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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3

타니사로 스님의 초기경전 해석 | Facebook

(3) 타니사로 스님의 초기경전 해석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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Ṭhānissaro 스님의 초기경전 해석을 공부하는 모임입니다. (초기불교가 무엇인지 생소하신 분께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셔도 좋겠습니다. => https://www.facebook.com/keepsurfinglife/posts/113767899327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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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dhi 스님, Gunaratana 스님, Dhammavuddho Mahathera 스님, 이런 분들의 가르침을 참고할 수 있으나, Ṭhānissaro 스님의 책 내용을 한국어로 전달만 해 드리는 것이 이 그룹의 목적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인간의 감각의 한계를 초월하는 근본 법칙/원리'일 텐데 '과학'이나 '증명'은 감각의 한계 내에서의 문제라는 딜레마가 있는지라, 증명, 논쟁, 전도, 선교 등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단지 소개만을 목적으로 합니다. 판단, 비교, the search for the path는 오직 각자의 개인적인 몫으로 남겨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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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룹 안에서는 연령, 직업, 지위 등과 무관하게 무조건! 서로의 first name에 '~님'을 붙여 호칭하겠습니다. 가입신청 시에는 다음 3개의 screening questions 모두에 Yes라고 대답하시는 분만 가입처리됩니다.
(1) 그룹 소개 (‘About’)에 적혀 있는 그룹 운영방침에 동의하십니까?
(2) 초기경전이 부처님 말씀의 100% 정확한 기록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해도,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에 '가장 근접'하는 '최선'의 자료임에는 동의하십니까?
(3) 어떤 철학이든 그 철학자의 주장을 현실적 한계 내에서 가급적 정확하게 인용, 해석하려는 ‘노력’은 그 철학자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예의이자 지적윤리임에 동의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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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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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 대승불교의 정체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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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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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봄 〈법보신문〉의 지면을 통해 전개되었던 ‘초기-대승불교의 정체성 논쟁’은 몇 가지 점에서 매우 유익한 논쟁이었다. 첫째는 불교계 내의 가장 민감한 교리적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를 공론화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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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이를 계기로 앞으로 불교학계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될 것으로 기대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이를 계기로 진지한 학자들과 일반 불자들이 한국불교의 문제점에 대해 공석과 사석에서 토론을 거듭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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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무엇이 불교적이고 정법에 근거하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보다 깊게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온갖  비불교적 요소가 판을 치는 불교계 현실을 감안할 때 현재보다는 미래의 성과가 더욱  기대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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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논쟁은 전개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점과 한계를 드러낸 것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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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처음에 보여주었던 논점의 진지함이 논쟁이 과열됨에 따라 주제 자체보다는 인신공격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이로 인해 논쟁에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해서 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아쉽게 종결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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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논쟁의 마당을 제공하고 이끌었던 (법보신문〉이 논쟁을 마무리하면서 사설을 통해 마녀 재판식 결론을 내린 것은 매우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과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인지는 모르나 그 사설은 논쟁이라는 형식을 빌어 〈법보신문〉이 의도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기획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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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논쟁을 주의 깊게 지켜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논쟁은 결코 아직 승패가 가려진 것이 아니다. 이제 겨우 논의의 주제가 설정된 단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지금까지 논의되어 왔던 주제를 하나하나 정리하고 재검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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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과정을 통해 어느 쪽의 주장이 옳고 그른지, 그리고 어느 쪽의 주장이 미래의 한국불교 발전에 보다 도움이 되는 견해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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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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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의된 주요 주제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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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붓다로 돌아가자는 것이 문제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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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논쟁은 동국대 불교학과 김용표 교수의 기고문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이 즉각 반론을 제기했다. 이렇게 불붙기 시작한 이번 논쟁의 주된 쟁점은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에 관한 것이었다.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이 문제는 김용표의 지적처럼, 역사적·철학적·해석학적 통찰이 필요한 난제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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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 혹은 초기불교에서 찾으려는 흐름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이유는 불교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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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성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불교의 정신은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역사적인 붓다의 삶 속에서만 드러난다. ……  초기불교라든가 대승불교라든가 하는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역사적인 붓다의 삶이라는  사건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라고 단정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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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어떤 형태의 불교이든지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석가모니불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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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역사적으로 후대에 성립된 대승불교가 정법의 기준이라도 되는 듯한 기술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정법의 잣대란 원래의 불교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 순리이지, 거꾸로 현재의 잣대로 원래의 불교를 진단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사상사(思想史)의 흐름에도 역행되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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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김성철 교수는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논리적 귀결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말속에는 분명 초기불교를 낮추어 보는 대승불교 전통의 편향된 시각을 아주 자연스럽게 답습하고 있다. 즉 초기불교는 불완전하고 미완성이었는데, 대승불교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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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각은 중국에서 고안된 종파적인 교판론(敎判論)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근거가 되는 교판론은 전혀 역사적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 지 이미 오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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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에도 역사의 개념이 도입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스다니 후미오가 지적했듯이, 역사의 개념을 전적으로 무시한 교상판석(敎相判釋)에 근거한 작업은 모두가 그릇된 전제 위에 선 것이다. 그런 전제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되었기에 그러한 교상판석에 근거한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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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은 아직도 인도불교는 서론에, 중국불교는 본론에, 한국불교는 결론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상좌불교도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붓다로부터 2,50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는 종갓집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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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자기들이 신봉하는 불교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자기 중심의 호교론적 입장은 두 전통의 불교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계속된 충돌만 있을 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조준호가 제시한 “초기불교는 초기불교로서 대승불교는 대승불교로서 각각 ‘불교의 귀결’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서로 조정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맥락은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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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바라보는 각도가 다를 뿐 동일한 목적지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주명철의 지적처럼, “오히려 대승불교는 세존의 깨달음과 자비의 가르침의 정신을 더욱 충실히 실천하였지 진리를 부정하거나 존재를 부정한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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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도 이 점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대승불교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른 초기 불교주의자들도 초기불교만이 진리이고, 대승불교는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계의 모든 불교가 초기불교의 틀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고 주장한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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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필자는, 현재의 한국불교가 그 원래의 대승불교에서 많이 일탈해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초기불교 지상주의를 건설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점에서 완전히 초기불교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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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주장은, 지금 이 시점에서 부처님의 불교, 즉 붓다의 본래 정신을 가능한 되살리자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불교적 전통과 모습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는 현재의 상좌불교도 원래의 초기불교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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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필자는 부처님의 불교를 하자는 것이지, 남방 상좌부 불교를 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상좌불교도들도 교단이 어지러울 때에는 언제나 원래의 불교 모습으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한다. 불교의 정통성과 기준은 오직 석가모니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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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 흥기의 배경도 ‘붓다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지 않은가! 부파불교가 사회적 실천이라는 붓다의 근본 정신을 외면했기 때문에 원래의 붓다 정신으로 되돌아가자는 외침이 대승불교 운동이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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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현재의 한국불교 현상들은 오히려 그러한 대승불교의 본질 혹은 정신을 크게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붓다의 원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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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를 강조하는 것은 대승불교를 똑바로 잘하기 위함이다.”라고 필자가 주장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그러한 취지에서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불교를 정법(正法)의 토대로 더욱 굳건히 올려놓기 위해 붓다로 돌아가자고 강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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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필자가 부처님의 불교를 생각해 보자고 제의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잘못된 것인 양 매도하려는 분위기는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다. 붓다로 돌아가자는 것이 과연 큰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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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태도는 정당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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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는 대승불교의 경전관(經典觀)에 관한 문제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논쟁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떠한 일방적인 입장으로의 결론이 도출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그 자체를 논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본다. 그리고 현재 상황에서 대승경전 전체를 비불설이라고 완전히 배제한다거나 부정하는 것도 편견에 빠질 염려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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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금까지 대승경전의 비불설을 주장한 적이 없다. 그리고 대승경전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도 않는다. 대승경전은 비록 붓다의 친설은 아니라 할지라도 사상적으로 매우 훌륭한 측면이 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을 드러낸 부분도 있는 것이다. 김성철의 주장과 같이 대승불전이 초기불전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점도 필자는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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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대승경전과 관련하여 홍사성이 주장한 내용은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태도는 이 시점에서 새롭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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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이해했다”라고 정직하게 말하지 않고,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고 함으로써 붓다의 친설과 자신의 설을 구별하지 않은 것은 지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대승경전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찬술자들의 부정직한  태도를 지적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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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마치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으로 가탁(假託)했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는 대승불교의 성립 배경과 원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종교사학적으로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그 자체는 한 번도 논의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여러 차례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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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서 진현종과 김성철은 크게 반박하고 있다. 진현종은 나의 깨달음과 부처님의 깨달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대승불전 찬술자들의 태도에 오히려 치하를 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붓다와 그 제자의 관계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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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초기불교 교단에서는 붓다도 아라한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포함시켰다. 즉 불교교단에서 붓다는 첫번째 아라한(阿羅漢)이었다. 그는 어떠한 구별도 없이 다른 아라한들과 같이 한 명의 아라한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이 최초로 고타마의 가르침에 귀의한 다섯 고행자(pan?avaggiya)의 개종 이후, 붓다를 그들 중의 하나로 계산하여 당시 세상에는 여섯 아라한이 있었다고 진술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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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후대에 오면 처음 깨달음을 이룬 붓다와 그의 가르침에 의해 나중에 깨달음을 이룬 제자와는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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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깨달았다는 점에서는 아라한과 동등하다고 말했다. 단지 다른 점은 붓다는 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개척한 선구자인데 반해서, 아라한들은 붓다가 밟았던 길을 따라서 같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아라한들은 붓다누붓다(buddha ubuddha), 즉   완전히 깨달은 자(正等覺者) 다음에 깨달음에 도달했던 사람들이라고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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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스승의 가르침에 의해 제자가 스승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지라도 스승과 동등하다고 자만한 흔적은 초기경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깨달음을 이룬 뒤에도 제자들은 한결같이 붓다를 스승으로 모시고 존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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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상수 제자였던 사리뿟따(Sariputta, 舍利弗)는 “그리고 존자시여, 제자들은 지금 길을 쫓아서 나중에 그 길을 구현하는 자로 살 것입니다”라고 했다. 비록 사리뿟따는 당시에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스승에 대한 존경의 예는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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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후대의 대승경전 찬술자들은 석가모니불과 동등한 입장에서 경전들을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행위와 태도가 진현종의 주장처럼 겸손해서 그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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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경전이 출현하기 이전에도 논장(論藏, Abhidhamma Pit.aka)은 있었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논장은 기원전 3세기경 제3결집 때, 목갈리뿟따-띳사(Moggaliputta-tissa) 장로에 의해 편찬된 《논사(論事, Kathayatthu)》로 알려져 있다. 이때 비로소 경·율·논 삼장이 성립되었다. 그후 부처님의 제자들은 자신이 이해한 견해들을 논서로 저술하여 후세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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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직 대승경전 찬술자들만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함에 있어서 논서의 저술가로 이름을 남기지 않고,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이라고 가탁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해 당시의 부파교단에서 강력히 반발하였을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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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부파교도들은 ‘대승은 악마의 설’이라고까지 반박하였다. 이에 대해 대승교도들은 ‘부처님은 한 목소리로 설법하셨는데 대중이 여러 가지로 이해했다(一音異解)’며 대승이 부처님의 말씀임을 논증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설은 《유마경》에서 역설한 것인데, 원래는 대중부(大衆部)에서 부처님의 신통자재한 덕을 찬양하려고 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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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부파교도들이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태도에 대하여 극심하게 비난했던 증거들이 오히려 대승경전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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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대승의 설이야말로 부처님의 진설(眞說)이므로 부파교도들의 반발과 주장에 동요하지 말라고 강조한 것이 그대로 대승경전 속에 기록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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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대승경전을 논서로 남겨두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불설·비불설 논쟁은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을 홍사성이 지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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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김성철은 지금도 계속적으로 대승경전을 편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마스다니 후미오가 그의 저서 《불교개론》에서 현대에서도 새로운 경전이 생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스다니 후미오의 주장은 위경(僞經)을 계속 생산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불교의 새로운 사상을 끊임없이 전개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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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후대의 불제자들이 더 많은 논소(論疏)와 주석서들을 저술하여 불교사상을 보다 풍부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러한 마스다니 후미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인지, 김성철은 대승경전을 2000년 동안 만들지 못한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하고 참회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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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의 주장대로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대승경전을 만들어 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불경의 의미는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후대의 사람들이 자칭 깨달았다고 말하고, 궤변을 늘어놓아도 불설이 된다. 이렇게 계속해서 불경을 만들어낸다면 나중에 불설과 비불설을 누가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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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경전을 옹호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지금도 논소(論疏)나 주석서가 아닌 대승경전을 계속 만들어내자는 것은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인도와 중국에서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불설을  빙자한 위경(僞經)들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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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역사적 실증주의는 과연 잘못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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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실증주의에 바탕을 둔 불교학의 연구는 정말 잘못된 것인가? 진현종은, 실증주의와 합리주의는 그 본산지에서조차 이미 박살난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실증주의는 사견과 망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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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친설은 초기불전에서도 신고층(新古層)이 있기 때문에 구분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 자체가 이미 실증주의와 합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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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역사적 실증주의를 배제하면 불교학은 물론 학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논쟁 자체도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논쟁도 어느 쪽의 주장이 더욱 더 역사적 진실에 가깝게 접근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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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서구 불교학의 출발은 호교론적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초기의 서구 불교학자들은 대부분 가톨릭 신부이거나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식민지 지배를 보다 확대하거나 공고히 하기 위해 인도학 불교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철저한 문헌비평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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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현대의 불교학이다. 초기경전 가운데 신·고층이 있다는 사실도 이러한 연구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초기경전에 신·고층이 있다는 진현종의 주장 자체가 이미 역사적 실증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논리적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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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그 어느 종교보다도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과학적이라는 것은 학계의 정설이다. 불교의 특질 가운데 하나가 합리성과 미신의 배제이다.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은 “불교에는 불합리한 미신적인 요소는 하나도 없다. 또 수행의 방법도 단계적인 순서를 좇아 합리적으로 조직되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종교의 학설에서 그에 비견될 만한 것을 볼 수 없는 바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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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명철은 “석존은 합리적이라기보다는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라고 했다. 또한 그는 “대승불교는 석존의 명상적이고 신비적인 면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그는 붓다를 비밀교의를 펼쳤던 신비주의자로, 그리고 대승불교를 신비주의로 이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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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그의 불교관은 자칫 불교를 신비주의로 이해하는 부류와 기복신앙을 조장하려는 부류에 편승하거나 아니면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의혹을 배제할 수 없다. 진현종은 부처님 자신도 실증주의적 입장을 거부했다고 했다. 이와 같은 주장을 거리낌없이 내두르고 있는 데에 그저 할 말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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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부처님은 합리주의와 실증주의를 부정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일반적으로 부처님은 실증주의에 바탕을 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는 “불교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닌 현실주의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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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먼저, 불교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어느 편이냐 하면, 불교는 현실주의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므로 현실주의적이다. 불교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본다(如實知見). 불교는 헛된 기대 속에 살도록 우리들을  거짓으로 달래지도 않고, 온갖 종류의 가상의 공포와 죄책감으로 우리들을 놀라게 하거나 괴롭게 만들지 않는다. 불교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주변 세계는 어떠한지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주며, 또한 완전한 자유, 평화, 평안 그리고 행복에 이르는 길을 우리들에게 제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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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붓다는 언제나 실증할 수 없는 것, 즉 진위(眞僞) 여부를 가릴 수 없는 사후(死後)에 관한 일이라든가 미래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결코 말한 적이 없다. 붓다의 가르침은 다른 종교가들의 주장과는 달라서 현실적으로 증명되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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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다. 즉 이 가르침은 현실적으로 증명되는 것,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능히 열반에 인도하는 것, 또 지혜 있는 이가 저마다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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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용문은 초기경전 여러 곳에서 되풀이되는 정형구로서, 붓다의 가르침의 기본적 성격을 아주 간단 명료하게 표현한 것이다. 붓다 가르침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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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존귀한 자에 의하여 잘 설해진 가르침(世尊善說法), 즉 ‘표현의 명료성(善說)이다.
- 두번째의 특징은, 경험적인 내용(現見)이라는 점이다.
- 세번째의 특징은, 특정한 시간에 제한되지 않는 것(非時間的)이다.
- 네번째 특징은, 검증 가능성(ehipassika, 來見)이다.
- 다섯번째 특징은,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생활 조건(즉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은 혼란으로부터의 자유)이 종교생활의 최종적인 목표나 효과(paramat.t.ha, 勝義)가 된다는 점이다.
- 여섯번째 특징은, 스스로 경험되는  것(paccattam. veditabbo, 自證)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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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둘째, 셋째, 넷째의 세 가지 항목은 붓다의 가르침이 리얼리스트(realist)의 사상이었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마스다니 후미오는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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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붓다의  가르침은 현실적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붓다가 설한 것은 모두가 인생의 현실 문제였으므로, 누구라도 편견 없는 눈으로 그 진상을 관찰한다면 그것이 헛되지 않음을 볼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붓다는 결코 환상을 말하지 않았다. 붓다는 신비주의자가 아니었다. 또한 붓다의 법은 비밀리에 비밀법을 전한 것도 아니다. 이에 대해 월폴라 라훌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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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Maha?arinibba?a-sutta)》에서 그는 상가(Sangha, 僧團)를 통제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고, 상가가 그에게 의지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가르침에는 비전(秘傳)의 교설은 없으며, ‘스승의  꽉 쥔 주먹(Ayariya-mut.t.hi, 師拳)’에 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혹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몰래 준비한 어느 것도 결코 없다고 붓다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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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히 말해서 원래의 불교에는 비밀리에 법을 전해준다는 따위의 신비적인 요소는 전혀 없다. 그러나 후대의 불교에 오면 신비적인 요소가 가미된다. 이에 대해 칼루파하나(David J. Kalupahana)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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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전수되는 것 중에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적인 것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승과 제자간의 관계나 그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교육의 본성이 불교에 관한 아주 최근의 설명에서처럼 지나치게 신비화됨으로써, 삭발하고 가사 장삼을 걸친 채 무언의 비전을 전수받기 위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지 않고서는 법의 실천이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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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경전에도 신(新)·고층(古層)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현종은 어느 것도 진짜 불설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무한급수의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빠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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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인 붓다의 말씀을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 불교학의 목적이다. 학자들은 지금도 어느 것이 가장 붓다의 친설에 가까운 교설인가를 계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초기경전 내부에 신·고층이 있다고  할지라도 현재 남아 있는 초기 문헌만으로도 붓다의 근본 교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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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붓다가 설한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연기설·사성제·팔정도·중도 등의 기본 교설은 대·소승에 별로 큰 차이가 없다. 우리는 그러한 교리들을 통해 붓다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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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실증주의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만일 역사적 실증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붓다의 탄생지, 열반지, 초전법륜지 등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인도나 동남아로 성지순례를 떠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곳이 역사적으로 부처님의 발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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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대승경전들을 직접 설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진실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했다는 것도, 베살리에서 유마거사가 《유마경》을 설했다는 것도 역사적 진실이 아님은 자명하다. 이처럼 비역사적인 사실은 역사라고 믿고, 진짜 역사적 사건은 역사적 실증주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몽롱한 주장은 현기증을 유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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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모든  학문과 종교현상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실증주의에 그 바탕을 두지 않으면 신뢰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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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다불다보살 신앙에 문제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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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대승불교의 신앙관에 관한 문제이다. 대승불교의 다불다보살(多佛多菩薩) 사상은 사상적으로 위대한 점이 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비불교적인 요소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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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의 불신관(佛身觀)에 의하면 과거·현재·미래에 수많은 부처님과 보살들이 존재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나 사상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다불다보살 사상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보다 법신불(法身佛)이나 보신불(報身佛)에 더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일반 불자들은 대부분  대승불교의 보살을 거의 신적(神的)인 존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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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상은 자칫 잘못하면 범신론적(汎神論的) 유신교(有神敎)로 전락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불다보살 사상은 신앙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전통이나 권위 혹은 대승이라는 이름으로 다불다보살 신앙을 포용함으로써 불교의 본질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지적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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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의 다불다보살 신앙은 절대주의의 경향이 농후하다. 마스다니 후미오는 “불교에서 말하는 ‘붓다’란 기독교인이 말하는 ‘신(神)’과는 그 개념이 다르다. 그는 천지와 만물의 창조자가 아니다. 최고의 유일한 존재도 아니다. 인간에게 ‘절대 타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 불교인 중에는 마치 절대자를 대하는 것같이 붓다를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붓다의 성격을 완전히 곡해한 것이며, 또 붓다 그분의 뜻에서도 빗나간 생각임이 명백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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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서 그는 “대승경전이 붓다를  절대화하는 과오를 범했다고 해서 거기에 담긴 많은 진리까지도 부정할 마음은 나에게  없다. 또 과거의 고승 대덕들이 도달한 종교적 경지에 대해서도 나는 겸허하게 고개를 숙일 아량을 갖고 있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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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불교국에서는 교차로나 주택의 입구에 사면불(四面佛)이나 십일면(十一面)관세음보살상등을 수호신(守護神)으로 봉안하고 있다. 인도의 힌두교적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매일 그 신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모든 재앙을 소멸하게 해달라고 빈다. 이러한 행위는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난 그릇된 신앙 행위임은  말할 나위 없다. 상좌부의 스님들도 이러한 비불교적 민간신앙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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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진현종은 불자들의 신관(神觀)과 외도들의 신관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주명철은 한술 더 떠서 “대승의 붓다관을 유신론이라는 잣대로 폄하하는 점은 인도 종교의 유신론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 편견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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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과연 누가 인도 종교의 유신론에 대한 이해 부족과 편견인지 이 부분의 전공자들이 밝혀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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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국의 사찰에서 행해지고 있는 각종의 비불교적인 신앙에 대해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은 그의 저서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1910년 저술)에서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지면 관계로 여기서는 칠성과 신중에 관한 부분만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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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七星)은 더욱 황당무계해서 웃음거리가 아닐 수 없다. 별을 상(像)으로 하여 받들 바에는 하늘에 있는 별이 매우 많은 터에 어찌 유독 칠성만을 위하는 것인가. 또 그것이 여래(如來)의 화현(化現)인 때문이라 한다면, 천지·일월과 삼라만상이 똑같이 부처님과 일체(一體)일 터인데, 하필 칠성만이 그렇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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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제자(佛弟子)로서는 여래의 참된 상(像)을 받드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멀리 부처님의 화현(化現)에게까지 숭배의 대상을 확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번거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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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神衆)은 부처님께서 영산(靈山)에 계실 때에 호위하는 임무를 띠고 항상 따르던 신의 무리니, 불법(佛法)을 보호함이 실로 그들의 책임인 터이다. …… 비유컨대 승려는 상관과 같고 신중은 호위 순경과 같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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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기에 한 상관이 있어서 손을 맞잡고 꿇어앉아 도리어 호위 순경에게 머리를 조아려 애걸한다면 약자에게 쩔쩔매는 그 꼴을 웃지 않는 자가 드물 것이니, 우리 승려들은 어찌 이것만을 보고 자기를 보지 않는  것이랴. 지금 남에게 뒤질세라 신중에게 몸을 굽혀 복을 비는 사람들이 있거니와, 나는  그 가치의 전도(顚倒)를 견디기 어려운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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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언급한 두 신관의 차이를 비교할 필요도 없이 한국불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비불교적인 잡다한 신앙들은 하루빨리 청산되어야 할 잘못된 신앙 형태라고 본다. 이런 측면에서도 만해 한용운은 시대를 앞서간 위대한 선구자였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대승불교 흥기와 함께 불교 속에 습합된 다불다보살 신앙은 다분히 유신교적 경향을 띠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한 신앙이 맹목적으로 강조될 경우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날 염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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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도들이 다불다보살 신앙을 통해 불교의 본질로 돌아온다면  다행이겠지만, 불교 교리에 무지한 일반 대중들이 자칫 잘못하면 미신이나 유신론으로  빠지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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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기복을 부추기는 것이 옳은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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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논쟁과 아울러 제기되는 문제는 기복신앙이다. 대승불교에서는 기복신앙이 용인되는 것으로 주장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다행히 주명철은 “한국불교의 기복문제는 대승불교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 종단, 교파, 기성체제 속에서 대승불교를 잘못 이해하고 적용한 후학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한국불교의 문제를 오로지 대승불교에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는 좋은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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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주장했던 내용과 동일하다. 필자도 한국불교가 대승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기복 위주의 잘못된 신앙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코 대승불교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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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기복(祈福)과 작복(作福)을 혼동하고 있는데, 만약 같다고 하면 이렇게 논쟁할 필요도 없고 기복을 두 손 들고 맞이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가 지면을 통해 자세히 언급하였음으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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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사실은, 기복의 대안이 작복이다. 조준호의 지적처럼 “작복은 백 번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작복이야말로 대사회적으로 불교의 위치를 당당히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반복적인 외침이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한국불교 분위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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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만해 한용운도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복은 빌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다가 부처님도 원래 화복의 주관자가 아니시니, 빌어 본대도 복을 얻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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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기복신앙을 작복신앙으로 전환하자는 데에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다만 현실적으로 기복신앙을 비판·부정하면 마치 한국불교가 무너져 버릴 것이라는 몇몇 사람들의 과민한 애종심이 문제이다. 그리하여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하자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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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교리적·이론적으로는 기복신앙이 불교에서 용인되지 않는다. 그 잘못된 신앙을 어떻게 해서든 바른 방향으로 유도해야만 한다. 그리고 기복의 대안인 작복도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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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준호는 기복신앙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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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예경(禮敬)의 대상이지, 화(禍)는 물론 복을 내리는 기도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나아가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한 이유는 세상 사람들의 물질적인 기대나 세속적인 욕망을 채워 주기 위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불교를 포함한 다른 종교의 기능에 있어 ‘기복’이야말로 더 현실적으로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어느 종교이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종교의 중심 경전에 근거한 본연의 입장과 대치되는 대중적 차원의 신앙이  병존(竝存)하는 이중적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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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불교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느 종교나 신행에 있어서 분명히 이중적 구조의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의 지성인들과 미디어 종사자들이 앞장서서 기복신앙을 옹호하거나 조장 혹은 부추겨서야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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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미신적·주술적·비밀교적인 그리고 무속적 기복신앙은 불교가 아님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그 명백한 사실을 왜 억지로 비호하고 권장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현실적으로 기복신앙을 갑자기 개선하기가 어렵다 할지라도 점차 개선해야 한다는 태도가 불교도의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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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의 언론은 기복신앙을 권장하거나 부추기기보다는 오히려 출가·재가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잘못된 신앙을 바른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기복신앙을 권장하는 것이 옳은가? 어떤 주장이 더 미래의 불교를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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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잘못된 전통까지 고수해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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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의 사설에서는 “불교의 특성 중의 하나가 전파 당시 그 나라의 고유한 신앙을 습합하며 정착한 데 있다는 것은 재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초기경전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불교가 아니라는 원리주의적 주장을 펴는 것은 폭력이다.”라고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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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 1910년에 만해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을 지었다. 만해는 이 〈조선불교유신론〉에서 한국불교 속의 비불교적 신앙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불가(佛家: 조선불교를 말함)에서 숭배하는 소회(塑繪 : 절에 모신 일체의 등상과 그림을 말함)는 가리어 혼란이 없어야 하겠고, 간략하여 번잡하지 않아야 하겠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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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만해 이전에 이미  “소회(塑繪)는 미신에서 나온 거짓된 모습이니 전부를 들어 소각함이 상책이다. 그리하여 절을 깨끗이 해서 암흑 시대의 미신을 일소하고 진리를 배양하여 불교의 새 나라를 고쳐 세워야 한다.”는 보다 과격한 주장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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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무릇 모든 종교는 어느 지역에 정착하기 위해서 기존의 신앙을 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측면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질적인 종교와 사상이 발을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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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라는 토양에서  잉태된 불교가 동쪽 끝에 위치한 한반도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재래 민간신앙을 습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완전히 민간신앙을 배제하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는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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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전래는 단순히 종교사상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함께 전래된다. 외래문화가 들어오면 처음에는 거부반응을 가지다가 점차 시간이 경과하면서 토착문화와의 습합을 통해 새로운 문화가 탄생되고 그것이 정착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독자적인 한국불교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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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형성된 한국불교 나름의 문화사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문화현상 자체를 좋다 나쁘다고 평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다만 그러한 과정을 거침으로 인해 원래의 불교, 즉 불교의 순수성 혹은 정체성이 희석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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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정당화하거나 찬양하는 듯한 논조는 문화사적인 측면에서는 타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불교의 정체성 확립이라는 명제에는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흔적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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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기백이 넘치던 옛 선사들이 한국불교 속에 남아 있는 산신각, 용왕각, 독성각 등을 철거하기 위해 탱화를 불살랐던 일화도 전설처럼 남아 있다. 이러한 행위는 한국불교의 문화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처절한 몸부림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만해 한용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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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염불당의 폐지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불가에서 숭배하는 소회(塑繪)의 철거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의 주장 가운데 극히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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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치도 않는 신들 앞에 종처럼 무릎 꿇어 아첨하고 있으니, 소회(塑繪)를 받드는 폐단이 이에 이르러 극단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누가 능히 만천하의 이런 소상(塑像)들을 불살라 날려보내고 물에 던져 가라앉혀서, 다시는 세상에 머물지 못하게 하여, 우리 종교의 진리로 돌이켜 흠이 없게 할 것인가. …… 설령 불교를 미신이라고 한다 해도 부처님을 미신하는 것으로 족한 터이다.  어찌 아침에는 부처님을 미신하고, 저녁에는 나한(羅漢)을 미신하고, 또 칠성(七星)을 미신하고, 또 시왕(十王)을 미신하고, 또 신중(神衆)을 미신하고, 또 천왕·조왕·산신·국사(國師) 따위를 미신함으로써 일정한 신앙이 없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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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지금의 필자와 같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불교계 내부에서도 열린 시각으로 일찍부터 한국불교의 문제점들을 지적해 왔다. 만해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전혀 통용될 가능성이 없는데, 1910년대에 그것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겠는가? 그 장벽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러한 토착화된 문화 혹은 종교현상은 불교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점을 필자는 강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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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잘못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그 잘못된 부분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감싸야만 한국불교가 바르게 되는가? 이를테면 가문의 명예를 빛낸 인물도 있지만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인물도 있을 수 있다. 비록 가문을 더럽혔다고 해서 그 가문의 출신이 아닌가? 그 옳고 그름은 후대에서 판단할 몫이다. 잘못된 부분을 두둔하거나 변명한다고 잘못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부분은 잘못된 부분대로, 잘된 부분은 잘된 부분대로 인정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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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의 역대 조사나 사상가, 그리고 한국의 고승 중에서도 본의 아니게 부처님의 뜻과 반대되는 주장이나 행동을 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그 잘잘못을 따질 수 있어야 한다. 과문의 탓인지는 모르나 부처님께서는 후회할 나쁜 행위가 전혀 없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만일 부처님도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그 잘못된 부분에 대해 비판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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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부처님께서는 안거(安居)가 끝나는 마지막 날의  자자(自恣, pava?an.a?에서 나의 허물을 보거나 발견한 사람은 지적해 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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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초기불교 교단에서는 붓다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잘못이 있다면 대중 앞에 발로 참회해야 한다. 이것이 불가의 전통이다. 허물은 덮어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의 잘못된 전통을 고수하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인가? 그 잘못을 지적하면 한국불교의 전통과 자존심을 짓밟는 것인가? 그 잘못을 덮어두면 한국불교의 전통과 자존심을 세우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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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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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을 주창할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과 같은 한국불교의 분위기에서도 한국불교의 잘못된 부분들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환영받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현재 초기불교 정신에 따른 한국불교 실태 파악이 수용되기는커녕 오히려 매도하려는 분위기는 더더욱 한국불교의 미래를 생각할 때 참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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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아직까지도 한국불교가 지적으로 성숙해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한국불교를 주도하고 있는 주된 세력들은 여전히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러한 주장들을 외면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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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비록 표면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불교를 올바르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은 어느 쪽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으며 미래 지향적인가를 잘 알고 있다. 이번 지상 논쟁을 지켜 본 많은 사람들은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 없다고 말한다. 잘못된 것을 올바른 것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올바른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올바른 것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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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한국불교 정체성 논쟁에 침묵을 고수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침묵하는 쪽이 오히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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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현실적으로 제도권 불교에 영합하고 편승하여 상대방을 공박하려는 태도 또한 훗날의 비판을 면키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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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새로운 한국불교의 모습은 언젠가는 올 것이고, 그러한 분위기는 굉장한 수준으로 성숙되고 있어 희망적이다. 새살이 돋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불교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더욱 정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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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한국불교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초기불교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지적하고자 한다. 기복신앙으로는 한국불교의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불교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오늘의 문제점들을 진단하고 그 대안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                                  
마성스님                      
스리랑카 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현재 스리랑카 팔리불교대학교 한국 분교 교수 및 팔리문헌연구소 소장. 마산 가야사 주지.
http://www.rip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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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적 '연구' 아닌 '수양'/'신앙'의 길잡이로서, 킹 제임스 버젼의 성경을 택하는 이도 있고 문선명의 통일교나 이만희의 신천지교에서 사용하는 성경을 택하는 이도 있다. 통일교나 신천지의 성경을 따르더라도, 히브리어 성경부터 시작하여 모든 버젼의 성경 공부를 병행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독교 교리의 '변질'인지 '발전' 혹은 '완성'인지는 전적으로 보는 사람의 주관적 판단이다.  그러나 선문대 교수에게서 '객관적인' 통일교 비판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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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몇월 몇일 몇시 몇초에 홍길동이 을지로 롯데백화점 정문 앞에서 신호등 빨간불일 때 차를 멈춰 세웠는지 아닌지와 같은 단식 판단 외에는, 삶의 대부분의 문제들이, 보는 관점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제 눈의 안경'일 뿐인 듯. 어떤 안경을 선택하느냐도 결국 자기 '복' 혹은 자기 '업'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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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PL.OR.KR
팔리문헌연구소

알라딘: [전자책] 세계 종교의 역사 - 인간이 묻고 신이 답하다 리처드 할러웨이 (지은이),이용주 (옮긴이)

알라딘: [전자책] 세계 종교의 역사


세계 종교의 역사 - 인간이 묻고 신이 답하다
리처드 할러웨이 (지은이),이용주 (옮긴이)소소의책2018-03-27
원제 : A Little History of Reli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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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페이지수 416쪽

책소개
종교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종교를 갖게 되었을까? 이것은 삶의 근원이자 원천적인 문제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우리는 묻는다. 인간이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까? 저 너머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계에 누가 있을까? 누가, 왜, 무엇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또는 우주를 창조했을까?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려는 시도가 바로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다. 사람들은 신(God)이라 부르는 초자연적 존재에 의해 우주가 창조되었다고 말하거나, 이 세계는 처음부터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인간의 역사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답은 없다.

오늘날 세계의 모든 종교는 어떤 형식으로든 신이라는 존재를 믿으면서도 제각각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그 뿌리는 같지만 하나의 종교 안에서 수많은 분파가 생겨나고 또 사라진다. 이 책은 특정한 주제나 논쟁에서 벗어나 인간의 오랜 역사 속에서 종교적 믿음이 어떻게 태동해 변화해왔으며, 인간의 삶에서 종교는 어떠한 의미로 받아들여지는지 등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듯이 간결하고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목차


1 저 너머의 세상?
2 문
3 바퀴
4 하나에서 여럿으로
5 왕자에서 붓다로
6 아무것도 해치지 말라
7 방랑자
8 갈대밭에서
9 십계
10 예언자들
11 종말론
12 이단자
13 마지막 전투
14 세속 종교
15 길
16 진흙을 휘저어서
17 종교, 개인으로 나아가다
18 개종자
19 메시아
20 예수, 로마로 가다
21 교회, 권력을 획득하다
22 마지막 예언자
23 복종
24 투쟁
25 지옥
26 그리스도의 대리인
27 저항
28 종교개혁과 기독교의 분열
29 나나크의 종교개혁
30 영국국교회
31 짐승의 머리를 자르다
32 친구들
33 인디언과 흑인의 영성
34 미국에서 태어난 종교
35 대실망
36 신비가와 영화배우
37 문 열기
38 성난 종교
39 성스러운 전쟁
40 종교의 종말?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종교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디서 왔는가?




인류의 조상들은 세계가 어디서 왔는지 스스로 묻고, 또 세계가 저기 어딘가에 있는 더 위대한 힘에 의해 창조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들은, 숨이 멎은 시체를 보면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 지금까지 머물던 육체를 떠나 어딘가로 가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종교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한 그룹은 너머의 세계 또는 죽은 영... 더보기
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종교의 역사 안에서 하나의 전환점이라고 말했다. 다신교에서 유일한 신을 믿는 일신교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전환은 종교란 결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종교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변화한다. 종교는 활동사진이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매력 넘치는 인물인 이유가 바로 그것... 더보기
흥미로운 사실은 개인에게 개별적으로 위안을 제공하는 종교가 점차 성장하여 보편적인 종교가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구원을 찾아 헤매는 개인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신비제의들은 이런 경향이 유효하게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개인들은 자발적으로 그런 제의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런 참여가 집단 정체성의 ... 더보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마르틴 루터의 마음속에서 불타고 있던 강박관념이었다. 루터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강박관념에 빠져 있던 사람인 성 바울의 편지들을 읽으면서 신에 대한 통찰의 순간, 즉 계시(revelation)를 경험했다. 사람은 끊임없는 기도나 순례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또는 교황이 직접 서... 더보기
종교가 신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적대자라고 하는 생각은 성서 구절 안에서도 가끔 만날 수 있다. 성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는 사람들이 종교를 악한 일을 하는 구실로 이용할 뿐 아니라 착한 일을 하지 않는 핑계로도 그것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사제와 그의 수행자는 도둑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쓰러져 있던 사람을 보고도 그...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리처드 할러웨이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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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를 떠나며》 저자


최근작 : <세계 종교의 역사> … 총 2종 (모두보기)

이용주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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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인문대를 졸업하고, 프랑스 고등연구원(EPHE) DEA 및 박사과정을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광주과학기술원(GIST)에서 인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문학ㆍ동양학ㆍ비교종교학 등을 공부했으며, 전통적인 문文ㆍ사史ㆍ철哲의 영역뿐만 아니라 ‘과학’ 자체도 인문학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학과 철학 그리고 과학과 종교의 대화는 그에게 중요한 화두다. 근대 중국이 서양과학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겪어낸 과학과 전통 간의 대결양상을 다룬 이 책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주요 저서로 『주자의 문화 이데... 더보기


최근작 : <생명과 불사>,<세계관 전쟁>,<성학집요> … 총 4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인간이 품은 첫 궁금증부터 최근의 정치?사회 문제의 근원까지,
이야기로 풀어내는 인문학적 통찰과 흥미로운 스토리텔링
“종교는 수많은 망치를 닳아버리게 만드는 모루와 같다.”

종교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종교를 갖게 되었을까? 이것은 삶의 근원이자 원천적인 문제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우리는 묻는다. 인간이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까? 저 너머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계에 누가 있을까? 누가, 왜, 무엇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또는 우주를 창조했을까?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려는 시도가 바로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다. 사람들은 신(God)이라 부르는 초자연적 존재에 의해 우주가 창조되었다고 말하거나, 이 세계는 처음부터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인간의 역사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답은 없다.
오늘날 세계의 모든 종교는 어떤 형식으로든 신이라는 존재를 믿으면서도 제각각 다른 해석을 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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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가 어떻게 분화했는지조차 몰랐던 내가 읽기에 딱 적합했던 책 ㅎㅅㅎ 재밌당
상식 충전용,,,
근데 너무 번역투가 난무해서 읽다 잘뻔한적이 많았습니다ㅠ
너가말해줘야지 2018-07-05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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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의 역사




"종교적 이야기들은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던져주는 것이기도 하다"(81)

이 이야기는 어쩌면 신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종교의 역사'라는 것을 객관화시켜서 본다면 - 엄밀히 객관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역사적 사실과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가끔은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설화처럼 읽어버리기도 하고 또 가끔은 유신론자인 신앙인의 관점에서 이야기 속에 담겨있는 의미를 찾으려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대부분 그냥 하나의 흐름처럼 '역사' 속에서의 종교의 변화와 흐름으로만 읽은 시간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약간 불편했던 것은- 간혹 번역문에서 개신교 특유의 단어표현이 나오는데 성경인물의 이름조차 오래된 한국어식 표현을 하고 있어서 글이 매끄럽게 읽히지는 않았다. 물론 보편적으로 종교가 없더라도 익숙한 이름인 베드로나 바오로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개인적으로 왠지 오래된 번역서를 읽는 느낌이어서 약간 어색했다고나 할까.



아무튼 이 책은 세계 종교에 대한 입문서 같은 느낌으로 그리 어렵게 읽히지는 않는다. 어떤 측면에서는 각각의 종교에 대한 책을 읽어본 내게는 조금 더 가벼운 책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역자처럼 이 책을 깊이있게 받아들이기에는 내 역량이 부족해서 그런지 읽으면 읽을수록 이도저도 아닌 느낌으로 역사 입문서를 읽는 느낌이 들어 그리 재미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자가 성공회 신부라는 선입견이 있어서 그런지 세계 종교의 역사적 흐름을 이야기하고 있는 글 속에서 유신론자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는 느낌은 많이 받았다. 사실 무신론자가 쓴 세계 종교의 역사라고 했다면 좀 더 가벼운 이야기가 되었을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의 종교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지는 않다. - 물론 전체적인 글을 다 읽은 후에 되새겨보면 몇몇의 이야기는 스윽 스쳐가듯 지나가버리기도 해서 그냥 그 종교의 발생과정을 설명하고 있을뿐이라는 느낌도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 믿음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기고 하나의 종교로 생성되었는지를 살펴보기에는 좋다. 근현대로 넘어와 대부분의 개신교와 가톨릭에서는 이단이라 일컬어지는, 미국에서 발생한 말일성도나 여호와의 증인, 심지어 문선명의 통일교도 언급이 되고 있어서 조금 의아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조금 더 깊이 읽어본다면 종교의 역사만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에서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인간의 역사속 시대의 현실과 문화안에서 어떻게 변형되어 왔는지에 대한 고찰을 통해 종교와 신앙 그리고 신神의 존재와는 별개로 그에 대한 인간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말도, 그 어떤 상징도, 신이라는 실재에 다가가지 못한다. ... 벽에 그린 그림이든 책에 쓴 단어든, 어떤 종류의 인간 예술로도 결코 신의 신비를 전달할 수 없다"(85)는 말 역시 곱씹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접기
chika 2018-05-08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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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세계 종교의 역사


교보샘에서 배철현 교수의 위대한 질문 시리즈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전에도 언급했듯이 모태신앙으로 개신교 집안에서 자란 현재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종교는 늘 궁금한 탐구의 대상이다. 도대체 하느님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가 어떻게 박권사님의 평생을 그 종교안에 묶어놓고 풀어주지 않는지 미루어 짐작은 갈지라도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와 같다.


종교 특히 기독교는 언제나 관심의 대상인지라 가끔씩 관련 서적들을 읽어주며 지적호기심에 대한 갈증을 달래주고 있다. 적당한 책이 뭐없나 골라보다가 이 책이 눈에 띄여 읽어봤는데 기대 이상으로 내용이 너무 좋아 종이책으로 소장할까 고민중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종교에 관한 개괄서다. 사실 개론을 그것도 종교에 관해 이렇게 묵직한 책을 쓰려면 작가 자신의 공력이 만만치 않아야 되는데 저자인 리처드 할러웨이의 식견에 감복했다. 리처드 할러웨이는 켈햄 신학교, 에딘버러 신학교, 뉴욕 유니온 신학교 등에서 공부했고 영국, 스코틀랜드, 미국의 여러 교구에서 목사로 활동했다. 1986년에는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에딘버러 주교로 선출되어 2000년까지 역임했다고 한다.


성공회의 종교인이지만 기독교에 치우치지 않고 세계의 여러 종교들에 대해 상당히 객관적인 시선으로 다루고 있다. 언급된 종교만 하더라도 도대체 몇 개인지 모를 정도로, 원시인의 종교부터 시작해 동양의 각종 종교까지 본질적인 핵심가치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특히 본인의 종교인 기독교에 대해서도 냉철한 시각으로 여러가지 논쟁적인 요소에 대해 본인의 의견을 개진한다.


책에서 말하는 종교의 역사는 곧 예언자와 현자, 그리고 그들이 시작했던 운동, 그들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를 말한다. 여러가지 종교중 가장 오래되고 복잡한 힌두교로부터 시작된다. 무한반복되는 생을 살면서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망각에 빠져야 되는 힌두교, 그런 힌두교의 자장안에 있었던 붓다, 아울러 세계 3대 주요 종교인 유대교, 이슬람교,기독교의 시조새 아브라함 아울러 실질적으로 기독교를 보급한 핵심인물로 일컬어지는 사도 바울, 이슬람의 무함마다까지 중요한 종교인들을 다루고 있다.



유대교, 이슬람, 기독교, 불교, 그리고 힌두교 등 세계의 중요 종교 신앙의 기원, 의미 탐구의 역사, 새롭게 태어난 종교들, 이런 종교들에 의해 추동되는 폭력, 종교 신자와 비종교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적대감 등 다양한 종교적 주제까지 포함해서 역사적인 사실들도 흥미진진하게 기술하고 있다. 종교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읽어볼만한 교양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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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티 2018-09-16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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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의 역사
종교는 여튼 제한된 인지(人智)로 세계를 이해하려 애 쓰던 인류의 위대한 과거 발자취 중 하나입니다. 그뿐 아니라 본능과 충동을 조절하고 도뎍률을 정신 속에 심어 줌으로써 보다 오랜, 그리고 질적으로 수월한 개체와 종족의 생존을 도모해 준 유용한 제도이자 장치이기도 합니다. 비록 고유의 기능을 (그간 개발된) 다른 제도와 체계에 빼앗기긴 했으나, 여전히 인구의 많은 수가 이에 의존하며, 따라서 종교가 무엇인지 깊이 탐구하는 건 곧 우리 존재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열심히 들여다 보는 발돋움도 겸하는 것입니다.

"논쟁의 여지가 없는 인간과 종교의 역사!" 영어로 하면 undisputed일까요? ㅎㅎ 사실 논쟁의 여지가 없는 이 분야 결정판 레퍼런스북이 나오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아니, 기다린다고 나오기나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책의 저자 리처드 할러웨이 주교(성공회)님의 면면을 보고, 또 제법 두꺼운 책을 읽어 보면, 특정 교파에 소속된 성직자로서 이만큼이나 공정한 논조와 엄정한 근거를 들어 이 주제를 논하는 게 과연 앞으로 또 가능할지. 그 품격과 완성도의 수준에 아무 "논쟁의 빌미"를 보태고 싶지 않습니다. 일반인의 교양을 위해, 또 종교학과 신입생의 학문적 발판 마련을 위해, 이보다 더 풍성하고 균형 잡힌, 유익하기까지 한 서술은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것 같습니다.

모한다스 "마하트마" 간디를 모르는 이는 없으나, 정작 그가 신봉한 종교가 무엇이었는지 물어 보면 그리 쉽게 대답이 안 나올 듯합니다. 자이나 교 인데, 이 종교는 석가모니(싯다르타)보다 이른 시기 바르다마나 라는 대 성인에 의해 창시되었습니다(한자로는 대웅[大雄] 즉 위대한 영웅 정도로도 번역되는데, 불교의 대웅전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나 불교의 "대웅"은 여튼 석가모니를 가리키죠). 살생을 절대 금하고 청빈을 강조하는 점에서 불교와 비슷하나, 특히 옷을 걸치지 않고 살 것을 교리 일부로 삼는 게 특이하며, 현대에 와서는 이 교리가 많은 타협 속에 완화된 편입니다.

책에는 특히 "아네칸타바다"에 대해 긴 설명이 나오는데, 우리가 흔히 "장님 코끼리 만지기"로 알고 있는 그 지혜와 관련된 것입니다. 자이나 교에서는 이런 인지의 제약 현상을 두고, "우리 실존의 한계 때문에 지식의 한계가 빚어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니 사실 지식의 한계는 수 없이 많은 인간사의 문제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다만 지식의 첨단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마주칠 때 비로소 그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나는 것뿐입니다. 이런 한계를 통감하고 나서야 인간은 존재 초극의 문제를 비로소 직시하며, 종교에 귀의한 후에야 영원한 난제,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을 늦게나마 깨닫습니다.

"예언자"란 누구일까요? 이 책은 물론 "종교의 역사"를 다루었고, 따라서 대체로는 시간 순으로 사항을 배열하고 설명하는 체제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규약에 얽매이지 않고, 예컨대 이 책 제10장처럼 "예언자들"이란 항목을 따로 분리하여 독립적으로(초시간적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주교님의 인상적인 설명은, "그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는 사람(foreteller)이 아니라, 앞서서 말하는 사람(forth-teller)이다."라는 부분입니다. 포어텔러라는 건 우리말로 점쟁이와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은 어감입니다. 그러나 포스텔러는, 선각자, 선구자의 개념과 오히려 잘 통하죠.

예언자는 전통적으로 헤브라이즘에서 군주와 별개로 작동하는, 성(聖)과 속(俗)이 분리된 사회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또다른 축으로 기능했으나, 사회에서 언제나 존경만 받았던 건 아닙니다. 때로는 기이한 행적과 언동 때문에 조롱을 받기도 했는데, 책에 나오는 다윗의 선임 군주인 사울의 경우 이 경계를 공연히 넘다 "사울도 예언자의 하나더냐?" 같은 핀잔, 빈축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예언자 자체가 문제라는 게 아니라, 왜 군주가 품위, 본분을 잊고 예언자 흉내나 내느냐는 뜻이죠. 아무튼 저자인 주교님이 가장 뚜렷하고 전형적인 예시로 드는 건 밧세바를 취했던 다윗에게 나아가 직언했던 나탄입니다. 사실 이야말로 모든 예언자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이 나왔으니 헤브라이 본명이 사울이기도 한 바울이 또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정 종교의 입장을 떠나 (신학이 아닌) 객관적 종교학의 견지에서 바라본 중 첫째로 꼽히는 인물은 단연 이 바울입니다. 예수는 그 역사적 실존조차 의심을 받을 때가 있으나, 바울은 자타가 공인하는 기독교의 교단적 시조이며 이론가이자 아키텍트입니다. 유목민들에게 있어 "텐트"가 얼마나 중요한 물품인지는 새삼 설명이 필요 없을 텐데, 그는 이 필수품의 제조와 유통을 통해 큰 부를 모은, 세상사에 너무나도 밝은 비즈니스맨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그 종적조차 몀확지 않고 현실에서 처참히 패배한, 예수라는 젊은이의 가르침에 매혹되어 그토록 극적인 회심을 보였으니, 초기 기독교가 지중해 세계에 몰고온 청신한 기풍과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능하죠.

현재까지도 신도들의 높은 충성도와 교리에의 헌신을 유지하고, 신도 수만 따져도 세력이 대단한 종교는 단연 이슬람입니다. 특히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은 입으로 암송했을 때, 특정 대목에서는 반드시 법열을 느끼며 무아지경에 들기도 한다니 해당 종교를 믿는 이들에겐 실로 대단한 영적 체험이 아닐 수 없고, 지금으로부터 1400여년 전에 종교적으로나 정치적, 군사적으로 뚜렷한 업적을 남기고 간 그 "예언자"에 대해 새삼 경의를 갖게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꾸란에는 아름다움과 위안이 있다."

그러나 꾸란 속의 알라, 혹은 예언자가 대신 전하는 유일신의 목소리에는 그저 안온한 평화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예언자 모하메드 자신이 뛰어난 전략가이자 전사이기도 했는데, 이는 교리가 용납지 않는 불의, 패륜에 대해선 불 같은 진노와 징벌을 내린다는 뜻이고, 이게 바로 저들이 말하는 성전, 지하드입니다. 이 분야를 가리켜서 "투쟁의 신학 그 기원"이라고도 하는데, 제국주의가 세게를 휩쓸 무렵에도 서유럽에서 유독 이 이슬람의 전투적 성격에 주목했습니다. 기독교와는 대조적이라는 뜻인데, 기독교가 서세 동점 상황에서 행한 역할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진행 중이긴 하나, 그 중 극단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비판한다 쳐도 이슬람의 교리에 대해서는 특이한 점이 여럿 눈에 띈다고 할 수 있죠. 예수는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고 했는데, 저 예언자는 교리로서 전쟁을 합법화했고 자신 역시 무엇이 바른 행동인지 스스로 생전에 추종자들에게 입증했기 때문입니다.

성공회가 이무리 로마 가톨릭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고 하나 엄연히 프로테스탄트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공유하는 교파입니다. 따라서 마르틴 루터는 성공회에서도 높이 받드는 큰 위인이며, 특히 저자는 "성경에 대한 발견"을 그의 가장 큰 공로로 꼽습니다. 유머러스하게도 저자는 "그가 나오기 전에는 성경책이 무슨 분실이라도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하며, "오로지 성경"이라는 핵심 원칙을 마르틴 루터가 새삼 기독교인들에게 환기시켜, 종교와 교회의 참된 자세를 일깨우고 이후 오백년이 지나도록 개신교가 고유의 원칙을 잃지 않게 이끌었다며 의의를 부여합니다. 당연한 말로 여길 수 있으나 위인이 핍박을 이기고 어떤 모범을 보이기 전까지는 이 당연한 게 다연하다는 듯 통념과 확신이 자리를 못 잡습니다. 또한 저자는 "성경의 발견" 못지 않게, "거대한 권력과 얼굴을 감히 마주할 수 있는 자유로운 개인의 옹호"를 중요 업적으로 듭니다.

이른바 주요 종교가 근세 초입에 자리를 잡은 후에도, 성장과 탄생을 멈춘 듯 보였던 종교 교단은 끊임 없이 새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제는 세계 대표 종교 중 하나로 어엿이 평가 받는 시크 교의 경우 그 신도들의 대단한 경제력과 건실한 풍속 때문에 특히 주목받는데, 서평 맨 위에서 예시한 자이나 교도 그 사정이 (양적인 교세는 다소 작으나) 비슷합니다. 역시 이 저자분의 진짜 장기는 이후 신교도의 다양한 분화를 설명하는 곳에서 제대로 드러나는데, 웬만큼 종교 관련 소양이 깊어도 도대체 재세례파, 청교도, 감리교, 장로교의 구체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이들 외 어디까지를 이단으로 잡고 경계해야 하는지 시원한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이는 매우 드물겠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사회적으로 확립된 평판을 지닌 교단에 (혹 몸을 담는다 해도) 담아야 한다고 여기지만, 기성 거대 종교가 과연 제 소임을 다하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견이 엇갈리죠. 종교의 역사를 차분히 개관하는 작업은, 곧 바른 종교상이 무엇이며 종교의 초심이 어떠해야 하는지 재확인하는 결과로도 이어집니다. 신자 비신자를 가릴 것 없이, 근본의 원칙과 시야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돕는 멋진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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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혈 2018-05-10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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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거의 모든 종교의 역사; 인간이 묻고 신이 답하다.

1.

최근에 '라이프 오브 파이'가 재개봉을 했었죠. 이야기를 듣고 나면 신을 믿게 될 것이라며 배짱 좋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영화입니다. 오늘 소개드릴 책도 어쩌면 비슷한 맥락이 있는지도요. 이 책을 읽고 나면 어쩌면 여러분의 신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지도 모릅니다.
독자가 누가 됐든, 그러니까 신을 믿는 신도들부터 시작해서, 리처드 도킨스를 필두로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제 경우는 과거엔 기독교도였으나 개인적인 이유로 종교는 가지지 않게 되었어요. 오히려 종교에 관한 글이나 강요에 조금 지쳐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세계종교의 역사>는 신앙이나 믿음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습니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 극에 대한 이야기는 담백하게 배제하고 있어요. (그 점 역시 '라이프 오브 파이'와 비슷한 종류의 탁월함이군요. ) 그런 부분에서 종교에 대한 어떠한 편견이나 부담없이 읽어나갈 수 있는 책입니다.


2.

사실 조금 불안했던 게 저자인 '리처드 할러웨이'가 현역 주교라는 점이었어요. 하지만 알고보니 이미 상당히 많은, 다수의 건강한 논의를 펼쳐나가는 저자더군요.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이 책은 종교를 가진 사람이 쓴 책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정확히 같은 이유로, 천부적으로 노련한 주교라고 느껴지기도 해요.) 본인이 오히려 신랄하게 교회를 비난하기도 하고, 오로지 건설적인 측면만 집요하게 파고드는 부분이 있어요. 역자인 이용주씨는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서 에필로그를 마치고 있는데 확실히 수긍이 가는 것입니다. 역자가 밝혔듯이 이 책은 종교학의 입문서로도 훌륭하고, 단순히 역사적인 교양서로서의 가치도 상당합니다.



3.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제목에 대한 오해가 조금 있는 것 같은데, 확실히 모든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불교랄지, 이슬람이랄지, 다른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발원적인 부분에서 얕게 정리하는데 그치고 있어요. 실은 그게 더 자연스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만…가톨릭 외의 종교의 경우, '종교'라는 현상의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오는 방식으로 글이 전개되기 때문에 오히려 그 분배는 적절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슬람교와 불교와 힌두교를 같은 비율로 설명하는 것은 오히려 과잉이겠죠.) 그리고 소재나 두께의 비해 책은 가독성이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이건 저자의 조어력이나 문장력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친절해야 할 부분은 상당히 사려깊게 (문장력을 과시하지않으면서) 설명하고 있고, 건너뛰어야 할 부분은 과감히 건너뛰기도 합니다. 그리고 특히 흥미롭고 대단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종교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부분, 그러니까 저자로서는 너무나 피하고 싶을 부분을 오히려 정면으로 마주하는 대목입니다. 마지막 3장에 걸친 내용이 그것인데요. 아무래도 저자는 근본주의라는 개념으로 반성과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멋지게 성공해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서를 읽는 방법이랄지, 성서를 이해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저자는 확실히 교단의 반성을 촉구하고 있고요. 그렇다고 종교를 훼손하거나 폄훼하지 않는 범위에서 상당히 우아하게 논지를 펼쳐나갑니다. 그 장력을 마지막까지 탄탄하게 유지하는 점이 시종 흥미로워요.



4.

종교를 저버린 저로써는 오히려 상당히 위로가 되는 책이었어요. 그러니까 제 경우, 성서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부담과 불합리를 느껴왔던 터였어요. 저자는 그런 부분에서 해답을 내놓는다기보다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해줍니다. 그런 부분에서 저자의 내공이 상당하단 느낌을 받았고 확실히 제가 가져야 할 스탠스에 있어서 방향을 적확하게 잡아준 책이었어요. 이 책은 첫째, 종교라는 테마로 역사를 들여다보는 교양서로써, 둘째로는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종교인을 대하는 편견과 방법을 이해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는 종교에 회의를 느끼고 방황하는 사람에게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책을 덮으면 신을 믿게 될 것이라는 얘기는 할 수 없지만 분명히 생각의 지침이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갈지도 모르겠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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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제 2018-04-29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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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세계 종교의 역사


종교들의 역사에 관심이 있어 읽기 시작했다 어렸을때 종교적으로 약간 독특한 경험이 있었던 탓이다

조금 읽다가 생각했다

‘역사라고 하기엔 조금 그렇지 않아?‘

뒤늦게 표지를 보는데 원제가 그냥 히스토리가 아니라 리틀 히스토리인가보다

그렇다면 말이 되지라며 계속 읽었다

다시 생각했다

‘리틀 히스토리도 좀 아니지않아?‘

마지막까지 읽었다

역자해설에 대학생을 위한 종교 입문서로 딱 맘에 들었다는 얘기가 나왔다


납득했다

물론 간단한 역사는 나온다

그렇다고해서 몇년도 어디에서 누가 이런 정치적 종교적 상황에서 이렇게 탄생해서 이렇게 발전하고.. (얘기하다보니 이런게 안나오는건 아니네)가 자세히 다 써있는건 아니다

많은 종교가 나오는 만큼 역사적인 얘기는 상당히 축약되어 있고 주가 되는 것은 오히려 철학이나 신학적인 면에서의 그 종교의 교리다 그것도 ‘굉장히‘ 쉽게 축약되어 있다

맞다 초심자 입문용으로 적당하다 대학생이 아니라 중학생이 읽어도 적당할것 같다

다만 이런 종류의 책은 객관적인 것이 내 취향인데 이 책은 저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내용이 많다

종교의 순기능 역기능이나 오늘날 극단적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생각에 깊이 공감하기도 했지만 어떤 종교들의 교리에 대해서는 너무 사적인 관점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쉬운 종교학 입문책을 원하는 사람에겐 추천

본격저인 책을 원했거나 역사에 집중된 책을 원했던 사람에겐 비추천


ps. 맨 마지막에 문선명과 통일교 나옴 ㅡ..ㅡ;; 여기서 한두줄로 읽으니 왠지 교리 그럴듯해..