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27

[도올김용옥] 동경대전70 부모 혼백은 없는데 너만 혼백이 있어서 하늘나라로? - '만고없는 무극대도' - 수운...


[도올김용옥] 동경대전70 부모 혼백은 없는데 너만 혼백이 있어서 하늘나라로? - '만고없는 무극대도' - 수운의 기독교 비판은 적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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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 2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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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의기독교비판ㅡ 제사  ㅡ3년의괴질병ㅡ 무극대도(時運) ㅡ종교적치유사상( 無藥自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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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pt


00:01
[음악]
00:04
00:09
그러니까 는 2권 학과라고 하는 것은
00:13
이미 이제서 하게 대해서 동학 이라는
00:16
의식을 가지고 내가 말하는 도는
00:20
이거는 누 국대 도 인데 이 무국
00:22
태도는
00:24
성악가는 한줄이 다른 세운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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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라는 확 지난 분배 의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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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있는 쓰고 있는 거죠 그 전에
00:33
10는 포동이 나 이럴 때만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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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식이 그렇게 뚜렷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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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내지는 않고 예 그런데 여기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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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에 나오기 때문에 기독교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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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장 가자고 여기서 그 명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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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고 있는데 이에 무슨 대장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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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인 비판도 아니고 이게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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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를 쓴 거지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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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 4 기독교 비판 은 너무도 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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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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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5
적하 카다 그 역사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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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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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냈던 모든 그 이런 모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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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 마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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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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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눈 이라던가 초월 주 의 적인
01:19
그리고 실체는 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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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실제로 움직인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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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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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자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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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인격적 존재 자로써 하나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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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아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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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 무리 된단 말이야 이게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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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되는 거야 뭐 그런 존재 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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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거 전 존재 자리가 물이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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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11이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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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나요 어땠느냐 에서 이런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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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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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번에 도 얘기했지만 이 우리가 살고 있 는 이 이 지상에서 의
모리 아니라 하나의 모든 여기에 것
02:00
거 컷 하나의 2
02:04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모든 이벤트 속에서 우리를 하나님임을 이해해야 된다
이렇게 말씀 드렸잖아요 예
02:14
그러니깐 이 게 아니라구요, 그런데 여기에 보세요 이런 들이 전부 교회가서 
천장 높은 때울 가가지고 명동 성당이 
이런데가 라지고 어둡게 올한해 게 허
수령을
허송세월 한단 말을 내가 범인 듯이
내 귀 속에 들어오는데
문장 아니하면 님께
이때 하늘님 이라는 거는
하나님 그렇게 썼거든 왜 야우리 약간
그런게 있는지 모르겠어요
02:46
그러나 머그 그런건 아니겠지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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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요 논의를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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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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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 한 아니라고 한 모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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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은 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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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역이 성격이 점이 있다는 거지
02:59
2 2
03:01
하느님 하고 다 다른거 자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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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는 튜닝하고 는 좀 다른 느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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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요 기영이 여기 하늘님 은 기록해
03:10
신 이란 말이야 그럼 앤 학적으로 볼
03:13
때 아영이
에 어떻겠어 어떤지 간의 여기는
내용적으로
기독교적인 하나님 하나님 나라의
기독교에서 마나는 하나님은 아몬 옷에
잊으면 하나님이라고
개역성경 대로 나는
얘기를 하고 내가 그리스도 쪽에
우리우리 우리의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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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한다는 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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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늘리면 하는 님으로 쓴다는 게
03:43
내가 세운 원칙에 해요 으 내기 뭐
03:46
이 원칙을 지키기 도 어려워 예다 이
03:50
혼동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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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 에게 있어서는 뭐 하나님이 나는
이미 나 하느님이 나 다 똑같으니까
무단 이 안 알림 께 아 늘림 께
주소 간 밤 낫으로 b 는 말이
밤 나서 로비 밀양이 30 삼척 웃겨
때 이건희 사람이
이게 동경에서 마노 쾅 형제가 살고
있다는 천상의 궁전 말하고 있어 업종
대비 거 여기서의
우리 성경을 마음이 게 뭐고 경제
락의 개인도 뭐 해 볼 이건 번영
이란 말입니까 갱 더 뭐가 힘들어 해
본 얘기에 옥경 돼 그 유리가 시그노
구로 막 되는데 그냥 거기에 그냥
요리 같은 천사들이 그냥 달 날
이하로 베뉴 이런데 근데 이것이 또
33 천에 있거든 얘도 불교적인 거죠
상수 뿐이야

옛날엔 하늘이 한 걸 해본 일하게 해
배번 씨라고 이렇게
이 복수하고 있잖아요 그런 해보니
라고 얘기하자 여기 중층적으로
2
됐거든 얘기 3 4단계 라는거
어여 그 올라가는 가 한 올라 원래도
이거 복잡해요 여긴 하다가 또 문지기 들이
05:09
있어가지고 다 검사를 검열을 하거든
05:13
왜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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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올라봐야 거고 경대 가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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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그 5 경내에 이거는
05:22
다 알려면
05:24
막이
05:25
내주 관람 나 죽거든
05:27
33 쳐 옥 경 대로 가게 하십시오
05:31
이게 뭐임
05:32
모든 신도들이 할 많은
05:35
요단강 건너 하니까 그 저 천당에서
05:39
맛나더라 그러면 이게 접어 삶 일상
05:42
주욱 영도에
05:44
날 중 거 든 내가 아마 내가 내
05:48
영혼이 그리로 가게 아 소소
05:51
그러면서 이노리 굉장히 리얼한 뭐 e
05:54
그리고 정확해요 원하면
05:57
우습다 저사람은
05:59
야 웃긴다
06:00
적극적 천주 천주 쟁이 사람들은
06:04
정의의 부모 죽은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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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도 없다 이름하고 힘도 없다는 게
06:09
뭐 이 거야
06:11
흰 도움되는 의 신주를 안 무신 타일
06:14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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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도 없다 545 폐지 3 다니죠
06:18
신도 없다 이름하고
06:21
퇴사 조치 안 되는 거야
06:23
그 윤지 중이란 사람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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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의 장성 대라 그러면서
06:30
장이 어머니 신주를 불사르고
06:33
제자도 거부하고 어 하순 신주를
06:37
불살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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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칸 서만 썩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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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4 라고 하는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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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조상숭배 인데 조상을 지리는 뭔데
06:50
이게 등대가 아니고 안 세 스 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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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라고 e 사람들이 번역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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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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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는 계란말이 제자라는
06:59
이게 이게 미신 일수가 업그 빙 새는
07:03
07:05
인간의 생명 이라고 하는 것이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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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 하지만 내 생명이 이렇게
07:11
부모님들도 받은 것들이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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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되고 1 쭉 한다 가 아닌 생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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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성을 말하는 뭣이 이 제사가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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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깔리고 이거 흑 요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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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소위 말해서 제수이트 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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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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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건 뭐 괜히 이것이 쳐 줄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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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우리 기독교와 전파 되는데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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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문제 가지고 그 할 필요 없다 해서
07:37
마테오 리치가 저장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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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이 문제 3 7 않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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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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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자 문제에 대해서 관용을 취했던
07:48
것은 재수 히트 고 재수 리튼 아주
07:50
훌륭하죠
07:52
어 그러면 나중에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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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트 들의 주장을 받아 가지고
07:57
지금 지금 현재 카토리 그 공식적으로
08:01
20회 이미 다
08:03
허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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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때만 해도 미니카 아니니
08:08
프란치스칸 이 모두가 다 아 이 안
08:11
세트 오심 이라고 하는 것
08:13
조상 제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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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는 우상숭배 다
08:18
아이돌 아트입니다 이렇게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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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렸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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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다가 이제 가장 사악한 자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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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희 프랑스 외방 정리해요 말이야
08:29
빠리의 랑 선교의 이트 랑스 신부들이
08:32
우리나라가 라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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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제자리를 보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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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죄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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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안
08:40
우리가 에 묻은 순교자들이 양 야
08:43
황당 이성주 잔 창조 삽 2월에
08:47
그냥 그 절레 문제에 대한 논쟁
08:50
때문에
08:52
시행 당 거야 우리나라 유지중인 이런
08:55
사람들이
08:56
정약용 뭐 이런 사람들이
08:59
십팔 년을 유배당 아무 것도
09:00
마찬가지죠 2 금 그 문제 때문에 다
09:03
되어 gu 종의 학전 이니 뭐 이게
09:06
많이 되니까 이게 아 그래 가는
09:10
우리나라의 소위 말해서 종교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그저 운이 4 한 것인가
그때 나의 존재에 그 다에 존재의
영속성 이라고 하는 것을 나의 존재의
한 사람이 내가 딱 죽을 푸시 다일
이렇게 생각하면 어 이건 아주 좋은
틴 사람이고 내가
돼 지금 그만이지 뭐 그걸 미리
했는데
되고 억울한 어찌 알지 않냐 너무
09:43
요요 인생이 너무 짧지 않냐 그래서
09:46
유감스런 약한 사랑 한테
09:48
이제 종교가 등장하는 것은 근데 그걸
09:52
올랐다가 영이를 단천 당해 올라가면
09:55
여긴 영화가 이루어 든 이간 하나님의
09:58
내용에서 나의 영속성 이 00 원한이
10:02
도장 된다
==================
그런데 우리 동양인들은
10:05
여러 이거 좀 심심하지 아냐 이게
10:07
심심하니까
10:08
이거를 역사 속에서 나의 후손들이
10:12
날을 기려 주는 것을 통해서
10:15
이렇게 연결 된다는 거
10:18
그냥
10:19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10:21
금일
10:24
된단 말이야 요는 건강한 이 방식이
10:28
10:29
그러나 또 적당한 때가 미역을 해지고
10:31
그만 그런 게 좋은 거지 이게 뭐에요
10:36
왜요 그러니깐 지금 이런 방식의 여
10:41
자기 존재의 영속성을 보장한다는 것
10:43
자체가 허망한 건데 여기서 신도 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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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일어나고 신주 도 다 태워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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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주차 안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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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는 3강 오존의 에어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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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서에서 벗어나는 거죠
그러면서 오직 빨리 돼 질꺽 안피는
다이아 시작한 거예요 빨리 되져 야
1한 하늘나라 내고 빨리 이 험악한 이 세상에 이런 최 로
될걸 은이 추잡한 세상에서 빨리
벗어나서
하나님 않도록 한다
=======
11:19
이런 사장은 우리 반만 년 동안 담군
11:23
2개 벽한 일이 없었던 우리 민족의
11:26
없었던 거예요
11:28
근데 지금은 거의 한 반이 이렇게
11:30
생각하는 것 같지 그래도 올라 최저
11:33
반은 그런 그런 생각을 미친놈들이
11:35
라고 행하고 누리 나 지금 인구의 반
11:37
이런 이런걸 있는 놈들을 한 반 된
11:42
다음에도 반을 안돼 웃긴다 고
11:44
생각하는 거예요
11:46
지구상에 안다 아니 인구의 반이 그런
11:49
커먼 센스 갖고 있는 나아가 없을
11:53
이게 사실은 한국 문명의 kdm 지금
11:56
이 파워 하니까 아
11:59
우리나라는
12:00
것만 센스가 통하는 말아요 그렇죠
12:06
내 플렉스 mi
12:09
올라가 있는 야한데
12:11
그냥 딱 잊어버리기 쉬운 영어
12:13
있습니다
12:14
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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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헹 고라니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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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있고 5
12:23
으 안 봤지
12:25
이 못 푼다고 이거
12:27
캐빈 코스트가 태빈 코스트너가
12:29
나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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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j 2년여 뭐예요
12:33
작년 저모 근데 이 영화야 말로 그냥
12:38
dg 스람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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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정말 미국의 현실입니다
12:44
치맥 시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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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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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뭔지 종류가 뭔지
12:51
이때 물 영원히 그 2 도동 이 뭔지
12:54
아주 심플한 테마를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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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회를 서양 살 정말 을 얘기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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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죠 특히 미국사회에
13:04
얼마나 미국 사회가 도덕성이 없는
13:06
하는거예요
13:09
10자리 어 진짜 2
13:12
아 대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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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내가 본 영화는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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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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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가지 쉬움
13:25
뭐 가 아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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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중 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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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학령 의 지평을 올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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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외국 가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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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 장면들을 그렇게 c 찍는다는
13:38
13:40
아 그 이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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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가지 슈 그것은 여러분들이
13:47
이 남북문제 임 뿐만 아니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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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북한
13:52
사람들의 그
13:56
아프리카에서 2대 장안 사이에서
14:00
아야
14:01
14:03
너무 너무 위대한 0
14:05
학력 그 정도로 이 우리 시대의
14:08
문제의식은 그렇게 표현하는 게
14:12
또 하나만 내 나온 기네
14:14
낙원의 박 용 업을 만 거야 아
14:19
누아르 양호한 내 거니 너 와리 불난
14:22
성을 말이잖아 느와르 양 헌데
14:25
0 포옹 구영 왕의 옛날에 그 벽 a
14:30
영화를 영웅문 제구 저 내려오는 그
14:35
래 매를 완전히 차원을 바꿨어요
14:40
나온 에는
14:42
취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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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박훈정 이라고
14:47
14:47
원래 그 아직 공부를 잘 해 가지고
14:50
의과대학을 들어갔는데 의과대 약의
14:53
그 암기하고 이런 공부가 싫어 가지고
14:56
그 빛의 나왔지 군대나 맡아 같은
14:59
영화 감독으로 풀렸다고 하는데 그
15:02
옛날의 유명한 부당거래 같은거에 각본
15:05
줄 수 없고
15:06
신세계의 뭐 대호 이런 것들 으 그
15:10
감독한
15:12
사람인데
15:14
한번 만나 왔거든 이거 만났는데 그
15:17
얘기를 하더라고 장이
15:19
평생 인해 봄
15:21
철학 강의를
15:23
1 꾸
15:25
저 사고의 개발을 받기 시작해요
15:28
요 문과 정의 소양을 기르게 되었다
15:31
야고 1회당
15:33
나이트 n 대 하나씩 아
15:36
이 정권 누비 2
15:38
아주 기분 좋게 볼 수 있는 요합니다
15:42
15:43
홍콩영화의 놓아 라는 개념 암은 다른
15:47
한국적인 요아리 야 뭐 같 이슈는 그
15:51
이제
15:53
오스카상 에도 저나 뒤에서 출품을
15:56
한다는데 그것도 잘 되시면 좋겠네요
15:58
예 뜬
16:00
16:01
유승안 감독이
16:04
과거부터 v2 폭력 영화야 주대
16:07
가지만은
16:08
그 테크닉을 다이제 습득 해가지고
16:13
생장이 사람이 깊어져 때요 철학적으로
16:16
문제를 접근하고
16:18
뭐가 되시는 아주 탁월한 수장인
16:21
답니다
16:22
보시지 않은 분들은 꼭 한번 봐 줄만
16:27
에 바꾸어야 할 거에요
16:29
돈을 너무
16:31
돈과 정서에 너무도 많이 들어간
16:33
영화는 그런데 보시면 알 수 있어요
16:35
16:36
영화 선자는 내가 여기 성
16:39
끝내고
16:40
유원 속사 한다고 한다 어떻게 영화는
16:43
하냐
16:45
빨리 되져 가지고 빨리
16:48
33절 국경 대에 올라 가는데
16:52
신 주도 살려 버리고 제일 4 도안
16:55
지닌다는 거는
16:56
부부에게 권력 502 업되고 얘기나
16:59
차관이 4
17:00
교회는 없지 유혹이 있어 라는 건 금
17:02
돈 넌 니 훈령 험 등은 어떻겠느냐
17:05
극은 이니 올려 온 등은 부모도 없는
17:09
홀려 운명을 넘어 니냐 그런 오만이
17:12
있는 훌륭한 102
17:14
옥경 대로 빨리 올라간다 그러 허깨비
17:16
가상 천에서 하늘로 올라가서 거기서
17:19
뭐 뭐 못할 먼 지랄 것이냐 이
17:22
썩어빠진 소리 하지 마라 이 새끼야
17:24
이런 가지입니다
17:26
어린 손님 알았어 라는 것은 이미 실
17:28
어린아이 새끼야 이름 이런거
17:30
아주 화가 난 것 영상이
17:33
그런 술 연령이 있으신 이걸 보면 은
17:37
욕지거리 할 때 파악해 버린 거야
17:40
그말 정말 그런 3 짤 다 없는 말에
17:43
혹해 가지고 서 확인이 뭐 하나 않은
17:47
이민 다고 지랄하지 말고
17:50
동 아기 말하는 우리 묵 대도가
17:53
제시하는
하느님을 공경하며 넌 이 하나님을
공경 한다는 건 뭐야
삼라만상 우리 부모가 줘 모든
산천초목 에 대한
모든 라임은 하나의 공경 심을 하는거죠

그렇게 되면은
아동 방 3년 괴 1
죽을려면 이시군요 아무리 지금 3년
동안 계속해서 연 년이 닥치는 괴질이 지음
18:24
이 세우고 인데 이 당시 굉장히 심해
18:27
거든요
18:28
그러니깐 이러한 회 질에 걸릴 그
18:32
걸려 죽을 염려도 없다 그러니까 는
18:35
사실은 이동하기 나중에 펼쳐지게 되는
18:39
것도 그 콜레라 에서 어그 해월
18:45
선생이 내린 그 많은 좋은 지시
18:48
때문에 동악 에 들어가면 이제 그
18:51
질량 올린다 콜레라 안 걸린다고 해서
18:53
동의 터지게 되거든요 먹도 가 근데
18:56
이때 이미 이순애 이 가사를 보내는
19:00
아동 방 3년 괴질 죽을 넓네 있어야
19:03
이게 벌써 해 월의
19:05
그 그거 그 현실을 벌써 얘기를 하고
19:09
있는 거예요 자기 시대에도
19:11
괴질이 쓸고 있고 나이 3년 동안
19:14
국민들이 다
19:17
지금 희생을 당하고 있는데
19:19
하늘님 을 아는 님을 공경하게 되면은
19:23
진정으로 합류를 공격에 되면은
19:26
죽을 여명 아
19:27
돼지 레 걸려 며 거 없다
19:30
허무한 너의 품 속 덕트 거 난 2절
19:33
창녀
19:34
그러니까 여기서 순이 얘기하는 것은
19:37
뭐냐면 이 수직적 버티컬 벌리 저희
19:41
수직적 사고가
19:43
문제라 이 거야 지금
19:45
그건
19:46
일체의 초월 주 의를 거 바로 2위는
19:50
19:51
나중에 이에 이제 앞에 소위 말해서
19:54
이 사상이 고대로
19:57
동악 논 압구 전에 나옵니다 동안은
20:00
아프지 한번으로 아주 포괄적인 논리로
20:04
나오는데
20:05
여의 에서 결국은 이 허무 한과의 품
20:10
품 속 이 허망한 니 기독교의 풍속을
20:15
듣고 나면 절차 민아 이런 요새 말로
20:18
그냥 우리가 항상 하는 말이 시조 1
20:21
이런 거예요 철창
20:23
아주 기내 캔 노래 고 시 적시고
20:26
시조 안에 그러자 나 그런거 안 못
20:29
들어봤어
20:31
20:33
그냥 진화라는 이러지
20:35
음 엉뚱한 소리 하냐 이럴때
20:38
시조 1 야 그래
20:40
듣고 나니
20:42
절창 2호
20:43
방법이 절창 처럼 들린다 이런식으로
20:46
봐야 되요 2
20:48
이제 창작을 끌어 진다는 게 아니야
20:51
보고나니 개탄 1씩 이렇게 탄
20:55
들어가 보면 좀 게타 날 그는 형국이
20:59
벌어지고 있다
21:01
나 역시 40 평생 하염 없이 해외로
21:05
없이 라그 해외 그 시 하여 없이
21:07
한잔 해요 해 음 이라는 게 이게
21:09
되게 ep 해운 이런 됐는데 그 해
21:12
음이란 이하영 없이는
21:15
속절없이
21:17
비난 진행 아니 이제야 이 세상에
21:20
홀연히 생각하니 쉬우니 들려 등 가
21:24
쉬우니 돌아갔다 입어야 쉬우니 돌아
21:28
왔다는 건 뭐예요 흥 진 비례하고 b
21:31
뭐 그 감 진 되고 곧이어 답례하고
21:34
이런식으로
21:35
이 꾸려 의 한테는
21:37
고진감래 의 쉬우니 왔다
21:42
기운이 돌아 따르면 쉬우니 도왔다
21:45
이고 둘러 또 다르게 돌았다 그는
21:47
그래서 망고 없는 북 되도 이 세상에
21:51
참고 안에 그래서 내가 만 뭐야 없는
21:54
유니크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21:58
기독교가 이렇게 초월적인 수십개의 를
22:02
가지고 인간을 복속시키는 여고 한
22:04
권이 새로운 권위의 복종시키는 라고
22:07
하는 이 시점에서 내가 망고 없는
22:12
모국 되더군요
22:14
회견 이 무국 때도 란 말 자체가
22:16
문구 캐고 낱말 자체가 진정한 대도
22:20
라고 한다면 대도 라고 한다 는 2대
22:23
도라는 그건 돼 라고 하는 여기
22:27
보인다면 이 노무 기라는 것은
22:31
연무읍 이라는 게 갈고 씨 거기라는
22:34
게이 극한 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게
22:36
1개 걷어 한계 어떤
22:40
이게 이게 지금 이익의 0에서 이
22:45
지우개를 보이는건 영의 해요 한계가
22:48
지어져 있기 때문에
22:51
얀 정자 란 말에 한정돼 있는 존재란
22:54
버리지
22:55
그런거는 이것이 바울이 끼어 없다
22:58
한계가 없다
23:00
그러면 이
23:02
어떤
23:04
좋게 잘 아는 개념을 계란 우 거지
23:07
그러면은 사실은 이 대도 란 말도
23:10
쓸수가 없죠 좀 크고 대선 하고 하는
23:13
비교 극적인 언어와 들어갈 수 없는
23:17
거니까 무희 되면
23:19
대도 라고 말할 수 없는 거예요
23:21
회의하는
23:22
사실은 b 대도 라고 하는
23:26
음 멋을 이 비누 급 때도 란 많은
23:30
다 10 이 속명 유황 에서
23:33
그 유명한 얘기 안 보여요 뭐 보기
23:37
태그 이라면 에그 2 성 성령의 하기
23:40
출발이 건 으 으
23:42
패군 이라고 하는 것
23:45
이건
23:47
무곡 이면서 대우의 태국이 면서
23:50
무기를 이 주장이 이걸 뭐가 택을
23:53
하나다
23:55
이것을 무게에서 태극이 나왔다
23:57
이런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거야 음
24:01
그래 이나
24:03
극이 없는 것이 크게 바로 태극이
24:06
지고 그 까 이거 또 뭐야
24:10
극이 없는 것이 대도 합니다
24:14
아 되도 라는 것은 이 영어 거 구
24:17
작자의 되더라는 애니 아니라
24:21
모국
24:22
하나의 그냥 모든 존재자
24:27
조직이 발 으
24:30
모든 생명체가 있다면
24:33
생명 그 자체 에 이렇게 자면 되는
24:37
건 이 아 쉽게 얘기하면
24:39
그러니까 는 그 무급 대도를 게 여기
24:42
동학 이란 말을 안 쓰잖아 치 여기까
24:44
아직 아직도 이 사람이 그 이제
24:47
동향 논을 쓰게 되면서 비로소 통 왕
24:50
이란 말을 새로워요
24:51
고 직전에 한글 가사 해서 여기 대국
24:54
묵 태도를 크림 하는거예요 망구 없는
24:57
누 때도 이 세상에 참가했다
25:01
자기야 이거 를 참관했다
25:05
이도 역시 시운 이라
25:07
내가 이제 창도 난 것은 내가 보고
25:09
개의 잘라서 기 발랄 어떠한 새로운
25:15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있어서
25:17
개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25:20
이거는 시대정신의 키운다고 심은 요즘
25:24
1차 이 트 가 있었고 이 시대에
25:26
사랑하는
25:28
차이가 있으나 일부 차이일까
25:31
시대적으로 이어 차일드 2
이 역시 쉬운 이랑
1cc 먹는
음식도 바로 벌써 해월 사상이나 내
오른 분은
수원 언냐의 모든 사상을 클래 위험한
거예요 으
그런 일 일 시 시
매일매일 때때로
먹는 음식 밥 한그릇이
이거를 성경 두 글자로 지켜야
우리가 농촌 문제 하는 것들이
마찬가지라는
농촌 한 마을 한 마을이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 최대의 하나의
공경의 대상이 라고 하는 것 성경
있자
섬과 경외 성경이라는 한성 이라는건
보람 있어요
대자연의
돌아가는 이지 천천 그 자체로만 이게
참 거치고 경 이라고 하는건 여기에
대해서 인간이 왜 라는 하나의 공경
된 마음을 가지고 이 섬 한때 자연의
웹 이어 하나의 그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그러니깐 성경 있자 지켜 내요
하늘님 을 공경 하면
어려서부터 있던 모든 신 병까지 물약
짜야 아니란 거야
약을 쓰지 않아도 타나 봅니다
그러니깐
27:05
이자 하니 그 여기에 이제 모든
27:08
종교 또는 뭐가 신
27:12
한해 치유 효과 라는 게 종교적
27:15
조기를 하나 있잖아요 예술도 크게
27:17
뜨고 치 유 사장은 취임사 길러 남
27:22
근데 이게 세라 피가 아니
27:26
힐링 이라는 말 자체가 힐러 란
27:29
거지
27:30
큐어 간 신 이라고 하면 힐이 랑은
27:34
몸 스스로 낫는 거야
27:36
일이라는 걸 다시 몸 스스로 나는
27:39
거예요 자유 물약 자유라
27:44
물약 자유 이게 수원 의 1 2
27:48
대치 플레이스 합니다
27:50
약을 쓰지 않아 고
27:53
스스로 효과가 있다 자유라
27:56
물이 약자 2
27:58
그 우리나라가 지금 문제가 되는 게
28:00
의도 시설도 중요하지만 은
28:04
모든 사람들이
28:06
의도가 잘 되어있다 이래가지고
28:08
또 윤아는 개념은 의식을 하는 거야
28:12
그렇죠 아 보며 난 그냥 2 40
28:16
물이 약 자유가 되는건데
28:18
어디 어랏 아니 사람이 살던 물이
28:21
라던가 아프게 돼 있어요 그러면 쉬고
28:24
자고 일어나는데
28:26
아 그 다음 방부 난 보험이 쓰는거
28:31
그래서 병원 암 어감은 소년 엄지가
28:34
손해 부르고 지가 뭔데
28:36
미쳐 보인다고 해야하나 벼와 미칠
28:38
봅니다 고 생각해요
28:41
그러곤 알고 가서 안남 곳 고 고생
28:44
나고 뭐 천대 받은
28:47
ic 앙크 황화 더 가고 나는 또
28:51
재미 붙여 와도 또 캄
28:54
그래 요새 사람들 보면 난 그 또
28:57
한번 경우 가는 거야
28:59
우리나라에는 나처럼
29:01
보험료 라울은 뭐 내고 다 내지만
29:05
날 일지 안 가면 일정 보험료 라고
29:09
하는 것은
29:11
필요한 사람들 나도 언젠간 필요하겠죠
29:15
내가 외과적인 뭐 이런 긴급 사태를
29:18
안 당한이라는 그
29:21
이것 당해 짐 회용
29:25
그렇지만 한 그
29:27
모든 사람이 이 보험 제도를 통해서
29:31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29:35
되셨으면 내야죠 많이 냈고
29:38
그러나 냈다고 그래서
29:41
병원 한다 이건 미친 씨름이 친지
29:46
으 미 진지 싫으니까 이거는 그냥
29:50
첫번 뭐냐면
29:52
노인들이 더 심한
29:55
젊은애들은 해서 병원 먹고 9대 악을
29:57
않은데 노인들은 그냥
29:59
병원 헌팅 된 이러니 읽어
30:03
그러한 경호원들이 흠 실제 없네
30:06
환자들은 매직 5
30:08
그러고 우리나라 마 바텍 통경 을
30:12
전부 영은 자라니 병원 가서
30:17
병원
30:19
30:20
성병이
30:22
병리 지식 패널 을 외치고
30:26
진짜 도움 반등한 30 거 아냐 이게
30:29
아주 텍스트 l 의료는
30:33
여러분들이
30:35
될 수 있으면 병원을 안감 검사 받지
30:39
않고
30:41
어 어 그럼 그 가능한 c 키를 찍고
30:44
30:46
아씨 칠하는 이 그게 보통 옛날
30:49
엑스레이 의 조사 량에
30:52
300배 산업의 대로 얘기에 아 그
30:55
그 cd 랙 의원 사망에 대해 이렇게
30:58
싸와 e 키 새로 만 으로서 가지고
31:00
그 달면 닿는 마다
31:04
여러분 입시 막장 없는 뒤에
31:06
그쪽은 뭐가 너 이게 왜 마리까지
31:08
가봐야겠네요
31:10
31:13
이게 지금 우리나라
31:16
이수의 전쟁이 하신 마신 요거를 r
31:18
무료 약 자유 롤
31:21
자랑 이라는 거는 약을 쓰지 않아도
31:24
낳게 되요
31:26
그런데
31:28
그렇게 내 몸이 내 나를 회복시켜줄
31:32
수 있다고 하는 그 믿음을 가져야
31:35
크게 사실 중교 본질 하는 것이
31:40
예수도
31:43
고친 게 아니에요
31:44
우유를
31:46
그 여인이 2술 딱 가서
31:48
소맷자락을 한 번 만지는데
31:53
이게
31:54
병이나 보여요
31:57
그래야지 9
31:58
뭐 가기가 싹 빠져라 점은 누가
32:01
사람들은 자
32:04
여인이 제가 되십니다 2
32:06
돌아오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이죠
32:09
너희 믿음이 너를
32:11
구하여 너 그 내가 고쳐 준 게
32:15
아니야 너의 미리 널 9화 또 기자
32:19
그러니까 크게 무리야 자율에 있고
32:21
한데 똑같은거 지금 예수나 순위나
32:25
자기들 찾아올 또는 사람들한테 전부
32:27
뭐냐면
32:28
물약 잘 아이 왜 그건 뭐야
32:32
하늘님 을 공격하면
32:34
그럴 라면은 왜 성경이 있자
32:37
대자연이 내 몹에 대한 내 몸에 대한
32:41
외관은 소망이 빳 2 내 내 몸이 내
32:44
몸이 곧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32:47
하나님의 대한 공경 심이 있어 연나라
32:50
요새는 0 영심이 없어 전부가 자기
32:53
몸을
32:54
외과 의사를 찾아 보듯이 있는
32:56
물건으로 봐 지각이 봄 음악 쉰다는
32:59
그런 님
33:01
막 그냥
33:02
6조 찾아 가지고 게 아주 뭐 뭔
33:05
증상 하시는 닿자 정 다 어이 잘
33:10
끝난후 자꾸 자기가 뭐 이런 치료를
33:13
다 해봤다는 거야 유튜브에서 이렇게
33:15
라는 1
33:18
나는 여러분들한테 얘기하지만 평생
33:21
종합 진짜 한번도 안 받고
33:24
오늘날까지 내 인생을 내가 스스로
33:28
진단하면서
33:31
조 신 우 4
33:33
병을 안 가 서로
33:35
그리고 하구요
33:37
항상 그 그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33:41
그렇게
33:43
조심하면서
33:45
자기 스스로 자기 몸을 스스로 경영해
33:49
나가는 그런 지혜를 배우는 게 인간의
33:54
내 어제는 그 지에 축척이 없이 그걸
33:57
다 의사한테 바뀌어 버려 그 인생이
34:01
공부 해 지고 체험이 없어지고
34:03
깨달음이 없어져
34:05
아예 러다가 요렇게 해서 났구나
34:07
호재가 자기가 장이 그 알고 으
34:12
아이템 끈 양 안 내 임은 지금 낮은
34:17
내일이면 저희 행함을 가서 또 곡성
34:20
을 해서 돌아 했네요
34:23
그런데 지방층이 이 강의를 하고
34:25
있잖아 내가
34:26
내가 가야 되는데 오늘 아지는 때
34:30
2인 악을 쓰고 50 매 를 쓰고
34:33
그니깐 뭐 역시 건강한 편이라고
34:36
봐야죠 공간 현영 봐야 되는데 이
34:39
건강이 뭐냐
34:40
결국은 성경이 짜 줘
34:45
성실하고 공경 된 삶을 살고 주변의
34:49
모든 것에 대해서
34:53
이 공경할 줄 알고 그것을 성 으로서
34:56
서우 로써 이해하는 거죠
34:59
그러니깐 다중 차제 우아한 없이 1
35:02
103 1년 360일 을 아루 아
35:06
지금까지 쉰다 기라 1년 365일을
35:10
집안의 모든 일이 우아한 이 없이
35:12
1년 360일 하루 아 지금 같이
35:14
실행한다 그러니깐 이제 라비
35:17
뭔가 이렇게 득도를 했다는 거 이게
35:20
처음 신주가 아니겠냐
35:22
그 여기서
35:23
해원의 밥 사상도 여기 나오는 g11
35:26
cc 먹는 음식
35:27
성경이 짜식 하네요 그래서 차차차
35:30
질문 해 나가는 거니깐 윰 배 심은
35:34
분명하나 여기 연애라는 것은 불교적
35:37
이 연회가 아니라 뭐야 성 3 의
35:40
윤회 주 성 성 3과 바뀌는걸
35:45
쉬운 의해 치 우뇌 쉬운 의 성 3
35:50
가 바뀔 워요 은혜 나올 거야
35:56
성인 세터 창조자가
35:58
바뀐다 말이야 그러니깐 어떻게 저씨
36:01
u 내심은 분명하다는 한 말이야
36:04
새로운
36:06
태평 3가 올 수 있는 다시 계획에
36:09
희망이 보인다고 희망
36:11
희망이고 있나요
36:13
어화 세상 사람들아 인해 경제 하는
36:17
말을
36:18
3 새
36:20
명찰 하운 후에 잊지 말고 지켜내 요
36:25
성지 우성 곤경에서
36:28
영이 뭐라 오세요
36:31
하나님만 구경 않습니다 아
36:34
하늘님 많은 공간은 음
36:36
중요하며 는 어
36:39
성진우 성
36:41
여기서
36:42
36:44
중용 에서 뭐 라는 점은 성지 작 성
36:48
지지 않겠 인지도 올
36:54
성자 너
36:56
동작 그 자체는 천주 독해
36:59
그러면 이 안을 배 도움방 0 2
37:02
여기 성지라 했자나 용이 성지 우성
37:06
우리 간 여기 3g 라고 했단 말이야
37:09
성 그 자체는 한우의 개리 고
37:14
서해 해질녁 5 노력하는 과정을
37:18
사람의 기자 이런 이잖아요
37:22
그러니까 는
37:23
성지 우성 공경 해서 하늘님 은
37:28
하느님만
37:30
생각하 서
37:32
하루하루 우리가 먹는 음식이
37:35
그것 자체가 하나의 영성체 라는 거죠
37:38
밥과 성령이 따로 있느냐 바 박
37:42
그것이 바로
37:44
성령이 라 박 그것이
37:47
성능이다
37:49
계속해 해야 되겠지만 은 영서 끊고
37:52
다음 시간에 마지막에 하면서 우리가
37:56
에 동경 대장
37:58
동학 논이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38:02
오늘 강의를 여기셨던 2 감사합니다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1-3) - 예장뉴스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1) - 예장뉴스
치유 화해 생명
NCCK/연합기관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1)
해방신학자의 선구자들
예장뉴스 보도부  |  webmaster@pck-goodnews.com
승인 2015.03.27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1)

해방신학자의 선구자들

▲홍인식 목사 : (장신대를 졸업하고 현대교회에서 목회)
- 파라과이 국립 아순시온 대학 경영학과 졸업. 장로회 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M. DIV.
-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ISEDET 에서 호세 미게스 보니노 박사 지도로 해방신학으로 신학박사 취득.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교수 역임. 쿠바 개신교 신학대학 교수 역임.
- 현재, 멕시코 장로교 신학대학 교수.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 이후 한국에는 해방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렇치만 우리가 거기서 배울 것과 극복할 것이 무언지를 알려면 우선은 잘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카토릭교회의 사회복음(사회선교)의 근거와 배경에 대하여 일부 카토릭 신학자들로 부터 들었습니다. 그러나 마침 우리 동문가운데 해방신학을 전공한 홍인식 목사(멕시코 장신대 교수)가 있어 개신교 학자의 눈으로 본 해방신학을 소개받으려고 합니다. 이 원고는 홍인식 교수가 “지금여기” 라는 신문사로 부터 의뢰를 받아서 집필한 것을 저자와 신문사의 허락을 받아서 다시 연재를 하게 됩니다.

지난 8월 교종 프란치스코의 한국 방문은 여러 가지 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파격적인 행동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한 종교와 종교 지도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 가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을까? 아마도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첫째는 그의 문화적 배경이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인이다. 특히 아르헨티나 사람이다.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문화는 무엇보다도 그의 친밀성과 삶의 단순성으로 특징 지워진다. 교종의 행위는 이러한 라틴 아메리카의 독특한 문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두 번째로 신학적 배경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인정되는 해방신학자는 아닐지라도 그의 신학적 배경에 해방신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시 말하면 그의 파격적인 행동을 신학적 행위로 간주할 때 그것을 우리는 해방적 신학행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한국에서 해방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은 주목해 볼 만한 현상이다. 그것을 단지 교종의 한국 방문으로 인한 일시적인 분위기로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 교회(가톨릭과 개신교를 망라하여)가 해방신학에서 나름대로 대안을 마련해보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몇 차례에 걸쳐서 해방신학에 대한 소개를 하려고 한다.

해방신학에 대한 비판이 많이 존재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해방신학을 변호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해방신학에 대한 편견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한국적 현실에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신학이 오늘의 기독교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전 세계의 많은 기독교회와 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 현재도 그 영향력을 상실하지 않고 있는 해방 신학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는 그런 의미에서 절실하다. 레네 파댜(Rene Padilla 라틴 아메리카의 통전적 선교학의 대가)에게 데이튼 로버츠(Dayton Roberts)가 물었다. “만일 당신의 제자 중 한 사람이 해방신학과 관련된 신학교에서 공부하고자 한다면 당신을 어떤 조언을 할 것인가?” 파댜는 이 질문에 “바울의 답변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분간하고 좋은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1데살 5,21-23)”라고 확신을 가지고 답변하고 있다. 해방신학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논하기 이전에 먼저 나의 해방신학과 얽힌 사연과 그리고 해방신학과의 만남에 대하여 언급함으로서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나의 해방신학과의 만남
나를 잘 알고 있는 어떤 분이 나에 대하여 글을 쓴 적이 있다. 지면을 통하여 나를 잘 소개하면서 칭찬을 하였다. 그런데 그 글에 댓글이 달렸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해방신학을 한 사람이라.....” 또 이런 일도 있었다. 한 번은 한국의 대도시에 있는 어떤 교회의 담임목사 청빙에 응했다. 그리고 마지막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면담을 했다. 그들은 나에게 가진 자, 그리고 높은 사람들을 위한 목회가 아니라 소외되고 가난하고 낮은 자리에 있는 교인들을 위한 목회를 해 달라고 주문한다. 그래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다음 질문을 한다. “해방신학을 하셨네요....” 나는 답변했다. “바로 해방신학이 나로 하여금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자리를 향한 목회를 하도록 만들었다”고. 그리고 나는 그 교회 담임목사 청빙에 실패했다.

내가 해방신학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1982년 파라과이에서였다.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나의 눈에 한 책의 제목이 들어왔다 “해방신학”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당시 파라과이는 극심한 군사독재의 학정 밑에서 민중들이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억압을 받고 있었다. 암울한 시절에 나는 ‘벗어남’에 상당히 목말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해방, 그것은 얼마나 시원한 단어였던지! 주저 없이 책을 구입하고 단숨에 읽어 나갔다. 그 책이 바로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이었다. 스페인어 원어의 제목은 “해방신학: 그의 전망에 대하여”였다.

구티에레스의 저서는 나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그때의 희열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후 나는 한국으로 유학을 와서 장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1991년 다시 파라과이로 돌아갔다. 파라과이에서 2년 정도를 선교사로 사역한 이후 나는 본격적으로 라틴 아메리카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단했다. 정보를 탐색해 본 결과 아르헨티나에 이세뎃(ISEDET)이라는 개신교 해방신학의 산실인 신학대학이 있었고 거기에 후일 나의 스승인 되신 고 호세 미게스 보니노(Jose Miguez Bonino) 박사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나는 그 길로 아르헨티나로 날아가서 그의 집을 방문하고 가르침을 청하였고 그 후 아르헨티나로 거처를 옮겨 이세뎃에서 미게스 보니노 선생님의 지도로 해방신학을 공부할 수 있었고 학위를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1982년 우연히 시작되었던 해방신학과 나의 인연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 해방신학과의 만남은 나의 삶을 변화시켰고 나로 하여금 진정한 믿음의 길이 무엇인가를 늘 추구하도록 만들었다. 해방신학이 나의 삶에 있어서 주홍글씨로 남아 많은 경우 어려운 일과 오해도 겪기는 했지만 해방신학은 나의 삶에서 전환점을 마련해 준 신학이다. 이제 몇 번에 걸쳐서 독자들과 함께 해방신학을 향한 여행길에 나서고자 한다.

해방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무엇보다도 그의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사건과의 연계성일 것이다. 1960년대 라틴아메리카는 극심한 이농현상을 경험한다. 많은 농촌인구가 대도시로의 유입했다. 이러한 현상으로 대도시 내에 대규모 빈민촌이 급격히 형성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들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사역을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사역의 현장에서 그들은 많은 질문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문제에 대하여 성서적 그리고 신학적 성찰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해방신학이 태동하게 되는 상황이 형성된다. 해방신학은 무엇보다도 먼저 삶의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성찰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 문제를 가슴에 품고 하는 행위로부터 시작된다. 해방신학은 역사의 현장과 그 삶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해방신학이 1968년 콜롬비아 메데인(Colombia, Medellin)에서 개최되었던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 II)에서 발표된 문서와 1971년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errez)의 저서, '해방신학'의 발간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해방신학의 역사는 그의 본격적인 시작을 위한 훨씬 이전의 역사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오늘의 해방신학 이야기를 해방신학의 태동을 전제로 한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을 언급할 것이다.

해방신학을 낳은 두 가지 사건
첫 번째는 1511년 12월 21일 도미니코회 안토니오 몬테시노(Antonio Montesino) 신부의 강론이다. 안토니오 신부는 신대륙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인디오들의 고통과 아픔에 민감한 모습을 보이면서 그들을 위한 선교 사역을 펼쳐나가게 된다. 안토니오 신부를 비롯한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신부들은 신대륙에서 벌어지는 인디오들에 대한 학살과 착취 현장을 목격하고 이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사역을 펼치게 된다.

그는 1511년 12월 21일 대림절 제4 주간의 강론에서 요한복음 1장 23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라고 규정하면서 강론을 시작한다. "여러분들은 죽음에 이르게 되는 죄악 속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죄 없고 순진한 사람들에게 행한 폭행과 잔악한 행위로 말미암은 죄 속에서 살고 있고 그 죄로 인하여 죽고 말 것입니다. 당신들은 도대체 어떤 권리와 정의로 순진한 인디오들을 노예로 삼고 잔악한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 무슨 권한으로 평화롭고 순전하게 자신들의 땅에서 살아가고 있던 이들을 향하여 전쟁을 하고 그들의 무고한 목숨을 빼앗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이 일을 계속한다면 여러분들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안토니오 몬테시노 신부의 강론은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 1474-1566)를 감동하게 만들었고 그 후 그는 스페인 사람들이 ‘인디오’라고 부르던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자행한 학살과 참상을 고발하고 ‘그들도 하느님의 자비 안에 있는 인간’임을 선포한 예언자로 살아갔다. 해방신학은 이러한 안토니오 몬테시노 신부와 라스 카사스 주교가 선택했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오늘의 삶의 현장에서 우선적으로 다시 선택했던 신학적 성찰이라고 볼 수 있다.

   
화형당하는 아투에이 추장.(사진 출처=de.wikipedia.org)

두 번째는 아투에이(Hatuey) 추장 사건이다. 아투에이는 에스파뇰라 섬(지금의 도미니카공화국)의 타이노(Taino) 부족의 추장이었다. 그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섬에 쳐들어오자 부족 사람들을 결집시켜 용맹스러운 투쟁을 벌인다. 그러나 잘 훈련된 스페인 군인들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그의 부족은 전멸하게 되고 그는 수백 명의 남은 타이노 부족 사람들과 함께 쿠바로 피신하게 된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스페인 정복자들과 전쟁을 벌이게 되고 1512년 2월 2일 결국 그는 사로잡혀 화형을 당한다.

사형이 집행되기 바로 직전 그는 스페인 가톨릭의 종군 신부로부터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고 천국으로 갈 것”을 제의 받는다. 잠시 생각한 후에 그는 신부에게 되묻는다. “여기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사람들, 아무런 잘못한 것이 없는 나의 가족을 겁탈하고 그리고 나의 온 재산을 빼앗고 가축들을 탈취해 간 이 군인들도 천국을 가는가?” 신부는“당연히 이들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으니 천국에 간다.”라고 답변한다.

아투에이는 즉시 “그렇다면 나는 그런 천국에는 가지 않겠다. 그것은 천국이 아니다. 이들이 없는 지옥이 바로 천국이다.”라는 말과 함께 산 채로 화형을 당한다.

많은 해방신학자들은 아투에이의 사건을 해방신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Luis Rivera Pagán, "A violent evangelism: the political and religious conquest of the Americas",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2.) 이 같은 아투에이의 천국과 구원에 대한 이해를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의 첫 번째 신학적 해석행위라고 간주하고 있다. 해방신학은 아투에이와 같이 거대한 권력과 힘 앞에 쓰러져가면서도 당당하게 저항의 정신을 놓치지 않고 살아갔던 억눌리고 가난하고 착취당하던 민중들의 의식과 행위[praxis]를 오늘의 상황에서 되살린 신학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관련기사]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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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2)해방신학자의 선구자들
편집위원 | oikos78@msn.com

승인 2015.03.23


해방신학자의 선구자들(2)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

1968년 메데인 주교 회의 뒤 본격 등장하기 시작한 해방신학은 많은 선구자의 적극적인 헌신을 통하여 점차 라틴아메리카에서 신앙과 신학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전 세계적으로 확장시켜 나가게 된다. 본 글에서는 몇 차례에 걸쳐서 해방신학의 선구자들, 특히 제1세대 신학자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 선구자들의 신학은 학문의 세계를 넘어서서 삶의 고난의 현장과 직접 연결됨으로 인하여 우리들에게 더욱 더 큰 감동을 주고 있기도 하다. 본 글에서는 이 선구자들의 신학 사상에 대하여 간결하게 소개할 것이다.

1.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errez)


▲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구티에레스는 해방신학의 아버지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928년 페루에서 태어났다. 그는 1971년 '해방신학'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함으로써 해방신학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의 가난의 문제는 가난의 현실을 조장하고 있는 불의한 사회체제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문제는 소수의 사람들이 부를 장악하고 있는 데서 발생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이러한 구티에레스의 사회적 분석적 생각이 가톨릭교회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톨릭교회가 해방신학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박해하게 된 것은 구티에레스를 비롯한 해방신학자들의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성서를 해석하자"는 주장이다. 성서의 해석권은 오직 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해방신학자들의 이 같은 주장은 용납될 수 없었다.

구티에레스는 해방신학은 유럽의 진보신학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유럽의 전통적인 진보신학과 해방신학의 차이는 둘 사이에 존재하는 신적 차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두 신학사이의 정치적 결별을 의미한다. 이것 없이 온전하게 해방신학을 이해 할 수 없다. 해방신학은 지금까지 역사의 부재자로 살아갔던 가난한 사람들의 전망에서 신학을 하자는 주장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우리의 신학적 질문은 "지금까지 인간으로 취급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느님이 사랑의 하느님이시며 또 그 사랑이 우리 모두를 형제자매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선포할 수 있느냐" 에 집중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오늘 신학의 문제는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가 아니라 억압자와 피억압자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주장을 통하여 지금까지 역사의 주체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가난한 사람들을 역사적 해방의 주체로 인식하며 신학을 하는 것이 해방신학의 정체성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2. 후벵 아우베스(Ruben Alves)
후벵 아우베스는 브라질 장로교 소속 목사다. 그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통하여 당시의 주류 신학의 신학적 언어에 대해 비판하면서 새로운 신학방법론을 제시했였다. 그는 1970년 출간된 “종교, 아편 혹은 해방의 도구인가?”라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근간으로 한 저서와 같은 해 발표한 “신학의 재건 프로그램을 위한 단상”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신학언어에 대한 비평을 출발점으로 하여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새로운 경험을 분석한다. 다시 말하면 이 지역이 경험하고 있는 저개발과 종속의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경험으로 출발하여 후벵 아우베스는 새롭게 등장하는 신학의 언어를 정치적 인간주의적 언어(Political Humanism)라고 부른다. 그는 지금까지의 신학언어는 초월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역사와 반대되거나 혹은 역사를 넘어서는 초월적이며 추상적인 언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짐으로서 오직 초월의 세계만을 향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그에게 인간은 역사를 초월하는 존재이기에 역사 안에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존재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적 초월성은 '미래창조'를 향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세계의 변혁을 위한 부름은 "저 너머 세계의 성격"이 아니라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초월성은 역사적 성격을 지녀야 하며 신학은 최종적으로 인간을 향하여 존재하고 궁극적으로는 이 땅의 변혁 안에서 그의 미래를 형성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 같은 신학적 생각은 당시 브라질 개신교 특히 장로교 내에서 매우 급진적이며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급기야 장로교 목사직을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는 브라질 장로교 내에서 설교를 금지 당했다. 해방신학자로서 그에게 가장 시급하고 우선적인 신학적 과제는 이 땅위에서의 정의 실현에 대한 관심이었으며 하느님, 영혼, 구원, 그리고 영원의 세계는 부차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브라질 장로교 목사로서 해방적 새로운 신학 언어를 전파하던 그는 2014년 7월 81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3. 레오나르두 보프(Leonardo Boff)


▲ 레오나르두 보프.(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보프는 1928년 브라질 콩코르지아에서 태어난다. 그는 1959년 박사학위 취득 후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들어간다. 그는 60권 이상의 저서를 발간하였으며 미국과 유럽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현재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주립대학 명예교수다. 그는 1984년 "교회, 카리스마와 권력"이라는 저서를 출간한 이후 그 내용으로 인하여 바티칸에 불려간다. 그리고 그는 신앙교리성의 재판을 받게 되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 당시 보프는 수백 년 전 갈릴레이가 재판 받을 당시 앉았던 의자에 앉아서 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이 재판에서 일 년간의 저서 출간 금지와 교수 금지라는 침묵의 징계를 받는다. 국제여론에 밀려 침묵의 징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 한다. 그럼에도 교황청은 지속적으로 보프를 탄압하고, 이에 그는 1992년 사제직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는 사제직을 던지면서 세계의 모든 친구들에게 보낸 공개서한 "해방여정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 동지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전쟁을 그만 두는 것은 아니다. 단지 참호만을 바꾸는 것이다. 투쟁은 계속된다"라고 말한다. 현재 보프는 생태신학에 집중하고 있다. 그는 지금도 리우데자네이루 시 근교에서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해방신학과 생태신학에 대한 연구와 저술을 계속하고 있다.

4. 호세 콤블린(Jose Comblin)
콤블린은 1923년 벨기에서 태어난다. 그는 1947년 사제로 서품을 받았으며 1950년 로바이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1958년 라틴아메리카 대륙으로 사목의 현장을 옮긴다. 그는 2011년 사망하기 전까지 칠레와 브라질에서 사목을 이어간다. 그는 1970년대 해방신학의 태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그 스스로가 해방신학자로서 라틴아메리카 신학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콤블린은 1958년 사제가 부족한 라틴아메리카에서 사목활동을 할 것을 당부하는 당시 교종 비오 12세의 요청에 따라 브라질로 간다.

▲ 호세 콤블린.(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그는 처음에 캄피나스 지역에서 교수로서 그의 사목을 시작하는데 곧 바로 가톨릭 청년노동 사목에 참여한다. 그는 칠레로 이동하는 1962년까지 그곳에서 머물며 도미니코 수도회의 신학교에서 가르친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중에 후일 해방신학자로 활동하게 되는 프레이 베토와 프레이 티토가 당시 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3년을 칠레에 머문 뒤 1965년 동 에우데르 카마라 주교의 요청을 받아들여 헤시피 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위하여 다시 브라질로 돌아온다. 그의 해방신학적 생각은 당시 브라질 군사정부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지목당했으며 결국 그는 1971년 체포되어 추방당한다.

브라질 군사정권에 의해 추방당한 그는 그 뒤 7년을 칠레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그러나 또 다시 칠레의 피노체트 군사정권에 의해서 칠레에서도 추방당하는 탄압을 당한다. 1979년 브라질로 다시 돌아온 그가 체류비자가 아닌 관광비자로 입국하였기 때문에 매번 3개월마다 인접국가로 출국했다가 다시 입국하면서 활동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헤시피의 동 에우데르 카마라 주교의 협력자로서 활동하였으며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평생의 삶을 바친 철저하며 진정한 해방신학자였다.

평상시 심장병을 앓고 있던 그는 2011년 88살의 나이로 브라질 북부지방의 기초공동체를 방문하여 성경공부를 인도하던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바로 그 순간까지 가난한 사람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콤블린은 진정한 예수의 제자의 삶을 산 해방신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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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3)해방신학과 의식화 교육
예장뉴스 보도부 | webmaster@pck-goodnews.com

승인 2015.05.11 


해방신학과 의식화 교육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3)

파울루 프레이리


오늘은 해방신학 세 번째 이야기로서 잠시 해방신학의 탄생에 관한 역사적 관찰을 중지하고 해방신학의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브라질의 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의 "의식화 교육"에 대하여 두 번에 걸쳐 알아보려고 한다.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는 누구인가?
그는 브라질 북부 지역인 헤시피(Recife)에서 1921년 9월 19일 태어났다. 그는 부모님, 다섯 형제들과 매우 화목하고 사랑이 가득한 가정에서 성장한다. 그의 부모는 그와 그의 자녀들을 매우 신앙적으로 양육했으며 십자가는 그의 어린 시절에 매우 강력한 상징으로 남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헤시피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다. 그 후 1960년 헤시피 대학에서 철학과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1962년 페르남부쿠 주 교육청 상담관으로 일하던 그는 1964년 그의 급진적인 교육학으로 인하여 교육청에서 해임되고 살해 위협 속에서 볼리비아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망명지인 볼리비아에서 군사정권이 수립되자 그는 또 다시 칠레로 망명한다. 그는 칠레에서 1964년부터 1969년까지 거주하는데 그 시기에 칠레 교육부 농촌개발원의 상담 고문과 유네스코의 고문관으로 재직한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하버드 대학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했으며 제네바 대학의 교육학 교수로 교육학을 가르친다. 1970-79년에는 유럽으로부터 방금 독립한 아프리카의 여러 신생국의 교육 고문관으로 활동하면서 신생국가의 교육 시스템 정착에 많은 도움을 준다. 1977년 오랜 망명 생활을 마치고 고국인 브라질로 귀환한 그는 계속해서 그의 해방 교육을 가르치고 실천한다. 1989년, 그는 상파울루 시 교육청장으로 재직한다. 그는 1997년 4월 10일 마지막 저서인 “자아결정의 교육학”을 발간하고 같은 해 5월 2일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역사적 상황에 대하여
프레이리의 저술이 처음으로 나오게 된 당시는 정치적 상황이 매우 어지럽게 전개되고 있었던 시절이다. 그 시절은 라틴아메리카 민중들 사이에서 “계급투쟁”이 점차 힘을 얻어 가고 있던 시기였다. 프레이리의 교육학에서 주장하는 이론과 또 그것이 정치 사회 신학과 교육에 미쳤던 영향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당시의 상황에 대한 전 이해는 필수적이다.

라틴아메리카의 1960대와 70년대는 역사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쿠바 혁명의 성공(1959-61),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의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의 수립(1962, 쿠바), 좌익 계열의 노동조합의 형성과 발전, 좌익 정당의 출현, 민중들의 정치적 역량의 증대는 당시의 라틴아메리카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으로 고무된 라틴아메리카의 급진적인 민중운동에 대한 견제와 반발로서 케네디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발전을 위한 연합 계획”이 시작되었음도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 계획은 라틴아메리카의 경제, 정치, 교육 발전을 위하여 괄목할 만한 경제, 금융 지원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 계획은 두 가지 면에서 주목을 받았다. 첫째는 전통적 지주에게 집중된 토지와 권력의 분산과 지역 농업의 상업적 성장을 위한 토지 개혁에 대한 지원이다. 두 번째는 수입 확장과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다국적 기업의 진출을 통한 공업의 발전과 다양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의 실현은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지배구조 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편 쿠바 혁명 등으로 민중정치에 대한 꿈이 현실로 점차 드러나자 전통적 지배계층은 1960년대와 70년대의 군사반란을 통한 집권을 통하여 구질서의 회복을 도모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으로 이러한 전통적 지배계층의 움직임은 라틴아메리카 민중운동의 확산에 자극제로 작용하기도 했다. 교육적인 면에서는 지금까지 “침묵의 문화”에 젖어 있었던 잠자는 민중을 깨우기 위한 교육 방법론에 눈을 뜬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라틴 아메리카 교육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실증주의와 실용주의적 교육에 반하여 교육을 해방적 실천과 연결시키고 있는 프레이리의 교육학적 제안은 당시의 민중운동가들과 진보적 교육가들에게는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프레이리의 교육학이 억압 받는 자, 잊혀진 자를 교육의 주체자로 삼고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이렇게 1960년대와 70년대의 라틴아메리카는 프레이리의 해방교육의 탄생과 수용에 있어서 매우 적합한 시대적 환경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 정치, 사회, 경제적 현실에서 프레이리의 해방교육은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진보교육계에서는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런 정치 상황과 더불어 프레이리의 해방 교육학의 형성과 발전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당시 가톨릭교회의 움직임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 1959년 브라질에서 개최된 제1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촉발된 가톨릭교회 내부의 변화 움직임은 프레이리의 교육학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로 인하여 1968년 메데인에서 개최된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는 교육의 목적에 있어서 획기적인 주장을 한 프레이리의 교육학을 상당 부분 채택한다. 초기 해방신학의 형성에서 프레이리의 해방교육학이 미친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프레이리 교육학의 내용을 언급할 것이다.

△홍인식 목사
파라과이 국립아순시온대학 경영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M. DIV.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에서 호세 미게스 보니노 박사 지도로 해방신학으로 신학박사 취득.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교수 역임. 쿠바 개신교신학대학 교수 역임.
현재 멕시코 장로교신학대학 교수.

“하나님 ‘떠나라’ 목소리 들릴 때마다 뒤돌아보지 않았죠” : 조현이만난사람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하나님 ‘떠나라’ 목소리 들릴 때마다 뒤돌아보지 않았죠” : 조현이만난사람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하나님 ‘떠나라’ 목소리 들릴 때마다 뒤돌아보지 않았죠”
등록 :2021-10-10 
조현 기자 

[짬] 자전 에세이 펴낸 홍인식 목사

지난해 순천중앙교회 담임을 사퇴하고 목회 현장을 은퇴한 홍인식 목사가 지난 6일 인터뷰에서 자전적 신앙고백서 <엘 까미난떼>를 쓴 이유를 말하고 있다.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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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식(65) 목사는 밝고 명랑하고 솔직한 성격으로 유명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센터 이사장으로서 차별금지법 폐지를 주장해도, 보수 목사들조차 명랑한 그의 얼굴을 보면 험한 말을 접기 일쑤다. 인생 대부분의 시기를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쿠바, 칠레, 멕시코, 한국 등을 떠돌며 산 방랑자의 낭만과 자유와 여유를 대하면 상대방도 완고한 무장이 해제되기 마련이다. 최근 스페인어로 ‘걷는 자’란 뜻의 책 <엘 까미난떼>(신앙과지성사 펴냄)에서 명랑한 겉모습과 달리 아픈 어린 시절까지 고백한 그를 지난 6일 서울 공덕동의 한 교회 카페에서 만났다.
스페인어 걷는 자 ‘엘 까미난떼’ 출간
부모 이혼·더부살이·남미 이민 등
성공·부자 갈망했던 성장기 아픔 첫 고백
한국인 최초 ‘해방신학’ 박사학위 받아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쿠바 칠레 등등
10차례 ‘꽃방석’ 자리 버리고 자유롭게
신앙과지성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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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목사는 20대 때 신학대학원생들이라면 누구나 선망했던 영락교회에 전도사로 들어갔다. 이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주목받던 한인교회에서, 50대엔 서광선 이화여대 교수·한완상 서울대 교수·이삼열 숭실대 교수 등이 활동했던 서울 압구정동 현대교회에서, 올 초까지는 전남 순천의 장자교회인 순천중앙교회에서 각각 목회 활동을 했다. 그는 그런 ‘꽃방석’을 언제나 임기나 정년도 채우지 않고 박차고 나갔다. 지위에도 돈에도 매이지 않고 언제나 떠났다. 그쯤은 놓고 떠나도 뭔가 유복한 뒷배경이 있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가 생애 처음으로 <엘 까미난떼>에서 고백한 삶은 ‘유복’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초등학교 1학년인 만 7살 때 부모가 이혼했다. “짐을 싸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아빠 집으로 옮겼다. 엄마 집을 떠나는 차에서 동화 <헨젤과 그레텔>을 떠올리며 조약돌로 표시도 해놓지 않았는데 어떻게 엄마 집을 다시 찾아올 수 있을지 고민하며 길을 잃지 않으려 뇌리에 박았던 창 밖 풍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아빠가 새엄마와도 이혼해 다시 짐을 쌌다. 옮긴 곳은 아빠를 ‘오빠’라 불렀으나 혈육은 아닌 ‘고모’의 집이었다. 그곳에서 더부살이 5년을 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학비를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20일간 등교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전교 1·2등을 했지만 학교에서 쫓겨나던 날의 설움과 모욕감을 잊을 수 없다. 그는 고교 2학년 때 어머니·누나·여동생과 함께 파라과이로 농업 이민을 떠났다. 가난을 벗어나려 고국을 떠나는 날, 너무도 울어서 앞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도 기어코 성공해서 가난에 보복하겠다는 마음만은 굳건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파라과이에서 고교를 다니며 옷행상과 옷가게를 했고, 아순시온국립대학 경영학과에서 성공과 부자의 꿈을 키웠다.

그런 그가 한국인 최초의 ‘해방신학’ 목사가 됐다. 해방신학은 혼자 잘 사는 길을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는 삶을 위한 선택이었다. 1960년대 이래 남미에서 독재자들과 다국적기업의 부도덕에 맞서 로메로 주교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를 낸 게 해방신학이었다. 그래서 해방공간 북에서 공산당에 의해 박해받고 남하해 친미·친독재의 길을 걷던 월남자들이 세운 영락교회를 비롯한 주류 교회의 보수적 크리스천들에 의해 민중신학, 해방신학을 비롯한 진보는 ‘빨갱이’로 매도당하기 일쑤였다. 북한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땅과 재산을 빼앗기고 남하한 아버지를 둔 그가 영락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해방신학자가 되리라곤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나님의 음성을 거부할 수 없었다.” 홍 목사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해방신학과 달리 마치 성령론자처럼 고백했다. 파라과이 한인교회의 환송을 받으며 “목사가 되어 다시 남미로 돌아오겠다”고 했던 그는 10년 만에 돌아온 고국에서 장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대형교회인 영락교회 전도사가 되었다. 교인들을 심방할 때마다 신자들이 여비 봉투를 줘서 주머니는 늘 두둑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 짝사랑했던 여성과 결혼해 ‘토끼 같은’ 아이들까지 생겼다. 가난한 파라과이로 돌아간다는 약속 같은 건 곧 잊혀졌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 미아리 산동네에서 할머니 권사가 봉투도 없이 꼬깃꼬깃한 5천원 지폐를 주었다. 마지못해 받긴 했지만 ‘내가 거지인가. 이따위 적은 돈을 주다니’ 하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 순간 머릿속에 뚜렷한 음성이 들렸다. ‘이가봇, 내가 너를 떠났다’는 성경 구절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고 떠났다는 소리에, 하나님이 아닌 봉투를 믿는 나를 발견하고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 뒤 그는 짐을 싸 파라과이로 떠났다. 그곳에서 목회를 하다 몇년 뒤 아르헨티나로 옮겨 목회를 했다. 거기서 체 게바라의 친구인 세계적인 개신교 해방신학자 호세 미게스 보니노를 스승으로 모시고 해방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교수 겸 목사로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잘 나가는 신성교회 담임을 할 때였다. 200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미주한인장로교총회에 참석했을 때 한 지인이 그를 처음 만나는 목사에게 “아르헨티나에서 온 홍인식 목사님입니다”라고 소개했다.

“‘내가 그냥 목사인가.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큰 한인교회 목사고, 박사에 교수까지 하고 있는 성공한 목사라고 소개해야지, 그따위로 소개하다니’란 생각에 불쾌해하며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다시 ‘떠나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신성교회를 떠나 남미에서도 가장 열악한 공산국가 쿠바로 가 5년간 신학대학 교수를 했다. 이후 칠레에서도, 서울 현대교회에서도, 멕시코 신학대에서도, 전남 순천중앙교회에서도 기득권을 버리고 떠났다. 무려 10차례 뒤돌아보지 않고 ‘엘 까미난떼’가 됐던 그는 말했다.

“‘신이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신을 믿느냐’가 문제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돈, 지위, 이데올로기, 명예를 믿은 건 아닌지…. 남미에서 평생 가난한 자, 핍박받는 자와 함께하며 군부 독재자에게 죽임까지 당하는 해방신학자에 비하면 나는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well/people/1014602.html#csidx437a30502bac4d28b0e97a62be9b3f1 

우리에게 영웅이 필요할까? (영웅에서 벗어나기) / 홍인식

우리에게 영웅이 필요할까? (영웅에서 벗어나기) / 홍인식



우리에게 영웅이 필요할까? (영웅에서 벗어나기) / 홍인식
사건과 신학 2021. 10. 1. 12:07








홍인식(NCCK 신학위원,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영웅’이라는 단어는 많은 경우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영웅’은 우리 삶의 모델이기도 하며 목표가 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의 역사는 ‘영웅’들을 요구하였고 또한 그들을 필요로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우리는 ‘영웅’을 세우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만들기도 하였다. 어찌 보면 인류의 역사는 영웅의 역사라고 불러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이처럼 우리의 역사는 수많은 영웅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성경도 예외는 아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영웅 이야기’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이다. 우리가 교회교육을 통하여 성경에 대해 배운 것은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측면에서도 ‘영웅’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의 성경 지식이 ‘영웅’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이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노아를 건너 아브라함을 거친다. 이삭과 야곱 그리고 마침내 요셉의 이야기에 도달한다. 꿈꾸는 자, 요셉은 모든 학부모의 기도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모세, 그는 잊을 수 없는 역사의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사울이라는 ‘영웅’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절대 따라서는 안 될 ‘영웅’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사울에 비해 다윗은 어떠한가? 다윗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큰 영웅’이다. 인류의 역사는 이처럼 큰 ‘영웅’들에 의해 지배되었고 ‘영웅’은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영웅’은 우리의 삶에 의미와 에너지를 제공해 준다. ‘영웅’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영웅’ 없는 시대는 상상할 수 없고 또 다른 의미에서 ‘영웅’ 부재 현상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아직도 ‘영웅’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는가? 오늘 우리에게 영웅이 필요할까?

나는 얼마 전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민중들을 위해서 일하고 싸운다고 한다. 그런데 남는 것은 없다. 아무것도 변하거나 나아진 것은 없다. 오직 남는 것은 소위 ‘영웅’들뿐이다. 슈바이처는 ‘영웅’으로 남아 있지만, 아프리카 토착민의 삶은 여전하다. ‘영웅’이 되지 않아야 하는데. 지하철 타고 출근하면서 문득 객차 안 창가에 걸려있는 한 ‘영웅’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천사는 더 천사 되고 밥 얻어먹는 사람은 오늘도 밥을 얻어먹고 산다.”

‘영웅’은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왔다. 그런데 화려한 ‘영웅’이 사라진 뒷자리는 어떠한가? ‘영웅’이 이끌어 온 역사는 어디를 향하여 흘러갔는가? 나는 수십 년을 라틴아메리카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해방신학을 공부하면서 실천적인 삶을 살고자 노력해왔다. 해방신학은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신학운동이다. 1968년 콜롬비아의 메델린에서 개최된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해방신학은 70~80년대를 지나면서 혹독한 박해와 시련에 시달리며 수많은 순교자를 양산한 ‘탄압받는’ 신학의 대명사였다. 억압적이고 불의한 권력에 의해 목숨을 잃은 수많은 순교자(영웅)들이 나타났다. 순교자뿐인가? 이름만 들어도 우리 모두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학자들을 배출했다. 20세기에 출현한 신학 중에서 해방신학보다 더 많은 순교자와 유명한 학자들을 배출한 신학운동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해방신학이 출현한 지 50년이 넘은 이 순간에 라틴아메리카의 억압받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어떠한가? 달라진 것이 없다. 오히려 50년 전부터 가난은 고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명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희망조차 완벽하게 사라진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여기에 해방신학자로서의 고민이 있다. 해방신학의 영웅들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해방신학이 억눌리고 가난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면서 시작되었고 또 가난한 사람들의 역사적 위력과 구원의 주체 세력을 인정하고 있지만, 과연 실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주체적인 위치에서 그들의 역사적 위력을 발휘하였는가는 의문이 남지 않을 수 없다. 라틴아메리카 역사에서도 단 한 번도 가난한 사람들이 역사적 주체로서 힘을 발휘한 적이 없다. 라틴아메리카 각국의 독립은 스페인 귀족의 후예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왜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역사가 ‘영웅’ 이야기로 변질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 영웅이 필요할까?

최근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몇몇 유력 후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들 후보들은 한결같이 청년세대들을 위한 정책을 발표한다. 위기에 처한 젊은 세대들을 구원(?)할 사람은 오직 자신 만이라고 강조한다. 이들의 정책과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신이 청년세대를 위한 영웅이 되겠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영웅) 자신을 선택한 (젊은) 사람들을 ‘영웅’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영웅적인(?) 제안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젊은이들은 영웅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오늘도 젊은이들이 영웅에 열광하고 있을까?

오늘의 상황에서 영웅의 존재는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첫째는 우리는 영웅을 찾고 그를 보면서 위안을 갖는다. 어떤 면에서 영웅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의 사회가 바라보고 있는 영웅은 대체로 소비적인 문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운동선수, 연예인 그리고 성공한 전문가들의 면면은 소비적 문화를 대변하고 있다. 이러한 영웅들은 고소득과 높은 인기 그리고 세련된 일상과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이 제시하는 환상과 꿈은 막연하다. 오히려 그것은 장 보드리야르(프랑스어: Jean Baudrillard, 1929~2007)가 지적했던 《치명적인 전략》 (Stratégies fatales, 1983)이 될 가능성이 많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상품을 소비하면서 상품을 지위, 품위를 상징하는 기호(記號)로 받아들인다. 기호와 소비는 개별적인 욕구를 넘어서 사회의 욕망체계를 반영하며 우리는 그 안에 매몰되고 결국현실은 시뮬라크르 현상으로 변질되고 만다. 이제 시뮬라크르는 실재보다 더 실재가 된다. 이 영웅들은 현실 변화에 관한 비전을 빼앗아 버린다. 영웅은 젊은이를 비롯한 우리 모두를 ‘가상의 현실’ 안의 ‘가상의 나’로 만든다. 소비적 영웅은 오히려 우리에게서 꿈을 빼앗는다. 치명적 전략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웅이 아니라 오히려 영웅으로부터 벗어남이 아닐까?

두 번째로 오늘의 소비사회에서 진정한 영웅은 누구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소비적 영웅에 의한 가상현실에 매몰되어 가는 오늘의 사회에서 드물지 않게 또 다른 형태의 ‘영웅 찾기’가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의 양극화가 심각해지고 기후위기로 전 우주적 파멸을 눈앞에 두고 있는 오늘의 인류사회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는 삶을 사는 작은(?) 영웅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 영웅들은 우리에게 미래를 향한 작은 희망과 비전을 보여주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에서 적은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작은 영웅들을 주변에서 찾아보는 것은 매우 유익할 것이다. 이 영웅들은 코로나19로 인해 지칠대로 지치고 희망을 상실해 가고 있는 우리에게 희망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내 주변에는 어떤 영웅들이 있을까를 살펴보자. 그리고 희망과 용기를 갖고 미래를 향하여 오늘의 삶의 발걸음을 내디뎌 보자.

그러나 결국 삶의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주체는 ‘나 자신’이다. 진정한 영웅을 찾아 그를 따라 나서는 것도 좋겠지만 오히려 영웅을 넘어서 ‘나 자신’을 찾는 ‘영웅 벗어나기’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시뮬라크르를 극복하고 온전한 현실에 근거하는 삶의 세계를 향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를 영웅에서 벗어나서 내자신 안에 있는 진정한 영웅을 발견하게 만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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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레이드 장로교회] 소요리문답 해설 1부 1과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

 소요리문답 해설 1부 1과^사람의 제일목적


1: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애들레이드 장로교회]

: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1) 그를 영원토록 즐거 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4:11).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73:25, 26)



I. 세상과 인간의 기원(존재 이유) 대한 답을 어디서 얻을까? 

1) 답은 창조주만이 있습니다.

이 우주만물의 존재의 이유를 말해 줄 수 있는 또 다른 존재는 누구인가?

우리 생명의 발생의 원인을 말해 줄 수 있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사람들은 그 답을 찾기 위하여 무척이나 노력하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인간의 편에서 나온 최고의 답은 모든 것이 우연이라는 답입니다.

우연히 진화되어 환경에 적응하다보니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고, 결국 모든 존재의 이유는 "우연"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하게되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창조주가 계시고, 그 창조주는 인격과 지성을 가지고 있음을 밝히십니다.

이 세상은 그의 지성과 인격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그의 완전한 목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지요. 특별히 하나님은 모든 만물 중에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니까 만물의 존재 이유, 특히 인간의 삶의 목적은 인간 속에서 발견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를 창조하신 분만이 답을 주실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

그 창조주의 계시인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이 원래 하나님의 참된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자기 중심보다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도록 지음 받았다고 밝히십니다.

죄가 만물을 파멸시키기 전, 인간의 유일한 생각과 욕망은 하나님을 섬기며 그 분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아담이 처음 하나님을 거슬러 범죄했을 그때, 모든 것은 변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놀라우신 분이신가를 생각하는 대신에 자신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은 그 자신이 위대해질 수 있다면 무엇과 같이 될 것이며, 얼마나 그 자신을 즐길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삶의 모든 활동이 하나님을 섬기고, 그를 즐거워하는 가운데 수행되어 졌던 삶이 이제는 삶의 모든 활동이 자신을 섬기고 즐거워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두 상태의 차이를 보도록 합시다.


[그림 A]는 창조된 본래의 인간 (아담)을 나타냅니다.

이 그림은 삶의 모든 활동이 하나님을 섬기고, 그를 즐거워하는 가운데 수행되어짐을 보여 줍니다.

 [그림 B] 죄 중에서 살고 있는 타락한 인간을 나타냅니다. 이 그림은 삶의 모든 활동이 자신을 섬기고 즐거워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3) 이타적으로 사는 같지만 결국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면서 사는 인본주의적

[그림B]의 설명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그를 즐거워하기 위해 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지만 그래도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어떤 이상이나 철학을 구현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닌 듯한 여러 가지 일들에 헌신합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은 국방을 위해 헌신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철학적 이상이나 민족 해방, 가난자의 구제 등을 위해 헌신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인류의 행복을 추구할 것입니다.

최대 다수를 위한 최대 유익의 공리주의적인 철학을 실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인류의 행복을 추구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최대 다수를 위한 최대 유익이 란 사상으로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것 역시 [그림 B]에서 볼 수 있는 동일한 개념의 삶인 것은, 그것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인간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주된 목적이 사람의 유익을 추구하는 자는 실제로 그는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자이니 이는 그도 역시 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자들은 다만 진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 신자들 뿐입니다.

삶의 주된 목적이 사람의 유익을 추구하는 자는 실제로 그는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자이니 이는 그도 역시 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음으로 마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실상은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그를 즐거워하기 위해 살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4) 성경은 우리의 삶의 창조의 목적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그러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누가 이 원래의 창조 목적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요?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이해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 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자들은 다만 진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 신자들 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신이라 부를 수 있지만,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가 있는 이유입니다.

II.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자연과 인간의 차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미 충분히 영광스러우신 분이기에 우리가 그를 더욱 영화롭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우상은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데로 멋있게 꾸미기도 하고, 높이 올려 놓기도 함으로써 더 영광스럽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하나님을 영화롭게 만든다.”란 뜻이 아닙니다. 이미 언급한데로 하나님은 이미 완전하게 영화로우시며, 영원부터 영화로우십니다. 그러므로 그로 말미암아 창조된 어떤 것도 이미 영화로운 그 분을 더 영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이미 존재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한다(to reflect)" 또는 "반영한다"라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19:1).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는 하나의 거울과 같으며, 그 거울을 들여다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 온 우주만물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그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경우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그 분 안에 기뻐하는 것을 위하여 초대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우주 만물, 즉 자연은 단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므로 선포할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초대되었다는 것은 이 일을 자원하여 할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이 부여되었습니다. 이것을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합니다. 물론 그런 면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지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 그의 아버지를 섬기던 일을 통하여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17:4).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기를 원하신 바를 행하셨습니다. 그가 그것을 하신 것은 하나님이 원하셨고 또 예수님 자신도 기쁨으로 그것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원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고, 또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축복스러운 초대를 받았고,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며 불손종하고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쁨으로 자원하여 주의 뜻에 순복하고 살아감으로 그 분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리모트 컨트롤 하는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물건이나 동식물로 만들지도 않으셨습니다.

만물의 영장으로 만드셨고 인격을 가진 영적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창조되어진 인간에게 가장 큰 축복이자 특권이 되는 것입니다. 

III.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가 모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사람들은 왜 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간혹하 게 됩니다. 물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하여 눈을 감게하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거부하고, 또 반발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영광 돌리며 살아야 한다는 말이 그들에게는 공허하게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잘못된 이야기로 치부합니다.

"하나 밖에 없는 인생 내 마음대로 살다가 죽어야지..."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주장입 니다.

진정으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정확한 말이 아닙니다.

믿는 자는 물론 하나님께 그 베푸신 구원을 인하여, 그리고 인도하시는 사랑의 섭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립니다.

반면에,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려 한다 할지라도, 심지어 하나님 섬기기를 고의적으로 반대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지배 아래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든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 9:21-23).

이 말씀은 즉, 구원 밖에 있는자, 즉 유기된 자(버려진 자)나 구원 받은 자나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들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원 받은 자들로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란에 대한 찬송이 드려질 것입니다. 그리고 버려진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와 공의가 나타나게 될 것이고, 그 공정하고 공의로운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그 차이란, 곧 회개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버려진 자들)에게는 그들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위해 심판하시며,

구원을 받는 자는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누가 주님의 예정 가운데 있는 지인지 죽는 순간까지 남을 판단하도록 알 지는 못합니다. 예수님 한편에서 마지막 십자가 상 구원을 받은 강도는 그 누구도 그가 예정 가운데 있는 자인지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자신이 구원받은 자인지 아닌지를 알 것입니다. 자신에 예수를 지금 믿고 있는 지 아닌지는 자신이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2,13)

그리고, 다른 사람의 행위 속에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열매를 보면 그 뿌라를 알 수 있듯이 약간의 짐작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고, 또 권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의 장래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는 자는 구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것이고, 믿지 않는 하나님의 공평한 진노로 역시 하나님의 공의를 찬양하여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만물이 걸국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마지막, 최고의 목적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할 때에 이해가 가능할 것입니다.

IV. 성도의 삶은 신앙과 일반 삶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영역은 일반 직장, 학교, 집안 가정 생활, 친구들과의 교제, 여가, 교회 일 등 여러 가지로 구분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의 일과 일반일을 구분하여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니까, 신앙 생활은 교회와 연관된 삶, 즉 예배, 전도, 봉사 등이고, 그 외에는 신앙생활과는 구분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이렇게 신앙생활과 일반생활을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삶이 예배의 연장입니다.

"그러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12:1)

그러므로 일반 삶을 통해서도 우리는 연장처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동시에 어떤 사람이 복음을 전한다고 교회 일을 한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츨릴 수도 있습니다.

많은 전도자가 거짓 교리를 전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기도 합니다.

반면에 많은 기독 신자들이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성경의 원칙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직하게, 성실하게,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마치 하나님 앞에서 청지기로 살아가듯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지요.

결코 신앙의 시간과 일반의 삶이 분리되어 신앙 따로 삶 따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면 그는 모든 시간과 활동을 불문하고 하나님 앞에서 즐거움으로 하여야만 합니다.

성실한 작업, 건전한 휴식은 안식일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거나, 불신자에게 전도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 신자의 인생관은 삶의 전부가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이름을 찬양하며, 그에게 예배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나기 전까지는 삶의 모든 영역들이 결국 "" 중심의 이기적인 삶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동정하고 돕는 것도 결국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후에는 그 모든 삶의 영역이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이 된 것입니다.

결코 거듭난 자의 삶이 이 세상과 분리되어 오직 예배만 드리는 수도사의 삶을 의마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안에서 삶의 모든 영역을 통틀어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산제사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의 영역을 나누어 자세히 살펴 보아야 합니다. 모두가 하나님 중심으로 구성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일부분은 하나님이 안 계신 영역은 없는지 잘 살펴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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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1.        이 교리문답에서제일되는이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 본인의 말로 설명하여 보세요.

 

2.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적은 누가 정의할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3.        영화롭게 하다.”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

4.        죄를 지은 후 인간은 무엇 중심이 되었는가?

5.        참된 신자의 삶은 하나님 중심이라는 말은 우리릐 삶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인가요?

6.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 중에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것 같은 이타주의 적인 삶이 결국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못 미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7.        자연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하는 것 사이엔 방법적인 차이가 있습니까?

8.        불신자나 행악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나요? 그 이유를 설명하여 보십시오.

9.        삶의 어떤 부분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설교자와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 중 어떤 사람이 보다 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요? 그 이유를 설명하여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