구하게 만든다.

오늘날 공부하는 이들이 그렇게 못하는 것은 그 병통(病痛)이 어느 곳에 있는가? 그것은 스스로를 믿지 않는 데 있다. 그대들 스스로의 믿음이 부족하면 망망하게 경계따라 전변(轉變)하여 온갖 경계에 휩쓸려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한편 생각 생각 치달려 구하던 마음을 쉴 수만 있다면, 조사나 부처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73)73) 《임제록》, 大正藏 47, p.497中. “如今學者不得 病在甚處 病在不自信處 횝若自信不及 卽便忙忙地 徇一切境轉 被他萬境回換 不得自由 횝若能歇得念念馳求心 便與祖佛不別.”

믿음에 대한 선의 가르침과 만해의 주장을 상호 비교해 볼 때 만해가 수많은 불 보살상을 폐지하자는 것은 그가 불교적 신앙심이 부족해서이거나 또는 불교를 메마른 이성적 입장에서 바라보기 때문이 아니라 선(禪)의 입장에서 참다운 믿음을 회복하자는 의미로 해석된다. 왜냐하면 참다운 믿음의 부족이 미신을 부르고, 자성(自性)에 대한 믿음의 결핍이 밖을 향해 치달리며 모양을 추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불교계의 현실은 자성에 대한 믿음은 이미 신화적 사실이 되어버렸고 눈앞에 펼쳐지는 믿음과 신행이란 수많은 소상을 향해 절하며 복을 비는 것으로 대변되고 있었다. 따라서 만해가 제기하는 믿음의 문제는 대상적 소상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적 믿음의 부재를 확인하고 이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경허(鏡虛)는 당시 승려들이 갖고 있던 내면적 믿음의 부재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대개 미혹한 자는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조종(祖宗)의 말을 보거나 들으면 그것은 성인들의 높은 경계라고 밀쳐버리고 다만 현실적인 함이 있는 것에만 힘을 쓰는데 혹은 손에 염주를 잡으며 입으로 경을 외우고 혹은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거나 그리고 공덕만을 바라니 보리(菩提)와는 틀렸고 도에는 멀어짐이로다.74)74) 경허, 〈결동수정혜동생도솔동성불과계사문〉, 《경허집》(양산: 극락선원, 1990), p.82.

말세의 하근기 중생이라 스스로 구제할 수 없다는 말세적 가치관은 자성(自性)이 참다운 귀의처이며, 삼신(三身)은 자성에 있다는 조사들의 말씀은 수용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말세의 중생으로 근기가 하열(下劣)해서 스스로 구제할 수 없기 때문에 타력에 의해 구원받아야 한다’는 말세관이 이들의 정신 세계를 지배한다.

이 같은 말세관은 결국 선적(禪的) 믿음의 약화로 나타나고 그와 반비례해서 대상적 믿음에 대한 집착은 점점 강고해지는 법이다. 따라서 당시 불교계의 상황은 자연히 “염불(念佛)이나 송경(誦經)·송주(誦呪)를 일삼고 있으며, 참선하는 사람은 극소수”75)가 되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75)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하편(서울: 보련각영인본, 1972), p.951.

그렇다면 수많은 불·보살상은 모두 폐지하고 모든 불·보살의 근본이 되는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만을 모실 때 그 부처님은 절대적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 만해의 입장에서 볼 때 소상(塑像)으로 드러나는 믿음이란 바른 믿음이 아니라 단지 겉으로 드러난 상(相)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비록 석가모니 한 부처님만을 신봉한다 할지라도 실은 그 부처님조차도 거짓 믿음의 대상일 뿐이지 진리의 당체는 아니다. 다만 중생들의 근기에 다라 신행(信行)의 구심점이 필요하기 때문에 모시는 것이지 그 자체가 부처님은 아니다.

무릇 현상은 진리의 거짓 모습(假相)이며, 소상(塑像)은 현상의 거짓 모습이니, 진리의 처지에서 바라본다면 소상은 ‘거짓 모습의 거짓 모습’이 된다.76)76)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89.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것이 선의 정신이므로 부처님이라는 상(相)을 갖는 것 자체가 거짓이다. 그 거짓 모양을 본 따 다시 소상을 만드는 것은 ‘거짓 모습의 거짓 모습’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겉으로 형상을 짓고 그것을 믿음의 대상이라고 하고 진리의 화현(化現)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빈주먹에 누런 잎사귀를 쥐고 돈이라고 속여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77)이라는 《임제록》의 말씀처럼 그 자체에 본질이 있는 것은 아니다. 77) 《임제록》, 大正藏 47, p.499中. “空拳黃葉 用쮱小兒.”

다만 근기에 따라 중생들에게 믿음의 표상으로 제시된 것일 뿐이다. 때문에 수많은 전각을 짓고 그 속에 수많은 불 보살상을 조성해 모시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 될 수는 없다. 이런 행위들은 선에서 바라보는 참다운 믿음의 대상인 자성으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결과만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도 배우는 이들이여! 진짜 부처는 형상이 없고, 참된 법은 모양이 없다. 그대들은 이처럼 변화로 나타난 허깨비들 위에서 이런 저런 모양을 짓는구나. 그렇게 구해서 얻는다 하더라도 모두가 여우 도깨비들이며 결코 참된 부처가 아니니, 이는 외도의 견해이다.78)78) 《암제록》, 大正藏 47, p.500上. “道流 眞佛無形 眞法無相 횝祇큯幻化上頭 作模作樣 說求得者 皆是野狐精魅 幷不是眞佛 是外道見解.”

부처님은 형상이 없지만 중생들은 외형적 모양을 찾아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다. 《금강경》에서는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므로 모든 형상이 실체가 없다고 보면 곧 여래를 본다.”79)라고 설하고 있다. 그러나 중생들은 수많은 형상으로 부처님을 조성하고 복을 빈다. 임제는 설사 그렇게 해서 얻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참다운 부처님이 아니라고 한다.79) 《금강반야바라밀경》, 大正藏 6, p.749下.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이처럼 선(禪)의 관점으로 만해의 소회 폐지론을 볼 때 그것은 단순히 미신적 소상의 폐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만해의 소회 폐지론은 불교의 본래성을 회복하자는 것이며, 더 구체적으로 선(禪)의 본래성을 회복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따라서 만해의 불교개혁은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올바로 세우자는 자각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5. 맺음말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이 탈고될 시기 한국불교는 쇠퇴를 거듭한 끝에 선풍(禪風)이 쇠진하고 참선하는 수행자가 드물었다.80) 자연히 불교 신행의 주된 흐름은 타력적 신행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사찰은 사원경제의 유지를 위해, 또 대중들은 역사적 격동기 속에서 내세적 구원과 현세적 안녕을 위해 기복신앙에 몰입하고 있었다. 쇠퇴해진 선풍은 이 같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더욱 외면 받게 되었고 불교계에는 말세의식이 만연해 있었다. 80) 제방(諸方)의 선교의 승려 수를 비교하여 보면 30본산의 전후 주지 50여 인 가운데 선종에 속하는 자는 불과 3, 4인에 불과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교종에 속한다. 만약 조선의 승려 7000인을 들어서 말하면 10중 8, 9는 모두 교종에 속하며, 선도 아니고 교도 아닌 사람이 실은 다수를 점하고 있다.(이능화, 《조선불교통사》 하편(서울: 보련각영인본,1972),p.951.

이 같은 교단적 흐름을 대변해 주는 것이 바로 만일염불회로 불리는 정토신앙의 성행이었다. 이 운동은 쇠락한 한국불교계에 활력을 불어넣는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염불신앙의 성행이 곧바로 불교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선법(禪法)의 전승(傳承)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보면 더욱 그랬다.

만해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임제종으로 보고 임제종 운동을 주도적으로 펼쳤던 인물이다. 그는 임제종 운동에 대해 “조선 고유의 임제종을 창립하야……”81)라고 표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임제종으로 보고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82)81) 한용운, 〈불교청년총동맹에 대하야〉, 《불교》 86호, 1931. 8.박한영도 “조선불교의 연원이 임제종서 발하얏슨즉 일본 조동종과 련합 수 없다.”(동아일보, 1920. 6. 28)라고 하고 있어 임제종 운동을 펼칠 시점에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이 임제종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82) 만해는 1911년 1월 15일 전남 송광사에서 열린 총회에서 임제종 관장 대리로 선출 된 이후 1912년 서울에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 건립시기까지 임제종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지만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임제종은 꽃을 피우지 못했다.

이 같은 만해의 삶에 비추어 본다면 당시의 불교 상황은 끝없는 자기 부정이 요구되는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만해는 그 같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선(禪)의 본질적 입장에서 해법을 찾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개혁이라기보다 본래성의 회복이라는 측면을 갖게 된다.83) 83) 당시 불교계 상황이 극복되어야 할 현실이라면 그가 추구할 이상은 선(禪)의 본래성이다. 여기서 만해는 현실적 타협보다는 이상적 가치관을 선택하고 있다. 이는 만해의 개혁론이 결코 쉽게 현실 속에 뿌리내릴수 없는 것임을 의미하기도 한다.아쉬운 점은 그가 주도했던 임제종 운동이 일제에 의해 무산됨으로써 이같은 개혁론이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소회 폐지의 문제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염불신행이 주된 흐름이 된 당시 상황에서 석가모니불만 남기고 다른 모든 소상을 폐지해야 한다는 의미는 당시의 보편적 신행 형태를 부정하고 선(禪)의 사상적 내용성을 회복하자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해가 제기한 개혁론은 제도적, 행정적 차원의 개선책을 넘어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본질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불교유신론》의 핵심은 미신과 은둔적 모습의 불교를 지양(止揚)함으로써 불교 본래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그것으로 현대적 불교의 모습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



서재영동국대 대학원 선학과 박사과정 수료. 동국대 강사. 한국선학회 운영위원.

인도에서 불교는 왜 사라졌을까? [BBS TV 자신감] 20회

‘왜 인도에서 불교는 멸망했는가’ - 불교신문

‘왜 인도에서 불교는 멸망했는가’ - 불교신문



‘왜 인도에서 불교는 멸망했는가’

 승인 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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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카 슌지 저서-김호성 교수 번역 출간



불교의 발생지 인도에서 불교는 거의 없다. 인도 북부에 남아있는 일부 불교성지와 그 주변의 한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건립한 사찰들을 제외하면 불교 흔적을 찾기 힘들다. 인구 11억 중에서 불교신자는 극소수다. 인도에서 불교가 왜 사라졌을까. 그 원인을 놓고 많은 학자들의 연구가 있었다. 기존 학설은 크게 두 가지다. 외적으로는 이슬람에 의한 파괴며 내적으로는 불교가 정체성을 잃고 힌두교로 흡수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학자 호사카 슌지 교수의 <왜 인도에서 불교는 멸망했는가>는 이슬람 사료로 불교 멸망의 원인을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사진> 동국대학교 출판부 ‘한걸음더’에서 출판한 ‘왜 인도에서 불교는 멸망했는가’ 표지.









이슬람 사료로 印불교 멸망이유 추적

           



 사회ㆍ종교성 침묵이 신도축소로 이어져



 한국ㆍ일본 등 현재의 불교국가에 ‘교훈’



                     



저자는 인도불교를 종교교단으로서의 불교라는 관점이 아니라 사회적인 존재 즉 일종의 정치집단이며 경제조직, 즉 문명으로 접근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분석틀을 인도사회가 아니라 유라시아 전체로 넓혀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변동이라는 측면에서 불교의 멸망을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와 힌두교는 인도사회에서 한 뿌리에서 나온 공존관계였다. 지역과 민족 문화영역에서 많은 부분을 힌두교와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수파 힌두사회에서 생존이 허용되었다. 불교와 힌두교는 이념적으로는 차이가 컸지만 문화적 기반은 거의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이 공존이 이질적인 이슬람이 유입되면서 흔들린다. 이슬람은 그들과 같은 뿌리로 동일한 신앙을 가진 유대교 기독교 사비아 교도 외에는 이교도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슬람의 적대적 정책에 대해 불교는 대항할 수단을 갖지 않았다. 교리는 군사적 대응을 부정했다. 즉 이슬람에 끝까지 대응해야 할 종교적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반면 힌두교는 인도의 자생종교로 문화적, 그리고 관혼상제와 같은 일상의 면에서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양자는 생존을 걸고 서로 다투게 되었다. 그 싸움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인도사회에서 갈등이 힌두교와 이슬람으로 편제되면서 불교는 양측에 흡수되어 갔다. 불교적 사상이나 습관이 각 종교의 교리에 저촉되지 않는 한도에서 불교는 흡수돼 간 것이다. 현재의 힌두교 속에 남아있는 많은 불교적 요소와 이슬람의 수피즘은 그 증거다. 이를두고 일부에서는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힌두교 안에 살아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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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부처님이 성도한 부다가야의 탑. 인도북부의 일부 불교성지를 제외하고 인도에서는 불교가 사라졌다. 그 이유를 정치경제적 입장에서 다룬 책이 바로 ‘왜 인도에서 불교는 멸망했는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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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종교가 단지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양식 즉 생활의 수단이며 생존의 기본인데 개종이 가져다 주는 변화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 의문에 대해 김호성 교수는 역자 후기에서 질문과 함께 해답을 제시한다. “인도사회에서 불교는 카스트 제도를 비판하면서 하나의 평등 이데올르기로서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즉 힌두교가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하나의 대항세력 대항종교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그것은 불교가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점이 사회적 역할면에서 보다 강력한 ‘안티 힌두교’인 이슬람교를 만나서는, 그러한 역할을 이슬람에 넘겨주게 됨으로써 불교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아이러니를 낳았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김호성 교수는 이어 “불교라는 종교 안에서 사회적 기능이나 역할 외에 마지막 까지 사회적인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종교로서의 불교’가 갖고 있었던 것은 정녕 없었다는 말인가”라고 물으며 불교가 앞으로도 존속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역할을 다하면서도 고유의 불교적인 그 무엇을 창출하고 내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책이 과거 인도에서의 불교 멸망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사회 혹은 일본이나 다른 불교국가에 화두를 던지는 이유다. 저자 호사카 ?지 교수는 몇 해전 옴진리교가 저지른 지하철 테러 사건에 대해 일본 불교계가 아무런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 책의 개정판을 썼다고 했다. 한국불교계의 ‘침묵’은 그보다 훨씬 심하다. 어떤 때는 사회의 흐름과 거꾸로 갈 때도 적지 않다. 한국불교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사회에 강력하게 각인시키고 있는지도 회의적이다.



해방 후 90%대에 이르던 불교신자가 불과 60여 년만에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진 것은 ‘문명적 개종’과 다름없어 보인다. 인도의 불교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임을 이 책은 말하고 있다.



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 2444호/ 7월19일자]

07 마성스님 동남아 상좌불교의 역사와 현황

불교평론







동남아 상좌불교의 역사와 현황

특집/ 동남아 불교의 재인식

[33호] 2007년 12월 12일 (수) 마성(摩聖) 

ripl@ripl.or.kr

 

마성스님

팔리문헌연구소 소장



1. 머리말



불교에는 크게 남전(南傳)과 북전(北傳)의 두 흐름이 있다. 남전은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전해져, 그곳을 근거로 하여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로 퍼졌다. 북전은 인도에서 서역을 거쳐 중국으로 전파되고, 다시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전해졌다.



전자를 남방불교 혹은 상좌불교(上座佛敎, Therav?da)라 하고, 후자를 북방불교 혹은 대승불교(大乘佛敎, Mah?y?na)라고 부른다. 상좌불교는 팔리어로 전승되어 온 팔리문헌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팔리불교’라고도 한다. 따라서 ‘남방불교’, ‘상좌불교’, ‘상좌부 불교’, ‘남방 상좌부 불교’라는 명칭들은 모두 남전의 불교를 일컫는 동일한 용어들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것을 짧게 줄여 ‘상좌불교’라고 부르자는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하나의 용어로 통일되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상좌불교 국가는 스리랑카·태국·미얀마·캄보디아·라오스·베트남 일부이고, 대승불교 국가는 중국·한국·일본·몽골·티베트·네팔 등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불교도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상좌불교를 소승(小乘, H?nay?na)이라고 업신여겨 왔다. 엄격히 말해서 현재의 테라와다(Therav?da, 上座部)는 히나야나(H?nay?na, 小乘)가 아니다. 테라와다(상좌부)는 히나야나(소승)와 마하야나(대승)라는 두 술어가 나오기 이미 오래 전에 존재하고 있었다. 대승불교도들이 소승이라고 폄하한 것은 부파불교를 가리킨 것인데, 이러한 소승부파는 오늘날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그 동안 멸시해 온 상좌불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초기불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 성과와 아울러 교통과 통신 및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다른 나라의 불교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승불교도들은 상좌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고, 상좌불교도 역시 대승불교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런데 최근에는 동남아 상좌불교에 관한 저서와 논문들이 발표되고 있다. 지난 2002년 <불교평론>에서는 ‘상좌부 불교의 이해’라는 특집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한 필자도 두 전통의 불교를 비교한 논문들을 발표한 바 있다. 여기서는 동남아 상좌불교의 역사와 현황에 대하여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2. 상좌불교의 역사와 전통



1) 상좌부의 기원과 의미



상좌부(上座部)라는 단어는 팔리어 테라와다(Therav?da)를 번역한 말이다. 테라와다는 테라(thera, 장로들)와 와다(v?da, 말씀 혹은 교리)의 합성어이다. 그 의미는 ‘장로들의 교의(敎義)’라는 뜻이다. 이 부파는 팔리삼장(三藏, Tipi?aka)에 토대를 두고 있다. 수세기 동안 상좌부는 스리랑카·미얀마·태국에서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오늘날 상좌불교도의 수는 전 세계적으로 1억이 넘는다. 최근에는 유럽과 미국 등 서양에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재의 상좌부의 뿌리는 불멸 직후에 개최되었던 제1결집 시기에까지 소급된다.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는 ‘테라와다’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스리랑카의 고대 년대기인 ??D?pava?sa(島史, 4세기)??와 ??Mah?va?sa(大史, 5세기)?? 및 Samantap?s?dik?(一切善見律註, 율장의 주석서)??에 의하면, ‘Therav?da’, ‘Theriya’, ‘Therika’라는 용어는 붓다 입멸 3개월 후 라자가하(R?jagaha, 王舍城)에서 개최된 제1결집 이후 처음으로 불교사에 소개되었다. 붓다의 직제자였던 500명의 아라한들이 참석했고, 마하깟싸빠(Mah?- kassapa, 大迦葉) 장로가 의장을 맡았던 이 결집에서 붓다의 전체 가르침인 법(法)과 율(律)이 7개월 동안 암송되었고, 스승의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만장일치로 수용되었다. 이 결집에서 승인되고 동의되었던 것이 ‘Therav?da(장로들의 교의)’, ‘Theriya’, ‘Therika(장로들의 전통)’으로 명명(命名)되었다.”



이와 같이 ‘테라와다’는 제1결집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으며, 이때 이미 그 이름이 지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현재의 상좌불교도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종가(宗家)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오늘날 현존하는 동남아 상좌불교는 부파로서의 상좌부가 아니라 부파로 분열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원래의 불교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상좌부는 역사적으로는 근본분열 이후에 성립된 부파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우선 부파분열의 원인과 그 결과에 대해서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2)부파분열의 원인과 그 결과



상가(Sa?gha, 僧伽)는 출가 수행자 집단을 말하며, 화합을 최고의 이상으로 여긴다. 하지만 어느 집단에서나 갈등과 다툼은 있기 마련이다. 붓다 재세시에도 꼬삼비(Kosamb?) 비구들의 분쟁이 있었다. 이 분쟁은 지율자(持律者, vinayadhara)와 지법자(持法者, dhammadhara) 사이의 다툼이었다. 붓다는 비구들에게 다툼을 즉각 중지하라고 훈계했으나 그들은 다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붓다는 그곳을 떠나버렸다. 나중에는 재가신자들이 이 사건에 개입하여 겨우 수습하였다. 한편 데와닷따(Devadatta, 提婆達多)는 엄격한 계율주의로 승단을 개혁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승인 붓다를 등지고 승단의 분열을 획책하였다.



이와 같이 붓다시대에도 승단 내부의 갈등은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표면상 승단이 분열되지는 않았다. 이것은 붓다의 높은 인격과 지도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붓다 입멸 후 시간이 경과하면서 교단이 확대되고 출가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교리와 계율의 해석에 있어서 의견의 대립이 생겨 결국 분열하게 되었다.



붓다 입멸 후 100년경 원래의 불교승단은 두 파로 분열되었다. 이 두 파는 각각 다시 분열을 되풀이 하여 마침내 20부파로 세분되었다. 일반적으로 최초의 분열을 근본분열(根本分裂)이라 하고, 그 이후의 분열을 지말분열(枝末分裂)이라고 한다. 최초의 분열은 제2결집으로 알려진 웨살리(Ves?l?, Sk. Vai??l?) 결집과 연관되어 있다. 그 원인은 웨살리의 밧지족 출신의 비구들이 십사(十事)를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 결집에서 밧지족 출신의 비구들이 주장한 열 가지 사항은 비법(非法)이라고 판정되었다.



하지만 밧지족 출신의 비구들은 이 결정에 승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별도로 모임을 갖고 대승가(大僧伽, Mah?sa?gha) 혹은 대중부(大衆部, Mah?sa?ghika)로 알려진 새로운 승단을 조직했다. 이 부파의 이름은 ‘많은 무리의 승려들(大會衆)’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불교승단은 크게 정통파와 비정통파 혹은 보수파와 진보파로 나누어졌으며, 그 후 다시 분열을 거듭하여 18부파 혹은 20부파가 되었다.



20부파 가운데 원래의 상좌부는 가장 보수적이었는데, 그들의 교설은 팔리어로 전승되고 있다. 티베트 전통에 의하면 웃자인(Ujjain, Ujjeni)에 속하는 마하깟짜야나(Mah?kacc?yana, 大迦?延)가 상좌부를 창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팔리 전통에 따르면 우빨리(Up?li, 優波離)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상좌부의 교도들은 빠딸리뿟따(P??aliputta, 華氏城)를 그들의 첫 중심지로 삼았다. 그 후 그들은 점차적으로 꼬삼비(Kosamb?), 아완띠(Avanti), 웃제니(Ujjeni)와 인도 서쪽의 다른 장소들에 정착했다. 사르나트(s?rn?th)의 비문에는 초기에 사르나트에 상좌부의 교도들이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나가르주나꼰다(N?g?rjunako??a) 비문에도 상좌부의 교도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상좌부의 교도들은 서인도로부터 남인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또한 남인도의 깐찌(K??ci)에서 매우 널리 성행되었다. 얼마 후 이곳은 상좌부 교도들의 중요한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3) 제3결집과 전도사 파견



부파분열 후 다시 100년이 경과한 뒤, 아쇼까(A?oka)왕 재위 기간에 제3결집이 개최되었다. 당시에는 법과 율의 양면으로 비정통파의 견해를 가진 많은 비불교도들이 불교 승려가 되어 승단에 들어왔다. 그로 인해 포살 의식이 약 7년간 빠딸리뿟따(P??aliputta)에서 실행되지 못했다.



아쇼까왕은 당시 가장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목갈리뿟따 띳사(Moggaliputta tissa) 장로와 상의하여 많은 비정통파 승려들을 승단에서 추방시켰으며, 그들의 이단적인 견해들을 진압시켰다. 왕은 가능한 한 승단에서 계율을 유지하고 승단을 정화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이 결집은 목갈리뿟따 띳사의 지도력 아래 빠딸리뿟따에서 오직 정통파 승려들에 의해 개최되었다. 아쇼까왕은 결집을 비호했고, 정통파 승려들을 지지했다. 제3결집은 9개월간 개최되었다. 목갈리뿟따 띳사는 결집에서 결론을 도출한 후 아쇼까왕의 후원 아래 불교의 전래와 발전, 그리고 전파를 위해 다른 9개국에 종교적 전도단을 파견했다. 이때 파견된 전도사와 지역 혹은 나라 이름은 다음과 같다.



①맛잔띠까(Majjhantika, 末單提)는 캐시미르(K??m?ra)와 간다라(Gandh?ra)에, ②마하데와(Mah?deva, 大天)는 마히삼만달라(Mahisama??ala)에, ③락키따(Rakkhita)는 와나와시(Vanav?s?)에, ④담마락키따(Dhammarakkhita)는 아빠란따까(Apar?ntaka)에 파견되었는데, 그는 그리스인이었다고 한다. ⑤마하담마락키따(Mah?dhammarakkhita)는 마하랏타(Mah?ra??ha)에, ⑥맛지마(Majjhima)는 히마완따빠데사(Himavantapadesa)에, ⑦소나(So?a)와 웃따라(Uttara)는 수완나부미(Suva??abh?mi, 金地國)에, ⑧마힌다(Mahinda)는 땀바빤니(Tambapa??i, La?k?d?pa)에 파견되었다. 그런데 맛잔띠까는 캐시미르와 간다라 두 곳에 파견되었기 때문에 도합 9개국이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세일론에는 아쇼까왕의 친아들 마힌다 장로가 파견되었다는 사실이다. 세일론의 전승에 따르면,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의 지시로 아쇼까왕은 불교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때까지는 단지 필요한 것을 보시하는 자(paccayad?yaka)였으나, 그것만으로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황제 자신이 불법의 상속자(s?sanad?y?da)가 되기 위하여, 그의 아들 마힌다와 딸 상가밋따(Sa?ghamitta)를 승단에 들어가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승단에 들어온 마힌다와 상가밋따를 특별히 세일론으로 파견한 것은 당시 인도의 아쇼까왕과 세일론의 데와남삐야 띳사(Dev?nampiya Tissa, B.C. 247-207 재위)왕 사이의 각별한 친분 때문이었다고 한다.



제3결집 기간과 이 결집 이후 목갈리뿟따 띳사에 의해 9개국의 다른 나라로 종교의 전도단을 파견한 것은 불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불교의 승려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포교하기 위해 외국에 간 것은 역사상 최초이기 때문이었다. 제3결집은 세일론, 미얀마와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상좌부라는 형태의 불교가 기원전 3세기 후반에 아쇼까왕에 의해 파견된 불교 승려들에 의해서 세일론과 동남아시아에 전래되었다. 상좌부가 세일론에 전래된 이후 시간이 경과하면서 상좌부 불교의 본부가 되었으며, 거기서부터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어 크게 번성했다. 인도에서 상좌부가 사라진 이후 중요한 본부로서 세일론은 상좌부 형태의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3. 동남아 상좌불교의 현황



현재 동남아시아의 대표적인 상좌불교 국가는 스리랑카·태국·미얀마이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앞의 세 나라에 비하면 그 세력이 약한 편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동남아의 상좌불교는 근본적으로 그 뿌리가 같기 때문에 큰 차이가 없다. 다만 각국의 전통과 역사에 따라 그 특징이 약간 다르게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스리랑카는 승려의 교육(敎育), 태국은 지계(持戒), 미얀마는 수행(修行)에 역점을 두고 있는 점이 다르다. 동남아 3국의 불교 현황을 살펴보자.



1) 스리랑카의 불교



세일론(현재 스리랑카)의 불교 개교(開敎)는 아쇼까왕의 아들 마힌다(Mahinda)에 의해 비롯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왕 데와남삐야 띳사(Devanampiya Tissa)는 마힌다에게 귀의하여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었는데, 아누라다뿌라(Anur?dhapura)에 ‘마하위하라(Mah?vih?ra, 大寺)’를 건립하였다.



또한 아쇼까왕의 딸 상가밋따(Sa?ghamitt?) 비구니는 마가다의 붓다 성도지로부터 보리수를 이식하였다. 어쨌든 아쇼까왕 당시 세일론에 불교가 초전(初傳)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할 수 있다. 세일론에서 발견된 오래된 각문(刻文)에는 아쇼까왕 시대의 문자와 매우 비슷한 것도 찾아볼 수 있다.



그 후 이 섬에서 전개된 불교는 수많은 성쇠의 변천을 겪어왔다. 띳사 왕 후 200년 정도 지나 둣타가마니(Du??hag?ma??)왕이 출현하여 도시 근교에 마리짜왓띠(Maricava??i) 사찰을 지어 승단에 바쳤으며 여러 가지 탑(塔)도 세웠다.



다시 수십 년이 지나 왓따가마니 아바야(Va??ag?ma?? Abhaya)왕 때 그의 귀의를 받은 마하띳사(Mah?tissa) 장로는 왕이 바친 아바야기리 위하라(Abhayagiri vih?ra, 無畏山寺)에 머무르면서 또 다른 부파를 세웠다. 이로써 세일론의 불교는 대사파(大寺派)와 무외산사파(無畏山寺派)의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또 그때까지 구송(口誦)으로만 전승되어 오던 삼장(三藏)을 비로소 문자로 기록하였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현존하는 팔리문헌의 원형이 되었던 것이다.



3세기 중엽 고타바야(Go?h?bhaya)왕 때 ‘닥키나 위하라(Dakkhi?a vih?ra, 南寺)’가 독립하였다. 이 파는 후에 제따와나 위하라(Jetavana vih?ra, 祇陀林寺)라고도 불리어졌으며, 4세기에서부터 5세기 초기에 걸쳐 크게 번성한 반면 대사파는 그 세력을 잃게 되었다. 5세기에 들어와 대사파에는 유명한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를 비롯한 주석가들이 나타나 많은 주석서들을 남겼다. 이 무렵 대사파의 세력은 옛날 같지는 않았지만 상좌부의 정통을 고수하려한 흔적이 엿보이고 있다.



요컨대 기원전 3세기에 마힌다 장로가 세일론에 상좌불교를 전래시켰으며, 거기에서 상좌불교를 굳건하게 설립했다. 세일론의 마하위하라(Mah?vih?ra, 大寺)는 상좌불교의 최고 중심지가 되었다. 상좌불교도들은 세일론에서 테라와딘(Therav?din, 上座部敎徒), 위밧자와딘(Vibhajjav?din, 分別說部敎徒)로 알려졌다. 그러나 ??까타왓투(Kath?vatthu, 論事)??는 스타위라와다(Sthavirav?da) 혹은 위밧자와다(Vibhajjav?da) 대신 사까와다(Sakav?da)라는 용어가 적합하다고 했다. 상좌부 혹은 분별설부는 나중에 제따와니야(Jetavaniya, 祇陀林寺派), 아바야기리와신(Abhayagiriv?sin, 無畏山寺派), 마하위하라와신(Mah?vih?rav?sin, 大寺派)이라는 세 부파로 분열되었다.



그 후 스리랑카는 450여 년 동안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처음에는 포르투갈(1505-1658)의 지배를 받았고, 이어서 네덜란드(1658-1796)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리고 영국(1796-1948)의 지배를 받았다. 식민지 지배를 받는 동안 불교는 크게 박해를 받았다. 그 결과 불교사원은 피폐해졌다.



현재 스리랑카에는 세 개의 종파가 있다. 이른바 씨암파(Siam-nik?ya)·아마라뿌라파(Amarapura-nik?ya)·라만냐파(R?ma??a-nik?ya)가 그것이다. 이 세 종파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종파는 씨암파이며, 1753년 태국의 우빨리(Up?li) 장로가 비구 25명과 함께 스리랑카로 와서 구족계를 전해주면서 시작되었다. 씨암파는 다시 아스기리야(Asgiriya)와 말왓따(Malwatta)로 양분되어 두 명의 종정(宗正)을 두고 있다.



 아라마뿌라파는 씨암파가 창종된 지 55년 후인 1808년에, 라만냐파는 그 후 56년 뒤인 1864년 일단의 스리랑카 스님들이 버마에 가서 구족계를 받아 돌아와서 창종한 종파이다.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3개 종파에 속하는 사찰의 총 숫자는 10,035개이고, 승려의 총 숫자는 32,715명이며, 이 중에서 비구는 15,397명이고 사미는 17,318명이다.



2) 태국의 불교



태국의 불교 역사는 곧 태국(Thailand)의 국가 역사이다. 국가·불교·왕은 하나 속의 셋(Trinity or Three in one)으로 서로 의존 관계에 있다. 불교는 국가의 종교, 즉 국교는 아니지만 불교 전래 이후 깊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태국의 불교 전래 시기는 둘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아쇼까왕이 소나(So?a)와 웃따라(Uttrara)를 수완나부미(Suva??abh?mi, 지금의 Nakon Pathom)에 파견했을 때였다. 두 번째는 스리랑카의 불교가 씨암의 첫 번째 통일국가의 수도였던 수코타이(Sukhothai)에 전해졌을 때였다. 태국의 상가는 세 가지 원칙, 즉 계율과 승가법, 그리고 타이의 관습을 준수한다.



현재 태국에는 2개의 상좌부 종파가 있다. 이른바 ‘마하니까야(Mah? Nik?ya)’와 ‘담마유트니까야(Dhammayut Nik?ya)’가 그것이다. 마하니까야는 수코타이 왕조시대에 스리랑카의 승려들에 의해 성립된 승가와 연계되어 있는 다수파이다. 담마유트니까야는 후에 왕이 된 몽쿠트(Mongkut, 1804-1868) 왕자가 1833년 설립한 소수파이다. 담마유트니까야는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는 작은 규모의 승단이다. 몽쿠트 왕은 즉위하기 전 27년간 승려로 지내면서 복고적인 불교부흥운동을 일으켰다.



태국 불교의 특징은 ‘승가법(Sa?gha Act)’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는 점이다. 태국의 승가법은 1902년에 제정되었으며, 1941년에 제2차 개정되었고, 1962년에 제3차 개정되었으며, 마지막으로 1992년에 다시 개정되었다. 태국불교의 두 중요한 전통, 즉 중국과 베트남계의 대승불교와 마하니까야와 담마유트니까야의 상좌불교는 승가법에 의해 인정되고 있다.



다만 승왕(僧王, Supreme Patriarch, Sa?ghar?ja)은 왕이 상좌부 중에서 한 명을 임명하는데, 종신제이다. 태국 승가의 중요한 정책은 ‘최고승가회의(Supreme Sa?gha Council)’ 혹은 ‘대장로회의(Mah?thera Sam?khom)’라고 하는 최고 의결기구에서 결정된다. 이 회의는 8명의 종신회원과 승왕이 임명한 순환회원 1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태국의 승려는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상가법’에 규정되어 있다. 스리랑카와 미얀마에서는 승려들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이 점은 태국과 다르다. 태국 불교는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왕실은 불교를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태국의 불교교육은 크게 교리학습과 팔리학습으로 구분된다. 교리학습은 3단계로 되어 있고, 팔리학습은 9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태국어로 가르치는 3단계의 교리학습은 비구와 사미를 위한 기본 교육으로 기획되었다. 팔리학습은 태국어를 팔리어로 팔리어를 태국어로 번역하는 것을 배운다. 9단계 시험을 통과하면 왕의 지원과 함께 학사학위와 동등한 자격을 부여한다. 하지만 많은 승려들은 이 시험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팔리시험에 응시하기를 꺼린다. 그래서 승가에서는 팔리학습의 최고 단계를 박사학위와 동등하게 인정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태국의 현대 불교교육은 두 파에서 운영하고 있는 두 개의 불교대학에서 담당하고 있다. 마하니까야의 마하출라롱콘라자위달라야 대학교(Mahachulalonkornrajavidyalaya University, MCU)와 담마유트니까야의 마하마쿠트 대학교(Mahamakut University)이다. 두 대학은 국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 국립이다. 두 대학 모두 승려와 재가불자 모두에게 문호가 개방되어 있으며, 학사에서 박사과정까지 개설되어 있다.



 특히 마하출라롱콘라자위달라야 대학교는 4개의 단과대학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태국 내에 10개의 캠퍼스와 10개의 교육센터(학습장)가 있다. 그리고 한국·대만·싱가포르 등 3국에 자매학교를 두고 있다. 태국불교의 현황을 살펴보면, 2002년 현재 6300만 인구 중 94%가 불교도이고, 32,000개의 사원이 있고, 265,965명의 비구, 87,695명의 사미가 있다.



3) 미얀마의 불교



미얀마의 공식 국가명은 ‘미얀마 연방(Union of Myanmar)’이다. 미얀마는 1989년 5월 27일 국명을 ‘버마(Burma)’에서 ‘미얀마(Myanmar)’로 바꾸었다. 미얀마라는 명칭은 17세기경부터 이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미얀마 국명은 범어 Brahma-de?a(‘범천의 국토’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미얀마의 상좌부 불교는 11세기 중엽 상부 미얀마의 파간(Pagan)을 중심으로 버마족에 의한 최초의 통일 국가를 건립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버마족의 영웅 아나와라따(Anawrata 또는 Anuruddha, 1044~1077년 재위, ‘아노야타’라고도 함)왕은 하부 미얀마의 몬족의 나라 타톤(Thaton)을 공격하여, 그곳으로부터 500명의 상좌부 승려를 팔리어 삼장(三藏)과 함께 파간으로 데려와서 미얀마 상좌부 불교의 확립을 꾀하였다.



 그 후 아노야타왕은 스리랑카의 대사파(大寺派, Mah?vih?ra)로 승려를 보내어 대사파 전승의 상좌부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파간 왕국은 13세기말(1287년) 몽고(元)의 쿠빌라이 칸(Kublai Khan)에 의해 왕국이 멸망하기까지 5천여 불탑과 사원을 건설하면서 상좌부 불교를 발전시켰다.



파간 왕국 멸망 후 200여 년간의 혼란기를 거쳐서 15세기 후반에 몬족 출신의 담마쩨디(Dhammacedi, 1472~1492 재위)왕은 남부 미얀마의 페구(Pegu)를 중심으로 페구 왕조를 일으킨다. 담마쩨디왕은 1475년 스리랑카로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 다시 스리랑카 대사파의 상좌불교의 올바른 계율의 맥을 도입하여, 당시 분열되어 있던 미얀마의 승단을 통일한다.



 이로써 미얀마는 파간 왕조의 아노야타왕에 이어 두 번째로 상좌불교의 부흥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이는 미얀마 불교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미얀마 불교는 16세기의 법난을 거쳐 17세기에는 가사의 착의법을 둘러싸고 승단의 정통성 문제가 생겼다. 즉 승려가 마을에 들어갈 때 가사로 어깨를 가려야 하는가 한쪽만 가려도 되는가 하는 문제로 승단은 편단파(偏袒派)와 통견파(通肩派)로 분열하여 18세기에 그 정점에 달했다고 한다.



이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왕은 보도파야(Bodawpaya, 1782-1819)왕이다. 그의 종교 정책은 ⑴ 미얀마의 상좌부를 통견파로 통일하고 ⑵ 종교정화위원회를 설치하여 승단을 정비하려고 하였다. 또한 스리랑카의 낮은 카스트의 사미의 수계를 위해서 스리랑카의 사미 몇 명을 당시의 수도 아마라뿌라에 불러 비구계를 받게 하였다. 이들이 스리랑카에 돌아가서 아마라뿌라파를 형성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보도파야왕에 의해 시도된 승단의 조직 체제 정비는 19세기 후반에 즉위한 민돈(Mindon, 1852-1877)왕에 의해서 한층 강화된다. 민돈 왕은 8명의 학식 있는 장로로 형성된 종교회의소를 수도 만달레이(Mandalai)에 두고 상좌부 승려와 사원을 지도하고 감독하도록 하였다. 1871년 민돈왕은 상좌부 제5차 결집을 개최해서 2,400명의 승려가 만달레이에 모여 팔리삼장과 주석서를 정비, 편찬하여 대리석 729매에 새겨서 만달레이의 쿠토도(Kuthodo)탑에 보관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영국의 식민지 등의 영향으로 승단의 질서가 흐트러지자, 승단 내에서 자체 정화를 위해서 몇몇 종파가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종파가 쉐진(shwegyin)파, 드와라(Dwara)파, 켓트윈(Hugettwin)파이다. 민돈왕의 종교회의(Thudhamma)에 기인하는 투담마파는 위의 세 파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한 승단 내부의 문제가 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자 민돈왕이 중재에 나서서 위의 세 파를 인정하게 되었다. 위의 세 파는 하부 미얀마에서 활동하였는데, 계율을 엄수하고 스승과 제자간의 복종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세 파의 활동에 자극받아 상부 미얀마의 승단도 정화되기 시작했다.



영국 식민지 시대에는 고승들이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불교 시험 제도는 왕조 시대부터 시작하여 영국 식민지 시대에도 1895년부터 46년간 계속되었다. 1948년 미얀마는 독립하였다. 독립 후 초대 수상인 우 누(U Nu)는 승단 및 불교 진흥을 위해서 많은 개혁을 하였다. 1954년~56년까지 거행했던 제6차 결집은 불멸 2,500년 기념사업으로 진행된 불교진흥 사업의 하나였다. 1962년 네 윈이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정교(政敎) 분리 정책을 취했다. 하지만 팔리 국가시험의 실시, 불탑의 보수 등의 불교진흥을 위한 사업은 계속되었다.



1980년 5월 24일부터 27일까지 미얀마 전 종파 합동 회의가 개최되어 종교와 정치적 문제, 종교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미얀마의 전 9종파를 통괄하는 조직의 설치, 종교적 분규의 해결, 출가 등록제와 신분의 규정 확립이라는 세 가지 사항을 입법화하였다.



미얀마 불교의 교학에 있어서는 두 가지 팔리경전 시험이 있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팔리 국가시험과 사설시험이다. 팔리 사설시험은 승려와 재가자가 중심이 된 감독 단체가 진행을 감독한다. 미얀마의 승려 교육기관은 크게 사설 교육기관인 전문 강원(Mahagandayong)과 국립 불교대학(State Pariyatti S?sana University)으로 대표된다. 사설 전문 강원이 전국의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설치되어 있고, 국립 불교대학은 양곤(Yangon)과 만달레이(Mandalai)의 두 도시에 설치되어 있다.



미얀마의 종교 인구의 분포를 보면, 인구의 89.4%가 상좌부 불교도이고, 이슬람이 3.9%, 힌두교도가 0.5%, 기독교도가 4.9%. 미얀마 고유의 정영(精靈, nat) 신앙이 1.2% 기타가 0.1%이다. 미얀마는 종교 인구 분포에서 알 수 있듯이 스리랑카·태국·라오스·캄보디아 등과 더불어 상좌부 불교 국가임을 알 수 있다.



1995년의 미얀마 종교국의 통계에 의하면, 미얀마에는 전체 승려의 약 87%를 차지하는 수담마(Sudhamma? or Thudhamma)파와 8%를 차지하는 쉐진파(Shwegyin)를 포함해서 9개의 공인된 상좌부 종파가 있으며, 미얀마의 승려 수는 비구가 162,195명, 사미가 234,595명으로 총 396,790명이다. 통계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여성 출가자(thira-shin)의 수는 3만 또는 9만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미얀마도 태국과 같이 남자는 일생에 한 번의 승려 생활을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사미계를 받고 절에서 생활하는 것이 관습화되어 있다.



현재 상좌불교 국가 중에서 수행의 전통이 가장 널리 보급된 나라는 미얀마이다. 전국 각지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수많은 명상센터(Meditation Center)가 있고, 이곳에서 다양한 수행법들이 행해지고 있다. 이것은 다른 상좌불교 국가보다 두드러진 현상이며, 미얀마 불교의 특징이기도 하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재의 동남아시아 상좌불교는 스리랑카에서 유래된 것이다. 기원전 3세기 스리랑카에 전해진 상좌부는 그곳에서 교의를 정비한 다음 벵갈만을 건너 동남아시아 각지로 전파되었다. 그런데 후일 스리랑카 불교가 유럽의 기독교 국가의 식민지로 인해 쇠퇴하자, 이번에는 동남아시아가 스리랑카 불교의 재건을 도왔다. 이처럼 상좌불교의 역사는 서로 돕고 보완하는 종교교류의 역사였다.



이를테면 스리랑카는 11세기에 위자야바후(Vijayab?hu) 1세가 버마의 아노야타왕의 도움을 받아서 법통을 계승하였다. 반대로 13세기가 되어 버마의 파간 왕조가 멸망함으로써 버마의 상좌부도 함께 쇠퇴하고 만다. 그리하여 페구 왕조의 담마쩨디(Dhammacedi, 1472-1492 재위)왕은 1476년에 비구와 사미들을 스리랑카에 파견하여 콜롬보 교외의 깔야니(Kaly???)(지금의 Kala?iya)에서 정식으로 수계를 받게 했다.



이 왕이 깔야니(Kaly???) 비문을 남겨 인도 불교의 상황을 전해 주고 있다. 버마 상좌부의 주류는 이때 전해진 것이다.



또한 스리랑카는 16세기 이후, 포르투갈과 그 뒤를 이은 네덜란드에 의해 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되는데 불교도 이때 고난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하여 16세기 말엽에서 17세기 후반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어서 쇠퇴해 가던 상가에 새로운 정통성과 활력을 불어 넣었다.



한편 태국에서도 라마 캄헹(R?ma Khamheng, 1275-1317)왕이 13세기에 비구들을 스리랑카에 파견하여 당시 대사파로 통일되어 있던 스리랑카의 불교계로부터 다시 정통적 상좌부 불교를 수입하였다. 이것이 태국의 마하니까야(Mah? Nikaya)이다.



버마에서는 11세기 중엽에 아노야타왕이 출현하여 남부 버마의 몬족(族)을 정복하여 파간에 수도를 정하고 몬족을 통해 알게 된 스리랑카계의 상좌부 불교를 국교로 제정했다. 타이에서는 13세기 중엽에 수코타이 왕조의 제2대인 라마 캄헨왕이 스리랑카계의 불교를 국교화(國敎化) 하였다.



 또 캄보디아에서는 일찍부터 불교와 힌두교가 혼합된 종교가 오랫동안 성행하였는데, 이것은 9세기에 이루어진 앙코르왓트(Angkor Wat)의 장엄한 불교 유적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러다가 자야와르만(Jayavarman, 1181-1218 재위) 7세 때인 1181년에 스리랑카로부터 상좌부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되었는데, 14세기 중엽에 이 앙코르 왕조가 태국인들의 세력에 의하여 붕괴되자, 캄보디아에는 상좌부 불교가 정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동남아시아의 불교는 상좌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남방 상좌부라는 한 계통으로만 발전되어 온 것은 아니다. 동남아시아는 기원전 3세기경부터 인도문화의 영향권에 있었다. 그래서 여러 형태의 인도문화가 들어왔다. 이를테면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 힌두교 등 다양한 형태의 신앙들이 도입되었다. 일종의 혼돈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점차 상좌부 불교로 정비되었다. 그 이면에는 각각 그 지방이나 나라에서 상좌부 불교를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국교적인 위치를 공고히 해 준 뛰어난 국왕의 힘이 밑받침되었다. 현재의 동남아 상좌불교는 그 나라에서 국교(國敎)는 아니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불교보호 정책을 펼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마성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초기불교 인간관 연구(Man in Buddhist Perspective)’로 부(副)철학박사(M.Phil.)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학교(경주) 불교학과 강사 및 팔리문헌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며, 태국 마하출라롱콘라자위달라야대학교 한국분교를 비롯한 각종 불교교양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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